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09 / 27 /2022 - 10 / 11 / 2022)


01-26-2023(목) 전도서 강해 자료 /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전도서 11:1)

전도서 11:10
그런즉 근심으로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으로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청년의 때가 다 헛되니라.

청년의 때라는 문구에 아라비아 숫자 1자가 난외에서 "새벽"이라고 번역합니다.

새벽이란 신앙인에게 매우 중요한 시간입니다.
새벽의 의미를 살펴봅니다.

잠언 1:28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부지런히 라는 단어에 아라비아 숫자 2자는 난외에서 "이른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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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2-2022(수)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린도후서 13:5)

확증하라. δοκιμάζω  1381  

1. 시험하다,  2. 시험하여 증거하다,  3. 증명된 것으로 받아들이다.

발음  / 도키마조(dŏkimazō)
어원 / 미래 δοκιμάσω, 제1부정과거 ἐδο- κίμασα, 완료수동 δεδοκίμασμαι, 138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분간하다(눅 12:56, 롬 2:18), 시험하다(눅 14:19, 고후 8:22, 히 3:9), 연단하다(벧전 1:7), 분별하다(롬 12:2, 빌 1:10),
옳다 하다(롬 14: 22), 살피다(고전 11:28, 갈 6:4), 인정하다(고전 16:3), 증명하다(고후 8:8), 감찰하다(살전 2:4), 헤아리다(살전 5:21).
신약 성경 / 22회 사용

시험하다. πειράζω 3985    

1. 시도하다,  2. 시험하다

발음  / 페이라조(pĕirazō)
어원 / 미완료 ἐπείραζον, 미래 πειράσω, 제1부정과거 ἐπείρασα, 제1부정과거중간태, 2인칭단수 ἐπειράσω, 수동태, 제1부정과거 ἐπειράσθην, 완료분사 πεπειρασμένος,

398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시험받다(마 4:1, 약 1:13, 히 4:15), 시험하다(마 4:3, 눅 11:16, 고전 7:5), 애쓰다(행 16:7), 시험 당하다(고전 10:13, 히 11:37, 계 3:10).
신약 성경  / 38회 사용

믿음에 있는가?(5절)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신(信) - 사람 인(亻) +말씀 언(言)

πίστις, εως, ἡ  4102

1. 믿음,  2. 신실성,  3. 엄숙한 약속

발음  / 피스티스(pistis) 

어원 / 398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믿음(마 8:10, 롬 1:8, 히 10:22), 도(행 6:7), 충성(갈 5:22), 신앙(빌 1:27, 히 6:1).
신약 성경 / 243회 사용
* 3982. πειθώ

1. 확신을 가지게 하다,  2. 설복하다,  3. 끌어들이다.

발음 / 페이도(pĕithō)

관련 성경 /  권하다(마 27:20, 행 13:43, 고후 5:11), 신뢰 하다(마 27:43, 빌 1:14, 3:4), 믿다(눅 11:22, 행 26:26, 롬 2:19),
인정하다(눅 20:6), 따르다(행 5:36,37, 롬 2:8), 옳게 여기다(행 5:40), 화목하다(행 12:20), 권면하다(행 18:4, 19:8), 권유하다(행 19:26), 순종하다(히 13:17), 확신하다(롬 8:38, 고후 2:3, 빌 2:24), 의지하다(고후 1:9, 히 2:13).
신약 성경 / 52회 사용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시험하라’, ‘조사하라’, ‘확증하라’, ‘증명하라’는 말을 하면서 자신의 믿음을 철저히 조사해서 믿음이 있는 지, 믿음이 있다면 그 증거를 보이라고 합니다.

5절의 특징적인 말 중에 ‘너희 자신을’, ‘너희가 스스로’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재귀대명사로 ‘자기 스스로’라는 강조의미입니다.
남이 아니라 먼저 자신을 테스트하고, 확증하고, 스스로 알아야 함을 말하고자 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시험-조사, 점검-해야 할 믿음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자신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가 입니다.
우리의 모든 믿음의 첫 출발은 내 속에 계신 예수의 영이 정말 계시고, 그 성령님과의 교통이 있을 때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 성령님을 통해서 믿음의 증거들과 성령의 열매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독수리의 일종인 뱀잡이수리가 있는데, 주로 공중을 높이 날아다니다가 두더지나 뱀을 발견하면 쏜살같이 내려가 낚아챈다고 합니다.
평상시에는 뱀잡이수리가 민첩하게 잘 날아다닙니다.
그런데 땅에 내려와 먹이를 먹고 있는데 맹수의 습격을 받게 되면, 날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해 뛴다고 합니다.
너무도 당황한 나머지 자기가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늘을 나는 짐승이 땅에서 뛰어봐야 얼마나 빨리 뛰겠습니까? 결국 얼마 못가서 맹수에게 잡아먹히고 맙니다.

이처럼 평상시에는 무척 믿음 있는 사람으로 알려졌지만 실제 믿음을 적용해야 할 상황에 맞닥뜨리면 휘청거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땅에 살면서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우리의 마음속에 성령님이 살아계시고, 그 성령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고, 능력 받을 수 있는 믿음의 날개를 주셨는데, 삶에 적용하지 못하므로 환난의 맹수, 사단의 맹수에게 잡아먹히는 자 없기를 바랍니다.

선을 행하고 있는가?(7절)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버림받은 자 같을지라도 너희는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

선(善) -  양 양(羊) + 입 구(口) + 초두머리 초(䒑)


καλός, ἡ, όν  2570

1. 아름다운,  2. 좋은 유용한,  3. 흠이 없는

발음 / 카로스(kalŏs) 

어원 /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좋은(마 3:10, 막 4:8, 요 2:10), 아름다운(마 7:19), 착한(마 5:16), 마땅한(마 15:26), 나은 (마 18:8,9, 막 9:45),
선한(요 10:11, 고후 8:21, 딤전 1:8), 옳은(고전 5:6), 잘하는(딤전 3:13), 유익을 얻는(히 13:9).
신약 성경 / 101회 사용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기를 구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버림받은 자 같을지라도 선을 행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만큼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선을 행하며 살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선과 악에 대해 아주 쉽게 풀이를 했습니다.

“선이란 뒷맛이 좋은 것이다. 악이란 뒷맛이 나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선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선을 행하기는 처음은 어렵고 힘들지만, 나중에 그 결과를 보면 흐뭇합니다.
악이란 처음에는 내게 큰 쾌락이 되고, 좋은 것처럼 보여도 나중은 오히려 고통이 됩니다.
기도하지 않고, 봉사하지 않고 쉬면 몸은 편하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몸은 힘들지만 기도와 봉사를 열심히 하고 나면 마음이 편하고 즐거운 것입니다.

감리교 창시자인 영국의 존 웨슬리 목사는 “나는 하루에 세 번씩 내 자신을 향해서 질문한다.
아침에는 내가 오늘 아침에 무슨 선한 일을 할까 질문하고, 점심에는 내가 정오에 무슨 선한 일을 할까 질문하고, 저녁에는 내가 오늘 무슨 선한 일을 행하였는가 질문한다”고 했습니다.

‘마천동 슈바이처’라는 불리는 서내과 원장 서대원 씨의 아버지는 사업을 하다가 부도를 냈고, 장남인 그에게 2억 원의 부채를 남기고 쓰러져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는 서울 경찰병원에서 인턴생활해서 겨우 70만원의 월급을 받으며 살았는데, 빚쟁이들이 찾아와 그 월급의 절반을 가져갔습니다. 그러자 그의 아내가 보따리를 싸면서 ‘의사한테 시집와서 호강할 줄 알았는데 고생만하는구나’하고 2살짜리 아들을 두고 가출했습니다. 그는 절망에 빠졌고, 경제적으로도 어렵고, 아내도 떠났고, 2살짜리 아들과 함께 살아갈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무작정 길을 걷다가 ‘소망의 집’이라는 지체장애인 보호시설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장애인들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몸이 아픈 것을 보고 들어가서 진료했습니다.
이때 서 원장은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구나, 나도 여기서 보람을 느끼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고 의료봉사를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그는 그들이야말로 내 인생을 새출발하게 해 준 사람들이라며, 무의탁 노인들과 장애인들을 도와주기 시작했습니다.
그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은 돈을 내든지 내지 않든지 성심껏 치료해주었습니다.
‘마천동의 슈바이처’라고 소문이 나서 처음에는 돈이 없는 사람들이 주로 많이 찾아왔었지만 지금은 진료비를 다 내는 손님들도 많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선행도 하고, 존경도 받고, 또 내과에 손님들이 많아지니 경제적인 문제도 해결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선을 행하면 처음에는 어려워도 하나님이 더 큰 복을 주십니다.
왜냐하면 선을 행하는 십자가는 더하기의 복으로 갚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온전하게 되어 가고 있는가?(9절)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가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온전(穩全)
- 편안할 온(穩), 온전할 전(全)

穩 : 안정되다, 믿음직하다, 확실하다 
벼 화(禾) + 삼갈 은(㥯) / 숨을 은(䔌), 마음 심(心)

全 : 흠이 없다, 갖추다
사람 인(Ƣ) +  임금 왕(王)

κατάρτισις, εως, ἡ  2676

1. 완전하게 됨,  2. 완성

발음 / 카타르티시스(katartisis) 

어원 / 267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온전하게 되는 것(고후13:9).
신약 성경 / 1회 사용

* 2675.  καταρτίζω 
1. 정돈하다,  2. 원상으로 복구시키다,  3. 완전하게 하다

발음  / 카타르티조(katartizō) 

어원 / 미래 καταρτίσω, 제1부정과거 κα- τήρτισα, 제1부정과거 중간태 κατηρ- τισάμην, 완료 수동태 κατήρτισμαι, 2596과 739의 파생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깁다(마 4:21, 막 1:19), 온전하게 하다(마 21:16, 살전 3:10, 벧전 5:10), 온전하게 되다 (눅 6:40, 고후 13:11), 짓다(히 11:3), 바로잡다(갈 6:1), 예비하다(히 10:5).
신약 성경 / 13회 사용

바울은 자신이 약하게 되더라도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온전하기를 간구합니다.
우리는 온전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부분적이거나 일시적인 것도 안 됩니다.
온전하되 끝까지 온전해야 합니다. 봉사해도, 순종해도, 예배를 드려도, 예물을 드리더라도 온전히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학생들이 좋은 결과를 얻으려면 모든 과목마다 성적이 좋아야 합니다.
한 과목을 아무리 잘 봤어도 다른 과목을 망치면 통계점수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 출석, 말씀 순종, 봉사, 충성 등 모든 분야에서 온전하길 바랍니다.

현대 조각 가운데 아상블라주(Assem-blage)라는 장르가 있습니다.
이것은 폐품, 다른 사람들이 버린 빈 깡통, 고물, 철사 등을 모아서 작품을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피카소의 ‘황소의 머리’라는 작품도 누군가 버린 고물 자전거에 망가진 쇠붙이와 고철을 모아서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이 작품에 사용된 재료는 값어치 없이 버려진 것이었지만, 피카소가 손을 대었을 때 고가의 작품이 되었습니다.

‘아상블라주’란 프랑스어로 집합 ·집적을 의미하며, 특히 조각 내지 3차원적 입체작품의 형태를 조형하는 미술상의 방법을 말한다.
종이나 베의 조각 등을 화면에 풀로 붙이는 큐비즘의 콜라주에서 비롯되었지만, 콜라주가 평면적인 데 대하여 아상블라주는 3차원적이다.

1961년 뉴욕에서 열린 아상블라주전(展)의 기획자 W.사이츠는 “아상블라주는 무엇보다도 먼저 예술품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물체의 집적이어야만 한다”고 정의하였다.

피카소의 《압생트 술병》(1912) 등이 선구적 작품이지만, 본격적인 개화(開花)는 다다이즘 및 초현실주의, 특히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네오다다이즘, 팝아트, 누보레알리즘 및 환경예술 등에서 이루어졌다.

D.스페리(1930∼ ), F.아르망(1928∼ ) 등은 폐품을 소재로 예술화한다는 데서 더 나아가, 오히려 ‘잡동사니’ 폐품이 지닌 표현력을 끌어내려는 데 예술활동의 중점을 두고 있다. 또한 공업제품의 폐품을 주로 사용한 정크 아트(junk art)도 이에 속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하나님의 작품이 된다면 우리의 삶을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를 만져주시도록, 삶에 개입하시도록 기도하십시다.
그럴 때에 내 인생의 작품은 계산할 수도 없는 고가가 됩니다.

우리 스스로 자신에게 ‘믿음이 있는가’,
‘선을 행하고 있는가’,
‘온전하게 되어가고 있는가’를 물어봅시다.
비록 우리는 부족해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하게 사용해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온전하라”는 무슨 의미인가?(마태복음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어떻게 인간이 하늘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처럼 온전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무죄한 존재이시다.
그러나 타락 이래로 인간은 죄성을 타고난 존재가 되었다(엡 2:3).
그렇다면 인간이 어떻게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할 수 있다는 말인가? 예수께서 하신 이 말씀은 무슨 의미인가?

마태복음 5:48에 있는 예수님의 분명한 이 말씀은 산상설교의 두 번째 부분의 결론이다.
산상설교 전체는 마태복음 5-7장인데, 그것의 둘째 부분은 5:17-5:48이다.
이 부분의 서언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케 하러 왔다고 주장한다.
서언 다음에 연속되는 여섯 개의 대조 진술(antithesis)이 뒤따라 나오는데, 예수님은 구약의 성경절이나 전해 내려오는 말씀을 다음과 같은 형식으로 인용한다.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마 5:21, 22).

이 대조 진술들은 구약의 개념들을 거부하고 예수의 새로운 가르침으로 대체하려 한다는 인상을 준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매 경우마다 구약의 가르침을 더 심도 있게 적용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분은 자신이 온 목적이 구약의 원칙들을 폐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옛 명령의 깊이와 더 폭넓은 적용을 보여 주려는 것임을 나타내셨다.

“그분은 당신께서 온전하신 것처럼 온전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분께서 우주에 대해 빛과 축복의 중심이 되시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작은 사회에서 그렇게 되어야 한다.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나, 그분의 사랑의 빛이 우리에게 비췸으로 우리는 그 빛을 반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역에서 온전하신 것같이, ‘선하신 그분의 선하심을 빌어’우리는 우리의 영역에서 온전하게 될 수 있다.”(산상보훈, 77쪽).

마태복음 5:43-48에 나오는 마지막 대조 진술은 원수를 사랑하는 문제를 다룬다.
예수님은 레위기 19:18의 일부(”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를 인용하면서, 거기에 전통으로 내려오는 진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을 덧붙인다.
그런 다음 그분은 우리의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그 유명한 원칙으로 전통적인 진술을 뒤엎는다.
계속하여 주님께서는 원수에게 이런 원칙을 행동으로 옮기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결과가 나온다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행위와 맞먹는 일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만을 사랑하는 사람들 또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자들을 언급하심으로써 자비가 크신 하나님의 행위와 대조하신다.
그런 사랑은 세리나 이방인 곧 성경적 종교의 범위 밖에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하는 사랑이나 진배없다고 말씀하신다. 이렇게 하여 두 부류의 행동 방식 곧 선인과 악인 모두에게 사랑과 관심을 베푸시는 하나님과 오로지 자신만을 사랑하고 자신에게만 관심을 두는 세리나 이방인이 대조되고 있다. 이런 내용이 있은 후에 제자들에게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처럼 온전하라(마 5:48)는 요청이 뒤따라 나온다.

마태복음 5:48의 문맥을 이해하는 것이 본문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는 데 필수적이다. 마지막 대조 진술의 문맥 안에서 온전[완전]은 결점이 없거나 일체의 도덕적 결함이 근절된 상태로 정의되지 않고, 오히려 우리와 사이가 가장 먼 자들 곧 우리의 원수에게까지도 사랑을 베푸는 것으로 정의되고 있다. 대조 진술의 전체 문맥 안에서 마태복음 5:48의 온전하라는 요청에는 가장 높은 도덕적 순결에 대한 의식이 포함돼 있다. 예컨대, 미움도 살인으로, 음욕의 눈길도 간음으로 재정의하고, 미움도 품지 말고 음욕도 품지 말라고 명한다.
이런 최상의 요구에 대면하여, 우리는 간단히 제자도를 포기해 버리려 하거나, AD 2세기에 한 저술가가 디다케(Didache)라는 책 6장 2절에서 마태복음 5:48에 대해 말한 것처럼 생각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그대가 주님의 온전한 멍에를 멜 수 있다면 완전해 질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그대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라.”

또는 예수님의 의도가 그렇지 않은데도, 완전은 불가능한 것이며 게다가 그리스도인은 은혜로 구원받기 때문에 그런 것은 불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한 데까지 나아갈 수 있다.

“온전”[완전]의 의미 :

마태복음 5:48에서 “온전”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텔레이오스인데, “완전한, 결함이 없는, 온전한, 충분히 발전된, 성숙한, 목표나 목적을 달성한” 등을 의미한다.(1)

어떤 것이 다 성장하여 그것의 목표에 도달하면 텔레이오스라고 말해진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목표가 있다.
그것은 하늘 지향적이다.
위에서 부르신 복음의 부름은 분명하다(빌 3:12-14).
하나님이 어떤 수준의 지점에서 우리를 발견하든 우리를 가납하시지만, 그 수준에 그대로 머물도록 내버려 두진 않으신다.
그분은 그리스도인 성숙으로의 여행으로 우리를 초청하신다.
마태복음 5:48의 예수님의 명령은 그 여행의 결실에 대해 말한 것이다.
그 명령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여행을 받아들여 그분의 뜻 안에서 걸어가는 것을 말한다.
온전[완전]의 목표 곧 그리스도인 성숙, 다시 말해서 하늘 아버지처럼 되는 것은 우리를 좌절시키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고, 도덕적 어둠의 세계에 비치는 우리의 길라잡이별과 같은 기능을 한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5:48은 그리스도인의 목표[온전]를 향해 끊임없이 걸어가라는 주님의 초청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 유비무환(有備無患) 

한경직 목사님께서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목사님들이 한경직 목사님을 찾아갔더니 그런 말씀을 하시더랍니다.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 예수 잘 믿으세요”

“목사님들 목회 잘 하세요”가 아니라,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 그러시더랍니다.
그래서 그 중에 어느 목사님이 작은 소리로 말했답니다.
“아이고 목사님! 저희들 목사들입니다.”
그러니까 한 목사님은, 여전히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
그제서야 모든 목사님들이 충격을 받고, 한 목사님의 하신 말씀을 받고, 정말 자신들을 돌아보면서 더 열심히 목회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목사가 목회를 잘하려면 예수를 잘 믿어야 하지요.. 그것이 기본이지요.
그러면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은 뭘까요? 예수를 잘 믿는 것입니다.

예수를 잘 믿는 것은 뭘까요?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신 것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버리운 자”라는 것입니다.
버리운 자 (새)실격자, (공)낙제한 것, (현)불합격자, (영)실패자

오늘 예배에 오신 여러분들은 예수님이 내 마음에 와 계시는 것을 확실히 시험해 봤더니 나는 확실히 주님이 계시는 것을 확증할 수 있어 그러면 ‘성공자’입니다.

그러나 그런 확신이 없으면 우리는 신앙의 ‘실패자, 낙제자, 실격자’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런 확증이 없다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잘 믿기 위해서 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항상 우리의 신앙을 잘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 건강도 그렇습니다.
잘 먹고 운동하고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정기건강 검진을 잘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큰 병 생기는 것도 모르고 지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참으로 중요한 것이 점검을 잘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몸에 갑자기 통증이 나면, 병원엘 갑니다. 병원 응급실에 가면, 응급조치를 한 후에 하는 일이, 통증에 대한 진단, 점검을 하는 일입니다.

진단을 잘 해야, 바른 처방이 나오고, 정확한 의료행위로 사람을 치료할 수가 있습니다.
그 환자의 통증을 잘 진단하느냐 못하느냐가, 잘 점검을 하느냐 못하느냐가 그 사람의 치료의 관건입니다.
잘못된 진단을 하면, 잘못 처방이 되고, 잘못된 처방이 나오면, 잘못 치료가 되어 치료가 불가능해집니다.
육적인 진단도 중요하지만 영적인 진단도 중요합니다.

고린도후서 13장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마지막 편지의 마지막 장입니다.

5절을 새번역으로 읽어봅니다.

“여러분은 자기가 믿음 안에 있는지를 스스로 시험해 보고, 스스로 검증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모른다면, 여러분은 ‘실패자’입니다.

사람의 눈을 가리고 어느 운동장으로 가로질러 똑바로 걸어가게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똑바로 가지를 못하고 삐딱하게..
그런데 그래도 운동장을 웬만큼 바르게 건너갈 수 있는 방법은 눈을 가리고 가다가 가끔씩 멈추어 서서 내가 가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점검을 하면 그래도 웬만큼 똑바로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공하면 성공할 이유가 있고, 실패를 하면 실패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 여호수아 7장에,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군대가 하나님의 기적으로 여리고 성을 정복했지만 그 다음에는 아주 작은 아이 성을 정복하려다가 오히려 실패를 하고 말았습니다.

여리고성을 정복하고 난 후에, ‘아이 성’은 아주 쉽게 정복하리라 생각했는데 실패했습니다.
그 이유를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 가서 기도하면서 진단을 하니까 진단이 나왔습니다.

‘아간’이라고 하는 한 사람이, 여리고 성을 정복할 때, ‘모든 물건은 여호와께 바치라’고 하였는데, 아간이 물건을 보고 탐욕을 느낀 나머지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의 금덩이 하나를 자기 장막에 숨긴 것이었습니다.

진단이 잘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 처방을 어떻게 했지요?
여호수아는 아간과 그 물건을 찾아내고, 아간의 자녀들을 ‘아골 골짜기’로 가서 돌로 쳐 죽였습니다.
수술을 한 것입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모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시험해서 잘 진단을 해야 합니다.

‘내 안에 주님이 계시는 것이 믿어지는가?’
‘주님이 내 안에서 내 인생의 운전대를 붙잡고 일하고 계시는가?’
그것이 안 믿어진다는 우리는 ‘실패자, 실격자, 불합격자, 낙제자’라는 것입니다.

"시험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라조(πειράζω)"는 ‘되돌아보다’. ‘자세히 조사하다, 살펴보다’라는 뜻.
‘노력하다, 분투하다, 책임지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즉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라’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그 말씀대로, 그 믿음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고, 애쓰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항상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고, 점검하면서 혹시, 나태하지는 않았나, 혹시, 게을러지지는 않았나, 혹시, 교만하지는 않았나, 혹시, 하나님의 영광을 내가 가로채고 있지는 않는가? 시험하고 점검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고린도 교인들은,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을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고린도후서 10:7절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사람은 외모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 안에 주님이 계시는가?’ ‘그 사람은 주님과 동해하고 있는가?’

사무엘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우리 사람을 볼 때 얼마나 외모를 보나요?
가진 것 보고, 배운 것 보고, 그 사람의 배경을 보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그런 것 보지 않으시고 우리의 중심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인가?”
“예수님을 목자로 모시고 사는 사람인가?”

그렇지 않으면 그런 사람은?
새)실격자, 공)낙제한 것, 현)불합격자, 영)실패자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판단하지 말고 나를 시험하고 뒤돌아보고 점검을 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에 대한 시험을 해야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데 눈을 돌리면 내게는 은혜가 없습니다. 은혜가 내리지 않습니다.

5절을 읽으면서도 우리의 관심은 우리 자신이어야 합니다.
나는 정말 우리 주님이 내 안에 오셔서 역사하고 계신 것을 믿는가?
이것이 믿어지지 않으면 우리 신앙은, 실패, 실격, 낙제, 불합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는 나의 눈이 다른 사람의 신앙을 살피고 점검했다면 이제는 “나는 믿음이 있는가, 나는 믿음의 사람인가, 나는 믿음으로 살고 있는가”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서울에 어떤 대형교회에 담임목사님을 모시기 위하여 담임목사 청빙위원회가 조직이 되고 여러달 후에 한 분을 담임목사로 청빈 위원회에서 소개하였습니다.

“여러분 한 분을 소개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분에게는 이런 흠이 있는데 우리 교회에서 청빙을 해도 될까요?”

첫째, 이 분은 중년이 되엇는데도 결혼을 못했습니다.
둘째, 이 분은 목회를 하면서 가끔 사업도 하는 분입니다.
셋째, 이 분은 외모가 너무 못생겼습니다.
넷째, 이 분은 간질병을 갖고 있어 가끔 발작도 하십니다.
다섯째, 이분은 말이 너무 어눌해서 설교를 잘 못하십니다.
여섯째, 이 분은 한 교회에 오래 계신 적이 없고, 자꾸 교회를 개척하면서 옮겨 다니십니다.
일곱째, 이 분은 신학대학교도 나오지 않은 분이라 당연히 박사학위도 없습니다.

누굴까요?
사도바울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이런 흠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 분 안에는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섰을 때 무엇으로 주님께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우리의 가진 것 배운 것 일생 쌓아놓은 것일까요? 지위와 명예, 직분인가요?
무엇에 관심을 가지며 살았습니까?
세상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살았으면 우리는 실패자 실격자 낙제자 불합격자입니다.  

내가 세상에 가진 것이 없어도 내가 내 안에 주님을 모시고 주님과 의논하고 주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살았다면 우리는 성공자입니다.
천국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다른 사람의 신앙을 진단하고 판단하는 자리에 있었다면 이제는 자신의 믿음을 바르게 진단하고 바르게 검진하십시오.
그것만이 내 영이 사는 길이요.
내 믿음이 바로 서는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참 신앙인과 신앙인답게 보이는 사람의 차이점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참 신앙인은, 예수님이 내 마음의 주인으로 살아가시도록 내 마음의 중심을 주님께 드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처럼 보이는 사람은, 자기가 인생의 주인입니다.
이런 사람은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자기 마음대로 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 신앙의 불합격자이냐? 낙제생이냐? 실패자이냐?

성도가 언제 실패자가 되고, 언제 불합격자가 됩니까?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시지 않을 때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지 않는 예배,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지 않는 기도,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지 않는 찬송과 헌신과 봉사....
이런 것은 낙제 불합격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며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계시는데도 믿지 못하는 어리석은 성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을 대화하고 사랑하고 교제를 해야 합니다.

항상 점검하고 확증해야 합니다.
여러분 건물을 잘 점검하지 못해서 무너지는 것 보셨죠?
다리를 점검하지 않아서 무너지는 것을 보셨죠?

건강진단도 잘못 점검되어 중병에 걸리는 분들... 자동차도 1년에 한 번은 검사를 받습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
유비무환(有備無患)

첫 번째는 자기 자신을 시험함을 통하여 입니다.
시험하라는 명령형이며 현재형입니다.
지속적으로 자기 자신을 시험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시험이라고 사용된 단어는 무엇인가를 증명하기 위한 시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신자가 자기 자신을 지속적으로 시험해야 하는 이유는 자신이 믿음 안에 있는가 입니다.
믿음 안에 있는가 하는 것이 시험의 이유이자 목적인데 믿음 안에 있다는 의미는 문맥에서 예수 안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누구 안에 있다라는 말이 가지는 의미는 항상 그 존재와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영향력 아래 있으며 지배아래 있다는 의미입니다.
원문에서 안에 라는 말은 소유의 개념이 강합니다.
즉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의 그의 소유아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와 예수 밖에 있는 자의 큰 차이는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가 이며 예수님의 지배와 다스림 가운데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그분의 말씀이 우선 순위이며 그분의 말씀이 앞서는가는 스스로 자신을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잣대입니다.
삶이 여전히 자신의 마음대로이고 내가 생각하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육체를 위하여 살고 있다면 예수 안에 있지 않고 밖에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대로 못합니다. 하고 싶은 대로 살지 않습니다.

예수를 안에 있으면 말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조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행동이 조심스럽습니다.
혹시 남에게 피해가 갈까, 다른 이가 나의 이러한 행동으로 오해할까 생각해서 행동하고 말합니다.
내가 믿는 그분이 사람들 가운데 멸시를 받고 조롱이 될까 하여 말에나 행동에나 절제합니다.
그러나 예수 밖에 있는 사람은 항상 생각이 인간적일 뿐만 아니라 자신만을 생각합니다.
말에 절제가 없고 행동에 절제가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겉과 속이 같은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도 예수를 위해 살고자 합니다.
자신이 예수 안에 있음을 잊지 않고 그대로 살아갑니다.

두 번째의 명령으로 확증하라는 것입니다.
확증한다는 것은 입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험을 통하여 입증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신을 보며 무엇 보다도 어떠한 상황에서도 예수의 다스림과 주권을 인정하고 높이여 주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자세와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스스로 시험을 통하여 입증됩니다.
자신의 내면을 자세히 살피는 일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내가 행하는 모든 일의 의도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하는가? 무엇을 위하여 하는가? 이것을 통하여 나는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하는 진지한 물음을 자신에게 던져 본다면 스스로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예수 안에 있는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지를 말입니다.

카테큐만(catechumen.  입문자 또는 예비 신자)

1-2세기 당시의 교회들은 신자를 만들어내기 위하여 엄격한 규정을 두었습니다.
카테큐만(catechumen.  입문자 또는 예비 신자)
이라고 하여 정식 교인으로 받아들이기에 앞서서 그가 크리스천으로서 믿음을 따라 살아가기에 필요한 신앙 교리와 고백을 갖추었는지 살피는 일정한 기간을 두었습니다.
이 기간을 잘 견디지 못하고 카테키즘(Catechism: 교리 문답)을 통과하지 못하면 교인으로 받아들이지 아니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때에는 크리스천으로서의 믿음을 인정받은 사람이 비로소 교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요즘도 세례를 위한 공부를 하고 세례문답을 하지만, 크리스천으로서의 믿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교인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세례를 주며, 아직 크리스천으로서의 죄사함의 확신도 없고 믿음의 고백이나 삶이 없는데도 직분자로 삼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만, 바른 교회생활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크리스천으로서의 자기 확신이 있음이 바람직하다고 할 것입니다.

한 스님이 “나는 30년 동안 좌선(坐禪)을 해왔기 때문에, 번뇌(몸과 마음을 시달리게 하고, 어지럽히고, 귀찮게 하고, 사로잡혀 방황하게 하고, 더럽히는 정신작용)가 말끔히 없어졌습니다.”고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이를 듣고 있던 어떤 큰스님이 초상집에서나 하는 조문(弔問)의 인사를 합니다.

“정말 얼마나 상심이 되시겠습니까?”

그러자, 자기의 오랜 좌선 수련을 자랑스럽게 말했던 스님은 화를 내면서 그런 조문의 인사를 하는 이유를 말하라고 대듭니다.
큰스님은 대답합니다.

“번뇌가 있어야만 벗어나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번뇌는 벗어나고 깨닫는 밑천입니다.
스님은 (번뇌가 없다고 하니) 그 밑천을 없애버렸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살아있는 한 번뇌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없어질 때는 사람이 죽은 뒤인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상심이 되셨는지 물어본 것입니다.”
(송원스님의 「알기 쉬운 반야심경(般若心經) 」에서)

바울은 로마서 7장 24절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부르짖습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울 자신의 곤고(困苦)를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바울이 아직 구원에 이르지 못했을 때를 돌아보며 이렇게 탄식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그보다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의 상태가 그 자신만으로는 곤고함이 있음을 말씀함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롬 8:2 참고)이 끊임없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지 않는 한 우리는 항상 죄에 노출되고 죄로 인하여 넘어지기 쉽습니다.

교회생활을 오래 하였다고 하는 사람이 “나는 별로 기도할 것이 없습니다. 나의 모든 삶이 다 순조롭습니다.”라고 말할 때 이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함에 이르는 성화의 삶을 살지 않고 있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성화의 삶을 사는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밝은 빛 가운데 자신이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자신의 부끄럽고 추한 모습과 생각으로 인하여서 안타까와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서도 “죄인 중에 내가 괴수(魁首)니라”고 고백합니다. 여느 크리스천들보다 예수님의 모습을 가장 많이 본받고 있던 바울의 입에서 어떻게 이런 험상궂은 고백이 나올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함의 거울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가까이 이르른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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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기쁨은 밤에 잠을 자던 중 갑자기 꿈에 전해야 할 말씀에 대한 가르침을 받을 때이다.
1시 30분경 눈을 떠야 했다.
왜냐하면 "사탄의 사자"라는 묵상의 주제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자성어로 생각하라는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즉지 자리에서 일어나 사자성어들을 살펴보면서 사도 바울이 천국에 대한 환상을 본 후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결국 세 가지 사자성어로 정리할 수 있었다.

σκόλοψ, οπος, ὁ  4647

1. 말뚝,  2. 막대기,  3. 가시

4628과 3700의 어간에서 유래한 듯 함 : 말뚝

발음  / 스코롭스(skŏlŏps)
관련 성경 / 가시(고후 12:7).
신약 성경 / 1회 사용

자고. ὑπεραίρω 5229

1. 일어나다,  2. 스스로 높아지다,  3. 의기양양하다

발음  / 후페라이로마이(hüpĕrairŏmai) 

어원 5228과 14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자만하다(고후 12:7), 자기를 높이다(살후 2:4).
신약 성경 / 1회 사용


10-11-2022(화)

사단의 사자(고린도후서 12:7)

안중무인(眼中無人)

눈 안,  가운데 중,  없을 무,  사람 인

- 눈에 보이는 사람이 없다는 뜻으로, 방자하고 교만하여 다른 사람을 업신여김을 이르는 말.

안하무인(眼下無人) 동병상련(同病相憐)

눈 안,  아래 하,  없을 무,  사람 인

- 눈 아래에 사람이 없다.

교만을 의미합니다.
천국을 경험했다는 많은 간증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같은 것이 없다.
도대체 천국은 보는 사람마다 다른 것일까?
천국 환상에 대한 자기 교만이 섞여 있는 것은 아닐까?

동병상련(同病相憐)

한가지 동, 병 병, , 서로 상, 불쌍히 여길 련(연)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면 그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고 한다.
그 아픔이 얼마나 지독할까?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왜 이런 아픔을 주시는 것일까?
그 이유는 같은 아픔을 겪는 부모를 위로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신 것이라고 하겠다.
 
합려(闔閭)는 자객(刺客)인 전저(專諸)를 시켜 오나라(吳--)의 왕 요(僚)를 죽이고 왕위(王位)에 올랐다.
오자서(伍子胥)는 전저(專諸)를 천거(薦擧)한 공로(功勞)로 대부(大夫)가 되었고 또한 초나라(楚--)에서 망명(亡命)한 백비(伯嚭)를 천거(薦擧)하여 함께 정치(政治)를 하게 되었다.
그때 같은 대부(大夫) 피리(被離)가 「백비(伯嚭)를 한 번 보고 왜 그렇게 신용합니까?」라고 물으니 「그것은 그와 내가 같은 원한(怨恨)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상가(河上歌)에 같은 병에는 서로 불쌍히 여겨 한 가지로 걱정하고 서로 구하네.」라고 대답(對答)했다.
결국 오자서(伍子胥)는 백비(伯嚭)를 경계(警戒)하는 피리의 충고(忠告)를 듣지 않다가 월나라(越--)에 매수된 백비(伯嚭)의 참언(讒言)으로 분사(焚死)했다.

오월춘추의 합려내전(闔閭內傳)에 나오는 일화에서 유래했다. 오자서가 합려를 오나라 왕으로 만들어 정권을 차지하는 데 성공하고 각지의 인재들을 끌어 모았는데, 그 가운데 내정의 명수 백비가 끼어있었다. 사람들은 백비가 물욕이 심하고 강직하지 못하다고 평했으나, 오자서는 백비의 가족이 초나라 왕에게 몰살당했음을 들면서 "같은() ()을 앓는 사람들은 서로() 동정하는() 법이다. 백비는 나와 같은 병을 앓고 있으니 나를 잘 이해할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한다. 사실 그정도가 아니라, 오자서도 초평왕의 방관 속에서 비무기의 농간 때문에 집안이 멸문당해서 오나라로 도망왔고, 백비도 비무극의 차도살인으로 집안이 초토화 되어서 오나라로 도망온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말대로 훗날 백비는 은혜를 잊고 오자서와 대립하고 그를 모함해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언유재이(言猶在耳)

言   말씀 언,  오히려 유, 在  있을 재,  耳  귀 이

들은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천국 간증을 들으면 성경보다는 천국 간증이 더 흥미롭다.
가장 귀한 진리는 성경이다.
기준을 능가하는 간증 더구나 사도 바울의 간증을 듣는다면 성경의 기준보다 더 그 가치를 높이므로 진리가 훼손되거나 오염 될 것이므로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개인이나 국가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구약성경에서 가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이나 환난을 가리켰고, 신약성경에서는 바울이 가졌던 경우처럼 육체의 가시를 가리켰습니다.
누구나 가시 없는 평안한 삶을 소망하겠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개인과 국가에까지도 가시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닭 우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주님을 부인했던 일을 기억하고 괴로했을 것입니다.
모세도 광야에서 순간 하나님의 명령을 제대로 받들지 못하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민 20:1-13).
엘리야 선지자에게도 연약한 가시가 있었습니다(왕상 19장).
더군다나 사무엘 선지자에게도 두 명의 자식이라는 가시가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8:2-3을 볼 때 요엘과 아비야 두 아들은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않고 이(利)를 따라서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도 창 15-16장을 볼 때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믿지 못했던 약점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에게는 하갈이라는 이방 여자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삭에게는 이스마엘이라는 가시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개인뿐 아니라 어떤 조직 기관 안에서도, 국가에도 가시를 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민 33:55을 보면 ‘그 땅의 백성들을 다 쫓아내지 아니하면 그 남겨둔 자들이 너희 눈에 가시가 되고 너희 옆구리를 찌르는 가시가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전체에게 주신 국가적인 가시를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시를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개인의 가시든 어떤 단체의 가시든 당사자에게는 매우 괴로운 것입니다. 마음속의 고통도 어려운 것이지만 육체의 가시도 참으로 견디기 어렵습니다. 여러 가지 가시로 인해 고통과 괴로움을 당할 때는 전력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가시를 주신 이유를 깨닫고 그 뜻대로 합당한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첫째, 겸손을 위한 것 

사도 바울이 가졌던 많은 지식과 신비한 영적 체험이 그를 교만하게 할 수 있음을 아시고 하나님께서는 육체의 가시를 주셨던 것입니다. 모세도 40년간이나 바로의 궁에서 애굽의 모든 지식을 통달하였으나 동족을 돕다가 죽이는 바람에 미디안 광야로 도피하여 40년간 처가살이라는 가시에 찔리면서 겸손을 익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가시를 주셔서 하나님의 종들을 겸손하게, 낮아지게 만드시는 분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잠 16:18) 인류가 최초로 지었던 죄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교만의 문턱에서 믿음으로 이 가시를 택함으로 하나님 앞에 끝까지 온전하게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두로 왕은 정치에 성공한 위대한 왕으로서 모든 길에 완전한 듯 했지만 그의 교만이 파괴와 멸망을 불러왔습니다(겔 28:1-24). 그의 오만과 허욕을 하나님께서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나아가 두로 왕과 함께 한 시돈 나라도 두로 왕을 모방하다가 패망하게 되는 무서운 심판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둘째,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것 

고후 12:10을 볼 때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가시에 찔려 약해졌을 때 하나님의 강함이 나타나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셉도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으나 형제들의 미움의 가시, 애굽의 종으로 팔리고 보디발의 아내의 가시에 찔리고 마침내 옥에 갇히는 가시에 찔리게 됐지만 이러한 가시들을 통해 그의 신앙인격이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동족을 기근에서 구원하고 이스라엘의 명맥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는데, 이 모든 과정에서 요셉은 온갖 가시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성도에게 가시는 참기 어려울 정도로 아픔과 쓰라림을 줍니다.
이 가시를 이기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첫째, 주님의 가시관을 생각할 때 우리의 작은 가시의 고통을 이길 수 있습니다.

둘째. 사도 바울같이 그의 곤고를 기뻐하는 믿음이 가시를 이길 수 있는 비결입니다(고후 12:10, 8:13).

셋째, 가시를 피하려만 하지 말고 오히려 그 가시를 정복하고 성숙한 신앙으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가시를 은혜로 받아들이고 감사하며 찬송과 기도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때 진정으로 가시를 이길 수 있습니다.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하심이니라(고린도후서 12:7)

​내 육체에 가시가 있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범위 내에 있는 것입니다. 
질병을 두시거나 아니면 불편한 환경적인 요소를 두게 하심으로 상한 마음을 가지게 합니다.
이 가시는 육체의 고통을 있게 하거나 마음이 상함으로 더욱더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게 합니다.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권세가 허락된 범위 내에 있으나 오히려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런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심으로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한 하나님을 의지하게 합니다. 

1. 하나님께서 교만하지 않게 하십니다.

​바울이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은 지극히 큰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무익하나마 부득불 자랑하는 것은 주의 환상과 계시였습니다.

바울은 낙원이라는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갔습니다.
낙원에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었습니다.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을 자랑하겠으나 절제할 수 있는 것은 자기를 돌아보아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영계의 세계를 보고 절제하지 못함으로 자랑하다가 넘어지는 자들이 많습니다.
사람이 은사를 많이 받았다고 해서 인격까지 훌륭한 덕을 지닌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은사가 사람을 교만하게 합니다.
나중에는 신이 된 것처럼 교만하다가 넘어지는 것입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의 은혜는 영계의 세계를 본 것을 자랑하지 못하게 육체의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2.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12:8~9)"

내가 세 번 주께 간구

사도바울은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인 질병이 있어 고통스러웠습니다.
이것이 바울에게서 떠나기 위하여 세 번 주께 간절하게 구하였습니다.
내게서 질병의 병마가 예수 이름으로 떠나가기를 구하였으나 여전히 질병은 떠나지 않고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주께 구하여 응답하여 주시는 기도가 있고,
세월이 지나서 이루어지는 기도가 있고, 
기도를 해도 들어주지 않은 기도도 있습니다.

질병의 고통을 당하는데도 주께서 들어주시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계셨습니다.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가 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어떤 중국의 목사님이 몸에 만성질병에 시달렸습니다.
하나님께 구하여도 몸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꾸었습니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고 있는 앞에 큰 바위가 있어 건너갈 수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내가 이 바위를 치워주랴 아니면 물이 바위를 넘치게 하여 건너가게 해주랴?"

목사님은 물이 바위를 넘치게 하여 건너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물을 바위 위로 넘치게 하여 배를 건너가게 하였습니다.
꿈에서 깨어 목사님은 깨달았습니다.
내 육체에 곧 사단의 사자가 있으나 질병이 있어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러 있어 약한 것들을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2. 만성질병이 내게 있어 오히려 크게 기뻐한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편하고 안전한 것입니다.

소유에 있습니다.

외모에 있습니다.

자랑에 있습니다.

부족함이 없는 넘치는데 있습니다.

인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기쁨은 잠시 잠깐이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은 오히려 약한데서 크게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은 세상적으로 잘나가는 것도 없고

내게 아무것도 없어도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할 수 있습니다.

내 속에 있는 기쁨은 "예수 기쁨 나의 기쁨"입니다.

약한 데서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약함으로 강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하박국3:17~18)"

​3. 나의 여러 약한 것들을 자랑한다.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능력을 발휘하게

부르심을 받아 쓰임받는 자들은 사람의 강함에 있지 않습니다.

성경인물들을 보면 약한 데서 하나님의 강한 것이

나옵니다.

모세는 나이 많았고 미디안의 오랜 광야생활로

애굽의 언어도 잊어 버렸으나 능력의 지팡이를 주셨고

말 잘하는 아론을 붙여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학문이 없는 자였으나 성령을 충만하게 받음으로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기탄없이 설교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어린 소년이라도 담대한 믿음으로

3미터나 되는 골리앗을 물맷돌로 이마를 맞게 하여 이기게 하셨습니다.

아직도 내가 강하고 능력있고 내가 내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능력에 있을 때 기독교를 박해하는 자였습니다.

다메섹으로 그리스도인을 결박하러 가다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눈멀어 3일간 회심하는 시간을 가짐으로

복음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나의 약한 것이 있어 강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린도전서1:26~28)"​

3.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고린도후서13:4)"​

예수님은 지극히 높으신 신성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 땅에 임하심은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셨습니다. 
울 자리 조차 없어 말구유에 누우셨습니다.
말 밥통에 누이는 수치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장 낮은데로 임하시는 것은 가장 약한 자를 들어 사용하심입니다.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셨습니다.
촌동네 나사렛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육체의 부친은 목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촌동네 사람 나사렛 예수라 불렀습니다.
예수께서 능력이 부족해서 정말 힘이 없어 붙잡히신 것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하늘의 하늘군대 천사들을 보내어 대적들을 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육체의 약함을 보이셨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조롱을 받았습니다. ​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 내려오라 하며(마태복음27:40)"

​예수께서 얼마든지 십자가에서 내려 와 조롱하고 희롱하는 자들을 다 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미련한 자는 십자가의 도를 어리석게 보나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약하지만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로 부활의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낮은데로 임하소서"​의 저자 안요한 목사님은 실명 전에 목사의 아들로 외국어에 능통하여 카츄사가 되었습니다. 

외국의 유학길이 열려 결혼까지 하였습니다.
안요한은 자신을 더 의지하였으나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어느날부터 눈에 이상이 옴으로 실명하고 말았습니다.
실명하였을 때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약할  그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약해진 실명으로 인하여 신학공부의 길이 열려 뉴욕의 헬렌켈러제단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실명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내게 약한 것 때문에 고민하고 염려합니까?
그 약한 것이 질병,가난, 배우지 못한 것, 가정의 어려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망과 불평으로 벗어나려 하고 간구하여도 그대로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자랑이 무엇입니까?
세상 것들을 붙잡아서 위로 받기 보다 약할 때 하나님의 강한 것을 붙들어 하늘에 소망을 가지고 사는 신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약할 그 때에 강하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린도후서12:10)"







조슈아 W. 지프는 책 ‘환대와 구원’에서 초기 기독교 서적인 ‘클레멘스 1서’에 나오는 이야기를 언급한다.
아브라함 롯 라합이 믿음과 환대를 통해 구원을 얻었다는 내용이다.
결코 우리가 환대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은 반드시 환대로 이어진다는 의미다.
오늘날 개인주의 시대에서 교회가 잃어버린 것이 있다면 타인을 향한 환대와 ‘손대접’일 것이다.
‘뜻밖의 회심’ 저자인 로자리아 버터필드는 기독교에 적대적이었고 레즈비언 공동체에 소속돼 있었던 사람이었지만, 복음을 따라 환대를 베풀었던 한 부부의 식탁 교제에 참여해 교류하면서 극적 회심을 경험했다.
복음전도가 잘 되지 않는 시대에 가장 효과적인 복음전도 방법도 바로 이웃에게 베푸는 환대와 손대접일 것이다.
그들과 친구가 되어보라.
우리의 우정과 섬김을 따라 복음이 흘러가게 될 것이다.
고립의 시대에 환대의 공동체는 외로운 시대에 가장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별명 중 하나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과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의 복음은 환대를 통해 흘러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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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2022(월)

하나님의 열심으로(고린도후서 11:2) 

도입 이야기 /

남자가 보기에 심히 좋은 여자에게 구혼을 하고자  만날 약속을 하고 그 곳에 도착했습니다.
두군거리고 떨리는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고 여자에게  청혼을 합니다.

남 :  '당신을 위해선 내 목숨까지 줄 수 있을 수 있을 정도로 사랑 합니다. 나와 결혼해 주십시요.'

여 :  '좋아요.  그럼 당신은 집이 있나요?'

남 :  '아니요. 그러나...'

여 :  '그럼 당신은 BMW 차가 있나요?'

남 :  '아니요. 그러나...'

여 :  '그럼 됐고요. 당신은 샐러리맨 인가요?'

남 : '아니요. 그러나...'

여 : '그러나, 그러나 하며 핑계 되지 마세요. 저는 당신과 같이 무능한 사람과 결혼 할수 없어요. 다신 연락하지 마세요.' 하고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여자가 떠난 후 남자는 혼자 말합니다.

나는 집은 없지만 맨숀이 여러채 있고, 자동차는 벤틀리와 람보기니, 포르쉐, 페라리등 여러 대가 있는데 왜 싸구려  BMW를 타야 하는지 모르겠네.
그리고 난 세계 최고 기업을 소유하고 있는데 왜 샐러리 맨이어야 하는지...' 

사람을 자신의 생각과 기준의 잣대로 평가 하거나 보지 말라는 예화라고 하겠습니다.

이 이야기를 예수님과 연결해서 살펴 보고자 합니다. 

저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님께서 죽으시기까지 사랑한 그 사랑과 그 분의 진정한 가치를 모른채 저희의 판단과 기준과 생각 가운데 예수님을 저 버리고 사는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그 분은 우리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귀한 분이시고 엄청난 능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우리의 협착한 생각에 사로잡혀 그 분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사는자의 삶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아울러 이러한 예수님이 저희의 신랑이시라는 것을 잊지 말고 사시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그 분을 너무나 잊고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아직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예수님의 청혼을 잠시 있다 없어질 세상의 것에 마음이 빼앗겨 그 부르심을 거부하므로 행복한 삶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습니다.
저희는 이 사람들에게 찾아 나가 그들이 예수님의 청혼에 기쁨으로 응답하여 그 분의 신부가 되게 하는 중매장이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 일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성령의 검인 말씀을 읽으신 후 열심히 전도하는 저희들의 영적 전쟁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교회를 부흥시켜 주시고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교회가 되리라 믿습니다.
이같은 예수님의 중매장이가 되는‘전도’이것은 해도되고 안되는 일이 아니라 저희가 꼭 매일의 삶 속에서 억지로라도 행하여야 할 저희의 의무와 사명과 축복입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면 정말 좋겠습니다.




중매(仲媒) 해 본 적이 있습니까?

중매하다. ἁρμόζω 718 

1. 결혼시키다,  2. 결합시키다,  3. 고린도후서 11:2

발음  / 하르모조(harmŏzō)
어원 / 제1부정과거중간태 ἡρμοσάμην, 완료수동태 ἥρμοσμαι, 제1부정과거수동태 ἡρμόσθην, 79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중매하다(고후11:2).
신약 성경 / 1회 사용

열심. ζηλός, ου, ὁ, ζηλός, ους, τό  2205

1. 열심,  2. κατὰ  ζηλός :  열심에 관한한,  3. ζηλός θεοῦ : 하나님을 향한 열심

발음  / 제로스(zē- lŏs)
어원 / 220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열심(요 2:17, 롬 10:2, 빌 3:6), 시기(행 5:17, 롬 13:13, 고전 3:3, 고후 12:20)
신약 성경 /  16회 사용

* 2204.  ζέω

1. 끓는 열성으로,  2. 사도행전 18:25,  3. τῷ πνεύματι ζέοντες

발음  / 제오(zĕō)
어원 / [기본형] 분사 ζέων : 끓이다, 삶다, ζέων τῷ πνεύματι
관련 성경 / 열심을 내다(행 18:25, 롬 12:11).
신약 성경 / 2회 사용

중매(仲媒, 하르모조, ἁρμόζω)
남자와 여자를 소개하여 결혼하도록 돕는 일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신부가 된 그리스도인들을 신랑이 되신 예수님께 소개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중매를 "거룩한 중매" 또는 "영적 중매"라고 합니다.

성경은 믿음을 결혼과 비유해 말씀합니다.

구약에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결혼한 신부라고 비유하면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고 우상에게 제사하는 행위를 아내가 딴 남자에게 한 눈 파는 외도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도 우리 성도들이, 또 교회가 거룩한 신부로서 신랑 되신 예수님과 결혼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처녀를 총각에게 중매하는 것처럼 우리 성도들을 예수님에게 중매해 영원히 함께 살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한 처녀와 총각을 중매해 성공하는 데도 얼마나 노력이 필요합니까?
얼마나 헌신이 필요합니까?
시간 들어가, 돈 들어가, 관심과 노력이 얼마나 많이 필요한지 모릅니다.
하물며 우리 성도들을 거룩한 신부로 예수 그리스도께 중매하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과 희생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모든 것을 이 일을 위해 바칩니다.

사도 바울의 이력을 살펴보면 세상적인 조건이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화려한 이력서의 소유자인데 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다 버리고 오직 주님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리고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해서 주님께 중매하려고 내 모든 것을 바치고, 시간과 물질과 땀을 바치고, 인생의 성공도 포기하고 헌신했습니다. 심지어 자기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드렸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바로 이런 헌신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가장 위대한 중매쟁이가 될 수 있었고 기독교역사 상 가장 위대한 사도요 선교사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노력과 열심을 바울은 뭐라고 표현합니까? 2절을 다시 보세요.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하나님의 열심으로!”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 거룩한 중매를 위해 노력을 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뜨거운 사람, 가장 열정적인 사람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의 뜨거움과 열정은 결국 하나님의 열심을 본받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의 열정은 바로 하나님의 뜨거움을 닮은 것이었습니다.

‘열심’이라는 헬라어로 ‘젤로스’인데 그 어원은 ‘제오’라고 합니다.
'제오'는 '끓이다, 뜨겁다’ 하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뜨거운 것입니다.
펄펄 끓는다는 뜻입니다.

열심이란 ‘젤로스’를 ‘열심’ 또는 ‘열정’(熱情)으로 번역합니다.
하나님의 열심!
우리 하나님은 본디 아주 열심히 있는 분이고 열정이 있는 분입니다.
아주 뜨거운 분입니다. 펄펄 끓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시는데 그냥 대충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냉랭하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정말 뜨겁게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너무 뜨겁게 사랑해서 견딜 수 없을 정도십니다.

스바냐 3:17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어요.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우리 때문에 하나님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까지 뜨겁게 사랑하다보니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우리를 위해 죽게 하실 정도로 사랑하신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뜨겁게 열정적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하나님의 열심, 하나님의 열정, 하나님의 뜨거움을 닮은 사도 바울이 그렇게 뜨거운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고 하나님처럼 내게 가장 귀한 것, 내 모든 것을 다 내어줄지라도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님에게 중매하기 위해 다 투자한 것입니다.


그러면 중매해서 결혼한 그 부부는 지금도 잘 살고 있습니까?
우리 주변에 유난히 중매(仲媒)를 잘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분은 희한하게도 중매를 했다하면 성공합니다.
그래서 이분의 중매를 통해 수많은 부부가 탄생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매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중매에는 세 가지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첫째, 중매가 잘되면 뭐지요?

술이 서 말이요?
우리는 예수 믿으니까 술 서 말은 좀 그렇고, 중매 잘 하면 양복 한 벌이라도 얻어 입을지 모르지요.
하지만 못 되면 뭡니까? 뺨이 석 대지요.
그러니까 중매라는 게 잘 되면 좋은 일이지만 잘 안 되면 참 그것만큼 곤란한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렵지요. 

둘째, 중매를 하려면 반드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확신이요? 양쪽에 대해 다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신랑 될 사람과 신부 될 사람 둘 다에게 확신이 있어야, 이 사람은 반드시 잘 살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중매를 하지 잘 모르는 사람을 중매 섰다가는 큰 코 다치기 십상입니다.

셋째, 중매가 잘 되어서 성공해서 결혼한다 쳐도 결혼해서 오래 오래 잘 살아야지 만약 그렇지 못하면 두고두고 원망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중매는 참 어렵다는 것입니다.

중매를 잘 하는 사람은 인간관계가 좋고 넓어서 아는 사람도 많고 그 많은 아는 사람들 중에서 “이 친구하고 이 친구는 틀림없이 잘 맞겠다” 싶으면, 확신이 오면 중매를 서는 것입니다.
물론 100% 잘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적어도 내가 잘 아는 사람, 확신이 있는 사람끼리 만나게 하니 잘되는 것입니다.

내 일도 아닌데 아낌없이 헌신하고 희생합니다.
바쁜 시간 쪼개가며 두 사람을 만나게 해주고, 심지어 내 돈 써가며 둘을 연결시켜 주려 합니다.
이렇게까지 열심이고 헌신을 하니 중매가 잘되는 것입니다.
양복 한 벌 얻어 입으려고 중매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 사람을 사랑하고 위하기 때문에 좋은 사람 만나게 해주려는 순수한 마음으로 중매를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2절)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사도 바울의 중매는 한 여자를 남자에게 소개해주는 사람을 소개하는 중매가 아니라 ‘거룩한 중매’를 말합니다.
‘거룩한 중매’는 신부된 성도들을 남편인 그리스도께 중매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 받아 만나고, 사귀고, 결혼해서 영원토록 동거하며 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 우리의 믿음을 이렇게 결혼과 비유해 말씀합니다. 구약에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결혼한 신부라고 비유하면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고 우상에게 제사하는 행위를 아내가 딴 남자에게 한 눈 파는 외도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도 우리 성도들이, 또 교회가 거룩한 신부로서 신랑 되신 예수님과 결혼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처녀를 총각에게 중매하는 것처럼 우리 성도들을 예수님에게 중매해 영원히 함께 살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한 처녀와 총각을 중매해 성공하는 데도 얼마나 노력이 필요합니까? 얼마나 헌신이 필요합니까? 시간 들어가, 돈 들어가, 관심과 노력이 얼마나 많이 필요한지 모릅니다. 하물며 우리 성도들을 거룩한 신부로 예수 그리스도께 중매하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과 희생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모든 것을 이 일을 위해 바칩니다. 지난 주 살펴본 것처럼 세상적인 조건이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화려한 이력서의 소유자인데 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다 버리고 오직 주님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리고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해서 주님께 중매하려고 내 모든 것을 바치고, 시간과 물질과 땀을 바치고, 인생의 성공도 포기하고 헌신했습니다. 심지어 자기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드렸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바로 이런 헌신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가장 위대한 중매쟁이가 될 수 있었고 기독교역사 상 가장 위대한 사도요 선교사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노력과 열심을 바울은 뭐라고 표현합니까? 2절을 다시 보세요.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으로!” 따라합시다. ‘하나님의 열심!’ 바로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 거룩한 중매를 위해 노력을 했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사도 바울이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뜨거운 사람, 가장 열정적인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 사도 바울의 뜨거움과 열정은 결국 하나님의 열심을 본받은 것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렇군요. 사도 바울이 왜 그리 뜨거운가 했더니 바로 하나님의 뜨거움을 닮은 것이었군요.

여기서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낱말은 헬라어로 ‘젤로스’인데 그 어원이 ‘제오’ 즉 ‘끓이다, 뜨겁다’ 하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뜨거운 것입니다. 펄펄 끓는다는 뜻입니다. 뭐가요? 마음이지요. 그래서 이 ‘젤로스’를 우리말로 ‘열심’으로 번역하기도 하고 ‘열정’(熱情)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열심! 우리 하나님은 본디 아주 열심히 있는 분이고 열정이 있는 분입니다. 아주 뜨거운 분입니다. 펄펄 끓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시는데 그냥 대충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냉랭하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정말 뜨겁게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너무 뜨겁게 사랑해서 견딜 수 없을 정도십니다. 그래서 스바냐 3:17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어요.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우리 때문에 하나님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까지 뜨겁게 사랑하다보니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우리를 위해 죽게 하실 정도로 사랑하신 것 아닙니까? 이게 다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뜨겁게 열정적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하나님의 열심, 하나님의 열정, 하나님의 뜨거움을 닮은 사도 바울이 그렇게 뜨거운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고 하나님처럼 내게 가장 귀한 것, 내 모든 것을 다 내어줄지라도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님에게 중매하기 위해 다 투자한 것입니다.

우리의 열정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리고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분의 형상으로 지어진 우리는 그분의 성품, 그분의 행동, 그분의 모든 것을 닮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분을 닮아가지 않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특히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뜨거운 열정을, 그 열심을 닮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뜨거운 성도들입니까?
우리는 얼마나 뜨거운 교회입니까?
우리는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그를 예수 그리스도와 중매하기 위해 얼마나 투자하고 희생하고 헌신하고 있습니까? 생각하면 할수록 부끄러운 일 뿐입니다.

아내와 함께 백화점에 갔습니다. 그런데 매장에 들어서니 복도에서부터 직원들이 나와 자기 물건 사달라고 난리입니다. 시장에서나 호객을 하지 백화점은 안 그럴 줄 알았는데 백화점도 시끌시끌하게 호객행위를 해서 처음에는 좀 얼굴이 찡그려졌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그들을 보며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정말 한 사람이라도 더 손님을 붙잡으려고 기를 쓰고, 정말 한 사람이라도 놓칠까봐 안타까워하는 그들을 보며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월급을 받고 일하는 저들도 저렇게 안타까워하고, 기를 쓰는데 하물며 영원한 하늘나라 상급을 바라고 사는 우리는 한 영혼을 어떻게 대하는가?”라고 말입니다. 저 자신부터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우리는 진정 하나님의 열심을 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열정을 닮아가야 합니다. 한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마음, 불타는 가슴을 닮아가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에 대한 열정과 열심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열심으로 믿고 뜨겁게 따르려는 자는 반드시 그 결과가 한 영혼을 향한 열심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한다고 아무리 말로 해도, 아무리 뜨겁게 믿겠다고 말해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다면 너는 몇 사람이나 나에게 중매했니?”라고 물으실 것입니다.

첫째, 우리의 ‘열심’은 이렇게 전도로 나타나야 합니다. 저는 올해 전도 작정을 하면서 열 사람을 작정했습니다. 여러분은 몇 사람이나 작정하셨나요? 솔직히 열 사람을 써내면서 자신이 별로 없었습니다. 매년 다섯 명씩 전도 작정을 써내면서 단 한 번도 성공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니, 아예 단 한 사람도 전도하지 못한 적이 더 많았습니다. 스스로에게 핑계를 대보기도 했습니다. “너는 담임목사잖아? 목회도 얼마나 바쁜데 어떻게 전도를 하겠어? 그리고 꼭 나가서 한 사람 데리고 오는 것만 전도가 아니라 네가 열심히 설교하고 심방하면 그게 다 전도 아니겠어?”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다 핑계에 불과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전도하라고 하면 “저는 바빠서요, 저는 숫기가 없어서요, 다른 건 다 하겠는데 전도는 정말 못하겠어요” 하고 핑계 대는 성도들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참 부끄럽습니다. 그동안 제가 성도들보고 전도하고 하면 “목사님도 못하면서 무슨 전도?” 하고 얼마나 흉봤겠습니까? 그래서 무슨 수를 써서든 올해는 꼭 전도를 하자, 올해는 반드시 목표를 달성하자, 하면 된다, 마음먹으면 된다 하고 결심하고 지금도 열심히 전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4주 전 소개했지만 하나님이 한 가정(유장용, 이정순, 유지수 성도 가정)을 제게 붙여주셨어요. 오늘 4주째가 되어 등록을 합니다만 정말 제가 직접 전도한 것도 아닌데 성탄절 때 우리 교회 와서 우연히 저를 만났고(화장실 안내) 그 후 또 우연히 통화할 일이 생겨서 “우리 교회 오세요” 하니까 “명절(설) 지나고 남편하고 가겠습니다” 하시는 거예요. 

그러더니 진짜 오셔서 제 이름으로 등록을 하신 겁니다. 좀 겸연쩍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내가 직접 가서 전도한 것도 아닌데 저를 인도자라고 쓰신 것을 보니 말입니다. 그런데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아, 하나님이 이분들을 내게 붙여주셨구나, 내가 전도하겠다고 마음먹고 기를 쓰니까 하나님이 이 분들을 내게 붙여주셔서 전도하게 하시는구나, 그러니까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나에게 이 분들을, 이 가정을 책임지고 정착시키라는 뜻이구나” 하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열심을 품으면 하나님이 붙여주십니다. 물론 거리고 나가서 전도하고 집집마다 다니며 문을 두르려야 하겠지만 우리가 일단 뜨거운 마음을 품으면 하나님이 사람들을 찾아 붙여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 경험을 꼭 할 수 있기 바랍니다. 이 가족 덕분에 제가 용기를 얻고 올해 꼭 열 명, 전도목표 달성하자 하고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도 꼭 저처럼 용기를 얻고 뜨거움을 품고 일단 시작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의 뜨거우신 하나님이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둘째, 우리의 ‘열심’은 또한 찾아온 성도들을 중매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찾아오기만 하면 뭐합니까? 그분들을 정착시켜야지요. 우리 교회에 발만 들여놓으면 뭐합니까? 우리가 모든 수단방법을 다 써서라도, 모든 것을 다 내주고서라도 그 분들을 예수님에게 중매해서 결혼시켜야지요. 우리가 중간에서 이런 중매자 역할을 꼭 해야지 이것을 못하면 책망 받습니다. “내가 그렇게 많이 보내주었는데 다 어디 갔냐?” “그 수많은 새가족들 지금 다 어디 있냐?” “왜 중매 제대로 못해서 나와 혼인시키지 못했냐?”고 하나님께 크게 야단맞게 됩니다.

지난 주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지요? 어떤 새가족이 “이교회 정말 냉랭하다”고 해서 제가 속이 상해서 며칠 몇날을 잠을 못 잤다고요. 그분 말씀이 제가 처음 왔을 때 환영도 열렬히 해주고 노래도 불러주고 꽃도 주고 해서 “야, 이 교회는 정말 사랑이 많은 교회구나. 뜨거운 교회구나” 기대했는데 그 후에 몇 달이 지나도록 선교회에서도 아무 연락이 없고, 구역방학이라지만 구역에서도 연락이 없고, 누구도 아는 척도 전화 한 통도 안 해서 실망했답니다. 이 교회 계속 다녀야 하나 고민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제가 이 말 듣고도 잠이 오겠어요?

정말 많이 달라졌다지만, 정말 좋아졌다지만 아직도 이게 우리의 현실이라면 심각한 문제 아닙니까? 물론 이렇게 냉랭해도 애써 적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를 쓰고 적응해야, 살아남아야 하겠다는 분들입니다. 하지만 더 많은 분들은 앞문으로 들어왔다가 뒷문, 옆문으로 나갑니다. 떠나갑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이 떠나도 잘 모릅니다. 누가 갔는지, 왜 갔는지 말입니다. 물론 우리 나름대로 노력을 했는데 그 진심이 전달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오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런 분들을 다 일일이 따라다니면서 챙기고 책임지겠습니까? 그런데 제가 성경을 읽다가 창세기 4:9을 주목해서 보게 되었습니다. 아담의 아들 가인이 동생 아벨을 너무 시기해서 돌로 쳐 죽이고 시침을 떼고 있는데 하나님이 가인에게 물으십니다. “가인아,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랬더니 가인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모릅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하나님, 내가 한가하게 아우나 지키는 사람으로 보입니까? 난 모르는 일입니다.” 이런 뜻입니다. 저는 정말 이 말씀을 보는 순간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게 내 모습 아닌가? 이게 지금 우리의 모습 아닌가? 하나님이 ‘내가 보낸 그 수많은 영혼들, 새가족들 다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실 때 ‘내가 그 사람들이나 지키는 사람입니까? 저 그렇게 한가한 사람 아닙니다’ 하는 우리의 모습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 좀 더 뜨거워져야 합니다. 우리 좀 더 하나님의 열심, 열정을 품어야 합니다. 지금도 뜨겁지만, 지금도 열심이지만 이 정도로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지금 이렇게 아름다운 새 성전 짓고 난 후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뜨거운 가슴’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뜨거운 사랑’입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교회의 온도는 아직 100도로 펄펄 끓지 않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단 한 번이라도 뜨거워본 적이 있습니까? 연탄재 발로 차는 사람처럼 뜨거운 사람 평가하고 판단하기 전에, “왜 저리 나서냐, 나대냐?” 하기 전에, “저 사람 왜 요즘 안 나오지?” 하기 전에, “우리가 도대체 뭘 잘못한 거지?” 하기 전에 우리는 일생 예수 믿으면서 단 한 번만이라도 하나님의 열심히, 그분의 열정으로 뜨거워 본 적이 있었는지, 한 영혼을 향해 불타는 심정으로 나 자신을 내 준 적이 있었는지 정말 뜨겁게, 치열하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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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교회에 대한 칭찬, 책망 및 권면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오늘 우리 교회가 어떠한 상태에 있는 지 알 수 있으며 또한 우리 개인들의 신앙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 지를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기 위해서 교회나 개인들이 가지고 있어야 할 요소들을 A부터 Z까지 순서대로 나열해 보면서 그 성경적인 근거를 한 번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A(Amen : 아멘)

아멘은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뜻이니 선포되는 하나님 말씀은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은 아멘으로 화답하고, 간구하는 기도는 아멘으로 함께 간구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실 것입니다.

B(Belief : 믿음)

성경에서 믿음의 장이라고 하는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믿음(faith)이라는 단어가 26번이나 나오고 있으며 히브리서 저자인 바울은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에 대해서 열거하면서 시간이 부족하여 말 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왜 거룩하고 공의로운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을 징계하지 않으시는지 물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종말이 정녕 임하리라고 말씀하시면서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라고 응답하시고 계십니다. 사도 바울도 이 구절을 로마서 1장 17절에서 인용하면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이신칭의(以信稱義)라는 로마서의 핵심 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C(Confession : 고백)

우리의 어머니가 죄 가운데 우리를 잉태하였고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죄를 가지고 있었으며(시 51:5), 모든 자연인(natural man)은 죄인이라고 바울은 말씀하시고 계십니다(롬 3:9-10). 먼저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그 죄를 다 입으로 토설하는 죄의 고백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첫걸음일 것입니다. 죄를 고백해야 하나님의 죄사하심을 입어 죄문제가 해결됩니다. 솔로몬은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고 말씀하시며, 여호와께서는 이사야를 통해서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 1:18)"라고 우리들에게 회개(repentance)를 촉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버가모, 사데, 라오디게아 교회 대해서도 회개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또한 입으로 주를 시인하는 신앙 고백이야말로 구원을 얻는 일이라고 바울은 말씀하시고 계십니다(롬 10:10).

D(Diligence : 근면)

예수님께서는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 게으르지 아니하고 부지런함을 칭찬하고 있습니다(계 2:3). '부지런한 사람이라야 먹고산다(The early bird catches the worm)'라는 속담이 있듯이 세상일을 함에 있어서도 우리는 부지런해야 합니다. 솔로몬도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잠 10:4)" "부지런한 자의 마음은 풍족함을 얻느니라(잠 13:3)"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라는 말씀을 생각해 볼 때 세상일도 부지런해야 할진대 하물며 하나님 나라의 일이겠습니까?

E(Endurance : 인내)

예수님께서는 에베소 교회가 자기 이름을 인하여 인내한 것(계 2:3)과 두아디라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가 인내의 말씀을 지킨 것(계 2:19, 3:10)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크리스천들도 이 땅을 살아 가면서는 시험과 시련을 당할 수 있는데 그럴 때일수록 낙심하지 아니하고 주 안에서 인내하는 자는 복되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야고보는 인내를 온전히 이루면 성도의 인격이 온전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으며(약 1:4), 베드로 사도는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벧전 1:7).

F(Faithful : 충성)

직분을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으며(고전 4:2), 요한은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달란트 비유(마 25:14-30)를 통하여 작은 일에 충성된 자가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G(Godliness : 경건)

예수님께서는 사데 교회에 대해서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라고 책망하고 있습니다(계 3:1). 그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딤후3:5) 즉, 외적으로는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 같으나 내적으로는 복종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바울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참된 경건이란 절제된 언행, 소외계층에 대한 보살핌, 세속에 물들지 아니한 구별된 삶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약 1:26-27).

H(Hope : 소망)

크리스천들에게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세상 사람들이 누리는 온갖 종류의 쾌락을 즐기지 못하는 우리의 삶은 참으로 불행한 삶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 39:7)"라고 고백하고 있으며 바울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I(Imploration : 간구)

여호와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 간구하면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십니다. 또한 의인의 간구는 역사 하는 힘이 많다고 했으니(약 5:16) 우리가 의롭게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닫게 해주며 요한이 그의 사랑하는 자의 영혼과 건강을 간구했던 것처럼(요3 1:2) 성도들을 위한 중보의 기도는 개인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도 큰 도움이 됩니다.

J(Jesus : 예수)

우리 삶에 있어서 예수님보다 더 중요한 분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권세를 받습니다(요 1:12). 지금까지 살아 왔던 나의 삶의 방식을 완전히 포기하고 예수님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모시면 예수 안에 우리가 거하고 우리 안에 예수가 거하는(요 6:56, 갈 2:20) 놀라운 일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적인 가치관에 의해 의사결정을 내렸던 우리의 삶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면서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까?라는 생각으로 가득 찬 삶으로 바뀌게 됩니다.

K(Keep : 말씀을 지킴)

알고도 행치 않는 것이 죄라고(약 4:17) 야고보가 지적하셨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온 마음을 다해 그것을 지켜 행해야 합니다. 또한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며 우리를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한다고 하였습니다(딤후 3:15-17). 하나님 말씀을 읽으면 우리가 죄인이므로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을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 말씀을 지켜 행하면 거룩한 하나님의 속성을 우리도 닮아가게 되고(聖化)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갈 5:22-23).

L(Love : 사랑)

사랑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입니다. 사랑의 장으로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의 필요성, 특성, 영원성에 대해 설명하면서 13절에서는 믿음, 소망 사람 중 사랑을 으뜸으로 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14)"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 즉,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따라서 거기에는 행함이 있고 진실함이 있습니다(요1 3:18). 바울도 피차 아무에게도 아무 빚도 지지 말되 사랑의 빚은 지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롬 13:8) 진실한 마음으로 형제간에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M(Mercy : 긍휼)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마 5:7). 야고보도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약 2:13). 바울은 그의 서신의 인사말에서 은혜, 긍휼, 평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딤전 1:2, 딤후 1:2) 긍휼은 하나님의 은혜의 구체적인 표현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아무 대가도 치루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거져 받았으니(엡 2:8) 우리 이웃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N(New-born : 중생)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이요, 산헤드린의 회원으로 정치인이었으며, 학문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선생이었던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요 3:1-21).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다는 것은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말하며(엡 4:22-24) 바울은 이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셨습니다(고후 5:17). 거듭난 사람의 생활은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엡 4:25-32, 골 3:12-17).

O(Obedience : 순종)

순종이란 우리의 생각이나 의지를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따르는 것입니다. 아말렉의 모든 소유를 진멸하도록 명령을 받은 사울은 이에 순종하지 않고 좋은 것들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는 명목으로 가져 왔을 때 사무엘로부터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삼상 15:22)"라는 책망을 들었습니다. 순종은 사랑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우리가 부모를 사랑하기 때문에 부모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요 14:23)"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순종하면 하나님으로부터 큰 축복을 받습니다(신 28:1-14).

P(Prayer : 기도)

기도는 크리스천들의 영적 호흡이며 마귀를 대적하는 영적 무기입니다. 또한 영육간의 필요를 하나님으로부터 얻기 위한 수단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기도의 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으며(눅 6:12) 성경은 항상 기도에 힘쓰고(골 4:2)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살전 5:17) 말씀하고 있습니다.

Q(Quiet Time : 묵상)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수 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묵상해야만 우리의 죄를 깨닫게 됩니다. 바울은 "하나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며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라고 적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 전에는 우리가 죄인인 지를 깨닫기가 어렵고 하나님 말씀을 읽어야만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율법의 역할입니다(롬 3:20).

R(Resurrection : 부활)

부활은 기독교가 존재하는 근거가 됩니다. 초대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않음에 대하여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을 통하여 부활의 확실성과 성격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시지 못하셨다면 복음 전파와 믿음이 헛것이며(14절),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거짓 증인이 될 것이고(15절), 우리가 여전히 죄중에 있을 것이고(17절), 주 안에서 죽은 자도 멸망할 것이고(18절), 그리고 믿는 자가 가장 불쌍한 존재가 될 것이라고(19절)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눈으로 직접 목격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10명의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자기들의 목숨을 버릴 수 있었을까요?

S(Sacred : 거룩함) 

거룩함(holiness)은 하나님과 인간이 공유하는 하나님의 보편적 속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창 1:26-27). 우리 조상 아담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자연인)의 그러한 속성은 불완전하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자연인과 구별하여 거룩하기를 명령하고 계십니다(레 20:26). 바울은 우리의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릴 때 거룩함에 이른다고 말씀하시면서(롬 6:19)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롬 12:1)"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실인의 서원 제도(민 6:1-21)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신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함을 닮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나실인이 되어 하나님의 거룩함을 날마다 연습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T(Tolerance : 관용)

관용이란 남에게 자진해서 주는 넓은 마음입니다. 저와 우리 가족의 삶의 원칙 중의 하나는 '자신에게는 엄격하게, 남에게는 관대하게(Strict to yourself, but generous to others)'입니다. 바울은 교회 감독의 자격으로 관용(gentle)을 들고 있으며(딤전 3:3), 디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관용(considerate)을 선행의 하나로 들고 있습니다(딛 3:2). 에베소 교회가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않음에 대해서 칭찬을 받은 것처럼 악과 거짓 가르침에 대해서는 일체 관용을 베풀지 말아야 하지만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롬 12:18)"는 바울의 말씀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최대한 관용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U(Unafraid : 담대함)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우리를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듯이 달려드는 마귀(벧전 5:8)를 생각하면 두려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라고 노래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당신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고, 굳세게 하고, 도와주고, 의로운 오른손으로 붙들어 주실 것이니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사 41:10). 예수님께서도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V(Victory : 승리)

바울은 우리의 싸움은 육적인 것이 아니고 영적인 싸움이며 이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엡 6:10-20). 또한 바울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라고 말씀하셨으며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1 5:4). 우리가 믿음을 지켜 세상을 승리하면 우리는 의의 면류관을 그 상급으로 받을 것입니다(딤후 4:7-8).

W(Wisdom : 지혜)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지혜의 대표적인 인물은 솔로몬입니다. 그가 하나님께 장수나 부를 구하지 않고 지혜를 구했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아 하나님께서는 지혜와 함께 부와 영광도 주셨습니다(왕상 3:3-15). 그러한 솔로몬은 지혜를 얻은 자는 복이 있으며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낫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잠 3:13-14). 야고보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고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고전 14:20).

X(Cross : 십자가)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믿는 자들은 죄사함을 받았습니다(히 9:11-22).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십자가는 죄인들을 죽이는 형틀의 상징에서 죄인들을 죽음에서 건져낸 생명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눅 9:23). 바울도 죄의 법을 섬기려는 육신의 생각과 하나님의 법을 섬기려는 영의 생각이 그의 속에서 투쟁함을 보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롬 7:13-24).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인 육신의 소욕을 능히 감당하고 이겨내면 영생을 얻을 것입니다(갈 6:8).

Y(Youth : 젊음)

저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아버님께서 제게 주신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시 119:9)"라는 말씀을 붙들고 유혹 많은 청년의 때를 하나님의 은혜로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솔로몬도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하면서 청년에 대한 권면의 말씀을 주시고 있습니다(전 11:9-12:7). 하나님께서는 말세에 젊은이들은 환상(vision)을 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행 2:17). 비전(vision)이 없는 청년은 무늬만 청년일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적으로는 나이가 들어간다 하더라도 우리의 믿음은 비전으로 가득한 활기를 항상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Z(Zeal : 열심)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 열심을 낼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면 토하여 내치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계 3:15-19). 바울도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12:11)"고 권면하고 있으며 좋은 일을 열심히 사모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갈 4:18).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도 가장 뛰어났던 사람 중의 하나였던 바울이 세상적인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고 하나님의 일에 보여 주셨던 그 열심을 우리도 가져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 13:5)"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Examine and test yourselves! 우리 교회 안에 그리고 우리 안에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을 위와 같은 요소들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우리가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는 요소들은 더욱 굳게 붙잡고, 가지고 있지 않은 요소들은 가지도록 해야겠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의지와 결단과 노력으로 가질 수 없고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가질 수 있으니 우리는 매일 매일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한국 교회가 양적으로 큰 성장을 하다가 이제는 양적으로 감소하는 시대를 맞았습니다.
이에 대한 여러 가지 진단이 나오고 있지만 저는 내적(영적) 성숙이 외적 성장에 크게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숫자놀음에서 벗어나 우리 개인이나 교회가 진정으로 영적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오늘날 개인이나 한국 교회가 하나님의 칭찬을 받기 위해서는 참된 경건을 회복해야 합니다.
의인 10명이 없어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소돔과 고모라를 생각해 볼 때 오늘 우리 사회를 구원하기 위해서 크리스천 한사람 한사람이 경건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귀중하며 축복 받은 일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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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8-2022(토)

주께서 주신 권세(고린도후서 10:8)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파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권세. ἐξουσία, ας, ἡ  1849

1. 선택의 자유,  2. 능력,  3. 사도행전 1:7

발음 / 에쿠시아(ĕxŏusia)
어원 / 1832 ‘능력’의 의미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권위(마 7:29, 눅 4:6), 군사(마 8:9), 권능(마 10:1, 행 8:19), 권한(막 13:34, 행 1:7), 병사(눅 7:8), 관할(눅 23:7), 마음(행 5:4), 권리(고전 7:37, 9:5, 12, 살후 3:9), 자유(고전 8:9), 힘(계 9:19).
신약 성경 / 102회 사용

세상에 있는 교회

요즈음 우리 사회의 분위기를 보면 기독교가 사회로부터 조금 무시 혹은 배척을 당하는 느낌이 든다.
기독교를 향한 부정적인 정서가 있다면 그것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심각하게 생각하고 이를 위해서 구체적인 대안을 세워야 할 것 같다.

흔히 이것을 기독교에 대한 핍박으로 치부할 수 있는데 종교적인 핍박과 교회를 향한 세상의 부정적인 정서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일들은 과거에 교회가 종교적으로 핍박을 받은 것과는 구별이 되는 것 같다.
그때는 기독교의 진리를 억누르기 위해서 그것을 따르는 사람들을 향해 핍박을 한 것이었다면 지금 교계가 겪는 것은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의 표현처럼 보인다. 무언가 정확한 원인을 꼭 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현재 교회가 사회 속에서 인기를 잃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다.

언젠가 직장 내에서 아직 신앙을 갖지 않은 직원과 이야기하다가 이런 반응을 듣고 당황한 적이 있다.

“기독교에 대해서는 관심이 있지만 교회는 나가고 싶지 않다.”

정말 마음을 섬뜩하게 만드는 이야기였다.
현재 우리 교회가 이 세상에서 주님이 원하는 만큼 소금과 빛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음을 반영한다.
교회만이 인기를 잃는다면 문제가 안 되지만 그 바람에 주님과 주님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배척당하게 되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교회가 성장했으며 거대한 교회건물들이 세워졌지만 그것으로 사회를 향한 영향력이 커지지는 않았다.
정말 중요한 것은 교회를 통해서 머리되신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때로는 교회가 정말 낮아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세례요한의 겸손한 외침이 생각난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
- 아필쇄미 타필흥왕(我必衰微 他必興旺)

요한이 기대한 것처럼 예수님이 흥하시도록 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전략이 필요하다.
그 전략은 지금까지의 전략과는 달라야 할 것 같다.

사람들은 교회가 큰 건물을 짓든지, 그 안에서 얼마나 열심히 봉사하든지 그것 때문에 교회를 인정해주거나 머리되신 예수를 알아주지 않는다.
세상 속에서 사람들의 칭찬을 받을만한 일들을 해야 한다.
초대 교회가 성장하는 과정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7)”.

오늘 우리 교회도 바로 이런 과정을 필요로 한다.
초대교회는 예루살렘과 유대를 복음화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었지만 복음화 이전에 먼저 세상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그 단계가 있은 후에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오게 되었고 교회가 성장을 했던 것이다.

