목장과 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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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란 무엇인가? 오늘 날 전도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가?

"전도"라는 단어는 헬라어 성경 60구절 속에서 28개의 다른 형태로 61번 등장한다. 
이러한 단어의 쓰임새를 분석하여 선포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총체적으로 살펴보면 놀라운 사실이 발견된다. 

"선포"라는 단어는 예수님의 복음 사역과 연결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역은 12가지의 내용으로 구체화된다.

1. 회개의 침례
2. 예수님의 심판
3. 예수님의 성육신
4. 예수님의 이름
5. 예수님의 그리스도되심
6. 예수님의 성자되심
7. 예수님의 복음
8. 예수님의 나라
9. 예수님의 기적
10. 예수님의 은혜
11. 예수님의 부활
12. 예수님의 말씀

이 열두가지를 선포하는 것이 전도인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께 범죄한 죄인이기에 영원한 지옥형벌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당신을 심판하기 원치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당신의 죄를 담당케 하셨고, 당신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으며, 당신을 대신하여 지옥의 고통을 맛보게 하셨다. 
그리고 이 예수님을 삼일만에 부활시키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게하심으로써 당신의 부활을 예비하셨다. 
당신은 이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구원받는다. 
그러니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라!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과, 주되심과, 성자되심을 믿으라! 
은혜의 예수님께서 당신을 하나님의 나라로 초대하실 것이다!

이것이 선포의 내용인 것이다.

현재의 문제 :  그러나 지금까지 내가 만난 21세기의 많은 전도자들은 이렇게 전도하지 않는다. 
그대신
교회나가세요! 
교회나가면 자녀가 잘될 것입니다! 
교회나가면 만사가 형통하고 병이 낫고 문제가 풀릴 것입니다! 
교회가면 친구들도 많이 사귈 수 있고, 공짜 점심도 먹을 수 있으며, 외로움을 달랠 수 도 있습니다! 
저도 교회에 나갔더니 건강해 졌고, 사업이 번성해졌으며, 자녀도 좋은 대학 갔습니다. 
그러니 교회에 나가십시오!

말하며 전도한다. 
마치 낚시꾼이 냄새가 구수한 깻묵을 바늘에 걸고 물속의 물고기를 낚듯이, 스파게티 소스를 파는 장사꾼이 소스를 팔기위해 통에 각종 장식을 달아놓고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하듯이, 그렇게 사람들을 꼬시려고만 한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해주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 
그저 사람들을 구수한 말들로 꼬셔 무작정 교회로 데려오려고만 한다.  이것은 성경이 증거하는 전도가 아니다.  전도란 사람을 교회로 데려오는 것이 아니라 교회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탕발림말로 사람을 꼬셔 교회로 나오게 하는것이 전도가 아니다.  전도란 진리를 가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선포함으로써 죄인을 예수님의 몸인 교회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역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케리그마적 사역인 죄, 심판, 지옥, 회개, 구원, 천국등을 선포함으로써만 이루어지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사역이다.

이쯤에서 나에게 이렇게 묻고 싶은 분들도 있을 것이다.

질문 1 :
초면에 만나는 사람에게 죄, 죄인, 심판, 지옥이야기를 하라는 것입니까? 
그것은 상식적으로 좋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좋은이야기만 하다가 성장한 후에 다른 이야기를 하는게 효과적입니다.

이러한 발상은 세상의 마케팅 전략에 물들어버린 인본주의적 전도방식이다. 
고린도후서 4:1~2는 이러한 발상을 이렇게 공격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전도의 직분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혼잡"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과일 장수들이 보기 좋은 과일을 맨 위에 놓고 아래에다가는 작은 과일들을 숨겨넣는 행위를 말한다.  이렇게 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것인지라, 그렇게 전도하지 말라는 것이다. 
전도할 적에 남들이 듣기 좋아하는 복이나, 상급이나, 천국이야기만 위에다 죽~ 늘어놓고, 죄나 지옥이나 심판에 대한 이야기는 살짝 가리며 전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대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다 들려 주라는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혼잡"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포도주에 물을 탐으로 원래의 농도를 줄이는 행위를 말하기도 한다. 
포도주에 물을 타서는 안된다. 
포도주는 포도주 자체로 있어야지 물을 타면 본래의 맛을 잃고 싱겁고 맛없게 된다. 
전도도 마찬가지이다. 
불신자들의 비유를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심판과 지옥을 이야기 하지 않고 축복에 대한 말을 하는 것은 복음을 희석시키는 행위라는 것이다. 
절대로 이렇게 전도해서는 안된다. 
말씀이 있는 그대로 전해질 수 있도록 있는 그대로 전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21세기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진리를 잊어버렸다.  그들은 인본주의에 찌들어 있는지라 불신자들의 심기를 건들지 않기 위하여 될 수 있으면 지옥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심판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며 회개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오직 복이나 천국, 축복이나 형통등의 말로만 사람들을 꼬시려 한다.  이것은 전도가 아니다!  죄를 이야기 하지 않고 어떻게 십자가의 예수님을 설명할 수 있나?  심판을 이야기 하지 않고 어떻게 공의의 예수님을 설명할 수 있나?  지옥을 이야기 하지 않고 어떻게 천국의 예수님을 설명할 수 있나?  죄와 심판과 지옥이 없으면 예수님도, 십자가도, 부활도 필요없다!  죄와 심판과 지옥이 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필요한 것이다.  고로 이 모든 것을 하나도 가감하지 않고 다 전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인 것이다.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도 있다.

질문 2 : 
그러다가 준비도 안된 사람들이 그러한 말을 듣다가 거부반응을 일으키면 어떡합니까?  오히려 역효과가 납니다.  이는 미련한 일입니다.

여러분에게 묻겠다.  이 세상에 준비된 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이 어디에 있던가?  여러분들은 준비된채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구원에 이르렀나?  아니지 않나?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분의 말씀이 순식간에 바람처럼 오지 않았던가?  그래서 구원에 이른것이 아닌가?  그리고 죄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때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것이 당연지사가 아니던가?  죄인이 죄성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때 어찌 편안하게 들을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이 진리앞에서 귀를 틀어막고 도망가고자 하는 것이 지극히도 당연하다.

게다가 죄인을 찔러 반응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 어찌 하나님의 말씀이란 말인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검보다도 예리하여 듣는 사람들의 심령속으로 들어가 죄성을 비수처럼 찌른다고 했는데, 말씀의 칼날이 내 심령속에 사정없이 와서 꽃히는데 어찌 꿈틀대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예레미아가 전도할때 왜 사람들이 그를 구덩이에 던저넣었나?  에스겔이 전도할때 왜 사람들이 그를 핍박했던가?  사도 바울이 전도할때 왜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고 했던가?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님께서 전도하실때 왜 사람들이 그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나?  복음을 들은 불신자들이 거부반응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어두움 속에 살고 있는 벌레에게 빛을 비추어봐라.  꿈틀대며 그 빛으로부터 도망가기위해 발버둥을 친다.  이처럼 어둠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케리그마적 사역을 전했더니, 그들로부터 거부반응이 일어났던 것이다.  명심하라.  불신자들로 하여금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전하는 복음은 희석된 복음이요, 가감된 복음이라는 것을!

또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도 있다.

질문 3 : 
만약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너무 직설적이라서 불신자들의 심기를 건드려 마음의 문을 닫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으면 어떡합니까?

이 역시도 인본주의적인 발상이다.  위의 질문은 우리가 걱정할 부분이 아니라는 말이다.  왜?  우리의 사명은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명이다.  우리는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  우리가 내 자신도 살리지 못하는데 어떻게 남을 살린단 말인가?  사람을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우리의 사명은 그러한 하나님이 역사할 수 있도록 말씀을 정확하게 전하는 것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우리는 말씀을 혼잡하지 않게 충실히 전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을 사용하사 예정된 자를 부르신다.  고로 우리가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이상, 듣는 자들이 구원으로 예정받은 자라면 그들은 반드시 돌아오고, 예정받지 못했다면 복음을 거절할 것이다.  고후 2:15-17를 들어보라.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보라.  우리가 복음을 정확하게 전할 때 두 가지의 일이 일어난다.  구원을 받기로 예정된 사람들은 생명에서 생명으로 이르고, 망하는 자들은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른다.  이것이 참된 전도의 목적이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전도란 예정된 자로 하여금 복음을 받아 들여 생명에서 생명으로 이르게 하는 것이고, 예정받지 못한 자로 하여금 복음을 거절하여 죽음에서 죽음으로 이르게 하는 작업이다.  사도 바울은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며 하나님은 자라게 하셨다"고 말했다.  우리의 사명은 말씀을 심고 물을 주는 것이고, 하나님의 사명은 그 사람을 자라게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처럼 행동하려고 하기 때문에 복음을 희석시키는 것이다.  고후 4:3도 보라.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이 얼마나 명확한 계시인가?  우리가 복음을 열심히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불신자들이 그 복음을 받지 않는다면 그들은 망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남을 구원시킬 수 있다고 착각하니까 복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것이다.  다시 한 번더 말하지만 성경은 우리더러 죄인을 구원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일은 딤후 4:2의 말씀처럼 오로지 하나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여기에 "전파하라"고 번역된 헬라어도 케루쏘이다.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하는 것이다.

이렇게 묻고 싶은 분들도 있을 것이다.

질문 4 : 
불신자들이 일단은 교회에 와야 말씀을 듣고 구원받을 것 아닙니까? 
불신자들을 교회로 데려오는 것이 뭐 그리 문제가 됩니까?

그럴듯해 보이는 말이다.  그러나 이도 옳지 않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도는 교회 안에서 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 밖에서 하는 것이다. 
교회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여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며 머리되신 예수님을 찬양하는 공동체이지, 불신자를 초대하여 전도하는 곳이 아니다. 
초대교회의 역사를 보면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하지 않는 자를 절대로 교회당 안으로 데려오지 않았다. 
함께 예배드리지도 않았다. 
교회란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산자를 위한 공동체이지 죽은자를 살리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교회당 안에서 예배드렸고, 교회당 밖에서는 전도했다. 
그래서 밖에서 구원을 얻은 성도들을 교회당으로 데려와 함께 예배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전도의 방법이다.

그러나 21세기의 많은 교회는 이러한 하나님의 방법을 무시한다. 
'일단은 교회로 불러놓고서 교제를 통하여 친목을 다진후 마음이 열려있는 상태에서 복음을 전하자'고 말한다. 
그래서 "열린 예배"따위나 "알파코스"등을 통하여 교회와 세상이 별 차이가 없다는 식의 분위기를 만들어 놓고 나서 복음을 전하려 한다. 
교회에서 가요를 부르고, 세상의 프로그램을 도입하며, 세상과 교회는 별로 다를 것이 없으니 너무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말라는 식으로 어필을 한다. 
그리고 교회로 불러모은 불신자들의 비유를 맞추며 굽실댄다. 
이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방법이 아니다. 
도대체 성경 어디에 하나님의 말씀 하나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열기에 부족하기에 "열린 예배"나 "알파 코스"와 같은 것을 사용하라고 되어있는가? 
성경 어디에 불신자들을 끌어모아 그들의 비유를 맞추며 기독교는 그렇게 폐쇠적인 곳이 아니라고 거짓말하라고 되어있는가? 
사람의 마음은 우리가 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케리그마적 사역을 선포함으로써만 열린다. 
그리고 그 일은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가장 확실하게 계시하는 구절이 있다. 
사도행전 2:14이하를 보면 교회 밖에서 이루어지는 베드로의 선포가 나와있다. 
베드로의 선포를 보면 인간은 죄인이라는 사실과 죄로부터 자유하게 위해서는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이 필요하다는 사실과 그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여 구원이 시작된다는 사실이 계시되어 있다. 
예수님의 케리그마적 사역을 선포한 것이다! 
그는 사교적인 말을 하지 않았다. 
인간적인 말을 하지 않았다. 
운동이나 어떠한 프로그램으로 사람들을 교회로 모으지 않았다. 
그는 밖에 나가 순수하게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했다. 
그랬더니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가?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여기에 "마음"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심령의 '중심'이라는 뜻이고 "찔리다"고 번역된 헬라어는 '뚫리다,' '꿰찔리다'는 뜻이다. 
베드로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중심에 쉬지않고 뚫리고, 꿰찔렸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게 역사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자들의 심령에 변화가 생겼다! 
예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죄를 짓던 사람들이 갑자기 마음이 찔리기 시작한 것이다. 
좌우에 날선 양날검보다도 더 예리한 하나님의 말씀이 베드로의 설교를 통하여 죄인들의 중심에 사정없이 꽃히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는가?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리라 하니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침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그들의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순서가 보이는가?  말씀이 먼저왔고, 그 다음에 구원이며, 그 후에 성도의 교제다. 
이것이 성경적인 순서이다. 
교제가 먼저 오지 않는다. 
구원이 먼저 오지도 않는다. 
말씀이 먼저요, 구원은 그 다음이며, 교제는 가장 나중이다! 
그러나 현재 대다수의 교회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한다. 
일단 불신자들을 교회로 불러 교제하게 한 후, 그 후에 구원을 선포하고, 그 다음에 말씀을 전한다.
이것은 인간이 고안해낸 인본주의적 순서이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순서가 아니다. 
이렇게 인본주의적인 순서를 따르니까 교회에는 죽은자들로만 꽉 차서 바른 예배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이다.

질문 5 : 
에이~  너무 원론적으로만 하지 맙시다.  그렇게 원론적으로만 하면 교회가 성장하지 않습니다.

아니다.  교회는 원론적으로만 해야 한다. 
원론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가 망가지는 것이다. 
교회는 사업터가 아니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위에만 세워지며,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운행되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완성된다. 
아무리 교회가 양적으로만 부흥하면 뭐하나? 
그 안에는 죽은 시체들이 득실대는데? 
참된  전도가 아닌 다른 것으로 그들을 모은 결과이다. 
 
교회에서는 성경이 열려야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설교되어져야 하며, 그 분의 가르침이 가르쳐져야 한다. 
바로 그럴 때 교회는 성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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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장(牧場)


1. 목장사역의 비전
  • 사람의 몸을 이루고 있는 작은 세포들이 건강해야 결국 한 인간의 몸이 건강하듯이 교회 안의 작은 교회인 목장이 행복하고, 건강해야 큰 목장인 교회가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가장 작은 세포인 목장의 활성화가 곧 대 목장인 교회의 부흥과 직결된다는 사실에서 목장으로의 변화는 매우 중요합니다.

  • 목장은 확대된 가정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한 가족인 것입니다.

  • 그러므로 목장은 믿음의 가정들이 (4-5세대 정도) 모여 좀더 큰 믿음의 가정을 이루고, 그 안에서 한 가족과 같이 서로가 돌보고, 섬기며, 양육하는 일들이 이루어지는 신앙공동체를 합니다. 그러므로 목장의 예배는 기존의 구역에서는 어른들만 예배를 드리던 것에서 벗어나, 목장 가족에 속한 남녀노소(온 가족)를 무론하고 모두가 참여하여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 또한 목장은 전도와 새가족 정착을 위하여 꼭 필요합니다. 인간은 낯설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교회생활 초기에 따뜻한 영접은 필수적인 정착요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장은 교회정착의 초기단계에서 이런 어려움을 해결하는 분위기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 또한 목장은 교회로 바로 오는 것에 부담을 느끼는 전도대상자들을 목장예배에 초대하여 사랑의 친교와 예배를 통하여 마음이 열리게 한 후 대목장인 교회로 인도하는 전도의 중요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2. 목장의 의의

  • 성경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모습을 모델로 한 소 그룹 형태의 목장으로 그 자체로서 일종의 가정 교회입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목자"라고 지칭하는 평신도 인도자가 이끌어 가는 예배와 교제, 그리고 전도를 지향하는 평신도 사역의 현장입니다.

  • 대체로 건물, 조직, 행사 중심인 전통적인 교회의 구조에서는 마음을 연 깊은 대화와 참된 사귐이 부족합니다. 또 직책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성도들이 지체가 되어 일하기 어렵고 불신자가 교회 분위기나 목회자를 불편해하기 때문에 전도가 어렵습니다. 이에 대한 해결책을 저희는 성경의 초대교회 모습에서 찾습니다.

3. 목장의 장점

하나의 가정 교회로서의 목장은 다음과 같은 장점을 갖고 있습니다.

  • 서로의 삶을 나누기 때문에 성도간의 구체적인 교제와 도움이 가능합니다.

  • 신뢰할 만한 사람들 속에서 자신의 삶을 나누기 때문에 내적 치유가 가능합니다.

  • 관계를 통한 불신자에 대한 전도가 가능하다.

  • 따뜻한 분위기로 서로를 돌보게 됩니다.

  • 성도의 제자화, 즉 목원 한 사람 한 사람이 목장 안의 사역자로서 이끌어 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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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의 단계적 방법

전도의 1단계(APPROACH)

1. APPROACH(어프로치)단계

어프로치란 접근하다라는 뜻이다
전도를 시작하기를 원한다면, 먼저 상대를 정하고 상대를 위해 기도하고,상대에게 어프로치를 해야한다.
사람에게는 처음본 사람을 만나면 보이지 않는 벽이있기 마련이다.
보이지 않는 벽을 허물고 상대와 친해지는 단계가 어프로치이다.
상대를 정하고 접근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복음을 어떻게 전하며,예수님을 어떻게 영접시킬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전도에 있어서 어프로치는 정말중요하다.
어프로치 단계는 상대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할것인가를 탐색하는 단계이다
마치 가난안땅에 정탐군이 먼저 들어가서 가나안땅를 탐색하는 것처럼...

우리가 높은산을 올라갈때 직선으로 산을 올라간다면 쉬 포기 할것이다.
대관령과 같은 높은산의 정상을 올라갈때 산을 돌면서 서서히 산을 접근하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정상에 오르게 되는 것을 기역하자
spiral approach(나선식접근법)이다
나선형으로 서서히 접근해 가는 것이다.

성경에서 최고의 전도자는 예수님이시다.
전도하실때 예수님을 어떻게 어프로치하셨는 알아보는 것을 참 중요하다.
요한복음4장에는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사 갈릴리로 가실쌔(4:4)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5)
예수님께서 수가성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전도하는 모습이 기록되어있다
예수님께서는 제육시에 우물가에 물을 길러나온 죄 많은 여인을 만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전도의 분위기를 높이시기위해 제자들을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보내시고 여인과 예수님이 우물가에서 만나게 된다.
죄많은 여인은 제육시에 우물가에 나온것을 보면 극도로 사람을 경계하는 여인이었음를 알수있다
예수님은 나는 메시아이다, 나를 믿어라
라고 하지않으신다.
예수님의 어프로치는 어떤 말로 시작하고 있는가?
물을 좀 달라(7)하시니
주어진 환경에서 극도로 경계심을 가지고 있는 여인에게 최고의 어프로치를 통해 전도를 시작하시는 예수님은 역시 전도왕답다.
여자는 물을 달라하는 이가 유대인(9)으로 인식한다
우물가에서 여인에게 물의 비유로 서서히 접근하시게 된다
시간이 흘러 여인은 선지자로소이다(19)라고 한단계 발전된 고백을 하게되고 나중에서 어떠한가?
이는 그리스도가 아닌가(29)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게되고 입술로 예수님를 시인했으니 전도의 마지막 단계에 이른다.
성경 한 page가 지나기전에 예수님의 어프로치와 전도는 성공하게되고
여인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기뻐서 양동이를 버려두고 예수를 전하는 최고의 전도자가 된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최고의 어프로치를 할수있는가?
전도하기를 원한다면 어프로치에 연구가 필요하다.

사무실에 있다보면 많은 세일즈맨들이 들어온다
나는 그들이 나에게 어떻게 접근하는 지를 유심히 관찰한다.
신입사원은 들어오자마자 안녕하세요 ( )회사에서 나왔는데 ( )상품이 필요하신가요?
나:아니요
세일즈맨:안녕히 계세요
신입사원 세일즈맨의 어프로치는 보기좋게 실패한 것이다
어프로치가 실패했으니 상품설명도 못해보고 나가버린 그세일즈맨은
마치 전도자가 와서
교회다니세요

전도의 2단계는 필요성(NEEDS)

어프로치단계를 통해 상대와 친해진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복음을 전하기위한 준비작업인것이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세례요한의 역활이 바로 NEEDS단계를 설명하기에 좋은 비유가 될것이다
겸손하게 예수님의 오심을 광야에서 외치다 사라진 세례요한...
약 5분정도 복음에 접근하기위한 가벼운 대화..
본인의 처음예수님을 만날때의 간증을 말해주는 것도 좋겠다
나는 예수님을 만났는데 이런것이 너무 좋더라
예수만난 감격,그리고 변화된 삶을 말해주라

어프로치시 이미 복음을 받아드린 사람이라면 NEEDS단계가 필요없을 것이다
그러나 전혀 복음을 들어본적이 없는 사람에게는 NEEDS단계를 통해 자연스럽게 복음을 접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중요하다.
효과적인 전도법은 모든사람에게 동일한 스피치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생각,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상대의 성향을 빨리 파악하여 상대에 맞는 스프치를 통해 전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NEEDS시 주의사항***
1,5분이상 NEEDS단계에서 시간경과하면 않된다.
(이유-사람을 처음만나서 25분정도

전도의 3 단계 프리젠테이션(PRESENTATION)

어프로치와NEEDS단계를 통해 친해진 상대에게 본격적으로 복음의 내용을 전하는 단계이다.
사도바울이 고백했던 예수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을 소개하는 단계이다.상대를 압도하기위해서는 사전 성경지식을 확보하여 내가 전하는 예수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어야한다.
무엇보다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어서 구원자이신 예수님에 대해 신뢰할수 있게하여야 한다.
그리고 베드로가 성령충만하니 담대히 그리스도를 전했다는 말씀처럼 성령충만은 전도자에게 있어서 필수조건이다.

**프리젼테이션시 꼭 전해야 할 포인트**
1,예수가 누구인가?
2,그가 이땅에 오셔서 무슨일을 하셨는가?
3,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다시오심을 약속해 주셨음
4,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기만 하면 구원받은다는 것

**프리젼테이션은 이렇게 하라**
1,간단하면서 정확하게
(시간은 10분-15분사이가 좋다)
2,자신있게 말하라(전하는 자의 확신을 전하라)
3,재미있게 말하라
4,성경을 보여주면서 하라(보여주는 것은 더 큰 효과를 가져온다)
5,타 종교을 결코 비방하지 말라.
6,주도권이 나에게 있어서 일방적으로 스피치해야함

프로젠테이션이 끝나갈 무렵에는 상대를 만나고 25분정도 되어있어야 정상이다.
자신있게 전하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상대가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다.
마치 낚시에서 찌가 움직이는 것 처럼...
이제는 상대를 응시하면서 클로징(결신)단계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면 된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을 제가 도와드릴께요
저의 기도를 따라하세요
일부의 사람은 이때 나의 기도를 따라하게 된다.
가까운 교회로 소개해 주고 그 교회의 담임교역자와 통화하여 그 결신자가 교회에 정착하여 믿음이 자라도록 도와주는 것 까지 하면된다.
그런데 클로징으로 넘어가려고 하니,상대가 거절을 한다.
이때 나오는 거절을 실질적 거절이라고 한다.

실질적 거절시 나올법한 거절

1. 주일에 시간이 없어요
2. 교회에 아픈 기억이 있어서...
3. 교회는 돈이 있어야 간다고 하던데...
4. 부모님이 불교신자예요
5. 가까운 곳에 교회가 없어요



실질적 거절시 당황하기 않고 거절극복을 하면 상대는 나의 결신기도를 따라 하게 된다.
전도는 성공한 것이다(90%)

전도의 4단계는 거절극복

상대의 거절을 받았을때 당황하지 않고 거절을 극복하기위해서는 어떠한 거절이라도 극복할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거절극복에 대한 사전연구가 필요하다.
상대의 실질적 거절을 극복하여 결신에 이르게 하는 단계이다.
거절극복에 가장중요한 것은 (YES/BUT용법)이다.
*YES/BUT용법*
YES/BUT용법은 상대의 거절을 일단 인정하고 나서 다시 반격하는 용법.
거절극복시 YES/BUT용법을 사용하지 않을시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여 마지막 크로징(결신)에 불리하게 작용할수 있다.

1,다음에 다닐께요
다음에 다니셔도 되요.그렇게 하세요.(YES/BUT용법)
그런데 한가지 말씀드리고 싶은것이 있어요.
다음에, 마음이 편하실때, 다니셔도 되는데 오늘이후의 우리의 삶을 누구도 알수 없다는 것이 문제지요
만약 이런일이 있어선 안되지만 오늘 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박정희대통령당시 미국의 대통령중에 지미 카터대통령이 계십니다
카터 대통령께서 한국에 방문하셨어요.
카터 대통령은 기독교인으로 대통령직무중에도 주일이면 고향에 교회에 가서 주일학교 교사를 했던 것으로 유명하죠
카터 대통령께서 방한하시고 방한 마지막날 김포공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카터대통령께서 마지막 인사를 하고 비행기쪽으로 가시던 걸음을 멈추시고 다시 박정희대통령에게 다가오셔서 대통령각하 부탁이있습니다
교회나가셔셔 예수님을 믿으세요
갑작스런 전도에 당황했는지 박정희 대통령께서 다음에 가죠
라고 대답했다는 거예요.
그리고 4개월후 박정희대통령은 저격을 당했고 예수님 믿을수있는 기회를 다음으로 미루었다가 영원히...
안따까운 비화입니다
당신께서 지금이시간 예수님을 영접하십시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2,교회의 안좋은 기억때문에...
어떤 안좋은 일이 있었나요?(경청한다)
그레요 전에 그런일이 있으셨군요. 정말 마음이 아프셨겠어요
저였더라도 낙심되었을거예요(YES/BUT)
그런데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복음의 중심에는 예수님이 계세요.
결국 우리가 믿고 따라야할 분은 예수님이라는 거지요.
예수님께서 12명의 제자들을 택하시고 그들을 직접훈련시키셨어요
기적도 보여주셨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습은 온전한것이 아니었어요.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반하는 자의 자리에 서기도 했어요
베드로도 그랬는데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하겠어요.
고정관념은 무서운거예요
그 고정관념은 나를 신앙의 성장을 저해하는 거예요
교회의 부정적인면은 분명 있어요
예수님께서 사시던 2000년전에도 있었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가 오기전에는 계속될거예요.
부정적인면을 바라보면서 낙심하지마시고 이런모습을 위해기도했으면 해요

3,주일에 시간이 없어요.
바쁘신것 같군요
주일까지 출근하시니 얼마나 힘드세요.
저의 간증을 들려드릴께요
저는 88년 모 회사에 영업사원으로 입사를 했어요.
그때는 교회등록한지 얼마되지 않았을때에요
그런데 토요일만되면 회사부장님께서 내일 일요일 정상근무입니다.
전원출근하세요.
정말 고민되던데요.
하나님께서 이런 지혜를 주셨어요.
월-토요일까지 목표를 잡고 그 목표를 가지고 부장에게 가서 저의 일주일목표가 **인데 이것을 달성하면 주일에 예배드릴수 있게 해주세요
부장님은 좋다고 승락하셨어요
다른 직원들보다 더 열심히 했어요 실적이 부족하면 야간에도(자진해서)했어요.그런데 이상한일들이 주중에 일어나는 거예요.
반드시 토요일저녁까지 목표를 채울수 있게 되는 거예요.
부서에서 유일하게 주일에 열외가 되어 예배를 드릴수 있게 되었어요.
한번도 목표를 달성못해 주일에 출근하는 일이 없었으니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고 무었이겠습니까?
하나님께 기도해보세요 주일에 예배드리겠다고 기도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실것을 저는 믿어요.
저또한 기도해드릴께요.

5,불교를 종교로 가지고 있어요(타종교)
부처님을 믿으시는 군요. 저또한 부처님을 존경합니다.
초등학교때 소풍가면서 절에 많이 가보았어요.(절대 타종교를 비방하지 말라)
저의 큰 어머님도 불교를 믿으셨는데 어릴때 불경을 외우시는 모습도 기억나요.
불교는 부처님을 유교는 공자님을 기독교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을 알고 계시죠?
이런 질문하나 드려 볼께요
부처,공자,예수는 모두 존경받을 만큼 훌륭한 사람이라는 거예요
세분 모두 죽으셨어요.
세분 모두는 그들의 무덤이 있어요.
그런데 부처,공자의 무덤에는 그의 죽은시체가 남아있고요
예수의 무덤에는 예수님의 시체가 없다는 것이 큰 차이예요
부처,공자,예수는 분명 우리와 같은 인간이셨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인간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다릅니다.
그의 시체가 없어진 것은 그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부활(다시태어나심)을 하신거지요
당신과 나를 구원하실 분은 이땅을 지으신 하나님 한분밖에 없으신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이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 주시고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기위해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셨고 다시 태어나시고 하나님 보좌우편에 계십니다.
다시오실 것을 약속해주셨는데 성경이 약속한데로 반드시 이루어질겁니다. 부처가 훌륭한 존경받을 만한 위대한 사람이지만 우리를 구원하실분은 될수 없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 나아오면 그리고 그분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선물로 주십니다.


전도의 5단계(CLOSING)

끝마무리로서 상대로 하여금 결신하도록 하는 단계이다.
프리젼테이션단계에서 자연스럽게 마루리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예)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누구나 천국의 열쇄를 얻을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것은 예수님을 내 마음에 영접하면 됩니다
제가 도와 드릴께요
저의 기도를 따라하세요.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마음으로...
(만약환자가 왔는데 손이 섞어서 잘라야 한다고 판단된다면 가족의 동의를 얻어 환자 본인이 거부한다해도 그의 팔을 잘라주어야 진정한 의사인것처럼)
지옥의 길로 가고 있는 상대를 불쌍히 여기고 그를 진정 도와 주는 것은 예수님 믿도록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강력하게 밀어부쳐야 한다

선생님이 학생을 가르치는 마음으로...
학생이 잘 못된 길로 가고있다면 야단을 쳐서라도 옮바른 길로 인도 하듯이 참 전도자라면 사정해서 결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큰 소리로 야단 치면서 결신을 유도해야 한다

복음전하는 전도자의 본연의 자세로 돌아와 강력하게 결신을 유도해야한다.
상대의 연락처와 성함 정도는 주고 받고 주일에 교회로 인도하여야한다
같이 예배를 보고,교회가 운영하신 성경공부모임,또는 양육프로그램으로
안내하여 신앙이 성장하도록 도와주어야한다.



<전도 소그룹 활성화 방안>
교인을 얻기 위한 전도를 하지 말라. 서기관과 바리새인처럼 배나 지옥 자식이 되게 한다(마 23:15). 교회를 늘리기 위한 전도가 아니라 영혼을 건지는 전도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오셨다(눅 19:10)는 것이다.
훈련기간은 보통 3,4일 정도로 한다.

지역별로 한 교회에서 교역자와 평신도를 나누어서 집중적으로 이론과 실습을 병행한다. 저녁에는 부흥회를 겸하기도 한다. 오전에 1-2신간 정도 기도와 강의를 듣는다. 그리고 1-2시간 정도 나가서 실제로 전도한다. 다녀와서는 전도보고를 통해서 간증을 하고 새로운 방법을 찾고 기도한다. 두 사람이 1조가 되어서 1명을 전도하는 동안 한 사람은 옆에서 성령께서 역사해 주시기를 기도한다. 철저하게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한다. 이들은 또한 쉬운 전도의 조건은 항상 전도하기 위해 준비된 사람, 영혼에 대한 사랑이 있는 사람, 열매가 있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전하는 사람, 끈질긴 기도가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을 강조하며 훈련을 시킨다.

장점 및 특징은 전도는 어렵다는 기존의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주고 있는 점이다. 반드시 열매를 얻기를 기도한다는 것이다. 주님은 추수할 일꾼을 원하셨다. 씨만 뿌리는 사람을 원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열매 얻기를 간절히 구하라. 그러면 반드시 예비 된 영혼이 있다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와 도우심을 구하라. 기도해서 성령의 임재가 분명하지 않으면 전도해도 소용이 없다. 어떤 때는 6시간까지도 기도한 적이 있다고 했다. 우리가 주님과의 교제가 잘되어 있으면 예수님께만 붙어 있으면 그래서 성결한 삶만 산다면 전도는 저절로 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이들의 전도방법에도 문제점은 있다. 우선 전도하면서 사람들을 교회로 소개하지 않고 예수님만 증거한다. 잘못하면 영적 사생아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어떤 통계자료도 결과도 이들은 남겨 놓은 것이 없다.
이상이 지금까지 한국교회에 소개되고 적용되고 있는 전도법이다. 그러면 사랑방전운동은 이러한 전도법들과 어떻게 다른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다음 장에서 목회적 차원에서의 사랑방전도법의 타당성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목회적 전략

교회성장은 목회자가 평신도를 얼마나 잘 동원하고 활용하느냐에 달려있다. 평신도를 활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구역조직을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로버트 로건박사는 다가오는 21세기의 교회는「구역교회」(thecell-groupchurch)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구역이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집에서 모이는 구역예배이상의 것이다.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일종의 소그룹, 혹은 자석집단(magneticgroup)을 의미한다. 새 시대의 새 교회는 감옥과 같이 사람들을 교회당에 가두어두는 교회가 되지 말고 중앙집권에서 탈피하여 현장목회로 분산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구역은 인간적 조직 이상의 영적 생명체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1.성경적 근거
1)전도는 소그룹으로 일어나야 한다
구역(Cell)교회는 바로 신약시대 초대교회의 모습이다. 사도행전 2장42절에서 47절에 나오는 신약교회는 건강한 구역의 7 대 기능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사랑방전도 운동에 대한 목회적 전략의 성경적 근거를 찾을 수 있다.
① 교육---가르침을 배우고 적용했다(42절)
② 교제---다 함께 떡을 떼며 나누었다(42,46절)
③ 예배---성찬을 나누며 하나님께 영 광을 돌렸다(42,47절)
④ 기도---기도하기에 힘썼다(42절)
⑤ 능력---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다(43절)
⑥ 봉사---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었다(45절)
⑦ 전도---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해졌다(47절)
효과적인 구역(Cell) 혹은 소그룹을 가지려면 소그룹의 특성을 잘 알아야 한다. 소그룹은 「교회 속의 교회」이다. 소우주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큰 교회일지라도 소그룹만 잘 활용하면 교회의 본질적 특성을 체험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소그룹은 또한 자석집단으로서 다양성과 수용성을 살려 모든 종류의 사람을 다 끌어들일 수 있고 포함시킬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의 성별 나이 학력 경제 경험 직업 등에 따라서 얼마든지 독특한 자아정체를 가진 소그룹을 확장시켜 나 갈 수 있다.
살아있는 소그룹이 많으면 많을수록 세포분열과 신진대사가 원할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성장하게 된다.

다중리더십 필수

소그룹 혹은 구역(Cell)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다중적 리더십이 필요하다 .즉 전체를 관장하는 구역장(leader)외에도 회원들을 개인적으로 돌보는 목양자(shepherd)가 있어야 하고, 비신자들을 끌어 오는 은사를 가진 전도자(evangelist)가 있어야 하며, 장소 와 음식을 제공하는 초청자(host)가 필요하고 또한 말씀을 가르치는 인도자(teacher)가 함께 있어 일종의 팀 사역이 가능해야 건강한 구역의 기능을 담당할 수 있다. 혼자서 모든 것을 맡게되면 항상 탈진하고 지쳐서 할 수 없이 일하는 형식적 리더십밖에 남지 않게 된다.
구역(Cell) 활성화의 열쇠는 올바른 지도자의 선발과 훈련에 있다. 구역지도자를 위한 교육은 이른바 도제식 양육(apprenticeship) 이 성서적이다. 목회자가 생활과 사역가운데에서 함께 거하고 부딪치며 가르치는 교육이 실제적이고 효과적이다. 구역(Cell) 지도자를 선발할 때에는 세 가지 자격, 곧 성품 경험 기술을 살펴야 한다. 그 중에서 무엇보다도 영적 성품이 가장 중요하다. 경험과 소질도 중요하지만 우 선하는 것은 성품이 되어야 한다. 경험과 소질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보충될 수 있지만 좋은 성품은 원래부터 가지고 있지 않으면 쉽게 가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구역(Cell)은 말 그대로 세포단위이기 때문에 끊임없는 세포분열이 일어나서 복제되고 재생산되어야 그 존재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성도수 1 백명당 6개 이상의 소그룹이 형성되고 가급적 모든 성도가 다 참여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교회에서 전체성도 의 25-30% 정도만이 구역(Cell) 혹은 소그룹에 가입되어 있는데 이 수치를 70-80%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노력이 필요하다. 지역성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구역을 성도들의 동질성, 예를 들어 직업이나 나 혹은 은사에 따라 구분하는 새로운 시도도 필요하다.
3)소그룹 모임 많게
평신도 지도자는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끊임없이 찾고 훈련해야 한다. 평신도들 전체를 총동원하여 교회를 「사역공동체」(ministr ycommunity)로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목사의 비전을 평신도 지도자들과 함께 나누는 교회는 성장하는 교회이다. 혼자 일하지 않고 팀으로 일하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이다. 목사를 닮은 평신도가 많은 교회는 부흥하는 교회이다. 작은교회(소그룹)를 많이 만들고 작은 목사(평신도 사역자)를 많이 키우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건물 안에 갇혀있는 교회가 아니라 건물 밖에 흩어져서 끊임없이 새로운 믿음의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는 교회가 21세기를 책임질 것이다.


소그룹의 종류들

1)업무를 위한 그룹/ 각종위원회(장학위원회, 선교위원회, 교육위원회, 차량관리 위원회...), 프로젝트 팀, 군대의 분대, 기동 타격대 등.
2)같은 관심에의한 그룹/ 동호인 그룹(컴퓨터 동호회, 산악 동호회, 낚시 동호회, 문학 동호회, 음악 동호회 ), 상담그룹(그룹상담 그룹), 학술회(학문연구를 목적으로하는) 등.
3)교육을 위한 그룹/ 학교의 학급, 수련회의 각 조, 교회 학교의 분반, 성경연구를 위한 소그룹 등.
4)관계중심의 그룹/ 가족, 종교적인 공동체 등.

소그룹과 성경공부

1) 소그룹의 조건
그룹은 개인의 집합(a collection of individuals)과는 다르다.
그룹이 되려면:
(1)2명이상의 확실한 회원이 있어야하고
(2)그룹의식 즉 우리의식(we-feeling)이 있어야하고
(3)공동의 목표의식이 있어야 한다.
(4)그룹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또한 그룹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상호협조, 상호 의존해야하고
(5)그룹회원간에 상호소통, 상호영향 및 상호반응을 일으켜야 그룹이라 한다.
(6)그룹이 된다는 의미는 또한 하나의 유기체가 되어 통일된 방법으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함께 아파하고 함께 즐거워 해야 한다. 일주일의 기쁨을 나누게 한다

대중 모임과 소그룹의 역동성

(1)대중 모임의 문제점
대중모임에서는 개인들이 필요로 하는 받아들여짐과 사랑의 정신이 결핍되어 있는 점이다. 대중모임은 교제를 삼켜버린다. 사람이 공동체 안에 깊숙이 받아들여지고 사랑을 느끼게 될 때 거기에서 배움이 일어나고 또한 주는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다. 이런 교제가 없는 곳에는 그저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받아 가지고 돌아갈 뿐이지 책임은 회피한다.
대중모임은 믿음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을 주거나 그것에 참여해서 실천할 수있는 기회를 신자들에게 줄 수가 없다. 큰 교회나 대중모임만으로는 성도들 간의 교통이 이루어지기가 매우 어렵다. 교육이란 참여하고 서로 교통(communication)하는 가운데 일어난다. 이 교통을 통한 배움은 믿음을 나누는 것이고 삶의 방법을 서로 교환하는 방법이어서 서로서로를 고무하고 격려하므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증가시켜 주고 은혜에 대한 감사를 불러 일으켜서 배움이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2)소그룹 학습의 가치//텔렌(J.A.Thelen)
심리적으로 아늑하며, 의사표현 뿐만 아니라 감정의 표현도 자유롭다. 참가의 기회가 많으며 따라서 사회적 평가를 받는 일도 많게 되어 학습의 동기도 고조된다.
①개인이 중시되어 개인의 책임감이 증대된다.
②자발적 자기 결정적 지도 행위가 양성된다.
③집단을 지도해 나가는데 용이하다.
④소그룹 성서학습은 회원들로 안정감과 만족감을 느끼게 하며 그의 가장 높은 가능성을 발전시킬 수 있다. 특히 성도의 교제를 통해 하나님의 진리를 바로 이해하고, 교회의 참된 본질의 하나인 Koinonia를 회복하는데 지대한 가치가 있다.
⑤이 소그룹 성서학습에서 가질 수 있는 가치는 장년들이 어떤 지식의 축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인격의 성장과 당면한 문제들을 숙달된 가치에 의하여 판단할 수 있는 능력배양을 요구한다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를 지닌 이 세상에서, 하나의 활력있고 성장하는 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문제들을 자신의 성장을 위해서 선용하며, 확장되고 있는 상호 관계속에서 자기 자신과 위치를 발견해야만 한다.

리더쉽에 관하여

1)소그룹의 지도자의 모습
그룹 성경 연구에서 지도자가 필요한가? 성경연구에서는 언제나 책임있는 지도자가 있어야할 뿐만 아니라 지도자는 성경연구의 승패를 좌우하는 핵이다. 소그룹 성서연구에서 지도자는 가르치는 자(teacher)로서가 아니라 가능케 하는 자로서 봉사하게 된다. 가능케 하는자는 안내자,협조자,촉진자로 봉사한다. 法은 만든사람들이 안지킨다. 한번만 침을 더 삼키라

2)그룹지도자의 자세와 역할:
(1)지도자가 부모가 자녀에게 하듯이 일반 회원들에게 사랑과 수용의 자세를 가지고 대화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때로는 지도자는 격려를 해 줄 필요가 있다. 그룹도 개인처럼 칭찬과 격려를 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2)자녀를 바르게 사랑하는 부모가 자기 아이를 위하여 엄격한 제재를 가하듯이 지도자는 아니오하기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룹 지도자는 언제든지 필요시에는 아니오를 해야 한다.
(3)지도자는 말과 행동으로 개인들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것 보여 주어야 한다. 이러한 행동은 그룹에 흥미를 잃었던 개인에게도 새로운 관심을 넣어주어서 적극적인 참여의식을 높일 수 있다.
(4)좋은 부모와 같이 그룹 지도자는 회원들로 하여금 책임과 지도력을 분담해서 지도토록 해야 한다. 그룹 성장과 함께 회원들의 독립심을 길러 주어야 한다.
(5)지도자는 정직하고 다른 친교가 일어나도록 하며 친교를 발전시킬 책임을 져야한다.
(6)지도자는 회원들이 서로서로 섬기면서 기쁨을 얻도록 분위기를 잘 조성해야 한다.
(7)지도자는 지식을 전달하거나 경험을 통하여 그룹을 인도하는 그 이상이다. 즉 그룹 회원의 성장을 도와야 한다.
(8)지도자는 토론과 대화로서 그룹과정에 참여해야 한다. 지도자의 참여를 통하여 참된 배움의 형태인 그룹 중심의 경험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9)지도자 토의 과정에서 한 사람이나 몇 사람에 의해 독점되는 것을 막아 주어야 한다.
(10)때때로 지도자는 토의 속에서 인내심 있게 기다려야 한다. 왜냐하면 성령의 역사가 회원들 안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11)무엇보다 지도자는, 성령께서 그룹 안에서와 동시에 개인들 속에서 역사하심을 믿고 관심을 가지되 과제보다는 늘 사람에게 두어야 한다.
(12)지도자는 기지와 유모어 감각이 있어야 한다.

성경 공부 시 어려운 문제점들:

(1)입이 무거운 회원들이 많을 때:
대화에 조력할 수 있는 사람 한 두 분에게 미리 대화에 적극 동참토록 부탁하면 좋다. 동역자 C0-leader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시사성 있는 화제로 돌렸다가 대화의 분위기를 이룬 다음 공부에 들어가도 좋다.(복음을 향하여) 질문을 바꾸어 그 사람에게 적절히 물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질문을 낮추어 가야 한다. 애매한 것을 수준을 낮추어 해야 한다. 또한, 성경 몇 구절을 읽도록 부탁하는 것이 좋다. 대부분 처음 온 분은 분위기를 탐지하고 있는 중이므로, 갑자기 질문을 던지지 말고 적당한 기회에 말할 기회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질문에 즉시 대답이 안나오더라도 충분히 기다려야 한다.
인도자가 신경질이 나더라도 화내지 말고 인내하며 잘 인도하면 좋아질 수 있다. 왜 말이 없는 지 잘 분석해 보고 대책을 다른 동역자와 상의해 봄이 좋다. 말없는 사람들이 의외로 깊이 듣고 있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2)말이 많은 회원이 있을 때:
모임을 완전히 독점하고 엉뚱한 곳으로 이끌고 갈 때 인도자가 구경하고 있으면 안 된다. 얼마만큼 듣고 있다가 참 재미있는 의견이군요, 다음기회에 한 번 들어보기로 합시다. 은혜 자매님은 어떻게 생각하시지요? 하고 적당한 곳에서 말을 끊고 전체회원이 공감하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다.
(3)곁 가지를 치는 사람이 많을 때, 어려운 질문을 받을 때:
너무 묵살하면 인도자의 차가움을 싫어할 것이므로 간단히 대답할 수 있는 것이면 대답해주고, 중요한 문제이면 기록하면서, 다음에 연구해서 대답해 드리겠습니다라고 성의를 보임이 중요하다.
(4)언쟁이 생겼을 때:
양쪽 의견을 듣게 한 후 성경말씀으로 주의를 집중시키고 해결될 수 있는 것이면 정확한 대답을 내리고, 해답이 어려운 것은 다음 기회로 일단 미루는 것이 현명하다.

소그룹 지도 방법

1)건전한 그룹
(1)그룹회원 전체가 그들이 생각하는 바를 말하며 참여한다.
(2)최후 결정은 전체 회원이 충분히 토의하여 합의 후에 결정한다.
(3)회원들이 피차 상대방의 의견이나 제안을 존중하고 고려하게 된다.
(4)회원들이 객관적으로(사사로운 감정없이)그룹의 목적과 과제에 대한 흥미에 중점을 둔다.
(5)회원전체가 서로 보상도 해 주고 비판도 한다.
(6)타회원들을 신뢰하고 가치를 인정하면서 의견을 내놓거나 책임을 다하는데 선도성(先導性)을 잡는다.
(7)그룹의 회원으로부터 도움을 받고자 하는 개방된 마음과 의욕을 갖는다.
(8)회원의 가치는 그 사람의 그룹에 대한 공로에 의해 평가된다.
(9)중요한 안건에 대해 많은 시간을 사용한다.
(10)회원들의 행동이 항상 다른 회원과의 관계를 생각하며 취해진다.
2)불 건전한 그룹
(1)몇몇 제한된 회원들만이 토의에 참여한다.
(2)대부분의 회원들은 무던히 동의를 한다.
(3)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하며 모든 문제에 대해 자기 중심적으로 성급하게 판단하고 지나간다.
(4)회원들이 그룹의 목적과 과제를 주관적으로 이해한다.
(5)회원들은 모든 일을 돕는 이에게만 의존하고 돕는이가 없으면 토의가 진전이 안된다.
(6)그룹 이외의 다른 자원에도 의존하여 도움을 얻고자 하는 의욕이 없다.
(7)좋은 생각을 제공한 사람의 의견을 순수하게 잘 받아 드리지 않는 경향이 농후하다.
(8)지엽적인 문제 대수롭지 않은 절차문제에 대해 오히려 많은 시간을 쓴다. 자기 자신의 이해 관계나 체면에 더 신경을 쓰기 때문이다.

그룹 유지를 돕는 기능들

(1)격려-다른 회원들에게 친절하고 부드럽게 대해 준다거나 좋은 의견이 나왔을 때 적극 동의하며 공헌을 끼친 회원에게는 칭찬을 해주는 기능이다.
(2)그룹 감정표현-그룹 안에서의 느낌이나 분위기 그리고 관계에 대하여 다른 회원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다.
(3)중재-회원간의 의견의 차이를 조화시키려고 시도하는 기능이다.
(4)타협-어느 한 회원의 의견이나 상대가 논쟁 가운데 있게 될 때 자신의 입장을 타협시키려거나 잘 받아들이며 그룹의 친교를 유지하려는 행동이다(예//잘 못된 것은 금방 시인하고 넘어간다)
(5)문지기 기능-조용히 있는 회원에게 이야기를 시키거나 그룹의 진행이 정지되었을 때에 좋은 제안을 하면서 그룹의 토의를 살리는 기능이다.(예//그 문제에 대해서는 '-이 전문가''-문제에 대해 생각')
(6)기준설정-기준을 제시하는 기능이다.
(7)청종-잘 들어 주는 기능이다.(눈, 고개로 응답해 준다)
(8)긴장완화-그룹 안에서 딱딱한 분위기나 불쾌한 감정이 생길 때 유우머를 써가면서 분위기를 조성하여 긴장을 없애는 역할을 하는 기능이다.(예//음담패설, 지역감정, 인종차별,성경을 가지고 하는 농담은 영적분위기를 손상시킨다.)
4)비 기능적 역할들
(1)봉쇄-화제에서 탈선된 이야기나 자기의 경험등을 많이 하는 경우나, 또는 무조건 남의 의견을 반대하면서 다른 회원의 참여를 가로 막는 역할을 봉쇄하고 한다
(2)공격-그룹안에서 심하게 비판하거나 비난하므로 적의를 드러내 보인다. 심지어는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는 수도 있다.
(3)인정요구-남의 주의를 자기에게 집중시키기 위해 자랑하거나 이야기를 길게 하면서 칭찬해 주기를 바라는 언동을 한다.
(4)후퇴-그룹토의에 참여하지 않고 혼자 딴전 피거나 무관심한 태도로 피동적으로 행동을 한다.(책 덮어놓고 있는 행동이 여기에 속한다.)
(5)지배-그룹을 자기가 조정하고 지배하려는 행동을 한다. 명령도 하고 사람의 발언을 무시하면서 권위를 부리려 한다.
이제 결론적으로 정리 해보면, 성경 연구의 목적은 성경의 지식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는데 있다. 건전한 방향설정(-ism)을 하라. 모든 종교는 Buddism. Shamanism Moonism이지만 기독교는 Christism이 아니라, Christanity이다.
내용이나 방법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인도자와 참여자가 어떤 영적 상태, 성경연구에 체질화가 문제이다. What, How 보다 Who가 문제이다.
그룹의 영적인 분위기는 성경연구의 능력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그룹의 습관적인 모임이 되지 않도록 늘 신선한 분위기를 유지한다. 매시간 참신한 장식준비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자리배열, 장미 한 송이, Coffee한잔 준비)
자신을 솔직히 고백하고 타인을 인정하고 포용할 수 있는 분위기 유지를 위해 노력한다. 지도자와 참여자는 그룹역학 속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역사에 민감해야 한다. 지도자나 참여자의 의견이 소중하지만 하나님의 말씀보다 중요하지는 않다. 말씀으로 의견을 수정해 가야한다. 사람의 의견은 언제나 배우는 말씀에 의해 수정되고 결정되어야 한다.
제 7 장. 전도소그룹을 위한 평신도 훈련계획
1884년 알랜과 언더우드가 한국에 개신교의 문을 연 이래 한국의 개신교는 가히 폭발적이라 할 만큼 부흥을 거듭하여 왔다. 1900년에 18,081명이었는데, 100년만에 1,000만을 돌파했다. 세계 교회가 한국교회의 괄목할 만한 성장에 그들이 연구할 모델로 주목하고 있을 지경이다. 그러나 수적인 성장의 모델이 될 수 있을런지는 몰라도 바람직한 교회로서의 모델이 될 수 있을런지는 의문이다.
한국에 기독교인이 1,000만을 넘는다고 자부들하고 있지만, 여전히 이 사회에 대한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의 빛이 사회를 비추지 못하고, 기독교의 소금이 사회의 부패를 치료하기는커녕 방지하는데도 너무나 무력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은 그 동안 교회가 성장하는 데만 주력하여 수적인 동원은 이룩했지만, 이들을 관리하는데는 실패했기 때문에 오는 결과이다.
교회 안에는 세상 앞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 놓고 있는 가견적인 교회인 99%의 평신도가 있다. 이들이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생활현장에서 자기의 삶을 통해서 구현할 수 있어야 교회는 빛이 되고 소금이 될 수 있을텐데 방치되어 있다. 또한 교회는 이들이 연결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 몸은 유기체로서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 그런데 교회는 이 교회의 지체들의 관계를 단절시켜 버림으로 유기체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결국 교회가 갱신되려면 교회의 지체들을 동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효과적이면서도 교회의 본질에 적합하게 교인을 동원하여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기능을 감당하게 할 수 있는가? 소그룹은 이러한 교회의 본질적인 면과 기능적인 면을 수용할 수 있는 기초구조로서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소그룹은 교회로 하여금 가장 신속하게 교회의 본래적 기능을 회복하는데 최선의 구조이며, 교회 운영에 있어서도 소그룹이 기본단위로서 교회의 모든 사역의 근간이 될 때, 교회의 본래적 기능이 회복될 것이다.
그러면 그 동안 소그룹이 교회에 없었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구역, 남 여전도회, 위원회 등의 소그룹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 조직체계는 있다. 하지만, 단지 기능적으로 대그룹을 축소해 놓은 정도에서 머물고 말았고, 소그룹으로 발휘될 수 있는 자유성이나, 역동성, 개체간의 활발한 상호관계가 억제되어 있는 상태이다. 따라서 형태만이 아닌 기능적이고 본질적인 면에서 소그룹의 특성이 충분히 채용되는 소그룹 운동이 필요하다. 아울러 선교지향적인 구조가 필요하다. 앞장에서 말했듯이 모달리티(Modality)적인 소그룹이 많아야 한다. 즉 전됴ㅗ 소그룹이 많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될 때, 소그룹은 교회를 갱신시키는 도구이면서, 갱신된 모습 그 자체가 될 수 있다.

이장에서는 본 연구자가 진주도동교회에 접목하고자 하는 전도소그룹 사랑방전도운동을 교회내의 평신도들에게 접목시켜나가는 방법을 열거해 보고자 한다.
제 1 절. 전도소그룹 활성화를 위한 세미나
교회 갱신운동은 항상 근본으로 돌아가려는 열의를 가지고 시작되었고, 기독교 운동의 진수를 찾아내려는 목적으로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런 갱신운동자들이 취했던 형태는 소그룹으로부터 시작된 기도와 교제와 훈련이었다. 이에 맞추어 본 연구자는 진주 도동교회에 전도소그룹 운동을 접목시키기 위한 계획을 가지고 실행에 옮겼다.
1. 세미나 준비를 위한 사전조사 및 진행
본 연구자는 본 세미나와 연구 조사를 도와 줄 그룹을 5인 선정하여, 진주 도동교회의 새로운 '사랍방전도 운동'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3차에 걸쳐 모임을 가졌는데 그 일정은 다음과 같다.
1999.7.1. PM:7시 목회관리그룹 5인 위원 선정. 담임목사의 설명. 신앙의식 조사
1999.7.8. PM:7시 교인들의 신앙의식 조사를 위한 설문지 작성 (문항수 30가지. 150명에 대한 조사계획 수립)
1999.7.15. PM:1시 설문지 배부 및 수거
곧바로 목회관리그룹들과 결과 분석
1999.7.21. PM:7시 세미나 실시 (소그룹전도운동과 도동교회의 비젼)
1999.2.1. PM:9시 세미나 후 설문조사

1) 도동교회 교우들의 신앙의식 조사 결과 분석
도동교회가 지난 수년간 열심으로 복음을 전하고, 말씀으로 교육을 시켰지만, 성도들에 대한 신앙의식을 조사한 결과, 의외로 성도들의 신앙이 말씀의 확신 위에 서있지 못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1번부터 10번까지의 질문은 구원의 확신, 죄 사함의 확신, 기도의 확신, 인도의 확신, 말씀의 확신, 성령 내주의 확신, 교회생활의 중요성들을 묻는 질문인데, 이 열 가지 질문에 모두 긍정적으로 대답한 사람은 150명의 응답자중 47명에 불과했다(28.9%).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라는 질문에는 121명의 사람이 긍정적으로 대답했지만 밑으로 내려올 수록 그 숫자는 줄어들어 성령님이 내 속에 내주하고 계시느냐 는 질문에는 73명 (47%)만이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또 20번까지의 질문은 교회에서와 세상에서의 봉사를 묻는 질문인데 이 부분 역시 30%이하의 응답률이 나왔다. 모름지기 성도의 삶에서 나을 돕고 교회를 섬기는 봉사의 삶이 되려면 무엇보다 기초신앙의 확립이 필요하다. 이러한 기초신앙의 확립과 봉사도 말씀에 기초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시다. 12번 십일조를 실천하고 계십니까?(24%) 16번 우리교회는 열심히 전도하고 있습니까?(18%) 18번 하나님의 말씀이 생활에서 실천되고 있습니까?(13%) 등등은 우리교회의 말씀교육상태를 진단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 읽기, 암송 등등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미미했으며 이에 대한 좀더 준비된 목회계획과 실행이 필요할 것 같다.
2) 신앙의식조사 결과 느낀 점
한국교회와 교인들은 전반적으로 말씀에 의한 지식적 신앙보다는 마음에 의존하는 감정적인 신앙임을 발견하게 해준다. 본교회의 교우들 중 거의 70%가 타 지역에서 전입해 들어온 사람이라면 이들은 이미 두 세개의 교회이상에서 신앙을 배웠고 말씀을 배워 왔을 터인데 의외로 그들은 말씀으로 견고하지 못했다.
이들이 모두다 수년씩 신앙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이 굳건히 서있지 못한 이유는 우리교회뿐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의 분위기가 그렇게 지성보다는 감정에 의존해 왔다는 뜻이 된다. 물론 감정적인 면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말씀의 기초가 없는 상태에서 감정만을 고조시킨다면 카타르시스가 일어나지 않는 모든 교회의 행사들은 철저히 저들에게 외면 당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반복적으로 복음을 강조하며, 또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고, 그리고 확인하는 구약적 방법을 동원하여 복음을 이해시키고 확신시켜야 할 것이다.
3) 실행을 위한 행동계획
이렇게 발견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본 교회는 다음과 같은 정기적인 사역을 시행하기로 했다.
정기적인 세미나를 통한 구원의 확신운동과 말씀의 확신운동
목회자와 함께 혹은 대신해서 구원의 확신을 시킬 수 있는 평신도 사역자 훈련
이상과 같은 두 가지의 기본 방향을 잡고 도동교회는 사역을 해나갈 것이며 본 장에서는 본 교회에서 실행하였던 세미나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밝히도록 하겠다.
대개의 도시교회들이 다그러하겠지만 산업화 도시화로 인해 성도들의 이동이 심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다들 오래했다고는 하지만 깊이 있고 체계 있게 성경을 배우고 익힌 적이 없는 것이다. 본인의 섬기고 있는 교회에서도 다른 교회에서 집사로 봉사했다고 하면 별 의심 없이 다시 본교회의 집사로 임명하게 되는데, 이런 식으로 성도들에 대한 점검 없이 지나 가다보니 성도들의 기초신앙이 부족하게 된 것이다.
이 세미나 후 간략하게 확인을 위해 돌린 설문지에서 밝히 소감은 대체로 세미나가 유익했다(97%). 세미나를 통해 새롭게 거듭났다(49%), 세미나를 자주 가졌으면 좋겠다(84%). 말씀의 중요성을 깨닫고 읽고 듣고 암송하고 공부하겠다(67%)는 등 긍정적인 변화를 고백하는 교우들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그러므로 도시교회는 이동하는 신자들의 신앙을 잘 점검해서 이들을 말씀으로 붙잡아 주며, 신앙을 성장시킬 때 교회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할 것은 뻔한 일이다. 성숙되지 못한 신자는 교회나 세상에서 맛없는 소금이요. 거치는 돌이 되어 교회성장을 방해하는 요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2. 도동교회의 전도 프로그램
예수님이 제자들을 선택하셔서 그들을 훈련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온 세계를 향하여 복음을 전하게 하신 방법은 오늘날에도 실천해야 되는 과제이다. 초대교회와 한국의 초대교회도 상황은 달랐으나 전도의 방법과 효과는 비슷했다. 철저한 회개와 변화된 모습, 성령의 충만을 사모함과 그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세 등은 우리가 배워야 할 본보기라고 생각한다. 이제 본 장에서는 현재 우리 나라에서 실시하고 있는 주요 전도이론들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그 이론들의 장단점과 보완점을 살펴보면서 도동교회의 바람직한 전도모델을 제시하고자 한다.

열왕기하 / 03. 30. 2022(Wed) -






구약의 일곱 가지 유대 절기



구약에 일곱 가지 유대 절기 즉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칠칠절(맥추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일, 그리고 초막절(장막절, 수장절)을 소개하고 있고, 이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참고: 레위기 23장).

  • (레 23:3) 이것이 너희가 그 정한 때에 성회로 공포할 여호와의 절기들이니라

절기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그 분의 영광을 기념하고 찬양하며 백성으로 기쁨을 누리기 위해 정해 주셨습니다.

  • (레 23:43)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주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유대 백성은 무교절, 칠칠절(오순절), 그리고 초막절에는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 (신 16:16) 너의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자신이 메시아 임을 알리시기 위해 창세기를 비롯한 모세오경선지서를 자주 인용하셨습니다. 선지서와 절기를 비롯해 여러 상징은 예수님을 가르키고 있기에 구약을 이해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메시아라는 것을 아는데 도움이 됩니다.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변장하고 싸우고자 하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므깃도 골짜기에 이르러 싸울 때에 활 쏘는 자가 요시야 왕을 쏜지라 왕이 그 신복에게 이르되 내가 중상하였으니 나를 도와 나가게 하라”(대하 35:22 ,23)


 요시야는 쇠락해 가는 남방 유다 왕국의 마지막 등불이었다.
그는 불과 8살에 왕위에 올라 부친 아몬과 조부 므낫세와는 달리 다윗의 길로 행하였다.
그는 재위 18년인 BC 621년에 율법서인 신명기서를 발견한 후 대대적인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여호와의 전을 수리하고 우상을 일소하고 성지를 회복하고 군사력을 증강시켰다.

특히 신명기를 낭독하는 것을 듣고는 그 자신이 옷을 찢으며 회개하였으며 가나안 정착 이후로 가장 큰 유월절 절기를 지키게 하였다. 그래서 성경은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사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왕하 23:25)

그런 그가 아직도 젊은 39세인 BC 609년에 쓸데없는 외교 분쟁에 휘말려 전사하고 말았다.
물론 이러한 비극의 원인은 조부 므낫세의 엄청난 죄악 때문이었다(왕하 23:26~27).
그러나 역대하 35장의 본문에서는 그의 죽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잘못된 판단으로 전쟁에 참여한 결과라고 설명하고 있다.

어찌 요시야 같은 이가 그렇게 하였을까?
그는 왜 그런 어리석은 결정으로 죽음을 맞게 되었을까?

그것이 아마도 이방 왕인 느고의 입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었는가?
여하튼 역대개의 본문은 그의 죽음을 전하는 므깃도 전쟁 기사를 시작하면서까지 “이 모든 일 후 곧 요시야가 전을 정돈하기를 마친 후에”(대하35:20)라고 하여 요시야가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께 헌신하였음을 보여준다.

 

 요시야가 최후를 맡은 소위 므깃도 전쟁을 바르게 이해하기 이해서는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자세히 알 필요가 있다. 요시야가 유다를 통치하고 있던 그 시대에는 바벨론이 고대 근동의 신흥 패권 국가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바벨론은 이미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와 하란을 정복하였다.

 

 그 후 앗시리아의 장군들이 앗수르-우발릿(Ashur-uballit)의 지휘 아래 갈그미스를 수도로 삼았다. 이에 애굽은 근동 아시아의 세력 균형을 깨뜨리는 바벨론의 등장을 억제할 목적으로 앗수르 왕국을 돕고자 갈그미스로 올라갔다. 그리하여 BC 609년 여름에 애굽의 바로느고는 대군을 이끌고 팔레스틴의 므깃도까지 이르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한글 개역성경의 “애굽왕 바로느고가 앗수르 왕을 치고자(agianst)하여”(왕하23:29)라는 번역은 잘못된 번역이다. 히브리어 전치사 알(לؽ)은 그 역사적 배경을 고려할 때 “치고자”(ahainst)가 아니라 “위하여”(on behalf)로 번역되어야 한다.그래서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은 무두 “애굽왕 느고가 앗수르 왕을 도우려고”라고 번역하였다.

 

 여하튼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서 요시야는 앗수르를 도우려고 올라오는 바로느고와 므깃도에서 맞섰다. 이는 애굽이 앗수르와 동맹하여 바벨론을 물리치면 팔레스틴에 대한 애굽의 지배권이 부활되고 결국 통일 히브리 왕국의 꿈이 위협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이때 바로느고는 요시야에게 이렇게 말했다. “유다 왕이여 내가 오늘날 그대와 무슨 관계가 잇느뇨. 내가 오늘날 그대를 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명하사 속히 하라 하였은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르지 말라 그대를 멸하실까 하노라”(대하35:21)고 하였다.

 

 그러나 요시야는 이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 말을 무시했는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여호와에 대한 열망이 너무 큰 나머지 여호와의 제지하시는 음성을 무시했는지도 모르겠다. 동기가 무엇 이였든지 간에 요시야는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변장하고 싸우고자 하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대하35:22)였다.

 

 이때 요시야가 느고의 말을 듣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선민 국가의 왕이라는 자부심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것은, 마치 큰 부흥과 개혁 사업을 주도하고 있는 경견하고 영감적인 목사에게 어떤 세속적인 사람이 영적인 문제에 대해 충고를 할때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것과 같다 .그러나 요시야는 바로느고의 입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했다. 사실 하나님은 전에도 이방의 왕들에게 기별을 주신 것이 있었다.(창12:17-20;20:3~7; 단4:1~3) 뿐만 아니라 심지어 나귀를 이용하시어 경고를 주시기도 하셨다.(민22:28~31).

 

 요시야가 비록 바로느고의 말을 듣지 않고 애통하게 전사하였지만 성경은 여전히 그를 의로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른다. 심지어 그의 죽음을 일찍이 하나님께서 여선지자 훌다의 입을 통해 예언한바 “내가 너로 너의 열조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곳 거민에게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가 눈으로 보지 못하리라”(대하34:28)는 말씀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성경은 요시야 왕의 삶에 대해 심지어 이 므깃도 사건 이후에도 그가 “행한 모든 선한 일과 그 시종 행적이”(대하 35:26) 기록되었다. 는 말로 마무리하고 있다.



미국은 인구 비례 60만명 당 1인의 국회의원
이러한 실예를 한국에 적용할 경우 85명 정도가 적당하다. - 이춘근박사(국제정치학 전공)

여야가 검찰의 6대 범죄 수사권 중 부패·경제범죄에 대한 수사권만 중대범죄수사청 설립 전 1년 6개월간 유지하는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중재안을 수용하기로 했다.
여야 원내대표가 중재안대로 합의한다면 다음 주 본회의에서 관련 법안이 처리될 전망이다.

더불어민주당은 22일 오후 국회에서 의원총회를 열어 '검수완박' 법안 관련 박병석 국회의장의 중재안을 논의하고 이같이 결정했다. 박홍근 민주당 원내대표는 의원총회 이후 기자들과 만나 "국회의장이 중재안으로 제시한 안을 수용하기로 결정했다. 중재안에 필요한 것은 향후 보완해 가겠다"고 밝혔다. 

이어 "그동안 민주당은 검찰에 과도하게 집중된 국민 기본권 침해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인식하에 기소권과 수사권을 반드시 분리돼야 한다는 원칙을 강하게 주장했다. (또) 시기를 끌 수 없기 때문에 4월 내 처리해야 하고, 국가의 반부패 수사 역량 강화를 위해 한국형 FBI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도 요구해왔다"며 "크게 이 세 가지 부분이 기본적으로 반영됐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의장의 중재안을 여야가 수용했기 때문에 이에 따른 법제사법위원회 법안 심사과정이 뒤따라야 한다. 안건조정위에서 하는 방법도 있고, (혹은) 조정위는 철회하고 법안소위에서 심사해 전체회의서 심사한 뒤 본회의 처리하는 과정을 밟을 것"이라며 "본회의를 다음 주에 열어 검찰개혁 관련 법을 처리하고, 5월 3일 국무회의에 최종 이송돼 의결될 걸로 본다"고 했다. 

공직·선거·방위사업범죄, 대형 참사 수사권 이달 내 폐지 제안 




 
국민의힘도 이날 오전 의원총회를 통해 박 의장의 중재안을 수용하기로 했다.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의원총회 후 기자들과 만나 "치열하게 논의한 결과, 우리 당은 의장 중재안을 수용하기로 했다"며 "의장 중재안은 의장과 양당 원내대표가 서너 차례 회동을 통해 합의한 안"이라고 말했다. 

박병석 국회의장은 앞서 이날 검찰의 부패·경제범죄 등 2개 중대범죄에 대한 수사권만 유지하고, 1년 6개월 내 중대범죄수사청(한국형 FBI)가 설립되면 수사권을 모두 폐지하는 안을 포함한 최종 중재안을 양당에 전달했다. 

중재안은 총 8개 항으로 구성됐다. 중재안에는 검찰의 직접수사권과 기소권을 분리하는 대신 검찰의 직접 수사권은 한시적으로 유지하도록 하는 내용이 담겼다. 다만 직접 수사의 경우에도 수사 검사와 기소 검사를 분리하며, 검찰 외 다른 수사기관의 역량이 일정 수준에 이르면 검찰의 직접수사권도 폐지하도록 했다. 

또 검찰의 수사범위가 명시된 검찰청법 4조 1항 1호 가목 중 공직자범죄, 선거범죄, 방위사업범죄, 대형 참사를 삭제하도록 했다. 기존 검찰의 수사 범위였던 6대 범죄 중 부패범죄와 경제범죄 등 2대 범죄만 한시적으로 남기도록 한 것.

정의당 "의장 제안 존중, 여야 합의 통한 법안처리 촉구"




 
더불어 박 의장은 검찰의 직접수사 총량을 줄이기 위해 6개 특수부를 3개로 축소하고, 3개 특수부의 검사수도 제한하자고 했다. 경찰의 송치사건에 대해서도 범죄의 단일성과 동일성에서 벗어나는 수사는 금지하도록 했다. 검찰의 시정조치 요구사건과 고소인이 이의를 제기한 사건 등에 대해 사건의 단일성과 동일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만 검사가 수사하도록 했다.

박 의장은 법률안 심사권을 부여하는 '사법개혁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중대범죄수사청 등 사법 체계 전반에 대해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중대범죄수사청은 특위 구성 후 6개월 내 입법을 완성하고, 입법 조치 후 1년 이내 발족하자는 안도 제시했다. 중대범죄수사청이 출범하면 검찰의 직접 수사권은 폐지된다.

특위는 민주당 7명, 국민의힘 5명, 비교섭단체 1명 등 13인으로 구성하고, 위원장은 민주당이 맡도록 했다. 이들은 중수청 신설에 따른 수사기관 권한 조정과 함께 수사기관의 공정성 및 중립성을 담보할 방안도 논의하게 된다. 중재안에는 검찰개혁법안을 이번 임시국회 4월 중에 처리하고, 공포된 날로부터 4개월 후 시행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한편 정의당에서도 이번 의장 중재안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여야 합의를 촉구했다. 이동영 정의당 수석대변인은 이날 국회에서 브리핑을 열고 "검찰개혁을 놓고 양당의 강대강 대치 국면을 해소하고, 시급한 민생 현안으로 국회가 전념하자는 국회의장의 제안을 존중한다"며 "시민의 기본권 보장과 견제와 균형을 통한 실효적 검찰개혁이 추진될 수 있도록 여야 합의를 통한 법안처리를 촉구한다"고 밝혔다. 



검수완박 : 검찰의 수사권을 완전히 박탈한다.
윤석열 / 검수완박 부패완판
한동훈 / 검수완박 야반도주


오나라 사람과 월나라 사람이 한  배에 타고 있다.
어려운 상황에서는  원수라도 협력하게 된다.
사이가 나쁜 사람끼리 같은 장소와 처지에 함께 놓임.   

손자(孫子)라는 책은 중국의 유명한 병서(兵書)로서 춘추시대 오나라의 손무(孫武)가 쓴 것이다.
손무(孫武)는 오왕(吳王) 합려(闔閭) 때, 서쪽으로는 초(楚)나라의 도읍을 공략하고 북방의 제(齊)나라와 진(晉)나라를 격파한 명장이기도 했다. 

오(吳)의 합려(闔閭)와 월(越)의 윤상(允常)이 서로 원한이 있었고 윤상이 죽자 그의 아들 구천(句踐)이 오나라를 침략하여 합려를 죽이고 합려의 아들 부차(夫差)에게 구천이 회계산에서 항복당하여 서로 물리고 무는 관계로 오나라와 월나라는 견원지간(犬猿之間)이 되었다. 

이에 대해 손무(孫武)의 손자(孫子) '구지편(九地篇)'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병(兵)을 쓰는 법에는 아홉 가지의 지(地)가 있다. 
 그 구지(九地) 중 최후의 것을 사지(死地)라 한다. 

주저 없이 일어서 싸우면 살길이 있고, 기가 꺾이어 망설이면 패망하고 마는 필사(必死)의 지(地)이다. 

그러므로 사지에 있을 때는 싸워야 활로(活路)가 열린다.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필사(必死)의 장(場)에서는 병사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필사적으로 싸울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유능한 장수의 용병술(用兵術)은 예컨대 상산(常山)에 서식하는 솔연 (率然)이란 큰 뱀의 몸놀림과 같아야 한다. 

머리를 치면 꼬리가 날아오고 꼬리를 치면 머리가 덤벼든다. 또 몸통을 치면 머리와 꼬리가 한꺼번에 덤벼든다. 이처럼 세력을 하나로 합치는 것이 중요하다. 

옛부터 서로 적대시해 온 '오(吳)나라 사람과 월(越)나라 사람이 같은 배를 타고[吳越同舟]' 강을 건넌다고 하자.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큰 바람이 불어 배가 뒤집히려 한다면 오나라 사람이나 월나라 사람이나 다 같이 평소의 적개심(敵愾心)을 잊고 서로 왼손, 오른손이 되어 필사적으로 도울 것이다. 

전차(戰車)의 말[馬]들을 서로 단단히 붙들어 매고 바퀴를 땅에 묻고서 적에게 그 방비를 파괴 당하지 않으려 해봤자 최후에 의지(依支)가 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의지(依支)가 되는 것은 오로지 필사적으로 하나로 뭉친 병사들의 마음이다." 

夫吳人與越人相惡也 當其同舟而濟遇風 其相救也 如左右手.  
 
吳 오나라 오. 越 넘을, 월나라 월. 同 한가지 동. 舟 배 주. 
 
[동] 同舟濟江(동주제강) : 한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 
                          즉 원수라도 한가지 일을 위해서는 돕게 된다. 
     同舟相救(동주상구) : 이해관계에 얽혀 있으면 자연히 돕게 된다. 
     오월지쟁(吳越之爭), 오월지사(吳越之思), 
     호월동주(胡越同舟), 오월지부(吳越之富) 

[출전] '孫子兵法' 九地篇



치료하시는 하나님(출애굽기 15:22-27)

26.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16세기 프랑스에 암브로스 파레라고 하는 유명한 외과의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의사로서 한평생 많은 환자를 돌아보았는데 그 때마다 그가 늘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 이 말을 묘비에 새겨놓았습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그 묘비명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묘비명은 이렇습니다.

"나는 상처를 싸매어줄 뿐이다. 상처를 고쳐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한평생 이 마음으로 환자를 돌아보았다는 말입니다.

“주여 사람이 사는 것이 이에 있고 내 심령의 생명도 온전히 거기에 있사오니 원하건대 나를 치료하시며 나를 살려 주옵소서”
이사야 38:16.

