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카로운 시각으로 성공의 비밀을 이야기 했던 아웃라이어와 빅트렌드의 비밀을 이야기 한 티핑포인트에 이어서 나온 블링크는 첫
2초의 힘을 이야기 한다. 순간적인 블링크를 통한 의사결정과 인간의 심리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1983년에
있었던 일이다. 폴게티 박물관에 한 사람이 찾아와서 자신은 미술상인데 기원전 6세기의 대리석상인 쿠르스상을 소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박물관 측은 쿠르스상의 진품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마이크로 분석기, 질량 분석계, 엑스레이 등 최첨단 도구를 사용하여
감정을 했다. 그 결과 미술상이 소지한 쿠르스상은 진품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런데 미술품 전문가들이 결과에 이의를 제기했다.
처음 보는 순간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진품 여부가 의심스럽다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지나서 이 대리석상은 진품이
아니라는 최종결론이 나왔다. 전문가의 눈에 비친 짧은 순간의 직감이 정확했던 것이다.
베스트셀러로 알려진
'블링크'라는 책에 소개된 이야기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2초 만에 처음 본 사람이나 사물을 판단한다'고 말한다.
'블링크'라는 말 자체가 "눈동자를 깜박인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는 책에서, 2초 만에 대리석상의 진위가 가려지듯이 인간의
직관은 사물을 처음 보는 순간 여러 감각을 통해 판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2초면 당신을 평가하는데 충분합니다'라는
말이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이처럼 첫 인상은 참 중요하다. 실제로 우리는 첫인상의 강한 기억이 오래 남아 있음을
경험하곤 한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쓴다. 그에 따라 성형외과가 성업을 이루고 전에는 여자들이 주로 하던
성형수술을 남자들도 즐겨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진리가 있다. 하나님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신다는 사실이다(삼상 16:7).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이새의 집에 가게 되었다. 사울왕을 폐하고 새로운
왕에게 기름을 붓기 위해서였다. 이새의 여러 아들들이 사무엘 앞을 지나갔다. 맏아들 엘리압(Eliab) 하나님이 아버지 되신다 둘째 아들 아비나답(Abinadab) 내 부친을 존중한다 셋째 아들
삼마(Shammah) 황폐하다
그들의 용모는 다 준수했지만 기름부음을 받지 못했다. 나머지 네 아들들도 사무엘의 앞을 지나갔으나 택함 받지
못했다. 하나님의 판단에 그들은 진품이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양을 지키고 있던 막내 아들 다윗이 사무엘 앞에 등장하게 되었다.
다윗(David) 사랑하는 자
하나님은 다윗을 택하여 기름을 붓게 하셨다. 다윗의 외모가 아니라 중심이 마음에 합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외모로
판단하는 첫인상은 중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내면의 세계이다. 다윗처럼 중심이 하나님을 향할 때, 하나님께서 그를
진품으로 인정해 주신다. 하나님께서 진품으로 인정해 주실 때라야 명품으로서 영화로운 인생이 될 수 있다.
말콤 글레드웰 – 우리의 통찰력을 길러주는 세계적인 작가
1만 시간 법칙, 티핑포인트, 블링크 등 새로운 비즈니스 용어를 만들며
『티핑포인트』(2000)와 『블링크-첫 2초의 힘』(2005) 등으로 전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그는 비즈니스맨을 위한
비(非)비즈니스 책을 씀으로써 그들에게 현대 경영의 경계 너머에서 통찰력을 찾을 수 있게 하였다. 인간사의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영역에서 일화와 비사들을 끌어오며, 풍부한 사례를 장착한 신선한 분석과 매력적 문장으로 독자들을 잡는다.
우리에게 숨겨진 능력, 순간적인 판단 저자는 많은 정보의 핵심내용을 파악하는 직관적 사고가 정확하고 빠른 판단을 할 수 있게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많은 정보를 얻어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사고할 때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우리의 고정관념일 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순간적인 판단은 우리의 무의식에서 나오는 강한 진실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너무 많은 정보는 오히려 우리의 무의식적 판단을 흐리게 한다고 전한다. 따라서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판단의 경험을 통해
의식을 키울 때 직관과 본능을 이용한 정확하고 빠른 판단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의사결정의 능력을 키우는 힘, 순간 포착 저자는 문제 해결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판단능력을 키우는 방법을 알려주고자 이 책을 저술하였다.
우리는 빠른 변화에 적응해야 하는 시대를 살면서 순간적인 판단을 해야 하는 상황에 부딪힐 때가
잦다. 자신의 판단이 옳은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된다. 저자는 빠른 판단을 위해서는 자신이 직면한 문제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해결책을 찾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말한다. 이 같은 능력을 길러 당연하게 알고 있던 것들이 새롭게 느껴질 때 빠른
판단을 할 수 있다고 전한다.
저자는 자신의 생각체계를 조직화함으로 빠른 판단과 의사결정 능력을 높일 수 있길 바란다.
멀티미디어나 인터넷 등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정보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들은
우리의 직관을 방해하는 요소가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직관과 본능을 통해 순간적인 판단을 하게 되는데 많은 정보 중
핵심이 되는 내용을 걸러내는 능력이 직관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빠르고 정확한 판단을 하기 위해서 다양한 정보들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필요한 정보만을 얻어낼 수 있어야 한다. 저자는 이처럼 많은 이들이 빠른 판단 능력을 길러 자신의 의사결정을
향상하는 힘이 되길 바란다.
끊임없는 관찰을 통해 정보의 핵심 요소를 가려낼 수 있을 때 정확하고 빠른 판단이 가능해진다.
우리는 불과 몇 초 사이의 본능적 판단이나 인식에 의구심을 가진다. 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을
걸쳐 해내는 일이 성과가 좋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는 우리의 고정관념일 뿐이다. 그러나 빠른 문제 해결 능력은 개인의 생활뿐
아니라 조직생활에서도 깊은 연관이 있다. 특히 매일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고 새로운 전략을 짜야 하는 조직생활에서 정확하고 빠른
판단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물론 순간적인 판단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외부 영향에 민감한 우리는 흥미나
정서, 감정이 있기 때문에 본래의 모습을 직시하지 못하고 편견이나 고정관념을 통해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경험하는 것들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체계적인 생각을 갖춰 직관에 의한 정확하고 빠른 판단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또한 정보의 핵심요소를 파악하는 노력을 통해 우리는 정확하고 빠른 판단을 할 수 있게 된다.
1. 한 조각의 지식과 무의식의 힘, 판단 순간적인 판단이란 행동의 패턴과 경험에 의한 상황판단 능력을 말한다.
심리학자인 존 고트먼은 부부의 대화 중 이들이 표현할 법한 감정들을 스무 가지로 나타내는
코드체계를 만들었다. 예를 들면 1은 혐오감, 2는 경멸, 7은 화, 11은 슬픔, 14는 평정 등의 코드이다. 그리고 매초
커플의 상호작용에 대해 수치의 열로 전환했다. 예를 들어 '7, 7, 14, 10, 11, 11'이라는 표기는 6초 동안 커플 중
어느 한 쪽이 화를 낸 후 평정을 찾고, 방어 자세를 보이다가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또한 수치의 전환과 함께
심장이 언제 두근거렸는지, 체온은 언제 상승했는지 등을 파악한 데이터들이 이에 더해져 복잡한 방정식으로 계산된다. 그 결과,
15분 간 부부가 나눈 대화의 분석만으로 그들이 15년 뒤에 여전히 부부로 살지를 90퍼센트의 정확도로 예측할 수 있었다. 결혼의
진실성을 짧은 시간 안에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을 ‘얇게 조각내기’라 하는데 이는 매우 얇은 경험들을 토대로 상황과
행동의 패턴을 찾아내는 무의식적 능력을 말한다.
인간관계에는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독특하면서도 변함없는 패턴이 있다.
이혼을 예측하는 일도 일종의 패턴 인식(pattern recognition)이다. 인간관계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 감정으로
표현된다. 긍정적인 감정이 우세하면 성급함을 억눌러 상대가 뭔가 나쁜 행동을 보이려 할 때 '이 사람은 기분이 별로일 뿐이야'라고
말한다. 반면 부정적인 감정이 우세하면 상대가 별다른 감정 없이 말해도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그런 상태에서는 무얼 해도 서로에
대한 결론이 변하지 않고 상대가 어떤 말이나 행동을 보여도 이기적인 사람으로만 보이게 되는 것이다.
고트먼은 방어
자세, 의도적 회피, 냉소, 경멸에만 초점을 맞춰도 중요한 것을 알아낼 수 있다고 한다. 그 중 경멸의 감정을 보일 경우, 이는
결혼생활에 적신호가 된다고 말한다. 경멸이란 일종의 모욕으로 상대를 나보다 낮은 위치에 두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경멸을 당하면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우리의 면역체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얼마나 자주 감기에 걸리는지와 같은
사소한 것으로도 부부 사이를 예측할 수 있다.
또한 무의식은 일종의 정신적 시종(始終) 역할을 하며 우리의 정신적인
소소한 부분까지 영향을 주며 주변에서 진행되는 모든 일을 감시하고 적절히 대응해 중요한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준다. 신경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의 연구에 의하면 코 뒤쪽에 있는 전두엽 피질이라는 뇌의 중요한 부분이 손상될 경우, 우리는 사고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전두엽은 의사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뇌 일부이다. 우연성과 관련성을 파악하고, 우리가 외부에서 얻는
많은 정보를 분류해 우선순위를 정하며, 즉각적인 관심을 필요로 하는 일들에 각별한 표시를 해둔다. 전두엽에 손상을 입은 사람들은
완벽하게 이성적인 성향을 띠며 지적 활동이나 기능적 수행은 잘하지만 어떠한 판단은 내리지는 못한다. 이는 오로지 중요한 문제에만
집중하게 하는 무의식 속의 정신적 시종(始終)이 파괴된 셈이다. 이처럼 전두엽 손상은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 사이에 단절을
불러온다.
2. 판단을 흐리게 하는 요인, 편견 편견을 없애고 긍정적인 자세를 가질 때 첫인상에 대한 정확한 순간적 판단이 가능하다.
얇게 조각내어 관찰하기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는 능력으로 관찰과 첫인상에
관한 판단을 눈 깜짝할 사이에 알아낸다. 그런데 신속한 사고가 상황을 파악하지 않은 상태에서 순간적인 판단을 하게 될 경우,
정상적인 사고 작용을 마비시켜 인식이 빗나가는 때도 있다.
무의식적 연상들이 우리의 믿음과 행동에 미치는 영향은
다음의 '암묵적 연상 테스트(Implicit Association Test, IAT)'를 통해 알 수 있다. 우리는 생소한
개념보다 머릿속에서 이미 연결된 개념들을 더 빨리 연결 짓는다. 예를 들어 우리는 ‘직업’과 ‘여자다움’보다는 ‘직업’과
‘남자다움’ 사이에 훨씬 강한 심리적 연상 고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남자 또는 가정’일 때 ‘비즈니스' 같은 단어를 대하면
결정을 내리기 전 수십만 분의 1초라도 생각을 한다. 이런 IAT테스트는 우리의 응답 시간을 1,000분의 1초 단위까지 측정할 수
있고 그 수치들로 점수를 매긴다. 사전 연상 고리가 강할 때 사람들은 1,000분의 400에서 600초 사이에 답을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때는 1,000분의 200에서 300초가 더 걸린다. 이 테스트는 우리가 선택해서 믿는 의식적인 태도와
무의식의 태도, 즉 미처 생각할 시간을 갖기도 전에 불쑥 튀어나오는 즉각적이고 자연 발생적인 연상으로 우리의 태도가 작용하는 것을
보여준다.
첫인상은 경험과 환경에 의해 생성되는데 인상을 형성하는 경험들을 변화시킴으로써 우리는 첫인상을 바꿀 수
있다. 예를 들어 당신이 백인에 대해 긍정적인 만큼 흑인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연상들을 갖고 싶어 한다면 평등에 대한 단순한 언급
이상이 필요하다. 즉, 소수 인종과의 편안함을 느끼며 그들의 좋은 문화에 친숙해지려고 노력해야 한다. 나아가 그들과의 만남이나
약속, 또는 그들을 채용하고자 할 때는 불안함이나 망설임이 없도록 당신의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 이처럼 자신의 직관적인 인식과
첫인상이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한다면 능동적인 자세로 첫인상을 관리하고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
3. 2초의 신중한 태도, 올바른 판단 올바른 판단을 위해서는 정보의 핵심내용 파악으로 신중한 사고와 본능적 사고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우리는 정보가 많을수록 더 나은 결정을 내리게 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핵심이 되는 간단한 내용이면 충분하다.
첫째, 정말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의사결정은 신중한 사고와 본능적 사고의 균형에 달려
있다.
즉 상대의 의사와 필요성, 감정을 한눈에 직관하는 능력이다. 또한 순간적 판단을 의식적으로 피할 수 있는 신중한 사고가
필요하다. 즉 신중한 사고를 거친 분석이 직관적인 인식을 도와준다.
둘째, 좋은 의사결정에는 간소화가 필요하다. 정보가 많으면
오히려 판단이 복잡해지므로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좋은 편집자가 되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얇게 조각내어 관찰할 때 패턴을
인식하고 순간적인 판단을 할 때는 무의식적으로 편집 작업을 한다. 선택지가 너무 많으면 즉, 무의식이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면 모든 것이 마비되어 버린다.
우리는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느낌을 받는지 끊임없이 예견하고 추측한다.
누군가가 '난 네가 좋아'라고 말할 때 우리는 상대의 눈을 들여다보며 그 사람의 진심을 판단한다. 이처럼 우리는 표정의 복잡하고
미묘한 차이들을 쉽게 분석해 낸다. 일례로 내가 두 눈을 반짝이며 생글거리면 모두 내가 즐거워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고개를
끄덕이거나 과장되게 웃으면 내가 놀림을 받고 있다고 받아들인다. 이 또한 단 몇 초 동안의 순간적인 느낌이다. 그러나 이런 마음
읽기가 착오를 가져오기도 하는데 이는 언쟁과 불화, 오해, 반감 등의 내면에 있다. 우리는 마음으로 감정을 느낀 후 그 감정을
표정으로 드러내거나 그러내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얼굴에서 감정이 시작되기도 하며 우리의 의식적 표현체계는 자신의
감정을 의도적으로 얼굴에 전하기도 한다.
우리는 눈 깜빡할 사이에 일어나는 일들을 자주 묵인한다. 그러나 직관적인
인식이 일어나는 주변 환경의 조절이 가능해지면 무의식에서 이끌어 내는 순간적인 판단도 균형을 맞추어나갈 수 있다. 이처럼 우리가
처음 2초를 신중하게 살필 때 작은 기적은 일어난다.
빠른 판단의 오류, 편견
편견을 없애고 직관과 본능을 활용하면 정확한 순간적 판단이 가능해진다.
말콤 글래드웰은 누구나 순간의 판단력, 즉 블링크 능력을 향상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이것을
잘할 수 있는 첫 단계는 경험과 전문 지식을 쌓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순간 판단을 방해하는 편견을 버리는 것이다. 경험과
전문 지식이 체계화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편견을 야기하는 방해물이 된다. 전문적 경험과 지식을 쌓고 또 다시 이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마음에서 생겨나는 '순간의 판단'이 바로 블링크이자 기(氣)가 충만한 순간이다. 이 순간은 바로 기회를 만들어내고
성공을 이루는 순간이다. 블링크, 이 놀라운 능력을 잘 활용하면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중략...
한국경제. 2005. 11. 28)
우리가 흔히 말하는 ‘첫인상’이나 ‘감’은 순간적인 판단이다. 하지만 우리의
고정관념인 편견에 사로잡혀 잘못된 판단을 하기 쉽다. 판단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관찰이 필요하다. 이는
올바른 판단의 구별을 하게 하며 우리의 인식능력 또한 향상시켜 준다.
감각적이고 창의적인 일 처리를 필요로 하는
시대적 흐름 속에 정확하고 빠른 판단은 우리가 갖추어야 할 필수 조건이 되었다. 순간적인 판단은 무의식의 영역에서 일어나며
핵심정보를 포착해 본능에 따라 내리는 결정이라고 저자는 전한다. 또한 자신의 고정관념을 없애고 정확한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직면한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관찰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이 책은 순간적인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직관과 본능을 효율적으로 이용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잘못된 판단은 편견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많은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일을 할 수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자신이 한 일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사무엘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어떻습니까? 외모를 봅니다. 아니, 외모만 보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래서 외모지상주의란 말까지도 생겨났습니다.
‘외모지상주의’란 외모가 개인 간의 우열과 성패를 결정한다고 믿으면서 외모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사회 풍조를 말합니다. 2000년부터 한국에 퍼지기 시작한 소위 ‘루키즘’(lookism)도 같은 의미입니다.
꽃거지와 얼짱
최근에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인 윌리엄 새파이어(William Safire)가 사람을 차별하는 요인 가운데,
인종, 성별, 종교, 이념과 함께 ‘외모’를 새로운 요인으로 꼽았습니다. 현대 사회는 외모로 사람을 차별한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외모지상주의를 넘어서 외모제일주의, 외모최고주의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꽃거지', '얼짱도둑' 등 외모에 대한
신조어가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사실 거지나 도둑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잘생기고 예쁘다는 이유로 거지와
도둑에게도 호감을 갖고 '꽃거지', '얼짱도둑'이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모가 뛰어난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는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첫 인상부터 편견을 가지고 바라봅니다. 똑같은 일을 해도 외모가 뛰어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습니다. 일명 외모로 인한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세인트
안셀름 대학 심리학과에서는 외모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기 위해 모의재판을 했습니다. 어떤 가게에 절도 사건이 일어났고, 두
명의 여성이 피의자로 기소되었습니다. 총 72명의 배심원 중 36명의 배심원 앞에는 외모가 매력적인 여성이 피의자로 섰고, 다른
36명의 배심원 앞에는 평범한 외모의 여성이 피의자로 섰습니다.
여러 차례 모의 재판을 한 결과 평범한 외모를
지닌 여성 피고인을 유죄라고 판결한 배심원은 평균 19.5명이었습니다. 그에 반해 매력적인 여성 피고인에게 유죄 판결을 낸
배심원은12.9명에 그쳤습니다. 약 일곱 명의 차이가 있습니다.
외모는 경제력에도 영향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미국의 경제학자인 다니얼 해머매시와 제프 비들은 외모의 아름다움과 경제적 능력과의 상관성을 알아보았습니다. 조사
결과, 평균 이상의 잘생긴 외모를 지닌 사람들이 평균 수준의 보통 외모를 지닌 사람들보다 5% 정도 더 많은 소득을 올리고
있었고, 못생긴 외모를 지닌 사람들보다는 소득이 10~25% 가량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사회풍조 때문에 취업 준비생들은 심각한 외모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다. 최근에 리쿠르트 회사가 1,264명의 취업준비생들을 대상으로한 조사에서 무려 98%가 '외모가 취업에 영향을 미친다'고 응답했습니다.
또 이들을 뽑는 기업의 인사 담당자 584명 중 94%가 채용시 ‘외모를 고려한다’고 밝혔습니다. 둘 다 90%가 넘는 대단한 수치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외모도 경쟁력이라고 합니다.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정말 예쁘면 뭘 해도 용서가 되고, 못 생기면 뭘 해도 죄가 되는 외모제일주의 시대의 씁쓸한 단면들입니다. 이 세상은 외모를
보시지 않는 하나님과는 정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오늘날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는 언제나 사람의 외모를 보고 판단을
했습니다. 3천 년 전 이스라엘의 왕을 뽑는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베들레헴에 있는 이새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새의 아들 중에서 한 사람을 택해, 사울 왕의 뒤를 이을 새로운 왕으로 기름부으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새에게는 모두 여덟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온다는 소식에 아들들의 몸과 마음을 성결하게 준비시키고 모이도록 했습니다. 이제 한 사람씩 사무엘 선지자 앞으로 나아갑니다.
제일 먼저 이새의 맏아들인 엘리압이 사무엘 선지자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사무엘이 보니 그 외모가 대단했습니다. 첫 눈에 보기에도 엘리압의 외모가 왕이 되기에 전혀 손색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마음 속으로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여기에 있도다’라며 감탄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말씀하십니다.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하나님은 엘리압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무엘 선지자 뿐만 아니라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엘리압의 용모와 키에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엘리압의
용모와 키를 본다면 누구라도 왕의 재목이라고 여겼습니다. 선지자 사무엘조차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그의 외모가 그만큼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아도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고 하십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이 말씀을 듣고는 아차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을 뽑는 이유는 하나님이 사울 왕을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울의 외모가 출중하지 못해서, 그의 키가 남보다 작아서 버리셨습니까? 아닙니다. 사울의 외모는 이스라엘에서
단연 최고였습니다. “기스에게 아들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더라”(삼상 9:2).
이스라엘 땅에서 사울보다 더 준수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키도 컸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보다 어깨 하나 만큼 큰 사람이었습니다. 외모로만 본다면 이스라엘에서
사울을 당해낼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사울을 버리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의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사울 왕의 중심이 타락하고, 사울 왕의 중심이 의롭지 못했습니다. 사울 왕의 중신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했고,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울을 버리시고 새로운 왕을 세우시기로 작정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 선지자가 엘리압의 외모를 보고는 잠시 그 사실을 잊었던 것입니다. 엘리압이 선택되지 못하자 그 다음 아들들이
차례대로 사무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일곱 명의 아들들이 다 사무엘 앞으로 지나갔지만 하나님은 누구도 택하시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당황스러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물었습니다.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의 대답이, 막내 아들
다윗이 있긴 한데 지금 들에서 양을 치고 있다고 합니다. 이새가 보기에 다윗은 왕의 재목도 아니었을 뿐더러 집 안에서조차 하찮고
별볼 일이 없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왕을 뽑는 그토록 중요한 날에도 다윗은 멀리 초원으로 나가 양을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외모로 보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다윗은 형들과 달리 아직 소년이었습니다. 한 나라의 왕은 전투에도 능하고
무술도 뛰어나야 하는데, 다윗이 하는 일은 들에서 양이나 치고, 시를 짓고 수금을 타며 밤낮 노래만 부릅니다. 누가 봐도 다윗은
왕의 재목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다윗을 이스라엘 왕으로 택하셨습니다. 그의 중심이 하나님께로 향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 생각으로 충만했습니다. 수많은 시편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주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향해 “내 마음에 합한 자다”라고 하실 만큼 그의 중심이 하나님께로 향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다 외모를 보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고 스펙을 보고 조건을 보고 선택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르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가지만 보십니다. 그의 중심, 중심만 보십니다.
우리가 외모가 아닌 중심이 아름답고, 외모가 아닌 중심이 진실되고, 외모가 아닌 중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긴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실 것입니다.
외모와 중심 (삼상 16:6-7)
신약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생겼다는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의 키가 얼마나 크며, 코가 어떻게 생겼으며, 머리 모양이
어떤지, 무슨 색깔의 눈동자를 가지셨는지 아무런 정보도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또 베드로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가
고기잡는 어부라는 직업외에는 그가 어부이므로 팔뚝 힘이 세다든지, 햇빛에 얼굴이 타서 검다든지에 대해 언급한 것이 없습니다.
신약
성경의 관심은 사람의 모습과 외형에 있지 않고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성경 구절의 하나는 요한복음 3:16의 말씀에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 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생긴 모습에 매력을 느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없는 줄 압니다. 실로 예수님의 초상화를 우리들은 믿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사랑이 너무나도 크고 놀라운
사랑이시기 때문에 이 사랑의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6:7에 “ 사람의 신장과 용모를 보지 말고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 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표리부동(表裏不同) duplicity
表 : 겉 표
裏 : 속 리(이)
不 : 아닐 부
同 : 한가지 동
표리일체(表裏一體) Duality
무슨 말입니까?
사무엘 선지자가 당시 베들레헴에 사는 이새라는 사람집에 들렀습니다. 이새는 여덟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준수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일곱 아들을 다 제쳐 놓으시고 맨 마지막 아들 다윗을 불러 그 머리에
기름을 붓게 했습니다. 이것은 장차 이스라엘의 왕을 삼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사무엘에게 어린 다윗의 머리 위에
기름을 붓도록 지시하면서 말씀하시기를 “ 나의 모든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 고 했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봅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특별히 인물이 잘 생기고 풍채가 좋았습니다. 그는 사람을
이끄는 수단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따르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악독이 가득 찼고 몹쓸 일을 품고 있었으며 화
받을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비참한 죽임을 당했습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사람들은 문벌, 학식, 재물, 인물 같은
외모를 보려고 합니다. 외모는 반듯하고 보기에 좋으나 중심이 바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외모는 좀 부족하고
미비되었다 할지라도 마음이 바르고 좋으며, 선하고 곱고 아름다워야 합니다. 죽음이 올지라도 변함없이 한 길로 가며, 한 뜻과, 한
정신과, 한 생각과, 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같은 사람이어야 쓸모있고 유익도 주며 좋은 일도 하고 값있게 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의 사람은 남을 망하게 하고 파괴시키며 불행하게 만들게 됩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세밀한 눈으로 우리를 살펴보십니다. 마음이 진실한가, 거짓된가. 깨끗한가, 더러운가, 교만한가, 겸손한가, 필영적인가, 참됨인가,
바른가, 그릇된가, 하나님에게 속한 자인가, 마귀에게 속한 자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인가, 세상을 사랑하는 자인가를
보십니다.
마음은 기본이요. 행실은 그 열매입니다.
누가복음 6:45에 “ 마음에 어떤 것을 오래 품고 있으면 결국은 행동으로 나타난다
” 고 했고, 마태복음 15:18에 “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 고 했습니다. 잠언
4:23에 “ 무룻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 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더러운
마음을 가진 자가 더러움이 행동으로 나타나며 이것이 그의 생명을 위험으로 끌고 간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마음을 지키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워야 합니다.
그러면 중심을 본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겉은 보지 않으시고 속을 보십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첫 인상이 좋고
외모가 잘생긴 사람은 많은 덕을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외모를 보지 않고 그 속 마음이 아름다우면 그 사람을 귀히 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외모보다 마음의 상태, 심령상태가 더 중요합니다. 겉을 보지 않고 속을 보신다는 것은 또한 형식보다 내용을 중히
보신다는 뜻입니다.
요엘 선지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패역하고 타락하여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오는데 겉으로만 옷을 찢으며
회개하는 체 하고 중심으로 회개하지 않으므로 요엘 1:23에 “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 고 꾸짖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마태복음 23:27-28에 “ 화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 찼도다 ”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를 제일 가증히 여기시고 저주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겉모양보다 속 중심을 보시고, 형식보다
내용을 더 중요히 여깁니다.
행위의 결과보다 동기를 보십니다.
사람들은 동기야 어쨌든 결과만 좋으면 인정해 줍니다.
심지어 공산당들은 “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 한다 ”고 합니다. 그러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행위의 결과보다 그 동기를 더
살펴보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제를 할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고 금식을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며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모든 선행의 결과보다 그 동기를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진실성을 보십니다.
겉마음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진실성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겉과 속이 같고, 말과 행실이 같아야 합니다. 겉으로만 착한
사람이 있고, 중심이 착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중심의 진실을 원하십니다. 다니엘은 그 중심이 진실하기 때문에 죽음을
각오하고 그 마음먹은대로 하루 세 번씩 창문을 열어 놓고 기도했습니다.
사사 입다는 승전하면 가장 귀한 것이라도 집이 돌아가는
길에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을 바치겠다고 서약한대로 외동딸을 바쳤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갚기를 기뻐하시는
것은 진실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30:2에 “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마음을 제어하기를 서약하였거든 파약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 ” 고 했고, 신명기 23:21-23에 “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 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 네가 서원치 아니하였으면 무죄하리라 마는 네 입에서 난
것은 그대로 실행하기를 주의하라 무릇 자원하는 예물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입으로 언약한대로 행할지니라 ” 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하기로 서원한 것, 즉 약속한 것이나, 마음에 제어하기로 약속한 것은 그대로 실행하기를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은
진실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도 중심에 진실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보시기에 진실했기 때문에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즉 다윗은 비록 양을 치는 목동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가 가진 바른 마음, 곱고 아름다운 마음을
보시고 어렸을 때에 그의 머리위에 기름을 부으셨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위대한 시인, 위대한 음악가, 위대한 정치가, 위대한
왕으로 축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요셉도 어려서 형제들의 악의로 팔려 애굽에서 종노릇하였고 억울한 누명을 받고 감옥살이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바른 마음, 그의 고운 마음, 아름다운 마음을 보시고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는 복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뚤어진 마음을 고치고 더렵혀진 마음을 깨끗이하고, 불의한 마음을 새롭게 하며, 거짓된 마음은 진실하게 하며,
속이는 마음은 참되게 하여야겠습니다.
시편 24:3-5의 말씀을 봉독하고 말씀을 마치려 합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을 정결하여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라 ”
바둑 격언 10훈
바둑은
인생의 축소판이란 말이 있습니다. 한 판의 바둑은 신통하게도 복잡한 인생사와 닮았습니다. 이를 실감나게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가
있습니다. 바로 바둑 둘 때 가져야 할 마음가짐과 교훈 등을 정리한 격언들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반상盤上의 말씀들은 인생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인생을 일깨우는 바둑 격언 10가지를 소개합니다.
1. 일수불퇴(一手不退)
바둑
헌법 1조 1항은 '일수불퇴'입니다. 한 번 놓은 돌은 절대 무를 수 없다는 뜻입니다. 돌을 바둑판에 내려놓는 순간, 다시 돌을
집어 다른 곳에 둘 수 없습니다. 무를 수 없는 건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선택해 발을 내딛었다면 내 길을 묵묵히 걸어야
합니다. 어떤 길이 더 좋은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것은 모두 '가지 않은 길'입니다. 혹여 잘못된 선택을 했다
해도 내가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2. 반외팔목(盤外八目)
바둑
격언 중에 '반외팔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둑을 직접 두는 사람보다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이 여덟 집 정도는 유리하다는
뜻입니다. 바둑판 앞에 있는 사람은 감정이나 승부욕에 휩쓸려 수의 변화를 냉정하게 보지 못합니다. 실제로 바둑을 두는 사람들은
이런 경험을 많이 합니다. 바둑 둘 때 가까이 들여다보면 보이지 않던 수가 바둑이 끝난 다음 복기할 때는 쉽게 보입니다. 이미
승패가 내 손을 떠나 마음이 평온해졌기 때문입니다. 고수들이 두는 바둑을 옆에서 구경하던 하수가 훈수하기도 합니다.
이 격언이 인생에 적용되는 경우 중의 하나가 연애입니다. 남의 연애를 보면 모두 뻔해 보입니다. 하지만, 정작 내가 연애를 할 때는 정신 못 차리고 허우적거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3. 남의 집이 커 보이면 바둑 진다
바둑은
상대보다 반집만 많아도 이기는 승부입니다. 굳이 욕심을 부려 많은 집 차이를 낼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바둑을 두다
보면 과욕 때문에 승부를 그르치는 일이 많습니다. 충분히 유리한 형세임에도 몇 칸 안 되는 남의 집을 깨러 들어갔다가 몽땅 망하는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바둑에서도 인생에서도 과욕은 언제나 금물입니다. 남의 것을 탐내다가는 내가 가진 것도 잃을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의 소중함을 알고 현재에 만족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4. 큰 집 먼저 짓는 사람이 진다
선작오십가자필패先作五十家者必敗.
'50집을 먼저 짓는 사람이 진다'는 뜻입니다. 바둑에서 50집은 큰 집입니다. 먼저 50집을 확보하면 절대 우세라고 판단하고
방심하게 됩니다. 방심하면 자만하기 쉽고, 자만하면 자꾸 상대에 양보하며 쉬운 길로 가게 됩니다. 반면 상대는 불리한 대국을
타개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합니다. 아차하는 순간에 국면이 뒤집힐 수 있습니다. 비슷한 격언으로 '대마 잡고 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일찍 상대방의 대마를 잡고 승리감에 도취해 있다가 역전패당하는 경우를 일컫는 말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반에
잘나간다고 방심하다가 거꾸러지는 경우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5. 잡고 싶은 반대편을 공격한다
비슷한
실력의 상대와 대국하면 상대방 말을 잡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바둑에서 상대 말을 공격할 때는 먼저 목표물의 반대쪽을
공격해 나의 세력을 형성해 놓은 다음, 목표물을 에워싸듯 공격하는 것이 요령입니다. 이는 현명한 처세술과 통합니다. 목표물을 향해
무조건 돌진하기보다 미리 주변에 밑밥을 깔아놓으면 원하는 것을 보다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병법에도 비슷한 말이 있는데, 바로 '성동격서聲東擊西'입니다. 동쪽에서 소리를 내고 서쪽에서 적을 친다는 뜻입니다.
6. 부득탐승(不得貪勝)
'부득탐승'은
당나라의 바둑 고수 왕적신王積薪이 정리했다고 전해지는 '위기십결圍棋十訣'의 첫 번째 항목입니다. '승리를 탐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바둑은 승리를 다투는 게임이므로 이기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그러나 너무 목적에만 집착하면 오히려 바둑을 그르칠 수
있습니다. 이기려는 마음이 지나치게 강하면 욕심에 눈이 멀어 정확한 수를 읽을 수 없습니다. 바둑에서 최선의 마음가짐은
평정심입니다.
7. 사소취대(捨小就大)
'작은
것은 버리고 큰 것을 취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둑을 둘 때 눈앞의 작은 이득을 탐내지 말고 대세를 보며 크게 움직여야
합니다. 말은 쉽지만 막상 바둑을 두다 보면 쉽지 않은 것이 바로 '사소취대'입니다. 작은 이익은 눈앞에 보이는 반면 큰 이익은
멀리 있어 얻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인생에서도 더 큰 그림을 보고 움직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8. 봉위수기(逢危須棄)
상대방이
강한 곳에서는 부담 되는 돌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바둑을 두다 보면 양곤마가 돼 쫓기는 경우도 있고, 미생마未生馬가 여러
개 생길 때도 있습니다. 작은 돌을 살리려다가 더 큰 대마를 죽이기보다는 아낌없이 돌을 버리고 다른 곳에서 만회하는 것이
좋습니다. 곤마를 살릴 수 있더라도 대가를 크게 치러야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걸 다 짊어지고 가려다간 어깨가 짓눌려 멀리 가지 못합니다. 감당할 수 없으면 기꺼이 포기하고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가벼운 걸음으로 새 출발을 할 수 있습니다. 버려야 할 때는 버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9. 동수상응(動須相應)
바둑판
위에 놓인 돌중에서 의미 없는 돌은 없습니다. 바둑판 위에 놓인 돌들은 이리저리 흩뿌려져 따로 노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한
수 한 수가 주변과 호응하며 저마다 의미와 중요성을 갖습니다. 착점 이후에 돌의 의미가 고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대국이
진행되면서 돌의 가치와 생명력이 시시각각 변합니다. 몇십 수 전에 놓았던 돌이 곤마를 살리는 요석要石이 되기도 하듯, 주변 환경에
따라 악수惡手와 좋은 수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동수상응'은 돌이 움직일 때는 주위의 돌과 호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반적인 국면을 살피면서 조화와 능률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수를 찾아야 합니다.
10.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
'내가
먼저 산 뒤 남을 죽이라'는 말입니다. 우선 내 말이 약하지 않은지, 상대로부터 반격당할 여지가 없는지 등을 꼼꼼히 따져봐야
합니다. 특히 상대를 공격할 때는 감정이 앞서기 쉬운데 이럴 때일수록 냉철하고 비판적으로 자신의 말부터 돌아봐야 합니다. 자기
말의 생사를 돌보지 않고 무리하게 공격하다가는 역습을 당해 망하기 십상입니다. 비슷한 말로 '공피고아(攻彼顧我)'가 있습니다.
상대방을 공격하려면 먼저 자신에게 허점이 없는가를 살피라는 뜻입니다. 반상에서도 세상에서도 내가 먼저 살아야 상대를 요리할 수
있습니다.
■ 스가랴서의 이름
스가랴서는 미래에 관한 책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은 선지자의 이름을 따라 ‘자카리아’(הירכז: ‘여호와께서 기억하시다’)이라고 했습니다.
70인역 성경(Septuagint)의 이름은 ‘자카리아스’(ΖΑΧΑΡΙΑΣ)입니다.
한글성경도 선지자의 이름을 따라 ‘스가랴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 스가랴서의 저자와 기록연대
스가랴는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슥 1:1)이라고 소개됩니다.
스가랴서의 기록연대는 주전 480년경으로 추정됩니다.
■ 스가랴서의 기록목적
기록목적을 요약하면, ① 포로에서 돌아온 자들의 성결한 생활요구, ② 성전건축을 위한 위로와 성공을 목적, ③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갖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 스가랴서의 주제와 중심사상
스가랴서의 주제는 ① ‘성결한 생활을 하자!’ ② ‘회개하자!’는 것입니다.
중심사상은 ① 메시야를 통한 참 성결과 ② 그의 통치하는 나라의 기다림 사상입니다.
2. 스가랴서의 본론(本論)
스가랴서는 ① 메시야 왕국에 대한 환상적 이상과 ② 금식 문제와 예루살렘의 회복내용, ③ 미래에 실현될 메시야의 오심과 백성들의 거절, ④ 반드시 다가올 메시야의 왕국과 다스림의 내용이 있습니다.
1장 1절로부터 6장 15절까지는 회개의 촉구(1:1-6)와 메시야 왕국에 대한 여덟 가지 환상(1:7-6:8), 그리고 구원을 가져오는 자(6:9-15)입니다.
7장 1절로부터 8장 23절까지는 금식문제와 이스라엘 회복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9장 1절로부터 14장 21절까지는 메시야 왕국에 대한 예언입니다.
첫째, 회개의 촉구와 여덟 가지 환상(1:1-6:15)
차례 구 절 환 상 의 미
1 1:7-17 홍마를 탄 자 백성의 재건
2 1:8-21 네 뿔과 네 공장 압제받을 심판
3 2:1-13 측량줄 하나님의 보호
4 3:1-10 여호수아의 정결 이스라엘의 정결
5 4:1-14 순금등대 하나님의 능력
6 5:1-4 날아가는 두루마리 개인의 죄와 심판
7 5:5-11 에바와 여인 없어질 민족의 죄
8 6:1-8 네 병거 열방의 심판
■ 1:1-6까지는 회개의 촉구
(1) 스가랴는 어느 때의 선지자입니까?
(2) 사람이 하나님께로 먼저 돌아갑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사람에게로 돌아오십니까?
(3) 이스라엘의 열조들은 어떠했습니까?
Q.T.를 위한 신앙적 질문 -- 당신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습니까?
■ 1:7-6:8까지는 여덟 가지 환상
(1) 하나님께서 유다를 향하여 노하신 지 얼마나 되었다고 했습니까?
(2) 두 번째 환상인 네 뿔과 네 명의 공장은 각각 무엇입니까?
(3) 혈기 있는 자들이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4) 3장 2절에 나오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는 무엇을 가리킵니까?
(5) 3장 9절에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6) 성전의 건축이 누구를 통하여 마쳐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까?
(7) 4장에 나오는(3, 11-14절) ‘두 감람나무’는 누구입니까?
(8) 날아가는 두루마리의 크기는 어떠했습니까? 두루마리는 무엇을 뜻합니까?
(9) 5장에 나오는 두 여인은 에바를 어디로 옮겨갑니까? ‘두 여인’은 누구이며, ‘에바’는 무엇입니까?
(10) 6장에 나오는 네 마리의 말들은 각각 어디로 향하여 나갑니까?
Q.T.를 위한 신앙적 질문 -- 당신은 환상을 본 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권능의 손길을 기다리면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까?
■ 6:9-15까지는 관을 쓰는 여호수아
(1) 여호와께서 스가랴에게 임하셔서 여호수아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씀하십니까?
(2) 12절에 “순(branch)이라 이름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3) 12절에 “자기 곳에서”라고 함은 어디를 말합니까?
(4) 15절에 “먼 데 사람”은 누구입니까?
Q.T.를 위한 신앙적 질문 -- 당신에게 하나님의 전(殿)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둘째, 네 편의 메시지(Messages) (7:1-8:23)
■ 7:1-7까지는 첫 번째 메시지
(1) 유다 백성들이 포로 된 칠십 년 동안 어느 달에 금식했습니까?
(2) 유다 백성들은 무엇을/누구를 위하여 금식했습니까?
Q.T.를 위한 신앙적 질문 -- 신앙의 삶을 살아가면서 금식을 해본 경험이 있습니까? 금식의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 7:8-14까지는 두 번째 메시지
(1) 여호와께서 유다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2)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이 불러도 듣지 아니하시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Q.T.를 위한 신앙적 질문 --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압니까? 그때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 8:1-17까지는 세 번째 메시지
(1) 2절에 하나님께서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신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2) 예루살렘 성읍 거리는 무엇으로 가득하겠습니까?
(3) 유다백성이 행할 일이 무엇입니까?
Q.T.를 위한 신앙적 질문 -- 하나님께서 당신을 복 주심을 믿습니까? 어떤 복을 받았습니까?
■ 8:18-23까지는 네 번째 메시지
(1) 금식의 절기가 어떤 절기로 바뀌었습니까?
(2) 많은 백성들과 강대한 나라들이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3) 열국 백성 열 명이 유다 사람 하나에게 무엇이라 말할 것입니까?
Q.T.를 위한 신앙적 질문 -- 교회생활을 하면서 당신은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셋째, 메시야 왕국에 대한 예언(9:1-14:21)
■ 9:1-12까지는 메시야의 임재
(1)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가 임한 곳은?
(2) 가사와 아스글론과 아스돗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은 무엇입니까?
(3) 시온에 임하실 왕은 어떤 분이십니까?
Q.T.를 위한 신앙적 질문 --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 중에 기다리고 있습니까? 당신이 기다리는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십니까? 기술해 보십시오.
Q.T.를 위한 신앙적 질문 -- 하나님께서 당신을 돌아보심을 믿습니까? 그것을 어떻게 아십니까?
■ 11:1-17까지는 메시야의 영광과 승리
(1) 4절의 ‘잡힐 양 떼’란 무엇입니까?
(2) 5절에 ‘산 자들’과 ‘판 자들’은 각각 누구입니까?
(3) 11장에 등장하는 두 개의 막대기는 각각 무엇입니까?
Q.T.를 위한 신앙적 질문 -- 고통이 올 때 당신은 이를 어떻게 견딥니까? 영원한 보호자요 목자이신 주님을 잊어버리고 좌절하지는 않습니까?
■ 12:1-13:6까지는 심판의 날에 관한 교훈
(1)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무엇이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까?
(2) 12장 11절에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 드림몬에 있던) 애통”이란 무엇입니까?
(3) 여호와의 (심판의) 날에 무엇을 끊으시겠다고 하십니까?
Q.T.를 위한 신앙적 질문 -- 하나님께 항상 성결함으로 나아갑니까? 주님의 날이 이름이 당신에게 기쁨입니까? 아니면 두려움입니까?
■ 13:7-9까지는 이스라엘 민족의 정화
(1) 하나님께서는 얼마의 사람을 남기겠다고 말씀하십니까?
(2) 그 남은 자를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신다고 약속하십니까?
Q.T.를 위한 신앙적 질문 -- 교회가 당신에게 구원의 방주입니까?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다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 14:1-21까지는 여호와의 날
(1) 여호와의 날에 여호와의 발이 어디에 서실 것입니까?
(2) 종말의 날이 언제 이를지 사람들이 알 수 있습니까?
(3) 열국 중에 남은 자가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지킬 절기는 무엇입니까?
(4) 여호와의 날에 말방울에까지 무엇이라고 기록될 것입니까?
Q.T.를 위한 신앙적 질문 -- 하나님의 구원이 미치는 영역은 어디까지입니까? 당신은 세상의 하찮은 것들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까?
3. 결론(結論)--스가랴서의 핵심적 교훈
스가랴서의 핵심적 교훈은, ① 성결한 교회와 교인이 되어야 하며, ② 메시야의 나라를 늘 사모해야 하며, ③ 미래에 대한 확신이 필요함을 교훈합니다.
*생활적용과 기도(祈禱)
1. 주님!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안에서 성결한 교회와 성도들 되게 하옵소서!
2. 주님! 우리로 소망 중에 주님의 나라가 도래할 것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3. 주님! 우리로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삶을 예비하는 성도들 되게 하옵소서!
*스가랴서가 예언하는 그리스도
1. 우리의 종(3:8; cf. 마가 10:45)
2. 우리의 순(3:8, 6:12; cf. 누가 1:78)
3. 우리의 중보자이시며 주님이신 제사장과 왕 (6:13; cf. 히 6:20-7:1, 7:25)
4. 공의로우신 우리의 구원(9:9; cf. 요한 14:6)
5. 겸손하신 왕(9:9; cf. 마태 21:4-5; 요한 12:14-16)
6. 우리들의 기반이신 모퉁이 돌(10:4; cf. 고전 3:11)
7.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말뚝(10:4; cf. 마태 11:28)
8. 우리의 방어자이신 싸우는 활(10:4; cf. 롬 8:37)
9. 은 삼십에 배반당한/팔린 목자 (11:12-13; cf. 마태 27:9)
10. 우리의 선물이신 은총의 영(12:10; cf. 엡 2:8-9; 고후 9:15)
11. 손이 찌른 바 됨(12:10; cf. 요한 19:37)
12. 우리를 정결케 하시는 샘(13:1; cf. 요한 15:3; 계시록 1:5)
13. 인성과 신성(13:7, 6:12; cf. 요한 8:40)
14. 우리를 지켜주시는 목자(13:7; cf. 시편 23:1, 3, 4)
15. 침을 당한 목자(13:7-9; cf. 마태 26:31; 마가 14:27)
16. 재림과 왕이 되심(14:5, 9; cf. 요한 10:16; 계시록 11:15, 21:27)
17. 우리의 숭배의 대상이 되시는 왕 만군의 여호와(14:16; cf. 골 1:18)
발음
[ Yehôvâh ] 어원 / 196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여호와(출 20:7, 레 24:13). 구약 성경 / 7020회 사용
* 1961. 하야(hâyâh) הָיָה
1. 있다, 2. 어떤 자에게 속하다, 3. 섬기다
발음
/ 하야[ hâyâh ] 관련 성경 / (장막을) 치다(창13:3), 임하다(창15:1, 수22:20), 계시다(창31:5), (싸우고)
있다(삿12:2), 섬기다(삼상2:11), 만나다(삼상6:9), 속하다(삼하9:9), 따르다(왕상16:21, 호3:3),
같다(시50:21), 두다(출25:15), 더하다(출9:3),성취하다(잠13:19), 이루다(겔21:7, 39:8),
지치다(단8:27), 얻다(슥8:10). 구약 성경 / 3549회 사용
'여호와의 날'이란 한 마디로 '여호와께서 역사의 어느 한 순간에 결정적으로 이 땅의 역사에 개입하셔서 악인을 멸하시고 의인 또는 여호와께 나아오는 자들에게 구원을 행하시는 역동적인 심판과 구원의 날' 을 말합니다.
여호와의 날이란 여호와가 심판의 주로 오시는 날을 말합니다. 여호와의 날에는 심판에 의하여 기쁨과 슬픔의 자리로 구분될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 시대에는 구약의 종말 사상으로 하나님 중심의 신앙과 삶을 버리고 각종 우상과 이방 신을 숭상하므로 그 백성들과 그 나라를 흔들어 다시 일으키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실현되는 날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현상의 주된 원인은 기름부음 을 받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들의 타락에 의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때마다 하나님은 그 시대를 깨우칠 새로운 선지자를 세워서 백성들에게 바른 길을 가도록 외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의 외침을 듣는 것이 복이 됩니다. 반면에 선지자의 외침을 듣지 않는다면 저주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듣기 좋은 설교를 좋아합니까? 아니면 꾸짖을지라도 잘못을 깨우치고 바른 길을 가도록 선포하는 설교를 좋아합니까? 진리의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이 없습니다. 문제는 그 하나님의 방향을 떠나 인간의 욕망에 사로잡혀 엉뚱한 곳에서 세속의 즐거움에 도취한 백성들과 더불어 함께 즐기는 거짓 선지자들을 가리켜 양의 탈을 쓴 이리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마음을 깨닫고 바르게 믿어 영생의 길을 걸으며 감사와 찬양과 평강과 기쁨의 삶을 날마다 즐기며 누릴 줄 아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것을 가장 귀한 것이라 생각하며 오늘도 평범한 하루가 내 삶에서 가장 좋은 최고의 날이 될 수 있도록 믿음으로 전진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교회에 대하여는 자비를 줄 것이며 교회의 대적자와 박해자들에게는 심판을 줄 것이라는 내용이 그 전반에 흐른다. 예루살렘을 치러 온
적국들의 파멸이 있은 후에(1-3절),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 은혜의 왕국이 설립된다(4-11절). 또한 예루살렘에서 적국들이
당하는 재앙과(12-15절), 전후의 열국 중에서 남은 백성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오고(16-19절), 모든 것이 아 거룩한 영광의
세계가 된다(20-21절).
[강 해]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죄악으로 인해 심판을 받았음을 밝히시면서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심판하시고 예루살렘을 회복시키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열국의 심판과 예루살렘의 구원은 장차 임하게 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영적교훈]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시다.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을 통치하시는 분으로 우리는 그분의 백성일 뿐이다. 우리의 삶과 목표와 가치관은
왕이신 하나님을 위해 설정되어야 한다. 옛 왕정 국가에서 나라의 주인은 왕이고 그 백성은 왕의 소유물이었다. 백성에게는 왕을
섬기고 충성을 다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영적 이스라엘에 속한 우리 신자는 바로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영적 왕국의 백성이다.
하나님을 위해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바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보장하신다. 눈동자와 같이 지키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외로움과 걱정 근심을 아시고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는 왕의 통치를 행사하신다.
왕으로 임하실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왕권을 배척한 것은 그들이 사람을 왕으로 세우던 때부터이다. 하나님께서 원래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계셨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이를 거부하고 자기들의 왕을 따로 옹립하였다. 그 후에 그 백성은 하나님을 왕으로
의지하지 않고 어떤 때에는 수리아에게, 어떤 때에는 애굽에게, 어떤 때에는 앗수르에게 의지하였다. 이런 일들은 하나님의 왕권을
무시한 행동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결국 바벨론에 잡혀 갔고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왕적 보호를 받지 못한 것이다.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 국가의 외로움 속에서 옛 하나님의 자비를 기억하게 되었다. 그들은 금식하며 애통해 하면서 하나님의
긍휼을 간청했다. 이스라엘 백성의 눈물과 회개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바벨론에서 건져내셨고 다시 그들의 왕 되신 관계를
회복하셨다. 이것은 신약 시대의 종말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실 것에 대한 예표이다. 이 이스라엘은 옛날의 구약의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택한 백성으로서의 영적 이스라엘을 의미한다. 즉, 옛날 이스라엘 민족의 왕이셨던 하나님은 이제
모든 택한 백성들 곧 성도들의 왕이 되시는 것이다.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라 함은 이 세상의 대종말에 하나님께서만
왕으로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때 이스라엘 민족은 교만한 선민 의식에 사로잡혀, 이방인들의 복음 접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택한 백성의 왕이심을 사도들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깨닫게 하시었고, 그 복음의
문을 세계 곳곳에 퍼지게 하셨다. 이제 구약에서 예언된 왕이신 하나님은 신약에 와서 성취된 것이다. 이것의 완전한 성취는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종말에 이루어질 것이다.
여호와의
날’ 이란 구약 선지서에 나타나는, 구약의 종말 사상을 반영하는 중요한 신학 용어이다. 암 5:18-20을 보면 분열 왕국
시대 후기 곧 B.C.8세기 중반경 아모스 선지자가 활동할 당시에 이미 이 ‘여호와의 날’의 개념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널리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구약 종말론 사상을 반영하는 ‘여호와의 날’ 사상은 동서고금의 모든 종말론이 그러하듯이 정치, 종교적 격변기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보다 상술하자면 분열 왕국 시대 말기에서B.C.722년의 북이스라엘의 멸망과 B.C.586년의 남유다 명망, 그리고
B.C.586-539년 사이의 바벨론 포수 그리고 포로 귀환시대 등 대략 B.C.8-5세기 사이를 배경으로 선지서들이 기록될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보편적으로 다음과 같은 중대한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먼저 종교적 관점에서 볼 때에 B.C.930년경 분열 왕국
시대가 개시된 이래 다소 정도의 차이는 있었으나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여호와 절대 유일사상을 버리고 각종 우상을 섬기는 패역의
역사를 끊임없이 일삼았다. 그리고 이러한 이스라엘 두 왕국의 백성들을 향하여 여호와는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심판의 경고를
끊임없이 보내셨다. 또한 정치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도 이스라엘 두 왕국의 백성들이 종교적인 타락을 거듭하던 시기와 때를 같이하여
근동 지역은 신흥 강대국 앗수르의 부상(浮上)을
시발로 하여 앗수르, 바벨론, 바사, 헬라, 로마 제국 등 대제국들(Great Empires)이 상호 연이어 발흥함으로써
B.C.8세기에서 멀리 A.D.수세기까지 소위 대제국 시대가 도래되어 연일 거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리게 되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유럽 및 근동 지역과 애굽 지역을 잇는 길목에 있었던 이스라엘은 그 소용돌이의 중심부에 들게 되었다.
이 길은 종교적, 정치적인 이유들로 인하여 이스라엘에는 종말론적 위기감이 크게 고조되었고 이와 관련하여 등장하게 된 구약의 종말 개념이 바로 ‘여호와의 날’ 이었던 것이다.
여호와의 날의 정의
‘여호와의 날’이란 한 마디로 ‘여호와께서 역사의 어느 한 순간에 결정적으로 이 땅의 역사에 개입하셔서 악인을 멸하시고 의인
또는 여호와께 나아오는 자들에게 구원을 행하시는 역동적인 심판과 구원의 날’ 을 가리키는 신학 용어이다.
이러한 구약적 종말론 용어인 이 ‘여호와의 날’ 의 개념을 이해 할 때 우리는 필히 다음 두 가지사실을 전제하여야 한다.
첫째, 구약 시대는 신약 시대와는 달리 아직 현 세상의 우주와 역사 전체가 궁극적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심판 종결되고 각각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사람과 천국의 축복에 동참할 사람으로 구분된 모든 인생들이 전혀 새로이 갱신된 우주 안에서 온전한 새 역사를
시작한다는, 범 우주적이고 최종적이요 그리고 단회적인 역사 대 종말에 대한 계시가 확립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여호와의 날’ 은 단회적 대종말 사건이 아니라 여호와가 이스라엘 및 그 주변 국가의 역사에 역동적으로 개입하시는 여러 날들을
통칭하여 가리키는 용어였다는 사실이다.
둘째, 구약 에언의 복합성에 따라 ‘여호와의 날’ 에 대한 예언들은 문맥에 따라서 각각 남과 북 이스라엘 왕국이 여호와의 심판으로
멸망 받던 날, 또는 반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억압하던 이방인들이 여호와의 심판을 받고 이스라엘은 포로에서 회복되는 날, 그리고 한
메시야가 와서 자신을 선민에게 승리와 평화를 가져와 줄 날 곧 신약적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 주 메시야 예수님의 초림 중 어느 한
날을 가리킬 수도 있었고, 이 세 가지 모두는 물론 심지어 세상 끝 날의 대종말 자체까지를 동시에 의미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욜 2:31, 슬 1:14-18, 슥 14:1-11).
한편
이와 같은 구약의 ‘여호와의 날’ 의 개념은 신약 시대에 이르러 역사 대종말 곧 범우주적이고도 최종적인 세상의 대종말에 대한
계시인 ‘주의 날’ 로 발전 된다. 이와 같은 구약의 ‘여호와의 날’ 의 신약의 ‘주의 날’ 로의 발전은 성경 계시의 점진성의 한
실례로서 전자가 후자의 전신 또는 예표(豫表)의 관계에 있다 하겠다. 참고로 두 가지를 다시 한 번 더 비교하자면 여호와의 날이
현재 역사 안에서 주로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으로 하여 반복적으로 일어난 여호와의 역동적 구원 행동을 가리켰다면 신약의 주의
날은 현 역사를 최종 종결하고 새로이 갱신될 새 시대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초역사적인 구원 행동을, 그리고 세계 만민 전체를 포괄한
단회적이고도 최종적인 여호와의 구원 행동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하겠다.
여호와 날의 양면성(兩面性)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여호와의 날’ 은 이 땅의 왜곡된 역사 현실을 그 역사의 현장에 여호와께서 종말론적으로 임재하사 일시에
극복하는 역동적인 말이었다. 따라서 이 날은 악인에게는 멸망의 심판이 행해지는 저주의 말이며, 동시에 의인 도는 회개하는
자에게는 구원과 회복이 주어지는 축복의 날이라는 양면성을 갖는다.
호
저주의 날
축복의 날
저주 내용
성경 구절
축복 내용
성경 구절
1
형벌과 보응이 임함
호 9:7
축복이 회복됨 암 9;11
2
땅이 황페하게 됨
욜 1:10-12
기쁨과 즐거움이 회복됨
욜 2:23
3
물질이 결핍됨
욜 1:16
성령 부음을 받음
욜 2:28
4
기쁜과 즐거움이 끊어짐
욜 1:16
꿈과 이상을 봄
욜 2:28
5
어둡고 캄캄함
욜 2:2,
암 5:18
구원을 얻음
욜 2:32,
미 7:18
6
불로 사름
욜 2:3
다시 긍휼을 베푸심
암 5:15
7
희생이 있음
습 1:8
만국으로 기업을 얻음
암 9;12
8
슬픔과 애통이 있음
습 1;14
순결함을 얻음
습 3:12-13
9
고통이 극심함
슬 1:15
평화와 번영을 누림
슥 8:12
10
극렬한 풀무불 같음
말 4:1
이방인들도 돌아와 구원 받음
미 4:5
여호와의 날의 의의
여호와께서
이 땅의 왜곡된 역사 현실에 적극적으로 임재하사 선악 간에 심판을 행하시고 의인 또는 당신의 백성을 위한 평화와 번영을 위한 새
질서를 구축해 주실 것을 대망하던 사상으로서 그것이 여호와에 의해 거듭 예언되어 왔고 또 이미 거듭하여 성취되어 왔으며 그
궁극적인 실체는 ‘주의 날’ 의 예언으로 승화되어 세상 끝 날의 대종말에서의 성취를 대망하고 있는 ‘여호와의 날’ 사상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눈앞에 펼쳐진 이 왜곡된 역사 현실과 그 안에서의 우리의 삶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마침내 대종말을 필히
그리고 분명히 맞을 것이라는 놀라운 사실 자체를 우리에게 새삼 각성시켜 준다. 즉 종말론적 구원과 심판의 날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강력하게 제시해 준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처럼 매 순간 다가오는 ‘여호와의 날’ 에 근거하여 종말론적 위로와 경고를 동시에 받게 된다. 먼저 우리는 이
‘여호와의 날’ 을 통하여 이 질고로 가득한 왜곡된 현실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우리 여호와에 의해 궁극적으로 초극되고 의인과
회개하는 자를 위한 새 세상이 필히 올 것을 기대하며 위로와 소망을 갖는다. 동시에 여호와의 날은 악인들의 멸망을 필연적으로
동반할 것이며 단순히 여호와를 아는 자가 아니라 다만 그 분께 참으로 순복하고 회개한 자에게만 구원이 주어질 것이며 오히려
여호와를 머리로만 알고 입으로만 섬기던 자들에게는 더욱 더 큰 심판이 주어지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나의 자신을 살피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여호와의 공의와 사랑의 오묘한 조화가 결정적으로 동시에 집행되어 천국 구언과 지옥 심판이 일시에 실현 될
이 크고도 두려운 날을 기억하면서 실로 매 순간을 여호와의 심판 보좌 앞에 서는 각오로 살아야 하겠다는 소위 실존론적의 종말신앙(實存論的 終末信仰) 을 결단하게 되는 것이다.
“ 평강의 여호와가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샘(4726) 마코르(mâqôwr) מָקוֹר
1. 샘, 2. 우물, 3. 근원
발음
/ 마코르[ mâqôwr ] 어원 / 697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산혈(레 12:7), 근원(레 20:18, 시 68:26, 렘 17:13), 원천(시 36:9), 샘(잠 5:18, 렘 51:36, 슥 13:1). 구약 성경 / 18회 사용
웅덩이(3849) 로그( lôg) לֹג
1. 깊은 구멍, 2. 액체의 최소 측정단위 ‘록’, 3. 랍비들의 주장에 따르면 한 ‘록’은 여섯 개의 달걀 부피에 해당되는 한 ‘힌’의 1/12이라고 한다.
발음
/ 로그[ lôg ] 어원/ ‘깊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록(레 14:10, 21, 15) 구약 성경 / 5회 사용
웅덩이(4113) 마라모라(mahămôrâh) מַהֲמֹרָה
1. 시내, 2. 웅덩이, 3. 시편 140:10.
발음
/ 마하모라[ mahămôrâh ] 어원 / 불확실한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웅덩이(시 140:10). 구약 성경 / 1회 사용
-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은, 비유적 표현이니, 그리스도의 속죄의 보혈을 믿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를 가리킨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는 자마다 사죄를 받나니, 그 역사는 "씻는 샘"과 같다. 요 7:38, 4:14 참조.
요한복음 7:38-39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한복음 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전국을 대표한다.
"열리리라"라는 말은, 히브리 원어로 이호예 니프다라고 하는데, 계속하여 열려 있음을 가리킨다(Pusey).
예레미야 2:13 내 백성이 두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웅덩이(877) 보르(Bô’r) בֹּאר
1. 저수지, 2. 수조, 3. 물통
발음
/ 보르[ Bô’r ] 어원 / 87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웅덩이(렘 2:13). 구약 성경 / 5회 사용
생수의 근원...웅덩이를 판 것
- 이스라엘의 두 가지 심각한 죄악성이 지적되고 있다. 하나는 생수의 근원되시는 여호와를 버린 것이요, 다른 하나는 물을 담지 못할 터진 웅덩이를 판 것이다. 성경에서 여호와의 구원 혹은 하나님(그리스도)께서 생수에 비유된 예는 종종 나타난다(사 12:3; 55:1; 요 4:10-14; 7:37-39). 그리고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물이 귀했으므로 수원(水源)을 확보해 놓기 위해 저수지를 만들거나 빗물을 모아두기 위해 웅덩이에 석회를 발랐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그 석회에 균열이 가서 속에 든 물이 새어 나가 버리는 경우가 흔했다. 본문에서 유다 백성이 스스로
웅덩이를 팠다는 것은 결국 터져 버리고 말, 즉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우상을 섬긴 사실을 가리킨다.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
12장에서 다윗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에 대하여 소개했습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성령을 부어주실 것을
요엘 선지자도 예언하였습니다. 그 예언대로 오순절 성령이 임하게 되자 그들이 찌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애통하며 은혜와
용서를 구하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애통이 어떤 애통이었습니까? 독자 외아들을 잃은 자의 애통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자식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드리라고 하였을 때에 아브라함은 약속의 자녀를 자기 손으로 죽어야 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찌른바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애통하기를 독자를 잃어버린 부모의
심정으로 애통합니다. 그 애통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을 버리시는 그 애통의 마음을 성령을 통하여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애통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책과 다큐멘터리를 보면 그들이 가족을 잃고서 애통하는 것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오히려 주님을 더 사랑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놀랍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를 잃었는데도 그 애통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그를 죽인 자들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마음들은 주님께서 부어주셔서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이 임한 자들의 모습이라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원통하다고
여기면서 억울해 하는 모습과 전혀 다른 차원의 애통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의 모습을 비추어보면 도대체
나는 무엇으로 애통하고 있는가를 돌아보면 한심스러운 모습입니다. 부디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시기를 구할 뿐입니다. 또한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으로 씻겨달라고 할 수밖에 없는 모습입니다.
13:1절에서 ‘그 날’입니다. 선지자들이 계속하여 예언한 그 날입니다. 그 날에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신다는 내용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성령이 임하심을 통하여 주어진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은 동일한 그 날의 약속이 어떻게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리게 되는 가를 보고자 합니다.
일반적으로
씻는다는 것은 더러움을 씻는 것을 말합니다. 서울대 의대의 어느 학생이 우리나라의 통치자들의 건강에 대하여 박사논문을 썼습니다.
조선시대의 임금들부터 그들의 건강을 조사하였는데 조선시대에 의학의 한계만이 아니라 불결한 생활환경으로 질병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신과 같은 대접을 받던 임금이 각양 좋은 것을 먹고 좋은 옷을 입고서도 잘 씻지 않아서 각종 종기나 부스럼이 낫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너무 많이 씻어서 탈이 날 정도입니다만 씻는다는 것은 몸의 청결문제만이 아니라 신들에게 정성을 바칠 때에 제의적인 면에서도
중요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조상들도 신에게 정성을 빌 때에 목욕재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약에서는 씻는 것에 대하여 어떤
규례가 주어져 있습니까?
민수기
8:5-8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6.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취하여 정결케 하라 7. 너는
이같이 하여 그들을 정결케 하되 곧 속죄의 물로 그들에게 뿌리고 그들로 그 전신을 삭도로 밀게 하고 그 의복을 빨게 하여 몸을
정결케 하고 8. 또 그들로 수송아지 하나를 번제물로, 기름 섞은 고운 가루를 그 소제물로 취하게 하고 그 외에 너는 또 수송아지
하나를 속죄 제물로 취하고.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를 대신하여 레위지파가 하나님께 대신 드려집니다. 그래서 레위인을 정결하게 하는데
속죄의 물을 뿌려서 정결하게 하고 또 수송아지의 번제물을 취하여 속죄 제물로 취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려지는 사람을 속죄의 물을 뿌림과 짐승의 피 뿌림이 함께 동반이 되는 것입니다. 민수기 19장에서도 각종
부정하게 된 자들이 정결하게 하는 물을 뿌려서 정함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람들이 목욕재계한다고 하여도 죄를
씻을 길은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의 현장에서 유출 병이 있는 것처럼 계속하여 죄가 줄줄 새 나오는 사람인데 무엇으로
씻을 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선지자들은 장차 자신들의 죄와 더러움과 부정함을 씻어줄 그 날을 고대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샘물이 터져 나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임하게 됨으로 일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심으로 그 찌른 자를 보면서
애통하여 회개하게 됨으로 죄가 사함을 받아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에스겔
36:16-31 이스라엘 족속에 그 땅을 더럽혔는데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의 부정함같이 더럽혔다고 합니다.
이러한 부정이란 우상숭배로 가득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갑니다. 그러나 잡혀간 그곳에서 다시 구원하여
내시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더럽힌 하나님의 자기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시는데 맑은 물을 뿌려서 정결하게 하고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우상 섬김에서 깨끗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로 씻는 것이 아니라 새 영을 그 마음속에 넣어주시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성령과 물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47장에서는 성전 동문에서 물이 스미어 나오는데 그 물이 발목, 무릎,
허리,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 되어서 흐릅니다. 그 강물이 가는 곳마다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물이 물이 아니라 성령임을
우리는 성령이 임하게 된 자들이기에 이미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4:13-14절입니다.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사마리아의 우물가에서 한 여인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이 판 우물을 마셔도 다시 목마르지만 예수님이 주시는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는 목마르지 아니하다고
하셨습니다. 이 물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7:37-39절입니다.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생수의 강이 흘러 나는 것은
성령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일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에서 각종 죄와 더러움과 부정함을 씻어야 한다고 하니 율법적 규례를 따라 씻는 것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방법으로
지키기 위하여 장로들의 유전까지 보태어서 음식을 먹을 때에 반드시 손을 씻고 먹게 한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부정함과 더러움을 씻는 그 행위를 가지고 또 다란 자기 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씻지 않고 먹는 자들을 정죄하였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15장에 보시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따집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아니하고 음식을 먹는 것은 장로들의
유전을 어긴다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너희는 어찌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고 되물으십니다. 그러면서 고르반
사상을 책망하시고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마음은 멀다고 합니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서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고 하였습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고 예언한 대로 예수님이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고 자기들이 평소에 지켜오던 씻는 것을 포기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바로 눈앞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터져 나오는데도 그것을 모르고서 그 생수를 버리고 자기들이 물을 보관할 웅덩이를 만든
것입니다. 예레미야 2:13절입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치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죄란 생수의 근원을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하지 못할 터진 웅덩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죄악인 것입니다. 스스로 웅덩이를 만들어 그곳에 자기들이 마실 물을 길어 놓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각종 율법지킴의 자기 의들을 채워 넣은 것입니다. 모세로부터 받은 것이니 그 웅덩이에 얼마나 오랫동안 모아둔
것이었겠습니까? 인도의 시골마을을 가보니 마을마다 웅덩이 들이 많았습니다. 우기 철에 비를 가두어 두고서는 일 년 동안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그 웅덩이에서 목욕 설거지 빨래를 다 처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물이 걸쭉해질 정도입니다.
페인티드
베일이라는 영화를 보면 영국인 병리학자가 중국에 콜레라가 번지는 곳으로 들어갑니다. 아내의 불륜을 견디지 못하여 선택한 일이기도
합니다만 그곳에서 우물과 강물을 현미경으로 조사하여 오염되었다고 먹지 못하게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물을 먹으려고
고집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의 눈에는 오염된 물임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과연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생수를 제공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마시고 마셔도 갈증만 더하는 세상의
욕망이라는 물을 공급하고 있는 것입니까? 온 세상을 둘러보아도 생수를 찾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양식이 없어서 주림이
아니고 마실 물이 없어서 갈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아모스 선지자가 외친 것처럼 지금도 그러합니다.
성령이
임한 사람은 오늘 이 말씀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죄와 더러움에서 씻어주실 영원한 샘물이 되심을 믿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만든 웅덩이를 의지 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의 공로를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늘 씻음을 받아야 하는 것임을 알기 때문에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 받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죄와 더러움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씻어짐을 성령이 임하여 믿게 된 자들은 영원한 생명의 샘을 마시는 사람들입니다.
2-6절입니다.
그 날에, 즉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리는 그 날에 우상의 이름을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 거짓 예언자들도 정체가 다
드러나서 부끄러워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황홀경 상태에서 몸에 상처를 내면서 주술적인 짓을 한 것을 숨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선지자인 것처럼 털옷을 입은 일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 세상은 거짓 선지자들이 수도 없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날이란 진행 중입니다. 이미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렸지만 거짓 선지자들이 다 사라지기까지는 예수님의 재림이 남아
있습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영적인 분별력을 갖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죄와 더러움을 영원히 씻는 샘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임을 성령을 통하여 날마다 넘쳐 나기를 소원합니다.
"그 날(one that day)"은 이스라엘의 원수들인 열국이 패망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그 날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에게는 도리어 축복의 날이요 사죄의 날이요 회복의 날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죄와 더러움을 씻을 수 있는 샘을 여시기 때문입니다. 죄는 세상 그 어디에서도 해결할 수 없고 씻을 수 없습니다.
세상의 법과 재판은 완전치도 못하지만 현상적이고 피상적인 부분만 문제 삼을 뿐 양심과 영혼의 더러움은 전혀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이사야 12:2-3).
"샘물과 같은 보혈은 주님의 피로다 보혈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정하게 되겠네 정하게 되겠네 보혈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저 도적 회개하고서 보혈에 씻었네 저 도적 같은 이 몸도 죄 씻기 원하네 죄 씻기 원하네 죄
씻기 원하네 저 도적 같은 이 몸도 죄 씻기 원하네."
주님의 보혈로 모든 죄와 허물과 더러움을 깨끗이 씻으십시오. 전신을 목욕한 자도 먼지 많은 세상에 나가 살면 다시
손발이 더러워집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3:9-10).
샘물은 고여 있는 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롭게 솟아나는 물입니다.
주님의 보혈도 골고다의 십자가로부터 마지막 재림 때까지 끊임없이 솟아나 우리의 죄와 모든 더러움을 깨끗케 하실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먼저 간 성도들과 천사들은 다 거룩한 모습으로, 모든 더러움이 다 씻긴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천국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계 15:6).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계 19:8).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계 19:14).
우리가 왜 반드시 <죄와 더러움>을 보혈의 샘에서 씻어야 할까요?
천국의 성도들, 천사들, 천군들은 왜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있을까요?
주님, 이 세상에는 샘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목욕탕, 사우나장, 찜질방도 많아 누구나 쉽게 씻고 샤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샘으로는 저희의 죄와 영혼의 더러움을 씻어내지는 못합니다. 반드시 주님의 보혈에 씻어야 정결케 됩니다.
부디 저희로 하여금 십자가 아래로 나아가게 하사 샘물 같은 보혈에 저희의 모든 허물을 씻게 해주시옵소서. 앞서간 성도들은 천국에서
다 세마포 옷을 입고 있음을 기억하게 하사 늘 손발을 씻듯 자신의 영혼을 깨끗하게 관리할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여호와의 날의 정의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그 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너의 중에서 나누이리라.
A day of the LORD is coming when your plunder will be divided among you.
여호와의 날(Day of the Lord. 욤 아도나이. yôwm Yehôvâh .יְהֹוָהיוֹם
발음
[ Yehôvâh ] 어원 / 196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여호와(출 20:7, 레 24:13). 구약 성경 / 7020회 사용
* 1961. 하야(hâyâh) הָיָה
1. 있다, 2. 어떤 자에게 속하다, 3. 섬기다
발음
/ 하야[ hâyâh ] 관련 성경 / (장막을) 치다(창13:3), 임하다(창15:1, 수22:20), 계시다(창31:5), (싸우고)
있다(삿12:2), 섬기다(삼상2:11), 만나다(삼상6:9), 속하다(삼하9:9), 따르다(왕상16:21, 호3:3),
같다(시50:21), 두다(출25:15), 더하다(출9:3),성취하다(잠13:19), 이루다(겔21:7, 39:8),
지치다(단8:27), 얻다(슥8:10). 구약 성경 / 3549회 사용
'여호와의 날'이란 한 마디로 '여호와께서 역사의 어느 한 순간에 결정적으로 이 땅의 역사에 개입하셔서 악인을 멸하시고 의인 또는 여호와께 나아오는 자들에게 구원을 행하시는 역동적인 심판과 구원의 날' 을 가리키는 신학 용어이다
여호와의 날이란 여호와가 심판의 주로 오시는 날을 말합니다. 여호와의 날에는 심판에 의하여 기쁨과 슬픔의 자리로 구분될 것입니다.
교회에 대하여는 자비를 줄 것이며 교회의 대적자와 박해자들에게는 심판을 줄 것이라는 내용이 그 전반에 흐른다. 예루살렘을 치러 온
적국들의 파멸이 있은 후에(1-3절),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 은혜의 왕국이 설립된다(4-11절). 또한 예루살렘에서 적국들이
당하는 재앙과(12-15절), 전후의 열국 중에서 남은 백성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오고(16-19절), 모든 것이 아 거룩한 영광의
세계가 된다(20-21절).
[강 해]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죄악으로 인해 심판을 받았음을 밝히시면서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심판하시고 예루살렘을 회복시키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열국의 심판과 예루살렘의 구원은 장차 임하게 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영적교훈]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시다.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을 통치하시는 분으로 우리는 그분의 백성일 뿐이다. 우리의 삶과 목표와 가치관은
왕이신 하나님을 위해 설정되어야 한다. 옛 왕정 국가에서 나라의 주인은 왕이고 그 백성은 왕의 소유물이었다. 백성에게는 왕을
섬기고 충성을 다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영적 이스라엘에 속한 우리 신자는 바로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영적 왕국의 백성이다.
하나님을 위해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바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보장하신다. 눈동자와 같이 지키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외로움과 걱정 근심을 아시고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는 왕의 통치를 행사하신다.
왕으로 임하실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왕권을 배척한 것은 그들이 사람을 왕으로 세우던 때부터이다. 하나님께서 원래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계셨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이를 거부하고 자기들의 왕을 따로 옹립하였다. 그 후에 그 백성은 하나님을 왕으로
의지하지 않고 어떤 때에는 수리아에게, 어떤 때에는 애굽에게, 어떤 때에는 앗수르에게 의지하였다. 이런 일들은 하나님의 왕권을
무시한 행동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결국 바벨론에 잡혀 갔고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왕적 보호를 받지 못한 것이다.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 국가의 외로움 속에서 옛 하나님의 자비를 기억하게 되었다. 그들은 금식하며 애통해 하면서 하나님의
긍휼을 간청했다. 이스라엘 백성의 눈물과 회개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바벨론에서 건져내셨고 다시 그들의 왕 되신 관계를
회복하셨다. 이것은 신약 시대의 종말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실 것에 대한 예표이다. 이 이스라엘은 옛날의 구약의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택한 백성으로서의 영적 이스라엘을 의미한다. 즉, 옛날 이스라엘 민족의 왕이셨던 하나님은 이제
모든 택한 백성들 곧 성도들의 왕이 되시는 것이다.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라 함은 이 세상의 대종말에 하나님께서만
왕으로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때 이스라엘 민족은 교만한 선민 의식에 사로잡혀, 이방인들의 복음 접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택한 백성의 왕이심을 사도들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깨닫게 하시었고, 그 복음의
문을 세계 곳곳에 퍼지게 하셨다. 이제 구약에서 예언된 왕이신 하나님은 신약에 와서 성취된 것이다. 이것의 완전한 성취는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종말에 이루어질 것이다.
여호와의
날’ 이란 구약 선지서에 나타나는, 구약의 종말 사상을 반영하는 중요한 신학 용어이다. 암 5:18-20을 보면 분열 왕국
시대 후기 곧 B.C.8세기 중반경 아모스 선지자가 활동할 당시에 이미 이 ‘여호와의 날’의 개념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널리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구약 종말론 사상을 반영하는 ‘여호와의 날’ 사상은 동서고금의 모든 종말론이 그러하듯이 정치, 종교적 격변기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보다 상술하자면 분열 왕국 시대 말기에서B.C.722년의 북이스라엘의 멸망과 B.C.586년의 남유다 명망, 그리고
B.C.586-539년 사이의 바벨론 포수 그리고 포로 귀환시대 등 대략 B.C.8-5세기 사이를 배경으로 선지서들이 기록될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보편적으로 다음과 같은 중대한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먼저 종교적 관점에서 볼 때에 B.C.930년경 분열 왕국
시대가 개시된 이래 다소 정도의 차이는 있었으나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여호와 절대 유일사상을 버리고 각종 우상을 섬기는 패역의
역사를 끊임없이 일삼았다. 그리고 이러한 이스라엘 두 왕국의 백성들을 향하여 여호와는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심판의 경고를
끊임없이 보내셨다. 또한 정치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도 이스라엘 두 왕국의 백성들이 종교적인 타락을 거듭하던 시기와 때를 같이하여
근동 지역은 신흥 강대국 앗수르의 부상(浮上)을
시발로 하여 앗수르, 바벨론, 바사, 헬라, 로마 제국 등 대제국들(Great Empires)이 상호 연이어 발흥함으로써
B.C.8세기에서 멀리 A.D.수세기까지 소위 대제국 시대가 도래되어 연일 거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리게 되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유럽 및 근동 지역과 애굽 지역을 잇는 길목에 있었던 이스라엘은 그 소용돌이의 중심부에 들게 되었다.
이 길은 종교적, 정치적인 이유들로 인하여 이스라엘에는 종말론적 위기감이 크게 고조되었고 이와 관련하여 등장하게 된 구약의 종말 개념이 바로 ‘여호와의 날’ 이었던 것이다.
여호와의 날의 정의
‘여호와의 날’이란 한 마디로 ‘여호와께서 역사의 어느 한 순간에 결정적으로 이 땅의 역사에 개입하셔서 악인을 멸하시고 의인
또는 여호와께 나아오는 자들에게 구원을 행하시는 역동적인 심판과 구원의 날’ 을 가리키는 신학 용어이다.
이러한 구약적 종말론 용어인 이 ‘여호와의 날’ 의 개념을 이해 할 때 우리는 필히 다음 두 가지사실을 전제하여야 한다.
첫째, 구약 시대는 신약 시대와는 달리 아직 현 세상의 우주와 역사 전체가 궁극적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심판 종결되고 각각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사람과 천국의 축복에 동참할 사람으로 구분된 모든 인생들이 전혀 새로이 갱신된 우주 안에서 온전한 새 역사를
시작한다는, 범 우주적이고 최종적이요 그리고 단회적인 역사 대 종말에 대한 계시가 확립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여호와의 날’ 은 단회적 대종말 사건이 아니라 여호와가 이스라엘 및 그 주변 국가의 역사에 역동적으로 개입하시는 여러 날들을
통칭하여 가리키는 용어였다는 사실이다.
둘째, 구약 에언의 복합성에 따라 ‘여호와의 날’ 에 대한 예언들은 문맥에 따라서 각각 남과 북 이스라엘 왕국이 여호와의 심판으로
멸망 받던 날, 또는 반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억압하던 이방인들이 여호와의 심판을 받고 이스라엘은 포로에서 회복되는 날, 그리고 한
메시야가 와서 자신을 선민에게 승리와 평화를 가져와 줄 날 곧 신약적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 주 메시야 예수님의 초림 중 어느 한
날을 가리킬 수도 있었고, 이 세 가지 모두는 물론 심지어 세상 끝 날의 대종말 자체까지를 동시에 의미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욜 2:31, 슬 1:14-18, 슥 14:1-11).
한편
이와 같은 구약의 ‘여호와의 날’ 의 개념은 신약 시대에 이르러 역사 대종말 곧 범우주적이고도 최종적인 세상의 대종말에 대한
계시인 ‘주의 날’ 로 발전 된다. 이와 같은 구약의 ‘여호와의 날’ 의 신약의 ‘주의 날’ 로의 발전은 성경 계시의 점진성의 한
실례로서 전자가 후자의 전신 또는 예표(豫表)의 관계에 있다 하겠다. 참고로 두 가지를 다시 한 번 더 비교하자면 여호와의 날이
현재 역사 안에서 주로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으로 하여 반복적으로 일어난 여호와의 역동적 구원 행동을 가리켰다면 신약의 주의
날은 현 역사를 최종 종결하고 새로이 갱신될 새 시대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초역사적인 구원 행동을, 그리고 세계 만민 전체를 포괄한
단회적이고도 최종적인 여호와의 구원 행동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하겠다.
여호와 날의 양면성(兩面性)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여호와의 날’ 은 이 땅의 왜곡된 역사 현실을 그 역사의 현장에 여호와께서 종말론적으로 임재하사 일시에
극복하는 역동적인 말이었다. 따라서 이 날은 악인에게는 멸망의 심판이 행해지는 저주의 말이며, 동시에 의인 도는 회개하는
자에게는 구원과 회복이 주어지는 축복의 날이라는 양면성을 갖는다.
호
저주의 날
축복의 날
저주 내용
성경 구절
축복 내용
성경 구절
1
형벌과 보응이 임함
호 9:7
축복이 회복됨 암 9;11
2
땅이 황페하게 됨
욜 1:10-12
기쁨과 즐거움이 회복됨
욜 2:23
3
물질이 결핍됨
욜 1:16
성령 부음을 받음
욜 2:28
4
기쁜과 즐거움이 끊어짐
욜 1:16
꿈과 이상을 봄
욜 2:28
5
어둡고 캄캄함
욜 2:2,
암 5:18
구원을 얻음
욜 2:32,
미 7:18
6
불로 사름
욜 2:3
다시 긍휼을 베푸심
암 5:15
7
희생이 있음
습 1:8
만국으로 기업을 얻음
암 9;12
8
슬픔과 애통이 있음
습 1;14
순결함을 얻음
습 3:12-13
9
고통이 극심함
슬 1:15
평화와 번영을 누림
슥 8:12
10
극렬한 풀무불 같음
말 4:1
이방인들도 돌아와 구원 받음
미 4:5
여호와의 날의 의의
여호와께서
이 땅의 왜곡된 역사 현실에 적극적으로 임재하사 선악 간에 심판을 행하시고 의인 또는 당신의 백성을 위한 평화와 번영을 위한 새
질서를 구축해 주실 것을 대망하던 사상으로서 그것이 여호와에 의해 거듭 예언되어 왔고 또 이미 거듭하여 성취되어 왔으며 그
궁극적인 실체는 ‘주의 날’ 의 예언으로 승화되어 세상 끝 날의 대종말에서의 성취를 대망하고 있는 ‘여호와의 날’ 사상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눈앞에 펼쳐진 이 왜곡된 역사 현실과 그 안에서의 우리의 삶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마침내 대종말을 필히
그리고 분명히 맞을 것이라는 놀라운 사실 자체를 우리에게 새삼 각성시켜 준다. 즉 종말론적 구원과 심판의 날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강력하게 제시해 준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처럼 매 순간 다가오는 ‘여호와의 날’ 에 근거하여 종말론적 위로와 경고를 동시에 받게 된다. 먼저 우리는 이
‘여호와의 날’ 을 통하여 이 질고로 가득한 왜곡된 현실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우리 여호와에 의해 궁극적으로 초극되고 의인과
회개하는 자를 위한 새 세상이 필히 올 것을 기대하며 위로와 소망을 갖는다. 동시에 여호와의 날은 악인들의 멸망을 필연적으로
동반할 것이며 단순히 여호와를 아는 자가 아니라 다만 그 분께 참으로 순복하고 회개한 자에게만 구원이 주어질 것이며 오히려
여호와를 머리로만 알고 입으로만 섬기던 자들에게는 더욱 더 큰 심판이 주어지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나의 자신을 살피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여호와의 공의와 사랑의 오묘한 조화가 결정적으로 동시에 집행되어 천국 구언과 지옥 심판이 일시에 실현 될
이 크고도 두려운 날을 기억하면서 실로 매 순간을 여호와의 심판 보좌 앞에 서는 각오로 살아야 하겠다는 소위 실존론적의 종말신앙(實存論的 終末信仰) 을 결단하게 되는 것이다.
“ 평강의 여호와가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스가랴 13장은 예루살렘의 회복을 예언하고 있스니다. 그러나 이런 이스라엘의 영적 의미를 회복하실 분은 정치적인 메시야가
아니라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야이시라는 것을 분명하게 암시합니다. 힘없는 순한 양처럼 인간의 모든 질고와 고통을 홀로 감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온 몸의 피와 물과 진액을 흘리신 그리스도의 고난은 오직 예루살렘을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그를 따르던 수많은 무리들은 흩어졌지만 그리스도의 삶이 영적 회복을 이루기 위한 귀중한 교훈이라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힘없이 몰락한 종교 지도자의 최후가 아니라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영적 싸움의 승리라고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이제부터 우리는 영적 이스라엘에 속하는 신령한 복을 누리게 되었으며 영원한 하늘나라의 소망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들도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완벽한 은혜의 선물입니다. 따라서 날마다 계속되는 영적 전쟁의 싸움터에서 패배자가 아니라 승리자가 될 것을 기대하며 오늘도 승리의 개선가를 부를 수 있는 믿음의 장부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발음
[ tachănûwn ] 어원 / 260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간구함(대하 6:21, 시 28:2, 86:6, 슥 12:10), 간구(시 116:1, 단 9:17), 기도(단 9:23). [동] 구하다(잠 18:23) 구약 성경 / 18회 사용
간구하는 심령(Spirit of supplication)
은총의 막대기가 끊어졌고 연합의 막대기마저 끊어져 버린 절망적인 상태에서 스가랴 12장은 새로운 소망을 위한 말씀으로 선포됩니다. 하나님은 하늘을 펴시고 땅을 세우셨고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호모 루아흐(Homo Ruach)"라고 정의 합니다. '호모 루아흐'는 "영의 사람"이란 뜻입니다.
사람은 심령(영, spirit)을 갖고 태어난 존재이므로 영의 자리에 있어야 할 존재가 그 자리에 없다면 삶은 헛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세상의 가치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더 좋은 집과 더 좋은 자동차와 더 좋은 옷과 더 좋은 음식과 더 좋은 환경을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영의 자리에 앉아야 할 주인이 없는 사람을 성경은 어리석은 부자라고 합니다. 거지 나사로의 삶과 부자의 호화로운 날마다의 잔치 자리와 같은 삶을 비교하면 누구나 부자의 삶을 선호합니다. 그런데 성경의 가르침은 거지 나사로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서 만족한 자리를 차지하였지만 부자는 뜨거운 불 가운데서 고통을 받으면 거지 나사로에게 손가락 끝에 물 한방울만 찍어서 마시게 하라고 애원합니다.