한국 교회가 선교의 사명을 강조하면서 5천만 민족을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게 하자고 외친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5천만에게 칭찬받는 교회가 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세상 속에 흩어져 사는 교회의 지체된 성도들이 칭찬을 받아야 한다.
불신자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사는 곳에서 인정받고 칭찬을 들어야 한다.
그것이 세상이 교회를 향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정서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며 현재 한국교회에게 맡겨진 중요한 사명이다.



고린도후서 10장은 인간의 교만과 자랑을 무너트리는 복음의 능력에 관한 말씀입니다.
오늘 묵상할 주제는 "주께서 주신 권세(the authority the Lord gave us)"라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서신서의 마지막 부분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거짓 교사들의 영향력 아래서 사도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마지막 권면입니다.
그들은 사도가 자신들에게 문전박대와 비난을 당한 뒤 돌아가서 눈물로 쓴 비통한 편지를 읽었습니다.
그들이 볼 때, 사도는 면전에서는 약하지만 글로 쓰는 편지로는 강한 사람입니다.
사도는 그들의 비난을 의식하고 그것을 인정합니다(1~2, 9~11).
오히려 사도는 다음 방문에서도 그들을 대면하여 약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이 회개할 때에만 가능합니다.
그때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사도가 그리스도의 권위로 벌하게 될 것입니다(6).
이것은 사도의 최후통첩입니다.
이 싸움은 육체에 속한 싸움이 아닙니다(3).
이것은 고린도교회 안에 있는, 하나님과 복음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세력을 향한 싸움입니다.
사도의 무기는 견고한 진을 파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4).
사도는 이 무기로 복음의 진보를 가로막는 자들의 자기 자랑에 의해서 세워진, 자기 신뢰와 자기를 높이는 방어진을 무너뜨릴 것입니다(5). 이것이 ‘견고한 진’입니다.

두 번째 파괴 대상은 ‘모든 이론과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입니다(4b~5).
이것은 하나님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그들의 죄악된 정신 구조, 하나님 없는 세상 방식입니다.
복음의 진리가 세상 방식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의 사고 구조를 무너뜨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들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세 번째로 사도는 인간의 지적 사고의 중심인 정신을 포로로 사로잡기까지 싸우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모든 생각’이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바입니다(5b).
싸움이 끝나 복종할 자들이 복종하게 되면, 사도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벌하러 갈 것입니다(6).
그러므로 아직도 거짓 교사들에게 속고 있는 고린도사람들은 그들 눈앞의 실상을 보아야 합니다(7).
만일 사도가 가짜라면 그들은 그들의 판단으로써 자신들이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셈입니다.

이 싸움의 핵심에는 복음이 있습니다.
복음은 인간의 모든 교만과 자랑을 깨뜨립니다.
회개하지 않는 고린도사람들은 세상 자랑으로 충만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자랑의 수준은 남과 비교함으로써 자기를 드러내는 유치한 수준이었습니다.
이런 자랑과 교만은 복음으로만 파괴됩니다.
참 복음은 인간의 헛된 자랑과 교만을 꺾는 힘이 있습니다.
사도는 고린도사람들을 세우려는 깨끗한 동기로 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8).

모든 자랑이 다 헛되고 교만한 죄성에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합당한 자랑도 있습니다.
그것은 남과 비교하는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기준 안에서 자랑하는 것이다(13~16).
하나님께서 주신 분량의 한계를 따라서 하는 자랑입니다(13).
사도는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아 자신의 한계를 지켜 소명을 이루어왔다고 말합니다(14).
사도는 결코 다른 사도와 자신을 비교함으로써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의 거짓 사도들은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는 자들입니다(15).
이것은 도둑질입니다.
사도는 고린도사람들의 믿음이 성장하면서 자신의 진실과 사도직이 그들 안에서 더욱 견고하게 세워지기를 기대하면서(15b) 이들의 지원을 받아 로마와 스페인으로 갈 계획도 전합니다(16).

끝으로 자랑하려면 주 안에서 하라고 사도는 말합니다(17).
이것은 주어진 모든 것이 자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마치 원래부터 자기 것인 양 자랑하는 모든 태도는 다 악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를 자랑하고 높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칭찬해주시는 사람, 하나님께서 자랑하실 만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17).

사도의 무기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습니다.
그 말씀의 능력이 인간의 모든 교만을 꺾을 것이라는 사실을 사도는 확신했습니다.
또한 우리가 매일 당하는 싸움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나와 내 생각과 내 생활방식을 지배하고 있습니까?
우리를 끊임없이 세상 방식의 노예로 삼으려는 죄의 유혹은 실로 엄청납니다.
내 안에 하나님 앞에서 헛된 자랑과 교만이 뿌리째 뽑혀 나가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의 능력을 통해서입니다.
매일, 매순간 말씀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인정이나 칭찬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을 소중히 여기고 사는 은혜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사도권 변호(1-11절)

열세 장으로 구성된 고린도후서는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1:1-11이 서론이라고 한다면,
13:11-13이 결론입니다.
그 사이 1:12-13:10이 본론입니다.

이 본론도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12-7장은 바울 자신의 사도성에 관해 설명합니다.
즉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주님께 불러주셨기 때문이고, 그 사도직을 수행하기 위해서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사람들을 하나님께 연결해 주는 연결고리로 살았다고 고백합니다.

8-9장은 연보(구제)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은 ‘연보’를 말하면서, ‘복’이라는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연보’는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서 물질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데, 그것이 받는 사람에게는 물론 드리는 사람에게도 복이 된다고 말합니다.
연보가 드리는 사람에게 복이 되는 것은 해보면 압니다.

10장-13:10인데, 고린도 교회를 흔드는 거짓 사도들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부터는 앞에서보다는 좀 더 강한 어조로 말합니다.

[(1) 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새번역성경은 이 구절의 앞 부분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내가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을 때에는 여러분에게 유순하나, 떠나 있을 때에는 여러분에게 강경하다고 합니다.” 이것은 바울을 반대하는 거짓 교사들의 주장을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을 굉장히 폄훼하는 말입니다. 즉 ‘바울은 사람이 없는 곳에서는 큰소리치지만, 직접 대면해서는 말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권한다’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 때 고린도에 와서, 고린도 교회를 시작하고 1년 6개월 동안 머물며 그들을 양육했습니다. 비록 그들이 한때, 거짓 교사들에게 현혹되기도 했지만, 이제는 돌아왔고, 바울은 그들이 사랑해야 할 대상임을 잊지 않습니다. 그래서 온유와 관용으로 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2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거짓 교사들을 대할 때는 담대하게(강경하게) 대했지만,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그렇게 대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말합니다.

[(3-4)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우리 그리스도인은 육신을 갖고 있지만, 그 육신을 따라서 즉 자신의 욕망이나 세속적인 가치관을 따라서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 주님께서 거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욕망이나 세속적인 가치관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며 사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바울을 모함하고, 바울을 공격하는 거짓 교사들은 바울에게 위해(危害)를 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위해를 가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싸움을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싸움이 욕망을 성취하기 위함이나 세속적 가치관의 시각으로 좋아 보이는 것을 위한 싸움이 아니라 진리를 위해, 생명을 위해 영원을 위해 그 반대편에 있는 것과의 싸움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서, 첫 국어 수업 때, 선생님이 칠판에다 ‘놀아라’, ‘싸워라’, ‘이겨라’라고 쓰셨습니다. 그리고 잘 놀고, 잘 싸우고, 잘 이겨라고 설명했습니다. 그 후에 그 단어들 뒤에 글자 세 자를 더 쓰셨습니다. ‘단 책과’. 바울도 놀고, 싸우고, 이기려고 했습니다. ‘단 진리와 생명으로’ 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싸움인 것을 잘 인식하고 있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거룩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통로로 사용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세속적인 가치관, 영원하지 않은 것과의 싸움이라면 무기가 있어야 하는데, 그 무기가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육신에 속한 것으로는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육신에 속한 무기는 재물, 지식, 능력, 권력, 명예 등일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갖추고 있으면 당장에는 이길 것 같지만, 나중에는 이런 것들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절감(切感)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을 충분히 갖춘 것처럼 보이는데도, 깊은 한숨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가 갖추어야 할 무기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한때 고린도 교회에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이 견고한 진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무너졌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진리와 진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유사 이래에 수많은 이론과 철학들이 왕성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지 않는 것은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사람들이 하찮게 여긴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논리와 가치관을 무너뜨렸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능력이고, 진리이며,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5)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하나님의 능력은 모든 이론을 무너뜨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 교만과 생각을 무너뜨린다고 말씀하십니다. 새번역성경은 5절 상반절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는 모든 교만을 쳐부수고’라고 번역합니다.
자신을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세운 사람은 결코, 결코 교만할 수 없습니다. 크신 하나님을 직면하는 순간 형편없고, 정말 보잘것없는 자신의 실상을 직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는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7)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바울은 고린도 교회 사람들에게 “어떻게 사람을 외모로만 보십니까? 만약 자신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인 것을 확신한다면, 우리도 그런 사람들인 것을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거짓 교사들이 바울을 외모로 공격했고, 그것을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그대로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2세기의 글에 의하면, “바울은 키가 작고, 양 눈썹은 붙었고, 코가 좀 크고, 머리는 벗어졌으며, 다리가 구부정하고 단단한 몸을 가진 은혜가 충만한 사람이었다. 사람처럼 보이면서도 때때로 바울은 천사의 얼굴을 가진 사람으로 보였다”라고 그리고 있습니다. 바울은 요즘 표현으로 하면, ‘얼짱’이나 ‘몸짱’, ‘훈남’과 같은 말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던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어쩌면 거짓 교사들은 바울보다는 외모로 훨씬 나아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그들의 말을 듣고, 한때 바울을 불신했던 것이었습니다.

[(8)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무너뜨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회 사람들에게 자신에게 있는 권위를 자랑했더라도 그것이 부끄럽지 않게 생각한 것은, 그것을 통해서 고린도 교회를 더욱 건강하기 세우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어떤 모임이나 공동체에 우리가 있으므로 그곳이 세워지고, 사람들이 삶이 변화된다면, 그것보다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것이 또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으로 인해서 고린도 교회가 다시 세워지게 된 것을 깊이 감사하는 것입니다.

또 거짓 교사들은 바울을 이렇게 폄훼했습니다.
[(10)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이 말의 무게 중심은 앞에 있지 않고 뒤에 있습니다. 즉 ‘바울은 글은 좀 쓰는 것처럼 보이지만, 말은 형편없다’ 입니다. 바울의 말이 형편없기에, 그가 쓰는 글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바울의 글과 말을 다 폄훼하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 제국의 5대 도시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에베소 그리고 고린도였습니다. 고린도는 수사학이 발달한 도시라, 많은 사람이 웅변술을 배웠습니다. 바울도 배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씨가 뛰어나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비아냥거렸던 것입니다. 바울은 달변가가 아니었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초라하게 보였기 때문에 오히려 진리만을 전했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영원한 가치로 승화시켜 주셨습니다.

[(11) 이런 사람은 우리가 떠나 있을 때에 편지들로 말하는 것과 함께 있을 때에 행하는 일이 같은 것임을 알지라]

거짓 교사들은 말을 잘하느냐 못하느냐로만 사람을 평가하지만, 바울 자신은 편지로 말하는 것과 자신이 고린도에서 행했던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즉 바울은 ‘언행일치’의 삶을 살았고, 거짓 교사들은 ‘말만 행함’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사람의 말은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속일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은 ‘말하는 수준의 우리’가 우리의 실상이 아니고, ‘살아가는 것 수준의 우리’가 우리의 실상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확인할 때는 그 사람의 말이 아니라 그의 삶을 보아야 합니다.

[주 안에서 자랑(12-18절)]
[(12)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어떤 자’는 ‘거짓 교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들은 말밖에 없고, 자기를 자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의 비교 대상이 되고 싶지 않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 구절에서 ‘자기’라는 말이 5번이나 나옵니다. 거짓 교사들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들의 삶의 표준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절대 표준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야 영원한 생명이 머물게 됩니다.

[(13) 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바울은 자신도 자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고 자랑을 하는데, 단지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한계 안에서 한다고 말합니다. 즉 자신은 자신을 표준 삼고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지금의 삶을 살도록 해주신 것을 자랑한다고 말합니다. 즉 바울은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삶을 살게 해주신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고린도까지 오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14-16) 우리가 너희에게 미치지 못할 자로서 스스로 지나쳐 나아간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자랄수록 우리의 규범을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풍성하여지기를 바라노라 이는 남의 규범으로 이루어 놓은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너희 지역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함이라]

바울은 자신이 일행과 함께 고린도까지 간 것은 욕심 때문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먼저 복음의 씨를 뿌린 곳에는 가지 않았고, 고린도 교회의 믿음이 자라기를 바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고린도를 디딤돌 삼아 나중에 로마까지 갔고, 이 고린도에서 쓴 편지가 로마서입니다.

[(17-18)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주님 안에서 자랑하는 사람은, 자기밖에 주님이 계시니까, 자랑을 해도 주님만 보이게 됩니다. 자기 안에서 자랑하면 자기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칭찬을 받는 사람은 자화자찬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칭찬을 받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칭찬을 받는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세우는 것입니다. 말씀 앞에 자신을 세우지 않고 칭찬을 받는 방법은 없습니다.
올해 우리 교회가 성경 일독하기와 요한복음 쓰기를 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말씀 앞에 세우지 않고는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예배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세우면 하나님의 말씀이 크게 들리지만, 말씀 앞에 서지 않으면 세속적 가치관의 소리, 자기 욕망의 소리만 크게 들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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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7-2022(금)

즐겨내는 자(고린도후서 9:7) 

5절.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제임스 허드슨 테일러(James Hudson Taylor, 1832. 5. 21 - 1905. 6. 3)
영국 출신으로 중국 내지 선교회 창설자

우리가 염려해야 하는 것은 돈이 너무 적다는 것이 아니라
성별되지 않은 돈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 11. 10 ~ 1546.  2. 18)는 독일의 종교개혁가

지금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드릴 것은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으나
명주와 비단을 살 돈은 가지고 있다.

헌금과 연보의 문제는 돈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라고 하겠다.



연보. 유로기아, εὐλογία, ας, ἡ  2129

1. 찬양,  2. 아름다운 말,  3. 축복

발음 / 유로기아(ĕulŏgia)
어원 / 2127과 동일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축복(고전 10:16, 히 12:17), 아첨(롬 16:18), 연보(고후 9:5), 복(롬 15:29, 갈 3:14, 엡 1:3, 벧전 3:9), 찬송(계 5:12, 13, 7:12).
신약 성경 / 16회 사용

* 2127. εὐλογέω 

1. 좋게 말하다,  2. 축복하다, 

누가복음 24:50

발음  / 유로게오(ĕulŏgĕō) 

어원 / 미완료 ηὐλόγουν, εὐλόγουν, 미래 εὐλογήσω, 제1부정과거 εὐλόγη- σα, 완료 εὐλόγηκα, 완료수동분사 εὐ- λογημένος, 미래 수동태 εὐλογηθή- σομαι, 1095와 3056의 합성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축복하다(막 10:16, 고전 10:16), 축사하다(마 14:19, 막 6:41, 눅 24:30), 찬송하다(마 23: 39, 막 11:9, 눅 2:28), ㅋ
복을 받다(갈 3:9), 복이 있다(눅 1:42), 복을 주다(행 3:26, 히 6:14), 복을 빌다(히 7:6, 벧전 3:9).
신약 성경 / 42회 사용


11절. 너희가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ἁπλότης, ητος, ἡ  572

1. 단순함,  2. 관용

발음  / 하프로테스(haplŏtēs)
어원 / 57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성실함(롬 12:8, 엡 6:5, 골 3:22), 거룩함(고후 1:12), 풍성한 연보(고후 8:2), 너그러운 연보(고후 9:11), 후한 연보(고후 9:13), 진실함 (고후 11:3).
신약 성경 / 8회 사용


♦ 10월 7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고린도후서 9:1∼15
♦ 묵상을 위한 주제 : 즐겨내는 자(7절)

♦ 성구 :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린도후서 9장은 풍성한 나눔이 낳는 풍성한 열매에 관한 말씀입니다.
풍성한 나눔이란 “즐겨 내는 자(a cheerful giver)”를 말합니다.

고린도교회가 이미 일 년 전부터 예루살렘교회를 돕기 위한 구제 연보를 준비하고 있다고 마게도냐교회 사람들에게 자랑했으며 이것은 마게도냐 사람들에게 신선한 자극이 되었습니다.

연보를 갑작스럽게 하려면 의무와 억지로 할 수 있고 이것은 합당한 자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5절에서 사용한 ‘연보(율로기아, εὐλογία)’라는 단어는 ‘축복(blessing)’ 혹은 ‘풍성한(bountiful)’이란 의미로  전후 문맥에서 ‘연보(하프로테스, ἁπλότης)’와는 다른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돈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복에 대해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은 흘러가고 나누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6절).
적게 심는다는 말은 인색하게 심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헌금이 참된 헌금이 되려면 인색한 마음이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7절).
그러므로 마음에 정한대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충동적이거나 강요로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미리 준비해 두는 것이 바람직 합니다.

하나님은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받는 기쁨 보다 주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연보가 아닐까요?
물질의 지배를 받는 삶이 아니라 물질을 잘 관리하며 모두가 함께 균등하게 누릴 수 있는 세상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 찬양 / 주 날 불러 이르소서

https://www.youtube.com/watch?v=SUi1YQ72_OI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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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2022(목)

섬기는 일(고린도후서 8:4)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연보(捐補) : 버릴 연(捐), 도울 보(補). λογεία
헌금(獻金) : 바칠 헌(獻), 쇠 금(金). δῶρον

헌금은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드려지는 예물(수직적 관계를 형성)
연보는 사람을 돕기 위하여 드려지는 예물(수평적 관계를 형성)

연보(捐補, the collection) λογεία
헌금(獻金, offerings) δῶρον

연보는 성도를 섬기는 일 - 수평적 관계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 - 수직적 관계  

연보에 관한 말씀은 고린도전서 16장과 고린도후서 8장 그리고 9장에서 반복하여 소개됩니다.

이렇게 여러 차례 언급하는 이유는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대해 주의를 상기 시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바울이 비방을 받았던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연보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교인들이 연보한 것을 바울이 사적으로 사용했다는 비방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바울이 전하는 복음까지 훼손되는 일까지 일어났습니다.

만약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고 싶었다면 연보 이야기는 당분간 꺼내지 않은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러한 부분에 대해 염려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언급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연보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일이며, 심각한 기근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연보(捐補, the collection)”와 “헌금(獻金, offerings)”을 구분해야 합니다.
연보는 사람을 돕기 위한 것입니다.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연보는 수평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며 헌금은 수직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도입 이야기)
감리교회를 창설한 요한 웨슬리 목사님이 어느 날 돈에 관한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최대한 돈을 많이 버십시오!
그러자 회중들은 모두 큰 소리로 "아멘" 하고 화답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여러분 돈을 많이 저축하십시오!
그러자 다시 회중들은 모두 "아멘"하고 외쳤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여러분 많은 돈을 헌금하십시오!
그 순간 회중들은 "오늘 설교 죽 썼네!" 하며 모두 돌아갔다고 합니다.

마틴 루터 / 지갑이 화개해야 진정한 회개이다.

언더우드 목사의 헌금

미국의 어느 주일학교 예배 시간에 있었던 일입니다.
헌금 시간이 되었습니다.
모든 아이가 헌금을 하는데 한 아이만 헌금은 하지 않고 눈을 감고 앉아 있었습니다.
담임 선생님이 아이를 따로 불러 사정을 물어보았더니 아이는 집이 너무 가난하여 헌금할 돈이 없어 대신 그 시간에 기도를 한다고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무슨 기도를 하느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하나님께 내 몸과 생명과 내 일생을 바치겠다고 기도드려요.”
그 말에 감동한 선생님은 아이를 격려하고 나서 약간의 돈을 주고는 잔돈으로 바꿔 매주일 1달러씩 헌금하라고 말했습니다.
몇 주일이 지나자 매주 꼬박 꼬박 헌금을 하던 소년이 더 이상 헌금을 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다시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잔돈으로 바뀌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헌금을 했는데 사먹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어요.
사먹으면 죄를 지을 것 같고... 그래서 지난 주일에 몽땅 바치고 이제는 다시 기도만 하기로 했어요.”

어려서부터 이렇게 성실하게 기도하던 소년이 바로 1884년 부활절에 한국에 온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 목사님입니다.


미국의 찰스 콜슨(Charles Colson)은 예수님을 알기 전 닉슨 대통령의 보좌관으로 있다가 거듭난 후 교도소 전도자로 다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쓴 책에 미국 의회 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순간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순간은 인도 캘커타의 고인이 되신 테레사 수녀가 미국 국회를 방문하여 연설했던 때라고 합니다.
미국 사람들은 대부분 연설 때 연설자에게 박수를 아끼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상하게도 테레사 수녀가 연설을 마치자 그 누구도 박수를 치지 않더랍니다.
오히려 침묵만이 감돌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숨막히는 감동과 전율이 그들의 가슴과 목을 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박수를 칠 여유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마지막 테레사 수녀가 던진 한마디의 말 때문이었습니다.

“섬길 줄 아는 사람만이 다스릴 자격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에서 연보에 대한 바람직한 사례를 “마게도냐교회들”에게서 살펴보겠습니다.

마게도냐 성도들은 극심한 환난과 가난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기근으로 인해 고통 당한다는 소식을 듣자, 없는 형편 가운데서도 더욱 풍성한 연보를 모았습니다. 이제 이 연보를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전해주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날처럼 연보금을 Check를 써서 편지로 보낼 수가 없습니다. 신용카드 한 장 들고 가서 긁고 올 수도 없습니다. 상당한 무게와 부피를 가진 은화와 금화를 직접 등과 어깨에 매고 전달해주어야 합니다. 중간에 도둑을 만나 헌금을 몽땅 빼앗길 위험도 있고, 노중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만에 하나 불미스런 일이 일어나게 되면, 바울에게도 큰 타격이 미치게 될 것이고, 결과적으로는 교회 성도들과 하나님의 복음에 불미스러운 영향을 주게 될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이 막중한 임무를 자신의 동역자 디도와 두 명의 형제들에게 맡기었습니다.
바울은 이제 디도가 고린도 교회로 향하기에 고린도 교회 성도들 역시 마게도냐 성도들과 같이 기근에 처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돕는 일에 자원하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 마음에 이미 자발적으로 섬기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고린도후서 8장 10절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이미 1년 전부터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기 위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마게도냐 성도들에게 전해 준 것이고, 그로 인해 마게도냐 성도들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도전을 받아 풍성한 연보를 마련하게 된 것이죠. 그러니 바울은 이제 앞서 이들보다 1년이나 먼저 연보 모을 준비를 해온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이 일에 마음과 힘을 모아주기를 바랬습니다.
바울이 먼저 디도와 나머지 두 형제를 고린도 교회에 보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3절 입니다. “(고후 9:3) 그런데 이 형제들을 보낸 것은 이 일에 너희를 위한 우리의 자랑이 헛되지 않고 내 말한 것 같이 준비하게 하려 함이라” 그것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바울이 도착하기 전에 스스로 돕겠노라고 약속했던 헌금을 미리 준비하도록 시간적인 여유를 주고자 함이었습니다. 특별히 바울은 이번 고린도 교회 방문 때 마게도냐인들도 함께 방문 할 것을 언급하였습니다. 4절 입니다. “(고후 9:4) 혹 마게도냐인들이 나와 함께 가서 너희의 준비치 아니한 것을 보면 너희는 고사하고 우리가 이 믿던 것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하노라” 만일 풍성한 상황 속에서 살고 있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모은 연보의 액수가 극심한 가난과 환난을 겪고 있는 마게도냐 성도들보다 적으면 이는 마게도냐 성도들이 실망하게 될만한 일이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바울은 마게도냐 성도들에게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1년 전부터 이 일을 준비해 왔다고 언급해 놓은 상태 입니다. 따라서 만일 연보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바울은 마게도냐 성도들에게는 거짓말쟁이가 되는 셈이고, 마게도냐 성도들은 바울의 선전에 속았다는 느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자기 자신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당황하거나 부끄러워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고 편지에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디도와 두 형제를 자기보다 앞서 고린도 교회로 보내는 이유가 바로 이런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미리 준비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5절 말씀을 보면 “(고후 9:5)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라고 바울이 말하며 이들이 연보를 모을 수 있는 시간적 준비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죠.
바울은 6-7절에서 하나님께 헌금하는 자의 자세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6-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고후 9:6)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고후 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헌금에 인색함의 때가 묻지 않도록 주의시켰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그들의 연보가 손 떨리는 금액의 돈이 아니라, 흔쾌하게 나누는 복의 선물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을 인색하게 억지로 드려서는 안 됩니다. 7저에서 말하는 인색함이란 단어는 ‘근심’ 또는 ‘슬픔’을 가리킵니다. 이는 헌금을 내는 자가 자신의 물질을 잃어버리는 마음으로, 손해보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런 상실감으로 헌금을 드려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기쁜 마음으로 드려야 하나님께서도 기쁘게 받으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쁨의 자세로 섬길 때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의 섬김이 복의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공급하심을 언급합니다. 8절 입니다. “(고후 9: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모든 넉넉함을 갖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서 ‘넉넉하다’는 이 말은 ‘자족’이란 뜻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만족이며,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만족 입니다. 인생의 참된 행복과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야만 우리가 누릴 수 있습니다. 또한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이러한 넉넉함 즉 자족을 우리에게 주시는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즉 우리의 넉넉함을 통해서 부족한 형제, 자매, 이웃들을 섬기고 돕도록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본래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모든 착한 일을 행하는데 사용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 예수님께서 살아 생전에 직접 말씀하시기를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재물과 은혜를 가지고 우리 형제자매들 그리고 이웃들과 함께 나누고 그들의 필요를 채우고 아픔을 위로하는 것이 곧 우리 주 예수님을 섬기는 것 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웃들을 섬기는 것을 곧 자기 섬기는 것으로 간주하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가 기쁜 마음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허락하신 은혜를 통해 더 많은 이들을 도와주고 섬기고 세워감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게도냐 교회들

'마게도냐'는 현재의 그리이스 북쪽에 있는 발칸반도로서 서쪽으로는 아볼로냐로부터 동쪽으로는 빌립보에 이르는 지역을 가리킨다.
이곳은 B.C.148년 이후부터 로마의 영토였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들'은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교회를 가리킨다(행 17:10-15, Bruce).

은혜를...알게 하노니

바울이 마게도냐 교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고린도교인들에게 이야기해 주는 이유는 그 말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극이 되어 예루살렘교회를 위한 헌금을 모으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바울이 헌금에 관한 문제를 '은혜'(카린)의 관점에서 접근해가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바울은 마게도냐의 교회들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헌금을 기꺼이 그리고 분에 넘칠 정도로 한 것에 대해서(2-4절) 하나님깨 은혜를 받은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바레트(Barrett)가 말하는 대로 '은혜'는 관대함을 뜻한다고볼 때, 죄인으로서 심판(審判)을 받아야 마땅하고 아무런 용서받을 조건을 갖추고 있지 못한 인간으로서의 마게도냐 교인들이 아무런 조건없이 베풀어진 하나님의 관대함을 입었기 때문에 다른 이들을 위하여 자비를 베푸는 것은 공로가 아니라 마땅히 해야할 일이었다.

결국 마게도냐 교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관대해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하나님의 은혜이다.

8: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 마게도냐 교회들이 당한 시련에대해서는 빌 1:29, 30; 살전 1:6;2:14;3:3, 4; 살후 1:4-10에 언급되어 있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다. 다만 유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환난과 같은 것을 마게도냐 교인들도 받았다고 언급될 뿐이다(살전 2:14). 마게도냐의교인들이 당한 환난은 그들이 기독교를 믿는다는 사실 때문에 당한 것이었으며, 아마유대인 적대자들에 의해 난동꾼들로 모함을 받았거나 유대인들로부터 직접적인 공격을받았을 것으로 보인다(행 16:20;17:5, 13). 또한 마게도냐 교인들은 피식민지 백성으로 받는 시련도 있었다. 이 모든 시련 가운데서도 마게도냐의 교인들은 넘치는 기쁨속에 살았다고 바울은 전해준다. 혹자는 말하기를 '이 기쁨은 마게도냐 교인들 자체에서 나온다기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관대함의 결과'라고 말한다(Schlatter). 아무튼 마게도냐의 교인들은 시련을 당할수록 오히려 넘치는 기쁨을 누렸는데 그것은 그들의 신앙이 매우 성숙한 수준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마치 그들은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는' 바울의 모습(6:10)과도 같았다.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 당시에 마게도냐는로마의 지배하에 있었으므로 금광이나 은광, 선박용 나무를 베는 권리 등의 수입원들을 모두 로마인들에게 빼앗겨 구조적인 가난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마게도냐는 전체적으로 농업, 광업, 목재 산업 등이 번성하였기 때문에 '극한 가난'의 상태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본다(Barrett).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 마게도냐 교회들의 형편을'극한 가난'으로 표현한 것은 경제적인 요인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해진 박해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본문은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마게도냐의 교인들은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였다는 사실을 또한번 전해주고 있다. 여기서 '연보'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플로테토스'(* )는 '소박', '단순', '순수함'이라는뜻으로 헌금의 기본적인 태도는 마음의 순수함에서 비롯되어야 하는 것임을 말해준다.한편 본문은 '가난'이라는 상황이 남을 돕거나 하나님께 드리는데 인색함의 동기가 되서는 안됨을 말해준다. 마게도냐의 교인들은 마치 자신의 전재산을 하나님께 바친 한가난한 과부처럼 극한 가난속에서도 자기들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었으니 그것은'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의 모습이었다(6:10).

8:3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 바울이 보기에 마게도냐의 교인들은 기대 이상으로 연보를 드렸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의 행위가 요청이나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자원(自願)해서 했다는 사실이다. 혹자는 마게도냐의 교인들이 오히려 물질적 원조를필요로 했기 때문에 바울이 이들에게 재정적 협조를 요청하기를 주저했을 것이라고 본다(Lowery).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게도냐 교회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어려운 사정을 외면할 수 없었고 바울이 말하지는 않았지만 자원하여 돕겠다고 나선 것이다. 참으로 놀랍도록 헌신적인 사랑이었다. 이런 이야기에 고린도의 교인들은 상당히 마음의 자극을받았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8:4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 마게도냐의 교인들은 곤경에 처한 다른 성도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구제하는 일이 성도로서 마땅히 해야 할 '특전'(공동 번역)이라고 보았고 그 특전을 나누어 달라고 바울에게 간청하였다. 여기서 곤경에 처한 성도들이라 함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가리키는데, 당시 유대 전역의 사람들은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Claudius, A.D. 41-54)가 통치하던 때에 있었던 심한 기근으로 대단히 궁핍한 생활을 했었다(행 11:27-30). 더구나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비천한 사람이었고 그런 만큼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 친구들도 없었다. 오히려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유대인들로부터도 종교적인탄압을 받고 있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친밀한 형제애(兄弟愛)로 굳게 뭉쳐 서로를 돕는 것이었다. 마게도냐인들이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일에 헌신적으로 나선 것은 그들도 가난했기 때문에 가난한 자의 고통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감사할 줄아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8:5
자신을 주께 드리고 - 마게도냐의 교인들이 보여준 헌신적인 행위들은 바울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성숙한 신앙적 행위였음이 드러나고 있다. 마게도냐의 교인들은단지 동정적인 행위나 인간적인 사랑의 행위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헌금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마음에서 행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음을 알았고 따라서 그들의 소유도 필요시에는 주님을 섬기는 일에 바쳐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Bruce).

우리에게 주었도다 - 본절의 의미는 '우리에게도 헌신하였습니다'(공동번역)이다.마게도냐의 교인들은 바울을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보내신 사도로 존중하였고 따라서그를 헌신적으로 잘 섬겼다. 그들은 사도에 대한 이런 마음이 곧 주님께 헌신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8:6
이러므로 우리가 디도를 권하여...성취케 하라 - 본절은 바울이 디도를 고린도에보낸 목적이 '눈물의 편지'를 전달하는 것 외에 예루살렘 교회를 구제하기 위한 헌금모금에 고린도 교인들도 참여케 하려는 목적도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고린도에서의 모금 사업이 이미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디도를 재차 보내 헌금 모금을 성취케 하라고 한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헌금을 내는 일에 기대에 못미쳤음을 본절이 또한 간접적으로 암시해준다. 여기서 '헌금 모금을 성공적으로 끝내라'는 말을 '은혜를 성취케 하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고린도인들이 헌금 모금에 참여하는 것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의미일 수 있고, 또 마게도냐의 교회들이 즐거이 헌금을 내어줌으로써 주님께 헌신하고 나아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성취하는 것처럼 고린도의교인들도 동일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성취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한편 본절의 '이러므로'는 마게도냐 교인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헌신이 바울로 하여금디도를 고린도에 보내 모금 사업을 완성하게 하도록 하는 동기가 되었음을 말해준다.고린도 교인들은 마게도냐 교회들이 외부적인 박해(迫害)와 내부적인 극한 가난의 상황에서도 능력 이상으로 헌신한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며 나아가 상대적으로박해도 받지 않고 가난에 시달리지도 않는 자신들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를 요청받고 있다(Harris).

8:7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 고린도 교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갖게되었고(고전 12:9;13:2, 13), 말과 지식이 풍부했으며(고전 1:5), 바울에 대한 간절함과 사랑을 풍성히 가지고 있었다(7:7).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하나님과 사도 앞에서는 바르게 서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그들에게 한 가지 더 필요한 것은 형제된 성도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이었다. 여기서 이 사랑을 '은혜'(* , 카로티)로 표현한 것은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이웃을 위하여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하는 것임을 깨닫게 해주고자 함이다. 따라서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헌금을 제공하도록 요청한 것은그들에게 어려운 짐지워주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은혜를 더 풍성하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8:8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도로서의 권위가있었고(10:8;13:10) 따라서 그의 성도들에게 유익한 일이라면 명령할 수 있는 위치에있었지만, 결코 명령으로 고린도 교인들의 행위를 이끌지 않고 다만 방향만을 지시하며 권유하거나 호소할 뿐이었다. 바울이 그렇게 한 이유는 (1) 마게도냐의 교회들이행했던 행동처럼 고린도 교인들도 자발적인 사랑을 행하도록 촉진하고, (2) 또한 자원함으로 드려진 연보만이 하나님께 합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께 대한 내적헌신이라는 동기에서 비롯되지 않은 구제헌금을 하였다면 그것은 바리새인의 외식 행위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눅 21:1-4).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증명코자 함이로라 - 본절의 정확한 의미는, 마게도냐 교인들이 보여준 헌신적인 사랑에 견주어 고린도 교인들의 사랑이 과연 진실한것인가를 증명해 보고자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마게도냐 교인들의 헌신적 사랑은 다른 교인들의 신앙과 사랑의 표준이 되고 있다(Martin).

8:9
부요하신 자로서...가난하게 되심은 - 앞에서 구제 헌금의 동기를 마게도냐 교인들의 모범(模範)으로 유발시켰던 바울은(1-7절) 보다 더 차원 높은 연보의 동기 및 근본원리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비하 즉 성육신하심(incarnation)과 만인을 위한 대속적 죽음을 들고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희생의 최고 모범으로서 고린도 교인들이 구제 헌금을 해야만 하는 신학적 당위성의 근거를 제시해 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본체이셨으나(빌 2:6)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낮고 선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시어 머리 둘 곳조차 없을만큼 희생적인 고난의 삶을 사셨고(마 8:20; 눅 9:58) 마지막에는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으니 그것은 절대적 가난의 한 모습이었다.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 루터(Luther)는 본절의 내용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그리스도의 가난함을 찬양하였다. "그는 가난한 모습을 하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하늘에서 부요하게 하시며, 당신의 사랑하는 천사들과 같게 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이같은 은혜를 주신 것은 그은혜를 받은 자도 그분이 하신 일을 본받게 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같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고린도 교인들은 마땅히 자신들의 부요함을 포기하여 가난한성도들을 유익하게 해야만 했다.

8:10
이 일에 내가 뜻만 보이노니 - 바울은 명령할 수 있는 위치에 있고 또 명령할 수있을 만큼 당위성이 있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명령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그는 '...이 좋겠습니다'(공동번역)라는 말로 정중하게 권고하고 있다. 이것은 바울이보여주는 목회자로서의 모범인 바, 하나님 앞에서 아무리 대의 명분이있는 일이라 하더라도 명령이나 강요에 의해 이루어져서는 안 되며 오직 행하는 자 스스로의 온전한결단에 의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유익함이라 - 이 말의 의미가, 고린도 교인들이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결단에 의해서 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인지, 아니면 기왕에 시작한 일인만큼 끝까지완수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인지 분명치 않다. 물론 두가지가 다 해당될 수도 있다.
 너희가 일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즉 - 여기서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그것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적어도 1년 전에 구제 헌금 사업을 시작했다는 것과, 그 일이 지지부진하여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지 못했다는사실이다. 이와 관련하여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구제 헌금 사업을 이제는 속히 완성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하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1) 고린도 교인들이 구제 헌금을 시작한 것은 전적으로 그들 자신의 의사에 의한 것이었다. (2) 그들이 구제 헌금 사업을 시작한지가 1년이나 되었지만 그들의 헌금은 그들보다 늦게 시작하고 시련과 극한 가난이라는 어려운 상황에서 헌금을 한 마게도냐 교인들보다도 미흡했기 때문이다(3절). (3) 적어도 그것이 선한일이라면 빨리 끝을 맺는 것이 신앙적으로 유익하다. 그렇지 않고 중도에 그만둔다면 그것은 진실한 신앙이 아니며(8절) 앞으로도 승리하는 생활이 되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4) 구제 헌금을 빨리 완성하여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속히 아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Harris).

8:11
행하기를 성취할지니...있는 대로 하라 - 고린도 교인들은 말과 지식이 풍부하고마음의 열정도 넉넉하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좀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요청되는 것은 마음에 있는 것을 행함으로 성취하는 것이다. 바울은 결코 그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는다. 그저 '있는 대로' 즉 '소유하고 있는 대로', '드릴 수 있는대로' 성의(誠意)만 보이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마게도냐 교인들에 비해 빈궁한 생활을 하지 않았고, 따라서 고린도 교인들은 마게도냐 교인들보다 많은 구제 헌금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8:12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 여기서 '받으실 터이요'의 주체는 하나님이다. 고린도교인들의 구제 헌금이 가시적으로는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에게 도움이 되겠지만, 궁극적으로 받으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중요하다. 이것은 달리 말해서고린도 교인들이 예루살렘 교인들을 위한 구제 헌금을 할 때 누구를 돕는다는 생각을해서는 안 되며 다만 하나님께 드린다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본절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헌금을 받으실 때 드려진 것의 양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사람의 마음을 중요하게 보신다는 것이며 또한 드려진 헌금과 드리는 자의 소유의 관계에서 평가하신다는 것이다(막 12:41-44). 그러므로 많이 소유한 자가많이 드리는 것과 적게 소유한 자가 조금밖에 드리지 못한 것 사이에는 어떠한 가치의차이도 없다. 다만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이다.

8:13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 본절은 고린도 교인들 중에서 구제 헌금에 대하여 말하기를 '남을 편하게 하기 위하여 바울이 자기들에게 짐을 지우고 있다'고 불평한 이들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Bruce). 그러나바울은 있는 자의 재물을 거두어 그를 가난하게 하고 그에게서 거둔 재물로 가난한 자를 부요하게 하는 것이 결코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중요한 것은 가진 자나 가지지 못한 자 모두가 평등하고 공평하게 살도록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떠한 강제도 물리적알력도 배제된다. 다만 넉넉한 자가 자원(自願)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은혜에 응답하여 가난한 자에게 자기의 소유를 나누는 것인데, 이것이 기독교의 공동체 의식이다.바울이 여기서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헌금에 참여하도록하기 위해 전개하는 논리는 상부 상조하는 공동체의 논리이며(14절) 이것은 로마서에서 사용한 논리와는 다르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이방인 성도들이 예루살렘 성도들로부터 영적인 것을 나누어 받았기 때문에 육적인 것에 관한 한 이방인 성도들이 예루살렘성도들을 위해 나누어 주는 것은 마땅하다는 논리를 전개하였다(롬 15:27). 한편 혹자는 본절에 "너희는, 예루살렘의 성도들에게 사치품을 제공하기 위해 너희를 가난하게하려는 친유대인적 경향이 나에게 있다고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암시가 있다고 보기도 한다(Farrar).

8:14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 바울이 본절을 통해 예루살렘과 고린도의 상황이 뒤바뀔 것을 예견했다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당시의 경제상황이 전체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 있었으므로 그럴 수 있는 가능성또한 얼마든지 있었다. 그리고 만일 그런 뒤바뀐 상황이 도래한다면 예루살렘의 성도들은 기꺼이 자기들의 소유를 나누었을 것이다.왜냐하면 예루살렘의 성도들은 이미 평균하게 사는 방법을 실천했기 때문이다(행 2:44, 45).

8:15
기록한 것 같이 - 바울은 자신이 제시한 평균의 원리에 더 강한 설득력을 부여하기위하여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내려주신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출 16:13-36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주실 때 많이 거두어 들인 자나 적게 거두어 들인 자나 모두가 배불리 먹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많이거두어 들인 자의 남은 것은 썩어서 저축될 수 없었다는 점과 적게 거두어 들인 자는모자라지 않았다는 점이다. 바울은 이 광야의 이야기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적용될수 있는 경제의 원리라고 생각한 듯하다. 즉 하나님께서는 과거 광야에서 직접 개입하시어 이스라엘 백성들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시되 남은 것의 축적(蓄積)을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백성들간의 경제적 평균을 이루게 하셨다. 이제 지금은 직접 개입하시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당신의 백성들이 이런 원리를 지켜 서로 풍족한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즉 물질을 넉넉히 가진 사람은 그물질이 하나님께로서 왔다는 것을 알고자기가 쓰고 남은 여분의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8:16
너희를 위하여 같은 간절함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 본절은 "내가 여러분에게 기울이는 것과 같은 열성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공동번역)의 뜻이다. 바울이 신뢰하는 동역자 디도가 고린도 교인들에 대해그 같은 열정을 갖고 있다는 것은 고린도에 가서 구제 헌금 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할수 있는 인물을 찾던 바울에게는 여간 감사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한편 바울은 본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디도의 열정을 상기시킴으로써(7:13-15), 고린도 교인들이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해주기를 은연중 바라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유익을위함이지 헌금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10절).

8:17
저가 권함을 받고...자원하여 너희에게 나아갔고 - 바울이 처음에 디도에게 고린도교인들의 구제 헌금을 성취케 하기 위해 이 일을 권한 것은 사실이다(6절). 그러나 디도는 권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깊은 열정 때문에(7:15) 자원하여나섰다. 본문에 대해, 혹자는 디도가 종종 바울의 전도와는 독자적(獨自的)으로 일했다는 암시가 있다고 보지만(Harris) 이는 타당치 않다.

8:18
복음으로서...칭찬을 받는 자요 -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구제 헌금을 위해 디도 외에 두 사람을 더 보냈다(22절). 본문에 '복음으로서 칭찬을 받는 자'(공동번역에는'복음을 전하는데 명성을 떨친 사람'으로 되어 있다)라고 소개된 이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학자들은 '누가'나 '디도의 형제'일 것이라고 추측하는데 이에 대한 근거는없다.다만 우리는 이 사람이 바울의 신뢰를 받았고 여러 교회로부터 칭찬을 받았던 자라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다.

8:19
여러 교회의 택함을 입어 - 본문은 방금 바울이 소개한 사람이 바울에 의해 선택된것이 아니라 여러 교회들에 의해 선택되었으며 이 선택의 방법은 교회들에 의한 공식적 투표에 의한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택함을 입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케이로토네데이스'(* )는 '거수(擧手)로써 투표하여 선택한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 선택된 사람이 공신력있는 인물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혹자는 이 사람이 마게도냐의 교인들로부터 뽑힌 대표자일 것이라고 보는데(Barrett), 이렇게 볼 수 있는 가능성은 많다. 왜냐하면 이미 마게도냐 교인들의 구제모금은 끝이 난 상태였으므로 모금된 돈을 디도와 함께 운반하고 보호할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8:20
이것을 조심함은 - 바울이 구제금을 모금하고 관리하기 위한 실무자를 그의 측근인디도 한 사람으로 국한하지 않고 두 명을 더 참여시킨 것은 불필요한 오해를 야기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한 사려깊은 행위였다. 거액의 연보로...
훼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 '거액의 연보'에 해당한는 헬라어'하드로테티'(* )는 '살진', '큰', '부유한'의 뜻을 가진 '하드로스'(*  )에서 파생된 말로 단지 '심정적(心情的) 많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실제로 '많은 액수의 헌금'이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훼방하지 못하게'가 뜻하는 바는그 모금된 돈을 도둑질 당하거나 분실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거액의 연보가바울과 관계되어 있음으로 해서 생길 수 있는 의혹이나 인간적인 의심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것을 뜻한다. 이는 '훼방하지 못하게'로 번역된 헬라어 '메 모메세타이'(* -   )가 문자적으로 '비난을 받지 않다'를 뜻하는데서 알 수 있다(be no accusations, JB). 당시 복음 전도자들이 대개 받았던 비난처럼 바울도 자신의이익을 위해 선교활동을 한다는 비난을 예견한 만큼, 바울은 오직 주의 영광과 성도들의 구원을 위해 일한 것이(4:12), 도리어 불필요한 오해를 일으켜 선교하는데 조금이라도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해야 했다(Barrett). 그러나 바울의 이런 세심한 주의에도불구하고 악의에 찬 오해를 면할 수는 없었다(12:16-21).

8:21
주 앞에서만 아니라 - 사실상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 앞에서 깨끗하다 인정받는 것이다(고전 4:4). 그러므로 그는 결코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지않았다. 그럼에도 바울이 이렇게 사람들의 의혹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좋지 않은 평판이 나는 것은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다(6:3;고전 9:12;10:32). 한편 본절은 바울이 70인역 잠 3:4을 인용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있다(Barrett, Harris).

8:22
또 저희와 함께 우리의 한 형제를 보내었노니...여러 번 시험하였거니와...너희를크게 믿은 고로 - 여기서 또 한 사람의 알려지지 않은 동반자가 소개되고 있다. 이 사람은 여러차례에 걸친 시험에서 증명될 만큼 열성을 가지고 있었고 더욱이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큰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였으므로 이번 일에 동행하게 하였던 것이다.학자들은 이 사람이 아볼로나 두기고일 수있다고 추측하나(Farrar, Robertson) 확실하지는 않다.한편 바울이 디도와 함께 보낸 두 사람에 대해서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은,디도가 이 편지를 고린도 교회에서 읽을 때 그들을 소개하려고 했거나 아니면 두 사람의 대표자들이 마게도냐 교회들에 의해 선출된 자로서 이미 고린도에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Harris).

8:23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무요...동역자요 - 고린도에서 보내진 디도 일행에 대한 신임장(信任狀)이 서술되고 있다. 디도는 다른 두 사람과 구별될 만큼 다소 특별한 존재였다. 여기서 '동무'라는 표현은 바울과 디도가 상당히 친밀한 관계에 있었음을 말해주며 '동역자'라는 표현은 디도가 복음 전파의 사역에 한 주체로서 지대한 공헌을 했음을 말해준다.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 - 여기서 '여러 교회'는 19절에서의 주석처럼 '마게도냐의 교회들'을 지칭하고, '사자들'(* , 아포스톨로이)은 '사신' 또는 '사절'을 뜻한다. 이 형제들은 바울이나 디도처럼 사역자로세워진 것이 아니라 이번의 구제금 사업을 위해 여러 교회들로부터 선택된 사람들로사도에 준하는 사람들이었다. 또한 구제금 모금 사업의 재정적인 면을 담당하는 지역교회들의 대리인들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한편 본절에 언급된 이러한 구별이 바울이나 디도와, 여러 교회들에서 선택된 '사절'들 사이에 지위의 차별을 암시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전자나 후자 모두가 그리스도의 영광이라는 점에서 동일 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디도를 비롯하여 두 형제들은 바울이 인정하고 신임하는 자들이었으며, 다른 교회들로부터도 신임받는 사람들이었다.

8:24
여러 교회 앞에서...보이라 - 공동번역은 본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 "그러니 여러분은 그들을 사랑으로 대하여 우리가 여러분을 자랑한 점이 사실이라는 것을모든 교회에 드러내십시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이 보내는 사절단을 따뜻하게 환대(歡待)할 것을 요청하고 있으며 이러한 환대는 자신이 고린도 교인들에 대하여 자랑한 것을 확증해주는 의미를 갖는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바울의 요구는 고린도교인들이 참으로 성숙하고 훌륭한 성도임을 보여달라는 것이었다.












1절입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마게도냐교회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린 헌금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2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마게도냐교회 성도들이 풍성한 헌금을 드린 이유가 환난과 시련과 극심한 가난 중에서도 풍성하도록 연보하였다고 합니다.

마게도냐교회 성도들이 풍성한 헌금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삶에 환난이나 시련이 없어서 즉 삶이 형통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경제적으로 여유롭고 넉넉하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흔히 우리가 감사할만한 이유가 생겼을 때 감사헌금을 드리는 것처럼, 감사할 조건이 생겨서 감사로 헌금을 드린 게 아니었습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감사할 이유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속에서 풍성한 기쁨이 있었기에 드릴 수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그 기쁨은 어디로부터 온 기쁨이겠습니까?
세상적인 관점에서 감사할 이유가 생겼기 때문에 솟아난 기쁨이 아니라면, 그것은 세상으로부터 온 기쁨이 아닐 것입니다(9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마게도냐교회 성도들의 기쁨의 원천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해 세 가지를 말했습니다.

첫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원래 부요하신 분이었습니다.
둘째,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셋째, 그로 인하여 우리가 부요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 부요한 분이시지만, 가장 절망적인 가난에 처하셨습니다. 로마의 식민지 지배를 받는 이스라엘, 그것도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셨으며, 동물의 여물통에 뉘였습니다. 가장 부요하신 분이 왜 가장 가난하게 되셨는가? 그 이유는 바로 우리를 부요하게 해 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마케도냐교회 성도들의 기쁨의 원천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나에게도 마게도냐 교회의 성도들처럼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기쁨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기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풍성한 연보를 드린 마게도냐교회들처럼 나도 풍성한 연보를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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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5-2022(수)

세상 근심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고린도후서 7:10)  

근심. λύπη, ης, ἡ  3077  

1. 슬픔,  2. 아픔,  3. 심뇌

발음 / 루패(lüpē)
관련 성경 / 슬픔(눅 22:45, 벧전 2:19), 근심(요 16:20, 고후 2:1, 빌 2:27).
신약 성경 / 16회 사용

1. 히브리어
카아브 - 아픔을 느끼다, 슬퍼하다, 상하다, 아프다.

2. 헬라어
루페 - 슬픔, 한숨, (싫은 것을 억지로) 근심, 서러움.

3. 한문
괴롭고 애를 쓰는 마음

4. 한글
해결되지 않은 일 때문에 속을 태우거나 우울해함.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세상 근심

다섯 가지 감옥

영국의 작가 G. 엘리오트는 나름대로 인간을 이렇게 분석하고 있다.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다섯 가지 감옥에 갇혀 살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자기가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을 자기도 모른다는 데 있다.
알 때도 있지마는 모를 때가 더 많다. 철장이 없는 감옥, 쇠사슬에 매인 것도 아닌데 더 강력하게 붙들려 있는 감옥, 그 감옥에 매여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부터 자유해야만 인간이 바로 설 수 있고 자기 성취를 이루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첫째, 이기적인 '자기 사랑의 감옥'

가만히 보면 남을 사랑한다 해도 결국은 자기 사랑이다.
특별히 자기 자식을 사랑한다는 말 같은 것을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이다.
자기 삶의 연장일 뿐이다.
이웃을 위하고 누구를 돕는다 하더라도 결국을 보면 자기를 위하는 것이다.
사람은 이기적인 이 자기 사랑의 감옥에서 출옥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문제이다... 어째든 이기심, 자기 사랑, 이것이 큰 감옥이다. 이로부터 벗어나기 전에는 사람답게 살지 못한다.

둘째, '근심이라고 하는 감옥'

근심이야말로 쓸데없는 것 아닌가?
걱정해서 되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걱정을 하고 보면 내 마음 상하고 남의 마음 해치고 주변 분위기까지 다 못쓰게 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과 가지고 있는 능력, 지혜마저 다 사라져 버린다.
창의력은 상상조차 못한다.
근심하는 자는 그야말로 가장 비겁하고 나약한 사람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걱정은 쓸데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감옥에서 헤어나지를 못한다.

셋째, 과거를 생각하는 '향수의 감옥'

과거를 생각한다.
그래서 옛날로 돌아가 본다.
그 당시에는 그 때가 제일 어려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는 그 때가 좋았다 한다.
특별히 잘못되기 쉬운게 뭐냐 하면 과거에 대해서 가정법을 쓴다.
그 때에 그러지 말았어야 되는데, 이 사람하고 결혼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 말을 믿지 말았어야 되는데, 그 때 좀더 열심히 공부할 것, 뭘 할 걸... 이렇게 생각한단 말이다.
이거야말로 아무 소용없는 짓이다.
이 과거지향적인, 과거에 대한 향수와 미련, 이것도 하나의 감옥이다.
여기에 붙들려 절대로 미래로 향해 나갈 수가 없다.
미래를 망치는 것이다.
비행기를 보라. 옛날에는 프로펠러 비행기였는데 앞에 있는 공기를 잡아당기면서 앞으로 추진되었다.
그래서 그때 엔진은 비행기의 앞에, 머리에 있었다.
그러나 요즘의 제트엔진은 뒤로 밀치면서 나간다.
그래서 엔진이 전부 뒤에 있다.
어떤 것은 아주 꼬리에 붙어 있다.
모름지기 과거를 밀쳐 버려야, 떨쳐버려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훨씬 더 강하게 나아갈 수 있다.
과거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면 마치 연의 줄처럼 그 한계에 딱 멈춰버리고 더 못 올라간다.
현재와 미래를 다 망치게 된다.

넷째, 남의 것만 좋게 보는 '선망의 감옥'

내 것이 왜 중요하지 않은가?
그런데 언제나 남의 것만 좋게 보인다. 남의 남편이 더 좋아 보이고, 남의 아이들이 더 잘하는 것만 같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다른 사람의 처지를 선망하는 것이다.
어느 새 나도 모르게 여기에 빠져들면 자기에게 주신 소중한 은사도 다 망각하게 된다.
남의 것은 남의 것이고 내 것은 내 것이다.
이걸 분명해 해야 된다.

다섯째, '증오라는 감옥'

어느 사이에 남을 미워하고 시기 질투하고 있다는 말이다.
아직 이만큼이라도 살아 있으면 고마운 줄 알지 왜 이렇게 사람들이 오래도록 한을 품는가?
찬 몸서리가 난다. 이걸 풀지 못하고 한을 그대로 뭉쳐 가지고 죽어버린다.
이 증오, 이 가옥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증오는 사람들의 뼈를 말린다.






100여 년 전(前), 미국에 '헨리 콤스톡(Henry Comstock)'이란 땅 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1856년(年) 당시 미국에서 가장 큰 '콤스톡 광산(Comstock Mine)'을 소유하고 있었던 광산업자이기도 했는데, '네바다'주(州) '버지니아 시티'에 있던 나무와 엉겅퀴가 무성한 척박한 산을 별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여 1만 1천 달러의 헐값에 팔았습니다.
그는 손에 지폐 다발을 들고 기뻐했습니다.
몇 년 후, 그 산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척박해 보이기만 하던 산(山)에서 미국(美國) 최대(最大) 규모(規模)의 금광(金鑛)이 발견된 것입니다.
매장량(埋藏量)이 무려 5억 달러에 상회했습니다.
'콤스톡(Comstock)'은 땅을 치며 후회(後悔)했습니다.
그는 자신(自身)의 잘못된 선택(選擇)을 한탄(恨歎)하며 술로 세월(歲月)을 보내다가 한 달 만인 1885년 10월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러나 1914년(年), 한 발명가(發明家)의 집과 연구실이 전소되는 대화재(大火災)가 발생(發生)했습니다.
200만 달러가 넘는 전(全) 재산(財産)을 날린 그의 인생(人生)은 잿더미처럼 공허(空虛)했습니다.
이 발명가(發明家)의 나이는 67세, 사람들은 재기(再起)하기에는 너무 늙어 보이는 그를 찾아와 위로(慰勞)의 말을 건넸습니다.
그러자 위대(偉大)한 발명가(發明家)는 빙그레 웃으며 말합니다.
"낡은 건물(建物)과 시설(施設)에 연연(戀戀)하는 내 좁은 소견을 깨우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청소(淸掃)를 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새 것을 주시기 위한 방법(方法)이랍니다."

이 사람은 발명왕(發明王) '토머스 에디슨(Thomas Alva Edison)'입니다.
그는 화재(火災)를 딛고 일어나서 이전(以前)보다 더욱 훌륭한 연구실(硏究室)을 지었고 이전(以前)보다 더욱 의욕적(意慾的)인 활동(活動)을 펼쳤습니다.

'콤스톡(Comstock)'과 '에디슨(Edison)'은 절망(絶望) 앞에서 상반(相反)된 선택(選擇)을 했습니다.
한 사람은 고난(苦難)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自殺)을 선택한 '실패(失敗)한 인생(人生)'이었고, 다른 사람은 한 번의 고난(苦難)을 오히려 새 출발(出發)의 기회(機會)로 삼은 '도약(跳躍)의 인생(人生)'이었습니다.

'에디슨(Edison)'에게는 시련(試鍊)이 곧 새로운 출발(出發)의 시그널(signal)이었습니다.
절망(絶望)을 대(對)하는 엇갈린 태도(態度)가 인생(人生)의 운명(運命)을 판이(判異)하게 가르는 법입니다.
결국 문제(問題)는 절망(絶望)이 아닌 그것을 대(對)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Christian)들에게는 문제(問題)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祈禱) 제목(題目)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 지 말고 오직 모든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염려는 무엇인가?

worry라는 영어 단어는 메림나오(merimnao. μεριμνάω)라는 희랍어 동사에서 생겼다.
그런데 이 단어는 "나누다"라는 의미의 메리조와 "마음"이라는 의미의 누스라는두 개의 단어가 합쳐진 합성어이다.
그러므로 염려란 "마음을 나눈다"는 의미이다.

μεριμνάω  3309

1. 염려하다,  2. 돌보다

발음 / 메림나오(mĕrimnaō) 

어원 / 미래형 μεριμνήσω, 제1부정과거 ἐμερίμνησα, 330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염려하다(마 6:27, 눅 12:26, 고전 7:33), 돌보다(고전 12:25), 생각하다(빌 2:20).
신약 성경 / 19회 사용

야고보는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야고보서 1:8)

염려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은 정서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분열된 사람이다.
염려는 죄악이다.
염려한다면 그는 참으로 하나님을 거짓말장이로 비난하는 것이다. 롬 8:28, 히 13:5...
염려는 하나님의 성전인 인간의 신체에도 해롭기 때문에 죄이다.

의학 적으로 밝혀진 바에 의하면 마음을 한 곳에 쏟는 사람보다 염려하는 사람이
더 많이 사고를 당한다는 것이다.

염려의 치료 :

1. 기도하기를 힘쓰라. 눅18:1
2. 기뻐하기를 힘쓰라. 빌4:4
3. 신뢰하기를 힘쓰라. 마6:25-34
4. 일하기를 힘쓰라. 시37
5. 당신의 축복을 세어보기를 힘쓰라.
6.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와 다른 사람에게 주의를 집중하라. 빌2:4


*인간의 세 고민

실존 철학자 하이덱거는 "사람에게는 세 가지 고민이 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 고민 중 첫째는 물질에 대한 것, 둘째는 사람에
대한 것, 그리고 세째는 자신에 대한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물질 즉 돈을
벌려 한다. 그것이 성공하면 다음으로는 다른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려 한다.
이것이 성공하면 마지막으로 자신에 대하여 고민을 느끼게 된다.

첫째의 고민을 누구나 노력하면 풀수 있다.
둘째의 고민을 푸는 자는 드물다.
세번째의 고민은 아무도 풀지 못한다."
이 세째의 고민은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만이 해결할수 있는 것이다.







“근심하게 한 것”
(8절)으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의 원형 ‘루페오(λυπέω)’ ‘성가시 게 하다’, ‘슬프게 하다’, ‘비통하게 하다’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일반적 인 근심이나 걱정을 뜻하기도 하지만, 죄로 인해 겪는 징벌과 관련된 고 난들을 뜻하기도 한다.

근심 없이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은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고 살아가는 존재이지만, 딱 하나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반드시 해야 합니다.
그 근심이 믿음을 성숙시키기 때문입니다.

첫째, 상처가 되더라도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충고를 담은 편 지를 보내고 잠시 후회했습니다. 자신 의 말이 사람들에게 상처가 될까 염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 성 도들은 바울의 편지를 받고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정직하게 인정함으로 바 울에게 결국 기쁨을 주었습니다. 

둘째, 유익이 되는 근심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편지 로 인해 분명한 마음에 찔림을 경험했 고 이윽고 잘못을 회개했습니다. 그들 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여 그런 결 과를 얻었고 더욱 참되고 경건한 그리 스도인의 삶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멀어질 때 반드시 근심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셋째, 회복되는 열정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는 사람은 올바른 신앙생활을 위해서 더욱 진지하 고 열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바로 그런 노력 을 기울이고 있다고 칭찬했으며 그들을 더욱 바르게 세우기 위해서 사랑으로 권면했습니다. 우리도 그런 목적으로만 서로에게 권면해야 합니다.

신앙적으로 바른 충고나 권면은 사 람을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합니 다. 비록 당장은 말하거나 듣기 불편하 더라도 권면이 낳는 절대적인 영적 유 익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사랑으로 서 로 권면하고 함께 회개하는 교회가 가 장 건강한 교회입니다.

회개의 실제성

죄를 진심으로 후회하고 슬퍼하는 것은 아주 실제적인 일입니다.
아무도 죄 안에 살고 있으면서 죄를 미워한다 고 말할 수 없습니다.
회개는 우리로 하여금 죄의 악함을 보게 하되 이론적으 로만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적으 로도 보게 합니다.
마치 불에 덴 아이가 불을 무서워하듯 그렇게 죄를 무서워하 게 됩니다.
마치 최근에 강도를 만나 곤 욕을 치른 사람이 고속도로 위에서 다 시 강도를 만나게 될까 봐 두려워하듯 그렇게 죄를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래 서 죄를 피하되 모든 점에서 죄를 피하 려 듭니다. (찰스 스펄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란 내 행위를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까, 내 행위가 죄는 아닐까, 내 언행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은 아닐까 등을 근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근심은 성도로 하여금 회개에 이르게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한 근심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분열되어 분쟁하며 음행과 자기자랑으로 더럽혀져 있을 때에 바울은 그들을 돌이키게 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로 알려진 편지를 써서 보냈고, 편지를 받고도 회개하지 않자 55년경에는 직접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방문은 소위 ‘가슴 아픈 방문’이 되고 말았습니다.
적대자들이 바울을 모함하며 몰아 세웠고 성도들은 그에 동조하거나 침묵 또는 방임하며 바울의 편에 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상황의 진보는 없이 마음의 상처만 안고 돌아온 바울은 56년 봄, 한 통의 편지를 더 써서 보낸 것으로 보입니다.
현존하지는 않지만, ‘눈물의 편지’, 또는 ‘준엄한 편지’로 불리우는 편지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눈물의 편지 역시 사랑의 편지였지만, 고린도 성도들에게는 고통을 준 편지였습니다.
편지의 어조가 너무나도 강렬하여 보내는 바울도 눈물로 썼지만, 읽는 성도들도 눈물로 읽어야 했습니다.
바울은 그것에 대해 잠시 후회를 했습니다.
편지의 내용이 너무 과격하여 성도들이 근심할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린도의 성도들은 일시적으로 근심했을 뿐 이내 회개하고 돌이키는 최상의 반응을 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의 근심은 회개로 전환이 되었고, 그로 인해 바울의 후회는 기쁨으로 전환이 되어졌습니다.
그것은 편지가 가진 설득력 때문이 아닌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한 것이 근심을 회개로, 후회를 기쁨으로 전환한 것이지요.

두 가지의 근심

성도에게는 두 가지의 근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과 세상 근심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란 내 행위를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까, 내 행위가 죄는 아닐까, 내 언행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은 아닐까 등을 근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근심은 성도로 하여금 회개에 이르게 합니다.
성결에 이르게 하는 ‘거룩한 근심’이라는 것이지요.

세상 근심이란 세상 사람들도 동일하게 하는 근심, 세상 것들에 대한 근심을 말합니다.
이러한 근심은 좌절과 원망과 불평과 분노 등을 낳습니다.
이러한 근심이 자기를 향하면 적극적으로는 자기 파괴 행위로 이어지고 소극적으로는 자기 정당화로 이어집니다.
지나친 자기 정죄로 인해 땅굴을 파고 들어가거나,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옹색한 변명들을 늘어 놓다가 오히려 사람들을 더 아프게 합니다.
이러한 근심이 상대방을 향하면, 적극적으로는 상대방을 공격하거나 험담하게 되고, 소극적으로는 대인기피증이 생겨 사람들과의 관계를 피하게 됩니다.

결국 세상 근심은 성도와의 관계, 목회자와의 관계,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관계를 더욱 단절시키게 되며, 결국 영적 사망으로 이르게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세상 근심을 영적 사망을 이루는 것이라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한 근심의 결과

하나님의 뜻대로 한 근심은 회개로 이어지고, 회개는 반드시 합당한 열매들을 맺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맺은  7가지 회개의 열매들을 나열합니다.

1. 간절하게 함

고린도 성도들은 자신들의 죄를 인지하게 되었으며, 죄를 교정하고 싶은 마음과 자신을 성결하게 만들고자 원하는 마음으로 간절해졌습니다.

2.  변증하게 함

고린도 성도들은 자신들의 죄를 회개했지만, 자신들의 진심에 대해서는 적극 변증을 했습니다.
그들은 변명한 것이 아닙니다.
변명은 죄로 인해 오는 결과를 모면하려고 늘어놓는 것일 때가 많은 반면, 변증은 자신들의 진심은 보이는 것과 다른 것임을 밝힘으로써 상대방을 기쁘게 해주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적대자들이 바울을 공격할 때에 그에 넘어가 동조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바울을 옹호하는 대신 침묵하거나 방조했습니다.
이는 바울로 하여금 대부분의 성도들이 등을 돌렸다는 극도의 외로움과 복음의 진리가 퇴색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을 낳게 했습니다. 성도들은 이에 대해 자신들의 진심은 바울을 여전히 사랑하고 존경하고 있음을 표현했던 것 갖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복음과 진리에 대해서도 변함이 없음을 변증했을 것입니다.

3. 분하게 함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에 대한 진심을 변증하는 한편 바울을 모함하고 비방했던 적대자들에 대해서는 분노했습니다.
가슴아픈 방문 때와는 전혀 다른 반응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4. 두렵게 함

고린도 성도들은 그들의 죄로 인해 바울을 대면하기를 두려워했고, 또한 하나님 진노가 임할 것을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5. 사모하게 함

고린도 성도들은 자신들의 죄로 인해 일그러진 바울과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할 수 있기를 열망했습니다.

6. 열심있게 함

성도들은 성결한 삶에 대하여 그리고 바울 일행을 섬기는 일에 대하여 열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7. 벌하게 함

성도들은 회개하고 돌이켜서 성결을 위한 열정을 품었을 뿐 아니라, 그들 안에 있는 바울의 적대자들을 공의대로 처벌하였습니다.

죄에 대한 침묵과 방임은 죄

고린도의 성도들은 이를 통해 자신들의 깨끗함을 나타냈습니다.
깨끗함을 나타냈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는 모호합니다.
적대자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성도들이 침묵하거나 방조했을 뿐 죄에 가담하지는 않았다는 뜻일 수도 있고, 이제 회개하고 돌이켰으니 깨끗해졌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명확한 것은 적대자들이 바울을 모독하고 비방할 때에 고린도 성도들은 동조하거나, 침묵하거나 방임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로 인해 바울의 마음을 찢기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죄를 적극적으로 짓지 않더라도, 죄에 동조하는 것이 죄임을 알아야 합니다. 심지어는 죄를 침묵하거나 방임하는 것도 죄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악한 자에게 동조해서는 안됩니다. 더 나아가 악한 자를 묵인하거나 방임해도 안됩니다. 그것은 무고한 사람을 아프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아프게 하는 행위입니다. 무고한 사람을 비방하는 말을 퍼뜨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 대해 묵과하지 말고 단호한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비방자와 적대자에 대한 용납은 사랑이 아니라, 무고한 자에 대한 배반이요, 죄에 대한 동참입니다.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를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를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가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로 말미암아 안심함을 얻었음이라.

눈물의 편지의 목적

불의를 행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불의를 당하는 자가 있습니다. 음행이라는 불의을 행하는 자가 있으면, 음행자의 배우자는 불의를 당한 것이 됩니다. 바울을 비방하는 불의를 행하는 자가 있으면, 바울은 불의를 당한 피해자가 됩니다. 그런데 바울이 눈물의 편지를 써서 보낸 것은 불의를 행한 자를 위한 것도, 불의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누군가의 편을 들기 위한 것도 아니고, 최대 피해자인 바울 자신을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눈물의 편지를 보낸 이유는 바울 일행에 대한 그들의 순수한 진심이 하나님 앞에 나타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를 통해 무너진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 앞에서도 막힘없이 설 수 있게 해주려는 의도였던 것이지요.

그러한 바울의 의도대로 고린도 성도들은 회개하고 돌이켰으며, 바울 일행에 대한 그들의 진심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식이 디도를 통해 전해졌고, 그로 인해 바울 일행은 위로를 얻었습니다. 특히 디도가 안전하게 돌아왔고 환대를 받았다는 사실이 바울을 더욱 기쁘게 하였습니다. 눈물의 편지를 들고 고린도로 파송을 받을 때만 해도 디도의 마음은 무거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외로 고린도 성도들은 디도를 환대했고, 디도의 가르침과 인도에 순종했습니다. 그것이 바울의 마음에 위로와 기쁨을 더욱 증폭시켰던 것입니다.

내가 그에게 너희를 위하여 자랑한 것이 있더라도 부끄럽지 아니하니 우리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 것 같이 디도 앞에서 우리가 자랑한 것도 참되게 되었도다

그가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과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

목회자와 성도가 서로에 대해 가져야 할 태도

바울은 회개하고 돌이킨 고린도 성도들로 인해 기뻤습니다. 성도들이 회개한 자체도 기뻤지만, 자신이 성도들에 대해 디도에게 했던 자랑이 증명되었기에 기쁘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비록 죄에 대한 동조와 침묵과 방임을 통해 바울의 가슴을 아프게 했어도 그들 안에 있는 진심과 가능성을 볼 줄 아는 눈이 있었습니다. 성도들이 비록 죄를 짓고 있어도 그들 안에 심겨진 복음으로 인해 결국 돌이키게 될 것을 믿었고, 그들이 갖고 있는 강점들을 여전히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로 향하는 디도가 불안에 떨고 있을 때에 바울은 고린도의 성도들을 자랑했습니다. 겉으로는 자랑스러울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 보이지만, 바울은 여전히 그들에 대해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들을 바라보는 목회자의 태도여야 합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이 가슴 아프게 하고, 미흡하고, 죄 가운데 있더라도, 그들 가운데 있는 장점을 보며 그들을 자랑스러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회개할 수 있었던 여러가지 이유 중 하나는 디도에 대한 그들의 태도였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디도를 대할 때에 두려움과 떨림으로 대했으며, 디도의 가르침과 인도에 순종했습니다. 디도는 어린 사람이었고 12 사도 중 한 명도 아니었습니다. 두려워하거나 떨 이유가 전혀 없었지요.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사역을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성도들은 그를 두렵고 떨림으로 대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 자세는 순종의 행위로 이어졌던 것이지요. 성도들은 목회자를 두렵고 떨림으로 대하며 그 말에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목회자가 위대하고 잘 나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전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성도들에 대한 목회자의 마음도 더욱 깊어지는 것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에 대해 디도의 마음이 깊어지게 되었던 것처럼 말이지요.

내가 범사에 너희를 신뢰하게 된 것을 기뻐하노라

회복은 회개의 아들

바울은 죄에 빠진 채 자신을 대적하는 고린도 성도들로 인해 마음이 아파 있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을 자랑하기는 했으나 성도들을 향한 온전한 신뢰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성도들이 회개하고 죄를 청산했으며, 악한 자들을 축출했기에, 그들에 대한 신뢰가 회복되었습니다.
회개는 회복을 낳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돌이키면 언제나 회복이 있습니다.
회개하고 돌이키면 성도와 성도 사이에, 성도와 목회자 사이에, 그리고 성도와 하나님 사이의 회복이 있게 됩니다.
참된 회개를 통해 서로 간의 신뢰가 회복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누리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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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4-2022(화)

은혜 받을 만한 때(고린도후서 6:12)

헛되이. κενός, ἡ, όν  2756

1. 빈,  2. 내용이 없는,  3. 마가복음 12:3

발음 / 케노스(kĕnŏs)
관련 성경 /  헛된(고전 15:10, 엡 5:6, 살전 2:1), 헛되게 하는(살전 3:5), 허탄한(약 2:20).
[명] 빈 손 (눅 1:53), 허사(행 4:25), 헛것(고전 15:14).
신약 성경 / 18회 사용
은혜란 무엇인가?

1. 값없이 받는 사랑
2. 예수님을 닮아가는 모든 환경과 사건

‘오스카 와일드’라는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가 있습니다.
19세기 영문학을 대표하는 당대 최고의 극작가였습니다.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단편집으로 ‘행복한 왕자’가 있습니다.
여러 단편 중에 한 편인 ‘행복한 왕자’는 아마도 제 기억에는 교과서에도 실렸던 것 같습니다.
자기 몸에 붙어 있는 모든 보석을 떼어서 가난한 백성들을 도와주려는 왕자의 동상(銅像)과 그 왕자 동상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서 추운 겨울이 와도 따뜻한 남쪽으로 내려가지 않고 돕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는 제비의 이야기입니다.

당시대 민중들의 척박한 삶의 상황과 그들에 대한 연민이 짧은 소설 가운데 잘 드러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작가인 오스카 와일드는 이렇게 시대의식이 있었고, 재미있고 풍자적인 작품을 많이 남겼습니다.

지옥의 단편이라는 단편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은 예수님이 한 때 은혜를 베풀어주었던 사람들을 다시 만난다는 설정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어떻게 변했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을 만난 후에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았을까요?

소설에서 예수님은 먼저 한 술주정뱅이 청년을 만납니다.
그는 한 때 예수님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반갑게, 또한 안타깝게 물으셨습니다.
“당신, 왜 그런 생활을 하고 있소?”
그가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절름발이였을 때 나를 찾아와 걷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걸어 다닌들 무슨 행복이 있겠습니까? 그동안 직업을 구해 보았으나 괜찮은 직업을 구할 수가 없었고, 도무지 먹고 살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날마다 술이나 마시며 삽니다.” 차라리 절름발이였을 때는 동정이라도 얻을 수 있었는데 이제 사지 멀쩡하여 아무런 배운 것도, 가진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사람이다 보니 이렇게 신세한탄이나 하며 폐인이 되어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났었는데도 말입니다.

한 창녀를 만납니다.
많은 남자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희롱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전에 그녀를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어째서 이런 생활로 되돌아갔소?” 여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창녀의 삶에서 건져 새 사람을 만들어주셨지요. 그런데 내가 손을 씻은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세상은 여전히 나를 외면하고 조롱했고, 나는 도저히 이 세상에서 다른 삶을 살 수가 없었어요. 나는 결국 다시 이 생활로 돌아오고 말았어요.” 세상이 자신의 변화를 인정해주지 않았고, 결국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났는데 말입니다. 

한 깡패를 만납니다.
역시 이전에 예수님이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여보시오... 청년, 저를 아시지 않소. 어째서 다른 사람들과 이렇게 싸우며 살고 있소?” 그가 대답합니다. “예, 나는 당신이 눈을 뜨게 해 준 소경이었습니다. 그러나 눈을 뜨고 도대체 무엇을 보라는 겁니까? 보이는 것 모두가 나를 신경질 나게 하고 화나게 만드는데 말입니다, 결국 나는 이렇게 날마다 세상과 싸우며 살고 있습니다.” 그는 오히려 이전보다 더 나빠졌습니다. 예수를 만났는데도 말입니다. 예수님이 고쳐주셨는데도 말입니다.

여러분, 오스카 와일드는 이 이야기들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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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3-2022(월)

새로운 피조물(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영적 하나됨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주인이 되신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하나가 될 때 성립됩니다.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별개의 사건입니다.
누구나 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그리스도와 함께 하고 따르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에 교회를 드나들고 교인으로 등록한 사람의 숫자는 1,200만 명에 가깝다고 합니다.
이 속에는 허수도 끼어있습니다.
교회 정착을 못하고 이 교회 저 교회를 전전하면서 교인으로 등록하기 때문에 교인 숫자가 겹치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 사람들이 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리고 교회의 위상을 망가뜨리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고백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입니다.
거듭난 사람들, 구원받은 사람들이 곧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에는 ‘거듭난 사람’이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4장 24절에서는 ‘새사람’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고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어 지으신 영을 가진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거룩한 영적 형상이 파괴되고 죄의 지배를 받는 타락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은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구원과 회복의 길을 터주셨습니다.
예수를 믿고 영접하고 부르는 사람들은 새로운 피조물, 새것이 된다는 것이 바울의 고백이고 선포입니다.

새로운 존재가 되고 새것이 되려면 이전 것은 지나가야 합니다.
이전 것을 그대로 지키고 있는 한 새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2∼24절에서 바울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너희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 새 것, 새 사람,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이전의 삶의 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쉬운 예를 들어봅시다.
집을 새로 구입하여 이사를 합니다.
이제부터는 옛 주소와 새 주소로 구분합니다.
이전에 살던 집과 현재 살고 있는 집으로 구분합니다.
이전 주소를 사용하면 우편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전 집으로 들어가려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집은 더 이상 내 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지구가 태양을 도는가, 아니면 태양이 지구를 도는가?
현재는 가장 쉬운 천문학 지식이지만 몇백년 전만 하더라도 이러한 질문에 답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심지어 목숨까지 바쳐야 했다. 중세까지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믿고 있었다.

​성경의 여러 말씀이 그러하거니와, 지구가 정지하고 않고 돌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란 어려웠다.
감히 이러한 인식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사람이 바로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이다.
그런데 그가 이러한 발견을 하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재미나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우선 코페르니쿠스가 이러한 발전을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과학적인 발견에 의해서가 아니라 심미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관심 때문이었다.
그는 천문학자임은 틀림없으나 단순한 아마추어에 불과했다.
그는 그 이전까지 전해오던 지구중심설인 프톨레마이오스의 모형을 놓고 생각하다가, 그 모형이 상당히 복잡하다고 느꼈다.
독실한 신자였던 그는, 전지전능하신 신이 프톨레마이오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우주를 그렇게 복잡하게 만들지 않았을 것이라는 확신을 했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복잡한 것보다는 단순한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성스러운 신전을 비추어 주는 촛불을 어디에 놓아야 전체를 동시에 비출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곳은 당연히 중앙이 아닐까 생각했던 것이다.
곧 태양을 중심에 두어야 빛이 골고루 비추어지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는 이같은 추측을 발판으로하여 소위 태양중심설을 전개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새로운 체계를 발표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도 잘 알다시피, 자신의 체계가 당시의 상식과는 크게 어긋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친구들과 제자들의 노력에 의해서 결국 1543년에 그의 저서 "천체의 회전에 대하여"가 출판되었다.

그때가 바로 그의 임종 때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코페르니쿠스는 생전에 자신의 천문학자적인 체계로 인해 이단으로 몰릴 것을 두려워했다.
교회와의 갈등을 두려워해서 그렇게 된 것인지 아니면 출판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인지 알 도리는 없지만, 그의 임종에 맞추어 책이 발간되었다는 것은 아무튼 참으로 공교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두려움은 이해할 만한 것이다.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루터나 다른 종교지도자들은 여전히 과거의 신념에 매달리고 있었다.
루터는 이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주장을 전해 듣고, 코페르니쿠스를 가리켜 천문학의 '천'자도 모르는 바보라고 하며 "이 바보는 천문학 전체를 뒤엎으려 하고 있다.
그러나 거룩한 성경은 여호수아가 멈추게 한 것은 태양이지 지구가 아니었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고 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천체의 회전에 대하여"라는 책 제목에서 '회전'이라는 단어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당시에는 180도를 돈다는 뜻의 '회전'이라는 단어가 나중에는 정치적인 격변을 뜻하는 '혁명'이라는 말로 서양에서 사용되었다.
우리가 아는 '혁명'이란 뜻의 어원이 바로 코페르니쿠스의 책 제목에서 나왔던 것이다.
과연 그의 전환이 서양 역사에서 얼마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그의 인식론적인 전환을 더 자세하게 이야기한 사람이 바로 시간보다도 더 정확하게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고 하는 철학자 칸트였다.
칸트가 철학에서 이룩한 인식론상의 전환은 자연과학에서 코페르니쿠스가 이룩한 전환과 아주 비슷했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시작하여 칸트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정신이 대상들을 인식하려고 대상들의 주위에 돌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던 것을 칸트는 대상들로 하여금 정신이라고 하는 중심적 사실의 주위를 돌게 했다.

이제는 정신이 대상의 조건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정신이 정해 놓은 조건에 따르게 되었다.
다른 말로 한다면, 우리들의 인식은 대상에 의거한다고 이제까지 생각되어 왔지만, 대상의 인식은 우리들의 주관 구성에 의하여 비로소 가능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놀라운 전환이었다.
그는 이것을 철학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불렀다.
마치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것처럼 주관과 대상의 위치가 서로 바뀌었던 것이다.

칸트 자신이 이렇게 말했다.

​"이와 같은 나의 생각은 별자리가 관측자의 주위를 회전한다고 보아서는 천체운동을 설명할 수 있다고 본 코페르니쿠스가, 오히려 관측자의 편에서 회전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별의 위치를 정지시킴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좀더 합당한 해답이 얻어질 수 있으리라는 획기적 사상을 제시했던 것에 비길 수가 있겠다."

​그래서 이제 커다란 전환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곤 한다.
그러나 제아무리 기발한 발상의 전환이라도 정작 코페르니쿠스의 전환에 비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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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G란 영어 단어의 약자
Environmental(친환경)
Social(사회적 책임)
Governance(공공경영)

현재 기업들은 ESG 경영을 향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ESG가 세상적인 단어인 것 같지만, 사실은 성경의 나타난 정신이며 이미 교회가 추구해왔어야 하는 가치입니다.

친환경과 관련해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다스리는 청지기의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지 말라고 해도 해야 하는 것이 창조세계의 보존이며, 생태적인 삶입니다.

사회적 책임은 이웃 사랑입니다.
율법에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또 예수님이 말씀하신 새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공공경영과 관련해 하나님 나라는 세상적인 방법으로 성공하는 사람만 인정받고 누리며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라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특정 유대인이나 종교지도자들만이 아니라 모두가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이며, 하나님께서는 작은 자를 통하여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시는 분이십니다.