성 프란시스가 자기 고향에 있을 때, 하루는 자기 집 하인이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인은 물을 길을 때마다 한 가지 이상한 행동을 했습니다.
큰 물통을 내려 물을 가득히 담은 후 끌어올릴 때 항상 조그마한 나무토막 하나를 그 물통 안에 던져 넣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신기하게 여긴 프란시스는 하인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하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물을 퍼 올릴 때 나무토막을 물통 안에 넣으면 물이 요동치지 않게 되어 물이 밖으로 흘러넘치는 것을 최대한 막을 수 있어요.
나무토막을 안 넣으면 물이 제 마음대로 출렁거려서 나중에 반통 밖에 안 될 때가 많거든요."

하인의 설명을 들은 프란시스는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서 자기 친구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흔들리는 마음의 물통을 가지고 있는가? 두려움으로 흔들리는 마음, 고통으로 심하게 요동하는 마음, 절망으로 부서지는 마음, 이것은 마치 심하게 흔들리고 출렁거리는 물통과 같은 것이지. 그러나 거기에 십자가라는 막대기를 던져보게."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 분을 바라볼 때마다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의 고통을 함께 져주시고 치료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읍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안과 진실이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예레미야33:6

젊은 자동차 정비사가 헌차를 한대 싸게 샀습니다.
거의 굴러가지 않을 정도의 고물차를 열심히 수리해서 타고 달리니 기분도 좋았고 자기의 기술이 자랑스럽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그 차를 운전하여 약간의 장거리를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엔진 이 털털 거리더니 딱 멎어 버렸습니다.
젊은이는 차에서 내려서 엔진의 뚜껑을 열고 고장원인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때마침 지나던 차 한대가 옆에 대고 정차하더니 노인 한 사람이 내려와 젊은 정비사의 곁에 와서 엔진을 함께 들여다보았습니다.
청년 정비사는 그 노인을 바라보고 "문제없습니다. 그냥 가세요. 나는 정비사이니까요."라고 하면서 자신만만한 태도로 여기 저기를 찾아 만져 보았습니다.
그러나 고장을 고치지 못하고 발동은 여전히 안 걸렸습니다.
그때까지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노인이 말했습니다.
"젊은이, 내가 좀 도와주지."그러면서 손가락 한 개로 엔진의 한 부분을 톡, 친 후 "자, 발동을 걸어 보시요."라고 했습니다.
의심쩍은 얼굴로 청년이 발동을 걸어보니 엔진이 붕, 붕 하며 잘 돌아갑니다.
기가 막혀진 정비사 청년은 그 노인을 향하여 의아스러운 눈으로 물어 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러자 노인은 대답했습니다.
"네. 나는 이 자동차를 만든 헨리 포드입니다."
만든 사람은 그것을 잘 고칠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문제와 질병을 능히 치료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5:26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의 병과 영혼의 병과 생활의 병을 다 고치시는 하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도 세상의 모든 질고와 인간의 모든 삶의 슬픔을 짊어지려 오신 것입니다(사 53:4).
그러므로 아무리 우리 개인과 직장과 나라에 마라 같은 쓴 것이 홍수같이 밀어닥친다 해도 모세처럼 엎드려 기도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단 세상이 됩니다. 아무리 흉악한 죄를 지었다 해도 진심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간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땅’도 고치시는 분입니다(역대하 7:14).

옛날 어른들이 아주 좋은 일이 생기면 “인생 도처 유청산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가는 곳마다 푸른 산이 있다는 쾌가의 소리입니다.
애굽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감사 찬송을 드리고 수르 광야에 이르렀습니다.
처음에는 쓴물을 만나 심히 아파 고생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징조와 말씀(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 말씀은 마리아를 통해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고 출생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예언은 700년 후 구원이라는 의미를 가진 예수의 탄생으로 성취됩니다.
예수가 그의 공식적인 이름이라면 임마누엘은 그의 이 땅에 오셔서 행할 미션을 나타내는 별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가 마리아라는 여인을 통해 이 땅에 오신 미션은 무엇 때문일까요?

첫째, 구원의 하나님을 계시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사람의 아들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을 보여주시고 이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거룩한 구원자가 되시고자 이 땅에 오신 분,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000년 전 예수가 이 땅에 오셨을 때 구원자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역사 가운데 오신 것이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의 구원자이실 뿐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 현존의 체험은 동일한 것이 아니라 매우 다양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외 없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만난 순간부터 이 하나님 현존의 체험 속에 평생을 살아갑니다.
구원의 하나님, 임마누엘의 하나님, 예수를 우리는 구주와 동행자로 만나야 합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마태복음 8:5~13)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며 이스라엘에서 “이만한 믿음”을 본 일이 없다고 칭찬하셨습니다.
복음서에서 주님께서 이처럼 한 사람의 믿음에 대해서 칭찬하신 일은 없었습니다. 10절에서는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라 말씀하셨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은 주님을 놀라게 한 믿음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주님을 놀라게 한 적이 있습니까? 사고를 쳐서 그렇거나, 주님 앞에 고집을 부려서 말고, 백부장과 같은 믿음으로 예수님을 놀라게 한 적이 있습니까? 백부장의 믿음에 주님이 완전히 감동을 먹었습니다.

감동이라는 것은 의례 그럴 것이라는 상식 적인 판단을 벗어날 때 일어나는 감정입니다. 부부나 부모 자식의 관계가 그런 것 같습니다. 가끔 가다 한 번은 서로에게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아 이 남자가 이런 줄 몰랐어.’, ‘아 이 여자에게 이런 면이 있는 줄 몰랐어.’ 하고 감동을 해야 그 사랑이 깊어집니다. 상대방을 다시 보게 하고 상대방에 대한 존경심이 우러나게 만듭니다. 부부도 서로 존경을 하는 사랑이 되어야 행복합니다. 

어느 날 문득 발견한 남편의 믿음직한 모습 때문에 평생을 사는 것 아닙니까? 맨 날 사고만 쳐서 놀라게 하는 남편이라면 어디 같이 데리고 살 수 있겠습니까? 힘들고 어려울 때 아내의 위로의 한마디나 깊은 서랍 속에서, 오래 동안 틈틈이 모아둔 통장 하나를 꺼내 들 때 남편이 감동을 먹는 것 아닙니까? 이제 올 한 해도 몇개월 남지 않았습니다. 부부간에 감동적인 사건을 하나씩 만드는 한 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이 백부장은 어떻게 예수님을 감동시켰는지 묵상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백부장의 모습을 보면 그가 예수님을 감동케 한 것이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백부장의 인격과 믿음을 보며 우리의 인격과 믿음을 점검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첫째, 겸손한 사람

백부장은 부하 100명을 둔 중대장급의 장교입니다. 아마 그는 가버나움 지역 치안 유지를 위해 파송된 로마 장교로 이방인임에 분명합니다. 로마 군단은 백부장의 위치를 매우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실제 전투력은 이들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죽음을 무릎 쓰고 앞장서서 용감하게 싸워야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가버나움이 그리 큰 도시가 아니었던 것을 볼 때 백부장은 이 지역 사회에서 꽤나 권세 있는 자리라 할 것입니다. 로마군단에서 존경받는 백부장이 식민지의 점령자로 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권세가 대단할 것입니다. 우리 일제 시대를 생각해보십시오. 칼을 찬 일본 순사가 얼마나 무서웠습니까? 아이들이 호랑이보다 더 무서워했던 것이 일본순사입니다. 상대는 식민지 백성이고 자신은 권세를 가지고 있으니 얼마나 거들먹거리겠습니까? 우리들도 그렇잖아요. 조그만 권세만 쥐어주면 그것 가지고 얼마나 교만합니까? 물질의 권세가 주어지면 그것이 무슨 대단한 벼슬이나 되는 냥 수준을 따지고 무시를 합니다. 교회에서 조그만 직책이 주어지고 동네에서 반장 완장이라도 차게 되면 얼마나 목에 힘이 들어갑니까?

그러나 이 백부장은 그렇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7장 1절 이하에도 동일한 백부장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서는 유대인 장로들이 백부장을 대신하여 예수님께 간청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들은 간청하면서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눅7:5)고 칭찬합니다. 백부장은 자기의 권세로 위력을 부리지 않고 오히려 그 지역 사람들을 위해 겸손히 수고하였습니다. 자기 돈과 시간을 내어 유대인들을 위한 회당까지 지어주었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아 올 때의 태도를 보십시오. 예수님을 “주님” 이라 부르며 겸손하게 간청을 합니다. 지금 우리들이야 당연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인정을 하지만 예수님이 막 공생애를 시작하던 당시의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도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아서 주님은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에서 활동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상대가 아무리 현인이요 능력을 베푸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까무잡잡한 식민지 백성의 한 사람인데 “주여”라고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진리되신 예수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습니다. 주님께서 자기 집에 가시려 하니까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며 사양합니다. 존귀한 주님이 누추한 자신의 집으로 들어오는 것도 황송하여 감당 못한다는 태도입니다. 자고로 겸손한 사람이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이 사람들의 인정을 받습니다. 겸손하다는 것은 자신을 낮추는 것을 말합니다. 물은 낮을 곳을 향하여 흘러 흘러갑니다. 그러다 가장 낮은 곳에 이르러 바다를 이룹니다. 세상에서 바다보다 크고 힘이 있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겸손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 진리에 이를 수 있습니다. 겸손하다는 것은 자기 생각을 내려놓는 수용성을 말합니다. 자기 생각이 너무 강하고 완고하면 그 안으로 어떻게 예수님이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백부장이 겸손히 그 마음을 비웠을 때 은혜가 그 속에 충만히 임한 것입니다.


둘째, 사랑의 사람

6절의 백부장의 말을 보십시오. 그가 얼마나 지극한 사랑의 사람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백부장은 자기 종의 고통을 마치 자기의 아픔이나 된 것처럼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합니다.’라고 말합니다. 당시 종은 어떤 존재였습니까? 하인은 주인이 사고팔 수 있는 물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바로’라는 학자가 농사 기구를 세 가지로 구분했는데 첫째는 소리 없는 도구(농기계)요 둘째는 말 못하는 도구(소 말)요, 셋째는 말하는 도구(종)였습니다. 종은 말하는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종을 마치 자신의 아들처럼 대우합니다. 아무리 사랑이 많은 주인이라도 자기 하인이 아프다면 형식적으로 의원에게 몇 번 보일 뿐이지 예수라는 아직 검증되지 않은 사람에게 주인이 친히 나아와 이렇게까지 머리를 조아리겠습니까? 

사랑이 기적을 만듭니다. 한 사람을 향한 극진한 사랑이 백부장을 예수님과 만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은 소중합니다. 그 한 사람을 정성껏 대하십시오. 회사에서 부하 직원들을 단순히 노동력을 착취하는 대상으로만 보지 마십시오. 사랑의 대상으로 알고 그들을 위해 주십시오. 상사를 월급이나 주는 존재로 보지 말고 그를 한 사람으로서 사랑하십시오. 사랑이 서로의 마음을 열게 만들고 그러면 반드시 그 대가가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상사는 부하의 앞길을 열어줄 것이요, 부하 직원은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중국의 고사에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에 오기(吳起)라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가 중산국을 공격할 때, 한 병사가 심하게 다쳐 상처가 진무르고 고름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오기 장군은 그 병사의 고름을 자신의 입으로 빨아주었습니다. 이 감동적인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을 타고 그 어머니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어머니가 갑자기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의아하서 그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장군이 당신 아들을 그처럼 아끼니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통곡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어머니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오기 장군이 예전에도 그 아이 애비의 고름을 빨아 주었습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그 은혜를 잊지 못하고 장군을 위해 용감히 앞장서서 싸우다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이제 장군이 다시 내 아이의 고름을 빨아 주었다고 하니 이 아이 역시 생명을 걸고 장군을 위해 싸우다 죽고 말 것 아닙니까?” 

사랑을 보여주면 그 열배, 백배로 보답하려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인색하여 자기 계산이 너무 빠르고, 눈앞에 보이는 이익만 탐합니다. 백부장은 지극한 사랑의 사람이었고 이 사랑이 예수님을 감동시키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칭찬한 것은 백부장의 믿음이었지만 믿음 이전에 백부장은 이처럼 대단한 인격의 소유자였습니다. 믿음과 인격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여러분은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인격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둘 다면 좋겠지요. 그런데 만약 여러분 주위에 믿음은 좋은데 인격이 좋지 않은 사람하고, 믿음은 별로인데 인격이 훌륭한 사람이 있다면 누구를 친구로 두고 싶습니까? 저는 단연코 믿음은 별로이지만 인격이 훌륭한 사람을 친구로 삼고 싶습니다. 믿음이야 시간이 지나가면 생길 수 있지만 인격이라는 것은 좀처럼 변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인격이 좋지 못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교회에 다니면 나중에 또 그 인격 때문에 교회 안에서도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만큼 우리 인격을 수양하고 가꾸는 일이 중요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인격을 가지고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의 인격의 좋고 나쁨은 하나님 보시기에 도토리 키재기일 것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생활하기에는 인격이 훌륭한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편하고 좋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에 장로와 집사를 선택하는 기준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이 그의 인격입니다. 생활에 절제가 있고 가정에 모범이 되는가? 사람들로부터 선한 증거를 얻고 있는가를 중요하게 봅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이런 성경의 원리를 벗어나 장로를 선출할 때 겉으로 드러난 믿음, 그것은 주로 헌금이나 교회에 대한 헌신으로 나타나는데, 그것만 보고 그 인격이나 능력은 잘 보지 않기 때문에 이후에 많은 문제들을 일으키고 맙니다. 백부장처첨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를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 믿음의 사람

백부장의 뛰어난 점은 그가 이처럼 인격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믿음은 9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군인들이 그렇지요. 군인들은 명령에 절대복종합니다. 심지어 최전선에서 돌격 명령이 떨어지면 죽음을 무릎 쓰고 공격하는 것이 군인정신입니다. 군대에서는 명령불복종은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입니다. 상관의 명령 한 마디가 이처럼 중한 것입니다. 그러니 백부장은 주님이 집에 오실 것도 없이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8) 하고 요청합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이는 “다만 명령만 내리십시오.”라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명령하시면 아무리 중풍병이라도 순종하여 떠날 수밖에 없다는 절대적인 확신입니다. 거리가 멀고 가깝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소리가 크냐 작으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의 명령이라면 그대로 집행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백부장의 믿음이었고, 이 믿음이 예수님을 감동시킨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백부장이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를 때 그는 형식적인 호칭으로 “주님”이라 부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주님이라 할 때는 첫째 나는 당신의 어떤 명령에도 따르겠습니다는 순종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둘째, 당신은 온 땅과 만물의 주인이시기에 당신의 어떤 명령도 그대로 성취된다는 주님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주님이라 부르면서도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얼마나 불순종합니까? 성경이란 것은 주님의 명령과 약속으로 가득한 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말씀을 믿지 못합니다. 백부장은 오실 것도 없이 다만 말씀으로만 하십시오라고 하는데 우리는 “말씀으로는 부족합니다, 직접 오십시오, 직접 보여주십시오.”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믿되 군인정신으로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옛날 군대에서 군인정신이 무어냐고 물으면 농담 식으로 “제정신이 아니다.” “무대뽀다.” 라고 답을 했습니다. 군인 정신은 제정신이 아닙니다. 무대뽀입니다. 자기 생각이나 자기 판단이 없기 때문입니다. 군인 정신은 상관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대장되십니다. 우리 대장되신 예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성 프랜시스의 예화입니다.
성 프랜시스가 수도원에서 농사 일을 하고 있었는데 두 명의 젊은이가 수도사가 되겠다고 찾아왔습니다.
성 프랜시스는 마침 배추 모종을 심고 있었습니다.
성 프랜시스는 그 두 젊은이들에게 배추 모종을 주며 “뿌리는 하늘로 향하게 하고 그 잎은 땅에 묻히도록 심으라.”고 명령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명령하고는 그에 대한 질문도 받지 않고 성 프랜시스 사라졌습니다.
이 명령을 받은 두 젊은이는 처음에는 순종하여 성 프랜시스의 명령대로 배추를 심었습니다.
그러다 그 중 한 젊은이는 도무지 그런 불합리한 명령을 따를 수 없었습니다.
세상에 뿌리를 하늘로 향하도록 심는 경우가 어디 있나 싶어 정상적으로 뿌리가 땅을 향하도록 심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젊은이는 프랜시스의 명령대로 뿌리가 하늘을 향하도록 계속 해서 심었습니다.

누가 성 프랜시스의 수도자로 받아 들여졌겠습니까?
한참 후에 돌아온 성 프랜시스는 자기 명령대로 뿌리가 하늘로 향하도록 심은 젊은이를 수도사로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젊은이는 돌려보냈습니다. 프랜시스는 순종하는 마음을 테스트한 것입니다.
유혹이 많은 수도 생활을 하려면 생각이 복잡하면 안 됩니다.
스승의 말에 단순히 순종할 줄 알아야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따르는 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어떨 때는 하나님의 명령이 이해가 안 될 때가 있습니다.
모순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라도 우리 판단을 접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할 때 우리 문제가 풀립니다. 단순하게 생각하십시오. 사실 인생의 문제는 생각이 모자라서 문제가 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우리 생각이 너무 많기 때문에 혼란스럽고, 그래서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습니다. 세상의 법칙을 보더라도 성공하는 사람들은 단순한 사람들입니다. 단순하게 믿고 따르다 보면 길이 보이는 법입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하는 백부장의 믿음을 우리는 가져야 합니다. 세상을 만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 기사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그대로 빛이 있고, 궁창 위의 물과 아래 물로 나뉘어라 하면 그대로 나뉘었고, 식물이나 새나 동물이 있으라 하면 그대로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이처럼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잘 듣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말씀에 가장 순종하지 않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렇게 살지 말라 하여도 말을 듣지 않습니다. 회개하라고 하여도 듣지 않습니다. 이 성경이란 것은 말 안 듣는 인간들을 향하여 제발 내 말 좀 들으라는 하나님의 답답한 호소로 가득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도 부족하여 하나님 우리에게 직접 음성으로 또 말씀해 주십시오. 하나님 직접 보여주십시오 하고 떼를 씁니다. 백부장은 우리 집에 오시는 것도 감당치 못하겠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 예수님을 억지로 우리 집까지 끌어들이려 합니다.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주님은 백부장을 향하여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13)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믿었던 백부장에게는 그 하인이 그 즉시로 낫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네 믿은 대로’가 진실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면 우리 인생은 기적으로 가득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못하거나, 또 다른 증거를 요구한다면 성경은 우리에게 아무런 능력도 보여주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대로 결과는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퍽퍽하고 힘든 이유는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더라도 자기가 좋은 부분만 취해서 믿기 때문입니다.

“먼저 그나라와 그의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마 21:22)

이 말씀을 믿지 못하고 안절부절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백부장의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백부장의 하인을 말씀으로 고친 이 이야기의 중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의 주권자로서의 권능입니까?
아니면 백부장의 믿음입니까?
이 이야기의 초점은 백부장의 믿음에 있습니다.

11절과 12절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백부장의 믿음과 반대편에 있는 것은 아브라함과 함께 소속해 있는 이스라엘 나라의 본 자손들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주님을 믿지 않던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우리가 좀 더 면밀히 살펴야 할 것은 마태복음이 기록된 시점입니다.

학자들은 마태복음 80년대에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이때는 예수님이 돌아가신지 50년이 넘은 때입니다.
물론 전승이라는 형태와 직접 본 증언으로 예수님의 말씀과 사건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문제는 마태복음을 기록 할 때 순전히 예수님 시대의 상황만 문제가 되었겠냐는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하며 마태교회의 당시 상황들도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나라의 본 자손”은 단순히 믿지 않는 유대인들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교회에서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해당한다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일찍 믿음을 가졌다는 이유로, 내가 교회에 직분을 가졌다는 이유로 자동적으로 천국잔치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백부장에게 주어졌던 칭찬처럼 “이 만한 믿음”의 수준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 만한 믿음”을 가지시길 원하십니다.
평범한 믿음으로 살겠다고 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칭찬하신 “이 만한 믿음”에 도전하십시오.
이 믿음은 무엇입니까?
주님을 철저히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주님의 뜻에 따르겠다는 순종의 믿음입니다.

교회가 크건 작건, 내가 큰일을 하건 작은 일을 하건, 내가 높은 자리에 있건 낮은 자리에 있건, 내가 부유하건 가난하건, 보다 중요한 것은 “이 만한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주님을 감동시키는 것은 백부장과 같은 “이만한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나옵니다.

그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나 유대인의 믿음을 받아들이고 자선을 하며 회당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등 경건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가 예수님 앞에 나와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하며 하인을 위하여 예수님께 나와서 간절하게 빌었다는 것은 좀 이례적입니다.

하인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이방인 백부장이 예수님 앞에 주여’ 라는 최고의 존칭을 사용하며 찾아 나온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의 부탁을 들으신 후 더 이상 세세히 묻지 않으시고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직접 백부장의 집으로 찾아가 들어가시겠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유대인의 통념상 유대인이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이 죄인 취급되었고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당시의 통념을 깨고 이방인 집에 들어가시려고 한 것입니다.
주님은 백부장의 하인을 향한 지극한 사랑의 마음에 감동하셨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방인의 집에 찾아오시겠다는 예수님의 반응에 놀란 것은 백부장입니다.
그리하여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예수님을 심히 놀라게 한 것은 단지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하는 다만 말 한 마디로  병을 고칠 수 있다고 생각는 백부장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단순한 치료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로 말씀 한마디로 병자를 고치시는 분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말 한마디로 이루어지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세상이 말씀으로 이루어졌다는 믿음입니다. 

“빛이 있어라” 하시니 빛이 있고,  ”하늘이 있어라“고 하시니 하늘이 있고,  ”땅이 있어라“고 하시니 땅이 있게 되는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일들입니다.

이미 나흘이나 무덤에 놓여 있던, 썩어서 냄새나는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일도 문둥병자가 치료받은 것도,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주를 위하여 무엇을 얼마나 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께서 원하시면 하늘에서 만나를 이슬비처럼 내리시고 동풍 바람을 불어 메추라기( 鹌鹑 )을 지면에 가득하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님을 놀라게 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의 자비의 행동입니까? 아니면 그의 믿음입니까?
자선과 선행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권면하고 힘쓰고 칭찬하는 일입니다.
자선과 선행, 가난한 자와 병든 자를 돕는 일은 주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신 일이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지만 우리가 제아무리 많은 자선과 선행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기쁘심을 이루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가 부해지고 병자가 나음을 받는 이 모든 일은 예수님의 한 말씀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 한마디면 가능하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에게 이러한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놀란 것은 백부장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으로서, 내게도 “백부장과 같은 믿음”이 있는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문제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십니까?
모든 것이 부족함이 없어서 기도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까?
만약 기도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도 없고 문제도 없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가 믿음으로 자라도록 끊임없는 도전과 갈등 속에서 자라게 하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더 기도하게 하시고 더 순수한 믿음으로 단련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매일 마다, 예수님께 구하기만 하고, 매일 마다, 예수님께 청하기만 하고, 매일 마다, 예수님께 원하기만 하고 있지는 않은지…

야고보서 5: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갈라디아서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때로는 나도 [백부장과 같은 믿음으로] 예수님을 놀라게 해드리고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는 없는지… 믿음을 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래된 신앙인의 특징은 예배시간에 빠지지 않고 봉사도 많이 하지만 매일의 삶 속에서 정해진 시간에 말씀과 기도에 열심을 다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묵상의 시간을 갖지 못하는 사람 세상사에 분주한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 스스로를 좋은 신앙의 소유자로 자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여 주여 하는 습관적인 신앙인의 특징입니다.
내가 무엇을 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이스라엘에서도 찾을 수 없는 그의 믿음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백부장은 자신의 사랑하는 하인을 위하여 모든 약을 써보고 유명한 의사를 다 찾아보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온갖 노력을 다 해보았으나 그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더 이상 없었습니다.
세상에는 사람의 노력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일들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노력으로 재물로 지혜로 되지 않는 일들이 많습니다.
아니 거의 대부분의 일들이 그렇습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이라는 말은 ‘인간의 일의 끝에 곧 하나님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사람이 아직 무엇인가 의지할 만한 것이 있을 때까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자신의 무능력이나 연약함을 깨닫게 되어서야 사람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백부장은 자신의 한계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한계 위에 권위가 있음을 알고 권위에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일은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정한 대로 내가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萬事는 주님이 원하는 때가 있습니다.
주님이 원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무엇을 한다.’라는 행위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늘의 뜻과 시기, 권능을 아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날 모든 일은 봄에 봄눈 녹듯이 풀어질 것입니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9절)

이곳에서는 예수님의 한 말씀으로 충분하다는 백부장의 믿음과 확신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설명합니다.
사람이 애쓰고 분내고 다투어서 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상관이 명령하면 그것은 그대로 실행됩니다.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한 말씀만 하시면 병이 순종하여 물러나가리라 믿었습니다.

생각하건대, 그는 분명히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는 성경을 읽되 유대인 학자나 일반 유대인처럼 지식을 위해서 라든지, 아니면 암송을 위해 읽지 않고, 진실한 마음으로 읽었을 것입니다.

부모의 권위를 알고 국가의 권위를 알고 상사의 권위를 알고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도 아니고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권위가 어디 있는가를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백부장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믿었습니다.

백부장의 이 믿음의 말이 예수님을 놀라게 한 것입니다(10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믿음입니다.
백부장의  큰 믿음 입니다.
믿음이란, 단지 내가 주를 향하여 예배를 드리고 찬송을 하고 봉사생활을 하는 종교생활이 아닙니다.

우리는 죽는 날까지 한없이 부족하고 실수 많은 사람이며 죄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폐부를 꿰 뚫어보시는 분으로 나의 생각과 감정을 모두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나의 재능과 가졌음을 자랑하지 말고 그분 앞에 날마다 나아가는 사람이 되십시다.

믿음이란 예수님은 나의 기도를 듣고 계시며 내가 주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예수님과 나 사이의 관계입니다.
날마다 예수님을 묵상하고 그 능력과 도우심을 구하고 사랑 안에 구하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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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의 바일 종교(신명기 7:1-5)


하솔 왕 야빈이 주도하였던 북부지역 연합군에는 당시 원주민이었던 여섯 종족이 포함되어 있다(수 11:3).
이들은 가나안 족속, 아모리 족속, 헷 족속, 브리스 족속, 여부스 족속, 히위 족속들이다.
여호수아서 다른 곳에서도 이들은 이스라엘과 대항하여 싸운 종족들로 언급되어 있다(수 9:1).
팔레스타인의 원주민이었던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1. 가나안 족속과 아모리 족속 :

성경에서 가나안인과 아모리인은 자주 혼용되어 사용된다. 그렇다고 이들 두 종족 사이에 구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나안인은 무엇보다도 가나안 땅과 관련이 있다.
가나안땅은 요단 동편을 제외한 서부 팔레스타인을 비롯하여 뵈니게 지방(오늘날의 레바논)과 시리아의 남부 지역을 지칭하였다.
그런 점에서 당시 가나안인은 지중해 해안지대와 이스르엘계곡 및 요단계곡 등지에 밀집하여 살았던 서북셈족을 의미했다.
이들은 산지 쪽으로는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반면에 '서부인'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아모리인은 상부 메소포타미아 지방과 시리아 지역에 살고 있던 서북셈족을 가리키는 명칭이었다. 이들은 주전 2000년대 초 유랑하는 유목민 형태로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해와 주로 산간지역에 정착하였다. 후에 이들은 요단동편 고원지역으로 영역을 확대하여 그곳에 아모리 왕국을 세우기도 하였다. 성경이 아모리인들은 주로 산지에 사는 사람들로, 가나안인들은 해안가에 사는 사람들로 구분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민 13:29; 신 1:7). 그러나 아모리인들은 여러 세기를 거쳐 그 땅에 살면서 가나안의 언어와 사회와 문화에 잘 동화되어 엄격하게 이 두 종족을 구별할 필요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

2. 헷 족속 :

헷 족속은 오늘날의 터키 중부지역에서 주전 17세기부터 이집트제국과 세력을 겨룰 만큼 강대한 히타이트제국을 건설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주전 13세기 이후로는 세력이 약화되었고, 그러한 상황은 에게해 주변의 해양민족들이 이들 지역으로 유입되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헷 족속들은 히타이트 제국시대부터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지역으로 이주하면서 광범위한 지역에 분포하여 살았다. 그런 종족의 이동은 히타이트 제국의 붕괴 이후 더욱 가속화될 수밖에 없었다. 아브라함 당시 헤브론 지역에 살던 사람들도 이들 헷 족속들이었다(창 23:10; 25:9). 여호수아 당시 북부지역에도 이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은 헷 족속의 생활영역이 널리 분포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3. 브리스 족속 :

브리스 족속에 관하여는 역사적 자료가 빈약하여 그들의 기원이나 역사를 정확하게 재구성하는 것이 어렵다. 그러나 이들은 족장시대 이전부터 팔레스타인에 거주하였던 가나안의 원주민임이 분명하다(창 13:7; 15:20; 34:30). 일부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들은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하여온 아모리족의 한 분파로서 가나안의 산간지역에 주로 거주하며 살았다. '브리스'라는 명칭은 히브리어로 '산골'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4. 여브스 족속 :

여브스족은 함의 아들이었던 가나안의 후손들로서 팔레스타인에 거주하였던 소수민족이다(창 10:16). 이들의 중심지는 예루살렘이었기 때문에 여브스는 예루살렘의 별칭이 되기도 하였다(삿 19:10, 11; 대상 11:4, 5). 그런 점에서 여부스 족속은 남부지역의 아모리 연합군 결성을 주도하였을 뿐 아니라 하솔의 야빈이 주도하였던 북부지역의 연합군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한 셈이다.

5. 히위 족속 :

히위 족속과 호리 족속은 같은 종족일 가능성이 높다. 성경 자체도 그런 점을 증거하고 주고 있다. 히위사람 시브온(창 36:2)이 바로 뒤에서는 호리사람 시브온(창 36:20)으로 지칭되고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어로 서로 비슷한 두 이름은 칠십인역에서 혼용되기도 한다(창 34:2; 수 9:7). 당시 팔레스타인에는 많은 호리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것은 이집트인들이 팔레스타인을 '후루' 곧 호리사람들의 지역이라고 지칭한 것에서 잘 나타난다. 히위족들은 팔레스타인 내의 여러 지역에 분포되어 살았음이 분명하다. 기브온과 세겜, 레바논을 비롯하여 여러 지역이 히위족들과 연관되어 있다(창 34:2; 수 9:7; 11:3; 삿 3:3).

영적 순결이 승리의 비결(1-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목적은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여 그 땅을 정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는 이스라엘보다 먼저 살던 일곱 족속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보다 수가 많고, 신체적으로 강했으며, 성읍들도 월등하게 우세한 위치에 있었습니다(1).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들을 진멸할 수 있었습니다(2).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전쟁은 하나님께서 이기겠다고 결정하셨기 때문에 결국 이길 수밖에 없는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의 영적 전쟁을 수행하는 군사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군사들이 영적 전쟁을 수행하려면 지켜야 하는 규칙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원수들과는 어떤 방법으로든 결코 타협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2-5). 이 원칙을 지키면 하나님의 군사들에게 승리가 보장됩니다. 최선을 다하여 여러분의 영적인 순결을 지키십시오.

하나님의 선택(6-11)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시면서 무척 기뻐하셨는데
(7),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기뻐하신 까닭은 그들의 숫자가 많거나 자랑할 만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에 비하여 풍족하지도 않았고, 특별히 중요하지도 않았으며, 능력이 많지도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객관적인 기준으로 본다면 선택받을 이유가 전혀 없었는데, 이스라엘이 적다는 것은 단지 숫자가 적었다는 뜻만이 아니라 무가치하다는 뜻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7).
이스라엘은 수로 보나 세력으로 보나 대단할 것이 없는 민족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들을 특별히 사랑하셔서 애굽에서 구출하셨기 때문에(8), 특별한 민족이 되었던 것입니다.
출애굽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을 예표하는 사건이 되었던 것입니다.

가나안이라는 이름

가나안만큼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도 없다.
그러나 가나안만큼 우리를 헷갈리게 하는 이름도 없다.
가나안 땅은 분명히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주시기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온갖 우상숭배와 음행과 타락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땅이요 이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나안의 이름을 사용할 때는 이 두 가지,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요소를 충분히 고려해야 하는 신중한 선택이 필요하다. 경우에 따라 가나안의 이름은 얼마든지 왜곡과 도용이 가능한 이름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가나안이라는 이름의 이미지는 대체적으로 매우 사악하고 거칠고 공격적이다. 그들은 여러 개의 분산된 개체로서 이합집산의 산발하는 떠돌이로 출몰한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가나안은  하나의 이상향이자 소망의 대상이지만 실제의 가나안은 안락함이 있는 낭만적인 곳이 아니라 치열한 전투장이고, 음행과 우상숭배가 만연한 타락의 땅이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히 저주받은 땅으로 등장한다.

가나안이라는 이름으로 시대마다 지역마다 이스라엘 앞에 나타나는 이들은 이스라엘을 역사적으로 시종일관 괴롭히고 성가시게 한다. 결국 그들의 유일한 공격 대상은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이었다. 족보상으로는 분명히 가나안은 노아의 후손으로서 동족의 피를 나누고 있지만, 이들에게 있어 이스라엘은 오직 원수일 뿐이다. 특히 일명 '가나안 7족'으로 호칭되는 부족들은 여호수아의 영도 하에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노략질과 침공과 탄압으로 일관한다. 이스라엘과 가나안 부족은 단 한 번도 평화의 시기를 보낸 적이 없다.

이러한 가나안의 상징성과 의미는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경각심을 깨우쳐 주는 도구다. 지금도 가나안의 이름을 가진 실체 없는 악한 대적이 살아있는 신앙인들을 쉼 없이 공격하고 괴롭히고 공격하고 넘어뜨리고자 유혹하고 있다. 이에 가나안의 정체를 살피고 연구하고 이에 대한 지식을 가지는 일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사악한 영의 도전에 맞서 승리할 수 있는 비법을 터득하는 매우 중요한 일이라 하겠다.

가나안(Canaan)은 히브리어로 '케나안'인데 이는 '법률, 혹은 평평한 땅'을 뜻한다. 가나안은 사람 이름에서 유래하여 지역의 이름과 한 부족의 이름이 되었다. 원래 가나안은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의 막내 아들이다(창 10:15). 가나안족은 바로 그의 후손을 가리키는 말이다.

성경에 따르면 가나안은 그의 아버지 함이 노아의 벗은 몸을 보고 버릇없이 행하여 노아로부터 아버지 함과 함께 저주를 받았다(창 9:24). 노아는 함과 가나안을 향해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창 9:25)"고 했다. 이 저주는 당장 가나안에게 실행된 것이 아니라 후손에 이르러 이루어진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정복하고 가나안족들을 종들로 삼아 부리게 된다. 그러나 아직까지 가나안족에 대한 정확한 규명은 결론나지 않고 있다. 성경에 등장하는 가나안 7족만을 가나안족으로 삼아야 할지, 그들이 살았던 지역은 또 어느 곳인지에 대해 우리는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일반적으로 일부 학자들은 주전 5세기 알라라크(Alalakh) 왕 이드리미의 비문에 있는 '마 아트 키 인 아 님(ma-at ki-in-a-nim, 가나안의 땅)'이라는 언급을 기초로 갈대 혹은 진한 자줏빛을 뜻하는 악카드어 어근 키나(Kina)와 가나안을 동일시한다. 또 주전 15세기 누지문서에 표기된 '키나후'(kinahhu, 가나안 사람의)라는 형용사가 원래 '자줏빛의 염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가나안족과 진한 자줏빛 직물과의 상관관계를 논한다.

그러나 최근 들어 학자들은 가나안이라는 이름은 가나안족의 고향 혹은 정신적 명사로 상징되는 이름이라는 해석을 지지한다. 다른 한편으로 가나안이라는 이름은 어떤 특별한 사회 계층, 즉 상인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보기도 한다. 실제로 히브리어 '케나아니'는 상인, 혹은 통상하는 자를 일컫는다. 상인으로서 가나안의 이름은 애굽의 아멘호텝 2세(주전 1449-1433)의 비석에도 나오고, 18세기 발견된 '마리서신'에는 도둑질하는 상인에 대한 언급을 하는데, 이때 상인이 가나안인을 가리킨다고 보고 있다.

성경과 함께 역사 속에서 가나안 족속은 갖가지 사회 정치 문화적 분류 속에 열거된다. 이는 노아의 손자 가나안이 낳은 자녀들과 그 후손들의 번창으로 인해 발생한 결과이다. 성경에는 가나안의 후손이 무려 11개 부족에 이르고, 그 분포지역이 팔레스타인 전체를 뒤덮는다고 보도한다.
 
"가나안은 장자 시돈과 헷을 낳고, 또 여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알가 족속과 신 족속과, 아르왓 족속과 스말 족속과 하맛 족속을 낳았더니 이후로 가나안 자손의 족속이 흩어져 나아갔더라. 가나안의 경계는 시돈에서부터 그랄을 지나 가사까지와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을 지나 라사까지였더라"(창 10:15-19)

저주 받은 떠돌이들

상기 기록에 의하면 우선 노아의 손자 가나안은 11명의 자녀들을 낳고 이 자녀들이 그 이름대로 각 후손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가나안의 후예는 모두 11개 부족이 되는 셈이다. 이들은 모두 저주 받은 함의 후손들이기도 하다. 저주를 받았다는 것은 철저히 하나님과 격리된다는 뜻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 저주는 마귀의 자녀들의 출현과도 상관성이 있다. 하나님은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연모하여 그들을 아내로 삼은 것에 대해 진노하시어 홍수 심판을 단행하셨고, 그 결과 생존한 사람은 노아와 그 아내와 아들 삼형제와 세 며느리를 합해 8명이었다. 만약 함과 가나안이 저주를 받지 않았다면 이 후손들 모두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되어 복락을 누렸을 것이다. 그러나 함과 가나안은 노아의 벗은 몸을 보고 그것을 힐난하는(?) 잘못을 범하여 저주를 받게 되고 하나님은 가나안족속의 경계를 정하고 난 다음 여러 곳으로 흩어지도록 심판하셨다.

가나안 족속의 영토에 대한 성경의 언급은 다른 곳에서도 발견된다. 민수기 34:1-12절 에스겔 47:15-20절과 48:1-28에 의하면, 가나안 족속의 영토는 동쪽으로는 하살에난에서 바산까지, 서쪽으로는 지중해까지, 남쪽으로는 사해, 북쪽으로는 아무르왕국과 접경을 이룬 하맛 어귀까지로 나타난다.

그런데 위 성경에 기록된 가나안 족속의 경계는 현재의 지명으로 확인이 정확히 되지 않는 지역들이 대부분이다. 시돈과 그랄, 가사와 소돔과 고모라, 아드마, 스보임, 라사가 정확히 어디를 지칭하는 것인지 아직까지 모두 파악하지 못한다. 고고학적 발굴 작업을 고대할 뿐이다.

대신 역사 문헌에 나타나는 가나안 지역에 대한 언급은 가나안 영토에 대한 간접적인 지식을 제공한다. 주전 14-13세기 애굽 문서에 의하면 가나안의 남쪽 경계는 '와디 엘 아리쉬(애굽 시내)'라고 밝히고 있다. 이곳은 실레(sile)로 부터 가사에 이르는 군사로가 있는 곳으로, 여호수아 15:1-4절에 의하면 사해 남동 해변까지 연장되어 있다. 즉 가나안 족속의 영토가 서로는 지중해, 북으로는 하맛 어귀까지요, 동으로는 하살에난에서 바산까지, 남으로는 사해까지로 나타난다.

여러 곳으로 흩어진 이들은 셈족, 비 셈족 요소로 이루어진 다양한 종족의 문화적 집단으로 성장한다. 후대에 이르면 가나안 족속이라는 말은 베니게 사람을 뜻하기도 하고, 청동기 시대 때엔 특별히 가나안 문화의 계승자들이 나타남으로 하나의 독특한 문화의 양식을 소유한 부족으로 이해되기도 하며, 이후 가나안 족속은 갖가지 사회·정치·문화적 분류 속에 열거된다. 성경은 이들의 다양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에서가 가나안 여인 중 헷 족속 엘론의 딸 아다와 히위 족속 시브온의 딸인 아나의 딸 오홀리바마를 자기 아내로 맞이하고, 또 이스마엘의 딸 느바욧의 누이 바스맛을 맞이하였더니(창 36:2-3)".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 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접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출 3:8)."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족속과 르바임 족속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개척하라 하니라(수 17:15)".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 근본과 난 땅은 가나안이요 네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이요 네 어머니는 헷 사람이라(겔 16:3)".

그런데 평화로웠던 초기 가나안의 촌락과 성읍은 주전 2,300년경 애굽 제6왕조의 침입으로 파괴되기 시작한다. 이후 주전 2,000년부터 약 1,800년까지 가나안은 애굽 제 12왕조의 지배에 놓인다. 주전 18-17세기에는 힉소스 왕조와 함께 가나안 지역에는 강력한 성벽으로 자신을 보호하는 도시들이 등장한다. 이들에 의해 주전 16세기 힉소스 왕조가 추방된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애굽은 투트모스 3세 등이 가나안을 재침공하여 탈환을 시도하지만 이후 애굽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되고 가나안 지역에는 헷 족속의 도시들이 성장하여 중심 세력이 되었다.

히브리인들이 모세의 지도 아래 출애굽하고, 여호수아를 앞세워 가나안에 들어갔던 때가 바로 애굽과 가나안이 갈등을 겪던 시기였다. 정치·경제·군사적인 면에서 열악하기 그지 없던 히브리인들이 강력한 도시국가로 무장한 가나안 지역에 들어가 정착한 것은 한 마디로 기적이었다.

애굽을 물리치고 앞선 문명국가였던 가나안은 그렇게 힘 없이 오합집산에 불과한 이스라엘과 주전 13세기경 지중해 연안에 정착한 블레셋에게 무너지고 말았다. 가나안 역사는 이렇게 종말을 고한 것이다.

그러나 가나안은 이스라엘의 문화와 정신세계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가나안 인들이 사용하던 알파벳은 히브리어와 우가리트어, 페니키아어에 영향을 미쳐 현대 서양 알파벳의 기초가 되었다. 또 가나안인의 신들은 히브리 문학에 등장하는 단골손님이었다. 오직 현세에서의 번영과 자손의 축복을 기원하는 대상으로 존재한 가나안 신들은 이스라엘을 현혹하기에 다채롭고 매력적인 우상으로 군림했다. 이를 위해 가나안 신들은 매춘행위를 종교적 의식으로 격상시켜 매춘에 대한 죄의식을 무디게 했다.

비와 폭풍의 신인 '바알(주인)', 천둥의 신 '하닷', 곡물의 신 '다곤', 사랑의 신 '아세라' 등이 이스라엘 족속을 유혹한 대표적인 우상들이었다. 특히 '엘'이라는 용어는 구약 성경에도 그대로 차용되어 '엘 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 '엘 엘룐(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엘 올람(영생하시는 하나님)', '엘 벧엘(벧엘의 하나님)이라는 칭호로 유입되었다.

교훈

안타깝게도 한국교회 안에서 일명 '가나안 성도'라는 별칭이 공유되고 있다. 나름대로 여러 이유로 기존 교회에서 이탈한 채, 교회 출석을 미루거나 탐색하거나 저항하거나 등등의 이유로 '교회를 안 나가는 성도'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물론 이런 용어가 합당하다거나 이들을 인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이런 부류의 성도들이 지금 우리 곁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엄연한 현실이고, 마땅히 기존 교회와 지도자들과 책임자들이 이들이 제기하는 교회의 모든 문제에 대해 진정성 있는 탐구와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노아는 가나안에게 저주를 행했지만, 하나님은 모든 가나안 족속을 저주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마치 야벳이 셈의 장막 안에 거할 때 축복을 받는 것처럼 가나안 족속에게 영원히 저주를 내린 것이 아니라, 훗날 헷 족속으로 하여금 셈의 후예들과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내 사라의 매장지를 헷 족속으로부터 매입했고(창23장), 다윗은 그의 수하에 헷 사람 아히멜렉(삼상 26:6)과 우리아(삼하 11:3)를 두었으며, 솔로몬 왕은 헷 사람과 혼인동맹을 맺고(왕상 11:1) 그들과 무역거래를 하였다(왕상 10:29). 이것이 가나안 족속에 대한 하나님의 '大구원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속히 '떠돌이 성도'들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들에게 바른 신학과 교리를 가르치고 참된 믿음의 삶이 무엇인지를 증거해야 한다. 성경대로 믿고 성경의 가르침대로 사는 참된 경건을 보여줌으로써, 그들로부터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하는 일에 모든 주의 종들이 모범을 보여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그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당당한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그동안 교회의 지도자들이 모든 교회와 성도들에게 너무 많은 실망감을 안겨준 것이 사실이다. 강제된 헌금과 각종 기부금 등에 얽힌 돈 문제, 교회 권력을 놓고 벌인 아귀다툼들, 성적 문제 등 차마 인정하기 싫은 부끄러운 사건들의 주인공이 되어 추태가 되고 세상으로부터 질타를 받는 초라한 신세가 된 것이 사실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우리 모두가 회개하고 '大개혁'을 선언해야 할 것이다. 모든 교단과 교회가 앞장서서 새로운 선언문을 작성하고 신앙을 새롭게 고백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앞세우고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아 새로운 한국교회의 깃발을 높이 쳐들어야 할 것이다.

'진리의 깃발'은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이 아니라 성령의 바람에 휘날리는 깃발이다. 이 성령의 바람은 회개한 자의 심령에 부는 바람임을 명심하자.

가나안의 종교는 부정하고, 잔인하고 부도덕 했다


그 이유는 그 종교의식은 다신적이고, 인위적이고, 정욕적이며, 제물로는 인간의 귀중한 생명이 드려졌기 때문이다.
또 종교의식 중에는 추잡한 성적인 행위들이 성행되어 사회의 부패타락을 조장했다.
그 증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가나안 족속들을 진멸하라고 하신 이유를 볼 때 알 수 있다(신 7:1, 20:1-3~20 출 34:13, 수 11:14).

또 가나안의 문화적 발달로 가나안 족속들의 유적에서 발굴된 신전에서 증명되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진리를 뒷받침하고 하나님의 뜻을 해명하여 주는 고고학적 업적을 살펴보겠다. 

가나안 종교에 대한 이론적이고, 변증적인 연구는 엉거(Unger)교수가 그의 저서 “구약과 고고학”(Arcjaeology and the Old-Testament)에서 설명하였다(p. 167~177). 

그는 가나안 종교의 의식과 가나안 신전과 신에 대해서만 아니라 가나안 우상의 보편적인 성격에 대하여 말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가나안 종교의 제신과 고고학적 증거와 우상의 성격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겠다.

1. 가나안 제신들

가나안 제신들 중에 중요한 신은 바알이라 하겠다.
바알에게는 아내 신이 있는데, 아스데라라는 여신이다.
이 여신은 자연의 생산을 의인화한 것이며, 바벨론(Babylon)에서는 이슈달이라 불리웠고, 헬라 및 로마에서는 아스달데라고 불리워졌다.
바알을 복수형으로 한 바아람은 바알의 상을 의미한다.
아스달데의 복수형의 돌, 또는 나무의 줄기를 야수리라고 부르며 여신을 상징했다(신 7:5, 출 34:13)
바알의 신전과 아스다롯의 신전은 일반적으로 같이 있었다.
그 신전의 여사제는 신전 매춘부이며, 소돔인 중에는 신전에 남성 매음자도 있었다.
바알 예배는 엉터리 축제였다.
그들의 신전은 악덕의 중심지였다. 

2. 고고학적인 증거

악덕한 가나안 종교는 고고학의 발달로 햇빛을 보게 되었고, 우리들의 눈으로 정확히 볼 수 있게 되었다.

1904-9년에 머카리스타가 팔래스틴 탐험 기금에 의하여 행한 게셀발굴에서 주전 1500년경 이스라엘이 가나안 점령하기 전 가나안인의 문화지층 중에서 가나안 인들의 남신 바알과 여신 아스다롯을 예배한 신전 “높은 곳”의 페허가 발견되었다.

그곳은 돌담으로 둘린 노천인데 45미터와 36미터의 위곽으로 되어 있고, 주민들은 그곳에서 종교에서 종교적 향연을 행하였다.
돌담의 내면에도 높이가 1.5미터에서 3미터가 되는 10개의 돌출한 기둥들이 있어서 그 앞에 희생을 드렸다.

“높은 곳”에 있는 퇴적물 밑에서 마카리스타는 바알에게 희생으로 바쳐진 아이들의 유해가 든 대를 다수 발견했다(렘 20:1~, 19:5 ~ ).

그리고 그 지역 전체는 생후 얼마 안 된 아이들의 묘지인 것이 드러났다.

이외에도 그들은 ‘정초의 희생’이라 부르는 무서운 습관이 있었다. 이것은 집을 세울 때 남은 가족에게 행운을 가져오게 하기 위하여 유아를 죽이고 그 사체를 벽속에 발라버렸다. 이런 것 다수가 게셀에서 발견되었고, 무깃도와 여리고에서 발견되었다.

희생된 유아의 시체는 함속에 넣었다. 그리고 그것은 신에게 제사 드려졌다. 그 후에 매장되었다. 그러므로 바알과 아스다릇 선지자들은 유아들의 공적인 살인자였다.

또한 마카리스타는 이 “높은 곳”퇴적물 밑에서 수다한 아스다롯상과 부속물들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성욕의 유발을 시도한 듯한 심히 과장된 성기가 불어 있었다. 이와 같이 가나안인은 종교의식에서 부도덕을 일삼았으며, 이것이 그들의 신들에 대한 예배로 드려졌던 것이다.

또한 그들은 자기들의 신들에게 희생 제물로 자기들의 낳은 첫 아들을 죽여 바친 것이다.
이런 일은 가나안 땅 대부분의 국가들이 행했는데, 소돔과 고모라 같은 곳도 그와 같이 행했다. 

3. 가나안 우상숭배의 성격

① 부도덕   
그들의 예배는 잔인하고 정욕적이고 미신적 타락현상이었다.

② 쇠퇴하고 부패한 것
생명력이 없고, 추잡하고 무위한 것이었다.

③ 하나님 명령을 파괴하므로 하나님의 공의의 불을   끌어내린 것  
소돔과 고모라와 이웃 도시들의 죄악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일으킴과 같이 그들의 죄악이 가나안 멸망을 초래한 것이다(창 6:1, 9 수 15:13, 14)

④ 가나안 숭배의 무서운 악에 물들게 했다  
그러기 때문에 공의롭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망하게 됐다.

“이리 하고서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을 멸망시킨 것에 대하여 의심할 수 있는 것인가? 가장 가증하고 어지럽고 야수적인 행위에 가득찬 문명이 더 이상 존재할 권리를 가질 수 있는 것인가?”

이것은 역사상 국가의 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낸 하나님의 실예이다.
가나안의 페허를 발굴한 고고학자들은 “하나님은 왜 좀 더 빨리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았나”하고 놀랐다.

4. 가나안의 세속적 풍습

신명기 14장 1절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의 아이들은 죽은 자를 위한 슬픔의 표시로써 스스로의 몸을 베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민족이 침입하려는 그 땅에 살던 가난안 족속들이 그와 같이 습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등 비평가들은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해서 회의를 표명하고 있으나, 가나안민족들 가운데 이러한 습관을 따랐다는 기록이 우가릿 문학(원문 67: VI: 19~22)에 실제로 나타나 있다.

원문에 의하면 바알(Baal)신의 신화적 죽음에 대해 엘(EI)신과 아나트(anat)여신이 스스로의 뺨과 턱, 팔뚝, 가슴 등을 잡아 찢으며 바알신의 죽음에 대해 슬픔을 표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출애굽기 38장 25:26절에서 우리는 한 달란트가 3000세겔(Shekel)에 해당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의 고등 비평가들은 바벨로니아 지방에서는 한 달란트가 3690세겔이었으므로 성경이 틀린 것이라고 오랫동안 주장했었다. 그러나 우가릿에서 사용하던 여러 가지 중량 단위의 발견으로 한 달란트는 3000세겔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으며, 이러한 사실은 성경의 기록이 얼마나 역사적 정확성을 가졌는가를 완전하게 증명해 주고 있다.

신명기 3장 11절에는 바산(Bashan)의 옥(Og)왕이 철로 만든 침대를 갖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성경 고등비평가들은, 옥 왕은 주전 1400년경에 살았었고, 가나안지방에서는 주전 1200년경까지는 철기가 사용된 적이 없었을 것이므로 이것 또한 성경이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우가릿시대로 추산되는 철제도끼나, 창촉, 괭이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로 미루어 보아도 가나안에서 주전 1400년 전에 철기를 사용하였다는 성경의 기록은 역사적 정확성을 갖고 있다.

구약에 언급되어 있는 당시의 전쟁에 관한 몇 가지 습관들도 오늘에 와서는 우가릿문학을 토대로 사실임이 입증되고 있다.

열왕기하10장 1~11절에 의하면 예후(Jehu)는 사마리아(Samaria)의 지배자들에게 그의 명을 받들어 70명에 달하는 적군의 목을 바구니에 담아 자기에게 바치게 했는데, 이때부터 전리품으로써 군인의 목을 성문 앞에 쌓아 놓는 풍습이 시작되었다.

이 같은 피비린 내나는 전쟁의 풍습은 우가릿문학(Anat 11:7-13)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 토판에 의하면 전쟁의 여신인 아나트(Anat)는 적군을 죽여서 승리의 상징으로 그들의 머리를 높이 쌓아 올렸다는 것이다. 사무엘상 11장 2절에는 전쟁에 관한 또 다른 풍습을 언급했는데, 여기에는 암몬사람(Ammonite)인 나하스(Na-hash) 가 길루앗야베스(Jabash-Gilead)에 사는 모든 남자들의 오른쪽 눈을 뽑아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이 풍습 역시 우가릿문학(IAqhat: 165~157)에 의해 사실임이 입증되었다. 즉 그 이야기에 의하면 어떤 왕이 자기 아들이 살해당한 그 도시에 가까이 가서 복수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는 “바알신이여! 이곳이 모든 사람들이 애꾸눈이 되게 하소서”하고 저주에 찬 소리를 외쳤다는 것이다.

신명기 3장 9절에는 헬몬산(Mt, Hermon)이 언급되었다. 헬몬산은 우연히 “시돈 사람들이 시돈이라고 부른다”는 점이 첨가되어 있다. 이점 역시 성경의 기록이 놀랄 만큼 정확하다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다. 즉, 우가릿 원문(51:VI:19)에 의하면 시돈시 근처의 우라릿 지역에 살고 있던 가나안 족속들은 헬몬산을 시돈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5. 가나안인의 윤리관

 

우가릿 문학이 구약성서의 진실성을 입증해주는 또 다른 분야가 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은 자기 선민에게 되풀이 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할 지어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레 20:7).

이스라엘민족은 항상 하나님의 율법에 복종하지만은 않았다.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백성에게 율법을 내려주셨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이 비록 타락해 있던 시절에도 이방 민족이 완전히 흑암시대에 빠져들었던 것처럼 그렇게 구제불능에 빠져들지는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주어지는 한 거기에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스라엘민족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선지자가 일어났다. 또한 이스라엘민족에게는 성경 말씀에 복종하고자 하는 남은 자들이 항상 있었다.

가나안족에게는 그러한 요소들이 없었는데, 제신들을 숭배하고 제신들이 사악행위를 범하는 것 등은 사실로 보다 큰 죄를 범하는 것이 되었다. 이에 대하여 시편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다․․․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시 115:4, 8).

우가릿 문학에는 제신이 인간들에게 죄를 짓게 만드는 아주 재미있는 예가 나와 있다. 우가릿 문학원문(2Aqht: VI: 15~3, Aqht:40)에 보면 아낫(Anath)여신이 어떤 왕의 아들이 가지고 있는 마술 활을 탐내었다는 얘기가 있다. 여신은 그 무기를 사려고 왕자와 흥정을 벌였으나 그가 팔기를 거절하자 여신은 왕자를 살해할 계획을 꾸며놓고 그가 죽은 후에 그 활을 차지했다. 가나안의 제신들은 선악에 대한 감각이 전혀 없었고, 가나안 족속 역시 그러하리라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 얘기가 쓰여지기 몇 해 후에, 이세벨이라는 가나안여인이 이스라엘 왕 중의 하나인 아합왕과 결혼하게 되었다. 한 번은 아합왕이 나봇(왕상21: )의 포도밭을 차지했다. 이세벨은 한편으로는 가나안족속의 종교를 이스라엘 민족에게 전파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녀의 이러한 시도는 하나님의 말씀과 한 선지자의 깨우침이 바알신의 선지자 450명과 가나안 종교의 몽매함 보다 훨씬 더 큰 위력이 있으므로 해서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고대 근동의 이방신들

 

 

명칭

나라

지위

성경의 언급

성경에 

언급된 

팔레스틴의 

신들

바 알

가나안

젊은 폭풍의 신

다산, 음란

왕상 16:31, 18:18-46등

아스다릇

가나안

모신, 사랑, 다산

삿 2:13, 10:6

삼상 12:10; 왕상 11:5

그모스

모압

국가의 전쟁 신

민 2:29 삿 11:24 왕상 11;l7 렘 48:7

몰록

(말감,밀곰)

암몬

국가의 신

습1:5 렘49:1 왕상 11:5 7:33

다곤

블레셋

국가의 곡물 신

삿 16:23 삼상 5:2-7

하늘 황후

가나안

이스다롯과 동일

램 7:18 44:17-25

성경에 

언급된 

메소포타미아 의 신들

므르닥

바벨론

젊은 폭풍신, 주신

램 50:2

바벨론

마르둑의 다른 명칭

사 46:1

렘 50:2, 51:44

느보

바벨론

마르둑의 아들

사 46:1

담무스

수메르

젊은 폭풍신

겔 8:14

성경에 

없는 

주요신들

애굽

메소포타미아

가나안-시리아

 오시리스 - 죽음

 이시스 - 생명

 호루스 - 태양

 하골 - 모신

 레 - 태양

 세트 - 악, 폭풍

 프타 - 명장,

      멤피스 창조자

 아누- 만신전의 우두머리

 엔릴 - 폭풍

 에아엔키 - 태초의 깊음

 신(난다) - 달

 이쉬탈 - Sex, 다산

 타아밋 - 염수(소금물)

 엘 - 만신전의 우두미리

 아나트 - 전쟁

 모트 - 죽음, 황무, 불모

 아닷 - 폭풍신(수리아)

 데슘 - 힛타이트의 모신

 아린나 - 힛타이트의 태양여신

 









신앙인(信仰人)과 종교인(宗敎人)


에베소서 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종교와 신앙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종교는 인간들이 자신의 복을 위해 만든 것이요, 신앙은 하나님이 자신을 알고 믿도록 자기 백성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은혜의 선물입니다.

​- 종교는 사람이 만든 것이지만 신앙은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하여  믿는 길을 알려주신 것이다.

종교생활은 인간들이 자신의 만사형통의 복을 위해 자신이 택한 신을 향해 자신의 온 힘을 다해 갈고닦은 헌신과 노력으로 나아가는 것이라면, 신앙생활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거저 주신 구원과 하늘의 백성 삼아 주신 그 은혜에 감사하며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는 것이지, 내가 착하게 살고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께 복을 받는 종교생활이 아닌 것입니다.

​만일 교회가 예수를 믿으면 만사형통하고 축복을 받아 잘 살게 하는 곳이라면, 예수를 안 믿는 우리나라 수많은 재벌들이나 세계의 모든 재벌들과 권세를 잡고 세상을 뒤흔드는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며, 평생을 예수를 믿고 신실하게 믿음 생활을 하며 살아오는 사람들 중에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과 지금도 어려움과 고난 가운데 사는 사람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요?

​특별히 수 십 년 동안 공산독재 치하에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 수용소에서 혹은 지하교회에서 숨을 죽이며 예배드리며 살아온 북한의 성도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들은 죄가 많아서일까요? 믿음이 없어서 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그들은 오히려 남한의 교회를 염려하며 기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 실정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만이 증거 되는 곳이요, 그의 이름을 믿고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그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든 입으로 예수를 주님이라 시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참 신자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우리 인간은 한 점 의도 없는 심판 받아야 할 죄인이요, 또한 인간은 어떤 선한 행위로도 결코 의를 행할 수도 없으며, 오히려 죄를 짓는 일에는 발이 빠른 금메달 선수들이며, 날마다 마음의 생각으로, 말로, 행동으로 죄만 생산하는 죄 공장들임을 깨닫게 해주는 곳이 교회이며, 거기 모인 모든 자들이 “그렇습니다. 나는 지옥 가야 마땅한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고백하고 회개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의지하게 하는 곳이 교회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도들로 하여금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희생으로 산다는 것을 감사하고 또 감사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하며 사모하고 오직 하나님으로 즐거워하며 기뻐하는 자들의 모임이 교회인 것입니다.
이제 나를 점검하며 고민해 봅시다.
나는 종교인이었나? 아니면 신앙인으로 살아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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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교인인가? 신앙인인가?
마태복음 7:20-27


이렇게 묻는 이유는 하나님이 주시는 경고의 메시지 때문입니다.
‘선 줄로 생각하거든 넘어질까 조심하라.’
‘너희 자신이 믿음에 있는가 늘 시험하고 확증하라’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라’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종교인의 특징

22절과 23절을 통해 예수님은 전형적인 종교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①주여 주여
②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③주의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④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 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전형적인 신앙인처럼 보이지만 이들은 종교인이었습니다.
이들의 특징을 보면 이렇습니다.

첫째, 이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주여, 주여’라는 분명한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둘째,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는 분명한 직분이 있습니다.
셋째,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습니다.
넷째,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합니다. 누가 보아도 신앙인요, 예수님의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자들이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예수님을 향해 ‘주여, 주여’ 하며, 주의 이름으로 직분을 행사했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했지만 주님은 오히려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꾸짖고 내쫓아 버립니다.

이들의 문제점이 뭔가요?
주님의 뜻대로 행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21절, 26절).
즉 주여 주여 하면서도, 주의 이름으로 직분을 행하면서도,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고, 많은 권능을 행하면서도 이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안했습니다.
자기 뜻대로 행했습니다.
즉 예수님의 말을 듣고 행치 않았습니다.
바로 이들이 전형적인 종교인입니다.

신앙인의 특징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들입니다.
즉 예수님의 말을 듣고 행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 27절에서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양은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며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자가 신앙인입니다.
고백보다, 직분보다, 권능을 행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며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떠나는 베드로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세관을 버려두고 떠나는 마태처럼 말입니다.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에 순교할 때까지 예수님을 따랐던 바울처럼 말입니다.

신앙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말씀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죽고 예수님으로 삽니다’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삶을 사는 자들이 신앙인입니다.

종교인의 수가 얼마나 될까?

겉보기에는 신앙인처럼 보이는데 실상은 종교인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한국교회 안에 종교인이 하나도 없기를 바라면서 겸손한 마음으로 묻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목사님들 가운데 종교인이 많을 것 같습니까, 신앙인이 많을 것 같습니까? 오늘날 한국교회 장로님들 가운데 종교인이 많을 것 같습니까, 신앙인이 많을 것 같습니까? 오늘날 한국교회 교인들 가운데 종교인이 많을 것 같습니까, 신앙인이 많을 것 같습니까? 22절에서 예수님은 ‘많은 사람’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오늘날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핍박이 아닌 비난을 받고 있는 현실이 우리에게 무엇을 증명하고 있습니까? 나는 죽고 예수님으로 사는 신앙인의 수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여, 주여’라는 외침은 하늘에 메아리치고, 주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임직식은 화려하고, 다양한 악기와 프로그램을 통한 예배는 축제화 되어 가고 있지만 나는 죽고 예수님으로 살아야할 교인들이 아닌 예수님은 죽고 나로 사는 종교인들이 판을 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들 때문에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는 것 아닙니까?

기독교에서 발간된 신문마다 광고를 보십시오.
가장 많은 광고가 뭡니까? 전도훈련이요, 전도세미나입니다.
그래도 전도가 안 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교인들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없는 종교인들이 생명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 모든 교우들이 나는 죽고 예수님으로 사는 참 신앙인으로 거듭난다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예수님을 보는 눈이 열릴 것입니다.
그들이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종교인입니까? 신앙인입니까?’
주님 만나는 순간까지 물어야할 질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죽고 예수님으로 사는 신앙인이 됩시다.





교회상식 속풀이 - 박종인

얼마 전에 ‘오키나와 평화기행’이라는 짧은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안내인 포함 열한 명이 오키나와에서 벌어지고 있는 군기지 반대운동 현장을 직접 보고 평화운동가들을 만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오키나와 전쟁(태평양전쟁의 끝 부분)의 참혹함을 가장 심하게 경험해야 했던 이들은 정작 군인들이 아니었습니다.
희생자 대부분은 민간인들이었는데, 당시 오키나와 주민들 3분의 1이 죽음을 당했고 장대비처럼 내리는 포탄으로 인해 대부분 형체를 알 수 없는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일본 본토를 대신해 미국과 대리전을 치른 땅, 오키나와의 사람들은 군대가 민간인을 보호하는 집단이 아니라 죽이는 집단이라고 이해합니다.
당연히 조상과 자신들과 아이들의 땅에서 군대가 없어야 진정 평화가 온다고 믿고 있습니다.
귀국하기 전날 평화운동에 대해 그곳 운동가들과 만나 활동 설명 및 질의응답을 할 수 있는 간담회 형식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때 자기소개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저는 저 자신을 가톨릭 사제라고 소개했는데 우리 그룹의 여행 가이드 친구는 자기 차례가 오자, 자기는 종교인이 아니라고 말하더군요.
순간 제게는 ‘그 친구가 가톨릭 신자인데 왜 종교인이 아니라고 하지?’ 하는 질문이 일어났습니다.

사실 종교인의 사전적 의미는 종교를 가진 사람이고 저도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우리가 이해하는 종교인은 특정 종교를 ‘업’으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사제, 목사, 수도자 등과 같이)을 가리키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저 역시도 종교인의 개념을 세속적으로 직업과 연결해야 하는 경우를 종종 경험했던 것입니다.
인터넷 상의 계정을 만든다거나 이력을 요구하는 서류를 작성하다 보면 직업란을 만나게 됩니다.
저는 직업군 목록에 ‘종교인’ 부류가 있다면 그것을 선택하지만, 없을 때는 그냥 기타로 표시합니다.
그러니 저 역시 종교인을 일정 부분 직업으로 이해하도록 유도됐던 셈입니다.
하지만 제 개인적인 입장에서 종교인은 직업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것, 즉 소명과 관련된 개념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종교인과 신앙인의 차이를 물어 오신 분이 있습니다.
솔직히 무슨 차이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특정 종교는 특정 신앙을 바탕에 두고 세워진 제도이니……. 둘이 다른 것은 아닙니다.

굳이 구분하자면 신앙이 좀 더 큰 거겠죠.
집보다 집이 들어서는 땅이 더 큰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가지고 있지만 교회에 안 나가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가족은 사랑하는데 집에는 안 들어올 수 있습니다. 연애는 하지만 결혼은 안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일단 신앙인이라고 해두죠.

이에 정반대로 대비되는 사람들, 즉 교회에는 나가는데 신앙이 없는 사람, 집에는 열심히 들어오는데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 결혼은 했으나 배우자를 아끼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번엔 이런 사람들을 종교인이라고 해두지요.

제도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시는 분들은 ‘종교인’보다는 ‘신앙인’이란 말을 선호하실 것입니다. 아무래도 전자가 규범적인 틀을 더 요구하는 인상을 준다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의식해야 할 것은 전자나 후자나 균형을 잃고 위에 언급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인다면, 세속적인 삶, 곧 하느님을 체험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인은 왠지 딱딱하니) 참된 신앙인이고자 한다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교회에 나가고 어려움에 처한 이들이 있는 현장에도 나가는 사람, 사랑하는 가족과 끊임없이 함께하고 화해를 시도하는 사람, 자신과 이웃이 맺은 약속(하느님과 맺은 약속)에 충실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결국 기도와 실천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기도하지 않는 수도자는 종교인일까요? 여러분이 한 번 답해보시기 바랍니다.
 



종교인과 신앙인

강덕영 | 상상나무 | 206쪽 | 10,000원

다국적 제약기업 한국유나이티드 강덕영 대표가,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생활하며 정리한 생각을 모아 신간 「종교인과 신앙인」을 출간했다.
강 대표는 “초신자들 뿐만 아니라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들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이 책은 기업인인 강덕영 대표의 일상이 이야기의 토대가 되고, 그 일상에서 퍼올린 신앙적인 묵상들을 잔잔한 문체로 담아냈다.

저자는 뚜렷한 문제의식을 갖고 때로는 한국교회와 성도들을 따끔하게 질책하기도 하지만, 결국 저자의 소원은 평신도나 목회자 모두가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다.

“야경의 절반이 십자가일 정도로 교회들이 많은 우리나라지만 신앙의 질은 어디에 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중략)… 지금은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은 세대인 것 같다.”(p 45~47)

“이 할머니는 우리 회사 공장이 있는 앨라배마 주립대 근처에 사는데, 슈퍼마켓에서 일해서 번 돈으로 한국 학생들만 자기 집에 하숙시키며 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크리스천이 되도록 전도해 한국으로 보내는 일을 꾸준히 해왔다고 했다. 그들이 한국에서 신앙을 갖고 사는 것을 보고 싶어서 없는 돈에 한국에 들렀다고 한다. 그 유학생들이 이제는 성공해서 할머니를 자기 가정에 초청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 늙은 부인이 바로 미국을 지탱하는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분이 바로 종교인이 아닌 신앙인의 본보기라는 생각이 들었다.”(p 14



또한 모태신앙인으로서 65년 동안 4대에 걸쳐 믿음생활을 하고 있는 저자는, 믿음의 뿌리가 된 어머니의 믿음생활을 전하며 신앙의 유산을 나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앓던 폐병이라는 몹쓸 병에 걸리셨기 때문이었다. …(중략)… 그러나 어머니에게는 기도와 찬송이 전부였다. 그리고 기도 내용은 ‘불교 집안인 친정집 식구와 남편이 예수님을 믿게 해 달라’는 기도 뿐이었다. …(중략)…

어머니는 건강이 좀 좋아지시면 봄, 가을에 수십 명의 교인들을 집으로 초청하여 가정부흥회를 열었고, 모든 경비는 아버지가 아무 불평 없이 후원해 주셨다. 그리고 아버지는 가끔 어머니께 금반지, 목걸이 등 패물을 선물하셨는데, 몇 달이 지나면 패물은 하나 둘 없어졌다. 부흥집회가 끝나면 금반지는 헌금이 되고 패물은 승인동 판자촌의 쌀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다시 아버지가 패물을 해주시면 그것은 어느새 연탄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어머니는 결국 병마와 십여년 동안의 싸움 끝에 돌아가셨다. 나는 그 때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죽음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그 때 그렇게 염원했던 어머니의 기도가 이루어진 것이다. 완고했던 외갓집 전 식구가 하나 둘 기독교로 개종했고, 지금은 외갓집 자손 어느 누구도 신자가 아닌 사람이 없다. 그리고 우리 집안도 모두 기독교인이 되었다. …(중략)… 무의미하게 보이던 한 여인의 기도는 그 당시 쓸모 없어 보였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그 위대한 기도의 힘을 알게 되었다.”(p 25~27)

강덕영 대표는 “책을 통해서 저는 씨를 뿌리는 역할만 하는 것이다. 열매를 맺는 것은 하나님이시니 저는 씨만 뿌리는 것”이라고 전했다.

덧붙여 “종교인 같으면 자기 이름을 내고 싶어하고, 목사님이라고 하면 성도를 늘리고 헌금을 많이 받고 싶을 수 있지만, 저는 목회자도 아니고 종교인도 아니고 신앙인이니, 다른 무슨 목표가 있겠는가”라며 “책을 통해 전도가 많이 됐으면 좋겠다”고 기대를 밝혔다.

난 종교인인가 산앙인인가?

수년 전 유럽의 종교 개혁지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체코를 비롯해 종교개혁의 중심지 독일, 스위스, 프랑스 교회를 방문했는데 정말 오랜 세월 동안 기독교는 유럽을 중심으로 서구문명의 주체, 그 자체였다.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 모두 좋은 자리에 화려하고 장엄한 건물들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수천 명이 들어갈 수 있는 큰 교회인데도, 젊은이들은 아주 적고 노인들만 수십 명부터 수백 명이 출석하고 있다는 설명을 듣고 매우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교인들이 십일조를 의무화하여 열심히 헌금을 하는데 이들 국가에서는 십일조는 없어지고 종교세를 국가에 납부하면 국가에서 목사 봉급과 운영비를 준다고 한다.

그리고 큰 교회 중에서는 성도가 떠나서 매물로 내놓은 교회가 있었고, 특히 영국에서는 큰 교회가 술집과 식당으로 팔려간 것을 보았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큰 문제는 교회의 교인들이 떠나니 이혼 가정이 늘고, 가정이 깨어지니 어린 자녀들의 교육을 국가가 책임져야 되고, 의지할 곳 없는 젊은이들은 마약을 하는 등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가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었다. 또한 우울증 환자도 증가하고 물질적인 풍요 속에 자살률이 높아지고 있다는 현지인의 설명을 듣고서 또 한번 교회 역할의 중요성을 실감했다.

수년 전 우리 집에 한 미국 할머니가 손님으로 오셨다. 60대 후반의 나이에 촌스럽고 가난해 보이는 평범한 미국의 할머니였다. 그런데 정말 많은 곳에서 할머니를 찾는 전화가 왔다. 주로 대학 교수들이었다. 우리 집에서 며칠 묵고 갈 예정이었는데, 그 교수들이 서로 자기 집에서 묵고 가라고 계속 전화를 하는 것이었다. 이 할머니는 아주 난감한 모양이었다.

결국 인천의 모 교수가 모셔갔다. 왜 이렇게 인기가 많으냐고 물었더니 이 할머니는 우리 회사 공장이 있는 앨라배마 주립대 근처에 사는데, 슈퍼마켓에서 일해서 번 돈으로 한국 학생들만 자기 집에 하숙시키며 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신앙인을 만들어 한국으로 보내는 일을 꾸준히 해왔다고 했다.

그들이 한국에서 신앙을 갖고 사는 것을 보고 싶어서 없는 돈에 한국에 들렀다고 한다. 그 유학생들이 이제는 성공해서 할머니를 자기 가정에 초청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정말 눈시울이 뜨거웠다. 이 늙은 부인이 바로 미국을 지탱하는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분이 바로 종교인이 아닌 신앙인의 본보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앙인과 종교인의 차이를 나는 이 할머니를 통해서 정의할 수 있었다. 나는 ‘내 자신을 종교인인가, 신앙인인가?’ 반성해보았다. 또 ‘나는 성경을 높이고 하나님을 높이는 생활을 하고 있나?’ 생각해보았다.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종교인보다는 신앙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 길을 향해 가고 있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하나님을 높이는 진짜 크리스천이 되고 싶다”라는 것이 진정한 나의 신앙고백이다.







종교인과 참 신앙인은 구별된다.
그것은 빛과 어두움의 차이요 생명과 죽음의 차이와 같다.
조화와 생화의 차이와 같다.
산헤드린 공회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으로 구성된 이스라엘의 정치 종교를 대표하는 집단이다.
이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일을 주도하였고 초대교회를 핍박하는 일에 앞장섰다.

본문에도 스데반을 재판하는 일에 이 공회가 주동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리새인은 서기관들과 함께 성경을 연구하고 필사하고 가르치고 지키는데 전력하는 사람들이었다.
사두개인들은 성전에서 제사드리는 일을 하는 제사장 집단들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의 기둥과 같은 하나님말씀인 율법과 하나님의 성전에서 평생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주님을 죽이고 성령이 함께하는 교회를 핍박하고 하나님 말씀을 거스려 행동하고 있다.
이것을 가르켜 종교인이라고 한다.

종교는 무엇인가?

사람들이 자기안에 부족과 두려움, 막연한 죽음이후의 염려와 불안을 극복하고자 좀더 선해지려고 하고 신의 마음을 달래보려고 하고 그 신앞에 도리와 의무를 다하려고 힘쓰는 것이다.
다시말해 사람이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안에 헛된 이기심과 욕망을 덮고자 최선을 다하지만 결국 하나님과 충돌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의 행위로 하나님을 만족시킬수 없기 때문이다.
종교인과 참 신앙인의 차이를 계속 살펴보자.