믿음의 사람이란 이 땅의 가치에 붙잡혀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비록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잡을 수 없지만 죽음 이후에 펼쳐질 그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세속의 가치에 시달림을 받지 않고 살아가는 지혜라고 하겠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으로 세상의 길잡이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구약의 메시야는 어떻게 예언되었을까? 아담의 타락직후 창세기 3:15에서부터 시작된 메시야에 관한 예언은 무려
350가지 이상이나 된다. 그런데 메시야의 예언은 크게 2가지로서, 영광의 왕으로 오실 메시야와 수난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야 예언이
있다. 그렇다면 고난받는 메시야에 관한 예언은 어디에 나오는가? 그것은 시편 22편, 이사야 53장과 더불어 스가랴 12~13장에
나온다. 그렇다면 스가랴서에 나오는 메시야의 수난예언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메시야의 수난과 더불어 반드시
알아야 할 또하나의 사건을 발견할 것이다.
구약성경에서는 메시야의 수난(고난)에 관한 예언이 그리 많지 않다.
이사야 53장과 시편 22편에 대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메시야의 수난에 관한 예언이 스가랴서에도 나온다는 것은 매우 놀랍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350가지의 메시야예언 중에서 영광스런 메시야 혹은 왕이신 메시야에 관한 예언은 참으로 많지만, "배척받는
메시야 혹은 찔림받는 메시야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 버림받은 메시야"에 관한 예언은 거의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스가랴서 12~13장에 나오는 메시야의 수난예언과 더불어 성령강림예언과 회개의 확산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스가랴 14장 가운데 스가랴 12~13장의 위치는?
스가랴서는 크게 스가랴가 젊었을 때에 본 환상과 벧엘인들의 금식질문(1~8장. B.C.520~518년)과 그가 늙었을 때에 받은 메시야의 예언들(9~14장, B.C.480~470년)로 나눠볼 수 있다.
그중에서 메시야의 공생애에 대한 예언은 스가랴 9장부터 13장에 집중되어
있다. 특히 스가랴에 나오는 메시야의 예언은 첫째, 메시야가 겸손하여서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입성할 것(9:9). 둘째, 어느 지파의 후손으로 올 것인지(10:4~6) 셋째, 어떤 역할을 감당할
것인지(11:4)
그 중에서도 스가랴 12장~13장에는 메시야의 수난과 성령강림 그리고 그 후에 있을 거국적인
회개운동과 성령께서 오셔서 사람을 회개케 하실 때에 나타나는 3가지 증상에 대해서 소상하게 언급한다.
말세의 종말론적인 예루살렘의 보존과 그 영광은 어떻게 예언되었는가?
하나님께서는 메시야의 수난에 대해 언급하시기 전에 먼저 종말론적인 예루살렘의 보존(보호)에 관하여 놀라운 예언의 말씀을 주신다( 12:1~9). 그것은 그 어떤 이방민족도 예루살렘을 쳐서 없애지는 못할 것이라는
예언이다. 그들이 예루살렘을 둘러쌀 수는 있어도 오히려 그 이유 때문에 자기들이 비틀거리게 될 것이며, 자기들이 다치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12:2~3).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에워쌀 이방민족의 상태를 2가지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는데, 하나는 예루살렘
사면을 둘러싼 이방민족은 "취하게 하는 자(비틀거리게 하는 대접)"이 되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다(12:2).
생각해보라.
비틀거리는 잔을 안고 있으면 정작 본인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 잔 때문에 자신은 더 많이 비틀거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날에는 하나님께서 이방민족들을 "무거운 돌"이 되게 하겠다고 하셨다(12:3). 왜냐하면 그 돌을 옮기려고 들었다가 오히려
자신의 몸만 상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온 말과 말탄 자들은 오히려 그들의 눈이 멀게 될 것이다.
그러면 예루살렘 거민들은 그것을 보고 오직 만군의 여호와로 인하여 힘을 얻었다고 말할 것이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전쟁 중에 유다의
족장들을 나무들 가운데에 화로같게 만들 것이라고 했으며, 곡식단 사이에 횃볼같게 함으로 유다의 족장에게 덤비는 모든 자가 그만
불에 타 없어질 것이라고 했다(12:6).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호해줄 백성의 범위는 고관대작부터가 아니라 평범한 유다시민으로부터 시작하여 예루살렘 거민들 그리고 다윗의 왕가로 확대되어갈 것이라고
하셨다(12:7).
이는 하나님은 객과 고아와 과부들에 대한 긍휼하심이 풍성하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렇듯 3년반동안 공생애를
사셨던 예수께서도 병들고 신음하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먼저 구원으로 초청하셨다. 그들을 먼저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다.
스가랴는 말세에 하나님께서 부어주실 성령이 오게 되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했는가?
스가랴는 그날이 되면 여호와께서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서 은총과 간구의 영(성령)을 부어주실 것이라고
했다(12:10). 그러면 그들이 찔렀던 바 그분(여호와)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심하게 통곡하기를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었던 애통과 같이 애통할 것이라고 했다(12:10~11). 그러므로 이 예언은 메시야에 대한 다음과 2가지를 예언을 포함하고
있는 놀라운 예언이 아닐 수 없다.
첫째는 메시야의 수난에 대한 예언이다(12:10).
먼저 이것은 메시야가 고난을 받되 찔림받는 고난을 받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며, 수난받는 그리스도는 다름 아닌 여호와 자신이시라는 놀라운 예언이다.
장차 메시야가 어떤 수난을 받을 것인지는 사실 이사야 53장과 시편22편이 없으면 잘 알 수도 없는 내용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스가랴 12:10에서 메시야의 수난에 대한 구체적이고 놀라운 예언을 보게 된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메시야로 오실 것이고 그분이
예루살렘 거민들에 의해 찔림을 받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다. 이것은 곧 메시야께서 장차 예루살렘 사람들로부터 가시면류관과 채찍
그리고 창에 의해 온 몸이 찔리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을 찌르는 장본인들은 바로 예루살렘에 사는
거민들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랬다. 메시야는 가시면류관으로 인하여 머리가 찔리셨고, 채찍과 창에 의하여 몸과 옆구리가
찔리셨다. 그리고 그분을 그렇게 처참하게 만든 장본인은 로마군병이 아니라 바로 예루살렘 사람들 자신이었다.
둘째, 성령강림과 성령강림에 대한 거국적인 회개에 관한 예언이다(12:10b~14).
그런데 성령께서 강림하시게 되면 동시에 큰 애통이 예루살렘에 서부터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눅 24:47). 그 통곡은 므깃도 골짜기 하드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은 큰 애통이라고 했다(12:11).
므깃도
골짜기에 있었던 큰 애통함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역대하 35장에 나오는 사건으로서, 남유다의 16대왕이었던 요시야가
므깃도에서 애굽왕 바로 느고를 맞이하여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게 되었을 때에, 남유다의 모든 백성들이 자신의 왕의 죽음
때문에 슬피 울었다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수께서 죽고 난 뒤 성령이 오시고, 베드로가 "너희들이 메시야를 죽였다"고
설교하자, 15개국에서 올라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자기드이 메시야를 죽인 장본인이었음을 깨달으면서 대성통곡을 하게
된다. 회개를 시작한 것이다. 이때 스가랴선지자는 회개의 순서가 왕의 족속에서부터 시작하여 제사장의 족속 그리고 남은 모든
이스라엘 족속들의 남녀가 다 회개할 것이라고 했다. 정말 그랬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 최대의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였고, 그러한 회개운동은 사마리아를 거쳐 온 이방지역으로 뻗어나갔다.
성령이 오시게 되면 어떤 증상이 나타나게 될 것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이 지은 죄들에 대한 회개하는 마음이 불길처럼 타오를 것이라고 예언이다.
즉 회개운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성령이 오시게 되었을 때에 나타나는 제일 첫번째 증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은 어떠한가? 성령이 오시게 되면, 대부분 예언하고 환상을 보며, 꿈을 꾸고 방언을 하게 되며,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치유한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들은 성령이 오셔야만 하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성령이 오시면
결론적으로 나타나는 부수적인 것들에 해당할 뿐이다. 성령이 오시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하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회개운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성령이 오시면 자신이 지은 죄들을 깨닫게 되어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성령이 오시어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리게 되면 나타나는 세 가지 증상은 무엇인가?
성령이 오시면 죄와 더러움울 씻는 샘이 열려 누구든지 이 샘에 와서 회개하여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 성령을 족히 마시게 된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가?
첫째, 자기와 자기의 마음 속에서 우상을 제거하게
된다(13:2a).
하나님을 마음 속에 모시게 되면 우상은 점차 자신에게 제거되는 것이다. 우상이 무엇인가? 우상이란
하나님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그것을 가리킨다. 기도해 보았더니 응답이 없다고 점쟁이를 찾아가면 그것이 우상인 것이다. 하나님을
알고 찬양하고 전하는 기쁨보다 세상에 있는 것을 즐기는 것이 더 좋은 사람은 그것이 우상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돈이며
명예이고, 쾌락이고 인기다. 어떤 이는 자기의 마음 속에 자식을 주님보다 더 아끼고 사랑한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는 자식이 우상인
것이다. 그런데 성령이 자기 맘 속에 들어와 죄를 깨끗하게 회개하게 되면 이러한 마음들이 어느순간인가 사라지고 없어진다는
사실이다.
둘째, 성령이 사람 속에 들어오시면 거짓선지자들의 예언이나 가르침을 추구하지도 않으며 따라가지도 않게 된다는
점이다(13:2b).
어떤 사람은 예언을 받으러 매주마다 예언은사자들을 찾아간다. 예언자들로부터 예언을 받지 않으면 불안해서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두고 "예수점쟁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이 주신 소원대로 행하면 되는 것이지
누군가에게 물어보아서 무엇을 결정하고 그 일을 행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포기한 것이요, 예언을 하는 자의 종이 되어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누군가를 종이 되게하고 누군가를 종 삼으라고 오신 것이 아니다. 종된 우리의 인생을 놓아주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은 예언자가 거짓된 가르침으로 말하는대도 그것이 거짓인 줄 모르고 그 가르침을 따라간다. 우리는
성령이 오시면 모든 진리 가운데로 성도들을 인도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령이 오시면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분별할
수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누군가에게 성령이 오시게 되면 그는 진리와 거짓된 가르침을 분별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거짓을 버리고
진리만을 따라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자기의 자녀들 중에 계속해서 예언하는 자가 있다면 부모는 그것을 근절시켜야
한다. 성령이 오시면 거짓말하는 예언이 사라지게 될 것이며, 환상과 예언하는 일이 점차 없어지게 될 것이다. 성령께서 가르쳐주시기
때문이다.
셋째, 성령이 사람 속에 들어오시면 더러운 귀신(영)을 추방하게 된다는
점이다(13:2c).
여기에 나오는 "더러운 영'이라는 "깨끗함을 받지 못한 영"을 가리킨다. 이것이 사탄 마귀와 귀신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자는 더러운 귀신과 하나될 수가 없으며, 더러운 귀신과 함께 할 수가 없다. 거룩한 영은 더러운 영과 함께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 삶에 귀신이 역사하고 있다면 우리는 즉시 회개해야 한다. 예수의 피로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계속해서 더러운 영이 남아있는 것이다. 그리고 회개했으면 꾸짖어 귀신을 내쫓아버려야 한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하나 되겠으며, 빛과 어둠이 어찌 같이 있을 수 있느냐고 말했던 것이다. 고로 우리가 성령의 다스림 안에
있게 된다면 우리는 점차 귀신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될 것이다.
목자를 치게 되면 나타나는 증상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언젠가는 칼로서 하나님의 짝된 자 곧 목자를 치실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짝 된 자요 목자"는 메시야를 가리킨다. 이 말씀은 메시야의 수난은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일이라는 것을 뜻하며, 그렇게 될 때에 비로소 양떼들이 어려움과 역경을 통해서 진실된 하나님의 자녀들로 연단받아 구별될 것이라고 했다. 또한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상황에서도 약한 자들을 당신의 손으로 보호하실 것이라고
하셨다(슥13:7). 그래서 하나님께서 목자를 치실 때에는 대부분의 양떼들이 커다란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때 양떼의 2/3는 멸망당하겠지만 1/3은 남아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1/3이 불가운데서 금을 연단함없이 연단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슥13:8~9). 그때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부르짖는 기도소리에 귀를 기울이실 것이며 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인정하실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고난의 연단없는 참된 하나님의 백성은 산출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고난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하는 가장 좋은 훈련소이며 교사이기 때문이다.
고난받는 종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는 이사야 53장에서만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스가랴 12~13장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사람들은 성령을 받게 되면서 비로소 왜 나를 대신하여 하나님께서 고난을 받으셨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저절로
회개가 터저나온다. 자신이야말로 메시야를 죽인 장본인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때에 비로소 성령의 샘이 열려질
것이고 그려면 모든 사람들의 갈한 영혼들이 비로소 만족함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자기가 추구한 우상을 버리게 될
것이고, 더이상 거짓선지자를 좇아다니지 않게 되며, 더러운 귀신을 확실히 내쫓아버릴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회개의 결과요
열매들이다. 그러므로 자기자신이 진정 회개한 자인지를 가늠해보면 앞의 세 가지 결과가 자신에게 나타나고 있는가를
점검해보라. 그러므로 우리의 회개가 예수께서 고난받으신 목적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회개가 성령께서 오시는 목적인 셈이다.
내가 이 잡힐 양떼를 먹이니 참으로 가련한 양이라 내가 이에 막대기 둘을 취하여 하나는 은총이라 하며 하나는 연락이라 하고 양떼를 먹일쌔. So I pastured the flock marked for slaughter,
particularly the oppressed of the flock. Then I took two staffs and
called one Favor and the other Union, and I pastured the flock.
은총(5278) 노암(noʽam) נֹעַם
1. 즐거움, 2. 총명, 3. אִמְרֵי נֹעַם 적당한 말
발음
/ 노암[ noʽam ] 관련 성경 / 아름다움(시 27:4), 즐거움(잠 3:17), [형] 정결한(잠 15:26), 선한(잠 16:24). 구약 성경 / 7회 사용
연락(2254) 하발( châbal) חָבַל
1. 단단히 감다, 2. ~와 맹세하다, 3. 욥기 22:6
발음
/ 하발[ châbal ] 관련 성경 / 악을 행하다(느 1:7), 잡다(겔 18:16), 전당잡다(출 22:26, 신 24:6,17, 암 2:8), 볼모
잡다(욥 22:6, 24:3, 9, 잠 20:16), 범죄하다(욥 34:31), 멸하다(전 5:6, 사 13:5, 미 2:10),
고생하다(아 8:5), 진멸하다(사 54:16), 낳다(시 7:14), 헐다(아 2:15), 쇠하다(욥 17:1),
떠나다(사 10:27). [명] 연합(슥 11:7, 14), 패망(잠 13:13). 구약 성경 / 14회 사용
* 연락이란 끈을 의미하며 이스라엘과 유다 사이의 연결을 말합니다.
스가랴 11:7 내가 이 잡힐 양떼를 먹이니 참으로 가련한 양이라 내가 이에 막대기 둘을 취하여 하나는 은총이라 하며 하나는 연락이라 하고 양떼를 먹일쌔. So I pastured the flock marked for slaughter,
particularly the oppressed of the flock. Then I took two staffs and
called one Favor and the other Union, and I pastured the flock.
스가랴 11:14 내가 또 연락이라 하는 둘째 막대기를 잘랐으니 이는 유다와 이스라엘 형제의 의를 끊으려 함이었느니라. Then I broke my second staff called Union, breaking the brotherhood between Judah and Israel.
잠언 13:13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얻느니라. He who scorns instruction will pay for it, but he who respects a command is rewarded.
스가랴 11장은 유대인의 멸망에 대한 예언으로 10장에서 유대 민족이 전쟁에 승리하여 형통할 것을
예언하였으나 이제는 수풀에 불이 붙는 것과 같이 전쟁으로 멸망할 것이라고 합니다.
왜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 생활에서 70년 만에 고향 땅으로 돌아왔는데 또 다시 멸망할 것이라고 진노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악한 목자 때문이라고 합니다. 선한 목자는 메시야를 예표하고 거짓 목자는 적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적그리스도는 메시야를 거부하도록 유혹하는 세력입니다. 따라서 유대 민족이 망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그리스도를 거절한 죄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간 이스라엘 민족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푸셔서 옛
이스라엘 지역으로 돌아오게 하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바벨론에서의 뉘우침과 통회는 금식으로 열심을 다하였으나 하나님은 이제
그들에게 평강이 깃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교만과 죄악을 미리 아셨기에 그들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흩으실 계획을 세우신다. 이스라엘의 가장 큰 죄는 그리스도를 거절한 것이다. 정치적 메시야를 갈망하던 그들에게 힘없어
보이는 나사렛 출신의 시골 청년 예수는 어떤 희망도, 정치적 해방도 가져다 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민족의 장래는 점점 더
암담해져 갔고 계속된 봉기와 전쟁은 이스라엘 민족의 나약성만 확인시킬 뿐, 강한 로마 군대를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나님은
드디어 이스라엘을 각국에 분산시키기로 작정하셨다. 그리스도를 몰라본 그들의 대가는 너무도 처절하였다. 유대 민족은 각국에
분산되었고 거기서도 많은 천대와 멸시를 당하고 있는 것이 현대 역사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가련한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셨으나 저들이 배척하였기 때문에 그 민족은 멸망하게 되었다. 메시야에 대하여 참되이 평가하지 못한 유대 민족은 결국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다. 그 결과로 그 민족 자체 안에서 인화가 깨어지고 서로 죽이는 참사가 발생되었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역사가 주후 70년 예루살렘 멸망윽 앞에 놓고 벌어진 사건들이다.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 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 3천년 전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숙으시고
다시 사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신약 초기에 그리스도를 거절한 유대 민족과 같은 자이다.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는 그의 생애도, 죽으심과 부활하심도 거부하는 자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거부한 채 신자라고 자청하는 사람들이 오늘날에는 너무나
많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를 좇는 자들에게 나타날 때, 유대 민족이 흩어진 것처럼 모든 불의한 자들은 영원한 하늘나라의
잔치에서 쫓겨나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선지자 스가랴서의 역사적 배경은 대략 기원전 520-470년 사이에 일어났던 사건이라고 합니다. 포로 후 활동했던 학개 선지자는 기원전 520년 몇 개월 동안 즉 성전 재건을 독려하던 시기에 활동하였고, 말라기 선지자는 기원전 432년 경 활동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에서 스가랴 선지자의 활동은 전반기 10여년 동안 성전 재건을 위한 백성들의 내면적인 신앙에 대하여 깨우침을 주었다면 후반기 40여년 동안 장차 하나님의 백성들이 갖추어야 할 신앙의 자세에 대해서 강조하였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메시야를 거절하는 자는 반드시 벌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던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영생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 길을 따라 믿음의 길을 선택한 사람은 장차 영생의 은혜를 누릴 수 있지만 그 길을 거부한 사람에게는 영벌의 문이 열려있을 뿐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했으나 여전히 세속적인 가치에 붙잡혀 살아가는 성령의 역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늦은 비의 은혜를 사모하며 남은 때를 바르게 지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도처에 흩으신 것(디아스포라)은 곧 세계 도처에 마치 씨앗을 뿌린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흩어진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땅끝까지 전파된 복음을 받아드린 후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예언된 메시야가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그 날이 세계 평화가 회복되는 날이라고 하겠습니다.
봄비 때에 여호와 곧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리라. Ask the LORD for rain in the springtime; it is the LORD who makes the storm clouds. He gives showers of rain to men, and plants of the field to everyone.
봄비 때에(Rain in the Springtime) 베에트 말르코쉬(בְּעֵת מַלְקֹושׁ)
이스라엘 우기에 내리는 ‘이른 비와 늦은 비’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이른 비와 늦은 비’로 비유하셨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스라엘의 자연적 특성과 기후를 알아야 한다.
이른
비와 늦은 비는 이스라엘에서 축복의 단비라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물이 귀한 나라다.
강수량이 적고 토질이 석회석과 사암
등으로 형성되어 있어 지하수를 얻기도 어렵다. 유적지 중 우기 때의 비를 저장해 식수로 쓰던 저수지가 많고, 성경 역사에서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이 가는 곳마다 우물을 파거나 우물 때문에 다툼이 생긴 것도 이 때문이다.
이스라엘에서 비는 생활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비가 내리지 않으면 생존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 농경사회에서 비는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다.
신명기 11:14~17 여호와께서
··· 이른비, 늦은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또 육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 너희는 스스로 삼가라 ··· 다른 신들을 섬기며 ··· 절하므로 여호와께서 ··· 진노하사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여 땅으로 소산을 내지 않게 하시므로 ··· 속히 멸망할까 하노라.
이스라엘의 여름은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건기가 지속된다. 우기는 가을과 봄이 시작되는 시점인 10월경에서 이듬해 4월경까지다. 이른 비, 겨울 비, 늦은 비가 내리는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이른
비(Autumn Rain) - 가을에 내리는 첫 비
10~11월경인 가을에 내리는 첫 비를 가리킨다. 이른 비를 시작으로 우기가 시작된다. 여름철 건기
동안 비가 오지 않아 땅이 메말라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이때 비가 내리지 않으면 경작을 할 수 없다. 농부는 농사 지을 준비를
갖추어놓고 메마른 땅을 보며 간절히 이른 비를 기다린다(야고보서 5:7).
이른 비가 내리기 시작해 2~3주가 지나면 들판은 푸른 초장으로 변한다. 농부들은 이때 밭을 갈고 파종한다. 이른 비가 적당한 시기에 내려야 제때 씨를 뿌릴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이른 비는 경작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겨울 비(Winter Rain) - 겨울에 내리는 늦은 비, 장마비
겨울 비는 본격적인 장맛비로, 12~2월경에 내린다. 이스라엘에서는 건기를 대비해 이때 내리는 비를 저장해 사용했다.
늦은
비(Spring Rain)는 겨울이 끝나고 봄이 시작되는 3~4월경에 내리는 비다. ‘봄비’라고도 불리는데 그야말로
단비다(스가랴 10:1). 겨울 동안 자란 농작물 결실에 절대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늦은 비가 제때 오지 않는
것을 저주로 간주하기도 한다(아모스 4:7).
비(4306)
מָטָרה스트롱번호4306
1. 비, 2. 강우, 3. 출애굽기 9:33
발음
/ 마타르[ mâṭâr ] 어원 / 430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비(출 9:33, 신 11:11, 왕상 8:35), 풍우(사 4:6), 비오는 것(잠 26:1). 구약 성경 / 38회 사용
* 4305. 마타르(mâṭar מָטַר스트롱번호4305
1.비가 오다, 2. 히필형 : 비를 내리게 하다, 3. 다른 것에 대해 적용될 경우: 출애굽기 9:18
발음
/ 마타르[ mâṭar ] 관련 성경 / 비(창 19:24, 욥 20:23, 시 78:24). [동] 내리다(암 4:7, 시 78:27, 출 9:18), 던지다(시 11:6). 구약 성경 / 17회 사용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비를 내리시어 밭의 소산을 먹게 하실 것이라고 예언하시면서 흩어져 있던 백성을
열방으로부터 귀환시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날은 열방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낮아질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견고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 이스라엘에 대한 회개 촉구
1)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스가랴 선지자는 봄비 때에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고 명하면서 여호와께서 번개를 내시는 분임을 강조했습니다. 비는 여호와께서 비를
주관하시는 주인 되심을 교훈한 것입니다. 이방 사람들은 우상 앞에 절하며 비를 구하였는데,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방 사람들을 따라
바알 앞에 가서 비를 구하며 경배함으로 하나님께 범죄하였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그러한 이스라엘에게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고
외침으로써 회개하고 돌아와 여호와께 복을 받을 것을 교훈한 것입니다. 농경 사회에서 비는 곧 안녕과 축복의 상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숭배할 때 여호와에서 진노하셔서 비를 내려 주시지 않음으로 그들은 기근과 고통을 당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면 여호와께서 소낙비를 내리셔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실 것이라고 예언함으로써 회개하면 모든
것이 회복될 것임을 교훈하였습니다.
a. 약속하신 것을 구해야 함(겔36:37)
b. 구하는 자에게 주심(마7:7-8)
c. 왕의 은택을 구해야 함(잠16:15)
스가랴 10:1 봄비 때에 여호와 곧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리라.
봄비(말코쉬) - 늦은 비, 봄비, 신명기 11:14-15
14.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15. 또 가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
이른 비(3138) 요레흐(yôwreh) יוֹרֶה
1. 흩뿌리기, 2. 물 뿌리기, 3. 물 끼얹기
발음
/ 요레흐[ yôwreh ] 관련 성경 / 이른 비(신 11:14, 렘 5:24) 구약 성경 / 1회 사용
예레미야 5:24 또 너희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 기한을 정하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 말하지도 아니하니.
* 이른 비(4175) 모레흐(môwreh) מוֹרֶה
1. 궁사, 2. 이른 비, 3. 가르치는 사람
발음
/ 모레흐[ môwreh ] 어원 / 338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비(욜 2:23), 이른 비(시 84:6) 구약 성경 / 7회 사용
@ 기도는 어린 아이들이 부모에게 칭얼 거리는 것이 아니다. 바람직한 기도는 사령관 앞에서 명령을 준수하고 돌아와서 다음의 명령을 기다리는 용사와 같은 자세이어야 한다. 때로는 명령을 모두 준수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명령을 모두 준수하지 못하였다고 사령관의 부하가 아니라 부하이기에 다음 명령을 듣고 다시 복종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특징은 번영신학에 의한 부흥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예수를 믿으면 병이 고침을 받고, 부유한 삶을 누려야 하며, 성공적인 삶을 즐기는 것으로 가르쳤고 이해하였다. 번영신학의 문제는 고난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가 없기 때문에 위기가 닥쳐오면 쉽게 흩어지고 무너지고 있다.
비(마타르) 소낙비(게쉠)
때(6256) 에트(ʽêth) עֵת
1. 시간, 2. 정한 시간, 3. 어떤 시간
발음
/ 에트[ ʽêth ] 어원/ 어미활용 עִתִּי, 복수 עִתּוֹת ,עִתִּים ,570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때(창 21:22, 욥 39:1, 렘 3:17), 철(레 26:4), 당시(왕하 16:6), 시세(대상 12:32),
역사(대상 29:30), 기한(스 10:14, 느 10:34, 렘27:7), 전례(에 1:13), 시대(사 33:6), 기회(시 32:6),
날(사 17:14), 낮(렘 27:7). [부] 아무 때나(레 16:2), 때때로(대하 24:11), 당장(스 8:34),
항상(시 106:3, 잠 5:19, 전 9:8) 구약 성경 / 294회 사용
봄비(4456) 말코쉬(malqôwsh) מַלקוֹשׁ
1. 늦은 비, 2. 봄비, 3. 신명기 11:14
발음
/ 말코쉬[ malqôwsh ] 어원 / 395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늦은 비(신 11:14, 잠 16:15, 욜 2:23), 봄비(슥 10:1) 구약 성경 / 8회 사용
비(4306) 마타르(mâṭâr) מָטָרה
1. 비, 2. 강우, 3. 출애굽기 9:33
발음
/ 마타르[ mâṭâr ] 어원 / 430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비(출 9:33, 신 11:11, 왕상 8:35), 풍우(사 4:6), 비오는 것(잠 26:1). 구약 성경 / 38회 사용
소낙비(메타르 게쉠)
소낙(1653) 게쉠(geshem) גֶּשֶׁם
1. 소나기, 2. 스가랴 10:1, 3. 욥기 37:6
발음
/ 게쉠[ geshem ] 어원 / 165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비(창 7:12, 아 2:11, 암 4:7), 폭우(겔 13:11, 13, 38:22), 소낙비(슥 10:1). 구약 성경 / 35회 사용
* 1652. 비가오다 / 가삼(gâsham) גָּשַׁם
1. 비가 오다, 2. 히필형 : 비 오게 하다
발음
/ 가솸[ gâsham ] 관련 성경 / 비를 내리게 하다(렘 14:22). 구약 성경 / 2회 사용
비(4306) 마타르(mâṭâr) מָטָרה
봄비 때에 여호와 곧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리라.
- '봄비 때에'는 실상 '늦은 비의 시절'을 의미하니 팔레스틴에는 추수하기 전에 결실케하기 위해 오는 비다. '번개를 내는 하나님'이라는 것은 비가 내릴 준비로 일어나는 번개를 하나님이 만들어주신다는 뜻이다. 성경은 자연 현상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립되는 것임을 가르친다. '비'는 하나님이 주시는 자연계의 축복을 상징하지만 영적 은혜도 비유한다. 영적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주시는 성령의 감화를 이름이다. 이 귀절은 하나님께 기도하여야 할 것을 강조한다. 우리에게 축복하실 이는 하나님밖에 없으니 그에게 부르짖으라는 것이다.
스가랴 10:9 내가 그들을 열방에 뿌리려니와 그들이 원방에서 나를 기억하고 그들의 자녀와 함께 다 생존하여 돌아올찌라. (새번역) 내가 그들을, 씨를 뿌리듯이, 여러 백성들 가운데 흩어 버려도, 그들은 멀리서도 나를 기억할 것이며, 아들딸과 함께 살아 있다가 돌아오게 될 것이다.
발음
/ 헤마[ chêmâʼ ] 어원 / 317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노(창 27:44, 시 37:8, 렘 23:19), 진노(레 26:28, 대하 34:21, 잠 16:14),
격분(신 29:23,28), 분(잠 15:18, 렘 42:18), 뜨거움(호7:5), 독(신 32:24, 33), 노함(사 27:4),
분노(겔 13:13, 슥 8:2), 진노(대하 28:9, 시 59:13), 분노함(욥 36:18), 분냄(시 90:7). 구약 성경 / 125회 사용
*3179. יָחַם
스트롱번호3179
1. 뜨겁다, 2. 마음에 그리다
발음
/ 야함[ yâcham ] 관련 성경 / 새끼를 배다(창 30:38, 41, 31:10), 뜨겁다(신 19:6), 따뜻하다(왕상 1:1, 전 4:11), 잉태하다(시 51:5). 구약 성경 / 6회 사용
스가랴 9장은 후반부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악인에 대한 심판과 메시아의 도래"에 관한 예언의 말씀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9:1-8. 수리아(아람), 베니게, 블레셋 등 유다 인방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
9:9-10. 평화의 왕의 내림과 그 평화.
9:11-12. 피로 말미암은 언약에 의한 구속.
9:13-17. 하나님의 백성의 승리와 축복.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원수인 이방국들에 대한 심판을 예고하시면서도 이방인들도 구원에 동참하게 될 것임을 예언하셨습니다. 또한
메시야가 왕으로 이 땅에 오실 것을 예언하시며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에게 영광이 임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구속의 비밀을 예언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나님이 겸손하셔서 나귀 새끼를 타신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사역 말기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나귀 새끼를 타심으로써 성취된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겸손하심으로 구속을 이루시고 모든 죄인을 구원하시며 그들의 왕이
되심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늘 보좌 우편을 버리고 스스로 낮아지셔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가장 낮은 자리까지 처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겸손으로 구속의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심(마태복음 11:29)
나귀 새끼를 타심(마가복음 11:7)
화평의 왕으로 오실 메시야
하나님께서는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으시겠다고 예언하심으로 전쟁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는
모든 전쟁이 사라지고 오직 평화와 안녕만이 임할 것을 약속하신 것으로, 메시야 시대에 임할 이러한 평화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화평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 사람에게 전해집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평화의 복음이 세상에 널리 전파됨으로써 이루어지는데,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되는 곳에는 영적인 평화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화평의 복음(사도행전 10:36)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심(에베소서 2:16)
메시야의 겸손.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야는 이 세상 권세를 가지고 임하시는 이가 아니고 도리어 지극히 미천한 자리에서 겸비를 그
처소로 하시는 분이다. 아담이 범죄하여 인류를 고난에 빠뜨렸다. 이제 인간은 하나님께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깊은 실연의 골짜기가 놓여지게 되었고, 인간은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조금도 자신의 처지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의 힘으로는 사망 가운데 놓여 있는 상태를 구원할 수 없기에 하나님은 직접 인간의 자리에까지 내려오시는 겸손을
보이셨다. 인류를 구원하려는 그 구원자가 인류의 지극히 낮은 자리까지 내려오셨다. 인간의 자리에까지 내려오시는 것만도 말할 수
없는 겸손이요 비하인데, 하나님께서는 어느 인간들보다 비천한 상태에 태어 나지고 성장하셨다. 말 구유는 이 비천함을 가장
극대화시켜 보여 주는 물건이다. 비천하게 태어나신 예수는 인간으로 처절한 수난을 받으셨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몸소 감당하셔야 했던 겸비요 겸손이었다. 예언서는 언제든지 이와 같은 메시야 곧 구원자 그리스도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다. 메시야는 겸손히 인간의 몸으로 오셨고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왕으로 등극하셨다. 메시야의 탄생과 삶, 그리고 죽으심 모두는
하나님의 겸비하심 그 자체이다. 구원자 예수는 십자가 위에 수난을 당하심으로 사람과 하나님을 화목케 하여 신자의 마음에 진정한
화평을 건설하셨다. 전쟁과 무력으로 평화를 가져오시지 않았다. 몸소 비천해지고 겸손해짐으로 화평을 가져오신 평강의 왕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는 폭력이나 전쟁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메시야로 오신 예수의 평화는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킨 평화이며, 모든
인류에게 본을 보이신 평화라고 합니다. 이 평화는 스스로 낮아져 희생하신 평화이므로 신자들의 평화는 겸손히 나를 낮추고 희생할 때
찾아올 것입니다. 나를 높이고 나의 이익을 추구하는 관계는 남의 희생을 통해 내가 유익을 얻으려는 이기적인 관계를 말합니다. 가장 비천한 말
구유에 태어나신 예수의 겸손과 낮아짐이 우리 삶에 적용될 때 신자들의 상태는 윤택해집니다. 비록 외적인 화려함과 세상적인 풍요로움이
조금 부족할지라도, 영적인 만족과 평화가 찾아올 수 있는 비결은 사랑과 긍휼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의 도라고 하겠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 여기 와서는 선지자가 신약 시대를 성립시키는 메시야의 내림을 예언한다.
여기 이른바 "시온의 딸"은 딸 같은 시온 곧, 약소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예루살렘의 딸"이라는 말도 역시 같은 것이다. "네 왕"은 메시야 곧,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는 공의로우며". 이것은 메시야께서 그 백성을 원수들의 무리한 침략 하에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필경 공의를 발동해서 구원하여 주심을 의미 한다. 이 공의는 실제에 있어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히우는 데까지 낮추사 그 백성의 죄 값을
담당하시므로 성립된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라는 말씀이 따른다.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왕이시지만,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 겸손한데 떨어지므로 그 백성을 구원하신 겸손의 왕이시다. "나귀 새끼" 를 타신 것은 그의 겸비의 극치를 의미하는 참된 왕의 덕을 상징한다. 마 12:17-21 참조.
당나귀와 말의 차이점 | 유사한 용어의 차이점 비교 - 과학 - 2023
Morris Wright
당나귀 대 말 | 특징, 특성, 수명 | 나이에 따라 다른 이름 – 망아지, 1 년생, 콜트, 암말, 암말, 종마, 겔딩
말과
같은 포유류 (Equids)이기 때문에 당나귀는 말과 몇 가지 유사점을 공유합니다. 수명, 신체 크기 및 구조, 사람들 간의
관심이 다릅니다. 말과 당나귀의 용도에 따라 몇 가지 유사점과 차이점이 있습니다. 둘 다 한때 야생이었고 일부는 길들여졌습니다.
현재 대부분의 당나귀와 말은 길들여지고 있지만 여전히 일부 야생 개체군이 있습니다.
당나귀
당나귀는
아프리카에서 시작되어 나중에 전 세계로 퍼졌습니다. 보통 당나귀는 최소 30년에서 최대 50년까지 산다. 품종에 따라 크기
(키 80 ~ 160 센티미터)와 색깔이 다릅니다. 그들은 길고 뾰족한 특징적인 귀를 가지고 있습니다. 폴 (머리 꼭대기)과
시들기 (어깨 사이 융기) 사이에는 볏을 통해 일련의 머리카락이 있으며 꼬리를 제외한 나머지 신체의 머리카락보다 약간 길다.
당나귀는 야생의 무리가 아니라 혼자 산다. 그들은 서로 의사 소통하기 위해 큰 소리로 끙끙 거리며 (브레 이잉이라고 함)
말합니다. 하루 동안 당나귀 몸무게의 약 1.5 %의 건조물 무게가 필요합니다. 당나귀는 일하는 동물로서 인간에게 매우
중요했습니다. 짐을 나르는 것뿐만 아니라 염소를 지키는 데에도 당나귀는 수년 동안 인간에게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3000
년에 처음으로 길 들여진 당나귀에 대한 증거가 있습니다.
말
유럽, 아시아 및 북미의 말 화석은 세계에서 초기에 분포했다는 증거를
제공합니다. 그들은 25-30 년의 수명을 가진 더 큰 포유류입니다. 말은 품종, 때로는 영양 및 부모 개체군에 따라 털 색깔,
털의 표시 및 몸 크기가 다양합니다. 귀는 뚜렷하게 길고 뾰족하지 않지만 폴과 시들 사이의 털은 더 길다. 말의 꼬리털은 상당히
길고 폭포처럼 떨어집니다. 연령대가 다른 말은 다른 이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Foal- <1 세, 1 살 ~ 2 세,
Colt- 4 세 미만 수컷, 암말-4 세 미만 암컷, Mare- 성인 암컷, 종마-성인 수컷, Gelding- castrated
남성). 말은 야생의 무리에 살지 않습니다. 그들은 특유의 징징 거리는 소리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특히 의사 소통을 위해
야생에서 중요합니다. 말은 매일 몸무게의 2 – 2.5 %의 건조물 무게가 필요합니다. 경제적 가치가 더 큰 말은 인간을 가족
애완 동물, 사냥감 동물, 때로는 음식으로 제공합니다. 또한 레크리에이션 활동에서 말은 매우 잘 사용되었습니다.
당나귀 대 말
두 동물의 기원은 다르며 당나귀는 아프리카에서 왔고 말은 그렇지
않습니다. 상대적으로 당나귀는 몸이 약간 작은 말보다 오래 산다. 말의 일일 필요량은 당나귀보다 조금 더 높습니다. 말은
당나귀보다 경제적 가치가 더 높고 인간의 관심을 더 많이 끌고 있습니다. 경마는 매우 인기가 있고 사람들은 전세계 경주에서 말을
위해 도박을하지만 당나귀에게는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에 경제적 가치가 다릅니다. 말의 미학적 가치는 당나귀의 미학적 가치보다 더
높습니다. 어쨌든, 수컷 당나귀와 암컷 말 사이의 성적 교미는 불임 노새를 초래합니다. 그것들은 일하는 동물입니다. 그것은
당나귀와 말의 중요성입니다.
스가랴서의 기본 이해
포로 귀환 세대의 신앙 독려를 위한 성전 재건 완성과 선민의 종말론적 축복의 비전 제시
구약 성경에 포함된 선지서들은 애가서를 포함하여 모두 17권이다.
17권의 선지서들 중에서 B.C. 538년의 바사 왕 고레스의 포로 귀환 허가 칙령이 반포된 이후 즉 포로 귀환 시대에 기록된 선지서는 학개, 스가랴, 말라기 등의 세 권이다.
이
세 권의 책들은 각 예언이 선포되고 기록된 시기, 각자의 예언에 포함된 미래의 사건들의 내용과 범위, 각 선지자가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시대적 문제 상황이나 그에 대한 메시지, 신학적 관점이나 문학적 서술 방식들은 서로 다르다.
그러나 이 세권의
책들은 모두 다 근본적으로는 포로 귀환 시대 이후를 살아가는 소위 이스라엘 신세대를 향하여 그들의 초라하면서도 고단한 현실에서
눈을 돌려 선민의 영광스러운 미래의 비전(vision}을 바라보게 함으로써 여호와 절대 신앙(信仰)의 순결과 열정을 굳게 붙잡고
잃지 않도록 촉구하거나 격려하기 위하여 쓰여졌다는 점에서 큰 틀을 같이 하고 있다.
이
세 권의 책 중에서 본서 스가랴서는 가장 긴 책으로서 세 권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포로 귀환 시대의 세 선지자의 활동 연대
또는 이들이 기록한 세 선지서의 기록 시기는 각각 학개는 B.C. 520년 9-12월 사이의 수개월, 스가랴는 B.C. 520년
11,12월에서 시작하여 B.C. 470년까지의 50여년, 그리고 말라기는 B.C. 432년 무렵의 수개월이다.
이렇게 볼때
스가랴서는 포로 귀환 시대의 세 권의 책 중에서 가장 오래 활동한 스가랴 선지자가 기록한 가장 긴 책이며 또한 기록 연대상으로도
서로 거의 90여년의 차이가 나는 학개서와 말라기서의 중간에 위치한 책임을 알 수 있다.
학개서와
말라기서는 각각 성전 재건 사업의 중단이나 포로 귀환 세대의 신앙 열정의 퇴조와 타락 등의 단편적 문제에 대한 구체적 지적과
그에 관한 직설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반면 스가랴서는 포로 귀환 세대가 처한 여러 문제를 포괄적으로 망라하고 그에 대하여
궁극적이고도 암시적인 메시지를 제시하고 있어서 뚜렷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스가랴서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결정적 키워드는 묵시문학이다. 스가랴서는 에스겔, 다니엘과 함께 구약 성경의 대표적인 묵시
문학서(默示 文學書)인 것이다. 주로 종말론적 사건과 관련한 기이하고도 생동감 넘치는 상징적 이미지들을 등장시키고 난해한 방식으로
구성하여 제시하는 묵시 문학서로서의 특징이 스가랴서 전반에서 발견된다.
스가랴서는
시간상 서로 40년 이상의 격차가 있고 그 직접적 시대 배경도 서로 완연하게 다른 전반부 제1-8장과 후반부 제9-12장 등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하여 스가랴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전 · 후반부 각각에 대한 분석과 양자 모두에 대한 동시적
이해가 동시에 필요하다.
전반부
제1-8장은 B.C. 520년 소위 스룹바벨 성전 즉 제2성전 재건 사업이 재개된 직후를 그 직접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B.C. 722년 북왕국 이스라엘이 먼저 멸망한 후에 약 130여년을 홀로 남아 근근이 명맥을 이어가던 남왕국 유다마저 B.C.
586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침략을 받아 끝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많은 백성들이 바벨론 제국 각처로 강제 이주 포로로
잡혀감으로써 멸망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선민 이스라엘 신정 국가(神政 國家)는 역사적 단절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는 B.C. 538년 바벨론 제국을 멸망시키고 새로이 등장한 바사 즉 페르시아 제국의 초대 왕
고레스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포함한 각 속국의 모든 강제 이주 포로들이 자유롭게 각자의 조국으로 돌아가 살 수 있도록 허가하는
조서를 내리게 하였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민족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할 수 있게 되었다(스 1:1-4). 이는 우연한 역사의 산물이 아니라 이미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부터 이사야, 예레미야, 호세아, 아모스 등의 여러 선지자가 타락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여호와께서
징계하신 후에 끝내 버려두지 않으시고 무조건적 은혜로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을 거듭 약속하여 주신 예언 말씀의 성취였다.
이에
그 다음 해인 B.C. 537년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영도 아래 제1차로 대략 42,360명의 바벨론 포로가
본국으로 귀환했다(스 2:64). 이들은 본토에 돌아오자마자 무엇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제단을 쌓고 새로운 예루살렘
제2성전(聖殿)의 기초를 놓았다. 이는 제1차 포로 귀환 이듬해인 B.C. 536년의 일이었다.
이것이
약 70년 간의 바벨론 포로 생활(Babylon Captivity)동안 단절되었던 선민 이스라엘의 신정 국가 역사 재개의
시발점이었다. 그러나 신정 국가 재건을 위한 첫걸음으로서의 새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 사업은 유다 공동체가 예루살렘 중심으로 본토에
재정착하여 강력한 경쟁 집단으로 등장하게 될 것을 꺼려하는 사마리아와 인근 국가들의 집요한 방해로 중단되었으며 이러한 상태로 약
16년간이나 방치되었다.
그러다
오랜 침묵을 깨고 B.C. 520년에 학개 선지자가 등장하여 성전 재건 사업을 다시 시작할 것을 부르짖었고, 스가랴 선지자는
학개보다 2개월 후에 등장하여 두 선지자 등이 함께 성전 재건 사업을 강력하게 독려함으로써 재개된지 약 4년 후인 B.C.
516년에 마침내 제2성전의 완공을 보게 되었다.
본서의
전반부는 바로 이러한 역사적 정황 가운데서 예루살렘 새 성전 재건 사업이 이제 막 다시 시작되었을 때 주어졌던 말씀이다. 즉
스가랴는 신정 국가의 중심일 수밖에 없는 성전 재건 사업을 무관심과 나약함으로 인하여 약 16년 동안이나 방치했었다가 학개
선지자의 책망을 받고 이제야 막 다시 성역(聖投)을 재개한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제2성전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필히 완공될 수 있다는
신념을 불어 넣어 더이상 머뭇거리는 일 없이 새 성전의 준공이 실현되는 그 순간까지 박차를 가하도록 독려하고자 하였다.
나아가
예루살렘 새 성전 재건 사업은 단지 선민의 새로운 출발의 상징으로서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임재의 상징적 처소로서
성전이 궁극적으로 예표하는 바 메시야의 도래와 그의 왕국을 맞이하는 데 진정한 근본적 의의가 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스가랴는 자신의 책 전반부에서 이러한 시대를 향하여 주신 하나님의 환상과 약속의 말씀들을 통하여 비단 소위 스룹바벨 제2성전이
필히 다시 완공될 것이라는 사실 뿐만 아니라 그 성전이 예표하는 메시야의 도래와 그 분으로 말미암아 선민들이 영원히 평화와 번영을
구가할 선민의 새 왕국 또한 분명히 이루어질 것임도 가르쳐 준다.
그리하여
이제 는 당시의 선민들 스스로가 건물로서의 예루살렘 새 성전의 준공에 그치지 않고 당시의 선민 포로 귀환 시대의 각자가 명료한
역사 의식과 원대한 소망을 갖춘 진정한 여호와의 백성이요 신앙인으로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근본적 바탕까지 갖추도록 격려하고
있다. 후반부 제9-14장은 앞선 제1-8장과 문체와 내용에서 현저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앞선 제1-8장이 당시의 선민 공동체가
직면한 실제적 문제인 성전 재건과 금식 관련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면 후반부 제9-14장은 묵시적이고 종말론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특별히 제11장은 메시야를 상징하는 참 목자의 행적과 백성들의 배척을 집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의 제9-14장은
B.C. 516년 제2성전, 곧 스룹바벨 성전이 완공된 지 약 40여년이 지난 후인 B.C. 480-470년경에 기록되었다.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 관해서는 그리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본서의 본문과 본서 후반부보다 30-40년 뒤의 시대를 반영하고 있는 말라기서를 참고하여 다음과 같이 추측해 볼 수 있다.
성전이
재건된 이후에도 포로 귀환자들은 확고한 생활의 안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최장 70 여년의 공백 후에 돌아온 귀환 세대는 비록
자신들의 본토에 돌아왔다고는 하지만 냉엄한 현실상으로는 엄연한 소수의 비주류 집단에 불과하였다. 자신들이 땅을 비울 동안 이런
저런 연유로 유다 본토를 차지한 이방인들이나 현지 혼혈인들의 행정, 치안, 경제적 잔재는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비록
스룹바벨 제2성전이 준공되었지만 귀환민들의 현실 생활은 특별한 극적 반전 이나 뚜렷한 기약없이 고단하고 초라한 것이었다.
포로
귀환 공동체가 본토에 빠르고도 강력한 재정착을 이루지 못한 가장 일차적 이유로는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죽은 이후
아직 본토에 돌아와 온전히 재정착하지 못한 당시의 유대인 공동체를 온전히 하나로 묶어주고 안정적으로 지도할 정치 종교 지도자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비록 다른 제사장들이 있긴 있었으나 그들 대부분은 혈통상으로 정통성을 의심받는 자들이었다.
바사 제국 중앙 정부가 왕위 승계 등의 문제로 권력 다툼에 휩싸이자 전 제국에 대한 장악력이 크게 악화되었고 구 앗시리아 지역과
애굽 중심으로 반란 사건이 거듭되었다. 또 뚜렷한 반란이 아니어도 각 지역의 파견 총독들과 토호들이 이런 저런 명분으로 수탈과
세력 다툼을 일삼아 제국 내의 질서가 무너졌다. 이런 틈바구니에서 비록 본토로 돌아온 귀환민이라고는 하지만 당장은 소수의 재정착
공동체에 불과한 귀환민들은 불안에 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외적 난관과 도전보다 더욱 큰 문제는 내적 침체와 회의의 확산이었다.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 등의 격려로 예루살렘 새 성전이
완공되었어도 별반 달라진 것이 없자 포로 귀환 세대의 신앙의 열기는 서서히 식어가고 초라하고 고단한 일상에 함몰되어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제 선민으로서의 긍지와 선민의 빛나는 미래에 대한 신념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는 자신들의 하나님 곧 선민의 구원자이시자 우주와 역사의 주권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순결과 열정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 자체와 그분의 백성으로서의 자신들의 정체성(Identity) 자체가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시대, 곧 자기 비하와 체념에 물들어 여호와 신앙마저 상실해 가는 당대의 백성들을 향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다시 스가랴 선지자에게 당신의 말씀을 외치게 하였다.
여호와 하나님은 스가랴를 통하여 당장 선민 자신들은 초라하고 왜소하고 주변 이방인들은 감히 넘볼 수조차 없을 만큼 기세 등등한 것
같지만 세계 역사를 홀로 주관하시는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새삼 각성시키셨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은 오직 당신의
백성인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원한 복락을 누리게 될 저 종말론적 메시야 왕국을 이 땅에 세우시기 위하여 온 세상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바 최종 승리는 결국 선민들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근본적 진리이자 살아 계신 하나님의 거듭된 약속을 다시 일깨우셨다.
그럼으로써 위축되고 침체된 포로 귀환 시대의 백성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고자 하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메시야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도래와 세상 끝날의 결정적인 구속사적 사건들을 중심으로 하여 이를 통하여 선민이
누리게 될 복된 미래의 비전을 펼쳐보이셨다. 최후의 영원하고도 완전한 축복과 상급을 확신하는 자는 결코 도중의 장애와 아픔에
굴하지 않는 법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막막해 보이는 당장의 현실 앞에서 위축되고 침체되었을 뿐 아니라 그저 일시적 안일과
세속적 이익을 쫓아 다니며 여호와 신앙의 열정과 순결을 상실할 위기에 처한 당신의 백성들에게 저 영원하고 완전한 종말론적 미래의
비전을 보여주심으로써 현실을 뛰어넘어 선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굳게 지킬 근본적 힘을 주셨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스가랴서 전 · 후반부는 비록 직접적 시기와 세부 상황은 다소 다르더라도 모두 다 각 때에 맞추어 포로 귀환 세대의 신앙을 독려하기 위하여 주어진 말씀들임을 발견하게 된다.
스가랴서의 내용 구조
스가랴서는
기록 시기를 기준으로 크게 나누면 제1-8장의 전반부 제9-14장의 후반부 등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내용 또는
소재를 기준으로 보다 상세히 나누면 제1-6장의 전반부 제7-8장의 중반부 내지는 삽입부 제9-14장의 후반부 등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는 보다 정확한 파악을 위하여 세 부분으로 나누어 그 내용 구조를 살펴보기로 한다.
전반부
제1-6장은 스가랴가 B.C. 520년 11, 12월 무렵 이제 막 다시 재개된 예루살렘 새 성전 재건 사업을 독려하기 위하여
하룻밤 사이에 받은 여덟 환상의 기록이다.
앞 머리의 서론적 회개 권면(1:1-6)과 일종의 부기적 성격을 가진 끝머리의 일련의
환상 예언 기사를 마감하는 대제사장 면류관 관련 기사(6:9-15) 사이의 1:7-6:8절에서 여덟 편의 신기하고도 웅장한 환상이
계속 이어진다. 이 전반부 기사의 핵심인 여덟 환상들은 이제 겨우 재개된 새 성전 재건 사업이 다시는 중단되는 일 없이 준공되는
그날까지 계속되도록 독려하기 위하여 주어진 묵시 문학적 비전들이다.
이
여덟 환상 예언은 예루살렘 새 성전 재건 사업의 당위성을 직설적으로 설교하거나 그 새 성전의 준공과 관련된 사항들만을 사실적,
단편적으로 예언하지 않는다. 이 여덟 환상 예언들은 하나의 독립된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소위 스룹바벨 제2성전의 준공 사건은 물론
이와 관련하여 당시 선민들이 명심하여야 할 여러 교훈들, 나아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함께 계심을 보여주는 여호와의
임재의 상징적 처소인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신약적 축복, 나아가 영원한 종말론적 축복까지를 망라하여 상징적, 포괄적,
입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당시의 포로 귀환 세대들이 자신들 시대의 역사적 소명으로서 수행하고 있는 예루살렘 새 성전
재건 사업의 의의를 근원적으로 깨닫고 자발적으로 동참하도록 이끌고 있다.
다음은 이 스가랴서 전반부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여덟 환상 예언들의 내용을 한 눈에 용이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요약 정리한 것이다.
제1환상 - 붉은 말을 타고 화석류 나무 사이에 선 여호와의 사자와 세 말의 환상(1:7-17)
여전히 질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새 성전 재건 사업까지 방해를 받던 선민과 달리 대적들은 번성을 누리고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선민을 핍박한 열방을 심판하고 예루살렘 성전과 성을 회복시켜 주실 것임을 보여줌.
제2환상 - 네 뿔과 네 대장장이의 환상(1:18-21)
힘, 권력, 교만 등을 상징하는 뿔이 나타내는 선민의 대적들을 하나님이 보내신 대장장이들이 파괴하는 환상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선민을 대적하고 핍박하는 사방의 모든 악한 세력을 심판하여 멸하실 것임을 보여줌.
제3환상 - 측량줄을 잡은 소년의 환상(2:1-13)
예루살렘 성전은 물론 예루살렘 시가지도 다시 재건될 것과 예루살렘이 번영하며 그 가운데 여호와께서 임재하심으로 안전을 누리게 될 것을 보여줌. 또한 선민을 압제하는 자들을 심판하고 그 가운데서 선민을 구원하실 것을 보여줌.
제4환상 - 대제사장 여호수아에 관한 환상(3:1-10)
대제사장 여호수아로 대표되는 선민의 죄를 하나님께서 사하여 정결하게 하셨음과 장차 ‘싹’으로 상징된 한 종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택한 백성들에게 종말론적 사죄와 축복을 보장하실 것임을 보여줌.
제5환상 - 순금 등대와 두 감람나무의 환상(4:1-14)
일차적으로는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케 하신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에 의해 새 성전이 반드시 재건될 사실을, 궁극적으로는 신약 성전인
교회가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지게 될 것과 교회가 성령의 능력으로 생명력을 유지하게 될 것을 보여줌.
제6환상 - 날아가는 두루마리 환상(5:1-4)
이스라엘이
비록 하나님의 선민이기는 하나 하나님께서 포로 귀환 세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하여 이루시려는 바, 특히 예루살렘 새 성전
건축의 역사적 소명을 망각하고 계속 범죄한다면 두루마리 곧 율법에 기록된 대로 저주를 받게 될 것을 경고함.
제7환상 에바 안에 앉은 여인의 환상(5:5-11)
에바
안에 앉은 여인은 범죄한 선민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인이 앉은 에바가 날개를 가진 두 여인에 의해 시날 땅으로 옮겨진 것은 만일
포로 귀환 세대도 죄악이 관영하면 그 조상들이 관영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것처럼 그들도
이방 땅으로 흩어지게 될 것임을 경고함.
제8환상 두 구리 산 사이에서 나온 네 병거의 환상(6:1-8)
선민의
원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반드시 통쾌하고도 장엄하게 시행될 것임을 보여주어 사탄의 세력에게 핍박을 받는 당시대의 백성들은
물론 모든 성도가 사탄의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최후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신시켜 줌.
중반부
제7, 8장 B.C. 518년 11, 12월 경 벧엘인들이 예루살렘 함락 이후 성전 파괴를 애도하며 불문율처럼 지켜오던 제5월의
금식일과 기타 기념 금식일들을 계속 지켜야할지에 대하여 제기한 질문과 이에 대한 답변을 기록하고 있다. 이 때는 앞서 전반부에
기록되어 있는 스가랴가 하룻밤 사이에 여덟 환상의 예언을 받아 선포한 사건으로부터 약 2년이 경과한 시점이었다. 그리고 B.C.
520년 재개되어 B.C. 516년 준공된 스룹바벨 제2성전의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일 때였다. 근 16년 동안이나 유야무야
중단되었던 예루살렘 새 성전 재건 사업이 재개되자 포로 귀환 세대 사이에서 다시 영적, 종교적 관심이 크게 고조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벧엘 지역에 재 정착한 사람들 중심으로 본래 모세 율법에는 규정되어 있지 않았지만 예루살렘 함락 이후 줄곧 지켜오던
제오월과 칠월의 금식일을 이제 다시 예루살렘 새 성전이 준공되는 상황에서 계속 지 켜야 하는지에 대하여 스가랴에게 질문을
제기하였다. 이에 대해서도 스가랴는 그 특유의 스타일대로 단편적, 직접적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스가랴는 먼저 이스라엘 신 · 구
세대의 형식적, 인본주의적 신앙 행태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의 뿌리깊은 악습을 지적한다. 그리고 현재 내외의 갖은 시련과
도전에 시달리고 있는 포로 귀환 세대의 완전한 회복과 영 · 육간의 풍성한 축복을 약속하며 저들이 지금 당장 직면하고 있는 성전
재건 사업에의 전 공동체적 동참과 완성을 다시 한번 독려한다.
그리고
끝으로 선민의 모든 금식일(禁食日)이 축제일(祝察日)로 변경되고 자신들 선민들은 물론 세계의 이방인들마저도 모두 회개하여 결국 온
세상이 선민을 중심으로 여호와를 경배할 것이라는 종말론적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즉 스가랴는 벧엘인들이 제기한 절차적, 형식적
문제에 대한 단편적 답을 주기보다는 궁극적이고 근원적인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당시의 선민들이 방법론적, 형식적 신앙 의식에 앞서
원대한 종말론적 역사 인식을 바탕으로 한 참 신앙의 실천이라는 보다 중요하고도 우선적 문제에 눈뜨도록 가르치고 있다.
후반부
제9-14장은 전반부 및 중반부의 시대 배경과는 40여년의 시차가 있는 B.C. 480-470년을 배경으로 주어진 말씀으로서
훗날 선민 앞에 등장하실 한 겸손한 왕이시자, 선민을 위한 유일한 참 목자이신 메시야를 중심으로 선민이 누리게 될 복된 미래의
비전에 대한 일련의 예언 선집(選集)이다. 이 무렵 대다수의 포로 귀환 세대는 다시금 깊은 영적 회의와 불감증에 서서히 빠져들고
있었다. B.C. 516년 스룹바벨 제2성전이 준공되었지만 그것은 그저 단절된 하나의 사건이었을 뿐 포로 귀환 세대의 영 ·
육간의 현실은 별반 달라질 것이 없었다. 오히려 포로 귀환 세대는 여전히 정치적 · 군사적 위협에 쫓기며 경제적으로도 뾰죽한
타개책이 없이 예루살렘과 주변의 기존 이방 토착민들의 눈치를 보며 근근히 살아가야 하는 별다른 희망 없는 삶이 계속되었다. 그러자
이내 포로 귀환 세대의 여호와 신앙의 열정은 사그라지고 오히려 과거 예루살렘 멸망 이전 시대의 선민들처럼 심각한 영적, 사회적
타락의 징후들마저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이런
시대 상황에 직면하여 스가랴는 여호와께서 자신에게 보여 주신 훗날 선민에게 찾아오실 한 겸손한 왕이시자 참 목자이신 메시야를
중심으로 선민들이 누릴 수 있게 될 복된 미래 즉 선민의 영원한 안정과 평화, 승리와 복락의 종말론적 도래의 비전을 선포하고
있다. 그리하여 자 신들의 본토에 돌아왔으면서도 아직도 쫓기는 철새처럼 제대로 뿌리내려 정착하지 못한 당대의 선민들을 향하여
선민의 복되고 영원한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이제 자신들이 돌아온 땅에서 어떤 난관과 역경에도 주저앉지 말고 과감히 일어나서
새역사를 창조해 나가도록 격려하고 있다. 여기서도 스가랴는 당대의 선민들에게 당장의 달콤한 안일과 보상을 약속하거나 직셜적,
당위론적 설교보다는 선민의 영원한 종말론적 비전이라는 궁극적이고도 근본적인 진리를 제시하여 자기 시대의 포로 귀환 세대가 이를
진정 깨닫고 사모하면서 굳건한 믿음 위에서 자발적이고 역동적인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독려하고 있다.
후반부는 선민이 누릴 복된 종말론적 미래와 선민에게 약속된 이 복된 미래는 오직 선민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서 세우신
왕이시자 목자로서의 메시야의 사역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을 예언하고 있다. 따라서 이 후반부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의 복된
종말론적 미래를 위 하여 세우신 유일한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핵심 사역에 대한 예언들을 담고 있다. 그리하 여 스가랴서는
구약성경에서 이사야서 다음으로 메시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을 가 장 많이 담고 있는 책으로 손꼽힌다. 메시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 400여년 전에 주어진 이 스가랴의 주요 예언들은 이미 그대로 성취되었으며 또한 성취되어 가
고 있는 과정에 있다. 따라서 이미 스가랴서의 예언이 부분 성취된 시점의 신약 시대를 사는 신 약 시대의 여호와의 백성들인 우리
성도들은 더욱 더 우리가 여호와의 선민으로서 누리게 될 복 된 영원한 종말론적 미래에 대하여 크고 놀라운 확신을 가질 수 있다.
후반부는 공히 선민 이스라엘을 위해 여호와께서 세우신 왕이시자 목자로서의 메시야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한 육적
선민 이스라엘과 영적 선민인 신약 교회의 복된 미래를 말하면서도 예수의 초림과 수난 동 예수의 지상 사역에 치중한 제9-11장과
예수의 숭천 이후의 신약 시대와 세상 끝날의 몇몇 핵심 사건을 주로 부각시킨 제12-14장의 두 부분으로 다시 나눌 수 있다.
이와 같은 후반부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그 내용 전개를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겸손한 왕, 참 목자이신 메시야의 지상 사역과 선민의 복락
원론적, 궁극적 차원에서의 이방 심판과 선민의 안전 대조(9:1-8)
한 겸손한 왕의 도래와 통치 및 여호와께서 선민에게 주실 복락(9:9-17)
유다 지파를 통한 선민 구원과 이방 열국 사이에서의 선민 소집과 인도(10:1-12)
선민이 미워할 참 목자의 행적 및 선민 대중과 한 악한 목자의 멸망 예언(11:1-17)
메시아의 수난 이후와 세상 끝날의 사건들을 통한 선민의 복락
종말론적 관점에서의 열국의 침략과 선민 보존과 승리의 삼중 예언(12:1-9)
성령 강림에 의한 예루살렘의 애통과 온 땅 모든 족속 각각의 회개 예언(12:10-14)
선민의 영적 고양과 목자 상실 후의 연단 등 선민 구원 과정의 핵심 사건들(13:1-9)
여호와의 날의 열국의 예루살햄 침략 및 천지 대격변과 예루살렘 평안의 완결(14:1-11)
여호와의 날의 열방의 심판과 여호와 경배 정착 및 선민의 땅의 성화의 완결(14: 12-21)
스가랴서
전반에서 거듭 발견되듯이 스가랴는 자기 시대 선민들이 부딪힌 모든 개별적, 구체적 문제 상황들에 대하여 단편적, 직설적으로
대응하기 보다는 궁극적 근원적 해결책으로서 여호와께서 선민을 위하여 예비하신 이 세상 끝날의 영원한 축복에 대한 종말론적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를 진정으로 깨달은 선민 각자가 원대한 구속사적 비전 위에서 스스로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근본적 해답과 위로를 전하고 있다. 오고 오는 시대의 모든 여호와의 백성들도 모두 다 이 종말론적
비전 위에 우뚝 설 때 자기 시대의 고난과 모순을 구속사의 한 과정으로 인식하고 이겨내는 동시에 각자의 시대적 사명을 묵묵히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인생의 근원적 좌표와 지침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미 2000년 교회사의 수많은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이러한 종말로적 비전 위에서 위대한 소망을 품고 승리와 영광의 삶을 현실로 실현하였던 것이다.
중세의
한 수도자는 스가랴서를 포함한 구약 예언서에 기록된 메시야 관련 예언들 즉 우리 인생에게 구원과 축복을 가져오실 유일한 왕이요
목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들을 가리켜 역사의 어둠 위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작은 별들이라고 묘사하였었다.
실로 구약
예언서 곳곳에 기록된 이 유일하고도 완전한 인생의 구원자에 대한 약속은 그 옛날 구약 선민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토록 가혹하고도
길었던 시련과 역경을 이기게 해주는 소망의 빛이었다. 더우기 이제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구원에 대한 예언의 말씀 중
일부가 이미 성취되었고 이제 세상 끝날의 완전하고도 영원한 성취를 향하여 실현되어 가고 있는 시대를 사는 오늘날 성도들은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의 시대보다 더욱 더 밝게 빛나는 이 예언의 말씀을 바라봄으로 그 어떤 시대와 세상의 어두움 속에서도 자신의 인생
길을 바르고 기쁘게 걸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스가랴 메시지 요약
1. 역사의 주관자이신 전능하신 하나님.
포로기
이후의 예언서인 동시에 성전 재건 촉구와 격려란 공동의 주제를 가진 학개서와 본서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신명(神名)은 ‘만군의
여호와’ 즉 ‘여호와 체바오트’이다. 이 신명이 학개서에서는 10회 사용되었고, 본서에서는 47회 사용되었다. 학개가 전체 두
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본서가 전체 열네 장으로 이루어진 사실을 감안하면 ‘만군의 여호와’라는 신명이 학개서에서 10회나 사용된
것은 본서에 비해서 많이 사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여튼 학개서와 본서에 ‘만군의 여호와’라는 신명이 이렇게 많이 사용되
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고대 근동 문화권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 이름으로 불리는 존재의 속성과 특징을
반영하며, 따라서 학개서나 본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이 점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만군의 여호와’는 하늘의 천체나 영적 존재인
천군 천사 및 지상의 모든 피조물에 대하여 완전한 통치권을 행사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면모를 강조할 때 주로 사용되는
신명이다. 본서에서 이러한 용례를 지니는 신명을 자주 사용한 것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유일한
참신이심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이다. 실로 천지와 그 안의 모든 것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은 또한 인류의 역사를 당신이 계획하신 대로
이끄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은 미래의 일을 정확하게 예언하실 수 있고, 또한 그러한 하나님의 예언은 반드시 성취된다.
본서에서는 과거 일차 재건이 좌절된 적이 있는 성전의 완공과 그 후에 선민에게 주어질 영광 및 성전의 원형이신 메시야의 도래와
희생, 전우주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과 신약의 남은 자인 성도의 종말론적 구원 등에 대한 무수히 많은 예언이 선포된다. 그리고
이러한 예언의 궁극적 주체가 ‘만군의 여호와’이심을 거듭 밝히고 있다. 이는 본서 에서 선포되는 예언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에 대한 보증이 된다. 특별히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선포된 본서의 예언들 중 일부는 이미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알고 있다. 이는 결국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선포된 나머지 예언들, 특히 종말론적
예언들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하여 준다.
2. 하나님의 백성에게 요구되는 성결한 삶.
본서에는
선민의 조상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징계를 받았던 과거의 사실과 더불어 여호와를 거부하는 열방이 장차
멸망당하게 된다는 미래의 일들이 여러 차례 지적 또는 예고된다. 이는 일차적으로 본서 기록 당시의 선민들로 하여금 과거
범죄함으로 심판받은 조상들의 불신앙적인 삶의 선례를 따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고, 더 나아가는 주변 이방 나라들의 불신앙적인
행태에서 벗어나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경건하고 성결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신앙적인 삶을 살 때에만 여호와의 축복이
회복될 수 있다. 하나님은 이를 ‘너희는 내게 돌아오라 …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란 약속의 말씀으로
보증하신다(1:3). 그리고 본서는 궁극적이고 항구적인 성화(聖化)가 이 세상 마지막 날에 완결된다는 예언으로
마감된다(14:20,21). 이러한 종말론적 거룩함에 참여할 수 있는 자는 바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성결한 삶을 사는 자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궁극적인 축복을 바라보는 자는 현재 자신의 주변에서 범람하고 있는 죄악의 조류에 휩쓸리지 않으며 선을 행하는 데서
오는 고난을 극복하는 데 힘쓴다. 또한 거룩한 삶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 더디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데 대해서도 초조해 하지
않고 꾸준하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거룩한 삶을 살아간다.
3. 형식적인 신앙을 넘어서는 참된 신앙의 추구.
본서
제7장과 제8장에는 벧엘 사람들이 스가랴에게 나와서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관련하여 전통적으로 지켜오던 금식일을 성전이 재건되는 이
시점에도 계속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과 이에 대한 여호와의 답변이 나온다. 그러나 여호와의 답변은 금식일 준수 여부에 대한
직설적인 대답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벧엘 사람들이 질문을 계기로 하여 오히려 선민 사회에 깊게 뿌리 내리고 있는 형식주의적이고
인본주의적인 행태 등과 같은 여호와에 대한 불순종의 악습을 지적하셨다. 그리고 과거 선민의 조상틀이 멸망한 것이 바로 이러한
왜곡된 신앙 행태 때문임을 밝히고 이러한 전철을 밟지 않도록 촉구하셨다. 또한 선민을 위한 충분한 신앙 규범으로서 이스라엘 멸망
이전에 주신 말씀을 제시하셨다(7:7). 뿐만 아니라 이 말씀에 근거한 참된 신앙을 추구할 때 주어지게 될 여호와의 임재와 선민의
재번성도 약속하고 있다(8:4-8). 즉 여호와께서는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며, 성문에서 진실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마음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와 같은 여호와가 미워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여호와 절대 신앙에 근거한 공의와
사랑을 실생활 가운데 행동으로 옮기기를 촉구하시며 독려하시는 것이다(9:16,17). 또한 이러한 실천적 신앙을 가질 때 선민
패망 기념 금식일이 축제일로 변화된다는 비전도 제시하셨다(8:18,19). 이는 하나님께서 실제 삶 가운데는 악을 행하면서도
형식적으로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을 얼마나 혐오하시는지와 더불어 이와 대비되는 진리와 화평을 사랑하며 실현하는 역동적 신앙이 얼마나
고귀한 가치 를 지니는지를 알게 하며 바른 행동이 뒤따르는 참된 신앙을 가질 것을 다짐하게 한다.
4. 메시야의 도래와 수난.
그리스도의
초림과 지상 사역 및 승천 이후에 기록된 신약 성경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전에 기록된 구약 성경의 근본 주제 역시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한 죄인된 인간의 구원으로 축약될 수 있다. 그리하여 구약 성경 중에도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예언과 그 의미가 매우 다양한 형태로 제시되고 있다. 그리고 구약 성경 중에서도 이사야서는 가장
다양하고 선명하게 그리스도의 면모와 사역에 대한 예언을 주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이사야서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본서에도 구약의
어떤 책에서 보다도 풍부하게 장차 도래하실 그리스도의 면모와 사역이 선명하게 예언되고 있다. 특히 본서에는 초림하여 인류 구속
사역을 수행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마지막 순간을 아주 선명하게 예언하고 있다. 예를 들면, 9:9에는 그리스도께서 겸손한
왕으로서 나귀 새끼를 타고 백성들 의 환호를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것이 예언된다. 이 예언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나아가실 때에 겸손하게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거민들이 예수를 메시야로 여기고 환영함으로 성취되었다(마
21:4,5 ; 요 12:14-16). 또한 11:12,13에는 참 목자가 품삯으로 은 삼십을 받으며 그 돈이 토기장이에게 던져질
것이라는 사실이 예언되고 있다. 이 예언은 가룟 유다가 그리스도를 은 삼십에 팔고 죄책감을 못이겨 그 돈을 여호와의 전에 던진
것을 제사장들이 나그네의 묘지로 쓰기 위하여 토기장이의 밭을 구입하는 데 사용함으로 성취되 었다(마 27:3-10).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창으로 허리를 찔려신 사건(요 19:37) 역시 12:10 예언의 성취였다. 이와 같이 본서가 메시야의
초림과 그의 사역을 예언하되 특히 수난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3위 하나님이신 성자(聖子)께서
성육신하여 고난당하며 치욕스러운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은 결쿄 우연이 아니라 태초부터 정해 놓으신 여호와의 구속 계획에 따른
것임을 명확하게 전하기 위해서이다. 이처럼 본서는 구속사의 획기적 전환점을 이루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수난을 가장 직접적으로
예언함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여 구원을 받도록 인도하는 놀라운 가치를 지닌 책이다.
5.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 다스릴 겸손한 왕으로서의 메시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는 주역이었던 대제사장 여호수아에 대한 언급들이 나온다(3:1-10 ; 6:9-14). 그 가운데
6:9-14에는 여호와께서 스가랴에게 백성들로부터 은과 금을 받아 면류관을 만들어 여호수아에게 씌울 것을 명령하시는 내용이
소개된다. 여기에 등장하는 여호수아는 바로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즉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는 것은 미래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실 것을 예표하며, 여호수아가 면류관을 쓰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통치하시는 왕이
되실 것을 예표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영광된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자이신 그리스도는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세상의 통치자와 달리
겸손하신 면모를 보이신다. 이는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여호수아가 '내 종 싹’으로 묘사되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여기서 '내
종'이라는 표현은 장차 그리스도께서 겸손하게 여호와의 명령을 수행하는 종으로서의 면모를 보이실 것임을 알게 한다. 그리고
'싹’이라는 표현은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보잘 것없는 면모를 보이실 것을 나타낸다. 실로 그리스도는 온유한 평화의
사람이었다(9:9). 또한 채찍에 맞고 거절 당하고 배신당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는 겸손의 사람이었다(13:7). 이처럼
본서는 장차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이 땅에 오실 것이나 인간의 생각과는 달리 순종을 미덕으로 삼는 종처럼 겸손하 게 성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구속 사역을 묵묵히 감당하실 것을 예언하고 있다.
6. 영원토록 만민으로부터 경배 받으실 여호와.
전체의 절정(Climax)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여호와의 날에 발생할 일들을 예언하는 본서의 마지막 단락인
14:12-21 부분이다. 여기에는 만왕의 왕으로 재림하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대적하던 열방의 세력들에게 초 자연적인 대재앙을
내리신다는 사실(14:12-15)과 더불어 그 날 이후에 열방의 남은 자들이 여호와를 경배하며(14:16-19) 선민의 땅
전체에 보편적이고도 항구적인 성화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예언된다(14:20,21). 즉 본서는 이 세상에 모든 악이 없어지고
여호와께서 세세토록 세계 만민에게 경배 받을 종말의 영광스러운 상태를 보여주는 것으로 끝맺고 있는 것이다. 이는 여호와를 섬기는
일을 최대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는 성도에게 이상적인 세계를 회구하는 벅찬 소망을 갖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소망은 성도들에게
지금 비록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악과 타협하지 않는 거룩한 삶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할지라도 고난에 좌절하지 않고
선으로 악올 이겨나갈 용기를 갖게 한다. 그런 점에서 본서는 성도들에게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캄캄한 바다에 저 멀리 반짝이는 등대의
불빛처럼 인생 항로의 바른 방향을 잡게 하며 안전한 영적 포구에 이르는 소망과 죄악의 물결을 이길 용기를 부여하는 소중한 책이라
할 수 있다.
7. 죄의 필연적 결과인 공의로운 심판.
과거 선민의 조상들이 극심한 고난을 받았던 것은 그들이 저지른 범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심히 진노하셨기 때문임을 상기시키는
내용으로 시작된다(1:2). 이는 선민으로 하여금 여호와의 권면을 저버리고 악한 길을 감으로써 심판을 받았던 조상들의 선례를
따르지 말고 이미 지은 죄는 회개하며 미래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도록 권고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권고에도 불구하고
선민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돗을 거스르고 죄를 범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전지하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에
본서에는 또한 이들에 대한 심판 선언이 끊임없이 주어진다. 특히 스가랴의 제6환상인 날아가는 두루마리 환상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계속 범죄하는 사람들이 두루마리 곧 율법에 기록된 대로 저주를 받게 될 것이란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다(5:1-4).
그리고 제8환상인 두 구리 산 사이에서 나온 네 병거의 환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며 악을 조장하는 사탄의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암시하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6:1-8). 그러나 더 나아가 본서는 재림하실 그리스도를 여호와께 순종하는 택한 백성에게는
영원한 승리와 영광을 주시는 반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멸망의 심판을 내릴 공의의 심판자가 되심을 예언한다(9:11-17 ;
14:12-15). 이러한 본서의 예언은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반복되고 있으며(마 25:31,32 ; 고후 5:10 ; 히
9:27), 특히 요한계시록에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계 20:12 ; 22:12). 죄에 대한 필연적 결과 로 종말에 그리스도의
공의로운 심판이 있을 것을 예언하는 본서는 최후 심판에 대한 이러한 신약의 모든 예언들이 갑자기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의 최종적 실현인 구속사의 필연적 과정임을 알게 한다.
스가랴서 전반부 개요(스가랴 1-6장)
스가랴서는
학개서와 함께 제1차 포로 귀환 세대 선민을 제일차 대상으로 하여 기록된 책으로 그 주제 또한 학개서와 일정 부분 일치한다. 즉
학개서와 스가랴서는 공히 제1차 포로 귀환 세대의 선민에게 가장 절실하고 시급한 사명이요 과제였던 성전 재건을 촉구하고 독려하는
것을 그 주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학개서가 오직 성전 재건을 촉구하고 독려하는 것만을 주제로 하는 것과 달리 스가랴서는 성전 재건 독려를 주제로 하는 전반부와
함께, 후반부에서는 성전이 재건된 후 약 30-40년이 지난 때를 배경으로 하여 겸손한 왕이자 참 목자이신 메시야를 중심한 선민의
복된 종말론적 미래 제시를 그 주제로 한다.
또한
학개서와 스가랴서의 전반부는 시대적 배경도 같고 주제도 동일하지만 메시지를 전달하는 양식이나 강조점은 사뭇 다르다. 학개서가
직설적으로 제1차 포로 귀환 이듬해에 착공하였으나 내외의 난관에 부딪쳐 중단한 채로 16년 동안이나 방치된 성전 재건 사업을 다시
재개할 것을 촉구하고 독려한 반면, 스가랴서는 단 한 번도 직접적으로 성전을 재건하라고 촉구하지 않는다. 다만 스가랴서에서는
하룻밤 사이에 받은 일련의 대 환상을 중심으로 하여 하나님께서 선민을 핍박하는 대적들을 심판하실 것과 성전 재건을 도우실 것,
그리고 선민의 승리와 영광을 제시함으로서 간접적으로 성전 재건을 독려하고 대적들의 핍박 가운데서도 성전 재건 공사에 입하고 있는
선민을 위로 격려한다.
한편
스가랴서는 이미 앞에서 밝힌 것처럼 기록된 시대적 배경과 주제에 의해 크게 1-8장과 9-14장 두 부분으로 구분된다. 이 중
전반부 제 1-8장은 스가랴보다 약 2개월 먼저 활동을 개시한 학개 선지자의 책망과 촉구로 이제 막 성전 재건 공사가 다시 재개된
지 한 달 조금 넘은 때로부터 성전 재건 공사가 재개되어 약 2년이 경과함으로써 성전 재건 공사가 절반 정도 진척된 때에 주어진
계시로서 성전 재건을 독려하는 것을 그 기본 주제로 한다.
그리고
이러한 전반부는 계시가 주어진 시점과 계시의 내용에 따라 다시 1-6장과 7-8장의 두 부분으로 구분된다. 이 중 전반부
1-6장은 성전 재건 공사가 이제 막 다시 재개된 때에 주어진 계시로서 앞머리의 서론적 회개 권면(1:1-6)과 일종의 부기적
성격을 가진 끝머리의 일련의 환상 기사를 마감하는 대제사장 면류관 관련 기사(6:9-15) 와 그 사이의 여덟 편의 신기하고도
웅장한 환상 기사(1:7-6:8)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1-6장을 구체적으로 개관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1:1-6의 문단은 일련의 환상 예언 기사를 시작하는 서론적 회개 권면을 다룬다.
이러한
본문은 다리오 왕 년 곧 B.C. 520년 월에 주어진 계시이다. 다리오 왕 년 월은 착공 하자마자 중단된 채로 16년간이나
방치되었던 성전 재건 공사가 학개 선지자의 책망과 촉구 로 다시 재개된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때이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께서
성전 재건을 격려하는 일련의 환상 계시를 주시기에 앞서 이처럼 회개를 권면하는 계시를 먼저 주신 것은 당시 선민에 게는 성전을
재건하는 일 이상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정립하는 일이 더 중요하고 선행되어 야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스가랴에게 처음 하나님의
계시가 입할 당시 포로 귀환 세대 선민은 비록 학개 선지자의 책망과 촉구로 성전 재건 공사를 이미 재개한 상태이기는 하였지만
학개서 제1장 전반부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은 영적인 나태와 조상들을 본받아 행하였던 악한 행실을 완전히 버린 상태는 아니었다.
따라서 만일 그러한 상태로 그들이 성전 재건 공사에 임한다면 성 전 건축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셜령 성전 건축이
완료된다고 해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는커녕 그 조상들과 같이 하나님의 징계를 피할 수 없을 것이었다. 이에 하나님은 성전 재건을
격려하는 일련의 환상 예언을 주기에 앞서 먼저 회개의 권면을 주신 것이다.
다음 1:7-6:8의 여섯 문단은 일련의 여덟 가지의 환상 예언을 다룬다.
이러한
여덟 가지의 일련의 환상 예언은 모두 스가랴가 하나님으로부터 처음 계시를 받은 때로부터 약 3-4개월이 지난 때인 다리오 왕
제2년 곧 B.C. 520년 11월 24일 밤에 연속하여 받은 계시이다. 이때는 학개 선지자가 포로 귀환 세대 선민들에게
마지막으로 메시지를 선포한 날 곧 성전 지대가 놓인 때로부터 만2개월이 지난 때로서(학 2:18,20), 이 여덟 가지 환상은
이제 겨우 재개된 성전 재건 사업이 다시는 중단되는 일 없이 완공되는 그날까지 계속되도록 독려하기 위하여 주어진 묵시 문학적
비전이다.
이러한 여덟 가지 환상의 내용과 의미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제1환상 ; 붉은 말을 타고 화석류 나무 사이에 선 여호와의 사자와 세 말의 환상(1:7-17) - 선민을 핍박한 열방을 심판하고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회복시켜 주시는 등 선민 회복 전반에 대한 예고.
제2환상 ; 네 뿔과 네 대장장이의 환상(1:18-21) - 포로 귀환 세대의 선민을 대적하고 핍박하는 사방의 모든 악한 세력을 심판하여 멸하실 것에 대한 예고
제3환상 ; 측량줄을 잡은 한 사람의 환상(2:1-13) - 예루살햄 성전은 물론 예루살렘 성까지도 다시 재건될 것과 예루살렘이 번영하며 그 가운데 여호와께서 임재하심으로 안전을 누리게 될 것에 대한 예고
제4환상
; 대제사장 여호수아에 관한 환상(3:1-10) - 여호수아가 입은 더러운 옷으로 대표되는 선민의 죄를 사하여 정결하게 하셨음과
장차 ‘싹’으로 상정된 한 종을 통하여 선민에게 종말론적 사죄와 축복을 보장하실 것에 대한 예고
제5환상 ; 순금 등대와 두 감람나무의 환상(4:1-14) -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케 하신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에 의해 성전이 반드시 재건될 것에 대한 예고
제6환상 ; 날아가는 두루마리 환상(5:1-4) - 계명과 계명으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자들에 대한 신속한 심판 예고
제7환상 ; 에바 안에 앉은 여인의 환상(5:5-11) - 관영한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확실성과 그 비참한 결과에 대한 예고
제8환상 ; 두 구리 산 사이에서 나온 네 병거의 환상(6: 1-8) - 선민을 대적하는 사방의 모든 악한 세력에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반드시 시행될 것에 대한 예고
이상에서
보듯 여덟 가지의 일련의 환상 예언은 성전 재건 사업의 당위성을 직설적으로 설파하거나 그 성전의 준공과 관련된 사항들만을
사실적, 단편적으로 예언하지 않는다. 이 여덟 환상 예언들은 하나의 독립된 사건으로서의 성전의 준공 사건은 물론 이와 관련하여
당시 선민들이 명심해야 할 여러 교훈들, 나아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함께 계심을 보여주는 여호와 임재의 상징적 처소인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신약 시대적 축복, 나아가 종말론적 축복까지를 망라하여 상징적, 포괄적, 입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당시의 포로 귀환 세대들이 자신들 시대의 역사적 소명으로서 수행하고 있는 성전 재건 사업의 의의를 근원적으로 깨닫고
자발적으로 동참하도록 이끌고 있다.
한편
일련의 연속적인 여덟 가지의 환상의 내용을 보면, 1-5환상과 환상은 모두 선민의 안전과 승리, 성전 재건의 완료 등 선민에게
모두 긍정적인 사실을 예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에 반해 제6,7환상은 선민의 범죄에 대한 심판을 그 내용으로 하는 것으로서
선민에게 부정적인 사실을 예언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6,7환상은 성전 재건을 독려하는 것과 무관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제6,7환상은 비록 선민의 범죄에 대한 심판과 관련된 환상이기는 하지만 이 환상 역시 선민으로 하여금 학개 제1장 전반부에
나타난 것과 같은 죄악된 생활에서 온전히 떠나 그들에게 부여된 사명인 성전 건축에 박차를 가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성전 재건을
독려하기 위한 환상이 분명하다.
끝으로 6:9-15의 문단은 일련의 여덟 가지 환상을 끝맺는 부분으로 대제사장 면류관 관련 기사를 다룬다.
즉 여호와의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면류관 제작과 보관 및 종말론적 성전 건축자에 대한 예언 전달 명령 및 여호와의 사자의 종말론적 성전 건축의 재확증 선언을 통하여 일련의 환상을 끝맺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상과 같은 본문을 대할 때 다음과 같은 영적 사실을 각성해야 한다.
첫째, 가시적인 성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로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입하는 성전인 성도 자신의 성결함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성전 재건이라는 당면한 과업을 수행하고 있는 선민을 격려하고 독려하는 일련의 환상을 주시기에 앞서 성전 재건의 주역인 선민의
회개를 먼저 촉구하셨다. 이는 성전 재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성전을 재건할 주역인 선민의 성결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가며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야 하는 시대적 사명을 감당해야 할 자들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을 성결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에서 공중 권세 잡은 사탄과 그의 사주를 받은 악한 무리들의 도전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완성된다는 사실이다.
바벨론에서
귀환한 선민은 제일 먼저 하 나님이 성전을 재건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성전 재건 사업은 사마리아인들과 주변 민족들의 핍박과
훼방으로 인하여 착공하자마자 중단된 채 무려 16년간이나 방치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의 활동으로 성전 재건
사업은 다시 재개되었으나 이민족들의 핍박과 훼방은 여전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성전 재건 사업에 임하였을 때 성전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완공되었다. 이렇게 모든 핍박과 훼방을 극복하고 완공된 성전은
하나님께서 영원히 임재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예표한다. 그리하여 성전의 완공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도래하여 그 완성을 위해
나아가는 중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반드시 완성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이 땅에 세워지기 시작한
하나님의 나라는 현제 세상에서 공중 권세를 잡은 사탄(엡 2:1)과 그의 사주를 받은 악한 자들의 훼방과 핍박으로 말미암아 큰
어려움에 처할 뿐만 아니라 심한 경우에는 하나님의 나라 건설의 완성이 요원한 일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의 힘과 능력으로 건설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의 능력으로 건설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 건설의 일꾼인 우리는
약하여 실패하고 좌절하기 일쑤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영에 의해 반드시 완성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건설의
일꾼인 우리 성도들은 사탄의 세력의 훼방과 핍박으로 말미암아 큰 어려움과 위기에 직면할지라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 나라 건설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셋째, 교회는 세상에서 사탄의 세력에게 핍박을 받으나 마침내 사탄의 세력에 대하여 최후 승리를 거두고 영광을 얻게 된다는 사실이다.