고린도전서 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1.행복한 새티스파이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최대 만족을 추구하는 맥시마이저와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고 사는 새티스파이스다.
만족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맥시마이저는 항상 더 많이,더 높이를 추구하기에 성취도가 높아 일에 성공할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자신보다 더 잘 나가는 사람이 옆에 있는 한 만족하지 못한다.
그래서 맥시마이저는 쉽게 행복해질 수 없다.
반면 새티스파이스는 이 정도면 됐잖아라고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다.
새티스파이스는 현실에 만족할 줄 알기 때문에 변화나 상승 의지에 약해 상대 평가에는 크게 성공하지 못한 사람일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별로 개의치 않기 때문에 늘 감사하는 삶을 산다.
중요한 것은 맥시마이저는 내적 기쁨을 누리지 못하지만 새티스파이스는 내적 기쁨을 누린다는 것이다.

잠언서 기자는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잠 17:22)

끊임없이 소유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감사의 삶이다.

하나님의 형상(צֶלֶם , 첼렘)과 모양(דמות,드무트), 평행어법

하나님의 ‘형상’(ֶלֶצם 첼렘, image)과 ‘모양’(דמות 드무트, likeness)에 대한 단어의 의미를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 원인은 구약성경 최초의 번역서인 칠십인 역(LXX) 때문이기도 하다.

LXX역은 창세기 2장 26절에 나오는 구절을 ‘우리의 형상과(and) 모양을 따라’로 번역했다.
형상과 모양 사이에 ‘and’를 넣어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해 형상과 모양이 마치 서로 다른 의미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어로 기록된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리의 형상, 우리의 모양을 따라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여기에서 표현된 형상과 모양에는 차이점이 없다.
문법적으로 동격이기 때문에 사실 같은 말이다.
하나님의 모양을 닮은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은 히브리어로는 단어의 모양은 다르지만, 사실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두 단어를 구분해서 이해를 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올바르지 않는 성경 해석이므로 지양해야 한다.

그렇다면 서로 다른 두 단어가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다음 두 가지 사실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창세기의 본문에서는 이 두 단어가 교차되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26)’ /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창 1:27)’ /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창 5:1)’ /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창 5:3)’

만약 두 단어 사이에 서로 다른 의미가 있다면 이렇게 교차되어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다. 그런데 문맥을 조사해 볼 때 강조점을 향해 흘러가는 방향성은 있지만, 의미상에는 큰 차이가 없다.

둘째, 성경을 해석하는 중요한 원리 중 하나인 병행어법이다.

이것은 평행어법(Parallelism)이라고도 하는데, 성경을 기록한 문학적인 기법과 용어를 함께 사용하고 있다.
형상과 모양이라는 단어가 서로 따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한 문장에 함께 있다는 원리이다.

서로 다른 단어이지만 내용과 의미, 그리고 사상이 같이 간다.
두 단어는 구분이 불가능한 단어의 쌍(word-pair)으로 존재 한다.
가끔 예외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단어의 쌍이 올 때에는 뒤에 오는 단어에 강조점이 주어진다.
이는 성경 해석의 중요한 원리이다.
예를 들어 A와 B라고 하는 두 단어가 쌍으로 있다 하자.
그럴 때 해석은 이렇게 된다.

B는 A 그 이상이다(B is more than A).
A와 B라고 하는 두 단어가 올 때 앞 단어 A보다 뒤 따라오는 B에 훨씬 큰 의미가 있다.
의미의 무게 중심이 B에 있다는 것이다.
이제 이런 성경 해석을 창세기 1장 26절에 적용한다면 두 단어 중 어디에 강조점이 놓여 있겠는가?
A=형상, B=모양이다.
강조점은 B, 즉 모양에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숨겨진 카드가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rodemnamusho&logNo=220452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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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2022(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고린도후서 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성경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가장 완벽한 존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는다는 것을  두 가지 측면으로 이해합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삶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중 육신의 몸으로 이 세상에서 생활하셨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삶의 방식과 우리 삶의 방식이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집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먼저 집을 찾습니다.
집이 있어야 복잡한 도시에서 편안하게 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성품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온유하면 빼앗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겸손하면 짓 밟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도저히 겸손과 온유를 유지하지 못합니다.
이미 세상의 질서가 너무 많이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별 따기 라는 말이 아주 쉽고 간단하게 더구나 무책임하게 남용됩니다.
사랑을 위해서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으시댑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어느 누구도 하늘의 별을 따 온 사람은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형상이 되셨던 것에서 두 가지를 찾아야 합니다.

첫째는 삶을 통한 형상의 회복

어렵더라도 예수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삶은 섬김을 받는 것과 높은 자리를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먼저 섬기며 더 낮은 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둘째는 믿음을 통한 형상 회복

믿음이란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위로부터 내려주신 은총을 따라가는 것 뿐입니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너무 멀리 떠났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내 삶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하여 고쳐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찾아봅시다.
내 믿음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하여 해야 할 기도와 적용해야 할 말씀을 찾아봅시다.
그리고 찾아낸 것을 내 마음 판에 새기고 예수님을 따라가도록 함께 달려봅시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주님께서 주시는 건강을
지금보다 더 좋게 하려고 몸부림 칠 것이 아니라 지금 상태만이라도 유지하면서 오늘을 살아봅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세기 1:26)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다는 말에는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피조물임과, 인간이 본래는 하나님과 닮은 데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형상을 상실했다면 회복해야 한다는 엄숙한 제시가 있음을 본다.

창세기 1장 26절에서 사용한 형상과 모양에 대한 히브리어는 쩰렘(צלם)과 데무트(דמּות)이다.
쩰렘은 영어로 Form 혹은 Image로, 데무트는 Likness로 번역되었다.
히브리어 쩰렘은 '자르다'의 어근으로 추정되고, 데무트는 '닮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쩰렘과 데무트가 외형적으로 사용된 성경 구절들을 살펴보자.

"느부갓네살이 분이 가득하여 … 낯빛을 변하고(단 3:19)"의 '빛(첼렘)'은 마음의 속 상태를 보여 주는 외적인 모습이다.

열왕기하 16장 10절에서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 가서 거기 있을 구조와 제도의 식양을 그려"에 쓰인 '식양(데무트)'은 타브니트와 마찬가지로 물질적인 의미로 쓰였다.

신명기 4장 16절의 "두렵건대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하여 아무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되 남자의 형상이라든지, 여자의 형상이라든지"에서는 형상(타브니트)과 우상(테무나)이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구약성경에서는 겉으로 보이는 모양과 물질적인 유사성이 강조되어 있다(형상에 대하여 신약에서는 빌립보서 2장 6~8절에서, 모르페(형상), 호모이오마(형체), 스케마(모양)의 세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고 할 때 외형적인 형상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외형적인 형상이 없는 영적 형상의 참된 신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어떤 물질적 형상이나 모양을 의미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영의 특성들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의 특성들을 따라 창조함을 받은 사람의 특성들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골 1:15)."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후 4:4)."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 것은 유형의 형상을 말하는 것인가 무형의 형상을 말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이 나오게 된다.
하나님은 유형의 형상이 없으니 무형의 형상이라 함이 자연스럽다.
아래 성구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무엇인지를 감지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30)."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 3:10)."

로마서 8장 29절과 30절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시고 구원하셨다는 것이고 골로새서 3장 10절은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하여 새사람이 된 것은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한 결과라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은 보이지 않는 무형의 형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보이지 않는 형상은 하나님의 의(시 99:4), 거룩(출 15:11, 시 22:3, 사 5:15, 57:15), 선(막 10:18), 사랑(신 7:9, 요3:16)임에 틀림없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형상은 존재론적으로는(영적 형상) 영이시며 보이지 않으시며 영원히 죽지 않으시는 형상이요, 의미론적으로는(속성적 형상) 의와 거룩과 선과 사랑이시다.

이 형상을 인간에게 주셨지만, 사단의 꼬임에 넘어가 타락하여 이 영적 형상을 상실해 버렸다.
육체까지 영생의 존재가 육체에 사망이 왔고 거룩해야 할 존재가 죄악 된 존재가 되어 버렸다.
죽지 않는 영혼마저 지옥 형벌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갈보리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와 사망을 짊어지시고 영원한 속죄 제사를 드려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죗값으로 사망한 육신이 부활하게 되고 불행한 영혼이 행복한 영생과 거룩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되었다.

이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칭의요 점진적 성화이며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두 가지 면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첫째는 믿음을 통한 칭의적 회복
둘째는 삶을 통한 행함의 회복

하나님의 형상(첼램)


성경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고 합니다.
다른 모든 피조물은 “각기 그 종류대로 ”창조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으셨습니다.

창세기 1:26-27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첼램 H6754) 우리의 모양대로(데무쓰 H1823)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아담 H120)

창조하시되 남자와(자칼 H2145) 여자를(네케바 H5347) 창조하시고.

*우리의 형상을 따라(첼렘 H6754) - ‘자르다, 베다’동사에서 유래

* 우리의 모양대로(데무쓰 H1823) - ‘무엇 무엇과 비슷하다’에서 나옴
자르고 베고 갂아서 하나님과 비슷하게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과 어떤 특정한 유사점이 있다는 것을 본문에서 추출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31.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토브 H2896)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어진 인간이 처음에는 순결했으며 죄가 없었으며 거룩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투영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존재하는 대표입니다.
*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
인간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형상이란 좁은 의미와 넓은 의미의 형상으로 구분합니다.
넓고 포괄적인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 - 구조적 측면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과 그 존재가 맺고 있는 다양한 관계 속에서 인간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을
행하도록 하게하며 하나님의 소명에 반응해서 살아낼 수 있는 모든 은사들과 재능들이 총체적으로 인간에게 부여된 상태.
인간의 이성적,합리적 능력들을 하나님의 이성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도덕적 감수성도 하나님의 도덕적 성품을 반영시키고 있습니다.
인간이 사회적인 교제를 할 수 있는 것도 성부 성자 성령하나님의 교제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결정을 하고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자기의 뜻에 따라 결정하시는 하나님의 결정 능력을 조금이나마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미적감각 역시 절묘하고 웅대한 자연의 경관을 만들어 내신 하나님의 미적 감각을 닮은 것입니다.
우리가 노래를 할 수 있는 재능도 역시 노래를 부르시며 즐거워하시는 하나님을 닮은 덕택입니다.
좁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 - 기능적측면

인간이 창조될 때 소유하게 된 영적인 특성들,
다시 말해 참된 지식,의로움,거룩함”
골로새서 3:10
새 사람을(네오스 G3501-새로운) 입었으니(엔뒤오 G1746)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에이콘 είκών G1504) 좇아 지식에(에피그노시스 ἐπίγνωσις G1921) 까지 - 명확한 지식,인식- 에피기노스코ἐπίγινώσκω에서유래;알다,인식하다
에피 ἐπί G1909-위에 + 기노스코 γινώσκω G1097;알다,알게되다
- 일관되게 구약과신약에서 하나님을 아는 자의 해위에 영향을 끼치시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인식으로서의 ‘지식’을 의미(바이블렉스)
새롭게 하심을 받는(아나카이노오G341) 자니라.
아나ἀνάG303-위로+카이노스καινόςG2537- 새로운
- 도적적 갱신(바이블렉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선물로 받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의
기준에 따라 끊임없이 새롭게 되기 때문.
(고후4:16)에서는 바울로 하여금 외적압력들을 초월하게 하는 성령을 통해
날마다 새롭게 되고 힘을 얻는 것을 가리킴
(엡4:24)
하나님을 따라 의(디카이오쉬네G1343)와진리(알레데이아ἀλήθειαG225)의
거룩함(호시오테스G3742)으로;경건,거룩
-호시오스ἅσιοςG3741에서유래 ‘올바른’
-‘하나님께 바쳐진’(경건한,신성한,분명한)거룩한,자비,될지어다
지으심을 받은(크티조κτίζω2936)-만들어내다,창조하다
새(카이노스G2537) 사람을(안드로포스G444) 입으라.(엔뒤오G1746)
* 입으라(ενδύω)- 옷을‘입다’;옷속에 ‘스며들다’라는 의미에서 유래
-입다,입히다,붙이다의 뜻포함
엔ένG1722-안에;정지에의미 + 뒤노δύνω또는뒤미δυμι G1416
;(duo-가라앉다의 연장형)-내려가다,해가지다
* 사람(안드로포스ἄνθρωποςG444) -‘인간의 얼굴을 가진’인간
아네르άνήρG435-사람,남편 + ops(안색,옵타노마이 όπτάνομαιG3700에서유래)
-응시하다;크게 뜬 눈으로 현저한 어는 것을 향한 것처럼)
:헬라어에서 짐승이나 신과 반대되는 ‘인간’을 의미
경멸적인 의미로‘노예’를 의미.비난및 노예를 부를 때 사용.
죄의종,율법적인 인간을 의미합니다.(바이블렉스참조)
타락하기 전의 인간은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을 모두 완벽하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을 닮아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독수리는 날아다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독수리의 날개가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난다는 것은 좁은 의미 즉 기능적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이고,
날기 위해서
필요한 구조적인 것을 넓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 이 세상 신(ὁ θεὸς τού αἰώνος τούτου, ‘이 세대의 신’)은 사단을 가리킵니다.

* 마음을 혼미케 하여의 혼미케 하여는 에튀플로센(ἐτύφλωσεν)으로서 ‘소경이 되게 하다’, ‘어둡게 하다’, ‘헛갈리고 흐리멍덩하게 하다’ 등을 의미한다(롬 1:21).

사람이 믿지 않는 것과 사단이 마음을 혼미케 하는 것은 밀접한 상관성이 있다.
사람이 믿지 않으니까 사단이 그 마음을 혼미케 할 수 있고, 또 사단이 사람의 마음을 혼미케 하기 때문에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에 대해 인간은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는 불신자의 마음의 눈을 감기게 하는 사단의 목적이자 결과이다.
즉, 사단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 복음이 발하는 광채(시 44:3, 78:14)가 비취지 못하도록 불신자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 것이다.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εἰκὼν τού θεού)

그리스도가 물질적이거나 육체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이 표현은 성육신 전의 그리스도나 현재의 영광스런 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에 국한시켜 이해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형상이었으며, 지금도 그렇고, 또한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요 17:5).
그분의 성육신이 그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이 되게 한 것이 아니라, 성육신의 과정을 통해 그분은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바로 그 형상이 되신 것이다”(Nicholson, p. 75).②}(저자의 골 1:15의 주석)

“형상”이란 에이콘(εἰκὼν)

단순한 유사함이나 모방이 아니라, ‘원형적 대표’를 의미한다(T. K. Abott, G. G. Findlay).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질을 그 본질로 삼는 것이다(黑崎幸吉). 이것은 요한복음 10:30의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와 같은 의미이다.

“이 낱말은 ‘현시’(manifestation)를 의미하기도 한다”(J. B. Lightfoot,③ C. Vaughan).
즉,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사랑, 의, 선, 지혜, 능력 등)과 존재가 완전히 그리스도 안에 드러났다는 점에서 볼 때, 그분은 하나님의 형상인 것이다(J. B. Lightfoot,④ C. Vaughan).

스튜와트(J. S. Stewart) 역시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그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본질과 존재가 가장 완전히 계시됐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⑤라고 설명하였다.

이것은 요한복음 저자의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 14:9)과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7:5) 등의 말씀으로도 뒷받침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성도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고후 4:6)을 가지고 있으며, 성도들이 주님의 영광을 볼 때, 주님의 영으로 인해 주님과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른다고 담대히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분(창 1:26-)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 그 자체라는 것이다”(F. W. Beare).

특히, 형상이란 고대 세계에서는 주권 또는 왕권을 표시하는 개념이었으며, 더 나아가 왕들은 현현신(現顯神)으로 간주되었다. 예를 들면, 애굽의 바로, 로마의 가이사, 중국의 천자 등이다. 따라서 바울이 그리스도를 가리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 것은 만왕의 왕으로서의 우주적 주권을 의미한 것이기도 하다.}(저자의 골 1:15의 주석)

주석(해)서에서 인용할 경우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1) 참조: 골 1:15, 히 1:3.
2) in C. Vaughan.
3) in 이상근.
4) 상동.
5) J. S. Stewart, op. cit., p. 303.

딕툼 메움 팍툼(Dictum Meum Pactum)

이 글은 영국 런던의 금융가(더 시티)에는 세계 최고(最古)의 옛 증권거래소가 있다.
그 건물 전면에 라틴어로 딕툼 메움 팍툼(Dictum Meum Pactum) 이란 문구가 새겨져 있다.
‘내가 한 말은 곧 보증수표’라는 뜻이라고 한다.

철저한 신용과 단단한 신의가 금융의 생명임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날 런던이 세계 금융의 중심이 된 것은 영어가 세계 공용어인 때문만도 아니고 시차 때문에 24시간 국제영업이 가능한 때문만도 아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축적된 신뢰 때문이다.
정부 정책도 금융 못지않게 신뢰가 중요하다.
국민이 정부를 신뢰하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기대하는 성과를 거둘 수 없다.
영국이 대영제국으로 발전한 역사나, 미국이 패권국으로 도약한 역사는 신뢰받는 정부의 역할을 빼놓고는 설명할 도리가 없다.

최근 우리 정부의 신뢰수준은 바닥에 떨어졌다.
정부가 부동산 대책을 빈번히 쏟아 냈지만 국민은 집값·전셋값 급등과 극심한 희망고문이라는 최악의 결과를 경험했다.
탈원전 정책은 과학적 분석과 충분한 공론화 과정 없이 결정되었다.
코로나 방역과 관련해선 ‘조금만 참으면 정상화될 것’이란 말을 정부가 수없이 반복했지만, 그런 호언장담을 믿는 국민은 이제 아무도 없다.
소상공인들은 빚더미에 짓눌려 생사의 기로로 내몰리는데도, 정부는 코로나 피해의 효율적·효과적 보상을 위한 선택과 집중은커녕 재난지원 대상을 전 국민에게로 확대하지 못해 안달이다.
피해가 크든 작든, 피해를 입었든 안 입었든 모든 국민이 똑같이 획일적으로 위로받아야 한다는 선거용 정치논리인가. 심각한 위험에 빠진 국민을 최우선으로 구하기 위해 정부가 진정성 있게 다가서지 않는다면 누가 정부를 신뢰하겠는가. 소수의 국민은 영원히 속일 수 있다.
많은 국민도 잠시 속일 수는 있다.
그러나 많은 국민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는 일이다.

정부가 신뢰 받아야 국가가 성장
부동산·방역 등 정책 잇따른 실패
사과하고 잘못된 것 빨리 고쳐야
동반성장을 사회 작동원리 삼기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제라도 신뢰를 회복하려면 정부가 그간의 정책 실패를 인정하고 국민에게 사과하는 수밖에 없다.
정부는 구체적으로 누구를 말하나?
국정의 최고 책임자는 대통령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야 한다.
주변의 다른 사람이 대신 사과해 봐야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다.
또 고칠 수 있는 것은 빨리 고쳐야 한다.
사과는 어떻게 할 것인가?
신뢰 회복을 위해서는 정직과 투명성이 중요하다.
그것은 정부가 지금껏 해온 것과는 다른 새로운 대응을 뜻한다.

1930년대 대공황기 미국의 뉴딜정책은 배울 게 많다.
상황이 똑같지는 않지만 그때 미국이나 지금 한국이나 위기인 건 마찬가지다.
미국의 뉴딜은 구호만으로 성공한 것이 아니었다.
과감하고 꾸준한 실천으로 성공했다.
성공의 뒤에는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있었다.
그리고 신뢰를 얻기 위한 루스벨트 대통령의 끊임없는 노력이 있었다.
그는 당시 라디오 ‘노변정담’에서 특유의 유머, 과장하지 않는 솔직함과 담백함으로 국민을 감동시키고 주요 정책을 국민에게 쉬운 말로 허심탄회하게 전달했다.
임기가 7개월밖에 안 남았지만 우리 대통령도 해야할 일은 끝까지 해야 한다.
‘대장동 사건’ 말이다.
이 사건의 공명정대한 처리는 대통령에게 그동안의 실책을 적잖게 만회할 기회라고 생각한다.
대통령이 대장동 사건을 신속히 그리고 철저히 조사토록 지시하고 그 진상을 세상에 밝힐 것을 촉구한다.

신뢰의 추락도 걱정이지만 한국경제의 앞날도 만만치 않다.
코로나 이후의 세상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국가의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는 가운데 기술혁신만큼 더 중요한 것도 없다.
그러나 미래가 불확실한 때일수록 원리원칙부터 세워야 한다.
나는 이 참에 동반성장을 우리 사회의 작동원리로 삼기를 제안한다.
있는 사람 것을 빼앗아 없는 이에게 나누어주자는 것이 동반성장인가?
그렇지 않다. 동반성장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공정한 기회, 불편부당한 규칙, 그리고 공정한 분배를 통해 다수의 참여를 이끌어내고 경제 전체의 파이를 키워 ‘함께 멀리가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동반성장은 경제학의 아버지인 애덤 스미스(A Smith)『국부론』과 『도덕감정론』에서 수립한 자본주의 정신에 부합한다.
중상주의, 고전적 자본주의, 케인스주의, 신자유주의를 이어갈 새로운 사회작동의 원리요, 철학이기도 하다.
코로나 이후 동반성장의 필요성은 더욱 커졌다.
그리고 오늘날 동반성장은 세계적 추세이기도 하다.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
CSV(공유가치창출), 포용성장, 기업시민, ESG(환경·사회·지배구조)운동 등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동반성장이야말로 대한민국이 지속 가능한 성장을 통해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다.
의식주가 넉넉할 때 변하지 않는 도덕심이 함양된다(恒産恒心).
우리 사회가 양극화를 해소하고 성장의 가치를 공유하여 모두 함께 잘 살 수 있을 때, 건강한 공동체가 비로소 실현될 것이다.
국민 각자가 서로 배려하고 관용하며 스스로 앞장서 건강한 공동체를 일궈가는 사회. 바로 이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동반성장 사회다. 물론 신뢰받는 정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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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0-2022(금)

그리스도의 편지(고린도후서 3:2)  만족. ἱκανότης, ητος, ἡ  2426

편지. ἐπιστολή, ῆς, ἡ 1992

1. 편지,  2. 서신,  3. 고린도후서 7:8

발음 / 에피스토래(ĕpistŏlē)
어원 / 198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공문(행 9:2, 22:5), 편지(행 15:30, 롬 16: 22, 고전 5:9, 고후 3:3), 추천서(고후 3:1).
신약 성경 / 24회 사용

* 1989. ἐπιστέλλω

1. 편지로 알리다,  2. 단순하게 편지를 쓰다, 3. 사도행전 15:20

발음 / 에피스텔로(ĕpistĕllō)
어원 / 제1부정과거 ἐπέστειλα, 1909와 472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편지하다(행 15:20, 21:25), 쓰다(히 13:22).
신약 성경 / 3회 사용

만족. ἱκανότης, ητος, ἡ  2426

1. 알맞음,  2. 능력,  3. 자격

발음 / 히카노테스(hikanŏtēs) 

어원 / 242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만족(고후 3:5).
신약 성경 / 1회 사용

* 2435.  ἱλαστήριον, ου, τό 

1. 속죄하는 것,  2. 속죄의 장소

발음 / 히라스테리온(hilastēriŏn) 

어원 / 2433의 파생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화목제물(롬 3:25), 속죄소(히 9:5).
신약 성경 / 2회 사용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제일 먼저 무엇을 보셨습니까?
눈, 얼굴, 옷, 말투.........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모를 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 사람의 능력이나 학벌이나 직장, 배경 등을 보면서 그 사람을 평가합니다.
오늘날 사람을 평가 할 때 그 사람의 중심이 어떤지는 별로 고려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으시고 그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습니다(삼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외모에 관심을 갖습니다.
그런데 그 외모는 단지 겉모습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사회적인 신분이나 능력과 조건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믿음의 사람인지 아닌지를 보려면 자신이 결혼을 하거나 아니면 자녀를 결혼시킬 때에 보면 압니다.
외적인 조건은 좋은데 믿음이 없는 사람과 외적인 조건은 별로인데 믿음이 있는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을 선택하는지를 보면 그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과는 정반대로 사는지가 드러납니다.
이처럼 결혼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선택을 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이 믿음의 사람인지, 아닌지를 우리는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도 바로 이런 문제에 부닥친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교회를 떠나 다른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중에 어떤 선생이라는 자들이 고린도교회에 왔습니다.

그들은 유명한 사람들의 추천서를 들고 왔습니다.
이처럼 외적인 조건들을 갖추었다는 사람들이 와서는 바울은 사도도 아니며 추천서도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의 말을 듣지 말고 자신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의 마음이 흔들립니다.
바울의 가르침을 버리고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에 끌리는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와중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흔들리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무엇이 진짜 중요한 추천서인가를 말합니다.  

1~3절의 말씀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살다보면 우리도 종종 사람을 소개받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을 소개받을 때는 아무래도 서로 대면하여 보는 것이 가장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직접 소개받는 경우도 있고 제삼자를 통해서 소개받기도 합니다.
때로는 서신이나 전화상으로 소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평소 잘 아는 사람끼리는 소개를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자신을 소개하지 않습니다. 만일 아들이 아버지에게 소개서를 쓰라든지 한다면 이것은 대단히 무례한 요구이며 상식을 벗어난 행동입니다.

그런데 보면, 사도 바울에게 추천서, 편지를 고린도교회에서 가져오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바울 사도가 경우가 그렇습니다.
고린도교회 개척을 누구 때문에 했습니까?
사도 바울입니다.
추천서가 필요없습니다.
바울의 추천서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낳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당시에 거짓선지자들이 많이 있어서 예루살렘교회 사도들의 추천서가 필요하였다하더라도 사도 바울에게 이런 관례를 들어 추천서를 요구하는 것은 바울을 아주 모욕하는 거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추천서를 요구하는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바울은 너희는 바울의 편지라고 말하였습니다.
바울의 복음 전도로 인하여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에 대한 글씨가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편지가 성도들 마음에 새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에 새겨져 있는 그리스도의 편지인 바울의 추천서는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의 쓰여졌습니다.(3절)

우편으로 편지를 받았을 때 봉투 위에 찍힌 스탬프와 우편소인을 봅니다.
그 우편소인이 뚜렷하게 보일 때도 있으며 너무 희미하여 그 편지가 어디에서 우송되어 왔는지 알기가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희미하여도, 그 편지가 거기에 도착하였고 그것을 뜯어보면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희미하여도 도장 찍힌 것이요, 우체국에서 찍은 스탬프라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 영과 더불어 증거하시는 성령의 증거도 희미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인침이 있는 것을 압니다.
그것이 매우 강력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의 추천서는 거짓 사도들의 추천서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완전하며 자랑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성령을 통해 고린도 성도들의 마음속에 새겨진 것으로 하나님 앞에 빛날 면류관이요 상급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야 말로 바울의 직분을 증명해 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라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4~5절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사도 바울의 이러한 고백이 참으로 그런 점에서 너무나도 놀랍습니다.
바울 사도는 무슨 일에든지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 수 있는 확신이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만족이 있는 것이 보입니다.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하면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지 말입니다.

생각하여보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족하시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하는게 바로 신앙입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보면, 그렇게 하는 것이 결국 우리 자신의 영혼에게 영원한 이익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산 이 세상에 세워진 교회는 이런 식으로 전도해서는 안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정확하게 깨닫게 하고 그 영혼들이 천국 사람으로 확실하게 변화하는 것에는 관심을 갖지 않고 오직 사람들이 자기 교회 교인들이 되게 하는 일, 그저 모든 사람들이 자기 교회를 다니게 하는 일에만 전념하는 교회는 이 세상에서는 성공적인 전도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크게 근심시키는 일이요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을 다해서 전도하고 말씀을 가르쳤으나 우리가 전도하고 가르친 사람들이 다른 교회 교인들이 되었다고 해서 우리가 손해 볼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세상이라면 그런 일이 큰 손해가 되겠지만 천국에서는 결코 손해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어떤 교회의 교인이 되었든지 천국 사람으로 변화하는 사람들이 우리의 전도를 통해서 우리의 가르침을 통해서 변화한 사람들이라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억하실 것이고 사람들의 영혼에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들에게 천국의 영광과 상을 풍성하게 내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마음이 사도 바울의 만족에 대해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요, 또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사도바울의 복음전도의 증거였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께서 써주신 추천서, 편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은 바울의 사도권은 예루살렘 교회의 추천서가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증명한다는 말입니다.

이를 통해 보면,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그리스도를 알게 됩니다. 세상은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를 보고, 그리스도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전한 것을 통한 성령의 역사를 통해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우리의 전도에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메시지를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것으로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의 편지인 복음이 성령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곧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오늘 주신 이 말씀의 은혜 잊지 말고 더욱 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세 가지 종류의 편지


1절.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당시에도 추천서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어느 분을 어느 지역으로 파송할 때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추천서를 써주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더 이상 고린도 교회와 당신 사이에 이런 추천서는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2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고린도 교우와 사도바울의 일행은 하나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추천서는 전혀 필요가 없는 관계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라는 표현에서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우들과 하나가 되어 있음을 읽어 볼수 있다고 봅니다.

고린도 교우들은 이 글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아마 이들은 마음이 뿌듯해졌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모든 교우들이 뿌듯한 생각을 갖지는 않았을 줄 압니다. 어떤 사람들은 겸연쩍은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사실 지금 사도바울이 이처럼 두세 번 편지를 쓰는 이유는 사도바울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꽤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인정하는 그룹과 인정하지 않는 두 그룹이 늘 다투었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써서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도를 통해 보내기도 한 것입니다. 그것이 고린도전서입니다. 고린도전서 하면 생각나는 것이 있죠. 고린도 전서 13장, 곧 사랑의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하여튼 겸연쩍어 하던 뿌듯해 하던 사도바울은 세 번째 종류의 편지를 언급합니다. 3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고린도 교인들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믿을 수가 없어서 눈을 비비며 보았을지 모릅니다. 특히 사도바울에게 불만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은 더 놀랐을 것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니.”

사도바울과 그 일행의 편지 곧 ‘우리의 편지’라는 말도 그렇게나 좋았는데 아니 미안하기까지 했는데 이제는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말을 들은 것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니.”

늘 내분이 심하고 싸움이 심한 자기들의 교회를 향해서 최고의 찬사를 사도바울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그리스도의 편지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져 있을까요? 3절 말씀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구약을 좀 아시는 분이라면 이 말씀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편지는 돌판에 쓰인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돌판이라고 하면 당연히 구약을 아시는 분이면 모세의 십계명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그리스도의 편지를 모세의 돌판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모세의 돌판 곧 십계명을 최고의 것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이를 완전히 뒤집어엎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 근거 없이 뒤집어엎는 것이 아닙니다. 이를 7, 8절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모세의 십계명은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이라고 표현합니다. 반면 그리스도의 편지를 소유한 자들은 영의 직분을 소유한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곧 묵직한 십계명의 돌판은 정죄의 도구이었지만 그리스도의 편지는 도리어 살리는 도구가 되어 있다고 말씀합니다.

결국 사도바울은 십계명과 그리스도의 편지를 소유한 자를 다음과 같이 구분합니다. 11절 말씀입니다.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모세의 빛은 사라지는 빛이지만 고린도 교우들은 영원에 이르는 빛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우들은 그리스도의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Justin Wren이라는 한 때 두 차례 프로 레슬링 챔피언이었던 젊은이가 있습니다. 이제는 콩고의 Pygmy족을 위한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어릴 때 친구들에게 늘 놀림을 당하였는데 선생님과 의사에게 우울증 환자라는 낙인까지 받게 됩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레슬링을 보게 되었는데 자신의 모든 frustration을 풀 수 있는 운동이라고 생각해서 레슬링에 빠지게 됩니다. 생각 보다 잘하게 되자 부모님이 후원을 해 줘서 레슬링을 자기의 career로 삼게 됩니다.

레슬링으로 성공도 하지만 레슬링을 하다가 부상을 입습니다. 그런 후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합니다. 결국 선수와 코치들에게 버림을 받습니다. 하도 마약에 빠져서 가장 친한 친구 결혼식에도 참석치 못합니다. 자기가 best man인데도….
이처럼 가장 어려울 때 친한 친구에게서 이메일이 옵니다. 60번 계속 보냈지만 Justin은 읽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친구는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정죄의 편지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60번의 이메일을 한번쯤을 읽을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메일의 제목은 ‘Game Plan for Victory’였습니다. 레슬링 매치에서 승리하는 방법이 기록된 것인지 하고 열어보니 친구가 수양회로 초대를 한다는 이메일이었습니다. 한편 더 반가운 소식은 본인이 다 지불하겠다는 약속을 하였습니다. 막상 아무데도 갈 데가 없었는데 친구의 요청으로 수양회에 참가합니다. 결국 그의 삶을 뒤집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긴 말씀 다 못 드립니다. 다시 레슬링으로 챔피언이 됩니다. 그러나 그 후로는 자기를 위한 선수가 아닙니다. 주님을 위한 레슬러가 됩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이제 잠시 레슬링을 접고 아프리카로 찾아 가게 되었습니다.
콩고의 피그미족들이 노예로 사는 모습을 가슴 아파하며 그들을 위한 선교사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마약에 찌든 레슬러를 선교사가 되게 했던 사건은 바로 친구의 편지였습니다. 정죄의 편지가 아니라 곧 십계명의 편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편지였습니다. 그 편지가 한 사람만 살린 것이 아닙니다. 이제 콩고에서 노예 생활로 죽어 가던 수많은 피그미 족들을 구원하게 하는 장본인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주는 가슴 아픈 교훈이 있습니다. Justin이 왜 60개의 이메일을 열어보지 않았습니까? 크리스천들의 손에는 돌이 들려져 있다고 생각해서 입니다. 가뜩이나 괴로운데 크리스천에게서 또 다른 돌을 맞기가 두려워서였습니다.

그러면 왜 Justin 은 기독교인들은 정죄의 돌을 손에 쥔 자로 생각하고 있었나요? 그렇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게 보였습니다. 남은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안 보이는 것뿐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안 보일 수 있나요?

그러나 그것은 별로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답은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곧 우리가 우리가 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면 되는 것입니다.
Justin의 친구처럼.

감사하게도 사도바울은 ‘우리가 우리가 되는 방법’을 5절 말씀을 통하여 역설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곧 하나님으로 초점을 돌릴 때 우리는 최고의 그리스도의 편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초점을 돌리며 살 때 우리의 전 삶은 아름다운 편지가 되어서 우리를 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읽힌다는 것입니다.

괄목상대(刮目相對)

괄은 비빌 괄(刮)인데, 눈을 비비고 다시 대한다는 뜻입니다.
삼국시대 초엽 오나라 왕 손권의 부하 중에 여몽이라는 장수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손권이 여몽을 불러 말합니다.
“자네가 좀 더 훌륭한 장군이 되기 위해서는 공부를 게을리 하면 안 될 것이네.”
이 말을 들은 여몽은 전쟁터에서도 책을 놓지 않고 학문에 힘썼습니다.
몇 년 후 재상 노숙이 여몽을 찾아왔습니다.
여몽과는 막역한 사이였던 노숙은 대화를 나누면서 여몽이 너무나 박식해졌음에 매우 놀랐습니다.
노숙이 여몽의 학문적 깊이를 칭찬하자 여몽은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무릇 선비란 헤어진 지 사흘이 지나 다시 만나면 ‘눈을 비비고 다시 대할 정도로 달라져야 하는 게 아니겠나?”

우리 기독교인들도 하나님 앞에서 선비들이 아닙니까?
사흘만 하나님 앞에서 지나면 눈을 비비고 다시 대할 정도로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삶 전체를 그리스도의 편지로 삼았던 사람 중 한 사람이 위대한 예술가 미켈란젤로입니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1474. 3. 6~ 1564. 2. 18)
14살 때 베르톨도 조반니((Bertoldo di Giovanni, 1420년 이후, Poggio a Caiano – 1491. 12. 28, 플로렌스)의 문하생이 되기 위해 그를 찾아 갔습니다.
미켈란젤로의 놀라운 재능을 본 조반니가 물었습니다.

“위대한 조각가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느냐?”
“제가 가지고 있는 재능과 기술을 더 닦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술만으로는 안 된다. 네 기술을 무엇을 위해 쓸 것인지 분명히 결정해야 한다.”

그러고는 미켈란젤로를 데리고 나가 두 곳을 구경시켜 주었습니다.
먼저 고급 술집으로 데려가 그곳의 조각품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어린 미켈란젤로의 손을 잡고 거대한 성당으로 가서 아름다운 조각상을 보여주며 말합니다.

“너는 이 아름다운 천사 조각상이 마음에 드느냐, 아니면 저 술집 입구에 있는 조각상이 마음에 드느냐?
똑 같은 조각이지만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또 하나는 술 마시는 쾌락을 위해 세워졌단다.
너는 네 기술과 재능을 무엇을 위해 쓰기를 바라느냐?”

미켈란젤로는 대답합니다.

“저는 제 재능을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쓰겠습니다.”

미켈란젤로 안에 있는 영광스런 빛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밝게 빛나게 된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편지가 된 것입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함으로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편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 세상으로 나갑니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헌신하면 우리는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 세상을 밝게 만들어 갑니다.
이 땅 위에 아름다운 자취를 남기게 될 것입니다.
미켈란젤로의 고백을 함께 나누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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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9-2022(목)

그리스도의 향기(고린도후서 2:15)

향기(香氣) /  εὐωδία, ας, ἡ 2175

1. 향기,  2. 향내,  3. 에베소서 5:2

발음 / 유오디아(ĕuōdia)
어원 / 2095의 합성어와 3605의 어간의 합성 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향기로운 제물(엡 5:2, 빌 4:18), 향기(고후 2:15).
신약 성경 / 3회 사용

* 2095. 유(εὖ) 
1. 잘,  2. 좋게,  3. εὖ ποιεῖν,  좋게 행하다

발음 / 유(ĕu) 

관련 성경 / 잘, 좋게, 다행히(마 25:21, 눅 19:17, 행 15:29, 엡 6:3).
신약 성경 / 6회 사용

* 3605. 오조(ὄζω) 
1. 악취를 풍기다,  2. 냄새를 풍기다,

발음 / 오조(ŏzō) 

관련 성경 / 냄새가 나다(요 11:39).
신약 성경 / 1회 사용

에베소서 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빌립보서 4:18
[주] Χριστοῦ εὐ. ἐσμὲν τῷ θεῷ :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그리스도의 향기,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고린도후서 2:15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악취(惡臭) / ὄζω 3605

1. 악취를 풍기다,  2. 냄새를 풍기다,  3. 요한복음 11:39

발음 / 오조(ŏzō)
관련 성경 / 냄새가 나다(요 11:39)
신약 성경 / 1회 사용

요한복음 11: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고린도후서 2: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 이기게 하시고(2358) θριαμβεύω 

1. 개선행진에서 누군가를 무엇을 끌고 가다,  2. 개선하게 하다,  3. 공개적인 행진에 나타내 보이다.

발음 /  드리암뷰오(thriambĕuō) 

어원 / 제1부정과거 ἐθριάμβευσα, 2360의 어간과 680의 파생어의 연장된 합성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이기게 하다(고후 2:14), 이기다(골 2:15).
신약 성경 / 2회 사용

* 개선장군이 행진을 할 때 끌고온 노예들을 군중들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행진에 세워주는 것.

페로몬(pheromone)같은 종의 동물끼리의 의사소통에 사용되는 화학적 신호를 말한다.
체외분비성 물질이며, 경보 페로몬, 음식 운반 페로몬, 성적 페로몬 등 행동과 생리를 조절하는 여러 종류의 페로몬이 존재한다.

개미는 페로몬이라는 화학 물질을 배출해 의사소통하거나 길을 안내합니다.
개미 한 마리가 페로몬을 분비하면 다른 개미는 더듬이로 냄새를 맡아 방향을 알게 되는 식입니다.
또 다른 개미들도 이런 방법으로 앞선 개미를 따라갑니다.

이 흔적을 따라 먹이를 찾고 이를 들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기독교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배출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세상 사람들이 구원의 길로 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쓴 건 교회가 사분오열돼 사랑이 식고 용서가 사라져 복음이 변질됐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며 이들을 생명으로 인도하길 원했던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개척한 교회입니다.
하지만 그는 교회의 주인이 되길 원치 않았습니다.
분명히 자신이 설립했고 깊은 애정이 있는 교회였지만 그리스도의 사랑 외에 어떤 것도 교회의 중심이 되길 원치 않았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바울의 바람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세상에 전하고 세상이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참 생명을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참 냄새는 어떤 의미여야 할까요?
로마 황제나 장군들은 전쟁에서 승리한 뒤 포로를 끌고 오면서 시민들에게 전쟁에서 이긴 걸 알렸습니다.
이때 개선 행렬 안에 향을 피웠습니다.
개선 행렬은 사실 피비린내가 진동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마차 위에 향로를 피워 향기로 피비린내를 덮었던 겁니다.
피어나는 연기로 개선 행진을 만방에 알리는 효과도 있었지요.
개선행렬에 참여한 군인과 시민에게 마차에서 나오는 향냄새는 기쁨과 축제를 느끼게 하는 승리의 향기입니다.
하지만 끌려오는 포로에게는 죽음의 냄새이기도 하죠. 한 냄새가 두 가지 의미를 지닌 셈이죠.

교회는 다릅니다.
교회 안이나 밖에서 모두 생명의 냄새를 풍겨야 합니다.
그래서 15절에서는 그리스도의 향기(유오디아, εὐωδία)를 말합니다.

창세기 8장 20-21절a에서 노아는 제사를 지냅니다.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

여기서 나오는 ‘그 향기를 받으시고’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희생 제사로 하나님께서 향기롭게 받으시도록 제물을 태웠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냄새를 하나님께서 먼저 받으셨습니다.
이는 결국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향기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날마다 머무는 자리에서 승리의 향기를 배출해야 합니다.
이를 하나님께서 받으십니다.
또한 주변에 승리의 기쁨과 축제의 즐거움을 전하는 교회로 만들어 갑시다.

교회에서 직분을 감당하면서 나의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냅시다.
봉사의 자리에서도 내 이름 대신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냅시다.
세상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생업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향기 즉 생명의 냄새를 풍겨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내보내는 향기를 따라 기쁨과 축제 그리고 승리의 자리로 찾아 오도록 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길 원하고 추구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부자 되길 바라자는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인은 여기에 매달려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돼 생명의 냄새를 배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곧 은혜의 향기이자 선행의 향기이며 사랑의 향기를 배출하는 성도가 돼야 합니다.

우리에게 생명의 향기가 진하게 배어 나와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세상에 사랑을 전하고 사망에 이르는 이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

어느 날 순례자가 한 덩이의 진흙을 발견했는데, 그 진흙에서 놀라운 향기가 났습니다.
순례자는 그 이유를 찾아내었습니다.
이 진흙은 백합과 같이 있었던 것입니다.
진흙 속에 배어 있는 백합의 향기, 어쩌면 이런 향기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알게 하는 냄새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유명한 대학에 소아마비로 큰 불편을 겪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은 공부도 잘 할 뿐 아니라, 항상 명랑하고 자신감에 차 있었습니다.
그 비밀을 말해달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소아마비가 내 마음까지 파고든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사지는 멀쩡한데 마음의 병, 영혼의 병을 앓고 있어서 주위를 괴롭히는 사람도 많습니다.
육신의 장애는 자기만 불편한 것으로 끝나지만, 영혼의 장애는 자기는 물론 다른 사람에게 까지 피해와 상처를 줍니다.
썩은 오물이 풍기는 악취는 바람 불고 씻으면 없어지지만, 인격이 풍기는 악취는 잘 지워지지도 않고, 오랫동안 괴롭힙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게서 나오는 냄새는 어떤가요?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멀리 레바논에 가서 백향목을 가져다가 성전을 지었습니다.
백향목이란 좋은 향기가 나는 나무입니다.
모세가 성막을 지을 때도 향단이 있었고, 동방 박사들이 예수님을 경배하고자 할 때 귀한 세 가지 예물을 드렸는데 그 중에 유향과 몰약은 향기를 내게 하는 향품입니다.

또 베다니에서 마리아가 좋은 옥합을 깨뜨려서 그 향기로운 기름을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그 발을 씻으니 향기가 온 방에 가득 찼다고 했습니다.

이렇듯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향기는 거룩한 것, 사랑, 충성과 정성, 믿음의 상징으로 생각되어 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향기로 생각할 뿐만 아니라 성도와 헌금 그리고 성도의 기도 역시 향기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모든 만물에는 독특한 냄새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냄새는 특성상 퍼져 나가게 됩니다.
더구나 냄새는 그 본체를 미루어 알게 합니다.

일제 말기에 어떤 장로님이 계속 신사참배를 거부하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찾아와 신사참배 할 것을 강요하니까 참다못한 장로님은 “내가 얼마나 믿음이 없고 썩었기에 이렇게 똥파리들이 달라붙느냐”며 통곡을 했다고 합니다.
 
누군가 나에게 아주 더럽고 나쁜 유혹을 해온다면 나의 신앙을 다시 한 번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의 모습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향기가 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더러운 냄새를 풍겼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으로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요즘 같이 더운 여름철에는 여기저기에서 많은 냄새가 나는 계절입니다.
더구나 요즘 들판에 나가보면 수많은 꽃들이 향기를 풍기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통하여 예수님을 전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는 사랑으로 풍성하게 하는 향기가 되고, 기쁨으로 넘치게 하는 향기가 되고, 평화와 즐거움을 넘치게 하는 향기가 되고, 감사와 찬양을 넘치게 하는 향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위에 사는 사람들에게 불쾌한 냄새를 풍기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가는 성도에게는 당연히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경건함과 거룩한 삶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를 나는 냄새가 되는 것입니다.
꼭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고린도후서 2: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공동번역)
우리를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언제나 끼워주시는 하느님께 감사 드립니다. 또 우리로 하여금 어디에서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풍기게 하시는 하느님께 감사 드립니다.

냄새(3744) ὀσμή, ῆς, ἡ 

1. 향기,  2. 좋은 냄새,  3. 좋지 않은 냄새

발음 / 오스메(ŏsmē)
어원 / 360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냄새(고후 2:14, 16). 향기(엡 5:2, 빌 4:18).
신약 성경 / 6회 사용
* 3605. ὄζω 

1. 악취를 풍기다,  2. 냄새를 풍기다

발음 / 오조(ŏzō)
관련 성경 / 냄새가 나다(요 11:39).
신약 성경 / 1회 사용

시바 여왕과 솔로몬의 지혜   


시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사모하여 그를 방문할 때에 솔로몬의 지혜를 시험해 보기 위하여 아름다운 꽃을 심은 화분 둘을 가져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꽃들은 똑같은데 실상은 하나는 진짜 꽃이요 다른 하나는 사람이 만든 조화였습니다.
시바 여왕이 화분 둘을 멀리 갖다 놓고 솔로몬 왕에게 어느 화분이 참꽃이냐고 물었을 때 솔로몬 왕은 조금 생각하더니 신하에게 “동산에 나가서 벌과 나비 몇 마리를 잡아오라”고 하여 신하가 벌과 나비를 잡아 왔습니다.
솔로몬 왕은 “그 벌과 나비를 방안에 놓아 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벌과 나비들은 그  방에서 조금 날더니 금방 화분 있는 대로 날아가더니만 한쪽 화분에 가서 앉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에 솔로몬 왕은 웃으면서 “저 벌과 나비가 앉은 화분이 진짜 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진짜 화분의 꽃에는 향기가 있었기 때문에 벌과 나비는 향기 있는 화분을 찾아 날았던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있습니다.
모양은 그리스도인인데 그리스도의 향기가 없으면 이미 그는 가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는 성도는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식당에 가면 음식 냄새가 납니다.
병원에서는 소독 냄새가 납니다.
생선 가게에 가면 비린내가 납니다.
화장품 가게에 가면 화장품 향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쓰레기 하치장에 가면 썩은 악취로 호흡이 곤란함을 겪습니다.
그것은 온갖 채소, 과일, 생선, 음식물들이 뒤범벅되어 썩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채소나 과일이나 생선이나 음식물들이 처음부터 악취를 내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방치되고 돌보지 않아 부패되면서 부터 악취를 내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그렇습니다.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 예수님을 모신 감격과 기쁨으로 살았고, 구원의 기쁜 소식을 나 혼자만 지닐 수 없어서 그 감격과 기쁨을 표현하려고 애쓰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지금 혹시 마치 쓰레기 하치장의 썩은 악취를 내듯 나의 생활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아닌 세속적 비도덕, 비윤리, 비신앙적 삶을 통하여 악취를 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진솔한 대답으로 “나는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할 수 있는 우리들의 삶이 되기를 기도하면서 말씀을 전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15절)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여기의 “향기”는 헬라어에서 ‘유오디아’(ευωδια)라는 말인데 이 말은 구약에서 “희생 제사”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창 8:21, 출29:18, 레 1:9, 민 15:3). 
바울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복음 증거의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희생적인 제사와 같은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에베소서 5:2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향기로운”에 해당되는 헬라어 ‘에이스 오스멘 유오디아스’(εις οσμην ευωδιας)는 70인 역에서 희생 제사와 관련된 문맥에 많이 나타나는데(창 8:21, 출 29:18, 레 1:9, 민 15:3),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은 향기로운 제물임을 시사하고 성도들도 그와 같은 희생적인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향기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18에서도 “향기로운 제물”이라는 동일한 말이 나오는데 여기에서는 빌립보 교회의 바울의 필요를 체우고도 남았다는 “풍부한지라”(περισσεύω, 페릿슈오)로 연결되는데, 즉 바울의 복음 선교 사역을 돕는 빌립보 교회의 물질적 도움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의미가 부여되고 그것은 곧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을 향기로운 제물이 된다는 놀라운 뜻을 담고 있습니다.

성도가 그리스도의 향기가 됨은 바로 예수의 복은 선교 사역에서 표현되어지는 지고한 축복이며,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희생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지는 거룩한 성도의 희생적 삶에서 표현되어지는 아름다움입니다.

향기 가운데서도 고급 향기로 살아갈 것인가 싸구려 향기로 살아갈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컨대 ‘샤넬 넘버 5’(Chanel Number Five)는 전세계의 여성들에게 사랑 받는 대표적인 향수입니다.
이 향수는 장미 꽃잎 45Kg을 가지고 향수액 28g을 만들어 낸다고 합니다.
이것은 약 1.600배로 농축을 한 것입니다.
장미 꽃잎 45Kg은 대단한 양입니다.
장미 꽃잎이 그 정도 무게를 가지려면 트럭으로 몇 대는 족히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향수는 한 방울만 떨어뜨려도 하루 종일 많은 사람들의 기분을 상쾌하게 해 줄 것입니다.

인삼에서 뽑은 향기가 인삼향이고, 국화향, 모과향, 오렌지향 등도 나름대로 각각의 향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의 향기, 봉사의 향기, 전도의 향기, 성가대의 아름다운 찬양의 향기 등 각자의 독특한 향기를 나타내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싸구려 향기는 다른 사람의 속을 매쓰겁게 하고 도 아무리 많이 뿌려도 오래가지를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악취를 내는 성도의 생활을 하면서 헐뜯고, 흉보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파당을 짓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그런 사람들에게서 악취가 납니다.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싸구려 향기인 것입니다.

향수 가운데서도 고급 향수가 있고 싸구려 향수가 있듯이 성도 가운데서도 고급 신자가 있고 싸구려 신자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시체는 3일 동안 그대로 두면 썩은 냄새가 난다고 합니다.
눈을 들어서 세상을 한번 바라봅시다.
가혹한 표현일지 모르지만 걸어다니는 시체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육체가 살았다고 영혼이 살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영혼이 죽어서 온갖 악취가 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야 합니다.

두 가지 냄새(16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그리스도의 향기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 얻는 자에게 생명의 냄새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복음을 거부하는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죽음의 냄새로 나타납니다.

멸망하는”의 헬라어 ‘아폴뤼메노이스’(απολλυμενοις)
구원 얻는”의 헬라어 ‘소조메노이스’(σωζομενοις)'는 둘 다 현재 분사형으로 쓰여 그 행위에 대한 즉각적인 결과가 계속적으로 일어남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향기의 실제적 의미를 말하는 것인데 곧 그리스도의 향기는 복음의 내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이 성도들에게는 집 모통이의 요긴한 돌이 되지만 불신자들에게는 거치는 돌이 되며(마 21:42, 행 4:11),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생명의 냄새가 되지만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사망의 냄새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똑같은 하나의 냄새지만 어떤 사람은 그 냄새로 힘을 얻고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 냄새를 맡으면 죽어 버리고 맙니다.
마치 여름에 모기향을 피울 때 그 향은 사람에게는 아무런 해가 없지만 모기에게는 죽음에 이르는 냄새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꿀벌은 주인을 위해서는 꿀을 준비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독침을 줍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향기는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되지만 멸망할 사람들에는 이 냄새가 역겨워 맡기도 싫은, 그래서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복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여러분에게서 그리스도의 냄새가 나고 있습니까? 똑같은 포장이지만 비누를 쌌던 포장지는 향내가 배어 잇고 굴비를 쌌던 포장지는 비린내가 배어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들 모습에서 예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우리들의 모습에서 풍겨 나는 냄새는 맡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에게서는 무슨 냄새가 배어 나오고 있습니까?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냄새라고 했던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의 냄새가 풍겨나야함은 두말할 일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향기로서 우리는 기도의 향기를 발해야 합니다.
성도의 기도는 금 대접에 담긴 향기라고 했습니다(계 5:8, 8:3).

독일의 화가 '앨버트 듈러'의 "기도하는 손"
이 그림의 배경을 아시나요?

“하나님, 내 친구로 하여금 유명한 화가가 되게 하기 위하여 제가 이렇게 일을 해가면서 친구의 학비를 담당하였는데 이제 제 손은 엉망이 되었습니다. 이 손으로는 그림을 그릴 수 없사오니 내 친구에게 하나님 은총을 내려 주셔서 제 소원까지도 이룰 수 있도록 유명한 화가로 만들어 주소서”

그리고 우리는 믿음의 향기를 발해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향기입니다(히 11:5).
그리스도의 향기로서의 우리들은 순종의 냄새를 나타내어야 합니다.
제사보다 나은 것은 순종입니다(삼상 15:22).
그리고 헌신의 향기를 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성도의 아름다운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발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롬 12:1).
우리는 또 감사의 향기를 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의 향기도 발해야 합니다.

향기는 그리스도 안에서 발생(14절)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성도의 모든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주 안에서”(εν κυριω, 엔 퀴리오)는 성도의 기쁨과 감사와 축복의 원천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할 수 있는 향기입니다.

한 나그네가 한 덩이의 진흙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진흙에서 굉장한 향기가 발산되었습니다. 나그네는 진흙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바그다드의 진주냐?” “아니오”
“그럼 너는 인도의 사향이냐?” “아니오”
“그럼 너는 무엇이냐?” "나는 그저 한 덩이 진흙일 뿐입니다.“
“그러면 어디서 그런 향기가 나오느냐?” “나는 백합화와 함께 오래 살았습니다.”

하찮은 진흙 한 줌도 백합화와 오랫동안 함께 했을 때 사람의 이목을 끄는 굉장한 물질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한 세월은 얼마나 되었습니까?
1년? 10년? 아니면 30년?
그런 세월을 예수와 함께 살아온 사람들에게서 예수 냄새와 성령 냄새가 나지 않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입으로는 예수와 함께 했지만 실제로는 물질과, 세상과 함께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흔드는 골치 아픈 악취를 발산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좋은 매장에 손님이 다시 가고 싶은 것처럼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교회가 되면 사람들은 그 교회에 서로 오고 싶어할 것입니다.
교회가 싸움 냄새를 풍기면 구경꾼밖에 더 몰려들겠습니까?
교회가 원망과 불평의 독기를 발산한다면 교인들은 저절로 멀리 멀리 피하여 달아나게 하는 훼방꾼밖에 더 되겠습니까?

기도할 때 그리스도의 향기가 발산됩니다.
서로 사랑할 때 그리스도의 향기가 발산됩니다.
감사할 때 그리스도의 향기가 발산됩니다.
찬양할 때 그리스도의 향기가 발산됩니다.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라 했는데 고난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은 불평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향기로서 아름다운 삶을 나타내는 것입니다(아 2:2).
 
옥합을 깨뜨린 여인처럼, 내게서 소중한 것이라 생각되는 것도 주님을 위하여 깨뜨릴 수 있을 때 향유 냄새가 온 집안을 가득 채우듯 하나님의 교회가 나의 희생과 헌신과 봉사와 사랑, 그리고 그리스도의 향기로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씨시의 프란시스가 제자들과 함께 전도를 나갔습니다.
제자들은 프란시스가 큰 소리로 외치면서 복음을 선포할 줄 알았는데 프란시스는 밭에서 땀 흘리면서 김을 매는 사람에게 가서 함께 김을 매어 주고, 힘겹게 짐을 진 사람의 짐을 대신 져 주고, 그렇게 하루종일 돌아다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를 믿으시오”라고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의아해서 묻자 “우리가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 우리 인격과 삶에서 예수의 향기가 충만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사람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발산되는 것이고 그 향기를 통해서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당신은 어떠하십니까?


구약성서에 보면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제사를 받으실 때에 번제를 받으셨다.
성서에 언급된 첫 번째 번제(燔祭)는 노아의 홍수 이후이다.

“노아는 야훼 앞에 제단을 쌓고 모든 정한 들짐승과 정한 새 가운데서 번제물을 골라 그 제단 위에 바쳤다. 야훼께서 그 향긋한 냄새를 받으시고 속으로 다짐하셨다.” (창세 8:20-21)

하느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에 관한 규례를 주시면서 분향단에서 향(Franklincense, 또는 incense)을 피워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하느님은 향긋한 냄새를 통하여 당신의 제사를 받으셨다. (출애굽 30:8, 40:27, 레위기 2;1, 2;15)
구약성서에서 하느님께 제사를 지낼 때엔 향기로운 향을 피웠다.
그 뿐만 아니라 요한 묵시록에 보면 하느님 나라에서의 예배 중에서도 향을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느님은 나처럼 향긋한 냄새를 좋아 하셨나 보다.

속죄의 제사

분향단, 또는 향에 대하여 개신교 목사들이 쓴 책에는 향의 기능을 단순히 성도들의 기도라고 해석을 하였는데 이를 향의 성능과 기능을 이해하지 못한 가운데 쓴 것이다.
물론 향은 성도들의 기도를 상징하는 면이 있다.
그 외에 향은 몇 가지 기능이 더 있다.

향은 우선 아름다운 냄새를 준다.
아름다운 냄새를 통하여 좋지 않은 냄새를 멀리하고 아름다움으로 채운다.
그래서 유향은 정화의 상징으로서 사용되어졌다.
이스라엘에 재앙이 내리면 분향으로서 그것을 정화하려 했으며(민수기), 분향은 살육과 희생의 장소를 깨끗하게 해 준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분향제는 하느님 앞에서 속죄를 드리는데 효과적이라고 생각되었다.
특히 레위기 16장을 보면 속죄제에 대한 규정이 나오는데 이때에 속죄와 정화의 의미로 유향의 사용에 대하여 나온다.
대제사장은 향기가 자욱한 가운데 지성소에 들어가 피를 일곱 번 뿌리며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속죄했다(레위 16:11-19).

“야훼 앞 제단에서 숯불을 향로에 담고 향기 좋은 향가루를 두 손으로 가득 떠 가지고 휘장 안으로 들어가서 그 향을 야훼 앞에서 숯불에 피우고 향기로 증거궤 위에 있는 속죄판을 가리워야 한다. 그래야 죽지 아니할 것이다.” (레위16:12-13)

“아론은 분향단 뿔에다가 해마다 한 번씩 속죄예식을 행해야 한다.
해마다 한 번씩 속죄제물로 바치는 희생제물의 피를 발라 분향단을 정하게 하여라.
너희는 대대로 이렇게 해야 한다.
이것이 야훼께 바치는 것 중에서 가장 거룩한 것이다.”(출애30:10)

1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향단의 뿔을 위한 속죄제를 드렸으며, 7월 10일 대속죄일 하루만은 향로가 옮겨져 지성소에 들어갔다(히브리 9:4).
그러므로 향을 피워서 제사를 드리는 것은 이스라엘에서 속죄의 제사를 드릴 때에 사용하였음을 볼 수 있다.

속죄의 예식으로서 장례예식

전통적인 교회(동방정교회, 천주교, 성공회)에서는 장례예식에서 죽은 이에게까지 분향을 한다.
비록 유한한 육신은 죽었지만 하느님의 성전이었던 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생의 희망과 부활을 믿으면서 하느님께 이 죽은 사람을 맡기는 행위, 당신의 거룩함으로 받아주시고 모든 죄를 용서를 구하는 기도의 청원인 것이다.

외경 집회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주님은 모든 사람들 중에서 그를 뽑아 주님의 제사를 주관하게 하셨고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향기롭고 감미로운 분향으로 기념 제사를 드리게 하셨다.“(집회서45:16)

야곱(창세 50:2-3)과 요셉(창세 50:26)의 시체는 향료를 사용하여 미이라로 만들었을 것이고, 아사왕의 장사에는 향료와 향유가 그의 관에 뿌려졌으며(역대하 16:14), 왕가의 화장(火葬)에도 향료가 사용되었음에 틀림없다.
니고데모(Nicodemus)는 몰약과 침향 섞은 기름을 예수님의 시신에 바르려고 무덤으로 가져갔다.(요한 19:39-40)

그러므로 우리들은 장례예식에서 죽은 이에게 분향을 하는 것, 또는 향료를 사용한 것은 속죄를 위한 신앙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정화의 상징으로

집 안에서도 안 좋은 냄새가 날 땐 좋은 냄새로서 냄새를 대신한다.

예를 들면 보통 향이 있는 초를 피워서 냄새를 제거한다.
한 번은 교우 중에 한 분이 집에서 사골 국을 끓이다가 그것을 잊고 태웠다.
사골 타는 냄새가 온 집안에 베게 되었다.
냄새를 어떻게 없애면 좋겠느냐고 나의 집 사람에게 물었다.
그래서 나는 그 교우에게 교회에서 쓰는 유향을 드렸고 유향으로 냄새를 제거하라고 말씀드렸다.
아름다운 향은 냄새로서 안 좋은 냄새를 제거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냄새로서 그곳을 새로운 영적인 에너지로 변화시킨다.
아름다운 향은 그 속성으로 그 장소를 깨끗하고 정한 곳으로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향을 피우면 벌레들이 도망을 가고 모이지 않는다.
벌레들이 향의 냄새를 통해서 죽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정화의 기능이며 깨끗케 하는 의도이다.
그래서 모든 종교에서, 특히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향을 통하여 공간을 정화하는 것으로 사용하였다.
향기 있는 냄새를 피워서 하느님을 예배드리는 것, 그것은 보편적 인간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 속성이며, 인간은 향기 있는 냄새를 통하여 새로운 영적인 기운으로 인도되는 것이다.

악취가 나는 곳에서 사람들의 감정과 행동은 어떻게 반응을 할까?

우리들은 일상의 삶 속에서 자주 악취를 경험하고 그 악취의 영향을 잘 알고 있다.
미국 인디애나 대학교의 질맨(D. Zillman) 교수는 담배냄새를 가지고 사람들의 생리반응을 실험하였다.

담배냄새가 가득한 방과 냄새가 나지 않는 방을 준비해 놓고 각각 사람들의 반응을 조사하였다.
이 실험에서 실험자는 실험 참가자에게 비디오를 보고 있을 때의 생리반응을 조사한다고 말하고, 참가자의 팔에 여러 가지 기계를 연결하면서 움직이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하지만 이 실험의 본래 참가자의 화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목적이었던 터라 참가자가 팔을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실험자는 이런 식으로 화를 냈다.
“움직이지 말라고 했잖아요.
자꾸 움직이면 정확한 테이터를 뽑을 수가 없어요.
왜 지시사항에 따르지 않는 거죠?
그게 그렇게 어려운가요?”

실험결과, 참가자가 화를 내는 정도는 냄새가 나지 않는 방보다 담배연기로 가득찬 방에서 2.8배나 더 많이 나타났다.
담배연기는 화를 증폭시키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환기시설이 좋지 않은 가게, 선술집 등에서는 손님들이 난폭하게 구는 경우가 많다.
공기기 나쁘기 때문이다.
냄새에 따라 사람들은 다르게 반응하는 것이다.

바로 향은 아름다운 냄새를 통하여 그 공간을 새로운 정화의 장소로, 새로운 창조의 공간으로, 새로운 영적인 기운이 감도는 장소로 변화시킨다.
향긋한 향을 받으시는 하느님, 우리들의 어둡고 더러운 것을 태워서 아름답고 향긋한 향기로 변화시키기를 기도한다.

출애굽기 29:18
그 수양의 전부를 불사르라. 이는 여호와께 드리는 번제요, 이는 향기로운 냄새니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니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향품 만드는 비결을 가르쳐줍니다.

출애굽기 30:34-3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의 향품을 취하고 그 향품을 유향에 섞어... 향을 만들되... 그 향 얼마를 곱게 찧어 내가 너와 만날 회막 안 증거궤 앞에 두라. 이 향은 너희에게 지극히 거룩하니라.

그런데 이 향품은 너무나 거룩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서만 만들고 인간들을 위해서는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이 향품의 냄새를 맡으려고 개인적으로 만드는 자는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출 30:38) 즉 죽는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 향품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만 전용으로 쓰는 향품이므로 인간이 그 영역을 침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치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것과 비슷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하나님이 전매특허를 낸 향품입니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은 냄새에 상당히 민감하고 조예가 깊으신 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구약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꿀을 그냥은 드리되 불에 살라서 화제로는 드리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꿀을 불로 태우면 냄새가 고약하기 때문입니다.(레2:11-12) 신약 성경에서도 보면 예수님과 냄새 즉 향기의 관계를 불 수 있습니다. 누구나 그렇듯이 예수님도 향기를 좋아합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이 탄생할 때 선물로 가지고 온 것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왕권을 상징하는 황금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하는 쓰디쓴 몰약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삶을 상징하는 향기로운 유향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라는 유명인사가 예수님의 시체 썩는 냄새를 방지하려고 많은 향품을 가지고 왔습니다. 물론 여인들도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 두 사람이 나옵니다. 한 여인은 막달라 마리아라고 추측하는 여인이고(누가복음 7장) 또 한 여인은 나사로와 마르다의 동생 베다니 마리아입니다. 특히 베다니에 사는 마리아는 지극히 비싸고 귀한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드림으로써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한 여인입니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은 탄생 때 동방박사가 가지고 온 유향의 냄새를 맡으셨고, 죽으실 때에는 베다니 마리아의 나드 향유의 냄새를 맡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리스도의 향기’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향기는 과연 어떤 향기일까요? 어린 아이들이 자기 엄마와 아빠를 보고 가끔 이런 말을 합니다. “으- 아빠 냄새! 오- 엄마 냄새!” 저도 옛날 어렸을 때 추억을 더듬으면 아빠는 밖에서 술 드시고, 담배 피우시고, 안주 드시고... 뭐 그런 것들이 어울어진 비리비리한 냄새가 납니다.

그런데 엄마는 날마다 화장을 하니까 늘 향기로운 냄새가 납니다. 그래서 아빠가 들어와서 내 얼굴을 비비면 저는 얼굴을 찡그리고 말합니다. “으- 아빠 냄새!” 그러나 엄마가 가까이 와서 껴안으면 코를 벌렁거리고 냄새를 맡으며 기분 좋게 말합니다. “오- 엄마 냄새!“

그런데 예수님의 냄새는 참 특이한 냄새입니다. 두 종류의 정반대의 냄새가 납니다. 하나는 사망의 냄새이고, 또 하나는 생명의 냄새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냄새를 가장 싫어합니다. 마귀는 예수님 냄새를 맡으면 기겁을 합니다. 그러니 마귀는 예수님이 나타났다 하면 그 냄새를 맡고 일곱 길로 도망갑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있어 예수님의 냄새는 향기로운 엄마 냄새와 같습니다. 예수님의 냄새를 맡으면 우리들은 기분이 좋습니다. 이 세상의 어느 향기보다 예수님의 향기가 가장 좋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향기를 뿜고 나타나면 사망의 세력, 질병의 세력, 저주의 세력, 미움의 세력이 사라집니다.

저희 집에는 자주자주 향초를 피웁니다. 특히 김치 냉장고를 몇 번 열고나면 냄새가 집안에 진동합니다. 이때 얼마간 향초를 피우면 좋지 못한 냄새는 제거되고 향긋한 냄새가 납니다. 금요일에 보면 우리 교회에 렌트하는 알코올 그룹이 가끔 식당에서 양초를 피웁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한국 사람들은 익숙해서 잘 모르지만 아마 그들에게는 마늘 냄새, 김치 냄새가 아주 역겨울 것입니다. 물론 우리들도 서양 사람들을 가까이 대하면 그들에게서 노린내가 납니다. 꼬리꼬리한 치즈 냄새입니다. 또한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그들만의 냄새가 나고, 중국 사람들에게는 그들만의 냄새가 납니다.

오늘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냄새가 납니까? 만약 마귀가 여러분의 냄새를 맡는다면 어떻게 반응할까요? “어- 이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술 냄새, 담배 냄새, 마약 냄새, 불신 냄새, 불순종 냄새, 음란 냄새, 교만 냄새가 아닌가?” 하고 마치 똥파리가 똥냄새를 맡고 모이듯이 여러분에게 덤벼듭니까?

아니면 “어- 이거 내가 가장 싫어하는 예수님 냄새네! 에이- 저 냄새 오래 맡다간 죽겠다. 도망가자.” 하고 일곱 길로 도망갑니까? 여러분! 우리는 마귀를 예수님의 향기로 쫓아내야 합니다. 마치 스컹크가 고약한 냄새로 적을 물리치듯이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향기가 나야 합니다. 그래야 마귀가 물러갑니다.

그런데 이건 뭐 아주 요상 야릇한 냄새가 납니다. 향수에다가 똥물을 섞으면 무슨 냄새가 날까요? 시간이 있고 궁금하신 분은 한번 시험해보십시오. 요즘의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런 요상 야릇한 냄새를 풍깁니다. 말로는 예수님의 향기가 나는데 행동으로는 악취 나는 마귀의 냄새를 풍깁니다.

여러분! 주일날 우리 교회 처음 들어오면 무슨 냄새가 납니까? 일단 식사 당번이 국을 끓이는 냄새가 날겁니다. 그리고 주일날 같이 식사하고 교회에서의 모든 행사를 마치고 집에 가서 속옷을 벗고 냄새를 맡아보십시오. 속옷까지 음식 냄새가 날것입니다. 머리털은 두말할 것도 없이 냄새가 많이 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우리의 코로 맡는 냄새도 있지만 우리의 코로 냄새를 맡지 못하는 영의 냄새가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갔다 오면 마귀는 그 냄새를 알아차리고 싫어합니다. “으- 교회 냄새! 으- 찬송 냄새! 으- 기도 냄새! 으- 감사 냄새! 으- 예수 냄새!” 하며 그 집에서 더 있지 못하고 도망가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14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즉 사도 바울 일생을 통하여 하나님은 각처에서 예수님을 전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전하는 것을 예수님의 향기를 전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향기를 맡는 사람들이 “아- 향기 좋다!” 하고 예수님께 나아오면 그는 생명을 얻는 것이요, “어- 이게 무슨 악취냐!” 하고 예수님을 거절하면 그들은 사망과 지옥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다행히도 저와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냄새를 맡고 좋다고 느끼는 분들입니다. 고로 예수님의 냄새는 우리를 생명과 축복으로 이끌게 됩니다.

결론입니다. 나에게는 지금 어떤 냄새가 나고 있습니까? 세상 악취가 납니까? 아니면 요상 야릇한 냄새가 납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향기가 납니까? 만약 악취가 나거나 요상 야릇한 냄새가 나면 빨리 제거해야 합니다. 회개의 기도로 씻어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의 향수를 날마다 뿌려야 합니다. 그래서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사랑을 풍성히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향기

첫째는 복음의 향기
둘째는 생명의 향기


온갖 냄새 중에 좋은 냄새를 향이라고 합니다.

예로부터 향은 사람들에게 유용하게 사용되어져 왔지요. 사람들이 선호하는 향이라면 아마도 꽃에서 나는 냄새 즉 ‘꽃향기’일 것입니다. 향기가 나는 꽃 곁에는 항상 벌과 나비 등 곤충들이 모여듭니다. 그래서 꽃은 향수의 주원료가 됩니다.

사람에게도 풍기는 각자의 냄새가 있지만, 인품이 훌륭한 사람에게서 풍기는 좋은 향기가 있습니다. 좋은 향기가 나는 사람이라면 더 가까이하고 싶고 자주 만나고 싶어지게 됩니다. ​

본문 14절에,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 하여 '냄새'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가 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냄새를 내는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이기게 하십니다.

이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란 어떤 것인지 함께 알아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복음의 향기입니다.

15절에,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

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로 하나님 앞에서 풍기는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풍기는 즉 복음의 향기를 전했던 것입니다. 그는 사역을 하면서 인간적으로는, 교회들에 대한 걱정, 동역자의 안부에 대한 염려 등, 골치 아픈 일들로 많은 고심꺼리가 있었겠지만,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는’ 기쁨이 넘쳤다는 것입니다.

여기서‘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언제나 끼워주시는’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자기 자신을 당시 로마 군대의 개선식에 참여한 군인에 견주어 표현한 것입니다.

세상에는 갖가지의 기쁜 일들이 있지만, 전쟁을 이기고 개선하는 장군이나 용사의 기쁨에 견줄만한 것이 또 있을까요?

개선장군과 병사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본분을 다해서 나라를 지켰고 국민을 보호하는 사명을 다 한 자긍심과 함께, 전리품과 포로들을 앞세우고 로마로 개선합니다. 그 개선 군을 환영하는 로마시민들은 온 거리에 향을 피웠습니다. 승리의 기쁨을 그 향냄새와 함께 온 도시 구석구석에 퍼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쁨과 함께 퍼지는 향기와 같이, 성도들이 어디를 가나 풍기는 냄새가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리스도의 지식을 다른 사람에게 알게 해 주는 향기입니다. 즉 성도는 어디를 가든지 만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즉 복음의 향기를 풍겨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을 향기가 전해지는 것으로 비유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는 사람은 항상 승리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의 복음 전도의 현장은 전쟁터였습니다.

목숨이 경각에 처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항상 보호해 주심으로 복음은 전해졌으며 영혼 구원의 열매가 열렸던 것입니다. 성도가 풍기는 냄새 역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여야 하며, 생명으로 인도하는 향기이어야 합니다. 이 향기를 세상에 나타내는 것이 성도의 사명이요, 전도자의 사명이며 보람이고 또한 복음의 승리인 것입니다.

이 승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항상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도우심을 받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당한다할지라도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바로 그런 기쁨이 늘 가득 넘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는 것이, 세상 사람들, 불신자들의 눈에는 고생을 사서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매사에 이기는 재미가 있음을 오늘 본문은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이기는 재미에 산다는 것을 모든 성도는 각자가 먼저 체험을 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향기를 풍기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에 향수를 먼저 발라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즉 향기의 근원이 될 만한 것이 자기 몸에 먼저 배어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참다운 개선장군이신 그리스도와 늘 동행한다면,

-예수 안에서 사는 즐거움을 누리며,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보람을 가지고,

-겉으로는 그저 고생만 하는 것 같고, 좁은 길로만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에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승리의 길을 가는 감격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나 자신도 모르게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젖어 그리스도의 향기, 복음의 향기를 많이 풍기는 성도가 되어 있게 될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15절에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라고 합니다.

향기란 것은, 원래 한 가지 냄새만 풍기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같은 향기일지라도 그 맡는 사람에 따라서 달리 느껴질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개선식에서 피운 향 역시 그것을 맡는 개선군과 로마시민들의 코에는, 하나같이 승리에 도취된 기쁨의 향기이겠지만, 패잔병인 포로들에게는, 치욕과 고통을 더해주는 역겨운 죽음의 냄새일 것입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향기라 함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이며 동시에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복음의 향기를 전하는 전도자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막3:14). 그리고 복음 전도는 주님의 명령입니다(마28;19,20).

그리스도께서 함께하는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의 성품, 그리스도의 모습,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타납니다. 성도의 언행을 통해 전달되는 복음의 향기를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천국의 영생을 가져다주는 생명의 향기가 되지만, 그 향기를 거부하는 불신자들에게는 지옥의 심판을 불러오는 죽음의 냄새가 되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로 예수님께서, 요3:36절로 자신을 가리켜 스스로 증거하시기를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향기는 그 누가 맡아도 다 향기로운 향기가 결코 아닌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향기를 그저 아무에게나 무조건 좋은 냄새만 나도록 만들려고 하는 자들이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설교에 천국을 언급하면서도 지옥을 결코 언급하지 않는 목회자 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하는 목사 들입니다.

-신명기 28장은 68개의 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행하면 복을 주신다고 3절에서 14절까지 11개절로 말씀하시 지만, 만일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말씀 이 15절로 68절까지 임으로 54개의 절로 언급하고 있음에도, 복 주신다는 11개절만 설교의 주 메뉴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類)의 설교는 불신자들이 들어도 조금도 기분 나쁘지 않는 말, 망하는 자들이 들어도 조금도 ‘사망의 냄새’가 나지 않는 말, 무조건 좋은 게 좋다는 식의 말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설교, 어느 누구에게나 기분 좋은 냄새만 풍겨 주는 그런 말들이 정말 향기로운 복음 같지만, 오히려 정반대로써 사실상 교인들의 영성을 말리는 것임을 우리는 똑바로 직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그 맡는 사람에 따라서, 천국 영생의 향기와 지옥 영벌의 냄새로 다르게 느껴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진짜 복음의 향기가 가진 본질이요 특성인 것입니다.

비유로 한 가지 들자면,

청국장의 냄새를 맡는 사람에 따라서 어떤 사람에게는 그 냄새가 그리운 고향의 아련한 향기요, 어머니의 냄새 같은 구수하고 맛있는 냄새이지만, 그 맛을 모르는 사람이나 이방인들에게는, 코를 틀어막고 고개를 돌리며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악취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청국장이 가진 특성인 것입니다.

이런 청국장을 모든 사람이 먹기 좋게 만든다고 그 고유의 냄새를 없애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청국장 고유의 냄새에 코를 틀어막든 사람이 조금 맛을 보게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청국장의 원 맛을 알고 애용하던 사람들에게는 그것은 청국장이 아니므로 변질된 맛에 실망한 나머지 고개를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도를 하면서,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

는 말을 했을 때 그 말을 듣고 기분 나빠하고 욕하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조금도 당황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게 되어 있는 하나님의 택한 자들에게 천국 영생을 느끼게 해 줄 이 지극히 좋은 향기를 풍겨야 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먼저 체험한 그리스도를 간증하고 늘 부지런히 자랑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그리스도의 좋은 향기를 풍기는 성도되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생명의 향기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모든 사람에게 미칩니다. 그 향기를 맡아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본문 16절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복음의 향기는,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냄새요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사망으로 인도하는 냄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증거하는 복음의 이중적인 면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복음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지만 그 복음을 거부한 자들에게는 곧 심판입니다. 그래서 복음 안에는 생명과 사망, 구원과 심판이 동시에 나타납니다.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누가 이런 사명을 수행할만한 자격이 있느냐?’라는 뜻입니다.

​과연 어떤 사람이 이런 진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길 수 있을까요?

과연 어떤 사람이 천국 구원을 선포하면서 동시에 지옥 영벌을 경고하는 이 진짜 복음 전파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요?

17절에 그 적격자와 부적격자를 각각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 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는 사명을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자격 미달자들이 사도 바울 시대에 “수다하게”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바로 ‘하나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자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진리 그 자체에는 아무 관심 없고 다만 젯밥에만 마음이 있는 자들이 예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제멋대로 요리해 왔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안에 들어와 있던 거짓 교사들은, 마치 정직하지 못한 상인들이 포도주에 물을 섞어 팔듯이 하나님 말씀에 불순물들을 첨가시킨 자들이었습니다.

유대 율법주의와 헬라 철학을 성경 말씀에 섞어 넣음으로써 복음의 진수를 왜곡시켰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는 성도는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전파한다고 바울 사도는 밝힙니다.

당시 사도들은 복음을 전파함에 있어서, 인간적인 욕심이 전혀 섞여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답게 순전한 복음의 향기를 전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17절 말미에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고 확신에 찬 표현을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자신이 영적으로 연합한 상태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명품 향수는 가격이 비싸지만 다른 보다 저렴한 향수에 비해서 향기가 훨씬 더 좋을 뿐만 아니라 조금만 뿌려도 좋은 향기가 오랫동안 지속되는 것입니다. 만일 불순한 생각을 가진 자가 양을 늘리기 위해 다른 액체를 넣어 희석시켜 만든 짝퉁향수라면 그 향기와 효능은 확실히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복음을 전할 기회가 있으면 순수한 복음만을 전해야 합니다. 영혼을 구원받아 천국시민이 되는 것이 목적인 것이지 이 땅에서 보다 잘 살기 위해 예수 믿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전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게 되는 사람도 많이 있지만, 불신자들에게 반감을 주지 않고 자연스럽게 전도하는 방법이 바로 성도가 자기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이 최고급 향수를 자기 자신에게 먼저 뿌려 놓고 그래서 자연히 각처에서‘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즉 만나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 사람에게서 나는 냄새는 다른 교인들에게서 나는 냄새와는 다르구나!!!’라는 느낌을 가지게 만드는 향기이어야 합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는 향기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향기입니다.

성도도 이 향기를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성도는 이 향기를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라면 항상 그리스도의 향기로 충만해야 합니다.

어디에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죽은 영혼을 살리고 병든 영혼을 고치며, 낙심한 영혼이 소망을 얻는 역사가 나타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혼잡하게’ 만들어서, 싸구려로 파는 삯군들이 설치는 이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조해 놓으신 이 고귀한 복음을 하나님께 받은 그대로 100퍼센트 순수하게 지키면서, 자신의 인격과 생활을 통해 늘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만을 풍기는 여러분 모두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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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8-2022(수)

성령의 보증(고린도후서 1:22)

보증(아르라본) ἀῤῥαβών
ἀῤῥαβών, ῶνος, ὁ  728

1. 첫 분납금,  2. 보증금,  3. 공탁금

발음 / 아르라본(arrhabōn)
어원 / 히브리어 66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보증(고후 1:22, 5:5,  엡1:14).
신약 성경 / 3회 사용

명사 - 첫 분납금, 보증금, 공탁금(물건에 대한 권리나 계약을 유효하게 만들기 위해서 미리 가격의 일부를 지불하는 것을 의미한다. 상징적으로도 사용됨) , 고후 1:22, 5:5, 엡 1:14.

* 662. ἀποτολμάω 

1. 담대히 ~하다,  2. 감히 ~하다,  3. 로마서 10:20

발음 / 아포톨마오(apŏtōlmaō)
어원 / 575와 511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담대하다(롬 10:20)
신약 성경 / 1회 사용

* 575. ἀπό 

1. ~으로부터,  2. ἀπάγεσθαι,  3. 마태복음 27:24

발음 / 아포(apŏ)
관련 성경 / ~부터(마 1:17).
신약 성경 / 646회 사용

* 5111. τολμάω

1. 감히 ~하다,  2. 할 마음이 들다,  3. 용기가 있다

발음 / 톨마오(tŏlmaō)
어원 / 제1부정과거 ἐτόλμησα, τόλμα ‘담함’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담대하다(고후 11:21), 감히~하다(마 22:46, 막 12:34, 유 1:9), 당돌히~하다(막 15:43), 용감히~하다(롬 5:7),
담대히~하다(고후 10:2, 빌 1:14).
신약 성경 / 16회 사용

위로. παράκλησις, εως, ἡ 3874

위로. παράκλησις, εως, ἡ 3874

1. 격려,  2. 간청,  3. 위로

발음 / 파라크래시스(paraklē- sis)
어원 / 387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위로(눅 2:25, 행 9:31, 롬 15:4, 5, 고후 1:3, 행 4:36), 권면(빌 2:1, 살전 2:3, 히 13:22).
[동] 권하다(행 13:15, 딤전 4:13, 히 12:5), 위로하다(행 15:31, 고후 1:4, 롬 12:8), 권면하다(고전 14:3).
신약 성경 / 29회 사용

의뢰하다. πειθώ  3982  

의뢰하다. πειθώ  3982

1. 확신을 가지게 하다,  2. 설복하다,  3. 끌어들이다.