종교인과 참신앙인의 차이는 그가 거듭났느냐 거듭나지 않았느냐로 알 수 있다.

유대 종교인들이 왜 주님을 불신하고 성령을 거스려 행동했는가?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이 죄악중에 출생한 상태에서 복음진리로 말미암아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중생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 말씀이 마음에 와 닿음으로 이런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고 주님의 은혜에 고마워 그 주님을 신뢰하고 경외하며 주님을 진실로 사랑하게 된다.
중생한 사람은 주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확실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의지적으로 주님앞에 복종하게 된다.
중생하지 않는 사람은 귀(지성)와 마음(감정)에 할례를 받지 않고 목이 곧은(의지) 사람이다.

할례란 무엇인가?
할례는 칼로 자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수술한다는 의미다.
옛사람의 귀와 마음이 잘리고 의지가 잘리는 것을 말한다.
나 중심적이고 교만하고 완고한 내가 잘리는 것을 말한다.
할례는 침례와 같다.
침례는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용서받는 것이요 내가 잘리고 죽는 것을 말한다.
침례는 거기에 머물지않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생명가운데서 살리는 것을 말한다(롬6:1-4). 그러면 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는가? 그 목적은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기 위해서다(롬6:6).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왜 살아났는가? 사망이 다시 우리를 주장하지 않기 위해서다(롬6:9-10). 그래서 거듭난 성도는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났다. 그래서 말씀이 들리고 말씀이 마음을 찌르고 감동하며 선한일을 하고자하는 소원과 욕구가 일어나고 하나님말씀앞에 자신을 쳐 복종시키게 된다. 그러나 산헤드린 공회 종교인들은 복음의 말씀을 듣지 않고 마음으로 반응하지 않고 목이 곧아 제고집대로 행하는 것이다. 믿음과 순종은 분리할 수 없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하였다.

2. 종교인과 신앙인의 차이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구별할 수 있다.

고전2장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을 날카롭게 대조하고 있다. 거듭난 사람은 주님이 어떤 분이고 어떤일을 하셨는가를 분명하게 아는자다(고전2:2). 그리고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믿음을 가진자다(고전2:4-5). 복음의 진리와 영적인 것들은 성령이 아니고는 깨달을 수 없다(고전2:9-10). 우리 거듭난 자들은 세상의 영을 받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영적인 일은 거듭난 영적인 사람만이 분별할 수 있다(고전2:12-13). 육에 속한 종교인들은 하나님의 성령을 받지 않으므로 영적인 것들이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이고 알 수도 없다(고전2:14). 그래서 거듭난 신앙인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게 된다(고전2:16). 그래서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스데반과 산헤드린 공회가 같은 하나님을 믿고 같은 성경을 보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다르게 이해하고 있는 것을 본다. 종교인들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스데반은 아브라함과 요셉과 모세, 율법과 성전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하고 설명한다. 영적인 귀가 열리고 눈이 떠지자 구약의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킴을 알게 된다(요5:39). 영적인 눈을 뜨자 세상의 역사도 바로 분별하게 된다. 성경을 통해서만 역사를 바로 이해할 수 있다. 미래의 역사도 하나님의 주관하에 있음을 알게된다. 아브라함도 유대인만을 위한 부르심이 아니라 천하만민의 복을 주기 위함임을 알게 된다. 율법을 주신 목적은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고 그리스도가 필요함을 알게 해준다(갈3:24). 또한 성전은 이러한 죄인들을 위하여 주님이 어떻게 죽으실 것을 모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예배의 참된 개념을 이해하게 된다. 스데반은 이 모든 것을 바로 이해하였지만 종교인들은 이 모든 것에 어두워 있었다.

3. 종교인과 신앙인의 차이는 죽음에 대한 태도가 다르게 나타난다. 왜 주님이 스데반의 순교를 막지 않으시고 받으셨는가? 일반적으로 초대교회가 시작된 이후로 사도들의 핍박과 감옥에 들어가고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어느정도 관여하셨다. 그런데 스데반의 죽음은 막지 않으셨다. 어느모로 보나 스데반은 훌륭한 신앙인이요 충성된 자다. 성령충만하고 믿음과 사랑, 은혜와 지혜, 능력이 충만한 자였다. 그에 집사직분을 충실히 하고 전도에 열정이 있었다. 말씀에 능한 자였다. 고후3:7-16절에서 구약의 율법의 직분과 복음의 직분을 대비하고 있다. 율법의 직분은 결국 그리스도로 인도한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 그의 얼굴에 영광이 나타났다. 율법은 장차 올 그리스도로 인도한다. 그래서 모세는 수건을 덮었다. 그런데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지게 된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함이 있다. 고후4:5-12절에서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스데반의 죽음을 통해서든지 삶을 통해서든지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고 전파되는 것이다. 순교를 통하든 삶을 통하든 그리스도인의 존재이유는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배(그리스도)가 육신인 질그릇안에 나타나기 위해서는 질그릇이 깨어져야 한다. 자아가 죽든지 실제 육신이 죽어 순교하든지 이런 과정없이 생명이 드러날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은 고후4:10절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고 하였다. 적색순교를 하든지 실제 자아만 죽는 백색순교를 하든지 반드시 죽음을 통해서만이 예수의 생명이 우리의 몸에서 나타나게 된다. 오늘날 성도들의 신앙의 심각한 오해는 환난이나 고통, 십자가를 면하려는 생각이다. 이것이 유대종교인들의 신앙이었다. 하나님을 믿으면 잘먹고 잘살고 돈벌고 건강하고 만사형통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주님 잘 믿으면 죽어야 한다고 말한다. 주님을 믿으면 이 세상에서 잘살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다. 이땅은 그리스도인의 훈련의 장소요 그리스도의 증인의 삶을 사는 것이 목적이다. 촛불이 빛을 발하기 위하여 자기를 녹이듯이 항아리에 있는 향을 드러내기 위하여 항아리를 깨야 하듯이 스데반처럼 자기를 순교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는 자존심을 세우는 일에 목숨을 건다. 거기에는 빛도 향기도 나타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주님 믿는 것이 고달프고 힘든 길이다.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이다. 행7:55~56절에서 스데반의 죽음 전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주님께서 하나님 보좌우편에 서신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은 비단 스데반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죽음앞에서 하늘이 열리고 그 영혼이 몸을 떠나 주님의 영광앞에 나아가게 된다. 그 사람이 종교인인가 참 신앙인인가는 그의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불신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위해서 천사가 그들을 데려가지만 신자는 하나님의 영광의 품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그들을 데려간다. 그래서 불신자의 죽음은 두려움과 공포와 불안의 휩쓸려 죽음을 저항하게 된다. 그러나 신자는 하나님의 영광과 주님의 영접을 받으며 평안함과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하게 된다. 스데반의 죽음의 이러한 하늘의 영광을 보여주는 것은 스데반의 믿음을 지키고 자신을 드리는 마지막 승리를 환영하는 모습이다. 마치 부모가 운동장에서 자기 자녀가 달리기에 모든 사람을 제치고 일등으로 골인할 때 관중석에서 일어나 환호하는 것과 같다. 실제 있었던 일인데 미국에서 한 선교사가 자기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아프리카로 선교를 떠나게 된다. 그는 열악한 환경에서 복음을 위해서 힘쓰다가 두 아들을 질병으로 잃게 되고 아내도 이 충격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된다. 그는 그토록 사랑했던 두 아들과 아내를 땅에 묻고 모든 전의를 상실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배를 타고 아프리카에서 미국 샌프란시스코 항구로 돌아오게 된다. 그는 배에서 내려오는데 그 때 마침 미국의 대통령이 아프리카에 사냥을 갔다가 그 배를 타고 같이 내려오게 된다. 그 때 미국국가군악대와 많은 환승객들이 환영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는 해변을 터벅터벅 걸으면서 깊은 절망과 슬픔 속에 거닐고 있을 때 문득 그가 이 믿음의 경주를 다 마치고 주님의 부름을 받을 때 저 대통령을 맞이하는 군중들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맞이해주실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는 그 때 다시 주님께서 주신 그 영감`을 받고 그 내렸던 배를 다시 타고 아프리카로 선교를 떠나게 된다. 그는 한 평생 최선을 다해서 선교를 하므로 아프리카의 많은 영혼들이 주님께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아프리카의 문화적인 발전도 이루어지게 된다. 그가 죽은 다음 그 아프리카 사람들은 그의 비석에 이렇게 새긴다. “그가 이곳에 왔을 때는 이곳은 어둠이었다. 그러나 그가 이곳을 떠날 때는 이곳은 빛의 세계가 되었다.”라고 새겼다고 한다. 스데반의 죽음 앞에 하나님과 주님께서 또 수많은 천사들이 그를 이렇게 환영했던 것이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믿음으로 죽게 되고 하나님의 대환영을 받게 된다.

누가복음 20:41~47

41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42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43 내가 네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44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라
45 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46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7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

사람들에게 어떤 종교를 믿느냐고 물어보면, 기독교나 불교, 천주교라고 대답하거나, 아니면 교회나 절, 성당에 다닌다고 대답합니다. 다니는 것과 믿는 것은 차이가 큽니다.
누군가가 교회나 절에 다닌다고 하면 그는 그곳이 자신에게 위로가 되기 때문에 그냥 다니는 것입니다.
이들은 종교인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다릅니다.
종교인은 종교를 가진 사람이지만, 신앙인은 그 종교를 전적으로 믿는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를 종교의 하나로 인정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만은 자신이 믿는 신을 유일신이라고 주장합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며 구원의 길을 선포하고,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다른 종교나 종교인들과 부딪히곤 합니다.
지금 세상은 이미 종교 다원주의가 자리를 잡은 분위기여서 다른 종교들과 이해와 화합을 도모하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풍조 가운데 기독교가 독단적이라는 비판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기독교는 종교의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그야말로 ‘종교적인 사회’였습니다. 그 나라에 살던 모든 유대인은 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율법을 읽고,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도 종교인이 있었고 신앙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사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에서 서기관과 과부를 비교하시면서 우리에게 종교인과 신앙인의 차이에 대한 교훈을 주시고자 했습니다. 종교인은 자기가 바라는 신을 찾지만 신앙인은 유일한 절대주권자를 믿습니다. 당시 메시아를 지칭하는 여러 이름 중에 ‘다윗의 자손’이라는 명칭이 있었는데, 이 명칭에 대해 유대교의 서기관들은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메시아는 분명히 혈통적으로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도록 구약에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오실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 다윗처럼 정치적으로 힘 있는 군주였으면 하는 기대를 했습니다. 다윗왕이 통치하던 시절에 강성하고 번영했던 이스라엘을 사모하면서, 오실 메시아가 바로 그 다윗왕의 통치 능력을 발휘해서 이스라엘에 또다시 정치적, 경제적 전성기를 가져다주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런 기대감으로 메시아를 ‘다윗의 자손’이라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메시아는 순전히 자신들이 스스로 바라는 존재에다 이름만 메시아라고 붙여놓은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믿어야 할 신앙의 대상인 매시아를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메시아는 당연히 이래야 할 것이다’라는 기대감으로 자신들이 마음대로 그려놓은 존재를 기다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메시아에게 최후 심판의 날이 올 때까지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도록 명하셨습니다. 이는 메시아가 정치적 군주가 아님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비록 육신적으로는 다윗의 혈통을 타고 태어날 메시아지만 그 메시아는 다윗왕에게도 주가 되시며, 더욱이 이스라엘의 왕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셔서, 장차 최후의 심판을 주도하실 심판주이심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종교인들은 신이라는 존재를 자기 생각이나 자기 필요에 따라 인식하고 찾기 때문에 다른 신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자신이 믿는 신이라는 존재를 사람들의 판단에 좌우되는 무력한 신으로 전락시킵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인은 그런 식으로 신을 찾거나 만나지 않습니다, 종교인은 사람을 의식하지만, 신앙인은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헌금도 많이 하고 사람들 앞에서 긴 옷을 입고 잘난 척하는 서기관들은 종교인에 불과 합니다. 오히려 과부처럼 가난하지만 전 재산을 드릴 만큼 사모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이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스스로 살아계신 분’이심을 유일한 전제로 삼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신앙인은 자기 쪽에서 바라는 신들을 무수히 만들어내는 우상 숭배적인 종교인과는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일깨워 주셨고 성경이 밝히 말하는 절대주권자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고 사모하며 의지하는 것입니다. 바다로 나갈 준비가 된 연어의 변태를 ‘스몰트’(smolt)라고 합니다. 강가에 살던 연어가, 몸은 유선형이 되고 비늘은 은빛으로 바뀌며 아가미는 바닷물에 잘 견딜 수 있는 형태로 변합니다. 과거의 모습으로는 바닷물에서 마음껏 헤엄치며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스몰트를 경험해 거듭난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영적 스몰트를 경험한 사람은 더 이상 세상의 잣대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도덕군자가 되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신앙 인격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성령과 피로 거듭나서 종교인이 아닌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게 되길 바랍니다.






히스기야

히즈키야(공동번역),
히스기야(개역개정)(히브리어: חזקיה , חזקיהו 야훼께서 강하게 하신다)

남유다 왕국 13대 왕으로 25세에 즉위하여 29년간 통치하였다.
유다 왕국의 왕 가운데 가장 위대한 왕 중 한 명이며 선지자 이사야가 그의 재위기 때 활동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야훼를 섬긴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종교 의례를 회복시키고 북이스라엘의 민족들과 화합을 도모했고, 아시리아의 침공을 받았으나 이겨내었다.
또한 잠언의 편집에도 기여를 하였다.

 주상(柱狀)을 부수었다.
 아세라 목상을 찍어 버렸다.
 산당과 당을 없애 버렸다.
 율법에 기록된 대로 번제와 안식일 등의 절기 제물을 드리는 일을 진행했다.
 모세가 만든 놋뱀을 쳐서 부쉈다.

여호와께 연합하여
열왕기하 18:6

곧 저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아멘

He held fast to the LORD and did not cease to follow him;
he kept the commands the LORD had given Moses.


연합하여(다바크, dâbaq.  דָּבַק )

합하다(창 2:24, 삼하 20:2), 붙다(신 28:60,욥 19:20, 시 22:15), 혼인하다(수 23:12), 붙좇다(룻 1:14), 묻다(욥 31:7),
밀착되다(욥 41:23),매달리다(시 119:31),
의지하다(신 11:22, 30:20),만나다(창 19:19),
친근히 하다(수 22:5, 신 10:20), 지키다(민 36:7,9), 대다(신 13:17), 들다(왕하 5:27), 붙들다(시 101:3),
따라가다(렘 42:16), 추격하다(삿 20:42, 삼상 14:22, 대상 10:2),
따르다(삼하 1:6), 속하다(렘 13:11), 쫓아가다(창 31:23)

열왕기하 18:4-5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 느후스단(놋 조각)

열왕기하 18:6

곧 저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연합하여 - 다바크(dâbaq.  דָּבַק )
* 주님과 연합한 신앙(로마서 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열왕기하 20:1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매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저에게 나아와서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처치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2절 /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히스기야  - 면벽기도(길, 방법이 없다)                            
 다니엘 - 면동기도                           
 예수님 - 입골기도(골방)

열왕기하 18:7-8

여호와께서 저와 함께 하시매
저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
저가 앗수르 왕을 배척하고 섬기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사람을 쳐서 가사와 그 사방에 이르고 망대에서부터 견고한 성까지 이르렀더라.


♦ 4월 19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열왕기하 18:1∼37
♦ 묵상을 위한 주제 : 여호와께 연합하여(6절)
♦ 성구 : 곧 저가 여호와께 연합(聯合)하여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命)하신 계명(誡命)을 지켰더라. 
(He held fast to the LORD and did not cease to follow him; he kept the commands the LORD had given Moses.)  

“여호와께 연합하여(He held fast to the LORD)”
히스기야 왕의 시작은 신앙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그 신앙을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이와 같은 히스기야의 신앙은 곧 우리들의 모습과 같습니다.
한자어 사자성어에 “초지일관(初志一貫)”이란 단어를 생각해 봅니다.
2022년 새해의 첫 출발을 시작하여 4월을 지내고 있습니다.
과연 첫날 다짐했던 그 마음과 생각이 얼마나 유지되고 있는지 살펴봅니다.

히스기야 왕의 시대에 신흥 강대국 앗수르가 등장하여 북 이스라엘을 점령하였으며 남 유다도 패망의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이때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이러한 믿음을 꾸준히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히브리서 3:12)
믿음의 사람은 항상 하나님에게서 떨어질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과 연합하여 세상을 이기셨던 예수님처럼 이 세상의 영적 싸움에서 이기는 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아

https://www.youtube.com/watch?v=2im3OSlPXoA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히스기야는 왕위에 오른 뒤에 여러 해 동안 앗수르 왕에게 조공을 바쳤습니다.
히스기야 왕 제 십사 년에 앗수르 왕 산헤렙이 유다를 쳐들어왔을 때는 성전의 은을 가져다 주기도 했습니다(18:15).
히스기야가 앗수르를 배반한 것은 십사년 동안 조공 바치던 것을 중단하고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의지하겠다는 신앙적 결단이 아니라 애급을 의지해서 앗수르를 배반했다가 앗수르의 침략이라는 막다른 골목에 처한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여호와의 전으로 갔지만(19:1) 여호와를 의지하는 신앙이 아니라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습니다.

1~5절을 읽어보시면 히스기야가 하나님께 간절하게 매달리는 것 같습니까?
앗수르와도 관계를 끊고 애급과도 관계를 끊고 유다의 운명을 오직 하나님의 손에 의지하는 것처럼 들립니까? 왕궁의 책임자도 하나님을 안 믿고 서기관과 제사장들도 하나님을 안 믿을 때 과연 히스기야는 오직 하나님을 믿으며 백성들에게 신앙의 본을 보이는 것처럼 여겨지십니까? 전혀 아닙니다.

첫째, 히스기야는 직접 기도한 것이 아니다.

히스기야는 신하들과 제사장을 이사야에게 보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할 뿐입니다.

둘째, 당신의 하나님에게 간구하였다.

히스기야는 자기의 하나님, 자기가 믿는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하들을 총동원하고 이사야 선지자까지 동원하서 자기가 믿는 하나님, 자기들 나라의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히스기야가 여호와의 전에 가기는 갔는데 직접 기도하지 않고 이사야에게 대신 기도해달라고 그것도 ‘당신의 하나님께’ 입니다. 자기가 직접 기도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시키고, 자기의 하나님이 아니라 당신의 하나님에게 부탁해 달라고 합니다.

셋째. 혹시의 신앙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그의 말을 들으셨을지라”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들으신 말 때문에 꾸짖으실 ‘듯하니’”로 완전히 남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고,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확신이 없고, 하나님이 유다의 하나님으로서 유다에 대한 언약이 있고 유다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히스기야의 전혀 믿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응답해 주십니다. 이것이 기적이요 이것이 은혜입니다. 히스기야의 설렁설렁한 태도, 남의 신을 대하는 듯한 불성실한 태도, 하나님이 하실지 않하실지 도무지 감을 잡지 못하는 어영부영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주 명쾌하게 6절과 7절처럼 응답하십니다. 히스기야가 기대하고 소망했던 것보다 훨씬 크게, 훨씬 정확하게 조치를 취해주십니다. 단순히 조취를 취할 뿐만이 아니라 히스기야를 위로까지 해 주십니다. 히스기야에게는 너무 과분한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구절을 읽으면서 하나님이야기는 하지 않고, 히스기야의 기도, 하나님의 믿음, 히스기야의 간구 등 온통 히스기야를 띄우기만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성경의 뜻을 왜곡하고, 성경의 의도를 변질시키는 것에 불과합니다. 성경은 특정 인물을 신앙적 모델로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들의 어이없는 행동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서 도와주시고 은혜주시는 하나님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어이없는 기도

하나님께서 7절에서 응답하신 내용이 하나는 ‘앗수르 왕이 본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본국에서 칼에 죽게 된다’는 것인데 첫 번째가 8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 순간에 히스기야는 유다가 위기에서 벗어났으니까 당연히 만세를 불러야 하고, 하나님이 자신이 기대한 것보다 더 빨리 더 큰 조치를 취해주셨으니 당연히 할렐루야를 외쳐야합니다. 랍사게가 물러가면서 한마디 하는 것이 19~13절인데 일종의 큰 나라의 자존심이고, 강대국의 위세이지만 전혀 신경 쓸 일이 아니고 무시하면 됩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여호와의 전으로 나가 편지를 펴놓고 이전과는 달리 직접 기도합니다. 앞뒤를 무시하고 단지 19:15~19절의 기도만을 살펴보면 믿음의 기도, 신실한 모습,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앞의 상황과 연결해서 살펴보면 이 기도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히스기야는 19:1~5절에서 이사야에게 기도를 부탁했고 하나님께서 6~7절에서 응답하셨고 실제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8절에서 랍사게가 본국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9절 이하는 본국으로 돌아가는 랍사게가 한마디 한 것에 불과합니다. 자신의 상황이 급하면서도 괜시리 가오를 잡은 것에 불과합니다. 이때 히스기야가 보여야 할 반응은 아주 평안함입니다. 협박하던 랍사게가 민망할 정도로 여유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히스기야는 이미 모든 것의 결과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랍사게가 마치 곧 돌아올 것처럼 말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는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칼에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대로 행하시고 계심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기에 14절 이하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앗수르 왕에게

처음에 히스기야가 마치 남의 신에게 부탁하듯 이사야에게 기도를 해 달라고 요청하자 하나님은 아주 신중하고 정확하게 응답해 주셨고 실제로 말씀대로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랍사게의 허풍에 벌벌 떨면서 거창한 뒷북 기도를 했습니다. 히스기야는 상황파악을 전혀 하지 못했고, 반대로 하나님은 상황파악을 정확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의 엉뚱한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을 하시는데 21절이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에게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기를”입니다.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 듣지 못하니까, 히스기야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예 대놓고 앗수르 왕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응답을 신뢰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앗수르의 왕이 물러갈 것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여호와의 열심

20~34절까지가 모두 하나님이 응답, 즉 하나님이 하실 일의 선언인데 그 중간에 31절 끝에 지구상의 모든 종교들과 비교할 때 오직 기독교에만 있는, 오직 하나님만 말씀하시는 선언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가 있습니다. 이 선언이 독특한 이유는 바로 ‘여호와가 열심을 낸다’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열심을 내라고 독려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에게 열심을 내지 않으면 벌을 주겠다고 협박하는 것이 아니고, 신 자신이 친히, 직접, 스스로 열심을 낸다고 선언하고 계십니다. 그것도 신의 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서 말입니다. 하나님은 신의 보좌에 앉아 신의 위엄을 드러내며 이런저런 멋진 말만 해대는 분이 절대로 아닙니다. 신의 권위를 주장하며 인간들에게 심판을 행하는 분이 절대로 아닙니다. 본문에서도 히스기야와 하나님 중에 하나님께서 더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히스기야가 한 일이란 기껏해야 왕이면서도 하나님에게 신하들을 대신 보내는 무례한 행동이었고, 하나님이 이미 응답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뒷북치며 어이없는 기도만 하는 불신앙적인 행동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요청을 들으셨고, 응답하셨고, 또 들으셨고, 거듭 거듭 반복하여 하나님이 하실 일을 선언하셨고, 심지어는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고 선언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 4월 18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열왕기하 17:1∼41
♦ 묵상을 위한 주제 : 남은 자(18절)
♦ 성구 :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심히 노하사 그 앞에서 제하시니 유다 지파 외에는 남은 자가 없으니라.
(So the LORD was very angry with Israel and removed them from his presence. Only the tribe of Judah was left.) 

“남은 자(The tribe of left)”
‘남은 자’는 “유다 지파를 말합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열 두 지파로 구성됩니다.
남 유다는 두 개의 지파로 출발하였고, 북 이스라엘은 열 개의 지파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열 두 개의 지파 중에서 남은 지파는 오직 하나 “유다 지파”뿐이라고 합니다.
왜 유다 지파만 남았을까요?
메시아 혈통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열왕기하 17장은 북 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한 원인과 결과에 대한 말씀입니다(17:7∼23).

북 왕국 이스라엘은 대략 200년 동안 존속하였으나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졌습니다(BC 930∼BC 722).


성경의 진가(眞價)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성경은 유대인의 역사라고 외면합니다.

물론 성경은 유대인 즉 이스라엘의 역사가 맞습니다.
그런데 유다 민족의 역사를 읽고 배우는 이유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나라를 통하여 현재 지구상에 세워진 모든 나라와 역사가 어떻게 펼쳐져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모든 나라와 역사의 본보기(sample)라고 하겠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이 왜 멸망하였습니까?

이스라엘이 망한 것은 “그 하나님 여호와께 죄를 범하고 또 다른 신들을 경외하며 이방 사람의 규례를 따랐기 때문” 이었다고 합니다(7∼8절).

이스라엘이 패망한 이유는 여호와께서 행하라고 하신 것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여호와께서 행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행하였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앗수르 왕 살만에셀은 제사장을 세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기도록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것을 “종교혼합주의”라고 하겠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은 마지막 날 심판의 주가 되실 것을 믿습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자리에 앉을 수 없습니다.

종교혼합주의가 이성적인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합리적인 가르침으로 들려질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합리적인 교리가 아니라 비합리적일지라도 진리로 믿고 따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Credo quia absurdum)”는 터툴리아누스(Tertulianus)의 고백처럼 합리적인 것만 믿는다고 주장하다가 비합리적인 것이라고 외면했던 진리에 의해서 심판대에 서야 할 그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잊지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역사와 양심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https://www.youtube.com/watch?v=rco1vI3Gr4c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열왕기하 17:1-41
남은 자(18절)
남은 자는 유다 지파를 의미합니다.

열왕기하 17장은 북 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한 원인과 결과에 대한 말씀입니다(17:7-23).
북 왕국 이스라엘은 대략 200년 동안 존속하였으나 완전히 망하여 없어지고 말았습니다(BC 930-BC 722).
성경의 진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성경은 유대인의 역사라고 합니다.
물론 성경은 유대인 즉 이스라엘의 역사가 맞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와 나라를 통하여 현재 지구상에 세워진 모든 나라와 역사의 교훈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따라서 성경은 모든 나라와 역사의 본보기(샘플)라고 하겠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이 왜 멸망하였습니까?
이스라엘이 망한 것은 "그 하나님 여호와께 죄를 범하고 또 다른 신들을 경외하며 이방 사람의 규례를 따랐기 때문"이라고 합니다(7-8절).

이스라엘이 패망한 이유는 한편으로는 여호와께서 행하라고 하신 것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여호와께서 행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앗수르 왕 살만에셀은 제사장을 세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기도록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종교혼합주의라고 하겠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은 마지막 날 심판의 주가 되실 것을 믿습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자리에 앉을 수 없습니다.
종교혼합주의가 이성적인 사람들에게는 아주 합리적인 가르침이 됩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합리적인 교리가 아니라 비합리적일지라도 진리로 믿고 따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앗수르 왕이 취한 조치가 ‘이스라엘에서 앗수르로 사로잡아 온 제사장 한 사람을 다시 이스라엘로 데려가되 그가 이스라엘에 가서 거주하며 그 땅 신의 법을 무리에게 가르치게 하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가 그 땅의 신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고, 그 땅의 신 여호와를 섬긴 적도 없는데 이방에서 온 사람들은 여호와가 그 땅의 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앗수르 왕의 조치로 이스라엘로 돌아온 사람은 제사장이기는 하지만 절대로 여호와의 제사장이 아닙니다.
여로보암이 세운 제사장은 여호와의 제사장이 아니라 금송아지를 섬기는 제사장이었을 뿐이요, 지금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온 사람도 우상의 제사장입니다.

그런데 이 제사장이 돌아와서 ‘백성에게 어떻게 여호와 경외할지를 가르쳤더라”입니다.
자기도 모르는 여호와, 자기도 해본 적이 없는 여호와 경외하기, 자기도 도대체 들어본 적도 없고 배워본 적도 없고 행해 본 적도 없는 ‘어떻게 여호와 경외할지’를 어떻게 가르쳤을지 궁금합니다.

신기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하튼 여호와 경외하는 것을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언컨대 ‘종교 쇼(Show)’입니다. 


배반의 연속

1. 열왕기하 17장

성경에 유다와 이스라엘을 비롯하여 애굽, 블레셋, 아람, 모암, 암몬, 앗수르, 바벨론, 바사 등 많은 나라가 등장하는데 유일하게 북 왕국의 패망에 대해서 원인과 결과에 대한 언급이 열왕기하 17장입니다.

BC 930년에 세워지고 722년에 패망하였으니 대략 200년 동안 지속되던 나라가 완전히 망하여 역사 속에서 사라져버렸는데 그 원인을 분석한 내용이 7절부터 23절까지 17절뿐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절대로 개인이 아니라 온 인류의 샘플이고, 성경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또한 절대로 특정한 나라가 아니라 온 인류의 샘플입니다.

특정 개인이 아니라, 특정 민족이나 나라가 아니라 모든 인간이 대상이고, 삶의 모든 영역에 해당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관계를 비교와 경쟁으로 설정하고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받아 다른 사람보다 더 좋아졌다고 평가하고, 어떤 나라가 하나님의 복을 받아 다른 나라보다 더 강성해졌다고 평가하는 것 자체가 온 인류를 대상으로 하고, 모든 인간이 행복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관점과는 매우 다른 기준, 다른 마음, 다른 원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이스라엘의 16대 왕인 므나헴 시대에 앗스르 왕 이 이스라엘을 쳐들어오자 왕이 나라의 큰 부자들에게서 은을 강탈하여 왕에게 조공을 바쳤고(왕하 15:19, 20), 18대 왕 베가 때에는 앗수르에게 많은 영토를 빼앗겼고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15:29, 30). 나라가 유지되고는 있지만 이미 나라로서의 기능, 나라로서의 명분을 모두 상실한 상태로 19대 왕 호세아가 왕 위에 올랐지만 거의 앗수르의 속국인 상태로 조공을 바치면서 근근이 이어가고 있을 뿐입니다.


앗수르에게 정치적 변화가 있어서 디글랏 벨레셀 왕에 이어 살만에셀 왕이 등장했습니다.
호세아가 처음에는 이 왕에게도 예전대로 조공을 드렸는데 정세변화를 관찰하면서 앗수르에게 보내는 조공을 중단하고 대신 애굽의 왕 소에게 사자를 보내어 구원을 요청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호세아의 갈아타기는 실패해 당장에 앗수르 왕이 호세아를 옥에 감금하고 사마리아를 삼년간 에워쌌고, 결국에는 수도가 점령당하고 백성들이 포로가 된 것입니다.

대략 삼십년 전부터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치다가 애굽의 도움을 받아 정세를 바꾸어보려다가 도리어 폭삭 망해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호세아 왕으로서는 최선의 선택을 했을 텐데 앗수르에게는 배반자로 찍혀 정복을 당하고, 애굽에게는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고 나라가 망해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이 패망한 이유는 한편으로는 여호와께서 행하라고 하신 것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여호와께서 행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권고, 하나님의 가르침과는 반대로만 행동한 것입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의 기대 즉 이스라엘의 안정과 평화, 백성들의 자유와 평화와 정반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명령이든, 부탁이든, 권고이든, 소망이든 여하튼 어떤 말을 하실 때에는 반드시 먼저 은혜를 주시고, 먼저 복을 주시고, 먼저 인간을 좋게 만들어 주시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설정하신 후에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무 조건없이 이스라엘을 출애굽시켜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만한 어떤 행동도 한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바로가 지시한 노동에 힘들어 하면서도 하나님께 부르짖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행하신 모든 것이 은혜와 복입니다.
그렇게 먼저 은혜와 복을 주신 이후에 하나님의 토라, 하나님의 규례가 주어지기에 하나님의 토라는 결코 상이나 벌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나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먼저 은혜와 복을 주셨기에 만약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면 이미 받은 은혜와 복을 누리며 유지하며 지속하는 것이오, 만약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으면 이미 은혜와 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땅 신의 법

6절은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앗수스로 끌려가서 고산 강가에 있는 할라와 하볼과 메대 사람의 여러 고을에 퍼져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24절은 반대로 이방의 백성이 이스라엘로 이주해서 이스라엘에서 살게 된 이야기입니다.

당시 최고의 강대국이었던 앗수르가 민족 이동정책과 민족 혼합정책을 사용한 것입니다.

25절을 읽고 문자 그대로,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으매 하나님이 사자를 보내서 죽게 했다고 받아들이시면 성경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이곳이 북 이스라엘인데 이스라엘은 나라가 세워진 이래로 패망할 때까지 여호와를 경외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자가 나타나서 사람들을 물어 죽인 적이 없습니다. 25절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26절의 이방 사람들입니다. 이방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25절처럼 이방 방식으로, 우상의 방식으로, 죄의 방식으로 상황판단하고 분석까지 다 했습니다. 그들이 한 말 중에 중요한 표현이 ‘그 땅 신의 법’입니다. 바벨론이나 구다나 아와나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살던 사람들로서 이스라엘로 이주 해 왔기에 이 땅에는 이 땅을 지배하는 신이 따로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고, 그 신은 은혜를 주는 것이 아니라 법을 주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요, 그 법을 따르지 않으면 죽이거나 병들게 하는 벌을 내리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라 전형적인 우상의 방식, 죄의 방식입니다.

26절과 같은 생각을 했기 때문에 27절과 같은 조치가 뒤따르는 것입니다.
북 이스라엘은 초대 왕 여로보암이 금 송아지를 만들어 단과 벧엘에 둔 이래로 모든 왕들이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였습니다.
그래서 북 이스라엘에는 여호와 신앙이 없고, 여호와의 성전이 없고, 여호와의 제사장이 없습니다.
그들 자신도 여호와가 행하라고 하신대로 행하지 않았고, 행하지 말라고 하신대로 행하지 않아서 망했습니다.
여호와를 아는 자도 없고,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한 자도 없습니다.

그런데 앗수르 왕이 취한 조치가 ‘이스라엘에서 앗수르로 사로잡아 온 제사장 한 사람을 다시 이스라엘로 데려가되 그가 이스라엘에 가서 거주하며 그 땅 신의 법을 무리에게 가르치게 하라’입니다. 정작 이스라엘은 여호와가 그 땅의 신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고, 그 땅의 신 여호와를 섬긴 적도 없는데 이방에서 온 사람들은 여호와가 그 땅의 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앗수르 왕의 조치로 이스라엘로 돌아온 사람은 제사장이기는 하지만 절대로 여호와의 제사장이 아닙니다.
여로보암이 세운 제사장은 여호와의 제사장이 아니라 금송아지를 섬기는 제사장이었을 뿐이요, 지금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온 사람도 우상의 제사장입니다.
그런데 이 제사장이 돌아와서 ‘백성에게 어떻게 여호와 경외할지를 가르쳤더라”입니다.
자기도 모르는 여호와, 자기도 해본 적이 없는 여호와 경외하기, 자기도 도대체 들어본 적도 없고 배워본 적도 없고 행해 본 적도 없는 ‘어떻게 여호와 경외할지’를 어떻게 가르쳤을지 궁금합니다.

신기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하튼 여호와 경외하는 것을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언컨대 ‘종교 쇼(Show)’입니다. 

여호와와 무관한 제사장이 가르친 종교의 현장이 29절 이하에 나오고, 하나님의 탄식, 하나님의 호소가 35절 이하입니다.
이것은 신의 영광에 집착하는 하나님의 배타적 선언이 아니고, 여호와의 주권만을 강조하는 독선적 주장이 아닙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하나님은 35, 36절처럼 백성에게 일하며 수고하게 하는 신이 아니라 친히 일하시면 친히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39절 ‘그가 너희를 모든 원수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즉 인간을 힘들게 하고 곤고하게 하는 모든 세력들, 더 나아가 죄의 속박으로부터 구원하시여 참으로 인간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도우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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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25:1-30


배반의 결과

 

1. 유다의 패망

바벨론이 여호야긴을 포로로 잡혀가는 대신에 유다의 왕으로 세운 사람이 20대 왕 시드기야입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고 시드기야는 바벨론을 배반했는데 불행하게도 배반을 실패했고, 배반의 결과는 아주 혹독했습니다. 어차피 바벨론에 의해 왕이 되었으니 이미 바벨론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아직 국가라는 명분은 있었는데 잠시 배반을 했고 바벨론에 의해 침략을 받고 전쟁에서 패하여 왕이 사로잡혔으니 이제부터는 공식으로 나라가 패망한 것입니다. 이제부터 남은 것은 점령군의 강포한 행위와 패한 백성의 험난한 삶입니다. 8절에는 연도를 표현하는 기준이 달라졌습니다. 그 동안은 모두 유다의 왕의 통치가 기준이었는데 8절부터는 모든 기준이 바벨론 왕의 통치년도입니다. 본문에 보면 ‘나라가 망했다, 주권을 이양했다, 항복문서에 서명했다’는 표현이 없습니다. 대신 사건을 표시하는 기준이 변한 것을 보고 나라가 망한 것을 파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유다가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는 것은 세 번에 걸쳐 일어납니다. 1차 포로는 24:2절에 기초합니다. 여호야김 삼년에 바벨론이 쳐들어와서 유다가 패하고 많은 사람이 포로로 잡혀가고 다니엘이 이때 잡혀갑니다. 이때가 주전 605년경입니다. 2차 포로는 24:8절 이하로 이때에 여러분이 잘 아시는 에스겔이 잡혀가고 이때가 주전 597년입니다. 그리고 3차 포로가 25장 이하이고, 이때가 주전 586년입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하나 있는데 이스라엘이 3차에 걸쳐서 포로로 잡혀가는데 반대로 유다로 귀환하는 것도 3차에 걸쳐서 일어납니다. 1차가 스룹바벨의 인도로 주전 538년에 돌아오고, 2차가 에스라의 인도로 주전 458년에 돌아오고, 3차가 느헤미야의 인도로 주전 432년에 돌아옵니다. 70년을 이해할 때 하나는 포로 귀환을 기준으로 삼아 1차 포로가 608년 영이고 1차 귀환이 538년으로 계산하는 방식과, 다른 하나는 성전을 기준으로 삼아 성전이 파괴된 것이 주전 586년이고, 학개와 스가랴 시대에 성전이 재건되는 것이 주전 516년으로 성전이 파괴되고 새로 지어지는데 70년이 경과된 것으로 계산합니다.

 

2. 배반의 결과

왕하 17장에서 북 왕국 이스라엘이 패망하고 25장에서 남 왕국 유다가 패망하는데 두 나라의 패망을 소개하는 본문에 유독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 ‘배반’입니다. 17:4절에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아가 앗수르를 배반한 결과로 북 왕국이 망했습니다. 18:7절에 유다의 히스기야가 앗수르를 배반하였는데 화친을 위해 성전의 은금을 털어다 주기까지 했습니다. 24:1절에 여호야김이 바벨론을 배반한 결과로 유다의 1차 포로가 사건이 일어납니다. 24:20에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을 배반한 결과로 유다가 패망하고 3차 포로 사건이 일어납니다. 북 왕국이 앗수르를 배반했다가 앗수르에 의해 망했고, 남 왕국이 바벨론을 배반했다가 바벨론에 의해 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순종의 징계로 이스라엘을 패망케 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한 것은 한 두 번이 아니고, 어제 오늘이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앗수르처럼 행동하셨다면, 바벨론처럼 반응하셨다면, 즉 인간들이 배반자를 다루듯 이스라엘을 다루셨다면 이스라엘은 진작에 망했어야 합니다. 왕정시대는 고사하고, 사사시대는 고사하고, 아예 광야에서 몰살당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버리고, 떠나고,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기를 반복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배반자 다루듯이 보복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왕이요, 이스라엘의 책임자요, 이스라엘의 보호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열왕기는 이스라엘의 패역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돌보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통해 과연 누가 이스라엘의 왕이며, 과연 왕의 역할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오면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나름대로 자신들이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여 가나안 족속을 살려두어 노역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왕정이 끝날 때에 더러는 바벨론으로 잡혀가고, 더러는 애굽으로 도망하고, 가나안에 남은 사람들은 포도원에서 노역을 했습니다. 자신들이 행한 대로 당하고 있음을 통해 이스라엘의 어리석음을 지적합니다.

 

 

Ⅱ. 여호와의 성전

 

1. 여호와의 신앙

열왕기서는 나라가 패망한 것에 대해 독립을 잃었다는 것을 슬퍼하거나, 주권을 상실했다는 것을 애통해하거나, 영토를 빼앗긴 것을 탄식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나라가 패망한 것을 묘사할 때 한편으로는 조상들이 애굽에서 나왔는데 후손들이 애굽으로 잡혀가고, 선조들이 갈대아 지역에서 나왔는데 후손들이 갈대아 지역으로 포로로 잡혀가는 것을 묘사해서 이스라엘의 어리석음 결과를 지적해 줍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의 대표, 이스라엘이 스스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선택한 왕의 말로 즉 한 왕은 애굽으로 포로로 잡혀가고, 다른 왕은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고, 또 다른 왕은 눈이 뽑혀지는 모습을 통해서 왕이 얼마나 무기력하고, 왕이 백성을 위해 싸워주기를 바랬던 백성들이 기대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지적해 줍니다. 열왕기는 나라가 패망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생각이 얼마나 틀렸는지를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또 하나 주목할 것이 바로 성전에 관한 것입니다. 인간이 범죄 한 후 하나님께서 여호와를 알리시는 계시하신 내용이 창12장부터 호24장까지로 장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성취하신 내용이 여호와 신앙의 핵심, 여호와 신앙의 정석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는 부족함이 없고, 결함이 없습니다. 당연히 수정이 없고, 개선이 없고, 보완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사기에서 하나님께서 사사를 동원해 새로운 규정, 새로운 신앙, 새로운 종교 양식을 만드신 것이 없습니다. 예언자들이 등장해서 예언을 하지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수정하지 않습니다. 사무엘 시대에 성전이 없어서 여호와가 거주하기에 불편하신 적이 없고 이스라엘도 성전이 없어서 여호와께 간구하기에 어려움을 겪은 적이 없습니다.

 

2. 이스라엘의 신앙

왕정제도 자체가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왕을 자신들의 통치자로 세운 것이기에 왕정제도는 하나님을 버린 것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열왕기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신앙은 바른 모습이 아니라 모두 변질된 모습, 왜곡된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를 통하여 가르쳐준 여호와 신앙의 정석을 떠나서 자신들이 생각하는 종교의 모습을 만든 것의 상징이 바로 성전이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성전이 필요했다면 진작에 하나님이 세우셨을 것인데 하나님은 성전을 언급하지 않으셨고, 성전 없이도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섬기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왕정시대에, 왕이 여호와의 신앙, 여호와의 종교를 변질시킨 상징이 바로 성전입니다. 게다가 이스라엘은 성전을 지어놓고, 자신들이 의도한 성전의 기능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왕상 8장에서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 할 때 여덟 차례에 걸쳐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구원해달라’고 아주 멋진 기도를 했지만 이스라엘은 왕정 시대에 성전을 향하여 기도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 왕이 병이들면 도리어 다른 신에게 찾아갔고, 이스라엘이 이방이 쳐들어오면 도리어 다른 이방나라에 찾아가 도움을 청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성전을 사용한 것은 이방에게 조공을 드리기 위해 성전의 은금을 거두어간 것과, 다른 이방의 신들을 수입했을 때 그 신들을 모실 곳이 없으면 여호와의 성전에 둔 것 뿐입니다. 여호와의 성전은 본의 아니게 여러 신들이 모셔져있는 만신전이 되어버렸습니다.

 

3. 성전의 재건

여호와의 성전이 파괴되었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교적인 관점에서 여호와 신앙의 중심, 여호와 종교의 중추인 성전이 무너졌다고 애통해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이 무너질 것도 예언하시고 70년이 지나면 성전이 재건될 것도 예언하셨지만 백성들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망은 여호와 성전의 재건이나 여호와 신앙의 회복아 아니라 오직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성전이 파괴됨으로 이스라엘의 어리석은 종교를 조롱하고, 왕정사 이후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성전회복이 아니라 여호와를 아는 마음을 회복하여 주십니다.



열왕기하 24:1-20

사로잡혀 가고

 

1. 16대 왕 요시야

요시야가 8살에 왕위에 올라 31년을 통치하는데 성경에 기록된 사건은 딱 두건인데 하나는 22~3장에 나오는 성전 수리에 이은 종교 개혁이고 다른 하나는 23장 28절 이하에 나오는 전쟁에서 죽는 사건입니다.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진행했으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모습이 소개되어야 하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성경에는 그런 모습이 전혀 없습니다. 요시야에 대한 내용을 분석하면 여러 우상들과 신전들을 제거했다는 것을 강조할 뿐 여호와를 섬겼다는 것을 강조하지 않는 것입니다. 요시야의 선대 왕들 즉 14대 므낫세와 15대 아몬은 친앗수르 정책을 택한데 반해 요시야는 친바벨론 정책을 택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요시야가 선택을 잘한 셈이 됩니다. 요시야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것이 주전 621년이고 채 10년이 지나지 않은 주전 612년에 앗수르가 패망합니다. 애굽이 앗수르를 치기 위해 올라올 때 요시야가 막아선 때가 주전 609년, 그 전쟁에서 요시야가 죽습니다.

 

2. 17대 왕 여호아하스

요시야 시대에 성전을 수리하고 온갖 우상들을 모두 제거하고 수백 년 만에 유월절을 지키기도 해서 ‘요시야의 종교개혁’이라고 불리기까지 했는데 실제로는 여호와의 신앙이 별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새로 왕이 된 여호아하스는 여호와를 의지하기보다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기를 선택했습니다. 죄인들의 기준에 근거하면, 신을 위해 대단한 일을 했으면 신으로부터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축복은 당연히 가시적으로 나타나야 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크고 강한 것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여호아하스가 생각하기에 아버지 요시야는 여호와 이외에 그 많은 우상들을 모두 제거하였습니다. 여러 신들을 제거하는 것은 각 신들이 주관하는 각 영역을 포기하는 것이요 각 기능을 포기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과연 다른 신들을 모두 제거하고 오직 여호와만을 섬기기로 했다면 여호와가 요시야를 얼마나 도와줄지 궁금해 하며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시야의 나라는 결코 강력해지지 않았습니다. 앗수르보다 커지지 못했고, 바벨론부터 강대국이 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는 그 동안 별로 힘이 없던 애굽보다도 세지지 못했습니다. 여호아하스가 생각하기에 아버지 요시야의 종교정책은 완벽히 실패한 것이요, 여호와의 뜻을 따라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십삼 세에 왕이 되었는데 통치 기간이 불과 석 달이고 애굽으로 사로잡혀 갔습니다.

 

3. 18대 왕 여호야김

애굽에 의해서 왕이 엘리아김은 애굽에 의해서 이름도 여호야김으로 바뀌었습니다. 애굽에 의해 왕이 된 여호야김은 당연히 친애굽 정책을 써야 했고 우선은 애굽의 바로 느고가 요청한 조공을 바쳐야만 했습니다. 요시야의 두 아들인 여호아하스와 여호야김은 두 살 터울이었는데 두 형제의 행적이 32, 37절처럼 똑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습니다. 앗수르는 패망해서 거의 소멸되어 가고 있고 바벨론과 애굽이 서로 경쟁을 하니까 유다로서는 눈치를 보면서 상황에 따라 조금 유리해 보는 쪽에 붙었다가 상황이 바뀌면 다시 유리해 보이는 쪽에 붙는 것을 반복하다가 바벨론은 배반했는데 결과적으로는 큰 판단착오였습니다. 주전 605년에 애굽과 바벨론이 당시의 패권을 두고 한바탕 전쟁을 벌이는데 바벨론이 이기고 애굽이 패한 것이 24장 7절입니다.

 

4. 19대 왕 여호야긴

여호야긴은 왕이 된지 불과 석 달만에 바벨론에 의해 폐위가 되고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잡혀갑니다. 아직 유다라는 나라가 공식적으로 망한 것은 아닙니다. 이미 애굽이 유다의 내정을 간섭해서 왕을 사로잡아 가고 대신 새로운 왕을 자기들 마음대로 세운 적이 있습니다. 똑같은 사건이 이번에는 바벨론에 의해서 발생했습니다. 19대 왕 여호야긴은 왕이 된지 석 달 만에 바벨론으로 잡혀 가고 바벨론에 의해 새로운 왕이 세워집니다.

 

 

Ⅱ. 누가 왕인가?

 

1. 이스라엘의 역사

이스라엘이 국가 또는 민족 또는 공동체로서 역사에 등장하게 된 시초는 출애굽이었습니다. 애굽에서 약 400여년 간 노예생활을 하다가 애굽을 벗어나면서부터 이스라엘이라는 집단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스스로 자신들이 나라를 지켜보고 다스려보겠다고 시작한 제도가 왕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왕정의 끝이 이스라엘의 대표인 왕이 애굽으로 잡혀 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출애굽하도록 진두지휘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출애굽시켜주셨는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선택한 제도와 스스로 선택한 정책의 결과로 입애굽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애굽에서 노예된 백성들을 이끌어 내어 자유민을 만들어 주었는데 이스라엘은 애굽으로 끌려가서 포로가 되어버렸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이스라엘의 조상은 아브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행하신 최초의 일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게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본토 친천 아비 집에 바로 갈대아 우르였습니다. 지역적으로 따지자면 아브람은 갈대아 지역 즉 바벨론 지역을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서 터를 잡고 살 수 있도록, 아들을 낳고 민족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은혜에 은혜를 더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갈대아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는데 이스라엘의 후손은 정반대로 가나안을 떠나 갈대아 지역 즉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고 있습니다. 성경이 이스라엘 역사의 앞과 뒤를 어떻게 대조하고 있는 지가 보이실 것입니다.

 

2. 왕정 제도의 의미

사사기의 마지막에는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모든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고 나오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이 표현은 틀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신이었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성경의 기록은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 상태’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자신들의 신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자신들의 왕으로 섬기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한 것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자신들이 왕이 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사사와 왕은 완전히 다릅니다. 비록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려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시기에 이스라엘이 어려운 곤경에 처해있을 때 하나님이 사사를 세우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사는 하나님의 대행자요, 사사들의 사역은 하나님이 행하신 사역입니다. 그러나 왕은 하나님이 제안하신 것도 아니요 하나님이 세우신 것도 아닙니다. 왕은 전적으로 인간이 선택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스스로 하나님을 자신들과의 관계에서 배제한 것입니다.

 

3. 누가 왕인가?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왕정제도를 허용하시면서 ‘과연 누가 왕인가?’를 알게 하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선택하는 왕, 때로는 세습을 통해 이어지는 왕, 때로는 반역을 통해 이어지는 왕을 모두 허용하십니다. 이스라엘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보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 자신들이 취할 수 있는 최상의 인물, 자신들이 행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정책을 모두 해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왕정시대에 이스라엘이 해보고 싶은 것을 하나님이 막아서 시도하지 못한 것이 없습니다. 결론은 한편으로는 애굽으로 사로잡혀 가고 다른 한편으로는 바벨론으로 잡혀 가면서 나라가 패망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지금까지 존재한 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 즉 하나님이 왕의 책임과 역할을 해오셨기 때문입니다. 도무지 배우지 않는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패망을 또 다른 계시의 사역으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영원토록 하나님의 책임과 역할을 절대로 소홀히 하지 않으십니다. 

 


열왕기하 23: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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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21:1-26


. 히스기야의 자만

 

1. 그 때에

왕하 20:1의 ‘그 때에’는 불과 몇 해 전에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패망했고, 그 동안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치던 유다는 애굽을 의지하면서 앗수르를 배반했지만 앗수르의 침략을 받아 거의 패망직전까지 몰렸지만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앗수르의 왕이 물러갔을 때입니다. 12절의 ‘그 때에’는 히스기야가 죽을 병이 걸렸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고침을 받고 있을 때입니다. 히스기야가 죽을 병이 걸렸다는 소문이 바벨론에게까지 퍼져서 바벨론에서 문병을 오는데 하나님의 치유가 너무 빨라서, 채 삼일도 걸리지 않고 벌써 다 낳았기 때문에 바벨론의 사자들이 출발할 때 이미 히스기야는 다 나아서 바벨론의 사자들은 문병을 오려고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치유를 축하하러 온 셈이 되었습니다. 여하튼 히스기야가 병들어 있는 그 순간에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의 왕 브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에게 편지와 예물을 보낸 것입니다. 19장과 20장은 같은 해, 즉 히스기야가 39세때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유다가 앗수르에게 위협을 받고 있을 때 유다와 바벨론, 히스기야와 브르닥발라단 사이에 친교가 있었던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남쪽의 애굽을 의지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북동쪽의 바벨론을 의지했던 것입니다.

 

2. 히스기야의 자만

불과 얼마 전에 앗수르에게 성전의 금은을 다 털어다 조공을 바쳤고, 또 얼마 전에 예루살렘이 포위되어 먹을 것을 걱정하며 생존을 위협받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앗수르로부터 구원해주셨고, 그때에 히스기야가 병이 들었고, 그때에 바벨론의 사신들이 왔는데 왕이 거의 같은 시기에 어디서 이런 귀중품들이 생겨서 왕의 보물고를 가득 채웠을까요? 근거는 19:35절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앗수르의 군사들을 물리쳐주어 히스기야가 전리품을 챙긴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엄청난 금은보화를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히스기야가 앗수르와 싸운 것이 아니고, 히스기야가 앗수르를 물리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군사 십팔만 오천명을 치는 동안 히스기야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잠만 잤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앗수르 군사가 모두 송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히스기야가 한 일이라곤 아침에 일어나 앗수르 군사들이 죽은 것을 본 것이고, 가벼운 마음으로 걸어가서 전리품을 긁어모은 것뿐입니다. 히스기야가 14절을 행한 것이 자랑질입니다. 당시 앗수르의 위협에 견딘 나라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앗수르가 유다에 와서 패하고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이 죽었습니다. 지금 히스기야는 당대의 주변 나라들이 하지 못한 일을 ‘자신이’ 해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앗수르를 물리쳤고, 자기가 앗수르에 승리했고, 자기가 앗수르 군사들을 죽였고, 자기가 엄청나고 대단을 일을 해냈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 제시하는 것이 바로 전리품입니다. 자기가 위대한 일을 해냈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서 가능한 모든 것을 다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보여줄 것이 많은 만큼 자기가 큰일을 해 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셨다는 신앙이 없고, 자기는 잠만 잤을 뿐인데 여호와의 사자가 이 모든 일을 행했다는 믿음의 고백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누가 했느냐 바로 자신이 행했다는 것입니다.

 

 

Ⅱ. 진노를 일으켰음이니라

 

1. 아버지와 다르게

21:1절의 므낫세는 히스기야의 아들입니다. 히스기야가 39세에 병이 들어 죽을 뻔했을 때 하나님께서 십오년을 더 살게 하셨는데 므낫세가 열두 살 때에 왕이 되었으니 므낫세는 히스기야가 치유 받은 후에 낳은 아들입니다. 므낫세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전무후무하게 악한’입니다. 21: 2~6절에 의하면 므낫세는 마치 혼자서 세계 종교박람회를 개최한 듯합니다. 므낫세가 참으로 다양한 우상 종교행위를 했습니다만 엄밀하게 말하면 이것이 처음이 아닙니다.

 

사사시대는 아예 건너뛰고 왕정시대부터만 살펴보아도 이미 솔로몬 시대부터 이스라엘은 여러 신들을 섬겼습니다. 솔로몬은 여호와의 성전 뿐만 아니라 많은 신전을 지었습니다. 왕상 11:4절 이하에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 등을 위하여 예루살렘 앞 산에 산당을 지었습니다. 왕은 언제나 백성의 대표입니다. 어떨 때는 왕이 먼저 백성을 선동하기도 하고 반대로 어떨 때는 백성들의 요구에 왕이 따라가기도 합니다. 왕은 선했는데 백성은 악했거나 왕은 악했는데 백성은 선한 경우란 거의 없습니다. 므낫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므낫세만 악한 것이 아니라 21장 9절과 같이 므낫세와 백성이 같습니다.

 

2. 이스라엘의 종교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유일하게 믿은 것이 아닙니다. 유대교에서는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구약시대는 유대교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유대교 나라가 된 것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온 이후입니다. 유대교는 포로귀환 이후에 새로 생겨난 종교입니다. 왕정시대 내내 이스라엘은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나라가 아니라 철저하게 여러 신, 많은 신을 믿었던 다신교 나라, 만신의 나라였습니다. 히스기야가 마치 종교개혁을 한 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전혀 다릅니다. 솔로몬이 수입한 각종 우상 신과 솔로몬이 지은 각종 우상 신전들은 히스기야 시대에도 제거되지 않고 멀쩡하게 세워져 있었습니다. 솔로몬은 외국에서 우상들을 들여왔고 므낫세는 새로 우상을 들여온 것이 아니라 이미 이스라엘 내에 행해지고 있는 다양한 우상 종교제도들을 왕이 직접 활성화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이스라엘이 다양한 우상종교가 만연되어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의 종교가 다분히 다신교적이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자신들의 정체성을 완벽히 부인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은 히브리 민족 집단이 아니고, 이스라엘 국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특정 민족을 선택한 것이 아니고, 특정 나라를 건국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인들 중에 아브람을 선택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죄인들에게 하나님을 계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하나님의 계시 사역의 결과로 형성된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배운 사람들, 하나님을 아는 신앙공동체입니다. 그런데 그 신앙공동체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 하나도 아닌 만신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 신앙 공동체의 의미를 상실했습니다.

 

3. 진노를 일으켰으며

죄인들은 자신들이 당한 결과에 대해 자신들의 죄 때문이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이 심판하셨다, 진노하셨다, 저주하셨다, 벌을 주셨다고 억지를 씁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도우시는 분이지 인간을 방해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늘 인간의 행동을 보고 그 행동에 따라 장차 되어질 일을 말씀하시며 일종의 권고를 하십니다. 특히 불의한 행동, 악한 행동을 할 때에 ‘그렇게 하면 망한다’라고 알려주십니다. 이것은 ‘내가 반드시 너를 망가뜨릴 것이다’라는 저주가 아니라 ‘내 말을 듣고 돌아서서 망하지 말라’는 간절한 부탁합니다. 히스기야에 대해서 20장 17절과 18절에서 왕의 모든 것이 바벨론으로 옮겨지고 자신이 사로잡혀 갈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므낫세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정말 므낫세와 백성들이 돌아서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상실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권고를 하십니다. 다만 그 표현이 마치 하나님이 벌을 주시는 듯, 하나님이 직접 징계를 하시는 듯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동에 대해 6, 15절 끝에 “므낫세가 여보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그 진노를 일으켰으며”입니다. 강조점은 하나님이 진노하셨다가 아니라 므낫세가 진노를 일으킨 것이며, 상대적으로 하나님이 지금까지 참으셨다는 것입니다. 히스기야와 므낫세, 아몬은 하나님 대신 애굽이나 바벨론을 의지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가장 분명하고 안전한 것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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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 왕의 패역과 불신앙(역대하 28:1-15)

​요담은 끝까지 형통의 시대를 살았는데 그의 아들 아하스는 평생 끝까지 패역과 불신앙의 시대를 살아갑니다.
아하스 시대에는 오히려 북 이스라엘에서 희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질문 : 아하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6)

결코 가서는 안 되는 지점(1-8)
남 유다 12대 왕 아하스는 그의 손자 므낫세와 더불어 사상 최악의 왕입니다.
아무리 악한 왕이라도 가끔은 선행을 하는데 아하스는 오직 악만 행합니다.
성경은 아하스가 남 유다 왕임에도 불구하고 북 이스라엘 왕들의 길을 갔다고 평가합니다(2).
최악의 평가입니다.
각종 우상 제조, 인신 제사, 산당 제사 등 하나님이 극도로 싫어하시는 짓을 전부 행합니다.
남 유다를 마치 이방 우상들의 박람회장처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참다 못해 아람 왕 르신과 북 이스라엘 왕 베가에게 유다를 넘겨버리십니다.
수많은 유다 백성이 아람의 수도 다메섹으로 끌려가고, 단 하루만에 북 이스라엘과 싸우던 유다 군사 12만명이 전사하고, 백성 20만 명이 포로가 되어 북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로 끌려갑니다. 하나님께서 그 이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이는 아하스가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음이라."(6) 결코 하나님을 버리는 지경까지 가서는 안됩니다.

질문 : 남 유다 왕 아하스 시대에 북 이스라엘에 깨어 있던 선지자는 누구입니까?(9)

반드시 가야 하는 지점(9-15)
아하스와 비교해 보라는듯, 성정은 북 이스라엘의 오뎃 선지자를 소개합니다.
남 유다와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고 무려 20만 명의 유다 백성을 포로로 끌고 오는 이스라엘 군대를 향해 오뎃이 외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승리는 우리가 강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유다를 징계하시려고 행하신 일임을 모르겠느냐? 우리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인데, 어찌 이렇게 살기 등등하여 함부로 유다 형제들을 죽이고 심지어 그들을 끌고 와서 노예로 삼으려고 하느냐? 하나님께 범죄하지 말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 유다 형제들을 돌려보내라."(9b-11)

오뎃의 말을 듣고 지도자 4인방이 움직입니다.
지도자들의 말에 따라 군인들이 움직이고, 즉시 남 유다 형제들을 돌려 보냅니다.
지금 북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통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말씀이 통하는 지점에 서십시오.
지금 서 있는 곳에서 말씀의 통로가 되십시오.


아하스의 악한 통치(역대하 28:1-15)

요담의 아들 아하스는 극도로 악한 왕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다윗과 달리 여호와 신앙 외에 모든 종교를 받아들인다.
아마도 아하스는 그렇게 하는 것이 외교에 도움이 되어 나라를 부강하게 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는 연합군으로 징계를 하셨다.
이사야의 기록에 따르면 연합군이 쳐들어오기 전 아하스에게 회개할 기회가 있었다(이사야 7-8장).
그러나 그는 그 기회를 거절했고 결국 온 나라가 큰 피해를 입었다. 그와 달리 북 이스라엘 병사들은 선지자의 말을 들었다.

아하스는 왕이 되자마자 다윗의 길을 떠나 적극적으로 우상숭배를 장려했다.
주변 나라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 나라가 회복될 길이라고 판단한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그런 방법으로 형통해지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붙들어야 살아날 수 있다.
아하스에게 회개의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는 스스로그 기회를 거절했다.
혹 세상을 의지하는가?
지금 회개의 기회가 선포되었다.
지금 즉시 회개하여 돌이키라.
은혜가 주어질 것이다.

​오늘의 말씀은 '아하스의 악한 통치'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우상을 좇을 때 맞이하는 결과는 심판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좇아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아하스는 왕으로 즉위하자마자 적극적으로 우상숭배를 장려합니다.
과거 외교 관계는 서로 섬기는 신들을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만 의지해서는 다른 나라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연합 군대가 예루살렘을 침공할 때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했습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회개할 것을 요구했지만 아하스는 듣지 않았습니다(사 7).
그가 하나님보다 앗수르를 더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아하스는 이처럼 철저하게 하나님을 외면하고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아람과 북 이스라엘을 통해 그들을 징계하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은 다른 곳에서 일어났습니다.
선지자 오뎃에게 말씀을 들은 북 이스라엘의 군대가 포로들을 돌려보낸 일입니다.
유다의 왕 아하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고, 북 이스라엘의 병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했습니다.

손에 잡히지 않는 하나님 말씀만을 붙들고 살 것인가, 아니면 눈에 보이고 구체적인 도움이 되어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 살 것인가?
이 질문은 모든 시대 모든 성도가 고민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아하스 왕이 그랬던 것처럼, 걸으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세상적인 방법을 더 의지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한 태도가 아니며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혹시 자기 생각이나 세상적인 방법을 더 믿어 실패하고 침체에 빠진 분 계십니까?
지금 즉시 회개하기 바랍니다.
지금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순간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이킬 때 은혜가 주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기를 기뻐하십니다.
말씀으로 우리에게 기회를 주실 때, 회개하고 돌아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성도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말씀의 통로가 되게 하소서!
예배자의 자리가 말씀대로 실천하게 하소서!

시대적 배경은 BC 732년경,
수백년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해 왔던 아람왕국앗수르제국에게 멸망당한 직후의 시점입니다.
당시 앗수르제국은 중동지역 거의 전체를 정복합니다.

중국 최초 통일국가인 진나라보다 500년 앞서서 앗수르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일통하는 거대한 제국을 이루어 냅니다.

이제 남유다를 둘러싼 고대 중동지역은 앗수르라는 거대한 단일 국가의 영향력 하에 놓이게 됩니다.
지난 수백년간 남유다가 경험해왔던 주변 세계가 모조리 부서지고 국가적 생존을 위한 전혀 새로운 환경이 도래한 것입니다.

모압, 암몬, 시돈, 블레셋, 그리고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람 등, 지난 수백년 동안 국경을 맞대고 숱한 전쟁의 역사를 써내려갔던 이웃 왕국들이 순식간에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당한 사건은 남유다에게 대단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이 중대한 시기에 남유다는 사악한 아달랴 이후로 요아스 – 아마샤 – 웃시야 – 요담으로 이어지는 130여년간의 선한왕들이 펼쳤던 선정의 시대가 끝나고 아하스라는 최악의 왕이 등장합니다.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는 앗수르 제국의 파괴적인 남하가 시작될 무렵이었습니다.
가나안 인근 국가들은 아람왕국과 북이스라엘이 중심이 되어 반 앗수르 연맹을 결성합니다.

그러나 아하스왕은 반앗수르 연맹에 동참하지 않습니다.
이사야서 7장에 보면 아람과 북이스라엘은 아하스 왕을 폐하고 다브엘의 아들로 새로운 남유다의 왕을 세워 반앗수르 연맹에 동참시키려고 하였고 남유다를 굴복시키기 위해서 남유다를 침략합니다.

그런데 남유다가 아람왕국에게 모질게 당했던 이유는 앞서 설명드린 당시 국제정세에 대한 분석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과 병행기록인 역대하 28장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하스는...” “바알들의 우상을 부어 만들고,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분향하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그의 자녀들을 불사르고, 또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니라”

남유다의 왕들 중에서 하나님 앞에서 가장 막나간 왕이라 해도 무방할만한 기록입니다.

“그러므로, 아하스가 이렇게 패역했기 때문에,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아람 왕의 손에 넘기시매 그들이 쳐서 심히 많은 무리를 사로잡아 다메섹으로 갔으며 또 이스라엘 왕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쳐서 크게 살육하였으니”

성경은 당시의 긴박했던 국제정세로 인해 아람이 침략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하스의 패역을 돌이키시기 위한 도구로 하나님께서 당시의 국제정세와 아람왕국을 사용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하스 왕은 하나님에게로 돌이키지 않고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보다 더 강력해보이는 신을 찾음으로 자신의 실패를 극복하려 했습니다.

열왕기와 역대기 그리고 이사야서에 나타난 아하스 왕의 행적을 따라가보면 그는 오히려 종교심, 경건심이 아주 강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 하나님만 가지고는 자신과 유다민족 앞에 펼쳐지고 있는 이 험난한 국제정세를 헤쳐나갈 수 없다고 여긴 것 같습니다. 아하스는 즉위하자마자 이방세계에서 영험하다고 이름난 온갖 우상들을 이스라엘에 들여옵니다.

심지어 자녀들을 불에 태워 우상에게 바치는 끔찍한 인신공양제사까지 드리는데 이는 종교적경건심이 지극한 민족들 가운데서나 나타나는 극단적인 제사방법이었습니다.

역대하 28장에 보면 “이 아하스 왕이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여 자기를 친 다메섹 신들(다메섹은 아람의 수도였습니다)에게 제사하여 이르되 아람 왕들의 신들이 그들을 도왔으니 나도 그 신에게 제사하여 나를 돕게 하리라 하였으나 그 신이 아하스와 온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였더라”.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대한 불안감이 아하스를 자극했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전에 경험해본 적 없었던 초강대국 앗수르가 등장하였고, 앗수르의 위협에 아람은 국가의 생존을 걸고 남유다를 반앗수르 동맹전선에 끌어들이기 위해서 핍박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자신을 돌아보고 겸비하여 하나님 앞에 엎드렸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하스 왕은 오히려 남유다를 궁지로 몰아갔던 막강했던 아람왕국이 섬기던 신들이라면 이 위기의 정국에서 나도 건져낼 것이라고 엉뚱한 생각을 하기에 이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아하스는 앗수르에게 정복당한 아람왕국의 수도 다메섹을 방문하면서 그 곳에 있는 아람의 신전을 본떠서 예루살렘 성전을 리모델링합니다.

아하스 당시에 예루살렘 성전은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당시와 비교할 때 이미 그 구조와 웅장함에서 크게 퇴색되어 있었습니다. 지난 200여년 동안 예루살렘 성전은 애굽이나 블레셋, 아라비아, 북이스라엘 등의 주변국들에게 성전자체가 노략질을 당했던 적도 있었으며 아달랴 시대에는 바알을 숭배하는 장소도 성전 안에 있었습니다.

이런 정황들을 감안해볼 때 아람신전을 모방하여 예루살렘성전의 리모델링을 명령하면서 아하스 왕 자신은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예배 방식을 세련되게 업그레이드 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여호와와 더불어 강력한 아람의 신을 함께 섬길 수 있는 효율적인 예배방식을 만들어냈다고 뿌듯해 했을 것입니다.

아하스의 강렬한 종교심에 관하여는 이사야 7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침략으로 인해 두려워 떨고 있는 아하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이사야 선지자가 찾아갑니다.

10절에서 12절을 살펴보면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하나님께서는 아하스 왕에게 아람과 북이스라엘은 곧 멸망할 것이니 걱정 말고 이스라엘을 구원해줄 징조를 하나님께 구하라고 명령 하십니다.

그런데 아하스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합니다.
그런데 거부하는 이유가 제법 경건해 보입니다.
내 주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라면 그것이 구원의 징조라 할지라도 구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라면 국가의 존망을 위협하는 외적들로부터의 구원도 구하지 않겠다는 어처구니없을 정도의 경건함을 보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같아 보이는, 어떻게 보면 절대자 앞에선 극도의 겸양으로 비췰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를 사람과 하나님 모두를 괴롭히는 큰~ 일이라고 단호하게 책망하십니다.

13절, “이사야가 이르되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면 하라고 하신대로만 해야합니다.

구하라고 하셨으면 구하고 멈추라고 하셨으면 멈추는 것이 경건이지 자신의 얕은 도덕적 잣대 따위를 하나님 앞에 들이대는 것은, 하나님을 괴롭히는 일이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가르치려는 무서운 교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 앞에 내 생각이라곤 없는 사람처럼 따르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순종의 제사인 것입니다.

아하스 왕은 초월적인 그 어떤 존재에 대한 경외심이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류의 경외심은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으로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기도취적인 종교심에 불과합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페르 나무로 방주를 지으라고 하셨는데 고페르 나무보다 더 귀한 백향목으로 방주를 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값비싼 마감재로 교회를 지어놓고 경건이라 생각하는 사람, 그리스도 안의 자유함이 아닌 자신의 수행과 고행을 통해 구원을 찾는 사람, 하나님께서 일하라고 세워두신 그 자리가 아닌, 자신이 서고 싶은 자리에 서려고 애쓰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모두 아하스의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방식이 아닌 자신의 방식으로 하나님께 경외심을 표현하려는 형식들은 모두 다 하나님을 괴롭히는 일이 됩니다. 하나님을 괴롭히는 이 마음은 결국은 사람도 괴롭게 합니다.

아하스처럼 내 방식의 경건함을 추구할 때 예배의 본질인 하나님은 사라지고 결국에는 자녀들을 헛된 우상 앞에서 불에 사르는 어처구니없는 거짓 경건의 참상에까지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아하스에게 하나님께서는 엄청난 사랑의 증거를 보여주십니다.
자신의 종교심에 도취되어서 하나님 앞에서 도대체 무슨 망령을 부리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아하스에게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향하신 구원의 증거를 친히 드러내십니다. 이사야서 7장 14절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예수님의 수태를 예고하는 이 예언은, 바로 참담한 아하스의 죄악을 꾸짖으신 직후 선포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의 마음이셨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인간이 잊으면 하나님께서 기억하십니다.
인간이 망가뜨리면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예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그런 사랑을 동일하게 베풀어주셨던 하나님이심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온라인 예배라는 2천년 기독교 역사가 경험해본 적 없는 새로운 장르의 예배방식에 많은 사람들이 우려를 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주인께서 알아서 챙기십니다.
앞으로 달라질 것으로 예측되는 예배환경들에 대해 우려하는 대신에 이 새로운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시대에 알려주시고자 하시는 교훈이 어디에 있는지에 찾고 기도하는데 집중한다면 지난시간 우리가 본질 아닌 것, 하나님 아닌 것에게 빼앗겨 왔던 잘못된 형식들과 왜곡됐던 마음 자세들을 찾아내어서 예배의 본질 되신 여호와 하나님 자체를 더욱 정결하게 섬길 수 있는 예배가 어떤 것인지 하나님께서 친히 보여 주실 줄 믿습니다.

아하스의 죄악의 면전에서, 아하스와 다윗 왕가를 넘어 인류 전체를 향해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궁극의 사랑의 약속은 오늘,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예수님이심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예배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서는 언제 어디에서라도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약속하셨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는 자리라면 그 곳이 어디라도 거룩한 예배의 자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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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의 꼬리는 항상 머리 뒤에 붙어 머리가 가는 대로 따라다니게 마련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꼬리가 화가 나서 머리에게 불만을 터뜨렸다.
"어째서 나는 항상 네 꽁무니만 무조건 따라다녀만 하고 나는 항상 네 마음대로 나를 끌고 다닐 수 있는 거지? 이건 공평하지 못한 일이야. 나도 붕명히 뱀의 한 부분인데도 항상 노예처럼 네게 달라붙어 끌려 다니기만 해야 된다니 이건 너무 부당해."

그러자 머리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바보같이? 너에게는 앞을 볼 수 있는 눈도 없고, 위험을 알아차릴 귀도 없고, 행동을 결정할 두뇌도 없잖니, 나는 결코 나 자신만을 위해 그렇게 하는게 아니라 너를 생각해서 끌고 다니는 거야. 알겠니?"

꼬리가 큰 소리로 비웃으며 말했다.
"그런 말은 지겹도록 들어 왔어.폭군이나 독재자들도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위하여 일한다는 구실로, 제 마음대로 하고 있는 거야."
이렇게 응수하자 머리는 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정 그렇다면 네가 한번 내가 하는 일을 맡아 볼래."

그러자 꼬리는 매우 좋아하며, 신이 나서 앞에 나서서 먼저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하여 뱀은 곧 도랑으로 떨어졌고, 머리가 천신만고 끝에 뱀은 간신히 도랑에서 기어 올라올 수 있었다.

또 얼마를 기어다니다가 꼬리는 그만 가시투성이인 덤불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러나 꼬리가 가시덤불을 빠져나오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가시에 점점 더 찔려서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이번에도 뱀은 머리의 도움으로 상처 투성이가 되어 간신히 가시덤불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또다시 꼬리가 앞장서서 나가다가, 이번에는 불길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몸이 점점 뜨거워지고 갑자기 앞이 캄캄해졌다. 뱀은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다급해진 머리가 필사적으로 탈출하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몸은 불타고, 머리도 함께 죽어 버렸다.

머리는 결국 맹목적인 꼬리에 의해서 희생되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지도자를 선택할 때에는 항상 머리와 같은 자를 선택해야지 꼬리와 같은 자를 선택해서는 안된다.

 

셈의 아들 앗수르(2)

인간의 역사는 늘 권력과 생명이 무한할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진행되어 왔다.
그만큼 인간은 교만하면서도 어리석다.
유럽 최고의 신, 아테네의 제우스 신전 터를 가보면 정말 앙상한 폐허만 남아 인간의 유한함과 허무함을 암묵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플루타크 영웅전은 "법과 정의는 제우스 신과 나란히 앉아 있다. 권력을 가진 이가 하는 모든 일이 곧 그대로 법이고 정의일 수 있다."고 했다.

오늘날 소위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 휘두르는 "마초"형 지도자들이 하는 행태가 아닌가.
앗수르의 흥망이 그랬다.
앗수르는 강력한 권력을 바탕으로 잔인하고 교만하며 문화와 문명과 종교적 우상이 그득한 영원히 만세를 누릴 것 같은 자신만만한 사회였다.
그러나 제우스 신전처럼 앗수르도 석조 유물만 남기고 형해화(形骸化) 되어 버렸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앗수르와 대면한 이스라엘

성경은 먼저 아브라함의 자녀 이스마엘의 후손들이 앗수르 지역까지 나아가 아브라함의 다른 자손들과 적대감을 가지고 살았다고 말한다(창 25:18). 디글랏-빌레셀 1세(Tiglath-Pileser 1, 주전 1115-1077) 시대 지중해의 시돈과 비브로스, 아르밧까지 영향력을 넓히고 조공을 받던 앗수르는 아람의 강한 저항과 내부 문제로 잠시 주춤한다.

