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召命, calling)과 사명(使命, mission)
소명이라는 말은 ‘왕이나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사명에로의 부름’을 의미하는 말로서 영어로는‘Calling’이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임금의 부름을 받은 신하는
임금의 소명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부르는 자의 권위가 지대 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소명을 받는 자는 그 부름을 거역할 수
없었다.
소명에는 그저 순종만 있을 뿐이다.
임금이 일꾼을 부를 때나, 신이신 하나님이 일꾼을 불러서 맡기는 일들은 국가적인
일이거나 신적인 과업이기 때문에 그 중요성이 대단하기 때문이다.
사명은 어떤 책무를 맡은자(혹은 소명을 받은 자)가 당연히 가져야
할 자연스러운 의무나 책임을 의미합니다.
당연히 해야만 할 어떤 과업이라는 뜻입니다.
사명을 영어로는‘Mission’이라고 합니다.
소명은 부름이고, 사명은 소명 받은 자의 과업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소명 없이
사명 없고, 사명감이 없는 자는 당연히 소명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독교인을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택한
자, 혹은 하나님의 부름 받은 자라고 합니다.
교회를 헬라어로 에클레시아(Ekklesia)라고 하는데, 이 말은‘부르다’, ‘불러내다’는 뜻입니다.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의 품으로, 죄악으로부터 영생으로, 마귀의 자녀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냈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기독교인은 소명을 받은 자들이며 각기 개별적인 교회라고도 말할 수 있다.
고린도전서 4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자기들을 포함한 모든
기독교인은, 마땅히 사명을 지닌 일꾼으로 여겨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일꾼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 즉 소명을 받은 자들에게는 오직
충성뿐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모든
기독교인은 누구나 소명을 받은 자들이며, 그들에게는 각기 중대한 사명이 맡겨져 있습니다.
목사나 선교사에게만 한정 된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됩니다.
일반적으로 목사나 선교사와 같이 구별된 직분자들에게는 소명과 사명을 요구하고
확인하는 일을 하지만, 그 외의 그리스도인들(자신들을 포함하여)에게는 전혀 관계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저 눈에 띄는
일에 부름 받은 사람들을 위한 들러리나 조역, 이들의 사역을 보고 받고 즐기는 관객이나, 혹은 심한 경우에는 그들을 평가하는
자의 자리에 앉고 싶어하는 것이다.
잘못된 인식이다. 교회의 질서와 효율성을 위하여 직분이 구분되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소명자이며 사명자들 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확실한 자만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람이며, 이런 사람들이 풍성한 교회만이 건강하게 성장하여 세상을 이기는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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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마리 의미
153이란 수는 충만을 상징하는 수라고 합니다.
153에 대한 의미를 소개합니다.
첫째, 그물은 요한 복음서를 의미하고, 큰 고기 153마리는 요한복음에 소개된 153개 말씀이라고 하는 입장입니다.
둘째, 복음을 전해야 할 사하나님의 사람들 곧 '하나님의 아들들'(The Sons Of God)'을 히브리어 숫자값으로 계산하면 '153'이라고 합니다.
셋째, 수학에서 '트리플 큐브 넘버(Triple Cube Number)'라는 수라고 합니다.
100에서부터 1000 사이에 4개의 수가 있다(153, 370. 371, 407)
트리플 큐브 넘버란 각자리수를 각각 세 제곱해 더한 값이 원래 자신의 수가 나오는 수를 말합니다.
1의 세제곱(1) + 5의 세제곱(125) + 3의 세제곱(27) = 153
그리고 '153' 은 17번째 정삼각 수 입니다(17 - 1 + 7 = 8)
성경에서 '8'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숫자값 - 888 / 방주에 들어갔던 노아 식구 - 8명)
수학에서 세제곱이란 정육면체(큐브)를 의미하는데 구약에 나오는 성막안의 성소와 지성소가 바로 정육면체입니다.
(솔로몬이 지었던 성전또한 정육면체 입니다)
그곳은 구별된 곳이기 때문에 1년에 한번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구별된 곳' 즉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거룩한 공간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153은 거룩 + 거룩 + 거룩을 뜻합니다.
거룩하고 거룩하고 거룩하다 - '지극히 성스러운 수'
나머지 트리플 큐브넘버들 역시 특별한 수로 성경에 등장합니다.
153 - 베드로가 낚은 물고기 수
370 - 두번째 큰 다윗의 별 10개로 이루어진 정삼각수
371 - 노아가 방주안에 들어가 있던 날짜수
407 - 창세기 1장 1절에서 '그리고' 땅 '을'(베엣)의 숫자값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또한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질서는 곧 수학이고 수학은 과학입니다.
넷째,
퀼리로스는
153이란 숫자 중
완전수 100은 가득 찬 이방인이고,
50은 모일 수 있는 이스라엘의 나머지 백성이며,
3은 삼위일체의 영광이라고 풀어냈다.
다섯째,
어거스틴에 따르면 153은 ‘1+2+3+4 .. +17’의 합계인데, 이는 율법(10계명)과
은혜(7은사)를 뜻하며,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오기로 감동된 모든 사람들을 나타낸다고 보았다.
여섯째,
제롬은 갈릴리 바다의 모든 종류의
물고기이며, 어느 날엔가 세상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모이게 된다고 해석하였다.
이런 기도문이 전해진다.
“
주님 저로 하여금 죽는 날 까지 물고기를 잡을 수 있게 하시고,
마지막 날이 찾아와 당신이
던진 그물에 내가 걸렸을 때 바라옵건대 쓸모없는 물고기라 여겨 내던져짐을 당하지 않게 하소서”.
요한은 왜 153마리라고 정확히 기록했을까?
153의 숫자에 대한 어떤 의미가 있는가?
요한은 '물고기'에 대한 단어를 세 가지로 나누어 표현하였다.
예수님께서 처음 제자들에게 5절에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라고 물으실 때는 '프로스파기온(προσφάγιον)'이라 표현했다.
이것은 빵과 함께 먹는 물고기로서 귀한 손님이 왔을 때 대접하는 '물고기'를 의미한다.
그리고 9절에 기록된 '물고기'는 식사 때 먹는 오프사리온(ὀψάριον)으로 말린 생선을 의미한다.
그러나 6절, 8절, 11절에 기록된 '물고기'는 '익투스(
ἰχθύς
)'라는 단어릏 사용했다.
'익투스'는 오병이어의 기적에 표현되었던 단어로서 이적에 사용되었던 표현이다.
특히 '익투스'는 '예수스 크리스투스 데오스 휘오스 소조메테'의 앞글자를 묶은 단어이기도 하다.
I : Iesus (예수스 : 예수)
X : Christus (크리스투스 : 그리스도)
θ : Theos (떼오스 : 하나님)
Y : Huios (휘오스 : 아들)
Σ : Sojomete (소조메테 : 구원자)
즉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마태복음 16:18절에 베드로가 고백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의 표현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렇게 해석하기도 한다.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귀한 것이 있느냐?'라고 물으시고,
제자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당신이십니다'라고 대답한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을 낚은 것이다.
그래서일까?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임을 표현하는 암호 기호로 물고기 즉 '익투스'를 사용하였다.
또한 히브리어 '베니 하 엘로힘' 즉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단어들의 알파벳 숫자를 다 더하면 153이 된다고도 한다.
예수님은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그 생선도 함께 드셨다.
결국 그 생선은 예수님 자신을 주신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아가파오)하느냐?"
베드로는 "내가 주를 사랑(필레오)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대답했다.
여기서 예수님은 '사랑'이란 단어를 '아가파오'로 사용하셨다.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하지만 베드로가 사용한 '사랑'은 가족과 형제간의 사랑을 의미하는 '필레오' 였다.
베드로는 차마 '아가파오'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인간적인 이름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 부르셨을 때는 더더욱 '아가파오'라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인 '필레오'라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한번 더 '아가파오'하는지를 물으셨다.
베드로는 여전히 '필레오'로 답해다.
그리고 예수님은 마지막 세 번째 물으실 때 '필레오'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다.
이때 베드로는 '근심'하며 대답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필레오)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베드로가 근심한 이유는, '필레오' 밖에 할 수 없는 연약한 인간의 사랑임을 표현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의식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 표현이 베드로에게 있어서 최선이었다.
예수님은 그 베드로의 표현을 그대로 받아주셨다.
그리고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 양'이란 의미이다.
바로 예수님의 양을 돌보는 목자가 되라는 뜻이였다.
우리가 아는바와 같이 베드로는 평생을 예수님의 양을 돌보는 목자로 살았다.
예수님께서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라고 표현하신 것처럼, 그는 평생을 목자로 증인으로 살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길을 따라간 제자였다.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베드로...
예수님을 버리고 다시 어부로 돌아갔던 베드로...
다시 예수님의 제자로 3년을 함께 살았던 베드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배신했던 베드로...
그러나 결국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순교했던 베드로...
베드로는 우리들의 연약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제자였다.
그러나 그 인간적인 베드로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거룩한 신부로 변해갔는지 우리는 보았다.
이제 주님은 우리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신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는 무엇이라 대답할 것인가?
그렇게 살아갈 자신이 있는가?
필기구를 만드는 M사의 볼펜에는 ‘153’이란 숫자가 상표처럼 새겨져 있다.
누구든 한 번 쯤 의문을 품어 보았음 직하다.
예수님 부활 이후 시몬 베드로를 비롯한 일곱 명의 제자들이 고기잡이에 나섰다.
밤새 헛수고만 거듭한 그들은 날이 샐 무렵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요 21:6). 음성을 듣고 순종했더니 그물 가득 물고기가 잡혔는데, 다행히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요 21:11)다. 잡힌 물고기가 바로 그 ‘153’마리였다.
시몬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을 만난 곳은 게네사렛 호숫가였다(눅 5:1-11).
그 시몬이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만난 곳
역시 처음처럼 같은 디베랴 호수였다(요 21:1-11).
게네사렛과 디베랴는 모두 갈릴리의 다른 이름들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경험한 첫 장면과 마지막으로 겪은 장면은 어찌나 유사한지, 신비하고 놀랍다.
베드로는 똑 같은 상황이 자신에게 반복되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데자뷔 현상을 연상시킨다.
성경에서 그물은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비유한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물은 백성을 취하고, 보호하는 선한 수단이었다.
그물은 예수님을 따른 첫 제자들의 직업과 남은 자들의 장차 사도직과 관련되었다.
물고기를 잡는 그물은 이제 영적인 그물로 바뀐다.
대표적인 보기가 천국비유이다.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마 13:47).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전하며 ‘그물’을 빗대신다. 그물 안에는 물고기로 가득 차지만, 어부는 취사선택을 하여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려낸다.
그물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사역 그 자체이다.
열 두 사도에 대한 공통된 이미지는 그물로, 사람을 낚는 영적 어부를
뜻한다.
또 찢어지지 않는 그물은 교회를 의미하였다.
2세기 말 이후 세례는 낚시 바늘과 그물에 의한 물고기 이미지로 표현되었다.
어부는 세례자이고, 물고기는 세례 받는 자이다.
물고기를 가리키는 헬라어 ‘익투스’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이시다’(Jesus Christos Theou Hyios Soter) 라는 신앙고백의 머리글자 모음이다.
오스트리아 트라운 호숫가에 있는 트라운키르헨 교회의 물고기 잡는 모습을 한 설교단(Fischerkanzel)은 유명하다.
1753년에 제작된 것으로, 고깃배에서 두 사도가 그물을 끌어 올리는 모습을 하고 있다.
로마 교황의 반지에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순히 응답하여 거두어들인 베드로의 풍어(豊漁)가 새겨져 있다. 초대 교부들은 작은 물고기라는 뜻인 ‘피스키쿨리’라고 불렸고,
라틴교회에서는 예수님 자신을 물고기로 상징하여 표현하기도 했다.
갈릴리 어부들은 물고기를 잡는 그물을 버리고, 사람을 구원하려는 영적 그물을 택하였다. ‘인생의 그물’을 버리고,
‘그물의 인생’을 얻은 것이다. 초대교회 교부들은 교회를 뜻하는 그물 안에 가득 잡힌 물고기 153마리를 다양하게 이해하였다.
퀼리로스는
153이란 숫자 중
완전수 100은 가득 찬 이방인이고,
50은 모일 수 있는 이스라엘의 나머지 백성이며,
3은 삼위일체의 영광이라고 풀어냈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153은 ‘1+2+3+4 .. +17’의 합계인데, 이는 율법(10계명)과
은혜(7은사)를 뜻하며,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오기로 감동된 모든 사람들을 나타낸다고 보았다.
제롬은 갈릴리 바다의 모든 종류의
물고기이며, 어느 날엔가 세상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모이게 된다고 해석하였다.
이런 기도문이 전해진다.
“주님 저로 하여금 죽는 날 까지 물고기를 잡을 수 있게 하시고,
마지막 날이 찾아와 당신이
던진 그물에 내가 걸렸을 때 바라옵건대 쓸모없는 물고기라 여겨 내던져짐을 당하지 않게 하소서”.
누군들 그물의 삶에서 예외일 수
있을까?
153이란 숫자는 볼펜에 붙여진 이름으로 설교자들이 강단에서 설교하기 좋아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볼펜에 붙은 153이라는 숫자에
대해서는 굳이 논할 필요가 없을 듯 하다.
신앙적 이유든 혹은 다른 이유든 사실 그것이 중요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153
이라는 숫자를 마치 마법사가 주문을 외울때 사용하듯 신성하게 받아들이는 일부 목회자들에게는 모나미볼펜에 153이라는 숫자를 붙여준
그의 신앙적 모범이 오히려 독이 되었을 수도 있다.
때로는 좋은 것을 주어도 변질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문제지, 변질될 것을
우려해 좋은 것을 아예 주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 낙원에 주어진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와 같이 말이다.
많은 설교자들이 153에 목을 매는 이유는 성경을 내러티브로 이해하는 대신 마치 전쟁터에서 쪽지에 쓰여진 암호문처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문단을 읽을 때 우리는 그 문단의 전후 관계를 살핀다.
그 글이 쓰여진 시간과 문화적 배경도 살핀다.
이 모든
것은 지극히 상식적이다.
"오빠는 바보야."라는 말을 들을 때 그것이 정말 객관적 사실을 전달하는 정보를 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연인 사이에서 자기의 마음을 몰라주는 상대에 대한 투정인지는 그 문장 하나만으로 알아낼 수 없다. 다시말해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문장의 전후를 보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굳이 신학을 전공하지 않아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굳이 국문학이나 문학, 언어학에 대해 심오한 지식을 갖추지
않아도 상식적으로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신학을 한다는 것은 여기에 더해서 그 글이 쓰여진 당시의 세계관과 지금과는 다른 관점들을
알기 위해서이고, 성경에 쓰여진 언어와 그 언어에 더해진 의미와 상징에 대해서 알기 위함이 기본적인 것이다.
153이라는 숫자에 대해서는 상당히 많은 연구아닌 연구가 있어왔다.
1. 알렉산드리아의 "퀼리로스(Cyril) (혹은 시릴)"는 153이라는 숫자는 세 가지 것으로 되어 있다고 했다.
Cyril은
100이라는 숫자는 완전수를 말하고, 목자의 완전한 양떼의 숫자, 씨앗의 완전한 열매도 100이라고 했다. Cyril에 의하면
100이라는 숫자는 장차 이방인들이 가득 차리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리고 50이라는 숫자는 모일 수 있는 이스라엘의 나머지
백성을 말한다. 3이라는 숫자는 삼위 일체를 나타낸다.
2. 게바(베드로)의 알파벳을 숫자로 계산하면 153이 된다.
튜빙겐학파에게서 나왔다고 한다.
3. 또 하나는 자연계의 물고기의 종류가 153가지 이므로 잡힌 물고기 153마리는 세상 모든 종족을 의미한다고 제롬이 말했다.
4. 어거스틴(Augustine)은 "10은 율법의 숫자이다. 10계명이기 때문이다. 7은 은혜의 숫자이다. 성령의 은사가
7배이기 때문이다. 7+10=17이다. 그리고 153은 1에서 17까지 더한 수의 합계(=1+2+3+...+17)이다. 그러므로
153은 율법과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올 모든 사람을 나타낸다"고 했다.
이 외에도 여러 주장들이 있겠지만 위의 주장들이 과연 타당성이 있고 납득할 만한 것인지에 대해서 상당한 의문을 가져보아야 한다.
(참고, 위의 설에 대해서는 자세히 찾아본 것이 아니므로 잘못이 있을 수 있습니다. 혹시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과연 성경은 암호로 가득한 책인가?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고, 그 숨겨진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수수께기 같은 퍼즐을
풀어내야만 하는 책인가? 하나님은 하늘의 비밀을 사람들에게 쉽게 알리지 않기 위해서 153과 같은 암호를 사용해서 그것을 깨달은
사람만이 하늘의 뜻을 알도록 하셨는가?
초창기의 신학이 중세기를 지나면서 신학은 오히려 일반사람들과 동떨이진 길을 걷기 시작했다. 결국 교회는 라틴어를 사용했고, 예배에
참석한 이들은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도 모른채 멍청히 시간만 보내고는 자신의 신앙적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면죄부나
사면서. 종교개혁이 시작되기 전까지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해독이 필요한 암호문을 던져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친히 인간이 되셨고,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셨고, 우리가 알아들을수 있는 언어로 우리에게 말해 주셨다. 하늘의 방언이 아닌 인간의 언어로 말이다.
그것이 내러티브다. 성경은 인간의 역사속에 들어와서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이다. 인디아나 존스가 하늘의 창고에 들어가
숨겨진 이상한 주문이 적힌 책을 훔쳐온 것이 아니란 말이다. 성경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친히 하늘의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인간의 문화속에서, 인간의 말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을 왜 수수께끼로 받아들이는가?
요한복음 20장에서 예수의 부활이 기록된다. 베드로는 비어있는 무덤을 보았고(20:6), 그 후 부활한 예수를
만난다(20:19). 다른 제자들과 함께 베드로는 기뻐했다(20:20). 그 자리에 없었던 것은 도마 뿐이었다(20:24).
그리고 21장의 사건이 기록된다. 21장에 기록된 사건은 앞에 기록된 사건과 관련없이 하늘에서 내려온 계시로 해석해야 하는 그런
사건이 아니다. 물고기 153 마리에 집중해서 내러티브를 놓치고, 이야기의 흐름조차 놓쳐버려서는 곤란하다.
이야기는 이렇게 진행된다. 밤에 고기를 잡으러 간 제자들은 밤새도록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날이 새어갈 무렵, 배에서 멀리 떨어진
뭍에 서 있던 한 사람이 말한다. 고기를 잡았느냐고. 그들은 고기를 못잡았다고 대답했다. 다시 목소리가 들린다. 멀어서 그가
누군지 확인할 수 없었다.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는 소리가 들린다. 그물을 던졌다. 고기가 잡혔다. 많은 고기가 그물에
걸렸다. 어디선가 한번 경험한 적이 있는 사건이다. 맞다. 요한은 깨닫는다. 아, 예전 우리가 처음 주님을 만날 때 그때 바로
이런 상황이었다는 것을(눅5:6). 그래서 요한은 베드로에게 말한다. 주님이라고...
베드로는 기쁜마음에 배가 뭍에 닿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뛰어 내린다. 아니 어쩌면 배는 아직도 많은 물고기때문에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베드로는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건져 올려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바다로 뛰어 들었다.
그물에 가득 든 물고기 153마리, 그리고 그물은 찢어지지 않았다. 신기한 일이다. 이 신기한 일이 예수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상식이다. 거기에 굳이 그 이상의 신비를 첨부하지 않아도 이 일은 그 자체로 충분히 신기한 일이다. 그물에 담긴
153마리의 물고기는 그 자체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요한은 물고기에 대해서 굳이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그 물고기들이 "서로
다른"물고기라고 언급하지도 않는다. 디베랴 바다에 사는 물고기 종류를 언급하지도 않고, 전 세계 어종의 숫자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요한은 베드로와 예수의 만남에 대해서 말한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예수의 질문과 그에 대한 베드로의 답변, 요한은 이것이 부활 후 세번째로 제자들 앞에 나타난 사건이라고
기록한다(21:14). 그 사이에 있는 길지 않은 공백의 시간, 부활한 주님을 만났던 베드로는 기뻤지만 그 기쁨을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아직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 다시금 주님을 만나고자 갈망하고 있었던 베드로의 모습이 아직 배가
뭍에 닿지도 않았는데 물에 뛰어드는 그 성급함 속에서 잘 드러난다. 수영을 해야 하는데 벗은 몸에 주님을 볼수는 없어 겉옷만
걸치고 물에 뛰어든 베드로는 과연 제대로 수영을 하기나 했을까? 당시의 상황을 그려보면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많은 물고기로
힘들어하는 동료들을 두고 혼자 헤엄쳐 주님을 만나러 갔다. 정작 주님은 보고 그 다음에 아마도 베드로는 아차했던것 같다. 많은
물고기때문에 고생하는 동료를 그냥 두고 혼자서 헤엄쳐 왔으니... 배는 고기를 싣지 못한채 그물에 담긴 고기를 그대로 끌고 뭍으로
왔다. 미안해진 베드로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슬슬 배에 돌아가 아직 물속에 있는 그물과 거기 담긴 고기들을 뭍으로 꺼내는 일을
도왔던 것 같다(20:11). 물론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를 위해 기꺼이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고 심부름을 보내셨다(21:10).
조금 다르게 볼수도 있다. 물에 뛰어든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해 헤엄을 쳐가지는 못했을 수도 있다. 조금이라도 배를 빨리 뭍에 대기
위해 물에 뛰어들어 배를 끌고 가려는 모습일 수도 있다.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수를 만났다. 생선을 가져오라는 스승의 말에 가장
먼저 달려가 그물에 담긴 생선을 꺼냈다.
어쨌건 이 모든 것은 예수의 이 말에 담긴 의미를 알려준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21:15)". 바로 조금 전 누구보다 먼저 바다에 뛰어들었던 베드로다. 아마도 베드로는 자신있게 말했을 것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21:15)". 방금 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았느냐는 대답이다. 그런데 같은
질문이 반복된다. 세번째 반복되었을 때 베드로는 이 질문이 심상치 않은 질문임을 깨달았던 것 같다.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21:17)". 그의 대답은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베드로는 근심했고, 그 베드로의 근심의 이유는 예수의 질문에 담긴
무게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의 대답을 들은 예수는 베드로에게 어떻게 베드로가 죽을 것인지를 말한다. 기쁘고, 장난스럽고,
즐거운 추억을 회상할 수 있는 만남이었고 저녁 식사 자리였지만 거기서 예수는 베드로에게 죽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숫자나 상징으로 숨겨진 암호를 풀겠다는 마음으로 성경을 보면 정작 우리의 말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 성경은
인간의 말로 쓰여졌다. 성경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해 말해준다. 어린아이라도 알수 있지만,
어른이라도 속을 수 있다. 성경은 가장 쉬운 말로, 가장 쉬운 논리로, 가장 평이한 일상의 삶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자에게 성경은 하늘의 비밀을 가장 쉬운 말로 풀어서 알려준다. 성경은 암호가 아니다. 쉽게 풀어서 쓴 이야기다.
153 마리의 물고기를 말할때 성경에서 사용된 한 단어가 ιχθυs(익두스)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서로를 알아보기 위해 사용했던
일종의 기호이자 암호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있기에 153 과 ιχθυs에 대한 관심이나 애착이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있었다.
그러한 맥락에서 시릴이나 튀빙겐, 제롬, 어거스틴 등이 말한 것들은 일종의 성경신학적 해석으로서의 가치보다는 교회사적 맥락에서
다루어져야 할 것들이다. 그것을 현대로 가져와 마치 그러한 기호론(기호학)에 입각한 해석이 정해인양 이야기되어서는 안된다. (꼭
공부하랄 때 공부안하고 나중에 이상한 주석책 보면서 이런거 좋아하는 분들이 있다)
물론 성경을 볼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틀림없이 나온다. 영어로 된 소설책을 읽어도 사전을 몇번씩 찾아봐야 한다. 수능준비를
한다면 지문을 이해하기 위해 사전을 뒤적이는 정도의 노력은 필요하다. 성경사전, 기왕이면 제대로 된 것으로 하나나 둘 정도는
갖추어야 한다. 성경사전을 몇번만 들추어보고, 최소한의 상식적인 맥락으로 이해를 하려는 수고를 한다면, 우리는 꽤 괜찮은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 적어도 중세시절, 라틴어를 쓰는 성직자에게 모든 권위를 위임하는 어리석음을 이미 벗어버릴수 있는 환경은
갖추어져 있지 않은가.
요한복음 21장에 나오는 물고기 153마리에 대한 소고 : 기호론에 입각한 암호풀이식 성경해석의 문제, 대안으로서의 내러티브
http://jeliclelim.tistory.com/493
JelicleLim (2011.12.28)
모나미 153이라는 볼펜이 있습니다.
153이라는 숫자는 성경에서 나온 숫자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그물을 배 옆에
던지라고 하여 베드로가 순종하였는데 그 때 잡은 물고기 숫자가 153마리입니다.
신학적으로도 이 숫자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있어왔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시릴이라는 사람은 153이라는 숫자는 세 가지 것으로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100이라는 숫자는
완전수를 말하고, 목자의 완전한 양떼의 숫자, 씨앗의 완전한 열매도 100이라고 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100이라는 숫자는 장차
이방인들이 가득 차리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50이라는 숫자는 이스라엘의 나머지 백성들, 3이라는 숫자는
삼위일체를 나타낸다고 합니다.
그러나 153이라는 숫자에 무슨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여서는 아니
됩니다. 성경의 전후 문맥을 볼 때 153이라는 숫자보다도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잡은 고기,’ ‘큰 고기가 가득했다,’ 그렇게
많은 고기가 잡혔는데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등의 의미가 더욱 중요 합니다.
베드로가
지금 잡은 물고기가 153마리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새언약의 백성을 사방에서 창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는 항상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하는 사역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부활하신 이후에 갈릴리에 부활의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었을까요? 그 제자들이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즉 새언약의 백성들을 창조하는 사역입니다. 주님은 이미 베드로를 택할 때
베드로에게 “이제 너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것이다” 라는 말로 부르셨습니다. 3년이 흘렀습니다. 이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기
위해서 갈릴리 바닷가보다 더 좋은 곳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배 오른쪽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말합니다. 그물을
올리니 큰 고기들이 가득 채워져 옵니다. 153마리나 되었습니다. 종류가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종류의
고기였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교회의 대표인 베드로를 통해서 창조되는 새언약의 백성, 그들은 사방으로부터 창조 될
것입니다. 그 숫자가 많습니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 차렸습니다. 그 후에 바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이 나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53이라는 단어보다도
다른 두 단어를 잘 보셔야 합니다. 하나는 “큰 물고기(great fish, large fish)” 라는 단어와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단어입니다. 상징적 의미를 가진 단어들입니다. 큰 물고기라는 의미는 새언약의 백성은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위대한
자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구언약의 사람들 중 가장 큰 사람이 세례요한입니다. 그러나 새언약의 사람들은 모두
세례요한보다도 큰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큰 자들일까요?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자녀들이니까 큰 자들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들은 큰 고기들입니다. 외적으로는 작지만 내면적으로 하나님과 가까운 자들이니까 큰 자들입니다. ‘리틀 자이언트’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신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은 그 자체가 신비라는
것입니다. 신비라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큰 사람들이고, 신비로운 인물들입니다. 잘난
척하실 필요 없습니다. 잘난 사람들입니다. 신비로운 척 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냥 신비입니다. 말을 하지 않아도 큰
고기이고, 말을 하지 않아도 신비로운 존재들입니다.
또 다른 예수님의 행동이 있습니다. 그것은 갈릴리 강가에서 만찬을
하시는데 ‘지금 잡은 고기’를 가져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고기를 굽고 계시는데 지금 잡은 고기를 가져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만찬을 거행하십니다. 성만찬 하는데 제자들 가운데서 아무도 감히 “선생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분이 주님이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신비한 침묵이 흐릅니다. 제자들은 압니다.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그들이 이제 어떤
일을 하여야 하는지를 압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피와 예수님의 살을 먹지 않고는 새언약의 백성으로 창될 수 없다는 것을 체험으로
압니다.
우리는 큰 고기입니다. 위대한 고기입니다. 하나님과 가장 가깝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예수님이 우리 죄를 지시고 피를 흘리셨기 때문입니다. 그 피로 우리 죄가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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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왕
히브리어와 로마와 헬라어로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이라는 팻말을 써서 십자가 위에 붙여 놓았습니다.
히브리어와 헬라어 그리고 로마(라틴)어 이 세 언어는 그 당시 유럽과 소아시아 지역 사람들 전체가 사용하는 대표적인 언어였습니다.
빌라도는 이 예수는 모든 민족과 모든 시대의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종교를 상징
로마는 법과 정치와 경제를 상징
헬라는 문화와 예술을 상징
따라서 온 세상의 모든 종교나 정치나 경제나 문화와 예술의 주인이 예수라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면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다.
예수의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다.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고 합니다.
예수는 자기 스스로 왕이라고 한 것이지 자신들의 왕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요구에
대해 빌라도는 ‘나의 쓸 것을 썼다’(22절)고 답합니다. 이 말은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것은 당연하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보면 빌라도는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온 존재로 여겼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즉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했는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왕으로 인정을 했기에 ‘나의 쓸 것을 썼다’는 말을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패 아래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세상은 비록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유대인의 왕으로 죽으신 것이 됩니다.
십자가에 기록된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에 대해 관심을 두신 적은 있습니까?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으로 죽으신 것이 유대인이 아닌 현 시대의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는 생각이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이 곧 빌라도의 생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빌라도가 쓴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의 글은 분명 거짓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나라는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왕으로 오신
분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18:36절에도 보면 내 나라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나라가 따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예수님이 왕으로 존재하시는 예수님의 나라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빌라도는 패에다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썼지만 그는 예수님의 나라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나라는 따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섬기는
왕도 따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의 눈에 예수님은 왕이면서도 왕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반대를 받고 초라하게
죽어가는 한 인물로만 비춰졌을 것입니다.
유대인들 역시 자신들이 소망하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를 이룩해줄 왕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왕이라고 자처하는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염원하는 나라를 결코 이뤄줄 수 없는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여러분의 왕으로 인정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잘한 일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왕에 대한 복종이 있는가에 있습니다. 왕의 나라에 대한 관심이 있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한다고
해도 복종이 없다면 그것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를 써서 십자가에 달아 놓는 빌라도와 다를 바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 우리 왕이여’하고 아무리 노래를 부른다고 해도 그것으로 예수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한다면 그것은 곧 예수님의 백성이라는 뜻인데, 백성이라면 왕에 대한 복종은
필수적인 것인만큼 예수님에 대한 복종이 있는가를 깊이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복종이란 왕의 권세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에게 있는 왕으로서의
권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나라를 열고 닫는 권세입니다. 즉 예수님의 나라에 들일 자는 들이고 쫓아 낼 자는 쫓아내는
권세가 왕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우리의 공로와 행위로 천국을 들어가 보려고 하는 시도를 감히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모든 권세가 예수님에게 있는 만큼 이것을 아는 백성이라면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 외에는 달릴 할 것이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복종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유대인이라 불려지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죽였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백성인 유대인은 달리 존재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면서
그분 앞에 복종합니다. 그분의 모든 것에 대해 순종을 합니다. 세상의 밑바닥 인생이라고 할 수 있는 세리와 창녀 죄인들과 가까이
하시고 함께 하신 예수님에게 복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약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약함을 깨닫는 것입니다. 내가 곧 세리요 창녀이며 죄인임을 아는 것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고, 이것이 곧 진정한
예수님의 백성이며 참된 유대인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예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여러분 속에 달리 다른 세상을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꿈꾸는 세상을 두지 마시고
예수님이 가지고 오신 그 나라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빌라도와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의 나라가 있었습니다. 이것으로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나라는 영원한 생명의 나라입니다.
이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외에는 결코 있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께 복종이 없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자칭 왕으로 떠들고 다니는 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 복종하십시오. 예수님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으면
예수님만을 구원에 이르는 길로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말씀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자기 의를 보지 않고 자신의 공로와 행위를
자랑하지 않고 십자가에 피흘리신 예수님의 의로우신 행위와 공로를 믿으며 사는 것이 복종입니다. 그것이 말씀대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복종이 있는 그들이 곧 참된 유대인이며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왕으로 존재하시는 것입니다.
알레데이아(ἀλήθεια) : 진리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6)
‘진리’ 로 번역된 헬라어 ‘알레데이아’((ἀλήθεια)는 ‘진실한, 진리를 사랑하는, 진리를 말하는, 참된, 진실된’ 이라는 뜻을 가진 ‘알레데스’(ἀληθής)에서 유래된 단어로 ‘진리, 객관적인 진리, 주관적인 경험적 진실’ 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알레데스’(ἀληθής)가 부정적 불변사로서 ‘아’(ἀ)와 ‘숨기다, 감추다, 깨닫지 못하다’ 라는 뜻을 가진 ‘란다노’(λανθάνω)의 합성어에서 파생된 단어라는 점에서 ‘진리’(ἀλήθεια)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속뜻은 국어사전이 정의하고 있는 ‘누구나 승인할 수 있는 보편적인 법칙이나 사실로써의 참된 이치 또는 도리’
라는 것과는 다른 ‘숨겨지고 감추어진 것이 밝히 드러남,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닫게 됨’ 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알레데이아’(ἀλήθεια)의 히브리어 단어는 ‘확고함, 충실함, 진실’ 이라는 뜻을 가진 ‘에메트’(אמח) 인데 이를 파자하면 ‘하나님 말씀의 완성’ 이라는 의미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4)에서 진리(ἀλήθεια)가 충만(플레레스 : πλήρης – 완성된)하신 분, 바로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에메트’(אמח)가
‘처음’(א=Ἄ)과 ‘나중’(ח= Ω)되시는 ‘말씀’(מ)이라는 의미에서 처음과 나중되시며 말씀이신 예수님은 스스로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에고 에이미 토 알파 카이 토 오메가 : Ἐγώ εἰμι τὸ Ἄλφα καὶ τὸ Ω.’(계1:8)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진리(ἀλήθεια)이신 예수님은
항상 ‘진리’(ἀλήθεια) 안에서 가르치셨으며(마 22:16),
‘진리’ (ἀλήθεια)에 대하여 말씀하셨고(눅 4:25, 막 12:14),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진리’ (ἀλήθεια) 안에서 할 것을 당부하셨다.
성경은 ‘진리’(ἀλήθεια)가 없는 자를 가리켜 ‘욕심’(에피뒤미아 : ἐπιθυμία)대로 행하는 자, 처음부터 살인한 자,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고 말하고 있다(요 8:44).
성도는 ‘진리’(ἀλήθεια)를 아는(γινώσκω) 자이며,
진리가 된(γινώσκω) 자이고,
지금 그리고 여기 (Now and Here)에서부터 영원히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자인 것이다(요 8:32).
그리고 그가 진리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아버지께 갈 수 있는 것이다(요 14:6).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요한복음은 진리라는 단어가 사용된 경우가 17구절입니다(21회 언급)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분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합니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진리가 옵니다.
진리이신 그분이 자유를 주십니다.
성령은 진리의 성령이십니다.
아버지의 말씀도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증언합니다.
진리에 속한 자는 진리이신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런데 진리에 대한 마지막 진술에서 빌라도는
진리가 도대체 뭐야?라고 진지하지 못한 자문을 합니다.
요한복음 8:31-32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셨다.
그러므로 진리를 알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이다.
그러면 ‘진리를 알면’은 무엇이며,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이 무엇인가?
1. 진리를 알면
1)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
(엡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하셨다. 즉 우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가(엡2:1)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곧 대속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다. 이것이 곧 진리이다.
2)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
(엡 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하셨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은 우리가(엡1:7)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 이것이 곧 진리를 아는 것이다.
2.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보혜사 성령의 임하심과 주의 성령의 임하심이 곧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이다.
1) 보혜사 성령의 임하심
① 영원토록 함께 계시는 보혜사
(요 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보혜사 성령이 임하셔서 영원토록 함께 계신다.
② 모든 것을 가르치시는 보혜사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보혜사 성령이 임하셔서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주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신다.
③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시는 보혜사
(요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보혜사 성령이 임하셔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신다.
2) 주의 성령의 임하심
(눅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의 성령이 임하셔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기름을 부으시고(제사장 직책과 선지자 직책과 왕 직책을 세우시고)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신다.
②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육신의 연약한 자<롬 5:6, 롬 6:19>를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롬 8:9> 생기 있는 자가 되게 하시는 것이다.
②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는 죄인 된 자<롬 5:8, 롬 11:30>를 하나님께 순종하는<롬 1:5) 의인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③ 눌린 자를 자유케
육신의 생각으로 하나님과 원수 된 자<롬 5:10, 롬 8:7>를 영의 생각<롬 8:6>으로 하나님과 화목하는 자가 되게 하시는 것이다.
문 1 : 진리가 무엇이냐
답 : 진리를 알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
문 2 : 진리를 아는 것은 무엇인가?
답 :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은 우리가(엡 1:7)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엡 1:13) 것을 말씀한다.
문 3 :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은 무엇인가?
답: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보혜사 성령이 임하셔서 영원토록 함께 계시고(요 14:16),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요 14:26),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 하시는(요 15:26) 것이며,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의 성령이 임하셔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기름을 부으시고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시는(눅 4:18) 것이다.
진리란?
진리이신 예수님은 빌라도의 질문에 대해 그의 마지막 행보로 대답하십니다.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우리에게 더 큰 일이 되는 십자가에 모든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면서 진리가 뭐야 라고 말하는 빌라도와 같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진리란 너희와 같은 사람들을 사랑해서 죽은 주님의 십자가라고 대답합니다.
진리는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갈 뿐입니다.
묵묵히 목숨을 건 섬김의 길을 갈
뿐입니다.
그리고 진리가 뭐야 하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게 주님이 너희를 위해 “다 이루었다” 라고 말할 뿐입니다(요 19:30).
주님, 오늘 진리에 속한 자로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저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진리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그리스도는 진리이신가?
첫 번째 질문은 주님께서 심문을 받으실 때, 빌라도가 던진 질문이다(요 18:38).
로마의 권력은 진리는 세상을 지배하는 힘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을 지배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한 것이므로 빌라도의 질문에 나는 유대인들이 원하는 이 나라의 왕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왕이라고 대답하셨다.
진리이신 그분 앞에서 진리가 무엇인지 묻는다는 것은, 빌라도가 얼마나 진리에 대하여 까막눈인지를
증명한 셈이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진리가 무엇인지 몸으로 보여주지 않았던가.
다시 말해, 그분의 생애를 통해 진리를 배우지 못한다면, 그래서 빌라도의 눈을 뜨게 하지 못한다면, 누가 "말"로 그에게 진리를 설명할 수 있을까?
주님은 생애 전체를 통해 진리가 무엇인지 직접 몸으로 보여주신 분이시다.
그리고 마지막에 빌라도 앞에 서 있었다. 바로 그때, 빌라도가 묻는다. "진리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로 대 히트를 치고 명석한 강의로 소문난 하버드 철학교수 마이클 센델도 주님만큼 진리를 잘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주님은 "진리가 무엇인가?"라고 묻는 질문에 한 마디도 하지 않으신다.
만약 이
질문에 대답하셨다면, 그 분은 스스로 비진리이고 사기꾼임을 밝힌 셈이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란 현존의 삶이기 때문이다.
이미 그분이 사셨던 삶 자체가 진리이시고, 이런 식으로 진리가 구현되는 것이라면 진리는 말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 외에는 진리로 존재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든 사람들에게 진리란 자기의 존재보다 무한히 높다.
그래서 진리를 알기 위해 질문을 던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욕구다.
진리가 무엇인지 묻는 빌라도의 어리석음을 한 번 설명해 보자.
얼굴을 맞대어 이야기하고 있는 상대방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한 사람이 있다.
"당신에게 묻겠습니다만, 당신은 여기 있습니까?"
주님은 진리가 무엇인지 아무런 설명도 없으셨다.
그러나 아마 설명을 붙이자면 이와 같을 것이다.
만약 진리가 무엇이냐 누군가 묻는다면, 그리스도인은 이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다음과 같이 말하면 된다.
"그리스도, 그분을 보라, 그리고 그분에게서 배우라. 그분이 진리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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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 세계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주장의 유력한 근거로 알려진 임사체험(臨死體驗· Near Death Experience)이 사실은
꿈의 일종이라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미국 과학뉴스 사이트인 라이브 사이언스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유체이탈 체험
연구센터(Out-Of-Body Experience Research Center)’ 연구 결과를 인용, ‘임사체험은
자각몽(自覺夢· Lucid Dreaming)의 일종’이라고 지난 16일 보도했다.
영혼 비슷한 것이 육체를 벗어나(유체이탈) 터널을
통과한 뒤 밝은 빛을 향해 날아가는 자각몽은 스스로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꾸는 꿈으로, 의식이 깨어 있기 때문에
스스로 꿈의 내용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으며 현실처럼 생생한 데다 나중에도 또렷이 기억할 수 있다. ”
‘사람이 죽으면 사후세계가 있는가, 과연 천국과 지옥이 있는가’ 하는 문제는 인간의 풀 수 없는 문제입니다.
딸 이민아 목사를 먼저 보낸 이어령 박사의 기사가 났지만 이어령 박사 또한 이 문제 앞에서 깊이 고뇌하였을 것입니다.
저도
양로원에서 일하면서 늙고 병들어 치매증세를 보이며 쇠약해져가는 노인들을 보면서 과연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참으로
인간에게만 사후세계와 영원의 약속이 주어졌다는 것인가, 우리의 믿음이 사실이요 진실인가 하는 생각이 다시 드는 것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눈에 보이는 현실세계, 곧 물질세계에 속하여 살아가는 영적존재입니다.
영적존재이면서 현실세계에 속하여 살아가기
때문에 현실세계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품을 떠나 죽음의 경계를 넘어 이 땅, 곧 물질세계의 영역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물질세계에서 죄악 가운데서 살아가는 죄인들에게 영적인 세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셨습니다.
죄와
거듭남에 대하여 말씀하셨고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물질세계에 사는 인간들이 보이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는 쉽게 믿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 14장을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두려워하고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 하십니다. 우리가 그 길을 어찌 알겠습니까, 하고 묻는
도마의 질문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라고, 생명에 이르는 길이라고 간단히 말씀하지 않으시고 ‘진리’를 넣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문제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나라, 그것이 진리요 사실인가입니다.
진리가 아니라면 길도 생명도 아버지의 집도 모두
허탕이요 거짓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 우리의 신앙여정도 따지고 보면 진리의 문제요 사실의 문제입니다.
만일 우리 믿음이 사실과 진리가 아니라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도바울이 말하는 바와 같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요, 부활도 없고, 천국과 지옥도 없고, 일생을 속아 사는
우리가 모든 사람 중에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진리가 아니라면 우리의 믿음은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믿음의 싸움은 진리 싸움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영적세계와 눈에 보이는 이
현실세계의 틈바구니에서 우리는 세상적 판단의 손가락질과 과학과 지식의 안개 속에서 증거도 없고 지식도 없는 죽음의 너머를 믿고
나아가는 믿음의 씨름을 일평생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극복하지 못 하였는지요?
평생 예수 믿다가도
막상 죽음 앞에서는 “죽어봐야 알지”라는 불신앙으로 무너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진리의 편에 서는 것은 그러나 사람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증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오직 택한
자만이 진리의 편에 설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요,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이 낳으시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요1:13). 빌라도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재판과정을 보면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인도 위험인물도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유대인들이 민란을 일으킬까봐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내어주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들었으면서도, “진리가 무엇이냐?”고 예수님께 물었으면서도, 침묵하시는 예수님을 두려워하면서도 끝내 진리 편에 서지 못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살아계시고 천국과 지옥이 참으로 있다는 것을 믿었다면 빌라도는 민란이 일어나는 한이 있어도, 설사
자신이 죽는 한이 있어도 진리 편에 섰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현실을 택하고 말았습니다.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지 못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이 기록을 보면서 이미 예정된 바에 따라 빌라도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과 진리에 속한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달려있다는 사실에 다시금 두려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아울러 만세 전에 나를 택하시고 구원하신 은혜에 감사를
새롭게 할 뿐입니다. 내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만나고,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세계를 믿을 수 있다는 것, 약속을 받아 영원한
생명, 구원을 얻었다는 것, 이 어두운 세상 가운데서 내가 진리에 속하였다는 것,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적이요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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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그룹의 창업주 호암 이병철 전 회장이 1987년
폐암으로 사망하기 한 달 전, 가톨릭 신학자 정의채 신부에게, A4 용지 다섯 장 빼곡히 써서 보낸 질문이 있다고 합니다.
“신이 존재한다면 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가?”
“지구의 종말은 오는가?”
스물네 가지 질문이 그것이었습니다.
고인은 돈이 너무 많아 한때 ‘돈병철’이라 불렸는데, 그에게도 돈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고뇌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정의채 신부가
답변을 준비해 만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이 회장의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져서 다음번으로 그 기회를 미루었습니다.
그러나 끝내
기회를 얻지 못한 채 그가 세상을 떠납니다. 향년 77세.
그리고
25년이 지난 2012년 1월, 정의채 신부의 제자 차동엽 신부가 고 이병철 회장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정리해서 <잊혀진
질문>(명진출판사, 2012년)이라는 제목의 책을 냈습니다.
정작 그 책을 읽어야 할 주인공은 세상에 없는데 말이지요.
저는
이병철 회장이 생애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런 고민을 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일찍이 삶과 죽음, 신과 사후 세계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기업 총수로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워낙 많다 보니, 이런 질문은 늘 우선순위에서
밀렸겠지요.
그러나 정작 세상을 떠날 때 가장 우선으로 해결해야 했던 문제가 바로 그 문제였습니다.
눅 12장의 어리석은 부자가
생각납니다.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눅
12:20-21)
만약 이병철 회장이 그때 다시 건강을 되찾아 정의채 신부를 만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가 신앙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100% 장담할 수는 없겠지요.
신부 또는 목사와 몇 시간 이야기를 나눈다고 해서 신앙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만난다 해도, 모두 그리스도인이 되는 건 아닙니다.
1세기 유대인 가운데 예수님을 만난 엄청난 행운의
소유자들이 많았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오히려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빌라도입니다.
우리가 모두 장차 예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하는데, 빌라도는 세상에서 오히려 예수님을 심판하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가 오늘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첫
번째 질문이,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당시 유대에는 두 명의 왕이 있었지요. 헤롯 안티파스와 헤롯 빌립.
모두 로마
황제에 의해 유대의 일부를 다스리도록 허락받은 분봉왕들 입니다.
빌라도가 말하는 ‘유대인의 왕’은 이들과는 다른, 즉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해 낼 다윗의 후손 ‘메시야’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서두에서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라고 말합니다.
즉,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유대인의 왕’,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왕’이 뭐
그리 중요할까 싶은데 중요합니다.
‘유대인의 왕’ 예수가 아닌, 다른 예수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장 요한복음 18장
뒷부분에서, 빌라도가 유월절 전례를 따라 사형수 한 사람을 놓아줍니다. 그때 백성들이 선택한 자가 바라바였습니다. 그는 단순
강도가 아닌, 로마제국에 항거한 폭력투쟁운동 지도자였습니다. 사본에 따르면 그의 이름이 ‘예수’예요. 그날 백성들이 선택한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가 아닌 바라바 예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오직 그리스도 예수, 하나님께서 성경에 약속하신 ‘유대인의 왕’,
메시야 예수를 선택해야 하는데, 때로는 엉뚱한 다른 예수를 선택할 때가 있지 않은가요?
두 번째 질문은
“내가 유대인이냐?”
빌라도는 자신이 유대인이 아니므로 ‘유대인의 왕’이 메시야인지 아닌지 알 필요도 없고, 관심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종종 그런 말을 듣지요.
“왜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단군의 자손이면서 자꾸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소리를
하는가?
우리나라 왕들에 대해서는 아는 것도 없으면서, 엄한 이스라엘의 왕들을 주워섬기는가?”
그러나 우리가 구원을 얻으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그 언약은 일찍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을 얻으려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이 아닌 우리가 어떻게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을까요?
실은 유대인이라고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지요.
그리고 오늘날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길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하신
구원의 약속에 참여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성경의 구원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단지 재미를 주는 책, 또는 목사들의 설교를 위해 만들어진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 책이 말하는 구원의 이야기
속으로 우리가 들어가, 그 이야기의 일원으로 참여해야 할 책입니다.
그렇게 해서 성경의 구원 이야기가 바로 나의 구원 이야기가 될
때, 우리가 비로소 구원의 감격을 누립니다.
“내가 유대인이냐?” 로마인 빌라도가 유대인이 아니듯이 우리도 당연히 유대인이
아닙니다.
굳이 유대인일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며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라고 말한
것처럼(롬 2:28-29),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사람들이 진짜 유대인, 새
이스라엘, 다시 말해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질문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예수님은 많은 병자를 고치셨고, 기적을 베푸시고,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모두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는 사역의 일환이었지요.
예수님이 하신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나라 사역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예수님은 그 나라가 세상에 속하지 않는 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36절,
“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하나님 나라가 저세상의 나라, 즉 우리가 죽어서
가는 나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 나라가 세상에서 비롯된 나라, 영어로 “kingdom
which is came from the world”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처럼 세상에서 비롯된 나라들은 늘 세상의 방식을
따라, 인간의 권력과 힘과 재물을 의지하지요.
그러므로 만약 하나님 나라가 세상에서 비롯된 세상 속의 나라였다면, 예수님이
체포당할 때,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어떻게든 이를 막았어야 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제자들 가운데 단검을 뽑아서 적들과 맞서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리셨지요.
하나님 나라가 칼로 일어서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 나라에 속했는지 세상에 속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교회가 세상과 똑같이,
때로는 그보다 더욱 인간의 권력과 힘과 돈을 의지하는가?
아니면 그로부터 일말의 자유로움이 있는가를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위기가 오면 드러납니다. 많은 교회가 위기의 순간에 권력 다툼과 재산
분쟁의 장으로 돌변합니다.
그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어서 결국 세상의 법정이 결론을 내려줄 때까지 그 추한 싸움을 멈추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권력과 힘과 부를 의지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는 너무나도 낯선 나라입니다.
당장 빌라도가 묻습니다.
네번째 질문
“네가 왕이 아니라는 말이냐?”
“37b,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왕, 하나님 나라의 왕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 나라는 권력과 무력과 재물이 아닌 오직 진리에 의존하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진리를 위해 태어나셨고, 그 진리를 전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왕으로 섬기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왕이신 그리스도의 진리의 음성을 듣고, 그 진리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우리는 과연 누구의 음성을 듣고 누구의
말에 순종합니까?
빌라도가 놀라서 묻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비웃음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짧은 순간이나마
진리에 대한 그의 갈망인지도 모릅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이 진리를 외칩니다.
세상에서 진리를 가장 크게 외치는 곳은
대학입니다.
하버드대 ‘진리’(베리타스),
예일대 ‘빛과 진리’(우림 베 둠밈),
칼텍/연세대(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서울대(진리는 나의 빛, 베리타스 룩스 메아),
고대(자유, 정의, 진리),
오늘날 많은 대학이 구호 속에서는 진리를 크게
외칩니다.
그러나 정작 진리를 추구하지는 않습니다.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
묻기라도 했는데, 대학은 더 이상 진리에 관해 묻지
않습니다. 교회는 과연 다를까요?
그날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 단지 질문만 던지고 예수님에게서 돌아섰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다가가 “나는 예수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라고 말합니다. 나름대로 예수님을 변호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것은 진리를 지키지 못하고 진리를 저버린 행위였습니다. 그는 진리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눈앞에 대하고서도, 귀한 진리를
버리고 말았습니다. 단지 “진리가 무엇이냐?” 메아리 없는 질문만 던지고 말 것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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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크리스챤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싶다"라고 말하지만, 그 말이 "거룩한 생활에 힘쓰고 싶다"
라는 뜻인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같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충성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시는 방향으로 바쁘게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크리스챤이 되게 하신 목적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위한 것"과, 또 우리가 거룩한 생활에 힘쓰지 않으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게 된다는
성경의 진리를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참 신앙은 믿음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의 거룩성을 바로 이해할 때 비로소 시작됨을
알아야 한다.
모세는 하나님이 자기를 부르셔서 사용하시기 전까지는 자기가 믿어야 할 참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와 만나실 때 그는 비로소 그가 믿어야할 참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게 되었다.
곧 그가 임재하신 곳은 "거룩한 땅"이므로 그의 신발을 벗어야 했고, 하나님의 거룩성이 나타날 때 모세는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렸다(출3:1-6).
그리고 야곱도 잠이 깨어 처음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의식하였을 때 "두렵도다 이곳이여!" 라고
고백하였다(창 28:17).
왜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성 앞에 두려워해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성 앞에서 인간의
죄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는 사람은 진실한 회개가 나오게 되어 있다.
이사야
선지자가 바로 그것을 보여주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앞에서 "화로다 나여! 내가 망하게 되었으니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로다"라고 하면서 회개하였다.
그러자 하나님은 제단의 숯불로 그의 입술에 대신 후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 졌느니라" 라고 하셨다(사 6:7).
죄 용서 받은 후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하나님과의 참된 관계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나오는 회개로 시작된다. 그러한 회개를 통해서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성은 우리가 멸망당할 수 밖에 없는 비참한 존재임을 느끼게 한다. 그것을 느껴야 진정한 회개가
나오며, 그것이 바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이다. 참 회개를 통하여 우리의 모든 죄가 예수님께로 전달되고,
반면에 예수님의 깨끗한 "의"가 우리에게 넘겨오므로 말미암아 우리들이 "의인"이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이다. 이
과정이 확실한 크리스챤은 항상 거룩하신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섬길 줄을 안다. 한글 성경에는 주로 "하나님을 경외한다"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본래의 의미는 "하나님을 두려워한다"이다.
그래서 대부분 영어 역본들은 "fear God" 또는 "fear the Lord"로 번역되어
있다. "성도"라고 하는 말은 "거룩하게 구별된 무리", 즉 "거룩한 백성"이라는 뜻이며, 거룩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백성이다. 그러므로 참 성도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두려움으로 섬긴다 그런데 너무나 쉽게 회개하고, 너무나 쉽게
구원받은 현대 크리스챤들은 그러한 것을 모르며, 예수님이 말씀하신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은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눅12:5)는
말씀에는 관심이 없어보인다. 왜냐하면 옳바른 중생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으므로 "거룩"에 대한 개념을 모르거나,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기 원하는 사람은 먼저 크리스챤이 "왜 거룩한 생활에 힘써야
하는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왜 거룩한 생활에 힘써야 하는가?
1. 거룩함에 이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 . .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그러므로 (거룩을)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살전 4:3-8)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의도하신 것이 바로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것인데,
이 "거룩함"을
우리가 저버리고 거절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저버리고 거절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이 말씀이 얼마나 심각한 내용인가를
독자들은 생각해 보았는가?
크리스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한 삶에 힘써야 한다는 것을 무시하고 거절한다면,
그것은 곧 거룩하신 하나님 자체를 거절하는 것이다.
그의 생활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뜻대로
사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한 신자의 믿음은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신다. 그가 아무리 주님을 위해서 힘써 헌신하고 아무리
주님의 능력을 많이 나타내었다 할지라도 그는 영생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얼마나 심각한가?
그런데
예수님이 산상설교에서 그점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1-23)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사람들은 세상에 살면서 주의 일에 충성하고 열심히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였고, 주님의 이름으로
악령들을 쫓아내었으며,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영생에 들어가지 못하고 쫓겨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기를 "불법을 행하였다"라고 하셨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지 않고 자기 뜻대로 생활한 것이다.
거짓 선지자나 거짓 사도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거룩성"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함"을 강조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지옥" 또는 "회개"라는 단어를 회피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전달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성령충만한 하나님의 종으로 위장하여 신자들을 속이는 것이다.
마지막 때에는 거짓 선지자와 거짓 사도들이 택하신 자라도 미혹할 수만 있으면 미혹하고, 사람들을 속이기 위한 많은
기적을 행할 것이라고 주님이 예고 하셨다(마 24:24-25).
이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면 감쪽같이
속아넘어갈 정도로 거짓 지도자들은 천사의 모양으로 위장하고, 의의 일군으로 위장한다(고후 11:14-15).
