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서신(06-10-2022 )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 공동서신(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디도서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342. 새롭게함, 갱신, 갱생 -  아나카이노시스(ἀνακαίνωσις)

ἀνακαίνωσις, εως, ἡ 

1. 갱신,  2. 갱생,  3. 새롭게 함
발음 / 아나카이노시스(anakainō- sis)
어원 / 303과 2537의 파생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새롭게 함(롬 12:2, 딛 3:5)
신약 성경 / 2회 사용


3067. 씻음 - 루트론(λουτρόν)

λουτρόν, οῦ, τό  

1. 목욕,  2. 씻음,  3. 세례
발음 / 루트론(lŏutrŏn)
어원 / 306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씻음(엡 5:26, 딛 3:5)
신약 성경 / 2회 사용

중생의 씻음 : 거듭남의 세례
성령의 새롭게 하심 :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과정



바른 교훈(디도서 2:1)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여.
You must teach what is in accord with sound doctrine.

5198. 바른 - 후기아이노(ὑγιαίνω)

ὑγιαίνω 
1. 건강하다,  2. 누가 5:31,  3. 건전하다
발음 / 후기아이노(hügiainō)
어원 / 519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건강하다(눅 5:31, 15:27), 강건하다(요삼 1:2), 바르다(딤전 1:10, 딤후 4:3, 딛 2:1), 온전하게 하다(딛 1:13, 2:2)
신약 성경 / 12회 사용

* 5199 ὑγιής, ές 
1. 건강한,  2. 마태 15:31,  3. 건전한
발음 / 후기에스(hügiēs)
어원 / 대격 ὑγιῆ, 837의 어간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성한(마 12:13), 온전한(마 15:31), 건강한 (막 5:34), 나은(요 5:6, 9,14), 고친(요 5:15), 바른(딛 2:8)
신약 성경 / 12회 사용

1319 교훈 - 디다스카리아(διδασκαλία)

1. 가르침,  2. 가르쳐진 교훈, 
발음 / 디다스카리아(didaskalia)
어원 / 132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교훈(마 15:9, 롬 15:4, 엡 4:14), 가르침(골 2:22, 딤전 4:1, 5:17), 가르치는 일(롬 12:7), 가르치는 것(딤전 4:13)
신약 성경 / 21회 사용

* 1320 디다스카로스(
διδάσκαλος)

1. 교사,  2. 마태 10:24,  3. 마태 8:19
발음 / 디다스카로스(didaskalŏs)
어원 / 132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선생님(마 8:19, 12:38, 요 11:28), 선생(마 9:11, 막 5:35, 약 3:1), 교사(행 13:1, 고전 12:28, 엡 4:11), 스승(딤전 2:7, 딤후 4:3)신약 성경 / 97회 사용

* 1321 디다스코(διδάσκω)

1. 마태 4:23,  2. ~을 가르치다,  3. 마태 15:9
발음 / 디다스코(didaskō)
관련 성경 / 가르치다(마 4:23, 막 1:21, 눅 4:15), 배우다(갈 1:12), 교훈을 받다(골 2:7).
[명] 가르침 (엡 4:21, 골 1:28)
신약 성경 / 97회 사용


바른 교훈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 벗어나지 않은 가르침을 말합니다.
바른 교훈과 다른 교훈을 구분하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느냐 따르지 않느냐에 따라 바른 교훈과 다른 교훈으로 구분됩니다.
잘 살펴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서 건강하게 동의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병이 들었다고 보면 됩니다.
그러나 다 이해 할 수는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에 대해서 거부 반응이 없이 건강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입니다.

둘째, 경건에 부합하는 가르침에게 건강한 관계를 맺느냐 아니냐

경건에 부합하는 가르침이란 예수님을 닮은 삶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본받는 가르침이란 뜻입니다.
윤리적 삶입니다.
바른 교훈이란 바른 교리와 바른 삶을 포함합니다.
바른 교리를 주장하면서 바른 윤리, 바른 삶은 무시한다면 바른 교훈이 아닙니다.
바른 삶은 있지만 바른 교리가 없으면 그것도 바른 교훈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중 어느 하나를 부인하는 것도 병든 교훈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 중에 하나를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도 다른 교훈, 병든 교훈입니다.
예컨대 예수님의 병 고침, 죽은 자 살림, 예수님이 행하신 각종 이적들, 이 모든 것은 예수님만이 구원자라는 것을 표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병고침, 이적들, 부유케하심 등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도 지나치게 나아간 병든 교훈입니다.

예수님은 천지만물의 창조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영과 육을 구별하는 가르침도 지나친 병든 교훈입니다.
이 세상의 삶만을 강조하는 것,반대로 내세의 삶만을 강조하는 것도 다 지나친 병든 교훈입니다.
사회성을 부인하고, 교회당만을 강조하는 것도 지나친 교훈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구원자와 계시록에 나오는 구원자를 균형 있게 다루어야 바른 교훈입니다.
예수님은 천지만물의 주인이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영의 세계의 왕이십니다.
종교적 색채만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윤리적인 면을 경시하는 것도 지나친 병든 교훈입니다.
지나치게 윤리적인 면을 강조하면서 복음을 경시하면 그것도 지나친 교훈입니다.
바른 교훈을 환영하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다 이해 할 수는 없어도 예수님의 말씀과 경건에 부합한 교훈을 건강하게 받고 소화시킵니다.

신약성경은 모두 27권인데 내용과 저자에 따라 크게 보면 4가지로 분류합니다.

예수님의 삶을 직접적으로 다룬 책은 '복음서(4권)'
초대교회 역사를 다룬 사도행전은 '역사서(1권)'
사도들이 쓴 편지글로 된 성경은 '서신서(21권)'
종말의 계시를 다룬 요한계시록을 '예언서(1권)' 라고 합니다.

'서신서'는 바울이 쓴 '바울서신(13권)'과 다른 사도나 제자들이 쓴 '공동서신(8권)'으로 구분합니다.
놀랍게도 바울이 쓴 13개의 편지글이 성경이 되었습니다.
바울서신은 다시 바울이 로마에 가택 연금 된 상황에서 쓴 '옥중서신(4권)', 목회를 위해 쓴 '목회서신(3권)', 그리고 각 지역 교회들에 편지한 '일반 서신(6권)'으로 분류합니다.

목회서신

디모데전서, 디도서, 디모데후서와 함께 '목회서신'으로 구분되는 책입니다.
목회서신은 바울이 에베소와 그레데에서 목회하고 있는 그의 제자 디모데와 디도에게 목회를 함에 있어 주의하고 살피며 전력을 다해야 하는 것에 대해 당부하는 내용들입니다.

특별히 디모데전서는 초대교회를 어렵게 했던 이단이나 거짓 교사들에 대해 경계하고 교회 행정과 관련해 공적 예배에서의 태도나 직분자들에 대한 자격을 설명하고 교회 내에 여러 계층들이 서로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등의 내용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교회 내 여성에 대한 지침은 문화적, 상황적 재해석이 필요하지만 전체적으로 현대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 가능한 내용들입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에베소에 보낸 첫 번째 목적이 교회 내에서 '다른 교훈'을 가르치고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고 있는 것을 금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1:3~4). 왜냐하면 이런 것들이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훼방하고 끝없는 변론을 만들어 내어(1:4)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거스르기 때문입니다(1:11).

오늘 본문 내용은 단순합니다. 바울은 '다른 교훈'에 대해 경계하면서(1:3~10), '바른 교훈'을 지킬 것을 요청합니다(1:10~11). 그리고 이 '바른 교훈'을 지키기 위해 주께서 '직분'을 주셨음을 분명히 합니다(1:12). 주께서 죄악 가운데 있는 자들을 부르사 하나님의 바른 교훈을 지키는 직분을 주심이 바로 참복음임을 설명하고 우리가 바른 교훈을 지키기 위해 이 참복음 안에 거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함을 설명합니다(1:13~17).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그토록 경계한 '다른 교훈'은 무엇일까요? 먼저 바울이 경계한 다른 교훈이 외부적으로 교회를 핍박하는 공격이 아니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세상의 평가, 세상의 핍박이 교회를 어렵게 하고 무너뜨릴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억울한 평가나 핍박이 있으면 우리 안에 어린 신앙인, 교회의 거룩성, 하나님의 영광을 지킨다는 명목을 내세워 거부하고 대적하려고 합니다.

바울이 활동했던 시대는 예수 믿는다는 것 자체로 핍박을 받아 가정과 직장에서 쫓겨나고 감옥에 갇히고 원형경기장에서 사자 밥으로 던져졌던 때입니다. 그리스·로마 지역은 온갖 신화와 신들로 가득했고 헬라 철학을 바탕으로 한 이성주의가 가장 발달했던 시기입니다. 외부적 핍박, 다른 종교와 철학의 확장 등 지금과 비교도 되지 않을 상황에서 바울이 이야기하는 '다른 교훈'은 이런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른 교훈'은 무엇인가

그것은 오히려 세속적 가치, 세상적 철학, 이데올로기를 교회 내에 가지고 들어와 마치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인 양, 하나님의 뜻인 양 포장하고 합리화해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바울이 당시에 경계하는 것은 '영지주의'와 '율법주의'입니다.

영지주의

'영지(gnosis)'는 지식, 깨달음 등의 의미로 지중해 연안의 토속 종교들의 신학적 이론과 사상의 영향을 받은 사상입니다.
영적 지식, 영적 깨달음 이런 것을 강조하며 육체는 악하고 천하다는 이원론이 핵심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인성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부활을 인정하지 않았으며(딤후 2:18) 결혼도 금지시켰습니다(딤전 4:3).
이들의 이원론적 사상은 결국 교회 내에 혼합 주의를 양산한 것입니다.

영적이라는 사상에서 각종 천상적 존재들을 유추하고 '신화'를 만들고 신들의 '족보'를 만들어 그것에 몰두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런 신화와 족보에 착념하며 하나님의 뜻을 밝히고 성경의 의미를 밝힌다며 끊임없이 논쟁하고 토론하는 것이 결국 하나님의 경륜(섭리, 역사)을 이루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경륜(섭리, 역사)은 토론과 논쟁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주의

유대인들로 어려서부터 구약성경을 배우고 예루살렘 성전과 지역 회당을 중심으로 코란과 선지서들을 공부했던 이들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율법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서도 어떤 행위를 통해 자신들의 믿음을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구약 율법을 다시 끄집어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 조문을 강조하면서 정작 그 율법이 가지고 있는 원래적 의미인 사랑과 은혜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1:7)."

한국교회를 어지럽히는 다른 교훈도 위에서 언급한 영지주의와 율법주의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극단적 '성령 운동'은 마치 영지주의처럼 영적인 것만이 모든 것인 양 사람들을 미혹하고 속입니다.
육적인 질병, 미래에 대한 불안 등을 이용해 사람들을 특종 종교 집단이나 종교 지도자들의 노예로 만듭니다.
또 다른 것은 '율법주의'의 부활입니다.
주일 성수, 십일조, 새벽 기도회, QT 등 다양한 종교적 행위를 절대화하고 신앙 성숙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바울의 말처럼 율법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잘못된 삶의 태도를 돌아보게 하고 기독교인으로서 책임 있는 삶을 살도록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그러나 그런 율법이 궁극적으로 믿는 자를 자유케 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1:11).

심각한 문제는 영지주의(성령 운동), 율법주의 등을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얻는 것입니다.
돈을 구하는 것입니다(딛 1:11, 딤전 6:5).
하나님의 이름, 은혜를 빙자해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용납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직분은  '바른 교훈'을 지키기 위해 주신 것

'바른 교훈'이라는 용어는 바울의 다른 서신에는 나오지 않는 말입니다.
오직 '목회서신'에만 5번 등장합니다(딛 1:9, 13, 딤전 1:10, 6:3, 딤후 1:13, 4:3)
그것은 바른 교훈을 지키는 것이 목회의 핵심이고 목적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를 지키게 하기 위해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1:12)"고 고백합니다.

직분은 바른 교훈을 지키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직분은 군림하고 명령하고 누리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일의 효율을 위해 직분도 필요하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죄인 된 우리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나라의 일꾼을 삼으시고 그의 일을 맡기심은 바른 교훈을 지키고 이를 전하라는 데 목적이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직분을 맡겨 주시고 이 거룩한 사명을 주신 것은 우리가 의로운 자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원래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 것입니다(1:13).
목사도 장로도 집사도 또 교회와 관련해 기독교와 관련해 어떤 직분을 맡은 자들은 바로 이 정신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라는 것입니다.
무슨 선한 것이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이는 예수님을 믿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할 때 이는 과거에 그랬다는 것이 아닙니다(딤전 1:15b).
현재진행형입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 주께서 우리를 긍휼이 여기셔서 믿음과 사랑으로 풍성하게 주신 것처럼 지금도 그의 긍휼하심이 필요하며 날마다 그의 긍휼하심 앞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긍휼은 먼저 믿은 자로서 본을 삼기 위함이다

이 긍휼은 내가 어떠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으로 찾아와서 일방적으로 주신 것입니다(1:16). 거저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통해 주를 믿어 영생을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1:16). 우리에게 중요한 사명이 주어진 것입니다. 먼저 믿은 자로서, 직분을 맡은 자로서 이제 다른 사람의 본이 되고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는 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사명을 통해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1:17).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을 위해 날마다 기도해야 합니다(1:5).
우리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도록 날마다 나아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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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의 소망(디도서 1:2)

하루살이와 메뚜기

하루살이가 메뚜기하고 아침부터 놀다가 저녘이 되었습니다.
메뚜기가 하루살이 에게  "하루살이야! 벌써 저녘이 되었으니 그만 놀고 내일 만나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루살이가 메뚜기에게 물었습니다. "내일이 뭔데?"
하루살이는 하루만 살기때문에 "내일"을 모릅니다.
하루살이가 죽고나니 메뚜기가 외로웠습니다.
그래서 만난 것이 "개구리" 였습니다.
개구리와 놀다가 가을이 왔습니다. 
그러자 개구리가 "메뚜기야! 겨울이 지나고 내년에 만나서 놀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메뚜기가 개구리에게 "내년이 뭐야!" 라고 물었습니다.
메뚜기는 "내년"을 모릅니다.
1년만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도 똑 같습니다.
아는 것만 알다가 갑자기 떠납니다.
사후, 아무 준비도 없이 칠십, 팔십 지나도 일만 하다가 그대로 딱 아는 그 만큼만 알고, 좋아하는 여행구경도 못하고. 저 세상으로 이 세상을 떠납니다.

우리는 지는 해를 바라보며 따르기 보다는 뜨는 해를 바라보며 남은 인생, 즐겁게 살아야겠습니다.
지는 노을이 좋을지 모르지만, 그 노을은 허무할뿐 뜨는 해는 내일을, 내년을 위하여 준비를 다하고 사는 나의 삶과 가족의 삶을 준비한 자에겐 항상 활력이 넘치고 자신감이 넘칩니다.


1680. 소망 - 엘피스(ἐλπίς)

ἐλπίς, ίδος, ἡ 
1. 기대,   2. 신뢰,   3. 행 16:19
발음 / 엘피스(ĕlpis)
어원 / ἔλπω
관련 성경 / 희망(행 2:26), 소망(행 16:19, 롬 5:5, 고전 9:10), 여망(행 27:20), 바람(행 26:6, 롬 5:2, 8:24)
신약 성경 / 53회 사용


생명(生命)


1. 부모로부터 받은 육체적 생명 : 비오스(βίος)

979. βίος, ου, ὁ  
1. 생명,   2. 지상의 생활,   3. 삶의 유지 수단
발음 / 비오스(biŏs)
관련 성경 / 생활비(막 12:44, 눅 21:4), 이생(눅 8:14, 요일 2:16), 생활(눅 8:43, 딤전 2:2, 벧전 4:3), 살림(눅 15:12, 30), 재물(요일 3:17)
신약 성경 / 10회 사용

2.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영원한 생명 : 조에(ζωή)

2222. ζωή, ῆς, ἡ  

1. 생명,   2. 죽음(θάνατος),   3. ἐν τῇ ζωῇ σου: 네가 살아있는 동안
발음 / 조에(zōē)
어원 / 219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생명(마 7:14), 이 세상의 삶(고전 15:19), 생기(계 11:11)
신약 성경 / 135회 사용


166. 영원한 - 아이오니오스(αἰώνιος)

αἰώνιος, ον
1. 영원한,   2. 시작이 없는,   3. 시작이나 끝이 없는 
발음 / 아이오니오스(aiōniŏs)
어원/ 16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영원한(마 18:8, 계 14:6), 영생의(눅 18:30, 요 17:2)
신약 성경 / 71회 사용

황해도 봉산군에 계동교회가 있는데 6·25를 전후하여 장로 7명 중 4명이 순교를 당했다.  
그 중의 강석기 장로는 공산주의자들이 나무에 묶어 놓고 눈알을 다 뽑았다.
두 눈이 다 빠져 피가 흐르는데 강 장로님은 "내가 두 눈을 가지고 있을 때는 하늘나라를 볼 수 없더니 두 눈이 빠지니 하늘나라를 볼 수 있구나"하며 외쳤다.

죽은 후 천국과 지옥을 보고 살아난 박상옥

그는 충북 괴산군 어느 농촌에서 태어났다.
본래 기독교 가정이 아니었고 누이가 예수 믿고 목사님에게 결혼하였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매형과 누이가 전도하여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였다.
그 후 그는 집사가 되었다.
1965년 11월 22일 사업상 볼 일 때문에 경북지방으로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떠났다.
그런데 조령새재를 넘는 순간 와장창하는 요란한 광음과 함께 버스는 벼랑으로 굴러 떨어졌고 그는 얼굴과 머리가 깨어졌다.
피는 눈, 코, 입으로 흘러내려 일어설 힘이 없었고 정신이 몽롱해졌다.
그는 쓰러져 있는 그대로 찬송가 562장을 불렀다.
<이 몸에 소망 구름 같고 부귀와 영화도 한 꿈일세……> 이렇게 4절까지 부른 후에 영영 의식을 잃고 말았다. 완전히 죽은 것이다.
그는 죽어서 끝이 보이지 않는 평탄한 길 위에 서서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앞에 가던 사람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그 사람은 충북 괴산 화양동에 사는 최인만(37세)이라는 분이었다.
그들은 둘이서 목적지도 없이 길벗 되어서 함께 걸었다.
얼마나 갔을까 그들 앞에 커다란 안내판이 나타났다.
알아보기 힘든 각 나라말로 적혀 있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우리나라 글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우측으로, 믿지 않는 자는 좌측으로>라고 쓰여 있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오른쪽으로 가고 최인만씨는 왼쪽으로 서로 헤어져 가게되었다.
그가 가는 우측 길은 계단이 있는데 서너 계단 올라서서 뒤로 돌아 최인만씨를 바라보니 그는 까맣게 변하여 있었다.
그래서 자기 옷을 보았더니 어느새 흰옷으로 바꾸어졌다.
계단을 올라서 보니 앞에는 잔잔한 큰 강이 있고 강가에는 흰 옷 입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배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낚시질하는 노인에게 가까이 가서 배가 언제쯤 오는가를 여쭈어 보았다.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니 그 분은 다른 분이 아니라 바로 그의 아버지였다.
"아직 때가 안되었는데……" 하시면서 그의 인사를 받으시는 것이었다.
이때 머리와 수염이 희고 긴 노인이 나타났다.
머리에 뿔관을 쓰고 도포를 걸치고 긴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세상 모든 인간이 가는 길을 보라> 위엄 있는 음성에 고개를 들어보니 직사각형의 12문이 있고 문 앞에는 흰옷을 입은 문지기가 있었다.
  문에는 사람들이 두 줄로 들어가고
  문에서는 세상에서 행한 사실을 말하고
  문에서 이간질, 거짓말하는 등, 입으로 죄를 지은 자는 혀를 뽑고, 눈에는 눈을, 손에는 손을 등 각가지 병신이 되고 있었다.
그는 좌측으로 90도 고개를 돌려보니 까만 옷을 입은 사람들이 두 줄로 서서 가는데 머리에는 뿔이 나고 눈이 셋이며 사람도 짐승도 아닌 빨간 옷을 입고 있는 괴물이 곡괭이를 들고 서서 이들을 찍어 던지는 것이었다. 용광로와는 비교가 안 되는 불꽃이 타오르고 붉은 물이 이글거리는 영원한 불못 지옥이었다(계 19 : 20).
  다시 오른쪽을 바라보니 문은 보이지 않고 흰 옷 입은 사람들이 많아 흰 구름같이 보였다. 그 왼쪽으로 붉은 말들이 있고 말을 탄 사람들은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 밑에 감옥이 있었는데 까만 옷을 입은 사람들이 들어가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음부였다(벧전 3 : 19).
  다시 우측을 보니 백말이 있고 백로의 머리와 어린 아이의 머리를 맞춘 것 같은 것이 평화스럽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낙원이었다. 정신 없이 낙원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는 갑자기 쓰러지고 말았다.
  이때 "소라야"하는 음성이 들려오기에 대답을 하였더니 "나를 믿느냐"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는 "주여 믿습니다"고 대답을 하니 구원의 증표를 준다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 후 잠시 후의 일이었다.
  가느다란 사람의 음성이 들려와 눈을 떠보니 자기가 살던 집이었다. 그가 일어났을 때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귀신이 나타났다고 놀라 야단들이었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자세히 살펴보니 산중에 무덤을 파놓고 그 시체를 하관 하려는 순간이었다.
  그는 3일 3시간 동안 죽은 가운데 있었다. 그는 어안이 벙벙했다. 교통사고로 즉사해야 할 그가 관 속에서 살아나다니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능치 못하신 일이 없는 하나님께서 이 일쯤이야 못하시랴.
  정신을 가다듬어 남은 여생 덤으로 사는 그는 주님을 위해 몸 바치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죽음 속에서 인사를 나누었는데 괴산의 최인만씨를 찾아보았다. 그런데 최인만씨는 그와 한 날 죽어 장사 지냈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 교우와 불신자들에게 그가 보고들은 천국과 지옥을 떨리는 마음으로 전하고 있다
자료출처 / 복음신보에서

영원한 집으로 가야지

  존 애덤즈 목사에게 한 사람이 문안했다. "목사님 요즈음 기력이 어떻습니까?". "예, 존 애덤즈는 든든한데 그가 사는 주택이 형편 없어요. (머리를 가리키며) 지붕이 이렇게 낡은 데다가, (가슴을 가리키며) 벽도 흙이 다 떨어지고 기둥만이 앙상하게 드러났답니다. 그 뿐만이 아니지요. (지팡이를 보이면서)바람이 불면 집이 넘어 질까봐 이렇게 받침대까지 있답니다.
  어디 살겠오. 이제 튼튼하고 영원한 아버지 집으로 이사를 해야지요"하고 존 애덤즈 목사님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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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개역 성경을 인터넷 다국어 성경으로 "말세"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7구절이 소개됩니다.
구약에서는 1구절신명기 31:29
신약에서는 7구절 사도행전 2:17, 고린도전서 10:11, 디모데후서 3:1, 야고보서 5:3, 베드로전서 1:5,  20, 베드로후서 3:3

신명기 31:29b
너희가 말세에 재앙을 당하리라.

베드로후서 3:3
먼저 이것을 알찌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야고보서 5:3b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사도행전 2:17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마태복음 16:1-4

  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

이단 못 떠나는 심리엔 ‘로미오와 줄리엣 효과’가…

이단·사이비에 빠진 신도의 마음을 돌이키는 일은 쉽지 않다.
객관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교리의 모순을 정면으로 반박해도 꿈적도 하지 않는다.
가출과 폭력, 심하면 가정 파탄까지 치닫게 만드는 이단·사이비는 왜 빠져나오기 힘든 걸까?
월간 현대종교(6월호)가 분석한 ‘이단을 떠나지 못하는 5대 심리’를 들여다봤다.

첫째, 로미오와 줄리엣 효과

연애를 하는 남녀가 부모의 반대 등 어려움이 있으면 유대관계가 더 끈끈해지는 것과 같은 심리다.
주변의 만류가 심해질수록 “예수님도 이단 취급을 받으셨다”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단체에 대한 마음이 두터워진다.

둘째, 선민사상

남들이 알지 못하는 교리를 알고 있다는 것에 우월감을 느끼는 것이다.
또 많은 사람에게 배척당하는 것 역시 ‘하나님께 택함받은 의인이 당하는 고난’이라 여기며 오히려 자부심을 갖는다.

셋째, 군중심리

수많은 신도가 불평 없이 교주를 따르는 모습에 휘둘리는 심리를 말한다.

넷째, 밀 그램 효과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의 이름을 딴 ‘밀그램 효과’도 있다.
권위자의 지시에 따라야 할 것만 같은 심리다.

다섯째, 탈퇴하면 지옥에 간다

교주들이 “탈퇴하면 지옥에 간다”는 식의 협박을 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신도들에게 구체적인 목표를 제시하고 무의식 중에 목표에 맞게 행동하게끔 하는 ‘자기실현적 예언’도 이단이 자주 사용하는 신도 관리 방식이다.

그렇다면 이단에 빠진 이들을 구출해내는 첫걸음은 뭘까?

“이단에 빠진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가족이나 친구 등 관계의 결핍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지나칠 정도로 친절한 이단 단체를 통해 관계의 욕구를 채우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단에서 빠져나오게 만드는 해법도 관계에서 찾아야 할 것”이라며 “가장 가깝게는 가족의 끊임없는 관심과 노력, 나아가 이들을 사랑으로 포용하려는 교회의 노력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s://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250259&code=23111111&sid1=chr

말세(末世) the Last Days 에스카토스 헤메라


2078. ἔσχατος, η, ον

1. 마지막,  2. 장소에 대하여,  3. 지위나 서열에 있어서 마지막
발음 / 에스카토스(ĕschatŏ)
어원 / 최상급, 2192에서 유래한 듯
2192. 에코(ἔχω) 가지다, 손에 가지다, 입다
관련 성경 / 가장 멀리(까지)의, 마지막의, 최후의, 가장 낮은, 가장 어려운 곤경[입장, 처지] 의.
신약 성경 / 52회 사용

2250. ἡμέρα, ας, ἡ

1. 날,  2. 마태 4:2
3. ἡμέρα γίνε- ται: 날이 밝아온다
발음 / 헤메라(hēmĕra)
관련 성경 / 때(마 2:1, 막 1:9, 눅 23:7), 날(마 7:22, 막 2: 20, 눅 4:2), 하루(눅 2:44, 8:22), 시대(눅 4:25), 낮(요 11:9, 살전 5:5),
                  나이(눅 1:7), 세(눅 2:37), 오래(행 15:7), 날짜(행 28:23), 주(살후 3:8), 무렵(막 8:1)
신약 성경 / 389회 사용


말일(末日) the Last Days 베아하리트 하야밈 /  אַחֲרִית  יוֹם

이사야 2:2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 들 것이라.

319. 말일 - 아하리트(אַחֲרִית )

1. 마지막 부분,  2. 종말,   3. 장래

발음 / 아하리트(’achărîyth)
어원 / 31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후일(창 49:1, 민 24:14), 종말(민 23:10, 신 32:20, 사 46:10), 끝날(신 4:30, 겔 38:16), 마침내(신 8:16, 잠 23:32),
나중(욥 8:7, 잠 29:21), 자손(시 109:13), 마지막(잠 5:11, 단 8:23), 필경(잠 14:12, 19:20), 장래(잠 23:18, 24:20, 렘  29:11),
말일(사 2:2, 렘 23:20), 남은 자(겔  23:25, 암 4:2, 9:1), 자손(단 11:4).
[동] 마치다(단 8:19)
구약 성경 / 61회 사용

3117. 말일 - 욤(יוֹם)

1. 낮,  2. 낮에,  3. 날마다

발음 / 욤(yôwm)
어원 / 어미활용 יוֹמְךָ ,יוֹמִי, 쌍수 יוֹמַיִם, 복수 יָמִים, 복수 연계형 יְמֵי, 덥다는 의미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낮(창 1:5, 시 136:8), 날(창 1:8, 출 6:28, 시 89:45), 일자(창 1:14), 때(창 3:5, 출 19:1), 세월(창 4:3), 오늘(창 4:14, 출 5:14, 민22:30), 당시(창 6:4, 신 17:9, 삼상 17:12), 항상(창 6:5, 신 5:29,삼하 19:13), 나이(창 18:11, 수 23:2), 오늘날(창 19:37, 신 1:10), 며칠(창24:55), 어느 날(창 27:2), 기한(창 25:24, 레 12:6), 해(창 29:7), 지금(창 35:20, 삼상 9:9), 여러 날(창 40:4), 생명(출 20:12, 신 5:15, 시34:12), 매일(출 29:36, 민 28:3), 일(창 7:4, 출 34:28), 날수(신 1:46, 시 90:15), 평생(신 12:1, 삼상 1:11), 종일(신 28: 32,시 74:22), 장수(신 30:20), 시기(수 3:15), 얼마(삿 11:4), 매년(삿 21:19, 삼상 1:3), 곧(삼상 9:13), 평일(삼상 18:10, 왕상 5:1), 요즈음(삼상 25:10), 일생(삼상 25:28), 볕(삼하 4:5), 수한(삼하 7:12), 시대(삼하 21:1, 왕상 21:29), 전(삼하 21:12), 한번(왕상 1:6), 세대(왕상11:12), 일평생(왕상11:25, 욥15:20), 여러 날(왕상17:15), 하루(왕상19:4), 햇수(왕하10:36), 생전(대상22:9), 기간(대상29:27), 초하루(스10:16), 생일(욥1:4), 연한(시 39:4), 옛날(시 44:1), 연수(시 109:8), 광명(잠 4:18), 보름(잠 7:20), 여생(사 38:10), 태초(사 43:13), 옛적(겔 38:17, 암 9:11), 시일(호2:13), 아침(암5:8). [부] 종신토록(창3:14), 날마다(39:10, 왕상8:59), 영원히(왕상11:39), 영영히(창44:32, 신18:5, 삼상28:2), 오래(민20:15), 처음(신10:10), 종일토록(수10:13, 삿9:45), 해마다(삿11:40), 먼저(삼상2:16), 때마다(삼상2:19), 영원토록(삼상2:32), 영구히(삼상2:35), 이제(삼상 9:27, 삼하 18:18), 오래(삼하 14:2), 때때로(대하 24:11), 당장(잠 12:16), 부지런히(렘 7:25).
[동] 장수하다(신 22:7), 장수하게 하다(시 61:6)
구약 성경 / 2291회 사용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디모데후서 2:3)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려면 강건해야 합니다(1절).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왜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강해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습니까?
디모데는 성품이 온화하고 진실되고 충성된 자였습니다.
또한 눈물이 많은 자로서 목사의 심정이 충만했습니다.
반면 내면이 연약하고 속 두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는 현재 에베소 교회의 책임 목사로 있었지만 연소하고(딤전 4:12), 몸이 허약하며(딤전 5:23), 성격은 소심하여 많은 고전을 겪고 있었습니다.
밖으로는 에베소의 타락한 문화와 싸워야 했고 안으로는 유대 율법주의, 영지주의와 같은 각종 이단 사상과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그가 의지하고 존경하던 사도 바울은 네로의 박해로 인해 재 투옥되어 어두운 지하 감옥에 갇혀 언제 순교 당할지 모르는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또한 이로 인해 아시아에 있는 모든 신자들이 박해에 대한 두려움으로 복음을 저버리고 바울을 떠나갔습니다(딤후1:15). 이 소식은 디모데를 더욱 연약하게 하고 위축되게 만들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디모데에게 “강하라”(be strong)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의 일꾼은 강건해야 합니다. 생존경쟁이 치열한 세상에서 강해야 살아  남듯이 영적으로도 강해야 합니다. 강해야 복음의 외적 내적 원수와 싸울 수 있고 제자 훈련을 시킬 수 있습니다. 강해야 죄의 소욕을 이길 수 있고 세상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강해야 자기부인,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강해야 세상에 영향을 받지 않고 오히려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몸이 강하면 병균이 몸에 침입해도 물리칠 수 있기 때문에 병에 걸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몸이 약하여 저항력을 상실하게 되면 병에 걸립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불신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고 영적으로 건강한 인생을 살려면 내면이 강해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강해질 수 있습니까? 열심히 운동을 하고 먹는 것을 조절하여야 합니까? 물론 운동을 하고 먹는 것을 조절할 때 육신이 강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육신이 강하다 할지라고 영적으로 약하면 사단을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연약함을 이기고 내면이 강해지려면 예수님과 깊은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고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거해야 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란 죄 사함의 은혜요 부르심의 은혜 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도 바울은 엡 6:10-11에서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강건하려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참으로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엡 6:12-18에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13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절)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15절)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절)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17절)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18절)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려면 충성스러워야 합니다(2절)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려면 충성스러워야 합니다. 

디모데는 딤후 1:13,14절에서 복음 진리를 지키라는 사명을 부탁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복음 진리를 수호할 뿐 아니라 전달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4단계로 설명하였습니다.  
맨 먼저 복음은 그리스도에 의해 바울에게 맡겨졌습니다(딤전1:12).
다음으로 바울에게 맡겨졌던 복음은 디모데에게 맡겨졌습니다.
바울에게서 디모데에게 전달된 복음은 사적으로 전해진 것이 아니라 많은 증인 앞에서 공적으로 전해진 것입니다.
이제 디모데는 이 복음을 충성된 사람들에게 맡겨야 합니다.
그러면 그 충성된 사람들은 또 다른 충성된 사람들에게 그 복음을 맡기게 됩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복음이 충성된 사람들을 통해서 계승되고 세계적으로 확산되어 나가는 것을 복음의 사도적 계승이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모든 성도에게는 사도적 사명이 있습니다.
이는 마치 올림픽 성화의 횃불이 성화 주자의 손과 손을 통해 전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복음의 횃불을 들고 달리는 성화 주자들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복음의 횃불을 꺼뜨리지 아니하고 온전하게 보존하였다가 충성된 사람들을 통해서 다른 세대에 전달해야 할 책임과 사명이 있습니다.
이 전달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충성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충성된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까? 
충성이란 말은 “변함이 없는 신실성”을 의미하기도 하고, “신뢰한 만한, 믿을만한 이란” 뜻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충성에는 책임성과 신뢰성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충성된 자는 상황이나 환경에 따라 변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습니다.
충성된 자는 좋으나 싫으나 꾸준히 맡은 바 사명을 감당합니다.
충성된 자는 책임성이 강하고 성실합니다.
일을 맡으면 상황을 핑계하거나 변명하지 않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책임성 있게 해냅니다.
이런 자는 신뢰할 만합니다.
하나님은 충성된 자를 귀히 쓰십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어떤 시련 가운데서도 배교치 않은 충성된 자들을 통해서 복음이 계승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의 좋은 군사로서의 일꾼이 되려면 주님께서 나를 충성할 자로 여겨서 내게 직분을 맡겨 주셨다는 확신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딤전 1:12-13에서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의 모습으로 충성할 때에 요셉과 같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놀라운 축복을 체험하게 됩니다.(창 39:1-6)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려면 고난을 견디어야 합니다(3절)

본문 3절에서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려면 고난을 견디이어야 합니다. 고난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믿음의 아들 딤후 4:5에서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군사가 된다는 것은 그 군사가 세속적이든 영적이든 고난을 견디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한 자연인이 늠름한 군인으로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우선 피나는 훈련이 요구됩니다. 혹 이 훈련기간 동안 심한 부상을 입을 수도 있고, 인간이하의 모욕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두려워 훈련을 거부한다면 그는 결코 훌륭한 군인이 될 수 없습니다. 국토방위와 국민의 생명을 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세속적 군사도 국가로부터 모집되어 훈련소에 들어가면 그 고난이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훈련이 끝난 후에도 주어진 임무를 수행해 가는 과정상에 숱한 고초와 시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심한 육체적 훈련과 정신적 고통, 잠이 모자라고 배가 고픈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때로는 멀리 도망하고 싶고, 탈출하고 싶고, 죽은 싶은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을 끝까지 견뎌야 훌륭한 군인이 되어 임무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현역 근무의 군사들은 안전하거나 편안한 시간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실제에 있어서 곤경, 위험과 고난을 감수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도 편안한 때를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고난과 핍박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가정으로 불화(不和)가 일어날 수있고, 재산(財産)상으로 피해가 닥칠 수도 있으며, 혹은 인격적인 수모나 심하게는 생명의 위협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마19:29, 행14:1-7) 그러기에 신자로서 충성된 주의 일꾼 되기를 열망(熱望)하는 분이 계시다면우선 그는 자신의 소유와 소망과 자유를 하나님과 교회를 위하여 위해 모두 희생(犧牲)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만 합니다(마26: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탄과 영적 싸움을 하는 그리스도의 군사가 고난을 두려워 한다면 되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고난을 견디고 참으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라면 ① 타협주의 ② 회피주의 ③ 대세주의를 거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난이 공로는 아니지만 ① 인간은 고난을 받아야 겸손해 집니다. 사람은 우선 겸손해야 진리를 깨닫습니다. 그래서 무디는 말하기를 "천국은 높지만 내려가면서 배운다"라고 했습니다.  ② 고난을 받아야 그의 신앙 인격이 연단을 받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약 1:2에서 모든 시험을 기쁘게 여기라고 말씀하고 있고, 약 1:3에서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앎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연단 없는 자는 믿을 수도 없고 소망도 없습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갖게 합니다(롬 5:3,4) 인내하는 자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 8:15) 특히 우리는 선을 행할 때도 인내해야 합니다(갈 6:9) "우리가 선(善)을 행하되 낙심하지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이르매 거두리라"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라면 마땅히 인내해야 합니다. 아브라함도(히 6:15), 이삭도(창 2618,20-22), 모세(출 16:7,8),다윗(시40:1), 욥도(약5:11), 바울도(고후 6:4-6) 인내하면 좋은 군사의 모습을 지켰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려면 영적 훈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통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파악(把握)하고, 그 말씀을 열심히 읽고 이해하여 어떻게 하면 좋은 군사가 될 수 있을 것인지를 연구(硏究)해야 합니다. 어떠한 환난과 역경도 참도 견디어 내야 합니다. 
욥은 자식과 재산과 건강을 하루아침에 잃었어도 신앙의 연단 과정에서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고통스런 연단 과정은 우리를 영적 사람으로 성장시킵니다. 사도 바울이 엡 6:12에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공중 권세를 잡고 있는 사탄과의 영적 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에게 어떤 어려움이 닥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자기 자신을 성숙한 군사, 훌륭한 군사, 좋은 군사로 훈련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배후에 숨겨져 있는 줄로 믿고 결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끝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고난을 극복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고난을 견디는 자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될 수 있습니다.  

 요즈음은 세상이 너무 편리한 세상이라 컴퓨터에 한번 접속으로 앉아서 모든 정보를 수고하지 않고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너무 편리하다 보니 안일해지고 연약합니다. 머리는 잘 돌아가지만 적용이 안되고 절제력, 투쟁심, 끈기 면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훈련을 통해 보완이 될 때 비로소 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될 수 있습니다. 훈련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사단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려면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4a)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려면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군사 훈련의 인간의 이기심을 없애는 것이라고 합니다.
즉, 갯벌훈련을 통해 수치심, 자존심, 이기심 등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감정을 버리고 국가를 위해 새로 태어나게 하는 훈련과정이라고 합니다.
군사가 국가의 부르심을 받기 전까지는 시민으로서 일생생활을 합니다.
시민에게는 개인의 인격과 자유와 권리가 보장됩니다.
그러나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군대에 들어가면 개인의 자유와 권리, 인격은 보장되지 않습니다.
군인은 국가의 안위와 전쟁에서의 승리를 최우선시해야 해야 합니다.
군인은 입대와 함께 이와 같은 군인의 존재의미와 목적에 바쳐진 자라고 할 수 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려면 자기 생활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자기 생각, 자기 감정, 자기 꿈과 이상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일단 민간인이 군(軍)에 복무하게 되면 민간인으로서의 생활을 모두 포기(泡起)하고 오직 군(軍) 생활에만 전념(專念)해야 합니다.
군인은 고난을 받아야 될 뿐만 아니라 기꺼이 군인(軍人) 생활에 전력투구해야 됩니다.
훈련 잘 받고 의무에 충실한 군인은 절대로 군의 규율을 어기면서 함부로 외출, 휴가 등을 하지 않습니다.
탈영하지 않습니다.
또한 군인이 되면 가정을 떠나서 국가에 헌신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현역 복무 중일 때 군인은 개인 사업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집안의 문제를 걱정한다거나 개인의 사생활에 연연할 수가 없습니다.
그 대신 국가는 군인의 먹고, 입고 살아가는 모든 비용을 책임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좋은 군사로서의 일꾼이 되려면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일단 성도의 길에 들어선 자는 무엇보다 경건(敬虔) 생활에 전념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라면 마땅히 영적 전투에서 강력한 싸움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련을 잘 받은 성도라면 함부로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가면서 자기 뜻대로 편한 대로하고, 자기 기분대로 하고, 자기의 생각대로 예수 믿지 않습니다. 성경을 자기 이치(理致)대로 사사로이 풀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자기의 일을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했던 많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에녹이 자기의 일에 얽매였다면 하나님과 300년동안 동행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좋은 군사로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려면 자기의 일에 얽매여서는 결코 안됩니다. 

좋은 군사로 부르심을 받는 성도라면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고난 핍박 시험 환난(患難)이 걷잡을 수 없도록 몰아쳐도 참고 견디며 자기 뜻 에 얽매이지 않고 주님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신본주의 곧 믿음 본위로 살아가는 것입니다(히 11:6)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 영적 싸움에서 강력한 능력을 나타내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예수의 군사로서 온전히 성령께 사로잡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온전히 성령께 사로잡힌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일에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목회자에게만 해당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이것은 일반 성도들에게 적용됩니다. 일반 성도라고 해서 생활에 얽매여 주님의 일을 게을리 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직장 생활을 하든지, 농사를 하든지, 장사와 사업을 하든지, 공부를 하든지, 가정생활을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들이든지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 좋은 군사가 되려면 결코 우리의 생활에 얽매여서 안됩니다. 우리 자신의 생활에 얽매이면서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려고 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불가능한 일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하여서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개인 생활이 필요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현세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결코 피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가정, 직장 및 사회 등에서의 통상적인 의무 들고 피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신분으로서 우리 자신에게 주어지는 의무들을 실행하고 양심적으로 지켜야 합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딤전 4:4에서 "하나님의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라고 말하면서 딤전 6:17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셨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에게 금지된 것은 모든 세속적인 활동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과 관련하여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일생에 주어지는 사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서의 삶을 사는데 완전히 무해(無害)한 것들이라 할지라도 영적 싸움에서 사탄에게 강력하게 대적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면 그것은 결과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의 삶을 살게 하는데 얽매이게 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본문 4절 상반절에서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말라"는 권면은 우리가 어떤 일을 행함에 있어서 무엇을 우선 순위에 정할 것인지에 대한 말씀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자신이 무엇을 하든지, 어떤 일을 하든지 삶의 우선 순위가 주님을 위한 것에 집중되지 않는 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자기의 생활에 얽매이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서의 삶을 살지 못하도록 얽매이게 하고 미혹하는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든지 간에 피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서의 얽매이지 않고 만족할 만한 선한 싸움을 싸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4b)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군사는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해야 합니다.
군인은 자신을 군사로 세운 지휘관에게 순종과 충성을 다함으로써 그들을 기쁘게 해야 합니다.
군사를 모집한 자는 군사에게 모든 생활비를 지원(志願)해야 하고, 또한 군사는 그 모집한 자를 위해 헌신하고 충성해야 합니다. 

고대의 좋은 군사들은 국왕이나 지휘관에게 충성을 다하여 생명까지 바쳤습니다.
군인의 생명(生命)은 바로 지휘 체계에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순종함으로서 그 주어진 임무를 충성스럽게 완수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시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국가는 군인(軍人)들에게 국가에 충성할 것을 요구합니다.
또한 개인의 이익이 국가의 이익에 충동할 때는 서슴없이 국가의 이익에 복종하도록 요구합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생명을 바치더라도 국가를 위해 충성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신자들도 그리스도의 군병으로 삼아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 절대적으로 순종하며 그분께서 분부하신 명령이 비록 힘들지라도 기쁨으로 복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죽기까지 충성해야 합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계 2:10).
충성은 군사된 자의 최고의 덕목(德目)이요, 최상의 영예(榮譽)인 것입니다. 

우리를 좋은 군사로 모집한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도를 가리켜서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를 부름을 받은 성도들은 우리를 좋은 군사로 불러 주신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순교자적 자세로 충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갈 1:10).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믿음으로 후사를 기다렸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독자 이삭을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좋은 군사로서 모집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있으되 정말 우리 자신을 모집하신 하나님께 기쁘게 하는 생활을 하는 자들이 얼마나 됩니까?
다른 사람을 언급하기 전에 지금 우리의 자신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저와 여러분은 우리를 만세 전에 선택하여 주시고, 시궁창 같은 죄악의 자리에서 우리를 불러 주시고, 우리에게 귀한 직분과 사명을 주신 주님께 얼마만큼 기쁨을 드리고 있습니까?
이것은 반드시 사명을 받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소요리 문답 제 1문답에 보면 "사람의 제일 목적이 무엇이뇨?라고 질문에 대한 답변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기본적인 일들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라는 명령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즐거워하라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라]는 절대적인 명령이요, 우리의 최대의 과제임을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전 10:31) 


좋은 논문을 쓰려면 좋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좋은 질문을 던져야 본질을 생각하게 되고 초점이 맞추어진 연구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좋은 질문을 던지는 것은 비단 학교에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Washington Cathedral에서 시무하는 Wedel 목사가 쓴 인명구조소(Lifesaving Station)라는 글입니다.
배가 자주 파선이 되는 어느 위험한 해안에 작고 보잘것없는 인명구조소가 있었습니다.
건물은 그저 움막 같았고 배는 한 척밖에 없었으며 몇 사람의 헌신된 사람들이 쉬지 않고 바다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열악한 환경에 대하여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파선이 되어 표류하는 자들을 열심히 찾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작은 구조소를 통하여 구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은 유명해지게 되었습니다.
구조 받은 사람들 중의 일부와 인근 지역에 살며 그곳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그 구조소를 위하여 무엇인가 해 보려고 자기들의 시간과 돈을 들였습니다.
새로운 구조선들이 구입되고 새로운 구조원들이 훈련되었습니다.
그 작던 인명구조소는 규모가 점점 커지게 되었습니다.

인명구조소에 새로운 멤버가 된 사람들은 건물이 너무 작고 초라한 것과 그들이 가진 장비가 너무 빈약한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바다에서 건져진 사람들을 위하여 좀 더 안락한 시설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간이침대 대신에 보다 좋은 침대와 가구를 들여놓았습니다.
이제 인명구조소는 멤버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을 더욱 아름답고도 고급스럽게 장식하였습니다.
그러나 멤버들은 점점 바다에 나가 구조하는 일에 관심이 없어지게 되었고 대신 사람들을 고용하여 그들로 하여금 구조 업무를 수행하게 하였습니다. 인명구조소의 설립 취지가 새겨진 현판과 모형 구조선은 여전히 상징적으로 건물 안에 있었으나 그 방에서는 각종 클럽 활동들이 벌어졌습니다. 바로 이때에 어떤 커다란 배가 해안에 난파하여 고용된 구조원들은 추위에 떨고 옷은 물에 젖고 익사 직전에 있던 사람들을 잔뜩 구조선으로 실어 왔습니다. 그들은 더러웠고 병이 들었고, 어떤 사람들은 인명구조소에 있는 사람들과는 전연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흑인도 있었고 아시아인도 있었습니다. 아름답던 클럽이 갑자기 그들로 인하여 더러워지게 되자 관리자는 재빨리 클럽 바깥에 샤워하는 곳을 두고 거기에서 구조된 사람들이 클럽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씻도록 하였습니다. 


다음 번 회의에서 멤버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었습니다. 대부분의 멤버들은 해난 구조가 별로 유쾌하지 못한 일이요 클럽의 정상적인 활동을 하는데 장애가 된다 하여 이제 구조 활동을 중지하기 원하였습니다. 어떤 멤버들은 클럽의 주된 목적이 인명을 구조하는 것이라 주장하였고 아직도 이 장소가 인명구조소라고 불리는 것을 지적하였습니다. 그 회의에서 소수의 주장이 묵살되었고 만일 난파된 사람들을 구하고자 한다면 그들만의 독자적인 인명구조소를 시작해야 한다고 결정하였습니다. 그들은 따로 나갔습니다. 몇 년이 흘러 새로운 구조소도 전에 있었던 것과 같은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곳도 클럽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러자 또 다른 인명구조소가 생겨났습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여러분이 오늘날 그 해안을 방문한다면 그곳에 호화로운 클럽들이 해변을 따라 많이 세워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바다에서 배들은 여전히 난파를 당하고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물에 빠져 죽어 가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됩니까? 인명구조소가 원래 생긴 목적은 파선되어 물에 빠진 사람들을 건지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이 많아지고 구조소가 커지고 활동이 많아지게 되니 본래의 사명감, 인명구조소의 존재 목적을 분명히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시간을 보내며 즐기는 사교 클럽이 되고 말았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 구하는 것이 귀찮아지게 되고 물에서 건져진 사람들의 지저분한 모습이 자기들의 깨끗하고 우아한 분위기에 맞지 않게 느껴졌습니다. 


이것은 교회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개척 교회 시절에는 모이기를 힘쓰고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도 하려고 합니다.
교회가 성장하면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교회에 생기다 보니 자연히 자기들과 취미가 같거나 배경이 비슷하거나 사회적인 지위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그룹을 만듭니다.
건축 헌금도 생겨서 크고 좋은 건물을 짓습니다.
새로 지어진 건물 안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각종 행사들이 자주 벌어집니다.
자칫하면 기도하고 말씀을 배우는 일에는 관심이 없어지고 교인 상호간의 친목의 비중이 더 커질 수 있습니다.
예배는 간단하게 빨리 보고 남은 시간을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각종 여가를 즐기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언제나 지켜주시고 인도하시는데 대부분의 교인들의 경우 주일 한 번 교회에 나오면서 예배 시간이 좀 길어진다고 안절부절 한다면 본질에 충실한 교인이라 할 수 없겠습니다.
자신들이 물에 뛰어들지 않고 대신 고용된 구조원들에게 물에 빠진 사람들을 건지게 하듯이 교우들이 잘 훈련받고 사역에 참여하려고 하기보다는 사역자를 교회에서 고용해서 월급이나 주는 사람들로 생각하고 사역은 사역자에게 맡기고 자기들은 관객이 되어 어떻게 하는가 관망하다가 잘하면 손뼉 치고 그렇지 못하면 비난하려 한다면 본질에서 크게 어긋난 것입니다. 





인간은 죄인이다.

에덴동산에서부터 오늘의 디지털 바벨론 시대까지 세상은 많이 변했다.
그러나 사람은 죄인 그대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죄인된 인간의 특징 중의 하나는 ‘참지 못함’이다. 

첫째, 정욕을 참지 못한다

하와는 동산 중앙에 있는 열매를 보고 참지 못했다.
보암직도, 먹음 직도,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에덴동산의 나무의 열매를 따 먹었다.
아담에게도 주었다.
죄가 코로나보다 더 빠른 속도로 전염된다.
모든 인류에게 오늘도 흐르는 죄성이다.

다윗도 한밤중에 목욕하는 밧세바를 보고 정욕을 참지 못하였다.
간음하였다.
죄를 덮으려고 우리야를 죽였다.
디지털 바벨론 시대의 Z 세대의 참을성은 8초다.
신상품을 보면 8초 안에 우선 저지르고 본다.
저들은 이런 일을 ‘지른다’라고 한다.
죄는 지르는 것, 선을 넘는 것, trespass다. 

둘째, 분노를 참지 못한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전 푸틴의 전쟁 선포하는 얼굴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옥에 가두고 죽이고 스데반이 돌 맞아 죽을 때 사울의 얼굴 에는 분노가 충만하였으리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지르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엡 4:26-27).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 오래 참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 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
푸틴이 쏘아대는 탄도 미사일보다, 핵폭탄보다 더 강 력한 것은 ‘오래 참는 것’이다. 

인내의 한자어 忍耐의 참을 인(忍)은 나의 마음에 무자비하게 칼을 대어 죽이는 것이다.
올림 픽 금메달리스트나 골프여제 박세리, 피겨여왕 김연아, 배구 여제 식빵 언니 김연경, 축구의 신 박지성이나 손흥민 같은 선수들은 무명시절에 자기 마음에 일어나는 육신적인 식탐과 분노에 칼 을 대고 오래 참았기에 오늘 유명인의 금메달을 목에 걸고 산다. 

성경의 인내는 자기 마음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꾸어(빌 2:5-11) 심령의 정욕과 분노에 칼을 대어 자기를 죽여 다른 사람들을 살리려고 오래 참는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오래 참으셨(히 12:1-2).
그리고 영적인 금메달을 목에 걸고 보좌에 앉아계신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 3:8).
예수님은 마귀를 미사일로, 폭력으로 멸하지 않으셨다.
‘오래 참으심’의 신의 성품으로 십자가에서 6시간 동안 참으셨다.
그리고 자신을 죽여 화목제물로 드려 마귀의 일을 멸하셨다.
십자가를 지고 오래 참으라! 그래서 정욕과 분노로 틈타서 나의 삶을 망치는 마귀의 일을 멸하고 살라!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디모데후서 1:14)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Guard the good deposit that was entrusted to you--guard it with the help of the Holy Spirit who lives in us.


뉴욕의 그랜드 센트럴역 42번 포터 랠스턴 영 이라는 사나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남의 짐을 운반해 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더 중요한 일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기차역에서 일하는 포터로서 기독교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는 한사람 한사람의 짐을 나를 때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그들에게 나누려고 애를 썼습니다.
어느 날 그는 몸집이 작은 할머니를 기차의 지정석에까지 모셔다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 할머니는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할머니의 휠체어를 밀고 승강기로 들어 갈 때 그는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승강기가 내려가는 동안 랠스턴 영은 눈을 감고 하나님께 구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이 할머니를 도울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그에게 한가지 생각이 떠오르게 하셨다.
그는 휠체어를 밀고 승강기에서 내리면서 "할머니, 괜찮으시면 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쓰고 계신 모자가 참 잘 어울리십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랠스턴 영을 쳐다보며 고맙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다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드릴 말씀이 더 있는데요 입고 계시는 옷도 참 잘 어울립니다."
할머니도 여성이기에 그 말에 호감이 갔습니다.
그녀는 그리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지만 밝게 그에게 웃었습니다.
"왜 나에게 친절하시지요? 참 자상하십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 눈에 할머니가 너무 슬퍼 보였습니다.
저는 할머니가 울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 어떻게 하면 할머니를 도울 수 있을까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모자에 관해 말하라는 지혜를 주셨지요"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습니다.
"할머니 어디 편찮으십니까?"
"그래요, 저는 늘 아프답니다. 너무나도 고통이 심해 견딜 수가 없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아프다는 것이 무엇인지 당신은 모르실 것입니다."
조용히 할머니의 말씀을 듣고있던 랠스턴 영이 대답했습니다.
"예. 할머니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한쪽 눈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저의 한쪽 눈은 밤이나 낮이나 마치 뜨거운 쇠를 대고 있는 것처럼 고통이 심했습니다."
"그래요? 그렇지만 지금은 아주 행복해 보이시는데요 어떻게 극복했나요?"
그는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기도 덕분이지요 할머니"
"기도? 정말 기도가 당신의 고통을 없애 주었단 말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기도가 언제나 고통을 없애주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면 고통을 극복하는데 큰 힘이 되지요. 할머니도 기도해 보세요."
어느새 할머니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고 그의 손을 잡은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 후 1년이 지나 할머니는 이 세상을 떠났고 그녀의 딸이 랠스턴 영을 찾아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어머니가 당신에게 전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제게 당신을 찾아가서 지난해 휠체어에 탄 어머니를 기차에 태워준 일에 대해 감사의 말씀을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당신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아니 영원히 기억하실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분명 긍정적인 자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요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기도는 나를 보게 하실 뿐 아니라 연약한 이웃을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잃어버린 이 시대에 그리스도의 사람이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할 것입니다.
한 장님이 안구를 기증 받아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수술이 끝나 눈에 두르고 있던 붕대를 푸는 날이 되었습니다.
붕대가 조금씩 풀리면서 차츰 밝은 물체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눈앞에 펼쳐 친 세상도 너무도 아름다웠습니다.
그는 너무 기뻐서 곁에 있는 어머니에게 외쳤습니다.
"어머니! 왜 이렇게 아름다운 세계 나에게 이야기해 주지 않으셨어요?"
어머니가 대답했습니다.
"얘야! 나는 너에게 이 아름다운 세계를 매일 이야기 해주었단다. 단지 네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야."
심판의 날이 되면 사람들은 그들 앞에 너무나도 화려한 천국과 영원한 불구덩이의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몇 사람은 왜 이런 곳이 있는지 알려 주지 않았느냐고 통곡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많은 선지자를 통해 그의 백성들에게 이 모든 것이며 말씀하셨고, 심지어 확장된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유일한 길인 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내 주셨습니다. 단지 우리가 그 증거들을 사실로 믿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이 많이 있습니다. 만남도 그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성경에 그와 같은 아름다운 만남이 있는데 바울과 디모데의 만남입니다. 처음엔 스승과 제자로 만났지만 나중에는 믿음의 아버지와 아들의 만남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한 내용이 본문 14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바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아름다움이란 무엇입니까?

첫째, 거짓이 없는 믿음(5절)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볼 때 거짓이 없는 믿음이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거짓 없는 믿음’이란 사람에게 거짓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 거짓된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디모데가 가진 이 믿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던 믿음을 디모데가 그대로 이어받은 것입니다.

둘째, 복음 전함(8절)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말씀은 복음을 전하라는 뜻입니다.
전하지 않는 복음에는 고난도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16절은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복음은 선택해서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 52장 7절이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라고 말씀하고 있듯 복음 전함은 아름답습니다.
우리 인간의 제일가는 존재 목적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이 전도하는 일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누가복음 15장의 잃은 양을 찾는 비유, 잃었던 은전을 찾은 비유, 탕자의 비유가 그것입니다. 찾았을 때 기뻐하는 주인, 목자, 아버지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한 생명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그렇게 기뻐하신다는 것은 우리가 죽어가는 생명에게 복음을 전할 때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전도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전도하는 일에 모두 동참하여 아름다운 족적을 이 땅에 남기십시다. 그럴 때 의의 면류관과 상급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경을 살펴볼 때 발을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아름답지 않은 발, 즉 복되지 못한 발입니다.
이러한 발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탐욕적인 발입니다.
둘째로, 불의한 재물을 구하려고 달려가는 발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도망가는 발입니다.

다른 하나는 아름다운 발, 즉 복된 발을 말합니다.
복된 발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봉사하는 발입니다.
둘째로, 믿음으로 전진하는 발입니다.
셋째로, 교회를 가까이 하는 발입니다.
넷째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산을 넘는 발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발은 어떤 발입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발, 복된 발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 말씀의 가르침(13절)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라고 했습니다. 내가 가르친 것을 그대로 지키라고 하는 것은 스승이 제자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말입니다. 11절에 보면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고 했습니다. 교사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직분입니다. 고전 14장 19절에 보면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합니다. 나를 변화시킨 그 말씀을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가르칠 때 그 모습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거짓 없는 믿음이 아름답고, 복음 전함이 아름답고, 말씀을 잘 가르침이 아름답습니다. 이것들을 잘 지키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듣게 하시고 구속의 은혜를 받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 많은 신앙의 조상들이 복음을 위해 헌신하여 우리에게 그 복음을 증거하였듯이 우리도 복음의 증인된 삶을 살게 하옵소서. 험한 세상 속에서 인내하며,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는 백향목처럼 살아가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지족하는 마음

(自足) : 스스로 자, 발 족

1. 스스로 넉넉함을 느낌.
2. 다른 곳으로부터 구(求)함이 없이 자기(自己)가 가진 것으로써 충분(充分)함.

자만자족(自慢自足)
스스로 뽐내며 흡족(洽足)하게 여김.

지족(知足) :  알 지, 발 족

1. 제 분수(分數)를 알아 마음에 불만(不滿)함이 없음.
2. 곧 무엇이 넉넉하고 족(足)한 줄을 앎.

지족안분(知足安分)
족한 줄을 알아 자기(自己)의 분수(分數)에 만족(滿足)함.


자족하는 마음

“하나님은 해와 공기와 물과 같은 것들을 공유케 하셨다.
만일 누군가가 어떤 것을 자신만 소유하려 한다면, 마치 자연이 분노하듯이 서로 투쟁하게 될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나의 것’과 ‘너의 것’ 이라는 차디찬 용어로 나누고 분리하기를 갈망한다.”

황금의 입이라 불리는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347~407)이 자신의 저서에서 한 말이다.

많은 사람이 물질을 두고 분쟁하며, 이로 인해 불안과 염려 그리고 시기심이 촉발돼 인간이 물질을 통해 누려야 할 행복을 빼앗기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물질의 포로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복음이 물질의 억압과 시험 속에서도 우리를 자유케 할 능력을 충분히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외부 조건에서 만족을 얻을 수 없다.
설령 외적 상황이 화려하더라도 영혼이 곤핍하다면 그것은 정신적 장식품에 불과하다.
그러나 외적 상황이 곤핍하더라도 그리스도로 인한 은혜는 그런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믿음의 에너지를 공급한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안티스테네스(Antisthenes)는 “현명한 사람은 자족한다”라는 유명한 격언을 남긴 바 있다.
자족한다는 것은 일상을 행복하게 만드는 지혜의 한 방편이다.
자족할 줄 아는 마음만이 물질에 얽매이지 않는다.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고 자족할 때 탐욕의 사슬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자족하는 삶

피얼 목사는 자바에 있는 발리(Bali)섬을 방문하였습니다.
이 섬 사람들이 세계에서 제일 행복하게 산다는 소문을 듣고 일부러 보러 간 것입니다.
큰 산업 시설이나 재미있는 오락시설도 없는 섬이었습니다.
어째서 발리 사람들은 그토록 행복할까?
피얼 박사는 섬 사람들을 일주일 동안 인터뷰한 뒤에 다음과 같은 다섯 개의 해답을 종합할 수가 있었습니다.

1. 우리는 가진 것이 없습니다(We have nothing)
2. 우리는 단순하게 삽니다(Our life is simple)
3. 우리는 서로 좋아합니다(We like each other)
4. 우리는 먹을 것이 충분합니다(We have enough to eat)
5. 우리는 아름다운 섬에서 살고 있습니다(We live ona beautiful island)

자족하는 삶은 행복한 것입니다.
오늘도 자족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솝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눈병이 난 나이 많은 한 여자가 눈병을 고쳐주면 크게 사례하겠다고 약속하고 의사를 불렀습니다.
의사는 매일같이 그 여자의 집에 가서 그녀의 눈에 약을 넣기 위해 눈을 감게 하고서 그 사이에 그 집에 있는 값비싼 물건들을 하나씩 둘씩 몰래 집어갔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녀의 눈병이 거의 나을 무렵, 그녀의 집에는 변변한 가구라곤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의사는 자기가 탐이 나는 물건을 모두 훔쳐갈 수 있을 때까지 눈병 치료를 질질 끌어온 것입니다.
마침내 여자의 눈이 다 나았으므로 의사는 약속한 대로 사례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약속한 사례를 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녀는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재판장에 불려나온 그녀는 "어찌하여 약속한 사례를 치르지 않느냐?"는 재판장의 심문에 태연스럽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확실히 내 눈이 잘 보이도록 고쳐주면 상당한 사례를 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나 저 의사의 치료를 받고 나서는 내 눈이 전보다 더 나쁜 형편이 되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의사는 물론 재판장도 크게 놀라 그 곡절을 다시 물었습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습니다.
"제가 저 의사의 치료를 받기 전에는 내 집에 있는 값비싼 물건들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내 눈은 좋아진 것이 아니라 전보다 더욱 나빠진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사례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결국 이 악덕 의사의 절도 사실이 법정에서 밝혀진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소유욕의 노예가 되어 마침내 자신의 파멸을 초래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은 것 같습니다.

독일의 신비주의자 타울러에 관해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습니다.

타울러가 하루는 거지를 만나서 “친구여, 오늘도 안녕하십시오” 하고 말하니 “나는 하루도 안녕하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행복하기를…” 하자 거지는 “난 불행해 본 적이 없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타울러가 놀라서 “그것이 무슨 뜻이오?” 하고 묻자 거지는 “날이 좋으면 감사하고, 비가 와도 감사하고, 먹을 것이 넉넉하면 감사하고, 배고파도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나의 뜻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 나를 기쁘게 합니다.
그러니 제게 무슨 불행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타울러는 더 놀라서 “대체 당신은 누구시오?” 하고 물었습니다.
“나는 왕이오” 하고 그 거지가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당신의 나라는 어디에 있소?” 하고 타울러가 물으니 거지는 “내 마음속에 있소”라고 대답했습니다.
랍비 시므온은 “평생 동안 나는 한 번도 사슴이 무화과를 말리는 것을 보지 못했고, 사자가 물건을 운반하고 여우가 장사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염려 없이 먹고 산다. 만일 나를 섬기기 위해 창조된 그들이 걱정 없이 먹고 산다면 창조주를 섬기기 위해 창조된 나는 얼마나 더 걱정 없이 먹이시겠는가?
그러나 나는 염려함으로 내게 있는 것까지 부패시켰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선한 행실의 증거
- 선한 행실의 스모킹 건

스모킹 건(smoking gun)
- 연기 나는 총

범죄 또는 사건 등을 해결하는 데 사용되는 결정적이고 확실한 증거를 일컫는 말

톨스토이의 '구두 수선공이 민난 하나님'은 마틴이라는 구두 수선공이 명일에 예수님을 만날 것이라는 꿈을 꾸고 하루 종일 예수님을 기다리는 내용입니다. 
그 기다림의 시간 가운데 그가 가난하고 곤란을 당한 이들을 도와주고 선행을 베풀자, 예수님께서는 그날 밤에 나타나셔서 네가 도와준 그들이 바로 자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이야기는 참으로 유명하면서도 우리 모든 신앙인에게 큰 도전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레프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Tolstoy, 1828-1910) 소개

레프 톨스토이는 백작 가문의 4남으로 러시아 뚤라 지방에 있는 야스나야 뽈랴나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부모와 사별한 후, 고모의 양육을 받았다.
1844년에 까잔 대학교에 입학했으나 1847년에 중퇴하고 영지 야스나야 뽈랴나에 정착하여 농노들의 생활 개선을 위해 노력한다.
잠시 환락에 빠져 타락한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공허하고 무용한 생활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1851년에 까프까즈 의용병에 들어가 포병장교가 된다.
그가 형을 따라 까프까즈로 가서 쓴 작품 『유년시절』(1852)이 시인 네끄라스프에게 인정받아 잡지 《현대인》에 게재되면서 작가로 데뷔한다.
제대 이후 톨스토이는 문학의 새로운 방향을 추구하기 위해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독일 등 외국을 여행하고, 1859년에는 영지로 돌아와 농민 학교를 세우고 농민과 아동 교육에 애쓴다.
1862년에는 폭넓은 지적 관심을 지닌 중산층 출신의 소피야 안드레예브나 베르스와 결혼한다.
15년간은 행복했지만, 그 후에는 지독히 불행한 결혼생활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불행했던 시기에 그의 문학 활동은 가장 왕성했다.
1910년에 자신에게 명성과 풍요, 번영, 수많은 자식을 안겨주었던 영지와 아내를 버리고 순례자가 되어 빈손으로 민중 속으로 들어가 그들에게 실천적 사랑을 실천하고자 노구를 이끌고 집을 나섰다가 허름한 기차역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이 책에 번역된 10편의 단편은 자살 직전까지 갔던 정신적인 위기를 맞으며 사상적인 전환을 겪는 과정에서 나온 치열한 고민의 결과물이다.
신약성경 복음서에서 건져낸 삶의 원리와 깨달음을 평범한 민중도 이해하는 언어로 표현하기 위해 그는 이전까지 사용했던 작품의 색깔을 완전히 바꾸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톨스토이가 주창한 기독교적인 윤리관과 무저항주의가 오롯이 담긴 ‘인생 단편’이 탄생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신다

- 톨스토이의 단편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신다.”

구두수선공 마틴 아브디치(Martin Avdeich)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을 위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마틴의 이야기는 눈물겨운 시련과 함께 시작됩니다.
그는 구두수선공이었지만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젊은 시절에 그의 사랑하는 아내가 세 살 된 아들 하나를 두고 세상을 떠납니다.
얼마 후, 그 아들마저도 그를 막 도울 수 있는 나이에 죽어 그의 곁을 떠납니다.
마틴은 절망했습니다.
상실의 슬픔에 젖어 삶의 의욕을 잃었습니다.
착하게 살아가는 그에게 찾아온 역경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상실의 아픔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했고, 결국 교회를 떠났습니다.
마틴이 회의와 낙담 중에 있을 때 그 앞에 한 노인이 등장했습니다.
8년 동안의 순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노인이었습니다.
노인은 마틴에게 그의 슬픔의 이유가 자신의 행복에 집착하는 데 있으니, 이제 하나님을 위해 살아보는 것이 어떠냐고 권면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 어떻게 사는 것인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노인은 하나님을 위해 사신 예수님을 그에게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삶에 대해 알고 싶으면 성경을 읽어 보라고 권면했습니다.
마틴은 노인의 권면대로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 무렵, 그를 찾아오시겠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마틴은 그를 찾아오시겠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기다립니다.

그런데 기다리는 그에게 하나님이 오시지 아니했습니다.
그를 찾아온 것은 나이 들어 쇠약한 채로 눈을 치우는 노병 스데반 청소부 이었습니다.
그는 추위에 떨고 있는 그를 방으로 모셔 들이고, 그에게 따뜻한 차를 대접했습니다.

노병이 떠난 후에 그를 찾아 온 사람은 추운 날 벌벌 떨면서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가난했습니다. 이 여인은 며칠 동안 먹지 못해 젖이 나오지 않아, 아이도 굶은 상태였습니다.
마틴은 따뜻한 차와 빵과 스프를 제공하고, 그 여인과 아이를 위해 자신의 외투를 선물했습니다.
은밀히 보관해 두었던 비상금을 꺼내어 그 여인의 손에 들려주었습니다.

또한 마틴을 찾아 온 사람은 사과를 파는 늙은 여인과 그 여인에게서 사과를 훔친 소년이었습니다.
늙은 여인은 사과를 훔친 소년을 경찰에 데려가겠다고 위협했습니다.
마틴은 늙은 여인에게 소년을 위해 사과 값을 대신 지불하겠다고 약속하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늙은 여인은 소년을 용서했고, 소년은 늙은 여인의 무거운 자루를 등에 지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 날 밤, 하나님은 마틴에게 찾아오셔서, 그가 만났던 작은 소자들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다는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그 소자들을 섬긴 것이 바로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임을 깨우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때 마틴의 영혼이 기쁨에 휘감겼습니다.
환경이 바뀐 것은 없었지만 그는 참으로 부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를 부요케 한 것은 소외된 이웃을 돕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심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본을 보여라

아프리카의 성자 슈바이처 박사에게 자녀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 세 가지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인즉 첫째도 본보기,둘째도 본보기,셋째도 본보기라고 했다.
자녀가 공부에 흥미를 나타내기를 원하면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부모가 시간을 내서 책을 읽는 것이다.
자녀가 몸이 튼튼하기를 원하면 부모가 시간을 내서 운동을 하는 것이다.


첫째, 말에 대하여 본이 되라.

말은 곧 칼입니다.
칼은 수술도로 사용되면 사람을 살리지만 흉기로 사용되면 사람을 해치기도 합니다.
이처럼 말 한마디는 칼이 되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좌우할 수 있는 것은 이 막중한 몸이 아니라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말을 꼭 필요할 때에, 친절하게 말해야 합니다.

둘째, 행실의 본이 되라

성경은 믿음 못지않게 행실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바르고 온유한 행실로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 본을 보여야 합니다.
성경은 겸손과 온유로,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고 옷을 입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긍휼을 경험한 우리는 말뿐만이 아니라 행함에도 온유함으로 본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 사랑의 본이 되라

사랑의 결과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게 합니다.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합니다.
이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오늘도 부지런히 나가서 사랑의 씨를 뿌린다면 언젠가 사랑의 열매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반드시 열릴 것입니다.

넷째, 믿음의 본이 되라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우리가 소망하는 것들이 이루어지게 하는 능력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을 확신할 수 있는 마음의 증거입니다.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는 것이 믿음의 결과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믿음의 결과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입는 것이 믿음의 결과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도 믿음의 결과입니다.

위험한 일, 손해 보는 일, 너무 어려워서 누구도 하기 싫어하는 그 일들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여 여러분과 제가 감당할 때, 우리 안에 있는 그 위대한 믿음의 실체를 세상 사람들은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다섯째, 정절의 본이 되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 1:16)
하나님이 깨끗하니 우리도 그분만큼 정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정절이라고 하는 것은 ‘깨끗하다, 청결하다’는 뜻과 동시에 ‘굳은 마음, 변하지 않는 절개’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깨끗함을 상실하면 그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만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찾으시고 사용하시는 사람은 깨끗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 말과 행동, 그리고 사랑의 본이 되고 믿음과 정절의 모습을 보인다면 진정한 세상의 소금이요 등불이 되어 그리스도의 구원을 전파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 받을 것입니다.
그리하면 이 세상 끝까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라는 위대한 사명이 바로 여러분의 삶을 통해 이루어지는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누구를 모델로 삼을까?

오늘날 미국의 상징이 된 자유의 여신상은 프랑스의 조각가 바르톨디의 작품입니다.
본래 미국에 줄 이 동상을 만드는 데에 프랑스 정부가 400만 달러를 지원하기로 약속했으나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바르톨디는 자신의 전 재산을 투자하며 20년이나 걸려 이 작품을 조각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걱정이 생겼습니다.
이 여신상의 얼굴을 누구를 모델로 삼아 조각할지가 문제였습니다.
여러 유명한 사람들이 물망에 올랐지만, 결국 그는 많은 고심 끝에 자신을 낳아 기르고 사랑해주신 어머니를 모델로 삼기로 결정했습니다.
뉴욕을 방문하는 모든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이 자유의 여신상은 바로 바르톨디의 어머니의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자녀들은 누구를 모델로 하여 인생을 바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자녀들의 인생모델로서 부끄럽지 않은 부모가 될 수 있어야겠습니다.


평안북도 정주 오산학교 서쪽 야산에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거기에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일생을 남을 위해 살았고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사람.’
이 비석의 주인공은 바로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선생입니다.
남강은 모진 고생을 하며 오산학교를 세웠는데 학교를 건축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건축하던 일꾼이 찾아와 기와가 모자란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집의 기와를 떼어다가 학교를 지어라.”
그는 오산학교를 위하여 재산을 다 팔았으며 나중에는 부엌세간까지 팔았다고 합니다.
남강은 1907년 평양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을 만난 후 희생을 앞장서는 생활을 철저히 하였습니다.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5년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성경을 세 번 통독하고 기도생활을 하였습니다.
특히 마태복음에 나오는 산상수훈을 암송하였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철저한 희생과 사랑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였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 날, 오산 학교 변소에 얼어붙은 오물을 교장인 자신이 먼저 도끼로 깨고 청소하는 솔선수범을 보였습니다.
학생들과 교직원에게 청결 관념을 철저히 가르쳤습니다.
남강 이승훈은 늘 이렇게 말했습니다.
“겨레를 위하여 걸레질하는 마음을 잃지 말자” 남강은 청빈하게 살았습니다.
어느 날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가 사람들에게 질문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아이들을 가장 잘 가르칠 수가 있지요?”
슈바이처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아이들을 잘 가르치는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즉 첫째는 본을 보이는 것이고, 둘째가 본을 보이는 것이며, 셋째도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녀의 교육을 중요시하였으며, 아울러 교육을 담당하는 스승을 매우 존경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부일체(師父一體)라고 스승과 부모를 동등하게 여겼습니다.
교회에서도 성경을 가르치는 훌륭한 교사들이 필요합니다.
훌륭한 교사란 먼저 자신이 성경을 잘 배우고, 다음에 그 배운 것을 잘 가르쳐야 합니다. 또한 가르치되 사명감으로 열심히 가르쳐야 합니다.

바울은 영적 지도자로서 주의 일을 하는 디모데에게 ‘믿는 자에게 본(本)이 되라’고 교훈합니다.
신앙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를 본받는 삶을 살았기에 자신을 본받으라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녀들을 포함하여 믿는 자들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 12절에서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여기의 ‘본(本)’은 본보기의 준말입니다.
옷을 만들 때, 만들려고 하는 옷을 생각하면서 먼저 종이 위에 그려보고 잘라 내어 본을 뜹니다.
그리고 옷감을 본위에 올려놓고 그대로 재단하여 옷을 만듭니다. 무엇이든지 본이 있어야 잘 만들 수 있습니다.

‘본’ 의 원어는 ‘튀포프’ 인데 ‘어떤 것을 만드는 데 필요한 양식이나 모델’이란 뜻입니다.
교사를 비롯한 가르치는 자들은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말로만 가르칠 것이 아니라 본을 보이며 가르쳐야 합니다.
먼저 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디모데를 향하여 어떤 면에서 본이 될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첫째, 오직 행실에 있어서

북유럽에 사는 흰 담비(ermine)는 흰 털이 아름답기로 유명합니다. 흰 담비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털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습니다. 사냥꾼들은 이 속성을 이용해서 흰 담비를 잡는다고 합니다. 흰 담비가 사는 굴 입구에 새까만 숯검정을 칠해 놓고 숲속에서 놀고 있는 흰 담비를 굴속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러면 굴 입구에 다다른 흰 담비는 자신의 흰털을 더럽히지 않기 위하여 새까만 숯검정이 묻어 있는 굴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차라리 사냥꾼에게 잡히는 죽음을 택한다고 합니다. 오늘날 교회와 교인들이 세상으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습니다. 교회를 떠나는 가나안(안나가) 교인도 많이 생긴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교인들의 행실이 본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거룩성을 잃어버렸고 그 행실이 거룩하지 않습니다. 성도가 되었으면 마땅히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하는데 거룩한 행실을 갖는 일에 실패하고 있습니다.

본문 12절입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바울은 디모데가 가지고 있는 상대적인 연소함을 행동의 진지함으로 보충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연소함으로 업신여김을 받지 않도록 행동으로 본을 보여서 권위를 지니라는 뜻입니다. 사역자의 권위는 외부적인 치장이나 장식, 그리고 연령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진정한 가르침과 거룩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여기의 ‘행실’ 은 ‘아나스토로’ 인데 다른 사람과 관계되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먼저 언행을 일치시켜야 합니다. 말과 행실은 실과 바늘 같이 불가분리의 관계로서 양자가 일치되어야 참된 인격이 나타납니다. 말과 행실이 다르면 위선자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행이 일치되는 행실은 교사의 필수적인 요건입니다. 말이 거룩하지 못하고 행실이 깨끗하지 못하면 복음이 제대로 전파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실되게 말하고 행실에 있어서는 십자가의 의로써 행하여 말과 행실이 모순이 없는 생활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둘째,  오직 사랑에 있어서

아프리카 선교의 선구자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은 25년 동안 원주민들을 섬기며 헌신적으로 선교하였습니다. 은퇴 후에도 종종 아프리카 밀림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던 중 공교롭게도 자신의 생일날, 선교지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 죽었습니다. 리빙스턴이 죽은 지 삼년 후에, 당대의 설교가 헨리 드루먼드(H. Drummond)가 선교지를 찾아가서 원주민들, 특히 리빙스턴과 가까이 지냈던 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리빙스턴이 당신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주었습니까? 어떤 설교를 들었습니까? 그에게서 배운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에게 남긴 인상 깊은 교훈은 어떤 것입니까?” 그의 질문에 원주민들은 전혀 뜻밖의 대답을 했습니다. “우리는 그가 가르쳐준 성경의 내용은 다 잊어버렸습니다. 설교 도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게 기억합니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였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베푼 사랑은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지식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감동적으로 읽은 책의 내용도 얼마 후 기억에서 사라집니다. 예배시간 마다 듣는 설교의 내용도 며칠이 못가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사랑은 결코 잊지 못합니다. 사랑은 영원합니다. 사랑만이 오래오래 남습니다.

본문 12절입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내면적인 성품으로 타인과 관계된 생활과 연결됩니다. 이 사랑은 말과 행위로 표현됩니다. 사랑은 주님께서 주신 새 계명이요 바울이 강조한 제일의 덕목입니다. 가르치는 자들은 자신을 비워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의 사랑을 본받아 영혼을 몸처럼 사랑함으로 본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헌신적인 구제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강조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희생적인 구제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부터 구제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혹여 자기 공로를 앞세우는 마음으로 행하는 구제와 희생이라면 사랑이 없는 헛수고가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섬기는 일든지, 봉사하는 일이든지, 충성하는 일이든지 사랑으로 행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시기 바랍니다. 모든 일에 사랑으로 감당하므로 모두에게 유익이 되는 신앙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  오직 믿음에 있어서

존 와나메이커(Johon Wanamaker)가 51세가 되었을 때 벤자민 해리슨(B. Harrison) 대통령으로부터 체신부 장관직을 맡아 달라는 제의가 왔습니다. 그러나 와나메이커는 정중하게 사양을 했습니다. 이유를 묻는 대통령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지금까지 수십년동안 주일이 되면 교회에서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쳐 왔습니다. 저는 기력이 다하는 날까지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장관직을 맡게 되면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일에 지장을 받을까 걱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해리슨 대통령은 와나메이커에게 주일이 되면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그 조건으로 와너메이커는 장관직을 수락했습니다. 그 후 4년 동안 장관직을 수행하면서 주일이 되면 반드시 섬기는 교회로 가서 아이들에게 변함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에게 입버릇처럼 늘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본업은 교회학교 교사입니다. 장관직은 부업일 뿐입니다. 교회학교 교사는 종신직입니다. 장관직은 임시직일 뿐입니다." 참으로 귀한 믿음입니다. 그는 세상일보다도 하나님의 일을 더 소중히 여겼습니다. 대통령이 맡긴 일보다도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더 소중히 여기는 믿음은 누구에게나 본이 되었습니다.

본문 12절입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믿음은 사랑에 근거를 두어야 합니다. 말과 행실이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듯이 믿음과 사랑도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굳건한 믿음 없이는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고, 사랑 없이는 믿음의 확신이 생겨날 수 없습니다. 진실로 믿음이 충만하다면 좋은 지도자로서 성도들 앞에 부끄럼이 없을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다메섹에서 회심한 후 사도 바울은 철저하게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살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그리고 믿음에 도움이 되지 않은 것은 모두 다 버렸습니다. 그토록 연마해 왔던 학문도 도움이 되지 않기에 다 버렸습니다. 출세와 성공을 위해 공들여 쌓아왔던 업적도 다 버렸습니다. 배설물처럼 다 버리고 철저하게 믿음만 앞세웠습니다. 바울처럼 그리스도만 바라보는 믿음으로 본이 되시기 바랍니다.

히말라야 산맥에서 등반대의 길을 안내하는 티베트 사람들을 ‘셰르파(sherpa)’라고 부릅니다. 셰르파는 길에 익숙합니다. 일기변화와 산세에 정통한 사람들입니다. 수없이 산을 오르내린 사람들입니다. 세계의 최고봉 에베레스트봉 등반에 따른 자신들의 기여가 인정되지 않지만 누구보다도 생명을 무릅쓰고 히말라야 등반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등반대는 셰르파의 안내하는 대로 따라가야 등반에 성공합니다.

모름지기 가르치는 교사들은 영적 셰르파가 되어야 합니다.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 해도 다른 이들을 잘 인도하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오직 거룩한 행실로 본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냄으로 본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만 향하는 믿음으로 본이 되어 모든 이를 살리는 복된 교사들과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엘리트보다는 사람이 되어라’란 책을 쓴 전혜성씨는 말한다.
“남편과 나는 집안에서는 영어를 쓰지 않았다.
한국에 계시는 부모님께 부탁해서 한글로 된 우리책을 아이들이 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또 ‘작은 천사들’이라는 노래 테이프를 사다가 틀어주기도 했다.
아이들은 그 노래를 모두 외우고 곧잘 따라 불렀다.
아이들은 한국어를 잘하는 것은 물론 읽고 쓰는 데도 별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적어도 초등학교 수준의 말과 글은 익힐 수 있었다”

칸트는 “어느 누구에게도 나와 똑같이 행하라고 말할 수 있게 행동하라”고 말했다.

생각은 쉽고 행동은 어려운데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부모가 말로 하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주는데 어떻게 자녀가 부모를 존경하고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간디와 사탕

어느 날 한 어머니가 아들을 데리고 간디를 찾아왔다.
“선생님,제 아이가 사탕을 너무 많이 먹어 이빨이 다 썩었어요.
사탕을 먹지 말라고 아무리 타일러도 말을 안 듣습니다.
제 아들은 선생님 말씀이라면 무엇이든지 잘 들어요.
그러니 선생님께서 말씀 좀 해주세요”

그런데 뜻밖에도 간디는 “한달 후에 데리고 오십시오. 그때 말해주지요”라고 말했다.
아이 어머니는 놀랍고도 이상했으나 한달을 기다렸다가 다시 간디에게 갔다.
“한달만 더 있다가 오십시오”
“또 한달이나 기다려야 하나요?”
“글쎄 한달만 더 있다가 오십시오”
아이 어머니는 정말 이해할 수 없었으나 참고 있다가 한달후에 또 갔다.
“애야,지금부터는 사탕을 먹지 말아라”
“예! 절대로 사탕을 안 먹을래요”
소년의 어머니가 간디에게 물었다.
“선생님, 말씀 한 마디 하시는데 왜 두달씩이나 걸려야 했나요?”
“실은 나도 사탕을 너무 좋아해서 사탕을 먹고 있었어요.
그런 내가 어떻게 아이에게 사탕을 먹지 말라고 할 수가 있나요.
내가 사탕을 끊는데 두달이 걸렸답니다”

희생의 모범이 가장 좋은 교육이다.
교육이란 끝없이 지속되는 희생의 과정이다.

재판장과 나뭇가지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담장 밑에 채소를 심었습니다.
그런데 옆집 나뭇가지가 담장을 넘어와서 그늘을 만들어 채소가 잘 자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담장을 넘어온 가지를 잘라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옆집 주인은 나뭇가지를 자르면 볼품이 없기 때문에 자를 수 없다고 버텼습니다.
두 사람은 결국 재판장 앞에 섰습니다.
재판장은 두 사람 말을 듣더니 재판을 하루 늦추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재판정에서 나뭇가지를 자르라고 판결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재판장에게 왜 판결을 하루 늦췄느냐고 물었습니다.
재판장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나뭇가지를 자르도록 판결하려고 했는데 우리집 나뭇가지가 옆집에 넘어가 있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어제 집에 가서 가지를 자르고 와서 오늘 판결을 한 것입니다.”

남에게 무슨 일을 시키려면 나부터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지도자입니다.

솔선수범

어떤 아버지가 중학생인 아들이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걱정스런 눈길만 보낼 뿐 아들에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아버지는 아들을 불러 담배를 끊으라고 타일렀다.
아들은 왜 아버지가 그때 바로 얘기하지 않고 한 달이 지난 다음 얘기했는지 궁금해 그 이유를 물었다.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했다.
"네가 알다시피 나도 담배를 즐겨 피웠단다.
그런데 어떻게 너만 담배를 끊으라고 할 수 있겠니?
내가 먼저 담배를 끊는 것을 네게 보여주고 싶었다.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한 달이 지난 지금은 완전히 담배를 끊었단다.
그래서 이제 너에게 이렇게 떳떳이 이야기하는 것이란다.

어른들은 요즘 아이들이 말을 너무 안듣는다고 말을 합니다.
물론 그럴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아이들의 잘못을 지적하기에 앞서 어른들이 먼저 모범을 보이는 것은 어떨까요.
아이들이 누굴 보고 배우겠습니까?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말이다. 초기 로마 시대에 왕과 귀족들이 보여 준 투철한 도덕 의식과 솔선수범하는 공공정신에서 비롯되었다.
실례로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영국의 고위층 자제가 다니는 이튼 칼리지 출신이 2,000여 명이 전사했고, 6. 25전쟁 때에도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의 아 들도 육군 소령으로 참전하였고, 미군 장성 이들이 142명 이나 참전해 35명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었다. 중국의 마오쩌뚱 아들도 6.25 때 전사했다고 한다.

믿음은 내면의 변화로부터

곤충을 매우 사랑하는 곤충학자가 있었다.
어느 날 고치를 찢으려고 몸부림치는 나비의 애벌레를 보게 되었다.
몸부림에 비해 고치가 너무 견고한 듯 보였다.
곤충학자는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 가위로 그 고치를 찢고 나비를 꺼내주었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그 나비는 공중을 몇 번 선회하더니 땅에 주저앉아 죽고 말았다.
고치에서 나오기 위해 스스로 애를 쓰며 싸우지 않았기 때문에 날개가 충분히 강해지지 못했고
물기가 마르지 않아 날개가 약해 날 수 없었다.
외부의 도움이 오히려 죽음을 재촉하는 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
만물은 변화와 성장을 갈망한다.
그래서 외모를 변화시키기나 외부의 힘에 의지하려 한다.
그러나 진정한 변화는 자기 내면에서 와야 한다.
변화시켜줄 무엇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변화해야 한다.
내면의 변화를 반영하는 외면의 변화가 진실한 것이다.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믿음의 비밀

에베소서 6: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믿음이란 내가 받은 사랑을 아는 것이다!

우리가 받은 사랑이란 사실상 내가 모를 때 받은 것입니다.
가장 큰 사랑은 4살까지 받는다고 합니다.
갓 태어난 핏덩이를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누이고 그 많은 고생을 하면서 애지 중지 키우지 않습니까?
그런데 교육학에서 보면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4살 전의 일은 까맣게 기억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갓난아이 때에 우유를 먹었습니까?
엄마의 모유를 먹었습니까?
아마 그걸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4살 이후에도 모유나 우유를 먹었던 사람일 겁니다.
그 소중한 사랑은 다 몰라요.
모르게 되어 있어요.
이것이야말로 믿음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나를 먹였다더라.
저 분이 나를 도왔다더라……
그것은 믿음으로 알게 된 것이지 결코 피부로 기억으로 알게 되어 있지 않아요.
내가 모르는 사이에 받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엄청난 사랑입니다.
이 엄청난 사랑을 내가 지금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라도 그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오를 때, 알지 못할 때에 사랑을 받았다고 성경은 말씀하는 것입니다.

디모데(Timothy) /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

부 : 헬라인
모 : 유대인 유니게  

사도바울의 복음 사역은 사도 바울 혼자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같은 부부를 비롯, 수많은 동역자들이 사도 바울 곁에서 도왔기 때문에, 위대한 복음사역이 가능했다.
디모데 역시 사도 바울의 동역자로서, 바울은 디모데를 자신의 영적인 아들로 생각할 정도로, 바울에게 있어 디모데는 가장 친밀하고 가까운 관계였다.

실례로, 바울 서신 가운데 여섯 곳의 서두에서 디모데의 이름이 바울의 이름과 나란히 등장하고 있다(고린도후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후서, 빌레몬서) 그리고 그중 네 곳에는 다른 동역자의 이름 없이 디모데의 이름만 나온다.
그런데 바울이 서신을 기록할 때, 바울 곁에는 여러 다른 동역자들도 있었음을 우리는 그의 서신 말미에 나오는 인사말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유독 디모데의 이름만이 서신에서 다른 동역자와 달리 자주 바울 자신의 이름과 나란히 등장하는 것은, 디모데가 변함없이 바울의 사역의 짐을 나누어지는 평생의 동역자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디모데라는 이름은 ‘하나님을 경외함’,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 ‘하나님의 영예’라는 다양한 뜻을 갖고 있다.
디모데의 조상에 대해서는 사도행전과 오늘 읽은 본문에 잘 나타나 있다.
디모데는 갈라디아성의 루스드라 출신이었다.
디모데의 어머니는 유대인이었고, 아버지는 헬라인이었다.
그러니까 디모데는 혼혈아였다.
디모데의 유대인 어머니 유니게는 디모데를 믿음으로 양육하였으며, 특히 유니게의 친정 어머니 로이스(즉, 디모데의 외할머니)의 격려가 한몫 거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구약성경을 잘 알고 있었다.

디모데가 성경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바울이 1차 전도여행 후 예루살렘 공회를 마치고 2차 전도여행을 떠나, 1차 전도여행지였던 루스드라를 두 번째로 방문했을 때였다.
그때 이미 디모데는 제자라고 불리고 있었다.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모친은 믿는 유대 여자요(행 16:1).”
그러니까 약 2, 3년 전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루스드라를 처음 방문했던 그 시기에 모자가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던 것 같다(행 14:6-20).

디모데가 바울을 통하여 회심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오늘 본문에 잘 나타나 있는데, 바울은 디모데를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라고 표현하고 있다(딤전 1:2). 
헬라, 로마인들 사이에서는 스승과 제자 관계를 부자 관계로 표현하는 관습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래서 바울도 자신이 전도한 제자를 흔히 자녀에 비유했는데, 디모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회심 후에 디모데의 영적 성장은 아주 빠른 편이었다.
그는 자기가 사는 성읍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칭찬을 들었을 뿐 아니라 거기서 상당히(약 30km) 떨어져 있던 이고니온의 성도들에게도 칭찬을 들었다.
그래서 바울은 청년 디모데를 잘 살펴본 후, 그의 평생의 동역자로 삼는다.

이때부터 디모데는 사도 바울의 동역자로서, 바울의 복음사역에 결정적인 조력자가 되는데, 바울은 그의 선교활동에서 생긴 개척 교회들을 방문하도록 자주 디모데를 파송했다.

예를 들면 데살로니가 파송(살전 3:2-3), 고린도 파송(고전 4:1), 빌립보 파송(빌 2:19-24)

그런데 사도행전을 통해 우리가 잘 알 수 있듯이, 초대교회 당시 복음사역은 순간순간 생명의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개척한 교회들은 너무나 어리고 취약하였다.
하지만, 젊은 디모데는 담대하게 그곳으로 달려갔으며, 책임감있게 사명을 잘 감당했다.
바울도 그런 디모데를 믿었기에, 주저함없이 여러곳으로 디모데를 파송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보낸 1년 6개월의 기간 대부분과 후에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하게 되는 3년이라는 기간에, 디모데는 줄곧 그의 곁에 같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개척한 교회에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바울은 디모데를 파송하여, 자신을 대신해 그 문제를 해결하도록 했다.

디모데는 바울의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 때도 그를 수행했으며, 예루살렘에서 바울이 체포된 후에는 잠시 보이지 않다가, 다시 로마에서 합류하게 된다.
로마의 옥중에서 바울이 빌립보서를 써서 디모데를 보내 그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또 그들의 소식을 가져오게 하는데, 빌립보 교회에 써 보낸 편지에 보면, 바울이 얼마나 디모데를 신뢰하고 있는지가 잘 드러난다.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빌 2:20-22).”

바울의 이 말은, 바울이 디모데 외 다른 동역자들을 크게 신뢰하지 못하는 듯한 인상을 줄 정도이다. 그만큼 바울은 디모데를 철저히 믿고 있었다.

그런데, 바울이 디모데에게 맡기려고 했던 일이 어떤 일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같은 상황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로마에서 빌립보까지는 걸어서 꼬박 40일이 걸린다.
그리고 또 돌아오는데도 40일이 걸린다.
다시 말해, 약 3개월 동안을, 온갖 어려움과 위험을 무릅쓰고 쉼 없이 걷고 또 걸어야만 하는 일이었다.
아무리 복음의 사역자들이라고 해도, 이같은 일을 선뜻 맡아 줄만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디모데만큼은 흔쾌히 맡아 주리라는 것을 바울은 알고 있었다.

디모데는 육신이 강건한 사람이 아니었다.

디모데전서 5:23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디모데는 위가 약하여 고생하였고 또한 몸이 약하여 자주 병을 앓았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은 디모데가 더욱 믿음직스러웠고 자랑스럽고 고마웠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기회 있을 때마다 디모데를 ‘내 사랑하는 신실한 아들’, ‘믿음 안에서 참 아들’이라고 자랑스럽게 불렀던 것이다.

빌립보서에 보면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곧 자기 부인의 마음을 품을 것을 간절히 권면하였다(빌 2:5).
디모데야 말로 그런 마음을 실제로 보여 준 살아 있는 실례였다.
디모데전후서에 보면, 바울은 아직 젊은 디모데를 든든한 사역자로 키우기 위해 얼마나 혼신의 힘을 기울여 가르치고 권면하고 있는지 잘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단순한 후계자가 아닌 자신의 분신처럼 여기며 정성을 쏟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즉 바울은 디모데를 향하여 아버지가 자기와 같은 마음을 품은 아들을 향해서 느낄 수 있는 모든 애정을 느꼈고, 그래서인지 디모데 또한 아들이 아버지에게 드릴 수 있는 모든 섬김과 헌신을 바울에게 다했다.

말년에 바울은 디모데에게 중요한 임무를 부과해 에베소 교회에 보낸 적이 있었다.
순교를 얼마 앞두고 로마감옥에서 디모데에게 급히 전갈을 보낸다.
최대한 빨리 자기에게로 올 것과 오는 길에 마가를 데리고 올 것이며, 또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두고 온 겉옷과 양가죽에 쓴 책을 가져오라는 전갈이었다(딤후 4:6-12).
죽음을 예고하는 듯한 예사롭지 않는 서신을 받은 디모데는 아마 겨울을 앞두고 두 달 이상 걸리는 여행을 서둘러 떠났을 것이다.
디모데가 바울이 순교당하기 전 늦지 않게 로마에 도착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바울은 순교를 앞두고 아들과 같은 디모데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디모데후서 4:16-18.
변명-재판에서 자신이 기소당한 것에 대해 변호하는 것) 본문에서 우리는 바울의 외로움을 짐작할 수가 있다.
바울은 독신이었다.

디모데는 이처럼 사도바울의 최후를 지켜줄 피붙이와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히브리서의 끝부분에 보면, 디모데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저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히 13:23).”

이로 볼 때, 디모데가 언젠가 감옥에 갇혔으며, 또 풀려났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디모데가 어떤 상황에서 언제 어디에서 갇혔고, 또 그의 최후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없다.

디모데의 경견한 신앙은 어려서부터 외조모와 모친의 철저한 신앙교육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어린 시절의 신앙교육이 자녀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잘 보여 주며, 세속 학문을 익히기 위한 학교 교육에 치중하여 신앙 교육을 소홀히 하는 오늘날의 기독교인 가정에 훌륭한 귀감이 된다.

바울은 디모데를 ‘내 사랑하는 신실한 아들’, ‘믿음 안에서 참 아들’이라고 칭할 정도로 그를 믿음으로 양육하였으며, 또 자신의 후임으로 에베소 교회를 돌보도록 하고 격려 편지를 보내는 등 디모데의 목회를 위해 힘써 협력하였다.
이는 복음을 전파하는 데 있어 자신만을 돌아보며 급급해 할 것이 아니라, 바울이 디모데를 양육한 것처럼 후세대를 힘써 양육하고 애정으로 협력해 주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고 효과적인 것인지를 잘 보여 준다.

디모데가 자신의 내성적 성격과 병약한 육체에도 불구하고 복음 사역을 충실히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도우심과 동역자들의 끊임없는 관심과 애정, 그리고 기도 때문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면 인간의 연약함을 들어 오히려 자신의 능력과 영광을 나타내신다는 사실과, 복음 사역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서로 기도해주며 관심과 애정을 쏟을 수 있는 동역자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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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서신
The Pastoral Letters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목회서신이란?

디모데에게 보낸 두개의 편지와 디도에게 보낸 한개의 편지를 가리켜 "목회서신"(the Pastoral Letters) 또는 "목자 서신"(the Shepherd Letters)이라고 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1227-1274)가 "이 세 서신은 하나같이 목회규칙을 취급하고 있다"고 말한데서 기인하며,
1849년 영국 성경 학자 헨리 알포드가 "목회서신"이라는 명칭으로 공식 사용할 것을 주창함으로 일반화되었다.
이 세 서신만이 지역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개인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디모데에베소 지역을, 디도그레데섬을 책임 맡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서신은 지역 교회를 잘 지도하도록 훈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유대적 영지주의 형태의 이단적 교훈들로부터 신앙을 방어할 것을 교훈한다.

1. 수신자

디모데(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는 소아시아의 루스드라 태생이다(행 16:1이하).

바울더베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아버지는 헬라인이라.
He came to Derbe and then to Lystra, where a disciple named Timothy lived, whose mother was a Jewess and a believer, but whose father was a Greek.

바울이 두번째 전도여행 때 루스드라에 들렸고 이때 디모데가 바울의 일행이 되어 전도 여행에 나섰으며
그 이후로 디모데는 바울의 가장 충실한 동역자가 되었다(빌 2:19-22).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
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디도(공경하다)는 바울에 의해 개종되었다(딛 1:4).

같은 믿음을 따라 나의 참 아들 된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갈 2:1이하에서 예루살렘 사도회의에서 바울과 바나바의 동역자로 나타나고 있으며,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바울은 3차 전도여행 때 디도를 고린도로 보냈고,
마게도니아에서 만나 다시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모금을 위해 고린도로 돌려보냈다(고후 7:5이하, 8:23이하).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료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

신실한 주의 종(참 아들 딛 1:4, 동무 고후 8:23) 개인적으로 보내진 것이지만
이 편지들은 교회의 모든 성도들을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딤전 6:21, 딤후 4:22, 딛 3:15).

2. 기록 시기

바울이 1차 로마 감옥 생활을 마친 후부터 순교하기까지의 기간동안에 목회서신이 기록되었다고 본다.
로마에서 석방된 시기가 62-63년으로 추정되기에 석방된 이후 계속 전도여행을 하면서 마게도냐 지방에서
디모데전서를(딤전 1:3), 아가야의 니고볼리에서 디도서를(딛 3:12), 그 이후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때에
디모데 후서(딤후 4:6-11)를 기록했다.

3. 기록 목적

사도들의 시대는 임박한 종말 기대로 특징지어져 있었고, 이로 인해 세상에 대한 무관심을 가져오기도 했다.
그러나 재림의 지연과 더불어 사도이후 시대에 세상에 대한무관심적 혹은 부정적 태도도 조정되어야 했다.
어떻게, 언제 종말을 맞아야 될까에서 종말이 오기까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적응해 가며 생활해야 할까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가 세상에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의 기구와 조직이 필요했다.
그것은 내적으로는 "이단"의 위협이, 외적으로는 "박해"라는 위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적 안정을 위해 교회의 제도화를 추구했으며,
외적인 안정을 위해서 세상에 대한 올바른 적응을 꾀해 나갔다.
그리고 정통 신조와 교회 성직자에 대한 순종만이 외적인 반대나 내적인 분열로부터 교회를 지키는 최선의 방편임을 가르쳤다.
이것이 목회서신의 목적이다.

1). 성육신 부인, 도덕 폐기론 주장하는 영지주의와 편협한 유대주의로부터 교회보호 (딤전 1:4-7 / 딤후 2:23-26 /딛 1:1-13)

2). 영적 나태를 막고 경건의 훈련과 도덕적 품성을 고양하도록(딤전 5:1-25/ 딤후 3: 14-17 /딛 2:1-10)

3). 교직제도와 그에 따른 교역자들의 자질을 규정함(딤전 3:1 / 딛 1:5)

4. 내용구분


디모데 전서


1) 인사 / 1:1-2

2) 거짓 교사들의 교리에 대한 공격 / 1:3-20
거짓 교훈은 유대적 요소를 가진 영지주의 형태이며, "꾸며낸 이야기와 지리한 족보 이야기"(4절)는 영지주의적 경향을, 그리고 "율법"(8-9절)에 대한 언급은 유대적 요소를 가리킨다.

3)교회질서 / 2:1-3:16 교회의 기구적 조직에 대한 관심이 나타난다.
가. 교회예배 / 2:1-15 : 세상과의 관계 개선을 꾀하는 후대의 시도이다.
나 성직제도 /  3:1-16 : 감독의 자격과 집사의 자격이 규정되고 있으며 기독론적 찬양시(16절)도 함께 기록되어 있다.

4) 거짓교사들의 윤리에 대한 공격 /4:1-10 거짓교사들의 윤리가 참 교사들에게 기대되는 행위와 대조되고 있다.

5) 교회질서 / 4:11-6:19 기독교 성직자의 이상을 제시하고 있으며(4;11-5:2) 과부들에 관한 규정도 밝히고 있다.

6) 결론 / 6:20-21


디모데 후서

1) 인사/1:1-2

2) 바울을 본받아 증거한 것에 대한 권면(1:3-2:13) 바울로부터 들은 "건전한 말씀"을 본받고 따르며 지킬 것을 권면하고 있다.

3) 모든 면에서 선한 행동을 보이라는 권면(2:14-4:8) 피해야 할 거짓교사들의 본보기와 따라야 할 사도 바울의 본보기가 제시되고 있다. 속되고 헛된 것(2:16)-부활이 이미 지나갔다는 말(2:18)-허탕한 이야기(4:4)는 거짓 교훈을 말하며, 이에 반해 성경은 "영감된"것, 유익된 것으로 성경을 말하고 있다(3:16).


디도서


그레데 교회가 상당히 혼란스럽고 믿음의 선한 행위가 없었기에 교회 내의 질서 확립과 바른 신앙관의 정립이 시급한 상태였다(1:10-13 / 2:1-10). 이 그레데 교회에서 목회하는 디도에게 올바른 권면과 격려가 필요하였다.

1)인사 /1:1-4

2) 성직제도 / 1:5-9 감독과 장로의 자격 및 그들에 대한 지시
* 두 직분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점을 살펴볼 수 있다.

3) 거짓 교훈에 대한 공격 / 1:10-16

4) 올바른 기독교적 행동에 대한 권면 / 2:1-3:7 표준적인 도덕 교훈이 나온다.

5) 거짓 교훈에 대한 또다른 공격 / 3:8-11

6) 개인적 언급 / 3:12-14

7) 마지막 인사 / 3:15


목회서신의 5 가지 주제들

목회서신은 바울의 말년에 자신의 선교팀의 일원이었다가 도움이 필요한 교회들로 파송되었던 디모데와 디도를 위해 바울이 쓴 서신들이다.
바울 자신이 먼저 많은 교회를 세우고 돌보았던 목회자로서 경험을 후배 목회자들에게 나누고 교회의 당면한 현실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알려주기 위해 쓴 것이다.

디모데 전후서와 디도서가 그 서신들인데 목회에 관한 바울의 신학을 가장 잘 엿볼 수 있기 때문에 목회서신이라 불리운다.
시기와 저작 동기가 비슷해서 서로 다른 세 권의 편지에 쓰여져 있지만 공통된 내용들이 많이 나타난다.
이 공통된 내용들을 크게 다섯 가지, 교회 직분자의 조건, 이단에 대한 대처, 공적인 예배에 대한 지침, 목회자의 사역과 영성, 참된 신자의 경건으로 묶어서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교회의 직분자의 조건

목회 서신의 중요 주제 중 하는 교회의 직분을 맡을 자의 조건이다.
왜 사도 바울은 목회 서신에서 직분자의 조건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일까?
이는 목회 서신을 쓰게 된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바울이 목회서신을 쓰게 된 배경 가운데 하나는 에베소 교회와 그레데 교회 가운데 이단의 거짓 가르침이 큰 위협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단의 거짓 교리를 물리치려면 탁월한 신학자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물론 교리에 대한 무장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본래 이단은 바이러스처럼 늘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애를 쓰고 있다.
하지만 건강한 교회는 이단 바이러스를 능히 물리칠 수 있다.
반면 건강하지 못한 교회는 이단 바이러스에 맥을 못 추고 넘어질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건강한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건강한 교회는 무엇보다도 직분을 맡은 자들이 건강한 교회이다.
직분을 맡은 사람들이 먼저 경건의 바른 모범을 보여줄 때 그들의 영향력이 교회 구석 구석에까지 미쳐서 교회의 건강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직분을 맡을 사람을 신중하게 세워야 한다.
문제는 그 기준이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직분자를 세울 때 세속적인 기준을 그대로 교회 안에 적용할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된다.
세속적인 기준이란 나이, 재산 정도, 학벌, 현재 직위, 인맥 관계, 능력 등이다. 안타깝게도 많은 교회들이 이런 세속적인 기준에 의해 직분자를 실제로 세우곤 한다.
그 결과 교회의 건강성을 잃게 되고 교회 답지 못한 교회로 전락하는 모습을 많이 목격한다.
우리는 직분자를 세울 때 바른 기준에 대해서 목회 서신을 통해 가이드를 얻을 수 있다.

디모데전서 3:1-13은 감독과 집사의 자격에 대해서,
디도서 1:5-9은 장로와 감독의 자격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이 중에서 장로와 감독은 사실상 같은 직분을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장로는 유대 전통에서 온 이름이고 감독은 헬라 전통에서 온 이름으로 보이나 역할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본문들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직분을 맡을 사람에 대한 성경적 기준은 무엇인가?

첫째로 가정을 잘 다스린 사람이어야 한다.

모든 직분에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사항이 한 아내의 남편이라는 조건이다.
이 말은 일부일처제 원칙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직분자는 한 명의 아내에 대한 신실함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단, 이 말이 재혼을 한 사람을 배제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또한 직분자는 자녀를 바르게 양육한 사람이어야 한다.
바울은 왜 직분자에게 가정 생활의 열매를 요구하는 것일까?
이는 가정과 교회 간의 연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의 집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형제 자매라는 호칭을 통해 성도 간의 관계가 가족 관계임을 나타내었다.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 열매를 맺은 사람만이 교회 공동체에서도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가정 생활이 엉망인데 교회 직분자로 잘 섬길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둘째로 절제할 수 있는 품성을 갖춘 사람이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사회에서도 리더에게 도덕성을 요구한다.
그러나 바울이 교회의 직분자의 자격 조건으로 세우는 도덕성의 조건은 매우 엄격하고 수준이 높다.
여러 도덕적 자질 중에서도 특별히 바울은 절제하는 능력을 지도자의 조건으로 꼽고 있는 듯하다.
방탕하여 술을 즐기거나 쉽게 화를 내어 다투는 사람은 곤란하다.
왜 하필 바울은 절제하는 능력에 중요성을 부여할까?
이는 지도자가 충동적이어서 한 번 사고를 내면 그 일이 자기 개인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게 큰 피해를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신중하고 절제하는 능력을 우선으로 여긴다.
한 마디로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
지도자의 허물은 공동체의 분열과 상호 비난의 꼬투리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셋째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목회서신의 본문은 지도자는 일단 결혼하고 어느 정도 성장한 자녀를 둔 사람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이를 보면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사람이 지도자가 될 수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또한 새로 입교한 사람도 적합하지 않다고 않다.
이 두 가지 조건이 말해주는 바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여러 모로 검증이 된 사람, 누가 보더라도 성숙을 이룬 사람이 직분자로 적합하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또한 깨끗한 양심을 갖고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조건도 있다.
나이가 들수록 이런 재리의 유혹에 취약하게 되기 쉽다.
그러나 직분자는 나이가 들었더라도 물질의 유혹과 시험으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속한 공동체 전체를 부패로 이끌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조건을 만족시키는 사람은 한 마디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한 가지 더 고려해야 할 사항이 있다.
모든 직분에 대한 요구 사항은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이 중에서 감독의 직분에는 가르치는 일을 잘 할 것을 요구한 반면에 집사에는 이 부분이 빠져 있음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감독이나 장로의 직분은 말씀을 가르치는 직무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말씀을 잘 가르치는 일은 장로나 감독 직분에 합당한 사람에게 부여된 은사이다.
앞에서 능력보다는 도덕성을 위주로 기준을 제시했지만 또한 능력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임을 알 수 있다.
직분을 맡게 되면 그 직분에 합당한 역할을 수행해 내야 하기 때문이다.
무능한 사람은 아무리 도덕적으로 흠이 없다 할지라도 공동체 전체에 해악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2. 이단에 대한 대처

위에서 언급했던 대로 바울이 목회 서신을 보낸 교회들의 당면한 위협은 이단 세력이었다.
바울의 선교팀은 일단 교회를 세운 후에는 그 교회를 지역 지도자에게 맡기고 다른 지역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이동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 설립되었던 교회에 심각한 문제가 있을 때 다시 선교팀의 동역자를 파송하기도 했다.
바울이 디모데와 디도를 각각 에베소와 그레데에 파견한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이단에 잘 대처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당시에 교회를 위협하던 이단은 어떤 종류의 이단이었을까?

첫째로 유대교의 율법주의와 신화이다.

디모데전서 1:3-11, 디도서 1:10-16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당시 교회의 이단은 유대교에 뿌리를 두었거나 그 영향을 깊숙하게 받은 이단이었다.
유대교의 영향을 크게 두 가지 방면에서 받은 것으로 보인다.
먼저는 율법주의이다.
구원의 조건으로 믿음 외에 특정 율법 준수 행위를 부각시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은 물론 할례였다.
이단의 교사들은 자신들의 율법 선생으로 자처했다.
그러면서 마치 바울이 성경과 복음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것처럼 왜곡하면서 바울이 가르치지 않은 율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성도들을 미혹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율법에 대해 피상적으로 알고 있을 뿐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바리새인으로서 교육을 받은 바울이 가진 율법에 대한 이해와 지식의 깊이는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이런 바울이 보기에 율법 선생을 자처하는 거짓 교사들이 얼마나 가소롭게 보였을까 싶기도 하다.
유대주의에 의한 두번째 영향은 신화에 지나친 관심으로 나타났다.
유대교 특별히 신구약 중간기에 유대교는 구약 성경에 기반을 하되 자신들의 상상력이 가미된 수많은 이야기들이 범람하던 종교였다.
그 이야기들은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하고 호기심을 이끌어낼 수 있는 잡다한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작 구원의 핵심과 하나님의 경륜에 관한 내용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한 마디로 겉으로 보기에만 화려할 뿐 알맹이는 없는 허탄한 이야기들이었다.
거짓 교사들은 이런 허탄한 이야기들로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허탄한 이야기들을 단순한 흥미거리로 취급한다면 별 문제가 되지 않겠으나 이 신화들을 지속적으로 탐닉하게 되면 결국에는 정작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일들을 간과하게 되고 열매를 맺을 수 없게 된다는 점에 있다.

둘째로 금욕주의이다.

디모데전서 4:1-5을 보면 거짓 교사들은 특정 종류의 음식물을 먹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고 또한 결혼을 하지 말 것을 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바로 식욕과 성욕인데 이단 교사들은 일종의 금욕주의를 가르쳤던 것이다.
이 같은 금욕주의는 본래 헤브라이즘 전통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영과 육의 극단적인 이원론을 가졌던 헬레니즘 전통 속에서는 익숙한 것이다.
바울 당시보다 후기에 나타나기는 했지만 영지주의가 바로 이 같은 헬레니즘 전통에 기반한 것이었다.
따라서 교회를 위협하던 이단 세력은 유대교의 강한 영향력 아래 있었지만 동시에 헬레니즘의 이원론 전통도 일정 부분 흡수한 혼합주의였음을 알 수 있다.
근원이 어찌되었던 금욕주의는 의외로 사람들에게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금욕적인 룰에 따르는 사람들은 무언가 특별한 사람, 남들보다 더 경건한 사람으로 쉽게 간주되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금욕주의 추종자들은 남다른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고 실제로 주변에서도 대단한 사람들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금욕주의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를 전면으로 부인하는 매우 잘못된 가르침이었다.
하나님은 영혼 뿐만 아니라 육체와 물질 세계도 선하게 창조하신 분이시다.
욕망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복종치 않는 욕망의 무한 추구가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이단의 거짓 교사들은 금욕주의를 통해 오히려 그들의 은밀한 욕구를 만족시키려 하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었다.

셋째로 탐욕과 쾌락의 추구이다.

디모데전서 6:3-10, 디모데후서 3:1-9을 통해서 보면 이단의 교사들은 경건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속으로는 매우 탐욕적이며 쾌락을 추구하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현재의 이단 사이비 교주들의 모습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단 교사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순한 양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마음 속에는 양들을 잡아 먹고자 하는 늑대 같은 본심을 감추고 있다.
이들이 바라는 것은 실은 재물이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접근하지만 확실하게 자기 편 사람이 되었다고 여기는 순간에 본색을 드러내서 재물을 갈취한다.
그야말로 벗겨 먹을대로 벗겨 먹어서 더 이상 남은 것이 없을 때까지 이들은 결코 한 번 물은 먹이를 놓으려 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쾌락을 추구하기도 한다.
특히 음란한 쾌락을 남몰래 추구한다.
이단 교사들은 자신들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하거나 혹은 종교적 명분으로 포장된 종교 의식을 통해서 이를 은밀하게 추구한다.
그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전혀 없는 얼마나 세속적인 인물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단에 미혹된 사람들의 눈에는 그 실체가 보이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이단에 대한 대응책으로 디모데전서 1:18-20에서 디모데에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권면한다.

목회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자기 양떼를 먹이고 돌보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외부의 위협으로 양떼를 지키는 것이다.
전자의 영역에서는 목회자가 자애로운 어머니 같은 모습이어야 하겠지만 후자에서는 주먹을 불끈 쥔 용기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어야 한다.
이단은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교묘히 사람들을 속여서 잡아 먹는 원수들이기 때문이다.
이단의 정체를 드러내고 그들을 교회 공동체로부터 추방해야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모함과 오해와 핍박을 각오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목회자는 이런 힘든 과정을 감수하면서라도 이단으로부터 자기에게 맡겨 주신 양떼들을 지켜내야 한다.

3. 공적인 예배에 대한 지침

바울 당시의 교회에는 두 종류의 예배 모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각 가정 교회별로 모이는 모임 속에서의 예배이다.
이 예배는 좀 더 친밀하고 일상적인 예배였을 것이다.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자유롭게 예배가 드려졌을 것이다.

둘째는 온 교회가 모이는 예배이다.
특정 지역 내에서 모든 가정 교회들이 한 자리에서 모이는 예배이다.
이와 같은 예배는 다수의 인원이 참석하기 때문에 좀 더 다양한 은사들이 나타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대신에 가정 교회의 예배에 비해 좀 더 공적인 성격이 있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온 교회가 드리는 공예배에 있어서 질서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관심은 고린도전서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뿐만 아니라 목회 서신에서도 이 같은 공적인 예배에서의 지침에 대해서 일부 언급하고 있다.
그 내용은 디모데전서 2:1-15에 잘 나타나 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면한 공예배의 지침은 무엇인가?

첫째는 공예배에서 기도, 특히 중보기도의 필요성이다.
바울은 공예배의 기도에 있어서 권력자들에 대한 중보기도를 요청한다.
이 말은 여러 모로 오해하기 쉬운 말씀이다.
마치 교회가 친정부 혹은 친권력자 편에 서야한다는 말씀처럼 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대 교회 당시 권력자들로부터 교회가 얼마나 큰 핍박을 받았는가를 생각해 보면 이런 해석은 전혀 맞지 않는다.
교회가 권력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바울의 당부는 정치와 사회가 안정되어야 선교와 신앙 생활에 있어서 방해를 받지 않기 때문에 기도하라는 뜻이다.
결코 현 권력자들의 통치를 옹호하거나 지지하기 위해 기도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정치와 사회가 안정이 되려면 하나님의 통치 원리인 공평과 정의, 인애와 자비에 따른 통치를 권력자들이 행해야 한다.
권력자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할 때 바로 이와 같은 기도 제목을 가지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남자들은 분쟁하지 말고 기도에 힘써야 한다.
남성들은 여성들에 비해 천성이 공격적인 성향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다 보니 공예배 모임에서 작은 일에 분노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다툼을 일으키기 쉽다.
당시의 예배는 지금의 예배보다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였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남자들은 성내고 다투기보다는 기도하기에 힘써야 한다.
특별히 손을 들어 기도하라고 권한다.
손을 들어 기도하는 모습이 당시 전형적인 기도의 자세이었던 것 같다.
다툴 때도 역시 손을 들 때가 많다.
똑같이 손을 든다 하더라도 기도하기 위해서 손을 드는 것과 다투기 위해 손을 드는 것은 천양지차이다.
기도하는 남자는 아름답다.
남자다운 남자는 싸우는 남자가 아니라 손을 들어 기도하는 남자이다.

셋째로 여자들은 정숙해야 한다.
복음이 전파된 곳마다 뚜렷한 변화의 표지가 남녀 차별의 철폐이다.
우리 나라만 해도 조선 시대 남존여비 사상을 깨트리고 새 시대 연 장본인들이 바로 선교사들이었다는 점을 봐도 그렇다.
그런데 이렇게 남녀 차별이 철폐되었다고 해서 여자들이 지나치게 공예배 가운데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다 보면 실족하는 남성 성도들이 나올 수 있었다.
혹은 보수적인 여성 성도들에게도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다.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 가운데 여성이 교회에서 가르치거나 의사 결정을 주도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아 아예 마음의 문을 닫아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에 사도 바울은 공예배에서 여성들은 잠잠히 있도록 지침을 주었다.
차별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유하지만 서로에게 종노릇하라는 바울의 일관된 입장의 피력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바울은 여자들이 소박하게 차려 입고 공예배에 나오도록 권면한다.
공예배에 참석하는 성도들은 그들의 경제적 수준이 각기 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부유하겠지만 상당수는 가난하다.
만약 부유한 성도가 화려하고 값비싼 옷을 차려 입고 공예배에 나온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가난한 성도들은 위화감과 위축감이 들어서 가까이 가기 힘들 것이다.
결국 하나됨과 가족 공동체성은 상실되고 말것이다.
그래서 공예배에서는 최대한 검소하고 소박한 옷차림을 할 필요가 있다.
남녀 공히 해당되는 사항이겠지만 특히 여자에게 더욱 적용되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여자에게는 옷차림으로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본능적인 욕구가 남자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다.
겉으로 드러난 외적인 아름다움보다 더욱 아름다운 것은 내적인 아름다움이다.
선한 행실과 인격과 거짓 없는 믿음만큼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

4. 목회자의 사역과 영성

목회 서신은 사도 바울이 선배 목회자로서 후배 목회자들에게 남긴 충고이자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목회 서신을 통해서 목회자의 사역과 영성에 대한 풍성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목회 서신에서 바울은 목회자를 그리스도의 일꾼, 그리스도의 군사,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로 정체성을 부여하고 있다.

첫째,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

디모데전서 4:12-16, 디모데후서 1:3-18, 디모데후서 2:14-26 등이 말씀을 보면 바울은 영적인 아들인 디모데에게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라고 권면하고 있다.
여기서 일꾼이라는 말은 청지기 혹은 사명자와 비슷한 개념이다.
즉 목회자는 그리스도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사명을 부여 받은 존재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목회자에게 갖추어야 할 영성은 무엇인가?
맡은 일에 대한 충성과 신실함일 것이다.
가장 나쁜 일꾼은 게으른 일꾼이다.
그보다 더 나쁜 일꾼은 부패한 일꾼이다.

목회도 마찬가지이다.
목회자는 부지런해야 한다.
전심전력해야 한다.
다른 일에 한눈 팔지 말고 목회에 전념해야 한다.
목회자는 자기가 맡은 일에 대해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
목회서신에서는 지키라는 말로 이를 표현하고 있다.
또 일꾼에게 있어서 최고의 보상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기에게 일을 맡긴 주인에게서 인정과 칭찬을 받는 일이다.
목회자 역시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인정을 받는 일꾼이 되어야 한다.
인정받는 일꾼이 되기 위해 사도 바울은 특히 깨끗한 그릇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큰 그릇이든 작은 그릇이든지 더러운 그릇은 쓸 수 없다.
목회자는 도덕성에 있어서 치명적인 결함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아무리 능력이 많고 가능성이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도덕적 결함과 하자가 있는 사람은 목회자로 합당하지 않다.
부도덕한 목회자는 주께서 쓰실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바울은 디모데전서 6:11-16, 디모데후서 2:1-13에서 사역자를 군인에 비유한다.
군인의 특징은 자기 생활이 없다는 점이다.
지금도 군인들은 몇 년에 한 번 씩 수시로 근무지를 이동한다.
이 때문에 군인 자신에게 고통이 있고 무엇보다도 군인 가족에게 고난이 많다.
그러나 이는 군인으로서 감수할 수 밖에 없는 고난이다.
목회자에게 있어서도 고난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고난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감수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영성 중에 중요한 것은 인내이다.
인내가 없으면 끝까지 사역자의 길을 갈 수 없고 사역의 영광을 맛보지도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군사는 또한 싸우는 사람이다.
항상 적을 상대하는 직업이 군인이다.
마찬가지로 목회자 역시 수많은 대적들 가운데서 믿음이 선한 싸움을 하는 사람이다.
앞에서 말한 이단의 세력이 그 대적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단만이 싸움의 상대는 아닐 것이다.
목회자는 사람들을 권면하여 복음을 따르도록 책임과 역할을 부여받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사람들 속에 있는 부패하고 타락한 본성과 싸워야 한다.
그래야만 성도들의 경건과 믿음의 성숙을 이끌어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적은 바로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부패한 본성이다.
자기와 싸우지 않고서는 누구와도 싸울 수 없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영성은 자기와의 싸움에서 어떻게 승리하느냐에 달려 있다.

셋째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

디모데후서 3:10-4:8, 디도서 2장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의 역할의 중요성에 대해서 디모데와 디도에게 강조한다.
목회자는 무엇보다 말씀을 수종드는 사람이다.
이 일을 위해 은사를 부여 받았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다른 무엇보다 말씀에 탁월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교회를 위협하는 이단의 세력도 말씀의 검으로 물리칠 수 있다.
성도들이 경건에 이르도록 양육하는 수단 역시 말씀이다.
그러므로 말씀이 바르게 전하여지지 않은 성도들이 결코 성숙에 이를 수 없다.
건강한 교회는 목회자에 의해 안전하고 풍성한 말씀이 공급되는 교회이다.
목회자는 그러므로 그 누구보다 말씀 연구에 전심전력하여야 한다.
말씀 속으로 깊숙이 침잠해 들어가야 한다.
목회자의 영성의 핵심은 말씀의 영성이다.

5. 참된 신자의 경건

목회 서신에서 공통된 주제 가운데 하나는 신자의 참된 경건이다.
목회자의 역할은 성도들이 참된 경건에 이르도록 하는 역할이기 때문이다.
‘참된’이라는 말이 붙은 것은 거짓된 경건이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를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이 없는 경건이라고 불렀다.
거짓 교사들과 또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경건이 바로 거짓된 경건이다.
거짓된 경건은 겉모습만 경건해 보일 뿐 사실 상 속이 비어있는 깡통 같은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1장에서 참된 경건의 표지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다른 바울 서신에서도 일관하게 말해 왔던 대로 바로 사랑이다.
또한 이는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강조하셨던 내용이기도 하다.
경건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경건의 능력이다.
그러나 이 사랑이 구체적인 삶의 정황 속으로 들어가면 여러 가지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될 수 있다.
한 가지만 예를 들어 보자면 디모데전서 6장에서 말씀하듯이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물질에 대한 탐욕을 버리고 자족하는 삶을 살 수 있다.
그 외에도 직분자에 대한 조건, 혹은 목회자가 힘써야 할 직무에 대해 언급하는 내용 등등 목회 서신 전반에 걸쳐 참된 경건에 대해 선한 행실, 도덕성, 절제, 깨끗한 양심 등등 다양한 언어들로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같은 참된 경건은 어디서부터 올 수 있는 것일까?

첫째, 참된 경건은 바른 교훈에 의해 지도를 받은 삶이다

경건은 바른 교훈에서부터 온다.
이단들의 거짓된 가르침은 참된 경건을 낳지 못한다.
그저 경건을 흉내낼 수 있을 뿐이다.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면 성도들은 그 말씀에 의해 양육을 받게 된다.
바른 말씀에 의해 양육된 성도들은 내면에 변화를 받아 점점 성숙에 이르게 되고 그 열매를 외적으로도 나타내게 된다.
그것이 경건이다.
바른 교훈의 선포는 말씀 사역자의 의무라면 바른 말씀을 분별하게 듣는 것은 모든 성도들의 의무이다.
이단들이 교회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려면 목회자 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깨어 있어야 한다.
바른 말씀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또한 그 말씀을 자주 듣는 것도 중요하다.
아무리 영양가가 좋은 음식이라 할지라도 띄엄띄엄 먹는다면 아이가 자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 성도는 자랄 수 없다.
또한 듣기만 하고 끝난다면 역시 자랄 수 없다.
먹은 것을 완전히 소화시켜야 영양분이 온 몸에 퍼질 수 있듯이 성도가 참된 경건에 이르기 위해서는 받은 바 말씀에 순종하고 자신의 삶에 이 말씀을 적용시키려는 노고가 필요하다.

둘째, 참된 경건은 은혜에 합당한 삶이다

디도서 2장에 잘 나타나 있다.
경건에 이르게 하는 원동력과 에너지는 어디로부터 오는가?
그것은 은혜로부터 온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은혜를 아는 만큼 경건해진다.
은혜를 모르면 참된 경건은 없다.
유대교의 영향을 받은 율법주의자들의 한계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말씀을 가르친다고 하지만 그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를 충분히 드러내주지 못하는 말씀이었다.
인간의 공로와 의를 내세우는 말씀은 힘이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변화시킨다.
경건은 내 편에서 하나님을 향해 무엇인가 하는 일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먼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하신 일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은혜를 받은 자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강력한 동기를 얻는다.
그 동기가 성도를 참된 경건으로 이끌어 간다. 이 은혜의 크기를 아는 것이 경건의 시작이요 끝이다.

셋째, 참된 경건은 성령에 의해 새롭게 된 삶이다

디도서 3장에 언급되어 있다.
새 언약 시대의 특징은 성령의 내주이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중생하게 하시고 중생하게 하신 후에도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며 우리 속에서 내주하시면 우리를 위해 탄식하며 기도하시고 우리에게 말씀이 깨달아 알아지도록 역사하시며 우리의 생각과 삶을 지도하시고 인도하신다.
성령님에 의해 이끌어지는 삶이 경건한 삶이다.
성령의 열매가 경건이다.
성령 충만함을 입을 때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된 삶을 살 수 있다.
거짓된 경건은 여전히 성령에 속하지 않고 육에 속해 있다는 점에서 사실상 불경건이다.
자신의 힘으로 경건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령께서 추동하시는 그 힘에 의해 경건에 이를 수 있다.
또한 성령에 의한 경건은 자기 혼자 이루어가는 일이 아니다.
성령께서는 공동체에 각기 다양한 은사를 주신다.
이 은사들을 통해 성도들은 경건에 이르는 길에서 크고 작은 도움을 받는다.
그러므로 신자는 성령의 임재와 은사가 나타나는 예배를 통해서 참된 경건을 갖춘 성도로 빚어지게 된다.

목회 서신에 나타난 공통 주제 다섯 가지를 살펴 보았다.
비록 지금으로부터 이 천년 전에 한국 땅도 아닌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들을 목회하던 디모데와 디도에게 쓰여졌던 편지이지만 놀랍게도 지금 여기의 현실에도 정확하게 부합하고 필요한 말씀임을 새삼 발견할 수 있었다.
한국 교회 역시 각종 이단들, 거짓된 가르침, 잘못된 신학에 의해 오염되고 공격받고 있다.
그러나 누구를 비난하고 탓하고 있을 수 만은 없다.
부지런히 내 자신을 연단하여 주님께 인정 받을 수 있는 일꾼이요 그리스도의 군사로 준비되어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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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신서의 명칭과 분류


1. 서신서의 명칭

‘서신서’(the Epistles) 는 초대 교회의 지도자들이 로미 제국 전역에 흩어져 있던 여러 지역의 초대 교회 공동체 또는 특정한 일개인에게 신앙의 도움을 주기 위해 써 보낸 편지 들 중에서 초대 교회 성도들 뿐아니라 오고오는 세대의 모든 성도들의 신앙의 근거가 되게 하시고자 특별하게 영감(靈感)하신 편지들로서 훗날에 신약의 정경(正經)으로써 채택된 로마서에서 유다서까지의 21권의 책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27권의 성경이 기록된 시기는 A.D.50년 -100년 여간이나 이것들이 공교회(公敎會) 의 공식적정경으로 인정된 것은 대략 300년이 지난 A.D. 397년의 칼카타 공회(Councile of Cartageo)에서였다.
또한 이 27권의 책이 ‘서신서’로 불리우게 된 것은 알렉산드리아의 교부 제롬(Jerome , A.D.346-420년 ) 에 의해서였다. 즉 제롬은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벌게이트 역’(Vulgate)이다. 이 ‘빌게이트 역’ 성경에서 제롬은 로마서에서유다서까지를 한 부류로 묶어 이름을 붙였는데 그것이 바로 ‘서신서’였다. 그리하여 A.D.150년경의 순교자 져스틴(Justin Martyr) 이 4 복음서를 가리켜 명명한 ‘복음서’(the Gospels) 란 명칭과 마찬가지로 ‘서신서’란 명칭은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의 모든 교회에서 통용되는 명칭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서신서는 성도들이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교회의 일원이며 여호와의 자녀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삶의 원리와 지침들을 제공해 주는 책일 뿐 아니라 기독교의 근간이 되는 교리인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 교회론, 종말론 전반을 다른 어떤 성경의 어떤 부분들보다도 직접적으로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 중요상이 크다. 한편 복음서와 사도행전이 주로 예수의 공생애와 복음의 확장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증거한 것이라면 서신서는 그러한 역사적 사건들을 성도의 삶과 연결하여 구체적으로 적용시킨 책이라고 볼 수 있다.


2.서신서의 분류

   가. 저자별 분류

서신서를 분류하는 일반적이고도 전통적인 방법은 저자별(著者別)로 분류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서신서는 바울의 저작 로마서에서 빌레몬서까지의 13권과 익명(匿名)의 저작인 히브리서 1권, 야고보의 저자 야고보서의 1권, 베드로의 저작 베드로 전서와 후서 2편, 그리고 사도 요한의 저작 요한일서, 이서, 삼서, 3권과 유다의 저작 유다서 1권으로 분류된다.

한편 바울이 저술한 서신들은 바울 서신서라 부르며, 그리고 그 이외의 저자들이 저술한 서신들은 통칭하여 공동 서신서라 부른다. 그러므로 서신서는 그 저자를 기준으로 하면 일단 크게 둘로 분류할 수 있다. 그것은 곧 로마서에서 빌레몬서까지 13권의 '바울 서신'과 바울 외의 사도들이 기록한 히브리서에서 유다까지 8권의 '공동 서신'이다. 이제 이와 같은 분류를 한 눈에 알아 볼수 있께끔 간략히 도표화 하면 다음과 같다.