발음 / 페이도(pĕithō)
관련 성경 / 권하다(마 27:20, 행 13:43, 고후 5:11), 신뢰하다(마 27:43, 빌 1:14, 3:4), 믿다(눅 11:22, 행 26:26, 롬 2:19), 인정하다(눅20:6), 따르다(행 5:36, 37, 롬 2:8), 옳게 여기다(행 5:40), 화목하다(행 12:20), 권면하다(행 18:4, 19:8), 권유하다(행 19:26), 순종하다(히13:17), 확신하다(롬 8:38, 고후 2:3, 빌 2:24), 의지하다(고후 1:9, 히 2:13).
신약 성경 / 52회 사용

거룩함. ἁπλότης, ητος, ἡ  572   

1. 단순함,  2. 관용,

발음 / 하프로테스(haplŏtēs)
어원 / 57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성실함(롬 12:8, 엡 6:5, 골 3:22), 거룩함(고후 1:12), 풍성한 연보(고후 8:2), 너그러운 연보(고후 9:11), 후한 연보(고후 9:13), 진실함(고후 11:3).
신약 성경 / 8회 사용

명사 단순함, 순진, 소박, 성실, 정직, 솔직, 고후 1:12, 11:3, 엡 6:5, 골 3:22.
          관용, 관대, 롬 12:8, 고후 8:2, 9:11,13, 11:13


진실함. εἰλικρίνεια, ας, ἡ  1505  

1. 순수,  2. 순전,  3. 고전 5:8

발음 / 에이리크리네이아(ĕilikrinĕia)
어원 / 150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순전함(고전 5:8, 고후 2:17), 진실함(고후 1:12).
신약 성경 / 3회 사용

은혜. χάρις, ιτος, ἡ  5485

1. 우아함,  2. 은총,  3. 은혜로운 행위

발음 / 카리스(charis)
어원 / 546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은혜(눅 1:30, 행 4:33, 몬 1:3), 칭찬(눅 6:32, 34), 칭송(행 2:47), 은총(행 7:10), 호의(행 25: 3), 은사(고후 9:15), 기쁨(몬 1:7), 아름다움 (벧전 2:19, 20), 사랑스러움(눅 2:52), 감사(눅 17:9, 롬 6:17, 고후 8:16, 골 3:16).
신약 성경 / 156회 사용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성령의 보증은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보증금(保證金) Deposit

중요한 상거래를 할 때에 상대방이 약속을 어기지 못하도록 보증금을 걸거나 보증인을 세웁니다.

예를 들면 집을 구할 때 그냥 “이 집 사겠습니다” 하고 말로만 한다고 계약이 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보증금을 걸고 말을 해야 계약이 유효해지기 시작합니다.
성령의 보증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에 대하여 모두 책임을 져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씻음을 받아 변화가 되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붙잡게 되면 성령께서 그에 따른 보증을 해주십니다.
우리 모든 삶을 붙들어주시고 책임지고 인도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보증을 어디에다가 주실까요?
마음 안에 주십니다(고후 1:22).
성령의 보증의 역사가 우리의 내적인 마음의 상태에서 시작됨을 알려줍니다.
아무리 돈이 많거나 환경이 풍요해도 마음이 슬프면 인생이 괴롭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문제가 있고 환경이 어려워도 내 마음이 기쁘면 인생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귀신이 들리게 되는 것은 미움이나 분노 그리고 나쁜 생각 악한 생각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생각을 완전히 포기하고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스스로 자신의 인격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우리의 마음에 기쁨과 평강을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은혜를 보증해주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성령께서 임하시면 우리 마음에 .매였던 결박들이 다 끊어지고 자유롭게 됩니다.
염려와 근심이 사라지고 불안과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천국의 기쁨과 평강을 보증해 주십니다.

둘째는 선불(先佛) prepayment

선불이란 “미리 지불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기도를 통하여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고 진리의 말씀을 통하여 인침을 받게 되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하늘의 영광과 축복을 미리 맛보게 해주십니다.
선불은 이미 나의 것이 된 것입니다.
나머지 돈은 나중에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와 성경공부와 성도의 교제와 다양한 섬김을 통하여 하늘의 기쁨과 축복을 체험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풍성한 기업과 유산을 깨닫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주님은 천국 시민권을 가진 성도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특권과 영광을 미리 맛보게 하십니다.
이것은 성령의 보증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성령의 보증이 우리 마음에 있게 되면 힘든 상황 속에서도 불안하거나 두렵지 않습니다.
어떤 고난과 어려움이 와도 흔들리거나 쓰러지지 않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담대하게 하시고 견고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날부터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삶을 보증하기 시작하셨고 이 보증하심은 매일 매일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상황이 절망적이라고 느낄 때마다, 성령의 보증하심은 우리 마음을 소망으로 가득차게 합니다.
내가 연약하다고 느낄 때, 성령의 보증하심은 나에게 매일 새로운 용기를 부어줍니다.
내가 믿음이 식어지고 떨어지려고 할 때 성령께서는 새로운 믿음을 보증해 주십니다.
내가 사랑이 없어 답답해할 때 성령님을 의지하면 성령께서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보증해 주십니다.
성령께서 내 마음에 하나님의 은총을 부어주셔서 나의 마음을 천국으로 만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성령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보증을 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4).
성령의 역사는 예수님을 증거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어떤 힘든 상황에도 낙심 절망하지 말고 성령의 보증으로 담대함과 확신을 갖게 되시길 축원합니다.

성령의 보증 세 가지

첫째, 보증금(保證金)(고린도후서 1:21-22) 

21.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22.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21 ὁ δὲ (And the one) βεβαιῶν (confirming) ἡμᾶς (you) σὺν (with) ὑμῖν (us) εἰς (in) Χριστὸν (Christ) καὶ (and) χρίσας (having) ἡμᾶς (us) Θεός ([is] God.)

22 ὁ (And the one) καὶ σφραγισάμενος (sealing) ἡμᾶς (us) καὶ (also) δοὺς (giving) τὸν (the) ἀρραβῶνα (pledge-money) τοῦ (of the) Πνεύματος (Spirit) ἐν (in) ταῖς (the) καρδίαις (hearts) ἡμῶν (of us.)

헬라어 원문은 네 가지 분사가 사용되고 있다.
‘굳건하게 하시고’ - 베바이온(βεβαιῶν) 
‘기름을 부으시고’ -  크리사스(χρίσας)
‘인치시고’ -  스프라기사메노스(σφραγισάμενος)
‘주시고’ -  두스(δοὺς)

분사들의 주어는 하나님이시다.
즉 하나님이 굳건하게 하시고, 기름을 부으시고, 인치시고, 성령을 주신다.
하나님은 기름을 부어 인치신다.

도장을 찍는 목적이 무엇인가?
너는 내 것이라는 것을 표시하기 위하여.

옛날에는 말이나 소 같은 가축에 도장을 찍어 자기의 소유를 나타내었다.
물론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 양에게 그럴 필요가 없었지만 거기다가 성령을 보증금 ἀρραβῶνα(pledge-money)[알라보나] τοῦ(of the) Πνεύματος(Spirit)으로 주셨다.

보증금(알라보나, ἀρραβῶνα. pledge-money)은 페니키아의 상업용어로서 이것이 βεβαιῶν(confirming)와 함께 쓰여 구속력이 있는 법적 용어로 사용된다.
보증이라는 법적 용어를 사용하여 우리의 구원이 확실한 것임을 보장하는 것이다.

성령은 구원의 보증만 아니라 우리가 받을 기업의 보증이 되신다(에베소서 1: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14. ὅ (which) ἐστιν (is) ἀρραβὼν (an earnest) τῆς (of the) κληρονομίας (inheritance) ἡμῶν (of us) εἰς (in) ἀπολύτρωσιν (the redemption) τῆς (of the) περιποιήσεως (possessing) εἰς (into) ἔπαινον (the praise) τῆς (of the) δόξης (glory) αὐτοῦ (of him.)

보증(금)은 미래에 온전히 받을 것에 대한 일부를 현재에 받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앞으로 온전히 받게 될 구원과 기업을 이 세상에서 누리게 하신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우리가 험악한 세상을 어찌 견딜 수 있으랴.

둘째,  양자(養子)(로마서 8:15) adopted son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5. οὐ γὰρ (For not) ἐλάβετε (you received) πνεῦμα (a spirit) δουλείας (of slavery) πάλιν (again) εἰς (to) φόβον (fear,) ἀλλὰ (but) ἐλάβετε (your received) πνεῦμα (a spirit) υἱοθεσίας (of sonship) ἐν (in) ᾧ (which) κράζομεν (we cry out) Ἀββᾶ (Abba) ὁ Πατήρ (Father.).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자녀, 요한은 양자라는 단어보다 어린 자녀, 테크니온(τεκνίον)이란 단어를 사용)가 된 것이다.
양자라는 단어는 5번 나타나는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양자가 된 것은 특권이었다(출 4:22).
그런데 성령은 양자 됨을 우리에게 증거하시는 영이시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시기를 좋아하셨고, 예수님에게 부여된 어떤 호칭보다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기뻐하셨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조차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유일하신 자’ μονογενής[모노게네스] (우리 성경에는 독생자로 번역)로서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셨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아들(자녀)이 되었다.
당시 법으로 양자는 친자와 차별 없이 자식의 권리가 주어졌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자녀)이 되었다는 것은 이런 뜻이 있다.

로마서 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εἰ δὲ (And if) τέκνα (sons) καὶ (and) κληρονόμοι (heirs,) κληρονόμοι (heirs) μὲν Θεοῦ (of God,) συνκληρονόμοι δὲ (and joint heirs) Χριστοῦ (with Christ) εἴπερ (if indeed) συμπάσχομεν (we suffer together) ἵνα (then) καὶ (also) συνδοξασθῶμεν (we be glorified together.)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 συνκληρονόμοι(joint heirs) Χριστοῦ(with Christ)’가 된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해졌나?
그것은 바울 신학의 특징인 ‘그리스도 안에서’(그리스도와의 일체 一體 의미하는것) 가능해진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계 21장)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양자가 되어 상속자가 된 것이 더 영광스럽다.

셋째, 첫 열매(고린도전서 15:20) first fruit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Νυνὶ δὲ (But now) Χριστὸς (Christ) ἐγήγερται (has arisen) ἐκ (out) νεκρῶν (of the dead.) ἀπαρχὴ (The first fruits) τῶν (of those) κεκοιμημένων (having fallen asleep.)

‘첫 열매’ 아파르케(ἀπαρχὴ) 출 23장이나 신 26장을 근거를 하고 있는 표현이다.
이것은 앞으로 추수할 소출을 대표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성도들도 예수님처럼 부활하게 될 것을 대표하는, 보증하는 사건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키심으로 우리에게 같은 소망을 가지게 하신다.
이것을 성령께서 보증하신다.

로마서 8: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신 분은 다름 아닌 성령이시다(롬 1:4).
예수님을 부활의 첫 열매로 일으키신 바로 이 성령께서 우리의 부활을 보증하시고 우리를 죽음에서 일으키실 분이 바로 성령이시다.

결론적으로 성령께서는 우리의 구원의 보증,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 됨, 그리고 부활을 보증하신다.

성령의 보증을 받은 성도의 삶

타인의 보증을 잘못 서 주어 엄청난 재산상 피해와 정신적 패해를 입는 경우가 많다.
부자간, 친척 간, 동료가 어쩔 수 없는 인정이나 관계 때문에 보증을 섰다가 패가망신을 당하는 경우가 흔하다.
인간이 인간의 보증을 선다는 인간 세계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그러나 성령께서 인침을 받은 택한 백성의 영원한 보증이 되신다.

고린도후서 1:21-22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를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의 마음에 주셨느니라.

고린도 후서 5:5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성령의 인침과 보증의 의미는 무엇인가?
누가 성도를 보증해 주시는가?
성도들은 과연 어떤 보증을 받는 것인가?
누가 보증을 받을 수 있는가?
성령의 보증을 받은 자의 삶은 어떻해야 하는가?
보증자 되신 성령님을 어떻게 하면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겠는가? 

첫째, 성령의 인침과 보증의 의미

성령의 인침은 성령님 즉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된 자라는 표식이다.
하나님의 권세가 함께 하는 자라는 증거이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가 함께 하고, 하나님께 대한 의무가 뒤따르는 자라는 의미가 있다.
성령의 보증이란 이러한 인침을 받은 자에 대한 구속의 날 까지 성령께서 책임을 져 주신다는 의미이다.
성령의 인침은 성령의 보증의 근거가 되고, 뒤집어 말하면 성령의 보증이 성령의 인침의 결과라는 말이다.
성령의 인치심은 과거 내지 현재적 사실이라면 성령의 보증은 하나님 앞에서의 미래적 사실에 대한 보장이다.

우리가 예전에 양복점에 가서 옷감을 고르고 몸의 치수를 재고 선금을 얼마만큼 지불한다.
그러면 영수증에는 중간에 마름질한 옷을 대충 꿰매서 입어 보는 날짜를 적고 선금과 잔금의 액수가 기록되며, 그 날 선택한 양복이 바로 이런 계통이라는 뜻으로 양복지 일부를 잘라 붙인다.
바로 이 양복지 중 일부를 잘라 붙인 영수증이 최종적으로 입고 다니게 될 양복에 대한 보증이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현재적 인치심은 바로 미래에 이루어질 성도들의 구원에 대한 성령님의 보증이 되신다는 말이다.
성령의 보증을 이미 받은 성도들이기에 구원과 축복과 상급과 부활이 확실한 것이다.

둘째, 누가 성도를 보증하가?

성도들에게 성령을 부으신 분은 성부 하나님이시다.
성도들에게 인을 치신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미래에 대한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다.
성도가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바로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확실하고도 든든한 보증이다.

우리가 토지를 매입할 경우에 거래가 성사되면 그 땅을 앞으로 완전하게 소유하게 된다는 보증으로 그 땅에서 가장 좋은 흙을 떠 주었다던 옛 선진들의 거래가 의미가 있다. 또한 어떤 작농 중에 있는 밭을 살 경우에도 거래가 이루어지면 그 밭에 있는 제일 좋은 곡식이나 열매의 일부를 보증으로 주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이 또한 미래에 우리가 누리고 받을 영광과 축복에 대한 보증과 증거가 되신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리고 성령안에 있다는 것만큼 보장이 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도들에게 성령님을 통하여 보증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영원불변 하신 분이시다. 영원토록 그 신실하심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시다. 끝까지 약속을 지키시고 계신다. 그 하나님이 영원히 살아 계셔서 대대로 통치하신다. 그런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이시다.

셋째, 성도들은 어떤 보증을 받는가?

 1. 영원한 구원의 보증(히브리서 5:9)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성령님을 통한 인침을 받고 새생명을 얻은 성도는
① 영원한 형벌에서 구원을 얻는다(살후 1:8~9).
② 눈물과 고통에서 영원한 구원을 얻는다(계 21:3~4)
③ 영원한 지옥불 속에서 영원한 구원을 얻는다(계 20:6).
④ 악한 마귀에서부터 영원한 구원을 얻는다(계 20:10).

2.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가 되는 보증(로마서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그리스도처럼 고난을 받지만 천국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의 후사가 될 것을 보증하신다.

3. 썩지 않을 부활의 보증(고린도전서 15:42~44)

성령은 주를 믿는 사람은 주님처럼 썩지 않을 부활의 몸을 입을 것을 보증해 주신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4. 영원한 안식처를 보증(고린도후서 5:1~5)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나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집, 하나님이 지으신 집에 거하는 보증을 얻는다.

육신의 몸을 입고 사는 우리를 흙집이라고 한다면 부활의 영광스러운 몸은 대리석 집이 될 만큼 엄청난 차이를 갖는다.
이 놀랍고도 영원한 천국 집에 거하는 보증으로 하나님은 성도의 심령 속에 성령님을 부어 주셨다.

요한계시록 21:1~7에 보면 성도는 그들의 영원한 기업으로 천국을 얻게 된다고 밝히고 있다.
천국은 하나님이 만드신 집이요 영원히 새로운 집이요 영광의 집이다. 또 주님과 함께 사는 집이며 거기 에서는 오직 기쁨과 감사만이 늘 있을 것이다. 더욱이 그 집에 거하는 자들에게는 절대 사망이 없고 밤이 없으며 애통이 없는 집이다. 예루살렘 성과 같이 빛나고 수정같이 맑으며 금으로 된 성과 그 성곽은 벽옥으로 장식되고 성의 기초석은 열두 보석으로 되어 있다.

좌우에 생명수 강이 흐르고 그 강의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어 달마다 열두가지 실과를 맺는다. 생명과 찬양과 기쁨이 넘치는 성이다. 눈물, 애통, 죽음이 없고 죄와 악과 고통, 그리고 어둠이 없다. 태양 빛 대신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비추는 영원한 낮의 세계로 성도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 성령님이 보증해 주신다.

5. 영광스런 상급을 보증

천국에 가면 이 세상에서 주님을 위하여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의 상급이 있다.
그것은 주를 위해 이 땅위에서 수고한 자에게 보상되는 면류관과 영광이다.
① 의의 면류관이 있다(딤후 4:7~8).
② 영광의 면류관이 있다(벧전 5:4)
③ 생명의 면류관이 있다(계 2:10)
④ 영광의 상급이 있다(고전 15:40~41)

넷째, 누가 하나님의 보증을 받을 수 있나?

1.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듣는 사람이 성령의 인치심을 받고 그 인침을 받은 자가 보증을 받는다(엡 1:13)

약속의 성령의 인치심을 받을 자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말씀을 전하는 일과 그 말씀을 듣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른다. 말씀은 살아 있다. 말씀에는 중생케 하는 힘이 있다. 말씀이 성령님과 함께 역사 하시기 때문이다. 말씀이 바로 살리는 도구이다.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말씀을 들을 때 역사가 일어나 죽었던 영혼이 살아난다.

2. 복음을 믿는 자가 바로 성령의 인치심을 받고 그 인침을 받은 자가 바로 보증을 받는다(엡 1:13).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서 끝나지 않고 말씀을 영접하고 말씀을 믿을 때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듣고, 그 말씀 안에 거하며, 그 말씀을 믿으면 말씀은 살아서 역사 할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에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 하느니라”“라고 증거하고 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면 거듭날 것이다. 거듭나는 역사는 바로 말씀과 성령으로 되어지기 때문이다(요 3:5)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자는 바로 거듭나게 된다. 이것은 바로 성령의 세례를 받은 자요 또한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자인 것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 즉,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 자는 그 증거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 로 부르게 된다. 로마서 8장 15~16 절에 “너희는 양자의 영을 받았으니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시나니” 라고 밝히고 있다.

다섯째, 보증을 받은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성령님은 어떤 사람도 또한 그 무엇에 의해서도 결코 자신을 받기를 강요하지 않으신다.
그는 불신자들에게 구원을 받도록 강요하거나 압력을 행사하지 않으신다.
또한 신자들에게도 굳이 성화되도록 강요하는 일이 없다.
그러나 성도가 죄를 범할 때 성령님은 크게 슬퍼하신다.
성도가 죄를 지을 때 그는 역사하지 않으시며 괴로워하신다.
성도들이 성령님을 오해하고 잘못 대하거나 상처를 주고 그 앞에서 교만하며 세상과 타협할 때, 그의 감동하심을 거부할 때 그는 깊은 근심을 하게 된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자신들의 생각대로 스스로의 고집대로 제 감정대로 나아갈 때 매우 안타까워하시며 슬퍼하신다. 우리가 성령님을 거절할 때도 그는 우리를 너무나 돕고 싶어하신다. 동행하기를 원하신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주님 뜻대로 살기를 원하신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

에베소서 4:30
우리는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다.

그러기에 우리의 영적, 도덕적 수준과 행위가 온전하지 못하다고 성령님이 우리를 떠나가시는 것은 아니다.
그는 결코 우리를 버리시지 않는다.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존전에 설 때까지 우리를 보호하시는 은혜의 보혜사 이시다.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님의 내주를 통해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가야 할 성령님의 목표를 거부한다면,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높이고 주님 중심의 삶을 사는 것을 거절한다면 성령님의 인도하시고 견인하시는 역사는 일시적으로 중지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① 성령님은 영광의 영이시다(벧전 1:14)
그러므로 우리가 높아지려고 교만하고 우리가 영광을 받으려고 한다면 성령님은 근심하게 되신다.

② 성령님은 생명의 영이시다(롬 8:2)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으로 연약해지고 영적인 성장이 중지되고 옛성품에 따라 살 때 성령님은 슬퍼하신다.

③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다(요 14:17) 
그러므로 어떤 거짓, 사기, 비판은 성령을 근심하게 만드는 것이다.

④ 성령은 믿음의 영이시다(고후 4:13)
그러므로 의심하고, 믿지 못하고, 걱정하고, 고민하는 것은 성령을 근심케 하는 것이다.

⑤ 성령님은 은혜의 영이시다(히 10:29)
그러므로 냉랭하고, 비참하고, 인색하고, 용서치 않고, 사랑하지 않는 것은 성령님을 근심케 하는 것이다.

⑥ 성령님은 성결의 영이시다(롬 1:4)
그러므로 불결하고, 음란하고, 비열한 것은 성령님을 근심케 만드는 것이다. 죄로부터 분리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로의 회귀를 원하신다.

⑦ 성령님은 지혜의 영이시다(사 11:2, 출 28:3)
그러므로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어리석은 자들과 동행하는 것은 성령님을 근심케 하는 것이다.

성령님을 근심케 하는 성도의 삶의 모습을 성경은 매우 구체적으로 에베소서 4장에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새생명의 영이신 성령의 역사로 인치심을 받고 영광과 구속과 부활을 보장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이 옛 구습을 쫓고 육신의 소욕대로 산다면 우리 안에 내주 하시고 우리를 살리시고 인치시고 보증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방해하고 근심케 하고 괴롭혀 드리게 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40년의 긴 여정 속에서 그처럼 수없이 범죄 했지만 결코 그들을 떠나지 않으셨고 그의 성막을 옮기지도 않으셨다. 그렇다 지금 우리의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므로 성령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는 않으신다. 그러나 그는 우리와 교제하지 않으시고 교통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성령님을 슬프게 해드리면 우리는 기쁨이 사라지고 삶에 생기가 없어지며 슬픔과 어두움과 무기력과 무의미가 우리를 압도하게 된다.

또한 성령님은 우리가 계속적으로 죄를 짓도록 허락하지 않으신다. 주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영적인 자유를 허락하셨다. 그러나 그 자유를 죄를 짓는데 사용한다면 성령님은 매우 마음 아파하시고 그 분이 주신 자유의 의미를 가치 없이 저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성령 안에서 주신 자유는 죄로부터의 자유, 죽음으로부터의 자유, 옛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율법과 양심과 사탄으로부터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유가 오히려 죄, 죽음, 옛 속박, 사탄을 위한 자유가 된다면 이 얼마나 주님의 구속 사역에 배치되는 일이 될 것인가? 어떤 자라도 계속적으로 범죄하며 산다면 그것은 그가 영적으로 죽어 가고 있다는 결과를 드러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을 통하여 몸의 죽은 행실을 죽이게 된다면 영적인 생명을 다시 회복할 것이다.

여섯째, 보증자 되신 성령님을 어떻게 하면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겠는가?

1. 우리가 범죄로 성령님을 근심케 해 드릴 때, 지체 말고 말씀의 거울 앞에 서서 우리 안에 있는 죄를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 고요히 나아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고 토설하면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자비와 긍휼과 인애가 풍성하신 주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깨끗하게 해 주시고 회복의 기쁨을 주실 것이다.

성령님을 다시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은 오직 한가지 길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가 지은 죄를 자백하는 길이다. 오늘의 현대인들은 죄를 자백하라, 회개하라는 설교를 제일 싫어한다. 목회자들도 그런 설교에 부담을 느끼는 성도들을 의식한 나머지 거짓 축복과 평안만을 빌기를 좋아한다. 그리되면 주님은 매우 슬퍼하시고 마귀는 너무나 좋아할 것이다. 실지로 우리 한국 교회 내부적인 상황이 그런 사실들을 증명해 주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많이 빌어 온 우리들의 평안은 지금 다 어디로 갔나? 쌓을 곳이 없도록 내려진 축복들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이야말로 회개하고 돌이켜야 할 때이다. 그것도 너무나 시급히 행해져야 할 과제들이다. 좌우를 둘러보기 전에 먼저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회복의 용광로 속으로 집어넣어야 한다.

성도들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그리고 성령님과의 원활한 교제를 이루고 성령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길은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 자백하는 길밖에 없다. 자백을 힘들어하는 것은 그만큼 죄의 수렁에 깊이 빠져 있다는 증거이다. 자백을 싫어하는 것은 그만큼 마음이 교만한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고백하고 회개치 않는 다면 그는 그만큼 마음이 강퍅해졌기 때문이다. 인간은 죄를 지을 때 다 무신론자가 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죄 가운데서는 자기 자신만을 신앙하기 때문일 것이다.

죄를 자백한다는 것은 결국 영적 싸움이기에 용이한 일이 아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더욱 힘들다. 성령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라. 우리는 죄를 고백하지 않고 숨기려 할 때 결코 형통하지 못할 것이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2. 죄에 대하여 민감해야 한다.

철저히 죄에 대하여 민감해야 한다. 혹여시 연약해서 범죄할 경우는 성령께서 탄식하시며 근심하시고 계신다. 이 때, 범죄한 죄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철저하게 회개해야 한다. 대충 회개하거나 적당히 회개하거나 미루어서는 안된다. 죄는 하나님과 단절, 자신과의 단절, 이웃과의 단절, 물질과의 단절을 가져 온다. 죄는 하나님과의 신령한 교통을 막아버린다. 아름답게 자라던 꽃나무에 비치는 햋볕은 차단하면 서서히 말라 죽는다. 죄는 하나님과의 은혜의 빛을 차단한다. 영혼의 시들어지고 만다. 하나님의 관계가 단절되고, 영적으로 무기력해지고, 생명의 빛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성령의 보증을 받은 성도,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은 철저히 죄에 대하여 민감해야 한다.

3. 하나님의 용서를 믿음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

요한일서 1장 7절에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용서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죄의 확신을 가지고 믿음으로 자백하면 그 순간 성령님은 더 이상 근심하지 않으시고 또한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동에서 서가 먼 것같이 사하여 주시고 기억도 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하나님과 막혔던 관계가 회복되어 지고 새로운 은혜의 생활을 하게 된다.

4.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우리가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아들이고 성령님과 교제가 회복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최선의 방책은 계속해서 성령님의 충만과 지배를 받는 것이다. 계속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성령님께 자신을 맡긴다는 구체적 의미가 무엇일까? 디모데전서에 보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자신의 영적 삶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바람직한 영적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이렇게 권면하고 있다.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 4:16). 쉽게 표현하자면 영적인 삶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그 영적 양식을 계속적으로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에베소서 5장 18절의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
골로새서 3장에서는 말씀이 지배하는 삶을 살라
그러므로 우리가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정기적으로 성경을 공부하는 일이 영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는 올바른 비결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뭇상하며 그 말씀을 자신의 삶 가운데 적용하는 자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쫓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게 된다” 고 말씀하고 있지 않는가.

성도가 어떤 어려움에 처했을지라도 성령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철저히 깨닫고 매일 매 순간 마다 우리 구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성령님을 의지하고 살 때 우리 속에 성령님의 역사는 더욱 활발해지고, 바로 그 때 우리의 삶은 힘과 기쁨이 넘치며 소망을 가지고 충만하게 될 것이다.

더욱이 성령님의 인치심을 받은 성도는 안정과 확신과 즐거움을 누리며 살게 된다.
그리고 참다운 내적 안식과 위로와 평화와 감격이 넘치게 된다.
그러나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성도가 죄를 범하게 될 때 사랑의 하나님이신 성령님은 근심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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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저자 :
고린도후서 1장 1절은 고린도후서의 저자를 사도 바울로, 그리고 아마 디모데와 함께 그 서신을 쓴 것으로 알려줍니다.

저작 연대 :
고린도후서는 주후 55-57년경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기록 목적 :
고린도 교회는 주후 52년에 바울이 두 번째 선교 여행을 하면서 거기에 방문했을 때 시작되었습니다.
그 때 그는 그곳에서 1년 반을 머물렀는데 그가 원하던 곳에서 그렇게 오래 머문 것은 처음입니다.
이 방문과 교회 설립에 관한 기록은 사도행전 18장 1-18절에 나와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고린도 교인들이 그의 ‘엄중한’ 편지(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를 긍정적인 태도로 받아들인 사실에 대해 안도와 기쁨을 표현합니다. 그 편지는 교회를 분리시키는 문제들, 또한 바울의 성품을 비난하고 신자들 사이에 불화를 심고, 거짓 교리를 가르치면서 자찬하는 (거짓) 사도들의 출현(고후 11:13)을 주로 다루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진실성(고후 1:15-17)과 언변(고후 10:10, 11:6), 그리고 그가 고린도 교회의 지원을 받아들이기를 꺼려하는(고후 11:7-9; 12:13)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듯 하였습니다. 또한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 방탕한 삶을 회개하지 않은 몇몇 사람들도 있었습니다(고후 12:20-21).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그의 ‘엄중한’ 편지를 잘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긍정적으로 여겼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의 대다수가 바울을 대적한 일에 대하여 회개한 것을 디도를 통해 알고는 매우 기뻐하였습니다(고후 2:12-13; 7:5-9). 이에 바울 사도는 진정한 사랑의 표현으로 그들을 격려합니다(고후 7:3-16). 바울은 또한 교회의 일부 사람들이 그의 권위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자신의 사도직을 옹호하였습니다(고후 13:3).

핵심 구절 :

고린도후서 3: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고린도후서 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후서 10:5,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고린도후서 13: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요약 :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에게 안부 인사를 하고 왜 그가 원래 계획대로 그들을 방문하지 못하였는지를 설명한 다음(고후 1:3-2:2) 바울은 그의 사역의 성격을 설명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승리와 하나님 앞에서의 신실함은 교회에 대한 그의 사역의 특징이었습니다(고후 2:14-17).
그는 그리스도 의의 영광스러운 사역을 율법의 “정죄의 직분”(고후 3:9)과 비교하면서 강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사역의 타당성을 선언합니다(고후 4:8-18).
5장은 기독교 신앙의 바탕, 곧 신자의 새로운 본성(고후 5:17)과 그리스도의 의와 우리의 죄의 교환을 요약합니다(고후 5:21).

6장과 7장에서 바울은 자기 자신 및 사역을 옹호하고, 또한 고린도 교인들에게 다시 한 번 그들에 대한 진실한 사랑을 확신시켜 주면서 회개와 거룩한 생활을 권고합니다.
8장과 9장에서 바울은 고린도 신자들에게 마게도니아에 있는 형제들의 본을 따라 도움이 필요한 성도들에게 풍성하게 베풀라고 권합니다.
그는 그들에게 은혜로운 연보의 원리와 보상을 가르칩니다.

바울은 그들을 향한 그의 권위를 다시 언급하면서 서신을 마칩니다(10장).
그는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거짓 사도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실함을 보여줄 것을 당부합니다.
그는 부득불 자신의 사도 자격과 그리스도를 위한 그의 고난을 자랑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자신을 "어리석은 자"라고 부릅니다(11장).
그는 자신이 체험한 천국의 환상과 겸손을 놓치지 않도록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육체의 가시"를 언급함으로 서신을 마칩니다(12장).
마지막 장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들의 믿음이 진짜인지 확인하도록 권한 후 그들에게 사랑과 평강의 복을 빌어주는 것으로 서신을 마칩니다.

연결 :

바울은 모세의 율법을 자주 언급하면서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및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의 놀라운 위대함과 비교합니다.
고린도후서 3장 4-11 절에서 바울은 구약의 율법과 은혜의 새 언약을 대조하면서 성령은 생명을 주는 반면 율법은 ‘죽이는 것’이라고 언급합니다.
율법은 단지 죄와 그 심판을 깨닫게 하기 때문에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직분”(고후 3:7; 출 24:12)일 뿐입니다.
율법의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것이지만 성령의 사역은 율법을 성취하신 그리스도를 주신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와 사랑을 나타내기 때문에 율법의 사역보다 훨씬 더 영광스럽습니다.

적용 :

이 서신은 바울 서신서 중에서 가장 전기적이며 가장 교리가 적습니다.
이 서신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사도인 바울이 사역자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어떤 사람인지 더 많이 알려줍니다.
우리는 이 편지에서 몇 가지를 끄집어 내어 오늘날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 중 한 가지는 돈뿐만 아니라 시간에 대한 청지기 정신입니다.
마게도니아 사람들은 관대하게 연보했을뿐만 아니라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습니다"(고후 8:5).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주께 바쳐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 전체를 바쳐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돈이 필요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전능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섬김을 바라고 기뻐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원하십니다.
청지기 정신 및 하나님께 바치는 연보는 단지 돈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수입의 일부를 십일조로 바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칠 때 우리에게 복을 베푸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더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100 %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모든 것을 바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존재 전체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우리의 아버지를 섬기며 지내야 합니다.
우리는 월급을 받은 후 연보로 하나님께 드려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가 그분을 나타내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을 주님께 바친 후, 그 다음에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 사역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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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고린도후서를 공부하는가?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있는 교회 회원들에게 보낸 이 서한은 고난 가운데서도 위안을, (바울 자신이 본보기가 되었듯이) 약한 것들 가운데서도 힘을, 거짓 교사들 사이에서 참된 교사를 분별하는 것을 주제로 다룬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고린도후서에 기록된 바울의 모범과 가르침은 여러분이 마주한 상황이나 결과에 관계없이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맺은, 영원한 성약에 참되고 충실하도록 영감을 줄 것이다.

누가 고린도후서를 기록했는가?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이 서한을 썼다(고린도후서 1:1).

고린도후서는 언제, 어디에서 기록되었는가?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쓴 직후에 에베소에서는 그의 가르침에 반대하여 소동이 일어났으며(행 19:23-41), 그는 마게도냐로 떠났다(행 20:1, 고후 2:13, 7:5).
그가 마게도냐에 있는 동안에 고린도후서를 쓴 것으로 보이며, 그 시기는 대략 주후 55년에서 57년으로 추정된다.

고린도후서는 누구를 위해, 왜 기록되었는가?

고린도후서로 실리게 된 이 서한은 고린도에 있는 교회 회원들을 위해 기록되었다.
바울이 제3차 선교 여행을 하던 시기에 마게도냐에 있는 동안, 디도는 바울이 앞서 보낸 서한을 고린도 성도들이 잘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고후 7:6-13).
고린도의 교회 지부는 발전하고 있었으나, 바울은 그곳에 그리스도의 참된 교리를 부패시키고 있는 거짓 교사들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바울은 처음으로 고린도를 방문한 이후에, 아마도 두 번째로 방문했을 때(고후 1:15-16) 성도들 중 일부를 질책했던 것으로 보인다(고후 2:1, 12:21).
예루살렘 지역 출신이었던 그 일부 설교자들은 고린도로 와서 그곳 성도들에게 유대인의 관습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바울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고린도후서의 많은 부분이 이 거짓 교사들이 일으킨 문제들을 다루는 내용이다.

바울의 서한은 그의 말씀을 더 듣고자 했던 사람들과(고후 1-9장),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했던 사람들 모두를 위해 기록되었다(고후 10-13장).
대체로 고린도후서에는 이 서한의 몇 가지 목적이 다음과 같이 드러난다.

이전에 보낸 서한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 성도들에게 감사를 표현하고 그들을 강화한다.
그리스도의 순수한 교리를 부패시킨 거짓 교사들에게 경고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자신의 성품과 권세에 대해 변론한다(고후 10-13장)
고린도 성도들에게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후한 헌금을 하도록 권한다(고후 8-9장) \

고린도후서에는 어떤 뚜렷한 특징이 있는가?

바울의 서한 중 다수가 교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반면, 이 서한에서는 대체로 자신과 고린도 성도들과의 관계와 그들에 대한 자신의 사랑과 염려를 강조한다.
바울은 자신을 비난하는 이들에게는 굳건하게 맞섰지만, 한편으로 그는 성도들의 행복과 안녕을 염려하는 애정 어린 신권 지도자였음이 고린도후서 전체에 걸쳐서 나타난다.
그는 또한 자신의 삶에 대한 몇 가지 상세한 내용을 자전적으로 서술했으며, 자신이 지닌 “육체[의] 가시”에 대해 썼다(고후 12:7).

고린도후서 12:2-4에  나오는 성스러운 경험에 대해 기록하면서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으로 묘사했으며,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들었다고 설명했다.
이 시현은 앞서 그가 부활체마다 영광의 차이가 있다고 했던 교리적 언급과 더불어 볼 수 있다(고전 15:35-44)

개요

고린도후서 1-5장

바울은 하나님께서 온갖 고난을 겪는 당신의 자녀들을 위로하신다고 간증한다.
성도들에게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라고 당부한다.
복음과 주님의 영이 하는 일은 모세 율법의 조문보다 더 영광스러운 것이다.
역경을 겪는 독자들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이 영원함을 상기시킨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해야 함을 이해하도록 돕는다.

고린도후서 6-13장

바울은 거짓 교사들의 비난과 반대에 맞서서 주님의 종으로서 자신의 진실성을 변론하고 독자들에게 세상에서 분리되라고 권고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에 대하여 가르친다(고후 7:10).
고린도 성도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금한 것에 대해 감사를 전하고, 그들에게 계속해서 후하게 헌금할 것을 권고한다.
“거짓 사도들”에게 강력히 반박한다(고후 11:13).
주님 안에서 자랑하며, 자신이 겪은 고난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자전적으로 상세히 전한다.
셋째 하늘에 대한 시현을 기록하고, 성도들에게 스스로를 살피고 자신의 충실함을 증명하라고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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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09 / 09 / 2022 - 09 / 26 / 2022)


고린도교회를 행하여 기도하며 4번에 걸쳐 그들에게 편지하고 방문하여 권면하고 꾸짖으며 그들을 바로 세우려한다.

첫 번째편지 : 전해지지 않음
두 번째편지 : 고린도 전서
세 번째편지 : 전해지지 않음
네 번째편지 : 고린도후서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고린도 지역 지형에 위치한 최고의 상업 도시로서 로마 속령인 아가야(Achaia)의 수도이다.
하나님의 사도 바울이 교회의 소재를 고린도로 밝히는 서두의 글은 하나님이 지역 교회를 사랑하고 있음을 나타내 준다.
로마의 역사가 중 스트라보(Strabo) 파우사니아스(Pausanias)는 고린도 도시에 대한 유일의 기록을 남기고 있는 데 내륙이 약 3.2km의 아크로 고린도 해안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바울이 이 편지의 수신인을 서두에 분명히 명기하고 있는데, 이들은 바울이 친히 세운 교회의 교인들이며 해상에서 동서가 피차 만나고 있는 까닭에 상업과 해운업이 발달하였다.
또한 육로로는 남북이 만나지는 특수 지역이므로 그리스 굴지의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이전에는 이곳이 로마에 대하여 항거하는 대표적 도시 중의 하나가 되기도 하였는데 B.C.14년무미우스(L. Mummius)가 이끄는 군대에 의하여 초토화되기도 하였다.
상업이 번창한 까닭에 성도덕이나 윤리 수준이 형편 없는 곳이기도 하였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고전 1:2).

바울은 그가 개척하여 설립한 고린도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라고 불렀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그의 제2차 선교 여행 때(A.D. 50, 51) 1년 6개월 동안 체류하면서(행 18:11) 개척 설립한 교회
이 교회는 그 도시의 타락상 만큼이나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뜨거운 애정을 가지고 그들의 윤리적, 종교적 문제에 대하여 깊은 신앙적 통찰력으로 때로는 엄격하게, 때로는 자애로운 언어로 교훈하고 권면했습니다.

* 사도행전 18:11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고린도 교회가 어떤 교회였는가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역사적 배경 

고린도 시

고린도는 로마 제국의 한 통치 구역인 아가야 도의 수부로서 총독이 주재하고 있던(행 18:12) 정치적, 군사적, 상업적 중심지었습니다.

"갈리오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이 도시는 헬라 본토(발칸 반도)와 그 남쪽에 큰 섬처럼(현재는 1893년에 완성된 고린도 운하로 완전한 섬이 됨) 매달려있는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잇는 지협에 위치한 도시로서 동쪽 12km 지점에는 에게해 연안의 겐그리아 항구(롬 16:1)와 서쪽 2km 지점에는 아드리아해 연안의 레카이움 항구를 끼고 있는 항구 도시였습니다.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남북으로 육로를 연결하고 동서로는 해로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이러한 지리적 요건은 이 도시로 하여금 아테네, 스파르타와 함께 정치적, 군사적, 상업적 도시 국가로 번창하게 만들었습니다.
고린도는 이들 고대 헬라의 도시 국가들의 맹주 역할을 했었으나 로마군에 의하여 파괴되었다가(B.C.146) 100년 후에 줄리어스 시이저(Julius Caeser)에 의하여 재건되었습니다.
20만 명의 자유인과 40만명의 노예로 구성된 이곳 주민은 대다수의 희랍인과 로마인들이 주축이었으며, 소수의 유대인들과(행 18:1-17) 지중해 연안의 각국에서 모여 든 상인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헬라의 다른 도시들처렴 고린도도 다신교적 우상 숭배가 성행했고(행 17:16) 아프로디테(Aphrodite) 신전에는 1,000명의 여사제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종교적 창녀들이었습니다.
고린도는 음란과 방탕의 도시로서 헬라에 있어서의 '허영의 거리'라고 일컬어졌습니다.
이러한 타락상은 고린도 교회 안에 침투되어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설립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제2차 선교 여행 중에(A.D. 50, 51) 1년반 동안 고린도에 머물면서 설립한 교회입니다(행 18:1-11).
이에 앞서 전도한 아덴에서 전도 효과를 별로 얻지 못한 바울은 고린도에 와서 전력을 다해 전도한 것처럼 생각됩니다.
다행히 로마에서 이주해 온 유대인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나 같은 직업인 천막 깁는 일을 하면서 주로 안식일에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전도했습니다(행 18:1-4).
그 후 실라와 디모데가 이에 합류해씁니다(행 18:5).

바울은 고린도 전도 중 유대인들에 의하여 총독에게 고발되었으나 갈리오 총독이 유대인들의 종교적 문제라 하여 재판을 기각시켜 버렸으므로 무사했습니다(행 18:14-17).

예루살렘 교회가 마가, 요한의 집에서 시작된 것처럼 고린도 교회는 디도 유스도의 집에서 시작됐습니다(행 18:7-11).
그후 고린도 교회는 많은 문제로 바울을 괴롭혔으나 바울을 뜨거운 애정을 가지고 이 교회를 돌보았습니다(고전 4:14,15).

고린도 교회의 윤리적 상황

1. 내적 분쟁

고린도 교회 안에는 그들에게 신앙적 영향을 준 사람들을 따라 분파가 생겼습니다.
① 바울이 이 교회를 개척했으므로 고린도 교회의 주류였을 것으로 생각되며
② 아볼로파는 성경에 능통하고 웅변적이었으므로 지적인 교인들이 이를 따른 것 같고
③ 게바(베드로)파는 예루살렘 등지에서 예수의 수사도인 베드로에게 감화를 받은 유대인 중심의 그룹으로 이해됩니다.
④ 그리스도파는 어느 파에도 초연한 입장을 취한 자들로, 배타적이며 독선적인 그룹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고전 1:11, 12).
바울은 이러한 파당적 분쟁을 단호히 부정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각 사역자는 있을지라도 분파는 있을 수 없음을 강조했습니다(고전1:13-17   고전 3:4-9).

2. 윤리적 상황

고린도 교회는 근친 상간의 음행이 있었고(행 5:1).
성도들끼리 세상 법정에 송사하는 도덕적 무질서가 있었으며(행 6:1-8),
독신 생활자와 이혼자, 재혼자 등 결혼 생활에 대해서도 매우 난잡했으므로 바울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성서의 교훈과 도덕적 규범에 따라 상세히 지도함으로써 고린도 교회의 정결을 도모했습니다.

3. 고린도 교회의 종교적 문제

고린도는 우상 숭배의 도시였으므로 우상의 제물이 시중에 범람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성도들의 신앙 생활에 문제가 되었으며(고전 8:1-10:33),
공중 예배에 있어서 여자의 머리에 쓰는 수건의 문제(고전 11:1-16),
성령의 은사에 대한 무질서(고전 15:1-58)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종교적 문제에 대해서도 심오하면서도 구체적인 지도를 함으로써 고린도 교회에 대한 그의 목회자적 정열을 보여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고린도 교회의 논란에 대해서도 그는 끈기 있게 논리 정연한 필치로 그의 사도로서의 권위를 옹호했습니다(고후 1:15-17,  고후 10:1-13:10).

4. 고린도 교회의 긍정적 측면

고린도 교회는 이러한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교회였으나 그들은 매우 지적으로 우수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각종 은사에도 부족이 없는 영적으로도 풍족한 은혜를 소유한 교회였습니다(고전 1:4-7).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헌금을 하는 봉사 정신도 가지고 있었으며(고전 16:1-4), 아가야 지방에 있어서의 복음의 요람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 

바울이 복음을 전한 지방임(행 18:1-8)
음란과 우상 숭배가 만연함(고전 5:1)
은혜가 풍성한 교회로 성장함(고전 12:9)

1. 고린도 지방

a. 아가야의 상업 도시임
  ㉠ 아가야의 수도(고후 1:1)
  ㉡ 총독 갈리오가 다스림(행 18:12)
  ㉢ 아가야 지방의 첫 개종자느 스데바나임(고전 16:15)

b. 바울이 교회를 세웠음
  ㉠ 바울의 2차 전도 여행 중 방문한 도시임(행 18:1)
  ㉡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의 도움으로 재정적 지원을 얻음(행 18:2)
  ㉢ 하나님의 교회를 세움(고전 1:2)
  ㉣ 믿는 무리를 성도라 일컬음(고전 1:2)

c. 고린도 지방의 윤리적 상황
  ㉠ 근친 상간이 성행함(고전 5:1)
  ㉡ 죄를 등한히 여기지 않음(고전 5:2)
  ㉢ 우상 숭배가 만연함(고전 10:7)
  ㉣ 부도덕함(고전 5:1-7)
  ㉤ 웅변과 철학이 성행함(고전 1:5)

2. 고린도 교회의 종교적 상황

a. 당시의 신앙 생활
  ㉠ 성령의 존재를 알지 못함(행 19:2)
  ㉡ 부활의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음(고전 15:12)
  ㉢ 교우의 송사를 불의한 자들 앞에서 행함(고전 6:1)
  ㉣ 시기와 분쟁이 있음(고전 1:11)
  ㉤ 주의 성찬을 무질서하게 행함(고전 11:20-22)
  ㉥ 네 개의 파로 나뉨

① 바울파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이므로 추종함(롬 11:13)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고린도 교회의 설립자이므로 추종함(행18:14) 이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1절)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4절)

② 아볼로파  
아볼로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하므로 추종함(행 18:24)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③ 게바(베드로)파  
유대인 사도로서 추종함(갈 2: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④ 그리스도파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거만을 중요시함(고전 1:11-13)
이는 다름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12절)

b. 교회의 분쟁에 대한 바울의 권면
  ㉠ 악한 사람을 내어 쫓으라(고전 5:13)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 자기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전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 주 안에서 결혼하라(고전 7:39)
  아내가 그 남편이 살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 교회에서 하나님의 질서에 순종하라(고전 11:16)
  변론하려는 태도를 가진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규례가 없느니라
  ㉤ 성찬에 참예하기 전에 자신을 살피라(고전 11: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 하나님께 얻은 대로 연보하라(고전 16:2)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 받은 은사대로 봉사하라(고전 12: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3. 고린도 교회의 발전

a. 모든 은혜가 풍성함(고후 8:7)
b. 성령이 충만함(고전 12:9)
c. 방언의 은사를 받음(고전 12:10)
d. 지혜와 지식의 축복을 받음(고전 12:8)

고린도교회에 서신을 쓴 계기

바울이 A.D.50년경(49-51년)에 고린도에 가서 복음을 전함으로 고린도 교회를 창설하였다(행 18장).
바울은 고린도에서 18개월간 복음을 전한 후에 에베소에 있을 때에 고린도전서 ‘이전의 편지(Previous Letter)'를 고린도에 보냈던 것 같다(고전 5:9).
바울이 어떤 계기로 그 편지를 썼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편지는 탐욕과 강도와 우상숭배와 아울러 특별히 신자들 중에 성적인 부도덕에 빠진 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룬 내용이었다.
바울은 그 후에 A.D. 53-54년경 에베소에서 고린도전서를 써서 고린도에 보냈다(16:8).
그렇다면 바울이 왜 고린도전서를 써서 보냈을까?

바울은 글로에의 집 편으로 고린도 교회에 분쟁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1:11).
고린도 교회에는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등 분파들이 있었고 그들 사이에 분쟁이 이었던 것이다.
바울은 또한 고린도 교회로부터 편지를 받게 되었다. 결혼과 독신에 대한 질문과 우상의 제물에 대한 질문이 그 편지의 내용이었던 것 같다(7:1, 8:1).
고린도 교회의 편지는 에베소에 있는 바울을 방문한 고린도 교회의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를 통해서 바울에게 전달된 것 같다(16:17).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다룬 내용 중에 어느 부분이 말로 들은 것에 대한 편지이고 어느 부분이 고린도에서 온 편지에 대한 회신인지 1-4장의 내용, 즉 글로에의 집 편으로 들은 내용과 편지로 문의한 7-10장의 내용을 제외하고는 확인하기 쉽지 않다.
어쨌건 바울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로부터 들은 내용과 편지로 받은 내용은 고린도 교회의 분파 문제(1-4), 간통 문제(5장), 세상법정 고소 문제(6장), 결혼과 독신 문제(7장), 우상제물을 먹는 문제(8-10장), 공예배와 성찬식 문제(11장), 영적인 은사 문제(12-14장), 육체적인 부활 문제(15장)등이었다. 바울은 이러한 사회적, 윤리적, 교회적, 신학적 문제에 대해 신학적이고도 실제적인 해결책을 고린도전서에 기록했다. 특별히 신학적으로 볼 때 고린도전서는 분파문제를 십자가의 복음으로 해결함으로 시작해서 육체적 부활을 부인하는 문제를 육체적인 부활을 증언하는 것으로 해결함으로써 끝나는 서신으로 상당한 의의가 있다.

3. 고린도의 바울 반대자들

고린도후서 2장 1절에서 바울은 “내가 다시 근심으로 너희에게 나아가지 않기로 스스로 결단”했다고 했다.
이 말씀은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보내기 전에 고린도 교회에 ‘근심의 방문(Painful visit)'을 한 것을 암시해 준다.
바울이 ’근심의 방문‘을 한 것을 통해 그 방문 이전에 이미 고린도 교회 안에 상당한 문제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고린도후서 10-13장에서 언급된 대로 고린도 교회에 외부인들이 침입해 들어와서 바울을 대적하고 고린도 교회를 혼란하게 했다는 증거가 고린도전서에는 강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9장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가 복음을 전하면서 거기서 나오는 것을 먹고 마실 권한을 언급하다가 12절에서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라고 했다.
여기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너희”라고 하고 바울과 바나바 등을 포함한 복음 사역자들을 “우리”라고 하면서 외부에서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자들을 “다른 이들”이라고 했다.
고린도 교회에는 이렇게 외부로부터 들어와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외부인들이 바울을 대적하고 고린도 교회를 혼란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지만, 고린도전서에서는 고린도 교회 자체 내에서 바울을 대적한 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바울이 4장 18절에서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라고 했는데, 이것은 고린도 교회 안에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여 바울의 권위를 약화시키면서 교만을 부리는 자들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바울은 15장 12절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 했다.
바울이 분명히 고린도 교회에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했음에도 불구하고(15:1-4)고린도 교인들 중에서 “어떤 이들”은 육체적인 부활을 부인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고린도 교회의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바울이 전한 복음에 도전했음을 보여준다.
4장 18절과 15장 12절을 보면 고린도 교회 안에 사도인 바울 자신과 바울이 전한 복음에 대해서 도전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린도전서에서는 고린도의 바울 대적자들이 고린도후서에서처럼 바울을 공개적으로 대적한 단계에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바울에 대한 적대관계는 소수에 의해서 시작되어 점차 악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1:12; 4:3, 6, 18-20; 9:3; 10:29-30; 14:37; 15:12)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의 사도적 권위와 복음에 도전한 자들은 고린도의 헬라 -로마 문화권과 바울이 전한 복음 진리 간의 괴리 때문에 도전한 것으로 보인다.
고린도 교회는 복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헬라-로마 문화권에서 중시하는 ‘로고스’와 ‘소피아’와 ‘그노시스’를 종래와 같이 중시한 결과 십자가의 복음, 즉 세상적으로 미련해 보이고 무능해 보이는 십자가의 ‘로고스’를 경시했던 것 같다(1:18-2:9).
고린도 교회는 “모든 구변”(‘로고스’)과 “모든 지식”(‘그노시스’)과 “모든 은사”를 풍족하게 받았는데(1:5-7), 그것을 십자가의 복음과 통합하지 못하고 세상적인 웅변화 지식 면에서 생각하면서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바울과 그 복음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고린도 교인들이 헬라적 웅변과 지혜의 각도에서 보았을 때에 바울에게는 그런 것이 부족했던 것이다(2:1-5).
그들이 헬라-로마 문화에서 자랑하는 지도자의 웅변과 지혜와 명예 면에서 볼 때 “만물의 찌끼”와 “세상의 구경거리”같은 십자가와 이에 걸맞는 십자가의 복음 사역자 바울은 초라하게 보였을 것이다(4:6-13).
그들은 스스로 이미 성령을 받아 하나님 나라가 실현된 상태에서 다스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4:8)(“과도실현”종말론, “영화 종말론”)바울은 초라하기 짝이 없으니 십자가의 복음과 십자가 복음의 사역자를 이해하지 못한 그들이 바울과 바울이 전한 복음에 대해 도전한 것이다.
사실 ‘로고스’와 ‘소피아’와 ‘그노시스’와 ‘프뉴마’(성령)가 교만과 자랑의 요인과(4:6, 18; 5:2; 8:1) 고린도 교회안에 분파와 분쟁의 요인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바울과 바울이 전한 복음에 대해 도전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바울이 9장에서 자신의 사도권을 강력하게 변화한 것도 “바울을 힐문하는”, 즉 재판자리에 앉아 바울을 재판하는(9:3)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의 사도권을 무시한 대적자들은 심지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문제에 있어서도 유일하신 하나님만 계시고 우상들은 없다는 ‘그노시스’(지식)에 근거하여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다고 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신전에서 제사과정 중 하나로 우상제물을 먹는 잔치 행사에 참석하여 그 음식을 먹는 것도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주장한 것 같다(8-10장).
바울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에 있어서도 자신의 사도권이 무시되는 것을 염두에 두고 9장에서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했던 것 같다. 바울은 그러면서도 자신은 자신의 사도권을 자신의 자유와 권한을 누리고 행사하기 위해서 사용하지 않고 어찌하든지 사람들을 구원하는 방향에서 사용하기 위해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자유로운 자신이 모든 사람들의 종이 된다고 한 것이다.

바울이 9장에서 언급한 사도권, 즉 복음을 전하는 자가 복음을 전함으로써 거기서 나오는 것을 먹고 마실 수 있다는 것을 언급할 때 어쩌면 고린도 교회의 부자 신자들의 후원을 염두에 두었는지도 모른다.
고린도 교회의 일부 부유한 신자들은 고린도 교회를 후원할 뿐 아니라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등 분파 형성의 배후에도 후원자들로 있었을 것이다.
고린도 교회 안에 라이벌 가정교회들이 따로 있고 그런 후원자들이 각 분파의 가정교회를 후원했을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교인들을 후원한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런 후원자들이 볼 때 바울은 자신들의 후원을 거부하기 때문에(고후 11:7-11) 그들 속에 반(反) 바울적 심리가 생겨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그런 상황 속에서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하면서 그것을 구원의 복음 전파를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는 말을 하였을 것이다.
고린도교회에서 바울에게 도전한 자들은 위에서 말한대로 ‘성령’ 문제에 있어서도 자만심을 가졌던 것 같다.

바울은 14장 36-37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고 했다.
고린도 교인들 중에 성령의 은사들을 받은 자들이 자신들만이 신령하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심지어 바울까지도 무시하는 경향을 보였던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그렇게 교만하여 자신의 사도적 권한을 무시하는 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고 한 것이다.
고린도 교인들은 앞서 지적한 대로 성령의 은사들을 받은 것이 마치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완성된 것처럼 생각하고 자신들은 그 완성된 천국에서 다스리는 자들인 것처럼 행세하면서 교회 안에 혼란을 초래했던 것 같다.
그들은 특별히 방언의 은사를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하나님께서 은사를 한 사람에게 다 주시지 않고 각 신자에게 분배하신다는 것과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그 지체들의 덕을 세우는 것이 은사의 목적임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12-14장). 

본문에는 세 종류의 사람들

1. 유대인(22절) -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 / 기적을 좋아하는 신앙
2. 헬라인(22절) - 지혜를 찾는 사람들 / 지식 및 지성인
3. 십자가인(24절) - 부르심을 입은 자들  / 십자가를 자랑하는 신앙 

세 부류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자신들의 독특한 눈과 시각을 가지고 십자가를 보고 있습니다.

첫번째 유대인

유대인들은 이성으로 논리를 추구하는 것을 좋아하기보다는 신앙으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기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22절에서 헬라인은 지혜를 추구하지만 유대인들은 표적을 찾는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기다릴 때에도 메시야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진짜 메시야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척도도 메시야로서의 표적을 행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는 유대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전혀 메시야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분입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규하면서 하나님께 원망하면서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신 예수를 메시야라고 볼 수가 없지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메시야는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로마를 뒤집어 엎어 버리고 이스라엘의 영광을 되찾아 주는 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기대를 우리 주님 예수에게서 유대인들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범죄자의 한 사람으로 수치스럽게 맥없이 나무 위에서 죽었던 나사렛 출신의 목수를 유대인들이 어떻게 메시야로 믿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두번째 헬라인

헬라인이란 혈통적으로 그리스인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와 지식을 숭상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요즈음 말로 헬라인을 정의한다면 세상 고등 교육을 잘 받은 지성인이라는 말입니다.

이들은 십자가를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십자가를 foolish하다, 즉 미련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십자가는 미련한 것이기에 그 십자가 안에는 참된 지혜를 찾을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십자가를 경멸합니다.
그들은 철학을 통하여 사물의 근본을 밝히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지성적인 눈에는 십자가는 천하기 그지없습니다.

세번째 십자가인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형틀에 죽었습니다.
그런 수치스러운 십자가를 우리들은 자랑합니다.
23절과 24절 말씀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18절에 기록되어 있는 데로 십자가의 도, 즉 십자가의 메시지는 현재 영적으로 멸망 당하여 있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현재에 얻어 가지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누구입니까?
오늘 우리들에게는 2천년이라는 시간의 갭이 있어서 십자가가 미화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의 이미지는 오늘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는 아름답고 고상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 당시의 십자가는 그야말로 처절한 십자가입니다.
피를 흘리면서 고통 스럽게 죽어 가는 처형대라는 말입니다.
그런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가는 예수를 바라 보면서 그를 주님이라고 부를 수가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 십자가에 못박혀서 피흘리면서 고통스럽게 죽어 가는 예수를 저주 받은 자로 보았습니다. 십자가에서 절규하면서 죽어가는 예수를 바라보면서 예수께서 주님이시다 라는 고백을 하는 무리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 저 뒤에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인데, 그것이 무엇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
피흘리며 죽어 가는 예수의 모습 속에 무엇이 나타나 있습니까?
오늘 본문 24절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십자가 저 뒤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첫 번째로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어떤 능력입니까? 나의 죄를 사하는 능력이 십자가입니다. 인생들이 죄를 지어서 죄에 매여 살게 되었습니다. 그 죄의 속박과 죄의 권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막강한 힘과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죄인들이 그런 죄의 속박을 부수고 죄의 권세로부터 탈출하도록 만들어 주는 권세가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18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되어져 있습니다:십자기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는 죄를 멸하는 능력입니다.
인류의 과학기술 문명이 발달하여서 로켓을 쏘아서 지구를 벗어 나서 달로 그리고 태양계 밖으로 까지 나갈 정도가 되었습니다. 로켓이 지구를 벗어 나기 위해서는 지구가 끌어 당기는 중력을 뿌리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힘이 없으면 로켓은 땅으로 떨어 집니다. 굉음을 내면서 로켓이 하늘로 솟아 올라가는데, 몇 분 동안 중력을 뿌리치는 가속도를 내면 지구의 중력이 영향력을 미치지 않는 무중력 상태에 들어가게 되지요.
십자가에 나타난 능력은 우리를 나락으로 잡아 당기는 죄악의 권세를 뿌리치는 능력입니다. 죄의 권세는 우리를 유혹하면서 나락에 떨어지도록 우리를 잡아 당깁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죄의 권세를 이겼습니다. 더 이상 죄의 권세가 우리를 억압하지 않는 그런 상태에 진입해 있습니다.


두 번째로 십자가 위에는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났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빠진 인류를 바라보시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두가지의 속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 이 두가지는 서로 대척하는 속성입니다.
하나님이 속에 가지고 있는 공의라는 속성은 인류를 그대로 멸망시키라고 주장하시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속에 가지고 계시는 다른 속성인 사랑은 인류를 구원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딜레마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모두 충족시킬 묘책이 있겠습니까?
그 방법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고민이 해결되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자신의 딜레마에서 빠져 나오는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도 100% 만족시켰고 하나님의 사랑도 100%만족시켰습니다. 어떻게 십자가가 그런 일을 했습니까?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독생자입니다.
독생자라는 말은 하나님과 독특한(unique) 관계를 맺고 있는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뿐이면서 하나님과 독특한 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리면서 죽었습니다.
왜 그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는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인류가 지었던 죄값을 청산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는 죄를 짓지 않았지만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지고서 십자가에서 피흘리고 죽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었습니다.
그냥 우리가 지은 죄를 말로 면죄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하나 뿐인 아들이 죄인인 우리를 대신하여서 피흘리고 죽었기에 그 댓가로 우리의 죄가 사하여졌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리심으로써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었습니다.
또한 십자가 사건은 하나 뿐인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죽일 정도로 하나님이 죄에 빠진 인류를 사랑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사건입니다.

로마서 5: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는 인류를 구원하려는 감추어진 하나님의 지혜가 들어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여러분과 저에게는 십자가는 더 이상 수치스러운 물건이 아닙니다.
그 십자가는 여러분과 저를 죄와 죽음과 영원한 지옥의 심판에서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입니다.

세 번째로 십자가 전도

십자가를 통하여 죄를 멸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지혜를 체험한 성도들에게 우리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전도입니다.

21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세상에서 솟아난 지혜인, 유교, 도교, 불교, 또한 스스로 계시의 종교라 자처하는 이슬람교도 그들 자체의 지혜로는 결코 십자가를 수용할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을 결코 세상 지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먼저 깨닫고 믿고 안 자들이 전도를 통하여 십자가의 도를 전수 할 때에 영혼을 구원할 수가 있습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를 깨우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라도 땅끝까지, 우리 주님이 가라 하는 곳으로 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면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라는 명령은 우리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전도사역을 통하여 세상 불신자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참 미련한 방법이지만, 전도 외에는 사람의 영혼을 구원할 방법이 없습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영혼이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가지고 이방 불신 세계로 가지 않기에 많은 사람들이 지옥 불 속으로 들어갑니다.
교회에 성령 불이 꺼져 가고 있기에 수 많은 사람들이 지옥 불 속으로 들어가고 있음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다시금 교회가 성령으로 불타 오르기를 바라고 소원할 뿐입니다.

십자가는 죄를 멸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를 죄의 늪에서부터 건져 올리는 능력이 십자가 위에 나타나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자랑입니다.
더 이상 그것은 수치가 아닙니다.
십자가에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우리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가 나타나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 땅에서의 모든 우리의 삶을 끝내고 영원 세계에 들어 갈 때에도 우리는 십자가를 의지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땅 위에서 생겨난 인간의 지혜로는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를 헤아려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전도를 명하셨습니다.
지금도 우리 주님의 바람 같은 성령은 교회 밖, 불신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불고 있습니다.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교회 밖에 살고 있습니다.
학문을 연마하며 지혜를 추구하며 사는 지성인들의 가슴속에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께서 들어가실 수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처럼 신앙적인 체험을 구하는 사람들의 심령 속에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는 들어 가실 수가 있습니다.
주님 명령 따라서 내가 깨달아 알게 된 십자가의 도를 불신 이웃들에게 전하는 우리의 삶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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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십자가의 도(고린도전서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For the message of the cross is foolishness to those who are perishing, but to us who are being saved it is the power of God.

십자가의 도( the message of the cross)

십자가의 도(The Word of the Cross)
- 호 로고스 가르 호 투스타우르
  Ὁ λόγος γὰρ ὁ τοῦ σταυροῦ
The message for of the Cross

십자가의 도는 십자가의 말씀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도(道)"라는 헬라어는 "로고스(λόγος)"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λόγος, ου, ὁ 3056

1. 말하기,  2. 말,  3. 너의 말

발음 / 로고스(lŏgŏs)

어원 / 300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말(마 5:37, 눅 1:20, 행 2:22), 말씀(마 8:8, 막 4:15, 행 6:2, 11:19, 14:25, 살전 1:6), 소리(눅 3:4), 소문(눅 7:17, 행 11:22),
이야기(눅 24:17), 글(행 1:1), 언변(고전 1:5), 모양(골 2: 23), 일(행 15:6, 18:15, 19:40), 고발(행 19: 38), 전도(골 4:3), 결산(마 18:23, 25:19), 전파(막 1: 45), 말씀(막 2:2, 요 2:22, 행 20:35), 고(벧전 4:5), 예언(벧후 1:19), 이유(마 5:32, 벧전 3:15).
신약 성경 / 330회 사용


* 3004. λέγω
1. 말하다,  2. 글로 말하다,  3. 묻다
발음 / 레고(lĕgō)
|관련 성경 / 칭하다(마 1:16, 눅 20:37), 말씀하다(마 2:15, 눅 11:45, 요 2:22), 이르다(마 5:18), 말하다(마 6:29, 12:38, 요 8:25),
대답하다(마 13: 51, 요 9:17), 논의하다(마 16:7), 여쭙다(마 19:7, 26:22, 막 1:30), 묻다(마 22:35, 막 8:29), 일컫다(행 15:17),
고발하다(롬 11:2), 고하다(막 9:5, 행 5:25).
[명] 말(막 13:37, 14:58, 행 15: 24), 대답(롬 11:4)
신약 성경 / 2262회 사용

십자가의 도 즉 십자가의 말씀이란 무엇일까요?

첫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둘째는 십자가의 교훈(말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란 곧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유대인들은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실 수 있는가?
이것은 사람들의 눈에 그렇게 보였을 것이라는 주장을 합니다.
이러한 주장을 가현설(假現說)이라고 합니다.

가현설(假現說)을 영어로 도우시티즘(Docetism)이라고 합니다.
도우티시즘이란 그리스어로 "보이다"라는 뜻의 '도케오'(δοκέω)가 어원으로 예수의 몸은 환상일 뿐이라는 영지주의 교리를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증언합니다.
이사야 7:14b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마태복음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성육신(成肉身) 이라고 합니다.
성육신이란 강생(降生, incarnatio)이라고 하여 하나님이 사람이 된 사건을 말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강생한 하나님 즉 하나님의 공현(Epiphany)이라고 믿습니다.

십자가의 도란 십자가의 교훈을 말합니다.
십자가의 교훈이란 십자가의 복음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고린도교회에는 여러 당파들이 서로 자기들이 믿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도를 말합니다.

다양한 교단과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어지럽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교회는 오직 하나뿐입니다.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며 교회도 하나뿐입니다.
어느 교회 어느 교단을 자랑하지 말고 오직 십자가의 도가 되는 예수님만을 자랑하며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지 말고 끝까지 그 길을 걸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통해 예루살렘에 최초의 기독교 공동체가 생겨난다(행 2:37~41).
성령이 오시면 능력을 받아 예수의 증인이 되리라는 예수의 약속이 본격적으로 성취되기 시작한다.
베드로를 포함한 다른 제자들의 놀라운 변화(행 2:14~36)도, 신도 수가 삼 천이나 "더해진 것"(행 2:41, 수동태의 주체는 성령)도 성령의 능력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누가는 성령의 역사로 시작된 예루살렘 공동체의 삶을 세 번에 걸쳐 간략하게 서술한다(2:42~47; 4:32~35; 5:12~16).
여기에 나오는 초기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성령 충만(자기 비움)을 통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행 2:36)의 가치관과 삶이 어떻게 변화될 수 있는지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그중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행 2:42~47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네 가지 공동체의 중요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첫째, 가르침을 받는 공동체

가장 먼저 사도들의 가르침이 나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도들이 지상의 예수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목격자요 증인이라면, 그들의 가르침은 곧 예수의 가르침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에서 그들이 믿고 섬기는 주님의 교훈을 배우는 것은 가장 우선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도들의 가르침이 진리임은 그들을 통해 나타난 기사와 표적들이 입증해 준다(43절).
예수의 기적이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대한 가시적인 징표인 것처럼, 사도들의 기적은 그들의 선포와 가르침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다는 점을 확인시켜준다.
이런 기사와 표적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경외심이었다(2:43; 5:5, 11; 8:13).

둘째, 사랑하는 공동체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가 된 공동체(41절)가 서로 연합하고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 '교제'란 말은 헬라어 '코이노니아'의 번역인데 이러한 교제는 성도 간의 재산 공유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44~45절; 4:32).
예수의 부활을 확신하는 성도들에게 돈이나 권력은 더 이상 절대적인 가치가 되지 못한다(행 4:33~34; 행 26:29).
이러한 재산 공유 공동체의 가장 큰 특징은 자발성이었다(4:32~35).
가진 자가 자신의 전 재산이나 그것의 일부를 내놓는 것은 성령의 감동에 따른 자발적인 헌신이었다.
다양한 인종과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사랑으로 하나가 된 공동체의 존재 자체가 외부에 있는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가장 강력한 매력과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셋째, 예배하는 공동체

처음 교회는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만날 때마다 떡을 떼며 기도에 힘썼다.
"떡을 떼다"는 말은 단순히 음식을 나눈다는 의미보다는 공동식사와 함께 거행된 성만찬을 의미할 것이다(고전 11:17~34).
처음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모범을 따라 자주 식탁공동체로 모인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성만찬과 함께 처음 공동체의 주요 예배 행위는 기도였다. 사도행전에는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그리스도의 삶에 있어서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1:14; 3:1; 6:4; 10:4, 31; 12:5; 16:13, 16).
이전에는 성전에서 행해지던 예배와 기도가 이제는 어떤 특정 장소나 공간을 넘어서 성령이 임하시는 곳이면 어디서든 드려진다.
처음 교회가 성전에서 모이기도 했고 집에서도 모였다는 점(46절)은 오늘날 교회의 공식적인 예배와 비공식적인 소그룹 모임 간의 바람직한 균형을 예시할 수 있다.

넷째, 전도하는 공동체

본문에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전도했다는 언급은 없다.
그러나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는 2:47의 요약은 처음 기독교 공동체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온 백성의 칭송(47절)은 그들의 경건한 삶과 사랑의 교제가 불신자들에게 끼친 가시적인 영향을 말해준다.
교회의 일치와 연합(2:46; 4:32; 5:12), 상호 사랑, 모범적인 삶의 방식이 지역사회에 매력적인 것으로 드러날 때 교회는 그 자체로 세상에 대한 선교적 공동체가 된다.
사도들의 강력한 선포와 교회의 변화된 삶이 초기 교회 선교의 중요한 요소로 나타난다.

처음 교회는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와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의 균형을 이루었기에 부흥할 수 있었다.
오늘날 교회의 참된 부흥은 이러한 초기 그리스인의 영성을 회복하는 데 있다.
그들에게는 분명 우리가 잃어버린 교회 본연의 모습이 있었다.

세상에는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다른 것들이 있습니다.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다가 적이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랍니다.
다 같은 예수믿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가 이단인 것을 알고 깜짝 놀라기도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저는 이슬람 학생과 대화를 하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이슬람 경전인 코란에 “예수를 믿으라”는 말이 나온다는 겁니다.

이 학생은 코란에 예수에 관해 참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코란에 나오는 예수에 대한 기록을 들어보니, 성경에 나오는 것과 거의 비슷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신 것이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셨다는 것, 그리고 그 복음을 믿어야 한다고도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자들을 고치시고 놀라운 기적을 베푸신 것도, 또한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것과 다시 재림하실 것도 기록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쯤 되면 이슬람교는 유대교보다 우리 기독교에 더 가까운 종교라고 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자칫 이슬람교와 기독교는 충분히 대화가 가능한 종교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한 가지 있었습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슬람은 예수의 십자가에 대하여 생략하거나 무시하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고 단언하며 가르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음을 모면한 후 샘이 흐르는 곳으로 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슬람교는 예수를 구세주가 아니라 알라가 보낸 위대한 선지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기독교가 예수를 잘못 가르치고 있다고 하면서 크리스챤을 적대시하고 공격합니다.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다른 것이 바로 종교입니다.
신구약 성경을 통하여 보면 십자가가 결정적인 기준입니다.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빼면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껍데기만 기독교의 탈을 쓰고 있는 것이지 진정한 기독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예수의 기적을 믿고, 예수의 말씀을 따르려고 노력하고,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승천까지 믿는다고 해도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가 빠지면 그것은 헛된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의 십자가를 부인한다면 아무리 예수를 치켜세우고 심지어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해도 그들은 모두 적그리스도입니다.

오늘날 많은 종교, 많은 사상에서 예수를 인정합니다.
예수를 치켜세우고 존경을 표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들이 말하는 예수 안에 십자가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의 죽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 구원이 없는 것입니다.
많은 크리스챤들이 예수님를 닮아가야 할 모델로 따릅니다.
그 말씀을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정작 십자가의 죽음이 생략되거나 강조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나 지혜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기독교의 핵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의 도로 우리가 구원을 받고, 십자가의 도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의 도”란 과연 무엇일까요?

“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는 “로고스”로서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도”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에 대한 말씀”을 가르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에 선포되어지는 말씀 – 즉 복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복음이 무엇일까요?
십가가의 복음은 과연 무엇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

먼저 십자가의 도 – 곧 십자가의 복음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나타내신 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24절).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는 말씀을 하시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죄악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말씀을 세상에 보내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란 표현은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모든 활동이 담겨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런 활동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는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성육신 자체만 보아도 하나님의 초능력입니다.
마리아에게 나타난 천사들의 말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마실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눅1:35).
동정녀 탄생에 대하여 믿지 않는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던지 예수 그리스도는 초능력으로 죄가 없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이 바로 성경의 선포입니다.

예수님의 세상에서의 삶만 보아도 하나님의 능력 자체를 볼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바울은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의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롬 1:3-4).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하나님의 신성을 가지시고도 제한된 세상의 삶을 사시며 죄가 없이 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죄가 없는 삶은 당시 세상 사람들에게 논란의 대상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죄와 상관없이 해맑은 양심을 가지고 살 수 있을까?”

예수님의 죽음도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 쓰게되면 우리는 그 억울함을 호소하며 발버둥 칠것입니다.
현대사회라면 아마도 고소하고 항소하고 대법원까지 가서라도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며 싸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침묵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죄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스스로 자신의 머리를 숙이시고 자신의 영혼도 하나님 아버지께 의탁하시며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는 감당할 수 없는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다시 사심도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태초부터 하나님이 행하셨던 모든 이적과 능력의 사건들을 아우르고 대치해 버리는 최고의 능력을 행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능력은 결국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로 종결이 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런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십자가의 복음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다이내믹한 능력으로 나타난 것을 믿은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지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24절).
본문에서 조금 지나 30절에 보면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지혜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의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예수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불가능한 일이 하나님의 지혜로 우리가 의롭게 변화된 것입니다.
수천년 전에 욥기에서 빌닷의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겠으며…”(욥 25:4)라는 질문의 바로 그 답이 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음에 내어주심을 당하시고 또한 우리의 의를 위하여 살아나셨습니다(롬 4:25).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단순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하나님의 지혜로 우리에게 돌려진 것입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의 문을 열어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그들의 모든 노력은 허사이고 시간낭비입니다.
이미 2000여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꼐서 이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우리가 해야하는 것은 믿음으로 빗장을 열고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지혜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거룩함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결코 거룩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거룩함이 있다면 매일 매일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거룩함이한 안과 밖이 같은 것입니다.
감출 것이 없는 것이 바로 거룩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안과 밖이 같으신 거룩한 분이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분이란 것입니다.
성도의 삶은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십자가의 능력으로 매일 매일 실험적으로 살아내어 밖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거룩한 삶이 내 노력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지혜가 되시는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때문이란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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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한 자(고린도전서 2: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The spiritual man makes judgments about all things, but he himself is not subject to any man's judgment.

고린도전서에서는 사람을 세 종류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육에 속한 사람(The man without the Spirit)(2:14)

Ψυχικὸς δὲ ἄνθρωπος
The natural however Man

둘째는 신령한 사람(The spiritual man)(2:15)

ὁ δὲ πνευματικὸς
He who however Spiritual

셋째는 육신에 속한 사람(worldly)(3:1) The Man of the Flesh

ὡς σαρκίνοις
as to fleshly

* worldly : 세속적, 속세의
  • worldly, secular, 
  • the world, secular society

육(肉)에 속한 사람, 육신(肉身)에 속한 사람, 영(靈)에 속한 사람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일을 받지 못하는 인본주의적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불신자들을 말합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영적 미숙아로서 시기와 질투, 미움과 분쟁이 있어 공동체 생활에 적응하기가 어려운 교인들이라고 하겠습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위해 섬기며 살아갈 수 있는 성도를 말합니다.

이 세상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가시적인 현상만 보게 됩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땅의 일에는 관심이 없으며 영원한 천국만을 사모하며 일합니다.
성령과의 교통 안에서 일합니다.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사람, 천국 시민권자로 살아가고 있기에 행인과 나그네의 삶에는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믿음의 사람으로서 강하고 담대하게 살아갑시다.


교인(敎人)과 그리스도인(基督人)

교인이란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 즉 교회에 다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한국어 사전에서는 기독교인을 ‘기독교를 믿는 사람’, 성도는 ‘기독교 신자를 높여 부르는 말’로 풀이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인과 성도에 대한 세상의 이해이며, 기독교인조차도 이러한 이해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은 물론이고 기독교조차도 성도에 대한 이해가 바르게 정립되어 있지 못한 현실입니다.

이로 인해서 스스로 성도라 자처하면서도 정작 성경이 말하는 성도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성도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 다만 기독교인이라는 종교인의 길로만 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기독교인으로 사는 것을 성도의 삶인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린도전서 2:14) 

육에 속한 사람이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일까요?
누군가가 여러분께 ‘당신은 육에 속한 사람이다’라고 말하면 기분이 나쁘겠지요?

육에 속한 사람을 말할 때 그 반대의 의미로 영에 속한 사람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로마서 8:5-6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바울은 인간을 육신과 영으로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따라서 육에 속한 자와 더불어 영에 속한 자가 있습니다.
영에 속한 사람을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5:48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여기서 생각할 것은 신자 또한 육에 속한 자였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5-6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신자라 할지라도 그 본질은 진노의 자녀이고 죽은 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육에 속한 자인 것입니다.

로마서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모든 일이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즉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을 때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는 죽은 자에서 산 자가 된 것이고, 흙에 속한 자라는 신분에서 하늘에 속한 자의 신분을 얻은 것이고, 육신 속한 사람에서 영에 속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존재의 변화, 신분의 변화는 오직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육신에 속한 사람에게 ‘영에 속한 사람이 되라’는 말이 가능할까요?
당연히 가능하지 않는 말입니다.
영에 속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선택한 자에게 주어진 은혜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육신에 속한 사람에 대해 언급하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성도로 지칭했습니다.
그 말은 고린도 교회가 죄의 죽음에서 생명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늘에 속한 자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고린도 교회는 성도로서 육신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결론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특정 사람에게 속한 것을 자랑으로 여겼고, 그로 인해 분쟁과 분파가 있었으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다시 말해서 육신에 속한 사람에게 어울리는 모습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성도로 인정되는 교회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자신에 대해 혼란스러워 하고 갈등하며 당황하는 것 중의 하나가 자신에게서 도무지 성령 받은 것 같지 않고 믿음이 아닌 것 같은 모습들이 있다는 것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은 거룩한 성도답지 않은 부정적으로 생각되는 모습들로 인해서 성도라는 존재성에 대한 회의와 의심에 붙들리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분쟁과 분파 등 수많은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 이상합니까?
그런데 그러한 교회를 향해서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성도로 지칭한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인간의 본질은 죄에 속한 자이고 죽음의 존재입니다.
비록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고 하늘에 앉힌바 되었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본질이 달라진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오해하기 때문에 자신에게서 육신의 모습이 보이는 것으로 당황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육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로 구분됩니다.
그리고 영에 속했다는 것은 육에 속한 자로부터 나왔다는 것이기 때문에 육에 속한 자의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일반적 생각입니다.
영에 속했다는 것을 육의 세계와의 결별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현실은 우리가 상상하는 신앙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고린도 교회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육에 속한 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여러 부정적인 행동들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자신의 성령 받음이나 성도됨에 대하여 확신이 희미해지면서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고린도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교회에서 동일하게 발생하는 문제로 인식해야 합니다.
모든 인간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여러분께 문제가 있다면 그 또한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애당초 성도의 존재를 성도 아닌 사람보다 나은 행동을 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 잘못이며 그것을 성령 받음으로 이해한 것이 문제입니다.

신자가 성령을 받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거룩한 성도로 여김 받지만 육에 속한 자라는 본래의 본성은 그대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자신에게서 육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목격하고 확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고린도 교회였던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를 시작하면서 말씀드렸던 내용이지만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문제없는 교회가 되게 하는데 관심이 없습니다.
바울이 쓴 편지의 내용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바울은 교회의 문제를 책망하면서 ‘너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성도인데 분쟁하고 분파를 만들고 자기를 자랑하면 되는가? 그것은 육에 속한 사람들이나 하는 행동이니까 성도답게 행동해서 아름다운 교회가 되어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교회에 문제가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까 그런 것에 신경 쓰지 말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라는 생각만 하고 살아가면 된다’라는 취지로 말하는 것일까요?
그런 것이라면 16장까지의 긴 편지는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몇 줄의 내용이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교회의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

13절에 보면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분별이라는 말을 하는데 여기서 말한 분별은 아닌 것은 아닌 것으로 알고 참된 것은 참된 것으로 아는 것을 뜻합니다.
즉 무엇이 육적이고 무엇이 영적인가를 아는 것을 분별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 하나님이 행하신 영적인 일들을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성령을 주신 것입니다.
영적인 일은 성령을 받은 자만이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오심의 목적은 인간의 변화에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이 미련하고 어리석게 보입니다.
그래서 방언을 하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처럼 믿음의 능력을 과시할 수 있는 것을 성령의 능력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을 아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영적인 일들을 보이지 않습니다.
인간의 행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새로운 세계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육이 중심이 되어서 육의 가치를 높이고자 하는 속성을 드러내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영적인 일과 충돌된다는 것을 까맣게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고린도 교회의 실상이었습니다. 