주전 1100년과 900년 사이에 일어난 앗수르, 바벨론, 엘람의 동시 권력 쇠퇴에 따른 중동 지역 권력의 힘의 균형 현상은 절묘하게도 다윗과 솔로몬 치하의 이스라엘 민족의 융성기를 가져왔다.

이후 앗수르 제국이 본격적으로 성경에 등장하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남 왕국 유다와 북 왕국 이스라엘로 갈라진 시대였다. 이 분열도 결국 원로들의 충고를 조롱하던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의 교만 때문이었다.

아람왕 하사엘이 가드를 점령한 후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오자 요아스는 선왕들과 자기가 하나님께 바쳤던 예물과 금을 몽땅 털어 하사엘 왕에게 예물로 보냈다. 성경은 하사엘이 자기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에서 물러났다고 기록하고 있다(왕하 12:17-18).

하지만 요아스가 예물로 구원 받은 게 아니었다.
오히려 요아스가 인간적 생각으로 하나님께 바친 예물을 함부로 자기 목숨 보전을 위해 아람왕에게 바친 것은 큰 죄악이었다.
역사는 앗수르의 아나드니나리 3세(주전 810-782)가 주전 804년 다메섹의 하사엘을 공격함으로 이스라엘이 구원 받았음을 알려준다. 당시 아나드니나리를 섭정한 삼무라마트(Sammuramat)는 훗날 그리스 전설에 아름답고 현명한 앗수르 여왕으로 알려진 세미라미스(Semiramis)였다.

북이스라엘의 16대 왕 므나헴은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 3세(주전 745-727)에게 은 34톤을 주고 그의 도움을 받아 자기 권력을 견고히 하려 했던 사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왕하 15: 19).

불(Pul)이라고도 불린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은 아나드니나리 3세의 아들이었다. 앗수르의 통치자 불은 우상 신들을 섬기던 므낫세 동쪽 반지파들인 르우벤, 갓, 므낫세 반지파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가 할리, 하복, 하라 그리고 고산 강가에 분산 수용하였다.

이 사건은 이 세 지파가 오늘까지 이스라엘 공동체와 영원히 멀어지고 결별하는 슬픈 역사적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므나헴은 자기 권력 강화를 위해 앗수르를 끌어들였으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앗수르의 불왕은 북아람을 점령하여 한 도(道)로 편입하였으며 유대인들도 독립 국가가 아닌 앗수르어로 "울루부"(Ullubu)라 부른 지역에 기거하고 있는 포로로 취급할 뿐이었다. 그리고 불의 뒤를 이은 살만에셀 5세(주전 727-722)는 호세아왕이 애굽을 의지하며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치지 않은 일을 핑계 삼아(왕하 17:4) 사마리아를 포위, 공격하여 결국 함락시켜버렸다.

사마리아 성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프라테스 강 상류 지역과 메디아로 끌려갔다(왕하 17:6). 이때 함께 사마리아를 점령한 사르곤이 살만에셀 왕을 이어 왕위에 올라 앗수르의 마지막 왕조를 창건하게 된다. 주전 722년 북이스라엘은 이렇게 앗수르의 두 왕에 의해 영원히 멸망당하고 말았다.

앗수르와 남왕국 유다

이때 남왕국 유다는 어땠을까? 풍전등화와 같았던 남 유다는 당시 히스기야의 치하에 있었다. 히스기야는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며 열강 제국들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히스기야는 눈물로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사르곤 2세의 뒤를 이은 아들 산헤립(주전 705-681)도 선왕들처럼 전쟁을 즐긴 왕이었다. 산헤립은 앗술을 거쳐 니느웨를 앗수르의 수도로 삼은 왕이기도 했다. 그는 바벨론, 갈대아, 엘람인들을 정복했을 뿐 아니라 므로닥 발라단이 앉았던 바벨론 왕의 자리에 자기 측근을 앉혔다.

므로닥 발라단("마르둑이 한 아들을 주었다"는 의미)이 히스기야에게 도움을 청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왕하 20:2-19). 산헤립은 주전 701년 아람으로 진격하여 시돈을 공략하고 아스글론을 거쳐 라기스를 정복한다(왕하 18:13,14). 그리고 남은 예루살렘을 집요하게 공격하기 시작했다(왕하 18- 19장; 대하 32장; 사 36-37장). 히스기야는 새장의 새처럼 갇혀버렸으며 히스기야는 앗수르에 공물을 바치지 않을 수 없었다(왕하 18:14-16). 인간의 권세란 얼마나 허망한 것이던가.

약소국의 슬픔은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 시대에도 이어졌다. 므낫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산헤립의 아들 에살핫돈에게 조공을 바쳐야 했다. 그는 한때 앗수르의 영역 안에 있던 바벨론에 잡혀가는 수모를 당하기까지 했다(대하 33:11). 에살핫돈의 뒤를 이은 왕이 바로 역사상 유명한 앗수르바니팔(주전 669-633, 성경의 오스납발)이었다. 애굽으로 진격하여 테베를 약탈하고, 애굽 왕 바로 느고를 죽인 앗수르 왕이 바로 앗수르바니팔이었다.

앗수르 족의 종교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중심에 자리 잡은 앗수르는 지정학적으로 민족적·문화적·종교적 혼합의 성격을 가질 잠재적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앗수르와 바벨론의 잡신 문화가 별 차이가 없는 것도 이 같은 지정학적 위치에 기인한다.

수메르 문명으로부터 기인한 이곳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종교는 기본적으로 다원론적이었다. 판테온(Pantheon, 온갖 신들을 모신 만신전)이 발달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수메르의 판테온에는 3천 내지 4천여 신들이 있을 정도였다. 이 가운데 수메르의 바람의 신 '엔릴'(Enlil)과 바벨론의 말둑(마르둑, Marduk, 렘 50:2)과 앗수르의 앗술은 민족 신인 동시에 최고의 신들이었다. 엔릴은 수메르의 하늘의 신 '아누'와 땅의 신 '키' 사이에 태어난 '니풀의 신'이었고 벨(Bel, 사 46:1; 렘 50:2; 51:44)은 말둑의 다른 이름이었다.

고대 앗수르 지역까지 진출한 수메르인들은 '앗술'에 '엔릴'을 위한 지구랏을 건설할 만큼 이 지역은 고대부터 종교적, 문화적 소통이 활발하였다. 니느웨의 앗수르바니팔 도서관에서 발견된 주전 7세기 중엽 쓰여진 유명한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와 길가메쉬 서사시(Gilgamesh Epic)가 성경 창세기 기사나 대홍수 이야기와 유사하면서도 성경과는 상이하게 다른 다신론적 창조 신화인 것도 이 같은 지역적 특성과 문화적 배경을 반영한다. 유명한 월신(月神) '신'(sin)이나 전쟁과 사랑의 여신 '이쉬타르'(Ishitar), 지혜와 문필의 신 '나부'(Nabu) 등도 모두 앗수르 땅의 신들이었다.

유일신을 섬기던 이스라엘과 우상 잡신을 섬기던 앗수르는 같은 셈족임에도 불구하고 종교에 있어 이렇게 판이하게 갈라졌다.

앗수르 족의 미래

오늘날 셈의 아들로서의 앗수르와 그 후손들은 앗수르 제국과 그 백성들의 이름 속에만 남아있다(민 24: 22, 24; 호 14:3). 그들이 숭배하던 신(神)의 이름조차 '앗술'이었다. 앗수르 제국이 융성할 때 앗수르인들의 지식과 예술과 문명의 불꽃은 크게 타올랐다.

반면에 앗수르의 황제는 교만하고 잔인하였다(사 10:11-12). 하나님은 이런 앗수르 왕의 교만을 가만히 두고 방치하지 않았다. 하나님 앞에 인간의 자랑과 위세란 허망할 뿐이다(사 10: 16-19). 이제 과거의 제국들은 사라지고 오늘날 앗수르와 바벨론의 옛 땅인 이곳은 지금 주로 이라크의 땅이 되었다. 그리고 21세기 들어 그들의 유적은 이슬람국가(IS)로 인해 무참히 파괴되었다.

이라크는 독재자 후세인 통치 시절 그나마 절묘하게 종교적 균형이 이루어져 왔었다. 한때 후세인 시절 부통령이 기독교(시리아정교회)인이던 시절도 있었다. 후세인 시절 모술의 시리아 정교회 소속 기독교인은 전체 모술 인구의 25%에 달하였던 적도 있었다. 이라크 전쟁 결과 후세인의 철권 정치는 종언(終焉)을 고했으나 안타깝게도 이 지역은 기독교인들에 대한 핍박과 위협이 점증하는 땅으로 바뀌어버렸다.

악은 악을 불러올 뿐이다. 과거 앗수르 제국 시절 신들의 상과 조각이 넘쳐 나던 이 지역에 과연 참 하나님의 진리는 언제 뿌리를 내릴 수 있을까?

우리는 주전 759년 경 갈릴리 출신 선지자 요나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니느웨 성에 가 성의 멸망을 예고하며 회개를 촉구한 사실을 알고 있다. 놀랍게도 니느웨 백성들과 왕은 함께 회개하였다. 성경에 나타난 집단적 회심의 놀라운 보기였다. 문제는 지속성이다. 니느웨 성 백성들의 회심은 오래 가지 못했다. 앗수르는 앗수르바니팔 왕과 그의 아들 앗수르에틸일라니의 치세 때 결국 멸망당하고 말았다. 선 줄로 알 때 넘어지는 게 인간이다.

나훔 선지자의 예언대로였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니느웨(앗수르)를 향한 요나의 외침과 니느웨 백성들의 대응은 작금의 우리들에게도 많은 교훈을 남기고 있다.

복음은 움직인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요나처럼 복음에 반응하고 행동할 것을 지금도 요구하신다. 이런 가운데 유엔 평화유지군 자격으로 대한민국 자이툰 부대가 모술에 진출한 일은 이라크와 쿠르드(야벳의 아들 마대 후손들)인들에게 세상에 대한 원망만이 아닌 사랑과 소망의 틈새도 있음을 알려주었다. 이 앗수르 땅의 제 2의 요나는 누구일까? 21세기의 요나여! 21 세기의 니느웨여! 함께 일어나라! 지금은 마치 무슬림 국가처럼 변해버린 이곳에 복음의 빛이 다시 스며들기를 기도한다.





























































































































































































































































































































































































































































































































































































































































































































































































































































































































































































































































































































































































































































































































































































































































































쿠쉬너 소령은 미국인 군의관이었다. 
그의 포로생활 회고담은  절망과 죽음의 관계를 보여준다.
 
그는 1967년 월맹군의 포로가 되었다.
지독한 학대와 영양실조로 체중은 절반으로 줄었다.

그가 수용소에 있는 동안 27명의 미군 중 10명이 죽어갔다.
죽은 병사중 로버트라는 하사관이 있었다.
그는 해병특공대 출신으로 억세고 이지적인 사람이었다.
소령이 로버트 하사를 처음 보았을때 비사상태의 다른 포로들에 비해 그는 유난히도 생기가 넘쳐흘렀다.
체중은 40킬로 이라로 떨어져 수수깡처럼 말라있었지만 눈은 빛나고 중노동을 잘 곁뎌냈다.
그것은 자유에 대한 희망때문이었다.

교활한 월맹군측은 포로들을 마음대로 부리기 위하여 말 잘 듣는 미군 포로 몇명을 석방시켜 주었다.
그리고 다음번 석방자는 로버트가 될 것이라고 했다.
석방에 대한 의망이 로버트 하사로 하여금 모든 고통을 극복할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 희망은 육체적,생물학적 한계마저 극복하게 하였다.
그러나 약속한 6개월이 되었지만 월맹군측은 그를 석방시켜 주지 않았다.
1개월을 더 기다렸으나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다.
게다가 월맹군 장교의 태도는 더욱 냉담해졌다.
"다 틀렸구나!" 생각한 그는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그리고 얼마후 군의관에 품에 안겨 죽었다.
"어머님, 아버님. 정말로 사랑합니다. 그리고 바바라 당신을 용서하오."
이것이 병사의 마지막 남긴 말이었다.

로버트는 질병때문이 아니고 절망때문에 죽었다고 군의관은 말하고 있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으며 앞으로도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믿게 되었을때 그는 마침내 죽고 말았다."고 쿠쉬너 소령은 회고하고 있다.


빅터 플랭클은 유명한 유대인 정신과 의사이다.

나치스에 의해 체포되어 죽음의 수용소인 '아우슈비츠'에 갇히게 되었다.
중노동과 영양실조로 사람들은 죽어갔다.
몸에 상처가 있거나 노동력이 없어진 유대인들은 모두 가스실로 보내졌다.
이가 득실거리고 이로인한 발진티푸스로 또많은 유대인들이 죽어갔다.
자살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끝까지 끈질기게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다.

몸이 건강해서가 아니고 살아남아야할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 중 어떤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개처럼 살았고 어떤 사람들은 끝까지 인간의 존업성을 지키며 살았다.
공통적인 것은 살고자하는 의지를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수용된 이들 유대인들 가운데 닥터 라는외과 외과의사가 있었다.
하루는 그가 밝은 얼굴로 프랭클 박사를 찾아와 간밤에 꿈을 꾸었다고 했다.
너무나 생생한 꿈이었다.
추수감사절에 연합군이 진격해와 석방되는 꿈이었다.
이 꿈을 꾼 후로 그는 마치 충실한 식사를 한 사람처럼 원기왕성하고 명랑해졌다.
수개월이 지나고 추수감사절이 되었으나 연합군의 소식은 감감했다.
어느날 밤 그 닥터는 프랭클 박사에게 "다 틀린거야... 헛된 꿈이었어." 라고 힘없이 말했다.
다음날부터 그는 심하게 열이 오르더니 수일만에 죽고 말았다.
자유를 향한 애타는 그리움과 희망은 닥터로 하여금 죽음의 수용소에서도 원기왕성한 삶을 살게 해 주었지만 기다렸던 그날이 훨씬 뒤로 물러가 버리자 그를 유지시켜 주었던 정신적 기둥이 무너져 버렸다.
이처럼 절망감은 인간을 병들거나 죽게 한다.
정신의학자들은 이에 대한 많은 근거를 갖고 있다.

불의를 행하는 자가 우리를 짖밟고 개가를 부를때 절망감에 빠질 수가 있다.
그러나 성경은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며...저희는 풀과 같이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이이로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시편 37:4)

유한한 우리에게 하나님만이 변치않은 소망을 주신다.
불치의 병이라는 선고를 받았을때 인간은 절망하며 이 절망감 때문에 병을 극복할 힘을 잃게 된다.
그러나 어떤 절망적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는 주안에서 소망을 발견할 수 있다.
복음은 우주 최대의 희망이다.




죽음에 관한 명언

죽은 자는 태풍 앞에서 벌벌 떨지만, 살아있는 자는 그 태풍과 더불어 함께 걷는다. 
- 칼릴 지브란 죽을 때에 죽지 않도록 죽기 전에 죽어두어라. 그렇지 않으면 정말 죽어버린다.
- 엥겔스 죽음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굳이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에 우리를 보내준 존재의 의지에 순순히 따라야만 합니다.
- 톨스토이 죽음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일어날 수 없다.
- 월트 휘트먼 죽음에는 내일이 없다는 하나의 두려움이 있다.
- 에릭 호퍼 죽음에 대한 혐오감은 우리들이 인생을 헛되이 보냈다고 생각하는 마음과 비례하는 것이다.
- 윌리암 해즐릿 죽음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죽음 전에 겪게 되는 죽음에 대한 공포, 그것이다.
- 바키리데스 죽음으로써 우리의 영혼은 자유로워진다.
- 헤라클레이토스 죽음은 단지 한순간의 고통이지만, 삶은 기나긴 고통이다.
- 버나드 조셉 소린 죽음은 때로는 태산보다 무겁고 때로는 새털보다 가볍다.
- 사마천 죽음은 밤의 취침, 아침의 기상이라는 과정과 본질적인 차이가 없는 커다란 과정이다.
- 힐티 죽음은 사람을 슬프게 한다. 삶의 3분의 1을 잠으로 보내면서도.
- 바이런 죽음은 시간의 적이다.
- 도교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이해하는 것만이 유한한 인생에 있어서 기쁨의 근원이 된다. 죽음은 연금 후에 맞게 되는 단계이다. 그것은 어떤 돈도 지급받지 못하는 영원한 은퇴이다.
- 쟝 지로도












































열왕기상 / 03. 04. 2022(Fri) - 03. 29. 2022(Tue)


♦ 3월 29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열왕기상 22:1∼53
♦ 묵상을 위한 주제 : 거짓말하는 영(22절)
♦ 성구 :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가로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 하는 영(靈)이 되어 그 모든 선지자(先知者)의 입에 있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꾀이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거짓말하는 영(a lying spirit)”이란 ‘거짓말을 하게 하는 영’을 말합니다.

정의가 무너진 사회에서는 거짓말을 잘 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것처럼 보여 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건전한 사회는 진실만이 인정을 받습니다.

왕의 권력에 붙잡혀 이득을 얻으려는 사람들 더구나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선지자들마저 왕의 비위를 맞추려는 예언을 하는 세상은 하나님의 징계만 남아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성공적인 삶을 원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원하는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요?

그 이유는 이미 사람들의 마음이 거짓말하는 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생활이란 내 안에 있는 거짓 것을 찾아내어 진실한 것으로 교환하는 생활이라고 하겠습니다.

거짓 것을 진실한 것으로 교환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잘못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풍요로운 환경에서도 감사할 줄 모릅니다.

그러나 마음의 태도가 올바른 사람은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는 없는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하나님만을 인정합니다.
때로는 어려운 환경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때로는 좋은 환경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에서 나타난 것이므로 감사함으로 받아드릴 수 있습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좋으신 주님으로 찬송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며 이 기쁨을 이웃에게 전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거짓말하는 영은 지금 너의 환경은 감사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고 합니다.

네가 감사하는 것은 위선이라고 미혹합니다.
감사하는 것은 지금만이 아니라 장래에도 복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속담에 “콩 심은 곳에 콩이 나고, 팥을 심은 곳에 팥이 난다.”는 말처럼 내가 감사를 심으면 반드시 감사할 것이 드러나게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창조적 삶을 즐기지만 원망과 불평은 저주와 파멸의 길로 이끌어 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감사하며 찬송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지금까지 지내 온 것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우정(友情)

사형수 "피시아스"와 그의 친구 "다몬"의 이야기

기원전 4세기경,
그리스의 피시아스라는 젊은이가
교수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효자였던 그는 집에 돌아가 연로하신 부모님께 마지막 인사를 하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하지만 왕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길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피시아스에게 작별 인사를 허락할 경우 다른 사형수들에게도 공평하게 대해줘야 합니다.
그리고 만일 다른 사형수들도 부모님과 작별인사를 하겠다고 집에 다녀오겠다고 했다가 멀리 도망간다면 국법과 질서가 흔들릴 수도 있었습니다.

왕이 고심하고 있을 때 피시아스의 친구 다몬이 보증을 서겠다면서 나섰습니다.

"폐하, 제가 그의 귀환을 보증합니다. 그를 보내주십시오."

“다몬아, 만일 피시아스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찌하겠느냐?”

"어쩔 수 없죠, 그렇다면 친구를 잘못 사귄 죄로 제가 대신 교수형을 받겠습니다."

"너는 피스아스를 믿느냐?"

"폐하, 그는 제 친구입니다."

왕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습니다.

“피시아스는 돌아오면 죽을 운명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돌아올 것 같은가? 만약 돌아오려 해도 그의 부모가 보내주지 않겠지. 너는 지금 만용을 부리고 있다."

"저는 피시아스의 친구가 되길 간절히 원했습니다. 제 목숨을 걸고 부탁드리오니 부디 허락해주십시오 폐하"

왕은 어쩔 수 없이 허락했습니다.
다몬은 기쁜 마음으로 피시아스를 대신해 감옥에 갇혔습니다.
교수형을 집행하는 날이 밝았습니다.
그러나 피시아스는 돌아오지 않았고 사람들은 바보 같은 다몬이 죽게 됐다며 비웃었습니다.
정오가 가까워졌습니다.
다몬이 교수대로 끌려 나왔습니다.
그의 목에 밧줄이 걸리자 다몬의 친척들이 울부짖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우정을 저버린 피시아스를 욕하며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그러자 목에 밧줄을 건 다몬이 눈을 부릅뜨고 화를 냈습니다.

“나의 친구 피시아스를 욕하지 마라. 당신들이 내 친구를 어찌 알겠는가.”

죽음을 앞둔 다몬이 의연하게 말하자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집행관이 고개를 돌려 왕을 바라보았습니다.
왕은 주먹을 쥐었다가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내렸습니다.
집행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때 멀리서 누군가가 말을 재촉하여 달려오며 고함을 쳤습니다.
피시아스였습니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다가와 말했습니다.

“제가 돌아왔습니다. 이제 다몬을 풀어주십시오. 사형수는 접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고 작별을 고했습니다.
피시아스가 말했습니다.

“다몬, 나의 소중한 친구여, 저 세상에 가서도 자네를 잊지 않겠네.”

“피시아스, 자네가 먼저 가는 것뿐일세. 다음 세상에서 다시 만나도 우리는 틀림없이 친구가 될 거야.”

두사람의 우정을 비웃었던 사람들 사이에서 탄식이 흘러나왔습니다.
다몬과 피시아스는 영원한 작별을 눈앞에 두고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담담하게 서로를 위로할 뿐이었습니다.

이들을 지켜보던 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큰 소리를 외쳤습니다.

"피시아스의 죄를 사면해 주노라!"

왕은 그 같은 명령을 내린 뒤 나직하게 혼잣말을 했습니다.
바로 곁에 서있던 시종만이 그 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내 모든 것을 다 주더라도 이런 친구를 한번 사귀어보고 싶구나!"

아리스토텔레스
친구란 누구인가?
두 개의 몸에 깃든 한 개의 영혼이다.

영혼이 같은 것이 친구라고 하였다.
서로의 생각과 행동과 삶이 같은 것이다.

♦ 3월 24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열왕기상 18:1∼46
♦ 묵상을 위한 주제 : 어느 때까지(21절)
♦ 성구 : 엘리야가 모든 백성(百姓)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萬一)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萬一)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百姓)이 말 한마디도 대답(對答)하지 아니하는지라.

하나님의 사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이여 그 말씀대로 순종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100% 순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의 생각과 하나님의 말씀이 일치하지 않을 때는 속에서 거부 반응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나의 생각과 다른 것일지라도 그 말씀대로 순종했을 때 순탄한 길이 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런 일이 기다리고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순종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역경과 고난이 하나의 은혜의 창구가 되기 때문에 순종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했습니다.
본문에는 엘리야 이외에도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을 살펴보면서 오늘 묵상의 주제 “어느 때까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오바댜(Obadiah, 여호와의 종)

오바댜는 하나님 앞에서 악한 일들을 도모하는
아합 왕의 궁내 대신이었지만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경외했다는 것은 왕비 이세벨이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일 때에 위험을 무릅쓰고 100명의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몰래 보호했다는 사실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한 오바댜도 죽음 앞에서는 두려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둘째, 아합(Ahab, 부친의 형제)

아합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스라엘의 왕이었지만 권력과 여자에 취하여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에 열중했습니다. 왕이 잘못된 신앙의 길에서 방황하므로 백성들은 심각한 가뭄과 기근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셋째, 이스라엘 백성(the People of Israel)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들이었지만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서 결단하지 못하고 머뭇머뭇하는 신앙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넷째, 바알의 선지자들(the prophets of Baal)

바알의 선지자들은 아침부터 낮까지 제물로 바친 송아지를 바알신이 불로 태워줄 것을 간구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신들의 기도가 무산되자 저녁이 될 때까지 미친 듯이 큰 소리로 외치며 춤을 추며 그들의 규례에 따라 자신의 몸을 칼과 창으로 자해했건만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개의 돌을 취하여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합니다. 그리고 송아지 제물이 있는 제단에 흥건하게 물을 채운 후에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을 벌인 것은 결코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이중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누구이심을 깨닫게 하므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죽은 후 나흘이 지난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을 유대인들로 하여금 믿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요 11:42).

이제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하며, 무엇을 위해 살고 있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아직도 나를 드러내려는 욕망이 있었는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엘리야가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하나님께 간구하며 다시 쌓았듯이 그리고 악의 덩어리인 바알 선지자들을 단호하게 죽인 것처럼 우리 마음속에 감추어진 것들을 회개하며 악한 것을 끊어버리고 무너진 기도의 단을 쌓아야 하겠습니다.

나의 생명이 있을 동안에 믿음의 제단을 수축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모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어려운 일 당할 때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어느 때까지(시편 13:1-6)

  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2.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3.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4.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5.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6.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다윗은 하나님께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간구하고 있다.
하나님, 언제까지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겠나이까?
하나님의 도움이 절실할 때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십니까?
나의 이 고통 속에서 하나님은 왜 침묵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진정 ‘나를 영영히 잊으셨나이까?’라고 절규하고 있다.

우리 삶속에서도 하나님의 임재와 도우심이 절박할 때, 우리가 고통으로 신음할 때 하나님은 마치 우리 자신을 잊으신 분처럼 침묵으로 일관하실 때가 있다.
정말 우리 영혼이 사망의 잠을 잘까 두려운 순간까지 침묵하신다.
이런 상황에 이르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왜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 속에 즉각 개입하시지 않는 걸까?
하나님은 나의 상황을 알고 계시는 걸까?
이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다윗은 자신의 영혼 속에 맴도는 생각과 번민을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토설하고 있다.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나의 눈을 밝히소서!"
하나님은 고통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절실히 갈구하는 인생에게 어는 덧 찾아오셔서 근심. 걱정을 찬양으로 바꾸어 주신다.

사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고 계신다.
우리의 믿음이 정금 같은 신앙으로 잘 단련되어 성숙되기를 원하신다.
우리 속에 있는 모든 불순물을 제거하고 순수하게 하나님만을 붙잡고 살도록 처절한 상황에까지 이르게 하신다.
하나님의 침묵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메시지이다.

그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의지할 때 어느 덧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게 하신다. 그 크신 사랑 때문에 마침내 고통 속에 있던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만나고 그 사랑을 의지하고 마음에 구원의 기쁨을 회복하게 하신다.

고통의 연단은 내가 하나님을 깊이 체험할 축복의 기회임을 기억하자!
그 고통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크게 부르짖으므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이 되어야겠다.

이세벨(Jezebel) 정숙한, 고상한, 계집아이

열왕기상 16:31-33

느밧
의 아들 여로보암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 안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또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니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이스라엘의 사악한 왕비 : 이세벨

Ⅰ. 이세벨의 인적사항

 1. 이세벨의 뜻 : “고상한, 정숙한”
 2. 시돈 왕 엣바알의 딸
 3.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내
 4. 베니게 종족 출신

Ⅱ. 시대적 배경

북이스라엘이 베니게와의 조약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누리고, 다메섹에 있는 아람에 대항할 힘을 획득하고자 했던 시기(B.C. 874~853년경)에 아합 왕과 이세벨의 정략결혼으로 북이스라엘 내에는 바알 숭배가 만연하게 됨.

Ⅲ. 이세벨의 특징

이스라엘은 사울 - 다윗 - 솔로몬을 잇는 단일왕국시대로 이어지다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때 르호보암의 악정으로 인해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분열되게 됩니다.

남유다는 유다지파의 계보를 잇는 왕조가 되지만 북이스라엘은 10개의 지파가 연합을 형성하면서 다양한 왕조를 형성하게 됩니다.
북이스라엘의 초대왕 여로보암의 왕조가 시작되는데 그의 아들 나답 때에 바아사가 모반을 일으키고, 바아사의 아들 엘라 때에 시므리가 모반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이 모반은 7일천하가 되고 맙니다.
시므리의 모반소식을 듣고 당시 이스라엘 군대는 군대 지휘관이었던 오므리를 이스라엘 왕으로 추대하여 시므리의 모반을 평정하게 됩니다.
그때 또 다른 모반을 꾸며 디브니가 모반을 하나 오므리가 모든 모반을 평정하고 오므리 왕조를 세우게 됩니다.
이렇게 모반에 모반을 반복하면서 세운 왕조이다 보니 오므리는 강력한 중앙 집권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수도를 디르사에서 사마리아로 옮기게 됩니다.

사마리아 : 오므리가 세멜에게서 은 두달란트로 산을 사고 성읍을 건축한 후 세멜의 이름을 따서 사마리아라고 하였다.

엣바알 : 엣바알은 본래 바알신의 제사장이었다.
그는 히람 왕가의 펠레스 왕을 암살한 후 왕이 되었다.
엣바알은 바알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엣바알의 본래 이름은 이도발이었다.)


왕권을 견고히 하기는 했지만 오므리는 악정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오므리 밑에서 보고 자란 아들이 아합입니다.
아합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되자 더욱 악한 정치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합은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하고 결혼을 하게 됩니다.

장인(이세벨의 아버지)이 바알을 섬기는 제사장이었으니 바알을 섬기는 우두머리, 바알의 최고 선지자의 딸을 아내로 맞이 한 것이다. 그러니 이세벨이 어떤 여자였는지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세벨이 이스라엘의 왕후가 되어 북이스라엘 역사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여자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세벨은 과연 어떤 여자였을까요?

1. 바알숭배를 이스라엘에 만연하게 했던 여인

아합왕이 다스릴 당시에는 나라가 아직 안정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나라 전체가 모반을 거듭하면서 국력은 많이 약화되었고, 남쪽으로는 남유다가 버티고 있고, 북쪽으로는 아람이 진을 치고 있고, 북서쪽으로는 베니게가 동쪽에는 암몬이 진을 치고 있었기에 아합은 정략적인 결혼을 하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그래서 우선 베니게와 동맹을 위해 베니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맞이한 것이다.

이세벨을 아내로 맞이한 아합왕은 이세벨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했다. 그래서 이세벨과 결혼 할 때 바알을 섬겨 거기에 예배하고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에 바알의 신전을 건축해 주었던 것이다. 이에 이세벨은 바알신전에서 예배할 수 있도록 제단을 쌓게 하고, 아세라상을 만들게 했다. 그리고 모든 제사를 집례하고 바알 종교의 포교를 위해 바알 선지자와 아세라 선지자를 불러 들였다. 그 수가 무려 850명이나 되었다.

이세벨은 아합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은 여인이었다. 그래서 아합으로 하여금 자신의 요구를 다 들어주게한 여인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진짜 목표는 온 이스라엘을 바알을 숭배하는 나라로 물들이는 것이었다.

이세벨은 아합의 마음을 완전히 빼앗아 버리는 매력이 있었다. 이스라엘의 수장인 왕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니 이세벨은 이스라엘 전체를 쥐락 펴락하는 권세를 누리게 된 것이다.

적용

이세벨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우상의 딸과 다름이 없습니다. 이러한 것과 정략적인 계약을 맺는 다는 것은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이세벨을 이용하는 것 같지만 결국 이세벨에게 모든 마음을 빼앗겨서 국정을 파국으로 이끌고 나라를 망쳐버리게 됩니다.

우리도 악한 것들과는 타협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떤 위협이 있어도,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자는 평안을 누리고 회복되는 줄 믿어야 합니다.

2. 이세벨은 여호와의 신앙을 말살하는 정책

이세벨은 단순히 바알종교를 전하는 전도자에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이스라엘 모든 민족에 뿌리내리고 있는 여호와의 신앙을 제거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우선 적으로 선지자들을 숙청하는 일을 대대적으로 거행했다.

열왕기상18:4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백 명을 가지고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더라.

이세벨의 권세는 아합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아니 아합의 모든 마음을 사로 잡아 수렴청정(垂簾聽政)하듯 자신의 권력을 마음껏 휘두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녀는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박해했고, 심지어 색출하여 죽이는 일에 앞자서게 되었다. 이에 당시에 왕궁을 맡은 궁내대신 오바댜는 여호와의 선지자를 몰래 굴에 숨겨 100여명을 돌본 적이 있었다. 어느 누구도 이세벨의 막강한 세력앞에 반기를 들 수 없었던 것이다.

이세벨은 사악한 여인의 대명사였던 것이다. 아합의 눈과, 귀를 다 막은 여인이다. 아합은 이세벨의 꼭두각시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적용

악이 들어어면 그 악이 얼마나 무섭게 번식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세벨은 악의 화신이었습니다. 암세포같은 존재였습니다. 모든 건강한 세포를 공격하여 죽이기를 합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을 멀리하게 하는 요인이 무엇인지 찾아 그것을 제거해야 합니다.

3. 이세벨은 사악한 변신의 귀재

이세벨은 변신의 귀재였다. 자신의 남편 아합에게는 아주 연약한 여인으로 행세했다. 그러나 아합이 없는 곳에서는 자신이 숨겨온 발톱을 드러내고 천하를 호령했다.

● 엘리야을 겁박하는 이세벨.....

아합의 악정을 보고 한 번은 엘리야 선지자가 아합에게 찾아가 말합니다.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정말 이스라엘 땅에 비와 이슬이 그쳐 버렸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경고의 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합과 이세벨은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가뭄이 시작 된 지 3년 째 되는 해에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를 갈멜산으로 불로 대결을 요청합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엘리야의 갈멜산 대첩이 시작됩니다. 물론 무기없는 싸움이지요.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제사장들과 엘리야와의 대결입니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대결이 아니라 신의 전쟁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 대결에서 엘리야가 이깁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바알선지자를 다 잡아 기손시내로 끌고 가서 다 죽여 버립니다. 그리고 나자 이스라엘에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이세벨은 크게 노합니다. 그래서 엘리야을 협박합니다.

열왕기상19:2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그렇습니다. 이세벨은 당장 엘리야 선지자를 잡아 죽일 듯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 당시 이세벨의 분기와 혈기가 짐작이 가는 내용입니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엘리야를 잡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전역을 이 잡듯이 뒤지겠다는 것입니다. 국가적 계엄령을 선포하고 보는 비상망을 총동원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세벨은 허풍을 떠는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한다면 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녀의 모습을 철저히 보여 준 것입니다. 이세벨의 이 선전포고가 얼마나 떨리는 일이고 무서운 일이었으면 금방 놀라운 기적을 행사한 엘리야까지 간담이 서늘해서 도망을 쳤겠습니까? 그래서 엘리야는 북이스라엘을 빠져나와 브엘세바까지 도망을 친 것입니다.

이렇듯 이세벨의 권세는 나는 새도 떨어뜨리고 막강한 권세였습니다.

● 나봇의 포도원을 뺏은 이세벨...

한 번은 아합이 거주 하는 왕궁 근처에 나봇이라는 사람을 농사를 짓는 포도원이 있었다. 아합은 그 포도원이 탐이 나서 나봇에게 그 포도원을 팔라고 한다. 그러나 나봇이 그 포도원을 팔지 않자 아합은 속이 상해 단식하고 침상에 들어가 고민을 합니다. 이 모습을 지켜 보던 이세벨이 아합을 위로합니다.

왕이 지금 이스라엘 나랄르 다스리시나이까 일어나 식사를 하시고 마음을 즐겁게 하소서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왕께 드리리이다.

이렇게 왕의 마음을 살살 녹입니다. 얼마나 요염합니까? 걱정하지 말고 다 자기에게 맡기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다 알아서 해결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왕의 이름으로 편지를 쓰고 인을 치고 봉해서 그 성읍에 있는 장로들과 귀족들에게 보냅니다. 그 내용은 그 성읍에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들 가운데 높이 앉힌 후에 불량자 두 사람을 매수하여 그들로 하여금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고 거짓증언을 하게 한 후에 나봇을 돌러 쳐 죽이라고 합니다. 이 얼마나 사악한 행위입니까? 그러자 모든 장로들과 귀족들이 이세벨의 명대로 합니다. 그러자 이세벨은 나봇의 포도원을 아합에게 진상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세벨의 악의 극치를 봅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 곧 법입니다. 안되는 것이 없습니다. 자신이 곧 걸어다니는 법이고 신입니다. 그러니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두려움에 떨었겠습니까? 상상을 초월할 일입니다.

이세벨은 아합의 눈만 가리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합은 심약한 존재입니다. 이세벨의 꼭두각시 역할만 했던 왕입니다. 참으로 비참한 노릇입니다.

이렇게 이세벨은 사악한 변신의 귀재였습니다. 남편에게는 애교 많고, 연약한 여인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백성을 위하고 왕을 위하는 척 합니다. 그러나 온 이스라엘 전체를 병들게 만들고 망쳐버리는 여인이었습니다.

적용

이세벨은 사악한 여인이 대명사였습니다. 그녀는 음녀였습니다. 그녀는 요녀였습니다. 괴녀였습니다. 나라의 안정을 위해서 정략적으로 잡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지를 모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무엇과 타협하고, 무엇과 계약을 맺겠습니까? 하나님을 등지고 하나님을 부인하고 내 마음속에 이세벨을 품는 다면 순간은 좋아보이나 그것이 곧 우리를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3. 이세벨의 비참한 최후

이세벨의 사악한 행위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 경고하게 합니다.

[왕상21:23]이세벨에게 대하여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개들이 이스르엘 성읍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지라

네 결국 이스라엘에 또 다른 모반이 생기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이 세운 예후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예후가 모반을 하여 아합의 아들을 제거하고 온 이스라엘을 악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한 이세벨을 잡으러 옵니다. 예후가 온 것을 본 이세벨은 화장을 하고 눈을 그리고 머리를 꾸미고 죽을 준비를 합니다.

아주 악한 여인은 끝까지 자존심을 지키려고 했나 봅니다. 그러자 예후가 내 편이 될 자가 누구냐고 소리치자 두 명의 내시가 창으로 내다봅니다. 예후는 이세벨을 내려 던지라고 하자 두 내시가 이세벨을 창 밖으로 내어 던집니다. 그러자 그 피가 담과 말에 튀었습니다. 예후가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난 이후에 저주받은 여인을 장사하려고 보니 이세벨의 시체를 찾을 길이 없고, 오직 그녀의 두골과 발과 손 만 있었다고 합니다. 참으로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의 육체는 개의 식사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적용

하나님이 악한 자는 반드시 심판하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댓가를 지불하게 합니다.
특히 하나님을 향해 대적하는 자의 악행은 절대 용서하지 않습니다.
혹시 이 땅에서 그 댓가를 받지 못했다면 영원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을 기억하고 우리는 악의 괴수가 되지 말아야 하고 그러한 자와 계약을 맺지도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악을 제거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악은 엄청난 번식력이 있습니다.
악이 우리의 삶의 귀퉁이에서 번식하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Ⅳ. 결론

1. 하나님 외에 다른 것과 타협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자
2. 내 안에 이세벨과 같은 사악함이 없는지 점검하자
3. 악은 엄청난 번식력을 가지고 있음을 깨닫고 제거하자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mam of God)’을 히브리어로 ‘이쉬-하엘로힘’(אִישׁ־הָאֱלֹהִֽים-iysh-hā’ĕlōhîm)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이쉬’(אִישׁ-ʼîysh)는 “남자, 인류, 남편, 위인”이라는 뜻의 남성명사 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불렸던 사람들이 여러 명 있습니다.
위대한 믿음의 선진들이 수 없이 많이 있지만, 실제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명예로운 별명으로 불리운 사람은 의외로 그리 많지 않습니다.

물론,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했던 선지자들(삼상 9:10; 왕상 13:1; 대하 25:9)을 그렇게 부르기도 했습니다만.

실제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불렸던 사람들은 모세(신 33:1; 수 14:6; 대상 23:14; 대하 30:16; 스 3:2; 시 90:1), 다윗(대하 8:14; 느 12:24, 36), 엘리사(왕하 4:7; 5:8; 7:2; 8:2), 그리고 스마야(왕상 12:22) 정도이고, 신약에서는 사도 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딤전 6:11)를 그렇게 부르 것이 전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사람입니다(로마서 8:9)
따라서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영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을 소유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로마서 8:14).

무릇 하나님의 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나님의 영은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요한일서 4:12)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찌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

‘하나님의 사람’으로 지칭된 다윗을 통하여 이 단어가 가지는 몇 가지 의미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사도 바울이 비시디아의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할 때(행 13:22),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이 부분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치 않습니다.

둘째, 조상 아브라함과 맺으신 땅의 언약을 성취한 사람

여호수아의 주도하에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분배했습니다만, 그 이전까지는 부분적으로 실현된 것이었습니다. 다윗 시대에 수 많은 전쟁을 통해 해당 지역의 여러 나라들을 정복하고, 실제적인 통치권을 행사함으로 온전하게 땅의 언약을 성취했다는 말입니다.

셋째, 율법의 제사 제도를 완벽하게 구현했기 때문

모세를 통해 제정해 주신 율법에 따라 레위인과 제사장들을 거룩하게 구별하고, 성전과 제사의 직무에만 전담하도록 함으로, 율법의 제사 제도를 완벽하게 구현하였기 때문입니다.

솔로몬도 아버지 다윗의 규례에 따라서 이를 그대로 시행했을 뿐입니다(14절).

넷째, 하나님께서 그에게 ‘영원한 언약’을 주셨기 때문(삼하 7:8-16)

이 언약의 주인공이 바로 다윗의 자손으로 이 땅에 성육신 하여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하나님의 사람이란, 다윗이나 모세처럼 어느 특정한 사람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너를 비롯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 사람들이다.
믿음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하나님의 사람이 것이다.
더구나 내가 다른 보혜사인 성령으로 내주하고 있는 성전(고전 3:16; 6:19)이기에 마땅히 하나님의 사람인 것이다.
문제는 너를 비롯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하나님의 사람 답게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그것이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왜 산당을 없애지 못하였을까?

아사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다윗과 같이 온전하였다고 하지만 다만 산당을 없애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선지자 오뎃의 말 듣고 용기를 내어 개혁 하였지만 산당을 제거하지 못한 것은 아사 왕 안에 산당이 들어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산당이란 결국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아사 왕은 예루살렘에서 41년을 통치하였습니다.
그는 조상 다윗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습니다.
남색 하는 자를 쫓아내고, 그 열조의 모든 우상을 없앴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모친 마아가가 아세라 우상을 만들었으므로 태후에서 폐하였습니다.
그러나 산당은 없이 하지 못하였습니다.

아사 왕이 엄청난 개혁을 합니다.
그래서 그의 조상 다윗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다고 합니다.
남색 하는 자를 그 땅에서 쫓아내고 그의 조상들이 지은 모든 우상을 찍어 불살라버렸습니다.
심지어 태후인 마아가가 아세라 상을 만들었다고 폐위시켜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우상도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라 버렸습니다.
아사 왕은 그 마음이 일평생 여호와 앞에서 온전하였습니다.
그는 그 부친이 성별한 것과 자기가 성별한 은과 금과 그릇들을 여호와의 성전에 받들어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도 다만 산당은 없애지 못하였습니다.

산당이 무엇이기에 그렇게 엄청난 개혁을 한 아사 왕도 산당을 없애지 못한 것입니까?

예루살렘에 성전이 세워지기 까지는 여러 산당에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성전이 세워지고 나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산당의 제사도 여호와 하나님께 드린다고 드린 제사였습니다.
성전이 세워지기 전에 사무엘도 솔로몬도 산당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전국에 산재하여 있는 산당들이 여호와의 제사와 바알과 아세라와 같은 우상의 제사와 혼합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로는 여호와께 제사를 드린다고 하지만 그 속 내용을 보면 가나안 원주민들과 주변 나라들의 우상숭배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산당을 다 제거한다는 것은 민간신앙을 송두리째 흔드는 것이기 때문에 전 국민적 반발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아사 왕은 개혁을 하면서도 산당만은 남겨둔 것입니다.
그런데 엄청난 개혁을 한 아사가 산당을 남겨둔 것은 자신의 마음에도 산당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6-22절을 보면 “아사와 이스라엘 왕 바아사 사이에 일생 전쟁이 있으니라.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 올라와서 라마를 건축하여 사람을 유다 왕 아사에게 왕래하지 못하게 하려한지라. 아사가 여호와의 전 곳간과 왕궁 곳간에 남은 은금을 몰수히 취하여 그 신복의 손에 붙여 다메섹에 거한 아람 왕 헤시온의 손자 다브림몬의 아들 벤하닷에게 보내며 가로되 나와 당신 사이에 약조가 있고 내 부친과 당신의 부친 사이에도 있었느니라. 내가 당신에게 은금 예물을 보내었으니 와서 이스라엘 왕 바아사와 세운 약조를 깨뜨려서 저로 나를 떠나게 하라 하매. 벤하닷이 아사 왕의 말을 듣고 그 군대장관들을 보내어 이스라엘 성들을 치되 이욘과 단과 아벨벧마아가와 긴네렛 온 땅과 납달리 온 땅을 쳤더니. 바아사가 듣고 라마 건축하는 일을 그치고 디르사에 거하니라. 이에 아사 왕이 온 유다에 영을 내려 한 사람도 모면하지 못하게 하여 바아사가 라마를 건축하던 돌과 재목을 가져 오게 하고 그것으로 베냐민의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하였더라”

아사와 북 이스라엘의 바아사 사이에 일평생 전쟁이 있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바아사 왕이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이 남 유다로 가는 길목을 막기 위하여 예루살렘 위의 라마라는 교통의 요충지에 자기들의 요새를 건설한 것입니다.
르호보암 왕 때에도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이 벧엘과 단에서 금송아지를 섬기게 하자 남으로 내려온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사 왕 때도 북 이스라엘의 사람들이 남쪽 아사 왕에게로 온 자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아사가 라마에 요새를 건설한 것입니다.

역대하 15:1-19
“하나님의 신이 오뎃의 아들 아사랴에게 임하시매. 저가 나가서 아사를 맞아 이르되 아사와 및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들아 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저가 너희의 만난 바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저를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이스라엘에는 참 신이 없고 가르치는 제사장도 없고 율법도 없은 지가 이제 오래였으나 그 환난 때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 돌아가서 찾으매 저가 그들의 만난 바가 되셨나니. 그 때에 열국에 거한 모든 백성이 크게 요란하여 사람의 출입이 평안치 못하며 이 나라가 저 나라와 서로 치고 이 성읍이 저 성읍과 또한 그러하여 피차 상한바 되었나니. 이는 하나님이 모든 고난으로 요란케 하셨음이니라. 그런즉 너희는 강하게 하라 손이 약하지 않게 하라. 너희 행위에는 상급이 있음이니라. 아사가 이 말 곧 선지자 오뎃의 예언을 듣고 마음을 강하게 하여 가증한 물건을 유다와 베냐민 온 땅에서 제하고 또 에브라임 산지에서 빼앗은 성읍들에서 제하고 또 여호와의 낭실 앞 여호와의 단을 중수하고 또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를 모으고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시므온 가운데서 나와서 저희 중에 우거하는 자를 모았으니. 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고 아사에게로 돌아오는 자가 많았음이더라. 아사 왕 십 오년 삼월에 저희가 예루살렘에 모이고 그 날에 노략하여 온 물건 중에서 소 칠백과 양 칠천으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고 또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하고 무릇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는 자는 대소 남녀를 무론하고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무리가 큰 소리로 부르며 피리와 나팔을 불어 여호와께 맹세하매 온 유다가 이 맹세를 기뻐한지라. 무리가 마음을 다하여 맹세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저희의 만난바가 되시고 그 사방에 평안을 주셨더라. 아사 왕의 모친 마아가가 아세라의 가증한 목상을 만들었으므로 아사가 그 태후의 위를 폐하고 그 우상을 찍고 빻아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으니. 산당은 이스라엘 중에서 제하지 아니하였으나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온전하였더라. 저가 또 그 부친의 구별한 물건과 자기의 구별한 물건 곧 은과 금과 기명들을 하나님의 전에 드렸더니. 이 때부터 아사 왕 삼십 오년까지 다시는 전쟁이 없으니라.”

하나님의 영이 임한 오뎃의 아들 아사랴가 아사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자 아사가 선지자 오뎃의 말을 듣고 마음을 강하게 하여 모든 우상들을 제거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제단을 재건합니다.
북 이스라엘의 사람들 중에 이 소식을 들은 자들이 아사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자가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남으로 가는 길목을 막기 위하여 북 이스라엘의 바아사 왕이 라마에 성을 건축합니다.
그런데 이때 아사가 여호와의 도우심을 구한 것이 아니라 아람 왕에게 성전의 은금을 보내서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합니다.
그래서 북 이스라엘을 아람이 공격하니 바아사는 물러가게 되고 아사는 라마를 건설하려던 재료를 가지고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합니다.
아사가 이렇게 한 것이 바로 아사의 마음에 있던 산당입니다.

역대하 16:7-10
“때에 선견자 하나니가 유다 왕 아사에게 나아와서 이르되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한 고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 구스 사람과 룹 사람의 군대가 크지 아니하며 말과 병거가 심히 많지 아니하더이까. 그러나 왕이 여호와를 의지한 고로 여호와께서 왕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 아사가 노하여 선견자를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그의 말에 크게 노하였음이며 그 때에 아사가 또 몇 백성을 학대하였더라”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고 아람 왕을 의지한 것을 하나님의 선견자 하나니가 책망을 하자 아사가 노하여 선견자를 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이 선견자의 편을 든 몇 사람도 함께 학대하였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오뎃의 말을 듣고 용기를 내었던 아사 왕이 전쟁의 승리로 평안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평안이 계속되자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을 잊어버리고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된 줄로 착각하고 교만해 진 것입니다.
그래서 북 이스라엘이 공격하자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아람 왕을 의지한 것입니다.
전에 아사는 구스 사람과 룹 사람의 군대 규모가 북 이스라엘 군대보다 더 큰 대군이었지만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승리하였습니다.
그는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아람 왕에게 도움을 청한 것입니다. 이것이 아사의 산당입니다.

그러면 구스 사람과 룹 사람의 군대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습니까?

역대하 14:8-15
“아사의 군대는 유다 중에서 큰 방패와 창을 잡는 자가 삼십만이요, 베냐민 중에서 작은 방패를 잡으며 활을 당기는 자가 이십 팔만이라. 다 큰 용사더라. 구스 사람 세라가 저희를 치려하여 군사 백만과 병거 삼백승을 거느리고 마레사에 이르매. 아사가 마주 나아가서 마레사의 스바다 골짜기에 진 치고 그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강한 자와 약한자 사이에는 주 밖에 도와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컨대 사람으로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구스 사람을 아사와 유다 사람 앞에서 쳐서 패하게 하시니 구스 사람이 도망하는지라. 아사와 그 좇는 자가 구스 사람을 쫓아 그랄까지 이르매 이에 구스 사람이 엎드러지고 살아 남은 자가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 앞에서와 그 군대 앞에서 패망하였음이라. 노략한 물건이 심히 많았더라. 여호와께서 그랄 사면 모든 성읍 백성을 두렵게 하시니 무리가 그 모든 성읍을 치고 그 가운데 있는 많은 물건을 노략하고 또 짐승 지키는 천막을 치고 양과 약대를 많이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더라”

이 말씀에 보면 58만대 100만의 싸움입니다.
그런데 이 싸움에서 여호와의 도우심을 구하여 이긴 사람이 아사 왕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을 한 아사 왕이지만 자기 안에 산당을 온전히 제거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여호와를 의지하기보다 아람 왕을 의지한 것입니다.

열왕기상 15:23-24
“아사의 남은 사적과 모든 권세와 무릇 그 행한 일과 성읍을 건축한 것이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저가 늙을 때에 발에 병이 있었더라. 아사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그 열조와 함께 그 조상 다윗의 성에 장사되고 그 아들 여호사밧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아사 왕이 늙었을 때에 발에 병이 났습니다.
그런데 그때도 아사 왕은 여호와께 묻지 않고 의원에서 물었습니다.

역대하 16:11-14
“아사의 시종 행적은 유다와 이스라엘 열왕기에 기록되니라. 아사가 왕이 된지 삼십 구년에 그 발이 병들어 심히 중하나 병이 있을 때에 저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 아사가 위에 있은지 사십일 년에 죽어 그 열조와 함께 자매. 다윗성에 자기를 위하여 파 두었던 묘실에 무리가 장사하되 그 시체를 법대로 만든 각양 향재료를 가득히 채운 상에 두고 또 위하여 많이 분향하였더라”

아사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다윗과 같이 온전하였다고 하지만 다만 산당을 없애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선지자 오뎃의 말을 듣고 용기를 내어 개혁을 하였지만 산당을 제거하지 못한 것은 아사 왕 안에 산당이 들어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 산당이란 결국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고 자기 머리를 의지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아사의 공격 때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고 아람 왕의 힘을 빌려 물리쳤습니다.
자신의 발에 병이 들었을 때도 여호와께 구하지 않고 의원에게 구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병원에도 가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사 왕에게 들어 있는 산당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 16:13-16
“이와 같이 네가 금, 은으로 장식하고 가는 베와 명주와 수 놓은 것을 입으며 또 고운 밀가루와 꿀과 기름을 먹음으로 극히 곱고 형통하여 왕후의 지위에 나아갔느니라. 네 화려함을 인하여 네 명성이 이방인 중에 퍼졌음은 내가 네게 입힌 영화로 네 화려함이 온전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나 네가 네 화려함을 믿고 네 명성을 인하여 행음하되 무릇 지나가는 자면 더불어 음란을 많이 행하므로 네 몸이 그들의 것이 되도다. 네가 네 의복을 취하여 색스러운 산당을 너를 위하여 만들고 거기서 행음하였나니 이런 일은 전무후무하니라”

에스겔 16장은 태어나면서부터 거리낌을 받아 탯줄도 자르지 못한 상태에서 버려진 계집아이를 예루살렘으로 봅니다. 이런 계집아이를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하시고 왕후로 만들어 놓았더니 하는 짓이라고는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으로 자기를 위하여 각색으로 산당을 꾸미고 거기에서 행음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일들이 이스라엘만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오늘날 우리들의 문제인 것입니다. 아사 왕이 산당을 없애지 못한 것처럼 우리 안에도 산당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산당들은 얼마나 교묘한 방법으로 자리 잡고 있는지 도무지 무너뜨려지지가 않습니다. 이 산당은 끊임없는 자기 합리화로 나갑니다.

미가서 1:1-5
“유다 열왕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 곧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라. 백성들아 너희는 다 들을지어다. 땅과 거기 있는 모든 것들아 자세히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거하시되 곧 주께서 성전에서 그리하실 것이니라.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사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 그 아래서 산들이 녹고 골짜기들이 갈라지기를 불 앞의 밀 같고 비탈로 쏟아지는 물 같을 것이니. 이는 다 야곱의 허물을 인함이요, 이스라엘 족속의 죄를 인함이라. 야곱의 허물이 무엇이뇨. 사마리아가 아니뇨. 유다의 산당이 무엇이뇨. 예루살렘이 아니뇨”

야곱의 허물이 사마리아이며, 유다의 산당이 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즉 북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나 남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이 다 산당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밝아버리신다고 합니다. 그러면 불 앞의 밀초 같이 녹아져 내리며 비탈로 쏟아지는 물 같이 흘러내리고 말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북 이스라엘도 남 유다도 다 멸망하였습니다. 멸망의 이유는 그들 안에 있는 산당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 자기를 위한 욕망의 산당들이 가득합니다.
우리 자신 안에도 교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온갖 세상의 보암직한 것들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산당에서 우리가 어떻게 스스로 벗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산당들을 파괴하여 버리심을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보여주셨습니다.
오늘날도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 안에 있는 산당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부수어 내십니다. 성도는 자기 안의 산당들이 무너지는 경험을 역사 속에서 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빈손 들고 십자가를 붙들게 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식언치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식언치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민수기 23:19).
이 하나님에서 우리 속에 있는 산당을 제거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굳게 붙잡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속에 있는 자기를 위하는 모든 산당이 무너지게 하시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하며,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산당은 왜 사라지지 않았을까?

열왕기하 12:3-4
다만 산당들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였더라.

위의 구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왜 산당들만 내버려 두었을까?
이에 대해 다양한 의견들이 있다.
어떤 이들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제거하지 못했을 것이라 말한다.
또 다른 이들은 아직 ‘중앙성소화’가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산당들이 제의적 장소로 사용되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솔로몬 성전이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 지방에 있는 레위의 도성들에서 산당들이 가동되었을 것으로도 본다.
종교적 중심지는 늘 권력과 정치와 물질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지방의 세력들이 이 권력을 쉽게 놓으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도 말한다.
이와 같은 지방의 세력들의 정치적인 이유나 사회적인 여러 이유들로 인해서 산당들이 다 제거되지 못한 이유들이 될 것이다,

나는 이외에 또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이스라엘에서 고고학을 전공하신 임미영 교수의 강의를 통해 산당(히: במה bamah)에 대해 자세히 배울 기회가 있었다.

바마에 대한 정의에 대한 견해에 일치된 의견이 없기 때문에 바마를 쉽게 정의내리기는 쉽지 어렵지만, 바마는 단순히 높은 장소만이 아니다.
물론 일반적으로는 바마가 다른 곳보다 높은 곳에 위치해서 제사를 지낼 수 있는 곳인데 바마는 산에도 있고 평지에도 있고 심지어 집에도 있을 수 있다. 길거리나 성문 앞 광장에도 있었고, 솔로몬이 갔던 바마는 산중턱에 있는 넓은 광장에도 있었다. 심지어 때로는 신상이 있기도 하고 신상이 없어도 산당이었다.

산당이 제거되기 힘든 이유는 집안에도 산당이 있었기 때문이다.

산당은 일종의 가정 재단과도 같은 것이었다.
산당은 큰 장소도 산당이지만 중국이나 일본에서 자기 조상들의 위패를 모셔 놓는 것처럼, 우리나라의 신주단지처럼 모셔놓듯이. 다른 장소보다 조금 더 높게 세우면 그 모든 것이 다 산당이었다.

이스라엘 갈릴리 호수 가까운 요단강 근처의 벳세다 유적지에서 발견된 신상은 성문 앞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은 성문에 왕래하는 사람들이 상거래가 잘되도록 기도하는 곳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여진다.





위의 그림은 벳세다 성문에 있는 바마이다.
이 돌(Matzevah)의 하나에는 바알하닷이 새겨져있고 다른 하나에는 아무 것도 그려져 있지 않다.
우상이 그려져 있지 않는 것도 우상 신상이다.
보통 이 둘이 같이 있을 때 그림이 그려져 있지 않은 돌은 여신상으로 간주한다.

리차드 S. 히스가 펴낸 ‘이스라엘의 종교’(원제, Israelite Religions: An Archaeological and Biblical Survey, CLC, 2013년)에 이런 내용이 담겨 있다.

주전 750년 하솔의 가정집에서 종교물품이 적게 발견되다 후에 제의 물품의 수가 증가하였다.
가정집에서 발견된 제의 물품의 수가 증가하는 것은 텔 베잇 미르심((Tell Beit Mirsim/ Debir))에서도 발견된다.
그것도 남왕국 말년에 45퍼센트가 가정주거에서 제의 물품을 포함하고 있다.
이 관찰들은 가정 주거에서 발견된 분향 수발과 석회석 제단에 관한 연구 결과와 일치한다.
북왕국과 남왕국이 멸망할 즈음 가정 제의가 늘어난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가정에서 다양한 신들에 대한 예배가 드리기 시작했음을 시사한다.
비주류 가정의 성소에서도 많은 수의 등잔과 음식준비, 섭취, 음용을 위한 그릇을 발견했다.
데버는 (2001)산당이 공식 종교에서 소외당한 여성들이 가정종교를 시작했다고 말한다.(pp. 382-384)
공식적인 산당에서 가정 산당까지 깊이 뿌리내리는 모습이라고 리차드 S. 히스는 그의 책에서 말하고 있다.

고대 남왕국 유대와 북왕국 이스라엘의 산당은 어떤 면에서 로마시대의 라레스 숭배와 관련된 라라리움(Lararium)과 비교해볼만 하다.

라레스는 로마시대 때 유명한 주신이 아닌 하급신이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더 자주 등장한다. 라레스는 일종의 수호신이다. 보통 죽은 조상 중 일부가 살아생전 훌륭한 일을 한 것이 인정되어 정령으로 추앙받은 존재이다. 이 정령들은 보통 후손들이 숭배했는데 집안의 자손들이 가정 안에 설치해놓은 작은 제단인 라라리움(Lararium)에서 매일 제물도 올리고 기도를 하며 숭배하였다. 이 신은 기본적으로는 가족 수호신이지만 장소를 수호하는 라레스도 있고, 심지어 로마 국가를 수호하는 라레스 아우구스티도 있었다. 이 라라리움 같은 것이 산당과도 비교될만하다.

산당이 제거되지 못한 이유는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산에 있거나 큰 장소에 있는 것은 없애기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민간신앙으로 뿌리 깊게 파고들어가 각 가정에까지 파고 들어갔기 때문에, 집안에 있는 것을 다 파괴하여 제거하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텔 아라드의 고대 신전 유적지. 그 안쪽이 성소 지성소가 자리하고 있다.

내가 고고학 수업을 배울 때 흥미로웠던 것 가운데 하나는 아랏(오늘날의 아라드)에 자리한 텔 아라드에서 발견된 제단은 2번에 걸쳐서 제단(바마)이 무너진 흔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최남단에 위치한 텔 아라드의 요새 자체는 586년에 파괴되어 무너졌다. 그런데 이곳에 자리한 신전은 그때 무너진 것이 아니었다. 그 이전에 무너져서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파괴된 시기는 탤 아라드에 있던 성이 무너진 시기와 달랐다.

이곳의 신전이 무너진 시기는 주전 700년경(히스기야 시대)과 주전 650년경(요시야 시대)에 2차례 파괴되었고, 그 이후로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그 시기가 요시야 시대와 히스기야 시대와 일치한다. 성경의 시대와 아랏의 바마가 무너진 시기가 일치해서 이 아랏을 배울 때 얼마나 가슴이 뛰었는지 모른다. 실제 이스라엘 박물관에서 아랏의 제단을 보았을 때 큰 감동이 있었다.

위의 사진은 텔 아라드(아랏)의 신전 구역이다. 그 안쪽이 성소이다. 아랏의 성소 안에 있는 곳을 보면 두개의 돌이 있다. 이 2개의 돌이 원래는 무너뜨려서 쓰려져 있었는데 그것을 세워보니 신상으로 쓰여 졌던 돌이었다. 돌(Matzevah)은 그림이 새겨져 있든 없든 그 자체로 이미 우상이다. 2번이나 무너졌던 흔적이 보인다.

이처럼 산당이 그대로 남아있던 이유데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있다.
이것을 보면 큰 장소나 대중적인 장소는 산당을 제거할 수 있었지만 뿌리 깊게 퍼진 민간 신앙 때문에 각 가정에 모신 산당은 파괴하지 못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가장 타당하게 다가온다.




아히야(Ahiah) : 여호와는 나의 형제이다
- 아히둡의 아들.
그는 사울의 통치 때 대제사장이었다(삼상14:3).
아히야는 에봇을 입고 있었는데 그는 이가봇의 형제인 아히둡의 아들이요, 비느하스의 손자요, 실로에 있던 {주}의 제사장 엘리의 증손이더라.

사울이 죽인 아히멜렉 즉 그의 뒤를 이은 대제사장의 형제였을 것이다(삼상 22:9).
그때에 사울의 신하들을 다스리도록 세워진 에돔 족속 도엑이 응답하여 이르되, 이새의 아들이 놉에 와서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에게 이른 것을 내가 보았는데

◐ 아히야(Ahijah)
솔로몬과 여로보암 시대의 대언자, 역사 기록자(왕상 11:29; 대하 9:29).
왕상 11:29, 여로보암이 예루살렘에서 나가던 그때에 실로 사람 대언자 아히야가 길에서 그를 만났는데 그는 새 의복을 입었고 그들 둘만 들에 있었더라

그는 성전을 지을 때 하나님의 이름으로 솔로몬에게 말을 전하고(왕상6:11) 또 그가 죄를 지었을 때 그에게 말을 전한 것으로 생각된다(왕상 11:11).
(왕상 6:11)  {주}의 말씀이 솔로몬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왕상 11:11) {주}께서 솔로몬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러한 일을 행하였고 또 내가 네게 명령한 내 언약과 내 법규를 네가 지키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반드시 왕국을 네게서 빼앗아 찢어서 네 신하에게 주리라.
그는 여로보암에게 이스라엘이 유다에서 떨어져나갈 것과 그의 집이 세워질 것과 또 그가 몰락할 것에 대해 예언을 했다(왕상14:1-14).

이스라엘이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분단되어 분열왕국 시대로 접어들 무렵 무명에 가까운 한 선지자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솔로몬의 정략결혼은 후궁들과 첩들이 가져온 온갖 이방신들로 왕궁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전역을 이교신앙(異敎信仰)으로 물들게 했다.

온갖 건축공사에 드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솔로몬이 부과한 지나친 과세와 악정(惡政)으로 인하여 백성들의 원성은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혼탁한 시기에 종교혼합주의를 배척하고 순수한 야훼신앙을 고수한 선지자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아히야였다.

아히야는 솔로몬의 죄악에 대한 임박한 심판을 예언하였는데 그는 실로의 제사장 가문 출신의 선지자였다.
실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던 초기 시대부터 이스라엘 역사와 종교의 센터였고 정치와 군사의 중심지였다.
오래전부터 실로는 법궤가 있던 중앙 성소의 역할을 담당해 왔기에 야훼종교의 중심지였던 셈이다.
철저한 야훼신앙을 고수한 아히야는 솔로몬의 반(反) 야훼적 신앙과 통치로 인해 솔로몬 왕국의 뿌리에 놓인 하나님의 심판의 도끼를 보았다.

솔로몬이 벌인 공사의 감독관이었던 여로보암을 만난 아히야는 자신이 입고 있던 새 옷을 벗어 열 두 조각으로 찢으며 여로보암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는 열 조각을 가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네게 주고 오직 내 종 다윗을 위하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한 성읍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만은 솔로몬이 다스리도록 남겨 주겠다."

아히야는 여로보암이 장차 분열 이스라엘 왕국의 초대 왕이 될 것을 예언했다.

여전히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던 솔로몬 통치시절에 왕국의 심판과 새로운 왕의 탄생을 예언한 아히야는 대단한 배포를 지닌 선지자라 아니할 수 없다.

"사람의 행위를 따라 갚으사 각각 그의 행위대로 받게 하시는"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의 메시지는 그대로 이루어졌다.
이후 솔로몬까지 3대째 내려온 통일 왕국은 아히야의 예언대로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분열되었으니 야훼를 떠난 지도자의 실정(失政)이 낳은 참담한 결과였다.

솔로몬의 실정으로 왕에 등극한 여로보암은 종교적 정통성을 획득하기 위하여 남 왕국 유다의 예루살렘 성전에 대응할 새 예배 처소를 만들었다.

그 예배 처소에 여로보암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세웠다.
여로보암은 북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를 드리러 예루살렘 성전에 가는 것을 막으려는 정치적 목적 때문에 야훼신앙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정책을 시행했다.

우상을 만들지 말고 목상이나 주상을 세우지 말라는 야훼의 명령을 무시한 채 금송아지 상을 만들었고 자기 임의대로 레위인 아닌 자로 제사장까지 삼았으니 솔로몬 실정의 재판(再版)이 아니던가?

오히려 솔로몬보다 더 악행을 자행했으니 아히야는 여로보암과 북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에 심판을 선언하였다.

"여호와께서 여로보암의 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을 버리시리니 이는 그도 범죄하고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하였음이니라"

아히야 선지자는 장차 200년 후에 일어날 이스라엘의 파멸을 예고하고 있으니 야훼 신앙의 '중심/과녁'을 벗어난 죄('죄'는 헬라어로는 '하마르티아'로 그 뜻은 '과녁을 벗어나다'이다.)의 결과는 이스라엘 역사의 탈선과 파멸이었다.

슈펭글러와 토인비는 "역사는 돌고 돈다"고 했다.
죄로 물든 역사의 악순환 속에서 궁극적 희망은 밑둥치 잘리고서 그루터기만 남은 인간 역사에 여전히 새 싹을 틔우시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긍휼이 아니던가?


이때는 틀림없이 솔로몬이 경건한 신앙과 번영의 절정기에 있을 때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스바 여왕을 남방여인이라고 하셨다(마태복음 12:42)

심판 때에 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스바가 가나안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디오피아에서는 그 여인의 후손이 간다게(사도행전 8:27)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많은 학자들은 복지국 아라비아 남부(현재 인도)에서 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역사학자 요세프스는 스바를 이디오피아라고 합니다.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그녀는 물론 정치적 목적이나 경제적인 협력을 얻기 위한 목적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솔로몬 왕에 대한 소문을 듣고 호기심이 발동하여 소문의 진실성을 알아 보고저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려운 문제를 시험하고자” 했다는 표현 속에서 우리는 방문 목적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정치에 대한 금언(金言)을 듣기 위해 왔었습니다.
예수님도 그녀가 지혜로운 말을 듣기 위해 땅 끝에서 왔었다고 했습니다(마12:42, 눅 11:31).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솔로몬의 지혜”라는 표현입니다.
솔로몬의 지혜의 출처가 하나님으로 부터라는 소문을 듣고 하나님 신앙에 상당히 마음이 끌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어떠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 시대의 유대인들을 경고하면서 그 여인의 방문을 인용했습니다.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그 먼 곳에서 찾아왔는데 너희는 솔로몬보다 큰 이를 눈앞에 두고도 거절하고 있으니 너희 유대인들은 얼마나 몽매한가? 그에 대한 심판이 지엄할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그녀는 신분에 어울리게 많은 수행원을 대동하였고 일행의 체재비를 부담하고도 남을 만큼 많은 황금과 보석과 향품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얻고저 하는 것에 가치를 알고 있었으니 구걸하는 자로서 온 것이 아니라 지혜라면 어떤 값이라도 치르고 사려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영생에 이르는 진리를 너무 값싸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녀는 그가 묻는 말에 대답하지 못한 것이 없는 것(3절)과 건축한 궁과 솔로몬 왕 앞에서 시립(侍立: 윗 사람을 모시고 서 있는 것)하는 신하들과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는 층계를 보고 솔로몬의 경건한 신앙에 정신이 어지럽고 황홀하여 스바 여왕은 당신의 행위와 지혜에 대하여 들은 소문이 진실하다고 감탄했습니다.(6-7절) 또 “솔로몬 앞에 서서 당신의 지혜를 듣는 당신의 신하들은 복되다”고 (8절) 거듭 감탄하며 여호와를 송축까지 했습니다.(9절) 그것은 장차 메시야 시대에 이방인들이 주님께로 돌아올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계21:24절)

그녀는 헤어지면서 솔로몬에게 금과 향품을 귀한 선물을 바쳤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그리스도께 선물로 가져 온 황금과 유향은 바로 이 스바 여왕의 선물에서 상징됩니다(마 2:11).
이와 같이 그녀는 자기가 깨우침을 얻은 지혜에 대한 값을 지불하였으며 그것을 비싸게 샀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가르침 받은 자들은 마음을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스바여왕이 선물 한 것은 그녀에게는 비싼 것이었겠지만 실상 솔로몬에게는 이미 넉넉하게 있어 별 것이 아니었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드리는 것도 사실 그 분에게 아무 필요가 없음을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그렇게라도 감사하도록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솔로몬의 주요 수입원은 외국과의 무역 거래였습니다.(14-15절) 또 이스라엘에게는 남북을 연결하는 무역로가 있었기에 통행료와 조공물을 많이 받을 수 있었습니다.(15절) 나아가 이스라엘 12지역에서 매월 1회씩 세금을 징수했습니다. 당시의 그의 부와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24-25절) 그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이 세상의 재물이 인간을 얼마나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지 시험해 보고 싶어서 계속 더 많이 가지려고 탐내었습니다. 딤전 6:9절은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에 떨어진다”고 경고했는데 이와 같은 일이 바로 솔로몬의 생애에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명성과 행운의 위험이 다가오고 있었으니 10:7절에서 “지혜와 복” 순서가 10:23절에서는 “재산과 지혜”로 순서가 바뀜을 볼 수 있습니다. 솔로몬이 이렇게 물질적인 것에 더 치우치자 영적인 면은 점점 쇠퇴 해 갔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군대의 병력을 더욱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축복의 풍성함에 감사치 않고 자기의 욕심을 만족시켜 줄 훌륭한 사치품을 구하려 사람들을 멀리 보냈습니다. 애굽에서 말과 병거를 수입하여 자국의 병력을 보강했고 나머지는 두로와 암몬 등지로 수출했습니다. 사실 왕이 말과 병거를 모으는 일을 모세 율법에 금지된 일이었습니다.(신17:16절)  그러나 1년에 금 666달란트를 받은 일은(14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계13:8) 그는 성별된 그릇이면 어떤 것이라도 사용하시는 주님(딤후2:20-31절) 과는 달리 금 그릇만 사용하였고(21절) 진정 영광과 호화로운 속에서 살았습니다. 얼마나 호화로웠으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백합꽃의 가치를 말씀하시며 솔로몬의 영화와 비교 하셨겠습니까? (마6:29절) 신명기서 17:16-20절에 보면 왕들에게 어떤 경고를 했습니까?

신명기 17:16-19

16.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17.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
18.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19.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1.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
2. 율법 책을 곁에 두고 읽으며 규례를 지켜 행할 것
3.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
4. 행위에 교만하지 말 것

그런데 솔로몬은 말들과 병거, 돈 아내들을 늘려 갔습니다.
솔로몬은 영적인 면이 쇠퇴해지자 하나님께서 금하고 경고한 일만 골라서 했습니다.
받은 복을 감사하기커녕 헛된 야망만이 더 불타올랐으니 그렇게 스스로 파괴 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바의 여왕은 누구?

세바는 남쪽에 있는 지명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세바’는 주로 상인들과 관련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세바‘는 장사에 능한 나라였던 것 같습니다. 학자들에 따라 이 ’세바‘가 정확히 어디인지 의견이 분분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지금의 예멘을 언급합니다. 다른 학자들은 이디오피아를 언급합니다. 또 어떤 학자들은 이집트의 여왕이라고 합니다. 여러 학설 중에서 이 여왕이 이디오피아와 이집트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통치한 여왕이라는 학설이 지지를 얻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바의 여왕은 시시한 여왕이 아닙니다. 여왕은 솔로몬에게 백이십 달란트, 심히 많은 향료와 보석을 주었습니다. 시바 여왕이 준 향료는 역대 최고였으며, 그 이후에도 이런 항료를 준 사람은 없었습니다.

 

세바 여왕이 솔로몬을 찾아온 이유

세바 여왕은 그의 나라로 들어온 상인들로부터 솔로몬의 명성을 들었습니다. 세바 여왕은 이미 경제적으로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이런 그녀에게 들려오는 솔로몬의 지혜에 대한 명성은 늘 동경의 대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녀는 심히 많은 수행원들과 향료와 심히 많은 금과 보석을 실은 낙타들과 함께 예루살렘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문제들을 가지고 솔로몬을 시험해 보았습니다. 여왕이 그 어떤 문제를 내더라도 솔로몬은 지혜롭게 답을 했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세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시험해 보고자 이 먼 길을 왔으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사람을 찾습니다. 인생의 문제가 고통스럽고 풀기 어려울수록, 그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세바 여인에게 있었던 문제가 어떤 문제인지는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시바 여왕의 왕궁이 이디오피아에 있었다면, 왕궁과 예루살렘의 거리는 족히 4000km가 됩니다. 서울과 부산의 거리가 약 400km 이니까 서울과 부산을 다섯 번 왕복하는 거리를 가서라도 솔로몬에게 물고 싶었던 질문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세바 여왕 감탄

(1) 솔로몬의 지혜에 감탄

세바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에 감탄했습니다. 그녀는 솔로몬과 함께 있는 자들을 부러워하였습니다. 그녀는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해 먼 길을 와야 했지만, 솔로몬과 같이 있는 사람들은 늘 가까이서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2) 솔로몬의 왕국의 번영에 감탄

세바의 여왕도 심히 강대한 나라를 다스렸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그런 여왕도 솔로몬이 건축한 집과 그의 상의 음식물과 그의 신하들의 앉는 것과 그의 일꾼들이 섬기는 것과 그들의 의복과 잔 나르는 자들을 보고 감탄했습니다. 이는 극찬입니다. 동종 업계에 그것도 나름 자신이 최고라고 자부하는 자의 입을 통해서 칭찬을 듣는 것은 극찬입니다. 솔로몬 왕국의 번영에 세바 여왕은 너무도 놀랍습니다. 5절에 “정신이 없어서”란 의미는 “압도당하였다” 말입니다. 세바 여왕이 압도당할 만큼 솔로몬 왕궁과 집은 훌륭했습니다.