참고로 바울 서신은 수신자 또는 수신 지역의 이름을 따서 그 책의 제목이 니어진 반면, 공동 서신은 수신자를 반영한 이름인 히브리서를 제외하고는 모두 그 책의 저자의 이름을 따라 그 제목이 붙여진 것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책  이 름

저자 이름

기록 연대

바울

 서신

로    마  서

바      울

A.D.57년

고린도전서

A.D.55년55년

고린도후서

A.D.56년

갈라디아서

A.D.61-62년

에 베 소 서

A.D.62-63년

빌 립 보 서

A.D.62-63년

골 로 새 서

A.D.62-63년

데살로니가전서

A.D.51년

데살로니가후서

A.D.51년

디 모 데 전 서

A.D.63-65년

디 모 데 후 서

A.D.66-67년

디   도   서

A.D.66년

빌  레  몬 서

A.D.62년

공동

서신

히  브  리  서

  미      상

A.D.60년대 후반

야  고  보  서

야  고  보

A.D.46-49년

베 드 로 전 서

베  드  로

A.D.64년 전후

베드로후서

베  드  로

A.D.64년 전후

요  한  일  서

요       한

A.D.90년

요  한  이  서

요      한

A.D.90년

요  한  삼  서

요       한

A.D.90년

유    다    서

유     다

A.D.70-80년

 


 나. 특징별 분류

서신서를 분류하는 또 다른 기준은 각 서신이 지니는 내용이 용도 및 기록 배경상의 특징이 있다. 그런데 이런 특징별 분류는 전통적이기는 하나 서신서 전체를 일관되게 한 기준으로 분류하는 것이 아니라 공통된 특징을 함께 가진 몇몇 서신을 함께 묶어 통칭하는 성격의 분류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에 서신서를 각 특징에 따라 구분하는 대표적 실레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1) 교리 서신(敎理書信)

다른 서신들도 교리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나 특별하게 기독교의 구원론, 기독론, 교회론 등의 주요 교리들을 집중으로 다루면서 그 교리들의 실생활에서의 적용 문제까지 다루고 있는 서신들을 가리킨다. 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이 4권이 이에 포함된다. 한편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는 기독교의 종말론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는 교리 서신적 성격을 지니고 있으나 동시에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된 사항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따로 '재림 서신' 이라 부르기도 한다.

     2) 옥중 서신(獄中 書信)

바울이 기록한 서신서 중에서 특별하게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생활함으로써 기록한 서신서를 말한다.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이 4권이 해당된다.

       3) 교회 서신(敎會 書信)

바울이 로마, 고린도, 갈라디아, 에베소, 빌립보, 골로새 , 데살로니가 이 7개 교회에 보낸 서신을 가리킨다. (로마서에서 데살로니가후서까지). 이 서신들은 이미 계시된 구속의 원리를 자세히 풀어 설파(說破)하는 가운 데 각 교회 성도들을 때로는 기독교의 기본 교리로 교훈하며, 또 때로는 임박한 예수님의 재림에 대비하여 성도들의 안이한 또는 잘못된 신앙생활을 시정 하도록 책망하며 바르게 이끌기 위해 교육하는 서신서들이다. (딤후 3:16).

       4) 목회 서신(牧會 書信)

바울 당시 에베소 교회와 그레데 교회의 목회를 담당하고 있던 디모데와 디도에게 보낸 3편의 서신서를 가리킨다. (딤전,후, 딛). 이 서신들은 분명하게 일 개인에게 보낸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 내용은 교회 전체와 괸련된 문제 곧 교회 직분자의 자격 및 거짓 교사에 대한 경계, 공중(公衆) 예배와 교회의 질서 유지 등과 같은 귀중한 목회 지침 등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이는 디모데나 디도는 물론 모든 신약 교회의 모든 시대의 목회자와 더 나아가 모든 성도들이 읽어야 할 서신서이다.

       5) 회람 서신(回覽 書信)

처음부터 여러 사람들이 돌아가며 읽을 것을 염두에 두고 쓴 서신서를 말한다. 골로새서와 갈라디아서가 대표적인 경우인데, 특별하게 골로새서에는 편지를 받은 자가 이 편지를 라오디게아 교회에도 전하여 그들이 함께 볼 수 있게 하라는 지시가 명기(銘記) 되어 있다.(골 4:16). 그리고 갈라디아서는 초대 교회 전체에서 가장 큰 논란이 되었던 문제 곧 율법과 복음과의 관계에 대하여 다루고 있으니 여러 사람들이 돌려 가며 읽었으리라는 것은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밖에도 비록 서로 돌려가며 일을 것을 지시한 특별한 언급은 나와 있지 않으나 로마서와 에베소서 역시 회람 서신으로 간주하고 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은혜로 말미암은 성도의 구원을 성찰(省察)한 다음 예수님의 지체(肢體)된 성도가 마땅히 행해야 할 덕목들을 역설하고 있는 이 서신서들은 많은 성도들이 널리 돌려 볼 필요가 있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6) 추천 서신(推薦 書信)

로마인들이 '에피스틀라 콤멘다티아(epistula commendaticia), 즉 '천거(薦擧)의 편지'라고 일컸던 것이다. 이는 편지를 전하는 사람을 소개하거나 그 신분을 보증하기 위해 작성한 서신을 가리킨다. 서신서 중에 해당하는 것으로는 빌레몬서와 요한 삼서가 있다. 이 중 빌레몬서는 주인 빌레몬의 재산을 훔쳐 달아났다가 바울을 만나 회심(回心)한 오네시모를 위하여 바울 이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로 오네시모를 용서해 줄 것을 요청하는 글이다. 그리고 요한 삼서는 요한이 가이오에게 보낸 편지로서 가이오의 선하고 신실한 행위를 칭찬하는 가운데 그 서신을 전하는 데메드리오를 천거하는 글이다.

         7) 답변 서신(答辯 書信)

이것은 어떤 문제에 대하여 대화 형식을 빌어 스스로 질의응답(質疑應答) 하거나 수신자로부터 받은 물음의 편지에 대하여 담하는 내용을 적어 보낸 서신을 가리킨다. 고린도전서와 후서와 빌립보서가 이에 해당하는데 전자, 즉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두 편지는 교회 내에서의 파당(派黨) 문제, 죽은 자의 부활 문제, 구제 헌금 등에 관하여 질의 응담한 답신서이다. 그리고 빌리보서는 빌립보 교인들이 옥중에 있던 바울을 위하여 보내준 헌금에 대하여 감사하며, 자신의 근황을 알린 글이라는 측면에서 답신서이다.

(그랜드종합주석 서신서 서론 pp 620-622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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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서신


신약성경에서 바울서신과 계시록을 제외한 서신서들을 공동서신(The Catholic Epistles)이 라고 부른다. 그 외에 일반 서신(The General Epistles)이라고 명하기도 한다. 이 서신서들을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서신서의 수신 대상이 어느 특정한 개 교회가 아니라 일반적이며 보편적인 독자를 상대로 기록된 것이기에 공동서신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그 외에 바울서신과 구분키 위해 그렇게 부른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공통된 것은 아니다.


히브리서(만일 바울서신에서 제외할 경우), 야고보, 베드로, 요한, 유다에 의해 기록된 서신서들은 그 주제와 내용이 각각 다르다. 그리고 각각 40여년 간의 기간 사이에

기록됐다. 초대교회는 제4세기경 베드로전서와 요한1서를 정경으로 공인했다. 기타의 서신들은 6세기경에 이르러서야 모든 교회에서 정경으로 인정했다. 개인적으로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가 히브리서를 제외한 현재의 7권의 서신을 공동서신으로 인정했으며, 그 후 1545년 트렌트 회의에서 정경으로 확인한 것이다.

 

1. 공동서신 저자에 관한 견해 차이들

 

개혁교회의 보수주의에서는 공동서신이 그 편지의 발신자들이 기록한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진보적인 사람들은 비평적인 관점에서 볼 때 훨씬 후대 교회 사람들이

유명했던 사도들의 이름을 이용하여 쓴 것이라고 주장한다. 요한서신도 베드로전서, 유다서도 또 야고보서도 실제 그 사도들의 기록물이 아니라 익명의 성도들이 기록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공동서신의 집필 시기도 주후 64-200년까지 보고 있다. 이와 같은 진보와 보수측의 견해 차이는 공동서신 각론에서 구체적으로 다룰 것이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는 대체로 정통 보수측의 견해를 따르고자 한다. 각 서신서에 기록된 당시의 사도들과 전도인들이 기록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2. 공동서신의 가치

 

바울서신이 기독교와 그 복음 진리를 해석하고 적용하고 확립시킨 '골격'의 가치를 지녔다면, 공동서신은 '힘줄과 살'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공동서신은 심오한 신학론이나 신비스러운 경험보다는 대중적이요, 윤리적이요, 교훈적인 내용이 주된 주제다. 실제적인 신앙 훈계와 권면으로 당시 핍박과 이단의 유혹과 신앙적 시험에 둘러 쌓였던 모든 교회에게 힘과 지혜를 주고자 기록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동서신을 통해 당시 초대교회가 당면했던 보편적인 문제와 다양한 삶의 구조를 알 수 있다. 도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 바울 이외에 예수그리스도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사도들의 신앙 사상과 생각과 인품들을 엿볼 수도 있는 것이다. 비록 공동서신이 깊고 높은 신학적인 내용은 바울서신과 비교해 볼 때 가볍다고 생각할 수는 있으나, 바울이 말한 신학과 진리가 공동서신 속에서는 '육화'되어 나타난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바울만이 신야성경의 기자로 세우시지 않고 다양한 공동서신의 기자들을 따로 세우신 뜻은 이 세상의 성도들과 그 삶들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바울의 논리와 공동서신의 풍성한 교훈은 서로 상호 보완하여 성도의 신앙을 깊고, 넓고, 높은 자리로 인도해 줄 것이다. 이처럼 공동서신의 가치는 신약의 감동된 정경으로서, 또 그 시대의 역사적 기록물로서 그리고 문학적인 가치로서 바울서신 못지 않은 영원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3. 공동서신의 특징

앞에서 말한 공동서신의 가치는 그 구성과 내용의 특성에서 기인된다. 우선 특정 지역이나 교회가 아닌 모든 교회를 염두에 두고 기록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시 교회의 보편적인 정황을 알 수 있다. 그 다음 실제적이며 대중적인 내용을 갖고 있다. 바울서신처럼 이론적이며 예방적인 성질보다 당시 모든 교회의 성도들의 삶의 애로에 대한 구체적인 권면이나 교훈을 제시해 주고 있으며, 그 내용도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대중적인 가르침으로 되어 있다. 그 다음 다양한 주제를 지니고 있다. 히브리서는 율법과 예언의 완성이신 그리스도를, 베드로후서는 참희망과 참지식을, 요한서신은 사랑의 가치를, 유다서는 이단자들에 대한 경계를 주제로 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내용들을 통해 기독교 진리의 다양하고 보편적인 가치를 터득할 수 있다.

 

4. 공동서신의 각 개관

 

본 연구에서는 바울서신에서 다루지 않았던 히브리서도 공동서신의 범주에서 다뤄보고자 한다.

 

1) 히브리서

작자 미상이다. 바울, 아볼로, 바나바 등으로 추론하나 확실한 증거는 없다. 그러나 목회자, 신학자, 철학자의 자질과 능력을 겸비한 사람만이 기록할 수 있는 심오한 내용과 구체적인 신앙 권면으로 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율법과 제사와 예언의 완성이시며 본체이심을 강조하며, 그분만이 영원하고 유일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대제사장'이심을 증거한다.

 

2) 야고보서

헤이스(Hayes)라는 신학자는 '야고보서는 신약 속의 구약성경이다'라고 말했다. 그 안에 기록된 그리스도께 대한 두 세 구절의 언급을 제외시킨다면 마치 구약의 잠언서를 보는 듯하다. 야고보서는 바울서신의 대주제인 '신앙으로 인한 구원'과 반하는 듯한 내용이 있어 몇몇 개혁자들로부터 외면당한 예도 있었다. 그러나 야고보는 신앙을 성도의 전인격을 통해 관조하고 강조한 것뿐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얻는다는 사도 바울의 사상과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 신앙이란 그리스도에 대한 어떤 '생각'이 분명 아니다. 인격과 삶의 열매로 나타난다. 이는 바울서신서에도 강조되는 내용이다.

 

3) 베드로전·후서

베드로전서는 대사도 베드로의 아름답고 거룩한 신앙 인품이 여실하게 드러나는 신앙고백서요, 위로서이다. 당시 로마 제국 판도 안에서 이질적인 존재들로 업신여김받고 오해받고 핍박받는 모든 성도들을 위로하고자 쓴 베드로의 첫째 서신이다. 그 주제는 '고난을 상쇠하는 참희망'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성도들의 삶의 본분 중 한가지이며 그와 같은 삶에는 영원한 축복이 따름을 역설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처럼 핍박하는 원수를 위해 기도하고 축복해 주는 생활을 할 것을 권고한다. 그리고 삶의 종말적인 위기가 올지라도 말은 사회적, 신앙적 의무에 최선을 다할 것을 전하는 내용이다. 후서는 베드로 사도의 유언장과 같다. 순교하기 전 자신의 마지막장을 감지하고 보낸 공동회람 문서이다. 당시 교회에 일어나기 시작한 신비철학 종교인 지혜 종교(영지주의)의 폐단을 지적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참된 지시임을 강조하고 있다.

 

4) 요한서신들

요한서신중 요한1서를 제외하고 2,3서는 특정한 사람에게 보낸 서신이다. 그래서 공동서신의 범주에 제외시키는 이들도 있다. 요한 1서의 주제는 참사랑이다. 이는 요한복음 14,15장의 확대다. 신앙과 지혜와 덕의 권능은 사람에 있음을 강조한다. 당시 성행하던 영지주의에 물든 자들을 깨우치고 교화하며 예방키 위해 쓴 것으로 본다. 참된 성도, 참된 하나님의 자녀와 그 증표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의 증거를 지닌 자임을 말한다. 요한2서는 1서의 내용과 관계된다. 즉 거짓 진리를 전하는 거짓 교사에 대한 경고다. 요한3서는 교회의 질서에 대한 교훈이다. 교만하고 그릇된 어느 신자의 예를 들어 그것을 정죄하며 진리 안에서 행할 것을 강조한다.

 

5) 유다서

유다서는 주 예수의 육신의 동생인 야고보 사도의 동생 유다가 쓴 서신이다. 베드로후서와 그 내용이 흡사하여 논란이 많은 서신이기도 하다. 그러나 유다가 베드로 사도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서신서를 기록한 것으로 본다. 그 내용은 역시 이단자들의 침투와 오염을 경계하는 것이며 그들의 운명에 대해 통렬하게 경고하고 있다.

 

이처럼 공동서신의 주제와 내용은 다양하고 풍성하다. 그만큼 그 안에 깃든 하나님의 메시지가 풍요함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동서신의 내용은 오늘 현재 경건한 삶을 갈망하는 모든 성도들의 삶에 있어 각 분야의 교사가 될 것이다.



제 1 강 히브리서


1. 명칭

 

본 서신의 명칭은 한마디로 애매하다. 초기 전승은 본 서신의 명칭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거나 언급하는 경우 '히브리인들에게'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주후 2세기경 활동한 판테누스와 터툴리안 역시 본 서의 저자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지만 본 서의 표제만은 '히브리인들에게'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런 명칭이 어떻게 해서 생겼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2세기에 이 문서가 바울 서간집에 포함되었을 때 편집자가 '로마인들에게'와 같은 말에서 유추하여 이 명칭을 붙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명칭은 단순히 수신자가 유대인들 또는 좀더 정확하게 말해서 유대 그리스도인들이라는 편집자의 막연한 느낌을 반영했을 수도 있다. 이러한 명칭에 관한 불확실성은 본 서신의 역사적 배경을 고찰하는 데 있어서 불리한 점이 되어 왔다. 물론 서신의 내용에서 역사적인 언급들을 찾아내어 추론할 수도 있지만 본 서신에서 역사적인 언급들은 매우 애매하고 단편적이다. 따라서 본 서신의 명칭에 관한한 누구도 확정적인 주장을 하기는 어렵다.

 

2. 수신자

 

만일 '히브리인에게'란 명칭이 원래의 명칭이 아니라 편의상 편집자가 본 서신에 갖다 붙인 이름이라면 수신자를 밝히는데 있어서 명칭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 이 문제는 가능한한 성경 본문의 내증에 근거하여 밝혀져야만 한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보아 본 서의 수신자들은 예수님을 직접 보거나 그의 말씀을 듣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어떤 사람들의 가르침을 받아 예수님을 알고 있었던 유대인 그리스도인의 집단이었던 것 같다. 그들은 개종한 이래 계속 박해를 받았는데 특히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그들의 생활이 시작된 직후 심한 박해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저자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에서 아주 떠날 위험에 대해 경고함으로써 계속 신앙의 전진을 하도록 격려하고 있다. 또한 이들은 헬레니스트였음을 본 서신에서 추론할 수 있다. 그들은 헬라어로 된 구약성경을 알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옛 제사의식에 대한 그들의 지식은 구약성경을 읽은 데서 얻은 것이지 예루살렘의 성전 예배를 직접 접한 데서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암시되어 있다. 본 서신의 수신자들은 계속되는 박해의 위협 속에서 유대교로 회귀하려는 강한 유혹에 처한 헬라어에 익숙해 있던 유대인 기독교인들로 보여진다.

 

3. 저자


1) 바울 저자설

본 서신이 누구에게 보내졌는지 확실히 알지 못하여 또한 누가 이 서신을 보냈는지도 알 수 없다. 바울이 저자라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유세비우스 등의 신념은 동방 기독교의 판단에 영향을 주었고 궁극적으로는 4세기 말엽에 서방 교회의 판단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에서도 본 서신에 대한 바울의 저작설은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의 경우처럼 단정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본 서신에 나타난 문체와 사상의 양식은 바울의 것과 같지 않다. 즉 본 서신은 구약성경의 헬라어 역인 70인역에서만 구약성경을 인용했으며 바울의 문체보다 훨씬 유창한 헬라어를 구사하고 있다. 특히 바울 서신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독특한 대제사장 기독론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은 바울의 저자설을 부인하기에 충분하다.

 

2) 바나바 저자설

주후 220년에 글을 쓴 터툴리안은 히브리서의 저자로 바울의 동료이며 사도인 바나바를 지적한다. 이 견해는 아프리카 지역의 교회들의 일반적인 견해로 보여진다. 바나바는 초대교회의 유력한 인물로서 '권위자'(행4:36)라고 불렀으며 헬라 사상에 젖어 있던 구브로 출신의 레위인이었다. 이런 점에서 제사 제도를 구속사에 정확하게 적용하여 기술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바울과 함께 전도 여행을 했으므로 히2:3의 내용과 부합된다. 그러나 이것은 터툴리안이 지나치게 반유대주의저인 편에 있는 가짜 바나바의 편지와 성경의 사용법이 유사한 것을 보았을 뿐 초대교회 당시의 외적 증거를 확보하고 있지 못한 취약점을 가지고 있다.

 

3) 기타 저자설

419년 칼타고 회의 때 가서야 비로소 본 서에 대한 바울의 저작설이 동방에서처럼 사방에서도 전통적인 것이 되었다. 그러나 비평적 판단을 하는 주석가들은 여전히 본 서의 저자가 로마의 클레멘트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누가를 본 서의 번역자 또는 편집자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종교개혁 시대에 칼빈은 누가나 로마의 클레멘트를, 루터는 아볼로 저작설을 주장하였다. 한편 하르낙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함께 본 서를 썼다고 주장했다. 분명한 것은 저자는 제2세대 그리스도인으로서 70인역에 정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풍부한 어휘력을 가졌으며 바울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수사학적인 문체의 대가였다. 그는 성경에 능한 자로서 스데반과 빌립의 동료들이며 이방 선교의 선구자들이었던 헬라파 유대인들의 사고 방식을 이어받은 한 헬레니스트였다. 그러나 실제로 누가 본서를 썼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만이 그 진상을 아실 뿐이다.

 

4. 기록연대

 

본 서의 기록 연대에 관하여 성전이 아직 기능을 하고 있었던 시대로 보는 견해가 전통적 입장이었다. 그러나 많은 현대 신학자들이 성전 파괴 이후로 연대를 계산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크게 본 서신의 기록연대는 조기 기록설(A.D.58-60년)과 예루살렘 멸망 직전설(A.D.70년이전)과 그 이후의 설(A.D.80-90년)로 각각 나누어진다. 이와 같은 본 서신의 기록 연대는 로마의 클레멘트 히브리서 인용, 성전 제사의 진행여부, 박해 시기, 신학적 발전 여부에 따른 내, 외증에 의해 결정한다.

 

5. 목적

 

그 당시 독자들은 예전에 복음을 받아들였지만 현재 계속되는 기독교안에 대한 박해와 죄의 문제로 딜레마에 빠져 유대교로 회귀함을 통해 제사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들은 세례 이후 죄의 문제로 시달리면서 예수를 믿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는가에 대한 신학적 의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히브리서 독자들의 특별한 상황에 비추어서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 그들에게 예수를 믿는 것이 계속 우리에게 도움이 됨을 논증하기 위해 히브리서의 대제사장 기독론을 전개한다. 여기서 저자는 예수께서 현재 대제사장 되심과 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계속적으로 주고 계심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종말론적으로 한 번 영원히 효과 있는 제사로써 과거의 죄뿐 아니라 현재의 죄도 해결해 줄 수 있는 제사라는 것을 보여 주어야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자는 좀 새로운 논제로 이 문제의 해결을 전개한다.



제 2 강 야고보서


1. 서론

 

우리는 이제 신약성경 중 공동서신(General Epistles)이라고 부르는 부분의 초입에 들어서고 있다. 바울서신처럼 어떤 특정한 교회에 보내진 서신서가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진 것이요. 그리고 여러 사도들의 서신서를 묶은 것이기에 공동서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 첫머리를 장식한 서신이 바로 야고보서라고 불리우는 본 서이다. 야고보서는 흔히 '신약의 잠언서'라는 별명을 지니고 있다. 신앙의 실천, 신앙인의 삶의 지혜가 가득 담겨 있다. 이제 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1. 저자와 기록 연대

 

1) 본 서의 저자 문제

많은 사람들이 본 서의 저자가 주 예수의 육신의 동생인 사도 야고보가 아니라고 주장해 왔다. 그 이유로는 갈릴리 어부 출신이 본 서와 같은 고상한 희랍어를 사용할 수가 없다는 것이요, 그 다음 문제로는 성모마리아를 신봉하는 구교에서 제기한 내용으로 예수님에게는 사촌만 있고 형제들은 없다는 견해 때문에 비롯되었다. 즉 마리아의 '무흠수태'(Immaculat conception) 교리를 지킴으로써 마리아의 순결성과 거룩성을 보호하고자 지어낸 이론으로 이것을 '히에로니무스 설'(Hieronymian)이라 부른다.

마리아는 성령으로 그리스도를 잉태하고 출산한 후 순결을 지켰으므로 야고보와 같은 예수의 씨다른 형제는 있을 수 없고 오직 사촌들만이 있는데 성경에서 그들을 예수의 형제나 가족으로 부르는 것은 유대인들이 사촌들도 그렇게 칭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그래서 히에로니무스 설을 신봉하는 자들은 '작은 야고보'로 불리는 '알패오의 아들 사도 야고보'이며, 예수의 사촌으로서 글로바의 아내, 즉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자매인 마리아의 아들로 보는 것이다.

 

2) 본 서의 저자가 주의 동생이라는 증거

그렇다면 우리는 본 서의 저자가 어떤 이유로 예수그리스도의 동생인 초대교회 사도 야고보로 볼 수밖에 없는가? 먼저 우리는 성경이 분명히 예수의 동생들이 있음을 증거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는 점이다(마13:55). 그 중에는 분명히 야고보도 언급되어 있다.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한 약속대로 예수를 출산한 후 결혼하여 많은 자녀를 낳았으며 예수와 육신적으로 이복 관계인 동생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을 정통 개혁교회들은 믿는데 이 이론을 '헬비디우스 설' (Helvidian)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본 서의 저자가 주의 동생 야고보가 될 수 없다는 이론은 받아들일 수 없다. 그 다음 희랍어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모국어와 함께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이들이 많았다. 사도 요한도 많은 서신서를 고급스러운 희랍어로 사용치 않았는가? 그 다음 약1:1에서 '주 예수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라고 밝힌 점이다. 이 사실이 저자의 권위에 대한 확실한 증표다. 이와 같은 표현은 당시 예루살렘 교회 감독이자 사도였던 주의 동생 야고보 외에는 사용할 수 없다. 만일 그가 아니라면 다른 표현으로 자신을 밝혔을 것이다. 그 다음 본 서 전체에 나타나는 명령적인 용법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와 가장 친근하게 생활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그리스도 예수와 유사한 표현법과 내용 등이 본 서가 주의 동생 야고보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산 증표이다. 그는 주후 62년경 순교했으니 그 시기 직전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한다.

 

3. 수신자와 기록 목적


본 서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약1:1)라고 시작한 것으로 보아 각처에 흩어진 유대인 성도를 주대상으로 삼은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로페스(Ropes)라는 신학자는 "모든 성도들은 저 하늘나라 본향을 떠나 이 땅에 흩어진 순례자(Diaspora)이며 새로운 이스라엘이다"라고 했다. 비록 야고보 사도가 유대 출신 기독교인들을 염두에 두었을지라고 그 내용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공통적으로 작용된다. 기록 목적은 '시험과 갈등의 해결'을 위한 것으로 본다. 외적인 박해로 인한 시험, 교회 내 다른 이웃과의 갈등을 그리스도 예수의 교훈을 순종하고 실천함으로써 해결하라는 것이 야고보서의 중심 요지인 것이다.

 

4. 타성경과의 연관성 문제

 

루터와 같은 개혁가는 본 서를 '지푸라기'라 불렀다. 바울에게서 확인 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의 진리와 배치되는 듯한 인상을 본 서에서 받았으리라. 그러나 본 서의 내용 중 행위가 강조되는 것은 바울서신서와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충적이다. 바울서신에서 강조된 믿음 역시 실천적인 삶을 요구한다. 야고보는 다만 그것을 강조했을 뿐이다.

 

5. 본 서의 특징

 

1) 유대교적인 논증

내용이 일관된 논리적인 진전이나 사상의 체계는 없다. 다만 당시 유대 랍비와 희랍의 지혜자들의 교수법과 설교 양식이 발견된다. 즉 설교자가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그 답을 하는 식이다.

 

2) 교리 중심이 아닌 생활 중심

본 서에는 그리스도의 성육신, 속죄, 고난, 부활이 없다. 다만 일상생활에서의 신앙적인 인내, 정절, 선행 등이 강조되어 있다. 그래서 본 서를 신약의 잠언서라고 칭하는 것이다.

 

3) 예수그리스도와 흡사한 교수법

본 서에는 자연을 사용한 비유법이 자주 등장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교수법이다. 주 예수와한 지붕에서 오랫동안 지낸 주의 동생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교수법이다.

 

6. 본 서의 내용 개관

 

1. 시험과 시련에 관한 교훈(1:1-16)

2. 참예배와 그릇된 예배에 대한 교훈(1:17-2:13)

3. 무가치한 신앙 생활에 대한 교훈(2:14-3:12)

4. 참지혜에 관한 교훈(3:13-18)

5. 교회의 분쟁과 세속화에 대한 질타(4:1-12)

6. 불의한 유력가에 대한 경고(4:13-5:6)

7. 인내에 대한 격려(5:7-11)

8. 맹세, 고난, 질병, 기도, 전도에 대한 금언(5:12-20)



제 3 강 베드로전서


1. 서론

 

우리는 이제 공동서신의 두 번째 서신을 접하게 된다. 베드로의 첫 보통 서신(The First General Epistle of Peter, KJV)으로 명명된 본 서신은 공공 서신 중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내용으로 다가온다. 그리스도의 가장 밀접한 사도였던 신앙과 위로와 교훈으로 가득한 이 서신의 가치를 온전하게 아는 이들은 별로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그 나라를 위해 경건한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에게는 귀중한 격려와 소망을 주는데 있어서 본 서만큼 가치가 있는 책은 없다고 할 것이다.

 

2. 저자 문제

 

본 서는 1세기 말엽부터 교회들이 베드로 사도의 첫 편지로 인정해 왔다. 로마 교회의 교부 클레멘트, 또 유명한 폴리갑, 이레나이우스, 터툴리안 그리고 3세기의 오리겐에게 이르기까지 베드로전서가 베드로 사도의 것임을 의심치 않고 그 내용을 공공연하게 인용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몇몇 비평가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의혹을 제기한다. 첫째, 본 서에서 사용된 헬라어가 어부 출신의 베드로가 썼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고상하다는 것이요, 그 다음 본 서의 내용이 너무나 바울 사도의 사상과 흡사하다는 것이며 그리고 본 서에서 다루는 고난과 박해는 베드로 사도가 순교하기 전에는 본격적으로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러나 헬라어 문제는 본 서 5:12에서 밝혔듯이 용역자 실루아노가 대필했음이 분명하며, 그는 바울의 중요한 동반자로서(행15:40 ; 행16:19) 바울에게 깊은 신학적인 영향을 받았기에 베드로 사도의 말도 바울처럼 표현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언약과 교훈을 직접 체험한 사도로서 그분의 죽음, 고난, 부활, 승천, 재림의 언약도 직접 목도한 사도이기에 바울서신의 교리들을 산 경험으로 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도인 것이다. 또 박해와 고난 문제는 네로 황제가 다스리던 주후 62년경부터 시작되었으며, 예수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상도들은 개인적으로 위기를 느낄만큼 성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는 임박하는 말세적인 대박해를 통해 모든 성도들에게 박해와 고난에 대비한 신앙 무장을 강조했던 것이다.

 

3. 저작 시기와 장소

 

1) 저작시기

대개의 학자들은 본 서가 로마 제국의 대박해 시기 중 어느 한 시기의 직전이나 초기에 쓰여진 것으로 본다. 본 서의 분위기나 표현에서 우리는 그것을 느낄 수 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벧전4:7) 또는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벧전4:17)라고 베드로는 종말적인 대환란을 예고한다. 그렇다면 그 시기는 언제인가? 베드로 사도는 주후 68년경 대박해 기간 중 네로 황제에 의해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네로 황제에 희한 기독교에 대한 로마 제국의 첫 박해는 주후 64년경부터이다. 그 당시 네로는 기독교를 불법 단체로 간주하고 온 로마 판도 각처에서 개인적으로 사회로부터 냉대와 불이익을 당했었으며 누구나 곧 대대적인 박해가 닥칠 것을 예견했고 교회의 위기가 도래하게 될 것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본 서는 베드로 사도가 로마에 온 주후 63-64년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본다.

 

2) 저작 장소

본 서에는 그 저작 장소가 언급되어 있는데, 즉 바벨론에 있는 교회(벧전5:13)에서 기록하여 보낸다는 구절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바벨론(벧전5:13)에서 기록하여 보낸다는 구절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바벨론은 어디인가? 중세의 에라스무스, 칼빈 등은 유브라데 강 유역의 유대인 정착지인 바벨론이라고 추정했다. 또 이집트 카이로 근처인 앗시리아인 정착지가 바벨론으로 불리워졌으므로 그 곳에 관심을 두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바벨론은 당시 로마를 상징하는 기독교의 보편적인 은어라는 사실을 지적한다(계14:8 ; 계17:5). 구전에 의하면 베드로는 말년에 20여년간 로마에서 활동하다가 주후 64년 늦여름 네로의 분노의 희생물로 십자가 처형을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본 서가 로마에서 기록된 것임에 유력하다.

 

4. 저작 목적과 대상


본 서는 임박한 대박해로 인한 삶의 시련에 대한 신앙 무장을 위해 쓰여졌다. 물론 그 대상은 로마 판도 안에 흩어져 살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러나 베드로전서의 위대한 점은 다가올 박해를 소극적으로 맞을 것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박해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영광스러운 것이요, 그 상급으로 영생 복락을 맞이하게 되는 축복임을 강조하므로써 성도들에게 한없는 힘과 위안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본 서는 격려의 서신 또는 소망의 서신으로 부르는 것이다.

 

5. 본 서의 특징


1)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총

벧전1:2은 본 서의 주제다. 곧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한다. 영원한 나라를 예비하신 성부, 고난과 영광에 참예케 해주신 성자 그리고 위로의 성령에 관한 내용이 본 서 전체에 흐른다.

 

2) 그리스도인의 고난에 관한 자세

고난은 곧 닥칠 것이나 한시적인 것이요, 그 고난으로 교회와 성도들은 더욱 견고케 될 것(벧전5:11)이며 극 고난으로 성도들은  더욱 성화될 것임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위대한 고난의 증인인 베드로 사도의 빛나는 교훈은 고난에 대한 성도의 자세다. 즉 고난으로 삶의 종말이 올지라도 성도의 본분과 사명을 더 열심히 감당하라는 것이다. 열심히 선을 행하며, 열심히 봉사하며, 더 뜨겁게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벧전4:7-11). 이와 같은 자세는 오직 고난의 주 그리스도의 그 자세를 본받음으로 이룰 수 있음을 강조한다(벧전2:18-25). 그러므로 본 서는 종말때에 행할 성도의 신앙 윤리의 지침서의 가치도 지닌다.

 

6. 내용 개관

 

1. 하나님의 베푸신 은혜(1:1-12)

2. 은혜에 대한 성도의 자세(1:13-2:12)

3. 고난중에 지녀야 할 자세들(2:13-3:12)

4. 고난중에 행해야 할 일들(3:13-5:9)

5. 축복과 인사(5:10-14)



제 4 강 베드로후서


1. 서론

 

교회의 위기는 성도의 신앙적 삶의 위기에서 기인된다. 교회 구성원인 성도 각 개인의 삶의 정황이 곧 교회의 형편을 좌우한다. 그렇다면 교회 위기의 배경은 무엇인가? 베드로전서는 외적인 박해로 인한 위기에 대한 지침서인 반면 베드로후서는 이단 사설로 인한 교회의 내적 위기에 대한 경계서이다. 성도 각 개인이 거짓 교사와 거짓 교설에 물들어 반성서적인 신앙을 지닌다면 교회는 영원히 멸망하게 될 것이다.

 

2. 저자 문제

 

1) 가장 의심받는 본 서의 저자

신약성경 중 본 서처럼 저자의 진위 문제에 논란이 많은 정경은 별로 없을 것이다. 본 서는 2,3세기경부터 논란의 대상이었다. 유세비우스(Eusebius)는 베드로전서를 사도 베드로가 쓴 것으로 인정했으나 베드로후서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오리겐(Origen)도 마찬가지로 제2서신서는 다소 의심스럽다고 했다. 종교 개혁 시대에 와서도 루터(Luther)만이 베드로의 저술을 인정했고 칼빈(Calvin)이나 에라스무스(Erasmus)는 부인했다.


20세기의 학자들(진보적)은 거의가 베드로후서를 위작으로 보며, 신약성경 중 가장 후대에 기록되어 삽입한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는 대략 다음과 같다. 전서와 후서의 전혀 다른 주제의 차이. 또 문제의 차이와 표현이 전서는 매우 고상한 반면 후서는 상대적으로 수준이 낮은 것으로 보이는 점이다. 그 다음 유다서와 내용이 많이 중복되었다는 점과 교회 안에서 많은 성도들이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기대를 포기했다고 언급한 점(벧후3:4) 그리고 신앙의 조상들(사도)이 이미 잠들었다고 언급한 점과 교회가 늦게 베드로후서를 정경으로 받아들였다는 점 등의 이유를 들어 본 서가 2세기경 어느 무명인에 의해 위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2) 베드로 사도가 저자인 증거들

그러나 그와 같은 문제들이 오히려 사도 베드로만이 본 서의 저자임을 대변해 주는 증거가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베드로는 분명히 '시몬 베드로'(벧후1:1)라고 자신을 밝혔다. 만일 위작이라면 그냥 베드로 사도라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생생한 신앙의 경험담, 즉 변화산에서 주님이 변모하신 사건을 말하고 있다(벧후1:16-18). 이는 베드로 자신이 아니면 증거할 수 없는 내용이다.


그 다음 문체나 어휘가 틀린 것에 대해서는 전편이 실루아노의 대필로 작성된 것이라면 후편은 베드로 스스로 쓴 것이기에 헬라어의 수준이 다르고 문체가 다른 것으로 본다. 또 유다서를 인용했다고 했는데 사실은 베드로후서는 '거짓 교사'들을 앞으로 나타날 존재들로 말하며 미래 시제로 표현했고, 유다서는 현재 시제로 말했음을 볼 수 있다. 오히려 유다서가 베드로후서를 인용한 것이다. 그리고 어휘나 내용이 전서와 1/6이 일치한다. 이는 전서나 후서가 같은 사람이 쓴 것임을 반증한다. 그리고 권위 있고 단호하게 바울 사도가 쓴 서신서의 영감적 권위(정경성)를 인정하는 내용도 있는데(벧후3:16), 이는 사도 베드로 외에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 이와 같은 몇몇 사례만 볼지라도 본 서의 저자는 사도 베드로임이 분명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은 것이다.

 

3. 저작 시기와 장소

 

만일 본 서가 베드로가 쓴 것이라면 전서의 집필 시기인 주후 63-64년에서 순교한 주후 68년경 사이일 것이다. 벧후1:13에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옴을 암시한 듯한 내용으로 볼 때 본 서는 순교 직전인 67-68년사이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 장소도 마지막 활동 무대였던 로마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4. 대상과 목적

 

이 공동서신 역시 베드로의 첫째 서신과 마찬가지로 특정한 교회나 성도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로마 제국 판도에 있었던 모든 교회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벧후1:1에서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한 것이다. 본 서의 수신자들은 이미 기독교의 모든 진리 체계를 이해하고 믿는 자들이다(벧후1:12). 그들은 베드로 사도의 권위를 이미 알고 있고 그의 가르침에 진지한 열의와 사모심을 지니고 있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어떤 목적으로 본 서를 기록했을까? 그 목적은 크게 베드로 사도의 개인적인 문제와 당시 세계 교회의 보편적인 당면 문제 때문일 것이다. 즉 사도 베드로는 유언적으로 온 교회에 당부하고 싶은 말을 하고자 했을 것이다. "내가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벧후1:15)는 말대로이다. 그 다음 세계 각처에서 성행하는 이단적 종교 사조인 '영지주의 풍조'를 경계하고자 본 서를 쓴 것으로 추정된다(벧후2:1-3). 영혼만 귀한 것이요, 육체는 하찮은 것이니 육체로 어떤 죄를 지어도 구원과는 관계없다는 교설로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이 일어나기 시작하자 사도 베드로는 종말적인 심판을 염두에 두고 거룩한 생활을 할 것을 강조한다.

 

5. 주제

 

'신앙적인 참지식'이 본 서의 큰 주제이다. '앎, 지식'(Know, Knowledge)이라는 말이 16회나 반복된다. 끝 말도 "오직 우리 주 곧 구주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벧후3:18)고 했다. 이는 당시 특별한 영적 지시과 지혜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미혹하는 영지주의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는 예수그리스도를 닮는 생활을 강조했다(벧후1:5-7). 영지주의에 미혹된 자들이 극단적으로 무도덕한 생활을 했기에 그리스도를 닮아 거룩한 생활을 하는 것이 참지식과 지혜임을 교훈한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생활은 종말에 필히 시행될 하나님의 대심판을 염두에 두고 행해야 함을 강조한다. 신앙의 참 지식, 참지혜가 본 서의 강조점이다.


6. 내용 구성

 

1) 참된 지식의 의미(1장)

2) 거짓 지식을 전하는 자에 대한 경계(2장)

3) 참지식과 거짓 지식을 따르는 자들의 미래(3장)


제 5 강 요한서신


1. 요한서신의 서론

 

요한 1,2,3서를 요한서신이라고 한다. 이 서신들은 공동서신으로 분류되어 있으며, 사도 요한이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에 대해 이견들이 있지만, 사상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요한이 기록한 것으로 알려진 다른 문서들-요한복음, 요한 계시록-과 같은 위치를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요한서신은 세 개로 나눌 수 있는데, 논문 형식을 취한 요한 1서와 일반적인 서신 형식을 취한 요한 2,3서가 있다. 각 요한 서신들간에 보여지는 상이점도 있지만 이 서신들을 일괄적으로 연구하는 데는 별무리가 없다. 따라서 세 서신을 일괄적으로 연구함으로 요한서신이 지니고 있는 진정한 가치를 알아 보아야 할 것이다.

 

2. 요한서신의 저자와 저작 연대 

  

1) 요한 서신의 저자

본 서신들이 요한의 저작이라는 데에는 학자들간에 많은 이견들이 있다. 요한의 다른 문서들과 요한1,2,3서의 저자가 다르다고 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들은 사랑의 사도로 불려지는 요한이 이단에 대한 과격한 표현을 사용하였다는 점을 들어서 반대하고 있다. 그리고 무식한 어부 출신인 요한이 본 서에 나타나 보이는 것처럼 깊고도 오묘한 글을 썼을 리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아닌 본 서에 등장하는 '장로'요한이 기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후대의 대다수 학자들(Alford, Calvin, Meyer)은 요한이 저자라는 데 일치를 보이고 있다. 그것은 무라토리 단편(Muratorian Fragment)에서도 입증하고 있다. 그리고 초대교회의 교부들과 주교들(Tertullian, Origen, Cyprian)도 요한의 저작이라는 것에 동의를 하고 있다. 그리고 장로라고 표현한 것은 직분을 가리키기보다는 헬라어의 원뜻인 '연장자'라는 의미에서 사도 요한자신을 가리키고 있다고 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본 서신의 기독론에 대해 특히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으며, 이것은 요한복음의 사상과 비슷함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요한의 저작인 다른 문서들과 문체나 신학 사상 그리고 어휘들을 살펴볼 때 요한이 본 서신서들의 저자라는 것이 입증되고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비평학자들도 이 사실에 대해 동의를 한다고 한다.

 

2) 요한서신의 저작 연대

본 서신의 저작 연대는 저작 장소와 깊은 연관이 있다. 저작 장소에 대해 알아보면, 요한이 팔레스틴 지역에서 기록하였다고 한다. 그 이유는 요일5:21을 근거로 하고 있으나 많은 역사가들(Eusebius, Irenaeus)은 에베소에서 본 서신을 기록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본 서신은 에베소에서 요한이 기록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 연대에 대해서는 학자들간에 의견이 분분하며,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첫째는 본 서신이 요한복음보다 먼저 기록되었다는 견해이다. 둘째로는 본 서신과 요한복음이 같은 시대에 기록되었다는 것이고, 마지막으로는 요한복음보다 본 서신이 후대에 기록되었다고 하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는 없지만, 본 서신이 요한의 말년에 기록되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그 연대를 말한다면 주후 90-95년경으로 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요한이 본 서신을 기록할 당시의 상황은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이단의 공격이 있었으며,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A.D.81-96)라는 로마 황제의 박해가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본 서신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3. 요한서신의 주제와 목적

 

1) 요한 서신의 주제

먼저 요한1서에서 보여지는 전체저인 주제는 '교제'라고 할 수 있다. 요한은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사랑을 표현하는 사람은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요한1서가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물든 초대교회에 대해서는 폭탄적인 선언을 하였다'라고 평하기도 한다. 요한2서에서는 성도들의 실천적인 삶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즉 성도들의 삶은 참된 사랑을 실천하여야 하며, 한편 요한3서에서는 성도의 실천적인 삶의 모습을 그리면서 특히 주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 성도가 해야 할 의무와 책임에 대해 말을 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주제를 종합하여 본다면, 요한서신의 주제는 '사랑의 윤리에 대한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이 말하는 사랑의 윤리는 이미 예수님께서 복음서에서 보여 주신 사랑이 전통적으로 유래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사랑의 실천을 성도들은 마땅히 행해야 하는 것이다. 단지 이론으로 끝나 버리는 사랑이 아니라 몸소 실천하여 열매 맺는 사랑이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 사랑의 대상은 우리의 형제요, 이웃임을 요한은 밝히고 있다.

 

2) 요한서신의 목적

요한의 서신에는 크게 다섯 가지의 주제가 있다고 한다.

그는 먼저 서로간에 사귐이 있도록 하기 위하여, 기쁨을 주기 위하여, 죄악에 물들지 않기 위하여, 잘못된 교리들에 대해 승리하도록 하기 위하여, 구원의 확신을 지닐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기록되었다고 한다. 당시의 상황은 새로운 거짓 가르침으로 인해 야기된 상황이었다. 이 가르침으로 인해 교회 안에서는 복음으로부터 이탈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이들의 주장과 진리의 복음을 구분할 수 있는 표준을 알지 못해 우왕 좌왕하는 상황 속에서 본 서신이 쓰여졌다.


따라서 예수그리스도란 분이 어떠한 분이신지 그리고 이탈자들이 아니라 독자들 자신이 그 표준임을 알리기 위하여 본 서신이 쓰여진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그리스도는 성육신하셨으며, 참하나님이시며, 우리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구세주이심을 요한은 밝히고 있는 것이다. 결국 본 서신은 예수그리스도의 선재설을 밝힘으로써 두 가지의 성품-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면서 거짓 가르침에 대해 논박하고 있으며, 예수그리스도가 보여 주셨던 사랑을 성도들이 실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쓰여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4. 요한서신의 특징

 

1) 요한서신의 특징

요한1서는 2,3서와 같이 편지글 형식을 취하지 않고 있으며, 교훈하기 위해 쓰여진 글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이 서신은 일반적인 독자들이 아니라 교회에서 영적으로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여 쓰여진 것이다. 왜냐하면 본 서신에서 나타나고 있는 사랑이 평범한 사람들이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심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사상을 표현하는 단어는 극히 단순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심오한 요한의 사상은 '사도적 권위의식'을 잘 표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사상을 파악할 수 있기 위해서는 사도와 같이 영적인 지도자의 위치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본 서신의 문체는 히브리서의 문체와 비슷한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요한2,3서는 신약의 서신 중 가장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요한이 나타내고자 하는 사상이 함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제 6 강 유다서


1. 저자와 저작 연대

 

1) 저자

본 서신은 1절에서 밝히고 있듯이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에 의해 기록되어졌다. 본 서신은 예수님의 동생인 유다가 기록하였다는 것이 전통적인 견해였다. 그러나 이러한 것에 반박을 하고 나선 일부 학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본 서신에 나타나는 영지주의 이단은 2세기에 있었던 것이며, 본 서신은 인용한 인용구는 외경인 에녹서와 모세승천기에서 인용된 것으로 이것은 2세기경에 기록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주장은 많은 외적인 증거에 의해 묵살되어 버리고 만다. 즉 초대 교부들은 본 서신이 예수님의 동생인 유다가 기록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무라토리 정경(Muratorian Canon)에서도 유다의 저작으로 보고 있다. 내적인 증거로는 유1:1에 잘 나타나고 있다. 신약성경에서는 유다란 이름이 많이 나온다(막3:19 ; 막6:3 ; 눅3:30 ; 눅6:16 ; 행5:37 ; 행9:11 ; 행15:22). 그러나 이들 중 여러 가지 여건상으로 보아 본 서신이 예수님의 동생인 유다(막6:3)가 기록하였다고 인정하게 된 것은 4세기 이후에 와서였다. 오늘날도 본 서신의 저자가 유다라고 알고 있는 것에 는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2) 저작 연대

본 서신의 저작 연대는 학자들마다 이견이 있기 때문에 정확한 연대를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예수님의 동생인 유다가 기록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근사치에 가까운 연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즉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본 서신의 저작 연대를 2세기 중엽에서 말엽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본 서신이 예루살렘의 멸망 이전과 이후 중 어느 한 때에 쓰여졌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는데, 본 서신의 내용 중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소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멸망 이전에 기록된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주후 70년 이전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1세기 후반에 발흥되었던 영지주의에 대한 성도들이 경계를 그 주된 내용으로 삼고 있으며, 예루살렘 함락에 대한 예연적인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함락 이후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유다가 주후 70-80년에 순교하였을 것으로 추정됨으로 본 서신의 기록 연대는 주후 80-90년으로 보든지 훨씬 이후인 1세기 말엽으로 보는 것이 모든 상황에 적절할 것이다.

 

2. 특징과 목적

 

1) 특징

유다서가 공식적으로 정경으로 받아들여진 때는 아다나시우스(Athanasius)가 주후 367년에 그의 정경에 본 서신을 포함시킴으로써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공식적인 인정은 주후 397년에 카르타고 회의(Council of Carthago)에서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있었던 니케아 공의회(Nicaen Council)에서는 본 서신을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본 서신이 외경인 '에녹서'와 '모세승천기'를 인용하였기 때문이었다. 본 서신은 비록 짧은 문장으로 기록되어져 있지만 그 구조 면에서 서신으로 갖추어야 할 것들을 모두 갖추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본 서신의 마지막 축도 부분이 바울이 기록한 로마서(롬16:25-27)에 기록되어 있는 부분과 상통한다는 사실을 들어 유다가 바울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을 하기도 한다. 유다서의 내용이 난해하기 때문에 본 서신 자체만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다. 그러나 짧은 내용 속에 구약의 많은 인물들이 열거되어 있으며, 이단자들에 대한 태도가 아주 논리저이고 단호한 것도 본 서신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외경을 인용한 것에 대해서는 크게 문제삼을 필요는 없을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바울도 이방 시인의 말을 인용하기도 하였으며(행17:28), 랍비의 문헌인 미드라쉬르 인용하기도 하였던 것을 볼 수 있다(고전10:4). 


2) 목적

유다서는 교회 내에서 일고 있는 이단들의 정체와 그들에 대한 성도들의 올바른 태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즉 유다는 교회 내에 침투하여 성도들의 신앙을 혼란하게 하며, 공동체를 위협하는 이단자들을 경계하고, 믿음의 반석 위에 굳게 서야 함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본 서신은 영지주의자들로부터 교회를 보호하며 성도들의 신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그 주된 목적이라고 한다.


본 서신은 베드로후서와 마찬가지로 영지주의자들의 침입에 대해 기록하고 있으며, 수신자들에게 믿음의 도를 위하여 싸울 것을 말하고 있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은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였다. 그래서 기존적으로 받아들인 성도의 구원에 대해 의심을 가지게 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의 값없이 주신 은혜를 하나의 색욕거리로 만들고 말았다. 이러한 가르침에 현혹되는 성도들이 있음을 알고 유다는, 이들의 종말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성도들이 이들의 위협으로부터 헤어나오기를 바랐던 것이다. 본 서신의 목적은 유1:3유1:4에 잘 나타나고 있다.



3. 유다서에 나타난 예수그리스도와 내용 그리고 주제 

  

1) 유다서에 나타난 예수그리스도

유다는 당시 만연해 있는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 반박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이원론적이다. 즉 물질은 악하고 영은 선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은 육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하면서 도덕적으로 방탕한 모습을 보였다(유1:4). 그래서 유다는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말한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은 종말에 심판하실 심판자로서의 예수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다(유1:15). 그리고 이단자들로부터 성도들을 영원까지 보호하여 주시며(유1:24). 언제나 긍휼을 베푸시는 예수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다(유1:21).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하나의 색욕 거리로 만드는 이단자들과는 대조적인 모습인 것이다. 유다가 말하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생활할 때 이 세상으로부터 오는 어떠한 유혹이라도 굳건히 이기며 신앙을 지킬 수가 있는 것이다.


2) 유다서의 내용과 주제

본 서는 크게 세 가지의 교리를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먼저 하나님께서 가지신 권위와 예수그리스도의 우월성 그리고 믿음의 실천이 믿음을 지키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적인 사고를 통하여 이단자들의 주장에 반박하고 있다. 본 서신의 내용은 이단자들의 특징적인 면과 그들이 종말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반드시 받을 것이라는 확신적인 면 그리고 이들에 대한 성도들의 바른 자세를 말하고 있다.


따라서 본 서선의 주제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이단자들의 가르침에 미혹되지 말고 사도들의 가르침으로 인한 믿음의 도를 위하여 싸울 것을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성경 66권 전체가 그러하듯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속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여기서 말하는 믿음의 도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교회사 시대 구분


교회사의 시대 구분

1. 고대사

  1) 사도시대 (AD 1~100년, 교회 건설기) - 그리스도~사도들의 활동 종료까지

     특징 - 기독교가 각지로 전파되었고 신약 성경이 기록되었다. 

     성도들이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고 바울의 개종과 선교로 

     기독교가 세계적 종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교회를 향한 박해가 시작되었고 교회의 변증이 발달되게 되었다.


 2) 사도후시대 (속사도시대 AD 100~313년, 교회 핍박기) - 콘스탄틴 대제의 기독교 공인까지

     특징 - 박해와 순례가 지속되었고 가톨릭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교부들이 등장했고 사상이 발달되었다. 

     정경이 집성 되었고 10대 박해가 일어났다. 

     사상적인 공격과 이단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3) 니케아회의시대 (AD 313~590년, 신학 조성기) - 초대 교황 그리고리우스 1세 즉위까지

     특징 -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공인되었다 (395년) 신학 논쟁이 열기를 더해 갔고 교황제도로 국왕권의 약화가 초래되었다.

     교회의 속화로 수도원 운동이 일어났다.

     밀라노 칙령(313년) 이 반포 되었고 사도 신경이 인준(381년)되었다.
   
    삼위일체의 존쟁과 펠라기우스의 논쟁이 일어났다


초대교회사

1. 초대교회사 범위와 시대구분

2. 초대교회사 문제


제1부 초대교회 배경


제1장 초대교회의 역사적 배경

1. Greco-Roaman 배경

(1) 로마제국: 지리적 및 정치적 환경

(2) 헬라적 배경

  1) 초기 헬라철학(Pre-Socratic Philosophy)

  2) 소크라테스(Socratic Philosophy: B.C.469-399 )

  3)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Post -Socratic Philosophy)

  4) 중기 플라톤주의(Middle Platonism)

(3) 스토아주의

  1) 스토이즘의 역사 개관

  2) 스토아 철학의 가르침

  3) 스토아주의와 기독교

(4) 필로(Philo)

2. 유대주의 배경

(1) 다윗에서 알렉산더까지

(2) 마카비(the Maccabees)

(3) 회당과 산헤드린

(4)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5) 분산된 유대인(the Dispersion)

3. 제국의 종교

4. 요약


제2부 2세기와 초대교회 사상의 정초


제1장 초대 기독교 박해

1. 제 1 차 박해기간(A. D. 64-96)

(1) 네로황제 이전

(2) 네로 황제 박해

(3) 도미티안 황제 박해

2. 2차 박해기간(A. D. 98-249)

(1) 트라얀 황제 치하의 박해

(2) 히드리안 통치하의 박해

(3)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치하의 박해

3. 제 3차 박해 기간(A.D. 249-313)

(1) 데시우스 칙령과 전국적인 박해

(2) 디오클레티안 황제 박해

(3) 갈레리우스 황제

4. 콘스탄틴 황제와 기독교 공인

5. 요약 : 교회 생활의 변화


제2장 속사도

1. 로마의 클레멘트

2. 안디옥 감독 이그나티우스

3. 서머나 감독 폴리갑

4. 기타 속사도 문헌들

5. 요약


제3장 기독교 변증가

1. 아테네의 콰드라투스

2. 아리스티데스

3. 신앙의 변호자 저스틴 마터(100-165)

4. 타티안

5. 기타 헬라 변증가들

6. 요약


제4장 이단의 발흥과 발전

1. 이단의 역사적 배경

2. 영지주의

(1) 영지주의의 성격과 특징

(2) 영지주의 자료

(3) 영지주의의 기원

(4) 영지주의의 종류

  1) 이집트계

  2) 시리안계

  3) 폰틱계

  4) 유대주의계

(5) 영지주의 평가

3. 영지주의의 대표적 실례

(1) 발렌티누스

(2) 마르시온 주의

  1) 신약과 구약의 대립

  2) 마르시온의 기독론과 구원론

  3) 마르시온의 영향

4. 몬타니즘

(1) 배경

(2) 가르침

(3) 몬타니즘과 교회

(4) 영향 및 쇠퇴

5. 요약


제5장 교회의 응전

1. 신경의 발달

2. 정경의 형성

3. 감독제도의 발달


제3부 3세기와 기독교 사상의 확립


제1장 이레니우스와 소아시아 신학

1. 이레니우스이 생애

2. 이레니우스의 작품

3. 이레니우스의 총괄 갱신(복구)

4. 이레니우와 전통

5. 요약 및 평가


제2장 라틴 신학

1. 터툴리안과 서방신학

(1) 터툴리안과 몬타니즘

(2) 터툴리안의 작품

(3) 터툴리안, 이성, 신앙, 철학

(4) 터툴리안의 세계관

(5) 터툴리안과 성서이해

2. 키프리안과 북아프리카 교회

(1) 키프리안과 데시우스 박해

(2) 키프리안과 교회의 일치

(3) 키프리안 대(對) 노바투스

(4) 북아프리카 교회와 로마교회의 대립

3. 요 약


제3장 알렉산드리아 신학

1.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1) 클레멘트의 작품

(2) 클레멘트, 철학, 이성

(3) 클레멘트의 성경해석과 신이해

(4) 클레멘트와 역사이해

(5) 클레멘스 사상 요약

2. 오리겐

(1) 오리겐의 성장 배경

(2) 명성을 더해가는 오리겐

(3) 팔레스틴에서의 작품 활동

(4) 제일원리와 콘트라 셀수스

(5) 오리겐의 신관

3. 오리겐 이후 알렉산드리아 신학


제4부 4-5세기와 정통의 확립


제1장 삼위일체 논쟁

1. 삼위일체 논쟁의 역사적 배경

2. 단일신론

3. 아다나시우스 대 아리우스 논쟁

(1) 아리안 주의

  1) 급진적인 아리안 주의(Anominism)

  2) 반(semi)아리안주의 - 성자의 본질은 성부의 것과 유사

4. 니케아 회의 신조

5. 니케아회의 이후의 아리우스 논쟁

6. 콘스탄티노플 회의


제2장 기독론 논쟁

1. 아폴리나리우스 주의(Apollinarianism)

2. 네스토리우스주의(Nestorianism)

(1) 논쟁의 핵심

(2) 에베소 회의와 평화안

3. 유티키스주의(Eutychianism)와 단성론(Monophysite)논쟁

4. 칼케돈 이후 기독론 논쟁

5. 기독론 논쟁 요약


제 5 부 초대교회 위대한 인물들


제1장 위대한 지도자들

1. 탁월한 행정가 앰브로스

2. 성경번역의 선구자 제롬

3. 황금의 입 요한 크리소스톰


제2장 어거스틴의 생애와 사상

1. 어거스틴의 성장 배경

2. 어거스틴의 사상적 배경

(1) 마니교

(2) 신플라톤주의

(3) 어거스틴의 회심

3. 어거스틴 사상

(1) 어거스틴의 인식론

(2) 어거스틴의 교회관

(3) 어거스틴의 인간이해

4. 어거스틴의 역사이해

5. 요약 및 평가


제 6 부 중세로의 준비


제 1 장 수도원 제도의 발달

1. 최초의 수도승들

2. 파코미우스 수도원

3. 대 바실과 동방수도원

4. 서방 수도원 발흥

5. 요 약


제2장 교황제도의 발달

1. 로마교회의 부상

2. 세르디카 서방교회

3. 교황제도의 확립


제 3 장 초대교회 세계선교 초석들

1. 아일랜드 선교사 패트릭

2. 스코틀랜드 선교사 콜럼바


제4장 결 론



서 론


1. 초대교회사 범위와 시대구분

외형적인 기간을 중심으로 할 때 초대 교회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던 주전 4년부터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Romulus augustus)황제가 폐위되어 로마제국이 멸망하던 476년까지로 잡는다. 내면적인 교회의 역사를 중심으로 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할 때부터 그레고리 1세가 즉위하기 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제 1세기를 사도시대라고 할 수 있다면, 제 2세기 전반은 속 사도시대, 제 2세기 중엽은 변증가들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제 3세기는 기독교 사상의 확립기라고할 수 있다. 3세기에 들어서면서 정통신학이 교회에서 서서히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제 4-5세기는 기독교 역사의 분깃점이다. 신학적으로는 기독교 정통사상의 형성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외형적으로는 교회가 세속화로 달려가는 전환점이기도 한다. 일련의 종교회의가 열려 교회에 분열의 요인이 되어왔던 신학적인 논쟁들을 종결지으려는 시도가 있었다. 325년의 니케아 종교회의를 시작으로 콘스탄티노플 회의(381), 에베소 회의(431), 그리고 칼케돈 회의(451)가 열려 정통신학의 초석을 놓았다.

초대교회사는 사도-속사도-변증가-소아시아 신학-라틴신학-알렉산드리아 신학-삼위일체 논쟁-기독론 논쟁-어거스틴으로 이어지는 사상적인 맥을 이해하면서 역사적인 흐름과 초대교회 역사를 이어온 사상가들을 함께 연구할 필요가 있다. 때문에 박해와 이단들의 연구, 수도원 운동의 발흥, 감독제도의 발달, 그리고 초대교회 선교운동은 초대교회사에서 필수적으로 다루어져야 할 주제들이다.


2. 초대교회사 문제

초대교회사를 총체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해 역사구성의 thesis로 삼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두 말할 것 없이 초대교회 최대의 주제였던 로고스다.
다시 말해 로고스는 초대교회를 이해하는 중심 열쇠이다.
1세기부터 진행된 기독교 박해, 2세기의 속사도, 변증가, 이단, 3세기의 소아시아, 알렉산드리아, 서방신학을 형성한 교부들, 4세기부터 진행된 삼위일체 논쟁, 기독론 논쟁, 이 문제들을 니케아회의(325)부터 콘스탄티노플 회의(680)에 이르기까지 로고스는 역사의 중심에 있었다.

당시 로마의 최대 종교 스토아주의는 점점 더 인격적인 종교로 탈바꿈했고 그 핵심에는 로고스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스토아 철학과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달랐고, 로고스에 대한 사상도 서로 차이가 있었지만, 스토아 철학과 기독교는 모두 로고스 사상을 공유하고 있었다.

스토아 철학에서 로고스 사상이 차지하는 그 이상으로 당대 헬라철학 특별히 플로톤주의에는 로고스 사상이 더욱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런 로고스 사상은 기독교가 잉태되었던 그 시대에 영향력을 떨치고 있던 중기 플라톤사상과 그 후에 나타난 신플라톤주의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때문에 플라톤주의는 기독교로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했다.

로고스의 성육신의 준비는 비단 그레코-로만 배경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다. 유대주의도 예외는 아니다. 수많은 구약의 선지자들의 예언들은 로고스의 오심을 예표하고 있는 것으로 믿었고, 그 때문에 당시 메시아 고대사상은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이런 성숙한 시대 속에서 로고스가 오셨던 것이다. 이처럼 초대기독교 핵심주제는 로고스이다.

이 로고스 사상은 예수님 당시는 물론 기독교가 태동되었던 제 1세기의 최대 주제였다. 제자들은 물론 성경의 모든 저자들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안에 거하신 그분이 인간의 구주이시며 인류의 구원자라고 믿었다. 또한 로고스는 변증가들에게도 최대의 주제였다. 로마의 클레켄의 서신에서, 이그나티우스의 일곱 서신에서, 폴리갑의 작품에서, 그리고 그 외 수많은 속 사도들의 작품과 사상에서도 로고스가 핵심에 있었다. 속 사도들의 로고스 사상이 점점 더 발전되어 하나의 틀을 갖기 시작한 것은 변증가들에 와서이다. 변증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주제는 로고스였다. 이 로고스 사상을 통해 그들은 기독교와 헬라철학을 연계시켰고 모세와 플라톤을 꿰뚫었으며 예루살렘과 아테네를 연결하였던 것이다.

로고스 사상은 2세기 이단들을 이해하는 열쇠이다. 2세기 역사무대에 등장한 일련의 이단들, 즉 영지주의, 발렌티누스, 마르시온이 갖고 있던 중심주제 역시 로고스였다. 기독교를 헬리철학의 틀 속에 뜯어 고친 나머지 기독교를 아예 헬라화시켜버린 영지주의자들의 한결같은 특징, 곧 영육의 이원론 사상은 플라톤 사상에 뿌리내려져 있다. 이들은 일부 플라톤 사상을 기독교화 시켰던 변증가들이나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달리 아예 전 헬라철학을 기독교화 하려고 하였다.

이런 일련의 도전을 맞은 교회는 전통적인 사도들의 신앙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고 그것들을 통해 잘못된 신앙을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고난과 부활과 재림을 담은 로마신경이 태동되었고, 이것이 오늘날의 사도신경 형태로 발전되었다. 정경형성이 촉진되고 감독제도가 발달하고 신경이 발달되면서 2세기 말엽에 들어서 초대교회는 하나의 틀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감독의 발달로 교구가 구체적으로 형성되었고 지역의 특성을 반영하는 신학자들이 등장하였다. 후대인들은 이들을 교부라 불렀다. 최초의 교부는 이레니우스였다. 이레니우스의 사상을 한마디로 집약한다면, 구속사와 성서적인 전통 및 언약사상에 근거한 로고스 총괄갱신 사상이다. 인류의 구속사는 창조와 더불어 시작되었고 종말까지 계속된다는 것이며, 로고스의 총괄갱신이 그 역사의 정점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레니우스의 역사관은 어거스틴의 역사관, 종교개혁 특히 칼빈의 역사해석의 원형이 되었으며, 종교개혁 이후의 콕세이우스를 비롯 많은 계약 신약자들의 계약신학도 이레니우스에게 상당한 빚을 지고 있다. 이레니우스의 로고스 사상은 요한복음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헬라철학의 로고스 사상과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또한 로고스는 알렉산드리아 학파를 이해하는 핵심열쇠이다.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원형은 저스틴에게서 찾을 수 있지만 필로에게까지 올라간다. 필로의 사상이 저스틴에게 와서 좀 더 성경적인 개념으로 발전되었고 이 저스틴의 로고스 사상이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원형이 되었다. 저스틴이 갖고 있던 진리라는 측면에서의 기독교와 헬라철학의 연속성이 클레멘트와 오리겐의 사상속에서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터툴리안이 헬라철학이야 말로 이단의 원천이라고 개탄한 것에 반해 알렉산드리아 신학자들은 헬라철학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확신했다.

터툴리안 역시 당대의 흐름을 주도했던 로고스 사상을 피할 수 없었고, 라티의 법률 용어를 동원하여 로고스론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터툴리안은 로고스의 성육신을 약화시키는 수많은 이단들 특별히 양태론자들에 맞서 참으로 인간이시고 참으로 하나님이신 로고스를 변화시키는데 온 정열을 다했다.

이것은 또한 4세기부터 6세기까지 초대교회사의 핵심 주제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과연 하나님이신가? 라는 주제와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참으로 인간이시고 참으로 하나님이시라면 인성과 신성이 예수의 한 인격 안에 어떻게 연합되었는가?

아다나시우스가 수없는 추방을 받으면서도 일편단심 아리우스에 대항하여 니케아 신앙을 변호하려고 했던 것도, 교회가 이 둘의 세력 다툼 속에서 양편가운데 어느 한편에 위치시키기 위해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정황도, 역시 로고스 때문이었다. 어쩌면 논쟁의 와중에서 고투해야 했던 4, 5, 6세기 교회회들에게 로고스는 생사문제였는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는 오류 많은 인간들의 이기적인 결정들을 거룩한 방향으로 진행시켜 주셨던 것이다.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출발했던 니케아 회의가 기독교 정통의 영원한 토대를 닦는 기회가, 시릴과 그 일행의 야심적이고 이기적인 결정이 에베소 정통으로 정착되는 계기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교회의 머리이신 살아계신 로고스께서 그 살아계심을 교회의 역사 속에서 선포하신 것이다. 역사에 초월하여 계시면서도 역사에 개입하신 그 로고스는 이 시간도 여전히 인류 역사와 나 자신의 역사에도 개입하고 계신다. 그리고 그 역사하심은 지금 이 시간에도 계속되는 것이다.




제1부 초대교회 배경


제1장 초대교회의 역사적 배경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여 하심이라.”(갈 4:4).

바울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설명하면서 “때가 차매”라는 말로 당시의 역사적 성숙을 표현하고 있다. 초대 교회사가 에버릿 퍼거슨(Everett Ferguson)도 갈라디아서의 “때가 차매”라는 말을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 속에서 이해해야 된다고 보았으나 외형적인 환경에서만 그 요인을 찾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는 두 가지를 지적한다. 첫째, 당시의 로마를 통한 정치적인 평화를 말한다. 둘째, 언어적인 준비를 지적하고 있었다. 당시 정치적으로는 로마가 세계를 통일하고 있었지만 헬라어가 세계를 통일하고 있었다. 헬라어는 의사소통, 사상, 사고방식, 교육수준, 이해 방식의 통일을 촉진시켰으며 또한 헬라 철학, 문학 그리고 종교의 확산을 가져다주었다.

따라서 “때가 차매”라는 바울의 말은 현대의 폴 틸리히가 지적하듯 내적인 시간과 외적인 시간 모두를 포함하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히스토리에(Historie)와 게쉬히테(Geschichte), 사건(event)과 행위(action), 그리고 외면적인 차원(the outer dimension)과 내면적인 차원(the inner dimension)이 바로 그것이다. 바울이 말한 바 ‘때가 찼다’는 말은 우리가 흔히 물리적, 양적 시간 개념에서 말하는 크로노스(chronos)라는 외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정시(the right time)를 의미하는 질적인 시간 카이로스(kairos)라는 내적인 면에서도 그리스도의 오심은 완벽하게 준비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두 가지 측면이 완벽하게 준비되었을 때 오셨다는 사실이다.


1. Greco-Roaman 배경

초대 기독교의 헬라-로마배경에 대한 연구는 주전 330년부터 주후 330년간을 대상으로 한다. 이 기간은 헬라시대(the Hellenistic Age)로 알려졌으며 이 헬라 시대는 다시 2기로 나눌 수 있다. 제 1기는 알렉산더부터 주전 약 200년까지로 헬라문화가 형성되고 팽창하여 지중해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쳤던 시대이다. 제 2기인 주전 200년 후부터는 이집트, 팔레스틴, 시리아 그리고 아시아에 토착문화가 발흥하면서 헬라적인 요소들이 움츠려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 황제부터 콘스탄틴 대제까지는 로마가 지중해를 완전 지배하면서 영향을 미쳤던 시대로 이 시대를 로마시대(the Roman Age)라고 부른다. 이시기의 제1기는 주후 2세기까지를 말하며 2세기부터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할 때까지를 제2기라고 할 수 있다. 로마의 영향을 2세기에 최고 정점에 달하다 2세기 이후 바바리안 족이 침입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1) 로마제국: 지리적 및 정치적 환경

로마제국은 긴 역사를 자랑하였으니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났을 때 이미 로마는 약 75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처음 서부 이탈리아 출발한 로마는 읍, 도시 그리고 작은 국가로 점차 성장했다. 주전 256년 로마가 설립된 지 50년 후에, 이탈리아 반도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 후 바다를 건너 서쪽으로 뻗어나가 10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시실리(Sicily), 코르시카(corsica), 사르디니아(Sardinia), 카르타고(Carthage)와 스페인의 대부분을 정복했다.

주전 27년까지 모든 로마 영토는 공화국이라 알려진 통치형태에 의해 다스려졌으며 매우 강력했던 로마시 의회는 어떤 한 개인이 통치권을 장악하지 않았다. 주전 27년에, 즉 약 100년 동안 지속된 비참한 내란(civil war) 후에 로마의 전권은 쥴리어스 시이저(Julius Caesar)의 조카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Gaius Octavianus)의 수중에 들어갔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제국의 역대 황제들 중에서 첫 번째이며 가장 위대한 아우구스투스 시저(Caesar Augustus)로 알려졌다. 이 아우그스투스 시저가 바로 누가복음 2장 1절에 기록된 시이저 이다. 그와 함께 공화국도 끝이 나고 제국이 시작되었다. 아우구스투스 시저에 의해 정착된 로마의 평화가 200년 이상 지속되었다. 이러한 평화(Pax Romana)는 모든 방면에서 문화의 발전을 촉진시켜 문학, 건축 그리고 조각 등에 위대한 업적을 낳았고, 법률연구가 대단히 발달했으며 경제가 번영했다. 모든 곳에서 로마군대는 로마제국의 그리고 법과 평화의 상징이었다.


(2) 헬라적 배경

로마라는 하나의 거대한 세계 속에는 헬라 사상이 깊숙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지중해를 지배했지만 문화적으로는 헬라가 지중해를 지배하고 있었다.

기독교와 헬레니즘과의 관계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 기독교가 발흥했던 당대의 역사적, 문화적 상황을 연구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상당히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헬라사상은 전기와 후기로 구분되는데, 전기는 다시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 탈레스부터 파르메니데스 (2) 소크라테스(399 B. C) (3) 플라톤(d. 347B. C) 과 아리스토텔레스, 제 1기의 관심은 세계의 본질이었고 제 2기의 관심은 인간, 그리고 제 3기의 관심은 우주의 본질과 인간의 본질을 한 문제로 다루는 것이었다. 그리고 후기는 스토아주의(Stoics), 에피큐리안주의(Epicurians), 신피타고리안주의(Neo-Pythagoreans), 회의주의(Skeptics)그리고 중기 플라톤주의(Middle-Platonists)를 포함한다. 기독교 사상에 영향을 미친것은 바로 후기 이다.


1) 초기 헬라철학(Pre-Socratic Philosophy)

탈레스부터 파르메니데스까지의 헬라 철학자들은 세계의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로 고민했다. 세계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일련의 고대 헬라철학을 회의주의(Skepticism)과 구별하기도 한다.

탈레스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물에서 발생했다고 믿었다. 탈레스의 제자 아낙시맨더(Anaximander)는 물이 아니라 무한 대기(the boundless atmosphere)가 만물의 근원이라고 가르쳤다. 주전 500년경 소아시아의 에베소에 살았던 헤라클리투스(Heraclitus)에 의하면 우주의 근본 요소는 불이며 불에서 만물이 발생했다. 불에서 공기가, 공기에서 물이, 물에서 땅이 나왔다. 그후 땅은 물로, 물은 공기로, 공기는 불로, 그래서 끝없는 변화의 회전(the endless cycle of change)이 계속된다. 이들의 변화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결합이 이 세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다양한 변화를 야기시킨다. 그러나 이들 중에 어느 것도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헤라클리이투스와 동시대에 살았던 파르메니데스(Parmenides)는 헤라클리투스와는 정 반대로 이 세상에는 전혀 변화가 없다고 말했다. 그에게 존재하는 것 한 가지는 존재 그 자체(Being itself)이며, 우리가 경험하고 관찰하는 모든 변화는 단지 그렇게 나타나는 것뿐이다.


2) 소크라테스(Socratic Philosophy: B.C.469-399 )

주전 450년 전 아테네(Athens)에 살았던 소크라테스로 말미암아 헬라 사고에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주로 자연과 세상의 본질에 관심이 있었으나 소크라테스에 와서는 세상의 본질보다도 인간의 자질(quality)에 더 많은 과심을 기울였다.

헬라-로마시대, 특별히 소크라테스 시대에 와서 교육받은 많은 사람들에게 철학은 하나의 종교였다. 오늘날과 같이 이론적 연구나 형이상학적 연구가 아니라 삶의 방식(a way of life)으로 그 목적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는데 있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에게 철학은 단순한 이론체계가 아니라 하나의 삶의 태도이며 삶의 방식이었다.


3)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Post -Socratic Philosophy)

고대 그리스에 모든 시대를 초월하여 가장 탁월한 두 철학자가 나타났으니 그들이 바로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Plato, B.C.429-347)과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B.C.384-322)이다. 소크라테스의 인간사고 혁명이 영향력 있는 일련의 다듬어진 철학체계로 열매를 맺은 것은 이들에 와서이다.

이들은 세계를 전체로 이해하려는 이전 철학자들의 관심과 소크라테스의 인간 이해를 하나로 연합시켰다. 플라톤은 두 개의 세계, 즉 이데아의 세계와 현상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데아의 세계(the world of the ideas)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말한다. 플라톤에게 이데아는 본질적인 실제(ousia)로서 사물의 참된 본질이다. 이데아의 개념은 초월적인 개념으로 형이상적적인 의미를 지니며 인간 경험의 영역을 넘어서 존재하는 것이다. 피라밋의 정상에는 성서적 신개념과 근접한 선의 이데아가 있다.

인간의 이성에 상당한 의를 부여하였던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인간의 이성적 능력에 의해 다른 생명체와 구별되므로 인간의 지고의 선은 이성적인 삶이다. 사람은 순수 이성과 실천 이성 모두를 지니고 있다. 순수 이성이란 생각하고 이해하며 명상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며, 실천 이성이란 행동에 적용된 이성을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행복이란 지적 미덕과 도덕적 미덕을 포함한다.

관념적이었던 플라톤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세상과 개벽적인 것에 관심을 가졌다. 플라톤이 모형에서 출발하여 개체로 진행해 나간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체에서 출발하여 보편으로 진행하여 나갔다. 개체와 보편의 불가분의 관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과 육체의 관계에 대한 이해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지대한 공헌 가군데 하나는 플라톤의 이원론적 인간 존재를 종합하여 하나로 연합시켰다는 사실이다. 중세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집대성하여 신학적으로 체계화시켰는데 개체와 보편, 자연과 은총, 이성과 계시의 통합이 바로 그것이다. 플라톤의 인식론에 따르면 지식은 감각적 경험(sense experience)에 의존하지 않으나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사람은 감각에 의해 개체를 이해한다. 지성에 의해 인간은 보편을 배우며, 이 지식은 감각을 통해 얻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안간 사고에 미친 영향은 너무도 컸으며 그 영향은 고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철학 학파를 통해 후대에 계승되어 왔으나 그의 제자 알렉산더 대왕이 철학자들의 관심을 실천적 도덕으로 돌리면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적 세계관은 뒷전으로 물러서게 되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중세에 복고되어 기독교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은 플라톤 사상과 함께 수천년 동안 기독교 사상을 지배하여 왔다.


4) 중기 플라톤주의(Middle Platonism)

주전 1세기에 플라톤의 연구가 복고되어 육체와 영혼의 구분과 같은 이원론적 사상이 다시 등장하면서 교부신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며 이것은 중세 신학의 기초가 되었다. 중기 플라톤 사상가들은 플루다크, 아풀레이우스, 막시무스(Maximus of Tyre) 그리고 알비누스(Albinus)이며, 이 중기 플라톤주의는 기독교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신 플라톤주의에로의 교량적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중기 플라톤주의는 2세기 기독교 변증가들 즉 저스틴 마터, 타티안, 아테나고라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의 저술활동에 지적 배경을 제공하였다. 퍼거슨은 히비스서에서 조차 플라톤주의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다름과 같은 몇 가지 이유 때문에 기독교 철학과 기독교 인식론을 정립하는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어 왔다.

첫째는 영적인 영역과 물질적인 영역의 구분이다. 하나님은 영적인 영역에 속하고 세상은 물질적인 영역에 속하며 인간은 양 영역을 연결한다. 둘째는 섭리론으로 인간과 절대자와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도움을 준다. 셋째는 영혼 불사개념으로 기독교와 가르침과 유사하다. 마지막으로 신개념의 정립을 들 수 있다. 이것은 특별히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두드러지는데 신은 물질이 없는 하나의 형상으로 그 자체와 완전한 존재이다. 비물질적인 실체(non-material reality)에 대한 플라톤주의의 강조는 성서적 신개념을 설명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플라톤의 영향을 반영하는 후대 일부 기독교 철학자들은 플라톤이 말한바 이데아의 개념과 성경의 로고스 개념을 연결하여 플라톤주의가 제시하는 우주적 종교사상(the idea of a cosmic religion)을 통해 인간의 종교성을 설명하려고 한다.

이런 기독교와 철학과의 유사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호간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플라톤이 말하는 궁극적인 존재는 비인격적인 존재인 것에 비하여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인격적 존재라는 점이다. 두 개의 중요한 이단인 영지주의와 아리안주의(Arianism)는 3세기 전후에 복음의 자리를 심각하게 위협했는데, 이 두 개의 이단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사상을 따라 인간과 세계를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되었다.


(3) 스토아주의

스토아 철학은 플라톤주의와 함께 그리스도와 초대교회 시대에 로마에 가장 성행하던 철학체계로, 폴 틸리이에 의하면 플라톤 사상보다도 기독교에 더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의 근본적인 사상과 스토아 철학의 가르침과는 비슷한 점이 많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로고스 교리이다. 이것은 초대 기독교의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의 역사를 연구하면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스토아철학에서 로고스는 모든 곳에 존재하는 신적 능력(the divine power)을 말한다. 스토아주의에서는 이 말이 세 가지 면은 내포한다. 첫째 로고스는 자연법(the law of nature)으로 모든 자연이 운행하는 원리이다. 따라서 로고스는 신적 존재이며, 창조적인 신적 능력이다. 둘째 로고스는 도덕법(the moral law)을 의미하며, 이것은 칸트가 “실천이성”이라 부르는 것으로 인간에게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셋째 로고스는 실체를 인식하는 인간의 능력을 말하며 폴 틸리히는 이것을 “순수이성”(theoretical reason)이라 불렀다.


1) 스토이즘의 역사 개관

스토이즘의 역사는 대체로 초기 스토아(the Early Stoa), 중기 스토아(the Middle Stoa) 그리고 후기 스토아(the Later Stoa)등 셋으로 대별할 수 있다.

초기는 대체로 주전 300-200년 까지의 기간으로 대표적인 인물은 스토아 학파의 창시자인 제노(Zeno of Citium ; 335-263 B. C), 크린테스, 크리시푸스,등이다.

중기는 150 B. C.부터 기독교가 시작되던 시기까지를 말하며 대표적인 인물로는 파나에티우스(Panaetius of Rhodes; 185-109 B. C)와 포시도니우스를 들 수 있다.

그리고 후기는 잘 알려진 네로 시대에 활동하던 관용론의 저자 루시우스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A. D. 1-65), 로마의 에펙터투스(Epictetus; A. D 50-135)그리고 명상록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 D. 121-180)를 들 수 있다.


2) 스토아 철학의 가르침

초기 스토아는 첫째로 유물론이다. 스토아주의에 따르면 비물질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하나님, 세계 그리고 심지어 언어도 물질적이다. 둘째로 스토아주의는 범신론이다. 스토아 철학은 만물에서 신적 실체를 발견하는 범신론에 기초한다. 셋째로 그들은 또한 모든 실체가 하나의 궁극적인 존재 형태로 구성되었다고 보는 일원론자(monist)이다. 일원론적 사고는 만물의 근원은 불이라고 보았던 헤라클리투스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스토아주의는 하나의 종교이며 철학이다. 스토아주의가 특성상 철학이기 때문에 단지 교육받은 지식층에만 수용되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스토아주의가 요구하는 것은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제국에서 우수한 지식층이 주로 스토아 철학을 따랐다.


3) 스토아주의와 기독교

용어상 많은 유사성이 있지만 스토아 철학과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관에서 출발하고 있다. 스토아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신관이다. 스토아주의는 완전히 인격적인 하나님을 갖지 않았으며 그들이 말하는 신은 단지 내재적인 신일뿐이다. 성경의 하나님은 세상의 창조자이시기 때문에 스토아철학의 범신론이 말하는 신과 결코 동일시 될 수 없다. 더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로고스의 성육신의 개념은 찾아보기 힘들며 단지 그들이 말하는 성육신이란 우리 각자가 자기 안에 로고스의 일부를 가졌다는 개념일 뿐이다.

또한 스토아 철학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격적인 죄의식이나 죄사함이 없으며 개인적인 불멸 개념도 없다. 사람이 죽으면 그의 선적 부분은 전체로 돌아간다. 스토아철학에서 말하는 이웃을 향한 도덕적 의무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기 희생과 능동적 사랑”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존중”을 도덕적 원천의 본질로 보는데서 출발하기에 스토아주의는 성경이 말하는 자비로운 하나님의 대속의 사랑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4) 필로(Philo)

디아스포라 유대인 알렉산드리의 필로는 스토아철학과 중기 플라톤주의를 이상적으로 융합시킨 초기 기독교 배경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주전 20년에 태어나 주후 50년에 세상을 떠났다. “언어학적 지식이 풍부하고 사상이 광범위하여 성경에 대해 탁월하고 고결한 견해를 지니고 있었던 필로는 거룩한 책들에 대한 주석을 저술하였다."

헬라인들이 구약에서 그들의 중심사상을 얻었다고 확신한 필로는 구약과 헬라철학을 연합된 가르침으로 결합시키려고 노력했다. 둘을 조화시키는 과정에서 그가 직면한 문제점이 바로 성경의 창조교리와 헬라의 창조관의 부조화였다. 헬라철학자들과 같이 하나님께서 모든 악의 근원이 되는 물질과 접할 수 없다고 믿었던 필로는 하나님과 세계와의 사이에 중재자(mediator)를 생각해 냈다. 이 중재자가 로고스였다.

요약하면 첫째, 필로는 고대 헬라사상과 유대주의 사상이 동일한 원천에서 나왔다고 보고 이 둘을 종합하였다. 둘째, 필로는 헬라사상과 유대주의 사상의 연속성을 확신하였기 때문에 구약의 상당부분은 우화적으로 해석하였다. 셋째, 필로는 헬라의 신관, 특별히 플라톤의 선의 이데아와 구약의 하나님을 동일선상에서 이해하였다. 마지막으로 필로의 기독교 이해는 초대교회사가들에게 오랫동안 관심의 대상이다.


2. 유대주의 배경


(1) 다윗에서 알렉산더까지

이스라엘 왕국은 주전 약 1,000년 전에 이새의 아들 다윗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는 주전 960년까지 이스라엘을 통치했다. 그의 아들 솔로몬은 주전 930년경 죽은 후에 다윗은 메시아 희망의 상징이 될 만큼 이스라엘에 위대한 공헌을 했다. 솔로몬 왕국 후 다윗의 왕국은 두 개로 분열되었다.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북부는 주전 721년 앗수르에 의해 포로가 된 후 결코 회복되지 못했다. 다윗의 왕가에 충실히 남아있던 남쪽왕국 유다는 586년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다. 539년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Cyrus)가 바벨론을 정복한 후 조국 이스라엘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포로들을 돌려보냈다. 첫 귀환 후 또 다른 그룹이 팔레스틴으로 돌아왔다. 그들의 지도자 중의 하나가 에스라였다.

주전 334년과 323년 사이에 젊은 마케도니아왕 알렉산더가 그리스에서 잊도에 이르는 모든 동부땅 그리고 남쪽으로는 이집트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정복했다. 주전 323년 알렉산더가 죽자 그의 부하 장군이 광활한 영토를 분할해 가졌다. 프톨레미(Ptolemy)는 이집트의 통치자가 되었다. 팔레스틴은 주전 198년까지 프톨레미의 통치권에 있었으나, 198년부터 다른 왕가인 셀류시드(Seleucids) 가문이 팔레스틴을 통치하게 되었다. 팔레스틴에서의 통치 변화는 유대 백성들에게 엄청난 결과를 초해하였다.


(2) 마카비(the Maccabees)

프톨레미 왕들은 유대인들이 자유로이 그들의 신을 섬길 수 있도록 허락했다. 하지만 새 통치자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종교를 포기하고 헬라 방식을 따르도록 강요했다. 이 정책을 대표한 지도자는 시리아의 셀류시드왕 (the Seleucid King of Syria) 안디옥 4세였다. 이러한 셀류시드 통치에 반대하는 폭동이 나이 많은 제사장 미타티아스(Mattathias)와 그의 네 아들들의 주도하에 일어났다. 이들 중에서 유다(Judas)가 지도자였다. 그들 모두는 마키비 즉 맹렬히 싸운 사람들로 알려졌다. 주전 141년에 유대인은 셀류시드를 몰아내고 완전한 승리를 쟁취해 주전 586년 이후 처음으로 이스라엘은 다시 독립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단지 80년 동안만 그들의 자유를 존속시킬 수 있었다.

주전 63년 팔레스틴에 일어난 내란은 로마 정부가 팔레스틴에 확고한 권력을 장악하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했다. 다음 60년 동안 이스라엘은 반(半) 독립국가로 어느 정도 자유가 주어졌으며 아스라엘의 통치자는 로마정부에 의해 임명되었다. 주전 37년 헤롯이 로마 정부에 의해 분봉왕이 되었다. 그 후 그의 세 아들에 의해 다스려 졌다. 주후 6년에 아켈라우스가 실수하자 그는 해직되고 추방되었다. 그가 다스리던 지역이 로마의 영이 되었고 로마의 총독이 지배했다. 주후 26년부터 36년까지의 총독은 5대 총독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라 이름하는 로마인이었다.


(3) 회당과 산헤드린

주전 586년 유대인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기 전 그들의 예배의 중심지는 예루살렘 성전이었다. 그러나 포로 후에는 회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들은 성전을 빼앗긴 후 기도, 성경낭독, 가르침의 목적으로 회당을 강조했다. 유대공동체의 지도자는 관할장을 회당의 통치자라 불렀다.

팔레스틴에서 유대인의 통치기구는 산헤드린이었다. 산헤드린은 대제사장 지도아래 주로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으로 구성되었다. 비록 로마 통치아래 있었지만 순전히 종교적인 문제에 있어서 팔레스틴 밖의 유대인들도 산헤드린의 권위를 인정했다.


(4)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마카비 시대 이후부터 유대지도자가 되었다. 사두개인들은 제사장 가운데서 나왔고 율법사였다. 그들은 구습을 선호했고, 변화를 싫어했다. 그럼에도 헬라 사상을 유대 생활에 도입하려고 할 때는 지지하기도 했다. 종교적으로 이들은 부활과 영생, 천사와 영혼의 불멸을 부정하고 영혼과 육체는 함께 사멸된다고 믿었다. 따라서 이들은 내세가 없다.

바리새인들은 거의 모든 면에서 사두개인들과 정 반대였다. 부활 내세의 삶과 상벌사상도 믿었다. 그들이 주로 집착한 것은 주로 율법의 외적 준수였으며 따라서 율법준수 이면의 영적 태도는 둔감했다. 이런 그들의 사상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대립되었다.

사두개인은 잘못된 교리를 가졌고, 바리새인들은 올바른 교리를 가졌지만 그들의 삶은 그들의 가르침과 모순되었다.

사두개인들은 그들의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주후 70년 예루살렘 몰락 후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바리새인들은 다소 오래 존속했지만 그들은 또한 유대정부의 몰락과 함께 역사에서 사라졌다.


(5) 분산된 유대인(the Dispersion)

전쟁포로의 분산 그리고 특별히 상업적으로 유대인은 팔레스틴에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분산된 유대인과 회당은 불과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그들 모두는 선교사들의 복음전파를 위한 자연적 요새를 팔레스틴 밖에 건설한 셈이다.

분산된 유대인들의 가장 중요한 중심지는 알렉산드리아와 이집트였다. 거기서 유대인들은 도시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주전 250년에 거기서 구약이 헬라어로 번역되어 헬라어 사용 세계에 구약성경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70연역(the Septuagint)으로 알려졌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유대인의 최대의 철학자 필로가 배출되었다.


3. 제국의 종교

로마제국의 종교는 크게 자연종고, 신비종교, 국가종교 등 세 종류로 나뉜다.

자연종교는 초자연적 능력을 산, 호수, 강, 나무, 태양, 그리고 달에서 또는 어떤 동물과 사람에게서 찾는다.

신비종교의 가장 큰 매력은 신과 직접적으로 교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데 있다고 본다. 이 신비종교는 기독교가 확산될 때 제국에서 강했던 종교이다. 잠시 동안 밀교의 한 형태인 미트라이즘(Mithraism)이 기독교의 강력한 경쟁자였다. 이것은 특별히 로마군대에 인기가 있었다.

국가종교는 강력한 정치적인 특징을 지녔다. 주된 요소는 황제를 위해 희생제물을 드리는 것이다. 국가종교는 신과의 교제, 연합 특별히 구원이 없는 종교이다.


요약

당시의 시대적 배경은 갈라디아서 4장 4절에 말한바 “때가 찼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이처럼 그리스도의 오심은 완벽하게 준비되었던 것이다. (정치적, 교통, 언어, 종교적, 사회 및 도덕적 요소, 정치적으로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통치기간동안 평화가 형성되어 새로운 종교가 발흥하기에 적합한 환경이 조성되었다.)




제2부 2세기와 초대교회 사상의 정초


제 1 장 초대 기독교 박해

“나는 86년 동안 그분을 섬겨왔는데 그동안 그분은 한 번도 나를 부당하게 대우하신 적이 없다. 그런데 내가 어지 이제까지 섬겨온 나의 왕 그리스도를 모독 할 수 있겠는가?”

폴리갑


고대 아태나고라스(Athenagoras)에 따르면 기독교인이 박해를 받은 원인은 “무신론과 식인풍습, 근친상간”이었다. 당시 로마제국은 공인된 종교 외에는 종교로 인정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상을 멀리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숭배하는 기독교인들을 무신론자로 낙인찍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받은 가장 큰 이유는 황제숭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주후 64년 네로 황제부터 시작된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는 313년 콘스탄틴과 리키니우스 두 황제에 의하여 기독교가 공인되기까지 계속되었다. 초대교회 박해는 크게 황제의 고의에 의하여 시작된 1차 박해기간(약 A. D. 64-96), 지엽적, 국부적으로 진행된 2차 박해기간(약 A. D. 98-249)그리고 전국적으로 박해가 진행된 3차 박해기간(A. D. 250-313)으로 대별할 수 있다.


1. 제 1 차 박해기간(A. D. 64-96)


(1) 네로황제 이전

네로황제 이전에는 기독교 박해가 진행되지 않았다. 알렉산더 대왕과 마찬가지고 역사의 전환점을 기록한 아우구스투스황제 이후 박해에 대한 진행은 간헐적이고 부분적이었다.

빌라도가 총독으로 있던 시기에 유대인들은 로마에서 추방되었고 심지어 4000명 유대 청년들이 도적과 싸우기 위해 사르디아로 보내졌다.


(2) 네로 황제 박해

글라우리오 황제가의 문란한 결혼생활로 인한 정치적 암투의 결과로 아그리파나의 아들 네로가 황제가 되었다. 네로는 16살의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황위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그러나 네로가 62년 자신의 고문 부루스를, 65년에 세네카를 각각 권좌에서 제거하면서 국가는 쇠퇴의 가도를 달리기 시작하였다. 특별히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과의 관계가 접점 악화되어가기 시작하였다.

유세비우스는 “극단적인 광기”라는 함축적인 표현을 통해 네로 황제의 성격을 단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네로 황제가 재임하던 주후 64년에 발생하나 로마의 대화재 사건은 기독교 역사에 잊을 수 없는 분기점이 되었다. 이 화재의 사건의 원인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린 후 기독교를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공식적인 대박해였으며 역사에 1차 박해기간의 시작으로 알려졌다. 고대 교회사가 유세비우스에 따르면 주후 64년 7월 “자신의 통치권을 확고히 다진 네로 황제는 사악한 계획을 세우고 유일하고 높으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신앙을 대적하여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

네로는 로마의 대화재 사건이 자신이 저지른 것이라는 소문을 무마시키기 위해 기독교인들에 화재의 원인을 돌려버렸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네로 황제하에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받은 것이 기독교인들이 로마 대화재의 장본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네로 황제의 개인적인 횡포로 말미암아 발생한 것임을 말해준다. 타키투스가 기독교를 가리켜 “매우 위험한 미신” 혹은 “사악하고 부끄러운 것”이라고 표현한 사실로 비추어 볼 때 당시 사람들은 기독교를 옳케 이해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일반인들이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네로는 자연스럽게 로마의 대화재 사건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려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네로 시대에 바울과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했다.

하나님께서 네로의 박해를 그냥 방관만 하실 수 없었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기독교를 극심하게 박해했던 박해자들이 거의 다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는 사실도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 계속되는 네로 황제의 폭정으로 서부의 군단들과 로마의 친위대가 반란을 일으키자 로마에서 도주하던 네로는 명을 다하지 못하고 30세의 나이에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끊고 말았다. 결국 그의 죽음으로 줄리어스 시저에게서 시작된 줄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68년에 막을 내리고 1년 동안 과도기의 내란이 제국을 휩쓸었다.


(3) 도미티안 황제 박해

초대교회 기록에 의하면 도미티안에 의한 대 박해가 그의 통치 15년에 있었다. 도미티안은 네로의 전철을 밟았다. 터툴리안은 도미티안이 네로와 “동일한 일”을 행하려 했으며 “잔인성에 있어서 실질적인 네로의 후계자였다”라고 말한다.

도미티안은 많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취급하였다. 그는 로마에서 상당히 많은 귀족들과 저명인사들을 부당하게 살해했고 아무 이유도 없이 많은 귀족들의 제산을 압수하고 그들을 추방하였다. 마침내 그는 하나님을 미워하고 적대하는 일에 있어 네로의 후계자가 되었다. 그의 부친 베스파시안은 전혀 신자들에게 불리한 시도를 하지 않았으나 도미티안은 박해를 시도한 두 번째 황제가 되었다.

전승에 의하면 도미티안 박해 때에 사도 요한이 말씀을 증거 하였다는 이유로 밧모 섬에 유배되었다. 도미티안이 사망하자 사도 요한은 유배지에서 귀환한 뒤 아시아의 교회들을 돌보았다.

도미티안 황제 역시 15년 동안 잔악하게 통치한 뒤 네로 황제처럼 비참하게 살해 되었다. 적어도 네로 황제와 도미티안 황제 치하에서 황제 치하에서 황제의 임의에 의한 박해가 진행된 뒤, 250년 데시우스 황제가 칙령을 발표할 때까지는 전국 전역에 그와 같은 박해가 다시 발생하지 않았다. 이기간 동안 박해는 지엽적, 국부적으로 진행되었다.


2. 2차 박해기간(A. D. 98-249)


(1) 트라얀 황제 치하의 박해

트라얀(Trajan; A.D. 98-117) 황제부터 안토니우스 피우스(Antoninus Pius; A.D. 138-161)황제의 통치 말엽까지 기독교는 위협 아래 있었지만 폴리니 2세(Pliny the Younger, A.D. 61-113)와 트라얀 황제 사이에 오갔던 서신에서 나타나듯이 기독교인들에 대한 의도적 색출은 금지되었다. 소위 2차 박해기간이라 알려진 이 기간동안은 박해가 지역에 따라 국부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드러나더라도 그에게는 신앙을 부인할 기회가 주어졌다.

플리니 2세는 기독교인들을 세 부류로 분류하여 처벌의 기준을 정했다. 첫째는 그리스도인이라 고백하고 그 고백을 계속하는 자들, 둘째는, 그리스도인이라는 혐의를 받았지만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자들, 셋째는, 과거에는 기독교인들이었으나 지금은 배교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다.

트라얀 황제는 플리니 2세에게 보낸 회답에서 적어도 분명한 세 가지 사실을 말하고 있다. 첫째는 의도적인 색출은 금한다는 것과, 둘째는 익명의 고소는 정부가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 셋째는 과거에는 기독교인이었지만 현재 아니라면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칙령으로 인해 혹독한 박해는 어느 정도 완화되었으며,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들이기 위한 수색은 금지 되었다.”


(2) 히드리안 통치하의 박해

임으로적으로 박해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박해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대표적인 속사도 중의 한 사람인 안디옥 감독 이그나티우스가 트라얀 황제 치하에 순교했다.

국경선과 본토의 안정을 추구했던 하드리안(Hadrian; A. D. 117-138) 황제는 헬라의 유산을 보존하는데 남다른 관심과 정열을 기울였다. 그는 125년 아시아의 총독 미누시우스 푼다누스(Caius Minnucius Fundanus)에게 보낸 서신에서 정당한 재판을 거치지 않고서는 기도교인을 처형하지 말라고 명했다.


(3)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치하의 박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D. 160-180) 황제는 매우 특이한 인물이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처음에는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인 경향을” 나타내 보였으나 점차 “다른 생각을 품게 되었고 아첨자들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박해는 참혹했다. 기독교인들이 채찍에 맞아 온몸이 찢어져 유혈이 낭자했으며 속살이 드러나고 창자까지 밖으로 터져 나왔다. 그 후 그들은 바다 조개 껍질이나 땅 위에 놓인 창 끝에 눕혀졌으며, 온갖 종류의 고문을 받은 뒤에 짐승의 밥으로 던져 졌다.

박해는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강화되었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치하에 폴리갑이 서머나에서 순교하였다.


사랑하는 복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당신에 관한 지식을 주신 아버지여! 당신 앞에 살고 있는 모든 천사들과 천군들과 피조물, 그리고 모든 의인들의 하나님이시여! 당신께서 오늘 이 시간 나로 하여금 순교자의 반열, 그리고 그리스도의 잔에 참여하게 하시어 내 몸과 영혼이 성령의 썩지 않는 축복 속에서 영생의 부활을 얻기에 함당하다고 여기어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나는 신실하고 참되신 하나님이신 당신께서 예비하시고 계시하시고 이루신 풍성하고 가납될 만한 제물로서 당신이 보시는 앞에서 받아들여지기를 바랍니다. 나는 이 모든 일을 인하여 당신의 사랑하는 독생자 영원한 대제사장을 통하여 당신을 찬양하고 감사드리며 영광을 돌리나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이제부터 영원히 영광이 있을 지어다. 아멘.


폴리갑에 이어 165년 대표적인 변증가 저스틴도 순교의 대열에 합류했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통치기간은 177년 심한 박해가 고울 지방에서 일어났으며, 이후 250년 까지 박해가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특히 202년과 203년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황제 아래 심한 박해가 주로 이집트와 카르타고(Carthage)에서 발생했다. 세베루스 황제가 교회를 박해했을 때 도처에 잇는 모든 교회 내에서 믿음의 용장들이 자신의 신앙을 끝가지 지켰다. 특히 알렉산드리아에서 많은 순교자들이 나타났다.

세베루스 이후 기독교를 심하게 박해한 황제는 알렉산더 황제를 승계한 막시미누스 황제이다. 그는 “교회의 지도자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바로 이 시기에 오리겐은 순교에 관한 책을 저술하여 박해를 받으면서도 자신의 신앙을 굽히지 않은 멜브로즈와 가이사랴 교회의 장로 프로톡테투스(Protoctetus)에게 헌정했던 것이다.

다행이도 막시미누스의 통치는 3년을 넘기지 못했다. 간헐적으로 진행된 박해 이후의 평화는 복음전파의 호기가 되었다. 3세기 첫 50년 동안 수천명의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었다.

박해가 진행되는 기단은 신앙의 순수성을 훈련하는 기간으로, 박해가 중단된 그 기간들은 복음전파를 위한 절호의기회로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것이다.

1차 박해와 달리 2차 박해는 고발되는 경우에만 행해졌으며, 지엽적이고 간헐적이며 산발적으로 진행되었음을 말해준다. 박해의 위협은 항상 존재하였지만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항상 박해를 받은 것은 아니다. 그러다가 250년에 데시우스 황제가 들어서서 “제국의 모든 거주민들은 신들에게 제물을 바쳐야 한다”는 내용이 담긴 칙령을 발표하면서 박해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소위 3차 박해가 시작된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그 칙령에 근거하여 황제를 숭배해야 했고 숭배한 사람들에게는 증명서가 주어졌다. 법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투옥을 당하거나 고문을 당했고 심지어 목숨을 잃었다.


3. 제 3차 박해 기간(A.D. 249-313)

전국적인 박해가 발생한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주요한 원인 5가지를 든다면 (1) 기독교의 급속한 성장 (2) 제국의 경제 및 도덕의 쇠퇴 (3) 로마제국 창립 1000주년의 임박 (4) 교회는 국가 내에 국가(a state within the state)이며, 따라서 로마제국의 위협적인 존재라는 로마 지도자들의 견해 (5) 로마의 쇠퇴가 기독교의 성장을 싫어했기 때문에 내린 벌이라는 견해를 들 수 있다.


(1) 데시우스 칙령과 전국적인 박해

250년부터 251년 사이 데시우스(Decius)황제 아래 기독교가 그 때까지 직면했던 박해 가운데 가장 혹독한 박해가 일어났다.

데시우스 명령 앞에 교인들은 순응, 타협, 거부, 도피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어떤 이들은 탐관오리들에게 돈을 주고 증명서를 사기도 했다. 다행히 조직적이고 극심했던 데시우스의 박해는 오래가지 못했다. 데시우스는 제국을 통치한지 2년이 못되어 아들들과 함께 살해되었고 갈루스가 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박해는 계속되었다. 박해자들의 최후가 그렇듯이 갈루스도 비참하게 최후를 맞았다. 그 후 발레리안이 아들 갈리에누스와 함께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처음에 기독교인들에 우호적이었던 발레리안 황제(253-260)가 태도를 바꾸어 그의 통치 말엽인 257년부터 기독교인들을 박해하지 시작하였다. 발레리안의 박해 때에 필레스틴의 가이사랴에서는 신실한 그리스도인 프리스쿠스, 말쿠스 그리고 알렉산더 세 사람이 사나운 짐승들의 먹이가 되어 순교의 영광을 차지했다. 발레리우스 황제 통치 때 키프리안(Cyprian)도 카르타고에서 순교했다. 발레리안이 페르시안과의 전쟁에서 사로잡혀 노예가 되면서 그렇게 극심했던 박해는 일단 중단되고 기독교인들에게 관용이 베풀어 졌다. 그 후 갈리에누스(Gallienus)가 황위를 계승하였고 그가 내린 칙령에 의하여 43년간 합법적인 종교(a religio licita)로 인정받았다.


(2) 디오클레티안 황제 박해

303년 디오클리테안(Diocletian)이 황제가 되면서 박해가 또 다시 시작되었다. 이 역시 처음에는 우호적이어서 기독교가 매우 급속히 성장하였으나 추측이지만 그의 사위 갈레리우스가 황제를 선동하여 그의 태도가 바뀌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원인은 시벨레(Cyele)를 섬기는 이교도이자 기독교를 미워한 그의 모친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결과 303년 2월 23일 아무런 경고 없이 갑자기 시작되어 디어클리티안의 수도 니코메디아(Nicomedia)에 들어가 성경을 불태워버리고 건물을 완전히 파괴하였다.

디오클리티안의 박해는 제3차 박해 기간 동안 가장 길고 무시무시한 박해였다. 303년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를 선포하면서 디오클레티안은 자신의 아내와 딸들까지도 기독교인들이라는 이유로 무참하게 살해하고 핍박를 더 강화시켰다. 디오클레티안이 305년 황제직을 사임한 후 박해가 잠시 중단되었다가 곧 재개되어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할 때 까지인 313년 까지 계속되었다.

(3) 갈레리우스 황제

그 즈음에 디오클레티안 사위 갈레리우스가 통치하는 지역에서도 박해가 발생하였다. 박해를 시작한지 8년이 되던 해부터 박해를 완화해 10년 되는 해에는 완전히 박해를 종식했다. 이유는 그의 중병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을 돌이켜 반성하면서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죄를 자백했다. 그리고 그는 박해를 중지하라는 칙령을 발효했다. 갈레리우스 황제는 책령을 발표하고 5일 후 고통에서 해당되어 일생을 마쳤다.


4. 콘스탄틴 황제와 기독교 공인

콘스탄틴(Constantine)은 A. D. 288년에 태어났다. 그리고 그는 막센티우스와 전쟁에서 승리하여 약관 24세에 명실상부한 최고의 통치자가 되었다.

정치적 변화는 서방에서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동방에서도 유사한 변화가 있었다.

313년 콘스탄틴과 리키니우스는 밀란의 칙령(the Eidct of Milan)이라 알려진 것을 공포했다. 이 밀란의 칙령은 공식적으로 교회의 종교의 자유를 선포한 최초의 선언이었다. 물론 “관용의 칙령”으로 특정되는 밀란의 칙령이 종교의 자유를 기독교에만 국한 시킨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기독교인들에게 합법적인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공식 선언이었다.

콘스탄틴은 기독교의 공인에서 멈추지 않고 기독교인들에게 재산권에 대한 구체적 자유를 보장하였다. 그리고 교회를 위한 경비까지도 주었다. 그리고 콘스탄틴의 기독교에 대한 관심은 재정을 넘어 교리적 문제 까지도 확대되었다.

313년 밀란의 칙령이후 한 차례의 고비를 만나기는 했지만 기독교이 박해는 공식적으로 종식된 셈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콘스탄틴은 점점 더 뚜렷이 기독교에 유리한 방향으로 정책을 결정하고 추진하기 시작했다. 비록 그는 세례를 받지 않았지만 일련의 기독교에 대한 정책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분명 기독교인 이었다. 콘스탄틴 대제 이후 기독교는 로마에서 가장 우대를 받으며 군림하는 종교가 되었다.


5. 요약 : 교회 생활의 변화

터툴리안이 말한 것처럼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가 되어 박해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꾸준하게 성장하였다. 핍박이라는 기독교 장애물이 오히려 기독교를 성장시키는 수단이 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그러나 313년 콘스탄틴 황제에 의하여 기독교가 공인 된 후 기독교는 새로운 시대를 맞았다. 그것은 세 가지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기독교는 공인된 종교로 바뀌었고, 그 결과 외형적으로 상당히 확산되었다. 자연이 정교의 밀착이 이루어졌고 교회가 영적인 생명력을 상실하면서 교회는 세속화 현상이 예배는 형식 위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콘스탄틴의 등장은 교회사를 완전히 바꾸어 놓은 만큼 교회의 역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그의 등장으로 일련의 회의, 특별히 니케아 회의를 통하여 정통신학이 집대성되었다. 그러나 일련의 종교회의가 동서방교회의 분리를 촉진시킨 또 하나의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누구보다도 교회의 통일을 원하였던 콘스탄틴 황제가, 오히려 수도를 이전함으로 말미암아 본의 아니게 동서방교회의 분리는 촉진시켰다는 것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제2장 속사도


“나는 순교가 얼마나 큰 유익을 주는지 알고 있노라, 이제야 나는 제자로서의 첫 걸음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스도를 얻을 수 만 있다면 눈에 보이는 것이나 보인지 않는 것이나 그 어느 것도 나의 야망을 자극하지 못한다. 내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얻게만 된다면 화형이나 십자가나 사나운 짐승의 공격이나 또는 내 뼈를 찢고 사지를 부러뜨리며 온 몸에 멍이 들도록 맞는 등 그 어떤 마귀의 괴롭힘도 참고 견디겠노라”

이그나티우스


속사도들은 열두 제지 이후로는 초기 기독교 저자들로서 속사도 시대 라고 불리는 1세기 말부터 2세기 까지 활동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사도와 2세기 후반 저작활동을 했던 변증가들 사이에 교량역할을 함으로 사도들의 사상을 후대에 계승하는 일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1. 로마의 클레멘트

클레멘트가 고린도 교회에 쓴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서신>(The Letterof the Church of Rome to the Church of Corinth)은 제1세기 말엽 로마의 3대 감독이었던 클레멘트가 기록한 것이다.

클레멘트의 서신의 특징은 첫째 장로와 감독을 구별하지 않고 상호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 특징은 헬라적 요소와 스토아적 요소이다. 하지만 클레멘트를 무분별하게 헬라사상과 기독교를 융합시키려 한 인물로 매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비록 클레멘트의 사상에 헬라주의적 요소가 나타나지만 그의 신관은 삼위일체적이라 할 수 있다. 현대 복음주의신학자들은 클레멘트가 성경의 권위를 존중하는 고등 성경관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클레멘트에 있어서 칭의론은 또 하나의 중요한 사상이다. 32장 4절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길임을 강조하고 있다. 클레멘트에게 믿음은 순종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심지어 때때로 순종을 믿음보다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클레멘트는 교회를 유기체적인 관계로 이해했다. 강자와 약한 자, 부자와 가난한 자가 교회 안에 존재할 수밖에 없지만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공유해야할 사랑의 윤리적 차원이 있다.


2. 안디옥 감독 이그나티우스

클레멘트와 동 시대인인 이그나티우스는 시리아 안디옥의 제3대 감독이라고 전해진다. 안디옥은 베드로와 바울 그리고 여러 성도들이 이곳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던 곳이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를 메시야로 믿는 신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이라 불리운 것은 이 안디옥에서였다. 또 “기독교”라는 말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 역시 안디옥 출신 이그나티우스였다.

이그나티우스는 트라얀 황제(A.D. 98-117)의 재위 기간에 체포당하였다. 이 때는 기독교가 모든 사회 계급으로 급속하게 확산되던 시기였다. 그는 로마로 호송되었고 이송되어 가는 도중 일곱 개의 서신을 기록하였다. 그는 로마에 도착하여 그리스도를 위해 맹수의 이빨에 “밀”처럼 갈아지기 원하였던 이그나티우스의 열렬한 소원은 마침내 로마에서 실현된다.

이그나티우스는 신약성경과 부흥도상에 있던 “보편교회”(Catholic Church)를 연결하는 중요한 고리였다. 그는 가현설자들의 그리스도관에 맞서 싸웠고 교회를 하나 되게 하는데 있어서 감독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며 그 하나 됨의 구체적인 실현을 위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감독에게 절대 순종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그나티우스의 편지들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순교에 대한 예찬이다. 이그나티우스는 순교를 통해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이르기를 열렬히 갈망하였다.

이그나티우스가 제창한 감독의 중추적 역할은 베드로를 잇는다는 “사도적 계승”의 토대위에 세운 것이 아니라 감독이 하나님의 위치에서 모든 것을 관장한다고 생각하는 신비적 신학에 입각한 이론이었다. 그는 하늘나라의 지상 모형이라는 사실에서 교회직분의 기원을 찾으려고 하였다.

교회의 하나됨에 대한 그의 관심은 성만찬 해석에도 나탄다. 이그나티우스는 교회의 하나됨이 진실 된 성만찬에 있다고 보았다.

이그나티우스의 작품에 두드러진 또 하나의 관심은 분열을 약시키는 이단적인 운동을 폭로하는데 있다. 그는 이단에 대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아그나티우스는 이단의 가르침을 전하는 거짓선생에 대해 심지어 야수(wild beasts)또는 미친개(mad dog), 혹은 허울 좋은 이리들이라고 혹평하였다.

이그나티우스가 볼 때 이단적인 요소는 첫째 기독교의 유대주의화이고 둘째는 가현설이다. 그가 이 두 이단을 강하게 반대한 것은 이들이 성육신을 비롯한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무로 돌리려고 하기 때문이었다.


3. 서머나 감독 폴리갑

젊었을 때 사도 요한의 가르침을 직접 받았던 직설적이고 정열적인 사람, 서머나 감독 폴리갑은 아우렐리우스 황제 때에 순교하였다.

폴리갑은 80년에 태어나 165년경에 순교할 때까지 86년 동안 충성스럽게 주님을 섬겨온 인물이다. 그는 사도들과 속사도시대를 연결하는 교량역할을 하였다. 폴리갑은 사도요한의 가르침을 후대에 전달했을 뿐 만 아니라 이그나티우스의 서신들을 모아 보존하였다. 이그나티우스의 순교는 폴리갑에게 상당한 도전과 용기를 주었다.

폴리갑은 아우렐루우스 때인 165년 경에 아시아에 큰 박해가 발생했을 때 순교했다.

폴리갑은 교회사적으로 몇 가지 면에서 중요하다. 첫째, 폴리갑은 로마에서 마르시온과 영지주의자들인 발렌티누스 추종자들을 정통주의로 회심시키는 도구로 쓰임을 받았다. 둘째는 클레멘트나 이그나티우스 보다 폴리갑은 공관복음과 사도행전을 잘 알고 있었다. 셋째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성서적 칭의론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보다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사실은 무엇보다도 폴리갑이 실천적인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4. 기타 속사도 문헌들

앞에서 언급한 속사도 외에 무게 있는 문헌들로는 바나바 서신과 디다케를 들 수 있다.

바나바 서신은 교리적 부분(1-17)과 실천적인 부분(18-21) 두 부분으로 구성되며 교리적 부분은 우화적 해석이 특징이고 실천적인 부분은 두길문서가 핵심부분이다.

속사도 문헌 가운데 빼 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중요한 문헌은 헐마스의 목자이다. 헐마스의 목자는 당시 그리스도인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5개의 환상과 12개의 명령과 10개의 비유를 수집했다.

1873년 필로데오스 바이레니오스(Philotheos Byrennios)가 발견한 디다케(The Didache)는 3가지 중요한 주제를 다룬다. 첫째는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차이이다. 둘째는 세례 예식에 과한 당대의 동향을 제시하여 주고 있다. 마지막 셋째 부분은 훈련지침이다.


5. 요약

속사도들은 몇 가지 중요한 의의가 있다. 그것은 소아시아 신학이 역사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폴리갑, 요한, 이그나티우스, 파피아스 등이 소아시아 출신이라는 사실이다.

속사도의 작품의 또 하나의 중요한 의의는 인물과 기록장소, 그리고 문장스타일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작품에서 몇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첫째, 순교자에 대한 지나친 열정이다. 둘째, 신앙의 표준으로 성경이 사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셋째, 정통의 형성이다. 속사도에 오면서 정통주의는 조금씩 형성되기 시작했다. 정통성의 표준은 사도들로부터 내려온 전통과 성경이다.

그러나 몇 가지 면에서 속 사도들의 작품들은 비평을 요한다. 아무래도 가장 두드러진 비판은 속사도들의 작품 속에 성격에서 떠난 전통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또 하나의 비판적 요소는 세례 후에 짓는 용서문제이다.



제 3 장 기독교 변증가


“로고스를 따라 산 사람들은 비록 저들이 하나님 없는 자들이라고 불리었을 지라도 그들을 그리스도인들이다. 헬라인들 중에 소크라테스, 헤라클리투스 등이 그러하였고, 야만인들 사이에 아브라함이나 아나니아, 아지리아나 미사엘, 엘리야 및 이제 그 이름을 다 열거할 자리가 없을 정도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였다.”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


2세기 들어서 당대의 이단들과 정부 지도자들 및 지식인들에게 기독교는 이 세상의 어떤 종교보다도 윤리적이며 어떤 철학체계보다도 가장 훌륭하고 진정할 철학임을 변호하면서 기독교를 수호하려는 저술가들이 나타났다. 이들을 가리켜 변증가들이라고 한다. 이들의 활동 시기는 대체로 130년부터라고 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변증가들은 속사도들과 당대의 정통주의 조류를 대표하는 이들로서 어떤 의미에서 최초의 신학자들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유대인과 이교도들을 동시에 공격하였다.

변증가들이 유대인을 공격한 것은 이들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않기 때문이며, 이교도들은 공격한 것은 이들이 기독교의 복음을 이질화 시켰기 때문이다. 변증가들이 기독교를 변호하는 방법은 소위 “공개적인 편지”들을 통해서였다.


1. 아테네의 콰드라투스

변증가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최초의 변증가로서 약 125년경 로마의 하드리안 황제에게 공개적인 변증서를 썼던 인물이다. 그는 예수께 병고침을 받은 자들 중 지금까지 살아있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들어 기독교를 힘있게 변증하였다.


2. 아리스티데스

변증가 아리스티데스는 로마의 황제 피우스(138-161)에게 변증서를 썼던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유세비우스 증언에 의하면, 신앙에 신실하게 헌신한 아리스티데스는 하드리안에게도 신앙의 변론을 써서 후손에게 남겼다.

변증서에서 그는 참된 신의 속성을 설명하고 이교도들의 신화를 공격하고 기독교 신자의 성품을 들어 기독교를 변증하고 있다. 아리스테스가 결론적으로 지적하려고 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우월성과 건전성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 윤리적 삶, 그리고 신행의 일치에 의하여 입증된다는 사실이다.


3. 신앙의 변호자 저스틴 마터(100-165)

2, 3세기의 기독교 대변자들로서 변증서를 내어 놓은 변증가들 가운데 최초의 한 사람으로 아마 가장 중요한 인물일 것이다.

저스틴은 기독교를 변증하는 일에 심지어 황제 앞에서 자신의 학식을 기독교를 변증하는데 사용한 학식 있는 최초의 이방인이었다. 무수한 저스틴의 저술 가운데 현존하는 저술로는 <제1 변증서>, <트리포(Trypho)와의 대화> 등이 있다.

장문의 <제1변증서(Tirst Apology>)에서 저스틴은 최초로 이교도의 여러 가지 비난과 몰이해에 대해 기독교를 변증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기독교가 어떤 새로운 창작품이 아니라 헬라 철학들보다 시대적으로 앞서가는 구약성경의 구체적 실현이라고 주장한다.

160년경에 기록된 <트리포와의 대화>는 바르쿠스 폼페이우스라는 어떤 인물에게 헌사된 책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 글이 기독교의 우월성을 보여줄 목적으로 유대교에 동정적인 이방인들을 위해 기록되었다고 생각한다.

저스틴은 자신의 변증을 순교로 확증했다. 유세비우스는 다음과 같이 저스티의 순교를 언급하고 있다. “이 무렵 저스틴은 앞서 언급된 통치자들에게 우리 신앙을 두 번째로 변론한 뒤 견유학파 철학자인 크레센스의 교활한 선동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순교의 면류관을 얻었다.”

저스틴은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변증가였다. 그러나 저스틴에 대한 현대인의 평가가 항상 통일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저스틴을 보는 시각은 두 가지가 있다. 프렌드는 부정적으로 보는데, 저스틴은 연속성이 없는 인물로 플라톤주의와 기독교와의 본질적인 조화가 가능하다고 보았고 그리스도의 양성과 삼위일체와의 관계를 분명히 인식하지 못한 가운데 로고스 신학을 발전시킨 인물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는 단적으로 저스틴이 어떤 신약의 저자들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바나드에 따르면 저스틴은 “기독교 안의 보편주의적 요소를 파악하고 전 문명사를 그리스도 안에서 종합, 완성한, 사도 바울 이후의 최초의 사상가였다.” 성경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는 어느 변증가보다 우수하다.

저스틴은 기독교가 무식한 종교라는 당대의 기독교 비판에 맞서 기독교야 말로 진정으로 지성적이라는 종교라 변호하고 있다. 저스틴의 헬라사상과 기독교 사상과의 연속성 추구는 영지주의자들이 갖고 있는 기독교 사상의 헬라화와 본질적으로 달랐다. 이것은 저스틴이 영지주의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데서도 어느 정도 입증된다.


4. 타티안

저스틴의 제자 타티안은 앗시리아 출신으로 저스틴이 순교한 후 165년경에 로마에 자신의 교육관을 설립하였다.

타티안의 <헬라인들에게 고함>은 타티안의 사상을 가장 잘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이다. 냉소적인 타티안은 희랍인들의 종교적인 자긍에 일침을 가하면서 희랍인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가 기원을 거슬러 올라간다면 결국 야만족들에게서 유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때문에 희랍의 종교가 야만인들의 종교보다 우월할 것이 결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타티안이 저스티의 뒤를 이어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그의 영향력은 그리 크지 않았다. 더구나 초대교회 교부들의 눈에 비친 타티안은 상당히 부정적이다. 특히 로마를 떠나 이단 엔크라티테스를 세워서 그의 사상은 본질적으로 기독교에서 이탈하고 말았다.


5. 기타 헬라 변증가들

아테나고라스는 삼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변호한 훌륭한 변증가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저스틴과 마찬가지로 태초에 하나님의 마음 안에 로고스가 존재했으며 이 로고스가 하나님에게서 나와 그들 통해서 만물이 창조되었음을 강조했다. 이 로고스가 성부와 일체인데 그것은 아들이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아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아테나고라스의 삼위일체 이해는 속사도들과 비교할 때 상당히 체계화 되고 발전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심지어 성령을 하나님에게서 흘러나오는 신적 존재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테나고라스는 삼위일체 발전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아테나고라스 보다도 더 구체저인 삼위칠체 개념을 제시한 변증가는 안디옥 감독 데오필루스이다. 그는 자신의 친구 아우툴리쿠스에게 헌정한 3권의 책에서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처럼 사용했으며 상당히 발전된 신관을 제시하고 있다.

변증가들의 작품 가운데 가장 까다로운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소위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서신은 저자와 연대로 미상이다. 문장의 스타일이 다른 변증가들과 맥을 같이 하지만 그 내용은 다른 변증가들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유대적 예언과 헬라 철학을 모두 경시하는 점이다. 이 서한의 대부분은 사회내의 기독교인이 감당한 특이한 역할에 기초하여 기독교를 변명하는 내용으로 구성된다. 디오그네투스에 나타난 사상은 신적인 출발이 역사에 결정적이라는 “역사신학”이라는 관점에서 기술되어 있다. 디오그네투스의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유대인이나 희랍인들과 본질적으로 구분되며 구분되는 분명한 증거는 그들의 삶이라고 단정한다.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서신의 저자는 유대인을 기독교인과 본질적인 다른 미신숭배자들이라고 보면서 그들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반면 사르디스의 멜리토는 유대주의와 기독교의 연속성을 대단히 강조하며 이 둘을 기독론적인 관점에서 연결시키고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나타난 상당히 많은 사건들은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사건들이라고 본다.


6. 요약

속사도들의 글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신학의 통일성이 헬라 변증가들의 작품에서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변증가들의 신학에서 분명히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은 헬라의 사상과 기독교의 사상 사이에는 모종의 연속성이 있다고 본 저스틴적 사고가 대부분의 변증가들의 사고와 맥을 같이 하고 있으며 이런 헬라사상과 기독교의 연계성은 로고스를 통하여 연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로고스 이론은 플라톤의 창조사상과 맥을 같이하지는 않지만 상당히 유사한 점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 로고스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냐 하는 문제는 아리우스와 아다나시우스 논쟁의 논제가 되었다. 그러나 변증가들은 성육신과 부활신앙으로 기독교의 본질을 조직적으로 제시하여 이를 후대 교부들이 기독교의 핵심진리로 체계화시킬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는 점에서 최초의 기독교 조직신학자로 평가 받는다.



제4장 이단의 발흥과 발전


나 이후에는 예언이 없을 것이요 다만 종말이 있을 뿐이다.

                                              막시밀리아Maximila


1. 이단의 역사적 배경

우리는 이단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수많은 이단들이 역사에 등장했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현재까지 하나의 집단을 형성하여 계속 번성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단을 판단하는 기준도 시대마다 달리하여 왔다. 사도요한은 당시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염두에 두면서 누구든지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마다 적그리스도라고 정죄하였다. 이레니우스는 이단을 표준 교리에서 벗어나는 자, 어거스틴은 신앙 자체를 해치는 하나님에 과한 잘못된 신앙, 그리고 저스틴은 “사탄의 교리”라고 정의 하였다. 철학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터툴리안은 “이단들이 철학에 의하여 고취되고 있다(Heresies are instigated by philosophy)고 봄으로써 철학과 이단을 상호 연계시켰다.

이단의 역사는 사도시대부터 시작된다. 2세기 정통신학의 대변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평가 받는 헤게시푸스에 따르면 당시 유대백성들 가운데 여러 이단들이 존재했다. 이들은 시므온에게서 시작된 시몬파, 클레오비우스에게서 시작된 클레오비우스파, 도시테우스가 창시한 도시테우스파, 다시 여기서 파생되어 고르테우스가 세운 고르테우스파, 마세보테우스가 세운 마스보테우스파, 그리고 역시 시므온에서 생겨난 메난드리안파, 바시리디안파, 마르시온파, 카로포크라티아파, 발렌티아파, 사투르실리아파 등이 있다.

이처럼 교회가 태동되기 시작한 초기부터 벌써 이단은 역사에 등장하여 정통신앙을 침해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이단세력은 궁극적으로 사탄의 조종을 받는 집단이라고 이해하였다.


2. 영지주의

2세기 중엽은 영지주의의 시대이다. 135년 예루살렘의 2차 함락과 193년 세베르 왕조의 즉위로 구별되는 두 세대 동안에 교회는 점진적인 헬라화의 과정을 겪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나타났던 중요한 이단 가운데 하나가 영지운동이다.

영지주의가 2세기 동안 만만찮은 세력을 형성하였던 기독교가 그 영향력을 증대시켜 나가면서 영지주의에 대한 헬라 지식인들의 관심이 점증했기 때문이다. 구원에 관한 문제, 그리스도-구세주에 관한 문제, 우주의 기원과 발달에 관한 문제 등은 그들이 해명하고자 했던 중요한 주제였다. 신약성경에는 영지주의적 특징을 반영하는 성경 귀절들이 여러 곳 나타나는데 예를 들면, 골로새서 2장 22-23절,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는냐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를 좇는 것을 금하는 데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가 바로 그것이다.


(1) 영지주의의 성격과 특징

켈리(J.N.D. Kelly)가 지산의 「초대기독교교리」("Early Christian Doctrine")에서 지적한 것처럼 영지주의는 유대교, 헬라철학 및 동양철학의 혼합이다. 영지주의는 기독교, 헬라의 철학 그리고 동양의 특별히 바벨론의 우주적인 신화론 페르시아의 이원론을 결합한 혼합 종교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영지 주의 사상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헬라의 이원론적 사상과 기독교와의 혼합이다.

하나님은 누구인가, 악은 무엇인가,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악에서부터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는 영지주의자들이 갖고 있던 중요한 관심사였다. 하나님, 인간, 죄인, 그리고 구속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영지주의자들은 한 가지 사실을 그들의 신념으로 수용한다. 그것이 영지(gnosis; knowledge)인데 이 영지는 영계로부터 온 계시이다.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여러 단계의 지식과 믿음을 창조하셨으며, 성경 외에 예수의 제자들에게 주신 비밀 구전(a secret oral tradition)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비밀 구전은 전승되어 내려왔고, 이 비밀의 구전을 소유한 이들이 곧 자신들이라는 것이다. 영지주의의 또 하나 공통적인 특징은 영육의 분리에 근거한 철저한 이원론적인 사고 때문에 영지주의자들의 삶은 금욕주의 아니면 자유방임주의라는 두 가지 극단으로 흘렀다. 만일 구원이 물질로 부터의 영혼 해방이라면 윤리적 이상은 금욕주의를 통해 달성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2) 영지주의 자료

영지주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이레니우스, 히폴리투스, 오리겐, 터툴리안 그리고 에피파니우스 같은 초대교부들의 저작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왔다. 이집트 상부에서 농부에 의해 1946년에 발견된 나그 하마디 본문(Nag Hamma야 texts)은 주후 400년경에 매장된 것으로 보이며 이 사본들은 약 50개의 작품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영지주의를 새롭게 재조명해 준다.


(3) 영지주의의 기원

저스틴과 이레니우스를 비롯한 초대교회 지도자들 대부분이 마술사 시몬(Simon Magus)을 모든 이단의 원천으로 보았다. 이레니우스는 ‘모든 종류의 이단들이 그로부터 생겨났다.’고 주장했다. 시몬의 사상은 그의 제자 메난더에게 계승되었다. 1세기 말경 시리아의 안디옥에서 영지주의를 가르쳤던 메난더는 시몬의 추종자로서 시몬과 같이 사마리아 출신이다. 메난더는 자신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주장하였지만 그가 죽음으로 ‘시몬 못지않게 사악한 도구임’이 드러났다. 이들 외에도 2세기 초에 영지주의자 새투르니누스(Saturninus)가 안디옥에서 그리스도는 구속자이지만 육체를 입으신 분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사도요한 당시 영지주의자 케린투스(Cerinthus)가 소아시아에서 영지주의 사상을 가르쳤다.


(4) 영지주의의 종류

일반적으로 영지주의는 크게 이집트계, 시리아계, 폰틱계 그리고 유대주의계로 대별할 수 있다.


1) 이집트계

이집트계의 대표적인 사람은 120년에서 130년 경에 로마에서 활약을 하였던 바실리데스(Basilides)이다. 유세비우스의 표현을 빌린다면 두 가지 상이한 이단지도자들, 즉 안디옥 사람 새투르니누스와 알렉산드리아이 바실리데스는 “시몬의 후계자 메산더에게서 나온 모리가 둘이고 혀가 둘인 뱀같은 세력”이다. 세투르니누스는 시리아에, 그리고 바실리데스는 이집트에 불경한 이단학파를 세웠다.

이집트계에 속하는 영지주의자들로는 바실리데스 외에 카르포크라테스(Carpocrates)같은 “영지주의라고 불리우는 또 다른 이단의 창시자”가 있기는 했지만 이집트계를 대표하는 영지주의자는 135-160년까지 활동을 하였던 발렌티누스(Valentinus)이다.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기록에 의하면 “히기누스가 감독으로 있을 때 로마에 온 발렌티누스는 피우스 황제 시대에 장년기에 들어서 있었고 아니세투스(Anicetus)시대까지 살았다. 바실리데스와 동시대인물인 발렌티누스(104-165)는 그의 적대자들에 의해 보다 더 심하게 오해되어진 영지주의자이다. 그는 로마에서 143년에 주교로 선출되어 교황 안티세투스(Pope Anticetus; 154-68)아래서 일했다. 그의 제자들인 플톨레미, 헤라클레온, 마르무스는 1세기 말에 각각 이탈리아, 알렉산드리아와 고을에서 영지주의를 퍼뜨리고 그 가르침을 그곳에 확산시키는데 공헌을 하였다. 발렌티누스는 바실리데스처럼 하나님을 단일한 초월자로 그리고 전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존재로 무에서 기원한 존재가 아니라 일자에서 기원한 존재로 보았다.


2) 시리안계

120년경에 활동하던 안디옥 출신 새투르니누스(Saturninus)가 시리안 형태를 대표하는 영지주의 자들이다. 시리안 형태의 영지주의는 다음 세 가지 두드러진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 자유방임주의 삶을 대표하며, 둘째, 구세주와 유대인의 하나님을 예리하게 구분해 주는 성육신하지 않았으며 육체와 형태를 갖고 있지 않으며, 셋째, 유대인의 하나님이 천사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3) 폰틱계

대표적인 인물은 마르시온이다. 세르돈의 지위를 계승한 폰투스의 마르시온이 세르돈의 가르침을 확대하여 율법과 예언자들이 선포한 하나님에 대하여 신성모독까지 행하였다. 마르시온은 구약의 하나님을 심지어 전쟁을 즐기는 악마의 협잡이(a worker of evils)며, 일관성 없이 심판을 일삼는 자기 모순적 존재라고 힐난하였다. 반면에 세상을 만든 하나님 보다 우월한 아버지로부터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찬하였다. 이레니우스가 남긴 말시온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마르시온은 그리스도의 탄생이 생략된 누가복음과 바울서신만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둘째, 반유대주의, 신구약의 구분, 신구약의 불연속성을 특징으로 한다. 셋째, 이 땅에서 취한 육체는 구원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을 영적인 영혼의 구원만으로 한정시켰다.


4) 유대주의계

1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유대주의 형태의 영지주의 가운데 대표적인 분파로는 에비온파(Ebionites)와 키린투스파(Cerinthus)가 있다. 에비온주의는 구약성경의 “가난한 자”라는 뜻의 evionim에서 유래했으며 본래 예루살렘의 신자들에 대한 경칭이었다. 이들의 큰 특징은 “유대주의와 기독교 요소들을 자신의 사상속에 혼합”시킨 점이다. 그리고 마태복음만 사용했다.

이들이 갖고 있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양자설이다. 예수는 동정녀에게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요셉과 마리아와의 사이에 탄생한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간이지만 공의, 신중성 그리고 지혜 등 다른 모든 면에 있어서 보통 인간들보다 탁월하다. 그들은 예수를 참 선지자로 이해하고 예수와 모세를 동일선상에서 취급한다. 또한 세례시에 그리스도가 비둘기 형태로 예수에게 임하여 알려지지 않은 아버지를 계시하다가 예수 생애의 말년, 십자가상에서 예수에게서 떠나갔다고 하였다.

유대주의계 영지주의 이단 가운데 더 위험했던 것은 케린투스였다. 에비온파와 비교한다면 키린투스(Cerinthus)는 좀 더 원색적인 이단 지도자였다. 카이우스는 자신의 논쟁(The Disputation)에서 케린투스는 “사도가 기록한 것처럼 꾸민 계시록을 사용”하고 “거짓으로 이적을 행하는 체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가 가르친 교리 중에는 그리스도께서 세상 나라를 소유할 것이라는 교리도 있다. 그는 축제와 희생제사 그리고 희생물을 살해함으로서 식욕과 정욕을 만족시켰다.