그러므로 마지막 때의 크리스챤들은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 즉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것"에 대하여 성경말씀을 자세히 살피고, 내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훈련을 쌓아가야 한다.
그러면 미혹 받아도 속아넘어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거룩함에 이르는 믿음은 영적 분별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거룩한 생활에 힘써야 한다는 것은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며, 참 믿음의 소유자는 그러한
삶의 행위로 자신의 믿음을 나타낸다는 뜻이다.
죽은 믿음이 아니고 산 믿음이라는 것을 거룩을 추구하는 삶의 행위로 보여주는
것이다.
또 크리스챤들은 왜 거룩한 생활에 힘써야 하는가?
2. 거룩함을 추구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히 12:14)
크리스챤들은 이유를 묻지말고, 무조건 거룩한 삶에 힘써야 한다. 이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이다. 왜냐하면,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체가 거룩한 백성으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으로 중생한 사람은 자연히 거룩한 삶을 추구하게 된다. 그것은 일부러 그렇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거듭나게 한 분이 바로 거룩한 성령님이시고, 그가 중생한 사람 속에 계시기 때문이다. 중생한 사람은 성령님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에(고전6:19) 본질적으로 죄에 대하여 민감하고 죄를 짓고는 오래 견디지 못한다. 성령께서 마음에서 질책하시고 충동을
일으키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곧 회개하고 죄를 피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을 삶의 원칙으로 삼는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깨닫고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섬겨야 함을 의식하는 성도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렇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고 그처럼 거룩한 삶을 추구하도록 성령으로 함께 하시는 것이다(살전4:7).
거룩하신 성령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성도는 자연히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되며, 그러한
신앙의 자세가 그를 점점 거룩함에 이르게 한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믿음이 자라가는 것이며,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자는 거룩에 대한 개념을 가질 수가 없으며, 거룩한 성도로 성숙해 갈 수가 없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의식하지 못한다. 뿐만아니라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한다.
다만 인간적인 생각으로 선과 악을 분간할 뿐이며, 하나님 앞에서의 선과 악은 분별하지 못한다. "거룩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하였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고전6:18에서) 하나님은 아버지, 우리는 자녀가 되는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고후7:1)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면, 거룩한 생활에 힘쓸 수 없음을 사도 바울은 분명히 증거하였다. 그리고 거룩한
생활을 무시하고 거절하면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것이고, 동시에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함을 추구하지 않는 신앙은 세상 끝날에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살면서 교회 충성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아무리 많이 수고했어도 결과적으로는 모래위에 집을 지은자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거룩함을 무시하는 신자는 마지막 때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내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큰 시련과 환난을 허락하실 때
예수를 배반할 수 밖에 없으며, 그의 신앙은 무너져내릴 것이다. 그 이유는 모래위에 집을 지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는 자신의 집을 모래위에 짓는 자와 같다.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예언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악령들을 쫓아내었으며,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은 바로 그와같이 모래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고 하셨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딛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7:26-27).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 즉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을 거절하고 무시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 하고 자기 뜻대로 행하게 되는데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의 행위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거짓 확신을 가질 수가 있는 것이 오늘의 기독교 문화라고 본다.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 머리에 상상하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일 것이다.
3. 하나님은 거룩함을 알게 하는 법칙을 주셨다
1) 거룩한 하나님을 알게 하시려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구별해 주셨다
참 여호와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존재하시는 영이시므로(사41:4, 요4:24), 죄성을 가진 인간의 지식과
지혜로는 그 거룩하신 분을 헤아려 알 길이 없다. 다만 그분 께서 자신을 계시해 주실 때에만 우리는 조금이나마 그 영원하신
분을 의식하며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그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분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구별"해 주셨다고 한다.
"나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지어다.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표징(a sign)이 되어 너희로 내가 여호와 너희 하나님인 줄 알게 하리라 하였노라" (겔20:20)
그러므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구별하지 않는 신자는 성경이 증거하는 참 여호와 하나님을 바르게 인식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기 때문에 성령의 감화와 감동이 오지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바로 안다는 것은 그분의
속성(attribute)을 바로 이해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시기 때문에 하나님 특유의 속성을 가지고 계신다.
그 분의 존재, 지혜, 권능, 거룩, 공의, 인자, 진실 등 그분의 영원하고, 무한하며, 불변하는 신의 속성인데 그 모든
여러가지 속성이 함께 조화를 이룬다. 하나님은 인자가 무한하신 사랑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그 분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천국과
지옥이 공존하며, 복과 저주가 공존하고, 생명과 사망이 동시에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작용한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사랑의 하나님만 강조하면, 하나님이 마치 마음씨 좋은 싼타클로스 할아버지 처럼 느끼고 만다.
그래서 웬만한 실수는 하나님이 눈감아주시고, 또 이 시대에 맞지 않는 성경말씀을 외면하고 무시해도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현실을 이해하고 넘기시는 줄 착각하는 것이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구별할 줄 모르면 그렇게 된다.
영원하신 불변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자기 머리 속에 상상하는 하나님을 적당히 섬기게 된다. 현대 크리스챤들이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 안식일을 거룩히 구별하여 지킬 때 우리 자신들이 거룩한 백성임을 자각하게 된다
하나님은 참 믿는 자들을 거룩하게 하셔서 영원한 천국으로 영접하시는 분이시다. 천국에는 아무나 못 들어가고 오직 거룩하게 된 성도들만이 갈 수 있는 곳이다. 사도 바울이 증거한 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룬"(고후7:1)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천국이다. 그런데 인간 스스로는 그렇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자신을 거룩하게 할 능력이 없다.
믿음이 아무리 좋다고 자신 만만해도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신자는 거룩하게 되어 갈 수 없다. 거룩하게 되는 것은
인간의 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다. 하나님이 거룩하게 만들어 주셔야 거룩해진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신자를 거룩하게 만들어 가시는가?
성경은 증거하기를 "하나님의 안식일"을 거룩히 구별하여 지키는 자를 그처럼 거룩하게 만들어 가신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주일"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며 우리가 그 날을 거룩히 지킬 때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 가신다"는 하나의 표시(a sign)이다. 그러므로 주일성수를 잘 하면 우리 자신이 거룩한 백성임을 자각하게 되며, 그렇게 되면 자연히 영원한 안식에 대한 소망, 즉 천국의 소망이 밝아질 것이다. 구원 받은자에게 약속된 천국은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가면서 점점 마음에서 느끼게 되어 있다. 그것이 "안식일(주일)에 주시는 하나님의 복"인데 그 복을 주시려고 그 날을 복되게 하셨다(창2:3).
"또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 하여 내가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a sign)을 삼았었노라" (겔20:12)
그런데 현대 크리스챤의 안식일은 어느날인가? 구약성경으로 말하자면 토요일이 안식일인데 그 날을 거룩히 지켜야 하는가? 현재 크리스챤들은 주일을 지키고 있지않는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지면상 생략하기로 하며 시대의소리미션의 참고자료 란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4. 거룩하게 구별하신 안식일은 영원한 안식의 표징(A Sign)이다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을 6일 동안 창조하시고 마감하셨다. 그리고 7곱째 날에 안식하시고 그 날을 복된 날로
정하셨는데 그것이 안식일의 시작이다. 하나님 자신만 일을 하지 않으시고 쉬실 뿐만 아니라, 그의 백성들도 그 날에는 모든
일들과 매매를 중단하고(느13:15-21, 렘17:19-23) 쉬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날로 정해주셨다(겔46:1-3).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창2:1-3).
하나님이 창조사역을 6일 동안 진행하실 때의 기록을 보면,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라 . . . .둘째 날이라 . . . . 셋째 날이라 . . . ." 는 식으로 한 날의 시작과 끝이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안식하신 7곱째 날은 시작만 있고 끝이 없는 "안식"이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괴롭고 고통스러운 이 세상을 살다가 죽은 후에는 창세기에서 시작된 그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성도가 들어가게 될 영원한 안식이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히4:3)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정해주신 안식일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누리게 될 영원한 안식을 실제 생활에서 어느정도 의식할 수 있도록 알려주시는 표시(a sign) 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애굽에서 종노릇하며 고생하던 이스라엘 자손들을 구원해 내신 후, 율법을 주시기 이전에 제일 먼저 구원받은 백성이 누리는 안식을 경험하게 하시려고 그들에게 안식일을 정해주셨다.
그날에 그들은 애굽에서처럼 일할 필요가 없으며, 먹을 것을 구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었다. 안식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안식일을 정해주시고 그 날을 지키게 하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통하여 안식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었다(신5:15).
이것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인데 구약의 성도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신약의 성도들에게도 똑 같이 적용되는
하나님의 표징(a sign)이다. 창세기 2장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안식"은 시대의 변화에 관계 없이 지속되는 영원한
안식이며, 구약의 성도나 신약의 성도나 동일하게 그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게 되어 있다(히4:1-11).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안식일에 관하여 계명으로 주실 때에도 "너희 대대의 표징 (a sign throughout your generations)"이라고 하셨고(출31:13), 또 그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영원한 언약"이며 "영원한 표징"이다(출31:16:17).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을 기억해야하는 표(a sign)이기 때문이다. 신약에 와서 안식일 개념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히 - 확실히, 진실히)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a sign)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 (출31:13)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a sign) 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제 칠일에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 하라" (출31:16-17)
그러므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 끝날까지 대대로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면서 앞으로 들어가게 될 영원한 안식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7일 중에 하루를 거룩한 날로 정하고 그 날을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는 성일로 지킬 때에만
거룩한 생활에 힘쓸 수 있고, 따라서 영원한 안식을 사모하며 천국의 소망을 가질 수 있다. 구약에 나오는 수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바로 그러한 신앙을 가지고 영원한 안식을 바라보면서 세상을 살아갔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가운데 거룩케하시는
하나님을 실감했으며 마침내 그들은 하나님이 계신 거룩하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신약의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기 때문에
히브리서에 그 사실을 다시 언급하였다(히11:13-16). 신약의 성도들은 안식일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 중심으로
그 날을 지킨다. 성도들에게 약속된 영원한 안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들어가는 것인데 그 영생의 소망은 예수님의 부활로서
성취되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도들은 안식후 첫날,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을 거룩한 날로 정하였고, 그 날에 모여서 예배드렸다 (참고: "어느날이 예배일인가? 토요일, or 주일?").
그래서 신약시대의 안식일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안식후 첫날인 주일이다.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Lord)가 되실 뿐만아니라(마12:8) 영원한 안식으로 인도하시는(요14:2-3) 중보자이시기 때문이다(딤전2:5). 7일 중에 하루를 거룩한 날로 정하고 그 날에 노동을 쉬고 상업을 중단하여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구약에서 뿐만아니라
신약에서도 계속되는데 그것이 바로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주일성수" 이다. "주일성수"는 크리스챤들이 "영원한 안식"을 항상 기억하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과 성도 사이에 대대로(throughout generations) 세우신 "영원한 언약"이며, "영원한 표징(a sign)"
이다. 그래서 과거의 크리스챤들은 20세기 중반까지 철저히 주일성수를 지켜오면서 그들의 경건성과 성화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처럼 교회가 영적으로 살아있을 때에는 사회도 건전하여 도덕성과 윤리를 유지하였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사회가 타락하기
전에 먼저 교회가 세속화된 것을 알 수 있다.
5. 주일을 거룩히 지키지 아니하면 배교(Apostasy)가 시작된다
천국에 들어갈 하나님의 백성은 거룩함을 추구하는 성도들이며(히 12:14),
그 성도들의 특징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는" 생활의 모습으로 보여진다(고후 7:1).
그리고 그들의 거룩함이 언제 성숙해 가는가 하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킬 때이다.
신약의 성도들로 말하자면 주일을 거룩히 구별하여 지킬 때 점점 거룩한 성도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기로 정하셨기 때문이다(출 31:13, 고후 7:1).
그러므로 크리스챤들은 주일성수를
무시하는 때부터 신앙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없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도
모르게 되고, 따라서 자신의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가는 것도 중단되며, 천국의 소망도 없어지고 만다. 그래서 이 세상에만
집착하게 된다. 그 순간부터 미혹의 영이 접근하여 마음과 생각을 다른데로 돌리고 세상 문화(풍속)에 재미를 붙이게 한다.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런 현상이 일어났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안식일"을 무시하고 그 날을 지키지 아니할 뿐만아니라, 안식일을 욕되게 하였다.
그러자 미혹의 영이 역사하기 시작하였고 그들은 이방 민족의 풍속(문화)를 즐기기 시작하였다.
이방 민족의 문화는 언제나 종교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우상문화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전에 살던 (문화)나 앞으로 들어가 살게 될 애굽의 풍속가나안 땅의 풍속가증한 풍속"이기 때문이다(레 18:3-5, 30).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지 않고 안식일을 더럽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였다.
그리고 이방 민족의 가증한 우상문화에 매력을 느끼고 그 문화를 따라가다가 결국은 우상숭배에 빠지고 말았다.
신약의 기독교도 마지막 때에는 그러한 이스라엘의 행위를 본받으면서 세속화 되고 하나님을 배반하게 된다는 것을 크리스챤들은 기억해야 한다.
현대 기독교는 이미 뉴-에이지(New Age) 우상문화로 가득차 있다.
그 이유는 크리스챤들이 거의 반세기 전부터 주일성수를 무시하고 거룩함을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기독교의 배교
“그러나 이스라엘 집이 광야에서 내게 반역하여(rebel) 사람이 행하면 그 가운데서 살게 될 내 법규내 법도내 안식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게 되는 시발점은 먼저 하나님이 말씀하신 삶의 규칙을 무시하고 저버리는데서부터 시작하며, 그 다음 단계는 "거룩한 안식일을 더럽히는 것"이다.
현대 크리스챤의 경우에는 "거룩한 주의 날(주일)을 세속화 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일성수를 무시하면 벌써 하나님을 저버리고 반역(rebel)
“이는 (하나님이 그들을 광에서 멸하시기로 정하신 것은) 그들이 으로 자기들의 마음우상들을 따라가며, 내 법도내 법규내 안식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이 미혹을 받아서 세상의 우상문화에 (현대의 뉴에이지 문화에) 이끌리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게 된다. 크리스챤을 타락시키려는 미혹의 영(요일 4:6)이 바로 그것을 노리며 진리에서 떠나게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를 합리화시키는 이유를 들어서 성경말씀을 확대 해석하거나,
축소해석해서 불편한 내용들을 빗겨가려고 한다.
그래서 오늘날 현대인들이 읽기 쉽게, 알아보기 쉽게 성경을 새롭게 번역한다고
하면서 진리의 본 뜻을 왜곡하는 일들이 소위 "진보주의 신학", 또는 변질된 "현대 복음주의 신학" 실제로는 "신복음주의 신학" 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많이 생산되고 있다.
그래서 그런 성경이나, 잘못된 사상의 영향을 받은 현대 크리스챤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도 모르고, 거룩함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다. 그래서 "주일성수"는 이제 지나가 버린 옛 시대의 "고전"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하나님을 배반하는 반역(rebellion)이 이미 한참 진행중이다.
“이는 (하나님이 그들을 포로로 끌려가 흩어지게 하실 것은) 그들이 내 법도를 집행하지 아니하며, 내 법규를 무시하며, 내 안식일을 더럽히고, 자기들의 눈(eyes)으로 자기 조상들의 우상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말씀을 무시하여 불순종하게 되면 자연히 주일성수가 무너지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그들은 "안목의 정욕(the lust of the eyes)"(요일 2:16)을 즐기게 된다.
관광 때문에 주일예배 빠지며, 골프치기 위하여 그렇게 하고, 연속극 때문에, 스포츠 중계 때문에 그렇게 한다.
그러는 가운데 우상문화에 빠지는 것이다.
사탄은 공중의 권세를 가진 통치자로서(엡 2:2) 세상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온 세상을 악으로 가득차게 하려고 한다(요일 5:19).
그래서 사탄 유행문화 안목의 정욕
하나님은 그런 문화를 가증하게 여기시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애굽의 풍속이나 가나안 땅의 풍속을 본받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안목의 정욕에 끌려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우상문화를 즐기다가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게 되었다.
신약의 크리스챤들도 똑 같은 패턴으로 타락하고 하나님을 배반하게 되어 있다.
그러한 타락을 막고 거룩한 생활로 이어지도록 우리에게 주신 삶의 가이드 라인(guide line)이 바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는 것", 즉 "주일성수"이다.
이것은 율법인 동시에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는 하나님의 도덕법이다.
이 하나님의 도덕법을 버리면 거룩에서 떠나 타락하여 "거룩한 백성(성도)"이 되지 못한다.
그것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이다(히 12:14).
6.예수님 재림 직전에 나타날 배교(Apostasy)의 형태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은 종말관에 대하여 오해가 있었으므로 매우 당황하였고 안정을 얻지 못하고 불안해 하며 갈팡질팡
하였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들을 안심시키고 올바른 종말관을 가지고 신앙생활하도록 편지한 것이 데살로니가후서이다.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말하기를,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두 가지 확실한 사건이 있을 것이며, 그 사건 후에 오실것이라고 하였다.
그 두 가지는 먼저, "배교하는 일"이 일어날 것이며,
그 다음에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서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할 것이며,
그 때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서 자신의 "입의 기운"으로 그 불법의 사람을 죽이실 것이라고 하였다.
대부분의 성경주석가들은 그 "불법의 사람"이 곧 "적그리스도"라고
주해하였다.
지금은 어느 때인가?
기독교인들은 물론 불신자들까지도 지구의 종말이 임박했다고 불안해 하는 시대이고, 세상 끝에 보여질
시대의 징조들이 예수님이 예고하신 대로 자연계와 사회와 민족과 나라간에 일어나고 있는 것을 피부로 느끼는 시대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영적으로도 심각한 상황이 교회안에 벌어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교회가 하나님을 반역하는 "배교(Apostasy)"이다.
“ 3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4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 . . . 8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살후2:3-8, 개역개정)
본 문장에서 "배교(apostasy)"라고 하는 말은 헬라어로 "아포스타시아"인데 그 뜻은 "저버림, 배반, 반역, 배교" 이다. 영어의 "아포스타시"(apostasy)
라는 단어는 그 헬라어에서 유래하였다.
그러면 누가 누구에게 배반하고, 반역한다는 말인가?
그 단어는 불신자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을 믿는다고하는 신자들에게 해당되는 용어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배반한다는 말이 적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내용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반역했던 것처럼 마지막
때에도 기독교회가 하나님을 저버리고 배반할 것을 예고한 말씀이다.
그러면 마지막 때에 기독교가 어떤 형태로 하나님을 저버리고 하나님을 배반할 것인가?
하나님을 저버리고 하나님께 배교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교회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다른 것을 사랑하며 따라가는 것이다.
필자는 마지막 때 교회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을 하나님의 도덕법인 "십계명"과 연관지어서 설명하려고 한다.
어떤 크리스챤들은 "십계명" 이야기만 나오면 불편해한다. 율법시대는 다 지나갔고 이제는
은혜 시대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율법의 요구가 다 이루어졌는데, 왜 십계명을 거론하는가? 당신은 율법주의자인가?
라는 의문을 던진다. 하지만 그런 분들은 하나님이 왜 "십계명"을 우리들에게 주셨는지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런 분들의 주장대로라면 신약시대에는 더이상 십계명이 필요없다는 논리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찬송가 커버 안쪽에는
예외없이 십계명이 인쇄되어 있지 않는가? 지금은 은혜 시대인데 왜 기독교 역사 속에서 계속 십계명을 유지하였고, 어째서 청교도들이 그처럼 철저히 아이들에게 십계명을 암송하게 하였는가?
그것은 십계명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하나님의 도덕법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후 명령하기를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하셨다(레11:45).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죄악 많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세상 법으로는 거룩함을 유지할 법이 없다.
오직 하나님이 정해주신 하나님의 도덕법에 의해서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유지되며 거룩하게 구별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이
십계명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목적이다. 이 도덕법은 하나님의 구원을 얻은 백성이라면 구약의 성도이든지, 신약의 성도이든지 관계 없이 동일하게 적용되어서 거룩한 삶을 살게하는 하나님의 Guide Line 이다. 미국의 헌법이 십계명에 기초하였기에
미국의 대법원안에는 십계명을 조각한 작품들이 자리잡고 있었으나, 지금은 그것들이 거의 제거당한 상태이다. 1960년대초
케네디 대통령 때는 공립학교 안에 걸려있던 십계명을 제거하였고, 교내에서 기도를 금지하였다. 그 이후 미국은 쇄퇴의 길로 걷고
있어서 지금은 국력이 약해질 뿐만아니가 국가부도 위기에 처한, 정말 부끄러운 처지가 되었으며, 영적으로도 급속히 타락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나라가 거룩하게 만들어 가는 하나님의 도덕법을 폐기하고, 하나님을 배반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나 개인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교회가 "십계명"을 외면하는 것은 "배교"의 시작이라고 본다. 율법의 요구를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예수님의 교훈을 한 번 살펴보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그 때 예수님은 첫째로 제일 큰 계명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고, 둘째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고 대답하셨다. 그리고 계속 말씀하시기를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Sum Up)이니라" 라고 하셨다(마22:34-40). 구약성경에 나오는 모든 율법과 선지자들의 교훈들을 집합적으로 간추려서 요약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 으로 크게 두 가지로 요약이 된다는 말씀이다. 구약의 대표적인 율법이 "십계명"인데 그 십계명의 내용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내용으로 정리되어 있다. 즉, 1-4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칙이고, 5-10계명은 이웃을 사랑하는 법칙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신을 믿지 않는다.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우상을 만들고 거기에 절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는다.
만일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는 가짜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킨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7일 중에 하루를 거룩하게 구별하시고 그
안식하는 날에 하나님을 섬기도록 "성일(거룩한 날)"로 정해주셨기 때문이다. 그 날에 하나님은 자신이 거룩하신 분임을 나타내시고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룩한 존재임을 스스로 느끼게 하신다. 이것을 기억하여 주일성수 하는 크리스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십계명은 율법으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재림하실 때까지 크리스챤들의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안내하는 하나님의 도덕법으로 지금까지 유효한 것이다 (참고: "십계명은 하나님의 도덕법").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라고 하셨다(마5:18-19).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와같이 "율법"을 모두 종합하면 "하나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데, 율법의 대표인 "십계명"이 그 실행사항을 10가지로 구분해 놓은 것이다.
마지막 때에 교회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배교하는 것은 교회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거역하며 멀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어떤 형태로 보여지는가?
필자는 교회가 십계명을 외면하고 거부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다고 본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인데, 바로 그 전에 교회가 하나님께 배교(배도)한다고 하였다(살후 2:3).
그러므로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인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때가지 교회는 배교하는 모습을 단계적으로 보여주게 된다.
그것은 가 단계적으로 을 파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처음에는 네번째 계명을 파괴하여 교회십계명주일성수적그리스도배교 주일성수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크리스챤들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그들의 거룩함이다(벧전1:16, 레11:44). 즉 그들이 구원받은 거룩한 백성답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행함이 있는 믿음"이며(약2:22),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이유 이다(레20:26). 하나님이 구원받은 백성에게 강요하시는 "거룩함"은 구약의 성도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신약의 성도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두려워하는거룩함두려움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으로 지내라"(벧전1:17),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두려움거룩하게두려움몸영혼지옥두려워하라"라고 하셨다(마10:28).
그러므로 크리스챤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신앙을 가지고 거룩한 백성으로 구별된 삶을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크리스챤들을 향한 ""이다. 그러한 신앙을 가지지 않으면 "아버지의 뜻헛된 믿음"을
가지고 스스로 속는 신앙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7:21-23에 말씀하신 내용이 바로 그 내용이다.
이 땅에 살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충성, 봉사, 헌신 하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악령)들을
쫓아내며,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기적들)을 행하였지만 막상 주님 앞에 설 때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거절당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이유는 간단한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아니한 것이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배반하였다는 것이며, 다른 말로는 "불법을 행한"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속아서 신앙생활한 사람들이며, "아버지의 뜻"을 저버리고 "자기의 뜻"대로 행동하므로 말미암아 "흑암과 사망의 그늘 아래" 머물러 있던 사람들이다(시107:10-11). 마지막 때의 크리스챤들도 그렇게 될 확률이 크다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크리스챤들은 "하나님의 뜻"인 "거룩함"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온전히 이루어 가려고 힘써야 할 것이다.
그러면 크리스챤들이 어떻게 해야만 거룩한 생활에 힘쓸 수 있는가?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러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방침을 정해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도덕법"인 "십계명"을
주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십계명을 주신 것은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하여 그 법을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죄 많고
사악한 세상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어떻게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주셨다. 다시 말해서
크리스챤들이 자신을 거룩하게 구별하도록 안내하고 그 법의 표준을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게 하시려고 십계명을 주신
것이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심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Guide Line이 십계명에 요약되어 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주신 사랑의 계명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크리스챤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 많일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에게 머물러있지 않는다고 하였다(요일2:15-16). 그처럼 세속화 되지 않도록 크리스챤들을 일깨우고 지시하고 질책하는 것이
바로 "십계명"이다. 이 십계명을 무시하고 버리게 되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게 되는데(삿17:6, 삿21:25) 그것이 바로 "자기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위험천만한 일이다.
과거의 모든 신실한 크리스챤들은 하나님의 도덕법(십계명)을 지키면서 신앙의 원리를 지켜왔으나 20세기 중반부터 기독교가 급속히 세속화되면서부터 십계명이 서서히 무시당해 왔고, 이제는 완전히 거부당한 것 같은 느낌이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절대 진리를 인정하지 않고, 전통적인 것을 배격하여 새로운 것을 추구하며, 다수가 좋아하면 그것이 진리이다 라고 하는 포스트 모더니즘(post-modernism) 사상이 널리 퍼지면서 일반 대중을 교회에 끌어들이려는 지도자들이 그 사상을 기독교에 도입하면서 본격적으로 십계명을 거부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같다. 그러므로 현재 "떠오르는 교회(emerging church movement)"들에서
그런 현상이 뚜렸하다. 17세기 중반에 영국에서 성경의 진리를 바로 이해하고 올바른 신앙의 자세를 가지는데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신앙 지침서들이 왕의 명령으로 신중하게 작성되어서 전 세계 기독교에 귀중한 교육자료로 보급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들이다. 교파들 간에 견해차가 있어서 어떤 항목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보는 관점에 따라 약간의 차이점은 있지만 포괄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다고 본다. 그 중에 일반 평신도 교육을 위하여 집필된 "소요리문답"은 많은 신실한 기독교인들을 배출하였다. 거기에 보면 크리스챤들이 어떻게 성수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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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8. 히로시마의 원자탄
왜 오키나와 미군이 한국에 들어왔나?
그 결과 한국의 분단국가, 6. 25 전쟁
일본군을 내쫓기 위한 미군의 진입
군사 기지는 용산이었다.
일본군 34만 명
미군 캠프 설치 후 일본에서 해방되었으나 미국에 의한 점령국이다.
9월 8일 오키나와 미군의 진입은
1차 미군 진입은 일본군 추방을 위한 것
원자탄은 일본 본토, 극동에는 76만 명
45년 8월 15일 천황의 항복 선언
야전군 사령부에서 원자탄을 맞고 항복하느냐
천황이 될 수 없다.
천황을 쳐내고 한국에 제2의 일본을 건국하자!
맥아더장군의 인천 상륙작전 후
심양, 한반도에는 원자탄의 위력을 몰랐던 일본군의 반항
미군이 진입하지 오지 않았다면 일본군이 후퇴하며 여성들에게 성폭력, 문화재 반출
하지 중장의 설문조사 결과
나라를 세워주자
1. 공산주의
2. 사회주의
전 국민의 82%
3. 자유민주주의
이승만에게 너희 나라 소망이 없다.
대한민국은 도와줄 가치가 없다.
너도 같이 가자!
이승만 나는 대한민국에서 죽을 것이다
무기는 놔 두고 가라!
무기를 갖고 북한으로 북침하려고 하는 것이다.
49년 6월 30일 미군의 철수
에치슨 미 국무장관
한반도에 관심이 없다.
에치슨 라인
대만 필리핀.
일본 호까이도
2차 대전은 동쪽에서 일본, 서쪽은 독일
러시아는 양대 전쟁을 모두 치뤄야 한다.
러시아는 일본과 5년 평화조약
힛틀러와 전투에 전력
45년 5월 전쟁 종료
러시아는 일본과 전쟁을 하려고 하였다.
평화조약은 깨트리기 위한 것이다!
극동 아시아로 러시아군의 이동 중 스칼린의 잔꾀
러시아 군대가 1800만명 사망
다시 일본과 전쟁을 하려면 미국의 루스벨트가 일본과 싸움을 시키려고 하는구나!
전쟁의 피해가 너무 강하여 러시아 군의 극동지역 진출 중단
얄타회담 / 루스벨트, 드골,
카이로선언
모스코바
1945. 7. 12 러시아군 진입 평양
러시아군은 운자탄 터지기 한 달 전에 평양 입성
한반도 전체를 먹으려고 하루에 4Km 진출
소련군과 협상할 때
협상 마치기 전에 계속 진출하면 원자탄을 때릴 것이다.
이때 38선을 긋게 된다.
(주사파) 미국이 일방적으로 38선을 만들었다.
소련군 진입을 막기 위한 선이었다.
6.25 당시 한국에 기독교인 50만명
미군을 한국으로 투입하라! 빌리그래함목사(사모님이 평양 출생)
트루만대통령이 유엔총회 소집
미국군의 2차 진입(인천 상륙작전)
한국전쟁에 의한 기독교인을 보호하기 위한 작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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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의 특징 / 예수의 피
전체 5장으로 구성된 짧은 편지인 요한1서는 굳이 주석을 달 필요도 없이 평이하면서도 우리의 신앙생활을 근본적으로 반성하게 한다. 난해한 신학이나 교리 논쟁을 끌어들이지 않고 단순 소박한 생활 언어로 신앙생활의 핵심을 이야기하는 요한1서의 신학은 참 멋지고 힘 있다.
뒤로멈춤앞으로
저자는 머리말에서 이 편지를 쓴 목적을 "우리가 보고 들은 그것을 여러분에게 선포하는 목적은 우리가 아버지와 그리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는 친교를 여러분도 함께 나눌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1:3)라고 밝힌다. '우리', 곧 요한 공동체가 직접 체험하고 있는 '아버지와 그리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는 친교'를 전함으로써 '여러분'도 이 친교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편지의 목적이다.
우리는 이 짤막한 고백에서 복음 선포의 본질을 발견한다. 개별적 신자가 아닌 신앙 공동체의 '집단적' 신(神) 체험이야말로 신학의 굳건한 기초요, 이 신 체험의 감격과 기쁨을 전하는 게 바로 복음 선포의 본질적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우리는 이 점을 바로 인식해야 한다. 참된 그리스도교 신앙은 공동체 안에서의 집단적 신앙이며, 참된 신 체험은 '나'만의 뭔가 독특하고 신비한 체험이 아니라 '우리'로서의 집단적 신앙 공동체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생겨나는 공동체적 신 체험이다. 그리고 이런 신앙과 신 체험에 기초한 복음 선포에는 다른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담겨 있다.
사실 성경이 어떤 책인가? 구약은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의 집단적 신 체험의 역사이며 신앙고백이고, 신약은 '예수님의 생애와 사상과 말씀과 십자가 죽음의 의미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우리의 구원과 생명의 길이 있다'는 것을 체험한 사람들의 공동체의 신앙고백이다.
요한 공동체는 "예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줍니다"라고 증언한다. 그런데 요한 공동체에서는 이 믿음이 '삶'과 밀착되어 있다. 예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이미' 우리의 죄가 씻김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식이 아니라, 십자가 보혈에 앞서 '삶'이 전제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처럼 우리도 빛 가운데서 살고 있으면 우리는 서로 친교를 나누게 되고 그분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줍니다." (1:7)
우리가 빛 가운데 살아 공동체의 친교, 곧 나눔과 섬김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아직은' 예수의 피가 우리 죄를 깨끗이 씻어주었다고 말할 수 없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기만 하면 우리의 죄가 말끔히 씻어지는 게 아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서 예수처럼 살려고 애쓰고 또 예수처럼 살 때 비로소 우리는 죄 사함을 받는다.
왜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렸는가? 예수의 역사적 삶에 대해 진솔하게 이야기하는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의 피 흘리심, 곧 십자가 죽음은 교리적이고 기적적이고 신비한 죽음이 아니라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한 몸을 이뤄 만인이 더불어 사는 따뜻한 세상을 만들고 싶어 했던 예수의 해방 실천의 삶의 불가피한 귀결이었다.
그 예수의 피 흘리심, 그분의 수난과 죽음은 오늘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된다. 이 도전에 우리의 양심이 찔려 회개하고 새 삶을 시작할 때, 우리 앞에는 구원의 문이 활짝 열린다. 예수의 피에 어떤 신비한 마술적 힘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종하여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을 사랑했던 예수의 생애는 오늘 우리에게 참된 삶의 길이 무엇인지 가르쳐준다.
예수가 흘린 피의 의미는 삶과 동떨어진 신학이나 교리로 이해될 성질의 것이 절대로 아니다. 우리들 자신이 신앙 공동체를 이루어 집단적으로 예수의 길을 걸어갈 때에만 예수의 피는 그 신비한 의미를 하나둘 드러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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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교황 이노센트 4세(1243. 6. 25 ~1254. 12. 7)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55~1274 ?)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지어 기증한 라테란 성당 발코니에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때마침 각 국에서 보내온 헌금주머니들이 속속 성당으로 도착하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교황 이노센트 4세가 말했다.
"선생 보시오. 베드로 사도께서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말했는데 지금 교황청은 은과 금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러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깊은 한 숨을 쉬며 대답을 했다.
"예,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교황님! 오늘의 교회는 은과 금은 있지만 대신 앉은뱅이에게 ‘일어나 걸으라.’고 말할 수 있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은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일본의 신학자인 우찌무라 간조(内村鑑三, 1861. 3. 26 - 1930. 3. 28)는 탄식했습니다.
“나는 가륫 유다가 부럽다. 그는 팔아먹을 예수라도 있었지만 현대 교회는 팔아먹을 예수조차 없다.”
다카사키 번사 우치무라 요시유키의 장남으로 에도 고이시가와(小石川)에서 태어났다.
미국 농학자인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가 세운 삿포로농학교를 다니던 중 친구의 전도로 기독교인 되었다.
대학생 시절 그는 친구들과 기도 모임을 구성하여 신앙생활했는데, 모임은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이 없는 민주적인 공동체였다.
이러한 새로운 신앙경험은 우치무라의 기독교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대학교를 졸업한 1882년 우치무라와 친구들은 삿포로 독립교회를 통해 서구의 교회가 아닌 일본적 교회를 설립하고자 했다.
교회는 5명의 위원들에 의해 공동으로 운영되었는데, 일상적인 교회의 일은 그들이 함께
처리했고 그 외의 것은 언제나 투표로 처리했다.
또 교회의 회원은 의무적으로 교회를 위해서 일해야만 했다.
1884년 미국 애머스트 칼리지 3학년으로 편입하여 명예상을 받고 졸업한 뒤 하트포드 신학교에 진학하였으나 4개월만에 학업을 포기했다.
신학을 포기한
이유에 대해 "나는 더 이상 신학공부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지난 3년 간의 극심한 정신적 긴장으로 신경이 불안정해지고 매우
심각한 만성 불면증에 시달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휴식이나 진정제, 기도도 효과가 없었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고향
땅으로 돌아가는 것밖에 없었다"라고 말했다.
결국 1888년 일본으로 귀국하였고, 도쿄에 있는 제일고등중학교 교원으로 취직하였다.
하지만 1891년 일본 천황의 절대권력의 상징인 "교육칙어(敎育勅語)" 봉독식 때 예를 갖춰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불경사건'으로 일본 천황을 숭배하는 존황파(尊皇派)들에게 미움을 받아, 보복 테러의 표적이 되어 아내와 자식 그리고 직장을 잃었다.
우치무라는 교원으로 활동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나는 왜 기독교인이 되었는가?》(How I Became a Christian), 《구안록》등을 저술했다.
또한 《만조보》지의 기자와 월간지 《성서지》 연구의 간행인으로도 일하는 등 바쁘게 활동했다.
1921년에는 도쿄의 한복판에서 일요일마다 로마서를 강의하여 수많은 청중들이 크게 감동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키에르케고르도 현대 기독교를 향하여 냉소적으로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기적을 행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더 위대한 능력을 행하고 있다.
그들은 그 포도주를 다시 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 말에 대해 어떤 신학자는 평을 내놓았습니다.
"현대교회는 한걸음 더 나아갔다.
포도주를 담았던 항아리마저 깨버렸다.
그 깨어진 항아리에 목회자도 찔렸고, 성도들도 찔렸고, 이웃들도 찔렸고, 교회 밖에 있는 사람도 찔려 지금 피를 흘리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여전히 교회는 우리의 희망입니다.
교회가 피 흘리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에도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은 여전히 고백합니다.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12:10)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할 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라야 합니다.
예수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 닮음이가 됩니다.
“위선이란
‘아는 것’과 ‘행하는 것’ 사이의 간격이다.”
그 간격이 클수록 더욱 위선적인 행동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아무리 화려한 말과 요란한 장식으로 겉을 포장하여도 사람은 결국 그 내용을 보고 값어치를 평가하는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진정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고백이 입술만이 아니라 삶에서 열매 맺을 때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16)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뿐만 아니라
그분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능력이라고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했다면, 생활 속에도 예수님의 삶이 드러나야
합니다.
오늘은 내 안에 살아 계신 빛이신 그분을 온전히 드러내며 살았으면 합니다.
입술로 고백하는 것과 살아가는 모습 사이에 간격은 없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주님의 이름이 능력임을 고백합니다.
그 능력의 이름으로 우리를 불러 주셨음을 고백합니다.
오늘 우리가 그 이름의 능력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옵소서.
예수의 삶이 온전히 드러나는 하루를 살게 인도해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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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이 폴란드를 점령했을 당시 한 농촌 마을에서 머무른 적이 있습니다. 마을의 영주는 나폴레옹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는데, 자리의 3번째 상석으로 안내했습니다.
자리를 안내받은 나폴레옹은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나는 이 나라를 점령한 왕이고 프랑스의 황제다. 그런데 나를 고작 이런 자리에 앉히려고 식사자리에 초대했단 말인가?❞
마을 영주는 급히 달려와 나폴레옹 앞에서 몸을 숙이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참으로 죄송합니다.
그러나 무례라고 생각하셔도 이 자리를 드릴 수 는 없습니다.
이 두 자리는 저의 부모님을 모실 자리입니다.
황제께서 나라의 가장 높은 분이시듯이 저의 집에서는 부모님이 가장 높으신 분들입니다.❞
영주의 말을 들은 나폴레옹은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나폴레옹은 그의 부모님을 모셔 함께 식사를 했고, 떠나면서 부하를 시켜 큰 상을 주었습니다.
우리 영혼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 삶에 최우선이어야 합니다.
주님이 아닌 사람을 높이는 교회와 나의 인생이 되지 않도록 늘 조심하고 점검 하십시오.
우리의 몸과 마음이 하나님의 집으로 개혁될 때 모든 것이 자리를 잡고 형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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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사랑의교회 백동조 목사님의 어머니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목사님의 어머니는 너무 어려운 가정 형편에서 전도를 받고 교회에 나간 후 기도를 시작하였는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새벽기도, 철야기도, 산기도를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해도 해결되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여전히 지독히 가난하고 가족끼리 문제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새벽마다 교회 가서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새벽에도, 철야기도회에도 교회에 가지 않으시는 것을 본 어린 백동조 목사님이 ❝엄마, 왜 교회에 가지 않아요?❞라고 물으니 어머니가 ❝응. 나 이제 집에서 기도하기로 했다❞고 하시며 힘없이 방으로 들어가 대성통곡 하며 하나님께 이렇게 이야기하시더랍니다.
❝하나님, 저, 더 이상 교회 가서 기도 안 할랍니다. 아무개 집사가 ❛기도해도 별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제가 봐도 그렇습니다. 하나님, 저를 보면 누가 기도를 하고 싶겠습니까? 이제 남부끄러워서 기도도 못하겠습니다.❞ 저렇게까지 기도하는데 아무 소용없다고 누군가 뒤에서 쑥덕이는 말을 들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집에서 기도하던 어머니가 일주일 만에 다시 교회에 나가셨습니다.
집에서는 기도가 안 된다면서 말입니다.
목사님의 어머니는 여생을 열심히 기도하다가 돌아가셨지만 돌아가실 때까지도 많은 문제에 대한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하셨습니다. 그런데 백동조 목사님은 고백하기를, 어머니의 기도가 지금 자신의 삶과 목회 가운데 다 이루어지고 있다고 울먹이셨습니다. 백 목사님의 어머니는 진짜 능력 있는 기도자였고, 본문의 주님이 개혁하신 ❛기도의 집❜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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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데이아(ἀλήθεια) : 진리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알레데이아’((ἀλήθεια)는 ‘진실한, 진리를 사랑하는, 진리를 말하는, 참된, 진실된’ 이라는 뜻을 가진 ‘알레데스’(ἀληθής)에서 유래된 단어로 ‘진리, 객관적인 진리, 주관적인 경험적 진실’ 이라는 의미이다.
‘알레데스’(ἀληθής)가 부정적 불변사로서 ‘아’(ἀ)와 ‘숨기다, 감추다, 깨닫지 못하다’ 라는 뜻을 가진 ‘란다노’(λανθάνω)의 합성어에서 파생된 단어라는 점에서 ‘진리’(ἀλήθεια)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속뜻은 국어사전이 정의하고 있는 ‘누구나 승인할 수 있는 보편적인 법칙이나 사실로써의 참된 이치 또는 도리’
라는 것과는 다른 ‘숨겨지고 감추어진 것이 밝히 드러남,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닫게 됨’ 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알레데이아’(ἀλήθεια)의 히브리어 단어는 ‘확고함, 충실함, 진실’ 이라는 뜻을 가진 ‘에메트’(אמח) 인데 이를 파자하면 ‘하나님 말씀의 완성’ 이라는 의미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진리(ἀλήθεια)가 충만(플레레스, πλήρης – 완성된)하신 분, 바로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에메트’(אמח)가
‘처음’(א=Ἄ)과 ‘나중’(ח= Ω)되시는 ‘말씀’(מ)이라는 의미에서 처음과 나중되시며 말씀이신 예수님은 스스로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에고 에이미 토 알파 카이 토 오메가, Ἐγώ εἰμι τὸ Ἄλφα καὶ τὸ Ω.’고 말씀하셨다(계 1:8).
진리(ἀλήθεια)이신 예수님은 항상 ‘진리’(ἀλήθεια) 안에서 가르치셨으며(마 22:16),
‘진리’ (ἀλήθεια)에 대하여 말씀하셨고(눅 4:25, 막 12:14),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진리’ (ἀλήθεια) 안에서 예배하라고 하셨다.
성경은 ‘진리’(ἀλήθεια)가 없는 자를 가리켜 ‘욕심’(에피두미아, ἐπιθυμία)대로 행하는 자, 처음부터 살인한 자,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고 말하고 있다(요 8:44).
따라서 성도는 ‘진리’(ἀλήθεια)를 아는(γινώσκω) 자
진리가 된(γινώσκω) 자
지금 그리고 여기 (Now and Here)에서부터 영원히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자라고 하겠다(요 8:32).
그리고 그가 진리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아버지께 갈 수 있는 것이다(요 14:6).
히브리어 “에메트”(אמת)
헬라어 “알레데이아”(ἀλήθεια)
객관적 사실과 주관적 경험에서 나온 진실과 진리다.
진리란 상대적이 아니라 절대적이다.
도마의 물음에 예수님이 답했다.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 빌라도가 법정에서 주님께 물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요 18:33),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요
18:35),
“네가 왕이 아니냐?”(요 18:37)
마지막으로 빌라도가 물었다.
“진리(ἀλήθεια)가 무엇이냐?”(요
18:38)
첫째, 성경 말씀이 진리다
캐논(Canon)이란 “자, 척도”란 뜻인데, 삶의 기준은 진리의 말씀이다.
진리를 깨우쳐달라고
기도하자!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사 50:4).
말씀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나에게 주의 법도들의
길을 깨닫게 하여 주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시 119:27, 34, 125, 130,
144).
그러나 한글성경만 보면 오해가 많다.
법궤를 나뭇조각으로 만들었다 생각하지만, 조각목은 싯딤나무다.
한 권사님은
외식(外食)과 외식(外飾)을 혼동해 평생 외식(外食)을 못했단다.
투기(妬忌)와 투기(投機)를 혼동한 어느 공인중개사는 “사랑은
투기하지 아니하며”란 구절을 싫어했단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사 40:8).
만물이
변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변치 않는 진리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한다”(시 19:7).
둘째, 말씀의 본체인 예수님이 진리다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 요 1:14)하신 예수님은 “내가
진리(ἀλήθεια)요”(요 14:6), “나는 알파(Α)와 오메가(Ω)라”(계 1:8)고 말했다.
진리를 알면, 그 진리가
자유케 한다(요 8:32).
성도는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요 4:23).
하나님의 소원은 우리가 진리를 아는 것이다(딤전
2:4).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2-24).
따라서 “무엇이 진리인가?”(What is the truth?)가
보다 “누가 진리인가?”(Who is the truth?)라고 물어야 한다.
진리인 성경과 진리 자체인 그리스도를 모르면, 인간은
사망의 길로 달려간다.
진리를 모르면, 우상숭배하고, 물질에 집착하고, 마귀의 영에 사로잡히고, 심지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부인한다(눅 23:34).
진리이신 예수님의 사역은 죄인을 회복하는 전인구원(全人救援)이다.
(1) 구원의 길로 인도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2) 빛 가운데로 인도한다.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 3:21).
(3) 거룩하게 한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
(4) 말씀을 행하게 한다.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요일 2:4).
(5) 자유케 한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예수님의 회복사역(回復使役)의 원동력은 성령의 기름부음이다(행 10:3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새봄을 맞이하며 진리의 말씀을 통해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만나자!(요 5:39-40)
그리스도를 만나 몸과 마음과 영혼의 전인구원으로 자유하자!(요 8:32)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 3:“17).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알레데이아(Homer 이래)는 어원적으로 '가리워져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보여지거나, 지적되거나
표현된 정도(범위)의 상태나 사태, 그것도 이러한 보임과 지적과 표현에서 나타내지거나 그 자체 사실 그대로 나타낸 정도의 상태나
사태를 지적하며, 물론 그것은 숨겨지거나 위조되거나 왜곡되거나 생략되거나 은폐될 수도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알레데이아는 사건의
진상(full or real stale of affairs)을 의미한다.
(a) 사법에서 여러가지 진술에 대항하여 지지될 수 있는 사건의 진상
(b) 역사에서 신화와 완전히 구별되는 실재적 사건
(c) 철학에서 절대적 의미의 참된 것 등을 의미한다(R. Bultmann).
그러므로 알레데이아는 일반적으로 거짓이나 거짓말에 반대되는 '진실'을 의미한다.
구약 및 70인역본의 용법
(a) 에메트와 의미와 그 역어 알레데이아
알레데이아에 상당하는 히브리어는 에메트이다.
구약성경에서 에메트는 126회 나오는데, 85회 알레데이아로 번역되었다.
에메트는 아멘, 곧 확고한, 확실한, 신실한 것으로 생각되는 사실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진실한 것을 의미한다.
인격에
대해 사용될 때 그것은 때때로 주로 그의 말, 행동, 사상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을 표현한다.
이쉬 에메트는 그의 행위가 진리의
규범에 지배를 받는 사람이며, 그러므로 성실한 사람이다.
하나님께 적용될 때, 특별히 그의 신실성에 대해 사용된다.
이 단어는
'확고하다'를 뜻하는 어근 'mn에서 파생된 것으로 학자들은 이해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구약성경 학자들은 히브리 저술가들이 말하는
'진리'란 의미상 '불변성'(stability), '확고함'(firmness) 혹은 '확실성'(reliability)이란 개념을
시사해주는 '신실성'(faithfulness)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예프센(Jepsen) 기록을 요약해서 말한다면,
'에메트는 신뢰할만한 것으로 입증되어야 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영어로 이 개념을 전달하는 데에는
'Reliability'(확실성)가 가장 포괄적인 단어일 것이다.
에메트는 다른 사람들이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고 했다.
예프센은 이것을 인간의 진리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에 적용시키는 것으로 말을 맺는다.
진리의 하나님으로서 "여호와는 ...
그의 말씀과 사역 안에서 우리가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TDOT Ⅰ313).
이런 견해를 근거로 하여 구약성경에서 진리는 단순히 이론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성에 근거한 것이라는
주장이 종종 있어 왔다.
만일 이 견해를 받아 들인다면, 이것은 진리에 대한 히브리적 개념과 헬라적 개념 사이의 근본적으로 분명한
대조를 보여주는 요인이 될 것이다.
볼트만(R. Bultmann)은 쉽사리 알레데이아의 헬라어 용법이 셈어적 용법과 대조된다고
말한다(TDNT Ⅰ238).
이 이론에 따르면, 고전 헬라어에서 알레데이아는 단순한 현상과 대조되는 '진리'(truth)를
의미하는데 반해, 히브리어에서 이에 병행되는 단어는 '불변성'(stability) 혹은 '신실성'(faithfulness)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런 대조가 어느 점에서는 타당성을 지니는 반면, 이 주장들이 조심스럽게 한정되지 않을 경우에는 잘못될
수도 있고, 지나치게 단순화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에메트는 그 사용된 문맥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나타낸다.
에메트가 에메트로 간주되고, 에메트에 의해 지적되는
독특한 사실들을 항상 의미하지 않는다.
이러한 경우에 이 단어는 법률적 영역을 넘어가는 불확정한 일반적인 타당성이나 정당성을
지적한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진실이나 사실(reality)로 인정하기를 항상 요구하는 사실(facts), 신과 인간의 질서에
일치하여, 존중을 받는 정상 상태를 가리키는데, 그것은 유사하게 미쉬파트(4941: 공의, 심판)의(6666: 의),
샬롬(7965: 완전, 평화)과 같은 관련 용어에 반영되어 있다. 그 의미와 일치하여 그것은 전혀 일반적으로 진리나
진실(truth)로, 심지어 정상적 개념으로서 '진실성'(veracity)으로 번역할 수 있다.
알레데이아는 70인역본에서 히브리어 에메트의 의미를 따라, '신실(성), 성실(성), 충실, 진리나 진실, 확실한, 정직한, 진실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b) 에메트/ 알레데이아의 법률적 용법
에메트는 기본적으로 가장 확실히 법률 용어에서 '사실상의 과정이나 인과의 진실을 묘사한다.
따라서 우리는 신 22:20에
"그 일이 참되어(에메트/ 알레데이아)..."라는 표현에서 앞의 경우와 같이 "그 일이 비방거리에 근거하지 않고 확실한 사실들, 곧
진실에 근거한다면"이란 의미를 읽는다.
사사시 9:16(삿 9:19)의 "너희의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라는 말에서 에메트/ 알레데이아는 의와 관련되며, 그들의 행위의 정당성을 따지고 있는 것이다.
사사기 9:15에서는 "참으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에메트가 사물에 적용되는 경우에 법률 용어의 비유적 용법을 보게 된다.
창세기 24:48에 "바른 길"이 데레크 에메트(알레데이아), 즉 제시되는 많은 길들 중에 확실히 성공하는 길이다.
예레미야 23:28의 "내 말을 받는 자(선지자)는 성실함으로(에메트/ 알레데이아) 내 말을 말할 것이라"는 말에서, 에메트는 그
자체 꿈으로가 아니라 실제적 역사(operation, 29절)를 나타내는 사실(a fact)을 가리킨다. 단 8:26에서(이상이
확실하니) 에메트/ 알레데이아는 그 계시가 실제로 일어날 명백한 것임을 확언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사야 59:14, 15에서 진실이 부족하다는 불평은 13절 상반절에 "배반하는 것"에 관한 언급이 있기 때문에, 언뜻 보기에
이스라엘의 불신실성에 대한 언급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좀 더 세밀하게 검토해 보면, 불평의 참된 원인은 "거짓말"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마찬가지로 예레미야도 "그들은 각기 이웃을 속이며 진실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 혀로 거짓말 하기를 가르친다"고
불평하였다(렘 9:5). 틀림없이 이런 일 때문에 결국 어느 누구도 자기 형제를 신뢰할 수 없는 것 같다(4절). 그러나 여기에서
주요 문제는 거짓말 그 자체이다.
스가랴도 이와 같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너희는 각기 이웃으로 더불어 진실을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을 베풀고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특별히 에메트/ 알레데이아의 개념에 있는 평결(judical finding)과
재판의 기준 사이의 관계를 나타낸다.
시편의 세 구절들에서 진리는, 많은 학자들이 오로지 헬라 문헌에서만 발견된다고 주장하는 거의 그런 의미에서,
은폐(concealment)와 대조하여 나온다.
시편 43:3에서 기자는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라고 기도한다.
이 기도는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계실 것을 바라는 기도가 아니라 "간사한 자"(1절)의 유혹적인 말에 직면하여 하나님께서 그에게 사건의
진상을 보여주기를 원하는 기도이다.
그러므로 그는 진리와 빛을 필요로 한다.
진리란 그를 어둠에서부터 벗어나게 하여 사건들이
있었던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해 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시편 45:4에서 왕은 진리의 옹호자가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염두에 둔 것은 왕의 확실성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의심스럽고, 부정하고, 공정치 못하거나 거짓된 것은 무엇이든지 기꺼이 다 드러낼 그의 마음 자세이다.
왕의 고통 당하는 자들의
고통의 원인을 공공연하게 드러냄으로써 그들을 옹호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시편 51:6의 "중심에 진실함을"이라는 유명한 언급은 그다지 분명하지 않다.
앤더슨(A. A. Anderson)은 여기에서
에메트가 '신실성'(faithfulness)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Psalms, Ⅰ, 396).
그러나 이 개념은 시편
기자가 충실함을 간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기만으로부터의 해방을 간구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인 것 같다. 이 시편의 주제는
고백이며, 이 고백은 하나님께서 보신 그대로 사건들의 상태의 진실됨을 시인하는 것이다.
이 해석은, 만일 우리가
"중심"(inward parts)을 계시의 필요와 관련되어 있는 "덮여 있는 것"을 의미하고(E. A. Leslie, The
Psalms, 1949, 400), 이 시편의 주제를 여호와께서 공정하시다라는 것으로 이해한다면(S. Mowinckel, The
Psalms in Isreal's Worship, 1967,Ⅰ, 214), 훨씬 더 적합할 것이다.
잠언에서 진리와 거짓말(혹은 속임수) 사이의 대조를 배경으로하여 에메트/ 알레데이아가 사용된다.
지혜가 "내 입은
진리를 말하며"(잠 8:7)라고 말할 때, 그 요지는 지혜가 지혜를 갖고 있는 사람을 기만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혜는 교육과 지식을 통해서 그에게 모든 것을 드러낼 것이다.
잠언 22:21에서는 진리가 참된 대답이 행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즉 그곳에 거짓이나 허위가 없도록 하기 위해 드러내어 진다.
(c) 에메트/ 알레데이아의 종교적 용법
① 법률적 영역에서 중요한 다른 표현과 같이, 진리의 개념은 특별히 구약성경의 종교적 용어에 그 자리를 잡고 있다.
에메트의
종교적 용법은 항상 비유적으로 이해하지 아니하지만, 종교적 이해(통찰)에서 생겨날 수도 있다.
어쨌든 많은 경우에 그것은 법률적
용법에 의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종교적 사실을 오로지 의미한다.
때때로 사법적으로 의인으로 묘사된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태도를 명백한 진리의 사실에 근거하며, 진리가 하나님 자신의 행위와 말씀 안에 있는 토대인 것 같이 진리를 행한다. 하나님의
진실함은 인간의 진실함을 요구한다(시 51:6).
여호와의 성산에 거하기에 합당한 자는 그 마음에 에메트("진실")를 말하는
자이며(시 15:2), 따라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생의 질서라는 의미에서 진리에 전념하는 마음을 가진 자이다.
이 마음은 사회
생활에서 실제적으로 표현된다(참조: 겔 18:8).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한다(참조: 18:9).
하나님은 그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라고 명하신다(왕상 2:4).