그러면 이런 의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성령을 받았다면서 왜 하나님의 영적인 일을 분별하지 못하고 육의 속성에서 나타나는 자신들의 모습을 알지 못하는가?’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드릴 수 있는 답은 성령을 받았다고 하여 그 즉시로 모든 지식과 앎에 대한 변환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아도 인간에게는 여전히 육에 속한 자로 살아온 습성이 있고 종교적 문화도 남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고넬료에게 베드로를 청하라고 말씀하시고 고넬료는 베드로를 자기 집으로 청하기 위해 욥바로 사람을 보냅니다.
그런데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도착하기 전에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부정한 짐승이 담긴 그릇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환상을 보여주면서 잡아먹으라고 하십니다.
베드로의 반응은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결코 먹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 강림을 체험했습니다.
즉 성령 받은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설교했을 때 각 나라 사람들이 그 말을 알아들었고 마음에 찔림을 받아 회개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베드로가 여전히 유대교 전통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말씀드린 것처럼 성령을 받았다고 하여 즉시로 기존의 습성과 지식과 앎의 변역이 있게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신자는 성령으로 인해서 기존의 앎에 대한 갈등이 있게 되는 것이고, 생각하고 고민하는 가운데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또한 말씀을 들으면서 자신의 잘못에 눈을 뜨게 되고 복음의 의미를 알아가면서 진리의 길을 점차 분명하게 보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 받은 성도라 하여 육에 속한 사람의 습성이 전혀 나타나지 않아야 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바울이 말하는 육신에 속한 자는 언약 밖에 있는 멸망의 존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존재를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되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을 알지 못하고 영적인 일을 분별하지 못하면서 여전히 육신에 속한 자의 습성에 의한 것을 신앙으로 착각하는 것에 대한 지적입니다.
그리고 신자라 하는 우리를 향한 지적이기도 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영적인 일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에게 속한 것으로 자신을 과시하고자 하는 것이 십자가를 믿는 것이 아니고 성령 받은 신자의 모습도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대해 무엇을 생각하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요?
중요한 것은 다시금 십자가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절)
십자가로 돌아가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에게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사실이 현실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고 성령을 받은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는 뜻입니다(16절).
따라서 신자는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자신을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보기에 세상의 헛됨을 아는 것이고 육신의 가치 또한 허망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습성은 세상으로만 향하고 싶어 하고 그것이 육에 속한 것임을 알기에 나 같은 자를 구원하신 은혜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일을 분별하는 신자로 사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

육에 속한 사람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영적인 것은 알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고전 2:14) 

육신에 속한 사람

육신에 속한 사람은 거듭나기는 했으나 영적으로 자라지 못하여 어린 아이들과 같은 사람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전 3:1)

신령한 사람

거듭난 사람의 영이 자라났을 때 이를 신령한 사람이라 합니다.
즉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을 신령한 사람이라 합니다.

로마서 8:5~6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이 세상에는 수많은 민족과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구약 성경은 이 땅에 사는 사람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누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으로 선택한 이스라엘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 즉 이방인

신약성경도 두 부류의 사람으로 나누는데,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그리스도인
예수를 믿지 않는 비그리스도인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시어 예수를 주로 믿는 사람들을 모우사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셨는데,
그 교회 안에도 두 부류의 사람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 한 부류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며 그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
다른 한 부류는 자신의 영광과 축복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

다시 말하면, 하늘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땅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며 사는 사람과 자신이 행한 선과 의를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

사도 바울은 그것을 “영에 속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으로 나누어 말하고 있습니다(고전 3:11~14). ​

오늘의 많은 교인들이 입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 말하지만, 실제 삶에 있어서는 자신의 유익과 복을 구하며 자신의 영광과 자신의 이름을 위해 힘쓰며 사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늘 자신의 행복과 기쁨을 먼저 구하며 자기만족과 자신의 축복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며, 어떤 문제에 부딪치면 자기를 변명하고 합리화하며 자신은 잘못이 없는 사람으로 보이려고 애를 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살지 못하기에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주님이 주시는 구원의 큰 기쁨과 하늘의 위로를 얻지 못하며 늘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될 뿐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귀면, 그 사람과 자주 만나게 되고, 오랜 만남과 사귐을 통해서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되고, 서로의 생각과 마음을 앎으로 서로를 신뢰하며 사랑하게 되고, 이제 서로 소중한 친구가 되어 기쁨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귀한 관계가 되지요.

이렇게 인간관계 속에서 서로의 사귐은 너무 귀하고 중요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은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고 사귀고 느끼며 하나님을 알고, 이제 그분을 깊이 알아 감으로 내 마음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며 의지하고 살아가는 실제적인 삶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과 깊은 인격적 사귐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알게 되고, 날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내가 하나님의 자녀 됨의 기쁨과 하늘로서 주시는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의 복을 위해 하나님을 예배하고, 더 많은 축복을 받기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거나, 교회로부터 인정받고 칭찬받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복과 기쁨을 구하는 것은,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이며, 자기를 예배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살지 못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라고 말씀하신 이유인 것입니다.

로렌스 형제는 “하나님의 임재 연습”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다는 것은 시종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어떤 비결이나 신비로운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잠자리에서 눈을 감을 때까지 자신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을 한순간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일이다.” 라고 말합니다.​

일을 하면서도, 길을 가면서도, 누군가를 만나면서도, 매 순간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과 사귀며 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경험하며 하늘의 큰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영에 속한 사람의 삶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 -> 육신에 속한 사람

육에 속한 사람이 거듭나면 육신에 속한 사람이 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고 육신에 속한 사람은 거듭나서 성령으로 믿게 되어 구원받은 사람입니다(고전 12:3하).

육에 속한 사람이 육신에 속한 사람이 되는 거듭남은 사람의 생각과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해주셔 수동적으로 거듭나게 됩니다(엡 2:1).
그리고 육에 속한 사람이 육신에 속한 사람이 되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순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육신에 속한사람 -> 신령한 사람

육신에 속한 사람은 믿음의 행함으로 인해 신령한 사람으로, 그리고 점진적으로 자라게 되는데 중요한 것은 행함이 없으면 자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약 2:17)

이 때 행함이란?

1. 기도가 아닙니다.
물론 기도 생활은 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도를 많이 한다고 신령한  사람으로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2. 믿음도 아닙니다.
믿음이 자라서 큰 믿음을 가져야 하지만, 믿음이 크다고 꼭 신령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3. 성경 말씀을 많이 아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 말씀을 많이 알아서 신령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을 많이 알고도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이 될 수도 있습니다.

4. 선한 일을 많이 하는 것도 아닙니다. 불우 이웃을 도와주고 교회 행사에 열심봉사한다고  곧 신령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5. 성령의 은사를 받고 그 능력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무조건 신령하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령의 은사를 받아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고 귀신을 쫒아내고 병자를 고치고 죽은 사람을 살리면 신령한 사람인 줄로 오해하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고전 1:7) 아홉 가지 은사를 다 받았습니다.(고전 12:8-10)
그런데도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을 신령한 자가 아니고 육신에 속한 자라고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전 3:1)

육신에 속한 사람이 신령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1.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2.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3. 성령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 5:16)

이 때 성령을 따라 행하지 아니하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행하면 육체의 열매 15가지를 맺게 됩니다.(갈 5:19-21)
그러나 십자가를 지고(갈 5:24) 성령을 따라 행하면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갈 5:22-23)  

그러므로 신령한 사람이 되는 것은 이 성령의 열매에 비례 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의 열매가 없으면 아무리 큰 업적을 남기고, 신비한 이적과 기사를 행할지라도 여전히 육신에 속한 사람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갈 5:25-26)

영혼육(Spirit Soul Body) 3분설에 대하여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image and likeness) 창조하셨습니다(창 1:26).
삼위일체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하긴 어렵지만,
흔히 물의 3 상태에 비유하기도 하고(수증기, 물, 얼음)
시간의 3 개념에 비유하기도 하며(과거, 현재, 미래)
인간의 영혼육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사람에겐 영과 혼과 육이 있기에 셋이면서도 하나인 개념을 어렴풋이나마 납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영혼육이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기에 이 개념도 독립적인 세 분이면서도 공존하는 한 분인 하나님을 설명하기엔 턱없이 부족합니다.

“오 주여, 신들 가운데 주와 같은 이가 없사오며 주께서 행하신 일들과 같은 일들도 없나이다(시편 86:8).

하늘에서 누가 여호와와 비교될 수 있으리이까?
신들의 아들들 중에서 누가 여호와와 같으리이까?(시 89:6)
위로 하늘에나 아래로 땅에 주와 같은 하나님이 없나이다(왕상 8:23)”

비록 영혼육의 개념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온전히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 해도, 영어나 원어 성경에 영과 혼과 육에 해당하는 독립된 단어들이 나오는 건 사실입니다.

예전에 영혼육을 셋으로 나눠 생각하는 것은 이단이라고 쓴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한국어 성경은 ‘혼’, 즉 ‘soul(영), nephesh(히), psyche(헬)’에 해당하는 단어를 ‘영혼’ 혹은 목숨, 생각, 마음 등으로 번역했기에 ‘영혼’과 ‘육’으로 2분화 해야지 정통성을 인정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영혼육을 각각 나눠 표현합니다.

“평강의 바로 그 하나님께서 너희를 온전하게 거룩히 구별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흠 없이 보존해 주시기를 구하노라(살전 5:23).”

또한, 영과 혼이 같이 나오는 구절이 성경 전체에 11번인데, 이 구절들을 읽다보면 영의 역할이 있고 혼의 역할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레 20:6; 삼상 1:15; 욥 7:11; 사 26:9; 42:1; 57:16; 마 12:18; 고전 15:45; 살전 5:23; 히 4:12; 벧전 1:22).

레위기기 20:6
음란하듯 신접한 자와 박수를 추종하는 자에게는 내가 진노하여 그를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사무엘상 1:15
한나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것 뿐이오니.

욥기 7:11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아픔을 인하여 말하며 내 의 괴로움을 인하여 원망하리이다.

이사야 26:9
밤에 내 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

이사야 42: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이사야 57:16
내가 영원히는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장구히는 노하지 아니할 것은 나의 지은 그 과 혼이 내 앞에서 곤비할까 함이니라.

마태복음 12:18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고린도전서 15:45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이 되었나니.

데살로니가전서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과 및 관절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베드로전서 1: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구약 성경에서 영을 지칭하는 히브리 단어는 ‘ruach(רוּחַ)’이며, 혼은 ‘nephesh(נֶפֶשׁ)’입니다.
히브리 언어엔 오히려 영과 혼은 있어도 거기에 대조해서 부를 수 있는 ‘육신’ 즉 ‘몸(육)’을 일컫는 단어는 없습니다.
영어 성경에서 ‘body(몸)’로 번역된 히브리 단어들을 찾아보면 다 제각각이기에 더 연구해보니, 히브리어는 몸의 한 부분을(배, 등, 뼈, 살, 창자 등등) 지칭하는 단어들만 있으며 그 단어들이 전체적인 ‘몸’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히브리어에서 ‘몸’과 가장 비슷한 단어를 뽑으라면, ‘고기 육(살)’을 뜻하는 ‘basar(flesh)’일 것 같습니다.

이에 비해 헬라어는 영과 혼뿐만 아니라 육(몸)을 지칭하는 확실한 단어가 있습니다.
신약에 영을 지칭하는 헬라어는 ‘Pneuma‘, 혼은 ‘Psyche‘, 육(몸)은 ‘Soma‘입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영혼육에 비유해서 나눠 생각해 볼 수 있는 내용이 꽤 나옵니다.

예를 들면, 지성소, 성소, 성막뜰로 나누어지는 모세의 성막입니다.
가장 깊은 곳에 안치된 지성소를 영, 성소를 혼, 성막뜰을 육에 비유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에 해당하는 지성소엔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번 들어갈 수 있으며 언약궤가 있습니다.
언약궤 안에 들어있던 증거판, 만나를 담은 항아리, 그리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히 9:4)도 영혼육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영이라면, 증거판은 혼, 만나 항아리는 육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은 나무 지팡이에서 싹이 트이는 것은 마른 뼈에 핏줄이 붙고 살이 붙는 성령의 역사로 느껴지기 때문이고,
증거판은 혼(의지, 자아, 생각)을 순종시켜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기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요 5:39, 빌 2:16).
그리고 만나를 담은 항아리는 주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하늘에서 내려온 빵(bread) 즉 육으로(flesh) 생각됐습니다(요 6:33, 35, 48, 51, 58).

물론 이 부분은 개인마다 생각의 차이가 있을 터이니 제 생각만 맞다고 주장하는 건 아닙니다.

또한 모세의 성막에서 혼에 해당하는 성소에도 3개의 기구(촛대, 분향단, 진설병)들이 있는데 이 또한 영혼육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금촛대빛은 영에 비유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며(요 4:24) 곧 빛(light)이시기에 그분 안에는 전혀 어둠이 없고(요일 1:5) 새 예루살렘에서는 어린양께서 그 도시의 빛(light)이시기 때문입니다(계 21:23).
그리고 분향단혼을 뜻하는 기도(간청, 간구)라고 생각합니다.
요한 계시록에는 ‘기도(prayer)’란 단어가 3번 나오는데 모두 금 향로나 금 그릇에 담은 향과 연기에 비유됩니다(계 5:8, 8:3, 8:5). 진설병은 빵이기에 역시 육을 뜻합니다(요 6:33, 35, 48, 51, 58).

모세의 성막에서 을 뜻하는 성막뜰에는 물두멍 번제단 밖에 없기에 기구들을 영혼육으로 나누지는 못하지만 번제단에 드려지는 희생 제물들은 크게 3그룹으로 나뉩니다. 

레위기의 5대 제사에 드리는 희생 제물들은 ‘소’와 ‘flock(양과 염소 떼)’ 아니면 ‘비둘기’에서 취합니다.
이 3그룹을 좀 더 세밀하게 나누면 소(Ox)는 숫소(bull)와 암소(heifer)로, 양(sheep)은 숫양(ram)과 암양(ewe)과 어린양(lamb)으로, 염소(goat)는 새끼염소(kid)나 어른 염소, 비둘기는 산비둘기(dove)와 집비둘기(pigeon)로 나눠집니다.

따라서 비둘기는 성령(마 3:16; 막 1:10; 요 1:32) 또는 신부를(아 2:14; 5:2; 6:9) 상징하기에 영에 비유할 수 있고 양과 염소는 혼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2:4절에 따르면 너희 혼의 수에 따라 양을 취하라고 되어 있고 벧전 2:25절엔 너희가 전에는 길 잃은 양 같았으나 이제는 너희 혼의 목자에게로 돌아왔다고 하며 민 15:27절은 어떤 혼이든 모르고 죄를 지었거든 암 염소를 제물로 바치라고 돼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소는 육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단 4:33, 5:21; 히 9:13).
이것 역시 제 생각만 옳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막에 이어 성경에 등장하는 주요 나무 3가지(올리브나무, 포도나무, 무화과나무)도 영혼육에 비유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올리브나무는 영을 뜻하는 기름, 포도나무는 혼(생명)을 뜻하는 포도주(피), 무화과나무는 육을 뜻하는 열매를 내니 말입니다.
또한 성경의 대표적인 3대 직분인 ‘선지자(대언자)’, ‘제사장’, ‘왕’도 순서대로 영혼육에 각각 비유될 수 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이 임해서 예언하거나 대언하는 사람들이며, 제사장은 희생 제물의 피로 백성들과 자신의 죄를 속죄하는 사람들이며, 왕은 백성들을 입히고 먹이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영이시지만 굳이 성부 성자 성령을 영혼육에 비유하자면, 성령은 영, 성부는 혼(자아 의지 생각 생명 마음), 성자는 육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셋째 하늘에 거하시며 거기에 ‘낙원’이 있습니다(눅 23:43; 고후 12:2-4; 계 2:7).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알았는데 그 사람은 십사여 년 전에 셋째 하늘로 채여 올라갔느니라…그가 낙원으로 채여 올라가서 말할 수 없는 말들을 들었는데 사람이 그것들을 말하는 것은 법에 어긋나느니라(고후 12:2-4).”

따라서 하늘도 성막처럼 셋으로 나눠진 걸 알 수 있으며 셋째 하늘이 영이라면, 둘째 하늘은 혼, 첫째 하늘은 육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또한 첫째 하늘은 공기권, 땅, 땅 밑(지옥) 셋으로 나뉘어 이 또한 영혼육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이 유업이요 약속의 땅이란 의미에서 영이라면 광야가 혼, 에굽은 육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히브리어는 몸의 한 부분을(배, 등, 뼈, 살, 창자 등등) 지칭하는 단어들만 있으며 그 단어들이 전체적인 ‘몸’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주석에서 해당 부분만 발췌한 것입니다.

http://www.biblestudytools.com/dictionary/body/

1. In the Old Testament:

soma, Latin corpus:

The term “body” is not found in the Hebrew of the Old Testament in the sense in which it occurs in the Greek “The Hebrew word for `body’ is gewiyah, which is sometimes used for the `living’ body (Ezekiel 1:11), `bodies of the cherubim’ (Genesis 47:18Nehemiah 9:37), but usually for the dead body or carcass. Properly speaking the Hebrew has no term for `body.’ The Hebrew term around which questions relating to the body must gather is flesh” (Davidson, Old Testament Theology, 188). Various terms are used in the Old Testament to indicate certain elements or component parts of the body, such as “flesh,” “bones,” “bowels,” “belly,” etc., some of which have received a new meaning in the New Testament. Thus the Old Testament “belly” (Hebrew beTen, Greek koilia), “Our soul is bowed down to the dust; our belly cleaveth unto the earth” (Psalms 44:25 the King James Version)–as the seat of carnal appetite–has its counterpart in the New Testament: “They serve …. their own belly” (Romans 16:18). So also the word translated “bowels” (meim, rachamim) in the sense of compassion, as in Jeremiah 31:20, King James Version: “Therefore my bowels are troubled for him,” is found in more than one place in the New Testament. Thus in Philippians 1:8 the King James Version, “I long after you all in the bowels (splagchna) of Christ,” and again, “if there be any bowels (splagchna) and mercies” (Philippians 2:1 the King James Version).


2:15 /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판단하다(ἀνακρίνω) 350

1. 자세히 조사하다,  2. 질문하다,  3. 사도행전 17:11

사도행전 17:11 /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발음 / 아나크리노(anakrinō)
어원 / 제1부정과거 ἀνέκρινα,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ἀνεκρίθην, 303과 291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고발하다(눅 23:14), 질문하다(행 4:9), 심문하다(행 12:19,  24:8,  28:18), 상고하다(행 17:11), 분별하다(고전 2:14),
판단받다(고전 4:3), 판단하다(고전 4:3), 비판하다(고전 9: 3), 묻다(고전 10:25,  27).
[명] 판단(고전 2:15, 14:24).
신약 성경 /16회 사용

2:16 / 그리스도의 마음
νοῦς, νοός, νοῒ, νοῦν, ὁ  3563

1. 이해력,  2. 지성,  3. 태도

발음 / 누우스(nŏus)
관련 성경 / 마음(롬 7:23, 고전 2:16, 딤전 6:5), 영(살후 2:2), 총명(계 13:18), 뜻(계 17:9).
신약 성경 / 24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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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성전(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Don't you know that you yourselves are God's temple and that God's Spirit lives in you?

성전

ναός, οῦ, ὁ 3485


1. 성전,  2. 예루살렘 성전,  3. 하늘의 성소 - santuality 

발음 / 나오스(naŏs)

어원 / ναίω ‘거하다’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성전(마 23:16, 막 15:29, 눅 1:9, 고후 6:16), 성소(마 27:5, 23:45), 전(행 17:24, 고전 6:19).
신약 성경 / 45회 사용

성전
ἱερόν, οῦ, τό  2411
1. 성소,  2. 이방성전,  3.  예루살렘 성전 마 12:6 - Temple

발음 / 히에론(hiĕrŏn) 

관련 성경 / 성전(마 24:1, 막 11:15, 고전 9:13), 신전(행 19:27) 
신약 성경 / 71회 사용
  • 고린도전서 6:19-20
  •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광을 돌리라.
    Do you not know that your body is a temple of the Holy Spirit, who is in you, whom you have received from God? You are not your own;you were bought at a price. Therefore honor God with your body.
  • 사람의 몸은 성전 성전

    우리는 우리가 섬기는 교회의 건물을 성전이라 한다.
    물론 그렇게 부를 수 있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성전이라기보다 예배당이다.
    성전은 건물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이 머물러 계시는 자리이다.
    그래서 우리들이 사는 자리가 어디이든지 그곳에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이 거하시면 그곳이 바로 성전이다.

    고린도전서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린도전서 3:16-17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기에 우리 몸이 바로 성전이 된다.
    바로 몸 성전이다.
    우리 몸이 성전이기에 성전 된 우리 몸을 소중히 지키고 가꾸어 나갈 책임과 의무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몸을 너무 소홀히 한다.
    몸에 해로운 담배를 피우고 과도하게 술을 마신다.
    운동을 게을리 하고 음식을 가려 먹지 못한다.
    성전인 우리 몸을 마구잡이로 다룬다.

    이런 잘못을 바로 잡으려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
    하나님의 영이 머무시는 성전을 가꾸는 마음으로 우리 몸을 가꾸어야 한다.
    우리 몸을 그렇게 가꾸는 데는 훈련이 필요하다.

    디모데전서 4:7-8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너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경건의 훈련
    육체의 훈련

    경건의 훈련을 통하여 우리들의 영성이 자라고 육체의 훈련을 통하여 성전인 몸이 강건하여진다.
    그런데 사람들은 영성의 강화와 육체의 건강을 분리하여 생각하려든다.
    성경의 가르침은 영과 몸이 분리되지 아니하고 일체를 이룬다.
    그러므로 경건의 훈련과 육체의 훈련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첫째, 경건의 훈련
    둘째, 몸의 훈련
    셋째, 생활의 훈련

    하나님의 성전(God’s Temple)
    나오스 데우(ναός  θεόῦ)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아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성전 - 나오스(ναός) : Sanctuary / 몸된 성전 : 장소, 위치, 건물이 아니라 성령의 임재가 있는 것
            - 히에론(ἱερόν) : Temple Area / 건물 성전

    영(지성소), 혼(성소), 육(성전뜰)



    외경 토비트 2장에 이런 기사가 실려 있다고 합니다.

    토비트라는 사람이 날씨가 너무 더워서 목욕을 하고, 얼굴을 덮지 않고 담 옆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새들이 담 위로 날아가다가 뜨거운 똥을 토비트의 눈에 누고 가버려서, 토비트가 양쪽 눈을 잃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 토비트는 그런 것으로 유명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포로가 되었을 때 이방 민족의 음식을 먹었지만, 그는 단호하게 그런 음식을 거절했던 사람, 즉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절개를 지키고, 자기의 몸을 소중하게 간직했던 경건한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구약성경에도 보면 이와 비슷한 기사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던 다니엘은, 우상에게 바쳐졌던 왕의 진미대신 채소만 먹고서도, 그 나라의 고기를 먹는 소년들보다 더 건강한 몸을 유지했던 기사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우리는 자신의 몸을 소중하게 간직한 사람들을 귀하게 여깁니다. 

    자신의 몸을 소중하게 여긴 사람이란, 자신의 몸을 깨끗하게 목욕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죄와 더러운 것에 물들지 않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나라를 위해 절개를 지켰던 정몽주나, 한 임금을 섬기기 위해 충절을 지켰던 사육신과 같은 사람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며, 열녀나 충신을 칭송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본문 말씀을 중심해서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0:21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집인 교회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유일한 기초라는 것은, 성경에 나타난 일관된 사상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터 위에 세워진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천하사람 중에, 예수 그리스도 외에 구원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으며, 교회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기초는 어떤 사람이나, 조직이나, 철학이나, 그 어떤 것도 될 수 없습니다.
    철학도 흔들리는 기초이며, 과학도 불완전한 기초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위의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것에는, 우리의 인생을 마음 놓고 세울만한 반석이 없습니다.
    교회의 기초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유일한 기초가 되실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세상 모든 것의 기초가 되신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그 어떠한 터도, 곧 사람에 의해 닦여진 사상이나 업적에 의한 그 어떤 것들도, 참다운 기초가 될 수 없습니다.
    소련은 20세기 초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사상을 기초로 하여, 레닌이 제정 러시아를 쓰러뜨리고 건설한 공산국가라고 했지요?
    한 때는 세계 최초로 우주선을 쏘아 올리며 전 세계를 놀라게 했고, 미국과 경쟁하며 세계를 양분하여 지배하던 초강대국이었습니다. 

    하지만 때가 되자 허망하게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소련이라는 거대한 제국을 세웠던 레닌의 동상은 이제 거의 모두 철거되어, 공원 한구석에 거적으로 덮여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찍이 다니엘을 통해 말씀하셨던 것처럼, 인간의 터 위에 세워진 것은 제아무리 강대해 보이는 나라라도, 결국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비단 한 나라 뿐만 아니라, 각 사람의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의 기초로 삼지 않는 사람들 역시, 제아무리 화려하게 성공한 것처럼 보여도, 결국 때가 되면 무너지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인생의 기초로 삼지 않은 자들은, 장차 마지막 심판 날에 자신이 세운 모든 공적이 무너지는 것을 볼 것이며, 그 자신도 영원한 멸망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그 어떤 다른 기초에 두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두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와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사, 우리를 요동치 않게 하실 영원한 반석이 되심을 믿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의 집’이라고 했던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였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신 것을 알지 못하느냐?”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향해, 그들이 곧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물론 이것은 비단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라, 만 세대 모든 성도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선언은 유대인들에게는 충격 그 자체요, 그들에 대한 정면 도전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성전은 오로지 예루살렘에 있는 돌로 지은 성전 한 곳 이외에는 있을 수 없다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그곳은 자신들조차도 함부로 접근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거룩한 곳이어서, 이방인들은 일정한 한계를 절대로 넘어서는 안 된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이렇게 제한적으로만 성전 접근을 허락하던 이방인들에게, 성전의 출입을 허락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들이 성전 그 자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성전이라 전파하고 다니는 사도 바울을 가리켜, 절대로 살려둘 자가 아니라고 흥분하며 티끌을 날렸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무슨 근거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가리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성도 안에 계시는 성령의 내주하심에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그 순간 성령께서 각 성도의 심령에 들어와 내주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이 누구십니까?
    삼위 하나님 가운데 제 3위시요,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의 영이 내주하시는 성도 역시,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즉 구약 시대의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신 것과 같이,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각 성도 안에 내주하심으로, 각 성도는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각 성도들의 집합체인 교회 역시, 하나님의 성전임에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처럼 성도나 교회를 구약의 성전에 비유한 까닭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이 성도나 교회를 하나님의 성전에 비유한 것은, 교인들이 나뉘어 분쟁하는 것이 교회를 부패시키고 파괴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중대한 죄악임을 경고하기 위함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성전을 더럽히는 자들은 사형에 처하거나, 하나님의 선민 공동체에서 추방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행위는, 곧 하나님을 모독하고 도전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성전을 더럽히는 자에 대해서는, 사형에 처하거나 선민 공동체에서 추방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성경을 보면 성전을 더럽힌 자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징벌하신 사례가 나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율법에 지시되지 않은 불로 분향함으로써, 성소를 더럽혔던 나납과 아비후를 즉시 불로 심판하셨으며, 제사장이 아니면서도 스스로 하나님께 제사했던 사울 왕과 웃시야 왕을 심판하기도 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성전을 더럽히는 일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일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처럼 돌로 지어진 성전을 더럽히는 자에게조차, 엄중한 형벌을 내리도록 규정하신 하나님께서, 영적 성전인 교회 공동체를 더럽히는 자들을 멸하실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므로, 분쟁을 그치고 교회를 거룩하게 유지하라는 것이 곧 사도 바울의 교훈인 것입니다. 

    그래서 17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고 했습니다. 특별히 이 말씀은 두 가지 측면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경종을 울립니다. 먼저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를 더럽히는 일에 대한 경고가 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인 성도들의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교회 역시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더럽히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파당을 만들어 분쟁함으로써, 교회를 더럽히고 파괴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더럽히고 파괴하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는, 간혹 자기의 이기적인 탐심을 위해, 교회를 나누고 더럽히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 역시 결단코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성도 자신을 더럽히는 일에 대한 경고가 됩니다. 이미 여러 번 언급한 대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각자는 스스로 죄와 불의를 멀리함으로써,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을 깨끗하게 간직해야 합니다. 만일 성도가 자기 몸을 죄 가운데 두며 회개하지 않고 계속해서 불의를 행하면, 심판을 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표어 중 첫 번째는 ‘순결한 신앙 공동체’입니다. 그것은 먼저 우리 교회가 신학적으로 영적으로 너무도 혼란한 이 시대에, 순수 복음 신앙을 간직한 순결한 신앙 공동체가 되자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소돔과 고모라를 훨씬 능가하는 성적으로 타락한 이 시대에, 육체적으로도 순결한 신앙 공동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정한 표어입니다. 

    3S 시대란 Science, Sports, Sex를 말합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Speed 시대라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문화와 성을 찬미하는, 소위 성의 혁명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현대의 가장 강력한 종교는 성의 종교라고도 했습니다. 이 성의 종교는 가장 많은 숫자의 신도들을 거느리고, 우리의 세계에 군림하고 있습니다. 여러 해 전 미국의 ‘패인’ 제단에서, 유명한 교육자들을 통하여 영화를 연구케 한 일이 있습니다. 

    그들은 1500편의 영화를 검열한 후, 대부분의 영화 주제가 성문제였다고 보고했습니다. 이미 우리의 청소년들도 이와 같은 음란한 영상물을 보며 자라고 있습니다. 수많은 잡지와 T. V의 노골적이고 선정적인 화면, 컴퓨터의 사이버 포르노 등, 도처에서 성문화가 홍수처럼 범람하고 있는 시대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엘톤 트루불러드(Elton Trueblood)는 말하기를 “문명의 부패는 잘못된 성 모럴의 미화에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한 시대 한 문화 한 사회가 몰락하기 이전에, 그 사회가 성의 문제를 어떻게 취급했는가를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잘못되고 부패한 성모랄 성도덕을,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그 사회는 언제나 멸망으로 치닫고 말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의 원인은, 말할 것도 없이 음행이라는 범죄 때문이었습니다. 폼페이의 최후와 로마의 멸망은, 음란과 간음의 죄가 가져온 무서운 최후였습니다. 어떤 역사가는 이러한 로마의 멸망사를 취급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로마는 희랍을 정복했지만, 희랍의 다신 문화와 오염된 섹스 문화는 마침내 로마를 정복하고 말았다.”고 증언했습니다. 로마는 희랍을 정복했지만, 희랍의 썩고 부패한 성문화까지 정복할 수 있는 거룩한 능력이 그들의 속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마침내 이 강대국은 부패한 성도덕 때문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부도덕을 정복하지 못하면, 그 사회는 결코 오래 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가공할 성도덕의 타락상을 보십시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에, 모든 사람들 속에 내재한 타락성이, 말과 행동으로 표출되는 현상이 성적인 타락입니다. 그런데 현시대의 성적 타락상은, 가히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요즘 젊은 세대를 향해 혼전순결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메시지로 들릴 지경이 되었습니다. 여러 해 전 인터넷 뉴스를 보니까, 미국의 한 여대생이 학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자신의 처녀성을 경매에 내놓았다고 합니다. 그런가하면 국내에서만도 하루 평균 500개씩의 음란 사이트가 생성되고 있다고 하며, 이 사이트들을 통해 배포되는 국내외 음란 동영상은, 하루에 1,000건이나 된다고 합니다. 온 나라가 음풍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성적 타락은 청소년 문제만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T. V 드라마는 불륜을 소재로 하여 안방을 침투하고, 간음을 조장하여 이 사회를 온통 병들게 하고, 가정을 파괴시키고 있습니다. 수많은 가정들이 불륜으로 깨어지고, 이런 면에서 기독교인들의 가정도 예외는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소돔과 고모라를 훨씬 능가하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사람들은 이러한 세태를 탓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부끄러움을 간직해야 할 처녀들까지도, 야한 모습이나 옷차림을 즐기며 섹시하다면서, 옛날 같으면 입에 올리지도 못할 말을 예사롭게 합니다. 

    전국의 모든 경치 좋은 곳에는 러브호텔이 즐비하고, 도시에도 모텔들이 교회당보다 더 많아 보이는 현실인가 하면, 사회 일각에서는 끊임없이 간통죄 폐지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남여가 합의해서 하는 성행위는 죄가 아니므로,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폰팅이니 채팅이니 원조 교제니 해서, 얼마나 많은 청소년들과 가정들이 무너져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나라의 이혼율은 갈수록 높아만 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마치 나비가 이 꽃에서 저 꽃으로 훨훨 날아다니고, 새들이 이 나뭇가지에서 저 나뭇가지로 옮겨 다니듯이, 이 남편에서 저 남편으로 이 아내에게서 저 아내에게로 옮겨 다닙니다. 

    급기야는 ‘스와핑 클럽’이라는 것까지 생겨나서, 회원들은 모임이 있을 때 부부가 꼭 동반해서 가는데, 거기에 가서 남편과 아내를 바꾸어 쾌락을 즐긴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세상은 이제 갈 데까지 간 것 같습니다. 세상은 온통 타락한 성문화의 범람으로,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 직전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이미 인류는 핵전쟁, 자원 고갈, 혹은 공해 같은 문제로 멸망 직전에 있지만, 전술한 바와 같은 타락한 성도덕 때문에 마침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고야 말 것입니다. 

    이렇듯 악한 시대에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실로 소중한 경종을 울려줍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신 것을 알지 못하느냐? 하나님의 성령이 그 안에 임재해 계시는 성도의 몸은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성령을 모신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 역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고 경고했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교회를 더럽히는 죄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를 불평으로 오염시키고, 교회를 나누고 분열시키고, 파당을 만들어 분쟁함으로써, 교회를 더럽히고 파괴하는 자들이 되면 절대로 안 됩니다. 

    다음으로 성도는 하나님의 성전인 몸을 더럽히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인 몸을 더럽히는 죄 가운데 하나가 곧 간음입니다. 성도덕이 참으로 무섭게 타락한 시대, 성 문화가 홍수처럼 범람하고 있는 시대, 예술과 문학이 아무리 성을 예찬하고 미화시킬지라도, 인본주의자들이 아무리 간통죄의 폐지를 주장할지라도, 성경은 분명히 간음은 죄라고 말씀합니다. 이 죄의 대부분이 은밀한 중에 행하여지기 때문에, 혹 사람의 정죄는 받지 않을 수 있으나, 하나님의 심판은 절대로 피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간음죄에 대한 성경의 경고를 들어보십시오. 욥 31:11에 “이는 중죄라. 재판장에게 벌 받을 악이요 멸망하도록 사르는 불이라.”고 했고, 잠 6:27-29절에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야 어찌 그 옷이 타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숯불을 밟고야 어찌 그 발이 데지 아니하겠느냐. 남의 아내와 통간하는 자도 이와 같을 것이라. 무릇 그를 만지기만 하는 자도 죄 없게 되지 아니하리라.”고 했으며, 고전 6:9-10절에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음행하는 자나....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했고, 레 20:10절에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했습니다. 

    계시록에 보면 간음하는 자들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 살인자들과 함께,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롬은 말하기를 “순간적인 쾌락을 얻고, 영원한 고통을 대신 얻는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 교회와, 우리의 몸을 더럽히지 말고, 거룩하고 성결하게 간직하는 순결한 그리스도의 신부들이 되어서, 예수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 몸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聖殿)입니다! (고전 3:16-18)

    우리 인간은 특별한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사람은 다른 동물과 달리 하나님의 특별한 작품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만물의 영장으로 모든 피조물을 지배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이 다른 생물들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생각하는 존재

    둘째는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입니다.
    언어가 있어서 자기 의사를 남에게 표현하며 의사소통을 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동물도 나름대로의 커뮤니케이션을 갖고 교류하고 삽니다만 인간과 같은 언어의 소통은 없습니다.

    셋째는 영적 존재
    그러나 인간의 가장 큰 신비는 인간은 영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동물과 같은 몸만을 갖고 있는 존재가 아닌 영혼이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영을 갖고 있는 존재로서 하나님과 교류하고 소통할 수 있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 방법으로 하나님은 성령을 우리 속에 보내주셨고 그 성령이 거하는 성도는 곧 하나님의 영이 거하므로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앞 부분에서 두 가지 중요한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하나는 교회 내의 분쟁의 문제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 사이에 바울파니 아볼로파니 게바파니 심지어는 그리스도파니 하는 파당들이 생겨나 교회가 마음과 뜻이 하나되지 못하고 파당이 생겼습니다.
    어떤 공동체라도 하나가 되지 못하면 분열이 생기고 무너지게 됩니다. 특히 교회공동체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 되는 곳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4:4-6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니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다른 하나는 지혜의 문제입니다.

    참 지혜는 세상의 지혜가 미련한 것으로 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야말로 참 지혜임을 확신시키는 문제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미련한 것으로 보는 자들은 멸망할 자들이고,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고린도전서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참 지혜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10-12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이 성령을 통해 얻게 되는 지혜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받아들이는 것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서 나뉘지 않고, 하나 되는 것을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교회'라는 개념에 연결을 시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이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이 그 안에 계셔야 하고, 성령이 계시다는 것은 십자가의 도를 믿는 지혜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서 하나 되는 지혜가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지혜가 있어야 하나님의 성전이라 할 수 있으며, 이 두 가지 지혜가 없으면 교회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교회를 각 사람의 심령 위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리 몸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16-17)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지만, 특히 우리 몸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것을 6:19절에서 더 구체적으로 강조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 몸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요, 성령이 거하시는 곳입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몸은 이제 더 이상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값을 주고 우리 몸을 사셨습니다.
    내가 주님을 영접하여 성령이 내 안에 오시는 순간부터 이제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 몸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씀에 몇 가지의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소중한 존재

    이사야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셨고, 우리를 한사람씩 지명하여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것이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러면서 4절에 서 '하나님의 눈에 나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긴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세상에서 무엇보다도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십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우리는 이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보배롭고, 존귀한 사람들, 하나님이 가치 있고,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여기에 모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는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내가 소중한 존재이기에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시고, 나의 삶을 책임지신다고 아울러 말씀하십니다.
    평온할 때는 물론이고, 혹이라도 우리 삶에 힘들고 어려울 때에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사랑하시고, 지키고, 보존하고, 이끌어 가십니다. 

    나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이 내가 고난 당할 때, 힘들어할 때, 상처받고 아파할 때, 가만히 두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나를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때마다 힘을 주시고, 평안을 주시고, 피할 길도 주시고, 모든 시련을 능히 감당하게 하십니다.

    이사야 43:2-3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둘째는 나는 하나님의 성전

    내가 곧 하나님의 성전임을 잊지 말고 행동해야 합니다. 
    '나'라는 존재는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예수그리스도를 믿기에 우리는 내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하고 더 나아가 자부심을 갖고 당당하게 살라고 하십니다.
     
    성도는 자신에 대해 두 가지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고백하는 자세입니다.
    마땅히 죄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는 용서 받은 죄인
    그러나 또 한편으로 예수를 구주로 믿어 하나님의 자녀 된 자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너무 죄인의식만 갖고 소극적으로 살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못된 짓을 하다 들켜 혼났다고 늘 죄송해하고 부모 앞에서 기죽고 사는 것을 기뻐하지 않듯이 이제 모든 죄를 용서받았으니 당당하고 멋있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는 프라이드를 갖고 담대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내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믿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때 인간이 죄 가운데 빠져 방탕할까요?
    자신에 대한 정체성이 사라질 때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며 동시에 성령이 내 속에서 거한다는 성전의식(聖殿意識)을 갖게 되면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면 좌절과 절망, 방황 속에 살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라는 존재가 가치 있는 존재요, 하나님 앞에서 쓰임 받는 존재임을 깨닫고 살아갈 때 그리스도인의 행복이 있습니다.

    셋째는 성전을 관리하는 책임

    내 몸에 성전을 귀하게 관리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배롭고 존귀한 사람들이기에, 이제 우리 몸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내 몸을 하나님의 것으로 알고 잘 관리해야 합니다.
    내 몸을 혹사시키거나 학대하면 안 됩니다.
    내 몸은 내 것이 아니기에 내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무서운 죄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자살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정면 도전입니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니 죄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자살은 또 다른 살인입니다.
    살인이란 다른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만이 아닙니다.
    자살도 일종의 살인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습니다.
    생명은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주님께서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희생하셨습니다.
    이런 귀한 생명을 버리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상황은 이해가 되어도 우리의 목숨을 스스로 끊거나 버려서는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생명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자살론을 말하자, 한 때 유럽은 자살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적이 있었습니다.
    자살 신드롬이 생겨난 것입니다.

    넷째는 더럽히지 말라

    나의 몸을 더럽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문이 바로 여기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문제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자신을 더럽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상숭배나, 음행이나, 부도덕, 세상의 문화로 깨끗하게 보존해야 할 몸을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바른 신앙을 심어주기 위해 고린도전서를 기록했습니다.
    본문도 그런 관점에서 우리가 이해되어야 은혜를 받습니다.

    자기와 몸을 더럽히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6:15-20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 몸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곳입니다. 그래서 몸을 거룩하고 깨끗하게 잘 보존하고, 몸을 지키고, 더럽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분명 성경과 세상의 문화는 다릅니다. 하늘의 것이 있고, 땅에 것이 있습니다. 세상에 속한 것이 있고, 교회에 속한 것이 있으며, 사탄에 속한 것이 있고, 분명 하나님께 속한 것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세상에 삽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문화나 관습에 빠지거나 물들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것을 상징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대표적인 것이 바로 '술과 담배'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것이 세상을 대표합니다. 하나님의 것으로서 우리는 바로 이런 것에서 나를 보존하고, 더럽히지 말아야 합니다. /아멘!/
     
    담배는 우리의 건강과 생명을 빼앗아 갑니다.
    우리의 몸을 헤치는 독과 같습니다. 몇 해 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고 이주일 씨의 금연광고가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담배, 그거 독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한때 담배의 1급 광고 모델로 남성미를 과시했던 최고의 영화배우 '율 브리너'도 담배 때문에 폐암으로 사망했습니다.
    1985년 죽기 전 녹화한 필름에서 그는 '나처럼 담배를 많이 피워서 폐암에 걸리지 말아 달라'고 간곡하게 호소했습니다.

    의사들의 연구에 의하면, 담배 한 개비를 피우면 5분 30초의 수명이 허공으로 날아간다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담배의 유해성분은 발암물질과 독성 화학물질을 합쳐 무려 4,000여종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서 가장 해로운 3대 물질이 '타르, 일산화탄소, 니코틴'입니다.
    특히 타르는 인체에 치명적입니다.
    담배 연기를 통해 인체에 흡수되는 타르 속에는 약 60여종의 발암물질이 포함돼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폐암을 일으키는 주원인입니다.
    폐암 뿐 아니라 무슨 암으로 죽던지 원인의 30-40%도 담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담배는 자기도 죽이고, 남도 죽입니다.
    그렇습니다. 담배가 바로 몸을 헤치는 주범입니다.
    담배가 이런 것이기에 절대적으로 멀리하라고 권합니다.
    하물며 내 몸을 하나님의 것으로 아는 우리가 담배로 몸을 헤치고, 더럽혀서야 되겠습니까?
    절대 안됩니다. 독을 알면서 독을 가까이 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고 강조합니다.
    독을 모르고, 아니 독을 알면서도, 독을 끊지 못하는 것이 '미련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술도 마찬가지입니다.
    술도 건강의 적이요, 독입니다.
    술은 우리 몸에 위, 뇌, 특히 간에 치명적인 병을 줍니다.

    성경에는 술에 대해 많은 교훈을 줍니다.
    물론 술은 때로 약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술을 멀리하라고 명령합니다.
    특히 에베소서에서 보면,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5:18) 

    술은 곧 '방탕'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술은 결코 술로 끝나지 않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술은 곧 방탕으로 가는 통로입니다.
    그것을 대표적으로 알려주는 사건이 성경에 나옵니다.

    다니엘서 5장에 보면, 메대와 바사의 연합군은 바사의 장군인 고레스의 지휘아래 바벨론에 진격하여 바벨론을 격파하고 성를 포위했습니다.
    이제 벨사살 왕과 바벨론의 운명은 풍전등화가 되었습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는 목숨을 내놓고 싸울 임전태세를 갖추고 깨어 경계를 해도 부족하였습니다.
    그런데 벨사살 왕은 큰 잔치를 배설하고 허세를 부렸습니다.

    그는 바벨론 중에서 중요한 인물 일 천명을 초대했습니다.
    벨사살 왕이 거나하게 취하여 술기운이 오르자 곧 자제력을 잃고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술은 이성의 조절기능을 마비시켜 본성과 본능대로 행하게 만듭니다.

    벨사살 왕이 어떻게 했습니까?
    술 취한 벨사살 왕은 명하여 그 부친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전에서 취하여 온 금, 은 기명을 가져오게 하고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로 더불어 그것으로 술을 마셨습니다.

    느부갓네살 같은 위대한 왕도 감히 거룩한 성전 기명에 손을 댈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들이 지극히 거룩하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가까이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벨사살은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죄를 범하게 했습니다.
    십계명에 비추어 볼 때 그는 신성 모독죄를 범했습니다.
    신성모독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공공연히 모욕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벨사살은 금, 은, 동, 철, 목, 석으로 만든 신들을 찬양했습니다.
    우상숭배는 또 다른 신성 모독죄입니다.

    벨사살 왕과 그 귀인들이 잔치를 벌이며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을 때, 이들 앞에 두려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다니엘 5:5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그때에' '여흥이 한창 무르익었을 때에' 술잔치가 다 끝났을 때에, 모든 사람들이 잠에 곯아 떨어져 있을 때가 아니고, 한창 지금 술잔치가 무르익은 그때에 벽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났습니다.

    조금 더 실감나게 표현한다면 '나타났다'는 말은 '툭 튀어나왔다'는 뜻입니다.
    벽에서 뭉클뭉클 하더니 사람의 손가락이 튀어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떠들면서 술을 마시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가 그 모습을 보고 놀라서 쥐죽은듯이 조용하게 되었고 찬물을 끼얹은 듯한 긴장감이 감돌았을 것입니다.
     
    다니엘 5:25
    '기록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메네'는 세어보았다는 뜻으로서 하나님이 여러 해 동안 그의 날을 세어보시다가 '이제 너의 시대는 끝났다'고 정지 신호를 내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끝났다고 선언하시면 인생들은 하던 모든 것을 중지해야 합니다. 벨사살 왕이 교만하여 하나님을 대적했을 때 하나님은 그의 날을 끝나게 하셨습니다.

    '데겔'은 '무게를 달아보았다'는 뜻으로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우바르신'은 무게를 잰 결과로 왕의 나라가 끝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과 호흡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끝났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끝난 것입니다.
    부르시면 가야 합니다.
    실제로 그 날이 벨사살의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30절을 보면 '그 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술 취함으로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사람들이 또 나옵니다.
    그중 한 사람이 헤롯왕입니다.
    헤롯이 자기 생일날 연회를 배설하였을 때, 헤로디아의 딸이 요사스럽게 춤을 추었습니다.
    만취한 헤롯은 그 춤에 매료되어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무엇이든지 원하는 데로 주겠다고 헛소리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 딸은 세례요한에게 원한이 사무쳐 있던 그의 어머니 헤로디아의 사주를 받아 요한의 목을 달라고 했습니다.
    결국 헤롯왕은 의인의 무죄한 피를 흘리는 무서운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노아도 술 때문에 큰 실수를 했습니다.
    의인이요 그 시대에 완전한 사람이라고 인정받았던 노아도 포도주에 취해 그의 막내아들을 저주하는 죄를 졌습니다.
    술은 의인이나 악인이나 가리지 않고 죄를 짓게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술입니다.
    술은 그냥 술로 끝나지 않습니다.
    방탕하게 되든지, 추태를 부리든지, 자기 몸을 내팽개치든지, 정신이 없어지던지 그렇게 이어집니다. 

    술에 잔뜩 취해 밤길을 비틀거리고 걷던 술꾼 한 사람이 맞은편에 서 있던 할아버지와 부딪혔습니다.
    순간 '꽈당'하는 소리와 함께 할아버지는 뒹굴고 말았습니다.
    겁이 더럭 난 그는 얼른 할아버지의 뺨을 두들겨 보고 가슴에 귀를 대어 봅니다.
    아무 소리가 없자, 할아버지를 업고 자기 집으로 갔습니다. 

    그는 할아버지를 자신의 침대에 뉘여 놓고 찬물을 끼얹고 다리를 주무르며 제발 살아만 달라고 애원합니다.
    그러다가 지쳐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새벽녘에 눈을 뜬 그는 기겁을 하고 말았습니다.
    물에 흥건히 젖어 있는 할아버지는 KFC의 광고용 할아버지 조형물이 누워 있는 게 아닙니까?
    술에 취하면 사람인지, 인형인지 구분이 안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18에서 '술 취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술은 먹되 취하지만 않으면 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술을 먹고 취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한잔만 먹어도 취하고, 어떤 사람은 10잔, 20잔 먹어도 취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도대체 술 취하는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하겠습니까?
    성경이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의 의미는 '술이 습관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습관이 무섭고, 몸에 베이고 중독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퇴근하면 가정이 생각나야 하는데, 한잔이 생각나는 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처음 술을 한잔부터 마시지 1병, 5병을 생각하고 마시지는 않습니다.
    한잔, 두 잔을 계속하면 습관이 되고 중독이 되어 빠져 나오지 못합니다. 

    그것은 담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이 박히고, 중독이 되면 좀처럼 끊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술과 담배가 내 삶에 습관이나 문화가 되지 말라는 뜻으로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술이 아니라 성령으로 취하고, 성령이 나를 지배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삶을 살라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몸 된 성전을 거룩하게 관리하라'고 명하십니다.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로마서 2:1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그 방법은 12:2의 말씀처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세상 사람들은 땅엣 것만 생각합니다. 그들은 썩어질 것, 덧없는 것, 일시적인 것만 추구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새로운 마음, 변화를 받은 마음은 다릅니다. 우리는 위엣 것을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영원한 것을 바라보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소망을 두면서 살아갑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세대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문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즉 세상적인 가치관에서 주님의 가치관으로 변화하라는 것입니다. 즉 성도는 세상 사람들이 즐기는 것 즐기고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같이 좋아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노는 물이 달라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 것을 본받지 않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변화란 외향적인 외모를 말하지 않습니다. 심령의 변화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라' 또 '변화를 받아라'라는 말은 다른 방향으로 가라는 말입니다.

    지금까지는 나 자신을 위해 살아왔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믿/ 그런데 그것이 내 힘으로 안됩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 즉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하나님의 뜻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별하라'는 말은 '도키마조' 시험하여 갈라놓는다는 뜻입니다. 참 진리와 비 진리를 구별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 비결은 무엇인가?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신앙 양심에서 찾아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에서 찾아야 합니다.

    마음에 성전 삼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윗 왕이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시14-15).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시 14:1)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성경은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누구인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설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엄숙하게 선언할 뿐입니다.

    창세기 1: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성경 첫장 첫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관해서는 더 이상 논할 여지가 없는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면 시인이 말한 것처럼 '어리석은 자.'가 됩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의 마음은 어떤 상태일까요?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부패한 까닭에 하나님을 깨달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패하지 않은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8세기의 유명한 불란서의 무신론 철학자 볼테르(Voltaire)는 '기독교가 세워 지기까지 여러 세기가 결렸지만 불란서의 한 사람이 50년 안에 기독교를 박멸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리라'고 큰 소리 치면서 펜을 들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은 지 20년 만에 스위스 제네바 성서공회에서 그의 집을 사서 성경 출판소로 만들었습니다. 그 후에는 외국어 성경을 출판하는 본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볼테르가 쓴 책은 6권 한 질에 1달러도 안 되는 90센트에 팔리기도 했습니다. 그가 죽을 때 한탄하며 말하기를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걸...' 그러면서 천국도 지옥도 없다던 그가 죽어가면서 고통 속에 '나는 지옥으로 간다.'고 자기 입으로 고백했답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소련의 최초 우주 비행사 유리 가가린은 비행을 하고 돌아와서 '하늘에 올라 가 봐도 하나님은 없더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모독했습니다. 그런 그가 비행사고로 34세 젊은 나이에 죽었습니다(l934-1968). 그러나 미국의 우주 비행사 암스트롱은 우주비행을 하면서 하나님의 신비한 창조의 솜씨에 충격을 받고 돌아와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세상 것에만 집착하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이 사람이 어리석은 것은 세상에 재물을 많이 쌓아 두면 그것이 영원히 자기 것이 되는 것으로 착각을 했습니다.
      이 어리석은 사람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인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많이 심으십시오! 성경은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심은 데로 거두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죽음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

    이 심판은 불신자들이 가는 지옥 음부에 심판입니다.
    그곳에서 영원히 몸부림을 치며 지내야 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 있는 우리들은 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저 천국에서 영원히 왕 노릇하며 살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교훈은 무엇인가?
    어리석은 자로 살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음의 성전 삼고 살아가는 바른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무엇인가?(시편 15:1-3)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나는 바른 예배자로 살고 있는가?'를 늘 묻고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시15:1).

      여기서 '주의 장막'이란 '하나님의 성전'을 의미하고, '유할 자'란 '계속적으로 머물러 살 자'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계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가 누구냐는 질문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입니다.

    기독교사상을 집대성한 교부 '어거스틴'은 자신이 대단한 신앙의 경지에 들어가 있는 줄로 자부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분이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천국에 갔습니다. 천국에 들어서자 입구에서 천사가 물었습니다.
      '너는 누구냐?' '저는 어거스틴이고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 천사가 다가와서 어거스틴을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야 네 머리 속에는 철학 사상만 가득 차있어'라고 호통을 치더랍니다.

    깜짝 놀라서 꿈에서 깼습니다. 그리고 차분하게 객관적인 관점에서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자 천사의 말처럼 자신은 머리로만 예수를 믿고 있더랍니다. 다시 회개하고 철저하게 신앙생활에 정진했다고 합니다.

    다윗은 시15:1절에서 '성전에 들어가서 예배할 수 있는 사람의 자격'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러 나오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물었다는 것입니다. '과연 제가 성전에 들어가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요?' 이 말씀은 예배하러 나오는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물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과연 나는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인가? 과연 하나님께서 내가 드리는 예배를 받으실 까?'
    이 말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 늘 고민하면서 살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다윗이 그리스도인의 덕목 몇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시15:20)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하나님 앞에 바로 사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직, 공의, 진실'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사는 모습입니다.

    '정직'은 '모든 참된 행위들을 포괄하는 근본적인 행위의 원리'입니다. 사람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이중적인 마음을 품지 않는 것, 즉 흠 없이 완전한 것을 말합니다.

    '공의'는 '무엇을 행하든지 치우치지 않고 상황에 따라 변하거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원칙을 거스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진실'은 '모든 언행의 근원인 마음속 깊은 데서부터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남을 속이지 않는 것은 물론 스스로에게도 정직한 것을 말합니다.

    신설동 설렁탕 집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신앙이 좋은 집사님이 설렁탕 집을 권리금을 주고 모든 것을 그대로 주방장까지 인수받았습니다.
    내일이면 이제 설렁탕 집을 운영하게 된 집사 님이 교회에 와서 간절히 기도하기를 '하나님! 우리 집에 오시는 손님을 예수님을 대접하듯이 하게 하여 주세요'

    다음 날 새벽기도를 마치고 첫 출근을 했습니다.
    주방장은 언제나 그렇듯이 하루 종일 팔 설렁탕 국물을 큰 가마솥에다 끓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고기 국물처럼 보이게 하려고 커피 후림을 약간 타서 뽀얗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것을 본 집사 님이 혼자 중얼거리기를 '예수님을 어떻게 커피 후림을 탄 설렁탕 국물로 대접 하냐?' 그리고 그 국물을 아깝지만 다 쏟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문 앞에 이렇게 써 붙였습니다. '금일은 휴업입니다!'

    식사 때가 되어 설렁탕을 먹으러 온 손님들이 왜 휴업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사정 이야기를 그대로 솔직하게 다 하자, 그 주변에 소문이 나기 시작했는데, '저 설렁탕 집은 진짜 고기국물만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그 설렁탕집은 사람들이 바글바글 끓어서 최고로 잘 되는 설렁탕 집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달라야 합니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집트의 한 가난한 농부가 알라 신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돈 200파운드만 달라는 것입니다.
    그 편지를 본 우체국에서는 수신자가 알라 신이므로 어디로 전해 줘야 할지 몰라서 계장에게 주었고 계장은 과장에게, 과장은 국장에게, 국장은 체신부 장관에게 전달하였습니다.
    이를 받은 체신부 장관은 그것을 대통령에게로 보냈습니다.
    당시 이집트 대통령이던 '낫세르'는 그 편지를 뜯어보고는 농부의 사정을 매우 딱하고 불쌍하게 여겨 대통령 이름으로 100파운드를 우송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농부는 100파운드를 받고 기뻐하거나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노발대발했다고 합니다.
    '알라 신은 분명히 내가 요구한 200파운드를 보내 주셨을 거야.
    그런데 대통령이 중간에서 100파운드를 떼어먹고 나머지 100파운드만 내게 보낸 거야' 우리들의 이야기가 아닙니까?

    어느 가게 주인이 동네 사람들에게 가까운 교회의 새로 부임해 온 목사님 칭찬을 하더랍니다.
    특히 그분 설교를 참 잘한다고 하더랍니다.
    한 번은 손님이 물었답니다.
    '그러면 목사님이 지난주에는 어떤 설교를 했습니까?'
    주인이 대답하기를 '저는 교회 다니는 사람이 아닙니다.
    한 번도 그 목사님 설교를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손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목사님이 설교 잘하는 줄 압니까?'
    주인이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그 교회 교인들이 그 목사님 오신 후에 외상값을 잘 갚아요'

    그렇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머리로 깨닫고 끝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마음으로 결심하고 끝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직하게 행하는 사람을 돌봐주십니다.

    욥기 8:6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정녕 너를 돌아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

    정직하게 행하는 자의 기도를 응답해주십니다.

    잠언 15:8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정직하게 행하는 자의 자손에게 복을 주십니다.

    시편 112:2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

    정직하게 행하는 자의 가정은 흥하게 됩니다.

    잠언 14:11
    '악한 자의 집은 망하겠고 정직한 자의 장막은 흥하리라.'

    정직하게 행하는 사람에게 장수의 축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한 히스기야 왕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그가 기도하자 그의 생명을 15년 동안 연장해주셨습니다(왕하 18:3, 20:6).

    언행심사가 바로 되어야 합니다(시편 15:3)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혀로 참소 한다.'는 말은 남을 해치기 위해서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중상 모략하는 것을 말하고,
    '행악'이란 온갖 나쁜 일로 괴롭히는 것을 말하며,
    '훼방'은 함부로 멸시하고 비난하는 것을 말합니다.

    '스펄전'은 말하기를 '남을 해치기 위하여 이 집 저 집을 두루 다니는 자의 혀끝에는 마귀가 붙어있고, 그 말을 잘 들어주는 자의 귀에도 마귀가 붙어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항상 남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축복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손과 발과 혀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전달해주는 매개체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는 지혜자로 살아야 합니다(18).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여기 '이 세상에서'는 '이 세상의 기준에 따라'라는 사는 자들을 뜻합니다.
    이 세상 기준으로 지혜 있다 하는 사람들을 신앙적인 눈으로 보면 어리석은 자일 뿐, 그러니 모두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볼 때 지혜로운 것을 세상의 기준으로는 어리석어 보여도 택할 줄 알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는 세상사람들이 보면 미련한 것으로 보이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 사실을 바로 아는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고린도전서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여러분, 인생이 이 땅에 태어나는 것이 우리의 뜻이 아니듯이, 떠나는 것도 인간의 뜻이 아닙니다.
    내 의지나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부르면 언제라도, 누구라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가야합니다.
    그것을 보면 분명 인생은 우리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 내 것이 아닌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미련한 사람은 이것을 모르고 더디 알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다릅니다.
    바울 사도는 바로 그것을 알려줍니다.
    내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고린도전서 3:21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만물이 아무리 모두 우리의 것이라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결국 우리는 곧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가만히 보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고린도전서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린도전서 2: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하나님의 성전(聖殿)   

    왜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일까요?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인 이유는 하나님의 성령이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내 안에 거하는 사람은 그 삶이 성령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삶은 성령의 사람입니다.

    (나오스, ναός)와 (히에론, ἱερόν)

    헬라어로 성전을 ‘나오스(ναός)’ 또는 ‘히에론(ἱερόν)’이라고 합니다.
    ‘나오스’는 몸된 성전
    '히에론’은 건물 성전

    한글성경에서 이 두 단어를 구분 없이 '성전'이라고 번역했지만, 의미는 많이 다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고전 3:16-17, 6:19, 고후 6:16, 엡 2:2)
    "예수께서 성전 된 자신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요 2:21)

    1세기 당시에 유대인들에게 성전은 건물성전 뿐이었기 때문에 예수님 이후의 몸 성전에 대한 이해는 전혀 없었습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 곧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시기 전까지는 성전이 대부분 건물성전 ‘히에론’을 말했습니다(마 4장, 12장, 21장, 24장, 막 12장, 요 7장, 행 2장. 행 3장, 4장, 5장, 21장,  24장, 25장).

    그러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고 하더라"는 성전은 ‘히에론’이 아니라 ‘나오스’입니다(마 26:61, 27:40, 요 2:19-21).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는데, 그 '성소'도 ‘나오스’였습니다(마 27:51, 막 15:38). ‘나오스’의 휘장이신 예수님의 몸이 찢어지신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아비 사가랴가 분향했던 성소도 ‘나오스입니다(눅 1:9, 21-22).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는 대부분 성전을 건물성전 ‘히에론’으로...,
    서신서 이하에서는 대부분 성전을 몸 된 성전 ‘나오스’를 사용했습니다.
    히에론은 건물성전의 외형을 가리켰지만,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는 몸 된 성전은 ‘나오스’를 사용했습니다.

    ‘나오스’는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곳, 언약궤가 있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던 곳으로, 성도들의 몸이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시는 ‘나오스’입니다(고전 3:16).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임재 하려면,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우리도 거룩해야합니다(고전 3:16-17,고후 6:16-18).
    이제 더 이상 건물이 성전이 아니라 우리 몸이 성전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이 됩시다!
    성령의 사람이 됩시다!
    신령한 사람이 됩시다!

    분쟁, 시기(3:3)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분쟁(2054 ) ἔρις

    ἔρις, ιδος, ἡ

    1. 다툼,  2. 논쟁,  3. 불화

    발음 / 에리스(ĕris)

    어원 /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분쟁(롬 1:29, 고전 1:11, 빌 1:15), 다툼(롬 13:13, 고후 12:20) 
    신약 성경 / 9회 사용

    시기(2205) ζηλός

    ζηλός, ου, ὁ, ζηλός, ους, τό

    1. 열심,  2. κατὰ ζ.: 열심에 관한한,  3. ζ. θεοῦ: 하나님을 향한 열심

    발음 / 제로스(zē- lŏs)

    어원 / 220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열심(요 2:17, 롬 10:2, 빌 3:6), 시기(행 5:17, 롬 13:13, 고전 3:3, 고후 12:20).
    신약 성경 / 16회 사용
    * 2204. ζέω

    1. 끓는 열성으로,  2.사도행전 18:25,  3. τῷ πνεύματι ζέοντες

    발음 / 제오(zĕō)

    어원 / [기본형] 분사 ζέων: 끓이다, 삶다, ζέων τῷ πνεύματι
    관련 성경 / 열심을 내다(행 18:25, 롬 12:11).
    신약 성경 / 2회 사용

    사역자(3:5) - διάκονος, ου, ὁ, ἡ 1249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1. 종,  2. 협조자,  3. 집사

    발음 / 디아코노스(diakŏnŏs)
    어원 / 아마도 폐어가 된 διάκω ‘심부름을 가다’에서 유래[1377과 비교]
    관련 성경 / 섬기는 자(마 20:26, 막 10:43, 요 12:26), 사환(마 22:13), 하인(요 2:5, 9), 사역자(롬 13:4, 고전 3:5), 추종자(롬 15:8),
    일꾼(롬 16:1, 고후 3:6, 엡 6:21), 집사(빌 1:1, 딤전 3:12), 짓게 하는 자(갈 2:17).
    신약 성경 / 29회 사용

    동역자 συνεργός, όν 4904


    1. 함께 일하는,  2. 조수

    발음 / 수네르고스(sünĕrgŏs)
    어원 / 4862와 2041의 어간의 합성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돕는(고후 1:24), 함께 수고하는(빌 2:25, 요삼 1:8).
    [명] 함께 역사하는 자(골 4:11), 일꾼(살전 3:2), 동역자(롬 16:3, 고전 3:9, 빌 4:3).
    신약 성경 / 13회 사용

    고린도전서 3:23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오늘의 기도

    하나님의 것으로 살아봅시다!
    Let's live as God's!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리스도의 일군(4:1) ὑπηρέτης, ου, ὁ  / 맡은 자 οἰκονόμος, ου, ὁ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찌어다.
    So then, men ought to regard us as servants of Christ and as those entrusted with the secret things of God.

    숨길 비(秘) - 향기로울 별
    1. 숨기다,  2. 향기롭다,  3. 祕의 俗字

    示(보일시) + 必(반드시필)

    빽빽할 밀(密)
    1. 빽빽하다, 2. 자세하다, 3. 은밀하다,  4. 숨기다, 5. 조용하다

        宓(잠잠할밀) + 山(메산)



      일군(5257).  ὑπηρέτης

      ὑπηρέτης, ου, ὁ 

      1. 하인,  2. 사환,  3. 조수

      발음 / 휘페레테스(hüpērĕtēs)
      어원 / 5259와 ἐρέσσω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옥리(獄吏), 아랫사람(마 5:25, 막 14:54, 요 7:32), 일꾼(눅 1:2, 고전 4:1), 맡은 자(눅 4: 20), 종(요 18:36, 행 26:16),
      부하(행 5:22, 26), 수행원(행 13:5).
      신약 성경 / 20회 사용

      맡은 자(3623).  οἰκονόμος

      οἰκονόμος, ου, ὁ  3623


      1. 청지기,  2. 일반 관리인,  3. 신적인 업무를 맡은 자

      발음 / 오이코노모스(ŏikŏnŏmŏs)
      어원 / 3624와 3551의 어간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청지기(눅 12:42, 갈 4:2, 딛 1:7), 재무관(롬 16:23), 일꾼(고전 4:1), 맡은 자(고전 4:2).
      신약 성경 / 10회 사용


      충성(忠誠)

      1. 히브리어

      아만 - 기본어근 ; 아마 `세우다', 또는 `지탱하다' 부모나 유모로서 `양육하다', 상징적으로 `확고하 다', 또는 `신실하게 하다', `신뢰하다', 또는 믿다, 영구하다, 또는 조용하다, 도덕적으로 진실하다, 또는 확실하다, 한번은-따라서 확신, 믿다.

       2. 헬라어

      페이도 - 기본 동사 ; 확신하다, 유추적으로 `화해하다 진정시키다, 동의(내적인 확신으로) 의존하다

      피스티스 - `설득' 즉 `신용', 도덕적으로(종교적 진리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에 대한, 종교적 선생에 대한) 확신, 특히 구원에 대해 그리스도를 신뢰(추상명사) 직업에서의 `꾸준함', 연루된 의미로 종교적(복음) `진리'자체의 체계, 충성(막11:22,롬3:3).

      피스토스 - 대상이 `믿을만한', 주체가 신실한.

      * 충성(忠誠)에 대한 성구

      1. 충성의 정도(범위)

      마 25:21 - 지극히 적은 일에 충성

      눅 16:10 - 큰 것에도 충성

      눅 16:12 - 남의 것에 충성

      고전 4:2 - 맡은 바에 충성

      히 2:17 - 하나님의 일에 충성

      히 3:2 - 하나님의 집에 충성

       2. 충성해야 할 이유

      마25:28 - 가진 것까지 빼앗기기 때문에

      딤전 1:12 - 더 큰 직분을 맡기니

      딤후 2:2 - 전할 사명이 있기 때문에

      히 3:6 - 아들이 고로

      계 2:10 - 생명의 면류관을 맡기 위하여

      3. 충성한 자의 결과

      마 25:23 -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게 됨

      마 25:29 - 풍족하게 됨

      눅 19:17 - 권세를 차지함

      딤후 2:2 - 타인을 가르치게 됨

      계 2:10 - 생명의 면류관을 얻음

      * 이렇게 일하자

      1. 성막에서 일하는 자처럼 책임감을 가지고............출 25:2

      2. 느혜미야와 그를 돕는 자들처럼 기도의 음성으로.....느 4:9

      3. 구스의 내시에게 간 집사 빌립처럼 민첩한 걸음으로..행 8:30

      4. 배 위에서 사람들에게 행한 사도들처럼 친절한 말로..행 27:34-36

      5. 마술사 시몬에게 한 베드로처럼 식별함으로..........행 8:22

      6. 고기잡이를 같이 돕던 제자들처럼 일하는 손으로.....눅 5:7

      οὕτω 3779

      1. 이와 같은 방식으로,  2. 다음과 같이,  3. 요한복음 3:14

      발음 / 후토(hŏutō)
      어원 / 377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이렇게, 이와 같이, 그렇게, ~같이, ~그렇게(눅 11:30, 요 3:14, 롬 12:5, 고후 1:5), 그대로(요 4:6).
      신약 성경 / 208회 사용

      능력(能力)

      δύναμις, εως, ἡ  1411

      1. 힘,  2. ἰδίᾳ δ. ~의 권능으로,  3. ἐν δ.: 권능으로

      발음 / 두나미스(dünamis)
      어원 / 141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권세(마 6:13, 행 4:7), 권능(마 7:22, 막 6:5, 행 1:8), 능력(마 13:54, 눅 1:17, 롬 1:4), 재능(마 25:15), 권능자(막 14:62),
      뜻(고전 14:11), 힘 (고후 1:8, 8:3, 히 11:11), 세력(히 11:34).
      [동] 능하다(막 9:39, 눅 19:37), 강하다(고전 15:43), 힘있다(계 1:16)
      신약 성경 / 119회 사용

       

      충성에 대한 이야기 

      처칠 수상이 하루는 국회에 나가 연설을 하게 되었는데 손님을 맞이하다가 시간이 좀 늦었다.
      그래서 운전수에게 신호를 무시해도 좋으니 속력을 내어 시간 안에 국회에 닿게 하라고 명령했다.
      도중에 교통순경이 달려와 차를 세웠다.
      운전수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수상 각하의 차요, 지금 국회에 가는 길인데 시간이 좀 늦어서 급하게 가는 중이요"

      그러나 교통순경은 뒷자리에 앉아있는 처칠을 한번 힐끗 보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수상 각하를 닮긴 했는데 영국의 수상인 처칠 경의 차가 교통위반을 할 리가 없소, 당신은 교통 위반에다 거짓말까지 했소.
      면허증을 내놓고 내일까지 경찰서로 출두하시오"

      처칠은 교통순경의 직무를 수행하는 엄격한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경시총감을 불러서 그 교통순경을 일 계급 특진시켜 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경시총감은 이렇게 말하며 처칠의 명령을 거절하는 것이었다.

      "경찰 조직법에 그런 규정이 없어서 특진을 시킬 수가 없습니다."

      두 번째로 감명을 받은 처칠은 아주 만족스럽게 웃음을 터트리면서 말했다.

      "내가 오늘은 경찰에 두 번씩이나 당하는군." 

       고종황제가 러시아 공관에 피신하고 있었다.
      친로파가 쿠데타를 일으킨 셈이었다.
      나라 일이 정동 골목에서 집행될 수밖에 없었다.

      그 때 이상재 선생은 참찬이라는 벼슬자리에 있어 고종을 뵈려고 러시아 공관으로 갔다.
      그러한 난중에도 나인(궁녀)들은 자줏빛 보자기에 싼 것을 고종 앞에 갖다놓으니, 매관 매작하는 첩지(사령장) 보따리가 분명하였다.

      선생은 아주 천연스럽게,
      "임금께서 계신 방이 어찌 이리도 추운고?" 하시며 슬쩍 그 보자기를 집어 벽난로에 넣으니 사령장 보따리는 활활 타버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땅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대죄를 하고 고종도 선생의 충성을 가상히 여겨 이를 불문에 붙이기로 하였다.
      선생이 밖으로 나오다가 내시들을 향해 "이놈들아, 외국 공관에까지 와서 폐하를 욕되게 하느냐?"고 큰 소리로 꾸짖었다. 

      영국의 그 유명한 빅토리아 십자훈장이 처음으로 수여된 것은 1857년, 런던의 하이드팍 공원에서 이었다.
      여왕에게 그 훈장을 받기 위하여 한 사람씩 올라오는 중에, 싸움터에서 용감하게 큰 공로를 세우고 팔과 다리를 잃은 군인이 여왕 앞에 올라와 섰다.
      지팡이에 의지하고 간신히 서있는 영국의 용사를 바라보던 여왕은 훈장을 떨어뜨린 채로 뒤로 돌아 서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여왕은 수천의 군인을 등 뒤로 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잠시 후 진정한 여왕은 수천의 군인의 돌아서서 훈장을 집어 들고 용사의 가슴에 꽂아주며 사례의 말을 했다.
      그러자 그 군인은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하나님이시여, 우리의 여왕을 축복하소서!
      여왕페하와 조국을 위해서라면 한번 더하래도 이 몸 바쳐 싸우겠습니다."

       팔 다리를 하나씩 잃어버린 용사의 심금을 감동시킨 것은 가슴에 찬 훈장 때문이 아니라, 나라 위해 희생한 충성을 뜨겁게 인정해 준 여왕 폐하의 눈물이었던 것이다.

      세상의 사람들이 모두 죄악과 정욕으로 살고 있는 동안에도 당신과 내가 주님을 섬기는 거룩한 믿음을 지켜 열심히 충성했다면 그분이 왜 이 모든 것을 모르시겠는가?

      히브리서 11장에는 신앙의 거성들이 수록되었는데 하나님께 충성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늘 아버지께 효자요 충신이요 산 순교자들이다.
      사람은 달란트가 각각 다르고 은사도 다르고 처해있는 상황도 다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처해있는 [지금] [여기]에서 충성하는 것이다.

      크리스천이 부름 받은 장소는 [지금 여기]다.
      과부가 가진 엽전 두 닢, 몸이 열개라도 모자라는 중요하고 바쁜 시간 중에서 주님께 드리는 첫 시간을 주님은 원하신다.
      병들고 깨진 질그릇 같은 인생이냐 깨진 항아리 소리로 찬송을 불러라. 문둥이면 어떠냐.

      법주사 뜰 구석 큰 바위 꼭대기에 500년 묵은 앙상한 소나무가 있다.
      던져진 곳에서 불평 없이 충성되게 삶을 지킨 그 나무같이 되고 싶다.

      내가 목사가 되기 전에 남부의 어떤 큰 상회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
      "자네가 한 훌륭한 일의 결과에 대하여 크게 치하하고 싶네."
      나는 이 말을 매우 고맙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너는 충성하였구나.
      잘하였다."고 하시는 것을 듣는다면 얼마나 굉장하겠습니까?

      우리 국군병사들이 전선에서 돌아왔을 때 그들의 충성과 훌륭한 행동을 축하하며 환호 갈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성도들이 하는 나라의 거리를 행진해 갈 때 주님께서 그들의 충성을 칭찬하실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보답은 언제나 충성된 자에게 돌아갑니다.

      뉴욕시에 어떤 사람의 청동상이 있는데 그의 팔다리가 묶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동상 밑에는 "조국을 위해 바칠 목숨이 하나 밖에 없는 것이 원통하다"는 글이 쓰여 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에게 충성합시다.
      우리의 목숨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 유일한 애통함이 될 것입니다.

      어느 고을에 두 명의 머슴을 둔 사람이 농사를 짓고 있었다.
      두 머슴 중 한명은 주인이 보건 안보건 상관없이 자기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여 주인의 농사일을 거들어주었고, 또 다른 한명의 머슴은 그와는 달리 주인이 없을 때는 일을 하지 않고 있다가 주인이 나타나기만 하면 지금까지 가장 잘 하던 것처럼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주인은 이를 모르는 척하고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그 해가 저물어 가고 있는데 주인은 이들 두 머슴에게 사경을 주기로 하고 그들을 불렀다.

      "이보게, 자네들. 지금까지 우리 집 일 해주느라 고생이 많았네.
      내일은 내가 자네들에게 사경을 줄 것이니 오늘 마지막으로 새끼를 꼬아 주겠나."

      그러자 한 머슴은 아무 말 없이 짚을 가져다가 물을 추겨 새끼를 꼬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주인 위해 일하는 것이니 잘 해주고 가리라 마음 먹었다.
      또 한 머슴은 생각하기를 내일이면 이집을 나가는데 새끼를 꼬라고 하니 하면서 투덜거렸다 일을 하기는 싫고, 하는 둥 마는 둥 한 발정도 시작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는 이내 잠을 청하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주인은 꼰 새끼를 가져 오라고 하더니 새끼줄 길이만큼 엽전을 꼬여서 가져가라고 했다.
      항상 주인 눈치만 살피던 머슴은 한 발 정도 밖에 안 되는 새끼줄에 엽전을 가져가야 했다.

      어느 공산주의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공산주의 철학보다 인간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너희를 이길 수 있다.
      우리는 현실주의자이다.
      우리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들을 갖고 있다.
      나는 공산주의를 위해 나의 봉급, 나의 정력을 모두 바친다.

      반면에 너희 기독교인들은 복음을 전하는 데 지극히 적은 정성을 쏟고 있다.
      기독교가 실제적 생활 속에서 증거하지 않으면 어떻게 그 높은 이상을 증거할 수 있겠는가?
      너희 기독교인들은 손에 흙이 묻는 것조차도 두려워하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은 당의 명령이라면 생명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들과 대항하기 위해서는 공산주의자들보다 더욱 확고한 신념과, 그리고 어느 누구도 용서할 수 있는 사랑과 그리스도의 명령이라면 세상 끝까지 따라가는 충성심이 우리에게 필요할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잘 아시는 김활란 박사께서 63세에 이화여대 총장직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퇴임 후 그가 처음으로 찾아간 사람은 감리교의 감독님, 목사님이었습니다.

      "제가 이제 목사 안수를 받아 목사가 될 수는 없습니까?"

      그 때 김 박사는 63세였으므로 감리교 헌법으로는 목사가 될 수 없었습니다.
      목사 안수를 받을 길이 없자 김 박사는 미국 유니온 신학교에 가서 두 학기 동안 성서를 연구했습니다.

      비록 목사 안수는 받지 못했지만 돌아오셔서 강원도와 충청도로 다니시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분은 억압받고 무시당하는 여성들의 교육을 위해서 일생을 바쳤습니다.

      자신은 첩의 딸로 태어났지만, 하나님의 복음으로 구원을 얻었으니 이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며 강원도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생명이 다할 때까지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나려는 때 제자와 친구들이 모여 슬퍼하자,
      "여러분, 나는 최선을 다해서 살아왔소. 내가 죽거든 장송곡을 부르지 말고 '할렐루야' 코러스를 불러주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조용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분은 언제나 죽음을 준비하면서 위대하게 살았던 것입니다.

      ‘오늘 내가 이 세상을 떠난다면 나는 어떤 흔적을 남기고 갈 것인가? 내 죽음의 준비는 되어 있는가?'

      오늘도 우리는 우리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 충성을 다하는 하루를 살아야 하겠습니다.

      어느 부자가 섣달 그믐날에 종들을 불러놓고 볏짚 한 단씩 주며 새끼를 꼬라고 했습니다.
      새끼를 꼬되 새끼손가락보다 가늘게 꼬라고 했습니다. 종들은 투덜거렸습니다.

      "아무리 지독한 주인이지만 섣달 그믐날까지 이렇게 새끼를 꼬라고 할게 뭐람?
      그것도 굵은 새끼가 아니라 손가락보다도 더 가늘게 꼬라고 하니 밤새도록 꼬아도 이 볏짚을 어떻게 다 꼴 수 있담?"

      어느 종은 새끼를 꼬다 말다 하는가 하면, 어느 종은 손가락의 몇 배나 굵게 꼬아서 빨리 볏짚을 없애려 했습니다.
      그러나 한 충성스러운 종은 아무 불평 없이 주인이 꼬라는 대로 가느다랗게 그리고 보기 좋게 꼬았습니다.
      그는 다른 종들이 요리조리 요령을 부려 일찍 끝내고 자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고 혼자서 밤새도록 새끼를 꼬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주인은 커다란 주머니를 하나 들고 나왔습니다.

      "모두들 들어라. 작년 한 해는 다 나를 위하여 너무나 수고가 많았다.
      이제 너희들이 꼰 새끼줄로 이 엽전을 마음껏 끼워 가져가거라.
      돈은 얼마든지 있으니 가져가도록 하라.
      단 새끼줄에 끼워 가는 것에 한한다."

      이 말을 들은 종들은 당황했습니다.
      자기들이 꼰 새끼로는 돈을 끼워 가져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종들은 후회가 막급하였으나 이제는 별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인이 하라는 대로 충직하게 밤새도록 가느다랗게 새끼를 꼰 종은 그가 충성스럽게 한만큼 많은 엽전을 가져갈 수 있어서 마침내 종살이를 면했다고 합니다.

      일본의 유명한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가 동경 제일 고등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
      일본 천황의 '교육 칭호'라는 것을 거부하여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교육 칭호'를 읽게 되면 모두 일어서서 차렷 자세로 듣곤 했습니다.
      그런데 우찌무라 선생은 천황도 사람인데, 거기에다 경의를 표할 필요가 없다고 했던 것입니다.

      우찌무라는 젊었을 때 미국으로 건너가 식당에서 접시를 닦으며 공부를 계속했습니다.
      그 때 어느 사람이 우찌무라에게 "무엇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하느냐?"고 묻자
      "나는 세상의 부귀와 명예에 관심이 없소. 내가 원하는 것은 더 큰 영광이외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충성을 약속한 사람에게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승리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이 면류관의 약속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리스도께 충성할 수 있는 힘을 공급해주는 것입니다.

      사냥꾼이 개 두 마리를 길렀다.
      한 마리에게는 사냥을 가르치고 다른 한 마리에게는 집을 지키게 하였다.
      그런데 사냥꾼은 사냥하여 온 것 중에서 한 몫을 언제나 집지키는 개에게 주곤 하였다.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사냥개가 집 지키는 개에게 항의를 하였다.

      "내가 고생 고생하여 잡아온 것을 너는 아무 일도 안하면서 먹다니 말이 되느냐."

      그러니까 집 지키는 개는 대답하였다.