지금까지 영지주의의 유형을 요약한다면, 현대 이단과 마찬가지로 초대교회 이단들도 역사에 현존하지 않는 새로운 교리를 도출하거나 역사적인 가르침을 일대 수정하여 자신들의 교리를 산출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새로운 교리의 창출은 기성교회의 특징은 아니다. 역사적 기독교와 정통주의 신학은 신학 자체가 완성된 것이 아니라 완성되어 가는 것임을 확신하기 때문에 기성의 교리를 발전 개혁하기는 하지만 성경의 교리를 새롭게 창조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와는 달리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이단들은 항상 새로운 교리를 고안한다. 이런 교리적 혁신 때문에 이단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라는 낙인이 찍힌 것이다.


(5) 영지주의 평가

이들이 기독교인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던 이유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무엇보다도 영지주의자들은 그들만이 그리스도와 구원에 관한 특별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하였다는 점이고 이것이 일부 불안정한 기독교인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다. 게다가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만이 악의 기원 문제를 해결하여 주는 것처럼 강조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영지주의에 매력을 느낀 근본 이유는 영지주의자들이 사용하는 교리나 가르침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교리와 유사한 점이 많았다는 점이다. 영지주의는 기독교로부터 특정의 요소를 빌어가지고 이를 자신들의 일반적인 구원론으로 변형시켰다.

영지주의와 기독교와의 본질적인 차이는 계시관, 신론과 구원론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성경 외에 특별한 계시가 있다고 믿으며 성육신도 부인한다. 기독교의 구원이 죄에서의 구원, 영육의 구원인데 반하여 이들은 영혼만의 구원을 말하며 구원의 개념도 영혼의 복귀 또는 영혼의 육체에서의 해방을 말한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 역시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3. 영지주의의 대표적 실례


(1) 발렌티누스

알렉산드리아 출신 발렌티누스는 로마에서 가르치다가 주후 160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교회의 일원이었고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생각했으며 기독교 가르침을 헬라사상 및 동양사상과 결합시켰다. 발렌티누스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영지주의는 원래 존재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출발한다. 그는 홀로 있기를 원치 않아 마음(mind)과 진리(truth)라는 두 애온(Aeons, divine beings)을 낳았다. 그들은 네 개의 애온인 세계-생명(world-life)과 인간-교회(man-church)를 낳았다. 그들로부터 생산의 과정은 계속되어 애온들은 총 30이 되었다. 인간-교회 사이에서 태어난 마지막 애온은 지혜라는 여자 애온이다. 그녀는 아버지를 알기 원했지만 알 길이 없자 그녀의 슬픔은 결국 남자 없이 “불확실함”을 의미하는 아카모스(Achamoth)라는 자녀를 낳았고 이 때문에 플레로마에서 떨어져 나갔다. 지혜는 더욱 슬퍼했고 애온 마음과 진리에게 그녀를 도와 줄 것을 청했다. 마음과 진리는 지혜를 슬픔에서 건져내기 위해 그리스도와 성령이라 이름 하는 두 개의 다른 애온들을 낳았다. 그들의 행위가 플레로마 사이에 조화를 회복시켰고 그 사실에 감사해서 30개의 애온들 모두는 또 다른 애온을 낳아(put forth)예수라 이름 했다.

발렌티누스의 체계는 어떻게 세상과 사람이 존재하게 되었는가? 왜 선이 악과 함께 공존하는가? 어디서 선과 악이 나왔는가? 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영적이며 어떻게 구원이 완성되는가를 설명해주는데 초점을 맞춘다. 발렌티누스는 기독교의 중요한 가르침과 헬라의 세계관을 연합시켰다.

역사적으로 기독교 교회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 때문에 영지주의를 거부했다.

a. 지고의 하나님(the Supreme God)에 대한 지식과 그와의 교제가 불가능하다. b. 세상의 창조가 절대자 하나님의 작품이 아니라 열등한 신(무 inferior deity)의 작품이다. c. 물질계는 악하다. d. 구주는 하나님도 사람도 아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죽지도 죽음에서 부활하지도 않았고 사람처럼 보일 뿐이지 실제로 인간이 아니다(이점은 Docetism의 가르침과 비슷). e. 단지 몇 사람, 즉 태어날 때부터 영적인 사람들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 f. 부활이 없다.


(2) 마르시온 주의

영지주의가 기독교와 헬라철학을 혼합시킨 종교적 잡록집(Potpourri)인 데 반해 마르시온은 사도바울에게서 나온 특정의 사상들에 기초하여 기독교의 급진적 재편과, 아울러 모든 유대주의 요소들의 제거를 시도했다.

마르시온이란 소아시아 북부 해안 도시 시노페에서 감도의 아들로 태어나 주후 140년경에 로마로 이주해왔다. 로마에서 그는 세르돈(Cerdon)이라는 영지주의자의 영향을 받았다.

세르돈의 영향을 받아 마르시온도 율법과 선지자들이 선포한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전자는 알려진 분이고 후자는 알려지지 않은 분이기 때문이다. 전자는 의로운 분이고 후자는 은혜를 주시는 분이다. 마르시온은 이런 가르침에 비추어 구약과 신약을 이해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마르시온이 영지주의와 연계되었다는 사실을 쉽게 발견 할 수 있다. 마르시온은 반유대적인 기독교 사상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1) 신약과 구약의 대립

마르시온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예리하게 구분했다.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들에 기록된 하나님은 세르돈이 말하는 열등한 하나님(the inferior God)이다. 반면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는 알려지지 않은 선한 아버지(the good unknown father)를 계시하신 분이다. 때문에 마르시온은 구약보다 신약을 선호했지만 신약 모두가 그리스도에 관한 순수한 가르침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두 하나님의 구별이 말시온의 가르침의 핵심이다. 자연히 그에게 구약과 신약, 율법과 복음은 절대적으로 구분되며 상호간에는 연속성이 없다. 구약과 율법과 이스라엘은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나왔다. 반면 신약과 복음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인 하나님에게서 나왔다.


2) 마르시온의 기독론과 구원론

마르시온의 기독론은 전형적인 영지주의를 반영한다. 그리스도의 몸은 물질이 아니라 그렇게 보일 뿐이다. 결과적으로 마르시온은 육체 부활의 사상을 거부하였다. 철저한 금욕주의 사상 때문에 그는 성찬식에서 포도주를 사용하는 것을 금하였으며 영지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결혼을 악한 것이라고 인식했다.


3) 마르시온의 영향

마르시온의 사상은 기독교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한편으로는 기독교를 헬라철학 사상과 혼합시켰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 내에 영육의 분리사상 즉 이원론을 뿌리 내려 타세적인 신앙을 더욱 촉진시켰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르시온 이단을 그의 섭리 역사를 위하여 선한 도구로 사용하였다. 그 첫째가 정경의 형성이다. 둘째 사도신경의 발달이다. 또한 말시온은 창조주 하나님과 구세주와의 관계를 연구할 필요성을 남겼다. 그리고 이것은 기독론뿐만 아니라 삼위일체론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구약과 신약의 연결을 하나님의 속성에서 찾았다. 이 하나님은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는 또한 창조주-구속주 하나님(the Creator-Redeemer God)이시다.

마르시온의 영향력은 2세기경에 절정에 달했다. 이레니우스와 터툴리안이 마르시온을 영지주의자들을 공격했던 똑같은 방법으로 공격했다. 천지창조부인, 창조주와 그리스도의 아버지 구분, 가현설적 기독론, 성육신과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부인, 영혼만의 구원, 물질계와 영계의 구분 등 이원론적 사고를 혹독하게 비판했다. 또한 서방에서 마르시온의 영향은 그들이 마니교와 연계되면서 급격히 세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레니우스와 터툴리안의 글이 영지주의를 격퇴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이 집단은 그 후 세력이 줄어들었지만 7세기까지 역사 속에 존재하였다.


4. 몬타니즘

몬타니즘은 본질적인 성격상 기독교라 말할 수 있다. 그들은 교회의 신앙을 따라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 이점에서 몬타니즘은 마르시온과 차이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몬타니즘은 초대교회에서 거부당했던 종교운동이었다.


(1) 배경

몬타니즘은 몬타누스에게서 출발한 운동이며 서부 소아시아 지역인 브리기아(Phtrigia)에서 172년부터 일어났다. 몬타니즘의 발흥에 관하여 유세비우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모든 선을 대적하는 큰 적수이며, 악을 조장하는 자이며, 또 인간들을 대적하여 온갖 음모를 아끼지 않는 하나님의 교회의 원수는 다시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교회를 대적하는 새로운 이단들을 출현케 했다. 이들 중 어떤 이단들은 독사처럼 아시아와 브리기아 지방에 기어들어왔다.

원래 이교 제사장(a pagan Phrgian priest)이었던 몬타누스는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한 후 이교주의를 포기했지만 여전히 새 종교를 구 종교 관습 속에서 이해하고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교회는 그들의 자만한 것이 기성교회의 문제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악령 때문이라고 보았다.


(2) 가르침

몬타누스는 그를 통해 성령(Paraclete)시대가 왔다고 가르쳤다. 유세바우스의 증언에 의하면 몬타니스트들은 “자신들이 성령과 예언의 은사”를 소유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이들의 일관된 주관은 성령께서(Paraclete)께서 예언자 몬타누스와 그를 돕는 두 여인을 통해 새 예언을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몬타니즘의 세력이 커지면서 다른 관습들이 추가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독신과 순교에 대한 강조다. 단지 한번만 결혼해야 하며, 영적인 이유로 결혼을 포기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순교가 권장되었고 순교를 피하는 것은 죄이다. 또한 여인이 교회에서 공직을 가질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


(3) 몬타니즘과 교회

예언과 은사에 대한 강조는 이런 것들을 소유하지 않은 이들이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인가 하는 문제로 고민하게 만들었다. 세 예언자와 뚜렷하게 성령을 받은 다른 사람들이 죄를 용서할 수 있다는 가르침은 감독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몬타누스주의자들은 세상과 완전한 분리를 강조하고 가르쳤다. 공식적인 박해에도 불구하고 몬타니즘은 종말에 대한 강조 때문에 핍박받은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4) 영향 및 쇠퇴

영지주의, 마르시온주의와 같이 몬타니즘은 교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성령께서 사도시대와 같이 교회 안에서도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또한 성령의 역사에 교회가 민감해야 한다는 교훈을 남겨 주었다. 또한 몬타니즘의 등장으로 교회의 권위의 형태에 변화가 오기 시작하였다. 부차적으로는 교회에 평신도 운동을 촉진하는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몬타니즘의 극단적인 성령운동은 교회에 무질서를 가져다주었다. 몬타니즘의 출현으로 교회는 새로운 운동이 일어날 때, 그것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몬타니즘은 교리적인 기준이 없는 신앙이 교회에 얼마나 유해한 것인가를 보여준 역사적 건이다.


5. 요약

영지주의는 정통주의 형성에 간접적인 촉진제가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단들의 도전을 통하여 기독교 신앙은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게 되었고 이단 사상이 등장하면서 정통 기독교 교리가 체계화되기 시작하였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이단이 무엇인지를 판별할 수 있는 이단의 판단기준들이 기독론과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정립되기 시작한 것은 니케아 회의 이후이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 이전에는 신약성경 이외에 정통 신앙의 보편적 표준은 존재하지 않았다.” 니케아 회의 이후 니케아 신조가 이단 판단의 기준이 되었으나 니케아 회의 이전에는 성경과 신앙율, 사도들의 가르침들이 이단 판단의 기준이 되었다.

영지주의가 많은 기독교적인 용어들을 차용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성육신, 구원, 삼위일체, 성령과 같은 성경적인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다.



제 5 장 교회의 응전

“그러므로 저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므로 그리스도인의 성경을 소유할 권한이 없다. 진실로 마르시온이여, 무슨 권한으로 너는 나의 나무를 찍는가? 발렌티누스여, 너는 누구의 허락을 받아서 나의 시냇물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가? 아렐레스여, 너는 무슨 권세로 나이 경계표를 옮기는가? 이 남은 자들, 너희들은 도대체 누구냐? 너희 마음대로 갈고 뿌리고 있느냐? 이것은 나의 소유다. 나는 이것을 오랫동안 소유하고 있었다. 나는 너희보다 먼저 그것을 소유하였다. 나는 이 재산의 본래의 소유자들로부터 받은바 틀림없는 양도증을 가지고 있다. 나는 사도들의 상속자다.”

터툴리안Tertullian


1. 신경의 발달

신경(creed)은 “나는 믿습니다”를 뜻하는 란틴어 크레도(credo)에서 유래했다. 신경의 역사는 교회의 역사만큼이나 오래 되었다. 사도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을 남겨주었고 이 신앙 고백은 하나의 틀을 이루어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성경에 나타난 신앙고백 외에 클레멘트와 이그나티우스 같은 속사도들의 신앙고백에서는 당대의 신앙고백의 일반적인 형식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이 시대의 신앙고백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였다. 당대의 영향력 있는 가현설(Docetism)을 염두에 둔 듯 속사도들의 신앙고백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이고 역사적인 삶이 실제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그나티우스의 신앙고백이후 좀더 모양을 갖춘 신앙고배이 변증가의 대변자라고 알려진 저스틴 마터의 작품에 나타난다. 165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이 신앙고백은 개인적인 형태의 훌륭한 신앙고백을 담고 있다.

“우리는 태초부터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모든 만물의 창조자이며 조물주이신 한 분 그리스도인의 하나님을 예배한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예언자들에 의해 성육신하셔서 구원을 알리시고 선한 스승이라고 앞서 선포되신 하나님의 종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한다.” 그러나 저스틴의 신앙고백에는 성령에 대한 고백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보다 좀 더 발전된 고백형태가 서머나의 장로들의 것이라 알려진 신앙고백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약 200년 혹은 이후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1907년에 발견된 발리제트 파피루스(Der Balyzeth Papyrus)라는 한 파피루스에는 매우 흥미있는 신앙고백이 담겨져 있었다. “나는 전능하신 성부하나님을 믿사오며, 그의 아들 독생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며, 그리고 성령을 믿사오며, 육체의 부활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the Holy Catholic Church)를 믿사옵나이다.” 속사도들과 변증가들의 신앙고백은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바울의 신앙고백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후 속사도들과 변증가들의 신앙고백이 교부들에 와서 더욱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지금가지의 단순하고 단편적인 신앙고백과 내용이 같지만 좀 더 체계적이고 해석적인 신앙율(Rules of Faith)이 약 150년부터 200년 사이에 널리 사용되었다. 이 신앙율은 세 가지 중요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신앙율은 먼저 교리적인 표준(a Standard of Faith)으로 사용되었고, 세례입문 교육의 기초를 제공했으며 성경해석의 안내서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단에 대항하여 정통신앙을 변호하는 신학적 내용을 제공해 주었다. 신앙율의 원형을 찾을 수 있는 대표적인 두 인물은 이레니우스(190)와 터툴리안(Tertullian, 200)이다.

이레니우스의 신앙율은 빌립보서 2장 5절 이하에 나타난 바울의 기독론과 상당히 유사하다. 이레니우스의 신앙고백은 사도신경과 전체적으로 내용, 윤곽, 체계를 같이하고 있는 훌륭한 신앙 고백서로 성부하나님이 천지의 창조주이심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런 신앙고백의 내용은 터툴리안이 제시한 신앙율 속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터툴리안의 신앙율은 이레니우스의 것과 비교할 때 한층 간결하고 함축적이며 후대에 발전된 사도신경과 흡사하다. 이레니우스의 신앙율이 빌립보서 2장의 내용과 유사한 반면 터툴리안의 신앙율의처음 부분은 요한복음 1장과 유사하다.

초대교외의 가장 집약된 신앙고백은 역시 사도신경이다. 사도신경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체계화 되었다.

기원은 확실하지 않지만 로마신경의 초기형식이 히폴리투스 신경(the Interrogatory Creed of Hippolytus's Apostololic Tradition. 215), 마르셀루스(Marcellus)가 쥴리우스 1세(340)에게 제출한 신조, 그리고 사도신경에 대한 루피누스(Rufinus)의 주석에서도 마찬가지로 보존되어 있다. 전형적인 로마 신경은 로마교회가 주후 200년경 세례 문답시 행한 신경이다.

히폴리투스의신경도 성부, 성자, 성령, 공회, 그리고 죽은 자의 부활 등의 신앙고백을 따라 문답의 틀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것은 사도신경의 순서와 상당히 맥을 같이 한다.

이런 신앙고백의 형태가 3세기 초엽에 일반적으로 교회의 신앙고백과 세례문답으로 널리 통용되다가 4세기 중엽에 문답식의 형식을 떠나 오늘날과 같은 사도신경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사도신경과 매우 근접한 가장 대표적인 것이 340년에 마르셀루스(Marcellus)가 줄리우스 1세에게 보낸 신경이다. 이 신조가 이전의 신조와 두드러지게 다른 점은 마지막에 죄의 용서와 영생이 추가되었고 좀 더 함축적으로 다듬어졌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 같은 사도신경은 약 5세기경에 등장했다. 사도신경의 텍스트 리셉투스(the Textus Receptus) 즉 원형은 프리미니우스(Priminius)의 De singulis libeis canonicis scarapsus 에서 최초로 발견된다.

약 710년과 724년 사이에 등장한 사도신경은 로마교회 신조에 상당한 빚을 지고 있으며 드디어 로마교회에 의해 처음으로 채택되어 서방교회의 신조가 되었다.

이단의 발흥에 대한 교회의 응전으로 생성된 신조는 이단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정착되었다.


2. 정경의 형성

신경 외에 이단의 발흥으로 촉진된 것이 정경의 형성이다. 우리에게 알려진 최초의 신약성경이 목차는 무라토이안 단편(the Muratorian fragment)으로 알려진 고대 문헌 가운데서 찾아 볼 수 있다. 주후 200년 까지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약의 대부분은 초대교회에 의해 정경으로 인정을 받았다.

정경을 형성하는 중요한 기준은 각권이 사도들 또는 사도들과 가까운 자들에 의해 기록되었는가하는 것이었다.

현재 존재하는 신약대로 완전한 정경이 설정된 것은 AD 367년 아다나시우스에 의해서이다. 두 번의 힙포 공의회(Councils of Hippo)가 힙포 레기우스(Hippo regius:393)에서 그리고 카르타고 공의회가 어거스틴(Augustine)의 지도 아래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carthage : 397)에서 열려 현재와 같은 정경을 공식적으로 확정지었다. 동방과 서방교회는 그들의 선례를 따라다.

정경이 완성되기 까지는 거의 300년이 필요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정경의 출현이 아다나시우스(Athanasius)나 종교회의(Synods)의 공식적 선언의 결과는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 공식선언은 이미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랫동안 받아들인 것을 단지 확인했을 뿐이다. 신약 성경의 기록과 그것들이 교회에 의해 정경으로 받아들여진 것 모두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단의 발흥으로 촉진된 정경의 형성은 이단과 이설을 평가할 수 있는 구체적인 평가기준을 교회에 제공해준 셈이다.


3. 감독제도의 발달

교회가 내외적으로 도전을 받으면서 교회는 그들의 결집된 힘을 통해 이런 외부의 도전들을 효과적으로 대처해야만 했다.

로마의 클레멘트(A. D. 96)는 96년에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감독(episkopos)과 장로(presbuteros)를 구분하지 않고 동의어로 사용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클레멘트가 감독들의 권위를 언급하면서 그 기원을 하나님에게서 찾았다는 사실이다. 이그나티우스에 의하면 감독은 기독교 공동체의 상징인 동시에 사도적 전통(apostolic tradition)의 전달자였다.

이레니우스는 로마교회의 권위를 강조한 또 하나의 중요한 인물이다. 두 가지 사상 즉 이그나티우스의 단일 감독제와 클레멘트의 사도직의 계승이 70년 후에 이레니우스에 의해 하나로 연합되어 감독의 권위를 한층 체계화 시켰다. 이레니우스는 모든 감독들이 똑같은 권한을 지니고 있다고 이해하지 않았다. 특별히 로마교구의 감독은 우월한 권위를 가지는데 그것은 그 교회가 베드로와 바울에 의해 설립된 교회이며 그들의 권위를 계승한 교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레니우스의 경우 로마교회는 사도의 권위를 계승한 교회이며 그 중에서도 베드로와 바울의 사도직을 승계한 정통성 있는 교구이기 때문에 로마교회 감독은 다른 교구보다 더 권위를 지닌다는 논리를 가지고 있었다. 자연히 여러 감독들 중에서 베드로와 바울을 계승했다고 알려진 로마이 감독이 첫 번째 서열에 있었다.

감독의 권위가 2세기 동안에 대단히 성장했지만 권위에 대한 이해에는 견해차가 있었다. 이레니우스가 로마교회의 우월성을 인정한 반면 터툴리안은 사도적 권위를 어떠한 교회에서 찾지 않고 정통교리를 고수하는 사도적 기원을 가진 교회들, 예를 들면 고린도, 빌립보, 에베로, 로마교회에서 찾았다.




제3부 3세기와 기독교 사상의 확립



제1장 이레니우스와 소아시아 신학


“그가 성육신 하셔서 사람이 되셨을 때 그는 스스로 인간의 오랜 족보 안에 총괄갱신(recapitulate) 하신 것이며, 따라서 우리에게 구원을 제공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담 안에서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 안에 존재하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얻은 것이다.”

Irenaeus


터툴리안이 서방신학의 초석을 형성하였고, 오리겐이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기초를 제공하였다면 이레니우스는 소아시아 신학의 초석이 되었다.


1. 이레니우스이 생애

가톨릭 교의학의 아버지 또는 “교회의 최초의 위대한 조직신학자”라 불리우는 이레니우스는 교회의 전통, 구속사, 신구약의 권위 등 여러 분야에서 업적을 찾을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2세기 영지주의자들과 논쟁에서 중요성 때문에 기독교회사에서의 의미심장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레니우스는 일생동안 영지주의를 논박하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계획을 역사신학 내에서 진지하게 설정하였으며, 신약을 구약과 같은 권위로 보면서 성경을 총체적으로 사용한 최초의 그리스도인이었다. 이레니우스는 기독교를 진정한 철학으로 보려는 변증가들의 견해에 반대하였으며, 헬라적 사색의 도움을 동원하지 않았고, 계시의 내용이 단순히 새로우면서도 보다 나은 철학에 불과하다는 자들과도 견해를 달리했다. 그에게는 성경적 전통만이 신앙의 유일한 근원이었다.

목회적 소질을 타고난 이레니우스는 고울에서 복음을 전파하며 이단으로부터 양들을 변호하는데 상당한 관심을 쏟았다.

다른 한편으로 이레니우스는 변방에 있는 켈트족의 복음화와 리용의 교회 평화를 위해 노력했다. 후기 자료에 의하면 이레니우스는 리용에 있는 기독교인들이 죽임을 당하던 202년에 순교하였다.


2. 이레니우스의 작품

이레니우스는 수많은 저술을 기록한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는 것은 <소위 영지주의의 고발과 논박>과 <사도적 설교의 논증>이다. 전자는 영지주의자들에 대항하여 기술된 작품으로 <이단 논박>(Adversus haereses)으로 알려졌다. 다섯 권으로 되어있는 이단 논박은 주제에 따라 다름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영지주의의 해설; 2-이성에 의하여 논박함; 3-5 - 선지서, 주의 말씀과 사도들에 기초한 성경으로부터의 논박, 이 책에서 이레니우스는 영지주의의 대표적인 유형인 발렌티누스의 제자인 플톨레매우스(ptolemaeus)의 제자들의 가르침을 집중적으로 파헤치고 있다.

역사적 성육신에 기초한 이런 통시적인 구속사와 신구약의 연속성의 개념은 에피데이키스(Epideixis)라고 불리우는 단편작품 <사도설교의 논증>에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이 작품에서 이레니우스는 창조에서 최후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구원의 역사를 제시한다.


3. 이레니우스의 총괄 갱신(복구)

이레니우스는 하나님의 형상을 독특하게 해석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셨다. 이 형상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바로 그 형상을 따라서 인간이 지음을 받았다.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은 아들 속에서 찾을 수 있으며 또 이 아들이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은 불완전한 인간이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에 이르기까지 성장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에덴에서의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인간을 사랑하시며, 그 사랑은 하나님의 본연의 계획을 수행하심으로 실현된다. 이런 사랑은 섭리라고 하는 하나님의 원대하신 계획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이 섭리는 4단계의 언약으로 구분된다. 첫 번째 언약은 아담언약으로 아담에서 노아홍수까지이고, 두 번째 언약은 노아의 언약으로 홍수 이후부터 출애굽까지 이며, 세 번째 언약은 모세의 언약으로 모세부터 그리스도의 초림까지 이고 마지막언약은 그리스도의 언약으로 그리스도의 초림 때부터 종말까지 이다.

창조와 구속 그리고 구약과 신약을 연결할 수 있는 구심점은 바로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과 원형이신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어 인간들 가운데 거하게 되셨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새로운 인간상을 회복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원대하신 계획의 일환이며 바로 이것이 이레니우스가 말하는 총괄갱신(recapitulatio)이다.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자신 안에 총괄하신다는 것은 곧 인류를 회복하는 것이며 인류를 갱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모든 인류의 대표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새로운 인간상의 총화이며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이자 구속의 정점이다.

총괄갱신의 또 하나의 근본적인 측면은 사탄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이다. 이런 사탄에 대한 투쟁은 3단계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는데, 첫 단계로 성육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현현되어 총괄갱신이 시작되었고 그리스도의 시험을 통하여 사탄에 대한 결정적 승리를 가져왔으며, 그리그도의 부활의 통해 사탄의 비장의 무기였던 사망을 정복하셨다. 그리고 마지막에 사탄에 대한 최종적인 승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도래하며 그 때가 오면 만물은 그에게 귀속될 것이다.

이레니우스의 총광갱신에서 교회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담이 인간의 머리이므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듯이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교회는 사탄을 정복한다. 그리스도께서 마귀를 정복하셨고,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충만케 이루기까지 성장시켜 줄 가능성을 회복시켜 주셨어도, 이 가능성은 몸이고,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는 세례와 성찬을 통해서 총괄갱신 사역을 진행시키시고, 세례와 성찬은 인간을 그리스도 자시에게 연합시켜 준다.

교회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서 매우 중요하다. 성만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의 실체는 물질적인 요소를 평가 절하시키는 영지주의에 대항하여 이레니우스가 확신하던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이 자신들의 비밀 전통과도 사도성을 주장하지만 그것은 왜곡된 것이며 그들은 총괄갱신의 구속사역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다. 이단들은 교회의 위협이며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장애물인데 무엇보다도 영지주의는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4. 이레니우와 전통

이레니우스는 사도적인 전통(가르침)은 성경에서 발견되며 교회에 보존되어 왔으며, 따라서 “진리를 보기 원하는 사람은 온 세계에 분명하게 된 사도들의 전통을 어느 교회에서나 분명하게 볼 수 있다”고 보았다.

교회의 전통에 대한 이레니우스의 호소는 정경형성과 깊은 관련을 갖는다. 이레니우스는 4복음서를 의심없이 수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4복음서가 이레니우스 시대에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레니우스의 역사관을 언급해보면, 이레니우스가 구속사관을 제시한 최초의 역사 신학자로 평가 받는 이유는 그가 창조와 구속을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구속사라는 관점에서 구약과 신약을 통일시 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그의 통시적인 역사 이해는 창조주와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하나이며 같은 하나님임을 확신하는데서 출발한다.


5. 요약 및 평가

이레니우스는 최초의 교부로서 사도시대와 속사도시대 그리고 변증가들의 시대를 요약하고 3세기와 4세기 교부들로 잇는 교차로에 서있다는 점에서 역사 신학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한 시대를 마무리하고 한 시대를 여는 역사적 교차로에 있었던 이레니우스가 이전 사상들과 연속성과 불연속성 둘 모두를 지니고 있는 인물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이레니우스가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매력을 주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제 2 장 라틴 신학


“아테네와 예루살렘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가? 플라톤의 아카데미와 교회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단들과 기독교인들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가? ‘스토아적’ 기독교 ‘플라톤주의적’ 혹은 ‘변증론적’ 기독교에 대한 모든 계획들을 치워버려라”

Tertullian


라틴신학은 로마에서 보다는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태동되기 시작했다. 카르타고와 북아프리카에 언제 어떻게 교회가 생겨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주후 180년에 그곳에 교회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알려졌다. 교회는 주로 로마인들이나 그들과 상업적인 거래를 했던 퓨닉계인들 가운데 존재했다. 따라서 기독교는 두드러지게 도회적이고, 도덕적이고 라틴적이었다. 북아프리카는 터툴리안(212), 키프리안(258년) 그리고 어거스틴(430) 등 3명의 위대한 교회 지도자를 배출했다.


1. 터툴리안과 서방신학

현대인들은 주저하지 않고 터툴리안 (150-212.)을 서방신학의 대변자 혹은 “라틴신학의 아버지”로 평가한다. 그가 서방신학에 미친 영향은 한마디로 지대하다. 그의 작품은 교회 생활뿐만 아니라 교리 및 신학논쟁에 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비록 그가 분리하여 공교회에서 이탈하기는 했지만 그의 저술들은 위대한 서방교부들에 의하여 전수되고 연구되었으며 라틴 교회에서 무게있게 취급되어왔다.


(1) 터툴리안과 몬타니즘

약 200년경 카르타고 교회의 장로로 안수 받은 터툴리안은 점차 몬타니즘으로 기울다가 207년 경에는 몬타니즘에 합류했고, 얼마 후에는 아예 공교회에서 완전히 분리해 나갔다. 그가 몬타니즘에 합류 하게 된 일반적인 견해는 첫째는 제랄드 브레이(Gerald L. Bray)같은 이들이 주장하는 것으로 터툴리안이 몬타니즘에 합류한 것은 이 집단이 터툴리안 자신의 가르침을 옹호하는 집단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몬타니즘의 금욕주의적인 신앙이 터툴리안의 생활태도와 일치했다고 보는 견해이다. 세 번째 견해는 “부분적으로는 당시의 교회가 회개의 문제와 관련하여 느슨한 관습을 가지고 있는 데에 대한 반발의 표시로 해석된다.


(2) 터툴리안의 작품

첫 번째 중요한 작품의 범주는 변증론(Apology)이다. 기독교로 개종한 후 자신의 신앙을 변호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터툴리안은 신앙을 변호하는 작품을 저술하였다. 일련의 변증서를 저술한 터툴리안은 변증적인 차원을 넘어 이설과 이단들을 반박하는 작품들을 쓰기 시작한다. 알렉산드리아 교부들이 직접 이단들의 문제를 거론하면서 그들을 반박하는 것에 비해 터툴리안은 법적인 용어를 동원하여 현재 교회가 갖고 있는 전통에 호소함으로써 영지주의를 비판하였다. 터툴리안에 따르면 진정한 기독교만이 전통을 소유할 권한이 있으며 그런 면에서 이단들은 취득시효를 상실했으며 전통적 교회가 그 권한을 가진다.

변증서나 반박 외에 터툴리안의 작품 가운데 또 하나의 작품 부류는 도덕적, 예전, 권징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작품의 성격상 목회적 작품들, 교회에서 여성의 위치와 역할에 관한 작품들, 그리고 이교철학을 논한 작품으로 나눌 수 있다.


(3) 터툴리안, 이성, 신앙, 철학

터툴리안이 철학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이러한 철학 거부 태도는 신앙과 이성에 관한 그의 태도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인간이 믿는 것인 그의 이성으로 이해될 수 없다는 식의 논리가 그것이다. 터툴리안에 따르면 믿음에 과한 지식은 이성에 관한 지식과는 다르다. 전자의 것은 그 나름대로의 지위를 가지는 것으로서 이성적 증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당대의 철학이 이단들과 연계성이 있음을 발견한 터툴리안은 철학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졌고, 그 때문에 터툴리안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세계에 살던 당대인들과는 달리 자신의 신학을 표현하는데 특별히 철학적 용어에 빠져들지 않았다.


(4) 터툴리안의 세계관

터툴리안의 철학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 그의 종말론적이고 금욕주의적인 태도는 그의 세계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듯하다. 터툴리안에 따르면 사회가 기뻐할 때 기독교인은 슬퍼하며, 이방인이 행복할 때 기독교인은 슬퍼하고, 저들이 슬퍼하기 시작할 때 그리스도인이 기뻐하는 역설이 가능하다. 세상의 쾌락을 멸시하며 세상의 활동을 비웃는 일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 없는 쾌락이라는 논리다. 이와 같은 터툴리안의 부정적인 세계관은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강하게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어느 정도는 터툴리안이 몬타니즘에 가담한 이후 몬타니즘의 부정적이며, 종말론적아고, 금욕주의적인 세계관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5) 터툴리안과 성서이해

터툴리안은 고등성경관을 갖고 있는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두 권을 제외한 신약의 거의 모든 성경으로부터 직접 인용하며 신양성경들을 구약과 같은 권위로 두고 있다. 그는 또한 신앙의 규범(“regula fidei")또는 신앙율이라 부르는 것을 많이 언급한 것으로 유명하다.


2. 키프리안과 북아프리카 교회

키프리안(Caecilius Cyprian)은 주후 248년에서 258년까지 카르타고의 감독으로 봉직했다. 키프리안 자신은 처음에 감독의 직위수락을 주저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일단 선출된 후에는, 직무에 열성적으로 헌신하여 오랫동안의 평화로 다소 침체의 기미를 보였던 이 교회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


(1) 키프리안과 데시우스 박해

키프리안은 3차 박해로 역사에 알려진 데시우스의 전국적인 박해기간에 8년 안 카르타고 감독을 지냈다. 그가 감독이 된지 불과 2년 만에 데시우의 황제의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것은 전국적으로 진행된 최초의 박해였다. 로마 제국 내에 모든 국민들은 신에게 제사를 드려야 했다.

키프리안 자신은 환난 기간 중에 지하로 숨어 편지로 목회하는 방식을 택했다.


(2) 키프리안과 교회의 일치

데시우스 황제가 고트족 전투에서 살해되고 251년 박해가 종결되자 박해 기간에 숨어 있던 키프리안이 카르타고의 교회를 재건하기 위해 나타났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문제가 발생하였는데, 박해기간 중에 그리스도를 부인했던 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나타나 교회에 재 입교 시켜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키프리안은 질서를 회복하는데 굉장한 진통이 따랐다. 키프리안은 순교자들과 핍박 중에도 절개를 지킨 고백주의자들을 크게 존경하였다.

키프리안은 교회의 통일성을 영적이고 내적인 통일성에서만 찾지 않고 오히려 가견적인 교회의 일치 속에서 그 의미를 찾으려고 하였다. 가견적인 단일체로서의 교회 밖에는 영적 생명이나 구원이 없다는 것이다.

교회의 통일성에 대한 키프리안의 변함없는 확신은 감독직의 통일성 이론을 확대되기 시작했다. 때문에 키프리안은 교회의 일치를 감독의 일치와 직결시키고 교화가 하나이듯이 감독직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키프리안은 교회의 일치를 강조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의 하나됨 그리고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됨에 호소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치를 파괴하는 것은 곧 교회의 순결을 파괴하는 반 기독교적인 행위로 간주했다.


(3) 키프리안 대(對) 노바투스

교회일치를 강조하며 분열을 막으려는 키프리안의 정책이 북아프리카 감독들과 로마 감독의 지지를 받았다. 노바투스가 “허황된 사상에 빠져 스스로를 카타리(Cathari)파라고 부르는 특이한 이단자들의 지도자가 되자 이 문제로 대단히 큰 규모의 종교회의가 열렸다. 종교회의에서는 키프리안의 입장을 따라 이방신들에게 실제로 제사를 지낸 자들은 죽을 때에 공교회에 재 입교 시킨다는 데로 의견이 모아졌다.

우리는 노바투스, 노바투스와 연합한 오만한 사람들, 그리고 그의 무자비하고 지극히 비인간적인 견해를 채택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교회로부터 멀어진 사람들로 간주한다. 우리는 과거 재난을 초래했던 회개라는 치료책으로 그들을 치유하여 주어야 한다.

교회 일치와 정치적인 일치를 추구했던 콘스탄틴이 즉위하여 326년에 칙령이 발표되면서 노바티안들에게도 신앙의 자유와 교회의 재산권이 인정되기 시작하였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는 노바티안의 감독 아케시우스(Acesius)가 참석하였다.


(4) 북아프리카 교회와 로마교회의 대립

로마에서는 감독이 그러한 사람(노바티안 교회에서 세례 받은 많은 사람들이 공교회에 들어오기 원했다.)에게 안수하는 절차를 밟은 후 그들을 교회로 입교시켰다. 반면 북 아프리카의 꽤 많은 교회들 중에는, 그러한 사람들이 반드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카르타고의 감독 키프리안과 로마의 감독 스데반의 주장은 서로 달랐다. 키프리안은 칼타고 교회의 입장을 그대로 반영하여 그러자는 제2의 세례를 받아야 할 것을 주장했지만 스데반은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로마의 감독 스데반은 교회 밖에서 일지라도 물로 세례를 베풀고, 그리스도의 명을 따라 성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시행했다면 유효한 세례로 인정하고 세례를 되풀이 할 필요는 없고 다만 안수하는 것으로 대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단자들의 세례문제를 두고 아프리카와 로마 사이에만 의견 대립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것은 초대교회 범 교회적 논쟁점으로 일찍이 몬타누스주의자들과 말시온주의자들의 세례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각 지역마다 의견이 대립되었다. 로마나 팔레스틴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그 유효성을 인정한 것에 반해 라틴 아프리카, 안디옥, 갑바도기아, 길리기아에서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다시 세례를 주어 왔다.


3. 요 약

비록 키프리안이 교회의 영적 측면의 일치를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제도적인 교회 속에서 교회의 일치와 통일을 찾으려고 했던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키프리안의 교회관을 집약한다면, 교회는 일차적으로 외적 조직체 속에서 통일성을 찾아야 하며, 이 가견적이고 보편적인 교회는 하나의 근원을 가지기 때문에 통일성이 존재하며 이 통일성은 감독을 중심으로 유지되고 보존되며, 그리고 이 교회를 떠나서는 결코 구원이 없다는 것이다.

키프리안은 순교로 일생을 마감했다. 또 다시 발레리우스 황제시에 박해가 발생했을 때 키프리안은 박해를 피하기 위해 숨지 않았다. 그는 곧 체포되어 집에 감금되었다. 얼마 후에 키프리안은 교수형에 처해져 순교자의 대열에 올랐다. 키프리안의 견대들은 순교자 감독으로서의 그의 위광에 힘입어 후 세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힘포의 어거스틴과 그의 도나투스파(Donatist) 대적들이 서로 키프리안을 자신들의 영적 아버지로 간주했을 정도이다.



제 3 장 알렉산드리아 신학

“율법이 히브리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듯이 철학은 헬라인들을 그리스도에게도 인도하는 ‘몽학선생’(schoolmaster)이다. 따라서 철학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함을 향한 길을 열어주는 하나의 준비이다.”

알렉산더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카르타고가 제국의 서부에서 로마 다음의 제2의도시가 된 것처럼 알렉산드리아는 동방에서 로마 다음의 도시가 되었다. 알렉산드리아는 정치적 경제적인 면에서 카르타고와 쌍벽을 이루었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서로 달랐다. 일반적으로 평가해서 카르타고는 로마 적인 특성을 지녔고, 알렉산드리아는 헬라적인 특성을 지녔다.

주전 200년부터 주후 300년까지 알렉산드리아는 헬라세계의 지적, 문화적 중심지였다. 약 50만의 인구를 가진 상업의 중심지 알렉산드리아에는 많은 유대인이 살고 있었으며 이집트 전체를 합친다면 유대인의 총수는 약 100만에 육박했다.

알렉산드리아는 헬라적인 특성이 강했지만 유대인의 중요한 중심지이기도 했으며, 이곳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헬라파 유대인들로 종교와 삶의 방식에서 헬라사상과 관습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이 때문에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전형적인 헬라파 유대인으로 역사에 알려졌으며 이들에 의해 이곳에서 주전 250년경에 70인경(the Septuagint)이 번역되었다.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플라톤주의적 경향을 반영하는 유명한 기독교 지도자들을 배출했는데 그중에 클레멘트와 오리겐은 대표적 인물이다.


1.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150-215)로 역사에 널이 알려진 티투스 플라비우스 클레멘트(Titus Flavius Clement)는 2세기 말엽부터 3세기 초엽까지 활동하면서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정초를 놓았다.

스토아 철학에서 회심한 판태누스(Pantaenus)는 저스틴이 로마에서 운영하고 있던 것과 유사한 최초의 기독교 학교를 알렉산드리아에 설립했다. 교회사가 유세비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클레멘트는 팬태누스를 만나 제자가 되어 그와 함께 성경연구에 전념하였다. 그 시기는 대략 180년경으로 추측된다. 클레멘트는 자신의 강요(Institutions)에서 판태투스를 스승이라고 칭할 만큼 높이 평가하고 있다. 판태누스가 죽자 클레멘트가 그를 계승했고 그의 지도력 아래 그 학교는 유명한 학교가 되었다. 이 학교는 교육받은 헬라 지식층에 복음을 전파하여 그들을 기독교인으로 개종시키는 창구역할을 했다.


(1) 클레멘트의 작품

그의 대표적인 저서는 <스트로 마타(Stromateis, The Miscellanies)>라고 불리우는 8권으로 된 책이다. 또 하나의 대표적인 클레멘트의 저서는 <교사(Paedagogus)>라는 제목이 붙은 8권의 저서가 있다. 그 외에 <헬라인에의 권고(Protrepticus: The Exhortation th the Greek)>, <회심에의 권고(An Exhortation to Conversion)>, <부자가 구원받는다면?> 그리고 <교회법(Ecclesiastical Canon)> 등이 있다.

이들 클레멘트의 작품 가운데 두드러진 것은 특별히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초점을 맞춘 3개의 작품으로 클레멘트의 진리 인식론을 그대로 반영한다. 이것들은 <회심에의 권고(Exhortation to Conversion)>, <교사(Tutor)>, 그리고 미완성 작품 <잡문집>(Miscellanies)등이 있다. 그의 첫 작품인 회심에의 권고는 기독교 변증학의 전통을 잇는 것으로 어떻게 로고스가 처음 우리를 회심시켰는가를 성명한다.

<교사>는 기독교 교리의 체계적인 강해를 담고 있으며 어떻게 로고스가 우리를 교회시키는가를 다룬다.

세 번째 작품 <잡문집>은 로고스가 어떻게 우리의 지식을 완전케 하여 참 지식(true gnosis)에 이르게 하는 가를 설명한다.


(2) 클레멘트, 철학, 이성

클레멘트의 신학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출발점은 그가 기독교 진리와 희랍 철학의 진리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이다. 이점에서 클레멘트가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적 기풍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으며, 저스틴과 아테나고라스의 전통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담대하게 기독교와 헬라 철학의 연합을 추구했다. 그것은 로고스가 진리의 원천으로 헬라인들의 철학과 기독교인들의 진리, 둘 모두의 저자라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 클레멘트는 “철학도 진리 참구의 존재로서 진리를 이해하는데 기여한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이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하였듯이 헬라인들에게는 철학이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Paidagogos)인 것이다.

클레멘트는 헬라인들이 철학을 통해 습득한 시작은 기독교인의 신앙을 심오하게 만드는데 사용될 수 있으며, 그러한 지식을 소유한 이들이야 말로 진정한 지식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완전히 알 수 있다고 믿었다. 결국 클레멘트가 강조하려고 하는 바는 신앙이란 지식의 토대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지식과 신앙의 관계는 이성과 신앙과의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클레멘트는 신앙과 이성이 떨어져 기능을 발휘 할 수 없다고 보았다. 믿음의 시발자로서 이성은 믿음보다 우선된다는 것이다. 신앙으로만 만족하고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자는 젖으로만 만족하는 어린 아이와 같다고 말한다. 이런 로고스 중심의 사상은 클레멘트의 성경해석, 신관 그리고 역사관에 깊이 반영되어 있다.


(3) 클레멘트의 성경해석과 신이해

클레멘트의 성경 해석은 문자적 해석과 우화적 해석으로 대별된다. 문자적 해석을 첫 번째 의미로 보고, 우화적 해석을 두 번째 즉, 진보된 의미로 이해했다.

클레멘트의 신관 역시 알렉산드리아의 전통을 반영한다. 그는 플라톤의 영향을 따라 신을 부정적인 개념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은 속성이 없으시고 분질의 범주를 넘어서 계시며, 하나님은 정의내릴 수 없는 분이므로 무엇이라고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클레멘트는 단순히 플라톤의 신관을 답습하기 보다는 성경의 삼위일체 신관과 조화시키려고 한다.


(4) 클레멘트와 역사이해

클레멘트는 현대적 의미의 역사관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의 구심점을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찾았다는 점에서 그의 역사해석은 의의가 있다. 역사의 주체이며 모든 지식과 피조물의 근원인 로고스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육신하셨다는 것이다. 이 성육신은 하나의 역사의 정점이며 헬라와 유대 역사를 한 점에 모으는 전환점이다.


(5) 클레멘스 사상 요약

클레멘트의 성경해석, 신론, 역사관의 구심점은 로고스이다. 결론적으로, 클레멘트의 신학의 핵심은 현대적인 용어를 빌린다면 기독론이라고 할 수 있고, 초대교회적인 의미로 표현한다면 로고스론이다.

이 로고스론은 헬라철학과 성경을 연결하는 교량이며 역사는 전체적으로 통일시켜주는 원리이고 또한 신구약을 총체적으로 연결시켜주는 근본원리이다. 헬라적인 특징과 성경적인 특징이 분명한 구분없이 한데 어울려 마치 현대판 종교 다원주의를 제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레멘트의 사고 속에서는 헬라철학의 중요성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기독교의 유일성을 제창하려는 내면적인 노력이 엿보인다. 정확히 표현한다면 클레멘트는 기독교 진리를 축으로 하여 헬라 철학을 끌어들여 조화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이런 클레멘트의 기독교 사상의 방법론은 오리겐의 신학의 원형이 되었다.


2. 오리겐

3세기 초반 기독교계에서 혜성 같이 떠올라 정통과 이단 양측으로부터 끊임없는 비판과 찬사를 동시에 받았던 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주후 185년경에 탄생하여 254년에 세상을 떠난 오리게네스 아다만티우스(Origenes Adamantius)였다. 터툴리안이 서방신학의 선구자였다면 오리겐은 명실공히 동방신학의 전통을 세워놓은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60평생 이단들과 로마 당국에 맞서 신앙을 변호하였으며 기독교 교육가로 활약하였고 유대인 사회에 대해 기독교를 증언하였으며 교회 내에서는 영적 지도자로 일하였다. 존경을 받았으나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의 저술과 사상은 역사 속에서 수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어왔다. 클레멘트의 사상이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초속이 되었다면 오리겐의 신학과 사상은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골격이 되었던 것이다.


(1) 오리겐의 성장 배경

오리겐은 기독교 가정에서 신앙으로 교육받으며 성장하였다. 세베루스 황제가 교회를 심하게 박해할 때 오리겐의 아버지 레오니데스(Leonides)가 순교했다. 당시 아직 어린 소년에 불과했던 오리겐의 영혼은 순교에 대한 열망에 강력하게 사로잡혀 있었다.

놀라운 지성적 역량과 비범한 경건에 힘입어 오리겐은 18세에 데메트리우스 감독의 지명을 받아 알렉산드리아의 세례 지원자(catechumens)학교를 관장하게 되었다. 곧 오리겐은 “모든 신자들에게서 훌륭한 명성을 얻었다.” 오리겐은 엄격하고 금욕적이며 극도의 빈고한 생활을 하였는데 이는 친구들마저 놀라게 했다.

이처럼 오리겐의 금욕주의적 성품은 그의 생활 전반을 재배했다. 열성적인 금욕생활과 더불어 신비주의는 오리겐의 신앙생활의 한 근본 요소였다. 이 오리겐의 신비주의는 무분별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성경에 뿌리를 둔 것이다.

오리겐의 금욕주의적인 금욕주의와 신비주의적인 삶은 그의 교육활동, 설교, 논박, 특히 저술 작업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오리겐의 명성을 더해 주었다.


(2) 명성을 더해가는 오리겐

오리겐의 명성이 알렉산드리아를 넘어 외부 세계에 널리 알려지면서 개인적으로 오리겐의 가르침을 받으려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오리겐이 긍정적인 평가만 받은 것은 아니었다. 유세비우스의 동시대 인물이며 오리겐의 비평가였던 포르피리(Porphyry)는 오리겐이 헬라철학과 야만인(유대인)들의 말을 혼합시켜 놓았다고 불만을 털어 놓았다. 불만의 요지는 헬라인인 오리겐이 헬라문학을 공부했으면서도 이 야만인들의 건방진 말에 현혹되어 자신의 학문의 업적을 야만인들에게 양도했다는 것이다. 이런 오리겐에 대한 비평은 객관성을 상실한 듯하다. 유세비우스도 인정하듯 오리겐이 헬라사상과 기독교를 조화시키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헬라사상과 기독교를 무질서하게 혼합시킨 것은 아니었다.


(3) 팔레스틴에서의 작품 활동

오리겐의 연구열은 대단했던 것 같다. 유세비우스의 증언에 의하면 오리겐은 그의 생애에 무려 6000여권이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다량의 책을 저술했다.


(4) 제일원리와 콘트라 셀수스

<제 1원리에 관하여>(De Principus)는 오리겐의 작품 중에서 가장 뛰어난 신학서이다. 이것은 오리겐의 잘 훈련된 신학적 머리와 헬라풍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 속에는 신론, 창조, 타락, 인간론, 윤리학, 성경의 역할과 성경의 해석 원리, 자유의지, 부활 등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들을 다룬 제반 단락이 들어있다. 제1권에서는 삼위 하나님과 영적 존재들, 제2권에서는 물질적 세계, 인간과 인간의 영혼을, 제 3권에는 자유의지, 악마와의 투쟁, 선의 궁극적 승리를, 그리고 제 4권에서는 성경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오리겐은 “하나의 연관성 있는 교리 체계를 구성하기를 원하는 자”가 기초적 원리로 삼을 원리들을 제1원리에서 이렇게 집약한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만물을 창조하시고 질서를 주시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때 우주를 존재케 하셨다.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하사 참으로 인간이 되셨다. 그리고 참으로 고난당하셨고, 참으로 죽으셨다. 그는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함께 하시다 하늘로 올리우셨다. 성령께서는 그 존영과 권세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과 연합되어 있으시다. 그리고 이 세상을 떠난 후에 반드시 심판이 있으며 성도들은 영광스러운 몸으로 다시 부활할 것이다. 모든 인간의 영혼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이들 악한 세력들은 죄악으로 영혼을 무겁게 하여 떨어뜨리려고 힘쓰기 때문에 믿는 영혼들은 그와 같은 세력으로부터 자유로워 지기위해 노력해야 한다.

영혼의 기원에 관하여는 오리겐이 분명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선재설을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리겐에게 그리스도는 역사의 중심이자 구약 성경 이해의 열쇠이며, 구약의 율법과 의식을 대신하는 존재였다. 때문에 구약에 대한 문자적 접근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오리겐이 볼 때 구약성경의 사건들, 인물들, 규범들은 사실상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것이다.

오리겐의 사상을 찾아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작품은 <콘트라 셀수스(Contra Celsus)>이다. 이것은 오리겐의 동시대에 살았던 이교도 비평가인 셀수스에 대항하여 기독교를 변호하는 글이다. 셀수스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교회를 비평하였다. 1) 기독교인들은 교리를 헬라철학에서 얻지 않고 야만인인 유대인들에게서 얻었다. 2) 이적은 참으로 기적이 아니라 단지 마술일 뿐이다. 3) 기독교 교리는 비합리적이다. 4) 마리아는 간음한 여인이며, 로마병사와 불륜의 관계를 갖고 태어난 아이가 바로 예수이다. 이에 대하여 오리겐은 만일 예수께서 그런 가정환경 출신이라면 간음을 반대하는 가르침을 설파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5) 오리겐의 신관

오리겐의 신론, 특히 삼위일체에 대한 가장 두드러진 공헌주의 하나는 성자와 성부의 관계에 대한 가르침이다. 오리겐은 성자를 성부와 같이 영원한 분으로 보았다. 오리겐의 영원 전 나심은 후에 삼위일체 정립에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된다.

그러나 오리겐은 아들이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영원하시다고 보았지만, 주저하지 않고 아들을 제2의 하나님(second God)이라고 부름으로써 성자와 성부가 다르면 성자가 아버지에게 종속된다고 보았다.


3. 오리겐 이후 알렉산드리아 신학

알렉산드리아신학은 그 성격상 아다나시우스를 중심으로 그 이전과 이후로 대별할 수 있다. 둘 사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은 지난 1세기 동안 역사신학계에 큰 논란이 되어 왔다.

둘 사이에는 어느 정도 구분이 된다. 예를 들면 초기 알렉산드리아 신학자들은 형이상학적 ‘그리스도의 의미’에 대한 탐구에 관심이 있었지만 후기 알렉산드리아 신학자들은 삼위신과 성육신에 관심이 있었지만 후기 알렉산드리아 신학자들은 삼위신과 성육신에 그 관심이 집중하였고 그 의미에 대하여는 저들의 선배들이 이미 탐구한 것 이상 나가지 못했다.

이런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에는 연속성이 존재하는데 바로 그것이 신화교리이다. 플라톤 사상의 영향을 받은 클레멘트는 인간의 신화를 믿었으며 이런 신화교리는 후기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대변자인 아다나시우스 사상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인성이 신성인 로고스와 연합함으로써 불사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이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핵심이다. 이런 면에서 알렉산드리아 신학은 전기 후기를 막론하고 로고스 사상을 축으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로고스가 성육신하심으로 불사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은 로고스에 참여하는 모든 인간도 역시 그로 말미암아 불사적인 존재로 새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아다나시우스가 강조한 로고스의 성육신에 근거한 인간의 신화교리를 시릴에게서도 그대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알렉산드리아 신학 속에서 흐르고 있는 기독론 사상의 맥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알렉산드리아 신학은 그 중심이 로고스 사상이며, 로고스 사상은 또 구원론 핵심을 구성한다.

따라서 아다나시우스를 중심으로 그 이전과 이후를 구분하는 것은 어느 정도 긍정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본질적우로 오리겐 이전의 알렉산드리아 신학과 그이후의 알렉산드리아 신학은 연속성이 더 강하다. 로고스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에게서 죽음을 제거하시기 위해 불가시적인 존재가 가시적인 존재로 나타나신 생명이요, 빛이요, 아버지의 로고스요, 우주의 통치자요, 그리고 왕이시다. 아다나시우스에게 이 로고스는 성부와 동질이시다.




제4부 4-5세기와 정통의 확립


제 1장 삼위일체 논쟁


만일 성부가 한분이고 성자는 또 다른 분이라면 그리고 성부도 하나님이고 성자도 하나님이라면 한 하나님이 아니라 두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면 결과적으로 그리스도는 사람이어야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성부께서 참으로 한 하나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Novatian


초대 기독교가 갖고 있는 초대의 주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였다. 과연 그리스도는 어떤 존재인가? 그는 정말 하나님이신가? 만일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이라면 창조주 하나님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성부와 성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성자가 하나님이고 성부도 하나님이라면 둘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라는 그리스도의 신성 문제와 관련된 문제는 초대교회 수 세기 동안 쟁점이 되어왔다. 이것을 삼위일체 논쟁(새 Trinitarian Controversy)이라 부른다.


1. 삼위일체 논쟁의 역사적 배경

주후 약 90년부터 140년 사이에 활동했던 속사도들은 비록 소위 신학적 의미의 삼위일체에 관한 분명한 교리는 제시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었다. 삼위일체 개념은 그리스도의 선재성이나 그리스도의 신성을 학문적으로 좀 더 체계화시킨 변증가들에게 오면서 더욱 분명해진다.

저스틴에게 성육신 이전에 선재하신 로고스는 “하나님의 첫아들”이며 “하나님에게서 나오신 하나님 다음 되시는 분”이다. 로고스는 하나님 다음 존재이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즉 지혜와 권능과 영과 능력에서 아버지에 종속된다고 보았다. 그의 삼위일체는 종속설(subordinationism)과 비슷했다. 이것은 대부분의 변증가들의 견해이다.

변증가들에 의하여 상당히 발전된 삼위일체 개념은 교부들에 와서 좀 더 체계화되기 시작하였다. 특별히 이레니우스는 변증가들 보다 상당히 진보된 신관을 갖고 있었다. 이레니우스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 이전에 존재하셨으며,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음을 받았다. 아들은 아버지와 같이 영원하시다. 아버지를 계시하시는 이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오직 한 하나님 창조주가 계시는데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하는 분이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다.

이레니우스는 아들이 아버지와 같이 영원하시다고 가르쳤다. 인류에 관련된 하나님의 모든 일이 그리스도 안에서 “요약”된다는 것이다. 이레니우스는 성자를 성부와 영원히 공존하시는 분으로 이해했다. 이 로고스는 “참 하나님이며 참 하나님”이시다.

터툴리안은 서방교회에서 가장 훌륭한 삼위일체론을 제시한 인물이다. 그는 삼위일체의 한 본성(one substance), 본질(nature) 그리고 삼위(three persons)의 개념을 도입한 최초의 신학자이다. 사실 그의 가르침이 325년 니케아 회의 그리고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 때에 신조의 기초가 되었다. 비록 터툴리안이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아니지만 삼위일체 교리의 윤곽을 제공한 최초의 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


2. 단일신론

우리는 삼위일체 논쟁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관련된 오류들과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과 관련된 오류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관련된 오류들의 전체적인 윤곽을 제시하면 다름과 같다.


* 단일신론(Monarchianism)

  하나님이 한 분임을 강조하는 이론


(1) 양태론적 단일신론(Modalistic Monarchianism)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한다. 한 하나님이 성부․성자․성령으로 모습을 바꾸어서 나타났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삼위를 나타나심의 세 양태(양식)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성부 수난설을 주장하였다.


▶ 성부 수난설 : 십자가에 못 박힌 분은 성부이며, 승천하신 분은 성령님이다고 한다. 이 양태적 군주신론은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을 주장하려는데 있다. 대표자는 프락시어스(Praxaeus)와 사벨리우스(Sabellius)였다. 이 사상을 동방교회에서는 일명 사벨리안설(Sabellianism)이라고 한다.

프락시어스는 하나님의 위적 구별을 반대하였고, 성부가 고난 받으셨다는 주장을 피하고 있다. 사벨리우스는 성부 성자 성령이란 명칭은 단순히 신적 본체가 자신을 나타내는 세 형상을 가리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하나님은 창조와 율법수여에서 성부로, 육신의 몸을 입으신 것에서는 성자로, 중생과 성화에서는 성령으로 각각 나타난다고 하였다. 양 군주신론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음을 알 수 있다.


(2) 역동적 단일신론(Dynamic Monarchianism or Adoptionism, Patripassianism)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했다. 그리스도는 선인이라, 그리스도가 너무너무 착해서 하나님이 그 안에 신적 능력을 부여하시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신적 능력이 Dynamic하게 그 안에서 역사를 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고 착한 사람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착한 사람인데 그 안에 능력이 컷을 뿐이라고 한다.

▶ 이것을 양자 기독론(Adoptionism)이라고도 한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탄생시나 세례시 양자로 입적하셨다는 것이다. 사모사타의 바울(Paul of Samosotg)이 이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로고스는 성부와 동질이었으나 신격에 있어서 구별된 인격은 아니었다, 로고스는 모든 인간 속에 계시지만 특히 인간 예수 안에서 특별하게 만들었던 한 인격적 힘일 뿐이다. 이 신적 힘은 진보적으로 예수의 인성을 신화하였다. 

인간 예수가 신화되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예수를 하나님으로 볼 수는 없으나 신적 존경과 영광을 받기에는 마땅하다고 하였다. 사모사타의 바울이 하나님의 단일성을 주장하여 후에 소시니안파와 일위신론(一位神論)자들의 선구자가 되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대부분 동태적 군주신론에 빠지고 있는 것을 본다.


3. 아다나시우스 대 아리우스 논쟁

동방에서 진행된 삼위일체 논쟁은 약 318년경 알렉산드리아 교회 알렉산더 감독과 그 교회 장로 아리우스 사이에서 발생한 논쟁에서 발단되었다.

서방의 양자론자들과 같이 아리우스는 하나님의 단일성에 관심을 기울인 나머지 성부 혼자만 시작이 없으신 분이며 성부만이 참으로 하나님이시라고 보았다. 성자는 본질적으로 성부와 구별된다. 아들은 시작이 있으시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위해 로고스를 창조하셨다. 이면에서 아리우스 사상은 헬라의 중기 플라톤주의를 반영한다. 결국 이 로고스는 는 무에서(ex nihilo) 창조된 첫 피조물(first born of creature)이며, 이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이지만 성부와 같은 동질(homoousios)이 아니고 유사 본질(homoiousios)이라는 것이다.


(1) 아리안 주의


1) 급진적인 아리안 주의(Anominism)

* 아들은 피조물이다.

* 아들은 시작이 있다(아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다).

* 아들은 아버지와 교통이 없고 아버지 지식을 공유하지 않는다.

* 아들은 변형할 수 있고 죄 지을 수 있다.


2) 반(semi)아리안주의 - 성자의 본질은 성부의 것과 유사

아리우스 논쟁이 중반에 접어들었을 때 하나님이 보내신 한 교회지도자가 출현했으니 그가 바로 328년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직을 계승한 아다나시우스(athanasius)이다. 300년경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373년에 세상을 떠난 아다나시우스는 니케아 신조의 기초를 세우는데 공헌했으며 그것을 보호하는데 일생을 바쳤다. 그의 이름은 니케아 정통 신앙의 동의어가 되었다. 아다나시우스는 아리우스가 오리겐을 오해했다며 아리우스주의를 전투적으로 공박하였다. 사실 아리우스는 오리겐의 로고스 사상을 잘못 이해했다. 아다나시우스가 볼 때 오리겐의 영원성은 곧 성부와의 동등성을 의미하였다. 이는 아들이 아버지와 동질이라고 선언한 니케아 회의 신조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알렉산드리아 감독 알렉산더는 321년 알렉산드리아 회의를 소집하여 아리우스 및 그 동료들을 정죄하고 출교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우스를 따르는 세력이 적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리우스의 견해가 다신론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유일성을 보호해 주는 것처럼 보였고 아리우스가 하나님이 물질계의 창조자가 될 수 없다는 헬라 사상을 주저함 없이 수용했으며,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또는 로고스를 신적 존재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니코메니아 감독 유세비우스는 전적으로 아리우스를 지지하고 나섰고 수리아에서는 가이사랴 감독 유세비우스도 아리우스 편으로 기울어졌다. 아리우스는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의 도움을 받아 은신처에서 있으면서 편지를 통해 자신의 입당을 계속 확산시켜 나갔다.


4. 니케아 회의 신조

콘스탄틴 황제는 아리우스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325년 5월 니케아에 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회의에는 약 300명의 감독들이 참석했다. 니케아 회의는 의견을 달리하는 세 부류의 집단이 주도하고 있다. 첫째가 니코메디아(Nicomedia) 감독 유세비우스가 이끄는 작은 그룹으로 아리우스를 전적으로 지지하고 있었고, 두 번째는 당대에 가장 학식있는 사람으로 알려졌던 교회사가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가 이끄는 작은 그룹으로 내심으로는 아리우스의 견해를 동정하면서 중도적 입장을 취했으며, 세 번째 그룹은 알렉산더를 중심으로 한 대부분의 대표자들로 반아리우스 입장을 갖고 있었다.

니케아회의에서 처음 작성된 니케아 신조는 아리우스의 견해를 닮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콘스탄틴 황제의 황실감독 호시우스의 개입으로 니케아 신조에 동일이 삽입되었다. 이것은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아리우스를 지지하는 자들이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 때문에 많은 교회사가들은 하나님께서 인간 역사에 섭리하시고 개입하신다는 고백을 하는 것이다.

니케아회의에서 아리우스파는 정죄를 받았지만 그의 영향력은 시들지 않고 확산되었다. 심지어 아리우스 세력은 황실을 등에 업고 영향력을 확대 하였다.


5. 니케아회의 이후의 아리우스 논쟁

니케아 종교회의 이후 전개된 아리우스 대 아다나시우스 논쟁은 3단계로 대별할 수 있다. 제 1기는 콘스탄틴 대제의 사망시기는 337년 5월 22일 까지이며, 제 2기는 콘스탄틴의 아들들이 황제의 직위에 오른 후부터 콘스탄티우스 1세가 죽던 361년 까지, 그리고 제3기는 줄리안이 즉위할 때부터 데오도우스 1세의 통치하에 아리우스가 완전히 제압될 때까지로 대별할 수 있다.

아다나시우스와 니케아 정통주의가 발전되고 더욱 체계화 된 것은 3인의 갑바도기아인(Cappadocans) 때문이다. 이들은 대 바실(Basil the Great; 330-379) - 가이사랴 감독, 니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 335-394) - 대 바실의 동생,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 330-390)등이다. 바실은 삼위일체를 위한 인정된 문구 즉 한 본질(substance, ousia)과 삼위(three persons, hypostasis)를 확정시킨 최초의 인물이었다. 373년에 아다나시우스가 세상을 떠나자 바실은 동방에서 정통 신앙의 수호자로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바실과 두 그레고리는 삼위일체를 설명하기위한 용어 사용 방법에 일치를 보았다. 그것은 곧 “한 본체 안에서 세 위격”이라는 용어이다.


6. 콘스탄티노플 회의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379년 황제에 오른 다음에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공식적인 국교로 만들었다. 콘스탄틴 대제 이래 동로마에선 최초의 열렬한 서방신학 지지자였던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를 소집하여 니케아 신조를 재확인하였다. 이 회의를 통하여 아리우스파는 완전히 정죄를 받은 셈이며 아리우스파의 종말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제2장 기독론 논쟁


“한 분 동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성과 인성에서 완전하시며, 참으로 하나님이시며 참으로 사람이시며 이성적인 영혼과 육신으로 이루어지시되, 신성에 있어서는 성부와 동질이시고 동시에 육신으로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동일이시되 죄는 없으시며, 신성으로는 만세전에 성부에게서 나셨으나, 인성으로는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성모(데오토코스)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었으니, 한 그리스도, 성자, 주, 독생자는 신성과 인성(한 인격 안에) 혼동되지 않고, 변하지 않으며, 분할과 분리됨이 없이 연합되었다.”

칼케돈 신조


니케아 회의와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는 그리스도가 완전한 하나님이시면 완전한 인간이라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문제를 해결할 셈이다. 그러나 두 성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분명하게 규정하지 않았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문제가 정립되자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이 어떤 관계가 있는가하는 기독론의 문제로 발전하였다. 이것이 콘스탄티노플 회의부터 칼케톤 회의까지 다루어진 주제였다. 기독론의 논쟁은 362년 아폴리나리우스주의(Apollinarianism)로 시작하여 381년 콘스탄티노플회의에서 아폴로나리우스의 견해가, 431년 에베소 회의에서는 네스토리우스의 견해가 그리고 451년 칼케톤 회의에서는 유티키안의 견해가, 553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는 단성론이, 그리고 680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는 일의론(Monothelitism)이 정죄됨으로써 일단락 되었다.


1. 아폴리나리우스 주의(Apollinarianism)

아폴리나리우스는 신성을 강조한 나머지 인성을 약화시켜 신성이 인성을 흡수했다는 인상을 남겨주었다. 로고스가 인간 예수의 영(human soul)을 대신하였다고 이해함으로 신인(divine-human)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하기 보다는 인간의 육체를 입고 오신 하나님으로 이해했다. 인간 예수가 로고스를 가졌다는 점에서는 완전한 하나님이시지만, 안간의 지성과 이성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로고스가 인간 예수의 마음을 대신했다고 봄으로써 예수가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 신적 지성을 가지고 활동하신 예수에 불고하다고 이해했다.

갑바도기아인들이 지적한 것처럼, 만일 예수가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면 구원자체를 무효화시키는 것이다. 370년 갑바도기아 바실이 아폴리나리우스를 논박하기 시작하였고, 377년에는 로마 감독 다마수스 지도 하에 한 회의가 열려 그를 정죄하였으며, 그 후 382년에 다시 확인하였다. 또한 379년에는 안디옥에서 한 회의가 열려 아폴리나리우스 주의를 정죄하였고,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다시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아폴리나리우스는 388년 데오도시우스 법전(Codex Theodosians) 이단 목록에도 포함되어다. 그 후 아폴리나리우스주의는 가현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같이 완전한 인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거부하는 이단으로 간주되어왔다.


2. 네스토리우스주의(Nestorianism)

네스토리우스는 아폴리나스리우스의 주장에 반대하여 성자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참으로 사람이라는 두 가지 사실을 강조하였다. 그에게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성과 신성을 가진 분이다. 신성과 인성이 뚜렷이 구별되며, 양성이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함께 존재한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아폴리나리우스의 약점을 넘어섰다. 그러나 이 신성과 인성이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어떻게 연합 되었는가하는 문제에서 네스토리우스는 오류를 낳고 말았다.


(1) 논쟁의 핵심

시릴과 네스토리우스 논쟁의 원초적인 출발점은 과연 마리아를 데오토코스(Theotokos)로 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알렉산드리아 신학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육체적 연합이 있었다면,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 그리고 마리아는 ‘하나님을 나신 분’(데오토코스)로 불러야한 다고 보았다. 마리아를 데오토코스라고 불어야 한다는 알렉산드리아의 전통을 따라 시릴은 마리라를 데오토코스라고 주장한 반면 네스토리우스는 그녀는 데오토코스라고 부를 수 없고 크리스토토코스(christotokos: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불러야 된다고 보았다.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두성의 실재성을 인정하면서도 신성은 십자가에 고난에 참여할 수 없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신성과 인성을 구분하려는 네스토리우스의 가르침은 예수를 인성으로서의 예수와 신성으로서의 예수 즉 두 인격으로 말한다는 인상을 남겼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신적 그리스도와 인간적 그리스도 두 그리스도(two Christs)를 주장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해서 그에게는 이단이라는 표지가 붙게 되었고 아울러 신적 요소와 인간적 요소사이의 그릇된 대조를 주장하는 견해의 원형으로 간주되어왔다. 네스토리우스의 기계적 연합은 유기적인 연합과는 달리 속성의 교류(communicatio idiomatum)를 약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을 나신 분(God-bearer)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데오토코스(theotokos)는 어머니의 특권을 강조하기 보다는 아들의 신성(the Deity of the Son)을 강조하는데 포인트가 있다. 성령으로 잉태하여 마리아가 뱃속에 갖고 있는 예수는 단순한 인간 예수가 아니라 완전한 인성과 신성을 가지신 삼위 하나님의 제 2위이신 성자 하나님이신 것이다. 때문에 마리아는 육신과 연합된 하나님의 말씀(the Divine Word)을 잉태한 것이며 이런 면에서 마리아는 데오토코스(“theotokos" ; God bearer)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은 마리아가 인격적으로 신성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수 안에서 인성과 신성이 연합되었기 때문에 양성의 구분은 가능하지만 양성의 분리는 불가능한 것이다.


(2) 에베소 회의와 평화안

네스토리우스를 지지하는 데오도시우스 2세는 네스토리우스의 요청에 따라 431년에 에베소 회의를 개최하였다. 431년 6월 22일 성 마리아 교회당에서 개최된 에베소 회의는 지리적이나 여러 가지 여건으로 미루어 시릴에게 유리했다.

네스토리우스보다 먼저 도착한 시릴은 그들이 15일 가량 늦게 도착할 예정이니 기다려 달라는 감독들의 항의에도 그들의 도착하기 4일전 6월 22일 단독으로 에베소회의를 개최하고 네스토리스를 정죄하고 파문시켰다.

안디옥 감독 요한의 인솔 하에 나중에 도착한 네스토리우스 지지자들은 에베소의 주교 멤논의 직위를 박탈하고 시릴을 정죄하였다. 네스토리우스를 지지하던 황제는 어쩔 수 없이 상황이 이렇게 되자 시릴, 네스토리우스, 멤논 세 사람 모두를 해임하고 이들을 연금시켰으나, 시릴이 가지고온 거액의 뇌물을 황실의 영향력있는 사람들에게 보냄으로 시릴이 급부상하게 되었다.

에베소회의 이후 반 시릴 세력들이 등장하면서 시릴도 교리적인 면에서 상당부분을 양보해야만 했다.

아폴리나리우스의 가르침과 유사한 시릴의 단성론적 기독론 이해는 그에 대한 반대세력이 등장할 것을 예견하기에 충분했다. 특별히 시릴의 12개 파문조항은 반발을 샀고 극단적인 시릴을 달갑지 않게 생각한 이들은 12개 조항을 완전히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데오도시우스 황제도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의 화해를 위해서는 안디옥의 요한이 네스토리우스를 포기해야 한다고 설득하는 한편, 시릴에게는 안디옥이 네스토리우스를 포기하는 대가로 알렉산드리아 전통과 안디옥 전통을 융합시킨 통합신조 곧 평화안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결국 시릴은 사이러스의 데오도렛 감독이 작성한 평화안에 서명해야만 했다.

이 평화안은 안디옥 측이 에베소에서 작성한 것으로 안디옥의 신학을 상당히 반영하는 것이지만, 시릴과 네스토리우스 사이에 긴 논쟁점이던 마리아 호칭을 데오토코스로 결정함으로써 시릴에게 상당한 명분을 가져다주었다. 결국 이 평화안은 한편으로는 시릴의 연합교리를 양성의 인정 하에 수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네스토리우스의 양성론을 한 인격 안에서의 연합 하에 받아들어 한 인격(one person)의 두성(two natures)연합으로 결론을 내린 셈이다.


3. 유티키스주의(Eutychianism)와 단성론(Monophysite)논쟁

콘스탄티노플의 수도원장 유티키스도 평화안을 달갑지 않게 생각했다. 네스토리우스가 양성의 구분을 강조하여 예수를 두 인격으로 구별하는 오류를 낳았음을 잘 알고 있었던 유티키스는 에베소 회의이후 네스토리우스주의자들을 적발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그는 네스토리우스의 이원론을 극복하기 위해 신성과 인성의 두 본성이 연합 후에 하나가 되었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448년 11월 유티키스는 콘스탄티노플 한 지방 회의에 소환을 받고 이단성에 대해 심문을 받았다.

레오의 기독론은 네스토리우스와 유티키스의 극단의 단성론(Monophysitism)을 피하면서 완전한 인간이며 완전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연합되어 있다고 가르쳤다. 레오는 연합 후에도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성과 완전한 신성을 갖고 있다는 점을 강하게 진술하여 그의 사상이 후에 칼케돈회의에서 작성한 신조의 중심 교리로 정착될 수 있었다.

네스토리우스의 양성론을 배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티키스의 단성론을 배격하는 방향에서 진행된 칼케돈 신조는 433년의 조문으로서, 시릴의 네스토리우스에게 보낸 두 번째 서신, 레오의 틈에서 핵심적인 부분을 따와 종합적으로 재합성한 것이다. 그 중에서 양성이 한 인격 안에서 혼합, 변함, 나뉨, 분리됨이 없이 연합되었다는 레오의 가르침은 칼케돈 신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칼케돈 신조는 다음 몇 가지 면에서 교리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칼케돈신조는 지금까지 논란이 되어왔던 아폴리나리우스주의, 네스토리우스주의, 그리고 유티키스주의와 단성론 문제를 해결했고, 둘째 예수 그리스도가 신성에 있어서는 성부와 동질이며 인성에 있어서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니케아 전통을 재확인했으며, 셋째 시릴과 네스토리우스 이후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디옥 학파 사이에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 온 동정녀 마리아를 “데오토코스”(God-bearer)로 확정함과 동시 양성의 연합 관계를 피함으로써 그 동안의 기독론의 문제를 정착시켰다는 데 있다. 이외에도 칼케돈 회의에서는 콘스탄티노플이 “각 지방회의로부터 항소를 취급할 수 있는 상급법원으로 결정”됨으로써 명실상부한 로마교회 다름의 서열을 굳힌 셈이다.


4. 칼케돈 이후 기독론 논쟁

칼케돈에서 정죄를 당한 네스토리우스주의자들과 유티키스를 따르는 단성론자들은 칼케돈 신조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들은 각각의 지방에서 지지기반을 넓혀 나갔다.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칼케돈 이후 칼케돈 정통주의자가 물러나고 단성론자가 감독으로 앉았고, 알렉산드리아에서도 감독이 살해되고 단성론자가 임명되었다. 심지어 안디옥에서도 461년 단성론자가 감독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황제 제노는 단성론자들과 모종의 타협을 시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단성론자들에 2년간이나 추방당한 후 돌아온 제노황제는 단성론자들과 칼케돈 주의자들과 분열을 피하기 위해 단성론자들과 칼케돈 신조를 통합시키려는 통합성(Edict of Reunion), 헤노티콘(Henotikon)을 482년에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제노황제 이후 동방황제들은 단성론을 옹호하는 선왕의 정책을 그대로 답습했다. 그러다 저스틴(Justine : 527-565) 황제가 들어서면서 반 칼케돈 쪽으로 방향이 선회되었다.

단성론 논쟁은 단의론(monothelitism)등장으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극단적인 단성론자들은 그리스도가 한 의지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콘스탄틴 포고나투스 황제는 단의론 논쟁으로 인한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사이의 적대 관계를 해결할 목적으로 681년 콘스탄티노플에 제 6차 에큐메니칼 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5차 에큐메니칼 회의를 재확인한 후 일의론 지도자인 셀기우스와 호노리우스를 정죄하였다.


5. 기독론 논쟁 요약

기독론과 관련된 모든 회의 핵심논제는 신성과 인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과연 어떤 관계로 존재하는가 하는 것이었고 각 회의는 이 문제에 대한 신조를 결정하였던 것이다. 니케아 회의에서는 그를 완전한 하나님이며 완전한 인간으로 규정하였는데 이 말은 그리스도가 인간의 조건을 모두 갖고 계신 것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기독론논쟁과 교회 회의 관계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1) 아폴로나리우스 주의는 “완전한 인성문제”와 관련하여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2) 네스토리우스는 431년 에베소 회의에서 그의 그리스도의 두 인격 교리(“the doctrine of Christ as two persons”)가 그리고 (3) 유티키스 단성교리(“the doctrine of one nature")가 451년 칼케톤 회의에서 거부되었다. (4) 단성론 논쟁이 553년 제 5차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칼케톤 신조를 재확인함으로써 해결되었고, (5) 그리스도의 일의론(monothelite)이 제 6차 콘스탄티노플 회의(680)에서 거부되었다.




제 5 부 초대교회 위대한 인물들


제 1 장 위대한 지도자들


“… 거듭 되풀이 하거니와 신앙의 일에 있어서 감독들이 기독교 황제들을 판단하는 것이 관례였고, 황제들이 감독들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암브로시우스Ambrosius


1. 탁월한 행정가 앰브로스

엠브로스(Ambrose : 340-397)는 고울의 수도 트레베에서 약 340년에 출생했다. 그는 34살의 나이에 감독의 직을 맡아 충실하게 그 직을 감당하였다. 그는 감독으로 상상할 수 없는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 후 세상을 떠나던 397년까지 앰브로스는 서구 사회에 교권을 강화시켜 놓는데 탁월한 행정적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감독직에 오른 후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부유했던 자기의 전 재산을 교회와 사회를 위해 바친 일이다. 탁월한 행정가였던 앰브로스는 자신의 경험을 살려 감독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켜 나갔다. 그러면서도 성경과 신학연구 그리고 설교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의 금욕적인 삶과 개방된 삶과 사역 그리고 꾸준한 연구는 세속정치에서 차지한 그의 명성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를 위대한 인물로 만들어 주었다.

전투적인 가톨릭 입장에서 확고히 서 있었던 앰브로스는 아리우스주의자에 대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또한 앰브로스는 국가와 교회의 분리가 아니라 교회의 권위위에 국가를  올려놓았다. 즉 평신도인 황제는 한 사람의 기독교인으로서 감독 아래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엠브로스 감독과 황제가 직면한 또 하나의 사건은 데살로니가 학살 사건이었다. 이 일일 있은 이후 앰브로스와 황제와의 대결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앰브로스는 회개할 것을 촉구했으나 황제는 감독의 회개 요청을 묵살해 버렸다. 하지만 앰브로스는 주일날 예배를 드리러 오는 황제의 출입을 막고 회개를 촉구하였다. 몇 달 동안 황제가 예배에 참석할 수 없었다. 공중 앞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바닥에 엎드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황제의 참회가 있을 후에야 예배에 참석 시켰다.


2. 성경번역의 선구자 제롬

제롬(331-420)은 성경번역과 함께 서방 수도원제도를 도입함으로 서방교회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제롬의 넓은 식견과 빼어난 언어적 은사는 그로 하여금 동서고금을 통해 가장 빼어난 성경 번역가 중 하나가 되기에 충분한 자질을 갖추도록 하였다.

오리겐과 제롬과의 관계는 제롬의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중요한 제이다. 오리겐을 상당히 존경했던 제롬은 오리겐의 방법론을 상당히 차용했다. 이것은 특별히 오리겐에 대한 존경이 개단했던 초기에 더욱 두드러진다. 그러나 후기로 가면서 제롬은 오리겐에 대한 존경이 변함없었고 “오리겐의 정통주의적 생애를 언제나 선망하였으나 오리겐의 신학 사변에 대해서 학자적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오리겐의 주석에 대한 존경은 여전했지만 그의 신학적 사명에 회의를 느낀 제롬은 오리겐에 대한 정죄에 재빨리 가담하였다.

제롬의 재치 있는 풍자와 격렬한 논박은 결국 인격적인 약점들을 남겨 놓았다. 편파성, 편협한 마음, 불공정, 허영심 그리고 그의 박학다식에 흠을 낸 부주의성 등이 그것이다. 제롬의 학적 감식력이 종경 받다 보니 결국 그의 통렬했던 개성은 간과되어 왔다. 그러나 상당한 인격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성경 번역, 주석, 기타 학적 저술을 통해 서방 기독교계에 헤아릴 수 없는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이다.


3. 황금의 입 요한 크리소스톰

기독교사에에서 가장 위대한 설교자 요한 크리소스톰은 350년 경 안디옥에서 태어났다. 그는 초대교회가 낳은 가장 명설교가 이자 성경 강해자였다. 그의 설교는 매우 직설적이고 강렬하며 단순한 것이 그의 특징이며, 교리적이기 보다는 도덕적이고 영적이었다. 진정한 설교자의모습이 무엇인가를 말과 행동으로 균형있게 보여주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곧은 성품을 가진 크리소스톰의 설교는 당대의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비록 자신의 곧은 성품과 직설적인 외침 때문에 황실의 미움을 사 오늘날 터키의 북동쪽에서 고독한 유배생활을 하다 외로이 세상을 떠났지만 요한의 메시지는 그의 삶과 함께 역사 속에서 길이 기억되어 왔다.


제 2 장 어거스틴의 생애와 사상


“두 나라가 서로 섞여 있는 동안은 우리는 또한 바벨론의 평화를 위하여서도 봉사하여야 한다. 진실로 하나님의 백성은 믿음으로 바벨론에서의 자유해방을 이미 받는다. 그러나 아직도 잠시 바베론과 함께 순례하여야 한다.”

어거스틴Augustine


역사, 신학, 철학, 문화 등에서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어거스틴은 “고대철학과 기독교의 종합”을 만들어 낸 인물이었다.


1. 어거스틴의 성장 배경

어거스틴은 354년 11월 13일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지방 타가스테에서 아버지 패트릭(Patrick)과 어머니 모니카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거스틴은 17살 나던 해에 카르타고에서 유학생활을 하다 “당시의 일반적인 관습에 따라” 한 여인과 깊은 육체적 사랑에 빠지고 만다. 이때부터 그의 방탕한 생활을 시작되었고, 얼마 후 아들 아데오다투스(하나님의 선물)를 않았다. 그러나 방탕한 생활 이면에 진리에 대한 열망이 끊이지 않았다. 그의 철학적 사유를 일깨운 것은 버질과 키케로의 작품이었다.

373년 19살 나던 해 있었던 진리에 대한 이 체험은 어거스틴에게 두 번째 도약이었다. “오 진리여, 진리여 그 시간 이후로 내가 얼마나 불타는 마음으로 그대를 사모했던가?”라고 어거스틴 자신이 고백하듯이 부와 명성에 대한 욕구가 이 책으로 말미암아 진리에 대한 열정으로 바뀌었다.


2. 어거스틴의 사상적 배경


(1) 마니교

<고백록>에 어거스틴은 마니교, 플라톤주의, 그리고 기독교로 세단계의 개인 확신을 회고하고 있는데 이것들은 어거스틴의 성숙한 사고에 두드러진 요소들로 부각되었다. 373년 19세의 어거스틴은 동방에서 기원된 마니교에 심취하게 된다.

오랫동안 기독교의 중요한 라이벌 중교 중의 하나로서 당대의 진실 된 과학적 신학체계를 대표하였던 이 철학체계는 특별히 이념적인 면에서 젊은 지성인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다. 어거스틴이 마니교에 몰입한 원인은 악의 기원 문제 때문이었다. 어거스틴은 마니교가 악의 기원 문제를 시원하게 해결하여 주는 것처럼 느꼈다. 만일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왜 이 세상에는 악이 존재하는가? 이것은 어거스틴이 가지고 있던 악에 대한 질문이었다.

마니교도들은 하나님과 세상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악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한다. 악은 하나님과의 병존하는 본래적인 원리로서 하나님의 지배를 제한하는 독립적인 권능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에 맞서서 싸우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선한 하나님과 악한 하나님의 끊임없는 대립과 투쟁이라는 관점에서 악의 문제를 해결한다.

그들의 구원관 역시 영지주의 이원론과 비슷한데, 구원이란 인간 안에 있는 빛이라 부르는 영적인 것과 암흑이라 부르는 물질의 두 가지 요소를 다시 분리시켜 영혼이 순후한 빛, 혹은 광명의 영역으로 다시 귀환하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19살부터 29살까지 10년 동안 어거스틴이 마니교에 몰입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마니교가 갖고 있는 진리 체계가 이론적이고 논리적일 뿐만 아니라 실천적이면서도 실존적이었고, 둘째, 악한 원리에 의하여 사로잡힌 선의 요소들을 악한 원리에서 구하는 것이라는 마니교의 구원체계야 말로 참된 구속의 진리이며, 셋째, 진리란 선과 악 사이에 벌어지는 투쟁 속에 존재한다는 마리교의 가르침이야 말로 가장 설득력 있는 세계관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이 마니교를 떠나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천문학과 플라톤 사상이다.


(2) 신플라톤주의

어거스틴이 마니교를 청산한 것은 그의 나이 29살 때이다. 마니교를 떠나온 후 어거스틴은 아카데미의 회의주의에 잠시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잠시 회의주의에 빠진 어거스틴은 당시 널리 읽히던 신플라톤주의의 원조 플로티누스의 작품을 닥치는 대로 섭렵하기 시작했다. 신플라톤주의는 어거스틴이 마니교의 이원론과 아카데미의 회의주의를 동시에 극복하고 영적실재를 발겨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신플라톤주의 신관은 마니교의 신관과 본질적으로 달랐다. 신플라톤주의는 하나님을 절대적이시고 불변의 선으로 모든 변화를 초월하며, 존재하는 모든 것으로 근원으로 인식하였다. 악은 결코 독자적인 원리는 아니며 악이 선과 더불어 싸우는 것이 아니다. 악이란 근본적으로 다른 근원으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라 단지 궁극적 존재로부터 멀리 벗어남으로써 성립하는 것이다. 신플라톤주의에서 악은 하나의 부정적인 성질이며 실제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선의 결핍을 의미한다. 마침내 어거스틴이 진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은 신플라톤주의를 통해서이다.


(3) 어거스틴의 회심

그를 완전히 기독교로 전향하도록 한 것은 밀라노의 한 정원에서 읽었던 로마서 13장 13절에서 14절이다. 현대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가 어거스틴의 신학이 계시 신학이며 그 계시신학은 기독교 회심을 통해서 발현되었다고 지적하듯이 어거스틴의 회심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노리가르(Noregaard)와 홀(Holl)같은 전통주의자들 역시 여기에 동의한다.

비록 어거스틴의 사상에는 플라톤적 구조가 나타나는 것을 부인할 수 없지만, 어거스틴의 회심은 진정한 의미에서 인생, 사상, 신앙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거스틴이 회심이전에 신플라톤주의를 일차적 원리로 삼은 것이 사실이나 회심 후에는 기독교 신앙을 일차적 원리로, 신플라톤주의를 이차적 원리로 삼았다. 후에 어거스틴은 진정한 진리 탐구와 종교적 삶은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 앞에 헌신한 후에 생겨났다고 고백하고 있다.

386년에 기독교로 귀하하고 387년 부활절에 세례를 받았다. 수년 후 어거스틴은 히포 교회의 장로로 선출되었고 그 뒤에 395년 같은 도시의 감독으로 선출되었다. 430년 말 발급소리를 들으며 임종하였다.


3. 어거스틴 사상


(1) 어거스틴의 인식론

“나는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Credo ut intelligam)는 어거스틴의 사상은 “나는 모순되기 때문에 믿는다”(Credo quia bsurdum)는 터툴리안의 견해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성과 신앙을 조화시키려는 어거스틴의 노력은 세례 직후에 저술한 <독백>(Soliloquia), 394년 의 <참종교에 관하여>(De Vera Religione), 395년 6월에 완성한 <자유 의지론>(De Libero Aritrio), 그리고 416년에 완성한 거작 <삼위일체론>(De Trinttate)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성이 영원한 것을 직관하는데 필수적일 만큼 중요하지만 영원한 것과는 본질적으로 비교될 수 없다. 그렇다면 이성보다 탁월하고 영원한 존재가 무엇인가? 그것이 궁극적인 인식 대상인 진리 자체이며 그 진리란 다름 아닌 하나님이다. 어거스틴은 이 진리가 바로 자신이 믿는 하나님 곧 자신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인식하였다.

신앙과 이성을 조화시키려는 노력은 삼위일체론에서도 나타난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믿어야 하며 그 후 그 믿음을 밝히는데 우리의 이성이 중요한 도구로 쓰임 받는다.

삼위일체의 영원성, 동등성, 통일성을 깨닫기 위해 우리는 먼저 믿어야 한다. 진리에 대한 탐구라는 것이 깨달았을 때에야 계속 탐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진리를 이해케하는 이성은 필수이다. “신앙은 찾고, 지성은 발견한다”는 어거스틴의 원리가 여기서 나온 것이다. 그가 삼위일체론을 끝맺음 하면서 “나는 내가 믿은 것을 나의 지성으로 보기 위하여 많이 희구하여 왔다”고 고백한 것도 그의 인식론 원리를 반영한 것이다.

우리가 간과해서 안 될 것은 어거스틴이 인식론적이고 철학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어거스틴의 일차적인 관심을 실천적인데 있었다. 따지고 보면 인식론적이고 철학적인 관심은 실천적인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2) 어거스틴의 교회관

어거스틴의 교회관은 도나티스트와의 논쟁을 통하여 정립되었다. 404년 어거스틴이 주도하여 열린 카르타고 회의에서는 호노리우스 황제가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줄 것을 공식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국가는 이 요청을 받아들여 도나투스파의 난폭한 행위에 대해 벌금을 부과하는 한편 이들의 교회당을 접수하기 시작했다.

411년 카르타고회의 이후 어거스틴과 도나투스파와의 대립을 더욱 심화되기 시작했다. 진실로 거룩한 자들만이 정당하고 효력있는 세례를 베풀 수 있으며 따라서 그들에 의한 세례가 무효하다는 도나투스파에 반대하여 어거스틴은 심지어 이단자들에 위해 베풀어진 세례도 교회가 인정해주어야 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베푸는 자의 거룩성에 상관없이 세례를 효력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세례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성례의 최고 집례자이며 따라서 만일 합당치 않는 사람이 집례하는 경우라도 그것은 여전히 참된 성례라고 주장함으로써 도나투스파의 재세례를 철저히 반박하였다. 교회관은 키프리안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성례관은 로마의 전통을 따르고 있었던 어거스틴으로서는 이 둘의 전통이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교회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 교회의 통일성을, 교회의 통일성을 보존하기 위해 교회의 순수성을 내세웠던 키프리안의 전통을 선별적으로 수용하였다. 한편으로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키프리안의 전통을 받아들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의 순수성이 보편적인 교회에만 속했다는 키프리안의 전통을 부분적으로 거부했던 것이다. 어거스틴이 볼 때 교회의 순수성은 보편적인 사도적 교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노바티안 그리고 어거스틴 당대의 도나투스파에도 있었다.

교회의 하나님도 사랑을 전제로 한다. 어거스틴에게 사랑은 교회 통일성의 기초이며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다. 신앙의 일치를 외치면서 사랑이 결여되었다면 그것은 곧 복음의 본질을 떠난 것이며 따라서 그런 교회는 교회의 생명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3) 어거스틴의 인간이해

동방이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관계로 논쟁을 벌이고 있던 시기에 서방에서는 인간의 의지와 하나님의 은총 문제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전형적인 서방의 인간이해가 좀 더 체계적으로 발전되기 시작한 것은 어거스틴에 와서이다. 어거스틴은 적수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을 통해 그의 은총론을 체계화하기 시작했다. 영국 아일랜드 수도승 출신이었던 펠라기우스는 400년에 로마로 와서 7, 8년간 머물면서 활동하였다.

그 즈음 펠라기우스는 두 가지 사건을 만난다. 첫 번째 사건은 펠라기우스가 인간의 책임을 약화시키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역설한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읽고 충격을 받은 사건이고, 두 번째 사건은 자신과 입당을 같이 하는 코엘레스티우스를 만난 사건이다. 이때부터 펠라기우스는 공개적으로 어거스틴 사상과 대립되는 교리를 만들어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펠라기우스 사상의 출발점은 하나님이 공의로우신 분이라는 사실과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이다. 펠리기우스는 그리스도인들이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모든 죄를 인간의 본성에 돌리는데 분개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하는 것은 은총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행조건이다. 그리고 인간이 행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요구하시지 않으며 모든 계명은 인간이 행할 수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에 따라 보응하시며 인간의 공로에 따라 심판하신다.

계명은 인간의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다. 인간에게 맡겨진 책임은 의지를 가지고 그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다. 인간이 그 계명을 실천한다고 해도 결국 그것을 행할 수 있는 그 가능성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영광을 받을 인간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펠라기우스는 이것을 가능성(posse), 의지(velle), 실천(esse)이라는 세 가지로 구별하여 순서를 나누고 있다.

펠라기우스는 원죄를 부인하고, 선과 악이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이라고 보았으며, 우리의 행위에 따라 선악이 결정된다고 믿었다. 아담의 죄는 아담에게만 국한되며 전 인류에게 전가 될 수 없다. 적어도 구원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만큼 하나님과 협력한다. 따라서 인류의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과 하나님의 행위가 인간 인간의 작품이다. 그리고 인간은 완전히 성숙한 상태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선악을 행할 능력을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난다. 유아는 죄 없이 무죄한 상태서 태어나기 때문에 타락이전의 아담의 상태와 같다. 인간은 태어날 때 원죄를 타고나는 것이 아니며 다만 선행과 악행 가능성 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므로 인간의 선행과 악행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인간자신이 져야 한다.

410년 고트족에 의하여 로마가 멸망당한 후에 펠라기우스는 411년에 북아프리카 카르타고로 가서 자신의 가르침을 전파하면서 그곳에서 어거스틴과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다음해인 412년 카르타고에서 회의가 열려 펠라기우스의 제자 콜엘레스티우스를 정죄했다. 그 이유는 1) 아담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2) 아담의 죄는 자신에게만 영향을 미치지 인간 전체에 미치지는 않는다. 3) 복음과 마찬가지로 율법도 하늘나라로 인도한다. 4) 그리스도가 오시기 이전에 죄 없는 인간이 있었다. 5) 새로 태어난 유아는 타락 이전의 아담과 같은 상태에 있다. 6) 아담의 타락으로 모든 인간이 죽는 것도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맘아 모든 인간이 다시 살아나는 것도 아니다. 세례를 받지 않은 유아들도 영생을 소유한다. 세례를 받은 부자라도 자기의 전 재산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어떤 선행에 의해서도 공로를 얻지 못하며 따라서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다.

이와 같은 선행을 통한 공로 사상은 어거스틴의 믿음을 통한 은총론과 대립된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모든 자비가 신앙에서 비롯되었다고 확신했다.

펠라기우스 인간론이 자유의지론에서 출발했다면 어거스틴의 인간론은 인간의 전적부패와 불가항력적 은총론에서 출발하였다. 어거스틴의 자유이해 역시 그의 은총론에 기초한다. 인간의 자유는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주어진다.

아담의 원죄를 전가 받은 인간이 그리스도의 은총 없이 율법으로 구원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의 완악함으로 주어진 율법은 하나님의 은총을 전제할 때만이 가치 있다. 어거스틴에게 은총 없는 율법은 의미가 없으며, 은총 없는 율법은 성취될 수도 없다. 이런 어거스틴의 가르침은 한마디로 종교개혁자들이 외쳤던 sola gratia로 집약할 수 있다.

우리는 성령의 은사를 받고 사랑으로 선행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받기 위하여 먼저 믿도록 명령을 받는다. 이 하나님의 부르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며 따라서 펠라기우스가 주장하듯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통해 스스로가 거부하거나 수용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불가항력적 은혜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는 어거스틴의 은총론은 자연히 예정론을 따른다. 어거스틴은 예정받은 자들이 아직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미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말한다. 예정 자체가 신적인 기원을 같은 다면 그것은 불변적이다. 하나님의 은총이 거역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 선물이듯이 예정 역시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주권적 영역이다. 따라서 어거스틴은 이중예정론과 성도의 견인을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종교개혁자들에 와서 어거스틴의 은총론이 재확인 되었다. 또한 어거스틴의 역사관 역시 중세와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정통적인 기독교 사관으로 정착되었다.


4. 어거스틴의 역사이해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생명을 상실할 때 교회가 속해 있는 공동체를 흩으시고 개혁하셨다. 한편으로 로마의 멸망은 문화적인 책임을 다하지 못한 기독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따라서 인간 편에서 볼 때 로마 멸망의 일차적인 책임은 문화적 책임을 다하지 못한 로마인들에게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역사 속에서 계시면서 역사를 초월해 계신 하나님 편에서 이해할 때, 그것은 또한 로마 제국의 주변의 수많은 이방 민족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

하나님의 도성과 인간의 도성이라는 모티프를 통해 결국 어거스틴이 제시하고자 하는 역사이해는 창조이후 인간의 역사가 하나이 종말을 향해 달려간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이 제시한 역사이해 즉, 목적론적이 직선적인 역사관은 당대까지 지배해온 헬라의 순환논적 역사이해를 넘어 성서적 견해를 따라 역사에는 처음과 절정이 있으며 시작과 끝이 있고 시간 속에서 한 목적을 향해 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역사란 한 편의로 개인의 실존 속에 존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개인의 실존을 넘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어거스틴은, 개인의 실존 속에서 또 그 실존을 넘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임을 인식하면서도 각 개인이 역사를 구성하고 역사를 형성하여 가는 역사의 주체자들이라는 인식을 동시에 제공함으로써, 하나님 문화변혁의 동참자인 인간이 문화 명령을 수동적으로 수행하는 무기력한 존재가 아니라 사회와 역사 속에서 적극적인 문화적 사명을 부여받은 존재임을 일깨워주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인간의 자율성을 동시에 긍정하는 어거스틴의 독특한 역사해석은 마치 이성과 신앙의 조화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논리처럼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함께 어울리는 새로운 역사지평을 열어주었다.

이런 이유에서 역사가들은 어거스틴이야 말로 최초의 역사철학자 혹은 역사신학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이 성장함에 따라 인간의 도성이 쇠잔해 간다는 개념을 제시함으로써 기독교 신앙과 독립적인 역사철학의 한계를 설정하여 기독교 역사철학이란 결국 역사신학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인상을 남겨 주었다.


5. 요약 및 평가

이레니우스 소아시아 신학, 알렉산드리아 신학, 라틴 신학이라는 거대한 사상의 물줄기가 어거스틴에 와서 하나로 종합되어 서양의 중세와 근대의 사상적 맥을 형성하였다. 중세 사상, 종교개혁도 어거스틴이 없었다면 역사에 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실존주의, 역사신학, 역사철학, 개인주의, 역사관, 문화관, 그리고 그 외 수많은 현대사조도 사상적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어거스틴에 귀착된다.

그렇게 그의 사상이 설득력 있고 영향력 있었던 것은, 알렉산드리아 전통과 라틴의 전통을 대립적인 구조 속에서 이해하지 않고 하나로 종합시켜 두 개의 상이한 전통을 하나의 전통으로 조화시켰기 때문이다.




제 6 부 중세로의 준비



제 1 장 수도원 제도의 발달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마태복음 19:21


콘스탄틴 대제가 313년 밀란의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한 후 교회의 영적 생명력은 급격히 저하되기 시작하였다. 기독교는 박해 받는 종교에서 군림하는 종교로 탈바꿈했으며, 자연히 종교의 중심도 변천하기 시작하였다. 영적인 측면이 간과되고 예전적이고 외형적인 측면이 종교의 중심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광의적인 의미에서 수도원 운동은 콘스탄틴 대제 이후 나타난 영적 쇠퇴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한 일종의 갱신운동이었다.


1. 최초의 수도승들

초기 수도사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애굽 출신의 곱트인 성 안토니(256-356)였다. 안토니는 마태복음 19장 21절을 실천하고 그 후 안토니는 인간사회로부터 점점 멀리 떨어져 사회와 완전히 동떨어진 사막에서 마귀와 투쟁하며 금욕주의 삶을 시작했다.

초기 수도승은 후기에 찾아 볼 수 있는 공동체적 성격보다는 은자적인 성격이 강해 독립적으로 혹은 소수의 사람들이 모여 집단을 형성하며 수도했다.


2. 파코미우스 수도원

파코미우스 수도원은 지극히 개인주의적 수도생활에 대한 반동으로 태동된 것이다. 이 수도원은 나일강변의 타벤니시(Tabennisi)에 안토니와 동시대 사람 파코미우스(285-346)에 의해 설립되었다. 파코미우스와 이 공동체의 특징은 극단적인 금욕주의에 반대하였다. 파코미우스는 중앙 수도원에서 여러 수도원을 다스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수도원 공동체는 일종의 운영규칙들이 발전되었고, 4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파코미우스 제도가 체계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수도원 운동이 2, 3세대로 내려가는 동안, 금욕주의적 생활은 자체 내에 특수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 점차 명백해졌다. 4, 5세기에 접어들면서 수도원 제도는 보편화 되었고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팔레스틴 및 시리아에 두드러지게 많았다. 아마도 그것은 수도원 제도 이전에 금욕주의 성격이 강했던 지역이었기 때문인 듯하다.


3. 대 바실과 동방수도원

바실은 고립적인 고행생활보다는 공동체적 수도생활을 강력히 선호하였다. 수도사들이 단순히 개인의 구원만을 추구하고 사회적인 목적을 등한시한다면 기독교의 삶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독립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반문화주의적인 당대의 수도원 운동을 보면서 바실은 금욕주의 운동이 개인주의적이고 분리주의적인 경향을 벗어나 사회적 목적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실은 지나친 개인적인 경건을 반대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명령들 가운데 다수가 남과 함께 살 때 비로소 실현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고립된 금욕 생활보다는 공동체 생활을 강력히 지지하였다. 그는 또한 수도승들이 “거룩함”을 경쟁하기보다 서로를 도와야 한다고 가르쳤다. 바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나눔의 실천을 통해서 구현되고 구체화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바실의 수도원 이상은 그의 가정배경, 교육 배경 그리고 훌륭한 동료들과 교제를 통하여 성숙되었다.

바실은 이 세상을 전적으로 타부시 하지 않았다. 심지어 후에 어거스틴과 칼빈처럼 당대의 이교문학의 유용성을 인정하고 그것이 표현상의 기교와 아름다움을 제공해 준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약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바실의 수도원 성격이 파코미우스 수도원 공동체와 달라 교회와 수도원 공동체의 이상을 연결하려고 하기는 하였지만 그에게도 이원론적인 측면이 있었다. 바실은 영혼에 비해 육체를 낮은 차원으로 이해했고 당대의 조류에 따라 “육체를 영혼의 감옥”으로 생각하는 경향도 있었다. 게다가 바실은 인간의 노력을 통해 그리스도의 법을 완전히 따르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한 시대를 살았던 바실 역시 그 시대의 산물이며 우리는 일차적으로 그를 그 시대의 역사적 정황 속에서 평가해야 할 것이다.


4. 서방 수도원 발흥

서방에서 수도원 운동이 발흥한 것은 투어스 마르틴(Martin of Torus). 제롬 그리고 요한 카씨안(John Cassian)에 의해서 이다. 이들에 의해 시작된 서방 수도원 운동이 베네딕트 수도원과 켈트 수도원에 와서 더욱 체계화 되었다.

서방 수도원 운동의 개척자 중에 또 한 사람은 유세비우스 히에로니무스 소프로니우스(Eusebius Hieronimus Sophronius)이다. 그는 제롬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다. 제롬에 와서 서방의 수도원 제도는 결코 낯선 제도가 아니었으며 하나의 기독교 이상으로 정착되기 시작했다.

밀란의 엠브로즈는 수도원 제도를 더욱 확대시켰고, 이탈리아 베르셀리의 감독 유세비우스는 자신의 사원에 속한 성직자들이 규칙에 따라 살도록 요구했고 어거스틴은 성직자 가족단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 수도원 이상을 실현했다.

서방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수도원 공동체는 역시 540년경에 출현한 베네딕트 수도원 이었다. 또 하나의 수도원은 5세기 말엽에 시작된 켈트의 수도원 운동이다 .


5. 요 약

영적 갱생의 필요성에 따라 발흥한 수도원 운동은 각 시대에 따라 모습이 약간씩 달랐음을 보여준다.

수도원 운동이 영적 쇠퇴에 대한 반동이었고 교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 수도원 운동은 교회에 적지 않은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수도원 운동으로 교회 안에 율법주의가 침투해 들어왔으며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간과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수도사들은 세상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피하는 결과를 가져왔는데 그것은 수도사의 첫째 목적이 그 자신의 구원에 있었지 다른 사람들의 구원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수도원 공동체는 자신을 철저하게 헌신하려는 무리들과 안주하려는 무리 두 종류로 처음부터 대별되었다.



제2장 교황제도의 발달


“로마의 감독은 모든 감독들 가운데 최고이다.”

Leo the Great


교회로서 베드로의 사도직을 계승한 정통성 있는 교회라는 로마교회가 자신들의 권위를 주장하기 위해 근거로 삼는 것은 마태복음 16장 17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이다.


1. 로마교회의 부상

로마교회에는 신경이 발달하였고 이단들과 투쟁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다. 사도들이 남긴 전통의 수호자라는 자신들의 자각은 대단했으니 약 160년경에 베드로와 바울을 기념하여 기념비를 그곳에 세운 것도 그 때문이다.

로마교회의 권위의 우월성에 대한 주장은 로마의 감독 줄리우스(Julius)가 341년에 있었던 안디옥 회의에서 아다나시우스와 마르셀루스(Marcellus)의 복권을 추구하는 서신에도 나타난다.

마태복음 16장에 근거한 로마교회의 우월성이 신학적 성경적으로 정립된 것은 그 후 382년 다마수스 때부터이다. 이때부터 로마교회는 상당히 권위적인 교구임을 주장하게 되었고 이것이 어느 정도 인정받기 시작하였다.


2. 세르디카 서방교회

세르디카(Serdica) 서방회의에서는 로마교구를 다른 교구의 상급 법원으로 지정하여 로마교구의 우월성을 합법화시켜 주었다. 세르디카 회의 법령에서는 밝히지 않고 자신들의 법령의 출처를 니케아회의에서 제정된 법령들과 합치시킴으로 말미암아 5세기에 이르러서는 세르디카 법령들이 니케아 회의의 결과인양 인용하는 경우도 생기게 되었다. 세르디카 법령들을 니케아 회의 법령들과 동등하게 다루게 된 이면에는 로마교회의 위치가 니케아 회의의 위치와 버금간다는 입장이 내포되어 있었다.

다마수스 외에 로마의 우월권을 확립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은 밀란의 감독 앰브로스이다. “다마수스 당시 로마 관습과 보조를 맞추고자 하는 정책은 일정 한도까지 밀란의 앰브로스에 의해 촉진되었다.” 엠브로스나 어거스틴과 같은 당대의 감독들을 아프리카에서 로마의 예식이 그대로 행해지고 관습화되고 있는 것에 대해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하나의 관례처럼 일반화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영향력이 우주적으로 모든 지역에까지 균형 있게 미친 것은 아니었다.


3. 교황제도의 확립

로마의 영향력은 레오 1세(Leo I : 440-461)가 로마교회 감독으로 재임하는 동안에 더욱 강화되었다. 레오가 로마 감독의 지위를 강화시킨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는 칼케돈회의이다. 여기서 레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450년에 칼케돈에서 열린 이 회의에서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혼합, 변한, 나뉨, 그리고 분리됨이 없이 연합되었다는 내용의 레오의 서신이 낭독되자 그곳에 모인 회원들은 갈채를 보내며 탄성을 보냈다. 그러나 칼케돈회의 에서는 제 28조항에 “새 로마” 콘스탄티노플이 교회 문제에 있어서 로마와 동등한 권한을 가져야하며 로마 다음가는 두 번째 지위를 가져야 된다고 명문화하였다.

칼케돈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레오는 로마교회의 우월성을 양보하지 않았다. 레오는 선대 감독들로부터 물려받은 자료들을 이용하여 로마 교회의 베드로적 권위를 구체화하고, 일관성 있고 권위 있는 로마교회의 최고성 교리를 만들었다.

레오 이후 영향력 있는 교황은 겔라시우스 1세(492-496)였다. 겔라시우스 1세는 세속의 최고의 권한자는 황제이고 교회의 최고 권한자는 교황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세속적인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황제가 해결의 열쇠가 당연히 로마의 교황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 시기까지 로마교회는 거룩한 교구(the Holy See)로서 자리를 완전히 굳히게 되었고 다른 교구들도 자의든 타의든 이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것을 교황제도는 역사에 정착되었다.



제 3 장 초대교회 세계선교 초석들


지금까지 주저해 왔다. 나의 글이 다른 사람의 글만 못하기 때문에 인간들의 혀의 판단 아래 떨어질까 나는 두려웠다.

패트릭Patrick


4세기에 접어들면서 복음은 로마주변의 야만족에게까지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1. 아일랜드 선교사 패트릭

패트릭은 서부 영국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패트릭은 아일랜드의 감독과 사도로 임명되었다. 패트릭은 아일랜드의 삶의 정황을 고려하여 지방 분권적 교회를 세웠다. 이 교회의 핵심은 대 수도원장들의 권력을 쥔, 반 은둔적 수도원제도였다. 패트릭은 아일랜드에 광범위하게 여행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지방의 왕들과 속 왕들(sub-kings)에게 의탁하여 보호를 받았다. 아일랜드 귀족의 자제들의 그를 수행한 경우도 빈번하였다. 그는 사회의 모든 계급으로부터 많은 개종자를 얻었던 것이다.


2. 스코틀랜드 선교사 콜럼바

일찍이 패트릭과 콜럼바가 없었다면 유럽 선교는 방향이 달라졌을 것이다. 아일랜드를 넘어 스코틀랜드에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 콜러바(521-597)는 “분쟁과 싸움이 얼룩진 사회”속에서 자랐다.

스코틀랜드 서부 해역에 있는 아이오나(Iona)라는 작은 섬에 정착한 콜럼바는 동료들과 함께 이교도적 스코트인들과 픽트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전진 기지를 세웠다.

콜럼바의 영향력 아래 563년부터 597년 까지 35년 동안 아이오나는 스코틀랜드와 북부 잉글랜드에 대한 복음 전파의 핵심지가 되었다. 콜럼바의 선교는 단순한 기독교인에로의 회심에만 초점이 맞추어 지지 않았다. 당시 종족문제가 선교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을 간파한 콜럼바는 575년에 아일랜드를 방문하여 데리 근처의 드럼시애트에서 열린 아일랜드 종족들의 국민 의회에 참석하여 고질적인 문제였던 고왕과 음영시인 들과의 분쟁을 중재하고 나섰다. 이러한 요인들에 힘입어 콜럼바와 그의 수도승은 스코틀랜드에 복음을 심고 그와 함께 보다 큰 질서와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절도 있는 수도원적 삶, 문제해결에 대한 탁월함 그리고 경건하고 실천적인 삶은 콜럼바의 영향력을 더욱 확산시켜 주었다.

직설적이고 단순한 성경적인 메시지를 전하며 선교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헌신적 삶을 통해 실천했던 콜럼바는 사랑하는 동료 수도승들에게 작별의 축복을 한 후 597년 6월 9일, 주일날 이른 시각에 평화로이 잠들었다.



제4장 결 론

지금까지 초대교회사 연구를 통해 발견한 몇 가지 두드러진 특징을 지적하고 초대교회사 우리에게 주는 역사적인 의미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모든 시대의 역사가 그렇듯이 초대교회 역사 역시 이전 시대와의 단절 속에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연속성에서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둘째, 초대교회의 역사에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또 하나가 도전과 응전의 대결구도 속에서 신학이 발전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셋째, 초대 교회사를 총체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사상적 주제는 그리스도 또는 다른 신학적 용어를 빌린다면 로고스라 할 수 있다.

넷째,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정통신앙을 정립시켜 교회의 틀을 형성할 수 있는 기초를 만드셨다는 사실이다.

다섯째, 알렉산드리아 전통, 라틴 전통, 그리고 소아시아 전통이 어거스틴에게 와서 종합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여섯째, 종말론의 변천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그들이 믿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사실은 절대 절망을 초극할 수 있게 만드는 절대 희망이 있다.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 교회의 역사에 주권적으로 개입하여 오셨다는 사실이다.

성경의 역사 속에서, 초대교회의 역사 속에서 개입하신 그 주권적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의 역사 속에서도 개입하실 것을 믿는다.





 

2. 중세사

 

1) 과도기 (AD 590~800년, 선교 발달기) - 신성로마제국 탄생까지

     특징 - 교황권의 강화와 교회의 갱신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영국, 프랑스, 동일 등지에 선교사가 파송되었다. 

     모하메드의 출현으로 기독교가 이슬람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니케아 신조가 작성되었다.


 2) 로마교회 성장기 (AD 800~1073년, 동서 교회 분리기) - 그렉고리우스 7세(힐데브란트)의 즉위까지 

     특징 - 신성로마제국이 건설되었다. 교황권이 강화 되었으며 이에 따라 교황권이 부패하게 되었다.

     교황의 축첩 정치가 이루어졌다. 

     동서교회가 분리되었다.


 3) 로마교회 전성기 (AD 1073~1303년, 기독교 실생활기) - 보니페이스 8세 사망까지

     특징 - 8차에 걸친 십자군 운동이 일어났다. 종교재판과 고해성사 제도가 실시되었다. 

     탁발교단이 생겨났고 스콜라 철학이 발달되었으며 신비주의가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카놋사의 굴욕사건이 발생하였다.


 4) 로마교회 쇠퇴기 (AD 1303~1517년, 개혁전초기) 루터의 종교개혁까지

     특징 - 교회의 아비뇽유수로 교황권이 실추되었다 문예부흥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면죄부가 발행되었고 국가주의가 발생하였으며 스콜라신학이 붕괴하였다.  

    종교 개혁직전에 개혁자들의 활발한 활동이 있어났고 종교개혁의 토양과 분위가 조성되었다. 

    동로마제국이 멸망했다.

 
 

3. 근세사

 

1) 종교개혁시대 (1517~1648년, 신교 발생기) - 웨스트팔리아 조약까지

     특징 - 루터에 의해 제창된 개혁운동이 지속되어 성공하게 되었다. 종교 개혁에 대항한 가톨릭의 반동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다 

     개혁신앙의 확산으로 곳곳에서 신교와 구교의 갈등과 대립이 일어났다.

     칼빈의 종교개혁의 신학적 뒷바침이 이루어졌고 신앙고백이 활발해졌으며 문서화 되었다. 

     성경이 번역이 활성화 되었다. 예수회가 조직되었고 트렌트 종교회의가 소집 되었으며 프랑스에는 위그노 사건이 발생하였다. 

     도르트 회의가 소집되었고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열렸다.


 2) 근세사시대 (1648~1800년, 신교 확장기) - 프랑스 혁명까지

     특징 - 종교개혁이 성공한 나라는 교황권이 약화되는 대신 왕권이 강화 되었다.

     왕권 신수설의 강조로 신앙의 자유가 강조 되었고 청교도 운동이 발생하게 되었다.

     계몽사조와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쟌세니즘이 발발했고 경건주의 운동이 시작되었으며 감리교회가 청설되었다.


 3) 최근세시대 (1800~현재, 세계 기독교화기) 

     특징 - 복음이 전세계로 뻗어나아가게 되었다. 

     기독교의 사회참여가 활발 해졌고 과학과 철학의 발달로 신앙의 새로운 방향이 모색 되었다.

     새로운 신학사조가 생겨났으며 종교적 반동운동이 시작 되었다.

     각종 교파의 형성과 난립 현상이 일어났다.

    프랑스 혁명과 옥스포드 운동이 일어났다 바티칸 공의회와 WCC가 탄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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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서신 / 에베소서(05-24-2022∼05-30-2022) 빌립보서(05-31-2022∼06-03-2022) 골로새서(01-04-2022∼06-08-2022) 빌레몬서(06-09-2022)





믿음의 교제의 유익(빌레몬서 1: 4-7)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행 2:46-47).
뿐만 아니라 사도의 가르침을 통해 교제하며 삶을 나누었습니다.
사도의 가르침과 성도간의 교제가 동일한 비중으로 언급되었습니다(행 2:42).
이러한 말씀을 통한 삶의 나눔이 곧 교제입니다.
오늘 본문 6절의 “교제(fellowship)" 란 용어는 성자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된 신앙인들이 나누는 거룩한 사귐을 의미합니다.
믿음의 교제는 십자가신앙의 횡선을 만들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구체적으로 성도들은 왜 믿음의 교제를 반드시 나누어야 할까요? 

첫째,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각종 은사와 축복을 자신이 보다 더 잘 알게 됩니다(6절)

만약 교제하지 않고 홀로 생활하면 예수님 안에 있는 각종 좋은 것들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믿음의 교제를 통해 비로소 하늘의 각양 선물과 축복에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를 알고 사모하여 받게 됩니다.

시편 133편 /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형제가 연합하며 동거하는 믿음의 교제 가운데 각종 은사와 축복이 주어집니다.

둘째, 믿음의 교제를 통해 성도들이 마음에 신선한 활력을 받게 된다(7a)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have been refreshed through you)

“평안함을 얻었으니”라는 헬라어는 “쉬게 하다”, “원기를 돋우다”, “안식하다” 등을 의미합니다(요 14:27).
그런데 이러한 평강이 빌레몬의 믿음과 사랑과 헌신의 교제를 통해 성도들에게 신선함을 안겨주었습니다.

“교제”는 신약성경 전체 곳곳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삼위하나님 사이의 코니노니아는 물론, 성도와 하나님과의 교제, 성도간의 사귐에 대해 수없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관계적 공통성(relational commonality)”을 통해 제자들은 더욱 공동체가 되어 갔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교제를 통해 성도들은 죄를 서로 용서받고, 용서하기도 하며, 변화받고 하나님나라를 위해 신령한 수고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새롭게 됨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더욱 모여 믿음의 교제를 나누기에 힘써야 합니다(히브리서 10:24-25). 

그리하여 보다 풍성한 신선한 활력을 주고 받으며 하늘의 평강을 서로 받게 되시길 축원합니다.

셋째, 지도자들이 기쁨과 위로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7b)

...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얻었노라.

무엇이 지도자들이 성도들로부터 받는 기쁨과 위로일까요?
여러 성도님들이 믿음 안에서 은혜받고 밝아지고 기뻐하고 변화되는 삶을 보는 것입니다.(7a)

히브리서 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어떻게 하면 보다 더 믿음을 갖게 되고 신앙생활 잘 하게 되는지 진지하게 관심갖고 대화나누는 장면을 볼 때, 지도자들은 참으로 보람을 느낍니다. 서로 간증하며 예수님께 감사드리고 하나님을 높히고 ... 우리 모두 믿음의 교제를 통해 지도자들에게도 사역의 위로와 기쁨을 선사할 수 있도록 하시길 축원드립니다.

사도 바울은 기도하며 빌레몬을 생각할 때 늘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4-5).
이유는 빌레몬의 하나님께 대한 신실한 믿음과 성도들에 대한 사랑의 소식을 듣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빌레몬처럼 믿음을 갖고 성도들을 서로 사랑하며 “믿음의 교제”를 나누지 않으시겠습니까?
“믿음의 교제”는 세 가지 유익이 있습니다.

가장 먼저 자신에게 유익을 끼칩니다.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좋은 선물들과 축복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깨달아 받게 됩니다.

주위의 성도들을 유익하게 합니다.
교제를 통해 성도들의 심령을 평안케 하며 새롭고 신선하게 해 줍니다.
나아가 교회지도자들에게도 큰 유익을 끼칩니다.
사역의 노고에 대한 위로와 열매의 기쁨을 누리게 합니다. 

교회의 유익
교회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주님의 몸된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부흥시키는 큰 활력소입니다. 

우리 모두 성령님의 감화감동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교제는 물론, 성도들과의 진정한 믿음의 교제가 더욱 있으시기를 성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의 본질을 성도의 교제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할때도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라고 신앙고백을 합니다.
예배가 끝난 다음에 하는 축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하는 말씀을 근거로 축복합니다.

‘교통’(코이노니아’ Koinonia)이란 말이 은혜와 사랑이라는 말과 함께 쓰였습니다.
교통(코이노니아)이라는 단어는 ‘은혜’, ‘사랑’과 함께 성경의 세 가지 기본적인 말 중의 하나라고 주장하기도 하며 교회라는 한문 글자도 가르칠 교(敎)가 아니라 사귈 교(交)를 써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교제는 가족과 관계됩니다

그리스의 철인 소크라테스가 조그만 오두막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 때 이를 본 제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그렇게 작은 오두막을 무엇에 쓰시려고 짓고 계십니까?" 그 때 소크라테스가 대답했습니다. 
"이 작은 집 안에 진실한 우정을 나눌 친구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다른 소원이 없겠네?"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에게 인생이란 누군가와 오두막 속에서 함께 사는 것임을 가르쳐 주고자 했습니다.
이 인생의 오두막 속에서 함께 살아야 하는 그 사람들과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인생의 행불행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가르쳐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네 인생은 작은 오두막 속에 그 누군가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이 작은 오두막 속에 정말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사람과 함께 거할 수만 있다면 우리 인생은 정말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오두막 속에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과 함께 있어야 한다면 우리 인생은 정말로 괴롭고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혼자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 누군가와 함께 믿으며 함께 하나님 앞에서야 합니다.
소크라테스 말처럼 우리네 신앙생활도 하나의 오두막 생활입니다.
이 신앙생활이라는 오두막 속에서 누군가와 함께 살아야 하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과 더불어 신앙생활이라는 오두막 생활을 잘하게 될 때 우리의 신앙생활은 행복합니다.
그러나 그 신앙생활이라는 오두막 생활을 잘하지 못하게 될 때 우리의 신앙생활이 괴롭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핵 가족이 되며 가족간에 교제가 멀어지는 면이 있습니다
핵가족 유머가 있습니다.

김정일이 죽었다 깨나도 서울에 올 수 없는 다섯 가지 이유

1. 서울에는 총알 택시가 너무 많다.
2. 서울에는 골목마다 대포집이 있다.
3. 남자들은 폭탄주를 마신다.
4. 서울에는 비행 청소년이 너무 많다.
5. 서울은 거의가 핵가족이다.(월간 조선에 발표된 글)

핵무기로 무장된 핵가족?
무시 무시 하지요?
그래서 김정일이 미사일 발사 한다고 하 는때에 오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위로 받는 것은 좋겠지만 핵 가족인 우리네 삶은 날로 삭막해 지고 있습니다.
가족간에 아름다운 교제가 이루어져야 힙니다. 

교제는 사회와 관계됩니다

게리 스멜리(Gary Smalley)와 잔 트렌트(John Trent)가 공동으로 쓴 인간의 숨겨진 가치(The Hidden Value of a Man)라는 책에서 두 사람은 인간은 일생 동안 두 개의 칼을 휘두르며 산다고 주장한다 합니다.

첫 번째 칼은 은으로 된 칼로써 법이나 사회적 신분, 직책, 혹은 학위 등등에 기초한 힘이나 권위의 칼입니다.
두 번째 칼은 황금으로 된 칼로써 내면의 인격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자비와 사랑, 친절, 온유, 등등의 덕성의 칼입니다.

은칼과 황금의 칼이 모두 우리 인생에 필요합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은칼만 무자비하게 휘두른다는데 있습니다.
은칼을 마구잡이로 휘두르기 때문에 사회적인 교제가 깨집니다.

좋은 생각이라는 잡지의 2000년 5월에 <굿 윌 헌팅>이라는 영화에 대해 소개한 내용이라 합니다. 
그 영화의 주인공은 윌 헌팅이라는 청년입니다.
그가 보스턴 빈민가에서 건달 친구들을 만나면서 그는 폭행을 일삼는 문제아가 되었습니다.
모든 일에 반항하는 반항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수학자들도 풀기 어려운 문제를 척척 풀고, 해박한 역사지식으로 하버드 대학생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드는 ‘삐딱한 천재’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메사추세츠 대학교에서 청소부로 일하던 중, 수학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낸 노벨상 수상자나 풀만한 복잡한 수학 문제를 단숨에 풀어내면서 수학과 교수 램에게 발견되었습니다.
램교수는 윌에게 체계적인 교육을 시키고 싶어 하지만 그의 거친 성격을 다스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램보 교수는 절친한 친구사이인 심리학 교수 숀 맥과이어에게 윌을 부탁합니다.
숀 교수는 윌의 상처 입은 마음을 달래주려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결국 윌은 따뜻하게 대하는 숀 교수의 손길을 통해 마음을 열었고, 어렸을 때에 의붓아버지로부터 받았던 상처가 치유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폭행을 일삼는 건달에서 미래를 향해 달리는 청년으로 변화되어 간다는 내용의 영화입니다. 
사회적인 교제속에 아름다운 관계가 형성됨을 상각하게 합니다
  
교제는 교회와 관계 됩니다

로버트 뱅크스 부부가 쓴 "교회,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책에 보면 종교개혁 시대의 한 침례교인이 노래한 가정교회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우리가 모이고 있는 이곳은 어떤 곳인가?
그저 하나의 집일뿐, 바닥은 흙
사람들을 보호하는 벽과 지붕
빛이 들어오는 창문, 열린문
하지만 우리 여기 모일 때
이 집은 살아있는 하나의 몸이 되고
우리는 주님이 가까이 계심을 아네
저 멀리서부터 오는 말씀과 떨어지는 별들
우리 안에 씨처럼 뿌려진 열정의 불꽃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부터 전해온 하나님의 이름들
그리고 꿈과 징조와 표적들
이곳에서 우리는 이미 들은 것을 또다시 기억하고 또다시 이야기한다네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그리고 그분의 식탁에서
우리는 떡을 받는다네
그 떡을 나누어 먹으며
살아있는 표적을 본다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서로가 서로에게 떡과 포도주라네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전파해야 할 사람들
바로 여기 이곳에서 그 정의와 평화를 받는다네. 
  
초대교회에서 이 교제가 얼마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는지 성경이 말씀합니다.

사도행전 2: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이 교제(코이노니아)란 사도들의 교제가 아니라 성도간의 교제를 말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도의 가르침과 성도간의 교제가 동일한 비중으로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말씀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배우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이어서 교제했습니다.
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들은 후에 그 말씀을 통해서 서로의 삶을 나누었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통한 삶의 나눔이 곧 교제 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교제에는 음식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음식준비도 억지로 의무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한 가족처럼 더불어 함께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그 다음에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힘썼다고 했는데 어떻게 기도했을까요?
말씀을 들은 후, 음식과 함께 대화를 하며 교제를 했습니다.
아마 그 동안 삶의 현장에서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간의 기도제목을 나누었을 것이고  그 제목들을 가지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서로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인양 생각으로 기도로 교제했던 것입니다. 

믿음의 교제는 하나님과 관계 됩니다

요한일서 1: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하나님과의 교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흘림에 기초한 용서에서 비롯됩니다
용서라는 영어 "Forgive"를 가지고 용서하는 방법을 재미있고 알기 쉽게 설명하기도 합니다. 

첫째, 참으라(Forbear)

속상하다고 해서 화풀이한다면 그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참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누가 오른편 뺨을 치면 왼편 뺨을 돌려대고, 속옷을 달라고 하면 겉옷을 주고,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 가줄 수 있는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는 것이 수 있는 용서의 첫 걸음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용서는 참는데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 잊으라(Forget)

나의 오네시모가 나에게 섭섭한 일을 하고 손해를 끼쳤다 할지라도 과감히 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이웃집에 가서 낫을 좀 빌려오너라."
아들이 가더니 빈 손으로 돌아왔습니다.
"왜 그냥 오느냐?"
"예, 빌려주지 않던데요."
거절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몇 일 뒤에 그 집에서 호미를 빌리러 왔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호미를 가져다주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이 항의를 했습니다.
"아니, 아버지! 그들은 우리에게 빌려주지 않았는데 우리는 왜 그들에게 빌려줍니까?"
아버지는 아들을 책망했습니다.
"애야! 그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도 빌려주지 않으면 그것은 복수하는 것이다.
 '그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는 빌려준다'라는 마음으로 빌려주면 그것은 증오라는 것이다.
그 집에서 빌려주었든지 빌려주지 않았든지 지난 것은 잊어버리고 지금 그 집에서 필요하니까 빌려주는 것이 용서요, 사랑이다.
그러니 용서와 사랑의 마음으로 살아라." 

우리는 어떠한 마음으로 살아갑니까?
복수의 마음으로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증오의 마음으로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용서와 사랑의 정신으로 살아갑시다.

셋째, 영원히(Forever)

영원토록 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내 기억 속에서 말끔히 잊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물었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잘못을 범하면 몇 번까지 용서해야 되겠습니까? 일곱 번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예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일곱 번 뿐만 아니고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 용서는 기억 속에서 영원히 깨끗하게 잊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6-7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용서에는 회개가 따라야 합니다
다윗도 침상이 뜨도록 회개하고 용서 받았습니다
베드로도 닭이 울때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심한 통곡으로 회개 하였습니다
용서 받은 사람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천국표가 있습니다

어느 날 앨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이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차장이 열차 안 곳곳을 돌면서 차표에 구멍을 뚫어 표 검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인슈타인 차례가 되었을 때 주머니를 아무리 뒤져봐도 표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차장은 아인슈타인이 위대한 과학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표는 볼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선생님이 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과학자 중 한 사람인 것을 잘 압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정직한 분인 것도 안답니다.
차표 안 보여주셔도 괜찮습니다." 

몇 분이 지난 뒤 차장이 표 검사를 마치고 아인슈타인 곁을 다시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이 때도 아인슈타인은 여전히 무릎을 꿇고 좌석 밑을 뒤지며 열심히 잃어버린 표를 찾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안쓰럽게 생각한 차장은 다시 "아인슈타인 선생님, 차표 때문에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선생님 표는 제가 검사 안해도 됩니다." 하면서 만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인슈타인은 자기가 꼭 잃어버린 표를 찾아야만 한다고 고집을 세웠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차장이
"왜 꼭 차표를 찾으셔야만 하지요?" 하고 물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대답인즉, 
"내가 이 표를 찾지 못하면 내가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인슈타인의 기차표는 잃어 버릴 수 있을 지 모르나 우리에게 주신 표는 심령에 새겨준 것이어서 결코 잃을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바울은 신실하여 많은 성도들에게 기쁨과 감사의 제목이 되는 빌레몬의 믿음을  칭찬하면서 빌레몬을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한다고 합니다. 바울이 그로 인하여 기뻐하며 감사하였던 것은 모든 성도에 대한 그의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의 믿음의 교제가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한다고 진술하며,  그로 말미암아 성도들의 마음이 평안함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또한  바울은 그의 사랑으로 인해 많은 기쁨과 위로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주인인 빌레몬에게서 주인을 떠나 도망하였으므로 다시 주인에게 돌려보내면서 그를 용서하고 자신을 위해 다시 돌려보내 줄 것을 부탁합니다.
그 당시에는 노예가 도망쳤다가 잡히게 되면 가혹한 처벌을 받게 되고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었고 만약 그를 살려주더라도 그 이마에 화롯불을 가지고 "F"자를 크게 새기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도망자"라는 라틴말(Fugitivus)의 첫 글자입니다.
영어의 "Fugitive"가 여기서 나왔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그와 같이 가혹한 처벌을 받지 아니하고, 이제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동역자로서 빌레몬의 가족들을 비롯한 모든 성도들이 그를 받아주기를 기대합니다. 

성도는 빌레몬과 같이 모든 사람에게 기쁨과 감사를 주는 복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가능합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오네시모의  문제를 놓고 부탁할 때 바울은 그의 순종을 확신하였는데  이는 그의 믿음으로 교제하는 신앙의 독실함을 근거로 하였습니다.
 

4. 내가 항상(恒常) 내 하나님께 감사(感謝)하고 기도(企圖)할 때에 너를 말함은.
5.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聖徒)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6.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交際)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善)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役事)하느니라.

첫째, 바울은 교회를 위해 기도했고 믿음의 교제를 언급 했다.

바울은 사랑하는 동역자(同役者. συνεργός 쉬네르고스. fellow workers.  동료일군. 함께 일하는 자) 디모데와 빌레몬과 자매 압비아와 및 군사 된 아킵보와 빌레몬의 집 교회(敎會. ἐκκλησία 에클레시아. church. 그리스도인의 운집)에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했다(1- 2).

그는 항상 자신이 믿는 하나님께 감사했고 동역 자들에 대해 기도를 할 때 빌레몬의 집에 있는 교회와 그들이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들에 대한 빌레몬의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은 것이라 말했고 이로써 믿음의 교제(交際. κοινωνία 코이노니아. communion.  형제의 연합의 증거)를 하게 된 것이다(4-6).

둘째, 믿음의 교제는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만나게 한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에무나. πίσστις 피스티스. faith. 예수를 믿는 마음)은 구원의 확신으로 인한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는 제자들과 교제를 통해서 그들을 마음에 영접(迎接. 카라. δέχομαι 데코마이. receive. 마음에 받아드리다)하여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역사를 경험해야 한다(고후 7:2-3. 빌 1:7)

빌레몬은 자신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 함께 교제하는 형제들이 그들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善. 토브. ἀγαθός 아가도스. good.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으며 예수님과 연합해 한 영(靈)이 되도록 역사하시는 것을 보았다(미 6:8. 고전 6:17. 몬 1:5-6)

셋째, 성도의 교제의 중심은 예수님.

성도의 실존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죄로 죽었던 우리의 영혼이 다시 살아난 하늘에 속한 생명의 존재이고 이 사람은 거룩하며 의로운 사람으로 죄가 그쳤고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으로 살지 않고 육체의 남은 때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다(골 2:12. 벧전 4:1-2)

주님 뜻대로 사는 자는 자신 안에 오신 예수로 살고 이 같은 제자들과 교제를 하면 그들 가운데 계신 주의 영의 교통하심이 그리스도와 교제를 하게 하시며 이는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케 하시므로 예수님 강림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신다(고전 1:8-9, 고후13:13)

넷째,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그리스도 반석이신 예수님.