 

(3) 성전 건축에 감탄

5절에 “{주}의 집에 올라갈 때 쓰는 오르막 통로를 보고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이 됩니다. 여러 영어 성경들이 이 구절을 “화목 제물을 드리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양의 화물 제물이 하나님의 집에서 들여지는 것을 보고 압도당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해석은 “주의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이라고 해석합니다. 영어 KJV은 후자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세바 여왕은 성전 계단으로 올라가면서 성전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을 수 있습니다.

 

세바 여왕의 소감 및 감사 예물

“6.왕에게 이르되, 내가 내 땅에서 당신의 행적과 당신의 지혜에 관하여 들은 소문이 참되도다. 7.그러나 내가 와서 내 눈으로 그것을 볼 때까지 그 말들을 믿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그들이 절반도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으니 당신의 지혜와 번영이 내가 들은 명성을 능가하는도다. 8.당신의 사람들은 행복하도다. 당신의 이 신하들은 행복하도다. 그들이 항상 당신 앞에 서서 당신의 지혜를 듣는도다. 9.{주} 당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분께서 당신을 기뻐하사 이스라엘 왕좌에 당신을 앉히시고 {주}께서 영원히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으므로 당신을 왕으로 삼아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셨도다, 하고 10.그녀가 금 백이십 달란트와 심히 많은 향료와 보석을 왕에게 주었는데 세바의 여왕이 솔로몬 왕에게 준 이 향료처럼 많은 향료가 다시는 오지 아니하였더라.”

 

자기를 위해 은금을 많이 쌓지 말지니라(신명기 17:17)

솔로몬은 ‘오빌’에서 많은 금과 백단목과 보석을 가져왔습니다. “백단목”은 매우 귀중한 건축 자재였습니다. 또한 이 나무로 악기를 만들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배운 것과 같이 솔로몬은 “에시온게벨”(열왕기상9:26)에 강력한 해군 함대를 육성하였습니다. 이 해군 함대를 통해 히람의 무역함을 보호해 주었습니다. 그 대가로 히람은 솔로몬에게 금과 각종 보석들과 귀한 건축 자재들을 자유롭게 실어 나를 수 있었습니다. 한 해 솔로몬에게 들어온 금의 무게는 육백육십육 달란트였는데, 이는 솔로몬이 상인들과 향료 상품을 무역하는 상인들과 아라비아의 왕들과 그 나라의 총독들에게 받은 것 외의 것이었습니다. 이런 무역의 융성은 솔로몬 왕국에 은이 하찮은 것으로 여겨질 정도의 부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주체 못할 금과 솔로몬의 사치

솔로몬은 이런 금으로 무엇을 했습니까?
그는 금을 쳐서 큰 방패 이백 개와 작은 방패 삼백 개를 만들었습니다.
또 왕좌를 상아로 만들고 가장 좋은 것은 금으로 입혔습니다.
왕이 그릇은 금으로 만들었습니다.
무역을 통해 벌어들인 금과 귀한 자재들은 모두 다 왕의 사치를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다윗도 금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모은 금은 그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위해 모든 것이었습니다.
영적인 일을 위해 일을 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솔로몬은 자신에게 주어진 지혜와 시간을 사용하여 자신을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사치와 능력을 과시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 보시기에 죄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이스라엘의 왕은 금과 은을 쌓아두지 말도록 가르치셨습니다.
검소한 생활을 통해 백성들에게 본을 보이는 삶을 살도록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이런 하나님의 뜻과 다른 삶을 살고 있음을 열왕기 저자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위해 말을 많이 늘리지 말며 말을 많이 늘리려고 백성을 이집트로 돌아가게 하지 말지니라(신명기 17:1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왕에게 말들을 늘리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왕이 그 백성들에게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믿고 살아가는 것이 이스라엘이 이 땅에서 증시해야 할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자신의 능력을 의지했습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의지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입니다.

 

아마 솔로몬은 이렇게 변명할 수도 있습니다. 이집트로 말을 사로 보낸 것은 이웃 국가들과의 중계 무역을 위함이라고 변명할 수도 있습니다. 헷족속과 시리아에 되팔아서 높은 수익을 얻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궁색한 변명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하나님의 명한 것을 자의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해서 자신의 행위를 변명해서는 안 됩니다. 영적 타락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데서 출발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의 물질적 부흥과 영적 타락을 지적하는 열왕기상 저자의 의도를 배웠습니다.
동종업계에 근무하는 최고의 전문가로부터 칭찬을 받는 것은 극찬입니다.
스바 여왕도 시시한 여왕이 아니었지만, 솔로몬의 지혜와 그 번영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녀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를 했습니다.
이는 솔로몬 왕국이 얼마나 그 시대 번영함을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또한 이런 물질적 번영의 시대에 자행된 솔로몬의 영적 타락을 우리는 또한 주의깊게 보아야 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오늘날 신약 교회의 모형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은 이스라엘의 거룩함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모습이며, 어떤 삶을 사는 것인지를 시청각적으로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때, 이스라엘을 부강케 하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살아갈 때,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이런 우선순위가 뒤바뀌었습니다.
자신이 능력이 있으니까, 굳이 하나님을 의지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불편한 삶을 굳이 살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는 영적인 타락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의지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저와 여러분을 구별하셔서 교회로 부르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땅에 나타내 보여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큰 교회 건물입니까?
아니면 성도의 수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에 대한 광신적인 신앙의 모습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거룩한 모습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백성의 삶을 보이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실제로 어떻게 믿는 자에게 역사하는지를 증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한국 기독교는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인정을 받았습니다.
비록 믿지는 않았지만,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가난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목회자들을 통해 큰 감명을 주었습니다. 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훌륭한 건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마다 헌금으로 풍족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만큼 기독교가 비난 받는 시대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성공으로 보고 달려왔을까요?
혹시 솔로몬과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달려온 것은 아닐까요?
모두가 한국 교회의 부흥을 말하지만, 실상은 영적인 타락이 함께 진행되고 있었음을 우리는 놓치고 있지는 않았을까요?
그리고 오늘 저와 여러분의 가치관도 솔로몬의 것과 같지는 않습니까?
오늘 신자는 이 땅에서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까?
어떤 모습을 세상에 보여야 합니까?






 ♦ 3월 15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열왕기상 10:1∼29
♦ 묵상을 위한 주제 : 당신의 하나님(9절)
♦ 성구 :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찌로다 여호와께서 당신을 기뻐하사 이스라엘 위에 올리셨고 여호와께서 영영히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므로 당신을 세워 왕을 삼아 공과 의를 행하게 하셨도다.

“당신의 하나님(Your God)”

‘스바’는 아라비아 남쪽에 위치한 ‘사베안’ 왕국으로 오늘날의 예멘입니다.

스바의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에 대한 소문을 듣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확인하고자 솔로몬을 방문했습니다.

스바 여왕은 자신의 어려운 질문에도 솔로몬이 지혜롭게 답하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왕궁과 여호와의 성전의 규모에도 감탄합니다. 동시에 이스라엘의 정치, 경제, 종교 등 국정 전반에 걸친 체계적인 통치 체계에도 감탄하며 이 모든 지혜가 하나님에 의한 것임을 깨닫고 비록 이교도였지만 여호와를 찬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호와를 송축한 스바 여왕은 솔로몬에게 금 120달란트와 많은 향품과 보석 등을 바쳤고 솔로몬도 그가 원하는 대로 답례했습니다.

솔로몬은 매년 들어오는 금 666달란트로 큰 방패 200개와 작은 방패 300개를 만들어 레바논 나무 궁에 두어 관리하도록 합니다.

솔로몬은 상아로 만든 6층 보좌를 만들고 정금으로 입혔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영화를 만방에 알리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사자를 보좌에 이르는 층계 양끝에 세웠습니다. 이처럼 솔로몬 왕국은 금과 은이 너무나 풍부하여 그릇들은 모두 금으로 만들었고 은을 귀하게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솔로몬은 부귀영화를 견고히 하기 위해 병거(1,400)와 마병을(12,000) 준비하여 예루살렘에 두었습니다.

병거는 당시의 상황에서 가장 효과적이며 가공할 만한 무기였으므로 주변 국가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솔로몬은 은을 돌같이 흔하게 하고 백향목을 평지의 뽕나무 같이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솔로몬은 군비 확장을 위해 애급에서 말을 수입했습니다. 그리고 국가적인 이익을 위해 헷 족속과 아람 사람들에게 이 말들을 수출했습니다.

화려한 것도 초라한 것도 모두 영원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약속받은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오늘도 말씀대로 믿고 말씀대로 순종하므로 영원한 것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 찬양 /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코람 데오(Coram Deo) / 하나님 앞에서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 / 사람 앞에서
코람 문도(Coram Mundo) / 세상 앞에서

우리들의 삶의 특징을 세 가지 양식으로 살펴봅시다.
첫째는 코람 데오
둘째는 코람 호미니부스
셋째는 코람 문도
 
코람 데오(Coram은 "앞에"  Deo는 "하나님")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라는 의미
영어로는 ‘in front of God, before the face of God’ 라고 합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18년의 기나긴 유배생활과 극도로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끝까지 자신을 지켜냈습니다.
선생이 자신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은 조선 명종때 문신이었던 임권 선생의 ‘독처무자기-해동소학’ 즉 ‘홀로 있는 곳에서 자신을 속이지 마라’는 인생철학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중 하나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나를 속이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남들이 보는 곳에서는 남의 눈에 들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하다가 홀로 있을때는 여지없이 양심을 팔고 마음을 무너뜨리는 것이 요즘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박재희, 나를 돌아보는 모멘텀 ‘3분고전’중)

스위스 제네바의 종교개혁가였던 칼빈(Calvin)의 일생을 지배했던 중요한 삶의 좌우명가운데 하나가 ‘코람 데오(Coram Deo)’라는 말입니다.

코람 데오 = 라틴어로 ‘Coram’ 즉 ‘앞에’라는 뜻 + ‘Deo’ 즉 ‘하나님’
‘하나님 앞에서’라는 의미가 되었습니다.
영어로는 ‘in front of God, before the face of God’라는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사람 앞에서(coram hominibus)”
세상 앞에서(coram mundo)’의 명예보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구하며 분별하며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라는 이 말은 부패가 극에 달했던 16세기 중세 시대에 종교개혁가들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권위아래서,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삶의 방식을 요약했던 말입니다.

아울러 이 말은 동시대 개신교(Protestant)를 탄생시킨 마틴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이 내세웠던
Sola Scriptura(오직 말씀으로만)
Sola Fide(오직 믿음으로만)
Sola Gratia(오직 은혜로만)
Solus Christus(오직 그리스도)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 영광)

산 속 깊은 곳, 아무도 없는 곳에 홀로 머물더라도 더욱 더 나 자신을 속이지 않는 다산 정약용의 ‘독처무자기’ 평생 가슴에 새겨 잊지 말고 실천해야 할 선현의 말씀입니다. 아울러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코람데오의 신앙생활’ 즉 내 앞에 계시는 하나님을 늘 의식하며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하며 겨울에도 피어나는 동백꽃과 같이 끝까지 신앙의 절개를 지켜나가는 모습은 결국 하나님과 사람의 인정을 불러오며 나중까지 잘 사는 모습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으실 때의 기준을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하나님은 특별히 H.I.G.H.의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찾으십니다.

Holiness(거룩) : 죄에 대해 민감하며 회개하는 심령을 가지고 있는가?
Integrity(정직) : 작은 일에도 성실하며 정직함을 보이는가?
Gratitude(감사) : 부족함의 현실가운데에서도 감사하는가?
Humility(겸손):  섬김을 받는 자인가? 아니면 섬기는 자인가?


지혜란 무엇인가?
- 성경에서 강조하는 지혜의 의미

성경에서 지혜에 해당하는 것을 "소금"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소금을 사용할 때 소금은 그 형체가 없어져야 합니다.
만일 소금이 그 형체를 유지하면 소금의 기능은 무용지물이 됩니다.
소금이 왜 지혜와 같을까?

첫째, 변화의 능력
둘째, 무언의 능력
셋째, 헌신의 능력

주원장의 황후

주나라 황제 주원장의 황후는 지혜로운 여인이었다.
주원장이 황제가 된 후, 어느 날 궁에서 왕후와 담소를 나누다가 갑자기 무릎을 탁치며 말했다.
“나, 주원장이 황제가 될 줄이야. 나도 상상치 못했단 말야!”
그리고는 기쁜 나머지 뛰어 일어나 춤을 추면서 옛날 변변치 못했던 시절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한 마디로 황제의 체통을 떨어뜨리는 추태를 부린 것이다.
그 때 두 명의 관리가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황제는 그들이 있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후 주원장이 밖으로 나가자 황후는 두 관리를 불렀다.

“황제가 곧 돌아오실 것이다. 너희들 중 하나는 벙어리 행세를 하고, 하나는 귀머거리 행세를 해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 둘의 목숨이 붙어 있지 못할 것이다.“

주원장은 밖으로 나가다가 자기가 한 짓을 생각해 보니 대단히 부끄러웠다.
그런 추태가 밖으로 소문이 나면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황제는 급히 궁으로 돌아와 관리를 불러들였다.
주원장이 곧 관리 중 하나는 벙어리이고 하나는 귀머거리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안심이 되어 관리는 생명을 건지게 되었다.



지혜를 얻으려는 젊은이를 깨우친 왕의 이야기  

어떤 나라에 젊은 재상이 나이 많은 왕에게 말하기를 자기는 아직도 젊은 몸인데 유혹에 들지 않는 좋은 무슨 교훈이 있으면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다고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왕이 가만히 잠깐 생각하더니 그 옆에 있는 신하를 불러서 얼른 안에 들어가서 금 잔에 기름을 가득 부은 것을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을 젊은 재상에 주면서 "자, 이 금잔에 기름이 가득하지 아니하냐? 이 가득한 기름을 가지고 이 궁전에 나가서 아무 거리, 아무 모퉁이, 다 돌아오되 한 시간 이내로 다 돌아 오라. 돌아올 때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안 된다. 한 방울이라도 그 기름이 흘러내리게 될 것이면 곧 자네 목을 베겠노라. 그런 줄 알고 한 방울도 흘리지 말고 곧 다녀 오라." 그러면서 그 뒤에는 군인 한 명에게 칼을 뽑아 가지고 뒤를 좇아가게 했습니다.  

한 방울을 흘리면 목을 자른다고 하니까 이 젊은 재상이 금 잔에다 기름을 가득 담아 가지고서는 조심스럽게, 그렇지만 한 시간 안에 돌아오라고 하니까 빨리 서둘러 땀을 뻘 뻘 흘려 가면서 그 모퉁이를 돌아서 어느 거리를 돌아서 겨우 한 시간만에 다시 가지고 왔습니다.

한 방울도 흘리지 아니하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숨이 차서 가지고 돌아 왔단 말입니다.

"한 방울도 안 흘렸는가?" 
"네 안 흘렸습니다."

그 때에 왕이 묻기를 "그 아무 거리에서 아무 상점들을 보았나? 거리를 가다가 아무개를 보았나? 어디쯤 가면 누구가 있는데 보았나?" 물어 보았습니다.
"그만 못 보았습니다."
"아니 못 보았다니, 지나오면서 못 봐?"
"이 기름 잔만 보려고 다른 것을 볼 사이가 있어야지요."

그때 노 왕이 웃으며 하시는 말이 "그러면 자네 유혹에 들지 않는 비결을 배웠나?"



시벌로마(施罰勞馬)

주마가편(走馬加鞭)과 의미 상통하는 고사성어로 이 역시 그 유래를 아는 자가 거의 없다.
열심히 일하는 부하직원을 못 잡아먹어 안달인 직장상사의 뒤통수에 대고 흔히 쏘는 말.

중국 당나라 시대, 한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이상한 장면을 목격하였다.
한 농부가 땀을 뻘뻘 흘리며 밭을 갈고 있는 말에게 연속 무자비한 채찍질을 가하는 광경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나그네는 매를 맞는 말이 너무 안쓰러워 그 연유를 농부에게 물었다.
“열심히 일하는 말에게 왜 채찍인가?”
농부는 심드렁하게 답했다.
“자고로 말이란 가혹하게 다루어야 꾀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법이지요.”

남의 말을 놓고 가타부타 시시비비를 가릴 수 없어 발걸음을 재촉하던 나그네는 매 맞으며 일하는 말이 못내 불쌍하여 잠시 가던 길을 멈췄다.
그리고는 긴 탄식과 함께 한 마디를 내뱉는다.
“아! 시벌로마(施罰勞馬).”
번역하면 “아, 열심히 일하는 말에게 (상 대신) 벌을 주는구나.”

모름지기 직장상사들은 시벌로마의 유래를 각골명심해야 부하직원들의 원성을 사지 않으리라.
씹어 제키는 “시~벌~로마.” 소리가 잦아지는 곳에 노사분규도 녹아내리지 않겠소?

중국 관광을 가서 가이드에게 배운 인사말 “조~따꺼, 쯔발로마?”는 “조 선생, 식사했소?”하는 소리다.
따라서 쯔발로마는 시벌로마와 어원이 상이함을 아울러 밝혀둔다.

우리는 말 안 듣는 말에게 채찍질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을 그렇지 않다.
달리는 말을 더 잘 달리도록 해 주라고 하신다.

“지혜 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라 그가 더욱 지혜로와질 것이요 의로운 사람을 가르치라 그의 학식이 더하리라.”(잠언 9:9)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고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께서는 “내버려 두신다”고 하셨다.

믿음의 성격은 언제나 미래적이고 소망적이고 긍정적이다.
똑 같은 장소 똑 같은 시간에 두 사람의 사형수가 감옥 안에서 바깥을 내다보아도 두 사람의 생각이 완전히 다를 수 있다.

한 사람은 창문을 내가 보며 이제 죽으면 저 흙 속에 뭍이겠구나…. 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서 두려워한다.
다른 한 사람은 이제 죽으면 이 감옥을 벗어나 참자유를 얻고 저 높은 푸른 하늘 저편의 천국으로 올라가겠지….
긍적적이고 미래적인 소망으로 밝은 미소를 띠며 죽음 건너편의 천국을 기다린다.
부정적인 사람은 인생의 승리자가 될 수 없다.

영국 속담에 “태도가 사실보다 중요하다”는 말이 있다.

주어진 사실에 어떤 태도를 갖느냐가 중요하다.
사람이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생관이 달라진다.
나쁜 습관이나 나쁜 태도나 고착된 부정적인 생각은 참으로 고치지 힘들다.

위대한 음악가 모차르트에 관한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모짜르트는 음악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에게 항상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예전에 다른 데서 음악을 배운 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수업료를 두 배로 내십시오. 그러나 배운 적이 없다면 수업료를 반만 내십시오.”
그러자 사람들과 학부모들이 항의를 했다.

“왜 음악에 대해 모르는 사람에게 수업료를 반만 받고, 이미 잘 아는 사람에게 두 배나 받습니까?”

모차르트가 대답했다.

“음악을 아는 사람은 잘못된 것을 알고 있기에 그것을 고치려면 내가 두배나 애를 먹으니까 두배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음악을 모르는 사람은 내가 원하는 대로 가르칠 수 있기에 노력이 적게 듭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난 한 해를 아픔과 슬픔과 고통 속에서 살았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일까?

욥처럼 특별한 잘못없이 억울한 좌절과 고통을 당한 사람이 예수님 말고 이 세상에 누가 있을까?
사랑하는 자식들을 하루 아침에 잃고, 동방에서 가장 부자였던 모든 재물을 다 잃고, 동방에서 가장 존경받았던 명예는 땅바닥에 떨어졌고, 사랑하는 아내마저 욥을 버리고 떠나버렸고, 온 몸은 썩어 구더기가 득실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는 입술을 끝까지 지켰다.
욥은 원망과 불평대신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23:10).
지금은 비록 처절한 고통 가운데 있지만 후에는 정금같이 되어 하나님 앞에 서리라는 소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런 욥에게 하나님께서는 욥을 갑절이나 더 축복해 주셨다.



전도서 7:12
지혜도 보호하는 것이 되고 돈도 보호하는 것이 되나 지식이 더욱 아름다움은 지혜는 지혜 얻은 자의 생명을 보존함이니라.

- 지혜는 생명을 보존하는 것

잠언 3:18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잠언 13:20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


전도서 7:19
지혜가 지혜자로 성읍 가운데 열 유사보다 능력이 있게 하느니라.


정보 홍수의 시대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휴대전화는 온갖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매우 편리한 도구라고 하겠습니다.
카톡, 페이스북, 트위터, 인터넷.....

미디어를 통해 어느 하나의 사건을 수 많은 주관적인 생각으로 바라보게 하고 그것을  사회적으로 객관화 시킨다.
이로 말미암아 때로 사실이 아닌 것이 사실로 둔갑이 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동요 시켜 사회적으로 혼란을 야기 시키거나 심지어 여론에 휘말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있어 댓글에 대한 심각성을 야기합니다.

정보의 홍수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정보를 인식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성경은 삶을 통해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별하도록 하는 지혜가 "위에 계신 하나님"으로 부터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린도전서 1:24-25)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지혜의 근원이시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죄를 사하기시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피흘려 돌아가신 것을 자신의 입으로 고백하고, 주님이 나의 구원자라고 믿어 주안에서 새 피조물이 되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사고력을 늘 지녀야 한다.





♦  3월 14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열왕기상 9:1∼28
♦ 묵상을 위한 주제 : 속담거리(7절)
♦ 성구 : 내가 이스라엘을 나의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爲)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區別)한 이 전(殿)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 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民族) 가운데 속담(俗談)거리와 이야기 거리가 될 것이며.

“속담(俗談)거리(a byword)”

구약의 언약을 두 가지로 분류합니다.

첫째는 아브라함 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무조건적이며 인간의 공로가 필요 없습니다.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어 가시는 구속사적 언약을 말하며 천상의 언약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모세의 시내산 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땅과 관련 된 언약으로 이스라엘 백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른 자태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축복과 저주라는 상과 벌로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조건적 언약이며 지상의 언약이라고 합니다.

열왕기의 말씀은 '역사서'가 아니라 '선지서'로 분류하므로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신명기적 사관에 따라 기록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저자의 의도는 “그가 주의 눈앞에서 올바른 것을 행하였으나” 혹은 “자기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하나님의 눈앞에서 올바른 것을 행하지 아니하고” 라는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준행하며 살아가도록 돕기 위해 이러한 축복과 심판을 말씀하셨습니다.

솔로몬은 7년 동안 성전을 먼저 건축한 후에 13년 동안 왕궁 건축을 마쳤습니다.

솔로몬은 자기가 이루기를 원하던 모든 것을 20년 동안에 마쳤습니다.

솔로몬은 성전 건축 뿐만 아니라 주위 여러 나라들과 교역이 활발하였고 외교 또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국력이 나날이 신장했습니다.

더구나 성전봉헌식도 마쳤습니다.
그 후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두 번째로 나타나셔서 주의해야할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이 하나님에게 드렸던 기도와 간구를 들으셨다고 하면서 솔로몬의 기도대로 여호와의 눈길과 마음이 항상 성전을 향하여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영원히 성전에 두시며, 눈길과 마음을 항상 거기에 두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다만 네 아버지 다윗처럼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에만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성전보다도 말씀에 순종하는데 있습니다.

성전은 잘 지었지만 여호와를 따르지 않을 수 있었기에 경고하시려고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계명과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다른 신들을 섬길 때에는 이스라엘을 그 땅에서 끊어 버리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될 때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속담거리와 이야기 거리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전 건물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 솔로몬에게 이것은 큰 충격이요 무서운 경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솔로몬은 훗날 이 말씀을 제대로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지 않고 이방 여인들에게 마음을 빼앗겨 우상숭배를 하였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분열되었으며 성전은 파괴되었고 유대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성전을 잘 지었어도 우상을 섬기면 망하게 됩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의 전성기를 맞아 교회를 아름답게 건축했던 유럽의 여러 나라들의 교회가 지금은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한국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지킬 때는 언약의 약속이 유지될 수 있지만 말씀에서 벗어난 신앙으로 타락할 때는 솔로몬 왕에게 나타나셨던 그 하나님의 저주와 유럽 교회들의 현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지난날 부흥과 성장의 축복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믿고 순종하는 신앙으로 자리를 잡아야 하겠습니다.

♪ 찬양 / 큰 은혜로 묶어 주신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오늘은 사순절 제8일입니다.
사람들의 평가는 어떤 결과물에 의해서 좌우되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러한 사회적 풍토 때문에 더 크고 더 화려하고 더 아름다운 것을 추구합니다.
심지어 세계에서 가장 큰 것이라고 자랑합니다.
과연 이러한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인가?"
한번쯤은 생각해 볼 이유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솔로몬의 성전은 그 당시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서 구하기 어려운 백향목이라는 나무를 사용했습니다.
유명한 석수를 동원하여 돌을 다듬었습니다.
겉모양은 누구든지 부러워할 수 있고 자랑할만 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려는 것은 그 외양 때문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오늘은 그 묻힌 것을 들추어보려고 합니다.

성막(聖幕)과 성전(聖殿)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첫째는 성막은 이동하기 쉽지만 성전은 이동할 수 없습니다.
둘째는 성막은 하나님이 직접 계시하신 설계도에 의해서 제작된 것이지만 성전은 사람의 욕망과 의도에 의해서 시작된 것입니다.

백향목 궁에 거주하던 다윗이 언약궤를 생각할 때 나는 이렇게 화려한 궁에 거하면서 언약궤를 천막속에 두어야 하는가 생각할 때 다소 미안한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선지자 나단도 처음에는 성전 건축에 대해서 동의하였으나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성전 건축을 멈추라고 했습니다.
차라리 다음에 태어날 자손을 통하여 그 일을 이루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출애급 후 480년 솔로몬이 왕이 된 후 4년 만에 드디어 성전 건축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자랑스런 사역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480년 만에 왕이 된 후에 4년 만에 이라고 그 숫자를 정확하게 열거한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자랑하고자 할 때 숫자를 사용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성막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과 함께 거주한다는 상징입니다(출 25:8, 겔 37:27).
이와 같은 상징이 언제 완성됩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됩니다(요 1:14).

그렇다면 솔로몬의 성전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오늘날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를 건축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사람의 욕망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여 자랑하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래 전 수정교회를 방문했을 때 그 규모와 웅장함에 놀랐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교회가 지금은 가톨릭교회에 팔렸습니다.
긍정적인 사고를 자랑하며 그와 사고에 의해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이 마치 신앙이라고 깨우쳤던 것이 무너져 버린 것을 깨닫게 합니다.

♦ 3월 10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열왕기상 6:1∼38
♦ 묵상을 위한 주제 : 전 건축(1절)
♦ 성구 : 이스라엘 자손(子孫)이 애급 땅에서 나온지 사백(四百) 팔십년(八十年)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王)이 된지 사년(四年) 시브월 곧 이월(二月)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전(殿) 건축(建築)하기를 시작(始作)하였더라.  

“전 건축(build the temple)”

열왕기상은 22장으로 구성되었습니다.
1장부터 11장까지는 ‘솔로몬’에 대한 말씀으로
5장부터 9장까지는 성전 건축과 낙성식에 관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열왕기상에서 솔로몬에 관한 말씀은 거의 절반이 성전에 관한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5장에서는 성전 건축을 위한 준비를 소개하며 6장에서는 성전 건축을 시작하는 것에 관한 말씀입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 나온 지 480년이 되는 때 왕위에 오르고 4년 만에 성전 건축을 시작합니다(B.C. 966년).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의 규모는 길이가 육십 규빗(약 27m), 너비가 이십 규빗(약 9m), 그리고 높이가 삼십 규빗(약 13.5m)입니다.
또한 건평은 대략 2,700 평방피트라고 합니다.

성전은 신약교회의 모형이고(고전 3:16, 고후 6:16, 엡 2:21, 히 3:6, 벧전 2:5)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요 2:21).

성전을 건축하는 동안 성전 안에서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조심하여 성전을 건축하였는지를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성전 돌은 이미 밖에서 다듬어 가지고 들어왔기에 성전 내부에서 돌을 깎거나 다시 다듬을 필요가 없었고 오직 끼워 넣기만 했습니다.

이러한 건축 방식에 대한 영적 의미를 존 길(John Gill)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영과 은혜와 말씀으로 먼저 잘라내고 맞추어진 것 외에는 아무 것도 교회의 영적인 건물에 놓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혹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은 믿음이 바르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맡은 사람들은 소란이나 논쟁이나 귀에 거슬리는 소리와 소동 없이 조용하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교회의 교화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교회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전임을 인식하는 거듭난 자들은 교회에서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도 본능적으로 알기에 교회는 소란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와 달리 시끄럽게 소리를 내는 자들이 교회 안에 많다는 것은 성전과 교회의 본질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전을 건축하는데 7년 6개월의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건축 하던 기간 중에 하나님께서는 솔로몬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후일에 빠지게 될 위험은 성전 자체가 목적이 되거나 우상이 되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외적 건축물인 성전이 그들 중에 있다고 해서 그들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것은 아닙니다. 성전이 그들의 믿음의 행위와 삶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훗날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을 자기들의 안전의 보장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성전을 건축한 것도 솔로몬의 삶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거듭난 사람들이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신자 공동체를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성장을 추구하는 교회들의 상호 경쟁은 교회를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도 자원하기만 하면 가입할 수 있는 단체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한시도 바람 잘 날이 없었고 그 안에서 돌깨는 소리와 나무를 자르고 패는 소리가 그치지 않는 곳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안으로부터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이라는 사실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본문이 주는 또 한 가지 교훈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삶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했다는 사실을 기념하고 그것에 붙잡혀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었는지요?

중요한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 이외에 그 어느 것도 대치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나는 교회 공동체의 한 사람으로 정말 주님이 기뻐하는 믿음으로 바르게 성장하고 있는지 점검하며 올바르지 못한 부분을 다듬어 바르게 세워가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 찬양 / 시온 성과 같은 교회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열왕기상(列王記上)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들이 그토록 원하여 세웠던 왕들이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왕은 거의 없었다.
그렇다면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과연 어떠할까?
우리들의 모습도 열왕기에 소개된 역대 왕들과 다를바가 없는 신앙이 아니겠는가!














김익두목사와 김일성




김익두 목사(金益斗 1874∼1950)




목사·부흥사. 황해도 안악(安岳) 출생.
청년시절에는 방탕한 생활을 하였으나 1900년 미국인 선교사 W. L. 스왈렌의 감화를 받고 기독교에 입교
평양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신천교회(信川敎會)에서 근무하였다.

그 후 전국을 순회하면서 신앙운동을 위해 전력하여 한국 최초의 부흥목사(復興牧師)가 되고 황해노회장(黃海老會長) 장로교 총회장(總會長)를 역임하였다.






신사참배 했느냐? 안했느냐?

장로교 총회는 1938년 제27회 총회시, 불법적으로라도 일단 신사참배는 우상숭배가 아니요, 국민의 의무라고 핑계대며 가결했다.
개별적으로 보면 주기철 목사는 전후 5차례나 구속되고, 전후 7년간 옥중 고초를 치르다가 끝내 옥중 순교했다.

김익두 목사는 어떠했는가?
그 당시 서울 승동교회를 8년째 시무하던 때이다.
종로경찰서에서는 김형사를 보내 김목사에게 신사참배를 하도록 강요하며, 협작하며, 때로는 애원까지 했으나 끝내 거절하자, 드디어 강제로 체포 연행하여 극심한 고문을 가했다.

몽둥이로 개패듯 두드려 때리고, 시멘트 바닥에 눕히고 구두발길로 차고 밟는 등 잔인한 방법을 계속하기를 1개월, 이제는 김목사가 빈사상태가 되어 아무런 반응이 없자 목사를 데려가라고 가족에게 연락이 왔다.
그러나 조건을 붙이기를 ‘승동교회에서 설교를 못한다.
목사직은 파면이다.
서울을 떠나라’는 조건부였다.

그러던 1941년 신의주 제일교회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는데 집회를 마치고 나오는 김목사를 일본인 경찰들이 강제로 신의주신사당으로 끌고 갔는데 교인도 몇 사람 함께 끌려갔다.

일본 형사들이 “고개를 숙이게 하고 최경례”라고 고함을 지르며 강제로 김목사의 머리를 눌렀으나, 김목사는 반사적으로 머리를 하늘로 뻗치며 속으로 하나님을 찾았다.
일본 형사들은 김목사와 한참동안 승강이를 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경찰은 본서에 돌아와서 서장에게 “김목사가 신사에 참배를 했다”라고 거짓 보고를 했으므로 그들의 기록에는 그렇게 기록이 되었을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경찰 서장은 친일파 목사들을 불러 놓고 “김익두 목사가 신사참배를 했다”라고 유언비어를 만들어 퍼뜨렸다.
김목사가 그렇게 쉽게 굽힐 것이면 어째서 종로경찰서에서 한 달 동안 모진 고역을 당하면서 투쟁했겠는가?

기독교도연맹 총회장 문제

김익두 목사는 8.15 해방 직후, 이제는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목회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그동안 적을 두고 있던 직전리교회를 담당했다.
또 얼마 안되어 재령 해창교회에서 청빙해 갔다.
그러자 신천서부교회에서 예전의 인연을 들고나와 자기네가 모시겠다고 나서 김 목사는 이 교회에 정착해서 목회에 전념하게 되었다.

조국이 해방되었으나 불행하게도 남북이 분리되었다.
그리고 더욱 불행하게도 북한 지역에는 무신론의 종주국인 소련이 진주하여 군정을 폈다.
그리고 김성주라는 청년을 만주에서 한국독립군을 통솔하던 김일성 장군으로 사칭하여 그를 중심으로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했다.

그런데 공산정권이 북한을 통치하는데 제일 걸림돌이 기독교였다. 당시 북한에 기독교는 3, 4십만의 교인이 있었고, 교인들은 이미 민주주의 생활 훈련이 잘 되어 있고 또 단체적 행동이 수월했다.

더구나 공산주의는 무신론에 근거하고, 기독교는 절대 유신론이라 쉽게 공산 정체에 순응하지 않았다.
교회지도자들은 감언이설로 유혹하고, 무력으로 위협 공갈해도 불응하니, 김일성은 자기 친척 중에 목사 출신이요, 외조부 격이 되는 강양욱을 내세워 소위 ‘기독교도연맹’을 만들어 기독교의 이름으로 기독교를 박해하는데 이용하였다.
목사는 되었어도 목회를 하지 못하게 되는 일이 빈번히 이뤄졌다.

1946년 11월 3일 북한에서는 첫 대의원 선거에 고의적으로 주일을 투표일로 정하고 강행함으로, 기독교가 전면 반대 불참하여 실패하자, 북한 오도연합노회 간부격인 지도자 목사들을 여러 가지 구실을 잡아 모조리 체포 구금함으로, 실제로 교회를 지도체계를 공백상태로 만들었다. 이렇게 상황을 만들어놓고 기독교도연맹은 자기네가 교회의 최고 지도자라고 나서서 총회를 구성했다.

여기에 총회장으로 추대된 분이 곧 김익두 목사이다.
회원들이 총회로 모여서 투표하여 당선된 것도 아니고, 또 총회장이 되었으니 취임식을 한 것도 아니다.
한 번은 강양욱이 신천으로 김익두 목사를 찾아왔다.
강양욱과 김목사는 사제지간이라고 한다.(근거는 미상이다)

강양욱은 선천서부교회 교인들 앞에서 “김목사님은 우리 중앙 정부에서 가장 존경하는 어른이시다. 그래서 이번에 총회장으로 추대되었다”라고 자랑스럽게 광고했다.

교인들도 어리둥절하고 김목사는 “총회장이란 무슨 소리냐?” 라고 따져 물었더니,
“이것은 다만 명예직이니 아무런 부담을 가지지 마시고 그저 가만히 앉아 계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알고 계십시오”라고 대답했다.

김목사가 계속 추궁하자, “오늘은 중앙에 중요한 일이 있어 시간이 없으니 후일 다시 찾아와서 상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고 뺑소니치듯 달아나고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강양욱은 평양에 돌아가서 김익두 목사가 총회장 취임을 승낙했다고 널리 선전했다.
그렇다고 김목사가 어느 방송국에 가서 총회장이 아니라고 거부방송을 할 수 있었겠는가?
또는 신문지상을 통해서 해명 성명서를 낼 수 있었겠는가?
결국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다.

강양욱과 기독교도연맹 간부들은 권위있는 총회장 김익두의 이름을 팔아 산하 목사들과 교인들에게 기독교도연맹에 가맹을 강요했고, 가맹을 거부하면 목회를 못하도록 추방하거나 불법 검거에 나섰다.
그러기에 이런 실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김목사를 오해하여 비난하고 심지어 욕까지 했다.

김익두 목사의 가짜 연설문제

6.25전쟁이 나던 전해 1949년 5월 1일은 북한에서 가장 성대하게 지키는 <노동절>이다.
강양욱은 김익두 목사를 찾아가서 이번 노동절에 김일성 수상께서 특별 초청을 하니 반드시 참석하시라는 간곡한 전달을 하고 돌아갔다.
김목사는 입장이 난처했다. 가서 마음에 없는 연설을 하기도 난처하고, 그렇다고 핑계대고 불참할 수도 없었다.
드디어 7일간의 금식기도 끝에 비장한 결의를 하고 당일 평양에 갔다.

김목사는 정중하게 성경을 펴더니 야고보서 5장 1~6절을 장중하게 봉독하고 “이 성경 말씀은 노동자들의 노임은 주지 않고 부자들이 떼여 먹은 그 노임이 소리 지른다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부자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라고 간단히 설명하고 ”북조선에 김일성씨를 정치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 하신 것이요, 남조선의 이승만씨를 정치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 하세 하신 것입니다”라며 내가 말하려는 것을 내 앞에 여러분이 다 하였으니 지루하게 할 것 없고, 만세나 부릅시다“라고 하며 느닷없이 ”김일성 장군 만세“가 아닌 ”노동절 만세“라고 고함쳤다.

그리고 만세를 마치고 돌아가면서 김일성에게 ”예수를 믿으시오“라고 전도했더니 김일성은 ”예 믿겠습니다“라고 약속하고 헤어졌다.

노동절 행사는 김목사의 권위있는 행사로 끝난 줄 알았는데 노동절 행사가 끝난 2일부터 평양 방송은 김익두 목사의 연설이 며칠동안 되풀이 되어 방송되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전혀 달랐다.
만세부분이 “노동절 만세”가 아니라 “김일성 장군 만세”가 우렁차게 흘러나왔고, 뒤이어 인민공화국의 정치를 찬양하는 반면에 남조선의 이승만 도당을 비난하고 성토하는 내용으로 일관해 나왔으니 어찌하랴? 내용인즉 김목사의 음성을 채취하고, 그 음성을 닮은 서우를 시켜서 김목사의 연설인양 꾸민 것이었다. 김목사는 사실과 다르다고 방송을 할 수도 없고, 신문을 통하여 해명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억울해도 할 수 없이 일방적으로 당하고 말았다.

결국 북한의 모든 인민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고난받으며 견디고 살던 수많은 기독교인들조차 아연실색했다.
그리고 남한의 모든 국민들은 김목사를 의심하기도 하고 비난도 했으며, 일부에서는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순교에 대한 곡해와 해명

세월이 흘러 6.25전쟁이 일어난 지도 벌써 석달이 지났다.
일방적으로 불법 남침했던 괴뢰군들이 3일만에 서울을 함락하고 한 달 만에 남한 전역을 휩쓰는 것 같았으나, 국군이 정비를 갖추고 유엔군이 참전하여 반격을 개시하자 전세는 바뀌었다.
낙동강변에서 괴뢰군 주력부대가 전멸하자, 나머지는 북으로 후퇴하기에 바빴다. 아군이 9월 28일에 서울을 탈환하고, 38선을 돌파하여 북으로 진격해 갈 무렵이었다. 때를 맞추어 북한에 잠재해 있던 반공 청년들이 궐기하기에 이르렀다.

김익두 목사가 거주하는 신천지구는 북한에서도 반공세력이 가장 강력한 지역이었다.
국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해온다는 정보에 발 맞추어 궐기하기로 내정되어 있었는데, 국군이 들어온다는 과잉 정보로 인해 10월 13일에 너무 이르게 의거하게 되었다.
13일 하루 종일 의거한 아군과 패주하는 괴뢰 잔당들과의 전투가 종일 벌어졌다.

김목사는 반가운 이 소식을 듣고, 너무 감격하여 14일 새벽종을 오래쳐서 교인들이 모여들어 새벽예배를 마치고, 국군이 곧 입성할 것이니 환영회를 하자는 광고까지 마치고, 교인들은 일단 돌아가고, 김목사와 20여명이 교인들이 계속 남아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 때 패잔해가던 괴뢰군 일단이 교회당 담 밖에 숨어서 김목사의 광고 소리를 모두 듣고 교회로 습격해 들어왔다.

그리고 강단에서 기도하는 김목사에게 총격을 가하고 다른 교인들에게도 사격하여 현장에서 6명이 숨을 거두고 몇 사람은 중경상을 입고 생명을 유지했다.

김목사는 6.25전에도 월남하기를 강권했으나, “죽어도 양떼와 같이 죽어야지 목자만 살겠다고 월남하겠나?” 라며 언젠가는 순교하리하고 각오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목사의 시신은 교회 뜰에 가매장하였다가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탈환하고, 치안이 유지될 때인 11월 29일 정식 장례를 치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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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인가?
변절자에 대한 토사구팽(兎死狗烹)인가?


북의 인민공화국 정부는 신천지역에서의 은밀한 반공우익 행적을 보인 김익두 목사를 제거한 것은 자신들의 활동무대인 프롤레타리아 계층을 기독교 측에 몽땅 넘겨주었다는 초조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좌익은 절박한 상황에서도 그 동안 자신들에게 물심양면으로 충성했던 김익두 목사를 과감히 처단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러 김익두 목사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현직에 있을 때 조기련 총회장으로 사역한 경력 때문에 사후부터 지금까지 남한에서는 좌경인물로 낙인 받아 왔으며 반면 북에서는 그곳대로 미제의 고용간첩으로 낙인찍힌 불운한 인물이 되었다.

마치 박헌영처럼 남과 북으로부터 동시에 버림받는 듯한 처지가 되어 보였다.
인생 말년의 김익두가 신천 지역에서 은밀히 행했던 친미 반공행각은 북측 입장에서 볼 때는 단죄할 수밖에 없는 변절자이며 배신자에 해당됐다.

그의 인생은 ‘역사의 악’과 ‘개인사의 불행’이 서로 뒤엉켜 있는 듯한 구조를 지니며 좌우의 이념 대립을 떠나 어떤 의미에서 볼 때 당시 사회와 교회를 구원한 걸출한 시대적 인물이었다고 본다.

역사의 정량론(定量論)으로 보아서 김익두 목사만이 그 시대에 좋은 것을 모두 다 갖출 수는 없기 때문이다.

최근까지 한국교회에서는 김 목사를 순교자로 규정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결국에는 순교자의 반열에 올려놓고 말았다.
그가 과연 순교자로서 적합한 자격을 지녔는가의 문제는 나의 관심 밖의 일이다.
그러나 그가 북조선기독교도 연맹의 총회장으로서 활동하던 시기에 연맹가입에 한사코 반대하다가 죽임을 당한 목회자와 신자들이 상당수가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김익두 목사는 당시 부총회장이던 김응순 목사와 함께 이북교회 목회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교회를 살리는 길은 연맹에 가입하는 길뿐이 없다”며 의도적으로 목사들을 연맹에 가입시켰으며 거부하는 목사들에게는 협박도 주저하지 않았다.

평양신학교 교장이던 김인준 목사이성휘 목사, 산정현교회의 방계성 전도사, 이기선 목사 등은 끝내 가입을 거부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했다.

이처럼 김 목사에게 실제로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과 그의 후손들이 아직도 생존해 있는 가운데 굳이 한국교회가 순교자 반열에 올려놓는 것은 아직은 시기적으로 적절하지 않다고 보여진다.

김 목사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과정도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죽음이 가해진 것이 아니라 신천 반공무력 사태에 대한 북측과 좌익계열의 보복 살인 때문이었다.

그의 죽음이 반공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반공 그 자체로는 순교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이처럼 그의 사역 전반에 대한 과학적 자료와 김일성 정부에 협력했던 과거 행적에 대한 신빙성 있는 자료들이 더 많이 수집되어 철저한 고증과 절차를 거친 후, 객관적 평가를 통해 순교자 규정 문제를 논의했어야 했다.

북측의 주장대로 겉으로는 김일성 정부에게 협력자로 일하면서 동시에 은밀히 미군과 국군 그리고 남한 정부와 내통했을 뿐 아니라 신천지역 기독교 청년들을 한데 묶어 반공연대세력을 꾀했던 김익두 목사는 중국 길림에서 선교목회를 하던 손정도 목사와는 또 다른 유형의 사회주의 목회를 시도한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13일의 금요일’에 반공우익 청년들을 규합한 김익두

강양욱 목사와 함께 김일성 수상을 협력하던 김익두 목사는 언제나 마음 한켠에는 자신의 과오와 행적에 대한 뉘우침과 갈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해방되기 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부흥목사가 되어 전국을 순회하면서 신앙운동을 위해 전력해 왔고 교단의 황해노회장과 장로교 총회장를 역임했던 자신이 아니었던가?

해방 전에는 순수한 부흥목회에만 주력했는데 해방이후 이북의 교회가 사회주의 교회로 변모해가는 과정에 자신이 그 일에 주역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돌이켜 보았을 것이다.

전쟁 중이라 해도 남아 있던 500명 정도의 신자들을 거느리며 신천 서부교회에서 목회하던 김 목사는 라디오를 들으며 남쪽소식을 접하거나 날이 갈수록 우익 세력들과의 접촉을 갖는다. 특히 남북을 오가며 우익 지하운동하는 사람들과 빈번하게 접촉하고 있었다.

김익두 목사가 거주하는 신천지구는 이북에서도 가장 기독교 세력이 왕성한 지역이다 보니 반면에 반공세력이 가장 강력한 지역이었다.
이에 국군과 미군을 비롯한 UN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해 온다는 정보에 맞춰 반격을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국군이 진격한다는 과잉 정보로 인해 너무 서둘러 10월 13일이라는 날짜에 반격을 한 것이 가장 큰 비극의 원인이 되었다.

전쟁이 시작된 지 3개월 만에 연합군의 대대적인 공습이 감행됐고 9월 15일, 맥아더의 인천 상륙작전은 낙동강까지 내려온 인민군들의 허리를 끊는데 성공했다.
갑작스런 연합군의 기습으로 허를 찔린 인민군은 당황했고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됐다.
서울 점령 사흘 만에 국군은 38선을 넘었고 뒤 이어 미군과 UN군도 북진에 가세했다.
UN군이 38선을 돌파해서 북진을 하니까 그 소문이 재령과 신천지역에 퍼지면서 김익두 목사의 주변에는 아주 커다란 동요가 일어났다.

당시 신천지역에는 남과 북을 오고가며 음성적으로 우익운동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백색테러로 유명한 한독당 당원, 백의사, 서북청년단 요원을 비롯해 김구 노선에 있는 인물 등 다양한 우익 조직들이 암암리에 활동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이승만 정부에서 파견된 권총을 소지한 첩자들도 남북을 오가며 몰래 활동하고 있었다.
이때 김익두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신천 서부교회 청년들과 읍내에 소재한 교회 청년조직들을 규합하여 국군과 UN군의 전황을 알려주며 반공궐기와 반격의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한편 국군과 UN군의 북진 소식과 함께 황해도 구월산에서는 은밀한 거사가 계획됐다. 구월산에서 봉화를 피우면 신천, 재령, 나무리벌, 북율, 남율, 소호 할 것 없이 한꺼번에 거사가 시작되는 것이며 교회의 반공 우익청년들의 계획은 연합군이 들어오기 전에 황해도 일대에서 반공 봉기를 일으켜서 미리 주도권을 잡는 것이 목표였다. 목표물은 신천군의 행정을 주관해 온 노동당 인민위원회 청사, 그날은 이른바 ‘13일의 금요일’이었다. 이날은 김익두 목사가 죽기 하루 전날이었다.

10월 13일 저녁 5시경이 되자 드디어 우익들의 반공 봉기가 일어났고 교회 청년들로 구성된 다양한 자체 치안대원들 한 사람이 아카보총을 대 여섯 정씩 메고 나타났다. “대한민국만세!. 국군만세!” 하면서 신천읍과 각 마을에는 청년들이 삽시간에 떼를 지어 나타나서 흥분한 상태로 좌익들을 체포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현재 신천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당시 신천군 노동당 인민위원회 청사를 접수하고 봉기에 성공한 우익은 대대적인 좌익 색출에 돌입했고 끔찍한 학살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 모든 사건은 김익두 목사가 죽기 하루 전날인 10월 13일에 도화선이 되어 터진 것이다. 마침 UN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퇴각하던 좌익계열 청년들이 우익반공계열 수백 명을 대상으로 예비 검속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지하에서 우익반공 조직 운동을 하고 있던 신천 서부교회와 동부교회 청년학생들을 비롯한 온천교회, 구당교회, 석당교회, 간성리교회, 은천교회, 지봉교회 등에 다니던 교회의 청년학생들 수백 명이 반발하면서 무장봉기를 일으키며 닥치는 대로 학살을 감행한 것이다. 13일 이후, 신천군 인민위원회 청사와 관공서를 장악한 우익청년들은 닷새간의 전투 끝에 신천군 전역을 장악하여 평양탈환을 목표로 북진하던 미군 제1기갑 사단의 통로를 열어주는 계기를 마련해 줬다


새벽기도를 드리던 중에 총격을 당한 김익두 목사

광란의 살육전이 계속되던 13일 밤이 지나고 어느덧 14일 새벽 4시가 되었다.
이제 신천지역은 우익 반공세력과 미군이 주도하는 것으로 모든 전세가 끝났다고 판단한 김익두 목사는 교회의 종탑으로 가서 그동안 전혀 하지 않았던 새벽종을 치고 교인들에게 새벽예배가 있음을 알렸다.

당시는 교회의 종을 칠 수 없을 시기였다.
종소리를 들은 교인들이 여기저기서 50명 정도가 모였다.
김 목사와 교인들은 긴장감과 안도감이 교차하는 심정으로 감격적인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다.
그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 합시다”라고 선언하며 “만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하겠네”를 찬송하는 것으로 새벽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설교를 모두 마치고 이윽고 광고시간이 되었다.

“나는 그 동안 하나님께 서너 가지 기도 제목을 두고 기도해 왔는데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셨어요.
첫째는 우리 교인들이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날을 속히 주옵소서.
둘째는 신천읍내 5일장을 다시 열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였는데 이제는 5일장이 서게 되어 우리 성도들과 자유롭게 만날 수 있게 되었어요.
셋째는 하루 속히 인민군대가 무너지고 성도들이 자유롭게 예배를 드리게 하옵소서.
넷째는 신앙고백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날을 달라는 것이었는데 마침내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마음 놓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때가 되었으니, ‘하나님 만세! 예수 만세!’를 부릅시다.”

김 목사는 광고시간을 이용해 교인들과 함께 신앙적인 만세삼창을 우렁차게 했다.
그는 이어서 ‘국군이 곧 입성할 것이니 우리 교회가 환영회를 개최하자’는 말로 모든 광고를 마치고 예배를 끝냈다.
예배를 끝내자 참석한 신자들의 절반 정도는 집으로 돌아가고 나머지 20명 정도가 김 목사와 함께 예배당에 계속 남아 기도를 하고 있었다.
김익두 목사는 강대상 옆 방석 위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이때까지도 예배당 밖에서는 좌익세력과 우익반공세력이 밤이 맞도록 서로 쫒고 쫒기는 살육전을 벌이고 있었던 살벌한 시간이었다.
때마침 전세가 불리해진 좌익세력들이 간혹 교회 뒷산 길목을 이용하여 간간히 도주를 거듭하는 중이었다.

김익두 목사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좌익과 인민위원회 대원들은 김 목사를 제거하기 위해 교회당 담 밖에 몰래 숨어서 예배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예배를 마치자 어둑어둑한 예배당 안에 구둣발로 진입한 그들은 강단 위에서 기도하던 김익두 목사를 찾아냈다.
그리고 깜짝 놀라 기도를 멈추고 말리려던 교인들을 향하여 총격을 가했다. 이어서 총구는 김 목사를 향하여 발사되어 현장에서 모두 6명이 즉사를 하고 몇 사람은 중경상을 입는 비극이 벌어진 것이다.
순간적으로 발생한 일이었다.
교회의 기둥이었던 채 장로와 임성근, 김채호 전도사, 그리고 맨 주먹으로 대항하던 청년 두 명, 이렇게 모두 6명이 절명했으며 당시 주일학교 교사와 성가대 대원으로 봉사하던 21살의 처녀 이순일은 창문을 넘어 밖으로 도망치다가 죽창에 뒷 어깨가 찔려 실신하였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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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02. 04. 2022(Fri) -03. 03. 2022(Thu)




아라우나(삼하 24:16)와 오르난(대상 21:15)은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 손을 들어 멸하려 하더니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 곁에 있는지라”(삼하 24:16).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멸하러 사자를 보내셨더니 사자가 멸하려 할 때에 여호와께서 보시고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멸하는 사자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 곁에 선지라”(대상 21:15).

다윗이 인구를 조사함으로써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불쾌히 여겨 염병을 보내시므로 70,000명이 죽었다.
파멸하는 천사가 예루살렘에 와서 하나님의 진노는 누그러지고 그 천사가 여부스 사람의 타작마당에 섰다.
그러나 사무엘하와 역대상은 이 타작마당의 주인의 이름을 각각 다르게 기록하기 때문에 질문이 생긴다.
그 천사가 누구의 타작마당에 섰는가?
그 여부스 사람은 아라우나인가 아니면 오르난인가?

두 이름을 갖는 관습 

여호와의 천사가 누구의 타작마당에 나타났는지를 알기 위해선 분석이 조금 필요하다.
이 두 기사에는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와 “여부스 사람 오르난”이라는 두 이름이 언급된다.
구약에서 두 개의 다른 이름을 가진 사람을 많이 볼 수 있다(예컨대, 아브람/아브라함, 야곱/이스라엘, 이드로/르우엘, 요람/여호람, 요아스/여호아스, 여호야긴/여고니야 등등).

이런 관습은 고대 애굽과 메소포타미아에서도 볼 수 있다.
예컨대,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왕하 15:29)은 불(Pul)로도 불렸다(대상 5:26).
한 사람의 개성, 기능, 경험, 혹은 삶의 정황 등이 바뀌면 제2의 이름이 주어지기도 했다.
야곱(“빼앗는 자”)이 얍복강 가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 이스라엘(하나님과 겨뤄 이김“)이 된 것이 그런 예에 속한다(창 32:28).
그러므로 아라우나가 오르난과 동일인이라고 해서 놀랄 필요는 없다.
아라우나라는 이름이 왕의 공식적 칭호였다고 제안하는 자들도 있다.

아라우나라는 이름이 “자유인” 또는 “귀족”을 뜻하는 힛타이트어라고 설명되어 왔다.
다른 학자들은 이 말이 “주인”을 의미하는 후르어에서 파생했다고 여긴다.

삼하 24:16에서 이 이름은 정관사와 함께 나오고, 따라서 23절은 “아라우나 왕”을 가리키는 말로 번역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라우나는 여부스 족의 예루살렘의 마지막 왕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J. D. Douglas, ed., The Illustrated Bible Dictionary, 3 vols. [Leicester, England: Inter-Varsity Press, 1980], s.v.“Araunah”).

또한 원래 히브리어 본문은 자음으로만 기록돼 있었고, 따라서 자음만 보면 이 두 이름은 거의 똑같다.
모음 부호는 구약의 마지막 책 말라기가 기록된 후 거의 1,000년이 지나서야 본문에 붙여졌다.
모음과 어미는 이 기사들이 기록되던 시기에 동일한 자음을 다르게 발음한 것에 따라 붙여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이름은 언어학적으로 관련돼 있고, 따라서 동일한 히브리어 어근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요압(Joab)
여호와는 아버지가 되신다

요압은 다윗의 누이 스루야(Zeraiah)의 아들로 아비새(Abishai), 아사헬(Asahel)와 형제(삼하 2:13).
스루야의 아들 요압다윗의 신복들도 나와 기브온 못 가에서 그들을 만나 함께 앉으니 이는 못 이쪽이요 그는 못 저쪽이라

여부스족을 이기고 다윗의 지휘관이 되었다(역대상 11:6).
다윗이 이르되 먼저 여부스 사람을 치는 자는 우두머리와 지휘관으로 삼으리라 하였더니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먼저 올라갔으므로 우두머리가 되었고.

요압은 다윗을 도와 여러 업적을 이루지만 반면, 다윗의 아들 압살롬을 비롯 다윗의 친인척을 죽이며 다윗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한 인물 중이 하나입니다.
요압은 결국 다윗의 아들 솔로몬에 의해 처형당합니다.



요압(?~기원전 965년)
'여호와는 아버지 이십니다.'
'여호와는 하나님 이십니다.'

다윗 왕 시기 때 활약하며 여러 이민족들을 무찔렀으나 다윗의 허락없이 두 장군을 죽인 죄로 솔로몬 왕 원년에 숙청당했다.


1. 요압은 생명의 소중함을 모르는 잔인한 사람이다

(삼하 3:27-30) 세상에는 폭력적이고 잔인한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의 모습 중 하나가 무정함과 무자비함이다(롬 1:31). 바울도 말세에 하나님을 떠난 악한 인간들에게 나타나는 특징은 ‘무정함’, ‘원통함을 풀지 않음’, ‘사나움’이라고 말하였습니다(딤후 3장).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사납고 폭력적이고, 망각적인 모습이 있다. 원래 하나님께서 만드신 에덴동산에서 인간은 죄가 없었고 양과 같이 폭력성과 공격성이 없었다. 그러나 죄를 짓고 나서 아담의 DNA가 후손들에게 전달되면서 폭력성, 잔악성, 잔인함, 생명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는 속성들이 인간 안에 들어와 인간 세계를 망쳐버리고만 것이다. 가인과 아벨을 보면, 형이 동생을 쳐 죽였다(창4:8). 배워서 죽인 것이 아니고 그 안에 살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라멕은 가인의 후예로 전쟁에 나가서 자기 몸에 입은 상처에 대하여 보복하기 위해 젊은 소년까지도 죽였다는 기록이 나옵니다(창4:23-24). 출애굽기 1장을 보면, 이집트의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숫자가 늘어나고 점점 더 강성해지자 모든 히브리 남자 아이들이 태어나면 모두 하숫가에 던져버리라는 대학살 명령을 내린다.

마태복음 2장에도 보면, 동방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분노했던 유대의 분봉왕 헤롯이 베들레헴 지경의 두 살 아래 아기들을 다 죽여 버리라는 집단학살을 명령한다. 이런 것들이 인간의 공격성, 야수성, 잔악함, 포악함을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정도는 다르지만 사람은 모두 어느 정도 포악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요압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1) 요압의 아브넬 살인사건(삼하 3:27-30)

다윗 왕은 적들을 품어주는 포용과 융화정책을 썼다. 그런데 요압은 그렇지 않았다. 사울이 죽고 그의 아들 이스보셋이 젊은 나이에 왕이 되자 아브넬이 2년 동안 섭정을 했다. 왕이 이스보셋이라도 정치적인 힘은 아무것도 없고 아브넬이라는 군대 장관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을 때, 다윗이 남쪽의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왕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다윗은 대세가 자신에게 이미 기울어졌지만 사울의 군대장관인 아브넬을 끌어안기 위하여 그를 위하여 큰 잔치를 베풀고 축복한 후 그를 다시 돌려보냅니다. 그런데 요압은 이 같은 다윗의 결정에 대하여 불복하고 사람을 보내서 다시 아브넬을 헤브론에 유인해 온 뒤에 칼로 그를 죽였다. 자신의 동생 아사헬을 죽인 것에 대한 보복이라고 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다윗이 국가 통일에 방해를 받고 많은 피를 흘리게 됩니다. 사실 아사헬이 아브넬에게 죽임을 당한 사건은 아브넬 입장에서는 정당방위였습니다. 아브넬을 죽이려고 쫓아간 아사헬에게 아브넬은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끝까지 추격하다가 창에 찔려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압은 그 일에 대하여 책임이 동생에게 있음을 자각하고 아브넬에 대하여 복수심을 갖지 않았어야 합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 일진데 전쟁에서 동생의 경솔한 행동으로 죽임 당한 것을 모두 원수로 적대시하고 보복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 뜻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2) 요압의 아마사 살인사건(삼상 20:4-6)

압살롬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다윗은 예루살렘을 버리고 피난을 갑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왕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그때 다윗이 압살롬에게 붙어서 군대 장관을 하던 변절자 아마사의 지위를 다시 회복시켜준다. 다윗의 융화정책입니다

그러나 요압 대신 아마사가 군대 사령관이 되었을 때,  요압의동생 아비새는 세바의 반역을 진압할 때  자신의 형인 요압을 불러들였고 요압은 아마사에게 조용히 인사하는 척하다가 갑자기 그의 배를 찔러 죽여 버린다. 이 사건은  다윗의 융화정책을 또한번 지체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이번에도 요압은  자기가 다윗 왕국을 장악하기 위해 경쟁대상을 제거한 것입니다.

요압은 그 소식을 듣고 아마사에게 조용히 인사하는 척하다가 갑자기 그의 배를 찔러 죽여 버린다. 자기가 다윗 왕국을 장악하기 위해 경쟁대상을 제거한 것입니다. 자기 지위에 걸림돌이 된다면 친인척도 마다하지 않고 죽이는 그런 잔인한 사람이다. 아마사는 요압과 사촌 관계입니다(이모의 아들: 삼하17:25).

요압은 무죄한 두 사람을 살인하므로써 다윗의 국가통일에 큰 어려움을 주었습니다.

(3) 에돔 땅의 남자를 전멸시킵니다(왕상 11:15-16)

열왕기상 11장에 보면, 다윗 왕이 에돔 지역에 전쟁을 하러 나가서 그 백성들을 통치하려고 했는데 에돔 사람들이 대적하게 되어 전쟁을 하면서 많은 유대의 군대들이 피해를 입게 됩니다. 군대 장관이었던 요압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6개월 동안 에돔 땅에 주둔하면서 에돔 땅의 모든 남자들을 전멸시킵니다. 이것이 바로 요압의 잔인성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무정한, 무자비한, 사나운, 동물적인 폭력성과 공격성을 갖고 살아갑니다. 이 잔인함, 포악함은 하나님의 성품이 아닙니다.

우리는 맹수가 아니라 공격성이 없는 양입니다. 잔인하고 폭력적인 그런 DNA를 우리는 버려야 됩니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말씀의 능력으로, 십자가의 힘으로 양처럼 변하는 역사가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요압은 제어가 안 되는 교만한 사람입니다(삼하 3:30, 39)

요압은 통제 불능의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이들이 너무 힘이 강하여 제어하기가 힘드니 주께서 그 악한 일을 행한 대로 갚아주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30절). 즉, 요압은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통제 불능이 된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14-15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죽기 전에 쓴 편지가 나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를 개척하고 목회하면서 부흥시켜 놓은 다음에 자신의 후임자였던 디모데에게 교회를 맡기고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노파심에서 젊은 목사 디모데에게 목회를 잘 하라는 의미에서 편지 두 편, 즉 디모데전서와 디모데후서를 씁니다. 그는 죽기 전까지 썼던 디모데후서 4장에서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니 그를 주의하고"라고 합니다. 바울에게 사법권이 없으나 자신이 할 수 있는 말은 딱 한 마디 합니다. "주께서 그에게 행한 대로 갚으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랑과 온유의 하나님의 사람, 바울도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알렉산더는 교회는 들어왔지만 거듭나지 못하고, 옛 사람이 살아 있는 통제 불능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요압이나 알렉산더처럼 누구의 말을 안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어가 안됩니다. 그는 저주스러운 인간입니다. 이 정도까지 가면 갈 데까지 다간 사람들입니다.

존 오웬(John Owen)

그가 존경했던 인물이 바로 시골사람, 땜장이였던 존 번연(John Bunyan)목사입니다.
가끔 존 번연이 런던에 와서 설교할 때마다 그의 설교를 들으러 갔다고 합니다.
찰스 왕이 존 오웬을 불러 물었습니다.
당신은 학식과 지위와 권위 있는 사람인데 왜 시골에서 온 땜장이 설교자, 존 번연의 설교를 들으러 가냐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존 오웬은 할 수 있거든 제 학식, 학위, 모든 지식, 신학을 모두 팔아버리고 존 번연이 가지고 있는 그 영성을 사고 싶다고 답했습니다.

이 존 번연이 『천로역정』을 쓴 사람입니다.
존 오웬은 들을 귀가 있었습니다.
사람은 들을 귀가 있어야 됩니다.
요한계시록에는 귀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안 듣고, 제어가 안 되는 요압과 알렉산더와 같은 인물들을 통하여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주님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습니다.
율법도, 권면도 안 통하는 교만한 사람은 갈데까지 간 통제 불능의 저주받은 인간입니다.
바로 요압이 이런 부류의 사람이었다.

3. 요압은 어리석은 판단으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왕상 1:7-8, 2:5-6)

에스키모인과 늑대 사냥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단 칼을 늑대를 유인하는데 쓰일 동물의 몸에 쩔러 넣습니다.
그 칼에 피와 기름이 엉겨 붙으면 끄집어내서 밖에 내놓으면 추운 영하 날씨의 모두 얼어붙습니다.
그 후에 동물에 두 번째로 집어넣습니다.
이렇게 30번, 40번 해서 피와 기름이 엉겨 붙어 이것이 칼인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두꺼워지면 칼을 세우고 손잡이를 땅에 묻습니다.
늑대가 피냄새를 맡고 다가와서 칼을 계속 핥으면서 얼음이 녹아 칼날이 드러나게 되는데, 그래도 늑대는 멈추지 않고 계속 칼을 빨게 됩니다.
자기가 마시는 피가 자기 피인데도 착각하고 계속 빱니다.
그렇게 몇 시간 뒤에 나가보면, 늑대가 죽어 있습니다.
에스키모 선조들의 지혜입니다.

사람에게 있는 탐심, 권력의 냄새를 쫓아가다가는 자기를 파괴시킨 늑대 같은 인생이 요압이었습니다.
다윗이 늙어서 죽을 때가 되었지만 후임자를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와중에 다윗의 넷째 아들인 아도니야가 다시 반역을 일으킵니다.
그는 용모가 준수하였고 아버지 다윗이 섭섭하게 한 적이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때 아도니야와 함께 공모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던 자가 바로 요압입니다(왕상 1:5-8).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어도 요압은 다윗 왕을 떠나지 않았지만 결정적으로 아도니야의 편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다윗의 뒤를 이어서 막내아들 솔로몬이 왕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요압은 자신의 권력욕망 때문에 정치적인 줄서기를 잘못하여 아도니야를 옹립하려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왕상 2:5-6, 28-35).
어리석은 판단으로 비참하게 죽습니다.

요압의 인생은 이렇게 살지 말라는 거울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오늘 요압의 인생에서 부정적이고, 파괴적이며 결정적 실수에 대한 말씀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맹수처럼 잔인하게 살지 말고 양처럼 온순하게 살아야 합니다.
통제불능의 교만함을 버리고, 겸비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됩니다.
욕심에 이끌려 죽는 자리에 줄서기 하지 말고,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고, 바르고 성경적으로 판단 할 때에 주님께서 우리 인생길을 열어주십니다.
요압을 거울삼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인생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 믿음의 성도, 성령 충만하여 승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 3월 3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24:1∼25
♦ 묵상을 위한 주제 : 인구를 조사하라(1절)
♦ 성구 :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向)하여 진노(震怒)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感動)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人口)를 조사(調査)하라 하신지라.

“인구를 조사하라(take a census)” 

다윗이 인구 조사를 명령한 목적은 이스라엘의 힘을 과시하고 스스로 위로를 얻고 자만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전쟁 욕구와 승전에 대한 과신으로 인하여 마음이 교만해지고 다른 민족들을 경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다윗에게 인구 조사의 명을 받은 군대장관 요압은 하나님께서 강하게 하실 터인데 왜 이런 일을 하느냐고 충고했습니다. 요압의 충고는 올바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를 무시하고 악을 강행하였습니다. 

인구 조사 후 다윗은 인구 조사의 동기가 교만과 자기 과시욕에서 나온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잘못을 깨달은 것은 290일 간의 인구 조사가 끝난 다음이었습니다. 이 기간은 다윗에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어둠의 시기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갓을 다윗에게 보내셔서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세 가지 재앙을 제시합니다.

첫째는 칠 년의 기근
둘째는 삼 개월의 전쟁
셋째는 삼일의 온역 이었습니다.

인구조사를 실시한 범죄의 대가로 세 가지의 징벌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다윗은 삼 일 동안의 온역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죄에 대한 결과는 극심하여 칠만 명이 온역으로 죽어갔습니다. 칠만 명이나 되는 인구의 감소는 인구 조사를 통해 만족을 얻으려 했던 다윗 왕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백성들이 온역으로 죽어 가는 모습을 보고 다윗이 하나님께 회개하며 탄식하자 하나님께서는 갓 선지자를 다윗에게 다시 보내셨습니다. 갓 선지자는 다윗에게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라”고 제안했습니다.

이는 구원의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갓 선지자는 다윗에게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아라우나에게 값을 지불하고 그 땅을 사서 그 곳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자 재앙이 그쳤습니다.

새벽마다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힘입어 하늘의 뜻을 이루어가는 진실한 삶을 회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PWmBJY_d0Y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2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23:1∼39
♦ 묵상을 위한 주제 : 다윗의 마지막 말(1절)
♦ 성구 :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올리운 자(者), 야곱의 하나님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者),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者)가 말하도다.  

“다윗의 마지막 말(the last words of David)”

다윗은 지난 세월을 돌아보며 지난 삶을 회고합니다.
22장은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23장은 언약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마지막 유언의 글을 남겼습니다(열왕기상 2장).

사무엘하 23장은 다윗이 지난 삶을 돌아보며 자신의 백성과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마지막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1절).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세워진 자, 야곱의 하나님께로 부터 기름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가 말하노라.”


다윗은 이새의 아들이라고 소개합니다.

다윗은 왕이 아니라 이새의 아들이라고 소개하는 것은 자신을 낮출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왕이 아니라 이새의 아들이었으며 기름부음을 통하여 그 능력이 자신에게서가 아닌 오직 하나님께로 부터 내려 온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라고 소개합니다.


다윗은 내가 가장 잘 하는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며 낮고 천한 자에게 기름을 부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으로 세워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라고 고백함은 노래 잘하고 찬양 잘하는 그의 입술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합니다.

다윗의 마지막 인생에서의 깨달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축복받는 자의 삶과 저주받는 자의 모습을 비교하는 것이었습니다.

축복의 삶과 저주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마음과 뜻을 헤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축복 받은 자들은 위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아래로는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할 때 가정에서, 일터에서 하나님의 속성인 공의를 실현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그의 마지막 삶의 여정 속에서 마지막 깨달음을 고백하였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관계가 가장 중요함을 강조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최우선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주님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후손들에게 물려줄 가장 위대한 유산은 우리들이 세속에 물들지 않고 오직 주님과 동행하는 삶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다윗과 함께 전쟁터에 나가 싸웠던 용사들이라며 그들의 이름을 소개합니다(23:8∼39).

우리는 모두 주님의 군사요, 주님의 용사들입니다.
다윗은 그의 마지막에 자신을 위하여 싸운 37명의 용사들을 한 명, 한 명 이름을 소개한 것처럼 우리 주님께서도 자신을 위하여 동행하며 매일같이 주님의 이름으로 싸웠던 그의 용사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오늘도 능력의 말씀으로 영적 싸움에 승리하는 십자가 군병으로 힘차게 일어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예수이름으로 승리를 얻었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1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22:1∼51
♦ 묵상을 위한 주제 : 큰 구원(51절)
♦ 성구 : 여호와께서 그 왕(王)에게 큰 구원(救援)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者)에게 인자(仁慈)를 베푸심이여 영원(永遠)토록 다윗과 그 후손(後孫)에게로다 하였더라.

“큰 구원(great victories)”

사무엘하 21장, 22장, 23장, 24장을 학자들은 "부록" "후기" "삽입" 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 기자는 부록과 같은 말씀으로 소개한 것이 아니라 다윗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헤세드(자비, 은혜)에 대한 깊은 신앙적 교훈을 마지막으로 소개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시편 18편의 표제는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와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로 여호와께 아뢰어 가로되” 라고 소개합니다.

한편 사무엘하 22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대적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씀으로 여호와께 아뢰어 가로되”

시편 18편의 표제와 사무엘하 21장 1절의 내용은 같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 다음의 내용은 모두 같습니다.

그러므로 시편 18편과 사무엘하 22장의 말씀은 같은 내용이라고 하겠습니다.

내용이 같다는 것은 역사적 사건이 분명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환난의 때를 여호와께 간구하므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능력 있는 왕이었지만 자기의 힘과 군사력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팔 즉 하나님의 능력을 절대적으로 의지했습니다.

다윗은 사망의 문턱과 극심한 환난 중에서도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으므로 여호와께서 들으셨으며 응답하셨다고 찬양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악인들에게는 분노를 터뜨리시며 그들을 멸하십니다.

다윗은 강한 원수와 많은 물에서 건지시고 구원하셔서 넓은 곳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구원하신 까닭은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순종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의롭고 깨끗한 심령을 결코 간과하지 않고 상을 내려주십니다.

구원은 공로가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선한 양심에 기초한 경건함을 항상 유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고 정미하여 그것을 의지하는 자에게 방패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정미하다는 것은 일체의 흠도 없이 완전함을 말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이룬 많은 성공과 업적을 열거하며 이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얻은 것이며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 돌립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생존하시며 찬양을 받으실 구원자로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입에서는 항상 감사와 찬양이 흘러넘칩니다.

복잡하고 어려운 현실에서 믿음의 사람들이 날마다 주님을 찬양할 수 있는 비결은 능력의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좋은 방향으로 인도하시며 선한 결과를 이루어주실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주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에 새롭게 경험하는 은혜가 풍성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찬양 / 내가 매일 기쁘게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2월 28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21:1∼22
♦ 묵상을 위한 주제 : 그 후에야(14절)
♦ 성구 :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의 뼈와 함께 베냐민 땅 셀라에서 그 아비 기스의  묘(墓)에 장사(葬事)하되 모두 왕(王)의 명(命)대로 좇아 행(行)하니라 그 후(後)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爲)하여 기도(祈禱)를 들으시니라.

“그 후에야(After that)”

사무엘하 21장의 표제는 “다윗이 기브온 사람의 말을 들어주다”이며 이렇게 시작합니다.

“다윗의 시대에 해를 거듭하여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그 후에야'라는 말씀은 다윗의 기도에 응답하셨던 하나님의 가르침을 실천한 후를 말합니다.

과연 무엇을 실천한 후를 의미할까요?

다윗이 이스라엘을 통치하던 시기에 3년간 기근이 계속되므로 백성들은 먹을 양식이 없어 굶주렸습니다.

다윗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 이유를 알려주셨습니다.

예전에는 가뭄으로 인한 기근이 심각할 때는 “기우제(祈雨祭)”를 드렸습니다.

다른 용어로는 “무우(舞雩), 무우제(舞雩祭), 우제(雩祭), 한제(旱祭), 수제사(水祭祀)”라고도 합니다.

반면에 “기청제(祈晴祭)”는 비를 멈추게 해 달라는 제사를 말합니다.

기우제보다 빈도는 낮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몇 번 등장한다고 합니다.

또 겨울 가뭄 때는 “기설제(祈雪祭)”를 지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기근의 원인을 해결하려고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다윗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라의 지도자는 나라를 잘 다스리고 지키며 백성들의 의식주를 책임져야 합니다. 따라서 백성의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그 책임이 막중한 것이기 때문에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인격적인 사람만이 지도자로 나서야 합니다.  