호세아가 호 4:1에서 이 땅에 진실(에메트)이 없다고 불평할 때, 진실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하였다:
즉
생의 모든 영역에서 진실함은 하나님의 뜻을 틀림없이 아는데서 성장하고, 이러한 앎은 그것에 관한한 진실함의 실현이라는 것이다.
지혜 문학에서 문맥은 셰켈(허위, 거짓)이나 아울라(불의)와 대조시키므로, 진실의 개념을 강조하는 한편(말 2:6; 잠
11:18; 렘 9:4; 참조: 잠 12:19), 악과 대조는 더욱 명확히 종교적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느 9:33):
"우리의 당한 모든 일에 주는 공의로우시니 우리는 악을 행하였사오나 주는 진실히(에메트: 신실하게) 행하셨음이니이다."
② 에메트는 자주 신실성이란 의미로 특히 하나님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시 31:5에서 하나님을 "진리의 하나님"으로 부른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으로서 일반적으로 의인과 사람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으실만 하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으로서 항상 신실하게(에메트) 대하신다.
하나님은 영원히 진실함의 규범을 지키신다(시
146:6).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진리를 확립하고 그 자체 진리인 법, 곧 진정한 율법(토로트 에메트)을 수여하셨다(느
9:13).(참조: Quell).
에메트는 보통 "내가 주의 에메트를 찬양하리이다"(시 71:22)와 같은 특징적인 구절들에서 '신실성'이란 의미로 나온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영원히 지속된다(시 117:2).
앤더슨(A. A. Anderson)은 시 119:43에 나오는 "진리의
말씀"이란 어구조차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에 관한 기록이란 의미로 해석했다(The Book of Psalms).
시
30:9에서 하나님의 에메트에 대한 증거의 개념이 훨씬 더 두드러지게 나오는데, 스올(Sheol)이 하나님의 신실성을 선언하지
못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신자에게 하나님의 신실성을 새롭게 증거해 줄 계속적인 경험이 중단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뿐만 아니라 거기서 그들에게는 그들이 호소할 수 있는 하나님의 약속이 없기 때문이다(시 30:9; 참조: 사 38:18).
③ 에메트가 '신실성'(faithfulness)이란 의미로 사용될 때 자주 헤세드(변함없는 사랑)와 병행되어 나오다.
이런
경우에 에메트가 '신실성'을 의미하는 문맥과 '진리와 진실'을 의미하는 문맥을 구별해야 한다.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이
아브라함에게 헤세드와 에메트를 보여주기를 브두엘과 라반에게 요청하는 대목에서(창 24:49), 이 두 단어의 의미를
'충성'(loyalty)과 '성실'(fidelity)로 볼 수 있겠지만 개역 표준 성서(RSV)에 따라 정직하고 성실하게
행동하다라는 의미의 "deal loyally and truly"(충성스럽고 진실하게 대하다)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러나 같은 장(창 24장)의 앞 부분에 나오는 엘리에셀이 리브가를 맨처음 만나는 대목에서 엘리에셀을 "헤세드와 에메트를 끊이지
않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 뜻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의 약속에 충실하고 신실했다는 것이다(창 24:27).
창
32:10에서 야곱은 아주 똑같은 방식으로 그가 하나님의 모든 신실하심(에메트)을 감당할 수 없다고 고백하였다(창 32:10).
그 특징은 시편에서 찬양과 기도가 모두 하나님의 신실성을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에메트의 용법 중 반수 이상이 이런 의미를
지닌다. 시편 기자가 "여호와의 모든 길은 ... 인자와 진리로다"(시 25:10)라고 외칠 때,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관계가
언약에 대한 충성으로 특징 지워지기 때문에 아주 신뢰할 만하다고 증거하는 것이다(M. Dahood). 에메트가 시 57:3,
10; 61:7; 69:13; 108:4; 115:1에서 헤세드와 결합되어 나올 때, "신실성"(faithfulness)이
에메트의 의미로 나온다. 흠정역 성서에 나타나 있듯이, 이런 의미에서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난다"(시 85:10)라고 번역된다.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은 그의 신실성에 대한 하나의 표현으로 명시된다. 그리고 알레데이아는 '충실, 성실'을 뜻하는 에무나(시
88:11-49), '신실한, 신뢰하는'을 뜻하는 에문(시 12:1; 시 31:24), '확실한, 진실한'을 뜻하는
야칩(3330; 단 2:8), '정직한'을 뜻하는 야샬(3474; 욥 23:7), '완전, 성실'을 뜻하는 톰(8537, 잠
28:6), '진실'을 뜻하는 케쇼트(7187; 단 2:47), '진실로'를 뜻하는 옴나(욥 9:2; 19:4), 우림(신
33:8)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④ 우리가 에메트가 사용된 여러가지 측면들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매우 많은 문맥들에서 진리가 단순히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말씀으로만 아니라 행위로 자기의 진리를 드러내시며, 이 진리는 사실상
그의 백성의 체험 속에서 입증된다. 마찬가지로 사람들도 진리에 대한 존중을 추상적인 이론으로가 아니라 그들의 이웃에 대한, 그리고
그들의 구두상의 상업적 거래에 대한 일상적인 증언으로 나타낸다.
시 119:142에서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고 표현한다. 이것은 단순한 실존적인 진리 이상으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신자들에게 사건의 진상을 보여줄 등이요 빛이다(105절). 여기에서 그는 사실상 그와 관련될 때의 사건의 진상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내발 ... 내길").
⑤ 이러한 진리는 신뢰할 만하며 또한 확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통찰이 오로지 신학적 기초 위에서만 도달되는 것이
아니다. 확실히 신자는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성(에메트, 헤세드, 에무나) 때문에, 확신을 가지고 그에게 의지할 것이다. 그러나
에메트의 이런 특별한 용법이 이 단어의 모든 용례들의 배후에 있는 것은 아니다. 히브리인들은 다른 사람들도 인정했던 논리적 진리,
곧 참된 말은 그것이 실제와 일치하기 때문에 믿을만하다는 점, 그리고 진리의 하나님에게 있어서나 진실한 사람에게 있어서 언행이
일치한다는 점을 인정하였다(참조: 수 24:14; 시 145:18). 진리를 말과 행동의 일치로 보는 개념이 신약성경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알레데이아의 신약성경의 용법
신약성경에서 알레데이아는 109회 사용 중, 바울 서신과 요한의 기록에서만 92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a) 알레데이아는 "확실성과 힘을 지니는"(has certainty and force)"에 대해 사용되었다(에메트의 의미로).
① 타당한 규범. 알레데이아는 엡 4:21; 엡 4:22에서 이런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생각한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이 진리는 지적 진리에 대한 단순히 이론적인 감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복음에서 나타날 때는 진리에의
위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와 만남으로써, 결국 삶에 변화를 가져오게 되고, 이 변화를 통해서 신자들은 과거의
속임수에서 벗어나게 된다.
갈 2:5에서도 알레데이아는 같은 의미를 가진다: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함이라". 여기서 바울은
유대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문제가 된 것은 완전히 "복음의 진리"라고 선언하였다. 바울의 판단에 따르면, 복음을 더럽히도록 유혹하는
것은 곧 진리(타당한 규범)를 더럽히도록 유혹하는 것이요, 그 반대의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유혹에 굴복한다는 것은 그
자신의 성실의 의미에서나 구원사에서의 현재 있는 그대로의 실제 상황이라는 의미에서도 진리 곧 타당한 규범을 부인하는 것이다.
갈 2:14에서 알레데이아 역시 같은 의미를 가진다: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게바는
복음의 타당한 규범을 따르지 않은 것이다. 고후 13:8의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라는 바울의 언명에서 진리는 복음의 진리인 동시에, 더 나아가서 이 언명은 아마도 진리의 개방에 의해(그 결과야
어쨌든간에) 진리의 능력이 그리스도의 주의와 복음을 오직 보급시킬 수 있다는 사상을 전달하는 것이다. 진리는 타당한 규범이다.
하나님의 요구는 롬 2:8과 롬 2:19에서 알레데이아이다.
② 올바름, 정직. 알레데이아는 에메트와 같이 '올바름, 정직'이라는 보다 약한 의미를 가진다. '진리를 좇는 것(행하는
것)'이란 표현에서 나타난다(요 3:21; 요일 1:6). 유사하게 요이 1:4; 요삼 1:1 이하에서 "진리에 행하는 것"은
정직하게 행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같은 맥락을 따라 알레데이아는 아디키아($93: 불의)의 반대이다(고전 13:6; 롬
1:18). 이 단어는 또한 디카이오쉬네($1343: 의)와 결합하며(엡 4:24; 엡 5:9; 엡 6:14), 아마도 때때로
그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약 3:14; 약 5:19).
(b) 알레데이아는 '진술의 사실'(truth of statement)에 대해 사용되었다. 행 26:25에서 바울은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나이다"고 하였다. 여기서 "참된 ... 말"(레마타 알레데이아스)은
환상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사실에 기초한 것이다. 엪 알레데이아스라는 문구는 일반적으로 '사실과 일치하여'나 '사실대로'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막 12:32; 눅 4:25; 눅 22:59에 나온다. 따라서 엪 알레데이아스를 말하는 것은 단순히 그 사건의
사실을 정확하게, 혹은 바르게 진술하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눅 4:25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서 중요하다. 예레미아스는 주장하기를 이 문구는 예수님이 자기의 말씀을 강화하고
자기 권세를 나타내고 자기 메시지의 확실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용하신 것이라고 한다(J. Jeremias, New
Testament Theology).
(c) 알레데이아는 드러난 '사건의 실상이나 진상'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롬 1:18("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서 확신하는 것은 이 경우에서 알레데이아를 하나님의
요구하는 것으로나 의(디카이오쉬네)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롬 1:19의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는
말을 보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된 사실(revealed reality)"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롬
1:25("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에서 하나님의 진리가 단순히 프슈도스($5579: 거짓, 허위), 즉 우상에
반대되는, 참된 또는 실질적인 하나님을 의미하지 않으면 위와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Bultman).
좀 더 설명하면, 바울은 알레데이아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자기 의지의 계시나 혹은 심지어 율법을 통해서든 어느 순간에는 창조를
통해서든 자기 존재의 계시를 나타낸다. 이런 용법은 로마서의 처음 두 장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사람들은 사악함으로
인하여 "진리를 막고"(롬 1:18),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꾼다(롬 1:25). 그러므로 진리에 순종치 않는 자에게는
진노가 있을 것이다(롬 2:8). 반대로 율법 그 자체는 지식과 진리의 구체화이다(롬 2:19)("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 여기서 문제가 되는 진리는 근본적으로 복음의 진리가 아니다. 바울은, 요한의 경우와 같이 사람들이 메시야를 알아볼 수
있는 지식을 받았다고 주장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창조주요 심판자이신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거부하기 때문에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본다. 바울은 모든 이방 세계가 고의적으로 복음-진리를 거부하였다고 말하지 않고 이 세계가 창세로부터 하나님과 그의
주권적인 주장들에 대해서 고려될 수 있는 것, 즉 분명히 보여진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롬
1:20)을 고의적으로 은폐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된 사실'이다.
유사하게 알레데이아는 다음과 같은 전치사와 함께 '실제적으로(real)'를 의미한다. 골 1:6(엔 알레데이아)에서 실제적인
경험을, 행 10:27과 행 10:34(엪 알레데이아)에서 실제적인 행위를 표현한다. 한편 롬 2:2에서 카타 알레데이안을
'사실과 일치하여, 사실대로'를 의미하며, 롬 2:11에 프로소포렘프시아(편파적임, 불공정)와 반대되는 것이다.
요일 3:18에서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는 대조는 헬라에서는 흔한 표현이다. "행함과 진실함으로"는 '실제적 행위로'를 뜻한다.
또한 고전 헬라어의 표현 '진실을 말하다'는 70인역본에서 뿐만 아니라(대하 18:15; 잠 8:7), 신약성경에도 나온다.
막 5:33에서 알레데이아는 "사실"을 의미한다. 무리 가운데에서 예수님을 만진 혈루증 앓는 여인은 "모든 사실"을 고하였다. 즉
아무 것도 숨기지 않고 사실을 말했다. 롬 9:1에서 참말을 하는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과 반대이며,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고후 12:6에서 참말을 하는 것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요 8:40; 요 8:45 이하; 요 16:7에서도 역시 '진리를
말하는 것'이 나오는데, 여기서 알레데이아는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듣거나 본 사실들, 곧 하나님의 계시로 해석할 수 있다.
(e) 알레데이아는 '믿거나 의지할 수 있는 것'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① 신뢰성이나 신뢰할만함, 롬 3:3 이하; 롬 15:8.
② 성실, 진실, 진심. 알레데이아는 '거짓말, 은폐, 속임수'와 반대되는 '진실' truth이라는 의미를 지니거나 '성실'
sincerity의 의미로 나온다. 마 22:15 이하(막 12:14)에서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은 질문을 가지고 예수님을
올가미에 걸리게 하려고 다음과 같은 말로 이 질문을 시작한다: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알레데스) 참으로써(엔 알레데이아)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여기에서 요점은 예수님이 그 말을 함으로써 얻어질 결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진리를 감추지
않으리라는 점이다. 그는 자기 견해를 피력하는데 정직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고후 7:14("우리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 것 같이 ... 우리의 자랑한 것도 참되게 되었도다"), 고후
11:10("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으니")에도 나타난다. 따라서 그것은 고전 5:8에서 에일릭리니아(명확, 순수, 성실)와
연결되어 있으며, 빌 1:18에서 프롭하시스(편파적임, 불공정)와 반대된다. 때때로 헨디아디스의 형태로 친족어와 관계되어 있다:
"믿음과 진리"(딤후 2:7). 요이 1:1과 요삼 1:1에서 이 용법이 사용되었다: "참으로 사랑하는 자",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를 가리킨다.
(f) 알레데이아는 복음, '참된 가르침 또는 믿음'에 대해 사용되었다.
① 고후 13:8: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여기서 알레데이아는 (a)①의
의미로 해석하지 않는다면 "다른 복음(에테론 유앙겔리온)(참조: 고후 11:4)과 대립되는 참된 교리를 의미한다.
② 이런 이유로 고후 4:2에서 바울은 복음을 전반적으로 그의 활약으로분명히 나타낸 알레데이아로 부르기도 한다("진리의
나타냄"). 이 경우에 알레데이아는 앞에 나온 말 로고스 투 데우("하나님의 말씀")의 개념을 포함시킨다(참조: 고후 2:14; 골
4:3 이하; 딛 1:3).
③ 갈 5:7에서 바울은 마치 "복음을 순종치" 아니했다고 말한 것처럼(참조: 롬 10:16). "진리를 순종치" 않는 것에 대해 말한다.
④ 벧전 1:22에 의하면 기독교의 믿음은 "진리를 순종함"이라고 할 수 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참조: 벧전 1:21 이하).
⑤ 또한 복음의 설교(전도)는 진리의 말씀이다(고후 6:7; 골 1:5; 엡 1:13 등).
⑥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진리를 아는데 이르는 것"이며(딤전 2:4; 딤후 3:7; 딤전 4:3; 히 10:26; 요이 1:1).
⑦ 살후 2:10-살후 2:12에서는 알레데이아는 "거짓"($5579)과 "불의"($93)라고 불리는 적그리스도의 계시에
대립되는 그리스도의 계시이다: "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11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⑧ 딤전 3:15에서 에클레시아(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로 묘사된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⑨ 벧후 1:12에서 알레데이아는 단순히 기독교 신앙이다.
⑩ 알레데이아가 '참된 가르침'이라는 것은 특히 그릇된 교훈과 반대된다.
딤전 6: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딤후 2:18,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딤후 3:8,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 알레데이아는 순종할 의향에 의해 결정되는 피스티스의 개념처럼 "권위있는 교훈"이다.
딤후 4: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딛 1:14,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좇지 않게 하려 함이라".
(g) 알레데이아는 또한 "진짜임", "하나님의 실체", "계시"를 의미한다.
① 계 8:44에서 신적 능력으로서의 알레데이아와 반신적인(anti-divine) 것으로서의 프슈도스(거짓)가 대조되어
있다. 알레데이아와 프슈도스는 인간 존재의 본질이라기보다는 진정한 가능성들로 이해된다. 이것은 말씀과 말씀의 경청에 대한 생각에
의해 결정되는 계시에 의해 보존되므로, 우리는 또 다시 진정한 존재의 가능성을 지닌다. 알레데이아는 하나님의 실체, 물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짐으로, 즉 죄로 말미암아 구성된 인간 존재와는 반대되고 가까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실체이며, 계시는 하나님과
조화되지 않는 존재가 도달할 수 없는 곳에서 일어나는 기적 사건이다. 계시에서 그의 고유한 존재의 참된 가능성이 그에게 드러나며,
그 때, 그와 만나는 계시의 말씀에 직면하여 그는 항복할 것을 결심한다. 그러므로 알레데이아를 받아들이는 것은 이성이나
비교(esoteric)의 지시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도 아니고 정신적인 각오와 연습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순종하는
믿음 속에서 일어난다.
② 요 8:44에서 하나님의 실체와 반신적 실체 간의 대조가 나타난다: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그러나 이것은 간접적으로 알레데이아가 생명을 주며, 알레데이아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은 것은 죽음으로
인도된다는 것을 역설한다. 그 말씀은 또한 알레데이아가 있을 때에 알레데이아는 그 자체가 구체적인 행위를 이루는 결정적인 힘이라는
것을 주장한다. 다시 말해 뒤따르는 말씀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은 "거짓말" 또는
"허위"라는 첫 번째의 잠정적인 의미를 지니지만 그 문맥은 명백히 첫째, 신성한 실체와 악마적인 실체가 모두 말로 표현되었다는
것과, 둘째, 이들 실체들이 존재의 활동 방식인으로서의 현실이라는 것, 또는 역으로 하나님의 또는 악마적인 실체에 의해 결정되는
존재의 모든 활동 방식이라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요일 1:8과 요일 2:4에서 하나님의 계시된 실체로 인한 존재의 결정이 지적되어 있다: "진리가 그 속에 있지"(않다). 이것은 또한 그러한 결정이 구체적인 행위로 그 자체를 나타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③ 이런 이유로 요한복음에는 특유의 다의성(ambiguity)이 생겨난다. 예수님께서 알레데이아를 말씀하실 때에 이것은 첫
번째로 "진리를 말하다"라는 표면적인 의미를 지니지만 또한 "말씀으로 계시하다"를 의미한다(요 8:40; 요 8:45; 요
8:46, 반대의 개념인 프슈도스[$5579] 대신에 더 일반적인 하마르티아[$266]가 사용된 곳, 특히 요 8:47,
알레데이아 대신 하나님의 말씀[타 레마타 투 데우]이 쓰여진 곳).
④ 이 단어가 세례(침례) 요한에 대해 말해질 때 같은 이중의 의미가 나타난다: 그가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느니라"(요
5:33). 그것은 요 18:37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여기서
빌라도의 질문이 그 말씀을 강조하고 계속되는 말씀에서 알레데이아가 스스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실체라는 것과 그것의 이해는
자유로운 존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실체로 말미암은 존재의 결정에 기초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⑤ 계시로서 알레데이아는 기노스케인(아는 것, 요 8:32; 요이 1:1, 요일 2:21)의 대상이다. 첫번째로 표현되는
것은 이해될 수 있는 말씀(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과 같은 계시의 결정적인 능력의 특성이다.
알레데이아는 본질적으로 질문한 사실의 표면적인 진실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그것을 일반적이고 표면적인 의미로
이해한다면 크게 오해하는 것이다. 엘류데리아($1657: 자유)가 인간 의지의 자유가 아니라 죄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참조: 요 8:34), 의미하는 바는 일반적인 지식이 아니라 계시에 대한 지식이다.
요 17:17; 요 17:19의 진리도 마찬가지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즉
아버지에 의해 예수님께 위탁된 선언),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하려 함이니이다"(요 17:19). 계시의 말씀은 말 또는
사상의 집합체도 아니고, 구체적인 마주침으로 성취되는 말씀이라는 사실은 그것이 예수님 개인과 그의 역사에서 성취하신 사건들과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에 의해 드러난다(요 17:17-요 17:19). 그는 단순히 그의 말씀에 의한 전달로서가 아니라
알레데이아를 위하여 자신을 거룩하게 함으로 알레데이아를 가져오므로 그것은 다음과 같이 말해질 수 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그러므로 계시는 목적에 이르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수단인 동시에 목적(조에: 생명)이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신성이 나타날 때에 진정으로 받아들여진다.
하나님께서 계시로 나타나신다는 것은 요 1:14; 요 1:17에 나오는데, 거기서 "독생자의 영광"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으로, 즉 하나님의 실체는 그것 안에 나타난다고 묘사되었다.
⑥ 우리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에 대한 요구(요 4:23 이하)를 같은 선상에서 이해해야 한다. 요한에게는 알레데이아
뿐만 아니라 프뉴마도 인간과 완전히 구별되는 신성의 본질과 출현의 영역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그 의미는 참된 예배는 영성과
의인화된(anthropomor- phic) 개념이 제거된 하나님의 개념에 기초한 순수한 지식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본질 즉 프뉴마에 의해 결정될 때에 일어난다. 알레데이아가 더해진다면 이것은 그러한 예배는 오직 예수님 안에서 성취된
계시(요 4:25)에 의해 결정될 때에, 따라서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신 계시자(요 1:18; 요 14:6)에 의해 결정될
때에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⑦ 세상을 떠나시는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보혜사는 요 14:17; 요 15:26; 요 16:13에서 "진리의 영"이라고
해석되며, 이것이 요한복음이 이 공동체에 주어진 "성령"의 전통적인 개념을 이해하도록 의도한 방식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참조: 특히 막 13:11; 행 1:8). 바로 그분 자신이 요 14:16에서 보혜사라는 용어를 선택하신다. 프뉴마 테스
알레데이아("진리의 영")가 단순히 하나님의 성령만을 의미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이 알레데이아 만큼이나 하기오스에 의해서도
표시되기 때문이다(참조: 요 17:17-요 17:19). 그러나 그 단어가 프뉴마에 대해 말할 때에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요 16:13)는 우리에게 요한에게 하나님의 진리는 항상 계시 안에서 작용하므로, "진리의 영"으로서
역사하시는 파라클레토스(보혜사)의 역할은 공동체에서 계속 역사하는 계시로 묘사되고, 요일 5:6에서 증거하시는 프뉴마는 바로
알레데이아와 같다. 같은 의미로 요일 4:6에서 "미혹의 영"과 대조되는 "진리의 영"에대한 언급이 있으며, 어떤 것이 하나님에
속한 것인지 아니면 불경한 세력에 속한 것인지를 알 수 있는 기준은 실제적인 행위, 즉 공동체 안에서 선포된 말씀을 듣는가 또는
안듣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알레데이아는, 그것이 선포된 한은, 옳은 교리이며 프슈도스(거짓, 거짓말)는 잘못된 것이다(요일
2:21). 한편 요삼 1:3의 알레데이아가 계시에 의하여 결정되는 삶의 방식을 나타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요일 1:6의 "진리를
행하는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과 반대되는 삶의 방식(-->242)을 나타낸다. 참으로 요삼 1:12에서 어떤 사람이
"뭇 사람에게" 가졌다는 증거는 "진리에게도"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계시는 공동체를 결정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요삼 1:8에서도 같은 맥락에서 공동체가 훈계,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게 하려함이니라"로 그것의
구체적인 기독교적인 행위에 동기를 부여한다. 이 결정이 개개의 신자들을 결속시킨다. 그 때문에 요한이서의 저자는 편지의 표현을
사용하여 그의 지도자들에 대해서 말한다: "1 장로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하노니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 2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할 진리를 인함이로다 3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요이 1:1-요이
1:3).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R. Bultman; A. C. Thiselton).
진리의 영
보혜사, 성령 진리의 영(요 14:16-20)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진리의 영(the Spirit of truth)
요한복음 14: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아멘
진리의 영(the Spirit of truth)
- 보혜사(Counselor)(16절) παράκλητος
(남을 위해 나타난 자, 중재자, 조정자, 돕는 자,
변호자, 위로 자, 중보자)
-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하신다(16절)
-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26절)
-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시리라(26절)
- 평안을 주노라(27절)
요한일서 4: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Dear friends, do not believe every spirit,
but test the spirits to see whether they are from God,
because many false prophets have gone out into the world.
요한일서 4:6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We are from God, and whoever knows God listens to us; but whoever is not from God does not listen to us.
This is how we recognize the Spirit of truth and the spirit of falsehood.
보혜사(진리의 영)
1. 살려주는 영(고린도전서 15:45)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So it is written: "The first man Adam became a living being"; the last Adam, a life-giving spirit..
보혜사(진리의 영)
2. 양자의 영(로마서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For you did not receive a spirit that makes you a slave again to fear, but you received the Spirit of sonship. And by him we cry, "Abba, Father."
갈라디아서 4: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Because you are sons,
God sent the Spirit of his Son into our hearts,
the Spirit who calls out, "Abba, Father."
보혜사(진리의 영)
3. 성결의 영(로마서 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Through the Spirit of holiness was declared with power to be the Son of God by his resurrection from the dead:
Jesus Christ our Lord.
보혜사(진리의 영)
4. 진리의 영(요한복음 14: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The Spirit of truth.
보혜사(진리의 영)
5. 그리스도의 영(로마서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You, however, are controlled not by the sinful nature but by the Spirit, if the Spirit of God lives in you. And if anyone does not have the Spirit of Christ, he does not belong to Christ.
보혜사(保惠師) / 보호하시고, 은혜를 주시고, 가르치시는 자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지, 보혜사의 참 뜻이 아닙니다.
보혜사(파라클레토스) / 돕기 위해부름 받은 자
예수님도 보혜사라는 존재를 처음 소개하시면 보혜사에 대해 이렇게 해석하셨습니다16-17절)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지금 예수님은 보혜사를 자기 자신과 그리고 진리의 영 성령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16절에서 예수님은 보혜사를 ‘다른 보혜사’라고 말씀합니다.
왜 다른 보혜사라고 말씀하실까요?
보혜사가 예수님과 비교해서 질적으로는 같으나 엄연히 다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보혜사 즉, 진리의 영 성령의 가장 바른 해석은 ‘돕는 자’, ‘위로자’, ‘상담자’라는 뜻입니다.
보혜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구주로 믿도록 도와주시며 믿음생활을 도우십니다.
보혜사는 사람들이 낙심해 있을 때 위로하여 새 힘을 주십니다.
보혜사는 사람들이 죄를 범하여 괴로워할 때 죄를 회개하게 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도록 상담해 주십니다.
보혜사, 진리의 영 성령은 일시적이거나 한시적으로 도우시고, 위로하시고, 상담하시는 게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항상 그리 하십니다.
보혜사, 진리의 영 성령께서 본문 16절 말씀처럼 예수 믿는 사람들과 영원히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금 전 읽어본 본문 17절 상반절을 보면 세상은 진리의 영을 받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여기서 세상은 어디입니까?
예수를 거부하며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곳을 가리키죠.
그 곳에는 보혜사, 진리의 영 성령 대신 미혹의 영, 사탄이 거처하며 역사합니다.
즉,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요한복음 16:13a 말씀처럼 진리의 성령이 오셔서 예수 믿는 성도들을 인도하십니다.
예수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미혹하는 영이 세상에 많이 나와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며, 예수님을 믿지 못하도록 세상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입니다(요한일서 2:17).
세상 사람들은 미혹의 영인 사탄에게 빠져 보혜사, 진리의 영 성령을 보지도, 알지도 못합니다.
결과적으로 갈라디아서 5:16말씀처럼 육체의 욕심을 이루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의 삶을 보십시오.
그들이 얼마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지 잘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다시 말해, 얼마나 음행하고, 영육으로 더럽고, 우상숭배하고, 굿하고, 원수 맺고, 다투고, 분내고, 분열하고, 투기하고, 술 취하고, 방탕 하며 사는지 모릅니다.
반면, 예수 믿는 사람은 보혜사, 진리의 영 성령이 그와 함께 계심으로 갈라디아서 5:22말씀처럼 성령의 열매를 맺으려 하며 삽니다.
즉,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를 열매를 맺으려고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고민스러운 것은 예수 믿는 사람도 미혹의 영, 사탄의 유혹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으려고 몸부림치는데도 불구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도 때로는 넘어져 육체의 욕심을 채우려 하는 모습이 발견되곤 하지 않습니까?
그럴 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얼마나 괴로운지 모릅니다.
심지어 보혜사, 진리의 영 성령이 자기에게서 떠난 게 아닌지 의심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보혜사, 진리의 영 성령은 결단코 예수 믿는 자로부터 떠나지 않습니다.
본문 17절 하반절 말씀처럼 예수 믿는 자들과 함께 거하실 뿐 아니라 예수 믿는 자들의 심령 속에 항상 계시어 그들을 도우시고, 위로하시고, 상담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보혜사, 진리의 영 성령에 대해 이해했을까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임을 말씀할 때에도 제자들 중 그 누구도 이해를 못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예수님께서 베푸신 이적과 기사를 자기들의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지 못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하물며 아무런 실체가 없는 보혜사, 진리의 영 성령을 말씀하실 때 제자들이 이해했을까요?
아마도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 자기 곁을 떠나시게 될 사실 앞에 유약하기 그지없는 제자들이 모두 망연자실하지 않았겠습니까?
절망한 나머지 아무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본문 16-17절을 봐도 잘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왜 예수님께서 본문 16-17절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여 받은 보혜사를 너희들과 영원토록 함께 있게 하겠다, 너희와 함께 거하겠다, 너희 속에 계시겠다”는 말씀을 계속 하실까요?제자들이 잘 이해하지도 또 믿지도 못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의 보혜사 약속을 믿는다면 예수님께서 그렇게까지 반복하며, 강조하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인지 본문 1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한 가지 약속을 해 주십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너희에게 오리라’는 말씀을 ‘이 세상 마지막 날에 너희에게 오겠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곤란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종말에 너희에게로 다시 오겠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성령으로 임재 하여 계속 너희와 함께 하겠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종종 제자들에게 자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귀띔해 주셨죠.
그 말씀대로 조금 있으면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로 올라가실 겁니다.
그러나 올라가시기는 해도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영영 떠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보혜사, 진리의 영 성령으로 제자들에게 임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은 결단코 제자들을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고 반드시 제자들에게로 오실 것입니다.
그와 같은 예수님의 함께하심의 약속은 실제로 성취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제자들이 오순절에 마가요한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할 때 예수님께서 보혜사, 진리의 영 성령으로 제자들에게로 오시지 않았습니까?
이후 예수님은 보혜사, 진리의 영 성령으로 제자들의 심령 가운데 계시며, 영원히 제자들과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28:20b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 약속을 그대로 지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 19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예수님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자신의 십자가 죽음이 가까이 다가왔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계속해서 예수 자기를 보게 될 것임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죠?
예수님 자신이 보혜사, 진리의 영 성령으로 제자들의 심령 가운데 오셔서 그들과 함께 계속 아니, 영원히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본문 20절 말씀처럼 그 날에 자신은 하나님 아버지 안에, 또 제자들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은 제자들 안에 계시는 것을 제자들로 하여금 알게 하실 것입니다.
여기서의 그 날은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신 날이기도 하고요.
예수님께서 이 세상이 마지막을 고하는 종말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종말에 예수님과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신 심판주로 선악 간에 사람들을 심판하실 겁니다.
그 때에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성도들이 보혜사, 진리의 영 성령의 역사로 인격적, 영적으로 완전히 연합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본문 20절 말씀을 제자들이 당장은 깨닫지 못했습니다만 예수님 승천하신 후에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예수님과 완전히 연합하는 것을 체험하게 되죠.
보혜사, 진리의 영 성령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여전히 자기들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체험한 제자들의 삶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보혜사, 진리의 영 성령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여생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다가 사도 요한을 제외한 열 한 명의 모든 제자들이 순교하지 않았습니까?
그처럼 보혜사, 진리의 영 성령의 역사는 강력하고요,
그러한 역사는 오늘날에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습니다.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 하겠다고 하신 예수님의 약속은 오늘날 저와 여러분 나아가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대로 유효합니다.
다시 말해, 보혜사, 진리의 영 성령은 저와 여러분을 비롯하여 오늘날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찾아오셔서 돕는 자로, 위로자로, 상담자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 뿐입니까?
오늘도 우리 심령 가운데 임재 하시어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시며 역사하시고요.
우리로 하여금 미혹의 영, 사탄에 미혹되어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지 않도록 간섭하시어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나아가 보혜사, 진리의 영 성령에 사로잡혀서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역사해 주십니다.
다만, 우리 또한 제자들처럼 미혹의 영, 사탄에게 미혹될 확률이 있는 존재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또한 보다 적극적으로 보혜사, 진리의 영 성령이 오순절에 강림하셨던 것처럼 우리 교회와 심령과 지역과 전도하는 현장 가운데 강력하게 역사하도록 하나님 아버지께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보혜사, 진리의 영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심령, 교회, 삶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은 오늘 주신 약속의 말씀을 꼭 붙들고, 하나님 아버지께 보혜사, 진리의 영 성령을 간절히 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구할 때에 하나님 아버지는 꼼짝없이 약속하신 말씀을 따라 보혜사, 진리의 영 성령께서 역사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처럼 여생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복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역절적 신앙
세상에
살다 보면 모순되는 것 같지만 역설의 진리가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소리없는 아우성”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소월의 시)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역설입니다.
지는 것은 지는 것이고 이기는 것은 이기는
것이지 어떻게 지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까?
그러나 논리는 모순되는 것 같아도 그 내용은 진리입니다.
이것이 역설입니다.
역설은
궤변과 다릅니다.
궤변은 논리도 모순이고 내용도 참이 아닙니다.
미국의 켄트 케이스라는 사람이 역설적 진리 십계명을 만들어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주장하기를 “세상은 미쳐있다 이런 미친 세상에서 올바르게 살아가려면 역설적 진리를 깨닫고 살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성경의 교훈을 보면 이와 같은 역설적인 진리들이 많이 발견됩니다.
이것은 케이스의 말처럼 “미친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생활 지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은 무언가 잘못되어 있고 그 속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손해를 보고 공격을 당할 수 있습니다.
오해를 받고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개의치 말고 진리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교훈 중에 대표적인 역설적 진리가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그 길은 좁고 찾는 이가
적지만 생명의 길이다”
또 다른 하나는 “남이 너를 대접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먼저 남을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교훈들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과는 정반대의 일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면 이 세상에서 살기 힘들고 손해만 보는 일들이 생길 것이 너무나 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기 때문이고 그것이 진리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국 진리는 승리하고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 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12:24-26에서 세 가지 역설의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십자가 죽음을 앞두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역설은 자신의 죽음의 가치를 말씀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1. 한 알의 밀이 떨어져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2.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고 버림으로 영원한 생명을 보전하고
3. 종처럼 자기를 낮추고 섬기는 것이 오히려 귀하게 여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곧 복음입니다.
복음은 역설적 진리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임합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역설의 진리입니다. 죽어야 사는 것입니다. 내가 죽을 때 내 속에 주님이 사는 것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죽은 척 하면서 죽지 않은 교인들이 많습니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요 12:25)
약함이 약함이 아니고, 강함이 강함이 아닙니다
"내가 약할 그때에 강함이라(고후 12:10)"는 역설적 진리입니다.
이 역설적 진리는 특히 약육강식의 동물 세계에서, 사자 호랑이 같은 맹수는 멸종하고, 맹수를 피해 굴이나 바위틈에 숨어사는
토끼 사반(잠 30:26) 같은 약한 짐승들의 번성을 통해 확인됩니다. 이는 비단 자연 생태계만의 아닌 영적 세계의 역설이기도
합니다. 40여년 하나님만을 의지했던,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이 바로 그랬습니다.
자급자족이 불가능해, 일용할 식량부터 물까지 오직 하나님의 손끝만 바라보고, 자연의 앙화나 적의 공격으로부터도 전혀 무방비인
채 오직 하나님만 의존하고 나아갔으나, 그들은 멸절당하지도 않고-오히려 그들을 공격하던 강대국들은 소멸됐습니다-의복이
해어지지거나 발이 부르트지도 않았습니다(신 8:4).
성경에 의하면 그들을 따르는 반석 그리스도가 그들의 공급과 보호가 되어 주신 때문입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4, 시 62:6)."
이 역설적 진리는 성경은 물론 기독교회사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까지 변함없이 유효합니다. 그들은 스스로의 안위는 불문한
채, 어떤 호구지책이나 안전망도 없이-그야말로 세상에 내 동댕이쳐 진 것처럼(벧전 2:11, 히 11:13;38)-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만을 좇았음에도, 멸절되지 않고 건재했습니다.
물론 타락한 세상에서는 그런 천수답 같은 삶의 양식이 유별나고 광신적으로까지 비쳐질 수 있으나, 무죄했던 태초의 에덴에서는 보편적인 존재 방식이었습니다.
본래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렇게 살도록 경륜하셨고,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즐겨 공급자와 보호자가 되어주셨습니다. 만일
아담과 인류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인간의 죄된 욕망이 빚어 낸 오늘 같은 눈부신 발전은 이루지 못했을지 모르나, 하나님의 보호와
공급으로 만족하는 극락(joy unspeakable, 벧전 1:8)의 삶을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바벨탑 사건에서 보듯, 과학 문명의 발전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인간의 힘을 우상시하는 타락의 산물이었습니다. 성경은 과학문명의 주도권이 육의 사람 가인(Cain)의 후손들에게 쥐어졌음을 명시합니다(창 4:20-24).
이 하나님 의존은 우리 앞서 이미 그리스도께서 그의 지상 생애에서 몸소 체현해 보이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2위(位)이셨으면서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 절대 의존의 삶을 사셨습니다.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고(요 5:30)",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 5:19)".
심지어 그리스도는 말 한마디, 가르침 하나까지도 자의적으로 하시지 않았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요
8:28)".
이러한 그리스도의 하나님 절대 의존 방식은, 우리로 하여금 그가 하나님의 2위시라는 사실을 잊게 만들 정도이며, 피조물인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을 의존해야 하는가를 교훈합니다.
이런 그의 삶의 태도는 태초에 무죄했던 아담의 삶을 능히 유추하게 합니다. 예수님이 포도나무 비유에서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고 하신 말씀은, 사실 하나님 의존적인 그리스도의 삶을 우리에게 그대로 투영시킨
것이었습니다.
그의 기도 중심의 삶 역시, 전적인 하나님 의존의 한 단면이었습니다. 공생애 시작 즈음 드려진 40일 금식 기도(마
4:1-2), 매일 새벽과 밤 기도(막 1:35),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드린 겟세마네 기도(눅
22:44), 말씀도 듣고 치유도 받고자 몰려오는 사람들을 물리치시고 홀연히 산으로 기도하러 가신 예(눅 5:15-16) 등은,
그가 얼마나 하나님 의존적이셨는지를 증명합니다.
사도 누가가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쳤던, 밤낮 부르짖는 과부의 전력투구적인 기도(눅 18:1-8)는,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 의존적인 삶의 방식을 반영한 것입니다.
이처럼 참된 그리스도인의 표지는 하나님 의존에 있습니다. 이는 공리주의자들(a utilitarian)의 주장처럼, 하나님
의존을 인간 잠재력의 사장(死藏) 여부와 연결지우기에 앞서, 하나님이 경륜하신 인간 정체성의 규현이라는 훨씬 중차대한 문제로
파악합니다.
누구든 진정으로 거듭나 그리스도가 내재하는 사람이라면,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하는 것(갈 5:25)"을 자신의 본분과 긍지로 삼으며, 자력적인 삶을 배교적이고 부끄러운 것으로 여깁니다.
바울 사도 역시 하나님 의존을 참된 그리스도인의 표지로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빌 3:3)."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하나님 의존은 자기 보존을 넘어, 하나님의 강함과 능력을 덧입는 원천입니다. 성경이 그리스도인이 약할
때에 강하게 된다(고후 12:10)고 한 것은, 그가 약하여 하나님을 전심 의뢰하니,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 머물기 때문입니다.
이는 누구보다 먼저 그리스도의 삶에서 확증된 바입니다. 그가 약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으나-정확하게 말하면 스스로 생명을 버린
것입니다(요 10:18)- 하나님이 그를 다시 일으키셨습니다(고후 13:4).
이러한 하나님 의존에서 오는 능력과 강함은 욕망에 매몰 된 세속적인 교인들이, 자신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일종의 심리요법으로
도용한,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의 왜곡과는 다른, 하나님 절대 의존에서 오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일찍이 바울은 이 강함의 원리를 깨달았기에, 자신의 약함을 부끄러움이 아닌 자랑으로 여겼으며, 우리를 향해서도 강해지려면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약해지라고 권면했습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고후 12:9)."
이 성령으로 말미암은 능력과 지혜는, 세상의 어떤 능력자, 지혜자의 그것들 보다 탁월합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다(고전 1:25)".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없을 만큼 충분히 강한 사람보다, 약하여 하나님의 도움 없인 못사는 사람이 훨씬 더 강하고 지혜롭다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약함이 약함이 아니고 강함이 강함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약하여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의 안전함을 거듭 거듭 강조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잠
30:5)", "마음이 탐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풍족하게 되느니라(잠 28:25)",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의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사 26:4)".
‘골방의 시간 갖기’
날마다 큐티하기, 1시간 기도하기, 성경일독하기 등등이 그
내용입니다.
믿음은 저절로 자라나지 않습니다.
날마다 말씀을 먹고 기도하고 순종하는 그 과정을 통해 성장하게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보면 발견하는 역설들이 있습니다.
역설, 혹은 역설적이다 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어떤 주장이나 이론이 겉보기에는 모순되는 것 같으나 그 속에 중요한 진리가 함축되어 있는 것을 역설이라고 합니다.
즉 성경에 나오는 말씀 중에 많은 것들이 세상의 일반적인 경향이나 가치와 사고 등과 상반되는 것이 많다는 것이죠.
그래서 모순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역설에 참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의 논리와 세상의 가치를 거스르고 모순되는 역설로 가득한 것이 성경이기에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런 역설에 해당되는 말씀들의 예는 이런 것들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너에게 잘못한 사람을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 네가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하라. 높아지려는 자는 낮아지고 낮아지는 자는 높아진다."
그 말씀들 하나하나를 보십시오.
세상의 가치와 우리 인간의 사고와 생각과는 전혀 다르지 않습니까?
모순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안에 참된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역설이 되는 겁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가난한데 복이 있다?
모순 아닙니까? 우리야 이미 신앙생활을 해왔기에 이 말씀을 가지고 모순이라고 하지는 않지만 세상적인
시각으로 보면 모순입니다.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누가복음 6:20을 보면 더 그러합니다.
누가복음에는 '심령이'라는 말을 빼고
그냥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니, 무슨 뚱딴지같은 말입니까?
가난이 어떻게 복입니까? 가난은 화죠. 저주입니다.
그것이 일반적인 사고
아닙니까?
세상 사람들 중에 누가 가난한 것을 복으로 여깁니까?
스스로 가난을 택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복으로
여기지는 않습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이 모순되는 말에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역설입니다.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이
말씀은 구약성경의 흐름에서 봐야 합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가난과 경건은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으로 이해가 되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가난하지만 마음도 가난한 경우가 많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의지할 데라고는 하나님에 대한 자신들의 믿음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의 대상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반면에 부자들의 경우는 많은 경우 경고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물질적인 부유함이 자칫하면 자기를 신뢰하는 교만으로 빠질 수 있고, 충분히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끝없는 탐욕으로 인해 죄를 질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구약의 배경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그런 구약의 배경을 가지고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을까요? 어느
정도는 맞지만 전부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아무리
가난한 자라 해도 그 안에 겸손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물질적으로
가난한 것이 오히려 하나님과 세상에 대한 불평불만과 증오심이 되어서 가진 이들을 증오하고 자신의 인생을 함부로 살고 포기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가 교만한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그런 사람이 나중에 부자가 되면 아주 악독하고 탐욕스러운 부자, 우리가 보통 말하는 졸부가 되어 버립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다 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자라고 해서 다 화가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역시 겸손입니다. 자신이 지금 가지고 있는 부와
재물, 권력이 원래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임을 겸손히 인정하는 마음이 있을 때 부자 역시 복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겸손이 있는 부자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가지고 거만하거나 없는 사람을 무시하거나 더 가지려고 탐욕을 부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부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없는 이들을 돌아보고 자신이 가진 물질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 부자라면 복 있는 사람입니다.
가난한 사람이든 부자이든 그 중심에 겸손이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누가와 달라 그 앞에
'심령이'라는 말을 추가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뜻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를 말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겸손은 이런 것입니다.
겸손은
먼저 하나님 앞에 자신이 죄인됨을 깨닫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없는 무능한 사람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는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스스로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께 긍휼과 자비를 구하고 도우심을 구하고 늘
은혜를 구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겸손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이 진정한 겸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그 겸손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나 겸손한 사람,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겸손입니다. 그렇다면 교만이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자신의
죄인됨과 무능함을 고백하지 않는 것,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구하지 않는 것,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 이것이 교만입니다.
겸손을 히브리어로 'ענו'(아나브)라고 하는데 '가난한 사람'과 같은 의미로 쓰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됨과 무능함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는 겸손한 사람이 곧 가난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했을 때는 이런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심령이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이 죄인됨을 깨닫고 고백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에는 무능한 사람임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도우심을 구하는 겸손한 심령을 가지고 있다면 물질적으로 부자든 가난하든 그것과 상관없이 그 사람은 가난한 사람입니다.
왜 이렇게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는지 아십니까? 이 겸손을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바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 이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 자체부터 복이 아니겠습니까?
이사야 57:15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어떤 사람과 함께 하시겠다고요?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 통회한다는 말과 겸손하다는 말은
같은 의미입니다. 누가 통회하겠습니까? 자신의 죄인됨과 무능함을 깨닫는 사람,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 통회하는
겁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런 겸손한 자와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어떻게 될까요? "겸손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이건 당연한 것
아닙니까? 생명의 근원이시고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데 어찌 그 영이 소생되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영을 소생시킨다'는 말은 다시금 힘을 주어서 일어서게 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통회하는 마음을 어루만져 주셔서 아물게
해주십니다. 그 마음 가운데 깊은 평안과 기쁨과 용기를 주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시편 10:17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귀를 기울이십니다. 여러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의 소리에는 귀를 막으시고 겸손한 자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겸손한 자가 구하는 소원을 들으십니다.
겸손한 자가 구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 저 부자 되게 해주세요. 돈벼락 맞게 해주세요. 저 출세하게 해주세요. 성공하게 해주세요." 이런 것일까요?
겸손한 자가 구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오늘도 죄에 대해 졌습니다.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며
살지 못했습니다. 또 악한 생각을 품었고 상처주는 말을 했고 사랑의 행동을 하지 못했습니다. 거룩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노력은
했는데 그렇게 하질 못했습니다.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죄를 이길 수 있도록, 순종할 수 있도록, 사랑하며 살 수 있도록,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당신의 거룩하심으로 옷 입혀 주옵소서. 당신을 더 알기 원합니다. 믿음 주옵소서. 능력
주옵소서..."
이런 기도를 드릴 겁니다. 삶에 문제에 대해서도 동일하겠지요.
"하나님 저의 삶에 이런 문제들이 있습니다. 가정에 이런 문제가 있고, 자녀들에게 이런 문제가 있고, 나의 장래에 이런 일이
있습니다.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습니다. 저의 무능함을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주님께서 친히 다스려주옵소서. 주님께 의탁합니다.
인도해주시고 열어주시고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감사할 수 있게 하시고, 모든 상황 속에서 주님만 바라보게
하옵소서."
문제가 해결되고 모든 일들이 잘 풀려나갈 때도 동일한 고백을 할 수 있을 겁니다.
"하나님, 이 부족한 자를 불쌍히 여겨 은혜주심을 감사합니다.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고백합니다. 이것으로 인해 제
마음이 높아지지 않게 하시고 이것으로 인해 죄짓거나 어려운 이들을 멸시하는 일이 없게 하옵소서.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사용하게 하옵소서."
저는 이런 기도가 겸손한 자들이 드리는 기도이고 하나님께 아뢰는 소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심령에 겸손이 없으면 성황당 앞에서
정한수 떠놓고 비나이다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기도를 하게 될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마음, 가난한 심령을 가지고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 기도에 귀 기울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귀를 기울이시면 되는 겁니다. 그것이 곧 응답입니다.
우리는
눈에 무언가가 보여지는 것만을 응답이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것 자체가 응답입니다.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의
때에 달려있어요. 하나님께서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시는 그 때에 구체적으로 나타내주십니다. 그러기에 겸손한 자는 조급해하지
않습니다.
겸손한 마음, 가난한 심령, 이것을 다른 말로는 상한 심령이라고 하는데, 적어도 내가 그런 상한 심령, 가난한 심령, 겸손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구했다면 하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약속입니다. 상한 심령을 구하시는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응답받은 것입니다. 내 눈에 보여지고 내 손에 주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주십니다.
행여
주어지지 않아도 그것 역시 응답입니다. 나는 상한 심령으로, 가난한 심령으로, 겸손한 심령으로 구했지만 하나님 보실 때 그것이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내 판단보다 하나님의 판단이 백배 천배 옳습니다. 나를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내게 가장 좋은 것,
가장 옳은 것으로 응답해주십니다.
내가 구했는데 응답해주시지 않았다? 그것 역시 응답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지요? 자신의 육체의 가시, 곧 질병인데, 그것을
고쳐달라고 얼마나 구했습니까? 정말 겸손한 마음으로, 상한 심령으로 구했단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No였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는 겁니다."
때로는 응답이 주어지는 않는 것이 내게 은혜가 됩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응답되지 않는 그것이 오히려 그를 바르게 세워주고
끝까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겸손히 사역할 수 있는 힘이 됩니다. 얼마나 존경을 받았겠습니까? 자칫하면 교만해질 수 있는 여지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신 것이 오히려 은혜가 되어 끝까지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면서 겸손히 충성되게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겁니다. 결국은 그것이 응답이었던 것입니다.
겸손한 자의 기도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는 믿음이 주어집니다. 그것이 겸손한 자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실제로 여러분 자신의 경험을 돌아보십시오. 제 경우도 하나님 앞에 상한 심령이 되어
겸손하게 구했을 때 주어지는 것은 마음 가득한 평안과 기쁨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깊은 신뢰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가난한 심령으로 나아가보십시오.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기쁨으로 채워질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깊은
신뢰가 생깁니다. 이것은 겸손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받아야 믿음이 성장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십시오.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성경에서 말하는 복이 무엇인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이 무엇입니까? 세상은 무엇인가를 가졌다라고 했을
때 복이라고 말합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복하면 다 그런 복입니다. 오복이니 칠복이 하는 것도 보면 대부분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복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다릅니다. 물론 성경에서도 물질의 복, 현세적인 복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복도
주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복의 본질이 아닙니다. 복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입니다. 복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나옵니다.
시편 33:12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누가 복이 있다?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 선택되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전심으로
경배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그것이 곧 복이라는 겁니다.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곧 자신의 분깃이 됩니다. 기업이
됩니다. 즉 하나님이 자신의 재산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제대로 되면 그 영혼이 잘됩니다. 그러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는 복도 덤으로 오는 겁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그 영혼이 잘 되어 있으면 그건 복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올바르게 되면 그 사람의 영혼이 잘되는데 그건 다른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된다는 겁니다.
정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고,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내 삶을
다스려주시고 인도해주시게 됩니다.
그럼 내 안에 무엇이 이루어지는지 아십니까? 천국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죠?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되면 내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천국을 미리 맛보면 살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천국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천국을 이해할 때 하나님의 나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불교적인
극락이나 무속신앙적인 저승개념으로 천국을 이해하는데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는 쉽게 말하면 하나님으로 충만한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는 죄악이 없고 사탄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만이 충만합니다. 그러기에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에 젖어 온전히 하나님만을 경배하며 하나님과
형제자매를 사랑하며 거룩과 공의를 행하며 살아가는 나라입니다. 충만한 기쁨과 행복과 평안으로 넘치는 나라입니다.
이건 단순히 죽어서 가는 저승이 아닙니다. 지금은 우리의 영혼이 가는 곳이고, 장차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신 후에 세워질 나라입니다. 또한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세워나가야 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한 나라,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이 충만한 나라, 그래서 죄악이 없고 사랑으로 충만하고 평화로 충만하고 기쁨으로 충만한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인데,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되면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했을 때, 현재형을 쓰신 겁니다.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여기에 쓰인 동사형이 미래형이 아니고 현재형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된 사람은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복을
받게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것이 진정한 복 아닙니까? 잘 생각해보세요. 무엇이 진정한 복인지. 예수는 믿는데, 교회는 다니는데 아직도 세속적인
복에만 매달려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되어 이 땅에서 미리 하나님의 나라를 맛본다, 놀라운 축복입니다.
이 복을 발견한 사람, 이 복을 맛 본 사람은 신앙이 차원이 달라집니다. 신앙의 깊이가 달라집니다. 정말 예수 믿는 복이
이거구나, 정말 천국을 맛보며 산다는 것이 이런 거구나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신앙의 차원과 깊이가 달라질 수밖에요.
또한
이런 분들은 세상적인 복에서도 자유할 수 있습니다. 돈이 없어도 그것 때문에 죽지 않습니다. 불편하죠. 어렵지요. 하지만 그것
때문에 죽지 않습니다. 마음이 죽으면 죽는 겁니다. 물질 때문에 염려하면 마음이 죽어요. 마음이 죽으면 하루하루가 고달파요. 죽지
못해 사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겁니다. 모든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맛본 사람은 세상적인 복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염러하지 않게 됩니다. 집착할 때, 염려할 때 위험해지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제대로 맛본 사람은 세상에서 열심히 삽니다. 단순히 자기의 성공과 안위를 위해 열심히 사는 것 아닙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함입니다. 힘들어도 타협하지 않고 싸우며 나아갑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lifestyle이 달라지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복을 누리고 싶지 않습니까?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며 사시렵니까? 지금 이대로가 좋습니까? 지금처럼 적당히 믿고 적당히 주님과 거리를 두고 믿는 지금 이대로가 좋습니까?
주님께서
말하신 복이라면 진짜 복입니다. 최고의 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 복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
길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초대하고 계십니다. 천국이 나의 것이 되는 복을 받으십시오. 이 복에 욕심을 내십시오. 이런
욕심은 거룩한 욕심입니다. 거룩한 욕심을 내십시오.
여러분,
잘 기억하시고 행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나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맺어져야 합니다. 이것은 심령이
가난해질 때 가능합니다. 심령이 가난하다, 그것은 겸손한 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한 마음으로 나아가십시오.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하시고 무능함을 고백하십시오.
하나님의 긍휼 없이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하나님의 자비 없이는,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고
구하십시오. 날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십시오. 우리의 죄악과 연약함과 무능함을 모두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묵상하세요.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신 예수님을 묵상해보세요. 그래서 겸손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더욱 더 하나님 앞에 가난한 심령으로 상한
심령으로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시편 107:9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분명한
약속이며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 확인된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십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가난한
심령으로,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갈급해하는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구하십시오. 겸손한 마음으로
구하십시오. 가난한 심령으로 구하십시오. 반드시 만족케 해주시고 좋은 것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1. 성경에 나타난 역설
1) 고린도후서 6: 8-10
2) 고린도후서 12:9-10
3) 고린도전서 3: 18- 20
4) 마태복음 16:25
5) 마태복음 19:30
6) 마태복음 23:12
7) 요한복음 12:25
2. 역설의 신앙
1) 낮아짐과 높아짐 / 약 4:10, 막 9:35
2) 약함과 강함 / 고후 12: 9-10
3) 내려놓음과 얻음 / 마 10:39, 눅 5:11
4) 죽음과 생명 / 빌 2:8-9, 고후 4:10, 갈 2:20, 갈 5:24, 갈 15:31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세상을 거스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역설의 신앙입니다.