하나님의 견고(堅固. 미차르. βέβαιος 베바이오스. fortification.  요새와. 반석)한 (예쏘드. θεμέλιος 데멜리오스. foundation. 신앙의 기초 예수) 예수님은 섰으니 (印. 호담. σφραγίς 스프라기스. signet.  하나님 소유로 도장을 침)침이 있어 우리가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었다(딤후 2:19)

인(印) 침을 받은 백성을 하나님이 아신다 하셨고 이에 너희가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었으니 그를 부르는 자마다 불의(不義. 아울라. ἀδικία 아디키아. unrighteousness.  불법. 부정. 옳지 못함)에서 떠나라 하셨으며 만일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면 선한 일에 쓰임을 받게 된다(딤후 2:19-21)

다섯째, 반석이신 예수님 안에서 복음으로 행하는 것.

복음(福音. εὐαγγέλιον 위앙겔리온. gospel.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신 예수님 소식)은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으로 이를 듣고 믿어 죄를 버리고 불의에서 떠나면 그 깨달은 첫날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를 하게 되며 이로 인해 너희 중에서와 온 천하에서 열매를 맺게 된다(빌 1:5.골 1:5-6)

교제의 결과는 너희 속에 착한(주와 동행)일을 시작하신 이는 하나님이고 그가 예수 강림의 날까지 이루실 것을 확신하며 바울의 마음에는 빌립보교회 형제들이 있고 함께 그의 사역의 매임과 복음을 말하는 은혜에 참여하여 바울은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그들을 사모하는 것을 하나님이 증인이 되셨다(빌 1:7-8)

여섯째, 종은 성도를 사모해 복음만 아니라 목숨도 주어야 한다.

주의 종 목사(牧師. ποιμήν 포이멘. pastor.  예배의 책임자. 말씀을 전하여 양을 돌보는 자)는 맡겨주신 성도들을 마음에 영접(迎接)하고 사모(思慕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목숨(육체의 생명)까지도 내어 주어야 한다(살전 2:8)

사도요한은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네페쉬. ψυχή 푸쉬케. life.  육신의 생명. 영혼)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며 또 이 세상 재물로 형제를 돕는 것 까지도 말했다(요일 3:16-17)

일곱째, 교제, 가상에서 하는 것이 아니고 얼굴을 보고해야한다.

예수님은 성경을 통해 영생을 얻게 된다 하셨지만 또 성령으로 거듭나려면 자기의 제자와 선지자와 의인과 어린아이를 영접(迎接)해야 한다 하셨고 이는 육체로 오셨던 주님이 이제 성령으로 제자들 속에 오셨기에 누구든지 제자를 마음으로 영접하면 곧 자신을 영접한다 하셨다(마 10:40-41.요 13:20, 14:23. 롬 5:5)

바울은 로마의 사랑하는 성도 보기를 심히 원했고 자신 안에 계신 무슨 신령한 은사(영생)를 나누어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한다 말했으며 오늘날은 가상에서 말씀을 서로주고 받지만 거듭나지 못하는 것은 얼굴을 보고 서로 마음으로 영접해야 거듭나는 상(賞)을 예수님께 받게 된다(마 10:40-41.막 9:37. 롬 1:10-11)

여덟째,  내 안의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로 증명된다.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보고 들은 첫날부터 교제하는 것은 너희 속에 착한일(ἀγαθός 아가도스. good.  하나님과 연합. 동행. 선한일)을 시작하신 주님이 허물이 없이 예수 강림의 날까지 이루신다 말했고 그는 자신 안에 그리스도가 함께 계시기에 자신의 안을 곧 예수님 안이라고 말했다(빌1:5-7, 10, 30)

나는 육신적인 신자로 삼십년 동안은 아무도 거듭나게 할 수 없었고 주께서 내게 오심으로 거듭나는 극적인 은혜를 입어 나의 가족들이 나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나를 마음으로 영접하였고 또 교회 개척 당시 나를 마음으로 영접한 분들이 성령으로 거듭나서 그들도 완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다(딤후 3:17)


♦ 6월 9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빌레몬서 1:1∼25

♦ 묵상을 위한 주제 : 믿음의 교제(6절)
♦ 성구 :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交際)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善)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役事)하느니라.
I pray that you may be active in sharing your faith, so that you will have a full understanding of every good thing we have in Christ.    

빌레몬서는 사도 바울이 오네시모에 대한 신원보증서와 같은 말씀입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 가정교회에 소속된 종으로 어느 날 그 집에서 귀한 것을 훔쳐 갖고 도주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오네시모는 사도 바울이 갇혀 있던 감옥에 수감됩니다.
빌레몬 가정교회에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던 오네시모가 감옥에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바울에게 신앙교육을 받은 후에 아주 신실한 믿음의 일군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오네시모는 감옥에서 바울을 위하여 수종 드는 일에 최선을 다하므로 바울에게는 복음을 위한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당시 노예가 주인에게 물질적인 손실을 끼쳤을 때는 반드시 그 물질에 대해서 보상을 해주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바울의 동역자로 함께 사역하는 일군이 아니라 주인에게 돌려보내면서 이 편지를 보내며 "과거에는 쓸모없는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너와 나에게 아주 유익한 사람이 되었으며 오네시모가 손해를 끼친 것은 바울이 부상해 줄 것" 이라고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죄인이었던 나를 위하여 십자가형을 받으셨고 내 죄를 값아 주신 후에는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들을 위한 신원 보증서를 약속하신 것입니다.

우리들을 사랑하시고 신원을 보증하신 주님의 놀라우신 은총을 찬양하며 오늘도 믿음의 교제로 인하여 오네시모와 같은 쓸모없었던 인생을 유익한 존재로 변화시킬 수 있는 은혜가 충만한 하루가 열려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자기 점검을 위한 세 가지 질문

- 하나님의 뜻에 따른 질문

1. 항상 기뻐하는가?
2. 끈질기게 기도하는가?
3. 모든 일에 감사하는가?


에베소서 5: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Redeeming the time, because the days are evil.

에베소서 5장 16절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명(George Bernard Shaw's epitaph)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세월이란 금방 지나가 버리는 특별한 기회를 의미합니다.

칼빈 / “마귀의 손에서 시간을 찾아 나의 소유로 삼아야 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 “세상적인 모든 방해와 향락을 내주고 사들이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5:8
“마귀는 항상 우리에게 있는 시간을 빼앗으려고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세월을 아끼라”고 합니다 또 그것은 때가 악하기 때문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시간은 언제나 우리 곁에 머물지 않습니다. 순식간에 휙 하고 지나가 버리는 것이 세월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쓰던 시기는 요한계시록 18장 13절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사람의 영혼을 상품으로 거래하는 로마의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극심한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사탄은 “세월이 좀먹느냐, 모래알이 싹트느냐, 새털같이 많은 날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무엇이 걱정이냐, 오늘 못하면 내일하지…”라고 저와 여러분에게 속삭입니다. 여기에 넘어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독일의 시인 F 실러는 ‘시간’을 세 가지 걸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폰 실러(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 , 1759년 11월 10일 ~ 1805년 5월 9일)

첫째, 미래는 주저하면서 다가오고 있다고 합니다.
둘째, 현재는 화살처럼 날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셋째. 과거는 영원히 정지하지 않고 서 있다고 했습니다.

왜 세월을 아껴야 할까요?
그 이유는 세월은 빨리 가기 때문입니다.
세월은 다시 되돌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나가버린 세월을 다시 살아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에 있어 세월은 세상의 어떤 귀한 것으로도 바꿀 수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진 세월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요?
세월을 아껴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혹시 아무렇게나 세월을 허비하고 싶은 분 계십니까?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인생은 소중합니다. 그렇다면 분명히 알아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허락하신 은혜와 축복의 시간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외아들 예수님의 피값으로 죄의 종 됐던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인생의 좋은 기회들은 준비된 사람에게만 옵니다. 또한 대가를 치르는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준비되지 못한 사람, 대가 치르기를 꺼리는 사람은 기회가 주어지는 것 같아도 기회를 잡을 수 없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성도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선포하시길 원하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높이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물쭈물하다 혹시 세월을 허비하는 일은 없으십니까? 시간을 낭비하는 것. 그것은 곧 인생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성도들은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세월을 뜻하는 헬라어 ‘카이론’은 중요한 시기 또는 금방 지나가 버리는 특별한 기회를 의미합니다. 종교개혁가 장 칼뱅은 “마귀의 손에서 시간을 찾아 나의 소유로 삼아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세상적인 모든 방해와 향락을 내주고 사들이는 것이다”고 역설했습니다. 모두 시간의 중요성을 의미하는 어록들입니다.

이처럼 삶이 유한한 인간에게 시간은 매우 중요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은 “마귀는 항상 우리에게 있는 시간을 빼앗으려고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다”고 경고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세월을 아끼라”고 합니다 또 그것은 때가 악하기 때문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시간은 언제나 우리 곁에 머물지 않습니다. 순식간에 휙 하고 지나가 버리는 것이 세월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쓰던 시기는 요한계시록 18장 13절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사람의 영혼을 상품으로 거래하는 로마의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극심한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사탄은 “세월이 좀먹느냐, 모래알이 싹트느냐, 새털같이 많은 날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무엇이 걱정이냐, 오늘 못하면 내일하지…”라고 저와 여러분에게 속삭입니다. 여기에 넘어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독일의 시인 F 실러는 ‘시간’을 세 가지 걸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첫째, 미래는 주저하면서 다가오고 있다고 합니다. 둘째, 현재는 화살처럼 날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셋째. 과거는 영원히 정지하지 않고 서 있다고 했습니다. 왜 세월을 아껴야 할까요? 그 이유는 세월은 빨리 가기 때문입니다. 세월은 다시 되돌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나가버린 세월을 다시 살아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에 있어 세월은 세상의 어떤 귀한 것으로도 바꿀 수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진 세월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요? 세월을 아껴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혹시 아무렇게나 세월을 허비하고 싶은 분 계십니까?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인생은 소중합니다. 그렇다면 분명히 알아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허락하신 은혜와 축복의 시간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외아들 예수님의 피값으로 죄의 종 됐던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인생의 좋은 기회들은 준비된 사람에게만 옵니다. 또한 대가를 치르는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준비되지 못한 사람, 대가 치르기를 꺼리는 사람은 기회가 주어지는 것 같아도 기회를 잡을 수 없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성도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선포하시길 원하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높이시기를 원하십니다.


신앙과 지혜는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분리되지 않는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강조하는 신앙은, 동시에 사람과의 관계를 강조하는 지혜이기도 하다.
잠언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강조한 것도 그 때문이다(잠 1:7; 9:10).
신앙은 하나님과 더불어 이웃과의 바른 관계를 지향해야 한다. 그것이 이 땅에서 우리들이 누릴 행복한 삶이다.

신앙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세월을 아끼다'는 것은 시간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소중하게 여겨 아끼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하찮게 취급하여 아까워하지 않게 된다.

'세월을 아끼는 삶'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세월'로 번역된 헬라어는 '카이로스'다.
곧 질적인 시간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이다.
그러므로 세월을 아낀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아끼다'로 번역된 헬라어 '엑스아고라조'는 '속량하다' '구속하다'인데, 남에게 팔린 것을 도로 사 온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시간인 '카이로스'는 본래 우리의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창 1:27).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권을 대행하는, 하나님의 청지기들이다.
그런 인간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과 끊임없는 교제를 유지하여야 한다.
최초의 인간이었던 우리의 조상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그런 삶을 살았었다.
그렇게 살았던 그때에는 하나님의 '카이로스'가 더 이상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크로노스'의 그릇 속에 '카이로스'가 온전히 충족된 삶이었다.
그런데 사탄의 유혹에 빠져 아담이 범죄함으로, 복된 '카이로스'가 모두 상실되고 말았다.
인간은 '크로노스'의 그릇만 들고 사는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세월을 아끼라'는 명령과 함께 "때가 악하니라"가 뒤이어 언급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여기에서 '때'로 번역된 헬라어는 '헤메라이'인데, '날'(day)를 의미하는 '헤메라'의 복수형이다.
그런 점에서 '때'는 어원적으로 '날들'(days) 곧 '크로노스'의 시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악하다'는 것은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뜻이다.
악의 본질은 사탄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때가 악하다'는 것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시대가 온통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사탄은 우리의 '카이로스' 회복을 방해하려고 온갖 계략을 꾸미고 있다.
그것이 사탄의 우선적 과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기회를 번번이 놓치는 원인도 사탄의 적극적인 방해 공작 때문이다.

사탄이 하나님의 시간 '카이로스'를 전혀 건드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카이로스'는 사탄의 손길이 닿을 수 없는, 하나님의 절대 영역이다.
사탄은 단지 우리들이 그것을 다시 소유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을 뿐이다.
'카이로스'의 회복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실 가장 큰 복이며 희망이다.
우리를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카이로스'로, 지금 문 밖에 서서 우리들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계 3:20).







시간을 구속하라!

과거의 시간을 어떻게 구속하는가?
- 하나님의 은혜로 묻어버려라!

현재의 시간을 어떻게 구속하는가?
- 하나님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라!

미래의 시간을 어떻게 구속하는가?
- 두려움을 믿음으로 맡겨라!

프리카 남단에 가면 ‘스프링복(springbok)’이라는 영양이 있다.
이 양떼들은 무리가 커지면 이상한 집단행동을 한다.
조금이라도 앞서서 풀을 뜯으려고 서로 달리기 시작한다.
한번 뛰기 시작하면 수천마리 양떼들이 풀 뜯을 시간도 없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 뛰기만 한다.
그러다 해안가에 도달하면 갑자기 설 수가 없어 모두 바다로 뛰어든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 같다.

21세기는 ‘신자유주의(Neoliberalism)’ 시대이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는 정글의 법칙(The law of the jungle)을 넘어선다.
무한 경쟁이요 전 방위 경쟁이다.
이것은 결국 무한탐욕으로 이어진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아니 한국은 더 심한 것 같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최근에 ‘더 나은 삶(OECD Better Life)’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34개국 OECD회원국을 포함한 36개국 국민들이 살아가는 상태를 분야별로 평가한 것이다.
한국은 종합 27위에 머물렀다.
그 중에서도 근로시간과 여가 활동을 토대로 집계한 ‘일과 삶의 균형’ 분야에서는 최하위권인 33위였다.
주간 노동시간은 44.6 시간으로 터키를 빼고는 가장 길었다.
무슨 말인가?
그만큼 쉬지 않고 달린다는 것이다.

왜 이럴까?
비교의식 때문이다.
한국교회도 여기서 비껴갈 수는 없다.
대형교회를 바라보는 중소형교회의 시계(視界)는 제로이다.
앞이 보이질 않는다고 한다.
역시 비교의식이 문제다.
인생도, 사업도, 가정도, 자녀도 비교의식이 문제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도 비교의식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가? 심기일전(心機一轉) 해보지만 안 되면 분기탱천(憤氣撑天) 한다.

마음들이 바쁘다.
굳이 ‘느림의 미학(aesthetics of slowness)’을 말하지 않더라도 호흡을 가다듬을 때이다.
지나치게 분주하지 말자.
분주함의 끝은 허탈감이요 외로움이다.
그렇지 않아도 인생길은 외로운데….

팡세(Penses)를 남긴 파스칼은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거대한 빈 공간이 있다.
그 공간, 그 외로움은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다.”

“시간을 구속하라.”는 성경말씀에 눈을 돌려 볼 때가 됐다.
개역성경에는 “세월을 아끼라.(엡5:16)”고 되어 있지만,
영어성경(NIV)에는 “Redeeming the time,”이라고 되어있다.
“시간을 구속하라.”는 것이다.
구속(redemption)이란 ‘깨끗하게 씻는다.’는 뜻이다.
시간을 깨끗하게 씻는다는 게 무슨 말일까?
시간을 되찾으라는 것이다.

 

후회와 나태함과 분주함에 주어버린 시간들을 되찾아오라는 것이다. 시간에 쫓기지 말라는 것이다. 일단 시간에 쫓기면 시간이라는 놈이 ‘갑(甲)질’을 시작한다. 그러다 방향을 잃고 달리기 시작하면 시간이 수퍼 갑(甲)이 된다. 우리는 을(乙)이 되고…. 그 때부터 우리는 시간의 노예가 된다. 시간을 구속해야 한다. 낭비하는 시간을 되찾아야 한다.

 

스티브 맥퀸과 더스틴 호프만이 주연한 ‘빠삐용(Papilon)’이라는 영화가 있다. 주인공 앙리 빠삐용 샤리에르(Henri Papilon Charriere)는 아내를 죽였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무기수로 한평생 감옥에서 살아간다. 주인공 빠삐용은 자유를 찾아 끝없이 탈출을 시도한다. 그러던 어느 날 감방에서 꿈을 꾼다. 판사와 배심원들이 빠삐용에게 판결을 한다. “너는 유죄야!” 빠삐용은 반박한다. “아니야. 나는 죄가 없어!” 다시 판사가 말한다. “넌 유죄야. 너는 인생을 낭비했어.” 주인공이 소리친다. “맞아. 난 유죄야. 난 인생을 낭비했어.”

 

십계명 중의 8계명이 무엇인가? “너는 도둑질하지 마라.”는 것이다. 이 명령이 단순히 남의 물건을 훔치지 말라는 뜻만 있을까? 아니다. 4계명은 보다 폭넓은 의미를 담고 있다.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그 시간만큼 부모님의 세월을 도둑질한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하나님의 시간을 도둑질한 것이다. 사명 운운하면서, 상급 운운하면서 동분서주(東奔西走) 하지말자.

 

마태복음 20장에 포도원 품꾼 비유가 나온다. 아침 일찍 먼저 고용된 자도 세 시쯤에 고용된 자도 여섯 시와 아홉 시쯤에 고용된 자도 그리고 열한 시쯤에 고용된 자도 주인에게서 모두 한 데나리온씩 같은 품삯을 받는다. 남과 비교하지 말고 내게 주어진 일만 신실하게 하자.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정당한 보상을 주신다.

 

성경에는 두 가지 상(賞)이 나온다. 하나는 경쟁에서 이긴 자에게 주는 상급(고전9:24)이 있다. 헬라어로는 ‘브라베이온(brabeion)’, 영어로는 ‘prize’라고 한다. 또 하나는 그 행위에 따라 주는 공정한 보상(고전3:8)이 있다. 헬라어로는 ‘미스도스(misthos)’, 영어로는 ‘reward’이다. 우리가 하늘에서 받는 상은 경쟁에 이겨서 받는 상(‘브라베이온’)이 아니라 섬김에 따라 공정하게 받는 보상(‘미스도스’)이다.

비교하고 시간에 쫓기고 쓸데없는 것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 시간을 구속하며 살자.

 

시간을 구속하며 사는 최고의 방법은 무엇인가? 흘러가는 시간을 되찾는 최선의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시간만이 가장 가치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이 땅의 시간을 영원의 시간으로 만든다.

 

런던 타임즈에서 큰 상금을 걸고 대대적으로 광고를 냈다. “영국 최남단에서 런던까지 가장 빠르게 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일등 한 답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가는 것이다.” 에녹이 한 일은 삼백년 동안 아들 딸 낳고 하나님과 동행한 것 밖에 없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도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다.

 

하나님은 오늘도 바쁘고 분주한 우리들을 부르신다. 그리고 함께 가자고 하신다. 동행하자고 하신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떠나가자. 보라, 겨울이 지나고 비가 그치고 사라졌도다. 땅에는 꽃들이 피고 새들이 노래하는 때가 이르러 멧비둘기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무화과나무는 푸른 무화과를 내며 연한 포도가 달린 포도나무는 좋은 향기를 풍기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떠나가자.”(아2:10~13)

 

무한 경쟁을 넘어서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데 있다. 분주한 것을 넘어서는 것도, 비교의식을 넘어서는 것도, 외로움을 넘어서는 것도, 하나님과 동행하는데 있다. 남은 시간, 하나님 그 분과 동행하면 좋겠다. 그것만이 시간을 구속하는 유일무이한 길인 것을 어찌 하리.



세월을 아끼라(에베소서 5:16, 골로새서 4:5)

웨슬리는 자신의 영적 삶을 위해서 매일 밤 기도 시간에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며 ‘자기 성찰’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1738년 회심 후 그의 인생을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맡기고 주님의 은혜에 의지하며 “완전한 성결”로 나아가는 목표를 지속하기 위해 밤 기도와 성찰과 결단의 시간을 갖습니다.

자기 성찰의 질문

질문 :   나는 하나님보다 여자나 세상 친구를 더 사랑하는가?
결심 :   나는 기필코 기도생활을 방해하는 잠과 세상 친구를 버린다.

질문 :   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게 하였는가?
결심 :   나는 경건한 마음이 아니면 하나님의 이름을 결코 부르지 않는다. 

질문 :  나에게 경건치 않은 요소가 있는가?
결심 :   나는 기도와 겸손으로 살아 가리라.

질문 :  나는 교만한가?
결심 :  나는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성경에 복종하리라.

질문 :   나는 게으른가?
결심 :   하루에 6시간은 기도와 연구에 사용한다.

질문 :   나는 잠을 너무 많이 자는가?
결심 :   나는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난다. 

질문:   나는 불결한 생각을 하는가?
결심 :   나는 전지하신 하나님 앞에 마음을 지킨다.

질문 :   나는 거짓말을 하는가?
결심 :   나는 하루에 두 번 마음을 살피고 진실하기로 다짐한다.

질문 :   없고(나는 하나님께 기도한 결심을 지키는가?)
결심 :   나는 매일 한 번씩 지난 주간의 결심을 잘 지켰는지 조사한다.

웨슬리는 자기 성찰의 질문과 답을 통해서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드리는 방법과 규칙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천국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웨슬리의 9가지 자기성찰을 위한 영적 진단 질문과 답은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는데 좋은 방법입니다.


1. 아침 기도에 대해서

기쁜 마음으로 정신 차리고 깨어 기도하였나?
새벽 기도회 또는 아침 개인기도 시간에 드린 기도를 다시 생각해 보자(보통 웨슬리는 기도문을 준비해서 시편 말씀과 함께 읽으며 기도하였고, 하루 종일 시간이 날 때마다 반복하였다).

2.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오늘 하루 일을 다시 생각해 보자. 어떤 일을 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영광스러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일했나?
직접이든 간접이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은 없었는지?
일을 시작하기 전에 조금이라도 하나님을 생각하였는지?

3. 오늘 할 일에 대해서

오늘 실천하며 훈련할 특별한 덕목과 오늘 해야 할 일을 미리 점검한 다음에 아침 일과를 시작했나?

4. 착한 일에 대해서

오늘 내가 할 수 있었던 착한 일을 생각해보자.
열심히 최선을 다했는지?
적극적으로 하였는지?

5. 배려와 사랑에 대해서

남을 도운 일을 생각해보자. 실제 필요보다 더 많이 해서 불편을 끼친 것은 아닌지?

6. 만남에 대해서

오늘 만남을 생각해보자.
누구를 만나기 전에 “이 만남으로 어떻게 서로 성장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는지?

7. 잘못에 대해서

오늘 남의 실수나 잘못을 말한 적이 있는지?
그렇게 남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닌데 이야기했는지?

8. 말과 행동에 대해서

불필요한 말이나 행동으로 남을 슬프게 한 적이 있는지?

9. 성장에 대해서

어떤 일이든 행동하기 전에 생각이란 것을 하였는가?
오늘 실천하기로 결심했던 덕목을 갖추는 데 나의 행동이 어떤 도움이 될지 생각해 보았는가?

자신을 점검하는 질문들

하루를 산다는 것이 기쁨이 되도록 기도하였는가?
한 시간마다 나 자신의 말과 행동을 돌아보며 감사하였는가?
웨슬리를 따라 하루를 살아보면, 질문에 질문이 꼬리를 잇는다.
자기 자신에게 계속해서 묻고 대답하기를 반복하게 된다.
그렇게 한두 달 계속하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조금씩 더 알게 되고, 조금씩 더 구체적인 기도를 하게 된다.

웨슬리는 자신의 경건 생활을 위해서 매일 점검할 질문 목록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질문 목록을 매년 조금씩 고쳐 쓰면서 다듬었다.
거기에 더해서 아침에 3가지 질문, 저녁에 9가지 질문, 또한 주일,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에 서로 다른 주제와 질문 목록을 만들어 놓고 기도하였다.

크리스천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을 매일 훈련하고 실천하였고, 날마다 저녁에는 하루 생활을 돌아보며 다시 질문하고 점검하였다.

자기 관리와 기도

영어 문법책, 성경 그리스어 문법책, 성경 히브리어 문법책, 라틴어 문법책, 불어 문법책, 논리학 교재 등을 저술한 웨슬리는 언어 사용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하지만, 그가 집중한 것은 누구나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일상생활 언어였다.
쉬운 말로 바꾸어 자신에게 질문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언어 사용에 점점 더 신중하게 된다.

웨슬리는 자신의 말과 어투와 어법을 사용하는 일에도 늘 조심스럽게 훈련하였고, 일상생활과 관련해서 언어 사용에 관한 논문을 작성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사용하는 어려운 언어를 사용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어려운 언어를 쉽게 풀어서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사용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옥스퍼드 대학의 종신 교수이며 목사였던 웨슬리는 쉬운 말을 사용하려고 노력하였다. 어려운 내용은 쉬운 말로 풀어서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값싼 책으로 출판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그 결과 200여 권의 저작과 기독교 문고가 나왔다. 그의 글에서는 단어 하나마다 그런 배려가 느껴진다.

그가 자신에게 던졌던 수많은 질문들은 그렇게 치열한 자기 관리와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나왔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날마다 평생을 반복하며 기도하는 웨슬리의 질문은 나이 89세(만87세)까지 계속되었다. 80세가 되어서는 “올해가 내 생의 최고의 해가 되기를” 기도하는 웨슬리를 만날 수 있다. 젊어서부터 노년에 이르러 마지막 숨을 거두기까지 계속하였던 기도와 질문이 도전이 되는 까닭이다.

웨슬리 건강의 비결

자신의 건강 비결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60년 이상 꾸준히 새벽에 기도하는 생활이라고 고백하기도 하였다. 그의 기도 생활은 어려서부터 시작되었다. 어머니 수산나 웨슬리 편지에는 말을 시작하는 어린 나이부터 주기도문을 암기해서 기도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계속해서 다양한 기도문을 암기하도록 가르쳤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실제로 웨슬리의 일기를 보면 여러 가지 기도문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그가 암기하고 있는 기도문을 반복해서 글로 적어 보는 훈련이기도 하였다. 짧은 부호와 약어를 사용해서 적어가는 방법은 필기 시간을 단축하는 효과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바쁜 생활 속에서, 분초를 다투며 기도문을 기록하는 웨슬리의 모습에서 그가 얼마나 기도문을 암기하려고 노력했고, 얼마나 진지하게 기도하려고 노력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기도와 질문이 쉼 없이 반복되면서 자기 관리로 이어졌고, 규칙적이고 끊임없는 그의 기도가 평생 건강을 지켜 주었다는 것에 공감이 되는 부분이다.

풀어 번역한 웨슬리의 질문들

웨슬리의 질문을 번역하면서 그의 설교문을 다시 살펴볼 수 있었다.
특히, “선한 청지기”는 두 번째 질문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질문하는 웨슬리의 마음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설교이다.

그의 질문이 설교와 연결되어 있고, 크리스천의 덕목과도 연결되어 깊은 묵상으로 인도한다는 사실은 많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성경 말씀을 읽을 때도, 편지를 쓸 때도, 일기를 쓸 때도, 같은 주제가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웨슬리의 질문이 더 깊은 기도와 실천으로 안내하고 있다.


요한 웨슬리의 자기 점검을 위한 질문

■ 매일 아침 자신에게 하는 질문

1. 나는 오늘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나의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출발하고 있는가?
2. 어제 이후 하나님 앞에서 나의 행동을 살펴보고 반성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는가?
3. 오늘 하나님을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선한 일을 다 하며,
오늘을 위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최선을 다하며 충성할 결심을 하고 하루를 시작하고 있는가?

■ 주일 저녁 개인 경건의 시간에 우선 다음의 질문을 자신에게 묻고 반성한 후에 개인 기도를 시작한다.

1. 나는 아침에 드리는 개인기도, 함께 드리는 공동기도에 어느 정도의 열정을 가지고 참여 했는가?
2.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지 않거나 하나님의 영광과는 관계없이 무슨 일을 한 것은 없는지?
3. 아침에 하려고 생각했던 덕목은 행했었는지, 무슨 계획한 일을 하지 않은 것은 없는지 생각해본다.
4. 오늘 하루 내가 할 수 있었던 선한 일에 최선을 다 했는지?
5. 다른 이에게 봉사하고 사랑을 나누어주는 일보다 자신을 더 사랑했는지?
6. 내가 방문을 받고 다른 이를 방문하기 전에 어떻게 사랑을 주고받는 것을 더 발전시킬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았는가?
7. 다른 사람의 실수를 상대방에게 꼭 도움이 될 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불필요하게 지적한 적이 있는지?
8. 불필요하게 다른 사람을 말로나 행동으로 슬프게 한 일은 없었는지?
9. 내가 오늘 하루 행한 모든 행동이 덕을 쌓았으며, 더욱 덕스러운 삶을 향한 발전적인 삶을 살았는가?

■ 하나님 사랑에 관한 질문(주일 저녁)

1. 오늘 하루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자비를 묵상하고 생각하는 경건한 시간을 가졌는지?
2. 오늘 하루를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하늘나라의 쉼과 거룩함을 맛보는 하루가 되도록 힘썼는지?
3. 기도와 묵상, 그리고 말씀을 읽는데 사용하지 않은 시간은 꼭 필요한 일과 남을 돕는 일에 사용했는지?

■ 이웃 사랑에 관한 질문(월요일 저녁)

1. 이웃을 기쁘게 하고 그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어진 일들이 있었는지 양심적으로 자신에게 질문해 보자.
2. 나는 이웃과 함께 즐거워하고 이웃과 함께 슬퍼하는 삶을 살았는가?
3. 나는 이웃의 부족함을 보고 분노하기보다는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4. 좋은 대책 없는 반대, 혹은 상대방을 설득시킬 가능성도 없으면서 나는 다른 사람의 의견에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지 않았는가?
5.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상대방에게 항상 최종적으로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는가?

■ 겸손에 관한 질문(화요일 저녁)

1. 나의 모든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을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원칙에 기본을 두고 살고 있는가?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나의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나의 힘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다.”)
2. 오늘 하루, 나의 부족함과 어리석음, 그리고 나의 죄 됨을 생각할 시간을 잠시라도 따로 가졌는가?
3.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하신 일을 조금이라도 나의 공로로 돌린 적이 있는가?
4. 사람들로부터 받을 칭찬을 염두해 두고 무슨 말을 하거나 일을 한 적이 있는가?
5. 나는 사람의 칭찬을 기대하고 갈망하고 있는가?
6. 사람들로부터 받는 칭찬을 즐겼는가?
7.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광을 위해 아무 거리낌 없이 사람들 앞에서 내 자신을 칭찬하고, 상대방 면전에 서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 그 사람을 칭찬하였는가?
8. 나에게 해 준 다른 사람의 충고를 무시한 것이 있는가?
9. 자신이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 때,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서슴없이 말을 했는가?
10. 나의 책임과 의무를 하는 동안 다른 사람의 냉담과 조소를 받았을 때 온유함과 겸손함으로 받았는가?
11.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신의 의를 드러내며 살았는지?
12. 다른 사람에게 비난을 받았을 때
  첫째로, 내 자신이 실족하거나 용기를 잃지 않도록
  둘째로, 상대방을 원망하지 않기 위해
  셋째로, 이런 일을 통하여 나의 교만함이 치유되고 더 겸손에 이르기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했는가?
13. 선한 일이나 선한 의도 없이 화를 낸 적이 있는가? 

■ 금욕에 관한 질문(수요일 저녁)

1. 단순히 즐기는 목적만으로 어떤 일을 한 적이 있는가?
2. 나의 감정이 나를 유혹할 때 감정에 치우쳐 생활하였는가? 혹은 감정을 극복하고 오히려 그 반대로 행동할 수 있었는가?
3.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제정된 은혜와 금욕의 수단들이 불편하도라도 그것을 피하지 않고 자신의 경건의 연습을 위하여 사용하였는가?
4. 자기 자신을 부정(Self Denial) 경건의 연습을 피하기 위해서 특별한 핑계를 만들어 낸 적이 있는가?
5. 나 자신이 너무 부족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는 너무나 가치가 없는 존재라고 생각해 보았는가?
6.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 아닌 한에서 나의 의사를 반대하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따라 본 적이 있는가?
7.  그리스도의 고난과 나의 죄를 보다 실감 있게 묵상하고 느끼며 하나님의 심판을 경시하지 않으며 나의 죄 된 습관을 어떻게 고칠 수 있는가를 생각할 시간을 가졌는가?

■ 자기 부정과 온유함에 관한 질문(목요일 저녁)

1.  하나님의 뜻만을 따라 살려고 노력했는가?
2.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모든 지혜의 근본이시며 선하신 하나님께서나를 위해서 섭리하신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사했는가?
3. 하나님이 나에게 지시하신 일들을 마친 후에, 미래에 관한 한 모든 일을 완전히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맡겼는가?
하나님이 어 떤 길로 인도하시든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노력했는가?
4. 이미 나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으로 나의 몸, 영혼, 친구, 명예, 그리고 재산을 드린 내가 다시 이 모든 것들의 주인인 것 처럼 생각하고 행도하고 있는가? 
5. 나의 말이나 행동에 있어서 언제나 남을 즐겁게 하고, 온유하며, 예의 바르도록 노력하고 있는가?
6.  나의 화난 모습, 친절하지 않은 말과 행동을 하고 있는가? 특히 하나님의 세계에 관해 말을 할 때 그렇게 한 적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 금욕에 관한 질문(금요일 저녁)

1.  단순히 즐기는 목적만으로 어떤 일을 한 적이 있는가?
2.  나의 감정이 나를 유혹할 때 감정에 치우쳐 생활하였는가? 혹은 감정을 극복하고 오히려 그 반대로 행도할 수 있었는가?
3.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제정된 은혜와 금욕의 수단들이 불편하도라도 그것을 피하지 않고 자신의 경건의 연습을 위하여 사용하였는가?
4. 자기 자신을 부정(Self Denial) 경건의 연습을 피하기 위해서 특별한 핑계를 만들어 낸 적이 있는가?
5.  나 자신이 너무 부족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는 너무나 가치가 없는 존재라고 생각해 보았는가?
6.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 아닌 한에서 나의 의사를 반대하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따라 본 적이 있는가?
7.  그리스도의 고난과 나의 죄를 보다 실감 있게 묵상하고 느끼며 하나님의 심판을 경시하지 않으며 나의 죄 된 습관을 어떻게 고칠 수 있는가를 생각할 시간을 가졌는가?

■ 감사에 관한 질문(토요일 저녁)

1. 지난 한 주간동안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축복에 대해 감사할 시간을 가졌는가?
2.  하나님의 축복에 보다 민감하게 느끼며 감사하기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축복을 신중하게 그리고 의도적으로 생각하고 감 사하는 시간을 가졌는가?
3.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더 크신 사랑에 빚진 자로서 더 큰 의무가 있음을 깨닫고좀 더 거룩한 삶으로 부 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가?

■ 웨슬리의 경건 생활 패턴(원칙)

1. 정해진 시간에 잠자리에 들고 일어나기
2.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우선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그분께 하루의 첫 열매를 드릴 것
3.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기도하기
4. 옷을 입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 위한 하루를 30분 정도 새벽기도를 함으로써 시작한다.
5. 옷 입는 데 시간을 쓰지 말고 옷은 깨끗하고 정숙하게 입을 것
6.  아침에는 영성에 도움이 되는 책을 읽고 그 읽은 내용을 묵상하고 하루 종일 되새기며 생활한다.
7.  성경은 매일 정기적으로 순서대로 읽고 묵상한다.
8. 오후에는 일하거나 방문하는데 시간을 쓰며 잠시라도 기도하고 말씀의 묵상을 다시 회상하는 시간을 갖는다.
9. 밤에는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 지며 참회의 시간을 갖는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는 경건한 생활을 하기 위해 매일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했습니다.

1. 너는 항상 기도하는가?
2. 너는 매순간마다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는가?
3. 너는 모든 경우에 감사하는가? 범사에 감사하는가?
4. 너는 욕심내는 것이 없는가?
5. 너는 두려워하는 일이 없는가?
6. 너는 네 중심에서 계속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가?
7. 무슨 말이나 일을 하든지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가?



위의 것을 찾으라

왜 위의 것을 찾아야 하는가?
그곳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밖에서만 찾고 만나려고 하였다.
안으로 들어가서 찾으려 하지 않았다.

생물학자 배스티언(S. L. Bastian)은 작은 나뭇가지나 덤불 속에 집을 짓고 사는 거미류를 관찰하면서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 거미는 나뭇가지나 덤불에 걸쳐 있는 울타리 속에 새끼들을 부화하는데, 만일 그 곳에 조금이라도 위험한 일이 발생해서 새끼들이 놀라게 되면 어느 순간 어미 거미가 쏜살같이 달려와서 새끼들을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미 거미가 어떻게 새끼들의 동요를 금방 알아채는지 주의를 기울여 살펴 본 결과, 이 거미는 아주 독특한 방법으로 새끼들의 잠재적 위험에 대비해서 경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즉 각 새끼 거미에게는 가는 비단줄 같은 것이 붙어 있고 이것이 어미의 몸에 연결되어 있는데, 새끼들이 적들의 위협을 받아 몸을 심하게 움직이면 그들의 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므로 어미가 즉시로 새끼들을 보호하러 달려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호세아서 11장 4절에서 하나님은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미 거미가 명주처럼 보드라운 실로 자기 새끼들을 자기 곁에 두듯이 우리를 밀접하게 이끄십니다.


하늘을 보지 말라!
Dont look up!


‘나는 인간들에게 무관심이라는 묘약을 쓰겠다.
무관심 한 인간들이란 결국 목자 없는 양이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4무(無)병’
1. 무목적
2. 무감동
3. 무책임
4. 무관심

제일 악한 것은 무관심입니다.
무관심 중에 제일 악한 무관심은 영원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돈 룩업(Don't Look Up)"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실제 혜성 충돌이 임박했음에도 경고를 귀담아듣지 않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대통령, 지구종말보다 돈이 더 중요한 사업가,
그리고 음모론에 휩싸여 진실을 보지 못하는 대중들의 모습이 영화에 나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학계, 언론, 미디어, SNS, 테크기업 등 모두를 돌아보게 하는 영화입니다.

"돈 룩업(Dont look up)"이란 "위를 보지마! 혜성이 오는걸 보지마! 진실을 보지 마라!"는 의미입니다.
그 반대는 "저스트 룩업(Just look up)" "하늘을 올려보라!" 거기에 진실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의 삶은 죽음이 있고 결산이 있고, 죽은 후 천국과 지옥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악한 마귀는 하늘을 보지 말고, 오직 땅만 바라보는 넝마 인생을 살라고 합니다.
카르페 디엠(현실을 즐겨라)은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 속에서 나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누가복음 21:34)

 ♦ 6월 7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골로새서 3:1∼25
♦ 묵상을 위한 주제 : 위엣 것을 찾으라(1절)
♦ 성구 :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右便)에 앉아 계시느니라.
Since, then, you have been raised with Christ, set your hearts on things above, where Christ is seated at the right hand of God.    

사도 바울은 성도들의 삶을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라고 축복합니다(빌 3:14).

성도들이 왜 위엣 것을 찾아야 할까요?
죄에 대하여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때 죽음이란 죄에 대한 죽음입니다(롬 6:6, 11)
죽음이란 율법에 대한 죽음입니다(롬 7:4)
죽음이란 세상에 대하여 죽음입니다(갈 6:14)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예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위의 것을 찾는다는 것은 인간적인 가치가 아닌 하늘의 가치와 영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가치는 땅의 것을 찾지 않는 것입니다.
땅의 가치는 영원하지 않지만 위의 것은 영원합니다.
비록 우리들이 땅 위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들의 가치는 땅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옛 생활을 버려야 합니다.

오늘은 새 날을 위한 새 삶의 기회를 약속받은 날입니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이 새 날에는 새 몸과 새 생각과 새로운 생활을 하면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은총의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주님 고대가”를 소개합니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고적하고 쓸쓸한 빈 들판에서
희미한 등불만 밝히어 놓고
오실 줄만 고대하고 기다리오니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신부되는 교회가 흰 옷을 입고
기름준비 다 해 놓고 기다리오니
도적같이 오시마고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천년을 하루같이 기다린 주님
내 영혼 당하는 것 볼 수 없어서
이 시간도 기다리고 계신 내 주님
오 주여 이 시간에 오시옵소서

♪ 찬양 /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겡글리뉴로파디(ganglineuropathy)

-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치명적인 무서운 병

더욱 치명적이고 위험한 질병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에  대한 무감각증'이라는 병입니다.
일찍이 사도 바울은 이 병에 걸린 자들을  가리켜 '양심에 화인 맞은 자들'이라고 진단하였다(딤전 4:2)


터어키에 선교하던 선교사 한 분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하려했습니다. 
"나는 여행하고 있습니다. 
길을 가는데 두 갈래의 길을 만났습니다. 
어느 길이 내가 목적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길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누군가에게 길을 물으려고 하다가  두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이요 또 한 사람은 죽어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누구에게 길을 물어야 하겠습니까?
산 사람입니까?
죽은 사람입니까? "
그러자 그들은 말하기를 "그야 물론 산 사람에게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찌 내가 살아 계신 예수님께 찾아가지 않고 죽어버린 마호멧을 찾아 가겠습니까?"

 ♦ 6월 4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골로새서 1:1∼29
♦ 묵상을 위한 주제 : 복음의 소망(23절)
♦ 성구 : 만일(萬一) 너희가 믿음에 거(居)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바 복음(福音)의 소망(所望)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福音)은 천하 만민(天下 萬民)에게 전파(傳播)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福音)의 일군이 되었노라.

바울의 옥중서신은 “에베소서”는 교회론, “빌립보서”는 기쁨의 서신, “골로새서”는 그리스도론에 관한 말씀입니다.

오늘 묵상의 주제는 “복음의 소망”입니다.
골로새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영광과 위엄”으로 소개됩니다.

복음의 근거는 구속 곧 죄 사함입니다(14절)

복음의 소망은 예수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18절)

복음의 능력은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를 변화시켜 하나님과 화목하여 함께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22절)

복음의 능력은 어느 날 내 안에서 시작된 구원의 역사는 마침내 나를 변화시켜, 주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나도 거룩한 자로, 그가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것처럼 그분을 닮아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 주 앞에 온전히 세워 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주님 앞에서 나를 온전하게 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는 중보 기도(3절)
둘째는 복음만을 들어라(5절)
셋째는 들은 것을 깨달으라(6절)
넷째는 하나님을 아는 일에 힘쓰라(10절)
다섯째는 서로 화목하라(20절)
여섯째는 힘을 다하여 수고하라(29절)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오늘도 주 안에서 복음의 열매 맺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주 안에 있는 나에게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기뻐하는 순서 : JOY

J - Jesus(예수님)
O - Others(다른 사람들)
Y - Yourself(당신 자신)



항상 기뻐하라(always rejoice)

기독교를 기쁨의 종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진실한 믿음은 어떤 환경에서든지 기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환경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환경을 다스리기 때문입니다.

항상 기뻐하려면 좋은 성품을 유지하라!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
따라서 좋은 열매를 얻으려면 좋은 나무를 심고 가꾸어야 한다.

나무를 사람으로 비유한다면 좋은 나무는 좋은 사람이다.
좋은 사람은 좋은 열매를 맺지만 나쁜 사람은 나쁜 열매를 맺을 것이다.

남편을 일찍 잃고 어렵게 딸을 키우며 산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유일한 어머니의 희망이었던 이 아이가 이제는 어엿한 교수가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을 아는 이 딸은 어머니의 은혜에 보답하고 싶었고, 어느 날 어머니에게 묻습니다.
“엄마! 소원이 있으면 말해 보세요. 제가 들어줄게요.”
그러자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었던 어머니는 딸에게 교회에 가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합니다.
딸은 기꺼이 어머니와 함께 교회에 갔습니다.
그런데 딸은 교회에 간 첫날 좋지 못한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서로 험담하는 여자들, 불의한 청탁을 하는 장로님, 식당에서 서로 먹겠다고 다투는 사람들 등등.
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딸은 엄마에게 말합니다.
“엄마! 나 다음부터 교회에 나가지 않을래.”
그러면서 자신이 교회에서 보았던 많은 일을 조목조목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엄마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딸아! 엄마는 수십 년 교회를 다니면서 예수님 얼굴 밖에는 보지 않았는데, 너는 하루 동안에 참 많은 것을 보았구나.”

성숙한 성품은 좋은 것만 보기 때문에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미성숙한 성품은 나쁜 것만 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모든 것이 불평과 불만이 될 것입니다.
내가 보는 것이 나로 하여금 좋은 성품으로 만들기도 하고 나쁜 성품이 되기도 합니다.

엄청난 기쁨

어느 날 한 부자 장로님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목사님, 우리 교회 여집사님 한 분이 혼자 살면서 어린아이 다섯을 키우니라 무척 어렵게 삽니다. 남의 집 빨래를 하는 등 고생이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분이 주일날이 되면 꼭꼭 5센트의 헌금을 합니다. 큰 액수는 아니겠지만 그 여집사님한테는 적지 않은 액수입니다."

장로님은 매주일 2불씩 헌금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5센트의 20배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습니다.
장로님의 권면인즉 그 집사님의 몫까지 자기가 대신할 테니 그 집사님을 불러서 헌금하지 말라고 애기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이 그 권면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그 집사님을 불러 "장로님이 당신의 사는 것이 너무 어려운 줄 알고 매주 헌금하는 것을 대신 내주겠다고 하니 다음 주일부터는 헌금 안하셔도 괜찮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이게 웬 일입니까? 여집사님은 앉은 자리에서 목을 놓아 우는 것이었습니다."
"왜 우십니까?" 하고 목사님이 묻자 여집사님은 대답했습니다.
"제가 비록 남의 집 빨래를 해가며 고생스럽게 살지만 하나님께 5센트씩 바칠 때에는 더할 수 없이 기쁘답니다. 그런데 그 기쁨을 왜 빼앗으려고 하십니까?"

결국 장로님도, 목사님도 회개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친다고 할 때에 바치는 일 자체가 엄청난 기쁨입니다.
이것을 바침으로써 복받고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행이나 헌금은 그행위 자체에서 기쁨과 감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서양속담에 ‘웃음은 내면의 조깅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옛 어른들이 믿었던 웃음의 미덕과 그 위상은 거의 불로장생의 명약쯤으로 취급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아무래도 웃음은 즐거운 마음에서 비롯될 진데, 마음의 힘과 기(氣)의 흐름, 그 불가시한 세계의 초월적 힘을 동경했던 이들로선 즐거운 마음이 곧 건강한 몸을 만든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리라.

의학적으로 입증된 웃음의 효과

스탠퍼드 대학의 윌리엄 프라이 박사(William Fry) 는 웃음의 효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이 마음의 기쁨을 가지고 한번 크게 웃을 때면 평상시 움직이지 않던 근육 중 230개 이상이 움직인다. 이로 인해 혈액순환이 활발해져 산소와 영양분이 피부 곳곳에 전달돼 피부노화 방지에 효과가 있다.

웃음을 이용한 의학적 치료의 권위자로 통한다.
그에 따르면 15초 동안 손뼉을 치며 크게 웃으면 100m를 전력 질주한 운동 효과와 맞먹는다고 한다.
또 크게 한번 웃으면 윗몸 일으키기를 25번 하는 효과와 3분 동안 노를 힘껏 젓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또한, 웃음은 순환을 촉진시키고, 근육을 자극하며, 폐와 호흡기 계통을 강화시키는 한편, 엔돌핀을 촉진시킴으로서 에어로빅 운동에 버금가는 효과를 가져온다고 한다.

그 외의 다른 많은 연구에서, 웃음은 통증을 완화시키는 효과를 발생하며, 하루15초 더 웃는 사람은 이틀을 더 살게 된다고 하고, 또한 면역계 세포의 증식을 도와 면역력을 높인다고 밝히고 있다.

사람이 1분 동안 마음껏 웃으면 10분 동안 에어로빅, 조깅, 자전거를 탈 때 일어나는 물리적, 화학적인 긍정적 변화를 몸 안에 일으키게 된다.


♦ 6월 3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빌립보서 4:1∼23
♦ 묵상을 위한 주제 : 항상 기뻐하라(4절)
♦ 성구 : 주(主) 안에서 항상(恒常)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Rejoice in the Lord always. I will say it again: Rejoice!    

“항상 기뻐하라”는 것은 기뻐할 조건과 환경 가운데서 유지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항상 기뻐하려면 항상 주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왜냐하면 옥중서신(獄中書信)으로 분류되는 에베소서와 빌립보서와 골로새서 그리고 빌레몬서는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기록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유전무죄(有錢無罪)와 무전유죄(無錢有罪)라는 말이 유행하는 어긋난 세상은 화인 맞은 양심의 사람들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도저히 기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지배를 받을 때는 사도 바울과 같이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 있을지라도 기뻐할 수 있는 능력이 그 안에서 불 일어나듯 뜨겁게 타 오를 것입니다.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빌 3:1)

항상 기뻐할 수 있는 비결은 “어떤 환경”이 아니라 “주 안에서” 라고 합니다.

‘주 안에서’는 어떤 환경이든지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3절)

무엇에든지 참되며, 경건하며, 옳으며, 정결하며, 사랑할만하며, 칭찬할만하기 때문입니다(8절)

자족할 수 있는 믿음 때문입니다(11절)
자족(아우카르케스. αὐτάρκης)이란 채워지지 않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아는 것입니다.
자족이란 "만족한" "자기 만족의" 라는 뜻입니다.

만족(아우타르케이아. αὐτάρκεια)이란 내가 원하는 것으로 채워졌을 때 기뻐하는 것입니다.
만족이란 "충분함"이란 뜻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무장하는 자족하는 신앙으로 항상 기뻐하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내게로 와서 쉬어라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부름의 상(the goal to win the prize)
the prize of the upward call

1. 삼가라(2절)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Beware of the dogs, beware of the evil workers, beware of the false circumcision;

/ 진리를 거역하는 존재를 가리키는 상징적 표현
예수님께서는 1. 진리를 거역하는 자들(마 7:6)
                      2. 이방인(마 15:26-27)
본문에서는 성도들을 괴롭히는 유대주의 자들(Michal)




손할례당 / 인간의 의식적 노력을 강조하는 사람들
반대 : 할례당 1. 성령으로 봉사
                      2.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
                      3.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자


어느 초등학교 운동회 때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유치부 어린이들의 달리기 경주가 시작되어 경주에 참여하는 어린이들의 어머님들은 자기 아이들을 응원하려고 열심히 손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출발선에 여러 명의 아이들이 일열로 달리기 준비를 하고 있었고 출발을 알리는 총소리가 울리자 모든 아이들은 앞으로 달리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갑자기 자기 엄마가 손을 마구 흔들자 엄마를 향하여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운동장에 모여 있던 학생들과 학부형들은 모두 웃고 말았습니다.
어린이는 엄마가 빨리 달리라고 손짓하는 것을 마치 자기를 부르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엄마가 있는 곳으로 달렸던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목표가 잘못 되었습니다.

14절 /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13절 :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 6월 2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빌립보서 3:1∼21
♦ 묵상을 위한 주제 : 부름의 상(14절)
♦ 성구 : 푯대를 향(向)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賞)을 위(爲)하여 좇아가노라.
I press on toward the goal to win the prize for which God has called me heavenward in Christ Jesus.    

그리스도인들이 달려야 할 목표는 “부름의 상” 입니다.

우리들을 하나님 자녀 삼아주신 것은 부르심의 뜻인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후에 “태어난 지 팔 일만에 할례 받은 것, 베냐민 지파, 바리새인, 가말리엘 문하생 이라는 학자” 라는 신분을 버렸습니다.

눈에 보이는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상을 위해 달려가겠다고 고백합니다.

성취 지향적인 삶이 아니라 가치 중심적인 삶을 결단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부름의 상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소개합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베드로전서 5:10)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브리서 3:1)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 8:28)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린도전서 9:24)

부름의 상을 위하여 믿음의 사람이 갖춰야 할 신앙적인 자세를 본문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라(3절)
둘째,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하라(3절)
셋째, 육체를 신뢰하지 말라(3절)
넷째,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을 갖추라(8절)
다섯째,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소속 의식을 잊지 말라(20절)

오늘도 부름의 상을 위하여 신앙의 진보를 완성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주를 앙모하는 자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그리스도 예수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지만 그분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셨다.
신격 외에는 다른 존재 방식을 갖지 않았던, 아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존귀한 그리스도께서 한갓 피조물의 존재 방식을 취하셨다.
신적 존재 방식피조물의 존재 방식으로 세상에 오셨다.

그것도 죄로 인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기꺼이 그러셨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라는 예수님의 본래 상태가 어떠한 것인지,
그분이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관계에서 누리다가 포기한 특권이 무엇이었는지
그리스도의 자기 낮춤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를 깨닫게 한다.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 역시 형언할 수 없는 놀라운 신비다.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자신을 비우셨는지’보다 ‘자기를 비우신 그리스도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찾아야 합니다.

네 가지 변화

첫째, 그리스도는 본래 율법의 제정자요 수여자였지만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율법의 판단을 받는 자리로 가셨다.
둘째, 그분은 스스로 모든 것을 충족하시는 분이었으나 우리에게 참된 부요를 주기 위해 가난하게 되셨다.
셋째, 성부 하나님과 누리던 영화를 포기하셨다.
넷째, 독자적으로 행할 권리마저 포기하셨다.
고난으로 순종을 배우며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만 행하셨다.

자신을 한없이 낮춰 죽기까지 복종한 그리스도에게 하나님은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빌 2:9-11).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에게 큰 위로와 소망이 된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로서 그분을 본받아 그분의 마음을 품고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행하실지 시사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다가 설혹 고난을 당하더라도 이처럼 ‘높여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인내할 수 있다.
또한 모든 무릎, 모든 입이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며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 돌리게 될 것이라는, 인류 역사의 마지막 결론을 알고 있기에 어떤 상황에도 담대할 수 있다.

‘나와 너’는 모두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걸고 섬겨주신 자들이다.
이 사실을 떠올린다면 우리는 공동체의 어느 지체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를 소중히 여기며 섬기게 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는 말씀에 반응하며 진정한 복음을 살아내는 삶의 주인공으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합니다.

(예화) 박종홍교수
우리나라 철학자 가운데 한국의 소크라테스라고 하는 박종흥 교수는 서울대 교수로 계시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철학적 자문을 해 주시던 박학다식했던 분입니다.
특히 진리를 사랑하고, 인격적으로도 훌륭해서 많은 사람들이 존경했습니다.
이분이 국민교육헌장을 만드셨습니다.
1976년 세상을 떠나시게 되었는데, 임종이 가까워졌습니다.
하루는 제자가 찾아와 위로 합니다.

“선생님, 극락세계에서 영생하셔야지요.”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아니야, 극락이 보이질 않아. 앞이 캄캄할 뿐이야.”

제자는 난감했습니다.
선생님이 천국가야 할텐데, 인격적으로 훌륭한 분이 눈 앞이 캄캄하다고 하니 어떻합니까?

“선생님, 그러면 예수 믿어 보십시오.”
이 말에 그분이 예수믿기로 작정하고 새문안교회의 강신명 목사님을 모셔다가 요한복음3:16을 읽고 예수믿고 세례받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지막 유언이 기독교식으로 장례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뛰어난 지식과 뛰어난 인격과 성실한 그의 인품이 많은 사람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지만, 그것가지고 천국 갈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직 예수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로마서 14:8)

(예화) 토마스 하디(Thomas Hardy, OM, 1840. 6. 2 ~1928. 1. 11), 환상을 쫓는 여인

<환상을 좇는 여인>은 영국 작가 토마스 하디가 1893년에 발표한 단편 소설이다.
19세기 영국의 여자들은 경제활동을 거의 할 수 없었기에 결혼해야만 안정적인 미래를 확보할 수 있었다.
주인공 엘라는 체구가 작고 우아했으며, 영혼이 드러나 보이는 밝은 눈동자를 가진 여인이었다.
그녀 또한 어머니에게서 여자에게는 평생을 함께할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기에, 키가 크고 긴 얼굴에 갈색 수염을 기른 적당한 남편감이었던 ‘마치밀’과 결혼한다.

신혼이 지나고 아이를 낳고 살면서 엘라마치밀은 서로 다른 점들을 발견한다.
가난한 시인의 딸엘라는 감수성이 예민하고 시를 좋아했지만, 총기 제조업을 하는 마치밀은 무기가 필수품이라고 생각하며 무기가 필요한 세상에 매우 만족했다.

마치밀은 엘라에게 친절하고 너그러웠지만 늘 고지식하게 말했다.
엘라는 그런 남편을 천박하고 세속적이라고 생각했고, 마치밀은 아내가 감상적이고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두 사람은 각자의 생활에 몰두하며 산다.

부부는 여름휴가를 맞아 세 아이들과 함께 휴양지인 솔렌트로 가고, 운명의 장난인지 엘라가 좋아하는 시인 ‘로버트 트리위’의 빈 집에 머문다.
엘라는 답답한 일상에서 좋아하는 시를 쓰는 것으로 삶의 생기를 유지하며 지냈다.
예전에 자신이 쓴 시를 ‘존 아이비’란 필명으로 발표하기도 했는데, 한번은 신문에 트리위와 자신의 시가 함께 실리면서 그에게 남다른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잠시 다른 곳에 간 트리위의 집에 머물게 된 엘라는 관광도 하지 않고 요트도 타지 않고 거의 집에서만 지낸다.
트리위가 적어놓은 메모를 보고 그리움에 젖고, 트리위의 을 입고 ‘그의 영감이 내려서 멋진 시를 쓰게 해달라’고 기도하기도 한다.
엘라트리위가 쓴 시를 다시 읽고 생각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는 진정한 내 모습과 더 가까워.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진정한 내 모습과 더 친밀하다고.”

행복하기 위해 결혼했지만 자신과 너무 다른 마치밀을 보며 마음이 남편에게서 점점 멀어진 엘라는, 만난 적은 없지만 자신과 닮은 트리위에게 마음이 갔다.

트리위를 한 번 만이라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휴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엘라는 트리위의 시를 읽고, 필명으로 그와 편지를 주고받는다.
아는 화가를 통해서 트리위를 자신의 집에 초대하려고도 했지만 무산된다.
만날 수 있는 기회가 계속 어긋나자 엘라는 더욱 애가 탄다.

한편 트리위는 새 시집을 출간해 언론의 주목을 받지만 그것도 한순간, 그는 자신의 시에 대한 혹평을 견디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한다. 엘라트리위의 묘를 찾아가 비통해하고, 하숙집 주인에게 부탁해서 트리위 머리카락사진을 받아 간직한다.
엘라는 넷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지만 슬픔에 빠져 몸이 점점 약해져 갔고, 결국 아이를 낳고 죽는다.
마치밀은 죽은 아내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트리위의 사진머리카락을 발견하고, 갓 태어난 넷째가 트리위와 닮았다고 느낀다.
그래서 소리친다.

그랬었군. 저리 가라, 이 못된 놈아! 넌 나와 상관없는 놈이다!

엘라의 고독한 삶, 그 삶의 황량함에 대해
이 소설을 처음 읽고, ‘현실과 동떨어진 환상에 빠져 살 때 인간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에 빠져서 현실을 외면하고, 현실을 사실과 다르게 어둡게만 치부할 때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소설을 다시 읽으면서 문득 ‘엘라가 환상에 빠지지 않고 현실에 맞추어 살았다면 행복했을 거라고 말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삶을 비극적으로 마치지는 않았겠지만 행복했을 거라고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의 고독한 삶이 환상에 끌릴 수밖에 없는 비극적인 엘라를 만들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에 가깝든 환상에 가깝든, 사람은 누구나 행복해지려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꿈꾸며 산다.
엘라는 아름다운 시를 쓰고 싶었고, 자신을 꼭 닮은 시인 트리위를 만나고 싶었다.
트리위는 자신이 쓴 시가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되기를 바랐다.
우리 인생이 바라는 대로만 흘러가지 않듯 소설 속 인물들도 그랬다.
트리위는 자신이 쓴 시들에 혹평이 쏟아지자 모멸감을 견디지 못해 죽음을 택했고, 엘라는 트리위를 만나고 싶다는 꿈이 사라져 살아야 할 의미를 잃어 죽고 말았다.

꿈이 깨질 때 사람은 휘청거리고, 심하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 각기 모양과 방법은 다르지만 행복을 얻기 위해 여행을 한다.
공부를 하고, 돈을 벌고,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들을 채우고, 좋은 사람을 만나고…. 그리고 자신이 꿈꾸던 것이 무너져내릴 때 좌절한다. 오랫동안 준비한 시험에서 떨어졌을 때, 사업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 좋아하는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을 때…. 좌절은 엄청난 슬픔과 고통을 가져다준다.
어떤 때에는 죽음과 바꿀 만큼 강한 슬픔과 고통을 남기기도 한다.

이렇게 사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행복을 향한 우리의 여행은 대부분 고독하다.
엘라나 트리위처럼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죽어버릴 만큼 외롭다.
거꾸로 생각하면, 외롭고 고독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얻기 위해 목숨을 거는 여행을 하는 것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행복을 스스로 얻지 않으면 누구도 자신을 생각해주지 않는다고 여겼기에 행복을 얻기 위한 여정을 외롭게 이어갔다.

나를 향하던 햇볕의 따스함을 느낄 수 있다면 
엘라나 트리위가 그들이 행복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어땠을까.
행복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야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 없이도 가질 수 있다고 말하며, 마음으로 행복을 느끼면서 사는 법을 하나하나 가르쳐주는 사람을 만났다면 그들의 삶은 달라졌을 것이다.
자신을 향한 연민으로 치닫지 않고 자신을 향하는 따듯한 마음에 연결되어 기쁨을 지닌 채,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위하며 밝고 보람된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따스한 햇볕을 무수히 받으며 산다.
그런데 그 볕의 따스함을 느끼지 못하고 살 때가 많다.
햇볕이 주는 따스함을 생각할 여유도 없이,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생각하며 무언가에 쫓기듯 정신없이 달려갈 때가 많다.
그래서 자신이 꿈꾼 행복으로 가는 길이 막히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모든 것이 끝이라고 여긴다.

잘 둘러보면 우리 주변에는 햇볕 같은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행복하길 진심으로 바라며 우리를 사랑하는 이들이 있다. 그 따스함을 느끼고 알 때, 우리는 넘어져도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따뜻한 사람들의 손을 잡고 다시 일어나 새롭게 살아간다.

살다가 ‘이젠 정말 끝이다!’라는 생각이 들 만큼 슬픔과 고통과 좌절을 느낄 때, 잠시 숨을 고르고 조금만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자. 나에게 따뜻한 마음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보자. 그들과 연결될 때, 우리는 인생의 고독한 여행길에서 벗어날 수 있다. 아주 새로운 여행을 시작할 수 있다. 아무 조건 없이도 마음에 잔잔히 흐르는 행복을 느끼며 살 수 있다.

소설 속 이야기지만, 엘라나 트리위가 이제 행복은 산산조각이 났다며 절망 속으로 끌려들어갈 때에도 그들이 행복하길 진심으로 바라는 사람은 있었을 것이다.


여자 주인공 "엘라"는 필명으로 "존 아이비"를 사용하여 시를 발표하며 즐거움을 누렸다.
'엘라'가 존경하는 유명한 시인 "로버트 트리위"를 마음에 담고 여름 휴가철에 그의 빈 집에 머물며 그의 모든 것을 느끼는 즐거움을 좋아하였다.
넷째 아들을 임신하였을 때 너무나 '로버트 트리위'를 흠모 하였으며 심지어 그가 죽은 후에는 그의 유품으로 머리카락과 사진을 갖게 된다. '엘라'가 넷째를 낳을 때 죽었으며 태어난 아들을 본 남편 '마치밀'은 아들이 시인 '로버트 트리위'를 닮았다는 이유로 “그랬었군. 저리 가라, 이 못된 놈아! 넌 나와 상관없는 놈이다!” 라고 소리친다.

한 여인이 흠모했던 시인의 모습을 닮은 아들을 낳았다는 이야기의 교훈에서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닮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일생토록 노력하고 훈련해야 할 과정이라고 하겠다.


♦ 6월 1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빌립보서 2:1∼30
♦ 묵상을 위한 주제 :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5절)
♦ 성구 :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Your attitude should be the same as that of Christ Jesus.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간단하게 표현한 말씀은 마태복음 11장 9절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소유한 사람은 구원을 이룰 뿐만 아니라(12b),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소개됩니다(15b).

교리를 강조하면 삶이 흐려진다.
삶을 강조하면 교리가 가리워진다.
교리와 삶을 조회롭게 드러낼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은 하늘 보좌를 버리고 세상으로 내려오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신적 존재 방식'에서 '피조물의 존재 방식'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죽음을 통하여 세 가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첫째,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죽음
둘째, 하나님에게서 분리되는 영적 죽음
셋째, 죄에 대한 최종 심판으로서의 형벌인 둘째 사망(죽음)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묵상합니다.

이제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사건에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은 아들이 다 이룬 의를 아버지가 기뻐하고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들에게 영화가 됩니다.
아들의 영화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그분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자기 아들을 속죄의 값으로 내주며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아들의 영화는 그와 함께 자녀가 된 우리의 영화의 첫 열매가 됩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닌 우리가 그와 함께 높임을 받게 되는 길이 열립니다.

마음은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마음을 느끼게 하는 것은 마음이 행동으로 드러나고 언어로 표현되지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Follow my example, as I follow the example of Christ.)”(고린도전서 11:1)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주님 앞에 정직하게 나를 점검해 봅시다.
나의 자녀들에게 "너희는 나처럼 예수를 믿어라!"

이렇게 가르칠 수 있습니까?

아니면 "너희는 나처럼 예수를 믿지 말고 사도 바울처럼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가르칠 수 밖에 없습니까?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갖기 위하여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행동하고 예수님처럼 말을 하면서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예수님은 누구신가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복음의 진보(進步) - 복음의 퇴보(退步)

진보는 차차 더 좋게 되어 나아가는 것 / 발달(發達), 전진(前進), 향상(向上)

어제 오후 3시경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약국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문을 닫았어요.
어제가 미국의 현충일 공휴일이지만 관공서가 대부분 휴일이지만 일반인들은 휴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확인하지 않고 당당하게 걸어갔더니 휴업입니다.
다시 돌아오면서 다니엘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다니엘아, 성경에는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였는데 약국에 갔는데 휴업이라 되돌아 가야 하는데 무엇이 감사할까?"
그런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나는 더운 오후에 몸이 나른한 시간이지만 이렇게 걷게 하여 감사하다"
"나는 내일 다시 약국에 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어 감사하다"

사도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려는 목적을 수행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감옥에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매임

7절 /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
12절 /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13절 /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14절 /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빌립보서 1:27a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Conduct yourselves in a manner worthy of the gospel of Christ.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1. 하나님이 기뻐하는 믿음

내가 주인이 되는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2. 하나님께 나가는 믿음


하나님이 기뻐하는 믿음이 있다면 예배하라고 해서 예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헌금을 하라고 해서 헌금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3.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믿음

하나님이 기뻐하는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할 때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 5월 31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빌립보서 1:1∼30
♦ 묵상을 위한 주제 : 복음의 진보(12절)
♦ 성구 : 형제(兄弟)들아 나의 당(當)한 일이 도리어 복음(福音)의 진보(進步)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Now I want you to know, brothers, that what has happened to me has really served to advance the gospel.

빌립보서는 옥중서신으로 분류합니다(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빌립보서를 "기쁨의 서신"이라고 하며 각 장의 기쁨을 살펴보겠습니다.

1장은 삶의 기쁨
2장은 봉사의 기쁨
3장은 친교의 기쁨
4장은 상급의 기쁨

“복음의 진보(advance the gospel)”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생활에서 출발합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고 행동하는 것이 기본 원칙입니다.

세상은 거친 풍랑이 솟구치는 바다와 같다고 합니다.

이처럼 거친 바다에서 기쁨을 누리려면 오직 예수 복음의 진보를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진보는 생명을 보호하는 유일한 능력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빌 2: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어렵고 힘든 환경에서도 기쁨을 유지하려면 날마다 복음의 진보를 위한 열매를 맺혀야 합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복음의 열매를 맺기 위한 영양분이 되는 말씀을 마음에 새겨봅시다.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빌립보서 1:25)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디모데전서 4:15)

매일 함께 읽어가는 오늘의 말씀을 통해 예수 복음의 진보가 내 안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 생명의 복음이 부흥하는 역사를 삶에서 경험하므로 승리의 기쁨을 날마다 확신하며 즐기는 거룩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5월 30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에베소서 6:1∼24
♦ 묵상을 위한 주제 : 성령의 검(17절)
♦ 성구 : 구원(救援)의 투구와 성령(聖靈)의 검(劍)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Take the helmet of salvation and the sword of the Spirit, which is the word of God.    

“성령의 검(the sword of the Spirit)”은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God)’을 말합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검’이라고 할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 때문입니다(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서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전투를 위한 무기를 방어용과 공격용으로 구분한다면 방패는 방어용이지만 ‘성령의 검’은 공격용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40일 금식하신 후 마귀에게 이끌려 영적 전투에 임하셨을 때 성령의 검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매순간마다 예수님은 사탄을 공격하려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셨고(신 8:3, 6:13, 6:16) 마침내 사탄은 예수님을 떠나게 되었습니다(눅 4:13).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힘입어 그 고통을 이기셨고 끝까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희생 제물로 죽임당하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일곱 번 말씀하셨으므로 “가상칠언(架上七言)” 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때에도 “메시아 시편(22:1∼31:5)”을 인용하여 십자가에서 승리하셨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편 22:1)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속량하셨나이다.”(시편 31:5)

극심한 고통과 사람들의 조롱, 사랑했던 제자들의 배반과 배신, 사탄의 비웃음, 무엇보다 하나님께로부터 단절되는 아픔 속에서도 예수님께서 끝까지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힘입어 자신을 공격하는 나쁜 감정과 상황들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성령의 검은 믿음의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공격 무기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을 부지런히 암송하고 마음에 새김으로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하겠습니다.

코리텐붐 여사(Corrie ten Boom)는 “암송한 성경 말씀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는다(Nobody can take away from you those texts from the Bible which you have learned by heart.)”고 강조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실 때 그리고 십자가에서 하셨던 것처럼 성령의 검 즉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암송하며 선포하여 영적 전투의 현장에서 매번 승리하는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과 능력이 있습니다.
성령의 검은 결코 무디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암기하고, 순종할 때 사탄을 이기고 정복하게 될 것입니다.

♪ 찬양 /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탈무드의 소경의 손에 들려진 등불
 
어느날 한 맹인이 등불을 켜들고 밤길을 나섰다.
자신은 비록 불빛을 보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이라도 자신이 들고 있는 등불빛을 보고 부딛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고 한참을 가는데 어떤 사람과 그만 "탁!"하고 부딛치고 말았다.
맹인은 화를 내었다.
"당신은 눈도 없소? 나는 맹인이라 앞을 못보지만 당신은 내가 들고 있는 이 등불도 보지 못하시오?"
그러나 부딪친 사람이 손으로 맹인이 손에 등불을 들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자네가 들고 있는 등불은 이미 꺼졌네."
등불을 들고는 있지만 이미 꺼진 줄 모르고 들고 다닌다.
꺼진 것을 모르고사니까 세상이 어두워지는 것이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빛으로 나타나야 한다.


무전유죄, 유전무죄(無錢有罪, 有錢無罪)

불공평한 사회의 한 단면을 고발하는 말입니다.
히브리 속담에는 "하늘과 땅을 웃기려면 고아를 웃기라. 고아가 웃으면 하늘과 땅도 함께 웃을 것이다"
가장 힘 없고 불행한 사람인 고아가 웃는다면 하늘과 땅, 온 세상이 웃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힘 없고 불행한 사람까지도 이 세상을 살 만한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들의 마음에는 어느덧 행복이 자리잡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은 밝게 빛날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밝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어두움에 속한 사람이 아무리 밝게 만들려 하여도 밝아질 수 없습니다.
어두움은 모이면 모일수록 더 어두워질 뿐입니다.
어두움을 밝힐 수 있는 것은 빛입니다.
세상에는 빛과 같은 존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빛되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어두움 속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빛이 비추어질 때 사회의 어두운 부분인 불의, 불공평, 잔인함, 착취 등이 서서히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가난한 자와 고아의 아버지는 다름아닌 하나님이십니다.


♦ 5월 28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에베소서 5:1∼33
♦ 묵상을 위한 주제 : 주 안에서 빛이라(8절)
♦ 성구 :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For you were once darkness, but now you are light in the Lord. Live as children of light.      

에베소서 5장은 영적 생활의 원리를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소금’과 ‘빛’은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활을 위한 기본 원리라고 하겠습니다.
‘빛’의 삶을 잘 하려면 먼저 “주 안에서 빛”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직접 빛이 될 수 있는 발광체(發光體, Luminator)가 있는가 하면 빛이 될 수 없는 비발광체(非發光體, Non luminous)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태양은 발광체라고 하며 반면에 달은 비발광체라고 합니다.
진노의 자녀로서 인간은 이미 빛을 잃었기 때문에 스스로 빛을 발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빛을 발하려면 먼저 태양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빛을 받아야 합니다.

어떻게 빛을 받을 수 있을까요?

1. 하나님을 본받아라(1절)
2. 사랑가운데서 행하라(2절)
3. 감사하는 말을 하라(4절)
4.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8절)
5. 세월을 아끼라(16절)
6. 주의 뜻을 이해하라(17절)
7.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18절)

빛의 자녀가 된 믿음의 동지들이여
내 손에 들려 있는 등불이 빛을 발하고 있었는지 점검합시다.
그리고 꺼진 등은 먼저 불을 밝힌 후에 세상에 나가 작은 불꽃이 되어 어둠을 비추는 빛으로 산위의 등대와 같이 세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빛의 사자들이여

https://www.youtube.com/watch?v=hX_MlJmBIrI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김성화스님이 목사가 된 배경

경북대 졸업 후 교사로 근무하던 중 머리를 깎고 산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
스님으로 일을 하면서 불교계의 비리를 알게 되어 불교대학을 설립하려고 공사를 진행 중 사기죄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어느 날 불경책을 달라고 하였는데 간수가 성경책을 가져왔다고 한다.
오늘은 불경책이 모두 대출되어 없으니 성경이라도 읽어보라고 가져왔다고 한다.
그래서 성경을 읽는데 누가복음 7장을 읽는데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내는 말씀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비슷한 사례가 불교에서도 전해오는데 석가모니는 어느 과붕의 아들이 죽었을 때 저 아래 마을에 내려가서 한 번도 죽음이 없었던 집에서 쌀 한줌을 얻어와 끓여먹으면 살릴 수 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마을에 가서 쌀 한줌을 얻으려 하였으나 단 한 번도 죽은 사람이 없는 집안이 없었다고 한다.
다시 석가모니를 찾아왔더니 사람은 생자필멸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청년아 일어나라 하고 말씀하였는데 그 청년이 살아났다는 것이다.

인간 실존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는 불교가 아니라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기독교로 개종하여 신학을 공부한 후에 목회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불교단체 내분과 정치문제로써 김해교도소에 수감되었다.

독방에서 아침, 저녁 염불과 참선 불경공부로써 하루의 일과를 보내게 되었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불경도 보지만 때로는 교도소 도서관의 불경인 화엄경, 법화경, 능엄경. 원각경 등을 빌려 보게 되었다.
도서 대출은 군복무를 마치려고 교도소에 배치되어 있는 경비교도대 대원이 업무를 맡아 보고 있다.  
한 두어 번은 불경을 잘 대출해 주다가 하루는 느닷없이 대출 신청한 불경은 가지고 오지 않고 기드온 협회 발행의 “신약성서”를 갖다 주는 것이다.
“불경은 어떻게 하고 대출 신청도 하지 않은 기독교 책을 가지고 왔소?”
“불경은 대출되고 없어서 심심하실 것 같아서 기독교 책을 가지고 왔으니 스님 한번 읽어 보십시오.”
“거짓말 하지 마시오. 그 어려운 불경은 볼 사람이 없는데 5권이나 신청했는데 한 권도 없이 다 대출되었소?”
“스님! 저는 대학 재학생입니다. 스님께서는 대학에서 강의도 하셨다 하는데 제자가 스승님께 꾸중을 들어도 당연하지요. 그러나 스님! 기독교도 수억의 인구가 믿고 있으니 여기도 진리가 있을 것이니 한번 읽어 보십시오. 
저는 내일 제대합니다. 스님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횡 가버리는 것이었다.
얼마나 얄밉고 괘씸한 생각이 드는지 그러면서도 참 기독교인들이 지독하다고 생각되었다. 
비록 독방에 수감되었으나 골수 불교승려에게 전도하는 열의가 한편 부러웠다.
불교는 소극적이며 전도는 전혀 생각도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편치 않아서 “나무아비타불”을 여러 수 천 번 외우고 참선을 해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 책을 이튿날부터 읽기 시작하였다. 나는 복음을 처음 접할 때 전기에 감전된 것 같았다.
평소에 그렇게 염원하던 생사문제가 해결되었다. 이럴 수가 있나?
갈등에 몸부림쳤다. 여기서 불교와 기독교를 단 한 가지만 비교하자.
  
옛날 인도의 구시라 성의 시다림(林)이란 한가한 숲속을 석가모니는 제자들과 같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 그 숲속에서 한 젊은 과부가 애통하니 울고 있었다.
외아들이 죽어서 너무나 처절하게 울고 있었다.
석가모니는 젊은 여인을 보고 울지 말라고 위로의 말을 하였으나 그 여인은 울음을 그치지 않고 석가모니에게 “부처님이시여 내 외아들을 살려 주십시오.” 라고 애원을 하는 것이다.

이에 할 수 없어서 석가모니는 “자매여 일어나서 마을에 가서 한 번도 사람이 죽은 일이 없는 집의 쌀을 한줌씩 얻어다가 죽을 끓여서 먹이면 너의 아들이 살아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젊은 과부는 기뻐서 마을로 힘 있게 걸어갔다.
그런데 저녁에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는데 그 젊은 과부는 빈손으로 힘없이 돌아왔다. 
부처님이시여, 하루 종일 다녀도 사람이 죽은 일이 없는 집이 없습니다. 한 톨의 쌀도 못 얻고 빈손으로 왔습니다.”
자매여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 사람이 나면 반드시 죽는 것, 인연 따라 일어나서 인연 따라 없어지는 것 너무 슬퍼할 것이 없느니라.” 

석가모니는 이 한마디의 위로의 말을 주려고 젊은 과부를 하루 종일 걷게 만들어 놓고 허탈상태에서 기진맥진하였을 때 가장 인간적인 척하여 얄미울 정도의 지혜를 짜내어 위로의 말을 한 것뿐이다.
  
여기서 기독교적인 입장을 살펴보자.
예수님께서는 나인 성 과부의 외아들의 애통한 장례행렬을 보고 자비로써 그 외아들을 살리셨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불교와 기독교의 생사문제에 근본적인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같은 과부와 외아들의 죽음이었는데 불교에서는 죽음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는 인간 능력의 한계를 보여 주었고 기독교에서는 생명의 삶의 기쁨을 맛보았다.
  
바로 여기에 부활이고 생명인 참 진리가 있는 것이다.
석가모니는 인생의 근본적인 생사문제에 있어서 문제만 제시하였으나 그 해답의 열쇠는 주지 못했다.
예수님은 문제뿐만 아니라 해답의 열쇠를 주셨다.
  
참 진리를 발견하였는데 차마 개종의 길로 돌아설 수 없었다.
수십만의 불교신도들과 수백의 승려가 따르는 것을 생각하니 더더구나 부모님을 배반하는 것 같아 차마 돌아설 수 없었다.
나는 8개월 가까이 고뇌에 몸부림쳤다. 
 
어느 날 이른 새벽에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듣고 생명성(生命聲)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한편 썼다.
 
“아침에 열리지 않은 한가한 옥창을 바라보지 못할 이름 모를 들새 하늘 가까이 날아와서 울어 울고 있네, 삼독(탐심, 성냄, 어리석음)에 크게 취해서 깨닫지 못하는 중이 있다기에 비록 새지만 날아와서 생명의 소리를 들려주는 것이라오.”
  
나는 84년 8월20일 교도소를 나와서 거처하던 경북 달성군 옥포면에 있는 장수사에 들러서 6일간 몸에 안정을 취했다.
복음을 접하고 난 뒤에 더욱 번뇌와 고뇌에 몸부림쳤다.
 
내가 불교에 대한 공부가 부족해서 마음이 흔들린다고 생각하고 순천 송광사의 선원(禪院)에 가서 많은 수행을 쌓으면 번뇌를 잊을 것으로 생각하여 84년 8월 27일 순천을 향해 가다가 진주에 내려서 내가 교사생활 할 때 친구인 삼천포공업고등학교은두기 선생을 찾아가서 하루 저녁 쉬면서 나의 괴로운 심정을 이야기하였다.
 
은두기 선생은 아무런 종교도 가지고 있지 않은 불신자이다.
은선생은 나에게 좋은 충고를 하는 것이다.
“혜경스님은 송광사 사원에 가도 번뇌가 없어지지 않을 것이오. 기독교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당신 머리 속에 무의식적으로 잠재해 있으니까 말이오. 돌아서려거든 한 나이라도 젊을 때 개종하시오. 예수교사 어떤지 잘 모르지만 그 도에 한번 물든 사람은 좀처럼 잊지 못한다고 들었소.”
  
친구의 간절한 충고로써 막연히 부산에 와서 평소 교도소에 복음 전하는 단체의 전화번호를 알기에 전화를 걸어, 오늘에 이르렀다.
84년 8월 29일 수요일 처음 교회 나가서 찬송가를 듣고 느낀 바 있어서 한 편의 글을 써 보았다. 
“問眞行客心不閑, 尋道歸僧尋明鏡, 深深山寺不覺道, 敎會讚頌到耳岸 : 진리 물어가는 나그네 마음이 바쁘고 도 찾아 돌아서 가는 저 중 마음이 밝은 거울 같은데 깊고 깊은 산골 절에서 도를 깨닫지 못했는데 교회 찬송 소리가 귓가에 닿네.” 
  
나는 내 인생의 적어도 2/3를 달려가다가 개종으로 돌아서는 데는 죽음을 각오한 아픔이 있었다. 이것은 내 자신의 양심의 해방이고 양심적 자유를 찾은 선언이자 결심인 것이다.
고문진보(古文眞寶)의 사랑 편에 보면 “古文學者必有師 師者傳道受業解惑 : 옛날부터 배우는 사람은 스승이 있었나니 스승 된 자는 반드시 바른 도를 전하고 바른 업을 주고 의혹을 풀어 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나는 바른 도를 전하지 못하고 그것도 한 두 사람이 아니고 여러 수십만의 사람들에게 거짓 도를 전했기 때문에 이 글을 쓰는 것은 첫째는 비록 모르고 했더라도 하나님께 지은 죄를 속죄하려는 것이고 둘째는 이 글을 읽고 많은 사람들이 참 진리요 생명의 도인 예수님께 돌아오기 바람이다.
  
극락은 설화(說話)
  
많은 세상 사람들은 “불교나 기독교나 같고 극락이나 천국이나 같은 것이니까 마음 바로 쓰고 죄짓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아무 것이나 믿으면 되지 불교 기독교 가릴 것이 무엇이냐?”하는 식으로 주관적이고 안이하게 자기 자신의 근본문제를 포기 체념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야 말로 위험천만한 생각이다. 장미 밭에 가 보라. 같은 종류의 장미는 많아도 엄밀히 따지면 같은 장미는 하나도 없다. 이 우주에 존재하는 어떠한 사물치고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이것이야말로 조물주의 위대한 섭리다. 여러분, 어떻게 극락과 천국이 같을 수가 있겠는가?
  
극락은... 석가모니의 설화적(說話的)인 이야기이다. 무량수경, 관무량수경, 아미타경에서 말하는 극락과 원각경에서 말하는 극락과는 서로 다른 것이다. 같은 불교경전이라도 이렇게 서로 틀리고 모순이 된다. 이것은 석가모니가 소설적인 사실로써 만들어진 극락이니까 서로 모순이 제기 되는 것이다...
  
극락은 심청전과 같은 설화인데 심청의 이야기는 설화소설로 돌리면서 신앙의 대상이 되지 않는데 어떻게 유독 극락만은 설화소설이 되지 않고 신앙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이것은 우리 국민이 오랫동안 불교적인 문화권에서 생활함으로써 굳어진 사고(思考)의 결과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허황되고 설화같은 극락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어리석은 생활에서 돌이키라는 것이다.
 
천국에 대하여

먼저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확실한 천국을 올바르게 증거하시기 바란다. 부활은 신화가 아니고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고 역사적인 사실이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로마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운명을 확인하였고 죽은 지 3일만에 부활할 때 무덤을 지키던 로마병정이 도망하여 증거하였다. 제자들이 듣고 만져보았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500명이나 보았다.
생명의 구주이신 예수님의 부활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불교의 극락은 Fiction(소설)이고 기독교의 천국은 Non-Fiction(실제적인 사실)이다.
여러분!
심청전 같은 허황된 소설인 극락을 믿으시겠는가? 엄연한 역사적인 사실인 예수님의 천국을 믿으시겠는가?
여러분 스스로 양심적인 판단을 하시기 바란다.
자료출처: 김성화지음. ⌜극락의 불나비(증보판)⌟. (서울: 성광문화사)


새 사람을 입으라

옷을 입는다는 것은 자기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것입니다.
옷을 입는다는 것은 자기 몸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옷을 입는다는 것은 자기를 드러나게 보이는 것입니다.
옷을 입는다는 것은 자기 신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옷을 입는다는 것은 변화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새 사람을 입는다는 것은 죄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것입니다.
새 사람을 입는다는 것은 세상 유혹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것입니다.
새 사람을 입는다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새 사람을 입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맞지 않는 것을 벗어 버리고 주의 뜻대로 행하는 옷을 입는 것입니다.
말씀을 보고 느끼고 깨달음이 올 때 성령님을 통한 가책으로 회개하고 굴복하고 버린 다음에 주님의 진리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로마서 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우리는 모두 옷을 입고 삽니다.
왜 옷을 입을까요?
그것은 자신의 몸을 보호하고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서이지요.
옷을 입지를 않고는 아무도 집 밖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옷을 입는 이유가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서 옷을 입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대부분 옷을 입음으로 자신을 자랑하고 나타내고 또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 옷을 입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유명한 명품 옷을 사서 입으려고 애를 씁니다. ​

인류의 첫 사람들인 아담과 하와는 옷을 입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전혀 부끄러움과 수치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 따먹고 범죄함으로 그들은 눈이 밝아져 자신들이 벗은 줄을 알게 되자 두려움과 부끄러움과 수치를 알게 되었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가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찾아오셔서 짐승을 잡아 그 가죽으로 옷을 지어 그들에게 입혀 주셨습니다.
그 가죽옷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부끄러운 죄를 가려 주심을 예표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로마교회를 향해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롬 13:14)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라”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통해 우리의 죄의 수치를 가리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옷을 입어 우리 몸에 부끄러움을 가렸다면, 아무도 모르는 내 마음속의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은밀한 죄들을 어떻게 가릴 수 있을까요?
우리가 멋있게 옷을 입고 예쁘게 화장을 하고 다니면, 벌거벗은 것이 아닌가요?
우리의 마음속에 아무도 모르는 은밀한 죄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죄는 결코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아무도 모른다고 감추어진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계 3:17)

주님은 우리의 우리의 마음에 깊이 감추어진 모든 은밀한 것도 익히 아십니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시 139:1~4)

아무도 모르게 지은 은밀한 죄, 그러나 하나님도 알고 마귀도 아는 그 죄가 어찌 드러나지 않을까요?
그 죄가 드러날 때 얼마나 수치스러울까요?
이것이 바로 벌거벗은 것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지은 은밀한 죄, 그 누구도 알아서는 안되는 그런 죄가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내 마음에 생각으로 지은 죄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생각으로 지은 죄까지도 반드시 드러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우리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럼 그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는 부끄러운 죄를 이대로 품고 사실 겁니까?
그리고 이 모습 이대로 살다가 하나님 앞에 서실 것입니까?
결코 아니지요, 이제 그 부끄러움 그대로 우리 하나님 앞에 드러내 놓으십시다.
이제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의지하십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십시오.
사도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말씀합니다.(갈 3:27)

사도가 세례를 받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하는 의미는, 나는 나 자신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장사되었음을 믿는 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천국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자만 가는 곳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예복을 입고 가는 곳이지, 내가 만든 의의 옷을 입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예복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만든 의의 옷입니다.
내가 성수주일하고 예배를 잘 드리고, 십일조와 전도와 봉사와 선을 행함으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계명을 지킨다고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옷은 인간의 신분, 즉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신분 등을 나타내 준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즉 이것은 예수그리스도를 입는다는 뜻, 혹은 예수그리스도의 옷을 입는다는 뜻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옷의 기능이 예수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첫째로, 예수그리스도는 인간의 약함을 외부로부터 보호한다.
여기서 외부라는 것은 유혹, 사단에서 비롯되는 죄성을 말한다.

둘째로, 예수그리스도는 약함과 수치심을 의미하는 벌거벗은 몸을 가려주신다.

변화된 모습으로 증거하는 신앙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과 신자가 아닌 친구가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 자네, 그리스도인이 됐다지?"
"그렇다네."
"그럼 그리스도에 대하여 많이 알겠군. 어디 좀 들어보세. 삼위일체라는 말은 무엇인가? 설명을 좀 해보게."
"글쎄, 잘 모르겠는걸."
"그리스도는 설교를 몇 번이나 했지?"
"잘 모르겠는데..."
"그럼, 수많은 사이비 종파들은 어떻게 된 거지?"
"글쎄, 나도 마음이 아프기는 하지만 잘 모르겠는걸."
"아니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고선 그리스도에 관해 아는 것이 없잖아!"
"자네 말이 맞아. 아닌게 아니라 나는 별로 아는 것이 없네.
부끄러워.
하지만 이 사실 하나는 분명히 알고 있지.
3년 전, 내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을 때는 난 주정뱅이였고 빚도 많았고 내 가정은 산산조각이 되가고 있었지.
저녁마다 처자식들은 내가 집에 오는 것일 무서워했지.
그러나 이젠 술도 끊었고 빚도 갚았고 우리 가정은 참으로 화목해 졌지.
저녁마다 아이들은 목이 빠져라 나를 기다리고 있게 되었거든.
이게 모두 그리스도가 나에게 이루어주신 것일세.
또한 나는 지독한 죄인이라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신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고 있지."

자기의 변화가 우선이다!


유명한 안소니 멜로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청년 시절에는 세계를 변화시키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중년이 되어서는 내 이웃을 변화시키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70세가 된 오늘은 나는 오직 하나 '하나님이여, 나를 변화시켜주옵소서' 라고 기도하고 있다."

우리는 정치 문제에 너무 관심이 많다.
세계 문제에 너무 민감하다.
그것은 하나님께 맡기라.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생활방식과 생각, 마음이 예수님의 성품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변화를 거부하는 기독교인들을 보게 된다.
변화되지 않는 기독교는 세상에 존재할 이유가 없다.
그 본래의 목적인 빛의 역할을 잃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변화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세상의 변화, 인류의 변화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변화를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톨스토이가 당시 러시아 기독교의 무력함을 바라보며 한 말이다.
나 자신의 변화를 위한 기도가 진정한 변화의 출발점이며 원동력이다.
우리는 먼저 나 자신을 변화시켜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내가 변해야 이웃이 변하고 세상이 변한다.
변함없는 인생은 고인 물과 같다.
그곳에는 악취가 풍긴다.
기도는 영혼을 정화시키는 묘약이다.
나부터 먼저 변화되어야 한다.


안소니 드 멜로 글 모음                                                              

인도 봄베이에서 태어난 예수회 신부 앤소니 드 멜로(1931-1987)는 평생토록 영성 지도, 영성지도자 양성으로 헌신하며 인도의 로나불라에 있는 ‘사다나 목회연구소’의 소장을 지냈습니다.  
그는 영성과 지혜에 관한 많은 책을 저술했습니다.

신앙은 정답을 아는 지식이 아닙니다. 

<복음서 속의 대화>

예수님 :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베드로 :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 :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정녕 복되구나.  너에게 그것을 알려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시다.

<오늘날의 대화>

예수님 :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크리스천 :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 : 훌륭하고 옳은 대답이다. 그러나 너는 불행하구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그것을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배웠기 때문이다.                                         

드멜로 신부가 쓴 이 짤막한 단상은 깊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주님을 개인적으로 깊이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에 대해 체험적인 신앙고백을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까지 성실히 구도자의 삶을 살아야 하겠죠.

드멜로 신부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습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대신해서 미리 대답을 다 해주는 바람에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것을 가르쳐주실 겨를이 없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 신앙의 위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보다.. 미리 답을 주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잘못된 들음’과 ‘올바른 들음’

안소니 드 멜로 신부님은, 우리가 남의 말을 듣고 있으면서도 대부분은 이미 자신이 생각한 것을 확인하려 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 싶으면 가슴이 시원하고,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 싶으면 가슴이 답답한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이것은 ‘잘못된 들음’이다.

‘올바른 들음’은  단순히 남의 말에 찬성과 반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열고, 무슨 말이듣지 '듣겠다'는 겸허한 자세로) 즉  '개방된 태도, 어떤 새로운 것을 발견하려는 의지'이고 '그렇게 듣고서, 내게서 배움이 깨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들을 때’는.. 항상 기도하는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개구리 울음소리

한 수도자가 밤에 창문을 열고 명상 기도를 드리는데 바깥 개울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개구리들의 울음소리에 도저히 참지 못하고 기도를 잠시 중단하고서 창문 밖을 내다보며 냅다 고함을 질렀다.
“제발 조용해!”
화가 치민 수도자의 마음에 즉시 내적 음성이 들려왔다.
‘지금 너도 기도하고 있고, 저 개구리들도 창조주를 찬양하고 있는데 너는 왜...?’
개구리들이 소음을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생각을 하니 그 후부터 수도자에게 개구리들은 도리어 ‘기도의 동반자’가 되었다.

너 자신을 바꾸지 않아도 돼! 

앤소니 드 멜로 신부님의「바다로 간 소금인형」에서 신부님은 오랫동안 노이로제에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건 대답은 마찬가지로 ‘네 자신을 바꾸라’는 이야기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부님 자신은, 정작 자신을 바꾸고 싶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게 잘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무리 자신을 바꾸기 위해서 스스로 몰아붙여보아도, 힘만 더 들었습니다.
그럴수록 자신은 더 무기력해지고, 옴짝달싹할수 없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 어느날 친구에게서 이런 이야길 듣게 됩니다.

“너 자신을 바꾸지 않아도 돼. 나는 지금 모습 그대로의 너를 사랑하니까!”

이때부터 마음이 놓이고 생기를 되찾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바꾸지 않아도 된다. 바꾸지 않아도 된다. 있는 그대로의 너를 사랑해.” 라는 친구의 말에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바라보고 사랑할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있는 그대로의 우리의 모습을 사랑하실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하나님께 드리며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다 안에서 바다 찾기

“실례합니다.” 라면서 어린 바닷물고기가 말을 걸어 왔다.
“당신은 저보다 훨씬 어른이시니 어디에 가면 사람들이 바다라고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는지 알려 주실 수 있겠지요?”
“바다라...?” 나이든 물고기가 말했다.
“네가 지금 있는 곳이 바다가 아니면 어디인 것 같으냐?”
“아, 여기 말이에요? 여긴 그냥 물이잖아요. 제가 찾는 건 바다라고요. 바다.”
실망한 어린 물고기는 바다를 찾아 다시 헤엄쳐 나갔다.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기적

옛날에 매우 믿음이 깊은 성자가 있었는데, 천사들도 그를 늘 주목했다.
그는 대단히 거룩하고 영적으로 살았지만, 자신 스스로 그렇게 여기지 않고, 늘 보통 사람으로서 순진무구하게 살았다.
진짜 그는 자신이 그렇게 위대한 성인인지 몰랐다.
(신발이 발에 맞을 때는 발을 의식하지 않는다. 옷이 허리에 맞을 때는 옷이나 허리를 의식하지 않는다. 실제로 거룩하고 영적인 사람은, 그것을 크게 의식하지 않는 면이 있다. 매사에 신경을 써서 거룩하고 영적으로 살려는 사람은 그런 노력이 물론 필요하지만, 아직 성자의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어느 날 천사가 그에게 찾아와 말했다.
"하나님이 나를 당신에게 보냈다. 당신의 소원이 무엇이든 이루리라! 치유의 능력을 받고 싶은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이 직접 치유해 주시기 바랍니다!" 
"죄인들을 무수히 돌아오게 만드는 그런 설교자가 되기 원하는가?"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을 돌이키게 만드는 일은 주님의 성령이 하실 일입니다!"
"그러면 덕행의 모범이 되어 모든 사람들이 본받고 싶은 모델이 되기 원하는가?"
"아닙니다. 주님만 관심의 초점이 되기 원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너는 무엇을 원하느냐?"
"정 그러신다면, 제가 한 가지 청하겠습니다. 
자를 통해서 좋은 일들이 이루어지되, 제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해 주세요! 
그래서 제가 교만에 빠지지 말게 해 주세요!"
그래서 그 성자의 그림자가 그의 뒤에 생길 때마다 그 곳은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가 지나가는 곳마다, 즉 그의 그림자가 지나가는 곳마다 병자가 치유되고, 땅이 기름지게 되고, 마른 땅에 샘이 생겼다. 
그러나 그 성자는 이것에 대해 전혀 몰랐다.
자기가 지나간 후에 항상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이며 또한 사람들의 관심도 온통 그 그림자에게 집중되어 있어서 그 성인은 잊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성자는 교만으로 넘어지지도 않았고 자기를 통해서 좋은 일들이 이루어지기 바란다는 그 성자의 소원도 충분히 성취되어졌다. 

보석보다 더 귀한 것

어떤 수도사가 여행 중에, 우연히 빛나는 보석을 하나 발견해서는 지니고 다녔다.
어느 날 그는 한 여행자와 동행하게 되었는데, 수도사가 음식을 나누기 위해 자기 등짐을 풀자, 거기에 빛나는 보석이 보였다.
그 동행한 여행자는, 보석을 보고는, 그 보석을 자기에게 달라고.. 수도사에게 부탁했다.
수도사는 기꺼이 선뜻 그 보석을 내 주었다.
두 사람은 서로 헤어져 각자 자기 길을 갔다.
보석을 얻은 여행자는 뛸 듯이 기뻤다.
자기 평생 부와 안락을 보장해 줄, 값비싼 보석을 얻은 행운에 기뻐 뛰었다.
그러나 며칠 후, 그는 수소문 끝에, 보석을 들고 이 수도사를 다시 찾아왔다.
그는 수도사에게 이렇게 물었다.
“도대체 당신에게 이 보석보다 더 귀한 어떤 것을 가지고 있길래, 이런 것을 나에게 선뜻 내어줄 수 있었습니까?
나는 당신으로부터, 이 보석보다 더 귀한 것을 얻고자 다시 찾아왔습니다!”                             
<앨리스터 맥그래스「목마른 내 영혼」The Unknown God에 나오는 앤소니 드 멜로의 글

소문

1946년 여름, 기근이 휩쓸 것이라는 소문이 남아프리카 대륙을 휩쓸었다.
사실 곡식들은 잘 자라고 있었고, 날씨도 추수하기에 정말 좋은 기후였다.
그런데 소문을 듣고 놀란 2만 명이나 되는 소작농들이 농토를 버리고 모두 도시로 도망가 버렸다.
결과적으로 농사를 망치게 되었고 남아있던 수 천 명의 사람들은 졸지에 기아에 시달리게 되었다.
기근이 든다는 소문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안토니 드멜로, <입 큰 개구리의 하품> 중에서

드 멜로 신부는 ‘반대자들의 갖은 비방이나 공격보다도 옹호자들의 열광 때문에 진리가 더 큰 몸살을 앓는다.’고 하였다.

우리 인생의 여행이 이와 같습니다.

한 무리 관광객들이 봄 소풍을 떠났다.
버스는 호수와 산, 전원과 강이 어우러진 매우 아름다운 지방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버스에는 커튼이 내려져 있었다.
그들은 차창 밖으로 무엇이 지나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들의 관심사는 이런 것이었다.
‘어떤 사람을 버스의 상석에, 좀 더 편안한 자리에 앉힐 것인가?’
‘누구를 더 중요한 사람으로 여길 것인가?’
바깥에는 황홀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데, 사람들은 엉뚱한 주제를 두고 말다툼하느라 여행의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아마도 사람들은 여행이 끝날 때까지 계속 그런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논쟁만 계속할 것이다. 

앤소니 드 멜로, ‘행복한 삶에로의 초대’에서

진리를 파는 가게                         

간판을 보고서,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진리를 팝니다. 각종 진리 일체>
판매원 아가씨는 매우 예의발랐다.
“무슨 종류를 사시려고요? ‘부분 진리’를 원하세요, 아니면 ‘전체 진리’를 찾으세요?”
“전체 진리, 그럼요. 전체 진리를 보여 주시오. 속임수는 필요 없소. 변명도, 합리화도 아닌,  (가짜 상품이 아닌)  쉽고도 명료한 전체 진리, 그게 내가 바라는 거요.”
아가씨는 가게 안의 다른 부분을 가리켰다.
그쪽이 ‘전체 진리’를 파는 곳이란다.
그곳 판매원은 걱정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가격표를 가리켰다.
“값이 몹시 비싼데요, 선생님.”
값이야 얼마든, '전체 진리'를 얻고야 말리라는 마음으로, 나는 물었다.
“얼마요?”
“이걸 가져가시면, ‘여생의 모든 평안을 잃는 값’을 치르시게 됩니다.”
나는 슬픈 마음으로 가게에서 나왔다.
싼 값으로 ‘완전한 진리’를 얻을 수 있을 줄로 나는 생각했던 것이다.
아직도 나는 진리를 위하여 값을 치를 각오가 되어있기는커녕 걸핏하면 평온과 안일을 갈구하고 있고, 아직도 나 자신을 두둔하고 합리화하여, 조금씩 스스로를 속일 필요가 있으며, 아직도 의문의 여지없이 ‘확고한 나의 믿음들’이라는 은신처를 찾고 있다.

(주/ 대가 치름 없이 얻는 진리, 그러나 내가 ‘전체 진리’라고 확신함. ‘내 믿음’도 그런 범주)     

“이걸 가져가시면, 여생의 모든 평안을 잃는 값을 치르시게 됩니다.”
→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대가를 치른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라도 ‘전체 진리’를 얻고 나면.. 그 치른 대가에 비교할 수 없는 큰 평안을 얻게 될 것입니다. 

앤소니 드 멜로, ‘종교 박람회’ 중에서   


어떤 성자가 시장에 가니까, 시장 분위기가 교회(성스러운 곳)로 바뀌는데
어떤 사기꾼이 교회에 오니까, 교회 분위기가 시장(시끄러운 곳)으로 바뀌었다는 옛말이 있다.

성자는 시장에 가서도... 진리에 귀 기울였다는 뜻이고
사기꾼은 교회에 와서도... 사기 칠 일에 귀 기울였다는 뜻이다. 

 

♦ 5월 27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에베소서 4:1∼32
♦ 묵상을 위한 주제 : 새 사람을 입으라(24절)
♦ 성구 :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To put on the new self, created to be like God in true righteousness and holiness.

새 사람을 입으라(put on the new self)
새 사람이 되려면 먼저 옛 사람에 대한 이해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옛 사람을 다른 말로 “이방인” 이라고 합니다.
    
에베소 지역의 첫번째 특징은 황제 숭배를 위한 신전과 아데미 여신을 위한 신전이 세워져 있는 곳이었습니다.

서로 다른 신전이 세워져 있었다는 것은 종교혼합주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고 하겠습니다.

에베소의 또 다른 특징은 매우 부유한 도시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에 가서는 돈 자랑을 하지 말라!"
이런 말이 널리 알려졌던 도시라고 합니다.    

이러한 도시에 사도 바울이 전도하고 개척한 교회가 에베소교회이었습니다.

화려한 도시생활에서 참된 것을 찾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에베소교회입니다.

새로운 가치관을 가르치고 강조하므로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도시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 교회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전의 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을 “이방인”이라고 하였으며 이제는 “새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어떻게 새 사람을 입을 수 있을까요?

첫째, 그리스도의 옷을 입으라(갈라디아서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둘째,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에베소서 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셋째, 심령을 새롭게 하라(에베소서 4:23∼24)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새 사람이 되려면 분명히 옛 사람의 삶을 버려야 합니다.

옛 사람의 삶의 방식이 나를 붙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옛 사람의 삶의 방식을 버리지 못하면 새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새 사람이 되려면 새 영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에스겔 37:26∼27)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날마다 새 마음을 회복하는 일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을 구하며 주의 말씀대로 순종하
여 새 사람의 기쁨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기독교를 무너뜨리는 ‘10가지 전략’과 '동성애'

오늘날 가정과 교회, 국가에서 일어나는 위기의 '숨겨진 실체'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기독교 가치관과 가족 봉괴, 생명경시, 동성애 합법화 등 사회적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일련의 움직임이 이른바 '반기독교 세력', 나아가 '적그리스도 세력'의 고도의 전략이라는 우려가 제기됐다. 특히 동성애는 이 전략의 핵심 중 하나라는 주장이다.

앨리스 베일리(1880-1949)
역사상 최고위급 사탄숭배자들의 지도자요, 귀신의 능력에 매우 민감한 영매였다.
기독교를 반대하는 가장 강력한 적대자였던 그녀가 책을 쓴 목적은 세상으로 하여금 기독교를 대체할 수 있는 ‘대체 가치체계’를 만들게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책에 기록된 모든 것들은 영계로부터 직접 왔고 자신의 창작물은 하나도 없다고 했다.
그녀에게 책의 내용들을 받아쓰도록 구술한 세 마리의 주신급(主神級) 영들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엘리스 베일리가 기독교 가치체계를 악한 것으로 대체하는 데 실천적으로 사용했던 전략은 노인을 상대하지 않고 어린아이들을 공략하는 것이었다.

염안섭 원장은 "약 140년 전에 출생한 앨리스 베일리(Alice A. Bailey)라는 최고위급 사탄숭배자 지도자였던 영매(靈媒), 우리나라로 치면 '무당'이라 할 수 있는 여성"이라 소개하면서 "이 여성이 주신급(主神級)의 세 마리의 마귀들의 계시를 받아 '기독교를 무너뜨리는 전략 10가지'를 받은 것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염 원장은 "반기독교를 넘어 기독교에 대한 증오와 맹목적으로 기독교를 무너뜨리겠다고 획책하는 적그리스도 세력들의 이 10가지 지침이 지금까지 내려오면서 그대로 실행되고 있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기독교를 반대하는 가장 강력한 적대자였던 베일리가 책을 쓴 목적은 세상으로 하여금 기독교를 대체할 수 있는 '대체 가치체계'를 만들게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책에 기록된 모든 것들은 영계로부터 직접 왔고 자신의 창작물은 하나도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베일리가 기독교 가치체계를 악한 것으로 대체하는 데 실천적으로 사용했던 전략은 노인을 상대하지 않고 어린아이들을 공략하는 것이었다.

앨리스 베일리가 주창한 '10가지 전략'을 살펴보면, 오늘날 각국 의회와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정책들과 꼭 같음을 알 수 있다. 앨리스가 수립한 이 전략의 핵심은 사회 각 분야에서 하나님을 추방하여 기독교적 전통을 말살하고 건전한 가정을 파괴하며 음란과 퇴폐의 영을 퍼뜨려서 국가와 사회를 타락시키는 것이다. 최고위급 '사탄숭배자' 앨리스 베일리가 전파한 '가정과 교회, 국가 무너뜨리는 10가지 전략'은 다음과 같다.

1. 교육시스템으로부터 하나님과 기도를 제거하라

커리큘럼을 변경시켜서 기독교 문화의 속박으로부터 아동들을 해방시켜라. 아동들이 학교에 가는 목적은 인생을 직면할 준비를 갖추기 위함이고 아동들은 학교와 교사를 신뢰하며 거기에 우월적 가치를 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육으로부터 하나님을 제거한다면, 아동들은 인생을 직면하는 데에 있어서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다는 신념을 무의식적으로 갖게 될 것이다. 아동들은 진급하는 데 있어서 학교당국이 중요하다고 인정하는 것들에 초점을 맞출 것이며, 하나님에 관하여는 그저 부가적인 존재 정도로 여기게 될 것이다.

2. 아동들에 대한 부모의 권위를 축소시켜라

부모와 자식 사이에 의사소통을 끊어라. 부모들이 자신들이 지키는 기독교적 전통을 자녀들에게 물려주지 못하게 함으로써 부모의 전통이라는 속박으로부터 아동들을 해방시키기 위함이다. 아래는 앨리스 베일리가 제시한 구체적인 방법들이다.

첫째, 아동권리를 과잉되게 신장시켜라
둘째, 체벌을 폐지하라
셋째, 교사들은 '10가지 전략'의 실행 요원이다.

3. 기독교 가정 구조 또는 전통적 기독교 가정구조를 파괴하라

전통적 기독교 가정구조의 억압은 견딜 수 없다. 가정이 국가의 핵심이라고 볼 때 만일 가정을 깨트린다면 국가를 깨트리는 것이다. 이런 감금상태의 구조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켜라. 이를 위해 앨리스 베일리가 제시한 구체적인 방법들이다.

첫째, 성 문란을 조장하라
둘째, 광고 산업, 미디어-TV, 잡지, 영화 산업을 이용하여 섹스 하는 쾌락이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즐거움이라고 부추겨라(선전전략).

4. '프리섹스'(Free Sex) 사회를 만들라 - 낙태를 합법화하고 낙태하기 쉽게 만들라

낙태 병원을 세워라. 학교 안에도 진료소를 만들라. 사람들이 섹스의 쾌락을 누리려면 그에 따르는 불필요한 두려움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원치 않는 임신으로 인하여 그들의 섹스가 훼방 받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낙태 금지는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며 이는 우리의 권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아이를 가질지 말지에 관해서 선택할 권리는 우리에게 있다. 한 여성이 임신을 원치 않는다면 그녀는 고통 없이 가능한 용이하게 그 임신을 지워버릴 자유를 가지는 것이 마땅하다.

5. 이혼하기 쉽게 만들고 이혼을 합법화하라 - 평생결혼의 개념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켜라

사랑은 '사랑결합'이라는 신비로운 연결을 가졌다. 그것은 마치 난소로부터 발생하는 난자와 같아서 당신이라는 시스템을 경유하면서 당신 안에서 사랑의 호의를 클릭하는데, 세상에는 당신의 그 '사랑결합'에 응답할 수 있는 한 사람이 있다. 당신이 그 사람을 만나면 당신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클릭하게 되며 이때 만나는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의 남자(또는 여자)이다. 만일 당신이 그 사람을 놓치면 그 사랑결합 사이클이 지나갈 때까지 수 년 간 결코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행복하려면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그 사람을 붙들어라. 그 남자(또는 여자)를 기혼자 상태에서 빼내는 것이라 할지라도 당신의 남자(또는 여자)인 그(또는 그녀)를 붙잡으라. 그(또는 그녀)가 엉뚱한 곳에 있다는 것은 심각한 잘못이다. 그리고 만일 일정 기간 함께 살다가 그 사랑이 이미 죽었음을 알게 된다면 당신은 기독교적 가치 같은 속박에 얽매이지 말라.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쉽게 이혼할 수 있는 방법과 그리고 또 다른 사랑결합의 생성을 허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하나의 난자가 발생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사랑결합이 생성되면 당신은 다시 한 번 인생을 즐기게 될 것이다.

6. 동성(연)애를 (누구나 선택할 수 있는) 대체 생활방식으로 만들라

'섹스'하는 쾌락이 인간 최고의 즐거움이어서 누구도 이런 즐거움에서 제외되어서는 안 되며, 누구도 그 즐기는 방법에 제약을 받아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스스로 원해서 선택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동성(연)애든지 근친상간이든지 수간(獸姦)이든지 아무튼 쌍방이 합의하기만 하면 어떠한 형태의 섹스도 허용되어야 한다.

7. 예술의 품격을 떨어트려라 '미친 예술'이 되게 하라

예술이야말로 문화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열쇠이다. 인간의 상상력을 더럽히고 타락시키는 새로운 형태의 예술을 장려하라. 왜냐하면 예술은 영의 언어로서 당신은 안에 있는 그것을 회화, 음악, 드라마 등의 형태로 끄집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유(類)의 예술과 음악과 영화들이 표현하고 있는 품격과 영성과 메시지를 살펴보라.

8. 미디어를 활용하여 선전하고 인간의 사고방식을 바꿔라

인간의 태도를 바꾸는데 가장 효과적인 최대의 경로는 미디어다. 신문, 라디오, TV, 영화를 이용하라. 미디어만이 아니라 광고회사, 옥외 광고판, 잡지 등을 통하라.

9. 종교통합운동을 일으키라

다른 종교들을 장려하여 기독교와 동등이 되도록 하라. 자신들만이 천국에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기독교의 주장을 분쇄하라. 그리함으로써 기독교는 격하될 것이고 여타 종교들이 신장될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미래와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점에서 인간의 중요성을 부각시켜라(인본주의).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지 선택할 권리가 인간에게 있으며 또한 그렇게 되도록 스스로 만들 능력이 있으며 자신의 목적을 결정할 권리를 인간이 가지고 있다고 말해 주라.

10. 각국 정부로 하여금 위의 모든 사항들을 법제화 하도록 하고 교회로 하여금 이러한 변화들을 추인하도록 하라 (동성애에 대한 차별금지법을 뜻함)

교회는 위의 사항들을 수용하도록 결국 교리를 변경시켜야 하며, 사람(성도)들을 변화에 적응시켜서 이러한 사탄적·세속적 구조와 체제 안으로 편입시켜야 한다.

염안섭 원장은 "이 이른바 '마귀의 십계명'에 따라서 움직이는 이 거대한 마귀의 영성의 결과가 100여 년이 지난 현대사회에 지금 나타나고 있다"며 "이 동성애 문제는 단순히 '성적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를 무너뜨리겠다는 적그리스도 세력의 핵심전락 중의 하나임을 명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 집의 주인은 예수님

이따금 가난한 백성들의 집을 예고 없이 방문해 민심을 헤아리곤 했던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하루는 신실한 과부의 집에 찾아가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과부의 신실한 믿음을 익히 알고 있던 여왕은 "당신의 집을 방문했던 이들 중에 가장 명예로운 손님은 누구였소?" 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과부는 망설임 없이 "예, 바로 여왕이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이라는 대답을 기대했던 여왕은 조금 실망스러워 "혹시 당신 집을 방문했던 가장 명예로운 손님은 예수님이 아닐까요?"라고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과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은 결코 손님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항상 저와 함께 계시는 이 집의 주인이십니다."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깨우쳐 알게 하는 곳입니다(10절)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빅토리아 여왕에게 가난한 과부는 이제까지 이 집을 찾아왔던 가장 명예로운 손님은 바로 여왕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왕이 기대했던 대답은 여왕이 아니라 예수님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은 과부의 집의 손님이 아니라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손님이 아니라 바로 주인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주인이 예수님이십니까?
여러분의 가정의 주인이 예수님이십니까?
여러분의 교회의 주인이 예수님이십니까?

예수님이 주인이 되실 때 은혜와 믿음과 환난에 대한 신앙이 분명해 질 것입니다.

은혜를 주신 이유(8절)
    기쁜 소식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려는 것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믿음이란(12절)
    담대함과 확신을 갖고 당당하게 하나님께 나가는 것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환난에 대한 자세(13절)
    고난 후에 영광이 찾아올 것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 5월 26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에베소서 3:1∼21
♦ 묵상을 위한 주제 : 예정하신 뜻(11절) 
♦ 성구 :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According to his eternal purpose which he accomplished in Christ Jesus our Lord.

“예정하신 뜻(eternal purpose)”이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전제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예정이란 "하나님께서 사람에 대하여 갖는 하나님의 뜻"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예정하신 하나님의 뜻은 "죄인이었던 나를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존재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정체성이 하나의 ‘의’며 그 ‘의’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예정하심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예정은 한 사람(a man)을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the Christ) 라는 정체성을 예정하신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생명을 가진 사람은 그 안에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같은 생명 정체성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집에 있는 사과나 마트에 진열된 사과는 모두 사과인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보이시고 그것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순종할지 말지에 대하여 사람에게 선택권을 주셨습니다.

선악과를 처음부터 먹지말라고 하지 않은 것도 정체성을 결정할 수 있는 주체가 바로 내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전에는 죽은 자이었으나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가 되는 것도 바로 그와 같은 원리라고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자기 안에 없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순종의 길을 선택하는 사람은 살아있는 존재가 됩니다.

시계방에는 수 많은 시계가 진열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주인이 결정되지 않았기 떄문에 시계가 정확하게 시간을 알려줄 수 없습니다.
만일 시계의 주인이 결정되면 그때부터 그 시계는 주인의 손에 의해서 시간을 정확하게 알려줄 수 있는 시계로 사용됩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의 손에 맡겨질 때 그때부터 예정하신 뜻을 실현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그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도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가르침에 따라 순종하므로 누릴 수 있는 은총을 함께 누려보시기 바랍니다.

♪ 찬양 /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https://www.youtube.com/watch?v=lIhIrsSsbVw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금은방에 있는 시계가 멈춰 있지만 주인에 의하여 선택이 되어 시각을 맞추면 그 때부터 시각을 알려주는 시계가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주인이 정해지기 전에는 시계로서 온전하나 아직 존재의 목적으로 볼 때는 죽은 것이다가 주인이 정해지면서 그 목적 안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 바로 목적 안에서 생명을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사람의 육신이 살아서 기능을 발휘하는 그 기간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이신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자기 운명으로 순종할 수 있도록 주신 삶의 기간일 뿐인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이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뜻, 곧 인생의 목적을 자기의 것으로 선택할 수 있도록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그 예정하신 뜻을 보이신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 그 말씀을 듣고서 그가 보이신 것이 육신의 평안이 아니라 육신을 드리고 사용하고 소비하여 영이신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 자신의 존재 목적임을 알고 살아가는 삶이 될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성경은 사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하셨다는 말씀이, 하나님께서 인생을 사랑하신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지으신 분이시기에 인생의 온전한 의미를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의 사랑도 서로에게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같은 행위라도 의미 있는 이들 사이에선 사랑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추행이나 범죄가 되기도 하는 것이 그 때문입니다. 그것은 모든 존재하는 것에게 그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보다 더 귀하고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것이야말로 유일한 사랑의 의미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랑 안에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미 있는 존재로 만드시고 또 그 의미를 알게 하시기 위하여 그 의가 육신이 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그와 같이 육신을 가진 모든 이들이 그것을 보고 자신의 존재 목적을 알게 하신 것이 하나님 사랑의 뿌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 안에서 예정되었다고 하는 것 역시 우리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으로 예정된 존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또한 거룩함이라고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니 목적대로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두 종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생명이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바로 이것에 기초를 둔 것입니다.

거룩함이란 구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흠이 없다는 것은 삶의 행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것에 흠이 없는 존재인지 아닌지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그 목적 안에 있어 하나님께서 생명 있는 자로 보는 사람이 거룩한 자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곧 우리를 지으신 그 목적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그 예정하심 안에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우리가 존재의 목적을 알게 된 것이므로 그것이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이 되는 것이며, 그 사랑 안에, 또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구분된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나타내시려고 지은 그 목적을 자기 삶의 목적으로 인도하시는 것이 예정된 것이고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며, 그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기쁨이 되며 우리 인생들은 자신의 존재 목적을 알고 살게 되는 영광과 감사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 5월 25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에베소서 2:1∼22
♦ 묵상을 위한 주제 : 하나님의 선물(8절)
♦ 성구 :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For it is by grace you have been saved, through faith and this not from yourselves, it is the gift of God.    

성경에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단어가 5번 소개 됩니다(전 3:13, 5:19, 요 4:10, 행 8:20, 엡 2:8).
성경에 소개된 ‘하나님의 선물’의 내용을 두 가지로 정리하면 “구원”과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선물”은 “어떤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받은 것” 즉 “공짜로 얻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원은 선물입니다(에베소서 2:8).
죄인이 자유를 얻으려면 반드시 죄의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2천 년 전에 나를 위하여 죄의 대가를 지불하셨다는 것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말씀은 선물입니다(요한복음 1:1).
하나님의 말씀은 선물입니다.
말씀(케리그마)에는 육체로 계시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기록된 말씀이신 성경 그리고 교회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으로 구분합니다.

매주일 선포되는 말씀을 듣고 성도들이 한 주간 동안 세상에 나가 영적 싸움을 할 때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막중한 책임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성도들은 주일마다 듣는 그 말씀을 위하여 기도하며 협력할 뿐만 아니라 설교자는 거룩한 부담감을 갖고 말씀을 준비하는 일에 게으름이 없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이 마음에 각인되며 각인된 그 말씀이 매일의 삶의 현장에서 순간순간 중요한 결정을 바르게 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이 되기를 소망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주 예수 크신 사랑

https://www.youtube.com/watch?v=xO0X1Qv51-U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이런 교회에 나가고 싶다!

미국 미주리(Missouri)주 어느 시골 마을에 있는 작은 미용실에 그날따라 많은 손님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손님들마다 하나같이 삭발을 요청했습니다.
미용사는 사연이 궁금했습니다.
이들은 그 마을의 50여명이 출석하는 어느 작은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이었습니다.
미용사는 처음엔 이상한 ‘광신도’들인가 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특별한 사연이 있었습니다.
그 교회에 여자 중학생이 있었는데 암수술을 받고 항암치료까지 마쳤지만 교회를 나오지 않자 목사님과 몇몇 성도가 심방을 갔다고 합니다.
머리를 짧게 밀어 삭발을 해서 부끄러워서 외출을 못 한다는 소녀의 사정을 듣게 된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교회에 돌아와 성도들과 의논한 결과 끝에 교인들이 모두 삭발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사연을 듣고 감동한 미용사는 방송국에 연락을 했습니다.
여학생에게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 주자고 의견을 모으고 이와 같은 작은 교회가 계획하고 있는 작은 사랑의 이벤트의 내용이 그 소녀의 엄마에게도 전달이 되었습니다.
주일날, 그 소녀의 엄마는 소녀를 간곡히 설득하여 모자를 씌워 교회로 데리고 나왔습니다.
방송국에서 취재차 나온 한 기자가 미리 교회에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엄마와 함께 교회에 나온 그 여학생은 교회 문을 연 순간, 50여명의 까까머리 교인들의 모습을 발견하고 소녀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모자를 벗어야 되나 하고 잠시 망설이던 소녀는 결국 모자를 벗었습니다.

중계하던 기자가 이 광경을 보고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하지만 언젠가 내가 교회를 나간다면 이런 교회에 나가고 싶습니다.”

방송을 보던 많은 사람들도 감동의 눈물을 닦았습니다.
불신자인 리포터가 “교회에 나간다면 이런 교회에 나가고 싶다”라고 말한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감동을 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 감동을 받습니까?
성도들이 예수님처럼 살아갈 때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지만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늘나라의 모든 영광을 다 내려놓고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들, 병든 자들, 그리고 연약한 자들을 위해서 자신의 특권을 내려놓으시고 그들과 함께 하시다가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셨습니다.

오늘 한국교회와 성도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처럼 세상의 탐심을 내려놓고 마음을 비우고 서로를 돕는 모습일 것입니다.
그럴 때에 교회가 살 뿐 아니라, “나도 저 교회에 가고 싶다”라는 감동이 있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감동의 꽃을 피웁니다.
감동은 마음의 문을 여는 열쇠이기도 합니다.
사랑과 감동은 바위 같은 마음도 녹이는 활활 타는 용광로가 되고 빙산 같은 마음도 녹이는 따스한 봄바람이 됩니다.
우리가 출석하는 교회에 이런 사랑과 감동이 그립습니다.
이것이 다른 사람을 돌아보는 마음입니다.
우리 교회를 이런 교회로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모두가 감동하는 사랑이 있는 교회로 만들기 위해 내가 먼저 머리를 깎는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흠모하는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좋은 소문이 난 교회일 것입니다.
교회는 여러 가지로 소문이 날 수 있습니다.
교인이 많이 모이는 교회라는 소문, 돈이 많은 교회라는 소문, 유명한 사람이 많은 교회라는 소문, 성전이 큰 교회라는 소문 등등,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좋은 소문은 《믿음이 좋은 교회》라는 소문일 것입니다.

믿음 보다 더 좋은 소문은 없는 줄로 압니다.
왜냐하면 다른 것이 다 좋아도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구동성으로 “나도 이런 교회 에 다니고 싶다”는 고백이 나오는 그런 믿음으로 소문난 교회가 많아지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집니다.

교회의 위기는 곧 세상의 위기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위기로 인하여 이미 세상은 위기의 위험 수위가 더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합니다.
세상이 교회를 비난하는 소리로만 들립니까?
아닙니다.
이미 세상은 무너져 버렸다는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마지막 희망은 교회인데 교회마저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공자와 예수의 차이

공자가 말하기를 군자는 사람을 쓸 때에

1. 먼 곳에 심부름을 시켜 그 충성을 보고,
2. 가까이 두고 써서 그 공경을 보며,
3. 번거로운 일을 시켜 그 재능을 보고,
4. 뜻밖의 질문을 던져 그 지혜를 보며,
5. 급한 약속을 하여 그 신용을 보고,
6. 재물을 맡겨 그 어짐을 보며,
7. 술에 취하게 하여 그 절도를 보며,
8. 위급한 일을 알리어 그 절개를 보고,
9. 남녀를 섞어 있게하여 그 이성에 대한 자세를 보는 것이다.

이 아홉가지 결과를 종합해 놓고 보면 사람을 바로 알아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게 우리는 공자님 밑에서 일하긴 다 틀렸어요.
그러나 다혈질과 배신자 베드로를 부르시고,
자신을 믿는 자를 핍박하고,
죽이는 일에 앞장 섰던 바울을 부르신 주님의 기준이라면 우리는 희망이 있지 않나요?

링컨의 유머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존경받고 있는 Abraham Lincoln은 또한 가장 조크를 잘하는 대통령으로 손꼽히고 있다. 링컨은 정적을 공격할 때도 조크를 했다.

링컨이 젊은 시절 하원의원으로 출마했다.

정견발표회에서 그의 라이벌 후보는 링컨이 신앙심이 별로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하고 나서 청중을 향해

(여러분, 천당에 가고싶은 분들은 손을 들어보세요)라고 소리쳤다.

물론 모두들 높히 손을 들었으나 링컨만은 손을 들지 않았다.

그러자 그 후보는 링컨을 향해
(미스터 링컨, 당신은 손을 들지 않았는데, 그럼 지옥으로 가고싶다는 말이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링컨 후보는 빙긋이 웃으며 (천만에요. 나는 지금 천당도, 지옥도 가고싶지 않소. 나는 국회로 가고싶소!)라고 응수해서 청중의 폭소를 자아냈다.


링컨의 신앙생활 십계명

1.나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예배 생활에 힘쓸 것입니다.

2.나는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매일 매일 읽고 묵상하며 그 말씀을 실천 할 것입니다.

3.나는 도움을 베풀어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께 날마다 겸손히 기도 할것입니다.

4.나는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 뜻에 순종 할 것입니다.

5.나는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 할 것입니다.

6.나는 연약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 할 것입니다.

7.나는 하나님만을 높여 드리고 그분께만 영광을 올려 드릴 것입니다.

8.나는 하나님 안에서 우리 모두는 자유하며 평등 하다고 믿습니다.

9.나는 형제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실천 할 것입니다.

10.나는 이 땅위에 하나님의 진리와 공의가 실현 되도록 기도 할 것입니다.







성경적인 교회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교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진정한 교회는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참으로 누추하고 보잘 것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귀중하고 사랑스러우며 높은 평가를 받는다.
제사장 아론은 성전에 나올 때, 장식품을 걸친 화려한 외모로 향기를 풍기며 영광스럽게 나타났으나, 그리스도는 가장 천하고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다."

점차 대형화되고 있는 현대 교회가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건물의 크기와 화려함으로 자신들의 교세를 과시하려는 것입니다.
이미 일부 대형화된 교회들은 자기들 위주의 공동체 모임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도와 주는 것은 좋아하지만, 그들이 자신의 공동체에 들어오는 것은 꺼려합니다.
교회가 너무 깨끗하고 화려해서 남루한 옷차림의 가난한 사람들이 어울리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모습을 입으면서까지 낮아지셨던 주님의 사랑을 돌이켜보면서, 화려한 교회 건물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가려지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합니다.

교인들만의 교회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교회가 되게 하소서.


좋은 교회

작은 시골 마을에서 이발사로 일을 하던 사람이 복권에 당첨이 되어 화려하고 큰 도시로 이사하여 더 큰 이발소를 차렸습니다.
작은 시골 마을에서 교회에 출석하던 사람이 그 마을을 떠나므로 환송회를 열고 축복하였다.
그런데 얼마 후 작은 시골 마을로 다시 돌아왔다.
도대체 왜 시골 마을로 돌아왔을까?
마을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하여 질문하였다.
그러자 그 사람은 도시는 크고 화려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예배하는 큰 교회가 있는 것 같았으나 그 안에서는 더 좋은 직장과 직업과 학식을 갖춘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다고 하였다.
나와 같은 이발사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고 합니다.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사귐이 있는 시골의 작은 교회가 그리워서 다시 돌아왔다고 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를 비판하고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
왜 교회를 비판하고 반대하는 것일까?
교회 안에 들어와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파리의 유명한 에펠탑을 건립하려고 할 때 많은 지성인들이 에펠탑 건립을 반대하였다.
그 이유는 파리 시내의 철구조물이 경관을 해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에펠탑이 건립된 후에 많은 지성인들이 에펠탑 카페에 앉아서 차를 마시거나 글을 쓰고 있었다.
한번은 어느 기자가 반대를 주도하던 지성인에게 "그렇게 건립을 반대하였는데 지금은 그 탑에 들어와서 즐기고 있는가?' 라고 질문하였다.
그러자 그 지성인은 "이 탑안에 들어오면 탑이 보이지 않는다!"

교회의 부정적인 것만 보는 사람은 아직 그리스도의 몸 안에 들어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베소서를 읽어가며 교회의 본질을 성경적으로 이해하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사랑할 수 있는 믿음을 굳건하게 유지하기를 소망합니다.

♦ 5월 24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에베소서 1:1∼23
♦ 묵상을 위한 주제 : 신령한 복(3절)
♦ 성구 :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Praise be to the God and Father of our Lord Jesus Christ, who has blessed us in the heavenly realms with every spiritual blessing in Christ.

“신령한 복(spiritual blessing)”

신령한이란 헬라어는 "프뉴마티코스(pnĕumati-kŏs. πνευματικός)"라고 합니다.
'프뉴마티코스'란 " 신령한(롬 1:11, 벧전 2:5)" "영적인(고전 2:13, 엡 6:12)" 이란 뜻입니다.

복이란 헬라어는 "유로기아(ĕulŏgia. εὐλογία)"
'유로기아'는 "찬양" "아름다운 말" "축복" 이란 뜻으로 성경에서는 "축복(고전 10:16, 히 12:17), 아첨(롬 16:18), 연보(고후 9:5), 복(롬15:29, 갈 3:14, 엡 1:3, 벧전 3:9), 찬송(계 5:12,13, 7:12)"이란 용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에베소서를 “교회론”에 관한 말씀으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합니다.

1장에서는 영적 소유(1:3)
2장에서는 영적 위치(2:5∼6)
3장에서는 영적 공동체(3:10)
4장에서는 영적 교제(4:3)
5장에서는 영적 생활(5:18)
6장에서는 영적 승리(6:13)   


사람들이 갈망하는 복은 대부분 육신적인 것들입니다.
그러나 에베소서에서 강조하는 복은 ‘신령한 복’을 말씀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를 현실의 삶에서 누릴 수 있는 물질적인 축복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물질적인 것으로 오해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의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을 알리지 않으면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복음이 들어와 우리가 예수를 믿는 오늘날에도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아주 적은 지식으로 추측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마치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한 만큼 우리의 필요를 들어주는 존재로 생각하고 교회를 찾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잘못된 교회 지도자들이 성도들의 무지한 심리를 이용하여 축복이란 말을 내세워 사람들의 혼을 휘어잡고 노예로 삼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하나님의 “신령한 복”은 하나님을 아는 매우 중요한 지식입니다.

‘신령한 복’이란 곧 “영적인 복”을 말합니다.
영적인 복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을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과정을 소개합니다.

1. 예정과 선택(4절)
2. 하나님의 양자됨(5절)
3. 용서와 구속(7절)
4. 지혜와 총명(8절)
5. 그리스도와의 연합(9∼10절) 
6. 하나님의 기업(11∼12절)
7. 성령의 인 치심(13∼14절)

신령한 복을 누리려면 성령의 간섭이 끊임없이 따라와야 합니다.
날마다 성령 충만을 간구하며 하나님을 닮아가는 일에 선봉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나의 영원하신 기업

https://www.youtube.com/watch?v=OLzMCrEgl0o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동양의 고전 『서경(書經)』은 정치학 교과서에 해당되는 책이다.
『서경』 「홍범」편에 인간이 향유하는 다섯가지 복을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이라고 하였다.
오복(五福) 중 첫번째는 장수하는 것(壽)이고, 두번째는 재산이 넉넉한 것(富), 다음으로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한 것(康寧), 덕을 좋아하는 것(攸好德),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명대로 살다가 죽을 때 편안히 돌아가는 것(考終命)을 들고 있다.
이 가운데 치아가 양호한 것은 들어있지 않다.
위 다섯 가지는 오행학설에 의하면 차례로 수(水), 화(火), 목(木), 금(金), 토(土)에 해당한다.

동양의 옛 글 가운데 서경(書經)은 정치학 교과서에 해당되는 책이다.
서경 「홍범」편에 인간이 향유하는 오복을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이라고 하였다. 

인간의 다섯 가지 복(福)을 말하는데 오복(五福)중에 장수하는 것(壽)을 첫 번째로 들고 있다.
이어서 재산이 넉넉한 것(富),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한 것(康寧), 덕을 좋아하는 것(攸好德),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명대로 살다가 죽을 때 편안히 돌아가는 것(考終命)을 들고 있다.
이 가운데 치아가 양호한 것은 들어있지 않다. 

위 다섯 가지는 오행학설에 의하면 차례로 수(水), 화(火), 목(木), 금(金), 토(土)에 해당한다.

수(壽)는 인간으로서 보편적으로 거쳐야 하는 생애주기를 보장받는 것으로 첫 번째 복이다.
일찍 요절하거나 횡사하게 되면 예비 되어 있는 많은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자는 어진 자는 수(壽)를 누린다고 하였다.

두 번째 부(富)는 부유함으로 아무리 수명이 길어도 가난한 삶은 자신이 원하는 많은 부분을 포기해야 한다.
특히 지금의 자본주의 시대에서는 더욱 그렇다.
재벌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중요하고 필요한 일을 처리하는데 사용되는 재화정도는 지니고 있어야 복이라는 의미이다.

세 번째는 강녕(康寧)인데 한마디로 마음이 편안한 것이다.
아무리 장수하고 돈이 많아도 집안에 자꾸 사고가 생기게 되면 그 또한 고달픈 인생이다. 