      "그 말은 나한테 하지 말고 주인한테 하렴. 나는 네 것을 먹는 것이 아니고 주인의 것을 먹는 거란 말이야."

      불란서 시인 알프레드 뮈세는 `5월의 밤'이라는 시(詩)로 유명합니다.

      이 아름다운 시 속에서 어미 새 펠리컨이 등장합니다.
      어미 새 펠리컨은 갓 낳은 굶주린 새끼 새들을 해변 위에 놓아두고 먹이를 구하기 위해 여행을 떠납니다.
      그러나 오랜 여행에도 불구하고 어미 새는 단 한 줌의 먹이도 구하지 못하고 되돌아오고 맙니다.
      여행에 지친 어미 새 펠리컨이 저녁 안개 속에서 갈대숲으로 돌아올 때  굶주린 새끼 떼들은 어미 새에게로 몰려갑니다.

      그러자 어미 새는 목을 흔들면서 늘어진 날개 속으로 새끼들을 포옹합니다.
      다음 순간 어미 새는 해변 위에 누운 채 자신의 심장을 새끼들의 먹이로 내어놓습니다.
      어미 새의 심장과 내장이 새끼들의 입으로 사라지기도 전에 어미 새는 숨을 거두고 맙니다.

      자신의 심장과 생명들을 살아가게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헌신일 것입니다.

      예수는 내 삶의 주인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다는 고백은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겠다는 결단입니다.
      이렇게 결단한 사람을 “예수님의 제자, 그리스도의 종, 하나님의 종, 관리인, 일꾼”이라고 합니다.

      ‘일꾼(ὑπηρέτης)’이라는 말의 원어의 의미는 그 당시 로마시대 전투를 하는 배 가장 밑층에서 노를 젓는 노예를 말합니다.
      노예 중에 가장 천한 노예입니다.
      주인의 명령, 배의 함장의 명령에 따라 일할 수 밖에 없는 일꾼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일군이요 종이 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우리는 그러한 밑층에서 노를 젓는 노예와 같은 자라고 알리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사도 바울이 이런 말씀을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고린도교회 안에 아볼로파, 바울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라는 파벌이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파벌이 형성되는 것은 사람이 주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인 하나됨을 깨트리는,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는 일을 하는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속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런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아볼로도, 베드로도, 바울인 나 자신도, 그리고 여러분 모두도 다 같은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는 신분을 분명히 알려 주고자 한 것입니다. 편이 나누어져 다투고, 싸워서는 안되는 모두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는 같은 일꾼이라는 것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은 주인이 되신 주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주님의 일이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것을 말합니다.

      ‘맡는 관리자’라는 말은 ‘오이코노모스’라는 단어이며 큰 집을 관리하는 청지기, 관리자, 집사란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일꾼이 하는 일이란 하나님의 집의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집의 일을 하는 일꾼 된 성도들이 가져야 할 첫 번째 자세는 “이런 경우에 관리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신실성입니다”
      개역성경에는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충성, 신실성이란 하나님이 믿을만한 사람, 신뢰할만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누구를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합니까?
      책임감이 있는 사람입니다.
      맡은 일을 끝까지 책임감 있게 수행하는 사람이 믿을만한 사람, 충성스런 일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 잘 하기를 요구하기보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끝까지 감당하기를 원하십니다.

      충성되고 신실한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서 기쁨이 되는 행동과 모습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회사나 가게에서 일을 하는 종업원들 가운데 주인의 마음을 힘들게 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 안에서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분열하게 하고, 힘들게 하는 험담과 미움, 시기와 불순종으로 어렵게 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충성됨은 하나됨, 화목함을 이룹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충성됨은 사랑의 열매, 기쁨의 열매, 감사의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충성됨은 오래참음으로 마지막에 선을 이룹니다.
      그렇기에 요한계시록 2:10절에도“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3절을 보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서 심판을 받든지,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받든지, 나에게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개역성경에는“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사도 바울은 사람들의 칭찬과 비난의 평가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매우 작은 일” 이라 했습니다.
      타인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겠단 뜻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는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잣대는 부정확합니다.
      잘 했다고 칭찬해도 너무 으슥해하지 말고, 잘못한다고 비난해도 너무 좌절과 분노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일꾼 된 우리는 스스로를 평가할 때가 있습니다.
      3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그뿐만 아니라, 나도 나 자신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개역성경에는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바울사도는 자기 스스로 자기를 평가하는 것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합니다.
      스스로 착각하여 우쭐해지기도 쉽고 열등감에 빠져 낙심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나를 판단하고 스스로 자책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결코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평가도, 자기 스스로의 평가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면, 그럼 진정한 평가는 어디에서 이루어집니까?
      바로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4-5절을 보십시오.
      “나는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로 내가 의롭게 된 것은 아닙니다. 나를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는, 아무것도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어둠 속에 감추인 것들을 환히 나타내시며, 마음 속의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 때에 사람마다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한 사람에 대해 내리는 평가는 지극히 일부분에 대한 평가입니다.
      우리가 그 사람의 일상을 24시간 관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까칠해보이고, 깍쟁이처럼 보이고, 뺀질뺀질해 보여도, 다른 곳에서는 후덕하고, 사랑이 많고, 섬기는 일을 잘하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못 보는 감추인 부분들을 다 드러내어 최종적인 평가를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가는 우리 마음의 뜻이 어떠한지 중요하게 평가하십니다.
      여기 “마음의 뜻”이란 마음의 동기를 말합니다.
      무슨 동기로 일하느냐는 것입니다.
      사람은 행동만 보지만, 하나님은 마음의 의도를 보십니다.
      고상하고 거룩한 일들을 하면서도, 이기적인 마음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가 보기에는 의심쩍고, 겉으로만 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거룩한 마음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사람들의 속마음을 아십니다.
      하나님만이 그 마음의 동기와 속을 보시고 바르게 평가하십니다.

      진정한 평가는 하나님 앞에서 이뤄집니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판단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명령이 5절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는 아무것도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어둠 속에 감추인 것들을 환히 나타내시며 마음속의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 때에 사람마다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나의 신분, 우리의 신분과 사명은 그리스도의 일꾼, 배 밑에서 노를 젓는 노예와 같다는 겸손함을 가지고 살아가십시오. 주님의 명령대로 함께 한 방향으로 노를 저어 배를 움직여 목적지에 도착하게 하는 자임을 기억하시고 하나됨으로 섬기는 자가 되기를 기도하십시오.

      우리는 누구를 판단하고 정죄하고 비난할 자격과 능력이 있지 않음을 깨닫고 마음의 속 마음을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다 드러내 심판하실 자는 심판하시고 상 주실자는 상 주실 것을 믿고 우리가 할 일은 그 영혼을 살리고, 세우고, 함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하나됨을 위해 힘써야 할 것임을 기억하고 살아가는 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신스틸러(scene stealer)? 후페레테스(ὑπηρετης)? 

      Scene Stealer란 관심을 독차지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ὑπηρέτης는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높은 지위와 명성에 대한 열망이 있다.
      명성은 다른 사람들이 어떤 개인에게 부여하는 가치다.
      가끔은 주목받고 싶고 인정받으며 살고자 한다.
      화려한 무대에서 관객의 박수를 한 몸에 받는 주연이 못되어도 괜찮다.
      투명인간으로 살고 싶지 않을 뿐이다.
      역사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시고 우리는 조연이지만 scene stealer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잖아 있다.
      영화나 TV 드라마에서 발군(拔群)의 연기력이나 독특한 캐릭터로 주연 이상의 주목을 받은 조연(助演), 즉 ‘신스틸러(scene stealer)’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람은 역사의 무대에서 주연이신 그리스도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뛰어난 연기력을 앞세워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신 스틸러’, 즉 주연 못지않은 조연 연기자가 아니다.

      사실 아담은 신스털러 1호였다.
      유발 하라리가 쓴 책 제목처럼 신이 된 인간, 즉 호모데오스가 되고자 하였다.
      하지만 에덴동산의 청지기요 조연 주제에 주인공이신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다 인류에게 죄와 사망을 가져오는 죄를 범하였다.
      자아실현에 대한 욕구가 있는 것이다.

      David Zweig(데이비드 즈와그, 언론인이자 작가)는 그의 책 'Invisibles'에서 딴지를 건다. "타인의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실제 가치보다 훨씬 과장되어 있다.
      외부의 인정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매우 뛰어난 능력이다. 묵묵히 맡은 일에 몰입하는 것이 나를 위대하게 만든다.

      일꾼에 해당하는 ‘ὑπηρετης’(후페레테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사자인 Hermes에 대해서 사용되었다.
      루스드라 사람들이 바울을 말하는 신으로 여기고 헤르메스라 부르는 일이 있었다(행 14:12).
      휘페레테스는 제우스의 뜻을 행하는 자, 그래서 자기 배후에 제우스의 권위를 지닌 자를 뜻하는 것이다.
      사자가 권위 있는 것이 아니라 제우스가 권위자이기에 사자도 또한 권위가 있는 것이다.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은 지도자들을 평가할 때 있는 그대로가 아닌 다른 사람과 비교에 의해 내려졌다.
      고린도전서 4:1에서 ‘사람이 마땅히 여길지라’는 호소를 통해 독자들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인식하길 원한다.
      여기에 사족을 달 필요가 없다.
      굳이 사도, 선교사, 목회자, 박사라는 군더더기를 달지 않아도 된다.
      일꾼이 강조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높아져야하기 때문이다.
      교회지도자를 비교하는 배경에는 더 훌륭하다, 더 좋다는 비교의식이 빼어있다.
      바울은 이런 높은 자리와 높은 지위 그리고 선호하는 호칭과 대조적으로 일꾼과 맡은 자라는 실질적인 지위와 호칭을 제시한다.
      ‘일꾼’은 종 또는 하수인(subordinates)이다.
      ‘맡은 자’는 관리인(estate-manager) 혹은 청지기(steward)다.

      과거 조직 리더에게 상명하복(上命下服)의 소통은 매우 효율적인 것이었다.
      선배 리더는 ‘답’을 알고 있거나 알고 있는 것으로 생각됐다.
      이때 후배는 ‘선배의 명령’에 큰 신뢰를 보내고 상황 판단에 대한 권한을 선배에게 위임한다.
      그리스도는 단순히 선배 리더가 아니라 주인이요 왕이다.
      우리는 후배 정도가 아니라 일꾼이요 종이다.
      주인의 권위와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휘페레테스의 자세다.
      휘페레테스는 종교에서 제사를 돕는 사람을 나타낼 때 쓴다.
      그리고 인간관계에서 이 용어는 친구를 위해서 무엇인가 안정되도록 이타적인 마음을 갖고 도와주는 사람을 말한다.
      복종을 받아들이고 봉사한다는 뜻이 언제나 초점이다.
      영화 ‘친구’의 명대사에서 찾을 수 있다.
      늘 한수 위인 친구 유오성에게 장동건이 불쑥 던진 말은 ‘내가 니 시다바리가’이다.
      일본말 시다바리는 ‘아랫사람, 부하, 조수’가 ‘일꾼’에 해당하는 ‘휘페레테스’이다.

      왕의 일꾼

      일꾼에 해당하는 ‘휘페레테스’는 사역자에 해당하는 ‘디아코노스’와 다르다. 휘페르테스는 ‘공적인 자리에 있는 어떤 이를 돕는 자’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일꾼은 주군이 왕이신 그리스도이심을 잊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일꾼은 철저하게 왕이신 그리스도의 사람이면 족하다. 수식어가 필요 없다. 그리스도의 총애를 받는 일꾼, 선임 일꾼, 수석 일꾼 같은 사족이 불필요하다. 사람들이 화려한 수식어에 매료되고 호감을 가질 것이라는 기대를 내려놓아야 한다. 그냥 왕의 사람이면 된다. keyman, 즉 중심인물이라는 말을 듣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중요 인사, 핵심 인물, 특정인, 오른팔, 좌청룡과 우백호가 아니다.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좌청룡 우백호가 있었으니, 바로 마에케나스와 아그리파였다. 바울은 자신을 비롯한 일꾼들이 모세에게 아론과 훌과 같이 그리스도를 섬긴다고 말하지 않는다.

      바울은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고 단언한다. 이것이 일꾼의 자세이다. 그리스도의 일꾼들은 남들이 알아주면 한편으로는 고맙지만 알아주느냐 아니냐에 목숨을 거는 자가 아니다. David Zweig는 'Invisibles'에서 남들이 알아주는 것이 일꾼의 가치를 측정하는 수단이나 기준이 아니라고 말한다. 누구의 눈에 띄지 않아도 좋다. 그리스도께서 알아주시면 오케이다. 사명을 감당하는 자체에 성취감과 기쁨을 얻으면 만족스러운 것이다. 일꾼이 세상에서 박수 받고 상을 다 받으면 하늘에서 상이 없다(마 6:1-2).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자는 백배의 복을 받고 핍박을 겸하여 받으면 내세에 영생을 얻지 못할 자가 없다(막 10:30).

      일꾼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자가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는 자들이다. 영화 ‘다이하드’를 보면 주인공 John McClane은 땀과 피로 얼룩진 런닝만 걸치고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부단히 악당들과 맞서 싸운다. 그 이유를 묻자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있다. 그렇다.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중심적이어서 고생스럽고 힘든 일은 가급적 남에게 넘기고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아담도 그랬다. 맡겨진 일에 만족하고 충성하였다면 선악과에 먹지 않았을 것이다. 마귀의 제안대로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되면 힘든 노동을 하지 않고도 영생불멸할 것으로 여겼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하고 싶은 일만 찾아 하고 해야 할 일을 남에게 미루는 사람이 아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엔 '신사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리스도의 일꾼

      그리스도의 일꾼은 그리스도를 최측권(最側權)에서 보좌한 자를 말하지 않는다.
      일꾼은 과거에 불법과 편법으로 주군을 모시다가 증언 혹은 배신을 때리는 가신, 최측권, 집사와 다르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최고의 지도자로 손꼽는 바울, 아볼로, 그리고 베드로는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문고리 3인방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일꾼은 일꾼인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그리스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다.
      일꾼인 자신은 무익한 종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인비저블이다.

      '인비저블(Invisibles)'은 "투명인간"을 말합니다.
      투명인간은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지만 분명하게 존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자기 일에 조용히 매진하면서 깊은 성취감을 얻는 이들이다.
      허황된 인정 욕구와 질투의 감정에 주목하면서 이런 흐름을 거스르는 자들이다.
      대부분 사람은 일에 성공할 때 주목을 받지만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던 선지자 요한은 한참 인기가 절정에 이를 때 자신은 쇠하고 역사의 무대에 서게 될 그리스도는 흥하게 되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자신이 보이지 않는 존재, 쇠하는 존재로 선언한다.

      일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이다.
      둘 중에 가장 행복한 사람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가?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이 일치하는 사람이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일꾼은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을 선호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일군은 해야 하는 일을 즐기는 자들이다.
      심지어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죽기 살기로 감당하는 자다.
      자신이 좋아하고 열정을 가진 분야에서 일하라는 조언은 독이 될 수 있다고 William MacAskill가 ‘냉정한 이타주의’에서 말한다.
      이는 좋아하고 관심을 가진 일은 생각보다 자주 바뀌기 까닭이다.
      심리학자 Daniel Gilbert는 사람들의 관심사가 생각보다 훨씬 자주 변하기 때문에 절대 과대평가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일꾼은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주신 일, 즉 해야 할 일을 즐겁게 감당하는 종이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종들을 보라.
      해야 할 일이지만 익숙지 않고 어색하고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처음 하는 사업이라 힘들고 짜증스럽고 종이라고 무시 받고 어려움이 많아도 이 일은 주인께서 그들에게 하라고 주신 일이기에 열심히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경영인으로 인정하고 알아 준 것을 생각할 때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하게 될 때 100%의 성과를 거두지 않았는가. 반면 한 달란트 받은 종은 해야할 일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변명을 할 때는 좋아하지 않은 일이라, 즉 주인이 마음에 안 들었다고 구차한 변명을 하므로 악하고 게으르다는 책망과 함께 형벌을 받는다.

      '용비어천가' 제1장에 ‘일마다 천복(天福)이시니’라는 말이 나온다.
      일은 ‘하늘이 주신 복된 노동’이다.
      또 ‘이루다(成)’의 어근 ‘일’은 명사로서 ‘일(事)’의 뜻을 지니고 있다.
      일의 목적은 이룸에 있고, 이룸이란 뜻하던 일의 완성에 있다.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는 것과 일꾼으로서 일을 잘하는 것은 다르다.
      누구나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고 제자가 될 수 있다.
      야구선수들의 특징을 줄줄 외우고 있는 야구광이 스포스용품 가게를 내는 것과 성공하는 것은 다르다.
      본인이 스포츠를 좋아하는 것과 다른 사람에게 물건을 파는 것은 다른 영역의 문제다.
      마찬가지로 일꾼이 되는 것과 일을 잘할 능력 사이에 간격이 있다.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잘한다는 것도 다른 문제다.
      명성과 능력은 비례하지 않는다. 일꾼은 자질과 함께 훈련이 필요하다.
      기술이 아니라 자세가 중요하다.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
      실적보다 적은 일에 충성하는, 즉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목숨을 걸고 사명감을 갖고 해야 하지만 즐거움과 기쁨으로 감당하는 일꾼에게 칭찬이 있다.

      판단(判斷) -
      1. 다른 사람의 판단 : 눈치를 보는 것, 자기의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야 하므로 실속이 없다.
         예를 들면 연예인이 인기가 없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가 자주 일어난다.

      2. 자기 성찰을 위한 판단 : 너 자신을 알라!
         후회 없는 삶을 위한 것

      3. 주님의 판단 : 상급을 얻는다
         최선을 다하였는가? 문제는 의롭다 할 수 있는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09-14-2022(수)

      육신과 영(고린도전서 5:5)


      육신(肉身)(4561)

      σάρξ, σαρκός, ἡ
      1. 육체,  2. 인간이나 동물의 뼈를 덮고 있는 물질을 총칭,  3. 몸

      발음 / 사르크스(sarx)
      어원 / 4563의 어간에서 유래한 듯함
      관련 성경 / 몸(마 19:5, 막 10:8), 육체(마 24:22, 요 8:15, 고후 1:17), 육신(마 26:41, 롬 1:3, 딤전 3:16), 살 (눅 24:39, 요 6:55, 56),
      육정(요 1:13), 육(요 3:6, 6:63, 고전 15:50), 골육(롬 11:14).
      신약 성경 / 147회 사용

      * 4563. σαρόω 

      1. 쓰다,  2. 깨끗하게 쓰다,  3. 마태복음 12:44
      발음 / 사로오(sarŏō)
      어원 / 제1부정과거 ἐσάρωσα, 제1부정과거수동 ἐσαρώθην, 완료수동분사 σε- σαρωμέ νος, σαίρω ‘솔질하다’의 파생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청소되다(마 12:44, 눅 11:25), 쓸다(눅 15:8)
      신약 성경 / 3회 사용


      영(靈)(4151)
      πνεῦμα, ατος, τό

      1. 불기,  2. 바람,  3. 숨 내쉬기 

      발음 / 프뉴마(pnĕnuma)

      어원 / 415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성령(마 4:1, 막 1:10, 눅 2:27), 심령(마 5:3, 눅 1:17), 귀신(마 8:16, 눅 4:36, 요 16:18), 마음(마 26:41, 막 8:12),
      영혼(마 27:50, 눅 23:46, 요 19:30), 중심(막 2:8), 하나님의 말씀(행 18: 5), 영(눅 24:37, 39, 엡 1:17), 빛(엡 5:9), 한마음(빌 1:27),
      기운(살후 2:8), 바람(히 1:7), 생기(계 11:11, 13:15).
      신약 성경 / 379회 사용
      * 4154. 프네오(πνέω) 
      1. 불다,  2. 숨을 쉬다,  3. 마태복음 7:25
      발음 / 프네오(pnĕō)
      관련 성경 / 불다(마 7:25, 요 3:8, 계 7:1). [명] 바람(행 27:40)
      신약 성경 / 7회 사용

      음행(淫行)

      음행(淫行)

      πορνεία, ας, ἡ  4202

      1. 매음,  2. 음란,  3. 부정

      발음 / 포르네이아(pŏrnĕia)
      어원 / 420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음란(마 15:19, 막 7:21, 고전 6:13), 음행(마 5: 32, 행 15:20, 고전 5:1, 계 2:21), 추악(롬 1:29).
      신약 성경 / 25회 사용
      * 4203. πορνεύω

      1. 몸을 팔다,  2. 고린도전서 6:18,  3. 요한계시록 17:2

      발음 / 포르네우오(pŏrnĕuō)
      관련 성경 / 음행하다(고전 6:18, 10:8, 계 17:2, 18:9), 행음하다(계 2:14).
      신약 성경 / 8회 사용
      고린도전서 6:18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요한계시록 17:2

      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포도주에 취하였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음행의 의미 

      성경이 말하는 음행이란 하나님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를 말합니다.
      남,녀간의 성적인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상황 속에서 음행의 문제를 살펴보고 성적으로 개방적인 현대문화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조심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음행에 대해선 오늘 본문 외에도 고린도전서 6장 9절과 18-19절, 그리고 갈라디아5장 19-21절에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불의 한자(고린도전서 6:9-10)
      자기 몸에게 죄를 짓는 것(고린도전서 6:18)

      고린도전서 6:9-10, 18-1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육체의 일(갈라디아서 5:19-20)

      갈라디아서 5:19-21

      육체
      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음행(淫行) : 음탕하고 난잡한 짓

      음란할 음(淫)
      1. 음란하다, 2. 지나치다, 3. 담그다, 4. 방탕하다, 5. 넘치다

      다닐 행(行)
      1. 가다,  2. 행위,  3. 줄,  4. 행실,  5. 대열(隊列)

      πορνεία, ας, ἡ  4202 - 포르노(Porn) 

      1. 매음,  2. 음란,  3. 부정

      발음 / 포르네이아(pŏrnĕia) 


      음행이란 단어가 한글 개역 성경에서 구약에서 20, 신약에서 25

      민수기 25:1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성경에서 처음의 음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여자와 성 관계를 갖기 시작한 것으로 소개됩니다.

      요한계시록 19:2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

      성경에서 마지막으로 음행은 땅을 어럽게 하는 큰 음녀 즉 영적으로 타락한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성경에서는 음행이란 육체적인 죄로 시작하여 마지막에는 용서받을 수 없는 성령 훼방 죄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현장에서 간음한 여자를 돌로 쳐 죽일 듯이 달려든 군중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시며 율법으로 정죄하는 것에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하시며 그 여인을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나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는 "성령 훼방 죄" 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12:31, 마가복음 3:29)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누구든지 성령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성(性)범죄에 대한 성경적 고찰  

      히브리서 13:4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간음(姦淫)과 음행(淫行)

      간음(姦淫)은 타인의 아내, 또는 남편과의 부정한 성(性)행위를 말하고, 음행(淫行)은 불법적 성행위를 말한다.

      1. 간음(μοιχεία)

      간음은 헬라어로 μοιχεία(모이케이아)며 μοιχὁς(모이코스)에서 왔다.
      어근은 μἱχ(믹)으로 ‘안개’, ‘어둡다’, ‘어두침침하다’의 뜻을 갖고 있다.

      이 단어의 파생어는 다음과 같다.
       
       ὀμίχλη(호밀클레) : 안개, 어둠, 구름 낀(구름). a mist, fog
       μοιχὁς(모이코스) : 간음자(눅 18:11; 고전 6:9; 히 13:4; 약 4:4)
       μοιχαλίς(모이칼리스) : 간음한 여자, 간부(마 12:39,16:4; 막 8:38; 롬 7:3; 약 4:4; 벧후 2:14)
       μοιχάομαι(모이칼로마이) : 간음하다
       μοιχεία(모이케이아) : 간음(마 15:9; 요 8:3; 막 7:21; 갈 5:19)
       μοιχέυω(모이큐오) : 간음하다(마 5:27,28; 막 10:19; 눅 16:18; 요 8:4; 롬 2:22; 약 2:11; 계2:22)

      2. 음행(πορνεία)

      음행은 헬라어로 πορνεία(포르네이아)며 어근은 περ(펠)로 ‘팔다’를 뜻한다.
      동사 περἀω(펠아오)는 물건과 같이 자신의 몸을 파는 행위를 뜻한다.

      περ(펠)에서 유래한 근의어는 다음과 같다.

       περάω(폴라오) : 몸을 팔다.
       πόρνη(포르네) : 창녀
       πόρνος(포르노스) : 음행자
       πορνεία(포르네이아) : 음행
       ἐκ πορνέομαι(엑크 포르네이오마이) : 음행하다

      간음과 음행에 관련된 마태복음 5:28에 의하면,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했고.
      마태복음 19:9은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라”고 했다.
      요한계시록 2:14에 나온 행음(πορνεία)이 영어성경에는 fornication(음행)으로 되어 있으나 간음(μοιχὁς)과 음행(πορνεία)을 혼동해 병행해서 사용된다.

      행음(行淫)의 헬라어 πορνεῡσαι(포풀뉴우스아이)는, 단순과거 가정법으로 ἐδίδασχεν(에디다스켄: 가르쳐)을 설명하는 보족어로 사용되며, 이 단어의 명사형 πολνεία(폴네이아)의 어근 περ(펠)은 ‘팔다’를 뜻한다. 동사 περάω(펠아오)는 물건과 같이 자신의 몸을 파는 행위를 뜻한다. 헬라어 περ(펠)에서 유래한 용어는 περάω(폴라오: 몸을 팔다), πόρνη(포르네: 창녀), πόρνος(포르노스: 음행자), πορνεία(포르네이아: 음행), ἐκπορνέομαι(엑크포르네이오마이: 음행하다) 등이 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음행에 대하여

      1. 음행하는 자는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며,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며 하나님이 심판하신다(고전 6:9; 갈 5:19-21; 엡 5:5,6; 골 3:6; 살전 4:3-8; 히 13:4; 유 1:7; 계 2:20-22; 21:8; 22:15)고 기록하고 있다.

      2. 음행을 금지한 규례를 범한 자는 죽이라고 했다.(레 18:20-30; 20:10-12, 14-15, 16,17, 20,21; 신 22:21,22, 24-25; 신 22:22-27; 요 8:5)

      3. ‘음행은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엡 5:3)

      4.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유 1:7)

      5. 음행을 회개하지 않으면 침상에 던질 터이요, 큰 환난에 던지고, 그의 자녀를 죽인다.(계 2:20-23)

      6.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8)

      7.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계 22:15)

      8. 음행을 영적(靈的)으로 해석하여 우상숭배로 대칭했다.(민 25:1-7; 호 2:1)

      9. 이방의 동화(同化)를 가리키는 것으로 쓰였다.(계 14:8; 17:2-4; 18:3; 19:2)

      한글 개역 성경에서 간음과 음행으로 번역된 구절

      * 간음 - 마 15:19; 막 7:22; 요 8:3.

      마태복음 19:9의 ‘음행한 연고 외에’(μή ἐπί πορνεία)는 신명기 24:1 ‘수치되는 일’(ד ת, 에르와트 다바르)을 인용한 것인데, ‘몸을 수치스럽게 드러냈다’를 뜻하며 음행을 지칭한다. - 창 7:22,23; 출 20:26; 겔 16:36,37; 신 23:4,5; 레 18:20

      * 음행 - 마 5:32; 19:9; 행 15:20,15:29; 21:25; 고전 5:1; 갈 5:19; 엡 5:3; 계2:21; 9:21; 14:8; 17:2, 17:4; 18:3; 19:2

      ⦁ 음란 : 마 15:19; 막 7:21; 요 8:41; 고전 6:13; 고후 12:21; 골 3:5; 살전 4:3

      ⦁ 추악 : 롬 1:29. 사악한 기질(악의)

      ⦁ 부정, 불법, 죄악 : 마 22:18; 막 7:22; 눅 11:39

      * ‘수치되는 일’은 이혼의 조건이 되었는데 미쉬나(Mishnah)에 세 가지 학설이 있다.

      Shammai 설(70인 공회 부회장) : 음행을 하지 않으면 이혼하지 말고 음행하면 이혼하라.

      Hillel 설(70인 공회 회장) : 아내가 남편에게 식사를 잘못 제공하면 이혼하라.

      Akiba 설(교법사로서 학문의 최고 권위자) : 자기 아내가 보기 싫을 때 마음에 드는 다른 여자가 나타나면 아내를 버리고 장가들라.

      위 학설은, 예수 당시 바리새인의 이혼설로 서로 논쟁이 되곤 했다.
      바리새인이 예수께 와서 시험한 것은 예수가 세 학설 중 어느 것을 지지하는지를 알아내고 상호 시비를 걸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는 바리새인의 이 질문에 대해 인간의 창조원리를 말씀하며 이혼할 수 없다고 했다.(마 19:4-6)

      성(性)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1.  간음하지 말지니라(출 20:14)
      2.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출 20:17)
      3.  네 어머니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레 18:7)
      4.  네 아비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레 18:7)
      5.  네 계모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레 18:8)
      6.  네 자매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레 18:9)
      7.  네 아비의 딸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레 18:9)
      8.  네 어미의 딸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레 18:9)
      9.  네 손녀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레 18:10)
      10. 네 외손녀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레 18:10)
      11. 네 계모의 딸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레 18:11)
      12. 네 고모의 딸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레 18:12)
      13. 네 이모의 딸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레 18:12)
      14. 네 아비의 형제의 아내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레 18:14)
      15. 네 자부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레 18:15)
      16. 네 형제의 아내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레 18:16)
      17. 너는 여인과 그 여인의 딸의 하체를 아울러 범하지 말라(레 18:17)
      18. 그 여인의 손녀나 외손녀를 아울러 취하여 그 하체를 범하지 말라(레 18:17)
      19. 너는 아내가 생존할 동안에 그 형제를 취하여 그 하체를 범하여 그로 투기케 하지 말라(레 18:18)
      20. 여인이 경도로 불결할 동안에 그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레 18:19)
      21. 타인의 아내와 통간(通姦) 하지 말라(레 18:20)
      22. 너는 여자와 교합 함과 같이 남자와 교합(交合)하지 말라(레 18:22)
      23. 짐승과 교합하지 말라(레 18:23)
      24. 네 딸을 더럽혀 기생이 되게 하지 말라(레 19:29)
      25. 여인과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레 20:13)
      26.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고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라(신 22:5)
      27. 창기가 있지 못할 것이요, 미동이 있지 못할지니...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이니라(신 23:17,18)
      28. 무릇 짐승과 교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신 27:21)
      29. 자기의 분노를 더하여 그로 취케 하고 그 하체를 드러내려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합 2:15)
      30.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
      31. 음란과 호색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3,14)
      32.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면 사귀지도 말고 함께 먹지도 말라(고전 5:11)
      33. 음란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 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
      34. 음행을 피하라.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고전 6:18)
      35. 서로 분방하지 말라(고전 7:5)
      36.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엡 5:3)
      37.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히 13:4)

      음행자의 멸망에 대한 성구

      1.  싯딤에서 모압 여자와 음행할 때 하나님이 염병으로 쳐 이만 사천 명이 죽음(민 25:9)
      2.  아내를 취한 후 처녀의 표적이 없으면 그 아비 집 문에서 끌어내고 성읍 사람들이 돌로 쳐 죽임(신 22:20,21)
      3.  남자가 유부녀와 통간(通姦)할 경우 그 통간한 남자와 여자를 모두 죽였음(신 22:22; 레 20:10)
      4.  처녀가 약혼한 후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서 만나 통간 하면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돌로 쳐 죽였음(신 22:23,24)
      5.  만일 남자가 어떤 약혼한 처녀를 들에서 만나서 강간할 경우 그 강간한 남자를 죽였음(신 22:25)
      6.  만일 남자가 어떤 약혼하지 아니한 처녀를 만나 그를 붙들고 통간하는 중 그 두 사람이 발견되면 그 통간한 남자는 그 처녀의 아비에게 은 50 세겔을 주어야 했음(신 22:29)
      7.  음행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함(갈 5:19-21; 고전 6:9)
      8.  음행은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고 했음(엡 5:3)
      9.  음란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함(골 3:5,6)
      10.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유 1:7)
      11. 간음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심(계 2:22)
      12. 땅의 왕들이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짐(계 18:3)
      13.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함(계 19:2)
      14.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들이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일 시간에 망함(계 18:9,20)
      15.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죽였음(레 20:10)
      16. 계모와 동침하는 자는 그 아비의 하체를 범한 것이므로 둘 다 죽였음(레 20:12)
      17. 누구든지 자부와 동침하는 자는 둘 다 죽였음(레 20:13)
      18. 여인과 교합(交合)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한 것이므로 반드시 죽임(레 20:14)
      19. 아내와 그 장모를 아울러 범하면 그와 그들을 함께 불살랐음(레 20:14)
      20. 남자가 짐승과 교합하면 반드시 죽이고 그 짐승도 죽였음(레 20:15)
      21. 여자가 짐승에게 가까이하여 교합하면 여자와 짐승을 죽이되 반드시 죽였음(레 20:16)
      22. 그 자매 곧 아비의 딸이나 어미의 딸을 취하면 민족 앞에서 끊어졌음(레 20:17)
      23. 이모나 고모의 하체를 범할 경우 죄를 당했음(레 20:20)
      24. 백숙 모와 동침하면 그들이 그 죄를 당하여 자식 없이 죽었음(레 20:20)
      25. 그 형제의 아내를 취하면 그 형제의 하체를 범한 것이 되므로 자식을 얻지 못했음(레 20:21)
      26. 여호람이 유다 여러 산에 산당을 세워 예루살렘 거민으로 음란하듯 우상을 섬기게 함으로 창자에 중병이 들어 창자가 빠져나와 죽음(대하 21:18)
      27. 간음하는 자와 동류가 되면 하나님이 네 죄를 네 목전에 차례로 베품(시 50:18,21)
      28. 음녀로 인하여 한 조각 떡만 남게 될 것이며 음란한 계집은 귀한 생명을 사냥하는 자다(잠 6:26)
      29. 음란한 여인 오홀라와 오홀리바를 하나님이 심판함(겔 23:4-38)
      30.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함(히 13:4)
      31.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 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약 4:4)
      32.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음(벧후 2:6)
      33.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음란하여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됨(유 1:7)

      성경에 나타난 음행자

      1.  소돔의 백성들이 천사와 상관(相關)하여 동성애(Sodomites)를 하려고 함(창 19:5)
      2.  롯의 두 딸이 롯을 술 취하게 한 후 아비와 동침함(창 19:30-38)
      3. 히위 족속의 추장 세겜이 야곱의 딸 디나를 강간함(창 34:1,2)
      4. 르우벤이 그 서모 빌하와 통간함(창 35:22)
      5. 오난이 그 형수에게 들어가 설정한 것이 여호와의 목전에 약하였기에 그를 죽임(창 38:9)
      6. 다말이 그 시부 유다와 동침함(창 38:14-18)
      7.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음행한 이스라엘 남자와 미디안 여인을 처형함(민 25:6-15)
      8. 이스라엘이 싯딤에서 모압 여자들과 음행함(민 25:1)
      9. 삼손이 가사에 가서 기생을 보고 음행함 (삿 16:1)
      10.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과 동침함(삼상 2:22)
      11.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함(삼하 11:4)
      12. 암논이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강간함(삼하 13:14)
      13. 압살롬이 온 이스라엘 무리의 눈앞에서 그 부친의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함(삼하 16:22)
      14. 호세아의 처 고멜이 결혼 후에도 음탕한 짓을 행함(호 1:2)
      15. 바리새인의 집에서 음탕했던 여자가 회개함(눅 7:36-39)
      16.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음(요 4:18)
      17. 순리를 역리로 사용한 이방인들이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받음(롬 1:26,27)
      18.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예수께서 사해 주심(요 8:1-11)
      19.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고전 5:1)
      20. 이세벨의 행음(계 2:20)

      음행에 대한 제 학설

      King James 역은 fornication, The Emphasized New Testament는 unfaithfulness, R.S.V.는 unchastity, The New Testment: A New Translation(Olaf M.Norlie)은 adultory, New International Version은 marital unfaithfulness, Good News for Modern Man은 unfaithful로 번역했다.

      몇 가지 학설

      1) H. Baltensweiler 설 : 레위기 18:6-23에 금지된 죄, 하체에 대한 범죄를 말함(Baltensweiler, Die Ehe im Neuen Testament, 1967, p. 93;
      J.A. Fitzmyer, “The Malthean Divorce Texts and some New Palestinian Evidence”, Theological Studies, 37, 1976, pp. 208-211).

      2) Mark Geldard 설 : 혼인 전 성 행위를 말함(Geldard, “Jesus Teaching on Divorce”, Charchman 926, 1978, 134-143).

      3) T. V. Fleming 설: 간음(Fleming, “Christ and Divorce”. Theological Studies, 24, 1963, p.109), 이 학설은 예레미야 3:8,9에 의함.

      4) Joseph Jensen 설 : 넓은 의미의 제반 성적범죄를 말함(Jensen, Does Mean Fornication? pp. 161-184; William Hendriksen, The Gosple of Matthew, pp. 716-717).

      5) R. K. Harrison 설 : 자진해서 갖는 남녀의 성행위를 말하며, 간음은 결혼한 남자가 다른 여인과 정욕적 성관계를 갖는 것을 말함(Harrison, Encyclopedia of Biblical and Christian Ethics, p. 158).


      간음하지 말지니라

      예수는 음행에 대해 가르치길,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 하였느니라’(마 5:28)고 했고, 음란은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고 했으며(마 15:20; 막 7:21) 음행한 연고 없이는 아내를 내어 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마 19:9; 눅 16:18)고 했다. ‘간음하지 말라’고 강조했고(마 19:18; 막 10:19; 눅 18:20), 음행하는 사마리아 여자를 회개시켰으며(요 4:3-26)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돌에 맞아 죽게 될 음녀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면서 살려 주었다.(요 8:4-11)

      사도 바울은 결혼 전, 부정한 성행위를 금했다.
      고린도전서 7:1, 2에서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 했다. 바울은 음행을 말할 때, 혼전 성관계(고전 6:18; 7:1-2), 불의의 성관계(고전 5:1), 동성 관계(롬 1:26-27), 포욕(살전 4:6) 등도 언급했다.

      고린도전서 6:9-10에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자, 10인이 나열되었다.

      ① 음란하는 자
      ② 우상숭배 하는 자
      ③ 간음하는 자
      ④ 탐색하는 자
      ⑤ 남색 하는 자
      ⑥ 도적질 하는 자
      ⑦ 탐람 하는 자
      ⑧ 술 취하는 자
      ⑨ 후욕 하는 자
      ⑩ 토색 하는 자

      동성애 성(性) 행위가 창궐한 이때, 죄를 증오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도록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아야 한다.


      간음과 음행에 대한 해결책

      1. 정욕적인 눈빛이나 접촉을 근절시켜야 한다.(잠 10:31; 마 5:27-30; 롬 6:6; 8:13; 골 2:11; 3:11)

      2. 지체에 대한 자아 부인이 요구된다.(눅 9:23; 롬 6:13; 벧후 3:17; 잠언 1:10; 4:14)

      3.  회개함으로 지옥에 던지게 되는 것에서 돌아서게 한다.(삼하 12:13)

      * 위의 글은 이상찬 박사 저. 아시아 일곱교회(도서출판 두레마을, 1989년)와 목회자를 위한 산상수훈(도서출판 두레마을, 1990년)을 토대로 발췌, 정리했다.

      * 형법 제 32장 강간(强姦)과 추행(醜行)의 죄

      제297조 【강간】 폭행 또는 협박으로 부녀를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제298조 【강제추행】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에 대하여 추행을 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5백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제299조 【준 간강, 준 강제추행】 사람의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를 이용하여 간음 또는 추행을 한 자는 전 2조의 예에 의한다.

      제300조 【미수범】 전3조의 미수범은 처벌한다.

      제301조 【강간 등 상해. 치상】 제297조 내지 제300조의 죄를 범한 자가 사람을 상해하거나 상해에 이르게 한 때에는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제301조의 2 【강간 등 살인. 치사】 제297조 내지 제300조의 죄를 범한 자가 사람을 살해한 때에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한다. 사망에 이르게 한 때에는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제302조 【미성년자 등에 대한 간음】 미성년자 또는 심신미약 자에 대하여 위계(僞計) 또는 위력(威力)으로써 간음 또는 추행을 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제303조 【업무상 위계 등에 의한 간음】 ① 업무, 고용 기타 관계로 인하여 자기의 보호 또는 감독을 받는 부녀에 대하여 위계 또는 위력으로써 간음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5백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제304조 【혼인빙자 등에 의한 간음】 혼인을 빙자하거나 기타 위계(僞計)로써 음행의 상습 없는 부녀를 기망하여 간음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제305조 【미성년자에 대한 간음, 추행】 13세 미만의 부녀를 간음하거나 13세 미만의 사람에게 추행을 한 자는 제297조, 제301조 또는 301조의 2의 예에 의한다.

      제305조의 2 【상습범】 상습으로 제297조부터 제300조까지, 제302조, 제303조 또는 제305조의 죄를 범한 자는 그 죄에 정한 형의 2분의 1까지 가중한다.

      제306조 【고소】 제297조 내지 제300조와 제302조 내지 제305조의 죄는 고소가 있어야 공소를 제기할 수 있다.


      음행이란 단어는 헬라어 포르네이아(πορνεια)를 번역한 것입니다.

      성경적 관점에서 말하면, ‘하나님이 정한 질서를 벗어난 성적 관계’를 말합니다.
      B F 웨스트 콧은 음행을 ‘불법적 성관계’로 정의했습니다.
      그런데 동성애와 동성결혼 등은 이전엔 불법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는데 최근엔 합법화되는 추세입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법적 차원보다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질서에 근거해 음행을 규정해야 할 것입니다.

      성에 관해 하나님이 정한 질서는 이렇습니다.
      창세기 계시에 따르면, 하나님은 창조 여섯째 날에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서로 다른 성적 존재로 만드셨다는 뜻입니다.
      그런 다음 남녀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결혼을 의미합니다.
      결혼은 남녀의 성적 관계를 허용하는 의식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결혼으로 연합된 남녀 두 사람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자녀의 출산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결혼하고 부부가 된 두 남녀 사이에만 성적 관계를 허용해주셨습니다.

      부부의 성적 관계는 두 가지 중요한 기능을 합니다.
      첫째는 한 몸이 되는 기쁨을 누리는 것
      둘째는 자녀를 얻는 기쁨 

      만일 성적 관계가 공부나 일처럼 하기 싫고 힘들기만 하다면 누가 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성적 나눔에 쾌감을 느끼도록 해주셨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 쾌감을 느끼는 것도 그렇습니다.
      맛을 느끼지 못하면 먹는 게 지루하고 고통스런 일이 될 겁니다.
      그러면 안 먹으려고 할 겁니다.
      아이들이 채소를 잘 안 먹는데 아직 그 맛이 좋다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크면서 맛을 알면 잘 먹게 되죠.
      그래서 하나님은 남녀가 관계를 가질 때 쾌감을 느끼게 디자인하셨습니다.

      인간이 범죄하고 타락하자 성적 관계에도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일부일처의 부부만 성관계를 허용하셨는데, 타락한 인간이 이런 하나님의 질서를 무시하고 육신의 쾌감을 느끼는 수단으로 하나님이 정한 질서를 벗어난 성적 관계를 맺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음행입니다.
      예를 들면, 비 혼인관계에 있는 남녀의 성관계인 간음, 배우자가 있는 사람이 배우자 이외의 사람과 성관계인 간통, 돈을 주고 관계를 맺는 매춘, 여러 사람이 관계하는 혼음, 동성애, 스와핑 등 이런 게 모두 음행입니다.

      범죄로 인간의 심성이 부패해진 후 남녀의 성관계는 가장 오용되고 오염된 것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최근에 펼쳐지고 있는 미투(metoo) 운동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그 동안 괜찮다고 존경받던 인사들인 유명 방송사의 메인 앵커, 국회의원, 주지사, 심지어는 대통령까지 성추문에 연루된 사람으로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이라고 하시긴 했지만, 우선 여기선 행동으로 옮긴 경우에 대해서 이야기 합시다.

      음행은 어떤 고린도교인이 “그 아비의 아내를 취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다음과 같은 상황을 가정해볼 수 있습니다.
      나이든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젊은 계모만 남았습니다.
      아들에게 친 어머니가 아니고 자기와 나이가 비슷하거나 적을 수도 있습니다.
      옛날에 다윗 왕이 늙고 병들어 주로 침실에 누워있을 때 신하들이 왕의 침실 시중을 들라고 처녀 아비삭을 궁에 들였습니다(왕상 1:2).
      생전에 다윗왕은 아비삭과 동침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왕이 죽은 후, 넷째 아들 아도니야밧세바를 찾아가 아비삭을 자기 아내 삼고 싶다며 솔로몬에게 허락을 받아달라고 요청한 일이 있었습니다(왕상 2:17).

      아내로 번역된 헬라어 구나이카(γυναικα)는 여자, 아내의 뜻을 가진 말입니다.
      성경엔 아내로 번역되어 있는데, 아비삭처럼 정식 부인이라기보다 그냥 아버지의 여자였을 수도 있습니다.
      아들이 그 여자를 취한 걸 보면, 여자로서 매력 있는 미인이거나 혹시 돈 많은 과부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이목이 부담스러운데도 아버지의 여자를 취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았겠습니까?
      어쩌다 범했더라도 매력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아들을 정당화하려는 게 아닙니다.
      죄를 짓게 만드는 어떤 요인을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하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일이 교인 중에 일어났는데 “어찌하여 한탄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고 책망했습니다.
      바울이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걸 보면, 이 일은 교인 사이에도 이미 알려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지도자들이 이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께서 염려한 것은 이렇게 되면 다른 교인들까지 음행의 유혹에 빠져 교회가 문란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6절의 누룩 이야기는 바로 그 뜻입니다.

      교회가 교인들의 죄를 다루는 목적은 교인들이 죄에 오염되는 것을 방지하고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케 된 교회에 죄가 퍼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바울이 물리치라고 한 것은 죄를 부인하며 은폐하지 말고 회개하고 용서받아 회복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걸 알지만 서로 한 교인으로 지내며 교제하던 사람인데 죄를 지적하며 회개할 때까지 교제를 단절하겠다거나 교회에 나오는 걸 금하겠다고 하기가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한국인들의 경우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자기 가족 중에 누가 잘못해서 교회의 징계를 받게 되면 다른 사람의 없는 죄까지 들추며 반발할 수도 있습니다.
      잘못하면 교회가 분란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권징은 당사자나 교회 모두 유익하도록 기도와 지혜로 잘 시행해야 합니다.

      음행의 문제와 관련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이 주는 몇 가지 교훈을 제시하는 것으로 결말을 짓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어느 시대보다 성적으로 개방된 문화 속에 하나님의 질서를 벗어난 성적 관계를 맺을 유혹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자만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교회에서 죄를 방치해서 다른 교인까지 그래도 괜찮다고 오해하는 일이 없도록 그런 문제가 발행했을 때는 가능한 빨리 회개하고 회복되도록 조치를 취할 수 있게 모두 협력해야 합니다.

      셋째로 음행은 신앙생활은 물론 인생을 망친다는 걸 유념합시다.
      최근 미투 운동에서 보듯 어렵게 올라간 자리에서 수치를 당하며 내려와야 하고 가정도 깨질 위험이 있습니다.

      넷째로 그리스도 안에서 음행도 용서받을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그걸 은폐하려고 남편 우리야를 전쟁터로 보내 죽게 한 죄를 범했지만 하나님은 나단을 보내 죄를 깨우치고 회개하여 용서받게 해주셨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도 음행의 죄가 있으면 지금 당장, 아니면 이번 한 주 동안 진심으로 회개하며 용서받고 새 출발하기를 축원합니다.

      행위의 율법에 적용을 받을 때에는 '성민' 들 사이에서의 육체적인 일을 일컫는 말이었으나 마음의 율법이 시행되는 그리스도 이후는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의 경우나 결혼과 이혼에 대한 경우로 다시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세상에서의 윤리적 선이나 사회적 법은 세상에 속한 것이고 내가 그 해당사회의 법을 따르고 도덕을 지키는 것은 진리이기 때문도 아니고 양심의 문제 때문도 아닙니다.
      내가 속한 사회의 법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세상이 하나님의 선과 악의 섭리를 통하여 움직여지는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나의 경기장이기 때문입니다.

      각 사람이 속한 사회는 모두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고 그 다른 가치관에 따라 어느 나라는 마약을 해도 되고 어느 나라는 안 되는 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는 간통이 죄고 어느 나라는 죄가 되지 않는 이러한 각 사람이 처하고 있는 상황 윤리적 환경은 각각 하나님이 택하신 그 사람에게 있어서 거룩함을 향해가는, 혹은 하나님을 찾게 하는 수단으로 작용을 합니다.

      악이 있을 때에만 선이 분별이 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마땅히 있어야 할 것들이 있는 것이므로 그 각 사람이 속한 사회의 법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사회의 가치관이 변하면 법도 변하고 전에는 지켰던 것을 법이 변하면 안 지켜도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가는 사람에게는 인생들의 가치관에 의하여 만들어진 사회적 법은 그렇게 나그네가 어떤 동네에 들어가서 그 동네의 규칙을 따라야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의미는 없습니다.

      영적인 질서 상에서 아비먼저 된 자, 즉 전도자를 말합니다.

      어떤 이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 전도를 하게 되면 전도의 열매로 처음 맺은 피 전도자는 전도자의 선택받음을 증명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성령이 그 전도자에게 함께 했다는 표시가 바로 처음 전도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 전도된 사람은 그 전도자를 돕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돕는 자'를 '아내'라고 성경은 표현합니다.

      솔로몬이 '처와 첩을 많이 두었다'라는 표현은 '직접 돕는 자와 간접적으로 돕는 자를 많이 두었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한 개인을 돕는 성령도 그에게 있어서 아내로 표현 되며 피 전도자도 아내로 표현 됩니다.

      그래서 잠언에는 "젊어서(전도자의 상태에서) 얻은 아내를 기뻐하라." 혹은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네 집 내실에 있는 아내"라는 말에서 '집'은 그리스도의 터 위에서 지은 내 마음 안에 지어진 집이고, 그 집이 성전이 되게 해야 하며, 그 집이 성전이 되게 했을 때 하나님의 나라가 내 마음에 섰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집의 내실에 있는 아내는 성령인 것입니다.

      이렇듯 성경이 말하는 음행은 이러한 질서 안에서 남의 아내, 즉 남이 전도한 사람을 자기의 사람으로 만들려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전도자에게 돕는 자로 주신 사람이므로 그를 데려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를 파괴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분파가 일고 서로 사람 빼앗기 경쟁을 하는 것에 대하여 "이런 음행은 이방인들도 안 한다"고 한 것은 "육신의 일만을 생각하며 사는 이들도 육신적으로 그와 같이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 안에서 영적인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를 할 수가 있는가?" 라고 하는 것입니다.

      레위기에 언급되어 있는 음행에 관한 규례를 굳이 들여다보고 참고할 필요도 없이 각 사람이 현재 가지고 있는 육적인 가계도 안에서의 육체의 성적인 질서를 영적인 질서에 적용을 하면 바로 이해가 될 것입니다.

      육체적인 도덕적 양심이나 윤리적 선이나 사회적 법규를 하나님의 진리와 혼합하여 사고하며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그렇게 섞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성령의 법을 훼방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육신으로는 가이사의 사회에 살므로 가이사의 법을 따르고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사회에 살므로 하나님의 법을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혼동했을 때 집총거부니, 병역거부니, 탈세니 하는 문제들이 야기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서 사는 사람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몸으로는 가이사의 사회에서 가이사의 것을 사용하고 있으니 가이사에게 주어야 하는 것은 마땅히 가이사의 것을 주고, 하나님의 나라에 사는 마음으로는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드리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은 '유물' 이 아닙니다.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인데 어찌 하나님이 당신의 돈이 필요하겠습니까?
      이 말을 빌미로 헌금을 하라고 말하는 것은 불법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달라고 하셨지 돈을 가져오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헌금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빙자하여 사기를 치는 것입니다.
      인생이 자기의 육체적 욕구를 채우기 위하여 육에 속한 것을 가져오게 한 것이 헌금입니다.

      영적인 나라에 어찌 육적인 규례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육체의 행위의 율법은 모세의 율법과 함께 폐하신 것입니다.
      마음의 율법을 세웠는데 행위의 율법을 다시 만들고 주장하는 것이 곧 하나님에 대한 음행인 것입니다.

      이와 함께 오늘날 ‘기독교’가 행하고 있는 음행에 관하여 말씀을 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낙태’, ‘수혈’등에 대한 교계의 ‘의사표명’입니다.
      낙태를 하는 것에 찬성을 하는 것이 옳은가, 반대를 하는 것이 옳은가를 말하기 이전에 그에 대하여 성경의 이름으로 의견을 표명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하여 음행을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재산 나누는 자로 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재산을 어떻게 나누는 것이 성경적이라는 가르침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인생은 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영이 살지 못하면 흙으로 돌아가고 끝나는 것입니다.
      당신이 어떻게 세상에 나왔습니까?
      당신의 부모의 육적인 욕구를 발현한 행위의 결과로 당신이 나온 것입니다.
      당신의 부모도 흙이며 당신도 흙입니다.
      흙이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가는데 어떻게 돌아가는 것이 바르게 돌아가는 것이라는 가르침이 성경에 있겠습니까?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의 기준과 육신들이 만들어 놓은 윤리적 선의 기준은 서로 섞일 수 없는 것입니다. 영의 법과 육체의 법이 어떻게 섞일 수 있겠습니까.

      인생이 아이를 배고 낳았습니다.
      그러면 그 아이는 이제 영이 사는 길을 가야합니다.
      예수님과 같이 자기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 와중에서 흙으로 만들어진 인생이 하나님의 아들인 신이 되는 것입니다.
      신이 되지 못하면 모두 흙으로 돌아가고 끝나는 것입니다.

      당신이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그냥 하나님의 아들인 신이 되겠습니까?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생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인생의 윤리적 선에 대한 의견을 교계가 표명한 것이며, 그 표명의 근본에는 ‘세상에 속하려는 마음’이 그 지도자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들의 사회적 윤리란 하나님의 선을 따라가는 사람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므로 그에 대하여 의견이 있을 수도 없는 것이며, 오히려 이렇게 의견을 표명하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에 대하여 영적인 음행을 저지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경우는 마치, 사람이 동물세계에서 벌어지는 약육강식의 법칙에 대하여 인생들의 윤리적 선을 적용하여 의견을 제시하고 그것을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수컷을 잡아먹는 암컷 사마귀에 대하여 형법을 적용하여 ‘살충 죄’를 적용하고 도덕과 관습법을 적용하여 ‘친고죄’ 나 ‘배은망덕’ 이라는 도덕적 기준의 잣대를 들이대 평가하는 것과 같이 우스꽝스러운 일인 것입니다.

      부부가 이혼을 하든지 말든지, 낙태를 하든지 말든지, 수혈을 받든지 말든지, 군대를 가든지 말든지 그것은 단지 육체를 가지고 세상에 속하여 사는 흙으로 돌아갈 인생들의 일이지 결코 영에 속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성경을 부정한 인생들의 윤리 책으로 변질시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잠언 27:5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면책이라는 단어 ‘토카하트’는 훈계와 징계를 의미합니다.
      누군가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은 큰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 허물을 계속 덮어주었을 때 결국 그 허물로 인해 그 사람과 그 사람이 속한 공동체에 큰 어려움을 겪을 게 분명하다면 사랑의 용기를 가지고 그 잘못을 훈계하고 징계하여 바로 잡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오히려 그냥 덮어주고 뒤에서 챙겨주는 사랑보다 낫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에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교회 교우들에게 스승을 넘어 복음으로 그들을 낳은 아버지의 마음을 가졌음을 이야기하며 마치 부모가 그 사랑하는 자녀를 훈계하며 매질하듯 그들의 잘못을 바로잡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어서 5장부터 실제로 고린도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바로 잡기 위한 권면을 시작합니다.

      음행한 자에 대한 징계(1-5절)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고린도교회에서 벌어진 심각한 음행에 대하여 이야기 합니다.
      특히 그 음행은 하나님의 법도를 모르는 이방인들 가운에서도 없는 음행이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바로 ‘아버지의 아내’ 곧 계모를 자신의 아내로 취하여 들인 사건입니다.
      여기서 계모라고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바울이 직접적으로 어머니를 취하였다고 하지 않고 ‘아버지의 아내’라고 부른 것으로 보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계모라고 해도 아버지의 아내로서 자신에게 어머니임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교우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대하였습니까?
      통한히 여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통한히’라는 단어는 ‘펜데오’라는 단어로 ‘슬퍼하다’, ‘애통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일어나지 않을 음행의 사건이 벌어졌음에도 그 사실에 슬퍼하거나 애통함이 없이 여전히 자신들은 신령한 공동체라 자부하는 교만함에 빠져있던 것입니다.
      그런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쫒아내지 않았다는 말씀은 아무런 치리의 조치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겠습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고린도는 성적타락이 만연한 도시였습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교회가 세상을 제자삼지 못하고 교회가 세속화되는 과정을 겪었던 것으로 볼 수 있고 혹은 그 사람이 참 회개의 열매 없이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가능성은 그들이 구원에 있어서 잘못된 가르침을 받아 은혜를 오용하고 있었을 가능성입니다.
      4장에 고린도교회에는 아무런 능력이 없이 말로 사람들을 선동하는 거짓 교사들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상을 가진 자임을 알 수 없지만 5장 서두의 문제들과 연결해서 생각해 보았을 때 ‘쾌락주의적 영지주의자’들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활보하는 시대는 아니었지만 그 사상적 뿌리들이 초대교회에 나타나고 있을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영지주의는 물질은 악하고 영적인 것만 선하다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주장합니다.
      그래서 물질계에 속한 우리의 육체는 더 악한 행위를 한다고 해서 더 더러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잘못된 교리적 주장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을 죄악된 길로 미혹하는 사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영지주의적인 가르침을 받은 이들 중에 극단적 자유방임 혹은 도덕 폐기론자들이 생겨서 교회의 일원이 된 뒤에 어떤 죄를 짓더라도 상관없다는 잘못된 신앙을 갖게 된 자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이 사람도 그중에 속한 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요즘에도 어떤 이단들은 영지주의와 비슷한 주장을 펼치기도 합니다.
      한 번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미 모든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에 다시는 회개를 하거나 죄를 용서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굉장히 달콤하게 들리는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칭의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가는 성화의 삶을 살며 우리가 받은 구원을 완성해가고 또한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삶으로 증거 해가는 치열한 자기부인의 현장입니다.
      이런 성화의 삶을 부정하는 구원론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아 자신의 욕망을 위해 그리스도의 보혈을 욕보이는 인간의 욕심 그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진심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우리의 부르심의 목적과 이유를 따라 때론 넘어질지라도 일어나 계속해서 그 구원의 길을 걸어가는 자이어야 합니다.
      마치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면죄부처럼 여기며 자기 정욕을 따라 죄악된 길을 고의적으로 계속해서 걸어가는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은 구원받았다하고 정욕을 따라 방종하는 자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런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이런 문제가 있을 당시 고린도교회에 머물러 있지 않았으면서도 아비의 마음으로 아파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 교우들은 이 문제가 생겼을 때 통한히 여기며 슬퍼하고 돌이키지 않았지만 도리어 멀리 떨어져 있던 바울은 고통스러워했습니다.
      3절에 몸은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다는 이야기는 바울이 고린도에 육신으로 함께 있지는 않지만 그 모든 상황들을 알고 함께 있는 자 이상으로 마음을 쏟고 이 일을 숙고하였음을 알려주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어주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사탄에게 내어주었다는 표현이 다소 과격하여 해석하기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지만 본문 2절에 ‘너희 중에서 쫒아내지 아니하였느냐’라는 표현이나 맥락을 살펴보면 ‘출교’에 대한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세상 사람들도 짓지 않는 음행을 저지르고 또한 아무런 회개의 조짐이 보이지 않는 그 사람을 교회에서 내보내는 최고의 권징 곧 ‘출교’시킬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출교는 단순히 죄를 지은 사람을 벌주기 위한 목적이 아닙니다.
      출교를 함으로써 먼저 교회가 어떤 공동체임을 나타내는 목적이 있습니다.
      만약 이런 음행하는 자가 회개하지 않고 뻔뻔히 죄악된 길을 가고 있음에도 그런 자를 내어 쫒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들은 교회가 성적으로 방탕하고 타락한 공동체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권징을 통해 교회 스스로의 자정능력을 잃지 않음으로 세상 속에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정체성을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는 출교를 당하는 자에게도 유익이 됩니다.
      회개할만한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회개치 않는 다는 것은 둘 중 하나입니다.

      첫 번째는 그가 원래 회개하지 않고 단순히 종교인으로서 교회의 일원으로 출석만 하고 있던 자이거나
      두 번째는 회개하고 주님을 믿었지만 죄에 미혹되어 영적 분별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병들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출교가 그에게 어떻게 작용하게 됩니까?
      일반적인 치료에서는 쓰이지 않지만 환자가 완전히 의식을 잃고 심장이 정지된 상태에서 그를 깨우기 위해 고강도 전기충격을 가하는 제세동기를 사용하듯이 출교는 곧 그의 죽어있는 혹은 잠들어 있는 신앙의 뿌리를 흔들어 깨우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신앙이 없었다면 자기 영혼의 문제에 대하여 깊이 고민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요 신앙이 있음에도 유혹에 미혹되어 잠들어 있었다면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놓고 깊이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출교를 통해 그를 예수님의 몸 된 교회에서 끊어버렸지만 그 일을 통해 회개하고 돌이켜 육신의 정욕에 속한 죄악을 멸하고 회개하여 주 예수의 날에 다시금 구원의 자리로 나아오게 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쉬운성경에 보면 5절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을 사탄에게 내어 주어, 그 사람의 죄의 본성은 멸망당하더라도 영혼은 우리 주님의 날에 구원 받게 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그 사람을 놓지만 완전히 놓은 것은 아니였습니다.
      아마도 그 사람의 구원과 회개를 위해 누구보다 더 뜨겁게 가슴아파하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마치 매를 맞는 아이보다 매질을 하는 아비의 마음이 더 아픈 것처럼 말입니다.
      교회가 정말 하나님의 가족공동체라면 우리는 서로를 향한 칭찬과 감사의 말도 해야 하지만 때로는 상대를 위하여 사랑에서 우러나온 권면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권면이 나를 향한 진심어린 사랑의 마음에서 우러러 나온 몸에 좋은 한약임을 알고 기꺼이 받아들여 마실 수 있을 때 우리의 신앙은 더욱 순결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성숙함을 이루어 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출애굽기 12장 15절에는 ‘너희는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어지리라’라는 무교절 지키는 규례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유월절과 함께 이어지는 무교절 기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집안에 누룩을 미리 제거하였습니다.
      바울은 음행으로 인해 악행을 저지른 자를 누룩에 비유하며 그리스도의 보혈로 거룩하여 진 고린도교회 교우들을 누룩 없는 덩어리라 부릅니다.
      이 말은 만약 이 사람을 출교하지 않고 받아들이게 된다면 누룩이 반죽을 부풀어 오르게 하듯 곧 그의 음행은 교회공동체의 도덕적 기준들을 무너뜨리고 세상 같은 아니 세상보다 더 도덕적 기준이 낮은 악한 공동체로 변질될 것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치 유대인들이 유월절 어린 양을 잡아 먹고 이어지는 무교절 기간 누룩을 제거하듯 유월절 어린 양, 예수님의 희생으로 거룩한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면 우리도 공동체의 거룩함을 위해 누룩 같은 죄악을 방치하지 말고 권징을 통해 제거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이는 권징의 궁극적인 목적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거룩함을 유지하는 것에 있음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죄는 확산성을 가지고 있기에 교회의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심각한 죄악을 근실히 징계하고 바로 잡아 거룩한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도록 애써야 합니다.

      그때에 8절 말씀처럼 순전함과 진실함의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순전함이란 도덕적 순결함을 의미하며 진실함이란 ‘알레데이아’ 곧 진리를 의미합니다.
      이는 교회가 단순히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는 날까지 존재하는 것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순결과 진리의 공동체로 거룩하여져서 결혼식 단장한 신부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주님 앞에 발견되어져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내 삶에 더러운 죄악과 날마다 싸워야 하고 또한 우리 공동체가 직면하는 악함의 누룩을 기꺼이 제거하려는 거룩한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하기 이전에 보내었던 서신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고 경고하였는데 이 말을 오해한 고린도교회 교우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고린도지역은 성적 타락이 극심하였기에 만약 부부의 순결을 깨끗하게 지키는 자와만 사업을 하거나 교제를 한다면 그들의 사회적 입지는 너무나 제한적으로 축소될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10절에 그런 자들과 만나지 않으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의도로 쓴 것이겠습니까?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

      바울이 사귀지 말라고 한 것은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믿음의 형제라고 하면서 음행과 탐욕과 우상 숭배와 모욕 그리고 술 취함과 속여 빼앗는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과 교제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성령 하나님의 거룩하게 하시는 성화의 삶을 따라가는 자가 아니라 육체의 정욕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지만 교회 안에서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스스로 누룩을 자처하며 교회를 병들게 하고 다른 사람을 죄악의 자리로 이끌어가는 미혹자들이 있다면 그들을 내쫒아야 한다는 엄중한 명령을 내리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전해준 말씀을 통해 세상 속 교회의 위치와 사명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됩니다.
      세상 밖에 존재하지 않지만 세상과 같지 않은 순전함과 진실함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촉매(觸媒. catalyst)’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는 화학 반응에서 그 자신은 변하지 않지만 다른 물질의 화학 반응을 일으키는 역할을 하는 물질을 의미합니다.
      세상 속에서 세상과 같아지지 않지만 오히려 그들을 변화시키는 존재로서 우리가 살아갈 때에 그 삶이 바로 예배의 생활화 생활의 예배화가 될 것이며 영과 진리로 살아가는 예배자의 삶이 될 것입니다.
      오늘도 세상으 소금과 빛으로 촉매 역활을 바르게 감당하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육신은 멸하고 영은...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이 구절은 해석상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다.
      유대교에서는 육체의 죽음을, 속죄받지 못한 죄들을 속죄하는 수단으로 취급하기도 하였으나 본절에서 이와같은 원리를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다시 말해서 육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영혼이 구원받는다는 견해는 성립될 수 없다는 뜻이다.
      성경에는 영과 육이 따로 분리되어 구원받거나 멸망받는 일에 대하여 전혀 말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둘다 구원받든가 둘다 멸망하든가 해야한다(Lenski).
      특히 바울은 다른 모든 구절에서 속죄는 육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본절의 육신의 멸망과 영의 구원은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칼빈(Calvin)은 전반부에 등장하는 '내어준다'라는 말의 법정적, 선언적 의미를 강조한다.
      다시말해서 사단에게 내어주는 행위는 일시적(一時的)인 것으로서 궁극적인 심판과 구원에 선행하는 임시 조치라는 뜻이다.
      음행한 자들을 사단에게 내어주는 교회의 심판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궁극적이며 영원한 그리스도의 심판에 의하여 그의 운명은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참된 사랑의 원리인 징계를 나타냄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다시 그들에게 미칠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하며 또한 올바
      른 징계를 행함으로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그들을 도와야 한다.
      한편 바울은 '주 예수의 날'이라는 구절을 첨가함으로써 그 징계받은 죄인들을 주의 백성들 가운데서 다시 볼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따라서 본절에서 범죄자에 대한 징계의 목적을 살펴볼 수 있다.
      즉 징계는 범죄한 영혼에 대한 최종적인 심판이나 유기가 아니라 회개와 돌이킴을 위한 일시적 고난이며 구원을 전제로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이다.

      본절은 특히
      1. 범죄자를 그대로 방치하는 행위는 사랑이 아니라 무관심의 소치로서 그 사람을 멸망에 빠뜨리며 다른 사람들까지 함께 타락케 만드는 범죄라는 사실
      2. 참된 징계의 정신은 사랑이라는 점을 극명하게 교훈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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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15-2022(목)

      주와 합하는 자(고린도전서 6:17)  

      주와 합(合)하는 자는 한 영(靈)이니라.

      6:1. 너희 중에 누가 다른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 송사하고 : 2919. κρίνω

      1. 나누다,  2. 판단하다,  3. 결정하다

      발음 / 크리노(krinō)
      관련 성경 / 고발하다(마 5:40, 고전 6:6), 비판하다(마 7:1), 심판하다(마 19:28, 눅 19:22, 요 3:17, 계 18:8), 정죄받다(눅 6:37),
      판단하다(요 8:16, 롬 2:1), 다스리다(눅 22:30), 심판받다(요 3:18, 벧전 4:6, 계 20:12), 재판하다(요 18:31), 결의하다(행 3:13, 21:25),
      작정하다(행 20:16, 고전 2:2, 딛 3:12), 심문받다(행 23:6, 24:21, 25:20), 판단받다(롬 3:4, 고전 11:32), 정죄하다(롬 14:22),
      결심하다(고후 2:1).
      신약 성경 / 115회 사용
      6:20. /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을 돌리라.

      영광(榮光) : 불 화(火) + 덮을 멱(冖 ) + 열 십(十)

      "예배"란 뜻과 마음과 몸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무한한 가치를 의도적으로 표현하는 모든 행동을 포괄하는 용어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예배에 대해 생각할 때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 의식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배를 그렇게만 생각한다면 이는 예배의 참의미를 아주 제한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러한 제한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삶의 모든 부분이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먹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아침식사이든 피자헛에서의 식사이든 혹은 오전 간식이든 그 무엇이라도 좋습니다.
      성경은 모든 먹는 행동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은 우리 삶에 있어 가장 기초적인 것들입니다.
      무엇이 이보다 더 실제적이고 인간적일 수가 있겠습니까?

      성행위를 예로 들어 봅시다.
      바울은 음행에 대한 대안은 예배라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6:18-20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죽음을 예로 들어 봅시다.
      죽음은 이 땅에서의 몸의 마지막 행동입니다.
      몸은 작별을 고합니다.
      이러한 몸의 마지막 행동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예배할 수 있습니까?

      빌립보서 1:20-21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바울은 그의 죽음을 통해서 그의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을 소망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서 "내게는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라고 더합니다.
      우리는 죽는 것을 유익한 것이라고 여김으로써 죽을 때 그리스도의 무한한 가치를 나타냅니다.

      여러분에게는 몸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여러분은 항상 하나님의 전 안에 있습니다.

      식사(고린도전서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죽음(빌립보서  1:20-21)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성행위(고린도전서 6:18-20)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사람이 하나님의 성령님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도바울은 다메섹에서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돌이켜 회개하고 전에 옛 사람의 목숨을 버리고 새사람이 되어 그 마음에 주님의 성령을 받아 모시고 하나 된 상태를 한 영(靈)이 되었다고 말합니다(고전 6:17).
      이는 주님의 성령과 나의 영혼이 연합된 것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기름부음은 거룩하게 구별하여 직분을 위임하고 성령으로인(印)을 치며 죄악에서 완전히 떠난 것을 인준하는 것을 말합니다(출28:41-43. 엡 1:13. 요일 2:27).
      또 다른 말로하면 하나님의 신(神)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를 예수께서 너희 율법에 기록된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은 신이라고 증언하셨습니다(요 10:34).
      이것은 이미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살을 떡으로 피를 언약의 피로 제시하시고 이를 먹고 마시는 자는 영생의 생명을 소유한자이며 이를 먹는 자속에 예수께서 거하시겠다고 말씀하시고 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靈)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6:54, 56, 63).

      예수께서 이르는 말씀이 주님 안에 계신 성령으로 말씀하신 것이며 그러므로 주님의 모든 말씀은 영(靈)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은 또 주는 영(靈)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은 자유가 있다고 말하여 주님과 성령께서 서로 다른 인격이지만 일체라는 말씀으로 증거 했습니다(요 6:63. 고후 3:17).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성경의 율법의 증언을 따라 주님의 말씀을 받은 자들을 신(神) 즉 성령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요 10:35). 

      시편에 아삽의 시(詩) 가운데서도 여호와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를 말하기를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시82:6). 

      이것은 우리가 주님과 같은 성령을 받는 것으로 주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그 말씀이신 성령과 그 안에 계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주의 영으로 우리가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이른 말씀에 성령님이 함께하신 것이시기 때문입니다(요 6:63).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과 육신에 있고 세상에 있고 죄악을 행하며 마귀에게 잡혀 그 감옥에 갇혀있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율법의 말씀으로 다가오고 생명을 살리는 영의 양식이 아닙니다(사 14:17, 42:7. 유 1:18, 19). 

      이들에게는 성령님이 함께하시지 않고 그 눈과 귀를 율법의 수건으로 덮어 놓아 주님의 말씀을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셨습니다(사 6:9, 10, 29:10-14. 마 13:14, 15. 고후 3:14).

      사도바울은 이와 같은 율법의 기능을 몽학 선생이라 후견인과 청지기라고 말합니다.
      이들에게는 율법으로 자신의 죄악 된 정체성 파악을 하여 죄인된 것을 알게 하고 하나님과 주님이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죄악에서 떠나지 않으면 결코 주님을 만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갈 4:1-4). 

      그 후에 하나님의 때가 차면 예수님께 나와 구속의 은총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게 하여 하나님의 원수인 세상에 속한 육적인 목숨과 불의한 죄악과 어둠의 영들과 세상의 우상들을 다 십자가에 드리고 구속을 받아 성령으로 새 생명을 받고 새롭게 되면 “율법의 모든 말씀들이 태도가 바뀌는데” 이제는 성령과 하나 된 자들에게는 시편에서 다윗은 주님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한다”고 말합니다. 

      그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자로 지혜롭게 하며 그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그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영이요 생명의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전에 정죄하고 어둠가운데 있는 것을 알게 하던 율법이 이제는 오히려 성령님과 함께 생명을 소성케 하며 보호해주고 마음을 기쁘게 하며 눈을 열어 밝히보게 해주는 우리 영(靈)의 생명의 양식으로 그 기능이 바뀌었습니다(시 19:7, 8. 요 6:63). 

      이는 우리가 주님과 그 영 안에 있게 되어 신분이 바뀌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므로 그 율법의 말씀들이 태도가 싹 바뀌어 우리를 살리는 말씀이 되어 그 영(靈)이 함께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가 되어 연합되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의 일을 받아드리게 되었습니다(고전 2:14, 6:17).

      이제는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함께 계신 것을 우리로 알게 하셨습니다(요 14:16-20, 26). 

      또 우리에게 오신 그 영께서 우리로 하나님과 일치하는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슥 4:6. 벧전 4:6. 빌 4:13). 
      이는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셔서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게 하셨으며 또 주님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알게 하셨습니다(요일 4:12, 13). 

      그 결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은 육신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되었습니다(롬 8:9). 
      이와 같은 자들은 비록 몸이 있어도 전(前)에 육신의 정욕에 있던 것과 같이 육신의 소욕에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갈 5:16, 17).
      이들에게는 그 몸속의 죄에 법이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어 멸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은 옛 사람의 죄에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게 하려한 것이라고 말합니다(롬 6:7, 14, 7:23)

      이제는 우리가 성령 안에 있어 그 영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는 자며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우리의 몸이 성령님의 전이되어 이제는 우리의 몸이라도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이는 주께서 죽음을 맞이하셔서 피 값으로 사셨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것으로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고전6:19, 20. 갈2:20)

      그러므로 이제는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으며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어야합니다.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일 뿐입니다(롬 14:7, 8). 
      이와 같은 자들은 주의 영과 합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어 주와 일치되는 삶을 살게 하시는데 이는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나님처럼 온전하게 살아간다는 말입니다(마 5:48. 벧전 4:6)

      이제 우리는 성령님과 하나 되어 신령한 영혼과 몸으로 성전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또 주님의 말씀인 그 영(靈)으로 주께서 기뻐하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며 산제사 드리는 예배 자가 되었습니다(롬 12:2. 고전 6:20. 벧전 2:5).
      그런데 우리가 주의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믿지 않는 자들과 사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그들을 예수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서 동반자로 지내야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일을 벗어나서 사귀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에 바울사도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고 합니다.
      의와 불법이 또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사단이 어찌 조화 될 수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으로 불신자와 어둠에 속하고 세상에 속한 자들과 사귀는 것을 스스로 구별해야하며 제한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우리는 그의 자녀이고 우리의 신분은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요 17:16. 고후 6:14-18). 

      우리의 신분은 성령님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만일 우리가 세상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그것을 사랑하여 주님에게서 돌아서면 영적인 간음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와 합한 자들로 한영인데 주안에는 의롭고 성결하며 거룩한 자들로서 이를 귀히 여기지 않고 죄를 범하면 몸 밖에 있던 죄가 우리 몸 안으로 들어오게 되어 우리가 다시 옛 사람으로 전락하여 타락한 자가 됩니다(고전 6:18).

      그러므로 조심해야하며 우리의 신분이 이제는 주님의 영과 합하여 한영이 되었기 때문에 오직 우리 영혼과 몸으로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 자기를 위하여 살지 말고 오직 우리를 위해 죽었다가 다신 사신 예수그리스도의 것으로 주님만 위하여 살아가는 거룩한 주의 백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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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16-2022(금)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고린도전서 7:24)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이제까지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직면한 문제에 대해서 해결을 위한 대답으로 말씀을 소개했습니다.
      교회 안의 분쟁에 대한 말씀 : 1-4장
      음행 : 5장
      소송 : 6장
      결혼 : 7장

      7:5.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절제(節制) / ἀκρασία, ας, ἡ  192

      1. 자제력이 없음,  2. 무절제,  3. 방종,  4. 방탕

      발음 / 아크라시아(akrasia)
      어원 / 19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방탕(마 23:25), 절제 못함(고전 7:5).
      신약 성경 / 2회 사용

      마태복음 23:35 - 방탕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제시한 세 가지 제도는 가정과 교회와 국가라고 합니다.
      가정을 위한 제도는 결혼으로 시작합니다.

      결혼은 법률행위로서, 일종의 계약을 말합니다.
      혼인에 합의한 당사자가 혼인신고를 하면서 법률혼은 시작합니다.
      이로써 부부, 남편, 아내 등으로 일컬어지는 계약관계가 형성되며 인척도 발생합니다.
      혼인에는 여러 가지 법에서 정한 의무가 있고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정조의 의무라고 하겠습니다.
      정조의 의무는 여러 인간관계 중 부부관계에만 유일하게 적용하는 법적 의무입니다.

      연애감정이 결혼의 전제조건은 아니며 쌍방간의 합의만 있으면 가능한 것이 결혼이고, 연령 역시 서로 비슷한 나이대의 연령끼리만 결혼하는 것도 아닙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는 이성 결혼과 남자와 남자 혹은 여자와 여자가 결혼하는 동성 결혼도 자주 언급되는 현실입니다.

      문제는 세상의 풍속과 성경의 진리를 혼돈하면 안 됩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세상의 가치로 전환하려는 잘못된 방향과 시도를 차단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법으로 이러한 시도를 금지하려고 합니다.
      그만큼 성경적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현실이라고 하겠습니다.

      결혼 적령기라는 말은 육체적 욕망에 사로 잡힐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육체의 욕망 때문에 결혼을 결정하는 것은 욕망의 대상이 바뀌때마다 심각한 문제를 야기 시킬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혼이란 성생활 적령기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가 결합하여 성경의 가르침을 함께 실천할 수 있는 기초를 쌓는 것이어야 합니다.

      때로는 사람마다 성적 관심과 감정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혼자서 지내는 것을 더 좋아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차라리 혼자 지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깨우칩니다.
      그러나 욕망이 불타올라 도저히 혼자서 견딜 수 없을 때는 결혼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결혼이란 남자와 여자가 서로 뜻이 맞아야 하고 성향이 같아야 합니다.
      서로 다른 체질과 성향 때문에 요즈음은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때 공항에서 이혼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6장까지는 고린도 교회가 가진 본질적 문제인 교회의 분쟁과 음행과 같은 도덕적 무질서에 대해 책망 하였습니다.
      7장에서는 매우 사적이고 개인적인 성과 결혼의 문제를 다룹니다.
      크게 두 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 단란은 1-24절까지이며, 이곳에서 바울은 결혼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몇 가지의 문제들을 다룹니다.
      둘째 단락은 25-40절까지로 아직 결혼하지 않는 처녀나 홀로 있는 여성들에게 조언합니다.

      우리가 고린도전서 7장을 이해할 때는 시대적 배경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고린도라는 항구도시와 성적으로 굉장히 문란했던 도시의 특성이 고린도 전서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하는 조언보다는 좀더 극단적이고 강력한 방향으로 조언을 했습니다.

      1-24절 결혼한 이들에게
      25-40절 홀로 있는 이들에게

      결혼의 의미 : 서로에게 의무를 다하라
      음행을 피하기 위해 남녀는 결혼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결혼했다면 남녀는 서로에게 의미를 다해야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부부 생활에 중요한 원리를 이야기합니다.
      남편의 몸은 아내가 주장하고, 아내의 몸은 남편이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개인주의 정신이 물든 현대인들에게는 굉장히 어색해 보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복음의 원리에 의한 것입니다.
      로마서 14장에 보면 믿음이 강한 자들은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위해 절제하고, 조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교회 안에서 다른 성도를 배려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신앙생활하는 것이 맞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원리를 부부생활에도 적용하여 자신의 몸이라고 자신의 마음대로 하지 않고 상대를 먼저 생각하고 고려하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한 가지의 원리는 결혼은 인간이 가진 육신적 본성을 충족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합니다.
      '음행을 피하고, 절제 못함으로 인해’분방하지 말라는 말은 인간이 마치 육신적 욕망에 사로잡혀 사는 존재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헬라적 사고를 육신을 열등하거나 악하게 보지만, 구약 성경에 뿌리는 둔 히브리즘은 몸을 악하게 보지 않고 하나님의 선한
      피조물로 봅니다.
      육신을 입고 있는 인간에게 배고픔과 갈증, 성욕 등은 당연한 것이며 선한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말씀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 악한 것입니다.

      이혼의 문제

      과부들에게 가능하다면 결혼하지 말로 홀로 지낼 것을 당부합니다.
      그러나 절제할 수 없다면 결혼하는 것이 낫다고 말합니다.
      만약 지금 결혼했다면 서로 갈라서지 말 것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결혼에 대한 것입니다.
      한쪽만 신자일 경우 상대편의 영혼의 문제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종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혼하게 되면 반드시 얽매이게 되어 있고, 그로 인해 얻는 것도 있고 잃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결혼은 사람이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음행을 피해야할 책임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지워지므로 거룩을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과도한 종속이나 짐으로 다가온다면 굳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바울의 권면입니다.