성도는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상식을 거스리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요한복음17:14-16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세상의 지식과 지혜를 좇지 말고 진리에 대한 욕심을 내셔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더 올바르게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고 맛보는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역설의 진리는 이 세상에서 경험되기도 하지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완성이 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중에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와 비밀을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기존 질서가 뒤집히는
날이 올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은 세상에 질서와 반대되는 것이고 세상의 질서를
대체하는 개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실 때에는 우리는 단지 저 멀리 높이 있는 하늘에 있는 나라만을 생각하지
말고, 세상의 질서와 반대되고 세상의 질서를 넘어서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영역에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질서를 생각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0: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누가복음 6:21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5절,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지금은 이 말씀이 이 세상에서는 앞뒤가 안 맞고 논리적이지 않은 것 같은 역설의 진리이지만, 마침내 새로운 세상, 다가오는
세상,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세상에서는 그대로 이루어질 진리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역설의 신앙을 소중히 갖고 역설의 진리가 완성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역설의
진리의 말씀은 겉으로의 기준과 평가와 안으로의 기준과 평가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설의 진리의 말씀은
보이는 세상의 기준과 평가와 보이지 않는 세상의 기준과 평가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설의 진리의 말씀은
물질세계의 기준과 평가와 영적인 세계의 기준과 평가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설의 진리의 말씀은 현세의 기준과
평가와 내세의 기준과 평가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설의 진리의 말씀은 순식간에 지나가는 세상의 기준과
평가와 영원한 세상의 기준과 평가가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이라면,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의 물질과 이세상의 가치와 이 세상의 평가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 하나님께서 어떻게 평가하시느냐, 하나님의 나라의 영원한 가치가 무엇이냐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세상에서 역설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역설적인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역설의 신앙을 가지고 삽니다. 역설의 신앙을 소중히 여깁니다. 역설의 신앙으로 성숙해집니다.
요한복음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생명의 역설입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아펜젤러가 한국 땅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는 배제학당을 창설하였고, 정동제일교회를 창설하였습니다. 그리고
성서 번역에도 크게 이바지하여 우리나라 선교에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그런데 1902년 6월11일. 성서번역의 일로 아펜젤러를
태운 배가 군산 근해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선박이 충돌해 이화학당의 여학생 두 명이 바다에 빠졌습니다.
아펜젤러는 여학생들을
구출하기 위해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자기 자신은 얼마든지 살아날 수 있었으나 마흔넷의 나이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미국인들은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겼습니다.
“아펜젤러는 총명하고 잘 생긴 사람이다. 미국에서 얼마든지 장래가 보장된 사람이었다.
그가 낙후된
한국에서 죽은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그러나 아펜젤러의 희생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세운 배재학교와
정동제일교회에서 수많은 인재들이 배출됐습니다.
그의 세 자녀는 모두 한국의 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대동강변에서
복음을 제대로 전하지도 못하고 칼에 맞아 죽은 토마스 목사님도 그렇습니다. 그가 죽기 전 몇 권의 성경책만 던지듯 전해
주었는데, 그것을 주어간 소년과 그 성경책을 찢어 벽에 붙인 사람이 나중에 예수님을 믿고 우리나라 교회사에 중요한 인물들이
되었습니다. 한 알의 밀이 죽으니까 많은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기독교는
역설의 종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역설의 신앙이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똑똑하고, 타산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은 역설의 진리를
받아드리지 못합니다. 세상적 관점에서 바보가 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세상적 관점으로는 바보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역설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 안에서 하늘의 지혜로 살아가고, 예수님의 능력으로 온전해 지고, 예수님으로 인해 모든 것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속이는 자 같지만 참된 사람들입니다. 무명한자 같지만 유명한 사람들입니다. 죽은 자 같지만 살아 있고, 징계
받는 자 같지만 죽임을 당하지 않습니다. 근심하는 사람 같지만 항상 예수님 때문에 기뻐합니다. 가난한 사람 같지만 다른 사람을
부요하게 해 주는 사람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사람 같지만 예수님으로 인해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임을 확신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역설적 진리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이사야 55:8~9)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은 큰 차이가 있다.
하나님의 생각인 성경 말씀은 주로 ‘역설적 진리’paradox로 되어있다.
우리가 사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많은 경우, '역설적 진리'를 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꾸 이성적 진리(성공, 권선징악)를 전하다 보니, 복음이 왜곡되고 만다.
반대로, 이성적 진리는 항상 빼 버리고, 시도 때도 없이 역설적 진리만 전하는 것을 광신(fanatic, 열광주의)이라고 한다.
1. 죽으면 살리라
이 말씀은 논리적 일관성이 전혀 없다.
아니 죽었는데, 어떻게 다시 사는가? 註1)
사람의 생각은 살고자 하면 살리라 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설적 진리는 죽고자 하면 살리라 이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12:24
우리가 성경 말씀에 순종하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역설적 진리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똑똑한 이성에 역행하기 때문이다.
① 에스더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에4:16
자기는 사실 왕비이기 때문에, 유대인이 모두 다 죽어도 자기는 살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처지를 버리고 죽고자 했더니, 죽으면 죽으리라며 나아갔더니,
자기도 살고, 민족도 다 살았다.
② 사렙다 과부
오랜 흉년에 오직 한 끼 분의 밀가루만 남아있었다.
엘리야 선지자가 방문했을 때, 그것을 자기들이 먹지 않고,
대신에 선지자에게 대접했더니 (그것은 죽을 각오였다)
평생 동안 먹을 것을 얻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
역설적(파라독스) 진리 때문이다.
③ 한 소년
군중들이 예수님을 따라온 지 사흘이 되자 모두 배가 고팠다.
그 때 어린아이 한 명이 자기 혼자 살고자 하지 않고
자기가 준비해 온 도시락을 내어 놓고, 군중과 함께 죽고자(굶고자) 했을 때
자기도 살고, 5천명도 사는(먹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
④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살고자 만약 도망쳤다면
‘허무한 죽음’으로 인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고자 하셨더니
부활하셔서 영원히 사시게 되었다.
⑤ 인도의 성자 썬다 싱의 유명한 일화
http://blog.naver.com/chanmbaek/100034155673
죽기를 각오한 썬다싱과 살기를 각오한 그의 동료 티벳인의 선택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준다.
어려운 때일수록 함께 살려고 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혼자 살려고 하는 것은, 결국 스스로 죽는 것이다.
비록 자기가 죽게 되더라도, 함께 사는 것을 택하는 것만이 모두가 사는 길이다.
⑥ 교회도 마찬가지다.
목사, 중직자들이 교회를 위해 죽고자 하면, 교회도 살고 자기도 산다.
그러나 약삭빠르게 자기만 살겠다고 하면, 교회도 죽고 자기도 죽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역설적 진리인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내 이성적 생각과 판단이 맞을 것 같은데,
하나님의 생각이 그것과 정반대가 되니까,
정말 그 진리를 생활에 적용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자기 죽음의 체험이 아니고서는... 어렵다.
⑦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 행20:35
세상 사람들의 생각은, 받는 자가 더 복 되다.
그러나 성경은 역설적으로 받는 자가 더 복 되다고 가르친다.
내 머리로 아무리 계산해도 의아스럽다.
하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 못 살게 될 것 같다.
경제적으로 망하게 될 것 같다.
그런데 성경은, 역설적 진리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게 역설이니까, 우리 마음속에 콱 박히지 않지만 말이다.
⑧ 낮아지는 자는 높아지리라
사람들을 보면, 높아지려는 귀신이 들린 듯이 살아간다.
하다못해 초등학교에서도, 내 자식 반장시키려고 돈을 아끼지 않고 쓴다.
높아지려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낮아지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가르치셨다.
이것이 역설적 진리다.
예수님을 가장 가깝게 따라다니던 제자들마저도 그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2. 살려면 죽으리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요12:25
①아간
한 민족의 운명을 걸고 전쟁을 하는 마당에
아간이라는 약삭빠른 사람은 하나님과 맺은 민족적 계약을 파기한다.
여리고 성에서 얻게 될 어떤 전리품도 취하지 않기로 약속했는데,
아간이 자기 혼자 잘 살려고 금덩어리 등을 감추었다.
그런데 결과는, 아간만 죽고 다른 사람은 다 살았다.
살고자 하면 죽는 역설적 진리가 적용된 것이다.
②가룟 유다
12제자 중에서 가룟 유다는 아주 계산이 빨랐다.
스승이 이제 곧 죽겠다고 선언하자,
그는 이제 앞으로는 따라다녀 봤자, 아무 이득이 없다는 판단이 섰다.
그는 밤중에 빠져나가서 혼자 살 길을 궁리한다.
3년 동안 따라다닌 것이 물거품처럼 되자, 무슨 보상을 받으려 했던 것일까?
그는 로마 당국에 돈을 받고 예수님을 팔아넘긴다.
결과는 어땠는가?
다른 제자는 다 살고, 자기만 죽었다.
③아나니아와 삽비라
예루살렘 교회에 성령이 임해서 모두 희생을 치르며 소유를 내 놓았는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기들 혼자 살겠다고 뭐 좀 감추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예루살렘 교회의 창립자가 되었지만,
그 부부 두 사람은 현장에서 죽었다.
살고자 하는 생각은 육신의 생각이다.
주님을 위해 죽고자 하는 자는 살리라고 역설적으로 되어있다.
그래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힘들다.
3. '하나님의 생각'대로 판단 내리려면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이사야55:8~9
위 성경은 '하나님의 생각' 과 '하나님의 길'이
사람의 생각과 다르고, 사람의 길보다 더 높다고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생각'대로 판단 내릴 수 있을까?
▲성령으로 올바른 판단을 내린다
성령의 역사가 내게 나타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백발백중 ‘내 생각대로’ 결정하게 된다.
보혜사 성령, 그가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14:26
베드로는 아직 성령을 체험하지 못해서
육신적인 생각과 판단을 하고 말았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마16:23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우리 생각을 지배하는 것은, 우리 영인데,
우리 영이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영적인 생각, 하나님의 생각을 할 수 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8:6
크리스천은
내 생각을 버리고 성령의 뜻을 끊임없이 따라야 한다.
어떤 일을 크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지 않고,
훌륭하게 하려는데 우리 목적이 있고,
어떤 일을 많이 하려는데 목적이 있지 않고,
작은 일도 성실하게 하는데 우리 목적이 있다.
높아지려는데 목적이 있지 않고,
낮은 곳에서도 선하게 사는데 우리의 목적이 있다.
이것이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역설적 진리이다.
그래서 순교자들은 죽는 길인데도 태연히 걸어갔다.
‘말 한 마디만 잘 하면 풀려나서 편안히 살 것인데... 왜 저렇게 고집스럽게?’
그러나 그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가장 지혜로운 삶이었다.
성령의 역사로, '내 길'을 버리고, '하나님의 길'을 택한 것이었다...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앨리스(동화)처럼 전혀 새로운 가치관, 세상을 보는 렌즈를 점점 가져야 한다는 주제의 글.
Jesus introduces us to an upside-down world.
It’s one that he inhabits and invites us in.
Our problem, however, is that it’s a topsy-turvy universe, very different than the one we are used to.
It’s much like Alice in Wonderland falling through the rabbit’s hole and finding herself in a world where her perceptions and understandings were continually challenged.
She had to see with new lenses, hear with new understandings, and respond in ways that were not familiar.
Jesus is asking us to enter into a whole new world; to see, hear and respond in ways that are very unfamiliar to us.
예수님은 우리에게 거꾸로 된 세상을 소개하십니다.
그것은 그가 거주하고 우리를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그것이 우리가 익숙한 것과는 매우 다른 혼란스러운 우주라는 것입니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토끼굴로 빠져들어 그녀의 지각과 이해가 끊임없이 도전받는 세상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녀는 새로운 렌즈로 보고, 새로운 이해로 듣고,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대응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완전히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라고 요구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매우 생소한 방식으로 보고, 듣고, 반응합니다.
밀알의 신앙
성경을 보면 역설(逆說)이 많이 나옵니다.
흔히 ‘패러독스’(Paradox)라고 하죠.
역설이란 잘 아시는 대로, 얼핏 보면 틀린 말 같은데 사실은 진리인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 이런 역설적 진리가 많습니다.
특히 신앙의 세계에는 더더욱 많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무수한 역설이 등장합니다.
그 중에 몇 가지만 소개해 드리면 이런 구절들입니다.
마가복음 10: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고린도후서12:10
“ ...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사도행전 20:35
“ ...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 ”
오늘 본문에도 보면 역설적 진리가 등장합니다.
한 알의 밀알이 썩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겁니다.
죽으면 오히려 산다는 진리요, 잃으면 오히려 얻는다는 진리입니다.
이것이 곧 십자가의 진리입니다.
십자가는 역설 중의 역설입니다.
피흘려 죽는데 사는 것이요, 수치를 당하는데 영광스러워지는 겁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이 역설적 진리를 터득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처럼 ‘한 알의 밀알’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서머나 교회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칭찬만 받은 교회입니다.
그 교회에 사도 요한의 제자였던 폴리갑이 감독으로 있었습니다.
폴리캅 기념 교회에 폴리갑과 함께 순교한 자들의 성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는 19세기 말 불란서의 화가 레이몽 페레(Raymond Pere)가 그린 그림인데 순교의 현장에서 손이 묶어져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장면입니다.
폭스(Fox)가 쓴「순교사」의 글에 보면 당시의 박해와 고난이 얼마나 심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폴리갑(Polycarp. 69-155)은 당시 열번째 순교자로서 86세의 나이로 하나님 앞에 산 제물이 되었습니다.
로마의 총독이 늙은 감독으로서 특별한 대우를 하여 회심시켜 보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총독은 "네가 예수를 모른다고만 하라. 그리하면 풀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폴리갑은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할 수 없습니다.
내가 주님을 믿고 살아온 86년 동안 주님은 나를 한 번도 모른다고 부인한 적이 없는데 내가 어찌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하여 주를 모른다고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하면서 화형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불길로 걸어가면서 "오, 주 아버지여 ! 나를 이곳에 적합한 자로 세워 주셔서 감사합니다."고 말했습니다.
불이 그의 몸을 태울 때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들이 나를 태우는 이 기회에 내 생명을 다해서 당신을 간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니 감사합니다."고 했습니다.
폴리캅은 초대교회 선교의 풍성한 열매가 맺어지기까지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덥고 독사와 악어가 들끓는 곳으로 이름난 '랑바레네'라는 곳에 서양 집도 아니고 토인들의 집도 아닌 40여 채의 자그마한 집들이 있습니다. 그 집들은 그 지방민들을 위한 병원으로서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 1. 14-1965. 9. 4)가 세운 것입니다.
알버트 슈바이처는 1875년 독일 알싸스 지방에서 태어나 26세 때 이미 철학, 신학, 음악의 세 가지 분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그리고 의학박사의 학위까지 네 가지의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1913년 그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가장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주 예수의 복음을 전하려 아내와 같이 아프리카를 향했습니다. 그곳에 이르러 그는 병원을 세우고 토인을 돌보아 주며 주의 복음을 전하기에 갖은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온 생애을 다 바쳐 아프리카 선교의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한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선교의 역사속에도 썩어지는 밀알이 되었던 순교자가 있습니다.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39-1866. 8. 31) 목사입니다.
토마스 목사가 목선을 타고 1863년 9월 13일 황해의 거친 파도를 헤치고 다다른 곳은 백령도였습니다.
토마스 목사는 우선 이 섬에 상륙하여 약 2개월 동안 그곳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여 옹진 일대의 여러 섬들을 돌아다니면서 선교에 주력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주민들과 사귀는 일이었습니다.
토마스 목사는 이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예수님과 선지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주민들 중에는 처음부터 거부반응을 보이면서 토마스 목사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사람도 있었으나 적지 않은 전도의 열매를 맺었으므로, 이번에는 방향을 돌려 육지로 무대를 옮기기로 했습니다.
토마스 목사는 한국에서의 선교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황무지와 같은 한반도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임을 깨닫게 되자, 이 일을 잠시도 지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날로부터 토마스는 하나님께 전도의 길을 열어 달라고 기도하는 한편 지혜를 총동원하여 관헌들의 눈을 피해 가면서 황해도 서해안 일대에 복음의 씨를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1866년 8월 셔만호를 타고 대동강을 따라 평양으로 향했으나 관군의 저항으로 배에 불이 붙었습니다.
셔만호에 탄 선원들은 불을 피하려고 물에 뛰어 들었으나 언덕으로 기어오르는 대로 잡혀 죽임을 당했습니다.
토마스 목사는 기슭에 나와 덤벼드는 관군에게 성경을 꺼내 주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토마스 목사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저들은 무지하고 가엾은 인간이니이다."
순간 관군의 시퍼런 칼날이 토마스 목사의 목을 내리쳤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한국의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1927년 5월 8일 수천 명의 신도들이 모인 가운데 토마스목사의 추도 예배를 드렸으며 그를 기념하여 대동강 변에 조왕교회를 세웠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초대교회의 감독 폴리캅의 순교도 슈바이져의 헌신도 토마스목사의 순교도 모두 이 땅에 복음의 풍성한 열매를 맺게한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었던 것입니다.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에 있는 어느 교회가 제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폭격을 맞고 크게 부서졌습니다.
마침 교회 안에 있던 예수님의 조각상도 파손이 되었으나 다행히도 두 손만이 떨어져 나간 체 보전되어 있었습니다.
성도들은 파손 된 이 조각상을 계기로 해서 이전보다 더 큰 교회를 세웠는데 어느 날 한 조각가가 파손 된 예수님 상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에서 우리가 없어진 두 손을 만들어 붙이자고 교회에 건의를 하였습니다.
그날 교인들이 모여 회의를 한 결과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우리는 조각상의 없어진 손을 다시 만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들이 예수님 손의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모두 주님을 향한 뜨거운 헌신과 섬기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위한 손이 되기를 기꺼이 자원했던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한 것도 그리고 우리 한국 교회가 부흥하고 발전한 것도 다 썩어지는 밀알처럼 자신을 희생하여 교회를 섬긴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또한 교회를 위하여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썩어질 밀알처럼 자기를 희생할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속에 살아있는 신앙
한 알의 밀이 심겨지는 것보다 이전에, 또한 땅에서 자기를 희생하는 것보다 이전에 중요한 것은 그 속에 있는 생명입니다.
생명 없는 씨앗은 싹을 티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생명 없는 죽은 씨가 아니라 생명 있는 살아있는 씨앗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안에 있어야 할 생명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안에 있는 사람이 진정 열매를 맺는 신앙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목적하는 것은 예수 생명을 모든 사람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도 친히 십자가에서 자기를 희생하셨던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이 썩으므로 맺어지는 열매들 속에는 동일한 생명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그 씨앗들을 심으면 싹이 나고 많은 열매들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나라의 비밀입니다.
겨자씨가 심어져서 자라면 큰 나무가 되는 것도 그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안에 예수 생명이 있어야 섬김도 희생도 봉사도 충성도 모두 의미가 있고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 없이 행하는 섬김이나 봉사는 세상 사람들이 하는 봉사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교회의 부흥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이 된 성도들의 헌신과 섬김을 통해 교회에 부흥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내일의 부흥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이 되는 성도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부흥이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의 이름 없는 희생이 있어야 하고 누군가의 영광 없는 섬김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처럼 되어야 교회의 부흥을 기대할 수 있기에 모든 성도들이 밀알의 신앙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좋습니다.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아도 좋습니다.
물론 아무도 섬겨 주지 않아도 좋고요. 다만 우리의 하는 일들이 예수님의 가신 길을 따라가는 길이라면 우리교회 성도들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저 그 길을 따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 안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생명이신 그분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그 분이 내 안에서 생명의 씨앗이 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자신을 희생하는 신앙
썩어지는 것은 곧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복음의 열매와 큰 역사는 남다른 희생과 헌신이 있을 때에 가능함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촛불은 흔적 없이 녹아질 때 더욱 밝은 빛을 나타내며 소금도 자체가 녹아 없어질 때 그 고유의 맛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세계 교회가 그러했고, 한국 교회가 그러했고, 각 교회마다 역시 남다른 희생과 봉사의 손길들이 있었기에 성장하여 왔음은 누구라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밀알 신앙을 소유한 성도들에게 있어서 얼마나 고난을 감내하느냐 보다는 얼마나 희생을 치르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단순히 고난을 감내하신 분이기보다는 기꺼이 희생을 치르신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는 것은 희생하셨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러 오신 분으로서 지금 우리가 그 분을 믿음으로 누리는 구원은 우리 편에서는 값없는 은혜의 선물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하신 엄청난 희생의 결과입니다.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 말씀은 역설적 진리이며 진리 중에 진리입니다.
죽으면 삽니다. 살고자 하면 죽는 것입니다.
죽어야 한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희생하는 것
예수님이 본이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희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죽으심의 희생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도는 희생할 줄 아는 성도이어야 합니다. 내가 희생해서 많은 사람이 산다면 희생할 수 있어야 하며 내 자신이 죽어져서 가정이나 교회가 화평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특별히 내가 희생하는 것을 통해 교회가 바르게 성장한다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둘째, 자기를 부인하는 것
나의 교만과 아집을 버리는 것입니다.
빌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여기 취한다는 말은 놓치지 않기 위하여 꽉 붙잡는다는 뜻으로서 자기주장을 강하게 고집할 때나 자기 권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을 때 쓰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나오는 형용어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까?
"여기지 아니하시고"
즉 예수님은 자기를 내세울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모습을 내세우지 않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가 진정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희생되는 밀알입니까? 그렇다면 자기를 주장하는 자리에 앉지를 않아야 하며 내가 왜 죽어야 하고 또 왜 썩어야 하느냐면서 거부하지도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기꺼이 자신의 모든 영광과 권리를 포기하셨습니다.
빌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자기를 비운다는 말은 물그릇을 쏟아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다 비우는 경우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의미의 빈 마음을 품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비우셨기에 마지막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땀과 물과 피까지도 다 쏟아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의 모습을 보면 예수님의 모습을 전혀 닮지도 못하고 자기 권리를 결코 양보를 하려고도 않습니다. 자기 주장이 너무나 강하고 고집이 아집이 여전히 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전히 내가 죽지 않고 살아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자기주장이 얼마나 강한지 조금만 내 권리가 침해되면 아파하고 분노하고 증오까지도 합니다. 이것은 죽지 않은 모습이요 비우지 못한 모습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교회에서 일을 맡은 직분자들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벧전5:3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내가 죽어 교회가 살고 성도가 살 수 있다면 기꺼이 죽어야 합니다. 아버지가 살아야 가정이 산다는 구호가 다른 의미에서는 아버지가 죽어야 가정이 산다는 말로도 표현 될 수 있습니다. 목사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는 말도 목사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는 말씀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에 자기를 부인하고 희생할 줄 아는 한 알의 밀알같은 성숙한 성도들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그 밀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셋째, 순교자의 신앙
미국의 명문대학을 졸업한 5명의 젊은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 피트는 신혼 여행도 포기하고 에콰도르 선교에 나섰습니다. 5명의 선교사는 아내들을 후방에 남겨둔 채 경비행기를 타고 단 한 명의 기독교인도 없는 아우카 인디언마을로 떠났습니다.
1956. 1. 2. 피트 선교사는 아내에게 긴급무선을 쳤습니다. "흥분한 인디언들이 몰려오고 있다. 기도해 달라." 그 후 연락이 끊겼습니다. 이튿날 구조대원과 가족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5명의 선교사들은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었습니다. 복음을 거부한 인디언들에게 순교당했던 것입니다. 20대의 선교사 부인들은 울부짖으며 한 가지 다짐을 했습니다. "남편들이 이루지 못한 과업을 우리가 완수하자."
아내들은 모두 아우카 마을로 이사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40여년이 지난 지금 그 마을은 '복음의 땅'으로 변했습니다. 선교사를 살해한 5명의 인디언들 중 4명이 목사가 됐고 1천여명의 주민들이 모두 신자로 변했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순교자의 피위에 오늘도 하나님 교회가 세워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한알의 썩어진 밀알처럼 순교자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순교자의 신앙이란 기꺼이 하나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성도를 위해서 죽는 신앙입니다.
지금도 선교의 현장에서는 순교자들의 피가 뿌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순교해야 할 선교의 현장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교자의 신앙이 필요합니다. 순교자의 신앙은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며 순교자의 신앙은 내가 죽고 교회가 사는 것입니다. 순교자의 신앙으로 많은 생명을 살리는 풍성한 열매가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두리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밀알의 신앙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신앙입니다. 밀알의 신앙은 자신을 희생하는 신앙입니다. 밀알의 신앙은 순교자의 신앙입니다.
밀알의 신앙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한 알의 밀알이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었던 것처럼 여러분들의 희생과 섬김과 헌신과 충성을 통해 많은 열매가 맺어지기를 바랍니다.
내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서 생명이신 주님을 높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생명 가지고 자기를 낮추고 희생함으로 그리스도의 피 값을 주고 산 교회를 부흥케 하는 밀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본문 바로 앞에 20절 이하를 보면, 헬라인 몇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아마 그들은 유대인 교포(디아스포라)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된 사람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유월절에 맞춰 예루살렘에 왔다가 예수님을 찾아온 겁니다.
성경에 나오지 않은 내용이지만, 전승에 의하면 이런 사연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당시 헬라(Greece)의 도시 국가 ‘에뎃사’에서 온 사신들입니다.
에뎃사 왕의 아들이 나병에 걸려 절망 중에 있었는데,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각종 병자들을 고쳤는데 특히 나병 환자를 고쳤으며,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린 분이라는 겁니다.
그 소문을 듣고 그들은 어찌하든 예수님을 모시고 가려 했습니다.
그러면 왕자의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이고, 더 나아가 나라의 스승(국사)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 겁니다.
그 때는 유대인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등 당국자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해서든 죽이려고 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생각하기에 예수님께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제안을 거절하셨고, 끝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밀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 십자가 죽음, 부활 승천
본문은 그들이 면담 요청을 했을 때 하신 말씀입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십자가를 피해 그 나라로 가서 호강을 하는 게 영광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십자가를 지는 게 영광임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이를 위해 밀알의 비유를 언급하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마치 한 알의 밀알과 같은 존재라는 겁니다.
먼저 23절을 보시죠.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인자(人子 Son of Man)는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표현인 것 아시죠.
마치 왕이 자신을 지칭할 때 “짐이 ...” “과인이 ...” 이렇게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 인자가 ...” 이 말은 “내가 ... ” 그런 뜻이죠. ‘영광을 얻을 때’라고 했는데, 이 말이 무슨 뜻인가요?
십자가 지실 때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십자가를 회피해서 세상의 부귀영화를 선택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신 겁니다.
24절을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의미를 밀알 비유로 분명히 설명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 진실로 진실로 ...”
이 말은 헬라어 원어로 “아멘 아멘”인데,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강조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은 항상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정말 금과옥조처럼 명심할 진리임을 강조하신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자연의 법칙인 동시에 인생의 법칙이요 신앙의 법칙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 속에 심겨지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 한 알 그대로 있습니다.
아무런 가치도 생산해내지 못합니다.
오래 전에 고대 분묘에서 발굴됐는데, 그 가운데 곡식 낟알들이 있었습니다.
신기하게도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썩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고고학적 가치야 있겠지만 곡식이라는 측면에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낟알들이 땅 속에 심겨졌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곡식을 계속 생산해 냈을 겁니다.
남아 있는 게 이익이 아니라, 오히려 엄청난 손실이죠.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땅 속에 심겨지고 썩어지는 밀알과 같은 존재가 되기 위해 오셨음을 밝히 증거하십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많은 인간을 위해 대속의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고, 그로 인해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실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예수님 한 분이 피 흘려 돌아가심으로 무수한 인생들이 죄와 사망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2천년 동안 구원의 역사가 계속됐습니다.
앞으로도 십자가 구원의 역사가 계속 될 겁니다.
이런 사실을 로마서 5:19에서는 뭐라고 말씀합니까?
“한 사람(=아담)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예수님)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무슨 말인가요?
인류의 시조 아담이 범죄함으로 모든 인간이 다함께 죄인이 되었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의인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 죽음이 그리 쉬운 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둔 고뇌를 토로하십니다.
마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연상시키는 대목입니다.
“27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 ”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성을 갖고 계시지만, 동시에 인성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생각할 때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이미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를 지실 것을 결단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28절(하). “ ...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놀라운 일이죠.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기 직전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 받으실 때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메시아 구세주로 공식 인정하는 표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기에, 또 십자가 후에 부활과 승천의 영광이 있을 것을 아셨기에 십자가를 당당히 지셨습니다.
히브리서 12:2
“ ... 그(=예수)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십자가 자체는 고통이지만, 그 이후를 내다 보셨기에 십자가를 감당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대속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요, 하나님 자녀와 천국 백성이 되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밀알 신앙의 계승자 그리스도인 : 예수 제자의 길
십자가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을 따르는 밀알 신앙의 계승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게 바로 예수 제자의 길입니다.
제자의 길을 흔히 ‘제자도’(弟子道 Discipleship)라고 하죠.
‘밀알 신앙’이 곧 ‘제자도’인 것입니다.
여러분, 밀알 신앙의 소유자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25절 보세요.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여기서 생명은 육체의 생명을 가리킵니다.
육신의 본능을 위해서 전전긍긍하면 실패하고 망한다는 겁니다.
오히려 육신의 본능을 극복하고 초월하면 승리하고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삶의 방식을 가리켜 자기부인(自己否認 Self-Denial)이라 부릅니다.
우리가 아무리 예수 믿는 사람이라도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에는 항상 죄의 본능이 내재되어 시시때때로 솟아오릅니다.
육신의 욕망이죠.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았다는 것은 죄의 책임(죄책)에서 구원받았다는 것이지 죄성 자체가 완전히 없어졌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죄의 본능에 이끌려 살다보면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기보다 철저히 세속인의 모습으로 살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구별이 안 됩니다.
예수님이 예비하신 풍성한 축복을 경험하지도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기도 합니다.
결국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자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육신의 본능과 욕망을 죽여야 합니다.
이미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계속해서 ‘확인사살’(確認射殺)을 해야 됩니다.
갈라디아서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sinful nature)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육체’는 죄의 본능 즉 육신의 욕망을 가리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가 예수와 함께 새 생명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육신의 뜻대로 사는 게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쉽지 않아요. 정신을 차리고 발버둥치지 않으면 어느새 죄의 본능이 솟아오릅니다. 그럴 때면 이 말씀을 기억하세요!
마태복음 16장을 보면,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나오죠.
베드로가 분명하게 신앙고백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16:16) 너무 기특해서 예수님이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그 전에는 제자들이 미성숙해서 십자가 고난에 관핸 언급을 회피했었는데, 이때 비로소 십자가를 언급하십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반응이 뜻밖이었습니다.
“예수님! 그러시면 안 되죠. 미쳤어요? 예수님이 죽기는 왜 죽어요?” 이런 식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지상의 이스라엘 건국을 꿈꾸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자기들도 한 자리씩 할 것을 기대했던 겁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십자가를 말씀하시니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베드로를 향해 뭐라고 책망하셨습니까?
마태복음 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사람의 일’은 죄의 본능 즉 육신의 욕망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일’은 주님의 뜻이고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럴 듯하게 신앙 고백을 했지만 베드로의 마음속에서 죄의 본능이 솟아오르는 것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사단의 시험에 넘어진 겁니다.
예수님이 오죽하면 “사단아! 내 뒤로 둘러가라!”고 하셨겠습니까?
육신의 욕망을 제어하는 것은 너무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게 제자의 길이요, 예수님을 섬기는 길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고, 진정한 승리의 삶이 펼쳐지게 됩니다.
26절을 보세요.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예수님을 섬기는 것은 제자로서 육신의 욕망을 이기며 밀알 신앙을 실천하는 겁니다.
십자가 없는 축복, 십자가 없는 영광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어요!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다.”(No Cross, No Crown)(스펄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겉모습은 신앙인의 모습으로 바뀌었지만, 속은 여전히 옛사람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내용물은 그대로이고 포장지만 바뀐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속사람, 내면의 영혼이 지향하는 방향이 달라져야 합니다.
세속인들처럼 무조건 복만 받겠다고 아우성치는 이른 바 ‘수복(受福)의 신앙’을 탈피해야 합니다.
복을 받는 것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고난을 당하더라도 주님의 뜻을 따라가는 겁니다.
이게 ‘자기부인’(自己否認)이요 고난을 불사하는 ‘수난(受難)의 신앙’입니다.
이런 삶을 살다 보면 순교도 가능합니다.
기독교 2천년 역사는 순교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신학자 터툴리안이 이런 말을 했어요. “순교의 피는 교회의 밑거름이다.”
오늘날도 전 세계적으로 보면 곳곳에서 순교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은 순교를 하고 싶어도 기회가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흔히 순교 하면 신앙을 지키다 피 흘려 죽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가리켜 ‘적색순교’(赤色殉敎)라고 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순교가 있어요. ‘백색 순교’(白色殉敎)입니다.
이것은 살아 있는 동안 주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눈물과 땀을 흘리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건 순교가 아니죠. 그러나 평소에 이런 삶을 살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적색 순교를 할 수 있겠습니까? 적색순교를 한 사람들은 예외 없이 평소에 백색순교를 실천한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육신의 본능조차 이기지 못한 사람이 결코 피흘려 순교할 수 없습니다. 그런 뜻에서 백색순교라는 말을 사용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간순간 솟아오르는 육신의 욕망을 십자가를 의지함으로 이겨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한 알의 밀알로 드려야 합니다. 이게 바로 헌신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희생은 결코 손해 보는 게 아닙니다. 더 큰 영광과 더 큰 축복 경험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밀알 신앙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몇 가지 소개해 드립니다.
기도의 밀알 :
그리스도인이라면 기도해야 되고, 기도하는 게 좋은 줄은 다 압니다.
그러나 기도가 잘 안 됩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본능으로는 기도하기 싫거든요.
요리조리 핑계대고 빠져나가려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이런 본능을 이기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그럴 때 비로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냥 막연히 축복을 구하고 기적을 바라지 마십시오!
그것은 기복 신앙이요 수복의 신앙입니다.
기도의 수난을 각오해야 비로소 축복의 문이 열리고 기적의 문이 열린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에스더 4장을 보면, 바사 왕국에 포로로 집혀 있는 유대인들이 큰 위기를 만나죠. 간신 하만이 모르드개를 미워해서 아예 유대인 전체를 학살하려고 흉계를 꾸밉니다. 그때 모르드개와 유대인들이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그 소식을 들은 에스더 왕후가 고민합니다. 왕에게 탄원하면 좋겠는데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왕실의 경호법으로는 왕이 부르기 전에 왕후조차 먼저 찾아갈 수 없습니다. 육신의 안일을 위해서는 숨을 죽이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에스더가 결단합니다. 에4:16 “당신(=모르드개)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결국 금식하며 기도하고 나아간 에스더가 승리합니다. 자기도 살고 유대 민족도 살았습니다. 그 이전보다 더 존귀해졌습니다. 자신을 기도의 밀알로 바쳤을 때 하나님의 영광과 축복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겁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의 밀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가정이 잘 되기를 소원합니까? 교회가 잘 되기를 소원합니까? 나라가 잘 되기를 소원합니까? 세계가 잘 되기를 소원합니까? 그냥 편하게 앉아서 되는 게 아닙니다. 기도의 밀알로 썩어지고 죽어야 합니다. 육신의 안일을 떨쳐 버리고 줄기차게 기도해야 됩니다. 아무쪼록 기도의 밀알이 되셔서 나도 살고 남도 살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전도 / 선교의 밀알 :
한 영혼이 주님께 돌아와 구원받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고와 헌신이 요구되는지 모릅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도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대학 3학년 때 복음을 받았는데 한 마디로 ‘뺀질이’였습니다.
친구가 전도할 때 너나 믿으라며 핀잔을 주며 여러 차례 거부했습니다.
대학생 선교단체에 인도됐는데 거기서도 많은 형제자매들의 수고를 무시하고 거절했습니다.
핑계를 대고 뛰쳐나왔는데, 계속 인내하면서 전화도 하고 편지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들의 수고를 보신 하나님께서 강권하셔서 저를 변화시켜주신 겁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체포되기 전 밀레도를 거쳐 가는데 그곳에서 고별설교를 합니다.
그 가운데 이런 고백을 했죠.
사도행전 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이러한 희생들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에게까지 복음이 다가온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입국했던 선교사들의 희생을 기억해 봅니다.
최초로 언더우드와 함께 온 아펜젤러 선교사(Henry Gerhart Appenzeller 1858~1902)가 생각납니다.
그분은 배재학당과 정동교회 설립자로 유명하죠.
특히 성경 번역을 위해서도 많은 공헌을 한 분입니다.
그는 군산 앞바다에서 선박 사고로 순교했습니다.
성경 번역을 위한 회의 참석을 위해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목포로 가는데, 군산 앞 바다에서 선박 충돌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본인은 살 수 있었는데 몸을 던져 조선 소녀 한 명을 구하고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비효율적인 것 같지만, 한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이 많은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겁니다.
사춘기 아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철이 든 후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 역시 이 땅을 위해 헌신합니다.
그가 노년에 신병 치료 차 한국을 떠나면서 유언을 남겼습니다.
“내가 죽으면 미국에 묻지 마십시오. 꼭 한국 땅에 묻어주십시오.”
그 유언대로 그는 지금 양화진에 묻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아버지 아펜젤러의 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이제 우리도 내가 다른 이들의 헌신으로 구원받은 것처럼 다른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전도와 선교의 밀알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밀알 :
세상의 이치는 희생이 있어야 그 결과가 생긴다는 사실입니다.
자식이 잘 되는 것도 부모의 희생이 전제됩니다.
공동체가 잘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이 잘 되려면 누군가, 교회가 잘 되려면 누군가, 나라가 잘 되려면 누군가의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했습니다.
갈라디아서 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옛날 영국의 웨일즈 남부 지방에 눈보라가 치던 날이었습니다.
한 여인이 길에 쓰러져 얼어 죽은 채로 발견됐습니다.
민망하게도 옷을 홀딱 벗은 모습이었습니다.
그 옆에는 젖먹이 아이가 작은 소리로 울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이 아이를 위해 옷을 다 벗어 덮어주고 자신은 얼어 죽은 겁니다.
그 아이가 철이 들자 양부모가 그 사연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는 친부모로부터 아무 것도 받은 게 없었지만, 그 사랑을 받았기에 훌륭한 크리스천으로 자랐습니다.
그가 바로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수상을 역임한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 1863~1945)입니다.
부모가 사랑의 밀알이 되는 한 자식은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사람들이 무조건 편안함과 안일함만을 추구합니다.
그 가운데 살다보니까 우리 자신도 모르게 이기적이 되어가고 육신의 욕망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게 됩니다.
자신 속에 있는 육신의 욕망을 죽이고 한 알의 밀알이 됨으로 나도 살고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풍성한 열매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갔습니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복이 있기를! 이스라엘의 왕에게 복이 있기를!”(요 12:13)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을 보며 사람들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님께서 오신다는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모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다시 살리셨다는 말을 그들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의 대제사장들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소생시키신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이 일로 많은 유대 사람이 떨어져 나가서, 예수를 믿었기 때문입니다(12:11).
바리새파 사람들 역시 예수님을 맞으러 나온 이들을 보며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라는 ‘위험한’ 인물을 주목하는 것이 못마땅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체념 섞인 투로 불평합니다.
“이제 다 틀렸소. 보시오. 온 세상이 그를 따라갔소.”(요 12:19)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시면서, 또 한편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을 비롯한 유대교 지도자들의 눈총을 받으시면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이후 하신 말씀입니다.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들 가운데 그리스 사람이 몇 있었습니다.
‘그리스 사람’은 유대인과 달리 율법과 예언서의 말씀을 모르는 이들입니다.
그들이 명절을 지키러 올라왔다는 것은, 그들이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그들 그리스 사람들은 빌립과 안드레를 통해 예수님을 뵙고자 했습니다.
본문에는 그들이 예수님을 만났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 사람들의 뜻을 전하고자 당신을 찾아온 빌립과 안드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요 12:23)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는 말씀의 의미는, ‘이제야 좋은 날이 오겠구나, 그리스 사람들에게까지 내 소식이 전해졌다니 이제 됐다, 드디어 수고한 보람을 거둘 때가 왔구나,’ 이런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이제 죽을 때가 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광을 받을 때”는, 주님께서 그분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고,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가실 때, 곧 죽음의 때를 말합니다.
그리스 사람들이 뵙기를 청한다는 빌립과 안드레의 말씀을 전해 들으시면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놀란 그들에게 주님은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요 12:24)
땅에 뿌려진 씨앗이 땅 속에서도 이전의 형체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면 그 씨앗은 싹을 틔우지 못하고 이내 썩어버립니다.
변함이 없다는 것, 한결같다는 것은, 성서의 여러 곳에서 충실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만, 이 경우에는 완고함을 뜻합니다.
충실함과 완고함은 비슷한 듯 보이지만, 완전히 다릅니다. 씨앗으로 말하자면, 충실함은 씨 뿌린 분의 뜻에 맞게, 때에 따라 변하는 과정에 충실하다는 뜻이겠습니다.
땅에 뿌려진 씨앗이 썩어져 발아(發芽)하고, 성장(成長)하고, 개화(開花)하고, 결실(結實)을 맺고, 시드는 그 모든 생명의 순환과정을 씨 뿌리신 분의 뜻으로 받아들인다는 것, 그것이 충실함, 충실한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반면, 완고함은 첫 단계에서부터 어긋나 발아하지도 못한 채 썩어버리는고 마는 것입니다.
씨앗이 썩어지고 부서지기를 거부함으로써, 즉 죽기를 거부함으로써 이후 생명의 순환 과정에 참여할 수 없는 것, 그것이 완고함, 완고한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밀알의 비유 뒤에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덧붙이셨습니다.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요 12:25)
밀알 신앙이란, 이 역설을 삶의 진리로 받아들이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선한 농부이신 그분의 손에 들린 씨앗입니다.
그분이 뿌리시는 곳에, 그분이 심으시는 대로, 뿌리고 심겨져 생명의 열매를 맺는 것이 신앙의 보람이자 기쁨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손에 들린 씨앗이 되면, 스스로를 높이지 않아도, 때가 이를 때에 그분께서 우리를 높여주실 것이라고,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나를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여주실 것이다.”(요 12:26)
그러나 이 과정은 우리가 경험하는 바처럼 쉽지 않습니다. 일상의 크고 작은 죽음들을 그분의 뜻으로 순순히 받아들인다는 것은 믿음과 더불어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일평생 열심히 일하고, 일에서 보람을 찾아온 분들에게는 은퇴가 곧 죽음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젊은 연인에게는 갑작스러운 이별통보가 세상의 끝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권력을 생명처럼 여기던 이들은 권력이 사라지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해 괴로워합니다. 죽음, 그것은 곧 상실입니다. 내가 갖고 있던 것, 내 것이라고 여겼던 것, 지금껏 한 번도 내 몫이 아니라고 의심해 본 적이 없던 바로 그것이 사라지는 고통스러운 경험이 죽음입니다. 이 상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예수님에게는 쉬운 일이었을까요? 요한은 제자들에게 밀알의 비유를 말씀하신 후 곧장, 예수님의 고뇌를 전달합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요 12:27)
얼마 전 어느 영성집회에 참여해 강사로 오신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첫 목회지로 성남의 한 빈민촌 전도사로 파송을 받아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목회에 보람도 있었지만, 너무 힘들어서 떠나려고 마음을 먹고, 지역 목회자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식사자리를 가지셨답니다. 그 자리에, 성남 그곳에서만 20년 넘게 목회를 해 오시면서 감옥에도 다녀오시는 등 온갖 고생을 다 한 선배 목사님 한 분이 계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젊은 그분이 물으셨답니다. “목사님, 저는 이제 겨우 2년 버텼는데, 목사님은 어떻게 20년도 넘게 여기에서 이 사람들과 이렇게 오래 계실 수가 있으세요? 정말 대단하십시다.” 그러자 그분이 남들 안 들리게 귓속말로 이렇게 얘기하셨답니다. “정 목사, 잘 들어, 나 오늘 밤에 짐 싸서 도망 갈거야.” 선배 목사님의 갑작스러운 도피(?) 선언에 놀라 할 말을 잃어버린 사이 그분이 그러시더랍니다. “정 목사, 나 매일 밤 이 생각하면서 지금까지 왔어. 오늘 밤에도 도망갈 생각하면서 잘 거야” 성남에서 주민교회 이해학 원로목사님과 관련된 일화입니다. 그 자리에서 오늘 밤 도망하시겠다고 말씀하신 이후, 그만큼의 세월이 더 지나는 동안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원로목사님까지 되신 분의 얘기입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 어쩌면 예수님도 공생애에 나서신 이후 매일 밤 이 생각을 하시면서 잠 드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낙심하시는 데 그치지 않고, 낙심을 털고 일어나 아버지의 뜻을 향해 가셨습니다. “아니다, 나는 바로 이 일 때문에 이 때에 왔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드러내십시오.”(요 12:27b-28) 나는 아버지의 일을 위해 이 때에 왔다, 이 믿음이 역경 가운데에서도 주님께서 흔들리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실 수 있었던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어떤 일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해야 할 분명한 하나의 이유가 있으면 그 일에 어떻게든 의미를 부여하면서 그 일을 계속하기 마련입니다. 직장인들에게 직장은 되도록 안 가고 싶은 곳입니다. 직장에 가지 말고 인생을 즐겨야 할 이유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장은 가야 할 곳입니다.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생계를 위한 돈을 마련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일의 보람도 있고, 사회적 관계를 맺는 즐거움도 있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국가 경제에 이바지한다는 자부심도 있겠습니다만, 가장 직접적이고 분명한 단 하나의 이유를 꼽으라면 돈을 벌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게 솔직한 말이 아니겠습니까?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에 나오지 않아도 되는 이유, 심지어 나오지 말아야 할 이유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문제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저도 저입니다만,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도 저 못하지 않게 ‘정답’을 말할 능력이 있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나와야 하는 단 하나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인들끼리의 친교 때문입니까?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입니까?
이 모든 이유들이 신앙생활에 입문하거나 신앙생활을 지속시키는 계기가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유들은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이유가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일평생에 걸쳐 지속될 만한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인간관계는 변하기 마련이고, 우리의 바람, 욕망의 내용도 삶의 시기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이유에도 불구하고, 신앙생활을 지속하는 단 하나의 분명한 이유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이유 때문에 신앙인으로 살아가십니까? 하나님 중심의 삶,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하는 창조신앙이 그 분명한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지난 주 평신도아카데미를 통해 박일영 교수님께서 귀한 강의를 해 주셨습니다만, ‘만들어진 것’에 대한 숭배가 아니라, ‘만드신 분’에 대한 믿음이 신앙생활의 굳건한 토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분, 나를 만드신 분, 나를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오늘 여기에 있게 하심으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분입니다. 이 ‘창조주 신앙’이 우리 신앙생활의 흔들리지 않는 토대입니다. 사실 그밖에 모든 것은 때에 알맞게 변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것이 완고함이 아닌 충실함을 지향하는 신앙인의 생활입니다. 변화에 자기를 개방하고, 이끄시는 대로 이끌려가는 것,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믿음’의 모범이 아닙니까? 설사 그 길이 내가 바라는 길과 다른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어가는 듯 보인다 할지라도, 앞길을 열어 주시고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분의 손길에 자기를 온전히 내어맡기는 삶이야말로 신앙인으로 사는 보람과 기쁨입니다.
창조주 신앙은, 밀알 신앙입니다. ‘만드신 분’의 손길에 자기를 내어 맡기는 삶, 하나의 밀알이 되어 썩어지고 부서지는 과정이 때로 불안하고 두려운 과정이라 할지라도, 선한 농부이신 그분의 손에 들린 씨앗임을 믿는 가운데 당당함을 잃지 않는 것이 밀알 신앙이자 창조주 신앙으로 살아가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아버지, 이 시간을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이 일 때문에 이 때에 왔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드러내십시오.” 주님의 이 고백이 우리 일상의 고백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손길에 붙들린 참 믿음의 사람의 될 때 우리는 완고함을 벗어버린 충실한 신앙으로 참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어떤 일이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당위에 사로잡히는 것은, 비록 그것이 바람직하고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밀알 신앙, 창조 신앙으로 살아가는 이에게 어울리지 않는 삶의 태도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누구나 계획이 있습니다, 뜻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손길에 붙들린 사람인 이상 그것은 언제나 잠정적인 계획이요, 말랑말랑한 뜻이 되어야 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절대적이지 않고, 영원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그분 이외에는 그 어떤 관계도, 재물도, 건강도, 재능도, 타인의 인정도, 그 무엇도 우리를 삶의 근원적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없습니다. 근본을 붙드십시오. 우리는 주님의 손에 들린 씨앗입니다. 밀알 신앙으로 살아가십시오. 창조주를 기억하며 사십시오. 그것이 혼돈의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길입니다.
김진홍의 '창대' 신앙과 허병섭의 '밀알' 신앙
1941년생으로 김진홍목사와 허병섭목사이다.
둘 다 경상도의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출신이다.
둘 다 20대에 서울로 올라갔다.
둘 다 신학을 공부해서 목사가 되었다.
둘 다 젊은 시절 빈민가에서 목회했다.
70년대 초 이들이
목회했던 곳은 넝마주이·창녀·거지·막노동꾼·깡패·장애인 들이 뒹굴고 살던 신설동·중랑천·청계천의 빈민가였다.
다 같이 사용하는
변소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면서 자기 순서를 기다리는 기다란 줄이 아침이 열릴 때마다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혈기 왕성했던 30대
초반 시절, 둘은 한편으로는 넝마주이로, 다른 한편으로는 성직자로 이들과 더불어 살았다.
땅 에 떨어진 한 알의 밀알
허병섭은 71년 목사가 되어 군목 생활을 한 뒤, 74년 중랑천과 청계천에서 빈민들과
같이 살았다.
서울시에 의해 청계천 무허가 판자촌 강제 철거 작업이 진행되자, 이번에는 산으로 올라갔다.
76년 하월곡동
산꼭대기에 동월교회라는 달동네 교회를 세웠다.
거기서 가난한 맞벌이
부부의 자녀들을 돌보기 위해 '똘배의 집'이라는 코믹한 이름의 탁아소를 세웠다.
병든 사람들을 위해서는 무료 진료를 알선해주었고,
집 없는 사람들의 내 집 장만을 위해서 공동 주택 조합을 만들었다.
정부의 무자비한 철거 폭력이 벌어질 때는 몸으로 맞서
싸웠다.
이러한 그를 박정희는 빨갱이로 낙인찍었다.
76년 서울 시경 대공분실에 끌려가서 50일이 넘도록 몽둥이로 맞고 고문을 당했다.
그 이후 연행과 구금만 20번이 넘었다.
전두환 시절인 86년에는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그때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독재 타도'와 '민주주의 쟁취'를 외치면서 분신하고 할복할 때였다.
그는
"왜 젊은이들이 죽어야 하나, 차라리 목사들이 희생되어야 하지 않느냐"면서 분신을 기도했다.
이 일이 자극이 되어 150명의
목사들이 민정당사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허병섭은 시위 주동자로 찍혀서 6개월 넘게 옥살이했다.
청계천에서, 달동네에서, 차가운 유치장 바닥에서 고단하고 고통스러운 30~40대를 보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삶에 감화되어 예수를 알게 된 사람들이 있었다.
82년 이동철(본명
이철용)이 소설로 쓰고 이장호 감독이 영화로 만든 <어둠의 자식들>, <꼬방 동네 사람들>에 나오는 목사
공병수의 실제 인물이 허병섭이다.
장애인이면서 초졸 출신으로 88년 국회의원이 된 소설가 이철용은 5공 청문회 때 증언대에 선
전두환 얼굴에 대고 삿대질을 하면서 "살인마"라고 외쳐서 유명해졌다.
그는 허병섭이 한때 포장마차 사장이었을 때 거기서 그를 만나
예수를 믿고 장로가 되었다.
지금은 역술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장로로서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다.
영화감독 이장호는
"이동철은 내가 모르는 재야 운동권의 골수들을 끊임없이 내게 소개했는데, 가장 인상에 남는 이가 바로 도시 빈민 선교로 봉사하고
있던 허병섭 목사였다.
이동철에게 신앙의 눈을 뜨게 한 장본인이다.
그분이 하루는 수줍은 말투로 '좋은 영화만 있다면 극장이 바로
교회의 역할을 하므로 목사가 따로 필요 없다'고 말했다.
나는 그를 만나면서
교회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처음으로 싹텄다.
그 후 <어둠의 자식들>, <낮은 데로 임하소서>, <바보
선언>, <과부춤> 등 계속해서 내 영화에는 허병섭 목사가 던진 기독교적 화두가 깊이 작용했다"고 <씨네
21>에서 회상했다.
학생 운동을 하다가 강제로 끌려간 강원도 어느 부대에서 허병섭과 인연을 맺은 양국주(열방을 섬기는 사람들 국제 대표)는 그를 이렇게 기억했다.
"허병섭이 최전방에서
군목으로 지내던 시절, 당시 중위 봉급이 2만 원이었는데, 1만 원은 아내에게 생활비로 주고, 나머지로 담배와 껌을 사들고
병사들을 만나러 다녔다.
전역 후에는 포장마차 사장이 되었다.
다음날 장사할 몫을 떼어내고 남은 걸로 동네의 일용직 노동자,
부랑자들에게 공짜로 뜨거운 오뎅 국물과 소주를 먹였다.
내가 제대한 뒤 사업을 해서 돈을 좀 만지게 되어서 허 목사에게
20~30만 원씩 건네주면, 으레 술 먹고 싸우다가 유치장에 들어간 사람들 빼내오는 일에 쓰는 듯했다."
군목이 병사들에게 복음은
안 전하고 담배를 전하다니. 성령에 취하도록 하지 않고 술에 취하도록 만들다니.
저주하고 내쫓아도 시원치 않을 무당을 교회에
불러 함께 예배하지 않나, 노가다 판에서 일용직 노동자들이랑 어울려 술 먹고 담배 피고 화투판을 벌이지 않나.
그러더니 결국은
사고를 쳤다.
허병섭은 88년 기장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했다.
기장에서는 최초의 사건이었다.
그는 동월교회에서 평신도와 평등하게 사역하는 교회를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종교 성직자보다 평신도 신분으로 자신의 신앙을 올바르게 지키면서 살아가는 게 훨씬 힘들다는 교인들의 고민에 공감했다.
또
노동자와 함께 구속됐을 때 경찰이 목사에게는 존칭어를 쓰고 노동자에게는 욕설과 위협을 서슴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목사라는 지위와
신분 때문에 받는 특혜를 괴로워했다.
목사직을 버린 다음
막노동판에서 노동자들과 어울리면서 미장질을 배웠다.
2년 뒤에는 일용직 건축 노동자들의 공동체인 '건축 일꾼 두레'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건축주와 노동자 사이에서 엄청난 이윤을 챙기는 중간 하청업자에 의존하지 않고, 건축주와 건축 노동자 간의 직거래를
텄다.
그로 인해 발생한 차액의 이윤만으로도 빈민 노동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건축 현장에서 빚어지는 온갖 비리와
모순을 없애려고 했다.
이 모든 변화를 통해 건축 노동자가 노동의 객체가 아니라 노동의 주체가 되도록 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는 한계를 느꼈고, 실망했다.
"민중은 돈을 벌기 위해 노동력을 상품으로 내놓아야 하며, 노동력을 팔아서 잘살아보려는 시장 경제 논리는 경매장의 아수라장 속에서 인간을 초라한 상품으로 전락시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노동자들과 뒹굴 때 품었던 생각이다.
"그런데 이 신념이 차츰
깨지기 시작했다. 도시 빈민의 문제는 빈민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도시화와 산업화라는 사회 구조가 도시 빈민을 그렇게 만들어간
것이라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이런 사회 구조를 바꾸는 일을 하기에는 내 힘이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자연에 몸을
던졌다." 2000년 <신동아> 5월호에 쓴 글 일부다.
도시 빈민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라는 한계를 느꼈다. 동시에 자기의 한계도 느꼈다. 그래서 더 근원적인 문제에 천착하기로 했다.
96년 무주로 내려갔다. 마을 이름은 진도리(眞道里). '예수님이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다'는 말씀을 담고 있는 땅 이름이라서 더 좋다 했다. 여기서 농사지으며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꿈꾸면서 살았다. 농약 쓰지
않고 오리와 우렁이를 풀어 짓는 유기 농법을 실험했다.
그는 이렇게 얘기한다.
"씨앗이라는 생명은 미생물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 자신을 분해하고 해체하면서 스스로를 부식시킨다. 주변 미생물들과 치고받고 먹고 먹히면서 생명을 만들어낸다. 나는 이를 '밀알 노동'이라 말하고 싶다.
씨앗 하나가 얼마나
작은가? 그런데 거기에서 수백 수천 개의 열매가 맺힌다. 땅속 미생물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다. 그러나 이들이 얼마나 많은
생명을 일으키고 있는가? 작은 자의 노동이라는 점에서 이들의 노동은 밀알 노동이고, 자신을 분해하고 희생한다는 뜻에서 밀알
노동이다.