본문에서
선민의 공동체로 언급되는 예루살렘은 일차적으로는 당시 이민족에게 압제를 당하던 바벨론 포로 귀환 세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키나 더 나아가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루어질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를 가리킨다. 그리하여 본문의 예루살렘의
온전한 회복 예언은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보여주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신약 교회가 사탄의 세력에 의해 고난을 당하나
마침내 최후 승리를 거두 고 영광을 얻게 될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세력이
하늘에서 내려온 불에 멸망하고 사탄은 영원히 무저갱에 갇히고 새 예루살렘이 도래함으로써 성취될 것이다.
넷째, 하나님께 택함을 받아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구원 백성이 된 자라도 자신에게 부여된 시대적 사명을 망각하고 죄악을 행한다면 하나님의 준엄한 징계를 피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바벨론 포수에서 구원하여 본토로 귀환시킨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에게 부여된 사명을 망각하고 과거 그들의 조상들처럼 죄악된 생활을
하게 될 때 그들 역시도 이방 땅에 흩으실 것을 경고하셨다. 그리고 이 경고는 훗날 그대로 성취되었다. 이는 구약 선민이
예표하는 신약 성도들 역시도 자신들에게 부여된 시대적 사명을 망각하고 죄악된 생활을 한다면 하나님의 엄정한 징계를 피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즉 우리 성도들은 우리에게 부여된 사명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을 물론 죄악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할
것이다.
페르시아의 고레스- 멸망까지의 연표
● 페르시아의 고레스- 다리우스 3세, 멸망까지의 연표 :
메대와 바사 : 단 1:21에는 ‘다니엘이 고레스왕 원년까지 (바빌론에) 남아있었다’고 쓰여 졌다. 다니엘은 고레스 왕 원년까지 있으니라.
단 5:30, 31에 보면 ‘바빌론/갈대아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고 메대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62세였다‘고 쓰여 있다. 그 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그 때에 다리오는 육십이 세였더라.
6:27-28에는 ‘다니엘을 구원하여 사자의 입에서 벗어나게 하셨다’고 하나님을 칭송하고 ‘다니엘이 다리오 왕의 시대와 바사 사람 고레스 왕의 시대에 형통하였다‘고 쓰여 있다.
9:1에는 ‘메대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바빌론 나라 왕으로 세움을 입던 원년‘이라고 쓰여 있다.
10:1에는 ‘바사왕 고레스 삼년에 한 일이 다니엘에게 나타났는데...’ 대하 36:22, 23. 사 1:1, 2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온 나라에 공포하고 조서도 내렸는데 유다 포로들의 귀환을 허락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라는 명을 내림.
바사(페르시아) 제국 : 고대 오리엔트 세계를 220년간 지배한 페르시아 인의 제국(BC 559-BC 330). 아케메네스 왕조 바사 제국이라고도 한다. 페르시아라는 명칭은 기원전 7세기경 이란 고원 남서부의 파르사(Fars)에서 비롯되었으며, 이곳이 아케메네스 왕조의 발상지였으므로 이 고대제국의 통칭이 되었다. 아케메네스의 아들 테이스패스(안샨 왕)의 현손, 고레스(키루스) 왕의 손자이고 캄비세스 왕의 아들로 고레스 2세(성경의 고레스대왕)도 안샨 왕을 상속받았다.(BC 559) 그는 페르시아 인을 모아 반란을 일으켜 메대를 점령하여(BC 550) 바사제국의 건설자로서 대왕으로 등단하였다.(키루스 2세, BC 559-529, 30년간). 이 신흥국가에 대하여 동맹을 체결하고 대항한 리디아· 신바빌로니아· 이집트 가운데 그는 우선 소아시아의 리디아를 쳐서 수도 사르디스를 함락하고(BC546,547), 바빌론을 무혈점령 하였다.(BC 538) 이로써 바벨론에 잡혀있던 유대인들이 이 때 해방되었다. 고레스와의 전투에 패한 리디아의 크로이수스 왕이(BC560-546) 장작 더미위에 앉아 화형을 기다리는데 갑자기 거센 바람을 일으키며 비가 내려 그가 죽음을 면하게 되자, 고레스는 그를 살려 자신의 고문역할을 하게했다. 그는 유목민의 반란으로 다시 동방원정에 나섰으나, 마사게타이와의 싸움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카스피아 동쪽 초원)
이어서 그의 아들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를 병합하여 오리엔트 세계의 통일을 이룩하였다. 약 2세기 동안 제국이 번성하였으나 다리우스 3세 때 알렉산더 대왕이 이끄는 군사에 패하여 페르시아 제국은 멸망하였다. 그 뒤 3세기에 사산조에 의해 다시 일어났다가 7세기에 아랍인에게 정복되었다. 뒤에 몽고· 투르크 등에 지배되어 오다가 독립하고, 1935년에 국명을 이란이라고 고쳤다.
메대, 바사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역사 이야기) : 이란계 메디아족(族)이 세운 왕국 메디아(Media) 왕국 데이오케스 때에 왕국으로 건립되었으며, 그의 아들 프라오르테스 때는 이란의 대부분을 영유하게 되었다. 캭사레스왕(재위 BC 624∼BC 585)은 BC612년 신(新)바빌로니아와 동맹하여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아시리아제국을 붕괴시켰다. 그는 더욱 서쪽으로 진출하여 리디아 왕국과 싸워서 소아시아 동반부(東半部)를 얻음으로써 서쪽은 카파도키아에서 동쪽은 인더스강 근방까지에 걸친 대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들 아스티게스(Astyges 재위 BC585∼BC 550)가 BC 549년 자신의 손자인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에게 살해됨으로써 메디아왕국은 멸망하였다.
기원전 6세기경 현 이란의 북서쪽에 메대라는 나라가 있었다. 메대는 거대국가로 당시 바사도 메대의 속국이었다. 그때 아하수에로(아스티아게스) 메대 왕은 딸 만다네를 자기 신하인 바사의 캄비세스 1세라는 군주와 결혼시켰다. 왕은 딸이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를 죽여 버리기로 하였다. 그 이유는 딸이 낳은 자식이 자신을 대신하여 왕이 될 거라고 점성술사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딸은 마침내 아들을 낳았고 고레스라 이름 지었는데 메대 왕이 자신의 심복 (수석고문관) 하르파고스에게 그 아이를 정말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후환이 두려워 죽이는 대신 아기를 산중에 버려져 이리의 젖으로 자랐다고 한다.(왕의 소치기 아내에게 맡겨 기르게 했다는 설도 있다.)
이후 메대 왕은 이 사실을 알고 하르파고스의 아들을 잡아 인육으로 요리를 만들어 함께 먹었다고 한다. 어린 고레스는 성장하여 12세에 친부모에게 돌아갔으며, 그의 뛰어난 재질 때문에 이때부터 고레스는 외갓집에서 외조부가 되는 메대 왕에 의해 양육되었다. 고레스는 비범한 재간과 통솔력으로 바사인들을 부추겨 메대를 쳐들어갔다. 이 때 메대 왕은 전쟁 총사령관으로 자기의 심복이라 여긴 하르파고스를 임명하였는데 왕에 대해 아들사건으로 원한에 차있었던 그는 고레스군에게 투항해버리고 만다. 이를 안 아하수에로 왕은 화가 나 직접 군대를 이끌고 고레스의 반란을 진압하려고 했으나 그의 군대가 배신하여 하르파고스와 고레스에게 투항하면서 메대왕을 고레스에게 인도하게 되었다.(BC550) 이리하여 고레스는 메대를 대신하여 중동의 지배자로 등장하였다. 메대와 바사는 종족도 같고 왕실 결혼으로 한 인맥도 있고, 한편 고레스는 메대인에 환심을 사기 위해 외조부는 선대하여 지방장관으로 보내고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고레스의 외숙부)를 즉위시켜 메대의 상징적 왕으로 남게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레스가 이끄는 메대-바사 연합군이 B.C.539에 바벨론을 점령한다. 바벨론 정복 후 메대왕 다리오를 명목상 통일 바사 왕으로 세우고 그의 딸과 결혼하였다. 고레스 나이는 그때 40세 정도였다. 메대인에 대한 유화정책으로 62세의 다리오(장인겸 외숙부)를 명목상 왕으로 앉혔고 2년 뒤 다리오가 죽자 고레스가 이어서 바사제국의 왕으로 등장하게 된다.(B.C.537). 고레스는 B.C.529에 죽어 파살갓 평원에 장사한 그 분묘가 아직 남아있다.
단 6:1-9 다니엘에 대한 음모: 다니엘의 탁월한 지혜와 행정가로서의 오랜 경험은 바벨론을 함락시킨 다리오에게 있어서도 큰 신임을 얻는 요소가 되었다. 이 다니엘에 대한 관리들의 살해모의는 하나님을 떠난 정치인들의 죄성과 부패성 및 권력 쟁취를 위한 잔인성과 허위와 기만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다니엘(당시 82세)은 메대의 3인 총리 중에 한 사람으로서 전국의 방백 120명을 통치하는 임무를 지님.
단 6:9 기도 금령: 메대 관리들은 다리오 왕 이외의 모든 잡신에 대한 기도를 금지할 것을 왕에게 간언했다. 그런데 다만 30일 동안만 다리오에게 경배하게 함으로써 그가 모든 잡신들의 살아있는 신의 현현임을 인정하는 증거를 보이라는 것이다.
단 6:10-15 다니엘의 기도와 참소: 다니엘은 굳은 신앙 자세와 이로 인해: 참소를 당하는 내용이다. 다니엘의 죽음을 각오한 기도와 감사는 우리 성도들에게 큰 충격이다. 또한 본문은 참소자들의 집요함을 보여주는데, 이는 사탄의 끈질긴 죄적 성향을 암시한다.
▶페르시아라는 이름은 본래 남부 이란의 한 주(州)인 파르스(Pars : 현대 페르시아 어로는 Fārs, 기원전 7세기경 이란 고원 남서부의 파르사(Fars)에서 비롯되었으며, 이곳이
아케메네스 왕조의 발상지)에서 유래했는데 그 곳에 아케메네스조의 수도가 있었다. 그 때문에 고대 그리스 인들은 이 왕조를 그
지역 이름으로 불렀고, 오늘날의 유럽 언어도 그것을 따랐다. 그래서 영어를 비롯한 유럽 어에서는 이 나라를 페르시아라 통칭했다.
또, 이 파르스 지방의 언어를 페르시아 어라 했으며, 현재 이란의 공용어이다. 페르시아 제국(메디아 왕국과 아케메네스조)은 고레스왕 이후에 13명의 왕이 있었고, 그 연대표는 아래와 같다.
①키루스 1세(재위 B.C.559~530; 30년)→②캄비세스 1세(재위 B.C.600~B.C.559)→③키루스 2세(고레스대왕, 재위 B.C. 559~B.C. 530, 30년간)→④캄비세스 2세(재위 B.C.530-522; 8년)→⑤바르디야(스메르디스,6개월)→⑥다리우스 1세(대왕, 재위 B.C.522-486; 35년)→⑦크세르크세스 1세(아하수에로, 재위 B.C.486-465; 20년)→⑧아닥사스다 1세(아르타크세르크세스, 재위 B.C.465-425; 40년)→⑨다리우스 2세(재위 B.C.423-404; 18년)→⑩아닥사스다 2세(아르타크세르크세스, 재위 B.C.404~358)→⑪아닥사스다 3세(아르타크세르크세스, 재위 B.C.358-338; 20년)→⑫아르세스(재위 B.C.337-336; 1년)→⑬다리우스 3세(재위 B.C.335-331; 4년).
1. 키루스 1세(재위 B.C.559-530; 30년):
B.C. 7세기말에 활동한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의 왕. 테이스페스의 큰 아들이며, 키루스 2세의 할아버지이다. 당시 엘람 왕국이 아시리아에 패해 멸망한 뒤인 B.C.691년, 아케메네스 왕조의 시조인 테이스페스(Teispes) 왕자는 안산(Anzan) 시를 점령하고, 부친 아케메네스(Achaemenes)의 이름을 딴 왕조를 세웠다. 테이스페스는 왕국을 확장시켰으나, 그의 사후 왕국은 둘로 나뉘어 북부는 차남 아리아라메스(Ariarames)가, 남부는 장남 키루스(Cyrus)가 통치했다.
아케메네스 제국(Achaemenid Empire, B.C. 550~B.C. 330)은아케메네스를 시조로 하는 페르시아 제국이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최대 판도였을 당시 3개 대륙에 걸친 대제국이었다. 동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의 일부에서부터 이란, 이라크 전체 흑해 연안의 대부분의 지역과 소아시아 전체, 서쪽으로는 발칸 반도의 트라키아, 현재의 팔레스타인 전역과 아라비아 반도, 이집트와 리비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 아케메네스 왕조의 영토였다. 안샨(엘람에 있는 수사의 북동부)을 지배했으며, B.C. 7세기 후반에는 동쪽으로 파르수마슈까지 세력을 뻗친 듯하다. 그는 아시리아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 바빌론의 샤마시 슘 우킨에게 지원을 보냈으나(B.C. 651), 아시리아 왕 아슈르바니팔에게 엘람을 정복당한 뒤로는 아시리아의 종주권을 인정해야만 했다(B.C. 639경). 키루스 1세는 큰아들 아루쿠를, 공물과 함께 볼모로 아시리아의 니느웨로 보냈다.
2.캄비세스1세(Kambyses I, 재위 B.C.600~B.C.559) :
키루스 1세(CyrusⅠ)는 페르시아인들을 통합했으며, 그의 아들 캄비세스 1세(Cambyses)는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지방의 군주로서 메디아 왕국(Media)의 마지막 황제인 아스티아게스의 딸인 만다네(Mandane)와 혼인함으로써 페르시아와 메디아를 통합했다. 고대의 기록에 따르면 캄비세스 1세는 비천한 출신이었으나 공주인 만다네와 결혼하면서 출세했다고 한다.
3. 키루스 2세(고레스대왕, B.C.585~529,재위 B.C. 559~B.C. 529, 30년간): 페르시아 제국의 건설자. 1대
B.C.612년 앗시리아가 멸망하자 오리엔트는 4개 국가로 분열되고 이란 남서부를 지배했던 페르시아인 에케메네스 왕조의 키루스 2세는 B.C.550년 메디아 왕국을 쓰러뜨리고 페르시아제국의 건설을 선언했다. B.C.548년 팀브라전투에서 세금을 과도하게 헌납했던 리디아 왕국을 멸망시켰다. B.C.525년
키루스 2세의 아들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를 병합해 오리엔트세계를 통일했다. 다리우스1세 때 대제국이 건설되어 동으로는 인더스강
유역, 서로는 에게 해 연안, 남으로는 이집트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손에 넣었다. 정복한 지역의 체제는 그대로 유지했는데,
군대와 공납의 의무만 지키면 필요이상으로 간섭하지 않았 다. 지배지역인 3대륙을 20개주로 나누어 중앙아시아~이집트 일대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했다. B.C.5세기초 페르시아전쟁에서 그리스에 패한뒤 B.C.330년 마케도니야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멸망했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스1:1~3).
캄비세스 1세의 장남 키루스 2세(Cyrus Ⅱ: B.C.559~529 재위)는 B.C.576년 또는 B.C.590년경에 외아들로 태어나 쿠루쉬(Kurush, ‘태양’을 뜻하는 쿠로스에서 유래)라고도 불렸으며, 주변국들을 점령하며 아케메네스 왕조의 초석을 마련하였으므로 그가 즉위한 B.C.559년부터를 아케네메스 왕조의 시작으로 본다. '키루스 대왕(Cyrus the Great)' 또는 히브리발음에 근접한 '고레스왕'이라고도 한다. 키루스 2세는 안산이라는 메디아 제국의 한 제후국의 왕이 되었는데 하르파구스의 도움을 얻어 BC554년 자신의 외할아버지이며 황제인 아스티아게스에게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고, B.C.549년 엑바타나를 정복함으로써 메디아 제국을 정복하고 나라의 이름을 메디아에서 페르시아로 바꾸었다. 키루스 2세는 페르시아의 창시자이며 약 B.C. 600~530년까지 살았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키루스 2세의 어머니는 메디아 왕국의 아스티아게스의 딸 만다네인데, 생후 곧 산중에 버려져 이리의 젖으로 자랐다고 한다.
4국 중 이집트를 제외한 메디아, 리디아, 신 바빌로니아를 차례로 정복해 대왕이라는 호칭이 붙었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os, B.C.484?~425?) 와 크세노폰도 키루스2세를 가장 이상적인 왕이라 기술했다.
B.C. 559년에 페르시아의 왕을 자처하며 페르세폴리스에 도읍지를 정하고 안샨(Anzan)왕이 되었다.
B..C 550년 아스티아게스를 쳐서 메디아를 멸망시켰고, 그 도읍인 엑바타나로 수도를 옮기고 '아케메네스 왕조'를 열었다.
(메디아와 페르시아를 통일한 후 키루스2세는 '아케메네스 왕조'를 세웠고, 다리우스1세는 '만국의 왕'이 되었다.)
B.C. 549년에는 엘람을 정복하여 엘람의 수도였던 수사를 페르시아 제 3의 수도로 만들다.
B.C. 546년 리디아 왕국을 정복(리디아가 소아시아 정복 중이었음)하여 리디아의 도읍 사르디스를 함락시키고 소아시아까지 판도를 넓혔고 이때 그리스의 모든 도시국가들을 점령했다. 다시 또 박트리아 ·마르기아나 등 동방의 여러 지역도 평정하여 북방 유목민에 대한 방비를 굳혔다.
B.C. 539년에는 나보니도스의 칼데아(신 바빌로니아) 왕국을 무너뜨리고 유대인들을 풀어주었다(이스라엘 민족의 해방). 이렇게 해서 페르시아는 서아시아 전역을 손에 넣었다.
마지막으로 B.C. 530년 중앙아시아 정벌을 위해 박트리아, 소그디아, 호레즘을 병합시키고 이후 키루스 2세는 중앙아시아의 마사게타이와 싸우다가 전사한다.
바빌로니아에
잡혀 있던 유대인 포로들이 이 때 해방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집트를 제외한 오리엔트는 그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여기서
페르시아제국의 기초가 다져졌다. 만년에는 파사르가다이로 도읍을 옮겼다. 피정복지에 대해서는 그 지방의 신(神)을 인정하고, 풍습을
존중하며, 자치를 허용하는 등 유화정책을 썼다. 마사게타이를 토벌하는 도중에 죽었다고 한다.
키루스 대왕의 무덤
메데인들은 키루스2세를 정복자로 생각하지 않았고 자신들과 같은 혈통의 왕으로 여겼다. 유대인들도 그를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 그리고 '하나님의 목자' 등으로 칭송하였다. 알렉산더 대왕조차도 키루스 2세를 위대하게 여겨서 그의 무덤인 파사르가드(Pasargadae)만은 파괴하지 않았다.
4. 캄비세스 2세(재위 B.C.530-522; 8년): 2대 왕.
키루스 2세는 두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가 후계자였던 캄비세스 2세(Cambyses Ⅱ)이고 둘째가 바르디야(Bardia, 헤로도토스는 스메르디스(Smerdis)라고 불렀다)이다. 키루스가 살아있을 동안에는 캄비세스 2세는 바빌로니아를 통치했고 죽고 나서 그의 후계자로 왕권을 승계했다. 그는 왕위를 잇자마자 북동쪽의 국경을 안정화 시키고 왕위에 오른 지 4년 만에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BC 525년에 이집트로 원정을 떠나서 이집트를 정복했다. 이미 키루스 왕이 모든 것을 준비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키루스
2세 대왕과 아케메네스 가문의 딸 카산다네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부왕(父王) 생존시에 캄비세스 2세는 바빌로니아에 대한
업무를 관장했다. 그는 BC 538년 신년행사에서 바빌로니아 왕의 의례 진행을 맡았으며, 부왕이 마지막 원정에 착수하기 전인 BC
530년에는 바빌론의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이집트의 정복은 키루스 때부터 계획되었지만, 캄비세스 2세가 이룬 주요한 업적이다.
이집트 제26왕조의 파라오 프삼티크 3세(Psamtik Ⅲ)의 군대를 격파하고 이집트를 정복한다. 캄비세스 2세는 이 원정에서 사모스의 폴리크라테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또한 이집트군에 있었던 그리스의 장군 파네스로부터 귀중한 군사정보를 얻었고, 아랍족으로부터도 시나이 사막을 횡단할 때 식수를 공급받았다. 나일 삼각주에서 있었던 펠루시움 전투(Pelusium, B.C. 525)에서 캄비세스2세가 승리하고 헬리오폴리스와 멤피스를 함락하자, 이집트의 저항은 끝났다. 이집트에 머물면서 캄비세스2세는 곧 군대를 세 팀으로 나누어서 현재 튀니지 지역과 나일 강 서쪽의 아몬 지역과 누비아(현재 수단과 에티오피아 지역) 지역으로 정복군을 보낸다. 누비아 지역은 캄비세스가 친히 지휘를 한다. 그러나 세 지역 모두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원정에 실패한다. B.C.522년 본토에서 그의 동생인 바르디야를 추종하던 세력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귀국에 서두르지만 귀국 도중 화병으로 캄비세스 2세는 사망한다. B.C.
5세기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캄비세스2세가 이집트에서 벌인 잔학행위를 미친 짓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당시 이집트측
사료에 따르면, 그러한 비난은 대부분 근거 없는 것으로 추측된다. 캄비세스2세는 적어도 그의 통치 초반기에는 화해정책을 추구했다.
후대에 아케메네스 왕조의 다리우스 1세 대왕이 남긴 비문을 보면, 캄비세스2세는 이집트 원정에 나서기 전에 그의 아우 바르디야를 남몰래 죽였는데(헤로도토스는 그의 아우를 스메르디스라고 불렀음), 그후 마기의 제사(祭司) 가우마타가 살해된 왕자로 분장해, B.C. 522년 3월 반란을 일으켜 아케메네스 왕조의 왕위에 올랐다. 캄비세스2세는 시리아에서 이 반란소식을 듣고, 이집트에 수비대를 남겨둔 채 황급히 귀국하던 도중, 시리아에서 B.C. 522년 여름 사고로 죽었는데,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헤로도토스의 기록과 다리우스가 남긴 비스툰(Bistun) 석비에 의하면 캄비세스 2세가 원정을 떠나면서 통치를 맡겼던 심복인 프레사스페스(Prexaspes)로 변장한 조로아스터교 사제 가우마타(Gaumata)가 은밀히 바르디야를 암살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가우마타는 그 후 몇 개월간 페르시아를 통치를 했지만 다리우스와 그를 지지하는 7명의 영주들에 의해서 진압되고 결국 왕권은 다리우스에게 넘어간다. 정확하게 정설로 인정되는 이야기가 없는 가운데 캄비세스 2세에서 다리우스로 왕위가 이양되는 과정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진실을 알기 위해 많은 사학자들이 오랫동안 매달렸지만 자료의 부족으로 아직도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키루스 2세의 아들 캄비세스 2세에서 적통을 끝내고 먼친척이자 장군인 다리우스1세에게 왕위가 옮겨진다.
5. 바르디야(스메르디스, 6개월):
바르디야(Bardiya)는 고레스2세의 동생이자 맏아들 캄비세스2세의 동생으로, 실질적으로는 사제인 가우마타(Gaumata)가 통치함. 다리우스 1세가 자신의 왕위를 되찾게 된 배경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한 '베히스툰 비문'에서 키루스 2세의 아들 바르디야(Bardiya)로 가장한 왕권 찬탈자로 지목되는 제사(祭司) 가우마타(Gaumata)가 실제 키루스 2세의 아들인 바르디야였다고 주장한다.
6. 다리우스 1세(다리오대왕, 히스타페스, 재위 B.C.522-486; 35년): 3대 왕
다리오 1세 히스타스페스(Hystaspes) : 에스라서에 등장하는 ‘바사 왕 다리오’(스 4:5) 및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가 활동하던 시대의 ‘다리오 대왕’에 해당하는 인물로, 히스타스페스의 아들이다. 캄비세스를 계승하여 왕이 된 그는 BC 522-486년에 통치했다. 그는 뛰어난 행정가의 재능을 발휘하여 20개의 행정구인 도를 총독이 나누어 다스리게 하였다(참고, 스 5:3, 6). 역사적 자료에 의하면 그는 운하를 파고 도로를 정비함으로 상업을 증진시키기도 했다. 고레스 왕의 종교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아 여러 민족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였다(스 6:1-12).
수리아와 팔레스타인 지역을 관할하던 총독 닷드내와 그의 동료 스달보스내의 요청(스 5: 3-17)으로 예루살렘 성전 건축의 합법성을 고레스 왕의 조서를 통해 확인하고 즉각 조서를 내려 성전 건축을 독촉하는 한편 재정적인 지원까지 아끼지 않았다(스 6:8). 심지어 “무론 누구든지 이 명령을 변개하면 그 집에서 들보를 빼어내고 저를 그 위에 매어 달게 하고 그 집은 이로 인하여 거름더미가 되게 하라”(스 6:11)라는 조서까지 내렸다. 성전이 완공된 것(예루살렘이 파괴된 때로부터 70년 후)은 그의 재위 6년째 되는 해였다. <!--[endif]-->
메대 사람 다리오(Darius the Mede) : 다니엘서 5:30-31과 6:1 그리고 9:1에 나오는 인물로, 그는 BC 539년 갈대아(바벨론) 멸망으로 ‘갈대아 사람 벨사살 왕’이 죽은 후 왕이 되었다.
“그 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그 때에 다리오는 육십이세 였더라”(단5:30~31).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받던 첫 해”(단9:1). 그는 아하수에로(Xerxes, 크세르크세스의 히브리 명칭)의 아들(단 9:1)로, ‘나라를 얻었을’ 때 그의 나이가 62세였다(단 5:31). 그는 ‘왕’의 칭호를 가졌으며(단 6:6, 9, 25) 다니엘 11:1에서는 ‘메대 사람 다리오 원년에’라는 그의 통치 기간이 나타난다.
다리우스 1세가 일으킨 종교적 혁신의 내용은 그가 인도-이란(Indo-Iranian/Arianian) 신화에 그 뿌리를 둔 ‘신들의 왕’ 아후라 마즈다(Ahura Mazada)를
그의 왕권을 수호하는 독보적인 신적 존재로 내세웠다는 점이었다. 아후라 마즈다는 B.C. 5000년경으로부터
B.C.2000년경까지 인도-이란인들이 공유한 신화에서 우주와 지상의 세계, 그리고 전 우주적인 질서를 수호하는 모든 신적 존재를
창조한 신이었다. 따라서 다리우스 1세가 아후라 마즈다를
그의 독보적인 수호신으로 설정함으로써 페르시아 제국의 왕권을 더 이상 메소포타미아 세계의 각 지역 신들의 주권에 종속된 개념으로
인식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었다. 다리우스 1세가 아후라 마즈다를 통해 일으킨 종교적 혁신은 이와 같은 인도-이란 신화의 세계관을
페르시아 제국의 새로운 왕권 이념으로 도입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페르시아명 다리야바우시. 흔히 다리우스 대왕이라고 한다. 제사(祭司) 가우마타는, 선왕인 캄비세스 2세가 동생 바르디아(스메르디스)를 죽인 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바르디아를 자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선왕은 이집트로 원정을 갔다가 귀국하는 길에 죽었으므로, 그와 동행했던 다리우스가 귀국하여 여러 제후와 함께 제사(祭司) 가우마타를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와 크테시아스가 그의 즉위에 관해 쓴 글은 여러 가지 점에서 분명히 비문을 따른
글이지만, 전설과 결합된 점도 있다. 예를 들면, 다리우스와 공모자들이 그들 중 누가 왕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그들의
말(馬)에게 맡겨 결정하기로 했을 때, 다리우스는 그의 마부가 속임수를 쓴 덕분에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그러나 가우마타를
정통적인 계승자라고 오인한 제후들은, 다리우스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2년간 전국은 혼란에 빠졌다. 마침내 다리우스는 이를
평정하여 제국의 기초를 확립한 뒤, 정벌의 상세한 기록을 비시툰의 산길 절벽에 새기게 하여, 왕위계승에 대한 정통성을 강조하였다.
B.C. 518년~B.C. 510년 인도의 펀자브 지방을 정벌하고, 소아시아의 그리스 식민지도 평정하였으며, 국토의 북변을 자주
침범한 스키타이인人도 몰아냈다. 또 두 번에 걸쳐 그리스 본토에 원정하였는데, 첫번째는 사위 마르도니우스에게 지휘를 맡겼으나
중도에서 실패하였고, 두 번째는 마라톤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맛보았다. 무장보다는 행정 조직가로서 후세에 명성을 남겼다. 광대한
영토를 20(23, 24, 28이라고도 한다)의 행정구인 사트라피(주 또는 방백령)로 구분하고, 총독에는 왕이 친히 임명하는
사트라프(방백)를 두어, 지방의 군사와 내정을 관장하게 하여 일정한 공물과 세금을 거둬들였다. 또한 중앙집화의 수단으로서 교통로를
건설하여 군용 및 통상에 도움이 되게 하였다. 이 역전제(驛傳制)와 사트라프 제도는 그 이후 오랫동안 동방의 여러 나라에서
통치제도로 답습하였다. 그리고 파르수아에 페르세폴리스를, 엘람 지방에 수사를 조영(造營)하여 여름과 겨울의 수도로 삼았는데, 규모의 광대함은 유적을 통하여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다리우스1세가 그리스와의 전쟁에서 세번이나 패배했다. 3차 페르시아 전쟁은 다리우스 1세의 사망으로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Xerxes I : 재위 BC485~BC465)가 그 뒤를 이어서 전쟁에 임했으나 패배했다.
▶페르시아 전쟁(Greco-Persian Wars)에서 그리스를 지켜냄 :
BC 492년~BC 448년까지 지속된 페르시아 제국의 그리스 원정 전쟁으로, 그리스의 여러 도시국가들은 페르시아 제국에 연합 대응하여 성공적으로 공격을 막아내었다. 페르시아는 BC 525년까지 오리엔트를 통일하고, BC 513년부터 발칸 반도 원정을 시작했다.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점령한 다리우스왕은 다뉴브 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영토를 확장했다. 이 때 트라키아 반도에 주둔하던 아테네 군 사령관 밀티아데스(Miltiades)가 페르시아 군의 진격을 막고자 다리를 불태웠으며, 이는 페르시아제국의 왕 다리우스 1세의 분노를 샀다. 이것이 후에 페르시아의 트라키아 공격의 원인이 되었다.
제1차 원정(BC 492년): BC 499년에는 소아시아 연안에 있는 이오니아(Ionia) 지방의 그리스 도시 밀레투스(Miletus)의 정치가 아리스타고라스(Aristagoras)를 중심으로 여러 소도시들이 연합하여 이오니아 반란(BC 499∼BC 494)을 일으키자, 다리우스 1세는 이를 먼저 진압하고자 했으며, BC 494년 이오니아 소도시들을 모두 점령했다. 다리우스 1세는 BC 492년 함대를 정렬하고, 사위 마르도니우스(Mardonius)를 사령관으로 하여 그리스 북쪽에 있는 트라키아 원정을 시작했고, 함대는 헬레스폰트 해협(Hellespont, 오늘날의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과했다. 그러나 함대는 아토스(Athos) 곶(串)에서 폭풍을 만나 난파했으며,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300척의 전함과 20,000명의 군사를 잃었다고 한다. 이것을 흔히 제1차 페르시아전쟁이라고 하는데, 이 때 페르시아가 노린 것은 트라키아였다는 점에서 페르시아전쟁에 포함시키지 않는 학자도 있다. 또한 트라키아는 페르시아의 세력권에 들어감으로써 목적은 일단 달성한 셈이다.
제2차 원정(BC 490년): BC 490년, 페르시아 제국은 제2원정에 들어갔다. 다리우스 1세의 형제 아르타페네스(Artaphernes)와 장군 다티스(Datis)는 실리시아(Cilicia) 군을 주력부대로 하는 대군을 이끌고 아티카(Attica)와 에레트리아(Eretria) 시(市)를 공격했는데, 그 명분은 이오니아 반란을 도왔다는 것이었다. 당시 페르시아의 군사력에 대해 헤로도토스는 약 20만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고대 로마 역사가 코넬리우스 네포스(Cornelius Nepos)는 보병 20만 명, 기병 1만 명으로, 플루타르코스(Plutarch) 등의 학자는 30만 명으로, 심지어 플라톤 등은 5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는 20만 명 가령이 전쟁에 동원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페르시아 함대는 키클라데스(Cyclades) 제도(諸島) 연안을 따라 에우보이아의 에레트리아를 공격하여 이를 함락시키고, 이어 아테네 북동쪽에 있는 마라톤(Marathon) 평야에 상륙, 아테네를 공격하였다. 당시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스파르타는 종교행사를 이유로 파병을 지체했고, 아테네는 1만 명 본군과 프라타이아에서 온 1천 명의 지원군으로 페르시아 군과 맞섰다. 그러나 아테네군은 중장병(重裝兵) 밀집대전술(密集隊戰術)로 페르시아에 크게 이겼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페르시아군은 6,400명을 잃은 반면 아테네군은 192명만을 잃었다. 이후 페르시아군은 아테네 공략을 단념하고 스니온 곶을 돌아 귀국하였다.
한편 다음 원정을 준비하던 다리우스 대왕이 병사한 후 그 뒤를 이어 크세르크세스가 즉위한다. 크세르크세스는 원래 그리스 원정에 열의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의외로 미적지근하게 전개되지만 장군들의 주장에 따라 크세르크세스는 대군을 몰아 그리스를 침범했고 이들은 테르모필레에서 결사적으로 항전하던 스파르타군과 동맹군 3,000을 격멸시킨 후 아테네를 불태운다.
제3차 원정(BC 480년): 전쟁에서 패한 뒤, 다리우스 1세는 다시 전면적인 그리스 원정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BC489년부터 수년간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에서 반란이 지속되어 원정이 연기되었으며, 다리우스 1세의 사망으로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Xerxes I : 재위 BC485~BC465)가 그 뒤를 이었다. 크세르크세스는 페르시아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군대와 물자를 모아 진격했으나, 유례없이 큰 규모로 인해 진군 속도가 느려졌으므로, 그리스군은 그 동안 충분한 방어 태세를 갖출 수 있었다.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하는 30개 그리스 도시국가가 참여한 동맹이 결성되었으며, 육군은 스파르타가, 해군은 아테네가 지휘권을 맡았다.
그리스군은 테르모필레의 협로에 7천 명의 병력을, 아르테미시움에(Artemisium) 271척의 전함을 배치하고 페르시아군을 맞았다. 페르시아군은 헬레스폰토스 해협에 선교(船橋)를 걸고, 아토스 곶에 운하를 판 뒤, BC 480년 8월, 해륙(海陸) 양면에서 그리스를 공격하였다.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는 중부 그리스로 가는 통로에 해당하는 테르모필레의 협로를 지켰으나 내통자(內通者)가 생겨 돌파 당함으로써 전원 전사하였다. 그러나 해전(海戰)에서는 양측 모두 해전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 승패가 쉽게 결정되지 않았다. 아테네는 테미스토클레스의 대함대 건조 제안을 채택하여 페르시아의 재침공에 충분히 대비하고 있었다.
살라미스해전(Battle of Salamis,BC 480년): 제3차 페르시아 전쟁 중인 BC 480년 9월 23일, 아테네 함대를 주력으로 한 그리스 연합해군이 살라미스 해협에서 우세한 페르시아 해군을 괴멸시킨 해전. 아테네의 영웅 테미스토클레스는 일찍이 페르시아의 침공을 예견하고 그리스의 선박을 강화하고 아테네의 시민들을 태워 근처의 살라미스 섬으로 피신시킨 후 살라미스 해협에서 진을 치고 그들을 기다린다. 크세르크세스의 강력한 페르시아 함대는 살라미스 해협으로 유인되어갔지만 오히려 해협의 물살에 많은 수가 끼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도중에 강화된 아테네의 해군이 거세게 충각전술로 몰아쳐 이들을 완파한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이 함선에 탈 것을 설득, 아테네 전면(前面)의 살라미스(Salamis) 섬과의 사이에 있는 바다에서 페르시아 함대와 싸워 이겼다. 크세르크세스는 곧 귀국하여 마르도니우스에게 자기의 뒤를 잇도록 하였다. BC 479년 마르도니오스는 플라타이아이에서 그리스 연합군과 싸워 패하였고, 같은 해 그리스 함대가 소아시아의 미칼레전투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격파하였다.
이렇게 하여 세 번(또는 두 번)에 걸친 페르시아의 그리스 원정은 모두 실패하고, 소아시아 연안의 그리스 도시들은 페르시아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페르시아의 원정을 맞아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잘 싸웠으나, 그리스의 도시 중에는 페르시아에 항복한 도시도 있었다. 또한 아테네 안에서도 페르시아와 내통하는 자가 있었다. BC 480∼BC 479년 그리스군의 총지휘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은 스파르타였으나, 그 후로는 아테네가 대신 연합함대의 지휘권을 쥐고 있다가, 마침내 ‘델로스 동맹’의 맹주(盟主)가 됨으로써 그리스의 패권을 잡았다. 마라톤에서는 중산시민(中産市民)이 중장보병(重裝步兵)으로서 활약하였고 살라미스에서 무산대중(無産大衆)이 수부(水夫)로서 활약하여, 정치적 발언력이 그들에게까지 미쳐, 아테네의 민주화를 촉진하였다.
7. 크세르크세스 1세(아하수에로;그리스 음역, 재위 B.C.485-465; 20년):
아하수에로(Xerxes, 크세르크세스 1세): 인도에서부터 이디오피아까지 127도를 다스린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BC486-464)이다(에 1:1). 일반 역사에는 그리스어 음역을 따라 크세르크세스 1세로 알려졌다. 아하수에로는 왕후 와스디를 폐위하고 유대인 에스더를 왕비로 맞았다(에 1:17). 그는 하만이 유대인을 말살하려던 음모를 좌절시키고 오히려 하만이 속한 아말렉 족속을 멸절시킬 것을 허락하였다(에 8장 참고). 메대 족속으로 갈대아 왕이 된 다리오 왕의 아버지이다(단 9:1).
그리고 아하수에로의 이름 앞에는 항상 ‘메대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그는 3명의 총리를 두고 그 밑에 120명의 방백을 임명함으로, 당시 서쪽으로는 소아시아와 리비아와 애굽까지 이르고 동쪽으로는 인더스 강의 광할한 지역에 이르는 메대-바사의 광범위한 지역을 통치할 행정 조직을 구성하였다(단 6:1-2). 다니엘은 그때 임명된 세 명의 총리 가운데 한 사람으로, ‘다리오 왕 시대와 고레스 왕의 시대’에까지 그 직임을 훌륭히 감당한 것으로 보인다(단 6:28).
그는 다른 총리들과 다니엘을 시기하는 관원들의 꾀임으로 다니엘을 사자 굴에 던져 넣을 수밖에 없었으나, 그 사건으로 인해 다니엘의 하나님을 “그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히 변치 않으실 자”라고 고백했다(단 6:25-27).
유명한 에스더 왕비의 부군. 다리우스 1세의 아들이자 계승자로 크세르크세스 1세(Xerxes)는 선왕 때부터 끌어 온 이집트 ·바빌로니아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BC 480) 테르모필라이·살라미스·플라타이아 전투
등을 통하여, 대규모 그리스 침공을 한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 전쟁에서 그가 결정적으로 패배한 결과, 아케메네스 왕조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다리우스의 아들이 크세르크세스(xerxes)이고 그 후손들의 이름 앞에 '아르타'를 붙이게 되어 아르타크세르크세스(Artaxerxes)로 부른 것이다.
에스더서의 아하수에로 왕이 그리스 침략하려다 즉위 7년 째 되던 해 살라미스 해전에서 패한다.
에스더 남편 아하수에로(Xerxes,크세르크세스)의 아들이 에스라서의 아닥사스다(Artaxerxes,아르타크세르크세스)이다.
크세르크세스는 다리우스 1세와 고레스(키루스2세)의 딸 아토사(Atossa)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다리우스가 즉위한 뒤 처음으로 얻은 아들이었다. 다리우스는 크세르크세스를 그의 형 아르타바자네스보다 더 편애해 후계자로 지명했다. 페르세폴리스 왕궁의 남쪽 현관과 트리필론(장식 계단)의 동쪽 문에 새겨진 부조에서, 크세르크세스는 후계자의 모습으로 옥좌에 앉은 아버지 뒤에 서 있다.
B.C. 486년 다리우스가 죽었을 때, 크세르크세스는 35세였고, 이미 12년 동안 바빌로니아를 통치한 경험이 있었다.
즉위와
더불어, 그가 가진 첫 관심사는 지난 2년 동안 반란자의 수중에 있는 이집트를 평정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를 위해 그는
다리우스 때보다 훨씬 강력한 수단을 동원해야 했다. 재위 2년째인 B.C. 484년, 이집트의 델타 지방을 파괴하고, 이집트인들을
징벌했다. 이때 바빌로니아에서 반란 소식이 전해졌다. 그곳에서 자칭 민족주의자가 반란을 일으켰고, 곧 그 후계자가 나타나 이를
계속 지도했다. 바빌로니아의 2번째 지도자 샤마시에리바는 크세르크세스의 사위에게 정복되었고, 바빌로니아는 난폭한 보복을 받았다.
바빌론의 성벽은 허물어졌고, 사원들은 약탈당했으며, 마르두크 신상은 파괴되었다. 이 행동들은 커다란 정치적 의미를 가졌다. 즉
크세르크세스는 더 이상 바빌로니아 신의 '가호'를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다리우스 대제는 이집트와 바빌로니아를 페르시아 제국과
사적인 관계로 결합된 왕국으로 다루었던(비록 총독령으로 다스렸지만) 반면, 크세르크세스는 강경한 태도로 행동했다.
사적인 결합이라는 의제(擬制)를 일단 거부한 후부터, 크세르크세스는 자신을 단순히 '페르시아인과 메디아인의 왕'이라고 부르면서, 바빌로니아의 왕과 이집트의 왕이라는 칭호를 뺐다. 다음과 같은 비문에서 크세르크세스가 암시한 것은 아마도 바빌로니아의 반란일 것이다(일부 학자는 박트리아의 소요라고 주장함). "이들 나라(반란을 일으킨) 중에 이전부터 데바를 숭배해온 나라가 있었다. 나중에 내가 아후라 마즈다의 은총을 받아, 데바의 신전을 파괴하고 선언했다. '데바를 경배하지 말라!' 전에 데바를 경배하던 곳에서, 나는 아후라 마즈다를 경배했다."
크세르크세스는 자신을 데바 신(조로아스터교 이전의 고대 신)의 적으로 선언하고, 아무런 의심없이 이들 아리안족 종교의 몰락한 신들과 바빌로니아의 신들을 동일시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의문점이 존재한다. 즉 마르두크 신상의 파괴는 위의 비문에서 언급한 데바 신전의 파괴와 반드시 관련이 있는 것인가? 크세르크세스는 아버지 다리우스보다도 더 열성적인 조로아스터교(Zoroaster : Zarathustra의 영어명)의 추종자였는가? 또는 그 자신이 참으로 조로아스터교의 신자였는가?
아케메네스
왕조의 종교와 조로아스터교 사이의 관계를 묻는 것은 난해한 문제이다. M. 몰레와 같은 학자는 문제 설정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그때의 종교는 3가지 다른 종류, 즉 엄격한 의식의 종교, 아케메네스의 비문에서 말하는 왕실 종교,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전하는 일반 민간 종교가 있었다는 것이다.
대(對)그리스 전쟁 : 다시
제국이 평온을 되찾자, 크세르크세스는 평화로운 활동에 전념하려 했으나, 그를 둘러싼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전쟁을
부추겼다(페르시아 전쟁). 추방된 그리스인의 강력한 파당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던 크세르크세스의 사촌이자 매제인 마르도니우스는, 부왕
다리우스가 생전에 마라톤에서 그리스인에게 당한 모욕(B.C. 490)을 복수하자고 선동했다. 감동 잘하는 성격인 크세르크세스는 측근들의 압력에 약했다. 그는 전쟁을 위해 3년에 걸쳐(B.C.484~481), 외교적·군사적 준비를 꼼꼼하게 추진했다. 헤로도토스는
이때의 전쟁준비를 일찍이 없었던 대규모의 것이었다고 기록했다. 병력은 모든 속주로부터 징집되었다. 군대의 병참선 역할을 위해
해군이 만들어졌다. 왕이 이 계획에 쏟은 아낌없는 배려를 볼 때, 그가 이 전쟁을 결코 작은 싸움으로 생각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원정의 진정한 목적에 대해서 후세에 많은 설명이 있었는데, 경제적인 목적은 아닐 것이라고 여겨진다. 당시 그리스는 중요한 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것은 군주 절대주의의 표현으로 보인다.
크세르크세스의
성격은, 나중에 그리스의 전설에서 왜곡되었지만, 결코 어리석거나 지나치게 낙관적이지는 않았다. G. 글로츠에 의하면, 그는 비록
분별있고 똑똑했지만, "신권(神權)에 의한 군주로서 자신에 대한 반대를 신성모독과 같이 귀찮아했고…… 흥분하기 쉬운
성격이었으며, 젊은 열정을 가지고 있던 그는 나태함에 빠져 있었고, 자기가 싫어하는 전쟁을 일으키도록 부추김을 받았다."
페르시아로 철수 : 그리스와의 제3차 페르시아 전쟁의 패배에 불쾌해진 크세르크세스는, 수사와 페르세폴리스에 틀어박혀, 이때부터 일찍이 무거운 과세로 긁어모은 막대한 자원과 부를, 그는 방대한 건설계획을 추진함으로써 국력을 더욱 소모시켰다. 재위 3년째 되는 B.C. 483년부터, 아토스곶[岬]의 지협(地峽)에 운하를 만들고, 또 다르다넬스 해협에 선교(船橋)를 가설하는 등 그리스 원정(제3차 페르시아 전쟁) 준비를 하였다.
재위 6년째 되는 B.C. 480년 봄, 군대의 선두에 서서 육해군을 이끌고 사르디스를 출발하여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기 위해 2개의 배다리를 만들었다. 그러나 폭풍이 다리를 날려버렸고, 크세르크세스는 그 벌로 바다를 채찍질하도록 했다.
다리가 다시 만들어진 후, 그는 7일 동안 군대의 해협 이동을 감독했다. 군대 수를 헤로도토스는
500만 명이라고 했지만, 700~800척의 배가 동원된 것으로 보아 현재는 36만 명으로 추산한다. 거대한 토목 작업으로
군대가 이동하는 길을 놓았다. 악티움의 이스트무스를 가로지르는 운하를 파서, 험준한 아토스 산을 피해갔다.
그렇지만
이같은 대규모 병력도 소용이 없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적지에 대한 정보 부족이 원인이었고, 그리스인의 민족적 감정이 나타난
것도 한 이유였다. 몇 차례의 승리를 거둔 후(B.C. 480년 8월의 테르모필레 전투등), 크세르크세스는 아티카를 점령하고,
9월 21일 아테네를 약탈했다. 그러나 9월 29일 그가 먼저 싸움을 건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리스군에 패배했다. 병참을 보급할 함대를 상실하자, 군대는 퇴각해야만 했다. 테살리아에 마르도니우스를 남겨두고, 그는 아시아로 다시 건너왔다. 재위 7년째인 이듬해 B.C. 479년 8월 27일, 마르도니우스가 이끄는 페르시아군이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대패하고, 나아가 미카레에서도 패배하였으나 페르시아 영토 그 자체는 빼앗기지 않아 국위는 여전히 융성하였다. 전쟁은 13년을 끌었지만, 그때 이후부터 크세르크세스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전쟁에서 그가 결정적으로 패배한 결과, 이때부터 아케메네스 왕조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성경 '에스더'서에 나오는 크세르크세스(아하수에로)의 재위 기간(1장 1절, 8장 9절)은 헤로도투스의
기록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는데, 이것은 페르시아 왕들의 역사에서는 유례가 없는 일이다. 또한 아하수에로 제3년에 열린
대연회(1장 3절)의 기록도, 헤로도투스가 그의 책에, 페르시아 왕이 그리스를 정벌하기 위하여 회의를 소집했다고 기록한 그 날짜와
시각이 일치한다. 수산궁에 관한 묘사도(1장 6절) 고고학에 의하여 그 사실성이 입증되었다.
아하수에로 왕이 제7년에 새 왕비를 맞아들인 사실(2:16)은, '아하수에로가 그리스 원정에 실패한 후에 후궁(後宮, harlem)의 환락에 빠졌다'고 전하는 헤로도투스의 보고와 일치한다.
만년에는 왕궁에서 호화생활을 누리다가 후궁(하렘,harlem)의 음모에 휘말려, B.C. 465년 그 자신이 장남과 함께, 그의 대신(大臣) 아르타바누스가 포함된 궁전의 살인집단에 의해 쓰러졌다. 다른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가 그의 뒤를 이었다.
다리우스 3세 때 마케도니아의 젊은 왕 알렉산드로스에게 B.C.330년에 멸망해 키루스2세의 건국부터 알렉산드로스에 멸망한 B.C.330년까지 220년밖에 되지 않는다. 기원전 역사로 3000년이 넘는 오리엔트문명의 긴 시간에서 바람처럼 지나간 페르시아지만 물질적, 정신적, 제도적 측면에서 오리엔트문명의 정점을 이룬 아시아제국의 모범이 되었다. 이후 파르티아, 사산조 페르시아부터 현재의 이란에 이르기까지 많은 국가들이 페르시아를 계승했다.
8. 아닥사스다 1세(아르타크세르크세스, 재위 B.C.464-424; 40년):
아닥사스다 1세(Artaxerxes(아닥세르세스), 롱기마누스(긴팔) : 에스라, 느헤미야 귀환시킨 왕(스7장, 느2장), 어머니는 폐위 당한 와스디이고 나중에 에스더가 어머니 역할함.
'아닥사스다'는 우리말 음역인데 세계사에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인데 이 말은 페르시아 언어가 아니고 후대에 기록된 헬라어로 '영웅들의 지배자'란 뜻이다. 로마에서는 '케사르(가이사, 시이저)'라고 했던 때가 있었고, 애굽에서는 '파라오'라 했는데
다리우스의 아들이 '크세르크세스'이고 그 후손들의 이름에 '크세스크세스라'는 이름 앞에 '아르타'를 붙이게 되었다.
고레스의 장자 크세르크세스
l세의 아들. 부왕을 암살한 아르타바누스에 의하여 제위에 올랐으나, 얼마 후 그를 죽이고, 이집트와 박트리아 등의 난을
평정하였다. 재위 17년째인 B.C. 448년, 칼리아스 협약을 성립시켜 아테네와의 화평에 힘썼다.
헤로도토스와
데모크리토스가 당시의 제국을 여행하여 그 지식을 그리스인에게 전하고, 또한 그리스 미술의 양식을 동방으로 전하기도 하여, 동서
문화교류로 왕의 치세는 고대 페르시아제국 융성기의 마지막을 장식한 시기였다. 그러나 같은 해 B.C. 448년[재위 17년째]
키프로스섬 앞바다에서, 키몬이 거느리는 아테네 해군에 패함으로써 트라키아 등지에서 세력을 상실하게 되어, 그후 고대 페르시아
제국은 서서히 쇠퇴하여 가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오른팔이 왼팔보다 길어 ‘롱기마누스(긴 팔)’라는 별명이 있다.
“여호와의 계명의 말씀과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례 학자요 학자 겸 제사장인 에스라에게 아닥사스다 왕이 내린 조서의 초본은 아래와 같으니라”(에스라7:11).
**아닥사스다(Artaxerxes): ‘율법에 주권을 주는 자’라는 뜻으로, 바사 왕을 가리키는 칭호이다. 아닥사스다로 호칭되는 왕은 네 명인데, 성경에 나오는 아닥사스다는 아닥사스다 1세를 말한다. 아닥사스다 1세(BC 464-424)는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 1세의 아들로, 오른손이 왼손보다 길어서 ‘롱기마누스’(Longimanus,긴팔)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애굽과 바사의 반란을 진압했다. 어떤 학자들은 아닥사스다 2세가 아닌 1세가 다스릴 때에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귀환해서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쳤다고 보기도 한다(스 7:1-8:1).
**아닥사스다 2세: 아닥사스다 1세의 손자로 다리오 2세의 아들이다. 그는 재위 7년에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가도록 허락했다(스 7:7-26; 8:1).
“아닥사스다 왕 제칠년에 이스라엘 자손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과 느디님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올 때에“(스7:7).
이렇게 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은 1,800여 명이었으며, 인도자는 에스라였다. 또한 그는 재위 20년에 느헤미야를 유대 총독으로 임명했고,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도록 했다(느 2:1-18). 이 과정에서 성벽 재건을 반대하는 세력들에 의해 성벽 재건이 잠시 중지되기도 했다(느 4:7-23). <!--[endif]-->
**느헤미야(Nehe-miah): BC 444년 이후 유다 지방을 다스렸던 총독으로 그의 아버지는 하가랴였다. 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의 술 맡은 관원이었던(느 1:11) 그는 신임받는 관리였다. 그는 하나니로부터 예루살렘의 소식을 전해들은 후,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를 절감하고 하나님께 기도했다(느 1:2-11). 왕에게 예루살렘 귀환을 허락받은 그는 총독 직책을 맡아 예루살렘으로 향했다(느 2:1-8).
당시는 12년 전 예루살렘을 재건하려던 에스라(바벨론에서의 2차 포로귀환 때 백성들을 이끌었던 훌륭한 지도자(스 7:7; 8:1)의 계획이 반대자들의 방해로 인해 중단되어 있던 상태였다(스 4:21-22). 느헤미야는 자신이 가지고 간 왕의 조서를 근거로 다시 예루살렘 성벽 건축을 시작했고, 결국 52일 만에 성벽을 재건했다(느 12:27-47). 아울러 여러 가지 사회제도나 종교제도도 잘 정비했다(느 7, 11장).
느헤미야는 능력있고 신뢰받는 사람이었다. 포로로 잡혀간 나라에서 중요한 지위에 올랐던 것을 볼 때 탁월한 실력을 지녔을 것으로 생각된다(느 1:11; 2:1-8). 그가 했던 술맡은 관원이라는 직책은 왕이 독살당하지 않도록 먼저 술 맛을 보는 일이었데, 이는 신뢰받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그는 또 문제가 생겼을 때 기도했던 기도의 사람이었으며(느 1:5-11; 2:4; 4:4-5; 6:9,14), 문제에 대해 주의 깊게 접근하여 철저한 계획을 세웠던 사람이었다. 그는 반대자들(산발랏, 도비야, 게셈)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는 용기를 지녔으며(느 4, 5, 13장), 스스로 모범을 보였다(느 5:14-18). 또한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쳐, 과거에 지은 죄를 회개하고(느 9:1-37) 헌신하도록 가르쳤던 지도자였다. 또한 느헤미야는 자신이 행한 일을 기록한 뒤, 하나님께 “나를 기억해 주소서”라고 간청했다(느 5:19; 13:14, 22, 31). 이는 곧 ‘나에게 상을 주소서’라는 의미로, 현 세상에서 보상을 바라지 않고,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실 것을 바랐던 내면의 가치가 잘 표현된 말이었다.
동시대의 에스라가 제사장으로서 영적인 부흥을 이끌었고, 말라기선지자가 이를 도왔다고 본다면, 느헤미야는 정치적이고 실제적인 부분에서의 주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9. 다리우스 2세(재위 B.C.423-405; 18년):
아르타
크세르크세스 1세와 그의 첩(妾) 바빌로니아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원래 이름은 오쿠스였다. 히르카니아 지방
사트라프(총독)를 지내다가, 이복 형 세키디아누스(또는 소그디아누스)의 왕위를 빼앗고 그를 처형했다. 노투스(서자)라는 별명도
갖고 있었으며, 왕위에 오른 후에는 다리우스라는 이름을 썼다.
그의
치세에 아케메네스 왕조의 궁정은 음모와 부패로 가득 차 있었으며, 왕은 잔인하고 야심만만한 아내이자 이복누이인 파리사티스와
환관들에게 조종당하고 있었다. 백성들은 그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히르카니아와 메디아에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곧 진압당했다.
다리우스
2세는 B.C. 413년에 시라쿠사에서 아테네군을 무찌른 후, B.C. 448년부터 아테네의 지배를 받고 있던 소아시아의
해안도시들을 되찾기로 결심했다. 소아시아 지방 사트라프인 티사페르네스와 파르나바주스를 시켜 밀린 공물을 거두어들였고, 아테네와
맞서기 위해 스파르타와 동맹을 맺었다. 아테네와 전쟁을 한 후 이오니아 지방을 대부분 되찾았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는데, 이는 스파르타군에게 제한된 지원만을 했던 티사페르네스의 정책에도 그 원인이 있었다.
그러나
BC 407년 다리우스 2세는 스파르타군을 아낌없이 지원하기로 결정해, 티사페르네스 대신 자기 아들 소(小) 키루스를 소아시아
지역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스파르타 함대 재건에 필요한 자금을 아들에게 주었다. 그 결과 아테네는 B.C. 405년
아이고스포타미에서 참패했다. 그러나 얼마 후 다리우스는 병으로 죽었다.
10. 아닥사스다 2세 (아르타크세르크세스;그리스어 표기, 므네몬(재위 B.C.404~358):
므네몬(기억이
좋다)이라고 불렀다. 다리우스 2세의 장자이다. 치정 초기에 동생 키루스(小)가 그리스인 용병과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왕은 쿠낙사 전투에서 동생을 죽이고 그리스 용병을 패주시켰다. 이것이 그리스 용병 l만 명의 퇴각이라 하여, 크세노폰의
<아나바시스 Anabasis>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집트 원정에는 실패하여, 유프라테스강 이서의 땅을 잃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소아시아에서도 반란이 일어나, 국내가 동요하고 궁정 안에서도 암살 ·음모가 끊이지 않았다. 이 불안 중에
아내와 자식이 잇달아 비참한 죽음을 당하고, 자신도 죽었다.
BC330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BC356~BC323, 재위 BC336∼BC323)에게 패배한 후 신하인 베소스에게 죽음을 당해 아케메네스 왕조인 페르시아 역사는 끝나고 헬라 제국시대가 시작했다.
왕가에서 갈라져 나온 먼 친척이었지만, 전왕(前王)인 아르타 크세르크세스3세와 아르세스를 독살한 환관 바고아스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다리우스3세가 환관의 지배에서 벗어나겠다고 선언하자, 바고아스는 그마저 죽이려 했으나 도리어 왕에게 사약을 받았다.
B.C. 337년에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는, 아케메네스 왕조가 다스리고 있는 그리스 도시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코린트 동맹을 결성하고, B.C. 336년초 소아시아에 선발대를 보냈다. 그러나 필리포스는 7월에 다리우스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암살당했다.
BC 334년 봄, 필리포스의 아들 알렉산더 대왕이 대군을 이끌고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넜다. 페르시아는 전쟁 태세를 전혀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그라니코스 강에서 패배했다. 알렉산더는 이듬해 소아시아의 대부분을 점령한 후, 킬리키아까지 진격했다. 마침내 다리우스 3세가 직접 출전했지만, BC 333년 가을 이소스에서 패배해, 어머니· 아내· 자식들을 버리고 도망쳤다.
그후
다리우스 3세는 알렉산더에게 화해하자는 편지를 2번 보냈는데, 2번째 편지에서 동맹을 맺어준다면 자기 가족의 몸값으로 막대한
재물을 주고, 유프라테스 강 서쪽에 있는 페르시아 영토를 마케도니아에게 모두 넘겨주겠으며, 자기 딸을 바치겠다고 제의했다. 알렉산더가 이 제의를 모두 거절하고 메소포타미아로 진격하자, 다리우스는 그가 유프라테스· 티그리스 강을 건너게 내버려둔 다음 ,지금의 모술 동쪽에 있는 가우가멜라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크게 패했다(B.C. 331. 10. 1).
그는 싸우고 있는 부하들을 버려둔 채 엑바타나로 달아났고, 알렉산더가 쫓아오자 다시 박트리아로 도망갔지만, 박트리아의 사트라프였던 베소스에게 폐위당한 후 살해되었다. 이로써 페르시아제국은 멸망하였다
**알렉산더 대왕(BC.356~BC323, 재위 BC.336∼BC323) : 필리포스 2세와 올림피아스의 아들로서 알렉산드로스 3세라고도 한다. 당시의 대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마케도니아 수도인 펠라의 궁정에 초빙되어 3년 동안 그에게 윤리학 ·철학 ·문학 ·정치학 ·자연과학 ·의학 등을 가르쳤다.
BC 333년 킬리키아의 이수스전투에서 다리우스 3세의 군대를 대파하였으며, 이어 페르시아 함대의 근거지인 티루스(티로스) ·가자 등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시리아 ·페니키아를 정복한 다음 이집트를 공략하였다. 이집트에서는 나일강 하구에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시(市)를 건설하고 1,000km가 넘는 사막을 거쳐 아몬 신전에 참배하였다. BC 330년 다시 군대를 돌려서 메소포타미아로 가서, 가우가멜라에서 세 번이나 페르시아군(軍)과 싸워 대승하였다. 이때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는 도주하였으나 신하인 베소스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를 융합시킨 새로운 헬레니즘 문화를 이룩했다.
2. 창세기 19:25 /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3. 시편 65:11
발음
/ 체마흐[ tsemach ] 어원 / 677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난 것(창19:25), 움돋게 함(사61:11), 가지(렘23:5), 풀(겔16:7), 이삭(호8:7),
싹(시65:10), 소산(사4:2), 순(슥3:8, 6:12). [형] 연한(겔 17:9), [동] 자라다(겔 17:10) 구약 성경 / 12회 사용
* 6779. צָמַח 차마흐(tsâmach)
1. 싹이 나다
2. 피엘형 : 자라다
3. 히필형 : 싹트게 하다
발음
/ 차마흐[ tsâmach ] 관련 성경 / 나다(창 2:5, 레 13:37, 창 2:5, 신 29:23), 솟아나다(시 85:11, 사 44:4, 겔 29:21),
일어나다(욥 5:6), 시작되다(사 42:9), 나타내다(사43:19),움돋다(사45:8), 자라다(출10:5, 대상19:5,
겔17:6), 돋아나다(슥6:12), 나오다(창41:6), 기르다(전2:6), 싹이 나다(사55:10), 내다(창3:18),
이루다(삼하23:5). 구약 성경 / 33회 사용
잠언 29:18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의 계시가 없으면 백성이 무질서하겠지만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복이 있다.
스가랴서의 8가지 환상
환상
의 미
여호와께서 두루 다니심
성전을 재건하다가 지치고 실망한 이스라엘에게 용기와 소망을 줌
네 뿔과 네 공장
때가 되면 하나님이 원수를 물리치실 것임
척량줄
예루살렘이 완전히 재건됨
대제사장 여호수아
택한 백성의 죄가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됨
등대와 감람나무
낙심한 스룹바벨에게 용기를 줌
날아가는 두루마리
율법을 깨뜨린 자들은 그 율법에 의해 징계 받음
에바 속의 여인
모든 죄악이 제거됨
네 병거
이스라엘의 대적을 정복하시는 하나님
스가랴의 8개 환상과 10개 예언
스가랴(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서는 구약성경의 39권의 중 38번째 책이다. 주전 520년경 기록되었으니 지금부터 2,543년전의 책이다. 14장으로 기록된 책은 8개의 환상과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이 기록된 난해한 책이다
스가랴 1장~6장 : 8개의 환상 스가랴 9장~10장 :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예언 스가랴 12장~14장 :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예언
스가랴서의 예언과 성취
1. 550년 후 성취 /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한 나귀 새끼의 예언은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 (슥 9:9) 2. 550년 후 성취 / 은 30개에 팔릴 것이 문자적으로 상취되었다 (슥 11:12) 3. 550년 후 성취 / 그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산 것도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 (슥 11:13) 4. 590년 후 성취 / 그들이 메시아를 거절하므로 여러 나라에 흩어질 것이다, 디아스포라 (슥 7:11~14) 5. 2468년 후 성취 / 여러 나라에 흩어졌던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 올 것이다 (슥 8:1~13) 6. 2540년 후 성취 / 예루살렘은 모든 민족들의 취하는 잔이 되고 무거운 돌이 된다 (슥 12:2~3) 7. 미성취 / 이방 나라들이 예루살렘을 치러 올 것이다 (슥 12:3~9, 14:12~15) 8. 미성취 / 이스라엘 큰 애통으로 회개하고 메시아에게 돌아올 것이다 (슥 12:10~13:1) 9. 미성취 / 주께서 예루살렘 동쪽 감람산에 재림하실 것이다 (슥 14: 4~5) 10. 미성취 / 이방 나라들이 초막절을 지키러 에루살렘으로 올라올 것이다 (슥 14:16~21)
스가랴의 8개의 환상
환상 1 : 온 땅을 돌아보는 말들 (감찰하시는 하나님) 환상 2 : 네 뿔과 네 일꾼들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자들과 그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환상 3 : 측량줄을 지닌 사람 (하나님의 백성을 측량하시는 하나님) 환상 4 : 여호수아와 제사장의 옷 (정결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환상 5 : 촛대와 두 올리브나무 (성령의 기름으로 꺼지지 않은 등잔) 환상 6 : 날아다니는 두루마리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환상 7 : 에바 속의 여자 (디아스포라 예언) 환상 8 : 네개의 전차 (네 개의 임무)
PART I
1. 환상 1 : 온 땅을 돌아보는 말들 (1:7~17)
여호와의 전지전능은 우주적이고 지구적인데 거기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알고 계신다. 특히 그의 백성의 회복에 관심을 가지신다. 붉은 말과 자줏빛 말과 백말 등 여러 말들이 있는데 말을 탄 자들의 임무는 세상 전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살피고 보고하는 일이다. 세상은 평온한 듯 보였지만 예루살렘의 성전건축은 중단되고 영적 나태함에 빠진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성전건축을 격려한다
환상 2 : 네 뿔과 네 명의 대장장이(1:18~21)
네 뿔은 이스라엘은 대적하고 괴롭히는 사방의 왕들을 의미한다. 넷이란 세상의 네 모퉁이 즉 지구 전체를 총체적으로 상징한다. 역사적으로 앗시리아, 이집트, 바벨론, 메대바사, 헬라, 로마 등이다. 네 명의 대장장이는 주의 백성을 괴롭히는 제국과 왕들을 심판하는 도구이다. 하나님은 악한 권세자들을 두고만 보시지 않으시고 반드시 심판하신다
환상 3 : 측량줄을 지닌 사람(2:1~13)
한 사람이 자기 손에 측량줄을 잡고 있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예루살렘을 재어서 그 너비와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러 간다" 측량줄이 예루살렘의 성전과 성벽재건과 관계 있다면 이스라엘의 회복을 상징할 것이다 또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불성벽이 되어 주실 것이며 그의 눈동자처럼 보호하실 것이다 이는 성도들에게도 같은 보호막이 되어 주실 것이며 그들의 중심과 삶이 측량되어질 것이다
환상 4 : 여호와 앞에 선 여호수아와 새싹(3:1~10)
네 번째 환상은 여호수아가 천상의 어전회의장에 서 있다. 더러운 옷을 입은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여호와 앞에 서 있고 사탄이 고발하는 환상이다 여호수아는 죄로 더럽혀진 이스라엘 민족과 성도들을 상징한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깨끗한 관과 아름다운 옷을 입음으로써 정결함을 회복한다 사탄이 여호수아를 참소할 때 여호수아를 변호하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시며 그를 통하여 정결해 질 수 있다 새 싹과 세운 돌은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환상 5 : 금촛대와 두 올리브나무(4:1~14)
금촛대는 스룹바벨 성전, 교회와 성도를 상징하는데 일곱개의 등잔은 기름그릇에 대롱으로 연결되어 자동으로 기름이 보충된다. 등잔의 기름은 성령을 상징하고 성령충만은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된다 두 올리브나무는 온 세상을 다스리는 여호와를 섬기는 기름 부음을 받은 두 사람이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총독 스룹바벨을 의미한다고 하지만 구약과 신약, 12지파와 신약교회, 두 증인 등을 다양한 견해가 있다 중요한 것은 교회와 신자들의 등잔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성령으로 충만해 지는 것이다
환상 6 : 날아다니는 두루마리(5:1~4)
날아다니는 양탄자처럼 길이 9m, 폭이 4.5m의 큰 두루마리가 날아 다닌다 두루마리의 크기는 성전의 성소 면적과 똑같았다 이 두루마리는 온 세계위를 날아 다니면서 범죄한 사람을 찾아 그 안에 기록된 죄를 짓는 자에게는 저주와 벌을 내렸다 두루마리의 양편에 써있는 글이 다음과 같다 날아다니는 두루마리는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다
"도둑질하는 자는 모두 없어질 것이다" "거짓 맹세하는 자도 모두 없어질 것이다"
당시 도둑질과 거짓맹세는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자들의 대표적인 죄였다 이 두 죄는 십계명을 요약한 죄이기도 하다 죄악된 삶은 성령이 거하는 성전이나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공동체에도 범죄한 자들이 활보하며 내부적인 부패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환상 7 : 에바 속의 여자(5:5~11)
에바는 곡식의 양을 재는 되와 같은 측정도구로 범죄의 양을 재는 기준으로 쓰였다 에바의 크기를 속여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범죄를 측정하여 또다시 이방땅으로 쫓겨 가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 그들은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디아스포라가 되어 세상을 떠돌아 다녔다
환상 8 : 네개의 전차(6:1~8)
놋쇠로 된 두 산 사이에서 네 대의 전차가 나온다 네 대는 네 뿔, 네 대장장이, 네 바람처럼 온 세상 사방을 의미한다 붉은 말, 검은 말, 흰 말, 얼룩진 힘센 말은 요한계시록의 네 개의 인의 임무와 유사하다 전쟁, 기근, 기만, 전염병을 상징한다
PART II
금식에 대한 질문 (7:1~14)
스가랴가 1~6장에 기록된 8가지 환상을 본 지 2년이 지났다 벧엘 사람들이 사절단을 보내 스가랴에게 금식에 대해 질문을 했다 "우리가 여러 해 동안 금식을 해 왔는데 올해도 금식을 해야 합니까?" 그들이 선지자에게 받은 네 가지 응답은 위선적인 금식보다 순종을 원하신다는 것이다 공정한 재판, 사랑과 자비, 억누르지 말 것, 서로 해치지 말 것에 대한 종교의 핵심 메시지를 받았다
예루살렘 회복에 대한 약속 (8:1~23)
예루살렘은 회복되어 사랑과 공의가 넘치는 도시가 될 것이며 슬픔이 사라지고 온 세계 만민에게 구원을 전하는 성읍이 될 것이다
PART III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심판(9장~11장)
그는 공의로우시고 구원을 베푸실 것이며 겸손하여 나귀 새끼를 타실 것이다 메시아의 성품은 공의, 구원의 원천, 겸손하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한 나귀 새끼의 예언은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 은 30개에 팔리고 그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산 것도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 그의 사역은 크게 4 가지로 언급되고 있는데 메시아는 평화를 선포할 것이며, 구원하실 것이며, 재림시에 거짓 목자들을 멸하실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모으실 것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배척한 결과로 겪게 될 무서운 심판(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였다
PART IV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12장~14장)
마지막 때에 이르러 예루살렘은 모든 민족들의 취하는 잔이 되고 무거운 돌이 된다 이 예언은 우리 시대에 성취되는 것을 목격중이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1/3이 남고 2/3는 멸망당한다 그 남은 1/3도 불 속에 던져 연단받고 시험받아 정결케 할 것인데 짐승의 통치때 박해 받을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침내 세계의 연합군이 예루살렘을 치러 올 것이고 이스라엘은 회개하며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아마겟돈 전쟁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승리할 것이다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이방 나라를 패전할 것이고 메시아 왕국이 완성될 것이다 모든 나라는 여호와를 섬기며 예루살렘으로 초막절을 지키러 매년 올라올 것이다 온 세상은 여호와께 거룩하게 구별되어 드려질 것이다
- 스가랴는 매우 공손하고 경외하는 말('내 주여')로 이 환상의 뜻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러자 해석하는 천사가 자신이 그 뜻을 설명할 것이라고 대답한다. 이런 내용은 13, 14, 19절; 4:1; 5:10; 6:4 등에도 나타난다.
네 병거를 끄는 말들의 환상(슥6: 1∼8)
스가랴가 본 마지막 여덟 번째 환상은 네 병거의 환상으로, 스가랴는
네 병거가 두 산 사이에서 나오는데 그 산은 구리산(놋산)이었습니다. 첫째 병거는 붉은 말이었고, 두 번째 말은 검은 말, 세 번 째 말은 흰 말이었으며 마지막 네 번째 말은 아룽지고 건장한 말이었습니다. 스가랴는 이 말들을 보여주신 이유를 몰라 천사에게 물었는데 그 때 천사는 이 네 말들은 하늘의 네 바람이다 라고 답변하며 곧 이 네 말들이 세상 온 땅으로 흩어져 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스가랴가 본 마지막 이 환상은 하나님 나라 완성에 대한 비전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네 병거들이 나온 놋산(구리산)이 주는 의미(1절)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네 병거가 두 산 사이에서 나오는데
그 산은 구리산(놋산)이더라”(1절)
스가랴는 네 병거가 두 산 사이에서 나오는데 그 산은
구리 산이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성경에서 구리 즉 놋은 강한 능력과 승리를 상징하며 또한 심판을 상징합니다.
▶신명기 28: 22∼24절을 보면 “하늘은 놋이 되고…….너를 멸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그러므로 스가랴가 본 놋산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며 그것은 그의 능력과 승리로 임하시는 심판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로서
스스로 자신을 높이고 하나님이라고 자신을 숭배하기를 요구하며 하나님을 대적하고 무시하며 불법을 자행한 자들을 강력하게 벌하실 것입니다.
▶지금 세상을 보면 그 주님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보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촌은 변화무쌍한 가운데 있습니다.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입니다. 시리아를
중심으로 이상한 일들이 자주 벌어집니다.
터키는 러시아 정찰기를 공격하여 추락시켰고, 러시아 여객기는 원인도 모르고 사하라 사막에 추락하여 224명 탑승객
전원이 사망했으며, 미국 구축함이 흑해에 들어옴으로 러시아는 계속 전투기를 띄우고 있으며, IS의 석유 밀매로 하루17억 원의 수입을 올리는데 이것을 막으려는
러시아는 시리아 정부군을 돕고 미국과 서방은 시리아 반군의 편이 되어 언제 러시아와 미국이 충돌할 지 일촉즉발입니다.
▶이 세상은 신세계 단일 정부를 만들려는 자들의
음모에 빠져 결국 그들의 각본대로 전쟁과 기근으로 가게 될 것이며, 그들은 자신들만의 파라다이스를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그들의 각본대로 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계획대로 가게 되는
것이고,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계획에 악의 도구로 쓰임 받는 것입니다.
오늘 스가랴의 환상을 보면 하나님은 여러 말들을 보내어
그들을 심판함으로 궁극적으로는 주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네 병거와 네 종류의 말들(2-4, 6,7절)
스가랴는 네 병거를 끄는 네 종류의 말들을 보았습니다.
▶첫째 병거를 끄는 붉은 말
붉은 말은 전쟁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구리 산에서 붉은 말이 나왔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전쟁을 통하여
세상 나라를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면 전쟁은 미국이나 시리아나 러시아 등 그런 나라들의 다툼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을 심판하는 도구로 그들 나라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노아 시대나 소돔과 고모라 성(城)과 같이 직접 지진이나 자연을 이용하실 때도 있지만 전쟁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특별히 요한계시록을 보면 가장 먼저 사용하시는 도구가 전쟁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전쟁이라는 도구를 사용할까요? 사람들의 탐욕 때문입니다. 인간의 탐욕은 예로부터 전쟁을 통하여
나타났습니다. 가진 것에 만족하지 않고, 또한 자기의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남의 것을 빼앗는 것으로 쾌감을 느낍니다. 이러한
것들은 마지막 때에 더 심각하게 나타나서 결국 동물이 자기 영역 싸움을 하듯 인간들은 자기 영역 싸움을 하고 더 나아가서 남의 나라에 탐을 내고
남이 가진 것 빼앗으려 하며 패권 전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가 그러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향한 예언적
메시지입니다. 시리아와 터키 그리고 러시아와 미국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지금 유일하게 석유로 살아가는 러시아와 사우디아라비아는
지금 경제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석유가 폭락했습니다. 미국이나
선진국 몇 나라를 제외한 우리나라를 비롯한 신흥국가는 석유 폭락과 더불어 경제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석유가 폭락했다고 좋아하는데 석유가 폭락하면
선진국에서 자신들의 주식을 모두 회수해 갑니다. 지난 주 신문에도 나왔지만 우리나라를 비롯한 신흥국가들은
석유 폭락으로 외국 자본가들이 자신들의 주식을 거두어 들이면 한 순간에 국가 부도 사태를 맞이하게 된다고 합니다.
전세계 경제 몰락이 눈 앞에 왔습니다.
갑자기 왜 석유가 폭락했을까요? 세계 경제를 손아귀에 넣고 있는 세력입니다. 이들은 러시아나 중동
국가들을 자극하여 전쟁을 유발시켜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들이 바라는
대로 되지 않고 자신들도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먼저 붉은 말을 등장시켰습니다. 전쟁을 통하여 불신 세상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3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붉은 말과 검은 말과 흰 말과 어룽진 말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어룽진 말이 건장한 말로 나오지만 6절에
이하를 보면 검은 말과 흰말, 그리고 어룽진 말은 나오는데 붉은 말이 나오지 않고 대신 건장한 말로
바뀌어 나옵니다. 이것은 전쟁은 갈수록 강하고 치열해 짐을 말합니다.
또한 7절을
보면 이 건장한 말, 붉은 말은 땅에 두루 다니고자 하여 하나님께서 하락하여 땅에 두루 다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이 마지막 때의 전쟁은 전 세계적인 전쟁임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에도 전쟁은 예수님 공중 강림 하시기 전부터
시작되어 7년 대환난 동안 내내 계속되어 오다가 예수님 지상강림 때 주님이 오심으로 끝나게 되는 것을
말씀합니다.
▶둘째 병거를 끄는 검은 말
둘째 병거를 끄는 말은 검은 말입니다. 요한계시록에도 보면 스가랴의 환상과 그 순서가 똑같습니다(계6장).
붉은 말에 이어 검은 말 그리고 어룽진 말입니다. 여기에 검은 말은 기근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6장 5절을 보면 둘째 인을 떼실 때 검은 말이 나오는데 검은 말에 탄 자가 저울을 가진 것을
봅니다.
전쟁 뒤에 오는 것은 당연히 슬픔과 죽음과 기근입니다. 전쟁이 남기고 간 자리는 어느 나라건 항상 같습니다. 죽음으로 인한
슬픔과 곤고함이 있고 기근이 따릅니다. 가족을 잃은 슬픔, 사랑하는
자의 죽음 등은 곤고함을 가져옵니다.
▶이러한 것을 잘 알면서도 인간은 전쟁을 일으키고 남의 소중한 가족을 피눈물 나게 하고 기근에 굶주려 쓰레기 통을 뒤지는데, 자신은 편안한 소파에 누워 그런 전쟁을 게임으로 생각하며 즐기며, 돈을
긁어 모으려는 악마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잠시 영화를 누리려고 그런 짓을 합니다. 그런 자들이 가는 곳이 결국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그런 자들을 도구로 사용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타락상
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일들을 허용하는 것은 그런 배고픔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타락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악이 차지 않았다면 그들이 아무리 그런 일을 계획한다 하더라도 결코 하나님이 허락하지 아니합니다.
▶주님 오실 때가 아직 멀었다고 하는 분들이 있다면
지금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죄악들을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얼마나 타락했는지,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돈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탐욕스러운지, 그리고
이 세상이 얼마나 추악한지 생각해 보세요.
200년 전의 사람들을 서울 한복판에 갖다 놓으면 그들이 예수님은 몰라도,
말세도 몰라도 세상 말세라고 할 것입니다.
▶니느웨성은 악독이 가득했음에도 요나의 외침에 금식하며 회개했는데, 지금 이 시대에 그런
외침을 한다면 귀를 기울여 듣고 가슴을 치며 회개할 사람이 있을까요?
세상의 끝은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회개의
메시지를 듣고도 깨닫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회개할 사람이 없을 때 행하십니다.
노아 때에 사람들은 회개할 줄 몰랐고, 소돔과 고모라성 사람들은 회개할 줄 몰랐습니다.
아모리 사람 그랄 왕은 하나님께서 그의 꿈에 나타나 책망
했는데도 그는 잠에서 일어나 행동을 고칠 줄 알았습니다.
니느웨 성 사람들도 선지자의 외침에 회개하고 엎드릴 줄
알았기에 하나님은 심판을 거두어 들인 것입니다.
▶회개할 줄 모르는 시대는 소망이 없습니다. 회개의 메시지에 비웃고, 코 웃음 치는 시대는 절망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가치관이 무너진 시대입니다. 미국이나 유럽은 이제
동성애를 반대하는 자들을 정신 이상자라고 말을 합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자이며 천국과 지옥을 말하는 자를 기독교
근본주의자라고 하여 그러한 자는 세계 평화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면 가장 먼저 그리스도인들이 표적이 되어 제거될 대상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이 더 지속되어야 한다고 믿으십니까? 그래서 주님의 강림은 멋 훗날에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고, 회개의 메시지에도 무감각하다면 그는 구원의 가능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검은 말의 출현은 붉은 말의 뒤를 따라 나타났듯이 머지
않아 이 지구촌에 전쟁과 그에 따른 기근이 일어날 것입니다. 6절을 보면 검은 말은 북쪽 땅으로 나갔다고
했는데, 이는 전쟁으로 북쪽 나라 사람들이 더더욱 기근이 클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 나라 사람들이 모두 돈을 사랑하고 우상화했기에 하나님은
기근으로 심판하는 것입니다. 검은 말이 북쪽으로 갔다는 것을 보면 지금도 그러하지만 북쪽 지역 나라
사람들이 더 경제적인 타격이 심할 것으로
봅니다.
셋째 병거를 끄는 흰 말
세 번째 병거를 끄는 말은 흰 말입니다. 그런데 6절을 보면 이 흰말은 검은 말 뒤에 따라 가는 말로 나옵니다. “검은 말은 북쪽 땅으로 나가고 흰
말은 그 뒤를 따르고”(6절)
백마는 승리와 번영을 말합니다. 성경학자들은 흰 말은 전쟁으로 죽음과 슬픔 속에 처한 사람들 사이에 하나님은 그의 택한 백성들을 보호하는 세력
또는 주의 천사일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또 어떤 분은 한바탕 전쟁이 일어난 후 주님께서 강림하시는
것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전쟁이 잠시 소강 상태로 있을
때 주님의 강림이 있고 그 이후로 일어나는 전쟁을 7년 대환난의 전쟁으로 봅니다.
요한계시록 6장을
보면 첫 번째 인부터 시작하여 여섯째 인까지 떼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7장에는 갑자기 구원 받은 자에 대한 기록으로 십사만 사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그 다음 8장을 보면 일곱째 인을 떼기 전 하늘이 반시간쯤 고요하다고
했습니다. 일곱 째 인을 떼면 곧 일곱 나팔을 부는 천사의 심판과 일곱 번째 나팔 천사의 일곱 대접
심판으로 이어집니다.
본문에 보면 검은 말 뒤에 흰말이 뒤따랐습니다. 실패 하는 자가 있으면, 승리하는 자가 있고, 죽는 이가 있는 반면 태어나는 자가 있듯, 검은 말로 상징되는 가난과
기근 뒤에 곧 바로 승리를 상징하는 흰 말이 따라간다는 것은 바로 한차례 전쟁으로 인한 죽음과 기근 뒤에 주님께서 강림하셔서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넷째 병거를 끄는 말 어룽진 말
3절을 보면 어룽진 말이 나오는데 6절을 보면 어룽진 말은
남쪽 땅으로 가는 것을 봅니다. 어룽진 말이란 알록달록한 말로서 요한계시록 6장 8절을 보면 청황색 말이 등장하는 것을 보는데, 청황색 말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국립묘지에 가면 청황색 말의
동상이 있는 것을 보며, 덴버 공항 벽화에도 청황색 말이 그려져 있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6장 7,8절을 보면 “넷째 인을 떼실 때에…..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그들이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서 죽이더라”
본문에 보면 어룽진 말은 남쪽으로 갔습니다. 이것은 남쪽 즉 단일 정부의 나라가 전쟁으로 인한 죽음이 심할 것을 말씀합니다. 특별히 남쪽을 죽음이 더 심한 것으로 묘사하는데 그 이유는 북방 나라들 보다 남방 나라들이 더 번영하고 번영된
도시에 밀집하여 살고 있기에 그럴 수도 있고, 전쟁으로 인한 흉년과 적그리스도에 의한 죽음이 더 심해서
이런 결과들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땅에 두루 다니는 건장한 말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3절에는
분명히 붉은 말로 표현된 말이 7절에서는 건장한 말로서 묘사되고 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건장한 말은 분명히 붉은 말을 가리킨다 라고 말합니다. 3절에서는
어룽진 말을 건장한 말로 표현했는데 7절에서는 붉은 말을 건장한 말로 표현했을까요?
주님의 마지막 심판 때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하는 것을
보는데 그 사망하는 것이 얼마나 심한지 처음에는 건장한 말과 같이 사망의 영이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사망의 영보다 전쟁의 영이 더 강력하고 지속적일 것이기에 이렇게 바뀐 듯 합니다.
예수님 강림하시기 전에 일어난 전쟁보다는 그 이후의 7년 대환난 때 즉 일곱 천사의 나팔과 일곱 대접 심판으로 이어진 전쟁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이 때를 가리켜 예수님은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이 후에도 없으리라”(마24장21절)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본 첫 번째 환상은 한 사람이 붉은 말을 타고 화석류 나무 사이에 섰
고 그 뒤에는 붉은 말과 자줏빛 말과 백마가 있는 환상이었는데, 이것은 주님이 지금 심판의 도구를 준비하고 세상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시하고 계신 주님이 드디어 명령을 내리는 것이 바로
마지막 여덟 번째 환상으로 마지막 때에 대한 예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판의 시간을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심판하는 붉은 말과 검은 말과 청황색 말들이 지금 대기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대입니다.
지금은 잠잘 때가 아닙니다. 위로가 필요한 때도 아닙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아파트 평수를 늘릴 때도 아니며 주식 투자할 때도 아닙니다. 지금은
깨어 있을 때이고, 기름 준비하며 주님 맞을 때입니다.
주님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습니다. 2015년 마지막 주일이며, 이제 새해를 맞이하지만 내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전 세계는 희망찬 새해를 소망하지만 세계 그 어느 나라도
결코 희망이 보여지지는 않습니다. 2016년의 세계경제나 국제정세를 보면 희망보다는 절망일 뿐입니다.
오직 희망은 예수뿐 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소망이 없어 고개를 숙이고 절망의 새해를
맞이하지만 우리에게는 신랑 되신 사랑하는 내 주님을 기다리는 희망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희망찬 새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이 누리는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왔은즉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This is what the LORD says: "I will return to Zion
and dwell in Jerusalem. Then Jerusalem will be called the City of Truth,
and the mountain of the LORD Almighty will be called the Holy
Mountain."