네 번째는 유호덕(攸好德)으로 덕을 갖추어야 복이라는 의미이다.
자신이 정립되었으면 남도 생각해서 덕을 베풀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마지막으로 고종명(考終命)이다.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는 사람이 후임자에게 일을 물려주고 퇴임사를 하듯이 총정리를 하고 갈길 가는 것을 복이라고 하였다. 

흔히 한국사람들을 ‘복을 기원한다는 의미’로 기복(祈福)적이라고 자기비하를 하는 경향이 있는데 복은 좋은 것이며, 누구든 복을 소원한다.

『서경』에서는 이 오복을 선량한 백성들이 향유할 수 있게 하라고 하였다.
위에서 말한 오복을 한 문장으로 서술하면 "눈에 보이는 자량인 부와 보이지 않는 자량인 덕을 갖추고 몸 건강히 맘 편히 오래오래 살다가 천명대로 가고 싶다."일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인간욕구의 표현이다.
현대에서 사용하는 복지(福祉)도 '복 복(福)'에 '복 지(祉)'자가 결합된 글자로, 복지사회란 모든 인간들이 위에서 말한 오복을 누리는 사회이다.
유학적으로 풀이하자면 복지사회건설이란 인간들이 오복을 향유할 수 있는 제반 여건과 마음씨를 확산하는 일이 아닐까?



신령한 복


(에베소서1:3) 신령한 복 일곱가지

 

(엡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나는 오늘 이 메시지를 받는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형제자매들의 심령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는 '신령한 복'이 임할 것을 기원합니다. 그러나 먼저 우리는 사도의 입을 통하여 우리에게 임한 '신령한 복'이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에게 '신령한 복'을 주신 이유와 목적은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I. 신령한 복이란?

먼저 '신령한 복'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살펴 보겠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교회가 마치 현실의 삶에 나타나는 물질적인 축복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물질적인 것으로 오해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의 소치입니다.
사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이방의 모든 나라들은 하나님에 대해 무지한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스스로 자신을 알리시지 않으면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또 복음이 들어와 우리가 예수를 믿는 오늘날에도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아주 적은 지식으로 새대가리를 가지고 우주만물을 추측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마치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한 만큼 우리의 필요를 들어주는 존재로 생각하고 교회를 찾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잘못된 교회 지도자들이 성도들의 무지한 심리를 이용하여 축복이란 말을 내세워 사람들의 혼을 휘어잡고 노예로 삼고 있습니다.

'신령한'이란 단어는 원문에는 없는 단어로서 '은사'라는 말을 해석하기에 언어가 부족하기 때문에 보충하여 넣은 단어입니다.
'은사'(카리스마)는 그 어원이 '은혜'(카리스)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임한 '신령한 매력'을 말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후서 1장에서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 하였고 이것은 '너희로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고 역설합니다(벧후1:4).
따라서 '신령한 복'이란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들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성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시 인간을 지으실 때 복주신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본디 인간은 신의 성품대로 지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배반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 육체의 속성을 따라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바울 사도가 말하는 신령한 복 일곱 가지를 살펴 보겠습니다.

1. 예정과 선택(4절)

바울은 4절에서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라고 말하였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택하심'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불과 2000년 전인데 창세전에 우리를 그 안에서 택하셨다는 말씀은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만, 예수님은 창조자로서 처음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이라고 할 때 우리의 택하심이 세상이 생기기 전에 예정된 사실이야 말로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5절에서 바울 사도는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택하심이 누구의 간섭이나 어떤 공적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의 기쁜 뜻과 예정에 의한 것을 설명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요1:13) 증거하였습니다. 이것이 신령한 복 그 첫번째입니다.

 (1) 거룩하게 하심

그러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시고 택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울 사도는 '거룩하고 흠없게 하시려고'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여기서 '거룩'(하기오스)라는 말은 하늘에 속한 언어로서 하나님의 신성과 위엄을 나타내는 말입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셨으므로 거룩함은 그의 자녀들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된 권위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우리를 거룩하기 위해서는 거룩한 자 그의 아들이 오실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2) 흠없이 하심

또 바울은 '흠 없이함'을 언급하였습니다. 이것은 죄인된 인간의 모습, 허물과 범죄를 말한 것입니다. 바울은 '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5:23)하였으며, 베드로 사도는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벧후3:14) 하였습니다. 이 허물들은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온 것이니 이 허물을 없이할 자는 오직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성경은 오직 흠없는 어린양의 피로 우리의 허물을 사함 받았다 증거하였습니다.

2. 하나님의 양자됨(5절)

신령한 복 두번째는 하나님의 양자됨입니다. 바울 사도는 5절에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 고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정하시고 택하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우리의 하나님의 양자됨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어떤 여목사님들이 하나님 어머니를 만들어 내려고 합니다만 성경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이들 밑에서 영혼을 갈취당하는 성도들이야 말로 얼마나 불쌍한 사람들입니까? 이 땅에 아버지 없는 자녀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세우신 인류의 질서이고 가정의 시작입니다. 어느 인류학자는 무능하고 범죄자 아버지라도 함께 사는 자녀는 행복하다고 하였습니다. 아들에게 있어 아버지는 그 삶의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양자의 지식은 아무라도 갖을 수 없고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4:6)하였습니다. 그로므로 바울은 여기서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양자됨을 언급한 것입니다.

 (1) 로마의 양자 법

로마에는 양자가 되는 법이 있어서 양자를 들이기 위해서는 팔고 사는 형식의 법적 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먼저 친 아버지는 두번에 걸쳐 그 아들을 팔고 다시 사야하며, 세번째에는 그를 팔고 사지 않습니다. 그때 앙자를 맞이할 사람이 법정에서 댓가를 지불하고 양자 등록을 합니다.

이렇게 법정 등록이 끝나면 먼저 아버지와 관련된 모든 과거는 무효가 되고 그는 새 아버지의 기업을 물려받을 아들의 위치에 서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의 값을 지불하고 하나님의 양자로 등록된 것입니다.

3. 용서와 구속(7절)

신령한 복의 세번째는 [용서와 구속함]을 받은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7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태어남으로부터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는 죄인된 신분이었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의 범죄로하여 '정녕 죽으리라'는 선고를 받은 죄인의 신분이었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구속은 그의 은혜의 풍성함으로 비롯된 것이라 하였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구속함을 받아 죄없이 함을 입어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은 우리의 행위의 공로나 신분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의 선물이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죄없는 어린양의 피의 제물로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4. 지혜와 총명(8절)

신령한 복의 네번째는 [지혜와 총명]입니다, 바울은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8절)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언급한 지혜(sophia)는 오직 하나님의 영에 속한 지혜로서 하나님의 예정된 계획을 알게 하고 또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또 총명(phronesis)이란 사물을 판단하는 지식과 능력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계획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게하기 위해 지혜와 총명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이 땅에서의 평안한 삶을 영유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주 안에서 평안을 누리기를 원하시며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였노라"(요16:33) 하셨습니다.

5. 그리스도와의 연합(9-10절)

다섯번째의 신령한 복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바울은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9-10절) 하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우리에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신비의 세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육체된 인간과 거룩한 하나님과 도킹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남자와 여자를 지으시고 서로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1) 비밀

바울이 여기서 언급한 '비밀'은 전혀 알 수 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하도록 봉해져 있다가 예정된 날에 홀연히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말씀 속에는 위대한 사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의 것과 땅에 속한 것의 통합입니다.

 처음부터 천지만물은 하나님의 신비에 속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세상은 하늘의 것과 땅의 것으로 분열되었습니다. 다시 말하여 선과 악으로 나누어진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분열된 것이 다시 하나가 되는 신비의 사상을 언급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박히시기전에 제자들과 만찬을 나누시며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요6:56-57)하셨습니다. 이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 것입니다.

 이 신비의 비밀은 계시록 19장에서 끝이납니다. 지금 우리는 이 때를 향한 긴 여행 중에 있는 것입니다. 그날이 오면 그리스도의 신부된 우리는 신랑되신 그리스도와 하나로 연합하게 됩니다. 그날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온전함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2) 경륜

바울은 10절에서 때가 찬 경륜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경륜"(dispensation)으로 번역된 말은 '오이코노미아'(oikonomia)로서 바울은 에베소서에서만 세 번을 사용하였으며 신약에서 19번 사용되었습니다. 바울은 1장10절에서 '때가 찬 경륜'을 말하였고 3장2절에서는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말하였으며, 3장9절에서는 '비밀의 경륜'(kjv- fellowship)을 언급하였습니다.

 바울이 사용한 '경륜'이란 말은 '청지기'('steward' 눅 12:42; 16:11; 3:8; 고전 4:1,2; 딛 1:7; 벧전 4:10)와 '청지기의 직분'(stewardship/눅 16:2,3,4)로 해석되었으며. 또한 나눔과 분배의 직무를 나타내는 '직분'(dispensation/고전 9:17; 엡 1:10; 3:2; 골 1:25)과 '친교' (fellowship/엡 3:9)그리고 '교훈'(edifying/딤전 1:4)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경륜"의 핵심적인 개념은 주인의 집을 관리하고 꾸려나가는 합당한 직무와 그 나타난 결과를 말합니다. 따라서 '경륜'은 어떤 의미로는 인간이 특별히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가에 대한 시험의 때를 의미하지만 분명한 것은 경륜은 청지기의 직분이지 일정한 기간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경륜'은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6. 하나님의 기업(11-12절)

여섯번째의 신령한 복은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이 된 것입니다. 바울은 11절에서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하였습니다. 여기서 기업이란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이은자를 말한 것으로 상속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하나님의 유일한 상속자이십니다. 주께서는 부르신 자들로 하여금 그 기업이 되게 하셨습니다.

 히브리 기자는 기업의 아름다움을 말하여 "저가 천사보다 얼마큼 뛰어남은 저희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셨다"(히1:4) 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 없는 피로 산제사를 드린 것은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히9:15) 기록하였습니다. 또한 바울은 로마서에서 "자녀이면 또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롬8:17)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기업을 물려 받을 자들인 것입니다.

 7. 성령의 인치심(13-14절)

마지막으로 일곱번째의 신령한 복은 [성령의 인치심]입니다. 13절에서 바울은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라고 말하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바울은 여기서 구원의 순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진리의 말씀 복음의 [들음]과 [믿음]과 성령의 [인치심]입니다. 여기서 인(印)이란 하나님의 것으로 도장을 찍은 것입니다. 도장을 찍은 것은 이미 선불금이 치루어지고 소유권 이전이 끝났음을 의미합니다. 에베소는 아시아의 귀한 물품이 로마로 들어 가는 항구였습니다.

 그곳에는 로마 선주들로부터 전권대사를 맡은 하인이 와서 주인이 필요로하는 물건을 사서 돈을 치루고 주인을 상징하는 큰 도장을 찍게 됩니다. 배가 로마에 도착하면 그곳에 나와 있는 하인들은 주인의 인장을 확인하고 물건을 찾아가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예수의 피로 댓가를 치루고 하나님의 성령의 인으로 '인'을 친 사람들입니다.

 II. 신령한 복을 주신 이유

지금까지 우리는 에베소 교회의 성도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신실한 자들에게 주신 신령한 복 일곱 가지를 살펴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산제사로 드리시면서까지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를 살펴 보겠습니다.

 바울은 6절에서 우리를 예정하사 택하시고 양자가 되게 하신 것은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제물로 드리신 구속하신 은혜의 영광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깨우치는 말씀입니다.

 

또 바울은 12절에서 우리를 기업이 되게 하신 이유에 대하여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하심이라'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먼저 신뢰한 자'들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을 말한 것으로 물러나지 않기를 기원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오직 나의 의인은 믿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히10:38)기록하였습니다.

 

또한 바울은 14절에서 우리를 성령으로 인치신 이유를 말하여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하였습니다. 결국 우리를 예정하시고 구속하시고 양자되게 하시고 성령으로 인치신 것은 우리 개인의 삶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을 찬미하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입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외치며 하나님의 영광에 손을 대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미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5:44)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사람과 영광을 나누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위엄이며 오직 찬송받으실 자 거룩하신 자 하나님만의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사람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깊이 살펴보면 사람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하나님 없이 살아온 그 인생은 별로 큰 차이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재산이 남보다 좀 더 있으면 행복해 하고, 없으면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또는 지위가 높으면 남보다 성공했다고 하고, 지위가 낮으면 실패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여정을 지나고 난 후에 뒤돌아 보면 그 모든 것이 바람을 잡은 것처럼 헛되고 헛될 뿐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땅에 속한 모든 복을 가지면 가질수록 더 욕심이 생기고, 사람이 추하게 될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사망에 이르게 될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진정한 복은 어디에 있습니까?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들이 누리게 될 복, 영적인 복, 하늘의 신령한 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3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신령한 복” “하늘에 속한 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신령한 복”이란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은 땅에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영광스럽고 참으로 소중한 복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복은 땅에 속한 육신의 축복이 아니라 바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땅의 복, 세상의 복은 바닷물 같아서 잠시 시원함을 느끼지만 조금 있으면 더욱 심한 갈증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은 그 누가 빼앗아 갈 수도 없고, 환란이나 핍박도 빼앗아갈 수 없고, 환경을 초월하여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가 솟아나며,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광의 주역이 될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에서까지도 누리는 복입니다.

오늘 본문의 역사적 배경이 무엇입니까? 지금 바울이 처한 상태가 어떤 환경입니까? 에베소서는 사도 바울이 1차로 투옥되었던 AD62년 경 로마 감옥에서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에게 써 보낸 서신입니다. 에베소서는 골로새서, 빌립보서, 빌레몬서와 함께 사도 바울의 대표적인 옥중서신입니다. 그는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의 상태입니다. 편히 쉬며, 자유를 누릴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온 몸이 병들고, 늙어서 힘이 없는 상태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도저히 찬송하라고 외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쓴 그의 옥중서신 첫 마디는 원망과 불평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찬송하리로다”였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바울을 가둘 수 있는 감옥은 없음을 말해줍니다. 바울이 이처럼 힘차게 찬송하는 이유는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는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도 크고, 놀랍고, 신비롭고, 환상적인 사건입니다. 그래서 감옥의 고통과 절망, 그에게 다가오는 각종 환란과 핍박도 바울을 더 이상 우울하거나 불안하게 만들 수가 없었고, 가슴속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찬송하리로다고 외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본문의 문맥을 살펴보면 엡1:3-14절은 헬라어 성경에서는 한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문장은 “찬송하리로다”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지만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찬송해야 할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셨다”는 것이 찬송해야 할 이유입니다. 그리고 4-14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 무엇인지를 풀어주고 있습니다. 헬라어 “카도스”라는 단어는 “즉” 다시 말하면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자연스럽게 연결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런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주시는 이유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특히 헬라어 “에이스”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구원받기로 예정하시고 그의 아들로 삼으신 궁극적인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하게 명시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 범죄하였을 때에, 연약하였을 때에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는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거져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왜 찬송하라고 외쳤습니까? 또한 하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 내용을 발견하게 될 때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을 찬송하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삶을 추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교회를 향하여 왜 찬송하리로다는 외칩니까?

바울은 하나님을 향하여 왜 찬송하리로다고 외치고 있습니까? 3절에 보면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누가 주십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은 이 땅의 왕이나 권세자가 줄 수가 없습니다. 돈이나 물질로 살 수도 없습니다. 오직 창조주이신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은혜의 선물로 주실 수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하고 영광스러운 구원의 복입니다. 이 복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만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은 이 구원의 은혜와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큰 복은 예수 믿는 복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복입니다. 예수님을 더욱 알아가고, 더욱 더 믿고 의지하며 사랑하고 순종함으로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이 가장 큰 복입니다. 이것이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입니다.

여기서 “신령한 것”이 무엇입니까? 신령한 것은 본래 땅에 속한 것이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신령한’으로 번역된 단어는 ‘육체적인 것이 아닌’ ‘영적인’으로 번역됩니다. 여기서 “모든 신령한 복” 이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주시는 모든 영적인 축복들을 말합니다. “모든” 이란 온전하고 완전한의 의미로 더 이상 다른 것이 필요 없는 복을 말합니다. 현대인의 성경으로 엡1:3절에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모든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려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찬송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땅에 속한 복이 아니라 하늘의 모든 영적인 복을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영원토록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는 하늘의 신령한 복을 모를 때는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세상에 눈이 어두워서 탐욕과 정욕에 빠져서 죄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늘의 속한 신령한 복을 얻게 되었고, 예수님을 통해서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늘의 속한 신령한 복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늘의 속한 신령한 복을 보는 눈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복을 알지 못하면 사막을 헤메는 이 나그네와 같은 인생을 살아갈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령한 복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이 복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지상적이며 육적인 축복이 아니라 천상적이며 영적인 복입니다. 성도들이 누려야 할 참된 축복은 현세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이 신령한 복이 무엇인지를 알고 누렸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 예수의 종이 되길 자처했습니다. 그리고 이 종으로 충실하기 위해 온갖 어려움과 고난, 시련과 역경, 죽음의 위기도 마다하지 않았고, 마침내 이 때문에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신령한 복을 알고 누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고 부르시며, 우리의 수고와 노고를 인정해 주는 복이 있는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2.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 무엇입니까?

바울이 말하고 있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란 무엇입니까? 첫째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은 속량 곧 죄사함을 받는 복입니다. 4절에 보면 “이는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다는 것은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 의인으로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것입니다. 죄는 나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를 파괴시킵니다. 마치 암세포와 같습니다. 암에 걸리면 방사선 치료, 항암치료를 하면 온 몸이 망가지고 고통스럽습니다. 우리 죄를 용서함 받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입니다. 죄로 인한 영원한 사형선고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면 면할 길이 없습니다. 속량 곧 죄사함 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믿을 때에 받는 신령한 복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죄는 반드시 영원한 사망을 가져옵니다. 죄 사함 받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밖에 없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친히 피를 흘려 우리의 죄악을 씻어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본래 죄가 없어서, 의로워서 용서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 피의 대가로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의 신령한 복을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은 것입니다.

둘째는,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치심”(sealing)의 의미는 무엇보다 소유권(ownership)을 뜻합니다. 우리가 구원의 복음을 듣고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는 순간 성령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소유로 인치셨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도장을 찍으셨다, 혹은 친필 서명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 하나님의 자산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의 모든 인생에 직접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에게 이사야의 말씀처럼 “너는 내 것이라”(사43:1)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보증(earnest)이라는 말은 우리로 하여금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게 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해 주시고, 하나님의 약속의 보증으로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곧 하나님의 후사로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기업에 대한 보증으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셋째는, 우리가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5절에 보면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 아들이 되게 하기 위하여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예정”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프로오리조"(미리 결정하다,예정하다.)입니다. 이 단어는 프로(전에, 앞에)+호리조(결정하다, 지정하다, 정하다)의 합성어입니다. 그래서 한글성경은 "예정"이라고 번역해 놓았는데, 이게 시간과 공간이라는 그런 크로노스적인 차원과 관련이 없는 예정인 것입니다. 이 예정은 하나님의 뜻대로 창세전에 미리 택하여 정하여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구절에서 매우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한글성경이 자주 "양자"라고 번역한 단어인 "휘오데시아" 라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아들삼기, 양자삼기"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단어의 핵심은 “나의 것이 되었다” “아들로 세우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헬라어 "휘오데시아"(아들로 세우다)는 휘오스(아들)+티데미(두다, 세우다)의 합성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우리가 이제는 아들로 세움을 받았고, 그와 한 몸이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즉 우리는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관계가 깨어진 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음으로 우리는 그분의 아들이 되었고, 그의 가족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원히 하나님과 한 몸을 이루는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100% 똑같아야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람들을 만드실때 자신의 형상과 형체대로 사람의 모습을 만드셨고 그 안에는 아버지의 생명과 비슷한 양심이라는 마음을 넣어주셨습니다. 처음으로 신약에서 아들이 된 예수님은 아버지와 생명이 같고, 피가 같고, 형체가 같고, 속성이 같고, 본질이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아들이 되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면 예수님과 같이 생명, 피, 형체, 속성, 본질이 같아야 합니다. 이렇게 된 사람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이 아버지의 창조 목적이자 아버지와 아들이 되는 생명관계가 기독교의 핵심 복음입니다. 롬8:29절을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아무나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우리도 아버지의 생명을 예수와 똑같이 받아야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하나님이 영원히 우리 아버지가 되려고 하면 입술로만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아버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생명을 실제 받아야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는 자가 될 때 하나님의 권세를 누리게 됩니다. 바울은 우리를 죄에서 부르신 목적이 로마서 8장30절에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자신의 기쁘신 뜻대로 창세 전에 미리 뽑아 택정하시고 부르셔서 그 아들(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고 형제중에 맏아들이 되게 하셨으며 그들을 의롭다 여기시고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 속에 들어가 있던 그 아버지의 생명이 그대로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의 생명이 되니까 우리도 100% 예수님과 똑같은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넷째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은 ‘영원한 기업이 되는 복’을 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업이 되는 복”은 영원한 상속을 말합니다.(11절) 재벌들이 자녀들에게 많은 재산 물려주어도 잠깐입니다. 질병이나 고난을 면하게 해주지도 못합니다. 영원한 기쁨이나 감격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상속받은 영원한 하늘나라는 근심도 없고, 눈물도 없고, 이별도 없고, 아픈 것도, 죽음도 없습니다. 성경에서 ‘기업’ 이라는 것은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성도들이 누리게 될 모든 축복을 망라하는 개념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비하신 영원한 집, 영원한 천국이 바로 우리의 영원한 상속을 받을 곳입니다.(요14:3) 이와 같이 놀라운 축복이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입니다. 이 땅의 복이란 모두가 시간이 흐르면 낡아지고, 없어지고, 부패하고, 일시적인 것이지만 하늘의 신령한 복이란 영원합니다. 이 신령한 복은 성부 하나님의 택하심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하심과, 성령 하나님의 구속 적용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복은 땅에 속한 복이 아니고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입니다. 이 구원의 복은 창세 전에 계획된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역사 가운데서 성취되고 입혀지는 것입니다. 이 구원의 복은 영원 과거와 현재와 영원 미래와 관련된 영원한 복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영광의 천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누릴 하늘에 속한 복입니다. 이 신령한 복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이며,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구원의 복이기 때문에 신령한 복이라 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주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바르게 인식하고 감사하고 찬송하는 성도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3.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율법의 저주와 죄에서 구원해 주시고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주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6절에 보면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져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여기서 “그의 은혜의 영광”이 무엇입니까? 본문의 내용적으로는 ‘은혜의 영광’이란 번역이 잘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3-6절은 은혜가 무엇인지를 먼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6절의 전반절에 보면 그 은혜가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은혜가 일반적인 것을 넘어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은혜를 말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시는 일반적 은혜를 넘어 “우리”에게만 주시는 특별한 은혜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사랑하시는 자”안에서 주어져서 이제 우리도 ‘사랑하시는 자’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 특별한 은혜가 바로 ‘영광스러운 은혜’이며 이 은혜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 안에 설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은혜를 깨닫는 것, 내가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체험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무엇을 찬양해야 합니까? 첫째, 성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환란과 풍파에 시달린다고 하더라도 창세전부터 이미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계획하신 성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생각하며 그분을 찬양해야 합니다. 둘째,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구원을 완성하신 성자 예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창세 전에 성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하늘 영광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분이 바로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구원은 결코 값싼 것이 아닙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피흘려주신 대가로 얻은 것입니다. 주님의 보혈이 없었다면 우리의 죄는 그 어떤 것으로도 씻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보혈만이 우리를 정결케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구원을 우리로 누리게 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를 찬양해야 합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13절) 성령님이 오셔서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듣는 사람들에게 인치시는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령으로 인치셨다는 말씀은 우리가 얻을 기업의 확실한 보증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적용시키시는 일을 왜 하십니까? 역시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14절)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해야 할까요? 우리가 “하나님이 거져 주시는 은혜” 가운데서 그의 영광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은혜 가운데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찬양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 받은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며, 찬양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자신의 욕망이나 욕심을 추구하는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게 거룩하게 사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마태복음 5:16절을 보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은혜를 입은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을 추구하고, 그리스도의 보혈 가운데 거하면 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것입니다. 또한 그 모습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 16:18)라고 하셨습니다. 지상에 세워지는 교회를 가리켜 예수님은 "내 교회"라고 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행20:28)라고도 하시어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바로 교회의 주인 되심의 근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교회의 창설자이시며 주인이십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교회론의 원리에 불과하고 구체적으로 교회란 어떤 기관이고, 바른 교회관이 왜 필요한가에 대하여는 확실한 답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기록한 많은 서신들은 각기 특색이 있습니다. 로마서는 구원의 도리에 대하여 기록하였고, 에베소서는 교회론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는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첫 번째 부분은 교회론이고(엡 1:-3:), 두 번째 부분은 바른 교회관에 입각한 실천 생활(엡 4:-6:)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에서 1절과 2절은 서신을 시작하는 인사이고, 3절-6절은 성부 하나님이 내리시는 신령한 복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성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신령한 복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신령한 복이 교회의 기초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오늘 확실하게 마음에 담아 두시기를 바랍니다.

신령한 복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엡 1:3).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신령한 복이란 무엇입니까? 신령이란 낱말의 어원은 헬라어로 인데 이 말은 성령 혹은 영이란 뜻입니다. 이 낱말에서 "신령한"이란 말 가 나왔습니다. 따라서 신령한 복이란 근본적으로 성령을 통하여 우리 영에 주시는 영적인 복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구약의 축복과 비교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구약의 복은 현실적이고 물질적이고 일시적인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가나안의 복도 영적으로 해석하면 하늘의 기업의 복이지만 근본은 현세적인 복입니다. 신약의 복은 영적인 것이며 영원한 것으로써 이것은 성도가 가지고 있는 부활의 소망, 혹은 천국에서 누리는 기업, 영원불멸의 약속 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구약의 복은 이 세상에서 누리는 것인 반면 신약에서 말씀하고 있는 복은 하늘에서 누리는 심령한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복은 꼭 하늘에서만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성도들이 영적으로 누리는 것도 있습니다. 완악하고 교만하여 하나님을 믿지 않던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 드리는 순간 우리 모두는 죄의 용서를 받고 마음의 평안과 자유함을 얻게 되는 것은 현세에서 성도가 누리는 신령한 복입니다. 이런 평안과 자유함은 성도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이 세상에서 누리는 하늘의 신령한 복입니다. 이런 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예정의 출발점

우리 교회에 등록하신 분들은 타 교회에서 장로가 되었던지, 안수집사가 되었던지, 권사가 되었던지 아니면 생전 처음 교회에 나오셨던지 과거를 묻지 않고 모두 새 가정 모임에 참석하여야 합니다. 이 모임에서 처음으로 강의되는 것은 구원언약입니다. 이 구원언약은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는 하나님의 예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셨고 예정하셨습니다. 이 예정과 선택은 칼빈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신학사상인데, 예정과 선택을 근간으로 삼는 기초는 "하나님이 참으로 하나님이 되시려면 그는 절대주권자이어야 하고 그런 분은 전지 전능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분은 당연히 미래를 설계하실 수 있는데 그의 설계가 바로 예정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정과 선택의 출발입니다.

예정이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완전하심을 전제하지만 또 하나의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인간의 완전타락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인간이 완전 타락하여 절대적으로 무능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무능이란 문명을 발달시켜서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활동이 무능해 졌다는 뜻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무능해 졌다는 것을 의미하고, 더욱이 절대적인 선 곧 하나님 앞에서까지 선하여 자신을 당당하게 구원하게 하는 선을 행하기에 부적절한 존재가 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을 고백하는 행위는 나의 무능을 고백하는 것이고, 그분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며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을 의미하는 행위입니다.

이 예정론을 처음으로 체계화한 사람은 어거스틴인데 그도 자신의 경험에 의하여 이 교리를 확립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학문을 통하여 진리를 발견하기를 바랬으나 그 속에 자신이 요구하는 진리가 없었습니다. 그는 종교를 통하여 진리를 발견하려고 마니교에 입교하였으나 역시 실패합니다. 그는 방탕과 육신의 향락을 통하여 인생의 삶의 의미를 찾아보려고 하였지만 그것도 허무한 것임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고민하고 있던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히게 되면서 말씀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까? 이것은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이 아니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는 바울과 같은 신앙 고백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인데 이것은 내가 잘하고 노력한 결과가 아니라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전 15:10)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결국 그는 사도 바울의 신앙에 동의하면서 예정과 선택을 체계화하게 된 것입니다.

예정이 왜 복인가?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이 말씀에는 예정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되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한 시기인데 "창세 전에"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전에 이루어 진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다윗은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의 붙드신 바 되었으며 내 어미 배에서 주의 취하여 내신 바 되었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시 71:6)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아시고 구원하시려고 예정하셨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고, 찬송할 수밖에 없는 크나 큰 복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복이 되는 이유 두 번째는 선택의 목적인데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장로교인들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즉 구원은 하나님의 예정으로 얻는 것이고 삶은 관계가 없으니 흐트러진 생활을 하여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고 믿는 감리교인이나 천주교인들보다도 오히려 더 못한 삶의 자세를 가지는 것이 장로교인들의 태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정은 거룩과 성화의 삶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런 목적을 알고 이에 부합하도록 살아야 합니다. 성경 말씀을 소개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택의 이유와 목적을 분명히 하십시다. 그리고 그 앞에 거룩하고 흠 없게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는 예정의 주체입니다. 우리를 예정하셨는데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셨다"(엡 1:5)는 것입니다. 그의 사랑 안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이것을 만족하게 여기고 있다는 뜻입니다.

노아시대의 사람들을 보시는 하나님의 시각은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과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창 6:5-6)하셨다고 하였고, 사울 왕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사건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그를 버리셨을 뿐 아니라 "여호와께서는 사울로 이스라엘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삼상 15:35)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사람 만든 것을 한탄도 하시고, 사울을 왕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도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유독 여러분과 나를 선택하신 일에는 후회가 없으실 뿐 아니라 만족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정이 복이고 감사입니다. 성경 말씀을 한 곳 소개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11:29).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시고 후회하시는 것이 아니라 만족해하십니다. 이 말씀을 믿으시고 아멘으로 받고 감사와 찬송으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네 번째로 하나님의 예정이 복이 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이 되게"(엡 1:5) 하시려고 그리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정의 내용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하늘의 기업을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선언하시는 말씀입니다. 지옥에 떨어져 영원한 저주와 고통을 받아야 할 우리가 구원을 받고 하늘의 기업을 누리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더 할 나위 없는 복입니다.

다섯 번째로 예정과 선택이 복이 되는 이유는 이런 모든 은혜를 거저 주시기 때문입니다(엡 1:6). 만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대가를 요구하셨다면 어느 누가 그에게 대가를 지불할 수 있겠습니까? 돈으로 대가를 지불할 수 있겠습니까? 선한 행위로 대가를 지불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그 대가를 계산한다면 92년 대선 자금보다도 더 많은 돈을 드려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 나라의 영광을 누릴 자격을 얻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대가를 요구받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하셨다"(딛 3:5)고 하였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제시한 조건을 충족시킨 것에 대한 보상이 아닙니다. 아무런 값을 요구하지도 않고 거저 주셨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은혜이며 하나님이 주시는 복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맺는 말

이런 은혜를 받고 있는 우리가 해야할 의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은혜를 찬양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요구이기도 합니다.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6).

둘째는 이런 예정과 선택을 믿었으면 이것을 우리의 삶의 현장에 적용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작정에는 우리의 구원에 대한 것과 일반적인 삶에 대한 것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전지하시고 전능하시어 우리를 선택하셨다면 그분의 작정이 어찌 구원에만 해당되겠습니까?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현장에도 그의 작정은 적용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만남을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가 예수님과의 만남만이 예정과 선택으로 되었습니까? 부부의 만남은 어떠합니까? 친구의 만남, 직장과의 만남, 스승과 제자의 만남은 우연이겠습니까? 더욱이 교회와의 만남,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와 목사와의 만남이나 성도 상호간의 만남은 모두 우연이겠습니까? 불신자와의 만남은 어떠합니까?

저는 여러분이 이런 모든 만남이 모두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 언제인지 아십니까? 예배를 마치고 인사를 할 때입니다. 우연히 만났다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내 옆자리에 앉은 성도를 만나게 하셨구나 생각한다면 어찌 인사하는 것이 그리도 희미하고 소극적일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예정과 작정의 섭리 안에서 여러분 모두의 만남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선물

오래전 2005년 3월 11일자 국민일보 겨자씨 란에 아름다운 희생의 이야기가 나와 있었습니다.
이탈리아 여기자 ‘줄리아나 스그레나’는 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에서 활동하던 종군 기자였습니다.
이라크 전쟁이 발발하자 이 기자는 단신으로 이라크에 들어가서 취재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무장단체에 의해서 납치되었습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이탈리아 정부는 비밀요원을 보내 이라크 무장단체와 협상을 벌였고, 마침내 이 여기자는 극적으로 구출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구출 이후, 비밀요원과 여기자가 바그다드 공항으로 오는 도중에 일어났습니다.
미군들이 오인하여 여기자가 탄 차에 총격을 가했던 것입니다.
비밀요원 한 명이 죽고, 두 명은 부상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줄리아나 스그레나는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한 비밀요원이 그 여인을 감싸 안았기 때문입니다.
총알이 비 오듯 쏟아질 때, 비밀요원 ‘리콜라 칼리파리’는 조국의 언론을 자기 가슴에 얼싸안았습니다.
총알은 그의 등에 박혔습니다.
결국 그는 죽었고, 여기자는 살아남았습니다.
이 여기자는 귀국한 후 기자 회견장에서 이렇게 말하면서 울먹였습니다.
“나는 그의 거룩한 죽음을 내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이 죽음은 나를 위한 죽음이구나.’
‘이 죽음으로 나를 살렸구나.’라고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 느낌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어요?
그 느낌을 어떻게 지울 수가 있겠어요?

1.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2.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믿음의 고백이 중요한 이유는?

1.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에베소서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선물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엇을 해야 한다면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선물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머니들은 자식들에게 이런 말을 잘 합니다.

“너 이번 시험에 학급에서 1등하면 선물로 자전거 사줄게.”
그래서 자식이 공부를 열심히 하여 학급에서 1등을 했습니다.
자전거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여러분, 엄밀한 의미에서 자전거가 선물일까요 아니면 노력한 대가일까요?
선물이 아니지요.
그것은 자식이 밤잠 안자고 노력한 대가일 뿐입니다.
선물이란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만, 아무 공로도 없지만 주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구원이 바로 그런 선물이란 말씀입니다.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러므로 구원을 받기 위해 무슨 공로를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감사하게 받으면 됩니다.
그러면 왜 구원이 선물이 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구원은 나의 의로움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근본적으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물이라고 합니다.

바울 사도가 구원의 진리를 가르치는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선포합니다(로마서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누구의 의’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우리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 인해 구원받기 때문에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통해 이뤄졌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다 이루었다”였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은 헬라어로 ‘테텔레스타이’입니다.
그 의미는 물건 값을 다 치렀다는 것입니다.
세금 고지서를 받았다면 세금을 다 지불했다는 것이고, 빚을 진 것이 있다면 그 빚을 다 갚았다는 것입니다.
죄인이었다면 받을 형벌을 다 받았다는 것입니다.
지불이 완료되었으므로 더 이상 지불할 것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모든 대가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지불하셨다는 것, 이것이 신앙의 기초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보면서 그렇게 감격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의 의미를 깨닫게 해 주는 몇몇의 사건들이 구약성경에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출애굽기에 나오는 유월절 사건입니다.
그 때 살아나기 위해서는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 안에 들어가 있어야 했습니다.

출애굽기 12:23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지나가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설주의 피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에게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여호와께서 무엇을 보시면 넘어가신다고 했습니까?
‘문 인방과 설주의 피를 보시면’
문 인방과 설주에 피가 있는 집 안에 강도가 있었으면 그는 구원받았을까요, 받지 못했을까요?

구원받았지요!
문 인방과 설주에 피가 있는 집 안에 살인자가 있었으면 그는 구원받았을까요, 받지 못했을까요?
구원받았지요!
왜냐하면 구원받는 것은 집안에 있는 사람의 의 때문이 아니라 피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문인방과 문설주에 피가 있는 집 바깥에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선한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구원받았을까요, 받지 못했을까요?
못 받았지요!
왜냐하면 구원받지 못한 것은 그 사람이 악했기 때문이 아니라 피가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양의 피였습니다.
피는 생명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어제나 이제나 우리가 구원을 받으려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을 받으려면 지은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런데 죄의 문제는, 대충 말로 때워 넘어갈 수 있는 그런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죄는 생명을 바쳐야 해결되는 엄중한 것입니다.
생명은 생명을 바쳐야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어린 양이 죽어야 했습니다.
어린 양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의 모형이지요.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그의 생명을 버리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신 것입니다.

생명은 생명을 바쳐야만 얻을 수 있다는 예를 들어보지요.

1941년도 6월 31일 폴란드의 아우슈비츠에서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히틀러는 폴란드에 포로수용소를 건설해 놓고 수많은 유태인들을 죽였습니다.
그때 유태인만 죽인 것이 아니고 폴란드 사람들도 많이 죽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으로 죽기 살기로 탈출했습니다.
탈출이 계속되자 포로수용소에는 규칙이 만들어졌습니다.
그것은 한 사람이 탈출했을 때 그 캠프에 남아 있는 사람 열 명을 죽인다는 것이었습니다.

서로 서로 감시해서 탈출을 못하도록 한 규칙이지요.

어느 날, 요란스럽게 사이렌이 울리고 모든 사람들이 운동장에 모였습니다.

한 사람이 탈출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남아있는 사람 중에서 열 명이 죽어야 했습니다.

사람들을 일 열로 세웠습니다.

수용소 소장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다가와,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지으면서 죽을 사람을 지적했습니다.

“너, 너, 너, 너, 너, 너, …….”

그러다 소장이 ‘프란시스 게요니첵’이란 사람을 가리키며 “너!”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그만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불쌍한 아내와 아이들, 이제 내가 죽으면 어떡하나’

너무나 안타까운 모습에, 동그란 안경을 쓴, 키가 작달만한 사람이 한걸음 나와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신부입니다. 저는 아내도 없고 아이도 없습니다. 제가 저 사람 대신 죽겠으니 대신 끌어가십시오. 저가 죽으면 한 사람이 죽는 것이지만 저 사람이 죽으면 일곱 사람이 죽는 것입니다.”

소장은 입을 삐죽거리면서 “그렇게 죽는 게 소원이라면 그렇게 해주지!”라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맥시밀란 콜베’라는 신부였고, 결국 그는 사십칠 세의 나이로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사십 년이 지난 후인 1982년 10월 12일, 로마 교황청에서는 이 신부의 죽음을 기리기 위하여 다시 한 번 장례식을 거행했습니다.

성 베드로 광장에 십오만 명이 모여서 성대한 장례식을 가졌는데, 그 장례식에는 프란시스 게요니첵의 아내와 아이들, 손자와 손녀들이 모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떨리는 목소리로 이와 같이 고백했습니다.

“이 분의 죽음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었습니다.”

얼마나 고맙고 감사했겠어요?

지금 우리는 똑같은 고백을 주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나에게 생명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주의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사탄의 참소입니다.

사탄은 오늘도 우리를 이렇게 공격해옵니다.

“아무개 장로야, 권사야, 집사야, 너 기독교인 맞니? 너 그 따위로 예수 믿어서 구원받겠니? 너 거짓말했잖아? 너 기도도 안했잖아? 너 미워했잖아? 그렇지?

이 때 내 자신의 의로 사탄에 대항해서는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나 같은 죄인이 어디 있다고.......감히 전도를 해.......”

이럴 때 사탄에게 속으면 안 됩니다.

즉시 우리의 관심을 나 자신과 내 죄로부터 십자가로 돌려야 합니다.

사탄이 “너 이런 죄 지었지?”하면서 공격하면, “그래, 그게 사실이다. 나는 죄를 지었다. 그러나!”라고 대답하십시오.

영어 문장에서 But(그러나)이 나오면 그 이후의 이야기가 진짜입니다.

“But(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나의 모든 죄에 대한 벌을 받으셨으므로 나는 더 이상 그 죄와 상관이 없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탄아 물러가라.”

이렇게 고백하는 순간 마귀는 슬그머니 물러가게 됩니다.

내 의를 내세우면 사탄이 집요하게 공격해오지만 십자가를 내세우면 사탄이 도망갑니다.

하나님의 의로 막아야 합니다.

 

D.L. 무디에게 한 청년이 와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지은 죄를 다 회개했습니다. 그런데도 한 가지 죄가 잊어지지 않고 계속 기억나서 괴롭습니다. 이 죄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자 무디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자네, 예수 믿는 사람 맞는가?”

“네 맞습니다.”

“그럼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자네의 모든 죄가 용서함 받았다는 것을 믿는가?”

“예, 믿지요.”

그 때 무디가 버럭 화를 내며 호통을 쳤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잊으신 죄를 왜 자네가 기억하고 있는가? 예수님께서 이미 용서하셨다는데 왜 용서가 안 되었다고 생각하는가?”

이런 태도는 십자가의 공로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십자가의 보혈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하나님의 의를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제야 청년은 그 호통을 듣고 “정말 그러네요.”하고 돌아갔습니다.

 

복음성가- 갈보리 십자가

 

2.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왜 믿음의 고백이 중요합니까?

롬10:10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받으리라.”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받으리라.’

왜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구원받는 데에 있어서 그렇게 중요합니까?

여러분, 대답해보세요.

결혼할 때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흰 드레스? 예물? 수많은 하객?

어떤 의미로 그런 것은 없어도 됩니다.

결혼식의 핵심은 ‘고백’, 사랑의 고백입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남편으로 맞이하겠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아내로 맞이하겠습니다.”

바로 그 고백이 결혼식의 핵심입니다.

이것이 핵심이 아니라면 그 결혼은 잘못된 결혼입니다.

고백하는 순간은 짧습니다.

그러나 그 고백의 효과는 생명을 다하는 순간까지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한다는 그 고백은 순간적입니다.

그러나 그 고백의 효과는 영원합니다.

그날에 주님께서 “너, 그때 나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했지.......” “너 그때에 나를 주인으로 모신다고 했지.......”하시면서 빙그레 웃으실 것입니다.

 

목회 현장에서 이 고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많이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늦게 믿은 할머니가 한 분 계셨습니다.

그 할머니가 앓아누운 지 오래지 않아 임종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본인도 그렇고 가족들이 보기에도 할머니가 믿는다고 하기에는 좀 부족하고, 그렇다고 믿지 않는다고 하기에도 어정쩡한 그런 상태였습니다.

임종예배를 드리러 가보니 할머니의 얼굴이 흙빛이었습니다.

불안한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는 게 분명했습니다.

건강했다고 죽을 때 얼굴이 환한 것은 아닙니다.

병약했다고 죽을 때 얼굴이 어두운 것은 아닙니다.

할머니의 손을 붙들고 귀에다 입을 갔다대고 따라 고백하도록 했습니다.

“주 예수님, 나는 주님을 믿고 싶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내 죄 값을 담당하시니 감사합니다.

지금 나는 내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합니다.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영생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나를 다스려주시고, 나를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기도가 끝나는 순간 기적을 보았습니다.

흙빛이었던 할머니 얼굴이 환하게 빛나는 게 아닙니까?

기억하십시오.

“확신이 생겨서 고백하는 것이 아니고, 고백하고 나면 확신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함께 고백합시다.

오늘 처음 나오신 분도 따라하시고, 오랫동안 믿는 우리 교우들도 따라하세요.

10년, 20년을 신앙생활 했지만 대충 믿었을 뿐 제대로 입으로 시인하지 못한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주 예수님, 나는 주님을 믿고 싶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내 죄 값을 담당하시니 감사합니다.

지금 나는 내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합니다.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영생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나를 다스려주시고, 나를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어린이들에게 부모나 산타한테서 어떤 선물을 받고 싶은지 물었습니다. 게임기, 책, 휴대폰이라고 답했습니다. 예수님께 받고 싶은 선물을 물었더니 1위로 은혜, 성령, 사랑, 지혜 등 성령의 열매를 꼽았고, 2위로 부모님의 건강과 가정의 화목을 꼽았습니다. 한 기독교 신문이 보도한 내용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께 어떤 선물을 받고 싶습니까. 사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특별한 선물을 이미 주셨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단어가 5번 나옵니다.

특히 전도서 3장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11절에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13절에서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신학적으로는 누구에게나 주시는 ‘보편적 선물’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인류에게 또 다른 특별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이 한 여인에게 물을 달라 하십니다. 여인은 “어찌 유태인이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 하느냐”고 말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라고 설명합니다. 인류 최고의 선물은 하나님의 아들,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구원받고 영원한 삶을 보장받았습니다. 이 땅에서 살면서 날마다 그분으로부터 지혜와 능력을 받아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분으로부터 받은 능력과 축복을 이웃에게 베풀며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은 또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했습니다. 바로 말씀입니다. 최고의 선물인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 즉 성경을 통해 만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인류에게 주신, 예수님 다음으로 특별한 선물인 것입니다.

초대교회, 종교개혁, 청교도, 일제시대 등을 돌아보면 참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이 시대의 특징은 성도들이 하나님 말씀을 직접 읽고, 묵상하고, 암송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며 경건한 삶, 능력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의 실상은 어떻습니까. 성도들의 70%가 1주일에 단 한 장도 성경을 읽지 않습니다. 35%는 아예 성경의 한 글자도 읽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매일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선물인 성경을 통해 정말 특별한 선물인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필자는 매일 성경 읽기 운동을 벌이는 국제선교단체 ‘원바디’에서 사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읽기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들도 매일 성경을 읽어 하나님께서 주신 복된 삶을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예정하신 뜻

바울 사도는 예정이란 하나님께서 사람이라는 정체성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가지신 뜻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기 위한 것”(엡 1:4)이라고 말씀한 것에서부터 에베소서 1장의 말씀들에서 더 확정이 됩니다.
물론 이 확정은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서 온전한 유일신으로 섬길 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택하시는 예정은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것이라는 분명한 선언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정체성이 하나의 ‘의’며 그 ‘의’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예정하심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예정은 a man을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 the Christ라는 정체성을 예정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생명을 가진 사람은 그 안에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은 교회라는 공간적 울타리에 있다거나 아니면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같은 생명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집에 있는 사과나 마트에 진열된 사과나 모두 사과 안에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진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시고 그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보이시고 그것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순종할지 말지에 대하여 사람에게 선택권을 주셨습니다.
선악과를 아예 먹지 못하게 만드시지 않은 것도 그 때문입니다.
우리가 전에는 죽은 자였는데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가 된다는 것도 그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자기 안에 없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는 죽은 자지만 성경 말씀을 듣고 사고할 수 있는 육신은 살아 있는 상태인 것은 오직 그 육신의 기능으로 하나님의 의를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두신 것입니다.

금은방에 있는 시계가 멈춰 있지만 주인에 의하여 선택이 되어 시각을 맞추면 그 때부터 시각을 알려주는 시계가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주인이 정해지기 전에는 시계로서 온전하나 아직 존재의 목적으로 볼 때는 죽은 것이다가 주인이 정해지면서 그 목적 안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 바로 목적 안에서 생명을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사람의 육신이 살아서 기능을 발휘하는 그 기간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이신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자기 운명으로 순종할 수 있도록 주신 삶의 기간일 뿐인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뜻, 곧 인생의 목적을 자기의 것으로 선택할 수 있도록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그 예정하신 뜻을 보이신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 그 말씀을 듣고서 그가 보이신 것이 육신의 평안이 아니라 육신을 드리고 사용하고 소비하여 영이신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 자신의 존재 목적임을 알고 살아가는 삶이 될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성경은 사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하셨다는 말씀이, 하나님께서 인생을 사랑하신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지으신 분이시기에 인생의 온전한 의미를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의 사랑도 서로에게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같은 행위라도 의미 있는 이들 사이에선 사랑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추행이나 범죄가 되기도 하는 것이 그 때문입니다.
그것은 모든 존재하는 것에게 그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보다 더 귀하고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것이야말로 유일한 사랑의 의미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사랑 안에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미 있는 존재로 만드시고 또 그 의미를 알게 하시기 위하여 그 의가 육신이 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그와 같이 육신을 가진 모든 이들이 그것을 보고 자신의 존재 목적을 알게 하신 것이 하나님 사랑의 뿌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 안에서 예정되었다고 하는 것 역시 우리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으로 예정된 존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니 목적대로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두 종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생명이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바로 이것에 기초를 둔 것입니다.

거룩함이라는 것은 먼지도 묻지 않은 것이 아니라 구분되는 것입니다.
흠이 없다는 것도 형식이나 육신의 삶의 행위가 어떠함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 정체성이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것에 흠이 없는 존재인지 아닌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그 목적 안에 있어 하나님께서 생명이 있는 자로 보는 사람이 거룩한 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곧 우리를 지으신 그 목적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그 예정하심 안에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우리가 존재의 목적을 알게 된 것이므로 그것이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이 되는 것이며, 그 사랑 안에, 또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구분된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나타내시려고 지은 그 목적을 자기 삶의 목적으로 인도하시는 것이 예정된 것이고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며, 그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기쁨이 되며 우리 인생들은 자신의 존재 목적을 알고 살게 되는 영광과 감사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

 

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설교>

 

11절을 보면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고 말씀하는데 예정하셨다는 말은 이미 1:5,9,11절에서 언급된 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셔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들이 되게 하셨고,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받은 모든 것 까지 하나님이 예정하심으로 되어진 일임을 증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예정에 대해 의문을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먼저는 인간의 구원이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 이미 작정되었다면 예정되지 못한 사람은 예수를 믿어도 결국 구원될 수 없는 불합리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고, 반면에 예정된 사람은 신앙생활의 여부와 상관없이 어쨌든 구원을 받게 된다는 불합리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리고 구원이 예정에 의한 것이라면 인간이 방종으로 흘러갈 위험이 크다는 것도 예정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는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 안에서는 인간의 책임과 열심 등이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정에 대한 내용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만약 구원이 하나님의 예정이 아니라 순전히 인간의 마음과 의지에 달린 문제라면 인간은 그 어떤 소망도 없는 영원한 어둠의 끔찍한 상태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선언처럼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인간의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거짓되고 부패한 마음으로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고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거짓되고 부패한 마음의 인간이 선택하는 것은 언제나 자기중심에서 자신에게 유익되는 것으로 향할 뿐입니다. 이러한 인간이 자기 허물을 깨닫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스스로 선택할 리가 만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의 여부를 우리의 판단과 결정에 맡기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시고 의로우신 계획에 의해 우리를 택하시고 예정하시고 부르시는 방법으로 행하시는 것보다 크고 확실한 은혜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에 우리의 공로는 개입될 수 없는 것이고 오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만의 영역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미 결정된 구원이고 어떤 경우에도 번복되지 않는 확실한 구원이니 우리 마음대로 살아가도 되는 것일까요?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일을 여전히 자기중심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정이라는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면 결코 그러한 생각으로 흘러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예정에서 우리가 확실하게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와 사랑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거룩한 자가 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여실히 증거되었습니다. 신자는 그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예정으로 인해 신자를 하나님의 은혜에 붙들어 놓으시고 평생을 감사의 길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일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높이고 찬송하게 하심으로 영광 받고자 하시는 것이 예정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예정을 인간의 구원에 초점을 두고 이해하는 것은 예정의 참된 뜻을 알지 못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정에 대한 또 하나의 잘못된 이해는 우리의 인생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까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대학 입학, 취업, 결혼 등등 모든 일들이 이미 예정된 가운데서 일어나는 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입학할 대학까지 하나님이 이미 정해 놓으셨고 취업할 회사나 결혼할 대상까지 하나님이 이미 예정하신 상태에서 되어지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습니다. 하지만 섭리와 예정은 다릅니다. 예정이 이미 작정되어진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라면 섭리는 그 뜻과 계획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다스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이 세우신 예정 안에서 허락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때문에 신자는 모든 사람을 자기의 생각을 따라 살아가되 모든 삶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주어지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즉 먹든지 마시든지 주를 위해서 해야 하는 것이 신자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십니다. 하지만 그 예정의 뜻은 우리의 구원을 향해 있지 않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정의 뜻은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거짓되고 부패한 심령이 되어 그 어떤 말씀으로도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마음을 돌이키지 않을 인간을 창세전에 택하시고 예정하셔서 부르시는 모든 이유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감사하고 그 은혜를 높이는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는 것으로 집중되어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방향이 아니라 모든 삶에서 영광이 찬송이 되게 하는 방향으로 역사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정 안에서 택함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 일에 있어서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그 어떤 인간이라 할지라도 기어코 불러내시고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부름 받은 신자로 하여금 하게 하시는 것은 나 같은 자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은혜에 눈이 열리게 하시고 감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 굴복하여 자신의 모든 힘을 내려놓고 온전히 하나님의 행하심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의 말씀은 늘 우리의 허물을 드러내심으로 우리가 보지 못하는 죄를 보고 깨닫게 하시고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어진 은혜임을 자각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지금의 교회는 우리의 구원에 내포되어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외면한 채 자기 구원과 복에만 집중해 버립니다. 그리고 자기 실천과 열심을 통해서 구원을 확인하게 함으로써 결국 자기 공로를 내세우는 헛된 길로 나아가게 하는 중대한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인간의 죄를 강조하고 하나님의 은혜에만 초점을 맞추면 신앙의 방종으로 나아가게 된다고 말합니다. 과연 그들이 생각하는 신앙의 방종은 무엇일까요? 교회 일을 등한시하고 십일조를 하지 않고 기도와 성경읽기도 하지 않는 것일까요? 만약 그러한 것이 신앙의 방종이라면 사도들이 방종으로 나아가지 않도록 그러한 실천에 열심을 낼 것을 가르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그러한 문제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신앙의 본질적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방종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외면하고 내 인생에 도움 되는 실용적인 신앙을 추구해 버리는 것입니다. 가령 자기 뜻과 욕구 충족을 위해 기도하고, 신앙을 자신의 복을 위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들이 신앙의 방종입니다.

 

 

그러고 보면 본질적으로 인간은 늘 방종으로 흘러갑니다. 방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인간은 없습니다. 여러분 스스로에게 하나님을 위해 뭘 하고 있는지 물어 보십시오.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여전히 사랑의 관계에 붙들어 놓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대신해 예수님을 저주에 밀어 넣으실 만큼 우리는 가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백번 천번 생각해도 지옥이 마땅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무엇으로도 이 사랑을 끊을 수가 없다고 하십니다. 신자는 이 같은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해 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사랑을 깨닫게 된 신자는 사랑에 의해 살게 됩니다. 자신을 보기보다는 하나님을 사랑을 바라보며 그 사랑에 따라 움직이게 됩니다. 사랑이 능력이 되어 신자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된 관계로 모이는 성도를 사랑하게 되고 타인의 허물에서 나의 허물을 보면서 비판보다는 용서와 사랑에 의한 권면을 하게 됩니다.

 

 

 세상의 것으로 자신을 채우고자 욕망까지 다스려지면서 주의 소유가 되어 주의 영광을 높이는 신자 됨에 뜻을 두고 주를 찾고 그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예정으로 말미암아 부름 받고 예정의 의미를 바르게 깨달은 신자입니다.

 


예정론이란 무엇인가?


로마서 8장 29-30절은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말합니다. 에베소서 1장 5절과 11절은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도다”라고 선언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정론에 대해 강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정론은 성경에 부합하는 교리입니다. 핵심은 예정론이 성경적으로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성경에서 “예정되었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말 (프르리조)는 “사전에 결정하다”, “미리 명하다”, “미리 정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정은 하나님께서 어떤 일이 발생할 것을 미리 정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미리 정하셨을 까요? 로마서 8장 29-30절에 따르면, 하나님은 어떤 개인들이 그분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고, 부르심을 받고, 의롭게 되고, 영화롭게 되는 것을 미리 정하셨습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어떤 개인들이 구원을 받도록 미리 정하십니다. 많은 성경 구절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미리 택함을 받았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마 24:22, 31; 막 13:20, 27; 롬 8:33, 9:11, 11:5-7, 28; 엡 1:11; 골 3:12; 살전 1:4; 딤전 5:21; 딤후 2:10; 딛 1:1; 벧전 1:1-2, 2:9; 벧후 1:10). 예정론은 하나님이 그분의 주권으로 어떤 개인들을 구원받도록 택하신다는 성경적 교리입니다.

예정론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반대는 그것이 불공평하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어떤 특정한 사람들만 선택하시는 것입니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중요한 사실은 아무도 구원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는 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지었고(롬 3:23), 모두 영원한 형벌을 받아 마땅합니다(롬 6:23).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지옥에서 영원히 보내게 하셔도 이는 완벽하게 공의로운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중에 몇몇 사람들을 구원하기로 선택하십니다. 이때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불공평하신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받아 마땅한 처우를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기로 하셨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불공평한 분이 되실 수는 없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으로부터 뭔가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아무 것도 받지 못한 사람이라도 따질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20명의 군중 속에서 다섯 명에게 무작위로 돈을 거저 준다고 합시다. 돈을 받지 못한 15명의 사람들이 화를 낼까요? 아마도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화를 낼 권리가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럴 권리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돈을 거저 준 그 사람은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단지 몇몇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기로 결정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를 택하신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믿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손상시키는 것이 아닙니까? 성경은 우리가 선택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요 3:16; 롬 10:9-10). 성경은 결코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믿는 그 누구라도 거부하시거나 그분을 찾는 그 어느 누구라도 외면하시는 일이 없다고 언급합니다(신 4:29). 어떻게든, 예정론은 하나님의 신비 가운데 하나님에 의해 이끌려 지고(요 6:44) 구원받기 위해 믿는(롬 1:16) 사람들과 밀접하게 역사합니다. 하나님은 구원 받을 자를 예정하시고,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 그리스도를 선택해야 합니다. 두 사실은 동등한 진리입니다. 로마서 11장 33절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라고 선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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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 서신이란 무엇인가?
 

에베소서 6:20.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문제.
옥중에서 쓴 것처럼 보이는 바울의 편지는 어디서 무슨 목적으로 어떤 순서로 기록되었는가?


해석.


1. 바울은 10년 동안에 걸친 제 1차, 2차, 3차전도 여행을 끝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편견과 핍박과 투옥이었다.

성전에서 폭도들에게 붙잡힌 바울은 천부장 루이사와 로마 군인들의 출동으로 겨우 목숨을 건진다.
사도행전 22장에서, 피투성이의 바울은 층대 위에 서서 그를 죽이려하는 백성들에게 간증적인 설교를 한다.
23장에서는 산헤드린 공회 앞에 불려가서 자기를 변명한다.
24장은 총독 빌릭스 앞에서, 25장은 총독 베스도 앞에서, 26장은 헤롯 대왕의 증손자요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아들인 헤롯 아그립바 2세 앞에서 자서전적 간증을 한다.
그러나 2년이나 기다려도 석방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바울은 로마 시민의 마지막 권리를 사용하여 황제에게 호소하기를 결심한다.


사도행전 27장과 28장에서 바울은 드디어 로마로 출발한다.
그가 평소에 늘 복음 전파를 위해 가고 싶어 하던 것을 죄수의 모습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알 길이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바울 일행은 바울과, 누가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 였으며,
총 276명의 죄수와 군인들 그리고 선원들이 승선한 (27:37)아드라뭇데노 배는 순풍에 돚을 달고 로마로 출발하였다. 율리오는 바울 일행에게 천절 하였다.
그것은 아마도 바울에게 호감을 가졌던 베스도의 배려였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 일행은 큰 풍랑을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긴다.
배를 버리고 상륙한 멜리데 섬에서 겨울을 난후 드리어 평생을 가고 싶어 하던 로마에 도착한다.
환호성 속에 영접 받는 사도로서가 아니라 감시받는 죄수로서 로마에 도착했다.
압비오와 삼관까지 마중 나온 형제들은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셋집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살면서 2년 동안 열심히 복음을 전파한다.

그러면서 4권의 서신, 즉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기록하였다.
이 네 권의 책을 바울의 옥중서신이라고 부른다.

 

2. 옥중서신 중 바울이 제일 먼저 쓴 편지는 골로새서이다.

골로새서는 이단 문제에 시달린 골로새와 그 주변교회가 그들의 지도자인 에바브라를 로마의 감옥에 있는 바울에게 파견하여 그의 지도를 구하자 바울이 써서 보낸 편지이다.
골로새 교인들을 괴롭힌 이단 문제는 주로 그리스도론에 관한문제이다.
바울은 여기서 모든 문제의 해결책으로 그리스도를 제시한다.
골로새는 에베소에서 동쪽으로 400리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인구가 많고 번화한 도시였다.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직접 세운 교회는 아니었지만 간접 설립자라고 볼 수 있다.
바울은 에베소를 중심으로 온 아시아에 3년 동안이나 복음을 전하였기 때문에 각 교회의 지도자들은 다 그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었다.(행19:10).
에바브라는 바울의 제자로 골로새 교회를 개척하였고 골로새뿐만 아니라 라오디게아와 히에라풀리스 등 근방 교회의 개척에 선구자였다.


골로새 교인들을 괴롭힌 이단의 정체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영지주의자, 혹은 이교의 철학자들, 철학적 사고방식을 가진 유대인들, 에세네의 금욕주의자들 등이 추측할 수 있는 이단들이지만 확실히 파악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그들이 “세상의 초등학문”(2:8)을 가르치고 천사를 숭배하며(2:18), 금욕주의자(2:21)인 것을 보아 당시 교회들을 괴롭힌 원시 영지주의(Proto-Gnosticism)의 일파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모든 것의 해답을 찾는다.
그리고 그 내용을 적은 골로새서를 두기고 에게 주면서 동시에 소아시아의 모교회인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교회론을 적은 편지와
자기에게 피신해 있는 골로새 교회 빌레몬의 노예 오네시모를 받아주기를 간청하는 편지도 같이 보낸다.
 
3. 골로새 교회의 이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골로새서를 쓴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장로인 빌레몬에게 극히 개인적인 편지를 써서 골로새서와 함께 보낸다.

그때 마침 골로새의 빌레몬 장로 집에서 도망쳐 온 한 노예가 그리스도인이 되어 바울을 시중들고 있었다.
바울은 이 노예 오네시모를 옛 주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그를 용서하여 주기를 탄원하고 있다.
그러므로 빌레몬서는 주인에게서 도망친 한 노예를 위한 바울의 탄원을 담은 극히 개인적인 서신이다.
웅대한 신학을 담은 그의 다른 서신과 좋은 대조를 이루지만 빌레몬서는 바울의 교리와 신학을 뒷받침하는 그의 인격과 사랑을 잘 나타내고 있다.

도망친 일개 노예를 형제로 대접하면서 그가 용서받도록 하기 위하여 참을성 있게 간곡히 허락을 구하는 바울의 모습은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비천한 노예 문제를 다루는 이 서신에서 우리는 고귀한 인간 정신의 승리와 인간 바울의 참 모습을 본다.

4. 에베소서는 바울의 옥중서신 중 세 번째로 쓴 책일 것이다.

로마로 바울을 찾아온 골로새 교회의 장로 에바브라가 골로새 교회의 문제들을 바울에게 고하였고
골로새 교회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바울이 쓴 편지를 두기고가 가지고 아시아로 가는 길에 빌레몬서와 에베소서도 전달하도록 에베소서를 기록하였다.
에베소서의 수신자는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이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 때 3년이나 머물면서 눈물로 목양한 교회이다(행20:17~35).
에베소서의 주제는 교회론이다(행20:17~35).
에베소는 소아시아 여러 교회들의 중심이었고 어머니 교회였다.
따라서 에베소 교인들은 올바르고 건전한 교회 관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장엄한 찬송과 명상으로 시작하는 에베소서는 예수 안에서의 새로운 삶을 집중적으로 조명했으며 기독교 교회관의 내용들과 새로운 의미를 제시했다.

기록 연대와 목적은 다음과 같다.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있을 때 골로새 교회의 에바브라가 찾아와 골로새 교회의 긴급한 문제들을 상의하고 바울의 지도를 구했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을 권면하는 편지를 써서 두기고 편에 보내면서 에베소와 빌레몬서도 같이 기록하여 보냈다.
물론 빌레몬의 종 오내시모도 이때 주인에게 돌려보내졌다. AD 61~63년경 바울이 오마의 감옥에 있을 때였다.
문제를 가지고 바울에게 의논하러 왔던 에바브라는 오네시모 대신 바울을 돕느라고 골로새로 돌아가지 못했다.

5. 빌립보서는 바울의 옥중서신 중 제일 나중에 쓰여진 편지서이다(AD61~63).

복음이 온 시위대 안에 전파되었다는 말이 그것을 증명한다(1:13).
옥중서신 중 다른 편지서들(에베소서,골로새서,빌레몬서)은 두기고가 가지고 소아시아에 가서 전달했으나 빌립보서는 빌립보 교회가 바울에게 파견한 에바브로디도가 직접 전달하였다(빌2:25).
로마에 온 에바브로디도는 죽을병이 들었고 그의 병은 바울과 빌립보 교회를 근심하게 하였으나(빌2:26).
하나님의 은혜로 이제 병이 나아 빌립보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세운 유럽의 첫 성이다.
빌립보에서 바울은 자주 장사 루디아를 만나 회집시켰으며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을 만나 그를 치료해 주었기 때문에 많이 맞고 감옥에 갇혔으며 거기서 만난 간수를 구원하였다.(사도행전 16장을 자세히 읽을 것).
그런 특별한 인연 때문인지 빌립보 교회는 바울을 특별히 사랑하여 그의 쓸 것들을 공급하고 감옥에 있을 때는 그의 옥바라지를 도맡았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그런 정성을 감사히 여겨 그의 편지에서 여러 번 그것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고후11:9,빌4:16).


빌립보서의 특징
 
첫째로 기쁨과 감사의 편지라는 것이다(1:3,4,18,25; 2:17,18; 3:1; 4:4,10,18).

성경의 어느책, 바울 편지서의 어떤 책보다도 기쁨과 감사에 대해 많이 언급하고 있다.
감옥에서 쓰여진 편지가 기쁨과 감사에 넘친다는 것은 바울의 믿음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가를 잘 드러내고 있다.
 
둘째로 에베소서와 골로새서가 교리적인 데 비하여 빌립보서는 실천적이고 간증 적이다.

물론 빌립보서에도 교리적인 부분이 있지만(빌2:6~11) 일반적으로 권면과 간증으로 이루어진 책이다.
따라서 일견 비조직적인 글로 보이기도 하지만 빌립보 교회와 그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따뜻한 감사가 절절히 배어 있는 편지서이다.

요약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네 권의 책을 바울의 옥종서신이라 부른다.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있을 때 골로새 교회의 장로 에바브라가 골로새 교회의 이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로마로 바울을 찾아왔다.
바울은 즉시로 펜을 들어 골로새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쓰면서 아울러 골로새 교회의 장로인 빌레몬에게서 도망친 그의 종을 용서하라는 편지도 썼다.
편지를 가지고 가는 두기고가 분명히 에베소 항구에 들를 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3년 동안이나 목회했던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도 같이 써서,
빌립보에서 파견되어 바울을 돕다가 죽을병에 걸렸었지만 이제 완쾌되어 돌아가는 에바브로디도 편에 보냈다.

 








































요한복음. 요한일서, 이서, 삼서



소명(召命, calling)과 사명(使命, mission)

소명이라는 말은 ‘왕이나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사명에로의 부름’을 의미하는 말로서 영어로는‘Calling’이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임금의 부름을 받은 신하는 임금의 소명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부르는 자의 권위가 지대 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소명을 받는 자는 그 부름을 거역할 수 없었다.
소명에는 그저 순종만 있을 뿐이다.
임금이 일꾼을 부를 때나, 신이신 하나님이 일꾼을 불러서 맡기는 일들은 국가적인 일이거나 신적인 과업이기 때문에 그 중요성이 대단하기 때문이다.

사명은 어떤 책무를 맡은자(혹은 소명을 받은 자)가 당연히 가져야 할 자연스러운 의무나 책임을 의미합니다.
당연히 해야만 할 어떤 과업이라는 뜻입니다.
사명을 영어로는‘Mission’이라고 합니다.

소명은 부름이고, 사명은 소명 받은 자의 과업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소명 없이 사명 없고, 사명감이 없는 자는 당연히 소명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독교인을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택한 자, 혹은 하나님의 부름 받은 자라고 합니다.
교회를 헬라어로 에클레시아(Ekklesia)라고 하는데, 이 말은‘부르다’, ‘불러내다’는 뜻입니다.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의 품으로, 죄악으로부터 영생으로, 마귀의 자녀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냈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기독교인은 소명을 받은 자들이며 각기 개별적인 교회라고도 말할 수 있다.

고린도전서 4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자기들을 포함한 모든 기독교인은, 마땅히 사명을 지닌 일꾼으로 여겨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일꾼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 즉 소명을 받은 자들에게는 오직 충성뿐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모든 기독교인은 누구나 소명을 받은 자들이며, 그들에게는 각기 중대한 사명이 맡겨져 있습니다.
목사나 선교사에게만 한정 된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됩니다.
일반적으로 목사나 선교사와 같이 구별된 직분자들에게는 소명과 사명을 요구하고 확인하는 일을 하지만, 그 외의 그리스도인들(자신들을 포함하여)에게는 전혀 관계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저 눈에 띄는 일에 부름 받은 사람들을 위한 들러리나 조역, 이들의 사역을 보고 받고 즐기는 관객이나, 혹은 심한 경우에는 그들을 평가하는 자의 자리에 앉고 싶어하는 것이다.
잘못된 인식이다. 교회의 질서와 효율성을 위하여 직분이 구분되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소명자이며 사명자들 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확실한 자만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람이며, 이런 사람들이 풍성한 교회만이 건강하게 성장하여 세상을 이기는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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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마리 의미

153이란 수는 충만을 상징하는 수라고 합니다.

153에 대한 의미를 소개합니다.

첫째, 그물은 요한 복음서를 의미하고, 큰 고기 153마리는 요한복음에 소개된 153개 말씀이라고 하는 입장입니다.
둘째, 복음을 전해야 할 사하나님의 사람들 곧 '하나님의 아들들'(The Sons Of God)'을 히브리어 숫자값으로 계산하면 '153'이라고 합니다.
셋째, 수학에서  '트리플 큐브 넘버(Triple Cube Number)'라는 수라고 합니다.
100에서부터 1000 사이에 4개의 수가 있다(153, 370. 371, 407)
트리플 큐브 넘버란 각자리수를 각각 세 제곱해 더한 값이 원래 자신의 수가 나오는 수를 말합니다.
1의 세제곱(1) + 5의 세제곱(125) + 3의 세제곱(27) = 153
그리고 '153' 은 17번째 정삼각 수 입니다(17 - 1 + 7 = 8)
성경에서 '8'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숫자값 - 888  / 방주에 들어갔던 노아 식구 - 8명)

수학에서 세제곱이란 정육면체(큐브)를 의미하는데 구약에 나오는 성막안의 성소와 지성소가 바로 정육면체입니다.
(솔로몬이 지었던 성전또한 정육면체 입니다)

그곳은 구별된 곳이기 때문에 1년에 한번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구별된 곳' 즉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거룩한 공간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153은 거룩 + 거룩 + 거룩을 뜻합니다.

거룩하고 거룩하고 거룩하다 - '지극히 성스러운 수'
나머지 트리플 큐브넘버들 역시 특별한 수로 성경에 등장합니다.

153 - 베드로가 낚은 물고기 수
370 - 두번째 큰 다윗의 별 10개로 이루어진 정삼각수
371 - 노아가 방주안에 들어가 있던 날짜수
407 - 창세기 1장 1절에서 '그리고' 땅 '을'(베엣)의 숫자값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또한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질서는 곧 수학이고 수학은 과학입니다.

넷째,  퀼리로스153이란 숫자 중 완전수 100은 가득 찬 이방인이고, 50은 모일 수 있는 이스라엘의 나머지 백성이며, 3은 삼위일체의 영광이라고 풀어냈다.

다섯째, 어거스틴에 따르면 153은 ‘1+2+3+4 .. +17’의 합계인데, 이는 율법(10계명)과 은혜(7은사)를 뜻하며,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오기로 감동된 모든 사람들을 나타낸다고 보았다.

여섯째, 제롬은 갈릴리 바다의 모든 종류의 물고기이며, 어느 날엔가 세상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모이게 된다고 해석하였다. 이런 기도문이 전해진다.

주님 저로 하여금 죽는 날 까지 물고기를 잡을 수 있게 하시고,
마지막 날이 찾아와 당신이 던진 그물에 내가 걸렸을 때 바라옵건대 쓸모없는 물고기라 여겨 내던져짐을 당하지 않게 하소서
”.






요한은 왜 153마리라고 정확히 기록했을까?
153의 숫자에 대한 어떤 의미가 있는가?


요한은 '물고기'에 대한 단어를 세 가지로 나누어 표현하였다.

예수님께서 처음 제자들에게 5절에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라고 물으실 때는 '프로스파기온(προσφάγιον)'이라 표현했다.
이것은 빵과 함께 먹는 물고기로서 귀한 손님이 왔을 때 대접하는 '물고기'를 의미한다.

그리고 9절에 기록된 '물고기'는 식사 때 먹는 오프사리온(ὀψάριον)으로 말린 생선을 의미한다.

그러나 6절, 8절, 11절에 기록된 '물고기'는 '익투스(ἰχθύς )'라는 단어릏 사용했다.



'익투스'는 오병이어의 기적에 표현되었던 단어로서 이적에 사용되었던 표현이다.
특히 '익투스'는 '예수스 크리스투스 데오스 휘오스 소조메테'의 앞글자를 묶은 단어이기도 하다.
I : Iesus (예수스 : 예수)
X : Christus (크리스투스 : 그리스도)
θ : Theos (떼오스 : 하나님)
Y : Huios (휘오스 : 아들)
Σ : Sojomete (소조메테 : 구원자)

즉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마태복음 16:18절에 베드로가 고백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의 표현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렇게 해석하기도 한다.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귀한 것이 있느냐?'라고 물으시고,
제자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당신이십니다'라고 대답한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을 낚은 것이다.
그래서일까?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임을 표현하는 암호 기호로 물고기 즉 '익투스'를 사용하였다.
또한 히브리어 '베니 하 엘로힘' 즉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단어들의 알파벳 숫자를 다 더하면 153이 된다고도 한다.
예수님은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그 생선도 함께 드셨다.
결국 그 생선은 예수님 자신을 주신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아가파오)하느냐?"
베드로는 "내가 주를 사랑(필레오)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대답했다.

여기서 예수님은 '사랑'이란 단어를 '아가파오'로 사용하셨다.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하지만 베드로가 사용한 '사랑'은 가족과 형제간의 사랑을 의미하는 '필레오' 였다.
베드로는 차마 '아가파오'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인간적인 이름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 부르셨을 때는 더더욱 '아가파오'라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인 '필레오'라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한번 더 '아가파오'하는지를 물으셨다.
베드로는 여전히 '필레오'로 답해다.
그리고 예수님은 마지막 세 번째 물으실 때 '필레오'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다.
이때 베드로는 '근심'하며 대답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필레오)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베드로가 근심한 이유는, '필레오' 밖에 할 수 없는 연약한 인간의 사랑임을 표현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의식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 표현이 베드로에게 있어서 최선이었다.
예수님은 그 베드로의 표현을 그대로 받아주셨다.
그리고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 양'이란 의미이다.
바로 예수님의 양을 돌보는 목자가 되라는 뜻이였다.
우리가 아는바와 같이 베드로는 평생을 예수님의 양을 돌보는 목자로 살았다.
예수님께서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라고 표현하신 것처럼, 그는 평생을 목자로 증인으로 살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길을 따라간 제자였다.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베드로...
예수님을 버리고 다시 어부로 돌아갔던 베드로...
다시 예수님의 제자로 3년을 함께 살았던 베드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배신했던 베드로...
그러나 결국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순교했던 베드로...
베드로는 우리들의 연약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제자였다.
그러나 그 인간적인 베드로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거룩한 신부로 변해갔는지 우리는 보았다.
이제 주님은 우리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신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는 무엇이라 대답할 것인가?
그렇게 살아갈 자신이 있는가?

필기구를 만드는 M사의 볼펜에는 ‘153’이란 숫자가 상표처럼 새겨져 있다.

누구든 한 번 쯤 의문을 품어 보았음 직하다.
예수님 부활 이후 시몬 베드로를 비롯한 일곱 명의 제자들이 고기잡이에 나섰다.
밤새 헛수고만 거듭한 그들은 날이 샐 무렵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요 21:6). 음성을 듣고 순종했더니 그물 가득 물고기가 잡혔는데, 다행히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요 21:11)다. 잡힌 물고기가 바로 그 ‘153’마리였다.

시몬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을 만난 곳은 게네사렛 호숫가였다(눅 5:1-11).
그 시몬이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만난 곳 역시 처음처럼 같은 디베랴 호수였다(요 21:1-11).
게네사렛과 디베랴는 모두 갈릴리의 다른 이름들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경험한 첫 장면과 마지막으로 겪은 장면은 어찌나 유사한지, 신비하고 놀랍다.
베드로는 똑 같은 상황이 자신에게 반복되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데자뷔 현상을 연상시킨다.

성경에서 그물은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비유한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물은 백성을 취하고, 보호하는 선한 수단이었다.
그물은 예수님을 따른 첫 제자들의 직업과 남은 자들의 장차 사도직과 관련되었다.
물고기를 잡는 그물은 이제 영적인 그물로 바뀐다.
대표적인 보기가 천국비유이다.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마 13:47).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전하며 ‘그물’을 빗대신다. 그물 안에는 물고기로 가득 차지만, 어부는 취사선택을 하여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려낸다.
 
그물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사역 그 자체이다.
열 두 사도에 대한 공통된 이미지는 그물로, 사람을 낚는 영적 어부를 뜻한다.
또 찢어지지 않는 그물은 교회를 의미하였다.
2세기 말 이후 세례는 낚시 바늘과 그물에 의한 물고기 이미지로 표현되었다.
어부는 세례자이고, 물고기는 세례 받는 자이다.
물고기를 가리키는 헬라어 ‘익투스’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이시다’(Jesus Christos Theou Hyios Soter) 라는 신앙고백의 머리글자 모음이다.

오스트리아 트라운 호숫가에 있는 트라운키르헨 교회의 물고기 잡는 모습을 한 설교단(Fischerkanzel)은 유명하다.
1753년에 제작된 것으로, 고깃배에서 두 사도가 그물을 끌어 올리는 모습을 하고 있다.
로마 교황의 반지에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순히 응답하여 거두어들인 베드로의 풍어(豊漁)가 새겨져 있다. 초대 교부들은 작은 물고기라는 뜻인 ‘피스키쿨리’라고 불렸고, 라틴교회에서는 예수님 자신을 물고기로 상징하여 표현하기도 했다.

갈릴리 어부들은 물고기를 잡는 그물을 버리고, 사람을 구원하려는 영적 그물을 택하였다. ‘인생의 그물’을 버리고, ‘그물의 인생’을 얻은 것이다. 초대교회 교부들은 교회를 뜻하는 그물 안에 가득 잡힌 물고기 153마리를 다양하게 이해하였다.

퀼리로스153이란 숫자 중 완전수 100은 가득 찬 이방인이고, 50은 모일 수 있는 이스라엘의 나머지 백성이며, 3은 삼위일체의 영광이라고 풀어냈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153은 ‘1+2+3+4 .. +17’의 합계인데, 이는 율법(10계명)과 은혜(7은사)를 뜻하며,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오기로 감동된 모든 사람들을 나타낸다고 보았다.

제롬은 갈릴리 바다의 모든 종류의 물고기이며, 어느 날엔가 세상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모이게 된다고 해석하였다.

이런 기도문이 전해진다.

주님 저로 하여금 죽는 날 까지 물고기를 잡을 수 있게 하시고,
마지막 날이 찾아와 당신이 던진 그물에 내가 걸렸을 때 바라옵건대 쓸모없는 물고기라 여겨 내던져짐을 당하지 않게 하소서
”.

누군들 그물의 삶에서 예외일 수 있을까?


153이란 숫자는 볼펜에 붙여진 이름으로 설교자들이 강단에서 설교하기 좋아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볼펜에 붙은 153이라는 숫자에 대해서는 굳이 논할 필요가 없을 듯 하다.
신앙적 이유든 혹은 다른 이유든 사실 그것이 중요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153 이라는 숫자를 마치 마법사가 주문을 외울때 사용하듯 신성하게 받아들이는 일부 목회자들에게는 모나미볼펜에 153이라는 숫자를 붙여준 그의 신앙적 모범이 오히려 독이 되었을 수도 있다.
때로는 좋은 것을 주어도 변질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문제지, 변질될 것을 우려해 좋은 것을 아예 주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 낙원에 주어진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와 같이 말이다.

많은 설교자들이 153에 목을 매는 이유는 성경을 내러티브로 이해하는 대신 마치 전쟁터에서 쪽지에 쓰여진 암호문처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문단을 읽을 때 우리는 그 문단의 전후 관계를 살핀다.
그 글이 쓰여진 시간과 문화적 배경도 살핀다.
이 모든 것은 지극히 상식적이다.

"오빠는 바보야."라는 말을 들을 때 그것이 정말 객관적 사실을 전달하는 정보를 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연인 사이에서 자기의 마음을 몰라주는 상대에 대한 투정인지는 그 문장 하나만으로 알아낼 수 없다. 다시말해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문장의 전후를 보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굳이 신학을 전공하지 않아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굳이 국문학이나 문학, 언어학에 대해 심오한 지식을 갖추지 않아도 상식적으로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신학을 한다는 것은 여기에 더해서 그 글이 쓰여진 당시의 세계관과 지금과는 다른 관점들을 알기 위해서이고, 성경에 쓰여진 언어와 그 언어에 더해진 의미와 상징에 대해서 알기 위함이 기본적인 것이다.

153이라는 숫자에 대해서는 상당히 많은 연구아닌 연구가 있어왔다.

1. 알렉산드리아의 "퀼리로스(Cyril) (혹은 시릴)"는 153이라는 숫자는 세 가지 것으로 되어 있다고 했다.

Cyril은 100이라는 숫자는 완전수를 말하고, 목자의 완전한 양떼의 숫자, 씨앗의 완전한 열매도 100이라고 했다. Cyril에 의하면 100이라는 숫자는 장차 이방인들이 가득 차리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리고 50이라는 숫자는 모일 수 있는 이스라엘의 나머지 백성을 말한다. 3이라는 숫자는 삼위 일체를 나타낸다.

2. 게바(베드로)의 알파벳을 숫자로 계산하면 153이 된다.

튜빙겐학파에게서 나왔다고 한다.

3. 또 하나는 자연계의 물고기의 종류가 153가지 이므로 잡힌 물고기 153마리는 세상 모든 종족을 의미한다고 제롬이 말했다.

4. 어거스틴(Augustine)은 "10은 율법의 숫자이다. 10계명이기 때문이다. 7은 은혜의 숫자이다. 성령의 은사가 7배이기 때문이다. 7+10=17이다. 그리고 153은 1에서 17까지 더한 수의 합계(=1+2+3+...+17)이다. 그러므로 153은 율법과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올 모든 사람을 나타낸다"고 했다.

이 외에도 여러 주장들이 있겠지만 위의 주장들이 과연 타당성이 있고 납득할 만한 것인지에 대해서 상당한 의문을 가져보아야 한다. (참고, 위의 설에 대해서는 자세히 찾아본 것이 아니므로 잘못이 있을 수 있습니다. 혹시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과연 성경은 암호로 가득한 책인가?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고, 그 숨겨진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수수께기 같은 퍼즐을 풀어내야만 하는 책인가? 하나님은 하늘의 비밀을 사람들에게 쉽게 알리지 않기 위해서 153과 같은 암호를 사용해서 그것을 깨달은 사람만이 하늘의 뜻을 알도록 하셨는가?

초창기의 신학이 중세기를 지나면서 신학은 오히려 일반사람들과 동떨이진 길을 걷기 시작했다. 결국 교회는 라틴어를 사용했고, 예배에 참석한 이들은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도 모른채 멍청히 시간만 보내고는 자신의 신앙적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면죄부나 사면서. 종교개혁이 시작되기 전까지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해독이 필요한 암호문을 던져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친히 인간이 되셨고,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셨고, 우리가 알아들을수 있는 언어로 우리에게 말해 주셨다. 하늘의 방언이 아닌 인간의 언어로 말이다.

그것이 내러티브다. 성경은 인간의 역사속에 들어와서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이다. 인디아나 존스가 하늘의 창고에 들어가 숨겨진 이상한 주문이 적힌 책을 훔쳐온 것이 아니란 말이다. 성경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친히 하늘의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인간의 문화속에서, 인간의 말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을 왜 수수께끼로 받아들이는가?

요한복음 20장에서 예수의 부활이 기록된다. 베드로는 비어있는 무덤을 보았고(20:6), 그 후 부활한 예수를 만난다(20:19). 다른 제자들과 함께 베드로는 기뻐했다(20:20). 그 자리에 없었던 것은 도마 뿐이었다(20:24).

그리고 21장의 사건이 기록된다. 21장에 기록된 사건은 앞에 기록된 사건과 관련없이 하늘에서 내려온 계시로 해석해야 하는 그런 사건이 아니다. 물고기 153 마리에 집중해서 내러티브를 놓치고, 이야기의 흐름조차 놓쳐버려서는 곤란하다.

이야기는 이렇게 진행된다. 밤에 고기를 잡으러 간 제자들은 밤새도록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날이 새어갈 무렵, 배에서 멀리 떨어진 뭍에 서 있던 한 사람이 말한다. 고기를 잡았느냐고. 그들은 고기를 못잡았다고 대답했다. 다시 목소리가 들린다. 멀어서 그가 누군지 확인할 수 없었다.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는 소리가 들린다. 그물을 던졌다. 고기가 잡혔다. 많은 고기가 그물에 걸렸다. 어디선가 한번 경험한 적이 있는 사건이다. 맞다. 요한은 깨닫는다. 아, 예전 우리가 처음 주님을 만날 때 그때 바로 이런 상황이었다는 것을(눅5:6). 그래서 요한은 베드로에게 말한다. 주님이라고...

베드로는 기쁜마음에 배가 뭍에 닿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뛰어 내린다. 아니 어쩌면 배는 아직도 많은 물고기때문에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베드로는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건져 올려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바다로 뛰어 들었다.

그물에 가득 든 물고기 153마리, 그리고 그물은 찢어지지 않았다. 신기한 일이다. 이 신기한 일이 예수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상식이다. 거기에 굳이 그 이상의 신비를 첨부하지 않아도 이 일은 그 자체로 충분히 신기한 일이다. 그물에 담긴 153마리의 물고기는 그 자체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요한은 물고기에 대해서 굳이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그 물고기들이 "서로 다른"물고기라고 언급하지도 않는다. 디베랴 바다에 사는 물고기 종류를 언급하지도 않고, 전 세계 어종의 숫자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요한은 베드로와 예수의 만남에 대해서 말한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예수의 질문과 그에 대한 베드로의 답변, 요한은 이것이 부활 후 세번째로 제자들 앞에 나타난 사건이라고 기록한다(21:14). 그 사이에 있는 길지 않은 공백의 시간, 부활한 주님을 만났던 베드로는 기뻤지만 그 기쁨을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아직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 다시금 주님을 만나고자 갈망하고 있었던 베드로의 모습이 아직 배가 뭍에 닿지도 않았는데 물에 뛰어드는 그 성급함 속에서 잘 드러난다. 수영을 해야 하는데 벗은 몸에 주님을 볼수는 없어 겉옷만 걸치고 물에 뛰어든 베드로는 과연 제대로 수영을 하기나 했을까? 당시의 상황을 그려보면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많은 물고기로 힘들어하는 동료들을 두고 혼자 헤엄쳐 주님을 만나러 갔다. 정작 주님은 보고 그 다음에 아마도 베드로는 아차했던것 같다. 많은 물고기때문에 고생하는 동료를 그냥 두고 혼자서 헤엄쳐 왔으니... 배는 고기를 싣지 못한채 그물에 담긴 고기를 그대로 끌고 뭍으로 왔다. 미안해진 베드로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슬슬 배에 돌아가 아직 물속에 있는 그물과 거기 담긴 고기들을 뭍으로 꺼내는 일을 도왔던 것 같다(20:11). 물론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를 위해 기꺼이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고 심부름을 보내셨다(21:10).

조금 다르게 볼수도 있다. 물에 뛰어든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해 헤엄을 쳐가지는 못했을 수도 있다. 조금이라도 배를 빨리 뭍에 대기 위해 물에 뛰어들어 배를 끌고 가려는 모습일 수도 있다.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수를 만났다. 생선을 가져오라는 스승의 말에 가장 먼저 달려가 그물에 담긴 생선을 꺼냈다.

어쨌건 이 모든 것은 예수의 이 말에 담긴 의미를 알려준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21:15)". 바로 조금 전 누구보다 먼저 바다에 뛰어들었던 베드로다. 아마도 베드로는 자신있게 말했을 것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21:15)". 방금 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았느냐는 대답이다. 그런데 같은 질문이 반복된다. 세번째 반복되었을 때 베드로는 이 질문이 심상치 않은 질문임을 깨달았던 것 같다.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21:17)". 그의 대답은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베드로는 근심했고, 그 베드로의 근심의 이유는 예수의 질문에 담긴 무게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의 대답을 들은 예수는 베드로에게 어떻게 베드로가 죽을 것인지를 말한다. 기쁘고, 장난스럽고, 즐거운 추억을 회상할 수 있는 만남이었고 저녁 식사 자리였지만 거기서 예수는 베드로에게 죽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숫자나 상징으로 숨겨진 암호를 풀겠다는 마음으로 성경을 보면 정작 우리의 말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 성경은 인간의 말로 쓰여졌다. 성경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해 말해준다. 어린아이라도 알수 있지만, 어른이라도 속을 수 있다. 성경은 가장 쉬운 말로, 가장 쉬운 논리로, 가장 평이한 일상의 삶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자에게 성경은 하늘의 비밀을 가장 쉬운 말로 풀어서 알려준다. 성경은 암호가 아니다. 쉽게 풀어서 쓴 이야기다.

153 마리의 물고기를 말할때 성경에서 사용된 한 단어가 ιχθυs(익두스)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서로를 알아보기 위해 사용했던 일종의 기호이자 암호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있기에 153 과 ιχθυs에 대한 관심이나 애착이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있었다. 그러한 맥락에서 시릴이나 튀빙겐, 제롬, 어거스틴 등이 말한 것들은 일종의 성경신학적 해석으로서의 가치보다는 교회사적 맥락에서 다루어져야 할 것들이다. 그것을 현대로 가져와 마치 그러한 기호론(기호학)에 입각한 해석이 정해인양 이야기되어서는 안된다. (꼭 공부하랄 때 공부안하고 나중에 이상한 주석책 보면서 이런거 좋아하는 분들이 있다)

물론 성경을 볼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틀림없이 나온다. 영어로 된 소설책을 읽어도 사전을 몇번씩 찾아봐야 한다. 수능준비를 한다면 지문을 이해하기 위해 사전을 뒤적이는 정도의 노력은 필요하다. 성경사전, 기왕이면 제대로 된 것으로 하나나 둘 정도는 갖추어야 한다. 성경사전을 몇번만 들추어보고, 최소한의 상식적인 맥락으로 이해를 하려는 수고를 한다면, 우리는 꽤 괜찮은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 적어도 중세시절, 라틴어를 쓰는 성직자에게 모든 권위를 위임하는 어리석음을 이미 벗어버릴수 있는 환경은 갖추어져 있지 않은가.


요한복음 21장에 나오는 물고기 153마리에 대한 소고 : 기호론에 입각한 암호풀이식 성경해석의 문제, 대안으로서의 내러티브
http://jeliclelim.tistory.com/493
JelicleLim (2011.12.28)


모나미 153이라는 볼펜이 있습니다.

153이라는 숫자는 성경에서 나온 숫자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그물을 배 옆에 던지라고 하여 베드로가 순종하였는데 그 때 잡은 물고기 숫자가 153마리입니다.
신학적으로도 이 숫자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있어왔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시릴이라는 사람은 153이라는 숫자는 세 가지 것으로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100이라는 숫자는 완전수를 말하고, 목자의 완전한 양떼의 숫자, 씨앗의 완전한 열매도 100이라고 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100이라는 숫자는 장차 이방인들이 가득 차리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50이라는 숫자는 이스라엘의 나머지 백성들, 3이라는 숫자는 삼위일체를 나타낸다고 합니다.

그러나 153이라는 숫자에 무슨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여서는 아니 됩니다. 성경의 전후 문맥을 볼 때 153이라는 숫자보다도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잡은 고기,’ ‘큰 고기가 가득했다,’ 그렇게 많은 고기가 잡혔는데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등의 의미가 더욱 중요 합니다.

베드로가 지금 잡은 물고기가 153마리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새언약의 백성을 사방에서 창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는 항상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하는 사역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부활하신 이후에 갈릴리에 부활의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었을까요? 그 제자들이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즉 새언약의 백성들을 창조하는 사역입니다. 주님은 이미 베드로를 택할 때 베드로에게 “이제 너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것이다” 라는 말로 부르셨습니다. 3년이 흘렀습니다. 이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기 위해서 갈릴리 바닷가보다 더 좋은 곳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배 오른쪽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말합니다. 그물을 올리니 큰 고기들이 가득 채워져 옵니다. 153마리나 되었습니다. 종류가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종류의 고기였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교회의 대표인 베드로를 통해서 창조되는 새언약의 백성, 그들은 사방으로부터 창조 될 것입니다. 그 숫자가 많습니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 차렸습니다. 그 후에 바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이 나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53이라는 단어보다도 다른 두 단어를 잘 보셔야 합니다. 하나는 “큰 물고기(great fish, large fish)” 라는 단어와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단어입니다. 상징적 의미를 가진 단어들입니다. 큰 물고기라는 의미는 새언약의 백성은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위대한 자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구언약의 사람들 중 가장 큰 사람이 세례요한입니다. 그러나 새언약의 사람들은 모두 세례요한보다도 큰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큰 자들일까요?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자녀들이니까 큰 자들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들은 큰 고기들입니다. 외적으로는 작지만 내면적으로 하나님과 가까운 자들이니까 큰 자들입니다. ‘리틀 자이언트’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신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은 그 자체가 신비라는 것입니다. 신비라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큰 사람들이고, 신비로운 인물들입니다. 잘난 척하실 필요 없습니다. 잘난 사람들입니다. 신비로운 척 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냥 신비입니다. 말을 하지 않아도 큰 고기이고, 말을 하지 않아도 신비로운 존재들입니다.

또 다른 예수님의 행동이 있습니다. 그것은 갈릴리 강가에서 만찬을 하시는데 ‘지금 잡은 고기’를 가져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고기를 굽고 계시는데 지금 잡은 고기를 가져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만찬을 거행하십니다. 성만찬 하는데 제자들 가운데서 아무도 감히 “선생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분이 주님이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신비한 침묵이 흐릅니다. 제자들은 압니다.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그들이 이제 어떤 일을 하여야 하는지를 압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피와 예수님의 살을 먹지 않고는 새언약의 백성으로 창될 수 없다는 것을 체험으로 압니다.

우리는 큰 고기입니다. 위대한 고기입니다. 하나님과 가장 가깝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예수님이 우리 죄를 지시고 피를 흘리셨기 때문입니다. 그 피로 우리 죄가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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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왕

히브리어와 로마와 헬라어로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이라는 팻말을 써서 십자가 위에 붙여 놓았습니다.

히브리어와 헬라어 그리고 로마(라틴)어 이 세 언어는 그 당시 유럽과 소아시아 지역 사람들 전체가 사용하는 대표적인 언어였습니다.
빌라도는 이 예수는 모든 민족과 모든 시대의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종교를 상징
로마는 법과 정치와 경제를 상징
헬라는 문화와 예술을 상징
따라서 온 세상의 모든 종교나 정치나 경제나 문화와 예술의 주인이 예수라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면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다.
예수의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다.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고 합니다.

예수는 자기 스스로 왕이라고 한 것이지 자신들의 왕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요구에 대해 빌라도는 ‘나의 쓸 것을 썼다’(22절)고 답합니다. 이 말은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것은 당연하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보면 빌라도는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온 존재로 여겼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즉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했는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왕으로 인정을 했기에 ‘나의 쓸 것을 썼다’는 말을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패 아래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세상은 비록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유대인의 왕으로 죽으신 것이 됩니다.

십자가에 기록된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에 대해 관심을 두신 적은 있습니까?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으로 죽으신 것이 유대인이 아닌 현 시대의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는 생각이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이 곧 빌라도의 생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빌라도가 쓴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의 글은 분명 거짓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나라는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왕으로 오신 분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18:36절에도 보면 내 나라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나라가 따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예수님이 왕으로 존재하시는 예수님의 나라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빌라도는 패에다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썼지만 그는 예수님의 나라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나라는 따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섬기는 왕도 따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의 눈에 예수님은 왕이면서도 왕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반대를 받고 초라하게 죽어가는 한 인물로만 비춰졌을 것입니다.

유대인들 역시 자신들이 소망하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를 이룩해줄 왕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왕이라고 자처하는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염원하는 나라를 결코 이뤄줄 수 없는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여러분의 왕으로 인정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잘한 일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왕에 대한 복종이 있는가에 있습니다. 왕의 나라에 대한 관심이 있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한다고 해도 복종이 없다면 그것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를 써서 십자가에 달아 놓는 빌라도와 다를 바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 우리 왕이여’하고 아무리 노래를 부른다고 해도 그것으로 예수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한다면 그것은 곧 예수님의 백성이라는 뜻인데, 백성이라면 왕에 대한 복종은 필수적인 것인만큼 예수님에 대한 복종이 있는가를 깊이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복종이란 왕의 권세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에게 있는 왕으로서의 권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나라를 열고 닫는 권세입니다. 즉 예수님의 나라에 들일 자는 들이고 쫓아 낼 자는 쫓아내는 권세가 왕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우리의 공로와 행위로 천국을 들어가 보려고 하는 시도를 감히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모든 권세가 예수님에게 있는 만큼 이것을 아는 백성이라면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 외에는 달릴 할 것이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복종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유대인이라 불려지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죽였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백성인 유대인은 달리 존재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면서 그분 앞에 복종합니다. 그분의 모든 것에 대해 순종을 합니다. 세상의 밑바닥 인생이라고 할 수 있는 세리와 창녀 죄인들과 가까이 하시고 함께 하신 예수님에게 복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약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약함을 깨닫는 것입니다. 내가 곧 세리요 창녀이며 죄인임을 아는 것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고, 이것이 곧 진정한 예수님의 백성이며 참된 유대인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예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여러분 속에 달리 다른 세상을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꿈꾸는 세상을 두지 마시고 예수님이 가지고 오신 그 나라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빌라도와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의 나라가 있었습니다. 이것으로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나라는 영원한 생명의 나라입니다.
이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외에는 결코 있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께 복종이 없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자칭 왕으로 떠들고 다니는 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 복종하십시오. 예수님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으면 예수님만을 구원에 이르는 길로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말씀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자기 의를 보지 않고 자신의 공로와 행위를 자랑하지 않고 십자가에 피흘리신 예수님의 의로우신 행위와 공로를 믿으며 사는 것이 복종입니다. 그것이 말씀대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복종이 있는 그들이 곧 참된 유대인이며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왕으로 존재하시는 것입니다.



알레데이아(ἀλήθεια) : 진리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6)

‘진리’ 로 번역된 헬라어 ‘알레데이아’((ἀλήθεια)는 ‘진실한, 진리를 사랑하는, 진리를 말하는, 참된, 진실된’ 이라는 뜻을 가진 ‘알레데스’(ἀληθής)에서 유래된 단어로 ‘진리, 객관적인 진리, 주관적인 경험적 진실’ 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알레데스’(ἀληθής)가 부정적 불변사로서 ‘아’(ἀ)와 ‘숨기다, 감추다, 깨닫지 못하다’ 라는 뜻을 가진 ‘란다노’(λανθάνω)의 합성어에서 파생된 단어라는 점에서 ‘진리’(ἀλήθεια)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속뜻은 국어사전이 정의하고 있는 ‘누구나 승인할 수 있는 보편적인 법칙이나 사실로써의 참된 이치 또는 도리’ 라는 것과는 다른 ‘숨겨지고 감추어진 것이 밝히 드러남,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닫게 됨’ 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알레데이아’(ἀλήθεια)의 히브리어 단어는 ‘확고함, 충실함, 진실’ 이라는 뜻을 가진 ‘에메트’(אמח) 인데 이를 파자하면 ‘하나님 말씀의 완성’ 이라는 의미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4)에서 진리(ἀλήθεια)가 충만(플레레스 : πλήρης – 완성된)하신 분, 바로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에메트’(אמח)가 ‘처음’(א=Ἄ)과 ‘나중’(ח= Ω)되시는 ‘말씀’(מ)이라는 의미에서 처음과 나중되시며 말씀이신 예수님은 스스로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에고 에이미 토 알파 카이 토 오메가 :  Ἐγώ εἰμι τὸ Ἄλφα καὶ τὸ Ω.’(계1:8)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진리(ἀλήθεια)이신 예수님은
항상 ‘진리’(ἀλήθεια) 안에서 가르치셨으며(마 22:16),
‘진리’ (ἀλήθεια)
에 대하여 말씀하셨고(눅 4:25, 막 12:14),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진리’ (ἀλήθεια) 안에서 할 것을 당부하셨다.   

성경은 ‘진리’(ἀλήθεια)가 없는 자를 가리켜 ‘욕심’(에피뒤미아 : ἐπιθυμία)대로 행하는 자, 처음부터 살인한 자,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고 말하고 있다(요 8:44).

성도는 ‘진리’(ἀλήθεια)아는(γινώσκω) 자이며,
진리가 된(γινώσκω) 자이고,
지금 그리고 여기 (Now and Here)에서부터 영원히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자인 것이다(요 8:32).
그리고 그가 진리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아버지께 갈 수 있는 것이다(요 14:6).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요한복음은 진리라는 단어가 사용된 경우가 17구절입니다(21회 언급)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분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합니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진리가 옵니다.
진리이신 그분이 자유를 주십니다.
성령은 진리의 성령이십니다.
아버지의 말씀도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증언합니다.
진리에 속한 자는 진리이신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런데 진리에 대한 마지막 진술에서 빌라도는 진리가 도대체 뭐야?라고 진지하지 못한 자문을 합니다.

요한복음 8:31-32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셨다.
그러므로 진리를 알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이다.

그러면 ‘진리를 알면’은 무엇이며,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이 무엇인가? 

1. 진리를 알면

1)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

(엡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하셨다. 즉 우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가(엡2:1)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곧 대속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다. 이것이 곧 진리이다.

 

2)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

(엡 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하셨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은 우리가(엡1:7)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 이것이 곧 진리를 아는 것이다.

2.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보혜사 성령의 임하심과 주의 성령의 임하심이 곧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이다.

1) 보혜사 성령의 임하심

① 영원토록 함께 계시는 보혜사

(요 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보혜사 성령이 임하셔서 영원토록 함께 계신다.

② 모든 것을 가르치시는 보혜사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보혜사 성령이 임하셔서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주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신다.

③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시는 보혜사

(요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보혜사 성령이 임하셔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신다.

2) 주의 성령의 임하심

(눅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의 성령이 임하셔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기름을 부으시고(제사장 직책과 선지자 직책과 왕 직책을 세우시고)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신다.

②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육신의 연약한 자<롬 5:6, 롬 6:19>를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롬 8:9> 생기 있는 자가 되게 하시는 것이다.

②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는 죄인 된 자<롬 5:8, 롬 11:30>를 하나님께 순종하는<롬 1:5) 의인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③ 눌린 자를 자유케

육신의 생각으로 하나님과 원수 된 자<롬 5:10, 롬 8:7>를 영의 생각<롬 8:6>으로 하나님과 화목하는 자가 되게 하시는 것이다.

문 1 : 진리가 무엇이냐

답 : 진리를 알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

문 2 : 진리를 아는 것은 무엇인가?

답 :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은 우리가(엡 1:7)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엡 1:13) 것을 말씀한다.

문 3 :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은 무엇인가?

답: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보혜사 성령이 임하셔서 영원토록 함께 계시고(요 14:16),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요 14:26),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 하시는(요 15:26) 것이며,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의 성령이 임하셔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기름을 부으시고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시는(눅 4:18) 것이다.


진리란?

진리이신 예수님은 빌라도의 질문에 대해 그의 마지막 행보로 대답하십니다.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우리에게 더 큰 일이 되는 십자가에 모든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면서 진리가 뭐야 라고 말하는 빌라도와 같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진리란 너희와 같은 사람들을 사랑해서 죽은 주님의 십자가라고 대답합니다.

진리는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갈 뿐입니다.
묵묵히 목숨을 건 섬김의 길을 갈 뿐입니다.
그리고 진리가 뭐야 하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게 주님이 너희를 위해 “다 이루었다” 라고 말할 뿐입니다(요 19:30).

주님, 오늘 진리에 속한 자로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저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진리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그리스도는 진리이신가?
첫 번째 질문은 주님께서 심문을 받으실 때, 빌라도가 던진 질문이다(요 18:38).

로마의 권력은 진리는 세상을 지배하는 힘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을 지배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한 것이므로 빌라도의 질문에 나는 유대인들이 원하는 이 나라의 왕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왕이라고 대답하셨다.


진리이신 그분 앞에서 진리가 무엇인지 묻는다는 것은, 빌라도가 얼마나 진리에 대하여 까막눈인지를 증명한 셈이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진리가 무엇인지 몸으로 보여주지 않았던가.
다시 말해, 그분의 생애를 통해 진리를 배우지 못한다면, 그래서 빌라도의 눈을 뜨게 하지 못한다면, 누가 "말"로 그에게 진리를 설명할 수 있을까?

주님은 생애 전체를 통해 진리가 무엇인지 직접 몸으로 보여주신 분이시다.
그리고 마지막에 빌라도 앞에 서 있었다. 바로 그때, 빌라도가 묻는다. "진리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로 대 히트를 치고 명석한 강의로 소문난 하버드 철학교수 마이클 센델도 주님만큼 진리를 잘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주님은 "진리가 무엇인가?"라고 묻는 질문에 한 마디도 하지 않으신다.
만약 이 질문에 대답하셨다면, 그 분은 스스로 비진리이고 사기꾼임을 밝힌 셈이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란 현존의 삶이기 때문이다.
이미 그분이 사셨던 삶 자체가 진리이시고, 이런 식으로 진리가 구현되는 것이라면 진리는 말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 외에는 진리로 존재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든 사람들에게 진리란 자기의 존재보다 무한히 높다.
그래서 진리를 알기 위해 질문을 던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욕구다.

진리가 무엇인지 묻는 빌라도의 어리석음을 한 번 설명해 보자.
얼굴을 맞대어 이야기하고 있는 상대방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한 사람이 있다.
"당신에게 묻겠습니다만, 당신은 여기 있습니까?"

주님은 진리가 무엇인지 아무런 설명도 없으셨다.
그러나 아마 설명을 붙이자면 이와 같을 것이다.

만약 진리가 무엇이냐 누군가 묻는다면, 그리스도인은 이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다음과 같이 말하면 된다.
"그리스도, 그분을 보라, 그리고 그분에게서 배우라. 그분이 진리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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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 세계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주장의 유력한 근거로 알려진 임사체험(臨死體驗· Near Death Experience)이 사실은 꿈의 일종이라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미국 과학뉴스 사이트인 라이브 사이언스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유체이탈 체험 연구센터(Out-Of-Body Experience Research Center)’ 연구 결과를 인용, ‘임사체험은 자각몽(自覺夢· Lucid Dreaming)의 일종’이라고 지난 16일 보도했다.

영혼 비슷한 것이 육체를 벗어나(유체이탈) 터널을 통과한 뒤 밝은 빛을 향해 날아가는 자각몽은 스스로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꾸는 꿈으로, 의식이 깨어 있기 때문에 스스로 꿈의 내용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으며 현실처럼 생생한 데다 나중에도 또렷이 기억할 수 있다. ”

‘사람이 죽으면 사후세계가 있는가, 과연 천국과 지옥이 있는가’ 하는 문제는 인간의 풀 수 없는 문제입니다.

딸 이민아 목사를 먼저 보낸 이어령 박사의 기사가 났지만 이어령 박사 또한 이 문제 앞에서 깊이 고뇌하였을 것입니다.
저도 양로원에서 일하면서 늙고 병들어 치매증세를 보이며 쇠약해져가는 노인들을 보면서 과연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참으로 인간에게만 사후세계와 영원의 약속이 주어졌다는 것인가, 우리의 믿음이 사실이요 진실인가 하는 생각이 다시 드는 것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눈에 보이는 현실세계, 곧 물질세계에 속하여 살아가는 영적존재입니다.
영적존재이면서 현실세계에 속하여 살아가기 때문에 현실세계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품을 떠나 죽음의 경계를 넘어 이 땅, 곧 물질세계의 영역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물질세계에서 죄악 가운데서 살아가는 죄인들에게 영적인 세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셨습니다.

죄와 거듭남에 대하여 말씀하셨고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물질세계에 사는 인간들이 보이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는 쉽게 믿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 14장을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두려워하고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 하십니다. 우리가 그 길을 어찌 알겠습니까, 하고 묻는 도마의 질문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라고, 생명에 이르는 길이라고 간단히 말씀하지 않으시고 ‘진리’를 넣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문제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나라, 그것이 진리요 사실인가입니다.
진리가 아니라면 길도 생명도 아버지의 집도 모두 허탕이요 거짓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 우리의 신앙여정도 따지고 보면 진리의 문제요 사실의 문제입니다.
만일 우리 믿음이 사실과 진리가 아니라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도바울이 말하는 바와 같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요, 부활도 없고, 천국과 지옥도 없고, 일생을 속아 사는 우리가 모든 사람 중에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진리가 아니라면 우리의 믿음은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믿음의 싸움은 진리 싸움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영적세계와 눈에 보이는 이 현실세계의 틈바구니에서 우리는 세상적 판단의 손가락질과 과학과 지식의 안개 속에서 증거도 없고 지식도 없는 죽음의 너머를 믿고 나아가는 믿음의 씨름을 일평생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극복하지 못 하였는지요?
평생 예수 믿다가도 막상 죽음 앞에서는 “죽어봐야 알지”라는 불신앙으로 무너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진리의 편에 서는 것은 그러나 사람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증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오직 택한 자만이 진리의 편에 설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요,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이 낳으시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요1:13). 빌라도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재판과정을 보면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인도 위험인물도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유대인들이 민란을 일으킬까봐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내어주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들었으면서도, “진리가 무엇이냐?”고 예수님께 물었으면서도, 침묵하시는 예수님을 두려워하면서도 끝내 진리 편에 서지 못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살아계시고 천국과 지옥이 참으로 있다는 것을 믿었다면 빌라도는 민란이 일어나는 한이 있어도, 설사 자신이 죽는 한이 있어도 진리 편에 섰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현실을 택하고 말았습니다.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지 못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이 기록을 보면서 이미 예정된 바에 따라 빌라도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과 진리에 속한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달려있다는 사실에 다시금 두려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아울러 만세 전에 나를 택하시고 구원하신 은혜에 감사를 새롭게 할 뿐입니다. 내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만나고,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세계를 믿을 수 있다는 것, 약속을 받아 영원한 생명, 구원을 얻었다는 것, 이 어두운 세상 가운데서 내가 진리에 속하였다는 것,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적이요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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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그룹의 창업주 호암 이병철 전 회장이 1987년 폐암으로 사망하기 한 달 전, 가톨릭 신학자 정의채 신부에게, A4 용지 다섯 장 빼곡히 써서 보낸 질문이 있다고 합니다.

“신이 존재한다면 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가?”
“지구의 종말은 오는가?”

스물네 가지 질문이 그것이었습니다.

고인은 돈이 너무 많아 한때 ‘돈병철’이라 불렸는데, 그에게도 돈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고뇌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정의채 신부가 답변을 준비해 만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이 회장의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져서 다음번으로 그 기회를 미루었습니다.
그러나 끝내 기회를 얻지 못한 채 그가 세상을 떠납니다. 향년 77세.

그리고 25년이 지난 2012년 1월, 정의채 신부의 제자 차동엽 신부가 고 이병철 회장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정리해서 <잊혀진 질문>(명진출판사, 2012년)이라는 제목의 책을 냈습니다.

정작 그 책을 읽어야 할 주인공은 세상에 없는데 말이지요.
저는 이병철 회장이 생애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런 고민을 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일찍이 삶과 죽음, 신과 사후 세계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기업 총수로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워낙 많다 보니, 이런 질문은 늘 우선순위에서 밀렸겠지요.
그러나 정작 세상을 떠날 때 가장 우선으로 해결해야 했던 문제가 바로 그 문제였습니다.
눅 12장의 어리석은 부자가 생각납니다.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눅 12:20-21)

만약 이병철 회장이 그때 다시 건강을 되찾아 정의채 신부를 만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가 신앙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100% 장담할 수는 없겠지요.
신부 또는 목사와 몇 시간 이야기를 나눈다고 해서 신앙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만난다 해도, 모두 그리스도인이 되는 건 아닙니다.
1세기 유대인 가운데 예수님을 만난 엄청난 행운의 소유자들이 많았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오히려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빌라도입니다.
우리가 모두 장차 예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하는데, 빌라도는 세상에서 오히려 예수님을 심판하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가 오늘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첫 번째 질문이,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당시 유대에는 두 명의 왕이 있었지요. 헤롯 안티파스와 헤롯 빌립.
모두 로마 황제에 의해 유대의 일부를 다스리도록 허락받은 분봉왕들 입니다.
빌라도가 말하는 ‘유대인의 왕’은 이들과는 다른, 즉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해 낼 다윗의 후손 ‘메시야’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서두에서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라고 말합니다.
즉,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유대인의 왕’,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왕’이 뭐 그리 중요할까 싶은데 중요합니다.
‘유대인의 왕’ 예수가 아닌, 다른 예수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장 요한복음 18장 뒷부분에서, 빌라도가 유월절 전례를 따라 사형수 한 사람을 놓아줍니다. 그때 백성들이 선택한 자가 바라바였습니다. 그는 단순 강도가 아닌, 로마제국에 항거한 폭력투쟁운동 지도자였습니다. 사본에 따르면 그의 이름이 ‘예수’예요. 그날 백성들이 선택한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가 아닌 바라바 예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오직 그리스도 예수, 하나님께서 성경에 약속하신 ‘유대인의 왕’, 메시야 예수를 선택해야 하는데, 때로는 엉뚱한 다른 예수를 선택할 때가 있지 않은가요?

두 번째 질문은 “내가 유대인이냐?”

빌라도는 자신이 유대인이 아니므로 ‘유대인의 왕’이 메시야인지 아닌지 알 필요도 없고, 관심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종종 그런 말을 듣지요.
“왜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단군의 자손이면서 자꾸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소리를 하는가?
우리나라 왕들에 대해서는 아는 것도 없으면서, 엄한 이스라엘의 왕들을 주워섬기는가?”

그러나 우리가 구원을 얻으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그 언약은 일찍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을 얻으려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이 아닌 우리가 어떻게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을까요?
실은 유대인이라고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지요.
그리고 오늘날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길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하신 구원의 약속에 참여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성경의 구원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단지 재미를 주는 책, 또는 목사들의 설교를 위해 만들어진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 책이 말하는 구원의 이야기 속으로 우리가 들어가, 그 이야기의 일원으로 참여해야 할 책입니다.
그렇게 해서 성경의 구원 이야기가 바로 나의 구원 이야기가 될 때, 우리가 비로소 구원의 감격을 누립니다.
“내가 유대인이냐?” 로마인 빌라도가 유대인이 아니듯이 우리도 당연히 유대인이 아닙니다.
굳이 유대인일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며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라고 말한 것처럼(롬 2:28-29),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사람들이 진짜 유대인, 새 이스라엘, 다시 말해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질문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예수님은 많은 병자를 고치셨고, 기적을 베푸시고,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모두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는 사역의 일환이었지요.
예수님이 하신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나라 사역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예수님은 그 나라가 세상에 속하지 않는 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36절,

“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하나님 나라가 저세상의 나라, 즉 우리가 죽어서 가는 나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 나라가 세상에서 비롯된 나라, 영어로 “kingdom which is came from the world”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처럼 세상에서 비롯된 나라들은 늘 세상의 방식을 따라, 인간의 권력과 힘과 재물을 의지하지요.
그러므로 만약 하나님 나라가 세상에서 비롯된 세상 속의 나라였다면, 예수님이 체포당할 때,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어떻게든 이를 막았어야 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제자들 가운데 단검을 뽑아서 적들과 맞서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리셨지요.
하나님 나라가 칼로 일어서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 나라에 속했는지 세상에 속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교회가 세상과 똑같이, 때로는 그보다 더욱 인간의 권력과 힘과 돈을 의지하는가?
아니면 그로부터 일말의 자유로움이 있는가를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위기가 오면 드러납니다. 많은 교회가 위기의 순간에 권력 다툼과 재산 분쟁의 장으로 돌변합니다.
그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어서 결국 세상의 법정이 결론을 내려줄 때까지 그 추한 싸움을 멈추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권력과 힘과 부를 의지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는 너무나도 낯선 나라입니다.
당장 빌라도가 묻습니다.

네번째 질문  “네가 왕이 아니라는 말이냐?”


“37b,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왕, 하나님 나라의 왕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 나라는 권력과 무력과 재물이 아닌 오직 진리에 의존하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진리를 위해 태어나셨고, 그 진리를 전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왕으로 섬기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왕이신 그리스도의 진리의 음성을 듣고, 그 진리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우리는 과연 누구의 음성을 듣고 누구의 말에 순종합니까?

빌라도가 놀라서 묻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비웃음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짧은 순간이나마 진리에 대한 그의 갈망인지도 모릅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이 진리를 외칩니다.
세상에서 진리를 가장 크게 외치는 곳은 대학입니다.

하버드대 ‘진리’(베리타스),
예일대 ‘빛과 진리’(우림 베 둠밈),
칼텍/연세대(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서울대(진리는 나의 빛, 베리타스 룩스 메아),
고대(자유, 정의, 진리),

오늘날 많은 대학이 구호 속에서는 진리를 크게 외칩니다.

그러나 정작 진리를 추구하지는 않습니다.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
묻기라도 했는데, 대학은 더 이상 진리에 관해 묻지 않습니다. 교회는 과연 다를까요?

그날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 단지 질문만 던지고 예수님에게서 돌아섰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다가가 “나는 예수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라고 말합니다. 나름대로 예수님을 변호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것은 진리를 지키지 못하고 진리를 저버린 행위였습니다. 그는 진리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눈앞에 대하고서도, 귀한 진리를 버리고 말았습니다. 단지 “진리가 무엇이냐?” 메아리 없는 질문만 던지고 말 것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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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크리스챤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싶다"라고 말하지만, 그 말이 "거룩한 생활에 힘쓰고 싶다" 라는 뜻인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같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충성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시는 방향으로 바쁘게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크리스챤이 되게 하신 목적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위한 것"과, 또 우리가 거룩한 생활에 힘쓰지 않으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게 된다는 성경의 진리를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참 신앙은 믿음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의 거룩성을 바로 이해할 때 비로소 시작됨을 알아야 한다.  
모세는 하나님이 자기를 부르셔서 사용하시기 전까지는 자기가 믿어야 할 참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와 만나실 때 그는 비로소 그가 믿어야할 참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게 되었다.  
곧 그가 임재하신 곳은 "거룩한 땅"이므로 그의 신발을 벗어야 했고, 하나님의 거룩성이 나타날 때 모세는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렸다(출3:1-6).  
그리고 야곱도 잠이 깨어 처음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의식하였을 때 "두렵도다 이곳이여!" 라고 고백하였다(창 28:17).  
왜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성 앞에 두려워해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성 앞에서 인간의 죄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는 사람은 진실한 회개가 나오게 되어 있다.  
이사야 선지자가 바로 그것을 보여주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앞에서 "화로다 나여! 내가 망하게 되었으니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로다"라고 하면서 회개하였다.  
그러자 하나님은 제단의 숯불로 그의 입술에 대신 후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 졌느니라" 라고 하셨다(사 6:7).  
죄 용서 받은 후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하나님과의 참된 관계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나오는 회개로 시작된다.   그러한 회개를 통해서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성은 우리가 멸망당할 수 밖에 없는 비참한 존재임을 느끼게 한다. 그것을 느껴야 진정한 회개가 나오며, 그것이 바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이다.   참 회개를 통하여 우리의 모든 죄가 예수님께로 전달되고, 반면에 예수님의 깨끗한 "의"가 우리에게 넘겨오므로 말미암아 우리들이 "의인"이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이다.   이 과정이 확실한 크리스챤은 항상 거룩하신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섬길 줄을 안다.   한글 성경에는 주로 "하나님을 경외한다"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본래의 의미는 "하나님을 두려워한다"이다.  

      그래서 대부분 영어 역본들은 "fear God" 또는 "fear the Lord"로 번역되어 있다.   "성도"라고 하는 말은 "거룩하게 구별된 무리", 즉 "거룩한 백성"이라는 뜻이며, 거룩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백성이다.   그러므로 참 성도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두려움으로 섬긴다   그런데 너무나 쉽게 회개하고, 너무나 쉽게 구원받은 현대 크리스챤들은 그러한 것을 모르며, 예수님이 말씀하신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은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눅12:5)는 말씀에는 관심이 없어보인다.   왜냐하면 옳바른 중생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으므로 "거룩"에 대한 개념을 모르거나,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기 원하는 사람은 먼저 크리스챤이 "왜 거룩한 생활에 힘써야 하는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왜 거룩한 생활에 힘써야 하는가?


1. 거룩함에 이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 . .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그러므로 (거룩을)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살전 4:3-8)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의도하신 것이 바로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것인데,
이 "거룩함"을 우리가 저버리고 거절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저버리고 거절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이 말씀이 얼마나 심각한 내용인가를 독자들은 생각해 보았는가?  
크리스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한 삶에 힘써야 한다는 것을 무시하고 거절한다면, 그것은 곧 거룩하신 하나님 자체를 거절하는 것이다.  

그의 생활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뜻대로 사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한 신자의 믿음은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신다.   그가 아무리 주님을 위해서 힘써 헌신하고 아무리 주님의 능력을 많이 나타내었다 할지라도 그는 영생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얼마나 심각한가?  
그런데 예수님이 산상설교에서 그점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1-23)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사람들은 세상에 살면서 주의 일에 충성하고 열심히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였고, 주님의 이름으로 악령들을 쫓아내었으며,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영생에 들어가지 못하고 쫓겨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기를 "불법을 행하였다"라고 하셨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지 않고 자기 뜻대로 생활한 것이다.  
거짓 선지자나 거짓 사도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거룩성"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함"을 강조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지옥" 또는 "회개"라는 단어를 회피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전달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성령충만한 하나님의 종으로 위장하여 신자들을 속이는 것이다.        

마지막 때에는 거짓 선지자와 거짓 사도들이 택하신 자라도 미혹할 수만 있으면 미혹하고, 사람들을 속이기 위한 많은 기적을 행할 것이라고 주님이 예고 하셨다(마 24:24-25).  
이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면 감쪽같이 속아넘어갈 정도로 거짓 지도자들은 천사의 모양으로 위장하고, 의의 일군으로 위장한다(고후 11:14-15).  

그러므로 마지막 때의 크리스챤들은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 즉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것"에 대하여 성경말씀을 자세히 살피고, 내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훈련을 쌓아가야 한다.  
그러면 미혹 받아도 속아넘어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거룩함에 이르는 믿음은 영적 분별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거룩한 생활에 힘써야 한다는 것은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며, 참 믿음의 소유자는 그러한 삶의 행위로 자신의 믿음을 나타낸다는 뜻이다.  
죽은 믿음이 아니고 산 믿음이라는 것을 거룩을 추구하는 삶의 행위로 보여주는 것이다.  
또 크리스챤들은 왜 거룩한 생활에 힘써야 하는가?

2. 거룩함을 추구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히 12:14)

      크리스챤들은 이유를 묻지말고, 무조건 거룩한 삶에 힘써야 한다.  이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이다.   왜냐하면,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체가 거룩한 백성으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으로 중생한 사람은 자연히 거룩한 삶을 추구하게 된다.   그것은 일부러 그렇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거듭나게 한 분이 바로 거룩한 성령님이시고, 그가 중생한 사람 속에 계시기 때문이다.   중생한 사람은 성령님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에(고전6:19) 본질적으로 죄에 대하여 민감하고 죄를 짓고는 오래 견디지 못한다.   성령께서 마음에서 질책하시고 충동을 일으키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곧 회개하고 죄를 피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을 삶의 원칙으로 삼는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깨닫고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섬겨야 함을 의식하는 성도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렇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고 그처럼 거룩한 삶을 추구하도록 성령으로 함께 하시는 것이다(살전4:7).  

      거룩하신 성령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성도는 자연히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되며, 그러한 신앙의 자세가 그를 점점 거룩함에 이르게 한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믿음이 자라가는 것이며,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자는 거룩에 대한 개념을 가질 수가 없으며, 거룩한 성도로 성숙해 갈 수가 없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의식하지 못한다.   뿐만아니라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한다.   다만 인간적인 생각으로 선과 악을 분간할 뿐이며, 하나님 앞에서의 선과 악은 분별하지 못한다.   "거룩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하였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 (고전6:18에서) 하나님은 아버지, 우리는 자녀가 되는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고후7:1)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면, 거룩한 생활에 힘쓸 수 없음을 사도 바울은 분명히 증거하였다.   그리고 거룩한 생활을 무시하고 거절하면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것이고, 동시에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함을 추구하지 않는 신앙은 세상 끝날에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살면서 교회 충성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아무리 많이 수고했어도 결과적으로는 모래위에 집을 지은자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거룩함을 무시하는 신자는 마지막 때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내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큰 시련과 환난을 허락하실 때 예수를 배반할 수 밖에 없으며, 그의 신앙은 무너져내릴 것이다.   그 이유는 모래위에 집을 지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는 자신의 집을 모래위에 짓는 자와 같다.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예언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악령들을 쫓아내었으며,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은 바로 그와같이 모래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고 하셨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딛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7:26-27).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 즉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을 거절하고 무시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 하고 자기 뜻대로 행하게 되는데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의 행위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거짓 확신을 가질 수가 있는 것이 오늘의 기독교 문화라고 본다.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 머리에 상상하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일 것이다.


3. 하나님은 거룩함을 알게 하는 법칙을 주셨다


1) 거룩한 하나님을 알게 하시려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구별해 주셨다

      참 여호와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존재하시는 영이시므로(사41:4, 요4:24), 죄성을 가진 인간의 지식과 지혜로는 그 거룩하신 분을 헤아려 알 길이 없다.   다만 그분 께서 자신을 계시해 주실 때에만 우리는 조금이나마 그 영원하신 분을 의식하며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그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분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구별"해 주셨다고 한다.

      "나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지어다.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표징(a sign)이 되어 너희로 내가 여호와 너희 하나님인 줄 알게 하리라 하였노라" (겔20:20)

      그러므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구별하지 않는 신자는 성경이 증거하는 참 여호와 하나님을 바르게 인식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기 때문에 성령의 감화와 감동이 오지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바로 안다는 것은 그분의 속성(attribute)을 바로 이해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시기 때문에 하나님 특유의 속성을 가지고 계신다.   그 분의 존재, 지혜, 권능, 거룩, 공의, 인자, 진실 등 그분의 영원하고, 무한하며, 불변하는 신의 속성인데 그 모든 여러가지 속성이 함께 조화를 이룬다.   하나님은 인자가 무한하신 사랑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그 분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천국과 지옥이 공존하며, 복과 저주가 공존하고, 생명과 사망이 동시에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작용한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사랑의 하나님만 강조하면, 하나님이 마치 마음씨 좋은 싼타클로스 할아버지 처럼 느끼고 만다.   그래서 웬만한 실수는 하나님이 눈감아주시고, 또 이 시대에 맞지 않는 성경말씀을 외면하고 무시해도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현실을 이해하고 넘기시는 줄 착각하는 것이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구별할 줄 모르면 그렇게 된다.   영원하신 불변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자기 머리 속에 상상하는 하나님을 적당히 섬기게 된다.   현대 크리스챤들이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 안식일을 거룩히 구별하여 지킬 때 우리 자신들이 거룩한 백성임을 자각하게 된다

      하나님은 참 믿는 자들을 거룩하게 하셔서 영원한 천국으로 영접하시는 분이시다.   천국에는 아무나 못 들어가고 오직 거룩하게 된 성도들만이 갈 수 있는 곳이다.   사도 바울이 증거한 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룬"(고후7:1)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천국이다.   그런데 인간 스스로는 그렇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자신을 거룩하게 할 능력이 없다.   믿음이 아무리 좋다고 자신 만만해도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신자는 거룩하게 되어 갈 수 없다.   거룩하게 되는 것은 인간의 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다.   하나님이 거룩하게 만들어 주셔야 거룩해진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신자를 거룩하게 만들어 가시는가?  

      성경은 증거하기를 "하나님의 안식일"을 거룩히 구별하여 지키는 자를 그처럼 거룩하게 만들어 가신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주일"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며 우리가 그 날을 거룩히 지킬 때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 가신다"는 하나의 표시(a sign)이다.   그러므로 주일성수를 잘 하면 우리 자신이 거룩한 백성임을 자각하게 되며, 그렇게 되면 자연히 영원한 안식에 대한 소망, 즉 천국의 소망이 밝아질 것이다.   구원 받은자에게 약속된 천국은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가면서 점점 마음에서 느끼게 되어 있다.   그것이 "안식일(주일)에 주시는 하나님의 복"인데 그 복을 주시려고 그 날을 복되게 하셨다(창2:3).

      "또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 하여 내가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a sign)을 삼았었노라" (겔20:12)

      그런데 현대 크리스챤의 안식일은 어느날인가?   구약성경으로 말하자면 토요일이 안식일인데 그 날을 거룩히 지켜야 하는가?   현재 크리스챤들은 주일을 지키고 있지않는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지면상 생략하기로 하며 시대의소리미션참고자료 란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4. 거룩하게 구별하신 안식일은 영원한 안식의 표징(A Sign)이다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을 6일 동안 창조하시고 마감하셨다. 그리고 7곱째 날에 안식하시고 그 날을 복된 날로 정하셨는데 그것이 안식일의 시작이다.   하나님 자신만 일을 하지 않으시고 쉬실 뿐만 아니라, 그의 백성들도 그 날에는 모든 일들과 매매를 중단하고(느13:15-21, 렘17:19-23) 쉬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날로 정해주셨다(겔46:1-3).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창2:1-3).

      하나님이 창조사역을 6일 동안 진행하실 때의 기록을 보면,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라 . . . .둘째 날이라 . . . . 셋째 날이라 . . . ." 는 식으로 한 날의 시작과 끝이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안식하신 7곱째 날은 시작만 있고 끝이 없는 "안식"이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괴롭고 고통스러운 이 세상을 살다가 죽은 후에는 창세기에서 시작된 그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성도가 들어가게 될 영원한 안식이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히4:3)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정해주신 안식일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누리게 될 영원한 안식을 실제 생활에서 어느정도 의식할 수 있도록 알려주시는 표시(a sign) 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애굽에서 종노릇하며 고생하던 이스라엘 자손들을 구원해 내신 후, 율법을 주시기 이전에 제일 먼저 구원받은 백성이 누리는 안식을 경험하게 하시려고 그들에게 안식일을 정해주셨다.  

      그날에 그들은 애굽에서처럼 일할 필요가 없으며, 먹을 것을 구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었다.   안식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안식일을 정해주시고 그 날을 지키게 하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통하여 안식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었다(신5:15).   이것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인데 구약의 성도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신약의 성도들에게도 똑 같이 적용되는 하나님의 표징(a sign)이다.   창세기 2장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안식"은 시대의 변화에 관계 없이 지속되는 영원한 안식이며, 구약의 성도나 신약의 성도나 동일하게 그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게 되어 있다(히4:1-11).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안식일에 관하여 계명으로 주실 때에도 "너희 대대의 표징 (a sign throughout your generations)"이라고 하셨고(출31:13), 또 그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영원한 언약"이며 "영원한 표징"이다(출31:16:17).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을 기억해야하는 표(a sign)이기 때문이다.   신약에 와서 안식일 개념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히 - 확실히, 진실히)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a sign)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 (출31:13)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a sign) 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제 칠일에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 하라" (출31:16-17)

      그러므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 끝날까지 대대로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면서 앞으로 들어가게 될 영원한 안식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7일 중에 하루를 거룩한 날로 정하고 그 날을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는 성일로 지킬 때에만 거룩한 생활에 힘쓸 수 있고, 따라서 영원한 안식을 사모하며 천국의 소망을 가질 수 있다.   구약에 나오는 수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바로 그러한 신앙을 가지고 영원한 안식을 바라보면서 세상을 살아갔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가운데 거룩케하시는 하나님을 실감했으며 마침내 그들은 하나님이 계신 거룩하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신약의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기 때문에 히브리서에 그 사실을 다시 언급하였다(히11:13-16).   신약의 성도들은 안식일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 중심으로 그 날을 지킨다.   성도들에게 약속된 영원한 안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들어가는 것인데 그 영생의 소망은 예수님의 부활로서 성취되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도들은 안식후 첫날,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거룩한 날로 정하였고, 그 날에 모여서 예배드렸다 (참고: "어느날이 예배일인가? 토요일, or 주일?").  

      그래서 신약시대의 안식일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안식후 첫날인 주일이다.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Lord)가 되실 뿐만아니라(마12:8) 영원한 안식으로 인도하시는(요14:2-3) 중보자이시기 때문이다(딤전2:5).   7일 중에 하루를 거룩한 날로 정하고 그 날에 노동을 쉬고 상업을 중단하여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구약에서 뿐만아니라 신약에서도 계속되는데 그것이 바로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주일성수" 이다.   "주일성수"는 크리스챤들이 "영원한 안식"을 항상 기억하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과 성도 사이에 대대로(throughout generations) 세우신 "영원한 언약"이며, "영원한 표징(a sign)" 이다.   그래서 과거의 크리스챤들은 20세기 중반까지 철저히 주일성수를 지켜오면서 그들의 경건성과 성화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처럼 교회가 영적으로 살아있을 때에는 사회도 건전하여 도덕성과 윤리를 유지하였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사회가 타락하기 전에 먼저 교회가 세속화된 것을 알 수 있다.



5. 주일을 거룩히 지키지 아니하면 배교(Apostasy)가 시작된다        

천국에 들어갈 하나님의 백성은 거룩함을 추구하는 성도들이며(히 12:14),
그 성도들의 특징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는" 생활의 모습으로 보여진다(고후 7:1).  
그리고 그들의 거룩함이 언제 성숙해 가는가 하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킬 때이다.  
신약의 성도들로 말하자면 주일을 거룩히 구별하여 지킬 때 점점 거룩한 성도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기로 정하셨기 때문이다(출 31:13, 고후 7:1).  
그러므로 크리스챤들은 주일성수를 무시하는 때부터 신앙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없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도 모르게 되고, 따라서 자신의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가는 것도 중단되며, 천국의 소망도 없어지고 만다. 그래서 이 세상에만 집착하게 된다.   그 순간부터 미혹의 영이 접근하여 마음과 생각을 다른데로 돌리고 세상 문화(풍속)에 재미를 붙이게 한다.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런 현상이 일어났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안식일"을 무시하고 그 날을 지키지 아니할 뿐만아니라, 안식일을 욕되게 하였다.  
그러자 미혹의 영이 역사하기 시작하였고 그들은 이방 민족의 풍속(문화)를 즐기기 시작하였다.  