이스라엘에 기근이 임하게 된 원인은 “사울과 그 집안사람들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것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 시 기브온 사람들은 여리고와 아이 성에 대한 소문을 듣고 꾀를 내어 사신들에게 해어진 전대와 찢어져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싣고 낡은 신과 옷을 입고 다 마른 곰팡이가 난 떡을 예비한 후 여호수아를 찾아와 아주 먼 곳에서 왔으니 우리와 약조하자고 제안하므로 여호수아는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릴 것이라고 언약을 맺었습니다(수 9:1-15).

그런데 사울 왕과 그 무리들이 그 약속을 무시하고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것입니다.

생명에 대한 약속은 어떤 경우에든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죄인을 향한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시인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생명을 보장하시고, 하나님의 구원에 들어오게 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이며 비밀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로마서10:9∼10)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한복음 1:12)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약속에 대한 경험이 내 생각을 바꾸며 내 삶을 바꾸도록 역사하므로 새로운 피조물의 삶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싸움은 죽느냐 사느냐의 치열한 싸움인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의 매일의 삶은 생명을 지키려는 선한 싸움과 같습니다.

블레셋의 거인들과 같은 공중의 권세를 잡은 세력들은 예수 안에서 약속된 생명을 빼앗으려고 마치 굶주린 사자가 먹이를 찾는 것처럼 달려들고 있습니다.

세상을 지배하려는 힘과 생명을 보존하려는 신앙은 매일같이 영적 전투 현장에서 치열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싸움에서 승리하여 최후의 영광을 얻기까지 영적 긴장과 강한 영적 야성을 갖춰야 합니다.

이와 같은 환경을 조성하려면 나라의 지도자를 세워야 할 때 올바른 선택과 결정이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지도자를 잘못 세우면 그만큼 영적 싸움의 현장은 더 치열해지고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은혜를 경험하며 그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협력하고 노력하여 승리의 기쁨을 함께 나눠야 하겠습니다.   

♪ 찬양 / 마귀들과 싸울지라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2월 26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20:1∼26
♦ 묵상을 위한 주제 : 여호와의 기업(19절)
♦ 성구 : 나는 이스라엘의 화평(和平)하고 충성(忠誠)된 자(者) 중(中) 하나이어늘 당신(當身)이 이스라엘 가운데 어미 같은 성(城)을 멸(滅)하고자 하시는도다 어찌하여 당신(當身)이 여호와의 기업(基業)을 삼키고자 하시나이까.  

“여호와의 기업(the LORD's inheritance)”

'여호와의 기업'이란 반란을 일으켰던 '세바'가 도망한 성 "아벨"을 말합니다.

19장에서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이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웠던 압살롬이 에브라임 수풀 전투에서 전사한 후에 다윗을 왕으로 모셔오자고 결의합니다. 이때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는 다윗을 왕으로 모실 수 없다며 이스라엘 사람들을 충동하여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이 동조하지 않았으나 다윗은 유다 사람들과 더불어 예루살렘으로 복귀합니다.
이때 압살롬의 반역에 의해 예루살렘 궁에 남아있던 후궁 열 명을 별실에 가두고 죽는 날까지 동침하지 않으므로 생과부로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윗은 "아마사"를 군장으로 임명하고 유다 사람을 동원하여 지키라고 하였으나 왕이 정한 기한에 지체 되므로 "아비새"에게 '세바'가 더 위험한 인물이므로 그를 쫓으라고 명령합니다.

요압의 일행이 예루살렘을 떠나 기브온 큰 바위 근처에서 아마사가 맞이하러 나오므로 요압은 아마사에게 "형은 평안하뇨?" 하며 문안하는 것처럼 말하며 아마사의 배를 칼로 찔러 살해합니다. 그리고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한 군사들이 아마사의 시체를 보고 동요할까봐 시체를 밭으로 옮기고 옷을 그 위에 덮었습니다. 

요압과 그의 군사들이 세바를 잡으려고 아벨 성벽을 쳐서 헐고자 할 때에 그 성에서 지혜로운 여인 하나가 크게 외쳤습니다.
아벨 성의 여인은 반역자 세바만 내어주면 아벨 성을 무너트리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은 후에 세바의 머리를 베어 요압에게 던졌습니다.

요압은 무리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왕에게로 나갔습니다.

요압은 이스라엘 군대 장관으로, 브나야는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의 장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아도니람은 감역관으로, 여호사밧은 사관이 되었으며 스와는 서기관, 사독과 아비아달은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라는 다윗의 대신이 되었습니다.

아벨 성의 지혜로운 여인처럼 한 사람으로 인하여 성이 초토화되려 할 때 지혜를 발휘하여 아벨 성을 지킬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도 나라의 위기가 닥쳐왔을 때 지혜로운 여인을 요구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지혜로운 여인처럼 시대의 흐름과 궤도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정확하게 꿰뚫고 올바른 분별력으로 나라와 민족의 위기를 지켜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찬양 / 나 맡은 본분은

https://www.youtube.com/watch?v=5bb3rVpLcAo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2월 25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19:1∼43
♦ 묵상을 위한 주제 : 왕은 돌아오소서(14절)
♦ 성구 : 모든 유다 사람들로 마음을 일제(一齊)히 돌리게 하매 저희가 왕(王)께 보내어 가로되 왕(王)은 모든 신복(信服)으로 더불어 돌아오소서 한지라.

“왕은 돌아오소서(Return YOU)”

다윗 왕의 백성들은 압살롬의 반란군을 쳐부수고 승리의 기쁨에 넘쳐 있었습니다.
다윗을 따르던 사람들은 이 기쁨을 다윗에게 알려 함께 기뻐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다윗 왕은 압살롬의 죽음에 대해 매우 슬퍼한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던 사람들의 마음은 다윗의 슬픔으로 인해 조용히 성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요압은 반역자 압살롬의 죽음을 슬퍼하는 다윗 왕에게 만일 왕이 반란군을 쳐부수고 기뻐하는 사람들을 맞이하지 않는다면 한 사람도 왕과 함께 머물지 않을 것이며 왕이 젊었을 때부터 당한 모든 화보다 더 심한 화를 당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제서야 다윗은 성문에 앉아 백성들을 맞이했습니다.

지도자 앞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는 왕의 눈치만 살피는 사람입니다.
둘째는 왕에게 아뢸 것을 아뢰고 바른 길을 선택하도록 하는사람입니다.

요압은 다윗 왕에게 왕이 왕으로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고 냉정하게 말할 수 있는 충신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오늘의 시대에도 요압과 같은 일군이 필요합니다.
요압과 같은 일군이 없기 때문에 나라가 흔들리고 어지럽습니다.

예루살렘 궁으로 돌아오는 다윗 앞에 여러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특히 바후림에 있는 베냐민 사람 시므이는 반란군에 쫓겨 피난가던 다윗에게 돌을 던지며 욕을 하며 저주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시므이를 처단해야 한다는 말에 다윗은 오늘 같은 날 어찌하여 사람을 죽이겠느냐 하며 시므이에게 너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사울의 손자 므비보섹에게는 전후 사정을 모두 듣고 거짓으로 보고하여 사울의 기업을 얻었던 것을 시바와 기업을 절반씩 나누라고 합니다. 이때 므비보셋은 왕이 살아서 돌아온 것으로 만족하니 시바에게 모든 것을 갖도록 하라고 말합니다.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쓴 므비보셋의 너그러움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에게 다윗은 함께 요단을 건너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함께 지내자고 합니다.
그러자 바르실래는 나는 나이가 많아 늙었으므로 내 고향 땅에서 머무는 것이 좋다며 나를 대신하여 김함을 데려가 달라고 합니다.
바르실래와 같이 내가 누릴 부귀영화를 오히려 다른 사람을 추천하여 그 자리를 얻게하는 부드러움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잠시 다윗은 고통스런 시간을 보냈지만 모든 것이 순조롭게 정리된 후에 용서할 사람은 용서하고 은혜를 베풀 사람에게는 은혜를 베풀어주며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멋진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루속히 잘못된 사상과 이념에 사로잡혀 질서를 어지럽히고 파괴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헤세드를 경험하므로 모두가 함께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그 날을 기대하며 기도할 뿐입니다.

오 주여
이곳에 오셔서
자비를 베풀어 주옵소서
서로 다른 것 때문에
빼앗고 속이는 전쟁과 같은 삶이 아니라
협력하며 나누는 마음으로
손에 손을 잡고 다 함께
평화의 나라를 세우게 하옵소서.

♪ 찬양 / 돌아와 돌아와

https://www.youtube.com/watch?v=xzSSyajUpI8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다윗의 부성애와 압살롬의 반역에 대한 문제

- 정치(政治)와 신앙(信仰)을 혼돈하지 말아야 한다!
정치는 반대 세력을 이겨야만 가능하다.
신앙은 반대 세력을 용서해야 승리한다.
정치와 신앙을 혼돈하면 세상을 점점 더 어지러워질 수밖에 없다.


다윗의 셋째 아들 압살롬은 정말 아름답고 흠이 없는 아들이었다.
이스라엘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고도 전해진다(삼하 14:25).
그리고, 지혜가 있었다.
압살롬이 다윗에게 죄를 저질러서 일단 용서를 받았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다윗이 압살롬을 계속 만나주지 않자 다윗 왕의 총애를 받는 요압의 밭에 불을 질러서 요압을 집으로 찾아오게 만들었다.
그리고, 요압을 설득해서 왕에게 나아간 사례도 있다.
그러니 아비의 입장에서 얼마나 마음에 품고 싶고 사랑하는 존재였겠는가?
다윗은 압살롬에게 여러 특권을 베푼다.


압살롬에게는 다말이라는 예쁜 누이가 있었다.
그런데, 자기의 형 즉 다윗의 맏아들인 암논이 자신의 누이를 좋아해서 겁탈하였다.
암논에게 올무를 놓고 자신의 집으로 불러서 하인들을 시켜서 죽여 복수를 한다.

여러 자식의 부모의 입장이 되면, 그 자식들이 서로 사이 좋게 지내는 것을 보면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진다고 한다.
자식들이 갈라져 싸울 때에는 이마에 기러기가 한마리씩 그려 진다고 한다.
더구나 압살롬이 암논을 살해하는 것을 들은 다윗은 심히 통곡하고 마음에 안타까움이 가득해진다.
이대로 부자 사이가 멀어지나 했었다.

그러나, 압살롬이 다윗의 눈을 피해서 3년간 다른 곳에서 지냈기에, 다윗은 압살롬을 더 이상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보고 싶은 마음이 점점 생기게 되었다(삼하 13장).
다윗은 결국 아버지의 사랑하는 마음으로 압살롬을 용서한다.

압살롬이 자신의 아버지를 향해 반기를 들다

압살롬은 점차 야심을 드러낸다.
자신을 위해서 병거와 말을 준비하고, 백성들의 인심을 얻기 위해서 왕의 이름을 팔아서 행동하게 된다.
이미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 모았기 때문에 인심은 압살롬에게로 흐르게 되고,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해서 아비 다윗을 죽이려는 압살롬의 계획은 점진적으로 진행 되었다.
압살롬은 계교를 써서 헤브론으로 아버지 다윗왕의 부하들을 데려가서 제사를 지내는 척 하면서 왕 즉위식을 한다.
헤브론은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고 왕이 된 장소이기도 하며,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은 장소이기도 하다.
이렇게 준비를 거의 마친 압살롬은 다윗의 고문이요, 지혜가 충만한 아히도벨을 자신의 조력자로 만들어 내서 다윗을 몰아내고 자신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데 큰 원동력으로 삼았다.

다윗이 예루살렘성에서 도망하다

다윗은 압살롬의 반란에 손 쓸 겨를도 없이 예루살렘 성에서 도망하게 된다.
사람이 위기를 당하게 되면 그 사람의 깊이를 알게 된다고 했다.
다윗은 자식에게 쫓겨 나서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상황에서조차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제사장에게 다시 돌아가 있기를 명하였고, 밀정이 될 수 있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 후새를 압살롬쪽으로 잠입시켜서 자신의 밀정으로 삼는다.
어려운 상황에서 믿기 어려운 이방사람이 함께 있기를 청했을 때에도 믿음으로 그를 거두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사람의 깊이가 깊어도 어려움을 바로 피할 수는 없는 바 다윗은 자신의 낳은 자식에게 생사를 넘나드는 쫓김을 당하게 된다.

전열을 정비한 다윗. 다윗과 압살롬의 최후의 전투와 압살롬의 죽음

마하나임에서 전열을 정비한 다윗은 군사들을 정비하고 최고의 장수 요압에게 압살롬과 싸우도록 지시한다.
다윗도 출전하고자 하나 사람들이 출전하지 못하도록 말린다.
다윗은 그 말을 들으면서 모든 장군들과 백성에게 다음 내용을 명령한다.

왕이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 하니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모든 군지휘관에게 명령할 때에 백성들이 다 들으니라(사무엘하 18:5)

부모의 입장이 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자신을 죽이기 위해서 칼날을 들었던 자식에게 전쟁을 하러 나가면서 너그러이 대우하라(살려주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들었을 때 이해할 수도, 행할 수도 없는 대목인이다.
다윗의 대장군 요압은 압살롬의 머리가 나무에 걸려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 다윗의 명을 어기고 결국 죽이고 만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다윗은 싸움을 전하는 전령이 도착하면 다른 것은 묻지 않고 오직 압살롬의 안부만 물었다.

삼하 18:28 아히마아스가 외쳐 왕께 아뢰되 평강하옵소서 하고 왕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이르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리로소이다 그의 손을 들어 내 주 왕을 대적하는 자들을 넘겨 주셨나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하니라 …

삼하 18:32 …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

다윗은 전쟁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 시점 만큼은 다윗의 관심의 전부는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었던 것이다.

삼하 18:33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다른 설명이 더 필요할까.
다윗의 마음을 너무도 자세히 나타낸 이 성경 구절에서 우리는 다윗과 압살롬에 대하여 그 다윗의 내리 사랑을 마음 속에서부터 깊이 새길 수 있다.
얼마나 사랑하였으면, 자신에게 칼을 겨눠 죽일려고 했던 자녀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고 대성통곡을 했던 것이다.
이 이야기를 볼 때마다 마음이 저리고 아프고 쓰려 온다.
온 왕국의 미래가 걸린 싸움에서도 오직 다윗의 관심은 압살롬이었고, 압살롬은 다윗의 전부였던 것이다.
이것이 부모의 사랑이고, 하늘에서 우리를 낳으신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 2월 24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18:1∼33
♦ 묵상을 위한 주제 : 왕은 나가지 마소서(3절)
♦ 성구 : 백성(百姓)들이 가로되 왕(王)은 나가지 마소서 우리가 도망(逃亡)할찌라도 저희는 우리에게 주의(注意)하지 아니할 터이요 우리가 절반(折半)이나 죽을지라도 우리에게 주의(注意)하지 아니할 터이라 왕(王)은 우리 만명(萬名)보다 중(重)하시오니 왕(王)은 성(城)에 계시다가 우리를 도우심이 좋으니이다.

“왕은 나가지 마소서(You must not go out)”

‘왕은 나가지 마소서’ 이 말은 다윗에 대한 백성들의 마음을 가늠케 하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다윗 왕은 큰 충격을 받고 좌절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을 따르는 사람들의 헌신적인 협력과 도움에 인해 용기를 회복했습니다.  

다윗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압살롬의 반역에 가담한 사람들의 전쟁이 시작됩니다.  

압살롬의 반란군은 다윗을 죽이려고 다윗이 피난해 있는 곳까지 쫓아왔습니다.

뛰어난 전략가인 다윗은 자신에게 속한 군사들을 재편하여 군대를 정비한 후 군을 삼 대로 나눠 각각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가 통솔하도록 합니다.

군대를 재편하여 적극적인 공세 작전을 명령한 다윗이 전투에 참여하려고 할 때 백성들은 왕은 전쟁에 참여하지 말고 후방에서 지켜보는 것이 바람직한 작전이라고 제안한 것이 "왕은 나가지 마소서!" 라고 하겠습니다.

모든 백성들과 군장관들이 다윗의 생명을 소중히 여겼던 현상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윗은 세 장수들에게 비록 반란을 일으켰던 아들이지만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할 것을 부탁합니다.

다윗의 군대가 출정하여 에브라임 수풀에서 싸웠습니다.

이 전투에서 압살롬의 반란군은 2만 명 가까운 희생자를 내면서 패하고 말았습니다.

압살롬이 큰 상수리나무에 걸린 것을 본 다윗의 군사가 요압 장군에게 보고했을 때 요압은 그 군사에게 왜 압살롬을 죽이지 않았느냐고 꾸짖었습니다.

그 군사는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는 다윗의 분부를 상기시키면서 요압의 명을 거절하였습니다.

이에 요압은 손에 작은 창 셋을 가지고 가서 아직 살아 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찔렀습니다. 그리고 요압의 병기를 맡은 소년 열 명이 압살롬을 에워싸 쳐 죽였습니다.

압살롬은 생전에 자식이 일찍 죽어 자기 이름을 남길 방법이 없었으므로 스스로 자기를 위하여 비석을 세웠습니다.

아히마아스는 요압에게 승전 소식을 다윗에게 전하겠다고 자청했습니다. 그는 제사장 사독의 아들로서 평안과 승리의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의 역할을 자청한 것입니다.

그러나 요압은 아히마아스 대신 구스 사람을 전령으로 보냅니다. 그 이유는 압살롬의 전사 소식을 듣고 다윗이 그 전령에게 화를 내릴 수도 있을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요압은 아히마아스를 귀하게 여겼으므로 혹시 당할지도 모르는 화에서 그를 피하도록 하기 위해 구스 사람을 대신 보냈습니다.

구스 사람의 뒤를 이어 아히마아스가 소식을 전하려고 달려갔습니다.

다윗이 두 전령에게 압살롬의 안부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 아파하며 슬퍼했습니다.

오늘의 시대를 바라보는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이 다윗이 압살롬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처럼 비통함을 느끼게 합니다.

왜냐하면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어떻게 무너진 공산주의 사상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권력을 잡고 후퇴하는 역사를 따라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사의 주인이 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던 것처럼 어지러움과 혼돈과 거짓된 사상과 이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무너트리고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질서를 반드시 세워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과 소망을 갖고 자유대한민국을 사랑하는 마음에 흔들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믿음으로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일에 모두가 함께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 찬양 / 어느 민족 누구게나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유명한 역사가 찰스 베어드(Charles a. Beard 1874-1948)는 역사를 연구한 끝에 다음 네 가지 교훈을 말했다.

첫째, 개인이나 국가가 권세욕에 날뛰면 반드시 망한다.

하나님과 백성이 무서운 줄 모르고 권세욕에 사로잡혀 날뛰는 지도자가 나타날 때면 이미 역사는 망조로 접어든 것이다

둘째,하나님의 공의의 맷돌은 천천히 도는 것 같지만 모든 악을 빠짐없이 분쇄한다.

역사의 맷돌이 너무 천천히 돌아 하나님이 계신지 의심하기도 하지만 결국 의는 의로, 불의는 불의로 나뉜다 시간이 지나면 어느 순간에 정의와 불의가 반드시 드러난다.
셋째, 벌이 꽃에서 꿀을 도둑질해 가지만 오히려 그것이 열매를 맺게 하는 것처럼, 인류 역사에는 언제나 강탈하는 자가 나타나 악을 행하지만 그로 말미암아 행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전개된다.

넷째, 날이 어두워질수록 별이 선명하게 보이듯이 세상에 암흑과 혼란이 깊어 갈수록 진리의 가치와 희망의 깃발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 모두를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하나님은 안 계신 것이 아니다 인간이 죄악으로 눈이 어두워져 하나님을 보지 못할뿐이다. 인간과 역사의 위기는 자원이 바닥나 굶주리거나 전쟁이 발발하는데 있지않다. 인간과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잊어버린 데 있다 세상만물을 창조하신 분, 인간의 삶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분, 의와 불의를 판단하시는 공의의 신이 누구인지 아는사람에게는 위기는 위기가 아니다


미국의 역사가 찰스 베어드(Charles A. Beard, 1874~1948)에게 기자들이 와서 물었다.
"박사님, 인류 역사를 연구하면서 깨달은 것을 핵심적으로 요약하면 무엇입니까?"
그러자 찰스 베어드 박사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역사를 연구하면서 네 가지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이 네 가지가 그 많은 시간, 세계 역사를 연구하면서내가 얻은 것의 전부입니다."
그가 깨달은 네 가지 진리는

첫째는 하나님의 계획에는 차질이 없다

벌은 꽃이 만들어 놓은 꿀을 탈취한다.
하지만 벌이 꿀을 빼앗아가면서 동시에 꽃가루를 옮겨 수정이 되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한다.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벌과 같은 강도가 항상 악을 행하지만, 그들을 통해서도 합력해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차분히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역사에는 실패가 없다.

둘째는 하나님의 맷돌은 천천히 돌아간다

하나님의 맷돌이 너무나 천천히 돌아가서 사람들은 과연 하나님의 심판이 있는지를 의심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맷돌은 보드랍게 갈아 결국은 의는 의로, 불의는 불의로 골라내고야 만다는 것이다.
인생에 있어서 100년이라고 하면, 굉장히 긴 시간이지만 인류의 역사로 보면 그것은 순간이다.
역사를 배우면 50년, 100년, 200년이 흘러가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심판하셨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셋째는 어두움이 깊을수록 별이 또렷하게 보인다

어두워야 별이 보인다.
어두움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다.
따라서 "이제 모든 게 끝났다.""우리는 망했다.""소망이 없다"는 비관할 필요가 없다.
암흑과 혼란이 깊어 갈수록 소망의 별이 나타날 때가 된 것을 역사가 증명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하나님이 망하게 하실 때는 교만하게 하신다

역사의 입장에서 본 하나님이 어떠한 것을 멸하려 하실 때는 개인이건 국가이건 막론하고 교만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자기 자랑, 자기 의, 자기 교만에 빠질 때 반드시 망하게 된다.
교만에 날뛰는 개인이나 국가나 단체나 민족을 보면 망할 때가 가까운 것이다.
어떤 나라나 개인이 교만한 모습을 보이면,"곧 망할 때가 됐군!"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정답이다.

지팡이는 험한 길을 갈 때 필요한 것이고,
로프는 높은 산 오를 때 필요한 것입니다.
빛은 어두운 땅에 필요한 것이고,
믿음과 소망은 시대가 암울할 때일수록 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역사는 절망하는 사람에게는 기회를 주이 않는다.
절대 희망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주어라고 하겠다.
희망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가 올 것이다.

♦ 2월 23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17:1∼29
♦ 묵상을 위한 주제 : 여호와께서(14절)
♦ 성구 :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모략(謀略)은 아히도벨의 모략(謀略)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禍)를 압살롬에게  화(禍)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謀略)을 파(破)하기로 작정(作定)하셨음이더라.  

“여호와께서(For the Lord)”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예루살렘 궁을 떠나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심지어 다윗의 전략가 아히도벨이 압살롬을 지지하므로 압살롬의 반역은 성공하는 것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아히도벨의 전략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명령과 같은 것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입니다(16:23).

아히도벨은 시대를 읽을 수 있는 눈과 통찰력을 갖춘 아주 유능한 전략가 이었습니다.

아히도벨이 다윗을 버리고 압살롬을 지지하였다는 것은 사람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윗을 깨우치기 위한 섭리라고 하겠습니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에게 일만 이천 명의 용사들을 동원하여 다윗을 죽이겠다는 전략을 제안했습니다.

이때 압살롬은 후새를 찾았습니다.

후새는 다윗 왕이 압살롬의 진영에 머물며 압살롬의 전략을 사전에 알기 위하여 심어놓은 사람이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압살롬의 반역과 다윗의 도망이라는 극과극으로 치달은 급박한 상황속에서 압살롬에게 유리했던 전세가 급속하게 다윗에게 유리하도록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던 매우 중요한 사건을 소개합니다.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전략보다는 오히려 후새의 계획을 선택했습니다.

아히도벨의 제안은 다윗 왕만 제거하면 민심이 압살롬에게 돌아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최소한의 피만 흘리고 반역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는 아주 좋은 계책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아히도벨의 계략을 압살롬을 비롯하여 이스라엘 장로들이 모두 옳다고 했습니다.

아히도벨의 전략을 모두가 찬성하였기 때문에 행동으로 옮기면 반역은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은 아렉 사람 후새를 불러 후새의 전략을 들어보자고 합니다.

후새는 다윗의 친구로 예루살렘을 떠날 때 함께 동행하지 말고 압살롬의 진영에 머물면서 압살롬 진영의 전략을 파악기 위하여 보냈던 심복이었습니다(15:37).

압살롬이 후새를 불러 그의 의견을 물은 것은 다윗 왕을 죽이려는 계획을 신중하게 진행하려는 것이었지만 그 배후에는 압살롬의 반역을 실패로 돌리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라고 하겠습니다.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계략은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셨음이더라”(14절)

후새는 압살롬에게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바닷가의 모래같이 왕께로 모으라’고 합니다.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는 이스라엘 전역을 가리키는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후새는 이와 같은 표현으로 압살롬의 왕권이 이미 이스라엘 전역에서 인정되고 있으며, 압살롬의 말 한마디면 온 백성이 따를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면서 압살롬을 추켜세웠습니다.


뿐만아니라 후새는 계속해서 ‘친히 전장에 나가라’고 합니다.

이것은 압살롬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압살롬을 전장으로 유인하여 죽이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은 후새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전에 다윗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은 다윗 보다 더 큰 공을 세워 왕위를 더욱 견고히 하려는 공명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들이여,

사람은 누구나 헛된 영광을 쫓아 자기 이름을 드러내려는 욕심에 사로잡혀 압살롬과 같이 패망의 길을 좋아하는 타락한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타락한 본성 보다는 겸손히 주님을 닮아가는 신앙생활에 성공하는 소금과 빛의 비밀을 간직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내 맘이 낙심되며

https://wwww.youtube.com/watch?v=TO0y8-Kj-NQ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농부의 기도

어느 마을의 농부들이 하나님께 요구하였습니다.

'하나님, 우리들이 원하는대로 일년만 날씨를 변화시켜 주세요.'

하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그래, 좋다. 일년동안 너희 원하는대로 날씨를 변화시켜 주마.'

그래서 농부들은 자기들의 경험에 의해서 하나님께 요구했습니다.
'하나님, 지금은 비를 주세요.'
'하나님, 지금은 햇빛을 주세요.'
'하나님, 지금은 바람을 주세요.'

가을이 되어 들판에 곡식이 잘되어 추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농부들은 신이 나서 추수를 하고 탈곡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막상 탈곡기에 넣어 탈곡을 해보니 알곡이 없습니다.

'아니, 하나님, 왜 알곡이 하나도 없습니까?' 농부들은 의아해서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들이 원하는대로 다 주었다. 비를 원할 때는 비를, 햇빛을 원할 때는 햇빛을, 바람을 원할 때는 바람을 주었다. 그런데 너희가 언제 나에게 알곡을 달라고 하였느냐? 너희들은 알곡 달라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제서야 농부들은 자신들의 경험에 의해서 하나님께 주문하는 것보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구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 2월 22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16:1∼23
♦ 묵상을 위한 주제 :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12절)
♦ 성구 : 혹시(或時)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冤痛)함을 감찰(監察)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詛呪) 까닭에 선(善)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The LORD will see my distress.)”

시바(Ziba)는 므비보셋의 사환입니다.
특별히 다윗 왕이 친구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위하여 사울 왕의 기업을 모두 므비브셋에게 상속하도록 배려하고 시바를 사환으로 임명했습니다.

시바는 많은 음식을 나귀에 싣고 다윗을 찾았습니다.

실은 그 많음 음식은 므비보셋의 소유물입니다.
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고 시바는 다윗의 환심을 얻으려고 이와 같은 것을 준비한 것입니다.

후에 알게 되지만 시바는 므비보셋을 배반하고 다윗을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므비보셋이 함께 오지 않고 시바만 온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여 "네 주인(사울 왕)의 아들이 어디있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시바는 므비보셋을 속였지만 다윗이 위기에 처했을 때 다윗을 따라나섰으므로 므비보셋의 기업을 넘겨받았습니다.

므비보셋은 다윗을 배신한 것이 아니라 다리가 불편하여 시바의 숨은 의도를 알면서도 쫓아오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떠나 피신할 때 마침 사울의 집 족속 시므이가 다윗을 향하여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하며 돌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아비새가 다윗에게 저 사람의 머리를 자르겠다고 단호하게 말할 때 다윗은 "여호와께서 저 사람을 통하여 다윗을 저주하라" 하신 것이므로 저주하게 내버려 두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모습에서 다윗의 위대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반역과 시므이의 저주를 들으며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깊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압살롬의 반역과 시므이의 저주로 나타났다는 분명한 믿음과 생각이 다윗으로 하여금 더욱 겸손하게 다듬었습니다.

나의 고통과 아픔을 해결해주고 나를 높여야만 하나님을 인정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나를 이끄실지라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영광을 돌리겠다는 믿음이 다윗의 위대함이라고 하겠습니다.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자신의 죄를 알고 겸손하게 자기를 낮출 줄 아는 사람만이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반드시 나의 원수를 갚아주실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혹시 그렇게 하실지도 모른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그리하지 아니하실지라도 다윗은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만사형통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만사불통할지라도 하나님은 항상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더 좋은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그 날을 기다리는 변함없는 믿음을 회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 주여
믿음의 지도자
소망의 지도자
사랑의 지도자를 세워주셔서
남과 북을 하나로 묶어
세계 선교를 위한
복음의 나라가 되어
하나님이 주인되는 세상
이루게 하옵소서.

♪ 찬양 / 나 어느 곳에 있든지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생명!

텍사스 낙태금지법,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2020년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을 임명하면서 미국 대법원은 보수 6 대 진보 3의 구도로 재편됐습니다.
보수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대법원이 올해 뒤집을 것으로 예상되는 판결 중 하나가 여성이 임신을 중절할 권리를 인정한 로(Roe) 대 웨이드(Wade) 판결입니다.  

* 로대 웨이드 판결이란?
임신 중절 여부를 선택할 권리는 아이를 밴 여성에게 있으며, 임신부의 선택을 정부가 강제하거나 제약할 수 없다.


태아의 심장 박동이 감지되기 시작하는 임신 6주 이후의 낙태를 사실상 전면 금지한 미국 텍사스주의 낙태금지법이 지난 1일 예고한 대로 발효됐습니다.
미국 대법원은 법의 시행을 막아달라며 낙태 클리닉과 시민단체가 제출한 긴급 청원을 기각했습니다.

임신 중절 여부를 선택할 권리는 아이를 밴 여성에게 있으며, 임신부의 선택을 정부가 강제하거나 제약할 수 없다고 명시한 대법원의 로(Roe) 대 웨이드(Wade) 판결 이 나온 게 지난 1973년의 일입니다.

이후 공화당과 종교 단체를 비롯한 보수 세력은 줄기차게 낙태를 금지하거나 제약하려고 노력해왔습니다.
텍사스주의 새 낙태금지법은 보수 진영에는 지난 반세기에 걸친 노력이 결실을 볼 수 있는 획기적인 법입니다.
반대로 진보 진영은 상당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그동안은 1992년에 있었던 가족계획연맹(Planned Parenthood) 대 케이시(Casey) 판결에 따라 아이가 태어났을 때 스스로 연명할 수 있는 시기로 간주하는 임신 22~24주가 낙태를 허용하는 기준이었습니다. 24주 이후의 낙태는 아이는 물론 산모도 위험할 우려가 크기 때문에 대체로 금지돼 있거나 엄격한 제약이 따릅니다. 하지만 그전에는 임신부가 임신을 중단하기로 할 때 국가가 과도하게 개입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준이 텍사스 낙태금지법과 함께 임신 6주로 앞당겨진 겁니다. 임신 6주에는 임신 사실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텍사스주는 어떻게 법과 다름없는 대법원 판례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법안을 제정할 수 있던 걸까요? 여기에는 보수가 절대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대법원의 대법관 구도도 한몫했지만, 기존의 낙태 금지 시도와 달리 새로운 전략을 반영한 법조문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텍사스주 낙태금지법의 디테일을 찬찬히 뜯어보면, 보수 진영은 진보 진영이 그동안 써온 전략을 훌륭히 벤치마킹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텍사스주의 법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미국 대법원과 대법관의 구성을 잠깐 생각해 봅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재선에 실패했지만, 4년 임기 동안 무려 3명의 대법관을 지명했고, 지명한 대법관은 모두 논란 끝에 의회의 비준을 받았습니다. 특히 지난해 (진보 성향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이 사망하며 생긴 공백을 (보수 성향인)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으로 메우면서 대법원은 보수 6대 진보 3의 구도로 재편됩니다.

특히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여성의 임신 중절을 금지하거나 제약하는 판결을 여러 차례 내린 코니 배럿 판사가 대법관이 되면서 6:3의 구도가 확립되자, 가족계획연맹을 비롯한 시민단체들은 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엎는 건 시간 문제라며 우려했습니다. 반대로 대법원은 어디까지나 헌법을 해석하고 법을 제정, 집행한 절차가 적법했느냐를 따지는, 기본적으로 보수적이고 의사결정 과정이 느릴 수밖에 없는 기관이므로, 벌써 반세기 가까이 이어지며 자리를 잡은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대법원이 앞장서서 번복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공화당이 다수인 텍사스주 의회와 그렉 애봇 주지사가 효과적으로 공략한 점이 바로 이 점입니다. 즉, 지난 5월에 애봇 주지사가 서명했고, 지난 1일 발효된 낙태금지법은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비롯해 여성의 낙태를 국가가 금지하고 제약해선 안 된다는 미국의 현행법을 실질적으로 어긴 법입니다. 그러나 이 법 자체에 관한 소송이 벌어져 지방법원, 항소법원을 거쳐 대법원까지 가려면 상당히 긴 시간이 걸립니다. 앞서 말했듯이 대법원이 판결을 내리는 과정은 빠르지 않으니까요. 또 매년 7천여 건의 사건이 대법원에 접수되지만, 이 가운데 대법원이 판결을 내리는 사건은 100여 건에 불과합니다.

안전한 임신 중절은 여성의 권리라고 주장하는 가족계획연맹 등 시민단체들은 대법원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정식 재판 대신) 긴급 청원을 넣었습니다. 헌법을 명백히 어긴 법을 텍사스주가 제정했으니, 대법원이 이 법을 무효로 되돌려달라고 요청한 겁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6:3이라는 보수 우위의 구도가 위력을 발휘합니다.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텍사스주의 낙태금지법의 효력을 대법원이 당분간 정지해야 한다며 진보 성향 대법관들과 같은 의견을 냈지만, 로버츠 대법원장이 없어도 여전히 다수인 보수 성향 대법관 다섯 명이 이 사안은 대법원이 아직 판단할 사안이 아니라며,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 법과 관련해 하급 법원을 거친 정식 재판이 있던 것도 아니며, 구체적으로 텍사스주 낙태금지법이 헌법의 어떤 점을 어떻게 어긴 건지 따져보고 다퉈봐야 하는지도 아직 분명하지 않지만, 어쨌든 대법원은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위헌 소지가 다분한 법을 주가 제정, 집행하는 걸 방관한 셈이 됐습니다.

소수 의견 편에 선 대법관 4명은 이례적으로 각자 서면으로 의견을 제출했습니다.
(원래는 한 명이 대표로 의견을 내는 게 보통) 소냐 소토마요르 대법관이 헌법을 명백히 위반한 법이 버젓이 시행된 걸 모른 척하고 넘어가는 상황을 개탄하며, 좀처럼 쓰지 않는 격정적인 표현을 썼습니다.

텍사스주의 법은 헌법이 보장한 여성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충격적인 법이다. 이런 법을 막지 않고 있다니, 다수 의견에 선 대법관들은 지금 모래에 머리를 처박고 있다. (The majority of the courts are burying their heads in the sand.) – 소토마요르 대법관

우리말로는 ‘눈 가리고 아웅’ 한다는 표현과 비슷합니다.

보수 진영은 오랫동안 낙태를 금지하거나 최소한 국가가 개입할 수 있는 주 수를 앞당기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성의 임신 중절 권리를 제약하는 법은 그 자체로 로 대 웨이드 판례를 어기는 셈이 돼 연방법원에서 효력이 취소되곤 했습니다. 주 의회를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어 법이 통과되더라도 거기까지였던 겁니다. 그렇다면 왜 연방 법원은 텍사스주가 제정한 이번 낙태금지법을 막지 못했을까요? 법조문을 자세히 뜯어보면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선 텍사스 낙태금지법에는 임신 중절을 못 하게 하는 주체가 명시돼 있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낙태금지법들은 주지사나 주 법무부장관 등 임신 몇 주 이후의 낙태를 금지하는 주체를 명시했습니다. 명시된 주체는 곧바로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비롯해 연방법, 나아가 헌법을 어긴 주체로 특정돼 소송 대상이 됐죠. 그러면 연방 법원이 나서서 법을 무효로 한 겁니다.

그런데 텍사스 낙태금지법은 임신 중절을 금지하는 주체가 주지사나 법무부장관이 아니라고 오히려 명확히 제외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직접 낙태를 못 하게 막는 법을 집행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소송 대상이 될 수도 없는 거죠. 그렇다면 누가 낙태를 막죠? 텍사스주 의회는 그 권한을 주 정부를 제외한 이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위임(deputize)했습니다. 누구나 임신 6주 이후에 낙태하려는 사람, 임신 중절 수술을 해주는 클리닉 등 낙태에 도움을 주는 사람을 찾아 신고하면 포상금을 주겠다고 한 겁니다.

정확히 말하면 정부가 직접 포상금을 주는 건 아니고, 낙태를 시도하는 사람이나 임신 중절 수술을 하는 클리닉 등 낙태금지법을 위반하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나 이들에게 민사 소송을 제기할 수 있고, 소송에서 이기면 최소 1만 달러의 배상금과 소송 비용을 받을 수 있게 했습니다. (피고는 재판에서 이기더라도 소송 비용을 원고에게 청구할 수 없습니다.) 임신 중절을 돕는 사람의 범주도 매우 넓은데, 낙태 클리닉을 소개해주거나 클리닉까지 우버를 타고 갈 때 우버 기사도 피고가 될 수 있습니다.

법의 목적은 명확합니다. 임신 중절에 관여하는 모든 이들에게 막대한 비용 부담을 질 수 있다는 공포를 심어(terrorize) 낙태를 막겠다는 거죠. 법이 발효된 뒤 실제로 텍사스주에서는 임신 중절 수술이 자취를 감췄습니다. 낙태 클리닉과 시민단체들은 법이 위헌이라며 연방 법원에 소를 제기했지만 잇따라 기각됐습니다. 주지사나 주 법무장관이 법을 집행하지 않는다고 명시됐기 때문에 이들에게 소를 제기할 수 없다고 판단한 거죠. 이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대법원에 긴급 청원을 제기하는 것밖에 없었고, 그 결과는 앞서 설명한 대로입니다.

텍사스 낙태금지법이 성공을 거두면서 공화당이 주 의회 다수당인 다른 주들에서도 비슷한 법이 잇달아 제정될 것으로 보입니다. 진보 진영에는 악몽의 시작이 될지도 모르죠. 흥미로운 건 정부가 직접 나서서 법을 집행하는 주체가 되는 대신 특정하기 어려운 개인들에게 법을 집행할 권한을 위임한 보수 진영의 전략이 실은 진보 진영에서 오랫동안 써온 전략이라는 점입니다.

덴버대학교 조슈아 윌슨 교수가 워싱턴포스트 멍키 케이지에 한 분석을 보면, 특히 인종 차별을 금지한 민권법(civil rights laws)을 정착시키는 데 진보 진영은 개인 차원에서 줄기차게 소송을 제기하는 전략을 세워 효과적으로 활용했습니다. 당시 보수 진영은 민권법을 어겼다며 소송을 제기할 유색인종이나 여성 등 소수자들이 소송 비용을 마련하기 어려워할 거로 생각했지만, 오히려 진보 성향의 젊은 인권 변호사들이 인종 차별 사례들을 적극적으로 모아 소송을 대리하고 나서면서 민권법은 꾸준히 판례를 쌓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경험을 쌓고 성장한 대표적인 법조인이 고 긴즈버그 대법관일 겁니다.

법조계가 진보 성향 일색으로 바뀌는 데 두려움을 느낀 보수 진영은 1980년대부터 보수적인 변호사, 법조인을 양성하려는 장기적인 전략을 세우고 로스쿨을 지원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노력이 낳은 대표적인 법조인이 코니 배럿 대법관입니다. 텍사스주 낙태금지법을 고안하고 제정하는 데는 이런 보수적인 로스쿨 출신의 변호사들이 많은 역할을 했습니다.

임신 중절 권리를 옹호하는 시민단체들은 텍사스주의 낙태금지법을 무너뜨리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할 겁니다. 먼저 대법원에 긴급 청원이 올라갔던 사안이 여전히 연방 항소법원에 계류 중이므로, 해당 판결이 나면 이 문제를 법원에서 다툴 수 있습니다. 또한, 텍사스주의 낙태 클리닉이 소송당할 것을 각오하고 임신 중절 수술을 해줄 수 있습니다. 그럼 보수 단체들이 해당 클리닉을 고발할 테고, 법정 공방이 시작되겠죠.

♦ 2월 21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15:1∼37
♦ 묵상을 위한 주제 : 사람의 마음을 도적하니라(6절)
♦ 성구 : 무릇 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에게 압살롬의 행함이 이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도적하니라.

“사람의 마음을 도적하니라(He stole the hearts of the men.)”

압살롬은 다윗 왕에게 백성들이 송사하려고 재판을 청하러 올 때에 그 사람을 불러 “너는 어느 성 사람이냐?” 묻고 난 후에 “네 일이 옳고 바르지만은 네 송사를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않으셨다” 하고 송사하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대한민국 20대 대통령 선거일이 앞으로 17일 남았습니다.

그동안 주사파 세력들에 의해서 사회 여러 분야가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심지어 '무상복지'라는 슬로건에 의해서 국가부체가 1인당 약 1,800만원 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상태가 계속되면 머지않아 국가는 파산될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오늘의 말씀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의미심장하다고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질한 압살롬은 4년 후에 헤브론에서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이스라엘의 인심이 모두 압살롬에게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은 압살롬을 피하여 예루살렘을 떠나야 했습니다.

압살롬을 따라 예루살렘에서 헤브론으로 간 사람은 모두 이백 명이었습니다.

헤브론에 입성한 압살롬은 이스라엘 모든 지파에 정탐꾼들을 보내고 나팔 소리와 함께 압살롬이 왕이 되었다고 외치게 합니다.

압살롬의 계획대로 반역은 시작되었습니다.
아히도벨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압살롬의 반역에 합류하였습니다.

아히도벨은 다윗의 절친한 친구입니다.
그가 다윗을 배반한 이유는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밧세바의 아버지 엘리암은 아히도벨의 아들입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한 후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최선전으로 보내어 전사하게 했던 사건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마 그때부터 다윗에 대하여 몹시 분개했을 것입니다.

한편 다윗이 예루살렘 성을 떠날 때 블레셋에서 귀화한 “잇대”는 다윗과의 신의를 소중히 생각하고 함께 동행했으며 언약궤를 가지고 따라온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언약궤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져가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압살롬의 동태를 파악하여 보고하는 중대한 임무를 맡기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독은 선견자이기 때문에 압살롬에게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었고 또 성 안에 있으면서 압살롬의  정황을 살펴 다윗에게 알려줄 수 있도록 부탁한 것입니다.

다윗은 어려운 시기에 “후새” 라는 귀한 충신을 만나게 됩니다. 후새는 다윗과 함께하겠다고 했지만 다윗은 이를 만류하고 새로운 도움을 요청하게 됩니다. 즉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압살롬의 신하로 머물면서 압살롬과 아히도벨의 음모를 살펴서 알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진실이 무너져버린 세상에서 진리를 위하여 힘과 지혜를 모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아직 소망이 있다는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다윗에게 후새와 같은 충신과 사독과 같은 선견자가 있었다는 것은 흔들리는 이스라엘 왕국을 다시 바로 잡을 수 있는 희망의 등불과 같습니다.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몹시 흔들릴 때 자유와 평화를 지키려는 후새와 사독과 같은 믿음의 성도들이 남아 있다는 것은 곧 우리의 소망이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나의 귀중한 한 표가 하나님을 부정하는 교회를 지킬뿐만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는 소중한 권리가 된다는 것을 잊지마라야 하겠습니다.

믿음의 기도와 더불어 행동하는 신앙으로 올바른 주권을 행사하여 반드시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내야 할 것입니다.

복음통일을 이루어 자유대한민국이 세계만방에 복음을 전하는 선교국가로 세워질 수 있도록 오늘도 삶의 현장에서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0대 대통령 선거일 D-17일

♪ 찬양 / 나 주를 멀리 떠났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십계명의 제8계명은 도적질 하지 말라(출애굽기 20:15, 신명기 5:19)

본문은 마음을 도적질하는 압살롬에 관한 말씀을 소개합니다.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이 왕으로 있을 때 반역을 일으켜 왕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먼저 사람들의 마음을 도적질합니다.

요한계시록 9:21
여섯째 천사의 나팔 심판에 이어 "살인 , 복술, 음행, 도적질" 이란 죄를 말씀합니다.
마귀는 사람의 마음에 도적질의 유전인자를 집어 넣어 죄를 짓게 합니다.

마음의 주인은 누구인가?

요압을 이용하여 다윗과 거짓으로 화친한 척 한 압살롬은 반역을 위해 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압살롬이 준비한 것은 군사를 모으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압살롬은 정치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던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백성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지 않고서는 아무리 반역을 하여 왕이 된들 진정한 왕이 될 수 없음을 생각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은 백성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서 한 일은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한 것이 본문의 내용인데, 그것은 송사가 있어서 다윗에게 재판을 청하러 오는 사람들로 하여금 왕에 대해 불만을 갖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압살롬 자신은 백성들을 위해 있는 것처럼 자신을 부각시킴으로써 마음을 얻었던 것입니다.

압살롬의 수완은 참으로 대단하다 할 수 있습니다.

3절의 “압살롬이 저에게 이르기를 네 일이 옳고 바르다마는 네 송사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아니하셨다”는 말을 보면 먼저 압살롬은 송사를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네가 바르다’는 말을 함으로써 그의 편을 들어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말을 옳다고 해주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말을 틀렸다고 반박을 하면 기분이 상하고 마치 그가 내 편이 아닌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즉 나를 옳다고 해주는 사람을 내 편으로 인정하고자 하는 것이 사람의 습성인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압살롬은 먼저 송사를 하고자 하는 사람의 행한 것이 옳고 바르다고 함으로써 압살롬이 그의 편이라고 생각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압살롬은 ‘네 일이 옳고 바르지만 네 송사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아니하셨다’는 말을 함으로써 현재 다윗의 정치에 대해 불만을 갖게 합니다. 다시 말해서 비록 네가 옳다고 해도 지금의 왕은 너의 옳음을 들어주지를 않을 것이라는 말로써 다윗에 대해 불신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압살롬은 “또 이르기를 내가 이 땅에서 재판관이 되고 누구든지 송사나 재판할 일이 있어 내게로 오는 자에게 내가 공의 베풀기를 원하노라”(4절)는 말을 함으로써 마치 자신만이 백성들 편에 서서 모든 송사를 공정하고 바르게 판결해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부각 시킨 것입니다.

이같은 압살롬의 수완은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고 있음에서 나오는 것이었고, 백성들의 마음을 더욱 확고하게 자신에게 돌려놓기 위해 그는 백성들 앞에서 지극히 겸손한 자로 행세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5절의 “사람이 가까이 와서 절하려 하면 압살롬이 손을 펴서 그 사람을 붙들고 입을 맞추니”라는 말씀처럼 압살롬은 사람들 앞에서 왕자라는 권세를 내세우지 않기 위해 사람들이 절하는 것을 막음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압살롬을 신뢰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사람들의 정서는 도덕적이고 권력을 내세우지 않고 겸손한 정치인을 신뢰합니다. 하지만 겸손이라는 것이 압살롬처럼 얼마든지 가장할 수 있는 것임을 생각한다면 겸손의 행위에 대해 속을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굴복함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는 하나님의 뜻에 북종 할 뿐입니다’는 마음이 겸손인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죄를 보면서 감히 자신은 하나님께 나올 수 없는 존재임을 아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만이 자신의 할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압살롬은 자신의 죄를 보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 앞에 나올 수 없는 죄를 범한 처지면서도 왕의 얼굴을 보기 위해 요압을 동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절을 하는 것을 막으며 그들의 입을 맞추는 것은 백성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겸손을 가장하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백성들이 볼 때에는 자신들의 절을 받지 않고 오히려 왕자의 신분으로 자신들의 손을 잡아주며 입을 맞춰 환대하는 압살롬이 지극히 겸손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또 그것이 압살롬을 신뢰하게 하는 것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어쩌면 다윗보다는 그러한 압살롬이 왕이 되었으면 하는 소원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렇게 겸손한 압살롬이 왕이 되어 자신들을 다스린다면 지금보다는 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가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6절을 보면 “무릇 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에게 압살롬의 행함이 이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도적하니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압살롬의 겸손과 자신들을 옳다고 인정해주는 것으로 인해 압살롬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압살롬을 신뢰하고 의지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 내용에서 우리는 압살롬이 무엇에서 크게 잘못되어 있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압살롬이 겸손을 가장한 것보다 백성들로 하여금 다윗에 대해 불만을 갖게 한 것보다 더 크게 잘못된 것은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한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러한지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도적했다고 말하는데, 왜 마음을 도적했다는 표현을 하는 것일까요? 도적했다는 것은 남의 것을 훔친 것을 뜻합니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의 주인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 주인이 누구입니까? 이스라엘 사람들 자신입니까? 여러분에게 있어서 여러분의 마음은 여러분 자신의 것입니까?

마음의 주인이 누구인가의 여부는 결국 나의 주인이 누구인가로 나아가게 됩니다. 나의 주인이 내 마음의 주인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주인은 누구일까요? 두말할 것 없이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무작정 우리의 상식으로 하나님이 주인이라는 답을 내릴 것이 아니라 왜 하나님이 나의 주인일 수밖에 없는가를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주인일 수밖에 없는 것은, 이스라엘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살아난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애굽의 장자 재앙에서 이스라엘도 죽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린양의 피를 바른 사람들은 살았습니다. 피로 말미암아 살아난 것입니다. 또한 홍해라고 하는 죽음에서도 이스라엘은 살았습니다. 이것을 안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넌 후 구원을 노래하면서 “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미치매 주의 팔이 큼을 인하여 그들이 돌같이 고요하였사오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이 통과하기까지 곧 주의 사신 백성이 통과하기 까지였나이다”(출 15:16)라는 노래를 불렀던 것입니다. 자신들이 홍해에서 살아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들을 사셨기 때문임을 안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피로써 살려낸 민족이라는 특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다를 바 없습니다. 고전 7:23절에서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 말씀한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를 값으로 산 하나님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이든 우리이든 마음은 나도 그 누구도 주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주인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점에서 이스라엘의 왕의 역할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왕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알아야 했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주인이신 하나님을 향하도록 그들을 다스리고 권면하는 것이 왕의 역할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왕이 백성들의 마음을 자신의 것으로 뺏고자 한다면 결국 이스라엘 사람들을 자신을 섬기는 자신의 종으로 삼고자 하는 것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이 경우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멀어지는 잘못된 신앙의 길을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압살롬이 잘못됨입니다.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한 것입니다. 이는 백성들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백성들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생각지 않는다는 것은 압살롬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전혀 생각지 않고 살았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다만 하나님을 주인으로 여기고 그 마음을 하나님께 둔 채 하나님을 섬길 뿐입니다. 이것을 돕기 위해 왕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압살롬은 백성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그리고 자신을 신뢰하고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 그들의 마음을 도적하기 위한 수단을 부린 것입니다. 백성들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간과한 것,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압살롬의 모습이 교회 내에서도 존재함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특히 압살롬과 같은 수완은 목사들에게서 많이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고 힘있는 목사로 군림하기 위해 교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자신이 마치 교인들의 편인 것처럼 행세하고, 또한 겸손을 가장하여 행동하는 것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보지 못하고, 신자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도록 돕는 것이 목사의 본분임을 생각하지 못하고, 다만 자신을 위해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자 하고 자신을 신뢰하도록 하기 위해 일한다면 그는 압살롬과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마음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주인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만 복종해야 할 마음으로 새롭게 창조된 것이 신자입니다. 그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하십시오. 즉 어떤 사람도 신뢰의 대상으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누군가가 여러분의 마음을 얻고자 한다면 오히려 그를 크게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람을 전혀 신뢰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신뢰할 사람은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도록 돕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를 의지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말이 자신의 마음을 돕는 것이라면 신뢰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 자체를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신뢰하는 것뿐입니다. 사람이 언제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를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마음은 어린양의 피를 향해야 하는 것처럼, 신자의 마음은 우리를 살리신 예수님의 피를 향해야 합니다. 이 일을 돕는 자가 곧 여러분의 형제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압살롬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된 것은 그들은 자신들의 억울함을 풀어줄 왕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안 압살롬이 백성들의 마음에 맞게 행동한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왕이 어떤 존재인가를 몰랐던 것입니다. 무엇이 자신들을 돕는 것인가를 모른 것입니다. 신자라면 나에게 오직 그리스도만 전해지기를 원해야 할 것이고 그것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그럴 때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지 않게 될 것입니다.

마음을 도적맞지 말라!


조선 말기 거상 임상옥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 「상도」를 보면 한 대감이 수수께끼를 내는 장면이 나온다.

“이 성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둘로 나누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방법이냐?”
아무도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는데, 곁에 있던 시중드는 여인이 말한다.
“이롭게 하는 ‘이자’(利資)와 해롭게 하는 ‘해자’(害者)로 나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슬렁거리고, 자기에게 꼭 필요한 얘기를 들었다고 생각한 대감은 여인에게 상을 내린다.

영적 세계에서도 이와 비슷한 적용을 할 수 있다.
‘이자’는 예수님이고 ‘해자’는 마귀다.
마귀가 도적보다 무섭다.

재물은 도적맞아도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믿음과 평안을 잃어버리면 절망이 들어오고 급기야 생명까지 잃게 되기 때문이다.

멀쩡히 회사 잘 다니던 가장이 도박에 빠져 이혼하고 살인까지 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얼마나 허탈하고 어이없는 일인가 싶지만, 깨어 있지 않으면 누구나 그처럼 마음을 도적맞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 역시 며칠만 말씀을 묵상하지 않고 기도를 쉬면, 마귀는 믿음과 평안을 도적질해 간다.

우리가 방심하면 마귀는 끊임없이 파고 들어와 우리 것을 도적질하고 결국 우리를 죽이려 한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시고 마귀는 도적이다. 우리 영혼을 도적맞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옛사람을 십자가에 처리하고 새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 영혼과 삶을 지켜 줄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

성경에 나타난 인물중 대표적인 도적놈을 보면, 구약에는 여리고 성을 점령한 후에 "바친 물건"을 개인이 취하지 말 것을 경고(수6:18-19)했는데, 유다 지파에 속한 아간은 이 명령을 어기고 그 물건을 도적질하므로 결국 아골 골짜기에서 돌로 쳐죽임을 당했으며, 신약에는 가룟 유다로서 그는 돈궤를 맡은 자로(요 13:29), 돈궤에 넣은 것을 훔치다가(요 12:6) 그에게 사탄이 들어가므로 스승인 예수님을 배반하고 은 30냥에 팔아 넘긴 후 괴로워하다 결국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중국 송나라 때 숭양현이라는 지방에, 장괴애라는 현지사(도지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부하에게 매우 엄격했습니다.
한 번은 관리 한 사람이 돈 1전(오늘날 화폐가치로 1천 원 미만)을 모자 속에 감춘 것이 발각되었습니다.
그 관리는 그로 인하여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벌이 대단한 것이었으므로, 그 관리는 놀란 나머지 "불과 1전의 돈으로 천황의 관리에게 지독한 벌을 준다는 것은 심하지 않습니까?"하고 반항했습니다.
그리고 말을 이어 "현지사께서 내린 형벌은 참으로 가혹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당신이 벌한 대도 나의 목숨까지는 뺏지 못 하리이다."하고 원망만 했습니다.
잘못을 뉘우치는 일 없이 원망만을 하는 것을 본 장 지사는, 곧 붓을 들고 다음과 같이 판결문을 썼습니다.
"하루에 일전이면 천 날이면 천 전, 새끼줄을 톱 삼아 나무를 자를 수도 있고, 물방울이 계속 떨어짐으로써 돌을 구멍나게도 할 수도 있다.
더구나 반성의 빛이 전혀 보이지 않으므로 사형에 처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1전을 훔친 관리는 목을 잘리는 형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언제나 생각하여야 할 일은 작고 큰 것에 상관없이 도적질이란 무거운 죄(중죄)에 해당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회개할 줄 모르는 일 역시 큰 죄입니다.

미국의 일반 도서관에서는 한 해에 200내지 500권의 책을 도적 맞는데 국가적인 통계로 본다면 연간 2,500만 불이나 된다는 것입니다.
낙망한 사서들이 붉은 손을 가진 도적들을 잡기 위해 새롭게 고안해 낸 것이 (센트로 책 탐지기)였습니다.
이는 자석의 원리를 이용한 것으로서 자기(磁氣)를 넣은 금속조각을 책 등의 내부에 살짝 넣고 그 책이 정당한 방법으로 반출이 되는 경우에는 도서관 사서가 전자 코일의 전류가 흐르는 위를 슬쩍 통과 시켜서 그 책 등에 있는 자석의 자기를 없애 버립니다.
그러나 부당하게 반출되는 책은 자기를 없애지 않았으므로 출구를 이용할 때 비밀장치에 의한 회전문이 자동적으로 잠기며 사서가 앉은 곳에 붉은 불이 켜집니다.
그러면 사서가 즉각 도서대출계에 통고하고 도서 대여장을 가지고 나와 확인하여 그를 잡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양심이라는 자석을 부착해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 낱낱이 보고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전자코일을 통하여 그 죄를 씻음 받지 않는 한 언제까지나 그대로 남아 있다가 심판의 문을 통과할 때 양심이 그대로 송사하여서 모조리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천사들이 우리의 죄의 기록을 확인하여 형벌을 줄 것이므로 우리는 결국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자와 같게 될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 마음 가운데의 탐욕을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과 말씀으로만 채울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우리가 참 그리스도인임을 만민이 알게 하옵소서.
작은 탐심이라도 제 마음 안에 머물지 않기를 원합니다.
내면의 작은 싸움에서부터 주님을 의지함으로 승리할 수 있도록 붙들어 주소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거울로 삼아 우리 자신을 그 거울에 비추어보면서 우리도 탐욕에 끌려 다니는 노예가 아닌가를 다시금 살필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가책을 받는 자가 있으면 성령께서 그 마음에 있는 나쁜 것을 제거해주시고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가득 채워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중 한 사람이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탐욕에 젖어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자가 없게 해 주시옵소서.
항상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면서 살게 해주시고, 오직 하나님만 전적으로 믿으면서 살게 해주시고, 세상 사람들의 말이 아닌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면서 살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  2월 19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14:1∼33
♦ 묵상을 위한 주제 : 우리는 필경 죽으리니(14절)
♦ 성구 : 우리는 필경(畢竟) 죽으리니 땅에 쏟아진 물을 다시 모으지 못함 같을 것이오나 하나님은 생명(生命)을 빼앗지 아니하시고 방책(方策)을 베푸사 내어 쫓긴 자(者)로 하나님께 버린 자(者)가 되지 않게 하시나이다.  

“우리는 필경 죽으리니(we must die)”

다윗은 훌륭한 인물이 아니고 그도 하나님 앞에 죄인 중의 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필경은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라고 성경은 이미 선언했습니다.

우리가 왜 다윗의 거짓된 모습을 들추어야 합니까?

다윗을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죄악 된 모습을 거울삼아 자신의 모습을 살필 줄 아는 믿음과 지혜를 갖추려는 믿음의 거울로 받아들이려는 것입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일컫는 아브라함이 아닙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온유하다고 강조한 모세가 아닙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도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무엘하 14장의 말씀은 다윗을 아주 초라하고 부끄럽게 소개합니다.

다윗과 요압, 압살롬의 실상을 낱낱이 공개하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내고 오직 하나님의 언약만 강조하려는 것이 성경을 기록한 의도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거나 묵상할 때 사람의 성품이 얼마나 훌륭하며 그 사람의 믿음이 얼마나 대단한가 하는 측면에서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어떻게 드러내고 계시는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최고라고 손꼽는 다윗의 통치 이면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그의 자녀들이 서로를 겁탈하고 죽였으며 이로 인해 틀어진 다윗과 아들 압살롬의 마음은 맞닿을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서로를 외면하고 보낸 2년 동안 다윗과 압살롬의 갈등은 오히려 깊어졌습니다. 이 시간을 지내며 압살롬은 아버지를 향한 분노를 반역을 일으켜 다윗의 가문을 흔들었습니다.

다윗의 왕권을 흔드는 불씨가 된 압살롬의 분노는 다윗의 통치 아래서 사랑하는 누이 다말이 당한 성폭력 사건이 정의롭게 해결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정의가 사라지고  억울한 자의 울음을 외면하는 나라에서 눈물 흘리는 자는 스스로 복수를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형제 암논을 죽인 압살롬의 행위는 무엇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다윗이 불의를 바로잡지 못하고 외면한 지점에서부터 이 불씨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불러주신 내 자리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혹시 내가 다윗과 같이 외면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덮어두고 있는 갈등은 없는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우리 공동체와 가정과 이웃들 중에 불의와 억울함 속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있는지도 살펴야하겠습니다.

무엇보다 불의와 억울함으로 고통 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 마음의 분노와 아픔을 하나님께서 어루만져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억울하게 눈물 흘리는 그곳에 정의를 세워 주실 것입니다.

불의한 재판으로 마음 아파하는 그곳에 공의를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낙심하여 주저앉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도록 붙잡아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여!
이제는 모두 한 마음과 한 뜻으로 나라와 민족을 덮고 있는 어둠의 장막을 벗겨버리고 밝은 미래를 바라볼 수 있도록 힘을 모아 기도합시다. 그리고 응답의 열매를 기다립시다.

자유대한민국이여 영원하라!
예수 한국
복음 통일을 이루어
선교의 깃발을 온 세계에 휘날리며
젊은 아들과 딸들이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는
그 날을 위하여
한 알의 밀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2월 18일(금)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13:1∼39
묵상을 위한 주제 : 미움과 연애(15절)
성구 : 그리하고 암논이 저를 심(甚)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이왕 연애(戀愛)하던 연애(戀愛)보다 더한지라 곧 저에게 이르되 일어나 가라.

“미움과 연애(hated and loved)”

“암논(Amnon, 충성스럽다)”은 이스르엘 사람 “아히노암”에게서 난 다윗의 맏아들이었는데(삼하 3:2) 이복누이였던 “다말(Tamar, 종려나무)”을 사랑하였으나 만날 수 없어 속으로 앓고 있을 때 친구였던 “요나답(Jonadab, 여호와는 관대하심)”으로부터 간교한 꾀를 얻어 다윗을 속이고 다말과 강제로 동침한 후 마음이 변하여 다말을 심히 미워하여 내쫓아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다말’의 친 오빠 “압살롬(Absalom, 내 부친은 화평) ”에 의해 양털 깎는 날 성대한 잔치 자리에 초대되어 압살롬의 부하의 손에 살해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가족간의 불화는 성적인 범죄를 저지른 다윗 왕가의 몰락의 시작이었습니다.

근친상간으로 시작된 이 비극적인 역사는 다윗이 밧세바와 더불어 지은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아비의 죄가 삼사 대까지 간다는 말씀처럼 다윗의 죄악은 그의 가정과 자손들에게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쳤던 것입니다.
암논에게 버림받은 다말은 머리에 재를 무릅쓰고 옷을 찢고 손을 머리 위에 얹고 크게 울었지만 다윗은 암논의 근친상간 소식을 듣고도 심히 노할 뿐 암논을 징계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암논을 법대로 처형하지 않은 것은 장자로서 왕위 계승의 일을 생각했기 때문이겠지만 인간의 생각을 앞세운 이런 그릇된 태도야말로 더 큰 죄악을 부르는 것입니다.

암논을 살해한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의 노여움을 피해 외가인 그술 왕 달매에게로 피신합니다.
다윗은 압살롬이 암논을 살해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처음에는 암논의 죽음을 슬퍼했으나 삼 년 후에는 압살롬을 몹시 그리워했습니다.
다윗 왕의 가문에 나타난 가족들의 불화의 씨앗은 다윗이 저지른 죄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인간의 욕망은 끊임없이 죄를 생산하고 생산된 죄는 더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여 죄를 낳게 합니다. 그러므로 죄는 그 모양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따라서 믿음이란 죄를 미워하여 멀리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이란 죄를 멀리 할 수 있는 특별한 은총의 날입니다.
하늘 은총을 땅에서 죄를 멀리하고 버림으로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 은총을 함께 누릴 수 있는 그 날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 찬양 / 너 주의 사람아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우리아는 누구인가?

우리아(Uriah)”라는 이름의 뜻은 “”입니다.
밧세바(Bathsheba)”라는 이름의 뜻은 “맹약의 여자”라고 합니다.

우리아는 헷 사람입니다
헷이란 히타이트 사람 즉 가나안 족속에 속하므로 유대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아는 다윗의 용사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충실하고 경건한 다윗은 그의 아내 유다의 밧세바와 사랑에 빠졌고 그를 제거하기로 결정하여 그를 전쟁터로 보냈지만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사무엘하 9장 : "헤세드"에 대한 믿음
"므비보셋"과 같이 죽은 개와 같은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십니까? 하며 겸손한 모습

사무엘하 10장 : "헤세드"에 대한 믿음
암몬 왕 "하눈"과 같이 조문객을 정탐군으로 판단하고 무례하게 행동하는 오만한 모습

사무엘하 11장 : "헤세드"에 대한 믿음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보다 왕의 지위를 사용하여 어둠에 갇히는 모습
왜냐하면 "우리아"는 헷 사람 즉 이방인으로 다윗의 용사되었는데 '우리아'라는 이름은 "빛"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이 어둠에 갇혀 있을 때 이방인 헷 사람 우리아를 통하여 그 실체를 드러나게 합니다.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할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다윗과 같이 어둠에 갇혀있기 때문에 세상이 더욱 혼돈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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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아즘(Chiasm)
히브리 문장구조로 성경을 해석하라

역사 속에서 성경을 연구하는 신학자들이나 설교자들은 신약 성경과 바울이 기록한 서실들에 대하여, 그 내용이 이해하기 어렵고 또한 그의 문장 표현력이 당시 전통적인 헬레니즘의 수사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때로는 중복되는 것이 많고 조잡스럽기까지 하다고 혹독한 비평을 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성경을 기록한 언어의 독특한 히브리 문장구조를 모르는 무지한 이방인의 시각을 가진 사람들의 편가에 불과하다.
만약 그들이 바울 서신에 나타난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과 중복 표현된 부분들이 대부분 ‘교차 병행 구조’ 라고 부르는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식인 히브리 사고방식을 가지고 기록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자신들의 무지에 대하여 인정하지 결코 그런 혹평을 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고 분석하여 해석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기록한 히브리 사고를 가진 성경의 기자들이 사용한 히브리 문장구조의 틀을 먼저 배운 다음에 접근해야 한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사도 바울 이후에 유대인들이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상황에서, 헬라 사고의 문화권에 속해 있는 이방인의 신학자들이 자신들의 전통적인 헬레니즘의 사고방식인 수사학적 접근으로 바울 서신을 해석하여 왔기 때문에 본문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다가 이백여 년 전부터 예수를 믿기 시작한 유대인들에 의해서 자신들의 문학적인 시각을 회복하기 위하여 히브리 문장구조의 새로운 시각으로 성경에 접근하여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히브리 사고로 성경을 다시 해석하기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불분명하고 이해하기 어려웠던 많은 문제적이 해결되는 경험을 갖게 되었다. 이처럼 저자는 히브리 사고에 입각한 히브리 문장구조의 성경해석을 이 책에서 처음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제까지 성경해석의 본문의 개념을 도출하는 작업은 극히 일부분의 전문적인 학자들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하지만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신약 성경에 나타난 대표적인 히브리 문장구조의 틀로 성경을 해석하는 과정을 체계화하고 시각화하여 성경의 원어를 모르는 사람들까지 쉽게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자 한다. 특별히 저자는 히브리 사고가 무엇인지를 누구나 알 수 있도록 정리하고 이를 토대로 히브리 문장구조로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까지 쉽게 설명할 것을 약속한다. 저자의 이러한 의도를 따라 이 책을 읽는 모든 사람들도 히브리 문장구조의 설교를 활용하는 계기가 될 것을 기대하고 이 책을 쓴다. 

히브리 사람들에 의해 기록된 신구약 성경이 갖고 있는 다양한 문학적인 운율과 구조의 독특성은 오래 전부터 학자들에 의해 연구되었다. 이렇게 정리된 히브리 문장구조의 성경 해석할 수 있는 보편적인 원리들이 이 책을 읽는 목회자들에 의해서 신구약 성경 적용하여 설교로 선포될 것이다. 이제 이 책을 통해서 이방인들의 사고를 가지고 있는 우리도 히브리 사고에 입각해서 하나님이 말씀을 기록하실 때의 본래의 의도와 사상을 전체적으로 조감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히브리 문장구조의 성경해석의 원리는 성경 해석학에 있어서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될 것이 틀림없다. 우리는 신약 성경의 바울 서신뿐만 아니라 계시록과 사복음서 및 공동 서신들을 넘어 구약의 모든 내용을 포함하여 특히 시문학의 범주에 속한 말씀을 가지고 히브리 문장구조로 적용하는 설교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풀러 신학대학원의 김세윤 교수는 “주기도문 강해”에서 히브리 문장 구조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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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은 매우 치밀한 히브리 문학 구조 속에 담겨 있습니다.
특별히 마태는 히브리 문장 구조의 특성을 좇아 본문을 문장의 가장 핵심이 되는 중앙에 해당하는 위치에 구성하고 있습니다.
왜 마태는 주기도문을 산상 수훈의 핵심 중의 핵심에 위치하도록 구조하고 있는 것일까요?
마태는 이러한 문학적 구조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마태가 히브리 문장 구조의 틀을 통해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를 기록한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주기도문의 중요한 내용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마태복음의 문장 구조 자체가 우리에게 이 주기도문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모종의 암시를 미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주기도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청원과 마지막 송영이 짝을 이루고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인클루지오(Inclusio) - 앞과 뒤의 문장의 일치(짝) - 라고 합니다. 마태가 기록한 주기도문은 이러한 히브리 문장 구조를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김세윤 교수가 주기도문을 강해하는 처음 부분에 히브리 문장구조의 틀을 자세히 설명한 것은,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바로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러한 히브리 문장 구조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성경을 정확히 해석할 수 없을 것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정의한 ‘히브리 문장구조’ (Chiasm)라는 용어는 이 부분을 연구한 많은 학자들은 ‘교차 병행 구조’라고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먼저 밝힌다.

 

 1. 히브리 사고의 시작, 히브리 문장구조

 

 히브리 사고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히브리 문장구조를 설명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저자는 알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성경에 나타난 예를 들어 설명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저자는 먼저 히브리 문장구조의 특징을 설명하고 난 다음에 성경의 구체적인 예를 들어 쉽게 설명하는 방법으로 이 글을 진행할 것이다. 히브리 문장구조는 히브리 문학에서 나타나는 문장의 기본적인 형태로 성경의 한 문장 안에서 각 단어가 교차적으로 배열되어진 것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이 분야에 많은 연구를 한 일랜드(Yelland)는 그의 책에서 “히브리 문장구조란 글의 후반부가 전반부에 관해서 도치되고 평형을 이루는 구정을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교차 병행 구조라고 부르는 병행적인 형태나, 혹은 반의적인 형태로 기록된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한편 히브리 문장의 원리인 교차 구조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요소가 나타나는데 이는 역(반의)과 편행이다. 하지만 모든 문장마다 역에 해당하는 반의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후반부는 전반부에 관해 서로 반의적일 수도 있고, 또는 서로 보충적인 수도 있다. 이는 히브리 문장이 기본적으로 구절, 문장 또는 문장 구조의 전체 내용 중에서 단어나 혹은 생각들이 도치되어 나타나는 병행 구조이기 때문이다.

 

 히브리 문장구조의 가장 간단한 예는 아래에 나타난 구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구약 성경에는 이런 교차 구조의 요소가 풍부하게 존재한다,. 이 구조는 첫 줄과 마지막 줄이 서로 대응되고, 둘째와 마지막 전의 요소가 대응한다. 이러한 형태는 히브리 문장에서 짧은 길이에서부터 몇 문장, 그리고 심지어 성경의 각 권의 전체의 시작부터 끝ㄲ지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복잡한 구조는 문법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구조나 성경을 기록한 저자의 의도에서도 조직적으로 언제나 심미적 표현에 집중하게 한다. 히브리 문장의 교차 구조를 이루는 평가 기준은 도치 순서, 병행, 그리고 중심부이다.

 

 히브리 문장구조가 점점 연구되고 발전되면서 다양한 형태의 교차구조를 언급하고 있다. 교차 구조의 종류는 형태에 따라 다음과 같이 연구한 학자가 붙인 이름을 따라 다르다. 그 구체적인 이름을 살펴보면 에파노도스(epanodos), 또한 내향적 병행구조(introverted parallelism) 확대된 내향구조(extended introversion), 집중 구조(concentrism), 키 구조 (the chi-form), 페리스트로페(palistrophe), 봉투구조(envelope conetruction), 델타구조(the delta-form), 반복구조(recursion) 등의 여러 가지 으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 모든 형태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은 교차구조가 두 부분으로 구성되고 후반부가 전반부의 거울상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교차구조는 강조하려는 내용을 중심부에 위치시키며, 다른 부분은 병행적인 틀로 배치되어 이를 보충 설명하는 문장의 구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히브리 문장구조는 이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발전하여 왔다.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을 간단한 것부터 성경을 통하여 예를 들어 보자.

 

예) 마가복은 2장 27절

  A 안식일은

   B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B` 사람이

  A`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예) 마태복은 7장 6절

  A 거룩한 것을 게에게 주지 말며

   B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B` 돼지들이 진주를 발로 밟고

  A` 개들이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이 글에서 마태복음의 기자는 히브리 문장구조를 기록하면서 마지막 요소와 문장의 중앙으로부터 처음이 서로 내용상 그것이 설명되어 있고, 마찬가지로 중간은 중간끼리 서로 같은 내용이 설명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마가복음에서는 동일한 단어가 교차적으로 나타나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유사한 단어가 역으로 나타난다.

 

 아래의 시편에서 히브리 문장구조는 조금 독특하게 병행되어 있다.

 

 그는 너를 도와 주시고 / 성소에서             도와주시고 / 붙드시며

              시온에서 / 그는 너를 붙드시며       시온에서 / 성소에서

       그는 기억하시며 /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 원하노라

           너의 번제를 / 받으시기를 원하노라       번제를  / 소제를

      그는 너를 주시고 / 너의 마음대로              주시고 / 이루시고

      너의 모든 도모를 / 그는 이루고                도모를 / 마음대로

  우리가 개가를 부르며 / 당신의 구원 안에서         부르며 / 세우리니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 우리 기를 세우리니       이름으로 / 구원 안에서

 

 위 문장의 시편 20편 2-5절에서 보면 명사와 동사가 쌍으로 도치되어 히브리 문장구조로 병행되고 있다. 시편의 저자는 히브리 문장에서 두 문단끼리 서로 쌍을 이루어 명사와 명사가 서로 병행되어 있고, 동사와 동사가 서로 도치되어 교차하고 있다. 만약 이러한 교차와 도치 구조로 배치된 것을 모르고 해석하게 되면 엉뚱한 방행으로 설교할 가능성이 높다.