      결혼하는 것도 좋고, 결혼하지 않은 것은 더욱 좋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현대의 교회가 그대로 받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지금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가 아니라 극도로 타락했던 고린도라는 도시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적으로 너무나 문란했던 고린도에서 결혼은 어떤 면에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동시에 잘못되면 사람에게 얽매일 수
      있는 길로 들어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지금 ‘임박한 환난’이 임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종말론적 관점은 29-31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결혼하여 세상에 얽매이게 된다면 그것이 안타깝다는 것입니다.
      32-34절은 결혼하는 것과 하지 않은 것의 차이를 말합니다.
      결혼하면 가정에 충실해야하고, 결혼하지 않으면 오직 주님만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지역의 음란한 문화는 결혼마저도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반대로 결혼 자체가 악하다고 여기는 금욕주의자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좋지만, 음행을 피하기 위해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 말합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만든 선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한 몸을 이루고, 함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기 원하십니다.
      따라서 결혼은 결코 음행이 아니며, 오히려 사람들을 음행의 문제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현실은 성적인 문제에 있어 그 기준을 이미 상실했으며, 교회 안에서도 심각한 경우가 많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이러한 문제로 고통을 겪고, 부부간에 큰 문제를 야기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오직 결혼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성관계를 허용하셨으며,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행복과 즐거움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당시의 아내들은 남편의 소유물에 불과하다고 할 정도로 가정에서 여성들의 힘은 약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내의 몸은 남편이, 남편의 몸은 아내가 주장하도록 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따라서 부부 간에는 서로 동등한 지위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에 전념하기 위해 얼마 동안의 분방은 부부가 서로 합의하여 할 수 있지만, 반드시 다시 합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서로가 절제하지 못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결혼하지 않은 자와 과부에게 말합니다.
      지금 자신이 독신으로 주님을 위해 살고 있는 것처럼 독신으로 주님을 섬길 것을 권했습니다.
      그러나 정욕이 불같이 타올라서 절제 할 수 없다면, 결혼을 하라고 권면합니다.
      정욕이 불타올라 시험에 빠져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것보다 결혼해서 주님을 섬기는 것이 훨씬 낫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결혼이 자유 아래 있다고 가르쳤지만, 이를 오해하여 결혼과 이혼을 가볍게 여기지 않도록 당부합니다.
      결혼한 자들은 이혼하지 말아야 합니다.
      혹시 이혼을 했다면 다시 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 남편과 아내는 한 몸이 되었기 때문에 비록 갈라서더라도 그 한 몸 됨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이혼율은 국가 통계청의 자료에 따르면 계속 증가하는 추세이며 2020년 9월 기준으로 한 달에 9,536건이나 발생을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혼인율은 계속해서 낮아지고 있지만, 이혼율은 점점 높아지고 있어서 혼인신고에 대비하여 절반인 50%에 가까운 이혼율을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아시아 국가에서도 우리나라의 이혼율은 1위입니다.

      지금도 하루에는 수많은 가정들이 여러 이유들로 깨어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많은 가정이 이혼과 별거, 싸움과 갈등으로 서로가 멀리하게 되기도 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자신의 의무를 외면하고 상대방이 지켜야할 책임만을 강조한다면 관계는 더 나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부부간의 사랑은 서로를 바꾸고 조종하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존중하고 수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주님 안에서 남편과 아내가 한 몸 되었음을 깊이 인식하고 복음의 진리 안에서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 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에도 주님이 세우신 가정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다른 경우의 사람들에게도 말했습니다.
      바울은 나중에 고린도후서 6장 14절에서 불신자와 함께 멍에를 메지 말라고 가르치지만, 이미 결혼을 한 상태라면 배우자가 신앙이 없어도 결코 이혼 사유가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배우자가 지금은 믿음이 없어도 나중에 예수님을 믿는 다른 배우자를 통해 믿음을 갖고 거룩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자녀들도 동일하게 믿음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부부가 갈라서지 않고 모두가 평화롭게 살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들의 주변에는 현재 믿지 않는 배우자로 인해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믿음이 없었지만, 믿음의 배우자로 인해 그 남편이나 아내, 온 가족이 신앙을 갖게된 경우들도 많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는 곳 마다 하나님의 복이 흘러넘친 것처럼 우리들도 그렇게 영과 진리로 아브라함처럼 살아간다면, 우리 주변의 가족들이 변화되리라 믿습니다.
      처음에는 지치고 힘든 과정일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며 남편과 아내의 역할을 영과 진리로 잘 감당 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고린도 교회 성도 가운데는 자신의 상태나 신분을 바꾸려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대로 있으라고 권합니다.
      할례자는 할례의 표지를 제거하기 위해 육체적 수술을 받을 필요가 없고, 무할례자도 할례가 절대적인 성도의 표지라도 되는 것처럼 할례를 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인위적으로 외적인 상태를 변화시킨다고 해서 스스로를 새롭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불러 주신 지금 현재의 상황 속에서 마음을 다해 영과 진리로 하나님의 뜻을 지키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그 부르심에 따라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삶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어떠한 순간에도 홀로 있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믿고 그분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일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결코 녹록지 않은 현재의 상황을 살아가야 된다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끈을 놓아버리지 않고 영과 진리의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하루를 살아갈 때도 바른 작심을 통해 영과 진리로 온전히 하나님만을 목적삼고 살아가며, 예배의 생활화와 생활의 예배화를 이루어 갈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결혼제도를 허락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가정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맡겨주신 역할과 책임을 끝까지 다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서로가 다른 욕망 때문에 갈등하며 원망하기보다는 서로 이해하며 받아주므로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게 하옵소서.
      믿음으로 더욱 굳건하게 천국 가정 이루도록 역사하여주시옵소서.


      가정(家政)과 교회(敎會) 그리고 국가(國家)는 하나님께서 인간사회에 내려주신 가장 이상적인 제도라고 하겠습니다.
      가정은 결혼하므로서 시작합니다.
      결혼(結婚)이란 하나님이 맺어 주신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평생 지속할 연합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연합은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제정하신 성스러운 결합입니다.
      하나님님께서는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서 자기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됩니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결혼의 목적 세 가지

      첫째는 둘이 하나 되는 것

      창세기 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서로 다른 사람 둘이 만나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여자는 마음의 친밀감을 원하고 남자는 육체적 친밀감을 원합니다.
      서로 다른 친밀감을 함께 해결하며 온전한 하나로 세워가야 합니다.
      온전한 하나가 되는 친밀감을 영적인 친밀감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자녀를 생산하는 것

      창세기1:27-28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셋째는 서로 돕기 위한 것

      사람은 처음부터 교제하며 사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여자는 남자를 돕는 자로 창조되었습니다.
      사랑의 교제는 결혼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본래의 목적입니다.

      에베소서 5:31-33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결혼은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로 발전해야 합니다.


      넷째는 음행의 방지를 위한 것

      세상은 ‘악하고 음란한’ 세상이며 성도는 세상에서 음행의 시험을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통해 이런 시험을 물리칠 수 있게 하셨다. 결혼은 음행에 대한 최선의 방지책이다. 잠언5:18-19는,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고 말한다.


      근자에는 결혼하는 만큼 이혼도 늘어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입니다.
      결혼은 둘이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나누면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절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혼이란 반쪽이 되는 것입니다.
      반쪽이 된 상태에서 또 다른 반쪽을 찾는 것이므로 재혼이 결혼보다 더 어렵다고 하겠습니다.

      결혼을 크게 기뻐하신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첫 번째 기적을 혼인 잔치에서 행하셨습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지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결혼은 정부의 권위를 앞서며 초월하는 성례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으로 한 몸을 이룰 때 그들의 연합은 하나님과 깊이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서로를 위해 만드셨으며 각자를 당신의 형상을 본떠 지으시되 서로가 없이는 불완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남녀의 연합을 다른 관계들과 달리 아이들을 낳아 기르는 특별한 관계로 의도하셨습니다. 
      진정한 결혼관계에서 남편과 아내는 임신과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반길 것입니다.
      이는 각자의 상황 때문에 임신과 출산이 어렵거나 불가능해 보일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는 결혼의 신비를 깊이 존중하시며 순결한 삶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의 선물인 성은 하나님과 그분의 뜻에서 동떨어질 때 영혼을 더럽히며, 결혼 밖에서 이루어질 때는 죄가 됩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혼전이나 혼외 관계에서 금욕하라고 요구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음욕을 품고 바라보는 것조차 마음으로 간음하는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결혼은 창조의 뜻에 따라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평생 연합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성적인 사랑을 오직 남편과 아내 사이에만 나누도록 의도하셨기 때문에 교회 공동체는 절대로 동성애 관계를,
      그것이 법이나 사회적 용어로 정의되어 있더라도 결혼으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동성애적 끌림을 가진 이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대변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누구도 정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고 선포하십니다.
      모든 제자를 이 좁은 길로 계속 가라고 부르십니다.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아들여 그분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의지가 있는 이들을 환영합니다.

      결혼은 아주 고귀한 선이지만, 최고선은 아닙니다.
      믿는 사람은 다른 어떤 것보다 그리스도가 항상 최우선이어야 합니다.
      미혼인 사람은 결혼하려는 마음보다, 결혼한 사람은 배우자에 대한 헌신보다 그리스도가 우선이어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에서 멤버는 교회 공동체의 축복이 있어야만 결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결혼은 모두 그리스도에 대한 공통의 신앙에 기초하고, 그리스도의 일을 위해 헌신되어야 합니다.
      결혼식에서 신랑과 신부는 절대 그릇된 일에 서로를 따르지 않고,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순종을 서로의 결합보다 우선으로 여기겠다고 약속합니다.
      이 약속은 그리스도인의 결혼이 세워져 있는 기초를 보호합니다.

      결혼의 목적 세 가지 


      러브(Love)와 로바(Lobha)

      사랑이라는 의미의 영어 단어 (Love)는 산크리스트어의 로바(lobha)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합니다.

      로바는 불교에서 말하는 악(惡)의 3가지 뿌리인 3업 즉 (貪, lobha)/탐욕, (瞋, dosa)/노여움, (癡, moha)/어리석음 중에서 탐욕을 의미합니다.  

      사랑이라는 말이 탐욕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로부터 갈라져 나온 것은 우연일 수 있으나, 한 편으로는 그저 우연이라고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 배경에는 연금술과 같은 신비한 과정이 숨어 있음이 틀림없는데 그것은 탐욕이 부드럽게 풀어져 사랑이 된다고 하여 로바(lobha), 그것은 탐욕이었으나 녹아 내리면 사랑이 된다고 할 뿐 아니라

      사랑은 나누어 주는 것이며 탐욕은 쌓아 두는 것이다.

      탐욕은 결코 나눠주려 하지 않고 사랑은 오로지 주려고 하고 보답을 바라지 않는 조건 없는 나눔이기에 로바(lobha) 라는 단어가 영어의 러브(Love)가 되기까지는 마법처럼 신비한 이유가 있다고 하겠다.

      내면의 연금술이 적용하지 않는 한 로바는 사랑이 되지 않으므로 “사랑이라는 신비를 행하는 사람은 진리의 그림자가 아니라 진리 그 자체와 만날 수 있다”고 플라톤이 말했다.

      복음의 무지로 멋대로 판단하여 선생이 될 뿐 아니라 복음의 무지로 신기루 외모인 도덕천을 따라 여호와께서 주신 이성으로 스스로 온전해지기 위하여 여호와께서 주신 자유의지인 감성을 소멸하기 위하여 감성을 탐욕으로 착각하여 불의와 불법으로 똥칠인 나팔과 꽹과리 소리로 미혹한 후 탐욕의 유사어 갈애(taṅha), 욕망(rāga), 감각적 욕망(kāma) 등을 통하여 탐욕은 바라고 원하는 것과, 물질적 세속적 이익을 얻으려고 집착하는 것을 비롯하여 아끼고 절약하는 것도 미묘한 형태의 탐욕으로 정의하고 또 탐욕의 기능은 대상을 붙잡는 것이고, 포기하지 않는 것으로 대상을 얻지 못하면 쉽게 분노(dosa)로 변하므로 결국 탐욕은 모든 해로  업의 원인이 된다.

      불교의 기초교리에서도 탐욕은 바램, 소원, 소망, 바램, 꿈, 희망, 욕망, 욕구, 등의 나쁜 마음으로 표현하여 결국 탐욕이 없으면 바로 열반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깨달음으로 나아가는데 가장 큰 장애가 된다고 하는 것을 보더라도 모든 종교는 신기루 외모인 도덕천을 따른 이성으로 스스로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여호와께서 주신 자유의지인 감성을 소멸하기 위하여 불가능에 도전하는 발악임을 바로 알 수 있고 또 바라고 원하는 것이 거의 대부분 탐욕에 해당하지만, 열반을 원하거나, 붓다의 가르침을 배우고자 원하거나, 가난한 자에게 보시하기 위해 돈을 원하는 것이나, 종교 단체에 헌금하는 것은 탐욕이 아니라고 자신들의 편의나 유익을 따라 멋대로 좋은 탐욕과 나쁜 탐욕으로 억지 분별을 할 뿐 아니라 이런 억지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아비담마에서는 스스로 분별한 좋은 탐욕을 열의라고 한다고 하며 그 이유로 아비담마에서 탐욕을 원숭이는 끈끈이에 한 손이 붙으면 다른 한 손으로 떼어내려다가 두 손 모두 끈끈이에 달라붙고, 입으로 물어 떼어내려다 입마저 달라붙고, 두 발로 밀쳐내려다 두 발마저 달라붙는다고 한다. 이렇게 머리로는 떨쳐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더 달라붙는 끈끈이처럼 탐욕은 대상이 다가오면 강하게 붙잡으려고 하고 또 달구어진 냄비에 고기가 달라붙듯이 대상에 달라붙으며 옷에 기름이 묻으면 깨끗이 제거하기 어렵듯이 대상에 한 번 집착하면 제거하기 어려운 것은 탐욕의 견해가 잘못되어 괴로운 것을 즐거운 것으로, 더러운 것을 깨끗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엉터리 주장을 할뿐 아니라 빨리어에도 탐욕과 관련된 뻬마(pema), 탄하(tanha), 라가(raga), 까마(kama) 등의 용어가 있는데 뻬마는 가족 간의 사랑, 남녀 간의 애욕 또는 애정을 말하고 애정이나 애욕은 족쇄가 되기도 하여 한 번 엮이면 벗어나기 힘들게 상대방을 속박한다고 하고 배고픔, 갈증과 같이 좀 강한 욕구를 갈애(딴하, tanha)라고 하며 원초적 욕망 중에 가장 강하고 질긴 것이 성욕으로 성욕과 같이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을 욕망(라가, raga)이라고 부르며 라가의 문자적 의미는 사람에 대한 집착이고 탐욕은 크던 작던 간에 괴로움의 원인이 되며, 탐욕이 크면 괴로움도 크고, 탐욕이 작으면 괴로움도 작으며 탐욕이 없으면 괴로움도 없고 그것이 바로 해탈이라고 불가능의 도전을 강요할 뿐 아니라 탐욕은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데 그것은 송아지가 자라면 뿔도 자라듯이 사람도 나이가 들수록 탐욕도 점점 커지며 순진무구한 어린아이는 탐욕이 뭔지 모르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소유욕과 집착이 커져간다고 피조물의 자유의지인 감성을 모르는 참으로 참담한 헛소리를 용감하게 하며 소금물을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심해지는 것과 같이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하고 충족하면 할수록 탐욕이 더 심해져 가기에 결국 탐욕이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집착하고, 그로 인해 윤회 속을 헤어나지 못한다고 복음에 무지로 온전한 복음을 가리는 똥칠을 할 뿐 아니라  아무리 작은 조약돌이라도 물에 던지면 가라앉듯이, 아무리 작은 탐욕이라도 악처에 태어나는 원인이 될 수 있기에 (법구경 240번 가사에 대한 집착으로 이가 된 띳사 장로 이야기 참조) 배우자, 자식, 재산에 대한 집착으로 아귀(불행한 귀신)계에 태어난 사람들이 많지만 그러나 탐욕이 많더라도 공덕이 있으면 선처에 태어날 수도 있다는 복음에 무지한 참담한 똥칠을 마치 바위를 강물에 던지면 바로 가라앉지만 배 위에 실으면 가라앉지 않고 저 언덕에 도달할 수 있는 거와 같다고 미혹하고 있지만 문제는 이 세상의 배가 유한하고 온전하지 못한 것처럼 배로 표현된 공덕도 온전하고 완벽하지 못함을 바로 안다면 플라톤이 <향연>이란 책에서 “사랑이라는 신비를 행하는 사람은 진리의 그림자가 아니라 진리 그 자체와 만날 수 있다. 인간의 축복 받은 본성을 알기 위하여 사랑보다 더 좋은 조력자는 없다”는 말은 복음에 무지한 플라톤이 자신이 가진 대단한 이성으로 회개하고 복음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서로 사랑함으로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인 자유를 누리는 복음을 외모로 분별한 것으로 만약 플라톤이 우리가 소유한 복음을 바로 알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그렇게 갈망하던 이데아가 되었다면 얼마나 기뻐하고 좋아하며 감동할 것이지 생각하며 더 열심히 서로 사랑함으로 우리가 받은 복을 신나고 행복하게 누리는 오늘이 되어야 하겠다.

      이혼과 재혼에 대하여 그리스도는 “누구든지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그 여자와 간음하는 것이며, 또 아내가 자기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도 간음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지켜 나가야만 합니다.
      그것만이 진정 신실함과 사랑으로 일관된 자세입니다.
      드물게 별거가 발생할 수는 있지만, 교회 공동체의 어느 멤버도 배우자와 이혼해서는 안 됩니다.
      나아가 전 배우자가 여전히 살아 있는 동안에는 어떤 이혼한 멤버도 재혼해서는 안 됩니다.

      남편과 아내의 부르심은 다르지만 똑같이 소중합니다.
      신약 성경에 따르면 남편은 가족의 머리이며 아내는 돕는 배필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절대 지배해서는 안 되며 아끼고 겸손하게 섬겨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에서 결혼식을 치를 때 남편은 아내를 언제나 존중하고 존경하겠다고 약속합니다.
      만약 남편이 이를 무시하면 하나님께서 기도를 거부하실 수도 있다는 사도 베드로의 경고를 결혼식에서 새겨 듣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내는 선한 일에 언제나 남편을 지원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두 사람이 받은 사명은 서로를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나가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은 신랑과 신부의 연합을 성스러운 신비이며 그리스도가 당신의 교회에 보여 주신 사랑의 증표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혼인 잔치에 비유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앞으로 도래할 그리스도의 완벽한 사랑의 통치를 상징하는 심오한 뜻을 결혼에서 어렴풋이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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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17-2022(토)

      우상의 제물(고린도전서 8:7)


      지식과 사랑에서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운다.

      지식 / γνῶσις, εως, ἡ 1108

      1. 하나님의 속성으로서의 지식,  2. 지식의 열쇠,  3. 율법에 있는 지식의 규모

      발음 / 그노시스(gnōsis)
      어원 / 1097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지식(눅 11:52, 행 11:33, 롬 2:20), 아는 것(고후 10:5), 아는 지식(빌 3:8), 알게 함(눅 1:77),
      [동] 알다(고후 2:14, 4:6).
      신약 성경 / 29회 사용
      * 1097.  γινώσκω

      1. 알다,  2. 신비를 알다,  3. 하나님을 알다

      발음 /  기노스코(ginōskō)

      관련 성경 / 알아보다(막 6:38), 알다(마 6:3, 12:5,7, 막 5:43, 8:17, 눅 20:19, 요 1:40), 알게 하다(마 9:30, 요 19:4), 알려지다(마 10:26, 눅12:2), 깨닫다(마 24:39, 막 5:29), 알리다(막 9:30, 요 7:17), 동침하다(마 1:25), 주다(막 4:11)
      신약 성경 / 222회 사용

      사랑 ἀγάπη, ης, ἡ ἀγάπη  26

      1.  사랑,  2. 인간의 사랑,  3. 사랑의 대상이 없는 경우  고전 8:1

      발음 / 아가패(agapē)
      어원 / 2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사랑(마 24:12, 고후 2:4, 갈 5:6), 애찬( 유1:12) 
      신약 성경 / 116회 사용
      * 25. ἀγαπάω

      1. 사랑하다,  2. 인격에 대한 호감,  3. 마태복음 5:44

      발음 / 아가파오(agapaō)
      어원 / 미완료 ἠγάπων, 미래 ἀγαπήσω, 제1부정과거 ἠγάπησα, 완료 ἠγάπη- κα, 완료분사 ἠγαπηκώς, 완료수동분사 ἠγαπημένος, 미래수동태 ἀγαπη- θήσομαι, ἄγαν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임
      관련 성경 / 사랑하다(마 5:43, 막 10:21, 눅 6:27, 요 3:16, 롬 9:13), 기뻐하다(눅 11:43), 사모하다(딤후 4:8), 아끼다(계 12:11).
      신약 성경 / 143회 사용

      교만하게하다 φυσιόω 5448  

      1. 부풀게 하다,  2. 잘난체하다, 

      발음 / 푸시오오(phüsiŏō) 

      어원 / 완료 수동태 분사 πεφυσιωμένος, 제1 부정과거 수동태 ἐφυσώθην, 544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교만한 마음을 가지다, 교만하여지다, 교만하다(고전 4:6, 5:2, 13:4), 과장하다(골 2:18).
      신약 성경 / 7회 사용

      덕을 세우다  οἰκοδομέω  3618  

      1. 건축하다,  2. 마태복음 21:42,  3. 마태복음 16:18

      발음 / 오이코도메오(ŏikŏdŏmĕō)
      어원 / 미완료 ῷκοδόμουν, 미래 οἰκοδο- μήσω, 제1부정과거 ῷκοδόμησα, 미완료수동태 3인칭단수형 ῷκοδομεῖτο, 완료수동부정사 ῷκοδομέσθαι, 완료수동분사 οἰκοδομημένος, 과거완료수동태 3인단수 ῷκοδόμητο, 제1부정과거 수동태 ῷκοδομήθην, 미래 수동태 οἰκοδομηθήσομα ι, 3619와 동일어에서 유래더보기
      관련 성경 / 짓다(마 7:26, 눅 6:48, 행 7:49), 세우다(마 16:18, 눅 14:28, 살전 5:11), 만들다(마 23:29, 눅 11:48), 건설되다(눅 4:29),
      서다(행 9:31), 건축하다(롬 15:20), 세워지다(벧전 2:5).
      신약 성경 / 40회 사용

      마태복음 21:42 /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마태복음 16:18 /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고린도전서 8장은 제사를 지내는 문제와는 다른 문제입니다.
      당시 고린도는 물건들이 장터에 나오기 전에 우상에게 바쳐져서 나옵니다.
      그래서 시장에 가면 대부분의 물건들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들입니다.
      이것을 "먹어야 되는가 말아야 되는가" 라는 문제입니다.
      바울은 우상숭배와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를 분리시킵니다.

      우상숭배의 경우에는 명백한 계명위반입니다(고전 10:7).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데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문제는 윤리적으로 규정 할 수 없는 "아디아포라"의 문제입니다.
      바울은 우상제물을 먹는 문제에 대한 세 가지의 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고전 8장).

      첫째는 믿음과 양심의 원리

      바울은 이점에 있어서 각자가 하나님이 주신 믿음과 양심의 원리대로 행하라고 합니다.
      당시에는 두 부류가 있었습니다 한 부류는 믿음이 강한 자(바울을 포함, 혹은 지식이 있는 자로 표현됨)로서 "먹어도 괜찮다"는 견해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근거는 "우상에게 제물이 바쳐졌다 하더라도 그 우상은 거짓이며 아무 것도 아니다.
      또 그 음식은 근본적으로 따져보면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먹어도 괜찮다"는 견해입니다(고전 8:3-6).

      그런데 또 한 부류는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견해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우상숭배인데, 우상숭배에 드려졌던 제물을 먹는다는 것은 결국 그 우상숭배의 행위에 동참하는 것으로 믿음의 양심에 위배된다는 것"입니다(고전 8:7).

      그러면 이에 대한 사도 바울의 입장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음의 양심대로 하라는 것입니다(롬 12:3).
      즉 먹느냐, 먹지 않으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믿음에 따른 양심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즉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또 다른 사람은 먹지 않는 믿음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각 개인의 고유한 믿음과 양심의 자유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죄가 되는 것은 믿음이 약한 사람(먹지 못하는 사람)이 자신의 믿음을 속이고 먹는 것입니다.
      먹는 것 때문에 죄가 아니고, 그가 자신의 믿음을 버린 것이 죄가 됩니다(고전 8:10-12).

      둘째는 서로 정죄(비판)하지 말라

      이 문제가 초대교회에서 심각한 문제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믿음의 양심만 절대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고 비판하고 정죄하는 논리입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이것 때문에 서로를 인정하지 못하고 정죄한다면, 그들을 받으신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합니다(고전 8:12, 롬 14:1-12).

      셋째는 공동체적 사랑의 원리

      고린도 교회는 믿음이 약한 자들이 다수를 차지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약한 자들이 바울과 같은 믿음이 강한 자들의 자유함에 대해서 상처가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이 하는 말은 아무리 믿음이 중요하고, 양심이 중요하고, 지식이 중요하지만 형제들에게 상처가 된다면 우상의 제물을 절대로 먹지 않겠다고 말합니다(고전 8:13).
      즉 믿음도 중요하고 양심도 중요하고, 지식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사랑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고전 8:1, 2).

      이것은 우상제물을 먹는 문제뿐만 아니라, 확실하게 성경에서 계명으로 규정하지 않은(윤리적으로 절대화할 수 없는) 아디아포라의 문제를 다루는 세 가지 중요한 원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제사의 문제가 아디아포라의 문제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될 수도 있고, 안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될 수 있다는 것은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과연 제사가 전통적인(무속적인) 의미에서 지켜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제사의 문제는 아디아포라의 문제가 아니고, 절대적 계명준수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만일 제사의 문제가 종교적으로 큰 의미가 없이 습관적 관행으로 일가친척들이 모이는 모임이라면 아디아포라의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우리의 문제는 절대적인 문제를 상대화시키며, 상대화할 문제를 절대화시키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것을 구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 아디아포라(adiaphora, ἀδιάφορα, 무관심한 것)

      스토아주의에 의해서 형성된 개념으로, 선도, 악도 아니고, 명령 받지도 않고, 금지되지도 않은 것.
      신약 성서에서도 이용되어 기독교의 개념으로도 논의되게 되었다.

      아디아포라는 희랍어 '아디아폴론'의 복수형으로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용어는 '성경에서 명하지도, 금하지도 않은 행동들'을 일컫는 말로 사용된다.
      종교개혁에 있어서 루터와 칼빈 간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는데, 그것은 아디아포라의 문제였다.

      루터와 칼빈, 쯔빙글리와 멜랑히톤 모두 근본적으로 성경에 기초한 개혁을 말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디아포라의 문제에서는 서로 다른 관점을 취했다.

      루터는 성경이 명백하게 금하지 않는 한에 있어서 로마교회의 전통과 관습은 구속력이 있고, 따라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칼빈은 성경이 명(命)하지 않는 한 로마교회의 모든 전통이나 관습들은 거부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 원리는 교리적인 문제에서만이 아니라 교회관이나 교회정치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디아포라(diaphora) & 아디아포라(adiaphora)

      성경이 명백하게 말하고 있는 것을 디아포라(diaphora)라고 하고 반대로 성경이 명백하게 말하지 않고 있고, 따라서 임의로 할 수 있도록 남겨진 영역을 아디아포라(adiaphora)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몇 시에 예배드릴 것인가, 예배 시에 어떤 색깔의 옷을 입어야 할 것인가, 예배순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등의 문제가 여기 속한다.

      자유는 칭의로부터 나온다고 하며 그리스도인의 자유에는 세 가지 차원이 있다고 했다.

      첫 번째 차원의 자유는 율법으로 부터의 자유이다.
      두 번째 차원의 자유는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양심의 자유이다.
      세 번째 차원의 자유가 아디아포라(adiaphora)로부터의 자유 즉 비본질적인 문제들로부터의 자유이다.

      칼빈은 일상가운데 비본질적인 것 때문에 양심에 거리낌이나 마음에 불안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가르쳤다.

      예를 들어 성례에서 어떤 포도주를 쓸 것인지, 물을 한번 뿌릴 것인지 세 번 뿌릴 것인지와 같은 것들은 각 지 교회에서 결정할 일이라는 것이다.
      이런 문제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 얽매여서 신앙 양심의 거리낌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디아포라로부터의 자유이다.

      아디아포라로부터의 자유는 교회 정체 체제에도 적용된다고 말했다.
      교회 정치체제는 구원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에 장로교 정치제도 뿐 아니라 감독정치도 가능하다고 칼빈은 주장했다.

      아디아포라로부터의 자유는 칼빈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칼빈주의 신학자들이 아디아포라로부터의 자유 부분을 몰라서 너무 편협적인 경향을 띠는 것이 사실이라고 밝혔다.

      칼빈학자들 간의 일부 해석의 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큰 틀에서는 칼빈이 아디아포라로부터의 자유를 중요시 여긴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밝혔다. 그러므로 비본질적인 것에 얽매여서 갈등을 만들고 거기에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가 없다.

      칼빈이 밝혔듯이 우리의 자유를 방종과 남용의 기회로 삼아서는 안 될 것이라고 강의했다.
      우리는 약한 형제들의 무지와 형편을 고려하면서 자유의 사용을 조절할 것이다.
      우리는 언제든지 사랑을 추구하며 이웃의 덕을 세우는데 유의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명백한 규칙은 이웃의 덕을 세우는 결과가 될 때에는 우리의 자유를 행사하고, 이웃에 도움이 되지 않을 때는 자유를 포기해야 한다.

      우리의 자유는 신앙 양심의 자유이다.

      양심이라는 말은 con+scientia (하나님과 공유한 지식)이다.
      따라서 양심의 문제는 Coram Deo의 문제이고 우리의 자유는 바로 하나님 앞에서의 자유이다.
      비본질적인 것으로부터 자유하여 말씀의 본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자유가 우리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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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19-2022(월)

      복음을 위하여(고린도전서 9:23) for the gospel, for the sake of the gospel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I do all this for the sake of the gospel, that I may share in its blessings.

      언행일치(言行一致)

      위하여  διά  1223  복음 εὐαγγέλιον, ου, τό  2098

      1. ~을 통하여.  2. διέρχεσθαι διὰ πάντων: 모든 곳을 거쳐가다

      발음 / 디아(dia)

      관련 성경 / «속격»통하여, 항상,«대격»~ 때문에, ~을 위하여, 말미암아(요 1:3), 후에(막 2:1), 인하여(마 10:22), 까닭이니라(마 17:20), 이러므로(마 18:23), ~에게는(마 26:24), 가운데로(막 9:30), 안으로(막 11:16), ~이므로 (눅 2:4), 새도록(눅 5:5), ~하니(눅 18:5).
      신약 성경 / 668회 사용

      복음 εὐαγγέλιον, ου, τό  2098  

      1. 좋은 소식에 대한 보상,  2. τὸ εὐαγ- γέλιον,  3. ὁ λόγος τοῦ εὐ.

      발음 / 유앙게리온(ĕuanggĕ- liŏn)

      어원 / 2095와 3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복음(마 4:23, 막 16:15, 롬 1:1).
      신약 성경 / 76회 사용
      * 2095. εὖ 

      1. 잘,  2. 좋게,  3. εὖ ποιεῖν: 좋게 행하다

      발음 / 유(ĕu)
      관련 성경 / 잘, 좋게, 다행히(마 25:21, 눅 19:17, 행 15:29, 엡 6:3) 
      신약 성경 / 6회 사용
      * 32. ἄγγελος, ου, ὁ

      1. 사자,  2. 사람이 보낸 사신,  3. 하나님이 보낸 사자 : 메시아의 예고자

      발음 / 앙게로스(anggĕlŏs)
      어원 / ‘소식을 가져 오다’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사자(使者)(마 1:20, 행 5:19, 약 2:25), 천사 (마 13:39, 히 1:4, 계 1:1)
      신약 성경 / 176회 사용
      사도란 누구인가?

      ἀπόστολος, ου, ὁ  652  * 649. ἀποστέλλω

      1. 고전 헬라어나 후기 헬라어에서의 ὁ ἀ.는 해양탐험의 대장을 나타내는 말이었는데 ‘보냄을 받은 자’란 의미가 있었다:
      2. 대의원,  3. 하나님의 사자

      발음 / 아포스토로스(apŏstŏlŏs)
      어원 / 64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사도(마 10:2, 눅 17:5, 롬 1:1), 사자(使者)(빌 2:25), 보내던 사람(행 15:33).
      신약 성경 / 80회 사용

      * 649. ἀποστέλλω 

      1. ...을 보내다,  2. 마태복음 13:41,  3.마태복음 15:24

      발음 / 아포스텔로(apŏstĕllō)
      어원 / 미래 ἀοστελῶ, 제1부정과거 ἀ- πές τειλα, ἀποστείλω, 행7:34, 현재완료 ἀπέσταλκα, 현재완료수동태 ἀ- πέσταλμαι, 제2부정과거수동태 ἀπε- στάλην, 575와 472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보내다(마 2:16, 막 12:2, 요 5:33), 통지하다 (마 14:35), 파송하다(마 23:37, 눅 13:34), 대다(막 4:29), 보내심을 입다(눅 1:19), 보내심을 받다(눅 1:26).
      신약 성경 / 132회 사용

      사도란 누구인가?

      1. 예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자
      2. 예수님에게 배운 자
      3. 부활을 목격한 자 - 사울이 사도로 주장하는 근거(행 22:6-
      4.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자

      * 사도의 신분은 계승되는 것이 아니다.
      단 사도의 신앙과 정신은 반드시 계승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도를 세웠던 것은 교회를 세우려는 것이었다.
      교회를 세우고 교회의 머리가 예수님이 되심을 이미 드러내셨기 때문에 사도직이 단회적이라고 한다.

      * 바울도 유대인이 고대하던 메시아를 기다렸다.
      그러나 예수는 오히려 죽으러 가야 한다고 가르쳤다.
      더구나 저주스런 나무에 달려 죽으신 것이다.
      이러한 예수를 바울이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은 잘못된 메시아 신앙이 수정되는 사건이었다.

      바울의 사도권이 무너진다면 전한 복음도 완전히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사도 구권을 주장한다(9:2)

      권(權) ἐξουσία, ας, ἡ  849 바울의 사도로서의 권리

      1. 선택의 자유,  2. 능력,  3. 사도행전 1:7

      발음 / 에쿠시아(ĕxŏusia)
      어원 / 1832 ‘능력’의 의미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권위(마 7:29, 눅 4:6), 군사(마 8:9), 권능(마 10:1, 행 8:19), 권한(막 13:34, 행 1:7), 병사(눅 7:8), 관할(눅 23:7), 마음(행 5:4), 권리(고전 7:37, 9:5, 12, 살후 3:9), 자유(고전 8:9), 힘(계 9:19).
      신약 성경 / 102회 사용

      바울의 사도로서의 권리 

      고린도전서 9:4-7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첫째, 먹고 마실 권리
      목회자의 생활을 교회가 책임져야 할 권리


      둘째, 가족 부양의 권리

      셋째, 일을 하지 않을 권리 
      세상의 직업을 갖지 않을 권리

      바울의 사도권이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나에게도 이러한 권리가 있지만 나는 이런 권리를 사용하지 않겠다.

      * 비지니스 미니스티리(Business Ministry)

      최근에 교회 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교회 수는 늘어가고 목회자의 배출은 여전히 변함이 없고 인구는 점점 줄어드는 시대에 과연 목회자가 목회에만 전념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목회자에 대한 이중직 문제가 거론되고 있다.


      8장에서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사도권으로 해석하는 방법

      12사도만 사도인가?
      12사도는 초기에 이미 결정되었으며 바울의 경우 그 후에 사도로 임명되었다.
      특별히 고린도교회에서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논쟁이 심각하였다.

      고린도전서 15:8-10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행동 강령 

      고(故) 주선애교수의 어느 특강에서 들었던 교육학에서 정의하는 죄

      첫째, 모르면서 배우지 않는 것
      둘째, 알면서 행동하지 않는 것
      셋째, 알면서 가르치지 않는 것


      첫째, 지식(智識)

      지식이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 이외에는 신이 없다.
      그러므로 우상은 있을 수 없으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다.

      둘째, 사랑(愛)

      사랑이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한다면 우상의 제물을 먹지 못하는 이웃을 실망하게 하는 행동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먹을 수 있으나 사랑 때문에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겠다.

      셋째, 양심(良心)

      양심이란 "수네이데시스(συνείδησις)"라고 한다.
      그 "서로를 아는 것( knowing together with)" 

      영어 conscience의 유래가 되는 고대 그리스어 συνείδησις(쉬네이데시스)나 라틴어 conscientia는 어원적으로 '함께 앎'이라는 뜻이다.

      양심’이란 단순히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인간의 품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양심은 하나님과 내가 서로 교제하게 도와주는 수단이다.
      즉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음성의 통로다.

      그래서 다윗은 “양심이 밤마다 나를 교훈하도다“라고 하였다.

      비로소 사도 바울이 왜 하나님을 양심으로 섬긴다고 하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인간은 영과 육으로 구성된 동시에 이 둘이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 착각한다.
      전혀 무관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밀접한 관계도 갖고 있지 않다.
      육체적 훈련이 영적 훈련일 수 없는데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유사 기독교인들이 경건한 자들을 혼란시키고 있고, 사회도 어지럽히고 있다.

      이와는 달리 영이 잘되면 육도 건강하고 복을 받는다는 극단주의자들이 있다.
      성경은 결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과거 율법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연약한 무리들을 위해 가시적인 것을 통해 진리를 선포하셨다.
      하지만 그들 역시 가시적인 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찾았고 오실 그리스도를 늘 바라보았다.
      심지어 가시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늘 하나님의 뜻을 찾았다.
      육과 영은 무관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기독교강요> 1권 5장 5항).
      그 영에는 양심이 자리잡고 있다.
      어떤 때는 영을 대표하는 것을 양심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놀라운 것은 양심이란 그릇에 믿음이 담겨 있다고 성경은 표현한다(딤전 3:9).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기독교강요> 3권 2장 12항). 또 양심에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새겨져 있기에 누구도 하나님을 부인할 수 없다(1권 3장 2항).
      누구든 종교성을 가진 것을 보아 양심에 새겨진 그분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복음을 직접 듣지 못했다 하더라도 자연과 양심에 새겨진 그분에 대한 인식으로 심판을 누구든 받게 된다(롬 2:15).

      양심이란 무엇일까?

      칼빈은 양심을 다음과 같이 정의 내린다(4권 10장 3항).
      마음과 지성을 가진 자들이 사물에 대한 지식을 파악할 때 그들은 안다고 한다. 양심이란 말은 지식이란 이름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보다 문자적으로 해석해 보면, 양심이란 영어로 ‘칸션스(conscience)’이다. 칸션스라는 영어는 라틴어 ‘콘슈엔티아(conscientia)’에서 나왔다. 이 단어는 두 단어의 복합어로 ‘콘(con)’과 ‘슈엔티아(scientia)’이다.
      ‘콘’이란 뜻은 ‘함께’라는 의미고, ‘슈엔티아’는 ‘안다’라는 의미다. 즉, ‘~와 함께 안다’는 의미다.
      또 라틴어 슈엔티아는 영어 사이언스(science)로 표기되어 과학이란 단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결국 칼빈이 양심의 정의를 ‘아는 것’이라고 내린 것은 정확한 것이다.

      다른 양심

      문자적으로 양심이 지식이라고 한다면, 지식에 따라 양심이 다를 수 있다.
      누구와 더불어 무엇을 아느냐에 따라 양심의 정도는 달라진다.
      무엇을 아느냐에 따라 양심의 척도는 다르다.
      누가 아느냐에 따라 양심은 다르다.
      문화와 시대에 따라 다르다.
      왜냐하면 문화와 시대에 따라 습득한 지식이 다르기 때문이며, 그것에 따라 살기 때문이다.

      같은 문화와 같은 시대에 살고 있어도 양심은 다르다.
      그 이유는 무엇을 알고 있느냐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시대마다 어디든 생기는 것은 그 기준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학식에 따라, 가정 문화에 따라, 각자의 경험에 따라 양심은 다르다.
      누구든 자신의 지식과 기준에 따라 살아간다.
      누구에게는 이것이 옳은 것이지만, 저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다.
      바른 지식이 갖춰지면 바른 양심을 가질 수 있다고 사회학에서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맞지만 궁극적으로 그 양심은 바꿔지지 않는다.

      기독교인의 양심

      기독교는 사회와 다른 양심의 기준을 갖고 있다.
      절대자이신 하나님이 모든 것은 안신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기독교인 양심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도덕성을 가진다.
      개인과 문화에 따른 양심이 아니라 절대적 양심을 갖고 있다.
      전지하신 하나님이 아신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요셉은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하며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창 39:9).
      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믿음은 지식이라 말할 수 있다(3권 2장 6항).
      이런 면에서 사도바울은 믿음이 양심이란 그릇에 담겨 있다고 말한 것이다(딤전 3:9).
      믿음도, 양심도 모두 지식이란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양심도 동일하게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중생된 자는 하나님에 대해 배우려고 한다(요 6:45).
      주님께 오는 자는 배우는 자라고 예수님도 말씀하신 것이다(마 11:29).
      배워야 하는 이유는 호기심에 따라 그리스도를 알라는 것이 아니라 그분에 대해 아는 지식으로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함이다.

      양심의 가책

      감람산으로 가려 하실 때 예수님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왔다(요 8:3).
      이들은 신명기 22장 23~24절레위기 20장 10절에 근거해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고 의도했다.
      이것을 파악한 예수님은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다(요 8:6).
      무엇을 쓰셨는지 우리는 전혀 알 수 없다.
      또 알 필요도 없다.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다(요 8:7).
      그리고 다시금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다"(요 8:8).
      이 말을 들은 그들은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갔다(요 8:9).

      이 본문을 어떻게 해석할까?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는 다윗의 간곡한 부탁에도 요압은 듣지 않고 그를 죽였다.
      그러자 “부끄러워 도망함 같이 가만히 성읍으로” 들어갔다고 한다(삼하 19:3).
      유사한 현상이 요한복음 8장에서도 일어났다.
      양심의 가책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기에 그들의 고소하는 악행과 악한 의도를 멈추도록 하셨다.
      땅에 무엇인가 쓰인 것이 그들의 양심을 찌른 것일까?
      우리가 말씀을 쓰신 것을 모른다는 것은 말씀 내용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임을 암시한다.

      양심적 행위

      하나님은 영이시다.
      인간의 영, 즉 심정 또는 양심을 살핀다.
      내면을 살핀다.
      영의 상태와 기능들을 살핀다.
      선한 의지를 갖고 있는지 저울질하신다(3장 23장 10항).
      이와는 달리 인간은 외형으로 판단한다.
      우리는 인격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격에 따라 판단한다.
      인간의 양심은 인격의 대변이요, 내면의 세계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판단의 대상이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갖고 있다면 선한 양심을 가진 것이다.
      그 지식인 믿음은 참된 성도로 하여금 실천을 행하도록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라 말씀하기 때문이다.
      행함이 부족하다는 것은 그만큼 지식이 없다는 것이고, 양심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자들은 배우려 하지 않는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배우면 배울수록 양심은 더해지고 행함으로 드러난다.

      신앙경력은 오래되었는데 실천이 따르지 않는 것은 양심의 문제가 있는 것이다.
      지식은 갖추고 있는지 몰라도 삶을 통해 얻어진 참된 믿음을 갖추질 못했다.
      그 참된 지식이 없기에 양심적 행위를 행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자는 가르치려고만 하지 배우려 하지 않을 것이다(롬 2:1~5).
      참된 믿음이 없는 것이다.
      결국 믿는 자가 아닌 셈이다.
      믿는 척할 뿐이다.
      그 안에는 성령도 거하지 않는다(요일 3:24).
      성령이 거하시지 않기에 말씀을 통한 역사도 없다.
      그 역사가 없기에 말씀의 순종도 없는 것이다.
      결국 양심적 행위가 있을 수 없다.

      구원을 이루어 가라(빌립보서 2:12-13)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바울은 디모데에게 복음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복음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부르신 것은 우리의 선한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하나님의 목적과 은혜로 된 것이다.
      이 은혜는 영원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우리 구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이제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인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은 만세전부터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준비하신 하나님의 비밀 이였지만 이 비밀이 예수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통하여 인류에게 알려진 복음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복음이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예수그리스도는 내 인생의 모든 허물과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신 이 복된 소식이다.

      복된 소식을 들은자의 반응은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바울과 같은 사람
      둘째는 부겔로와 허모니게 같은 사람
      셋째는 오네시보로 같은 사람

      1. 바울같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움을 받았다고 합니다.
      바울의 인생의 목적은 이 복음을 위해서 살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그 치욕스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하여 감옥에 투옥되며 매맞으며 배고프며 헐벗으며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가 믿는 하나님을 내가 알고 내가 의탁한  자기의 생명을 변함없이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것을 예수님 오시는 날까지 하실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디모데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 내게 들은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고 명령합니다. 

      인생의 목적을 복음에 두고 살았던 바울 복음 때문에 감옥도 피하지 않았던 바울 매 맞는것도 피하지 않고, 배고픈 것, 헐 벗은 것도 참으며 주님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던 바울 믿음과 사랑으로 본을 보인 바울 주님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 신앙되게 하옵소서. 고난 앞에서도 담대하게 하옵소서.

      2. 부겔로와 허모게네와 같은 사람

      바울이 두번째 로마의 감옥에 투옥되었을 때에 바울을 떠나갔던 소아시아 사람 가운데 한명이다.
      당시에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가 매우 심했는데 박해가 두려워서 믿음을 지키지 못한 자의 대표일 것이다.
      주여 나로 믿음을 지키게 하옵소서.

      3. 오네시보로 같은 믿음의 사람

      바울이 감옥에 갖혀있을 때 사슬에 매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로마의 감옥에 갖혀 있을 때에도 부지런히 심방하여 찾아 만나고 로마에서 뿐만이 아니라 에베소에서도 얼마나 바울을 잘 섬겼는지 네가 잘 안다고 디모데에게 오네시보로의 숨은 봉사를 언급한다.

      당시의 그 심한 박해를 피하지 않고 감옥에 까지 심방하고 유쾌하게 하고 에베소에서도 로마에서도 변함없는 섬기는자, 봉사자 오네시보로 오네시보로의 이름의 뜻이 '유익을 가져다 주는 자' 라고 합니다.
      나도 이런 유익을 주는 자 되었으면 좋겠다.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생명을 거는 자가 있고,
      핍박과 박해가 왔을 때 돌아서서 떠나는 자가 있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섬기고 봉사하는 자
      나를 섬긴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 칭찬하는 자가 있음을 봅니다.

      주여 나로 믿음의 사람되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시는 사람들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책임져주신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대해 순종하면,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으며,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신 28:6, 8).
      하나님께서 모두 책임져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나의 방법으로 복을 받겠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을 찾는 사람을 책임져주신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찾는 사람을 아주 기뻐하십니다.
      여러분, 무슨 문제가 있으면 혼자 고민하지 말고, 부르짖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찾으시면 만나주십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책임져주십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저버리시거나 외면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레미야 29:12~13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셋째,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사람을 책임져주신다.

      요한일서 5:14~15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려고 하고, 하나님의 뜻만 이루어지기를 구했더니 다 이루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구한 것을 다 받은 줄로 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마음으로 살면, 하나님이 책임져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넷째, 주님과 복음을 위해 사는 사람을 책임져주신다.

      마가복음 10:29~3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백 배나 받는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전부 책임져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복음을 위해 사는 사람은 아무것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시는 축복을 가로막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기심과 탐욕’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기심과 탐욕에 사로잡혀 눈이 어두워져서 얼마나 많은 우상을 가지고 사는지 모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전부 우상입니다.
      우상을 버리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시는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책임져주시는 복을 주시기를 원했습니다.

      창세기 12:1~3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아브라함은 이 말씀에 무조건 순종했습니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는 것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순종했습니다.
      이 순종이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시는 복을 받는 비결이 되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가서 번제로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무조건 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요구하신 것은, 백세에 낳은 아들 이삭이 아주 귀하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가장 큰 우상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상을 가지고 있는 한 하나님이 책임져주시는 복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에 우상을 버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무조건 순종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22:16~18).

      여러분에게는 우상이 없습니까?
      어떤 사람은 돈이 우상이고, 어떤 사람은 명예나 권력이 우상입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가장 큰 우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우상이 되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자기를 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도 바울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버리고, 예수님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사도 바울처럼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주님을 섬기는 종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주인 노릇을 하고 삽니다.
      세계 최대의 부자로 꼽히는 록펠러는 중년의 나이에 회사와 직원이 아주 많아서 사업에 쏟는 스트레스로 인해 심한 노이로제와 소화불량, 무력감과 악몽에 시달리며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담당 의사가 죽음을 준비하라고 하자, 그는 자신이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았습니다.
      그때까지 그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밤낮 돈 버는 것, 세상의 일에만 골몰하다보니, 돈은 많이 벌었지만, 건강을 잃고 죽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잘못된 삶을 하나님 앞에서 통회 자복하고, 회개하고, 인생을 완전히 바꿨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자기 재산을 하나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쓰기 시작했습니다.
      대학과 교회를 세우고, 교육과 선교 사업에 후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자기를 비우고 물질을 사용하자 그의 건강이 회복되어 무려 98세까지 장수했습니다.

      그는 생전에 4,928개의 교회와 24개의 대학을 세웠습니다.
      수많은 복지센터를 설립했고, 자선사업에도 7억 5천만 불, 약 9천억 원을 기부해 지금까지 사회사업에 투자한 금액으로는 최고를 기록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123만 원을 2천 년 동안 매일 지급한 것과 같은 금액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록펠러 재단에서는 매년 1만 명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으며, 그의 장학금을 받은 사람 중에 무려 60여 명의 사람이 노벨상 수상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물질에 잡히고, 욕심과 탐욕에 잡혔을 때에는 생명을 잃게 되었지만, 자기를 비워 하나님을 위해, 남을 위해 살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생명, 건강, 축복과 행복까지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모든 것의 주인을 하나님으로 알고, 주님의 종으로 주님을 위해서 사는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강동석 집사님은 호텔에서 30년간 근무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호텔의 이사까지 했는데, 그 호텔이 계속 적자가 나더니 결국에는 부도가 나서 토지공사에 매각되었다고 합니다.
      그 바람에 집사님은 실업급여를 받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2개월 후에 토지 공사 측에서 그에게 한 가지 제의를 했습니다.
      호텔 지분의 절반을 주는 대신, 다른 어떤 후원도 없는 조건으로 파산한 호텔을 운영해보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만년 적자에 후원도 없는 호텔을 경영할 자신이 없었지만,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기로 하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호텔은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나는 종으로 경영할 테니 이 호텔을 맡아도 괜찮습니까?”

      그때 주님이 마음속에 “맡아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2개월 동안 문을 닫았던 호텔에 가서 매일 청소하고, 정비했습니다.
      그리고 기도실을 만들어 직원들과 함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호텔 경영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는 결단하고 매일 자정부터 새벽 2시까지 소나무 숲에 들어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오전 11시 30분에 전 종업원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이 호텔은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때부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 주말에는 빈 객실이 없고, 매출이 늘면서 적자경영이 회복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교사업도 많이 하고, 축복을 받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어려울 때에 하나님께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모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일을 해주실 뿐 아니라, 우리를 책임져주십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사십니까?
      무엇을 위해 사업하시고, 직장생활을 하십니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 살고, 가족을 위해 일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밤낮 달라는 기도만 합니다.
      건강하게 해주시고, 아이들이 공부 잘하고, 사업이 잘되고, 시집을 잘 가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은 미신을 믿는 사람과 같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회사를 경영해도 자기가 사장이고, 하나님은 돕는 자가 되어 달라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가 왕이고, 하나님은 자기 비서 노릇만 해달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뜻대로만 살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뜻대로 될 수 있도록 축복해 달라고 하나님께 비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책임져주시는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책임져주시는 복을 받으려면, 자기 자신이 왕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그 자리에 모셔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 가정의 주인이 되어주시고, 우리 회사의 주인이 되어주시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이 주인이 되어주셔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주인이 되어주시면, 하나님의 큰 손이 우리의 일을 하시고, 모든 일을 책임져주십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절대 주권을 가진 분이시고, 신실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실수나 실패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우리의 일을 해주시고, 우리를 책임져주시면, 잘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책임져주시는 복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과 복음을 위해 집이나 밭, 부모 형제나 자녀를 버리면 백배의 복을 받는다고 말씀하셨는데, 주님은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집이나 땅이나 부모 형제, 자녀가 우상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보다 그것을 더 사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이 책임져주시는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므로 그 아들을 잃어버렸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그 아들을 얻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책임져주시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복이 되었습니다.

      스펄전 목사는 “헌신은 자기에 대한 소유권을 하나님께 이전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헌신하는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의 소유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소유로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려고 한 것은 그 아들을 자기의 소유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소유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시는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0:37~39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주님을 위해 버리고 포기하면, 잃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십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 우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시는 복을 받으려면, 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과 복음을 위해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삶의 목적은 땅 끝까지 주님과 복음을 전파하는데 있어야 합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6:15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주님은 이 말씀대로 사는 자를 가장 기뻐하십니다.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므로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힘은 부족하지만, 주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에 반드시 그대로 성취됩니다.

      마태복음 28:19~20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주님께서 복음 전하는 자와 항상 함께하시기 때문에 실패할 것 같아도 성공합니다. 안 될 것 같아도 됩니다.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리라 말씀하셨으니 그대로 됩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됩니다.
      마태복음 24장 1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으니 그대로 됩니다. 반드시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주님과 복음을 위해 살면,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시는 복을 받습니다.

      마태복음 6: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가 주님과 복음을 위해 살아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져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복음을 가장 열심히 전하는 나라가 가장 강한 나라가 되고, 가장 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영국은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고, 선교사들을 많이 보낼 때가 제일 강대국이었습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할 정도로 전 세계 구석구석에 영향력을 미치도록 하나님께서 도우셨습니다.
      복음 전하는 것 하나 때문이었습니다.
      죄 짓는 사람도 있지만, 복음 전하는 주의 종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본문의 배경이 되는 고린도전서 8장부터 10장 사이에 대두되고 있는 논쟁점들을 간단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논의의 주제는 우상숭배와 음식 나눔으로 인한 교회의 시험이 주요 주제입니다.
      고린도교회 안에는 소위 믿음이 강한 자들과 믿음이 약한 자들이 존재했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들의 입장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이제 만유의 주재되신 하나님 한 분 만을 섬기니 우리에게 이 세상의 우상은 실재가 아니다라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자유자로서 당시 주변 환경과 풍속과 음식등에 거리낄 것이 없다라는 입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상 제의에 참석은 하지만 문화의 하나로서 그것을 넘어서고 신앙 양심에 거칠 것이 못되고, 우상에게 드려졌던 고기들이 시장에서나 혹은 믿지 않는 친구들이 대접할 때에 거리낌 없이 먹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들에게는 세례와 성만찬을 매번 하기 때문에 구원에 아무 문제가 없다라는 입장입니다.
      반면에 소위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찌 보면 이제 막 믿기로 시작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매사에 우리가 이방 신들의 제의에 참여하고 그들의 음식을 먹는 것이 옳은지, 혹 남의 초대를 받고서도 눈 앞에 차려진 음식들과 고기들을 보고 혹시나 이 음식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것은 아니었는지, 혹은 시장에 가서도 그들 앞에 놓인 고기가 신전 제의에 사용된 것이었는지 늘 물어보며 염려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소심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내에 이런 믿음의 차이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 판단하고 정죄하는 시험이 찾아온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쉽게 다가오는 문제이기도 할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리게 된 사람들이 주변 세상 문화에 그들이 대하는 태도가 각각이고 그 태도에서 누리는 자유함의 강도가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사도 바울은 이런 고린도교회의 상황을 보면서 어떤 권면을 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본문 말씀을 통해서 두 가지 뚜렷한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자유인으로서 지식에는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겸손하지 않으면 지식의 종이 되어 교만과 방종할 수 있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의 결국은 구원의 패망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구약과 연결해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권면합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그들의 세례와 매 모임마다 함께 하는 성만찬을 자랑했습니다.
      이것이 그들 구원의 조건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더 나아가 이제 하나님이 그들의 주님이시기에 그들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해서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일면 신학적으로는 이런 그들의 모습을 적극 지지합니다.
      그래서 시장에 나온 음식과 고기들을 묻지 말고 그냥 먹으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음식들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 속에서 나왔기에 아무 문제가 없다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들의 윤리적인 부분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복음으로 자유함을 얻었다고 하지만, 그들 속에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어도 여전히 애굽의 이방 풍속을 그리워하고, 우상을 숭배하며, 모압 여인들과 간음하고 하나님을 구원을 의심하며 원망했듯이 그러한 옛사람의 모습이 그들에게도 있었던 것입니다.
      직업을 따라 참여했던 아프로디테와 각종 이방 신들에 대한 제의가 더 이상 우상숭배로 참여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것을 부러워했고 선망했다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들 중에 신전 창기들과 간음을 행한 옛습관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세례 받았으니까, 우리는 성만찬을 하니까,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을 믿으니까 괜찮다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식이 그들의 현세적 삶을 정당화 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믿음이 있는데 이만큼 타협한다고 뭐 어때? 세상을 살면서 이 정도는 해도 괜찮지 않아. 예수 믿는 다른 사람들도 다 이렇게 하는데. 때론 예수님도 이렇게 했잖아. 성경에는 이것에 대해서 아무런 말이 없잖아?’

      우리들도 역시 우리 주변의 많은 일들을 얼마나 우리의 신앙의 지식으로 정당화하고 타협하는지 모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자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그런즉 (믿음의 지식으로 굳게)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린도전서 10장 11-12절).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고린도전서 10장 5절)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가진 믿음의 지식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겸손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성경을 더 많이 안다고 해서 그것들을 판단과 우리 삶의 정당화의 잣대로 들이 내밀지 마시고. 오히려 지식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도구에 불과할 뿐이지 우리를 온전히 세울 수 없는 불완전한 것임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또 무엇을 권면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고린도전서 8장 1절에서 그 힌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또 10장 23-2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이 말들을 쉽게 표현하자면 우리가 덕을 세우며 남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의 종이 되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신앙 양심에 거리끼지 않고 우리가 누릴 자유는 참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행함이 믿음이 연약한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을 얻기 위해 우리가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고 그들에게 전도와 믿음의 덕을 세울 줄 아는 사랑의 매임이 필요합니다. 사실 자원하여 매인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구약에서는 매칠년 안식년 때에 해방된 종들이 주인의 은혜와 사랑이 너무 고마워 자발적인 종이 된 경우가 있습니다. 제사장 앞에서 자신이 자유를 포기하고 자발적으로 종이 되었다는 증거로 그의 귀를 뚦습니다. 물론 이러한 경우에 그 종의 주인은 그 종을 하대하거나 막대하지 않습니다. 이후로는 종이지만 그들 아들처럼 귀하게 여깁니다. 이런 경우에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상호이해가 성립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에 매여 자발적으로 섬김의 종이 되는 경우를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오해합니다.

      서른 셋 나이로 2006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우리에게 깊은 신앙의 감동을 남겨주고 떠난 청년이 있습니다.
      바로 ‘그 청년 바보의사’의 주인공인 안수현 형제입니다.
      2000년도에 한국에 의약분업 분쟁으로 인해 거의 모든 병원에 파업이 일어났습니다.
      모든 의사들이 다 파업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리고 설령 파업에 참여했다고 하더라도 밤에 몰래 와서 진찰하고 처방을 내리는 의사들도 있었지만 당시 대세는 파업이었습니다.
      특별히 위계질서가 엄한 병원에서 개인행동을 한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고대 안암병원에서 레지던트 2년차였던 안수현 형제는 홀로 남아서 끼니를 걸러가며 밤을 새우며 환자들을 지켰습니다. 그에게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대의 명분이 많이 있었지만, 의사란 환자 곁에서만 의미가 있다라는 소신과 또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원하시는 바라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고 앞으로의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파업 병동을 지켰습니다.
      이때 사람들 중에 드러내놓고 혼자 튄다고 비난하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러 논리에 밀려 위로 받지 못하고 충분히 돌봄을 받지 못하는 환자들이 제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합니다.
      누구보다도 위로 받아야 할 사람들, 병원에서 도움이 될 길과 하나님 앞에서 자유할 수 있는 길을 위해 기도하면서 병원에 남는 길을 택했습니다.
      기도해 주십시오. 고대병원 내과 R2 스티그마 안수현”¨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선한 양심에 비추어 죽어가는 한 사람이라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사람들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사랑의 종이 되라고 권면합니다.
      사랑의 종이 되기 위해서는 고린도전서 9장 25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가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우리에게 절제가 필요합니다.

      교회 내에서는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배려할 줄 아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혹 믿음이 약한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먹을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그 음식들이 우상에게 드려진 것이라고 밝히면 그것을 먹을 자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게 한 자와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10:29)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교회 밖에서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처럼 율법 있는 자에게는 율법 있는 자같이, 율법 없는 자는 율법 없는 자같이, 그리고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들 같이 된다는 말은 사랑에 근거한 자유함의 절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쉽게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이웃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의 방식, 자신의 스타일도 포기하고 이웃을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자신을 포기하겠다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인간으로 보내신 방식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 같은 인간의 모습을 입고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의 모습처럼, 우리가 가진 신앙적 지식의 허울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우리의 이웃을 얻기 위한 낮아짐이 필요함을 우리에게 가리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절제요 희생이며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보스톤 트리니티 교회의 설교자로 계셨던 필립 브룩스(Philip Brooks)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에게는 로버스 잉거솔(Robert Ingersoll)이라는 무신론자 친구가 있었습니다.
      브룩스는 아주 절도 있고 철저한 시간 계획을 따라 사는 분이었지만, 이 무신론자 친구를 전도하기 위해서 자주 자신의 시간 계획을 바꾸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까지 자네가 할 필요가 있느냐?”라는 물음 앞에 그는 “내가 그를 참으로 사랑하고 그를 천국으로 인도하기 원한다면 내 시간표가 아닌 그의 시간표를 따라야 하지 않겠느냐?”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브룩스가 말년에 병을 얻어 병원에 입원했을 때에 그는 심신의 안정을 위해 ‘면회사절’이라는 푯말을 걸어두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만일 잉거솔이 찾아 오면 예외로 만나게 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잉거솔이 그 사실을 알고 “왜 나에게만 자네가 예외로 하고 만나주느냐?”는 물음에 브룩스 목사는 빙그레 웃으며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다른 친구들이야 다시 천국에서 만나겠지만 자네에게는 그런 보장이 없지 않느냐?”고.
      이 실화는 참으로 우리가 되새겨야 할 많은 교훈을 줍니다, 우리 위해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도 복음을 위해 사랑과 섬김의 자발적인 종이 되시기를 권면합니다.

      우리가 종이 되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를 살리고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복음의 종이 되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그러하기 위해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을 알아가며 복음의 지식으로 자유함을 누리지만 그 풍성한 지식에는 늘 겸손하며, 그리스도를 본받아 절제함과 담대함이 드러나 사랑에 매인 종이 되는 그런 진정한 그리스도인들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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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20-2022(화)

      남의 유익(고린도전서 10:24)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Nobody should
      seek his own good, but the good of others.

      유익한 것. συμφέρω  4851

      1. 가져다 쌓다,  2. 돕다,
      3. 마태복음 18: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발음 / 쉼페로(sümphĕrō)
      어원 /  미완료 συνέφερον, 제1부정과거 συνήνεγκα, 제1부정과거분사 συνε- νέγκας, 4862와 534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유익하다(마 5:29, 요 11:50, 고전 6:12), 낫다(마 18:6), 좋다(마 19:10), 유익하게 하다(고전 12:7).
      [명] 유익(요 16:7,고전 7:35, 히 12:10).
      신약 성경 / 15회 사용

      남의 유익(the good of others)을 구하라!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신앙이며 삶의 자세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에는 다른 사람을 위하는 여유가 사라졌고 오직 자기만을 위하는 공간을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자기보다 남을 위한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1-4장은 인사와 고린도 교회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분쟁에 대한 답변
      5장은 음행에 대한 답변
      6장은 성도 간의 소송 문제에 대한 답변
      7장은 결혼에 대한 답변
      8-10장은 우상 제물에 대한 답변 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사백 년 동안 노예살이했던 애굽에서 자유하는 은총을 입었음에도 그 자유를 남용하고, 패역한 삶을 삶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던 사실을 상기시킴으로 교훈하고 있습니다.

      교훈을 받아드리는 자세가 두 가지라고 하겠습니다.

      첫째는 소극적인 자세
      둘째는 적극족인 자세

      소극적인 자세는 나도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나도 남을 돕지 않는 자기 중심적이 삶을 선호하는 것입니다.
      적극적인 자세는 내가 먼저 남을 돕고자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신명기 8:12-14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우리 안에는 우리에게 재물을 얻을 능력을 주신 하나님을 잊게 하고, 자신의 능력과 자신의 힘으로 이 재물을 얻었다고 말하게 하는 자기 중심적인 죄성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슬하(膝下)’가 ‘무릎 아래’입니다.
      그래서 ‘구름 아래’는 ‘하나님 슬하’의 의미입니다.
      출애굽기, 민수기, 신명기를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얼마나 많이 보호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무릎 아래’ 정도가 아니라 ‘눈동자’와 같이 지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바다 가운데로 지났다’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홍해를 열어 주셔서, 그 바다를 건너갔다는 것입니다.

      구름 아래에 있었다는 것과 바다 가운데로 지났다는 것은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이 아니라, 노예가 자유인이 되는 신분의 변화가 일어났으며, 애굽에 속했던 사람이 가나안에 속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 된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구름 기둥 아래에 있다가 홍해를 건넌 것을 ‘세례’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홍해를 건너기 전에 세례 예식을 행하고, 서약을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데 홍해를 건넌 사건은 정말 세례의 의미를 잘 설명해 줍니다.

      애굽이 죄와 사망의 상징이라면, 가나안을 향하는 길은 복과 생명의 상징입니다.
      그들이 홍해를 건널 수 있었던 것은 헤엄을 쳐서 스스로 가나안 땅에 닿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또한 크고 작은 배를 타고서 힘을 써서 배를 조종했거나 노를 저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열어 주시고, 그 땅바닥을 마르게 해 주셨기 때문에 건널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건너고 나자 홍해는 다시 닫혔습니다.
      그들은 다시는 애굽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홍해를 건너는데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홍해가 열리고 길이 났던 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결단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적용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고, 세례 교인이 된 것이 우리의 능력이나 지혜, 선함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죄의 세상에서 우리를 불러주시고,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세례 교인으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더 이상 애굽으로 돌아가는 길은 없고 가나안을 향하는 길만 있듯이, 우리에게도 주님을 믿기 이전으로 돌아가는 길은 없고, 하나님을 목적 삼고 걷는 길만 있습니다.

      ‘신령한 음식’은 ‘만나’를 가리킵니다.
      만나는 몸을 위한 양식이었습니다.
      그럼에서 ‘육체의 양식’이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신령한 음식’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만나가 땅에서 솟아나지 않고 하늘에서 내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주워야 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만나를 하루분씩만 주우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많이 거둔 사람도 남는 것이 없었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욕심을 부리고 다 먹지 못할 정도로 거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그 삶이 썩고 냄새가 날 수 있습니다.
      또한 안식일 전날에는 이틀분을 거두도록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날에도 만나는 괜찮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몸을 위한 음식이 신령한 음식이 되었습니다.
      동일하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면 우리의 먹는 모든 음식은 신령한 음식이 됩니다.

      르비딤에서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반석을 쳤더니 물이 나왔습니다.
      그래야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마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반석이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즉 그 물이 터지게 해주신 분이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터진 반석’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징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신령한 반석’이 그들을 따라다녔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동행해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런 은혜를 베푸심에도 그들을 그것을 몰랐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홍해를 건넘과 불기둥과 구름기둥, 반석에서 터진 물, 만나로 대표되는 은혜 베푸심을 수없이 보았음에도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했습니다.
      특히 가데스바네아에서 12명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왔는데, 10명은 “우리는 그들 앞의 메뚜기와 같다”라고 보고했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곳은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심히 아름다운 땅이고, 그들은 우리의 먹이다”라고 보고했습니다.
      불행하게도 이스라엘 자손들은 10명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 결과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출애굽의 1세대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마침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믿는 사람에게는 매해가 약속의 땅이 됩니다.
      물론 이 땅에서 그 약속의 땅을 마지막으로 받으면, 영원한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본보기(튀포스)’는 ‘맞아서 생긴 자국’을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던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못 자국을 보여주시며 “믿는 자가 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자국’과 ‘본보기’가 같은 말입니다.

      혹 몸에 수술 자국이나 불에 덴 흉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그때를 떠올리며 더욱 조심해서 살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불순종을 우리 몸에 있는 상처 자국으로 여긴다면, 우리는 더욱더 바른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민수기 25장에 나오는 싯딤에서의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우상숭배하고, 모압 여인들과 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것은 고린도 교회가 우상숭배하고 음행을 저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도 마음이 상해서, 만나도 지겹고, 애굽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했을 때 불뱀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달아, 그것을 본 사람은 치유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을 광야 생활 내내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원망’은 내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 일어나곤 합니다.
      고린도 교회에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과 원망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고, 주어진 상황에 순종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진면교사(眞面敎師)’라고 한다면, 이스라엘 자손들은 ‘반면교사(反面敎師)’와 같습니다.
      우리가 중심으로 진면교사를 본보기로 삼지 않으면, ‘미워하면서 닮는다’라는 말처럼, 반면교사의 삶이 우리의 삶을 비춰주는 거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그런즉’이 중요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이 서 있지 못하면서 서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고, 성숙하지 못했음에도 성숙하다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는 걸림돌이 많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 다 자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 자람을 잘하기 위해서 말씀을 읽고 쓰고,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4가지의 경고를 했습니다.
      우상숭배, 간음, 하나님을 시험,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고린도 교회에 만연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피할 수 있는데, 피하지 않았다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습이 고린도 교회에 그대로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도 동일하게 요구받습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 세속적인 욕망 추구,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스라엘 자손이고, 고린도 교회입니다.

      우리가 이런 삶을 살지 않고,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기 위해,  주일예배, 수요 성서여행, 새벽 묵상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진정한 교인으로 살아가는 한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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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21일(수)

      나를 본 받는 자 되라(고린도전서 11:1)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본 받다.
      μιμητής, οῦ, ὁ 3402

      1. 모방자,  2. 본 받는 사람

      고린도전서 4:16

      발음 / 미메테스(mimētēs)

      어원 / 3401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본받은 자(고전 4:16, 엡 5:1, 살전 2:14), 행하는 자(벧전 3:13)

    • 신약 성경 /  6회 사용

    • *3401. μιμέομαι

      1. 모방하다,  2. 본따다,  3. 본받다

      발음 / 미메오마이(mimĕŏmai)
      어원 / 명령 μιμοῦ, 미완료 ἐμιμοῦμην, 미래 μιμήσομαι, 제1부정과거 ἐμιμησάμην, ‘흉내내다’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본받다(살후 3:7, 히 13:7, 요삼 1:11).
      신약 성경 / 4회 사용

      11:2. (이제)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대로 그 유전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이제) - 데(δέ) 1161
      1. 그러나,  2. 마태복음 6:1,  3. μέμδέ

      발음 / 데(dĕ)

      어원 / 헬라어
      신약 성경 / 2801회 사용

      11:3.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머리. κεφαλή, ῆς, ἡ  2776
      1. 머리,  2.사람이나 짐승의 머리,  3. 그리스도를 가리킴

      발음 / 케팔레(kĕphalē)
      어원 / 기본형 κάπτω ‘잡다’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머리(마 5:36, 행 18:6, 계 1:14), 머릿돌(마 21:42, 막 12:10, 벧전 2:7).
      신약 성경 / 75회 사용
      *케팔라 : 통치하다, 권위가 있다, 기원이 된다, 출처가 된다, 지휘한다, 결정권이 있다.
      청빈낙도(淸貧樂道)

      벤치마킹(Benchmarking)

      벤치마킹(Benchmarking)이란 말을 들어보셨지요?
      벤치마킹이란 어느 분야에서건 그 분야에서 모범이 될만한 인물을 선정하고 그를 본으로 삼아 자기 자신을 발전시켜 나가는 경우를 말합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자신의 가슴 속에 저마다 벤치마킹의 모델이 있기 마련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을 벤치마킹하라고 권면합니다.

      본 받는다는 말은 어떤 대상을 통해 누군가를 흉내내고, 모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빌립보서 4: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배우고 듣고 본 바를 그대로 행하는 것은 그 사람을 닮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본문에서 자신을 본받으라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자신을 닮으라는 것이고, 모방하라는 말입니다.
      사실 자신의 삶에 웬만큼 자신이 있지 않고서는 타인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구 사도 바울이 자신을 본받으라고 한 것은 그만큼 자신의 삶에 충실했고, 성실했다고 하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바울이 나를 본받으라고 권면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비결은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있기 때문”임을 오늘 본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자 된 것이 하고 있습니다.
      현재진행형으로 나타나있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본받아 닮아가고 있는 자신과 함께 그리스도를 같이 본받아 가자는 권면입니다.
      그래야 10장 31절 말씀처럼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거치는 자가 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것은 사도바울처럼 곧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이요, 자신을 통해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가운데 나도 모르게 그리스도처럼 변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삶이 바로 참된 신자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닮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사람은 자주 만나는 사람을 닮아갑니다.
      부부는 닮는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마도 그것은 매일 만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매일 만나다보면 서로 닮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후 바울의 삶은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이 변하여 이방인의 사도 바울로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세리 마태도 예수님을 만난 후 그의 삶이 완전히 달라져서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이웃을 향하여 베풀고 나누는 삶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야만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본받아 닮아 갈 수 있습니다.

      자신을 비우는 겸손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그 당시의 모든 것을 갖춘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운 최고의 지식인이었습니다.
      어디에 내놔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비웠기에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이 상대보다 낫다고 생각하면 상대를 본받을 수 없고, 닮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낮아지고 겸손해져야 닮아갈 수 있고 본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시대는 대단한 이기주의의 시대요, 나 중심의 시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게 요구하시는 것이 생길 때 우리는 아주 불편해 집니다.
      사실 우리의 내적 자아는 하나님께 푹 빠지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자신을 비워야 합니다.
      자신을 비우는 겸손이 바로 하나님과 만나는 자리인 것입니다.
      자신이 겸손하지 못하면 결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사도바울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비우고 낮아지고 겸손해져야 그리스도를 본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사람들을 좋아하는 사람을 닮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청소년들을 보면 대중스타를 닮아 갑니다.
      대중스타들이 하는 목걸이, 머리 스타일, 입는 옷 등 흉내를 내고 다닙니다.
      왜 입니까?
      청소년들은 그들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을 닮아가기 마련입니다.
      사모하고 존경하면 닮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의 겉모습만 닮아 가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인격까지 닮아가기 마련입니다.
      이처럼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사모했기에 예수님을 본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들도 사도바울처럼 우리 자신을 통해 그리스도가 나타나야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나를 통해 그리스도를 느끼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하나님께 영광을 위하여 사시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나를 통해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 다면, 즉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 라고 생각하신다면 우리의 믿음이 좀 더 성숙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입술로만 겉모습만 닮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내면의 인격으로부터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는 참된 신앙인으로 살아감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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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22-2022(수)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린도전서 12:31)


      은사(恩賜)란 무엇인가? 

      Ⅰ.  이끄는 말
      Ⅱ.  은사란 말의 뜻
      Ⅲ.  은사의 종류
      Ⅳ.  은사의 용도(목적)
      Ⅴ.  은사의 구분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로마서 12:4-8   

      Ⅰ. 이끄는 말  


      종교개혁 이후, 지금처럼 교회가 성경에서 이탈되어진 경우도 그렇게 흔하지는 않을 것이다.
      서구 교회들은 물론, 한국 교회 역시 성경과는 거리가 상당히 먼 기형적(畸形的)인 교회들이 너무도 많아지고 있다는 데서 위기의식(危機意識)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한국 교회가 이와 같은 모습으로 탈바꿈이 되어지기까지는 여러가지 원인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신학적인 미숙은 물론, 성경교육에 대한 미온적 태도, 또는 사회적 환경, 신자들의 의식구조 등 다양한 원인들을 들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신학적인 미숙과 성경교육에 대한 미온적인 태도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에 근거한 구체적인 신학적 이론을 무시하고 소위 성령 운동을 통한 체험 위주(爲主)의 신앙을 우선한 결과가 바로 오늘의 기형적인 교회로 변하게 된 것이다.
      이론이 무시된 체험은 자기 최면(催眠)일 수 있다.
      자기 최면 상태가 진리일 수는 없는 것이다. 체험 일변도의 신앙생활은 자연히 은사면(恩賜面)에 치우치게 된다. 허다한 교회들이 소위 성령의 은사에 관심을 가지는 원인도 체험 중심의 신앙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는 성경으로 돌아가서 치료를 받아야 할 상태이다. 아니, 대수술을 받아야 할 중병을 앓고 있는 상태이다. 아무리 큰 수술이라도 한국 교회는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수술을 하기전에 먼저 질병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필요하다. 그리고 병명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질병의 원인도 파악되어야 한다.

         한국 교회가 앓고 있는 중병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성령의 은사'에 대한 오해이다. 전통적으로 무속신앙에 잘 길들여진 한국 교회 신자들은 철저하게 무속적인 행위들을 '성령의 은사'라고 착각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것은 성령의 은사에 대한 성경적인 이론적 체계의 결여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은사'란 과연 무엇인가? 이에 대한 해답을 본 논고에서 제시함으로써 대 수술을 받아야 할 만큼 중병에 시달리고 있는 한국 교회의 중환 치료에 적게라도 기여하고자 한다.



      Ⅱ. 은사(Gifts)란 말의 뜻  



        국어사전에서는 은사라는 뜻을 '임금께서 내려 줌', 또는 '임금께서 내려주는 물건'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경에서 은사라는 말은 헬라어로 '퓨뉴마티카(  )'인데, 그 뜻은 영에 속한 것들이라는 말이다. 또는 '카리스마타'라고도 하는데, 그 뜻은 은혜의 현현(顯現), 거저 주어진 선물들이라는 말이다. 이상의 언어들을 종합적으로 의역(意譯)을 한다면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에게 베풀어지는 모든 것을 뜻한다고 말할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는 은사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언급이 되고 있으나, 구약성경에서는 신약성경에서와 같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구약성경에도 은사로서의 의미를 담고 있는 내용이 신약성경 못지 않게 많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 일이나

      (창12:1-2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근원이 될지라)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에게 잉태케 해서 이삭을 낳게 하신 일

      (창17:15-16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야곱으로 하여금 거부가 되게 하신 일

      (창30:37-43  야곱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취하여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 무늬를 내고 그 껍질 벗긴 가지를 양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 구유에 세워 양떼에 향하게 하매 그 떼가 물을 먹으로 올 때에 새끼를 배니 가지 앞에서 새끼를 배므로 얼룩얼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은지라

      야곱이 새끼 양을 구분하고 그 얼룩무늬와 검은 빛 있는 것으로 라반의 양과 서로 대하게 하며 자기 양을 따로 두어 라반의 양과 섞이지 않게 하며 실한 양이 새끼 밸 때에는 야곱이 개천에다가 양떼의 눈앞에 그 가지를 두어 양으로 그 가지 곁에서 새끼를 배게하고 약한 양이면 그 가지를 두지 아니하니 이르므로 약한 자는 라반의 것이 되고 실한 자는 야곱의 것이 된지라  이에 그 사람이 심히 풍부하여 양떼와 노비와 약대와 나귀가 많았더라)

      요셉으로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신 일

      (창41:37-43  바로와 그 모든 신하가 이 일을 좋게 여긴지라  바로가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있는 자가 없도다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  내 백성이 다 네 명을 복종하리니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 뿐이니라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로 애굽 온 땅을 총리하게 하노라  하고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사슬을 목에 걸고 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를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로 애굽 전국을 총리하게 하였더라)

      또는 모세로 바로 앞에 신이 되게 하신 일

      (출7: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내가 네게 명한 바를 너는 네 형 아론에게 말하고 그는 바로에게 말하여 그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보내게 할지니라)

      여호수아를 세워 모세의 뒤를 잇게 하신 일

      (수1:1-2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사사들을 세우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신 일

      (삼상16:6-13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듬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그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이새가 아비나담을 불러 사무엘의 앞을 지나게 하매 사무엘이 가로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이새가 삼마로 지나게 하매 사무엘이 가로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이새가 그 아들 일곱으로 다 사무엘 앞을 지나게 하나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고

      또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가로되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이에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레위 지파로 제사장을 삼고 선지자들을 기름부어 세우신 일 등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의 많은 사건들이 모두가 구약성경에 있어서의 은사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내용들임을 알 수 있다. 알고 보면 구약성경에 있어서의 은사가 아주 넓은 의미를 담고 있음을 볼 수 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 전 영역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 되어지고 있다.

         신약성경에 있어서도 구약성경에서와 같이 넓은 의미로서의 은사적인 내용들이 많이 있다. 처녀 마리아에게 예수가 잉태된 사실이나

      (눅1:26-38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세우신 일

      (마4:18-22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저희가 곳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바울을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세우신 일

      (행9:1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등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베푸신 은사로 이해될 수 있다.

         결국, 신ㆍ구약성경에 있어서의 은사(Gifts)란 말은,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이나 재능, 그리고 임무나 능력 등이 은혜로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을 말한다.



      Ⅲ. 은사의 종류  



        하나님께서 은혜로 인간에게 주시는 은사의 종류는 매우 많고 다양하다. 신ㆍ구약성경에서 그 종류를 다 찾아 열거(列擧) 한다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그 수가 많을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어느 것 하나 하나님께로부터 은사로 주어지지 아니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은사의 종류는, 주로 신약성경에서 구체적으로 밝혀주고 있는 은사들을 중심으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 글의 목적이 현재 은사 중심의 신앙으로 인한 교회들의 폐단(弊端)을 시정하고자 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넓은 의미의 은사에 관하여는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으나 신약성경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몇몇 종류의 은사들에 관해서만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신약성경에 언급된 구체적인 은사의 종류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밝혀준 내용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이에게는 성령을 따라 지혜의 말씀을 어떤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어떤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이에게는 방언을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전12:4∼11)"고 밝혀 주었다.

      그리고 로마서에서는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12:6∼8)"고 했다. 이들 말씀의 내용들은 모두가 은사의 종류들을 말해주고 있다.

         이상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면, 은사의 종류는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침, 능력 행함, 예언, 영들 분별, 방언, 통역 등이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들 은사보다 더욱 큰 은사가 있음을 말한다. 그 은사는 사랑이다.

      (고전13:13   그런즉 믿은,소망,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이와 같은 은사들은 교회에 세운 직임과 함께 주어진다. 즉 은사를 받은 자는 받은 은사에 따라 직임이 주어진다는 뜻이다. 그 직임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언급한 사도, 선지자, 교사 등

      (고전12: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이며,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는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 등이라고 했다.

      (엡4: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Ⅳ. 은사의 용도(목적)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은사를 주시는 목적이 무엇인가? 무엇을 하시기 위해서 무슨 용도로 주시는 것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해답은 은사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작용을 하는 것이다. 은사의 용도(목적)는 성령의 사역과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다. 그 이유는 성령의 사역이 은사들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신 이후, 오순절에 성령을 보내 주신 것은,
      첫째로 사도들로 하여금 신약성경을 기록하게 하시기 위함이며

      (계22:17-19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둘째는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케 해서 교회를 세우도록 하기 위함이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이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은사를 주어 받은 자들로 하여금 은사 따라 사용하게 하시는 것이다. 결국 은사는 성령의 사역을 이루는 데 도구로 쓰시기 위해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먼저, 은사는 신약계시를 완성시키는 데 사용된다

         오순절 성령강림 전에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복음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문서화 되어진 사실이 없다. 다만 제자들이 예수께로부터 직접 귀로 듣고 배운 바는 있으나 기록으로 전해진 바는 없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의 내용을 제자들이 분명히 깨닫지 못하고 있는 부분도 많이 있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베드로에게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요13:7)"고 하신 말씀이 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예수 자신이 죽으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 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2∼13)"고 하셨다. 이와 같은 말씀들은 오순절 성령강림 전에는 제자들이 복음진리에 대하여 분명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예수께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어 주신 것은 제자들로 하여금 복음의 진리를 확실히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고 말씀 하셨고,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7)"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성령이 오셔서 제자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셔야 진리를 알 수가 있기 때문에 예수께서 가셔서 성령을 보내어 주시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하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오순절 날에 보혜사 성령을 보내어 주셨고

      (행2:1-4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성령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복음진리를 깨달아 신약계시를 완성 시키게 하시려고 제자들에게 각종 은사들을 선물로 주신 것이다. 그래서 은사들 중에는 복음진리를 깨달아 알게 하는 은사들이 있는 것이다.