이방 민족의 문화는 언제나 종교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우상문화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전에 살던 (문화)나 앞으로 들어가 살게 될 애굽의 풍속가나안 땅의 풍속가증한 풍속"이기 때문이다(레 18:3-5, 30).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지 않고 안식일을 더럽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였다.
그리고 이방 민족의 가증한 우상문화에 매력을 느끼고 그 문화를 따라가다가 결국은 우상숭배에 빠지고 말았다.  
신약의 기독교도 마지막 때에는 그러한 이스라엘의 행위를 본받으면서 세속화 되고 하나님을 배반하게 된다는 것을 크리스챤들은 기억해야 한다.  

현대 기독교는 이미 뉴-에이지(New Age) 우상문화로 가득차 있다.  
그 이유는 크리스챤들이 거의 반세기 전부터 주일성수를 무시하고 거룩함을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기독교의 배교

“그러나 이스라엘 집이 광야에서 내게 반역하여(rebel) 사람이 행하면 그 가운데서 살게 될 내 법규내 법도내 안식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게 되는 시발점은 먼저 하나님이 말씀하신 삶의 규칙을 무시하고 저버리는데서부터 시작하며, 그 다음 단계는 "거룩한 안식일을 더럽히는 것"이다.
현대 크리스챤의 경우에는 "거룩한 주의 날(주일)을 세속화 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일성수를 무시하면 벌써 하나님을 저버리고 반역(rebel)

“이는 (하나님이 그들을 광에서 멸하시기로 정하신 것은) 그들이 으로 자기들의 마음우상들을 따라가며, 내 법도내 법규내 안식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이 미혹을 받아서 세상의 우상문화에 (현대의 뉴에이지 문화에) 이끌리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게 된다. 크리스챤을 타락시키려는 미혹의 영(요일 4:6)이 바로 그것을 노리며 진리에서 떠나게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를 합리화시키는 이유를 들어서 성경말씀을 확대 해석하거나, 축소해석해서 불편한 내용들을 빗겨가려고 한다.  
그래서 오늘날 현대인들이 읽기 쉽게, 알아보기 쉽게 성경을 새롭게 번역한다고 하면서 진리의 본 뜻을 왜곡하는 일들이 소위 "진보주의 신학", 또는 변질된 "현대 복음주의 신학" 실제로는 "신복음주의 신학" 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많이 생산되고 있다.  
그래서 그런 성경이나, 잘못된 사상의 영향을 받은 현대 크리스챤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도 모르고, 거룩함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다.  그래서 "주일성수"는 이제 지나가 버린 옛 시대의 "고전"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하나님을 배반하는 반역(rebellion)이 이미 한참 진행중이다.

“이는 (하나님이 그들을 포로로 끌려가 흩어지게 하실 것은) 그들이 내 법도를 집행하지 아니하며, 내 법규를 무시하며, 내 안식일을 더럽히고, 자기들의 눈(eyes)으로 자기 조상들의 우상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말씀을 무시하여 불순종하게 되면 자연히 주일성수가 무너지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그들은 "안목의 정욕(the lust of the eyes)"(요일 2:16)을 즐기게 된다.

관광 때문에 주일예배 빠지며, 골프치기 위하여 그렇게 하고, 연속극 때문에, 스포츠 중계 때문에 그렇게 한다.  
그러는 가운데 우상문화에 빠지는 것이다.  
사탄은 공중의 권세를 가진 통치자로서(엡 2:2) 세상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온 세상을 악으로 가득차게 하려고 한다(요일 5:19).

그래서 사탄 유행문화 안목의 정욕      

하나님은 그런 문화를 가증하게 여기시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애굽의 풍속이나 가나안 땅의 풍속을 본받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안목의 정욕에 끌려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우상문화를 즐기다가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게 되었다.  
신약의 크리스챤들도 똑 같은 패턴으로 타락하고 하나님을 배반하게 되어 있다.  
그러한 타락을 막고 거룩한 생활로 이어지도록 우리에게 주신 삶의 가이드 라인(guide line)이 바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는 것", 즉 "주일성수"이다.  
이것은 율법인 동시에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는 하나님의 도덕법이다.
이 하나님의 도덕법을 버리면 거룩에서 떠나 타락하여 "거룩한 백성(성도)"이 되지 못한다.  
그것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이다(히 12:14).  


6.예수님 재림 직전에 나타날 배교(Apostasy)의 형태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은 종말관에 대하여 오해가 있었으므로 매우 당황하였고 안정을 얻지 못하고 불안해 하며 갈팡질팡 하였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들을 안심시키고 올바른 종말관을 가지고 신앙생활하도록 편지한 것이 데살로니가후서이다.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말하기를,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두 가지 확실한 사건이 있을 것이며, 그 사건 후에 오실것이라고 하였다.  
그 두 가지는 먼저, "배교하는 일"이 일어날 것이며,
그 다음에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서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할 것이며,
그 때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서 자신의 "입의 기운"으로 그 불법의 사람을 죽이실 것이라고 하였다.  
대부분의 성경주석가들은 그 "불법의 사람"이 곧 "적그리스도"라고 주해하였다.  

지금은 어느 때인가?  
기독교인들은 물론 불신자들까지도 지구의 종말이 임박했다고 불안해 하는 시대이고, 세상 끝에 보여질 시대의 징조들이 예수님이 예고하신 대로 자연계와 사회와 민족과 나라간에 일어나고 있는 것을 피부로 느끼는 시대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영적으로도 심각한 상황이 교회안에 벌어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교회가 하나님을 반역하는 "배교(Apostasy)"이다.

3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불법의 사람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4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 . . . 8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살후2:3-8, 개역개정)

본 문장에서 "배교(apostasy)"라고 하는 말은 헬라어로 "아포스타시아"인데 그 뜻은 "저버림, 배반, 반역, 배교" 이다.   영어의 "아포스타시"(apostasy) 라는 단어는 그 헬라어에서 유래하였다.  
그러면 누가 누구에게 배반하고, 반역한다는 말인가?  
그 단어는 불신자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을 믿는다고하는 신자들에게 해당되는 용어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배반한다는 말이 적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내용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반역했던 것처럼 마지막 때에도 기독교회가 하나님을 저버리고 배반할 것을 예고한 말씀이다.
그러면 마지막 때에 기독교가 어떤 형태로 하나님을 저버리고 하나님을 배반할 것인가?  
하나님을 저버리고 하나님께 배교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교회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다른 것을 사랑하며 따라가는 것이다.  
필자는 마지막 때 교회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을 하나님의 도덕법인 "십계명"과 연관지어서 설명하려고 한다.

어떤 크리스챤들은 "십계명" 이야기만 나오면 불편해한다.   율법시대는 다 지나갔고 이제는 은혜 시대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율법의 요구가 다 이루어졌는데, 왜 십계명을 거론하는가?   당신은 율법주의자인가? 라는 의문을 던진다.   하지만 그런 분들은 하나님이 왜 "십계명"을 우리들에게 주셨는지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런 분들의 주장대로라면 신약시대에는 더이상 십계명이 필요없다는 논리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찬송가 커버 안쪽에는 예외없이 십계명이 인쇄되어 있지 않는가?   지금은 은혜 시대인데 왜 기독교 역사 속에서 계속 십계명을 유지하였고, 어째서 청교도들이 그처럼 철저히 아이들에게 십계명을 암송하게 하였는가?   그것은 십계명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하나님의 도덕법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후 명령하기를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하셨다(레11:45).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죄악 많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세상 법으로는 거룩함을 유지할 법이 없다.   오직 하나님이 정해주신 하나님의 도덕법에 의해서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유지되며 거룩하게 구별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이 십계명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목적이다.   이 도덕법은 하나님의 구원을 얻은 백성이라면 구약의 성도이든지, 신약의 성도이든지 관계 없이 동일하게 적용되어서 거룩한 삶을 살게하는 하나님의 Guide Line 이다.   미국의 헌법이 십계명에 기초하였기에 미국의 대법원안에는 십계명을 조각한 작품들이 자리잡고 있었으나, 지금은 그것들이 거의 제거당한 상태이다.   1960년대초 케네디 대통령 때는 공립학교 안에 걸려있던 십계명을 제거하였고, 교내에서 기도를 금지하였다.   그 이후 미국은 쇄퇴의 길로 걷고 있어서 지금은 국력이 약해질 뿐만아니가 국가부도 위기에 처한, 정말 부끄러운 처지가 되었으며, 영적으로도 급속히 타락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나라가 거룩하게 만들어 가는 하나님의 도덕법을 폐기하고, 하나님을 배반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나 개인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교회가 "십계명"을 외면하는 것은 "배교"의 시작이라고 본다.   율법의 요구를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예수님의 교훈을 한 번 살펴보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그 때 예수님은 첫째로 제일 큰 계명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고, 둘째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고 대답하셨다.   그리고 계속 말씀하시기를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Sum Up)이니라" 라고 하셨다(마22:34-40).   구약성경에 나오는 모든 율법과 선지자들의 교훈들을 집합적으로 간추려서 요약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 으로 크게 두 가지로 요약이 된다는 말씀이다.   구약의 대표적인 율법이 "십계명"인데 그 십계명의 내용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내용으로 정리되어 있다.   즉, 1-4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칙이고, 5-10계명은 이웃을 사랑하는 법칙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신을 믿지 않는다.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우상을 만들고 거기에 절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는다.

      만일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는 가짜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킨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7일 중에 하루를 거룩하게 구별하시고 그 안식하는 날에 하나님을 섬기도록 "성일(거룩한 날)"로 정해주셨기 때문이다. 그 날에 하나님은 자신이 거룩하신 분임을 나타내시고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룩한 존재임을 스스로 느끼게 하신다. 이것을 기억하여 주일성수 하는 크리스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십계명은 율법으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재림하실 때까지 크리스챤들의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안내하는 하나님의 도덕법으로 지금까지 유효한 것이다 (참고: "십계명은 하나님의 도덕법").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라고 하셨다(마5:18-19).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와같이 "율법"을 모두 종합하면 "하나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데, 율법의 대표인 "십계명"이 그 실행사항을 10가지로 구분해 놓은 것이다.  
마지막 때에 교회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배교하는 것은 교회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거역하며 멀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어떤 형태로 보여지는가?  

필자는 교회가 십계명을 외면하고 거부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다고 본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인데, 바로 그 전에 교회가 하나님께 배교(배도)한다고 하였다(살후 2:3).  
그러므로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인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때가지 교회는 배교하는 모습을 단계적으로 보여주게 된다.  
그것은 가 단계적으로 을 파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처음에는 네번째 계명을 파괴하여 교회십계명주일성수적그리스도배교 주일성수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크리스챤들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그들의 거룩함이다(벧전1:16, 레11:44).   즉 그들이 구원받은 거룩한 백성답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행함이 있는 믿음"이며(약2:22),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이유 이다(레20:26). 하나님이 구원받은 백성에게 강요하시는 "거룩함"은 구약의 성도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신약의 성도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두려워하는거룩함두려움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으로 지내라"(벧전1:17),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두려움거룩하게두려움영혼지옥두려워하라"라고 하셨다(마10:28).  

      그러므로 크리스챤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신앙을 가지고 거룩한 백성으로 구별된 삶을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크리스챤들을 향한 ""이다.   그러한 신앙을 가지지 않으면 "아버지의 뜻헛된 믿음"을 가지고 스스로 속는 신앙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7:21-23에 말씀하신 내용이 바로 그 내용이다.   이 땅에 살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충성, 봉사, 헌신 하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악령)들을 쫓아내며,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기적들)을 행하였지만 막상 주님 앞에 설 때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거절당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이유는 간단한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아니한 것이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배반하였다는 것이며, 다른 말로는 "불법을 행한"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속아서 신앙생활한 사람들이며, "아버지의 뜻"을 저버리고 "자기의 뜻"대로 행동하므로 말미암아 "흑암과 사망의 그늘 아래" 머물러 있던 사람들이다(시107:10-11).  마지막 때의 크리스챤들도 그렇게 될 확률이 크다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크리스챤들은 "하나님의 뜻"인 "거룩함"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온전히 이루어 가려고 힘써야 할 것이다.

      그러면 크리스챤들이 어떻게 해야만 거룩한 생활에 힘쓸 수 있는가?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러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방침을 정해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도덕법"인 "십계명"을 주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십계명을 주신 것은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하여 그 법을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죄 많고 사악한 세상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어떻게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주셨다.   다시 말해서 크리스챤들이 자신을 거룩하게 구별하도록 안내하고 그 법의 표준을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게 하시려고 십계명을 주신 것이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심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Guide Line이 십계명에 요약되어 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주신 사랑의 계명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크리스챤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 많일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에게 머물러있지 않는다고 하였다(요일2:15-16). 그처럼 세속화 되지 않도록 크리스챤들을 일깨우고 지시하고 질책하는 것이 바로 "십계명"이다.   이 십계명을 무시하고 버리게 되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게 되는데(삿17:6, 삿21:25) 그것이 바로 "자기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위험천만한 일이다.  

      과거의 모든 신실한 크리스챤들은 하나님의 도덕법(십계명)을 지키면서 신앙의 원리를 지켜왔으나 20세기 중반부터 기독교가 급속히 세속화되면서부터 십계명이 서서히 무시당해 왔고, 이제는 완전히 거부당한 것 같은 느낌이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절대 진리를 인정하지 않고,  전통적인 것을 배격하여 새로운 것을 추구하며,  다수가 좋아하면 그것이 진리이다 라고 하는  포스트 모더니즘(post-modernism) 사상이 널리 퍼지면서 일반 대중을 교회에 끌어들이려는 지도자들이 그 사상을 기독교에 도입하면서 본격적으로 십계명을 거부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같다.   그러므로 현재 "떠오르는 교회(emerging church movement)"들에서 그런 현상이 뚜렸하다.   17세기 중반에 영국에서 성경의 진리를 바로 이해하고 올바른 신앙의 자세를 가지는데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신앙 지침서들이 왕의 명령으로 신중하게 작성되어서 전 세계 기독교에 귀중한 교육자료로 보급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들이다.   교파들 간에 견해차가 있어서 어떤 항목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보는 관점에 따라 약간의 차이점은 있지만 포괄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다고 본다.   그 중에 일반 평신도 교육을 위하여 집필된 "소요리문답"은 많은 신실한 기독교인들을 배출하였다.   거기에 보면 크리스챤들이 어떻게 성수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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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8. 히로시마의 원자탄

왜 오키나와 미군이 한국에 들어왔나?
그 결과 한국의 분단국가, 6. 25 전쟁

일본군을 내쫓기 위한 미군의 진입

군사 기지는 용산이었다.
일본군 34만 명
미군 캠프 설치 후 일본에서 해방되었으나 미국에 의한 점령국이다.

9월 8일 오키나와 미군의 진입은
1차 미군 진입은 일본군 추방을 위한 것
원자탄은 일본 본토, 극동에는 76만 명
45년 8월 15일 천황의 항복 선언
야전군 사령부에서 원자탄을 맞고 항복하느냐
천황이 될 수 없다.
천황을 쳐내고 한국에 제2의 일본을 건국하자!

맥아더장군의 인천 상륙작전 후
심양, 한반도에는 원자탄의 위력을 몰랐던 일본군의 반항
미군이 진입하지 오지 않았다면 일본군이 후퇴하며 여성들에게 성폭력, 문화재 반출

하지 중장의 설문조사 결과
나라를 세워주자
1. 공산주의
2. 사회주의
전 국민의 82%

3. 자유민주주의

이승만에게 너희 나라 소망이 없다.
대한민국은 도와줄 가치가 없다.
너도 같이 가자!

이승만 나는 대한민국에서 죽을 것이다
무기는 놔 두고 가라!
무기를 갖고 북한으로 북침하려고 하는 것이다.
49년 6월 30일 미군의 철수

에치슨 미 국무장관
한반도에 관심이 없다.
에치슨 라인
대만 필리핀.
일본 호까이도

2차 대전은 동쪽에서 일본, 서쪽은 독일
러시아는 양대 전쟁을 모두 치뤄야 한다.
러시아는 일본과 5년 평화조약
힛틀러와 전투에 전력
45년 5월 전쟁 종료

러시아는 일본과 전쟁을 하려고 하였다.
평화조약은 깨트리기 위한 것이다!
극동 아시아로 러시아군의 이동 중 스칼린의 잔꾀
러시아 군대가 1800만명 사망
다시 일본과 전쟁을 하려면 미국의 루스벨트가 일본과 싸움을 시키려고 하는구나!
전쟁의 피해가 너무 강하여 러시아 군의 극동지역 진출 중단

얄타회담 / 루스벨트, 드골,
카이로선언
모스코바

1945. 7. 12 러시아군 진입 평양
러시아군은 운자탄 터지기 한 달 전에 평양 입성
한반도 전체를 먹으려고 하루에 4Km 진출
소련군과 협상할 때
협상 마치기 전에 계속 진출하면 원자탄을 때릴 것이다.
이때 38선을 긋게 된다.

(주사파) 미국이 일방적으로 38선을 만들었다.

소련군 진입을 막기 위한 선이었다.

6.25 당시 한국에 기독교인 50만명
미군을 한국으로 투입하라! 빌리그래함목사(사모님이 평양 출생)
트루만대통령이 유엔총회 소집

미국군의 2차 진입(인천 상륙작전)
한국전쟁에 의한 기독교인을 보호하기 위한 작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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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의 특징 / 예수의 피

전체 5장으로 구성된 짧은 편지인 요한1서는 굳이 주석을 달 필요도 없이 평이하면서도 우리의 신앙생활을 근본적으로 반성하게 한다. 난해한 신학이나 교리 논쟁을 끌어들이지 않고 단순 소박한 생활 언어로 신앙생활의 핵심을 이야기하는 요한1서의 신학은 참 멋지고 힘 있다.



뒤로멈춤앞으로
저자는 머리말에서 이 편지를 쓴 목적을 "우리가 보고 들은 그것을 여러분에게 선포하는 목적은 우리가 아버지와 그리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는 친교를 여러분도 함께 나눌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1:3)라고 밝힌다. '우리', 곧 요한 공동체가 직접 체험하고 있는 '아버지와 그리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는 친교'를 전함으로써 '여러분'도 이 친교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편지의 목적이다.

우리는 이 짤막한 고백에서 복음 선포의 본질을 발견한다. 개별적 신자가 아닌 신앙 공동체의 '집단적' 신(神) 체험이야말로 신학의 굳건한 기초요, 이 신 체험의 감격과 기쁨을 전하는 게 바로 복음 선포의 본질적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우리는 이 점을 바로 인식해야 한다. 참된 그리스도교 신앙은 공동체 안에서의 집단적 신앙이며, 참된 신 체험은 '나'만의 뭔가 독특하고 신비한 체험이 아니라 '우리'로서의 집단적 신앙 공동체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생겨나는 공동체적 신 체험이다. 그리고 이런 신앙과 신 체험에 기초한 복음 선포에는 다른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담겨 있다.

사실 성경이 어떤 책인가? 구약은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의 집단적 신 체험의 역사이며 신앙고백이고, 신약은 '예수님의 생애와 사상과 말씀과 십자가 죽음의 의미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우리의 구원과 생명의 길이 있다'는 것을 체험한 사람들의 공동체의 신앙고백이다.

요한 공동체는 "예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줍니다"라고 증언한다. 그런데 요한 공동체에서는 이 믿음이 '삶'과 밀착되어 있다. 예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이미' 우리의 죄가 씻김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식이 아니라, 십자가 보혈에 앞서 '삶'이 전제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처럼 우리도 빛 가운데서 살고 있으면 우리는 서로 친교를 나누게 되고 그분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줍니다." (1:7)

우리가 빛 가운데 살아 공동체의 친교, 곧 나눔과 섬김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아직은' 예수의 피가 우리 죄를 깨끗이 씻어주었다고 말할 수 없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기만 하면 우리의 죄가 말끔히 씻어지는 게 아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서 예수처럼 살려고 애쓰고 또 예수처럼 살 때 비로소 우리는 죄 사함을 받는다.

왜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렸는가? 예수의 역사적 삶에 대해 진솔하게 이야기하는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의 피 흘리심, 곧 십자가 죽음은 교리적이고 기적적이고 신비한 죽음이 아니라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한 몸을 이뤄 만인이 더불어 사는 따뜻한 세상을 만들고 싶어 했던 예수의 해방 실천의 삶의 불가피한 귀결이었다.

그 예수의 피 흘리심, 그분의 수난과 죽음은 오늘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된다. 이 도전에 우리의 양심이 찔려 회개하고 새 삶을 시작할 때, 우리 앞에는 구원의 문이 활짝 열린다. 예수의 피에 어떤 신비한 마술적 힘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종하여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을 사랑했던 예수의 생애는 오늘 우리에게 참된 삶의 길이 무엇인지 가르쳐준다.

예수가 흘린 피의 의미는 삶과 동떨어진 신학이나 교리로 이해될 성질의 것이 절대로 아니다. 우리들 자신이 신앙 공동체를 이루어 집단적으로 예수의 길을 걸어갈 때에만 예수의 피는 그 신비한 의미를 하나둘 드러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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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교황 이노센트 4세(1243. 6. 25 ~1254. 12. 7)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55~1274 ?)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지어 기증한 라테란 성당 발코니에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때마침 각 국에서 보내온 헌금주머니들이 속속 성당으로 도착하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교황 이노센트 4세가 말했다.

"선생 보시오. 베드로 사도께서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말했는데 지금 교황청은 은과 금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러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깊은 한 숨을 쉬며 대답을 했다.
"예,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교황님! 오늘의 교회는 은과 금은 있지만 대신 앉은뱅이에게 ‘일어나 걸으라.’고 말할 수 있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은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일본의 신학자인 우찌무라 간조(内村鑑三, 1861. 3. 26 - 1930. 3. 28)는 탄식했습니다. 

“나는 가륫 유다가 부럽다. 그는 팔아먹을 예수라도 있었지만 현대 교회는 팔아먹을 예수조차 없다.”

다카사키 번사 우치무요시유키의 장남으로 에도 고이시가와(小石川)에서 태어났다.
미국 농학자인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가 세운 삿포로농학교를 다니던 중 친구의 전도로 기독교인 되었다.
대학생 시절 그는 친구들과 기도 모임을 구성하여 신앙생활했는데, 모임은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이 없는 민주적인 공동체였다.
이러한 새로운 신앙경험은 우치무라의 기독교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대학교를 졸업한 1882년 우치무라와 친구들은 삿포로 독립교회를 통해 서구의 교회가 아닌 일본적 교회를 설립하고자 했다.
교회는 5명의 위원들에 의해 공동으로 운영되었는데, 일상적인 교회의 일은 그들이 함께 처리했고 그 외의 것은 언제나 투표로 처리했다.
또 교회의 회원은 의무적으로 교회를 위해서 일해야만 했다.

1884년 미국 애머스트 칼리지 3학년으로 편입하여 명예상을 받고 졸업한 뒤 하트포드 신학교에 진학하였으나 4개월만에 학업을 포기했다.

신학을 포기한 이유에 대해 "나는 더 이상 신학공부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지난 3년 간의 극심한 정신적 긴장으로 신경이 불안정해지고 매우 심각한 만성 불면증에 시달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휴식이나 진정제, 기도도 효과가 없었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고향 땅으로 돌아가는 것밖에 없었다"라고 말했다.

결국 1888년 일본으로 귀국하였고, 도쿄에 있는 제일고등중학교 교원으로 취직하였다.
하지만 1891년 일본 천황의 절대권력의 상징인 "교육칙어(敎育勅語)" 봉독식 때 예를 갖춰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불경사건'으로 일본 천황을 숭배하는 존황파(尊皇派)들에게 미움을 받아, 보복 테러의 표적이 되어 아내와 자식 그리고 직장을 잃었다.
우치무라는 교원으로 활동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나는 왜 기독교인이 되었는가?》(How I Became a Christian), 《구안록》등을 저술했다.

또한 《만조보》지의 기자와 월간지 《성서지》 연구의 간행인으로도 일하는 등 바쁘게 활동했다.
1921년에는 도쿄의 한복판에서 일요일마다 로마서를 강의하여 수많은 청중들이 크게 감동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키에르케고르도 현대 기독교를 향하여 냉소적으로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기적을 행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더 위대한 능력을 행하고 있다.
그들은 그 포도주를 다시 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 말에 대해 어떤 신학자는 평을 내놓았습니다. 

"현대교회는 한걸음 더 나아갔다.
포도주를 담았던 항아리마저 깨버렸다.
그 깨어진 항아리에 목회자도 찔렸고, 성도들도 찔렸고, 이웃들도 찔렸고, 교회 밖에 있는 사람도 찔려 지금 피를 흘리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여전히 교회는 우리의 희망입니다.
교회가 피 흘리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에도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은 여전히 고백합니다.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12:10)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할 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라야 합니다.
예수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 닮음이가 됩니다.

“위선이란 ‘아는 것’과 ‘행하는 것’ 사이의 간격이다.”

그 간격이 클수록 더욱 위선적인 행동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아무리 화려한 말과 요란한 장식으로 겉을 포장하여도 사람은 결국 그 내용을 보고 값어치를 평가하는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진정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고백이 입술만이 아니라 삶에서 열매 맺을 때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16)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뿐만 아니라 그분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능력이라고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했다면, 생활 속에도 예수님의 삶이 드러나야 합니다.
오늘은 내 안에 살아 계신 빛이신 그분을 온전히 드러내며 살았으면 합니다.

​입술로 고백하는 것과 살아가는 모습 사이에 간격은 없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주님의 이름이 능력임을 고백합니다.
그 능력의 이름으로 우리를 불러 주셨음을 고백합니다.
오늘 우리가 그 이름의 능력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옵소서.
예수의 삶이 온전히 드러나는 하루를 살게 인도해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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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이 폴란드를 점령했을 당시 한 농촌 마을에서 머무른 적이 있습니다.

마을의 영주는 나폴레옹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는데, 자리의 3번째 상석으로 안내했습니다.
자리를 안내받은 나폴레옹은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나는 이 나라를 점령한 왕이고 프랑스의 황제다. 그런데 나를 고작 이런 자리에 앉히려고 식사자리에 초대했단 말인가?❞
마을 영주는 급히 달려와 나폴레옹 앞에서 몸을 숙이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참으로 죄송합니다.
그러나 무례라고 생각하셔도 이 자리를 드릴 수 는 없습니다.
이 두 자리는 저의 부모님을 모실 자리입니다.
황제께서 나라의 가장 높은 분이시듯이 저의 집에서는 부모님이 가장 높으신 분들입니다.❞

영주의 말을 들은 나폴레옹은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나폴레옹은 그의 부모님을 모셔 함께 식사를 했고, 떠나면서 부하를 시켜 큰 상을 주었습니다.
우리 영혼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 삶에 최우선이어야 합니다.
주님이 아닌 사람을 높이는 교회와 나의 인생이 되지 않도록 늘 조심하고 점검 하십시오.
우리의 몸과 마음이 하나님의 집으로 개혁될 때 모든 것이 자리를 잡고 형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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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사랑의교회 백동조 목사님의 어머니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목사님의 어머니는 너무 어려운 가정 형편에서 전도를 받고 교회에 나간 후 기도를 시작하였는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새벽기도, 철야기도, 산기도를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해도 해결되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여전히 지독히 가난하고 가족끼리 문제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새벽마다 교회 가서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새벽에도, 철야기도회에도 교회에 가지 않으시는 것을 본 어린 백동조 목사님이 ❝엄마, 왜 교회에 가지 않아요?❞라고 물으니 어머니가 ❝응. 나 이제 집에서 기도하기로 했다❞고 하시며 힘없이 방으로 들어가 대성통곡 하며 하나님께 이렇게 이야기하시더랍니다.

❝하나님, 저, 더 이상 교회 가서 기도 안 할랍니다. 아무개 집사가 ❛기도해도 별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제가 봐도 그렇습니다. 하나님, 저를 보면 누가 기도를 하고 싶겠습니까? 이제 남부끄러워서 기도도 못하겠습니다.❞ 저렇게까지 기도하는데 아무 소용없다고 누군가 뒤에서 쑥덕이는 말을 들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집에서 기도하던 어머니가 일주일 만에 다시 교회에 나가셨습니다.
집에서는 기도가 안 된다면서 말입니다.
목사님의 어머니는 여생을 열심히 기도하다가 돌아가셨지만 돌아가실 때까지도 많은 문제에 대한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하셨습니다. 그런데 백동조 목사님은 고백하기를, 어머니의 기도가 지금 자신의 삶과 목회 가운데 다 이루어지고 있다고 울먹이셨습니다. 백 목사님의 어머니는 진짜 능력 있는 기도자였고, 본문의 주님이 개혁하신 ❛기도의 집❜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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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데이아(ἀλήθεια) : 진리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알레데이아’((ἀλήθεια)는 ‘진실한, 진리를 사랑하는, 진리를 말하는, 참된, 진실된’ 이라는 뜻을 가진 ‘알레데스’(ἀληθής)에서 유래된 단어로 ‘진리, 객관적인 진리, 주관적인 경험적 진실’ 이라는 의미이다.  

‘알레데스’(ἀληθής)
가 부정적 불변사로서 ‘아’(ἀ)와 ‘숨기다, 감추다, 깨닫지 못하다’ 라는 뜻을 가진 ‘란다노’(λανθάνω)의 합성어에서 파생된 단어라는 점에서 ‘진리’(ἀλήθεια)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속뜻은 국어사전이 정의하고 있는 ‘누구나 승인할 수 있는 보편적인 법칙이나 사실로써의 참된 이치 또는 도리’ 라는 것과는 다른 ‘숨겨지고 감추어진 것이 밝히 드러남,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닫게 됨’ 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알레데이아’(ἀλήθεια)의 히브리어 단어는 ‘확고함, 충실함, 진실’ 이라는 뜻을 가진 ‘에메트’(אמח) 인데 이를 파자하면 ‘하나님 말씀의 완성’ 이라는 의미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진리(ἀλήθεια)가 충만(플레레스, πλήρης – 완성된)하신 분, 바로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에메트’(אמח)가 ‘처음’(א=Ἄ)과 ‘나중’(ח= Ω)되시는 ‘말씀’(מ)이라는 의미에서 처음과 나중되시며 말씀이신 예수님은 스스로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에고 에이미 토 알파 카이 토 오메가,  Ἐγώ εἰμι τὸ Ἄλφα καὶ τὸ Ω.’고 말씀하셨다(계 1:8).

진리(ἀλήθεια)이신 예수님은 항상 ‘진리’(ἀλήθεια) 안에서 가르치셨으며(마 22:16),
‘진리’ (ἀλήθεια)
에 대하여 말씀하셨고(눅 4:25, 막 12:14),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진리’ (ἀλήθεια) 안에서 예배하라고 하셨다.   

성경은 ‘진리’(ἀλήθεια)가 없는 자를 가리켜 ‘욕심’(에피두미아, ἐπιθυμία)대로 행하는 자, 처음부터 살인한 자,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고 말하고 있다(요 8:44).

따라서 성도는 ‘진리’(ἀλήθεια)아는(γινώσκω)
진리가 된(γινώσκω)
지금 그리고 여기 (Now and Here)에서부터 영원히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자라고 하겠다(요 8:32).
그리고 그가 진리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아버지께 갈 수 있는 것이다(요 14:6).

히브리어 “에메트”(אמת)
헬라어 “알레데이아”(ἀλήθεια)

객관적 사실과 주관적 경험에서 나온 진실과 진리다.
진리란 상대적이 아니라 절대적이다.
도마의 물음에 예수님이 답했다.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 빌라도가 법정에서 주님께 물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요 18:33),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요 18:35),
“네가 왕이 아니냐?”(요 18:37)
마지막으로 빌라도가 물었다.
“진리(ἀλήθεια)가 무엇이냐?”(요 18:38)

첫째, 성경 말씀이 진리다

캐논(Canon)이란 “자, 척도”란 뜻인데, 삶의 기준은 진리의 말씀이다.
진리를 깨우쳐달라고 기도하자!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사 50:4).

말씀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나에게 주의 법도들의 길을 깨닫게 하여 주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시 119:27, 34, 125, 130, 144).

그러나 한글성경만 보면 오해가 많다.
법궤를 나뭇조각으로 만들었다 생각하지만, 조각목은 싯딤나무다.

한 권사님은 외식(外食)과 외식(外飾)을 혼동해 평생 외식(外食)을 못했단다.
투기(妬忌)와 투기(投機)를 혼동한 어느 공인중개사는 “사랑은 투기하지 아니하며”란 구절을 싫어했단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사 40:8).
만물이 변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변치 않는 진리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한다”(시 19:7).

둘째, 말씀의 본체인 예수님이 진리다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 요 1:14)하신 예수님은 “내가 진리(ἀλήθεια)요”(요 14:6), “나는 알파(Α)와 오메가(Ω)라”(계 1:8)고 말했다.
진리를 알면, 그 진리가 자유케 한다(요 8:32).
성도는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요 4:23).
하나님의 소원은 우리가 진리를 아는 것이다(딤전 2:4).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2-24).

따라서 “무엇이 진리인가?”(What is the truth?)가 보다 “누가 진리인가?”(Who is the truth?)라고 물어야 한다.
진리인 성경과 진리 자체인 그리스도를 모르면, 인간은 사망의 길로 달려간다.
진리를 모르면, 우상숭배하고, 물질에 집착하고, 마귀의 영에 사로잡히고, 심지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부인한다(눅 23:34).

진리이신 예수님의 사역은 죄인을 회복하는 전인구원(全人救援)이다.

(1) 구원의 길로 인도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2) 빛 가운데로 인도한다.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 3:21).

(3) 거룩하게 한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

(4) 말씀을 행하게 한다.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요일 2:4).

(5) 자유케 한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예수님의 회복사역(回復使役)의 원동력은 성령의 기름부음이다(행 10:3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새봄을 맞이하며 진리의 말씀을 통해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만나자!(요 5:39-40)
그리스도를 만나 몸과 마음과 영혼의 전인구원으로 자유하자!(요 8:32)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 3:“17).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알레데이아(Homer 이래)는 어원적으로 '가리워져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보여지거나, 지적되거나 표현된 정도(범위)의 상태나 사태, 그것도 이러한 보임과 지적과 표현에서 나타내지거나 그 자체 사실 그대로 나타낸 정도의 상태나 사태를 지적하며, 물론 그것은 숨겨지거나 위조되거나 왜곡되거나 생략되거나 은폐될 수도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알레데이아는 사건의 진상(full or real stale of affairs)을 의미한다.

 (a) 사법에서 여러가지 진술에 대항하여 지지될 수 있는 사건의 진상
 (b) 역사에서 신화와 완전히 구별되는 실재적 사건
 (c) 철학에서 절대적 의미의 참된 것 등을 의미한다(R. Bultmann).

그러므로 알레데이아는 일반적으로 거짓이나 거짓말에 반대되는 '진실'을 의미한다.

구약 및 70인역본의 용법

 (a) 에메트와 의미와 그 역어 알레데이아

알레데이아에 상당하는 히브리어는 에메트이다.
구약성경에서 에메트는 126회 나오는데, 85회 알레데이아로 번역되었다.
에메트는 아멘, 곧 확고한, 확실한, 신실한 것으로 생각되는 사실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진실한 것을 의미한다.
인격에 대해 사용될 때 그것은 때때로 주로 그의 말, 행동, 사상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을 표현한다.
이쉬 에메트는 그의 행위가 진리의 규범에 지배를 받는 사람이며, 그러므로 성실한 사람이다.
하나님께 적용될 때, 특별히 그의 신실성에 대해 사용된다.
이 단어는 '확고하다'를 뜻하는 어근 'mn에서 파생된 것으로 학자들은 이해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구약성경 학자들은 히브리 저술가들이 말하는 '진리'란 의미상 '불변성'(stability), '확고함'(firmness) 혹은 '확실성'(reliability)이란 개념을 시사해주는 '신실성'(faithfulness)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예프센(Jepsen) 기록을 요약해서 말한다면,
'에메트는 신뢰할만한 것으로 입증되어야 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영어로 이 개념을 전달하는 데에는 'Reliability'(확실성)가 가장 포괄적인 단어일 것이다.
에메트는 다른 사람들이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고 했다.
예프센은 이것을 인간의 진리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에 적용시키는 것으로 말을 맺는다.
진리의 하나님으로서 "여호와는 ... 그의 말씀과 사역 안에서 우리가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TDOT Ⅰ313).

이런 견해를 근거로 하여 구약성경에서 진리는 단순히 이론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성에 근거한 것이라는 주장이 종종 있어 왔다.

만일 이 견해를 받아 들인다면, 이것은 진리에 대한 히브리적 개념과 헬라적 개념 사이의 근본적으로 분명한 대조를 보여주는 요인이 될 것이다.

볼트만(R. Bultmann)은 쉽사리 알레데이아의 헬라어 용법이 셈어적 용법과 대조된다고 말한다(TDNT Ⅰ238).
이 이론에 따르면, 고전 헬라어에서 알레데이아는 단순한 현상과 대조되는 '진리'(truth)를 의미하는데 반해, 히브리어에서 이에 병행되는 단어는 '불변성'(stability) 혹은 '신실성'(faithfulness)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런 대조가 어느 점에서는 타당성을 지니는 반면, 이 주장들이 조심스럽게 한정되지 않을 경우에는 잘못될 수도 있고, 지나치게 단순화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에메트는 그 사용된 문맥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나타낸다.
에메트가 에메트로 간주되고, 에메트에 의해 지적되는 독특한 사실들을 항상 의미하지 않는다.
이러한 경우에 이 단어는 법률적 영역을 넘어가는 불확정한 일반적인 타당성이나 정당성을 지적한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진실이나 사실(reality)로 인정하기를 항상 요구하는 사실(facts), 신과 인간의 질서에 일치하여, 존중을 받는 정상 상태를 가리키는데, 그것은 유사하게 미쉬파트(4941: 공의, 심판)의(6666: 의), 샬롬(7965: 완전, 평화)과 같은 관련 용어에 반영되어 있다. 그 의미와 일치하여 그것은 전혀 일반적으로 진리나 진실(truth)로, 심지어 정상적 개념으로서 '진실성'(veracity)으로 번역할 수 있다.

알레데이아는 70인역본에서 히브리어 에메트의 의미를 따라, '신실(성), 성실(성), 충실, 진리나 진실, 확실한, 정직한, 진실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b) 에메트/ 알레데이아의 법률적 용법

에메트는 기본적으로 가장 확실히 법률 용어에서 '사실상의 과정이나 인과의 진실을 묘사한다.
따라서 우리는 신 22:20에 "그 일이 참되어(에메트/ 알레데이아)..."라는 표현에서 앞의 경우와 같이 "그 일이 비방거리에 근거하지 않고 확실한 사실들, 곧 진실에 근거한다면"이란 의미를 읽는다.

사사시 9:16(삿 9:19)의 "너희의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라는 말에서 에메트/ 알레데이아는 의와 관련되며, 그들의 행위의 정당성을 따지고 있는 것이다.

사사기 9:15에서는 "참으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에메트가 사물에 적용되는 경우에 법률 용어의 비유적 용법을 보게 된다.

창세기 24:48에 "바른 길"이 데레크 에메트(알레데이아), 즉 제시되는 많은 길들 중에 확실히 성공하는 길이다.

예레미야 23:28의 "내 말을 받는 자(선지자)는 성실함으로(에메트/ 알레데이아) 내 말을 말할 것이라"는 말에서, 에메트는 그 자체 꿈으로가 아니라 실제적 역사(operation, 29절)를 나타내는 사실(a fact)을 가리킨다. 단 8:26에서(이상이 확실하니) 에메트/ 알레데이아는 그 계시가 실제로 일어날 명백한 것임을 확언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사야 59:14, 15에서 진실이 부족하다는 불평은 13절 상반절에 "배반하는 것"에 관한 언급이 있기 때문에, 언뜻 보기에 이스라엘의 불신실성에 대한 언급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좀 더 세밀하게 검토해 보면, 불평의 참된 원인은 "거짓말"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마찬가지로 예레미야도 "그들은 각기 이웃을 속이며 진실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 혀로 거짓말 하기를 가르친다"고 불평하였다(렘 9:5). 틀림없이 이런 일 때문에 결국 어느 누구도 자기 형제를 신뢰할 수 없는 것 같다(4절). 그러나 여기에서 주요 문제는 거짓말 그 자체이다.

스가랴도 이와 같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너희는 각기 이웃으로 더불어 진실을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을 베풀고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특별히 에메트/ 알레데이아의 개념에 있는 평결(judical finding)과 재판의 기준 사이의 관계를 나타낸다.

시편의 세 구절들에서 진리는, 많은 학자들이 오로지 헬라 문헌에서만 발견된다고 주장하는 거의 그런 의미에서, 은폐(concealment)와 대조하여 나온다.

시편 43:3에서 기자는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라고 기도한다.
이 기도는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계실 것을 바라는 기도가 아니라 "간사한 자"(1절)의 유혹적인 말에 직면하여 하나님께서 그에게 사건의 진상을 보여주기를 원하는 기도이다.
그러므로 그는 진리와 빛을 필요로 한다.
진리란 그를 어둠에서부터 벗어나게 하여 사건들이 있었던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해 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시편 45:4에서 왕은 진리의 옹호자가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염두에 둔 것은 왕의 확실성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의심스럽고, 부정하고, 공정치 못하거나 거짓된 것은 무엇이든지 기꺼이 다 드러낼 그의 마음 자세이다.
왕의 고통 당하는 자들의 고통의 원인을 공공연하게 드러냄으로써 그들을 옹호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시편 51:6의 "중심에 진실함을"이라는 유명한 언급은 그다지 분명하지 않다.
앤더슨(A. A. Anderson)은 여기에서 에메트가 '신실성'(faithfulness)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Psalms, Ⅰ, 396).
그러나 이 개념은 시편 기자가 충실함을 간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기만으로부터의 해방을 간구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인 것 같다. 이 시편의 주제는 고백이며, 이 고백은 하나님께서 보신 그대로 사건들의 상태의 진실됨을 시인하는 것이다.
이 해석은, 만일 우리가 "중심"(inward parts)을 계시의 필요와 관련되어 있는 "덮여 있는 것"을 의미하고(E. A. Leslie, The Psalms, 1949, 400), 이 시편의 주제를 여호와께서 공정하시다라는 것으로 이해한다면(S. Mowinckel, The Psalms in Isreal's Worship, 1967,Ⅰ, 214), 훨씬 더 적합할 것이다.

잠언에서 진리와 거짓말(혹은 속임수) 사이의 대조를 배경으로하여 에메트/ 알레데이아가 사용된다.
지혜가 "내 입은 진리를 말하며"(잠 8:7)라고 말할 때, 그 요지는 지혜가 지혜를 갖고 있는 사람을 기만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혜는 교육과 지식을 통해서 그에게 모든 것을 드러낼 것이다.
잠언 22:21에서는 진리가 참된 대답이 행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즉 그곳에 거짓이나 허위가 없도록 하기 위해 드러내어 진다. 

 (c) 에메트/ 알레데이아의 종교적 용법

① 법률적 영역에서 중요한 다른 표현과 같이, 진리의 개념은 특별히 구약성경의 종교적 용어에 그 자리를 잡고 있다.
에메트의 종교적 용법은 항상 비유적으로 이해하지 아니하지만, 종교적 이해(통찰)에서 생겨날 수도 있다.
어쨌든 많은 경우에 그것은 법률적 용법에 의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종교적 사실을 오로지 의미한다.
때때로 사법적으로 의인으로 묘사된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태도를 명백한 진리의 사실에 근거하며, 진리가 하나님 자신의 행위와 말씀 안에 있는 토대인 것 같이 진리를 행한다. 하나님의 진실함은 인간의 진실함을 요구한다(시 51:6).

여호와의 성산에 거하기에 합당한 자는 그 마음에 에메트("진실")를 말하는 자이며(시 15:2), 따라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생의 질서라는 의미에서 진리에 전념하는 마음을 가진 자이다.
이 마음은 사회 생활에서 실제적으로 표현된다(참조: 겔 18:8).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한다(참조: 18:9).
하나님은 그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라고 명하신다(왕상 2:4).

호세아가 호 4:1에서 이 땅에 진실(에메트)이 없다고 불평할 때, 진실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하였다:
즉 생의 모든 영역에서 진실함은 하나님의 뜻을 틀림없이 아는데서 성장하고, 이러한 앎은 그것에 관한한 진실함의 실현이라는 것이다.

지혜 문학에서 문맥은 셰켈(허위, 거짓)이나 아울라(불의)와 대조시키므로, 진실의 개념을 강조하는 한편(말 2:6; 잠 11:18; 렘 9:4; 참조: 잠 12:19), 악과 대조는 더욱 명확히 종교적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느 9:33):

"우리의 당한 모든 일에 주는 공의로우시니 우리는 악을 행하였사오나 주는 진실히(에메트: 신실하게) 행하셨음이니이다."

② 에메트는 자주 신실성이란 의미로 특히 하나님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시 31:5에서 하나님을 "진리의 하나님"으로 부른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으로서 일반적으로 의인과 사람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으실만 하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으로서 항상 신실하게(에메트) 대하신다.
하나님은 영원히 진실함의 규범을 지키신다(시 146:6).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진리를 확립하고 그 자체 진리인 법, 곧 진정한 율법(토로트 에메트)을 수여하셨다(느 9:13).(참조: Quell).

에메트는 보통 "내가 주의 에메트를 찬양하리이다"(시 71:22)와 같은 특징적인 구절들에서 '신실성'이란 의미로 나온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영원히 지속된다(시 117:2).

앤더슨(A. A. Anderson)은 시 119:43에 나오는 "진리의 말씀"이란 어구조차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에 관한 기록이란 의미로 해석했다(The Book of Psalms).

시 30:9에서 하나님의 에메트에 대한 증거의 개념이 훨씬 더 두드러지게 나오는데, 스올(Sheol)이 하나님의 신실성을 선언하지 못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신자에게 하나님의 신실성을 새롭게 증거해 줄 계속적인 경험이 중단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뿐만 아니라 거기서 그들에게는 그들이 호소할 수 있는 하나님의 약속이 없기 때문이다(시 30:9; 참조: 사 38:18).

③ 에메트가 '신실성'(faithfulness)이란 의미로 사용될 때 자주 헤세드(변함없는 사랑)와 병행되어 나오다.
이런 경우에 에메트가 '신실성'을 의미하는 문맥과 '진리와 진실'을 의미하는 문맥을 구별해야 한다.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이 아브라함에게 헤세드와 에메트를 보여주기를 브두엘과 라반에게 요청하는 대목에서(창 24:49), 이 두 단어의 의미를 '충성'(loyalty)과 '성실'(fidelity)로 볼 수 있겠지만 개역 표준 성서(RSV)에 따라 정직하고 성실하게 행동하다라는 의미의 "deal loyally and truly"(충성스럽고 진실하게 대하다)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러나 같은 장(창 24장)의 앞 부분에 나오는 엘리에셀이 리브가를 맨처음 만나는 대목에서 엘리에셀을 "헤세드와 에메트를 끊이지 않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 뜻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의 약속에 충실하고 신실했다는 것이다(창 24:27).
창 32:10에서 야곱은 아주 똑같은 방식으로 그가 하나님의 모든 신실하심(에메트)을 감당할 수 없다고 고백하였다(창 32:10).

그 특징은 시편에서 찬양과 기도가 모두 하나님의 신실성을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에메트의 용법 중 반수 이상이 이런 의미를 지닌다. 시편 기자가 "여호와의 모든 길은 ... 인자와 진리로다"(시 25:10)라고 외칠 때,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관계가 언약에 대한 충성으로 특징 지워지기 때문에 아주 신뢰할 만하다고 증거하는 것이다(M. Dahood). 에메트가 시 57:3, 10; 61:7; 69:13; 108:4; 115:1에서 헤세드와 결합되어 나올 때, "신실성"(faithfulness)이 에메트의 의미로 나온다. 흠정역 성서에 나타나 있듯이, 이런 의미에서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난다"(시 85:10)라고 번역된다.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은 그의 신실성에 대한 하나의 표현으로 명시된다. 그리고 알레데이아는 '충실, 성실'을 뜻하는 에무나(시 88:11-49), '신실한, 신뢰하는'을 뜻하는 에문(시 12:1; 시 31:24), '확실한, 진실한'을 뜻하는 야칩(3330; 단 2:8), '정직한'을 뜻하는 야샬(3474; 욥 23:7), '완전, 성실'을 뜻하는 톰(8537, 잠 28:6), '진실'을 뜻하는 케쇼트(7187; 단 2:47), '진실로'를 뜻하는 옴나(욥 9:2; 19:4), 우림(신 33:8)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④ 우리가 에메트가 사용된 여러가지 측면들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매우 많은 문맥들에서 진리가 단순히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말씀으로만 아니라 행위로 자기의 진리를 드러내시며, 이 진리는 사실상 그의 백성의 체험 속에서 입증된다. 마찬가지로 사람들도 진리에 대한 존중을 추상적인 이론으로가 아니라 그들의 이웃에 대한, 그리고 그들의 구두상의 상업적 거래에 대한 일상적인 증언으로 나타낸다.

시 119:142에서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고 표현한다. 이것은 단순한 실존적인 진리 이상으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신자들에게 사건의 진상을 보여줄 등이요 빛이다(105절). 여기에서 그는 사실상 그와 관련될 때의 사건의 진상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내발 ... 내길").

 

⑤ 이러한 진리는 신뢰할 만하며 또한 확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통찰이 오로지 신학적 기초 위에서만 도달되는 것이 아니다. 확실히 신자는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성(에메트, 헤세드, 에무나) 때문에, 확신을 가지고 그에게 의지할 것이다. 그러나 에메트의 이런 특별한 용법이 이 단어의 모든 용례들의 배후에 있는 것은 아니다. 히브리인들은 다른 사람들도 인정했던 논리적 진리, 곧 참된 말은 그것이 실제와 일치하기 때문에 믿을만하다는 점, 그리고 진리의 하나님에게 있어서나 진실한 사람에게 있어서 언행이 일치한다는 점을 인정하였다(참조: 수 24:14; 시 145:18). 진리를 말과 행동의 일치로 보는 개념이 신약성경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알레데이아의 신약성경의 용법

신약성경에서 알레데이아는 109회 사용 중, 바울 서신과 요한의 기록에서만 92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a) 알레데이아는 "확실성과 힘을 지니는"(has certainty and force)"에 대해 사용되었다(에메트의 의미로).

① 타당한 규범. 알레데이아는 엡 4:21; 엡 4:22에서 이런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생각한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이 진리는 지적 진리에 대한 단순히 이론적인 감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복음에서 나타날 때는 진리에의 위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와 만남으로써, 결국 삶에 변화를 가져오게 되고, 이 변화를 통해서 신자들은 과거의 속임수에서 벗어나게 된다.

갈 2:5에서도 알레데이아는 같은 의미를 가진다: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함이라". 여기서 바울은 유대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문제가 된 것은 완전히 "복음의 진리"라고 선언하였다. 바울의 판단에 따르면, 복음을 더럽히도록 유혹하는 것은 곧 진리(타당한 규범)를 더럽히도록 유혹하는 것이요, 그 반대의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유혹에 굴복한다는 것은 그 자신의 성실의 의미에서나 구원사에서의 현재 있는 그대로의 실제 상황이라는 의미에서도 진리 곧 타당한 규범을 부인하는 것이다.

갈 2:14에서 알레데이아 역시 같은 의미를 가진다: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게바는 복음의 타당한 규범을 따르지 않은 것이다. 고후 13:8의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라는 바울의 언명에서 진리는 복음의 진리인 동시에, 더 나아가서 이 언명은 아마도 진리의 개방에 의해(그 결과야 어쨌든간에) 진리의 능력이 그리스도의 주의와 복음을 오직 보급시킬 수 있다는 사상을 전달하는 것이다. 진리는 타당한 규범이다. 하나님의 요구는 롬 2:8과 롬 2:19에서 알레데이아이다.

 

② 올바름, 정직. 알레데이아는 에메트와 같이 '올바름, 정직'이라는 보다 약한 의미를 가진다. '진리를 좇는 것(행하는 것)'이란 표현에서 나타난다(요 3:21; 요일 1:6). 유사하게 요이 1:4; 요삼 1:1 이하에서 "진리에 행하는 것"은 정직하게 행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같은 맥락을 따라 알레데이아는 아디키아($93: 불의)의 반대이다(고전 13:6; 롬 1:18). 이 단어는 또한 디카이오쉬네($1343: 의)와 결합하며(엡 4:24; 엡 5:9; 엡 6:14), 아마도 때때로 그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약 3:14; 약 5:19).

 

(b) 알레데이아는 '진술의 사실'(truth of statement)에 대해 사용되었다. 행 26:25에서 바울은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나이다"고 하였다. 여기서 "참된 ... 말"(레마타 알레데이아스)은 환상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사실에 기초한 것이다. 엪 알레데이아스라는 문구는 일반적으로 '사실과 일치하여'나 '사실대로'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막 12:32; 눅 4:25; 눅 22:59에 나온다. 따라서 엪 알레데이아스를 말하는 것은 단순히 그 사건의 사실을 정확하게, 혹은 바르게 진술하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눅 4:25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서 중요하다. 예레미아스는 주장하기를 이 문구는 예수님이 자기의 말씀을 강화하고 자기 권세를 나타내고 자기 메시지의 확실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용하신 것이라고 한다(J. Jeremias, New Testament Theology).

 

(c) 알레데이아는 드러난 '사건의 실상이나 진상'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롬 1:18("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서 확신하는 것은 이 경우에서 알레데이아를 하나님의 요구하는 것으로나 의(디카이오쉬네)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롬 1:19의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는 말을 보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된 사실(revealed reality)"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롬 1:25("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에서 하나님의 진리가 단순히 프슈도스($5579: 거짓, 허위), 즉 우상에 반대되는, 참된 또는 실질적인 하나님을 의미하지 않으면 위와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Bultman).

좀 더 설명하면, 바울은 알레데이아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자기 의지의 계시나 혹은 심지어 율법을 통해서든 어느 순간에는 창조를 통해서든 자기 존재의 계시를 나타낸다. 이런 용법은 로마서의 처음 두 장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사람들은 사악함으로 인하여 "진리를 막고"(롬 1:18),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꾼다(롬 1:25). 그러므로 진리에 순종치 않는 자에게는 진노가 있을 것이다(롬 2:8). 반대로 율법 그 자체는 지식과 진리의 구체화이다(롬 2:19)("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 여기서 문제가 되는 진리는 근본적으로 복음의 진리가 아니다. 바울은, 요한의 경우와 같이 사람들이 메시야를 알아볼 수 있는 지식을 받았다고 주장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창조주요 심판자이신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거부하기 때문에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본다. 바울은 모든 이방 세계가 고의적으로 복음-진리를 거부하였다고 말하지 않고 이 세계가 창세로부터 하나님과 그의 주권적인 주장들에 대해서 고려될 수 있는 것, 즉 분명히 보여진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롬 1:20)을 고의적으로 은폐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된 사실'이다.

유사하게 알레데이아는 다음과 같은 전치사와 함께 '실제적으로(real)'를 의미한다. 골 1:6(엔 알레데이아)에서 실제적인 경험을, 행 10:27과 행 10:34(엪 알레데이아)에서 실제적인 행위를 표현한다. 한편 롬 2:2에서 카타 알레데이안을 '사실과 일치하여, 사실대로'를 의미하며, 롬 2:11에 프로소포렘프시아(편파적임, 불공정)와 반대되는 것이다.

요일 3:18에서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는 대조는 헬라에서는 흔한 표현이다. "행함과 진실함으로"는 '실제적 행위로'를 뜻한다.

또한 고전 헬라어의 표현 '진실을 말하다'는 70인역본에서 뿐만 아니라(대하 18:15; 잠 8:7), 신약성경에도 나온다. 막 5:33에서 알레데이아는 "사실"을 의미한다. 무리 가운데에서 예수님을 만진 혈루증 앓는 여인은 "모든 사실"을 고하였다. 즉 아무 것도 숨기지 않고 사실을 말했다. 롬 9:1에서 참말을 하는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과 반대이며,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고후 12:6에서 참말을 하는 것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요 8:40; 요 8:45 이하; 요 16:7에서도 역시 '진리를 말하는 것'이 나오는데, 여기서 알레데이아는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듣거나 본 사실들, 곧 하나님의 계시로 해석할 수 있다.

 

(e) 알레데이아는 '믿거나 의지할 수 있는 것'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① 신뢰성이나 신뢰할만함, 롬 3:3 이하; 롬 15:8.

② 성실, 진실, 진심. 알레데이아는 '거짓말, 은폐, 속임수'와 반대되는 '진실' truth이라는 의미를 지니거나 '성실' sincerity의 의미로 나온다. 마 22:15 이하(막 12:14)에서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은 질문을 가지고 예수님을 올가미에 걸리게 하려고 다음과 같은 말로 이 질문을 시작한다: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알레데스) 참으로써(엔 알레데이아)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여기에서 요점은 예수님이 그 말을 함으로써 얻어질 결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진리를 감추지 않으리라는 점이다. 그는 자기 견해를 피력하는데 정직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고후 7:14("우리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 것 같이 ... 우리의 자랑한 것도 참되게 되었도다"), 고후 11:10("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으니")에도 나타난다. 따라서 그것은 고전 5:8에서 에일릭리니아(명확, 순수, 성실)와 연결되어 있으며, 빌 1:18에서 프롭하시스(편파적임, 불공정)와 반대된다. 때때로 헨디아디스의 형태로 친족어와 관계되어 있다: "믿음과 진리"(딤후 2:7). 요이 1:1과 요삼 1:1에서 이 용법이 사용되었다: "참으로 사랑하는 자",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를 가리킨다.

 

(f) 알레데이아는 복음, '참된 가르침 또는 믿음'에 대해 사용되었다.

① 고후 13:8: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여기서 알레데이아는 (a)①의 의미로 해석하지 않는다면 "다른 복음(에테론 유앙겔리온)(참조: 고후 11:4)과 대립되는 참된 교리를 의미한다.

 

② 이런 이유로 고후 4:2에서 바울은 복음을 전반적으로 그의 활약으로분명히 나타낸 알레데이아로 부르기도 한다("진리의 나타냄"). 이 경우에 알레데이아는 앞에 나온 말 로고스 투 데우("하나님의 말씀")의 개념을 포함시킨다(참조: 고후 2:14; 골 4:3 이하; 딛 1:3).

 

③ 갈 5:7에서 바울은 마치 "복음을 순종치" 아니했다고 말한 것처럼(참조: 롬 10:16). "진리를 순종치" 않는 것에 대해 말한다.

 

④ 벧전 1:22에 의하면 기독교의 믿음은 "진리를 순종함"이라고 할 수 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참조: 벧전 1:21 이하).

 

⑤ 또한 복음의 설교(전도)는 진리의 말씀이다(고후 6:7; 골 1:5; 엡 1:13 등).

 

⑥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진리를 아는데 이르는 것"이며(딤전 2:4; 딤후 3:7; 딤전 4:3; 히 10:26; 요이 1:1).

 

⑦ 살후 2:10-살후 2:12에서는 알레데이아는 "거짓"($5579)과 "불의"($93)라고 불리는 적그리스도의 계시에 대립되는 그리스도의 계시이다: "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11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⑧ 딤전 3:15에서 에클레시아(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로 묘사된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⑨ 벧후 1:12에서 알레데이아는 단순히 기독교 신앙이다.

 

⑩ 알레데이아가 '참된 가르침'이라는 것은 특히 그릇된 교훈과 반대된다.

딤전 6: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딤후 2:18,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딤후 3:8,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 알레데이아는 순종할 의향에 의해 결정되는 피스티스의 개념처럼 "권위있는 교훈"이다.

딤후 4: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딛 1:14,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좇지 않게 하려 함이라".

 

(g) 알레데이아는 또한 "진짜임", "하나님의 실체", "계시"를 의미한다.

① 계 8:44에서 신적 능력으로서의 알레데이아와 반신적인(anti-divine) 것으로서의 프슈도스(거짓)가 대조되어 있다. 알레데이아와 프슈도스는 인간 존재의 본질이라기보다는 진정한 가능성들로 이해된다. 이것은 말씀과 말씀의 경청에 대한 생각에 의해 결정되는 계시에 의해 보존되므로, 우리는 또 다시 진정한 존재의 가능성을 지닌다. 알레데이아는 하나님의 실체, 물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짐으로, 즉 죄로 말미암아 구성된 인간 존재와는 반대되고 가까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실체이며, 계시는 하나님과 조화되지 않는 존재가 도달할 수 없는 곳에서 일어나는 기적 사건이다. 계시에서 그의 고유한 존재의 참된 가능성이 그에게 드러나며, 그 때, 그와 만나는 계시의 말씀에 직면하여 그는 항복할 것을 결심한다. 그러므로 알레데이아를 받아들이는 것은 이성이나 비교(esoteric)의 지시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도 아니고 정신적인 각오와 연습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순종하는 믿음 속에서 일어난다.

 

② 요 8:44에서 하나님의 실체와 반신적 실체 간의 대조가 나타난다: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그러나 이것은 간접적으로 알레데이아가 생명을 주며, 알레데이아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은 것은 죽음으로 인도된다는 것을 역설한다. 그 말씀은 또한 알레데이아가 있을 때에 알레데이아는 그 자체가 구체적인 행위를 이루는 결정적인 힘이라는 것을 주장한다. 다시 말해 뒤따르는 말씀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은 "거짓말" 또는 "허위"라는 첫 번째의 잠정적인 의미를 지니지만 그 문맥은 명백히 첫째, 신성한 실체와 악마적인 실체가 모두 말로 표현되었다는 것과, 둘째, 이들 실체들이 존재의 활동 방식인으로서의 현실이라는 것, 또는 역으로 하나님의 또는 악마적인 실체에 의해 결정되는 존재의 모든 활동 방식이라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요일 1:8과 요일 2:4에서 하나님의 계시된 실체로 인한 존재의 결정이 지적되어 있다: "진리가 그 속에 있지"(않다). 이것은 또한 그러한 결정이 구체적인 행위로 그 자체를 나타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③ 이런 이유로 요한복음에는 특유의 다의성(ambiguity)이 생겨난다. 예수님께서 알레데이아를 말씀하실 때에 이것은 첫 번째로 "진리를 말하다"라는 표면적인 의미를 지니지만 또한 "말씀으로 계시하다"를 의미한다(요 8:40; 요 8:45; 요 8:46, 반대의 개념인 프슈도스[$5579] 대신에 더 일반적인 하마르티아[$266]가 사용된 곳, 특히 요 8:47, 알레데이아 대신 하나님의 말씀[타 레마타 투 데우]이 쓰여진 곳).

 

④ 이 단어가 세례(침례) 요한에 대해 말해질 때 같은 이중의 의미가 나타난다: 그가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느니라"(요 5:33). 그것은 요 18:37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여기서 빌라도의 질문이 그 말씀을 강조하고 계속되는 말씀에서 알레데이아가 스스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실체라는 것과 그것의 이해는 자유로운 존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실체로 말미암은 존재의 결정에 기초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⑤ 계시로서 알레데이아는 기노스케인(아는 것, 요 8:32; 요이 1:1, 요일 2:21)의 대상이다. 첫번째로 표현되는 것은 이해될 수 있는 말씀(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과 같은 계시의 결정적인 능력의 특성이다.

알레데이아는 본질적으로 질문한 사실의 표면적인 진실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그것을 일반적이고 표면적인 의미로 이해한다면 크게 오해하는 것이다. 엘류데리아($1657: 자유)가 인간 의지의 자유가 아니라 죄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참조: 요 8:34), 의미하는 바는 일반적인 지식이 아니라 계시에 대한 지식이다.

요 17:17; 요 17:19의 진리도 마찬가지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즉 아버지에 의해 예수님께 위탁된 선언),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하려 함이니이다"(요 17:19). 계시의 말씀은 말 또는 사상의 집합체도 아니고, 구체적인 마주침으로 성취되는 말씀이라는 사실은 그것이 예수님 개인과 그의 역사에서 성취하신 사건들과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에 의해 드러난다(요 17:17-요 17:19). 그는 단순히 그의 말씀에 의한 전달로서가 아니라 알레데이아를 위하여 자신을 거룩하게 함으로 알레데이아를 가져오므로 그것은 다음과 같이 말해질 수 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그러므로 계시는 목적에 이르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수단인 동시에 목적(조에: 생명)이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신성이 나타날 때에 진정으로 받아들여진다. 하나님께서 계시로 나타나신다는 것은 요 1:14; 요 1:17에 나오는데, 거기서 "독생자의 영광"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으로, 즉 하나님의 실체는 그것 안에 나타난다고 묘사되었다.

 

⑥ 우리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에 대한 요구(요 4:23 이하)를 같은 선상에서 이해해야 한다. 요한에게는 알레데이아 뿐만 아니라 프뉴마도 인간과 완전히 구별되는 신성의 본질과 출현의 영역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그 의미는 참된 예배는 영성과 의인화된(anthropomor- phic) 개념이 제거된 하나님의 개념에 기초한 순수한 지식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본질 즉 프뉴마에 의해 결정될 때에 일어난다. 알레데이아가 더해진다면 이것은 그러한 예배는 오직 예수님 안에서 성취된 계시(요 4:25)에 의해 결정될 때에, 따라서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신 계시자(요 1:18; 요 14:6)에 의해 결정될 때에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⑦ 세상을 떠나시는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보혜사는 요 14:17; 요 15:26; 요 16:13에서 "진리의 영"이라고 해석되며, 이것이 요한복음이 이 공동체에 주어진 "성령"의 전통적인 개념을 이해하도록 의도한 방식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참조: 특히 막 13:11; 행 1:8). 바로 그분 자신이 요 14:16에서 보혜사라는 용어를 선택하신다. 프뉴마 테스 알레데이아("진리의 영")가 단순히 하나님의 성령만을 의미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이 알레데이아 만큼이나 하기오스에 의해서도 표시되기 때문이다(참조: 요 17:17-요 17:19). 그러나 그 단어가 프뉴마에 대해 말할 때에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요 16:13)는 우리에게 요한에게 하나님의 진리는 항상 계시 안에서 작용하므로, "진리의 영"으로서 역사하시는 파라클레토스(보혜사)의 역할은 공동체에서 계속 역사하는 계시로 묘사되고, 요일 5:6에서 증거하시는 프뉴마는 바로 알레데이아와 같다. 같은 의미로 요일 4:6에서 "미혹의 영"과 대조되는 "진리의 영"에대한 언급이 있으며, 어떤 것이 하나님에 속한 것인지 아니면 불경한 세력에 속한 것인지를 알 수 있는 기준은 실제적인 행위, 즉 공동체 안에서 선포된 말씀을 듣는가 또는 안듣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알레데이아는, 그것이 선포된 한은, 옳은 교리이며 프슈도스(거짓, 거짓말)는 잘못된 것이다(요일 2:21). 한편 요삼 1:3의 알레데이아가 계시에 의하여 결정되는 삶의 방식을 나타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요일 1:6의 "진리를 행하는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과 반대되는 삶의 방식(-->242)을 나타낸다. 참으로 요삼 1:12에서 어떤 사람이 "뭇 사람에게" 가졌다는 증거는 "진리에게도"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계시는 공동체를 결정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요삼 1:8에서도 같은 맥락에서 공동체가 훈계,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게 하려함이니라"로 그것의 구체적인 기독교적인 행위에 동기를 부여한다. 이 결정이 개개의 신자들을 결속시킨다. 그 때문에 요한이서의 저자는 편지의 표현을 사용하여 그의 지도자들에 대해서 말한다: "1 장로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하노니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 2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할 진리를 인함이로다 3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요이 1:1-요이 1:3).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R. Bultman; A. C. Thiselton).



진리의 영

보혜사, 성령 진리의 영(요 14:16-20)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진리의 영(the Spirit of truth)
요한복음 14: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아멘 

진리의 영(the Spirit of truth)

- 보혜사(Counselor)(16절) παράκλητος
(남을 위해 나타난 자, 중재자, 조정자, 돕는 자,
변호자, 위로 자, 중보자)
-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하신다(16절)
-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26절)
-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시리라(26절)
- 평안을 주노라(27절)

요한일서 4: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Dear friends, do not believe every spirit,
but test the spirits to see whether they are from God,
because many false prophets have gone out into the world.

요한일서 4:6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We are from God, and whoever knows God listens to us; but whoever is not from God does not listen to us.
This is how we recognize the Spirit of truth and the spirit of falsehood.


보혜사(진리의 영)
1. 살려주는 영(고린도전서 15:45)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So it is written: "The first man Adam became a living being"; the last Adam, a life-giving spirit..

보혜사(진리의 영)
2. 양자의 영(로마서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For you did not receive a spirit that makes you a slave again to fear, but you received the Spirit of sonship. And by him we cry, "Abba, Father."

갈라디아서 4: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Because you are sons,
God sent the Spirit of his Son into our hearts,
the Spirit who calls out, "Abba, Father."

보혜사(진리의 영)
3. 성결의 영(로마서 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Through the Spirit of holiness was declared with power to be the Son of God by his resurrection from the dead:
Jesus Christ our Lord.


보혜사(진리의 영)
4. 진리의 영(요한복음 14: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The Spirit of truth.

보혜사(진리의 영)
5. 그리스도의 영(로마서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You, however, are controlled not by the sinful nature but by the Spirit, if the Spirit of God lives in you. And if anyone does not have the Spirit of Christ, he does not belong to Christ.





보혜사(保惠師) / 보호하시고, 은혜를 주시고, 가르치시는 자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지, 보혜사의 참 뜻이 아닙니다.

보혜사(파라클레토스) / 돕기 위해부름 받은 자

예수님도 보혜사라는 존재를 처음 소개하시면 보혜사에 대해 이렇게 해석하셨습니다16-17절)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지금 예수님은 보혜사를 자기 자신과 그리고 진리의 영 성령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16절에서 예수님은 보혜사를 ‘다른 보혜사’라고 말씀합니다.
왜 다른 보혜사라고 말씀하실까요?
보혜사가 예수님과 비교해서 질적으로는 같으나 엄연히 다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보혜사 즉, 진리의 영 성령의 가장 바른 해석은 ‘돕는 자’, ‘위로자’, ‘상담자’라는 뜻입니다.
​보혜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구주로 믿도록 도와주시며 믿음생활을 도우십니다.

보혜사는 사람들이 낙심해 있을 때 위로하여 새 힘을 주십니다.
보혜사는 사람들이 죄를 범하여 괴로워할 때 죄를 회개하게 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도록 상담해 주십니다.
보혜사, 진리의 영 성령은 일시적이거나 한시적으로 도우시고, 위로하시고, 상담하시는 게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항상 그리 하십니다.
보혜사, 진리의 영 성령께서 본문 16절 말씀처럼 예수 믿는 사람들과 영원히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금 전 읽어본 본문 17절 상반절을 보면 세상은 진리의 영을 받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여기서 세상은 어디입니까?
예수를 거부하며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곳을 가리키죠.
그 곳에는 보혜사, 진리의 영 성령 대신 미혹의 영, 사탄이 거처하며 역사합니다.
즉,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요한복음 16:13a 말씀처럼 진리의 성령이 오셔서 예수 믿는 성도들을 인도하십니다.
예수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미혹하는 영이 세상에 많이 나와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며, 예수님을 믿지 못하도록 세상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입니다(요한일서 2:17).

세상 사람들은 미혹의 영인 사탄에게 빠져 보혜사, 진리의 영 성령을 보지도, 알지도 못합니다.
​결과적으로 갈라디아서 5:16말씀처럼 육체의 욕심을 이루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의 삶을 보십시오.
그들이 얼마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지 잘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다시 말해, 얼마나 음행하고, 영육으로 더럽고, 우상숭배하고, 굿하고, 원수 맺고, 다투고, 분내고, 분열하고, 투기하고, 술 취하고, 방탕 하며 사는지 모릅니다.

반면, 예수 믿는 사람은 보혜사, 진리의 영 성령이 그와 함께 계심으로 갈라디아서 5:22말씀처럼 성령의 열매를 맺으려 하며 삽니다.
즉,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를 열매를 맺으려고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고민스러운 것은 예수 믿는 사람도 미혹의 영, 사탄의 유혹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으려고 몸부림치는데도 불구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도 때로는 넘어져 육체의 욕심을 채우려 하는 모습이 발견되곤 하지 않습니까?

그럴 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얼마나 괴로운지 모릅니다.

심지어 보혜사, 진리의 영 성령이 자기에게서 떠난 게 아닌지 의심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보혜사, 진리의 영 성령은 결단코 예수 믿는 자로부터 떠나지 않습니다.

본문 17절 하반절 말씀처럼 예수 믿는 자들과 함께 거하실 뿐 아니라 예수 믿는 자들의 심령 속에 항상 계시어 그들을 도우시고, 위로하시고, 상담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보혜사, 진리의 영 성령에 대해 이해했을까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임을 말씀할 때에도 제자들 중 그 누구도 이해를 못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예수님께서 베푸신 이적과 기사를 자기들의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지 못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하물며 아무런 실체가 없는 보혜사, 진리의 영 성령을 말씀하실 때 제자들이 이해했을까요?

​아마도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 자기 곁을 떠나시게 될 사실 앞에 유약하기 그지없는 제자들이 모두 망연자실하지 않았겠습니까?

절망한 나머지 아무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본문 16-17절을 봐도 잘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왜 예수님께서 본문 16-17절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여 받은 보혜사를 너희들과 영원토록 함께 있게 하겠다, 너희와 함께 거하겠다, 너희 속에 계시겠다”는 말씀을 계속 하실까요?제자들이 잘 이해하지도 또 믿지도 못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의 보혜사 약속을 믿는다면 예수님께서 그렇게까지 반복하며, 강조하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인지 본문 1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한 가지 약속을 해 주십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너희에게 오리라’는 말씀을 ‘이 세상 마지막 날에 너희에게 오겠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곤란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종말에 너희에게로 다시 오겠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성령으로 임재 하여 계속 너희와 함께 하겠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종종 제자들에게 자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귀띔해 주셨죠.

​그 말씀대로 조금 있으면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로 올라가실 겁니다.

그러나 올라가시기는 해도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영영 떠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보혜사, 진리의 영 성령으로 제자들에게 임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은 결단코 제자들을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고 반드시 제자들에게로 오실 것입니다.

그와 같은 예수님의 함께하심의 약속은 실제로 성취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제자들이 오순절에 마가요한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할 때 예수님께서 보혜사, 진리의 영 성령으로 제자들에게로 오시지 않았습니까?

이후 예수님은 보혜사, 진리의 영 성령으로 제자들의 심령 가운데 계시며, 영원히 제자들과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28:20b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 약속을 그대로 지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 19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예수님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자신의 십자가 죽음이 가까이 다가왔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계속해서 예수 자기를 보게 될 것임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죠?

예수님 자신이 보혜사, 진리의 영 성령으로 제자들의 심령 가운데 오셔서 그들과 함께 계속 아니, 영원히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본문 20절 말씀처럼 그 날에 자신은 하나님 아버지 안에, 또 제자들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은 제자들 안에 계시는 것을 제자들로 하여금 알게 하실 것입니다.

여기서의 그 날은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신 날이기도 하고요.

예수님께서 이 세상이 마지막을 고하는 종말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종말에 예수님과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신 심판주로 선악 간에 사람들을 심판하실 겁니다.

그 때에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성도들이 보혜사, 진리의 영 성령의 역사로 인격적, 영적으로 완전히 연합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본문 20절 말씀을 제자들이 당장은 깨닫지 못했습니다만 예수님 승천하신 후에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예수님과 완전히 연합하는 것을 체험하게 되죠.

보혜사, 진리의 영 성령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여전히 자기들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체험한 제자들의 삶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보혜사, 진리의 영 성령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여생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다가 사도 요한을 제외한 열 한 명의 모든 제자들이 순교하지 않았습니까?

 

그처럼 보혜사, 진리의 영 성령의 역사는 강력하고요,

그러한 역사는 오늘날에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습니다.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 하겠다고 하신 예수님의 약속은 오늘날 저와 여러분 나아가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대로 유효합니다.

다시 말해, 보혜사, 진리의 영 성령은 저와 여러분을 비롯하여 오늘날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찾아오셔서 돕는 자로, 위로자로, 상담자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 뿐입니까?

오늘도 우리 심령 가운데 임재 하시어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시며 역사하시고요.

우리로 하여금 미혹의 영, 사탄에 미혹되어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지 않도록 간섭하시어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나아가 보혜사, 진리의 영 성령에 사로잡혀서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역사해 주십니다.

다만, 우리 또한 제자들처럼 미혹의 영, 사탄에게 미혹될 확률이 있는 존재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또한 보다 적극적으로 보혜사, 진리의 영 성령이 오순절에 강림하셨던 것처럼 우리 교회와 심령과 지역과 전도하는 현장 가운데 강력하게 역사하도록 하나님 아버지께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보혜사, 진리의 영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심령, 교회, 삶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은 오늘 주신 약속의 말씀을 꼭 붙들고, 하나님 아버지께 보혜사, 진리의 영 성령을 간절히 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구할 때에 하나님 아버지는 꼼짝없이 약속하신 말씀을 따라 보혜사, 진리의 영 성령께서 역사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처럼 여생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복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역절적 신앙

세상에 살다 보면 모순되는 것 같지만 역설의 진리가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소리없는 아우성”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소월의 시)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역설입니다.
지는 것은 지는 것이고 이기는 것은 이기는 것이지 어떻게 지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까?
그러나 논리는 모순되는 것 같아도 그 내용은 진리입니다.
이것이 역설입니다.
역설은 궤변과 다릅니다.
궤변은 논리도 모순이고 내용도 참이 아닙니다.

미국의 켄트 케이스라는 사람이 역설적 진리 십계명을 만들어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주장하기를 “세상은 미쳐있다 이런 미친 세상에서 올바르게 살아가려면 역설적 진리를 깨닫고 살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성경의 교훈을 보면 이와 같은 역설적인 진리들이 많이 발견됩니다.
이것은 케이스의 말처럼 “미친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생활 지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은 무언가 잘못되어 있고 그 속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손해를 보고 공격을 당할 수 있습니다.
오해를 받고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개의치 말고 진리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교훈 중에 대표적인 역설적 진리가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그 길은 좁고 찾는 이가 적지만 생명의 길이다”
또 다른 하나는 “남이 너를 대접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먼저 남을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교훈들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과는 정반대의 일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면 이 세상에서 살기 힘들고 손해만 보는 일들이 생길 것이 너무나 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기 때문이고 그것이 진리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국 진리는 승리하고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 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12:24-26에서 세 가지 역설의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십자가 죽음을 앞두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역설은 자신의 죽음의 가치를 말씀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1. 한 알의 밀이 떨어져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2.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고 버림으로 영원한 생명을 보전하고
3. 종처럼 자기를 낮추고 섬기는 것이 오히려 귀하게 여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곧 복음입니다.
복음은 역설적 진리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임합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역설의 진리입니다. 죽어야 사는 것입니다. 내가 죽을 때 내 속에 주님이 사는 것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죽은 척 하면서 죽지 않은 교인들이 많습니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요 12:25)

약함이 약함이 아니고, 강함이 강함이 아닙니다

"내가 약할 그때에 강함이라(고후 12:10)"는 역설적 진리입니다.

이 역설적 진리는 특히 약육강식의 동물 세계에서, 사자 호랑이 같은 맹수는 멸종하고, 맹수를 피해 굴이나 바위틈에 숨어사는 토끼 사반(잠 30:26) 같은 약한 짐승들의 번성을 통해 확인됩니다. 이는 비단 자연 생태계만의 아닌 영적 세계의 역설이기도 합니다. 40여년 하나님만을 의지했던,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이 바로 그랬습니다.

자급자족이 불가능해, 일용할 식량부터 물까지 오직 하나님의 손끝만 바라보고, 자연의 앙화나 적의 공격으로부터도 전혀 무방비인 채 오직 하나님만 의존하고 나아갔으나, 그들은 멸절당하지도 않고-오히려 그들을 공격하던 강대국들은 소멸됐습니다-의복이 해어지지거나 발이 부르트지도 않았습니다(신 8:4).

성경에 의하면 그들을 따르는 반석 그리스도가 그들의 공급과 보호가 되어 주신 때문입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4, 시 62:6)."

이 역설적 진리는 성경은 물론 기독교회사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까지 변함없이 유효합니다. 그들은 스스로의 안위는 불문한 채, 어떤 호구지책이나 안전망도 없이-그야말로 세상에 내 동댕이쳐 진 것처럼(벧전 2:11, 히 11:13;38)-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만을 좇았음에도, 멸절되지 않고 건재했습니다.

물론 타락한 세상에서는 그런 천수답 같은 삶의 양식이 유별나고 광신적으로까지 비쳐질 수 있으나, 무죄했던 태초의 에덴에서는 보편적인 존재 방식이었습니다.

본래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렇게 살도록 경륜하셨고,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즐겨 공급자와 보호자가 되어주셨습니다. 만일 아담과 인류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인간의 죄된 욕망이 빚어 낸 오늘 같은 눈부신 발전은 이루지 못했을지 모르나, 하나님의 보호와 공급으로 만족하는 극락(joy unspeakable, 벧전 1:8)의 삶을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바벨탑 사건에서 보듯, 과학 문명의 발전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인간의 힘을 우상시하는 타락의 산물이었습니다. 성경은 과학문명의 주도권이 육의 사람 가인(Cain)의 후손들에게 쥐어졌음을 명시합니다(창 4:20-24).

이 하나님 의존은 우리 앞서 이미 그리스도께서 그의 지상 생애에서 몸소 체현해 보이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2위(位)이셨으면서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 절대 의존의 삶을 사셨습니다.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고(요 5:30)",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 5:19)".

심지어 그리스도는 말 한마디, 가르침 하나까지도 자의적으로 하시지 않았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요 8:28)".

이러한 그리스도의 하나님 절대 의존 방식은, 우리로 하여금 그가 하나님의 2위시라는 사실을 잊게 만들 정도이며, 피조물인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을 의존해야 하는가를 교훈합니다.

이런 그의 삶의 태도는 태초에 무죄했던 아담의 삶을 능히 유추하게 합니다. 예수님이 포도나무 비유에서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고 하신 말씀은, 사실 하나님 의존적인 그리스도의 삶을 우리에게 그대로 투영시킨 것이었습니다.

그의 기도 중심의 삶 역시, 전적인 하나님 의존의 한 단면이었습니다. 공생애 시작 즈음 드려진 40일 금식 기도(마 4:1-2), 매일 새벽과 밤 기도(막 1:35),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드린 겟세마네 기도(눅 22:44), 말씀도 듣고 치유도 받고자 몰려오는 사람들을 물리치시고 홀연히 산으로 기도하러 가신 예(눅 5:15-16) 등은, 그가 얼마나 하나님 의존적이셨는지를 증명합니다.

사도 누가가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쳤던, 밤낮 부르짖는 과부의 전력투구적인 기도(눅 18:1-8)는,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 의존적인 삶의 방식을 반영한 것입니다.

이처럼 참된 그리스도인의 표지는 하나님 의존에 있습니다. 이는 공리주의자들(a utilitarian)의 주장처럼, 하나님 의존을 인간 잠재력의 사장(死藏) 여부와 연결지우기에 앞서, 하나님이 경륜하신 인간 정체성의 규현이라는 훨씬 중차대한 문제로 파악합니다.

누구든 진정으로 거듭나 그리스도가 내재하는 사람이라면,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하는 것(갈 5:25)"을 자신의 본분과 긍지로 삼으며, 자력적인 삶을 배교적이고 부끄러운 것으로 여깁니다.

바울 사도 역시 하나님 의존을 참된 그리스도인의 표지로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빌 3:3)."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하나님 의존은 자기 보존을 넘어, 하나님의 강함과 능력을 덧입는 원천입니다. 성경이 그리스도인이 약할 때에 강하게 된다(고후 12:10)고 한 것은, 그가 약하여 하나님을 전심 의뢰하니,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 머물기 때문입니다. 이는 누구보다 먼저 그리스도의 삶에서 확증된 바입니다. 그가 약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으나-정확하게 말하면 스스로 생명을 버린 것입니다(요 10:18)- 하나님이 그를 다시 일으키셨습니다(고후 13:4).

이러한 하나님 의존에서 오는 능력과 강함은 욕망에 매몰 된 세속적인 교인들이, 자신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일종의 심리요법으로 도용한,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의 왜곡과는 다른, 하나님 절대 의존에서 오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일찍이 바울은 이 강함의 원리를 깨달았기에, 자신의 약함을 부끄러움이 아닌 자랑으로 여겼으며, 우리를 향해서도 강해지려면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약해지라고 권면했습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고후 12:9)."

이 성령으로 말미암은 능력과 지혜는, 세상의 어떤 능력자, 지혜자의 그것들 보다 탁월합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다(고전 1:25)".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없을 만큼 충분히 강한 사람보다, 약하여 하나님의 도움 없인 못사는 사람이 훨씬 더 강하고 지혜롭다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약함이 약함이 아니고 강함이 강함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약하여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의 안전함을 거듭 거듭 강조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잠 30:5)", "마음이 탐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풍족하게 되느니라(잠 28:25)",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의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사 26:4)".



 


‘골방의 시간 갖기’
날마다 큐티하기, 1시간 기도하기, 성경일독하기 등등이 그 내용입니다.
믿음은 저절로 자라나지 않습니다.
날마다 말씀을 먹고 기도하고 순종하는 그 과정을 통해 성장하게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보면 발견하는 역설들이 있습니다.
역설, 혹은 역설적이다 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어떤 주장이나 이론이 겉보기에는 모순되는 것 같으나 그 속에 중요한 진리가 함축되어 있는 것을 역설이라고 합니다.

즉 성경에 나오는 말씀 중에 많은 것들이 세상의 일반적인 경향이나 가치와 사고 등과 상반되는 것이 많다는 것이죠.
그래서 모순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역설에 참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의 논리와 세상의 가치를 거스르고 모순되는 역설로 가득한 것이 성경이기에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런 역설에 해당되는 말씀들의 예는 이런 것들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너에게 잘못한 사람을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 네가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하라. 높아지려는 자는 낮아지고 낮아지는 자는 높아진다."

그 말씀들 하나하나를 보십시오.
세상의 가치와 우리 인간의 사고와 생각과는 전혀 다르지 않습니까?
모순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안에 참된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역설이 되는 겁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가난한데 복이 있다?
모순 아닙니까? 우리야 이미 신앙생활을 해왔기에 이 말씀을 가지고 모순이라고 하지는 않지만 세상적인 시각으로 보면 모순입니다.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누가복음 6:20을 보면 더 그러합니다.
누가복음에는 '심령이'라는 말을 빼고 그냥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니, 무슨 뚱딴지같은 말입니까?
가난이 어떻게 복입니까? 가난은 화죠. 저주입니다.
그것이 일반적인 사고 아닙니까?
세상 사람들 중에 누가 가난한 것을 복으로 여깁니까?
스스로 가난을 택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복으로 여기지는 않습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이 모순되는 말에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역설입니다.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이 말씀은 구약성경의 흐름에서 봐야 합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가난과 경건은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으로 이해가 되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가난하지만 마음도 가난한 경우가 많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의지할 데라고는 하나님에 대한 자신들의 믿음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의 대상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반면에 부자들의 경우는 많은 경우 경고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물질적인 부유함이 자칫하면 자기를 신뢰하는 교만으로 빠질 수 있고, 충분히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끝없는 탐욕으로 인해 죄를 질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구약의 배경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그런 구약의 배경을 가지고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을까요? 어느 정도는 맞지만 전부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아무리 가난한 자라 해도 그 안에 겸손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물질적으로 가난한 것이 오히려 하나님과 세상에 대한 불평불만과 증오심이 되어서 가진 이들을 증오하고 자신의 인생을 함부로 살고 포기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가 교만한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그런 사람이 나중에 부자가 되면 아주 악독하고 탐욕스러운 부자, 우리가 보통 말하는 졸부가 되어 버립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다 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자라고 해서 다 화가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역시 겸손입니다. 자신이 지금 가지고 있는 부와 재물, 권력이 원래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임을 겸손히 인정하는 마음이 있을 때 부자 역시 복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겸손이 있는 부자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가지고 거만하거나 없는 사람을 무시하거나 더 가지려고 탐욕을 부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부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없는 이들을 돌아보고 자신이 가진 물질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 부자라면 복 있는 사람입니다.

가난한 사람이든 부자이든 그 중심에 겸손이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누가와 달라 그 앞에 '심령이'라는 말을 추가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뜻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를 말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겸손은 이런 것입니다.

겸손은 먼저 하나님 앞에 자신이 죄인됨을 깨닫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없는 무능한 사람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는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스스로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께 긍휼과 자비를 구하고 도우심을 구하고 늘 은혜를 구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겸손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이 진정한 겸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그 겸손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나 겸손한 사람,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겸손입니다. 그렇다면 교만이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자신의 죄인됨과 무능함을 고백하지 않는 것,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구하지 않는 것,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 이것이 교만입니다.

겸손을 히브리어로 'ענו'(아나브)라고 하는데 '가난한 사람'과 같은 의미로 쓰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됨과 무능함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는 겸손한 사람이 곧 가난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했을 때는 이런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심령이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이 죄인됨을 깨닫고 고백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에는 무능한 사람임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도우심을 구하는 겸손한 심령을 가지고 있다면 물질적으로 부자든 가난하든 그것과 상관없이 그 사람은 가난한 사람입니다.

왜 이렇게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는지 아십니까? 이 겸손을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바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 이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 자체부터 복이 아니겠습니까?

이사야 57:15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어떤 사람과 함께 하시겠다고요?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 통회한다는 말과 겸손하다는 말은 같은 의미입니다. 누가 통회하겠습니까? 자신의 죄인됨과 무능함을 깨닫는 사람,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 통회하는 겁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런 겸손한 자와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어떻게 될까요? "겸손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이건 당연한 것 아닙니까? 생명의 근원이시고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데 어찌 그 영이 소생되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영을 소생시킨다'는 말은 다시금 힘을 주어서 일어서게 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통회하는 마음을 어루만져 주셔서 아물게 해주십니다. 그 마음 가운데 깊은 평안과 기쁨과 용기를 주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시편 10:17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귀를 기울이십니다. 여러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의 소리에는 귀를 막으시고 겸손한 자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겸손한 자가 구하는 소원을 들으십니다.

겸손한 자가 구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 저 부자 되게 해주세요. 돈벼락 맞게 해주세요. 저 출세하게 해주세요. 성공하게 해주세요." 이런 것일까요?

겸손한 자가 구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오늘도 죄에 대해 졌습니다.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며 살지 못했습니다. 또 악한 생각을 품었고 상처주는 말을 했고 사랑의 행동을 하지 못했습니다. 거룩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노력은 했는데 그렇게 하질 못했습니다.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죄를 이길 수 있도록, 순종할 수 있도록, 사랑하며 살 수 있도록,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당신의 거룩하심으로 옷 입혀 주옵소서. 당신을 더 알기 원합니다. 믿음 주옵소서. 능력 주옵소서..."

이런 기도를 드릴 겁니다. 삶에 문제에 대해서도 동일하겠지요.

"하나님 저의 삶에 이런 문제들이 있습니다. 가정에 이런 문제가 있고, 자녀들에게 이런 문제가 있고, 나의 장래에 이런 일이 있습니다.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습니다. 저의 무능함을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주님께서 친히 다스려주옵소서. 주님께 의탁합니다. 인도해주시고 열어주시고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감사할 수 있게 하시고, 모든 상황 속에서 주님만 바라보게 하옵소서."

 

문제가 해결되고 모든 일들이 잘 풀려나갈 때도 동일한 고백을 할 수 있을 겁니다.

"하나님, 이 부족한 자를 불쌍히 여겨 은혜주심을 감사합니다.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고백합니다. 이것으로 인해 제 마음이 높아지지 않게 하시고 이것으로 인해 죄짓거나 어려운 이들을 멸시하는 일이 없게 하옵소서.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사용하게 하옵소서."

저는 이런 기도가 겸손한 자들이 드리는 기도이고 하나님께 아뢰는 소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심령에 겸손이 없으면 성황당 앞에서 정한수 떠놓고 비나이다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기도를 하게 될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마음, 가난한 심령을 가지고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 기도에 귀 기울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귀를 기울이시면 되는 겁니다. 그것이 곧 응답입니다.


우리는 눈에 무언가가 보여지는 것만을 응답이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것 자체가 응답입니다.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의 때에 달려있어요. 하나님께서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시는 그 때에 구체적으로 나타내주십니다. 그러기에 겸손한 자는 조급해하지 않습니다.

겸손한 마음, 가난한 심령, 이것을 다른 말로는 상한 심령이라고 하는데, 적어도 내가 그런 상한 심령, 가난한 심령, 겸손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구했다면 하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약속입니다. 상한 심령을 구하시는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응답받은 것입니다. 내 눈에 보여지고 내 손에 주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주십니다.


행여 주어지지 않아도 그것 역시 응답입니다. 나는 상한 심령으로, 가난한 심령으로, 겸손한 심령으로 구했지만 하나님 보실 때 그것이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내 판단보다 하나님의 판단이 백배 천배 옳습니다. 나를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내게 가장 좋은 것, 가장 옳은 것으로 응답해주십니다.

내가 구했는데 응답해주시지 않았다? 그것 역시 응답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지요? 자신의 육체의 가시, 곧 질병인데, 그것을 고쳐달라고 얼마나 구했습니까? 정말 겸손한 마음으로, 상한 심령으로 구했단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No였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는 겁니다."

때로는 응답이 주어지는 않는 것이 내게 은혜가 됩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응답되지 않는 그것이 오히려 그를 바르게 세워주고 끝까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겸손히 사역할 수 있는 힘이 됩니다. 얼마나 존경을 받았겠습니까? 자칫하면 교만해질 수 있는 여지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신 것이 오히려 은혜가 되어 끝까지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면서 겸손히 충성되게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겁니다. 결국은 그것이 응답이었던 것입니다.

겸손한 자의 기도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는 믿음이 주어집니다. 그것이 겸손한 자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실제로 여러분 자신의 경험을 돌아보십시오. 제 경우도 하나님 앞에 상한 심령이 되어 겸손하게 구했을 때 주어지는 것은 마음 가득한 평안과 기쁨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깊은 신뢰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가난한 심령으로 나아가보십시오.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기쁨으로 채워질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깊은 신뢰가 생깁니다. 이것은 겸손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받아야 믿음이 성장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십시오.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성경에서 말하는 복이 무엇인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이 무엇입니까? 세상은 무엇인가를 가졌다라고 했을 때 복이라고 말합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복하면 다 그런 복입니다. 오복이니 칠복이 하는 것도 보면 대부분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복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다릅니다. 물론 성경에서도 물질의 복, 현세적인 복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복도 주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복의 본질이 아닙니다. 복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입니다. 복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나옵니다.

시편 33:12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누가 복이 있다?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 선택되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전심으로 경배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그것이 곧 복이라는 겁니다.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곧 자신의 분깃이 됩니다. 기업이 됩니다. 즉 하나님이 자신의 재산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제대로 되면 그 영혼이 잘됩니다. 그러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는 복도 덤으로 오는 겁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그 영혼이 잘 되어 있으면 그건 복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올바르게 되면 그 사람의 영혼이 잘되는데 그건 다른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된다는 겁니다. 정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고,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내 삶을 다스려주시고 인도해주시게 됩니다.

그럼 내 안에 무엇이 이루어지는지 아십니까? 천국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죠?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되면 내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천국을 미리 맛보면 살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천국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천국을 이해할 때 하나님의 나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불교적인 극락이나 무속신앙적인 저승개념으로 천국을 이해하는데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는 쉽게 말하면 하나님으로 충만한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는 죄악이 없고 사탄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만이 충만합니다. 그러기에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에 젖어 온전히 하나님만을 경배하며 하나님과 형제자매를 사랑하며 거룩과 공의를 행하며 살아가는 나라입니다. 충만한 기쁨과 행복과 평안으로 넘치는 나라입니다.

이건 단순히 죽어서 가는 저승이 아닙니다. 지금은 우리의 영혼이 가는 곳이고, 장차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신 후에 세워질 나라입니다. 또한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세워나가야 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한 나라,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이 충만한 나라, 그래서 죄악이 없고 사랑으로 충만하고 평화로 충만하고 기쁨으로 충만한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인데,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되면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했을 때, 현재형을 쓰신 겁니다.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여기에 쓰인 동사형이 미래형이 아니고 현재형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된 사람은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복을 받게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것이 진정한 복 아닙니까? 잘 생각해보세요. 무엇이 진정한 복인지. 예수는 믿는데, 교회는 다니는데 아직도 세속적인 복에만 매달려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되어 이 땅에서 미리 하나님의 나라를 맛본다, 놀라운 축복입니다.

이 복을 발견한 사람, 이 복을 맛 본 사람은 신앙이 차원이 달라집니다. 신앙의 깊이가 달라집니다. 정말 예수 믿는 복이 이거구나, 정말 천국을 맛보며 산다는 것이 이런 거구나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신앙의 차원과 깊이가 달라질 수밖에요.


또한 이런 분들은 세상적인 복에서도 자유할 수 있습니다. 돈이 없어도 그것 때문에 죽지 않습니다. 불편하죠. 어렵지요. 하지만 그것 때문에 죽지 않습니다. 마음이 죽으면 죽는 겁니다. 물질 때문에 염려하면 마음이 죽어요. 마음이 죽으면 하루하루가 고달파요. 죽지 못해 사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겁니다. 모든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맛본 사람은 세상적인 복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염러하지 않게 됩니다. 집착할 때, 염려할 때 위험해지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제대로 맛본 사람은 세상에서 열심히 삽니다. 단순히 자기의 성공과 안위를 위해 열심히 사는 것 아닙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함입니다. 힘들어도 타협하지 않고 싸우며 나아갑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lifestyle이 달라지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복을 누리고 싶지 않습니까?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며 사시렵니까? 지금 이대로가 좋습니까? 지금처럼 적당히 믿고 적당히 주님과 거리를 두고 믿는 지금 이대로가 좋습니까?


주님께서 말하신 복이라면 진짜 복입니다. 최고의 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 복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 길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초대하고 계십니다. 천국이 나의 것이 되는 복을 받으십시오. 이 복에 욕심을 내십시오. 이런 욕심은 거룩한 욕심입니다. 거룩한 욕심을 내십시오.

 


여러분, 잘 기억하시고 행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나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맺어져야 합니다. 이것은 심령이 가난해질 때 가능합니다. 심령이 가난하다, 그것은 겸손한 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한 마음으로 나아가십시오.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하시고 무능함을 고백하십시오.

 

하나님의 긍휼 없이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하나님의 자비 없이는,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고 구하십시오. 날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십시오. 우리의 죄악과 연약함과 무능함을 모두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묵상하세요.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신 예수님을 묵상해보세요. 그래서 겸손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더욱 더 하나님 앞에 가난한 심령으로 상한 심령으로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시편 107:9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분명한 약속이며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 확인된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십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가난한 심령으로,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갈급해하는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구하십시오. 겸손한 마음으로 구하십시오. 가난한 심령으로 구하십시오. 반드시 만족케 해주시고 좋은 것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1. 성경에 나타난 역설


1) 고린도후서 6: 8-10

2) 고린도후서 12:9-10

3) 고린도전서 3: 18- 20

4) 마태복음 16:25

5) 마태복음 19:30

6) 마태복음 23:12

7) 요한복음 12:25


2. 역설의 신앙

 1) 낮아짐과 높아짐 / 약 4:10, 막 9:35
 2) 약함과 강함 / 고후 12: 9-10
 3) 내려놓음과 얻음 / 마 10:39, 눅 5:11
 4) 죽음과 생명 / 빌 2:8-9, 고후 4:10, 갈 2:20, 갈 5:24, 갈 15:31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세상을 거스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역설의 신앙입니다.
성도는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상식을 거스리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요한복음17:14-16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세상의 지식과 지혜를 좇지 말고 진리에 대한 욕심을 내셔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더 올바르게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고 맛보는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역설의 진리는 이 세상에서 경험되기도 하지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완성이 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중에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와 비밀을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기존 질서가 뒤집히는 날이 올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은 세상에 질서와 반대되는 것이고 세상의 질서를 대체하는 개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실 때에는 우리는 단지 저 멀리 높이 있는 하늘에 있는 나라만을 생각하지 말고, 세상의 질서와 반대되고 세상의 질서를 넘어서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영역에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질서를 생각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0: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누가복음 6:21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5절,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지금은 이 말씀이 이 세상에서는 앞뒤가 안 맞고 논리적이지 않은 것 같은 역설의 진리이지만, 마침내 새로운 세상, 다가오는 세상,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세상에서는 그대로 이루어질 진리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역설의 신앙을 소중히 갖고 역설의 진리가 완성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역설의 진리의 말씀은 겉으로의 기준과 평가와 안으로의 기준과 평가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설의 진리의 말씀은 보이는 세상의 기준과 평가와 보이지 않는 세상의 기준과 평가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설의 진리의 말씀은 물질세계의 기준과 평가와 영적인 세계의 기준과 평가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설의 진리의 말씀은 현세의 기준과 평가와 내세의 기준과 평가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설의 진리의 말씀은 순식간에 지나가는 세상의 기준과 평가와 영원한 세상의 기준과 평가가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이라면,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의 물질과 이세상의 가치와 이 세상의 평가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 하나님께서 어떻게 평가하시느냐, 하나님의 나라의 영원한 가치가 무엇이냐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세상에서 역설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역설적인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역설의 신앙을 가지고 삽니다. 역설의 신앙을 소중히 여깁니다. 역설의 신앙으로 성숙해집니다.

 


요한복음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생명의 역설입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아펜젤러가 한국 땅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는 배제학당을 창설하였고, 정동제일교회를 창설하였습니다. 그리고 성서 번역에도 크게 이바지하여 우리나라 선교에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그런데 1902년 6월11일. 성서번역의 일로 아펜젤러를 태운 배가 군산 근해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선박이 충돌해 이화학당의 여학생 두 명이 바다에 빠졌습니다.
아펜젤러는 여학생들을 구출하기 위해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자기 자신은 얼마든지 살아날 수 있었으나 마흔넷의 나이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미국인들은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겼습니다.
“아펜젤러는 총명하고 잘 생긴 사람이다. 미국에서 얼마든지 장래가 보장된 사람이었다.
그가 낙후된 한국에서 죽은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그러나 아펜젤러의 희생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세운 배재학교와 정동제일교회에서 수많은 인재들이 배출됐습니다.
그의 세 자녀는 모두 한국의 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대동강변에서 복음을 제대로 전하지도 못하고 칼에 맞아 죽은 토마스 목사님도 그렇습니다. 그가 죽기 전 몇 권의 성경책만 던지듯 전해 주었는데, 그것을 주어간 소년과 그 성경책을 찢어 벽에 붙인 사람이 나중에 예수님을 믿고 우리나라 교회사에 중요한 인물들이 되었습니다. 한 알의 밀이 죽으니까 많은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기독교는 역설의 종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역설의 신앙이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똑똑하고, 타산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은 역설의 진리를 받아드리지 못합니다. 세상적 관점에서 바보가 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세상적 관점으로는 바보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역설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 안에서 하늘의 지혜로 살아가고, 예수님의 능력으로 온전해 지고, 예수님으로 인해 모든 것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속이는 자 같지만 참된 사람들입니다. 무명한자 같지만 유명한 사람들입니다. 죽은 자 같지만 살아 있고, 징계 받는 자 같지만 죽임을 당하지 않습니다. 근심하는 사람 같지만 항상 예수님 때문에 기뻐합니다. 가난한 사람 같지만 다른 사람을 부요하게 해 주는 사람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사람 같지만 예수님으로 인해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임을 확신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역설적 진리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이사야 55:8~9)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은 큰 차이가 있다.
하나님의 생각인 성경 말씀은 주로 ‘역설적 진리’paradox로 되어있다. 

우리가 사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많은 경우, '역설적 진리'를 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꾸 이성적 진리(성공, 권선징악)를 전하다 보니, 복음이 왜곡되고 만다.

반대로, 이성적 진리는 항상 빼 버리고, 시도 때도 없이 역설적 진리만 전하는 것을 광신(fanatic, 열광주의)이라고 한다.  

1. 죽으면 살리라


이 말씀은 논리적 일관성이 전혀 없다.

아니 죽었는데, 어떻게 다시 사는가? 註1)


사람의 생각은 살고자 하면 살리라 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설적 진리는 죽고자 하면 살리라 이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12:24


우리가 성경 말씀에 순종하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역설적 진리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똑똑한 이성에 역행하기 때문이다.


① 에스더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에4:16

자기는 사실 왕비이기 때문에, 유대인이 모두 다 죽어도 자기는 살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처지를 버리고 죽고자 했더니, 죽으면 죽으리라며 나아갔더니,

자기도 살고, 민족도 다 살았다.


② 사렙다 과부

오랜 흉년에 오직 한 끼 분의 밀가루만 남아있었다.

엘리야 선지자가 방문했을 때, 그것을 자기들이 먹지 않고,

대신에 선지자에게 대접했더니 (그것은 죽을 각오였다)

평생 동안 먹을 것을 얻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

역설적(파라독스) 진리 때문이다.


③ 한 소년

군중들이 예수님을 따라온 지 사흘이 되자 모두 배가 고팠다.

그 때 어린아이 한 명이 자기 혼자 살고자 하지 않고

자기가 준비해 온 도시락을 내어 놓고, 군중과 함께 죽고자(굶고자) 했을 때

자기도 살고, 5천명도 사는(먹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


④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살고자 만약 도망쳤다면

‘허무한 죽음’으로 인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고자 하셨더니

부활하셔서 영원히 사시게 되었다.


⑤ 인도의 성자 썬다 싱의 유명한 일화

http://blog.naver.com/chanmbaek/100034155673

죽기를 각오한 썬다싱과 살기를 각오한 그의 동료 티벳인의 선택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준다.

 

어려운 때일수록 함께 살려고 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혼자 살려고 하는 것은, 결국 스스로 죽는 것이다.

비록 자기가 죽게 되더라도, 함께 사는 것을 택하는 것만이 모두가 사는 길이다.


⑥ 교회도 마찬가지다.

목사, 중직자들이 교회를 위해 죽고자 하면, 교회도 살고 자기도 산다.

그러나 약삭빠르게 자기만 살겠다고 하면, 교회도 죽고 자기도 죽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역설적 진리인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내 이성적 생각과 판단이 맞을 것 같은데,

하나님의 생각이 그것과 정반대가 되니까,

정말 그 진리를 생활에 적용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자기 죽음의 체험이 아니고서는... 어렵다.


⑦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  행20:35

세상 사람들의 생각은, 받는 자가 더 복 되다.

그러나 성경은 역설적으로 받는 자가 더 복 되다고 가르친다.


내 머리로 아무리 계산해도 의아스럽다.

하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 못 살게 될 것 같다.

경제적으로 망하게 될 것 같다. 


그런데 성경은, 역설적 진리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게 역설이니까, 우리 마음속에 콱 박히지 않지만 말이다.


⑧ 낮아지는 자는 높아지리라

사람들을 보면, 높아지려는 귀신이 들린 듯이 살아간다.

하다못해 초등학교에서도, 내 자식 반장시키려고 돈을 아끼지 않고 쓴다.


높아지려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낮아지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가르치셨다.

이것이 역설적 진리다.

예수님을 가장 가깝게 따라다니던 제자들마저도 그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2. 살려면 죽으리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요12:25

 

①아간

한 민족의 운명을 걸고 전쟁을 하는 마당에

아간이라는 약삭빠른 사람은 하나님과 맺은 민족적 계약을 파기한다.

여리고 성에서 얻게 될 어떤 전리품도 취하지 않기로 약속했는데,

아간이 자기 혼자 잘 살려고 금덩어리 등을 감추었다.


그런데 결과는, 아간만 죽고 다른 사람은 다 살았다.

살고자 하면 죽는 역설적 진리가 적용된 것이다.


②가룟 유다

12제자 중에서 가룟 유다는 아주 계산이 빨랐다.

스승이 이제 곧 죽겠다고 선언하자,

그는 이제 앞으로는 따라다녀 봤자, 아무 이득이 없다는 판단이 섰다.


그는 밤중에 빠져나가서 혼자 살 길을 궁리한다.

3년 동안 따라다닌 것이 물거품처럼 되자, 무슨 보상을 받으려 했던 것일까?

그는 로마 당국에 돈을 받고 예수님을 팔아넘긴다.


결과는 어땠는가?

다른 제자는 다 살고, 자기만 죽었다.


③아나니아와 삽비라

예루살렘 교회에 성령이 임해서 모두 희생을 치르며 소유를 내 놓았는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기들 혼자 살겠다고 뭐 좀 감추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예루살렘 교회의 창립자가 되었지만,

그 부부 두 사람은 현장에서 죽었다.


살고자 하는 생각은 육신의 생각이다.

주님을 위해 죽고자 하는 자는 살리라고 역설적으로 되어있다.

그래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힘들다.



3. '하나님의 생각'대로 판단 내리려면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이사야55:8~9


위 성경은 '하나님의 생각' 과 '하나님의 길'이  

사람의 생각과 다르고, 사람의 길보다 더 높다고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생각'대로 판단 내릴 수 있을까? 


▲성령으로 올바른 판단을 내린다

성령의 역사가 내게 나타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백발백중 ‘내 생각대로’ 결정하게 된다.


보혜사 성령, 그가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14:26


베드로는 아직 성령을 체험하지 못해서

육신적인 생각과 판단을 하고 말았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마16:23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우리 생각을 지배하는 것은, 우리 영인데,

우리 영이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영적인 생각, 하나님의 생각을 할 수 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8:6

 

크리스천은

내 생각을 버리고 성령의 뜻을 끊임없이 따라야 한다.


어떤 일을 크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지 않고,

훌륭하게 하려는데 우리 목적이 있고,


어떤 일을 많이 하려는데 목적이 있지 않고,

작은 일도 성실하게 하는데 우리 목적이 있다.


높아지려는데 목적이 있지 않고,

낮은 곳에서도 선하게 사는데 우리의 목적이 있다.


이것이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역설적 진리이다.

그래서 순교자들은 죽는 길인데도 태연히 걸어갔다.

‘말 한 마디만 잘 하면 풀려나서 편안히 살 것인데... 왜 저렇게 고집스럽게?’


그러나 그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가장 지혜로운 삶이었다.

성령의 역사로, '내 길'을 버리고, '하나님의 길'을 택한 것이었다...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앨리스(동화)처럼 전혀 새로운 가치관, 세상을 보는 렌즈를 점점 가져야 한다는 주제의 글.

Jesus introduces us to an upside-down world.
It’s one that he inhabits and invites us in.
Our problem, however, is that it’s a topsy-turvy universe, very different than the one we are used to.
It’s much like Alice in Wonderland falling through the rabbit’s hole and finding herself in a world where her perceptions and understandings were continually challenged.
She had to see with new lenses, hear with new understandings, and respond in ways that were not familiar.
Jesus is asking us to enter into a whole new world; to see, hear and respond in ways that are very unfamiliar to us.

예수님은 우리에게 거꾸로 된 세상을 소개하십니다.
그것은 그가 거주하고 우리를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그것이 우리가 익숙한 것과는 매우 다른 혼란스러운 우주라는 것입니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토끼굴로 빠져들어 그녀의 지각과 이해가 끊임없이 도전받는 세상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녀는 새로운 렌즈로 보고, 새로운 이해로 듣고,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대응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완전히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라고 요구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매우 생소한 방식으로 보고, 듣고, 반응합니다.

 





밀알의 신앙

성경을 보면 역설(逆說)이 많이 나옵니다.
흔히 ‘패러독스’(Paradox)라고 하죠.
역설이란 잘 아시는 대로, 얼핏 보면 틀린 말 같은데 사실은 진리인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 이런 역설적 진리가 많습니다.
특히 신앙의 세계에는 더더욱 많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무수한 역설이 등장합니다.
그 중에 몇 가지만 소개해 드리면 이런 구절들입니다.

마가복음 10: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고린도후서12:10
“ ...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사도행전 20:35
“ ...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 ”  

오늘 본문에도 보면 역설적 진리가 등장합니다.
한 알의 밀알이 썩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겁니다.
죽으면 오히려 산다는 진리요, 잃으면 오히려 얻는다는 진리입니다.
이것이 곧 십자가의 진리입니다.
십자가는 역설 중의 역설입니다.
피흘려 죽는데 사는 것이요, 수치를 당하는데 영광스러워지는 겁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이 역설적 진리를 터득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처럼 ‘한 알의 밀알’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서머나 교회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칭찬만 받은 교회입니다.
그 교회에 사도 요한의 제자였던 폴리갑이 감독으로 있었습니다.
폴리캅 기념 교회에 폴리갑과 함께 순교한 자들의 성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는 19세기 말 불란서의 화가 레이몽 페레(Raymond Pere)가 그린 그림인데 순교의 현장에서 손이 묶어져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장면입니다. 

폭스(Fox)가 쓴「순교사」의 글에 보면 당시의 박해와 고난이 얼마나 심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폴리갑(Polycarp.  69-155)은 당시 열번째 순교자로서 86세의 나이로 하나님 앞에 산 제물이 되었습니다.
로마의 총독이 늙은 감독으로서 특별한 대우를 하여 회심시켜 보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총독은 "네가 예수를 모른다고만 하라. 그리하면 풀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폴리갑은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할 수 없습니다.
내가 주님을 믿고 살아온 86년 동안 주님은 나를 한 번도 모른다고 부인한 적이 없는데 내가 어찌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하여 주를 모른다고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하면서 화형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불길로 걸어가면서 "오, 주 아버지여 ! 나를 이곳에 적합한 자로 세워 주셔서 감사합니다."고 말했습니다.
불이 그의 몸을 태울 때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들이 나를 태우는 이 기회에 내 생명을 다해서 당신을 간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니 감사합니다."고 했습니다. 

폴리캅은 초대교회 선교의 풍성한 열매가 맺어지기까지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덥고 독사와 악어가 들끓는 곳으로 이름난 '랑바레네'라는 곳에 서양 집도 아니고 토인들의 집도 아닌 40여 채의 자그마한 집들이 있습니다. 그 집들은 그 지방민들을 위한 병원으로서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 1. 14-1965. 9. 4)가 세운 것입니다. 

알버트 슈바이처는 1875년 독일 알싸스 지방에서 태어나 26세 때 이미 철학, 신학, 음악의 세 가지 분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그리고 의학박사의 학위까지 네 가지의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1913년 그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가장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주 예수의 복음을 전하려 아내와 같이 아프리카를 향했습니다. 그곳에 이르러 그는 병원을 세우고 토인을 돌보아 주며 주의 복음을 전하기에 갖은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온 생애을 다 바쳐 아프리카 선교의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한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선교의 역사속에도 썩어지는 밀알이 되었던 순교자가 있습니다.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39-1866. 8. 31) 목사입니다.
토마스 목사가 목선을 타고 1863년 9월 13일 황해의 거친 파도를 헤치고 다다른 곳은 백령도였습니다.
토마스 목사는 우선 이 섬에 상륙하여 약 2개월 동안 그곳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여 옹진 일대의 여러 섬들을 돌아다니면서 선교에 주력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주민들과 사귀는 일이었습니다. 
토마스 목사는 이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예수님과 선지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주민들 중에는 처음부터 거부반응을 보이면서 토마스 목사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사람도 있었으나 적지 않은 전도의 열매를 맺었으므로, 이번에는 방향을 돌려 육지로 무대를 옮기기로 했습니다. 
토마스 목사는 한국에서의 선교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황무지와 같은 한반도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임을 깨닫게 되자, 이 일을 잠시도 지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날로부터 토마스는 하나님께 전도의 길을 열어 달라고 기도하는 한편 지혜를 총동원하여 관헌들의 눈을 피해 가면서 황해도 서해안 일대에 복음의 씨를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1866년 8월 셔만호를 타고 대동강을 따라 평양으로 향했으나 관군의 저항으로 배에 불이 붙었습니다.
셔만호에 탄 선원들은 불을 피하려고 물에 뛰어 들었으나 언덕으로 기어오르는 대로 잡혀 죽임을 당했습니다.
토마스 목사는 기슭에 나와 덤벼드는 관군에게 성경을 꺼내 주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토마스 목사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저들은 무지하고 가엾은 인간이니이다."
순간 관군의 시퍼런 칼날이 토마스 목사의 목을 내리쳤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한국의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1927년 5월 8일 수천 명의 신도들이 모인 가운데 토마스목사의 추도 예배를 드렸으며 그를 기념하여 대동강 변에 조왕교회를 세웠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초대교회의 감독 폴리캅의 순교도 슈바이져의 헌신도 토마스목사의 순교도 모두 이 땅에 복음의 풍성한 열매를 맺게한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었던 것입니다.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에 있는 어느 교회가 제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폭격을 맞고 크게 부서졌습니다. 
마침 교회 안에 있던 예수님의 조각상도 파손이 되었으나 다행히도 두 손만이 떨어져 나간 체 보전되어 있었습니다.
성도들은 파손 된 이 조각상을 계기로 해서 이전보다 더 큰 교회를 세웠는데 어느 날 한 조각가가 파손 된 예수님 상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에서 우리가 없어진 두 손을 만들어 붙이자고 교회에 건의를 하였습니다.
그날 교인들이 모여 회의를 한 결과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우리는 조각상의 없어진 손을 다시 만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들이 예수님 손의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모두 주님을 향한 뜨거운 헌신과 섬기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위한 손이 되기를 기꺼이 자원했던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한 것도 그리고 우리 한국 교회가 부흥하고 발전한 것도 다 썩어지는 밀알처럼 자신을 희생하여 교회를 섬긴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또한 교회를 위하여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썩어질 밀알처럼 자기를 희생할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속에 살아있는 신앙

한 알의 밀이 심겨지는 것보다 이전에, 또한 땅에서 자기를 희생하는 것보다 이전에 중요한 것은 그 속에 있는 생명입니다.
생명 없는 씨앗은 싹을 티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생명 없는 죽은 씨가 아니라 생명 있는 살아있는 씨앗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안에 있어야 할 생명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안에 있는 사람이 진정 열매를 맺는 신앙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목적하는 것은 예수 생명을 모든 사람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도 친히 십자가에서 자기를 희생하셨던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이 썩으므로 맺어지는 열매들 속에는 동일한 생명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그 씨앗들을 심으면 싹이 나고 많은 열매들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나라의 비밀입니다. 

겨자씨가 심어져서 자라면 큰 나무가 되는 것도 그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안에 예수 생명이 있어야 섬김도 희생도 봉사도 충성도 모두 의미가 있고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 없이 행하는 섬김이나 봉사는 세상 사람들이 하는 봉사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교회의 부흥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이 된 성도들의 헌신과 섬김을 통해 교회에 부흥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내일의 부흥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이 되는 성도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부흥이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의 이름 없는 희생이 있어야 하고 누군가의 영광 없는 섬김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처럼 되어야 교회의 부흥을 기대할 수 있기에 모든 성도들이 밀알의 신앙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좋습니다.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아도 좋습니다. 

물론 아무도 섬겨 주지 않아도 좋고요. 다만 우리의 하는 일들이 예수님의 가신 길을 따라가는 길이라면 우리교회 성도들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저 그 길을 따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 안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생명이신 그분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그 분이 내 안에서 생명의 씨앗이 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자신을 희생하는 신앙

썩어지는 것은 곧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복음의 열매와 큰 역사는 남다른 희생과 헌신이 있을 때에 가능함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촛불은 흔적 없이 녹아질 때 더욱 밝은 빛을 나타내며 소금도 자체가 녹아 없어질 때 그 고유의 맛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세계 교회가 그러했고, 한국 교회가 그러했고, 각 교회마다 역시 남다른 희생과 봉사의 손길들이 있었기에 성장하여 왔음은 누구라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밀알 신앙을 소유한 성도들에게 있어서 얼마나 고난을 감내하느냐 보다는 얼마나 희생을 치르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단순히 고난을 감내하신 분이기보다는 기꺼이 희생을 치르신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는 것은 희생하셨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러 오신 분으로서 지금 우리가 그 분을 믿음으로 누리는 구원은 우리 편에서는 값없는 은혜의 선물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하신 엄청난 희생의 결과입니다.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 말씀은 역설적 진리이며 진리 중에 진리입니다.
죽으면 삽니다. 살고자 하면 죽는 것입니다.
죽어야 한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희생하는 것

예수님이 본이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희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죽으심의 희생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도는 희생할 줄 아는 성도이어야 합니다. 내가 희생해서 많은 사람이 산다면 희생할 수 있어야 하며 내 자신이 죽어져서 가정이나 교회가 화평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특별히 내가 희생하는 것을 통해 교회가 바르게 성장한다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둘째, 자기를 부인하는 것

나의 교만과 아집을 버리는 것입니다. 
빌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여기 취한다는 말은 놓치지 않기 위하여 꽉 붙잡는다는 뜻으로서 자기주장을 강하게 고집할 때나 자기 권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을 때 쓰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나오는 형용어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까? 

"여기지 아니하시고" 
즉 예수님은 자기를 내세울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모습을 내세우지 않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가 진정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희생되는 밀알입니까? 그렇다면 자기를 주장하는 자리에 앉지를 않아야 하며 내가 왜 죽어야 하고 또 왜 썩어야 하느냐면서 거부하지도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기꺼이 자신의 모든 영광과 권리를 포기하셨습니다. 

빌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자기를 비운다는 말은 물그릇을 쏟아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다 비우는 경우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의미의 빈 마음을 품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비우셨기에 마지막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땀과 물과 피까지도 다 쏟아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의 모습을 보면 예수님의 모습을 전혀 닮지도 못하고 자기 권리를 결코 양보를 하려고도 않습니다. 자기 주장이 너무나 강하고 고집이 아집이 여전히 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전히 내가 죽지 않고 살아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자기주장이 얼마나 강한지 조금만 내 권리가 침해되면 아파하고 분노하고 증오까지도 합니다. 이것은 죽지 않은 모습이요 비우지 못한 모습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교회에서 일을 맡은 직분자들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벧전5:3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내가 죽어 교회가 살고 성도가 살 수 있다면 기꺼이 죽어야 합니다. 아버지가 살아야 가정이 산다는 구호가 다른 의미에서는 아버지가 죽어야 가정이 산다는 말로도 표현 될 수 있습니다. 목사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는 말도 목사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는 말씀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에 자기를 부인하고 희생할 줄 아는 한 알의 밀알같은 성숙한 성도들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그 밀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셋째, 순교자의 신앙

미국의 명문대학을 졸업한 5명의 젊은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 피트는 신혼 여행도 포기하고 에콰도르 선교에 나섰습니다. 5명의 선교사는 아내들을 후방에 남겨둔 채 경비행기를 타고 단 한 명의 기독교인도 없는 아우카 인디언마을로 떠났습니다. 

1956. 1. 2. 피트 선교사는 아내에게 긴급무선을 쳤습니다. "흥분한 인디언들이 몰려오고 있다. 기도해 달라." 그 후 연락이 끊겼습니다. 이튿날 구조대원과 가족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5명의 선교사들은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었습니다. 복음을 거부한 인디언들에게 순교당했던 것입니다. 20대의 선교사 부인들은 울부짖으며 한 가지 다짐을 했습니다. "남편들이 이루지 못한 과업을 우리가 완수하자." 

아내들은 모두 아우카 마을로 이사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40여년이 지난 지금 그 마을은 '복음의 땅'으로 변했습니다. 선교사를 살해한 5명의 인디언들 중 4명이 목사가 됐고 1천여명의 주민들이 모두 신자로 변했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순교자의 피위에 오늘도 하나님 교회가 세워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한알의 썩어진 밀알처럼 순교자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순교자의 신앙이란 기꺼이 하나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성도를 위해서 죽는 신앙입니다. 

지금도 선교의 현장에서는 순교자들의 피가 뿌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순교해야 할 선교의 현장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교자의 신앙이 필요합니다. 순교자의 신앙은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며 순교자의 신앙은 내가 죽고 교회가 사는 것입니다. 순교자의 신앙으로 많은 생명을 살리는 풍성한 열매가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두리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밀알의 신앙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신앙입니다. 밀알의 신앙은 자신을 희생하는 신앙입니다. 밀알의 신앙은 순교자의 신앙입니다. 

밀알의 신앙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한 알의 밀알이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었던 것처럼 여러분들의 희생과 섬김과 헌신과 충성을 통해 많은 열매가 맺어지기를 바랍니다.

내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서 생명이신 주님을 높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생명 가지고 자기를 낮추고 희생함으로 그리스도의 피 값을 주고 산 교회를 부흥케 하는 밀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본문 바로 앞에 20절 이하를 보면, 헬라인 몇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아마 그들은 유대인 교포(디아스포라)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된 사람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유월절에 맞춰 예루살렘에 왔다가 예수님을 찾아온 겁니다.
성경에 나오지 않은 내용이지만, 전승에 의하면 이런 사연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당시 헬라(Greece)의 도시 국가 ‘에뎃사’에서 온 사신들입니다.
에뎃사 왕의 아들이 나병에 걸려 절망 중에 있었는데,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각종 병자들을 고쳤는데 특히 나병 환자를 고쳤으며,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린 분이라는 겁니다. 
그 소문을 듣고 그들은 어찌하든 예수님을 모시고 가려 했습니다.
그러면 왕자의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이고, 더 나아가 나라의 스승(국사)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 겁니다.
그 때는 유대인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등 당국자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해서든 죽이려고 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생각하기에 예수님께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제안을 거절하셨고, 끝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밀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 십자가 죽음, 부활 승천

본문은 그들이 면담 요청을 했을 때 하신 말씀입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십자가를 피해 그 나라로 가서 호강을 하는 게 영광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십자가를 지는 게 영광임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이를 위해 밀알의 비유를 언급하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마치 한 알의 밀알과 같은 존재라는 겁니다. 

먼저 23절을 보시죠.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인자(人子 Son of Man)는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표현인 것 아시죠.
마치 왕이 자신을 지칭할 때 “짐이 ...” “과인이 ...” 이렇게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 인자가 ...” 이 말은 “내가 ... ” 그런 뜻이죠. ‘영광을 얻을 때’라고 했는데, 이 말이 무슨 뜻인가요?
십자가 지실 때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십자가를 회피해서 세상의 부귀영화를 선택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신 겁니다.
24절을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의미를 밀알 비유로 분명히 설명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 진실로 진실로 ...” 
이 말은 헬라어 원어로 “아멘 아멘”인데,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강조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은 항상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정말 금과옥조처럼 명심할 진리임을 강조하신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자연의 법칙인 동시에 인생의 법칙이요 신앙의 법칙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 속에 심겨지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 한 알 그대로 있습니다.
아무런 가치도 생산해내지 못합니다.

오래 전에 고대 분묘에서 발굴됐는데, 그 가운데 곡식 낟알들이 있었습니다.
신기하게도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썩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고고학적 가치야 있겠지만 곡식이라는 측면에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낟알들이 땅 속에 심겨졌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곡식을 계속 생산해 냈을 겁니다.
남아 있는 게 이익이 아니라, 오히려 엄청난 손실이죠.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땅 속에 심겨지고 썩어지는 밀알과 같은 존재가 되기 위해 오셨음을 밝히 증거하십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많은 인간을 위해 대속의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고, 그로 인해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실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예수님 한 분이 피 흘려 돌아가심으로 무수한 인생들이 죄와 사망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2천년 동안 구원의 역사가 계속됐습니다.
앞으로도 십자가 구원의 역사가 계속 될 겁니다. 

이런 사실을 로마서 5:19에서는 뭐라고 말씀합니까?
“한 사람(=아담)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예수님)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무슨 말인가요?
인류의 시조 아담이 범죄함으로 모든 인간이 다함께 죄인이 되었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의인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 죽음이 그리 쉬운 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둔 고뇌를 토로하십니다.
마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연상시키는 대목입니다.

“27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 ”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성을 갖고 계시지만, 동시에 인성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생각할 때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이미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를 지실 것을 결단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28절(하). “ ...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놀라운 일이죠.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기 직전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 받으실 때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메시아 구세주로 공식 인정하는 표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기에, 또 십자가 후에 부활과 승천의 영광이 있을 것을 아셨기에 십자가를 당당히 지셨습니다.

히브리서 12:2
“ ... 그(=예수)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십자가 자체는 고통이지만, 그 이후를 내다 보셨기에 십자가를 감당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대속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요, 하나님 자녀와 천국 백성이 되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밀알 신앙의 계승자 그리스도인 : 예수 제자의 길 

십자가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을 따르는 밀알 신앙의 계승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게 바로 예수 제자의 길입니다.
제자의 길을 흔히 ‘제자도’(弟子道 Discipleship)라고 하죠.
‘밀알 신앙’이 곧 ‘제자도’인 것입니다. 

여러분, 밀알 신앙의 소유자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25절 보세요.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여기서 생명은 육체의 생명을 가리킵니다.
육신의 본능을 위해서 전전긍긍하면 실패하고 망한다는 겁니다.
오히려 육신의 본능을 극복하고 초월하면 승리하고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삶의 방식을 가리켜 자기부인(自己否認 Self-Denial)이라 부릅니다. 

우리가 아무리 예수 믿는 사람이라도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에는 항상 죄의 본능이 내재되어 시시때때로 솟아오릅니다.
육신의 욕망이죠.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았다는 것은 죄의 책임(죄책)에서 구원받았다는 것이지 죄성 자체가 완전히 없어졌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죄의 본능에 이끌려 살다보면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기보다 철저히 세속인의 모습으로 살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구별이 안 됩니다.
예수님이 예비하신 풍성한 축복을 경험하지도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기도 합니다.
결국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자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육신의 본능과 욕망을 죽여야 합니다.
이미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계속해서 ‘확인사살’(確認射殺)을 해야 됩니다.

갈라디아서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sinful nature)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육체’는 죄의 본능 즉 육신의 욕망을 가리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가 예수와 함께 새 생명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육신의 뜻대로 사는 게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쉽지 않아요. 정신을 차리고 발버둥치지 않으면 어느새 죄의 본능이 솟아오릅니다. 그럴 때면 이 말씀을 기억하세요! 

마태복음 16장을 보면,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나오죠.
베드로가 분명하게 신앙고백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16:16) 너무 기특해서 예수님이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그 전에는 제자들이 미성숙해서 십자가 고난에 관핸 언급을 회피했었는데, 이때 비로소 십자가를 언급하십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반응이 뜻밖이었습니다.
“예수님! 그러시면 안 되죠. 미쳤어요? 예수님이 죽기는 왜 죽어요?” 이런 식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지상의 이스라엘 건국을 꿈꾸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자기들도 한 자리씩 할 것을 기대했던 겁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십자가를 말씀하시니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베드로를 향해 뭐라고 책망하셨습니까? 

마태복음 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사람의 일’은 죄의 본능 즉 육신의 욕망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일’은 주님의 뜻이고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럴 듯하게 신앙 고백을 했지만 베드로의 마음속에서 죄의 본능이 솟아오르는 것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사단의 시험에 넘어진 겁니다.
예수님이 오죽하면 “사단아! 내 뒤로 둘러가라!”고 하셨겠습니까? 

육신의 욕망을 제어하는 것은 너무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게 제자의 길이요, 예수님을 섬기는 길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고, 진정한 승리의 삶이 펼쳐지게 됩니다. 

26절을 보세요.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예수님을 섬기는 것은 제자로서 육신의 욕망을 이기며 밀알 신앙을 실천하는 겁니다. 

십자가 없는 축복, 십자가 없는 영광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어요!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다.”(No Cross, No Crown)(스펄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겉모습은 신앙인의 모습으로 바뀌었지만, 속은 여전히 옛사람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내용물은 그대로이고 포장지만 바뀐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속사람, 내면의 영혼이 지향하는 방향이 달라져야 합니다.
세속인들처럼 무조건 복만 받겠다고 아우성치는 이른 바 ‘수복(受福)의 신앙’을 탈피해야 합니다.
복을 받는 것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고난을 당하더라도 주님의 뜻을 따라가는 겁니다.
이게 ‘자기부인’(自己否認)이요 고난을 불사하는 ‘수난(受難)의 신앙’입니다. 

이런 삶을 살다 보면 순교도 가능합니다.
기독교 2천년 역사는 순교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신학자 터툴리안이 이런 말을 했어요. “순교의 피는 교회의 밑거름이다.”
오늘날도 전 세계적으로 보면 곳곳에서 순교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은 순교를 하고 싶어도 기회가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흔히 순교 하면 신앙을 지키다 피 흘려 죽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가리켜 ‘적색순교’(赤色殉敎)라고 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순교가 있어요. ‘백색 순교’(白色殉敎)입니다.
이것은 살아 있는 동안 주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눈물과 땀을 흘리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건 순교가 아니죠. 그러나 평소에 이런 삶을 살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적색 순교를 할 수 있겠습니까? 적색순교를 한 사람들은 예외 없이 평소에 백색순교를 실천한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육신의 본능조차 이기지 못한 사람이 결코 피흘려 순교할 수 없습니다. 그런 뜻에서 백색순교라는 말을 사용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간순간 솟아오르는 육신의 욕망을 십자가를 의지함으로 이겨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한 알의 밀알로 드려야 합니다. 이게 바로 헌신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희생은 결코 손해 보는 게 아닙니다. 더 큰 영광과 더 큰 축복 경험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밀알 신앙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몇 가지 소개해 드립니다. 

기도의 밀알 :

그리스도인이라면 기도해야 되고, 기도하는 게 좋은 줄은 다 압니다.
그러나 기도가 잘 안 됩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본능으로는 기도하기 싫거든요.
요리조리 핑계대고 빠져나가려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이런 본능을 이기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그럴 때 비로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냥 막연히 축복을 구하고 기적을 바라지 마십시오!
그것은 기복 신앙이요 수복의 신앙입니다.
기도의 수난을 각오해야 비로소 축복의 문이 열리고 기적의 문이 열린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에스더 4장을 보면, 바사 왕국에 포로로 집혀 있는 유대인들이 큰 위기를 만나죠. 간신 하만이 모르드개를 미워해서 아예 유대인 전체를 학살하려고 흉계를 꾸밉니다. 그때 모르드개와 유대인들이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그 소식을 들은 에스더 왕후가 고민합니다. 왕에게 탄원하면 좋겠는데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왕실의 경호법으로는 왕이 부르기 전에 왕후조차 먼저 찾아갈 수 없습니다. 육신의 안일을 위해서는 숨을 죽이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에스더가 결단합니다. 에4:16 “당신(=모르드개)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결국 금식하며 기도하고 나아간 에스더가 승리합니다. 자기도 살고 유대 민족도 살았습니다. 그 이전보다 더 존귀해졌습니다. 자신을 기도의 밀알로 바쳤을 때 하나님의 영광과 축복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겁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의 밀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가정이 잘 되기를 소원합니까? 교회가 잘 되기를 소원합니까? 나라가 잘 되기를 소원합니까? 세계가 잘 되기를 소원합니까? 그냥 편하게 앉아서 되는 게 아닙니다. 기도의 밀알로 썩어지고 죽어야 합니다. 육신의 안일을 떨쳐 버리고 줄기차게 기도해야 됩니다. 아무쪼록 기도의 밀알이 되셔서 나도 살고 남도 살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전도 / 선교의 밀알 :

한 영혼이 주님께 돌아와 구원받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고와 헌신이 요구되는지 모릅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도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대학 3학년 때 복음을 받았는데 한 마디로 ‘뺀질이’였습니다.
친구가 전도할 때 너나 믿으라며 핀잔을 주며 여러 차례 거부했습니다.
대학생 선교단체에 인도됐는데 거기서도 많은 형제자매들의 수고를 무시하고 거절했습니다.
핑계를 대고 뛰쳐나왔는데, 계속 인내하면서 전화도 하고 편지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들의 수고를 보신 하나님께서 강권하셔서 저를 변화시켜주신 겁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체포되기 전 밀레도를 거쳐 가는데 그곳에서 고별설교를 합니다.
그 가운데 이런 고백을 했죠.