진리의 성읍(the City of Truth) 이르 하에메트(עִיר־הָאֱמֶת)
성읍(5892) 이르(ʽîyr) עִיר
1. 도시
발음
/ 이르[ ʽîyr ]
어원 / 578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성(창 4:17, 출 9:29, 삼상 30:3), 성읍(창 19:25, 레 25:33, 민 13:19), 고을(창 35:5,
신 3:5), 도성(창 36:32, 민 21:26, 대상1:43), 집(삼하 17:23), 성주(왕상 22:26, 왕하 10:5),
성중(대하 23:21), 영문(느 2:8), 읍(에 8:17, 9:2, 합 2:12),촌락(렘 19:15). 구약 성경 / 1042회 사용
* 5782. עוּר
1. 깨다
2. 일어나다
3. 깨우다 발음
/ 우르[ ʽûwr ] 관련 성경 / 깨다(삿 5:12, 욥 14:12, 시 73:20, 사 51:17), 일어나다(아 4:6, 슥 2:13),
격동시키다(욥 41:10, 단 11:2, 슥 9:13), 통하다(욜3:12), 깨우다(시 108:2, 아 8:5, 슥 4 :1),
들다(삼하 23:18, 대상 11:11), 치다(사 10:26), 소동하다(사 14:9), 내다(시 80:2), 일으키다(대상5:26,
잠 10:12, 사 45:13, 호 7:4), 부르짖다(사 15:5), 감동시키다(대하 36:22, 스 1:1), 감동받다(스 1:5),
부추기다(렘 51:11), 떨치다(시35:23, 단 11:25), 격려하다(욜 3:9), 어지럽게 하다(신 32:11),
흔들다(아 2:7, 8:4), 분발하다(사 42:13, 64:7), 깨우치다(사 50:4), 떨치다(단 11:25),
흥분시키다(학 1:14), 뽐내다(욥 31:29), 놀라다(욥 17:8). [명] 격동(렘 50:41) 구약 성경 / 80회 사용
3. 아이를 운반하다 발음
/ 아만[ ’âman ] 관련 성경 / 양육자(룻 4:16), 유모(삼하4:4), 양부(사 49:23), 충성된 자(삼하 20:19, 시 101:6,
욥 12: 20), 충실한 자(시 12:1), 충성(잠27:6), 의지 (욥 29:24), 믿는 자(사 28:16), 성실한 자(시
31:23). [동] 자라다(애 4:5), 보존되다(삼하 7:16), 교육하다(왕하 10:1,5), 충성하다(시 78:8),
성실하다(시 78:37), 확실하다(시 93: 5, 사 55:3), 신실하다(잠 11:13, 호 11:12, 사 49:7),
진실하다(창 42:20, 사 8:2), 안기다(사 60:4), 충성되다(민 12:7), 오래다(신 28:59), 충실하다(삼상 2:35),
견고하다(삼상 2:35, 왕상 11:38, 사 33:16), 세움을 입다(삼상 3:20), 든든하다(삼상 25:28),
충직하다(느 13:13), 굳게 세우다(시 89:28), 단단하다(사 22:25), 믿다(창 15:6, 왕상 10:7, 신 1:32),
확신하다(신 28:66), 바라다(욥 15:22, 24:22), 의탁하다 (욥 39:12), 신뢰하다(대하 20:20). 구약 성경 / 100회 사용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Jerusalem will be called the City of Truth) 여호와의 산은 성산(the mountain of the LORD Almighty will be called the Holy
Mountain)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백성들을 향하여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한 선지자들은 "학개" "스가랴" "말라기"입니다. '학개' 선지자는 보이는 성전 재건을 위하여 백성들을 깨우쳤다면 '스가랴' 선지자는 보이지 않는 성전을 재건하도록 백성들을 가르쳤습니다. 스가랴서는 모두 14장으로 구성되었는데 1장에서부터 8장까지를 전반부라고 하여 8개의 환상과 금식에 관한 말씀을 소개합니다. 특별히 금식에 관한 7장과 8장의 역사적 배경은 바사(페르시아)의 다리오 왕 제4년 즉 기원전 518년의 시기라고 합니다. 기원전 520년부터 516년까지 4년 동안 총독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성전 재건에 전력했으므로 7장과 8장은 성전 건축이
한창일 때라고 하겠습니다.
심판 중에 구원을 베푸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벨론에서 돌아온 백성을 축복하실 것을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회복되고 개혁되며
복구되어(1-8절), 그 나라가 부요할 것이며, 나라의 일들이 성공적일 것이며, 그들의 명성이 회복되고 그들의 상태가 모든 면에서
과거 수년 동안 계속되어 왔던 것의 반대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9-15절).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하여
백성들이 실천해야 할 진실과 화평의 규범을 강조합니다(16-17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지키던 슬픔과 탄식의 금식을
그만 두고 즐거움의 금식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18-19절).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르게 될 때 이스라엘은 다시 부요하게 되며 강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시고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오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20-23절).
하나님께서는 이방국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심판하셨지만 이스라엘을 괴롭힌 이방국들에 대하여 분노를 발하시어 멸망시키시고 예루살렘을
회복시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와 같이 행하심은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풍성한 은혜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되 끝까지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은혜는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머무는 것입니다. 머물러야 할 자리를 떠나서 다른 곳에서 방황하는 것은 은혜를 거부하느 반역적인 행동입니다. 날마다 머물러야 할 자리를 찾아서 머물고 떠나야 할 자리를 떠나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찾는다면 약속의 은혜는 이전보다 더 풍성하게 임할 것입니다.
- "사월 금식"은 예루살렘이 느부갓네살의 정복을 당한 사건을 기념하는 금식이고, "오월 금식"은 성전을 불사른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고, "칠월 금식"은 그달리야 총독의 피살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고, "시월 금식"은 예루살렘이 포위된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이 네 가지 금식절은, 바벨론에 포로된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지키던 것이다. 이제 저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본국에 돌아와서는 그 금식을 지키지 않고 희열의 기회로 가진다. "너희는 진실과 화평을 사랑하라". 진실은 진정한 이스라엘의 특징이다(요 1:47). 그리고 화평도 하나님의 자녀(참 이스라엘)된 증표이다(마 5:9). 이 말씀은, 재건된 이스라엘 백성의 특징을 말해 주지만 겸하여 신약 시대 새 이스라엘의 특징을 예언하기도 한다.
08-25-2023(금) 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를 위하여(스가랴 7:5)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Ask all the people of the land and the priests, 'When you fasted and mourned in the fifth and seventh months for the past seventy years, was it really for me that you fasted?
אֲנִי
스트롱번호589
1. 나.
2. 나로서는
3. 때때로 존재 동사를 내포한다
발음
/ 아니[ ’ănîy ] 구약 성경 / 871회 사용
צוּם
스트롱번호6684
1. 금식하다
2. 삿 20:26
3. 슥 7:5.
발음
/ 춤[ tsûwm ] 관련 성경 / 금식하다(삼하 12:21, 에 4:16, 느 1:14). [명] 금식(슥 7:5) 구약 성경 / 21회 사용
예루살렘 성전 재건 공사가 진행 중이던 때에 벧엘 사람들이 '사레셀'과 '레겜멜렉'과 그들의 하인들을 보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고 전능하신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에게 '우리가 여러 해 동안 해 온 대로 5월에 울며 금식해야 합니까?' 하고 질문을 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행하던 금식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위한 것이었다고 책망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였으므로 회개하라고 합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 앞에 가증하고 외식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금식을 하여도 하나님을
위하여 자기의 죄를 자복하는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적 형식에 이끌리어 금식을 했다고 합니다.
의식과 규례를 중요하게 생각하였으나 순종하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제사를 가증히 여기신 하나님께서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고,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갖추고 있었지만 경건의 능력이 없는 신앙생활을 책망합니다. 겉 모양은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속 내용은 아무 것도 없는 쭉정이와 같은 신앙생활에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만을 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하기 전에 먼저 나의 거짓된 삶을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깨끗한 그릇에 음식을 담아야 하듯 청결한 양심과 순수한 믿음의 행동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거짓된 삶에 능력이 임하면 더 큰 잘못이 형성되어 사회의 악으로 자리를 잡아갈 것입니다.
매일의 삶이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메아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5월의 금식과 7월의 금식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 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통 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 여기 이른바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함은, 금식 문제에 대하여 유대 민족 전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을 지적 하려 함이다. 그 잘못된 생각은 이렇다. 곧, 외부적 의식 문제를 영적 생명이나 또는 하나님의 도덕적 의지보다 중대시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사리의 경중을 구분할줄 모르는 잘못이다. 사리의 경중을 구분하지 않고 경미한 것을 취하느라고 중대한 것을 희생 시키는 것은, 실제에 있어서 그 경미한 것도 바로 취해지지 않는 것이다. 비유를 들면, 가죽보다 살이 중요한데 살을 손상시키면서 어떻게 가죽을 올바로 보호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주님께서도, 종교 사리의 경중을 바로 구분하지 아니하고 행동하는 자들을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라고 하셨다(마23:24).
"오월과 칠월에 금식"
"오월 금식"은, 성전 훼파의 사건을 기념하기 위하여 바벨론에 잡혀 간 유대인 포로들이 금식한 것,
"칠월 금식"은, 바벨론 군대로 말미암아 유대 총독 그달리야와 및 유대 땅에 남아 있었던 유대인들의 살해된 사건을 기념 하느라고 금식한 것을 가리킨다(왕하 25:25, 26; 렘 41:1-).
열왕기하 25:25 칠월에 왕족 엘리사마의 손자 느다니야의 아들 이스마엘이 부하 열 명을 거느리고 와서 그달리야를 쳐서 죽이고 또 그와 함께 미스바에 있는 유다 사람과 갈대아 사람을 죽인지라.
예레미야 41:1-2 일곱째 달에 왕의 종친 엘리사마의 손자요 느다냐의 아들로서 왕의 장관인 이스마엘이 열 사람과 함께 미스바로 가서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이르러 미스바에서 함께 떡을 먹다가.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과 그와 함께 있던 열 사람이 일어나서 바벨론의 왕의 그 땅을 위임했던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그다랴를 칼로 쳐죽였고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칠십 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는 중 이런 금식일들을 정하고 행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회개하며 기도하기 위함보다 다만 저들의 민족적 사정이 애달퍼서 그 금식을 통하여 비애를 표시하였던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금식을 자기들이 하나님앞에 설 수 있는 공로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지요. 그런 종류의 금식은 실제에 있어서 하나님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금식은 공로도 아니며 그 누구의 비참한 처지를 애처롭게 여겨서 동정하는 행위도 아니다. 금식은 하나님을 향하여 회개함과 기도하기 위함이니 어디까디든지 자기와 및 기타 인간적 요소를 기껏 낮춤이다. 그러나 그 때 유대인들은 벌써 위에 말한 바와 같이 그릇되이 금식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여기서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라고 하셨다. 여기 두 번씩이나 "나를 위하여"라는 말씀이 나왔으니 이 중언체는 역설체이다. 곧, 그들의 금식이 주님을 위하지 않은 것이 확실한 것을 힘있게 지적하는 것이다. 금식을 하는 자가 그것을 하나님의 도덕적 의지에 대한 순종보다 더욱 존중시하여 그것으로써 진정한 종교 생활의 내용을 대표할 것처럼 생각하거나, 혹은 그것을 공로로 내세운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금식이 아니다.
외식하는 종교지도자들은 외부적 경건에 관계된 의식적 법규 같은 것을 중요시하였다. 그들의 생활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일시적으로 어떤 외부적 경건의
규례를 지켜 메꾸려고 하였다. 금식 문제에 있어서도 그들은 얼마 동안의 금식이 그들의 다른 때의 모든 불의한 생활을 감추어 줄
것처럼 생각하였기 때문에 금식하지 않는 때와, 먹고 마실 때에는 하나님을 위하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였던 것이다. 또한 금식 후의
결과는 전혀 하나님 중심적인 생활과 거리가 멀었다.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재하지 말고 인애와 긍휼로 대하라는
하나님의 명령도, 이미 종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떠나 있음을 증명해 준다. 옛부터 내려오던 하나님 섬김의 자세가 참 사랑과
희생을 잃어버린 채 인간의 형식만 남아 있게 되었다. 이 때만 아니라 이런 모습은 예수님 당시에도 만연되어 내려왔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의 봉사자로 세워진 것이 아니고, 당시의 혼탁한 정치적 역학 관계 속에서 권력의 핵심으로
자리잡게 된다.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말씀을 전달해야 될 그들의 자세가 군림하고 통치하는 세속적 위치에만 관심을 쏟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을 가리켜 외식하는 자,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책망하셨던 것이다. 종교 지도자들의 외식은 결국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영적 혼란을 가져오게 된다.
신자의 외식은 그 마음이 썩어 들어갈 때 이미 시작된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의 기본적 요소는 긍휼과 사랑 그리고 희생이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것을 모두 드리는 희생도 우리 이웃에 대한 사랑과 긍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나의 것을 움켜쥐고 불쌍한
이웃을 돌보지 못하는 것은 외식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뒤를 걷고 마는 것이다. 인애를 익히고 제사를 원치 않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예배만 있고 중심이 없는 신자의 생활을 원치 않으실 것이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는 신자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사랑과 긍휼이다.
스가랴 7장의 말씀은 금식에 대한 말씀입니다. 1절에서3절입니다. “다리오 왕 제사년 아홉째 달 곧 기슬래월 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그 때에 벧엘 사람이 사레셀과 레겜멜렉과 그의 부하들을 보내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고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물어 이르되 내가 여러 해 동안 행한 대로 오월 중에 울며 근신하리이까 하매.”
페르시아 왕 다리오 통치 4년 아홉째 달 4일에 주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했습니다. 그 말씀은 금식과 관련된 말씀으로 벧엘 사람이
몇 몇의 사람들과 부하들을 선지자 스가랴에게 보내 우리가 계속 오월에 금식해야 하냐고? 물은 물음에 대한 주님의 대답이었습니다.
스가랴서 8장19절을 보면 바벨론 제국에 이어 페르시아 제국의 포로기를 보내고 있던 유다인들에게는 포로기간 동안 일 년에 네 번의
금식이 있었는데 넷째 달, 다섯째 달, 일곱째 달, 열째 달에 금식을 했습니다. 유다인들이 그렇게 했던 이유는 먼저 넷째 달은
바벨론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것을 기억하며 한 금식이었고, 다섯째 달은 예루살렘을 점령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불태운 것을 회고하며 한 금식이었고, 일곱째 달은 유다 총독 그달랴가 암살 된 것을 기억하며 한 금식이었고, 열째 달은
느부갓네살에 의해 예루살렘이 포위 된 것을 기억하며 한 금식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리스도인으로 신앙생활을 해오며 대부분 한두 번 정도는 금식을 해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 끼를 금식했든,
3일을 금식했든 심지어 더 긴 날을 금식했든 금식에 대한 경험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금식을 했을 때는 포로기의 유다인들처럼 이런 저런 다양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하루 한 끼 금식을 했던가, 입시를 앞에 둔 자녀를 위해 금식했던가. 취업이나 결혼
문제를 놓고 금식했던가, 진로를 놓고 금식했던가, 병 때문에 금식했던가 등등 다양한 이유로 금식을 했을 수 있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 금식과 관련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4절에서 7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 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 예루살렘과 사면 성읍에 백성이 평온히 거주하며 남방과 평원에 사람이 거주할
때에 여호와가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외친 말씀이 있지 않으냐 하시니라.” 곧 '너희가 바벨론 포로기인 지난 칠십 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며 애곡하기는 하였으나, 너희가 진정, 나를 생각해서 금식을 한 적이 있느냐?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도
너희 스스로 만족하려고 먹고 마신 것이 아니냐? 그리고 너희들의 수가 불어나고, 마음 놓고 살 때 내가 이미 이전 예언자들을 통해
아래의 말씀을 전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유다의 금식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금식이 아니었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금식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가 두 번이나 반복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라는 겁입니까?
8절에서 10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
곧 공정하게 재판을 하고, 서로 긍휼히 여기며, 자비를 베풀고, 힘없고 의지할 데 없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무시하거나 그들의
것을 약탈하지 않고 도리어 돕고 나누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금식이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음식을 금하고,
스스로 몸을 괴롭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원하시고 인정하시는 금식이 아니라, 심지어 자신의 야망과 욕망을 이루고 채우기
위한 금식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을 생각하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의 진정한 금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유다는 그리하지 않은 것입니다. 단순히 먹지 않았을 뿐이지 진정한 금식을 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생활을 하며 금식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음식을 금하고 몸을 쳐 복종하는 금식이 필요한 경우도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노는 것에 지나치게 관심을 쏟는 것은 주님 보시기에 선한 신앙적 태도가 아닙니다. 금식을 해야 할 때는
금식도 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금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재판, 인애, 긍휼, 과부, 압제하지 않음,
해하지 않음이 다 사람에 대한 말씀이듯이 진실과 정의, 긍휼과 나눔, 존중으로 사람을 대하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참된 금식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고 응답하시는 온전한 금식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말씀에 대한 순종이 담겨져
있는 금식이야말로 진정한 금식인 것입니다.
사람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진실과 공평으로 사람을 대합니다. 자신의 더러운 이득을 위해 사람을 해치고 거짓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작은 것으로도 나누고 베풉니다. 사람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말을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부정적인 영향보다 좋은 영향, 선한 영향을 끼칩니다. 인생을 긍정하게
하고 희망을 품게 합니다. 사람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추호라도 자기 의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사람을 생각하는 것은 훈련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고, 사람을 생각하는 길에는 지나야 하는
기다림과 외로움과 인내의 터널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궁극적으로 사람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사람을 하나님의 영원으로
초대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의 성취를 보고, 인생의 친구를 얻습니다. 우리의 오늘 하루가 이런
날인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도 사람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하루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서의 진정한 금식의 의미를
되새기며, 진심으로 사람을 생각하는 자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경험하는 하루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주전 520년 경 16년 전 중단됐던 성전 재건 촉구
에스라 3:10~11은 고레스왕의 명을 따라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 5만 명이 솔로몬 성전터에서 희생제물을 바칠 때
그해 7월에 성전의 기초를 놓았다고만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537년(또는 538년)쯤 되었을 것입니다.
에스라 3:10~11 건축자가 여호와의 전 지대를 놓을 때에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아삽 자손 레위 사람들은 제금을 들고 서서 이스라엘 왕 다윗의 규례대로 여호와를 찬송하되. 서로찬송가를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가로되 주는 지선하시므로 그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하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전 지대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
그러나 에스라 4:4 이하에서는 사마리아인들과 다른 이웃나라들이 고레스의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계획을 막았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에스라 4:4-6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부터 바사 왕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의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경영을 저희하였으며. 또 아하수에로가 즉위할 때에 저희가 글을 올려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을 고소하니라
에스라 4:24은 이들의 방해로 인해 하나님의 성전공사가 다리오왕 2년까지 중단되었다고 합니다. 이때는 주전
520년(또는 519년) 쯤 될 것입니다.
에스라 4:24 이에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전 역사가 그쳐서 바사 왕 다리오 제 이년까지 이르니라.
이때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집은 훌륭하게 지었지만 하나님의 집은 황무한 채 버려두고 재건의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었습니다(학
1:3~4). 주전 520년(또는 519년) 쯤 학개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므로 16년 전 중단했던 성전 재건을 유대인들에게
독촉했습니다.
유대인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남은 모든 백성의 마음에 감동이 생겨 성전 재건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학 1:14). 그때는 다리오왕 제2년 6째달 24일이었다고 합니다(학 1:15).
일곱째달 24일에 학개는 제2성전의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클 것을 예언하면서 백성들을 격려하고(9절) 2개월 후 아홉째달 24일에 여호와의 성전지대를 쌓던 날이라 했습니다(18절).
다리오왕은 537년에 고레스왕의 본래 조서를 찾아 이웃 나라의 방해없이 성전 재건공사를 명령했습니다(스 6:3~12). 516년에 제2성전은 완성되었습니다. 즉, 다리오왕 제6년 아달월 삼일에 성전 일을 끝냈습니다(15절).
이렇게 성경의 모든 자료를 정확히 분석하고 비교해 보면 거기엔 상호충돌이나 모순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08-24-2023(목)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늘의 네 바람(스가랴 6:5)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하늘의 네 바람인데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셨다가 나가는 것이라 하더라. The angel answered me, "These are the four spirits of heaven, going out from standing in the presence of the Lord of the whole world.
(새번역) 그 천사가 나에게 대답하였다. "그것들은 하늘의 네 영이다.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님을 뵙고서, 지금 떠나는 길이다.
(현대인) 그가 나에게 '이것들은 하늘의 네 영인데 온 세상의 주 앞에 섰다가 나가는 것이다.'하고 대답해 주었다.
(공동번역) "이 네 병거는 하늘의 영들이다. 이 영들은 온 천하의 주님을 들어가 뵈옵고 이제 막 나와 사방으로 떠나는 길이다.
발음
/ 솨마임[ shâmayim ] 관련 성경 / 천하(창 1:9, 출 17:14, 신 29:20), 하늘(창 1:8, 왕상 8:22, 암 9:2), 공중(창 1:28, 신 28:26, 삼하 18:9), 천지(창 1:1, 신 4:26, 렘23:24). 구약 성경 / 421회 사용
* 넷(703) 아르바(’arbaʽ) אַרְבַּע
1. 넷, 2. 단 3:25
발음
/ 아르바[ ’arbaʽ ] 어원 / 히브리어와 동일한 형, 702와 유래가 같음 관련 성경 / 사(스 6:17), 넷(단 7:3, 6) 구약 성경 / 5회 사용
예수께서는 이 세상의 죄를 속하고 영원한 형벌 가운데 처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 어떤 정치적
목적과 세상적인 의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를 오해하여 그들의 지도자로 삼으려 하였으나 이러한 계획은 당시 우매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치적인 야망과 세속적인 바램에 의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는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주신 구세주로서만 우리에게 신령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는 우리의
정치적 상황을 변화시켜 세상적 왕국을 이루려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세상의 왕이 아니라 영적 세계의 왕 곧 이 땅과 저
세상의 영원한 영적 통치자가 되십니다.
영원한 생명이 되신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지도자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땅의 가치를 하늘의 가치로 높여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비록 몸은 땅에 속해 있지만 땅에 붙잡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볼 수 없고 잡을 수 없는 신령한 것을 찾아가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환상 8 : 네개의 전차(6:1~8)
놋쇠로 된 두 산 사이에서 네 대의 전차가 나온다 네 대는 네 뿔, 네 대장장이, 네 바람처럼 온 세상 사방을 의미한다 붉은 말, 검은 말, 흰 말, 얼룩진 힘센 말은 요한계시록의 네 개의 인의 임무와 유사하다 전쟁, 기근, 기만, 전염병을 상징한다
성경에서 "네 바람"은 무슨 뜻일까?
성경에서 바람이란 표현이 나온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람과 성경의 바람은 다른가?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떨어지고 실체가 없지만 반드시 있는 존재가 바람이다. 날씨예보에서 설명하는 바람이 성경에서 사용한 "바람"과 다른 예를 뽑아서 설명해보자. 1. 요한계시록 7:1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땅 사방의 네 곳에서 부는 바람으로 네 바람이다. 이 바람은 땅과 바다와 나무를 해롭게 하는 바람이다.
2. 다니엘 7:2 다니엘이 진술하여 이르되 내가 밤에 환상을 보았는데 하늘의 네 바람이 큰 바다로 몰려 불더니.
네 바람이 불자 네 짐승이 나왔다. 이 네 짐승은 바로 바벨론과 페르시아, 헬라와 로마이다 이 네 짐승의 환상계시는 너무나 유명하다. 다니엘의 네 바람이 그냥 바다에 불었던 강풍일까 아니다 분명히 영적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말씀한다.
3. 스가랴 6: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하늘의 네 바람인데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다가 나가는 것이라 하더라.
이 바람이 날씨 예보에서 표현하는 바람이 아니라 심상치 않는 의도가 있는 바람이라는 것은 누구든 의심치 않을 것이다.
온 세상 주앞에 있다가 나간다는 표현은 스가랴 4장1 4절<이르되 이는 기름 부음 받은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는 자니라 하더라>에 나타난다. 이 말씀은 두증인을 설명할때 나온 말씀으로 두 감람나무를 표현하고 있다. 온 세상의 주 앞에 있다나 나가는 존재가 보통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네 바람 또한 그냥 바람이 아니라, 분명히 하나님의 역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을 의미한다.
결론
1.계 7장의 네 천사가 붙잡고 있는 땅 사방의 네 바람은 영적실체란 뜻이다. 이 네 바람의 하는 일은 땅과 바다와 수목을 해롭게 하는 일이었다. 2절 말씀에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받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또 다른 천사가 외친다.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하는 네 바람을 제어하는 네 천사에게 말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2절의 네 천사는 땅의 네 바람을 제어할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며, 이 바람은 땅과 바다와 나무를 해롭게 하는 권세가 있다는 뜻이다.
네 천사가 나팔을 하나님께 받아 분다는 뜻은 이 네 바람이 해롭게 하는 일을 하도록 풀어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네 바람은 우리가 아는 바람이 아니라 영적인 실체가 있는 존재들이란 뜻이다.
2. 계 7장의 말씀은 계 6장까지의 일곱교회의 설명과 일곱인봉의 모든 설명이 끝난 상태로 인봉이 모두 떼어졌어도 나팔재앙이 늦추어지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나팔의 재앙이 지연되는 것은 14만 4천의 인치심을 위한 연고로 이 모든 계시록의 재앙들의 본격적인 활동은 네 천사가 네 바람을 놓아주는 시점으로 이는 1234나팔이 불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8장에서는 반시간의 고요라고 설명한것이 이 7장의 말씀들이다.
스가랴가 바라보는 새 시대의 여명
1. 스가랴 6장의 구조
스가랴 6장은 1~8절과 9~15절로 분명히 구분된다. 1~8절 단락은 환상에 관한 기록으로 스가랴서에 나타난 8가지 밤의
환상(Nachtgesichten)시리즈 가운데 마지막을 장식한다. 첫 번째 환상(1:8~17)은 붉은 말을 탄 사람의 환상이고, 두
번째 환상(1:18~21)은 뿔 넷과 대장장이 넷의 환상이며, 세 번째 환상(2:1~4)은 척량줄을 잡은 사람 환상이다. 네
번째 환상(3:1~10)은 여호수아의 무죄판결과 임명 환상이며 다섯 번째 환상(4:1~14)은 순금 등대와 두 감람나무의
환상이고, 여섯 번째 환상(5:1~4)은 날아가는 두루마리 환상이다. 일곱 번째 환상(5:5~11)은 에바 속의 여인 환상이고,
마지막 여덟 번째 환상(6:1~8)은 네 병거 환상이다.
스가랴의 마지막 환상은 홍마, 흑마, 백마 그리고 어룽진 말들이 이끄는 네 병거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온 땅을 두루 다니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 마지막 환상은 여러 말들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홍마와 자마와 백마가 등장하는 스가랴의 첫 번째 환상과
유사하다. 여덟 번째 환상은 첫 번째 환상(슥 1:7~17)이 다룬 주제를 상기시킴으로 전체 환상들을 마무리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스가랴의 밤의 환상은 수미쌍관법(Inclusio)을 이루고 있다. 9~15절 단락은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면류관을 씌워
주고 그 면류관을 성전에 두어 기념물로 삼는 예언자의 상징행동을 보여 준다. 스가랴 6장은 다음과 같은 짜임새로 구성되어 있다:
6:1~8 여덟 번째 환상 - 네 병거 환상 1~3절 : 두 놋 산 사이의 네 병거 4~8절 : 스가랴의 질문과 해석 천사의 대답
6:9~15 상징행위 - “여호수아에게 면류관을 씌우라” 9~11절 : 면류관 제작과 여호수아에게 씌움 12~15절 : 성전에 놓인 기념물로서의 면류관
4. 두 구리산 사이에서 나온 네 병거의 마지막 여덟 번째 환상(슥6:1~8)(참고, 계6:1~17)
1)본문내용(슥6:1~8)
첫째, 두 구리산 사이에서 나오는 네 병거(전차)의 등장(1~3절)
스가랴가 또 눈을 들어보니, 네 병거가 두 구리산 사이에서 나왔다. 첫째 병거는 붉은 말들이, 둘째 병거는 검은 말들이, 셋째 병거는 흰 말들이, 넷째 병거는 어룽진 말들이 메고 있었다. 모두가 건장한 말들이었다.
둘째, 스가랴와 천사 사이의 네 병거에 대한 문답(4~5절)
그때 스가랴는 자기에게 말하던 천사에 그것들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그러자 천사는 이는 하늘의 네 영들로서,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다고 나가는 것이라고 했다.
셋째, 네 병거의 말들을 향한 천사의 명령과 말들의 출발(6~7절)
검은 말은 북쪽 땅으로 나가고 있었고, 흰 말들은 서쪽으로 나가고 있었고, 어룽진 말들은 남쪽으로 나갔다. 건장한 말들은 나가서 땅에 두루 다니고자 하였다.
넷째, 천사의 스가랴를 향한 북쪽 병거들의 활약 강조(8절)
그 천사가 말하기를 북쪽으로 나간 말들이 북쪽에서 하나님의 영을 쉬게 하였다고 했다.
2)영적 교훈
첫째,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게 하려고 하늘의 천사들을 사용하신다(1~8절).
둘째, 천사들은 각기 자신의 맡은 소임을 각각 따로 가지고 있다(1~3절).
하나님의 곁에는 네 종류의 천사들이 있으니, 붉은 말들과 검은 말들과 흰 말들과 어롱진 말들(청황색말들)이 있다. 이들은 각기 다른 소임을 맡고 있으니, 검은 말들은 북쪽 땅으로, 흰 말들은 서쪽 땅으로, 어롱진 말들은 남쪽 땅으로, 붉은 말들은 동쪽 땅으로 가서 일을 한다.
천사들은 세상으로 가서 정찰하고, 통제하고, 집행하며, 감시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셋째, 하나님 곁에서 하나님을 시종하는 천사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하늘에서 지상으로 파송을 받아 임무를 수행한다(4~5절).
천사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하늘에서 지상으로 파송을 받아 명령을 수행하고 있음은 요한계시록 6장에 네 인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계6장에 나오는 네 마리의 말들과 그 탄 자는 흰 말과 붉은 말과 검은 말과 청황색 말이었는데, 복음전파를 담당하고,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치는 심판을 담당하고 있었다.
넷째, 천사들은 모두가 사명을 수행하기에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7절).
천사들은 다 건장한 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위임하신 이을 성실하게, 능하게, 견고하게 감당할 수 있다.
시103:20-22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행하며 그의 말씀의 소리를 듣는 여호와의 천사들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21 그에게 수종들며 그의 뜻을 행하는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22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벧후2:11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도 주 앞에서 그들을 거슬러 비방하는 고발을 하지 아니하느니라
다섯째, 북쪽집회에 참석했던 루시퍼와 그의 천사들을 하늘에서 쫓아버린 천사들도 있다(8절).
하나님과 천사들의 모임이 있는데, 그곳은 북쪽에 위치한 하늘의 시온산에서다.
시48:2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 산이 그러하도다
사14:13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시82:1 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
시89:7 하나님은 거룩한 자의 모임 가운데에서 매우 무서워할 이시오며둘러 있는 모든 자 위에 더욱 두려워할 이시니이다
여섯째, 하늘에서 사탄과 그의 천사들이 검은 말들로 상징하는 하나님의 천사들에 의해 쫓겨남으로 하늘에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었다(8절).
계12:7-11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과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8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그들이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9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속]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10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11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일곱째, 사탄마귀가 하늘에서 쫓겨남으로 하늘에 안식이 찾아왔다(8절).
마6:9-10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눅10:18-19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떨어졌던) 것을 내가 보았노라 19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5. 성전 재건을 독려하는 여덟 환상을 끝맺는 대제사장 면류관 관련 기사들(슥6:9~15)(참고, 슥3:1~5, 사11:1~5)
1)본문내용(슥6:9~15)
첫째,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면류관 제작과 보관 및 종말론적 성전 건축자에 대한 예언 전달 명령(9~14절)
이제 예언의 궁극적인 주체이신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한다. 선민들의 헌물 수취와 대제사장 면류관을 제작하려 명령하신 것이다. 즉 사로잡힌 자들 가운데 바벨론으로부터 돌아온 헬대와 도비야와 여다야가 스바냐의 아들 요시아의 집에 들어가 있는데, 스가랴는 그의 집에 들어가서 그들로부터 은과 금을 받아 면류관을 만들어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라고 하신다.
그리고 더불어 장차 싹이라고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의 자리에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것이라고 하신다. 그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으며, 자신의 보좌에 앉아서 다스리게 될 것이요, 또한 제사장이 그의 보좌에 장차 있을 것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는 영원한 평화의 의논이 오갈 것이라고 하신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성전재건 헌신자들을 기념하기 위한 대제사장의 면류관을 성전 내에 보관하라고 명령하신다.
둘째, 종말론적 성전 건축의 재확증을 통하여 일련의 환상을 끝맺는 선언(15절)
장차 먼 데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것인데, 그때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천사를 보낸 줄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할 때에라야 그 일이 성취되 것이라고 한다.
2)영적 교훈
첫째, 하나님께서는 성전건축의 봉사자를 기리기 위해 사용되어지는 몇몇의 사람들이 있다(10절).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으로 돌아온 자들 중에 헬대와 도비야와 여다야과 요시아로 하여금 여호수아를 위한 면류관들을 만들라고 하신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짓는 자에게 영예를 안겨주시기를 원하신다(10~11절).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건축하는데 힘을 쏟았던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면류관을 만들어 씌우라고 하셨다.
셋째, 구약에 성전을 건축했던 여호수아는 신약의 교회를 건축하는 예수님을 예표한다(12절).
요2:19-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엡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넷째,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 오실 메시야는 연한 순같은 자로서, 자신을 희생하여 인류의 죄를 속죄할 것이다(12절).
사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렘23:5-6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싹=체마흐)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6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렘33:15-16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싹=체마흐)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16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슥3:8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들이라 내가 내 종 싹(체마흐)을 나게 하리라
다섯째, 메시야는 다윗의 자손일 뿐만 아니라 다윗의 뿌리이시다(12절)
예수님은 나무의 몸통에서 올라오는 가지(호테르)일 뿐만 아니라, 뿌리에서 올라오는 싹(네째르)이시다.
사11:1-2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가지=호테르)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싹=네째르)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계22: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여섯째, 메시야는 왕의 지위와 제사장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13절)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유다총독 스룹바벨이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했던 것처럼(그리고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가 독려함으로), 오실 메시야도 대제사장과 왕과 선지자로서 일을 하실 것이다.
계17:14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
히6: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일곱째,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헌신한 자들의 수고를 잊지 아니하신다(14절)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씌워줄 면류관들을 제작한 자들을 기념하기 위해 대관식에 사용했던 면류관들을 여호와의 전 안에 두라고 하신다.
마25:34-36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 스가랴 5:1~6:15에 나오는 명령과 선포 >
1)감사와 회개
주여, 사죄의 은총과 구원을 받은 자라도 또 범죄하면 멸망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지은 죄가 있는데도 회개하지 않으면 개인과 국가라도 멸망당한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이기적이고도 사사로운 유익을 얻기 위해 함부로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삶에 악이 함께 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천사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창조된 능력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천사들에게는 각기 맡겨진 소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사탄과 그의 천사들이 쫓겨남으로 하늘에 안식이 찾아왔음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하나님은 성전과 교회를 건축하는 자에게 반드시 영예를 안겨주신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메시야로 오신 예수께서는 왕이요 제사장이요 선지자인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메시야는 이 땅에 교회를 세우러 오셨음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지 못했나이다. 용서해주소서.
2)장자권 누림의 결단
주여, 이제는 날마다 회개하겠나이다.
주여, 이제는 함부로 주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않겠나이다.
주여, 이제는 죄를 멀리하겠나이다.
주여, 이제는 맡겨진 소임에 충실하겠나이다.
주여, 이제는 교회를 건축하는데 최선을 다하겠나이다.
3)장자권의 누림, 명령과 선포
이제까지 나로 하여금 죄를 멀리하지 못하게 가로막은 악한 영들은 떠나가라.
이제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교회를 건축하는 일을 방해하는 악한 영들은 결박을 받으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내 영혼아, 깰지어다! 내 영혼아, 깰지어다!
죄를 멀리할지어다. 교회를 건축하기에 더욱 힘쓸지어다.
4)오늘의 말씀의 핵심
1. 하나님인 우리가 죄를 멀리하는 것을 매우 기뻐하시는구나.
2. 지금도 천사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분주히 일하고 있구나.
3. 사탄이 하늘에서 심판받아 쫓겨난 것처럼 재림시에는 무저갱으로 완전히 쫓겨나겠구나.
4. 메시야이신 예수께서는 왕이요 제사장이시며, 선지자이시로구나.
5. 하나님은 성전을 건축하고 교회를 건축하는 자를 잊지 않고 축복하시는구나.
5)훈련의 기본원칙 열 번 복창
‘단순, 반복, 지속, 강행’
6)장자권의 발동, 명령과 선포 일곱 번 복창
‘있을지어다. 그대로 되니라, 좋았더라’ ‘복이 있을지어다.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호크마 주석, 다니엘 07장 - 호크마 주석 - HANGL NOCR
15–18분
=====7:1 열방들에 대한 예언 부분인 본서의 둘째 단락이 끝나는 부분으로 인간
역사의 흥망성쇠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섭리에 달려있음을 보여주는 본장의 환상은 내용적으로는 2장의 큰 신상의 환상과 유사하나
중심 사상에 있어 다소의 차이를 보인다. 곧 2장이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시작해 그의 재림으로 성취될 메시야 왕국의 비전에 그
중점을 두었다면 본장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성취될 적그리스도에 대한 최후 심판에 주안점을 둔다(본장 강해 참조). 특별히
6장까지는 설화체 형식을 통해 다니엘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가 객관적인 입장에서 설파되었으나, 본장에서부터는 다니엘 개인에게 직접
주어진 일련의 계시들이 1인칭 형식으로 기술된다. 먼저 8절까지는 네 짐승에 대한 환상이 기술되는 바, 이는 인간 전역사의 절대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세상 역사에 대한 구체적인 섭리의 계시이다. 바벨론 왕 벧사살 원년에 - 벧사살의 부왕인
나보니더스가 즉위(B.C. 556) 직후 중앙 아라비아의 테마(Tema)로 원정을 떠나면서 벧사살을 바벨론의 섭정왕으로
임명함으로써 이중적 통치가 시작된 B.C. 556(또는 555)년을 가리킨다(Wiseman, 5:1 '벧사살' 주석 참조).
혹자는 섭정왕 임명과 동시에 벧사살의 즉위가 이루어 지지는 않았으리란 점에서 그보다 조금 늦은 B.C. 553년으로 보기도
한다(Wood). 여하간 당시 바벨론은 이미 국력의 쇠퇴로 인해 메대와 바사의 침공에 시달리고 있었다.
=====7:2
하늘의 네 바람이 큰 바다로 몰려 불더니 - 여기서 '하늘의 네 바람'은 '넷'이란 숫자가 상징적으로 모든 방위(方位), 곧
인간 역사의 전영역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인간의 전역사를 주관하는 하늘의 권세와 능력을 상징하는데(Delitzsch,
Thomson) 여기서는 특별히 세상 나라에 대한 심판적 의미로 쓰여졌다(렘 49:36). 또한 '큰 바다'는 성경의 용례상 이방
세계나 사탄의 세력을 상징한다는 점(시 46:3;사 8:7;27:1)에서 포괄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의 악한 세력을
가리킨다(Hofmann, Delitzsch, Thomson). 따라서 네 바람으로 인한 바다의 흉용함은 심판을 위한 하나님의 악한
세상 역사에 대한 주권적인 섭리, 곧 악의적인 세상 역사의 급작한 변환 속에서 세상의 모든 백서들이 무서운 소요 속에 빠지게 될
것임을 가리킨다(사 57:20). 결국 선지자는 네 짐승으로 상징되는 바벨론과 메대와 바사, 헬라, 로마 제국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세상 백성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 앞에서 소멸될 것임을 예시한다. 혹자는 이 네
바람으로 나타날 네 마리의 짐승(3절)이 곧 지중해를 중심한 제국들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여기서의 '큰 바다'를 '지중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Gesenius, Hitzig, Ewald).
=====7:3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 이는 곧 2절의 주석에서 밝힌 대로 소란한 세상 역사속에서 태동될 4개의 세상 제국들을 가리키는 바, 4개의
세상 제국은 상징적으로인본주의적인 세상 역사 전반을 가리키는 것이다(Thomson). 한편 여기서 '짐승'(* , 헤와)은
인본주의의 근본을 가진 세상 역사의 잔악성과 폭력성이 하나님 나라의 특성과 비교해 야수와 같다는 점에서 쓰여진 말로, 다른 성경의
예언에서는 흔히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 열방에 대한 호칭으로 사용된 바 있다('리워야단'-사 27:1, '용'-사 51:9,
'악어'-겔 29:3, '독수리'-겔 17:3 등).
=====7:4 네 짐승의 구체적인 모습들이 언급된다.
첫째는 사자와...날개가 있더니 - 날개 달린 사자의 모습을 한 이 첫 번째 짐승은 니느웨와 바벨론의 유적지에서 발견된 날개 달린
사람의 형상과 유사한 것으로 곧 바벧론 제국을 상징한다. 이는 사자와 독수리를 지상과 공중의 짐승들 중에서 왕으로 생각한
사실에서 유추된 표현으로 역대의 세계 제국들 중 바벨론의 탁월한 위상을 강조하는 것이다(Kliefoth, Delitzsch).
이러한 상징은 2장의 신상에 관한 환상 중 금머리가 곧 바벨론을 상징한 것과 일치하는 것이며(2장 도표 참조) 그 왕 느부갓네살
역시 사자와 독수리로 비유된 바 있다(렘 4:7;49:19;겔 17:3). 그 날개가 뽑혔고...사람의 마음을 받았으며 - 혹자는
사자의 날개가 뽑혔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4장과 연관시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정신병을 얻어 그의 지위와 능력을 상실한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후반절의 '사람처럼...'을 느갓네살의 정신병이 회복되고 이성을 되찾은 것으로 이해한다(Hoffmann). 그러나 본
구절이 왕 개인에 대한 환상이 아니라 제국 자체에 대한 환상이라는 점에서 이는 왕과 제국의 필연적인 관계성이 강조되는 고대의
개념상 느부갓네살의 왕적 위상의 상실과 동시에 바벨론 제국의 영광과 국력의 상실이 함께 연계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Delitzsch, Thomson). 따라서 '사람처럼...사람의 마음을 받았으며'는 위의 주석에 비추어 보아 바벨론이
더이상 탁월한 위엄과 힘을 가진 사자가 아닌 비천하고 낮아진 인간과 같아진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Calvin, Thomson).
=====7:5
둘째는 곰과 같은데 - 곰은 사자 다음으로 힘이 센 짐승으로 여겨진다는 점에서 이는 바벨론의 뒤를 이어 대제국을 형성하게 될
메대와 바사 제국을 상징한다. 몸 한편을 들었고...세갈빗대가 물렸는데 - '몸 한편을 들었다'란 표현은 2:33과 8:9의
경우와 같이 메대와 바사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제국에서 바사(페르시아) 제국으로 단일화될 것임을 가리킨다(Delitzsch). 또한
'그 입에 세 갈빗대가 물렸다'는 것은 단일화 된 바사 제국의 고레스와 캄비세스가 행한 일련의 정복 사역, 곧 리디아(B.C.
546), 바벨론(B.C. 539), 애굽(B.C. 525) 등에 대한 정복 사실과 잘 부합된다. 그에게...많은 고기를 먹으라 -
이는 또 다른 바사의 정복 사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3이라는 숫자의 상징적 의미에서도 볼 수 있듯이, 세 나라에 대한
완전하고도 철저한 정복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Delitzsch, Ewald, Kranichfeld).
=====7:6
표범과 같은...새의 날개 넷이 있고 - 표범은 알렉산더 대왕의 헬라 제국을 의미한다. 특별히 표범으로 비유한 이유는, 비록
사자 같은 위엄이나 곰과 같은 힘은 가지지 않았으나 그 약탈성과 신속성은 위의 두 짐승을 능가한다는 점에서, 헬라가 특유의
기동력으로 신속하게 정복 사역을 수행한(8:6 '달려가더니' 주석 참조) 사실에서 유추된 비유인 듯하다(Delitzsch). 또한
'새의 네 날개'란 말이 탁월한 기동성과 신속성을 강조하기 위한 상징이라는 점을 볼 때도, 비록 알렉산더 대왕이 느부갓네살과
같은 왕적 위엄(4절)은 없으나 정복 사역의 신속성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음을 알게 된다. 그는 이러한 신속한 정복
사역을 통해 불과 13년 만에(B.C. 336-323) 세계적인 대제국을 형성하였다. 또 머리 넷이 있으며 또 권세를
받았으며 - 여기서의 '네 머리'는 알렉산더의 사후에 분할될 네개의 나라 즉 (1) 안티파터(Antipater)와
카산더(Cassander)의 헬라와 마게도냐(Greece-Macedon), (2) 리시마쿠스(Lysimachus)의 트라케와
소아시아(Thrace, Asia Minor), (3) 소아시아와 팔레스틴을 게외한 셀류쿠스(Seleucus)의 아시아(시리아),
(4) 톨레미(Ptolemy)의 애굽과 팔레스틴을 의미한다. 한편 '권세를 받았으니'의 '권세'(* , 숄탄)는 '지배하다',
'통치하다'란 어의에서 파생된 말로, 세상에 대한 지배권과 통치권을 의미하는 바(2:39), 이는 네 개의 나라가 각각 강력한
제국이 될 것임을 암시한다(Delitzsch).
=====7:7 이제까지의 일반적인 짐승의 묘사와는 다른 넷째
짐승에 대한 언급으로 이는 로마 제국을 상징한다. 이처럼 로마 제국이 특별한 모습의 짐승으로 묘사된 것은 그가 가진 무서운 힘과
파괴력, 잔혹성(무섭고...강하며)이 지금지의 제국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한 '큰 철 이'는
같은 로마 제국을 암시한 2장의 신상의 철 다리를 연상시키는 것으로(2장 주석 도표 참조), 그의 강력함과 파괴력, 정복욕에
대한 상징이다. 한편 '그 나머지'(* , 쉐아라)는 원어상 '찌꺼기로 남은 것'이란 뜻으로 이전 제국들의 침략에도 살아 남은
나라들을 가리킨다. 열 뿔이 있으므로 - 2장의 신상에 관한 환상 중 열 별가락에 상응하는 부분으로, 성경의 용례상
'뿔'이 힘의 상징이라는 점과 보편적으로 10이 전체를 의미하는 숫자임을 미루어 볼 때, 로마 제국을 기점으로 태동될 수많은
왕이나 제국을 가리키는 것이다(Delitzsch). 따라서 이는 역사적으로 로마시대부터 적그리스도가 출현할 때까지의 전기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이 '열 뿔'과 '작은 뿔'(8절)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본장 15-28절 강해 도표를
참조하라.
=====7:8 다른 작은 뿔이...뿌리까지 뽑혔으며 - 여기의 '작은 뿔'에 대해 개혁주의자들은
인간적인 성정과 지혜(사람의 눈...입이 있어), 그리고 사탄에게서 부받은 능력과 권세로 많은 사람들을 미혹할 적그리스도적인
인물로 본다(마 24:5;살후 2:3-8;계 13:4-10). 특별히 7절과 함께 '뿔'이 대체적으로 압제자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본 구절의 '작은 뿔'은 궁극적으로 이미 태동된 압제자들을 통합하여 그 우위에 서게 되는(먼저 뿔
중에서...뽑혔으며)악한 압제자의 종말론적인 전형 곧 적그리스도라도 볼 수 있다(본장 15-28절 강해 도표 참조). 한편 '큰
말'(* , 메말렐 라브레반)은 원어상 '오만한 말'이란 뜻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며 선민들을 핍박하기 위한 악한 의도에서 기인된
말이다(계 19:19-21).
=====7:9,10 이제 선지자는 적그리스도에 대한 묘사(7, 8절)를 중지하고, 심판자로서의 하나님의 보좌(9-12절)와 하나님 나라의 권세와 영광을 상속받으실 그리스도에 대한 환상(13, 14절)을 묘사한다.
왕조가 놓이고 - 톰슨(Thomson)과 베르만(Behrmann)은 본 구절이 심판자로서의 하나님의 보좌를 지시한다는 점과
본질적으로 재판장의 직무가 왕의 직무란 점을 들어 여기서의 '왕좌'를 왕의 보좌라기보다는 재판장의 자리로 이해한다(계 20:11,
12). 옛적부터...양의 털 같고 - 여기서 '옛적부터 계신 이'(* , 아티크 요민)는 문자적으로 '나이가 많은'이란
뜻으로, 다니엘에게 있어 하나님은 위엄하고 당당한 노인의 모습으로 제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상징은 곧
노인에 대한 고대의 개념에 비추어 하나님의 영광과 장엄함, 존귀함을 드러내준다(Delitzsch, Thomson). 또하 그
모습의 직접적 묘사('그 옷은...털같고')는 하나님의 흠없는 순결함과 거룩함에 대한 상징이다(계 1;14). 한편 그 심판
보좌의 '불'은 악인에 대한 심판과 동시에 자기 백성을 정결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열정을 상징한다(Delitzsch). 수종하는
자...만만이며 - '수종하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 명령을 수행하는 천사를, '시위하는 자'는 이 심판의 증인으로서의 천사들을
각각 가리키며, '천천'과 '만만'은 셀수 없는 무리에 대한 과장법적 표현인 바, 수많은 천사들이 하나님의 심판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 소집된 사실을 가리킨다.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 '심판을 베푸는데'는 곧 '심판이 시작되었는데'란
의미이다. 한편 여기서의 '책'(* , 세파르)은 원어상 '새기다'란 뜻에서 파생된 말인 바, 고대 바벨론에 있어서 이처럼 토판에
새겨 기록한 것은 주로 법적 문서들이었다. 따라서 본 구절의 '책'은 심판 대상자들의 혐의를 기록한 법적 문서로 볼 수 있으며 그
책이 펼쳐졌다는 사실은 '심판을 베푸는데'란 말과 함께 이미 그 심판이 시작되고 있음을 암시한다(계 20:12, 13).
=====7:11,12
넷째 짐승에 대한 심판이 묘사된다. 그 큰 말하는...목소리 - 곧 하나님을 대적하고 모독하는 오만의 말(8절)을 가리킨다.
한편 '사이에'라는 말은 후반절과 함께 하나님 심판의 즉각성과 신속성을 암시한다. 짐승이...붙는 불에 던진 바 되었으며 - 로마
제국과 이에서 태동된 열 뿔(적그리스도 출현 이전의 세계 제국들)과 작은 뿔(적그리스도7)의 완전한 멸망을 상징하는 것으로,
하나님 심판의 엄중성과 악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한 승리를 의미한다. 한편 죽임을 당한 뒤에 시체의 상태로 불에 던지웠다는 사실은
악인이 죽음의 고통과 함께 사후에 겪을 고통까지를 강조하여 예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 남은 모든 짐승은...기다리게 되었더라 -
여기서 '그 남은 짐승'은 작은 뿔에 의해 종속되었던 나머지 제국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넷째 짐승에 앞서 언급된 세
짐승을 가리킨다(Delitzsch, Havernick, Kliefoth). 이러한 사실은 그들 나라들이 비록 그 뒤의 나라들,
최종적으로는 넷째 짐승과 같은 영원한 심판적 형벌은 당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유추할 수 있다. 이것은 곧 2장의 신상에 관한 환상
중에서 그 신상이 차례로 파괴된 것이 아니라 뜨인 돌에 의해 동시에 파괴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Delitzsch). 한편 그
나라들이 보존된다는 의미는 작은 뿔, 곧 적그리스도의 심판 이후까지 그들이 남아 있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멸망의
정도에 있어서 작은 뿔보다 심하지 않으며 기간 또한 순간적인 작은 뿔의 멸망(11절)에 비교해 연장된다는 것이다.
=====7:13,14 하나님의 심판(11, 12절)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구절로 인자 곧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될 하나님 나라의 임재가 예시된다.
인자 같은 이(* , 케바르 에나쉬) - '벤 아담'(* )과 동일어인 이 말이 구약에서 인간이 아닌 신적 존재에 쓰여진 용례는
이곳밖에는 없다. 곧 본 구절의 '인자'는 '구름을 타고'(계 1:7)란 말과 결합해 메시야적 호칭으로 쓰여졌는 바, 메시야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본 구절을 자신에 대한 예언으로 인정하신 바 있다(마 24:30;26:64;막 13;26). 이에 따라
14절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으로 임하셨고 그의 재림으로 성취될 하나님의 나라에서 인자는 전우주적 통치적(권세와 영광과 나라)을
하나님께로부터 위탁받게 될 것이다. 이러한 위탁은 그의 흠없음(사 53:9)과 속죄 사역(사 53:5, 6), 그리고 부활을 통한
인류의 심판자의 자격을 입증하셨던(행 17:31;롬 2:16) 사실에 의거한 것이다.
=====7:15 앞선
환상에 대한 다니엘의 보충적인 해석이 천사의 개괄적인 해석(17, 18절)과 함께 22절까지 기술된다. 중심에
근심하며...번민케한지라 - 다니엘이 이상 중에 본 것은 곧 선재적으로 성취된 확고한 예언이었던 바, 그의 근심과 번민은
28절에서 천사의 해석이 끝난 후에도 같은 근심과 번민의 상황에 빠져있었다는 사실을 미루어 볼 때, 느부갓네살처럼(2:1) 단순히
그 해석을 알지 못한 사실에 기인한 것이라고보다는 이상 중에서 본 성도들의 당할 고난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Delitzsch).
=====7:16 그 곁에 모신 자 중 하나 - 이는 곧 10절에 언급된 천사 중의
하나로서 혹자는 9:21을 예로 들어 이 천사가 가브리엘일 것으로 추측한다(Thomson). 한편 본 구절에서 이 이상의 진상을
하나님 곁에 수종들고 있는 천사에게 묻는다는 사실을 아직도 이 이상이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Delitzsch).
=====7:17,18 다니엘의 질문에 대한 천사의 개괄적인 답변으로, 세상에 대한 네 제국의 지배권이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재림으로 성취될 하나님 나라에서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에게로 영원히 귀속될 것임을 말한다('나라를 얻으리니'). 네 왕이라 - 이는 곧 앞서 언급된 '네 제국'(four Kingdoms, NIV)을 가리킨다(해당 주석 참조).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 - 곧 하나님(4:17 주석 참조)의 택하신 백성을 가리킨다(시 85:8). 이들은 구약에 주로 언급된 육적 이스라엘 아니라 하나님과 새 언약을 체졀한 영적 이스라엘 백성이다(Delitzsch).
=====7:19,20
성도들이 당할 고난의 원인으로 제시된 넷째 짐승에 대한 다니엘의 특별한 관심을 드러내는 부분으로 보다 확실한 해석에 앞서 자신의
이상에 대한 부가적인 설명을 덧붙인다(7, 8절 주석 참조0. 한편 본절에는 '그 발톱은 놋이며'란 말이 새로이 첨가되고 있다.
=====7:21,22
이 뿔이...이기었더니 - 여기서의 '이 뿔'은 8절에 언급된 '작은 뿔'로서,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 하나님을 대적하고 성도들을
핍박하게 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8절 주석 참조). 또한 '싸워 이기었더니'란 말은 성도들을 굴복시켜 자신의 수하에 두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성도들을 압제하며 그들을 죽이기까지 핍박할 것이란 사실을 의미한다. 한편 22절의 '신원하셨고'(* ,
디나 예히브)는 원어상 '재판하다'란 뜻으로, 이는 악인에 대한 심판적 징계와 의인에 대한 영생의 상급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본문은 7년 대환란 후반부 삼 년반 동안 있을 성도들에 대한 핍박으로 적그리스도가 일시적으로는 승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활동은 극히 제한되어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패배하여 영원한 볼못에 던져질 것임을 말한다(계 19:1, 20).
아울러 신실한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주권을 얻게 될 것(18절 주석 참조)을 예시한다.
=====7:23,24 다니엘의 환상에 대한 본격적인 천사의 해석이 주어진다. 천사의 해석 중 중심적인 내용은 작은 뿔에 관한 것이다(7, 8절 주석 참조).
=====7:25
말로...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 사탄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과 성도들에 대한 실제적인 핍박을 가하게 된다(8절 '큰 말',
21절 주석 참조). 한편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의 '대적하다'(* , 차드)는 원어상 '...곁에', '...편에란
뜻으로, 이는 하나님을 대적함과 동시에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에까지 스스로를 높이는 교만을 지적하는 말이다(Thomson).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거시며 - 여기서 '때'(* , 제만)는 원어상 '정한 기한'이란 뜻으로 하나님께서 창조 당시에 정하신
순리적인 시간의 흐름을 의미하며, '법'(* , 다트)은 '명령'이나 '규례', '포고령' 등의 문자적 의미로서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모든 피조물의 생명과 활동의 근간이 되는 원리와 법칙을 가리킨다(Delitzsch). 실로 이러한 '때와 법'의 변경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영역에 속한 것인 바, 이것을 변경시키고자 하는 것은 곧 하나님과 자신을 동등한 위치에 놓으려는
적그리스도의 극악한 교만을 드러내는 것이다(Kliefoth).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 곧 여기서의 '때'(* ,
이딴)가 본서의 용례상 '년'(年)을 가리킨다는 점에서(4:16) 7년 대환란 중의 3년반의 기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계 13:5). 따라서 성도들이 3년반 동안 적그리스도의 손에 붙이우게 된다는 것은 그 시기에 집중적으로 성도들에 대한
엄청난 핍박이 있을 것임을 암시하는 것으로(21, 22절 주석 참조) 아마도 이 마지막 칠 년의 후반부(9:27)에 계
14-19장에 언급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점진적으로 시행됨으로써, 결국은 아마겟돈의 최후 전쟁과 그리스도의 왕적 재림을
예비하게 될 것이다.
=====7:26 곧 적그리스도에 대한 심판적 멸망을 기술한다(10절 주석 참조).
=====7:27 26절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부분으로 적그리스도의 영원한 소멸과는 달리 신실한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주권을 획득하게 된다(18절 주석 참조).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민 - 곧 본장에 나타난 '성도'(* , 카디쉐)와 동일한 말이나(18절 주석 참조), 이 '성민'은
특별히 '거룩한 백성'(* , 암 카다쉐)이란 집합적인 의미로 쓰였는 바, 이는 '그의 나라'의 단수형인 '그'가 지극히 높은 자
곧 하나님을 지시한다는 것과 분명한 구분을 짓게 한다.
=====7:28 나 다니엘은...낯빛이 변하였으나 - 15절에 이어 여전히 번민하는 다니엘의 모습을 모여준다(15절 주석 참조). 한편 '낯빛이 변하다'(* , 지위 이쉬타논)는 특별한 두려움이나 번민으로 안색이 창백해진 상태를 가리킨다.
이 일을 마음에 감추었느니라 - 여기서 '이 일'(* , 미르타)은 문자적으로 '말', '사건'등의 의미를 가진다는 점에서 이는
다니엘이 본 환상과 또 그 환상에 대한 천사의 말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이는 '지키다', '보관하다'란 뜻의
'감추었느니라'(* , 네타르)란 말과 함께 곧 다니엘이 자신의 환상과 천사의 해석을 가슴 깊이 새겨 간직했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바, 본장의 정확성에 대한 확실한 보증의 의미로 쓰여진 듯하다.
사자굴에서 구원받은 사건을 통하여 다니엘은 형통한 자가 되었고(6:28) 동시에 이 사건을 계기로 하나님은 만방에 계시되었다(6:26). 6장까지는 주로 다니엘이 이방 나 라에서 경험하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중심으로 그 내용이 전개되어 왔었다면, 본장부 터는 다니엘이 직접 하난미으로부터 받은 꿈을 중점적으로 언급고 있다. 이전까지는 다니엘이 꿈의 해석자로 부각되었지만, 본장에서는 직접 꿈을 꾸는 자로 나타나고 있 다. 그러나 이전의 꿈들과 본장에 나오는 꿈들이 하나님의 계시라는 점에서는 동일 성격을 갖는다. 그러므로 본장도 이전의 장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속 역사를 꿈의 형로 계시하는 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본장은 (1) 네 짐승에 대한 환상을 묘사하고 있는 전반부(1-14절), (2) 이 환상 에 대한 해석을 묘사하고 있는 전반부(1-14절), (2) 이 환상에 대한 해석을 묘사하고 있는 후반부(15-28절)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을 통하여 본장은 세계 역사 의 진행 과정과 종말론적 완성에 대한 제시를 드러내고 있다. 한편, 본서 1-7장은 교차 대구법적 구조가 내재되어 있다. 이러한 배열을 통해 저자 는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가 되심을 더욱 분명하게 계시하고 있다. 이제 본 대목 의 구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A. 2 : 네 왕국들에 대한 환상(느부갓네살) B. 3장 : 신왕과 기적적인 구원(세 친구들) C. 4장 : 심판의 예언과 구체적 실현(느부갓네살) C'.5장 : 심판의 예언과 구체적 실현(벨사살) B'. 6장 : 신앙과 기적적인 구원(다니엘) A'. 7장 : 네 왕국들에 대한 환상(다니엘)
또한, 본장은 2장에서 보여준 네 나라에 대한 계시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2 장이 신상으로 설명된 네 나라가 모두 파멸당한다는 사실에 강조점이 있는 반면, 본장은 난 폭하고 잔인한 네째 짐승에 대해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또한 2 장은 메시야의 초림 으로부터 재림까지의 긴 기간, 즉 메시야 시대를 초점으로 하고 있지만, 본장은 그리 스도의 재림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이제 두 부분을 비교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구 분 2 장 7 장
상징물 큰 신상(2:31) 네 짐승(7:3)
주제 세상 나라의 멸망(2: 44, 45) 세상 나라들의 멸망(7:26)
꿈꾼 자 느부갓네살(2:1) 다니엘(7:1)
강조점 네 나라의 파멸 넷째 짐승에 대한 관심
심판자 하나님(2:44) 인자와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7:13)
또한, 본장은 상징적인 표현 방식을 아주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다. 즉 사자(4절), 독수리(4절), 곰(5절), 표범(6절) 등을 통하여 세상 역사의 흐름과 적그리스도의 출현 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예고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본장은 다니엘의 꿈을 통하여 세계 역사의 변화를 예언하고 있다. 다니 엘이 목격한 네 짐승은 앞으로 세계를 주도할 네 제국을 의미한다. 이 세상 나라는 그리스도의 출현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입으며, 재림으로 인하여 완전히 붕괴된다. 하 나님은 역사의 주관자로서 종말런적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킬 것이다. 이처럼 저자는지 상에 존재했던 막강한 국가들이 메시야의재림으로 완전히 패망하고 오직 새로운평화의 시대가 도래함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1. 다니엘의 환상(7:1-14) 본 단락에 들어오면서 본서의 내용은 그절정에 이른다. 이전까지는 구체적인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가 드러난 반면, 본단락부터는 다니엘 자신의환상에 집중한다.다 니엘은 이상 중에서 본 바다에서 올라오는 네 짐승과 적그리스도의 출현및 심판장되신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으신 장며늘 묘사한다. 이러한 환상은 세계 역사의 주인곤이시며 종말에 가서 선악간에 판단하시는 분이심을 제시해주고 있다. 이러한 보뉴 단락은 (1) 네 짐승에 대한 심판의 환상을 묘사하고 있는 후반부)9-14절)등으로 구성되어 있다.이 러한 내용을 통하여 본문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이 최후 승리를 얻게됨을 알려주고 있다. 한편, 본 단락에 나타나는'네 바람'(2절)에 대하여 어떤 주석가들은 네나라를 지키는 천사 혹은 세상사람들을 움직이도록 세우신 하늘의 권세자들이라고 보기도 한다. 특히 비평학자들은 고대 신화적인 배경에서 이해되는데, 주로'바벨론의 티아말(Tiamt)신화' 로 설명하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일 경우 다니엘은 다신론적인 고대의 종교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간주되므로 성경자체의 권위가 무시될 뿐 아니라,하나님이 주신 게시인 꿈의 독특성을 파괴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네 바람은 어떤 신화 적인 존재라기보다는 하나님을 대적하기위해 일어나는 세상의 악한 세력에 대한심판으 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와 관련하여 나타난는 '큰 바다'가구체적으로 무엇을 지칭하 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들이 있었다. 세대주의자들은 이 바다를 구체적으로 지중해 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성경에서 통상적으로 의미하고 있는'바다'의 개 념에 대하여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많이 있다. 만일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모 든 바다를 지중해로 보아야 하는가 라고 반문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어떤 특수한지 역으로 한정하기보다는 더 광범위한 장소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것이 합당하다. 성경 에서는 하나님께 대적하는 세상 권세들을 종종 큰물로 상징했다.(사 8:7이하 ; 17:12 이하 ; 렘 46:7 ; 47:2 ; 계 17:1, 15). 더구나 여기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하는네 짐승들이 바다에서 나왔다고 기록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역사를 방해하는 근본적인 악 의 세력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특징을 담고 있는 본 단락의 핵심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네짐승의 성격(1-8절) : 여기서 나타나는 네 짐승의 공통점은 잔인하고 포악한성 격을 가지고 있으며, 이세상에서 보는 일반적인 동물들과는 달리 모습이 매우 괴이하 다는 점이다. 그리고 마지막 네번째 짐승이 이전의 짐승보다 막강한힘을 갖고 있다는 점이 독특하다(7절). 특히 '뿔'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므로써 짐승의 힘, 권세 등을 부각시키고 있다(8절). 이러한 묘사를 통하여 저자는 세상 나라의 포악성과 잔인 함을 보여주며, 권세가 상당할 것임을 예견케 해준다. 또한 네 번째 짐승이 이전의 짐 승보다 막강한 힘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을 통해서, 이세상의 나라는 마지막 정점으로 갈 수록 힘이 커지며, 하나님의 나라를 적극적으로 방해하게 됨을 알려준다. (2) 네 짐승에 대한 심판(9-14절) : 네짐승은 엄위와 권위가 서려 있는 보좌와한인물 에 의해 철저하게 심판을 받게 된다(9절). 이 인물은 '옛적부터 항상 계신이(9,13절) 로서 신적인 존재임이 분명하다. 그는 마치 어전 회의를 연상시키듯이 많은수종자들을 거느린 상태에서 심판을 수행하신다(왕상 22:19-23 ;욥 1:6-12 ; 사 6:1-4). 이심판은 일거에 이루어지면서도 완전한 심판은 아니다(12절).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졀정적으로 타격을 입은 사탄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때까지 마지막힘을행하 할 것이라는 신야의 관점에서 일치를 보인다. 인자의심판은 확실한 것이로되,잠정적인 기간이 지나야 완전한 심판이 이루어진다.
2. 환상에 대한 해석(7:15-28) 네 짐승에 대한 환상과 그 심판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전 단락(1-14절)에 이어서 본 단락은 환상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은 이전에 있었던 사건들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방법이다. 즉 먼저 환상이 나오고, 그 다음에 해석이 제시됨으로 써 꿈에대한 계시적인 성격을 분명하게 표현고 있는 것이다. 다니엘은 환상의 내용에 보충적으로 설명하고(15-22절)이어서 천사에 의한 환상의 해석(23-28절(을 언급함으로 써 계시의 참된 주체자는 하나님이시며 계시의 해석 및 취도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속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본 단락에 나타나는 넷째 짐승과 뿔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이를정 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구 분 넷째 짐승 열 뿔 작은 뿔
세대주의 역사상 로마제국 말세에 재생될 로마제국 재생될 로마제국의 왕
칼빈 역사상 로마제국 로마제국이 정복한 여러 쥴리어스 카이사르와 지역들 그 후계자들
영과 퓨지 역사상 로마제국 로마 멸망에서 적그리 적그리스도 스도까지
간하배 역사상 로마제국 역사상 로마에서 적 적그리스도 에서 적그리스도까지 그리스도까지
이제 본 단락의 주도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넷째 짐승과 성도의싸움(17-22절) : 넷째 짐승의 주된 임무는 성도를 이기는 것 으로 묘사되고 있다(21절). 특히 이 넷째 짐승은 두려움을 주는 대상우로 묘사되고 있 는 점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19절). 두려움을 보이는 대상은 성도라고 묘사되어 있 는데, 이는 성도들이 네째 짐승의 공격을 감당할 수없음을 알려준다. 이러한 사실은사 탄의 공격 목표가 성도라는 사실과 일맥 상통한다(엡 6:12). 이 싸움에서 성도는 스스 로의 힘으로 승리할 수 없다. 오직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의 중보적 신원으로 말미 암아 승리의 영광을 얻을 수 있다(22절). 예수 그리스도는 사탄의 궤게를 근본적으로 물리치고 온전한 승리를 마련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의지함으로써 세상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다. (2) 넷째 짐승에 대한 심판(23-28절) : 천사는 네째짐승을 네째 나라라고 해석함으로 써 짐승의 정체를 알려주었다(23절). 이 짐승은 상당한 기간 동안 성도를 괴롭힐 것이 며(25절), 마지막 심판의 때에 결정적으로 멸망당할 것이다(26절). 그리고 나서 하나 님의 나라가 영원히 설 것이다. 이러한 계시의 흐름은 요한계시록의 흐름과도 일치한 다(계 19:11-21:5). 세상의 세력은 마지막 공격을 감행한 후에 철저히 진멸될 것이다. 다니엘은 네째 짐승에 대한 심판을 기록함으로써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궁극적인 심판 과 하나님 나라의 성취를 미리 예언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본장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깨닫게 된다. (1)다니엘과 같은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계시를 꿈으로 받을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성도들은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연구하고 믿음으로 살 때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된다. (2)인간은
자신의 힘으로는 사탄을 이길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더를 믿으며 성렬 충만한 삶을 유지할 때 죄부터 승리할 수 있다(엡
5:18).
내가 다시 눈을 든즉 날아가는 두루마리가 보이더라. I looked again--and there before me was a flying scroll!
날아가는 두루마리(a flying scroll) 메길라 아파(מְגִלָּה עָפָה)
두루마리(4039) 메길라(megillâh) מְגִּלָּה
1. 두루마리, 2. 시 40:8, 3. 렘 36:14
발음
/ 메길라[ megillâh ] 어원 / 155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두루마리(시 40:7, 렘 36:2, 슥 5:1). 구약 성경 / 21회 사용
* 1556. 가랄( gâlal) גָּלַל
1. 구르다. 2. 이 단어는 다음과 같은 파생어로 사용된다. 3. 바퀴
발음/ 가랄
[ gâlal ] 관련 성경 / 옮기다(창 29:3,8), 떠나가다(수 5:9), 의탁하다(시 22:8), 굴리다(수 10:18, 삼상 14:33,
렘 51:25), 맡기다(시 37:5, 잠 16:3), 떠나게 하다(시 119:22), 말리다(사 34:4),
흘리다(암 5:24), 묻다(사 9:5), 끌려들다(창 43:18), 달려들다(욥 30:14). 구약 성경 / 16회 사용
날아가는(5774) 우우프(Wu ʽûwph) עוּף
1. 덮다, 2. 날다, 3. 어둠으로 덮다
발음
/ 우우프[ Wu ʽûwph ] 관련 성경 / 날아 앉다(사 11:14), 날다(삼하 22:11, 욥 5:7, 사 6:2), 날아가다(시 55:6, 잠 26:2, 슥 5:1), 피곤하다(삼상 14:28, 삼하 21:15), 지나가다(욥 20:8), 흐르다(시 91:5),
날개치다(사 31:5), 춤추다(겔 32:10), 날아 다니다(사 30:6). 구약 성경 / 26회 사용
날아가는 두루마리(내가 다시 눈을 든즉 날아가는 두루마리가 보이더라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기로 내가 대답하되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보나이다 그 장이 이십 규빗이요 광이 십 규빗이다
- "눈을 든"것은 하나님과의 교통을 얻기 위하여 준비된 행동이다. 인간은 영적으로 우준하기 때문에 경건한 노력으로 주님을 바라보아야 점점 주님과 교통이 열리는 법이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도 몇 날 동안 기도를 힘쓰고 애써야 필경 기도가 되어진다. "날아가는 두루마리" 이것은 빨리 두루 돌아다니는 저주이니(3절), 두루마리의 안팎에 쓰인 것이다(겔 2:9,10)" 그 장이 이십 규빗 이요 광이 십규빗"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성소의 면적으로서(출 26:1), 그 면적이 이렇게 성소와 같은 이유는, 거기 쓰인 저주를 받을 자들이 성소에 나타나는 하나님 백성에게서 끓어지겠기 때문이다(Delitzsch).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계시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목적은, 그들이 성전 재건 공사에 있어서 원수들의 방해로 인하여 낙심하였던 것으로 이제 다시 착수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온 땅의 백성들의 죄악을 하나하나 다 벌하시리라는 것은 , 하나님 백성으로 하여금 주님을 가까이 하려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사람에게 진정한 종교심이 작홍되는 것은 온 땅이 평안함을 보는 데서가 아니고, 도리어 온 땅이 하나님의 징벌로 캄캄하여질 것이 내다보일 때에 일어나는 것이다.
바둑 격언에 ‘묘수 세 번이면 진다’는 말이 있다.
묘수를 세 번이나 둬야 할 상황이 벌어지면 질 수밖에 없으니, 아예 묘수를 둘 일이 없게 만들라는 뜻이다. 공인된 격언은 아니나
‘떡수 세 번이면 무조건 진다’는 말도 있다. (병살타 세 번이면 진다는 야구 잠언과 유사하다) 그러면 떡수를 남발하다가 결정적
묘수 한 수를 뒀다면 그 바둑은 성공한 걸까 실패한 걸까.
<사활편>이나 <귀수편>이나 모두
한 마디로 정의 내리면 복수극이다. 주인공이 마침내 복수를 완성했을 때 관객은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거다. 그러니까 화면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관객과 주인공은 2인 3각 달리기를 하는 파트너인데, 어릴 때 동네 깡패에게 100원짜리 하나 빼앗겼다고 수십 년이
지나서 되갚아주는 주인공을 보면서 ‘그래, 잘 했네~!’하고 박수 쳐줄 관객이 과연 있을까. 즉, 주인공이 처절한 액션을 벌이고
복수를 벌이는 당위성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도무지 명분이 약하다. 이게 떡수가 아니면 무어랴.
사공 많은 배가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고 열심히 노를
젓는 형국이니 이것도 떡수다. 구성이라도 좀 멋지게 해서 바둑이나 액션이나 맞물려 돌아가면 좋으련만 ‘우리 열심히 영화
만들었어요!’ 하고 백화점 상품 진열하듯이 무작정 다 꺼내서 보여주기 바쁘다. 덕분에 화면 속 처절한 싸움을 그저 구경만 하고
있으니 그래서 떡수다.
그래도 묘수를 한 수 뒀으니, 액션은 꽤나 볼만하다. 사실 전작이나 프리퀄이나 바둑을 소재로
끌어왔을 뿐이지 보여주고자 하는 건 누가 뭐라고 해도 액션이다. ‘우리는 원래 액션영화였어요.’를 강변하는 노력이 보여서 슬며시
흥미가 돋는다. 물론 이야기와 밀착감이 있었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떡수로 도배한 바둑에 묘수 하나 곁들이고 나니
그럭저럭 킬링타임용 액션영화가 되었다.
메길라 아파(מְגִלָּה עָפָה) 날아가는 두루마리와 에바
첫째 : 두루마리의 의미
2절을 보면 스가랴가
본 두루마리의 규격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길이는 20 규빗이요,넓이가 10 규빗이라고 했는데, 오늘날의 도량형으로 계산하면 , 길이는 약 9m, 넓이는 약
4,5m 정도의 크기입니다.
이 길이와 넓이는 솔로몬 성전의 제단 앞에 있는 ‘낭실’(왕상 6:3)과 똑 같았고, ‘솔로몬
성전의 놋단’과 ‘성막 가운데 있는 성소’의 치수와 같습니다(대하 4:1).
열왕기상 6:3 전의 성소 앞 낭실의 장은 전의 광과 같이 이십 규빗이요 그 광은 전 앞에서부터 십 규빗이며.
역대하 4:1 솔로몬이 또 놋으로 단을 만들었으니 장이 이십 규빗이요 광이 이십 규빗이요 고가 십 규빗이며.
옛날부터 솔로몬 성전 제단 앞에 있는
‘낭실’에서는 하나님의 율법이 읽혀졌습니다. 따라서 이 둘의 규격이 똑 같다는 것은 이 두루마리는 율법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기록된 두루마리가 날아다녔다는 것은 곧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말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율법에는 복과 저주 두 가지
개념이 있는데 본문에서는 주로 저주의 측면만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둘째 : 날아다니는 두루마리의 저주의 대상
3절을 보면 “도둑질 하는 자는 그 이쪽 글대로 끊어지고 맹세하는 자는 그 저쪽 글대로 끊어지리라”고 말씀 하는데, 이것을 보아 저주의 대상은 특별히 도둑질과 헛된 맹세에 대한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도둑질은 인간들 사이에서 행하여지는 것이고, 맹세는 하나님께 관계된
것입니다.
물론 말라기서를 보면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지 않는 것을
하나님께 도적질 했다고 말씀하고 있고, 맹세는 하나님께만 아닌 사람들 사이에서도 행하고 있는 것이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도적질은 사람 사이에서 행하는 것으로, 그리고 거짓 맹세는 하나님에 관계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이러한 환상을 스가랴에게 보이신 이유는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이러한 죄들이 흔히 짓는 죄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것을 도적질하면서도
죄로 생각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맹세를 하고도 별로 귀중하게 생각지 않는 생활이 만연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무엇보다 물질에 대한
어려움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직 그들이 사는 집과 생활이 정착되지 않았고 그러기에 물질에 대한
집착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돌아와서 거처할 곳이 필요했기에 그들의 주관심사는 집과 생계입니다. 그래서 스가랴와 동시대 선지자였던 학개는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학1:4-6)
당시 유대인들은 거할 집과 먹을 양식에 치중하고 있었습니다. 돌아온 유대인들은 당장 겨울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고, 먹을 양식에
욕심을 부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의 것에 욕심을 부리고 도적질하는 일들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대나 도적질이 심하고 도둑이 많다면 먼저 불안에 떨게 되고, 안정이 찾아올 수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의 옆 집에 도둑이 들어와
털어 갔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래 집도 도둑이 들었다는 소리를 듣게 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불안해서 일터에도 못나가고 안정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이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스가랴에게 도둑질하는 자에게 내릴 저주에 대해서 말씀하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는 거짓 맹세를 많이 했습니다. 아무래도 여기에는 성전건축과 관계된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15년 전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되어 꿈에도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오자 이들은
기쁨과 감격 속에 있었고, 이때 스룹바벨이 하나님의 무너진 성전을 다시 건축하자고 할 때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고 또 약속도 하면서 시작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파사
왕이 조서를 내려 중단시키고 사마리아 사람들이 반대하자 이들은 중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후로 15년
동안 살아오면서 이들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도 포로에서의 해방이란 감격도 사라지고 하나님께 약속한 이전의 모든 맹세도 잊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회는 도적질로 불안해 싸여있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감사는 사라지고 맹세도 가볍게 여기는 등 육신적으로, 신앙적으로
문란해진 것이 당시 이스라엘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두루마리의 환상을 통해 돌이킬 것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 두루마리의 저주의 내용(3, 4절)
4절에 보면 “이는 온 땅 위에 내리는 저주라 도둑질
하는 자는 그 이쪽 글대로 끊어지고 맹세하는 자는 그 저쪽 글대로 끊어지리라” 두루마리 내용은 분명
저주에 관한 내용일 것입니다. 두루마리에 기록된 바와 같이 끊어지는 저주를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더 구체적인 저주의 내용이 4절에 나옵니다. “……내가 이것을 보냈나니 도둑의 집에도
들어가며 내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의 집에도 들어가서 그의 집에 머무르며 그 집을 나무와 돌과 아울러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일반적으로 집에 불이 나면 그 집의 기둥들은 남아 있는
경우가 있고 또 설령 기둥마저 다 타 없어진다 하더라도 그 집의 주춧돌은 남아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저주의 내용을 보면 그 돌까지도 불사르겠다고 하심으로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가 얼마나 철저하고 무서운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택한 이스라엘 백성이라 할지라도 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이렇게 철저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인데 이방인의 죄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넷째 : 심판의 성격
활짝 펼쳐져 있는 채로 날아다니는 두루마리의 모습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의 성격을 잘 보여줍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그 모습을 보고 굉장히 놀랐을 것입니다. 그냥 두루마리가
아닌 길이가 9m에 이르는 커다란 두루마리에 온갖 저주의 말씀이 기록된 가운데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커다란 두루마리는 저주의 크기를 말하며, 날아다니는 것은 급속히
임할 심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게 주어질 가혹한 징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다섯 가지 환상을 통해 스가랴와 이스라엘을 위로하고
격려하셨던 하나님께서
여섯 번째 환상을 통해서는 저주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성전을 건축하기 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결이기 때문입니다. 죄가 있는 가운데
성전을 지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토록 성전 건축의 마음이 있었고, 건축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마쳤음에도 허락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그는 전쟁을 많이 하여 피를 흘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스룹바벨이 성전 지대를 놓은 지 15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렸고, 해방의 감격도 사라졌습니다. 성전을 다시 지으려는
마음조차도 희미해졌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본래 이와 같습니다. 처음 가졌던 마음을 간직하고 있어야 하는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마음이 변질됩니다. 결혼할 때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힘들 때나 어려울 때나 사랑하겠다고 자신
있게 서약하지만 몇 년이 지나면 그 감동과 결심이 사라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와 같았습니다. 성전을 짓기 전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이 성결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에게는 육신에 젖어 죄악을 행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짓게
할 수는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여섯 번째 환상을 통하여 성결을 촉구하신 것이며 그 성결한 마음을 갖지 못할 때 내리는 무서운 저주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주님의 교회를 건축할 때는 교회가 사랑으로 하나되어야 하며, 죄를 버리고 거룩한 부흥을 가져온 후 교회당을 건축해야 합니다. 교회가
가장 거룩하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그런 때에 주님의 교회를 건축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적인 교회
건축의 시작이고 출발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주님께서는 끝까지 그 교회의 건축을 도우실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적인 관점으로 돈으로 지으려 하고, 목회자와
장로와 성도들이 하나되지 못하고 인본주의적이며, 기도가 쌓이지 않은 가운데 짓는다면 그 교회는 건축에
어려움이 있을 뿐만 아니라 주님과는 아무런 관계없는 건축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제까지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하고 격려하시다가
갑자기 이런 죄를 지적하시며 가혹한 저주의 하셨을까요?
앞에서 말씀 드렸듯이 성전 건축을 앞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전 건축을 앞에 두고 가장 중요한 성결을 가르쳐 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성전 건축하기 전 신앙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잘못된 죄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사람들과의 평화가 있어야 하며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관계 회복이 가장 시급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며 구원의 감격 속에 건축되어야
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성전을 건축하기
전의 신앙 자세를 말하며 더 나아가서는 마지막 시대에 주님 강림하실 때 누가 들림 받아 주님 계신 영원한 성전 되신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를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셨습니다. 은혜의 때였습니다. 그러나 주님 계신 하늘 성전이 가까이 올 때는
다릅니다. 그 때는 심판의 주로 세상에 오십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 그 구원의 감격이 있습니까?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처음 예루살렘 성에 돌아왔을
때의 유대인들의 감격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이제 돌아 온지 15년
밖에 안되었는데도 그들은 그 감격을 다 잃어 버리고 지금은 이방인과 같이 도둑질하며 세상에 젖은 생활을 하고 있었듯이 그래서 하나님이 저주를 선포했듯이
그들의 모습이 지금 나의 모습은 아닌지요?
아직도 주님의 격려와 위로가 필요합니까? 거룩한 하늘 성전이 가까이 올 때는 위로와 격려가 아닌 우리 자신의 정결함이 필요합니다. 성경에 위로는 주님 나라에 가서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 땅에 지어지는 성전도 이렇게 엄격하고 거룩함을 요구하고
있다면 하늘 성전은 어떻겠습니까?
신앙이 회복되지 아니한 자는 들어 갈수 없습니다. 거룩함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 젖어 있는 자는 그 하늘 성전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죄에서 분리되어야 합니다. 예수의
보혈로 죄를 제거된 자가 들어갈 수 있습니다.
주님을 가장 뜨겁게 사랑하며 구원의 감격 속에 거해야
합니다. 이웃과 평화가 있고, 하나님과 아름다운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중요합니다.
주님 강림하시는 그 날이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며 주님 맞을 준비를 시급히 해야 합니다. 두루마리가
날아다니는 것은 시급함을 말하는데, 지금이 바로 그러한 때입니다. 이럴
때 우리가 준비하지 않으면 주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두루마기가 날아다니는 시급한 이 때, 우리는 천년만년 살 것처럼 육신에 젖어 살아서는 안됩니다. 내일이면
푸줏간에 끌려갈 돼지가 아무것도 모르고 꿀꿀 거리며 주인이 준 음식에 행복해 하며 구정물에 입을 쳐 박고 있듯이 그러한 자가 우리 중에는 없는지요?
지금은 부끄럼 없이 주님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할
때입니다.
이제는 죄를 삶에서 모두 제거하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해결하십시오.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십시오.
그리고 세상의 오락과 쾌락과 죄를 단절하십시오, 주님께서 흠모하실 만한 아름다움으로 채우십시오.