성서의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구절에서 밀알 노동을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도 육체 노동, 몸의
노동, 밀알 노동으로 시골의 일상을 수놓고 있는 것이다." (<신동아> 2000년 5월호)
올해 1월에는 2만 평
가까이 되는 땅을 마을 공동 재산으로 내놓았다. 옛날에 교회에서 받은 돈과 이리 저리 마련한 돈을 모아 5000만 원으로 산
땅이다. 하지만 그는 "잠시 빌린 것일 뿐 내 땅이 아니다"며 그걸 자연환경국민신탁에 맡겼다. 여기서 생태 체험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자연도 보존하고 마을 주민의 소득도 높이는 산촌 마을 자립 모델을 만들 계획이다. 그러면서 대안학교인 푸른꿈고등학교와
온배움터(전 녹색대학)에 관여했으나, 총장이라는 직함보다 공동 대표, 공동 교사라고 불리길 좋아했다.
미약한 시작, 창대한 나중
30살의 전도사 김진홍은
허병섭처럼 청계천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어울렸다. 1971년 세운 활빈교회가 사역의 중심이었다. 이곳에서 '배달학당'을 만들어
청소년을 교육하고, '배꽃어린이집', 장미어린이집'이라는 탁아소를 만들어 어린이들을 돌봤다. 주민자활회, 의료봉사회 등을 조직해
빈민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 애썼다.
때로는 밑 빠진 독에 물을 붓고 있는 것 같은 좌절감, 과연 하나님이 살아 계신가 하는 낙망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믿었다.
"나는 청계천 둑 위를 걸으며 상상했다. 지금 예수님께서 서울에 오신다면 어느 곳부터 방문하실까? 분명 세종로나 명동 같은 곳은 찾지 않으실 거다. 이 악취 나는 청계천을 찾으실 테지.
예수님은 지금 내가 걷고
있는 둑길을 걸으며 말씀하실 거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판자촌 주민들이여, 다 모이시오. 내가 여러분들을 푹 쉬게 하는 동민
위안의 밤을 열어드릴 것이오. 그렇게 말씀하시고 예수님은 밀가루 다섯 포대와 동태 두 마리로 청계천 주민들을 배불리 먹이실
것이다." (김진홍의 자전 소설 <황무지가 장미꽃 같이>)
박정희는 장기 집권을 위해 1972년 10월 유신을 선포했다. 반대 운동이 격렬해지자 대통령 긴급 조치라는 걸 발동했다. "유신 헌법을 반대하거나 개정하는 운동을 하면 징역 15년 형에 처한다"는 기막힌 명령이었다.
김진홍은 74년 1월 유신 헌법을 반대하는 시국 기도회를 연 죄목으로 다른 목사, 전도사 5명과 함께 군법회의에 넘겨졌다. 김진홍, 이해학 전도사가 주동자로 찍혀서 15년 형을 받았는데, 그나마 13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당시 이들의 변론을
맡았던 한승헌 변호사는 "피고인들은 성서적 진리에 따른 신앙적 결단으로 유신 통치와 긴급 조치를 반대하는 것이며, 그것은
크리스천의 사명이라고 의연하게 말했다"고 했다. 그는 이들 성직자들에게 감명을 받고 교회를 나가게 되었다.
하지만 한승헌이 사람을 잘못 본 것이다.
김진홍은 2004년
이렇게 말했다. "나는 민주 투사도 아니고 운동권도 아닌데, 어쩌다 줄을 잘못 서서 징역을 살았다. 어영부영 콩밥을 먹게
되었다." 보수 세력을 설득해야 할 때는 이렇듯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반대로 자신의 생각과
다른 방식으로 데모하는 이들을 비난할 때는 자신의 과거 투쟁 경력을 내세웠다. "나도 한때는 민주화 운동을 한다고 데모도 하고
징역살이도 하고 매도 맞아 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민주화 운동하던 때에는 민주주의라는 절대적 가치를 지키려면 운동의 내용도
민주적인 원칙을 지키면서 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민주화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76년, 청계천 철거
작업이 강행되자 허병섭은 산으로 올라갔다. 반면 김진홍은 경기도 남양만으로 집단 이주를 했다. 현대판 출애굽을 이끄는 한국판
모세였다. 여기서 시작한 것이 두레 공동체 운동이다. 허병섭과 김진홍의 인생이 극명하게 갈리는 시점이기도 하다.
두레 운동이 때로는 실패를 맛보기도 했지만, 김진홍은 이때부터 '잘나갔다'.
그가 청계천 시절을
바탕으로 82년에 쓴 신앙 수기 <새벽을 깨우리로다>는 24년이 지난 2006년에 100쇄를 넘겨서 30만 권이 넘게
팔렸다. 영어, 일본어, 중국어, 러시아어, 아랍어 등 세계 각 나라 언어로 번역되었고, 89년에는 자신이 주인공 된 같은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그가 쓴 자전 소설, 만화, 설교집, 묵상집은 수십 권에 이른다. 이메일로 보내는 '아침 묵상'을 받아보는
사람은 10만 명이 넘는다.
95년 적십자사 봉사상
금장을 받았고, 96년 모교인 계명대에서 명예철학박사가 되었다. 98년에는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잠시 교수도 했다.
2001년에는 미국 킹칼리지 명예신학박사가 되었고, 그해 계명대학교, 계명문화대, 계명유치원, 동산의료원을 운영하는 계명기독학원
이사장도 했다.
소심하고 수줍음 많은 허병섭이 막사이사이상 수상자로 선정됐으나 이를 고사하는 바람에 같이 빈민 운동을 했던 제정구가 후에 그 상을 받게 된 것과는 딴판이다.
두레 공동체는 미국,
일본, 독일, 중국 등 세계 곳곳에 세워져 있다. 미국에 있는 땅이 1000만 평방미터가 넘고, 미얀마의 땅은 3000만
평방미터에 이른다. 세계 곳곳의 두레 땅만 한데 모아도 웬만한 도시 하나는 세울 법하다. 해외와 국내에 각각 8개씩의 교회를
세웠다. 두레 공동체가 만든 대안학교, 복지센터, 문화센터 등의 규모는 어마어마하다.
그는 다단계 사업에도
손을 댔다. 김진홍은 "하나님 다음에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며, 자본주의는 성경적 윤리가 낳은 자식"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두레교회 성도들에게 '지금 두레내츄럴에 투자하면 10년 후에 큰 빛을 볼 수 있다'고 권유한다"고 했다. 국민들에게 주식 투자를
권한 이명박은 김진홍의 이 말에서 힌트를 얻었을지 모른다.
김진홍은 97년 경기도
구리에 구리 활빈교회(지금의 두레교회)라는 교회를 세웠다. 10년 뒤인 2007년에는 예배당에 5000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4층짜리 새 교회를 건축했다. 71년에는 무허가 판자촌에 가마니 깔고 교회를 세우더니, 36년 뒤에는 권력과의 유착에 의한 특혜
시비를 일으키면서 교회를 세웠다. 입당 예배에는 이명박 대통령 후보, 김문수 경기도지사 등이 참석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욥기 8장 7절에 나오는 성경 구절로 만든 장식용 현판은 신장개업한 동네 중국집보다 창대해질 대로
창대해진 두레와 김진홍에 어울린다. 그가 목사라고 하니, 이 구절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아니라 수아 사람 빌닷이 욥에게 한
말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그의 창대해진 입지는 보수 집단을 하나로 묶고, 우리
사회를 박정희 시대와 같은 암흑기로 되돌리는 데에도 모세와 같은 몫을 톡톡히 했다. 이라크 파병 지지, 한반도 대운하 지지,
미국산 소고기 수입 지지, 수도권 이전 반대 등은 준비 운동에 불과했다.
시장 경제 체제를 절대적으로 숭배하는 물신주의는 그의 지금 성공을 뒷받침해준 과거 고난의 시절마저 부정하게 만든다.
"미국의 경우는 만일
데모하는 도중에 경찰에게 폭력을 휘두르게 되면 현장 사살까지 허용한다. 가까운 나라 일본의 경우는 경찰을 폭행하는 경우에 강제
연행을 하여 엄한 실형을 내린다. 한국 경찰로서는 꿈같은 이야기다." 목사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믿기 어려운 이 논리대로라면,
그는 74년 즉결 처형을 당했어도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대기업, 엘리트, 부자는 본받아야 할 대상이지, 규탄하거나 싫어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국민들이 지향(指向)하여야 할 사람들이고 대상이지, 지양(止揚)하여야 할 사람들이거나 대상이 아니다.
삼성이 과연 나쁜
기업인가? 삼성 그룹의 총수인 이건희 회장이 나쁜 사람인가? 신문 보도에 의하면 어느 정당에 소속된 한 국회의원이 지금 해외에
나가 있는 이 회장을 체포해 올 체포조를 만들자는 말을 한 것 같은데, 과연 그렇게 할 성질일까?
나는 삼성그룹이 무슨
나쁜 일을 하였는지, 혹은 어떤 법을 어겼는지 모른다. 그러나 설령 어떤 부문에 하자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렇게 다룰 성질은 아니라
여겨진다. 우리 사회는 법치 사회이다. 잘잘못은 사법 기관에서 다룰 일이고, 신문 지상에서 매도하거나, 그룹의 회장을 체포조
운운할 성질은 전연 아니라 여겨진다.
듣건대 삼성의 수출이
우리나라 전체 수출의 20%라 하고, 납세액이 전국의 5%가 넘는다 한다. 그리고 요즘 같이 청년 실업자가 날로 늘어나고 있는
판에 많은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고 있다. 나는 그런 삼성이 몹시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삼성의 이 회장이 훌륭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체포조를 만들자는 발상까지 하고 있는 국회의원이 있다니 퍽 놀라운 일이다." (김진홍의 '아침
묵상')
김진홍은 자신이 이렇게 말한 사실은 기억하고 있을까. 몇 번을 읽어도 위아래 두 개의 글에서 드러나는 상반된 가치관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새벽을 깨우는 일이 나의 사명이다. 어둠에서 잠자고 있는 민중들에게 새벽을 알리는 사명은 위대한 사명이다. 이를 위해 일생을 살아야 한다. 한밤중에 잠들어 있는 한국 교회에 새벽이 다가옴을 알려야 한다.
가난과 질병에 잠들어
있는 청계천 판자촌의 6만 형제들에게도 새벽을 알려야 한다. 가난한 자들의 아픔을 모른 채 호화로운 주택에 잠들어 있는
부자들에게도 새벽을 알려야 한다. 나는 밖으로 나가 새벽을 알리는 종을 울렸다. 땡그랑 땡- 땡그랑 땡- 종소리에 일어난 듯
가까운 집의 창문에 등불이 밝혀지고 있다." (<새벽을 깨우리로다>)
김진홍의 창대함은
2005년 뉴라이트전국연합을 만들어 상임의장이 된 뒤, 30년 지기(知己)인 이명박을 대통령 만드는 데 성공하는 지점에서 정점을
이룬다.
서머나 교회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칭찬만 받은 교회입니다. 그 교회에 사도 요한의 제자였던 폴리갑이 감독으로 있었습니다. 폴리캅 기념 교회에 폴리갑과 함께 순교한
자들의 성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는 19세기 말 불란서의 화가 레이몽 페레(Raymond Pere)가 그린 그림인데 순교의
현장에서 손이 묶어져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장면입니다.
폭스(Fox)가
쓴「순교사」의 글에 보면 당시의 박해와 고난이 얼마나 심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폴리갑은 당시 열번째 순교자로서 86세의
나이로 하나님 앞에 산 제물이 되었습니다. 로마의 총독이 늙은 감독으로서 특별한 대우를 하여 회심시켜 보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총독은 "네가 예수를 모른다고만 하라. 그리하면 풀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폴리갑은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할 수 없습니다
.
내가 주님을 믿고 살아온 86년 동안 주님은 나를 한 번도 모른다고 부인한 적이 없는데 내가 어찌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하여
주를 모른다고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하면서 화형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불길로 걸어가면서 "오, 주 아버지여 ! 나를
이곳에 적합한 자로 세워 주셔서 감사합니다."고 말했습니다. 불이 그의 몸을 태울 때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들이 나를 태우는 이
기회에 내 생명을 다해서 당신을 간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니 감사합니다."고 했습니다.
폴리캅은
초대교회 선교의 풍성한 열매가 맺어지기까지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덥고 독사와 악어가
들끓는 곳으로 이름난 '랑바레네'라는 곳에 서양 집도 아니고 토인들의 집도 아닌 40여 채의 자그마한 집들이 있습니다. 그 집들은
그 지방민들을 위한 병원으로서 알버트 슈바이처가 세운 것입니다.
알버트
슈바이처는 1875년 독일 알싸스 지방에서 태어나 26세 때 이미 철학, 신학, 음악의 세 가지 분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그리고 의학박사의 학위까지 네 가지의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1913년 그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가장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주 예수의 복음을 전하려 아내와 같이 아프리카를 향했습니다. 그곳에 이르러 그는 병원을 세우고 토인을
돌보아 주며 주의 복음을 전하기에 갖은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온 생애을 다 바쳐 아프리카 선교의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한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선교의
역사속에도 썩어지는 밀알이 되었던 순교자가 있습니다. 토마스목사입니다. 토마스 목사가 목선을 타고 1863년 9월 13일 황해의
거친 파도를 헤치고 다다른 곳은 백령도였습니다. 토마스 목사는 우선 이 섬에 상륙하여 약 2개월 동안 그곳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여 옹진 일대의 여러 섬들을 돌아다니면서 선교에 주력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주민들과 사귀는 일이었습니다.
토마스
목사는 이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예수님과 선지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주민들
중에는 처음부터 거부반응을 보이면서 토마스 목사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사람도 있었으나 적지 않은 전도의 열매를 맺었으므로,
이번에는 방향을 돌려 육지로 무대를 옮기기로 했습니다.
토마스
목사는 한국에서의 선교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황무지와 같은 한반도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임을 깨닫게 되자, 이 일을 잠시도 지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날로부터 토마스는 하나님께
전도의 길을 열어 달라고 기도하는 한편 지혜를 총동원하여 관헌들의 눈을 피해 가면서 황해도 서해안 일대에 복음의 씨를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1866년 8월 셔만호를 타고
대동강을 따라 평양으로 향했으나 관군의 저항으로 배에 불이 붙었습니다. 셔만호에 탄 선원들은 불을 피하려고 물에 뛰어 들었으나
언덕으로 기어오르는 대로 잡혀 죽임을 당했습니다. 토마스 목사는 기슭에 나와 덤벼드는 관군에게 성경을 꺼내 주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토마스 목사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저들은 무지하고
가엾은 인간이니이다." 순간 관군의 시퍼런 칼날이 토마스 목사의 목을 내리쳤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한국의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1927년 5월 8일 수천
명의 신도들이 모인 가운데 토마스목사의 추도 예배를 드렸으며 그를 기념하여 대동강 변에 조왕교회를 세웠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초대교회의 감독 폴리캅의 순교도 슈바이져의 헌신도 토마스목사의 순교도 모두 이 땅에 복음의 풍성한 열매를 맺게한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었던 것입니다.
지난
주일은 우리 교회의 창립36주년 기념주일이자 순교자 기념 주일이었습니다. 오늘은 순교자의 신앙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그래서 밀알의 신앙이라는 제목을 정해 보았습니다. 우리 교회가 예수님을 닮아 행복을 주는 교회가 되어지기 위해서 특별히 저와 성도
여러분들이 밀알의 신앙을 소유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밀알의 신앙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교회의 부흥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에 있는 어느 교회가 제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폭격을 맞고 크게 부서졌습니다.
마침 교회 안에
있던 예수님의 조각상도 파손이 되었으나 다행히도 두 손만이 떨어져 나간 체 보전되어 있었습니다. 성도들은 파손 된 이 조각상을
계기로 해서 이전보다 더 큰 교회를 세웠는데 어느 날 한 조각가가 파손 된 예수님 상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에서 우리가 없어진 두
손을 만들어 붙이자고 교회에 건의를 하였습니다. 그날 교인들이 모여 회의를 한 결과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우리는 조각상의 없어진
손을 다시 만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들이 예수님 손의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모두 주님을 향한 뜨거운
헌신과 섬기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위한 손이 되기를 기꺼이 자원했던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한 것도 그리고 우리 한국 교회가 부흥하고 발전한 것도 다 썩어지는 밀알처럼 자신을 희생하여 교회를
섬긴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밀알의 신앙을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또한 교회를 위하여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썩어질 밀알처럼 자기를 희생할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 한국 교회를
위하여 그와 같은 삶을 살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이 시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일군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밀알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속에 살아있는 신앙입니다. 한 알의 밀이 심겨지는 것보다 이전에, 또한 땅에서 자기를
희생하는 것보다 이전에 중요한 것은 그 속에 있는 생명입니다. 생명 없는 씨앗은 싹을 티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생명 없는 죽은 씨가 아니라 생명 있는 살아있는 씨앗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안에 있어야 할 생명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안에 있는 사람이 진정 열매를 맺는 신앙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목적하는 것은 예수 생명을 모든 사람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도 친히 십자가에서
자기를 희생하셨던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이 썩으므로 맺어지는 열매들 속에는 동일한 생명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그
씨앗들을 심으면 싹이 나고 많은 열매들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나라의 비밀입니다.
겨자씨가
심어져서 자라면 큰 나무가 되는 것도 그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안에 예수
생명이 있어야 섬김도 희생도 봉사도 충성도 모두 의미가 있고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 없이 행하는 섬김이나 봉사는
세상 사람들이 하는 봉사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교회의 부흥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이 된 성도들의 헌신과 섬김을 통해 교회에 부흥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내일의
부흥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이 되는 성도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부흥이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의 이름 없는
희생이 있어야 하고 누군가의 영광 없는 섬김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처럼 되어야 교회의 부흥을
기대할 수 있기에 모든 성도들이 밀알의 신앙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좋습니다.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아도 좋습니다.
물론
아무도 섬겨 주지 않아도 좋고요. 다만 우리의 하는 일들이 예수님의 가신 길을 따라가는 길이라면 우리교회 성도들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저 그 길을 따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 안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생명이신 그분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그 분이 내 안에서 생명의 씨앗이 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밀알 신앙은 자신을 희생하는 신앙입니다. 썩어지는 것은 곧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복음의 열매와 큰 역사는
남다른 희생과 헌신이 있을 때에 가능함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촛불은 흔적 없이 녹아질 때 더욱 밝은 빛을 나타내며 소금도
자체가 녹아 없어질 때 그 고유의 맛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세계 교회가 그러했고, 한국 교회가 그러했고, 각 교회마다 역시 남다른 희생과 봉사의 손길들이 있었기에
성장하여 왔음은 누구라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밀알 신앙을 소유한 성도들에게 있어서 얼마나 고난을 감내하느냐 보다는 얼마나
희생을 치르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단순히 고난을 감내하신 분이기보다는 기꺼이 희생을 치르신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빌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는 것은 희생하셨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러 오신 분으로서 지금 우리가 그
분을 믿음으로 누리는 구원은 우리 편에서는 값없는 은혜의 선물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하신 엄청난 희생의 결과입니다.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 말씀은 역설적 진리이며 진리 중에 진리입니다. 죽으면 삽니다. 살고자 하면 죽는 것입니다. 죽어야 한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희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본이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희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죽으심의 희생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도는 희생할 줄 아는 성도이어야 합니다. 내가 희생해서 많은 사람이 산다면 희생할 수 있어야 하며 내 자신이
죽어져서 가정이나 교회가 화평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특별히 내가 희생하는 것을 통해 교회가 바르게 성장한다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둘째로 죽는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나의 교만과 아집을 버리는 것입니다.
빌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여기 취한다는 말은 놓치지 않기 위하여 꽉 붙잡는다는 뜻으로서 자기주장을 강하게 고집할 때나 자기 권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을 때 쓰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나오는 형용어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까?
"여기지 아니하시고"
즉
예수님은 자기를 내세울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모습을 내세우지 않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가
진정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희생되는 밀알입니까? 그렇다면 자기를 주장하는 자리에 앉지를 않아야 하며 내가 왜 죽어야 하고 또 왜
썩어야 하느냐면서 거부하지도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기꺼이 자신의 모든 영광과 권리를 포기하셨습니다.
빌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자기를
비운다는 말은 물그릇을 쏟아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다 비우는 경우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의미의 빈
마음을 품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비우셨기에 마지막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땀과 물과
피까지도 다 쏟아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의 모습을 보면 예수님의 모습을 전혀 닮지도 못하고 자기 권리를 결코 양보를 하려고도 않습니다. 자기 주장이 너무나 강하고
고집이 아집이 여전히 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전히 내가 죽지 않고 살아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자기주장이 얼마나
강한지 조금만 내 권리가 침해되면 아파하고 분노하고 증오까지도 합니다. 이것은 죽지 않은 모습이요 비우지 못한 모습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교회에서 일을 맡은 직분자들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벧전5:3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내가
죽어 교회가 살고 성도가 살 수 있다면 기꺼이 죽어야 합니다. 아버지가 살아야 가정이 산다는 구호가 다른 의미에서는 아버지가
죽어야 가정이 산다는 말로도 표현 될 수 있습니다. 목사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는 말도 목사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는 말씀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에 자기를 부인하고 희생할 줄 아는 한 알의 밀알같은 성숙한 성도들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그 밀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셋째, 밀알 신앙은 순교자의 신앙입니다. 미국의 명문대학을 졸업한 5명의 젊은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 피트는 신혼
여행도 포기하고 에콰도르 선교에 나섰습니다. 5명의 선교사는 아내들을 후방에 남겨둔 채 경비행기를 타고 단 한 명의 기독교인도
없는 아우카 인디언마을로 떠났습니다.
1956.
1. 2. 피트 선교사는 아내에게 긴급무선을 쳤습니다. "흥분한 인디언들이 몰려오고 있다. 기도해 달라." 그 후 연락이
끊겼습니다. 이튿날 구조대원과 가족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5명의 선교사들은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었습니다. 복음을 거부한
인디언들에게 순교당했던 것입니다. 20대의 선교사 부인들은 울부짖으며 한 가지 다짐을 했습니다. "남편들이 이루지 못한 과업을
우리가 완수하자."
아내들은 모두 아우카 마을로
이사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40여년이 지난 지금 그 마을은 '복음의 땅'으로 변했습니다. 선교사를 살해한 5명의 인디언들 중
4명이 목사가 됐고 1천여명의 주민들이 모두 신자로 변했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순교자의
피위에 오늘도 하나님 교회가 세워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한알의 썩어진 밀알처럼 순교자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순교자의
신앙이란 기꺼이 하나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성도를 위해서 죽는 신앙입니다.
지금도
선교의 현장에서는 순교자들의 피가 뿌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순교해야 할 선교의 현장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교자의 신앙이 필요합니다. 순교자의 신앙은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며 순교자의 신앙은 내가 죽고 교회가
사는 것입니다. 순교자의 신앙으로 많은 생명을 살리는 풍성한 열매가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두리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밀알의 신앙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신앙입니다. 밀알의 신앙은 자신을 희생하는 신앙입니다. 밀알의 신앙은
순교자의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밀알의 신앙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한 알의 밀알이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었던 것처럼 여러분들의 희생과 섬김과 헌신과 충성을
통해 많은 열매가 맺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위해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처럼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서 생명이신 주님을 높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생명 가지고 자기를 낮추고 희생함으로
그리스도의 피 값을 주고 산 교회를 부흥케 하는 밀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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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알의 밀알(요한 12:23-33) 주님은 십자가의 길을 한 알의 밀로 비유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밀알이 땅 속에서 썩어져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는 것같이 주님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셨습니다. 33 절에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주님은 그 밀알의 비유를 통해서 십자가의 죽음이 어떠한 죽음인지를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첫째 십자가는 자신 안에 있는 희망은 죽고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목적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섬길 때에 고통의 길을 지나야 할 때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고 약속의 땅에 왔습니다. 하늘의 별과 같은 후손을 주시고 그 땅을 영원한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약속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노령의 나이임에 아들 이삭을 얻었습니다. 그 아이들은 아브라함의 미래요 희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물로 받치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이삭을 받치면 그의 미래의 꿈도 희망도 사라집니다. 아브라함은 침묵합니다. 그리고 3 일 길을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산을 향해 갑니다. 그는 자신의 희망을 포기해기 위해 걸어가는 모리아 산은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신 갈보리와 같습니다. 아들을 번제물로 죽여야 하는 산이고, 하나님께 독생자 예수님을 죽게 하시는 장소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여러분도 하늘의 뭇 별을 바라보며 기대하던 희망을 내려 놓고 죽음과 같은 자리로 내려가는 때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한 알의 밀이 땅에 죽지 않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고 하셨습니다(24 절). 죽음은 또 다른 면에서는 생명을 낳는 과정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 속에서 자신이 썩어져 죽지 않는다면 생명을 낳지 못하지만, 자신이 썩어져 죽을 때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죽어야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가져옵니다. 우리의 신앙도 죽어야 새로운 생명이 있는 신앙으로 일어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얻기 위해 아들을 기대하며 살았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들을 받치라고 하심으로, 모리아산에서 그의 모든 희망을 죽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만을 희망으로 삼는 삶이 되게 하십니다. 죽음의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 안에서 삶의 목적과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는 것입니다. 두번째 십자가는 주님을 따르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무엇을 행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주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어나가야 합니다. 신앙의 길은 우리의 노력과 수고으로 가는 길이 아닙니다. 주님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포도나무의 줄기에 붙어있는 가지에서 열매가 맺히는 것같이 주님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밀알이 땅에서 썩어져 죽고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십자가의 죽음을 예고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26 절에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주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따르다 보면 우리는 주님이 계신 곳에 이르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감당할 비결에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따르다보면 우리가 십자가를 능히 감당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예수님이 서신 그 자리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아가서 4:8 에 “나의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데기에서 사자굴과 표범 산에서 내려다 보아라”. 아주 험한 산 꼭데기를 지나고 사자와 표범과 같은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위험한 지역을 사랑하는 자와 함께 갈 수 있었다는고백입니다. 아무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할 지라도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지나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시련은 상처의 시간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 시련이 변화와 은혜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 차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시간이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시편 121:5- 6). 세번째로 십자가를 순종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복종하신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때를 면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으나 주님은 다시 기도의 내용을 바꾸십니다. 27-28 절에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자신에게 고통과 죽음이 있는 십자가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일이라면 아버지의 이름을 위하여 순종하겠다고 기도하십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을 위해 영광을 돌리고자 하십니다. 해가 지구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해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이 우리가 인생의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중심이십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며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이며 우리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합당한 찬양과 영광을 돌립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영광을 돌리는 자리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 그의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만나고 감사하는 자리입니다. 죽음으로 소멸할 것같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은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죽은자 가운데서 일어나셔서 산소망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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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다른 두 사람
두 사람의 공통점은 참
많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어린 시절, 서울 상경, 신학 공부와 목사, 빈민들과 어울림, 민주화 운동과 감옥살이, 소설과 영화로
만들어진 삶, 대안적이고 생태적인 공동체 만들기, 수많은 사람들이 받은 감화와 변화, 심지어는 첫 번째 아내와 헤어지고 재혼한
것까지.
그러나 지금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다.
김진홍은 30여 년 전
악취 나는 청계천에서 미약하게 시작했으나, 지금은 번듯하게 변신한 청계천에서 창대하게 변신했다. 하지만 당시 그가 거닐던 청계천
둑길에 오셨던 예수님이 이명박과 김진홍이 함께 거닐고 있는 지금 청계천 둑길에 오실 거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목사로서의 특혜가
부끄럽다며 목사직을 버리고 농촌으로 돌아간 허병섭은 차가운 1월 화려한 도시의 어느 길목에 쓰러졌다가 발견되어, 한 달이 넘도록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다. 일주일 먼저 쓰러진 아내를 간호하다가 극심한 스트레스와 체력 저하로 갑자기 뇌에 손상이 온 것은
아닐까 의심할 뿐, 원인도 모른 채 한 달이 넘도록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화려함과 창대함은커녕 비참하고 초라한 노년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30여 년 전 청계천에서
사셨던 예수님은 지금 어디서 누구를 만나려 할까.
이 시대의 참된 목사를 찾아보기 원하는 수많은 죄인들은 지금 어디서 누구를
만나려 할까.
나는 한 알의 작은 밀알이 되어 죽고 썩어지려 하나, 창대하고 화려하게 번성하려 하나.
서머나 교회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칭찬만 받은 교회입니다. 그 교회에 사도 요한의 제자였던 폴리갑이 감독으로 있었습니다. 폴리캅 기념 교회에 폴리갑과 함께 순교한
자들의 성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는 19세기 말 불란서의 화가 레이몽 페레(Raymond Pere)가 그린 그림인데 순교의
현장에서 손이 묶어져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장면입니다.
폭스(Fox)가
쓴「순교사」의 글에 보면 당시의 박해와 고난이 얼마나 심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폴리갑은 당시 열번째 순교자로서 86세의
나이로 하나님 앞에 산 제물이 되었습니다. 로마의 총독이 늙은 감독으로서 특별한 대우를 하여 회심시켜 보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총독은 "네가 예수를 모른다고만 하라. 그리하면 풀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폴리갑은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할 수 없습니다
.
내가 주님을 믿고 살아온 86년 동안 주님은 나를 한 번도 모른다고 부인한 적이 없는데 내가 어찌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하여
주를 모른다고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하면서 화형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불길로 걸어가면서 "오, 주 아버지여 ! 나를
이곳에 적합한 자로 세워 주셔서 감사합니다."고 말했습니다. 불이 그의 몸을 태울 때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들이 나를 태우는 이
기회에 내 생명을 다해서 당신을 간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니 감사합니다."고 했습니다.
폴리캅은
초대교회 선교의 풍성한 열매가 맺어지기까지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덥고 독사와 악어가
들끓는 곳으로 이름난 '랑바레네'라는 곳에 서양 집도 아니고 토인들의 집도 아닌 40여 채의 자그마한 집들이 있습니다. 그 집들은
그 지방민들을 위한 병원으로서 알버트 슈바이처가 세운 것입니다.
알버트
슈바이처는 1875년 독일 알싸스 지방에서 태어나 26세 때 이미 철학, 신학, 음악의 세 가지 분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그리고 의학박사의 학위까지 네 가지의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1913년 그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가장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주 예수의 복음을 전하려 아내와 같이 아프리카를 향했습니다. 그곳에 이르러 그는 병원을 세우고 토인을
돌보아 주며 주의 복음을 전하기에 갖은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온 생애을 다 바쳐 아프리카 선교의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한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선교의
역사속에도 썩어지는 밀알이 되었던 순교자가 있습니다. 토마스목사입니다. 토마스 목사가 목선을 타고 1863년 9월 13일 황해의
거친 파도를 헤치고 다다른 곳은 백령도였습니다. 토마스 목사는 우선 이 섬에 상륙하여 약 2개월 동안 그곳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여 옹진 일대의 여러 섬들을 돌아다니면서 선교에 주력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주민들과 사귀는 일이었습니다.
토마스
목사는 이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예수님과 선지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주민들
중에는 처음부터 거부반응을 보이면서 토마스 목사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사람도 있었으나 적지 않은 전도의 열매를 맺었으므로,
이번에는 방향을 돌려 육지로 무대를 옮기기로 했습니다.
토마스
목사는 한국에서의 선교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황무지와 같은 한반도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임을 깨닫게 되자, 이 일을 잠시도 지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날로부터 토마스는 하나님께
전도의 길을 열어 달라고 기도하는 한편 지혜를 총동원하여 관헌들의 눈을 피해 가면서 황해도 서해안 일대에 복음의 씨를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1866년 8월 셔만호를 타고
대동강을 따라 평양으로 향했으나 관군의 저항으로 배에 불이 붙었습니다. 셔만호에 탄 선원들은 불을 피하려고 물에 뛰어 들었으나
언덕으로 기어오르는 대로 잡혀 죽임을 당했습니다. 토마스 목사는 기슭에 나와 덤벼드는 관군에게 성경을 꺼내 주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토마스 목사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저들은 무지하고
가엾은 인간이니이다." 순간 관군의 시퍼런 칼날이 토마스 목사의 목을 내리쳤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한국의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1927년 5월 8일 수천
명의 신도들이 모인 가운데 토마스목사의 추도 예배를 드렸으며 그를 기념하여 대동강 변에 조왕교회를 세웠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초대교회의 감독 폴리캅의 순교도 슈바이져의 헌신도 토마스목사의 순교도 모두 이 땅에 복음의 풍성한 열매를 맺게한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었던 것입니다.
지난
주일은 우리 교회의 창립36주년 기념주일이자 순교자 기념 주일이었습니다. 오늘은 순교자의 신앙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그래서 밀알의 신앙이라는 제목을 정해 보았습니다. 우리 교회가 예수님을 닮아 행복을 주는 교회가 되어지기 위해서 특별히 저와 성도
여러분들이 밀알의 신앙을 소유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밀알의 신앙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교회의 부흥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에 있는 어느 교회가 제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폭격을 맞고 크게 부서졌습니다.
마침 교회 안에
있던 예수님의 조각상도 파손이 되었으나 다행히도 두 손만이 떨어져 나간 체 보전되어 있었습니다. 성도들은 파손 된 이 조각상을
계기로 해서 이전보다 더 큰 교회를 세웠는데 어느 날 한 조각가가 파손 된 예수님 상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에서 우리가 없어진 두
손을 만들어 붙이자고 교회에 건의를 하였습니다. 그날 교인들이 모여 회의를 한 결과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우리는 조각상의 없어진
손을 다시 만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들이 예수님 손의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모두 주님을 향한 뜨거운
헌신과 섬기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위한 손이 되기를 기꺼이 자원했던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한 것도 그리고 우리 한국 교회가 부흥하고 발전한 것도 다 썩어지는 밀알처럼 자신을 희생하여 교회를
섬긴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밀알의 신앙을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또한 교회를 위하여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썩어질 밀알처럼 자기를 희생할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 한국 교회를
위하여 그와 같은 삶을 살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이 시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일군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밀알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속에 살아있는 신앙입니다. 한 알의 밀이 심겨지는 것보다 이전에, 또한 땅에서 자기를
희생하는 것보다 이전에 중요한 것은 그 속에 있는 생명입니다. 생명 없는 씨앗은 싹을 티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생명 없는 죽은 씨가 아니라 생명 있는 살아있는 씨앗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안에 있어야 할 생명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안에 있는 사람이 진정 열매를 맺는 신앙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목적하는 것은 예수 생명을 모든 사람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도 친히 십자가에서
자기를 희생하셨던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이 썩으므로 맺어지는 열매들 속에는 동일한 생명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그
씨앗들을 심으면 싹이 나고 많은 열매들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나라의 비밀입니다.
겨자씨가
심어져서 자라면 큰 나무가 되는 것도 그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안에 예수
생명이 있어야 섬김도 희생도 봉사도 충성도 모두 의미가 있고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 없이 행하는 섬김이나 봉사는
세상 사람들이 하는 봉사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교회의 부흥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이 된 성도들의 헌신과 섬김을 통해 교회에 부흥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내일의
부흥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이 되는 성도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부흥이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의 이름 없는
희생이 있어야 하고 누군가의 영광 없는 섬김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처럼 되어야 교회의 부흥을
기대할 수 있기에 모든 성도들이 밀알의 신앙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좋습니다.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아도 좋습니다.
물론
아무도 섬겨 주지 않아도 좋고요. 다만 우리의 하는 일들이 예수님의 가신 길을 따라가는 길이라면 우리교회 성도들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저 그 길을 따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 안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생명이신 그분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그 분이 내 안에서 생명의 씨앗이 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밀알 신앙은 자신을 희생하는 신앙입니다. 썩어지는 것은 곧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복음의 열매와 큰 역사는
남다른 희생과 헌신이 있을 때에 가능함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촛불은 흔적 없이 녹아질 때 더욱 밝은 빛을 나타내며 소금도
자체가 녹아 없어질 때 그 고유의 맛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세계 교회가 그러했고, 한국 교회가 그러했고, 각 교회마다 역시 남다른 희생과 봉사의 손길들이 있었기에
성장하여 왔음은 누구라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밀알 신앙을 소유한 성도들에게 있어서 얼마나 고난을 감내하느냐 보다는 얼마나
희생을 치르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단순히 고난을 감내하신 분이기보다는 기꺼이 희생을 치르신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빌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는 것은 희생하셨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러 오신 분으로서 지금 우리가 그
분을 믿음으로 누리는 구원은 우리 편에서는 값없는 은혜의 선물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하신 엄청난 희생의 결과입니다.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 말씀은 역설적 진리이며 진리 중에 진리입니다. 죽으면 삽니다. 살고자 하면 죽는 것입니다. 죽어야 한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희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본이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희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죽으심의 희생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도는 희생할 줄 아는 성도이어야 합니다. 내가 희생해서 많은 사람이 산다면 희생할 수 있어야 하며 내 자신이
죽어져서 가정이나 교회가 화평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특별히 내가 희생하는 것을 통해 교회가 바르게 성장한다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둘째로 죽는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나의 교만과 아집을 버리는 것입니다. 빌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여기 취한다는 말은 놓치지 않기 위하여 꽉 붙잡는다는 뜻으로서 자기주장을 강하게 고집할 때나 자기 권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을 때 쓰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나오는 형용어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까?
"여기지 아니하시고" 즉
예수님은 자기를 내세울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모습을 내세우지 않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가
진정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희생되는 밀알입니까? 그렇다면 자기를 주장하는 자리에 앉지를 않아야 하며 내가 왜 죽어야 하고 또 왜
썩어야 하느냐면서 거부하지도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기꺼이 자신의 모든 영광과 권리를 포기하셨습니다.
빌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자기를
비운다는 말은 물그릇을 쏟아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다 비우는 경우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의미의 빈
마음을 품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비우셨기에 마지막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땀과 물과
피까지도 다 쏟아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의 모습을 보면 예수님의 모습을 전혀 닮지도 못하고 자기 권리를 결코 양보를 하려고도 않습니다. 자기 주장이 너무나 강하고
고집이 아집이 여전히 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전히 내가 죽지 않고 살아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자기주장이 얼마나
강한지 조금만 내 권리가 침해되면 아파하고 분노하고 증오까지도 합니다. 이것은 죽지 않은 모습이요 비우지 못한 모습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교회에서 일을 맡은 직분자들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벧전5:3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내가
죽어 교회가 살고 성도가 살 수 있다면 기꺼이 죽어야 합니다. 아버지가 살아야 가정이 산다는 구호가 다른 의미에서는 아버지가
죽어야 가정이 산다는 말로도 표현 될 수 있습니다. 목사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는 말도 목사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는 말씀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에 자기를 부인하고 희생할 줄 아는 한 알의 밀알같은 성숙한 성도들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그 밀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셋째, 밀알 신앙은 순교자의 신앙입니다. 미국의 명문대학을 졸업한 5명의 젊은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 피트는 신혼
여행도 포기하고 에콰도르 선교에 나섰습니다. 5명의 선교사는 아내들을 후방에 남겨둔 채 경비행기를 타고 단 한 명의 기독교인도
없는 아우카 인디언마을로 떠났습니다.
1956.
1. 2. 피트 선교사는 아내에게 긴급무선을 쳤습니다. "흥분한 인디언들이 몰려오고 있다. 기도해 달라." 그 후 연락이
끊겼습니다. 이튿날 구조대원과 가족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5명의 선교사들은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었습니다. 복음을 거부한
인디언들에게 순교당했던 것입니다. 20대의 선교사 부인들은 울부짖으며 한 가지 다짐을 했습니다. "남편들이 이루지 못한 과업을
우리가 완수하자."
아내들은 모두 아우카 마을로
이사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40여년이 지난 지금 그 마을은 '복음의 땅'으로 변했습니다. 선교사를 살해한 5명의 인디언들 중
4명이 목사가 됐고 1천여명의 주민들이 모두 신자로 변했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순교자의
피위에 오늘도 하나님 교회가 세워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한알의 썩어진 밀알처럼 순교자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순교자의
신앙이란 기꺼이 하나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성도를 위해서 죽는 신앙입니다.
지금도
선교의 현장에서는 순교자들의 피가 뿌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순교해야 할 선교의 현장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교자의 신앙이 필요합니다. 순교자의 신앙은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며 순교자의 신앙은 내가 죽고 교회가
사는 것입니다. 순교자의 신앙으로 많은 생명을 살리는 풍성한 열매가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두리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밀알의 신앙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신앙입니다. 밀알의 신앙은 자신을 희생하는 신앙입니다. 밀알의 신앙은
순교자의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밀알의 신앙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한 알의 밀알이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었던 것처럼 여러분들의 희생과 섬김과 헌신과 충성을
통해 많은 열매가 맺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위해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처럼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서 생명이신 주님을 높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생명 가지고 자기를 낮추고 희생함으로
그리스도의 피 값을 주고 산 교회를 부흥케 하는 밀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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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판기를 통한 신앙
‘자판기 안의 스낵은 강철 코일에 감겨 있다. 그것을 꺼내려면 누군가 현금 투입구에 돈을 넣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도 비슷하다. 우리 구주가 자신의 피로 우리를 사실 때까지 우리는 죄의 사슬에 묶인 존재다.(고전 6:20)’
미국 캘리포니아 사우스랜드 교회의 수련목회자인 윌 앤더슨이 9일(현지시간) 기독교연합기구인 복음연합(The Gospel Coalition) 홈페이지에 게재한 기고문 ‘자판기에서 배우는 신학적 교훈 5가지’
첫째, 우리는 구원이 필요하다
앤더슨은 ‘인간은 눈을 뜨고 있으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찰스 스펄전(1834~1892) 목사의 발언을 언급하면서 자판기를 통한 건강한 신앙인의 자세를 제시했다.
둘째, 우리는 선택받은 존재
그는 “자판기에서 스낵을 구입할 때 원하는 것을 정확히 선택한 다음 키패드에서 숫자 등을 입력해야 한다”면서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무작위로 뽑지 않으신다. 이미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셨다(엡 1:4)”고 강조했다.
셋째, 쾌락을 조심하라
자판기 먹거리는 방부제와 지방, 당분으로 가득한 인스턴트 식품이 대부분이다. 눈은 즐겁게 하지만 영양가가
부족하다.(요 4:13~14). 그렇기 때문에 ‘생명의 떡’에서 멀어지지 말아야 한다(요 6:35)고 그는 강조했다.
넷째, 의로움을 과시하려는 유혹을 조심하라
그는 “트랜스 지방을 30% 줄였다는 감자칩이라고 해서 건강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그리스도인의 영양 성분에는 ‘100% 그리스도의 의’가 표시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다섯째, 세상의 것을 멀리하라
자판기 물품이 밖으로 나오려면 밑으로 떨어진 뒤 손에 쥐어진다. 엔더슨은 이를 두고 “교만의 단상에서 겸손한 곳으로
떨어지는 것”이라고 비유한다. 이를 통해 새로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으로 바뀌어야 한다(갈 2:20)는 것이다.
돌을 옮겨 놓으라
나사로의 사건에서 "소생"과 "부활"을 구분해야 합니다.
부활(復活, resurecction)이란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것처럼 다시 살아난 후에는 죽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소생(蘇生, revival)이란 나사로처럼 죽었다가 살아났지만 다시 죽은 것을 말합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
1. 믿음을 행동으로 보여달라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믿지 않는 강한 무엇이 나를 붙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돌을 옮겨 놓으라는 말씀은 불신을 제거하는 믿음을 행동으로 보여달라는 교훈입니다.
2. 율법을 옮겨 놓으라
돌은 율법을 상징합니다.
왜냐하면 십계명을 돌판에 새겨서 주셨기 때문이다.
사탄이 예수님에게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시험은 율법을 먹어보라는 것과 같은 시험이다.
율법으로는 사람을 살릴 수 없지만 돌을 옮겨 놓으면 율법을 치우면 죽은 사람이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율법을 어긴 사람을 돌로 쳐 죽이는 것은 율법을 어겼기 때문에 율법으로 처단한다는 것이다.
3. 죄를 치워라
돌은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나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 막고 있는 것은 "죄"라고 합니다.
돌을 옮기라는 것은 죄를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4.
예수님과 가족처럼 지냈던 마리아 가족 중 마리아의 오라버니인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예수님께서는, 이상하게도
곧바로 나사로에게로 가시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 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병이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그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주의 뜻을 행하심으로 인하여 영광을 받을 일이라고 하십니다.
15절에 보면 그 이유가 나와 있는데,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라고 하십니다.
당장 나사로에게 가시지 않은 것은 제자들을 위함이니, 이는 제자들로
하여금 진정한 믿음을 가지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치고 싶으신 것이 있었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무언가를 알려주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결국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과 뜻을 이루는 것을 보여주심으로써, 제자들이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경우는 이외에도 더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를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을 위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 불신을 제거하는 것
사실 우리 모두에게는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고 믿음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나라의 법인 ‘그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사실은 믿음의 문제이기 보다는 불신의 문제가 훨씬 더 큰 것입니다.
둘째,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
돌을 옮겨 놓았을 때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보여주기를 원하신 것이었습니다.
셋째, 나사로야 나오라
바로 그 무덤이 열렸을 때 예수님께서 큰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하고
큰소리로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역하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첫째는 불신의 제거, 둘째는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 셋째는 주의 뜻을 이루는 사역을 어떻게 하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불신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육신을 치유하는 능력자로만 인식하고 있을 뿐,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걸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불신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했을 때에 마르다는 “죽은 지
나흘이 되어서 냄새가 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마르다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있고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에는 예수님께도 하실 수 없는 일이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죽음의 권세(나흘이나 지나
냄새가 나는 죽음)는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흘 뒤에 오셨을 때에 마리아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죽기 전에 오셨으면 틀림없이 살릴 수 있는데 이미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죽음의 권세는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의 법칙을 뛰어 넘는
일을 행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불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 당시 유대에는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다시 돌아오기
위해 삼일 정도는 그 사람 주위를 맴돈다고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나흘이라는 시간은, 유대인의 생각에 의하면 완전히
죽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다시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 왜 삼일 뒤가 아니라 나흘 뒤에 가셨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바로 모든 인간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두 가지 불신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불신
둘째, 이 세상의 법칙을
붙드시고 만드시고 지금도 이끌어 가시는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에 대한 불신
죽음의 권세에서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불신은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이 두 가지 불신이 사라질 때 진정한 믿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지금도 붙들고 계십니다.
그분에게 있어서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네가 믿으면”(40절)
이 말씀은 다시 말하면 “불신을 제거하면”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천년 전에는 예수님께서 수많은 기적들을 일으키신 것은 쉽게 믿었지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은 하지만,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시는 것에
대해서는 의심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예수님인데 이천년 전과 이천년 후에 살고 있는 우리의 마음의 생각은 이렇게 엇갈려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두 가지 불신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의 불신이 사라지고 주님의 말씀을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의 불신하는 마음을 제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 마음의 불신이 제거되고, 그에 따른 믿음으로 행동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흑암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의 통치로 건너오는 유일한 길과 같은 것입니다.
믿음으로 우리의 인식을 바꾸는 것은 마치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나아가는 길이 열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로새서 1:13)
이것은 돌을 옮겨야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로 하여금 불신을 제거하고 믿음으로
영적 세계인 하나님나라로 통하는 문을 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돌을 옮기는 것은 예수님 때문이 아니라 바로 우리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의 의식을 바꾸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기적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나라가 도래했음을 알리고자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었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통해서 그 통치권이
회복되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그 나라로 침노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즉, 인간의 불신을 제거하심으로써, 새로운
인식 가운데 행동하도록 하고, 결과적으로 주의 뜻을 이루도록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돌을 옮겨 놓았을 때 예수님은 다음 단계의 믿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은 아들 예수와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 하나이며,
예수님은 자신의 일을 행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주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오신 것임을 알려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아들 예수님의 신적 권위, 이 두 가지는 전혀 충돌하거나 상호 훼손되는 일이 없으며, 온전히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가 아버지께 구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아버지께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뜻을 이루기 위한
간구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가 우리 이름으로 우리
생각대로 말하고 행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뜻을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의
말씀대로 주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구할 때,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행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주인인 삶을 사는 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하고 부르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는 뜻은, “나자레 듀로 엑소”입니다.
“나사로야 나오라!(Lazarus, come out!)”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동일하게, 우리에게도 “불신에서 나오라!”하고
큰소리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죽음의 세력을 깨뜨리는 능력의 말씀이며, 세상 신을 굴복시키는 능력의 말씀이고, 자연의 법칙을 통치하시는
능력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가 행하실 일들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아버지께서 행하셨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도 주의 뜻을 나타내는 삶을 살 수 있고,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가 깨닫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요14:12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요16:23-24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앉으시니라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막16:17-20
오늘 하나님나라의 질서를 보도록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 우리의 불신을 제거하고 새로운 의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둘째,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십니다. 셋째, 주의 뜻을 이루는 선포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의식이 바뀌면 하나님의 영광에 접속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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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라는 것은 성경에서 늘 율법을 상징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실 때에 돌에 새겨 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율법을 어긴 사람을 돌로 쳐서 죽인다.
그것은 율법을 어겼기에 율법으로 심판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금식하시고 시험을 받으실 때에 사탄이 말하기를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한 것도 그것이다.
돌로 떡을 만들라는 것은 율법을 사람이 먹을 수 있게 해 보라는 의미이다.
돌은 사람이 먹을 수 없다.
그것은 율법은 사람이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먹을 수도 없고, 율법으로 인하여 사람이 살 수도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핵심적인 것은 바로 그 율법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금식하시고 나왔을 때 사탄이 돌을 떡으로 만들어 보라고 한 그 때부터 예수님께서는 늘 율법의 기준과 논쟁을 하셨다.
그리고 그 율법의 기준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되었다.
그 논쟁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 사람을 향하여 죄를 사한다고 하신 것, 그리고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또 메시아라고 하신 것 그 모두가 다 율법과 예수님의 논쟁이었다.
유대인들의 가친관 안에서 그 논쟁의 핵심은 이것이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고, 율법의 조문을 어기는 행동을 하고, 세리와 창녀와 문둥병자들과 먹고 마시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인가?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에게 율법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사람 안에 있으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나, 생명은 없으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지키려 하면 스스로 자기 안에 생명이 없다는 것, 곧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법이었지만, 유대인들에게 율법은 사람이 부족하니 율법을 행동으로 지켜내면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그 유대인들의 가치관은 먼저,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사람의 모습이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한다고 자기 맘대로 하나님의 만드신 사람을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정의한 것이 죄고, 다음으로는 하나님을 사람이 행동으로 행한 공로로 의롭게 여기시는 신으로 치환하여 모욕한 것이 죄며, 마지막으로 사람의 겉모습, 곧 눈에 보이는 것이 본질이라고 여긴 것, 그것이 죄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관점을 하나님의 관점보다 더 의로운 것으로 여겼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이 율법이 완성된 존재라는 것을 알 수도 없었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들은 율법을 행위로 지켜내어 하나님의 의에 이른다고 하는 생각이 돌을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떡으로 만들어 보라고 한 사탄의 생각과 같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것이 어두움이고, 빛이 없는 것이고, 생명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그 어두움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앞에서 포스팅 한 글에서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남매들을 사랑하신 이유 중의 하나가 베다니라는 죄인들의 동네에 살고 있는 것 때문이라고 했다.
베다니나 나사렛과 같은 동네에 산다는 것은 당시 유대인들의 가치관, 율법의 가치관으로 보면 죄인들의 동네다. 세리와 죄인들과 창녀와 같은 이들이 사는 곳, 문둥병자가 있고, 온갖 병자들이 모여 사는 가난하고 더럽고 죄인의 동네였다. 즉 율법의 기준으로 볼 때 다 패자들이요, 죄인들이요, 율법의 기준으로는 살았다고 할 것이 없는 죽은 자들의 동네였다.
그런 동네에 예수님께서 늘 머무셨다. 왜냐하면 그 곳의 사람들을 죄인으로 규정하는 그 율법의 기준에 의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분이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율법으로 심판 받아 십자가를 지신 것은, 사람은 율법 앞에서는 늘 죄인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은 육신으로 지켜낼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율법으로 사람을 심판하면 누구나 죄인이 되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이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베다니와 같은 죄인의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이 그렇게 율법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한 사람들이었기에 예수님께서 그들과 머물렀고, 나사로를 사랑하신 것이다. 그것이 죄를 시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율법, 돌로 상징되는 그 율법으로 무덤을 막았다는 것이다.
다시 이야기해서 나사로가 시체인 것은 율법의 기준으로 시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사로의 죽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는 것이다. 영광은 나타난다는 의미인데,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죄인이 되어 죽은 사람이 된 자, 그리고 그것은 시인하고 순종하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보실 때 산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신 것이 바로 나사로를 살리신 것, 곧 부활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그 성품을 나타내시기에 그것이 영광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실 능력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시기 위한 퍼포먼스가 아니라, 율법의 관점, 세상의 가치관, 그리고 그런 가치관으로 보는 육신을 가진 사람을 보는 안목과 같은 것으로 볼 때 죽었다고 할 수 있고, 패자고, 건축자가 버린 돌과 같은 인생일지라도, 오히려 사람이란 그런 세상의 관점 앞에서는 죄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나, 자신들의 정체성이 그렇다는 것을 인정하고 죄인의 동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다고 하는 사람의 정체성을 가졌다고 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표현되다 보니, 세상의 법으로, 율법의 가치관으로 죽은 사람, 돌에 갇힌 사람을 구원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타나심인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다 보니 죽은 자가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돌을 치우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살아 있다고 하는 사람은 율법으로 가둘 수 없다는 것이다.
율법으로 죽은 자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기에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요, 그것이 예수님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이 그것을 확정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서 죄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육신의 삶을 죄인으로 여기고 부끄럽게 여기며 율법을 지켜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의 율법과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죄인이기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다. 육신을 입고 있으면 그럴 수밖에 없기에 육신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놋뱀과 같이 들리신 예수님의 그 모습을 보고서 자신도 그런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게 하시려고 그렇게 순종하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의 모습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게 만든 사람의 모습은 스스로 선악의 기준을 가진 사람들의 세상의 법으로 볼 때는 부끄럽고 죽어야 마땅한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그것을 인정하면 자신이 하나님이 만드신 목적을 인정하는 것이 되고,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 말씀이 그 육신으로 표현되는 사람, 즉 하나님이 보실 때 생명이 있는 존재가 되어 그 생명이 표현되는 삶을 사는 것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고 복음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육신으로 사는 자기 삶을 늘 부인한다. 항상 육신 이상의 능력을 보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노력한다. 그러다 안 되면 교회나 신전을 찾아서 신비한 능력을 구하고, 자기 육신으로 이루지 못할 본질도 아닌 세상의 일을 해결하려고 한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육신을 부끄럽게 여기는 아담의 모습이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돌로 가둔 율법이 자기 가치관인 사람들의 모습이다.
예수님께서 보시는 나사로는 자기 정체성을 인정한 사람이었다.
그가 인정한 자기 정체성, 곧 사람이 세상의 법으로 보면 죄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베다니에 살면서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여기시는 모습, 모든 인생에게 기대하는 모습인데, 그를 돌로, 율법으로 가두어 시체로 두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육신을 가진 자기 삶의 모습을 하나님이 지으신 그대로 인정하는 것을 죽음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구원과 부활은 바로 여기에 비밀이 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생명이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보시는 생명은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기에 만드신 목적 안에 있고, 그 목적을 표현할 때 비로소 생명이 있는 것이다. 시간을 알려고 산 시계가 시간을 알려주고 있을 때 살아 있다고 하는 것처럼. 그 생명이 있는 자는 율법으로 가둘 수 없다. 죽음 가운데 두실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성품인 것이다.
하나님이 보실 때 산 것이 어떻게 사람이 볼 때 죽어야할 기준 아래 죽은 자로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셨고, 예수님도 돌에 갇히실 수 없었던 것이다. 또 누구라도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었다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이고, 그것이 부활인 것이다.
주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서서 계시면서 연약한 여자에게 돌을 옮겨 놓으라고 명령하시었습니다.