사도행전 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이러한 희생들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에게까지 복음이 다가온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입국했던 선교사들의 희생을 기억해 봅니다.
최초로 언더우드와 함께 온 아펜젤러 선교사(Henry Gerhart Appenzeller 1858~1902)가 생각납니다.
그분은 배재학당과 정동교회 설립자로 유명하죠.
특히 성경 번역을 위해서도 많은 공헌을 한 분입니다.
그는 군산 앞바다에서 선박 사고로 순교했습니다.
성경 번역을 위한 회의 참석을 위해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목포로 가는데, 군산 앞 바다에서 선박 충돌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본인은 살 수 있었는데 몸을 던져 조선 소녀 한 명을 구하고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비효율적인 것 같지만, 한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이 많은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겁니다.
사춘기 아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철이 든 후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 역시 이 땅을 위해 헌신합니다.
그가 노년에 신병 치료 차 한국을 떠나면서 유언을 남겼습니다.
“내가 죽으면 미국에 묻지 마십시오. 꼭 한국 땅에 묻어주십시오.”
그 유언대로 그는 지금 양화진에 묻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아버지 아펜젤러의 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이제 우리도 내가 다른 이들의 헌신으로 구원받은 것처럼 다른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전도와 선교의 밀알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밀알 :

세상의 이치는 희생이 있어야 그 결과가 생긴다는 사실입니다.
자식이 잘 되는 것도 부모의 희생이 전제됩니다.
공동체가 잘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이 잘 되려면 누군가, 교회가 잘 되려면 누군가, 나라가 잘 되려면 누군가의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했습니다.

갈라디아서 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옛날 영국의 웨일즈 남부 지방에 눈보라가 치던 날이었습니다.
한 여인이 길에 쓰러져 얼어 죽은 채로 발견됐습니다.
민망하게도 옷을 홀딱 벗은 모습이었습니다.
그 옆에는 젖먹이 아이가 작은 소리로 울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이 아이를 위해 옷을 다 벗어 덮어주고 자신은 얼어 죽은 겁니다.
그 아이가 철이 들자 양부모가 그 사연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는 친부모로부터 아무 것도 받은 게 없었지만, 그 사랑을 받았기에 훌륭한 크리스천으로 자랐습니다.
그가 바로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수상을 역임한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 1863~1945)입니다.
부모가 사랑의 밀알이 되는 한 자식은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사람들이 무조건 편안함과 안일함만을 추구합니다.
그 가운데 살다보니까 우리 자신도 모르게 이기적이 되어가고 육신의 욕망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게 됩니다.
자신 속에 있는 육신의 욕망을 죽이고 한 알의 밀알이 됨으로 나도 살고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풍성한 열매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갔습니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복이 있기를! 이스라엘의 왕에게 복이 있기를!”(요 12:13)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을 보며 사람들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님께서 오신다는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모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다시 살리셨다는 말을 그들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의 대제사장들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소생시키신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이 일로 많은 유대 사람이 떨어져 나가서, 예수를 믿었기 때문입니다(12:11).
바리새파 사람들 역시 예수님을 맞으러 나온 이들을 보며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라는 ‘위험한’ 인물을 주목하는 것이 못마땅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체념 섞인 투로 불평합니다.
“이제 다 틀렸소. 보시오. 온 세상이 그를 따라갔소.”(요 12:19)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시면서, 또 한편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을 비롯한 유대교 지도자들의 눈총을 받으시면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이후 하신 말씀입니다.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들 가운데 그리스 사람이 몇 있었습니다.
‘그리스 사람’은 유대인과 달리 율법과 예언서의 말씀을 모르는 이들입니다.
그들이 명절을 지키러 올라왔다는 것은, 그들이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그들 그리스 사람들은 빌립과 안드레를 통해 예수님을 뵙고자 했습니다.
본문에는 그들이 예수님을 만났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 사람들의 뜻을 전하고자 당신을 찾아온 빌립과 안드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요 12:23)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는 말씀의 의미는, ‘이제야 좋은 날이 오겠구나, 그리스 사람들에게까지 내 소식이 전해졌다니 이제 됐다, 드디어 수고한 보람을 거둘 때가 왔구나,’ 이런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이제 죽을 때가 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광을 받을 때”는, 주님께서 그분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고,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가실 때, 곧 죽음의 때를 말합니다.
그리스 사람들이 뵙기를 청한다는 빌립과 안드레의 말씀을 전해 들으시면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놀란 그들에게 주님은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요 12:24)
땅에 뿌려진 씨앗이 땅 속에서도 이전의 형체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면 그 씨앗은 싹을 틔우지 못하고 이내 썩어버립니다.

변함이 없다는 것, 한결같다는 것은, 성서의 여러 곳에서 충실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만, 이 경우에는 완고함을 뜻합니다.
충실함과 완고함은 비슷한 듯 보이지만, 완전히 다릅니다. 씨앗으로 말하자면, 충실함은 씨 뿌린 분의 뜻에 맞게, 때에 따라 변하는 과정에 충실하다는 뜻이겠습니다.
땅에 뿌려진 씨앗이 썩어져 발아(發芽)하고, 성장(成長)하고, 개화(開花)하고, 결실(結實)을 맺고, 시드는 그 모든 생명의 순환과정을 씨 뿌리신 분의 뜻으로 받아들인다는 것, 그것이 충실함, 충실한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반면, 완고함은 첫 단계에서부터 어긋나 발아하지도 못한 채 썩어버리는고 마는 것입니다.
씨앗이 썩어지고 부서지기를 거부함으로써, 즉 죽기를 거부함으로써 이후 생명의 순환 과정에 참여할 수 없는 것, 그것이 완고함, 완고한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밀알의 비유 뒤에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덧붙이셨습니다.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요 12:25)

밀알 신앙이란, 이 역설을 삶의 진리로 받아들이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선한 농부이신 그분의 손에 들린 씨앗입니다.
그분이 뿌리시는 곳에, 그분이 심으시는 대로, 뿌리고 심겨져 생명의 열매를 맺는 것이 신앙의 보람이자 기쁨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손에 들린 씨앗이 되면, 스스로를 높이지 않아도, 때가 이를 때에 그분께서 우리를 높여주실 것이라고,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나를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여주실 것이다.”(요 12:26)

그러나 이 과정은 우리가 경험하는 바처럼 쉽지 않습니다. 일상의 크고 작은 죽음들을 그분의 뜻으로 순순히 받아들인다는 것은 믿음과 더불어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일평생 열심히 일하고, 일에서 보람을 찾아온 분들에게는 은퇴가 곧 죽음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젊은 연인에게는 갑작스러운 이별통보가 세상의 끝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권력을 생명처럼 여기던 이들은 권력이 사라지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해 괴로워합니다. 죽음, 그것은 곧 상실입니다. 내가 갖고 있던 것, 내 것이라고 여겼던 것, 지금껏 한 번도 내 몫이 아니라고 의심해 본 적이 없던 바로 그것이 사라지는 고통스러운 경험이 죽음입니다. 이 상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예수님에게는 쉬운 일이었을까요? 요한은 제자들에게 밀알의 비유를 말씀하신 후 곧장, 예수님의 고뇌를 전달합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요 12:27)

 

얼마 전 어느 영성집회에 참여해 강사로 오신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첫 목회지로 성남의 한 빈민촌 전도사로 파송을 받아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목회에 보람도 있었지만, 너무 힘들어서 떠나려고 마음을 먹고, 지역 목회자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식사자리를 가지셨답니다. 그 자리에, 성남 그곳에서만 20년 넘게 목회를 해 오시면서 감옥에도 다녀오시는 등 온갖 고생을 다 한 선배 목사님 한 분이 계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젊은 그분이 물으셨답니다. “목사님, 저는 이제 겨우 2년 버텼는데, 목사님은 어떻게 20년도 넘게 여기에서 이 사람들과 이렇게 오래 계실 수가 있으세요? 정말 대단하십시다.” 그러자 그분이 남들 안 들리게 귓속말로 이렇게 얘기하셨답니다. “정 목사, 잘 들어, 나 오늘 밤에 짐 싸서 도망 갈거야.” 선배 목사님의 갑작스러운 도피(?) 선언에 놀라 할 말을 잃어버린 사이 그분이 그러시더랍니다. “정 목사, 나 매일 밤 이 생각하면서 지금까지 왔어. 오늘 밤에도 도망갈 생각하면서 잘 거야” 성남에서 주민교회 이해학 원로목사님과 관련된 일화입니다. 그 자리에서 오늘 밤 도망하시겠다고 말씀하신 이후, 그만큼의 세월이 더 지나는 동안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원로목사님까지 되신 분의 얘기입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 어쩌면 예수님도 공생애에 나서신 이후 매일 밤 이 생각을 하시면서 잠 드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낙심하시는 데 그치지 않고, 낙심을 털고 일어나 아버지의 뜻을 향해 가셨습니다. “아니다, 나는 바로 이 일 때문에 이 때에 왔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드러내십시오.”(요 12:27b-28) 나는 아버지의 일을 위해 이 때에 왔다, 이 믿음이 역경 가운데에서도 주님께서 흔들리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실 수 있었던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어떤 일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해야 할 분명한 하나의 이유가 있으면 그 일에 어떻게든 의미를 부여하면서 그 일을 계속하기 마련입니다. 직장인들에게 직장은 되도록 안 가고 싶은 곳입니다. 직장에 가지 말고 인생을 즐겨야 할 이유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장은 가야 할 곳입니다.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생계를 위한 돈을 마련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일의 보람도 있고, 사회적 관계를 맺는 즐거움도 있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국가 경제에 이바지한다는 자부심도 있겠습니다만, 가장 직접적이고 분명한 단 하나의 이유를 꼽으라면 돈을 벌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게 솔직한 말이 아니겠습니까?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에 나오지 않아도 되는 이유, 심지어 나오지 말아야 할 이유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문제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저도 저입니다만,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도 저 못하지 않게 ‘정답’을 말할 능력이 있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나와야 하는 단 하나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인들끼리의 친교 때문입니까?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입니까?
이 모든 이유들이 신앙생활에 입문하거나 신앙생활을 지속시키는 계기가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유들은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이유가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일평생에 걸쳐 지속될 만한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인간관계는 변하기 마련이고, 우리의 바람, 욕망의 내용도 삶의 시기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이유에도 불구하고, 신앙생활을 지속하는 단 하나의 분명한 이유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이유 때문에 신앙인으로 살아가십니까? 하나님 중심의 삶,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하는 창조신앙이 그 분명한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지난 주 평신도아카데미를 통해 박일영 교수님께서 귀한 강의를 해 주셨습니다만, ‘만들어진 것’에 대한 숭배가 아니라, ‘만드신 분’에 대한 믿음이 신앙생활의 굳건한 토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분, 나를 만드신 분, 나를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오늘 여기에 있게 하심으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분입니다. 이 ‘창조주 신앙’이 우리 신앙생활의 흔들리지 않는 토대입니다. 사실 그밖에 모든 것은 때에 알맞게 변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것이 완고함이 아닌 충실함을 지향하는 신앙인의 생활입니다. 변화에 자기를 개방하고, 이끄시는 대로 이끌려가는 것,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믿음’의 모범이 아닙니까? 설사 그 길이 내가 바라는 길과 다른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어가는 듯 보인다 할지라도, 앞길을 열어 주시고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분의 손길에 자기를 온전히 내어맡기는 삶이야말로 신앙인으로 사는 보람과 기쁨입니다.

 

창조주 신앙은, 밀알 신앙입니다. ‘만드신 분’의 손길에 자기를 내어 맡기는 삶, 하나의 밀알이 되어 썩어지고 부서지는 과정이 때로 불안하고 두려운 과정이라 할지라도, 선한 농부이신 그분의 손에 들린 씨앗임을 믿는 가운데 당당함을 잃지 않는 것이 밀알 신앙이자 창조주 신앙으로 살아가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아버지, 이 시간을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이 일 때문에 이 때에 왔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드러내십시오.” 주님의 이 고백이 우리 일상의 고백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손길에 붙들린 참 믿음의 사람의 될 때 우리는 완고함을 벗어버린 충실한 신앙으로 참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어떤 일이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당위에 사로잡히는 것은, 비록 그것이 바람직하고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밀알 신앙, 창조 신앙으로 살아가는 이에게 어울리지 않는 삶의 태도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누구나 계획이 있습니다, 뜻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손길에 붙들린 사람인 이상 그것은 언제나 잠정적인 계획이요, 말랑말랑한 뜻이 되어야 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절대적이지 않고, 영원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그분 이외에는 그 어떤 관계도, 재물도, 건강도, 재능도, 타인의 인정도, 그 무엇도 우리를 삶의 근원적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없습니다. 근본을 붙드십시오. 우리는 주님의 손에 들린 씨앗입니다. 밀알 신앙으로 살아가십시오. 창조주를 기억하며 사십시오. 그것이 혼돈의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길입니다.


김진홍의 '창대' 신앙과 허병섭의 '밀알' 신앙

1941년생으로 김진홍목사와 허병섭목사이다.
둘 다 경상도의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출신이다.
둘 다 20대에 서울로 올라갔다.
둘 다 신학을 공부해서 목사가 되었다.
둘 다 젊은 시절 빈민가에서 목회했다.

70년대 초 이들이 목회했던 곳은 넝마주이·창녀·거지·막노동꾼·깡패·장애인 들이 뒹굴고 살던 신설동·중랑천·청계천의 빈민가였다.
다 같이 사용하는 변소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면서 자기 순서를 기다리는 기다란 줄이 아침이 열릴 때마다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혈기 왕성했던 30대 초반 시절, 둘은 한편으로는 넝마주이로, 다른 한편으로는 성직자로 이들과 더불어 살았다.








땅 에 떨어진 한 알의 밀알  




병섭은 71년 목사가 되어 군목 생활을 한 뒤, 74년 중랑천과 청계천에서 빈민들과 같이 살았다.
서울시에 의해 청계천 무허가 판자촌 강제 철거 작업이 진행되자, 이번에는 산으로 올라갔다.
76년 하월곡동 산꼭대기에 동월교회라는 달동네 교회를 세웠다.

거기서 가난한 맞벌이 부부의 자녀들을 돌보기 위해 '똘배의 집'이라는 코믹한 이름의 탁아소를 세웠다.
병든 사람들을 위해서는 무료 진료를 알선해주었고, 집 없는 사람들의 내 집 장만을 위해서 공동 주택 조합을 만들었다.
정부의 무자비한 철거 폭력이 벌어질 때는 몸으로 맞서 싸웠다.

이러한 그를 박정희는 빨갱이로 낙인찍었다.
76년 서울 시경 대공분실에 끌려가서 50일이 넘도록 몽둥이로 맞고 고문을 당했다.
그 이후 연행과 구금만 20번이 넘었다.

전두환 시절인 86년에는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그때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독재 타도'와 '민주주의 쟁취'를 외치면서 분신하고 할복할 때였다.
그는 "왜 젊은이들이 죽어야 하나, 차라리 목사들이 희생되어야 하지 않느냐"면서 분신을 기도했다.
이 일이 자극이 되어 150명의 목사들이 민정당사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허병섭은 시위 주동자로 찍혀서 6개월 넘게 옥살이했다.




 


 

청계천에서, 달동네에서, 차가운 유치장 바닥에서 고단하고 고통스러운 30~40대를 보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삶에 감화되어 예수를 알게 된 사람들이 있었다.

82년 이동철(본명 이철용)이 소설로 쓰고 이장호 감독이 영화로 만든 <어둠의 자식들>, <꼬방 동네 사람들>에 나오는 목사 공병수의 실제 인물이 허병섭이다.

장애인이면서 초졸 출신으로 88년 국회의원이 된 소설가 이철용은 5공 청문회 때 증언대에 선 전두환 얼굴에 대고 삿대질을 하면서 "살인마"라고 외쳐서 유명해졌다.
그는 허병섭이 한때 포장마차 사장이었을 때 거기서 그를 만나 예수를 믿고 장로가 되었다.
지금은 역술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장로로서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다.

영화감독 이장호는 "이동철은 내가 모르는 재야 운동권의 골수들을 끊임없이 내게 소개했는데, 가장 인상에 남는 이가 바로 도시 빈민 선교로 봉사하고 있던 허병섭 목사였다.

이동철에게 신앙의 눈을 뜨게 한 장본인이다.
그분이 하루는 수줍은 말투로 '좋은 영화만 있다면 극장이 바로 교회의 역할을 하므로 목사가 따로 필요 없다'고 말했다.

나는 그를 만나면서 교회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처음으로 싹텄다.
그 후 <어둠의 자식들>, <낮은 데로 임하소서>, <바보 선언>, <과부춤> 등 계속해서 내 영화에는 허병섭 목사가 던진 기독교적 화두가 깊이 작용했다"고 <씨네 21>에서 회상했다.

학생 운동을 하다가 강제로 끌려간 강원도 어느 부대에서 허병섭과 인연을 맺은 양국주(열방을 섬기는 사람들 국제 대표)는 그를 이렇게 기억했다.

"허병섭이 최전방에서 군목으로 지내던 시절, 당시 중위 봉급이 2만 원이었는데, 1만 원은 아내에게 생활비로 주고, 나머지로 담배와 껌을 사들고 병사들을 만나러 다녔다.
전역 후에는 포장마차 사장이 되었다.
다음날 장사할 몫을 떼어내고 남은 걸로 동네의 일용직 노동자, 부랑자들에게 공짜로 뜨거운 오뎅 국물과 소주를 먹였다.
내가 제대한 뒤 사업을 해서 돈을 좀 만지게 되어서 허 목사에게 20~30만 원씩 건네주면, 으레 술 먹고 싸우다가 유치장에 들어간 사람들 빼내오는 일에 쓰는 듯했다."

군목이 병사들에게 복음은 안 전하고 담배를 전하다니. 성령에 취하도록 하지 않고 술에 취하도록 만들다니.
저주하고 내쫓아도 시원치 않을 무당을 교회에 불러 함께 예배하지 않나, 노가다 판에서 일용직 노동자들이랑 어울려 술 먹고 담배 피고 화투판을 벌이지 않나.
그러더니 결국은 사고를 쳤다.

허병섭은 88년 기장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했다.
기장에서는 최초의 사건이었다.
그는 동월교회에서 평신도와 평등하게 사역하는 교회를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종교 성직자보다 평신도 신분으로 자신의 신앙을 올바르게 지키면서 살아가는 게 훨씬 힘들다는 교인들의 고민에 공감했다.
또 노동자와 함께 구속됐을 때 경찰이 목사에게는 존칭어를 쓰고 노동자에게는 욕설과 위협을 서슴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목사라는 지위와 신분 때문에 받는 특혜를 괴로워했다.

목사직을 버린 다음 막노동판에서 노동자들과 어울리면서 미장질을 배웠다.
2년 뒤에는 일용직 건축 노동자들의 공동체인 '건축 일꾼 두레'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건축주와 노동자 사이에서 엄청난 이윤을 챙기는 중간 하청업자에 의존하지 않고, 건축주와 건축 노동자 간의 직거래를 텄다.
그로 인해 발생한 차액의 이윤만으로도 빈민 노동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건축 현장에서 빚어지는 온갖 비리와 모순을 없애려고 했다.
이 모든 변화를 통해 건축 노동자가 노동의 객체가 아니라 노동의 주체가 되도록 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는 한계를 느꼈고, 실망했다.

"민중은 돈을 벌기 위해 노동력을 상품으로 내놓아야 하며, 노동력을 팔아서 잘살아보려는 시장 경제 논리는 경매장의 아수라장 속에서 인간을 초라한 상품으로 전락시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노동자들과 뒹굴 때 품었던 생각이다.

"그런데 이 신념이 차츰 깨지기 시작했다. 도시 빈민의 문제는 빈민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도시화와 산업화라는 사회 구조가 도시 빈민을 그렇게 만들어간 것이라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이런 사회 구조를 바꾸는 일을 하기에는 내 힘이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자연에 몸을 던졌다." 2000년 <신동아> 5월호에 쓴 글 일부다.

도시 빈민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라는 한계를 느꼈다. 동시에 자기의 한계도 느꼈다. 그래서 더 근원적인 문제에 천착하기로 했다.



 
 


 
96년 무주로 내려갔다. 마을 이름은 진도리(眞道里). '예수님이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다'는 말씀을 담고 있는 땅 이름이라서 더 좋다 했다. 여기서 농사지으며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꿈꾸면서 살았다. 농약 쓰지 않고 오리와 우렁이를 풀어 짓는 유기 농법을 실험했다.

그는 이렇게 얘기한다.

"씨앗이라는 생명은 미생물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 자신을 분해하고 해체하면서 스스로를 부식시킨다. 주변 미생물들과 치고받고 먹고 먹히면서 생명을 만들어낸다. 나는 이를 '밀알 노동'이라 말하고 싶다.

씨앗 하나가 얼마나 작은가? 그런데 거기에서 수백 수천 개의 열매가 맺힌다. 땅속 미생물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다. 그러나 이들이 얼마나 많은 생명을 일으키고 있는가? 작은 자의 노동이라는 점에서 이들의 노동은 밀알 노동이고, 자신을 분해하고 희생한다는 뜻에서 밀알 노동이다.

성서의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구절에서 밀알 노동을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도 육체 노동, 몸의 노동, 밀알 노동으로 시골의 일상을 수놓고 있는 것이다." (<신동아> 2000년 5월호)

올해 1월에는 2만 평 가까이 되는 땅을 마을 공동 재산으로 내놓았다. 옛날에 교회에서 받은 돈과 이리 저리 마련한 돈을 모아 5000만 원으로 산 땅이다. 하지만 그는 "잠시 빌린 것일 뿐 내 땅이 아니다"며 그걸 자연환경국민신탁에 맡겼다. 여기서 생태 체험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자연도 보존하고 마을 주민의 소득도 높이는 산촌 마을 자립 모델을 만들 계획이다. 그러면서 대안학교인 푸른꿈고등학교와 온배움터(전 녹색대학)에 관여했으나, 총장이라는 직함보다 공동 대표, 공동 교사라고 불리길 좋아했다.

 
 
 
 
 

미약한 시작, 창대한 나중

30살의 전도사 김진홍은 허병섭처럼 청계천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어울렸다. 1971년 세운 활빈교회가 사역의 중심이었다. 이곳에서 '배달학당'을 만들어 청소년을 교육하고, '배꽃어린이집', 장미어린이집'이라는 탁아소를 만들어 어린이들을 돌봤다. 주민자활회, 의료봉사회 등을 조직해 빈민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 애썼다.

때로는 밑 빠진 독에 물을 붓고 있는 것 같은 좌절감, 과연 하나님이 살아 계신가 하는 낙망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믿었다.

"나는 청계천 둑 위를 걸으며 상상했다. 지금 예수님께서 서울에 오신다면 어느 곳부터 방문하실까? 분명 세종로나 명동 같은 곳은 찾지 않으실 거다. 이 악취 나는 청계천을 찾으실 테지.

예수님은 지금 내가 걷고 있는 둑길을 걸으며 말씀하실 거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판자촌 주민들이여, 다 모이시오. 내가 여러분들을 푹 쉬게 하는 동민 위안의 밤을 열어드릴 것이오. 그렇게 말씀하시고 예수님은 밀가루 다섯 포대와 동태 두 마리로 청계천 주민들을 배불리 먹이실 것이다." (김진홍의 자전 소설 <황무지가 장미꽃 같이>)

박정희는 장기 집권을 위해 1972년 10월 유신을 선포했다. 반대 운동이 격렬해지자 대통령 긴급 조치라는 걸 발동했다. "유신 헌법을 반대하거나 개정하는 운동을 하면 징역 15년 형에 처한다"는 기막힌 명령이었다.

김진홍은 74년 1월 유신 헌법을 반대하는 시국 기도회를 연 죄목으로 다른 목사, 전도사 5명과 함께 군법회의에 넘겨졌다. 김진홍, 이해학 전도사가 주동자로 찍혀서 15년 형을 받았는데, 그나마 13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당시 이들의 변론을 맡았던 한승헌 변호사는 "피고인들은 성서적 진리에 따른 신앙적 결단으로 유신 통치와 긴급 조치를 반대하는 것이며, 그것은 크리스천의 사명이라고 의연하게 말했다"고 했다. 그는 이들 성직자들에게 감명을 받고 교회를 나가게 되었다.

하지만 한승헌이 사람을 잘못 본 것이다.

김진홍은 2004년 이렇게 말했다. "나는 민주 투사도 아니고 운동권도 아닌데, 어쩌다 줄을 잘못 서서 징역을 살았다. 어영부영 콩밥을 먹게 되었다." 보수 세력을 설득해야 할 때는 이렇듯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반대로 자신의 생각과 다른 방식으로 데모하는 이들을 비난할 때는 자신의 과거 투쟁 경력을 내세웠다. "나도 한때는 민주화 운동을 한다고 데모도 하고 징역살이도 하고 매도 맞아 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민주화 운동하던 때에는 민주주의라는 절대적 가치를 지키려면 운동의 내용도 민주적인 원칙을 지키면서 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민주화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76년, 청계천 철거 작업이 강행되자 허병섭은 산으로 올라갔다. 반면 김진홍은 경기도 남양만으로 집단 이주를 했다. 현대판 출애굽을 이끄는 한국판 모세였다. 여기서 시작한 것이 두레 공동체 운동이다. 허병섭과 김진홍의 인생이 극명하게 갈리는 시점이기도 하다. 
 

 
 
 
 

두레 운동이 때로는 실패를 맛보기도 했지만, 김진홍은 이때부터 '잘나갔다'.

그가 청계천 시절을 바탕으로 82년에 쓴 신앙 수기 <새벽을 깨우리로다>는 24년이 지난 2006년에 100쇄를 넘겨서 30만 권이 넘게 팔렸다. 영어, 일본어, 중국어, 러시아어, 아랍어 등 세계 각 나라 언어로 번역되었고, 89년에는 자신이 주인공 된 같은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그가 쓴 자전 소설, 만화, 설교집, 묵상집은 수십 권에 이른다. 이메일로 보내는 '아침 묵상'을 받아보는 사람은 10만 명이 넘는다.

95년 적십자사 봉사상 금장을 받았고, 96년 모교인 계명대에서 명예철학박사가 되었다. 98년에는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잠시 교수도 했다. 2001년에는 미국 킹칼리지 명예신학박사가 되었고, 그해 계명대학교, 계명문화대, 계명유치원, 동산의료원을 운영하는 계명기독학원 이사장도 했다.

소심하고 수줍음 많은 허병섭이 막사이사이상 수상자로 선정됐으나 이를 고사하는 바람에 같이 빈민 운동을 했던 제정구가 후에 그 상을 받게 된 것과는 딴판이다.

두레 공동체는 미국, 일본, 독일, 중국 등 세계 곳곳에 세워져 있다. 미국에 있는 땅이 1000만 평방미터가 넘고, 미얀마의 땅은 3000만 평방미터에 이른다. 세계 곳곳의 두레 땅만 한데 모아도 웬만한 도시 하나는 세울 법하다. 해외와 국내에 각각 8개씩의 교회를 세웠다. 두레 공동체가 만든 대안학교, 복지센터, 문화센터 등의 규모는 어마어마하다.

그는 다단계 사업에도 손을 댔다. 김진홍은 "하나님 다음에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며, 자본주의는 성경적 윤리가 낳은 자식"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두레교회 성도들에게 '지금 두레내츄럴에 투자하면 10년 후에 큰 빛을 볼 수 있다'고 권유한다"고 했다. 국민들에게 주식 투자를 권한 이명박은 김진홍의 이 말에서 힌트를 얻었을지 모른다.

김진홍은 97년 경기도 구리에 구리 활빈교회(지금의 두레교회)라는 교회를 세웠다. 10년 뒤인 2007년에는 예배당에 5000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4층짜리 새 교회를 건축했다. 71년에는 무허가 판자촌에 가마니 깔고 교회를 세우더니, 36년 뒤에는 권력과의 유착에 의한 특혜 시비를 일으키면서 교회를 세웠다. 입당 예배에는 이명박 대통령 후보, 김문수 경기도지사 등이 참석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욥기 8장 7절에 나오는 성경 구절로 만든 장식용 현판은 신장개업한 동네 중국집보다 창대해질 대로 창대해진 두레와 김진홍에 어울린다. 그가 목사라고 하니, 이 구절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아니라 수아 사람 빌닷이 욥에게 한 말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그의 창대해진 입지는 보수 집단을 하나로 묶고, 우리 사회를 박정희 시대와 같은 암흑기로 되돌리는 데에도 모세와 같은 몫을 톡톡히 했다. 이라크 파병 지지, 한반도 대운하 지지, 미국산 소고기 수입 지지, 수도권 이전 반대 등은 준비 운동에 불과했다.

시장 경제 체제를 절대적으로 숭배하는 물신주의는 그의 지금 성공을 뒷받침해준 과거 고난의 시절마저 부정하게 만든다.

"미국의 경우는 만일 데모하는 도중에 경찰에게 폭력을 휘두르게 되면 현장 사살까지 허용한다. 가까운 나라 일본의 경우는 경찰을 폭행하는 경우에 강제 연행을 하여 엄한 실형을 내린다. 한국 경찰로서는 꿈같은 이야기다." 목사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믿기 어려운 이 논리대로라면, 그는 74년 즉결 처형을 당했어도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대기업, 엘리트, 부자는 본받아야 할 대상이지, 규탄하거나 싫어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국민들이 지향(指向)하여야 할 사람들이고 대상이지, 지양(止揚)하여야 할 사람들이거나 대상이 아니다.

삼성이 과연 나쁜 기업인가? 삼성 그룹의 총수인 이건희 회장이 나쁜 사람인가? 신문 보도에 의하면 어느 정당에 소속된 한 국회의원이 지금 해외에 나가 있는 이 회장을 체포해 올 체포조를 만들자는 말을 한 것 같은데, 과연 그렇게 할 성질일까?

나는 삼성그룹이 무슨 나쁜 일을 하였는지, 혹은 어떤 법을 어겼는지 모른다. 그러나 설령 어떤 부문에 하자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렇게 다룰 성질은 아니라 여겨진다. 우리 사회는 법치 사회이다. 잘잘못은 사법 기관에서 다룰 일이고, 신문 지상에서 매도하거나, 그룹의 회장을 체포조 운운할 성질은 전연 아니라 여겨진다.

듣건대 삼성의 수출이 우리나라 전체 수출의 20%라 하고, 납세액이 전국의 5%가 넘는다 한다. 그리고 요즘 같이 청년 실업자가 날로 늘어나고 있는 판에 많은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고 있다. 나는 그런 삼성이 몹시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삼성의 이 회장이 훌륭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체포조를 만들자는 발상까지 하고 있는 국회의원이 있다니 퍽 놀라운 일이다." (김진홍의 '아침 묵상')

김진홍은 자신이 이렇게 말한 사실은 기억하고 있을까. 몇 번을 읽어도 위아래 두 개의 글에서 드러나는 상반된 가치관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새벽을 깨우는 일이 나의 사명이다. 어둠에서 잠자고 있는 민중들에게 새벽을 알리는 사명은 위대한 사명이다. 이를 위해 일생을 살아야 한다. 한밤중에 잠들어 있는 한국 교회에 새벽이 다가옴을 알려야 한다.

가난과 질병에 잠들어 있는 청계천 판자촌의 6만 형제들에게도 새벽을 알려야 한다. 가난한 자들의 아픔을 모른 채 호화로운 주택에 잠들어 있는 부자들에게도 새벽을 알려야 한다. 나는 밖으로 나가 새벽을 알리는 종을 울렸다. 땡그랑 땡- 땡그랑 땡- 종소리에 일어난 듯 가까운 집의 창문에 등불이 밝혀지고 있다." (<새벽을 깨우리로다>)

김진홍의 창대함은 2005년 뉴라이트전국연합을 만들어 상임의장이 된 뒤, 30년 지기(知己)인 이명박을 대통령 만드는 데 성공하는 지점에서 정점을 이룬다.



서머나 교회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칭찬만 받은 교회입니다. 그 교회에 사도 요한의 제자였던 폴리갑이 감독으로 있었습니다. 폴리캅 기념 교회에 폴리갑과 함께 순교한 자들의 성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는 19세기 말 불란서의 화가 레이몽 페레(Raymond Pere)가 그린 그림인데 순교의 현장에서 손이 묶어져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장면입니다.

폭스(Fox)가 쓴「순교사」의 글에 보면 당시의 박해와 고난이 얼마나 심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폴리갑은 당시 열번째 순교자로서 86세의 나이로 하나님 앞에 산 제물이 되었습니다. 로마의 총독이 늙은 감독으로서 특별한 대우를 하여 회심시켜 보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총독은 "네가 예수를 모른다고만 하라. 그리하면 풀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폴리갑은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할 수 없습니다

. 내가 주님을 믿고 살아온 86년 동안 주님은 나를 한 번도 모른다고 부인한 적이 없는데 내가 어찌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하여 주를 모른다고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하면서 화형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불길로 걸어가면서 "오, 주 아버지여 ! 나를 이곳에 적합한 자로 세워 주셔서 감사합니다."고 말했습니다. 불이 그의 몸을 태울 때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들이 나를 태우는 이 기회에 내 생명을 다해서 당신을 간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니 감사합니다."고 했습니다.

폴리캅은 초대교회 선교의 풍성한 열매가 맺어지기까지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덥고 독사와 악어가 들끓는 곳으로 이름난 '랑바레네'라는 곳에 서양 집도 아니고 토인들의 집도 아닌 40여 채의 자그마한 집들이 있습니다. 그 집들은 그 지방민들을 위한 병원으로서 알버트 슈바이처가 세운 것입니다.

알버트 슈바이처는 1875년 독일 알싸스 지방에서 태어나 26세 때 이미 철학, 신학, 음악의 세 가지 분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그리고 의학박사의 학위까지 네 가지의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1913년 그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가장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주 예수의 복음을 전하려 아내와 같이 아프리카를 향했습니다. 그곳에 이르러 그는 병원을 세우고 토인을 돌보아 주며 주의 복음을 전하기에 갖은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온 생애을 다 바쳐 아프리카 선교의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한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선교의 역사속에도 썩어지는 밀알이 되었던 순교자가 있습니다. 토마스목사입니다. 토마스 목사가 목선을 타고 1863년 9월 13일 황해의 거친 파도를 헤치고 다다른 곳은 백령도였습니다. 토마스 목사는 우선 이 섬에 상륙하여 약 2개월 동안 그곳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여 옹진 일대의 여러 섬들을 돌아다니면서 선교에 주력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주민들과 사귀는 일이었습니다.

토마스 목사는 이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예수님과 선지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주민들 중에는 처음부터 거부반응을 보이면서 토마스 목사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사람도 있었으나 적지 않은 전도의 열매를 맺었으므로, 이번에는 방향을 돌려 육지로 무대를 옮기기로 했습니다.

토마스 목사는 한국에서의 선교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황무지와 같은 한반도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임을 깨닫게 되자, 이 일을 잠시도 지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날로부터 토마스는 하나님께 전도의 길을 열어 달라고 기도하는 한편 지혜를 총동원하여 관헌들의 눈을 피해 가면서 황해도 서해안 일대에 복음의 씨를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1866년 8월 셔만호를 타고 대동강을 따라 평양으로 향했으나 관군의 저항으로 배에 불이 붙었습니다. 셔만호에 탄 선원들은 불을 피하려고 물에 뛰어 들었으나 언덕으로 기어오르는 대로 잡혀 죽임을 당했습니다. 토마스 목사는 기슭에 나와 덤벼드는 관군에게 성경을 꺼내 주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토마스 목사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저들은 무지하고 가엾은 인간이니이다." 순간 관군의 시퍼런 칼날이 토마스 목사의 목을 내리쳤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한국의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1927년 5월 8일 수천 명의 신도들이 모인 가운데 토마스목사의 추도 예배를 드렸으며 그를 기념하여 대동강 변에 조왕교회를 세웠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초대교회의 감독 폴리캅의 순교도 슈바이져의 헌신도 토마스목사의 순교도 모두 이 땅에 복음의 풍성한 열매를 맺게한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었던 것입니다.

지난 주일은 우리 교회의 창립36주년 기념주일이자 순교자 기념 주일이었습니다. 오늘은 순교자의 신앙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그래서 밀알의 신앙이라는 제목을 정해 보았습니다. 우리 교회가 예수님을 닮아 행복을 주는 교회가 되어지기 위해서 특별히 저와 성도 여러분들이 밀알의 신앙을 소유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밀알의 신앙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교회의 부흥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에 있는 어느 교회가 제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폭격을 맞고 크게 부서졌습니다.

마침 교회 안에 있던 예수님의 조각상도 파손이 되었으나 다행히도 두 손만이 떨어져 나간 체 보전되어 있었습니다. 성도들은 파손 된 이 조각상을 계기로 해서 이전보다 더 큰 교회를 세웠는데 어느 날 한 조각가가 파손 된 예수님 상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에서 우리가 없어진 두 손을 만들어 붙이자고 교회에 건의를 하였습니다. 그날 교인들이 모여 회의를 한 결과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우리는 조각상의 없어진 손을 다시 만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들이 예수님 손의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모두 주님을 향한 뜨거운 헌신과 섬기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위한 손이 되기를 기꺼이 자원했던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한 것도 그리고 우리 한국 교회가 부흥하고 발전한 것도 다 썩어지는 밀알처럼 자신을 희생하여 교회를 섬긴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밀알의 신앙을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또한 교회를 위하여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썩어질 밀알처럼 자기를 희생할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 한국 교회를 위하여 그와 같은 삶을 살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이 시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일군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밀알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속에 살아있는 신앙입니다. 한 알의 밀이 심겨지는 것보다 이전에, 또한 땅에서 자기를 희생하는 것보다 이전에 중요한 것은 그 속에 있는 생명입니다. 생명 없는 씨앗은 싹을 티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생명 없는 죽은 씨가 아니라 생명 있는 살아있는 씨앗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안에 있어야 할 생명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안에 있는 사람이 진정 열매를 맺는 신앙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목적하는 것은 예수 생명을 모든 사람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도 친히 십자가에서 자기를 희생하셨던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이 썩으므로 맺어지는 열매들 속에는 동일한 생명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그 씨앗들을 심으면 싹이 나고 많은 열매들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나라의 비밀입니다.

겨자씨가 심어져서 자라면 큰 나무가 되는 것도 그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안에 예수 생명이 있어야 섬김도 희생도 봉사도 충성도 모두 의미가 있고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 없이 행하는 섬김이나 봉사는 세상 사람들이 하는 봉사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교회의 부흥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이 된 성도들의 헌신과 섬김을 통해 교회에 부흥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내일의 부흥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이 되는 성도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부흥이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의 이름 없는 희생이 있어야 하고 누군가의 영광 없는 섬김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처럼 되어야 교회의 부흥을 기대할 수 있기에 모든 성도들이 밀알의 신앙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좋습니다.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아도 좋습니다.

물론 아무도 섬겨 주지 않아도 좋고요. 다만 우리의 하는 일들이 예수님의 가신 길을 따라가는 길이라면 우리교회 성도들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저 그 길을 따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 안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생명이신 그분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그 분이 내 안에서 생명의 씨앗이 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밀알 신앙은 자신을 희생하는 신앙입니다. 썩어지는 것은 곧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복음의 열매와 큰 역사는 남다른 희생과 헌신이 있을 때에 가능함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촛불은 흔적 없이 녹아질 때 더욱 밝은 빛을 나타내며 소금도 자체가 녹아 없어질 때 그 고유의 맛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세계 교회가 그러했고, 한국 교회가 그러했고, 각 교회마다 역시 남다른 희생과 봉사의 손길들이 있었기에 성장하여 왔음은 누구라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밀알 신앙을 소유한 성도들에게 있어서 얼마나 고난을 감내하느냐 보다는 얼마나 희생을 치르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단순히 고난을 감내하신 분이기보다는 기꺼이 희생을 치르신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빌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는 것은 희생하셨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러 오신 분으로서 지금 우리가 그 분을 믿음으로 누리는 구원은 우리 편에서는 값없는 은혜의 선물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하신 엄청난 희생의 결과입니다.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 말씀은 역설적 진리이며 진리 중에 진리입니다. 죽으면 삽니다. 살고자 하면 죽는 것입니다. 죽어야 한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희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본이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희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죽으심의 희생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도는 희생할 줄 아는 성도이어야 합니다. 내가 희생해서 많은 사람이 산다면 희생할 수 있어야 하며 내 자신이 죽어져서 가정이나 교회가 화평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특별히 내가 희생하는 것을 통해 교회가 바르게 성장한다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둘째로 죽는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나의 교만과 아집을 버리는 것입니다.
빌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여기 취한다는 말은 놓치지 않기 위하여 꽉 붙잡는다는 뜻으로서 자기주장을 강하게 고집할 때나 자기 권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을 때 쓰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나오는 형용어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까?

"여기지 아니하시고"
즉 예수님은 자기를 내세울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모습을 내세우지 않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가 진정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희생되는 밀알입니까? 그렇다면 자기를 주장하는 자리에 앉지를 않아야 하며 내가 왜 죽어야 하고 또 왜 썩어야 하느냐면서 거부하지도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기꺼이 자신의 모든 영광과 권리를 포기하셨습니다.

빌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자기를 비운다는 말은 물그릇을 쏟아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다 비우는 경우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의미의 빈 마음을 품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비우셨기에 마지막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땀과 물과 피까지도 다 쏟아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의 모습을 보면 예수님의 모습을 전혀 닮지도 못하고 자기 권리를 결코 양보를 하려고도 않습니다. 자기 주장이 너무나 강하고 고집이 아집이 여전히 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전히 내가 죽지 않고 살아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자기주장이 얼마나 강한지 조금만 내 권리가 침해되면 아파하고 분노하고 증오까지도 합니다. 이것은 죽지 않은 모습이요 비우지 못한 모습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교회에서 일을 맡은 직분자들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벧전5:3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내가 죽어 교회가 살고 성도가 살 수 있다면 기꺼이 죽어야 합니다. 아버지가 살아야 가정이 산다는 구호가 다른 의미에서는 아버지가 죽어야 가정이 산다는 말로도 표현 될 수 있습니다. 목사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는 말도 목사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는 말씀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에 자기를 부인하고 희생할 줄 아는 한 알의 밀알같은 성숙한 성도들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그 밀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셋째, 밀알 신앙은 순교자의 신앙입니다. 미국의 명문대학을 졸업한 5명의 젊은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 피트는 신혼 여행도 포기하고 에콰도르 선교에 나섰습니다. 5명의 선교사는 아내들을 후방에 남겨둔 채 경비행기를 타고 단 한 명의 기독교인도 없는 아우카 인디언마을로 떠났습니다.

1956. 1. 2. 피트 선교사는 아내에게 긴급무선을 쳤습니다. "흥분한 인디언들이 몰려오고 있다. 기도해 달라." 그 후 연락이 끊겼습니다. 이튿날 구조대원과 가족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5명의 선교사들은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었습니다. 복음을 거부한 인디언들에게 순교당했던 것입니다. 20대의 선교사 부인들은 울부짖으며 한 가지 다짐을 했습니다. "남편들이 이루지 못한 과업을 우리가 완수하자."

아내들은 모두 아우카 마을로 이사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40여년이 지난 지금 그 마을은 '복음의 땅'으로 변했습니다. 선교사를 살해한 5명의 인디언들 중 4명이 목사가 됐고 1천여명의 주민들이 모두 신자로 변했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순교자의 피위에 오늘도 하나님 교회가 세워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한알의 썩어진 밀알처럼 순교자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순교자의 신앙이란 기꺼이 하나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성도를 위해서 죽는 신앙입니다.

지금도 선교의 현장에서는 순교자들의 피가 뿌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순교해야 할 선교의 현장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교자의 신앙이 필요합니다. 순교자의 신앙은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며 순교자의 신앙은 내가 죽고 교회가 사는 것입니다. 순교자의 신앙으로 많은 생명을 살리는 풍성한 열매가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두리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밀알의 신앙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신앙입니다. 밀알의 신앙은 자신을 희생하는 신앙입니다. 밀알의 신앙은 순교자의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밀알의 신앙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한 알의 밀알이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었던 것처럼 여러분들의 희생과 섬김과 헌신과 충성을 통해 많은 열매가 맺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위해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처럼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서 생명이신 주님을 높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생명 가지고 자기를 낮추고 희생함으로 그리스도의 피 값을 주고 산 교회를 부흥케 하는 밀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한알의 밀알(요한 12:23-33)
주님은 십자가의 길을 한 알의 밀로 비유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밀알이 땅 속에서 썩어져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는 것같이 주님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셨습니다. 33 절에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주님은 그 밀알의 비유를 통해서 십자가의 죽음이 어떠한
죽음인지를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첫째 십자가는 자신 안에 있는 희망은 죽고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목적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섬길 때에 고통의 길을 지나야 할 때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고 약속의 땅에
왔습니다. 하늘의 별과 같은 후손을 주시고 그 땅을 영원한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약속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노령의 나이임에 아들 이삭을 얻었습니다. 그 아이들은 아브라함의 미래요 희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물로 받치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이삭을
받치면 그의 미래의 꿈도 희망도 사라집니다. 아브라함은 침묵합니다. 그리고 3 일 길을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산을 향해 갑니다. 그는 자신의 희망을 포기해기 위해 걸어가는 모리아 산은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신 갈보리와 같습니다. 아들을 번제물로 죽여야 하는 산이고, 하나님께 독생자 예수님을
죽게 하시는 장소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여러분도 하늘의 뭇 별을 바라보며 기대하던 희망을 내려 놓고
죽음과 같은 자리로 내려가는 때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한 알의 밀이 땅에 죽지 않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고
하셨습니다(24 절). 죽음은 또 다른 면에서는 생명을 낳는 과정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 속에서 자신이
썩어져 죽지 않는다면 생명을 낳지 못하지만, 자신이 썩어져 죽을 때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죽어야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가져옵니다. 우리의 신앙도 죽어야 새로운 생명이 있는 신앙으로 일어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얻기 위해 아들을 기대하며 살았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들을 받치라고 하심으로, 모리아산에서 그의 모든 희망을 죽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만을 희망으로
삼는 삶이 되게 하십니다. 죽음의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 안에서 삶의 목적과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는
것입니다.
두번째 십자가는 주님을 따르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무엇을 행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주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어나가야 합니다. 신앙의 길은 우리의 노력과 수고으로 가는 길이 아닙니다. 주님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포도나무의 줄기에 붙어있는 가지에서 열매가 맺히는 것같이
주님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밀알이 땅에서 썩어져 죽고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십자가의 죽음을 예고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26 절에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주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따르다 보면 우리는 주님이 계신 곳에 이르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감당할 비결에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따르다보면
우리가 십자가를 능히 감당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예수님이 서신 그 자리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아가서 4:8 에 “나의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데기에서 사자굴과 표범 산에서 내려다 보아라”. 아주 험한 산 꼭데기를
지나고 사자와 표범과 같은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위험한 지역을 사랑하는 자와 함께 갈 수 있었다는
고백입니다. 아무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할 지라도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지나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시련은 상처의 시간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 시련이 변화와
은혜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 차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시간이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시편 121:5-
6).
세번째로 십자가를 순종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복종하신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때를 면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으나 주님은 다시 기도의 내용을 바꾸십니다. 27-28 절에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자신에게 고통과
죽음이 있는 십자가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일이라면 아버지의 이름을 위하여
순종하겠다고 기도하십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을 위해 영광을 돌리고자 하십니다.
해가 지구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해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이 우리가 인생의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중심이십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며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이며 우리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합당한
찬양과 영광을 돌립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영광을 돌리는 자리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 그의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만나고 감사하는 자리입니다.
죽음으로 소멸할 것같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은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죽은자 가운데서
일어나셔서 산소망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너무 다른 두 사람

두 사람의 공통점은 참 많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어린 시절, 서울 상경, 신학 공부와 목사, 빈민들과 어울림, 민주화 운동과 감옥살이, 소설과 영화로 만들어진 삶, 대안적이고 생태적인 공동체 만들기, 수많은 사람들이 받은 감화와 변화, 심지어는 첫 번째 아내와 헤어지고 재혼한 것까지.

그러나 지금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다.

김진홍은 30여 년 전 악취 나는 청계천에서 미약하게 시작했으나, 지금은 번듯하게 변신한 청계천에서 창대하게 변신했다. 하지만 당시 그가 거닐던 청계천 둑길에 오셨던 예수님이 이명박과 김진홍이 함께 거닐고 있는 지금 청계천 둑길에 오실 거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목사로서의 특혜가 부끄럽다며 목사직을 버리고 농촌으로 돌아간 허병섭은 차가운 1월 화려한 도시의 어느 길목에 쓰러졌다가 발견되어, 한 달이 넘도록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다. 일주일 먼저 쓰러진 아내를 간호하다가 극심한 스트레스와 체력 저하로 갑자기 뇌에 손상이 온 것은 아닐까 의심할 뿐, 원인도 모른 채 한 달이 넘도록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화려함과 창대함은커녕 비참하고 초라한 노년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30여 년 전 청계천에서 사셨던 예수님은 지금 어디서 누구를 만나려 할까.
이 시대의 참된 목사를 찾아보기 원하는 수많은 죄인들은 지금 어디서 누구를 만나려 할까.
나는 한 알의 작은 밀알이 되어 죽고 썩어지려 하나, 창대하고 화려하게 번성하려 하나.



서머나 교회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칭찬만 받은 교회입니다. 그 교회에 사도 요한의 제자였던 폴리갑이 감독으로 있었습니다. 폴리캅 기념 교회에 폴리갑과 함께 순교한 자들의 성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는 19세기 말 불란서의 화가 레이몽 페레(Raymond Pere)가 그린 그림인데 순교의 현장에서 손이 묶어져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장면입니다.

폭스(Fox)가 쓴「순교사」의 글에 보면 당시의 박해와 고난이 얼마나 심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폴리갑은 당시 열번째 순교자로서 86세의 나이로 하나님 앞에 산 제물이 되었습니다. 로마의 총독이 늙은 감독으로서 특별한 대우를 하여 회심시켜 보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총독은 "네가 예수를 모른다고만 하라. 그리하면 풀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폴리갑은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할 수 없습니다

. 내가 주님을 믿고 살아온 86년 동안 주님은 나를 한 번도 모른다고 부인한 적이 없는데 내가 어찌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하여 주를 모른다고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하면서 화형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불길로 걸어가면서 "오, 주 아버지여 ! 나를 이곳에 적합한 자로 세워 주셔서 감사합니다."고 말했습니다. 불이 그의 몸을 태울 때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들이 나를 태우는 이 기회에 내 생명을 다해서 당신을 간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니 감사합니다."고 했습니다.

폴리캅은 초대교회 선교의 풍성한 열매가 맺어지기까지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덥고 독사와 악어가 들끓는 곳으로 이름난 '랑바레네'라는 곳에 서양 집도 아니고 토인들의 집도 아닌 40여 채의 자그마한 집들이 있습니다. 그 집들은 그 지방민들을 위한 병원으로서 알버트 슈바이처가 세운 것입니다.

알버트 슈바이처는 1875년 독일 알싸스 지방에서 태어나 26세 때 이미 철학, 신학, 음악의 세 가지 분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그리고 의학박사의 학위까지 네 가지의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1913년 그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가장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주 예수의 복음을 전하려 아내와 같이 아프리카를 향했습니다. 그곳에 이르러 그는 병원을 세우고 토인을 돌보아 주며 주의 복음을 전하기에 갖은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온 생애을 다 바쳐 아프리카 선교의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한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선교의 역사속에도 썩어지는 밀알이 되었던 순교자가 있습니다. 토마스목사입니다. 토마스 목사가 목선을 타고 1863년 9월 13일 황해의 거친 파도를 헤치고 다다른 곳은 백령도였습니다. 토마스 목사는 우선 이 섬에 상륙하여 약 2개월 동안 그곳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여 옹진 일대의 여러 섬들을 돌아다니면서 선교에 주력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주민들과 사귀는 일이었습니다.

토마스 목사는 이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예수님과 선지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주민들 중에는 처음부터 거부반응을 보이면서 토마스 목사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사람도 있었으나 적지 않은 전도의 열매를 맺었으므로, 이번에는 방향을 돌려 육지로 무대를 옮기기로 했습니다.

토마스 목사는 한국에서의 선교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황무지와 같은 한반도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임을 깨닫게 되자, 이 일을 잠시도 지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날로부터 토마스는 하나님께 전도의 길을 열어 달라고 기도하는 한편 지혜를 총동원하여 관헌들의 눈을 피해 가면서 황해도 서해안 일대에 복음의 씨를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1866년 8월 셔만호를 타고 대동강을 따라 평양으로 향했으나 관군의 저항으로 배에 불이 붙었습니다. 셔만호에 탄 선원들은 불을 피하려고 물에 뛰어 들었으나 언덕으로 기어오르는 대로 잡혀 죽임을 당했습니다. 토마스 목사는 기슭에 나와 덤벼드는 관군에게 성경을 꺼내 주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토마스 목사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저들은 무지하고 가엾은 인간이니이다." 순간 관군의 시퍼런 칼날이 토마스 목사의 목을 내리쳤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한국의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1927년 5월 8일 수천 명의 신도들이 모인 가운데 토마스목사의 추도 예배를 드렸으며 그를 기념하여 대동강 변에 조왕교회를 세웠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초대교회의 감독 폴리캅의 순교도 슈바이져의 헌신도 토마스목사의 순교도 모두 이 땅에 복음의 풍성한 열매를 맺게한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었던 것입니다.

지난 주일은 우리 교회의 창립36주년 기념주일이자 순교자 기념 주일이었습니다. 오늘은 순교자의 신앙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그래서 밀알의 신앙이라는 제목을 정해 보았습니다. 우리 교회가 예수님을 닮아 행복을 주는 교회가 되어지기 위해서 특별히 저와 성도 여러분들이 밀알의 신앙을 소유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밀알의 신앙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교회의 부흥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에 있는 어느 교회가 제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폭격을 맞고 크게 부서졌습니다.

마침 교회 안에 있던 예수님의 조각상도 파손이 되었으나 다행히도 두 손만이 떨어져 나간 체 보전되어 있었습니다. 성도들은 파손 된 이 조각상을 계기로 해서 이전보다 더 큰 교회를 세웠는데 어느 날 한 조각가가 파손 된 예수님 상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에서 우리가 없어진 두 손을 만들어 붙이자고 교회에 건의를 하였습니다. 그날 교인들이 모여 회의를 한 결과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우리는 조각상의 없어진 손을 다시 만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들이 예수님 손의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모두 주님을 향한 뜨거운 헌신과 섬기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위한 손이 되기를 기꺼이 자원했던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한 것도 그리고 우리 한국 교회가 부흥하고 발전한 것도 다 썩어지는 밀알처럼 자신을 희생하여 교회를 섬긴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밀알의 신앙을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또한 교회를 위하여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썩어질 밀알처럼 자기를 희생할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 한국 교회를 위하여 그와 같은 삶을 살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이 시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일군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밀알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속에 살아있는 신앙입니다. 한 알의 밀이 심겨지는 것보다 이전에, 또한 땅에서 자기를 희생하는 것보다 이전에 중요한 것은 그 속에 있는 생명입니다. 생명 없는 씨앗은 싹을 티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생명 없는 죽은 씨가 아니라 생명 있는 살아있는 씨앗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안에 있어야 할 생명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안에 있는 사람이 진정 열매를 맺는 신앙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목적하는 것은 예수 생명을 모든 사람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도 친히 십자가에서 자기를 희생하셨던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이 썩으므로 맺어지는 열매들 속에는 동일한 생명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그 씨앗들을 심으면 싹이 나고 많은 열매들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나라의 비밀입니다.

겨자씨가 심어져서 자라면 큰 나무가 되는 것도 그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안에 예수 생명이 있어야 섬김도 희생도 봉사도 충성도 모두 의미가 있고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 없이 행하는 섬김이나 봉사는 세상 사람들이 하는 봉사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교회의 부흥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이 된 성도들의 헌신과 섬김을 통해 교회에 부흥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내일의 부흥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이 되는 성도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부흥이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의 이름 없는 희생이 있어야 하고 누군가의 영광 없는 섬김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처럼 되어야 교회의 부흥을 기대할 수 있기에 모든 성도들이 밀알의 신앙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좋습니다.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아도 좋습니다.

물론 아무도 섬겨 주지 않아도 좋고요. 다만 우리의 하는 일들이 예수님의 가신 길을 따라가는 길이라면 우리교회 성도들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저 그 길을 따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 안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생명이신 그분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그 분이 내 안에서 생명의 씨앗이 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밀알 신앙은 자신을 희생하는 신앙입니다. 썩어지는 것은 곧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복음의 열매와 큰 역사는 남다른 희생과 헌신이 있을 때에 가능함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촛불은 흔적 없이 녹아질 때 더욱 밝은 빛을 나타내며 소금도 자체가 녹아 없어질 때 그 고유의 맛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세계 교회가 그러했고, 한국 교회가 그러했고, 각 교회마다 역시 남다른 희생과 봉사의 손길들이 있었기에 성장하여 왔음은 누구라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밀알 신앙을 소유한 성도들에게 있어서 얼마나 고난을 감내하느냐 보다는 얼마나 희생을 치르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단순히 고난을 감내하신 분이기보다는 기꺼이 희생을 치르신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빌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는 것은 희생하셨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러 오신 분으로서 지금 우리가 그 분을 믿음으로 누리는 구원은 우리 편에서는 값없는 은혜의 선물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하신 엄청난 희생의 결과입니다.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 말씀은 역설적 진리이며 진리 중에 진리입니다. 죽으면 삽니다. 살고자 하면 죽는 것입니다. 죽어야 한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희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본이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희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죽으심의 희생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도는 희생할 줄 아는 성도이어야 합니다. 내가 희생해서 많은 사람이 산다면 희생할 수 있어야 하며 내 자신이 죽어져서 가정이나 교회가 화평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특별히 내가 희생하는 것을 통해 교회가 바르게 성장한다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둘째로 죽는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나의 교만과 아집을 버리는 것입니다.
빌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여기 취한다는 말은 놓치지 않기 위하여 꽉 붙잡는다는 뜻으로서 자기주장을 강하게 고집할 때나 자기 권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을 때 쓰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나오는 형용어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까?

"여기지 아니하시고"
즉 예수님은 자기를 내세울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모습을 내세우지 않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가 진정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희생되는 밀알입니까? 그렇다면 자기를 주장하는 자리에 앉지를 않아야 하며 내가 왜 죽어야 하고 또 왜 썩어야 하느냐면서 거부하지도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기꺼이 자신의 모든 영광과 권리를 포기하셨습니다.

빌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자기를 비운다는 말은 물그릇을 쏟아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다 비우는 경우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의미의 빈 마음을 품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비우셨기에 마지막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땀과 물과 피까지도 다 쏟아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의 모습을 보면 예수님의 모습을 전혀 닮지도 못하고 자기 권리를 결코 양보를 하려고도 않습니다. 자기 주장이 너무나 강하고 고집이 아집이 여전히 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전히 내가 죽지 않고 살아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자기주장이 얼마나 강한지 조금만 내 권리가 침해되면 아파하고 분노하고 증오까지도 합니다. 이것은 죽지 않은 모습이요 비우지 못한 모습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교회에서 일을 맡은 직분자들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벧전5:3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내가 죽어 교회가 살고 성도가 살 수 있다면 기꺼이 죽어야 합니다. 아버지가 살아야 가정이 산다는 구호가 다른 의미에서는 아버지가 죽어야 가정이 산다는 말로도 표현 될 수 있습니다. 목사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는 말도 목사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는 말씀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에 자기를 부인하고 희생할 줄 아는 한 알의 밀알같은 성숙한 성도들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그 밀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셋째, 밀알 신앙은 순교자의 신앙입니다. 미국의 명문대학을 졸업한 5명의 젊은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 피트는 신혼 여행도 포기하고 에콰도르 선교에 나섰습니다. 5명의 선교사는 아내들을 후방에 남겨둔 채 경비행기를 타고 단 한 명의 기독교인도 없는 아우카 인디언마을로 떠났습니다.

1956. 1. 2. 피트 선교사는 아내에게 긴급무선을 쳤습니다. "흥분한 인디언들이 몰려오고 있다. 기도해 달라." 그 후 연락이 끊겼습니다. 이튿날 구조대원과 가족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5명의 선교사들은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었습니다. 복음을 거부한 인디언들에게 순교당했던 것입니다. 20대의 선교사 부인들은 울부짖으며 한 가지 다짐을 했습니다. "남편들이 이루지 못한 과업을 우리가 완수하자."

아내들은 모두 아우카 마을로 이사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40여년이 지난 지금 그 마을은 '복음의 땅'으로 변했습니다. 선교사를 살해한 5명의 인디언들 중 4명이 목사가 됐고 1천여명의 주민들이 모두 신자로 변했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순교자의 피위에 오늘도 하나님 교회가 세워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한알의 썩어진 밀알처럼 순교자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순교자의 신앙이란 기꺼이 하나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성도를 위해서 죽는 신앙입니다.

지금도 선교의 현장에서는 순교자들의 피가 뿌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순교해야 할 선교의 현장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교자의 신앙이 필요합니다. 순교자의 신앙은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며 순교자의 신앙은 내가 죽고 교회가 사는 것입니다. 순교자의 신앙으로 많은 생명을 살리는 풍성한 열매가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두리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밀알의 신앙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신앙입니다. 밀알의 신앙은 자신을 희생하는 신앙입니다. 밀알의 신앙은 순교자의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밀알의 신앙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한 알의 밀알이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었던 것처럼 여러분들의 희생과 섬김과 헌신과 충성을 통해 많은 열매가 맺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위해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처럼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서 생명이신 주님을 높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생명 가지고 자기를 낮추고 희생함으로 그리스도의 피 값을 주고 산 교회를 부흥케 하는 밀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자판기를 통한 신앙

‘자판기 안의 스낵은 강철 코일에 감겨 있다. 그것을 꺼내려면 누군가 현금 투입구에 돈을 넣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도 비슷하다. 우리 구주가 자신의 피로 우리를 사실 때까지 우리는 죄의 사슬에 묶인 존재다.(고전 6:20)’

미국 캘리포니아 사우스랜드 교회의 수련목회자인 윌 앤더슨이 9일(현지시간) 기독교연합기구인 복음연합(The Gospel Coalition) 홈페이지에 게재한 기고문 ‘자판기에서 배우는 신학적 교훈 5가지’

첫째, 우리는 구원이 필요하다

앤더슨은 ‘인간은 눈을 뜨고 있으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찰스 스펄전(1834~1892) 목사의 발언을 언급하면서 자판기를 통한 건강한 신앙인의 자세를 제시했다.

둘째, 우리는 선택받은 존재

그는 “자판기에서 스낵을 구입할 때 원하는 것을 정확히 선택한 다음 키패드에서 숫자 등을 입력해야 한다”면서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무작위로 뽑지 않으신다. 이미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셨다(엡 1:4)”고 강조했다.

셋째, 쾌락을 조심하라

자판기 먹거리는 방부제와 지방, 당분으로 가득한 인스턴트 식품이 대부분이다. 눈은 즐겁게 하지만 영양가가 부족하다.(요 4:13~14). 그렇기 때문에 ‘생명의 떡’에서 멀어지지 말아야 한다(요 6:35)고 그는 강조했다.

넷째, 의로움을 과시하려는 유혹을 조심하라

그는 “트랜스 지방을 30% 줄였다는 감자칩이라고 해서 건강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그리스도인의 영양 성분에는 ‘100% 그리스도의 의’가 표시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다섯째, 세상의 것을 멀리하라

자판기 물품이 밖으로 나오려면 밑으로 떨어진 뒤 손에 쥐어진다. 엔더슨은 이를 두고 “교만의 단상에서 겸손한 곳으로 떨어지는 것”이라고 비유한다. 이를 통해 새로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으로 바뀌어야 한다(갈 2:20)는 것이다.



돌을 옮겨 놓으라


나사로의 사건에서 "소생"과 "부활"을 구분해야 합니다.
부활(復活, resurecction)이란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것처럼 다시 살아난 후에는 죽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소생(蘇生, revival)이란 나사로처럼 죽었다가 살아났지만 다시 죽은 것을 말합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

1. 믿음을 행동으로 보여달라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믿지 않는 강한 무엇이 나를 붙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돌을 옮겨 놓으라는 말씀은 불신을 제거하는 믿음을 행동으로 보여달라는 교훈입니다.

2. 율법을 옮겨 놓으라

돌은 율법을 상징합니다.
왜냐하면 십계명을 돌판에 새겨서 주셨기 때문이다.
사탄이 예수님에게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시험은 율법을 먹어보라는 것과 같은 시험이다.
율법으로는 사람을 살릴 수 없지만 돌을 옮겨 놓으면 율법을 치우면 죽은 사람이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율법을 어긴 사람을 돌로 쳐 죽이는 것은 율법을 어겼기 때문에 율법으로 처단한다는 것이다.

3. 죄를 치워라 

돌은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나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 막고 있는 것은 "죄"라고 합니다.
돌을 옮기라는 것은 죄를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4. 


예수님과 가족처럼 지냈던 마리아 가족 중 마리아의 오라버니인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예수님께서는, 이상하게도 곧바로 나사로에게로 가시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 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병이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그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주의 뜻을 행하심으로 인하여 영광을 받을 일이라고 하십니다.

15절에 보면 그 이유가 나와 있는데,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라고 하십니다.

당장 나사로에게 가시지 않은 것은 제자들을 위함이니, 이는 제자들로 하여금 진정한 믿음을 가지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치고 싶으신 것이 있었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무언가를 알려주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결국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과 뜻을 이루는 것을 보여주심으로써, 제자들이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경우는 이외에도 더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를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을 위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 불신을 제거하는 것

사실 우리 모두에게는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고 믿음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나라의 법인 ‘그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사실은 믿음의 문제이기 보다는 불신의 문제가 훨씬 더 큰 것입니다.

둘째,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

돌을 옮겨 놓았을 때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보여주기를 원하신 것이었습니다.

셋째, 나사로야 나오라

바로 그 무덤이 열렸을 때 예수님께서 큰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하고 큰소리로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역하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첫째는 불신의 제거, 둘째는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 셋째는 주의 뜻을 이루는 사역을 어떻게 하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불신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육신을 치유하는 능력자로만 인식하고 있을 뿐,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걸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불신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했을 때에 마르다는 “죽은 지 나흘이 되어서 냄새가 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마르다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있고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에는 예수님께도 하실 수 없는 일이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죽음의 권세(나흘이나 지나 냄새가 나는 죽음)는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흘 뒤에 오셨을 때에 마리아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죽기 전에 오셨으면 틀림없이 살릴 수 있는데 이미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죽음의 권세는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의 법칙을 뛰어 넘는 일을 행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불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 당시 유대에는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다시 돌아오기 위해 삼일 정도는 그 사람 주위를 맴돈다고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나흘이라는 시간은, 유대인의 생각에 의하면 완전히 죽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다시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 왜 삼일 뒤가 아니라 나흘 뒤에 가셨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바로 모든 인간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두 가지 불신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불신
둘째, 이 세상의 법칙을 붙드시고 만드시고 지금도 이끌어 가시는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에 대한 불신

죽음의 권세에서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불신은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이 두 가지 불신이 사라질 때 진정한 믿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지금도 붙들고 계십니다.
그분에게 있어서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네가 믿으면”(40절)

이 말씀은 다시 말하면 “불신을 제거하면”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천년 전에는 예수님께서 수많은 기적들을 일으키신 것은 쉽게 믿었지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은 하지만,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시는 것에 대해서는 의심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예수님인데 이천년 전과 이천년 후에 살고 있는 우리의 마음의 생각은 이렇게 엇갈려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두 가지 불신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의 불신이 사라지고 주님의 말씀을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의 불신하는 마음을 제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 마음의 불신이 제거되고, 그에 따른 믿음으로 행동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흑암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의 통치로 건너오는 유일한 길과 같은 것입니다.
믿음으로 우리의 인식을 바꾸는 것은 마치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나아가는 길이 열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로새서 1:13)

이것은 돌을 옮겨야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로 하여금 불신을 제거하고 믿음으로 영적 세계인 하나님나라로 통하는 문을 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돌을 옮기는 것은 예수님 때문이 아니라 바로 우리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의 의식을 바꾸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기적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나라가 도래했음을 알리고자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었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통해서 그 통치권이 회복되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그 나라로 침노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즉, 인간의 불신을 제거하심으로써, 새로운 인식 가운데 행동하도록 하고, 결과적으로 주의 뜻을 이루도록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돌을 옮겨 놓았을 때 예수님은 다음 단계의 믿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은 아들 예수와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 하나이며, 예수님은 자신의 일을 행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주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오신 것임을 알려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아들 예수님의 신적 권위, 이 두 가지는 전혀 충돌하거나 상호 훼손되는 일이 없으며, 온전히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가 아버지께 구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아버지께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뜻을 이루기 위한 간구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가 우리 이름으로 우리 생각대로 말하고 행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뜻을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의 말씀대로 주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구할 때,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행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주인인 삶을 사는 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하고 부르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는 뜻은, “나자레 듀로 엑소”입니다. “나사로야 나오라!(Lazarus, come out!)”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동일하게, 우리에게도 “불신에서 나오라!”하고 큰소리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죽음의 세력을 깨뜨리는 능력의 말씀이며, 세상 신을 굴복시키는 능력의 말씀이고, 자연의 법칙을 통치하시는 능력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가 행하실 일들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아버지께서 행하셨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도 주의 뜻을 나타내는 삶을 살 수 있고,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가 깨닫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요14:12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요16:23-24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앉으시니라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막16:17-20

오늘 하나님나라의 질서를 보도록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 우리의 불신을 제거하고 새로운 의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둘째,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십니다. 셋째, 주의 뜻을 이루는 선포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의식이 바뀌면 하나님의 영광에 접속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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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라는 것은 성경에서 늘 율법을 상징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실 때에 돌에 새겨 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율법을 어긴 사람을 돌로 쳐서 죽인다.
그것은 율법을 어겼기에 율법으로 심판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금식하시고 시험을 받으실 때에 사탄이 말하기를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한 것도 그것이다.
돌로 떡을 만들라는 것은 율법을 사람이 먹을 수 있게 해 보라는 의미이다.

돌은 사람이 먹을 수 없다.
그것은 율법은 사람이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먹을 수도 없고, 율법으로 인하여 사람이 살 수도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핵심적인 것은 바로 그 율법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금식하시고 나왔을 때 사탄이 돌을 떡으로 만들어 보라고 한 그 때부터 예수님께서는 늘 율법의 기준과 논쟁을 하셨다.
그리고 그 율법의 기준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되었다.

그 논쟁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 사람을 향하여 죄를 사한다고 하신 것, 그리고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또 메시아라고 하신 것 그 모두가 다 율법과 예수님의 논쟁이었다.
유대인들의 가친관 안에서 그 논쟁의 핵심은 이것이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고, 율법의 조문을 어기는 행동을 하고, 세리와 창녀와 문둥병자들과 먹고 마시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인가?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에게 율법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사람 안에 있으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나, 생명은 없으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지키려 하면 스스로 자기 안에 생명이 없다는 것, 곧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법이었지만, 유대인들에게 율법은 사람이 부족하니 율법을 행동으로 지켜내면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그 유대인들의 가치관은 먼저,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사람의 모습이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한다고 자기 맘대로 하나님의 만드신 사람을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정의한 것이 죄고, 다음으로는 하나님을 사람이 행동으로 행한 공로로 의롭게 여기시는 신으로 치환하여 모욕한 것이 죄며, 마지막으로 사람의 겉모습, 곧 눈에 보이는 것이 본질이라고 여긴 것, 그것이 죄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관점을 하나님의 관점보다 더 의로운 것으로 여겼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이 율법이 완성된 존재라는 것을 알 수도 없었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들은 율법을 행위로 지켜내어 하나님의 의에 이른다고 하는 생각이 돌을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떡으로 만들어 보라고 한 사탄의 생각과 같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것이 어두움이고, 빛이 없는 것이고, 생명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그 어두움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앞에서 포스팅 한 글에서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남매들을 사랑하신 이유 중의 하나가 베다니라는 죄인들의 동네에 살고 있는 것 때문이라고 했다.

베다니나 나사렛과 같은 동네에 산다는 것은 당시 유대인들의 가치관, 율법의 가치관으로 보면 죄인들의 동네다. 세리와 죄인들과 창녀와 같은 이들이 사는 곳, 문둥병자가 있고, 온갖 병자들이 모여 사는 가난하고 더럽고 죄인의 동네였다. 즉 율법의 기준으로 볼 때 다 패자들이요, 죄인들이요, 율법의 기준으로는 살았다고 할 것이 없는 죽은 자들의 동네였다.

그런 동네에 예수님께서 늘 머무셨다. 왜냐하면 그 곳의 사람들을 죄인으로 규정하는 그 율법의 기준에 의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분이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율법으로 심판 받아 십자가를 지신 것은, 사람은 율법 앞에서는 늘 죄인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은 육신으로 지켜낼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율법으로 사람을 심판하면 누구나 죄인이 되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이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베다니와 같은 죄인의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이 그렇게 율법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한 사람들이었기에 예수님께서 그들과 머물렀고, 나사로를 사랑하신 것이다. 그것이 죄를 시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율법, 돌로 상징되는 그 율법으로 무덤을 막았다는 것이다.
다시 이야기해서 나사로가 시체인 것은 율법의 기준으로 시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사로의 죽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는 것이다. 영광은 나타난다는 의미인데,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죄인이 되어 죽은 사람이 된 자, 그리고 그것은 시인하고 순종하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보실 때 산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신 것이 바로 나사로를 살리신 것, 곧 부활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그 성품을 나타내시기에 그것이 영광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실 능력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시기 위한 퍼포먼스가 아니라, 율법의 관점, 세상의 가치관, 그리고 그런 가치관으로 보는 육신을 가진 사람을 보는 안목과 같은 것으로 볼 때 죽었다고 할 수 있고, 패자고, 건축자가 버린 돌과 같은 인생일지라도, 오히려 사람이란 그런 세상의 관점 앞에서는 죄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나, 자신들의 정체성이 그렇다는 것을 인정하고 죄인의 동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다고 하는 사람의 정체성을 가졌다고 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표현되다 보니, 세상의 법으로, 율법의 가치관으로 죽은 사람, 돌에 갇힌 사람을 구원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타나심인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다 보니 죽은 자가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돌을 치우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살아 있다고 하는 사람은 율법으로 가둘 수 없다는 것이다.
율법으로 죽은 자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기에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요, 그것이 예수님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이 그것을 확정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서 죄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육신의 삶을 죄인으로 여기고 부끄럽게 여기며 율법을 지켜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의 율법과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죄인이기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다. 육신을 입고 있으면 그럴 수밖에 없기에 육신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놋뱀과 같이 들리신 예수님의 그 모습을 보고서 자신도 그런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게 하시려고 그렇게 순종하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의 모습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게 만든 사람의 모습은 스스로 선악의 기준을 가진 사람들의 세상의 법으로 볼 때는 부끄럽고 죽어야 마땅한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그것을 인정하면 자신이 하나님이 만드신 목적을 인정하는 것이 되고,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 말씀이 그 육신으로 표현되는 사람, 즉 하나님이 보실 때 생명이 있는 존재가 되어 그 생명이 표현되는 삶을 사는 것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고 복음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육신으로 사는 자기 삶을 늘 부인한다. 항상 육신 이상의 능력을 보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노력한다. 그러다 안 되면 교회나 신전을 찾아서 신비한 능력을 구하고, 자기 육신으로 이루지 못할 본질도 아닌 세상의 일을 해결하려고 한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육신을 부끄럽게 여기는 아담의 모습이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돌로 가둔 율법이 자기 가치관인 사람들의 모습이다.

예수님께서 보시는 나사로는 자기 정체성을 인정한 사람이었다.
그가 인정한 자기 정체성, 곧 사람이 세상의 법으로 보면 죄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베다니에 살면서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여기시는 모습, 모든 인생에게 기대하는 모습인데, 그를 돌로, 율법으로 가두어 시체로 두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육신을 가진 자기 삶의 모습을 하나님이 지으신 그대로 인정하는 것을 죽음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구원과 부활은 바로 여기에 비밀이 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생명이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보시는 생명은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기에 만드신 목적 안에 있고, 그 목적을 표현할 때 비로소 생명이 있는 것이다. 시간을 알려고 산 시계가 시간을 알려주고 있을 때 살아 있다고 하는 것처럼. 그 생명이 있는 자는 율법으로 가둘 수 없다. 죽음 가운데 두실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성품인 것이다. 

하나님이 보실 때 산 것이 어떻게 사람이 볼 때 죽어야할 기준 아래 죽은 자로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셨고, 예수님도 돌에 갇히실 수 없었던 것이다. 또 누구라도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었다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이고, 그것이 부활인 것이다.


주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서서 계시면서 연약한 여자에게 돌을 옮겨 놓으라고 명령하시었습니다.

사람의 할 일은 돌을 옮겨 놓는 일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냐 안하느냐에 따라서 생명과 사망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예수를 믿으라는 말씀에 순종하느냐 불순종하느냐의 여하에 따라서 생명과 사망이 달라지게 나타납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 예수님이 죽은지가 나흘이나 지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썩어서 냄새가 나는 송장이지만, 돌을 옮겨 놓으라는 말씀에, 마르다는 일단 사람의 상식을 주장하며 벌서 냄새가 나는데, 그런 말을 하지 말라는 뜻으로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상식에 어긋나지만, 말씀에 순종하여 돌을 옮겨 놓는 순종을 보일 때에 나사로가 살아나는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오늘 돌을 옮겨 놓으라는 주님의 명령의 의미를 찾아봅시다.

1. 죽음에서 생명으로 역전이 됩니다.

인간의 종말은 무덤에 들어가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육신적인 죽음만 아니라 영혼도 영원한 사망인 지옥으로 들어가는 일로 끝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 오셨습니다.

인간이 사망으로 마치는 것을 보시고 주님은 우리 앞에 오셔서 생명의 길을 얻는 부활의 길을 순종하는

 사람에게 열어 주십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 는 말씀을 들은 인간들은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로 인간의 상식으로 대답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사람의 상식으로는 썩은 송장이 돌을 옮겨 놓는다고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인간의 합리적인 생각입니다. 이런 합리적인 생각을 인간은 항상 주장하며 살아갑니다.

암이란 병에 걸렸으면 죽어야 한다. 돈이 없으면 가난하다. 하는 것이 우리의 합리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 인간의 합리적인 생각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는 나의 합리적인 생각을 주장하기에 앞서서, 하나님의 권능을 믿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내 합리적인

생각을 죽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돌을 옮겨 놓는 사람이 될 때에, 말씀에 의지하여 행동하는 사람이

될 때에 생명의 기적을 얻게 됩니다.

예수를 많은 사람이 알면서도 믿지를 못합니다.

그 이유는 자기의 합리적인 생각을 떠나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를 믿지 못합니다.

예수가 내 죄를 담당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이 인간의 생각으로는 믿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000년 전에, 내가 태여 나기도 전에, 어떻게 예수가 내 죄를 위해 죽었단 말인가? 하는 합리적인 생각으로는 예수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을 버리고 순종하고, 그 말씀대로 믿을 때에는 구원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중국에서 지식 분자들에게 전도를 하면, 자기의 합리적인 생각 때문에, 유물론 때문에 예수를 믿지 못하고

구원을 놓치는, 생명을 잃는 사람을 많이 보게 됩니다.

우리의 합리적인 생각을 버리고, 돌을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순종함으로 옮겨 놓을 때에 사망이 생명으로

변화되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합리주의 신앙을 가집시다.
하나님의 입장을 따릅시다.

인간의 합리적인 생각에서 하나님의 합리적인 생각으로 바꿀 때에 생명을 얻게 됩니다.

성경은 이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전능을 따라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이고 믿음입니다.

내 생각을 따르고 주장하면 이것은 불신앙입니다.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입장을 따르는 자가 믿음이 있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기적을 불러오는 사람입니다.

성경에는 요나의 이적, 동정녀의 탄생,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등 많은 인간의 상식을 벗어난 기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하나님의 합리적인 전능하심으로 믿을 때에는 모든 것이 쉽게 풀어집니다.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은 사람의 합리적인 생각을 버린 사람이요, 예수를 잘 못 믿는 사람은 자기의 합리적인

생각을 주장하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25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주여 그러 하외다” 하면서 하나님의 합리를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내 이성에 따라서 믿을 수가 없나이다. 라고 대답 할 때에는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성도가 예수에 대한 고백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 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니이다 하고 고백하는 베드로의 고백과 같은 사람이 있고,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등 다른 선지자의 하나로 고백하는 반신반의하는 고백도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을 때에 나의 합리적인 생각을 버리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돌을 옮겨 놓는 행함이 따라오게 되고 그 결과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3. 돌을 옮겨 놓으면 생명이 시작됩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오라비 나사로의 인생은 끝이 난 것으로 알고 비애와 절망에 빠졌습니다.

인생의 삶이 70년, 80년으로 끝이 나는 줄로 아는 사람은 절망과 비애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인간의 무능으로 끝이 나게 하시지 않고, 믿음으로 돌을 옮기는 자에게 새로운 생명의 삶을

시작하게 하십니다.

 

돌을 옮겨 놓는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뜻이 있습니다.

1. 주님의 말씀을 믿는 자가 돌을 옮겨 놓습니다.

2.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돌을 옮겨 놓습니다.

3. 고집 부리고 안 믿고 자기의 생각을 주장한 사람들이 불순종을 회개하는 마음으로, 회개하는 사람들이 돌을 옮겨 놓습니다.

요나가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고 할 때 요나의 인생이 끝이 난 것으로 생각했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요나를 다시 살려서, 새 생명을 얻고 니느웨를 회개시키는 구원의 역사를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2장 11절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마리아와 마르다는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서 복음을 크게 전파하는 일을 생각도 못하였지만, 나사로 때문에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역사하시었습니다.

우리 인간이 끝장이라고 포기 할 때에 주님은 그 사람을 능력으로 다시 살려서 새 생명의 역사를 할 때가

 있습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 할 때에 믿고 순종하고 옮겨 놓으면 병들어 죽어 가던 육신이 새 생명을 얻고, 망해 가던

사업이 다시 일어나고, 꺼져 가던 불이 다시 활활 타오르는 기적이 나타납니다.

믿고 순종하면 반드시 새 생명의 역사가 돌을 옮겨 놓는 자에게 나타납니다.


4. 돌을 옮겨 놓으라는 말씀에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내 스스로를 위하여 돌을 옮기는 수고가 있어야 기적이 나타나는 법입니다.
내가 내 믿음을 주님께 보일 때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내가 수고하여야 다른 사람이 생명을 얻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썩어져 죽을 때에 많은 열매가 맺힙니다.
내가 믿고 순종하고 돌을 옮기는 수고를 함으로 내 형제가 살아납니다.
내가 믿고 순종하고 주님 말씀에 따라서 돌을 옮기는 수고를 하면 내 자손이 복을 받습니다.

5. 돌을 옮기는 것은 하나님과 나 사이를 막고 있는 것을 치우는 것입니다.
이사야 59:1-2

죄가 바로 나와 하나님 사이의 돌입니다.

사망을 이루는 죄가 돌이 되어 우리를 사망의 굴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회개 할 때에 하나님과 나 사이의 사망의 돌이 옮겨지고 생명의 부활이 나타납니다.

이사야 59:1-2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어제나 오늘이나 하나님의 능력은 동일합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돌(죄)이 없어야 주님의 능력으로 생명 주시는 이적이 베풀어집니다.

돌을 옮깁시다.
회개함으로, 믿음으로, 순종함으로 돌을 옮기면 하나님의 큰 영광의 기적이 오늘도 나에게 나타납니다.
나의 합리적인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합리적인 생각을 따를 때에 죽은 자가 생명을 얻는 기적이 나타나는 복을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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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아가도스'와'칼로스'

예수님의 비유 제7강 소금과빛 중에서....(본문요약)

 

'착한'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는 헬라어로 '아가도스'와'칼로스'입니다.

둘은 혼용해서 쓰이기도 하지만 '칼로스'라는 단어가 훨씬 폭 넓고 깊은'선'을 가리킬때

자주 쓰이는 단어입니다.

 

(칼로스는 선과악 구조의내용을 품은 선으로 그 칼로스로 아가도스의 참 선으로

이해 되어 진다면 선도악도 아닌 그 참 선으로 하나되는 그 깊은 '선'을 의미합니다.)

 

(요10:11) 나는 선한(칼로스G2530-가치있는)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빌 1: 6) 너희 속에 착한(아가또스G18)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니

* 예레미야스에 의하면 그 두단어는 서로 혼용해서 쓰였던 단어입니다.

 

성도의 착한 일,성도의 착한 행실은 세상의 선악기준에 의한 착한 일이라기보다

예수님의 착한 행실,혹은 예수님의 착한 행실에서 기인한,성도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착한 행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그게 빛과소금의 삶입니다.

 

예수님의 착한행실은 이 세상속에서 순종으로 비움으로 자기부인으로 십자가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착한 행실에 의해 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성도의 삶 속에서 바로 그 새 창조의 행위 자기부인과 순종으로 지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 과정

그게 하늘나라 백성들의 세상 속 착한 행실입니다.

 

(행 10:38)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바로 이 예수의 착한 일이 성도에게서 그대로 재현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빛과소금의 삶,착한 행실은 자기를 부인하고,수난의 삶을 통과하며,

하나님의 새 창조 역사에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성도의 착한 행실,순종의 착한 행실,십자가의 착한 행실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지면,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는 말입니다.

 

즉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상태를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성도의 삶 속에서 가입을 하여 세상은 도처히 감당해 낼 수 없는

인내와 수고와 섬김과 순종의 삶이 성도의 삶에서 드러나게 될 때

거기에서 하나님의 영광,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세상에 증거 되는 것입니다.

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드러나는 삶,그 삶이 바로 착한 행실이고 빛과소금의 삶인 것입니다

 

(마5:14-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나는 선한 목자

예수님은 선한목자가 되십니다.
선한목자의 생활은 양들과 함께 들판에서 잠을 자고 함께 일어납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양을 먹일 때 넓은 들판에서 양을 먹입니다.
저녁이 되면 양들을 우리 안으로 들어오게 합니다.
우리라고 하여 울타리가 높은 곳이 아니라 양의 발에 걸리기만 하는 작은 돌입니다.
이렇게 양의 주위에 작은 돌들을 빙둘러 놓은 후 돌이 없는 부분은 목자가 누워서 잠을 자는 잠자리가 됩니다.
양은 발에 걸리는 것이 있으면 절대로 넘어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침이 되면 목자가 일어나면 그 자리가 양의 문이 됩니다.
양들은 그 문으로 나와 또다시 들판의 풀을 뜯습니다.

선한목자가 양들과 함께 눕고 일어나기 때문에 양들을 공격하는 사나운 들짐승을 곧바로 쫓아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삯군목자는 


예수님 당시 백성의 지도자였던 바리새인들이나 장로들, 대제사장들은 이스라엘의 ‘목자’였습니다.
그들의 사명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말씀으로 잘 양육하여 오실 메시아를 소망하며 살도록 가르치는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참 목자가 되지 못하고 절도와 강도요 삯군 목자가 돼 버렸습니다.
백성의 영혼을 상하고 죽이는 강도같이 됐고, 오직 삯을 위해 일하는 삯군이 됐습니다.

에스겔 34장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목자들이 양은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배만 채우고 살찐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로 옷을 만들어 입는다고 탄식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친히 양의 목자가 되셔서 흩어진 양을 모으고 잃어버린 양을 찾으며 상한 양을 싸매주며 병든 양을 강하게 하고 양들을 먹이겠다고 말씀하십니다(겔 34:12).

목자가 가운데 있는 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찌라.

바로 그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시려고 이스라엘 가운데 목자가 찾아왔습니다.
거짓 목자가 판을 치며 양의 생명을 약탈하는 곳에 참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바로 “나는 선한 목자”라고 선언합니다.

다윗이 시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 찬양했던 그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제 양도 아니라 이리가 오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고 했습니다.

선한 목자는 자기 양을 사랑하기 때문에 맹수가 오면 생명을 걸고 싸워 양들의 생명을 지킵니다.
그러나 삯군은 품삯이 목적이기 때문에 품삯 때문에 자기 목숨을 버리지는 않습니다.

바리새인이나 당시의 지도자들 대부분은 삯군이었습니다.
여기서 삯군은 단순히 삯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삯을 목적으로 일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들이나 레위인들이나 백성을 위해 일하는 자들에게 그 몫을 다 정해주셔서 생활대책을 다 세워주셨습니다.
자기 생활수단을 위해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봉사함에 전념하도록 그들의 생활을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께 봉사하고 백성의 영혼을 사랑함에는 관심이 없고 돈에만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목회자로 살아가는 내게도 똑같은 문제가 놓여 있음을 봅니다.
나는 좋은 목자가 될 수도 있고 삯군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교회가 목회자에게 주는 사례는 품삯이 아니라 생활비입니다.
목회에만 전념하도록 그 생활을 교회가 책임져 주는 것입니다.
목사가 목회에 전념하지 않고 딴일 보기에 바쁘면서 생활비에만 마음을 둔다면 삯군 되기 십상일 것입니다.
삯군은 이리가 오면 달아나겠지요.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말씀 앞에서 ‘나는 예수님을 따르는 선한 목자로 헌신하고 있는가’라고 물어보면서 주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주께서 나를 아시듯, 나도 맡겨진 양을 알고, 그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의 길을 가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나는 지금 선한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을 따르고 있는가 물어봅니다.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 / 나는 .....이다

요한복음에는 공관복음서에서 보기 힘든 특별한 형식의 문장이 여럿 나옵니다.
그중의 하나가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 문장입니다.
그 뜻은 “나는 … 이다.”입니다.

요 6:35절에 나오는 “나는 생명의 떡이다.” 
요 10:7절의 “나는 양의 문”
요 14:6절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

오늘 본문에는 “나는 선한 목자라.”(Ἐγώ εἰμι ὁ ποιμὴν ὁ καλός)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원문을 충실하게 번역하면 "나는 그 선한 그 목자"라고 하겠습니다.
11절과 14절에 반복됩니다.

듣기에 따라서 “나는 선한 목자다.”라는 문장이 어색해 보이기는 합니다.
자기를 스스로 높이는 듯이 들리니까요.
이런 표현은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고백으로 보는 게 옳습니다.
복음서에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또는 그리스도로 칭하는 표현이 종종 나오지만 그런 표현도 예수님이 직접 발설하신 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내서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눅 7:19)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그래, 내가 바로 메시야다.”라고 대답하지 않으시고, 메시야의 일을 증언하셨습니다.

마 16:13~20(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따르면 예수님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인정하셨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는 “선한 목자”라는 신앙고백이 무슨 뜻인지를 따라감으로써 요한복음 기자의 신앙을 배우려고 합니다.
거기서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람을 비롯한 당시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 대부분은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적 전통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종교 전통을 배척하면 기독교 신앙이 성립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적 전통에는 하나님을 목자로 보는 견해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유목민으로 살았기에 목자와 양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설명한 것입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앞에서 ‘성시교독’으로 읽은 시편 23편이 그런 자료 중의 하나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짧은 시편입니다.
마지막 6절은 이렇습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이스라엘 백성은 힘든 세월 가운데서도 목자이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붙들고 살았습니다.
이런 전통 가운데서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님이 바로 구약이 말하는 선한 목자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현대인에게 이런 목자 개념이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오해되는 이유는 자신들의 실존이 양이라는 사실을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온순하거나 의존적으로 보이는 게 싫다는 겁니다.
자기의 분명한 주관을 세우고 기세등등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기독교 신앙이 인간 삶을 수동적으로 만든다는 비판은 지난 역사에서 많이 발생했습니다.
인간의 생명력을 약화하는 반(反)생명적인 종교라고 말입니다.
그건 오해입니다.
아무런 판단 능력도 없이 의존적으로, 일종의 노예 심리에 물들어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목자와 양이라는 표현은 목자를 향한 양의 전적인 신뢰를 강조하는 개념입니다.
여기서 목자를 절대 생명이라고 바꿔서 생각해도 됩니다.
돈이 아니라 절대 생명만 신뢰하고 순종하는 사람은 생명을 충만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기쁨과 해방과 안식이 충만하다는 뜻입니다.
이런 삶의 태도는 주변의 다른 말에 솔깃해하지 않기에 실제로는 가장 강력합니다.

11절 - 목숨을 버리는 목자

예수님이 선한 목자인 근거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에고 에이미” 문장을 중심으로 볼 때 두 가지입니다.
먼저 11절입니다.

에고 에이미 호 포이멘 호 칼로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

선한 목자는 자신의 양이 늑대나 이리의 공격을 받을 때 자기 목숨을 걸고 싸웁니다.
이런 일들이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종종 일어났습니다.
개들이 있으면 도움이 되겠지만, 당시에는 그런 도움을 받기도 힘들었을 겁니다.
목자 중에는 삯꾼이 있습니다.
그는 고용된 사람입니다.
그의 관심은 양이 아니라 돈입니다.
그는 기계적으로 양을 돌보기에 양이 위험에 빠졌을 때 자기 목숨을 걸고 양을 구해내지는 않습니다.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의 죽음이 우리에게 현실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의 죽음이 우리의 운명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요즘 젊고 지성적인 기독교인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도 이런 데에 있습니다.
자신들이 노력해서 좋은 직업을 얻었고, 집도 장만해서 재미있게 꾸려가는 자기들 인생에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끼어들 틈이 전혀 없는 겁니다.

지금 예배드리고 설교를 듣는 여러분은 예수님이 여러분을 위해서 목숨을 버렸다는 말이 실감 납니까?
그래서 그걸 생각할 때마다 고맙고 감격스럽습니까?
아니면 남의 일입니까?
이 문제를 실감하려면 우리는 2천 년 전 그 당시에 일어났던 사건을 오늘 우리의 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미 잘 알고 있는 기독교 교리의 초보를 잠시 설명하는 걸 이해해주십시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정도로 하나님과 일치된 분이었습니다.
기독교 전통은 예수님이 출생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보았습니다.
여러 아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아들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보이는 형태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후 4:6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어떤 사람을, 연인이라고 해도 좋고 친구라고 해도 좋고 사제 간이라 해도 좋은데, 진심으로 사랑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그 사람을 통해서 사랑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의 예수 경험은 이런 우리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사랑 경험의 극치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신적인 사랑과 생명의 능력을 예수님에게서 경험한 겁니다.

예수님은 삼십 대 초반의 나이로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제자들은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분하고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만 생각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할 지점은 다음입니다.
그를 배척하고 죽게 한 이들은 유대교 산헤드린 의원과 예루살렘 주민들과 빌라도 로마 총독과 그 총독의 명령에 따라서 십자가형을 집행한 로마 군인들만이 아니라 바로 우리입니다.
오늘 우리도 그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세상을 삽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진리를 분별하지 못합니다.
희생양을 찾습니다.
때로는 악을 꾸미고 모함하고, 죄가 없는 이의 고난과 죽음을 외면합니다.
여기서 자신은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의 죽음에 우리 모두 직간접으로 연루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인식하고 인정할 때만 예수가 선한 목자라는 사실이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14절- 양을 아는 목자

예수님이 선한 목자인 두 번째 근거는 14, 15a절입니다.
첫 번째 근거보다 이 두 번째 근거가 더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에고 에이미 호 포이멘 호 칼로스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

양을 안다고 할 때의 그 단어 “안다”는 헬라어 “기노스코”의 번역입니다.
기노스코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단순하게 그 사람이 누군지 알거나, 세상에 대한 지식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특별한 경우에는 성적인 관계를 포함합니다.
상대방을 아주 깊이 안다는 뜻입니다.
목자가 양 한 마리 한 마리를 깊이 알듯이 예수님은 제자들의 중심을 알고 계셨습니다.
자신을 배신할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말을 듣고도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했으나 나중에 깨달았습니다.
제자들 자신도 자기가 누군지를, 즉 자기 정체를 몰랐던 겁니다.
바꿔말해 예수님을 통해서만 우리는 우리가 누군지를, 즉 양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대목에서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양이 목자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려면 목자가 누군지를 알아야 합니다.
사람 사이의 모든 관계가 깊어지려면 서로가 깊이 알아야 하듯이 기독교 신앙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필수입니다.
안다는 말은 여기서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실제로 예수님이 누군지를 신학적으로 깊이 있게 안다는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친구처럼 가깝게 느끼는 차원입니다.
이 두 차원은 구분되지만 분리되지는 않습니다.
그런 신학적인 앎이 없으면 기독교 신앙이 건강해질 수 없습니다.

간혹 기독교인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관심이 크지 않고 교회 활동에만 관심이 큰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와의 관계는 깊어지지 않고 자기의 종교적 열정만 왕성해집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지만 예수님 자체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습니다.
그런 신앙생활이 습관이 되면 결국은 신앙의 공백 상태에 떨어집니다.
평생 목사와 장로로 살아도 영적으로는 메말라갑니다.
예수를 깊이 알려면 신학 공부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일반 신자들이 신학을 공부하기는 물론 쉽지 않습니다.
신학 공부가 어렵기도 하고, 더 핵심적으로는 신학적인 문제는 몰라도 신앙생활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C.S. 루이스는 소위 평신도인데도 신학자 못지않게 신학적인 내공이 깊습니다.
우리가 루이스처럼 될 수는 없어도 그 방향이 옳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어야겠지요.

여기서 양이 목자를 안다는 말은  예수님과의 관계에 집중한다는 뜻입니다.
거기에 온전히 집중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출가 수도사들입니다.
아주 가까운 친구나 도반처럼 관계를 맺는 겁니다.
우리는 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살지 못하나 기본적으로 그 수도사들의 영성은 따르는 게 옳습니다.
일종의 재가 수도사처럼 사는 겁니다.
수도사 영성은 자신에게 닥치는 모든 일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받아들이는 삶의 태도입니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로 일희일비하지 않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깊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아는 깊이만큼 우리는 그 하나님의 통치를, 즉 생명의 능력과 신비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바로 그런 앎의 과정입니다.
그런 앎의 과정을 기쁘게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분을 통해서 제시해준 생명의 길이 보일 겁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를 선한 목자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선한” 목자(호 포이멘 호 칼로스)라고 표현했습니다.
삯꾼 목자가 아니라 선한 목자입니다.
선하다는 말을 착하다는 뜻인가, 하고 대수롭잖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선하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한 후에 나온 말과 통합니다.
창 1:12b절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입니다.
19절, 21절, 25절에도 나옵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뒤에는 한층 강조된 표현이 나옵니다. 31절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우리는 심히 좋다거나 선하다는 말을 주로 자신에게 유익한지 아닌지만을 기준으로 생각합니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가 자신에게 무엇이 유익한 일인지를 근본적으로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창조 세계를 보십시오.
지구 안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들의 유익이 충돌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선한 목자라는 말은 그가 우리에게 생명을 준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 구절인 요 10:10b절에서 요한복음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생명을 풍성히 얻는다는 말도 눈에 보이는 건 아닙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세상 사람과 우리 기독교인의 삶이 크게 달라 보이지도 않습니다.
비슷한 일로 힘들어하고 비슷한 일로 즐거워합니다.
부부 사이도 그렇습니다.
자기 남편은, 혹은 자기 아내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생명을 풍성히 누리는 사람 같다고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믿지 않는 사람이나 별로 다른 점이 없다거나, 더 못하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사람들이니 그런 일로 너무 실망하지는 마십시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풍성하게 누리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생명의 본질이 아닌 일에 치우쳐 산다는 데에 있습니다.
생명의 본질이 아닌 일은 한 마디로, 자기를 높이는 것입니다.
요즘 용어로 성취 욕망입니다.
이에 대한 불안감이 우리 삶을 옥죄고 있습니다. 자기 성취 외에 인생의 다른 의미가 있냐, 하고 질문할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여러분, 피조물인 우리 인생에는 자기 성취라는 단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생명의 주인은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아닌데도 주인 행세를 하려다 보니 온갖 문제가 발생합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잘 이해하고 있다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가끔 나를 향한 누군가의 오해앞에 저 사람은 나를 잘 모르는 것 같다 또는 어떤 사람의 행동앞에 언어앞에 저 사람은 자기를 잘 모르는 것 같다 합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여러분이 알고 있는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어야 한다 생각하십니까?
우리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에 대해 잘 알고 계셨습니다.
어떻게 오셨는지 왜 오셔야 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사셔야 했는지 어떻게 죽어야 하는 지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이렇게 우리 예수님은 자신을 잘 아셨을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려 주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오늘 본문을 통해 나는 선한 목자의 이름을 통해 나는 선한 목자란다 하십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의 이름을 통해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한가? 어떤 마음으로 사역을 감당하게 될 것인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우리 예수님은 이렇게 자신을 소개하며 소개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선한 목자의 마음을 가지고 선한 목자의 모습으로 사역을 감당함에 모범을 보이시면서 우리에게도 선한 목자의 마음을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선한 목자의 삶을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선한 목자의 신앙을 사역을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교회공동체 안에서도 가정공동체 안에서도 선한목자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선한 목자가 기대하는 선한 목자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말씀을 근거로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이 기대하는 선한 목자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선한목자는 양을 잘 알고 잘 이해하고 있는 목자입니다.

14절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입니다. 내가 내양을 알고 선한 목자는 양들에게 절대 필요가 되어 준다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은 양들의 연약함을 잘 아십니다. 그리고 양들의 연약함은 주님의 자녀 된 성도들의 연약함이기도 합니다. 이 비밀을 알고 있는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만 되어주신다면 자신은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양을 길러본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양에게 필요가 되어 주었던 사람입니다. 죽은 양이라도 사자의 입에서 건져내 올 정도로 양에 대한 애착이 깊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선한 목자앞에 양은 어떤 모습입니까? 양은 대체로 시력이 약합니다. 2-3미터의 앞을 분간을 못할 정도로 약한 시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내일을 모르는 인생입니다. 아니 잠시 후도 모르는 인생인 것입니다. 무엇인가 내일을 아는 것처럼 자기 뜻대로 살아보지만 금새 구렁텅이에 빠질 뿐입니다. 큰 소리를 치지만 별 것 없습니다. 또한 양은 소화기능이 약합니다.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쓰러집니다. 그래서 선한목자는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야하는 것입니다. 말 한마디 하나도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하는 인생들입니다. 밀려오는 유혹하나 소화해내지 못하는 인생들입니다. 그래서 늘 상처투성인 인생들인 것입니다. 자녀, 부모, 회사, 사업등 모든 것이 무거운 짐으로 다가와 쓰러지면 못 일어나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을 목자로 삼고 살겠다는 고백을 한 것입니다. 목자 되신 하나님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은 목자가 알아서 해줍니다. 또한 양은 털이 길고 엉켜있어 기생충과 온갖 해로운 곤충의 위협으로부터 노출이 되어있습니다. 목자가 제때에 털을 깎아주지 않으면 그 고통을 해결할 방법은 양에게는 속수무책인 것입니다. 인생의 문제를 다 해결할 것 같이 큰 소리를 치지만 아닙니다. 선한 목자이신 주님이 나를 안다는 것은 내가 너의 필요가 되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의 인도자가 되어주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의 상처를 치료하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주겠다는 것입니다. 선한목자는 양을 필요로 삼기 위해 양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양의 필요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보혈을 흘리기까지 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저와 여러분을 이용하시는 분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의 필요가 되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선한목자는 양도 선한목자를 안다합니다. 나의 필요가 되어 주시는 목자를 안다합니다. 나의 필요가 되어 주시는 주님을 안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나의 필요가 되어 주시는 선한 목자를 믿는다면 나의 연약함으로 인해 약해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선한목자라 하심은 너희는 예수님이 없이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양들은 선한목자를 외면한 채 각기 제 길로 갔습니다. 그래서 사53:6절에서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거늘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자꾸만 선한 목자이신 주님보다 제 갈 길로 간다는 것입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자기 욕심에 이끌려 적당히 타협하며 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가정에서 선한 목자 형 지도자는 서로의 필요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요구하며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필요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 목사가 선한 목자형 목사라면 성도에게 필요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요한사도는 요삼4절에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합니다. 회사에 들어가도 사람이 선한 목자형의 사람이라면 월급부터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 회사의 사장에게 필요가 되리라 하는 것입니다. 알고 보면 사장하나 기쁘게 못하는 것도 은사입니다. 선한 목자형 성도는 교회에서 내가 목사에게 필요가 되어야지 합니다.


  선한목자는 힘이 없는 연약한 양에게 더 많은 애정을 주는 목자입니다.

3절에 선한목자는 각각 자기양의 이름을 부른다 했습니다. 목자가 양을 대할 때 양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한 마리라도 소홀히 여긴다면 참 목자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 마리 한 마리에 관심을 두는 선한 목자 예수님은 99마리 양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에 더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선한목자형 지도자는 하나를 소중하게 압니다. 작은 것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작은 시간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연약하고 소외당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둡니다. 선한목자이신 주님은 하나하나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나를 잊으셨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지하에서 식사하면서 한 성도님이 말하시길 교회가 더 부흥되면 목사님 보기가 힘이 드니 목사님 앞에서 식사하자 합니다. 염려마십시오. 목사는 혹 그러하여도 주님은 한명 한명에게 관심을 두고 계십니다. 그리고 내가 너를 안다 내가 너의 필요가 되어 주겠다 합니다. 우리교회 성도들이 선한 목자의 마음을 갖는다면 한사람 한사람을 소중하며 여겨야 합니다. 주님은 99마리를 잊은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한 마리에 마음을 둡니다. 자식을 둔 부모가 생일을 맞이했는데 하나가 연락도 없이 못 왔습니다. 자식들은 우리끼리 즐기자합니다. 그러나 부모의 마음은 참석을 못한 연약한 자식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유명한 양과 목자의 그림을 보면 선한목자는 양무리와 함께 갑니다. 그런데 유독 주님의 품에 안긴 어린양이 있습니다. 이것은 특별히 사랑하는 양을 안고 가는 것이 아니라 가장 연약한 양을 안고 가는 것입니다. 이때 어리석은 양들은 주님이 저놈만 안고 가니 쫓아내리라 합니다. 교회에서 목사도 소외당한 것 같은 사람이 늘 걸립니다. 교회에서도 함께 모여 즐겁고 좋아하는 무리보다는 늘 혼자 있는 듯 하는 사람이 마음에 걸립니다. 선한목자형 지도자는 주일 날 예배후에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나중입니다. 홀로 왔고 이름도 없고 연약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쏟게 됩니다.


  선한목자는 생명을 더 귀하게 여기고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하는 목자입니다.

선한목자되신 주님은 언제나 일보다 사람을 귀하게 아셨습니다. 주님은 더 큰 일을 하겠다고 사람을 상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을 아프게 하지 않았습니다. 일을 다 잘하기 위해 제자들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선택을 소중하게 아셨습니다. 선한목자이신 주님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제자들을 이동한 것이 아닙니다. 선한목자이신 주님은 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해 누군가를 이겨먹고 죽이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기다려주고 키우고 살리고 주님은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들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사회정의를 위해 돌을 들 때 저를 귀하게 여겼습니다. 주님은 사마리아여인을 귀하게 여기고 만나 주셨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주님은 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해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주님자신이 죽으셨습니다. 교회나 가정에서 선한 목자형 지도자는 일보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가정에서 돈보다 아내 아이들이 소중합니다. 교회에서 더 큰 일 더 잘하기 위해 누군가를 상하게 함은 선한 목자형 지도자가 아닙니다. 목자형 지도자는 아닙니다. 큰일을 못해도 좀 천천히 해도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가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영혼을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을 보더라도 선한목자이신 예수님은 3년반동안 많은 일들을 하셨습니다. 바다를 잔잔케 하시며 죽은 자를 살리시고 그러나 냉정하게 따져보면 주님은 하신 일보다는 하시지 않은 일일 더 많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전능자였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움직일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일까요? 예수님은 목적이 있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영혼 살리는 것이었기에 만가지를 다 하실 수 있었지만 십자가를 선택하셨습니다. 주님은 영혼을 가장 소중하게 아는 선한 목자이셨습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다 떵떵 거릴만큼 부자가 되길 바랍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고급차를 타고 다닐만큼 능력이 되길 바랍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100평도 넘는 집에서 살 수 있는 능력이 있길 바랍니다. 호피무늬 코트도 입고 자가용 비행기도 갖고 전국에 별장을 갖고 살만한 능력 있는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 그러나 성도의 진정한 능력은 그런 것을 거절하는데 있습니다. 선한 목자형성도의 관심은 무엇을 누릴 것인가가 아니라 주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영에 더 많은 관심이 있습니다.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지만 영혼을 소중히 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돈보다도 영혼이 중요합니다. 교회를 세우고 교회학교 젊은이에게 투자되는 돈이 하나도 아깝지 않게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길 바랍니다.


  선한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버림’의 본을 보이십니다.

11절에서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거니와 입니다. 선한목자는 희생정신이 있습니다. 선한목자이신 주님이 먼저 희생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양들을 위해 죽을 줄 아는 것이 선한 목자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증거를 부자 되고 건강하고 출세하는 것으로 증명하려 한다면 삯군일 수 있습니다. 철저하게 자신의 이익으로 기독교를 증명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삯군에게 목적은 주님도 아니요 양도 아닙니다. 오직 자기입니다. 선한목자는 희생을 통해 죽음을 통해 증명하는 것입니다. 가끔 삯군 같은 성도들을 봅니다. 세상의 방법과 똑같습니다. 세상에서 그렇듯 무언가 휘둘려고 합니다. 자기 세력을 모아 힘자랑하려 합니다. 삯군입니다. 무엇인가 환경에 결과가 나서 내가 예수를 잘 믿는 자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오늘 믿음의 싸움을 싸우고 있음이 귀할 것입니다. 선한 목자 형 지도자는 앞서갑니다. 모범을 보입니다. 15절입니다. 죽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는 잃어버린 양을 불타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에 들지 아니할 양들 저들을 인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소중한 것만큼 우리밖에 잃어버린 영혼에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 주님의 양이 있고 교회밖에는 주님의 양이 있다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의 마음에는 나만 잘하고 나만 좋은 것이 아닙니다. 돌아와야 할 양 들이 명단을 가슴에 품고 있습니다. 낙심해 있는 양들의 명단을 가음에 품고 있습니다. 나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선한 목자는 한번도 만나지 않았지만 알지도 못하지만 저들 영혼에 대한 거룩한 부담이 있습니다. 성도님들에게 바로 이런 선한 목자가 되길 원합니다. 우리교회가 우리끼리 좋아서는 아니 됩니다. 성도가 나만 편하자 하면 안 됩니다. 무너지는 소리입니다. 선한 목자이신 주님은 여러분이 선한 목자가 되길 바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이 크게 외치셨습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양인데 주님이 우리의 문이 되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 하신 주님을 여십시오. 주님을 구하십시오. 주님을 찾으십시오. 다른 문에서 그만 서성거리십시오. 세상에 그만 속으십시오. 우리를 위해 묵숨 까지 버리신 십자가의 사랑 주님은 자신을 고백합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




한 가지 아는 것

아는 것이 힘이다!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의 주장에 의한 격언입니다.
라틴어로는 "scientia potentia est"
영어로는 "knowledge is power"라고 합니다.

모르는 것이 약이다!

영어로는 "Ignorance is bliss"

두 격언과 속담의 기준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할 때 적용되는 의미를 살펴봅시다.

예수를 아는 것이 힘이다!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은 후에 밝은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람에게 바리새인들은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묻습니다.
그 사람은 선지자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소경의 고백은 마지막이 그 분이 곧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소경은 유대교회에 출교를 당합니다.
당시 출교는 마치 문둥병자가와 같은 취급을 받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인 곳에 나갈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한 가지 아는 것은 지금 두 눈을 떠서 세상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를 모르는 것이 약이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인 입장에서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에 의해서 그리스도를 가르칩니다.
차라리 이런 지식이 없었다면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르는 것이 약이 될 것입니다.

철학자는 많지만 철인은 많지 않습니다.
희랍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철인이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소크라테스가 아는 것에 대한 분명한 고백을
모다른 것은 알 그가 그리스도가 맞는



희랍의 철인 소크라테스는 마지막 독배를 마셔야 하는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 제자들이 스승 소크라테스에게 내가 이제까지 한 말을 모두 거짓이라고 한마디만 하면 감옥에서 자유롭게 될 수 있으며 목숨을 구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한마디만 해 수십시오! 하며 간곡하게 부탁했다고 합니다.
이때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죽으러 가고
너희는 살러 간다
그러나 어느 것이 행복한 것인지
오직 하나님만이 알고 있다.

진리를 위하여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철인의 고백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두려워해야 할까요?

내가 정말 주님의 뜻대로 믿고 있는가?
내가 정말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의 고민이며 두려워 할 질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세 종류의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첫째는 종교적인 사람들 바리새인
둘째는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볼 수 없었던 소경
셋째는 예수님

예수님은 사랑과 자비의 주님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일까?
부모의 죄 때문일까?
자기의 죄 때문일까?
이렇게 논쟁할 때 예수님께서는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시려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는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은총의 한 날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십일조를 어떻게 바쳐야 하는가?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와 같은 형식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만일 우리들의 신앙이 이와 같은 형식에 얽매인 것이라면 당장 그 형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신앙은 구원에 대한 감사와 감격과 찬송만이 필요합니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인생이 다시 삶을 얻었는데 그 이상 무엇이 필요합니까?

날때부터 소경되었던 사람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오직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지금 두 눈을 뜨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디오게네스의 침"

어떤 부자가 디오게네스의 명성을 듣고서 그를 자기의 집으로 초청했습니다.
그에게 자신의 집을 자랑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과연 부자의 집은 으리으리했습니다.
정원도 온갖 기화요초로 깨끗하게 잘 손질되어 있었습니다.
집안은 각종 보석으로 사치스럽게 꾸며 졌습니다.
부자는 보란듯이 온갖 거드름을 피우면서 디오게네스를 이곳저곳으로 안내했습니다.
부자는 자기 집 자랑하는데 여념이 없어서 초대를 한 디오게네스에게는 단 1분도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별안간 디오게네스가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하더니 자기의 가래침을 "퉤!"하고 부자의 얼굴에 뱉어버렸습니다.
명성있는 철학자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부자가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겠습니까?
얼떨떨해 있는 부자에게 디오게네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말 당신의 집은 너무 깨끗하고 아름답군요.
그래서 내가 아무리 둘러보아도 내 가래침을 뱉을 만한 적당한 장소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단지 교만과 위선으로 가득찬 당신의 더러운 얼굴이 내게는 쓰레기통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내 가래침을 당신의 얼굴에 뱉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얼마나 통쾌한 말입니까?
그래서 "디오게네스의 침"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입니다.
교만과 위선, 오늘 우리가 읽은 바리새인들의 모습입니다.
정말 그 얼굴에 디오게네스의 침이라도 한 번 뱉어주고 싶은 사람들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소경된 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보시고서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너무나 놀라운 일입니다.
당연히 축하하고 감사해 주어야 될 놀라운 사건입니다.

32절 말씀에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물론 구약시대에도 많은 기적이 베풀어 졌습니다.
그러나 소경의 눈을 뜨게 했다는 예는 단 한 번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단지 그 일은 장차 오실 메시야의 표적으로 예언되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예수님에게 이루어졌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그 자리에 기쁨과 감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축하와 찬양과 영광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타난 바리새인은 전혀 엉뚱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뜨이게 한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그런 기막힌 일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안식일을 주셨습니까?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까?
요즘 말로 하면 법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까?
사람이 법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까?
사람은 쉬지 않고 일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일주일에 하루쯤은 아무 걱정하지 말고 푹 쉬도록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먹여주시고 보살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안식일에는 직장에 나가 일하지 않고 이렇게 편히 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소경은 일평생 동안 흑암의 고통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 한 맺힌 고통에서 예수님은 그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그보다 더 멋지고 훌륭한 안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 규례 속에 예수님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감히 하나님의 아들을 정죄했습니다. 죄인으로 취급해 버렸습니다. 또 거기다 나음입은 소경도 자기들의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다고 출교시켜 버렸습니다. 정말 답답하고 짜증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30절에 보면 소경이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상하다"라고 했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정말 디오게네스의 침이라도 한 번 뱉어주고 싶은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든지 바리새적인 요소가 다 있게 마련입니다. 저에게도 있습니다. 교만과 위선, 외식, 탐욕 등은 모두 바리새적인 요소입니다. 남이 잘 되면 칭찬해 주지 못하고,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도 역시 바리새적인 모습입니다. 이런 것들이 자리잡게 되면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해도 마음에 기쁨이 없습니다. 감격이 없습니다. 그저 불평하고 비판하고 정죄하기 바쁜데 무슨 마음 속에 기쁨과 감사가 생기겠습니까? 소경처럼 단순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오직 한 가지에 집중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살아있는 것, 그 한 가지만으로도 기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택함을 받았다는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쓰임을 받는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상고하면서 우리의 삶 속에 있는 바리새적인 요소를 다 떨쳐버리기 바랍니다. 그리해서 우리가 매일 매 순간 마다 뜨거운 감격 속에 살아가는 아름다운 모습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편의상 오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첫째로 바리새인의 모습을 살펴보고, 둘째로 고침받은 소경을 살펴보고, 셋째로 예수님의 은혜로우신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바리새인

당시 바리새인들은 전문적인 종교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의식을 철저하게 지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안식일에 관한 규례를 잡다하게 만들어 놓고 그것을 엄격하게 지키려고 애썼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위에서 이미 밝혔듯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안식일을 주신 목적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사람이 일만 하며 살 수는 없으니까 쉬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감사하며 즐겁게 안식일을 보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식일에 일하지 말고 쉬라고 했다고 해서 하루종일 낮잠만 잔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안식일을 지키되 이왕이면 생산적으로 지켜야 할 줄 압니다. 예컨대 책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평소에 못 읽었던 책도 읽고,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음악도 듣고,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림을 그리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인위적으로 여러 가지 잡다한 규례들을 600가지가 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예컨대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에는 불을 피워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불을 피우면 일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안식을 범하는 것이 된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되기 전에 미리 등잔불을 붙여 놓아야 합니다. 아무리 어두워도 안식일에 등잔불을 피우는 것은 일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안식을 범하는 결과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자들은 안식일에 거울도 보지 못합니다. 괜히 거울을 보았다가 검은 머리카락 사이에 흰머리를 발견하면 그것을 뽑고 싶은 충동이 있습니다. 그것을 뽑았다가는 일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병든 사람이 있습니다. 병세를 호전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치료해야 합니다. 병든 사람을 낫게 하고 병세를 호전시키면 그것은 치료행위로 일하는 것이 되어서 안식을 범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에 의하면 예수님이 바로 이 규례에 어긋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왜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 인위적으로 잡다한 규례들을 만들어 놓았겠습니까? 그 배후에는 교만과 위선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나는 안다. 너희들이 지키지 못하는 것을 나는 지킨다. 나는 이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지킨다. 나는 거룩하다. 깨끗하다. 흠이 없다."
그러니 얼마나 도도합니까? 교만함이 그 배후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들은 남들이 그것을 지키지 못할 때 마구잡이로 무시하고 정죄했습니다.
"그것이 무슨 사람이야? 개, 돼지보다도 못한 짐승이지."
그러니 또한 얼마나 위선적인 모습입니까? 그들은 마구잡이로 남을 비평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는데 바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 마음에 무슨 평강이 있고 기쁨이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 우리의 삶 속에서 이런 바리새적인 요소가 사라져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복잡하면 신앙은 오히려 무기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해도 뜨겁지 않습니다. 찬송을 불러도 감격이 없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감동이 없습니다. 얼굴에 기쁨이 없습니다. 불평과 원망과 짜증과 남을 비방하고 중상하는 모습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르다와 마리아를 한 번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르다는 마음이 분주했습니다. 마음에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평온한 가운데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에게는 감격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베다니 마리아가 나중에는 예수님을 위해서 자신의 소중한 옥합을 아낌없이 깨뜨렸습니다.
우리에게는 활짝 열린 마음, 예수님의 마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전통, 관습이라는 굴레에 우리 자신을 얽어매고 다른 사람들까지 얽어매려고 하는 바리새적인 모습이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의 기쁨과 구속의 은총을 노래하면서 신앙 생활의 감격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신앙 생활이 술과 담배를 하지 못하게 하는 금연 학교처럼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것도 안된다! 저것도 안된다! 이것도 하지 말아라! 저것도 하지 말아라!"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신앙 생활에는 아무런 기쁨이 없을 것입니다.

미국에서 발간되는 신앙 잡지 가운데 풀핕(Pulpit)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 스피노스 조디아티 목사님이 자신의 목회 체험을 토대로 해서 "살아있는 교회와 죽은 교회"에 대해서 적어 놓았습니다. 제가 잠시 소개해 드립니다.

살아있는 교회와 죽은 교회

스피노스 조디아티

살아있는 교회는 항상 변화한다.
죽어가는 교회는 늘 똑같다.

살아있는 교회는 아이들의 소리로 늘 시끄럽다.
죽어가는 교회는 죽은 듯이 조용하다.

살아있는 교회는 예산을 초과해서 쓴다.
죽어가는 교회는 은행에 잔고가 많다.

살아있는 교회는 새 얼굴, 이름을 알기 어려워 애를 먹는다.
죽어가는 교회는 해를 거듭해도 그 얼굴이 그 얼굴이다.

살아있는 교회는 선교사업이 활발하다.
죽어가는 교회는 교회 안에서만 움직인다.

살아있는 교회는 주는 자로 가득 차 있다.
죽어가는 교회는 티내는 자로 가득 차 있다.

살아있는 교회는 배우고 봉사하기에 바쁘다.
죽어가는 교회는 움직이려고 들지 않는다.

우리 속에 있는 모든 바리새적인 요소들을 떨쳐버리고, 남들이 좋은 일을 당할 때 같이 기뻐하고 축하해 줄 수 있는 감격이 우리 속에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고침 받은 소경

여러분, 바리새인과 소경의 차이점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은 복잡했습니다. 이것저것 많이 알았습니다.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되고 무엇을 지키는데 열심은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 속에는 기쁨과 감격이 없습니다. 반면 소경은 단순했습니다. 어린 아이와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와 같은 심정에 천국의 기쁨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단순해야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트집잡기 위해 나음 받은 소경을 앞에 두고 신문합니다.
"예수는 안식일을 범했다. 그러므로 그는 죄인이다. 그에 대해서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소경이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오늘 본문 2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소경의 신앙은 한 가지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내가 다른 것은 다 몰라도 한 가지 아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내가 소경이었다가 지금 보는 것이다.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나는 이 한 가지만큼은 분명하게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가 있다."
그의 신앙은 단순하고 깨끗했습니다. 그러니 그의 마음 속에는 기쁨이 있고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젊은 부부가 산부인과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희 부부가 결혼한지 1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아기가 없습니다. 어떻게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의사는 그 말을 듣고서 부인을 자세히 진단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딱 잘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기는 기대하지도 마십시오! 아기는커녕 부인은 두 달을 살기가 어렵겠습니다."
그들은 너무도 놀랐습니다. 아기를 원해서 병원에 찾아갔다가 사형선고를 받은 것입니다. 그 부인은 공포심에 떨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두 달 동안 거의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부인의 몸은 비쩍비쩍 마르기 시작했습니다. 두 달이 지났습니다. 그런데도 부인은 죽지 않고 살아있었습니다. 그래서 부부가 다시금 예전의 산부인과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선생님, 도대체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제 부인이 두 달을 넘기기가 어렵다고 했는데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그랬더니 의사 선생님이 껄껄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는 것입니다.
"그럴 테지요. 이제 곧 부인은 아기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부인이 아기를 못 가지는 것은 부인의 몸이 너무 비대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살을 빼야지 아기를 가질 수 있을 텐데 그러려면 어쩔 수 없이 충격요법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일부러 엄포를 놓은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비만한 사람은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생명을 죽이는 일만 하게 됩니다. 교만의 살을 빼버려야 됩니다. 위선의 살을 빼버려야 됩니다. 탐욕의 살도 빼버려야 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단순해야 합니다. 소경의 신앙은 오직 한 가지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셨다. 예수님은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눈을 뜨게 해 주셨다."
소경은 이것 한 가지만 알았습니다. 그러니 그의 마음 속에는 감격이 있었습니다. 소경에게는 그러한 감격이 있었기에 출교 당하는 고통도 인내하면서 참아낼 수가 있었습니다. 스데반에게도 그 감격이 있었기 때문에,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얼굴이 환하게 빛났습니다. 다윗에게도 감격이 있었기에, 그는 법궤 앞에서 덩실덩실 춤을 출 수 있었습니다. 베다니 마리아에게도 감격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예수님을 위해서 자신의 소중한 옥합을 아낌없이 깨뜨렸습니다. 삭개오에게도 감격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기의 재산을 팔아서 아낌없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습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십시다. 소경의 소박한 신앙이 우리의 신앙이 되어서 매 순간 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면서 큰 감격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예수님

예수님의 사랑은 주권적입니다. 예수님은 소경을 주권적으로 사랑해 주셨습니다. 소경이 자기의 눈을 뜨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부탁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먼저 소경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발적으로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소경을 주권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나중에 소경이 출교를 당했습니다. 그 당시 출교는 대단히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누군가 출교를 당했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돌로 그를 때려 죽여도 살인죄에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그러했습니다. 그가 출교를 당해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래도 그것이 살인죄에 해당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만큼 출교는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소경의 부모가 출교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들 앞에서 겁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증거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때에 소경이 출교를 당했습니다. 그러니 그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너무나 외로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를 찾아와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뒤에 있는 3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예수님이 일부러 찾아와 주셔서 소경을 만나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필요한 때에 필요한 장소에서 필요한 모양으로 찾아와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주권적인 사랑입니다.
유럽에 있는 오스트리아에는 하나의 유명한 다리가 있습니다. 그 다리가 유명한 이유는 그곳에 각기 다른 모습을 하신 예수님의 동상이 열 두 개가 서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에게 적합한 예수님의 동상을 보고,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면서 은혜를 받는다고 합니다. 예컨대 농부들은 씨뿌리는 농부의 모습을 한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은혜를 받습니다. 어부들은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아래서 은혜를 받습니다. 목동들은 선한 목자의 상을 하신 예수님의 동상 밑에서 은혜를 받습니다. 또 병든 사람들이나 의사 또는 간호사는 병든 자를 치유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은혜를 받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간에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가 되십니다. "너희는 나의 친구라!" 예수님은 말씀해 주셨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예수님은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필요한 때에 필요한 장소에서 필요한 방법과 필요한 모양으로 우리를 찾아와 주십니다. 우리의 외로움을 달래 주십니다. 우리의 도움이 되시고 힘이 되시고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진리 가운데 인도해 주시고, 빛 가운데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이 소경을 도우셔서 점차 진리의 빛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소경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메시야로 고백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신앙은 점차적으로 발전되어 나갔습니다.

1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처음 소경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단순히 훌륭한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1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에 소경 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한 대."
소경은 예수님을 선지자로 고백했습니다.

3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자라고 고백했습니다. 그의 신앙이 많이 발전했습니다.

이제 그가 출교를 당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찾아오셨습니다.

35절에 "네가 인자를 믿느냐"라고 물으시면서 그를 유도해 나가십니다.
38절에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고 소경은 자기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순간 그는 예수님에게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말하자면 소경은 육신적으로 유대교에서 출교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를 도우셔서 영적으로는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 소경이 눈을 뜨지 못했다면 그는 일평생 사람들의 동정을 받으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그가 눈을 뜨게 되니까, 그는 시비에 휩쓸려 버렸습니다. 비난받았습니다. 핍박을 받았습니다. 나중에는 출교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내버려 두지 아니하셨습니다. 필요한 때에 그를 찾아와 주셨습니다. 위로해 주셨습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일편단심 민들레, 일편단심 예수님
여러분, 일편단심 민들레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우리나라 토종 민들레는 강인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나 가는 사람들의 발길에 짓밟혀서 만신창이가 되어도 기어이 잎과 꽃대를 다시 내밀고 꽃을 피우며 씨를 날려 보내는 꽃이 바로 우리나라 토종 민들레랍니다. 그런데 왜 민들레에게 일편단심이란 별명이 붙었냐하면, 토종민들레 아가씨는 서양민들레의 꽃가루 총각이 찾아와 애걸해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오직 토종민들레 신랑이 날아오기를 일편단심으로 기다리다 토종민들레의 꽃가루 총각이 날아오면 받아들이고 끝내 오지 않으면 급기야는 처녀임신을 해버리고 만답니다. 발아가 되지 않는 무정란과 같은 씨를 퍼뜨려 순수하게 동족을 보존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일편단심 민들레처럼,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만 증거하고, 예수님만 굳게 믿는 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소경 거지입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일편단심 예수님”을 외치는 소경 거지의 믿음을 만나보시고, 여러분도 “내가 아는 한가지, 일편단심 예수님”을 외칠 수 있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소경된 거지를 보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자기 죄 때문입니까?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환경을 탓하며 일말의 동정심을 보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직 낮이니 우리가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자고 초청해 주셨습니다. 또 하나님의 일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심을 통해 ‘믿음만 있으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이란 것도 가르쳐주셨습니다. 또한 소경 거지는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하여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되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정말 당신이 그 소경 거지요?
그런데 눈을 뜬 소경 거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습니다. 그를 알아보고 그가 눈을 떴다는 사실에 놀란 사람들과 그럴 리가 없다며 극구 그가 아니라고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소경 거지가 눈을 떴다는 사실은 정말 축하해줄 일입니다. 이제까지의 동정의 감정을 버리며 축하하고 함께 기뻐할 일입니다. 그러나 슬픔을 나누는 것보다 기쁨을 나누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이 인간의 죄인된 본성입니다. 기쁘고 놀라운 일을 보며 잔치를 벌여도 시원치 않을 판에 뻔히 아는 사람을 놓고 ‘누구냐?’며 모른 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 본성의 시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저렇게 잘 되어야 할 사람이 바로 나인데’ 하는 데서 출발하는 ‘시기심’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동정을 베푸는 것은 쉽지만 진정으로 함께 기뻐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형제가 잘되면 박수를 쳐주고 더 잘되도록 격려해주고 기도해주는 사람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진실한 사랑과 진실한 축하와 진실한 격려와 진실한 위로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사건을 보는 눈이 달라질 때, 진심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축하해주며 함께 기뻐하고 더 놀라운 일을 위해 전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 영암교회가 함께 박수치며 전진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내가 바로 그 소경 거지요!
이렇게 사람들이 ‘소경 거지’가 ‘눈을 떴다 안떴다, 그다 아니다’ 할 때 그는 오히려 담대하게 자신에 대해 말합니다. ‘내가 바로 그 소경 거지였다. 그러나 이제는 보게 되었다. 나의 눈을 뜨게 해준 사람은 바로 예수이다. 그가 내 눈에 진흙을 이겨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했고, 그가 시킨 그대로 했더니 내가 보게 되었다.’(9-11) 참으로 놀랍습니다. 소경 거지가 하는 한마디 한마디를 보십시오. 모두다 진실입니다. 한마디 한마디에 진실이 배어 있다. ‘내가 그이다’는 사실과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진실을 그대로 드러내며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소경 거지의 증거를 듣고 오히려 사람들은 그를 바리새인들에게로 데리고 갔습니다. 왜냐하면 이 소경 거지가 눈을 뜬 날이 바로 안식일이었고, 그의 눈을 뜨게 한 방법이 안식일 법에 위배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소경이 눈을 떴다면 참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아버지께로부터 온 자를 믿음으로 영접하며, 자기들의 영의 눈도 떠지게 해주시기를 간구해야 할텐데... 시기심에 눈이 멀어 놀라운 하나님의 일을 전혀 보지도 못하고 영광도 돌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다양한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교회 안에, 성도 안에 다양한 일을 행하십니다. 그 일을 볼 수 있는 눈이 뜨이는 것이 커다란 영적 축복입니다. 지금 우리 영암교회에 영적인 일들이, 하나님의 복음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져가고 있는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일을 믿음 안에서 바로 해석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에 동참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깨어있어야 합니다. 세상 일에 눈이 멀어서도 안되고, 잠에 취해 있어서도 안되고, 깨어서 주님을 기대하며, 말씀으로 이 시대를 분별할 때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 목자를 통해 문자적 율법만을 주입받고 사람들 정죄하는 훈련만 받은 무리들은 참빛이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이렇게 소경 거지를 정죄하기 위해 거짓 심판자에게 끌고 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쟁론
16절. “바리새인 중에 혹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 하며 혹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런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피차 쟁론이 되었더니” 소경 거지의 증거를 들은 바리새인들 사이에 쟁론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로서 온 분인가 아닌가에 대한 쟁론이었다. 한쪽은 ‘안식일 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쪽은 ‘그가 만약 죄인이라면 어떻게 이런 표적을 행할 수 있느냐’며 의아해 합니다. ‘안식일 법이냐 표적이냐’ 이렇게 바리새인들은 티격태격하다가 소경 거지에게 다시 묻습니다.  17절에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그런데 헛갈리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한 소경 거지의 대답이 일품입니다. 문제의 핵심을 바로 찔러 버립니다. 뭐라고 대답합니까? ‘그는 선지자이니이다’ 당당하게 내가 만난 주님, 내가 믿는 주님을 ‘선지자이니이다. 하나님의 사람입니다!’하고 분명하게 고백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주의와 권위주의로 ‘있는 사실’조차도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지만, 소경 거지는 그 있는 사실을 통해 ‘그분이 누구인가’에 대한 믿음을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오히려 바리새인들이 소경이라는 것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면 이쯤에서 자기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예수님이 선지자이시고, 하나님이 보내신 분인 것을 인정해야 할 텐데, 그들은 전혀 반성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가 소경이었던 사실 마저 부인하며 그 부모를 호출하여 심문합니다. ‘그가 정말 소경이었냐?’ 얼마나 바보같은 질문입니까! 자기들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서 하는 말이 그가 정말 소경이었냐는 것입니다. 오히려 바리새인들에게 당신들이 소경 아니냐고 말해주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부모의 대답을 보십시오. 20-21절. “그 부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부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 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무슨 태도입니까? ‘오리발’을 쑥 내미는 것입니다. ‘내 자식은 맞는데 우린 모르겠다!’ 그의 부모는 진실을 진실되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어떻게 보는지, 누가 그 눈을 뜨게 했는지는 모르쇠로 딱 잡아뗍니다. 오히려 ‘그가 장성했으니 그에게 물어보라’고 합니다. 여러분, 그 부모들이 정말 몰랐을까? 설령 부모가 그 현장에 없었다 할지라도 아들이 부모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았을까요? 부모라면 아들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이들은 지금 모른다고 딱 잡아떼고 있습니다.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현실적으로 손해보고 싶지 않아서였습니다. 22절.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 부모들은 이미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들 때문에 출교당할 일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출교란 율법을 범한 자에게 가해지는 최고의 형벌이었습니다. 출교당한 자는 동족과의 접촉마저 금지되었기에 유대 사회에서 영구히 매장됩니다. 그러니 소경 거지를 둔 것도 억울한 데, 이제까지도 그놈 때문에 많은 고통을 당했는데, 이제 그가 보게 되어 근심 걱정 면하나 싶었는데, 이제는 그놈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릴 위기에 놓였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순간 얼마나 자식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을까요? ‘이 놈이 끝까지 애비 속을 썩이는구나...’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분명히 불신앙의 결과입니다. 아들의 말을 듣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았다면, 예수님이 참빛이신 것을 알았다면, 믿음으로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그 빛을 쫓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 믿음을 저버렸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 속에서,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 앞에서, 과연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려하지 않고 환경 탓만 하고 있는 제자들인지, 율법으로 눈이 멀어 이 사람 저 사람 정죄하는 바리새인인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지만 현실적으로 손해보고 싶지 않아서 대충 오리발 내밀며 믿음을 저버리는 부모와 같은지, 아니면 당당하게 진리를 붙들고 믿음을 고백하는 소경 거지인지! 이렇게 말씀은 여러 사람들의 여러 모습을 극명하게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저 사람은 죄인이다!
이렇게 소경 거지의 부모가 두려움에 믿음을 저버리며 책임을 회피하자 바리새인들은 소경 거지에게 더 힘을 주어 말합니다. 24절.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예수님을 죄인으로 정죄하며 그를 따르면 너도 죄인으로 정죄하여 출교시키겠다는 엄포를 놓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라는 권위주의와 율법이라는 칼을 들이밀며 이제 막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어린양의 마음에 의심과 불신과 두려움을 심고 있습니다. 그래서 출교가 무서워서라도 예수를 부인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 때문에 눈을 뜬 자가 예수를 부인하며 죄인이라고 정죄한다면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신나고 기고만장해 지겠습니까! ‘봐라! 기적을 체험한 자가 아니라고 하지 않느냐! 하나님이 하신 일을 저가 빼앗아 자기에게 영광을 돌리며 가로채고 있다!’ 그리고는 예수님에 대한 정죄의 칼날을 더 높이 들 심산이었습니다.
이처럼 거듭난 자에게는 빛의 역사를 삼키려는 어두움의 역사가 반드시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며 믿음의 삶을 진실되게 시작하려 하면 어두움이 가만두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 마음을 낙심하게 하고, 나는 예수를 믿으면 안된다는 거짓을 심으려고 두려움과 회의와 불신을 일으킵니다. 그러면 이럴 때, 우리가 예수님을 굳게 붙들고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려고 할 때 오는 두려움과 의심과 불신을 어떻게 몰아낼 수 있습니까?