주님 강림 하시는 그 날! 주님이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은총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늘 성전의 문이 열리는 그날, 우리 사랑하시는 주님과 함께 들어가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행복해요 남과 비교하지 않고 자신이 만족하는 사람이어요
이제 내가 어떤 사람이 행복하냐고 물은 것은 나 나름대로 생각한 것이 있는데 이렇게 볼 수 있어요 기억해야 할 것은 잘 기억하고
잊어 버려야 할 것은 잘 잊어 버리는 사람이 행복하다
그러니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을 잊어버리면 안 되지요 세상에 불행한 사람은 기억해야 될 것을 망각하고 강물에 떠 내려 보내야 할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어요 어떻게 보면 불행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진자 행복한 사람은 누군가가 나를 기억하고 있음을 아는 사람이 행복하지요 내가 외로움 속에 있지마는 나는 잊혀진 존재가 아니라 그 생각처럼 나를 산자의 땅으로 되돌리는 힘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 그러면 행복하지요 하나님이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하신다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스가랴라고 하는 그 이름의 뜻이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
그동안 4장 까지에서 여러 가지 환상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스가랴가 환상을 보는데
(1)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자(이스라엘의 회복이 시작됨)
(2) 네 뿔과 네 대장장이(이스라엘을 괴롭히던 민족을 향한 심판)
(3) 측량줄을 든 사람
(4) 여호와 앞에 서 있는 대세자장 여호수아
(5) 등잔대와 두 감람나무 (종교 권력이 조화를 이루는 세상)
(1) 화석류 사이에 선 자를 보거든요
화석류라고 하는 것은 회복의 상징 화석류 사이에 선 사람을 보았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회복이 시작되었어 먼저
(2) 그 다음에 네 뿔과 네 대장장이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뿔이라는 것은 권위를 뜻하고 힘을 뜻하는데 그 네 뿔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나라들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이 그 힘 앞에 대적할 수 없었어요 네 대장장이가 나타나서 그들을 떨어진 것이어요 그들의 심판이 행해진 것을 볼 수 있어요
(3) 세 번째 스가랴가 보았던 환상은 측량줄을 든 하나님의 사자를 보게 됩니다
측량줄을 젠다고 하는 것은 심판을 뜻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출애굽 시대에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지파별로 하나님이 나누어 준 것처럼 땅의 회복을 징조를 보여주거든요
상스러움을 보여주는 천사의 등장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뿔들을 무너뜨리는 대장장이의 등장 황폐된 땅을 회복하는 측량 줄을잡은 사람이 이야기 등장하고
(4) 그 다음에 등장한 것이 여호와 앞에 서 있는 대세자장 여호수아
아주 남루한 옷을 입고 있지만 남루한 옷을 벗기고 새 옷을 입히는 여호수아 하나님앞에 제사를 성직 제도의 재 확립 이게 등장해요
(5) 등잔대와 두 감람나무 (종교 권력이 조화를 이루는 세상)
등잔대와 두 감람나무가 등장해서 종교와 정치 권위가 함께 만들어가는 세상을 보여 주고 있어요
이것이 지금까지 공부한 것이어요 상당히 흐름이 분명하지요 지금까지 스가랴서 공부해 온 것을 잘 복귀가 되지요 이스라엘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 다음 읽은 이야기가 오늘 읽을 말씀입니다
어렵지요 두루마리도 어렵고 에바도 어렵고 그래서 안내자가 필요하고 그
안내자로 서 있습니다 보면 날아가는 두루마리가 보이지요 그 두루마리라고 하는 것은 성경에 하나님이 앞으로 역사속에서 행하실 그
계획들이 적혀 있는 아주 상징적인 것으로 두루마리가 자주 등장합니다
이 두루마리는 미구에 벌어지게 될 심판의 이야기 하나님의 역사 섭리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다고 볼 수 있지요 하나님의 시간이 무르익음을 두루마리는 보여 주고 있어요 우리가 시도 때도 밥 먹는 사람이 없지요
그 동안 살아 왔던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고 저마다 인생에 이런 삶의 계기들이 있는데 성경은 이런 수평적인 시간을 크로노스라고 이야기 하고 시계로 측량할 수 있는 시간 하루가 24시간이라든지 이것이 측량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삶의 시간에 무엇인가로부터 도입 한 것 같은 시간 이것을 우리는 카이로스라고 이야기 하는 데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신적 개입의 순간이어요 하나님이 우리의 삶속에 개입해 보고 있는 때이거든요
지금 두루마리를 비젼 가운데 보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대가 무르익었다
드디어 하나님의 때가 무르익었다
2절 그가 내게 묻되 천사가 스가랴에게 물은 것이어요
네가 무엇을 보느냐 천사가 네가 무엇을 보느냐 자꾸 묻지 않아요 물음은 우리에게 자세히 보게 만들어요
내가 성경에 대한 질문을 하면 성경을 자세히 볼 수 밖에 없어요 예를
들면 제 아들이 영문과를 나왔는데 영문과의 시험을 보면 나는 고상에 문학에 대한 것을 이야기 하는 지 알았더니 학생들의 공부는
무엇이냐 하면 자세히 읽는 습관을 들여야 엠리네에게 장미꽃을 이런 책이 있는데 그 책 다 읽고 시험 내용이 이래요 에밀 리가
자살할 때 사용한 도끼의 이름이 무엇이냐 그러면 영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정말 자세히 텍스트를 읽어야 하기 때문에 소홀히
넘어가서는 안 되는다는 것을 선생님이 보여 주어요
성경도 그렇습니다 질문이라고 하는 것은 소홀히 넘어가기 쉬운 것들을 깊이 생각해 보라는 것이어요 네가 무엇을 보느냐 그러자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보나이다 그 깅이가 이십 규빗이요 넓이가 십 규빗이니이다
길이가 이십 규빗하면 1 규빗이 45.6센치 그러면 길이 20 규빗이면 10미터 그 다음에 넓이가 10 규빗이니까 5미터 상당히 어마 어마한 두루마기입니다
왜 하필이면 길이가 20규빗 넓이가 10규빗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까닭이 있어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연약궤를 모신 지성소에 언약궤가 있지 않아요 언약궤가 있으면 그 위에 순금으로 이렇게 뚜껑을 만들어요 그것을 속죄소 그래요
그 위에 법궤를 지키는 그 법궤 위에 있는 그룹들을 만들었어요 이것은 group가 아니야 공동번역은 거룩이라고 번역을 해 놓았는데 일종의 천사입니다 지키는 역할을 합니다
왕상 6장 24절 한 그룹의 이쪽 날개도 다섯 규빗이요 저쪽 날개도 다섯 규빗이니 이쪽 날개 끝으로부터 저쪽 날개 끝까지 십 규빗이라
올리브 나무에 만든 그룹에 둘을 세워 놓았기 때문애 펼치면 20 규빗 20규빗이라고 하는 것은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라 성전의 회복을 상징하기 위해서 이 두루마리의 크기가 그렇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적힌 내용은 성전의 회복에 대한 내용일 가능성이 많고 아까 엄청 크다고 했지 않아요 왜 이렇게 크느냐 하면 누구나 읽을 수 있게
3절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온 땅에 내리는 저주라
온 땅에 내리는 저주라 말합니다 그 두루마리에 적혀 있는 내용이 그렇다는 것이어요
도둑질하는 자는 이쪽 글대로 끊어지고 맹세하는 자는 그 이쪽 글대로 끊어지고
이쪽 글대로 끊어지고 저쪽 글대로 끊어지고 말하는데 새번역은 이렇게 번역을 합니다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은 온 땅 위에 내릴 저주라 두루마리의 한 쪽에는 도둑질 하는 자가 모두 땅에서 없어진다고 쓰여 있고 두루마리의 다른 쪽에는 땅 위에서 맹세하는 자가 말끔히 없어진다고 쓰여있다
명확하게 알 수 있스니다 날아가는 두루마리는 온 땅에 내리는 저주인데
언약을 지키지 않을 경우에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지 않을 경우에 지금까지는 벌을 받지 않았어 도둑질 해도 처벌 받지 않았고
언약을 지키지 않아도 처벌을 받지 않았지만 이제 그 유보의 시간은 끝났다
이제 하나님이 벌을 내리신다 여기 도둑질을 이야기 할 때 우리가
도둑질 하지 말자도 있어요 계명이 있는데 이것은 물건을 목적으로 받을 때도 있고 어떤 물건 훔치지 말아라 사람을 목적으로 삼을
때도 있고 하나님의 것을 목적으로 삼을 때도 있어요
이때에 도둑질은 하나님의 것을 훔치는 것을 벌하겠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누가 야단을 맞느냐 하면
4절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사용하는 자 어떤 경우일까요? 망령되이 행하는 게 어떤 것도 있을까요? 계명을 지키지 않았을 때 그런 것도 있겠지요
이렇게 생각을 해 봐요 어떤 나라가 전쟁을 해요 사실 그 전쟁의 동기는 나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어요 그런데 무엇이냐 하면 여기가 악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하라고 말하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자기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갖다 쓰는 경우가 망령되이 일컷는 것이지요 이런 것을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컷는 것이어요 어떻게 보면 목회자가 빠지기 쉬운 유혹이기도 합니다
교회를 크게 짓는게 하나님께 영광이다고 말한다든지 굉장히 조심스럽게 말해야 하는데 그런 것들입니다 따지고 보면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귀환한 사람들은 학개서에도 보았지만 굉장히 생활 형편이 어려웠거든요
하나님께 바쳐 마땅한 것을 바치지 않고 우선 내 집부터 살아야 돼
이게 도둑질이야 어떻게 보면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고요 거짓 맹세를 하는 것도 하나님 앞에 나는 맹세코 이렇게 말하면서 자기의
이익을 확보하려고 해요 그들은 하나님은 가만히 두지 않겠다
그들의 집에 머물겠다 그 심판이 어떻게 시향되느냐 하면 그 집을
나무와 돌과 아울러 사르리라 이것도 새 번역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만준의 주의 말이다 그 집에 머무르면서 나무 대들보와 돌로
싸운 벽까지 그 집을 허물어 버릴 것이다
파멸의 철저함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은 이들에 대한 무서움 이런 것들이 보여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은혜로운 하나님 이야기 하고 있는데 은혜로우신 그런데 이 하나님만 알면 안 돼 어떤 하나님도 알아야 해 심판의 하나님
이 둘을 함께 알아야 여기에서 발생하는 우리의 감정이 경외 하나님을
공경할 뿐 아니라 두려워 할 줄도 알아야 해요 신앙 생활하면서 하나님이 너무 편안해서 하나님 제 마음 아시지요 이렇게 하면 다
알아 보고 여러분 그런 모습이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우리의 잘못을 벌하시는 분이기도 하지요
빵 한 덩어리가 있는데 이 빵의 이름이 사랑이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우리가 빵을 먹으면 잘라 먹지요 이 단면은 무엇으로 나타나느냐 하면 정의로 나타나야 되어요 정의 없는 사랑 사랑 없는 정의 이런 것들은 문제가 있어요
정의와 사랑은 함께 사랑하기 때문에 부정해도 된다 내가 사랑하는 자이기에 잘못했어도 놔 둬 그를 망치는 일이기도 꾸지람을 하는 까닭은 무엇이냐 하면 그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그가 더 이상 어긋날 길에 가지 않기 위한 사랑이지요
사랑이 없는 정의는 어떤 사람을 사랑과 정의가 함께 가야 되는 것이지요
5절 내게 말하던 천사가 나와서 내게 이르되 너는 눈을 들어 나오는 이것이 무엇인가 보라
보라 그러니까 우리가 무심히 세상을 보면 안돼 칼 야스퍼스라고 하는
철학자가 있는 데 이 분이 세계를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초월자의 암호로 가득 차 있다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초월자의 암호 그는
구지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어
초홀자의 암호로 가득차 있다고 하는데 암호라는 게 보는 순간 풀립니까? 아니지요 해독해야 되지 않아요 잘 살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세상에 가득차 있는 하나님의 암호를 해독할 수 있어야 되어야 해요
때때로 김상훈이라고 하는 초월자의 암호가 있어요 그것을 누군가가
풀어낼 때 겉 모습으로 어떤 사람 말고 저 사람 속에 신적 광휘를 볼 수 있으면 나는 함부로 대할 수가 없지요 그 사람들을 우리가
서로를 대할 때 보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 사람 속에 하나님의 술결을 보지 못하기에 대하는 함부로 대하거든요
우라는 정말로 대하는 사물들 하나 하나에 하나님의 술결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마태복음 6장 26절 너희는 하늘을 나는 새를 보아라
28절 들에 핀 백합화를 보아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냥 눈으로 보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마음의 눈으로 꽤 뚫어볼 때 그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나늑 섯이어요 초월자의 암호를 해독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가 묻습니다
6절 그가 말하되 이것이 무엇이니이까 에바이니라
에바가 무엇이지요? 에바라는 게 부피를 재는 단위 쉽게 이야기 하면
다른 번역은 뒤주라고 번역을 했는데 뒤주가 무엇인지 알지요 옛날에 말 에바라고 하는 게 호멜의 1/10인데 이것이 몇 리터정도
되는가 하면 22리터 정도 볼 수 있어요
한 말이 18리터여요 한말보다 큰 것이어요 한말 조금 남짓이지요 우리가 룻기도 공부하고 룻이 보아스의 밭에서 떨어진 이삭을 줍거든요 그것을 재 보니 룻기 2장 17절 그것이 일 에바였다
에바가 지금 등장하고 있습니다
6절. 온 땅에서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니라하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모양이라는 것이 형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 땅의 형편이 이와 같다
7절. 이 에바 한 가운데에는 한 여인이 앉았느니라.
뒤주 같은 데 한 여인이 앉아 있어요. 그 때에 둥근 납 한 조각이 들리더라.
이것 무슨 상황이지요 무엇이냐 하면 에바의 뚜껑이 있는데 납으로 만든 뚜껑이어요 이 여인이 고개를 이렇게 드는 것이어요. 그 에바를 덮는 뚜껑이 지금 열리고 있는 데 그가 이르되 이는 악이라 하고 말합니다
도대체 이 에바 속에 들어 있는 여인은 누구일까 생각해 보는데 이것은 종교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고대 근동 지방에서 사람들이 숭배하고 있었던 여신들이 있어요.
성경에서는 하늘 여신 하늘 여왕으로 등장하는 여신들입니다
그 여신들의 특생이 무엇이냐 하면 다산과 사랑을 관장한다
그래서 이슈타르의 여신상을 보면 다산을 상징하기 때문에 엉덩이가 커요 출산과 관련이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사랑 아주 사랑스럽게 형상이 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이스타르는 전쟁의 신이기도 해요 역사적으로 그러니까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결국 제국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어요 자신의
풍요를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수단으로 삼는 자라 그 수단으로 전쟁으로 활용하고 있는 나라 강력한 나라를 상징하는데 이스라엘에서도
저런 여신을 숭상하는 사람이 늘어난 것이어요
이 여인이 뚜껑에 덮여 있었는데 고개를 드는 것이어요
무슨 이야기인줄 알겠지요 그러자 그 여인을 에바 속에 던져 넣고 납조각을 에바 아귀 위에 덮더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도 음녀에 비유되고 했는데 악을 에바 속에
던지고 뚜껑을 덮었다고 이야기 하는데 이 장면을 보면서 방사선 물질을 납 용기에 담거든요 왜냐 하면 납이 안정화 되어 있기 때문에
분열을 안 일으킨데요 납속에 납은 유해하지 않아요 옛날에도 납으로 이렇게 봉인을 했구나
우리도 어렸을 대 우리도 납을 녹여 본 적이 있습니다 낙시 추 만들기 위해서 납을 집어 넣고 군불을 데서 녹여 낙시 추를 만들기도 했는데 납은 낮은 온도에서 높지 않은 온도에서 녹거든요 그게 유해한지 잘 몰랐어요
어쩼던 납으로 봉인한다고 했는 데 남을 에바 속에 던지고 뚜껑을 닫는다고 하는 이야기는 심판의 단호함 이런 이야기른 요한 계시록에서도 이야기 하거든요
요한계시록 20장 3절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하나님이 사탄을 결박해서 무저갱 속에 집어 넣어요 인봉하여 천년이 지나도록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렇게 말하는 데 비슷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9절 내가 도 눈을 들어 본즉 두 여인이 나오는데 학의 날개 같은 날개가 있고 에바속에 있는 여인과는 다른 여인이어요 학의 날개 같은 날개가 있어요 그 날개에 바람이 있더라.
그 여인들의 사명은 무엇이냐 하면 그 에바를 들고 하나님이 정화하는 그 땅에 더 이상 그 에바가 놓여 있으면 안 돼 그래서 하늘 바람을 타고 날아가서 어디엔가 옮겨 놓는 것이어요
10절 내가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묻되 그들이 에바를 어디로 옮겨 가나이까 하니
11절 그가 이르되 시날 땅으로 가서 그것을 위하여 집을 지으려 함이니라 준공되면 그것이 제 처소에 머물게 되리라 하더라
시날 땅은 바벨론을 이야기 합니다 그것을 위하여 집을 지으려 함이리라 준공되면 거기에 머물게 되리라 합니다
재미나는 게 학의 날개 성경에서는 학이라고도 번역하기도 하고 고니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요 학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가 하시다인데 하시다는 여러분이 아는 단어와 유사해요 헤세드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
여기에 학의 날개 같은 날개가 있다고 말하므로서 어떤 이야기냐 하면 하나님이 이 백성들을 버리지 않고 그 백성을 끝끝내 사랑하신다고 하는 것을 학의 이미지에서 보여 주어요
그리고 성경에 보면 이학이나 고니는 정결한 짐승이 아닙니다 부정한 짐승입니다
신명기 14장에 18절 이 고니 학이라는 것이라는 게 먹을 수 없는 부정한 짐승이어어요 부정한 짐승이기 때문에 에바를 들고 이방 땅으로 갔어요
에바를 이방 땅 시날로 옮김으로 이스라엘에 망연한 우상 숭배를 제거해요 이것이 에바의 환상이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우상을 옮기느냐 하면 여러분 그릇의 소용은 그릇은 어떤 때 쓸 수 있지요? 그릇의 소용은 비어 있을 때 그릇이라는 것이 비어 있을 때 쓰지요 무엇이 담겨 있으면 못 쓰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 그릇이라고 하는 게 비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우상으로 차
있는 그릇에는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기 어려워 지금 하나님은 에바를 옮기는 이미지를 통해서 아까 이야기 한 다산과 풍요로움 폭력
이런 것들로 점철된 우상 숭배를 하나님이 제거하심을 통해서 그래서 하나님의 영이 그 속에 임하시도록 하는 정화의 의미가 이 속에
담겨 있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결국은 에바가 머물게 되는 그 장소가 시날로 날아가서 거기에다가 두고
신전을 짓는 다고 이야기 했는데 그 말속에 담겨 있는 의미는 세상을 호령하고 있는 저 제국이 사실은 죄의 온상이라고 하는 사실을
넌지시 보여주고 있습니다 굉장한 상징이 그 속에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따르기 보다는 우상앞에 절하기 쉽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상을 섬기게 되지요 우리가 원죄 그러지 않아요
원죄 사람들은 원죄 설명할 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어서
우리도 재수 없게 유전이 되어 가지고 나도 죄인이래 그러면 억울한 생각이 들 수가 있어요 그러나 원죄의 이야기는 인류의 첫 사람
그러니까 일 이 삼 사 해 가지고 이 분이 죄를 지어서 나도 죄를 지은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인류의 첫 사람은 인류 전체를 상징해요
선악과를 따 먹은 사람은 이 원죄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악의
가능성이어요 그러니까 악에게 이끌리는 악의 영향력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이상하게 하지 말라는 것은 하고 싶거든요 그런 요소가
있지요 하라고 하는 것은 하기 싫은데 하지 말하는 것은 이상하게 매력적으로 보여요
창세기 3장 6절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하와가 나무를 보거든요 그 동안 많이 보았을 것이어요 무심히 보았거든요 뱀이 말해서 유심히 보니까 내 마음속에 욕심이 생겨요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기도 해 금지된 것에 대한 인간의 욕망 이런 것이 있어요
악에게 이끌리는 근원적인 가능성 이것이 원죄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고 하는 것은 악에 이끌릴 가능성이 있는 것을 그 가능성이 욕망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거스려
가면서 내 속에 하나님의 뜻을 채워가는 과정 이것이 신앙 생활이어요
늘 승리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비우고 또 비우고 이게 비워져야 하나님의 영이 내 속에 들어오는 데 내가 의지적으로 내 욕망을 절제 해야지 잘 안 되어요 오히려 강화 되어요
어떤 때 내 욕망이 절제되느냐 하면 다른 것이 좋아지기 시작할 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 보니까 너무 행복해 이제 진자 내가 누군가를 유익하게 하는 삶을 사니까 내가 행복해 지는 것이어요
그 경험이 내게 생기게 될 때 약의 영향력은 내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돼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들이 술좀 끊어 한데 내가 한번 끊어 보리라고 해도 못 끊어 끝까지 무엇이냐 하면 정말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생기면 술 먹는 것 잊어 버리거든요
그래서 옛날에도 이야기 했습니다하면 여기 상처가 나며 딱지 자꾸 뗄려고 하면 상처 나지 않아요 그냥 놔두어서 그냥 떵어져 악의 가능성을 그렇게 가는 것이어요
하나님은 인간이 그 땅에 인간이 살고 있는 그 땅에 악의 가능성을
옮기고 악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 인간이 돈으로 만든 제국임을 보여 주면서 이 비젼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지요 오늘 두루마리 환상 그
다음에 에바 환상을 보았는데 이해가 되었지요.
스가랴 5장은 여섯 번째 하늘을 날아가는 두루마리 환상과 일곱 번째 에바 가운데 앉은 한 여인의 환상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늘을 날아가는 두루마리의 크기는 장(길이)이 20규빗, 광(넓이)이 10규빗이라고 하였는데 오늘날의 도량형으로 환산하면 길이는 약 9m, 넓이는 약
4,5m 정도의 크기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길이와 넓이는 솔로몬 성전의 제단 앞에 있는 ‘낭실’(왕상 6:3)과 같았고, ‘솔로몬
성전의 놋단’과 ‘성막 가운데 있는 성소’의 치수와 같습니다(대하 4:1).
옛날부터 솔로몬 성전 제단 앞에 있는
‘낭실’에서는 하나님의 율법이 읽혀졌습니다. 따라서 이 둘의 규격이 똑 같다는 것은 이 두루마리는 율법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기록된 두루마리가 날아다녔다는 것은 곧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말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율법에는 복과 저주 두 가지
개념이 있는데 본문에서는 주로 저주의 측면만이 강조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이방에 의한 심판에 대해서도 예언하십니다. 에바 속에 앉은 여인 곧 죄악이 '시날
땅'으로 옮겨간다는 것은 이교주의의 본산으로 옮겨가는 것을 말합니다. 유대인의 죄악이 이방에 옮겨짐은 이방 나라들의 권세로 유대인들을
분산시키실 것을 예언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시날 땅은 인류가 교만하여 바벨탑을 쌓았던 곳입니다. 따라서 시날 땅이란 이방 사상과 환경을
의미합니다.
유대인의 죄악은 흩어져 살면서 이방 세력과 타협하여 본국에서는 빌라도의 정권을 이용해 그리스도를 죽였고, 또 다른
나라에 흩어져 있는 자들은 사도들을 핍박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죄악은 팔레스타인과 여러 나라에서 그 에바를 가득히
채우는 것과 같이 죄악을 관영시켰습니다. 그것이 바로 비유로 예언된 시날 땅과 같이 죄악을 극도로 관영시킨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세상 사람들의 죄악을 감찰하시고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공정하게 벌하심을
말씀하십니다. 회개하지 않는 대표적 민족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선민 의식 때문에 더욱
자고하고 하나님의 명령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이와 같이 교만은 저주와 멸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교만은
무지를 낳게 되고, 이 영적인 무지는 메시아를 거역하고 십자가에 못박는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성도의 교만은 자기를 주장하고 내세울 때
나타납니다. 내가 나의 주인이 되는 순간 주님이 계실 자리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중심에 계시지 못할 때 우리는
이미 멸망의 자리로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08-22-2023(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오직 나의 신으로(스가랴 4:6)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So he said to me, "This is the word of the LORD to
Zerubbabel: 'Not by might nor by power, but by my Spirit,' says the LORD
Almighty.So he said to me, "This is the word of the LORD to
Zerubbabel: 'Not by might nor by power, but by my Spirit,' says the LORD
Almighty.
오직 나의 신으로(But by my Spirit) 즉 오직 나의 영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스가랴 4장은 다섯 번째 환상으로 순금 등대와 감람나무 이상을 보여 주셨고 스룹바벨이 성전을 재건할 것과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실 것을 예고하신 것으로 궁극적으로 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역사를 예시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아무리 방해하는 세력이 있어도 결코 넘어지지 않습니다. 스룹바벨 주도하에 진행되는 성전 재건 공사가 반대자들에 의해
중단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성전 건축을 계속 진행시키시고 완성시킬 것이라고 스가랴 선지자에게 격려하며 위로하셨습니다.
성도들이 현재 교회의
모습이 미약해 보이고, 우리의 삶을 힘있게 해주는 것 같지 않아 보여도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하에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어떤 방해와 비방도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지는 것에 지장을 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기초가 되며 영원한 삶의 보장되는 증거가 됩니다. 따라서 성도들의 삶은 곧 이 세상에서 천국의 모형으로 생생하게 드러나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천국의 한 부분을 드러낼 수 있는 믿음으로 부각되는 은총의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키 임 베루히(כִּי אִם־בְּרוּחִי) but by my Spirit
오직(키. kîy) but (3588) כִּי
1. ~한 것을 창 1:10, 2. 창 1:4. 3. 왕상21:15
발음
/ 키[ kîy ] 관련 성경 / 반드시(출 3:12, 왕상 1:13), 조금(출 5:11), 오히려(민 16:13), 진실로(수 2:24). [형] 합당하다(창 27:36) 구약 성경 / 4475회 사용
임( ’îm)(518) אִם
1. 오! 2. 직접 의문문으로 쓰일 때 : 왕상1:27, 3. 완곡한 의문문으로 쓰일 때 : ~인지. 발음
/ 임[ ’îm ] 관련 성경 / 아니하다(창 14:23, 삼상 19:6, 겔 35:6), 못하다(삼상 17:55, 겔 14:20). [부] 진실로(렘
15:11), 결단코(민 14:23), 결코(민 32:11), 만일(출 22:23, 대하 33:8), 참으로(삼상 21:5),
반드시(민 14:35) 구약 성경 / 1071회 사용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벧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 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 이것은 위에 보인 순금 등대의 의미를 설명해 준다. 곧, 스룹바벨이 건축하기 시작한 성전이,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필경 산과 같은 난관을 극복하고 준공되어 하나님의 진리를 비취는 등대의 역할을 하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겸하여 장차 오실 메시야(그는 스룹바벧에게서 예표되셨던 참 스룹바벧이심)께서 세우실 신약 교회를 상징한다. 순금 등대가 두 감람나무에서 공급되는 기름으로써 그빛을 발함과, 이 스룹바벨이 세울 성전(또 그것이 예표한 신약 교회)은 성령의 능력으로만 성립될 것이라는 의미에서 천사는 여기 말한다. 곧,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고 한다. "힘"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속한 각양 세력(예컨대 부력, 병력 등)이고, "능"이라는 것은, 개인의 정력이나 담력 같은 것을 가리킨다.
순금등잔대와 두 감람나무의 환상(슥 4: 1∼14)
다섯 번째 환상에서 천사는 스가랴에게 두 그루의 살아 있는 감람나무의 가지들에 의해 기름을 공급받는
일곱 가지가 난 등대를 보여 주었습니다. 이 등대는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일곱 등잔은 ‘하나님의
눈’을 그리고 두 감람나무는 하나님의 은총이 마르지 않는 원천을 상징하는 것으로, 결론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스룹바벨에 의하여 하나님의 성전 건축의 완성을 약속하고 성전건축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 제거될 것이라는 성전의 영광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순금등대와 두 감람나무의 환상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며 이 환상을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발견하고자 합니다.
첫째 : 순금등잔대와 일곱 관에 대하여(2절)
스가랴가 본 환상은 순금으로 된 일곱 개의 등잔과 기름을 공급하는 일곱 관입니다. 등잔은 일곱 개이나 이 등잔에 기름을 공급하는 일곱 개의 관은 하나의 큰 관에서 갈라져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등잔은 큰 관에서 나오는 기름에 의해 타는 양만큼 자동적으로 공급이 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일곱 등잔은 스룹바벨에 의하여 건축될 성전을 말하며, 궁극적으로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질 교회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칙령으로 BC537년에 포로에서 해방되어
예루살렘에 올라온 유대인들은 1년 후 BC536년에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려고 성전 지대를 놓았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들이 파사 왕에게 고발을
하여 성전 건축이 중단되어 약 15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중단된
성전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광스러운 성전을 다시 짓지 못할 것이라는 패배감에 빠져 있을 때, BC520년에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의 성전 건축 촉구의 메시지에 다시 힘을 내어 건축을 시작하여 4년 후인 BC516년 제 2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이 건축되게 됩니다.
▶오늘 스가랴가 본 환상은 성전 건축이 중단된 지
약 15년에 본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스가랴에게 성전의 비전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스가랴가 본 환상은 먼저 일곱 등잔대입니다. 일곱 순금 등잔대는 바로 성전을 의미합니다. 일곱 순금 등잔대가 성전 안을 환하게 비출 때 제사장은 성전 안에서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성전 안의 등잔에서 비추는 빛과 같이 세상을 비추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스가랴에게 이 환상을 보여주면서 성전이 다시 건축될 것과 나아가 장차 그리스도에
의하여 교회가 세워질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기름을 등잔으로 공급하는 등잔대는 성전과 교회의 활동을 말합니다. 일곱 개의 등잔에서 빛이 나기 위해서는 기름이 공급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등잔은 일곱 개이지만 이 등잔에 기름을 공급하는 일곱 개의 관은 하나의 큰 관에서 갈라져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등잔은 큰 관에서 나오는 기름에 의해 타는 양만큼 공급이 됩니다. 교회의 모든 활동은 하나의 큰
관, 바로 성령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성전의 등잔을 보여 주시면서 성전이 건축될
것임을 약속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환상을 본 스가랴는 성전의 완공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그래서 그는 비전을 갖고 백성들에게 힘을 내어 전을 건축할 것을 촉구하게 된 것입니다.
둘째 : 등대 좌우에 있는 두 감람나무에 대하여(3절)
본 환상 가운데 보여진 등대 좌우편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가 하는 역할은 주발에 계속하여 기름을 공급하는
‘기름 공급처’입니다. 스가랴는
그것이 의미하는 것을 궁금하게 여겼는데, 7절의 말씀을 보면 두 감람나무 중 하나는 스룹바벨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스룹바벨이 하는 일, 곧 성전 건축은 잘 될
것이며 모든 어려움이 스룹바벨 앞에서는 사라질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즉 ‘총독’이라는 위치에 있는 그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성전 건축은 오직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이루어
집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6절)
스가랴에게 임한 말씀은 성전 건축은 사람의 힘으로나 능력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주님의 교회는 사람의 지혜나 힘이나
돈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는 말썽도 없고 은혜와 부흥과 평강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수많은 교회는 돈만 있으면 세우는 줄 알고 있습니다.
돈과 자기들의 지혜나 힘과 능력을 의지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건축해 놓고 교인들이 떠나버리는 일이 많고, 교회가
부채로 넘어가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지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전이나 교회를 건축할 때 반드시 방해하는
자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스룹바벨이 전(殿) 지대를
놓자마자 이 소리를 들었던 사마리아 사람들이 훼방하고 고발했습니다. 약 15년 동안 유대인들은 다시 건축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스가랴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7절) 여기에서 큰 산이란 그 동안 스룹바벨이 성전을 건축하는데
방해했던 모든 장애물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일을 방해하는 모든 원수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스룹바벨을 격려하시면서 어떠한 대적과 방해하는 자들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일을 이루신다는
것이고, 스룹바벨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앞에 대적이 ‘큰 산’과 같을지라도 그것이 평지가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주님을 믿는 신앙생활을 할 때 반대하고 훼방하고 대적하는 자들이 큰 산처럼 보이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평지가 되게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애굽의 왕과 애굽이 ‘큰
산’과 같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평지로 만드사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방되어 나왔고, 그들 앞에 홍해가 가로 막혀 홍해가 그들에게 ‘큰 산’으로 보였지만 하나님은 길을 내사 평지가 되게 했습니다. 여리고 성이
견고한 성으로 큰 산과 같이 보였지만 하나님은 한 순간에 무너뜨렸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큰 산’이란 없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볼 때는 한 나라의
왕이 ‘큰 산’으로 보이고 대적자들이 ‘큰 산’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한 순간에 평지로 만드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가야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하나님이며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입니다.
셋째 : 주를 모시는 두 사람(11절)
본문 11, 12절에 ‘두 감람나무’ ‘두 금관’ ‘두
가지’가 나옵니다. 많은 이단들이 이 내용을 잘못
이해하고 그리고 두 감람나무를 자기라고 하면서 ‘내가 감람나무다’ ‘내가
메시아다’ 하고 사람들을 미혹한적이 많았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두 감람나무란 14절에 나오듯이 ‘보좌에 앉으신 주를 모시면서 그 명령을 대기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왕상 22장 19절에서도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 좌우편에 모시고 서 있는데’ 라는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두 감람나무 즉 ‘기름부음 받은 자 둘’은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통치자 총독
스룹바벨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 두 명은 다만 예표의 사람들로서 장차 오실 메시아는 대제사장으로서, 왕으로서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예표인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이 했던 하나님의 그 일은 예수님에게서 통합되었습니다(히 5:6-11)
스룹바벨에 의해 성전이 완공 되었듯이,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그의 몸을 성전으로 세우셨습니다. 또한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의 마음을 주님께서는 성전으로 삼으셨습니다.
스룹바벨이 이스라엘의 통치자로 세움 받았듯이, 예수께서는 우리의 왕으로 우리의 통치자로 오셨습니다. 또한 여호수아가
당시 대제사장으로 하나님 앞에 섰듯이 예수님은 영원한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오셨습니다. 두 금관 사이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가지는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본 다섯 번째 환상은 성전 건축을 중단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스룹바벨에게 성전 건축 완공의 약속을 하신 환상이며, 그 앞에 어떠한 대적자들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일을 이루신다는 환상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장차 메시아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아로서 대제사장이시며, 모든 대적자를 물리치시는 평화의 왕으로 오신다는 예언입니다.
고난의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이 땅과 세상을
심판하시는 왕으로서, 만 왕의 왕으로서 오실 것입니다.
스가랴 4장에서는 위로가 되는 다섯 번째의 환상을 보는데, 현재 곤궁에 처한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는
격려가 많이 들어 있다. 그들의 현재 고통이 너무도 커서 그들은 자신의 경우를 소망이 없는 것으로 생각했으며, 그들의 성전은
재건될 수 없고 그들의 성읍이 회복될 수도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환상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힘에 의해 그 일을 행하실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 환상을 보기 위해 스가랴 선지자가 깨어 일어난다(1절). 그 내용은 기름을 공급받고 계속 타는 일곱
등잔이 있는 촛대는 양옆에 자라나는 두 감람나무로부터 기름을 직접 공급받고 있다는 것이다(2-3절). 또한 성전의 건축자들에게
주어져서 그 선한 사업을 해 나가게 하면, 그것이 완수될 것이라는 확신과 그 실증이 나타난다(4-14절).
하나님께서는 스가랴 선지자에게 순금 등대와 감람나무 이상을 보여 주시고 천사를 통하여 그 이상의 뜻을 해석하여 주셨습니다. 이는
스룹바벨이 성전을 재건할 것과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실 것을 예고하신 것이었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역사를 예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아무리 방해하는 세력이 있어도 넘어지지 않는다. 스룹바벨 주도하에 이루어진 성전 재건 공사가 반대자들에 의해
중단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성전 건축을 계속 진행시키시고 완성시키겠다고 스가랴 선지자에게 위로하셨다. 신자는 현재 교회의
모습이 미약해 보이고, 우리의 삶을 힘있게 해주는 것 같지 않아 보여도 실망할 필요가 없다. 교회의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하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인간의 어떤 방해와 비방도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지는 일에 지장을 주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기초가 되며 영원한 삶이 보장되는 증거가 된다.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교회를 보았다. 순금은 가장 고귀한 금속인데, 여기서는 그 변치
않는 성질을 통하여 하늘의 것을 상징한다. 등대는 두말할 것 없이 신약 교회를 상징한다. 스가랴는 순금 등대의 의미를 주의 사자를
통해 알게 된다. 곧 스룹바벨이 건축하기 시작한 성전이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필경 산과 같은 난관을 극복하고 준공되어 하나님의
진리를 비취는 등대의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는 장차 오실 메시야께서 세우실 신약 교회를 상징한다. 하나님은 스룹바벨을 시켜서
성전을 재건케 하셨은데, 이 성전 재건 공사를 반대하는 세력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래서 성전 재건은 극히 힘들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그 공사를 반대하는 세력이 큰 산악 같을지라도, 평지와 같이 변화시킨다. 오히려 하나님은
성전 재건 공사를 중단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위로하신다. 하나님은 스룹바벨을 봉해 시작하신 성전 재건 공사를 스룹바벨을 통해 마치게
하실 것이다. 이 성전 재건 공사가 비록 미약해 보였으나 필경 완성될 이유는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 곧 모르심이
없으신 성령께서 그 일을 성사시키겠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전적으로 성령에 의해 운행되고 실행됨을 본 예언서는 설명하고
있다. 결국 신약의 교회도 하나님의 지키시므로 그 시작은 미약했을지라도 세계 곳곳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고 많은 열매를 맺는
예언의 성취를 보게 되었다. 완전한 교회의 설립은 종말에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된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이라 내가 내 종 순을 나게 하리라. 'Listen, O high priest Joshua and your associates
seated before you, who are men symbolic of things to come: I am going to
bring my servant, the Branch.
발음
/ 모페트[ môwphêth ] 어원 / 복수 מֵפַעַת, 진정한 어원은 모르나 מוּפַעַת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 관련 성경 / 이적(출 4:21, 대하 32:24, 시 105:5), 기적(출 11:9, 시 78:43, 렘 32:20), 징조(사 8:18, 겔 12:6,11), 표징(신 28:46, 겔24:24, 27), 예표(슥 3:8). 구약 성경 / 36회 사용
예표(豫表)의 사람들! 안세 모페트!
예표(豫表)의 사람들 אַנְשֵׁ֥י מוֹפֵ֖ת
스가랴서 3장은 네번째 환상으로 제사장 여호수아의 성결에 관한 말씀입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이 성전 재건에 힘을 모을 때 성전에서 섬겨야 할 일군 제사장을 세워가는 과정을 환상으로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성결케 됨과 정한 면류관을 씌우는 환상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사하시고 의롭게 하실 것을
예시하셨습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통한 단번의 속죄를 예언하심으로써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받을 성도의 행복을
예고하셨습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그 옛날 모세의 뒤를 이어 백성들을 지도했던 여호수아와 같은 이름으로 그 의미는 "구원자" 라고 합니다. 이제는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는 백성들을 위하여 성전 제사를 맡아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않은 것을 구별하며 죄를 속하는 제사를 맡아 집례하는 거룩한 대제사장으로 마치 장차 오실 메시아의 표상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벗기시고 그 대신 아름다운 옷을 입히시므로 신약의 칭의를 나타내셨습니다. 구원의 방법은 여호수아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없고 그 여호수아를 인도하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을 이루어주심을 보여 주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인간의 의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이 진리를 믿어야 합니다. 구원의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할 때 수많은 이단과 거짓 선지자들이 등장하여 세상을 어지럽히고 사람들을 미혹하게 합니다. 이단(異端)이란 성경과 아주 크게 다른 내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애매한 부분을 마치 진리라고 주장하여 결국 성경 전체를 거스르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따라서 이단이란 "끝이 다른 것"을 말합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 인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할 때 비로서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넷째 이상, 제사장 여호수아의 성결(결례) - 이스라엘의 특권 회복.
여호수아와 제사장의 옷 (정결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3:1-2. 여호수아에 대한 사단의 고소와 여호와의 변호.
3:3-5. 여호수아의 갱의 대관.
3:6-7. 여호수아에 대한 축복.
3:8-10. 메시야 강림과 그 왕국의 축복 및 예언.
예표(豫表)의 사람(men who are a symbol)을 히브리 성경에서는 "안세 모페트(אַנְשֵׁ֥י מוֹפֵ֖ת)" 라고 합니다.
어느날 예언자 스가랴는 하늘나라에서 재판이 열리고 있는 꿈을 꾸었습니다. 피고인석에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기죽은 채로 서있었고, 고발자는 사탄이었습니다. 사탄이 대제사장을 고발한다는 것은 놀라운 장면이었습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와 동일한 이름일 뿐 같은 사람은 아닙니다(동명이인, 同名異人). 이스라엘이
70년간의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고국으로 돌아올 때 정치적 지도자로는 다윗의 혈통인 스룹바벨을 세웠고 여호수아는
대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부여받고 귀국한 사람이었습니다.
귀국한 후 성전을 지으려고 했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의 정치적 방해가 거셌고 경제적으로도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성전공사는 16년이나 중단되었고 거룩해야할 성전은 잡풀만 무성한 폐허가 되었으니 대제사장으로서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자기의 역할을 감당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그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호출하고 법정에 세웠습니다.
사탄이
참소합니다. '이런게 무슨 제사장입니까?' 고발합니다. 고소합니다! 할말이 있으면 해보시오! 아마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이
비참했을것 같습니다. 하지 않아야하는 것을 하는 것도 죄이지만 해야할 것을 하지 않는 것도, 하지 못한 것도 죄가 되었습니다.
인생법정! 인생법정이 있다면? 우리도 혹 그런 인생법정에 서게되는 날이 혹 오게될까요? 그 어느날 너는 과연 어떻게 살았는지 무죄인지 유죄인지를 묻는 결정하는 날이 있을까요? 영화 빠삐용Papillon이 생각납니다. 죄수 빠삐용은 끝까지 무죄를 주장합니다. 살인혐의를 입고 쌩로랑 수용소에 갇히고 징벌 독방에 6개월동안 웅크려 신음하던 빠삐용은 꿈을 꿉니다. 꿈에 판사가 말합니다! 너는 살인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너는 유죄이다! 그래도 유죄이다! 그 이유는 바로 인생을 낭비한 죄!
Judge : Yours is the most terrible crime a human being can commit. I ACCUSE YOU OF A WASTED LIFE! 판사 : 네 죄는 인간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중죄다. 난 널 인생을 낭비한 죄로 기소한다! Papillon Guilty 유죄? 유죄... 유죄... 유죄... 유죄..........
유죄라면 가장 무서운 유죄! 인생을 낭비한 죄! 시간을 낭비하고 감정을 낭비하고 능력을 낭비하고 관계도 낭비하고!
대제사장도 지금 기가 죽고 초라하게 사탄이 호출한 법정에 서있습니다. [슥3:1]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마음이 참으로 복잡했을 여호수아! 사탄까지도 그를 비웃습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무슨 무슨 큰 죄를 저질렀나요? 아니었습니다! 다만 해야할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죄가 되었습니다! 여호수아가 말없이 고개를 숙였을듯합니다! 왜? 왜 그랬나요? 물을 때 어떻게 대답해야하나요? 왜 이렇게 되었어?! 왜 그렇게 살았어? 사는게 그렇게 힘들었어? 세상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나라는 사람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실패했습니다! 성격교정이 안되고 관계는
늘 부딪히고 열등감을 다스리지 못하고 남의 말에 늘 좌절했고 욕심을 내려놓지 못했고 욕구불만을 해소하지 못했고 내 마음 속의
자기모순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남의 시선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기억이 찔러대는 상처를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사탄아! 입다물라! 그런데!!! 여기에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놀라운 은혜! 놀라운 선언! [슥3:2]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슥3:3]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있는지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입 다물라! 여호수아가 지금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같아도 적어도 너에게 비웃음 받을 영혼은 아니다! 그 여호수아를 내가 택했기
때문이다! 너는 그를 비웃고 조롱할지 몰라도 나는 그를 버리지 않았다! 나는 그를 버리지 못한다!
지금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같은 모습으로 서있는 여호수아의 모습을 사탄은 즐기지만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십니다. 안타까워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회복의 수순을 밟아주십니다! 옷을 갈아입혀주십니다! 내 사랑은 아직 식지 않았다! 아니, 영원히 식지 않는다! 거기에 스가랴도 말합니다. 이 여호수아의 머리에 다시 관을 씌워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셨습니다! [슥3:4]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슥3:5]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
옷을 갈아입혀주시다!
영적회복의 기회! 재활의 축복!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하여 다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고 율법으로 돌아가고 규례를 지키면 권위도 회복시켜 주시고
사명도 회복시켜주시고 할 일도 회복시켜주시며 사람들 앞에 떳떳이 왕래할 수 있도록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귀하고 감격스럽습니다! [슥3:6] 여호와의 천사가 여호수아에게 증언하여 이르되
[슥3:7]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만일 내 도를 행하며 내 규례를 지키면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내 뜰을 지킬 것이며
내가 또 너로 여기 섰는 자들 가운데에 왕래하게 하리라
감사한 것은 여호수아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수아와 함께 나아와 있는 기가 죽고 부끄럽고 초라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여호수아의 동료들이었습니다.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예표의 사람들이라고 부르십니다! 예표(豫表)의 사람! 스가랴 3:8!
[슥3:8]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들이라 내가 내 종 싹을 나게 하리라
예표(豫表)의 사람! 안세 모페트! אַנְשֵׁ֥י מוֹפֵ֖ת 희망의 미래를 되찾아 낸 사람들! Men of wonderous sign
예표! 표증이 되고 증거가 될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단수가 아니라 복수입니다! 모두가 그렇게 될 것이고 되어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싹이 나게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새로운 싹이 돋을 것이다! 희망의 싹, 생명의 싹, 웃음의 싹, 행복의 싹!이 돋을 것이다! 너도 나도 모두 예표의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희망의 증거가 되어야합니다!
중세 수도원 일화가 있습니다. 덕망으로 널리 알려진 수도원장이 죽자, 사람들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고 운영도 어려워 수도사들은
해산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꼭 전해야할 계시를 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곳에 바울과 베드로
못지 않은 놀라운 성인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신들 중에 있습니다. 바로 당신들 중에 있습니다! 이곳을 살려낼 분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 사람이 당신일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 마주 보고 고민합니다! 저 사람? 아니면 이 사람? 아니면 혹시 내가?
내가 혹시 그 사람인가? 그렇게 생각하고 기도하는 사이에 놀라운 영적 변화가 일어나고 훗날 그 수도원은 모두가 성인으로 변해 그
수도원에 가는 사람들마다 큰 은혜를 받았다는 일화입니다.
예언자 스가랴는 꿈을 꾸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재판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피고인석에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기죽은 채로 서있었습니다. 고발하는 사람이 누군가 보니 놀랍게도 사탄이었습니다! 사탄이 대제사장을 고발한다?! 놀라운 장면이었습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와 이름이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70년간의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면서 고국으로 돌아올 때 대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부여받고 귀국한 사람이었습니다.
귀국한 후 성전을 지으려고 했지만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결국 성전공사가 16년이나 중단되었으니 대제사장으로서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자기의 역할을 감당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그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호출하여 법정에 세웠습니다.
사탄이 참소합니다. '당신같은 사람이 무슨 제사장이요?' 비웃습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이 비참했을것 같습니다. 그는 지금 비참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기가 죽어 사탄이 호출한 법정에 서있습니다.
[슥3:1]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마음이 참으로 복잡했을 여호수아! 사탄까지도 그를 비웃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놀라운 은혜! 놀라운 선언!
하나님께서 사탄을 책망하시고 여호수아의 편을 들어주셨습니다!
[슥3:2]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슥3:3]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있는지라
사탄아! 입 다물라! 여호수아가 지금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 같아도 적어도 사탄에게 비웃음 받을 사람은 아니다!
내가 그 여호수아를 택했기 때문이다! 너는 그를 비웃고 조롱할지 몰라도 나는 그를 버리지 않았다! 나는 그를 버리지 못한다!
발음
[ tsemach ] 어원 / 677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난 것(창 19:25), 움돋게 함(사 61:11), 가지(렘 23:5), 풀(겔 16:7), 이삭(호 8:7),
싹(시 65:10), 소산(사 4:2), 순(슥 3:8, 6:12). [형] 연한(겔 17:9), [동] 자라다(겔 17:10) 구약 성경 / 12회 사용
이들은 예표의 사람이라 내가 내 종순을 나게 하리라
- '예표의 사람'은 바로 여호수아와 그의 동료 제사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들의 직분이 예언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다. 결국 구약의 제사장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가치는 메시야를 통해 확실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메시야를 가리키는 '종'(사 42:1; 49:3; 50:10; 겔 34:23)과 '순'(荀)(렘 23:5)에 대한 약속으로 이어진다. '종'이라는 표현은 메시야이신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행하여 완전한 속량을 이루실 것을 잘 나타내며, '순'은 다윗의 계보에서 나올 새로운 싹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적 특성을 시사한다(6:12; 사 11:1; 42:1).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예표의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보여주어야 할 의무와 책임을 보여주어야 할 책임을 갖고 있는 존재라고 하겠다. 그런데 천국의 징조를 보여주지 못하므로 세상을 실망시키고 있다. 순이란 싹을 말합니다. 싹은 아주 작은 것을 말합니다. 비록 작은 것 같지만 그 작은 것이 자라서 큰 나무가 될 것이며 그 나무에 많은 그늘이 만들어져서 새들이 둥지를 만들고 자리를 잡게 될 것이다.
당신이 내게 예표의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표의 사람들입니다. 함께 예표의 사람들이 되기 원합니다! 함께 희망의 사람들이 되기 원합니다. 한번 진실하게 간증하기 원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서로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약해도 주님께서 우리를 만들어가실 것입니다. 싹을 트게 하실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고백을 기억합니다. [고전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간증의 사람들, 예표의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영혼이 맑은 사람들, 헌신이 진실한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균형감각이
있고 열정도 있고 지구력도 있고 소망을 붙잡고 가고 사람을 품을 줄 알고 화목을 만들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못가진 것을 그분이 가지고 있기에 서로 배우는 공동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지금까지는 남의 간증을 들으며 내 신앙을 키워왔고 점점
신앙이 깊어졌습니다. 이제는 내 차례입니다! 인생의 아픔과 슬픔을 어떻게 이겨냈는지, 어떻게 욕심을 이기고,
분노를 이기고, 자기와의 싸움을 이겨냈는지, 어떻게 믿음이 더욱 깊어지고 어떻게 더욱 사랑하게 되었는지! 희망을 주는 사람들!
간증하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언젠가는 한번 열정의 간증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격정의 간증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스가랴 예언자는 여호수아 대제사장 환상을 봅니다. 환상 속에서 여호수아 대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데 주위에 천사들이 빙
둘러서 있고, 그 한쪽에 사탄도 끼어들어 있어요. 대제사장이 꾀죄죄한 옷을 입고 있으니까 사탄이 온갖 험담을 다 쏟아내요. 이때
하나님이 사탄을 쫓아내고 천사들을 불러서 여호수아에게 깨끗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고, 머리에 멋진 관을 씌우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런
다음 여호수아를 둘러싼 동료들을 향해서 ‘예표의 사람들’(8절)이라고 선포합니다. 예표는 히브리어로 ‘모페트’인데 두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놀라운 일, 기적과 같은 일, 엄청난 일이라는 뜻도 있고 또한 징조, 조짐, 예감이라는 뜻도 있어요.
어떤
예감이 있을 때 좋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고, 께름직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어요. 여기에서 말하는 예표는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알 수 있어요. “그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하게 지내는 것은 가장 평화로운 세상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전쟁도 그치고, 못된 사람들도 다 사라지고,
걱정 근심이 한 자락도 없는 세상입니다.
지금은 사는 것이 옹색해요. 포로 생활을 끝내고 돌아왔으니 오죽하겠어요. 밭은
호랑이가 새끼 칠 정도로 무성하고, 이랑마다 돌멩이가 수북이 쌓였으니 농사를 지어봤자 수확이 제대로 나올 리가 없지요.
고생고생해서 성전을 지었는데 옛날 솔로몬의 성전에 비하면 너무 초라해요.
하지만 예표가 있어요. 앞으로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지금은 팍팍하지만 앞으로는 살림살이가 넉넉해질 겁니다. 지금은 농사가 잘 안되지만 앞으로는 농사가 잘 돼서 풍성해질
겁니다. 지금은 성전이 조그맣지만 이 성전에 세상 만민이 예물을 들고 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될 겁니다. 좋은 징조지요.
우리가 예표의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가는 곳마다 좋은 일이 생기고 동네의 어려운 일이 다 해결돼서 동네 사람들이 환영하고, 어디서든지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예표의 사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지요.
그럼
어떤 사람이 예표의 사람인가요. 여호수아처럼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또 천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사람입니다. 여호수아
주위에 천사들이 빙 둘러서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다 씻어주신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벗기고 깨끗한 옷을 입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씻겨 주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여러분이 예표의 사람이 되면 어디를 가든지 환영받을 것입니다. 예표의 사람은 누구나 좋아합니다. 교회가 평안해지고,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비난하지 않고 칭송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예표의 사람인가요.
길조(吉鳥)와 흉조(凶鳥) - 까치와 까마귀
행운의 수와 불길한 수 길조와 흉조
7이라는 숫자를 보면 기분이 좋습니다. 행운의 숫자이니까요. 토끼풀이 만발한 들판에서는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무언가를 찾으려고 안달입니다. 네 잎 클로버를 발견하면 행운이 온다고 하니까요. 행운의 편지를 받으면 말이 행운이지 그리 기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편지 내용을 그대로 베껴 아무도 모르게 7명에게 몰래 행운을 전달합니다. 혹시라도 내 행운이 달아나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행운을 상징하는 여러 동물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이 새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찾아온다고 하죠. 매년 해가 바뀔 때면 이 새가 등장하는 노래를 부르고 새해를 축하하며 소망을 빕니다. '까치 까치설날은~'의 주인공 까치입니다.
길조라고
불리는 까치는 검은 색깔의 새이지만 흰색의 털이 있어 생김새가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반면 까치보다 덩치도 크고 울음소리도 기분
나쁜 새가 있습니다. 이 새가 울면 불길한 일이 생긴다고 꺼려합니다. 우리나라에서 흉조라고 알려진 새, 까마귀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까마귀의 울음소리를 떠올려보면 위협적이고 무섭게 느껴집니다.
길조인 까치와 흉조인 까마귀. 마치 무슨 공식처럼 외운 이 사실은 진짜일까요?
그리고 말귀를 못 알아듣거나 엉뚱한 짓을 하는 녀석을 보고 흔히 '새大가리'라고 놀립니다. 머리가 나쁜 사람한테도 마찬가지이고요. 친구들끼리 '조두(鳥頭)'라 부르면서 무시할 때도 있습니다. 정말 새들은 머리가 나쁠까요?
까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텃새입니다.
동네
어귀의 높은 나무나 전봇대에 둥지를 틀고 살아가는 까치는 시각과 후각이 뛰어나 주위의 냄새뿐만 아니라 사람의 냄새도 기억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낯선 사람이나 다른 짐승이 들어오면 낯선 냄새를 파악하고 경계의 표시로 울어대는 거라고 하는데요, 먼 옛날 마을을
찾아오는 낯선 손님이 있다면 대개는 친척이거나 명절날 타지에서 부모님을 찾아온 자녀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당연히 반가운
만남이었을 테고요.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라는 말은 여기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까치는
잡식성이라서 쥐와 같은 작은 동물은 물론이고 곤충이나 나무 열매, 감자 같은 채소도 가리지 않고 먹습니다. 이 때문에 봄이나
여름에는 나무에 사는 해로운 곤충을 잡아먹어서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새입니다만 마냥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워낙 가리지 않는 식성
때문에 딸기, 수박 같은 과실을 쪼아 먹고 비닐하우스에 큰 구멍을 뚫어놓거나 농작물을 상하게 만들어 농가에 피해를 주기도 합니다.
까치가
울면 반가워야 하는데 현실은 유해 조수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생태계의 균형이 깨지면서 까치의 천적인 맹금류가 줄어 까치의 수가
급격하게 늘어난 데다가 전봇대에 서식하며 배설물로 인해 정전 같은 사고를 일으키기 때문인데요, 한때는 길조로 사랑받았지만 지금은
오히려 포획 대상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흉조라며 멀리하는 까마귀는 우리나라처럼 부정적으로 여기는 나라들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나라도 있습니다.
중국에서도 까마귀를 보통 '불길한 새'로 여긴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까마귀를 붉은색으로 그리면 태양, 금색으로 그리면 효도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서양에서는 까마귀가 길조인데요, 옛날 뱃사람들이 항해를 나갈 때마다 까마귀를 새장에 넣어 데리고 다녔습니다. 배가 방향을 잃었을 때 까마귀를 날려 보내면 가장 가까운 육지 쪽으로 곧장 날아간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랍인들은 결정의 순간에 까마귀가 오른쪽으로 날면 행운이, 왼쪽으로 날면 불행이 온다고 여겼기에 까마귀를 '예언의 아버지'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일본에서는 까마귀가 이웃처럼 아주 친근한 새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렇듯 단순히 길조, 흉조를 떠나 전 세계적으로 까마귀에 대해 다양한 이미지가 존재합니다. 그만큼 까마귀는 다른 나라에서도 관심이 많다는 의미입니다.
조류 중에서 까마귀는 가장 똑똑한 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결과를 보여주는 연구 결과도 많다고 합니다.
까마귀는
부리로 나뭇가지를 주워 올립니다. 그러고는 나무 틈새에 넣어서 그 안에 있는 먹이를 꺼내 먹습니다. 사람이나 침팬지 같은
유인원만 도구를 쓰는 게 아니라 까마귀도 도구를 쓰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게다가 나뭇가지를 원하는 길이로 잘라서
사용할 줄도 안다고 하니 대단한 새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어떤 까마귀는 먹이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줬다고 합니다. 상자 안에 더 큰 먹이가 있는 것을 보고 그걸 위해 다른 먹이를 17시간이나 먹지 않고 참은 건데요,
도구를 쓰거나 이렇게 자신을 통제하는 능력은 침팬지 같은 유인원에게서만 있는 특성이라는 말을 무색하게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정도보다 새들이 훨씬 똑똑한 것 같습니다. 굉장히 둔해 보이는 까마귀도 보기와 다르게 뛰어난 인지능력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까마귀는
뇌의 무게만 보면 몸집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람보다 큰 뇌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텃새는 한 장소에서 많은 정보를 수집해야 하기에
뇌가 더 크다고 하는데요, 몸집은 작게 만들면서 천적에 맞서 생존할 수 있도록 환경에 따라 진화해온 결과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까마귀는 효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예로
중국에서는 까마귀를 반포조(反哺鳥)라고 불렀습니다. '까마귀의 효'라는 뜻인 반포지효(反哺之孝)는 까마귀 새끼가 자라서 늙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며 은혜를 갚는대서 유래한 사자성어입니다. 자식이 자란 후에 부모님의 은혜를 갚는 효성은 인간이 유사
이래로 늘 강조하는 덕목인데 까마귀는 가르치지 않아도 이미 몸소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길조라며
새 중에는 가장 사랑받은 새였던 까치는 지금은 오히려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고, 흉조라고 무시했던 까마귀는 뛰어난 인지능력에,
지극정성인 효가 있어 본받아야 할 새가 됐으니 세상에는 영원한 것은 없나 봅니다. 물론 인간의 편의에 따라 관점이 변한 결과이지만
말입니다.
아울러 머리 나쁜 친구에게 함부로 조두라고 놀리는 일도 까마귀한테 실례되는 행동이 아닐까 싶습니다. 까마귀 입장에선 꽤 기분 나쁠 것 같습니다.
까치로 시작해서 까마귀까지, 이렇게 이야기를 이어오다 보니까 기존에 알고 있던 이미지와는 꽤나 다릅니다. 이제는 어느 한 새를 가리켜 길조다 흉조다 말하는 것이 선입견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척량 줄을 그 손에 잡았기로. Then I looked up--and there before me was a man with a measuring line in his hand!
척량줄(a measuring line) 헤벨 믿다(חֶבֶל מִדָּה)
헤벨(2256)
[ chêbel ] חֵבֶל
1. 끈, 2. 측량선, 3. 유산
발음
[ chêbel ] 어원 / [여성으로는 단 한 번 사용됨, 습2:6], 어미활용 חַבְלִי, 복수חֲבָלִים, 복수 연계형 חֶבְלֵי, 시18:5,116:3, חַַבְלֵי수17:5, 225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지방(신 3:4,13, 수 19:29), 줄(수 2:15, 삼하 8:12, 미 2:5), 분깃(수 17:5,14),
기업(基業)(수 19:9), 무리(삼상 10:5,10), 땅(왕상4:13), 테두리(왕상 20:31, 32), 지경(대상 16:18,
시 105:11), 괴로움(욥 39:3), 노끈(욥 41:1, 겔 27:24), 슬픔(사 13:8), 고통(사 66:7, 렘13:21,
22:23), 어려움(호 13:13). [동] 멸하다(미 2:10), 택하다(신 32:9), 산고를 겪다(사 26:17). 구약 성경 / 7회 사용
미다(4060)
[ middâh ] מִדָּה
1. 확장, 2. 치수, 3. 옷
발음
[ middâh ] 관련 성경 / 크기(겔46:22), 자(대상23:29), 부분(느3:11,21, 3:30), 세금(느5:4),
분량(욥28:25), 옷깃(시133:2), 장대(사45:14), 측량줄(렘31:39),길이와 너비(겔40:22),
측량(슥2:1), 장단(출36:9), [형] 큰(렘22:14). [동] 측량하다(겔40:5,21, 42:15). 구약 성경 / 56회 사용
또...본즉 한 사람이 척량줄을 그 손에 잡았기로
- 본절에서 13절까지는 세 번째 환상이 기록되어 있다. 이 환상에 약속되고 있는 축복과 회복의 범위는 그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넘어서 메시야 시대에까지 확장된다. 두 번째 환상이 대적들의 파멸을 묘사하고 있는 반면, 이 환상은 그로 인한 예루살렘의 번영과 성장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 환상이 그 당대의 적들을 멸망시킴으로써 그 당시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말하고 있다면, 이 환상은 보다 먼 미래를 내다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환상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스가랴와 척량사, 그리고 해석하는 천사, 그리고 신분이 알려지지 않은 천사이다. 어떤 이들은 이 척량사를 '여호와의 사자'로 해석하기도 한다(Perowne). 그리고 '척량줄'은 예루살렘의 회복과 성전 재건, 더 나아가서는 메시야 시대를 준비하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선지자(先知者)는 먼저 아는 사람입니다. 선견자(先見者)는 먼저 보는 사람입니다. 예언자(豫言者)는 먼저 말씀을 듣는 사람입니다. 선지자와 선견자외 예언자를 히브리 단어로 "나비(nâbîyʼ. נָבִיא)" 라고 합니다. '나비'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고, 보고, 확증한 후에 그것을 증거하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발음
/ 나비[ nâbîyʼ ] 어원 / 아람어 관련 성경 / 선지자(창 20:7, 신 18:22, 왕상 18:4), 대언자(출 7:1), 예언자(렘 28:9), 예언(단 9:24), 예언하는 자(겔 13:2, 3). 구약 성경 / 315회 사용
스가랴서에는 여덟 가지 환상이 소개됩니다.
1장에서는 두 가지 환상이 소개되었습니다. 첫번째 환상은 온 땅을 둘러보는 세 종류의 말(1:7-17) 두번째 환상은 네 뿔과 네 명의 대장장이(하라쉬, 숙련공)(1:18-23)
2장에서는 세번째 환상은 척량줄을 잡은 사람(2:1-13) 세번째 환상은 척량줄을 잡은 사람이 나타나서 예루살렘 성의 복구와 왕성할 것을 보여줍니다.
세번째 환상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2:1-2. 척량줄 잡은 자의 계시로서 이는 예루살렘이 왕성할 것을 보여준다. 2:3-5. 예루살렘의 복구와 그의 안전과 명예에 대한 예견을 제시한다. 2:6-9. 아직 바벨론에 머물고
있던 유대인들을 훈계하여 그들을 재촉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을 서두르게 하려는 것이다. 2:10-12. 돌아온 자들에 게 위안을 주고 그들이 겪어야 할 많은 곤란들과 어려움들을 알려 준다. 2:13. 하나님을 규정하거나
그를 제한하지 않고, 인내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모두에게 영적 이스라엘 곧 복음을 믿는 자들이 각국에서 하나님 백성과
압류하여 천국 운동이 크게 전개될 것을 예언.
2:4. 이르되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예루살렘에 사람이 거하리니 그 가운데 사람과 육축이 많으므로 그것이 성곽 없는 촌락과 같으리라.
성곽없는 촌락(페라자)(perâzâh) 6519. פְּרָזָה
1. 광활한 평야, 2. 성곽없는 촌락, 3. 에 9:19
발음
/ 페라자[ perâzâh ] 어원 / 6518과 동형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고을(에 9:19, 겔 38:11), 촌락(슥 2:4). 구약 성경 / 3회 사용
2:5.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그 사면에서 불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서 영광이 되리라.
* 불 성곽(호마트 에쉬)
열왕기하 6:17. - 18절,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불(784) 에쉬(’êsh) אֵש
1. 불, 2. 하나님의 불, 3. 또한 ‘하나님의 진노’를 비유적으로 나타낼 때도 사용됨
발음
/ 에쉬[ ’êsh ] 관련 성경 / 불(창 22:6, 신 1:33), 불길(신 4:12), 화염(시 106:18, 사 4:5), 화, 노(시 78:21). [동] 타다(창 15:17, 레 6:10), 분향하다(레 16:13). 구약 성경 / 379회 사용
성곽(2346) 호마(chôwmâh) חוֹמָה
1. 벽, 2. 쌍수 חֹמֹתַיִם은 복수로부터 유래 ‘이중벽’
발음
/ 호마[ chôwmâh ] 관련 성경 / 벽(출 14:22, 29), 성벽(레 25:29, 왕하 14:13, 나 3:8), 담(삼상 25:16, 사 30:13,
겔 40:5), 성(삼하 11:21, 왕상 20:30, 욜 2:7), 성곽(느 2:8, 애 2:18, 겔 26:10), 성읍(대하 14:7),
외성(대하 32:5, 33:14), 궁전(애 2:7). 구약 성경 / 133회 사용
영광(3519) 카보드(kâbôwd) כָּבוֹד
1. 무거움, 2. 영광, 3. 삼상4:21
발음
[ kâbôwd ] 어원 / 351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재물(창 31:1), 영화(창 45:13, 삼상6:5, 시8:5), 영광(창49:6, 출33:18, 대하1:11,
에5:11), 존귀(잠15:33), 귀(貴)(대상29:12, 잠3:16), 존영(잠 11:16), 영예(잠 25:2, 29:23),
위력(사 8:7), 심령(시 108:1). 구약 성경 / 199회 사용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포로 중에 있는 유다 백성에 대한 구원을 계시하시며 선지자를 통하여 바벨론에 거하는 유다 백성에게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것을 촉구하셨습니다. 바벨론은 이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아 멸망당하고 유다 백성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맛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신 이유는 이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이 확장될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누구나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우리 자신이 구약적 의미에서 보면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이방인으로선 복음의 혜택을
누리고 있기에 다른 이방인들에게 주의 복음을 전함으로써 사도 바울과 같은 복음에 빚진 자가 되어야 한다. 복음을 받아야 할 대상이
있기에 우리의 영적 이스라엘인으로서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복음에 소외된 자들에게 복음으로 빚진
자이다.
척량 줄 ㅡ셋째 이상(스가랴 2:1)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척량 줄을 그 손에 잡았기로 네가 어디로 가느냐 물은즉 내게 대답하되 예루살렘을 척량하여 그 장광을 보고자 하노라 할 때에(2:1~2)
하나님께서
스가랴에게 준 셋째 이상은 예루살렘을 측량하는 자에 대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의 회복과 부흥케 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스가랴에게 임한 측량줄에 관한 이상과 같은 의미의 이상이 에스겔에게도 주어졌습니다(겔 40:1~3).
예루살렘의 회복으로 그 크기가 사람의 충만한 부흥과 가축의 증산으로 성 밖까지 확장이 되어 성곽 없는 촌락과 같을 것이라고 한다.(슥 2:4)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그 사면에서 불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서 영광이 되리라(슥 2:5)
성곽은
사람과 가축의 보호와 안전을 위한 구조물입니다. 부흥하여 성곽 없는 촌락과 같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불 성곽이
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시편 18편 2절에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고레스 조서로 돌아온 자들에게, 그리고 바벨론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남아있는 유대인들에게 돌아오기를 권면하며(슥
2:6~9) 위로와 소망을 주고 있다. 불 성곽이란 의미는 특별한 보호하심을 의미한다. 만약에 이스라엘이 온전히 순종했다면 그들에
대한 부흥은 성취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위에 세워진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지지 않은 스가랴의 이상이 실형 될 것이다.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슴에 품고 임마누엘의 피 묻은 깃발을 들고 날마다 그 살을 먹고, 피를 마시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최우선으로 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자에겐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과 함께 영과 혼과 몸이 흠 없이 보존되도록 성령이라는 불 성곽으로 보호해 주시면서 창조주 하나님께서 동행하여 주신다.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시 125:2)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를 하늘의 사방 바람 같이 흩어지게 하였거니와 이제 너희는 북방 땅에서 도망할지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슥 2:6)
이사야의
고레스 예언(사 44:28), 예레미야의 예언(렘 29:10)대로, BC 538년 고레스가 귀환 칙령을 내려 스룹바벨의 지도
아래 귀환하고 성전을 중축하도록(스 1:1) 했지만. 이 때 유대인들이 다 귀환하지 않고 사만 이천 삼백 육십 명만 귀환을
하였음으로 이를 일차 귀환이라고 한다.
이네
대하여 스가랴 2장 6절로부터 9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속히 귀향하라는 말씀을 주고 계신다. 그러나 그들은 듣지 않았기에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 시대에 하만의 계획에 의하여 엄청난 시련을 당하게 되었지만, 역사의 주관자이시고, 미래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에스더와 모르드개를 준비하심으로 한 번 더 기회를 허락하셨다.
이 감동적인 호소가 그같이 별 반응을 얻지 못한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도망하라는 이 호소에 유의하였더라면 모르드개와 에스더 시대에 당한 시련의 때에 유대인들의 상황이 얼마나 달라졌겠는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주님의 목적은 언제나 동일하시다. 그분은 인간 자녀들에게 부요함에 가득찬 영원한 유업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그분의
왕국은 영원한 왕국이다. 지극히 높으신 자의 순종하는 신하가 되기로 한 사람들이 마침내 영광의 왕국으로 인도 될 때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은 성취될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임하여 네 가운데 거할 것임이니라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 거하리라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 알리라(슥 2:10~11)
이 이상에 대하여 이스라엘이 실패 하였기에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회가 주어졌다.
호와께서 장차 유다를 취하여 거룩한 땅에서 자기 소유를 삼으시고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니 무릇 혈기 있는 자들이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성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 하라 하더라(슥 2:12~13)
내 안에 있는 자아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을 때에 창조주 하나님께서 재창조(회복)의 일을 하시려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 일어나신다.
말씀
묵상을 줄이며 척량 줄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짧게 논해 본다. 척량 줄(슥 2:1)과 비슷한 내용이 다림줄(암 7:7),
다림줄(슥 4:10), 먹줄(겔 9:3), 지팡이 같은 갈대(계 11:1), 등 이다. 잰 줄과 다림줄은 심판의 잣대이다.
북방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 시기에 활동했던 아모스 선지자의 아모스서를 보면 아모스 7장 7절에 "다림줄"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는데, 아모스 7장 8절에 보면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베풀고 다시는 용서치 아니하리라” 하신 것을 볼 때 다림줄은 심판의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율법과 말씀 이다.
잰
줄은 건축을 할 때에 수평을 유지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고, 다림줄은 건축 공사에 쓰이는 도구로 무게중심을 잡는 다림추를 달아
중력에 의하여 지구 중심을 향하게 하여 건물이 수직으로 견고히 설 수 있도록 해주는 도구이다. 잰 줄과 다림줄에 맞추지 않고
건물을 지으면 얼마 되지 않아 무너지고 만다.
성령이 거하는 하나님의 성전이 된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잰 줄과 다림줄로 어떤 지진, 폭풍과 한파에도 쓰러지지 않는 견고한 성령의 전으로 유지되도록 날마다 자신을 살펴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잰 줄은 하나님의 계명이요,
다림추는 십자가의 보혈의 구원으로,
다림줄은 예수 믿음이다.
계시록11장
1절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지금은
심판의 시기이다. 누가 마지막 날에 설 것인가를 알기 위하여 성전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는 일이 진행되고 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늘 깨어있고, 은밀한 기도로 거룩한 교제를 나누며, 성령께 순종함으로 헌신으로 충성하여,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엡 3:19)하여 영생을 담도록 내 안의 성전을 건축하자!
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스가랴서를 '예언서들의 진수'라고 예찬한바 있습니다.
그 이유는 스가랴의 예언 속에는 다른 여러 선지자들의 예언들이 집중적으로 반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의 격동기에 소명을 받았습니다. 유다가 바벨론에서 70년 동안이나 포로 생활을 하던 민족 수난의 현장에서 태어난 포로 1세 였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혈관에는 선민의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제사장인 할아버지 잇도와 또 아버지 베레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아버지가 일찍 죽임을 당한 일로 인하여 할아버지의 제사장직을 일찌기 승계하였습니다(슥 1:7). 그러므로 스가랴는 제사장인 동시에 선지자로서 일인이역(一人二役)의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는 유대인이 해방령을 받아 처음으로 돌아오는 스룹바벨과 여호수아 그룹에 속하였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 재건과,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는 민족사적 거사에 참예할 수 있었던 축복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스가랴에게 여덟가지 환상을 주셨습니다.
그 첫 번째가 홍마를 타고, 화석류 나무 사이에 서 있는 자의 환상이었습니다. 선민 중에 임재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성전 재건의 메세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두 번째는 네 뿔과 네 공장(工匠)들의 환상이었습니다. 선민을 들어 성전 재건을 방해하는 원수들을 물리치는 환상이었습니다.
오늘은 그 세 번째의 환상입니다. 그 환상 계시는 '척량줄을 잡은 한 사람'에 관한 것입니다.
첫째. 예루살렘을 척량하는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1.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2장 1절로 2절에 [내가 또 눈을 들어 본 즉 한 사람이 척량줄을 그 손에 잡았기로 네가 어디로 가느냐 물은 즉 내게 대답하되 예루살렘을 척량하여 그 장광(長廣)을 보고자 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본문을 다시 표현하면, [보라 한 사람을!] (and vehold, a man!) 하는 뜻입니다. 여기 나타난 '한 사람'이 누구인가?
1장 8절에 [홍마를 타고, 화석류 나무 사이에선] 그 사람입니다. 바로 사사기 중에 저 소라땅 마노아 부부에게 나타난 기묘자를 가리킵니다(삿 13:18).
겔 40:2-3에도 에스겔 선지자는 손에 삼줄과 척량하는 장대를 잡은 한 사람의 이상을 보았는데, 그 모양이 놋과 같이 빛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여기 한 사람(힌네 이쉬 = )은 황폐되어 버린 예루살렘을 재건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가 천사의 모습이나,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남은 하나의 영체인데, 이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계시 전달의 한
양태입니다. 실제로 그 분은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사람으로 도성인신하여 33년을 지구에 사셨습니다.
그가 '한 사람'으로 나타남은 강하고 능력 있는 유일의 존재자임을 알려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2. 척량줄을 잡은 한 사람으로 나타났습니다.
2장 1절에 [내가 또 눈을 들어 본 즉 한 사람이 척량줄을 그 손에 잡았기로....]라고 하였습니다.
'척량줄'(line of measurement)은 물건이나, 공간을 자로 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가 척량줄을 손에 잡았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그것은 그의 주권적 관할과 통치를 의미합니다. 그는 세계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동
시에 그 모든 것을 통치하고 관장할 수 있는 주인이심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는 그 척량줄을 가지고 동과 서를 나누고 남과 북을 구별시키는 자입니다. 그는 그 척량줄을 가지고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구별시키는 자입니다. 그는 그의 손에 있는 척량줄을 가지고 양과 염소를 나누고 있는 자입니다. 그는 그 척량줄을 가지고 성전
안에 있는 자와 성전 밖에 있는 자를 구별시키는 자입니다. 바로 그의 손에 있는 그 척량줄은 죄인들의 영혼을 통치하시는 십자가의
복음이요, 신구약 66권 성경인 것입니다.
3. 예루살렘의 장광(면적)을 척량하는 한 사람이었습니다.
2장 2절에 선지자는 그의 손에 척량줄을 잡은 사람에게 당신은 어디로 가십니까? 라고 질문하였습니다. 그 때 그분이 답하기를 [예루살렘을 척량하여 그 장광을 보고자 하노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뜻일까?
① 역사적으로 예루살렘 성전과 성의 재건을 알려 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위로요, 소망입니다.
② 구별시키는 경계선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즉 예루살렘(이스라엘)과 이방 지역을 구별시키는 경계의 표식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갈라놓고 구별시키는 생명의 척량줄이 됩니다(고전 1:18).
③ 예언적 의미로 주님의 교회 관할을 나타내는 뜻입니다.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서 주께로부터 받은 지팡이 같은 갈대를 받아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라고 하는 메세지를 받은 바 있습니다(계 11:1-2).
④ 영원한 새 예루살렘 곧 천국 통치의 내용을 알려 주는 말씀입니다.
계 21:15-17에는 그리스도께서 새 예루살렘을 척량하시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중대한 내용은 그 한 사람! 손에 척량줄을 잡은 그 한 사람이, 예루살렘의 면적을 재 보러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것은 예루살렘의 재건과 복구를 알려 주는 소망의 환상 계시임을 알려 줍니다.
둘째. 예루살렘의 번영을 약속하신 한 사람이었습니다(2:3-5).
스가랴 선지자는 손에 척량줄을 잡은 그 한 사람이 또 다른 천사를 시켜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에게 예루살렘의 번영을 알려 주라고 하는 사실을 보고 듣게 되었습니다.
2장 4절에 나오는 [그 소년]은 바로 스가랴 자신을 가리킵니다.
척량줄을 잡은 그 사람은 천사를 재촉하였습니다. 달려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소년에게 예루살렘의 번영을 속히 알려 주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영계는 살아 움직이고, 질서정연하고, 또 신속하고, 확실합니다.
스가랴는 자기에게 말하여 주는 천사도 보았고, 그 천사를 영접하는 또 다른 천사가 나타남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스가랴
선지자를 [그 소년]이라고 지목하고, 그 소년에게 빨리 달려오는 천사들의 기민한 동작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들이 갖고 온 메세지의 내용을 들었습니다. 그 내용을 한마디로 말하면, 장래 예루살렘의 번영입니다.
천사가 그 소년(선지자 스가랴)에게 갖고 온 예루살렘 번영의 메세지와 내용이 무엇인가?
1. 예루살렘은 성곽 없는 촌이 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2장 4절에 [...그것이 성곽 없는 촌락과 같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곽 없는 촌락'이란 '탁 트인 땅'을 뜻합니다. '평원의 부락' 혹은 '넓은 마을'을 의미합니다.
성벽이나, 문도 없고 벽도 없는 완전 개방의 마을을 의미합니다. 곧 완전 평화의 마을, 완전한 안전의 마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대적의 침략을 상상할 수 없는 곳입니다.
도대체 과연 이런 이상향의 마을이 지구촌에 존재할 수 있을까? 역사상에 존재할 지구촌의 예루살렘이 이런 이상향의 마을을 가져 볼 때가 언제 있었던가?
성경의 이러한 영감의 표현은 철두철미하게 영적이고, 메시야적 미래 왕국에 대한 예언입니다.
바벨론의 압제 아래서 예루살렘 해방을 받은 영적 자유를 알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방언들이 인종의 차별이나,
국경의 차별이 없이 함께 모여 예배 드릴 신약교회 운동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영원한 새하늘, 새땅의 메시야 왕국을
알려 주는 웅변적 예언입니다.
2. 그 가운데 사람과 육축이 거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2:4).
이는 예루살렘의 인구 증가를 예언한 것입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재건 이후에 누릴 번영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것은
신령한 메시야 왕국의 자손들의 번영, 곧 신약교회 시대의 왕성을 알려주는 예언입니다. 별 같이 빛나는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들의
번영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령한 예루살렘 곧 교회의 풍요와 번영과 축복을 알려 주는 소망의 메세지입니다.
3. 하나님 자신이 불성곽이 되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2장 5절에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그 사면에 불 성곽이 되며...]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불성곽'이란 불의 보호나 파수를 뜻함인데 하나님 자신의 초자연적 역사를 뜻합니다.
예컨대 출애굽하여 가나안 행군을 계속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애굽 왕 바로가 변심하여 추격하여 온 일이 있습니다. 그 때 갑자기
하늘에서 구름기둥이 나타나고 불기둥이 나타나서 저들의 행진을 인도하여 추격하던 애굽군대와 이스라엘 백성 사이를 갈라놓은 일이
있었습니다. 애굽 군대와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갈라놓았습니다(출 13:21, 14:20).
또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엘리사가 거하던 도단성을 아람의 군대가 포위했을 때 하나님께서 불 말과 불병거로 엘리사를 둘러
진치고 보호한 일이 있었습니다(왕하 6:17). 이런 일들은 모두 하나님 자신이 선민을 위기에서 구원하고 보호해 주는 초자연적
역사입니다.
슥 9:8에는 [내가 내 집을 둘러 진을 쳐서 적군을 막아 거기 왕래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 포학한 자가 다시는 그 지경으로
지나지 못하리니, 이는 내 눈으로 친히 봄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경우 불성곽은 하나님의 전지와 전능의 보호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일종의 불이요, 불성곽입니다.
사 26:1에 [그 날에 유다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으로 성과 곽을 삼으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경우 하나님의 극적인 전능의 구원이 바로 불성곽이 되는 것입니다.
4. 그 가운데 영광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2장 5절이 다시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그 사면에 불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서 영광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불성곽이 되신다 함은 외부의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 주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영광'이
되신다 함은 그 예루살렘에 거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친히 육적으로 임마누엘이 되어 주신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이 친히
이스라엘에게 은혜와 축복이 되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신약적 의미로 예언성을 띠고 움직일 때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께서 우리에게 화육강세하시므로 생명의 불성곽이되시고, 세상에 빛이 되어 주신다는 뜻입니다(요 1:1-4).
바로 임마누엘의 영광입니다(마 1:21).
나폴레옹 군대가 러시아를 정복하러 적국을 통과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이때 아들들과 함께 살고 있던 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과부는 나폴레옹 군대의 횡포를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하였습니다.
"오 하나님이시여! 우리 집 주위에 성벽을 쌓으셔서 우리들을 지켜 주옵소서. 아무도 우리 모자를 해치지 못하게 지켜 주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날 밤 잠자리에서 아이들 중 막내가 형에게 물었습니다.
"형 아까 엄마가 가정예배 때 우리 주위에 성벽을 쌓아 달라고 기도했는데, 그 성벽이 뭐야?" 그 형은 "글쎄, 그건 나도 모르겠는데....."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날밤 그 과부 성도의 아이들은 어머니가 기도 드린 성벽에 대해서 궁금해하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 제일 어린
막내가, "형! 저기 좀 봐! 하나님이 성벽을 쌓아 놓으셨어!"라고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온 가족이 놀라서 창 밖을 내다보니,
밤새도록 눈보라가 쳐서 집 주위를 온통 눈으로 덮었습니다. 집이 어디에 있는지 조차 구별할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은 온 마을을 눈
성벽으로 쌓아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 군대들의 횡포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불성곽도 있고, 눈의 성곽도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시간 척량줄을 잡은 한 사람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척량줄 안에 들어 있는 예루살렘을 보았습니다. 척량줄 안에 있는 예루살렘은 번영의 축복이 있다고 하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스가랴를 통하여 받았습니다.
바로 오늘에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스러운 교회운동의 승리를 보여주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높이를 척량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리킵니다. 그것은 바로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넓이를 척량하십니다. 그것은 사람과의 관계인데 사랑입니다. 그것이 세계 선교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깊이를 척량하십니다. 그 깊이란 교회를 향한 충성과 봉사, 헌신의 농도를 가리킵니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인격을 달고 계시는 저울도 되십니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단 5:25)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척량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척량 안에 들어 있는 개인, 가정, 교회 나라는 반드시 번영하고 말 것입니다.
심판과 구원의 그리스도
① (1절~2절)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척량 줄을 그 손에 잡았기로 네가 어디로 가느냐 물은즉 내게 대답하여 예루살렘을 척량하여 그 장광을 보고자 하노라 할 때에”
▶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첫째 환상(홍마를 탄 사람)과 둘째 환상(네 뿔VS네 공장)에 이어스가랴는 다시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본다. 하루 밤 사이에 연속해서 보여주신 이유는 ‘반드시 속히 이루실 것’을 뜻한다. (창41:32)
‘바로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속히 행하시리니’ (암3:7)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시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리라’
▶ ‘한 사람이 척량 줄을 그 손에 잡았기로’ 척량 줄은 건축을 위한 측량도구인데, ‘다림줄 (암7:7~9)’이다. 심판과
구원의 도구다. ‘한 사람’은 히브리 원어로 ‘힌네 이쉬’라고 쓰였는데 ‘보라! 한 사람을’이란 뜻이다. 피조물인 ‘아담’이
아니라 ‘인자(人子)’를 가리키는 ‘이쉬(成肉身, incarnation)’라는 단어로 쓰였다. ‘인자(人子)’는 심판과 구원을
위임받으신 메시아(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기독교는 그리스도교다.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아)’로 고백하는 종교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온 세상과 우리의 인생을 구원하심을 믿는 것이다. 계시록5장에 나오는 보좌에 앉으신 분으로부터
위임받으신 ‘어린 양’과 같은 분이시다. 한마디로 지금 스가랴는 눈을 들어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절망 중에 삶의
주관자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스가랴의 질문에 대한 인자의 답변이다. ‘예루살렘을 척량하여 그 장광을 보고자
하노라’ 예루살렘성전을 재건하기 위해 길이와 너비를 재기 위함이다. (겔40:1~3, 계21:15~17)
② (3절~4절)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나가매 다른 천사가 나와서 그를 맞으며 이르되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예루살렘에 사람이 거하리니 그 가운데 사람과 육축이 많으므로 그것이 성곽 없는 촌락과 같으리라”
▶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다른 천사가 나와서 ‘내게 말하는 천사’를 맞으며 ‘그 소년(예언자
스가랴)’에게 다급하게 기쁜 소식을 전달할 것을 재촉한다. 그 내용은 ‘예루살렘에 사람과 육축이 많으므로’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회복시키시고 다시 번성하게 하실 것이라는 복음(福音, Gospel)이다. ‘성곽 없는 촌락과 같으리라’ 예루살렘의 영광이
무제한으로 확장될 것을 가리키는 비유적인 표현이다. 말씀을 준행함으로 성전을 재건하면 그 영광이 민족과 지역을 넘어 열방과 세계로
퍼져나갈 것을 예고한다. (창12: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 말씀대로 준행하는 아브라함으로 인해 축복의 본보기가 될 것을 선포한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땅와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③ (5절)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그 사면에서 불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 영광이 되리라”
▶ ‘내가 그 사면에서 불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 영광이 되리라’ 이스라엘백성이 광야를 행진할 때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해주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지켜주셨다. 아람군대에 의해 성이 둘러싸였을 때 엘리사의 사환에게 보여주셨던 불 말과 불 병거의
형상과도 같다. (왕하6:15~17) ‘하나님의 사람의 수종 드는 자가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을
에워쌌는지라 그 사환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 말과 불 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2. 디아스포라(Diaspora)와 에클레시아(ecclesia)
① (6절~7절)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를 하늘의 사방 바람 같이 흩어지게 하였거니와 이제 너희는 북방 땅에서 도망할찌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바벨론 성에 거하는 시온아 이제 너는 피할찌니라”
▶ 죄악으로 인해 이스라엘을 ‘흩어지게(디아스포라)’ 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불러내서 다시 모으실 것(에클레시아)을 선포한다.
바벨론의 포로가 되게 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바벨론으로부터 해방시키신다. 타락한 예루살렘성전을 무너뜨리신 하나님께서 이제 거룩한 새
예루살렘성전을 세우시겠다는 것이다. (계3:7)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이’ 삶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께서는 흥하게도 하시고 망하게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신다.
② (8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를 노략한 열국으로 영광을 위하여 나를 보내셨나니 무릇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
▶ ‘나를 보내셨나니’ 보내심을 받은 ‘스가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사람을 보내서 일하신다. (민16:28) ‘모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사 이
모든 일을 행하게 하신 것이오 나의 임의로 함이 아닌 줄을 이 일로 말미암아 알리라’ 고라와 족장 이백오십인이 모세와 아론을
거스릴 때 ‘너희가 너무 분수에 지나치느니라’ 책망하시며 징계하셨다. 나를(메신저) 멸시하는 것은 나를(메신저) 보내신 자를
멸시하는 것이다. (눅10:16)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 보내심을 받은 자의 권위는 보내신 분의 뜻을 그대로 전달하는 데 있다. 예언자는 ‘임의대로’ 행하면 안 된다.
또한 보내심을 받은 자가 보내신 분의 ‘뜻대로’ 전하는 메시지는 보내신 분의 말씀으로 청종해야 마땅하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는
보내신 분의 뜻대로 전달하지 않는 메신저와 보내신 분의 뜻대로 전달하는 메신저조차 멸시하는 우매한 청중들이 공존한다는 점이다.
‘무릇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 이 말씀을 하신 까닭은 이런 일이 서슴없이 공공연하게 벌어졌기 때문이다.
(눅11:49) ‘선지자와 사도들을 저희에게 보내리니 그중에 더러는 죽이고 또 핍박하리라’
③ (9절) “내가 손을 그들 위에 움직인즉 그들이 자기를 섬기던 자에게 노략거리가 되리라 하셨나니 너희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리라”
▶ ‘내가 손을 그들 위에 움직인즉’ 하나님의 손은 하나님의 손가락 곧 하나님의 권능이다. ‘그들이 자기를 섬기던 자에게
노략거리가 되리라’ 하나님의 역사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기고,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는 ‘인생역전’을 통해 나타난다.
‘너희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리라’ 스가랴의 예언은 자신의 말이 아니라 천사가 전해준 말이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말씀이다. 기적은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는 사건이다. 기적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기적을 통해 언약을
성취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참된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의 구별법은 ‘그 열매’로 나무를 안다. 열매는 삶의 결과물과
언약의 성취여부에 달려있다. (요6:28)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요11:44~45)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라’
3. 구원의 대망, 임마누엘!
① (10절)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임하여 네 가운데 거할 것임이니라”
▶ 신앙생활에서 누리는 최고의 축복과 구원의 최고 경지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와 동행하는 삶이다. ‘The
best of all is God is with us – John Wesley’ (사41: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두려워하고 놀라는 이유는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푸른 초장과 맑은 시냇물
가에서만 함께 하시지 않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도 ‘여전히’ 함께 하신다. 형통할 때만이 아니라 환란 중에도 함께
하신다. 성공 할 때만이 아니라 실패할 때도 함께 하신다. 상황 따라 형편 따라가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
믿음을 가리켜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라고 부른다. 이 믿음이 없으면 때때로 두려워하고 낙심하지만 이 믿음이 있으면 환란
중에도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② (11절~12절)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 거하리라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 알리라 여호와께서 장차 유다를 취하여 거룩한 땅에서 자기 소유를 삼으시고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니”
▶ ‘그 날에’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되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날이다. 유다를 취하여 자기 소유를 삼으시고 다시
예루살렘을 선택하신 이유는, ‘경외하면 청종하고 준행할 때 동행하신다!’것을 나타내시어 열방의 본보기가 되게 하시기 위함이다.
성전재건의 사명은 ‘경외와 청종, 준행과 동행’을 나타내는 표적이다. 우리를 선택하시고 사명을 맡기신 이유도 동일하다. ‘경외하면
청종하고 준행할 때 동행하신다!’는 축복의 본보기를 삼으시기 위함이다.