 

 예) 시편 135편 15-18절

 

   A 열방의 우상은 은금이요

    B 사람의 수공물이라

     C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D 눈이 있어도 듣지 못하며

      D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C` 그 입에는 아무 기식도 없나니

    B` 그것들을 만든 그들은 그것들과 같고

   A` 그들의 신뢰를 그것들에 두는 그들과 같도다

 

 예) 골로새서 3장 3-4절

 

  A : 이는 너희가 죽었고

   B : 너희 생명이

    C : 감추어져 있음이니라

     D : 그리스도와 함께

      E : 하나님 안에서 

     D` : 그리스도께서

    C` : 나타나실 때

   B` : 너의 생명이

  A` :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이 구절은 A B C D-E-D` C` B` A`의 대칭적 구조로 병행을 이루고 있다. 바울은 이 문장의 중앙으로부터 시작하여 밖으로 확산되면서 서로의 관계를 보완하는 대칭적 히브리 문장구조를 사용하였다. 우리가 이 문장을 가지고 짧은 메시지를 만든다고 한다면 다음과 같이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이 문장 구조의 중심 주제를 제목으로 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E)라고 말하는 것은 본문의 교차대친 구조를 적용해 보면, ‘그리스도와 함께’ (D-D`)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런 신비한 영적인 연합은 복음 안에서 ‘감추어진 것으로’ (C) 이것은 그리스도계서 ‘나타나실 때’ (C`)에 ‘우리의 생명’ (B-B`)도 함께 나타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런 일은 ‘우리가 죄로 인해 죽었고’ (A) 다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스러운 주인공으로 나타날 때 (A`)만 가능하게 된다. 이상에서 히브리 문장의 교차 구조를 따라 본문 그대로 간단하게 저자는 설교로 적용해 보았다.

 

예) 로마서 2장 12-15절

 

 A(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B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B`(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A`(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병하며

 

 이 구절은 A B-B` A` 의 교차 병행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12절에서 두 개의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전체가 언급되어 있고, 이것은 대칭적인 교차 구조를 가지고 13-15절에서 각각 율법에 관해 변증하는 내용을 볼 수 있다.

 

 예) 디모데전서 1장 19절

 

  A 믿음과

   B 착한 양심을 가지라

   B`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A`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 하였느니라

 

예) 갈라디아서 2장 7–8절

 

 A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고

  B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B`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A`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예) 고린도후서 1장 3절

 

  A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을

   B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오

   B` 자비의 아버지시오

  A`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오

 

예) 로마서 11장 21-23절

 

 A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 즉

  B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C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D 엄위를 보라

    D`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C`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B`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A`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이상의 성경의 예들은 모두 교차 구조에 대해서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2. 히브리어, 히브리 문장구조

 

 히브리 문장구조란 용어는 고대의 수사학적인 용어로 일부 사용되다가 르네상스 이후에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 히브리 문장구조는 특히 구약 성경에 많이 나타나며, 다른 히브리어(셈어) 문서들에서도 같은 패턴의 히브리 문장구조로 언급되어지고 있다. 이 분야를 연구한 독일 신학자 룬드(Lund)에 의해서 신약 성경에도 히브리 문장구조가 나타난다고 발표하였다. 이때부터 시작하여 히브리 문장구조의 연구는 활발하게 진행되어 현재까지 왔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태는 나름대로 연구한 신학자들에 의해 다른 이름의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이런 일은 아직까지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태가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저자는 보고 있다. 하지만 이제부터 저자가 모든 용어를 통일하여 히브리 문장구조 즉 키아즘이라고 부를 것이다. 비록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부르지만 그 내용적인 의미는 거의 같기 때문이다.

 

 히브리 문장구조는 몇 가지 특징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성경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교차구조라고 부르는 A B – B` A` 의 현태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시편 8편 3-4절에 잘 나타나 있다. 이 형태는 신구약 성경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형태로, 앞에 나와 있는 내용이 다시 뒤에서 대칭적 구조를 가지고 같은 의미를 반복할 뿐 아니라 부연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이런 대칭 구조는 히브리 문장의 대표적인 형태로 우리가 이런 구조를 모르면, 문장의 내용이 단순히 긴 것으로만 이해할 수 있고 복잡한 문장 구조로만 받아들여 서로 연관성이 없이 해석하고 설교할 수 있는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 이처럼 우리가 신구약 성경의 히브리 문장구조의 핵심이 되는 교차 병행구조를 모르면 말씀을 바르게 해속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히브리어 문장구조의 틀

 

 키아즘(Chiasm) 즉 히브리 문장 구조한 용어는 고대의 수사학적인 용어로 일부 사용되다가 르네상스 이후에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 키아즘에 해당하는 병행 구조는 많은 구약성경과 다른 히브리어(셈어) 문서들에서 언급되어지고 있다. 이는 독일신학자 룬드(Lund)에 의해서 신약성경에 나타난 것이 제시되었으며 히브리 민족(셈어족)으로부터 서장으로 문화적인 유산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독일 신학자 바레이는 히브리 별행 구조로부터 자신의 병행 구조를 세웠으며, 그는 신약성경에 있는 문학적인 구조의 형태를 분류하였다. 그는 키아즘을 연구하고 결론 내리기를 도치구조(Inversion)형태야 말로 성경에서 발견되는 가장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구조라고 말했다. 초기 키아즘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히브리 문장 병행 구조’가 학자들에 따라 약간씩 의미가 다른 여러 가지의 용어로 다음과 같이 사용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히브리 병행 구조를 연구한 신학자들의 분류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그들이 연구한 이름은 대침구조, 도치 병행구조(Inverted parallelism), 내향적 병행구조(Introverted parallelism), 회귀구조(regression), 원격 병행구조(봉투 구조, envelope figure), 대응구조(correspondence)등 여러 가지로 연구한 학자들마다 다른 이름으로 자신의 책에 붙였다.

 

 한편 ‘히브리 문장구조’는 그 이름에 따라 다음과 같은 형태를 갖는다. 예를 들어 우리가 키아즘의 ‘대칭구조’라고 말하는 것은 가장 기초적인 AB-A`B`의 구조의 현태를 가지고 있다. 이는 신구약 성경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형태로 앞에 나와 있는 내용이 다시 뒤에서 대칭적 구조를 가지고 같은 의미를 반복할 뿐 만 아니라 부연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이런 ‘대칭병행구조’는 히브리 문장의 대표적인 형태로 우리가 이런 구조를 모르면 문장의 내용이 단순히 긴 것으로만 이해할 수 있고, 복잡한 문장 구조로만 받아들이는 관계로 서로의 연관성이 없이 해석되고 설교될 수 있는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구약 성경의 히브리 문장구조의 핵심이 되는 히브리 문장구조인 ‘병행 구조’를 모르면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책은 키아즘의 기본적인 형태부터 시작해서 복잡한 내용들조차 히브리 문장구조로 인해 하나님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처음부터 차근 차근 쉬운 구조부터 복잡한 구조까지 하나씩 배우면 여러분도 성경의 전문가가 될 것을 기대해도 좋다.

 

시편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예) 시편 8편 3-4절

 

3절  A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B  주의 하늘과

     A` 주의 베풀어 두신         B`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절  A  사람이 무엇이관대        B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A` 인자가 무엇이관대        B`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시편 기자는 독특한 히브리 문장구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우주와 사람이 어떤 존재가 가치가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A의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셨다는 것에 대하여 A`는 주께서 이 땅에 베푸신 하늘과 별들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4절에 가면 사람과 인자가 병행되고 있고 주께서 생각하고 권고하는 것이 키아즘이 되어 반복적인 설명을 하고 있는 히브리 문장구조를 살펴볼 수 있다.

 

3. 히브리 문장구조 – 키아즘의 역사

17세기부터 산발적이기는 하지만 몇 명의 신학자들에 의해서 히브리 문장구조의 현태에 관한 연구는 간간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연구는 대개 성경의 원어에 관심이 있는 몇 사람으로 그들은 히브리 문장구조의 현태 정도 찾는 것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관련된 학자들은 대부분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태를 찾는데 있어서 바울 서신과 복음서에 집중하는 정도였다.

그들의 문제점은 자신들이 히브리인이 아니기 때문에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배워서 문장의 구조를 연구하는 수준에 있어 아주 초보적인 단계로 접근한 한계가 분명하였다.
그들의 접근방법도 대부분 전통적 방법을 히브리 문장구조에 익숙한 유대인들의 책을 통해서 적용하는 정도였다. 그러므로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태 연구는 역사적으로 세 시기로 분류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초기 교부시대, 종교 개혁시대, 그리고 근대와 현대에 이르는 연구로 구분한다.

 

 키아즘에 대한 관심이 17세기가 되면서 증폭되어 독일과 영국 신학자들에 의해서 히브리 문장구조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시작되었다. 초대교회 역사가인 요세푸스(Josephus)는 구약 성경에 대해서 나름대로 구분하여 춥애굽기 15장, 신명기 32장의 모세의 노래가 “운문 절”의 형태로 기록되어 있고, 다윗의 시편들이 “여러 종류의 운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하여 어거스틴과 동시대를 살았던 제롬(Jerome)도 유사한 말을 했다. 그렇지만 히브리 문장구조에 대하여 연구한 학자들은 이것들이 단순히 히브리 문학의 시 형태라고만 보면서, 이런 키아즘은 그리스와 로마의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히브리인들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문장 구조라고 말했다.

 

 어거스틴(Augustine)도 수사학의 교사로서 성경의 문체에 대해 연구하였다. 그는 특별히 구약의 예언서들과 바울 서신에 관심을 가졌다. 한편 제롬도 히브리적인 문장 구조에 많은 관심을 가졌으며, 그는 특히 바울 서신 중에서 디도서 1장 12절, 고린도전서 15잘 33절, 사도행전 17장 28절 등을 깊이 연구했다. 그렇지만 초대교부들은 주로 성경 안에서 이러한 히브리적인 문장구조를 찾으려는 노력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았다. 그 가운데 오리겐(Origen), 크리소스톰(Chrysosto)과 락탄티우스(Lactantius)도 같은 입장을 취하였다. 이런 현상은 초대 교부들이 주로 우리와 같은 이방인의 시각으로 성경을 처음으로 설교하는 입장에서 당연한 결과로 보여 진다. 그 이유는 그들 스스로가 히브리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히브리적인 문장 구조에 무지한 결과로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교부인 오리겐이 이방인의 시각으로 설교하면서 최초로 영해라고 알려진 알레고리로 해석을 시도한 것에 대하여, 우리는 쉽게 그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무지했던가를 유추할 수 있다.

 

콘스탄틴(Constantine)시대에 교회는 만개한 그리스 문화에 동화되어 점차 수사적 방법론의 사조에 밀려 히브리 문장구조의 연구가 점점 더 사라지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르네상스 시대 전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르네상스에 의해 성경에 기록된 히브리 문장구조의 연구가 주로 독일 신학자들에 의해서 관심을 가졌다. 특별히 독일의 로이흐린(Reuchlin)과 종교 개혁자인 루터(Luther)가 히브리 문장구조에 깊은 관심을 두고 연구했다. 하지만 그들이 관심을 갖는 것과 히브리 문장구조를 아는 것에는 많은 제약이 있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히브리 문장구조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거니와 그 어떤 책에도 소개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사운데도 에라스무스(Erasmus)는 신약 성경을 히브리 문장구조를 연구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새로운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근대에 와서 블래스(Blass)는 신약 성경에서 바울 서신은 다른 성경들과 구분되어 문장의 구조에서 독특한 히브리 리듬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광범위한 형태의 바울 서신의 히브리 문장구조 연구는 요하네스 바이스(Johannes Weiss)에 의해서이다. 그는 히브리 문장구조를 연구한 결과 바울 서신들이 눈이 위함이 아니라 귀를 위하는 문체임을 발견하였다. 특히 바이스의 공헌은 바울의 설교가 병행요소를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복음서의 연구에 있어서 저스틴마티(Justin Marty)는 히브리 성경과 헬라의 그리스 회상록을 비교하여 많은 차이점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 후 마틴 알버츠(Martin Albertz)는 성경은 문학 작품의 일반적인 역사 즉 양식사에 포함 될 수 없다고 했다.

 

 한편 그때까지 만해도 그들이 신약성경에서 헬라어의 수사학 양식의 관점을 가지고 관찰해도 히브리 문장구조(chiasmus)라고 알려진 문학 양식에 관한 연구가 발견되지 않았다. 이 특수한 문학적 양식은 성경 사전에 의하여 “내향적 병행구조”라고 불리 운다. 이것은 브리그(Briggs)와 몰튼(Moulton)의 작품에서 언급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체계화 작업은 정통 유대인으로 신학자였던 로우스(Lowth)에 의해서 히브리 문장구조의 비약적인 발전과 함께 설교에 적용하게 되었다. 로우스는 신약성경이 전총적인 헬라 문화뿐만 아니라 히브리어의 유산이 함께 융화되어 있다고 했다. 이때부터 우리는 지금까지 전통적인 해석 방법의 헬라의 수사학을 배제하고 히브리어 즉 유대인의 문학 양식인 병행 구조를 현대까지 발전시킴으로 성경 이해에 대한 진일보하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에 나타나는 병행 구조는 그것이 산문이던 운문이던 간에 히브리 문장 구조의 핵심임을 알아야 한다.

 

 계속해서 히브리 문장구조인 키아즘에 관해서 유대인으로 16세기의 드로시(De Rossi)의 작품 ‘눈의 빛’(Meor Enajim)에서 최초로 성경에 나타난 내용을 중심으로 발표되었다. 그는 이 책에서 과거 교부들에 의해 간헐적으로 히브리 문장구조에 대하여 언급 되어왔던 것들과 비교하여 볼 때 획기적인 적용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벵겔(J.A.Bengel)dl 1742년에 저술한 주석에서 이 구조에 대해 언급 및 활용되고, 그가 처음으로 병행 구조(chiasmus)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벵겔은 사상이나 용어의 ‘병행 구조’뿐만 아니라, 아직까지 아무도 발견하지 않은 ‘교대 병행 구조’(alternating parallelism)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그는 구체적인 예로 로마서 3장 9절 – 4장 12절을 7개의 부분으로 병행 구조로 배열하고 중심에 3장 22절의 믿음이라는 단어를 배치하였다.

 

 키아즘의 비약적인 발전은 1752년 영국에서 유대인으로 기독교 신학자였던 로버트 로우스(Robert Loeth)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히브리인의 거룩한 시”라는 제목으로 일련의 강의를 시작했다. 이것이 현대적 히브리 문장구조라고 불리는 병행구조 연구의 본격적인 장이 마련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로우스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많은 부분이 히브리 문장 병행구조라는 히브리 시의 리듬의 본질을 발견한 공로가 있다. 그는 히브리 문장구조를 다음과 같이 “각 주기 안의 구성 요소간의 어떤 동일성, 닮음, 관계성으로, 같은 주기의 구성 요소들이나 줄 들 안에서, 어떠한 규칙들에 의해서 상호 간에 일 들이나 단어들이 대답되어지는 것이다”라고 정의했다. 그는 더 발전시킨 히브리 문장 병행구조를 동의적(synonymous, gradational : 눅 1:46-47), 반의적(antithetic, opposite : 잠 27:6), 종합적(synthetic, construction: 시 19:7-9)으로 세분화한 신학자로 기록된다. 이러한 많은 예들이 로우스(Robert Lowth)의 저작인 “이사야서의 새로운 번역”에 아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그가 히브리 문장 구조에 익숙한 유대인이기 때문에 되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때부터 히브리 문장구조는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했다. 정작 로우스의 책이 세상에 나온 것은 독일 학자인 믹카엘리스(J. D. Michaelis)에 의해 수정 보완되어 1758년과 1761년에 각각 출판되었다.

 

 그들의 공로로 인해 우리는 히브리 문장 병행구조의 분야에 기초적인 토대가 마련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어떻게 로우스에 의하여 키아즘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로우스가 유대인 신학자이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로우스의 절대적인 도움으로 히브리 문장구조에 대한 비약적인 발전과 아울러 더 많은 연구에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던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대인 신학자들인 랍비들이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원리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 그의 유대적인 배경이 이방인 신학자들의 책상에서 성경을 연구한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자기 민족이 구약성경을 해석하던 원리들을 가지고 신구약 성경을 히브리적인 문장구조에 관심을 가지고 적용했기 때문에 키아즘의 비약적인 방전이 가능했다고 보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유대인인 로우스가 기독교 신학자로 히브리 문장 구조의 핵심을 알게 된 것은 아주 우리에게 무척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때부터 그의 유대적인 배경에 입각한 해석학의 적용으로 다른 신학자들이 히브리 문장구조인 ‘교차 병행구조’에 대한 연구의 꽃을 피우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로우스의 연구를 이어 받은 영국의 존 제브(John Jebb)는 1820년에 발표된 “거룩한 문학”(Sacred Literature)에서 로우스가 말한 동의적 병행을 “같은 어원의 병행구조”(coganate parallelism)로 대치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그는 로우스에 의해 제안된 세 가지 종류 외에 한 가지를 추가하여 이것을 “내향적 병행 구조”(introversion, introverted parallelism)라고 명명한 것이 그의 중요한 공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종의에 의하면 키아즘은 “시의 문장 가운데에 그 줄이 얼마이든 간에 처음이 끝과 병행하고, 두 번째가 마지막 전 것과, 이런 식으로 계속되어져서, 밖에서 안 쪽 중심으로 들어가는 모양”이라고 말했다. 그는 시편 135편 15-18절을 예를 들어 설명하였다. 그는 이 원리를 더욱 발전시켜 병행원리를 구약에서 신약으로 확대 적용하여 많은 문장들을 문단이나 연으로 집단화 하였다.

 

 한편 로우스는 줄 만으로의 병행 구조를 다룬 반면, 독일신학자 제브는 병행조를 긴 본문 부분에도 적용한 것이 공헌이라 하겠다. 계속해서 제브는 “앞에서 열거한 각 형태는 많은 부속 변형과 상호 결합이 존재하며, 여러 절들이 여러 가지 형태로 상호 결합되며, 분위기가 상호 문장에 생기를 띠게도 하며, 사고의 흐름을 특수하게 부각시키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 외에도 병행 구조에는 여러 가지의 변형 형태가 존재하며 각 줄들은 2행 배열, 3행 배열, 4행 배영 또는 그 이상의 형태를 가진다고 하였다. 그는 이 구조를 취급하는데 있어서 American Standard Bible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제브는 실로 키아즘을 대중화시키는 일에 선구자로 간주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영국의 토마스 보이스(Thomas Boys) 목사는 1824년 그의 저서 “Tactica Sacra”와 1825년의 “Key to the Book of Psalms”에서 도치 순서(inverted order)에 관하여 연구한 것을 발표하였다. 보이스는 이러한 형태인 도치 순서 병행은 히브리인의 문학작품, 대화, 토의 등에서 두루 발견된다고 하였다. 보이스는 제브의 ‘내향적 병행구조’란 용어를 버리고 “대응(correspondence)”란 용어를 사용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현상들이 줄들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문장이나 책 전체에도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즉 병행 구조의 한계를 더욱 확장시켜 같은 문단에서 각 대응되는 줄들 간, 뿐만 아니라, 전체 문단 간에서도 이와 같은 상호 대응이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그는 모든 구조를 분류하면서 1) 교대적인 2)내향적인 3) ‘교대적인 + 내향적인’ 결합형의 형태로 분류하였다.

 

 스코틀랜드의 신학자인 존 포비스(John Forbes)는 1854년에 “성경의 대칭적 구조”(The Symmetrical Structure of Scripture)를 출판하여 신구약에 나타난 도치 구조를 찾아냈으며, 그의 책에는 로우스와 벵겔과 보이스 및 제브를 자주 인용하였다. 또 다른 스코틀랜드 학자인 윌리엄 밀리간(William Milligan)은 요한계시록을 연구하여 그의 저술에서 도치 순서 구조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렇지만 그는 제브나 포비스가 사용한 용어들은 사용하지 않고, 단지 “도치 병행 구조”라는 단어만 사용했으며 이러한 구조에 관해 확실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1908년에 룬드(Nils Wilhelm Lund)가 1942년에 그의 박사학위 논문인 “Chiasmus in the New Testament”를 시작으로 이에 관련된 여러 눈문들을 다수 발표하였다. 그는 1922년에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에서 벌린저(E.W.Bulliger)의 감수 아래 “동료성경(The Companion Bible)”을 출간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도치 구조’를 많이 적용해서 발전시켰다. 하지만 이 책은 세대주의 입장에서 편집되어 많은 오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참고로 할 때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또한 1978년에 웰치(John W. Welch)가 “Chiasmus in Antiquity”라는 책을 통하여 그 간의 동 분야에서 이룩한 업적들을 전체를 종합해서 모았으며 여기에 자신의 연구를 포함시켜 편집 발표하였다.

 

4. 단문, 히브리 문장구조의 종류

 

 아래의 분류는 단문의 경우 나타나는 키아즘 병행구조에 적용된 기본적인 분류이다. 정말 히브리 문장구조에는 확실히 절과 간 사이에 병행구조가 있다. 여기서 각 문장의 단락들은 그 글의 중심 문단으로부터 서로 병행하고 대칭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신학자들은 이러한 대칭에 대해서 병행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문장 구조의 병행은 많은 다양성과 등급이 있다. 그렇지만 히브리 문장구조는 여러 가지의 기본적인 형태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므로 히브리 문장 구조는 아래의 여러 가지 구조들이 교차 병행되어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생하게 구성되어 있다. 히브리 문장구조는 이 몇 가지 기본적인 병행에서 파생되어 다른 여러 가지의 다양한 병행 구조가 포함된다. 우리가 히브리 문장 구조의 기본적인 형태를 알고 있으면 성경에 나와 있는 다른 형태의 것들은 어렵지 않게 적용할 수 있다. 이제 우리가 병행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이는 병행되고 있는 내용과 단어 사이에 어떤 관계로 설명하는 가에 대한 문제이다.

동의적 병행

 

 근대의 최초로 유대인 신학자가 된 로우스는 정의하기를 히브리 문장 병행 구조로 대응하는 곳에 묘사된 단어는 서로 차이가 있어도 실제로 그 의미는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좀 더 쉽게 설명하면 문장의 서로 대응되는 병행구조는 같은 의미를 가지나 반복을 피하고 좀 더 이해를 돕기 위하여 동일한 의미를 가진 다른 용어를 사용해서 구체적인 뜻을 설명한다. 따라서 어떤 문장에서 한 주제가 정해지면 그 전체 또는 일부가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다른 용어로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단어는 서로 다르지만 그 뜻은 동일한 어원(cognate)이라는 용어가 더 적합하다고 제시했다. 하지만 후대의 이 분야를 깊이 연구한 신학자들은 같은 개념이 점진적으로 상승 또는 하강한다는 의미에서 동의적 병행을 점진적 병행(gradational)이라는 단어가 더 적합하다고 하였다.

 

동의적 병행이 되는 시편에서 그 예를 살펴보자.

 

예) 시편 8편 4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니이까

 

  사람과 인자 그리고 생각과 권고가 서로 동의적으로 병행되고 있다. 시편이나 잠언은 이런 동의적 병행이 많이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같은 문장을 단순히 반복하는 것보다 그 뜻을 더 분명하고 강조하는데 동의적 문장이나 단어를 통해서 표현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히브리 문장구조에서 동의적인 병행은 단순한 반복을 피하고 하나님께서 그 사실을 강조하고 각인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형태의 문장이다. 특히 어떤 사실을 말하고 우리로 하여금 그 의미를 잘못 이해하지 않도록 다시 한 번 동의적인 표현을 써서 그 뜻을 분명히 하기 위한 히브리 문장구조가 가지고 있는 특징이라 말할 수 있다.

 

가장 단순한 히브리 문장구조를 통해서 다시 한 번 동의적 병행을 살펴보자.

 

시편 19편 2절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말한다

 

 본문은 내용적으로 볼 때 병행되는 단어들이 서로 동의적이다. 다른 예로는 시 21:1-2; 24:3-4; 107:1, 사 55:6-7 등을 예시하였다. 동의적 병행은 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태로 보면 된다. 우리가 동의적 병행의 구조를 보면 하나님께서 좀 더 구체적으로 그 단어와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비슷한 단어나 같은 의미의 단어를 통해서 강조하고 반복할 때 많이 쓰이는 히브리 문장구조의 가장 일반적인 패턴이다.

 

반의적 병행

 반의적 병행은 문장 구조 안에서 서로 두 줄이 병행이 되고 있으나 서로 간에 단어나 감정이 반대로 되는 경우를 말한다. 한편 히브리 문장구조에서 반의적 병행 구조를 자주 사용하는 덧은 바로 반대적인 개념을 언급하기 때문에 다른 해석이 없어도 성경을 읽는 사람이 쉽게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흰색과 검은색을 대조하여 그 차이를 설명하기 위하는 것과 같다. 아래의 잠언에 나타난 반의적 병행은 서로 반대적인 의미로 설명하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쉽게 그 의도를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그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주로 잠언에서 하나님께서 자주 쓰는 방법으로 동의적 병행과 아울러 반의적 병행은 매우 중요한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태이다.

 

잠언에 나타난 반의적 병행의 형태의 예를 살펴보자.

 

예) 잠언 27장 6 - 7절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하고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

 

 본문은 서로 대칭되는 단어와 내용이 서로 반대가 되는 단어를 통해서 히브리 문장구조의 반의적 병행의 패턴을 잘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면 친구와 원수가 서로 반의적으로 병행이 되고 있고, 더 발전하여 친구는 충고할 때 충성된 마음으로 시작하지만, 원수의 가식적인 사랑의 행동은 거짓에서 출발하는 것이라고 반의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계속해서 배부른 자와 주린 자가 반의적으로 병행이 되고 있고, 꿀과 쓴 것이 반의적으로 병행되어 그 의미가 너무도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런 예들은 잠언에 주로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더 연구하고 싶으면 잠언 10장 1, 7절과 29장 26절 그리고 시편 20장 7 - 8절에서 찾아보기 바란다.

 

종합적 병행

 

 키아즘은 근대에 와서 유대인 신학자 로우스에 의하면 히브리 문장구조인 병행 구조가 건축물의 형태와 유사하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사이에 동의적 병행이나 반의적 병행이 직접 존재하지 않지만, 본문의 전체 문장과 각 부분들의 주제를 더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구조의 형태에서 서로 대칭 및 동질적으로 종합적인 내용으로 병행의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명사는 명사에게, 동사는 동사로, 의문사는 의문사로, 구성 요소들은 구성 요소들에게, 반대는 반대로, 질문은 질문으로 등 유사성이나 동일성이 상호간에 종합적인 형태로 병행이 되는 형태를 말한다. 히브리 문장 구조에서 종합적 병행을 통해서 성경을 쉽게 이해하도록 배려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아래의 예를 보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종합적 병행에 대한 예를 시편에서 살펴보자.

 

예) 시편 1편1절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죄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않지 아니하고

 

 본문은 단어나 동사가 직접 대칭은 되지 아니하나 비유적이거나 은유적인 같은 사상을 가지고 전개됨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어떤 점진적인 병행과 종합적인 병행을 동시에 히브리 문장 구조를 사용하여 좀 더 쉽게 이해할 구 있도록 돕고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복 있는 사람이 어떤 상태에서 살아야 하는지를 실제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더 나아가 죄인의 길에 서지도 아니하고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않는다는 행동의 동사를 통해서 복 있는 자가 어떤 자리에 있는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시편 기자는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자리에 있는가에 따라 그곳이 복된 자리가 될 수도 있지만, 어떤 자리는 죄와 악인들이 있는 복 없는 자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 있는 자는 악인과 죄인 오만한 자들이 아닌 의인들의 자리에 있을 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설명을 히브리 문장구조에서 종합적인 병행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말 술 먹는 자리는 복 있는 자리라고 할 수 없고 은혜 받는 자리가 복 있는 가리라는 사실을 시편기자는 너무도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에 고백하고 있다. 물론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과 복 없는 사람 즉 의인과 악인에 대한 종합적인 병행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

 

교차적 병행

 

 교차적 병행은 제브에 의해 내향적 병행구조(introverted parallelism)로 제시된 4번째 구조이다. 교차적 병행은 대칭적 병행구조라고도 말하는데 이는 문장에서 줄이 아무리 길더라도 글의 중심에서부터 시작하여 첫 줄이 마지막 줄과 병행이 되고 둘째 줄은 마지막 전 줄과 병행이 되고 그런 식으로 전체가 배열되는 형태를 말한다. 키아즘은 신구약 성경을 기록하고 있는 이러한 ‘히브리 문장 병행구조’를 CHIASMUS(키아스무스, synchysis, epanodos)라고 히브리 문장구조를 연구한 신학자들이 불러왔다. 저자는 히브리 문장구조에 해당하는 이러한 형태를 ‘히브리 문장구조’ 즉 키아즘(chiasm)란 용어로 통일한다. 주님께서 저자에게 키아즘이라는 한 가지 형태의 히브리 문장구조만 배운 것이 아니라 히브리 사고의 전반적인 내용을 배웠기 때문에 이렇게 종합해서 키아즘 프리칭이라는 책을 쓸 수 있는 큰 축북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히브리 문장구조는 문장에 나타나는 글의 형태를 통해서 저자의 의도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키아즘 병행구조는 신구약 성경에 적용할 수 있는 히브리 문장구조의 핵심적인 원리가 된다. 따라서 히브리 문장구조의 원리는 성경의 모든 문장에 망라해서 적용되고 있다. 실제로 우리가 이상의 히브리 문장 병행구조를 모르면 성경을 정확히 해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글 성경은 번역에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병행구조의 원리는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교차적 병행구조는 우리가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예) 마태복음 6장 24절

 

A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B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B`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A`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본문은 A에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언급하면서 A`는 구체적인 설명의 형태로 한 사람은 우리로 적용하고 두 주인은 하나님과 재물이라고 정확한 해석을 하고 있는 형태가 교차적 병행구조의 키아즘이다. 실제로 우리가 키아즘을 모르면 두 주인이 정확히 무엇인가를 고민할 수 밖에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든지 재물을 섬기든지 하는 존재이지 둘 다 섬길 수 없도록 지음 받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존재를 섬길 것인지를 선택해야 하는데 주님은 하나님을 섬길 것을 암시적으로 압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키아즘의 형태인 교차적 병행은 가장 많이 나오는 형태로 긴 문장이 아닌 짧은 문장에서 즐겨 쓰는 방법이다.  

 

마태복음에서 우리는 또 다른 예를 살펴보자.

 

예) 마태복음 10장 16절

 

A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B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고다

 B`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A`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위에 나타난 예를 보면 AB-B`A`로 기록하고 있는 교차적 병행구조를 볼 수 있다. 이러한 현태는 성경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히브리 문장 구조 형태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병행 구조는 성경해석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에 해당한다.

 

교대적(alternating) 병행

 

 교대적 병행은 전반부의 내용이 그대로 후반부에서 같은 순서로 전개되는 것을 말한다. 이런 히브리 문장 병행구조 형태의 문장이 반복되면서 성경의 저자가 자신의 의도를 자연스럽게 그 뜻을 밝힘으로 이 본문을 해석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다르게 해석하는 실수를 막고자 함이다. 예를 들어 성경의 저자는 교대적 병행의 구조를 통해서 자신이 A라고 말한 것은 A`라는 의도의 뜻이기 때문에 다른 의미로 해석하지 말라는 적용된 설교의 문장구조이다. 그러므로 히브리 문장구조에서 교대적 병행의 짝을 찾으면 무엇을 설교할 것인지를 저자 자신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엉뚱한 내용으로 설교할 수 없게 해준다.

 

이제 우리는 교대적 병행구조의 예를 살펴보자.

 

예) 마태복음 6장 34절

 

 A 그러므로 내일 일을

  B 염려하지 말라

 A` 내일 일은 내일

  B` 염려할 것이요

 

 교대적 문장구조는 병행이 나타날 때 같은 순서로 반복되어 설명하는 수순을 따라 기록된다. 본문은 짧지만 AB-A`B` 교대적 병행구조로 되어있다. 다시 말해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일이기에 내일 것까지 오늘 가져다가 염려하는 어리석은 일을 반복하지 말라는 교훈을 강조하고 있다.

 

또 다른 예를 계속해서 살펴보자.

 

예) 에베소서 1장 15절

 

A 주 예수 안에서

 B 너희의 믿음과

A` 모든 성도를

 B` 향한 사랑을

 

 본문은 아주 단순한 문장이기는 하지만 AB-A`B` 교대적 병행구조를 볼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누가복음에 나타난 교대적 병행구조의 예를 살펴보자.

 

 예) 마태복음 7장 7 - 11절 [기도의 명령]

 

A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B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C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요

 

A`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B` 찾은 이가 찾을 것이요

  C`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라

 

 이 문장의 예는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내용으로 ABC-A`B`C`의 순서로 교대적 병행구조로 본문이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저자는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첫째로 이 본문은 앞에 등장하는 ABC의 문장과 A`B`C`의 교대적 병행구조가 단순히 강조하기 위한 서술인가 아니면 그 이상의 다른 의미의 설명인가 하는 문제이다. 둘째로 이 본문이 기도에 대한 약속인데 같은 내용을 다른 내용으로 설명하는 것인가 아니면 전혀 다르게 표현한 기도의 점층적 표현인가 하는 문제이다. 실제로 이 본문은 히브리 문장구조의 키아즘의 진수를 알려주는 기법으로 우리가 이 패턴을 잘 이해하면 다른 성경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먼저 ABC는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불변적인 약속임과 동시에 히브리 문장구조에서 명령형 동사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명령형 동사는 히브리 문장구조에서 아주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명령형 동사가 하나님께서 약속한 말씀이라고 할지라도 그 명령의 약속대로 순종할 것을 전제함과 동시에 순종할 때 그 말씀이 실행이 되도록 결정해 놓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씀을 백번 천 번 암송하고 가슴에 품고 있어도 이 말씀은 아무런 일을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히브리 사고에서 명령형 동사는 순종할 때 일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직접 그 기도하라는 약속을 붙잡고 기도하는 그 시간이 바로 하나님께서 직접 그 기도를 응답하시는 타이밍이다. 하나님은 기도에 대해서 순종에 대해서 믿음에 대해서 아는 것에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으신다. 도리어 우리가 기도할 때, 순종할 때, 믿음의 반응을 할 때 일을 시작하신다. 그것이 명령형 동사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실행 원칙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기도하는 자를 찾으시고 그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역을 진행하신다. 이 원칙은 히브리 사고의 명령형 동사가 가지고 있는 전제이며 원칙이다. 이 원칙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변할 수 없는 진리이다.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하는 사실은 ABC가 주님께서 보편적인 모든 사람들에게 약속하는 명령형 약속이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ABC 단계는 기도와 응답에 대해서 약속하는 명령일 뿐 응답 자체는 A`B`C`의 단계에서 우리 자신이 기도할 때 성취되는 응답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히브리 문장구조에서 ABC가 보편적인 기도하라는 명령의 약속일 뿐이다. 이 단계에서는 기도의 능력이나 응답이 있을 수 없다. 기도의 응답은 A`B`C`의 단계에서 그 약속의 말씀을 믿고 실천하는 자들이 경험하는 세계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것이 본문의 히브리 문장 교대구조를 통해서 주님께서 가르쳐 주고자 하는 분명한 목적이다. 이 본문은 성경 각권을 다룰 때 마태복은 키아즘 편에서 아주 자세히 언급할 것이다.

 

교대적 병행구조의 예를 하나 더 살펴보자.

 

예) 고린도전서 3장 6-7절

 

 A 나는 심었고

  B 아폴로는 물을 주었으되

   C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느리라

 

A` 그런즉 심는 이나

 B`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C`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분쟁은 언급하고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일어난 분쟁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본문의 핵심 키아즘 구조이다. 고린도 교회에 일어난 분쟁의 원인은 제일 먼저 지도자들에 대한 왜곡에서 시작된 것을 바울은 잘 알고 있었다. 이 교회를 개척한 바울을 지지하는 바울파가 득세했고, 그 다음은 초대교회의 정신적 지주인 베드로를 지지하는 베드로파가 도전했고, 바울을 이어 목회학 아볼로를 지지하는 아볼로파가 만만치 않았고, 마지막으로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자신은 누구의 파도 아닌 그리스도파라고 만날 때마다 큰 파벌 싸움이 있었던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바울은 이 분쟁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고 히브리 문장구조인 교대적 병행구조를 가지고 한 방에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관점에서 출발하고 있다.

 

 바울은 A에서 나무로 고린도 교회의 개척을 비유하면서 자신은 심었을 뿐인데 그 심었다는 의미를 A`에서 심은 자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바울이 자신을 지지하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교회의 지도자인 목회자의 위치가 어떤 존재인지를 스스로가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선언하고 있다는 점이다. 많은 교회가 지도자의 문제로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 시대의 상황에서 본문에서 바울 자신이 자신의 존재의 위치를 부정하는 것은 목회자의 현재의 위치가 어떤 모습인지를 깨닫고 적용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복적인 관계를 설명하는데 완벽한 샘플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지도자란 자리의 문제가 아니고 역할의 문제만 있다는 인식이 고착화된다면 많은 교회의 자리의 갈등이 해결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바울은 계속해서 B에서 아볼로를 지지하는 성도들을 향해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나, B`에서 설명하기를 물주는 이도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대단한 존재가 결코 아니라 바울 자신처럼 아볼로도 아무 것도 아니라고 선언하는 키아즘 구조인 것이다. 지도자가의 자기 부인은 오늘날 메가톤급 교회의 목회자가 하나님의 위치처럼 높아진 상황에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하고 깨닫게 하는 고백이 아닐 수 없다. 교회의 지도자는 단지 심는 일과 물주는 일의 역할만 존재하고 결국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설명은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순을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원리가 아닌가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모든 갈등과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결정문을 선언하는 히브리 문장 교대적 병행구조를 보여준다. 바울은 C에서 ‘오진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였으니’라는 선전포고 같은 말씀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바울은 여기서 오직이라는 유일무의한 단어를 선포하고 있는데 이 단에서 반발하거나 거부할 자가 없어야 한다는 경고적인 말씀이다. 오직 고린도 교회가 성장하고 자라는 것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고, 또한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지 그 어떤 개인의 교회가 될 수 없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바울은 C`에서 오직 고린도 교회를 자라게 하신 이는 하나님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말씀은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뿐 그 누구도 교회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교회의 성도인 양떼도 주님의 양이지 그 어떤 지도자나 목회자의 양이 될 수 없고, 교회 자체도 하나님만이 주인이라는 선언적인 병행구조의 설명이다. 이런 사실을 망각하고 그 어떤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자리에 앉은 것은 사탄적인 발상이라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다. 결국 바울은 심는 자나 물을 준 자는 하나님께 그 행한대로 상급을 받을 뿐, 이 땅의 그 어떤 목회자라고 할지라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설명하였다.(고전3:8)

 

5. 장문,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태

 

순차적 병행

 

 순차적 병행은 저자가 신구약 성경에서 제일 먼저 발견한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태이다. 또한 저자는 히브리 문장구조의 전체를 키아즘(Chiasm)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통일시켜 신학적으로 처음으로 붙여 말하는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순차적 병행구조는 헬라 사고에 익숙한 사람들이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문장구조임에 틀림없다. 지금까지는 그 어떤 사람도 성경이 히브리 문장구조로 병행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가장 쉬운 구조조차 설교로 발전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저자도 키아즘을 배우고 설교에 적용하고 가르치면서 마지막까지 풀리지 않았던 것이 바로 순차적 병행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키아즘을 연구하면 할수록 지금까지의 병행적 분류로 해결할 수 없는 본문이 많다는 것에 대한 문제에 봉착했다. 그러다가 순차적 병행 문장으로 설명한 본문이 있다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발견했다. 그 후 신구약 성경 가운데 순차적 병행이 많이 있을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본문의 병행구조들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발견은 저자가 우직스럽게 성경 본문만을 붙잡고 한길만을 걸어온 것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히브리 문장구조에서 순차적 병행은 긴 본문 안에서 각 절 별로 병행적 구조가 같은 패턴으로 계속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A 와 A`가 순서적으로 설명되어지고 계속해서 B 와 B`의 패턴으로 C C`, D D`로 연속적으로 설명되어지는 구조이다. 이런 구조는 헬라 사고에 익숙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만들어진 특별한 구조임을 저자가 찾아낸 원리이다. 순차적 병행구조는 이야기 형태의 글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짧은 본문만 가지고 키아즘의 형태를 찾았다면, 긴 본문에서 순차적 병행구조로 접근할 때 전체적 내용이 한눈에 들어오는 병행구조라는 사실이다. 앞으로 이런 예들은 이 책에서 많이 접하겠지만 이렇게 글로 설명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인식해 주면 좋겠다.

 

 히브리 문장구조의 순차적 병행은 지금까지 획일적인 형태만을 고집한 사람들의 선입관을 깨고 새롭게 성경을 접근하고 해석할 수 있는 획기적인 틀을 마련해주었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런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태를 새롭게 분류하여 키 구조와 브이 구조로 구분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성경이 히브리 문장구조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의 문제를 알아야 한다. 이는 성경이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주신 설교의 현태를 가진 문장의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볼 때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라는 문장으로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이미 성경 자체가 하나님에 의해서 해석되어진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 그러면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조건 해석하고 주석해서 오늘날의 환경에 적용을 덧붙여 설교한 모든 행위에 대하여 다시 한 번 되물어 보아야 마땅하다. 지금까지 수천 년간 설교해 온 것을 정당화하는 것이 마땅한가 말이다. 저자는 이제부터 히브리 문장구조를 이해한 목회자는 자신의 의지를 따라 해석한 설교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설교한 문장구조를 가지고 선포하는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는 믿는다.

 

히브리 문장의 키(X, Chi) 구조

 

 히브리 문장구조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교차병행구조라는 부르는 키 구조이다. 이 형태는 신구약 성경의 많은 분량이 키 구조의 형태라고 보면 틀림없다. 이것은 히브리 문장에서만 나타나는 형태로 다른 언어에서는 그 유래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만약 우리가 이런 히브리 문장구조로 글을 쓰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성경을 번역해보면 이런 구조로만 번역이 가능하게 되어 히브리 문장의 형태로 글이 구성된다. 성경이 이런 형태로 기록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의 형태로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기록된 글이기 때문에 필연적인 결과였다. 결국 이런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태는 하나님의 사고로만 기록할 수 있는 유일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설교 형식의 문장에서는 반복과 점층적인 상승과 설명이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런 히브리 사고의 문장 구조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키 구조의 예들은 앞에서 많이 언급했고 앞으로도 성경의 각권에 나타나는 예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할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히브리 사고의 문장의 현태가 나올 때 해석자가 가장 주의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면 그는 설교자의 자격이 없다. 키 구조의 해석은 이미 성경 자체가 해석적인 문장의 구조로 설명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해석자는 그 구조의 분석만 잘해도 이미 설교의 내용은 다 준비된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렇듯 키 구조의 형태는 우리가 많은 실습을 통해 습관적으로 찾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야 한다. 저자는 이 책을 읽는 모든 분들이 히브리 문장구조의 키 구조에 전문적인 안목의 사람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히브리 문장의 순차적 구조(V구조)

 

 브이 구조의 히브리 문장구조는 저자가 새롭게 찾아낸 히브리 문장구조의 틀이다. 저자는 브이 구조를 키 구조에 넣기 보다는 너무 다른 형태이기 때문에 새로운 히브리 문장구조 안에 배치하였다. 특히 브이 구조는 순차적 병행이라는 이름으로 저자가 분류하였다. 물론 브이 구조는 키 구조의 형태에서 변형된 것으로 헬라 사고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친숙한 히브리 문장구조이다. 이는 저자가 십년동안 키아즘 즉 히브리 문장구조를 연구하면서 찾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결과하고 고백하고 싶다. 이런 형태는 앞으로 설교자가 앞 뒤 문장의 형태를 잘 보면 찾을 수 있는 원리이다. 정말 좋은 설교자가 되길 원하면 이런 브이 형태의 키아즘을 찾으면 된다. 한편 브이 구조의 설교의 형태는 실제로 헬라 사고의 문장에 길들여진 우리에게 익숙한 문장의 구조이기 때문에 우리가 더욱더 쉽게 친숙할 수 있다.

 

  브이 구조의 형태의 문장은 아주 단순하게 성경의 기록자가 한 문장을 설교하고 바로 다음 문장에 연속해서 자신의 해석을 달아 놓은 형태이기 때문에 찾기도 쉽고 접근하기도 쉬운 글이 분명하다. 이방인의 문장의 사고에도 아주 숙달된 문장으로 우리가 좀 더 찾기 쉬운 것이 특징이다. 브이 구조의 문장 형태는 특별히 논리성이 강한 서신서에 가장 두드러진 현상이라고 보면 된다. 그 이유는 서신서가 주로 내러티브 문장이 아닌 서술적인 문장으로 된 설교의 형태이기 때문에 이런 구조로 작성할 때 좀 더 쉽게 이 편지를 읽어주고 들려주고 이해하는데 훨씬 더 효과적인 문장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브이 구조의 키아즘의 해석은 키 구조의 해석보다는 우리에게 좀 더 친숙하고 익숙한 형태로 접근할 수 있다. 성경의 기록자가 이미 설교로 해석해서 적어 놓았기 때문에, 설교자가 억지로 해석하려고 애쓰지 않고도 쉽게 설교할 수 있는 형태이다.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은 브이 구조만 찾으면 이미 성경의 원저자가 기록해 놓은 순서대로 설교의 뼈대가 완전하게 있기에 우리가 억지로 해석하려고 힘쓸 필요가 없이, 설교자는 그 내용의 순서를 따라 잘 적용하여 설교하면 될 수 있다. 이번에 저자는 이 책에서 성경 전체를 통해 브이 구조의 형태의 설교를 많이 접하게 되고 익숙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정말 특이한 점은 브이 구조가 다시 키 구조의 문장 형태로도 도치된다는 사실이다.

 

이제 브이구조의 본문을 가지고 그 예를 살펴보자.

 

예) 눅 16장 17-31정

 

A(19절) 한 부자                   A`(20절) 한 거지 나사로

B(22절) 그 부자의 죽음            B`(22절) 그 거지도 죽음

C(23절) 그 부자가 음부에서 고통   C`(23절) 그 거지는 아브라함의 품에 있음

D(24절)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간구  D`(25절) 하늘 아버지의 대답

E(27절) 또 다른 간구(영혼구원)    E`(29절) 하늘 아버지의 또 다른 대답

                     F(29,31절)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들으라

 

본문은 히브리 문장의 순차적 구조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 준다. 비록 히브리 문장의 순차적 구조를 전혀 모르는 사람조차 저자가 작성한 본문의 구조만 보아도 하나님께서 이 본문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특히 본문은 처음에는 두 사람의 대칭적 관계를 대비하면서 말씀하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면, 중반부에 가면서 천국과 지옥의 병행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후반부에서는 한 부자와 주님의 대화를 통해서 이 땅의 사람들을 구원하는 방법에 대한 이여기로 마무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듯 히브리 문장의 순차적인 구조는 도표로 표현되고 그 주제나 제목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하나님께서 무엇을 의도하고 말씀하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이것을 보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알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는 것이 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순차적 병행구조를 모르고 읽거나 설교하면 그 내용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을 가능성이 너무 크다는 사실이다. 결국 히브리 문장구조의 원리를 알고 어떤 구조인가를 아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하신 말씀의 핵심을 한 눈에 파악하는 것이 키아즘의 특징이라 말할 수 있다. 이 본문은 누가복음 키아즘 편에서 아주 자세히 다룰 것이다.

 

6. 히브리 문장구조의 성경 해석 및 적용

히브리 문장구조의 ‘키아즘의 병행구조’는 현 시대에서 보면 비효율적이고 문장이 너무 복잡하게 보일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것을 가볍게 취급하고 간단히 넘길 문제가 아니다. 특별히 히브리 문장구조가 이렇게 독특한 양식을 갖고 있는 것은, 성경을 읽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기억하기 쉽고 강렬한 인상을 심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는 문서가 발달하였으나 그 당시는 구전 문화로 모든 것이 구전에서 구전으로 전해진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이런 당시 문화적인 역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히브리 문장 구조는 아주 독특한 특성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히브리 문장구조는 그 특성상 한번 들으면 쉽게 잊어버릴 수 없는 구조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그 이유는 당시 히브리인들에게 성경은 모든 사람등의 필수적인 법과 질서를 가진 경전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히브리 문장 구조를 모르면 본문을 정확히 해석할 수 없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께서 직접 해석해 놓은 책 성경

하나님께서는 각 시대의 형편을 따라 시대에 맞게 적용해서 히브리 기록자들을 통해서 직접 설교한 본문을 기록한 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이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 설교의 기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의지를 따라 단어와 문장을 잘못 해석하는 일은 더 이상하면 안된다.
물론 목회자 자신도 이런 설교를 하는 것을 조심하고 또한 설교를 듣는 청중들도 인위적인 설교를 더 이상 용납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제부터 지향해야 할 설교를 더 이상 용납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제부터 지행해야 할 설교는 하나님께서 직접 작성하는 히브리 문장구조를 따라 충실히 전달하는 역할을 해야 마땅하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직접 말씀하신 설교를 제쳐두고, 자기의 신학의 틀을 가지고 전통적인 방법으로 설교하는 것은 자신도 괴롭고 듣는 사람도 괴로운 일이기 때문에 더욱 곤란하다.
그러면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 설교의 원고를 가지고 설교자인 우리가 현 시대의 쉬운 언어로 적당한 예화를 삽입하여 잘 전달하는 순간,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설교 가운데 자신도 느끼고 듣는 사람들도 공통적으로 경험할 것이다



사무엘 11장과 12장의 키아즘(Chiasm) 구조 분석

장절

내용

묵상

11장

11:1

다윗의 군사 파병(랍바)

 

11:2∼5

다윗과 밧세바 동침(죽음)

 

11:6∼17

다윗의 우리아에 대한 음모

 

11:18∼25

요압이 다윗에게 심부름꾼 보냄

 

11:26∼27

다윗을 악하게 보신 하나님

 

12장

12:1∼14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나단을 보냄

헷사람 우리아(이방인 우리아)

12:15∼23

다윗의 아이를 치심

죄 없는 아이를 치셨나?
죄 없는 예수의 죽음

12:24∼25

다윗과 밧세바 동침(솔로몬)

여디디야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

12:26∼31

다윗의 랍바 점령(요압의 요청)

 


♦ 2월 17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12:1∼31
♦ 묵상을 위한 주제 :  여디디야(25절)
♦ 성구 : 선지자(先知者)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因)함이더라.  

“여디디야(Jedidiah)”

‘여디디야’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 사랑을 입음” 이라고 합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므로 심히 앓다가 이레만에 죽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와 동침한 후 낳은 아들은 “솔로몬”입니다.
여호와께서 선지자 나단을 보내어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당신 보시기에 악하게 행동했던 다윗에게 당신의 대언자인 나단을 보내셨습니다. 나단이 다윗 왕 앞에서 전한 이야기는 많은 양과 소를 가진 부자가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이웃의 가난한 한 마리밖에 없는 양을 빼앗았다는 비유였습니다. 

나단이 비유를 들어 말한 이유는 간음과 살인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된 다윗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나단의 비유를 듣고 다윗은 크게 노하여 그 부자를 죽이고 사 배나 갚아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때 나단 선지자는 엄한 목소리로 “바로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책망했습니다.

나단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는 사하셨으나 아이는 죽을 것이며 후손들에게 비극이 임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나단의 말을 듣고 다윗은 회개했습니다.
다윗의 회개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아무런 변명이나 핑계도 없었습니다.

밧세바가 낳은 아이가 앓자 다윗은 금식하고 밤새도록 엎드려 칠일 동안 여호와께 간구했습니다.  

자신의 죄로 인해 아이가 앓자 밤새도록 울며 간구하던 다윗은 아이가 죽자 몸을 씻고 여호와께 경배하고 일상생활로 돌아왔을 때 신하들은 다윗이 크게 실망하고 슬퍼할 줄 알았으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돌이킬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이를 겸허히 수용한 것입니다. 

다윗의 후계자요 그리스도의 조상이 될 솔로몬이 바로 밧세바의 소생으로 여호와께서는 나단을 보내어 솔로몬에게 “여디디야 - 여호와께 사랑을 입음”라는 이름을 친히 붙여 주셨습니다. 

다윗이 암몬의 수도 랍바를 공략한 것은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형통한 길이 열림을 보여줍니다. 이전에 간음과 살인을 계획할 때에는 암몬을 공략하는 데 실패했지만,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서야 비로소 암몬을 공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 찬양 / 돌아와 돌아와

https://www.youtube.com/watch?v=PRBnoEZ10do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2월 16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11:1∼27
♦ 묵상을 위한 주제 :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3절)
♦ 성구 : 다윗이 보내어 그 여인(女人)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고(告)하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the wife of Uriah)”

“우리아(Uriah)”라는 이름의 뜻은 “빛”입니다.
“밧세바(Bathsheba)”라는 이름의 뜻은 “맹약의 여자”라고 합니다.

이스라엘과 암몬은 전쟁 중이었을 때 다윗은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왕궁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저녁때에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을 거닐다가 목욕하는 한 여인을 보고 안목의 정욕에 사로잡혀 우리아의 아내라는 사실을 알고도 그 여인을 불러 들여 동침합니다.
그 여인  즉 밧세바가 잉태하자 다윗은 이를 은폐하기 위해 급히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소환하여 아내와 동침하도록 시도합니다.

다윗은 전쟁터에서 돌아온 우리아가 집으로 돌아가 그의 아내 밧세바와 잠자리를 갖게 하므로 자신의 죄악을 은폐하려고 하였으나 우리아는 다윗의 명을 따르지 않고 왕궁 문에서 다른 신복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다윗은 더욱 간교한 계획으로 우리아를 술에 취하게 한 후 집에 들어가도록 유도하였지만 우리아는 술에 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왕궁 문 앞에서 밤을 보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은폐시키려는 계획이 실현되지 못하자 요압에게 편지를 보내어 적군의 공격에 의해 우리아가 살해당하도록 합니다. 우리아는 자신을 살해하라는 명령을 담은 편지를 요압에게 전달했고 결국 우리아는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다윗의 죄악을 알아차린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이 모든 일을 꿰뚫고 계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전진전능 무소부재하신 영원하신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감출 수 없는 아주 미약한 존재입니다.
드러나지 않는 것을 드러나게 하시는 하나님 앞에 모든 잘못된 것을 고백하므로 심판의 날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믿음의 사람의 반열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 찬양 / 신랑 되신 예수께서

https://www.youtube.com/watch?v=2mlMA_YAisE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헤세드(은총)를 중심으로 사무엘하 9 10, 11장을 설명

9장 / 은총을 수용한 므비보셋
10장 / 
은총을 거부한 암몬 왕 하눈
11장 / 은총을 거역한 다윗

은혜의 복음이 전파 될 때 영생 얻기로 작정된 자는 므비보셋과 같이 복음을 받아드릴 것이다.
반면에 영생 얻기로 작정되지 않은 자는 하눈처럼 은총을 모독할 것이다.
그런데 다윗은 은총을 거스리는 반역 행위를 스스로 선택하였다.  

히브리서 10:28-29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세상의 심판 기준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의 기준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굳게 붙잡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 은혜 위에 굳게 서게 서서 오직 우리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찬양하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멸망의 자식이 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 하는 복된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다윗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므비보셋이나, 오늘 등장하는 하눈이나, 자격없는 자들이긴 마찬가지이다.
하눈은 암몬의 왕이었는데, 다윗이 하눈의 아버지로부터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조문하러 신하들을 보냈다.
므비보셋이나 하눈이나, 자신의 공이 아니라 그 아버지의 선행으로 은혜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런데 므비보셋은 겸손과 감사로 다윗의 은혜를 수용했고 암몬은 교만과 의심으로 다윗의 은혜를 발로 걷어차버렸다. 

믿음이라는 은혜를 선물로 받았을 때 성도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본문이다.
우리는 값었이 예수님 보혈의 피로 죄를 씻는 은혜를 입었다.
천국 백성이 될수 있는 자격도 얻었다.
이것은 나의 공이 전혀 아니고,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다.
이 은혜를 받아들이는 나의 마음의 자세는 어떠한가?
기쁨과 감사함, 겸손함으로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되었는가?
교만함과 의심으로 은혜가 은혜인 줄을 모르고 복을 발로 차내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똑같은 은혜를 받았지만, 받아들이는 마음밭에 따라 은혜를 삶속에서 경험하기도 하고, 오히려 믿음을 속박과 굴레로 여기며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기도 한다.

은혜를 온전히 내몫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비결은 오직 겸손이다.
내가 죄인이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만 은혜를 감사함으로 받을 수 있다.
하나님 없이도, 믿음없이도 잘살 수 있다고 생각하면 은혜가 고맙지 않다.
귀찮고 나를 간섭하는 굴레로 느껴질 뿐이다.  

믿는자들을 핍박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
교회는 점점 세상으로부터 배척 당하고, 예수를 증거하는 것 만으로도 핍박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받은 은혜는 감히 세상이 줄수 없는 무한한 사랑이고 축복이다.
그 사실을 믿고, 은혜에 감사하며 하루를 살아내야 한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이 은혜를 기쁨과 감사로 내 삶에 녹여내는 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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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천'의 이름은 조선시대 중국의 사신들이 숙식을 하던 최초의 국립여관이던 홍제원이 있어 홍제원천이라고 불렸고, 지금의 명칭도 이런 연유에서 붙여졌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홍제(洪濟)'로 쓰다가 조선 세종 이후부터 홍제(弘濟)와 함께 쓰였다고 한다.


홍제천
에는 환향녀에 대한 아픈 사연이 전해진다.

병자호란당시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다행히 돌아온 여성들이 고국땅을 밟았지만 끝내 고향에는 돌아가지 못한 <환향녀>에 관한 이야기가 그것이다.

17세기 중반 중국의 주도권은 북쪽에서 다시 일어난 여진의 후예 후금의 세력에게 넘어가 마침내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세워지기에 이른다.

청나라는 조선을 침공하여 사대(事大)를 표할 것을 요구했다.
완강히 버티던 조선은 결국 1637년 2월 인조임금이 청나라 태종앞에서 무릎을 꿇고 항복하는 삼전도의 굴욕으로 끝이났다.
치욕적 결말이었지만 이보다 더한 것은 청나라 군사가 철수하면서 조선의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간 것이었다.
그 수는 50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볼모로는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 봉림대군과 부인,그리고 관리들의자제들까지 포함되었다.
자동차도, 비행기도 없었던 시절 만주벌판을 지나 심양까지는 2천리길, 육로로 70일이 넘게 걸리는 길이었다.
추운겨울 만주벌판의 칼바람은 건강한 사람도 버티기 어려운 날씨였다.
그래서 포로의 대부분은 너무 어리거나 늙지 않은 청장년층이었으며, 절반 이상이 여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성은 혼인 유무를 가리지 않았는데, 청나라 병사들의 첩이나 노예로 삼기 위함이었다.

끌려간 여성들은 나이와 신분에따라 값이 매겨저 그 값을 충당해야만 돌려보냈다.
큰돈을 치르고 속환하여 겨우 돌아온 여성들을 '환향녀'라 불렀는데, 고국으로 돌아온 그녀들을 기다린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유부녀들이 남편과 아이들이 그리워 돌아왔지만 시집에서는 그녀들을 받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이미 정절을 잃었다 하여 양반가정에서는 이혼을 요구하는 소송이 계속 제기되었다.

당시 사대부가의 이혼은 왕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는데, 인조는 고민에 빠진다.
자신의무능함으로 백성을 곤경에 처하게 하더니 이제는 포로에서 풀려나온 여성들이 시댁에서 핍박받고 있는 꼴이었다.
인조는 한양으로 들어오는 길목인 "홍제천에서몸을 씻고 들어오면 모든 것을 없었던 일로 해주겠다"며 그녀들의 정절을 문제 삼는 이혼을 금지 시켰다.

 ♦ 2월 15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10:1∼19
♦ 묵상을 위한 주제 : 너는 담대하라(12절)
♦ 성구 : 너는 담대(膽大)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百姓)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城邑)들을 위(爲)하여 담대(膽大)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善)히 여기시는대로 행(行)하시기를 원(願)하노라.

“너는 담대하라(Be strong)”

다윗이 조문객을 암몬에 보낸 것과 조문객이 조롱을 받은 것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이며 예수님께서 유대인에게 조롱과 조소를 받은 사건과 같은 의미라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암몬 왕 하눈은 다윗의 조문객을 조롱하였으나 그 결과는 참담한 실패로 끝나는 것을 볼 때 복을 저주로, 승리를 패배로, 생명을 죽음이 되게 한 것입니다.  

언약의 사람들은 저주를 복으로, 패배를 승리로, 죽음을 생명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보면서 언약으로 인하여 세상에서의 고통은 일시적인 어려움이지만 결과는 고통과 비교할 수 없는 상급이기에 항상 감사하며 끝까지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비록 그 과정은 어렵고 힘들지만 그 결과는 약속된 복이 있기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여 승리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승리해야 할까요?
정신을 차리고 깨어서 일어나야 합니다.
은혜를 입은 성도는 언약의 말씀을 믿기 때문에 “오직 성경으로!” 라는 개혁자들의 슬로건을 마음에 새기고 말씀대로 믿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마지막 날의 심판은 피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 날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길은 감사와 은혜와 믿음만이 아니라 다윗처럼 언약으로 인한 공과 의를 행한 삶이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믿음은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고백이 있어야만 합니다.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회복할 때 무슨 일을 만나든지 담대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로마서 10:17)

믿음의 사람들이여!
이제는 믿음을 입으로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보여주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너지는 사회 질서를 믿음으로 세워 내일의 소망이 오직 믿음에 있다는 것을 증거 하는 일에 동참하므로 세상의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구약에서 246번 언급이 되고 있는 ‘헤세드’는 절반 이상이 시편에 나온다.
‘헤세드’의 용례는 세 가지 영역으로 구분된다.

1. 일상적 용례 / 인간이 인간을 향한 태도
2. 신앙적 용례 /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태도
3. 천상적 용례 / 인간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태도

이런 용례 가운데 언약 이해와 가장 밀접하게 관련된 것은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태도로서의 ‘헤세드’이다.

‘헤세드’는 언약 당사자들 상호 간의 의무 사항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언약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느 1:5).
그것은 언약의 당사자로서 이스라엘이 언약 유지를 위하여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서 이스라엘은 언제나 실패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만큼 이스라엘은 연약한 존재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언약과 관련하여 상벌 규정을 명확하게 제시하셨다.
그 대표적인 본문은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이다.

‘헤세드’는 이스라엘의 언약 준수 여부와 상관없이 언약관계를 이끌어 가시겠다는 하나님의 결정이면서 이스라엘을 위한 배려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헤세드’가 어떤 경우에도 변함없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언약을 성실히 준수한다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경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저주로 심판을 받는 상황이 된다.
성경은 그에 대한 실제 증거들의 기록이다.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상으로서의 복과 저주로서의 심판은 모두 하나님의 ‘헤세드’에 의한 결과이다.
이스라엘이 언약을 잘 지키는데도 복을 받지 못하거나 이스라엘이 언약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데도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실종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긍정적 차원의 ‘헤세드’라면, 하나님의 심판은 부정적 차원의 ‘헤세드’이다.
전자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더욱 강화시키는 효과가 있다면, 후자는 본래의 위치로 돌이키는 회개의 기회가 된다.
두 경우 모두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긍정적인 ‘헤세드’가 최종 목표인 셈이다.
언약의 상벌 규정은 하나님의 ‘헤세드’가 시행되는 통로이자 수단이다.
그 때문에 ‘의’가 ‘헤세드’와 나란히 사용되는 동의어로 등장하기도 한다(잠 21:21).

‘헤세드’의 또 다른 동의어는 ‘성실’이다.
‘성실’은 히브리어는 ‘에메트’인데, ‘떠받치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동사 ‘아만’의 명사형이다.
기본적으로 확실성이나 신뢰성을 의미하는 ‘에메트’는 대체적으로 ‘성실’로 번역되지만, 그 외에도 ‘견고함’ ‘진실’ ‘진리’ 등의 번역이 있다.
‘에메트’의 부사형은 ‘아멘’인데, ‘참으로’ ‘진실로’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기도와 찬송의 말미에서 화답으로 나오는 ‘아멘’은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뜻으로서, 기도나 찬송의 대상이신 하나님께 대한 확신을 표현한다.

‘헤세드’와 ‘에메트’가 한 단어처럼 밀접하게 결합되는 용례가 성경에 자주 나온다(창 24:27, 49; 32:11; 47:29; 출 34:6; 민 14:18; 수 2:14; 삼하 2:6; 15:20; 시 25:10; 40:11, 12; 57:4; 61:8; 85:11; 86:15; 89:15; 115:1; 잠 3:3; 14:22; 16:5; 20:28).


시편 25:10
여호와의 모든 은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잠언 3:3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출애굽기 34: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시편 115:1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므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



그것은 신뢰에 바탕을 둔 성실함이 ‘헤세드’의 기본적 의미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스라엘을 언약의 동반자로 삼으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언약 준수 여부와 상관없이 자신이 세우신 언약을 끝까지 책임지시는 분이시다. 성경은 그런 하나님을 ‘눈동자처럼 지키시는 분’(신 32:10; 시 17:8; 잠 7:2)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분’(시 121:4)으로 표현한다.


♦ 2월 14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9:1∼13
♦ 묵상을 위한 주제 : 은총을 베풀리라(1절)
♦ 성구 : 다윗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오히려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을 인(因)하여 그 사람에게 은총(恩寵)을 베풀리라 하니라.

“은총을 베풀리라(I can show kindness)”

“므비보셋(Mephibosheth, 부끄러움을 해치는 자)”은 “요나단”의 아들이며 “사울”의 손자입니다. 두 다리를 절뚝이는 장애인으로 “미가(Mica)”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풀었습니다.
왜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풀었을까?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전쟁을 치루면서 지난 날 받은 은혜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부족한 것이 없는 평화의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평화를 누리면서 먼저 하나님의 궤를 위한 전을 건축하려고 하였으나 그 계획은 다음 세대가 맡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예전에 신세졌던 사람들을 생각하며 은혜를 갚으려고 합니다.

가장 많은 은혜를 준 사람은 “요나단” 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의 집에 남은 가족이 누구인가를 찾게 됩니다.

사울의 집에 남은 가족은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있었습니다.
‘므비보셋’은 두 다리를 저는 아들이었습니다.
므비보셋은 다섯 살 때 유모가 안고 도망하다가 아이가 떨어져 절게 되었습니다(삼하 4:4).

은혜를 갚는 것은 철저히 성경적입니다.
세상에서는 이러한 것을 “인간의 도리” 라고 합니다.

신세를 졌으면 신세를 갚는 것이 정상입니다.
물질로만 갚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라도 고마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고마움을 잊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도 잊어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도리와 고마움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알겠습니까?

인간적인 고마움을 아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도 알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과 그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은혜를 모른다면 예수님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은혜를 알면 예수님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은 그 은혜를 잊지 않고 므비보셋을 찾아내어 함께 살자고 합니다.

그리고 왕의 식탁에서 함께 식사를 하자고 합니다.

죄 많은 나를 위하여 죽으신 주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매일의 삶을 즐기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마음과 생각으로 평생을 살아갈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천국으로 불러 주셔서 그곳에서 영원히 살자고 하실 것입니다.

오늘도 그날을 기다리며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가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구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사랑”이라는 뜻의 히브리어는 “헤세드”입니다.
“자비” “인자” “선대(善待)” “은총”이라고 번역되곤 하는데, 헬라어로 본다면 “아가페”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 “헤세드”의 사랑은 크게 세 가지 용례를 갖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
둘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사랑
셋째, 이웃을 향한 우리의 사랑

성경은 이 세 용례들을 각각 보여 주는데, 시편 136편 1절에서 26절까지의 경우에는 매절마다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인자”로 번역된 단어가 “헤세드”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인자(헤세드)가 얼마나 큰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편 52:8, 역대상 16:34, 역대하 5:13, 에스라 3:11, 느헤미야 9:17, 예레미야 33:11 등 곳곳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헤세드”로 표현합니다.

호세아 6장 6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헤세드”의 사랑을 기록합니다: “나는 인애(헤세드)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헤세드”의 사랑을 다시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헤세드의 사랑이기를 하나님은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성경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하는 “헤세드”의 사랑을 기록합니다: “나오미가 자기 며느리에게 이르되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헤세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룻 2:20). “다윗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헤세드)을 베풀리라”(삼하 9:1).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은 자신들과 관계된 사람들에게 “헤세드”의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헤세드”의 대상이 누구이며, 방법이 무엇이든지 공통점은 “자기 희생”입니다. 제니 레이크가 뱃속에 있는 아이를 살리기 위해 죽음을 불사했던 희생의 사랑처럼, 이 글을 읽으시는 당신과 저를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 바로 “희생의 사랑”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당신은 하나님께서 주신 헤세드의 사랑을 체험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도 그 헤세드의 사랑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까? 뿐만 아니라, 당신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그 사랑을 전달하고 있습니까?





  

구약에서 246번 언급이 되고 있는 ‘헤세드’는 절반 이상이 시편에 나온다. ‘헤세드’의 용례는 세 가지 영역으로 구분된다. 곧 일상적 생활 속에서 인간이 인간을 향한 태도, 신앙의 영역에서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태도, 그리고 인간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태도 등이다. 이런 용례 가운데 언약 이해와 가장 밀접하게 관련된 것은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태도로서의 ‘헤세드’이다.

‘헤세드’는 언약 당사자들 상호 간의 의무 사항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언약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느 1:5). 그것은 언약의 당사자로서 이스라엘이 언약 유지를 위하여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서 이스라엘은 언제나 실패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만큼 이스라엘은 연약한 존재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언약과 관련하여 상벌 규정을 명확하게 제시하셨다. 그 대표적인 본문은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이다.

‘헤세드’는 이스라엘의 언약 준수 여부와 상관없이 언약관계를 이끌어 가시겠다는 하나님의 결정이면서 이스라엘을 위한 배려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헤세드’가 어떤 경우에도 변함없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언약을 성실히 준수한다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경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저주로 심판을 받는 상황이 된다. 성경은 그에 대한 실제 증거들의 기록이다.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상으로서의 복과 저주로서의 심판은 모두 하나님의 ‘헤세드’에 의한 결과이다. 이스라엘이 언약을 잘 지키는데도 복을 받지 못하거나 이스라엘이 언약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데도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실종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긍정적 차원의 ‘헤세드’라면, 하나님의 심판은 부정적 차원의 ‘헤세드’이다. 전자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더욱 강화시키는 효과가 있다면, 후자는 본래의 위치로 돌이키는 회개의 기회가 된다. 두 경우 모두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긍정적인 ‘헤세드’가 최종 목표인 셈이다. 언약의 상벌 규정은 하나님의 ‘헤세드’가 시행되는 통로이자 수단이다. 그 때문에 ‘의’가 ‘헤세드’와 나란히 사용되는 동의어로 등장하기도 한다(잠 21:21).

‘헤세드’의 또 다른 동의어는 ‘성실’이다. ‘성실’은 히브리어는 ‘에메트’인데, ‘떠받치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동사 ‘아만’의 명사형이다. 기본적으로 확실성이나 신뢰성을 의미하는 ‘에메트’는 대체적으로 ‘성실’로 번역되지만, 그 외에도 ‘견고함’ ‘진실’ ‘진리’ 등의 번역이 있다. ‘에메트’의 부사형은 ‘아멘’인데, ‘참으로’ ‘진실로’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기도와 찬송의 말미에서 화답으로 나오는 ‘아멘’은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뜻으로서, 기도나 찬송의 대상이신 하나님께 대한 확신을 표현한다.

‘헤세드’와 ‘에메트’가 한 단어처럼 밀접하게 결합되는 용례가 성경에 자주 나온다(창 24:27, 49; 32:11; 47:29; 출 34:6; 민 14:18; 수 2:14; 삼하 2:6; 15:20; 시 25:10; 40:11, 12; 57:4; 61:8; 85:11; 86:15; 89:15; 115:1; 잠 3:3; 14:22; 16:5; 20:28). 그것은 신뢰에 바탕을 둔 성실함이 ‘헤세드’의 기본적 의미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스라엘을 언약의 동반자로 삼으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언약 준수 여부와 상관없이 자신이 세우신 언약을 끝까지 책임지시는 분이시다. 성경은 그런 하나님을 ‘눈동자처럼 지키시는 분’(신 32:10; 시 17:8; 잠 7:2)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분’(시 121:4)으로 표현한다.



♦ 2월 12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8:1∼18
♦ 묵상을 위한 주제 : 이기게 하시니라(6절)
♦ 성구 : 다메섹 아람에 수비대(守備隊)를 두매 아람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租貢)을 바치니라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이기게 하시니라(The LORD gave David victory wherever he went)”

다윗이 주변 국가들을 정벌할 수 있었던 것은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블레셋과 모압과 소바 그리고 다메섹 아람을 쳐서 이스라엘의 속국으로 만들었습니다. 

다윗은 전리품으로 취한 수많은 말과 병거를 무용지물로 여겼습니다. 이러한 결정은 말이나 병거의 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려는 다윗의 신앙을 드러낸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윗이 소바를 정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하맛 왕 도이는 자기의 적을 정벌해 준 다윗에게 그 보답으로 패물을 바쳤는데 다윗은 하맛의 패물뿐 아니라 모든 전리품을 남김없이 여호와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또한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백성에게 공과 의를 행하였습니다.

요압은 군대 장관으로, 아히멜렉은 제사장으로, 스라야는 서기관으로, 브나야는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을 관할하는 총독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두 세상에서 영적 싸움을 위하여 선택받은 십자가 군병입니다.
오늘도 삶의 현장에 흩어져서 영적 싸움의 승리자가 되어 승리의 깃발을 흔드는 삶의 주인공으로 우뚝 세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찬양 / 십자가 군병 되어서

https://www.youtube.com/watch?v=pEiKgh2Mplo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2월 11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7:1∼29
♦ 묵상을 위한 주제 : 집을 세우리라(27절)
♦ 성구 : 만군(萬軍)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主)의 종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爲)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신고(故)로 주(主)의 종이 이 기도(祈禱)로 구(求)할 마음이 생겼나이다. 

“집을 세우리라(I will build a house for you.)”

‘집을 세우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궤를 안치할 집을 짓겠다는 다윗의 간절한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법궤를 수도 예루살렘으로 옮긴 후 하나님은 그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모든 어려운 날들을 보내고 평안히 왕궁에 거하던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가 왕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초라한 장막에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다윗은 성전을 건축하고 싶은 자신의 뜻을 나단 선지자에게 알렸습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에게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어야 되겠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다윗의 의사를 거절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임재가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본질보다 형식이 더 앞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성전 건축을 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전 건축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서 어긋난 것일 수 있습니다. 그것보다 더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시고 모든 대적을 물리쳐 주셨으며 그의 후손을 통해 나라를 영원히 견고케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왕국을 견고케 하시고 다윗이 건축하지 못한 성전을 솔로몬 때에 건축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죄에 대한 징벌은 받아도 은총은 영원할 것이라는 복을 주셨습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놀랍고 엄청난 축복의 약속을 받고 감격하였습니다. 다윗은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하며 감사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자신에게로 부르지 않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철저히 낮추어 계시를 밝히신 것을 감격스럽게 고백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을 견고케 하겠다는 은혜로운 약속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었기에 하나님께 구하는 바를 받을 줄 확신했습니다. 

자유롭게 주 예수를 믿을 수 있는 환경가운데 거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며 이 은혜를 영원토록 누릴 수 있는 길을 예비하고 준비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내 모든 소원 기도의 제목

https://www.youtube.com/watch?v=FQmXxT8qx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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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10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6:1∼23
♦ 묵상을 위한 주제 : 베레스웃사(8절)
♦ 성구 : 여호와께서 웃사를 충돌(衝突)하시므로 다윗이 분(忿)하여 그곳을 베레스웃사라 칭(稱)하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베레스 웃사(Perez Uzzah)”
‘베레스’는 “터짐”이란 뜻입니다.
‘웃사’는 “능력”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베레스 웃사는 “능력이 터지는 곳”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윗은 블레셋을 정복하고 정치적으로 안정을 되찾게 되자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려고 합니다.

당시 법궤는 “바알레유다” 즉 “기럇여아림”의 산 가운데 “아비나답”의 집에 있었습니다. 다윗은 법궤를 옮겨오기 위해 삼만 명의 무리와 새 수레 그리고 악단을 준비하여 기럇여아림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아비나답의 집에 있는 법궤를 새 수레에 싣고 예루살렘으로 출발했습니다. 