한 가지 아는 것은
25절.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당신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왜 내가 하는 말을 믿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분명히 아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전에는 내가 소경이었는데 지금은 본다는 사실이다!” 소경 거지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 자기 속에 이루어진 능력의 역사 한 가지를 꼭 붙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내 눈을 뜨게 해 주셨다는 그 한 가지 구원의 사실을 꼭 붙들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나는 말씀도 모르고 신학교를 나온 것도 아니고 날 때부터 나는 소경이고 거지로 살았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는 것이 딱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나를 보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이런 것이 있습니까? 예수님에 대해 결코 부인할 수 없는 ‘내가 아는 한 가지’ 언제 어떤 상황에 어떤 두려움이 나를 엄습한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가 되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확신할 수 있는 한 가지! 그것이 있습니까? 오늘밤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꼭 이 한 가지를 붙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주되신다”는 것을 결코 흔들지 못하는 한 가지가 나에게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을 붙드십시오. 그것을 붙들면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신앙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저도 ‘내가 아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중학교 3학년때 목사가 되겠다고 서원했지만, 대학생이 되고 나서부터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이리 저리 도망치며, 좋은 직장에 취직하여 될 수 있으면 안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사랑하는 예수님은 1997년 나를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가 아니라 병원 침대에 누이시고, 육신의 질병을 먼저 치료해 주시고, 영혼의 질병인 불신과 회의도 말끔히 고쳐주셨습니다. 주님을 버리고 도망쳐도 포기하지 않고 찾아오시고 고쳐주시고, 목자의 길로 초청해 주신 예수님! 바로 이 사실이 내가 목자의 길을 가야하는 단 한 가지 이유입니다. 어떠한 어려움과 두려움과 불신과 회의가 든다 할지라도 이것은 절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내 신앙의 원동력은 바로 내가 아는 한 가지입니다.

결국 소경 거지는 출교를 당하고...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 한 가지 사실을 부인했습니다. 오히려 소경 거지를 욕하며 꾸짖었습니다. 28절.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그러나 소경 거지는 자기가 아는 것을 더 확실하게 고백합니다. 31절.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참으로 확실하고 분명한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경건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시는 분이시고, 창세 이후 한 번도 없었던 소경이 눈을 뜨는 기적을 베푸신 하나님께로 와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분이라는 감격스러운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 자리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자칭 율법에 정통하다는 바리새인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에 대해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소경 거지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아는 한 가지 때문입니다.

다시 찾아오신 예수님
그리고 소경 거지는 그것 때문에 쫓겨났습니다. 출교당한 것입니다. 이제 그는 또 다시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부모도 그를 버렸습니다. 눈을 뜬 기쁨은 잠시였고, 이제는 또 다시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받는 어두움에 갇혔습니다. 이제는 거지 생활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내가 아는 한 가지’를 고백한 결과 얻게 된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면 믿음을 고백하고 암담한 현실을 직면한 이 소경 거지가 얻는 것이 무엇입니까? 35절.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서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아멘. 사람들이 소경 거지를 쫓아냈다는 말을 예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찾아가 주시고 그를 만나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올바른 믿음을 심어 주십니다. 이전에 소경 거지는 예수님을 선지자로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 고백은 불완전한 고백입니다. 이제는 인자, 곧 하나님께로부터 온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소경 거지는 그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37절.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소경 거지는 실로암 못에서 눈을 씻고 육신의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영의 눈을 뜨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본 것입니다. 38절.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여러분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그러면 그의 믿음이 여기까지 자랄 수 있었던 힘은 무엇입니까? “내가 아는 한 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래서 소경 거지가 출교 당했을 때 그를 찾아가 동정하지 않으셨습니다. 현실 문제를 안타까워하며 해결해 주시려고 노력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일의 궁극적인 근원은 바로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오직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소경 거지를 찾아가셔서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분명히 말씀해 주시고, 그에게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소경 거지는 “주여 내가 믿나이다!”하고 고백했습니다. 이제는 빛을 볼 뿐만 아니라 빛을 따르는 자가 된 것입니다.

결  론
교회는 사회 봉사단체가 아닙니다. 자원봉사 기구도 아닙니다. 친목단체도 아닙니다. 교회는 믿음을 심어 생명을 거두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위해 오셨고, 바로 우리가 그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출발점은 “내가 아는 한 가지”입니다. 나의 모든 불신과 회의와 두려움을 몰아낼 “내가 아는 한 가지” 여러분은 무엇입니까? 그 “한 가지”를 붙들고, 내 신앙을 말씀에 뿌리내리기 위해 현실과 싸우며, 기도의 무릎으로 주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고, 복음을 전하여 제자삼고, 다음 세대를 세우는 일에, 일편단심 충성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생명의 부활 - 의인의 부활 - 첫째 부활
심판의 부활 - 악인의 부활 - 둘째 사망

성경에서는 죽음을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으로 구분합니다.

첫째 사망이란?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자연적인 죽음(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둘째 사망이란?
마지막 심판의 날에 부활의 몸이 심판을 받아 불 못으로 들어가는 것(요한계시록 20:14, 21:8)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둘째사망이라는 용어는 요한계시록에만 등장하는 독특한 용어다.

그 첫번째 용례는 예수께서 서머나교회의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 가운데 나온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계 2:11)"

요한계시록 2~3장에 보면, 아시아의 일곱교회를 향해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반드시 이기는 자에 대한 축복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이기는 자"란 신앙생활에서 승리하여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이기지 못하는 자는 결국 지는 자가 되는 것이며, 이런 자는 이기는 자가 받을 축복을 받을 수 없다.
그렇다면 지는 자는 어떤 결과를 얻게 되는가?
그것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결국 불못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계 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계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둘째사망"이란 한 번 죽은 사람이 이제 심판을 받고 영원히 하나님과 분리되어 불못에 들어가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이 세상에 살아있을 때에 자신의 죄를 용서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생명을 얻지 못한 자가 받게 되는 최종적인 형벌에 해당한다.

둘째사망은 언제 받는 것인가?

요한계시록 20장에 의하면, 둘째사망은 재림하시는 예수님의 백보좌심판 이후에 주어지는 형벌이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기 전에 둘째사망의 해를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둘째사망은 백보좌 심판대에서 예수님의 최종심판이 내려진 이후에 받는 형벌이기 때문이다.

둘째사망은 누가 받는가?

둘째 사망은 구원받는 성도들은 받지 않을 형벌로서,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받는 형벌이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죽은 즉시 음부(땅 속에 있는 불타는 형벌의 장소)에 들어가서 주님의 재림시까지 불가운데서 고통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곳에 들어갈 때에 사람들은 부활체를 입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곳에 들어가는 자들은 그냥 영혼의 상태로서 들어갈 뿐이다.
그러므로 음부는 불신자들의 임시감옥이자 임시형벌의 장소라고 보아야 한다.
그곳은 정식으로 재판을 받고 선고를 받기 전에 들어가는 일종의 구치소와 같이 때문이다.

언제 불신자들은 부활체를 입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이후 백보좌심판대에 설 때다(계 20:11~14).
언젠가 하나님의 때가 되면, 예수께서 공중으로 재림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마겟돈전쟁으로 악의 무리들을 처단하시고, 이미 죽어서 음부(바다포함)에 들어가는 모든 영혼을 불러내실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아마겟돈 전쟁 때에 죽었던 모든 불신자까지 다 부활체를 입게 될 것이다(조금 있다가 살펴보겠지만 이것을 "심판의 부활"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때 죽은 자들은 다 백보좌 앞으로 나아가서 자신의 행위를 따라 심판을 받아 둘째사망 곧 불못에 던져지게 되는 것이다(계20:12~14).
왜냐하면 그들이 이 땅에 살고 있을 때에 살 수 있는 방법을 붙잡지 않고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계 20:15).
그러므로 첫째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말한다(계 20:6).
이들은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부활체(생명의 부활)를 입고 곧바로 천국에 들어가 왕노릇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순교자들을 포함한 성도들인데, 이들은 결코 둘째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할 것이다(계2:11).

첫째부활과 둘째부활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

첫째부활과 둘째부활은 사실 성도들만이 받는 부활을 가리킨다. 
첫째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승천이후 성도들이 개인적으로 맞이하는 부활로서, 죽은 즉시 부활체를 입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가리킨다.

사실 예수께서 부활의 첫열매가 되시어 천국에 들어가셨다(고전 15:20).
그리고 이윽고 구약의 모든 성도들이 이때 한꺼번에 부활체를 입고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때부터 죽은 모든 성도들은 죽은 즉시 부활체를 입고 천국에 들어가고 있다.
그리고 재림 때가 되면, 이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 철장권세를 가지고 아마겟돈전쟁에 참여할 것이다(계 2:26~27, 19:14~16).

여기서 "둘째부활"이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성도들이 한꺼번에 부활하는 우주적인 부활을 가리킨다.
그때 죽은 자들과 그때까지 살아남아있는 성도들은 이 둘째부활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살전 4:16~17).
이때 성도들의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가게 되는 것을 "휴거"라고 말한다.
이들은 공중으로 마중나가서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맞이할 것이다(마 24:31).
그리고 질적으로 달라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내려와서 영원히 왕노릇하게 될 것이다.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예수께서는 사람들은 두 가지 종류의 부활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선한 일들을 행했던 자들은 생명의 부활에 참여할 것이고, 악한 일들을 행했던 자들은 심판의 부활에 참여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5:29).
그런데 예수께서 들려주신 그 말씀을 듣고 있고 또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를 믿고 있는 자는 영생을 가진다고 하셨다.
더불어 그런 자는 심판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고 하셨다(요 5:24).
그러니까 결국 예수님을  통하여 자신의 죄의 문제를 해결받고 아버지의 생명을 받은 자는 심판 없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간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께서는 "선한 일들을 행했던 자는 생명의 부활 안으로 나올 것이다"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자신의 죄문제를 해결받고 주님을 위해 살았던 자들은 생명의 부활에 참여할 것인데 이들은 결코 심판의 부활로 나아가지 않는다. 즉 성도는 죽은 즉시 부활체를 입고 생명의 부활에 참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일컬어 "첫째부활"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사도요한은 설명한다(계 20:5).
이런 자들은 곧바로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으로 들어가게 된다.
거기서 예수님의 재림때까지 왕노릇하다가 예수님의 재림시에 예수님의 뒤를 따라 이 세상으로 들어오게 된다(살전 3:13).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20장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승천이후 예수님의 재림때까지 개인적으로 부활체를 입고 천국에 들어가서 왕노릇하는 것을 "천년왕국"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계 20:4~6).

"첫째부활"이란 그리스도의 재림전까지 성도들이 죽어서 죽은 즉시 부활체를 입고 부활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들은 둘째사망의 해를 결코 받지 아니할 것
이다.
그러므로 첫째부활에 참여하는 자가 복있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일컬어 "생명의 부활"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심판의 부활"에 대해 살펴보자. 심판의 부활의 시기는 예수께서 재림하시고 아마겟돈전쟁을 치르신 후 백보좌 심판을 행할 때다(계20:11~15). 이때 음부(바다포함)가 자기 속에 있는 이미 죽은 모든 불신자의 영혼들을 내어주게 된다. 그리고 아마겟돈전쟁시에 죽은 불신자들까지 함께 심판의 부활을 입게 된다. 즉 불신자들 전체가 이 때에 부활체를 입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백보좌심판대 앞으로 나아가 심판을 받는다. 그러므로 백보좌 심판대 앞으로 나아가는 모든 불신자들은 다 심판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다. 성도들은 이미 죽은 즉시 생명의 부활을 입고 부활체로서 천국에 들어가 왕노릇하지만, 불신자들은 부활체를 입지 못한 채 영혼의 상태로 음부에 내려가 불 가운데서 고통을 받다가(임시감옥에 들어간 상태), 이제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부활체를 입고 심판을 받아 불못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못은 불신자들이 부활체를 입고 들어가는 영원한 형벌의 장소인 것이다. 이전에 불못과 비슷한 음부는 불신자들이 영혼의 상태로 들어가 형벌을 받는 장소였다. 하지만 예수께서 재림하시게 되면 질적으로 다른 세상을 만나게 될 것이다. 성도들은 질적으로 다른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왕노릇하게 되지만, 불신자들은 지금의 음부와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형벌의 장소인 불못에 들어가서 영원히 형벌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왜 불못을 질적으로 다른 형벌의 장소라고 하는가 하면, 그것은 이전까지 불신자의 영혼이 들어가서 일시적으로 형벌받던 장소로서 음부에서는 귀신들은 전혀 고통을 받지 않았지만, 질적으로 달라지는 불못에서는 귀신들도 불신자들처럼 그곳에서 고통을 받기 때문이다(계20:10).

계 20:10,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계 20:10, [직역] 그리고 그들을 [현재[ 미혹하고 있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 안으로 [단번에] 던져졌다. 그리고 그곳에 역시 짐승과 거짓선지자도 [던져졌다]. 그리고 그들은 세세토록 밤낮으로 괴로움을 받게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20:10의 말씀을 정말 놀라운 말씀이다.
천년왕국이 결코 문자적인 왕국이 아니라 상징적인 왕국이라는 것을 한 방에 알려주며, 뿐만 아니라 불못은 이전의 음부와는 질적으로 다른 세계(장소)라는 것을 한 방에 알려주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아마겟돈전쟁 때에 짐승과 거짓선지자가 붙잡아 불못에 던져지고, 이어서 지상에는 천년왕국 있으며, 천년왕국 끝에 가서 곡과 마곡의 전쟁이 있을텐데, 이때에 마귀가 불못에 던져진다고 주장하지만, 계 20:10에서는 곡과 마곡의 전쟁 후에 마귀와 짐승과 거짓선지자가 한꺼번에 불못에 던져진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겟돈전쟁과 곡과 마곡의 전쟁은 동일한 전쟁인 것이다.
그리고 천년 간격을 두고 짐승과 거짓선지자 그리고 마귀에 불못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천년왕국 후에 셋 다 한꺼번에 불못에 던져지는 것이다.
 

아담의 범죄 이후 모든 사람들은 사실 첫째사망을 다 겪고 있다(히 9:27).
"첫째사망"이란 자신의 영혼이 육체로 분리되는 것을 가리킨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 살아있을 때에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받고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말씀대로 살아간 자는 둘째사망의 해를 받지는 아니할 것이다(계 2:11).

"둘째사망"이란 재림하시어 크고 흰 보좌에 앉아계시는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 심판을 받고 불못에 던져지는 것을 가리킨다.
그렇다. 불신자들은 죽고나서 영혼의 상태로 음부에 들어가 있다고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부활하여 심판받고 불못에 들어간다. 그들이 바로 "심판의 부활"로 나오는 자들이다. 그런데 사실 둘째사망 곧 불못은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세계다. 이것은 성도들이 들어가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이 질적으로 다른 세계인 것과 같은 이치다. 우리는 어찌하든지 이 세상에 살아 있을 때에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서, 자신의 죄문제를 해결받고 성령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거듭난 성도들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그래서 죽은 즉시 생명의 부활 안으로 들어가 질적으로 새롭게 열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땅을 기업으로 받아 왕노릇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여기 심판의 부활저주의 부활 또는 정죄의 부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자도 부활하고 예수 믿지 않는 자도 부활합니다.

따라서 어떤 종류의 부활인가가 더 중요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한사람도 예외 없이 생명의 부활을 체험합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생명과 부활의 주님을 믿는 고백이 없으면 심판의 부활을 맞게 된다고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생명의 부활을 주시는 분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21절).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치료하자 안식일에 사람을 치료한다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밌게 표현하시면서 성부하나님처럼 자신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시는 분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육체적인 면만 치료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 전체를 붙잡으시고 영생을 선물로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아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24절).

‘영생을 얻었다’는 말은 현재형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말은 현재 완료형으로 
그것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사람은 그 미래가 확실하기에 한사람도 예외 없이 영생의 선물을 체험할 뿐 아니라 살아서도 주의 자녀로 살고, 죽어서도 영생의 선물을 확실하게 받는다는 것을 주님이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만이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26절). 예수님만이 생명의 근원이요 ‘살려주는 영’(Life giving spirit)이십니다(고린도전서 15:45). 요새는 종교다원주의(宗敎多元主義)가 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아무리 드세게 나와도 비진리가 진리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의 구세주이시고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신 분이시며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시는 부활의 첫 열매이십니다(고린도전서 15:20).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런 정보를 가진 자들은 정보를 가지지 못한 자처럼 살면 안 됩니다. 생명의 부활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은 자신의 믿음을 삶으로 실천해야 합니다(信行一致). 세 가지 실천 사항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더욱 잘 믿어야 됩니다(29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 나오리라”(29절). 여기 선한 일은 하나님의 관점에서의 선한 일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선한 일 곧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요한복음 6:28-29).
우리교회, 나아가서 우리한국교회의 건강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교회내의 중년남성 교우들의 영적무장이 절실합니다. 영적무장의 핵심은 우리주님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정리되고 분명한 선언적 고백위에 교회생활은 생기를 가집니다.

예수님은 나를 절망 속에서 구원해 주신 분입니다. 내게 죄를 깨닫게 해 주셨고 나의 인생이 무의하게 주어진 것이 아님을 알게 하셨으며 나의 중심에서 내가 느끼든지 못 느끼든지 간에 늘 함께 계시고 나를 주관해 주셨습니다.」모든 교우들의 신앙고백이 분명하고, 뜨거워야합니다. 중년의 남자 성도들이 예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 새출발하면 그가 속한 가정과 직장생활의 변화는 눈부시게 다를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교회의 건강은 물론 직장의 건강성을 회복하는 주역으로 쓰임받을 것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25절). ‘바로 지금’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말씀을 따라 결단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약속으로 보장해주십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詳考)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한복음 5:39). 성경의 중심 주제는 생명 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체 주제를 압축하면 예수 그리스도만 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주님의 십자가 사랑만이 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도 압축하면 예수님만 남는 복된 삶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살아야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겉모습을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바라볼 때 존중할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심판주로 믿는 우리의 삶 가운데 주님의 향기가 나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듯하게 살아야 됩니다. 예수를 믿는 신앙인이라면 세상보다 탁월한 윤리가 있어야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십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가운데 신앙적인 역사관과 신앙의 영향력을 가지고 새롭게 나라와 교회를 세워 나가야 합니다.

셋째, 우리는 도전하면서 담대하게 살아야 됩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요한복음 5:17). 일한다는 것은 주저앉아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식일에 일을 행하심에 대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음해하고 핍박했습니다(16절). 그러나 우리 주님은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담대히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담대하고도 용기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신앙의 야성(野性)을 회복해야 합니다.
주를 위해 봉사하다가 조금만 어려우면 그냥 포기해 버립니다.

골프계의 살아있는 전설 잭 니콜라우스(Jack Nicklaus)는 “인생에게 우리가 저지르는 최악의 일은 포기하는 것이다. 인생에 포기하면 진짜 늙기 시작한다.”고 말했습니다. 스포츠맨들에게 요구되는 도전정신이 있다면, 진실로 그리스도인들이 희미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린도전서 15:58). 경제 문제 자녀문제 혹은 남모르는 인생문제로 포기하고자 하는 맘이 드는 자는 주님을 바라볼 때 주님으로부터 능력과 용기를 얻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일하시니 우리도 충분히 일할 수 있고 마땅히 일해야 합니다. 어려움은 우리의 영적인 근육을 단련시킬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되기에 우리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가슴에 안고 애통하는 자는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주님의 능력주심과 사랑하심을 온몸을 던져 신뢰하는 주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교회와 나라의 미래를 맡겨주십니다.

넷째,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파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8:19-20).

주님의 뜻을 좇아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주님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into the world) 보내었고”(요한복음 17:18).
기독교 역사 2천년은 복음전파의 역사로 점철되어 왔습니다.
지금은 바로 영적으로 추수할 때가 되었기에 더더욱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요한복음 4:35).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자녀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힘으론 달려나올 수 없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붙들어 주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는 귀한 사역을 우리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생명의 전달자로 우리 모두를 불러주셨습니다.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이 있음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생명의 부활을 주시는 분이심을 확신하는 우리는 삶으로 믿음을 실천해야합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만을 더욱 사랑합시다.
예수를 믿는 신앙인답게 윤리적인 탁월성과 아울러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도전하면서 담대하게 살아나갑시다.
부활의 주님만이 나와 우리 가족과 민족과 인류에게 소망이 되시기에 주님 오실 때까지 부활의 주님만을 신뢰하고 전파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됩시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神靈)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린도전서 15:42-44)




나의 양식(요한복음 4:34)

양식을 육체를 위한 양식, 정신을 위한 양식, 영을 위한 양식으로 구분합니다.
- 영, 혼, 육을 흠 없이 보존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육체를 위한 양식에 매달려 있습니다.
간혹 정신을 위한 양식에 집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의 양식에 특별한 관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예를 들면 공생애를 시작할 무렵 40일을 금식하며 기도하신 후에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그때 첫번째 시험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로 떡을 만들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사탄을 물리치셨습니다.

오늘 요한복음 4장에서는 사마리아 수가성에서  한낮에 우물가로 물을 긷기 위해 왔던 사마리아 여자와 육을 위한 물을 주제로 이야기를 하던 중 영의 물을 가르치며 이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 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깨우쳤습니다.

마을로 들어가 먹을 것을 구해 왔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먹을 것을 드리자 예수님께서는 나의 양식은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이며 그 일을 온전히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양식에 대한 이해가 우리들과 다르다는 것을 깨우치신 말씀입니다.

첫째는 영혼 구원

잃어버린 영혼을 위하여 말씀을 가르치고 바르게 세워가는 것이 예수님의 양식입니다.

둘째는 구원받은 영혼을 성장시키는 것

구원으로 일을 마친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후에는 그의 삶이 예수님을 닮아가도록 가르치고 깨우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잃어버린 영혼보다는 우리 교회로 끌어가는 것이 주된 관심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느 교회에 새로운 프로그램이 개설되면 그 프로그램에 참여시켜 자기 교인으로 세우려고 합니다.



사람이 만족을 얻는 여러가지 방식들
주님께서 먹는 것과 관련해서 하신 말씀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주님은 공생애 초기에 40일을 금식하신 후에 사단에게 시험받으실 때 떡의 문제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때 주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 생존의 또 다른 방식이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사람이 밥먹고 산다는 것은 이치이고 원리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것을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은 그것으로만은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만족을 얻는 것은 밥을 먹는 것 외에 여러 방식이 있습니다. 배부르다는 것은 만족을 표시하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그것은 가장 원초적인 방식의 만족일 것입니다. 사람의 욕구가 많습니다. 심리학자들이 여러 방식으로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설명합니다마는, 기본적으로 인간은 영적인 만족을 추구하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이 성경의 설명입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하신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떡을 먹는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금 다른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다. 우리도 세상을 살면서 부인할 수 없는 것은 떡의 문제에 너무 많은 관심을 두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님이 도전하시는 것은 “너, 떡으로만은 살 수 없다” 그러십니다. 다른게 있다고 하십니다. 그 배부름에 대해서 아느냐고 도리어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인데, 특히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그 말씀을 순종하고 살아가는 만족에 대한 문제입니다. 시편 기자는 40:8에서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을 여러분은 이해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기쁨을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32, 34)
주님이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라고 하신 말씀의 진의를 좀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A. 주님의 자기정체성: “보냄 받은 자”(34)
먼저 주님은 설명하시기를,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주목하려고 하는 것은 ‘나를 보내신 이’라는 부분입니다. 주의해서 요한복음을 읽어보면 주님은 특별히 당신 자신을 ‘보냄을 받은 분’으로 이해하고 사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표현하실 때에도 ‘나를 보내신 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셨습니다(5:23~24, 30, 37~38; 6:39, 44, 57; 7:16, 18, 28, 33; 8:16, 18, 26, 29; 9:4; 12:44~45; 49; 13:20; 14:24; 15:21; 16:5). 즉, 하나님 아버지와 당신 자신의 관계를 보내고 보냄을 받는 것으로 이해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당신 자신의 정체성을 이해하시는 방식입니다. 보냄을 받았다는 인식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닙니다. 보냄을 받았다는 것은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그 ‘할 일’을 염두에 두고 삶을 사셨습니다. 주님께서 사마리아를 지나가셔야 했던 것도 할 일을 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었습니다.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한 마디로 말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죄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다 한 몸에 받으시고 죽으시는 것이 주님을 보내신 성부 하나님의 뜻입니다. 요한복음은 모든 사건이 다 그 때를 향하여 전개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를 만나신 사건도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신 사건도 다 그 때를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은혜가 필요한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오셔서 그녀를 만나주셨고 그녀를 구원하셨으며 그녀를 통해서 수가성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그 길에 수많은 죄인들을 찾으셨고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이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주님은 삶에서 단 한 순간도 단 한 번의 사건도 당신 자신의 뜻을 주장하여 사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아무 것도 스스로 행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5:30). 성육신하신 주님의 삶을 이해하는 열쇠는 철저하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추구하고 그 뜻대로 움직이며 사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냄을 받은 자의 삶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다’라는 인식, 이것이 주님의 삶과 십자가 죽으심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바울 사도가 알았던 양식(행 20:24)
성경에서 그런 사람 한 분을 소개합니다. 그는 바울 사도입니다. 그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 그에게는 사명이 생겼습니다. 그는 주의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택하신 그릇이었습니다(행 9:15). 그는 이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수많은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는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밀레도에서 그의 사랑하는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 작별인사를 나눕니다. 그때 그가 그들에게 한 작별인사입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그의 가슴 속,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그것 뿐이었습니다. 그것을 단지 행하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미 충분히 만족할만큼 주의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언제까지 말입니까? ‘마칠 때까지’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나의 양식은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성삼위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삼상 2:35) 하나님의 말씀대로 세워진 제사장이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일을 행할 때 복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성군 다윗은 “주님의 뜻을 행하기 즐기며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그의 기도에는 자신으로 하여금 주의 뜻을 행하게 하심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내 뜻을 다 이루리라”고 언약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의 7가지 표적

 

요한복음은 “예수는 어떤 분인가?”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총 7 가지 기적들과 담화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증거의 책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구속을 말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을 나타낸다.

 

* 요한복음의 Focus - “예수는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말씀을 주시기 위하여 말씀을 기록하게 하신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 무슨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가?,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성경을 보아야 한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에서 무엇을 하셨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은 기적과 말씀(교훈) 두 가지로 나누어 기록되어있다. 

기적이라는 것은 일반적인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초자연적안 역사가능하다. 

요한복음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베푸셨던 기적들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말씀 즉, 교훈이 함께 기록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삶을 가르쳐주고 있다.

 

- 기적 : 기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 말씀, 교훈 : 하나님의 나라 백성의 삶을 나타내는 것이다.

 

  사도요한은 요한복음 본론에서 7가지의 표적과 7가지의 담화를 통하여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를 우리에게 증명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기록되어 있는 표적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그리고 그 표적은 각각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 요한복음의 7가지 표적

1.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표적 - 요한복음 2장 1절 ~ 12절

2. 왕의 신하의 아들을 살리신 표적 - 요한복음 4장 46절 ~ 54절

3.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표적 - 요한복음 5장 1절 ~ 9절

4. 5천명을 먹이시고 물 위를 걸으신 표적 - 요한복음 6장 1절 ~ 21절

5.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신 표적 - 요한복음 9장 8절 ~ 10장 42절

6.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 - 요한복음 11장 1절 ~ 57절

7. 십자가와 부활의 표적 - 요한복음 18장 1절 ~ 20장 31절

 

  이 7가지의 기적은 7개의 교훈을 담고 있는 담화와 함께 서로 대칭 병행을 이루고 있다.

 

* 7가지 기적의 병행

 

 


 

  7가지의 표적들을 요한복음의 구조 속에서 각각의 증거하고자 하는 의미를 가지고 대칭, 

                                                                                 병행되어 기록되어 있다.

 

1.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표적 vs 십자가와 부활의 표적

‣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이 두 가지 표적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기록된 표적들이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것(요 2:1-12)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표적을 행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을 스스로 증거 하신 것이다.

  또한 포도주 표적과 병행되는 표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표적(요18:1-20:31)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우리를 대속하시고 완전한 죽음에서 그 죽음을 이기셨다. 

그리고 부활하셨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우리에게 증거하고 계신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나타나는 첫 번째 기적인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표적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원형적인 표적에 대한 상징적인 표적으로 서로 대칭 병행되고 있다.

 

첫 번째 표적을 상징적인 표적으로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구조적 흐름의 관점에서 두 표적을 서로 대칭 ‧ 병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2) 요한복음 2장 4절에서의 “나의 때”는 십자가와 부활의 때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3) 포도주는 유대 공동체가 기쁠 때 마시는 것으로, 기쁨과 축복의 상징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십자가와 부활은 새로운 은혜의 시대를 보내주기 때문에 이들이 대비되고 있다.

4) 그래서 여섯 개의 돌 항아리에 담겨있는 결례용 물은 유대의 율법의 시대, 그리고 

    변화된 포도주는 구속의 새로운 은혜의 시대가 도래되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첫 번째 표적은 원형적 표적에 대한 상징적인 표적으로 이해한다.

5) 2장 11절의 제자들의 믿음은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참 하나님이심에

    초점이 있다. 그렇다면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표적은 바로 이 원형적 표적에 대한      

    첫 번째의 상징적인 표적으로 이해 할 수 있다.

6) 그러나, 십자가의 피와 포도주의 붉은 색과 그 상관성을 연결시키는 것은 지나친 해석으

    로 이해된다.

 

2. 왕의 신하의 아들을 살리신 표적 vs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왕의 신하의 아들을 살려 주셨다(요 4:46-54). 

또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요 11:1-57). 사람의 목숨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을 가능케 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시다. 

예수께서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자를 살리신 것 뿐 아니라 이미 죽은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려내셨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 표적을 통하여 주님은 우리에게 그 분이 하나님 되심을 스스로 증명하셨다.

 

3.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표적 vs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신 표적

‣ 인간의 힘으로는 고칠 수 없는 병을 고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38년 된 병자는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베데스다 못에 스스로 들어갈 수 없었다. 

베데스다 못은 일 년에 한 번 물이 동하였는데, 

그 때 제일 먼저 그 물에 들어가면 어떠한 병도 고침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38년 된 병자는 스스로 그 못에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이 되지 않았다. 

때문에 누군가의 도움을 기다렸지만 그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때 주님께서 그 38년 된 병자를 찾아가셔서 그의 병을 고쳐주셨다(요 5:1-9). 

이는 인간으로서는 고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쳐주신 것을 보여주는 표적이었다.

  또한 날 때부터 소경이 된 자를 주님은 고쳐주심으로 그의 눈을 뜰 수 있도록 해 주셨다. 

날 때부터 소경이라는 것은 고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병이었다. 

불가능했던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심(요 9:8-10:42)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증거하셨다.

  요한복음은 38년 된 병자의 병 고침과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신 표적을 병행시켜 기록함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고 있다.

 

4. 5천명을 먹이신 표적과 물 위를 걸으신 표적

‣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행하신 표적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이 두 가지 표적은 모든 표적의 중앙에 기록되어 있는 표적이다. 

이 표적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결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표적이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5개로 5천명을 먹이신 표적은 말 그대로 기적이었다. 

이 표적은 구약의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려주셨던 만나와 메추라기의 실체이다. 

때문에 이 표적은 예수께서는 본인이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먹이셨던 그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신 사건이었다.

  또한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물 위를 걸으신 사건도 말 그대로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물리학적으로 인간이 물위를 걷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물 위를 걸어 배에 있는 제자들에게 오셨다.

일반적인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었던 이 두 가지 표적(요 6:1-21)은 결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을 결정적으로 표현해준 표적이었던 것이다.

 

5. 물고기 153의 표적

 153 물고기 표적은 베드로 물고기 표적으로도 유명하다. 

이 표적은 병행되어 있는 표적과는 좀 다르게 다루어진다. 

이 표적은 1장에 대한 증거로서의 표적으로 병행되는 표적들과는 다르게 분류된다. 

그리고 요한복음의 마지막 21장에 기록되어 1장과 병행되고, 

1장을 증거하고 있는 요한복음의 마지막 표적이다.

이 표적 역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기적이다. 

이 표적의 메시지 또한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 말했던 것 같이 요한복음은 말 그대로 표적으로만 이루어져있는 책이 아니다. 

표적과 함께 주님께서 하셨던 말씀(교훈, 담화)도 함께 기록이 되어 표적과 함께 어우러져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함께 기적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표적들 사이에 언급되어 있는 주님의 교훈들은 어떤 것들이었을까?

 

* 표적과 담화의 구성


  

 

  위의 표와 같이 요한복음에는 표적과 담화가 함께 짝을 이루어 기록되어 있다. 

담화의 대표적인 의미 자체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을 담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 및 복음서 자체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위에 나타난 담화에 대한 구성과 내용은 차후에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다.

 

성경문화연구원 / 성경구조분석연구원(서영환교수)



예수님께서는 자기 육체를 성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은 성전에 대한 당시 유대인들의 잘못된 신앙을 바로 잡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성전의 내용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곳입니다.
성전의 형식 성막, 솔로몬의 성전으로 드러났습니다.

이적, 표적에 대한 바른 이해


1. 표적(Sign)이나 이적(Wonder), 또는 기적(Miracle)은 주로 같은 상황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행적을 다루는 4복음서에서 이 용어들은 거의 비슷한 용어처럼 등장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적과 기적은 비슷한 말로서 놀라운 행적을 묘사하는 용어지만 표적은 그렇지 않습니다.

2. 이적이나 기적은 놀라운 일(Wonder), 보통 인간이 할 수 없는 일, 또는 자연법칙을 넘어서는 초자연적인 일(Miracle)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10가지 재앙을 내리신 일이나, 여호수아가 전쟁 때 태양을 멈추게 한 일, 또는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하고, 빵 5덩이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을 먹이신 일과 같은 일들은 모두 "기적" 또는 "이적"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적이나 기적을 행하는적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신성, 놀라우신 위엄 등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3. 표적(Sign)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말하려는 것을 증명하는 도구입니다.
"표적"은 헬라어로 "세메이온", 영어로 "sign"이라고 하는데, 이는 "표시", 또는 "징조"로 이해할 수 있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말씀하시거나 주장하실 때에 표적을 통해서 그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증거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적이나 기사를 통해서 표적을 나타내실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막 16:16)이하에 나오는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과,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는 일, 또는 병자들에게 안수하여 치유하는 일들은 이적인 동시에 "표적"이라고 불려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성령께서 복음 전도자의 말이 진리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나타나는 표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출 4장)에도 이러한 예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이집트로 보내려고 했지만, 모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보소서! 그들이 나를 믿지도 아니하고 내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리니, 그들이 말하기를 '주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출 4:1)."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보내셨다는 증거를 요구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막대기로 뱀을 만들어 보이셨고, 모세의 손에 문둥병을 발하게 했다가 다시 치유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두 가지 이적들을 자신이 모세를 보내셨다는 "표적"으로 제시하셨습니다.

그러나 표적 중에는 이적이나 기사가 아닌 것도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안식일은 "표적"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이적"이나 "기적"에 속하지 않습니다(겔 20:20).

표적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표적은 바로 "치유"의 표적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오실 때에, 그 분이 메시야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왕의 표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오셨을 때 백성들은 어떻게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을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통해서 알 수 있었습니다.

"그때에 소경의 눈이 뜨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뚫리리라. 그때에 절름발이가 사슴처럼 뛰고,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라. 광야에는 물이 솟아 나오며 사막에는 시내가 흐르리라"(사 35:5-6).

"내가 잃어버린 자를 찾을 것이요, 쫓겨났던 자를 다시 데려오고 상한 자를 싸매 주며 병든 자를 강건케 해 주리라. 그러나 나는 살지고 강한 자를 멸할 것이며 심판으로 그들을 먹이리라"(겔 34:16).

이 모든 예언들은 메시야께서 오실 때에 일어날 일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역을 하시는 동안에 그렇게 많은 치유를 행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러한 표적을 보고서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거부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표적은 후에 사도들에게 이어졌는데, 이는 "사도들의 표적"이라고 부릅니다는(고후 12:12).
이러한 표적은 이 일을 행하는 자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성령의 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미혹(迷惑)케 하는 자

  1) 거짓 교사 (딤전 4:1-5; 벧후 2:1, 3:3,4)
  2) 거짓 그리스도 (마24:5,24;막13:6;눅21:8;고후11:4)
  3) 거짓 선지자 (마24:24;막13:22;벧후2:1;요일4:1)
  4) 당을 짓는 자 (갈5:20;유1:18,19)
  5) 성경을 가감하는 자 (계22:18,19)
  6) 이단 (갈5:19-21;딛3:10;벧후2:1)
  7) 적그리스도 (요일4:3;요이1:7;유1:4)

2. 용어의 의미

 1) 기사(奇事, wonder)
 기이한 일(출 11:10; 막 13:22; 행 2:19).
 외적으로 자연현상에 나타남을 말합니다(신 7:19; 행 7:36).
 ‘기사’라는 말은, 어떤 일에 의해 생겨난 사건을 목격한 자의 놀라움이라는 것을 포함합니다(막 2:12; 행 3:10,11).
 예수님께서 직접 행하신 ‘기사’는 폭풍 잠재우기(마 8:23-27), 오병이어(마 14:15-21), 바다 위로 걸으시기(마 14:22,23),
 물을 포도주로 만들기(요 2:1-11) 

  2) 기적(奇蹟, miracle)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놀랄만한 일. 하나님의 행위를 가리킵니다(시40:5;사20:3;살후2:9). 성경에서 기적은 기사와 표적으로 구분하여 표현하였습니다. 기사는 외적으로 자연현상에 나타남을 말하고, 표적은 내적으로 주로 사람에게 나타남을 말합니다.

 

★ 기적을 행하는 자(miracle workers)

대표적인 사람은 모세인데 그를 통하여 발생한 '표적 기사'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을 성취합니다(출애굽기). 엘리야와 엘리사의 예언자적 역할도 그들의 말에 따라 이루어진 기적을 통하여 마련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들은 하나님의 왕국의 도래를 준비하는 데 있어서의 악한 세력들의 타파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막 3:22-26; 눅 11:19,20).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의 사역을 확장하도록 위임받았다(막 3:14-15).
바울은 기적을 행하는 것을 성령님의 은사로 보고 있습니다(고전 12:9-10).

 3) 이적(異蹟, miracle, divine work)
 기적과 동의어로 초자연적인 것으로 불가사의 한 일(출 3:20,4:8; 욜 2:30; 눅 23:8; 막 13:22).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놀랄만한 일(사 20:3)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그 뜻에 맞는 일은 무슨 일이든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므로, 자연법에 제한 받는 일 없이, 그 자신의 의지를 행하시기 위해서는 새로운 법칙을 만드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적 중의 이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인데, 이것을 출애굽에 의해 예표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해, 교회를 죄와 죽으심의 영역에서 구출하셨습니다. 신약성경에는 ‘기이한 일’(powerful deeds), ‘기적’(wonders), ‘표적’(signs)으로 기록되어 예수님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의 표현을 뜻합니다.

 

★ 이적을 행하는 이유

이적이나 기적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신성, 놀라우신 위엄 등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세 가지 종류의 이적, 곧 병 고침과 귀신 축출, 그리고 '자연 이적'(nature miracles)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자연 이적’(물로 포도주 만드심, 바람과 바다를 잠잠하게 하심 등)은 오직 예수님만이 행하셨습니다.

4)표적(標的, sign)

표징. 초자연적인 능력이 외부에 드러나는 일로서 진리임이 증거 또는 묵시되는 일(출12:13;시74:9;마16:4;롬15:18).
‘이적’과 동의어로 씌어진 경우가 많은데, ‘이적’은 초자연적인 능력에 의해 생겨나는 사건을 주로 가리키고, 표적은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말하려는 것을 증명하는 도구입니다. 대개의 경우 ‘이적과 표적(기사)’이라는 표준적인 표현으로 되어 있습니다(신28:46;신4:34;렘2:20).

★ 표적을 행하는 이유

 

예수님에 접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적’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표적’을 보아 알았습니다(요2:11,3:2). 따라서 이것을 이해할 수 없는 자들과 다만 이상한 현상만을 구하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은 ‘표적’을 주시기를 거부하셨습니다(마12:33;막8:11;눅2:12;요2:18).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세상에 와서(마1:25;눅2:11-17,) 만민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가(마27:35-50;막15:24-37;눅23:33-46;요19:17-30)부활하시고(마28:1-10;막16:1-11;눅24:5,6;요20:11-18;행1:3), 승천하신 것이(막16:19,29;눅24:50-53;행1:9-11) 참된 표적이기 때문입니다.

 

3. 이적과 표적에 대한 바른 자세

하나님은 이적이나 기사를 통해서 표적을 나타내실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막 16:16)이하에 나오는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과,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는 일, 또는 병자들에게 안수하여 치유하는 일들은 ‘이적’인 동시에 ‘표적’이라고 불려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성령님께서 복음 전도자의 말이 진리라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 나타나는 표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표적 중에는 이적이나 기사가 아닌 것도 있습니다.
성경(겔 20:20)을 보면 ‘안식일’을 ‘표적’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이적이나 기적에 속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표적을 요구했을 때,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마 12:38-40; 16:1,4). 나아가 표적을 주시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막 8:11-12).

이와 같이 하신 것은 사람들이 표적을 신뢰하는 데 따르는 위험성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악의 세력도 '거짓된 표적'으로 이적을 행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4:24; 살후 2:9-10; 계 13:13-14,19:20).
진리의 기준은 이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참으로 합당한가 하는 것입니다(신 13:1-3; 마 7:21-23).
따라서 표적을 구하는 믿음은 올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입으로만 주의 이름을 부르는 믿음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믿음이 필요합니다(롬 10:13).


예배당이 성전인가?(요한복음 2:19-22)

언제부터인가 교회 내에서 예배당을 가리켜 ‘성전’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대표기도를 드릴 때에도 “우리가 주님의 성전에 모였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특히 교회당을 새로 건축할 때는 거의 대부분의 교회가 ‘성전 건축’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심지어 얼마 전부터는 대형교회들을 중심으로 ‘지성전’이라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는데, 필요에 따라 교인들을 지역별로 나누고 각각의 회중이 모이는 건물이나 장소를 그렇게 부르게 된 것입니다.

교회와 교회당(예배당)은 다릅니다.
교회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이고, 교회당은 그러한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건물이나 장소를 뜻합니다.

교회당을 성전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경향이 나타납니다.

첫째,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는 특정한 건물이나 장소와 연관된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자기들이 모이고 활동하는 건물을 신성시합니다.

예를 들어, 옛날 어른들이 많이 그러셨는데, 아이들이 교회에서 놀다가 본당에 들어와 강단 위로 올라오면 “에이 이놈들, 여기가 어디라고 올라와!” 하면서 야단을 쳤습니다.
또 드럼 같은 악기는 본당이라고 해서 쓰지도 못했습니다.
물론 그런 것이 다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단순히 신성한 예배당이라서 안 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성경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생각하는 신앙적 경향을 가리켜 ‘성전 신앙’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성전 신앙이 한국 크리스천들에게 두드러지게 된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 중 가장 큰 것은,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성전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중심이 된다는 것을 발견하고, 우리도 우리의 교회당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구약에 나타난 성전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율법을 주셨습니다(출 20-23장).
그리고 성막을 짓고 제사장 제도를 세울 것을 명하셨습니다(출 25-31장).
그런데 그렇게 성막을 짓게 하신 목적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거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내가 그들 가운데 머물 수 있도록, 그들에게 내가 머물 성소를 지으라고 하여라.” (출 25:8)

하나님께서는 그 가운데 임하겠다고 하시는 놀라운 특권을 이스라엘에게만 허락하셨습니다.
또 그러한 하나님의 임재가 이루어지는 것은 성소를 지음으로써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가운데 임재하실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과 만나고 그들에게 당신의 뜻을 말하기 위해 성소를 짓게 하셨습니다(출 25:22).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사사시대를 거쳐 왕국체제로 돌입했으며, 첫 번째 왕은 사울이고 두 번째는 다윗인데, 다윗은 성전을 짓고 싶었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고 대신 모든 재료를 다 준비해놓음으로 그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성전 역시 모세 때의 이동 성막과 같은 목적에서 세워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전을 세운 목적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시고 그들 가운데 처소를 마련하시도록 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네가 나에게 한 기도와 간구를 내가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네가 내 이름을 영원토록 기리려고 지은 이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였다. 따라서 내 눈길과 마음이 항상 이곳에 있을 것이다.”(왕상 9:3)  

이와 같이 모세 때의 이동 성막이든 솔로몬의 영구적 성전이든, 그 건립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누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성막과 성전이 완성될 때 하나님께서 구름으로 임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이 그곳에 가득한 것을 볼 때 그러한 목적이 성취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금 내용과 형식이 연결되는 것을 봅니다.
성전의 경우, 내용은 ‘하나님의 임재’이고, 형식은 ‘이동 성막’ 혹은 ‘솔로몬의 성전’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가 특정 양식의 건물을 통해서만 가능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명하신 이동 성막이나 솔로몬의 성전이 없었다면, 결코 하나님의 임재는 경험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형식도 내용 못지않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막이나 성전의 건축 구조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하나님의 생각에 의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너에게 보여 주는 모양과 똑같은 모양으로 성막과 거기에서 쓸 모든 기구를 만들어라.” (출 25:9)

물론 그렇다고 하여 성전이라는 형식 자체가 있다고 해서 성전에 오는 사람들의 바른 태도 없이 그 내용인 하나님의 임재를 저절로 보장해주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은 이미 성전을 지을 당시부터 하나님이 밝히셨습니다.  

“그러나 너와 네 자손이 나를 따르지 아니하고 등을 돌리거나, 내가 네게 일러준 내 계명과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곁길로 나아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들을 숭배하면, 나는, 내가 준 그 땅에서 이스라엘을 끊어 버릴 것이고, 내 이름을 기리도록 거룩하게 구별한 성전을 외면하겠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사이에서, 한낱 속담거리가 되고,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왕상 9:6-7) 

하지만 구약시대에는 성전의 제도와 건물 없이 하나님의 임재를 마음대로 누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벨론 포로 귀환과 더불어 유다 백성이 가장 먼저 힘쓴 일은 성전 건축이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구약의 성도들은 여호와의 성전을 그토록 사모했던 것입니다.

“주님, 나에게 단 하나의 소원이 있습니다. 나는 오직 그 하나만 구하겠습니다. 그것은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면서 주님의 자비로우신 모습을 보는 것과, 성전에서 주님과 의논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시편 27:4)

이처럼 하나님의 임재라는 내용은 성전이라는 형식을 통해서만 의미가 살아나는 것이어서,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에 대해 그토록 간절한 열망을 품은 것입니다.

새 언약 시대의 성전

성전을 통한 하나님의 임재는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큰 변화를 겪습니다.
즉 내용과 형식의 긴밀한 연관이 깨어지면서 성전은 더 이상 구약 식의 의미와 중요성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먼저,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잘못된 성전 신앙을 가지고 있다가 망했습니다.
그들은 성전이 자기들 가운데 있다는 이유로, 실제 삶에서는 온갖 죄와 비리와 부정을 다 저지르면서도, 성전이 함께 있으니까 자기들은 얼마든지 안전하다고 착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도 행하지 않고 뒤로 온갖 더러운 짓을 다 하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제사를 드리고 성전이 거기 있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하다가 망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참된 성전 신앙이 무엇인지 보여주신 것입니다.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임재 자체이시므로, 이제는 더 이상 다른 형식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요한복음 1:14)

여기서 ‘사시다’라는 동사는 ‘장막을 치다’라는 뜻으로, 주님의 성육신이 구약시대 하나님께서 성전에 임재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것과 같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영광” 역시 모세 때의 이동 성막이나 솔로몬의 성전이 완공될 때 충만했던 여호와의 영광을 연상시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이 온전히 임재하시고 그분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 알 수 있으므로,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해준 분이십니다.

“일찍이,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버지의 품속에 계신 외아들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알려주셨다.”(요한복음 1:18)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성전이라고 밝히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육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19-22절)

예수님이 성전을 3일 동안에 일으키겠다고 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이 말을 너무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오해했습니다.
사실 BC 20년에 시작된 제2차 성전 보수 공사는 46년이 지나서도(AD 26년) 끝나지 않았고, 이후로도 38년이나 더 걸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성전이 되셨으므로 이제 더 이상 형식으로서의 성전, 곧 건물로서의 성전과 이에 따른 제사 제도는 필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진 것으로도 드러났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이러한 십자가 사건 당시의 현상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서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휘장을 뚫고 우리에게 새로운 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휘장은 곧 그의 육체입니다.”(히브리서 10:19-20)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부활하시고 승천하여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받으신 성령을 그의 교회에 부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높이 올리셔서, 자기의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약속하신 성령을 받아서 우리에게 부어 주셨습니다.”(사도행전 2:33)

이것은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게 된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것으로 인해 바로 그리스도인 각 개인과 또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처소, 곧 성전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의 성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성령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모시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고린도전서 6:19)

구약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는 건물이 성전이었는데, 이제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은 우리는 늘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하시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 안에 늘 함께 하시니까, 우리가 곧 성전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놓은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며, 그리스도 예수가 그 모퉁잇돌이 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 전체가 서로 연결되어서, 주님 안에서 자라서 성전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도 함께 세워져서 하나님이 성령으로 거하실 처소가 됩니다.”(에베소서 2:20-22)

그리스도인 각자가 성전일 뿐 아니라, 우리가 함께 공동체로서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겁니다.
이렇게 신약시대에는 성전 건물이라는 형식 없이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임재라는 내용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지금 참다운 의미에서의 성전은 우리 각 그리스도인과 교회 공동체이지, 예배당 건물이 아닙니다.

예배당을 가리켜 ‘성전’이라고 부르고 교회당을 지으면서 ‘성전 건축’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성경적으로 볼 때 바른 표현은 아닙니다. 만일 ‘성전’이라는 단어를 쓰면서 단순히 ‘거룩한 건물’이라는 뜻으로 쓴다면 문제가 없지만, 옛날 예루살렘 성전을 생각하며 거기에 비교하여 쓴다면 바르지 않은 것입니다.

참된 '성전 신앙'으로 나아가는 길

잘못된 성전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은, 구약의 성전을 은근히 지금의 교회당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그릇된 성경 해석 및 적용이 그 주된 원인입니다. 물론 그 외에 다른 요인들도 있습니다.

무교적 요인(巫敎的 要因)

한국 크리스천들은 무교적 세계관과 심성이 깊이 배어 있습니다.
샤머니즘에서는 영적 실체나 현상을 어떤 특정한 물체와 연관을 짓는 특징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어떤 물건이 자기에게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굳게 믿는 것, 어떤 길로 지나가면 불길하다고 하는 것 등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목걸이도, 그것을 목에 걸고 다니면 뭔가 자기를 보호해줄 것 같은 생각으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게 부적이지 무슨 십자가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부르면서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합니다.
특정한 장소에 ‘성전’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그곳은 다른 데와는 달리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이므로 거룩하고 신성하고 구별된 곳인 것처럼 여깁니다.
물론 교회당 안에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지만 건물 자체에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이 작용한다고 믿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종교 심리적 원인(宗敎 心理的 原因)

교회당이라는 공간이 주는 종교적, 심리적 효과를 말합니다.
먼저, 예배당은 공동체 의식을 형성하는 역할을 해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배당이라는 공간을 통해 공 예배를 드리고, 그룹으로 기도회를 하며, 어른들의 성경공부와 제자양육 및 어린이와 청소년 주일학교 교육을 실시합니다.
그렇게 같은 공간에서 같이 활동을 함으로써 공동체 의식이 아주 높아집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교회당은 교인들에게 많은 영적 경험과 추억들을 생각나게 해줍니다.
인간의 영적 정서는 특정한 영적 체험을 했을 때의 장소와 분위기와 상황에 따라 크게 올라갈 수 있습니다. 
종교적, 심리적 효과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당을 중요시하고 어떤 경우에는 심지어 ‘성전’이라고까지 부르는 것입니다.

성전 신앙에 있어,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것과 무교적 요인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종교 심리적 요인의 경우는 다릅니다.
이것이 잘못 방향을 잡아서 교회에서 모여 경험하는 것들만 중요시함으로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하면 바람직하지 않지만, 참된 의미의 성전 신앙으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드는 영적 경험들은 우리에게 도움이 됩니다.

진정한 의미의 ‘성전 건축’은 건물을 지어나가는 동시에 성도 각 개인의 신앙을 강화해주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후로는 예루살렘에 세워진 건물이 성전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성전 건축은, 우리 각자가 세워지고 함께 사랑의 공동체로 세워져나가는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화평을 도모하는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을 씁시다.” (롬 14:19)

“'모든 것이 다 허용된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모든 것이 다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다 허용된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모든 것이 다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도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추구하십시오.” (고전 10:23-24)

‘덕을 세우다’라는 말은 개인의 체면이나 위신을 높여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단어가 바로 <새로운 삶> 공부에서 배우는 ‘오이코도메오(oikodomeo)’입니다. 이 단어는 원래 ‘집, 권속, 가족’을 뜻하는 ‘오이코스(oikos)’와 ‘짓는다(to build)’라는 의미의 ‘데모(demo)’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다시 말해, 집이나 어떤 영적 건물을 세운다는 것이 ‘덕을 세우다’의 원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개인을 세우는 일과 공동체의 유익을 도모하며 공동체를 세우는 일이 바로 ‘오이코도메오’(덕을 세우다)입니다.

내 마음 자세가 틀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희생이 들어간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시간을 희생하고 노력을 희생하고 개스(gas)도 써가면서 온 것입니다.
또 이곳에 나와서 기도를 하고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나 중심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 중심으로 하겠다는 선포가 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집에서도 얼마든지 기도하고 예배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 당연히 그것은 가능합니다. 그렇게 할 수만 있으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말이 자기를 속이는 함정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그 말 속에, 피곤한데 교회까지 가서 하기보다는 그냥 집에서 편하게 하겠다는 생각이 있다면, 다른 믿음의 지체들과 마음을 합해야 하는데 꼴 보기 싫은 사람이 있기 때문에 나가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면, 그것은 자기를 속이는 말이 됩니다.

교회당에 나와서 하는 만큼의 간절함이 없이 대충 하게 된다면, 다른 형제자매들과 합심해서 눈물로 드리는 기도와 예배의 간절함이 없이 집에서 한다면, 반드시 나와서 함께 기도하고 함께 예배드려야 합니다. 그것은 예배당이 성전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참된 성전인 나 자신의 신앙을 세우고 함께 지어져가는 성전인 공동체를 함께 세우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개인과 공동체의 덕을 세우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성전 신앙입니다. 이러한 신앙을 기초로 할 때, 예배당은 그 기능이 건전하고 아름답게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개인과 관련되었든 공동체와 연결되었든, 사랑과 용서와 섬김을 통해 덕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 ‘성전’이라고 불러주신 뜻을 이루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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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 험한 세상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 믿는(현재분사형) 계속진행형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 되는(부정과거형) 한번 됨으로 영원히 계속되는 것

자녀
1. 휘오스 : 양자로서 자녀가 되는 것 / 바울 서신(롬 8:15, 갈 4:5-6)

υἱός, οῦ , ὁ  5207

1. 아들, 2. 사람의 남자 자식 3.동물의 수컷 새끼


2. 테크논 : 본성적 자녀(요 9:52, 요일 3:1, 2, 5:2)

τέκνον, ου, τό 5043

1. 아이, 2. 자녀, 3.자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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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세상속으로…] 추락하는 교회 부활의 길은

코로나 팬데믹과 대선 기간을 지나는 동안 한국교회 신뢰도가 급락한 것으로 조사됐다.

국민일보와 사귐과섬김 부설 코디연구소가 여론조사기관 지앤컴리서치에 의뢰해 지난달 31일부터 지난 4일 전국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기독교에 대한 대국민 이미지 조사’ 결과 한국교회 신뢰도는 18.1%로 26일 나타났다. 2년여 전보다 13.7% 포인트 떨어졌다. 2020년 1월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 조사에서 31.8%였던 신뢰도는 지난해 1월 목회데이터연구소 조사에서 20.9%였다.

일반 국민 중 기독교(개신교)를 신뢰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18.1%였다. 기독교인 중 기독교를 신뢰한다는 비율은 63.5%였다. 2년 전 기윤실 조사보다 12.0% 포인트 낮아졌다. 비기독교인 중 기독교를 신뢰한다고 답한 비율은 8.8%였다. 응답자 특성별로 보면 19~29세에서 신뢰한다는 비율이 11.7%로 가장 낮았고 60세 이상에서 27.7%로 가장 높았다. 설문 분석 결과 정부의 코로나 방역 지침과 대선에 대한 일부 교회의 모습이 부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됐다. 기독교에 대한 호감도는 25.3%로 3대 종교 중 가장 낮았다. 천주교는 65.4%, 불교는 66.3%였다. 기독교에 대한 이미지 형성에는 주변 사람(56.3%) 언론 보도(53.6%) 자기 경험(49.8%) 등이 골고루 영향을 미쳤다.

한국교회 신뢰도 회복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는 교회 지도자들의 윤리적인 삶이 필요하다(50.2%)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언행 자제(34.0%)가 그 뒤를 이었다. 재정 투명성 제고(28.9%) 교인들의 윤리적인 삶(26.2%)에 대한 응답률은 비슷했다. 기독교에 대한 신뢰도와 호감도가 낮은 원인은 삶으로 증명되지 않는 신앙과 배타적인 이미지로 유추할 수 있다. 설문조사 대상은 지역 성별 연령 비례할당으로 추출됐고, 표본 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3.1% 포인트다.

이번 조사는 한국교회가 우리 사회에 과거보다 더 편협하고 위선적인 ‘얼굴’로 비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미지 개선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있다. 안덕원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 교수는 “교회가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은 십자가이고 은혜이며 환대(골 3:1~17)여야 한다. 삶과 죽음, 부활로 모범을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고 했다. 신국원 총신대 명예교수는 “사회 봉사를 통해 복음의 능력을 증거하는 데 힘써야 한다”고 했다.

미국 뉴욕 리디머장로교회 설립자 팀 켈러 목사는 최근 ‘갱신의 길’이란 글에서 “선지자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제단을 쌓았지만 번제물에 불을 붙인 것은 하나님”이라며 “우리는 ‘제단’을 만들면서 하나님이 부흥의 불을 댕기도록 기도해야 한다”고 했다. 국민일보는 올해 ‘한국교회, 세상 속으로’라는 슬로건으로 한국교회가 어떻게 이 땅에 바로 서서 하나님을 아름답게 전할지 모색한다.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s://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242488&code=23111113&sid1=ch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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ἐξουσία, ας, ἡ  1849

1. 선택의 자유

2. 능력

3. 행1:7

요한복음(04-28-2022) 목요일

열왕기서를 읽으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은 이 세상에 견고한 나라를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구별된 백성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문제는 메시아를 기다리면서도 메시아가 오셨을 때에는 메시아를 인정하지 않고 십자가형으로 핍박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교회는 많지만 예수의 몸된 교회를 세워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도입 이야기)

교황 이노센트 3세와 스콜라신학의 대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 1225~ 1274. 3. 7)가 교황청의 발코니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을 때
마침 유럽 각 교회로부터 도착하는 헌금주머니들을 보며 교황이 말했습니다.

"보시오, 선생.
베드로 사도께서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에 금은보화가 넘쳐나고 있질 않소!
"

이때 토마스아퀴너스는 이노센트 3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대신 교회는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 걸인을 일으켜 세우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과 권능은 잃어버렸습니다."


미국 사회를 흔드는 힘은 "뉴 에이지운동(New Age)"이라고 하겠습니다.

뉴에이지 운동은 현대과학과 자연숭배, 서양의 마술, 동양의 신비주의, 등이 합쳐진 복잡한 종교체계입니다.
특히 불교와 힌두교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데, 요가, 점성술, 명상, 심리치료, 수정구슬 점(占), 기(氣)수련, 해몽(解夢), 등의 여러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된 사상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문제점과 기독교의 가르침과는 어떤 점이 다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모든 것은 하나다(All is one)

뉴에이지의 가장 기본적인 사상은 모든 것이 하나라는 생각입니다.
모든 것은 서로 연관되어 있고, 서로 의존적이며, 서로 통한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을 일원론(Monism)이라고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신(神)이나 인간, 식물, 바위 모든 것이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경계가 없이 연속적인 실재(reality)의 한 부분들이며, 겉으로 볼 때 서로 나뉘어진 것처럼 보일 뿐, 사실은 구별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세계관은 일원론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하나님은 나눌 수 없는 한가지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물, 동물, 식물과 사람들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의 기록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고, 낮과 밤, 하늘과 땅, 바다와 육지를 나누셨습니다.
그리고 식물과 동물을 종류에 따라 창조하시고, 마침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구별되지 않는 하나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다양한 여러 가지를 창조하셨고, 그 자체가 하나로 통일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 안에서 하나가 된 것입니다. '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섰느니라'''(골 1:17).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 자신도 구별되지 않는 한 분이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 세분이 일체(Trinity)를 이루고 계십니다.

둘째, 모든 것은 신(神)이다All is god)

'''신을 포함한 모든 것이 하나다'''라는 것을 받아들이면, 그것은 곧, '''모든 것은 신이다'''라는 이야기로 발전하게 됩니다.
사과나무, 고양이, 책, 등 모든 것이 신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범신론(Pantheism)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다, 모든 것은 신이다''라고 생각하게 되면 신은 모든 것을 포함하는 한 존재(one being)이므로, 신은 인격적인(personal) 신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따라서 뉴에이지는 우주 만물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하여, 우리를 사랑하시고 다스리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버리고, 그 대신 우주의 에너지, 힘(force)을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에 놓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이 그의 피조물과는 전혀 다른 초월적인 분이심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피조물들을 창조하신 후, 무관심하신 것이 아니라 피조물과 함께 하시지만, 피조물과 혼동되지 않으며 피조물이 하나님을 포함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3에서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는'' 사람들을 책망하였습니다.

전도서 5:2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라''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처럼 여기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idolatry)라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셋째, 인간은 신이다(Humanity is god)

이것이 바로 뉴에이지가 사람들을 현혹하는 주된 이유중의 하나입니다.
우리 인간은 완전하며 사실상의 신인데, 단지 우리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신성이 발휘되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 안에 내재되어 있으면서도 잠자고 있는 신성을 깨워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피조물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무한하거나, 전지 전능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인간과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리를 노리는 자들을 계속해서 정죄하고 있습니다.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사 14:13-15)

넷째, 깨달음(Enlightenment) - 각성(覺性)

뉴에이지는 "모든 것은 하나요, 모든 것은 신(god)이다. 따라서 우리는 신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우리 자신이 신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가?
무지(無知)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얻을 수 있는 경험이 제한적이고, 무엇이 진리인가에 대해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왔기 때문에, 인간이 유한(有限)하다는 잘못된 생각에 만족하며 인간의 정체성(identity)을 망각한 채로 살아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깨달음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지각(consciousness)을 교정하는 기법을 이용하면 진정한 실재(true reality)를 볼 수 있고, 모든 것이 하나(oneness)라는 것과 영적 능력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방법으로는 운동, 과학, 미확인 비행물체(UFO), 외계인과의 접촉, 명상,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인간은 타락하여서 외부로부터 구원이 필요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과 화해할 필요가 없고 단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 자신에 지혜, 능력, 기쁨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신성을 깨달으면 영적 능력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엉뚱한 주장을 하는 뉴에이지 운동이 젊은이들을 유혹하고 널리 퍼져나가고 있으니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성경적으로 볼 때 현재 인간이 깨달아야 할 문제는, 인간의 신성이 아니라, 인간의 죄입니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배반하고 그의 법을 어겼습니다. 우리 인간 안에 해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뉴에이지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신성을 계발하는데서 해답을 찾으려고 하는 반면에, 기독교는 죄의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선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거룩하신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해서 세상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죄를 용서받고 영생을 얻게 된다고 가르치셨고 (요 3:16), 그 자신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가 누리게 될 미래를 보여주셨습니다.

다섯째, 모든 종교는 하나다(All religions are one)

뉴에이지를 가르치는 사람들은 모든 종교들은 하나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혼합주의(Syncretism)입니다. 이들은 예수님, 부처, 모하메드, 크리슈나를 동일한 하나(oneness)를 가르치는 여러 종교들의 깨달은 자들로 여깁니다. 이 종교들의 겉모습은 달라 보여도 본질은 같다는 것입니다. 진리에 이르는 길은 여러 갈래이고, 모든 차이는 피상적일 뿐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뉴에이지는 기독교의 유일성을 부인합니다. 예수님을 더 이상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主), 그리스도로 여기지 않고, 단지 여러 시대를 통해서 인간에 내재되어있는 신성이 나타난 여러 인물들 중의 하나로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상의 예수님은 여러 신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사람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유일한 하나님입니다. 그는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라고 선언하셨고, 사도 바울도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범신론적인 여러 신들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그는 모든 것 보다 높으시며 오히려 그들을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그 분이 우리 모두를 부르고 계십니다.

여섯째, 우주는 진화한다(The universe evolves)

무신론적 인본주의와 진화론의 신봉자인 줄리앙 헉슬리(Julian Huxley)는 뉴에이지 운동의 기초를 닦아놓은 인물입니다. 그는 모든 종교와 철학을 하나로 합쳐서 인간을 신격화한 인본주의를 만들고, 이것을 앞으로 나오게될 세계를 통치하는 단일 정부의 유일한 종교로 만들자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헉슬리의 이와 같은 주장이 미래에 대한 낙관적 희망을 가지고 뉴에이지 운동을 촉진시키게 된 것입니다. 우주의 역사를 진화론적 관점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인간이 중심이 되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정하자는 의도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주의 역사가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 하시는 (엡 1:11)"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움직여 가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래의 희망이 인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나, 불순종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임을 약속하셨습니다 (신명기 8, 28; 렘 18:5-10). 역사의 절정은 예수님께서 양들을 염소들로부터 영원히 갈라놓으시기 위해 재림하실 때 이루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미래가 어떤 이들에게는 상상할 수 있는 어느 것보다도 훨씬 좋겠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훨씬 나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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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부요함을 자랑하기보다는 하늘로부터 임하는 능력을 자랑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을 자랑하게 하시고
믿음의 반석 위에 세워져 변함이 없고 흔들림이 없는 교회를 자랑하게 하옵소서.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돈 재능과 권력의 힘이 대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와 영적인 일은 돈이나 권력이나 사람의 지혜나 재능으로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시골 촌구석 나사렛의 예수는 은과 금으로 일 하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돈과 권력을 축복으로 알고 돈과 세상의 권력의 유혹에 빠져, 세상의 재물로 하나님의 나라를 사려고 할 때 이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으로부터 철저히 단절되어 있는 생명 없는 종교일 뿐입니다.

* 토마스아퀴너스 / 임종의 자리에서 유언하기를
"내 벗인 죽음이여, 어서 오게나... 기다리고 있었네."

* 이노세트 3세(Innocentius PP. III, Papa Innocenzo III, 1160-1216)
제176대 교황(재위, 1198. 1. 8-1216. 7. 16)
본명 / 로타리오 데이 콘티 디 세니(Lothario dei Conti di Segni)

인노첸시오 3세는 ‘교황은 태양, 황제는 달’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교황권의 전성기를 이룩하여 중세의 교황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교황으로 손꼽힌다.
그는 유럽의 모든 군주들을 대상으로 우위를 차지하여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에 대해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는 교령들을 반포하여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를 소집해 가톨릭교회를 쇄신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 결과 서방 교회의 교회법이 크게 개선되었다.
비록 이러한 조치들이 항상 성공한 것은 아니었으나 인노첸시오 3세는 성무 금지와 견책 등을 적절히 이용하여 군주들이 자신의 뜻에 따르게 만들었다.
인노첸시오 3세는 알안달루스와 거룩한 땅의 무슬림들을 몰아내기 위한 십자군 원정과 프랑스 남부 카타리파를 진압하기 위한 알비 십자군 원정을 촉구하였다.

인노첸시오 3세가 내린 중대한 결정들 중의 하나는 제4차 십자군을 조직한 것이었다.
당초 이집트를 통해 예루살렘을 공략하려고 했던 십자군은 일련의 예기치 않은 상황으로 인해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였다(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처음에 인노첸시오 3세는 자신의 지시를 명백히 위반한 것이었기 때문에 십자군을 파문했지만, 나중에는 이를 동서 교회의 재일치를 위한 하느님의 뜻으로 보고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이 일로 인하여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 간의 적대감이 커지게 되었다.

이노센트 3세가 교황으로 재직했던 기간은 교황 체제의 가장 찬란한 역사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는 실로 막강한 권력의 중심이었고 교회는 물론 세속 정치에도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이것은 그가 재임하던 당시 제국이 분열 상태에 있었다는 이유도 있으나 그보다는 이노센트가 야망과 능력을 지닌 특출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로마 귀족 집안 출신으로서 파리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볼로냐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교회법 전문가로서 삼촌이었던 교황 클레멘스 3세에 의해 30세에 추기경으로 임명되었고 37세 때인 1198년 1월 교황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처음 군중 앞에서 자신은 “하나님의 종으로 모든 사람을 위해 살겠노라”고 선언하였고, “마태복음 24장의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의 생활을 모방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후에 그는 지상에서의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그의 통치권은 세계를 포함하며, 자신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섰을 때 하나님보다는 아래지만 모든 인간보다는 높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지상의 어떤 법정에도 복종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구약의 신정 체제를 이론적 근거로 제시하면서 “교회는 태양이며 세상은 달과 같다. 제왕들은 자기 왕국만 통치하지만 베드로는 세상 전체를 다스리신다. 영적 권위는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서 주어졌지만 왕권은 인간들의 음모에 의해 주어져 있다”고 말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는 대리인을 통해서 만물을 다스리시며 하늘과 땅과 지옥의 만물들은 그리스도에게 복종해야 하므로 그 대리인에게도 복종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또 “마치 영혼이 몸보다 더 중요한 것인 만큼 신부들은 왕들보다 더 귀중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시대는 교황권이 절정에 달했던 시대였는데 그의 재임 기간 중에 세속 왕에 대항하여 절대권을 행사했던 두 가지 예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는 프랑스 왕 필립 2세가 아내와 이혼하고 불법으로 다른 여자를 취했을 때 교황은 이를 승인치 않고 본처를 받아들이도록 압력을 넣었습니다. 프랑스 왕 필립 2세가 처음에는 불복하였으나 교황으로부터 수찬정지령을 받고 결국 승복한 일이 있습니다.

또 영국의 캔터베리 대주교의 임명 문제와 관련하여 영국 왕 존 랙클랜드와 대립한 일이 있습니다. 1205년 캔터베리 대주교 허버트 월터가 서거하였을 때 베네딕트 수도사들은 수도회의 부원장을 대주교로 임명하기를 원했으나 영국의 존 왕은 놀위치의 주교 존 드 그레이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하였습니다. 이 문제로 옥신각신하자 교황은 이 모두를 무시하고 랜톤 추기경을 임명하였지만 존 왕은 불복하였습니다.

화가 난 교황은 존 왕에게 수찬정지령을 내렸고, 1209년에는 그를 파문하였습니다. 존 왕은 이에 대항하여 영국내의 교회 토지를 압류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황은 1212년 영국 왕 존의 폐위를 선언하고 그의 영토를 몰수하고 프랑스 왕 필립에게 영국을 침입하도록 종용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영국 왕 존은 교황에게 굴복하고 사죄를 간청하였습니다. 이에 교황은 1213년 복권하여 주고 영토를 되돌려 주었는데 역사가들은 ‘실지왕(失地王) 존’이라고 부릅니다.

교황과의 싸움에서 패한 그는 권위를 잃었고, 1215년 6월 19일에는 심지어 자신의 왕권을 제한하는 문서인 마그나 카르타(Magna Charta ; 大憲章)에 서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65개조로 되어 있는 이 문서는 근대 민주주의 발전에 중요한 문서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노센트 3세는 제4차 라테란 범 종교회의(1215)를 소집하였는데 이 회의에서는 로마가톨릭의 교권체제를 반대하고 싸웠거나 복음적인 활동을 했던 알비조파, 카다리파, 그리고 왈도파를 이단으로 몰아 진멸하기 위한 십자군 칙령을 발표하여 박해를 가하였습니다. 비밀 종교 재판소를 설치하고 반 로마교회적 인물을 처단하였는데, 이 재판소는 두 사람의 증인만 있어도 이단으로 정죄, 고문하는 공포의 재판소였으니 교황은 자신의 절대 권력을 통해 복음적인 신앙 집단을 탄압하고 오도된 교리를 확정했던 교황으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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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가와 도요히코

평화주의 애국자, 기독교 사회주의자, 열렬한 평화주의자

1909년, 스물 한 살의 신학생이던 가가와 도요히코는 불우한 사람들과 삶을 함께 하기 위해 그 해 성탄절 이브에 일본 고베의 신카와 빈민가로 거주지를 옮겨 신학생 목회자로서 받는 자신의 급여로 그들과 함께 먹으며 살았다.

어느 사무라이의 사생아로 태어났던 가가와는 4살에 고아가 되었다.
중학교시절에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과의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되는데 그들이 베푼 사랑과 배움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처음으로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가가와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는 러스킨과 톨스토이의 작품, 그리고 성경을 읽었다.

“나는 그리스도라는 사람이 두루 다니며 선을 행했다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저 나다니길 좋아했던 나는 그 이야기에 매우 당황했습니다.”
—가가와 도요히코

가가와는 자신이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아야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하지만 빈민가로 이사한 후에 깨달은 것은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용기를 잃고 사기가 꺾여 의지가 없는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스스로 돌볼 수 있게 도와줄 수 있을까?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의 기회를 가질 수 있게 하려면 경제는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어린이들이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랄 수 있도록 가족이 함께 모여 살 수 있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가가와는 그의 사역에 전심으로 참여하며 도왔던 시바 하루를 아내로 맞게 되었다.
1922년, 그들의 첫 아기가 태어났을 때 영아 사망률이 75%에 달했던 빈민가를 떠났다.
그러나 가가와는 지칠 줄 모르고 단체를 조직하며 글을 썼고, 영국의 길드 사회주의에서 영감을 받아 노동자협동조합과 노동조합 건설에 주력했다.
또한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며 국제평화운동에 적극 나서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가가와는 자신을 애국자라고 여겼다.
일본의 진주만 폭격과 미국의 2차 세계대전 참전이 시작된 후 가가와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미국의 야만성을 규탄하였지만 일본의 만행에 대해선 언급한 적이 없었다.
그랬음에도 그는 일본이 만주를 침공한 것에 관해 중국에 공개 사죄를 하는 등 평화주의를 표방한 기록에 의해 '반전사상' 혐의를 받아 두 차례나 체포됐다.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투하하면서 전쟁은 끝났다.
1946년 2월, 가가와는 더 이상 공식적으로 신이라고 간주되지 않는 히로히토 천황의 초청으로 황궁을 방문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위대해지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예수의 말씀을 인용하여 가가와는 천황에게 조언했다.

“왕의 주권은 백성의 마음에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섬길 때에만 사람이나 국가가 신과 같이 될 수 있습니다.”

전후 국가재건을 위한 고문이 된 가가와는 노동 조합의 합법화, 토지 재분배, 노동자 협동 조합, 여성 참정권 등 자신이 추구했던 많은 개혁이 실현되는 것을 보았다.
전쟁은 가가와의 사명을 위태롭게 만들었으나 패전으로 인해 그의 임무는 오히려 성취되었다.  
그는 베스트셀러 소설을 포함하여 150권 이상의 책을 저술했고, 노벨 문학상 후보로 두 번, 노벨 평화상 후보로 네 번이나 지명되었다. 평화주의 애국자이며 사회주의 기독교인, 선동적 평화주의자였던 가가와는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성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돌보시므로 우리도 서로 돌보아야 한다는 확신을 결코 잃지 않았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Thy will be done,” in its full extent, must be the guideline for the Christian life.

- 이디스 슈타인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 전체는 이 말씀만으로 안내 받아야 합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 년 내내, 생애 전체를 다스리는 규범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다른 걱정과 염려를 주님께서 맡아 주시고,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아버지의 뜻'에만 집중할 수 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우리에게 남을 것은 이것 하나뿐이라는 것을 머잖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제 막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시작한 신앙생활 초기에는 하나님의 손이 든든하게 인도해 주고 있음을 분명하게 느낍니다. 그러나 평생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누구든지 주와 함께 끝까지 가야 합니다. 언젠가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 겟세마네 골고다 언덕까지 이를 수 있도록 장성해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 신실하겠습니까? 신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의 전쟁으로 불타고 있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결정에는 생명의 대가가 따르므로 무엇을 약속할지 깊이 고려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주를 십자가에 못박기 전에, 이미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기로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당신이 십자가의 새신부가 되고 싶다면 자신의 뜻을 완전히 버리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 외에 다른 것을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구주께서는 가난을 선택하셨기에 당신 앞에서 벌거벗고 궁핍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계십니다. 주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세상의 모든 재물을 버려야 합니다. '다 버리고 수도원에 들어왔다'는 식의 단 한번의 결정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늘, 언제나 이것에 진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감사히 받아들이십시오. 그분이 어떤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더라도 기쁘게 행하십시오. 자기 몸의 사소한 필요와 성향에 신경 쓰지 말고 그것들을 책임져 주실 분께 맡기십시오. 내일이나 다음 끼니를 염려하지 마십시오.

당신 앞에 심장이 찔리신 주님이 달려 있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마음을 얻기 위해 피를 쏟았습니다. 거룩하고 순결하게 그분을 따르고 싶다면 세속적인 모든 욕망에서 마음이 자유로워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만을 생각하고 갈망하며 소망해야 합니다.
세상은 악하게 불타고 있는데 그런 악을 내어 쫓을 마음이 있습니까? 십자가를 바라 보십시오. 주님의 보혈은 당신의 열린 마음을 통해 용솟아 지옥의 불을 끕니다. 충실히 서원을 이행하여 자유로운 마음이 되면 당신 마음에 부어진 신성한 사랑의 홍수가 땅 끝까지 흘러 넘쳐 열매를 맺게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만을 갈망하고 소망하며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 이 끝에서 저 끝에 이르는 전쟁터에서 부상당해 신음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립니까? 의사도 간호사도 아닌 당신은 그들의 상처를 싸매 주러 그 자리에 갈수 없습니다. 비통하게 죽어가는 사람의 소리가 들립니까? 성직자가 되어 그들을 위로하고 싶겠지요. 과부와 고아의 탄식때문에 마음이 괴롭습니까? 자비로운 천사가 되어 그들을 돕고 싶을 겁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을 바라보십시오. 거룩한 서원을 충실히 지킴으로써 그분께 결합되어 있다면 당신의 존재는 보혈이 됩니다. 그분에게 묶여 있으면 당신은 주님처럼 온 세상에 있게 되고 성직자나 의사들처럼 그 현장에서 도울 수는 없지만, 십자가의 능력으로 슬픔이 있는 곳 최전방에 언제나 설 수 있습니다. 당신이 품고 있는 하나님의 마음에서 나온 자비로운 사랑은 우리를 어디로든 데려갑니다. 그 귀한 피는 모든 곳에 부어져 위로하고 치유하여 구원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의 눈이 당신을 내려다보며 유심히 물으십니다. 십자가에 달린 내 앞에서 너의 언약을 진정으로 새롭게 하려느냐? 어떻게 답해야 할까요?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리이까?"



요한복음 1-21장

1. 인간 사도 요한


요한이라는 이름은 '여호와의 은총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사복음서 중 요한복음은 그 철학적이고 깊이 있는 서술방식 때문에 같은 복음서이지만 공관복음서와는 다른 복음서로 구분됩니다.
요한의 부친은 세베대요, 모친은 살로메인데 살로메는 예수님의 이모가 아니었을까 짐작되고 있습니다.
( 요19:15 = 마 27:56 =막 15;40 살로메)
요한의 고향은 갈릴리 벳세다이며 형은 야고보, 직업은 어부였습니다.
처음엔 세례요한의 제자였다가(요 1:35 / 안드레와 요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붙여준 그들의 별명이 보아너게(의미 : 우레의 아들, 분노의 아들 막 3:17)인 것으로 보아 그들은 강한 성격을 가졌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 눅 9:54 사마리아 마을에 불을 지르기를 원함)
요한은 또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 것을 적발하여 금지시키고 예수님께 보고하기도 했습니다. ( 마가복음 9:38 = 눅 9:49-50)
특히 그들의 어머니 살로메는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순간 요한과 야고보를 특별 대우 해주기를 예수님께 간청하여 다른 제자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습니다. (마태 20:20-24)

그러나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을 특히 많이 받았습니다. ('그가 사랑하시는 자' 요한 13:23, 19:26, 21:7, 21:20) 그는 충성된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된 후 흩어졌지만 베드로와 함께 위협을 무릅쓰고 그가 알던 대제사장의 법정에 함께 들어가 예수님의 심문장면을 지켜보았고( 18:15) 마지막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처형당하는 순간까지 십자가 밑에 같이 있었고 예수님은 요한에게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했습니다. ( 요 19:26-27)

그때로부터 요한은 밧모섬에서 귀양을 갔다가 다시 온 후까지 그리고 에베소에서 죽을 때까지 마리아를 계속 모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예수님의 승천 후 요한은 베드로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와 함께 초대교회의 3대 지도자가 되어 오순절 성령충만을 받았으며, 베드로와 함께 앉은뱅이를 고쳤고 에베소에서 전도하다가 밧모섬에 유형되었습니다.

그는 요한복음(믿음)과 요한계시록(소망)과 요한1,2,3서(사랑)를 기록했고 주후 100년경 97세로 하나님께 돌라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생애에 있어 놀라운 변화는 그토록 급하고 질투가 많고 편협하던 그의 성품이 생애 마지막 부분에 쓴 요한일서에 이르러서는 사랑의 삶으로 바뀐 것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에베소에서 말년 설교를 할 때 오직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는 한 마디만 했다고 알려질만큼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하였습니다. 인간은 변할 수 있다는 예증을 그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베드로와 함께 어부 출신이었습니다. 흔히 베드로와 요한을 당시 유명 학문을 배우지 않은 무식한 사람들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유명한 정규교육을 따로 받지는 않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성경을 배워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특히 성령충만과 평생의 사역을 통하여 깊은 신앙의 지식을 소유하게 되었고 이 열정으로 귀한 성경을 기록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또한 요한에게는 이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뜨거운 열정으로, 에수님을 위한 열정으로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의 헌신과 충성은 오늘도 우리에게 신앙의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한 20;30-31)(21:24-25)

< 요한복음에서... 생각나누기 >


1. 로고스(logos)

요 1:1 태초에 말씀(logos)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창 1:1을 연상시키는 본 구절에서 요한은 예수님을 로고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말씀'으로 번역된 이 로고스는 철학적 용어로서 법칙, 원칙, 진리로 번역이 되는 우주와 이 세상의 불변의 법칙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이 용어를 쓸 때 그는 로고스에서 말씀으로 드러난 하나님의 원칙, 하나님의 마음을 이야기 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 하나님의 마음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나는 ... 이다(에고 에미)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은 7번에 걸쳐 "나는...이니라"(에고 ..에이미)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생명 떡 6:35 세상의 빛 8:12 양의 문 10: 7 선한 목자 10:11
부활이요 생명 11:25 길, 진리, 생명14: 6 참 포도나무 15: 5

그런데 이 말씀은 구약적 관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하나님은 과연 누구시라고 가르쳐야되느냐고 묻는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 하야 아쉐르 하야 I am that I am)이라고 말씀하시며 나는...이다라는 표현을 쓰셨습니다. (출1:14) 즉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나,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 된 나는.. 너희들에게 ... 이다라는 뜻이 담긴 말씀을 주신 것이었습니다.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3. 세족식 洗足式 (요한 13;1-14)

요한복음에는 성찬식 기사가 따로 구별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밤에 있었던 세족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마지막 밤의 성찬식 대신 세족식을 기록한 것은 섬김을 가르치신 예수님의 뜻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 13: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4. 제자들의 고민 ( 요한 2;40-42// 마태4;18-22)


5. 153마리 고기 어획의 기적 ( 21;11)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요 3: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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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5장

Lectio Divina(렉치오 디비나) 거룩한 읽기

개역개정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새번역

1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2 내게 붙어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잘라버리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손질하신다.

3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 그 말로 말미암아 이미깨끗하게 되었다.

4 내 안에 머물러 있어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 안에 머물러 있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이, 너희도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6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면, 그는 쓸모 없는 가지처럼 버림을 받아서 말라 버린다.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서 태워 버린다.

7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어서 내 제자가 되면, 이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10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12 내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이다.

15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종은 그의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운 것이다. 그것은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게 하려는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것은 이것이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포도나무에 접붙인 가지처럼
제자들이
 예수님께 머물면 말씀의 양분을 공급받아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성경 이해

하나님 나라를 포도원으로 비유하면, 성부는 농부요, 성자는 포도나무입니다(1절). 
농부는 열매를 얻기 위해 가지들을 포도나무에 접붙임니다.
존재의 변화로 이끄는 접붙임입니다. 
그리고 적당한 때에 가지치기를 합니다(2~3절).
마른 가지들은 잘라버리고, 열매 맺을 가지를 깨끗하게 합니다.
가지가 양분을 공급받아 나무의 일부가 되는 것처럼, 제자들도 예수님의 말씀에 머물러 작은 예수가 됩니다.
들포도를 맺던 가지가 이제 참포도 열매를 맺듯이, 제자들은 ‘사랑’이라는 열매를 맺습니다(12절). 
나무를 돌보는 농부의 사랑, 나무의 희생하는 사랑, 그리고 가지가 맺는 사랑의 열매가 마치 동심원 물결처럼 퍼져갑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사람을 진정한 친구로 여기겠다고 하십니다(12~15절).

 

나의 복음(로마서 1:9, 16:25)

1:9 /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16:25 /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전부터 감취었다가.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를 향해 쓴 편지를 보면 ‘나의 복음’ 이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옵니다(로마서 1:9, 16:25).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고 공개적으로 천명했고, 만약 다른 복음을 만들거나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하늘의 천사라도 저주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나의 복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까요?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이 바른 복음임을 변증하기 위해 복음의 신적 기원에 대해 강조했습니다(1:11).

1:11 /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12 /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배운 것도 아니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 받은 것이 복음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 기록된 성경에 쓰여 있는 그대로 이뤄진 것임을 선포했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3~4)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이 예언한 대로 죽으시고 성경이 예언한 대로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증거했으며, 그 십자가에 대한 믿음으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거듭나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다”(고전 1:25)는 사실을 깨달은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야말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라고 선포했던 겁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선포한 ‘나의 복음’이라는 단어는 그 어떤 다른 복음을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 자신이 삶을 통해 경험한 믿음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진솔한 신앙 고백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도 바울의 신앙 정수가 바로 ‘나의 복음’이라는 선포입니다. 다른 사람이 경험하고 고백한 복음이 아닌, 사도 바울 자신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던 복음, 예수님의 빛으로 인해 앞을 보지 못하며 감겨 있던 두 눈을 뜨거움의 눈물 자락으로 만들었던 복음, 바로 그 복음의 감동을 바울은 ‘나의 복음’이라는 단어로 표출했던 것입니다. 자신을 체포하고 고문하고 핍박했던 사람들의 입에서 고백 되었던 예수 그리스도, 그들이 죽어가면서도 끝까지 지켰던 복음, 스데반이 순교하면서 보았던 그 예수님의 영광을 사도 바울도 직접 보았음이 ‘나의 복음’이라는 고백에 담겨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목숨 바쳐 전파하는 스데반의 얼굴에서 천사의 얼굴을 보았고 그 눈부신 얼굴은 바울의 기억 속에 강한 충격으로 남았습니다. 심지어 바울의 모습마저도 바꾸어 놓았습니다. 주후 2세기경에 쓰인 ‘바울과 테크라의 행적’이라는 외경을 보면 사도 바울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대머리와 흰 다리에 눈썹은 서로 맞닿고 코는 매부리에 단신의 다부진 체구를 가진 호감에 찬 사나이, 그는 인간의 모습에 천사의 얼굴을 가진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신학적 교리에 그치지 않습니다.
날마다 체험하는 ‘나의 복음’이 돼야 합니다.

‘나의 복음’은 삶 속에서 십자가를 직접 체험하고 경험한 실제적 복음이며, 동시에 그 경험한 십자가의 능력을 땅끝까지 전파하는 선교적 복음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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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스런 일군의 이야기

런던의 켄더베리 교회 니콜라이 집사

런던의 켄더베리 교회 니콜라이 집사님은 열일곱 살에 사찰 집사님이 되어 한평생 교회 청소와 심부름을 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교회를 사랑하고 충성했는지 모릅니다.
교회 종을 얼마나 정확하게 치는지 런던 시민들이 시계를 니콜라이 집사님의 종소리에 맞추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충성하면서 기른 그의 두 아들이 다 복을 받아 유명한 교수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교수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런데 그 당시에 교수가 되었으니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 두 아들이 말했습니다. 

“아버지, 이제 일 그만 하세요.”
“아니야, 나는 끝까지 이 일을 해야 해.”
그는 76세까지 종을 치며 교회를 사랑하고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가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가족들이 그의 임종을 보려고 모였습니다.
그런데 종을 칠 시간이 되니 그가 일어나 밖으로 나가 종을 쳤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음 직전에도 종칠 시간이 되니 일어나서 종을 친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들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감동을 받고 영국 황실의 묘지를 그에게 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세상 떠난 날을 런던의 공휴일로 정하여 모든 상점의 문을 닫게 했습니다.
열일곱 살 때부터 심부름하던 사람이 하나님 앞에 충성하니 그 가족이 귀족처럼 되고 그가 죽은 날이 공휴일이 되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에 수많은 목회자들이 죽었으나 황실의 묘지에 묻히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배당 종치기를 하던 분이 얼마나 충성했는지 황실의 묘지에 묻히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그분의 충성은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하늘에서도 큰 영광으로 돌려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행한 대로 갚으시는 분입니다. 구원에 관한 문제만은 믿음만으로 결정되지만 이 땅에서의 축복과 상급은 행한 대로 받는 것입니다. 
본문은 유명한 달란트의 비유입니다. 한 주인이 타국에 가면서 세 명의 종들을 불러서 그들의 재능대로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한 사람은 금 다섯 달란트를, 또 한 사람은 금 두 달란트를, 또 한 사람은 금 한 달란트를 받았습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과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바로 가서 장사를 했습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남겼고,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두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습니다.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와서 종들과 결산을 합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자기가 받은 달란트와 남긴 달란트를 주인 앞에 내놓습니다. 주인은 그 두 사람에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칭찬하였습니다. 반면에 한 달란트 받아 묻어두었던 사람에게는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고 하시면서 책망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달란트를 빼앗아서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충성과 불충성의 결과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충성과 불충성의 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충성한 사람은 착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불충성한 사람은 악한 사람으로 분류됩니다. 주인은 받은 달란트를 가지고 장사를 해서 이익을 남겼던 충성된 종들에게 ‘착하고 충성된 종’ 이라고 불렀습니다. 반면에 받은 달란트를 묻어두었던 종에게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일반적으로 착한 사람은 성격이 순해서 다른 사람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 사람, 자기에게 좀 손해가 되어도 양보할 줄 아는 사람, 누가 무엇을 요구하면 거절할 줄 모르는 사람을 착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악한 사람은 남을 괴롭게 하거나 바르지 않은 방법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악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주님이 보시는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은 일반적인 개념과 좀 다릅니다. 본문에서는 그가 온유한지 그렇지 않은지, 남에게 양보를 잘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남의 요구를 거절 못하는지 냉정하게 거절을 잘하는지를 보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주인은 착한 종과 악한 종을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충성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달란트와 은사 그리고 맡겨진 일에 대해서 충성하는 사람이라면 주님 보시기에 착한 사람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달란트와 은사 그리고 맡겨진 일에 충성하지 못하고 있다면 주님 보시기에 악한 사람입니다.
충성한 사람은 더 받고, 충성하지 못한 사람은 있는 것도 빼앗깁니다. 주인은 불충성한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의 달란트를 빼앗아서 충성한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충성한 사람은 받아서 풍족하게 되지만 불충성한 사람은 있는 것까지 빼앗기게 됩니다. 
내게 주어진 것을 더 풍성하게 만들려면 주어진 것으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지금 가진 것에 충성하면 더 받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가진 것에 최선을 다하지 않고 되는대로 대충대충 살아가면 지금 가진 것도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충성한 사람은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되고 충성하지 못한 사람은 슬피 울게 됩니다. 충성한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맡는 것만 아니라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됩니다. 반대로 불충성한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김을 받고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됩니다. 
이번에 임직자를 피택 할 때 충성되지만 피택 되지 못한 분들이 있습니다. 교회에 온 년 수 때문에 피택 되지 못한 분들도 있고, 나이가 젊어서 제외되신 분들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충성스런 사람’입니다. 본문에 나온 달란트의 비유를 통해서 충성스런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살펴보겠습니다.  

1. 믿음직한 사람이 충성스러운 사람이다.

분문에서 사용된 ‘충성’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피스티스(pistov")’입니다. 이 단어는 ‘믿음’이라는 말과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으며 그 뜻은 ‘이랬다 저랬다 변덕을 부리지 않는 한결같음’입니다. 다른 표현을 사용하면 믿음직스럽다는 말입니다. 믿음직스러운 사람은 변덕을 부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언제나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 믿음직스러운 사람 즉 충성된 사람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사업을 하신다면 어떤 사람을 직원으로 두고 싶습니까? ‘한결 같은 사람, 믿음직한 사람’일 것입니다. 언제나 맡겨진 일에 성실하며 변함없이 충성하는 사람이 믿음직스러운 사람입니다. 
하루 이틀 부지런한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 부지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두 번 깔끔하게 하는 것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변함없이 깔끔하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한두 번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것도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변함없이 계속 예의바른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결같은 사람, 그런 사람이 믿음직한 사람입니다.

19절을 보면 주인이 오랜 후에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오랫동안 변함 없이 충성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충성하다가, 처음에는 순수한 마음을 갖고 있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변질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후에도 처음처럼 충성하는 사람이 믿음직스러운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부분에 부족한 것 같습니다. 언제나 변함없이 언제나 충성스러운 믿음직스러움이 필요합니다.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직장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처음과 끝이 같은 충성스럽고 믿음직스러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미국 서부에서는 야생마를 길들일 때 나귀와 같이 묶어 놓습니다. 나귀와 같이 밧줄로 묶어 놓으면 말이 콧방귀를 뀌며 껑충껑충 뛰어다니면서 나귀를 끌고 다닙니다. 먼 산으로 껑충껑충 뛰어다니면서 나귀를 떨쳐버리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밧줄로 묶어 놓았기 때문에 나귀가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면 나중에 말이 지치게 됩니다. 그래서 며칠 뒤에는 어떤 모습으로 오는지 아십니까? 나귀가 말을 끌고 옵니다. 말이 끌려옵니다. 백 마리를 훈련시켜도 똑같답니다. 처음에는 말이 껑충껑충 뛰어다니면서 나귀를 우습게보지만, 나중에는 말이 나귀에게 끌려오는 것입니다. 당나귀는 인내심이 있습니다. 말처럼 충성하면 안 됩니다. 한 때는 혼자 충성을 다하는 것같이 그냥 껑충껑충 뛰어다니다가 나중에는 억지로 끌려 다니지 말고, 변함없이 충성하시기를 바랍니다. 엡 6:24에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반짝 충성은 누구든지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속적인 충성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겠다고 다짐했으나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들도 봤고, 처음 헌신 그대로 변함없이 충성하는 사람들도 봤습니다. 여러분들은 변함없이 믿음직스럽게 충성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2. 청지기 정신을 가진 사람이 충성스런 사람이다.

청지기 정신은 어떤 정신입니까?
청지기 정신을 가진 사람은 모든 것이 주인의 것이라는 정신을 가진 사람입니다.
14절에 보면 주인이 종들에게 자기의 소유를 맡겼다고 했습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아주 준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타국에 다녀올 동안 맡긴 것입니다. 
인류역사상 하나님께 물질을 가장 많이 드렸던 사람이 다윗입니다. 금 5000달란트, 금 1만 다릭, 은 만 달란트, 놋 1만8000달란트, 철이 10만 달란트 등 수많은 보석, 금속, 목재 등을 드렸습니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약 25조원 이상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엄청난 액수를 하나님께 드렸던 다윗이 대상 29:14에서 그 모든 것을 즐겁게 드리면서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고백하며 주님에게 기꺼이 드렸던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이 내게 하나님의 영광과 선한 일을 위하여 쓰라고 맡기신 것입니다. 이것을 확신하고 사는 것이 청지기 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청지기 정신을 가진 사람은 주인의 것이지만 내 것처럼 생각하고 일하는 사람입니다.
록펠러는 어마어마한 부자였습니다. 오늘 이 시대의 최고 부자는 ‘빌 게이츠’라고 하는데 빌 게이츠가 번 돈을 다 합쳐도 록펠러가 번 돈의 반도 안 된다고 합니다. 록펠러는 그렇게 많은 돈을 벌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록펠러가 가장 신임했던 사람 중에 하나인 아치볼드(Archibald)는 본래 Standard Oil의 말단 직원이었습니다. 그는 일에 대한 성실과 열정으로 자기가 일하는 회사를 자기 것으로 생각하며 일했습니다. 아치볼드는 출장 가서 호텔에 묵을 때면 숙박부에 자기 이름을 적고 그 옆에 ‘한 통에 4달러 스탠더드 오일’이라는 문구를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그의 동료들이 그의 이런 행동을 조롱했지만 그는 자신의 작은 이 일이 반드시 회사에 큰 도움을 주리라는 생각을 잊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캘리포니아의 작은 도시로 출장을 간 아치볼드는 밤이 늦어서야 방에 들어왔는데 숙박부에 이름만 쓰고 온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내려가 종업원에게 숙박부를 달라고 해서 ‘한 통에 4 달러 스탠더드 오일’이라고 적었습니다. 그 때 한 신사가 유심히 그의 행동을 보고는 물었습니다. “왜 그런 문구를 넣지요?”, “저희 회사를 조금이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한 달쯤 지나 아치볼드는 자신의 회사 회장에게 특별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 회장이 바로 호텔에서 만났던 록펠러였던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록펠러는 그의 열정을 칭찬하며 본사로 불러들였고, 아치볼드는 스탠더드 오일을 세계 최대의 기업으로 만드는데 크게 기여하게 되었습니다. 

기업의 사장이 회사의 중요한 일을 맡길 때 어떤 사람에게 맡기겠습니까? 회사는 어떻게 되든 자기 살길만 챙기는 사람에게 회사의 중요한 일을 맡기지 않을 것입니다. 회사를 자기 회사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에게 중요한 일을 맡길 것입니다. 목사도 교회의 일을 맡길 때 교회의 일을 자기 일처럼 생각하는 사람에게 맡깁니다. 교회의 중직자들은 반드시 그런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자기 일처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일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청지기 정신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주인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24절에 보면 한 달란트를 묻어두었던 종이 주인을 ‘굳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굳은 사람이라는 말은 ‘a hard man’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냉혹한 사람’, ‘인색한 사람’, ‘구두쇠’라는 뜻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을 ‘인색한 구두쇠’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주인이 준 것이 적어서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종은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받았는데 자신은 한 달란트를 받은 것이 못 마땅했습니다. 
주인이 각자의 재능에 맞게 구별하여 달란트를 맡겼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남들을 비교하다보니 자신의 한 달란트가 초라하고 하찮아 보였던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주인을 인색한 사람으로 보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한 달란트는 큰 돈입니다. 금 한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입니다.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 하루 품삯이니까 약 8만 원 정도 되는 돈이니, 6천 데나리온은 4억 8천만 원 종도 되는 돈입니다. 5억 원이 작은 돈입니까? 절대 작은 돈이 아닙니다. 엄청난 돈입니다. 그런데 그 돈을 받고서 주인을 구두쇠로 생각했습니다. 그가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았다면 그 돈이 큰 돈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청지기 정신을 가진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이 결코 적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자신이 가진 것을 한국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니까 적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외국을 나가보면 우리가 가진 것이 결코 적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많이 받았습니다.

3. 부지런한 사람이 충성스런 사람이다.

26절에 보면 불충성한 종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 이라고 말합니다. 충성스러운 종은 부지런합니다. 16절에 보면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달란트를 받고 바로 가서 장사를 합니다. 17절에 보니 두 달란트 받은 종도 그 같이 했다고 말합니다. 불충성한 종은 게을렀고, 충성한 종들은 부지런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께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사고를 치는 것보다는 가만히 있는 것이 돕는 사람도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종을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합니다. 

어떤 대 사업가가 자식이 없어서 양자를 맞으려고 했는데 가까운 친구가 한 청년을 소개하면서 훌륭한 양자감이라고 했습니다. 그 사업가는 우선 청년을 사원으로 채용하고 얼마 동안 관찰을 하기로 했습니다. 하루는 청년을 불러 1만 달러를 내놓으며 “이걸 자네 마음대로 쓰게”라고 했습니다. 청년은 얼떨떨했지만 마음속으로 ‘아하! 이건 나를 테스트하는 것이구나.’ 생각하며 그 돈을 받았습니다. 그 후 얼마 동안 사업가는 청년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1년쯤 지난 뒤 사업가는 불쑥 청년에게 물었습니다. “그때 자네에게 준 돈을 어떻게 썼나?” 청년은 이제야 때가 왔구나 하고 기뻐하며 곧 집으로 달려가 1만 달러뭉치를 가지고 왔습니다. “사장님, 한 푼도 쓰지 않았습니다. 

여기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자 사업가는 그 청년을 양자로 맞을 것을 포기하며 소개한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돈은 쓰기 위한 것이 아닌가? 사업상 친구를 사귀기 위해서 교제비로써도 좋을 것이고, 어떤 투자를 해서 사업 공부도 할 수 있었을 텐데 돈을 손에 쥐고도 가만히 있는 그런 사람에게 나의 큰 사업을 맡길 수 없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선한 일에 부지런히 사용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달란트를 묻어두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사용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들이 열심히 일한 증거는 그들이 남긴 것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주인에게 받은 것의 갑절을 남겼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일했으면 갑절을 남겼겠습니까? 여기 장사하는 사람, 사업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에게 묻겠습니다. 갑절을 남기기가 쉽습니까? 어렵습니다. 갑절을 남겼다면 대단히 열심히 일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맡긴 것을 부지런히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남기셨다고 생각합니까? 그 것을 지금 열심히 사용하고 있습니까? 묻어두고 있다면 악하고 게으른 종입니다. 부지런히 사용하고 있다면 착하고 충성된 종입니다. 

4. 적은 일도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충성스런 사람이다.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적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입니다. 적은 일에 불충성하면서 많은 일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눅 16:10에 보면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우리가 보기에 하찮아 보이는 일이 큰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때문에 적은 일에 충성하면 많은 일을 맡게 되고, 작은 일에 충성하면 큰 일을 맡게 되는 것입니다. 

1947년 미국의 시카고 근교의 위스칸신 주에 있는 천체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었던 천체물리학자 닥터 첸드리스카 박사는 시카고대학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를 받습니다. “박사님 겨울방학 동안에 저희 대학에 와서 고급물리학에 관한 특별강의를 좀 해주시겠습니까?” 그는 쾌히 승낙을 했습니다. 몇 주후에 다시 대학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박사님 아무래도 강의를 취소해야만 하겠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클래스가 너무 작아서요. 두 명밖에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클래스가 작은 것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제가 강의를 하죠” 그래서 첸드리스카 박사는 그 겨울동안, 눈보라와 차가운 바람을 헤치고 시카고에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그는 일주일에 이틀 동안 한 번도 빠짐이 없이 두 학생을 상대로 강의를 최선을 다해서 했습니다. 

그로부터 꼭 십년이 흘러갑니다. 이 첸드리스카 박사에게 강의를 받았던 두 사람이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첸넝 양 박사라는 분이고 또 한 분은 충도 리라는 중국계의 미국 과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수상의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결정적으로 우리가 이 상을 수상하게 된 데는 우리 두 사람을 앞에 놓고 강의했던 첸드리스카 박사의 강의 때문이었습니다” 동양계 두 사람을 앞에 놓고 열정을 다한 첸드리스카 박사의 강의가 노벨상으로 열매가 맺혀진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주신 적은 일이라도 최선을 다해서 충성한다면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많이 보게 될 것입니다. 

5. 주인과 주인의 뜻을 알고 행하는 사람이 충성스런 사람이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주인을 오해했습니다. 24절에 보면 그는 주인을 향하여 말합니다. “당신은 굳은 사람입니다” 여기서 굳은 사람이란 말은 완악한, 혹독한, 엄한, 잔인한, 고집센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종은 주인을 완악하고 고집이 센 잔인한 수전노 같은 사람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에게 그 책임을 돌립니다. 그는 처음부터 일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고 끝까지 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만약에 장사를 하여 이를 남기면 주인이 빼앗아 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쩌다 실패하는 날에는 일생동안 그 보상을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예 감추어 두었다가 그대로 가져가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고약한 마음입니까?

그런데 실제로 주인은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 남긴 것을 빼앗아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인은 더 많은 것을 그들에게 맡겼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주인의 뜻을 오해했습니다. 
[백금율]이라고 하는 책이 있다고 합니다. 황금율이라는 것은 들어봤지만 백금율은 못 들어 보았지요? 황금율은 무엇입니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칭찬 받기를 원하면 남을 칭찬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 비난받지 않기를 바라거든 너도 남을 비난하지 말라는 것이 황금율입니다. 

백금율은 황금율과 조금 다릅니다. 상대가 원하는 방식대로 그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왜요? 기본적으로 사람의 욕구와 성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입맛이 다 다르고 취미가 다르고 가치관도 이상도 다르기 때문에 부득불 우리는 내 생각을 버리고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그를 대하라는 것이 백금율입니다. 
자기 수준에서, 자기 성향으로 남을 대하지 말고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하는가? 그 수준과 그 입장, 그 욕구를 따라서 그 방법대로 그를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이 기대하는 것과 상관없이 자기 방식으로 주인을 이해하고 일처리를 해 놓고는 잘 했다고 떠듭니다. 주인이 그 큰 금을 맡길 때는 그거 도둑맞지 않게 잘 지키라고 맡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가지고 장사해서 이를 많이 남기라고 맡긴 것입니다. 그렇지만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공연히 관리하기도 복잡하게 이런 걸 왜 맡겨’ 하고 땅을 파고 묻어 두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 생각대로 믿고는 잘 믿었다고 떠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하신 대로 사는 사람만이 칭찬들을 수 있습니다. 자기 생각과 자기 기준으로 멋대로 판단하고 엉뚱하게 살면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소용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성경과 성령의 인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뜻대로 살아야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인이 멀리 사는 친구에게 보낼 편지를 종에게 들려보냈습니다. 종이 열심히 달려서 편지를 전하기는 했는데 엉뚱한 사람에게 전달했다면 그 종은 충성된 종이 아닙니다. 주인이 원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전달해야 충성된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충성된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예화 하나 들려드리고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은퇴하여 농촌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젖소를 사서 기렸던 한 사람의 실패담입니다. 이 사람은 소를 산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젖소의 젖이 마르자 이웃 농부에게 그간의 일에 대하여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농부로부터 젖소의 젖이 마른 이유를 듣고 놀랐습니다. 그는 날마다 자기에게 그날 필요한 만큼의 젖만을 짰습니다. 한 병이 필요하면 한 병만 짜 마셨고 별로 우유 생각이 나지 않으면 짜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필요한 만큼만 짜는 것이 젖을 마르게 하는 원인이 된 것입니다. 젖소는 젖을 짤 수 있는 만큼 최대한도로 짜내야 계속 더 많은 신선한 젖을 생산하기 때문입니다. 충성은 마치 그와 같은 것입니다. 지금 상황에서 다 짜내는 것, 다 쓰는 것이 충성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다음에 늙어서 힘드니까 아껴서 그 때 써야지”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면 아꼈던 힘 쓸 수 있을까요? 못씁니다. 슬 수 있을 때 써야 합니다. 지금 건강한 것, 지금 돈 있는 것, 지금 능력 있는 것,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금 쓰라고 주신 것입니다. 지금 안 쓰면 나중까지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충성은 지금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모든 것을 짜내는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은 바로 가서 일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달란트는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그 달란트를 가지고 바로 가서 일하십시오. 오늘 설교를 듣고 하나님이 내게 명하시는 일을 발견했다면 즉시 움직이십시오.

하나님은 “바로 가서 일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마귀는 속삭입니다. “그래, 기도생활에 힘써라. 성경도 많이 읽어라. 전도도 열심히 해야지, 교회 봉사도 잘하고, 성경공부도 해라. 헌금도 많이 드리고 새벽기도도 시작해라. 그러나 바쁠 것은 하나도 없다. 지금 바쁜 일이 많으니까 나중에 천천히 해라” 
충성된 성도가 되어서 잘했다 칭찬 듣는 신앙생활 하기를 바랍니다.













































신명기적 역사관과 제사장적 역사관



신명기적 역사관과 제사장적 역사관 


신명기 역사서(6권)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상· 하, 열왕기상· 하

신명기 역사서의 특징

1. 신명기 신학의 주제는 계명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과 저주가 내려진다는 것입니다.
신명기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순종하면 축복을 받지만 불순종하면 징계를 받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 여호수아서로부터 열왕기서에 이르는 6권의 책은 신명기적 사관에 따라 이스라엘의 흥망성쇠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신명기적 역사서는 “범죄→징계→회개→구원”의 역사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데 이스라엘이 범죄하고 타락하면 하나님의 징벌을 받고, 징벌을 받는 중에 회개하면 하나님의 구원을 받게 되는데 얼마 있지 않아 또 범죄, 회개, 징계, 구원의 과정이 계속적으로 순환됩니다.

3. 신명기 역사서는 단순히 역사적 사건을 나열하거나 소개하기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소개하며, 회개와 순종 및 그것을 통한 구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역대기 역사서(4권)
역대상· 하, 에스라, 느헤미야

역대기 역사서의 특징

1. 신명기 역사서가 가나안 정복 시대로부터 서술을 시작하고 있는 것에 반해 역대기 역사서는 아담으로부터 시작되는 족보(대상 1-9장)의 서술로 시작됩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정체성를 부각시키기 위함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는 역대기 역사서가 쓰인 시기가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부터 귀환하여 동질성과 자기의식이 절실히 요구되던 때였기 때문입니다.

2. 역사의 관심은 지속적으로 불순종했던 북 이스라엘 왕국보다 남 유다 왕국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이는 남 유다 왕국이 참 이스라엘이며 포로기 이후의 이스라엘 공동체의 중심은 예루살렘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3. 다윗 집안의 정통성이 변함없이 강조됩니다.
아울러 다윗 집안이 일으킨 예루살렘 성전과 그 제의(祭儀)에 대한 강조가 나타납니다.
이는 백성들로 하여금 찬란했던 다윗 왕조를 회복하자는 희망을 갖게 하기 위한 데 있습니다.

4. 페르시아 제국의 고레스 왕의 명령으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한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는 포로 기간 동안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주체성을 지켜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성전을 향한 열심과 재건에의 뜻에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이처럼 역대기는 성전과 제사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신명기 역사서와 역대기 역사서의 비교

1. 공통점  

신명기 역사서나 역대기 역사서는 모두 이스라엘이 범죄하고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징계가 내려졌으며, 회개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두 역사서가 서로 다른 시각에서 쓰여졌다고 할지라도 그 근본적인 주제는 같은 것입니다.

2. 차이점

신명기 역사서는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를 함께 취급하며 소개하고 있는 반면, 역대기 역사서는 남 유다와 성전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명기 사가의 시각이 선지자적이라고 한다면 역대기 사가의 시작은 제사장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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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화면(04-15-2022 / (금) 열왕기하 드라이브 참조

열왕기와 역대기

열왕기 : 신명기적 역사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상· 하, 열왕기상· 하
범죄 → 징계 → 회개 → 구원

역대기 : 제사장적 역사
역대상· 하, 에스라, 느헤미야
아담으로 시작 → 이스라엘 정체성 → 성전과 제사

 

 

 

 

 


열왕기와 역대기 비교와 그 차이점

 

 

 

1. 열왕기서

 


  ⑴ 순종하면 축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신명기적 사관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열왕기는 모세를 통해 전하여진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라는 잣대를 가지고, 이 율법을 왕과 백성이 힘써 지키면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시며 적들을 물리치시고 구원해 주시지만 율법을 범하고 죄를 지으면 나라에 환란이 찾아오고 적들에게 패배하여 고생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⑵ 열왕기서의 이런 집필의도는 역대 왕들의 치세를 간략히 평가하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또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라는 구절을 통하여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⑶ 역대기가 남 유다 왕국의 역사만 기록하고 있음에 반해 열왕기는 북 이스라엘 왕국과 남 유다 왕국의 역사를 모두 기록하고 있습니다.

 


  ⑷ 역대기가 제사장적인 시각에서 기록된 역사서라면 열왕기는 선지자적인 시각에서 기록된 역사서입니다.

 


2. 역대기

 


  ⑴ 역대기는 똑같은 역사를 다루면서도 열왕기와는 다른 접근을 하고 있습니다. 즉 같은 왕이라도 어떤 왕은 선하게, 어떤 왕은 악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므낫세의 치세를 기록한 부분을 열왕기와 비교해보면, 역대하 33장 전반부는 열왕기처럼 므낫세의 우상숭배에 대하여 다루고 있지만 10절 이하 후반부는 열왕기에서는 볼 수 없는 앗수르에서의 포로생활과 그가 하나님 앞에 크게 겸비하여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기사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후 므낫세의 행적에 대해서는 포로 이전과는 다르게 전에 지었던 우상과 산당을 훼파하고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섬길 것을 권면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대하 33:15-16).

 


  ⑵ 열왕기서가 므낫세를 악한 왕으로 묘사한 것과는 달리 역대기가 므낫세를 나중에 회개하고 선하게 행한 왕으로 묘사한 것은 회개를 통한 이스라엘의 재건에 초점을 맞춘 역대기적 사관에 의해서입니다.

 


  ⑶ 열왕기가 남북 두 왕국의 역사를 모두 기록하고 있음에 반해 역대기는 남 유다 왕국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⑷ 열왕기가 선지자적인 시각에서 기록된 역사서라면 역대기는 제사장적

        인 시각에서 기록된 역사서입니다. 그래서 역대기는 제사장의 반열까

        지 기록할 만큼  성전과 제사에 대해 비중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 신명기적 역사관

과거의 그 시대에 남북의 조선사람들은 식민지 사관이라는 관점의 교육 받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것은 우리나라를 식민지화하기 위해서 그러한 식민지 사관을 주입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사람이 알게 모르게 그 사관에 주입되어 지금까지 그 영향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근래에 어떤 소위 명문대학의 교수의 책을 통해서도 알 수 있고 일부 교수들은 몇 십년 전의 어떤 나라가 식민지화 하기 위한 역사적 교육을 그대로 되풀이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들이 그 교육을 일방적으로 하였기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고 그 때는 거부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배운 것일 것이다. 그 어떠한 이론과 시각도 그 이론을 합리화를 목적으로 한다면 다 일리가 있는 면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의 학계의 일부 교수는 물론 언론이나 소위 여론 리더 그룹도 이 식민사관 또는 사대 사관에 완전히 물들어 있는 것을 일부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믿음으로 담대하게 출애굽 하였는데 광야 사십년은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였지만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를 민족적으로 체험하는 기간이기도 하였다.

또한 애굽의 노예적 사고에 또는 사관을 완전히 청산하는 기회도 되었을 것이다.
그들이 출애굽 행진 중 어려울 때에는 그래도 애급이 낫지 아니하였느냐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는 장관을 세워서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백성들이 외치기도 하였다.
이러한 노예적 사고나 사관을 씻어내고 하나님의 말씀 절대의지의 사고 사관을 갖는 것을 위해서도 결과적으로 광야 사십년이 필요했다고 할 수도 있다.

지금의 한국은 어떤 역사적 사관 어떤 사관을 갖고 있는 것인가?
사람들은 각 개인과 역사에 대하여 어떤 사관(historical view) 가지고 있는 것인가?

인도주의적 사관, 평화와 번영의 사관, 인류애의 사관, 사대주의적 사관 ,
지금 식민지적 사고나 사관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없을지 모르나 어떤 집회에 성조기를 들고 다니며 흔들어 대는 모습도 보는데 그것은 아직도 자기도 모르게 식민지적 사관에서 아니 사대주의적 사관에서 행동하는 아닌가 보아야 할 것이다.
적어도 신앙적 사관이나 성경적 사관의 행동은 아닐 것이다.

목회자가 그러하다면 자신은 성경을 잘못 이해하는 것일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절대 의지하라고 하였지 주위 강대국을 의지하라고 하지 않았다.
우리 선조들이 만든 애국가 가사에도 어느 나라 의지하다가 다시 어느 나라에 먹힐지 모른다는 마음도 담긴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것은 자주적 신앙적 혼이 담긴 의지 결단 절규가 아니겠는가, 조선의 그 시대상황과 그 현실을 안다면 말이다.

지금 한국의 언론 소위 지식인 정치인들 등 소위 리더 그룹의 일부를 보면 그들의 역사관이 한국인의 자주적 역사관이라기 보다고 소위 강대국에 의지하려는 또는 어떤 강대국에 의지해야 한다는 사대주의적 관점에서 역사와 현실을 보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선조와 후손에게 부끄러운 모습이 아닌가 하다. 퍽 하면 어떤 나라에 달려가 도움을 구하는 치인들이 있다. 한국의 어떤 대사는 과연 어떤 나라를 위하고 있었는가를 안다면 그것도 난감할 일이다. 한반도 남북의 평화 번영의 행진을 우리 남북이 아직도 주체적으로 못한다면 자괴감을 갖는다. 이제 총선이 있기에 좀 조심스럽기도 하겠지만 총선에서의 합당한 결과가 나오고 과감하게 자주적 신앙적 결단을 하고 과감하게 경우에 따라서는 단호하게 평화 번영행진을 추진하여야 할 것이다. 삼일 독립선언서를 보라 우리의 선조들이 바라는 이상과 현실의 내용이 얼마나 잘 담겨 있는가,

(이러한 내용은 외국어로도 번역하여 외국어 공부에도 활용하여야 할 것이다. 외국에 공부가 기본 생활 회화 이상의 이러한 명문의 내용을 가지고 공부하여야 생각과 언어가 더욱 유익하고 발전할 것이다. 최고의 방법은 배우고자 하는 외국어를 잘 번역 된 성경으로 하는 것을 추천하지만 말이다. 물론 기본 생활에는 당장 적용되는 것은 아니어도 근본 어학의 바탕은 가장 유익하다 할 것이다. 우리의 역사에서 삼일 독립선언문을 높이 평가하다가 어학공부 이야기가 나왔다. 다시 본 주제로 가보자.)

1. 역사란 무엇인가?

천국은 영적세계로 가고 오고가 동일한 언어일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에게는 이미 와 있고 그러므로 죽음이후에도 겨속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즉 영생은 죽음 이후에 시작되는 거이 아니라 믿는 그 순간 부터 계속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주님이 성령으로 내 안에거 거하시는 순간부터 천국과 영생은 시작하는 것인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는 지금 믿고 영생은 죽음 이후에 받는다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는가 했는데 영적 세계은 영원히 현재인 것이다. 아니 과거 현재 미래가 동일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너무나 세상이 좀 부조리라고 할까 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순간적으로 무신론자가 되었다.
그러나 잠시 후 다시 생각해 보면 과연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과연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것도 객관적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해도 그 하나님의 나의 삶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든 아니든 나의 삶에 도움이 되시지 않는다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잠시 불가지론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 저러한 이유로 목사 되는 것을 완전히 포기하였다.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하였기에 혹 다시 마음이 바뀌어 내가 목회자가 되는 것이 아닐까 하여 더욱 목회자가 되지 않기를 다짐하였다. 안된다 안된다 죽으면 죽어도 안 된다. 목회자가 다짐하고 다짐하였다. 그러할수록 혹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그 길로 인도하실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므로 더욱 다짐하였다.

그럼에도 혹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그리고 그 기도가 혹 응답이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 더욱 안된다 안된다는 마음으로 다짐하였던 것이다.

어떤 하나의 역사적 한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능력과 역사와 성품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홍해 바다를 가르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능력과 관심과 참으로 세밀하심 그리고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의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 역사에서 우리는 너무나 풍부한 자료들을 찾을 수 있고 볼 수 있다.

성경에서 모세 오경 이후에 나오는 역사서들 중 사무엘서 이후 열왕기서와 역대기서의 내용은 참으로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다고 배울 것도 많이 있지만 좀 어렵다고 생각하여 많이 읽지 않는 경향도 있다,

역사가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를 알고 기번의 로마 역사의 흥망성쇠를 일고 연구하지만 성경에 이미 역사 연구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신앙적인 관점은 물론이지만 역사가들의 관점에서 보아도 잘 갖춘 탁월한 역사가들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알려진 어떤 역사가 이상으로 학문적이기도 하고 사실적 근거에 의해 역사를 기술하였다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자신들이 보았고 겪었던 사실적 경험의 관점에서 과거의 역사를 신앙적으로 해석하고 설명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기록은 그들의 개인적인 보고 경험한 현재의 하나님의 생생한 개인적인 체험에도 근거하는 것이다.
지금 생생하게 보고 경험한 신앙적 근거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기록인 것이다.
어떤 근대 현대 역사가 그 이전에 역사의 흥망성쇠를 신앙적 사관으로 본 것이다.

열왕기서 역대기서는 신명기적 역사관으로 보고 기록한 것이다.

성경학자들은 열왕기서는 신명기적 선지자적 역사관이라고 하고 역대기는 제사장적 역사관이라고 하지만 크게 보면 역대기서도 신명기적 역사관이 담겨 있다 할 것이다.

신명기적 역사관

모세 오경 중 모세가 가나안 들어가기 직전에 과거의 하나님의 역사를 회고 기억하게 하고 가나안에 들어가서는 어떻게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를 설교한 내용이다.  이스라엘의 그 후의 역사를 그 신명기적 사관을 가지고 평가하는 것이다. 신명기의 핵심은 율법의 핵심으로 십계명이고 그 요약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이다. 구약에서 가나안에 들어간 이후의 열왕의 평가의 구체적 기준의 사람은 다윗이었다.

열왕기서는 예레미야가, 태어나기도 전에 선지자로 지명 받은(렘 1:4) 예레미야가 기록한 내용이다.
다윗을 신앙적 관점으로 즉 열왕을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을 기준으로 형통을 말하고 있다.
그것이 나라 역사의 흥망성쇠가 평가의 기준이었다는 것이다.

역대기서는 제사장 학사 선지자인 에스라가 아담부터 시작한다는 점에서 그 연구가 얼마나 방대하고 깊은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예레미야는 베냐민 땅 아나돗 의 제사장 들 중 힐기야 의 아들 예레미야 의 말이라(렘 1:2)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다,

예레미야는 제사장의 신분으로 태어나 선지자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다.

에스라, 제사장 에스라는 대제사장 아론의 십 육대 손이라고 하였다.
또한 에스라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율법학자 학사 서기관이다.
어떤 기록에 의하면 유대인들이 존경하는 삼대 율법학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한다.(스 7:5-6)

신명기 사관(historical view)

모세가 드디어 그 백성이 가나안 땅 들어가기 직전에 모압 땅에서 설교한 그 내용의 핵심에 근거해서 그 이후의 역사를 보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도 그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역사를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신명기서의 다음 장 절 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신 5: 6:4 , 8:1-4, 10:12-13, 신 11: 30:-34:) 

신명기에는 이스라엘아 들으라(6:4)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 이웃 사랑은 지리적 혈통적 뿐 아니라 서로 ,, 나도 상대방에게 이웃이라는 것이다. 서로이다,, 이웃은 혈통적 지리적 또는 특정한 이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이다,,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대로 사는 삶이 일등 국민으로 사는 큰 사람이고 행복한 삶일 것이다.

신명기 10:12-13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신명기적 역사관 - 성경 연구 (Bible study)

1. 먼저 인생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신명기서의 역사관을  연구해 보자.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오라버니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르다에게 가장 놀라운 말씀을 하셨다.
요한복음 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Jesus said to her,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He who believes in me will live, even though he dies;
and whoever lives and believes in me will never die. Do you believe this?"

요한복음 11:43-44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11:43 When he had said this, Jesus called in a loud voice, "Lazarus, come out!"

11:44 The dead man came out, his hands and feet wrapped with strips of linen, and a cloth around his face. Jesus said to them, "Take off the grave clothes and let him go."

예수님께서는 이 가장 놀랍고 복된 말씀을 하시고 죽은지 나흘 된 나사로를 불러 살아 나오게 하시므로 이 말씀을 증명하셨다.
부활과 영생을 증명해 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죽은지 나흘 된 나사로를 큰 소리로 나사로아 살아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나사로야 나오라고 외치신 것이다.
예수님의 관점에서는 나사로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었던 것이다.
그 생명이 없어지지 않았고 존재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인생역사를 신명기서의 관점에서 보기위해 신명기서로 달려가 보자.

신명기서는 이야야서와 함께 신약에서 가장 많이 인용한 책 중에 하나이다.
신명기는 계명적인 내용이 많고 이사야서는 메시야 예언의 교리적인 면이 강하다 할 것이다. 물론 신명기서에도 가장 분명하게 메시야 예언을 하고 있다.

성경 주석가들은 열왕기서를 선지자적인 관점에서 또한 신명기적 관점에서 그리고 역대서는 제사장적 관점에서 기록하였다고 하나 넓은 의미에서 열왕기서나 역대기서 모두 신명기적 사관을 가지고 기록하였다고 할 것이다.

또한 학사 즉 서기관이고 제사장인 에스라가 기록한 많은 성경의 역사적 사료들을 사용하여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음의 에스라서를 통해서 알 수 있다.(스 7:10 )

이것은 마치 신약성경의 초대교회사 성령행전이라고도 하는 누가복음의 사도행전을 기록과 연관하여 볼 수 있다.

(스7:10)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For Ezra had devoted himself to the study and observance of the Law of the LORD, and to teaching its decrees and laws in Israel.'

(비, 눅1:1-4,, 누가는 의사 문학가 그리고 역사가라고 할 수 있는데 에스라도 역사가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에스라와 누가는 역사가로서의 자세와 모습이 보인다는 것이다.) 

* 결심하였더라 ,, 영어성경은 devote 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원) 준비되어 있다(준비하게 하다), 바른, (똑바로, 굳게, 앞에)세우다, 안정하다, 세우다(튼튼히 하다 prepare, establish, ready, stablish, provide, fixed, confirmed, firm, preparation.

NIV 1984 판의 번역을 높이 평가하는데 이 구절에서도 에스라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성경 연구에 헌신적인 열심을 다한 것을 에스라서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에스라의 심정과 자세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가 겪은 상황과 역사를 보면 그야말로 헌신적인 자세를 전심전력을 다하는 모습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결심하였더라는 굳게 굳게 헌신적으로 온 생애를 다하여 준비하고 시행하였다는 것은 그의 너무나 분명한 모습인 것을 그가 본 상황을 안다면 그렇게 받아드려야 할 것이다. 자신의 민족이 이방 나라의 포로로 끌려왔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현실을 보고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인 것을 알았다면 얼마나 절규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연구하였겠는가는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 자기의 전 생애를 건 연구이었다 할 것이다. 그의 성경 연구가 가벼운 마음이 아니라 전 생애를 건 결단의 결심이었을 것이다. 우리의 민족이 다시는 이러할 수 없다는 절규의 심정을 담아 온 힘을 다하여 자료를 구하고 연구하고 또 연구하였을 것이다.

예수 메시야 그리스도의 초대교회 역사를 기록함에 있어 얼마나 객관적 사실에 근거하였는가와 비교할 수 있다. 바울의 동역자 의사 누가는 초대교회에서 바울과 동역하며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생생하게 많이 체험하였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누가의 복음서를 기록함에 있어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의 목격자들의 많은 증언과 자료들을 가지고 기록한 것이다. 그는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이며 역사가로서 그 사실을 기록 한 것이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는 대단히 세밀하고 정밀하고 착오없게 진단하고 처방해야 하는 직업인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과학적 합리적 객관적인 관찰로 진단하고 처방하는 직업을 그의 누가 복음의 기록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바울과의 동행에서 예수님의 영 성령의 놀라운 많은 역사를 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목격자들의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증언을 자세히 듣고 그 자료들을 세밀하게 검증하여 성령의 감동으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하는 모습과 연관하여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신명기서의 주요 내용

성경의 앞 부분은 모세 오경이다, 그 모세의 오경 중 신명기서는 장차 가나안에 들어가서는 어떠한 신앙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명기 이후의 가나안의 역사는 그 신명기의 말씀에 근거해서 보아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것을 신명기적 역사관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신명기 이후의 역사에 대해서 역사의 기록자들은 신명기적 관점에서 역사를 기록하였다는 것이다.

우리의 개인의 역사와 세계의 역사도 신명기적 사관(viewpoint)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신명기적 사관은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율법학자의 가장 첫째 되는 내용이 무엇인가 물었을 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말씀하셨다. 신앙인들은 이 관점에서 개인의 역사와 세계 역사를 보아야 할 것이다.또한 보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 사랑은 종교적인 면인 것이고 이웃 사랑은 지리적 혈통적인 이웃 이상의 서로 사랑이라는 것인 것이다. 서로 사랑은 윈윈 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두 돌 판에 손수 써 주신  사랑의 언약 십계명은 출애굽에 있지만 신명기에도 반복하여 기록하고 있다.

모세가 새 세대를 포함한 백성들에게 다시 반복하여 말한 것이다. 그 내용에는 계명을 지키면 그 은혜의 복이 얼마나 풍성한가를 말씀하고 있다.

(신5:10)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but showing love to a thousand generations of those who love me and keep my commandments.

( 이러한 약속을 보아도 현실에서

한반도 남북이 적대를 청산하고 평화 공존 협력 이웃사랑 서로 사랑을 실천하면 그 은혜의 복은 얼마나 엄청날 것인가를 신앙인들은 알야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증오 비방 적대 등등을 진행한다면 먼저 자신의 마음과 입술에 손해이다. 마음에 그러한 마음을 품고 있고 말한다면 최대의 손해는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위선적 거짓 애국을 과시하려고 하는 것 뿐이다. 혹 일시적 스트레스 해소는 될지 모르고 일부 치인들이 과격한 말로 자기 이름을 알리는 공천을 덛기 위한 전략일지 모르지만 가장 어리석은 짓이다. 신앙인들은 이러한 모습이 당연히 없어야 한다. 생각과 언어와 행동에서 말이다.)

 

신명기서는 모세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 그 출애굽 사십 년 십일월 일일에 가나안 땅이 보이는 요단 이편 모압 땅에 다시 한번 율법과 지금까지의 역사를 말하고 약속의 땅에서의 행복한 삶을 위한 설교의 내용이다.

신명기의 두 번째 말씀이라는 뜻으로 신 자는 한문으로도 거듭 신으로  율법을 새 세대를 포함한 사람들에게 다시 설교한 내용이다.

   

그들은 신명기서를 진지하게 읽고 또 읽어야 할 것이다. 그 당시로서는 듣고 또 들어야 할 것이다.거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왜 우리가 그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로 얻고도 이렇게 되었는지 말이다. 그리고 어떻게 그들이 이제 어떠해야 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었다.

스 1:1-3

신1:1-5



(신5:12- )

모세가 가나안 들어가기 직전에,,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돌판에 친히 써 주신 사랑의 언약 십계명 돌판을 받고 전한 그 내용을 그 시대를 모르는 그 이후 세대에게 다시 전하고 있는 것이다.



(신6:4 )

이스라엘의 교육의 근거 또는 목표는 쉐마 이스라엘 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 목표는 이스라엘이 인구비례로 가장 많은 노벨상을 탔다는 점에서도 세상 교육에 적용할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신6:18)

여호와의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얻고 여호와께서 네 열조에게 맹세하사 네 대적을 몰수히 네 앞에서 쫓아내리라 하신 아름다운 땅을 들어가서 얻으리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으리라

Do what is right and good in the LORD'S sight, so that it may go well with you and you may go in and take over the good land that the LORD promised on oath to your forefathers,

신 8:1-4

신10:12-13

11:8-12

신11:13-25

(신13:18 )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목전에 정직을 행하면 이같이 되리라

because you obey the LORD your God, keeping all his commands that I am giving you today and doing what is right in his eyes.

(* '지키다'  히브리어 솨마르 는 행함으로써 지키는 것이 아니라 keep, 마음에 간직하다. 신10:13,,11:1, 11:18,, )

신29:

신30:14-

신31:1-30

신32:

신33: 29

신34:1-34

34:10-12,,



이러한 감격적인 내용을 모세를 통하여 주었는데 그들이 지금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면 그 사람들은 더구나 제사장 예레미야의 심정은 그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다고 하는 그리고 그것을 예언해야 하는 예레미야의 심정은 어떠하였겠는가, 그것은 예레미야서 와 예레미야 애가에서 절절하게 볼 수 있다.



그리고 바벨론 칠십 년을 포로로 살고 있었을(B.C.586~537) 제사장 율법학자 서기관이었던 에스라의 심정은 어떠하였겠는가, 그리고 무엇을 찾았고 알았고 무엇을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겠는가, 그것을 실천한 것을 에스라서에서 역시 절절하게 볼 수 있다. 그것은 객관적이고 실제적인 과거의 역사에서도 찾았고 전했던 것이다. 그것이 역대기서인 것이다.


시편 34:8-11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 너희 소자들아 와서 내게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함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Taste and see that the LORD is good; blessed is the man who takes refuge in him./ Fear the LORD, you his saints, for those who fear him lack nothing./ The lions may grow weak and hungry, but those who seek the LORD lack no good thing. / Come, my children, listen to me; I will teach you the fear of the L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