③ (12절) “무릇 혈기 있는 자들이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성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 하라 하더라”
▶ (메시지성경) ‘모두들, 조용히 하여라! 쉿! 하나님 앞에서 침묵하여라. 그분의 거룩한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분이 움직이고 계신다!’ 하나님이 성소에서 일어나셔서 역사하실 때 우리는 잠잠해야 한다. (출14:13~14)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격언은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삶에서 만나는 위기와 절망의 순간에 요동치며 소란스런 이유는 하나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사람은 '내 주여 뜻대로 행 하시옵소서,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며 담대하게 기도한다.
성전에 대해 설명해 주어라(에스겔 43:10)
주요 내용 : 에스겔이 본 영광스러운 성전 환상의 의미
에스겔이 환상에서
본 성전은 여러 세기 후에 사도 바울이 설명한 거대한 영적 성전과 동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앞 장에서 그 점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또한 에스겔이 본 환상은 순결한 숭배에 대한 하느님의 표준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그분의 백성에게 가르치기 위한
것이라는 점도 배웠습니다. 그들은 그 표준을 따를 때에만 그분과 다시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다음과 같은 표현을 하나의 구절에서 두 번 사용하심으로 자신의 표준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이것이 성전의 법이다.”
2
이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질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에스겔 시대의 유대인들은 이 성전 환상에서 순결한 숭배에 대한
여호와의 표준에 관해 어떤 구체적인 교훈을 배울 수 있었습니까? 둘째, 이 환상은 고난이 많은 마지막 날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먼저 첫 번째 질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면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아는 데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과거에 유대인들은 이 환상에서 어떤 교훈을 배웠는가
3. 환상에서 성전이 높은 산 위에 있다는 점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왜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입니까?
3 첫 번째 질문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이 성전 환상에 나오는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점들을 고려해 보겠습니다. 높은 산. 이스라엘 백성은 에스겔의 환상에 나오는 성전이 높은 곳에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사야의 감동적인 회복 예언을 떠올렸을지 모릅니다. (이사야 2:2)
그러면 여호와의 집이 그처럼 높은 산 위에 있다는 점은 그들에게 어떤 교훈을 주었습니까? 순결한 숭배가 다른 어떤 것보다
드높여져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물론, 순결한 숭배를 위한 마련을 하신 분이 “그 어떤 신보다 훨씬 더 높으신 분”이므로 그 숭배는
원래 드높여져 있습니다. (시 97:9)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그러한 숭배와 관련하여 자신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세기 동안 그들은 거듭거듭
순결한 숭배가 소홀히 여겨지고 더럽혀지게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마음이 올바른 사람들은 하느님의 신성한 집이 마땅히 있어야 할
영광스럽고 탁월한 위치로 드높여진 것을 보면서, 자기들의 잘못에 대해 분명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4, 5. 에스겔 시대의 사람들은 높이 솟은 문들을 통해 어떤 교훈을 얻었을 것입니까?
4높이 솟은 문들. 환상의 앞부분에서 에스겔은 천사가 문들의 치수를 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문들의 높이는 약 30미터나 되었습니다! (에스겔 40:14)
그 입구 안쪽에는 경비실이 있었습니다. 성전의 설계도를 자세히 살펴보는 사람들은 그러한 점들을 통해 무엇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까? 여호와께서는 에스겔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전의 입구[에] 면밀히 주의를 기울여라.” 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숭배를 위한 하느님의 신성한 집에 “마음과 몸에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분의 성전이 더럽혀졌습니다.’—에스겔 44:5, 7.
5 “몸에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은 아브라함 시대부터 주어진 하느님의 분명한 명령을 따르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창세 17:9, 10; 레위 12:1-3)
하지만 ‘마음에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은 더 심각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지시와 인도를 따르지 않는
고집 세고 반역적인 태도를 나타냈습니다. 숭배를 위한 여호와의 신성한 집에 그러한 사람들이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위선을 매우 싫어하시는데도 그분의 백성은 그분의 집을 위선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환상에 나오는 성전의 문들과 경비실들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분명했습니다. 더 이상 성전을 그처럼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하느님의 집에 들어오는 사람들에
대한 높은 표준은 반드시 지켜져야 했습니다. 그럴 때에만 여호와께서 자신의 백성이 드리는 숭배를 축복하실 것이었습니다.
6, 7. (ㄱ) 여호와께서는 성전 지역 전체를 둘러싼 담을 통해 백성에게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십니까? (ㄴ) 여호와의 백성은 이전에 그분의 집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각주 참조)
6둘레에 있는 담. 환상에 나온 성전에서 주목할 만한 또 다른 특징은 성전 지역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담이었습니다. 에스겔의 말에 따르면, 사면에 있는 담의 길이는 각각 500갈대 즉 1555미터나 되었습니다! (에스겔 42:15-20) 반면에 뜰을 포함한 성전 건물은 사면의 길이가 각각 500큐빗 즉 259미터에 불과했습니다. 따라서 성전은 넓은 땅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그 둘레에 이 담이 있었습니다.a 이 담의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7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들은 자기들의 영적인 매춘 행위와 그 왕들의 시체를 내게서 멀리 치워 버려야 할 것이다. 그러면 내가 그들 가운데서 영원히 살 것이다.” (에스겔 43:9)
“그 왕들의 시체”는 우상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에스겔의 환상에서 성전이 넓은 땅으로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보여 주신 것은 사실상 이렇게 말씀하신 것과 같았습니다. “그 더러운 것을 모두 멀리 치워 버려라. 조금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여라.” 그렇게 해서 백성이 계속 순결한 숭배를 드린다면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축복하시어 그들과 함께하실 것이었습니다.
8, 9. 책임 맡은 남자들에게 베풀어진 여호와의 강한 충고는 무엇을 보여 주었습니까?
8책임 맡은 남자들에 대한 강한 충고.
여호와께서는 백성 가운데서 큰 책임을 맡고 있던 남자들에게 강력하면서도 사랑에 찬 충고를 베푸셨습니다. 그분은 백성이 우상
숭배에 빠졌을 때에 자신에게서 멀리 떠난 레위 사람들은 강하게 시정하셨지만, ‘그분의 신성한 곳을 돌보는 책임을 수행한’ 사독의
자손들은 칭찬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 두 부류의 사람들을 그들의 행위에 따라 공정하고 자비롭게 대하셨습니다. (에스겔 44:10, 12-16) 또한 그분은 이스라엘의 수장들도 강력하게 시정하셨습니다.—에스겔 45:9.
9
그렇게 하심으로, 여호와께서는 감독하는 위치에 있는 권위를 가진 남자들이 자신들의 책임을 수행하는 방식에 대해 그분에게 답변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그들은 충고와 시정과 징계가 필요 없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충고를 기꺼이
받아들임으로 그분의 표준을 앞장서서 옹호해야 했습니다!
10, 11. 유배 생활에서 돌아온 사람들 중 일부가 에스겔의 환상에 담겨 있는 교훈을 적용했다는 어떤 증거가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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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 생활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에스겔의 환상에 담겨 있는 교훈을 적용했습니까? 물론, 우리는 그 당시 충실한 사람들이 이 놀라운
환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유배 생활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무슨 일을 했고
여호와께 드리는 순결한 숭배에 관해 어떤 견해를 갖게 되었는지에 대해 많은 점을 알려 줍니다. 그런 점들을 통해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그들이 에스겔의 환상에서 배울 수 있는 원칙들을 어느 정도 적용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바빌론으로 유배되기 전에 살았던
그들의 반역적인 조상들과 비교해 볼 때 그렇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1 예언자들인 학개와 스가랴, 제사장이자 필사자인 에스라, 총독 느헤미야와 같은 충실한 남자들 모두는 에스겔의 성전 환상에 담겨 있는 것과 같은 원칙들을 백성에게 가르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에스라 5:1, 2) 그들은 순결한 숭배가 드높여져야 하고, 물질적이고 이기적인 관심사를 추구하는 것보다 그 숭배가 앞자리에 와야 한다는 점을 백성에게 가르쳤습니다. (학개 1:3, 4) 또한 순결한 숭배에 대한 표준을 따라야 한다고 강력하게 권고했습니다. 예를 들어,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백성을 영적으로 약해지게 만들고 있던 외국인 아내들을 내보내라고 강하게 충고했습니다. (에스라 10:10, 11낭독.느헤미야 13:23-27, 30)
우상 숭배는 어떠합니까? 이스라엘 민족은 과거에 우상 숭배에 자주 빠졌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유배 기간 후에 마침내 우상 숭배를
미워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러면 제사장들과 수장들 곧 방백들은 어떠합니까? 에스겔의 환상과 일치하게, 그들도 여호와의 충고와
시정을 받았습니다. (느헤미야 13:22, 28) 그들 중 많은 사람이 겸손하게 그 충고에 따라 행동했습니다.—에스라 10:7-9, 12-14; 느헤미야 9:1-3, 38.
느헤미야는 백성과 함께 일하면서 순결한 숭배에 대해 가르쳤습니다 (11항 참조)
12. 여호와께서는 유배자들이 돌아온 후에 그들을 어떻게 축복하셨습니까?
12 여호와께서는 그러한 자신의 백성을 축복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오랫동안 누리지 못했던 영적 번영과 건강과 질서를 어느 정도 누리게 되었습니다. (에스라 6:19-22; 느헤미야 8:9-12; 12:27-30, 43)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백성이 마침내 순결한 숭배에 대한 여호와의 의로운 표준을 따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올바른 마음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성전 환상에 들어 있는 교훈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제까지 살펴본 내용을 요약해 보자면, 에스겔의 성전 환상은
유배자들에게 두 가지 중요한 면으로 유익을 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 그 환상은 순결한 숭배의 표준에 관해 그리고 그들이
그 표준을 어떻게 옹호해야 하는지에 관해 실용적인 교훈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2) 그 환상은 앞으로 있을 일들을 보증해
주었습니다. 그 환상은 순결한 숭배가 회복될 것이며, 더 나아가 백성이 순결한 숭배를 드릴 때 여호와께서 그들을 축복하실 것임을
예언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다음 질문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그 환상은 오늘날에도 성취되고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는 에스겔의 환상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13, 14. (ㄱ) 에스겔의 성전 환상이 우리 시대에 성취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ㄴ) 그 환상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두 가지 면으로 유익을 줍니까? (또한 13가 “서로 다른 부면에 초점을 맞춘 두 성전” 제하의 내용 참조)
13
에스겔의 성전 환상이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된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에스겔의 환상과 이사야의 예언 사이에
유사점이 있다는 것을 떠올려 보십시오. 에스겔의 환상에서는 하느님의 신성한 집이 “아주 높은 산” 위에 있었으며, 이사야의
예언에서는 “여호와의 집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보다 높이 굳게 서”게 될 것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이사야는 자신의 예언이
“말일” 즉 “마지막 날”에 성취될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말했습니다. (에스겔 40:2; 이사야 2:2-4; 각주. 또한 미가 4:1-4
참조) 따라서 에스겔의 예언도 이사야의 예언과 마찬가지로 마지막 날에 적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예언들은 순결한
숭배가 마치 높은 산 위에 놓이는 것처럼 드높여지고 회복되기 시작한 때인 1919년 이후로 성취되어 왔습니다.b
14
따라서 분명, 에스겔의 환상은 오늘날 순결한 숭배에 적용됩니다. 그 환상은 고대 유대인 유배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에게도 두 가지 면으로 유익을 줍니다. (1) 그 환상은 순결한 숭배에 대한 여호와의 표준을 우리가 어떻게 옹호할 수
있는지에 관해 실용적인 교훈을 가르쳐 줍니다. (2) 그 환상은 순결한 숭배가 온전히 회복될 것이며 여호와께서 축복을 가져오실
것임을 보증해 줍니다.
오늘날 순결한 숭배에 대한 표준
15. 에스겔의 성전 환상에서 교훈점을 찾으려 할 때 무엇을 기억해야 합니까?
15
이제 에스겔의 환상의 몇 가지 구체적인 특징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에스겔과 함께 환상에 나오는 웅장한 성전을 둘러보고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 눈앞에 있는 것이 거대한 영적 성전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영적 성전에서
숭배를 드리고 있으므로, 우리의 숭배에 적용되는 교훈점을 에스겔의 환상을 통해 찾아 보겠습니다. 이 성전에서 어떤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까?
16. 에스겔의 환상에 나오는 자세한 치수들을 통해 어떤 점들을 배울 수 있습니까? (제목 위에 있는 삽화 참조)
16성전의 자세한 치수들. 에스겔이 보니, 구리 같은 모습을 한 천사가 담과 문, 경비실, 뜰, 제단을 포함해 성전 곳곳을 세세하게 측량합니다. 이 내용을 읽다 보면 자세한 치수들이 계속 나오기 때문에, 읽어 나가기가 힘들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에스겔 40:1–42:20; 43:13, 14)
하지만 그러한 세부점들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중요한 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표준의 중요성을 인상적인
방법으로 강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표준을 정하시는 분은 여호와이시지, 사람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어떤 방법으로
숭배하든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여호와께서는 성전을 세세하게
측량하는 모습을 보여 주심으로 순결한 숭배가 반드시 회복될 것임을 확신시켜 주고 계십니다. 환상에서 언급된 치수가 분명하고
구체적이었던 것처럼, 하느님의 약속도 정확히 성취될 것입니다. 따라서 에스겔의 기록은 마지막 날에 순결한 숭배가 반드시 회복될
것이라는 확실한 보증이 됩니다!
성전의 분명하고 구체적인 치수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16항 참조)
17. 성전 지역 둘레에 있는 담을 통해 오늘날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까?
17둘레에 있는 담.
앞서 살펴본 것처럼, 에스겔은 환상에서 성전 지역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담을 보았습니다. 이 담은 하느님의 집이 더럽혀지는 일이
없도록 그분의 백성이 모든 종교적 불결함을 순결한 숭배에서 멀리 치워 버려야 한다는 강력한 교훈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에스겔 43:7-9낭독)
오늘날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교훈이 아닙니까! 하느님의 백성이 큰 바빌론의 오랜 영적 포로 상태에서 해방된 뒤, 그리스도께서는
1919년에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을 임명하셨습니다. 특히 그때 이후로 하느님의 백성은 우상 숭배나 이교 신앙과 관련된 거짓 교리와
관습을 없애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우리는 순결한 숭배가 더럽혀지지 않도록 영적 불결함을 멀리 치워 버리기 위해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왕국회관에서 상업 활동을 하지 않으므로, 세속적인 활동을 우리의 숭배와 분리시킵니다.—마가 11:15, 16.
18, 19. (ㄱ) 환상에 나오는 성전의 높은 문들을 통해 어떤 교훈들을 배울 수 있습니까? (ㄴ) 사람들이 여호와의 높은 표준을 낮추려 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를 들어 설명해 보십시오.
18높이 솟은 문들.
에스겔이 보았던 높은 문들에 대해 생각해 보면 어떤 교훈들을 얻게 됩니까? 그 문들은 여호와께서 매우 높은 도덕 표준을 갖고
계시다는 점을 유대인 유배자들에게 일깨워 주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여호와의 거대한 영적 성전에서
그분을 숭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위선이 없는 올바른 행실을 유지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훨씬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로마 12:9; 베드로 전서 1:14, 15) 이 마지막 날에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점진적으로 인도하여 도덕적 행실에 대한 자신의 표준을 그들이 더 밀접히 따르게 해 오셨습니다.c 예를 들어, 여호와의 백성은 그분의 표준에 따라, 회개하지 않는 범죄자를 회중에서 추방합니다. (고린도 전서 5:11-13)
높이 솟은 문들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만한 또 다른 점은 문 안쪽 통로에 경비실이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점을 통해
여호와의 승인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영적 성전에 들어와 그분을 숭배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중생활을 하는 사람은 왕국회관에 들어올 수 있을지는 몰라도, 여호와께서 요구하시는 대로 생활을 바로잡지 않는 한 그분의
승인을 얻을 수 없으며 따라서 영적 성전에서 숭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야고보 4:8) 그렇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 부도덕하고 타락한 시대에 순결한 숭배가 더럽혀지지 않도록 보호하고 계십니다!
19 성경은 끝이 오기 전에 이 세상이 타락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성경은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사람들이 더욱더 악해져서, 잘못 인도하기도 하고 잘못 인도되기도 할 것”이라고 알려 줍니다. (디모데 후서 3:13)
오늘날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잘못 인도되어, 여호와의 높은 표준이 지나치게 엄격하고 시대에 뒤떨어지고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어떠합니까? 예를 들어, 누군가가 동성애에 대한 하느님의 표준이 잘못되었다고 당신을 설득하려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그의 견해가 옳다고 생각할 것입니까, 아니면 여호와의 견해가 옳다고 생각할 것입니까? 여호와께서는 그러한 행동이
“음탕한 일”이라고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또한 부도덕한 행동을 좋게 여겨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십니다. (로마 1:24-27, 32)
그러한 문제들에 직면할 때, 에스겔의 성전 환상에 나오는 높이 솟은 문들을 떠올리십시오. 그리고 이 악한 세상의 압력이 아무리
거세다 해도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의로운 표준을 결코 낮추지 않으신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견해를
따르며, 옳은 것에 대한 그분의 표준을 옹호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순결한 숭배에 참여할 때 “찬양의 희생”을 바칩니다
20. “큰 무리”에 속한 사람들은 에스겔의 환상에서 격려가 되는 어떤 점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20뜰.
에스겔은 성전의 매우 넓은 바깥뜰을 보았을 때, 여호와를 숭배하는 행복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그곳에 모일 수 있을지를 생각하며
큰 기쁨을 느꼈을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그보다 훨씬 더 신성한 곳에서 여호와를 숭배합니다. 여호와의 영적 성전의
바깥뜰에서 숭배를 드리는 “큰 무리”에 속한 사람들은 에스겔의 환상에서 격려가 되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계시록 7:9, 10, 14, 15) 에스겔은 바깥뜰 가장자리에 식당들이 늘어서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식당들은 숭배자들이 자신들이 가져온 친교 희생 제물을 먹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에스겔 40:17)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여호와 하느님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친구로서 그분과 평화로운 관계를
누린다는 표시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유대인들이 모세 율법 아래서 바쳤던 것과 같은 희생 제물을 바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순결한 숭배에 참여할 때 “찬양의 희생”을 바칩니다. 그러한 희생 가운데는 야외 봉사에서 사람들에게 증거하거나 집회에서 해설이나
그 밖의 방법으로 우리의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히브리 13:15) 또한 우리는 여호와께서 주시는 영적 양식을 즐기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다음과 같이 노래한 고라의 자손들처럼 느끼고 있습니다. “당신의 뜰에서 보내는 하루가 다른 곳에서 지내는 천 날보다 낫습니다!”—시 84:10.
21. 에스겔의 환상에서 제사장과 관련된 내용을 통해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까?
21제사장.
에스겔이 보니, 제사장과 레위인이 안뜰로 들어갈 때 사용하는 문과 제사장 지파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바깥뜰로 들어갈 때 사용하는
문이 모양과 크기가 같았습니다. 이것은 제사장들에게 그들 역시 순결한 숭배에 대한 여호와의 표준에 달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일깨워 주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누가 이 점을 통해 특히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오늘날 하느님의 종들 가운데 혈통에 따라
제사장으로 일하는 사람은 없지만, 성경은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선택된 민족이고, 왕 겸 제사장”이라고 알려 줍니다. (베드로 전서 2:9) 고대 이스라엘의 성전에서 제사장들은 별도의 뜰에서 숭배를 드렸습니다. 오늘날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동료 숭배자들과 따로 분리되어 숭배를 드리는 것은 아니지만, 여호와의 입양된 자녀로서 그분과 특별한 관계를 누립니다. (갈라디아 4:4-6)
기름부음받은 자들은 에스겔의 환상에서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는 교훈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고대 제사장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도 충고와 징계를 받을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우리가 “한 목자” 아래 섬기는 “한
무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요한복음 10:16낭독.
22, 23. (ㄱ) 에스겔의 환상에서 수장과 관련된 내용을 통해 그리스도인 장로들은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까? (ㄴ)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까?
22수장.
에스겔의 환상에서 수장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제사장 지파에 속해 있지 않으며, 성전에서 제사장들의
지시에 따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백성 가운데서 감독자로 일하면서, 희생 제물을 바치는 일에서 백성을 지원합니다. (에스겔 44:2, 3; 45:16, 17; 46:2) 따라서 수장은 오늘날 회중에서 책임을 맡은 그리스도인 남자들이 따라야 할 본이 됩니다. 여행하는 감독자를 비롯한 그리스도인 장로는 기름부음받은 충실한 종에게 계속 복종해야 합니다. (히브리 13:17) 장로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그리스도인 집회와 야외 봉사에서 찬양의 희생을 바치도록 돕기 위해 열심히 노력합니다. (에베소 4:11, 12) 또한 장로들은 이스라엘의 수장들이 권한을 남용했을 때 여호와께서 그들을 질책하셨다는 점에 유의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 45:9) 따라서 장로들은 자신들이 충고와 시정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더 나은 목자와 감독자가 되도록 여호와께 정련받을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소중히 여깁니다.—베드로 전서 5:1-3낭독.
23 여호와께서는 미래에 낙원이 된 땅에서도 사랑 많고 유능한 감독자들을 계속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장로들은 사실상 낙원에서 사람들을 잘 돌보는 유능한 목자가 되도록 훈련받고 있는 것입니다. (시 45:16)
그러한 남자들이 신세계에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축복이 될지 생각해 보면 정말 기대가 되지 않습니까? 에스겔의 환상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다른 회복 예언들과 마찬가지로, 여호와께서 정하신 때에 더욱 분명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앞으로 그 환상에 담긴 놀라운
적용점이 새롭게 밝혀지거나 그 환상의 어떤 부면이 우리가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성취될지도 모릅니다. 구체적인 점은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것입니다.
높이 솟은 문들과 뜰을 통해 우리의 숭배와 관련된 어떤 점을 배울 수 있습니까? (18-21항 참조)
순결한 숭배에 대한 여호와의 축복
24, 25. 에스겔의 환상에서는 여호와의 백성이 순결한 숭배에 고착할 때 여호와께서 주시는 축복을 어떻게 묘사합니까?
24
마지막으로 에스겔의 환상에서 일어나는 한 가지 중대한 사건을 떠올려 보겠습니다. 환상 가운데서 여호와께서는 성전에 오셔서,
자신의 백성이 순결한 숭배에 대한 자신의 표준을 충실히 따른다면 그 성전에 계속 머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에스겔 43:4-9) 여호와께서 그곳에 계시는 것은 그분의 백성과 그들의 땅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입니까?
25
에스겔의 환상에서는 하느님의 축복을 묘사하기 위해 희망을 주는 두 가지 예언적 장면을 보여 줍니다.
(1) 성전 신성한 곳에서
강물이 흘러나와 땅에 생명과 풍요를 가져옵니다. (2) 땅이 질서 있고 정확하게 나누어지고 그 중심부에 성전 지역이 자리
잡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 내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우리는 여호와께서 훨씬 더 신성한 숭배 제도, 즉 거대한 영적 성전에
들어오셔서 그곳을 정련하고 승인하신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말라기 3:1-4)
만군의 여호와 / 구약 275회
학개 : 13회 스가랴 : 46회 말라기 : 24회 포로 귀환 후 선지자들이 사용한 횟 수 - 83회
아도나이 체바오트( יְהוָה צְבָאֹות)
아도나이(3968) - 여호와
3068. 예호바(Yehôvâh) יְהֹוָה
1. 자존자
2. 영원한 자 : 히브리인들이 최고의 하나님으로 여기는 신의 이름 ‘여호와’.
발음
/ 예호바[ Yehôvâh ] 어원 / 196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여호와(출 20:7, 레 24:13) 구약 성경 / 7020회 사용
* 1961. 하야(hâyâh) הָיָה
1. 있다, 2. 어떤 자에게 속하다, 3. 섬기다
발음
/ 하야[ hâyâh ] 관련 성경 / (장막을) 치다(창 13:3), 임하다(창 15:1, 수 22:20), 계시다(창 31:5), (싸우고)
있다(삿 12:2), 섬기다(삼상 2:11), 만나다(삼상6:9), 속하다(삼하 9:9), 따르다(왕상 16:21, 호 3:3),
같다(시 50:21), 두다(출 25:15), 더하다(출 9:3), 성취하다(잠 13:19), 이루다(겔 21:7, 39:8),
지치다(단 8:27), 얻다(슥 8:10). 구약 성경 / 3549회 사용
체바오트(6635)
6635. 차바(tsâbâʼ) צָבָא
1. 군대
2. 하늘의 무리 : 천사들의 무리
3. 하늘의 신들의 무리
발음
/ 차바[ tsâbâʼ ] 관련 성경 / 군대장관(창 21:22, 삼하 10:16, 대상 19:16), 군대(출 6:26, 삿 9:29, 욥 10:17),
싸움(민 1:22, 26:2, 31:36), 군인(민 31:21, 53), 만군(삼상 1:11, 사 1:9, 슥 1:3),
군사령관(삼상 12:9, 삼하 17:25), 군사(삼하 3:23, 대하 26:11), 용사(삼하 10:7, 대상 5:18, 19:8),
노역(사40:2), 전장(대하 25:5, 28:12), 천군(시 103:21), 싸우다(수 22:33), 참가하다(민 4:3),
일하다(민 4:23, 8:24), 무장을 시키다(민 31:5), 무장하다(수 4:13). 구약 성경 / 76회 사용
"만군의 여호와"는 무슨 뜻인가요?
"만군의 여호와" 아도나이 체바오트(יהוה צבאות
)
하나님의 이름 중 하나입니다. 이것이 처음 등장하는 곳은 불임과 씨름하는 한나와 그녀의 남편
엘가나가 나오는 한나 이야기입니다. 한나는 이 이름으로 하나님을 처음 부른 사람입니다. 히브리어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만군의
여호와"입니다.
짜바(צבא)는 군대를 의미하는 단어이며 오늘날은 이스라엘 방위군을 의미합니다. 쯔바옷(צבאות)은
복수형입니다. 여러 군대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군사적 용어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만군의 여호와”라고 부를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군대"라는 단어의 의미
군대란 무엇인가요? 예를 들어 개미 군대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군대가 공동의 목적을 위해 함께 일할
준비가 된 집단적 그룹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의미는 영어에서 유연하며 아래에서 살펴보겠지만 히브리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메리엄-웹스터 (Merriam-Webster) 사전은 이 개념에 대해 많은 도움을 줍니다. 다양하지만 관련된 아이디어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 특별히 지상전을 위해 훈련된 대규모의 조직화된 무장 요원 2. 큰 무리(예 : 새 떼) 3. 대의를 발전시키기 위해 조직된 사람들의 모임
다음은 메리엄-웹스터에서 이 단어를 영어로 사용하는 방법에 대한 몇 가지 예입니다.
1. 알렉산더 대왕의 군대 2.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을 나와 군에 입대했다. 3. 회사는 법률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변호사 군대를 고용합니다. 4. 그들은 훈련된 기술자들로 구성된 군대를 보냈습니다 5. 조직은 헌신적인 자원 봉사자 군대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천사의 군대
일부
성경 번역본에서는 이 문구를 "천사 군대의 하나님"으로 번역합니다.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실제에 대한 이 그림을 아주 잘
묘사하는 성경 구절 중 하나가 열왕기하 6장에 있습니다. 선지자 엘리사는 그들이 보이지 않는 전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지만 그의 종은 그들 바로 앞에 있는 거대한 시리아 군대에 더 집중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이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에워쌌는지라
그의 사환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하니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원하건대 저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 하매 엘리사의 말대로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신지라 엘리사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그 길이 아니요 이는 그 성읍도 아니니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가 찾는 사람에게로 나아가리라 하고 그들을 인도하여 사마리아에 이르니라 사마리아에 들어갈 때에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여 이 무리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들의 눈을 여시매 그들이 보니 자기들이 사마리아 가운데에 있더라
이스라엘 왕이 그들을 보고 엘리사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가 치리이까 내가 치리이까 하니
대답하되 치지 마소서 칼과 활로 사로잡은 자인들 어찌 치리이까 떡과 물을 그들 앞에 두어 먹고 마시게 하고 그들의 주인에게로 돌려보내소서 하는지라
왕이 위하여 음식을 많이 베풀고 그들이 먹고 마시매 놓아보내니 그들이 그들의 주인에게로 돌아가니라 이로부터 아람 군사의 부대가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하니라
이 구절에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점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동원하실 수 있는 자원이 수적으로 많다는 것입니다. 핵심 구절은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입니다. 우리가 영적 전쟁 중에 있을 때 이것은 항상 사실이 될 것입니다.
보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 믿음과 의심이 여기에서 평행을 이룹니다. 엘리사는 보지 않고 알았고 그의 종이 의심하여 보여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시리아 군대가 모든 카드를 쥐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들의 몸에 있는 세포는 창조주의 명령에 복종해야
했고, 갑자기 하나님께서 주신 시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진정한 힘의 개념과 정복의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왕이 이렇게 묻는 것은 거의 우스꽝스럽습니다. "내가 그들을 죽일 수
있습니까? 내가 그들을 죽일 수 있습니까?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있습니까? 뭐라구요?" 대답은 "아니오"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시리아 군인들에게 큰 잔치를 베풀어 주었고 그들의 길로 내보냈습니다. 그리고 문제는 멈췄습니다.
그는 누구의 편인가요?
우리는 얼마나 빨리 우리를 대적하는 자들에 대한 가혹한 심판을 원하는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손 안에 안전할 때 진짜 위협이 없다고 믿기에는 우리가 얼마나 느린지요.
전쟁이 여호와께 속한 것임을 잊어버릴 때 우리는 얼마나 혼란스럽고 무자비하게 되는지요. 전쟁은 여호와께 속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적들도 그 분에게 속합니다. 그리고 그 분은 그들을 매우 사랑하십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하는지라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고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여호수아 5:13-15)
예수님은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들이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이것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적의 권능으로 보호받고 있고 영생이 있음을 알 때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압제하고 대적하며 전멸시키려 했던 나라인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또 다른 맹렬한 적인 앗수르를 어떻게
언급하시는지 보십시오.
“그
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 (사
19:23-25)
천사들
군대의 사령관은 독점적으로 "친이스라엘"이 아닙니다. 그분은 창조주이시고 만유의 아버지이시며 축복하고 구원하고 구속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분에게는 여러 존재들에게 몫을 나누어 줄 충분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는 특정한 대상의 편을 들도록 끌리기를
거부하십니다. 오히려 그 분은 우리가 그의 편과 그의 목적에 동참할 것을 고집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는 누구십니까?
짜바(צבא)라는 단어는 대부분의 성경에서 군대가 아니라 “만물(만유)”의 의미로 자주 번역됩니다. "만물"은 군대 또는 많은 수 또는 무리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바로 시작 부분인 창조 이야기에 있습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창 2:1).
저는
랍비로부터 이것이 모든 원자와 모든 분자 그리고 이것들의 방대한 배열이 함께 일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군대처럼 모두 모여서 목적을 향해 움직인 것입니다. 군대처럼. 기계가 아니라 군대처럼 말입니다. 이것은 저에게 놀라운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불임 여성이었던 한나가 하나님의 인격의 이 측면을 요청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녀는 모든 세포와 원자에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아무 것도 없는 무에서 창조할 수 있는 분에게 부르짖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희망이 하늘과 땅의 만물이 복종해야
하는 그 분의 목소리에게만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녀는 만군의 여호와의 명령이 실행될 것이며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만군의 여호와”라고 부를 때 그 이름에는 많은 것이 들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그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무수한 천사의 군대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전투에서 강력한 전사이십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모든 창조물의 전체가 되는
아름다운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이십니다. 모든 원자와 모든 분자는 그의 목적과 명령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분은 강력한 말씀으로 모든
것을 지탱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Lord Almighty) : ‘체바오트’ -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이름 가운데 하나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말이다. 구약성경에 255회 나오며(삼상 1:3; 15:2; 17:45; 삼하 6:2; 7:8; 왕상 18:15; 왕하 3:14; 대상 11:9; 시 24:10 등), 특히 선지서에서 자주 나오는 하나님에 대한 명칭이다(사 1:9; 렘 6:9; 미 4:4; 나 2:13; 합 2:13; 습 2:9; 학 1:2; 슥 1:3; 말 1:4 등). 만군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이시며(삼상 17:45) 이스라엘의 구속자이시며(사 44:6) 영광의 왕이시요(시 24:10) 능하신 분이시며(시 89:8) 공평하시고(사 5:16) 기묘하며 지혜로운 분이시다(사 28:29).
또한 만군의 하나님은 하늘보좌에 계시고(왕상 22:19) 언약궤 위 그룹 사이에도 좌정하시는 분이시며(삼하 6:2) 그분의 백성과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다(삼하 5:10; 시 46:7, 11).
신약에서는 만군의 여호와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리오스 사바오트’(kyrios sabaoth)가 ‘만군의 주’로 번역되었다(롬 9:29; 약 5:4).
2962. κύριος, ου, ὁ
1. 주, 2. 주인, 3.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
발음
/ 쿠리오스[ küriŏs ] 어원 / 남 κῦρος ‘초교통치’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주(마 1:20, 요 1:23, 고전 7:12), 주인(마 6:24, 눅 6:5, 요 15:15), 상전(마 10:24,
25, 엡 6:5), 아버지(마 21:30), 구주(눅 2:11), 임자(눅 19:33), 하나님(행 13:48), 선생(행 16:30),
주재(행 17:24), 그리스도(엡 5:29), 만주(계 19:16). 신약 성경 / 719회 사용
4519. σαβαώθ
1. 히브리어 6635의 여성 복수 : 군대, 2. 만군, 3. 대군
발음
/ 사바오트[ sabaōth ] 관련 성경 / 만군(롬 9:29, 약 5:4) 신약 성경 / 2회 사용
만군의 여호와[萬軍-, the Lord Almighty]
온 세상 만물을 친히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창 2:1; 사 45:12) 권능에 찬 하나님을 일컫는 말로서(시 84:8), 특히, 그 누구도 견줄 수 없는 초월한 힘과 권세를 지닌 분(시 89:8), 공의로 세상을 다스리시며 정의로운 심판을 행하시는 분(암 3:13-15), 작정하신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사 10:23; 14:24, 27; 17:3)임을 강조할 때 사용되는 거룩한 하나님의 호칭이다.
어원적 측면에서는 ‘이스라엘 군대의 총사령관’(삼상 17:45; 사 31:4-5)이라는 뜻과 함께 ‘하늘 군대 곧 천군의 총사령관’(창 28:12-13; 시 89:6-8; 호 12:4-5) 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구약에 255회에 걸쳐 빈번하게 언급되는데, 특히 선지서에 자주 나타난다(삼상 1:3; 삼하 6:2; 왕상 18:15; 왕하 3:14; 대상 11:9; 사 1:9; 렘 6:9; 미 4:4; 나 2:13; 합 2:13; 습 2:9; 학 1:2; 말 1:4; 롬 9:25; 약 5:4).
한편, ‘만군의 하나님’의 다른 이름을 통해 그분의 성품과 일하심에 대해 폭넓게 이해할 수 있다. 즉, 그분은 ‘만군의 주’(롬 9:29; 약 5:4)로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삼하 7:26-27; 시 59:5; 렘 29:8),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사 6:3; 47:4)가 되시며, ‘이스라엘의 전능자’(사 1:24)요 ‘이스라엘의 구원자’(사 44:6; 렘 50:34)가 되신다. 또한 그분은 ‘만물을 조성하신 창조주’(렘 10:16; 51:19; 암 4:13)요, ‘크고 능하신 하나님’(렘 32:18)이며, ‘왕’(사 6:5; 렘 46:18) 곧 ‘영광의 왕’(시 24:10)으로서, ‘유일하신 하나님’(사 37:16)이며, ‘살아 계신 하나님’(렘 23:36)이시다.
'여호와'와 결합된 여러 표현들
한글성경에 그대로 번역된 '여호와 닛시', '여호와 샬롬', '여호와 삼마', '여호와 이레' 외에 '여호와 로프에카'('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 출15:26), '여호와 메카디쉬켐'('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 출31:13), '여호와 체바오트'('만군의 여호와', 삼상1:3), '여호와 엘욘'('지존하신 여호와', 시7:17), '여호와 로이’('여호와는 나의 목자', 시23:1), '여호와 치드케누'('여호와 우리의 의', 렘23:6; 33:16) 등이 있다.
08-18-2023(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여 이들이 무엇이니이까(스가랴 1:9)
내가 가로되 내 주여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이들이 무엇인지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매. I asked, "What are these, my lord?" The angel who was talking with me answered, "I will show you what they are."
"주여 이들이 무엇이니이까(What are these, my lord?)" 마 엘레 아도니(מָה־אֵלֶּה אֲדֹנִי)
무엇이니이까(마) 4100. מָ ,מַ ,מֶה ,מֶה ,מַה ,מַה־מָה
1. 의문대명사 : 무엇
2. 소유격 뒤에 위치한 경우
3. 소유격 앞에 위치한 경우
발음
/ 마[ mâh ] 구약 성경 / 554회 사용
이들이(엘레) 428. אֵלֶּה
1. 이들, 2. 그렇게
발음
/ 엘레[ ’êl-leh ] 어원 / [지시대명사]. 복수. 단수 וֶה의 복수형으로 쓰임, 간혹 אֵל이라는 단순형으로 쓰이기도 함. 411에서 유래한 연장형 관련 성경 / 서로(왕상 20:29), 피차(대상 24:5). 구약 성경 / 745회 사용
내 주여(아도니) 113. 아돈 / אָדוֹן
1. 주인, 2. 재물 소유자나 주인, 3. 왕상1:17
발음
/ 아돈[ ’âdôwn ] 어원 / 복수אֲדנִֹים, 복수 연계형 אֲדךֵֹני, 어미활용 אֲדנָֹיו, ‘다스린다’는 뜻의 어원에서 유래[사용되지 않음] 관련 성경 / 주인(창 18:12, 삿 19:11, 삼상 25:10), 주(창 19:18, 수 3:11, 슥 1:9),
상전(출 21:4, 사 24:2, 잠 30:10), 아도니베섹(삿 1:6, 7), 선생(왕하 2:3), 주관할 자(시 12:4,
105:21). 구약 성경 / 334회 사용
내 주여 이들이 무엇이니이까...내가 네게 보이리라
오늘부터 "스가랴서"를 읽게 됩니다. '스가랴' 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
역사적인 배경은 다리오 왕 제 이년 열한째 달(7절)이며 이때는 주전 519년 2월 15일이었습니다. 주전 519년에 다리오 왕은 이집트의 충성을
재확인하기 위해 이집트로 행군했습니다. 그 내용은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올 백성들을 향한 권면의 말씀으로 그 내용은 여덟 가지 환상과 두 가지 메시지 그리고 두 가지 예언이 담겨 있는 묵시에 관한 말씀입니다.
스가랴 1장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소개합니다.
첫째는아직도 온전하게 회개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조상들이 받았던 벌을 다시는 받지 말 것을
권면합니다(1-6절).
둘째는 첫 번째 환상을 소개합니다. 환상의 내용은 말탄 자들의 이상을 본 스가랴에게 하나님은 이들이 땅에 보내신 사자로서 이들로 인해 땅의 평안을 만들 것이라고
합니다(7-11절).
셋째는 주의 사자들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예루살렘을 위하여 간구할 때 하나님은 이 기도에 응답하시어 예루살렘
성읍의 회복을 약속하셨습니다(12-17절).
넷째는 두 번째 환상으로 네 뿔과 네 농장으로 이 뿔들은 유다를 헤친 뿔임을
알게 됩니다(18-21절).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을 자녀 삼으시기 위해서 수많은 연단과 고통을 허락하십니다. 항상 즐겁고 편안한 날만 지속된다면 성도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려는 절박한 신앙을 유지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있는 몸의 질병을 감사하였고 유익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성도의 기쁨과 즐거움과 인간의 죄악된 본성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도록 이끌지 못하므로 성도에게 닥치는 고난과 고통은 하나님의 자녀로 세워갈 수 있는 유익한 과정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때로는 즐겁지만 때로는 견디기 어려운 슬픔과 질고에 붙잡히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 일을 병행하게 하사 인간으로 장래 일을 알 수 없게 하시고
결국 하나님께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자로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여 나에게만 닥쳐온 것같은 고통과 눈물과 시련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거룩한 반석 위에 나를 세우려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이라 믿고 오늘도 진리의 말씀으로 다듬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4 대장장이 - 하라쉬(2796)
[ chârâsh ] חָרָשׁ
1. 조각가, 2. 숙련공, 3. 이사야 44:12. 철공은 철을 숯불에 불리고 메로 치고 강한 팔로 괄리므로 심지어 주려서 기력이 진하며 물을 마시지 아니하여 곤비하며
발음
/ 하라쉬[ chârâsh ] 어원 / 279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새기는 자(출 28:11), 조각하는 자(출 35:35, 38:23), 장색(匠色)(신 27:15), 만드는
자(사 45:16), 익숙한 자(겔 21:31), 목수(삼하 5:11,왕하 12:11, 스 3:7), 철공(삼상 13:19,
사 44:12), 공장(工匠)(왕하 24:14), 장인(匠人)(대상 29:5, 사 40:19, 54:16), 목공(렘 24:1),
대장장이(사 44:11), 은(銀)장색(匠色)(호 13:2). 구약 성경 / 37회 사용
* 2790. 하라쉬
[ chârash ]
1. 새겨 넣다, 2. 제조하다, 3. 음모를 꾸미다
발음
[ chârash ] 관련 성경 / 밭 갈다(삿 14:18, 암 9:13, 호 10:13), 갈다(시 129:3, 신 22:10, 사 28:24),
잠잠하다(삼상 10:27, 욥 13:5, 시2 8:1), 막다(미7:16), 꾀하다(잠 6:14, 12:20), 도모하다(잠 14:22),
새기다(렘 17:1), 경작하다(렘 26:18), 입을 열다(시 32:3), 쉬다(삼상 7:8), 그치다(렘38:27), 놋쇠
대장장이(왕상 7:14). [부] 조용히(삿 16:2), 잠잠히(삼하 13:20, 습 3:17), 가만히(출 14:14),
묵묵히(창 24:21). 구약 성경 / 47회 사용
스가랴서의 8가지 환상
환상
의 미
여호와께서 두루 다니심
성전을 재건하다가 지치고 실망한 이스라엘에게 용기와 소망을 줌
네 뿔과 네 공장
때가 되면 하나님이 원수를 물리치실 것임
척량줄
예루살렘이 완전히 재건됨
대제사장 여호수아
택한 백성의 죄가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됨
등대와 감람나무
낙심한 스룹바벨에게 용기를 줌
날아가는 두루마리
율법을 깨뜨린 자들은 그 율법에 의해 징계 받음
에바 속의 여인
모든 죄악이 제거됨
네 병거
이스라엘의 대적을 정복하시는 하나님
스가랴의 8개 환상과 10개 예언
스가랴(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서는 구약성경의 39권의 중 38번째 책이다. 주전 520년경 기록되었으니 지금부터 2,543년전의 책이다. 14장으로 기록된 책은 8개의 환상과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이 기록된 난해한 책이다
스가랴 1장~8장 : 8개의 환상 스가랴 9장~10장 :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예언 스가랴 12장~14장 :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예언
스가랴서의 예언과 성취
1. 550년 후 성취 /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한 나귀 새끼의 예언은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 (슥 9:9) 2. 550년 후 성취 / 은 30개에 팔릴 것이 문자적으로 상취되었다 (슥 11:12) 3. 550년 후 성취 / 그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산 것도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 (슥 11:13) 4. 590년 후 성취 / 그들이 메시아를 거절하므로 여러 나라에 흩어질 것이다, 디아스포라 (슥 7:11~14) 5. 2468년 후 성취 / 여러 나라에 흩어졌던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 올 것이다 (슥 8:1~13) 6. 2540년 후 성취 / 예루살렘은 모든 민족들의 취하는 잔이 되고 무거운 돌이 된다 (슥 12:2~3) 7. 미성취 / 이방 나라들이 예루살렘을 치러 올 것이다 (슥 12:3~9, 14:12~15) 8. 미성취 / 이스라엘 큰 애통으로 회개하고 메시아에게 돌아올 것이다 (슥 12:10~13:1) 9. 미성취 / 주께서 예루살렘 동쪽 감람산에 재림하실 것이다 (슥 14: 4~5) 10. 미성취 / 이방 나라들이 초막절을 지키러 에루살렘으로 올라올 것이다 (슥 14:16~21)
스가랴의 8개의 환상
환상 1 : 온 땅을 돌아보는 말들 (감찰하시는 하나님) 환상 2 : 네 뿔과 네 일꾼들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자들과 그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환상 3 : 측량줄을 지닌 사람 (하나님의 백성을 측량하시는 하나님) 환상 4 : 여호수아와 제사장의 옷 (정결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환상 5 : 촛대와 두 올리브나무 (성령의 기름으로 꺼지지 않은 등잔) 환상 6 : 날아다니는 두루마리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환상 7 : 에바 속의 여자 (디아스포라 예언) 환상 8 : 네개의 전차 (네 개의 임무)
PART I
1. 환상 1 : 온 땅을 돌아보는 말들 (1:7~17)
여호와의 전지전능은 우주적이고 지구적인데 거기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알고 계신다. 특히 그의 백성의 회복에 관심을 가지신다. 붉은 말과 자줏빛 말과 백말 등 여러 말들이 있는데 말을 탄 자들의 임무는 세상 전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살피고 보고하는 일이다. 세상은 평온한 듯 보였지만 예루살렘의 성전건축은 중단되고 영적 나태함에 빠진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성전건축을 격려한다
환상 2 : 네 뿔과 네 명의 대장장이(1:18~21)
네 뿔은 이스라엘은 대적하고 괴롭히는 사방의 왕들을 의미한다. 넷이란 세상의 네 모퉁이 즉 지구 전체를 총체적으로 상징한다. 역사적으로 앗시리아, 이집트, 바벨론, 메대바사, 헬라, 로마 등이다. 네 명의 대장장이는 주의 백성을 괴롭히는 제국과 왕들을 심판하는 도구이다. 하나님은 악한 권세자들을 두고만 보시지 않으시고 반드시 심판하신다
환상 3 : 측량줄을 지닌 사람(2:1~13)
한 사람이 자기 손에 측량줄을 잡고 있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예루살렘을 재어서 그 너비와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러 간다" 측량줄이 예루살렘의 성전과 성벽재건과 관계 있다면 이스라엘의 회복을 상징할 것이다 또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불성벽이 되어 주실 것이며 그의 눈동자처럼 보호하실 것이다 이는 성도들에게도 같은 보호막이 되어 주실 것이며 그들의 중심과 삶이 측량되어질 것이다
환상 4 : 여호와 앞에 선 여호수아와 새싹(3:1~10)
네 번째 환상은 여호수아가 천상의 어전회의장에 서 있다. 더러운 옷을 입은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여호와 앞에 서 있고 사탄이 고발하는 환상이다 여호수아는 죄로 더럽혀진 이스라엘 민족과 성도들을 상징한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깨끗한 관과 아름다운 옷을 입음으로써 정결함을 회복한다 사탄이 여호수아를 참소할 때 여호수아를 변호하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시며 그를 통하여 정결해 질 수 있다 새 싹과 세운 돌은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환상 5 : 금촛대와 두 올리브나무(4:1~14)
금촛대는 스룹바벨 성전, 교회와 성도를 상징하는데 일곱개의 등잔은 기름그릇에 대롱으로 연결되어 자동으로 기름이 보충된다. 등잔의 기름은 성령을 상징하고 성령충만은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된다 두 올리브나무는 온 세상을 다스리는 여호와를 섬기는 기름 부음을 받은 두 사람이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총독 스룹바벨을 의미한다고 하지만 구약과 신약, 12지파와 신약교회, 두 증인 등을 다양한 견해가 있다 중요한 것은 교회와 신자들의 등잔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성령으로 충만해 지는 것이다
환상 6 : 날아다니는 두루마리(5:1~4)
날아다니는 양탄자처럼 길이 9m, 폭이 4.5m의 큰 두루마리가 날아 다닌다 두루마리의 크기는 성전의 성소 면적과 똑같았다 이 두루마리는 온 세계위를 날아 다니면서 범죄한 사람을 찾아 그 안에 기록된 죄를 짓는 자에게는 저주와 벌을 내렸다 두루마리의 양편에 써있는 글이 다음과 같다 날아다니는 두루마리는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다
"도둑질하는 자는 모두 없어질 것이다" "거짓 맹세하는 자도 모두 없어질 것이다"
당시 도둑질과 거짓맹세는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자들의 대표적인 죄였다 이 두 죄는 십계명을 요약한 죄이기도 하다 죄악된 삶은 성령이 거하는 성전이나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공동체에도 범죄한 자들이 활보하며 내부적인 부패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환상 7 : 에바 속의 여자(5:5~11)
에바는 곡식의 양을 재는 되와 같은 측정도구로 범죄의 양을 재는 기준으로 쓰였다 에바의 크기를 속여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범죄를 측정하여 또다시 이방땅으로 쫓겨 가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 그들은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디아스포라가 되어 세상을 떠돌아 다녔다
환상 8 : 네개의 전차(6:1~8)
놋쇠로 된 두 산 사이에서 네 대의 전차가 나온다 네 대는 네 뿔, 네 대장장이, 네 바람처럼 온 세상 사방을 의미한다 붉은 말, 검은 말, 흰 말, 얼룩진 힘센 말은 요한계시록의 네 개의 인의 임무와 유사하다 전쟁, 기근, 기만, 전염병을 상징한다
PART II
금식에 대한 질문 (7:1~14)
스가랴가 1~6장에 기록된 8가지 환상을 본 지 2년이 지났다 벧엘 사람들이 사절단을 보내 스가랴에게 금식에 대해 질문을 했다 "우리가 여러 해 동안 금식을 해 왔는데 올해도 금식을 해야 합니까?" 그들이 선지자에게 받은 네 가지 응답은 위선적인 금식보다 순종을 원하신다는 것이다 공정한 재판, 사랑과 자비, 억누르지 말 것, 서로 해치지 말 것에 대한 종교의 핵심 메시지를 받았다
예루살렘 회복에 대한 약속 (8:1~23)
예루살렘은 회복되어 사랑과 공의가 넘치는 도시가 될 것이며 슬픔이 사라지고 온 세계 만민에게 구원을 전하는 성읍이 될 것이다
PART III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심판(9장~11장)
그는 공의로우시고 구원을 베푸실 것이며 겸손하여 나귀 새끼를 타실 것이다 메시아의 성품은 공의, 구원의 원천, 겸손하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한 나귀 새끼의 예언은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 은 30개에 팔리고 그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산 것도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 그의 사역은 크게 4 가지로 언급되고 있는데 메시아는 평화를 선포할 것이며, 구원하실 것이며, 재림시에 거짓 목자들을 멸하실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모으실 것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배척한 결과로 겪게 될 무서운 심판(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였다
PART IV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12장~14장)
마지막 때에 이르러 예루살렘은 모든 민족들의 취하는 잔이 되고 무거운 돌이 된다 이 예언은 우리 시대에 성취되는 것을 목격중이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1/3이 남고 2/3는 멸망당한다 그 남은 1/3도 불 속에 던져 연단받고 시험받아 정결케 할 것인데 짐승의 통치때 박해 받을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침내 세계의 연합군이 예루살렘을 치러 올 것이고 이스라엘은 회개하며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아마겟돈 전쟁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승리할 것이다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이방 나라를 패전할 것이고 메시아 왕국이 완성될 것이다 모든 나라는 여호와를 섬기며 예루살렘으로 초막절을 지키러 매년 올라올 것이다 온 세상은 여호와께 거룩하게 구별되어 드려질 것이다
- 스가랴는 매우 공손하고 경외하는 말('내 주여')로 이 환상의 뜻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러자 해석하는 천사가 자신이 그 뜻을 설명할 것이라고 대답한다. 이런 내용은 13, 14, 19절; 4:1; 5:10; 6:4 등에도 나타난다.
Guide
다리오 왕 제 이년 열한째 달(7절): 이때는 주전 519년 2월 15일이다. 주전 519년에 다리오왕은 이집트의 충성을
재확인하기 위해 이집트로 행군했으며, 이 행군을 위해 군대를 정비하는 것이 유대 백성들에게는 중요한 일이었다(IVP 성경배경
주석).
우리가 온 땅에 두루 다녀보니 온 땅이 평안하고 조용하더이다(11절): 이스라엘은 페르시아 제국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페르시아 제국이 평안하다는 소식은 예언 성취가 지연되거나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는 의미로, 매우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Meditation & Life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자가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로 향하고 있을 때, 스가랴는 환상으로 다른 군대가
진군해오는 것을 봅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평안 중에 교만해진 페르시아 제국을 심판하고 시온을 회복하실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만군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시며, 그 집을 다시 건축하시고,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을 풍성하게 하실 것입니다.
스가랴는 이집트로 향하는 다리오 왕의 군대를 보면서 동시에 제국 전역을 살피는 하나님의 군대를 보았습니다. 다리오 왕의 군대는
현실 속에 존재하며, 여호와의 군대는 환상 중에 머물러있습니다. 그러나 스가랴에게는 환상 중에 머물러있는 하나님의 군대야말로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참 현실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 나라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나라입니까?
스가랴가 환상 중에 본 말들에게 맡겨진 일은 무엇입니까?(10절)
온 땅이 평안하다는 보고를 들은 천사가 하나님께 간구한 것은 무엇입니까?(12절)
하나님께서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자기 백성을 위해 질투하시는 하나님, 자기 백성을 위해 싸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자기 힘을
의지하여 평화를 노래하는 세상 나라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있습니다. 헛된 권세를 의지하여 거짓된 삶의 화려함을 자랑하는
세상 권세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지만,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은 그 사랑 안에서 회복됩니다. 우리는 세상이
자랑하는 거짓 평화에 현혹되어 세상과 함께 심판에 이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깨어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삶을 찾아야 합니다. 사랑으로 자기 백성을 회복시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오늘도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회복을 기대하는 삶이 되도록 기도합시다.
Today's Prayer
오늘도 우리를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게 해주십시오.
세상이 이룬 거짓 평화 안에서 안일하게 살지 않게 하시고, 깨어 기도하며 주님의 나라를 기다리게 해주십시오.
스가랴 - 8가지 환상, 2가지 메세지, 2가지 예언이 담겨있는 묵시에 관한 말씀
7절에는 다리오 왕 이 년, 십일 월 이라고 합니다. 유대인의 11월은 오늘의 2월로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서 BC 519년 2월 스가랴 선지자는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8가지 환상의
형태로 임하고 있습니다. 즉 8가지 환상이 스가랴에게 임했습니다.
8절을 보면, 내가 밤에 보니, 이렇게 시작됩니다. 내가 밤에 보니, “한 사람이 붉은 말을 타고 골짜기 속 화석류나무 사이에
섰고 그 뒤에는 붉은 말과 자줏빛 말과 백마가 있기로” 그리고 9절을 보면, 스가랴가 환상을 보며 질문을 합니다. "내주여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내가 본 환상들, 이들이 도대체 무엇입니까?라고 질문을 합니다. 그랬더니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하고 대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환상을 언제 보느냐면, 밤에 봅니다. 왜냐하면 스가랴 선지자가 살던 그 시대가 바로 어두운 밤이 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어두운
밤에 선지자에게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살고있는 때가 어두울수록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환상이며 비젼 입니다. 우리가
살고있는 삶의 자리가 어두울수록 내가 지금 걸어가고 있는 내 인생의 길이 어두울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젼입니다. 희망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람에게 환상은 매우 중요합니다. 어두울수록 고통스러울수록 삶이 절망과 시련일수록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환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환상이라는 것은 보고싶다! 그래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환상은 보여지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하루종일 매우
피곤하게 하루를 살았다 오늘 밤 꿈이라도 멋있게 꾸어보자! 그래서 꾸어져요? 그것이 마음대로 안됩니다.
환상은 하나님 편에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환상을 본 사람들, 그들이 환상을 본 그 삶의 정황을 살펴보면 두가지 사실이 현저한 특성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는 그들이 정말 주의 말씀을 순종하기를 원했을 때, 그리고 엎드려 기도하고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어두운 시대를 이기기 위해서 고통의 삶의 장을 극복해 나가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환상입니다. 환상을
보아야 합니다. 눈에 실제로 보이는 환상이든 마음으로 보여지는 환상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환상을 본 자는 견딥니다. 극복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찬란한 승리하는 사람으로 고난 저 건너편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환상을 볼 수가 있느냐? 순종하는 자, 또 하나는 기도 하는 자,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를 원했을 때 그리고
엎드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환상을 보여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환상의 궁극적 메세지는 16, 17절인데,
예루살렘의 성전의 재건에 대한 말씀입니다. 내 집이 다시 지어질 것이라는 겁니다.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재건하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만 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관심을 갖고 계시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 그들의 삶의 장에 언제나 주께서 축복하신다는 메시지입니다.
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가운데 서 있으면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나를 도우시고 나를 책임 져주시고 나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붉은 말을 탄 사람은 이 환상의 주인입니다.
그런데 이 홍마 탄 사람이 어디에 서 있었습니까? 화석류나무 사이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홍마 탄 사람의 인물의 정체성을 밝혀내기 위해서는 11절보시면 됩니다. 11절을 보면,
"그들이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여호와의 사자에게 고하되 우리가 땅에 두루 다녀보니 온 땅이 평안하여 정온 하더이다" 자 홍마 탄
사람이 화석류나무 사이에 서 있었는데 11절에 보니까, 그 사람은 여호와의 사자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분이 골짜기 속 화석류나무 사이에 섰고라고 했습니다. 이 나무는 주로 초막을 지을 때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나무는
어떤 의미에서 이스라엘백성의 상징이기도 했어요. 어떤 학자들은 무화과 나무가 이스라엘백성의 상징이라고 하지만 또 어떤 경우에는 이
화석류나무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주 좋아했든 나무이고 많이 사용했든 나무이고 또 그 백성을 상징하는 나무이기도 했습니다.
자, 그런데 화석류나무 사이에 그 분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화석류나무는 지금 어디에 있었습니까? 골짜기 속에 있는 화석류나무,
이것은 고난 속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합니다. 고난 속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 그런데 고난 속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찾아오신 우리 주님, 바로 이것이 환상의 의미에요.
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포로 된 자리에서 돌아왔습니다. 꿈을 가지고 돌아왔지만 고향 예루살렘은 형편없었습니다. 살만한
조건이나 환경이 전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성전도 쓰러졌고, 성벽은 아에 다 무너지고, 말할 수 없이 비참한 환경이였습니다.
그들의 삶은 마치 골짜기의 삶과도 같았습니다. 아주 거칠은 삶, 황폐한 삶, 그러나 하나님께서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 이 환상을
보여주시면서 주시고자하시는 메세지, 전달하고자 하는 중요한 메세지는 딱 하나에요. 그대들은 아직도 고난 속에 있다 그러나 고난
속에 찾아오시는 하나님,
그렇습니다.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고난을 허용하시는지 그것은 잘 모르겠어요. 하나님만이 아시는 어떤
이유, 그것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유익일 수 있는 어떤 계획과 플랜이 계시기 때문에 주께서는 그의 백성들의 삶의 장에 고난을
허용하실 것 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그의 백성들이 고난 속에 있을 때 주님은 반드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내 삶이 장이 캄캄한 골짜기여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여도 그 골짜기 속에 임하시고 찾아오시고 함께하시는 주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 황폐함 속에 살고 있어요. 아무것도 아직 지어지지 않았어요. 성전도 지어지지 않았어요.
도성은 아직도 비참한 상태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환상을 보여주었어요. 자, 이 환상을 보았을 때 무얼 느꼈을까요?
환상을 보고 또 전달하고 전달된 메시지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환상을 보았을 때 야! 지어질 성전, 그렇다면 우리가 성전을
지어야겠구나! 그리고 이 성전을 그리고 이 도성을 하나님의 축복의 도성, 샬롬의 도성이 될 수가 있도록 일해야 겠구나, 라는 그
용기가 일어나지 않았겠어요?
이 환상을 본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 교회의 형편을 보십시오. 성전은 낡고 어두침침합니다. 성도님들은
암에 걸리고, 까맣던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해가며 건강할 줄 말 알았던 건강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서 예전같지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때에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 환상을 보는 일 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께서 보시는 환상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환상과
꿈, 그리고 비전이 되기 위해서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에도 꿈을 꾸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거룩한 환상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 환상은 제가 처음에 강조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로 결단하는,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만 환상은 보여집니다. 주님, 제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살겠습니다. 그 일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습니다. 그리고 엎드려 정말 기도할 때 주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여러분 가정을 위한 자녀들을 위한, 또 우리민족을 위한 위대한 꿈을, 거룩한 꿈을 보여주실 줄 믿습니다. 그 꿈을 통해서 그
비젼을 통해서 회복의 삶을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
스가랴! 하나님께서 기억하신다!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화석류(花石榴) 나무 - 이스라엘의 토속 꽃나무 이스라엘 백성이 좋아한 꽃 나무, 에스더의 원명도 고향 땅의 꽃나무인 하다스였습니다. 스가랴는 포로 귀환 후의 선지자입니다.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입니다.
'스가랴(Zechariah)'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기억하신다'는 뜻이요 '베레갸(Berechiah)' 는 '하나님께서 축복하신다'는 뜻이요
'잇도(Iddo)'는 '적절한 시기에'라는 뜻을 가졌으니 그 이름들이 다 영적으로 풍성한 뜻을 가졌습니다.
그 이름들을 이어보면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적절한 시기에 축복하실 것"이라는 영적 뜻을 발견합니다.
스가랴서는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으로 시작하여(1:1-6) 유다 백성에게 소망을 주는 8가지 환상(1:7-6:15) 메시야를 통한 영광스러운 미래의 구원과 심판의 예언(9-14장)
스가랴가 예언하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페르샤에 의해 귀국명령을 받고 성전건축을 하다가 중단된 상황이었습니다.
바벨론이
바사-페르샤에 의해 멸망한 후 페르샤의 초대 왕 고레스는 유대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칙령을 발표해서 5만여명에 가까운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귀환했습니다. 다윗의 혈통이던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함께 했고 또 이 때
학개와 스가랴도 같이 귀국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포로생활에서 귀국한 후의 재건 운동도 쉽지 않았습니다.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성전건축이었습니다. 성전 건축을 시작한 때가 B.C.536년 초였습니다 (스3:8-13). 그러나 여러 방해로 인해 성전 건축은 16년 동안이나 중단되었습니다. 긴 세월 동안 이스라엘 땅에 남아있던 사람들이 적대세력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사왕권에 아부하면서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함하고 성전건축을 방해했습니다. 중단된 기간동안 의욕도 꺾이고 믿음도 시들해진 모습들이었습니다.
이때 선지가 학개가 등장하여 성전재건을 외쳤고 그 두 달 후 젊은 스가랴도 합류해서 성전재건을 외쳤습니다. 방치되었던 성전 재건에 혁혁한 공을 남긴 사람들이 바로 에스라, 느헤미야, 학개, 스가랴, 그리고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다윗의 혈통으로 백성들의 정치적 지도자였던 스룹바벨이었습니다.
스가랴가 예언을 시작할 때의 왕은 바사(페르샤)의 다리오 왕이었습니다. 성경은 다리오왕 2년 8월에 잇도의 손자이며 베레갸의 아들인 스가랴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고 말합니다.(1절).
여기에서의 '다리오'(Darius)왕은 다니엘을 사랑했던 다리오왕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다니엘서
6장에 나타나는 메대의 다리오는 벨사살이 변사한 뒤를 이어 바벨론을 통치한 자로 120 방백을 감독하는 3인 중 다니엘을 그 한
사람으로 삼았고 다니엘이 사자굴에서 기적으로 구출된 후 전국에 선포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스가랴서에
나타나는 다리오는 B.C. 521년에 바사 왕으로 선언한 히스다페스의 아들입니다. 다리오가 통치하는 동안에 유대 백성은
자유스러운 생활을 하였으며 성전 중수공사를 다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스 6:15). '다리오왕 2년 8월'은 바사왕 고레스가
귀환 조서를 내린지 약 20년이 지난 때이며 성전 재건을 시작한지 5개월째 되는 시점입니다 (학1:15). (스4:1~)
포로귀환 후 성전재건과 성벽 재건을 이루어낸 실질적인 사역자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바사 왕권의 인정을 받아 정치적 힘을 어느 정도 지니고 있었기에 그동안 이곳에서 권력을 휘두르던 세력들을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학개와 스가랴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70년의 포로생활에서 귀국한 백성들이 처음 귀국했을 때의 열정을 잃어버리고 현실에 찌들려 성전건축도 방치해놓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성전건축 재시작이라는 같은 주제의 예언을 전한 학개는 학자들에 따르면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고 스가랴는 아마도 그 손자뻘 쯤 되는 젊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훗날 성전을 드디어 봉헌하고 나서 에스라서는 이 두 선지가 학개와 스가랴가 수고가 많았음을 치하하고 있습니다.
[에스라 6:14] 유다 사람의 장로들이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의 권면을 따랐으므로 성전 건축하는 일이 형통한지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명령과 바사 왕 고레스와 다리오와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따라 성전을 건축하며 일을 끝내되
스가랴서는 14장이나 되는 비교적 긴 예언서입니다.
특히 환상이 많이 나타나 있어서 신약에서도 71번이나 인용되었고 그 환상부분은 요한계시록에도 28회나 인용되었습니다.
스가랴의 예언은 성전이 재건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만 동시에 메시야가 오신다는 이중성취적 예언이기도 합니다.
선지자 학개가 산에서 나무를 베어서라도 성전건축을 재개하고 빨리 완공해야한다는 현실적이고 직설적인 입장이었다면 스가랴는 좀더 영적인 측면에서 성전재건의 중요성과 시급성을 설명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회복계획과 구원계획은 성전회복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 스가랴의 확신이었고 하나님께서는 스가랴를 통하여 백성들을 가르치고 때로는 경고하시고 또 위로와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스가랴는 소망의 예언자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가랴에게 임한 하나님 말씀의 내용은 유다 백성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그들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슥 1:1] 다리오 왕 제이년 여덟째 달에 여호와의 말씀이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슥1:2] 나 여호와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심히 진노하였느니라 [슥1:3] 그러므로 너는 무리에게 고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혹시 다시 바벨론 포로가 되지 않으려면 열조를 본받지 말라는 경고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해 악한 길과 악한 행실에서 떠나 돌아오라고 했으나 그들이 듣지 않아서 징계하셨습니다. 심판
경고를 했던 선지자들은 죽었지만 그들이 전한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2-6절). 하나님이 이사야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들을 통해 유다 백성의 범죄를 지적하고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는데 그들이 듣지 않았고 그
말씀을 전한 선지자들은 죽어 없어졌어도 그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슥1:4]너희
조상들을 본받지 말라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위를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슥1:5] 너희 조상들이 어디 있느냐 또 선지자들이 영원히 살겠느냐 [슥1:6]
내가 나의 종 선지자들에게 명령한 내 말과 내 법도들이 어찌 너희 조상들에게 임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돌이켜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 길대로, 우리 행위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고 뜻하신 것을 우리에게 행하셨도다 하였느니라
스가랴는 첫번째 환상을 봅니다.
[슥1:7] 다리오 왕 제이년 열한째 달 곧 스밧월 이십사일에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니라 [슥1:8] 내가 밤에 보니 사람이 붉은 말을 타고 골짜기 속 화석류나무 사이에 섰고 그 뒤에는 홍마와 자줏빛 말과 백마가 있기로 [슥1:9] 내가 말하되 내 주여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이들이 무엇인지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니 [슥1:10 ]화석류 花石榴 나무 사이에 선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땅에 두루 다니라고 보내신 자들이니라 [슥1:11] 그들이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여호와의 천사에게 말하되 우리가 땅에 두루 다녀 보니 온 땅이 평안하고 조용하더이다 하더라
스가랴가 본 8가지 환상 가운데 첫번째 환상인 '말과 말탄 자의 환상'의 내용입니다. 한 사람이 붉은 말을 타고 골짜기 속 화석류(花石榴) 나무 사이에 섰고 그 뒤에 홍마(紅馬)와 자줏빛 말(紫馬)과 백마(白馬)가 있었습니다.
홍마와 자줏빛 말과 백마를 탄 자들이 화석류 나무 사이에 선 자에게 보고하기를 "우리가 땅에 두루 다녀 보니 온 땅이 평안하고 조용하더이다"고 했습니다.
얼핏
보면 좋은 보고같은데 사실은 바벨론이나 바사처럼 이스라엘을 강점하고 다스리는 그 나라들이 평온하고 이스라엘만 힘들고 고생하고
있으니 괴롭다는 보고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꾸짖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죄를 지었기에 그들을 이용해서
이스라엘을 심판했지만 그러나 도를 넘어, 해도 너무 했기에 그들을 이제는 꾸짖으시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슥 1:12] 여호와의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려하나이까 이를 노하신 지 칠십 년이 되었나이다 하매 [슥1:13] 여호와께서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으로 대답하시더라 [슥1:14]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너는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예루살렘을 위하여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슥1:15] 안일한 여러 나라들 때문에 심히 진노하나니 나는 조금 노하였거늘 그들은 힘을 내어 고난을 더하였음이라
하나님은
유다 백성에게 조금 진노하여 그들에게 붙였는데 그들은 자기들의 힘과 소욕대로 유다 백성에게 고난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열국이
하나님의 도구임을 망각하고 자만하여 난폭하게 행하고 하나님의 의도보다 지나치게 행하므로 하나님이 그들에 대해 진노하신 것입니다
(삼하7:14, 사10:5-7,12, 사14:4-5, 렘50:23). 마치 주인이 자녀의 불순종을 징계하려고 하인에게 초달을 하게
했으나 하인이 자녀를 미워하여 지나치게 때렸을 때 주인이 하인에게 노하는 이치와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억울한 마음을 풀어주시는 위로의 말씀이 있습니다!
[슥1:13] 여호와께서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으로 대답하시더라
다시 생각해보는 화석류 나무(하다스) 환상의 뜻입니다.
밤에 본 환상입니다. 어두운 밤입니다.
화석류
나무, 향기로운 꽃나무, 푸른 잎을 가진 나무가 골짜기에 피어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랑하는 꽃, 민족정서가 담긴
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필 골짜기에 피었습니다. 골짜기에는 돌과 가시도 바람도 많을텐데, 그곳에 애처롭게 피어있습니다. 짐승들에게
찢길텐데 골짜기에 피어있습니다. 환한 햇빛 아래 화려하게 빛나는 하다스꽃이 아니라 밤중에 어두운 골짜기에 있어 아름다움을
구분하기도 어렵습니다. 현재 이스라엘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건장한 말들이 그곳에 있습니다. 힘과 능력과 회복을 상징합니다. 그 꽃을 지켜주고 세상을 지금 살핍니다. 각 색깔에 따라 심판과 전쟁의 능력도 있습니다. 계시록은 그것을 상징적으로 설명한 바 있습니다!
새로운 출발! 먹줄을 다시 쳐주신다!!
스가랴 1:16-17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처럼 말하노라 내가 불쌍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에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쳐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가 다시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할 것이라 여호와가 다시 시온을 위로하며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리라 하라 하니라.
소망의 선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돌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이 건축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먹줄을 치게 될 것입니다. 먹줄은 건축할 때 나무에 치는 건축설계 첫 단계입니다. 계획과 비전과 꿈과 소망을 상징합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예루살렘 성읍을 넘치도록 풍부하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부요와 번영을 누리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주님의 놀라운 축복이 오늘 우리에게도 우리 가정에도 우리 민족에게도 더욱 풍성히!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다시 돌아와주시고 먹줄을 다시 쳐주시고 새로 시작하게 하시고 풍성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그 사랑 가운데, 산 믿음으로 더욱 힘차게 전진하게 하옵소서.
화석류 나무
화석류 꽃들 화석류 열매
화석류(소귀나무, 은매화)
- 초막을 지을 수 있는 5가지 식물중의 하나 -
학명 : Myrtus Communis L. (도금양과 : Myrtaceae)
영명 : Myrtle, Common myrtle
히브리명 : הדס(하다스)
원산지 : 지중해 연안
개화기 : 4~8월
성경 : 느 8:15, 사 41:19, 55:13, 슥 1:8~11
< 주요 성경구절 >
느헤미야 8:15 또 일렀으되 모든 성읍과 예루살렘에 공포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산에 가서 감람나무 가지와 들 감람나무 가지와 화석류나무(הדס 하다스) 가지와 종려나무 가지와 기타 무성한 나무 가지를 취하여 기록한 바를 따라 초막을 지으라 하라 하였는지라
이사야 41:19 내가 광야에는 백향목과 싯딤나무와 화석류(הדס 하다스)와 들감람나무를 심고 사막에는 잣나무와 소나무와 황양목을 함께 두리니
이사야 55:13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הדס 하다스)는 질려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
스가랴 1:8~10 내가 밤에 보니 사람이 홍마를 타고 골짜기 속 화석류나무(ההדסים 하-하다심, ‘하다스’의 복수형) 사이에 섰고 ... 화석류나무(ההדסים 하-하다심) 사이에 선 여호와의 사자에게 고하되 우리가 땅에 두로 다녀 보니 온 땅이 평안하여 정온(靜穩)하더이다
식물 해설
성지에 초막절이 가까워지면 골목 어귀에 종려나무 가지가 수북하게 쌓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주민들이 초막을 지을 수 있도록
무료로 공급되는 초막 재료이다. 느헤미야서는 초막을 지을 수 있는 재료로 종려나무와 화석류(花石榴) 등 5종류의 나무를
열거하고 있으며, 그중에서 화석류는 향기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화석류는 귀한 나무이기 때문에 실제로 초막에 사용되는 모습은 보기
어렵다. 이사야 선지자는 ‘너희는 여호와를 찾을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 55:6)’고 말한 후
“우리가 그를 부르면 질려(쐐기풀)가 자라던 땅에서라도 화석류가 날 것”이라고 하였다.
쐐기풀
대신 향기로운 화석류가 자란다는 것은 큰 축복을 의미한다. 스가랴에게 나타나신 여호와의 사자는 화석류 나무 사이에 서 있었고,
스가랴는 이 환상에 힘입어 성전을 재건할 수 있었다. 화석류나무를 석류나무로 오해하는 사람이 있으나 이는 완전히 다른 나무이다.
그리고 일부 성경에 소귀나무로 번역되어 있으나, 역시 다른 나무이다. 성지에서
본 화석류 화석류는 약간 건조한 지역에서 잘 자라며 꽃, 잎, 줄기에서 좋은 향이 나므로 향수의 원료나 차(tea)로
이용된다. 유대 처녀들은 남자 친구를 만나러 갈 때 신발 속에 이 잎을 넣어 갔다고 한다. 걸을 때마다 잎이 비벼져 향기가 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네오트 캐두밈 성서식물원 계곡에서 볼 수 있으며, 지중해 연안에는 한 종류뿐이지만, 남아메리카와 호주에서는 100여종이 자란다.
식물 모양화
화석류는 키가 3m 정도 자라는 관목으로서 가지가 많이 난다. 잎은 1~2cm이며, 마주나거나 나선형으로 빽빽하게 달린다. 장타원형의 피침형(披針形)잎은 뾰족하며, 가죽질이고 매끄러우며 점들이 나 있다. 꽃은
잎겨드랑이에서 하나씩 나고, 지름은 1.5cm 정도이다. 취산화서이며 꽃자루는 길다. 5개의 꽃받침과 5개의 꽃잎을 가지며,
흰색으로 핀다. 수술은 꽃잎보다 배나 긴 것이 많이 나며, 암술대는 실 모양으로서 수술보다 짧고 암술머리도 작다. 씨방은 꽃받침 아래에 붙어 있고 씨앗이 2~3개의 방에 많이 들어 있다. 장과(漿果)는 0.8~1cm이고 검은빛이 도는 파란색이다.
08-19-2023(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의 큰 날(스바냐 2:14)
스가랴 개요
1. 서론 :
모든 성경들은 본서의 중심인물인 ‘스가랴’를 표제로 삼았으며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 란 뜻이다. 학개가 성전재건을 통한 현실적인 회복에 대해 말하고 있다면, 스가랴는 성전 재건의 의미에 관한 메시아적 비전과 소망에 대해 말하고 있다.
2. 저자 :
전통적으로 스가랴를 저자로 인정하며 구약성경에 29명의 동일 인물이 등장할 정도로 흔한 이름이었다. 1-8장과 9-14장 사이에 나타나는 차이점들로 인해 저작권 논쟁이 치열하다.
3. 기록시기와 시대적 배경 :
학개와 스가랴는 동시대에 활동하면서 비슷한 주제의 메시지를 선포했다. 스가랴서의 기록 시기는 성전 재건 이전(1-8장)과 이후(9-14장)로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는 스가랴 선지자가 처음 계시를 받은 다리오 왕 2년, B.C.520년(1:1)에서 부터 다리오 왕 4년, B.C.518년(7:1)까지 2년에 걸쳐 기록되었다. 그러나 후반부에는 기록시기를 짐작할 만한 아무런 단서가 없으며 성전 재건 후 선지자 말년 B.C.480-470년경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4. 기록목적 :
회의주의와 개인주의에 빠진 포로귀환 공동체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회복시켜 주심을 믿음으로 성전 재건을 독려하기 위해 기록하였다. 악한 지도자들을 폐하시고 참된 선한 목자를 세우심으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실 것을 말한다. 장차 오실 메시아의 영광스러운 왕국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므로 소망을 주려는 목적으로 기록하였다.
5. 구조 :
초 점
8개의 환상
4개의 교훈
2개의 예언
구 분
1:1-6
1:7-6장
7-8장
9-11장
12-14장
소명
(돌아오라)
환상
금식에 관한
교훈
고난 받는 목자
메시아 왕국의
도래
주 제
이스라엘의 정화와 회복
금식보다 순종이 중요
고난 받고 버림당하는
메시아
시점
과거와 현재
미래
핵 심
구 절
9:9-10
6. 8가지 환상과 의미 :
환 상
의 미
관련구절
홍마 탄 사자
시온과 그 백성들을 회복시키실 것임
1:7-17
네 뿔과 네 대장장이
이스라엘을 압제한 자들을 심판하심
1:18-21
척량 줄을 쥔 사람
예루살렘을 보호하시고 영화롭게 하심
2:1-13
대제사장 여호수아
장차오실 싹(종)에 의해 정결케 되고 회복될 것
3:1-10
순금등대
하나님의 영이 스룹바벨에게 능력을 주실 것
4:1-14
날아가는 두루마리
도둑질하는 자, 거짓 맹세하는 자들이 심판받을 것
5:1-4
에바와 여인
죄와 반역이 이스라엘에서 바벨론으로 옮겨 갈 것
5:5-11
네 병거
온 땅위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
6:1-8
7. 메시아에 대한 예언 :
이방 민족을 심판하고 언약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메시아적 왕을 세울 것을 말한다.(9:1-8) 메시아적 왕은 정의를 시행하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한 마음을 가진 자이시며, 화평을 전하는 자이다.(9:9-10) 거짓 목자들로 인해 고난을 당하는 백성들을 위해 메시아적 목자를 보내 주시지만 백성들이 그 목자를 배신하고 버릴 것이라고 말한다.(10-11장) 묵시적 표현들 상당수가 요한계시록의 언어 속에서 재현되고 있다.
8. 중요 메시지 :
학개서가 성전 재건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책이라면 스가랴서는 성전 재건을 다양한 환상과 예언을 통해 묘사하고 있다. 다양한 어려움으로 힘들어 하는 포로귀환 공동체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구원과 회복이 반드시 성취될 것임을 선포한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금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온전히 지키며 정의롭고 자비롭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신다. ‘그 날에‘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열방을 심판하고 메시야 왕국을 세울 것이라는 미래적 소망을 제시한다.
9. 결론 :
포로귀환 공동체처럼 회의주의와 이기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언약의 공동체 안에서 좋은 목자가 세워지길 기도해야 하며 자신도 좋은 양떼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종말에 악한 무리는 심판을 받을 것이며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게 됨을 소망하며 형식적인 삶을 떠나 정의롭고 자비롭게 살아가야 한다.
■ 학개서의 이름
학개서는 성전건축에 관한 책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은 선지자의 이름을 따라 ‘학가이’(יגח: ‘축제, 잔치, 나의 기쁜 향연’)이라고 했습니다.
70인역 성경(Septuagint)의 이름은 ‘악가이오스’(ΑΓΓΑΙΟΣ)입니다.
한글성경도 선지자의 이름을 따라 ‘학개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 학개서의 저자와 기록연대
학개는 선지자 스가랴와 총독 스룹바벨과 같은 시대에 활동하던 선지자입니다(1:12, 13, 2:1, 20).
학개서의 기록연대는 페르시아 왕 다리오 1세(주전 522-485)가 팔레스틴을 통치하던 시기입니다.
■ 학개서의 기록목적
기록목적을 요약하면, ① 일어나 성전을 재건하라는 것을 알려 주고, ②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의 안일함을 책망하고, ③ 새로운 용기와 격려를 주기 위한 것입니다.
■ 학개서의 주제와 중심사상
학개서의 주제는 ‘성전을 재건하자!’는 것입니다.
중심사상은 ① 하나님께 대한 예배생활이 모든 삶의 우선이며, ② 그리하면 축복과 번영이 오리라는 사상입니다.
2. 학개서의 본론(本論)
학개서는 포로생활 후에 예루살렘에 귀환한 백성들을 향해 “성전을 재건하여 하나님 경외하기를 소홀하지 말자!”라고 외쳤던 메시지입니다.
그의 메시지를 간략하게 구분하면,
1:1-15까지는 ‘성전을 재건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고(무관심에서 성전 재건으로), 2:1-9까지는 성전 재건을 하면 어떤
결과가 올 것인가라는 격려와 약속의 메시지(낙심에서 성전 재건으로), 2:10-19까지는 정결한 제물의 생활을 하게 되면 복이
임한다는 메시지(오욕에서 축복으로), 그리고 2:20-23까지는 스룹바벨에 대한 미래의 축복의 메시지입니다.
첫째, “성전을 재건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1:1-15)
(1) 2절에서 백성은 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라고 말합니까?
(2) 그들이 많이 뿌리는데 어떻게 수입이 적을 수 있습니까?
(3) 하나님은 백성에게 무엇으로 전(殿)을 건축하라고 말씀하십니까?
(4) 하나님의 전(殿) 역사가 어떻게 되어졌습니까?
Q.T.를 위한 신앙적 질문 -- 당신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귀중함을 아십니까? 하나님의 전에 나올 때 어떤 마음으로 나옵니까?
둘째, 성전 재건에 대한 격려와 약속의 메시지(2:1-9)
(1)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예수아)는 그 당시에 무슨 직책의 사람들이었습니까?
(2) 7절에 “만국의 보배”는 무엇을 가리킵니까?
(3) 9절에 “이 전(殿)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Q.T.를 위한 신앙적 질문 -- 당신은 어떻게 마음에 평강을 지속적으로 가질 수 있습니까?
셋째, 정결한 제물의 생활에 대한 축복의 약속(2:10-19)
(1)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모든 일들이 부정하다고 말씀하시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2) 하나님은 백성들의 완악함을 어떻게 표현하셨습니까?
(3) 하나님의 축복은 유다 백성들에게 어떤 모양으로 임합니까?
Q.T.를 위한 신앙적 질문 -- 당신은 삶에서 하나님의 축복의 비결을 깨달으십니까? 현재 당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축복이 무엇입니까?
넷째, 스룹바벨에 대한 미래 축복의 메시지(2:20-23)
(1)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진동시키고 열국의 보좌를 엎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 하나님께서 스룹바벨에게 복 주시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Q.T.를 위한 신앙적 질문 --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용하셔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당신은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께 당신을 드립니까?
3. 결론(結論)--학개서의 핵심적 교훈
학개서의 핵심적 교훈은, ① 성전 건축에 대한 나의 선입견을 수정해야 하며, ② 자신의 소유를 살피므로 영적 성전에 대한 건축도 가르칩니다.
*생활적용과 기도(祈禱)
1. 주님!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함과 거룩함으로 예배하게 하옵소서!
2. 주님! 우리에게 하나님의 한없는 평강 안에 거하게 하옵소서!
3. 주님! 우리로 하나님의 나라 자녀 삼아주심을 늘 감사하게 하옵소서!
*학개서가 예언하는 그리스도
1. 성전은 그리스도의 몸
2. 만국의 보배 (2:7)
08-17-2023(목)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만국의 보배(2:7)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I will shake all nations, and the desired of all
nations will come, and I will fill this house with glory,' says the LORD
Almighty.
만국의 보배(the desired of all
nations)
헤므다트 콜 학고임( חֶמְדַּת כָּל־הַגֹּויִם)
보배(2532) 헤므다(chemdâh) חֶמְדָּה
1. 바람, 2. 기쁜 것, 3. 기쁨
발음
/ 헤므다[ chemdâh ] 관련 성경 / 사모하는 자(삼상 9:20), 아끼는 자(대하 21:20), 은총을 입은 자(단 9:23), 귀한 땅(렘 3:19,
12:10), 은총을 받은 사람(단10:11,19), 보물(단11:38,43). [형] 좋은(창27:15, 단10:3),
보배로운(스8:27), 귀한(대하36:10, 렘25:34), 아름다운(사2:16, 단11:8, 나2:9),
기뻐하는(겔26:12). 보배의(호13:15, 학2:7). 구약 성경 / 16회 사용
만국(3605. 1471)
3605. 콜( kôl) כֹּל
1. 전체, 2. 모두, 3. 온통.
발음
[ kôl ] 어원 / 3634에서 유래 구약 성경 / 5408회 사용
* 3634. 카랄(kâlal) כָּלַל
1. 완성하다, 2. 왕관을 쓰다
발음
/ [ kâlal ] 관련 성경 / 온전하게 하다(겔 27:4, 11). 구약 성경 / 2회 사용
1471. 고이(gôwy) גּוֹי
1. 국민, 2. 이스라엘 사람들, 3.이스라엘 이외의 민족들
발음
/ [ gôwy ] 어원 / 1465와 동형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한 덩어리가 된다’는 뜻에서] 관련 성경 / 나라(창 10:5, 민 14:12, 시 83:4), 여러 나라(민 14:15), 민족(창 12:2, 신 4:34,
수 23:13), 고임(창 14:1), 만민(창 18:18), 백성(창 20:4, 수 3:17, 사 60:12), 국민(출 34:10),
족속(창 48:19, 출 33:13), 이방나라들(출 34:24, 레 26:33, 45), 주민(레 18:28, 합 2:8),
이방인(레 25:44, 느 5:8), 나라 사람(신 4:6), 무리(왕하 6:18), 이방 사람(왕하 17:8), 만국(대상 16:35),
만방(사 2:2), 대적(사 18:2), 조상(겔2:3), 이방 신(말 1:11). 구약 성경 / 556회 사용
* 1465. 게바( gêvâh) גֵּוָה
1. 몸, 2. 신체, 3. 욥 20:25.
발음
[ gêvâh ] 관련 성경 / 몸(욥 20:25). 구약 성경 / 1회 사용
만국의 보배(the desired of all
nations)가 무엇일까요?
보배(헴다트. חֶמְדַּת)는 문자적으로 '열망' 또는 '사모하는 것' 혹은 '귀중한 것'을 말합니다. 보배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그리스도(Jeromem R. L. Aldon)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전에 임하실 때 온전한 영광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임을 시사합니다.
둘째는 은과 금과 같은 귀중한 것(70인역, P. A. Verhoef, Von Orelli, Calvin) 만국이 가져오는 재물로 지은 하나님의 성전의 영광이 이전의 솔로몬이 지었던 성전보다 훨씬 더 영광스러울 것임을 시사합니다(9절).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로 상반된 것처럼 보이나 한 가지 흐름을 갖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성취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도래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본 구절의 '보배'를 그리스도로 해석하든 재물로 해석하든 간에 그것은 기독론적인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T. V. Moore).
때가 이르면 열방들은 그리스도를 고대하며 바라보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을 짓기 위해서 재물을 가지고 오게 될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스룹바벨 스가랴 4:6-10 6.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7.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어 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찌어다 하리라 하셨고 8.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9. 스룹바벨의 손이 이 전의 지대를 놓았은즉 그 손이 또한 그것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 10.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베드로전서 2: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베드로전서 2: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시편 118:22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새번역 / 또 내가 모든 민족을 뒤흔들어 놓겠다. 그 때에, 모든 민족의 보화가 이리로 모일 것이다. 내가 이 성전을 보물로 가득 채우겠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현대인 / 모든 나라를 뒤흔들어 놓겠다. 온 세상의 보물이 이리로 굴러들어올 것이며 내가 이 성전을 영광으로 충만하게 할 것이다.