사람의 할 일은 돌을 옮겨 놓는 일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냐 안하느냐에 따라서 생명과 사망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예수를 믿으라는 말씀에 순종하느냐 불순종하느냐의 여하에 따라서 생명과 사망이 달라지게 나타납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 예수님이 죽은지가 나흘이나 지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썩어서 냄새가 나는 송장이지만, 돌을 옮겨 놓으라는 말씀에, 마르다는 일단 사람의 상식을 주장하며 벌서 냄새가 나는데, 그런 말을 하지 말라는 뜻으로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상식에 어긋나지만, 말씀에 순종하여 돌을 옮겨 놓는 순종을 보일 때에 나사로가 살아나는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오늘 돌을 옮겨 놓으라는 주님의 명령의 의미를 찾아봅시다.
1. 죽음에서 생명으로 역전이 됩니다.
인간의 종말은 무덤에 들어가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육신적인 죽음만 아니라 영혼도 영원한 사망인 지옥으로 들어가는 일로 끝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 오셨습니다.
인간이 사망으로 마치는 것을 보시고 주님은 우리 앞에 오셔서 생명의 길을 얻는 부활의 길을 순종하는
사람에게 열어 주십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 는 말씀을 들은 인간들은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로 인간의 상식으로 대답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사람의 상식으로는 썩은 송장이 돌을 옮겨 놓는다고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인간의 합리적인 생각입니다. 이런 합리적인 생각을 인간은 항상 주장하며 살아갑니다.
암이란 병에 걸렸으면 죽어야 한다. 돈이 없으면 가난하다. 하는 것이 우리의 합리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 인간의 합리적인 생각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는 나의 합리적인 생각을 주장하기에 앞서서, 하나님의 권능을 믿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내 합리적인
생각을 죽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돌을 옮겨 놓는 사람이 될 때에, 말씀에 의지하여 행동하는 사람이
될 때에 생명의 기적을 얻게 됩니다.
예수를 많은 사람이 알면서도 믿지를 못합니다.
그 이유는 자기의 합리적인 생각을 떠나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를 믿지 못합니다.
예수가 내 죄를 담당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이 인간의 생각으로는 믿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000년 전에, 내가 태여 나기도 전에, 어떻게 예수가 내 죄를 위해 죽었단 말인가? 하는 합리적인 생각으로는 예수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을 버리고 순종하고, 그 말씀대로 믿을 때에는 구원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중국에서 지식 분자들에게 전도를 하면, 자기의 합리적인 생각 때문에, 유물론 때문에 예수를 믿지 못하고
구원을 놓치는, 생명을 잃는 사람을 많이 보게 됩니다.
우리의 합리적인 생각을 버리고, 돌을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순종함으로 옮겨 놓을 때에 사망이 생명으로
변화되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합리주의 신앙을 가집시다.
하나님의 입장을 따릅시다.
인간의 합리적인 생각에서 하나님의 합리적인 생각으로 바꿀 때에 생명을 얻게 됩니다.
성경은 이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전능을 따라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이고 믿음입니다.
내 생각을 따르고 주장하면 이것은 불신앙입니다.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입장을 따르는 자가 믿음이 있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기적을 불러오는 사람입니다.
성경에는 요나의 이적, 동정녀의 탄생,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등 많은 인간의 상식을 벗어난 기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하나님의 합리적인 전능하심으로 믿을 때에는 모든 것이 쉽게 풀어집니다.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은 사람의 합리적인 생각을 버린 사람이요, 예수를 잘 못 믿는 사람은 자기의 합리적인
생각을 주장하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25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주여 그러 하외다” 하면서 하나님의 합리를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내 이성에 따라서 믿을 수가 없나이다. 라고 대답 할 때에는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성도가 예수에 대한 고백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 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니이다 하고 고백하는 베드로의 고백과 같은 사람이 있고,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등 다른 선지자의 하나로 고백하는 반신반의하는 고백도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을 때에 나의 합리적인 생각을 버리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돌을 옮겨 놓는 행함이 따라오게 되고 그 결과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3. 돌을 옮겨 놓으면 생명이 시작됩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오라비 나사로의 인생은 끝이 난 것으로 알고 비애와 절망에 빠졌습니다.
인생의 삶이 70년, 80년으로 끝이 나는 줄로 아는 사람은 절망과 비애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인간의 무능으로 끝이 나게 하시지 않고, 믿음으로 돌을 옮기는 자에게 새로운 생명의 삶을
시작하게 하십니다.
돌을 옮겨 놓는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뜻이 있습니다.
1. 주님의 말씀을 믿는 자가 돌을 옮겨 놓습니다.
2.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돌을 옮겨 놓습니다.
3. 고집 부리고 안 믿고 자기의 생각을 주장한 사람들이 불순종을 회개하는 마음으로, 회개하는 사람들이 돌을 옮겨 놓습니다.
요나가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고 할 때 요나의 인생이 끝이 난 것으로 생각했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요나를 다시 살려서, 새 생명을 얻고 니느웨를 회개시키는 구원의 역사를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2장 11절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마리아와 마르다는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서 복음을 크게 전파하는 일을 생각도 못하였지만, 나사로 때문에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역사하시었습니다.
우리 인간이 끝장이라고 포기 할 때에 주님은 그 사람을 능력으로 다시 살려서 새 생명의 역사를 할 때가
있습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 할 때에 믿고 순종하고 옮겨 놓으면 병들어 죽어 가던 육신이 새 생명을 얻고, 망해 가던
사업이 다시 일어나고, 꺼져 가던 불이 다시 활활 타오르는 기적이 나타납니다.
믿고 순종하면 반드시 새 생명의 역사가 돌을 옮겨 놓는 자에게 나타납니다.
4. 돌을 옮겨 놓으라는 말씀에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내 스스로를 위하여 돌을 옮기는 수고가 있어야 기적이 나타나는 법입니다.
내가 내 믿음을 주님께 보일 때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내가 수고하여야 다른 사람이 생명을 얻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썩어져 죽을 때에 많은 열매가 맺힙니다.
내가 믿고 순종하고 돌을 옮기는 수고를 함으로 내 형제가 살아납니다.
내가 믿고 순종하고 주님 말씀에 따라서 돌을 옮기는 수고를 하면 내 자손이 복을 받습니다.
5. 돌을 옮기는 것은 하나님과 나 사이를 막고 있는 것을 치우는 것입니다.
이사야 59:1-2
죄가 바로 나와 하나님 사이의 돌입니다.
사망을 이루는 죄가 돌이 되어 우리를 사망의 굴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회개 할 때에 하나님과 나 사이의 사망의 돌이 옮겨지고 생명의 부활이 나타납니다.
이사야 59:1-2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어제나 오늘이나 하나님의 능력은 동일합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돌(죄)이 없어야 주님의 능력으로 생명 주시는 이적이 베풀어집니다.
돌을 옮깁시다.
회개함으로, 믿음으로, 순종함으로 돌을 옮기면 하나님의 큰 영광의 기적이 오늘도 나에게 나타납니다.
나의 합리적인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합리적인 생각을 따를 때에 죽은 자가 생명을 얻는 기적이 나타나는 복을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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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아가도스'와'칼로스'
예수님의 비유 제7강 소금과빛 중에서....(본문요약)
'착한'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는 헬라어로 '아가도스'와'칼로스'입니다.
둘은 혼용해서 쓰이기도 하지만 '칼로스'라는 단어가 훨씬 폭 넓고 깊은'선'을 가리킬때
자주 쓰이는 단어입니다.
(칼로스는 선과악 구조의내용을 품은 선으로 그 칼로스로 아가도스의 참 선으로
이해 되어 진다면 선도악도 아닌 그 참 선으로 하나되는 그 깊은 '선'을 의미합니다.)
(요10:11) 나는 선한(칼로스G2530-가치있는)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빌 1: 6) 너희 속에 착한(아가또스G18)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니
* 예레미야스에 의하면 그 두단어는 서로 혼용해서 쓰였던 단어입니다.
성도의 착한 일,성도의 착한 행실은 세상의 선악기준에 의한 착한 일이라기보다
예수님의 착한 행실,혹은 예수님의 착한 행실에서 기인한,성도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착한 행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그게 빛과소금의 삶입니다.
예수님의 착한행실은 이 세상속에서 순종으로 비움으로 자기부인으로 십자가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착한 행실에 의해 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성도의 삶 속에서 바로 그 새 창조의 행위 자기부인과 순종으로 지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 과정
그게 하늘나라 백성들의 세상 속 착한 행실입니다.
(행 10:38)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바로 이 예수의 착한 일이 성도에게서 그대로 재현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빛과소금의 삶,착한 행실은 자기를 부인하고,수난의 삶을 통과하며,
하나님의 새 창조 역사에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성도의 착한 행실,순종의 착한 행실,십자가의 착한 행실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지면,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는 말입니다.
즉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상태를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성도의 삶 속에서 가입을 하여 세상은 도처히 감당해 낼 수 없는
인내와 수고와 섬김과 순종의 삶이 성도의 삶에서 드러나게 될 때
거기에서 하나님의 영광,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세상에 증거 되는 것입니다.
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드러나는 삶,그 삶이 바로 착한 행실이고 빛과소금의 삶인 것입니다
(마5:14-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나는 선한 목자
예수님은 선한목자가 되십니다.
선한목자의 생활은 양들과 함께 들판에서 잠을 자고 함께 일어납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양을 먹일 때 넓은 들판에서 양을 먹입니다.
저녁이 되면 양들을 우리 안으로 들어오게 합니다.
우리라고 하여 울타리가 높은 곳이 아니라 양의 발에 걸리기만 하는 작은 돌입니다.
이렇게 양의 주위에 작은 돌들을 빙둘러 놓은 후 돌이 없는 부분은 목자가 누워서 잠을 자는 잠자리가 됩니다.
양은 발에 걸리는 것이 있으면 절대로 넘어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침이 되면 목자가 일어나면 그 자리가 양의 문이 됩니다.
양들은 그 문으로 나와 또다시 들판의 풀을 뜯습니다.
선한목자가 양들과 함께 눕고 일어나기 때문에 양들을 공격하는 사나운 들짐승을 곧바로 쫓아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삯군목자는
예수님 당시 백성의 지도자였던 바리새인들이나 장로들, 대제사장들은 이스라엘의
‘목자’였습니다.
그들의 사명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말씀으로 잘 양육하여 오실 메시아를 소망하며 살도록 가르치는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참 목자가 되지 못하고 절도와 강도요 삯군 목자가 돼 버렸습니다.
백성의 영혼을 상하고 죽이는 강도같이 됐고, 오직
삯을 위해 일하는 삯군이 됐습니다.
에스겔 34장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목자들이 양은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배만 채우고 살찐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로 옷을 만들어 입는다고 탄식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친히 양의 목자가
되셔서 흩어진 양을 모으고 잃어버린 양을 찾으며 상한 양을 싸매주며 병든 양을 강하게 하고 양들을 먹이겠다고 말씀하십니다(겔
34:12).
목자가 양 가운데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찌라.
바로 그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시려고 이스라엘 가운데 목자가 찾아왔습니다.
거짓 목자가 판을 치며 양의 생명을
약탈하는 곳에 참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바로 “나는 선한 목자”라고 선언합니다.
다윗이
시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 찬양했던 그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제 양도 아니라 이리가 오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고
했습니다.
선한 목자는 자기 양을 사랑하기 때문에 맹수가 오면 생명을 걸고 싸워 양들의 생명을 지킵니다.
그러나
삯군은 품삯이 목적이기 때문에 품삯 때문에 자기 목숨을 버리지는 않습니다.
바리새인이나 당시의 지도자들 대부분은 삯군이었습니다.
여기서 삯군은 단순히 삯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삯을 목적으로 일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들이나 레위인들이나 백성을 위해
일하는 자들에게 그 몫을 다 정해주셔서 생활대책을 다 세워주셨습니다.
자기 생활수단을 위해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봉사함에 전념하도록 그들의 생활을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께 봉사하고 백성의 영혼을
사랑함에는 관심이 없고 돈에만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목회자로 살아가는 내게도 똑같은 문제가 놓여 있음을
봅니다.
나는 좋은 목자가 될 수도 있고 삯군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교회가 목회자에게 주는 사례는 품삯이 아니라 생활비입니다.
목회에만 전념하도록 그 생활을 교회가 책임져 주는 것입니다.
목사가 목회에 전념하지 않고 딴일 보기에 바쁘면서 생활비에만 마음을
둔다면 삯군 되기 십상일 것입니다.
삯군은 이리가 오면 달아나겠지요.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말씀 앞에서 ‘나는 예수님을 따르는 선한 목자로
헌신하고 있는가’라고 물어보면서 주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주께서 나를 아시듯, 나도 맡겨진 양을 알고, 그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의 길을 가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나는 지금 선한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을 따르고 있는가 물어봅니다.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 / 나는 .....이다
요한복음에는 공관복음서에서 보기 힘든 특별한 형식의 문장이 여럿 나옵니다.
그중의 하나가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 문장입니다.
그 뜻은 “나는 … 이다.”입니다.
요 6:35절에 나오는 “나는 생명의 떡이다.”
요 10:7절의 “나는 양의 문”
요 14:6절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
오늘 본문에는 “나는 선한 목자라.”(Ἐγώ εἰμι ὁ ποιμὴν ὁ καλός)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원문을 충실하게 번역하면 "나는 그 선한 그 목자"라고 하겠습니다.
11절과 14절에 반복됩니다.
듣기에 따라서 “나는 선한 목자다.”라는 문장이 어색해 보이기는 합니다.
자기를 스스로 높이는 듯이 들리니까요.
이런 표현은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고백으로 보는 게 옳습니다.
복음서에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또는 그리스도로 칭하는 표현이 종종 나오지만 그런 표현도 예수님이 직접 발설하신 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내서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눅 7:19)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그래, 내가 바로 메시야다.”라고 대답하지 않으시고, 메시야의 일을 증언하셨습니다.
마 16:13~20(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따르면 예수님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인정하셨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는 “선한 목자”라는 신앙고백이 무슨 뜻인지를 따라감으로써 요한복음 기자의 신앙을 배우려고 합니다.
거기서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람을 비롯한 당시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 대부분은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적 전통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종교 전통을 배척하면 기독교 신앙이 성립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적 전통에는 하나님을 목자로 보는 견해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유목민으로 살았기에 목자와 양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설명한 것입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앞에서 ‘성시교독’으로 읽은 시편 23편이 그런 자료 중의 하나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짧은 시편입니다.
마지막 6절은 이렇습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이스라엘 백성은 힘든 세월 가운데서도 목자이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붙들고 살았습니다.
이런 전통 가운데서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님이 바로 구약이 말하는 선한 목자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현대인에게 이런 목자 개념이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오해되는 이유는 자신들의 실존이 양이라는 사실을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온순하거나 의존적으로 보이는 게 싫다는 겁니다.
자기의 분명한 주관을 세우고 기세등등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기독교 신앙이 인간 삶을 수동적으로 만든다는 비판은 지난 역사에서 많이 발생했습니다.
인간의 생명력을 약화하는 반(反)생명적인 종교라고 말입니다.
그건 오해입니다.
아무런 판단 능력도 없이 의존적으로, 일종의 노예 심리에 물들어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목자와 양이라는 표현은 목자를 향한 양의 전적인 신뢰를 강조하는 개념입니다.
여기서 목자를 절대 생명이라고 바꿔서 생각해도 됩니다.
돈이 아니라 절대 생명만 신뢰하고 순종하는 사람은 생명을 충만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기쁨과 해방과 안식이 충만하다는 뜻입니다.
이런 삶의 태도는 주변의 다른 말에 솔깃해하지 않기에 실제로는 가장 강력합니다.
11절 - 목숨을 버리는 목자
예수님이 선한 목자인 근거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에고 에이미” 문장을 중심으로 볼 때 두 가지입니다.
먼저 11절입니다.
에고 에이미 호 포이멘 호 칼로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
선한 목자는 자신의 양이 늑대나 이리의 공격을 받을 때 자기 목숨을 걸고 싸웁니다.
이런 일들이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종종 일어났습니다.
개들이 있으면 도움이 되겠지만, 당시에는 그런 도움을 받기도 힘들었을 겁니다.
목자 중에는 삯꾼이 있습니다.
그는 고용된 사람입니다.
그의 관심은 양이 아니라 돈입니다.
그는 기계적으로 양을 돌보기에 양이 위험에 빠졌을 때 자기 목숨을 걸고 양을 구해내지는 않습니다.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의 죽음이 우리에게 현실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의 죽음이 우리의 운명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요즘 젊고 지성적인 기독교인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도 이런 데에 있습니다.
자신들이 노력해서 좋은 직업을 얻었고, 집도 장만해서 재미있게 꾸려가는 자기들 인생에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끼어들 틈이 전혀 없는 겁니다.
지금 예배드리고 설교를 듣는 여러분은 예수님이 여러분을 위해서 목숨을 버렸다는 말이 실감 납니까?
그래서 그걸 생각할 때마다 고맙고 감격스럽습니까?
아니면 남의 일입니까?
이 문제를 실감하려면 우리는 2천 년 전 그 당시에 일어났던 사건을 오늘 우리의 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미 잘 알고 있는 기독교 교리의 초보를 잠시 설명하는 걸 이해해주십시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정도로 하나님과 일치된 분이었습니다.
기독교 전통은 예수님이 출생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보았습니다.
여러 아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아들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보이는 형태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후 4:6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어떤 사람을, 연인이라고 해도 좋고 친구라고 해도 좋고 사제 간이라 해도 좋은데, 진심으로 사랑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그 사람을 통해서 사랑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의 예수 경험은 이런 우리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사랑 경험의 극치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신적인 사랑과 생명의 능력을 예수님에게서 경험한 겁니다.
예수님은 삼십 대 초반의 나이로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제자들은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분하고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만 생각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할 지점은 다음입니다.
그를 배척하고 죽게 한 이들은 유대교 산헤드린 의원과 예루살렘 주민들과 빌라도 로마 총독과 그 총독의 명령에 따라서 십자가형을 집행한 로마 군인들만이 아니라 바로 우리입니다.
오늘 우리도 그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세상을 삽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진리를 분별하지 못합니다.
희생양을 찾습니다.
때로는 악을 꾸미고 모함하고, 죄가 없는 이의 고난과 죽음을 외면합니다.
여기서 자신은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의 죽음에 우리 모두 직간접으로 연루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인식하고 인정할 때만 예수가 선한 목자라는 사실이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14절- 양을 아는 목자
예수님이 선한 목자인 두 번째 근거는 14, 15a절입니다.
첫 번째 근거보다 이 두 번째 근거가 더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에고 에이미 호 포이멘 호 칼로스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
양을 안다고 할 때의 그 단어 “안다”는 헬라어 “기노스코”의 번역입니다.
기노스코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단순하게 그 사람이 누군지 알거나, 세상에 대한 지식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특별한 경우에는 성적인 관계를 포함합니다.
상대방을 아주 깊이 안다는 뜻입니다.
목자가 양 한 마리 한 마리를 깊이 알듯이 예수님은 제자들의 중심을 알고 계셨습니다.
자신을 배신할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말을 듣고도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했으나 나중에 깨달았습니다.
제자들 자신도 자기가 누군지를, 즉 자기 정체를 몰랐던 겁니다.
바꿔말해 예수님을 통해서만 우리는 우리가 누군지를, 즉 양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대목에서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양이 목자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려면 목자가 누군지를 알아야 합니다.
사람 사이의 모든 관계가 깊어지려면 서로가 깊이 알아야 하듯이 기독교 신앙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필수입니다.
안다는 말은 여기서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실제로 예수님이 누군지를 신학적으로 깊이 있게 안다는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친구처럼 가깝게 느끼는 차원입니다.
이 두 차원은 구분되지만 분리되지는 않습니다.
그런 신학적인 앎이 없으면 기독교 신앙이 건강해질 수 없습니다.
간혹 기독교인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관심이 크지 않고 교회 활동에만 관심이 큰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와의 관계는 깊어지지 않고 자기의 종교적 열정만 왕성해집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지만 예수님 자체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습니다.
그런 신앙생활이 습관이 되면 결국은 신앙의 공백 상태에 떨어집니다.
평생 목사와 장로로 살아도 영적으로는 메말라갑니다.
예수를 깊이 알려면 신학 공부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일반 신자들이 신학을 공부하기는 물론 쉽지 않습니다.
신학 공부가 어렵기도 하고, 더 핵심적으로는 신학적인 문제는 몰라도 신앙생활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C.S. 루이스는 소위 평신도인데도 신학자 못지않게 신학적인 내공이 깊습니다.
우리가 루이스처럼 될 수는 없어도 그 방향이 옳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어야겠지요.
여기서 양이 목자를 안다는 말은 예수님과의 관계에 집중한다는 뜻입니다.
거기에 온전히 집중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출가 수도사들입니다.
아주 가까운 친구나 도반처럼 관계를 맺는 겁니다.
우리는 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살지 못하나 기본적으로 그 수도사들의 영성은 따르는 게 옳습니다.
일종의 재가 수도사처럼 사는 겁니다.
수도사 영성은 자신에게 닥치는 모든 일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받아들이는 삶의 태도입니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로 일희일비하지 않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깊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아는 깊이만큼 우리는 그 하나님의 통치를, 즉 생명의 능력과 신비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바로 그런 앎의 과정입니다.
그런 앎의 과정을 기쁘게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분을 통해서 제시해준 생명의 길이 보일 겁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를 선한 목자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선한” 목자(호 포이멘 호 칼로스)라고 표현했습니다.
삯꾼 목자가 아니라 선한 목자입니다.
선하다는 말을 착하다는 뜻인가, 하고 대수롭잖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선하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한 후에 나온 말과 통합니다.
창 1:12b절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입니다.
19절, 21절, 25절에도 나옵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뒤에는 한층 강조된 표현이 나옵니다. 31절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우리는 심히 좋다거나 선하다는 말을 주로 자신에게 유익한지 아닌지만을 기준으로 생각합니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가 자신에게 무엇이 유익한 일인지를 근본적으로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창조 세계를 보십시오.
지구 안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들의 유익이 충돌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선한 목자라는 말은 그가 우리에게 생명을 준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 구절인 요 10:10b절에서 요한복음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생명을 풍성히 얻는다는 말도 눈에 보이는 건 아닙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세상 사람과 우리 기독교인의 삶이 크게 달라 보이지도 않습니다.
비슷한 일로 힘들어하고 비슷한 일로 즐거워합니다.
부부 사이도 그렇습니다.
자기 남편은, 혹은 자기 아내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생명을 풍성히 누리는 사람 같다고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믿지 않는 사람이나 별로 다른 점이 없다거나, 더 못하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사람들이니 그런 일로 너무 실망하지는 마십시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풍성하게 누리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생명의 본질이 아닌 일에 치우쳐 산다는 데에 있습니다.
생명의 본질이 아닌 일은 한 마디로, 자기를 높이는 것입니다.
요즘 용어로 성취 욕망입니다.
이에 대한 불안감이 우리 삶을 옥죄고 있습니다. 자기 성취 외에 인생의 다른 의미가 있냐, 하고 질문할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여러분, 피조물인 우리 인생에는 자기 성취라는 단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생명의 주인은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아닌데도 주인 행세를 하려다 보니 온갖 문제가 발생합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잘 이해하고 있다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가끔 나를 향한 누군가의 오해앞에 저 사람은 나를 잘
모르는 것 같다 또는 어떤 사람의 행동앞에 언어앞에 저 사람은 자기를 잘 모르는 것 같다 합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여러분이 알고 있는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어야 한다 생각하십니까?
우리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에 대해 잘 알고
계셨습니다.
어떻게 오셨는지 왜 오셔야 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사셔야 했는지 어떻게 죽어야 하는 지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이렇게
우리 예수님은 자신을 잘 아셨을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려 주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오늘 본문을 통해 나는
선한 목자의 이름을 통해 나는 선한 목자란다 하십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의 이름을 통해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한가?
어떤 마음으로 사역을 감당하게 될 것인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우리 예수님은 이렇게 자신을 소개하며 소개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선한 목자의 마음을 가지고 선한 목자의
모습으로 사역을 감당함에 모범을 보이시면서 우리에게도 선한 목자의 마음을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선한 목자의 삶을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선한 목자의 신앙을 사역을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교회공동체 안에서도 가정공동체 안에서도
선한목자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선한 목자가 기대하는 선한 목자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말씀을 근거로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이 기대하는 선한 목자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선한목자는 양을 잘 알고 잘 이해하고 있는 목자입니다.
14절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입니다. 내가 내양을 알고 선한 목자는 양들에게
절대 필요가 되어 준다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은 양들의 연약함을 잘 아십니다. 그리고 양들의 연약함은 주님의 자녀 된
성도들의 연약함이기도 합니다. 이 비밀을 알고 있는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만 되어주신다면 자신은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양을 길러본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양에게 필요가 되어 주었던
사람입니다. 죽은 양이라도 사자의 입에서 건져내 올 정도로 양에 대한 애착이 깊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선한 목자앞에 양은 어떤
모습입니까? 양은 대체로 시력이 약합니다. 2-3미터의 앞을 분간을 못할 정도로 약한 시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내일을 모르는 인생입니다. 아니 잠시 후도 모르는 인생인 것입니다. 무엇인가 내일을 아는 것처럼 자기 뜻대로 살아보지만 금새
구렁텅이에 빠질 뿐입니다. 큰 소리를 치지만 별 것 없습니다. 또한 양은 소화기능이 약합니다.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쓰러집니다.
그래서 선한목자는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야하는 것입니다. 말 한마디 하나도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하는 인생들입니다. 밀려오는 유혹하나
소화해내지 못하는 인생들입니다. 그래서 늘 상처투성인 인생들인 것입니다. 자녀, 부모, 회사, 사업등 모든 것이 무거운 짐으로
다가와 쓰러지면 못 일어나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을 목자로 삼고 살겠다는 고백을 한 것입니다. 목자 되신
하나님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은 목자가 알아서 해줍니다. 또한 양은 털이 길고 엉켜있어 기생충과
온갖 해로운 곤충의 위협으로부터 노출이 되어있습니다. 목자가 제때에 털을 깎아주지 않으면 그 고통을 해결할 방법은 양에게는
속수무책인 것입니다. 인생의 문제를 다 해결할 것 같이 큰 소리를 치지만 아닙니다. 선한 목자이신 주님이 나를 안다는 것은 내가
너의 필요가 되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의 인도자가 되어주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의 상처를 치료하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주겠다는 것입니다. 선한목자는 양을 필요로 삼기 위해 양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양의 필요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보혈을 흘리기까지 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저와 여러분을 이용하시는 분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의 필요가 되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선한목자는 양도 선한목자를 안다합니다. 나의 필요가 되어 주시는 목자를 안다합니다. 나의 필요가 되어 주시는 주님을
안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나의 필요가 되어 주시는 선한 목자를 믿는다면 나의 연약함으로 인해 약해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선한목자라 하심은 너희는 예수님이 없이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양들은 선한목자를 외면한 채 각기 제 길로
갔습니다. 그래서 사53:6절에서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거늘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자꾸만 선한 목자이신 주님보다
제 갈 길로 간다는 것입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자기 욕심에 이끌려 적당히 타협하며 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가정에서
선한 목자 형 지도자는 서로의 필요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요구하며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필요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 목사가
선한 목자형 목사라면 성도에게 필요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요한사도는 요삼4절에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합니다. 회사에 들어가도 사람이 선한 목자형의 사람이라면 월급부터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 회사의
사장에게 필요가 되리라 하는 것입니다. 알고 보면 사장하나 기쁘게 못하는 것도 은사입니다. 선한 목자형 성도는 교회에서 내가
목사에게 필요가 되어야지 합니다.
선한목자는 힘이 없는 연약한 양에게 더 많은 애정을 주는 목자입니다.
3절에 선한목자는 각각 자기양의 이름을 부른다 했습니다. 목자가 양을 대할 때 양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한 마리라도 소홀히
여긴다면 참 목자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 마리 한 마리에 관심을 두는 선한 목자 예수님은 99마리 양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에 더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선한목자형 지도자는 하나를 소중하게 압니다. 작은 것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작은 시간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연약하고 소외당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둡니다. 선한목자이신 주님은 하나하나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나를 잊으셨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지하에서 식사하면서 한 성도님이 말하시길 교회가 더 부흥되면 목사님 보기가 힘이 드니 목사님 앞에서 식사하자 합니다.
염려마십시오. 목사는 혹 그러하여도 주님은 한명 한명에게 관심을 두고 계십니다. 그리고 내가 너를 안다 내가 너의 필요가 되어
주겠다 합니다. 우리교회 성도들이 선한 목자의 마음을 갖는다면 한사람 한사람을 소중하며 여겨야 합니다. 주님은 99마리를 잊은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한 마리에 마음을 둡니다. 자식을 둔 부모가 생일을 맞이했는데 하나가 연락도 없이 못 왔습니다. 자식들은
우리끼리 즐기자합니다. 그러나 부모의 마음은 참석을 못한 연약한 자식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유명한 양과 목자의 그림을 보면
선한목자는 양무리와 함께 갑니다. 그런데 유독 주님의 품에 안긴 어린양이 있습니다. 이것은 특별히 사랑하는 양을 안고 가는 것이
아니라 가장 연약한 양을 안고 가는 것입니다. 이때 어리석은 양들은 주님이 저놈만 안고 가니 쫓아내리라 합니다. 교회에서 목사도
소외당한 것 같은 사람이 늘 걸립니다. 교회에서도 함께 모여 즐겁고 좋아하는 무리보다는 늘 혼자 있는 듯 하는 사람이 마음에
걸립니다. 선한목자형 지도자는 주일 날 예배후에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나중입니다. 홀로 왔고 이름도 없고 연약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쏟게 됩니다.
선한목자는 생명을 더 귀하게 여기고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하는 목자입니다.
선한목자되신 주님은 언제나 일보다 사람을 귀하게 아셨습니다. 주님은 더 큰 일을 하겠다고 사람을 상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을
아프게 하지 않았습니다. 일을 다 잘하기 위해 제자들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선택을 소중하게 아셨습니다. 선한목자이신 주님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제자들을 이동한 것이 아닙니다. 선한목자이신 주님은 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해 누군가를 이겨먹고 죽이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기다려주고 키우고 살리고 주님은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들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사회정의를 위해 돌을 들 때 저를 귀하게 여겼습니다. 주님은 사마리아여인을 귀하게 여기고 만나 주셨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주님은 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해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주님자신이 죽으셨습니다. 교회나 가정에서 선한
목자형 지도자는 일보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가정에서 돈보다 아내 아이들이 소중합니다. 교회에서 더 큰 일 더 잘하기
위해 누군가를 상하게 함은 선한 목자형 지도자가 아닙니다. 목자형 지도자는 아닙니다. 큰일을 못해도 좀 천천히 해도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가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영혼을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을 보더라도 선한목자이신 예수님은 3년반동안 많은 일들을 하셨습니다. 바다를 잔잔케 하시며 죽은 자를 살리시고
그러나 냉정하게 따져보면 주님은 하신 일보다는 하시지 않은 일일 더 많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전능자였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움직일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일까요? 예수님은 목적이 있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영혼 살리는 것이었기에 만가지를 다 하실 수 있었지만 십자가를 선택하셨습니다. 주님은 영혼을 가장 소중하게 아는 선한
목자이셨습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다 떵떵 거릴만큼 부자가 되길 바랍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고급차를 타고 다닐만큼 능력이
되길 바랍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100평도 넘는 집에서 살 수 있는 능력이 있길 바랍니다. 호피무늬 코트도 입고 자가용
비행기도 갖고 전국에 별장을 갖고 살만한 능력 있는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 그러나 성도의 진정한 능력은 그런 것을 거절하는데
있습니다. 선한 목자형성도의 관심은 무엇을 누릴 것인가가 아니라 주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영에 더 많은 관심이 있습니다.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지만 영혼을 소중히 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돈보다도 영혼이 중요합니다. 교회를 세우고 교회학교 젊은이에게
투자되는 돈이 하나도 아깝지 않게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길 바랍니다.
선한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버림’의 본을 보이십니다.
11절에서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거니와 입니다. 선한목자는 희생정신이 있습니다. 선한목자이신
주님이 먼저 희생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양들을 위해 죽을 줄 아는 것이 선한 목자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증거를 부자 되고
건강하고 출세하는 것으로 증명하려 한다면 삯군일 수 있습니다. 철저하게 자신의 이익으로 기독교를 증명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삯군에게 목적은 주님도 아니요 양도 아닙니다. 오직 자기입니다. 선한목자는 희생을 통해 죽음을 통해 증명하는 것입니다. 가끔
삯군 같은 성도들을 봅니다. 세상의 방법과 똑같습니다. 세상에서 그렇듯 무언가 휘둘려고 합니다. 자기 세력을 모아 힘자랑하려
합니다. 삯군입니다. 무엇인가 환경에 결과가 나서 내가 예수를 잘 믿는 자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오늘 믿음의 싸움을 싸우고
있음이 귀할 것입니다. 선한 목자 형 지도자는 앞서갑니다. 모범을 보입니다. 15절입니다. 죽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는 잃어버린
양을 불타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에 들지 아니할 양들 저들을 인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소중한 것만큼 우리밖에 잃어버린
영혼에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 주님의 양이 있고 교회밖에는 주님의 양이 있다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의 마음에는 나만
잘하고 나만 좋은 것이 아닙니다. 돌아와야 할 양 들이 명단을 가슴에 품고 있습니다. 낙심해 있는 양들의 명단을 가음에 품고
있습니다. 나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선한 목자는 한번도 만나지 않았지만 알지도 못하지만 저들 영혼에 대한 거룩한 부담이 있습니다.
성도님들에게 바로 이런 선한 목자가 되길 원합니다. 우리교회가 우리끼리 좋아서는 아니 됩니다. 성도가 나만 편하자 하면 안
됩니다. 무너지는 소리입니다. 선한 목자이신 주님은 여러분이 선한 목자가 되길 바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이
크게 외치셨습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양인데 주님이 우리의 문이 되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
하신 주님을 여십시오. 주님을 구하십시오. 주님을 찾으십시오. 다른 문에서 그만 서성거리십시오. 세상에 그만 속으십시오. 우리를
위해 묵숨 까지 버리신 십자가의 사랑 주님은 자신을 고백합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
한 가지 아는 것
아는 것이 힘이다!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의 주장에 의한 격언입니다.
라틴어로는 "scientia potentia est"
영어로는 "knowledge is power"라고 합니다.
모르는 것이 약이다!
영어로는 "Ignorance is bliss"
두 격언과 속담의 기준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할 때 적용되는 의미를 살펴봅시다.
예수를 아는 것이 힘이다!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은 후에 밝은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람에게 바리새인들은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묻습니다.
그 사람은 선지자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소경의 고백은 마지막이 그 분이 곧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소경은 유대교회에 출교를 당합니다.
당시 출교는 마치 문둥병자가와 같은 취급을 받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인 곳에 나갈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한 가지 아는 것은 지금 두 눈을 떠서 세상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를 모르는 것이 약이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인 입장에서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에 의해서 그리스도를 가르칩니다.
차라리 이런 지식이 없었다면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르는 것이 약이 될 것입니다.
철학자는 많지만 철인은 많지 않습니다.
희랍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철인이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소크라테스가 아는 것에 대한 분명한 고백을
모다른 것은 알 그가 그리스도가 맞는
희랍의 철인 소크라테스는 마지막 독배를 마셔야 하는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 제자들이 스승 소크라테스에게 내가 이제까지 한 말을 모두 거짓이라고 한마디만 하면 감옥에서 자유롭게 될 수 있으며 목숨을 구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한마디만 해 수십시오! 하며 간곡하게 부탁했다고 합니다.
이때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죽으러 가고
너희는 살러 간다
그러나 어느 것이 행복한 것인지
오직 하나님만이 알고 있다.
진리를 위하여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철인의 고백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두려워해야 할까요?
내가 정말 주님의 뜻대로 믿고 있는가?
내가 정말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의 고민이며 두려워 할 질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세 종류의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첫째는 종교적인 사람들 바리새인
둘째는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볼 수 없었던 소경
셋째는 예수님
예수님은 사랑과 자비의 주님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일까?
부모의 죄 때문일까?
자기의 죄 때문일까?
이렇게 논쟁할 때 예수님께서는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시려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는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은총의 한 날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십일조를 어떻게 바쳐야 하는가?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와 같은 형식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만일 우리들의 신앙이 이와 같은 형식에 얽매인 것이라면 당장 그 형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신앙은 구원에 대한 감사와 감격과 찬송만이 필요합니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인생이 다시 삶을 얻었는데 그 이상 무엇이 필요합니까?
날때부터 소경되었던 사람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오직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지금 두 눈을 뜨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디오게네스의 침"
어떤 부자가 디오게네스의 명성을 듣고서 그를 자기의
집으로 초청했습니다.
그에게 자신의 집을 자랑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과연 부자의 집은 으리으리했습니다.
정원도 온갖 기화요초로
깨끗하게 잘 손질되어 있었습니다.
집안은 각종 보석으로 사치스럽게 꾸며 졌습니다.
부자는 보란듯이 온갖 거드름을 피우면서
디오게네스를 이곳저곳으로 안내했습니다.
부자는 자기 집 자랑하는데 여념이 없어서 초대를 한 디오게네스에게는 단 1분도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별안간 디오게네스가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하더니 자기의 가래침을 "퉤!"하고
부자의 얼굴에 뱉어버렸습니다.
명성있는 철학자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부자가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겠습니까?
얼떨떨해 있는 부자에게
디오게네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말 당신의 집은 너무 깨끗하고 아름답군요.
그래서 내가 아무리 둘러보아도 내 가래침을
뱉을 만한 적당한 장소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단지 교만과 위선으로 가득찬 당신의 더러운 얼굴이 내게는 쓰레기통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내 가래침을 당신의 얼굴에 뱉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얼마나 통쾌한 말입니까?
그래서 "디오게네스의 침"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입니다.
교만과 위선, 오늘 우리가 읽은 바리새인들의 모습입니다.
정말 그 얼굴에 디오게네스의 침이라도 한 번 뱉어주고 싶은 사람들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소경된 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보시고서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너무나 놀라운 일입니다.
당연히 축하하고 감사해 주어야 될 놀라운 사건입니다.
32절 말씀에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물론 구약시대에도 많은 기적이 베풀어 졌습니다.
그러나 소경의 눈을 뜨게 했다는 예는 단 한 번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단지 그 일은 장차 오실 메시야의 표적으로 예언되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예수님에게 이루어졌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그 자리에 기쁨과 감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축하와 찬양과 영광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타난 바리새인은 전혀 엉뚱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뜨이게 한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그런 기막힌 일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안식일을 주셨습니까?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까?
요즘 말로 하면 법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까?
사람이 법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까?
사람은 쉬지 않고
일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일주일에 하루쯤은 아무 걱정하지 말고 푹 쉬도록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먹여주시고 보살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안식일에는 직장에 나가 일하지 않고 이렇게 편히
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소경은 일평생 동안 흑암의 고통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 한 맺힌
고통에서 예수님은 그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그보다 더 멋지고 훌륭한 안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 규례 속에 예수님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감히 하나님의 아들을 정죄했습니다. 죄인으로
취급해 버렸습니다. 또 거기다 나음입은 소경도 자기들의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다고 출교시켜 버렸습니다. 정말 답답하고 짜증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30절에 보면 소경이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상하다"라고 했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정말
디오게네스의 침이라도 한 번 뱉어주고 싶은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든지 바리새적인 요소가
다 있게 마련입니다. 저에게도 있습니다. 교만과 위선, 외식, 탐욕 등은 모두 바리새적인 요소입니다. 남이 잘 되면 칭찬해 주지
못하고,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도 역시 바리새적인 모습입니다. 이런 것들이 자리잡게 되면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해도 마음에
기쁨이 없습니다. 감격이 없습니다. 그저 불평하고 비판하고 정죄하기 바쁜데 무슨 마음 속에 기쁨과 감사가 생기겠습니까? 소경처럼
단순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오직 한 가지에 집중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살아있는 것, 그 한 가지만으로도 기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택함을 받았다는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쓰임을 받는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상고하면서 우리의 삶 속에 있는 바리새적인 요소를 다 떨쳐버리기
바랍니다. 그리해서 우리가 매일 매 순간 마다 뜨거운 감격 속에 살아가는 아름다운 모습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편의상 오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첫째로 바리새인의 모습을 살펴보고, 둘째로 고침받은 소경을 살펴보고, 셋째로 예수님의 은혜로우신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바리새인
당시 바리새인들은 전문적인 종교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의식을 철저하게 지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안식일에 관한 규례를 잡다하게 만들어 놓고 그것을 엄격하게 지키려고 애썼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위에서
이미 밝혔듯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안식일을 주신 목적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사람이 일만 하며 살 수는 없으니까 쉬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감사하며 즐겁게 안식일을 보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식일에 일하지 말고 쉬라고 했다고 해서 하루종일 낮잠만 잔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안식일을 지키되 이왕이면
생산적으로 지켜야 할 줄 압니다. 예컨대 책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평소에 못 읽었던 책도 읽고,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음악도
듣고,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림을 그리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인위적으로 여러 가지 잡다한
규례들을 600가지가 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예컨대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에는 불을 피워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불을 피우면 일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안식을 범하는 것이 된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되기 전에 미리 등잔불을
붙여 놓아야 합니다. 아무리 어두워도 안식일에 등잔불을 피우는 것은 일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안식을 범하는 결과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자들은 안식일에 거울도 보지 못합니다. 괜히 거울을 보았다가 검은 머리카락 사이에 흰머리를 발견하면 그것을 뽑고 싶은
충동이 있습니다. 그것을 뽑았다가는 일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병든 사람이 있습니다. 병세를 호전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치료해야 합니다. 병든 사람을 낫게 하고 병세를 호전시키면 그것은 치료행위로 일하는 것이 되어서 안식을 범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에
의하면 예수님이 바로 이 규례에 어긋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왜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 인위적으로 잡다한 규례들을 만들어 놓았겠습니까? 그 배후에는 교만과 위선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나는 안다. 너희들이 지키지 못하는 것을 나는 지킨다. 나는 이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지킨다. 나는 거룩하다. 깨끗하다. 흠이 없다."
그러니 얼마나 도도합니까? 교만함이 그 배후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들은 남들이 그것을 지키지 못할 때 마구잡이로 무시하고 정죄했습니다.
"그것이 무슨 사람이야? 개, 돼지보다도 못한 짐승이지."
그러니 또한 얼마나 위선적인 모습입니까? 그들은 마구잡이로 남을 비평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는데 바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 마음에 무슨 평강이 있고 기쁨이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 우리의 삶 속에서 이런 바리새적인 요소가 사라져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복잡하면 신앙은 오히려 무기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해도 뜨겁지 않습니다. 찬송을 불러도 감격이 없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감동이 없습니다. 얼굴에 기쁨이 없습니다. 불평과 원망과 짜증과 남을 비방하고 중상하는 모습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르다와 마리아를 한 번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르다는 마음이 분주했습니다. 마음에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평온한 가운데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에게는 감격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베다니 마리아가 나중에는
예수님을 위해서 자신의 소중한 옥합을 아낌없이 깨뜨렸습니다.
우리에게는 활짝 열린 마음, 예수님의 마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전통, 관습이라는 굴레에 우리 자신을 얽어매고 다른 사람들까지 얽어매려고 하는 바리새적인 모습이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의 기쁨과 구속의 은총을 노래하면서 신앙 생활의 감격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신앙 생활이 술과 담배를 하지
못하게 하는 금연 학교처럼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것도 안된다! 저것도 안된다! 이것도 하지 말아라! 저것도 하지 말아라!"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신앙 생활에는 아무런 기쁨이 없을 것입니다.
미국에서 발간되는 신앙 잡지 가운데 풀핕(Pulpit)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 스피노스 조디아티 목사님이 자신의 목회 체험을 토대로 해서 "살아있는 교회와 죽은 교회"에 대해서 적어 놓았습니다. 제가 잠시 소개해 드립니다.
살아있는 교회와 죽은 교회
스피노스 조디아티
살아있는 교회는 항상 변화한다.
죽어가는 교회는 늘 똑같다.
살아있는 교회는 아이들의 소리로 늘 시끄럽다.
죽어가는 교회는 죽은 듯이 조용하다.
살아있는 교회는 예산을 초과해서 쓴다.
죽어가는 교회는 은행에 잔고가 많다.
살아있는 교회는 새 얼굴, 이름을 알기 어려워 애를 먹는다.
죽어가는 교회는 해를 거듭해도 그 얼굴이 그 얼굴이다.
살아있는 교회는 선교사업이 활발하다.
죽어가는 교회는 교회 안에서만 움직인다.
살아있는 교회는 주는 자로 가득 차 있다.
죽어가는 교회는 티내는 자로 가득 차 있다.
살아있는 교회는 배우고 봉사하기에 바쁘다.
죽어가는 교회는 움직이려고 들지 않는다.
우리 속에 있는 모든 바리새적인 요소들을 떨쳐버리고, 남들이 좋은 일을 당할 때 같이 기뻐하고 축하해 줄 수 있는 감격이 우리 속에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고침 받은 소경
여러분,
바리새인과 소경의 차이점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은 복잡했습니다. 이것저것 많이 알았습니다.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되고
무엇을 지키는데 열심은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 속에는 기쁨과 감격이 없습니다. 반면 소경은 단순했습니다. 어린 아이와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와 같은 심정에 천국의 기쁨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단순해야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트집잡기 위해 나음 받은 소경을 앞에 두고 신문합니다.
"예수는 안식일을 범했다. 그러므로 그는 죄인이다. 그에 대해서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소경이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오늘 본문 2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소경의 신앙은 한 가지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내가 다른 것은 다 몰라도 한 가지 아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내가 소경이었다가 지금 보는 것이다.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나는 이 한 가지만큼은 분명하게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가 있다."
그의 신앙은 단순하고 깨끗했습니다. 그러니 그의 마음 속에는 기쁨이 있고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젊은 부부가 산부인과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희 부부가 결혼한지 1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아기가 없습니다. 어떻게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의사는 그 말을 듣고서 부인을 자세히 진단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딱 잘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기는 기대하지도 마십시오! 아기는커녕 부인은 두 달을 살기가 어렵겠습니다."
그들은
너무도 놀랐습니다. 아기를 원해서 병원에 찾아갔다가 사형선고를 받은 것입니다. 그 부인은 공포심에 떨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두 달 동안 거의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부인의 몸은 비쩍비쩍 마르기 시작했습니다. 두 달이
지났습니다. 그런데도 부인은 죽지 않고 살아있었습니다. 그래서 부부가 다시금 예전의 산부인과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선생님, 도대체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제 부인이 두 달을 넘기기가 어렵다고 했는데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그랬더니 의사 선생님이 껄껄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는 것입니다.
"그럴
테지요. 이제 곧 부인은 아기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부인이 아기를 못 가지는 것은 부인의 몸이 너무 비대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살을 빼야지 아기를 가질 수 있을 텐데 그러려면 어쩔 수 없이 충격요법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일부러 엄포를 놓은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비만한 사람은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생명을 죽이는 일만
하게 됩니다. 교만의 살을 빼버려야 됩니다. 위선의 살을 빼버려야 됩니다. 탐욕의 살도 빼버려야 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단순해야
합니다. 소경의 신앙은 오직 한 가지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셨다. 예수님은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눈을 뜨게 해 주셨다."
소경은
이것 한 가지만 알았습니다. 그러니 그의 마음 속에는 감격이 있었습니다. 소경에게는 그러한 감격이 있었기에 출교 당하는 고통도
인내하면서 참아낼 수가 있었습니다. 스데반에게도 그 감격이 있었기 때문에,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얼굴이 환하게 빛났습니다.
다윗에게도 감격이 있었기에, 그는 법궤 앞에서 덩실덩실 춤을 출 수 있었습니다. 베다니 마리아에게도 감격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예수님을 위해서 자신의 소중한 옥합을 아낌없이 깨뜨렸습니다. 삭개오에게도 감격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기의 재산을 팔아서 아낌없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습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십시다. 소경의 소박한 신앙이 우리의 신앙이 되어서 매 순간 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면서 큰 감격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예수님
예수님의
사랑은 주권적입니다. 예수님은 소경을 주권적으로 사랑해 주셨습니다. 소경이 자기의 눈을 뜨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부탁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먼저 소경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발적으로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소경을
주권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나중에 소경이 출교를 당했습니다. 그 당시 출교는 대단히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누군가
출교를 당했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돌로 그를 때려 죽여도 살인죄에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그러했습니다. 그가
출교를 당해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래도 그것이 살인죄에 해당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만큼 출교는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소경의 부모가 출교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들 앞에서 겁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증거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때에 소경이 출교를 당했습니다. 그러니 그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너무나 외로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를 찾아와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뒤에 있는 3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예수님이 일부러 찾아와 주셔서 소경을 만나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필요한 때에 필요한 장소에서 필요한 모양으로 찾아와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주권적인 사랑입니다.
유럽에
있는 오스트리아에는 하나의 유명한 다리가 있습니다. 그 다리가 유명한 이유는 그곳에 각기 다른 모습을 하신 예수님의 동상이 열 두
개가 서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에게 적합한 예수님의 동상을 보고,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면서 은혜를 받는다고
합니다. 예컨대 농부들은 씨뿌리는 농부의 모습을 한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은혜를 받습니다. 어부들은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아래서 은혜를 받습니다. 목동들은 선한 목자의 상을 하신 예수님의 동상 밑에서 은혜를 받습니다. 또 병든 사람들이나
의사 또는 간호사는 병든 자를 치유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은혜를 받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간에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가 되십니다. "너희는 나의 친구라!" 예수님은 말씀해
주셨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예수님은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필요한 때에 필요한 장소에서 필요한 방법과 필요한 모양으로
우리를 찾아와 주십니다. 우리의 외로움을 달래 주십니다. 우리의 도움이 되시고 힘이 되시고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진리 가운데 인도해 주시고, 빛 가운데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이 소경을 도우셔서 점차 진리의 빛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소경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메시야로 고백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신앙은 점차적으로 발전되어 나갔습니다.
1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처음 소경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단순히 훌륭한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1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에 소경 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한 대."
소경은 예수님을 선지자로 고백했습니다.
3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자라고 고백했습니다. 그의 신앙이 많이 발전했습니다.
이제
그가 출교를 당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찾아오셨습니다.
35절에 "네가 인자를
믿느냐"라고 물으시면서 그를 유도해 나가십니다.
38절에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고 소경은 자기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순간 그는 예수님에게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말하자면 소경은
육신적으로 유대교에서 출교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를 도우셔서 영적으로는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 소경이 눈을 뜨지 못했다면 그는 일평생 사람들의 동정을 받으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그가 눈을 뜨게 되니까, 그는 시비에 휩쓸려 버렸습니다. 비난받았습니다. 핍박을 받았습니다. 나중에는
출교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내버려 두지 아니하셨습니다. 필요한 때에 그를 찾아와 주셨습니다. 위로해 주셨습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일편단심 민들레, 일편단심 예수님
여러분, 일편단심 민들레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우리나라 토종 민들레는 강인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나
가는 사람들의 발길에 짓밟혀서 만신창이가 되어도 기어이 잎과 꽃대를 다시 내밀고 꽃을 피우며 씨를 날려 보내는 꽃이 바로 우리나라
토종 민들레랍니다. 그런데 왜 민들레에게 일편단심이란 별명이 붙었냐하면, 토종민들레 아가씨는 서양민들레의 꽃가루 총각이 찾아와
애걸해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오직 토종민들레 신랑이 날아오기를 일편단심으로 기다리다 토종민들레의 꽃가루 총각이 날아오면
받아들이고 끝내 오지 않으면 급기야는 처녀임신을 해버리고 만답니다. 발아가 되지 않는 무정란과 같은 씨를 퍼뜨려 순수하게 동족을
보존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일편단심 민들레처럼,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만 증거하고, 예수님만 굳게 믿는 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소경 거지입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일편단심 예수님”을 외치는 소경 거지의 믿음을 만나보시고, 여러분도 “내가 아는
한가지, 일편단심 예수님”을 외칠 수 있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소경된 거지를 보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자기 죄
때문입니까?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환경을 탓하며 일말의 동정심을 보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직 낮이니 우리가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자고 초청해 주셨습니다. 또
하나님의 일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심을 통해 ‘믿음만 있으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이란
것도 가르쳐주셨습니다. 또한 소경 거지는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하여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되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정말 당신이 그 소경 거지요?
그런데 눈을 뜬 소경 거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습니다. 그를 알아보고 그가 눈을 떴다는 사실에 놀란 사람들과 그럴
리가 없다며 극구 그가 아니라고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소경 거지가 눈을 떴다는 사실은 정말 축하해줄 일입니다. 이제까지의
동정의 감정을 버리며 축하하고 함께 기뻐할 일입니다. 그러나 슬픔을 나누는 것보다 기쁨을 나누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이 인간의
죄인된 본성입니다. 기쁘고 놀라운 일을 보며 잔치를 벌여도 시원치 않을 판에 뻔히 아는 사람을 놓고 ‘누구냐?’며 모른 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 본성의 시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저렇게 잘 되어야 할 사람이 바로 나인데’ 하는 데서 출발하는
‘시기심’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동정을 베푸는 것은 쉽지만 진정으로 함께 기뻐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형제가 잘되면 박수를 쳐주고 더 잘되도록 격려해주고 기도해주는 사람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진실한 사랑과 진실한
축하와 진실한 격려와 진실한 위로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사건을 보는 눈이 달라질 때, 진심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축하해주며 함께 기뻐하고 더 놀라운 일을 위해 전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 영암교회가 함께 박수치며
전진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내가 바로 그 소경 거지요!
이렇게 사람들이 ‘소경 거지’가 ‘눈을 떴다 안떴다, 그다 아니다’ 할 때 그는 오히려 담대하게 자신에 대해 말합니다. ‘내가
바로 그 소경 거지였다. 그러나 이제는 보게 되었다. 나의 눈을 뜨게 해준 사람은 바로 예수이다. 그가 내 눈에 진흙을 이겨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했고, 그가 시킨 그대로 했더니 내가 보게 되었다.’(9-11) 참으로 놀랍습니다. 소경 거지가
하는 한마디 한마디를 보십시오. 모두다 진실입니다. 한마디 한마디에 진실이 배어 있다. ‘내가 그이다’는 사실과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진실을 그대로 드러내며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소경 거지의 증거를 듣고 오히려 사람들은 그를 바리새인들에게로 데리고 갔습니다. 왜냐하면 이 소경 거지가 눈을 뜬
날이 바로 안식일이었고, 그의 눈을 뜨게 한 방법이 안식일 법에 위배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소경이 눈을 떴다면 참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아버지께로부터 온 자를 믿음으로 영접하며,
자기들의 영의 눈도 떠지게 해주시기를 간구해야 할텐데... 시기심에 눈이 멀어 놀라운 하나님의 일을 전혀 보지도 못하고 영광도
돌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다양한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교회 안에, 성도 안에 다양한 일을 행하십니다. 그 일을 볼
수 있는 눈이 뜨이는 것이 커다란 영적 축복입니다. 지금 우리 영암교회에 영적인 일들이, 하나님의 복음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져가고
있는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일을 믿음 안에서 바로 해석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에
동참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깨어있어야 합니다. 세상 일에 눈이 멀어서도 안되고, 잠에 취해 있어서도 안되고, 깨어서 주님을
기대하며, 말씀으로 이 시대를 분별할 때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 목자를 통해 문자적
율법만을 주입받고 사람들 정죄하는 훈련만 받은 무리들은 참빛이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이렇게 소경 거지를 정죄하기 위해 거짓
심판자에게 끌고 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쟁론
16절. “바리새인 중에 혹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 하며 혹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런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피차 쟁론이 되었더니” 소경 거지의 증거를 들은 바리새인들 사이에 쟁론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로서 온 분인가 아닌가에 대한 쟁론이었다. 한쪽은 ‘안식일 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쪽은 ‘그가 만약 죄인이라면 어떻게 이런 표적을 행할 수 있느냐’며 의아해 합니다.
‘안식일 법이냐 표적이냐’ 이렇게 바리새인들은 티격태격하다가 소경 거지에게 다시 묻습니다. 17절에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그런데 헛갈리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한 소경 거지의 대답이 일품입니다. 문제의 핵심을 바로 찔러 버립니다.