법궤를 옮기는 일은 정성만으로는 될 수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순종이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아비나답의 집에 있는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운반하는 데 쓰인 도구는 소가 끄는 새 수레로 아비나답의 두 아들인 “웃사”와 “아효”가 끌었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는 성소의 모든 기구를 운반하고 보관하는 책임을 맡은 레위 지파의 고핫 자손에게 맡겨야 하며(민 3:27∼32), 어깨에 메어 운반해야 합니다.

다윗은 이러한 규례를 어겼습니다.

웃사와 아효는 다윗의 명에 따라 수레를 몰았습니다. 그런데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에 소들이 놀라서 갑자기 뛰는 바람에 수레에 실린 법궤가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그러자 법궤가 땅에 떨어질 것을 염려한 웃사가 법궤를 손으로 잡았고 그는 하나님의 징계로 즉시 죽게 되었습니다. 

웃사의 죽음으로 법궤 이동은 중단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내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법궤를 가드 사람인 오벧에돔에게 맡기었습니다. 오벧에돔은 웃사의 죽음을 목도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법궤를 자기 집에 두는 것에 대해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오벧에돔이 법궤로 인하여 하나님께 복을 받았음으로 다윗이 다시 법궤를 자신의 처소로 옮기려고 계획합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법에 따라 먼저 순종과 기쁨의 제사를 드린 다음 법궤를 옮겼는데 수레를 사용하지 않고, 레위인들이 어깨에 메도록 했습니다(대상 15:11∼15).

미갈이 법궤를 모셔오는 다윗을 업신여긴 이유는 다윗의 환희와 기쁨을 이해하지 못하고 인간의 수치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기쁨의 표현을 사람의 생각으로 판단하므로 실수하는 일이 없도록 모든 일에 신중해야 하겠습니다.

다윗은 “나를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고 하나님은 찬양했습니다.

팬데믹의 지루한 삶이 때로는 힘들고 어렵더라도 다윗과 같이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즐거움으로 지루한 삶의 자리가 기쁨으로 채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주의 진리 위해 십자가 군기

https://www.youtube.com/watch?v=XbOKfMZYp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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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너지효과(Synergy effect)

시너지(synergy) 또는 협력작용(協力作用) 혹은 상승효과(相乘效果)는 일반적으로 두 개 이상의 것이 하나가 되어, 독립적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 이상의 결과를 내는 작용이다.

1+1=2 가 되는게 아니라 1+1=3 도 되고 그 이상도 될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그런데 이 이론에도 적용되는 원칙이 있습니다.
투입(input)이 0이면 산출(output)도 0 이외에는 다른 결론이 도출되지 않습니다.
즉 투입이 전무하면 시너지 효과는 어떤 경우에도 발생하지 않습니다.

성경에도 이 시너지 효과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기선 선(good)은 최고, 최선, 최대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부르심에 순종하여 나가는 자들에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최고, 최선, 최대를 이루게 하십니다.

성경에 계속 나오는 말씀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으리라 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 맺는 것을 즐겨 말씀하셨습니다.
이 놀라운 시너지 효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능력으로, 성령님의 도우심으로만 맺을 수 있는 결과입니다.
이 세상 어디서도 100배의 시너지 효과를 얻지는 못합니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만, 아버지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만이 맛볼 수 있는 복입니다.

교회가 어렵고 성도들도 많이 어렵습니다.
교회가 너무 많아서 교회들마다 빈 자리가 많을까요? 아니라고 봅니다.
큰 교회 탓만 하지 말고 전도하는 흉내라도 내야 합니다.
익은 곡식이 널려 있는 현실에 놀라게 됩니다.
나가서 전도 해봐야 ‘요나’ 선지자의 마음이 어땠을지도 알게 됩니다. 10 만큼이라도 투입을 해야 합니다-물론 상황에 따라 더 많은 투입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기도 말씀 전도에 10 을 투입하면 100 이라는 놀라운 결과를 주시기도 하시는 분이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분명 투입한 10 보다는 더 많이 산출물을 주실 것입니다.투입이 0 이면 아무 것도 하나님께 얻기 힘들 것입니다.

링겔만효과(Ringelmann effect)


원래 회사나 조직은 개인들이 각자 자기 일을 할 때 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만든 인위적 집단이다.
대체로 많은 기업들은 조직이 방대해지고 직원의 수가 늘어날수록 전체의 성과가 개인의 성과의 합보다 적어져 버린다.
다시말하면 능률과 생산성이 역으로 떨어지는 현상을 맞게 된다.

조직이라는 집단 속에 포함된 개인의 수가 늘어날수록 그 성과에 대한 1인당 공헌도가 비례적으로 늘어나지 않고 오히려 떨어지는 현상을 "링겔만효과(Ringelmann Effect)"라고 한다.

즉 1+1=2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1.3이나 1.7처럼 2보다 적게되는 현상인데, 이것은 개인이 혼자 일할 때 100%의 역할을 하는 구성원이 남들과 함께 집단 속에서 일할 때는 이에 미치지 못하는 성과를 내는 조직 심리학 측면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깨진 유리창 이론(Broken Windows Theory)



주변의 깨진 유리창을 그대로 방치하면 그로부터 범죄가 확산된다는 이론이다.
실제로 1994년 미국 뉴욕에서 이에 어울리는 사례가 발생했다.

뉴욕시장으로 선출된 루돌프 줄리아니윌리엄 브래턴 신임 검찰국장은 뉴욕의 지하철 범죄를 줄이기 위해 고심했다.
당시 뉴욕은 연 60만건 이상의 중범죄가 발생하는 지역이었으며 이들 중범죄의 90% 이상이 지하철 범죄였다.
여행자들도 “뉴욕 지하철은 절대로 타지 말라”고 말할 만큼 악명 높았다.

신임 시장과 검찰국장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나 전쟁의 주요 대상은 살인·강도 등 강력범죄가 아니었다.
우선 지하철역의 낙서부터 지웠다.
무단횡단·신호위반 등 교통질서를 바로잡았고, 쓰레기 무단투기를 근절했다.
그러기를 5년.
언론과 시민들은 “강력범죄와 싸울 자신이 없어 경범죄를 택했다.”며 시장과 검찰국장을 조롱했다.
그러나 결과는 놀라웠다.
연 2200건에 이르던 살인범죄는 1000건 이상 줄었으며, 지하철 범죄율도 75%나 급감했다.

‘주일 근무 거부로 해고→소송 제기’
아마존 배달기사 통해 본 기독인 딜레마 ‘24시간 경제’ 시대, 기독인은 반문화적?

미국 아마존이 최근 빠른 배송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배달원들은 일요일인 주일에도 배달에 나서게 됐다.
크리스채너티투데이(CT)는 4일(현지시간) 아마존이 ‘프라임’ 서비스를 위해 주7일 근무제를 시행하면서 주일에 일하지 않았다가 해고된 배달기사 사연을 소개하고 ‘24시간 경제’ 시대에 주일을 지키려는 기독교인들이 반문화적 시선을 받게 됐다고 전했다.

플로리다의 아마존 배달기사는 일요일에 근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실직했다.
펜실베이니아에서 일하는 제럴드 그로프씨도 일요일 근무를 다른 요일로 조정하려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2017년과 2018년 총 24일간 일요일 결근을 했다는 이유로 2019년 해고됐다.
해고된 두 사람은 회사가 다른 요일에 일할 수 있는 ‘합리적 편의’를 제공하지 않았다며 인권법 제7장을 근거로 종교적 차별을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다.

결과는 상반되게 나왔다.
미국평등고용기회위원회(EEOC)는 플로리다의 배달기사를 대신해 소송을 제기했고 최근 5만 달러의 합의금을 받기로 했다.
이에 반해 그로프씨가 제기한 소송에선 지난해 지방법원이 회사 측에 유리한 판결을 내놨다.
그는 법원에 항소한 상태다.

CT는 그로프씨처럼 예배를 위해 모든 일을 제쳐두고 주일을 엄수하는 사람들은 생산성을 앞세우며 24시간 경제로 전환한 21세기엔 반문화적으로 인식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로프씨의 소송 담당 변호사는 “이번 사건은 인권법 7장을 통해 ‘합리적 조정’이 무엇인지를 질문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퍼스트리버티 히람 사서 법률고문도 “고용주가 종교를 근거로 직원을 차별하는 것은 불법”이라며 “주일을 지켜야 한다는 믿음을 인정하고 그에게 종교적 면제를 부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2월 9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5:1∼25
♦ 묵상을 위한 주제 : 이스라엘의 주권자(2절)
♦ 성구 : 전일(前日) 곧 사울이 우리의 왕(王)이 되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려 출입(出入)하게 한 자(者)는 왕(王)이시었고 여호와께서도 왕(王)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百姓) 이스라엘의 목자(牧者)가 되며 이스라엘의 주권자(主權者)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이스라엘의 주권자(you will become their ruler)”

이스보셋이 죽자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용사들과 장관들이 헤브론에 있는 다윗을 찾아와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줄 것을 요청합니다.

다윗이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른 것이며 다윗의 신실함에 온 백성이 복종했기 때문이었습니다(1∼3절).

다윗은 이스라엘 전체를 다스리는 왕위에 오른 후에 이스라엘의 새 도읍지로 예루살렘을 내정하고 이곳을 정복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하려고 할 때 여부스 사람들은 “네가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소경과 절뚝발이라도 너를 물리치리라” 하며 조롱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성을 빼앗은 후에 “다윗 성” 이라 불렀습니다.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 왕국을 강성하게 만들자 두로 왕 히람은 백향목과 건축 기술자들을 보내 다윗 궁을 건축하는 일을 도왔습니다.  

다윗이 점차 강성해질 수 있었던 것은 힘의 근원이 무력이나 우수한 장비와 무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철저히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살기 위해 애썼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비록 완전무결하지는 못했으나 다윗의 중심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붙들고 계심을 깨닫고 그 믿음을 지켰습니다.  

블레셋은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 이스라엘을 침략하였습니다.

블레셋이 침입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하나님께 블레셋 사람을 내 손에 붙이시겠습니까? 하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올라가라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고 말씀하셨지요.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문제가 닥쳐온 후에 그 문제 해결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블레셋과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하나님의 응답을 듣고 블레셋과의 전투에 임하므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기도가 없는 곳에는 사람만 일하고, 기도 있는 곳에는 하나님이 일하신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오늘 먼저 기도로 일을 시작하고 일을 한 후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 은혜에 감사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내 기도하는 그 시간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이스라엘의 목자와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는 다윗

- 목자(라아) רָעָה , 주권자(나기드) נָגִיד  

첫째, 모든 지파(5:1)
둘째, 모든 장로(5:3)





왜 가룟 유다는 실패한 제자가 되었나?

가룟 유다는 어쩌다가 예수님을 팔아 먹은 저주 받은 인생이 되었을까요?
마가복음은 14장 10절에서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행위한데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그는 3년씩이나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훈련을 받은 사람이었기에 그에 대해 여러 의문을 품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요 13:2) 라고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마귀가 그를 지배하게 되었을까?
궁금증이 더해만 갑니다.

필자는 결정적인 한 가지를 잘하고 못하느냐에 따라 신앙 여정의 승패가 갈린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인정을 받기도 하고 버림을 받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사울 왕과 다윗 왕입니다.

사울은 삼상 15:9의 범죄로 인해 여호와께 버림을 받게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다윗 왕이 하나님을 모욕하는 골리앗을 향해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고 행동함으로써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됐다고 봅니다.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된(마 26:6~13, 막 14:3~9, 눅 7:36~50, 요 12:1~8)
-누가복음도 동일한 사건으로 보는 입장-

마리아 향유 사건에서 드러난 가룟 유다의 행위 때문에 그는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게 됩니다.
향유를 부은 마리아를 향해 분을 내고 그녀를 책망한 사람들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마 26:8).
그런데 그 제자들 중에서도 유다가 핵심 인물이었음을 성경은 말씀합니다(요 12:4~6).
그는 예수님의 사역에 쓸 공금을 횡령한 도적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마리아의 마음이 읽혀질리가 없었습니다.
그의 마리아를 향한 분노와 비난과 책망은 다름 아닌 예수님에 대한 그것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향한 헌신에 대해 제자들 특히 가룟 유다와 같은 처신을 해서는 안됩니다.
이는 예수님과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자 속에서 역사하시고 일하시는 성령님을 훼방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훼방한(모독한) 서기관들이 성령님을 훼방한(모독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성령님을 훼방하는 죄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한다고 하십니다(막 3:29).
마리아의 헌신에 대한 방해는 결국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먹는 불행한 인생이 되게 만든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향유 사건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준비하고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온 천하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 기념되는 복을 받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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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과거를 한 번 돌아봅시다.
어린 시절에 사무엘이 찾아와서 기름 부어서 왕을 삼겠다고 약속을 했고 얼마 후에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이름을 날리고 그런 일을 계기로 해서 군대장관까지는 못됐지만 사울의 밑에 있으면서 출세 가도를 달렸습니다.
그 후에 사울에게 쫓기고 친구와 부인의 도움으로 간신히 탈출해서 도망을 다녔는데 이 세월이 적은 세월이 아니었습니다.

5장까지 오는 동안 다윗이 겪었던 험난한 세월을 말하자면 파란만장한 일생이었다고 할 수 있죠.
그 생이 다 끝나고 새로운 단계로 넘어갑니다.
다윗이 어려운 시기를 다 지나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복을 주셨는지를 요약한 이야기라고 보면 됩니다.

본문에서 다윗이 받은 축복이 뭐가 있는지 찾아 봅시다.

다윗의 가정생활은 결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형제들끼리 죽이고 싸우는가 하면 아들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고 집안으로 보면 고통스럽고 가슴 아픈 일들이 많아요. 부인이 많았기 때문에 생겨나는 문제, 바로 이 뒤에 나오는 밧세바와의 관계. . . . . . . , 다윗은 어떤 면에서 감히 흉내내기 어려울 정도로 위대한 신앙인입니다만 우리가,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위대한 면들이 굉장히 많은 반면에 다윗이 자기의 명성을 다 깎아 먹었다면 바로 여자 문제이었어요.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밧세바의 관계 사이에서 있죠. 그것말고도 다윗이 정말 수치스러운 일을 겪게 된 것, 후궁 열 명을 자기 아들에게 공개적으로 겁탈을 당하는 이런 사건이 뒤에 벌어집니다. 결국은 처첩들이 많았던 그것이 다윗으로 하여금 위대한 신앙인의 점수를 많이 깎아 먹는 일이 되게 하는 거죠. 복이라면 복이겠지만 그로 인한 고통 역시 상당히 많았습니다. 솔로몬도 여전히 후궁들이 아주 많았었지만 그로 인해서 솔로몬 시대에 우상들이 많이 범람하고 자기 스스로도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결과가 결코 좋지는 않았더라는 얘깁니다. 여기에 처첩보다는 그것 말고 다른 것에 관심을 더 두는 것이 좋은데...

전쟁의 승패를 미리 알고 싸운다? 큰 복이네 그죠? 전에 누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세상에 전쟁 놀이만큼 재미있는 것이 없대요. 그 대신에 조건이 하나 있어요. 자기만 안 죽으면...... 안 죽는다는 보장만 있으면 총알이 쏟아지고 대포알이 터지는 그 가운데를 총을 양손에 들고 뛰어다니면 세상 천지에 그것보다 더 재미있는 것이 없을 거예요. 전쟁의 승패를 이길 것 알고 싸우니까. . . . . . . .

코메디언들은 소망이 하나 있죠? 자기가 만든 유행어를 하나 띄우는 것, 그것 하나 뜨면 큰 돈 됩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런 속담을 하나 남겼단 말이죠. 그것보다 정말 좋아 보이는 것이 하나 있는데요.

예를 들면 이런 비유를 하나 들어 봅시다. 연애하다 차였어요. '나중에 한번 보자 내가 네 억울한 꼴을 보여 줄거다' 이러면서 자기를 버린 그 장본인이 살고 있는 바로 앞에 으리으리한 집을 하나 짓고 거기서 보란 듯이 잘 살면요? 날 버린 그 사람은 어렵게 어렵게 살고 나는 그 앞에 으리으리한 집 지어 놓고 폼 잡고 살면 기분이 어떨 것 같아요? 비유가 제대로 될는지 모르겠지만, 느낌이 어떨 것 같아요?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다윗에게 와서 다윗을 보고 당신이 우리의 왕이 되어야 합니다라고 이야기 하죠.
왕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몇 가지 있어요?

신명기 17장에 보면 '이스라엘의 왕은 반드시 이스라엘 사람이어야 한다'.

'우리는 왕의 골육이니이다' 그랬죠. 이것도 그 항목에 들어갈 겁니다. 

이스라엘 모든 지파,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

아, 1·2절은 여론 이었고,, 3절은?


왜 예루살렘을 수도로 할려고 했을까요?

예루살렘이 지리적으로 봤을 때도 중심지이고, 헤브론은 유다 남쪽이고 예루살렘이 조금 올라오죠. 완전 중심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중간에 있고 또 하나는 수도가 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조건은 수도가 강가에 잘 있긴 하지만 그러나 옛날 같으면 가장 중요한 것이 수비하기 좋은 천혜의 요새라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00년동안 그 땅을 점령해있는 그 한 가운데 있으면서도 점령을 안 당했다 말이죠.


오팔의 유래

한 젊은 남자가 사랑하는 연인에게 줄 보석을 사려고 귀금속 상인을 찾아갔다.
상인이 여러 보석을 보여줬다.
하지만 남자는 사랑하는 연인을 위한 아주 특별한 보석을 원했다.
잠시 고민하던 상인은 “마침 그런 보석이 있다”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금고에서 보석을 가지고 나왔다.
그러나 보석은 아주 평범해 보였다.
“별다른 광택도 없고 세공도 별로인 것 같은데 왜 그 보석이 특별하다는 말씀입니까?”
“특별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지요. 잠시만 기다려보세요.”
상인은 손안에 보석을 쥐고 있다가 몇 분 후에 펴서 보여주었다.
그러자 평범했던 보석에서 영롱한 무지갯빛이 나기 시작했다.
“아니, 어떻게 된 것입니까.”
“이 보석은 오팔입니다. 그냥 보면 평범한 보석 같지만 사람 체온이 닿으면 이런 빛이 납니다. 사람이 있어야 빛이 나기 때문에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이보다 더 특별한 보석은 없을 것입니다.”

정채봉 작가에 따르면 5종류의 만남이 있다고 한다.

첫째, 생선 같은 만남

처음엔 싱싱하지만 금방 상하고 비린내가 나는 만남이다.
생선처럼 시기 질투하고 싸우며 원한만 남기는 만남이다.

둘째, 지우개 같은 만남

아무 의미 없이 곧 기억에서 지워지는, 시간만 아까운 만남이다.

셋째, 건전지 같은 만남

쓸모 있을 때는 들고 있다가 필요가 없어지면 멀어지는 수지 타산적인 만남이다.

넷째, 꽃송이 같은 만남

화려하게 피지만 금방 지고 마는 끝이 안 좋은 만남이다.

다섯째, 손수건 같은 만남

슬플 땐 눈물 닦아주고 힘이 들 땐 땀을 닦아주며 서로 의지하는 아름다운 만남이다.

오팔이 사람 체온을 만나야 빛이 나는 것처럼 사람도 하나님을 만나야 특별해진다.
하나님은 만남으로 일하시고, 만남 가운데 역사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만나야 할 만남 중 가장 중요한 만남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호 12:4)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 승리자의 복을 받고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되었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행 13:22)
하나님이 다윗을 만나니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다윗은 왕이 되었다.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행 16:14)
바울은 마게도냐에서 루디아를 만남으로 유럽이 복음화되는 기회가 열리게 되었다.

이처럼 우리는 좋은 만남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무엇보다 예수를 구원자로 영접하고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 2월 8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4:1∼12
♦ 묵상을 위한 주제 : 레갑과 바아나(5절)
♦ 성구 :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바아나가 행(行)하여 볕이 쬘 때 즈음에 이스보셋의 집에 이르니 마침 저가 낮잠을 자는지라.

“레갑(Recab, 약대를 타는 자)과 바아나(Baanah, 슬픔의 아들)”

세상에는 점점 강하여 지는 가문과 점점 약하여 지는 가문이 있는 것처럼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점점 강하여 지는 사람입니다.
다른 하나는 점점 약하여 지는 사람입니다.

레갑과 바아나는 림몬의 아들들입니다.
브에룻 사람 림몬의 아들인 레갑과 바아나는 길을 떠나 한낮에 해가 쨍쨍할 때 이스보네셋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그때 이스보셋은 낮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레갑과 바아나 형제는 마치 밀을 얻으러 온 체하고 곧장 집안으로 들어와서 이스보넷의 배를 칼로 찌르고 그 길로 도망쳐 버렸습니다(5∼6절).

이들은 베냐민 족속 림몬이 낳은 형제로서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지휘하는 기습부대의 군장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집안에 들어갔을 때 이스보셋은 침실의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보셋을 칼로 쳐 죽여 목을 베었고 그것을 들고 밤새 아라바로 도망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헤브론에 있는 다윗에게 이스보셋의 머리를 바치며 말했습니다.

왕의 목숨을 빼앗으려던 왕의 원수인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머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여호와께서 사울과 그 자손에 대해 내 주 왕의 원수를 갚아주셨습니다(7∼8절).

아주 자랑스럽게 자신들의 업적을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상상외로 다윗의 반응은 칭찬이 아니라 질책이었으며 그리고 그들을 역적으로 몰아붙였습니다.

좋은 소식이라는 생각에 사울을 죽였다고 말했던 아말렉 소년병을 죽였다. 그것이 바로 그가 전한 소식에 대한 보상이었다.

왜냐하면 기름부음을 받은 왕을 함부로 손을 들어 쳤다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물며 죄 없는 사람을 자기 집 침대 위에서 죽게 한 악한 사람들은 어떻겠느냐? 내가 너희 손에서 그의 피 값을 구해 너희를 이 땅에서 없애 버려야 하지 않겠느냐(10∼11절).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결국 레갑과 바아나형제는 다윗의 군졸들에 의하여 처형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의 교훈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명령을 저버리고 자신들의 단순한 공명심 때문에 직속상관을 살해하는 것은 거룩한 전쟁(성전) 원칙에도 어긋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의 의리에 어긋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동족이나 혈육 간의 투쟁에 있어선 절대 칼을 쓰지 아니하고 믿음과 관용으로 대한 경력이 있습니다.

엔게디 황무지 토굴에서 사울의 옷자락만 베고 그를 죽이지 않았던 일, 압살놈의 죽음을 슬퍼한 일은 그 좋은 실례입니다.

사건의 동기도 악하고 결과도 범죄이었기에 의로운 왕 다윗에게는 결코 용납될 수 없었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나를 온전히 드러내어 작은 부정한 것까지도 털어버릴 수 있는 은혜를 기도합시다.

♪ 찬양 / 내 평생 소원 이것뿐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의인(義人)과 악인(惡人)

예수님이 세상에 계셨을 때 놀랍게도 세리와 창녀같은 죄인,악인들은 예수님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유명한 종교인들 곧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은 전혀 환영받지 못했다.

 

무엇 때문인가? 세리와 창녀같은 죄인들은 예수님께 자신들의 영혼이 병들었음을 알고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자칭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건강한 영혼을 가진양 스스로 의로운체 하기 위해서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혼이 병들었기 때문에 예수님께 치료를 받아야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죄와 고통과는 상관없는 듯 말하고 행동하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해주실 수가 없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인이란

단순히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완벽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의인과 악인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단순히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을 의인이라고 하고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을 악인이라고 하는 개념적인 차원이 아니다.

 

성경에서 의인이란 마음에 예수님을 영접하므로

하나님께서 값없이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므로 의인이란 온전히 성화에 이른 사람을 뜻하지 않는다.

즉 우리는 의롭다고 의인이라고 인정은 받았지만

아직도 우리 모습은 죄인이요 죄를 행하는 악인의 모습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전 7:20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롬 3:10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 눈에 의인으로 보이는 신자일찌라도

그가 외식하는 바리새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마음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을 우리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 당시에 사회적인 시각으로만 보면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은 분명코 의인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에 문둥병자나 세리나 창기를 시각적으로만 본다면

그들은 모두가 죄인이고 악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판단은 전혀 다르셨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진정코 의인이고 어떤 자가 악인인가?

 

의인이란 예수님을 영접한 가운데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사람이라고 단순하게 정의를 내릴 수 있다 (히 12: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

 

그리고 악인이란 예수님을 전심으로 영접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경 말씀에는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마 19: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또한 의인도 타락할 수 있고 그 죄로 인해 심판과 사망이 온다고 말씀한다.

(겔 18:24,26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범죄하고 악인의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죽으리라)

(겔 33:12~13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이르기를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의가 구원치 못할 것이요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는 날에는 그 악이 그를 엎드러뜨리지 못할 것인즉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의로 인하여는 살지 못하리라 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지은 죄악 중 곧 그 중에서 죽으리라)

(히 6:4~6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히 10:26~29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벧전4:18~19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찌어다)

 

나는 의인인가?... 아니면 의인인 체 하는 악인인가...

아니면 의인에서 악인의 길로 접어든 사람인가?

아니면 악인인데 새롭게 의인의 길로 가고자 하는 사람인가?

 

할렐루야

 

창세기 18:23~26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찌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신명기 25:1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시비가 생겨서 재판을 청하거든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사무엘하 4:11

하물며 악인이 의인을 그 집 침상 위에서 죽인 것이겠느냐 그런즉 내가 저의 피흘린 죄를 너희에게 갚아서 너희를 이 땅에서 없이 하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시편 1:1,5~6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편 7:9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나이다

 

시편 11:5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강포함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시편 34:21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죄를 받으리로다

 

시편 37:12,16~17

악인이 의인 치기를 꾀하고 향하여 그 이를 가는도다

의인의 적은 소유가 많은 악인의 풍부함보다 승하도다

악인의 팔은 부러지나 의인은 여호와께서 붙드시는도다

 

시편 37:21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

 

시편 37:32

악인이 의인을 엿보아 살해할 기회를 찾으나

 

시편 75:10

또 악인의 뿔을 다 베고 의인의 뿔은 높이 들리로다

 

시편 125:3

악인의 권세가 의인의 업에 미치지 못하리니 이는 의인으로 죄악에 손을 대지 않게 함이로다

 

잠언 3:33

악인의 집에는 여호와의 저주가 있거니와 의인의 집에는 복이 있느니라

 

잠언 10:3

여호와께서 의인의 영혼은 주리지 않게 하시나 악인의 소욕은 물리치시느니라

 

잠언 10:6

의인의 머리에는 복이 임하거늘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

 

잠언 10:7

의인을 기념할 때에는 칭찬하거니와 악인의 이름은 썩으리라

 

잠언 10:11

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이라도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

 

잠언 10:16

의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르고 악인의 소득은 죄에 이르느니라

 

잠언 10:20

의인의 혀는 천은과 같거니와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

 

잠언 10:24

악인에게는 그의 두려워하는 것이 임하거니와 의인은 그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느니라

 

잠언 10:25

회리바람이 지나가면 악인은 없어져도 의인은 영원한 기초 같으니라

 

잠언 10:28

의인의 소망은 즐거움을 이루어도 악인의 소망은 끊어지느니라

 

잠언 10:30

의인은 영영히 이동되지 아니하여도 악인은 땅에 거하지 못하게 되느니라

 

잠언 10:32

의인의 입술은 기쁘게 할 것을 알거늘 악인의 입은 패역을 말하느니라

 

잠언 11:8

의인은 환난에서 구원을 얻고 악인은 와서 그를 대신하느니라

 

잠언 11:10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치느니라

 

잠언 11:21

악인은 피차 손을 잡을찌라도 벌을 면치 못할 것이나 의인의 자손은 구원을 얻으리라

 

잠언 11:23

의인의 소원은 오직 선하나 악인의 소망은 진노를 이루느니라

 

잠언 11:31

보라 의인이라도 이 세상에서 보응을 받겠거든 하물며 악인과 죄인이리요

 

잠언 12:5

의인의 생각은 공직하여도 악인의 도모는 궤휼이니라

 

잠언 12:7

악인은 엎드러져서 소멸되려니와 의인의 집은 서 있으리라

 

잠언 12:10

의인은 그 육축의 생명을 돌아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

 

잠언 12:12

악인은 불의의 이를 탐하나 의인은 그 뿌리로 말미암아 결실하느니라

 

잠언 12:13

악인은 입술의 허물로 인하여 그물에 걸려도 의인은 환난에서 벗어나느니라

 

잠언 12:21

의인에게는 아무 재앙도 임하지 아니하려니와 악인에게는 앙화가 가득하리라

 

잠언 12:26

의인은 그 이웃의 인도자가 되나 악인의 소행은 자기를 미혹하게 하느니라

 

잠언 13:5

의인은 거짓말을 미워하나 악인은 행위가 흉악하여 부끄러운데 이르느니라

 

잠언 13:9

의인의 빛은 환하게 빛나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느니라

 

잠언 14:19

악인은 선인 앞에 엎드리고 불의자는 의인의 문에 엎드리느니라

 

잠언 14:32

악인은 그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

 

잠언 15:6

의인의 집에는 많은 보물이 있어도 악인의 소득은 고통이 되느니라

 

잠언 15:28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잠언 15:29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 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

 

잠언 17:15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

 

잠언 18:5

악인을 두호하는 것과 재판할 때에 의인을 억울하게 하는 것이 선하지 아니하니라

 

잠언 21:18

악인은 의인의 대속이 되고 궤사한 자는 정직한 자의 대신이 되느니라

 

잠언 24:16

대저 의인은 일곱번 넘어질찌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잠언 25:26

의인이 악인 앞에 굴복하는 것은 우물의 흐리어짐과 샘의 더러워짐 같으니라

 

잠언 28:1

악인은 쫓아 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

 

잠언 28:12

의인이 득의하면 큰 영화가 있고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느니라

 

잠언 28:28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고 그가 멸망하면 의인이 많아지느니라

 

잠언 29:2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

 

잠언 29:6

악인의 범죄하는 것은 스스로 올무가 되게 하는 것이나 의인은 노래하고 기뻐하느니라

 

잠언 29:7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 주나 악인은 알아 줄 지식이 없느니라

 

잠언 29:16

악인이 많아지면 죄도 많아지나니 의인은 그들의 망함을 보리라

 

잠언 29:27

불의한 자는 의인에게 미움을 받고 정직한 자는 악인에게 미움을 받느니라

 

전도서 3:17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목적과 모든 일이 이룰 때가 있음이라 하였으며

 

전도서 7:15

내가 내 헛된 날에 이 모든 일을 본즉 자기의 의로운 중에서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 중에서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전도서 8:14

세상에 행하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의 행위대로 받는 의인도 있고 의인의 행위대로 받는 악인도 있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

 

이사야 5:23

그들은 뇌물로 인하여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의를 빼앗는도다

 

에스겔 18:20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찌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 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에스겔 18:24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범죄하고 악인의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죽으리라

 

에스겔 21:3

이스라엘 땅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를 대적하여 내 칼을 집에서 빼어 의인과 악인을 네게서 끊을찌라

 

에스겔 21:4

내가 의인과 악인을 네게서 끊을터이므로 내 칼을 집에서 빼어 무릇 혈기 있는 자를 남에서 북까지 치리니

 

에스겔 33:12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이르기를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의가 구원치 못할 것이요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는 날에는 그 악이 그를 엎드러뜨리지 못할 것인즉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의로 인하여는 살지 못하리라

 

하박국 1:4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

 

말라기 3:18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마태복음 13:49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사도행전 24:15

저희의 기다리는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시편 1편 1절에 따르면, 복된(blessed) 사람과 그 반대편 사람 곧 악인(cursed)을 뚜렷하게 대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복된 사람이라면, 결코 함께할 수 없는 부류의 사람을 가리켜서 “악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악인이라고 하면, 품행이 못된 자로서 남에게 해악을 끼치는 그런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악인’이라는 이 단어를 조금 특별한 뜻으로 사용합니다. [히브리어] 라샤(rasha’)의 기본적인 뜻은 godless(=경건치 않은, 불경건한)로써, ‘하나님 없이 사는 자’를 말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악인이란 세상 윤리나 도덕규범에 비추어서 그것에 역행하거나 미치지 못하는 자를 악인이라고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성경이 선과 악을 구별하는 기준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자세와 관계가 있으며, 일반 세상의 판단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성경은 ‘악’을 근본적으로 ‘하나님 없이 사는 것’, ‘하나님을 떠나서 그분과 상관없이 사는 자세’로 규정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자기자신의 뜻을 따라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악인 것입니다. 쉽게 말한다면 ‘악인’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는 세상에 속한 자를 가리키며 바로 불신자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악인이라고 할 때, 성품이나 행실에서 이런저런 잘못이 있는 사람을 뜻한다기 보다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떠나 있으며 그분과 상관없이 사는 자(=불신자)를 가리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의인’으로 규정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어떤 선하고 의로운 일을 행하느냐가 그 판단 기준이라기보다, 그 전에(=행동 전에) 그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나님에 대한 그의 내적 자세가 어떠한가, 여기에 따라서 판단하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biblically) ‘의’ 또는 ‘악’이라고 부르는 행위나 성품도 이런 내적 자세(=하나님에 대한 그 사람의 자세)에서 파생하는 것입니다.


잠언이 말하는 ‘의인과 악인’  세 가지 차이

잠언 28장은 대조법이 특이합니다.
악인과 의인의 성격과 행위, 그리고 그들의 행위에 대한 결과의 차이를 서로 대조하면서 여러 가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의인과 악인은 율법, 즉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것을 기준으로 합니다.

의인은 여호와를 찾는 자, 명철과 지식이 있는 사람, 성실한 자, 지혜롭게 행하는 자,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 등 여러 호칭으로 나옵니다. 이 호칭들은 모두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사람이라는 말로 요약됩니다.
이 말씀을 배경으로 하면서 ‘믿음의 담력으로’라는 제목으로 묵상합시다.

1.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

1절에서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악인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사람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두려움은 지나치게 사람의 눈치를 본다, 지나치게 사람을 의식한다 등의 뜻으로, 오늘날에는 일종의 ‘대인공포증’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눈치를 지나치게 보는 사람은 어떤 일을 올바로 해 나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잠언 29장 25절에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니라”고 했습니다.

아론은 사람을 두려워하다,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드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도 사람을 두려워하다,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마 26:69-75). 그러면 이 말씀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의미입니다.

2. 담대한 마음을 가지라

‘담대하다’를 사전으로 보면 ‘배짱이 두둑하고 용감하다’는 뜻입니다.
이는 요즘 말로 ‘BGR 정신과 MH 정신’이 합쳐진 것입니다.
BGR은 ‘배째라’는 배짱을, MH는 ‘맨땅에 헤딩한다’는 용기를 말합니다.
요즘 우리 교회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성경에 보면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는 말씀이 여러 곳에 나옵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을 전도하러 내보내시면서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힘을 주셨습니다. 특히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는 말씀은 모세의 후계자가 되는 여호수아에게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하라!”고 한 것으로, 너무 유명합니다.

흥미롭게도, 세상에서 이른바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모두 배짱과 용기로 가득찬 사람들입니다. 독일 문호 괴테는 “돈을 잃는 것은 가벼운 손실이고, 명예를 잃는 것은 중대한 손실이지만, 용기를 잃는 것은 보상받을 수 없는 손실이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두둑한 배짱의 믿음과 담대한 용기를 갖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3. 믿음의 능력을 가지라

믿음의 능력은 믿음의 힘, 즉 위력을 말합니다. 사도 요한은 “대저 하나님께로 난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며 믿음의 위력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갖추어야 할 것이 많지만, 무엇보다 믿음의 능력, 즉 영적 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지식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능력을 가져야 힘든 인생을 잘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엔진을 장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조금만 힘들어도 뒤로 미끄러지거나 낙심하고 좌절하여 곤두박질을 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능력과 관련해,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의 기수인 존 녹스의 예를 들고자 합니다.
존 녹스는 프랑스군에게 붙잡혀 1년 7개월 동안 배에 억류되어 고생을 했고, 영국왕 메어리 1세에게 박해를 받아 프랑스에 망명하는 등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을 위해 전 생애를 바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식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한 사람이 이곳에 잠들어 있다”고 그를 추모했다고 합니다.
진정한 믿음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생의 길에 믿음의 담력으로 승리하는 축복을 체험하여 간증하는 자리에 이르시기를 바랍니다.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느니라(잠 28:1)’.




단락구분

1~3절 : 이스보셋의 근황
4절 : 요나단 아들의 근황
5~7절 : 자신의 신복에게 죽임을 당한 이스보셋
8~12절 : 이스보셋을 죽인 자들을 처형하는 다윗

이스보셋은 아브넬이 방자하게 행동한 것에 대해서 비판했지만 아브넬의 비열한 반박을 듣고서도 아브넬이 두려워서 감히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3:11).

이스보셋은 왕이라고 하지만 군대장관 아브넬의 위엄에 눌려서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아브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손맥이 풀렸다고 합니다(4:1).
또한 온 이스라엘 백성들도 놀랐습니다.
그 이유는 아브넬이 이스라엘을 지켜주는 마지막 보루(堡壘)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아브넬이 죽자 나라는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이럴 때 이스보셋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던 “바아나”와 “레갑”이 이스보셋을 죽였던 것입니다.

다윗은 이 죽음에 전혀 연루되지 않았고, 4장 11절에서 “그런즉 내가 저의 피 흘린 죄를 너희에게 갚아서 너희를 이 땅에서 없이 하지 아니하겠느냐”고 하면서 이스보셋의 죽음에 대해서 그 피를 흘리게 한 자에게 그 피를 갚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아브넬 죽음의 여파(4:1~3)

아브넬이 헤브론에서 죽었다는 소식에 대한 여파가 나옵니다.
1. 이스보셋이 손에 맥이 풀렸다는 것
2. 온 이스라엘이 놀랐다는 것

이스라엘의 왕 이스보셋과 아브넬의 관계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스보셋은 아브넬에 의해서 세워진 왕이기에 아브넬이 없으면 그의 정권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3. 이스보셋은 아브넬의 죽음으로 권력 장악력을 잃었다

아브넬의 죽음은 온 이스라엘을 놀라게 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의 정권이 붕괴에 이르렀다는 것
이제 다윗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2~3절에서 이스보셋의 군대장군 두 사람의 이름 “바아나”와 “레갑”이 나옵니다.
두 사람은 브에롯 출신의 베냐민 지파 사람으로 림몬(Rimmon)의 아들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기회주의자들이어서 북이스라엘이 붕괴될 지점에 오자 자기들이 모셨던 이스보셋을 죽이고 그 목을 베어 헤브론에 있는 다윗에게로 갔습니다(4:5~7).

이 두 사람의 출신 지역인 “브에롯”은 예루살렘에서 동북쪽으로 14km 떨어진 곳입니다.
이곳은 원래 히위족의 네 성읍(기브온, 그비라, 브에롯, 기럇여아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수 9:17).
그런데 사울 왕은 이곳에 있던 히위 사람들을 내쫓고 그곳에 림몬과 그 가족들이 살게 한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들에게 새로운 정착지를 선사해 준 사울 왕을 림몬의 두 아들이 배신한 것입니다.

둘째,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4:4)

4절의 말씀은 이스보셋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중간에 끊고서 “므비보셋”의 이야기를 삽입시킨 것입니다.
왜 갑자기 “므비보셋”의 이야기를 삽입시켰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스보셋은 죽을 운명인 반면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Mephibosheth)은 자비를 받을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삼하 4:4의 말씀은, 다윗이 요나단과 약속한 부분(삼상 20:14~17)과 또한 그 약속을 성취한 삼하 9:1~8 중간 지점에 있습니다. 즉 다윗이 요나단을 향한 “자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므비보셋은 다윗과 요나단 사이에 맺은 그 약속을 성취해 가는 통로인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다윗은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요, 자비(hesed)를 베푸는 사람임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삼하 4:4에서는 어떻게 므비보셋이 다리를 절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울과 요나단이 죽은 소식이 이즈르엘에서 올 때에, 즉 그의 나이 다섯 살 때 그의 유모가 그를 안고 급히 도망하다가 아이가 떨어져 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두 다리를 절었다는 것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 후에 이스라엘의 왕위를 계승할 사람은 “므비보셋”인데 그 당시 왕은 전쟁의 영도자가 되어야 하고, 야전 사령관이 되어야 하는데 당대의 기준으로 볼 때 미흡하다는 것입니다.

셋째, 이스보셋의 죽음(4:5~12)

① 5절에서 “바아나와 레갑이 한낮에 이스보셋의 집에 이르니 이스보셋이 낮잠을 자는지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는대로 이스라엘의 대낮은 매우 해가 뜨겁게 내리쬐므로 대개 집안에서 낮잠을 잡니다. 이스보셋은 낮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② 6~7절에서 “바아나”와 “레갑”은 이스보셋을 쳐서 죽이고 목을 베었습니다. 삼상 17:46에서 다윗이 골리앗과 전쟁하러 나설 때 세 개의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그것은 쳐서, 죽이고, 목을 베었다는 것입니다.

③ 7절에서 이스보셋의 머리는 전리품이 되었습니다.

ⅰ) 이것은 사울 세력의 마지막을 뜻하는 것이며

ⅱ) 림몬의 아들들이 다윗에게 호의를 살 수 있는 근거처럼 보이며, 또한 자신들이 다윗에게 헌신하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ⅲ) 그리고 동시에 아버지를 잃고, 군대장관 아브넬을 잃고 가련하게 된이스보셋의 비참한 최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④ 8절에서 “바아나”와 “레갑”은 헤브론에 있는 다윗에게로 가서 “여호와께서 오늘 우리 주 되신 왕의 원수를 사울과 그 자손에게 갚으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ⅰ) 여기서 이 두 사람은 하나님과 다윗을 잘못 이해하였습니다.

ⅱ) 하나님은 인간이 복수하게 하지 않습니다.

ⅲ) 이스보셋의 죽음은 다윗에게 기쁨이 아니라 경악스러운 일이었습니다(10절).

ⅳ) 이 일은 두 사람에게 진보를 가져온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와는 반대로 자신들의 마지막을 가져왔습니다.

⑤ 9절에서 다윗은 분명하게 말하기를 “... 내 생명을 여러 환난 가운데서 건지신 여호와 ...”에서 자기가 오늘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이지 이렇게 기름부음 받은 자를 죽임으로, 무죄한 자를 죽임으로 자기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고 있지 인간의 불법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⑥ 10절에서 다윗은 사울 왕을 죽였다는 아말렉 소년에게 “네가 좋은 소식을 전하는 줄로 생각하지만 그것이 좋은 소식이 아니라 슬픈 소식이고, 네가 한 일이 악한 일이라.”고 해서 시글락에서 처형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⑦ 11~12절에서 악인이 의인을 그 집 침상에서 죽인 것에 대해서 심판을 내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보셋의 머리를 이미 죽어 장사된 아브넬 곁에 묻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ⅰ) 다윗은 이스보셋을 의인, 그를 죽인 두 자객을 악인으로 부릅니다.

ⅱ) 또한 다윗은 기회주의적인 배신자들이 생각하는 권모술수적이고 반역적인 사람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ⅲ) 이처럼 림몬의 자손들과 브에롯 사람들은 사무엘서가 쓰여지던 시대까지 깃다임(gittaim)으로 도망가서 거기서 외지인 취급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즉 불의한 자들은 자신의 고향을 빼앗기고 타향살이를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⑧ 1~4장에서 사울, 아브넬, 그리고 이스보셋의 죽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마음도 볼 수 있습니다.


  죽음                           대리인                  다윗의 마음

사울과 요나단         아말렉 사람              애통함(1:7)

아브넬                         요압                    슬픔과 금식(3:31~35)

이스보셋              레갑과 바아나             처형(4:11~12)


다윗이 통일이스라엘의 왕이 되는데에 있어서 전쟁의 길보다는 화해 통합으로 나아간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기회주의자들인 아말렉 사람, 요압, 그리고 바아나와 레갑 등은 칼로 출세하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통일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칼부림을 가져왔습니다.
이에 반해 사울 왕과 요나단의 죽음에 애절해하고, 아브넬의 죽음에 슬퍼하고, 이스보셋의 죽음에 대해 심판한 다윗은 남북이스라엘의 통일을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명령하신 평화의 대로를 여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기회주의도 아니고, 칼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화해가 이루어졌듯이 바로 각자의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즉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삶입니다. 마 5:8 “평화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이스보셋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던 '바아나'와 '레갑'은 북이스라엘이 붕괴될 지점에 오자 모셨던 이스보셋의 목을 베어
 헤브론에 있는 다윗에게로 갔습니다(5-7절).
이 두 사람의 출신 지역인 '브에롯'은 예루살렘에서 동북쪽으로 14km 떨어진 곳으로  원래
히위족의 네 성읍(기브온, 그비라, 브에롯, 기럇여아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수 9:17).
그런데 사울 왕은 이곳에 있던 히위 사람들을 내쫓고 그곳에 림몬과 그 가족들이 살게 한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들에게 새로운 정착지를 선사해 준 사울 왕을 림몬의 두 아들이 배신한 것입니다.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 왕에게 이스보셋의 머리를 드리며 고하되 왕의 생명을 해하려 하던 원수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머리가 여기 있나이다... 다윗이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그 형제 바아나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 생명을 여러 환난 가운데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4:5-9)
다윗은 그들에게 “여호와는 내 생명을 여러 환난 가운데서 건져내셨나니.....”
자기가 오늘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이지 이렇게 기름부음 받은 자를
죽임으로, 무죄한 자를 죽임으로 자기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고 있지 인간의 불법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들에게 사람의 도움은 필요없다는 자신의 입장을 당당하게 내 세울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두 사람은 다윗의 정적이라고 저들이 믿었던 이스보셋의 목을 베어 옴으로써 다윗이 자기들에게 큰 상을 내리고 다윗 군대의 장군쯤으로 임명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4절에는 이스보셋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중간에 끊고서 '므비보셋'의 이야기를 삽입시킵니다. 왜 갑자기 '므비보셋'의 이야기를 삽입시켰을까? 이스보셋은 죽을 운명인 반면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Mephibosheth)은 다윗이 요나단과 약속한 대로(삼상20:14-17) 약속을 성취할 때가 된 것입니다.
어떻게 므비보셋이 다리를 절게 되었는가 하면 사울과 요나단이 죽은 소식이 이즈르엘에서 올 때에,
즉 그의 나이 다섯 살 때 그의 유모가 그를 안고 급히 도망하다가 아이가 떨어져 절게 되었다고 밝힙니다.

"전에 사람이 내게 고하기를 사울이 죽었다 하며 좋은 소식을 전하는 줄로 생각하였어도
내가 저를 잡아 시글락에서 죽여서 그것으로 그 기별의 갚음을 삼았거든..."(4:10)
전에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을 알렸던 사람도 그 소식을 전함으로써 상을 받을 줄 알았지만
그가 기대했던 상과는 정반대의 상을 받아 죽임을 당하는 꼴이되고 말았었습니다.
좋은 소식이라고 생각하여 사울의 죽음을 알리려 했던 그가 그 기별에 대한 상으로 받은 것이
죽음이었거늘 이제 사울의 아들을 제 손으로 죽이고 찾아온 이 두 사람에 대한 상이야 오죽하였겠는가?
 ".. 그런즉 내가 저의 피 흘린 죄를 너희에게 갚아서 너희를 이 땅에서 없이 하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저희를 죽이고 수족을 베어 헤브론 못 가에 매어달고...
헤브론에서 아브넬의 무덤에 장사하였더라"(4:11-12)
다윗은 이스보셋을 죽인 두 자객을 악인으로 부르며 그들을 기회주의적인 배신자들로 낙인을 찍습니다.






오늘은 사울왕의 아들인 이스보셋이 살해를 당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사울 집안도 참 안됐습니다.
사울왕을 비롯해 그 아들들 모두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됩니다.

1절에 보면 이스보셋이 ‘아브넬’이 죽었다는 소식 듣고 ‘손의 맥’이 풀렸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의지하던 사람인데 자신을 배신하러 갔다가 허무하게 죽어 버리니 겁도 나고, 인생무상, 권력무상을 느끼며 낙심천만하게 된 것이겠지요.

사람 의지하는 사람은 ‘의지하는 사람’이 무너지면 같이 무너집니다.
하나님 없이 살게 되면 충분히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친박, 친노하면서 정치하는 사람들이 우리 나라에는 많은데 친박하고, 친노하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힘이 있고, 힘이 생기니까 모이는 거지만 의지하는 사람 무너지면 의지하던 사람들도 무너지게 되 있습니다.

이스보셋이 아브넬 심하게 의지하지 않았으면 맥까지 풀릴 이유가 없었을 겁니다.
자신이 왕인데 전열 정비해서 대처해 나가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어려운 일 당하면 그 사람이 무엇을 의지하고 사는지가 드러나게 됩니다.
이스보셋도 다윗처럼 하나님의지하고 살았다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다윗보십시오.
이스보셋을 죽인 두 사람의 장교 바아나와 레갑이 이스보셋 머리 들고 찾아 옵니다.
대적의 왕을 대신 죽여주면 다윗이 좋아할 줄 알았던 거고, 그런 자신들에게 대단한 보상을 해 줄 것을 기대했던 건데, 다윗은 이 두 사람을 처형합니다.
다윗도 사람 의지하고 그랬으면 얼씨구나 하면서 이 사람들을 환영했을 겁니다.

사람 의지하는 사람,
돈 의지하는 사람,
힘 의지하는 사람은 그런 것들이 무너지면 같이 무너지기 쉽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존하며 사는 사람은 어려움이 와도 쉽게 무너지지 않고 이겨 낼 수가 있습니다.
왜 그렇지요. 하나님은 무너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번 살펴 보세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고 있나, 아니면 다른 것을 의지하면서 살고 있나?
우리 교우들 모두 하나님 더 많이 의지해서 웬만한 어려움에는 손에 맥이 풀리지 않는 강함을 가지고 살면 좋겠습니다.

사람 의지하고, 물질 의지하고, 등등 의지하다 무너지면 브레이크 없는 차처럼 정말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게 됩니다.
이게 참 무섭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살하고, 어떤 사람은 술에 빠져 살고. 악해 지고. 몰락하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마저 다 떠납니다.

이스보셋도 보십시오.
의지하던 사람이 죽어 버리니까
무주공산(無主空山), 힘 못쓴다는 것을 아니까 당장에 공격이 들어 오지 않습니까?
이스보셋 집에 드나들 정도의 장교들이면 신복들일텐데 신복 두 사람이 대낮에 들어와서 암살을 하는 겁니다.

이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한 때 자신의 주군을 대낮에 암살하고, 목을 자른 다음, 그 자른 목을 들고 밤새 달려가는 모습을. 이럴 수 있는 겁니까?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세상 힘에 의지하면서 사는 인간의 처량하고 악하고 비참한 모습입니다.

힘든 일 있어도 무너지면 안됩니다. 하나님 의지하고 정신 바짝 차리고 헤쳐 나가야 사람들도 함부로 못하지, 무너져 있으면 사람들은 더 배신 때리고 달려 드는 겁니다. 하나님 없는 세계는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동물의 세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진리의 허리 띠 띠고, 믿음의 방패 가지고, 구원의 투구 쓰고,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 가지고 기도하면서 깨어 있어야 됩니다.(엡 6장)

그리스도인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의존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다 좀 늦어지고, 실패하고, 부족하게 산다해서 조급할 필요도 없고, 낙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 깊게 의지하고 하나님 방식대로 사는 삶만이 진정한 승리와 기쁨과 평안을 가져다 준다는 것, 한치도 의심하지 말고 믿고 나가야 합니다.

무너지는 사울 왕가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 의지하면서 사는 삶에 더 매진하는 오늘 아침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하나님, 부족하지만 새벽을 깨워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의 모습으로 불러 주시니 감사합니다.
더 깊게 의지하며 소망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오늘 분명히 보여주시지 않았습니까?
사람만 의지하며 살던 사람은 의지하던 그 사람이 무너지면 손에 맥이 풀려 삶의 의미를 잃어 버리는 그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 내 손에는 맥이 풀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버지 계시니 담대하고 힘있게 살아가는 인생으로 우리 모두를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세속적인 방법으로 세워진 나라는 자멸하고 맙니다.
내 장래와 계획도 마찬가지입니다.
더뎌도 주님의 뜻과 방법을 붙잡을 때 속히 갈 수 있습니다.
사실 전 인생을 통틀어볼 때 지연된 얼마간의 세월은 인생을 망칠 만큼 위협적이지도, 늦지도 않습니다.





♦ 2월 7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3:1∼39
♦ 묵상을 위한 주제 : 점점 강하여 가고(1절)
♦ 성구 :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戰爭)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强)하여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弱)하여 가니라.

“다윗의 집은 점점 강하여 가고(David grew stronger and stronger)”

본문에서 집이라고 부른 것은 “가문(家門, family)”을 말합니다.

다윗의 집은 다윗의 가문으로 이스라엘 나라의 “왕(王, king)”이 된 가문을 말합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집이 있습니다.
하나의 집은 다윗의 집과 같이 점점 강하여 가는 집입니다.
다른 하나의 집은 사울의 집과 같이 점점 약하여 가는 집입니다.

여러분의 집은 강하여 가는 집입니까?
아니면 점점 약하여 가는 집입니까?

누구나 점점 강하여 가는 집이 되기를 원합니다.
점점 강하여 가는 집이 되는 비결을 살펴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은 모두 열 두 지파입니다.
다윗의 집은 오직 유다 지파로부터 지원을 받았습니다.

반면에 사울의 집은 열한 지파의 후원을 받았습니다.

수적으로 계산하면 사울의 집은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모였지만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점점 약해진 것은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하나님이 내 편에서 나를 위하여 일하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비성경적인 사고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성경적 사고는 “하나님이 신자 편에 서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하나님 편에 서 있어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남북전쟁 당시 링컨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 편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과연 하나님 편인가?”
하나님께서 내 편이 되기를 원하지 말고 내가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편에 설 때 세상의 온갖 환난 풍파를 이길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날마다 매 순간마다 내가 하나님 편에 있다는 믿음으로 우환질고 많은 세상에서 주님께서 부르시는 그 날까지 늘 강건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너 주의 사람아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2월 5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2:1∼32
♦ 묵상을 위한 주제 : 헤브론으로 갈찌니라(1절)  
♦ 성구 : 후(後)에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 가로되 내가 유다 한 성(城)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올라가라 다윗이 가로되 어디로 가리이까 가라사대 헤브론으로 갈찌니라.

“헤브론으로 갈찌니라(To Hebron)”
‘헤브론’이란 지명의 뜻은 “연합(聯合, union)”이라고 합니다.
 
다윗은 이제까지 정처 없이 도망다녀야 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를 위하여 '헤브론'으로 가서 모든 사람들과 연합해야 할 사명을 갖게 됩니다.

 사울이 죽었습니다.
사울을 피해 시글락에 와 있었던 다윗은 이제 사울을 피하여 도망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그때 다윗은 임의대로 행하지 않고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였으며 "헤브론으로 가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1절).

다윗은 시글락에서 자기의 부하들과 모든 가족을 데리고 헤브론으로 갔습니다.

다윗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유다 사람들이 몰려와 다윗을 자기 지파의 왕으로 삼았습니다.

다윗은 사무엘을 통해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었지만(삼상 16장) 공식적인 행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비록 한정적인 유다 땅이지만 다윗은 백성 앞에서 공식적인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사울이 죽었기 때문에 당연히 다윗이 이스라엘의 다음 왕으로 등극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사울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먼저 다윗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끌어안아야 했습니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암몬 족속에게 위협과 큰 모욕을 당할 때 사울이 구해준 적이 있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사울를 지지하는 중심 세력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사울이 죽자 길르앗 애베스 사람들은 사울의 장례식을 정성껏 치러주었습니다.  이 소식이 다윗에게 전해졌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다윗은 그들을 호의로 대했습니다.

강압적으로 그들의 마음을 돌려 자신의 세력으로 만들 수도 있었지만 다윗은 강제적으로 그들의 마음을 돌리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울에 대한 그들의 충성에 대해 칭찬하며 축복했고 그들의 마음이 어떠하든 다윗 자신은 그들에게 선을 베풀 것을 약속했습니다(5~7절).

또 한 가지 다윗이 해결해야 할 사람은 "아브넬"이었습니다.

그는 사울 군대 총사령관이었는데, 사울밑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이 죽은 후에 권력에 눈이 먼 그는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발빠르게 움직였습니다(8-10절).

"아브넬"은 사울의 아들인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유다 지파는 다윗을 왕으로 세웠기에 그 지파를 제외한 모든 지파의 왕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보셋은 아브넬에 의해 세워진 무기력한 왕이었습니다.
재위기간도 2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아브넬을 중심으로 한 이스보셋의 세력과 다윗의 세력은 결국 전쟁을 초래했습니다(12-32절).

다윗은 이미 사무엘을 통해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참 오랫동안 사울의 핍박을 피해 도망 다녀야 했고, 또 사울이 죽어서도 7년 6개월 동안 유다 지파의 왕으로서 다른 지파를 통합해야 하는 어려운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무한한 인내가 요구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 또한 다윗과 비슷한 상황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다윗은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에도 여호와께 물었습니다.

내가 유다 한 성으로 올라가리이까?
어디로 가리이까?

먼저 하나님께 가야 할 방향을 묻고 하나님의 음답에 따라 가야 할 방향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생각대로 말씀하시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며 행하겠다는 다윗의 결연한 의지를 본받아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믿음으로 어떤 일을, 어떤 길을 선택했다고 말한다면 그 말은 어떤 난관이 있다 해도 끝까지 하나님께 맡기고 그 길을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길을 걷는 중에 난관을 만난다면 그 난관은 필요한 시점에 필요한 일을 위해 만들어 놓으신 하나님의 훈련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그 난관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무너지지 않을 영적 용사로 무장시키시고 또 타인을 살리기 위한 통로로 삼으실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뜻하지 않는 난관을 만난다 하더라도, 시간이 멈춘 어두운 한밤중 같이 느껴지는 시간이 있어도, 어떤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지라도  하루의 길을 먼저 주님께 묻고 주님의 지혜를 구하며 주님을 믿고 따라가는 은총의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나는 갈 길 모르니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2월 4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1:1∼27
♦ 묵상을 위한 주제 : 활 노래(18절)   
♦ 성구 : 명(命)하여 그것을 유다 족속(族屬)에게 가르치라 하였으니 곧 활 노래라 야살의 책(冊)에 기록(記錄)되었으되.  

“활 노래(lament of the bow)”

히브리어 성경에는 사무엘서가 상하로 나뉘어진 것이 아니라 한권입니다.
한글 성경은 사무엘 상하 두 권으로 구분하여 사용합니다.
사무엘상은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의 죽음으로 막을 내립니다(31장). 
사무엘상은 다윗의 생애 일부를 포함하고 있지만 사무엘과 사울의 생애에 일어났던 역사라고 하겠습니다.
사무엘하는 다윗의 왕위 등극과 통치 업적 및 다윗의 범죄 그리고 반역자들의 반란과 다윗의 피난 등의 역사라고 하겠습니다.

사무엘하 1장은 길보아 전투에서 사울의 죽음과 장사를 기록한 사무엘상 31장과 다윗의 유다 왕 등극인 사무엘하 2장 사이에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던 다윗의 반응에 관한 기록입니다.

사울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죽었던 길보아 산과 다윗이 아말렉 사람들로부터 빼앗겼던 시글락과의 거리는 대략 80km 라고 합니다.
다윗은 사울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사흘 째 되던 날 듣게 됩니다(1:2).

다윗은 그 소년에게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의 죽은 것을 네가 어떻게 아느냐?"고 묻습니다.

소년은 우연히 길보아 산에 올라갔다가 사울이 내게 이르기를 내 목숨이 아직 내게 있으므로 내가 고통에 시달리니 나를 죽이라고 하므로 더 이상 살 수 없는 줄 알고 죽이고 면류관과 팔고리를 가져왔다고 합니다(1:10).

다윗은 그 소년의 말을 듣고 네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느냐 하며 저를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다윗은 사울과 그의 아들이자 절친한 요나단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듣고 매우 슬퍼했습니다.
그래서 슬픈 노래를 만들어 이들의 죽음을 애도하였습니다.
다윗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고 애가를(활노래) 지어 유다 족속들에게 가르치라 명령하였고 또한 그 애가를 책에(야살의 책) 기록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1:17-27).

다윗이 그의 절친한 친구 요나단의 죽음에 대한 애도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심하게 괴롭히고 죽이려고 했던 사울에게도 왜 이같이 애도를 하였을까요?

다윗은 하나님께서 기름 부은 사람은 그가 비록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인간이 심판할 수 없다는 신앙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치하기 위하여 선택한 하나님의 종이라고 믿었기에 하나님만이 그를 벌하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을 하나님께 맡기려는 믿음을 본받아 오늘날도 믿음의 사람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일에 기쁨이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저 하늘 나라는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다윗의 눈물

다윗이 위대한 신앙의 인물이 되었던 중요한 비결 중의 하나는 다윗이 눈물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었던 중요한 비결 중의 하나도 다윗이 눈물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윗이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중요한 비결 중에 하나도 다윗이 눈물의 사람이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눈물이 진실의 상징이고 소박함의 상징이고 순수함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눈물은 곧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세 가지 일 때문에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첫째, 다윗은 자기가 범한 죄 때문에 회개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내가 탄식하므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 6:6).

대부분의 사람들은 간음죄와 살인죄를 짓고서도 눈물을 흘리기는커녕 태연한 모습을 보입니다.

기독교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간음죄를 짓고서도 눈물을 흘리며 회개를 하기는커녕 태연한 모습으로 위선을 떨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단이라는 선지자가 다윗에게 와서 다윗의 죄를 지적했을 때 다윗은 태연하게 위선을 떨지 않았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나이다”라고 솔직하게 자기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나단 선지의 말과 다윗의 고백을 들어보시기를 바랍니다.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왕을 삼기 위하여 네게 기름을 붓고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상 12:7-13).

다윗은 그 후 평생토록 죄를 회개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내가 탄식하므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내 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며 어두웠나이다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시 6:6-8). 다윗은 자기가 범한 죄 때문에 그리고 죄 값으로 당하는 환난 때문에 평생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대부분의 시에는 슬픔과 탄식과 울음이 나타나 있었습니다. “여호와여 어느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시 13: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시 22:1-15).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나의 우매한 연고로소이다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픈 중에 다니나이다”(시 38:4-6).

다윗은 한 평생을 다음과 같은 참회의 시를 읊으면서 살다가 죽었습니다. 후에 어거스틴이 그 시를 읊으면서 살다가 죽었고, 김치선 목사님이 그랬습니다. 저도 부족하지만 그 분들의 흉내를 내면서 그 참회의 시를 읊으면서 살다가 죽기를 바랍니다. 그 참회의 시는 시편 51편입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10). 다윗은 울다가 또 울다가 하나님께 이렇게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시 56:8) 다윗은 한 평생 자기가 범한 죄 때문에 회개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가장 귀하게 여기시고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바로 회개의 눈물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다윗은 다른 사람들의 불행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삼상 30:4).

다윗은 시글락에 살던 자기의 동족이 아말렉 사람들에게 침략을 당하여 사람들이 붙잡혀 가고 온 성이 불 탄 것을 보고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내어 울었다고 했습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성에 이르러 본즉 성이 불탔고 자기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사로잡혔는지라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삼상 30:3,4). 자기의 동족이 불행을 당했을 때 울 수 있는 사람은 착한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도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롬 12:15)고 권면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다윗의 울음의 귀중함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생각하기를 어려운 때에 우는 것은 약자들의 하는 일이라고 한다. 더욱이 시글락에서 다윗이 통곡한 것은 일국의 대왕이 될 사람으로서 체통을 지키지 못한 것같이 보인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울 수 있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보다 용이하게 신앙으로 들어간다. 사람이 울 때에는 그 심령이 부드러워져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울음이 없는 자는 대부분 심령이 마비되어 있는 자로 판단된다.”

다윗은 시글락 사건 바로 후에는 자기를 죽이려고 하던 사울 왕이 전쟁터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또 슬퍼하며 울었습니다. 사무엘하 1장 1절 이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울의 죽은 후라 다윗이 아말렉 사람을 도륙하고 돌아와서 시글락에서 이틀을 유하더니 제 삼일에 한 사람이 사울의 진에서 나왔는데 그 옷은 찢어졌고 머리에는 흙이 있더라 저가 다윗에게 나아와 땅에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저에게 묻되 너는 어디서 왔느냐 대답하되 이스라엘 진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다윗이 가로되 일이 어떻게 되었느뇨 너는 내게 고하라 저가 대답하되 군사가 전쟁 중에서 도망하기도 하였고 무리 중에 엎드러져 죽은 자도 많았고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도 죽었나이다 이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으매 함께 있는 모든 사람도 그리하고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을 인하여 저녁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니라”(삼상 1:1-4,11,12).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 하던 사울 왕이 죽었다고 하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대신에 슬퍼하며 울었다고 했습니다. 다윗이 슬퍼한 이유 중의 하나는 사울 왕이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다윗은 근본적으로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고 마음이 착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착한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착한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이 죄를 범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것을 바라보시면서 슬퍼서 우신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사 1:2-4) 예수님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면서 좋아서 기뻐하시지 않았고 슬퍼서 우셨다고 했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찌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눅 19:41-44).

지금 우리들의 가슴에는 원수들에 대한 분노만이 있고 슬픔과 눈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은 아닙니다. 니느웨 성을 바라보시면서도 하나님은 우셨습니다. 물론 요나는 분노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북한을 바라보면서 우는 마음보다는 분노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마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고 비극적인 죽음을 당한 것을 바라보면서 다윗은 좋아서 기뻐하지 않았고 슬퍼서 울었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마음이요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심판을 받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슬퍼서 우는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셋째,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에 감격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다윗의 시편들 중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고 감탄하는 시들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감탄사들을 계속해서 발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시 8:4-5)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운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찌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오히려 주와 함께 있나이다”(시 139:17,18). 마음이 부드럽고 감성이 풍부한 다윗이 이와 같은 고백을 할 때 그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음이 무디고 강퍅한 저 같은 사람도 이 고백들을 읽으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면 이 시의 원 저자인 다윗은 얼마나 뜨거운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까?

다윗은 자기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고백하며 너무 감격하여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을 것입니다. 다윗의 감격의 시들 중에서 하나만 여기 옮깁니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 103:8-14).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찌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 103:1-5).

다윗은 자기의 죄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다윗은 다른 사람들의 불행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저의 금년도 기도 제목 중의 하나는 저의 가슴에 주님의 눈물을 품는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의 마음과 생각과 눈물을 품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 되는 삶을 살게 하시고 제물 되는 죽음을 죽게 하시옵소서.” 저의 소원대로 하나님께서 메마르고 강퍅한 저의 가슴에 눈물을 조금씩 채워주시고 계십니다. 저의 허물을 바라보면 가슴에 눈물이 흐릅니다. 아프가니스탄의 어린이들이나 캄보디아의 어린이들을 생각하면 저의 가슴에 눈물이 흐릅니다. 어제 캄보디아에 같이 갔던 목사님 한 분이 캄보디아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내왔습니다. 그 사진들 중의 하나는 버스 고장으로 시골 길에서 한 시간을 기다리는 중 지나가는 어린이 세 명에게 제가 스티커를 나누어 주었는데 그 세 어린이들이 스티커를 손목이 붙이고 저와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 어린이들이 귀엽게 보였는데 그 어린이들을 바라보면서 제 눈에 눈물이 맺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너무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저도 다윗처럼 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통곡하며 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울 기력이 없도록 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실 때 눈물을 흘리셨던 예수님의 눈물을 내게도 주옵소서
십자가에서 저희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하며 우시던 주님의 눈물을 제게도 주옵소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시던 그 눈물도 제 마음에 품게 하옵소서



본문에서 다윗은 큰 슬픔에 빠진다.
사울 왕이 죽었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던 원수 사울이 죽었는데 슬퍼했다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습니까?

다윗 개인적으로는 춤이라도 춰야 할만큼 기쁜 소식입니다.
사울이 죽음으로 그의 오랜 피난 생활이 끝나고 이제 왕이 되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슬퍼합니다.
어떻게 다윗은 원수의 죽음을 슬퍼할 수 있었을까?
그 이유를 생각하며 은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무엘상 28:4
블레셋 사람들이 모여 수넴에 이르러 진 치매 사울이 온 이스라엘을 모아 길보아에 진 쳤더니.

사울이 마주한 것은 블레셋과의 전쟁이었다.
가나안 해변에 머물러 있던 블레셋 족속들이 이스라엘의 중심으로 그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공격해 온 것이다.
사울은 다급했던 것 같다.
하나님께도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그는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다.
사울은 신접한 여인을 통해 죽은 사무엘을 불러 대화한다.
사무엘은 이렇게 답해주었다.

사무엘상 28:19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라 하는지라. 

내일 너와 네 아들 요나단이 죽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사울의 죽음은 예고된 죽음이었다.

사무엘상 31:1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치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여 길보아 산에서 엎드러져 죽으니라. 

성경은 전투의 과정은 언급하지 않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죽었다는 내용만 기록하고 있다.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이 예고된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시글락에 있었던 다윗은 한 아말렉 청년으로부터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 청년은 죽어가는 사울의 요청으로 사울을 죽이고 그의 머리에 있던 왕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서 다윗에게로 가져온 것이다.
절대 권력을 상징하는 빈 왕관이 다윗 앞에 있었다.
아말렉 청년은 아마도 다윗이 좋아하며 자신에게 상이라도 줄 것을 기대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옷을 잡아 찢는다.
옷을 찢는 행동은 히브리어로 ‘크리야’다.
유대인들은 슬픔이나 분노 같은 감정이 있을 때 그것을 가장 격렬하게 표현하는 행위로 옷을 찢는다.
다윗만 옷을 찢은 게 아니었다.
다윗과 함께 했던 약 600명의 사람들도 다 옷을 찢었다.
쫓겨 다니느라 옷도 많지 않았을 텐데 온 공동체가 옷을 찢으며 사울을 잃은 슬픔에 동참한 것이다.

사무엘하 1:11-12
이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으매 함께 있는 모든 사람도 그리하고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저녁 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니라.

다윗과 그의 공동체는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 뿐만이 아니라 여호와의 백성인 이스라엘 족속이 블레셋에 패배하며 많은 사람이 죽은 것 때문에도 슬퍼했다.
여기서 다윗의 눈물이 조금은 이해된다.
그는 사울과의 개인적인 애증을 넘어 국가적인 상실을 슬퍼하고 있는 것이다.

다윗은 이어서 그 아말렉 청년을 꾸짖는다.

사무엘하 1:14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 하고. 

다윗에게 사울은 여전히 하나님이 기름부어 세우신 왕이었다.
사울 때문에 다윗은 정말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자를 죽이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지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했다.
사울이 자신에게 저질렀던 모든 악행보다 하나님이 그를 기름부어 세웠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그는 사울이 죽고 나서 이런 시편을 남긴다.

시편 18:1-3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와 사울의 손에서 건져 주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로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다윗은 절대주권이 하나님게 있음을 노래했다. 그는 원수가 아무리 강할지라도 원수의 손에서 자신을 건지실 분이 하나님임을 신뢰했다. 그는 자신의 하나님을 신뢰하며 자신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지 않고 완전히 행하고자 결심했다.

시편 18:23-24
또한 나는 그의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나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 그의 목전에서 내 손이 깨끗한 만큼 내게 갚으셨도다.

다윗은 어쩌면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힘들게 지켜왔던 자신의 원칙과 그로 인하여 고통스러웠던 시간들을 돌아보며 눈물 흘렸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는 사울 때문에 결과적으로 하나님께만 피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만 그의 방패와 요새가 되시는 견고한 영혼이 되었다.
그는 아둘람 굴에서 하나님께 억울함을 토하며 숱한 눈물의 기도를 드렸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을 신뢰하며 믿음의 기도를 심었던 것이다.

신약 성경에서도 바울은 이런 권면을 한다.

로마서 12:14, 17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로마서 12:19-21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다윗은 자신의 삶에 원수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시간을 보냈다.
그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자신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기로 결심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박해했던 사울왕을 위해 기도하며 축복했을 것이다.
자신이 오랜 시간 축복했던 사울이 죽었을 때 그의 마음이 어땠을까?
슬펐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옷을 찢고 눈물 흘리며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금식했던 것이다.

원수를 위해 슬퍼하며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영혼은 자유로운 영혼이다.
사람의 반응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영혼이다.
그의 앞 길은 아무도 막을 수 없다.
이어지는 사무엘하 2장에서 다윗은 드디어 유대의 왕이 된다.
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간에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며 자신을 준비시킨 것이다.

우리 역시 살면서 나를 괴롭히는 원수들을 만난다.
그럴 때 ‘복수는 나의 것’이 나의 삶의 목표가 되어선 안된다.
원수가 망하도록 저주하는 것도 나의 기도가 되어선 안된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오히려 원수를 위해서는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견고한 영혼으로 빚어지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삶이 되야 할 것이다.

사무엘하 1:17-18
다윗이 이 슬픈 노래로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을 조상하고 명령하여 그것을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 하였으니 곧 활 노래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으되.


다윗은 슬픈 노래를 지어 자신과 함께한 공동체뿐만이 아니라 전체 유다 족속에게 그 노래를 가르치도록 명령한다.
다윗은 이 노래에서 사울과 요나단을 칭송한다.
두 용사의 죽음을 애도한다.
그들이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였음을 기념한다.
다윗은 그들을 잃어버린 것이 우리 모두의 상실임을 노래했다.
상실을 슬퍼하는 시간을 통해 해결되지 않았던 묵은 상처들이 치유된다.
다윗 개인적으로도 슬픔을 노래함으로 사울을 통해 고통받았던 시간들이 치유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공동체가 함께 왕을 잃은 슬픔을 공유하면서 이스라엘은 이제 서로를 격려하며 새로운 다윗 왕조를 향해 일어설 준비를 하게 되는 것이다.

슬픔은 숨겨야 하는 감정이 아니다. 눈물은 빨리 닦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애통할 때 위로하시기 원하신다. 이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함께 애통하며 함께 슬퍼할 수 있는 우리 공동체가 되길 원한다. 우리 사회와 민족과 열방에 벌어지는 분쟁과 상실의 순간을 슬퍼하며 기도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길 바란다.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주님이 오시기까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눈물이 있는 곳에서 우리가 함께 울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 야살의 책

야살의 책'은 창세기부터 사사기 1장까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성경에 짧게 나오거나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사건들 사이의 이야기들을 기록했다.

특히 창세기의 내용은 성경보다 약 두 배 정도 더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랍비들이 야살의 책을 연구 자료로 활용했다는 증거도 있다.

'세데르 올람(Seder Olam)'은 히브리어 역사서로 기원후 169년경에 기록되었다.
이 책에 랍비 엘리에셀이 그의 연대기를 기록할 때 야살의 책을 사용했다는 내용이 여러 번 나온다.
이 책은 또한 그가 계산한 날짜와 절기가 가장 정확했는데 그것은 그가 야살의 책을 최고의 자료로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야살의 책이 기원후 2세기에 이미 사용되고 있었고 잘 알려진 책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야살의 책'은 한글이나 영어 성경으로는 알 수 없는 성경 원문의 히브리적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면 성경은 야곱이 '조용한 사람'이고 '장막에 거주한다'고 말한다.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창세기 25:27

이 두 가지 표현은 성경의 히브리적 개념을 말하는 것이지만 번역된 성경으로는 그 뜻을 알 수 없다.
여기서 '조용한'은 히브리어로 '톰'인데 '흠이 없는, 완전한'이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여 하나님이 보시기에 흠이 없고 완전한 자'를 의미한다(창 17:1, 욥 1:1).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욥기 1:1

또한 '장막에 거한다'는 것은 '장막 안에서 그의 부모나 조부모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모가 집에서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도록 명령하셨기 때문이다(신 6: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신명기 6:7

야살의 책은 이 히브리적 개념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야곱은 온전하고 지혜로운 자로 장막 안에 거하며 양 떼를 먹이고 주의 교훈과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명령을 배웠다
야살의 책 26:17

이 외에도 이 책은 우리가 성경에서 읽지 못하고 놓치고 있는 중요한 히브리적 개념들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말씀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 안에서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중요한 가르침들을 발굴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저자 미상 | 이상준 옮김| 이스트워드 | 311쪽 | 1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