공동번역 / 뭇 민족도 뒤흔들리라. 그리하면 뭇 민족이 보화를 가지고 오리니, 내가 내리는 영광이 이 성전에 차고 넘치리라. 야훼의 말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 재건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공사를 시작한 지 한 달이 채 못되어 공사는 또다시
중단됩니다. 그것은 이 성전의 위세가 솔로몬의 성전과 비교도 안 될 만큼 초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다시 학개를 통하여
비록 지금 짓고 있는 성전이 예전의 솔로몬 성전만큼은 못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더 크게 빛날 수 있음을 보여주면서 계속 재건해 나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학개가 전하고 있는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방법이 어떤 외형적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진실한 믿음에 있으므로 낙심치 말고, 실망치 말고 계속 성전을 재건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사실 인간의 판단은 그 대상의
외모를 기준 삼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스룹바벨 성전의 기초석이 놓여질 때 이전 솔로몬 성전의 위용을 기억하고 있던 많은
이스라엘의 원로들은 큰 슬픔과 실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나버린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때 학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고 하는 말씀은 계시의 점진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는 구속사의 관점에서 희망찬 메시지라고 하겠습니다.
결국 모든 것은 메시아가 이 땅에 오심으로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믿음으로 묻어놓고 이해되는 것을 자랑하며 내 삶의 자리가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이전보다 더 거룩하고 견고한 믿음의 반석으로 다져지기를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오 주여 오늘도 진실하게 하옵소서 늘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살믕의 임배로 마장차 도래할 메시아 사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부정한 과거의 죄악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그로 인하여 임하였던 재앙을 기억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백성이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함을 인하여 다시 그들에게 복을 내려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은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써 내려 주실 구원의 축복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신학주제]
계시의 점진성. 성전의 첫 유래는 모세 시대의 성막이었다. 그러다가 이것이 솔로몬 시대에 이르러서 고정적인 형태인 성전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신약 시대로 넘어와서는 교회 형태로 바뀌었다. 이것은 외형적인 면에서는 규모의 축소나 형태의 단순화일지는
모르지만 그 성전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성막이나 성전 가운데 영광으로 임하셨지만 신약으로 넘어와서는
그리스도가 친히 성전으로 임하신 것이다. 따라서 성전이 갖는 의미는 구약의 성전이나 성막보다도 그 의미 면에 있어서는 더 크다 할
수 있겠다. 따라서 구약의 성전처럼 건물이나 형태의 외형적인 면에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 신약의 성전은 건물의 의미를
초월하여 장차 메시야의 완전한 구원 사역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즉 신약의 성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심판의 날에
완전하고도 새로운 예루살렘의 형태로 임하셔서 성도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여기서 예루살렘이란 성과 성전의 의미를 둘 다 지니 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성전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는 성막보다는 성전에, 성전보다는 신약의 교회에 더 완전한 계시의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영적교훈]
본장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성전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심과, 또한 그가 성전으로 오셔서 우리들로 하여금 성전 중심의
삶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역시 성전을 통하여 성도들을 구원시킬 것이라는 사실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신약의 성도들은 무엇보다 성전 중심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Go up into the mountains and bring down timber and
build the house, so that I may take pleasure in it and be honored," says
the LORD.
전을 건축하라(build the house) 우베누 합바이트(וּבְנוּ הַבָּיִת)
전(1004) 바이트(bayith) בַּיִת
1. 집, 2. 장막, 3. 왕하23:7.
발음
/ 바이트 [ bayith ] 어원 / 연계형 בֵּית, 복수 어미활용 בָּתֵּיהֶם ,בָּתֵּיכֶם ,בָּתֵּינוֹ, 1129에서 유래한 약어로 보임 관련 성경 / 집(창 7:1, 레 14:35, 삼상 1:7), 권속(창 18:19, 레 16:6, 삼하 2:3), 궁(창12:15,
삼하7:2), 처소(창 24:31, 대하 5:7), 집 안(창27:15, 시55:14),전(출 34:26, 신 23:18),
옥(창 39:20, 삿 16:21,왕하 25:27), 간수장(창 39:21), 궁중(창 45:2,왕하 21:33, 에 7:8),
가족(창 5:22, 신11:6, 시 68:6), 족속(출 2:1, 레 22;18, 수 17:17), 식구(출 12:3),
안쪽(출 28:26), 가옥(레 14:55, 신 19:1, 사 5:8), 친정(레 22:13), 종족(민 1:2, 대상7:4),
지도자(민 25:14), 지파(수 22:14), 신전(삿9:4,왕하19:37, 대상10:10), 신당(삿17:5),
궁내(왕하10:5), 성전(왕하16:18, 대상29:3), 창고(왕하20:13), 궁궐(왕하 21:18, 대상 14:1),
성막(대상 9:23), 궁전(대상 17:1), 곳간(대상 26:15,사 22:8), 반열(대상 28:13), 내전(內殿)(대하3:13),
무더기(욥 8:17), 가산(욥 20:28), 국고(사 22:15), 딸(사 10:32), 부엌(겔 46:24), 집(미 2:2). 구약 성경 / 2036회 사용
건축하라(1129) 바나(1129) בָּנָה
1. 짓다, 2. 왕상 6:15, 3. ~위해 집을 짓다 / 렘 24:6
발음
/ 바나[ bânâh ] 관련 성경 / 쌓다(창 11:5, 신 27:5, 애 3:5), 건축하다(민 32:37, 대하 6:2, 느 2:18),
만들다(신 20:20, 겔 27:5, 창 2:22), 세우다(룻 4:11, 왕상 11:38, 렘 45:4), 증축하다(대하 27:3),
짓다(욥 27:18, 전 2:4, 렘 35:9), 건설하다(시 122:3, 사 25:2), 건축되다(겔 36:33, 잠 24:3, 슥 1:16),
번성하다(말 3:15), 얻다(창 16:2, 30:3), 복구시키다(사 44:26). [명] 건축(왕상 6:9), 건축자(왕상 5:18,
스 3:10). 구약 성경 / 373회 사용
전을 건축하라는 말씀은 선지자 학개의 첫 번째 설교로서 포로 귀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성전 재건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을 말합니다.
당시에 바벨론 포로생활에서부터 고향으로 돌아왔던 귀환자들에게 심각한 문제는 여호와를 사모하는 열정은 식었고 무기력하여 현실에 안주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선지자 학개를 통해 영적 각성 운동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삶의 중심인 성전을 재건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으로 성전을 재건하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전하는 전반부(1-11절)와 그 지시에 백성들이 순종하였음을 보여 주는
후반부로 내용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12-15절).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유다 백성들은 현실적인 어려움을 핑계로 성전 재건 사역을 미루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신앙을 책망하시며 그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재앙이 임하게 되었음을 말씀하셨고,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의 마음을 자극하여 성전 재건 사역을 감당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성전은 이 땅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성전 자체가 하나님은
아니었으나 성전은 하나님을 상징하는 공간적 위치로서 신앙의 확신과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오늘날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고 영접한 그리스도인이 곧 성전이라고 하셨습니다(고전 3:16-17, 6:19).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은 내가 있는 그 자리가 곧 거룩한 성전이 세워진 장소라는 것을 명심하고 내 삶의 주위를 거룩한 땅으로 회복시켜야 할 의무와 책임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도 내가 세워야 할 성전을 바르게 세워 주위 사람들에게 삶의 최종 목표가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영적 경고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런 사실을 볼 때 성전도 결국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의미를 지닌 예수의 모형이요, 그림자이며 예표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 성전은 그 유래가 모세가 시내 산에서 받은
성막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의 조건으로 이스라엘에게 십계명을 주시고 그것을 지키도록 명령하셨습니다. 한편
하나님께서 언약을 지키실 것임을 증거하는 표징으로 성막을 짓게 하셨습니다. 즉 성막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제나 함께하시며 영원히
보호하실 것임을 보장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막에서 모세를 만나시고 백성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성막과
성전도 단지 성막이 이동적 성격을 띠고 있는 반면 성전은 고정성을 띠고 있다는 것이 다르지만 그 이외의 의미는 같다고 하겠습니다.
본장에 나오는
성전은 이스라엘 역사상 세 번 건립되었으나 성경에서는 에스겔이 본 환상까지 합하여 네 개의 성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솔로몬
성전, 스룹바벨 성전, 에스겔 성전, 헤롯 성전 등이다. 결론적으로 이 성전은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께서는 성전의
머리로 신약에서는 매듭짓고 있다. 따라서 이 성전에 출입하는 성도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은 교회 즉 성전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곧 교회 밖, 즉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은혜의 시대 즉 신약을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은 성전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전은 우리의 구원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의 살아
있는 임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을 떠난 성도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성도들은 성전이 그리스도의
몸이듯이 우리 또한 그리스도의 일부분으로서 살아 있는 성전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성전으로서의 삶은 결코 오늘날
이야기하는 교회란 건물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성전으로서의 삶은 교회에서 행하는 예배와 봉사에 충실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의 모습을 본받는 삶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책망하셨듯이 바른 삶과 하나님을 믿는 참된 믿음이 있는 교회의 활동은 거짓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교회 생활만이
아니라 일상의 삶 속에서도 항상 성전으로서의 의식을 갖고 정결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 아모스(B.C. 760 / 북 여로보암2세 때) 호세아(B.C. 760 /북 여로보암2세 때) 요나(B.C.760 /북 여로보암2세 때)
유다 / 요엘(B.C.597 / 남 여호사밧 때) 오바댜(B.C. 848~841 / 남 여호사밧 때) 이사야(B.C.700~680 /아하스, 히스기야 때) 예레미야(B.C. 627~587 /남 요시야, 여호아하스,여호야김,여호야긴,시드기야 때) 다니엘(B.C. 605년의 1차 포로 / 남 여호야김,여호야긴,시드기야, 느부갓네살 때) 에스겔(B.C.597년의 2차 포로 /남 여호야긴, 시드기야, 느부갓네살 때) 미가(B.C. 627-586 /남 아하스, 히스기야 때) 하박국(B.C. / 남 여호야김 때) 스바냐(B.C. 640~609 / 남 요시야, 여호야김 때) 나훔(B.C. 663~612 /남 요시야 때)
포로 귀환 / 학개(B.C. 520-519) 스가랴(B.C. 520-475) 말라기(B.C. 430 / 다리오 2세 때)
니느웨 /요나(B.C. 760 / 북 여로보암 2세 때) 나훔(B.C. 663~612 / 남 요시야 때)
1차 포로 / 다니엘(B.C. 605년의 1차포로 / 남 여호야김,여호야긴,시드기야, 느부갓네살, 고레스 때)
2차 포로/ 에스겔(B.C. 597년의 2차포로 /남 여호야긴, 시드기야, 느부갓네살 때)
에돔 / 오바댜(B.C. 848-841 /남 여호사밧 때)
통일왕국시대
사무엘 - 다윗에게 기름 부어 왕을 삼음 / 삼상 16:12 나단 - 다윗의 간음을 책망함 / 삼하 12:1-12 갓 - 다윗의 인구 조사를 책망함 / 삼하 24 11-19 아히야 - 여로보암에게 북이스라엘을 세울 것을 예언 / 왕상 11 : 29-39 앗도 - 솔로몬의 행적을 기록 / 대하 9:29
학개
구분
구약
분류
소예언서
장수
2장
기록 관련
기록자
학개
기록 연대(추정)
B.C. 520년경
기록 장소
예루살렘으로 추정
학개(Haggai)는 구약성경의 37번째 책으로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기록된 예언서다. '학개'라는 명칭은 '축제의, 절기의'라는 뜻이며, 기록자인 학개 선지자의 이름에서 따왔다.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어 본토에 귀국한 유다 민족에게 예루살렘성전 재건을 독려하는 것이 본서의 주요 내용이다.
기록자
본서의 기록자인 학개는 포로기 이후 유다에서 활동한 선지자다. 유다 민족을 독려해 스룹바벨 이후 약 15년간 중단되었던 예루살렘 성전 재건 역사를 마쳤다. 바사(페르시아) 왕 다리오 1세 제2년 6월부터(오늘날 8-9월에 해당) 9월까지 약 4개월간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했다.
작성 배경
바사 왕 고레스는
바벨론(신바빌로니아)을 정복한 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있던 유다 민족을 본국으로 귀환시키고 성전 건축을 명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백성들은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는 일에 착수하였으나 사마리아 사람들과 이방 민족의 방해로 중단되었다.[1] 이러한 상태는 약 15년간 이어졌다.[2] 다리오 1세 2년(B.C. 520년경)에 학개 선지자는 스가랴와 함께 백성들이 하나님 성전을 건축하는 일에 마음을 모으고,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자고 촉구했다. 모두의 노력으로 성전은 공사를 재개한 지 4년 만에 완공되었다.[3]
선지자 학개는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백성들이 열심히 일해도 궁핍한 이유가 하나님의 성전이 황무한 것을 보고도 자신들의 집만 돌보았기 때문임을 일깨웠다.
하나님의 뜻을 전해 들은 이들은 마음이 뜨거워져서 6월 24일에 성전 건축을 다시 시작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과 함께하시겠다고
격려하시고 새로 건축한 성전이 솔로몬 성전보다 영광스러울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더불어 이제부터 그들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바벨론 포로시대와 바벨론의 멸망
남 유다왕국이 망하면서 유대인들은 4차에 걸쳐서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1차 포로 / B.C. 605년에 다니엘을 포함한 왕족들과 귀족 계급이었고, 2차 포로 / B.C. 597년에 여호야긴 왕을 포함한 일반 백성들과 모든
방백들과 군사들 1만 명 외에 많은 기술자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3차 포로 / B.C. 586년에 예루살렘의 성전과 성이 최후로 함락될 때 시드기야 왕을 포함한
백성들이었습니다. 4차 포로 / B.C. 581년 바벨론제국의 느부갓네살 왕의 시위대장인 느부사라단이 마지막 남은 유대인들을 사로잡아
갔습니다.
그렇게 대부분의 유대백성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갔고 유대 본토에 남겨진 백성들은 극히 미천한 자들로 토지를 갈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자들은 불과 2만 명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멸망한 후 각처로 도망갔던 유대인들이 다시 모여 왔으나 황무해진 그 지역의 형편은 기아와 무법천지였습니다.
반면 바벨론으로 끌려간 자들에게 바벨론 정권은 비교적 많은 자유를 허락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집을 짓고 사업을 할 수도 있었으며, 관리에 등용되기도 하였습니다. 비록 성전은 없었지만 종교의 자유도 허락되어서 성전을 대신한
회당을 중심으로 그들의 신앙을 유지하며 민족의 흩어짐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런 환경에서 신앙과 민족의 순수성을 유지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유대인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남유대왕국의 사람들로서 유대지파와 베냐민지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왕국의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12지파 중의 나머지 10지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앗수르(앗시라아)에게 망하고 일부는 포로로 잡혀갔으나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앗수르는
북이스라엘 백성의 대부분을 강제로 자신들의 다른 영토로 이동시켰고, 남아 있는 자들에게는 이방 민족을 이스라엘과 혼합되게 하여
새로운 사마리아족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스라엘의 잊혀진 열 지파로 사라져 갔습니다.
바벨론제국에 포로로 있던 유대인들은 바벨론이 바사(페르시아)에게 망한 후, 바사제국의 고레스왕(고레스2세)이 유대인들의 귀환을 허락함에 따라 1차 귀환을 하였습니다. 그 때가 B.C. 538-537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도자는 스룹바벨이었습니다. 그 후 B.C. 457년 아닥사스다왕 때에 에스라를
지도자로 2차 귀환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B.C. 444년 2차와 같은 아닥사스다왕 때에 유대인 느헤미야가 유대지방의 총독이
되어 민족을 이끌고 3차 귀환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포로귀환 후 활동하던 선지자들은 학개, 스가랴, 그리고 말라기입니다.
바벨론제국이 B.C. 586년에 유대왕국을 멸망시키고 B.C. 538년에 바사에 의해 바벨론이 망하게 되는 그 사이에 인도지방에서는 불교의 석가모니가 태어나고, 중국에서는 유교의 공자가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리스에서는 지배계급인 귀족들에 대한 평민들의 불만이 폭력으로 귀족정치를 타도하고 평민에 의한 독재정권을 세우는 일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런 독재자를 참주라고 부르며 그런 정치를 참주정이라고 부릅니다.
그 참주정은 민주주의의 시효로 알려지는 그리스의 B.C. 508년의 민주정치의 도입까지 이어졌습니다. 민주주의(Demokratial)란 말은 민중(Demos)이 권력(Kratos)를 가지는 정치체제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벨론이 망하고 바사가 근동지역을 지배하던 때인 B.C. 509년에 유럽의 이탈리아반도에서는 로마의 공화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석가모니 출생 BC 564년 네팔 룸비니
공자 출생 BC 551년 노나라 취푸(曲阜)에서 떨어진 시골인 창평향(昌平鄕) 추읍(郰邑)에서 부친 숙량흘과 모친 안징재(顔徵在) 사이에 태어났다.
08-17-2023(목)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만국의 보배(2:7)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I will shake all nations, and the desired of all
nations will come, and I will fill this house with glory,' says the LORD
Almighty.
만국의 보배(the desired of all
nations) 모든 민족이 사모하는
새번역 / 또 내가 모든 민족을 뒤흔들어 놓겠다. 그 때에, 모든 민족의 보화가 이리로 모일 것이다. 내가 이 성전을 보물로 가득 채우겠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현대인 / 모든 나라를 뒤흔들어 놓겠다. 온 세상의 보물이 이리로 굴러들어올 것이며 내가 이 성전을 영광으로 충만하게 할 것이다.
공동번역 / 뭇 민족도 뒤흔들리라. 그리하면 뭇 민족이 보화를 가지고 오리니, 내가 내리는 영광이 이 성전에 차고 넘치리라. 야훼의 말이다.
[내용개요]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 재건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공사를 시작한 지 한 달이 채 못되어 공사는 또다시
중단되었다. 그것은 이 성전의 위세가 솔로몬의 성전과 비교도 안 될 만큼 초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다시 학개를 통하여
비록 지금 짓고 있는 성전만큼은 못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더 크게 빛날 수 있음을 보여주면서 계속 재건해 나가라는 메시지를
주셨다. 학개가 전하고 있는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방법이 어떤 외형적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진실한 믿음에 있으므로 낙심치 말고, 실망치 말고 계속 성전을 재건해 나가라는 데 있는 것이다. 사실 인간의 판단은 그 대상의
외모를 기준 삼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스룹바벨 성전의 기초석이 놓여질 때 이전 솔로몬 성전의 위용을 기억하고 있던 많은
이스라엘의 원로들은 큰 슬픔과 실망 속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나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 학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9절)고 하는 이
메시지는 계시의 점진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는 구속사의 관점에서 희망찬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이런
내용을 담고 있는 본장은 장차 성전에 임할 하나님의 영광을 알려 주며 성전 재건을 촉구하는 전반부(1-9절)와 이스라엘의 불순한
믿음을 지적하며 결국은 하나님이 축복을 주실 것을 전하는 후반부(10-23절)로 나눌 수 있다.
[강 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부정한 과거의 죄악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그로 인하여 임하였던 재앙을 기억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백성이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함을 인하여 다시 그들에게 복을 내려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은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써 내려 주실 구원의 축복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신학주제]
계시의 점진성. 성전의 첫 유래는 모세 시대의 성막이었다. 그러다가 이것이 솔로몬 시대에 이르러서 고정적인 형태인 성전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신약 시대로 넘어와서는 교회 형태로 바뀌었다. 이것은 외형적인 면에서는 규모의 축소나 형태의 단순화일지는
모르지만 그 성전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성막이나 성전 가운데 영광으로 임하셨지만 신약으로 넘어와서는
그리스도가 친히 성전으로 임하신 것이다. 따라서 성전이 갖는 의미는 구약의 성전이나 성막보다도 그 의미 면에 있어서는 더 크다 할
수 있겠다. 따라서 구약의 성전처럼 건물이나 형태의 외형적인 면에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 신약의 성전은 건물의 의미를
초월하여 장차 메시야의 완전한 구원 사역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즉 신약의 성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심판의 날에
완전하고도 새로운 예루살렘의 형태로 임하셔서 성도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여기서 예루살렘이란 성과 성전의 의미를 둘 다 지니 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성전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는 성막보다는 성전에, 성전보다는 신약의 교회에 더 완전한 계시의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영적교훈]
본장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성전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심과, 또한 그가 성전으로 오셔서 우리들로 하여금 성전 중심의
삶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역시 성전을 통하여 성도들을 구원시킬 것이라는 사실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신약의 성도들은 무엇보다 성전 중심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Go up into the mountains and bring down timber and
build the house, so that I may take pleasure in it and be honored," says
the LORD.
전을 건축하라(build the house) 우베누 합바이트(וּבְנוּ הַבָּיִת)
발음
/ 바나[ bânâh ] 관련 성경 / 쌓다(창 11:5, 신 27:5, 애 3:5), 건축하다(민 32:37, 대하 6:2, 느 2:18),
만들다(신 20:20, 겔 27:5, 창 2:22), 세우다(룻 4:11, 왕상 11:38, 렘 45:4), 증축하다(대하 27:3),
짓다(욥 27:18, 전 2:4, 렘 35:9), 건설하다(시 122:3, 사 25:2), 건축되다(겔 36:33, 잠 24:3, 슥 1:16),
번성하다(말 3:15), 얻다(창 16:2, 30:3), 복구시키다(사 44:26). [명] 건축(왕상 6:9), 건축자(왕상 5:18,
스 3:10). 구약 성경 / 373회 사용
전을 건축하라는 말씀은 선지자 학개의 첫 번째 설교로서 포로 귀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성전 재건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을 말합니다.
당시에 바벨론 포로생활에서부터 고향으로 돌아왔던 귀환자들에게 심각한 문제는 여호와를 사모하는 열정은 식었고 무기력하여 현실에 안주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선지자 학개를 통해 영적 각성 운동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삶의 중심인 성전을 재건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으로 성전을 재건하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전하는 전반부(1-11절)와 그 지시에 백성들이 순종하였음을 보여 주는
후반부로 내용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12-15절).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유다 백성들은 현실적인 어려움을 핑계로 성전 재건 사역을 미루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신앙을 책망하시며 그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재앙이 임하게 되었음을 말씀하셨고,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의 마음을 자극하여 성전 재건 사역을 감당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성전은 이 땅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성전 자체가 하나님은
아니었으나 성전은 하나님을 상징하는 공간적 위치로서 신앙의 확신과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오늘날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고 영접한 그리스도인이 곧 성전이라고 하셨습니다(고전 3:16-17, 6:19).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은 내가 있는 그 자리가 곧 거룩한 성전이 세워진 장소라는 것을 명심하고 내 삶의 주위를 거룩한 땅으로 회복시켜야 할 의무와 책임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도 내가 세워야 할 성전을 바르게 세워 주위 사람들에게 삶의 최종 목표가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영적 경고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런 사실을 볼 때 성전도 결국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의미를 지닌 예수의 모형이요, 그림자이며 예표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 성전은 그 유래가 모세가 시내 산에서 받은
성막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의 조건으로 이스라엘에게 십계명을 주시고 그것을 지키도록 명령하셨습니다. 한편
하나님께서 언약을 지키실 것임을 증거하는 표징으로 성막을 짓게 하셨습니다. 즉 성막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제나 함께하시며 영원히
보호하실 것임을 보장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막에서 모세를 만나시고 백성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성막과
성전도 단지 성막이 이동적 성격을 띠고 있는 반면 성전은 고정성을 띠고 있다는 것이 다르지만 그 이외의 의미는 같다고 하겠습니다.
본장에 나오는
성전은 이스라엘 역사상 세 번 건립되었으나 성경에서는 에스겔이 본 환상까지 합하여 네 개의 성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솔로몬
성전, 스룹바벨 성전, 에스겔 성전, 헤롯 성전 등이다. 결론적으로 이 성전은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께서는 성전의
머리로 신약에서는 매듭짓고 있다. 따라서 이 성전에 출입하는 성도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은 교회 즉 성전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곧 교회 밖, 즉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은혜의 시대 즉 신약을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은 성전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전은 우리의 구원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의 살아
있는 임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을 떠난 성도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성도들은 성전이 그리스도의
몸이듯이 우리 또한 그리스도의 일부분으로서 살아 있는 성전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성전으로서의 삶은 결코 오늘날
이야기하는 교회란 건물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성전으로서의 삶은 교회에서 행하는 예배와 봉사에 충실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의 모습을 본받는 삶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책망하셨듯이 바른 삶과 하나님을 믿는 참된 믿음이 있는 교회의 활동은 거짓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교회 생활만이
아니라 일상의 삶 속에서도 항상 성전으로서의 의식을 갖고 정결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모든 성경들은 본서의 중심 인물인 ‘학개’를 표제로 삼았으며 이름의 뜻은 ‘절기’ 혹은 ‘축제’ 이다. 하나님의 일을 미루고 자신의 삶과 일에만 치중하는 자들에게 성전 재건을 통해 가치관을 재정비하라고 권면한다.
2. 저자
전통적으로도 학개의 저작으로 보며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 선포했다는 내용이 여러 곳에서 언급되고 있다(1:1, 3; 2:1, 10, 20). 학개의 이름이 3인칭으로 서술되어(1:12-13; 2:12-14) 학개 저작 설을 부인하는 일부의 견해가 있다.
3. 기록시기와 시대적 배경
바벨론을 멸망시킨 고레스는 유다 백성의 귀환을 허락하는 칙령을 내려 1차로 스룹바벨의 인솔 하에 귀환하여 B.C.536년경 성전 재건에 착수하였다. 사마리아 사람들과 주변 이방인들의 방해로 2년 만에 중단되었다가 다리오 왕 2년(B.C. 520년)에 학개 선지자를 통해 다시 재개한다. 성전은 공사를 재개한 지 4년 만인 B.C. 516년(다리오 6년)에 완공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네 편의 메시지가 나오는데(1:1; 2:1,10, 20), 모두 날짜가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4. 기록목적
스룹바벨 이후 중단되었던 성전 재건을 독려하고, 다시금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으로 돌아오도록 격려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헌신과 희생하는 마음으로 성전을 건축하도록 격려하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는 삶의 우선권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심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5. 구조
초 점
성전재건
하나님의 언약회복
구 분
1장
2:1-9
2:10-19
2:20-23
첫 번째 설교
두 번째 설교
세 번째 설교
네 번째 설교
주 제
성전재건 촉구
재건될 성전의 영광
순종한 사람들의 복
위로와 약속
핵 심
구 절
[학]1:8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6. 성전의 역할
태초에 성전의 모델인 에덴동산을 창조하시고 아담을 통해 온 세상으로 확장되게 하였지만 불순종으로 성전의 기능이 파괴 되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과 언약관계를 맺고 함께하시며 만나주시는 것을 상징한다.(출 25:22) 성전은 죄를 사함 받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며, 완전한 성전이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현실화 되었다.(레 26:11, 요 2:21) 성전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백성답게 올바르게 살아가야 할 방법을 가르쳐 주는 역할을 한다.
7. 성전 재건의 중요성
포로 귀환 공동체의 삶이 피폐해진 이유는 자신들의 생존과 복지 문제를 해결하는데 최우선 가치를 가지고 성전 재건을 회피하였기 때문이다.(1:2-11) 성전 재건은 죄악으로 인해 멈춰버린 것 같았던 하나님과의 언약관계가 다시 회복되었음을 의미한다. 성전 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며 약속하신 언약적인 복을 주신다.
8. 중요 메시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생존과 번영에 대해 그것을 이루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말하고 있다. 잘못된 예배와 부정한 삶을 지적하고 성전 재건을 통해 바른 예배를 회복하도록 호소하고 있다. (2:10-19) 성전 재건은 이스라엘의 영광이 회복되는 것이며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평강을 누리는 것이다.
9. 결론
성도의 책임은 축복만을 누리는게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철저한 희생과 헌신이 있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성전 재건은 단절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의미하는 동시에 하나님 중심적 삶으로 복귀하는 것임을 천명한다. 성도들이 견지해야 할 삶의 최우선 순위는 하나님을 삶에 중심에 모시고, 성령을 따라 성전으로 살아가는 것임을 말한다.
우선순위(優先順位)
넉넉할 우, 먼저 선, 순할 순, 자리 위 어떤 것을 먼저 차지하거나 사용(使用)할 수 있는 차례(次例)나 위치(位置).
피터 드러커(P. Drucker) 훌륭한 경영자란 많은 일을 한꺼번에 처리하는 다양한 재능의 사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일을 복잡하게 만들거나 뒤죽박죽되지 않게 하고, 한 번에 하나씩 집중해서 처리하는 사람이다.
경영에서 한 번에 하나씩 집중해서 처리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방법은우선순위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우선순위를 결정하고 일하는 것이라고 했다.
우선순위란 많은 일 중에 무엇을 먼저 하고 무엇을 나중에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우선순위 문제는 경영분야 뿐 아니라 하루 일과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고, 우리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가름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리스도인의 순간적인 선택은 영원을 좌우하는 것이다. 우리 삶에 있어서 무엇을 우선순위에 두고 무엇을 뒤에 두고 사느냐에 따라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갈라진다.
선택이 필요한 이유
그러면 인생에서 무엇을 우선순위에 둘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이 왜 중요하고 필요한 것인가? 인생은 선택이다. 누구도 두 가지 모두를 동시에 할 수는 없고,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얻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선택은 불가피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둘 다를 가지려고 하지 말고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사람들은 하나님과 재물 둘 다를 가지려고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며 어리석은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것을 우리 인생에 적용할 수 있다. 여러 가지에 가치를 두지 말아야 한다. 하나는 가치 있게 여기고 하나는 덜 가치 있게 여겨야 한다. 더 가치 있는 것을 선택하기 위해서 덜 가치 있는 것을 포기하고 버려야 한다. 더 가치 있는 것을 위해 하나를 포기하지 못하고 다 가지려고 하면 둘 다를 잃게 된다. 년 초에 어디 놀러가고 즐기는 것도 하고, 영적인 축복도 받는 것 둘 다를 가질 수 없다. 우리는 영적인 축복을 더 가치 있게 여기기 때문에 즐기는 것을 포기하고 지금 저녁마다 집회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가지거나 모든 일을 다 할 수 없는 이유는 시간과 능력의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가치 있는 것을 가지기 위해 덜 가치 있는 것을 포기하는 지혜와, 더 가치 있는 일을 행하기 위해 덜 소중한 일을 뒤로 미루고, 시간과 능력이 되면 하고, 못하면 그 일은 포기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런 인생이 평생을 통해 모이고 모인 것을 성공적인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다.
계획성이 없고 닥치는 대로 살며, 인생을 뒤죽박죽으로 사는 사람은 결코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없다. 닥치는 대로 살고 인생을 뒤죽박죽으로 살아온 인생을 성공적인 인생으로 바꾸어 살려면 ‘우선순위를 수정하라’
하루 일도 닥치는 대로 하지 말고 뒤죽박죽되지 않게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중요한 일부터 하나하나에 집중하라. 한 해의 계획을 세우고, 한 달의 계획을 세우고, 한 주간의 계획과 하루의 계획을 철저하게 세우고 중요한 일부터 우선 순위에 두라. 1년 뒤에는 인생이 달라져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먼저 구할 것은 무엇인가?
마태복음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말씀은 먹고 사는 문제는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먼저 구할 것은 ‘하나님나라’라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먹고 사는 문제를 우선순위에 두고 더 가치 있게 여기고, 먼저 선택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나라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분 안에서 영원한
가치를 발견하고 세상의 가치를 포기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에 우선순위를
두고 사는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말도 안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듣고 말도 안 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런데 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듣고 그대로 사는 사람들 세상을 바꾸어 놓는다.
사실은 이 말도 안 되는 삶의 방법이 본래는 진리였고 정상적인 질서였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 하고 타락하면서 이 질서를 무시하고 반대로 살아왔다. 그 결과 세상은 뒤죽박죽이 되고 파괴되고 만 것이다. 세상에 가치를 두고 사는 것이 진리가 되어버렸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가 되어버렸다. 예수 그리스도는 본래의 질서를 회복시키려고 하다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찌걸인 죄로 죽임을 당했다. 그 후 수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복음을 듣고 세상의 가치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로 바꾸어 살기 시작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성경의 원리, 창조의 원리로 돌아가는 것이 우선순위를 수정하는 것이다. 우선순위를 수정하 면 뒤죽박죽이 된 우리 인생도 수정될 수 있다.
과거에 우리는 성공, 부, 출세, 재물을 인생의 우선순위에 두고 그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찾고 섬기는 우상숭배와 같은 인생을 살아왔다. 이제는 그 삶의 방법을 뒤집어 반대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 우선순위를 두고 시간, 노력, 재물, 성공을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를 위해 구하고 얻고 사용하는 삶의 우선순위를 수정하고 사는 삶이 바로 된 인생이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법이다.
그러면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원칙은 무엇인가?
이와 같이 우리 삶의 방법, 방향과 목적을 완전히 뒤바꾸어놓는 것은 무엇인가? 경제학자 피터 드러커는 ‘경영에 있어서 우선순위를 정하는 중요한 원칙은 효용성, 가치성’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제마다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우선순위도 다른 것이다. 가장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우선순위에 두고 사는 것이다.
삶의 가치가 삶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세상 사람들과 완전히 다르게 살게
하는 그 요인은 ‘가치’이다
세상의 성공과 출세, 부를 가치로 여기는 사람은 명예, 돈, 권세, 출세를 얻는데 우선순위를 두고 거기에 모든 것을 쏟고 투자한다. 명예, 돈, 권세, 성공이 모든 인생을 바치는 제단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구원과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이 그분의 가치였기 때문에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죽임을 당하셨다. 자신의 목숨 보다 인류구원이 우선이었던 것이다. 그 제단에 그분의 생명을 바치고 피를 쏟은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가치는 바로 예수의 십자가이다
십자가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구원과 영생을 얻게 한다
최고의 가치는 십자가의 복음이다
십자가의 복음만이 세상을 구원하고, 사람을 변화시키며 주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한다
이 땅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며, 굶주리는 자들에게 양식을 나눠주는 구제이다
하나님은 이런 일에 재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시고 그분의
자녀들에게 공급해주신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인생 전부, 모든 재물을 가장 가치 있는
일을 우이해 바치는 거룩한 제단이 있어야 한다
다른 헛된 제단에 인생을 허비하고 사는 것은 마귀에게
바치는 인생이다
기독교는 세상에 말씀을 전파하여 인생을 허비하는 사람들의
잘못된 우선순위를 바르게 수정하고 가장 가치 있는 삶을 살
도록 도와주는 종교이다
집에 불이 났다. 그 집의 안주인은 겁에 질려 홀로 뛰쳐나왔다가 갑자기 불 속으로 다시 뛰어 들어가 귀중품이 들어 있는 보석 상자를 안고 나왔다. “아, 이제 살았다. 귀고리, 목걸이, 팔찌, 모든 보석을 다 찾았다. 참으로 다행이다”고 외쳤다. 그때 사람들이 “저기 보세요. 아이들이 창가에 있어요”라고 외쳤다. 보석 상자를 들고 나온 여인은 그제 서야 정신을 차리고 “내 아이들! 내 아이들!”하고 소리치며 발을 동동 구르며 몸부림을 쳐보았지만, 불은 아이들의 생명을 삼켜버렸다. 가치관이 올바르면 큰 것을 얻게 되지만, 가치관이 올바르지 못하면 인생의 소중한 것을 다 잃고 망치게 된다.
사람들이 무시하고 사는 우선순위의 중요성
신학자 존 네이스빗은 “우선순위를 잘못선택하면 삶의 목표에서 멀어진다”고 했고,
찰스 휴멜은 “우리들이 삶에서 만나는 온갖 딜레마들은 시간과 물질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일의 우선순위를 잘못 선택함
에서 온다”고 주장했다.
혼란스러운 인생을 사는 사람들의 문제점 하나는 우선순위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 삶이 혼란스럽고 뒤죽박죽이라면 삶의 우선순위가 잘못 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삶의 우선순위가 바로 수정되면 뒤죽박죽이 된 인생에 혼란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바로 설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오늘 결정하고 평생을 살아야 할 우선순위는 무엇인가?
첫째, 예배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야 한다
요한복음 4:23- 24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하나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지금 찾고 계신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먼저 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다. 아브라함이 결정적인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있었다. 백세에 얻은 외아들을 제물로 드리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아브라함에게 우선순위는 아들보다 예배와 순종이었다. 그랬더니 결과는 믿음의 조상이 되는 영적인 축복도 받고 후손의 축복을 받아 최고의 명문가가 되었다.
부모들이 ‘공부해서 남 주나 다 네 잘되라고 공부하라는 것이지’라고 하면서 아이들에게 주일예배보다 공부와 성적과 성공에 우선순위를 둔다. 그러나 주일 예배에 우선순위를 두고 공부하는 아이들은 예배에서 말씀에 은혜를 받고 자기 잘되려고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해서 남 주려고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아이들을 축복해주시는 것이다. 지금 성적이 좋거나 별로 안 좋은 것 가지고 아이들의 미래를 예단 할 수 없다
우리는 남 주려고 열심히 공부하고, 남 주려고 열심히 일한다. 이게 우선순위가 바로 되어 있는 인생을 사는 것이다. 우리가 주일 예배를 우선순위에 두고 살면 하나님도 여러분의 일을 우선순위에 두고 도와주시는 것이다.
오늘 새해 첫 주일을 맞아 우리가 결정할 것이 있다. 어떤 일보다 주일 예배를 우선으로 정하고 일 년 동안 어떤 일이 있어도 주일예배 빠지지 맙시다. 그러면 새해에는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
둘째, 사명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야 한다
사도행전 20:23- 24 오직 성령이 각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우리가 존경하는 사람들은 자기중심으로 살지 않고 사명을 따라 살고 움직인 사람들이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자신의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극한 상황에서 자신의 생명보다 주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사명을 따라 갔다.
하나님이 어느 날 닭, 개, 돼지를 불러 “너희들은 인간 세상에 내려가 1년 동안 사람들을 위하여 봉사할일을 찾아 섬기다가 올라오라”고 하셨다. 이들이 1년 후에 돌아와서 하나님께 보고하였다. 맨 먼저 닭이 입을 열었다. “하나님, 세상에 가보니 사람들이 시간을 몰라 사는데 어려움이 있는 것을 보고 매일 새벽마다 ‘꼬끼오’하고 소리를 내 시간을 알려주었습니다.” 듣고 계시던 하나님이 너무 기뻐서 닭에게 벼슬을 하나 주셨다. 그게 닭 벼슬이라고 한다.
그 다음엔 개가 보고를 한다. “하나님, 제가 세상에 가보니 도적이 하도 많아 사람들이 불안해하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보이는 사람이 나타나면 ‘멍멍’하며 짖어서 집을 지켜주었습니다.” 개의 이야기를 들으신 하나님은 너무 기뻐서 개에게 다리를 하나 더 주셨다고 한다. 본래 개는 다리가 세 개뿐이었는데 다리 하나를 더 주셔서 네 개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가끔 보면 개들이 쉬를 할 때 한 쪽 다리를 든다고 한다. 하나님이 주신 다리라며 들어서 자랑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돼지가 보고를 한다. “저는 세상에 가서 보니 세상에 별 할 일이 없어서 매일 먹고 자고 놀다가 왔습니다.” 돼지의 이야기를 다 들으신 하나님은 노하시면서 “여봐라, 저 돼지의 주둥이를 치라!”고 하셨다. 그래서 돼지는 다른 짐승과는 달리 주둥이가 없고 코와 입이 붙어 있어 보기가 좀 우습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 조국 이스라엘 국회가 만장일치로 이스라엘 대통령으로 추대키로 결정하고 대통령이 되어줄 것을 제의 했을 때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물리학을 가르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라고 하면서 정중하게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사명을 선택한 것이다.
모든 피조물에는 사명이 있다. 성공적인 인생은 무슨 유명인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명을 발견하고 그 사명대로 충실하게 사는 인생이다.
셋째, 하나님의 것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야 한다
말라기 3장에 보면 하나님의 것에 우선을 두지 않고 주의 것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한 백성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유다가 멸망한 이유 중에 하나가 십일조 문제였다고 말라기 성경은 밝히고 있다. 십일조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 중요한 교훈이 여기에 있다.
첫째 이유는 십일조는 하나님의 명령 둘째는 십일조는 하나님의 은혜
십일조가 하나님의 은혜인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것이기에 하나님이 다 요구하신다 해도 할 말이 없고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것인데 하나님은 십분의 일만 드리라고 하시니 십일조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십일조가 은혜인 두 번째 이유는 우리는 하나만 드렸는데 하나님은 열을 다 받으시는 것처럼 받으시기 때문이다
셋째는 우리가 하나만 드리면 하나님은 나머지 아홉을 지켜주시고 보장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 십일조는 무거운 짐이나 고통이 아니라 십일조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재산을 지켜주는 큰 은혜의 약속이 있다
십일조는 우리를 망하지 않게 지켜주는 하나님의 전략이요 최고의 방패이다
하나님 우선으로 사는 삶의 결과는 무엇인가?
우리가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나라에 두고 살면 우리가 먹고사는 문제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누가 책임져주는가? 무슨 보장이 있는 것인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우선순위를 수정하고 살면 영생도 주시고 땅의 것도 다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닥치는 대로 살고, 인생을 뒤죽박죽으로 살면 영생도 얻지 못하고 땅의 것도 다 잃는다는 것이다.
미국에 구두를 만들어 돈을 엄청나게 번 브라운이라는 분이 있었다. 어느 날 목사님이 구두로 성공한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제 성공의 비결은 우선순위가 분명하였습니다. 저는 매사에 첫째는 하나님, 둘째는 가정, 그리고 셋째는 구두였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모든 것을 형통하게 하여 주셨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지금 인생을 바꾸어 살고 싶은가? 가치관이 변하지 않고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지 않는 한 어떤 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며, 아무리 기도를 하고 좋은 계획을 가지고 있어도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이제 무엇에 가치를 두고 살 것인가를 결정하고 우선순위를 바로 수정하여 그 우선순위를 따라 살면 인생이 바뀌고 운명이 달라질 것이다.
스바냐(Zephaniah)는 구약성경의 36번째 책이다. 선지자 스바냐가 기록했으며 요엘이나 아모스와 마찬가지로 '주의 날(여호와의 날)'을 주제로 하는 예언서다. 경건치 못한 자는 심판을 받지만 혼란하고 부패한 현실 속에서도 신실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규례를 지킨 자들은 구원받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1]
스바냐서 기록자
스바냐는 유다 왕 히스기야의 현손(고손자)으로 왕가 출신이며, 요시야가 집권하던 때 활동했던 선지자다.[2] 우상 숭배에 빠진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되돌리는 일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작성 배경 및 시기
스바냐서는 요시야왕이 통치하던 초기에 기록되었다. 당시 히스기야왕이 죽은 후에 므낫세왕은 히스기야가 무너뜨린 바알 제단을 다시 지었다. 그 아들 아몬은 범죄의 정도가 더했다. 뒤이어 요시야가 왕이 되었을 때 유다 사회는 극심한 우상숭배와 사회적 부패로 매우 혼란한 상황이었다.
유다에 만연한 우상숭배를 질책하는 내용으로 보아 본서는 요시야왕이 종교개혁을 단행하기 이전에 기록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앗수르(앗시리아)의 수도인 니느웨(니네베)에 대한 심판도 언급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니느웨 멸망(기원전 612년경) 이전의 기록으로 추정된다.
스바냐의 내용 구성
1장
유다에 대한 심판
2장
이방 나라에 대한 심판
3장
남은 자의 구원
스바냐서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숭배한 유다에 대한 심판과 블레셋, 모압, 암몬, 앗수르 등 유다를 괴롭힌 이방 나라의
멸망을 예언했다. 그러나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는 사람들은 심판의 날에 보호받을 것이며 대회로 인해 근심하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다시 모아 그들과 함께하시고 그들로 세상에서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도 함께 기록하고
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열왕기하 22장, 역대하 34-35장
요시야 왕
요시야는 여덟 살의 나이로 유다의 왕이 되었어요. 요시야는 주님을
사랑하는 선한 왕이었어요. 그는 자신의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주님께 순종하고 더이상 우상을 숭배하지 않게 돕고 싶었어요.
요시야 왕이 성장했을 때, 그와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을 수리하고 다시 아름답게 정비하기 시작했어요.
요시야는 힐기야에게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주님께 여쭈어보라고
했어요. 힐기야와 왕의 신하들은 훌다를 찾아갔어요. 그녀는 하나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충실한 지도자이자 여선지자였어요. 훌다는
요시야가 백성들이 순종하도록 도운 일로 주님께서 요시아를 기쁘게 여기신다고 말했어요. 주님은 요시야 왕이 평화롭게 살 것이라고
약속하셨어요.
예레미야는 요시야 왕 때(BC 627년) 부터 유다가 망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기까지(BC 586)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예레미야서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유다의 불순종과 그로 인해 닥칠 심판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부르시고,
예레미야는 유다를 향한 경고와 훈계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유대인들은 예레미야를 통해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대신
자신들이 듣고 싶은 말을 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따르며 예레미야를 박해합니다. 결국 유다는 바벨론에 망하고 유대인들은 포로로
잡혀가거나 애굽으로 망명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유대 뿐 아니라, 이웃 나라에 대한 경고도 하십니다.
다른 선지서와 비교하여, 예레미야서와 예레미야애가는 개인적인 삶과 힘겨운 몸부림을 깊고 자세하게 적고 있어,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라 불립니다.
08-15-2023(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불의한 자 (스바냐 3:5)
그 중에 거하신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치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간단 없이 자기의 공의를 나타내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 The LORD within her is righteous; he does no wrong. Morning by morning he dispenses his justice, and every new day he does not fail, yet the unrighteous know no shame.
불의한 자( the unrighteous) 불의한 자(5767) 아발(ʽavvâl) עַוָּל
1. 악한, 2. 사특한 자
발음
/ 아발[ ʽavvâl ] 관련 성경 / [명] 불의한 자(욥 18:21, 29:17, 31:3, 습 3:5), 악인(욥 27:7) 구약 성경 / 5회 사용
스바냐 3장
3:1-7. 하나님의 경계에 따르지 않는 유다 백성의 죄를 책망하다.
3:8-13. 의인에게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을 기다릴 것을 권하다.
3:14-20. 그들의 구원의 기쁨.
수치(1322) 보쉐트(bôsheth) בּשֶׁת
1. 수치, 2. 치욕, 3. 우상
발음
/ 보쉐트[ bôsheth ] 어원 / 어미활용 בָּשְׁתִּי, 95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수치(삼상 20:30, 시 70:3, 습 3:5), (낯이) 뜨거움(대하 32:21), 부끄러움(욥 8:22), 욕(합 2:10). 구약 성경 / 30회 사용
아니하며 / 로(3808) <lôʼ> לֹא
1. ~하지 않았다
2. ~하지 않을 것이다
발음
/ 로[ lôʼ ] 관련 성경 / 전무후무한(출 11:6), 풀리다(전 12:6). [명]무죄(호 8:5). [부] 틀림없이(욥 1:11), 진실로(렘 15:11) 구약 성경 / 5097회 사용
심판과 미래의 구원[습 3장]
하나님의 재앙과 심판이 그리고 그의 구원과 이에 대한 찬양이 함께 어우러져 소개됩니다.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패역과 탐욕에 대해 신랄하게 꾸짖으며 동시에 심판의 필연성을 강조합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도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통한 구원을 거듭 강조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양면성을 보여주셨습니다.
유다와 이방 국가들은 자신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멸망받게 될 것이지만 유다의 남은 자들은 결국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이 언급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들을 사랑으로 보호하시고 그들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신다는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죄악에 대해서 진노하시고 공의를 베푸시는 하나님은 한편으로는 그의 백성들에게 구원과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선지자를 통해 보여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은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열방 모든 민족에게도
포함됩니다. 뿐만 아니라 극한 환경과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구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심판을 집행하시는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회복시키는 하나님입니다.
악인들은 영원히
멸절되지만 그의 자녀들은 그의 은혜 가운데 회복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회개를
통하여 다시 그의 백성으로 인정받을 수 있으며 나아가 완전한 선민의 위치까지도 올라갈 수 있습니다. 회복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심으로 완전하게 성취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사랑의 극치요 구원의 완성임과 동시에 불완전한
세상을 완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불변적인 사랑을 보여 주신 것이며 이 사실을 믿는 한 신약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을 수 있으며 나아가 그의 완전한 축복의 자리까지 나아 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려운 시대에도 굴하지 않고 믿음으로 전진하려는 거룩한 사람들이여 이 믿음 더욱 굳세라는 찬양을 들으며 오늘도 믿음으로 승리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본장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첫째로 하나님의 구원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열방까지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한 백성뿐만 아니라 열방까지도 구원시키길 원하신다. 즉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통해 열방들이
깨닫고 구원에 동참하도록 역사하신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는 남은 자를 통해서 계속적으로 이루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의롭고 순전하며 하나님을 신실히 찾는 자들에게 구원의 축복을 베푸신다. 결론적으로 여호와의 날엔 하나님의 백성들이
즐거움의 절정을 맛볼 수 있게 된다. 여호와의 날은 구원의 회복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날이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날에는 심판과
응징이 사라지고 모든 대적들이 쫓겨나게 되며 모든 두려움은 사라지게 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그리스도로 인한 최후의 승리의 날까지
소망을 가지고 기쁨이 충만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남은 역사를 계속적으로 전개해 나가야 할 것이다.
앗수르제국
<앗수르제국의 영토>
분열왕국시대에 강력한 나라로 등장하는 앗수르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왕국들 중의 하나로 남방 왕국인
바벨론이 바그다드와 페르시아만 사이의 평지를 차지한 반면에 앗수르는 대체로 시리아 사막과 남쪽으로 베벨로니아와 북쪽과 동쪽으로
아르메니아 및 페르시아 산과 접경을 이루었습니다.
셈의 아들 앗수르의 후손인 이들은 족장 시대 이전에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바벨론 북쪽에 고대 왕국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유능한 왕이었던 다윗 왕 시대에 극도로 쇠약해 있었던 앗수르는 그 후 수도 니느웨를 중심으로 점차 그 세력이 강해지기 시작하였고 특히 북 왕국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물론 그 세력이 다소 약화되었던 여로보암 2세와 웃시야 왕 때에 이스라엘은 어느 정도의 힘을
발휘하여 자유를 찾아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기도 하였지만 앗수르 제국의 재건을 시도한 디글랏 빌레셋 3세와 뒤를 이은 살만에셀
5세의 공격으로, 결국 북 이스라엘왕국은 멸망하여 앗수르의 속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앗수르의 세력은 B.C.8세기에 황금 시대를 이루었으나 그 후 B.C. 612년에 신 바벨론에 의한 수도 니느웨의 함락과 동시에 멸망되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왕국에 대한 성경에 나타나는 앗수르의 위협을 살펴봅시다.
B.C. 853년에 살만에셀 3세는 앗수르 군대를 이끌고 아람 왕 벤하닷과 이스라엘왕 아합을 포함한 동맹군과 싸우러 왔습니다. 하지만 B.C.841년에 이르기까지는 이렇다 할 전과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아합은 이스라엘을 앗수르와 정면으로 충돌시켰습니다. 이때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하나의 속국으로 취급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값진 조공을 바치는 예후의 사절단이 살만에셀의 흑색 방첩탑에 나타나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치고 앗수르는 다메섹의 위협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지켜주는 관계로 이스라엘이 이웃나라 다메섹의 압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게 해주었습니다.
그것은 B.C. 800년경 요아스가 조공을 바치던 때에 앗수르의 출정한 기록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결과 이스라엘은 급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여로보암 2세와 유다 왕 웃시야는 그 뒤로 앗수르의 운명이 바뀌었을 때 남부
수리아와 팔레스타인의 주도권을 쥔 군주가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B.C. 745년에 이르러서는 디글랏빌레셀 3세가 앗수르 제국의 지위를 회복시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왕 므나헴은 조공을 바쳤으나 반앗수르 요인들로 인하여 그의 아들 대신에 베가가 왕으로 지명되었는데 얼마 안
가서 베가도 앗수르가 인정하는 호세아에게 왕위를 내어놓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호세아왕 때인 B.C.722년에 앗수르가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가므로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남 유다왕국에 대한 앗수르의 위협을 살펴봅시다. 북 이스라엘의 왕 베가의 반앗수르적인 태도는 남 유다의 왕 아하스로 하여금 앗수르의 품에 들어가 보호받게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유다왕 히스기야의 독립정책은B.C.701년에 있은 앗수르의 왕 산헤립의 무자비한 보복을
초래하였습니다. 이때로부터 므낫세는 바벨론에 강제로 끌려갔다 온 다음 앗수르에 줄곧 충성하였고 그로 인하여 오랜 기간의 통치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요시야는 앗수르가 안심하고 있는 틈을 타서 유다를 강화하였으나B.C. 609년 앗수르의 마지막 왕을 돕기 위하여 진군하던 애굽 군대를 저지하려다가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산헤립은 앗수르의 왕 사르곤2세의 아들로서 그 부친 사르곤이 살해되므로 앗수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바벨론의 엘람을 정복하고 B.C. 701년 서방 여러 나라를 원정하기 시작했으며, 유다왕 히스기야는 애굽에 원군을 청하여
앗수르에 도전하였습니다.
산헤립은 유다를 공격하여 46도시를 점령하고 200,150명을 포로로 데려갔습니다. 그러나 그 후
예루살렘 포위 작전때 전염병이 생겨 전쟁을 포기 하였습니다. 성경은 이 사건이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되어진 것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B.C. 681년 니느웨에서 산헤립은 그의 두 아들의 손에 암살 당하였습니다.
유대왕국의 멸망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간 경로>
애굽과의 갈그미스전쟁을 승리로 끝낸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은 B.C. 605년에 예루살렘을 공격하였습니다. 이때 느부갓네살은 유대의 여호야김왕의 목숨은 살려 주었지만 유대인들 중 일부를 바벨론으로 끌어갔습니다.
당시 유다의 왕 여호야김은 요시아왕의 둘째 아들로서 유대왕 여호아하스를 바로느고가 애굽으로 잡아가고 그 대신으로 왕으로 추대 되었는데 그의 본명은 엘리아김이었습니다.
그는 25세에 즉위하여 국민에게 세금을 많이 부과하였고, 애굽왕 느고에게 조공을 바쳤습니다. 그후 바벨론왕 느부갓네갈이 느고를 격파한 후에는 바벨론왕에게 조공 바쳤습니다.
당시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것을 신랄하게 비난하였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는 서기관 바륵을 시켜 모든 예언을 기록하게 하고 백성 앞에서 읽었으나 여호야김은 이 두루마리를 뺏어 불에 태우기도 하였습니다.
처음으로 바벨론에 끌려간 사람들 중에는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그리고 아벳느고가 있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로 유명한 사드락, 메삭, 그리고 아벳느고는 모두 바벨론식의 이름입니다.
사드락의 유대식 본명은 하나냐이며, 메삭의 본명은 미사엘이며, 아벳느고는 아사랴였습니다.
여호야김이 죽자 그의 아들인 여호야긴이 왕위를 이어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호야긴은 겨우 석 달 밖에 나라를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B.C. 597년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다시 예루살렘을 공격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조약을 어기고 자신의 나라를 배반한 유다를 징벌하기 위해서입니다.
여호야긴은 자기 모친과 궁궐에 있는 모든 사람을 데리고 가서 느부갓네살에게 항복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은 하나님의 전과 유다 왕궁에 있는 모든 기물들을 부수어 가져갔습니다.
그리고 바벨론의 대규모 공사에 동원될 많은 기술자들도 사로잡아 갔습니다. 이는 약 115년 전
히스기야 왕 때에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느부갓네살은 시드기야로 왕을
세웠습니다.
유다의 16대 왕인 요시야의 막내아들 시드기야는 제19대 왕인 여호야긴의 숙부였습니다. 그는 여호야긴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 조카를 대신해 바벨론 왕에 의해 유다의 20대 왕위에 오른 인물입니다.
시드기야의 원래 이름은 ‘맛다니야’로서 바벨론 왕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 이름을 바벨론식인
‘시드기야’로 고쳤습니다. 하지만 즉위 3년 뒤에 시드기야는 모압 암몬 두로 시돈 에돔 등 유다 주변에 있는 군소 국가들의 권유를
받고, 또한 친 애굽파인 신하들의 의견을 따라 애굽과 동맹을 맺고 바벨론에 대항하는 반바벨론 음모에 가담하였습니다.
당시는 예레미야선지자가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 선지자는 시드기야에게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바벨론과의 동맹을 깨뜨리지 말 것을 역설하였으나 헛수고였습니다. 결국 시드기야는 바벨론 왕의 노여움을 사게 되고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유다를 침공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습니다.
포위된 예루살렘은 1년6개월 동안을 힘겹게 버티다가 결국 성벽이 무너지면서 함락되었습니다. 이때 시드기야는 포위망을 뚫고 요단계곡쪽으로 몰래 도망치다가 여리고에서 붙잡혀 느부갓네살 왕 앞으로 끌려갔습니다.
거기서 시드기야는 모진 고문을 받고 두 눈이 뽑힌 채 쇠사슬에 결박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곳의 감옥에 갇힌 채 여생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성은 황폐화되고 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이 때가 B.C. 586년으로서 유대왕국이 망한 때입니다. 이로써 분열왕국시대가 끝이나고 바벨론
포로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의 통일왕국시대(B.C. 1095-975)와 분열왕국시대(B.C.933-722)로
이어지던 나라가 망하였습니다.
바벨론 포로시대
<바벨론 제국 영토>
북이스라엘왕국이 앗수르제국에게 멸망하고, 이어서 남유다왕국도 바벨론제국에게 멸망하므로서 이스라엘의 분열왕국시대도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바벨론에 유다왕국의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가 살던 70년을 ‘바벨론 포로시대’라고
분류합니다. 유다왕국의 사람들은 바벨론에 세 번에 걸쳐 포로로 끌려가는데, B.C. 605년에 1차 포로, B.C. 597년에
2차 포로, 그리고 B.C. 586년에 3차 포로가 끌려갔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살던 가나안지역은 바벨론제국의 총독의 통치하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간에 포로로 끌려간 곳에서 부름받은 선지자 다니엘과 에스겔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벨론제국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전 612년 바벨론와 메데의
연합군의 공격 앞에서 앗수르 제국의 수도 니느웨는 의외로 힘없이 무너졌습니다. 이로써 앗수르 제국 시대는 끝이 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의 새로운 패권자로 등장한 것이 바벨론 제국이었습니다. 이와 함께 메소포타미아의
중심축도 북부의 니느웨에서 남부의 바벨론으로 옮겨졌습니다. 사실 바벨론이 메소포타미아 역사에서 중심 역할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보다 약 1100년전에 바벨론에 유명한 왕이 등장했었습는데, ‘함무라비 법전’으로 인류 역사에서 유명한 ‘함무라비’ 왕이었습니다(B.C. 18세기).
함무라비 왕을 전후한 시대의 바벨론은 메소포타미아 지역 전체를 장악했던 권력의 핵심부였다. 그러나 그 세력은 오래 가지 못했고B.C. 1600년보다 약간 후에 헷왕국(힛타이트)의 침략을 받아 멸망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앗수르 제국이 차지해 오랜 기간 메소포타미아의 맹주가 되었던 것입니다. 함무라비 왕 시대로부터 약 1000년이 지난 후 바벨론의 영광의 날은 다시 찾아왔습니다.
역사가들은 과거 함무라비 왕 시대와 1000년 뒤에 일어난 제국 시대를 구별하기 위해서, 후자를 ‘신바벨론 제국’(Neo-Babylonian Empire) 시대라고 부릅니다.
이 신바벨론 제국의 역사는 그리 길지 못했습니다. 100년도 채 넘기지 못하고
단명했습니다(B.C. 626∼539년). 그러나 이 제국은 고대 어느 제국보다도 더 큰 권세와 영화를 자랑했습니다.
나보폴랏사르(Nabopolassar)왕에 이어서 등장한 느부갓네살(네부카드네자르 2세)왕은 제국 역사의 중심인물로서 구약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제국 역사의 절반이나 되는 40년이 넘는 기간에 메소포타미아의 절대적 제왕으로
군림했고(B.C. 605∼562년) 그의 이름 뒤에는 ‘왕’ 대신 ‘대왕’이라는 호칭이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 바벨론 제국은
B.C. 539년 벨사살왕 때에 바사(페르시아)의 고레스왕에게 망하였습니다.
앗수르제국, 바벨론제국 등 우리가 ‘제국’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그 제국이라는 말은 일개
국가를 훨씬 초월하는 막강한 지배력이나 권력을 표현할 때 사용합니다. 영어로 제국을 엠파이어(empire)로 표현하는데 그 기원은
라틴어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라틴어로 임페리움(imperium)은 권력이나 권한을 의미합니다. 그 말에서 최고사령관을
의미하는 임페라토르(imperator) 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말이 황제를 의미하는 엠퍼러(emperor)가 되었고, 그
황제가 지배하는 영역을 empire(제국)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영어의 황제라는 말이 엠퍼러(emperor)라면 독일에서는 황제를 ‘카이저’로, 러시아에서는
‘차르’로 불렀습니다. 카이저나 차르라는 말도 로마시대의 말 ‘카이사르’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로마시대에 율리어스
카이사르(시이저) 이후 카이사르는 황제를 뜻하는 호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에게 원로원이 존엄자라는 존칭인 ‘아우구스투스’라는 말을 쓰면서 그 후 황제를 칭할 때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한글 성경에 ‘가이사 아구스도’로 표현됨)로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08-14-2023(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수치를 모르는 백성(스바냐 2:1)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찌어다 모일찌어다. Gather together, gather together, O shameful nation,
수치를 모르는 백성(O shameful nation) 학고이 로 니크사프(הַגֹּוי לֹא נִכְסָף)
백성(1471) 고이(gôwy) גּוֹי
1. 국민, 2. 이스라엘 사람들, 3. 이스라엘 이외의 민족들
발음
/ 고이 [ gôwy ] 어원 / 1465와 동형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한 덩어리가 된다’는 뜻에서] 관련 성경 / 나라(창10:5, 민14:12, 시83:4), 여러 나라(민14:15), 민족(창12:2, 신4:34,
수23:13), 고임(창14:1), 만민(창18:18), 백성(창20:4, 수3:17, 사60:12), 국민(출34:10),
족속(창48:19, 출33:13), 이방나라들(출34:24, 레26:33,45), 주민(레18:28, 합2:8),
이방인(레25:44, 느5:8), 나라 사람(신4:6), 무리(왕하6:18), 이방 사람(왕하17:8), 만국(대상16:35),
만방(사2:2), 대적(사18:2), 조상(겔2:3), 이방 신(말1:11). 구약 성경 / 556회 사용
모르는(3808) 로(lôʼ) לֹא
1. ~하지 않았다, 2. ~하지 않을 것이다
발음
/ 로 [ lôʼ ] 관련 성경 / 전무후무한(출 11:6), 풀리다(전 12:6). [명]무죄(호 8:5). [부] 틀림없이(욥 1:11), 진실로(렘 15:11). 구약 성경 / 5097회 사용
수치(3700) 카사프(kâçaph) כָּסַף
1. 창백해지다, 2. 바라다, 3. 니팔형
발음
/ 카사프[ kâçaph ] 관련 성경 / 기다리다(욥 14:15), 찢다(시 17:12), 사모하다(창 31:30, 시 84:2). [명] 수치(습2:1). 구약 성경 / 6회 사용
개만도 못한 인간
현대
국어 ‘개새끼’의 옛말인 ‘개삿기’는 16세기 문헌에서부터 나타납니다. ‘개삿기’는 명사 ‘개’와 ‘삿기’가 결합한
합성어입니다. 한편 17세기에는 ‘가희삿기’의 예도 나타나는데, 이는 ‘개’의 옛말인 ‘가히’와 관형격 조사 ‘-의’, 명사
‘삿기’가 결합한 것입니다. ‘가히>개’의 변화에 따라 18세기 이후에는 ‘개삿기’로만 나타납니다. 근대국어 후기에 ㅣ모음
역행동화 현상에 의해 ‘삿기>새끼’의 변화가 일어남에 따라 ‘개삿기’도 현대 국어와 같은 ‘개새끼’로 변화하였다고 합니다.
(참고: 국립국어원 홈페이지 온라인가나다)
한편 조선시대 임금들도 개새끼(狗子/狗雛/狗兒)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며, 이는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욕설에 속한다고 합니다.
곰 같은 남자 : 곰 같은 여자
스바냐 1장에서는 유다에 대한 혹독한 심판의 심각성을 알리며 멸절하리라 전멸하리라고 선언했습니다. 스바냐 2장에서는 먼저 회개를 권고한 후에 유다의 이웃 나라들에 대한 심판을 선언합니다.
2:1-3. 회개의 권고.
2:4-7. 블레셋에 임하는 하나님의 형벌의 예언.
블레셋은 5부족의 수도인 가사, 가드, 아스글론, 아스돗, 에그론이라는 5도시 중심으로 운영되었습니다(수 13:3, 삼상 5:1-12). 그 도시마다 방백으로 번역된 지도자가 있어서 자치적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여호수아 13:1-3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이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의 남은 것은 매우 많도다
곧 애굽 앞 시홀 시내에서부터 가나안 사람에게 속한 북방 에그론 지경까지와 블레셋 사람의 다섯 방백의 땅 곧 가사 사람과 아스돗 사람과 아스글론 사람과가드사람과 에그론 사람과 또남방 아위 사람의 땅과
2:8-11. 모압, 암몬에 임하는 하나님의 형벌의 예언.
모압 : 근친상간에 의해 태어난 롯의 맏아들(창 19:37). 암몬 : 근친상간에 의해 태어난 롯의 둘째 아들(창 19:38).
(창 19:36, 킹흠정) 이와 같이 롯의 두 딸이 자기들의 아버지로 말미암아 아이를 배니라. (창 19:37, 킹흠정) 맏딸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는데 바로 그는 이 날까지 모압 족속의 조상이며 (창 19:38, 킹흠정) 작은딸도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벤암미라 하였는데 바로 그는 이 날까지 암몬 자손의 조상이니라.
2:12-17. 구스(에디오피아), 앗수르에 임하는 하나님의 형벌의 예언.
애굽 남쪽에 있는 땅인데, 수에네(=아스완, 겔 29:10)에서 남쪽으로 수단에까지 이른다. 그리스어 번역본(칠십인 역본)에서는 '에티오피아'라고 옮겼다. 창 10장에 나오는 민족들의 계보에서 구스는 한편으로 애굽(6절의 미스라임)과 밀접히 관련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 홍해를 넘어서서 - 아라비아와도 관련된다(7절의 스바, 하윌라, 라아마, 스바, 드단. 대하 21:16; 사 43:3; 45:14도 참조).
이와는 달리 8절의
구스는 주전 2,000년경 메소보다미아로 이주해 온 코커서스 기마 민족 '카시트' 사람들(바벨론 말로 '카스')을 가리키는
듯하다. 애굽 남쪽의 나라 구스의 수도는 나파타였는데, 주전 2,000년대에 구스는 여러 차례 애굽의 지배를 받았다. 주전
8-7세기에는 구스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애굽 통치권을 차지하여 그 세력으로 심지어는 앗수르 사람들에게 도전하기조차 했다(왕하19:9; 사 20장; 37:8-9).
그렇지만 애굽 사람들은 주전 6세기에 다시 제 나라의 주인이 된다. 구스는 계속 메로에를 수도로 하고 제사장 계층의 통치를 받는
독립적인 나라로 존속하다가 이 제사장 계층은 주전 3세기에 무너진다. 구스 사람들은 용병으로 애굽 군대에 들어 있었지만(대하 12:3; 14:8-14; 16:8; 렘 46:9), 또한 유다 임금을 섬기기도 했다(삼하18:21-23,31-32; 렘38:7-13; 39:15-18). 로마 시대에는 여왕들이 - 곧 태후*들이 - 간다게라는 칭호를 지니고 다스렸다(행 8:27). 옛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구스는 가장 먼 나라, 곧 세상 끝으로 통했다(에 1:1; 8:9에서는 '나일' 대신에 '구스'가 나온다). 그렇지만 거기까지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권능이 미치고(암 9:7; 사 11:11), 또 구스 사람들도 언젠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로 나아와서 그를 경배하게 될 것이다(사 18:7; 습 3:8-9; 시 68:31; 87:4. 행 8:26-39 참조). 관련용어 : 에티오피아
하나님께서 선민에게 분노의 날이 미치기 전에 자신들의 죄악을 뉘우치고 돌아오라고 권고하셨습니다(1-3절). 그리고 이스라엘의
멸망을 비웃고, 그들을 괴롭히며, 심지어 하나님을 무시하고 교만했던 이방 국가들을 향한 심판이 경고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심판받게
될 이방 국가는 블레셋과 모암과 암몬, 그리고 구스와 앗수르입니다.
습관적인 신앙생활은 교회에서는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하나님께 눈물로 회개합니다. 그리고 교회 밖에서는 또다시 과거의 삶과 똑같이
행동합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교회에서 내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들어주셨을 것이라고 믿고 안심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잘못된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겉모양)을 보는 것이 아니라 중심(심령)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기도의 내용을 보시고 듣는 것이 아니라 기도자의 마음에 진실이 있는가를 살피십니다. 따라서 자신의 회개에 걸맞는 행동이 없는 기도는 오히려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한마디의 기도보다 한번의 삶 속에서 자신의 죄악을 뉘우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변화될 때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용서하시며 참된 구원의 축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삶을 위하여 겸손하라고 권면합니다(3절) 겸손이란 영어로 험블(humble) 이라고 하며 히브리어로는 아나브(ʽânâv. עָנָו)라고 합니다. '아나브'를 예수님께서는 산상복음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팔복의 내용은 한 마디로 아나브라고 하겠습니다.
스바냐 2:3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겸손한 자들아(6035) 아나브(ʽânâv) עָנָו
1. 억압된, 2. 유순한
발음
/ 아나브[ ʽânâv ] 어원 / 603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온유한(민 12:3). [명] 가난한 자(욥 24:4, 시 9:12, 사 61:1), 겸손한 자(시 10:17,
사 11:4, 습 2:3), 온유한 자(시 25:9, 69:32, 76:9), 빈곤한 자(잠 14:21), 가련한 자(사 32:7). 구약 성경 / 21회 사용
발음
[ ʽănâvâh ] 어원 / 603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겸손(잠 15:33, 22:4, 습 2:3), 온유함(삼하 22:36). 구약 성경 / 7회 사용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찾으며(1245) 바카쉬(bâqash) בָּקַשׁ
1. 찾다. 2. 피엘형 בִּקֵּשׁ
3. 추구하다
발음
[ bâqash ] 관련 성경 / 구하다(민16:10, 대상4:39, 삼상13:14), 찾다(대하15:15, 왕상2:40, 렘50:20),
요구하다(느5:18, 사5:12, 잠15:14), 수색하다(시54:3,삼상26:20), 내다(전7:29), 묻다(단1:20,
창43:9, 삿6:29), 간구하다(대하20:4, 스8:21, 단9:3), 살피다(전7:25),
알아보다(전8:17),얻다(렘2:33, 잠11:27), 물어내다(창31:39),추종하다(레19:31), 벌하다(수22:23),
꾀하다(삼상19:2), 명령하다(대상21:3), 힘쓰다(잠17:11, 슥12:9), 따르다(잠18 : 1),
앙모하다(출33:7), 원하다(왕상10:24, 대하9:23), 걸식하다(시37:25). [명] 바라는 자(시69:6), 구하는
자(시105:3, 잠29:26), 찾는 자(잠28:5, 렘2:24, 겔34:6). 구약 성경 / 225회 사용
공의(6664) 체데크(tsedeq) צֶדֶק
1. 물리적인 의미에서 곧음, 2. 정의와 동일 레 19: 15, 3. 해방
발음
/ 체데크[ tsedeq ] 어원 / 666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공의(레 19:15, 시 15:2, 사 11:4), 의(욥 36:3, 시 4:1, 사 26:10), 정의(시 45:7,
48:10), 공평(시 98:9, 잠 2:9, 사 16:5), 의로움(사 45:8), 불의(렘 22:13). [형] 공평한(레 19:36,
욥 31:6, 겔 45:10), 공정한(신 25:15), 의로운(신 33:19, 잠 8:8). 구약 성경 / 119회 사용
* 6663. צָדַק스트롱번호6663
1. 올바르다
2. 정당한 이유를 가지다.
3. 창 38:26
발음
/ [ tsâdaq ] 관련 성경 / 옳다(창38:26, 욥27:5, 사43:9), 의롭다(욥9:15, 사45:25, 겔16:52),
정결하다(단8:14),의롭게 하다(잠17:15). [명] 의(사43:26, 사5:23), 의로움(렘3:11),
정의(삼하15:4), 공의(시82:3), 정직(창44:16). 구약 성경 / 41회 사용
정의(正義)와 공의(公義)
한글역본 성경들에 ‘정의’(正義)와 ‘공의’(公義)란 용어가 자주 나온다. 이 두 단어가 한 문장 안에 함께 나오는 경우도
허다하다(약 48회). 이 두 용어의 개념이 모호해서 한글역본들에서 서로 엇갈리게 번역된 경우가 많다.
아모스서 5:24
개역개정, 오직 정의 를 물 같이, 공의 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새번역, 너희는 다만 공의 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 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이
구절에서 ‘정의’와 ‘공의’가 개역과 새번역에서 서로 엇갈리게 번역되어 있다. 개역은 <미쉬파트>מִשְׁפָּט 를
‘정의’ 라고 번역했고 <처다카> צְדָקָה 를 ‘공의’ 라고 번역했지만 새번역은 그 반대로 번역했다.
창세기
18:19
개역개정, 공의 와 정의를 행하게 하려고
새번역, 옳고 바른 일을 하도록 가르치라는 뜻에서 한 것이다.
새번역은
이 두 용어들을 풀어서 의역하였다. 개역개정역에서 ‘정의’ 란 단어는 오경에서 다섯 차례 언급되며(창 18:25; 출 23:6;
신 10:18; 32:4, 41). 새번역 오경에는 ‘공의’ 란 역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정의’ 란 역어는 다섯 차례
사용했다(창 18:25; 출23:6; 신10:18; 32:4, 41).
이 두 단어는 우리말 성경에서 일관된 용어로 정립되어 있지
않다. 번역이 문맥에 따라 여러 가지로 다르게 나온다. 독자들은 종잡을 수가 없다. 더구나 한글 사전을 보아도 이 두 단어의 뜻을
서로 구별하기 어렵다.
‘정의’(正義)는 ‘사회나 공동체를 위한 옳고 바른 도리’ ‘공의’(公義)란 ‘공평한
도리’
히브리어 원어를 찾아보자.
‘의’ 또는 ‘공의’ 라고 번역되고 있는
<처다카>는 여성명사이고 남성으로는 <체데크>이다. 이 명사는 본디 나무 막대기를 가리켰다. 길고 짧은 것을
재어볼 때 막대기를 도구로 사용하다 보니 <처다카>는 ‘자’(尺)가 되었다.
더 나아가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에 대해서
판단을 할 때 그 판단의 기준이 되는 규범을 가리키는 용어로 발전하였다. 하나님의 백성은 행동할 때 판단의 기준이 되는 척도가 곧
<처다카 / 체데크>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애쓰는 사람은 ‘의인’ 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썼던
사람 노아는 ‘의로운’ 사람이었다(창 6:9). 아브라함이 늙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더니
주께서 그를 ‘의롭다’ 고 인정하셨다(창 15:6). 그렇게 본다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법적인 정의(justice)는
<처다카>가 아니다. 그래서인지 서방의 많은 성경학자들은 <처다카>를 righteousness 내지는
Rechtigkeit라고 번역한다.
사법적인 정의는 <미쉬파트>의 개념에 가깝다. <미쉬파트>는
‘재판하다’ 란 동사 <샤파트>의 명사형이므로 법정의 소송에서 사용되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영어로는 대개
justice, ordinance, judgment 라고 옮긴다. 우리말 역본들에는 ‘정의’, ‘율례’, ‘법규’, 등으로
번역했다. 고대사회에서는 오늘날과 같은 성문법 제도가 없었다. 지역사회에서 오래 전수되어오던 관습법을 중심으로 재판하였다.
관습법을 표현하는 <미쉬파트>란 용어가 성경에 채용되어 하나님의 통치를 표현하였다. 시내산에서 선포된
<미쉬파트>는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계약법이다. <후크>라는 단어와 함께 쓰여 <호크 우미쉬파트>란
상투어가 구성되었는데 ‘계약법’ 을 칭하는 표제가 되었다. <후크>는 대개 ‘규례’ 라고 번역된다.
<미쉬파트>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 공동체에서 통용되는 관습법이다.
<미쉬파트>는
하나님을 믿고 말씀을 준행하며 살려고 모인 말씀공동체의 관습법 <차디크>는 모든 생활에서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살려고 애쓰는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
<미쉬파트>는 <차디크> 없이는 실천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미쉬파트>와 <처다카>는 사람 사이의 윤리 도덕을 규정하는 세상의 법률을 넘어서서, 하나님을 중심으로
엮어진 인간의 공동체 내에서 이루어지는 규범에 관련된다. 하나님 나라의 ‘정의’ <미쉬파트>는 용서와 사랑이다.
"만일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 정의<미쉬파트> 와 공의 <처타카> 대로 행하면 그가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겔 33:19)
이렇게
이해할 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은 정확하게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는 말씀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의’
<체데크>로 인하여 성취된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로 현존하고 있다.
"보라, 장차 한 왕이 공의 <체데크> 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정의 <미쉬파트> 로 다스릴 것이며"(사 32:1).
공의와 정의의 차이점
의는 사적 / 개인적인 덕목이다. 정의는 공적 / 사회적인 덕목이다. 공의는 공적 / 법적인 덕목이다.
1. 의(義)
의는 어원적으로 자기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온순하게 행동한다는 뜻입니다. 자기를
지킨다는 말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기의 몸을 지키는 것만 가리키는 아닙니다. 세상이 어지럽더라도 자기 마음을 지키고, 영적인
타락을 막을 수 있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그렇게 자기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이 그런 힘/능력으로 다른 이를 해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호랑이나 용처럼 공격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양처럼 온순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의의 어원적인 뜻입니다.
후대에 의는 사람이 태어나면서 하늘로부터 받은 마음의 능력이라고 정리됐습니다.
맹자님은 의를 수오지심, 즉 '내 잘못을 부끄러워할 줄 알고, 남의 잘못을 미워할 줄 아는 마음'이라고 정의하셨지요. 부끄러운 내
잘못은 고치고, 미운 남의 잘못은 내가 반복하지 않도록 경계할 줄 안다는 뜻이겠습니다.
그래서 의는 대체로 개인적인 수신의 덕목으로 이해됩니다. 그래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어진(仁) 사람,' '예절 바른(禮) 사람,' '슬기로운(智) 사람'과 함께 군자의 도의 하나로 꼽혔습니다.
그래서 의(義)로운 사람은 자기와 자연과의 관계, 자기와 세상과의 관계,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옳게' 설정합니다. 그런 올바른 관계 안에서, 즉 자기 분수 안에서 몸과 마음과 넋을 지키는 것이지요.
그런 의의 실천은 군자지도를 이루는 수신 덕목입니다. 수신이란 기본적으로 개인적이고
사적인 영역입니다. 그러나 이런 수신의 덕목이 결국 제가와 치국과 평천하의 바탕이 됩니다. 수신과 제가는 사적인 활동이지만
치국과 평천하는 공적인 활동입니다. 그래서 의를 알고 행하는 것은 개인적이고 사적인 덕목이지만 사회적이고 공적인 덕목을 이루는
바탕이 됩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한국말에서도 사람의 두 손 중에서 일반적으로 더 능숙한 손을
'옳은 손 --> 오른손'이라고 부르는 데, 잉어권에서도 그런 손을 '롸이트 핸드(right hand)'라고 부릅니다.
'의'와 '롸이쳐스니스'의 긴밀한 상응 관계가 심상치 않은 수준임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2. 정의(正義)
전통적인
한자어 의미론에 따르면 정의는 그냥 의와 별반 다름이 없는 개념입니다. 바를 정(正)자가 수식어로 사용되기는 했지만 '바르지
않은 의'라는 게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 19세기 중엽에 일본식 한자어로 탄생한 정의개념은 서양의
'저스티스(justice)'를 번역한 말입니다. 이런 뜻으로 쓰이는 정의는 '준법 행위'를 가리킵니다. '저스티스'가 '법'을
가리키는 라틴어 '유스(jus)'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입니다. '저스티스'로서의 정의(正義)는 전통적인 한자어 정(正)이나
의(義)개념과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습니다.
사실상 지금 우리가 쓰는 정의라는 말은 전통적 한자 의미론에 따라 독자적으로 조합한 것이 아니라 일본식 한자어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래는 개인적/사적 덕목이 아니라 법적/공적 덕목이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지금 우리가 쓰는 정의는 그런 좁은 뜻의 '저스티스'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준법행위'라는 사법적인 의미보다는 더 포괄적이지만, 사회적이고 공적인 뜻을 가진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의 개념과도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요즘의 '정의'개념은 '의'와 '저스티스'의 중간지점에 놓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쓰이는 '정의'라는 말은 어떤 때는 잉국말 '롸이쳐스니스'의 번역어로
쓰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저스티스'의 개념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다소 모호한 정의 개념은 한국말 문헌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바로 대표적인 문헌입니다.
최초의 한국어 구약 성경은 1911년에 번역이 끝나서 출판됐습니다. 그 이후 두
차례에 걸쳐서 개역이 됐지만 주로 개정된 맞춤법에 따라 표현만 바꿨을 뿐 사용된 낱말을 바꾼 적이 없습니다. 지금 가장 널리
사용되는 한글 개역판 성경은 1967년에 개정된 것인데, 거기에 사용된 개념들은 기본적으로 1911년에 출판됐던 이른바 '구역'
성경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이 개역 한글판 구약 성경에는 정의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정의라는
말들은 때로 잉어 '저스티스'의 번역어로 쓰이기도 했지만 '롸이쳐스니스'의 번역어로도 사용됐습니다. 아래 인용한 시편과
예레미아서의 구절을 한번 보시지요.
저는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시편 33:5) (He loveth righteousness and judgment: the earth is full of the goodness of the LORD.)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예레미아서 23:5) (I will raise unto David a righteous Branch, and a King ... shall execute judgment and justice in the earth.)
시편 33:5에 나오는 '정의'는 영어 '롸이쳐스니스'의 번역어이지만, 예레미야서 23:5에 나오는 '정의'는 영어 '저스티스'의 번역어입니다.
영어 '롸이쳐스니스'와 '저스티스'는 상당히 다른 개념이라고
보았습니다. 롸이쳐스니스는 도덕적 / 윤리적 / 종교적 옳음이고, 저스티스는 법적인 옳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롸이쳐스니스는
개인적 / 사적인 덕목인 반면에 저스티스는 사회적 / 공적인 덕목이라고 합니다. | 그런데 그렇게 서로 다른 개념을 한국말로는 똑같이 '정의'라고 했습니다. 번역상의 실수일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수가 아닙니다. 실수가 있었다면 그건 오히려 영어 성경이 저질렀다고 보아야 합니다.
영어 성경(킹제임스 역본)이 시편 33:5에서 '롸이쳐스니스'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낱말은 "체다카"입니다. "옳다"는 뜻을 가진 동사 "차다크"의 명사형이지요. 그런데 예레미야서 23:5에서 영어 성경이
'저스티스'라고 번역한 말도 똑같은 "체다카"입니다.
그러니까 히브리말로 똑같이 "체다카"인 것을 잉어 성경이 '롸이쳐스니스'와
'저스티스'로 달리 번역했던 것이지요. 그것을 한국말 성경에서는 다시 똑같은 말을 써서 "정의"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이 두 구절에 나오는 "정의"의 번역을 보면 킹제임스 잉어 성경보다는 개역 한글판 성경이 더 정확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서 23:5에는 "체다카"가 두 번이나 나옵니다. 하나는 "의로운
가지"라고 번역됐고, 다른 하나는 "정의"라고 번역됐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의(義)"와 "정의(正義)"가 결국 같은
개념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럼 어째서 한국말 성경 번역자들은 히브리어 "체다카"를 "의"와 "정의"로 따로 번역했을까요? 그점을 미루어 짐작하려면 '체다카'가 적어도 5천년의 역사를 가진 낱말이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5천년 전의 언어는 지금보다 훨씬 단순합니다. 사회가 단순하고 사람이 단순하고
사상이 단순했으니까 언어와 그 뜻도 단순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그때는 개인적인 의이든 사회적인 의이든 모두
"체다카"로 불러도 모자람이 없었겠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회와 사람과 사상은 아주 복잡합니다. 따라서 언어도 더욱
분화되어서 복잡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비록 5천년 전에는 모두 "체다카"로 뭉뚱그려 말할 수 있었던 것도, 지금은
개인적 덕목과 사회적 덕목으로 나누어 불러야 할 필요가 생긴 것이지요.
그게 바로 영국말 성경 번역자들이 같은 "체다카"를 '롸이쳐스니스'와 '저스티스'로
나누어 번역했던 까닭이겠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이유로 한국말 성경 번역자들이 "체다카"를 때로는 "의"로 번역하고 때로는
"정의"라고 번역했던 것이지요.
정의 개념은 원래는 의와 같은 개념이었지만, 시대와 사회의 변화
덕분에 개인적 사적인 덕목과 사회적 공적인 덕목을 구분해야 했던 사정에 따라서 분화된 말이라고 보면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정의는 개인의 수신을 가리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바람직한 관계와 그런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바람직한 상호작용을
제시하는 개념입니다.
예컨대 부모 자식 사이에는 친(親)함이 있어야 한다는 게 오륜의 하나입니다.
'친함'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는 또 다른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어쨌든 '친함이 있는 부모 자식 관계'가 바로 정의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버린다거나 자식이 부모를 해치는 것은 '친하지 않음'이고 따라서 불의입니다.
민주사회에서는 유권자가 투표를 통해 대표자를 뽑기로 돼 있습니다. 그러니 선거
때에는 투표를 하는 것이 정의입니다. 투표를 하지 않고 먹고 놀러 가는 것은 불의입니다. 투표를 통해서 뽑아놓으면 그의 임기
동안에는 소신껏 일할 기회를 주기로 돼 있습니다. 그런 기회를 주지 않고 비판만 하는 것은 불의입니다.
기업이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상품을 광고할 때에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야 합니다.
그게 정의입니다. 과대 광고나 소비자들의 눈속임을 일으키는 광고를 하는 것은 불의입니다. 상품을 만들어서 파는데 짧은 기간에
많은 이윤을 볼 수 있다면서 매점매석을 하는 것도 불의입니다. 사회적 약자인 근로자들의 불리한 입장을 이용해서 사용자들이
근로자들에게 불리한 근로 조건을 강요한다면 이 역시 불의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성직자는 목자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내 양을 먹이라"는 명령을 받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도 예수님 성직자의 관계는 양 목자 양치기 개(sheep dog)의 관계입니다. 그게 옳은 관계이고,
그런 관계 속에서 상호작용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게 바로 정의입니다. 만일 '양치기 개'가 '양'의 '목자' 노릇을 하려고
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또 '양'이 '양치기 개'를 '목자'로 여기게 되면 이것도 사단입니다. 그게 바로 불의의
출발점입니다.
3. 공의(公義)
거의 같은 뜻으로 만들어진 정의와 공의는 한반도로 건너와서 서로 다른 길을 걸었던 것
같습니다. 정의는 점점 전통적인 의 개념으로 옮겨가면서도 사적 개인적 덕목으로서의 의와는 구별되는 사회적 공적 덕목을 가리키는
말로 자리잡았습니다.
공의는 본래의 번역어였던 '저스티스'와 '젓지먼트(judgment)'를 가리키는 말로 그냥 남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공의는 다분히 '법적이고 공적인 덕목'을 가리키는 말로 굳어졌습니다.
그러나 뜻이 이렇게 특화된 이후에도 공의는 일상어로 널리 유포되지 못했고, 단지
그리스도교 내에서만 하나님의 속성을 서술하는 말로 살아 남았습니다. 일종의 은어지요.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라는
표현으로만 주로 쓰이는 제한적인 용법의 낱말입니다.