뭐라고 대답합니까? ‘그는 선지자이니이다’ 당당하게 내가 만난 주님, 내가 믿는 주님을 ‘선지자이니이다. 하나님의
사람입니다!’하고 분명하게 고백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주의와 권위주의로 ‘있는 사실’조차도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지만, 소경 거지는 그 있는 사실을 통해 ‘그분이 누구인가’에 대한 믿음을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오히려 바리새인들이
소경이라는 것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면 이쯤에서 자기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예수님이 선지자이시고, 하나님이 보내신 분인 것을 인정해야 할 텐데, 그들은 전혀
반성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가 소경이었던 사실 마저 부인하며 그 부모를 호출하여 심문합니다. ‘그가 정말 소경이었냐?’ 얼마나
바보같은 질문입니까! 자기들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서 하는 말이 그가 정말 소경이었냐는 것입니다. 오히려 바리새인들에게 당신들이
소경 아니냐고 말해주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부모의 대답을 보십시오. 20-21절. “그 부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부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 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무슨 태도입니까? ‘오리발’을 쑥 내미는 것입니다. ‘내 자식은 맞는데 우린 모르겠다!’
그의 부모는 진실을 진실되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어떻게 보는지, 누가 그 눈을 뜨게 했는지는 모르쇠로 딱 잡아뗍니다. 오히려
‘그가 장성했으니 그에게 물어보라’고 합니다. 여러분, 그 부모들이 정말 몰랐을까? 설령 부모가 그 현장에 없었다 할지라도
아들이 부모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았을까요? 부모라면 아들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이들은 지금 모른다고 딱
잡아떼고 있습니다.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현실적으로 손해보고 싶지 않아서였습니다. 22절.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 부모들은 이미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들 때문에 출교당할 일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출교란
율법을 범한 자에게 가해지는 최고의 형벌이었습니다. 출교당한 자는 동족과의 접촉마저 금지되었기에 유대 사회에서 영구히
매장됩니다. 그러니 소경 거지를 둔 것도 억울한 데, 이제까지도 그놈 때문에 많은 고통을 당했는데, 이제 그가 보게 되어 근심
걱정 면하나 싶었는데, 이제는 그놈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릴 위기에 놓였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순간 얼마나 자식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을까요? ‘이 놈이 끝까지 애비 속을 썩이는구나...’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분명히 불신앙의 결과입니다. 아들의
말을 듣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았다면, 예수님이 참빛이신 것을 알았다면, 믿음으로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그 빛을 쫓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 믿음을 저버렸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 속에서,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 앞에서, 과연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려하지 않고 환경 탓만 하고 있는 제자들인지, 율법으로 눈이 멀어 이 사람 저 사람 정죄하는 바리새인인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지만 현실적으로 손해보고 싶지 않아서 대충 오리발 내밀며 믿음을 저버리는 부모와 같은지, 아니면 당당하게 진리를
붙들고 믿음을 고백하는 소경 거지인지! 이렇게 말씀은 여러 사람들의 여러 모습을 극명하게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저 사람은 죄인이다!
이렇게 소경 거지의 부모가 두려움에 믿음을 저버리며 책임을 회피하자 바리새인들은 소경 거지에게 더 힘을 주어 말합니다. 24절.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예수님을 죄인으로 정죄하며 그를 따르면 너도 죄인으로
정죄하여 출교시키겠다는 엄포를 놓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라는 권위주의와 율법이라는 칼을 들이밀며 이제 막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어린양의 마음에 의심과 불신과 두려움을 심고 있습니다. 그래서 출교가 무서워서라도 예수를 부인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 때문에 눈을 뜬 자가 예수를 부인하며 죄인이라고 정죄한다면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신나고 기고만장해 지겠습니까!
‘봐라! 기적을 체험한 자가 아니라고 하지 않느냐! 하나님이 하신 일을 저가 빼앗아 자기에게 영광을 돌리며 가로채고 있다!’
그리고는 예수님에 대한 정죄의 칼날을 더 높이 들 심산이었습니다.
이처럼 거듭난 자에게는 빛의 역사를 삼키려는 어두움의 역사가 반드시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며 믿음의 삶을 진실되게
시작하려 하면 어두움이 가만두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 마음을 낙심하게 하고, 나는 예수를 믿으면 안된다는 거짓을 심으려고
두려움과 회의와 불신을 일으킵니다. 그러면 이럴 때, 우리가 예수님을 굳게 붙들고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려고 할 때 오는 두려움과
의심과 불신을 어떻게 몰아낼 수 있습니까?
한 가지 아는 것은
25절.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당신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왜 내가 하는 말을 믿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분명히 아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전에는 내가
소경이었는데 지금은 본다는 사실이다!” 소경 거지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 자기 속에 이루어진 능력의
역사 한 가지를 꼭 붙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내 눈을 뜨게 해 주셨다는 그 한 가지 구원의 사실을 꼭 붙들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나는 말씀도 모르고 신학교를 나온 것도 아니고 날 때부터 나는 소경이고 거지로 살았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는 것이 딱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나를 보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이런 것이 있습니까? 예수님에 대해 결코 부인할 수 없는 ‘내가 아는 한 가지’ 언제 어떤
상황에 어떤 두려움이 나를 엄습한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가 되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확신할 수 있는 한 가지! 그것이
있습니까? 오늘밤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꼭 이 한 가지를 붙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주되신다”는 것을 결코 흔들지
못하는 한 가지가 나에게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을 붙드십시오. 그것을 붙들면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신앙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저도 ‘내가 아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중학교 3학년때 목사가 되겠다고 서원했지만, 대학생이 되고 나서부터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이리 저리 도망치며, 좋은 직장에 취직하여 될 수 있으면 안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사랑하는 예수님은
1997년 나를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가 아니라 병원 침대에 누이시고, 육신의 질병을 먼저 치료해 주시고, 영혼의 질병인 불신과
회의도 말끔히 고쳐주셨습니다. 주님을 버리고 도망쳐도 포기하지 않고 찾아오시고 고쳐주시고, 목자의 길로 초청해 주신 예수님! 바로
이 사실이 내가 목자의 길을 가야하는 단 한 가지 이유입니다. 어떠한 어려움과 두려움과 불신과 회의가 든다 할지라도 이것은 절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내 신앙의 원동력은 바로 내가 아는 한 가지입니다.
결국 소경 거지는 출교를 당하고...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 한 가지 사실을 부인했습니다. 오히려 소경 거지를 욕하며 꾸짖었습니다. 28절.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그러나 소경 거지는 자기가 아는 것을 더 확실하게 고백합니다. 31절.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참으로 확실하고 분명한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경건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시는 분이시고, 창세 이후 한 번도 없었던 소경이 눈을 뜨는 기적을 베푸신 하나님께로
와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분이라는 감격스러운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 자리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자칭 율법에 정통하다는
바리새인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에 대해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소경 거지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아는 한 가지
때문입니다.
다시 찾아오신 예수님
그리고 소경 거지는 그것 때문에 쫓겨났습니다. 출교당한 것입니다. 이제 그는 또 다시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부모도 그를
버렸습니다. 눈을 뜬 기쁨은 잠시였고, 이제는 또 다시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받는 어두움에 갇혔습니다. 이제는 거지 생활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내가 아는 한 가지’를 고백한 결과 얻게 된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면 믿음을 고백하고 암담한 현실을 직면한 이 소경 거지가 얻는 것이 무엇입니까? 35절.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서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아멘. 사람들이 소경 거지를 쫓아냈다는 말을 예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찾아가 주시고 그를 만나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올바른 믿음을 심어 주십니다. 이전에 소경 거지는
예수님을 선지자로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 고백은 불완전한 고백입니다. 이제는 인자, 곧 하나님께로부터 온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소경 거지는 그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37절.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소경 거지는 실로암 못에서 눈을 씻고 육신의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영의 눈을 뜨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본
것입니다. 38절.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여러분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그러면 그의 믿음이 여기까지 자랄 수 있었던 힘은 무엇입니까? “내가 아는 한 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래서 소경 거지가 출교 당했을 때 그를 찾아가 동정하지 않으셨습니다. 현실 문제를 안타까워하며 해결해 주시려고 노력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일의 궁극적인 근원은 바로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오직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소경 거지를 찾아가셔서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분명히 말씀해 주시고, 그에게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소경
거지는 “주여 내가 믿나이다!”하고 고백했습니다. 이제는 빛을 볼 뿐만 아니라 빛을 따르는 자가 된 것입니다.
결 론
교회는 사회 봉사단체가 아닙니다. 자원봉사 기구도 아닙니다. 친목단체도 아닙니다. 교회는 믿음을 심어 생명을 거두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위해 오셨고, 바로 우리가 그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출발점은 “내가 아는 한 가지”입니다. 나의 모든 불신과 회의와 두려움을 몰아낼 “내가 아는 한 가지” 여러분은 무엇입니까? 그
“한 가지”를 붙들고, 내 신앙을 말씀에 뿌리내리기 위해 현실과 싸우며, 기도의 무릎으로 주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고, 복음을
전하여 제자삼고, 다음 세대를 세우는 일에, 일편단심 충성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생명의 부활 - 의인의 부활 - 첫째 부활
심판의 부활 - 악인의 부활 - 둘째 사망
성경에서는 죽음을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으로 구분합니다.
첫째 사망이란?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자연적인 죽음(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둘째 사망이란?
마지막 심판의 날에 부활의 몸이 심판을 받아 불 못으로 들어가는 것(요한계시록 20:14, 21:8)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둘째사망이라는 용어는 요한계시록에만 등장하는 독특한 용어다.
그 첫번째 용례는 예수께서 서머나교회의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 가운데 나온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계 2:11)"
요한계시록 2~3장에 보면, 아시아의 일곱교회를 향해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반드시 이기는 자에 대한 축복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이기는 자"란 신앙생활에서 승리하여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이기지 못하는 자는 결국 지는 자가 되는 것이며, 이런 자는 이기는 자가 받을 축복을 받을 수 없다.
그렇다면 지는 자는 어떤 결과를 얻게 되는가?
그것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결국 불못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계 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계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둘째사망"이란 한 번 죽은 사람이 이제 심판을 받고 영원히 하나님과 분리되어 불못에 들어가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이 세상에 살아있을 때에 자신의 죄를 용서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생명을 얻지 못한 자가 받게 되는 최종적인 형벌에 해당한다.
둘째사망은 언제 받는 것인가?
요한계시록 20장에 의하면, 둘째사망은 재림하시는 예수님의 백보좌심판 이후에 주어지는 형벌이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기 전에 둘째사망의 해를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둘째사망은 백보좌 심판대에서 예수님의 최종심판이 내려진 이후에 받는 형벌이기 때문이다.
둘째사망은 누가 받는가?
둘째 사망은 구원받는 성도들은 받지 않을 형벌로서,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받는 형벌이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죽은 즉시 음부(땅 속에 있는 불타는 형벌의 장소)에 들어가서 주님의 재림시까지 불가운데서 고통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곳에 들어갈 때에 사람들은 부활체를 입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곳에 들어가는 자들은 그냥 영혼의 상태로서 들어갈 뿐이다.
그러므로 음부는 불신자들의 임시감옥이자 임시형벌의 장소라고 보아야 한다.
그곳은 정식으로 재판을 받고 선고를 받기 전에 들어가는 일종의 구치소와 같이 때문이다.
언제 불신자들은 부활체를 입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이후 백보좌심판대에 설 때다(계 20:11~14).
언젠가 하나님의 때가 되면, 예수께서 공중으로 재림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마겟돈전쟁으로 악의 무리들을 처단하시고, 이미 죽어서 음부(바다포함)에 들어가는 모든 영혼을 불러내실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아마겟돈 전쟁 때에 죽었던 모든 불신자까지 다 부활체를 입게 될 것이다(조금 있다가 살펴보겠지만 이것을 "심판의 부활"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때 죽은 자들은 다 백보좌 앞으로 나아가서 자신의 행위를 따라 심판을 받아 둘째사망 곧 불못에 던져지게 되는 것이다(계20:12~14).
왜냐하면 그들이 이 땅에 살고 있을 때에 살 수 있는 방법을 붙잡지 않고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계 20:15).
그러므로 첫째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말한다(계 20:6).
이들은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부활체(생명의 부활)를 입고 곧바로 천국에 들어가 왕노릇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순교자들을 포함한 성도들인데, 이들은 결코 둘째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할 것이다(계2:11).
첫째부활과 둘째부활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
첫째부활과 둘째부활은 사실 성도들만이 받는 부활을 가리킨다.
첫째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승천이후 성도들이 개인적으로 맞이하는 부활로서, 죽은 즉시 부활체를 입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가리킨다.
사실 예수께서 부활의 첫열매가 되시어 천국에 들어가셨다(고전 15:20).
그리고 이윽고 구약의 모든 성도들이 이때 한꺼번에 부활체를 입고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때부터 죽은 모든 성도들은 죽은 즉시 부활체를 입고 천국에 들어가고 있다.
그리고 재림 때가 되면, 이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 철장권세를 가지고 아마겟돈전쟁에 참여할 것이다(계 2:26~27, 19:14~16).
여기서 "둘째부활"이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성도들이 한꺼번에 부활하는 우주적인 부활을 가리킨다.
그때 죽은 자들과 그때까지 살아남아있는 성도들은 이 둘째부활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살전 4:16~17).
이때 성도들의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가게 되는 것을 "휴거"라고 말한다.
이들은 공중으로 마중나가서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맞이할 것이다(마 24:31).
그리고 질적으로 달라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내려와서 영원히 왕노릇하게 될 것이다.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예수께서는 사람들은 두 가지 종류의 부활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선한 일들을 행했던 자들은 생명의 부활에 참여할 것이고, 악한 일들을 행했던 자들은 심판의 부활에 참여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5:29).
그런데 예수께서 들려주신 그 말씀을 듣고 있고 또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를 믿고 있는 자는 영생을 가진다고 하셨다.
더불어 그런 자는 심판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고 하셨다(요 5:24).
그러니까 결국 예수님을 통하여 자신의 죄의 문제를 해결받고 아버지의 생명을 받은 자는 심판 없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간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께서는 "선한 일들을 행했던 자는 생명의 부활 안으로 나올 것이다"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자신의 죄문제를 해결받고 주님을 위해 살았던 자들은 생명의 부활에 참여할 것인데 이들은 결코 심판의 부활로 나아가지 않는다. 즉 성도는 죽은 즉시 부활체를 입고 생명의 부활에 참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일컬어 "첫째부활"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사도요한은 설명한다(계 20:5).
이런 자들은 곧바로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으로 들어가게 된다.
거기서 예수님의 재림때까지 왕노릇하다가 예수님의 재림시에 예수님의 뒤를 따라 이 세상으로 들어오게 된다(살전 3:13).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20장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승천이후 예수님의 재림때까지 개인적으로 부활체를 입고 천국에 들어가서 왕노릇하는 것을 "천년왕국"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계 20:4~6).
"첫째부활"이란 그리스도의 재림전까지 성도들이 죽어서 죽은 즉시 부활체를 입고 부활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들은 둘째사망의 해를 결코 받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므로 첫째부활에 참여하는 자가 복있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일컬어 "생명의 부활"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심판의 부활"에 대해 살펴보자. 심판의 부활의 시기는 예수께서 재림하시고 아마겟돈전쟁을 치르신 후 백보좌 심판을 행할 때다(계20:11~15). 이때 음부(바다포함)가 자기 속에 있는 이미 죽은 모든 불신자의 영혼들을 내어주게 된다. 그리고 아마겟돈전쟁시에 죽은 불신자들까지 함께 심판의 부활을 입게 된다. 즉 불신자들 전체가 이 때에 부활체를 입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백보좌심판대 앞으로 나아가 심판을 받는다. 그러므로 백보좌 심판대 앞으로 나아가는 모든 불신자들은 다 심판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다. 성도들은 이미 죽은 즉시 생명의 부활을 입고 부활체로서 천국에 들어가 왕노릇하지만, 불신자들은 부활체를 입지 못한 채 영혼의 상태로 음부에 내려가 불 가운데서 고통을 받다가(임시감옥에 들어간 상태), 이제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부활체를 입고 심판을 받아 불못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못은 불신자들이 부활체를 입고 들어가는 영원한 형벌의 장소인 것이다. 이전에 불못과 비슷한 음부는 불신자들이 영혼의 상태로 들어가 형벌을 받는 장소였다. 하지만 예수께서 재림하시게 되면 질적으로 다른 세상을 만나게 될 것이다. 성도들은 질적으로 다른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왕노릇하게 되지만, 불신자들은 지금의 음부와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형벌의 장소인 불못에 들어가서 영원히 형벌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왜 불못을 질적으로 다른 형벌의 장소라고 하는가 하면, 그것은 이전까지 불신자의 영혼이 들어가서 일시적으로 형벌받던 장소로서 음부에서는 귀신들은 전혀 고통을 받지 않았지만, 질적으로 달라지는 불못에서는 귀신들도 불신자들처럼 그곳에서 고통을 받기 때문이다(계20:10).
계 20:10,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계 20:10, [직역] 그리고 그들을 [현재[ 미혹하고 있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 안으로 [단번에] 던져졌다. 그리고 그곳에 역시 짐승과 거짓선지자도 [던져졌다]. 그리고 그들은 세세토록 밤낮으로 괴로움을 받게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20:10의 말씀을 정말 놀라운 말씀이다.
천년왕국이 결코 문자적인 왕국이 아니라 상징적인 왕국이라는 것을 한 방에 알려주며, 뿐만 아니라 불못은 이전의 음부와는 질적으로 다른 세계(장소)라는 것을 한 방에 알려주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아마겟돈전쟁 때에 짐승과 거짓선지자가 붙잡아 불못에 던져지고, 이어서 지상에는 천년왕국 있으며, 천년왕국 끝에 가서 곡과 마곡의 전쟁이 있을텐데, 이때에 마귀가 불못에 던져진다고 주장하지만, 계 20:10에서는 곡과 마곡의 전쟁 후에 마귀와 짐승과 거짓선지자가 한꺼번에 불못에 던져진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겟돈전쟁과 곡과 마곡의 전쟁은 동일한 전쟁인 것이다.
그리고 천년 간격을 두고 짐승과 거짓선지자 그리고 마귀에 불못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천년왕국 후에 셋 다 한꺼번에 불못에 던져지는 것이다.
아담의 범죄 이후 모든 사람들은 사실 첫째사망을 다 겪고 있다(히 9:27).
"첫째사망"이란 자신의 영혼이 육체로 분리되는 것을 가리킨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 살아있을 때에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받고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말씀대로 살아간 자는 둘째사망의 해를 받지는 아니할 것이다(계 2:11).
"둘째사망"이란 재림하시어 크고 흰 보좌에 앉아계시는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 심판을 받고 불못에 던져지는 것을 가리킨다.
그렇다. 불신자들은 죽고나서 영혼의 상태로 음부에 들어가 있다고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부활하여 심판받고 불못에 들어간다. 그들이 바로 "심판의 부활"로 나오는 자들이다. 그런데 사실 둘째사망 곧 불못은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세계다. 이것은 성도들이 들어가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이 질적으로 다른 세계인 것과 같은 이치다. 우리는 어찌하든지 이 세상에 살아 있을 때에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서, 자신의 죄문제를 해결받고 성령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거듭난 성도들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그래서 죽은 즉시 생명의 부활 안으로 들어가 질적으로 새롭게 열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땅을 기업으로 받아 왕노릇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여기 심판의 부활은 저주의 부활 또는 정죄의 부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자도 부활하고 예수 믿지 않는 자도 부활합니다.
따라서 어떤 종류의 부활인가가 더 중요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한사람도 예외 없이 생명의 부활을 체험합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생명과 부활의 주님을 믿는 고백이 없으면 심판의 부활을 맞게 된다고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생명의 부활을 주시는 분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21절).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치료하자 안식일에 사람을 치료한다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밌게 표현하시면서 성부하나님처럼 자신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시는 분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육체적인 면만 치료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 전체를 붙잡으시고 영생을 선물로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아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24절).
‘영생을 얻었다’는 말은 현재형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말은 현재 완료형으로
그것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사람은 그 미래가 확실하기에 한사람도 예외 없이 영생의 선물을 체험할 뿐 아니라 살아서도 주의 자녀로 살고, 죽어서도 영생의 선물을 확실하게 받는다는 것을 주님이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만이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26절). 예수님만이 생명의 근원이요 ‘살려주는 영’(Life giving spirit)이십니다(고린도전서 15:45). 요새는 종교다원주의(宗敎多元主義)가 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아무리 드세게 나와도 비진리가 진리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의 구세주이시고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신 분이시며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시는 부활의 첫 열매이십니다(고린도전서 15:20).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런 정보를 가진 자들은 정보를 가지지 못한 자처럼 살면 안 됩니다. 생명의 부활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은 자신의 믿음을 삶으로 실천해야 합니다(信行一致). 세 가지 실천 사항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더욱 잘 믿어야 됩니다(29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 나오리라”(29절). 여기 선한 일은 하나님의 관점에서의 선한 일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선한 일 곧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요한복음 6:28-29).
우리교회, 나아가서 우리한국교회의 건강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교회내의 중년남성 교우들의 영적무장이 절실합니다. 영적무장의 핵심은 우리주님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정리되고 분명한 선언적 고백위에 교회생활은 생기를 가집니다.
예수님은 나를 절망 속에서 구원해 주신 분입니다. 내게 죄를 깨닫게 해 주셨고 나의 인생이 무의하게 주어진 것이 아님을 알게 하셨으며 나의 중심에서 내가 느끼든지 못 느끼든지 간에 늘 함께 계시고 나를 주관해 주셨습니다.」모든 교우들의 신앙고백이 분명하고, 뜨거워야합니다. 중년의 남자 성도들이 예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 새출발하면 그가 속한 가정과 직장생활의 변화는 눈부시게 다를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교회의 건강은 물론 직장의 건강성을 회복하는 주역으로 쓰임받을 것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25절). ‘바로 지금’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말씀을 따라 결단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약속으로 보장해주십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詳考)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한복음 5:39). 성경의 중심 주제는 생명 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체 주제를 압축하면 예수 그리스도만 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주님의 십자가 사랑만이 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도 압축하면 예수님만 남는 복된 삶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살아야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겉모습을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바라볼 때 존중할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심판주로 믿는 우리의 삶 가운데 주님의 향기가 나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듯하게 살아야 됩니다. 예수를 믿는 신앙인이라면 세상보다 탁월한 윤리가 있어야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십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가운데 신앙적인 역사관과 신앙의 영향력을 가지고 새롭게 나라와 교회를 세워 나가야 합니다.
셋째, 우리는 도전하면서 담대하게 살아야 됩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요한복음 5:17). 일한다는 것은 주저앉아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식일에 일을 행하심에 대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음해하고 핍박했습니다(16절). 그러나 우리 주님은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담대히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담대하고도 용기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신앙의 야성(野性)을 회복해야 합니다.
주를 위해 봉사하다가 조금만 어려우면 그냥 포기해 버립니다.
골프계의 살아있는 전설 잭 니콜라우스(Jack Nicklaus)는 “인생에게 우리가 저지르는 최악의 일은 포기하는 것이다. 인생에 포기하면 진짜 늙기 시작한다.”고 말했습니다. 스포츠맨들에게 요구되는 도전정신이 있다면, 진실로 그리스도인들이 희미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린도전서 15:58). 경제 문제 자녀문제 혹은 남모르는 인생문제로 포기하고자 하는 맘이 드는 자는 주님을 바라볼 때 주님으로부터 능력과 용기를 얻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일하시니 우리도 충분히 일할 수 있고 마땅히 일해야 합니다. 어려움은 우리의 영적인 근육을 단련시킬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되기에 우리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가슴에 안고 애통하는 자는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주님의 능력주심과 사랑하심을 온몸을 던져 신뢰하는 주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교회와 나라의 미래를 맡겨주십니다.
넷째,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파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8:19-20).
주님의 뜻을 좇아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주님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into the world) 보내었고”(요한복음 17:18).
기독교 역사 2천년은 복음전파의 역사로 점철되어 왔습니다.
지금은 바로 영적으로 추수할 때가 되었기에 더더욱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요한복음 4:35).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자녀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힘으론 달려나올 수 없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붙들어 주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는 귀한 사역을 우리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생명의 전달자로 우리 모두를 불러주셨습니다.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이 있음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생명의 부활을 주시는 분이심을 확신하는 우리는 삶으로 믿음을 실천해야합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만을 더욱 사랑합시다.
예수를 믿는 신앙인답게 윤리적인 탁월성과 아울러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도전하면서 담대하게 살아나갑시다.
부활의 주님만이 나와 우리 가족과 민족과 인류에게 소망이 되시기에 주님 오실 때까지 부활의 주님만을 신뢰하고 전파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됩시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神靈)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린도전서 15:42-44)
나의 양식(요한복음 4:34)
양식을 육체를 위한 양식, 정신을 위한 양식, 영을 위한 양식으로 구분합니다.
- 영, 혼, 육을 흠 없이 보존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육체를 위한 양식에 매달려 있습니다.
간혹 정신을 위한 양식에 집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의 양식에 특별한 관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예를 들면 공생애를 시작할 무렵 40일을 금식하며 기도하신 후에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그때 첫번째 시험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로 떡을 만들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사탄을 물리치셨습니다.
오늘 요한복음 4장에서는 사마리아 수가성에서 한낮에 우물가로 물을 긷기 위해 왔던 사마리아 여자와 육을 위한 물을 주제로 이야기를 하던 중 영의 물을 가르치며 이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 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깨우쳤습니다.
마을로 들어가 먹을 것을 구해 왔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먹을 것을 드리자 예수님께서는 나의 양식은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이며 그 일을 온전히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양식에 대한 이해가 우리들과 다르다는 것을 깨우치신 말씀입니다.
첫째는 영혼 구원
잃어버린 영혼을 위하여 말씀을 가르치고 바르게 세워가는 것이 예수님의 양식입니다.
둘째는 구원받은 영혼을 성장시키는 것
구원으로 일을 마친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후에는 그의 삶이 예수님을 닮아가도록 가르치고 깨우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잃어버린 영혼보다는 우리 교회로 끌어가는 것이 주된 관심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느 교회에 새로운 프로그램이 개설되면 그 프로그램에 참여시켜 자기 교인으로 세우려고 합니다.
사람이 만족을 얻는 여러가지 방식들
주님께서 먹는 것과 관련해서 하신 말씀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주님은 공생애 초기에 40일을 금식하신 후에 사단에게 시험받으실 때 떡의 문제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때 주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 생존의 또 다른 방식이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사람이 밥먹고 산다는 것은 이치이고 원리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것을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은 그것으로만은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만족을 얻는 것은 밥을 먹는 것 외에 여러 방식이 있습니다. 배부르다는 것은 만족을 표시하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그것은 가장 원초적인 방식의 만족일 것입니다. 사람의 욕구가 많습니다. 심리학자들이 여러 방식으로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설명합니다마는, 기본적으로 인간은 영적인 만족을 추구하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이 성경의 설명입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하신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떡을 먹는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금 다른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다. 우리도 세상을 살면서 부인할 수 없는 것은 떡의 문제에 너무 많은 관심을 두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님이 도전하시는 것은 “너, 떡으로만은 살 수 없다” 그러십니다. 다른게 있다고 하십니다. 그 배부름에 대해서 아느냐고 도리어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인데, 특히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그 말씀을 순종하고 살아가는 만족에 대한 문제입니다. 시편 기자는 40:8에서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을 여러분은 이해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기쁨을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32, 34)
주님이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라고 하신 말씀의 진의를 좀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A. 주님의 자기정체성: “보냄 받은 자”(34)
먼저 주님은 설명하시기를,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주목하려고 하는 것은 ‘나를 보내신 이’라는 부분입니다. 주의해서 요한복음을 읽어보면 주님은 특별히 당신 자신을 ‘보냄을 받은 분’으로 이해하고 사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표현하실 때에도 ‘나를 보내신 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셨습니다(5:23~24, 30, 37~38; 6:39, 44, 57; 7:16, 18, 28, 33; 8:16, 18, 26, 29; 9:4; 12:44~45; 49; 13:20; 14:24; 15:21; 16:5). 즉, 하나님 아버지와 당신 자신의 관계를 보내고 보냄을 받는 것으로 이해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당신 자신의 정체성을 이해하시는 방식입니다. 보냄을 받았다는 인식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닙니다. 보냄을 받았다는 것은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그 ‘할 일’을 염두에 두고 삶을 사셨습니다. 주님께서 사마리아를 지나가셔야 했던 것도 할 일을 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었습니다.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한 마디로 말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죄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다 한 몸에 받으시고 죽으시는 것이 주님을 보내신 성부 하나님의 뜻입니다. 요한복음은 모든 사건이 다 그 때를 향하여 전개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를 만나신 사건도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신 사건도 다 그 때를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은혜가 필요한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오셔서 그녀를 만나주셨고 그녀를 구원하셨으며 그녀를 통해서 수가성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그 길에 수많은 죄인들을 찾으셨고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이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주님은 삶에서 단 한 순간도 단 한 번의 사건도 당신 자신의 뜻을 주장하여 사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아무 것도 스스로 행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5:30). 성육신하신 주님의 삶을 이해하는 열쇠는 철저하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추구하고 그 뜻대로 움직이며 사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냄을 받은 자의 삶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다’라는 인식, 이것이 주님의 삶과 십자가 죽으심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바울 사도가 알았던 양식(행 20:24)
성경에서 그런 사람 한 분을 소개합니다. 그는 바울 사도입니다. 그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 그에게는 사명이 생겼습니다. 그는 주의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택하신 그릇이었습니다(행 9:15). 그는 이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수많은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는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밀레도에서 그의 사랑하는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 작별인사를 나눕니다. 그때 그가 그들에게 한 작별인사입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그의 가슴 속,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그것 뿐이었습니다. 그것을 단지 행하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미 충분히 만족할만큼 주의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언제까지 말입니까? ‘마칠 때까지’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나의 양식은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성삼위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삼상 2:35) 하나님의 말씀대로 세워진 제사장이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일을 행할 때 복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성군 다윗은 “주님의 뜻을 행하기 즐기며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그의 기도에는 자신으로 하여금 주의 뜻을 행하게 하심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내 뜻을 다 이루리라”고 언약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의 7가지 표적
요한복음은 “예수는 어떤 분인가?”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총 7 가지 기적들과 담화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증거의 책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구속을 말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을 나타낸다.
* 요한복음의 Focus - “예수는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말씀을 주시기 위하여 말씀을 기록하게 하신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 무슨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가?,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성경을 보아야 한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에서 무엇을 하셨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은 기적과 말씀(교훈) 두 가지로 나누어 기록되어있다.
기적이라는 것은 일반적인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초자연적안 역사가능하다.
요한복음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베푸셨던 기적들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말씀 즉, 교훈이 함께 기록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삶을 가르쳐주고 있다.
- 기적 : 기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 말씀, 교훈 : 하나님의 나라 백성의 삶을 나타내는 것이다.
사도요한은 요한복음 본론에서 7가지의 표적과 7가지의 담화를 통하여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를 우리에게 증명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기록되어 있는 표적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그리고 그 표적은 각각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 요한복음의 7가지 표적
1.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표적 - 요한복음 2장 1절 ~ 12절
2. 왕의 신하의 아들을 살리신 표적 - 요한복음 4장 46절 ~ 54절
3.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표적 - 요한복음 5장 1절 ~ 9절
4. 5천명을 먹이시고 물 위를 걸으신 표적 - 요한복음 6장 1절 ~ 21절
5.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신 표적 - 요한복음 9장 8절 ~ 10장 42절
6.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 - 요한복음 11장 1절 ~ 57절
7. 십자가와 부활의 표적 - 요한복음 18장 1절 ~ 20장 31절
이 7가지의 기적은 7개의 교훈을 담고 있는 담화와 함께 서로 대칭 병행을 이루고 있다.
* 7가지 기적의 병행
7가지의 표적들을 요한복음의 구조 속에서 각각의 증거하고자 하는 의미를 가지고 대칭,
병행되어 기록되어 있다.
1.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표적 vs 십자가와 부활의 표적
‣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이 두 가지 표적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기록된 표적들이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것(요 2:1-12)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표적을 행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을 스스로 증거 하신 것이다.
또한 포도주 표적과 병행되는 표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표적(요18:1-20:31)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우리를 대속하시고 완전한 죽음에서 그 죽음을 이기셨다.
그리고 부활하셨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우리에게 증거하고 계신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나타나는 첫 번째 기적인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표적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원형적인 표적에 대한 상징적인 표적으로 서로 대칭 병행되고 있다.
첫 번째 표적을 상징적인 표적으로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구조적 흐름의 관점에서 두 표적을 서로 대칭 ‧ 병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2) 요한복음 2장 4절에서의 “나의 때”는 십자가와 부활의 때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3) 포도주는 유대 공동체가 기쁠 때 마시는 것으로, 기쁨과 축복의 상징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십자가와 부활은 새로운 은혜의 시대를 보내주기 때문에 이들이 대비되고 있다.
4) 그래서 여섯 개의 돌 항아리에 담겨있는 결례용 물은 유대의 율법의 시대, 그리고
변화된 포도주는 구속의 새로운 은혜의 시대가 도래되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첫 번째 표적은 원형적 표적에 대한 상징적인 표적으로 이해한다.
5) 2장 11절의 제자들의 믿음은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참 하나님이심에
초점이 있다. 그렇다면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표적은 바로 이 원형적 표적에 대한
첫 번째의 상징적인 표적으로 이해 할 수 있다.
6) 그러나, 십자가의 피와 포도주의 붉은 색과 그 상관성을 연결시키는 것은 지나친 해석으
로 이해된다.
2. 왕의 신하의 아들을 살리신 표적 vs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왕의 신하의 아들을 살려 주셨다(요 4:46-54).
또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요 11:1-57). 사람의 목숨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을 가능케 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시다.
예수께서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자를 살리신 것 뿐 아니라 이미 죽은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려내셨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 표적을 통하여 주님은 우리에게 그 분이 하나님 되심을 스스로 증명하셨다.
3.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표적 vs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신 표적
‣ 인간의 힘으로는 고칠 수 없는 병을 고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38년 된 병자는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베데스다 못에 스스로 들어갈 수 없었다.
베데스다 못은 일 년에 한 번 물이 동하였는데,
그 때 제일 먼저 그 물에 들어가면 어떠한 병도 고침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38년 된 병자는 스스로 그 못에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이 되지 않았다.
때문에 누군가의 도움을 기다렸지만 그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때 주님께서 그 38년 된 병자를 찾아가셔서 그의 병을 고쳐주셨다(요 5:1-9).
이는 인간으로서는 고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쳐주신 것을 보여주는 표적이었다.
또한 날 때부터 소경이 된 자를 주님은 고쳐주심으로 그의 눈을 뜰 수 있도록 해 주셨다.
날 때부터 소경이라는 것은 고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병이었다.
불가능했던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심(요 9:8-10:42)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증거하셨다.
요한복음은 38년 된 병자의 병 고침과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신 표적을 병행시켜 기록함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고 있다.
4. 5천명을 먹이신 표적과 물 위를 걸으신 표적
‣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행하신 표적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이 두 가지 표적은 모든 표적의 중앙에 기록되어 있는 표적이다.
이 표적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결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표적이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5개로 5천명을 먹이신 표적은 말 그대로 기적이었다.
이 표적은 구약의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려주셨던 만나와 메추라기의 실체이다.
때문에 이 표적은 예수께서는 본인이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먹이셨던 그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신 사건이었다.
또한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물 위를 걸으신 사건도 말 그대로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물리학적으로 인간이 물위를 걷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물 위를 걸어 배에 있는 제자들에게 오셨다.
일반적인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었던 이 두 가지 표적(요 6:1-21)은 결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을 결정적으로 표현해준 표적이었던 것이다.
5. 물고기 153의 표적
153 물고기 표적은 베드로 물고기 표적으로도 유명하다.
이 표적은 병행되어 있는 표적과는 좀 다르게 다루어진다.
이 표적은 1장에 대한 증거로서의 표적으로 병행되는 표적들과는 다르게 분류된다.
그리고 요한복음의 마지막 21장에 기록되어 1장과 병행되고,
1장을 증거하고 있는 요한복음의 마지막 표적이다.
이 표적 역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기적이다.
이 표적의 메시지 또한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 말했던 것 같이 요한복음은 말 그대로 표적으로만 이루어져있는 책이 아니다.
표적과 함께 주님께서 하셨던 말씀(교훈, 담화)도 함께 기록이 되어 표적과 함께 어우러져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함께 기적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표적들 사이에 언급되어 있는 주님의 교훈들은 어떤 것들이었을까?
* 표적과 담화의 구성
위의 표와 같이 요한복음에는 표적과 담화가 함께 짝을 이루어 기록되어 있다.
담화의 대표적인 의미 자체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을 담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 및 복음서 자체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위에 나타난 담화에 대한 구성과 내용은 차후에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다.
성경문화연구원 / 성경구조분석연구원(서영환교수)
예수님께서는 자기 육체를 성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은 성전에 대한 당시 유대인들의 잘못된 신앙을 바로 잡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성전의 내용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곳입니다.
성전의 형식은 성막, 솔로몬의 성전으로 드러났습니다.
이적, 표적에 대한 바른 이해
1. 표적(Sign)이나 이적(Wonder), 또는 기적(Miracle)은 주로 같은 상황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행적을 다루는
4복음서에서 이 용어들은 거의 비슷한 용어처럼 등장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적과 기적은 비슷한 말로서 놀라운 행적을 묘사하는 용어지만 표적은
그렇지 않습니다.
2. 이적이나 기적은 놀라운 일(Wonder), 보통 인간이 할 수 없는 일, 또는 자연법칙을 넘어서는
초자연적인 일(Miracle)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10가지 재앙을 내리신 일이나, 여호수아가 전쟁 때 태양을 멈추게 한
일, 또는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하고, 빵 5덩이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을 먹이신 일과 같은 일들은 모두 "기적" 또는 "이적"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적이나 기적을 행하는적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신성, 놀라우신 위엄 등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3. 표적(Sign)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말하려는 것을 증명하는 도구입니다.
"표적"은
헬라어로 "세메이온", 영어로 "sign"이라고 하는데, 이는 "표시", 또는 "징조"로 이해할 수 있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말씀하시거나 주장하실 때에 표적을 통해서 그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증거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적이나 기사를 통해서 표적을
나타내실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막 16:16)이하에 나오는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과,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는 일, 또는 병자들에게
안수하여 치유하는 일들은 이적인 동시에 "표적"이라고 불려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성령께서 복음 전도자의 말이 진리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나타나는 표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출 4장)에도 이러한 예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이집트로 보내려고 했지만, 모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보소서! 그들이 나를 믿지도 아니하고 내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리니, 그들이 말하기를 '주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출 4:1)."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보내셨다는 증거를 요구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막대기로 뱀을 만들어 보이셨고,
모세의 손에 문둥병을 발하게 했다가 다시 치유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두 가지 이적들을 자신이 모세를 보내셨다는 "표적"으로
제시하셨습니다.
그러나 표적 중에는 이적이나 기사가 아닌 것도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안식일은 "표적"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이적"이나 "기적"에 속하지 않습니다(겔 20:20).
표적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표적은 바로 "치유"의 표적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오실 때에, 그 분이 메시야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왕의 표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오셨을 때
백성들은 어떻게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을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통해서 알 수 있었습니다.
"그때에 소경의 눈이 뜨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뚫리리라. 그때에 절름발이가 사슴처럼 뛰고,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라. 광야에는 물이
솟아 나오며 사막에는 시내가 흐르리라"(사 35:5-6).
"내가 잃어버린 자를 찾을 것이요, 쫓겨났던 자를 다시 데려오고 상한
자를 싸매 주며 병든 자를 강건케 해 주리라. 그러나 나는 살지고 강한 자를 멸할 것이며 심판으로 그들을 먹이리라"(겔 34:16).
이 모든 예언들은 메시야께서 오실 때에 일어날 일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역을 하시는 동안에 그렇게 많은 치유를 행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러한 표적을 보고서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거부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표적은 후에 사도들에게 이어졌는데, 이는
"사도들의 표적"이라고 부릅니다는(고후 12:12).
이러한 표적은 이 일을 행하는 자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성령의
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미혹(迷惑)케 하는 자
1) 거짓 교사 (딤전 4:1-5; 벧후 2:1, 3:3,4)
2) 거짓 그리스도 (마24:5,24;막13:6;눅21:8;고후11:4)
3) 거짓 선지자 (마24:24;막13:22;벧후2:1;요일4:1)
4) 당을 짓는 자 (갈5:20;유1:18,19)
5) 성경을 가감하는 자 (계22:18,19)
6) 이단 (갈5:19-21;딛3:10;벧후2:1)
7) 적그리스도 (요일4:3;요이1:7;유1:4)
2. 용어의 의미
1) 기사(奇事, wonder)
기이한 일(출 11:10; 막 13:22; 행 2:19).
외적으로 자연현상에 나타남을 말합니다(신 7:19; 행 7:36).
‘기사’라는 말은, 어떤 일에 의해 생겨난 사건을 목격한 자의 놀라움이라는 것을 포함합니다(막 2:12; 행 3:10,11).
예수님께서 직접 행하신 ‘기사’는 폭풍 잠재우기(마 8:23-27), 오병이어(마 14:15-21), 바다 위로 걸으시기(마 14:22,23),
물을 포도주로 만들기(요 2:1-11)
2) 기적(奇蹟, miracle)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놀랄만한 일. 하나님의 행위를 가리킵니다(시40:5;사20:3;살후2:9). 성경에서 기적은 기사와 표적으로 구분하여 표현하였습니다. 기사는 외적으로 자연현상에 나타남을 말하고, 표적은 내적으로 주로 사람에게 나타남을 말합니다.
★ 기적을 행하는 자(miracle workers)
대표적인 사람은 모세인데 그를 통하여 발생한 '표적 기사'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을 성취합니다(출애굽기). 엘리야와 엘리사의 예언자적 역할도 그들의 말에 따라 이루어진 기적을 통하여 마련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들은 하나님의 왕국의 도래를 준비하는 데 있어서의 악한 세력들의 타파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막 3:22-26; 눅 11:19,20).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의 사역을 확장하도록 위임받았다(막 3:14-15).
바울은 기적을 행하는 것을 성령님의 은사로 보고 있습니다(고전 12:9-10).
3) 이적(異蹟, miracle, divine work)
기적과 동의어로 초자연적인 것으로 불가사의 한 일(출 3:20,4:8; 욜 2:30; 눅 23:8; 막 13:22).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놀랄만한 일(사 20:3)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그 뜻에 맞는 일은 무슨 일이든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므로, 자연법에 제한 받는 일 없이, 그 자신의 의지를 행하시기 위해서는 새로운 법칙을 만드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적 중의 이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인데, 이것을 출애굽에 의해 예표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해, 교회를 죄와 죽으심의 영역에서 구출하셨습니다. 신약성경에는 ‘기이한 일’(powerful deeds), ‘기적’(wonders), ‘표적’(signs)으로 기록되어 예수님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의 표현을 뜻합니다.
★ 이적을 행하는 이유
이적이나 기적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신성, 놀라우신 위엄 등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세 가지 종류의 이적, 곧 병 고침과 귀신 축출, 그리고 '자연 이적'(nature miracles)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자연 이적’(물로 포도주 만드심, 바람과 바다를 잠잠하게 하심 등)은 오직 예수님만이 행하셨습니다.
4)표적(標的, sign)
표징. 초자연적인 능력이 외부에 드러나는 일로서 진리임이 증거 또는 묵시되는 일(출12:13;시74:9;마16:4;롬15:18).
‘이적’과 동의어로 씌어진 경우가 많은데, ‘이적’은 초자연적인 능력에 의해 생겨나는 사건을 주로 가리키고, 표적은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말하려는 것을 증명하는 도구입니다. 대개의 경우 ‘이적과 표적(기사)’이라는 표준적인 표현으로 되어 있습니다(신28:46;신4:34;렘2:20).
★ 표적을 행하는 이유
예수님에 접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적’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표적’을 보아 알았습니다(요2:11,3:2). 따라서 이것을 이해할 수 없는 자들과 다만 이상한 현상만을 구하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은 ‘표적’을 주시기를 거부하셨습니다(마12:33;막8:11;눅2:12;요2:18).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세상에 와서(마1:25;눅2:11-17,) 만민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가(마27:35-50;막15:24-37;눅23:33-46;요19:17-30)부활하시고(마28:1-10;막16:1-11;눅24:5,6;요20:11-18;행1:3), 승천하신 것이(막16:19,29;눅24:50-53;행1:9-11) 참된 표적이기 때문입니다.
3. 이적과 표적에 대한 바른 자세
하나님은 이적이나 기사를 통해서 표적을 나타내실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막 16:16)이하에 나오는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과,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는 일, 또는 병자들에게 안수하여 치유하는 일들은 ‘이적’인 동시에 ‘표적’이라고 불려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성령님께서 복음 전도자의 말이 진리라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 나타나는 표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표적 중에는 이적이나 기사가 아닌 것도 있습니다.
성경(겔 20:20)을 보면 ‘안식일’을 ‘표적’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이적이나 기적에 속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표적을 요구했을 때,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마 12:38-40; 16:1,4). 나아가 표적을 주시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막 8:11-12).
이와 같이 하신 것은 사람들이 표적을 신뢰하는 데 따르는 위험성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악의 세력도 '거짓된 표적'으로 이적을 행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4:24; 살후 2:9-10; 계 13:13-14,19:20).
진리의 기준은 이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참으로 합당한가 하는 것입니다(신 13:1-3; 마 7:21-23).
따라서 표적을 구하는 믿음은 올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입으로만 주의 이름을 부르는 믿음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믿음이 필요합니다(롬 10:13).
예배당이 성전인가?(요한복음 2:19-22)
언제부터인가
교회 내에서 예배당을 가리켜 ‘성전’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대표기도를 드릴 때에도 “우리가 주님의 성전에 모였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특히 교회당을 새로 건축할 때는 거의 대부분의 교회가 ‘성전 건축’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심지어 얼마 전부터는
대형교회들을 중심으로 ‘지성전’이라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는데, 필요에 따라 교인들을 지역별로 나누고 각각의 회중이 모이는 건물이나
장소를 그렇게 부르게 된 것입니다.
교회와 교회당(예배당)은 다릅니다.
교회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이고, 교회당은 그러한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건물이나 장소를 뜻합니다.
교회당을 성전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경향이 나타납니다.
첫째,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는 특정한 건물이나 장소와 연관된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자기들이 모이고 활동하는 건물을 신성시합니다.
예를
들어, 옛날 어른들이 많이 그러셨는데, 아이들이 교회에서 놀다가 본당에 들어와 강단 위로 올라오면 “에이 이놈들, 여기가
어디라고 올라와!” 하면서 야단을 쳤습니다.
또 드럼 같은 악기는 본당이라고 해서 쓰지도 못했습니다.
물론 그런 것이 다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단순히 신성한 예배당이라서 안 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성경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생각하는 신앙적 경향을 가리켜 ‘성전 신앙’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성전 신앙이 한국 크리스천들에게
두드러지게 된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 중 가장 큰 것은,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성전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중심이
된다는 것을 발견하고, 우리도 우리의 교회당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구약에 나타난 성전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율법을 주셨습니다(출 20-23장).
그리고 성막을 짓고 제사장 제도를 세울 것을
명하셨습니다(출 25-31장).
그런데 그렇게 성막을 짓게 하신 목적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거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내가 그들 가운데 머물 수 있도록, 그들에게 내가 머물 성소를 지으라고 하여라.” (출 25:8)
하나님께서는
그 가운데 임하겠다고 하시는 놀라운 특권을 이스라엘에게만 허락하셨습니다.
또 그러한 하나님의 임재가 이루어지는 것은 성소를
지음으로써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가운데 임재하실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과 만나고 그들에게 당신의
뜻을 말하기 위해 성소를 짓게 하셨습니다(출 25:22).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사사시대를 거쳐 왕국체제로 돌입했으며, 첫 번째 왕은 사울이고 두 번째는 다윗인데, 다윗은 성전을 짓고
싶었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고 대신 모든 재료를 다 준비해놓음으로 그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성전
역시 모세 때의 이동 성막과 같은 목적에서 세워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전을 세운 목적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시고 그들 가운데 처소를 마련하시도록 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네가 나에게 한 기도와 간구를 내가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네가 내 이름을 영원토록 기리려고 지은 이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였다. 따라서 내 눈길과 마음이 항상 이곳에 있을 것이다.”(왕상 9:3)
이와
같이 모세 때의 이동 성막이든 솔로몬의 영구적 성전이든, 그 건립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누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성막과
성전이 완성될 때 하나님께서 구름으로 임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이 그곳에 가득한 것을 볼 때 그러한 목적이 성취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금 내용과 형식이 연결되는 것을 봅니다.
성전의 경우, 내용은 ‘하나님의 임재’이고, 형식은 ‘이동 성막’ 혹은 ‘솔로몬의
성전’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가 특정 양식의 건물을 통해서만 가능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명하신 이동
성막이나 솔로몬의 성전이 없었다면, 결코 하나님의 임재는 경험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형식도 내용 못지않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막이나 성전의 건축 구조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하나님의 생각에 의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너에게 보여 주는 모양과 똑같은 모양으로 성막과 거기에서 쓸 모든 기구를 만들어라.” (출 25:9)
물론 그렇다고 하여 성전이라는 형식 자체가 있다고 해서 성전에 오는 사람들의 바른 태도 없이 그 내용인 하나님의 임재를 저절로 보장해주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은 이미 성전을 지을 당시부터 하나님이 밝히셨습니다.
“그러나
너와 네 자손이 나를 따르지 아니하고 등을 돌리거나, 내가 네게 일러준 내 계명과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곁길로 나아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들을 숭배하면, 나는, 내가 준 그 땅에서 이스라엘을 끊어 버릴 것이고, 내 이름을 기리도록 거룩하게 구별한
성전을 외면하겠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사이에서, 한낱 속담거리가 되고,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왕상
9:6-7)
하지만
구약시대에는 성전의 제도와 건물 없이 하나님의 임재를 마음대로 누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벨론 포로 귀환과 더불어
유다 백성이 가장 먼저 힘쓴 일은 성전 건축이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구약의 성도들은 여호와의 성전을 그토록 사모했던
것입니다.
“주님, 나에게 단 하나의 소원이 있습니다. 나는 오직 그 하나만 구하겠습니다. 그것은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면서 주님의 자비로우신 모습을 보는 것과, 성전에서 주님과 의논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시편 27:4)
이처럼 하나님의 임재라는 내용은 성전이라는 형식을 통해서만 의미가 살아나는 것이어서,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에 대해 그토록 간절한 열망을 품은 것입니다.
새 언약 시대의 성전
성전을
통한 하나님의 임재는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큰 변화를 겪습니다.
즉 내용과 형식의 긴밀한 연관이 깨어지면서 성전은 더 이상 구약
식의 의미와 중요성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먼저,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잘못된 성전 신앙을 가지고 있다가 망했습니다.
그들은 성전이 자기들 가운데 있다는 이유로, 실제 삶에서는 온갖 죄와 비리와
부정을 다 저지르면서도, 성전이 함께 있으니까 자기들은 얼마든지 안전하다고 착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도 행하지 않고 뒤로
온갖 더러운 짓을 다 하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제사를 드리고 성전이 거기 있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하다가 망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참된 성전 신앙이 무엇인지 보여주신 것입니다.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임재 자체이시므로, 이제는 더 이상 다른 형식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요한복음 1:14)
여기서
‘사시다’라는 동사는 ‘장막을 치다’라는 뜻으로, 주님의 성육신이 구약시대 하나님께서 성전에 임재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것과 같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영광” 역시 모세 때의 이동 성막이나 솔로몬의 성전이 완공될 때 충만했던 여호와의
영광을 연상시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이 온전히 임재하시고 그분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 알 수 있으므로,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해준 분이십니다.
“일찍이,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버지의 품속에 계신 외아들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알려주셨다.”(요한복음 1:18)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성전이라고 밝히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육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19-22절)
예수님이
성전을 3일 동안에 일으키겠다고 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이 말을 너무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오해했습니다.
사실 BC 20년에 시작된
제2차 성전 보수 공사는 46년이 지나서도(AD 26년) 끝나지 않았고, 이후로도 38년이나 더 걸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성전이 되셨으므로 이제 더 이상 형식으로서의 성전, 곧 건물로서의 성전과 이에 따른 제사 제도는 필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진 것으로도 드러났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이러한 십자가 사건 당시의 현상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서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휘장을 뚫고 우리에게 새로운 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휘장은 곧 그의 육체입니다.”(히브리서 10:19-20)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부활하시고 승천하여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받으신 성령을 그의 교회에 부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높이 올리셔서, 자기의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약속하신 성령을 받아서 우리에게 부어 주셨습니다.”(사도행전 2:33)
이것은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게 된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것으로 인해 바로 그리스도인 각 개인과 또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처소, 곧 성전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의 성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성령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모시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고린도전서 6:19)
구약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는 건물이 성전이었는데, 이제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은 우리는 늘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하시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 안에 늘 함께 하시니까, 우리가 곧 성전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놓은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며, 그리스도 예수가 그 모퉁잇돌이 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 전체가 서로
연결되어서, 주님 안에서 자라서 성전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도 함께 세워져서 하나님이 성령으로 거하실 처소가
됩니다.”(에베소서 2:20-22)
그리스도인
각자가 성전일 뿐 아니라, 우리가 함께 공동체로서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겁니다.
이렇게 신약시대에는 성전 건물이라는 형식 없이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임재라는 내용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지금 참다운 의미에서의 성전은 우리 각 그리스도인과 교회
공동체이지, 예배당 건물이 아닙니다.
예배당을 가리켜 ‘성전’이라고 부르고 교회당을 지으면서 ‘성전 건축’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성경적으로 볼 때 바른 표현은
아닙니다. 만일 ‘성전’이라는 단어를 쓰면서 단순히 ‘거룩한 건물’이라는 뜻으로 쓴다면 문제가 없지만, 옛날 예루살렘 성전을
생각하며 거기에 비교하여 쓴다면 바르지 않은 것입니다.
참된 '성전 신앙'으로 나아가는 길
잘못된 성전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은, 구약의 성전을 은근히 지금의 교회당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그릇된 성경 해석 및 적용이 그 주된 원인입니다. 물론 그 외에 다른 요인들도 있습니다.
무교적 요인(巫敎的 要因)
한국 크리스천들은 무교적 세계관과 심성이 깊이 배어 있습니다.
샤머니즘에서는 영적 실체나 현상을 어떤
특정한 물체와 연관을 짓는 특징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어떤 물건이 자기에게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굳게 믿는 것, 어떤 길로
지나가면 불길하다고 하는 것 등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목걸이도, 그것을 목에 걸고 다니면 뭔가 자기를 보호해줄 것 같은 생각으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게 부적이지 무슨 십자가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부르면서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합니다.
특정한 장소에 ‘성전’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그곳은
다른 데와는 달리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이므로 거룩하고 신성하고 구별된 곳인 것처럼 여깁니다.
물론 교회당 안에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지만 건물 자체에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이 작용한다고 믿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종교 심리적 원인(宗敎 心理的 原因)
교회당이라는 공간이 주는 종교적, 심리적 효과를
말합니다.
먼저, 예배당은 공동체 의식을 형성하는 역할을 해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배당이라는 공간을 통해 공 예배를 드리고,
그룹으로 기도회를 하며, 어른들의 성경공부와 제자양육 및 어린이와 청소년 주일학교 교육을 실시합니다.
그렇게 같은 공간에서 같이
활동을 함으로써 공동체 의식이 아주 높아집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교회당은 교인들에게 많은 영적 경험과 추억들을 생각나게 해줍니다.
인간의 영적 정서는 특정한 영적 체험을 했을 때의
장소와 분위기와 상황에 따라 크게 올라갈 수 있습니다.
종교적, 심리적 효과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당을 중요시하고
어떤 경우에는 심지어 ‘성전’이라고까지 부르는 것입니다.
성전
신앙에 있어,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것과 무교적 요인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종교 심리적 요인의 경우는 다릅니다.
이것이
잘못 방향을 잡아서 교회에서 모여 경험하는 것들만 중요시함으로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하면 바람직하지 않지만, 참된 의미의 성전
신앙으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드는 영적 경험들은 우리에게 도움이 됩니다.
진정한 의미의 ‘성전 건축’은 건물을 지어나가는 동시에 성도 각 개인의 신앙을 강화해주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후로는 예루살렘에 세워진 건물이 성전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성전 건축은, 우리 각자가 세워지고 함께 사랑의 공동체로 세워져나가는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화평을 도모하는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을 씁시다.” (롬 14:19)
“'모든
것이 다 허용된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모든 것이 다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다 허용된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모든 것이 다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도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추구하십시오.” (고전
10:23-24)
‘덕을
세우다’라는 말은 개인의 체면이나 위신을 높여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단어가 바로 <새로운 삶> 공부에서 배우는
‘오이코도메오(oikodomeo)’입니다. 이 단어는 원래 ‘집, 권속, 가족’을 뜻하는 ‘오이코스(oikos)’와 ‘짓는다(to
build)’라는 의미의 ‘데모(demo)’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다시 말해, 집이나 어떤 영적 건물을 세운다는 것이 ‘덕을
세우다’의 원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개인을 세우는 일과 공동체의 유익을 도모하며 공동체를 세우는 일이 바로
‘오이코도메오’(덕을 세우다)입니다.
내 마음 자세가 틀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희생이 들어간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시간을 희생하고 노력을 희생하고
개스(gas)도 써가면서 온 것입니다.
또 이곳에 나와서 기도를 하고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나 중심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
중심으로 하겠다는 선포가 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집에서도 얼마든지 기도하고 예배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 당연히 그것은 가능합니다. 그렇게 할 수만 있으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말이 자기를 속이는 함정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그 말 속에, 피곤한데 교회까지 가서 하기보다는
그냥 집에서 편하게 하겠다는 생각이 있다면, 다른 믿음의 지체들과 마음을 합해야 하는데 꼴 보기 싫은 사람이 있기 때문에 나가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면, 그것은 자기를 속이는 말이 됩니다.
교회당에 나와서 하는 만큼의 간절함이 없이 대충 하게 된다면, 다른 형제자매들과 합심해서 눈물로 드리는 기도와 예배의 간절함이
없이 집에서 한다면, 반드시 나와서 함께 기도하고 함께 예배드려야 합니다. 그것은 예배당이 성전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참된
성전인 나 자신의 신앙을 세우고 함께 지어져가는 성전인 공동체를 함께 세우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개인과 공동체의 덕을 세우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성전 신앙입니다. 이러한 신앙을 기초로 할 때, 예배당은 그 기능이 건전하고
아름답게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개인과 관련되었든 공동체와 연결되었든, 사랑과 용서와 섬김을 통해 덕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 ‘성전’이라고 불러주신 뜻을 이루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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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 험한 세상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 믿는(현재분사형) 계속진행형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 되는(부정과거형) 한번 됨으로 영원히 계속되는 것
자녀
1. 휘오스 : 양자로서 자녀가 되는 것 / 바울 서신(롬 8:15, 갈 4:5-6)
υἱός, οῦ , ὁ 5207
1. 아들, 2. 사람의 남자 자식 3.동물의 수컷 새끼
2. 테크논 : 본성적 자녀(요 9:52, 요일 3:1, 2, 5:2)
τέκνον, ου, τό 5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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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세상속으로…] 추락하는 교회 부활의 길은
코로나 팬데믹과 대선 기간을 지나는 동안 한국교회 신뢰도가 급락한 것으로 조사됐다.
국민일보와
사귐과섬김 부설 코디연구소가 여론조사기관 지앤컴리서치에 의뢰해 지난달 31일부터 지난 4일 전국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기독교에 대한 대국민 이미지 조사’ 결과 한국교회 신뢰도는 18.1%로 26일 나타났다. 2년여 전보다 13.7%
포인트 떨어졌다. 2020년 1월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 조사에서 31.8%였던 신뢰도는 지난해 1월 목회데이터연구소 조사에서
20.9%였다.
일반 국민 중 기독교(개신교)를 신뢰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18.1%였다. 기독교인 중 기독교를
신뢰한다는 비율은 63.5%였다. 2년 전 기윤실 조사보다 12.0% 포인트 낮아졌다. 비기독교인 중 기독교를 신뢰한다고 답한
비율은 8.8%였다. 응답자 특성별로 보면 19~29세에서 신뢰한다는 비율이 11.7%로 가장 낮았고 60세 이상에서 27.7%로
가장 높았다. 설문 분석 결과 정부의 코로나 방역 지침과 대선에 대한 일부 교회의 모습이 부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됐다.
기독교에 대한 호감도는 25.3%로 3대 종교 중 가장 낮았다. 천주교는 65.4%, 불교는 66.3%였다. 기독교에 대한 이미지
형성에는 주변 사람(56.3%) 언론 보도(53.6%) 자기 경험(49.8%) 등이 골고루 영향을 미쳤다.
한국교회
신뢰도 회복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는 교회 지도자들의 윤리적인 삶이 필요하다(50.2%)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언행 자제(34.0%)가 그 뒤를 이었다. 재정 투명성 제고(28.9%) 교인들의 윤리적인
삶(26.2%)에 대한 응답률은 비슷했다. 기독교에 대한 신뢰도와 호감도가 낮은 원인은 삶으로 증명되지 않는 신앙과 배타적인
이미지로 유추할 수 있다. 설문조사 대상은 지역 성별 연령 비례할당으로 추출됐고, 표본 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3.1%
포인트다.
이번 조사는 한국교회가 우리 사회에 과거보다 더 편협하고 위선적인 ‘얼굴’로 비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미지 개선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있다. 안덕원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 교수는 “교회가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은 십자가이고 은혜이며 환대(골 3:1~17)여야 한다. 삶과 죽음, 부활로 모범을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고 했다. 신국원 총신대 명예교수는 “사회 봉사를 통해 복음의 능력을 증거하는 데 힘써야 한다”고 했다.
미국
뉴욕 리디머장로교회 설립자 팀 켈러 목사는 최근 ‘갱신의 길’이란 글에서 “선지자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제단을 쌓았지만 번제물에
불을 붙인 것은 하나님”이라며 “우리는 ‘제단’을 만들면서 하나님이 부흥의 불을 댕기도록 기도해야 한다”고 했다. 국민일보는 올해
‘한국교회, 세상 속으로’라는 슬로건으로 한국교회가 어떻게 이 땅에 바로 서서 하나님을 아름답게 전할지 모색한다.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s://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242488&code=23111113&sid1=ch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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ἐξουσία, ας, ἡ 1849
요한복음(04-28-2022) 목요일
열왕기서를 읽으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은 이 세상에 견고한 나라를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구별된 백성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문제는 메시아를 기다리면서도 메시아가 오셨을 때에는 메시아를 인정하지 않고 십자가형으로 핍박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교회는 많지만 예수의 몸된 교회를 세워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도입 이야기)
교황 이노센트 3세와 스콜라신학의 대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 1225~ 1274. 3. 7)가 교황청의 발코니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을 때
마침 유럽 각 교회로부터 도착하는 헌금주머니들을 보며 교황이 말했습니다.
"
보시오, 선생.
베드로 사도께서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에 금은보화가 넘쳐나고 있질 않소!"
이때 토마스아퀴너스는 이노센트 3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
그러나 그 대신 교회는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 걸인을 일으켜 세우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과 권능은 잃어버렸습니다."
미국 사회를 흔드는 힘은 "
뉴 에이지운동(New Age)"이라고 하겠습니다.
뉴에이지 운동은 현대과학과 자연숭배, 서양의 마술, 동양의 신비주의, 등이 합쳐진 복잡한 종교체계입니다.
특히 불교와 힌두교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데, 요가, 점성술, 명상, 심리치료, 수정구슬 점(占), 기(氣)수련, 해몽(解夢), 등의 여러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된 사상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문제점과 기독교의 가르침과는 어떤 점이 다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모든 것은 하나다(All is one)뉴에이지의
가장 기본적인 사상은 모든 것이 하나라는 생각입니다.
모든 것은 서로 연관되어 있고, 서로 의존적이며, 서로 통한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을 일원론(Monism)이라고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신(神)이나 인간, 식물, 바위 모든 것이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경계가 없이 연속적인 실재(reality)의 한 부분들이며, 겉으로 볼 때 서로 나뉘어진 것처럼 보일 뿐, 사실은
구별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세계관은 일원론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하나님은 나눌 수 없는
한가지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물, 동물, 식물과 사람들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의 기록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고, 낮과 밤, 하늘과 땅, 바다와 육지를 나누셨습니다.
그리고 식물과 동물을 종류에 따라 창조하시고, 마침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구별되지 않는 하나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다양한 여러 가지를 창조하셨고, 그 자체가 하나로 통일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 안에서 하나가 된 것입니다.
'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섰느니라'''(골 1:17).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 자신도 구별되지
않는 한 분이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 세분이 일체(Trinity)를 이루고 계십니다.
둘째,
모든 것은 신(神)이다All is god)'''신을
포함한 모든 것이 하나다'''라는 것을 받아들이면, 그것은 곧, '''모든 것은 신이다'''라는 이야기로 발전하게 됩니다.
사과나무, 고양이, 책, 등 모든 것이 신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범신론(Pantheism)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다, 모든 것은 신이다''라고 생각하게 되면 신은 모든
것을 포함하는 한 존재(one being)이므로, 신은 인격적인(personal) 신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따라서
뉴에이지는 우주 만물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하여, 우리를 사랑하시고 다스리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버리고, 그 대신 우주의 에너지,
힘(force)을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에 놓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이 그의 피조물과는 전혀 다른
초월적인 분이심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피조물들을 창조하신 후, 무관심하신 것이 아니라 피조물과 함께 하시지만,
피조물과 혼동되지 않으며 피조물이 하나님을 포함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3에서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는'' 사람들을 책망하였습니다.
전도서
5:2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라''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처럼 여기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idolatry)라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셋째,
인간은 신이다(Humanity is god)이것이
바로 뉴에이지가 사람들을 현혹하는 주된 이유중의 하나입니다.
우리 인간은 완전하며 사실상의 신인데, 단지 우리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신성이 발휘되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 안에 내재되어 있으면서도 잠자고 있는
신성을 깨워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피조물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무한하거나, 전지 전능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인간과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리를 노리는 자들을 계속해서 정죄하고 있습니다.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사 14:13-15)
넷째,
깨달음(Enlightenment) - 각성(覺性)뉴에이지는
"모든 것은 하나요, 모든 것은 신(god)이다. 따라서 우리는 신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우리 자신이
신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가?
무지(無知)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얻을 수 있는 경험이 제한적이고, 무엇이
진리인가에 대해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왔기 때문에, 인간이 유한(有限)하다는 잘못된 생각에 만족하며 인간의
정체성(identity)을 망각한 채로 살아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깨달음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지각(consciousness)을 교정하는 기법을 이용하면 진정한 실재(true reality)를 볼 수 있고, 모든 것이
하나(oneness)라는 것과 영적 능력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방법으로는 운동, 과학,
미확인 비행물체(UFO), 외계인과의 접촉, 명상,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인간은 타락하여서 외부로부터 구원이 필요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과 화해할 필요가 없고 단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 자신에
지혜, 능력, 기쁨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신성을 깨달으면 영적 능력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엉뚱한 주장을 하는 뉴에이지 운동이 젊은이들을 유혹하고 널리 퍼져나가고 있으니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성경적으로 볼 때 현재
인간이 깨달아야 할 문제는, 인간의 신성이 아니라, 인간의 죄입니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배반하고 그의 법을 어겼습니다.
우리 인간 안에 해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뉴에이지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신성을
계발하는데서 해답을 찾으려고 하는 반면에, 기독교는 죄의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선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거룩하신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해서 세상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죄를 용서받고 영생을 얻게 된다고 가르치셨고 (요 3:16), 그 자신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가 누리게 될 미래를 보여주셨습니다.
다섯째,
모든 종교는 하나다(All religions are one)뉴에이지를
가르치는 사람들은 모든 종교들은 하나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혼합주의(Syncretism)입니다. 이들은 예수님, 부처,
모하메드, 크리슈나를 동일한 하나(oneness)를 가르치는 여러 종교들의 깨달은 자들로 여깁니다. 이 종교들의 겉모습은 달라
보여도 본질은 같다는 것입니다. 진리에 이르는 길은 여러 갈래이고, 모든 차이는 피상적일 뿐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뉴에이지는 기독교의 유일성을 부인합니다. 예수님을 더 이상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主), 그리스도로 여기지 않고, 단지 여러 시대를 통해서 인간에 내재되어있는 신성이 나타난 여러 인물들 중의 하나로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상의 예수님은 여러 신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사람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유일한 하나님입니다. 그는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라고 선언하셨고, 사도 바울도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범신론적인 여러 신들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그는 모든 것 보다 높으시며 오히려 그들을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그 분이 우리 모두를 부르고 계십니다.
여섯째,
우주는 진화한다(The universe evolves)무신론적
인본주의와 진화론의 신봉자인 줄리앙 헉슬리(Julian Huxley)는 뉴에이지 운동의 기초를 닦아놓은 인물입니다. 그는 모든
종교와 철학을 하나로 합쳐서 인간을 신격화한 인본주의를 만들고, 이것을 앞으로 나오게될 세계를 통치하는 단일 정부의 유일한 종교로
만들자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헉슬리의 이와 같은 주장이 미래에 대한 낙관적 희망을 가지고 뉴에이지 운동을 촉진시키게 된 것입니다. 우주의 역사를 진화론적 관점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인간이 중심이 되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정하자는 의도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주의 역사가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 하시는 (엡 1:11)"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움직여 가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래의 희망이 인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나, 불순종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임을 약속하셨습니다 (신명기 8, 28; 렘 18:5-10). 역사의 절정은
예수님께서 양들을 염소들로부터 영원히 갈라놓으시기 위해 재림하실 때 이루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미래가 어떤 이들에게는 상상할 수
있는 어느 것보다도 훨씬 좋겠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훨씬 나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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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부요함을 자랑하기보다는 하늘로부터 임하는 능력을 자랑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을 자랑하게 하시고
믿음의 반석 위에 세워져 변함이 없고 흔들림이 없는 교회를 자랑하게 하옵소서.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돈 재능과 권력의 힘이 대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와 영적인 일은 돈이나 권력이나 사람의 지혜나 재능으로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시골 촌구석 나사렛의 예수는 은과 금으로 일 하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돈과 권력을 축복으로 알고 돈과 세상의 권력의 유혹에 빠져, 세상의 재물로 하나님의 나라를 사려고 할 때 이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으로부터 철저히 단절되어 있는 생명 없는 종교일 뿐입니다.
* 토마스아퀴너스 / 임종의 자리에서 유언하기를
"내 벗인 죽음이여, 어서 오게나... 기다리고 있었네."
* 이노세트 3세(Innocentius PP. III, Papa Innocenzo III, 1160-1216) 제176대 교황(재위, 1198. 1. 8-1216. 7. 16)
본명 /
로타리오 데이 콘티 디 세니(Lothario dei Conti di Segni)
인노첸시오 3세는 ‘교황은 태양, 황제는 달’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교황권의 전성기를 이룩하여 중세의 교황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교황으로 손꼽힌다.
그는 유럽의 모든 군주들을 대상으로 우위를 차지하여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에 대해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는 교령들을 반포하여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를 소집해 가톨릭교회를 쇄신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 결과 서방 교회의 교회법이 크게 개선되었다.
비록 이러한 조치들이 항상 성공한 것은 아니었으나 인노첸시오 3세는 성무 금지와 견책 등을 적절히 이용하여 군주들이 자신의 뜻에 따르게 만들었다.
인노첸시오 3세는 알안달루스와 거룩한 땅의 무슬림들을 몰아내기 위한 십자군 원정과 프랑스 남부 카타리파를 진압하기 위한 알비 십자군 원정을 촉구하였다.
인노첸시오 3세가 내린 중대한 결정들 중의 하나는 제4차 십자군을 조직한 것이었다.
당초 이집트를 통해 예루살렘을 공략하려고 했던 십자군은 일련의 예기치 않은 상황으로 인해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였다(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처음에 인노첸시오 3세는 자신의 지시를 명백히 위반한 것이었기 때문에 십자군을 파문했지만, 나중에는 이를 동서 교회의 재일치를
위한 하느님의 뜻으로 보고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이 일로 인하여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 간의 적대감이 커지게 되었다.
이노센트 3세가 교황으로 재직했던 기간은 교황
체제의 가장 찬란한 역사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는 실로 막강한 권력의 중심이었고 교회는 물론 세속 정치에도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이것은 그가 재임하던 당시 제국이 분열 상태에 있었다는 이유도 있으나 그보다는 이노센트가 야망과 능력을 지닌
특출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로마 귀족 집안 출신으로서 파리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볼로냐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교회법 전문가로서 삼촌이었던 교황 클레멘스 3세에 의해 30세에 추기경으로 임명되었고 37세 때인 1198년 1월 교황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처음 군중 앞에서 자신은 “하나님의 종으로 모든 사람을 위해 살겠노라”고 선언하였고, “마태복음 24장의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의 생활을 모방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후에 그는 지상에서의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그의
통치권은 세계를 포함하며, 자신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섰을 때 하나님보다는 아래지만 모든 인간보다는 높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지상의 어떤 법정에도 복종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구약의 신정 체제를 이론적 근거로 제시하면서
“교회는 태양이며 세상은 달과 같다. 제왕들은 자기 왕국만 통치하지만 베드로는 세상 전체를 다스리신다. 영적 권위는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서 주어졌지만 왕권은 인간들의 음모에 의해 주어져 있다”고 말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는 대리인을 통해서 만물을
다스리시며 하늘과 땅과 지옥의 만물들은 그리스도에게 복종해야 하므로 그 대리인에게도 복종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또 “마치
영혼이 몸보다 더 중요한 것인 만큼 신부들은 왕들보다 더 귀중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시대는 교황권이 절정에 달했던
시대였는데 그의 재임 기간 중에 세속 왕에 대항하여 절대권을 행사했던 두 가지 예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는 프랑스
왕 필립 2세가 아내와 이혼하고 불법으로 다른 여자를 취했을 때 교황은 이를 승인치 않고 본처를 받아들이도록 압력을 넣었습니다.
프랑스 왕 필립 2세가 처음에는 불복하였으나 교황으로부터 수찬정지령을 받고 결국 승복한 일이 있습니다.
또 영국의
캔터베리 대주교의 임명 문제와 관련하여 영국 왕 존 랙클랜드와 대립한 일이 있습니다. 1205년 캔터베리 대주교 허버트 월터가
서거하였을 때 베네딕트 수도사들은 수도회의 부원장을 대주교로 임명하기를 원했으나 영국의 존 왕은 놀위치의 주교 존 드 그레이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하였습니다. 이 문제로 옥신각신하자 교황은 이 모두를 무시하고 랜톤 추기경을 임명하였지만 존 왕은
불복하였습니다.
화가 난 교황은 존 왕에게 수찬정지령을 내렸고, 1209년에는 그를 파문하였습니다. 존 왕은 이에
대항하여 영국내의 교회 토지를 압류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황은 1212년 영국 왕 존의 폐위를 선언하고 그의 영토를 몰수하고 프랑스
왕 필립에게 영국을 침입하도록 종용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영국 왕 존은 교황에게 굴복하고 사죄를 간청하였습니다. 이에 교황은
1213년 복권하여 주고 영토를 되돌려 주었는데 역사가들은 ‘실지왕(失地王) 존’이라고 부릅니다.
교황과의 싸움에서
패한 그는 권위를 잃었고, 1215년 6월 19일에는 심지어 자신의 왕권을 제한하는 문서인 마그나 카르타(Magna Charta ;
大憲章)에 서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65개조로 되어 있는 이 문서는 근대 민주주의 발전에 중요한 문서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노센트
3세는 제4차 라테란 범 종교회의(1215)를 소집하였는데 이 회의에서는 로마가톨릭의 교권체제를 반대하고 싸웠거나 복음적인
활동을 했던 알비조파, 카다리파, 그리고 왈도파를 이단으로 몰아 진멸하기 위한 십자군 칙령을 발표하여 박해를 가하였습니다. 비밀
종교 재판소를 설치하고 반 로마교회적 인물을 처단하였는데, 이 재판소는 두 사람의 증인만 있어도 이단으로 정죄, 고문하는 공포의
재판소였으니 교황은 자신의 절대 권력을 통해 복음적인 신앙 집단을 탄압하고 오도된 교리를 확정했던 교황으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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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가와 도요히코
평화주의 애국자, 기독교 사회주의자, 열렬한 평화주의자
1909년, 스물 한 살의 신학생이던 가가와 도요히코는 불우한 사람들과 삶을 함께 하기 위해 그 해 성탄절 이브에 일본 고베의 신카와 빈민가로 거주지를 옮겨 신학생 목회자로서 받는 자신의 급여로 그들과 함께 먹으며 살았다.
어느 사무라이의 사생아로 태어났던 가가와는 4살에 고아가 되었다.
중학교시절에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과의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되는데 그들이 베푼 사랑과 배움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처음으로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가가와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는 러스킨과 톨스토이의 작품, 그리고 성경을 읽었다.
“나는 그리스도라는 사람이 두루 다니며 선을 행했다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저 나다니길 좋아했던 나는 그 이야기에 매우 당황했습니다.”
—가가와 도요히코
가가와는 자신이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아야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하지만 빈민가로 이사한 후에 깨달은 것은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용기를 잃고 사기가 꺾여 의지가 없는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스스로 돌볼 수 있게 도와줄 수 있을까?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의 기회를 가질 수 있게 하려면 경제는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어린이들이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랄 수
있도록 가족이 함께 모여 살 수 있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가가와는 그의 사역에 전심으로 참여하며 도왔던 시바 하루를 아내로 맞게 되었다.
1922년, 그들의 첫 아기가 태어났을 때 영아
사망률이 75%에 달했던 빈민가를 떠났다.
그러나 가가와는 지칠 줄 모르고 단체를 조직하며 글을 썼고, 영국의 길드 사회주의에서
영감을 받아 노동자협동조합과 노동조합 건설에 주력했다.
또한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며 국제평화운동에 적극
나서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가가와는 자신을 애국자라고 여겼다.
일본의 진주만 폭격과 미국의 2차 세계대전 참전이 시작된 후 가가와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미국의 야만성을 규탄하였지만 일본의 만행에 대해선 언급한 적이 없었다.
그랬음에도 그는 일본이 만주를 침공한 것에
관해 중국에 공개 사죄를 하는 등 평화주의를 표방한 기록에 의해 '반전사상' 혐의를 받아 두 차례나 체포됐다.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투하하면서 전쟁은 끝났다.
1946년 2월, 가가와는 더 이상 공식적으로 신이라고
간주되지 않는 히로히토 천황의 초청으로 황궁을 방문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위대해지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예수의 말씀을 인용하여 가가와는 천황에게 조언했다.
“왕의 주권은 백성의 마음에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섬길 때에만
사람이나 국가가 신과 같이 될 수 있습니다.”
전후 국가재건을 위한 고문이 된 가가와는 노동 조합의 합법화, 토지 재분배, 노동자 협동 조합, 여성 참정권 등 자신이 추구했던
많은 개혁이 실현되는 것을 보았다.
전쟁은 가가와의 사명을 위태롭게 만들었으나 패전으로 인해 그의 임무는 오히려 성취되었다.
그는 베스트셀러 소설을 포함하여 150권 이상의 책을 저술했고, 노벨 문학상 후보로 두 번, 노벨 평화상 후보로 네 번이나
지명되었다. 평화주의 애국자이며 사회주의 기독교인, 선동적 평화주의자였던 가가와는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성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돌보시므로 우리도 서로 돌보아야 한다는 확신을 결코 잃지 않았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Thy will be done,” in its full extent, must be the guideline for the Christian life.
- 이디스 슈타인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 전체는 이 말씀만으로 안내 받아야 합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 년
내내, 생애 전체를 다스리는 규범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다른 걱정과 염려를 주님께서 맡아 주시고,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아버지의 뜻'에만 집중할 수 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우리에게 남을 것은 이것 하나뿐이라는 것을 머잖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제 막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시작한 신앙생활 초기에는 하나님의 손이 든든하게 인도해 주고 있음을 분명하게 느낍니다. 그러나 평생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누구든지 주와 함께 끝까지 가야 합니다. 언젠가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 겟세마네 골고다
언덕까지 이를 수 있도록 장성해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 신실하겠습니까? 신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의 전쟁으로 불타고 있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결정에는 생명의 대가가 따르므로 무엇을 약속할지 깊이 고려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주를 십자가에 못박기 전에, 이미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기로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당신이 십자가의 새신부가 되고 싶다면 자신의 뜻을 완전히 버리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
외에 다른 것을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구주께서는 가난을 선택하셨기에 당신 앞에서 벌거벗고 궁핍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계십니다. 주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세상의 모든 재물을 버려야 합니다. '다 버리고 수도원에 들어왔다'는 식의 단 한번의 결정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늘, 언제나
이것에 진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감사히 받아들이십시오. 그분이 어떤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더라도 기쁘게 행하십시오. 자기
몸의 사소한 필요와 성향에 신경 쓰지 말고 그것들을 책임져 주실 분께 맡기십시오. 내일이나 다음 끼니를 염려하지 마십시오.
당신 앞에 심장이 찔리신 주님이 달려 있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마음을 얻기 위해 피를 쏟았습니다. 거룩하고 순결하게 그분을
따르고 싶다면 세속적인 모든 욕망에서 마음이 자유로워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만을 생각하고 갈망하며 소망해야 합니다.
세상은 악하게 불타고 있는데 그런 악을 내어 쫓을 마음이 있습니까? 십자가를 바라 보십시오. 주님의 보혈은 당신의 열린 마음을
통해 용솟아 지옥의 불을 끕니다. 충실히 서원을 이행하여 자유로운 마음이 되면 당신 마음에 부어진 신성한 사랑의 홍수가 땅 끝까지
흘러 넘쳐 열매를 맺게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만을 갈망하고 소망하며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 이 끝에서 저 끝에 이르는 전쟁터에서 부상당해 신음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립니까? 의사도 간호사도 아닌 당신은 그들의
상처를 싸매 주러 그 자리에 갈수 없습니다. 비통하게 죽어가는 사람의 소리가 들립니까? 성직자가 되어 그들을 위로하고 싶겠지요.
과부와 고아의 탄식때문에 마음이 괴롭습니까? 자비로운 천사가 되어 그들을 돕고 싶을 겁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을
바라보십시오. 거룩한 서원을 충실히 지킴으로써 그분께 결합되어 있다면 당신의 존재는 보혈이 됩니다. 그분에게 묶여 있으면 당신은
주님처럼 온 세상에 있게 되고 성직자나 의사들처럼 그 현장에서 도울 수는 없지만, 십자가의 능력으로 슬픔이 있는 곳 최전방에
언제나 설 수 있습니다. 당신이 품고 있는 하나님의 마음에서 나온 자비로운 사랑은 우리를 어디로든 데려갑니다. 그 귀한 피는 모든
곳에 부어져 위로하고 치유하여 구원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의 눈이 당신을 내려다보며 유심히 물으십니다. 십자가에 달린 내 앞에서 너의 언약을 진정으로 새롭게 하려느냐? 어떻게 답해야 할까요?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리이까?"
요한복음 1-21장
1. 인간 사도 요한
요한이라는 이름은 '여호와의 은총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사복음서 중 요한복음은
그 철학적이고 깊이 있는 서술방식 때문에 같은 복음서이지만 공관복음서와는 다른 복음서로 구분됩니다.
요한의 부친은 세베대요, 모친은 살로메인데
살로메는 예수님의 이모가 아니었을까 짐작되고 있습니다.
( 요19:15 = 마 27:56 =막 15;40 살로메)
요한의 고향은 갈릴리 벳세다이며
형은 야고보, 직업은 어부였습니다.
처음엔 세례요한의 제자였다가(요 1:35 / 안드레와 요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붙여준 그들의 별명이 보아너게(의미 : 우레의 아들, 분노의 아들 막 3:17)인 것으로 보아 그들은 강한 성격을 가졌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 눅 9:54 사마리아 마을에 불을 지르기를 원함)
요한은 또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 것을 적발하여 금지시키고 예수님께 보고하기도 했습니다. ( 마가복음 9:38 = 눅 9:49-50)
특히 그들의 어머니 살로메는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순간 요한과 야고보를 특별 대우 해주기를 예수님께 간청하여 다른 제자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습니다. (마태
20:20-24)
그러나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을 특히 많이 받았습니다. ('그가 사랑하시는 자' 요한 13:23, 19:26,
21:7, 21:20) 그는 충성된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된 후 흩어졌지만 베드로와 함께 위협을 무릅쓰고 그가
알던 대제사장의 법정에 함께 들어가 예수님의 심문장면을 지켜보았고( 18:15) 마지막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처형당하는 순간까지 십자가
밑에 같이 있었고 예수님은 요한에게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했습니다. ( 요 19:26-27)
그때로부터 요한은 밧모섬에서 귀양을 갔다가
다시 온 후까지 그리고 에베소에서 죽을 때까지 마리아를 계속 모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예수님의 승천 후 요한은 베드로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와
함께 초대교회의 3대 지도자가 되어 오순절 성령충만을 받았으며, 베드로와 함께 앉은뱅이를 고쳤고 에베소에서 전도하다가 밧모섬에 유형되었습니다.
그는 요한복음(믿음)과 요한계시록(소망)과 요한1,2,3서(사랑)를 기록했고 주후 100년경 97세로 하나님께 돌라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생애에 있어 놀라운 변화는 그토록 급하고 질투가 많고 편협하던 그의 성품이 생애 마지막 부분에 쓴 요한일서에
이르러서는 사랑의 삶으로 바뀐 것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에베소에서 말년 설교를 할 때 오직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는 한 마디만 했다고
알려질만큼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하였습니다. 인간은 변할 수 있다는 예증을 그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베드로와 함께 어부
출신이었습니다. 흔히 베드로와 요한을 당시 유명 학문을 배우지 않은 무식한 사람들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유명한 정규교육을 따로 받지는
않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성경을 배워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특히 성령충만과 평생의 사역을 통하여 깊은 신앙의 지식을 소유하게 되었고 이
열정으로 귀한 성경을 기록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또한 요한에게는 이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뜨거운 열정으로, 에수님을 위한 열정으로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의 헌신과 충성은 오늘도 우리에게 신앙의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한 20;30-31)(21:24-25)
< 요한복음에서... 생각나누기
>
1. 로고스(logos)
요 1:1 태초에 말씀(logos)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창 1:1을 연상시키는 본 구절에서 요한은 예수님을 로고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말씀'으로 번역된 이 로고스는 철학적 용어로서 법칙, 원칙, 진리로 번역이 되는 우주와 이 세상의 불변의 법칙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이 용어를 쓸 때 그는 로고스에서 말씀으로 드러난 하나님의 원칙, 하나님의 마음을 이야기 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 하나님의 마음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나는 ...
이다(에고 에미)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은 7번에 걸쳐 "나는...이니라"(에고 ..에이미)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생명 떡 6:35 세상의 빛 8:12 양의 문 10: 7 선한 목자 10:11
부활이요 생명 11:25 길, 진리,
생명14: 6 참 포도나무 15: 5
그런데 이 말씀은 구약적 관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하나님은 과연
누구시라고 가르쳐야되느냐고 묻는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 하야 아쉐르 하야 I am that I am)이라고 말씀하시며 나는...이다라는
표현을 쓰셨습니다. (출1:14) 즉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나,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 된 나는.. 너희들에게 ... 이다라는 뜻이 담긴
말씀을 주신 것이었습니다.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3. 세족식 洗足式 (요한
13;1-14)
요한복음에는 성찬식 기사가 따로 구별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밤에 있었던 세족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마지막 밤의 성찬식 대신 세족식을 기록한 것은 섬김을 가르치신 예수님의 뜻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 13: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4. 제자들의 고민 ( 요한 2;40-42//
마태4;18-22)
5. 153마리 고기 어획의 기적 ( 21;11)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요 3: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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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5장
Lectio Divina(렉치오 디비나) 거룩한 읽기
개역개정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새번역
1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2 내게 붙어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잘라버리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손질하신다.
3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 그 말로 말미암아 이미깨끗하게 되었다.
4 내 안에 머물러 있어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 안에 머물러 있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이, 너희도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6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면, 그는 쓸모 없는 가지처럼 버림을 받아서 말라 버린다.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서 태워 버린다.
7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어서 내 제자가 되면, 이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10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12 내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이다.
15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종은 그의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운 것이다. 그것은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게 하려는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것은 이것이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포도나무에 접붙인 가지처럼,
제자들이 예수님께 머물면 말씀의 양분을 공급받아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성경 이해
하나님 나라를 포도원으로 비유하면, 성부는 농부요, 성자는 포도나무입니다(1절).
농부는 열매를 얻기 위해 가지들을 포도나무에 접붙임니다.
존재의 변화로 이끄는 접붙임입니다.
그리고 적당한 때에 가지치기를 합니다(2~3절).
마른 가지들은 잘라버리고, 열매 맺을 가지를 깨끗하게 합니다.
가지가 양분을 공급받아 나무의 일부가 되는 것처럼, 제자들도 예수님의 말씀에 머물러 작은 예수가 됩니다.
들포도를 맺던 가지가 이제 참포도 열매를 맺듯이, 제자들은 ‘사랑’이라는 열매를 맺습니다(12절).
나무를 돌보는 농부의 사랑, 나무의 희생하는 사랑, 그리고 가지가 맺는 사랑의 열매가 마치 동심원 물결처럼 퍼져갑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사람을 진정한 친구로 여기겠다고 하십니다(12~15절).
나의 복음(로마서 1:9, 16:25)
1:9 /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16:25 /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전부터 감취었다가.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를 향해 쓴 편지를 보면 ‘나의 복음’ 이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옵니다(로마서 1:9, 16:25).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고 공개적으로 천명했고, 만약 다른 복음을 만들거나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하늘의 천사라도 저주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나의 복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까요?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이 바른 복음임을 변증하기 위해 복음의 신적 기원에 대해 강조했습니다(1:11).
1:11 /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12 /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배운
것도 아니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 받은 것이 복음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 기록된 성경에 쓰여 있는 그대로 이뤄진 것임을 선포했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3~4)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이 예언한 대로 죽으시고 성경이 예언한 대로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증거했으며, 그 십자가에
대한 믿음으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거듭나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다”(고전 1:25)는 사실을 깨달은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야말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라고 선포했던 겁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선포한 ‘나의 복음’이라는 단어는 그 어떤 다른 복음을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 자신이 삶을 통해 경험한
믿음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진솔한 신앙 고백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도 바울의 신앙 정수가 바로 ‘나의 복음’이라는 선포입니다. 다른 사람이 경험하고 고백한 복음이 아닌, 사도 바울 자신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던 복음, 예수님의 빛으로 인해 앞을 보지 못하며 감겨 있던 두 눈을 뜨거움의 눈물 자락으로 만들었던 복음, 바로 그
복음의 감동을 바울은 ‘나의 복음’이라는 단어로 표출했던 것입니다. 자신을 체포하고 고문하고 핍박했던 사람들의 입에서 고백
되었던 예수 그리스도, 그들이 죽어가면서도 끝까지 지켰던 복음, 스데반이 순교하면서 보았던 그 예수님의 영광을 사도 바울도 직접
보았음이 ‘나의 복음’이라는 고백에 담겨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목숨 바쳐 전파하는 스데반의
얼굴에서 천사의 얼굴을 보았고 그 눈부신 얼굴은 바울의 기억 속에 강한 충격으로 남았습니다. 심지어 바울의 모습마저도 바꾸어
놓았습니다. 주후 2세기경에 쓰인 ‘바울과 테크라의 행적’이라는 외경을 보면 사도 바울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대머리와 흰 다리에 눈썹은 서로 맞닿고 코는 매부리에 단신의 다부진 체구를 가진 호감에 찬 사나이, 그는 인간의 모습에 천사의
얼굴을 가진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신학적 교리에 그치지 않습니다.
날마다 체험하는 ‘나의 복음’이 돼야
합니다.
‘나의 복음’은 삶 속에서 십자가를 직접 체험하고 경험한 실제적 복음이며, 동시에 그 경험한 십자가의
능력을 땅끝까지 전파하는 선교적 복음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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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스런 일군의 이야기 런던의 켄더베리 교회 니콜라이 집사
런던의
켄더베리 교회 니콜라이 집사님은 열일곱 살에 사찰 집사님이 되어 한평생 교회 청소와 심부름을 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교회를 사랑하고 충성했는지 모릅니다.
교회 종을 얼마나 정확하게 치는지 런던 시민들이 시계를 니콜라이 집사님의 종소리에 맞추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충성하면서 기른 그의 두 아들이 다 복을 받아 유명한 교수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교수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런데 그 당시에 교수가 되었으니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 두 아들이 말했습니다.
“아버지, 이제 일 그만 하세요.”
“아니야, 나는 끝까지 이 일을 해야 해.”
그는 76세까지 종을 치며 교회를 사랑하고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가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가족들이 그의 임종을 보려고 모였습니다.
그런데 종을 칠 시간이 되니 그가 일어나 밖으로 나가 종을 쳤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음 직전에도 종칠 시간이 되니 일어나서 종을 친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들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감동을 받고 영국 황실의 묘지를 그에게 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세상 떠난 날을 런던의 공휴일로 정하여 모든 상점의 문을 닫게 했습니다.
열일곱 살 때부터 심부름하던 사람이 하나님 앞에 충성하니 그 가족이 귀족처럼 되고 그가 죽은 날이 공휴일이 되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에 수많은 목회자들이 죽었으나 황실의 묘지에 묻히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배당 종치기를 하던 분이 얼마나 충성했는지 황실의 묘지에 묻히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그분의 충성은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하늘에서도 큰 영광으로 돌려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행한 대로 갚으시는 분입니다. 구원에 관한 문제만은 믿음만으로 결정되지만 이 땅에서의 축복과 상급은 행한 대로 받는 것입니다.
본문은 유명한 달란트의 비유입니다. 한 주인이 타국에 가면서 세 명의 종들을 불러서 그들의 재능대로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한 사람은 금 다섯 달란트를, 또 한 사람은 금 두 달란트를, 또 한 사람은 금 한 달란트를 받았습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과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바로 가서 장사를 했습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남겼고,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두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습니다.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와서 종들과 결산을 합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자기가 받은 달란트와 남긴 달란트를 주인 앞에 내놓습니다. 주인은 그 두 사람에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칭찬하였습니다. 반면에 한 달란트 받아 묻어두었던 사람에게는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고 하시면서 책망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달란트를 빼앗아서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충성과 불충성의 결과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충성과 불충성의 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충성한 사람은 착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불충성한 사람은 악한 사람으로 분류됩니다. 주인은 받은 달란트를 가지고 장사를 해서 이익을 남겼던 충성된 종들에게 ‘착하고 충성된 종’ 이라고 불렀습니다. 반면에 받은 달란트를 묻어두었던 종에게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일반적으로 착한 사람은 성격이 순해서 다른 사람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 사람, 자기에게 좀 손해가 되어도 양보할 줄 아는 사람, 누가 무엇을 요구하면 거절할 줄 모르는 사람을 착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악한 사람은 남을 괴롭게 하거나 바르지 않은 방법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악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주님이 보시는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은 일반적인 개념과 좀 다릅니다. 본문에서는 그가 온유한지 그렇지 않은지, 남에게 양보를 잘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남의 요구를 거절 못하는지 냉정하게 거절을 잘하는지를 보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주인은 착한 종과 악한 종을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충성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달란트와 은사 그리고 맡겨진 일에 대해서 충성하는 사람이라면 주님 보시기에 착한 사람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달란트와 은사 그리고 맡겨진 일에 충성하지 못하고 있다면 주님 보시기에 악한 사람입니다.
충성한 사람은 더 받고, 충성하지 못한 사람은 있는 것도 빼앗깁니다. 주인은 불충성한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의 달란트를 빼앗아서 충성한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충성한 사람은 받아서 풍족하게 되지만 불충성한 사람은 있는 것까지 빼앗기게 됩니다.
내게 주어진 것을 더 풍성하게 만들려면 주어진 것으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지금 가진 것에 충성하면 더 받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가진 것에 최선을 다하지 않고 되는대로 대충대충 살아가면 지금 가진 것도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충성한 사람은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되고 충성하지 못한 사람은 슬피 울게 됩니다. 충성한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맡는 것만 아니라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됩니다. 반대로 불충성한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김을 받고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됩니다.
이번에 임직자를 피택 할 때 충성되지만 피택 되지 못한 분들이 있습니다. 교회에 온 년 수 때문에 피택 되지 못한 분들도 있고, 나이가 젊어서 제외되신 분들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충성스런 사람’입니다. 본문에 나온 달란트의 비유를 통해서 충성스런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살펴보겠습니다.
1. 믿음직한 사람이 충성스러운 사람이다.
분문에서 사용된 ‘충성’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피스티스(pistov")’입니다. 이 단어는 ‘믿음’이라는 말과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으며 그 뜻은 ‘이랬다 저랬다 변덕을 부리지 않는 한결같음’입니다. 다른 표현을 사용하면 믿음직스럽다는 말입니다. 믿음직스러운 사람은 변덕을 부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언제나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 믿음직스러운 사람 즉 충성된 사람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사업을 하신다면 어떤 사람을 직원으로 두고 싶습니까? ‘한결 같은 사람, 믿음직한 사람’일 것입니다. 언제나 맡겨진 일에 성실하며 변함없이 충성하는 사람이 믿음직스러운 사람입니다.
하루 이틀 부지런한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 부지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두 번 깔끔하게 하는 것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변함없이 깔끔하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한두 번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것도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변함없이 계속 예의바른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결같은 사람, 그런 사람이 믿음직한 사람입니다.
19절을 보면 주인이 오랜 후에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오랫동안 변함 없이 충성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충성하다가, 처음에는 순수한 마음을 갖고 있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변질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후에도 처음처럼 충성하는 사람이 믿음직스러운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부분에 부족한 것 같습니다. 언제나 변함없이 언제나 충성스러운 믿음직스러움이 필요합니다.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직장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처음과 끝이 같은 충성스럽고 믿음직스러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미국 서부에서는 야생마를 길들일 때 나귀와 같이 묶어 놓습니다. 나귀와 같이 밧줄로 묶어 놓으면 말이 콧방귀를 뀌며 껑충껑충 뛰어다니면서 나귀를 끌고 다닙니다. 먼 산으로 껑충껑충 뛰어다니면서 나귀를 떨쳐버리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밧줄로 묶어 놓았기 때문에 나귀가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면 나중에 말이 지치게 됩니다. 그래서 며칠 뒤에는 어떤 모습으로 오는지 아십니까? 나귀가 말을 끌고 옵니다. 말이 끌려옵니다. 백 마리를 훈련시켜도 똑같답니다. 처음에는 말이 껑충껑충 뛰어다니면서 나귀를 우습게보지만, 나중에는 말이 나귀에게 끌려오는 것입니다. 당나귀는 인내심이 있습니다. 말처럼 충성하면 안 됩니다. 한 때는 혼자 충성을 다하는 것같이 그냥 껑충껑충 뛰어다니다가 나중에는 억지로 끌려 다니지 말고, 변함없이 충성하시기를 바랍니다. 엡 6:24에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반짝 충성은 누구든지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속적인 충성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겠다고 다짐했으나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들도 봤고, 처음 헌신 그대로 변함없이 충성하는 사람들도 봤습니다. 여러분들은 변함없이 믿음직스럽게 충성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2. 청지기 정신을 가진 사람이 충성스런 사람이다.
청지기 정신은 어떤 정신입니까?
청지기 정신을 가진 사람은 모든 것이 주인의 것이라는 정신을 가진 사람입니다.
14절에 보면 주인이 종들에게 자기의 소유를 맡겼다고 했습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아주 준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타국에 다녀올 동안 맡긴 것입니다.
인류역사상 하나님께 물질을 가장 많이 드렸던 사람이 다윗입니다. 금 5000달란트, 금 1만 다릭, 은 만 달란트, 놋 1만8000달란트, 철이 10만 달란트 등 수많은 보석, 금속, 목재 등을 드렸습니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약 25조원 이상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엄청난 액수를 하나님께 드렸던 다윗이 대상 29:14에서 그 모든 것을 즐겁게 드리면서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고백하며 주님에게 기꺼이 드렸던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이 내게 하나님의 영광과 선한 일을 위하여 쓰라고 맡기신 것입니다. 이것을 확신하고 사는 것이 청지기 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청지기 정신을 가진 사람은 주인의 것이지만 내 것처럼 생각하고 일하는 사람입니다.
록펠러는 어마어마한 부자였습니다. 오늘 이 시대의 최고 부자는 ‘빌 게이츠’라고 하는데 빌 게이츠가 번 돈을 다 합쳐도 록펠러가 번 돈의 반도 안 된다고 합니다. 록펠러는 그렇게 많은 돈을 벌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록펠러가 가장 신임했던 사람 중에 하나인 아치볼드(Archibald)는 본래 Standard Oil의 말단 직원이었습니다. 그는 일에 대한 성실과 열정으로 자기가 일하는 회사를 자기 것으로 생각하며 일했습니다. 아치볼드는 출장 가서 호텔에 묵을 때면 숙박부에 자기 이름을 적고 그 옆에 ‘한 통에 4달러 스탠더드 오일’이라는 문구를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그의 동료들이 그의 이런 행동을 조롱했지만 그는 자신의 작은 이 일이 반드시 회사에 큰 도움을 주리라는 생각을 잊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캘리포니아의 작은 도시로 출장을 간 아치볼드는 밤이 늦어서야 방에 들어왔는데 숙박부에 이름만 쓰고 온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내려가 종업원에게 숙박부를 달라고 해서 ‘한 통에 4 달러 스탠더드 오일’이라고 적었습니다. 그 때 한 신사가 유심히 그의 행동을 보고는 물었습니다. “왜 그런 문구를 넣지요?”, “저희 회사를 조금이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한 달쯤 지나 아치볼드는 자신의 회사 회장에게 특별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 회장이 바로 호텔에서 만났던 록펠러였던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록펠러는 그의 열정을 칭찬하며 본사로 불러들였고, 아치볼드는 스탠더드 오일을 세계 최대의 기업으로 만드는데 크게 기여하게 되었습니다.
기업의 사장이 회사의 중요한 일을 맡길 때 어떤 사람에게 맡기겠습니까? 회사는 어떻게 되든 자기 살길만 챙기는 사람에게 회사의 중요한 일을 맡기지 않을 것입니다. 회사를 자기 회사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에게 중요한 일을 맡길 것입니다. 목사도 교회의 일을 맡길 때 교회의 일을 자기 일처럼 생각하는 사람에게 맡깁니다. 교회의 중직자들은 반드시 그런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자기 일처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일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청지기 정신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주인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24절에 보면 한 달란트를 묻어두었던 종이 주인을 ‘굳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굳은 사람이라는 말은 ‘a hard man’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냉혹한 사람’, ‘인색한 사람’, ‘구두쇠’라는 뜻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을 ‘인색한 구두쇠’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주인이 준 것이 적어서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종은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받았는데 자신은 한 달란트를 받은 것이 못 마땅했습니다.
주인이 각자의 재능에 맞게 구별하여 달란트를 맡겼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남들을 비교하다보니 자신의 한 달란트가 초라하고 하찮아 보였던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주인을 인색한 사람으로 보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한 달란트는 큰 돈입니다. 금 한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입니다.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 하루 품삯이니까 약 8만 원 정도 되는 돈이니, 6천 데나리온은 4억 8천만 원 종도 되는 돈입니다. 5억 원이 작은 돈입니까? 절대 작은 돈이 아닙니다. 엄청난 돈입니다. 그런데 그 돈을 받고서 주인을 구두쇠로 생각했습니다. 그가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았다면 그 돈이 큰 돈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청지기 정신을 가진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이 결코 적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자신이 가진 것을 한국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니까 적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외국을 나가보면 우리가 가진 것이 결코 적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많이 받았습니다.
3. 부지런한 사람이 충성스런 사람이다.
26절에 보면 불충성한 종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 이라고 말합니다. 충성스러운 종은 부지런합니다. 16절에 보면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달란트를 받고 바로 가서 장사를 합니다. 17절에 보니 두 달란트 받은 종도 그 같이 했다고 말합니다. 불충성한 종은 게을렀고, 충성한 종들은 부지런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께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사고를 치는 것보다는 가만히 있는 것이 돕는 사람도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종을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합니다.
어떤 대 사업가가 자식이 없어서 양자를 맞으려고 했는데 가까운 친구가 한 청년을 소개하면서 훌륭한 양자감이라고 했습니다. 그 사업가는 우선 청년을 사원으로 채용하고 얼마 동안 관찰을 하기로 했습니다. 하루는 청년을 불러 1만 달러를 내놓으며 “이걸 자네 마음대로 쓰게”라고 했습니다. 청년은 얼떨떨했지만 마음속으로 ‘아하! 이건 나를 테스트하는 것이구나.’ 생각하며 그 돈을 받았습니다. 그 후 얼마 동안 사업가는 청년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1년쯤 지난 뒤 사업가는 불쑥 청년에게 물었습니다. “그때 자네에게 준 돈을 어떻게 썼나?” 청년은 이제야 때가 왔구나 하고 기뻐하며 곧 집으로 달려가 1만 달러뭉치를 가지고 왔습니다. “사장님, 한 푼도 쓰지 않았습니다.
여기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자 사업가는 그 청년을 양자로 맞을 것을 포기하며 소개한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돈은 쓰기 위한 것이 아닌가? 사업상 친구를 사귀기 위해서 교제비로써도 좋을 것이고, 어떤 투자를 해서 사업 공부도 할 수 있었을 텐데 돈을 손에 쥐고도 가만히 있는 그런 사람에게 나의 큰 사업을 맡길 수 없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선한 일에 부지런히 사용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달란트를 묻어두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사용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들이 열심히 일한 증거는 그들이 남긴 것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주인에게 받은 것의 갑절을 남겼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일했으면 갑절을 남겼겠습니까? 여기 장사하는 사람, 사업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에게 묻겠습니다. 갑절을 남기기가 쉽습니까? 어렵습니다. 갑절을 남겼다면 대단히 열심히 일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맡긴 것을 부지런히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남기셨다고 생각합니까? 그 것을 지금 열심히 사용하고 있습니까? 묻어두고 있다면 악하고 게으른 종입니다. 부지런히 사용하고 있다면 착하고 충성된 종입니다.
4. 적은 일도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충성스런 사람이다.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적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입니다. 적은 일에 불충성하면서 많은 일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눅 16:10에 보면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우리가 보기에 하찮아 보이는 일이 큰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때문에 적은 일에 충성하면 많은 일을 맡게 되고, 작은 일에 충성하면 큰 일을 맡게 되는 것입니다.
1947년 미국의 시카고 근교의 위스칸신 주에 있는 천체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었던 천체물리학자 닥터 첸드리스카 박사는 시카고대학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를 받습니다. “박사님 겨울방학 동안에 저희 대학에 와서 고급물리학에 관한 특별강의를 좀 해주시겠습니까?” 그는 쾌히 승낙을 했습니다. 몇 주후에 다시 대학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박사님 아무래도 강의를 취소해야만 하겠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클래스가 너무 작아서요. 두 명밖에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클래스가 작은 것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제가 강의를 하죠” 그래서 첸드리스카 박사는 그 겨울동안, 눈보라와 차가운 바람을 헤치고 시카고에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그는 일주일에 이틀 동안 한 번도 빠짐이 없이 두 학생을 상대로 강의를 최선을 다해서 했습니다.
그로부터 꼭 십년이 흘러갑니다. 이 첸드리스카 박사에게 강의를 받았던 두 사람이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첸넝 양 박사라는 분이고 또 한 분은 충도 리라는 중국계의 미국 과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수상의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결정적으로 우리가 이 상을 수상하게 된 데는 우리 두 사람을 앞에 놓고 강의했던 첸드리스카 박사의 강의 때문이었습니다” 동양계 두 사람을 앞에 놓고 열정을 다한 첸드리스카 박사의 강의가 노벨상으로 열매가 맺혀진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주신 적은 일이라도 최선을 다해서 충성한다면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많이 보게 될 것입니다.
5. 주인과 주인의 뜻을 알고 행하는 사람이 충성스런 사람이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주인을 오해했습니다. 24절에 보면 그는 주인을 향하여 말합니다. “당신은 굳은 사람입니다” 여기서 굳은 사람이란 말은 완악한, 혹독한, 엄한, 잔인한, 고집센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종은 주인을 완악하고 고집이 센 잔인한 수전노 같은 사람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에게 그 책임을 돌립니다. 그는 처음부터 일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고 끝까지 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만약에 장사를 하여 이를 남기면 주인이 빼앗아 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쩌다 실패하는 날에는 일생동안 그 보상을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예 감추어 두었다가 그대로 가져가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고약한 마음입니까?
그런데 실제로 주인은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 남긴 것을 빼앗아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인은 더 많은 것을 그들에게 맡겼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주인의 뜻을 오해했습니다.
[백금율]이라고 하는 책이 있다고 합니다. 황금율이라는 것은 들어봤지만 백금율은 못 들어 보았지요? 황금율은 무엇입니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칭찬 받기를 원하면 남을 칭찬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 비난받지 않기를 바라거든 너도 남을 비난하지 말라는 것이 황금율입니다.
백금율은 황금율과 조금 다릅니다. 상대가 원하는 방식대로 그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왜요? 기본적으로 사람의 욕구와 성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입맛이 다 다르고 취미가 다르고 가치관도 이상도 다르기 때문에 부득불 우리는 내 생각을 버리고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그를 대하라는 것이 백금율입니다.
자기 수준에서, 자기 성향으로 남을 대하지 말고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하는가? 그 수준과 그 입장, 그 욕구를 따라서 그 방법대로 그를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이 기대하는 것과 상관없이 자기 방식으로 주인을 이해하고 일처리를 해 놓고는 잘 했다고 떠듭니다. 주인이 그 큰 금을 맡길 때는 그거 도둑맞지 않게 잘 지키라고 맡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가지고 장사해서 이를 많이 남기라고 맡긴 것입니다. 그렇지만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공연히 관리하기도 복잡하게 이런 걸 왜 맡겨’ 하고 땅을 파고 묻어 두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 생각대로 믿고는 잘 믿었다고 떠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하신 대로 사는 사람만이 칭찬들을 수 있습니다. 자기 생각과 자기 기준으로 멋대로 판단하고 엉뚱하게 살면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소용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성경과 성령의 인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뜻대로 살아야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인이 멀리 사는 친구에게 보낼 편지를 종에게 들려보냈습니다. 종이 열심히 달려서 편지를 전하기는 했는데 엉뚱한 사람에게 전달했다면 그 종은 충성된 종이 아닙니다. 주인이 원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전달해야 충성된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충성된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예화 하나 들려드리고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은퇴하여 농촌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젖소를 사서 기렸던 한 사람의 실패담입니다. 이 사람은 소를 산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젖소의 젖이 마르자 이웃 농부에게 그간의 일에 대하여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농부로부터 젖소의 젖이 마른 이유를 듣고 놀랐습니다. 그는 날마다 자기에게 그날 필요한 만큼의 젖만을 짰습니다. 한 병이 필요하면 한 병만 짜 마셨고 별로 우유 생각이 나지 않으면 짜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필요한 만큼만 짜는 것이 젖을 마르게 하는 원인이 된 것입니다. 젖소는 젖을 짤 수 있는 만큼 최대한도로 짜내야 계속 더 많은 신선한 젖을 생산하기 때문입니다. 충성은 마치 그와 같은 것입니다. 지금 상황에서 다 짜내는 것, 다 쓰는 것이 충성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다음에 늙어서 힘드니까 아껴서 그 때 써야지”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면 아꼈던 힘 쓸 수 있을까요? 못씁니다. 슬 수 있을 때 써야 합니다. 지금 건강한 것, 지금 돈 있는 것, 지금 능력 있는 것,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금 쓰라고 주신 것입니다. 지금 안 쓰면 나중까지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충성은 지금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모든 것을 짜내는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은 바로 가서 일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달란트는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그 달란트를 가지고 바로 가서 일하십시오. 오늘 설교를 듣고 하나님이 내게 명하시는 일을 발견했다면 즉시 움직이십시오.
하나님은 “바로 가서 일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마귀는 속삭입니다. “그래, 기도생활에 힘써라. 성경도 많이 읽어라. 전도도 열심히 해야지, 교회 봉사도 잘하고, 성경공부도 해라. 헌금도 많이 드리고 새벽기도도 시작해라. 그러나 바쁠 것은 하나도 없다. 지금 바쁜 일이 많으니까 나중에 천천히 해라”
충성된 성도가 되어서 잘했다 칭찬 듣는 신앙생활 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