성경에서도 '공의'는 주로 '젓지먼트'의 번역어로 쓰였습니다. '젓지먼트'로 옮겨진
히브리어는 "미슈파트"인데, 이는 "재판하다, 다스리다, 벌주다"는 뜻을 가진 동사 "샤파트"의 명사형입니다. 또 재판이나
통치나 처벌은 공정해야 한다는 보았기 때문인지, 미슈파트에는 "공정하다"라는 파생적인 뜻도 갖고 있었습니다.
'미슈파트'라는 한 단어에 왜 이렇게 많은 뜻이 담겨 있었던 것일까요? 그 점을
알려면 또다시 히브리어가 5천년 전의 원시 언어였다는 점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의 단순한 사회에서는 언어의 뜻이
그다지 분화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슈파트'라는 한 단어를 가지고서도 그렇게 다양한 인접 의미를 다 가리킬 수가
있었던 것이겠지요.
킹제임스 잉어성경이 번역됐던 16세기까지만 해도 '젓지먼트'라는 한 단어를 가지고서 '미슈파트'의 뜻을 거의 다 옮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어 '미슈파트'는 거의 예외없이 잉어 '젓지먼트'로 번역됐었지요.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는 사정이 그리 호락호락하질 못했습니다. 한국말 성경
번역자들은 '미슈파트' 혹은 '젓지먼트'를 번역하기 위해 적어도 여섯 가지의 서로 다른 낱말을 동원했습니다. 사람과 사회와
사상이 5천년이나 5백년 전에 비해 매우 복잡해 졌기 때문에 하나의 낱말로 그런 복합적인 현상을 모두 가리키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겠습니다.
그 여섯 가지 번역어는 공의(公義)를 비롯해서 공법(公法), 공도(公道), 공평(公平), 심판(審判) 그리고 벌(罰) 등이었습니다. 그런 번역어의 예들을 개역 한글판 구약 성경에서 하나씩만 찾아서 아래 옮겨 놓았습니다.
너희는 공법을 쓸개로 변하며 정의의 열매를 인진으로 변하며 (아모스 6:12) (ye have turned judgment into gall, and the fruit of righteousness into hemlock.)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창세기 18:19) (they shall keep the way of the LORD, to do justice and judgment.)
너희는 공평을 지키며 의를 행하라 (이사야 56:1) (Keep ye judgment, and do justice.)
하나님이 어찌 심판을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욥기 8:3) (Doth God pervert judgment? or doth the Almighty pervert justice? )
이제는 악인의 받을 벌이 네게 가득하였고 (욥기 36:17) (But thou hast fulfilled the judgment of the wicked)
이중에서 심판과 벌, 그리고 공평은 오늘날 일상적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그러나 공법/공도/공의라는 말은 일반화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들은 모두 합쳐져서 법을 집행하는 사법(司法)의 전과정을 가리킵니다.
사람들의 행위를 규제하는 법(公法)이 명시되어야 하는데, 그런 법은 사회적
도리(公道)에 기반을 두어야 합니다. 사람의 행위를 판단하는 과정(審判)이 마련돼 있어야 하고, 그런 심판은 공평(公平)해야
합니다. 심판을 통해 유죄가 확정되면 벌(罰)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전 과정을 가리켜 공의(公義)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공의는 사법의 전과정을 가리키는 말로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사회의 공적인 덕목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점에서는 정의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명시적인 법(法)이 있어야 한다는 점, 그리고
그런 법에 비추어 사람의 행동을 판단하는 공적인 심판 과정이 뒤따라야 한다는 점에서 정의와 차이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공의는
원래적 의미의 '저스티스,' 즉, 법을 집행하는 과정과 결과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교에서 하나님을 '공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그리스도교의 하나님, 특히 구약 성경 시대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으로 불립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법을 제시하고,
그 법대로 살 것을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법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은 심판하고, 그런 심판의 결과로 상을 내리거나
벌을 내리는 일이 가시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제시한 법은 율법(律法)이라고 불립니다. 그 율법은 좁은
의미로는 '토라'라고 불리는 모세오경만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로는 구약성경과 탈무드까지 합친 문헌을 모두 포함합니다. 거기에는
"--를 해라"는 명령보다는 "--하지 마라"는 명령이 더 많습니다. 오늘날의 형법(刑法)과 아주 비슷합니다. 그런 금지
율법을 어기면 심판과 처벌의 대상이 되는 것이지요.
신약 시대에는 그런 공의적 특성이 엷어지기는 했지만 아주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죄인에 대한 심판이 예고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그런 심판의 결과로 영생이나 영벌이 마련돼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이런 특성 때문에 그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라고 불려 왔다는 점을 일단 지적해 둡니다.
공의와 정의에 대해서
우리는 흔히 ‘공의’라고 부르는 말을 영어 성경 속에서 찾아보면 ‘righteousness’이며, 히브리어로는 ‘쩨다까’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편 ‘공의’와 함께 따라오는 말은 ‘정의’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로 ‘justice’이며, ‘미슈파트’라는 히브리어에 해당합니다.
공의란?
공의의 사전적 의미는 ‘공평하고 의로운 도의’ ‘선악의 제재를 공평하게 하는 하느님의 적극적인 품성’입니다. 따라서 성경 말씀에 비추어보면 공의는 관계적 개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이를 대체할 단어들로는 ‘긍휼’‘공평’ 등을 들 수 있으며, ‘마음을 같이 하는 것’‘동의하는 것’ 등으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인간의 형편과 처지를 보시고 불쌍하게 여기시며, 바로잡으려고 하는 의로운 하나님의 마음이며, 일반적인 ‘정의’의 개념에 ‘긍휼’이 포함된 개념으로도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예로 “아브라함을 ’정의‘롭게 여기셨다”보다는 “아브라함을 ’공의‘롭게 여기셨다”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고 봅니다. ’공평‘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는데 가난하고 약하며, 핍박받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긍휼‘하게 여김으로서의 공평한 하나님 마음, 또는 억압하고 착취하는 폭력에 대해 참지 않으시는 ’공평‘한 마음 등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의란?
정의의 사전적 의미는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 “개인 간의 올바른 도리. 또는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공정한 도리”입니다. 따라서 정의는 실제적 개념이며 마찬가지로 성경 말씀에 비추어보면 ’심판‘’법도‘’재판‘’규례‘’공평한 저울‘ 등으로 대체할 수 있을 것 입니다. ’공의‘가 관계나 그 성품(마음)을 표현하는 단어라고 한다면, 정의는 실제적인 법과 규례 그리고 집행을 의미할 것입니다. 또한 정의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요구하는 규례, 즉, 올바른 삶의 원칙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고 봅니다.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않으며, 무제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렘 7장 :5~6절)”
아울러 위 말씀과 같이 ’약자를 억압하지 않은 것‘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여, 상거래 시 ’저울을 정당하게 사용하는 것‘을 ’정의‘로 표현할 수 있으며, 소작농에게 급여를 제날짜에 정확히 주는 것도 ’정의‘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잠언‘을 통해 우리가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고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려고 공의와 정의를 적절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하며...(잠언 1:3)
이 두 말들을 적절하게 사용한 예를 몇 가지 들어보고자 합니다.
- 우리에게 있어서 구원은 하나님의 ’공의‘의 선물이고, 심판은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 우리는 정의를 행함에 있어서 ’공의‘로운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말라는 뜻은 죄는 ’정의‘롭게 심판하되, 죄인은 긍휼함, 즉, ’공의‘로 대하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끝으로 실제 생활 속에서 정의와 공의를 동시에 실천한 재판관의 명판결 예화를 소개하면서 마무리하겠습니다.
1930년 어느 상점에서 빵 한 덩이를 훔치고 절도 혐의로 기소된 노인이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판사가 빵을 훔친 이유를 물었습니다. "판사님, 저는 지금 이혼한 딸과 살고 있는데 딸은 병들었고 두 손녀딸이 굶고 있습니다. 빵 가게 앞을 지나가는데 나도 모르게 그만 손이 나갔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노인의 말을 들은 방청객들은 노인에게 동정의 시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공정한 법의 집행을 내려야 하는 판사는 고민을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판사는 잠시 후에 다음과 같이 판결을 내렸습니다. "아무리 사정이 딱하다 할지라도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은 잘못입니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고 예외가 없습니다. 그래서 법대로 당신을 판결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에게 1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당시 10달러는 노인에게는 너무나도 컸습니다. 노인의 딱한 사정에 선처를 기대했던 방청객들은 실망스럽다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판결을 내린 판사는 자리에서 일어난 후 법정에 있는 사람들에게 모자를 내밀며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노인이 빵을 훔쳐야만 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임에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고 방치한 우리 모두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 10달러를 제가 내겠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한다면 50센트를 이 모자에 넣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돈을 거두어 이 노인분에게 다 주도록 하시오."
그렇게 해서 57달러 50센트의 돈이 모였고, 노인은 돈을 받아서 10달러를 벌금으로 내고, 남은 47달러 50센트를 손에 쥐고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습니다.
'의, 공의, 정의'의 원어와 그 개념
1. '의, 공의, 정의'의 원어(原語)
1) 히브리어 '체데크'(qd,x,
tsedeq ; 남성형), '체다-카-'(hq;d;x, tsedaqah ;여성형)남성형 117회, 여성형 155회 씌어져 있다.
공평, 정직, 의, 올바름, 의로움, 공정, 번영, 균등한, 전적으로 올바른), 공정한(-함), 의로운, 의롭게 등으로 번역되어
있다.
2) 히브리어 '미슈파-트'(fP;v]mi, mishpat)이것은 '재판, 판결' 등도 의미하는 넓은 의미의 말로서, '체데크', '체다-카-'보다 윤리적인 의미가 강한데 대해, '미슈파-트'는 법적 의미가 우월하다.
3)
그리스어 '디카이오-마'(dikaivwma, dikaioma), '디카이오-스'(dikaivwsi",
dikaiosis)'디카이오-마'(dikaivwma, dikaioma)가 10회, '디카이오-시스'(dikaivwsi",
dikaiosis)가 2회 씌어져 있다. 이것은 한마디로 구약에 있어서의 '의'의 개념의 연장으로 이해되는 것으로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또는 이에 기초한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표현한(예컨대 '사랑'과 같다) 관계 개념이다. 이 말은 바울서신에 있어서,
극히 중요한 신학적 개념인데, 기타의 문서에 있어서는 비교적 나오는 수도 적고(34회), 당시의 유대교의 사상적 공유재산과 깊이
관계되어 있다.
죄를
하나도 짓지 않은 상태(출 15:26; 시 119:142; 마 6:33; 계 22:11). 일반적인 '의'는 윤리적인 성질에, 윤리적인
표준에의 일치에 한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 표준은 사회 또는 집단의 규범에 의존하며 상대적이다. 하지만, 성경적인 용법에서는 그
표준은 '하나님의 의'이지, 사회의 규범은 아니다(시 85:11; 빌 3:9; 계 22:11). '의'(義)는 제1의적으로
'하나님의 의'이고, 하나님이 그 자신의 거룩하심에 적합하도록 인간에게 요구하는 일이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신앙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이고, 이 행위의 결과, 즉, 이 의를 이웃 사람에의 사랑에 있어서 완성하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이다. 하나님은
믿는 자를 '의로운 자'로 여기신다(롬 3:25; 행 13:38; 롬 4:3).
"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시 119:142).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공명정대하고
의로움. 하나님의 속성의 하나(신 16:20; 시 106:3; 창 18:25; 요7:24; 눅 11:42). '하나님의 공의'란, 그 절대
공정하심과 정의로우심을 뜻하고, 하나님은 이것을 사랑하신다(시 37:28, 99:4; 사 61:8, 62:2). 또한 이것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으로(미 6:8) 치리자는 공의에 따라야 하고(잠 29:4; 렘 5:1; 합 1:4; 습 3:5), 사람마다 이것을 행할
것이다(렘 7:5; 암 5:15; 미 6:8).
'공의'로 번역된 원어는 수종이나 되는데, 같은 원어가 거의 '의'로도 번역되어
있다. 공의로 역된 히브리어 중 주요한 말은 명사 [미슈파-트]로서, 이것은 [심판하다]는 동사[샤-파트
fP'v,;(shaphat)]에서 파생된 것인데, 이 미슈파-트는 인간 상호의 관계를 정하는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리스어 명사로는 '디카이오수네-'가 '공의', 또는 '의'로 번역되어 있는데, 신약에 91회 씌어져 있는 말로서, 다만
하나님의 '의'에만 씌어져 있지 않고, 경건한 행위에 대해서도 씌어져 있다(마 55:20). "공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06:3).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요7:24).
올바른
도리(렘 33:15; 암 5:24; 시 33:5). 이 용어는 기독교 신학의 역사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서로 연결된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①. 하나님의 본성을 표현하는 말 ②. 죄에 의하여 잃어진 인간의 완전성과 의를 가리키기 위하여 ③. 인간의 사회생활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있어야 할 정당한 관계.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렘 33:15).
겸손(6038) 아나바(ʽănâvâh) עֲנָוָה
1. 겸손한 마음, 2. 자비
발음
/ 아나바[ ʽănâvâh ] 어원 / 603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겸손(잠 15:33, 22:4, 습 2:3), 온유함(삼하 22:36). 구약 성경 / 7회 사용
* 6035.
겸손한 자들아(6035) 아나브(ʽânâv) עָנָו
1. 억압된, 2. 유순한
발음
/ 아나브[ ʽânâv ] 어원 / 603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온유한(민 12:3). [명] 가난한 자(욥 24:4, 시 9:12, 사 61:1), 겸손한 자(시 10:17,
사 11:4, 습 2:3), 온유한 자(시 25:9, 69:32, 76:9), 빈곤한 자(잠 14:21), 가련한 자(사 32:7). 구약 성경 / 21회 사용
- 본 구절에서 스바냐가 권면하는 대상은 오직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뿐이다. 왜냐하면 그 외의 사람들은 도저히 여호와의 날에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Von Orelli). 모든 겸손한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하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계명과 규례들을 지키는 자들이다. 스바냐는 여기서 '세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겸손한 자들이 단순히 유다 백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그들은 이방인이나 유다 백성이나 그 혈통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을 간절히 기대하며 겸손히 공의를 행하며 하나님의 규례를 즐겨 찾는 이들이다.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 스바냐는 겸손한 자들조차도 심판이 행해지는 여호와의 날에 겨우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것인지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아모스에게도 나타나는 것으로(암 5:15) 모든 것이 여호와의 주권에 달려 있음을 시사한다(Smith).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기독교는 단순히 내세 지향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죽음 이후에 천국이 전부가 아닌 겁니다. 그렇다고 오늘 우리 삶의 형통함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도 아닙니다. 목적이 불분명하면 엉뚱한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 알아야 하는 거죠. 선택과 부르심은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가는 걸까요?
소위 기독교 신앙을 종말론적 신앙이라 부릅니다. 끝을 향해 가고 있지만, 종말은 오늘과 맞물려 있습니다. 오늘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오늘 내가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가 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매일 매 순간, 그 끝에 서 있는 자신을 상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무엇을 했었다가 아니라 수없는 오늘에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단면이 아닌 전체의 우리를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기회가 한없이 주어질까요? 성경은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다.” 바로 심판의 날이 가까이 이르렀다는 경고입니다. 이 경고는 스바냐 선지자가 선포하고 있는 그 시대의 사람들을 향한 것이기도 하지만, 어느 특정한 시대를 향한 말씀이 아닌, 오고 오는 모든 시대를 향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이 경고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지만, 이것은 궁극적인 종말의 날로써 모든 시대에 선포되는 심판의 경고인 겁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심판의 경고를 가볍게 여기곤 했습니다. 거기에는 그들의 잘못된 믿음도 일조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결코 자신을 버리지 않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반복적으로 경고의 시한이 닥쳐와도 변화된 행동을 취하지 않다가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하곤 했던 겁니다.
인간의 좋지 않은 특징 가운데 하나가 다 끝났는데도 끝까지 버텨 보려는 행동입니다. 어리석게도 “설마 이것이 끝이겠어? 그래도 조금의 시간은 있지 않을까? 또 다른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하시고 명확하시고,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스바냐 선지자는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잠잠하라는 것입니다.
습 1:7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고 그가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음이니라.”
이미 하나님은 계획하셨고 계획하신 대로 심판을 실행하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고 그가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음이니라.” 이렇게 급박한 상황에서는 다른 변명과 핑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가장 중요하겠습니까? 긴박한 시간에 그곳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오직 회개하는 것 뿐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멈추시지 않겠어요. 그러기에 스바냐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그런데 회개하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자기 잘못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기가 분명히 크게 잘못하였음에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뻔뻔하고 안하무인 격입니다. 그래서인지 부끄러운지 모르고 더 큰소리칩니다. 적반하장입니다. 죄는 사람을 뻔뻔하게 만듭니다. 그러니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양심에 화인을 맞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일 때가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에 다시 회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1절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여기에서 히브리어 “니크샤프”는 부끄러워 하다는 뜻도 있지만 “사모하다, 갈망하다, 바라다”는 의미로도 사용이 됩니다. 그런 점에서 수치를 모르는 백성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찾지도 갈망하지도 사모하지도 않는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이스라엘은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구하는 대신에 사람의 구원을 의지하곤 하였던 거죠. 따라서 “수치를 모르는 백성”은 스바냐 1장 6절에서 언급한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1:6)을 다시금 지적한 것입니다. 이들을 향하여 스바냐는 하나님을 찾도록 회개를 촉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패역한 백성을 향해 당신을 사모하고 찾으며 또한 은혜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찾을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주셨음에도 찾지 않으면 하나님은 이들을 어떻게 하신다고 하셨을까요? 습 1:6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과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을 멸절하리라.”
하나님은 저들을 멸절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시고자 이렇게 수치를 모르는 백성에게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선포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같은 동사의 반복은 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오직 모이는 길이 살길이라는 거예요. 그냥 저들끼리 모이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예배로의 부르심입니다. 즉 심판의 날이 임하기 전 범죄 한 모든 백성이 다 같이 하나님 앞으로 모여 나아와 한 가지로 회개하고 오직 하나님을 사모하고 찾을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 앞에 서는 일은 매우 중요한 행동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봉사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올려드리고 은혜의 충만함으로 세상 가운데 나아갈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넉넉하리라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시급합니다. 언제 우리 주님 다시 오실지 알 수가 없습니다. 속히 임하리라는 그래서 언제라도 맞이할 준비 된 종말론적 신앙이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스바냐 선지자는 2절에서 임박한 심판 앞에서 우리가 머뭇거리지 아니하고 대비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습 1:2 “명령이 시행되어 날이 겨 같이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내리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
항상 준비된 자만이 주 앞에 설 수 있습니다. 긴박함을 잃어버리고 느슨해지기 시작할 때 우리는 매우 중요한 포인트를 놓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놓치지 않도록 여러 가지 비유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파국을 맞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 순간 온전한 신앙의 자리에 서 있기를 힘써야 합니다. 사람들은 느순하게 있다가 문제가 닥친 다음에 행동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먼저 대비할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그날을 대비하는 것은 수치를 모르는 이들이나 구원받은 자들 모두에게 요구되고 있어요.
습 2:3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라고 했습니다. 그냥 겸손한 이들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겸손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도 세상적인 겸손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낮아짐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낮아짐이 하나님의 뜻에 철저하게 낮아지는 겸손일 때만이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자기의 뜻의 우선되고 세상의 것들이 우선되는데, 하나님의 말씀과는 멀리 동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찾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을 의지하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겸손한 자라면 여호와를 사모하고 그분 앞에 거하기를 기뻐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모하지 않는 수치를 모르는 자들과는 반대편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서 있음에도 하나님은 그와 같은 삶을 지속적으로 요청하십니다. 그것은 그 삶에 대한 갈망과 연속성이 우리에게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었으니까 이젠 죽으면 천당 가겠지”라는 단순한 생각을 내려놓고 매순간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라는 말씀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날을 알지 못합니다. 마 25: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날과 그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에게는 영적 긴장 필요합니다. 다 이룬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늘 언제나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구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합니다. 그와 함께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공의와 그리스도의 겸손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순종하며 사는 이들은 여호와의 공의 가운데 있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겸손한 자들임에도 다시 여호와를 찾고,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고 강조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심판이 참으로 엄중함을 암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고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과 은혜를 사모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끊임없이 견지하며 계속해야 할 합당한 삶의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찾고 공의와 겸손을 구하는 삶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중요한 신앙적 덕목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을 찾고 공의와 겸손을 구하는 삶은 어느 순간 완전히 성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의 순간까지 끊임없이 견지하고 실천해야 할 성도의 태도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한 후에, 그것도 후회함 없이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구원이 인간의 행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실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언제나 부끄럽고 두려운 일입니다. 항상 이사야의 심정인 거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된 자신의 모습을 깨닫지 못한다면 물론 이런 반응은 나오지 않겠지요.
비록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고 하나님 앞에서 공의를 행한다 할지라도, 그의 구원은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스바냐는 회개를 촉구하고 여호와를 찾고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고 하면서 그것이 다가 아니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3b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모습을 올려드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에게 거저 주는 구원의 은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은혜는 하나님의 공의가 전제된 것입니다. 공의를 이루기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 은혜를 구할 수 없게 되는 거죠. 아무리 우리 행위가 완벽해도 말입니다.
딤후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그러기에 우리는 수치를 모르는 자여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죄로 인한 우리 자신의 부끄러움을 인지하고 우리의 부끄러움을 덮어주시는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벧후 2:6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은 혹시 구원해주시리라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확신으로 우리를 이끌어 갈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수치를 당하심으로 우리의 수치를 덮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힘입어 우리는 더욱 깨어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고, 그분의 공의와 그리스도의 겸손으로 서 있는지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제 수치를 모르는 강퍅한 백성이 아닙니다. 자랑스러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봉사자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하신 우리 자신의 존재를 지켜냅시다. 이를 위해 우리의 회복을 이루어주시는 그리스도 안에 날마다 서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수치를 모르고 살아가는 존재가 얼마나
불쌍한 존재인지 모른다. 그렇기에 악행을 행하고도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조차 모른다. 목사라는 틀 안에서 나는 수치를 모르고
살아간다. 목사이니까!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겠지 생각하며 제 맘대로 살아간다. 목사이지만 기도하지 않고 목사이지만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더욱 쫑긋 세우고 듣지 않는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들아 부르는 저 스바냐의 외침이 나를 향해 부르는 외침으로 들린다.
마치 확성기로 내 귀에 대고 부르는 듯하다. 제발 정신 차려라! 넋놓고 있지 말아라! 정신이 바짝 든다. 정신줄을 놓고 있던
것을 이제 다시 주어담는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이 아니라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로 세워지길 소망한다.
목사로써 깨어서 할 수 있는 일을 준비한다. 겸손함으로... 어쩌면 손가락질 당할 수 밖에 없는 일이지만 준비해 본다.
공의와 정의로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그렇기에 나의 수치도 모르고 살아가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도록 오늘도 저를 깨워주소서! 불의와 불공정 앞에 하나님이라는 틀로
뒤짚어쓰고 수치를 외면하고 모른척하지 않게 하소서! 오늘도 규례를 지키는 겸손한 자로 살아가게 하소서!
하 나님께서 창조하신 땅 위의 모든 것을 진멸해 버리시겠다고 한다면 분명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어떻게 세상을
멸절하신다는 무시무시한 말씀을 하십니까?’라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세상이 멸절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에 마음을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멸절의 이유가 나 자신에게서도 발견된다면 ‘나 역시 멸망을 받아야 하는 죄인일 뿐입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하나님께 나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아는 바른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장에서 선지자는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합니다. 그들이 멸망을 받는 것은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했기 때문이고, 여호와를 찾지도 구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1:4-6).
유다는 나름대로 하나님을 찾고 구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제사 제도는 성실히 실천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유다가 제사 드리는 날이 되면 성전에 모였지만 하나님은 그것은 모이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1절을 보면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유다가 하나님 앞에 모여 제사를
드리는 것을 시행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이 부지런히 모였으되 하나님은 그 모임을 부인하셨다는 뜻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유다가 자기의 수치를 모르는 인간으로 모였기 때문입니다. 자기 수치를 전혀 알지 못하는 인간으로써
행하는 제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우신 제사 규례는 인간의 수치를 가려주시는 은혜가 담겨 있고, 그것은
흠없는 제물의 희생을 통해서 증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기 수치를 모르는 인간이 행하는 제사는 단지 종교 의식일 뿐 믿음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는
종교 의식 자체를 믿음으로 간주합니다. 유다가 제사라는 종교 의식을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으로 여긴 것과 같습니다. 결국 종교
의식을 실천하기 위해 예배당에 모이고, 그것을 신앙으로 간주하는 현대 교회나 멸망을 받은 유다가 같은 수준에 있다면 현대 교회
역시 멸망을 피할 수 없다는 결론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수치를 아는 백성으로 하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자기 수치를 아는 자로 하나님께 나올 때
수치를 덮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볼 것이고, 그 은혜를 기뻐하고 감사하는 자의 모임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모임을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수치를 모른다는 것은 자신의 불의와 더러움을 보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유는 자신의 속이 아니라 겉만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표면적으로는 별 문제가 없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불의하고 더럽고 악하다고 할 만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불의하고 더러운 존재로 표현을 하면 떨떠름한 표정을 짓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속 중심을 보신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속을 위장할 수가 없습니다. 표면적인 것은 얼마든지 감추거나 위장할 수 있지만 속마음은 위장하지 못합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감출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속이 깨끗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온갖 악하고 더러운 것으로 가득한 것이 우리의 속입니다. 만약 자신의 속이
그대로 드러난다면 떳떳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수치와 부끄러움으로 어디론가 숨어 버리고 싶은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
심정으로 하나님께 나오고 하나님을 찾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수치를 아는 사람은 자기 육신을 위해 하나님께 무언가를 구할 자격조차 없음을 압니다. 오직 수치를 덮어주시는 은혜만을 구할 뿐입니다.
2절을 보면 “명령이 시행되어 날이 겨 같이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내리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처럼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이르기 전에 우리가 할 일은 수치를 아는
백성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수치를 아는 것은 생명과 연관된 참으로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3절에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에게 여호와를 찾으면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겸손을 구하라는 말은 겸손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말입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에게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이 실상은 겸손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세상이 볼 때는 겸손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교만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겸손은 자기 수치를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수치를 모른다면 아무리 ‘나는
부족합니다’라는 말로 자신을 위장하고 겸손한 척해도 교만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고 겸손을 구하는 사람은 자신은 의롭지 못하고 교만한 존재일 뿐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공의와 겸손은
자신에게서는 나올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알기 때문에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게 됩니다.
그런데 과연 현대 교인들이 여호와를 찾으면서 공의와 겸손을 구할까요? 현대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육신을 즐겁게 해 주는
것입니다. 육신의 가치를 향상시킬 수 있는 것, 세상에서 높임 받을 수 있는 것을 필요로 하고 구할 뿐이지 공의와 겸손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은 자신의 가치를 향상시켜주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공의와 겸손을 구하는 것은 자기 수치를 아는 사람들에게만 있습니다. 자기 수치를 안다면 수치를 덮을 수 있는 것이 돈도
권력도 아님을 알 것입니다. 큰 집에 살고 큰 차를 탄다고 해서 수치가 가려지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의로만 수치가 가려지고,
자신의 교만을 알기 때문에 겸손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신자를 분노의 날에 숨기신다고 하십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드러내는 것은 수치라는 것을 아십니까? 말씀을 볼 때마다 어김없이 잊고 있었던 우리의 수치가 발각되고 드러남을 실감하십니까? 그것이 말씀의 능력이고 은혜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윤리와 도덕으로도 수치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수치가 윤리와 도덕으로 포장되어 굳게 감추어질 뿐입니다.
돈과 권력 또한 수치스러운 인간됨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하지만 말씀은 우리가 보지 못하던 수치를 보게 하면서 하나님이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자로 하나님을 찾게 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보려고 하십니까? 다시 말하지만 말씀은 교만한 자로 살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으며 오로지 멸망에 해당되는 우리의 실제를 보게 합니다. 그것이 말씀의 은혜입니다.
롬 1:29-32절을 읽어 보십시오. 왜 자신을 수치스럽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지 아실 것입니다. 자기 수치를 앎으로써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덮어주시고 가려주신 은혜를 구하고 감사하는 신자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참된 백성입니다.하
08-12-2023(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의 큰 날(스바냐 1:14)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심히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애곡하는도다. "The great day of the LORD is near-- near and coming
quickly. Listen! The cry on the day of the LORD will be bitter, the
shouting of the warrior there.
여호와의 큰 날(The great day of the LORD) 욤 아도나이 학가돌(ום־יְהוָה הַגָּדֹול)
스바냐가
활동하던 시기는 유다 왕국의 영적 암흑기였습니다. 므낫세와 아몬의 영향으로 우상 숭배의 죄악에 푹 빠졌습니다. 요시야가 개혁을 이끌었지만 진실한 회개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제사 형식을 정비하고 우상을 몰아냈지만 백성들의 부패한 마음을 바꿀 수 없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스바냐를 통해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유다 백성과 지도자의 죄악을 고발합니다(4-5). 여호와의 날 즉 심판 날에 대해서 예언합니다(7-13).
불의한 권력자들, 우상 숭배자들, 예루살렘에서 포악을 행한 자들, 돈을 의지한 자들은 심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심판의 날이 가깝고 빠르게 올 것이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큰 날에 멸절하고자 하는 대상은 누구인가?
지붕에서 하늘의 뭇 별들에게 경배하는 자들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들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
우상숭배하는 자들과 여호와를 따른다고 하면서도 우상을 따르는 자들, 그리고 여호와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멸절하신다고 하였다.
그 중에서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들'을 멸절하신다는 말씀이 귀에 더 쟁쟁하게 들려온다.
참된
경배의 대상이신 만군의 여호와를 경배하지 않고 잘못된 대상인 하늘의 일월성신을 경배하는 자들을 멸절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명목적으로는 여호와를 섬기지만 실제로는 이방신을 섬기는 패역한 선민들의 죄악을 질타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역사적으로 볼 때 전적으로 이방신을 섬기는 데에 전념한 적은 거의 없었다. 죄악에 빠진 경우 거의 대부분 이러한 범죄를
저질렀다. 즉 가식적 · 형식적으로 여호와를 섬기거나 종교 혼합주의적 · 종교 다원주의적 유혹에 미혹되어 여호와께 범죄하였던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여호와를 섬기면서도, 하나님을 믿노라고 하면서도 세상적인 것들을 쫓아다니는 삶들이 너무 너무 많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가증히 여기시는 것이다. 우리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찾아보고 뉘우치고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자.
예배의 형식은 엄청나게 발전하였다. 축제와 같은 예배를 드린다고 각본에 짜여진 대로 연출을 한다. 성도들에게 감동을 주는 예배의 형식은 뛰어나다. 현대 문화의 발전을 교회 예배 의식에 도입하여 엄청나게 화려하다.
그러나 예배를 준비하는 자들의 마음 속에 어떤 것들이 존재하고 있을까? 종교 혼합주의, 다원주의 뿐만 아니라 개인의 사욕을 채우기 위한, 연출자에게 기쁨과 만족을 주기 위한 예배가 대부분임을 볼 때 안타까울 뿐이다.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힘써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스바냐 선지자는 각종 우상 숭배와 죄악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박한 '여호와의 날'을 선포하면서 회개를
촉구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보편성에 대해 보여 주고 있는데 심판이 온 지면에서부터 시작될 것임을 선포하고
있는 전반부(1-6절)와 예루살렘에 임할 심판의 양상을 언급하고 있는 중반부(7-13절), 그리고 임박한 여호와의 날을 기록하고
있는 후반부(14-18절)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본장에서는 심판이 유다에 집중되어 있음과 아울러 하나님의 심판의 심각성을
강조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촉구하고 있다.
주일이면 도처에서 많은 성도들이 교회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습니다. 과연 이러한 행렬이 구원을 받은 증거가 될 수 있을까요? 그들은 모여서 예배하며 설교를 듣고 헌금을 바치고 때로는 직분에 따라 봉사도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구원을 받은 외적인 모양은 될 수 있지만 내적인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은 하나님이 선택을 받은 거룩한 백성이라고 증거하려고 율법에 따라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와 같은 행동에 대하여 여호와의 날 즉 여호와의 두렵고 큰 날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형식적인 예배와 신앙생활을 버리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신앙과 생활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이 길만이 여호와의 날에 인정을 받을 수 있는 비결입니다.
여호와의 날은 세상과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는 날로 인류 역사의 마지막으로 벌어질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권능으로 악을 징계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 여호와의 날은 종말 혹은 최후의 심판이라도 불립니다. 심판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이들에게 그날은 가장 두려운 날이고, 믿는 이들에게는, 그들의 삶이 옳았음을 입증해 줄 것이기에, 간절히 기다리는 날입니다.
스바냐는 요시아 왕 시대에 활동하던 선지자로 포로 기간 중에도 살아 있었습니다. 스바냐는 임박한 예루살렘의 파멸에 관해 백성에게 경고하고, 다가오는 구원을 예언하였습니다. 1장은 여호와께서 온 땅과 유다 백성에게 진노하셔서 그들을 멸절시키신다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2장에서는 이방 나라들에 대한 심판을 예고합니다. 3장에서는 예루살렘에 대한 재앙을 알리고 다가오는 구원을 선포합니다. 스바냐는 유다 민족이 이방 민족들과 함께 파멸을 당할 것이지만 때가 오면 그들이 해방의 기쁨을 누린다는 약속의 말씀으로 격려해 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전 우주적인 심판을 선포하는 내용입니다. ‘여호와의 날’이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여호와의 날은 역사적으로는 바벨론을 통해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날을 가리킵니다. 종말론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심판장으로 재림하실 날을 가리킵니다. 여호와의 날은 불신자들에게는 심판의 날이요,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날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여호와의 큰 날에 임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어떤 자들에게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 수 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시대에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더라” 스바냐는 유다 왕 요시야 시대에 활동하던 선지자였습니다. 요시야는 8살에 왕이 되었고, 어려서부터 여호와 앞에 정직한 왕이었습니다. 20살에 종교개혁을 시작했습니다. 26살에 성전을 수리하던 중 모세의 율법책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그 성경을 읽다가 유다가 쇠락한 것이 언약의 말씀을 어겼기 때문임을 깨닫고 온 백성들과 함께 애통하며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개혁을 이루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앗수루의 국내 혼란을 기회로 국토를 넓혀나갔습니다(왕하 22:1-23:20). 그러나 유다에는 선왕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스바냐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사 대 조상인 히스기아까지 언급함으로서 자신의 예언이 권위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내가 땅 위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겠다고 선포하였습니다. 노아 홍수 심판 때에 세상을 진멸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을 철저하게 심판하시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어느 정도로 심판하십니까? 3절을 보십시오. “내가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거치게 하는 것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할 것이라 내가 사람을 땅 위에서 멸절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은 지면에서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십니다. 공중의 새, 바다의 고기, 거치게 하는 것을 진멸하십니다. ‘거치게 하는 것들’은 우상을 가리킵니다. 우상들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하십니다. 땅 위에서 사람을 멸절하십니다. 이는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죄악을 심판하시되 그들에게 맡기신 짐승,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들까지 함께 심판하십니다. 그들이 섬기던 우상들을 악인들과 더불어 파멸시키십니다. 저자는 '진멸하고' ‘진멸할 것이라’ ‘멸절하리라’고 반복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이 엄격하며 철저함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우상숭배자들을 진멸하십니다. 4절을 보십시오.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들 위에 손을 펴서 남아 있는 바알을 그 곳에서 멸절하며 그마림이란 이름과 및 그 제사장들을 아울러 멸절하며”하나님은 심판의 손길을 유다와 예루살렘 모든 거민 위에 펴십니다. 그래서 남아 있는 바알을 그 곳에서 멸절합니다. 바알은 가나안 사람들의 농경의 신이요, 다산을 주관하는 풍요의 신이었습니다. 유목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이 농경생활로 접어들면서 농사의 신 바알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농사 월력이 모두 바알 숭배와 관련되었습니다. 점차로 백성들의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나 바알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했습니다. 요시아 왕은 철저하게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종교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를 거부하고, 은밀히 바울을 숭배하는 자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마림이란 바알을 숭배하는 가나안의 제사장들을 가리킵니다(왕하 23:5; 호 10:5).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절하시고 바알 제사장들까지도 모조리 파멸시키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5절을 보십시오. “또 지붕에서 하늘의 뭇 별에게 경배하는 자들과 경배하며”지붕에서 하늘의 뭇 별들에게 경배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별과 달을 숭배하는 자들입니다. 천채숭배 의식은 가나안과 바벨론에서 흔히 행해진 우상숭배였습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은 왕정시대가 끝날 때까지 지속적으로 별과 달을 숭배하였습니다(신 4:19; 왕하 21:3,5; 렘 8:2; 19:13; 44:8-10). 이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죄악입니다. 이는 피조물을 창조주 하나님의 자리에 끌어올리는 신성모독의 죄입니다. 하나님은 스바냐를 통해서 이들도 예외 없이 심판하실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또 어떤 자들을 멸절하십니까? 5b,6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들과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과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을 멸절하리라”말감은 암몬 족속의 신이었던 밀곰을 지칭합니다. 밀곰 숭배는 솔로몬이 후궁들을 위해서 산당을 지어준 데서 비롯되었습니다(왕상 11:5-8,33; 왕하 23:13).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은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맹세한 후에도 돌아서서 또 밀곰을 섬겼습니다. 이런 종교적 혼합주의는 아하스 왕과 므낫세 왕 때에 흔히 자행되었습니다(왕하 16:3).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여호와를 배반하고 좇지 아니한 자와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자들을 멸절하십니다. 이들은 배교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관심이 없었습니다. 영적인 무관심이야말로 가장 타락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심판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스바냐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예언했습니다. 온 땅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여 노아 시대에 하나님께서 사람과 가축과 코로 숨 쉬는 모든 생물을 진멸하신 것처럼 멸절시키십니다. 노아시대에는 물고기들은 심판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장차 임할 심판 때에는 바다의 물고기까지도 멸절시키십니다. 이는 우주의 종말에 있을 철저한 심판을 보여줍니다. 처음 창조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처음 창조된 모든 것들이 진멸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것들만이 살아남습니다. 또한 그날에는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이 거민이 하나님의 심판의 손길이 펼쳐집니다. 그날에는 회개를 거부하고 타락한 본성을 따라 행하던 은밀한 일들까지도 다 심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특히 혼합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맹세를 하면서 속으로는 밀곰을 숭배하는 거짓된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기만하는 자들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이 보이면서도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하나님께 구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임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위선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에게 심판을 경고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주여, 주여”한다고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위선과 가식적인 신앙생활을 가증히 여기십니다. 이는 하나님을 속이고 기만하는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힘쓰고, 애써야 합니다(롬 12:3). 입으로만 “주여, 주여”하고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사는 자들은 다 하나님을 기만하는 우상숭배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준엄하는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II. 주 여호와 앞에 잠잠할지어다(7-13)
7절을 보십시오.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고 그가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음이니라”스바냐는 온 백성들에게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하라고 선언했습니다.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이 침묵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날은 불의를 심판의 날입니다. 그 심판의 날이 임박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희생을 준비하셨고,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준비하신 희생은 유다 백성을 가리킵니다. 그가 청할 자들은 유다를 심판하는 도구로 작정한 바벨론 군대입니다. 그들은 심판의 도구로 유다 거민들을 멸망시킬 자들입니다(사 13:1). 하나님은 이들을 구별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날에 하나님께서 어떤 자들을 벌하십니까? 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희생의 날에 내가 방백들과 왕자들과 이방인의 옷을 입은 자들을 벌할 것이며” 먼저 방백들과 왕자들을 심판하십니다. 방백들은 유다 거민들의 지도자들을 가리킵닌다. ‘왕자들’은 요시아의 친족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종교 개혁을 반대하고 대적했던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벌하시고, ‘이방인의 옷’을 입은 자들을 벌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백성들에게 경건한 옷차림을 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항상 말씀을 기억하며 살도록 옷 술을 달도록 명하셨습니다(민 15:38; 신 22;11,12). 의복은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방백들과 왕자들이 이방인들이 입는 의복을 즐겨 입었습니다. 이는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린 것이었습니다. 여호와의 날에는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불신자들처럼 살아하는 자들을 벌하십니다.
또 어떤 자들을 벌하십니까? 9절을 보십시오. “그 날에 문턱을 뛰어넘어서 포악과 거짓을 자기 주인의 집에 채운 자들을 내가 벌하리라”그날에, 여호와의 날에, 여호와의 희생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들의 문턱을 뛰어 넘어서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문턱을 뛰어 넘는 자들은 왕자들과 방백들의 하수인들입니다. 이들은 남의 집의 문턱을 침입하여 포악과 거짓으로 재물을 약탈하여 자기 주인의 집을 채운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포악한 자들을 반드시 벌하십니다.
또 하나님의 그들을 벌하실 때의 상황이 어떠합니까? 10절을 보십시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어문에서는 부르짖는 소리가, 제 이 구역에서는 울음 소리가, 작은 산들에서는 무너지는 소리가 일어나리라”어문은 다메섹 문 가까이에 있는 북쪽 성문을 가리킵니다(대하 33:14; 느 3:3; 12:39). 이는 적들이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문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부르짖는 소리가 들입니다. 제 이 구역은 어문 가까이에 있는 성읍 안쪽에 있는 문인데 그 구역에서도 울음소리가 일어납니다. 뿐만 아니라 작은 산들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여호와의 날’에 이방 군대의 침략으로 예루살렘 성읍이 파멸되고, 그곳 거민들은 곡하게 될 것입니다.
스바냐는 호소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막데스 주민들아 너희는 슬피 울라 ”예루살렘 남쪽 저지대에 사는 막데스 주민들을 향하여 슬피 울라고 했습니다. “가나안 백성이 다 패망하고 은을 거래하는 자들이 끊어졌음이라”막데스는 상업으로 이름이 난 지역입니다. 그런데 상거래의 중심이 되었던 가나안 백성이 다 패망했습니다. 더 이상 은을 거래하는 자들도 끊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모든 것이 황폐하게 되어 버립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어떤 자들을 찾아내어 심판하십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에서 찌꺼기 같이 가라앉아서 여호와를 멸시하는 말을 하는 자들을 등불로 두루 찾아내어 벌하십니다. 찌꺼기같이 가라앉는다는 말은 쾌락에 취해있고 악을 조장하며 숨어 있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지 않고, 세상에 숨어서 계속적으로 악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스스로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그들은 여호와는 살아계시지 않으며, 생화화복을 주장하지도 않으신다고 합니다.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복을 내리지도 않고, 거역하는 자에게 화도 내리지 아니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이들은 포도주와 독주로 만취되고 내일도 오늘 같으리라고 생각하며 사는 자들입니다(사 56:12).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숨어있는 곳을 아시고 등불을 들고 두루 찾아내어 벌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날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신 30:15-18) 우리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뿐만 아니라 역사를 주관하시고 섭리하는 분이십니다.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복을 내리고 불순종하는 이들에게는 저주를 내리시는 만왕의 왕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섭리를 부정하고, 하나님은 자신들의 삶에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큰 교만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등불을 들고 찾으시는데 누가 그 심판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이들에게 어떤 벌이 내려집니까? 13절을 보십시오. 그들의 재물이 노략질당하고, 그들의 집이 황무하게 됩니다. 그들은 집을 건축하지만 그 집에 살지 못합니다. 포도원을 가꿀 것이지만 포도주를 마시지 못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를 부정하는 완악한 자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자신들이 받았던 축복이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던 그들이 ‘여호와의 날에’는 재물을 약탈당하고, 집이 불타고, 포도원까지도 모두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심판에 개입하셔서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를 드러내십니다. 그날이 바로 여호와의 날입니다.
III.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14-18)
1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우는도다” 여기에서는 여호와의 날을 ‘여호와의 큰 날’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여호와의 날에 임할 심판이 너무나 심각한 것임을 말해줍니다. 이런 하나님의 심판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심판이 가까이 왔습니다. 너무나 가까이 왔고, 빠르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미 여호와의 날의 소리가 들립니다. 심판의 소리가 들입니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울고 있습니다. 이만큼 여호와의 심판은 우리 가까이 와 있고, 긴박하게 일어날 것을 알고 항상 마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도 심판의 긴박성을 경고했습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녹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마 3:10) 히브리서도 말합니다.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요 그 후에 심판이 있다”(히 9:27). 주님이 재림하셔서 심판하실 것인데 그날과 그 시간을 알려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 날과 시는 아버지의 권한에 두셨습니다. 이는 심판의 긴박성을 인식하고 하루하루 오늘이 심판의 날이라고 생각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항상 긴장하고 언제라도 주님을 만날 준비된 상태로 살아야 함을 깨우쳐 줍니다.
그날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15절을 보십시오.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그날은 하나님에게는 분노의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에 대한 진노가 너무 커서 멈출 수 없습니다. 동시에 백성들에게는 환난과 고통의 날입니다. 온 땅은 황폐하고 패망하는 날입니다.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입니다. 하나님의 현현과 임재하심이 진노로 나타나십니다(출 19:16; 20:21;신 4:11). 여호와의 날은 구원을 받을 사람에게는 은혜의 날이요, 형벌을 받을 사람들에게는 심판의 날입니다.
또 16절을 보십시오.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들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그날에 그들은 나팔을 불어 경고할 것입니다. 견고한 성읍들을 치는 날이요, 높은 망대를 치는 날입니다. 견고한 성읍이 무너집니다. 높은 망대가 무너질 것입니다. 그날에 전쟁의 나탈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전쟁처럼 처절하게 임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리십니다. 1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맹인같이 행하게 하십니다. 맹인들은 고난의 날에 피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여호와의 큰 날에 아무도 그 재앙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범죄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의 피가 쏟아져서 티끌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같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우상 섬기기를 즐겨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의 심판은 너무나 엄정합니다.
18절을 보십시오.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지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주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라”그들이 의지하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합ㄴ다. 그들은 은과 금을 하나님처럼 섬겼습니다. 유다 지도자들과 하수인들은 자신들의 물질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강포를 행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의지하던 은과 금도 그들을 구원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날에는 이 온 땅이 여호와의 분노의 불길에 삼켜질 것입니다.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집니다.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주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바냐는 유다 거민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이야기하다가 모든 세계 만민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선포했습니다. 이 예언은 역사적으로 40여년 후에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에 의해 실현되었습니다. B.C. 587년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온 땅에 임할 하나님의 진노와 질투의 불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이 날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장으로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 때에 일어날 모습을 다음과 같에 기록했습니다.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 1:7).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그날에 여호와의 큰 날입니다. 재림 나팔이 울려 퍼질 때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던 사람들 모두 다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집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8) 주님의 재림이 임박하였습니다. 모든 징조들이 급박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고도 빠르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더욱 더 깨어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상숭배는 패망의 길입니다. 여호와를 찾지도 안고 구하지도 않고, 거짓과 위선으로 살면 반드시 살면 패망합니다. 우리가 이방 풍조에 휩쓸리지 않고, 언약의 백성으로서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합당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은과 금이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서 온전히 구원해 주실 수 있습니다.
[서론]
밤이 깊고 어두움이 온 땅을 덮었다는 것은 새벽이 가까이 왔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빛이 임하면 어둠은 자연스럽게 자취를 감춥니다. 제 2의 도약과 도전의 시간표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악인이 심판을 받고 사라지면서 새로운 시대가 열립니다.
[1] 멸망과 회복의 날
멸망과 회복의 분기점이 무엇일까? 언제 멸망하고 언제 회복되는가?
1) 인류의 멸망의 날
인류의 멸망이 창세기3:1-6에서 시작됩니다. 아담의 타락은 인류의 타락이요 나의 타락입니다. 하나님 떠나 죄와 사단에 빠짐으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입니다. 영적 죽음, 영적 무지에 빠짐으로 우상, 점술, 미신, 종교에 빠집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깨지고 사람의 지배를 받으면서 온갖 정신병이 생겼습니다. 육 신과 삶이 병들고 가난, 우환, 고통, 상처, 중독에 빠져가고 있습니다. 결국 영원한 멸망 지옥에 빠지고 후손들이 그 길을 대물림하고 있습니다.
2) 회복의 날
창세기3장 아담의 후손이 멸망에 빠지자 바로 창세기3:15 여자의 후손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사단을 멸 한 왕으로, 죄와 저주에서 해방하신 제사장으로, 하나님 만나는 길 되시는 선지자로 회복의 길을 여셨습 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마다 영생을 얻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됩니다. 사단이 주 인 되는 날이 멸망의 날의 시작이요 그리스도가 주인 되는 날이 회복의 날입니다.
[2] 여호와의 큰 날
1) 우주적 심판 - 전 세계가 끝이 나는 우주적 심판이 있습니다. 복음이 다 증거 되면 끝이 옵니다. 말세가 되면 점점 악으로 빠지는 사람들과 반대로 믿음으로 가는 자들로 갈라지게 됩니다.
2) 심판의 원인과 대상 - 남 유다의 심판의 가장 큰 원인은 우상숭배와 혼합종교 입니다. 하나님을 배교하 고 세상에 빠진 자들이 심판을 받습니다. 세속과 향락에 쪄들어 자기 만족에 도 취해 하나님을 찾지 않는 자들 모든 것을 잃고 포로가 됩니다.
3) 하나님의 심판의 날 - “가깝고 빠르도다” 의 뜻은 즉시 행할 만큼 임박하다는 뜻입니다. 악인들의 어떤 기회도 없이 매우 신속하게 심판이 행해질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분노가 타올라서 온갖 죄악과 불의를 다 태울 것이며 혼란과 공포로 우왕좌왕 길을 못 찾고 무너질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범죄 입니다.
[결론]
1. 세상에는 두 종류의 길만 있을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자녀 되어 천국으로 가는 사람들과 사단 숭배에 빠져 지옥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을 뿐입니다.
2. 가문, 민족, 세계가 사는 길은 우상, 미신, 종교 생활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그리스도께로 돌아가는 것이 며 저들을 강권하여 주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라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우는도다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들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
첫째는 개인 종말
목사님이 지난 주일 아침에 돌아가셨어요. 아침 8시에 아마 교회를 가시다가 교통사고가 나가지고 아주 건장한
목사님인데 돌아가셨어요. 히브리서9장27절 사람이 한 번 죽는 건 정한 이치입니다. 그 후에 심판이 있습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개인 종말이 있습니다.
둘째는 시대 종말
시대란 말이 뭐냐면 역사가 바뀌는 거죠. 예를 들면 지도자가 바뀐다던지
아니면 어떤 나라의 이게 바뀔 때 시대의 종말 그럽니다. 일제의 치하에서 36년 동안 있었습니다. 해방 됐지 않겠습니까. 이게
뭐냐면 변화거든요. 그리고 해방 후에 전쟁 나고 남북이 갈라지면서 약 70년 동안 지금 남과 북이 오랫동안 한 민족이 총을
겨누면서 살아왔습니다. 북한이나 남한을 보니까 극에 달했어요. 결국 우리나라가 통일시대가 올 수밖에 없습니다. 시대 종말 이건
시대가 바뀐다는 말입니다. 세상의 종말이 있습니다. 너무 이상하면 “말세다” 이러잖아요. 큰 악이 행할 때 말세라는 표현을
씁니다. 죄가 홍수처럼 밀려옵니다. 죄가 차고 올라서 하늘을 치고 올라가는, 하늘에 닿으니까 심판이 돼버리는 이게 말세.
디모데후서 3장 1절에서 5절 보면 말세의 징조가 나옵니다. 사람이 변합니다. 악하게 변해요. 무정하고, 부모를 거역하고, 인정이
없고, 무자비하고, 부모 효도, 그런 말은 옛날 말입니다. 점점 갈수록 사람들은 악을 좋아해요. 선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악이
성행하는 시대가 와요. 악과 불법이 성행하는. 온 땅은 타락 극치가 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마음을 다 뺏겨요. 너무 돈을
사랑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요. 돈과 쾌락에 빠지는 시대 옵니다. 그리고 나를 너무 사랑해. 나밖에 몰라. 부모도 필요
없어, 선생도 필요 없어. 그냥 내가 돈 벌고 누리고 성공하고, 내가 귀찮으면 부모도 형제도 다 내던지는 거예요. 성경은 이처럼
개인, 시대, 세상 종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멸망과 회복의 날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 시작합니다. 이게 근본 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은 모든 지혜와 지식의
근본 입니다. 하나님을 모른다? 그 사람은 근본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 합니다. 그래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과 함께 입니다. 함께 하면서 하나님과 축복을 마음껏 누리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만들었어요.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고 축복을 인간에게 다 주었어요.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고, 다스리고,
정복하고... 만물의 영장이라. 이 어마어마한 축복과 권세를 인간에게 주었습니다. 인간에게 통치권을 줬습니다. 이런 축복된 인간이
이 땅에서 고통이 많을까? 딱 하나입니다. 하나님 떠나서 그렇습니다. 근본이 무너져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행복하다 그건
거짓말이에요. 하나님 떠난 것을 죄라고 말해요. 죄란 말이 뭐냐면 근본이 무너진 걸 말합니다. 이게 원죄 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비참한 사건이 벌어졌는가? 원인자가 있어요. 그게 사단입니다. 사단이라는 악한 영 때문에 인간은 속아서 하나님 떠나게 되고 죄에
빠집니다. 그 후로 사람들은 사단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이게 운명 그럽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운명에 묶여 있어요. 태어나면서
인간들은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뿌리가 죄에요. 인간은 씨가 죄의 씨입니다.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죄로 잉태합니다. 죄악 중에
출생하고, 죄 중에 살아가고, 죄 중에 죽습니다. 인간은 죄를 피할 수 없습니다. 이게 인간의 근본이에요. 인간은 죄와 사단에
묶여서 태어났기 때문에 축복 아닙니다. 이미 저주 아래 있습니다. 이미 뿌리가 무너져버린, 근본이 무너진 인간 입니다. 사단
숭배에 빠져 버립니다. 우상 숭배라 말합니다. 왜 우상을 하나님이 가장 미워합니까? 우상은 사단 숭배 입니다. 그리고 온갖 이
땅의 미신, 풍습, 제사, 고사, 전통 이게 다 한마디로 말하면 귀신을 섬기는 겁니다. 문제의 뿌리 입니다. 이걸 영적 문제라
그래요. 원래 하나님의 영이 함께했는데 사단이 들어왔단 말이에요. 영이 병들고 잘못 되니까, 근본이 무너지니까 아무리 애를 써도
행복 안 나옵니다. 그래서 나오는 게 정신병이 오기 시작합니다. 뭔가 혼란스럽단 말이에요. 근본이 깨지니까 내가 나를 모르겠어.
정체성도 모르겠고 왜 사는지도 모르겠고 늘 죄 속에서 죄책감만 있고. 죄의식 있지. 악령이 역사하니까 시달리지. 악몽, 가위
눌리지, 시달립니다. 우울증으로, 공황증으로, 조울증으로. 근본이 무너지니까 정신이 분열된다는 말이에요. 정신병 시대 옵니다.
이상한 짓도 합니다. 살인도 하고 자살도 하고 별짓 다 하잖아요 악령이 역사하니까. 육신도 병들어요. 대부분의 질병들이 몸이 아픈
게 아니에요. 영과 마음이 병드니까 몸으로 튀어나온 겁니다. 많은 병들의 뿌리는 여기서 와요. 육이 병들고 삶이 병들어요. 삶의
터전이 병들어 버리고. 가정이 병들어 버려요. 이 배경 때문에 부부 간에 얼마나 갈등이 많겠어요. 겉으로 포장하지만 포장이
됩니까? 화장 싹 하고 입술 칠하면 감쪽 같습니다. 그러나 본질은 안 되잖아요. 행복을 위해서 살아가고 애를 쓰지만 남는 게
뭡니까? 조금 낫겠지, 낫겠지 하지만 근본이 그대로 있으니까 오는 게 고통이란 말이에요. 인간이 뭐냐고 묻는다면 고통입니다. 저는
이걸 찾았어요. ‘아 고통이구나’ 행복을 꿈 꾼 만큼 남는 거 하나 있습니다 상처. 인간은 고통, 상처. 포장하죠. 고통과
상처가 쌓여 가니까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상처가 쌓여서 오는 게 분노 입니다. 그래서 못 참는 거예요, 못 견디는 거예요. 원망
하고 누구 때문에. 아닙니다. 이 뿌리에서 오는 거예요. 근본을 못 찾게 되면 누구 때문에 하고 평생 원망하다가 인생을 망쳐
버려요. 온 땅은 병든 세상이에요. 정신이 병들고, 마음이 병들고, 육신도 병들고, 삶도 병들고 다 병들었어요. 사람들은 끙끙
앓아요. 어떻게 해결합니까. 몸부림치는 거예요. 너무 괴로우니까 하는 게 뭡니까? 도피처가 없잖아요. 술을 많이 찾습니다. 조금
세련된 사람은 마약을 먹어요. 도박에 빠지고, 학생들은 게임에 빠지고 어딘가에 빠져 가는 거예요. 점점점 사람들은 중독됩니다.
중독 시대 와요. 아무도 나를 치유할 수 없어. 가족도 도움이 안 돼. 어딜 가도 위로가 안 돼. 결국 학생들은 게임, 다 기계
중독이라. 왜? 위로가 안 돼. 그나마 개, 강아지는 속을 안 썩이고 상처 안 주네? 사람은 상처 줘도 개는 상처 안 주잖아요.
사람들이 외로우니까 강아지, 고양이 이런 걸 많이 키웁니다. 식물, 분재 많이 키우더라고요. 그렇게 사람들이 마음을 다른 쪽으로
쏟아 갑니다. 중독 시대가 와요. 그러면서 너무너무 괴로우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살에 빠집니다. 죽으면 끝이라면 일찍 죽으면 괜찮죠
오래 살면 힘든데.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내세가 있단 말이에요. 지옥 간단 말이에요. 그리고 이건 못 끊어. 우리 후대가 또
가야 돼. 끝없이 계속 가는 문제에요. 악령 사단의 지배를 받는 그 날부터, 사단이 주인 된 그 날부터 인간은 멸망 길로 들어와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가고 있어요. 어떻게 행복합니까? 행복한 척 하고 있죠. 다 속임수이죠. 사람들이 불쌍한 거예요.
회복의 날이 있습니다,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와서 죄를 멸하고, 사단을 깬 분 이걸 구세주라고 불러요. 그 단어가
그리스도 입니다. 그리스도란 하나님 만나는 길 선지자, 죄를 멸한 제사장, 사단 이긴 왕 이 말이에요. 그 분의 이름이 예수님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예수를 믿는 거예요. 그리스도는 뭐냐면 직책이에요. 예수는 이름 입니다. 예수님이 질문하잖아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십니다” “예수님은 바로 내 죄를 해결하신 분입니다, 사단을 이긴
왕 입니다, 빠져 나오는 길 입니다” 예수만이 길, 다른 길은 없습니다. 아무리 별짓 다 해도 답은 그리스도에요. 이거 모르면
헛일이라니까요. “주는 그리스도시요” 신앙고백이 필요합니다. 주인을 교체해야 돼요. 우리가 사기 당했어요. 사단에게, 이 원수
마귀에게 속았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 원수 마귀를 이기신 그리스도 예수를 주인으로 모셔야 돼요. 길은 이거밖에 없어요. 영접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가 돼요. 이걸 구원 그래요. 그리스도 예수가 구원하는 겁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구원자 입니다. 영접할 때
해방됩니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권세가 생깁니다. 악귀가 떠나간단 말이에요. 귀신이 굴복하기 시작합니다. 왜? 사단, 마귀, 귀신을
이긴 그리스도, 메시야가 왔기 때문에 무너진단 말이에요.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성령으로 함께합니다. 아예 하나님의 영이
나와 함께 해요. 영원히 함께 합니다. 그리고 영원한 천국으로 갑니다. 회복의 날 이 말입니다. 언제 그리스도가 주인 된 날. 그
날이 회복의 날 입니다. 악령이 주인 되는 그 날은 멸망의 날 입니다. 그래서 복음 안에 있으면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자유함이 있어요. 평안이 있습니다. 왜? 죄 사함 받았잖아요, 운명에서 빠져 나왔잖아요, 악령 떠나가잖아요, 천국 가잖아요. 근본
평안이 있어요. 이 배경을 가지고 가문을 세워야 돼요. 산업도, 나라도 이 배경위에 세워야 돼요. 나라가 우상을 많이 섬기게
되면 재앙 옵니다. 가문이 우상 많이 섬기고 제사 지낸다? 재앙 와요. 왜? 악령을 끌어 들이니까. 전도가 뭐냐면 이 땅에 가장
시급한 겁니다. 내가 돈이 필요한데요? 좀 불편한 거지. 가장 시급한 게 전도, 선교. 이것은 절대 명령이요 교회의 존재 이유
입니다.
여호와의 큰 날
여호와의 큰 날. 하나님의 심판을 말씀 합니다. 왜 하나님이 심판할까?
1. 우주적 심판
2-3절
우주적 심판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땅 위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 내가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거치게 하는 것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할 것이라 내가 사람을 땅 위에서 멸절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땅 위의
모든 것을 진멸한다 마지막 심판을 말씀합니다. 진멸, 멸절 그런 단어가 나와요. 그게 뭐냐면 모든 걸 다 끝낸다 말합니다. 노아
시대도 하나님이 심판 했어요. 노아 때와 좀 다른 점이 있습니다. 물로 심판하면 물고기는 물이 많으니까 안 죽잖아요. 그런데
마지막 때는 물고기도 다 죽어요. 그게 차이점 입니다. 마지막 심판 때는 모든 게 다 죽어요. 심판하는데 강조하는 게 하나
있어요. 사람 입니다. 왜 사람을 강조 하냐면 모든 심판의 근본 원인자가 짐승이 아니란 말이에요. 심판 근본 원인이 사람들이에요.
사람들의 타락 때문에 심판이 오는 거지 갑자기 개가 독해져서 심판 오는 거 아니란 말이에요. 사람의 죄악이 근본 심판의 원인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2. 심판의 원인과 대상
왜
그렇게 그 당시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들이 심판 받는가? 심판의 가장 큰 직접적인 원인이 4절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들 위에 손을 펴서 남아 있는 바알을 그 곳에서 멸절하며 그마림이란 이름과 그 및 제사장들을 아울러 멸절하며』
이스라엘 민족들이 바알을 섬겼어요. 이방인의 신, ‘그마림이란 이름과’ 그마림이 뭐냐면 이방인 제사장들 입니다. 완전 이방
우상에 쪄들은 사람을 말합니다. 5절 『또 지붕에서 하늘의 뭇 별에게 경배하는 자들과 경배하며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들과』 ‘또 지붕에서 하늘의 뭇 별에게 경배하는 자들과 경배하며’ 그걸 섬기는 겁니다. 여기서 보게 되면 하나님의
심판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뭐냐면 우상 숭배에요. 이방인의 우상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심지어 성전 안 까지도 우상이 들어
와버렸어요. 5절‘뭇 별에게 경배하는 자들과 경배하며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들’ 하나님도 맹세하고, 우상
앞에서도 맹세하고. 이게 뭐냐면 혼합 종교에요. 하나님도 믿고 부처도 믿고 제사 지내고 예배 드리고 완전 혼합 종교. 신앙생활은
오직 입니다. 오직 하나님 외에는 경배의 대상이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자가 없습니다. 하나님도 믿고 우상도 믿고
나중에 어떡합니까? 그게 발전하니까 결국 하나님 떠나죠. 그것이 6절『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과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을 멸절하리라』 점점점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에 빠지더니, 반반 믿더니 이제는 아예 하나님을 배반
해버려요. 그리고 여호와를 찾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사람은 영적으로 하나님을 멀리하면서 서서히 서서히 교회, 예배
떠나기 시작하면 나중에는 완전히 떠나버려요. 우상 숭배 해요. 로마서1장25절 우상이 뭐냐면 거짓을 진리처럼 믿는단 말이에요.
돌, 나무, 새... 이게 다 하나님이 만든 선물 아닙니까. 다스리라 했는데 피조물을 창조주 이상으로 섬겨요. 이게 미련한
거예요. 무지죠. 어떻게 돌 밑에 절을 합니까. 돌 밑에, 나무 밑에 그건 무지한 거예요. 고사 지내는 거 어떻게 생각 합니까?
어떻게 돼지 대가리에 절을 합니까? 그건 돼지만도 못 하다는 거예요. 나를 비하시키는 겁니다. 고린도전서10장19절20절 우상과
제사는 귀신을 섬기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철저히 금한 겁니다. 7절 점점점 이방인의 풍습이 들어와요. 서서히 뒤바뀝니다. 반
하나님 믿더니, 떠나더니, 이제는 이방인의 것이 싹 들어와서 자리 잡습니다. 이렇게 변해가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심판을
말하는 겁니다. 7절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고 그가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음이니라』 희생이 뭐냐면 심판 때에 희생 제물처럼 죽는 다는 말이에요. 청할 자들을 구별한다는 말이 뭐냐면 이방인이
들어와서 타락한 백성들을 희생 제물처럼 죽인다는 얘기입니다. 8절『여호와의 희생의 날에 내가 방백들과 왕자들과 이방인들의 옷을
입은 자들을 벌할 것이며』 방백들이 뭐냐면 지도자 입니다. 지도자들이 먼저 타락 해버렸어요. 왕자들, 왕들이 타락 합니다.
‘이방인의 옷을 입은 자들’ 이방인이 제사할 때 입는 옷, 우상 숭배 할 때 입는 옷 알록달록 하잖아요, 멋있어 보이잖아요.
그러니까 이들이 그런 옷을 가지고 들어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걸 즐겨 입는 거예요. 우상 숭배의 옷을 입고 돌아 다녀요. 그런
식으로 서서히 문화가 잠식 됩니다. 9절 ‘그날의 문턱을 뛰어 넘어서’ 문턱을 뛰어 넘는다는 말이 뭐냐면 “문턱 밟지 마라” 들어
봤어요? “문지방 밟지 마라 복 나간다” 이방 풍습은 정성을 다해서 문지방 안 밟으려고 노력하면서 하나님은 완전 무시하는
사람들, 문지방이 집 안과 밖의 경계선 아닙니까? 집 안을 지키는 신이 있다고 문지방을 밟으면 귀신이 노한다고 해서 안
밟았거든요. 우상의 옷은 멋있다고 유행처럼 입고 다니면서 하나님은 거부하고 점점점 빗나가서 이스라엘 땅들이 완전히 우상으로,
무속으로 쪄들어 가는 그런 모습 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서 이들을 벌을 하죠. 『그 때에 내가 예루살렘에서 찌꺼기 같이
가라앉아서 마음속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하는 자를 등불로 두루 찾아
벌하리니』 찌꺼기 같이 가라앉은 사람들. 포도주 통 제일 밑에 찌꺼기 달라붙어서 응고된 거 있어요. 찌꺼기가 응고된 것처럼 향락과
세상에 응고 돼서 빠져 들었단 말이에요. 자기 안일에 빠져서 하나님은 복도 안 주고 화도 안 준다. 우리가 죄를 지어도 괜찮다.
왜? 봐라 오랫동안 벌 안줬지 않느냐? 하나님을 완전히 무시하고 응고된 찌꺼기처럼 빠진 인생들 이걸 하나님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심판
14절
보면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라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우는도다』 ‘여호와의 큰
날’ 크다는 말이 뭐냐면 총제적인 전체를 심판 합니다. ‘가깝고도 빠르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즉시 행할 만큼 임박하다는
뜻입니다. 가까운 것도 가까운 건데 또 빨라. 즉시 뭔가 행할 만큼 임박한 시간표다 말씀하고 있어요. 악인들에게는 전혀 기회를
주지 않고, 악인들에게는 전혀 경고도 하지 않고 즉시 심판한다는 뜻이거든요. 너무 악을 행하니까, 기회도 안 주고 즉시 하나님이
심판 하겠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북한 빨리 회개해야 됩니다. 왜냐면 너무 오랫동안 어두운... 너무 오랫동안 우리 백성들 괴롭혔고
너무 악을 많이 행했어요. 우리나라가 통일 시대 옵니다. 세계복음화 하도록 하나님이 하시겠죠. 악은 결국 무너지게 돼있어요.
하나님이 손을 볼 수밖에 없는 시간표 왔단 말이에요. 15절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분노라는 말이 그런 뜻이 있어요. 과잉되다 또는 범람하다. 과잉되게 넘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노가 쌓이고 쌓여서 폭발한다는 뜻이에요. 17절 ‘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맹인 같이 행하게 하리니’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린다 ‘내린다’ 뜻을 보니까 좁게 한단 말이에요. 하나님을 거역하는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올무에 밀어 넣듯이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코너에 밀어 넣어서 묶어 놓겠다 말씀하고 있어요. 그리고 맹인 같이 눈은 떴지만 이 환난과 문제
때문에 당황해서 이들이 우왕좌왕 하다가 무너지는 모습을 말하고 있어요. 이들은 결국 맹인처럼 눈 뜨고 당한다. 너무 악을 행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코너에 몰아넣고 이들을 심판 하겠다. 하나님이 이 말씀 준 것은 뭔가 대한민국 땅에 새로운 시작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그리스도를
주인 삼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예배하며 가는 사람들 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는 길이죠. 이들은 이 땅에서
희생도 합니다. 복음을 위해서 그렇게 살아가죠. 왜냐면 이들의 소망은 영원한 천국에 있습니다. 사단을 주인 삼은 사람들이 있어요.
우상에 빠져가는 사람들이에요. 특징이 항상 나 중심 입니다. 그리고 오직 돈 밖에 모르는 사람들, 목적은 성공 입니다. 이것
때문에 나라고 뭐고 다 이용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게 악인들이거든요. 범죄와 악을 행하는데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거짓을
많이 합니다. 거짓인데 안 부끄러워요. 왜 거짓은 사단의 것입니다. 사단은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에 거짓이 안 부끄러워요. 왜냐면 제
것 이니까. 내면에 많은 범죄를 일으킵니다. 그리고 나라를 위하는 척 하지만 탐욕에 묶여 있는 사람들이에요. 아마 깊은 내면
보게 되면 무한한 돈들이 왔다갔다 할 거예요. 결국 이 길은 나중에는 멸망으로 갑니다.
우리가
살려야 돼요. 우상과 사단이 역사하기 때문에 먼저 저와 여러분이 복음을 깨달아야 돼요. 복음부터 이해해야 돼요. 예수님이
그리스도 이거 알아야 돼요. “예수님이 그리스도” 사단을 이긴 왕, 귀신을 꺾은 왕, 저주를 막은 제사장,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는 선지자. 그리스도는 모든 저주를 없애 버리고 원래 인간 회복 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알아 가면 회복이 돼요. 그래서 이
복음을 가진 사람들이 일어나야 돼요. 후대들이 미래 입니다. 다민족 입니다. 다민족은 선교 입니다. 탈북자 입니다. 북한 문
열리게 되면 북한이 선교지가 돼요. 같은 나라이지만 너무 오랫동안 문화가 달라서 이걸 염두에 두고 가야 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
자신, 우리 교회는 발판이 돼야 돼요. 우리는 배경 돼야 돼요. 무슨 배경? 복음적 배경 돼야 돼요. 나라가 안정 돼야지 국민과
산업 하는 분들이 똑같이 안정되고 또 우리 교회 성전건축도 해야 되는데 같이 맞물려 있습니다. 개인, 가정, 가문에 새롭게
뒤바뀌는, 어둠이 다 물러가는 복된 시작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스바냐 / 여호와의 날을 선포한 선지자
1. 인적 사항
(1) 스바냐는 '여호와께서 숨겨 주신 자', '보호하신 자'라는 뜻.
(2) 남 유다 제13대 왕 히스기야의 4대손, 아마랴의 증손, 그다랴의 손자 구시의 아들(습 1:1).
③ 남유다 제16대 왕 요시야 때 활동한 왕족 출신의 선지자.
④ 소선지서 스바냐서의 저자.
2. 시대적 배경
스바냐는 B.C. 630-625년경, 남유다 제16대 왕 요시야의
통치(B.C.640-609년) 때에 주로 활동한 선지자이다. 당시 근동의 패권국인 앗수르는 신바벨론
제국(B.C.625-539년)의 등장과 함께 그 세력이 급격히 쇠퇴해져 가던 때였다. 이 때에 요시야는 대외적으로는 선왕들이
친앗수르 정책을 폈던 것과는 달리 강력한 반 앗수르 정책을 폈다. 그리고 대내적으로는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단행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자주성을 회복하는데 크게 주력하였다. 이러한 때에 스바냐는 요시야가 종교개혁을 본격적으로 개시하기에 앞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에 대한 책망과 열방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을 예언함으로써 그의 종교개혁에 박차를 가하였던 것이다.
(1) 왕족임에도 불구하고 왕과 정치 종교 지도자들을 위시하여 일반 백성들의 사회적 부패와 종교적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한 것으로 보아 불의에 대해 단호하고 사리 판단이 분명한 자(습 1:4-13).
(2) 여호와의 날에 대한 그의 메시지가 매우 힘있고 선명한 것을 보아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강한 확신을 소유한 매우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습 1:14-18).
(3)
여호와의 날의 심판 예언이 흡사 죽은 자를 위해 부르는 진혼곡이나 장엄한 장송곡과도 같은 만가체(挽歌體) 운율을 갖추고 있으며,
이외에도 매우 아름다운 문장들을 많이 사용한 것 등을 볼 때 문학적 재능이 탁월한 자(습 1:12, 17; 2:4;
3:11-13).
5. 구속사적 지위
(1) '여호와의 날'의 심판 예언을 통해 의인과 악인이 종말에 맞이할 운명의 대조적인 모습을 매우 선명하게 예언한 선지자.
(2) 백성들의 죄악과 도덕적 결함과 신랄한 비판으로 요시야 왕의 종교 개혁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자(습 1:2-3; 대하 34:3-8).
6. 평가 및 교훈
(1)
스바냐는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날로서 '여호와의 날' 도래를 선포하고 있다. 이 날은 궁극적으로 세상
끝날에 세계 만민에게 시행될 최후 심판의 날을 예언한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이 최후 심판의 날에 영원한 멸망에 이를
악인의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영원한 구원과 축복을 받을 의인의 삶을 살고 있는가를 두려운 마음으로 돌아볼 일이다.
(2)
남유다 전 지역에 걸쳐 사회·경제·종교 전반적인 부패함이 퍼져 있던 때 왕족 출신의 스바냐는 안일하게 그 사태를 방관한 것이
아니라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먼저 왕국 주변의 사람들이 부패와 종교 지도자들의 범죄 함으로 날카롭게 비판하였는데, 범국민적인
각성과 회개를 촉구하였다. 이는 부정 부패와 타락과 향락의 일변도로 치닫는 오늘의 이 사회 속에서 성도된 우리가 행해야 할 마땅한
본분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한다(습 2:1-3).
(3)
스바냐는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심판 예언을 준엄하게 선포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한번 택한 백성을 결코 영원히 버리지
아니하시며 징계 중에도 반드시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사실도 확신 중에 선포한다. 이는 실로 현재 시험으로는 고난받는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힘써 전해야 할 것이다.
7. 핵심 성구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습 2:3).
스바냐는 어떤 책인가?
하나님의 그루터기를 희망한 스바냐는 유다의 가장 유명한 왕 중의 한 사람인 히스기야의 증손자입니다. 그의 혈관에는 왕의 피가 흐르고 있었으나, 보다 더 중요한 일은 그의 입술에 하나님의 메시지를 담고 전하는 자였습니다.
• 스바냐서의 선지자
스바냐는 “여호와의 숨기심”,
또는 “여호와의 보호하심“이란 뜻입니다.
이는 스바냐서의 메시지의 주요 내용으로 하나님께서는 ”심판 날에 겸손한 자를 숨기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것을 말해주는 듯
합니다.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4대 후손이라고 하였는데(1:1), 그렇다면 스바냐 선지자는 요시야의 조카뻘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는 조카로서 삼촌(요시야)에게 예언 활동을 했으며,
우상 숭배에 대하여 심하게 책망을 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가 활동했던 기간은 요시야가 종교 개혁(주전 627년)을 하기 이전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는 히스기야 이후에 약 60년간이나 계속되었던 영적인 암흑기를 깨트리고 요사야 왕에게 다가가서 하나님의 뜻을 전해주었습니다.
”주의 날은 심판의 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면 기쁨의 날이 될 것입니다!“
• 스바냐서의 배경
스바냐는 경건한 왕 요시야가 통치하는 동안에 메시지를 전하였으며 이 때는 신앙의 큰 “부흥“이 일던 시대였습니다(왕하 22-23장).
요시야는 8세에 보좌에 올랐으며 16세에 자신을 여호와께 헌신하였슶다.
20세 때에는 그 땅에 큰 개혁을 시작하였으며 우상을 헐고 거짓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을 심판하였습니다.
다음으로 그는 성전을 재건하여 그 민족으로 하여금 유월절을 크게 지키도록 인도하였습니다.
외관상으로 나타난 일들로 보아서는 신앙적인 관심과 정화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스바냐는 표면보다 더 깊은 곳을 보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보았으며, 그들의 신앙적인 열성이 진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개혁은 얄팍한 것이었으므로,
백성은 가정에서 우상들을 제거하였으나 그들의 마음에 있는 우상들은 제거하지 않았습니다.
그 땅의 지도자들은 여전히 탐욕스럽고 불순종하였으며 예루살렘성은 온갖 사악함의 근원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 스바냐서의 개요
스바냐서의 개관도표
1) 심판의 날에 대한 예언(1:2-3:8) -모든 생물에 대한 심판(1:2-3) -유다의 심판과 회개에의 권고(1:4-2:3) -이방 열국들에 대한 심판(2:4-15) -예루살렘의 범죄를 책망함(3:1-8)
2) 회복에 대한 약속(3:9-20) -열국의 회복(3:9) -유다의 회복(3:10-20)
• 스바냐서의 메시지 스바냐의 멧세지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두 부분은 심판을 다루며 한 부분은 자비를 다룹니다.
1. 하나님은 유다를 심판하실 것이다(1:1-2:3) 그들의 죄 때문인데 특히 우상 숭배의 죄 때문입니다(4-6절).
이 선지자는 세 종류의 죄인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여호와를 버린 사람들과 우상만을 섬기는 사람들(4-5상반절)과,
여호와와 우상을 함께 섬기는 사람들(5하반절),
또한 여호와를 공개적으로 버리고 그와 아무 관계를 맺지 않으려는 사람들(6절)입니다.
장차 임할 심판은 7-18절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스바냐는 이 날을 “여호와의 날“이라고 부르는데 이중의 의미가 있습니다. 즉,
지역적으로는 과거에 유다와 이스라엘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이며,
또한 예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그의 진노를 퍼부으실 장차 임할 심판(계 6-19장 참조)입니다.
이 경우에 있어서 “여호와의 날“은 주전 606년의 바벨론의 침략과 주전 586년의 성읍과 성전의 마지막 멸망이 될 것입니다.
2장 1-3절에서 스바냐서의
선지자는 예루살렘과 유다를 향하여 백성이 여호와께 돌아와 그들의 죄를 회개할 것을 탄원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칙령이 통과되기 전에 시간이 아직 있을 때, 여호와를 향하여 자비를 요청하라.“
그를 만날 만한 때에 그를 찾으라! 그러나 슬프게도 이 민족은 “종교적인“ 것으로 만족하였습니다.
2. 하나님은 이 나라를 심판하실 것이다(2:4-3:7) 선지자는 유다 주위에 있는 여러 이방 나라들의 이름을 말하며 그들의 죄들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벌하실 것임을 알립니다.
블레셋(4-7절), 애굽(12절), 앗수르와 그 수도 니느웨는 완전하게 파괴되어 그들의 땅은 황야가 될 것입니다(13-15절).
스바냐는 자기의 백성에게 다시금 호소함으로 그의 메시지를 끝맺고 있습다(3:1-7).
만일 하나님이 이방인들의 죄를 심판하신다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인 유다의 죄에 대해서는 얼마나 더욱 심판하실 것인가?
그는 예루살렘이 음란하고 오염되었다고 말합니다. 요시야가 모든 우상들을 제거하였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볼 수 있으시며,
그들의 마음 가운데 있는 반역을 보셨습니다. 이들은 여호와를 믿는 참된 믿음을 가지지 못하였습니다.
3.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회복시키실 것이다(3:8-20) 스바냐는 위대한 약속으로 그의 멧세지를 끝맺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다시 모을 것이며 이방 나라들을 벌하실 것이고, 이스라엘과 유다를 자기의 땅으로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스바냐는
3장 8절은 아마겟돈 전쟁을 예언하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이 때는 모든 나라들이 예루살렘에 대항하여 모이게 될 마지막 때입니다(계 19:11-21).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셔서 이 민족들을 심판하실 것이며 주님의 왕국을 건설하실 것입니다.
그는 흩어진 유대인들을 다시 모을 것이며, 그들의 죄에서 정결케 하실 것이고,
그의 의로운 왕국을 창설하셔서 예루살렘에 있는 다윗의 보좌에 앉으실 것입니다(슥 12-13장 참조).
• 스바냐서의 남은 자 신앙 스바냐는 “남은 자들“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2:7/2:9/3:13)
그 당시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을 가진 적은 무리의 믿음의 그루터기가 있었는데 오늘날에도 그와 같이 남은 믿음의 그루터기가 있습니다.
말세에 모든 유대인이 주님을 따르지는 않을 것이지만 남은 신앙인들은 따르게 될 것입니다.
심판이 지나고 하나님의 진노가 끝이 나면 그는 이 민족을 회복시키실 것이며 그들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괴롭힌 자들을 괴롭힐 것이며(3:19) 유대인들을 그들의 땅으로 돌려 보내실 것입니다.
물론 이 일은 70년의 포로 생활이 끝난 후에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스바냐는 시온의 딸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의 형벌을 제하시고, 원수를 쫓아내시며,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계시므로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기쁜 노래를 부르라고 권면합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스바냐 3: 14-18).
스바냐 개요
1. 서론
모든 성경들은 본서의 중심인물인 ‘스바냐’를 표제로 삼았으며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숨기시다’ 이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심판하는 날에도 그분의 참된 백성은 안전하게 숨겨주
실 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2. 저 자
전통적으로 스바냐 선지자로 보는 데는 이견이 없으며 선지자로 부름을 받고 말씀을 선포했다고 증거하고 있다(1:1).
유다의 히스기야왕의 4대손(현손)으로 왕족 출신이며 왕실과 귀족사회의 타락상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3. 기록시기와 시대적 배경
유다의 요시야 왕(B.C.640-609) 시대에 사역을 하였다.(1:1)
앗수르은 아슈르버니팔 왕(B.C.669-633년)이 다스리던 시대로 앗수르가
점점 쇠퇴해 가던 때였다.
므낫세와 아몬 왕의 우상숭배에 반하여 요시야 왕이 종교개혁을 할 당시 도와 신앙부흥 운동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대략 B.C.640-622년 어간에 기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4. 기록목적
요엘서나 아모스서와 마찬가지로 스바냐서 역시 ‘여호와의 날’이 중심주제다.
‘여호와의 날’은 불법하고 경건치 못한 자에게는 심판의 날이요, 고난 중에도 신앙을 지키는 의로운 자에게는 구원의 날임을 말한다.
오직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만이 여호와의 날에 구원에 참여하게 됨을 말하고 있다.
5. 구조
초 점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구원
구 분
1:1-2:3
2:4-3:8
3:9-20
유다심판
열방 심판
남은 자들을 구원하심
주 제
여호와의 날 : 진노의 날
여호와의 날 : 구원의 날
핵 심
구 절
[습]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6. 여호와의 날 : 심판의 날
어떤 선지자들보다 여호와의 날에 대하여 강렬하고 직접적인 묘사로 이루어졌다.
여호와의 날이 임박했음을(1:7,14), 또한 미래에 범우주적으로 이스라엘과 열방의 구원을 통해 성취됨을 선포한다.(3:16-20)
군사적 용어들로 묘사하며 만군의 여호와께서 적들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날로 묘사한다.
자신의 백성을 포함한 세상 만민들이 회복되어 여호와께 참 예배를 드리게 하기 위하여 이 날을 행하신다.
7. 중요 메시지
스바냐는 유다 사회를 오염시킨 종교적, 사회적 불의를 질타한다.
여호와의 날에 범죄 한 유다는 참혹하게 심판 받을 것이며, 이방나라들도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힌 까닭에 초토화 될 것이다.(2:14-15)
온전히 하나님을 찾는 가운데 마음을 겸비하고 공의와 겸손하게 살려고
힘쓰면 ‘혹시’ 심판을 면할 수도 있다.(2:3)
8. 하나님의 회복의 약속
범죄 한 예루살렘을 심판하는 중에도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들을 남겨두시고 보호하실 것이다.(3:12)
남은 자들은 입술이 깨끗하고 행실이 의로운 자들이 될 것이다.(3:13)
때가 되면 사방에서 ‘남은 자’들을 모으셔서 구원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영광을 받으실 것이며 그들을 보고 기뻐하실 것이다.(3:17)
9. 결 론
‘여호와의 날’은 심판의 날이기도 하지만 회개하여 죄사함 받은 모든 자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한 구원의 날이기도 하다
예언서는 거의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슬픔, 탄식, 분노, 절망을 묘사하는 부분이 많으나 스바냐는 하나님의 ‘기쁨’을 말한다.(3:17)
한낱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있으며 반대로 슬프게도 할 수도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 가운데 올바르게 살아가야 한다.
스바냐
저자 : 스바냐 1장 1절은 스바냐서의 저자가 선지자 스바냐라고 알려줍니다. 스바냐라는 이름은 "하나님에 의해 보호를 받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작 연대 : 스바냐서는 주전 635-625년 사이, 즉 요시야 왕이 통치하던 초기에 기록되었습니다.
기록 목적 : 스바냐의 메시지는 심판과 격려를 포함하는데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주요 교리를
알려줍니다. 1) 하나님은 모든 나라를 다스리는 주권자이시다. 2) 심판 날에는 악인이 처벌되고 의인은 신원을 받게 될 것이다.
3) 하나님은 회개하고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신다.
핵심 구절 :
스바냐 1:18,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지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주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라”
스바냐 2:3,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스바냐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요약 :
스바냐는 온 땅과 유다와 주변 국가와 예루살렘과 모든 나라에 대한 주의 심판을 선언합니다. 그 후 모든 민족, 특히 유다 백성의 신실한 남은 자를 향해 주의 축복을 선포합니다.
스바냐는 자기가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용기를 가지고 노골적으로 말하였습니다. 그의 책은 "주님의
말씀"으로 시작하여 "주님의 말씀"으로 마칩니다. 그는 사람들이 숭배하는 수많은 신들도, 앗수르 군대의 힘도 그들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모든 경고가 무시될 때 반드시 심판이
따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날은 성경에 자주 언급되어 있습니다. 선지자들은 그 날을 "주의 날"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날에 이루어질 사건들로서 예루살렘의 몰락과 같은 여러 사건들을 언급했는데, 그 사건들 각각은 궁극적인 주의 날을 가리킵니다.
예표 :
3장 14-20절에서 선포된 시온에 대한 마지막 축복은 아직 거의 다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우리는 그 예언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에 성취될 메시아적 예언들이라고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의 죄를
위해 죽임 당하시려고 오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의 형벌을 제하여 버릴 수 있으셨습니다(습 3:15, 요 3:16). 그러나
이스라엘은 아직 진정한 구세주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앞으로 발생해야 합니다(롬 11:25-27).
그들의 왕이 그들 가운데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그것을 자신을 위해 구속하시기 위해 재림하시는 때
이스라엘의 평화와 안전에 대한 약속이 성취될 것입니다. 주께서 부활하신 후에 하늘로 올라 가셨듯이, 그분은 다시 오셔서 이 땅에 새
예루살렘을 세우실 것입니다(요한계시록 21장). 그때에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성취될 것입니다.
적용 :
이름과 상황을 약간 조정만 하면, 주전 7세기경의 이 선지자가 오늘 우리의 강단에 서서 악한
자들을 향한 심판과 신실한 자들을 위한 소망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바냐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그의 백성의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죄로 인해 모독을 당하시는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고의로 죄를 범하면 하나님의 백성은 징계를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징계는 고통스러울지 모르지만 그 목적은 형벌보다는 구속적일 수 있습니다. 악이 반드시 처벌되는 것은 악이 맘대로
휘저으며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러한 때에 위로를 줍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불순종할 자유가 있지만 불순종의 결과를 피할 수
있는 자유는 없습니다. 하나님께 충실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이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잊지 않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