      다음은 은사는 진리의 터 위에 교회를 세우는 데 사용된다

         예수는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 교회는 머리되신 예수의 몸이 된다. 예수께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어 주신 것은 예수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이다. 예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성령께서는 제자들에게 능력을 받게 하시고, 복음을 깨닫게 해서 예수의 증인이 되게 하시므로 예수의 몸된 교회를 세우게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교회를 세우실 것에 대하여 말씀하신 바가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신분에 대하여 물었을 때, 베드로가 합당한 고백을 하니까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陰府)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고 말씀 하셨다.

      그리고 승천하시기 직전에는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제자들에게 대한 예수님의 약속이었다.

      이 약속대로 예수께서는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어 주셨고, 성령께서는 제자들에게 권능을 받게 하여 예루살렘을 비롯해서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하셨고, 그 결과로 예루살렘과 이방 땅 여러 곳에 주님의 몸된 교회가 세워지게 하셨다. 이것이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께서 하신 또 하나의 일이었다.

      이에 관하여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말하기를, 예수께서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교회에 받은 바 은사 따라 직분을 세우신 이유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2)"고 했다. 그리고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신데 온 몸이 서로 상합(相合)해서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세운다고 했다.

      (엡4:15-16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예수께서 성령을 통하여 주신 은사들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시는 데 사용하시기 위해 교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다.



      Ⅴ. 은사의 구분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성령을 통하여 은혜의 선물로 주신 은사들은 몇 가지로 구분이 된다. 먼저는 일시적(一時的)인 은사이고, 다음은 지속적(持續的)인 은사이며, 그 다음은 영원적인 은사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원전 작정하신 섭리 따라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시고, 그 계시된 진리 위에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시고 영원한 천국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에서 그 때마다 필요한 은사들을 성령을 통하여 주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 같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은사이지만 용도에 따라서 구분이 가능하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대부분의 교사들이 성령의 은사를 아무런 구분 없이 이해하고 받아들여 가르치고 주장해 왔기 때문에 신앙에 많은 혼란을 일으켜 온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대한 정확한 성경적인 정립(定立)은 은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결정적인 작용을 하게 될 것이다.

      먼저는,
      일시적인 은사이다

      일시적인 은사는 성령께서 어떤 특정한 기간에만 필요로 해서 주신 것으로 그 기간이 지나면 폐해 버리시는 은사를 말한다.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이후, 오순절에 보내신 성령을 통하여 지상에서 사역하게 하시는 기간 중에 특정한 기간이 있다. 그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 중의 하나인 신약계시시대라고 말한다. 이 시대는 성령이 강림하신 이후부터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계시를 받아 요한계시록으로 신약계시 기록을 끝마칠 때까지를 말하는 것이다.

         앞 장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예수님 당시에는 제자들이 진리에 대하여 미숙한 상태에 있었으나 성령강림 이후에는 보혜사 성령의 인도를 따라 진리를 온전히 깨닫고 기록을 한 것이 신약성경이다. 이 성경 이외에 일점일획(一点一劃)이라도 더하거나 덜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한 계시가 주어진 것이다.

         성령께서 신약계시를 기록하게 하신 계시시대에는 복음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은사로서 방언, 예언, 지식 등과 같은 일시적 은사를 주셨다.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실 때에 베드로가 방언으로 각국에서 온 유대인들에게 복음의 내용을 전했다.

      (행2:1-13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에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놀라 동하여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담니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즉 복음의 비밀을 말하게 하신 것이다.

      (고전14: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예언의 은사 역시 복음의 내용을 깨닫도록 하기 위하여 주신 은사이다.

      (고전14:6, 24-25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마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

      지식의 은사는 복음진리의 기초지식으로서 복음을 깨닫게 하는 도구로서의 은사이다.

      (고전14:6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즉 복음진리를 깨닫도록 인도해 주는 구약적 지식의 은사를 말한다.

      (히10: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이상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방언과 예언과 지식 등의 은사들은 신약계시 기록이 완성된 이후에는 다 폐해진 일시적인 은사들이다.


         이에 관하여 사도 바울은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 13:8∼10)"고 했다.
      즉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방언이나 예언, 그리고 지식의 은사가 폐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온전한 것이 올 때"를 예수 재림하실 때라고 해서 지금도 방언이나 예언의 은사들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올 때"는 완전한 계시가 주어질 때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계시가 주어지는 시대(사도시대, 주후100여년까지)에는 방언이나 예언, 그리고 지식 등의 은사를 통하여 부분적인 신약계시가 주어졌으나 완전한 신약계시가 주어진 후에는 이들 은사들은 모두 폐해진 것이다. 따라서 이들 은사들은 모두가 일시적인 은사들이다.


      다음은 지속적인 은사이다

      지속적(持續的)인 은사는 성령께서 신약계시가 완성된 후에도 교회를 세워 견고히 자라게 하기 위하여 과거는 물론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 예수 재림때까지 지속적으로 주시는 은사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부터 예수 재림시까지를 교회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대에는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께서 지상 교회에게 지속적인 은사를 주어 교회를 자라게 하고 견고히 하여 유익하게 하신다.

      (고전12:7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와 같은 지속적인 은사는 신약계시 기록을 위한 일시적인 은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은사들이다. 즉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침, 능력 등의 은사들인데

      (고전12:8-10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성령께서 이같은 은사들을 주어 교회에 목사나 교사, 복음 전하는 자, 능력을 행하는 자, 병 고치는 자, 봉사자, 다스리는 자 등을 세워

      (엡4: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고전12: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교회를 자라게 하신다. 이 외에도 사도나 선지자 직임이 더 있으나 이들 직임들은 사도시대 즉 신약계시 시대에만 국한된 일시적인 직임들이다. 따라서 현재 교회에는 사도나 선지자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속적인 은사라고 해서 성령께서 신약교회 성도 모두에게 분별 없이 주시는 것은 아니다. 성령께서 필요에 따라 교회 중의 몇을 세워 직임을 감당하게 하시려고 그들에게만 주시는 것이다.

      (고전12:28-30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따라서, 지속적인 은사는 교회가 세워지고 자라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 이들 은사들은 모두가 성령을 따라 주어지는데 서로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지혜의 말씀은 지식의 말씀을 가능하게 하고, 지혜와 지식의 말씀은 믿음을 가능하게 하며, 지혜와 지식의 말씀에 의한 믿음은 병 고침과 능력 행함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므로 모든 은사 중에 가장 머리되는 은사는 지혜의 말씀인 것이다. 은사 중에 '지혜의 말씀'은 하늘로서 오신 참 지혜

      (고전1:24-25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2:6-7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즉 복음진리에 대한 말씀을 뜻하며 진리의 영이 오셔서 진리를 알게 하고 깨닫게 하는 말씀을 통하여 배워서 아는 말씀을 말한다. 따라서 지혜의 말씀 없이 지식의 말씀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이 따로 분리될 수 있는 성질의 은사가 아니다.

      이러한 말씀의 은사 없이는 믿음의 은사 역시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말씀의 은사와 믿음의 은사가 서로 나누어질 수 없다. 말씀을 통하여 깨달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 된

      (엡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성숙된 믿음 없이는 병 고침과 능력 등의 은사 역시 불가능하며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교회를 세우기 위한 지속적인 은사들은 모두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의 분량 따라 역사하게 하시려고 성령께서 선물로 주신 것이다.

      (엡4:15-16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리라)

      그 다음은 영원적인 은사이다

      영원적인 은사는 현세 즉 교회시대에는 물론, 예수 재림 후 영원한 천국에 가서까지 영원토록 주어지는 은사를 말한다. 이 은사는 모든 은사들의 처음이며 나중이고 또한 가장 큰 은사이며 제일 좋은 은사이다.

      (고전13:8-13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페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페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페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소망,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이 은사는 곧 사랑인데, 이 은사를 기초하지 아니한 모든 은사들의 사역은 모두가 무가치한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고전13:1-3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그 이유는 모든 은사들의 사역 목적이 사랑의 은사를 실현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은사들은 사랑을 따라 구해야 한다.

      (고전14:1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바울은 사랑의 은사에 대하여 강조하면서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4∼7)"고 했다. 이같은 사랑은 교회가 세워지고 자라는 데 있어서 반드시 있어야 할 요소이다.

         사랑의 은사는 지상교회에서는 완전하게 실현될 수는 없다. 다만 교회의 성숙 과정의 농도에 따라 비례적(比例的)으로 실현이 되는 것이다. 사랑의 은사가 완전하게 실현이 되는 곳은 바로 영원한 천국이다.
      천국은 사랑의 은사가 영원토록 실현되는 곳이다. 지상의 교회는 사랑의 은사가 완전하게 실현되는 목표를 향해 점진적(漸進的)으로 성숙되어져 가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방언이나 예언의 은사로 혼란을 빚고 있는 고린도 교회를 향해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12:31)"고 말했고,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전13:13∼14:1)"고 한 것이다.

          성령께서 교회에게 주시는 사랑의 은사는 일시적이나, 지속적인 모든 은사들의 목적이 되는 은사이며, 가장 크고 제일이 되는 영원적인 은사이다.

         결국 성령의 은사는 신약계시를 완성하기 위해서 주신 일시적인 은사와 교회를 세우기 위한 지속적인 은사, 그리고 영원한 천국에서까지 영속되는 영원적인 은사로 구분이 된다. 이들 은사들은 서로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주어진 직임따라 사역을 하게 된다. 일시적인 은사는 신약계시를 완성해 놓은 후 폐하게 되고, 지속적인 은사는 완성된 계시진리 토대 위에 교회를 세워 자라게 한 다음 폐하게 되며, 영원적인 사랑의 은사는 자라난 교회가 천국으로 인도된 후에 영속적으로 실현이 되는 은사이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고전13:8) 

       


        
       

       

      <십자가의 전달자>

       

      난 지극히 작은 자 죄인 중에 괴수

      무익한 날 부르셔서

      간절한 기대와 소망 부끄럽지 않게

      십자가 전케 하셨네

       

      어디든지 가리라 주 위해서라면

      나는 전하리 그 십자가 내 몸에 벤 십자가

      그 보혈의 향기

      온 세상 채울 때까지

       

      살아도 주를 위해 죽어도주를 위해

      사나 죽으나 난 주의 것

      십자가의 능력 십자가의 소망

      내 안에 주만 사시는 것

       

      난 지극히 작은 자 죄인 중에 괴수

      무익한 날 부르셔서

      간절한 기대와 소망 부끄럽지 않게

      십자가 전케 하셨네



      고린도의 시대적 배경과 고린도 교회의 문제


      고린도는 그리스 중남부의 펠로폰네시스 반도에 위치하며 아테네에서 서쪽으로 약 80km 떨어져 있습니다.
      기원전 3천년 전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어요. 지금은 인구 3만명의 시골이지만 로마 시대에는 인구 60만
      명의 부와 방탕의 도시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고린도와 코린토스는 같은 말이예요.


      그리스 반도와 대륙을 연결하는 지협 남단에 잇으며 겐그리아 항구와 로마의레기온 항구를 연결하고 지중해의 동서를 연결하는 묘한 지형으로 상업과 물 질적인 변영을 누린 도시요 잡다한 인종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어 동서 문화 와 종교의 혼잡을 이루었다. 고린도의 종교중에 여사 프로디트라는 우상이 있어 600피트나 되는 산상에 무녀가 무려 1,000명이나 있고 이로 인하여 고린도인들은 음탕한 풍습에 젖어 고린도라하면 음행한 사람의 대명사가 되었다.

      (1) 바울이 2년을 선교하여 교회를 설림(행 18:1-8).

      (2) 교인 전체의 수가 상당히 많은 것으로 예상된다(고전 1:26).

      (3) 바울의 동역자 그리스보 (행 18:8)가이로 에라스도(롬 16:23)스데바나 (고전 1:16)등으리 거주지다.



      바울이 처음으로 이방인들에게 선교를 시작한 곳이다.> 현재 고린도라고 하는 시는 신 고린도로 1858년과 1928년의 대지진 후에 세워진 곳으로 아테네에서 서남쪽으로 80 Km 되는 거리에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전도했던 고린도는 그리스에서 가장 활발한 상업 중심지로 국제적인 도시였다. 고린도는 천혜의 지리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었는데 즉 서쪽에는 이오니아 해와 이탈리아로 향하는 레카이온 항구를 품고 있었고 동쪽으로는 아테네를 바라보면서 에게 해로 나갈 수 있는 겐그레아 항구를 품고 있었다. 아카 지방의 수도였던 고린도는 번창한 항구 도시 였으나 심한 빈부의 차이와 퇴폐적인 윤리 생활로 악명이 높은 곳이기도 했다. 사도 바울은 제 3차 전도 여행 중 에베소에 3년동안 머물면서 고린도전서를 집필했고, 57년 경 그리이스 북부 마케도니아에서 후서를 써 보냈다.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 내용은 교우들이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어 그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고 사목적인 대답을 해 주기 위해 쓰여졌다. 

      이 서간에서 다룬 문제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고린도 신자들 중에는 의붓 어머니와 동거하는 사람이 있는데도 이를 방관만 하고 있었고 (고린도전서 5:1-13), 어떤 교우는 자유를 구실 삼아 창녀와 관계를 맺었고 (고린도전서 6:12-20), 또 성행위라고 하면 무조건 죄악시 하는 극단적인 사람이 있었다. (고린도 전서 7:1-10).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결혼, 이혼, 독신 등 성윤리를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다. 그 외에도 교우들 간에 분쟁이 생겼을 때, 이교도 법정에 가서 소송하는 문제 (고린도전서 6:1-11),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는 문제 (고린도전서 8:1-11), 성찬의 전례시 부자들은 그들이 가져온 음식을 배불리 먹고 가난한 사람들은 굶은 사례도 있었기에 올바른 성찬례를 가르쳐 주고 (고린도전서 11:17-34), 그 외에도 교회의 질서를 파괴하고 (고린도전서 14장), 부활 신앙을 부인하는 (고린도전서 15:12) 사례를 그리스도 부활의 근거로 삼아 주장하며 가르쳤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신자들간의 분쟁과 파벌 의식 이엇다. 신자들 간에는 바울파, 아폴로파, 그리스도파 등이 조성 되었다. 이러한 파벌 의식이 만연되었다는 교회의 소식을 듣고 바울은 이 서간에서 그들이 전해 듣고 받아들인 복음을 상기 시키면서 교회 공동체가 무엇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역설하였다. 

      둘째 편지인 고린도후서는 첫째 편지를 발송한 다음에 고린도에 거짓 선교사들이 와서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부인하였다. 사태가 다급함을 인식한 바울은 직접 고린도 교회를 찾아 갔지만 이미 대부분의 신자들이 바울을 반대하는 자들에게 동조하여 그를 맞아 주지 않았다. 



      바울은 비통한 마음을 안고 에베소에 돌아와 '번민과 비통한 마음을 안고 울면서' 매우 격앙된 어조로 편지를 썼는데 이것이 고린도 교회로 보낸 '눈물의 편지'이다. (고린도후서 2:4). 바울은 디도를 고린도로 보내어 이 눈물의 서간을 보내고 그 사이에 마케도니아로 건너가서 지도가 돌아 오기만을 기다렸다. 마침내 디도를 만나 고린도 신자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사도에게 순종하고 모든 적들을 엄하게 다스리겠다는 약속을 들었다. 이에 대한 바울의 답신으로 나온 편지가 고린도후서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이 고린도후서는 사도직에 대한 편지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사도직의 본질과 역활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나 겸허한 태도로 자신의 약함 안에서 힘차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높이 기리고 있다.

      $$ 

      고린도전서(1Corinthia) 0|고린도전서(1Corinthia)



      1. 배경

      고린도는 아가야 지방의 수도로서 지리적 위치로 보아 상당히 중요한 지점에 놓여 있다.헬라 본토에서 페로폰네소스반도로 나가는 바로 길목에 있어서 육로와 수로로 상업상 교통이 빈번한 곳이다. 

      고린도에는 잡다한 인종이 모여 살고 있었기 때문에 각 곳에서 모여온 우상도 많았고 생활은 사치 하였으며 윤리적으로는 방탕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이러한 곳에 바울은 전도하여 교회를 세웠다.바울은 글로에의 집안 식구들이 고린도에 다녀와서 전도하는 말을 통해서 고린도 교회가 가지고 있는 파당의 문제 계모와 같이 사는 부 도덕한 생활 문제, 또 신자들 끼리 관청에 소송하는 문제등에 있어서 고린도 교회의 영적 생활과 전도 사업을 위협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또한 고린도 교회에서도 그 교회에 발전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 바울의 의견을 묻는 편지도 보내왔던 것같다.그러므로 바울은 이 여러 문제에 대하여 실제적인 해답과 교훈을 주기로 하고 이 편지를 썼다.바울은 3차 여행을 하는 중에 에베소에 머물러 있으면서(고전16:8), 57년 이 편지를 썼다 신약 성서에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로 한 서신이 둘 밖에 없다.그러나 실상은 적어도 네번은 하였으리라는 사서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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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행전(08 / 08 / 2022 - 09-08-2022) 제1차 온라인 두 이레 특별 새벽기도회(08. 29 - 09. 06)


      독일 사람들은 상점에서 물건을 살 때 “이 물건 얼마나 오래 쓰나요?”
      일본 사람들은 “이거 신제품인가요?”
      한국 사람들은 “이거 진짠가요?”

      얼마나 ‘가짜’에 속고 살았으면, 이렇게 ‘진짜’인지를 묻는 것이 생활화가 되었겠는가?
      그러다보니 기름도 참, 진짜, 순, 100%, 원조 등의 말이 붙어야 조금 안심이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물건을 살 때만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묻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세상 사람들은 주일날 성경책을 옆에 끼고 교회를 향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도 마음속으로 이런 질문을 묻고 있는 것 같다.
      ‘당신 진짜요?’

      ▲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의 <만들어진 신>. ⓒ 김영사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의 <만들어진 신>(영어 원제 The God Delusion)이다.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 또는 <눈먼 시계공> 등으로 잘 알려진, 세계적인 진화생물학자다.
      그런데 7,000권만 팔려도 대박이라는 작은 한국 인문학 출판 시장에서, 이 책은 2007년 7월 중순에 출간된 지 한 달 만에 4만 권 이상이 팔려나갔고, 그해 연말 40만 권을 훌쩍 넘어섰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이후 인문학 도서 분야에서 최대의 돌풍이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의 돈지갑을 흔쾌히 열게 한 이 두껍고 비싼 책의 맨 첫 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인용되어 있다.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이상이라고 한다.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 한다.”

      저자는 가수 존 레넌(John Lennon)의 노랫말을 인용하면서 독자들에게 한번 ‘종교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라’고 권유한다.
      그러면 자살 폭파범, 9·11도, 아프가니스탄전쟁과 이라크 전쟁도, 십자군도, 마녀사냥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갈등도, 또한 보스니아 인종청소도 없었을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우리에게 과감히 종교를 버리고 “행복하고 도덕적이며 지적인 무신론자가 되라”고 주문한다.

      '기독교 전도자 퇴치법 10계명'이란 우스개가 유포되는 사회

      왜 한국인들은 이 책에 열광하는가?
      요즘 우리사회에 ‘안티 기독교’ 현상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안티 기독교 인터넷 사이트는 너무 많아 일일이 언급하기도 힘들 정도인데, 반기독교 정서의 조직화 및 운동화 수위가 심상치 않다.
      아마 22세기의 한국 역사학자는 21세기 초 한국문화의 가장 대표적인 현상으로 안티 기독교를 꼽을지 모르겠다.

      이화대학교에서는 비기독교인 학생들 사이에 '기독교 전도자 퇴치법 10계명'이라는 우스개가 널리 유포되고 있다.

      제1계명은 ‘절대 혼자 식당에서 밥 먹지 않기’
      왜냐하면 학생들의 약 15분 동안의 평균 식사 시간 동안에 최소한 5명 정도의 전도자를 만나기 때문이다.

      제2계명은 누가 다가와 ‘교회 나가시느냐’고 물으면 ‘네~’ 하고 말꼬리 내리지 말고 ‘넵’하고 단호하게 말하기

      제3계명은 또 누군가 다가와 ‘나와 같이 성경공부 해보지 않겠냐’고 물으면 ‘아니오~’ 하고 말꼬리 내리지 말고 ‘아니욥’ 하고 확실하게 거절하기 등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사도행전 2장에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 초대 교회의 모습이 잘 소개되어 있다.
      이때는 베드로가 입을 열어 설교하면 하루에 3,000명씩 세례를 받고 크리스천이 되던 때였다.
      그 이유가 44절에서 47절에 소상히 설명되어 있다.

      “믿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필요한대로 나누어 가지며,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또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으며,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느니라.”

      성도들의 본이 되는 생활과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열정이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고” 그 결과 구원 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다”는 말을 표준새번역 성서는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 ‘호감’이라는 말에 주목해보자.

      일반인들을 상대로 한 종교 호감도 조사가 있었다.
      1970년대에 조사에서 종교 이미지 선호도는 개신교가 1위, 불교가 2위, 가톨릭이 3위였다.
      그런데 2000년도에는 순위가 바뀌어 가톨릭이 1위, 불교는 그대로 2위, 개신교는 3위로 떨어졌다.
      개신교에 대한 비호감도가 증가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호감도의 변화는 실제 신도 수의 변화로도 이어졌다.
      2005년 통계청이 발표한 우리나라 인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그 전 10년간 우리나라 3대 종교 중에서 천주교 신자는 74.4%, 불교 신자는 3.9%가 증가한 반면, 개신교 신자만 1.6% 감소했다.
      성장가도를 달리던 한국 개신교의 신도 수가 줄었다는 충격적인 발표였다.

      그때 매우 신기했던 일은 그 -1.6% 성장률을 실제 사람 수로 환산하면 ‘14만 4,000’명이 된다는 통계였다.
      우연치고는 너무도 상징적인 숫자가 아닌가?
      잘 알다시피, 14만 4,000은 요한계시록 7장과 14장에 나오는 말세 때의 공중 휴거 숫자다.
      그렇다면 이번 한국 개신교인 숫자의 감소는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에 보내신 가히 ‘종말론적’ 메시지라고도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나님의 교회인가 아무개 목사의 교회인가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설득당하는 데 말이나 논리가 차지하는 비율은 5%에 불과하다고 한다.
      60% 이상은 첫인상의 호감도가 좌우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아무리 논리적으로 말을 잘해도 첫인상에 왠지 호감이 가지 않으면 사람들의 3분의 2는 이미 마음의 문을 닫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개신교의 이미지가 갈수록 비호감이 되다보니, 아무리 담대히 길거리에 서서 복음을 외쳐도 사람들은 좀처럼 마음의 문을 열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예수는 좋은데, 기독교는 싫소.”

      왜 이렇게 한국 개신교회의 대사회적 이미지가 땅에 떨어졌는가?
      무엇이 그 원인인가?
      말하기 힘들고 또 듣기 힘든 고언(苦言)이지만 참회하는 심정으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돌아보고자 한다.
      뼈를 깎는 자기 성찰이 없이 우리는 생명의 길로 나아갈 수 없고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의 도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여러 자료를 종합해보니 한국 개신교회의 이미지가 악화된 가장 큰 원인은 일부 교회의 세습 문제로 나타난다.
      성공한 제1세대 목회자들의 일부가 자기 자식들에게 교회를 기업처럼 물려주었다.
      사회적 질타를 맞자 맞바꿔 물려주었다.
      자기 교회는 친구 목사 아들에게, 친구 목사 교회는 자기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사람들은 그런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로 보지 않는다.
      아무개 목사의 교회로 생각한다.

      * 여기서 한 가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세습(世習)이란 단어가 어떻게 한국교회에 나타나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습(世習)이란 한자의 훈은 "인간 세(世)" "엄습할 습(習)" 입니다.
      그 의미는 "재산, 신분, 직업 등을 한집안에서 자손 대대로 물려받음" 이라고 사전에서 정의합니다.
      그런데 '세습'이란 용어가 2005년 북한에서 한국교회를 무너트리기 위하여 선동 용어로 지시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현재 북한에서 간첩을 남파하기 위한 공작 책임자로 있던 '김국성"씨가 탈북 후 한국에 들어와서 밝혀낸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한국교회를 부흥 성장시켰던 1세 목회자들이 모두 은퇴하면 그 다음 세대 중에서 과거의 한국 역사와 고난의 시기를 알지 못하는 사람을 내세우면 교회가 반드시 무너질 것이라는 정치적 책략에 의해서 북한의 지령에 따른 것이라고 합니다.

      교회의 전통은 "세습"이 아니라 "승계(承繼)" 라고 해야 합니다.
      승계란 이을 승, 이을 계라는 훈으로 "선임자나 선대의 업적, 유산, 전통 따위를 뒤이어 물려받음." 또는 "다른 사람의 권리나 의무를 뒤이어 물려받음."을 의미합니다.

      잘 알다시피, 가톨릭교회에서는 사제들의 결혼을 금하고 있다.
      하지만 이상성 박사의 말대로 사제들의 결혼금지는 11세기까지만 해도 권장 사항에 불과했다.
      그런데 교회가 세속을 능가하는 절대 권력을 갖게 되자, 가톨릭교회는 교권의 세습을 막기 위해 사제들의 독신을 의무화했다는 것이다. 이제 한국 개신교회의 세습을 막기 위한 마지막 방법은 신학생들도 독신을 서원해야 안수를 주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

      교회의 물질적 세속화

      교회가 대형화되었고 기업이 되었으며 부자가 되었다.
      그러면서 세속화 되었다.
      기독교인들은 교회에 나가면 부자도 되고 성공한다고 믿고 나가는지 몰라도, 사람들은 물질과 하나님을 동시에 잘 섬길 수 있다고 설교하는 교회로부터 아무런 영적 신비도 느끼지 못한다.
      이 세상의 시류와 정확히 일치하는 교회의 메시지에서 아무런 희망과 위안을 얻지 못한다.

      가짜 박사의 절반이 목사님들

      도덕성의 위기

      몇 년 전 신정아 사건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필자는 당시 신 씨가 조사를 받기 위해 불려 다니던 서부지방검찰청사 근처에 살고 있기 때문에 수많은 TV 방송차량이 포진한 그 건물 앞을 지나다니며 당시 국민적 관심사와 분노가 얼마나 높았는지를 잘 기억하고 있다.

      그때 핵심적인 문제는 바로 신 씨의 예일대 박사학위 위조였다.
      서부지검 앞을 지나다니면서 부끄러워 머리를 숙이고 다녔다.
      한국에 가짜 미국박사 학위 소지자가 968명이 있는데(정말 믿기지 않지만) 이들의 45%가 신학박사라고 한다.

      이 나라 가짜 박사의 절반이 목사님들인 것이다.
      가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목사님들에게 왜 그랬냐고 물으면, ‘교인들의 학력이 높아져서 어쩔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하지만 599불에 석사학위증을, 799불에 박사학위증을 사 오신 목사님이 단상 위에서 ‘정직하게 살라’고 설교하면 과연 어느 교인이 그 말씀대로 살려하겠는가?

      잘못된 단기 선교

      몇 년 전 여름 서울의 한 유명 교회가 전 세계 27개국 53개 도시로 무려 103개나 되는 단기 선교팀을 보내 ‘땅 밟기’ 선교라는 것을 한 적이 있다.
      얼마 전에는 봉은사 땅 밟기가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된 적도 있다.
      땅만 밟고 와도 그 땅에 선교가 된다는 이야기인데, 예수님도 하지 못한 일을 하겠다는 이 기괴한 발상의 선교에 필자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만다.

      기피1호 신부감이 ‘교회 다니는 여성’인 이유

      한국 개신교의 오만함이 이제는 하늘을 찌르는 것에 경악하고 만다.
      한국교회에 선교사를 파송했던 미국 교회의 여러 선교대회에 참석하면서 선교가 무엇인지에 관해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두 단어가 있다.

      선교란?

      첫째, Life-long commitment
      둘째, Equal partnership

      첫째로 ‘뼈를 묻는’ 평생 헌신이다.

      지금도 지하철 2호선 합정역 근처의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지에 가보면, 거기에는 우리보다 이 땅을 더 사랑한, ‘조선 사람을 더 나은 조선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 헌신하다 이 땅에 뼈를 묻은 많은 분들이 누워있다.

      둘째로 ‘평등한 동반자 관계’

      선교란 문화적·경제적·복음적으로 우위인 자가 앞서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현지인과 함께 겸손히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땅 밟기 선교라니 이런 발상이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가.

      이화대학 학생들을 면담해보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공격적으로 펼쳐지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의 전도 앞에 상처 입지 않은 학생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인가. 최근 발표된 한 결혼정보회사의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신랑 후보들의 기피1호 신부감이 ‘교회 다니는 여성’이라고 나왔다 하지 않는가.
      그들이 뽑은 두 이유가 재미있다.
      ‘왠지 배타적일 것 같아서’
      ‘왠지 생활비를 헌금으로 빼돌릴 것 같아서’ 라고 한다.

      ‘밥 퍼주는 시인’ 최일도 목사의 일화가 생각난다.
      속칭 청량리 588 굴다리 밑에서 노숙자와 행려자들에게 밥 먹이기 운동을 시작한 그가 그 일을 시작하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힌 적이 있다.

      하루는 경기도 부천에 있는 한 신학대학교에 강연 초대를 받아 전철 1호선 타고 가던 중이었다.
      자리가 없어 서서 가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날 과로를 한 탓에 하염없이 졸음이 쏟아졌다고 한다.
      그래서 전철이 흔들리는 대로 함께 흔들리며 한참을 졸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옆구리를 콱 찌르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깨보니 이마가 약간 벗겨지고 아주 깐깐하게 생긴 초로의 아저씨 한 사람이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한 무서운 눈초리로 자신을 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더니 느닷없이 ‘예수 믿어!’ 하고 소리치는 것이었다.
      엉겁결에 최 목사는 ‘나 목사인데요’ 라고 말도 못하고 ‘저, 믿고 있는 데요’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그 아저씨는 또 한참을 노려보더니 이렇게 또 한마디를 콱 내뱉고 옆 칸으로 가더라는 것이다.
      ‘졸지 말고 바로 믿어!’
      그때 최 목사는 너무 창피해서 자신이 목사라는 사실도 잊고 달리는 전철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때 그는 거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결심을 했다고 한다.
      ‘나 다시는 저렇게 입으로 예수를 증거 하지 않으리라!
      나 다시는 저렇게 자신의 확신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으리라!’

      한국 개신교가 비호감이 된 가장 큰 원인의 하나는 ‘종교가 생활화되지 못하고 생활이 종교화 되지 못한 것’

      한 다른 여론조사에 의하면, 일반국민들이 기독교에 대해 좋지 않는 느낌을 가지는 이유 중 1위는 “교인들이 진실성이 없어 보이기 때문”(34%)이고, 2위는 “교인들이 이기적이기 때문”(11.8%)이며, 3위는 “타종교에 배타적이기 때문”(10.7%)이다.

      1920년대에 농촌계몽운동을 펼치던 김활란 박사는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혹자(或者)는 종교란 모든 실생활과의 관계를 떠나 자기 혼자 어떤 신비한 경험을 하고 일요일에 예배당 가는 것으로만 알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고리대금업이나 다른 방식으로 착취를 하다가도 주일에 양심에 아무 저촉도 없이 예배를 드린다. 그 원인은 종교생활이 실제화 되지 못하고 실생활이 종교화 되지 못한 까닭이다.”

      종교가 생활이 되지 못하고 생활이 종교가 되지 못하니까 (달리 말하면 ‘예수 믿기’와 ‘예수 살기’가 하나가 되지 못하니까) 요즘 사람들은 기독교인을 이렇게 정의한다.

      “기독교인이란 누군가. 그들은 토요일까지 한 일을 일요일에 회개하고 월요일부터 다시 하려는 사람들이다.”

      일주일에 하루라도 회개하는 것이 일주일에 단 한 번도 회개하지 않는 것보다 더 나은 삶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의 회개가 진정한 회개라면 우리는 우리가 회개한 일을 다음날 또 반복하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크리스천들의 신앙의 ‘진정성’(authenticity)이 의심을 받기에, 사람들은 교회에 등을 돌린다.

      어느 도시에 목회를 잘 하는 목사님이 있었다.
      맨 땅에 개척해서 열심히 목회를 하니 교회가 크게 부흥했다.
      그런데 그만 과로로 병에 걸리고 말았다.
      콩팥 두개를 다 떼어내고 다른 사람의 것을 이식받아야 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평소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사랑의 실천을 강조했으니 교인들 중 누가 콩팥 하나 떼어주지 않을까 싶어 주일 설교 시간에 상황을 설명하고 콩팥을 떼어줄 사람 손을 들어달라고 부탁했다.
      처음에는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맨 앞줄에 앉아 있던 수석 장로님부터 조심조심 손을 들더니 급기야 예배당을 가득 메운 3,000명의 교인이 다 손을 들더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목회를 잘못하진 않았어!’ 목사님은 마음이 흡족해졌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3,000개의 콩팥이 다 필요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목사님은 이렇게 제안했다.
      자기가 머리카락 하나를 뽑아서 공중에 날릴 것이니 모두가 ‘주여 삼창’을 하고 통성으로 기도하는 동안 그 머리카락이 자기의 머리 위에 떨어지는 사람이 콩팥을 기증하자는 제안이었다.
      그래서 모두가 눈을 감고 열심히 통성으로 목사님의 건강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몇 시간이 지나도 그 머리카락은 공중에 둥둥 떠다니기만 할 뿐 아무에게도 떨어지지 않는 것이 아닌가.
      너무도 이상해서 자세히 보니 교인들 모두가 이렇게 기도하더란다.
      (머리카락이 가까이 오면 입으로 바람을 불며) “주~여” “아~멘” “믿~습니다.”

      은퇴하신 박종순 목사님의 설교에서 기억하고 있던 예화다.
      요한계시록 3장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신구교를 포함해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된 지 200년이 넘었다.
      기독교가 조선에 들어왔을 때, 기독교는 당시의 사회를 개혁하고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위계적이고 가부장적인 유교적 가치관에 의해 철저히 소외되어 살아가던 이들에게 (특히 여성들에게) 기독교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 받았고 또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있는 자격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가히 혁명적인 평등사상을 소개함으로써 급속히 전파되어 나갔다.
      특히 가난하고, 힘없고, 천대받던 사람들에게 급속히 퍼져나갔다.

      물론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사상은 양반과 남성을 세상의 중심으로 믿어온 조선의 유교 체제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도전이었다. 하지만 같은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던 미천한 사람들에게 그것은 글자그대로 ‘복음’(福音)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한국 기독교는 선교 초기의 이와 같은 변혁적이고 인습타파적인 특성들을 점차 잃기 시작했다. 한 종교가 소종파적 형태를 지니고 있을 때는 평등적이고 변혁적이며 예언자적 특성을 지니다가도, 그 소종파가 점차 조직화되고 제도화되어 한 사회에 무리 없는 안착을 시도할 때가 되면 초기의 특성들을 포기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점점 강한 현상유지적 성향을 가지게 되고, 변화를 위한 어떠한 시도도 위험시 하게 된다.

      성차별의 보루가 된 한국 교회

      한국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언제부턴가 한국 교회는 성차별의 보루가 되었다.(한 교회여성단체가 교회 안에서 여성들이 담당하고 있는 일에 대한 설문조사를 벌인 적이 있는데, 설문자 1,000명 중 51%가 청소 및 음식 만들기, 7.3%가 행사 준비라고 응답했다. 이것은 오늘날 한국 교회 여성의 약 60%가 집안일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을 교회에서 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이 여성들이 교회에서 ‘가장 하고 싶은 일’이라는 항목에서 청소 및 음식 만들기를 택한 사람은 겨우 0.3%에 불과했다.) 언제부턴가 한국 개신교회는 지극히 배타적 신앙 행태를 강화해 왔고, 일부 대형 교회 목회자들은 도덕적 타락과 권력 사유화의 길을 걸었으며, 개 교회들은 수평 이동을 통한 교회 성장을 추구하면서 교인들을 뺏고 빼앗기는 소모적인 경쟁에 몰두해 왔다. 그렇게 교회는 점점 자신의 원래의 모습에서 멀어져 갔고, 교회의 성장이 곧 복음 선포라는 환상 속에 살다가 급기야 성장 자체의 위기까지 맞이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는 더 이상 소수 종교가 아니다. 한국 기독교는 다수 종교이며 주류 종교다. 이제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더 이상 ‘위험한’(risky) 일이 아니다. 초대교인들과 달리 오늘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신변에 아무 위협도 느끼지 않고 서슴없이 ‘예수는 나의 주’라 말할 수 있다. 이제 교회 나가는 것은 하나도 부끄러운 일이 아닐 뿐더러, 오히려 사회생활에 보탬과 이득이 된다. 기독교는 더 이상 이 나라에서 ‘좁은 문’이 아니라 가장 넓고 평탄한 길이 되었다. 그러면서 신앙은 서서히 ‘일상적인’(routine) 일이 되어 갔다. 판에 박힌 일과가 되어 갔다. 그리고 마치 중년의 부부들에게 권태기라는 것이 찾아오듯이, 첫 신앙의 감동도 사라져갔다. 그러면서 우리 모두는 제도교회의 안락함과 기득권 속에 거하게 되었다.

      예수는 따르지 않는 3가지 완벽한 신학적 알리바이

      실로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의 삶은 예수의 삶을 닮지 않았다.
      교회는 종종 ‘예수 닮지 않은 그리스도’를 예배한다.
      신학 강단에서 가르쳐지는 기독론(基督論)은 종종 예수를 따르지 않기 위한 교묘한 신학적 알리바이로 둔갑한다.
      한인철 교수는 한국 교회가 예수는 잘 믿어도 예수는 따르지 않는 3가지 완벽한 신학적 알리바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 적이 있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를 따를 수 없다’
      왜냐하면 감히 신이신 예수를 따르는 일은 인간에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를 따를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가 이미 우리를 위해 모든 죄를 다 짊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를 절대 따라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를 따라 무엇을 하려는 것은 ‘오직 은총’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교묘한 3불(三不) 원칙이다.

      참으로 철저하게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라”(롬 15:1-6)는 사도 바울의 권면의 말씀도 부정되고 있다.

      문제의 뿌리는 종교개혁 신학 안에 잉태해 있고 그에 대한 우리의 불철저한 사유(思惟)와 전유(專有)에 있다. 우리는 “sola fide”를 이유로 행함을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우리는 “sola gratia”를 이유로 이웃에 대한 책무로부터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발부한다. 그리고 우리는 “sola scriptura”를 이유로 자연을 하나님 계시의 통로에서 배제해버렸으며 그 결과 자연을 자기 맘대로 착취하게 되었다. 문제의 뿌리는 우리가 물려받은 신학적 유산 안에 있고, 그것을 근원적으로 성찰하지 못한 신학자들과 신학 교육 안에 자리 잡고 있다.

      결코 싸고 편리한 이름이 아닌 ‘크리스천’

      필자 자신부터 참회해야 한다. 그 결과 오늘 우리는 한국 교회 안에서 하나님나라라는 자신의 중심적 메시지로부터 ‘이혼’ 당한 슬픈 예수를 본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떨어져 나간 예수의 빈자리는 언제나 정치적 권력, 문화적 우월감, 종교적 완고함, 기존질서에의 순응, 그리고 도피적 구원관이 메워왔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의 위기를 운운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성경책을 옆에 끼고 교회를 향하는 우리들을 향해 길거리의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던졌던 바로 그 질문, 즉 ‘당신 진짜요?’를 우리 스스로에게 정직하게 물어보아야 한다. 우리는 진짜 크리스천인가? 우리의 믿음은 진정성이 있는가? 우리는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는 참된 크리스천인가?

      미국 남북전쟁 때 ‘프레드릭스버그 대전투’라는 유명한 싸움이 있었다. 육탄전까지 치르고 수많은 부상자들을 중간에 남겨 놓을 채 쌍방은 후퇴하여 대치하고 있었다. 이 때 북군 병사 하나가 물통을 들고 달려 나갔다. 남군에서 사격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병사가 목숨을 걸고 남군과 북군 가리지 않고 부상자들에게 물을 마시게 하는 광경을 보고 사격은 중단되었다. 이를 계기로 쌍방은 한 시간 동안 휴전을 하기로 하고 서로 부상자 처리를 하게 되었다. 이때 남군 장교가 이 북군 병사에게 다가가 묻는다. “What is your name?” 그러자 그가 대답한다. “My name is Christian.”

      그때 그는 자기 부모가 지어준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그때 그는 총탄에 맞아 죽을 지도 모르는 사지 한복판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향해 뛰어나가게 만든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이렇게 그에게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은 결코 싸고 편리한 이름이 아니었다. 그에게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은 이렇게 목숨을 건 이름이었다. 전 존재를 건 이름이었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의 이미지가 땅에 떨어진 이유는 혹 이런 ‘진짜’ 크리스천의 수가 적어서는 아니겠는가?


      찐빵집 경영철학을 본받자

      "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골로새서3:23)
      '안흥찐빵'집 주인 심순녀씨(55)는 강원도 횡성에서 30년간 전통적인 방식으로 찐빵을
      만들어 오고 있다. 심씨는 우연히 길거리 호떡장수에게 호떡 만드는 방법을 배워 장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심씨의 찐빵집은 전국에서 단골손님의 발길이 끓이지 않는 지역의 명소가 되었다. 심씨가 찐빵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남다른 비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비법은 남들이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하면서도 차별화된 맛과 전통음식을 팔면서 지역 연고 판매에 만족하지 않고 최신 물류시스템과 택배서비스를 접목시켜 전국을 상대로 영업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비법은 찐빵 하나 하나에 들어있는 심씨의 '정성'이었다.
      최근 매출 1조 7천억원이 넘는 대기업 LG의 부회장 권문구씨는 이러한 안흥찐빵론을 직원들에게 강의했다. 작은 장사에서도 대기업이 배울 수 있는 많은 경영 기법이 숨어있다는 얘기다. 권부회장은 안흥찐빵집이 처음 장사를 시작할 때 호떡장사로부터 호떡 만드는 법을 배워 찐빵에 원용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일종의 '벤치마킹'이었다는 것. 그러나 권부회장이 특별히 강조한 것은 역시 '정성'이었다. 세계적인 LG전선에서 아직 불량품이 나오는 것은 정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결국 안흥찐빵의 '정성'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09-08-2022(목) 

      신이라(사도행전 28:6)  

      유라굴로 광풍으로 알렉산드리아 호는 파선되었고 승선했던 276명은 모두 "멜리데" 라는 섬에 상륙할 수 있었습니다.
      마침 멜리데 섬의 원주민들은 풍랑이 일어났던 바다에서 구사일생 살아남은 사람들을 정중하게 맞이하여 옷을 말리고 몸을 따뜻하게 할 수 있는 모닥불을 피워 주었습니다.

      바울은 이때 불이 계속 타오르도록 땔감을 넣고 있었습니다.
      그때 나뭇가지에 숨어 있던 독사가 바울을 물었습니다.
      섬의 원주민들은 이 사람이 거센 풍랑에서는 살아남았으나 결국은 독사에 물려 죽는구나!
      아마 말못할 중한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며 바울이 죽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독사를 모닥불에 떨어트리고 태연하게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바울을 지켜보던 원주민들은 " 이 사람은 신이구나!" 하고 감탄합니다.
       
      바울이 뱀의 독성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던 것은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를 지켜주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일행들과 함께 그 섬에서 석 달을 머물면서 멜리데 사람들에게 큰 유익을 주었습니다.
      비록 죄수의 몸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계속 역사하셔서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었을 때 안수하여 그를 낫게 했습니다.
      또한 멜리데 섬의 많은 병자들을 치유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고 다음 항해에 필요한 것들을 대접받을 수 있었습니다.

      로마에서 바울은 그를 지키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있도록 허락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비록 군사의 감시를 받았지만 개인적인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며 형제들이 자기를 위해 마련해 준 편안한 숙소에서 지낼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먼저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몇 가지 요청을 합니다. 
      그는 유대인이나 유대의 관습에 해를 입히지 않았습니다.
      유대에 있는 로마 권력자들은 바울이 무죄임을 인정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자기를 공정하게 판단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마지못해 가이사에게 호소하였습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그는 자기 민족인 이스라엘을 송사하려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다만 무죄 방면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가 지도자들을 부른 우선적인 목적은 이스라엘의 소망에 관해 함께 이야기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바울의 말을 들고 유대 지도자들은 우리가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너에 대한 이야기도 들은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공연한 일에 끼어들어 황제의 분노를 사거나 백성의 원망을 듣게 될까봐 이렇게 대답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바울과 유대교 지도자들의 두번째 만남에서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증거했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를 믿게 하려고 했습니다.
      어떤 유대인들은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지도자들이 복음에 순종치 않음을 보고 이사야의 말을 적용해서 최종적으로 두려운 선언을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택함받은 민족이고 누구보다도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지만 영의 눈이 어둡고 귀가 어두워 예수님을 배척하여 이 귀한 은혜가 이방인에게 넘겨지게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사도행전은 바울이 로마에 도착한 후 이 년 동안 아무런 방해 없이 복음을 전파했다는 기사로 끝맺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행전의 성령의 역사는 끝나지 않고 오늘날까지 계속되어짐을 의미합니다.

      로마로 온 이유(16-20절)

      보디올에서 일주일을 머물렀다가 출발한 바울 일행은 마침내 제국의 심장 로마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거기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전해주며 사도행전의 막이 내려옵니다.

      16.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에게는 자기를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당시 로마 시민으로 황제에게 상소한 미결수는 로마에 도착하면 황제의 근위대장에게 인수인계되어 황제근위대 감옥에 감금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근위대장은 바울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고, 감옥 밖에, 가택연금의 형태로 따로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습니다.
      황제의 근위대장은 황제의 명령을 철저하게 준수하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왜 바울에게 이렇게 관대하게 대해주었는지 그 이유는 알 길이 없지만, 하나님의 신비한 손길이 역사하셨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바울은 감옥 밖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복음도 전하고,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할 수 있었습니다.
      30절에서 증거하듯이, 이때부터 바울은 2년 동안 자기 ‘셋집’에 머물렀습니다.
      ‘셋집’은 돈을 주고 빌린 공간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이지, 실제로 공간적으로는 ‘싸구려 헛간’ 같은 곳이었습니다.

      17a.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로마에 도착한 바울은 가택연금 상태에서 가장 먼저 초대한 사람은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얼핏 표면적으로 생각하면, ‘높은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함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그리스도인들을 먼저 초대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당시 로마는 로마제국에서 가장 큰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로마에는 처음 왔기 때문에 로마에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이 가택연금을 당할 셋집을 얻었다는 것은 누군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그리스도인이 도와주었고, 그들이 곁에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흘이 지나서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초대했던 것이었습니다.
      왜 자신이 로마까지 오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려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죄수의 신분인 바울이 일일이 높은 사람들을 찾아다닐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17b-19. 그들이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관습을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준 바 되었으니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석방하려 하였으나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 못하여 가이사에게 상소함이요 내 민족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사도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은 바울을 배교자로 여겨 어떻게 해서든지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2년에 걸쳐서 벨릭스 총독과 베스도 총독에게 거짓된 내용으로 바울을 고발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 중에서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동맹한 사람이 40여 명이나 있었습니다.
      그만큼 유대인들은 바울에게 적대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 시민의 자격으로 황제에게 상소했습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이 황제에게 상소한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기 전에, 로마에 있는 유대교 공동체에 바울을 모함하는 편지를 보냈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의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왜 자신이 왜 황제에게 상소했는지 그 이유를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 상소는 바울이 자기 민족, 유대인을 고발하기 위함이 결코 아니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0.  이러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으니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바울이 싸구려 헛간 같은 셋집에 가택연금 상태로 구금되어 있었다고 해서, 그 안에서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본문에 ‘쇠사슬’은 ‘쇠사슬에 매인 것과 같은 억압된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쇠사슬_chain’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황제의 근위대장이 바울에게 감옥 밖에서 살 수 있도록 배려해주면서도, 미결수인 바울이 도망칠 수는 없도록 쇠사슬로 묶어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감옥 밖에서 머무는 미결수에게는 그 미결수의 한쪽 팔과 그 미결수를 지키는 군인의 한쪽 팔을 쇠사슬로 연결해 두곤 했습니다. 도망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왜 쇠사슬에 매여 있는지에 대해 해명하는데, 그것은 자신이 로마법을 어겼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인함이라고 합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오랫동안 간절히 기다려온 그 소망, 메시아의 오심에 대한 소망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복음에 대한 반응(21-29절)
      그에 대한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의 반응이 이러하였습니다.

      21.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전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

      바울의 변론을 들은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바울에 관한 편지를 받은 적도 없고, 누가 와서 바울에 대해 험담한 사람도 없었다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정말 바울을 전폭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에 한 말은 아니라 다소 사탕발림이었습니다.

      22.  이에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니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알기 때문이라 하더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즉 그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는 지금과 같은 정보가 빨리 오가던 때가 아니니까?
      누군가가 그들에게 바울에 대한 부정적인 정보를 전해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을 무작정 배척하지는 않았고,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들어 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만날 날짜를 정했습니다.

      23.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약속한 날짜가 이르자, 바울을 처음 방문했던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만이 아니라,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관심이 있는 유대인들까지, 많은 사람이 바울이 가택 연금되어 있는 싸구려 헛간 같은 셋집에 모였습니다.

      본문의 ‘강론하다’는 ‘자세히 설명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은 ‘구약성경’을 일컫는 표현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찾아온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면서,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가 바로 나사렛 예수님이심을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자신을 찾아온 유대인들에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즉 ‘하루 종일’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강론했습니다. 특히 ‘아침’이라는 말은 ‘새벽’ 또는 ‘동트는 시각’을 뜻하는 말입니다.
      즉 유대인들은 바울과 약속한 날이 밝자마자 바울을 찾아왔던 것이었습니다.
      그 이른 아침부터 해가 저물어 앞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바울은 지금 인생 말년에 접어들었고, 지병에도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팔에는 쇠사슬도 있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는 것은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을 위해서, 주님 안에서 그들을 살리기 위해, 바울이 자신의 생명을 던진 것과도 같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이러하였습니다.
      24.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동일한 공간에서 동일한 사람으로부터 동일한 복음을 들었음에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성경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앙 경험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와 동일한 마을에 있는 교회에서 동일한 목회자로부터 동일한 복음을 들으며 신앙생활 했음에도, 우리는 지금 주님 앞에 있지만, 지금 주님과 등지고 있는 사람도 참 많지 않습니까?
      오직 주님의 은혜라는 말 외에는 설명이 불가합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그 말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아니하는 사람으로 나뉘었습니다.
      그때 바울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25-28.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이르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

      이 말씀은 이사야 6:9-10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듣는 것뿐만 아니라 삶으로 들으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영원히 구원해 주시려 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선민을 자처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아예 귀로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이방인은 이스라엘 백성과는 달리,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들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거부함으로, 그 말씀이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게 되었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참 신비하고도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연금 생활 2년 요약(30-31절)
      28장으로 구성된 사도행전은 이렇게 막이 내리고 있습니다.
      30-31.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바울은 싸구려 헛간 같은 셋집에 2년 동안 연금되어 있었는데, 찾아오는 사람을 다 영접했다고 합니다.
      ‘영접하다’는 동사가 미완료형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사람들이 계속해서 찾아왔고, 바울을 계속해서 그들을 영접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찾아온 사람들에게 전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주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사도행전은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입니까?”라고 질문하면서 사도행전의 막이 올라갔습니다.
      물론 이때 제자들이 꿈꾸었던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달랐습니다.
      하지만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임하신 후에, 제자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의 막이 내리면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의 주인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다고 증거합니다.
      즉 사도행전의 주제, 우리 그리스도인이 꿈꾸고 살아야 할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이 온전히 임하는 곳입니다.
      즉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사도행전의 주역입니다.

      사도행전은 사도인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님을 기다리며 기도했고, 마침내 성령님께서 임하신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사도들은 자신들이 한 번도 배우지 않았던 언어로 말하게 되었고, 또 복음을 전했을 때, 그 말씀을 듣고 믿게 된 사람들이 3,000명, 5,000명이나 되었다고 증거합니다.
      그러면 마지막에는 대단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습니다.
      로마제국이 복음화가 되었다든지, 사도들이 다 대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든지로 마침표를 찍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순교를 당했고, 바울도 가택 연금된 것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어가셨고, 지금까지 이어오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이 세상의 나라나 세속적인 가치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이며, 영원한 가치관을 추구해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영원한 가치관을 추구하는 사람이 하나님이 힘이 되심을 삶으로 증명하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은 변질의 인생이 아니라 변화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삶이 각자의 사도행전으로 엮어지기를 소망하고,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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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와 숭어의 대한 우화

      게에게는 늘 옆으로만 걷는 자식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게의 부부가 그의 자식을 위하여 걱정하던 끝에 물고기 숭어네 집으로 아들을 보내서 바로 걷는 교육을 시키도록 결론을 얻고 보냈답니다.  
      아들 게는 숭어네 집에 가서 오랫동안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아들 게는 똑바로 걸을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교육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그러나 웬 일인지 아들 게는 집에 돌아오자 마자 다시 옛날처럼 다시 옆으로 걷는 거예요.
      게의 부모는 다시 아들 게를 숭어네 집에 보내 교육을 다시 받게 했다. 
      아들 게는 숭어네 집에 가자마자 다시 정상으로 잘 걷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기 집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옆으로 걷는 것이었다. 
      이에 속이상한 게의 부모가 아들 게에게 야단을 쳤다. 
      야단을 맞은 아들게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숭어네 부모는 바로 걷는데  엄마 아빠는 옆으로 걸으시니까 나까지 모로 걷게 되쟎아요?"

      여러분 !  그렇습니다. 
      윗 사람들이 본을 보이는 것이 최상의 교육이됩니다.

      09-07-2022(수) 

      그대로 되리라(사도행전 27:25)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Wherefore, sirs, be of good cheer: for I believe God, that it shall be even as it was told me.

      그대로 되리라
      (it will happen just as) NASB

      바울의 3차 전도여행은 사도행전 21장에서 끝이 났습니다. 
      22장에서는 가이사랴 빌립보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이후 사도행전 22장에서 26장은 2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던 바울이 복음에 대해, 자신에 대해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유대를 다스리던 로마의 관리들을 대상으로 변론하고 변호한 내용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27장에서 바울은 로마를 향해 출발하게 됩니다. 
      로마로 가는 것은 바울의 소원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바울의 열심은 유대와 사마리아와 소아시아를 넘어 이제 로마까지 향하기를 원했습니다. 

      사도행전 19장 21절
      에 보면 그의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이 일이라는 것은 에베소에서의 복음 사역을 말합니다. 
      바울은 3년 동안 에베소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로마를 향한 복음의 비전을 품게 됩니다. 
      로마를 향한 복음은 사실 바울만 말한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이미 말씀하셨던 부분입니다.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의 증인이 될 것이라는 말씀은 바울의 가슴에 새겨져 있었고, 그는 에베소 사역 가운데 그 비젼을 구체화시켰던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2년의 기다림 끝에 그는 로마를 향해 출발하게 됩니다.

      가이사랴를 출발한 배는 시돈, 구브로해안, 길리기아, 밤빌리아 바다, 무라시 등의 구체적인 위치와 항로를 가리키며 항해를 시작합니다. 
      누가가 바울과 함께 배를 타고 가지 않았다면 기록될 수 없는 꼼꼼함입니다. 
      중요한 것은 로마로 가는 길에 누가는 바울과 함께 있었다는 것입니다. 
      누가의 흔적은 28장 16절 “우리”라는 표현을 통해 마지막으로 등장하며, 그가 로마로 가는 길에 바울과 끝까지 함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7장 말씀을 묵상하면서, 복음을 향한 바울의 열심도 중요하지만, 누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함께 복음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위해 살아가기 위해서는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내 자존심도, 내 시간과 계획도, 내 물질도 포기해야 할 때가 분명히 찾아옵니다. 
      그러다가 14절의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 어려움에 처한 바울의 일행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을 위해 가지고 배에 올랐던 음식과 각종 도구들을 바다에 던지는 모습을 보면서, 마치 하나님께서도 동일하게 저에게 버려야 할 것이 있는지 물어보시는 것 같았습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함께 로마로 가도록 하시기 위해서 항해의 과정, 그리고 태풍을 만나 나 자신을 버리는 과정을 겪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로마의 가는 길은, 복음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과정은 쉽지 않습니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광풍이 우리를 덮쳐오기 때문이며, 수많은 삶의 짐들이 아직도 우리 내면의 배에는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 때마다 오늘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사도행전 27:24-25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로마로 가는 길에 누가만 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계셨음을 믿으십시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복음의 길을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에도 항상 함께 하십니다. 
      오늘 하루 로마로 향하는 복음의 여정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또한 가족과 이웃들과 함께 걸어가는 은혜가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항해의 첫 부분에서는 백부장, 선장, 선주가 행해를 지휘했다면,
      풍랑 속으로 들어가면서부터 풍랑의 중반까지는 풍랑이 항해를 지휘했고,
      항해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바울이 항해를 지휘했다.
      항해의 주역이 마지막에는 죄수인 바울에게로 옮겨간 셈이다.
      비록 바울은 그의 법적인 자유를 점차로 박탈당했지만, 그의 예언 속에서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의 주권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점차로 확대되어가고 있다.
      바울의 구금(拘禁)은 복음의 운반 기구(carrier) 역할을 하고 있다.

      결국 이 14일간의 풍랑은 선장과 선주 그리고 백부장이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도착지인 말타 섬으로 바울 일행을 인도했다.
      바다를 통하는 이 항해 여행은 어떤 의미를 보여주고 있는가?

      첫째, 1장 8절에서 주님이 알려주신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된다는 말씀의 성취
      둘째, 하나님의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셋째, 복음은 풍랑 속을 통과하며, 전도자는 풍랑 속에서 절대 절명의 훈련을 거쳐 사명을 재다짐 하는 기회를 맞는다.
      넷째, 하나님은 전도자의 여정 속에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셔서 구원을 이루어 가신다.
      이 예기치 못한 여정에서 하나님은 전도자를 사용하여 전도자가 계획하지 않았던 동승한 이방인들과 그리고 말타 섬 주민들의 구원을 위해서 역사하신다. 

       









       

       





      마침내 바울은 이달리야로 향하게 됩니다.
      바울이 가이사에게 호소하였기 때문에 바울은 군인들의 호송하에 로마로 보내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의사 누가와 아리스다고가 바울과 동행을 했습니다.
      이들의 항해는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그 배는 폭풍 이는 겨울 항해철이 접어들기 전에 이 취항지를 향해서 항해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흥미롭게도 바울은, 가이사랴를 떠나 첫 기항지인 시론에 도착했을 때 그 곳에 친구들을 만났고 또한 백부장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바울 일행은 지중해 동부에서 서부로 항해하는 데 바람을 거슬리며 항해를 했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소아시아의 남부 해안에 위치한 항구 도시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났습니다.
      이 배는 276명을 태울 만큼 큰 곡물 운반 선이었습니다.
      바울이 탄 이 두번째 배의 항로는 무라에서 출발하여 니로에 이른 다음 그레데의 남서 해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를 향한 바울은 우기로 행선하기가 위태로운 때라 이번 행선이 화물과 배뿐 아니라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을 것이라고 충고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겨울을 지내고 나서 항해를 시작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었습니다.

      스르디스는 그레데 섬 서쪽에 있는 얕은 바다로, 이 바다에는 유동하는 모래가 깔려 있어 줄로 선체를 둘러감고 연장을 내렸습니다.
      풍랑을 만난 사흘째는 배의 기구를 내어버렸습니다.
      이때 바울은 ‘안심하라 너희의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을 것이고 배만 상할 것이라’고 안심시켰습니다.
      바울은 비록 죄수의 몸이긴 했지만 위로자가 되어 줄 수 있었습니다.

      난파선에서의 바울은 용기를 내어 그들을 도왔습니다.
      그 용기의 근원을 하나님께 두었던 바울은 먼저 열 나흘 동안 불안과 공포에 떨며 아무것도 먹지 못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먹도록 권했습니다.
      바울은 구원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폭풍과 파도가 조금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또한 배가 깨어짐으로 인해 바울에게는 커다란 위기였지만 백부장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섭리하심으로 백부장은 바울 사도를 구하고 죄수들도 살해 당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27장 1절에 우리라고 표기된, 사도 바울과 누가는 이제 배편으로 로마로 향하게 되며, 백부장 율리오가 그들과 다른 죄수들의 호송 책임을 맡게 됩니다.

      아마도 의사였던 누가가 노쇠하고 병약한 바울의 곁에 필요했기에 누가가 동행했을 것입니다만 이 길고 어려운 항해의 길에 두 사람 외에도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게 되었음을 2절이 기록해 줍니다.
      감사하게도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고, 이후 몇 개의 항구를 거쳐 로마로 가기 위해 미항이라는 곳에 다다릅니다.

      그런데 그 때가 당시 9월이나 10월에 있는 금식하는 절기라고 표기된, 유대인의 속죄일이 이미 지나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백부장 율리오에게 권합니다.

      10절 말씀입니다.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 이미 여러 번의 파선 경험을 가진 바울은 당시 금식하는 절기가 지나 겨울이 다가오면 바람과 파도가 거세어 지고, 항해 가운데 큰 폭풍을 만날 수 있는 것을 알았기에 무리한 항해의 위태함을 알아 백부장에게 10절의 말씀으로 권한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백부장은 바울의 권고보다는 선장과 선주의 말에 더 귀를 기울입니다.
      11절입니다.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바울이 머물렀다가 겨울이 지나면 가는 것이 좋겠다고 권고한 항구는 겨울을 지내기에 비교적 작은 항구라 불편했고, 뵈닉스라는 그레데의 항구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고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기 때문에 백부장은 바울의 말을 귀담아 듣기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따라 결정을 내립니다.

      그리고 임박한 겨울에도 불구하고 남풍이 순하게 불어 순조로운 항해가 시작됩니다.
      이 배는 곡식을 가득 실은 이집트에서 로마까지 곡물을 운반하는 배로 추정되기에 제법 컸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도 이후 37절 말씀에 보면 276명이나 탄, 커다란 규모의 배입니다. 커다란 배가 순조로운 항해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유라굴로라고 하는 광풍이 크게 일어납니다.
      배의 크기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어마어마한 파도와 광풍으로 위기 가운데 처하고, 선원들은 배 곁이나 뒤에 매달던 거루라고 하는 작은 거룻배 형태의 구조선을 간신히 끌어 올립니다.
      그리고 풍랑에 깨져 버릴 것 같은 배를 밧줄로 감고, 스르디스라고 하는 모래톱에 걸려 좌초되는 것을 막기 위해 연장을 내리고 바람에 밀려 다닙니다.

      하지만 그 다음날이 되어도 풍랑은 잠잠해 지지 않아, 사공들은 이제 배의 짐을 바다에 던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까지 그들의 손으로 내버리기까지 합니다.
      그래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습니다.
      아니 더욱 악화되어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않고 큰 풍랑도 여전해, 구원의 남은 소망마저 없어져 기진맥진한 상황이 됩니다.
      여러 날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할 뿐 아니라, 풍랑에 따라 이리 저리 구르며 탈진하였기에 이제 아마 배에 탄 어느 누구도 살아 돌아갈 것이라는 기대조차 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바울이 사람들 가운데에 일어납니다.
      광풍 가운데, 한치 앞도 볼 수 없어 두려움과 불안 속에 사로잡혀 소망조차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바울은 안심과 소망의 말을 전합니다. 22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바울은 대체 무슨 근거로 자신이 반대했던 시기에 무리해서 항해를 진행한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얘기를 하며 위로와 소망을 전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바울이 낙관론자이거나 긍정적인 성품의 소유자이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 죽음의 풍랑 속에 바울은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며 독대하였습니다.
      그 풍랑 속에서도 자신과 함께 계시며 자신의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통해 위로와 믿음과 평안을 회복한 것입니다.

      23절부터 25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24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25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모두가 두려워하는 가운데 담대함을 소유한 삶은, 오직 예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과의 독대를 통해서만 우리는 오늘도 우리를 돌보시는 주님 앞에, 주님께서 허락하신 인생의 걸음을 주님과 함께 바르게 해석하며 걸을 수 있습니다. 허락하신 고난 속에 하나님을 깊이 만난 바울을 사용하셔서 하나님께서는, 고난 중의 사람들을 위로하시고 안심시키실 뿐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하셔서 죽을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운명까지도 변화시켜 주신 것입니다.

      인생의 풍랑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깊이 만날 기회를 허락해 주십니다. 두려움 가운데 믿음 없음을 책망하시며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신 예수님,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오셔서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평안을 주신 예수님과의 깊은 교제와 독대 속에 우리는 비로소 풍랑 속에서도 내 곁에 계신 주님을 만나고, 내가 해야 할 일을 깨달을 뿐 아니라, 다른 이들을 주님께로 이끌어 주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과 깊이 교제하시는 또 하루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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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06-2022(화) 

      나와 같이 되기를(사도행전 26:29) 자부심(自負心) 자존심(自尊心) 자긍심(自矜心)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여러분들의 자녀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너희도 나처럼만 살아보라!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부모가 과연 얼마나 될까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Follow my example, as I follow the example of Christ.)

      내가 먼저 예수님을 본 받는 삶에 성공해야 합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나를 본 받으라"고 깨우쳐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아그립바의 허락을 받은 바울은 손을 들어 예의를 표하고 자신이 회심하게 되는 과정을 설명했습니다.
      다메섹에서 만난 예수님은 사울에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시채는 뾰족한 쇠나 동물의 뼈가 박힌 채찍으로, 밭가는 소가 말을 듣지 않을 때 사용하는데 이때 소가 반항하며 뒷발질을 하면 더욱 채찍을 가하게 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대적하면 할수록 바울 자신이 더욱 고통을 당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신 이유는 바울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삼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박해에서 바울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했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생명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유지되었고 그래서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베스도는 바울의 변명에 대해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에게서 뚜렷한 죄를 찾지도 못하고 오히려 궁지에 몰리게 되자 베스도는 바울이 미쳤다고 선언하고 일단은 심문을 마치고자 한 것입니다.

      바울은 분명한 회심의 과정을 경험했기 때문에 나를 본 받으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회개는 좁은 의미라고 한다면 회심은 넓은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회개는 수시로 잘못을 깨닫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회심은 일생에서 단 한 번으로 돌이킨 후에 다시는 잘못된 길에 머물지 않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바울을 향한 권력자와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은 바울이 미친 사람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나는 오직 예수에게만 미친 사람이라고 당당하게 고백합니다.
      이제부터 예수에게만 미쳐봅시다.
      이제부터 예수님만 따라갑시다.
      절대 진리와 가치는 오직 예수님입니다.

      우리의 삶이 변화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9-12).

      지금 바울은 자신이 예수를 믿기 전에 어떤 사람인가를 이야기합니다.
      9-12절에 보면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10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 11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세와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 

      여기 사울은 예수 믿는 자,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 칙령을 받아들었습니다.
      그는 너무나도 이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약 230km, 그 당시 상당히 먼 거리인 예루살렘부터 다메섹까지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본문과 같은 9장 1절에 보면 ‘그가 칙령을 받으러 들어갈 때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위협과 살기의 마음이 등등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마음에 살기가 있었습니다. 미움이 있었고 분노가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여야 되겠다라는 미움이 그의 마음속에 가득 차 있었어요.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살기등등한 마음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향할 그 때에 예수님이 그에게 나타나셨다고 얘기합니다. "사울아, 사울아!" 이름을 부릅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죄 지은 아담을 부르셨던 하나님, 살인한 가인을 부르셨던 하나님,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 살기등등해서 찾아가는 사울을 부르셨던 하나님이 오늘 여러분을 부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목놓아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을 녹취한 책입니다. 우리를 포기할 수 없어서, 우리를 끝까지 그의 품에 안으시려는 하나님의 추적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구약시대에 한 선지자를 택하십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목사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얘야, 너 오늘 가서 저 창녀와 결혼하라!" "아니, 하나님, 제가 목사인데 창녀와 어떻게 결혼합니까?" "결혼하라!" 명령하셨습니다. 할 수없이 그가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그 창녀가 옛 버릇을 못 버리고 도망을 갔어요. 그렇게 사랑해 주었는데, 목사가 창녀를 데려왔는데... 하나님이 또 명령을 하십니다. "가서 돈을 주고 찾아 오라!" 포주에게 속했던 그를 다시 돈을 주고 찾아와 아내를 삼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런데 평생을 감사하며 그를 남편으로 모시고 살아야 할 터인데, 그 창녀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또 도망을 갑니다. 이번에는 이름도 모르는 한 남자와 동침을 해서 아들까지 낳아버렸습니다. 하나님이 그 목회자에게 찾아와서 다시 그 여자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으라고 하십니다. 너무나 괴로웠지만 하나님의 명령이라 할 수 없이 순종했습니다. "여보, 이제는 도망가지 마라! 내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당신을 이렇게 사랑했잖아! 내가 가진 재산을 다 버리고 당신도 누군지 모르는 아들을 내가 키우지 않소! 여보, 이제 나를 사랑하고 나를 믿음으로 내 평생 내 가슴에 상처를 입히지 말고 살아주오!" 애원했지만 얼마 세월이 지나지 않아 이 여자는 또 도망을 가버립니다. 

      그리고 다른 남자의 아기를 또 갖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이 그 목회자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가서 그 창녀를 데려오라고 명령하십니다. 이것이 상상이나 가는 일입니까? 오늘날 한번만 외도를 해도 이혼의 사유가 되어 이혼을 하겠거든, 몇 번씩이나 외간 남자의 아이를 가진 그 여자를 데리고 와 같이 살라니요? 아내로 같이 데리고 살라니요? 하나님이 도대체 어떻게 이런 명령을 내릴 수 있단 말입니까? 소설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역사, 성경에 기록된 호세아 선지자의 얘기입니다. 호세아서를 읽어보십시오. 하나님은 왜 이 잔혹한 일을 선지자 호세아에게 시켰습니까? 

      여기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사랑을 경험해야 한다는 것

      하나님의 사랑을 백성들에게 전달하기 전에 하나님의 심정을 호세아 선지자 스스로가 한번 겪어보라는 겁니다.
      네가 내 사랑을 안다고 설교하느냐?
      정말 네가 내 가슴을 알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이러한 여자와 한번 살아보아라!
      수없이 하나님을 떠나 도망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되풀이하시며 쫓아다니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려 보라는 겁니다.
      호세아가 이 메시지를 받고는 그의 삶이 달라졌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려는 것

      호세아를 위한 메시지가 아니라 오늘 바로 당신을 향한 메시지가 여기에 들어있는 겁니다.
      "얘야, 내가 너를 향한 사랑이 어느 정도인 줄 아니?
      네가 계속해서 내 곁을 도망가는구나!
      데려다 놓으면 또 죄를 짓고, 세상에 빠지고, 쾌락에 빠지고, 물질에 빠지고...
      그러나 나는 너를 한번도 포기한 적이 없단다!"

      우리를 사랑한다 말씀하시는 하나님,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당신의 사랑을 친히 보여 주셨던 하나님은 그것으로도 되지 않아서 마침내 그 사랑을 확증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찾아오셨습니다. 

      여러분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여러분은 과연 듣고 계십니까?
      오늘 왜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습니까?
      왜 그토록 신앙생활을 오래하고도 우리 마음에 변화가 없습니까?
      그 이유는 성경을 수없이 읽으면서도 이 애타는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을 우리가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음성을 듣는 자는 복이 있을 줄 믿습니다.

      오늘 이 음성을 들으십시오.
      사울을 찾으셨던 하나님이 오늘 당신을 찾으십니다.
      여러분의 있는 자리가 어디입니까? 

      오늘 이 말씀을 듣는 가운데 내 머리 속의 하나님이 아닌, 성경 속에 기록된 제3의 하나님이 아닌, 나의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 모두가 듣기를 바랍니다.
      자신을 올바로 바라보아야합니다.
      예수 믿는데 가장 방해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왜 사람들이 예수를 못 믿는가?
      또 예수를 믿고 나서도 왜 신앙생활을 잘하지 않는가?
      신앙생활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입니다.
      이 세상 살면서 신앙생활 하는데 가장 원수가 자신입니다. 

      모든 판단의 주인이 자신이었어요.
      자신의 견해로 볼 때 예수님은 가짜였습니다.
      그러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사람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스데반을 과감하게 죽였어요.
      양심의 가책도 없이... 그리고 이것도 모자라서 예수 믿는 사람, 저 230km 밖에 있는 사람까지 전부 잡아다가 감옥에 넣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불교신자라도 이렇게 못하잖아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안 믿는 사람이 아니라 유대교 신자였습니다. 

      그는 구약성경,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이렇게 악하게 행동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유는, 그가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실제로 자신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자신을 믿는 사람이 오늘날 교회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주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판단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미워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에게 말의 상처를 입힙니다. 

      인류역사에서 가장 잔혹한 전쟁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십자군 전쟁입니다.
      임신한 부인의 배를 갈랐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실상은 자신을 믿고 있었던 겁니다.
      사울 역시 자신의 의를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는 것입니다. 

      때가 정오라고 얘기합니다.
      낮이 얼마나 밝습니까?
      태양이 얼마나 밝은가요?
      그러나 놀랍게도 그날 이 태양보다도 몇 십 배, 몇 백 배 더 환한 빛이 사울에게 쏟아졌습니다.
      홀연히 쏟아졌습니다.
      그 빛을 받은 사울이 도저히 견딜 수없어 그 자리에서 시력을 잃어버리고 땅에 고꾸라집니다.
      그리고 사울이 가장 먼저 한 말이 무엇인가 하면 "주여! 뉘시오니까?" 옛날에 예수가 나타났으면 이렇게 물었을 겁니다. 

      "너, 누구냐?" 그러나 오늘 사도 바울은 이렇게 부릅니다. "주여!" 사도 바울이 그를 구세주로는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만 하나의 존경의 표시였겠지요. 무한한 힘을 바라보고 자기를 부르는 그 위대한 분을 향해 "주여! 뉘시오니까?"라고 대답합니다. 훗날 이 사건을 돌이켜보며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에서 자신을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라고 일컬었습니다. 나는 율법적으로 흠이 없고, 도덕적으로 예수 믿는 너희보다 낫다. 이만하면 내가 너희를 정죄할 자격이 있다라고 생각했던 사울, 그래서 살기가 등등했던 사울, 그러나 그는 오늘 이 다메섹에서 비로소 자신을 바라보았습니다. 

      왜 사람들이 교만한 줄 아십니까? 자신을 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왜 함부로 남을 정죄하는지 아십니까? 자신을 못 봐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못 보는 이유는 하나인데,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나도 저 멀찌감치서 만났어요. 여기에 아무리 환한 빛이 있어도 100미터 정도 떨어져서 반짝거리는 불빛 아래 깜깜한 밤에 옷을 보십시오. 

      아무런 티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밝은 빛에 오면 올수록 깨끗해 보이던 옷과 얼굴이 더러워져 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를 보는 것입니다. 오늘 사울은 자신을 보았습니다.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이었던가, 내가 얼마나 교만해서 내 지식에 미쳐서 살았던가, 그래서 함부로 판단하여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정죄하며 살았던가를 그는 보았던 것입니다. 

      그 후, 날마다 날마다 간증하기를 "죄인 중에 내가 죄수니라." 남은 인생을 그는 이렇게 간증하며 살았습니다. 변화되기 원하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당신을 바라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성도 여러분! 나를 보십시다. 나를 보십시다. 정말 하나님 앞에서 나를 돌아보면 허물이 나에게만 있고 남에게 있지 않습니다. 남편에게 있지 않고, 아내에게 있지 않고, 자녀와 부모에게 있지 않습니다. 모든 허물이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부르신 그 부름 앞에 일관되게 복음의 간증자로 살아갑니다.

      바울은 행 13장에서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 이방인 선교에 나선 후 순교할 때까지 약 20년 동안 선교여행에 헌신했습니다. 1차 전도 여행 때 약 2년 여 갈라디아 지역 2240키로나 되는 먼 거리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2차 전도 여행 때는 약 3년 여 기간 동안 약 5000키로의 먼 거리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3차 전도 여행 때는 약 6년여 기간 동안 5000키로나 되는 먼 거리를 여행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다 로마로 가서 긴 투옥생활을 보내고 잠시 풀려났습니다. 

      그 후 서바나와 기타 여러 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다 다시 로마에서 체포되어 순교하게 되었습니다.바울은 이 여행 도중 자기가 겪었던 그 고초를 고후 12:23절 이하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헐벗었노라” 그야말로 바울은 예수를 위해 철저하게 헌신했던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가장 큰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뜻은 원칙적으로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유일한 뜻이요,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한 순간도 잊지 말아야 됩니다. 나는 이번 터치 153 새 생명 축제에 바울과 같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세상이 미쳤다해도 결코 위축됨이 없이 복음을 증거하는 은혜의 사람이 넘쳐나기를 기도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에 계실 때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미쳤다고 모함을 받을 만큼 '해산의 수고'를 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수많은 성도들도 지난 2000년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십시오. 도대체 누가 미친 것입니까? 영원한 생명을 발견하여 그 영생을 위해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투자한 사람이 미친 것입니까? 아니면, 잠깐 후면 사라져 버릴 명성을 위해 죽을지 살지도 모르면서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 채 10년도 가지 못하는 권력의 바람에 자신의 목숨을 다 걸어 놓고 사는 사람들, 자신의 목숨을 깍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술과 담배를 끊지 못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미친 것입니까? 

      사람은 어차피 무엇엔가 미쳐야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어디엔가 빠져들게끔 되어 있습니다. 흔히들 10대는 사랑에 미치고, 20대는 야망에 미치고 30대는 소유에 미치고, 40대는 정욕에 미치고, 50대는 늙음과 고독에 미치고, 60대는 명예와 죽음에 미친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에 미쳐 살아가십니까? 우리 주님께서 필요로 하는 사람, 오늘 교회와 이 시대가 진정 필요로 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게 똑바로 미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미칠 줄 아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저들의 뜨거운 정열, 불타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눈물과 감격과 열정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울 줄도 모르고 웃을 줄도 모르고 감격도 열정도 없는 고드름 같은 믿음 가지고는 어떠한 역사도 변화도 기적도 가져올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미치도록 사랑하지 않았다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드릴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치도록 사랑하지 않았다면 독생자를 날 위해 보내 주실 수 있었겠습니까? 오늘 우리 시대는 무감각의 질병으로 역사가 시들어 가고 교회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죄에 대해서도 무감각합니다.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도 무감각합니다. 신앙의 열정도 감격도 잃어버리고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들 때문에 오늘 이 시대가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 역시 예수님께 미치고 싶습니다. 완전히 미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처럼 온전한 사랑으로 모든 죽어 가는 사람들을 위해 해산의 수고를 해서라도 그들을 세우고 싶습니다. 사랑하고 싶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예수님의 사랑에 미쳐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에 취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세상을 복음으로 역사하는 성령의 계절을 가져오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복음은 기쁨을 줍니다. 이제 우리 교회는 사람을 세우기 위해 총 진력을 할 것입니다. 바울과 같이 영혼 구원에 대한 열정과 비전을 가지고 우리 모두 또 하나의 열매를 맺기 위해 충성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 14:15b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함이라.

      옳은 말을 기분 나쁘게 하는 사람 : 엄마, 선생님
      바울의 위대함 : 복음 전하는 일에  나를 본 받으라


      나와 같기를 원한다(29)

      자신을 변론하라 주어진 시간에 예수를 전하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지켜본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이 “네가 미쳤다”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도다.” 라고 혹평을 합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이 말에 굴하지 않고 “내가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당신들도 나와 같기를 원한다.”

      “나와 같기를 원한다”는 것은 “나를 본 받으라”는 권면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서도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그리스도인들은 어디를 가든지 “나와 같기를 원한다.”, “나를 본 받으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나를 본 받으라” 권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본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늘 은혜 충만, 감사 충만해야 하고, 또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문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본이 되는 삶을 살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본이 되는 삶을 살지 못하니 복음을 전해도 세상 사람들이 들으려 하지 않는 겁니다.

      한국 교회도 세상에 본이 되어야 하는데, 현실은 오히려 안 좋은 일에 본이 되고 있어서 부끄럽다 하는 것입니다.
      평상시 본이 되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만이 당당히 복음을 전하고 “나와 같기를 원한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대형 교회 50개를 선정한 후 1위부터 23위까지는 모두 한국에 있는 교회라고 합니다.
      선교 역사 130년 만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교회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분명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세계 적으로 본받을 만한 교회가 있느냐 라고 질문할 때 큰 것은 자랑할 수 있지만 본 받을 만한 것은 큰 것만큼 내세울 수 없다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큰 것과 더불어 내세 울 수 있는 신앙으로 회복해야 합니다.
      그와 같은 신앙을 "나를 본 받으라"는 외침이라고 하겠습니다.
       

      자부심(自負心)

      자부심(自負心) / 스스로 자, 질 부, 마음 심 - self-respect pride, self-esteem,

      - 모든 것을 가진 자

      고린도후서 6:9-10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골로새서 2:2-3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자존심(自尊心)

      자존심(自尊心) / 스스로 자, 높을 존, 마음 심 -  one's pride, self-respect, self-esteem

      -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로마서 1:16-17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자긍심(自矜心)

      자긍심(自矜心) / 스스로 자, 자랑할 긍, 마음 심 - self-pride
      눅 16:19-31
      - 불쌍히 여기는 심정

      누가복음 16:25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헬라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집이라고 는 나무통 하나가 있었는데 다닐 때는 통을 굴리면서 다니다가 적당한 데 세우고서 그 나무통 안에 들어가 하루 밤을 자고 또 아침이 되면 굴리고 다녔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헬라에서 유명한 철학자로서 알렉산더 대왕이 그를 만나기를 원하여 어느 날 만났습니다.
      대왕은 디오게네스에게 무슨 소원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디오게네스는 "특별한 소원은 없습니다만 굳이 말한다면 지금 내가 햇빛을 쪼이고 있는데 국왕이 앞을 가로막고 있어 방해가 되오니 조금만 옆으로 비켜주셨으면 합니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이 때 알렉산더 대왕이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만약 내가 알렉산더가 아니라면 디오게네스가 되었을 걸세." 만일 내가 왕이 아니라면 네가 되고 싶다라는 말입니다.

      자기 존재, 자기 가치, 자기 처지를 깊이 알고 아무 것도 부러워하지 않는 마음이 행복입니다.

      다윗 왕은 시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읊었습니다.
      원문에는 아무 소원도 없다라는 뜻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예수를 믿었다고 하지만 기도하는 것을 보면 소원이 너무 많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에게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 나는 아무 소원도 없습니다. 이대로 좋습니다. 이대로 만족합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입니까?
      다른 사람을 부러워한다는 것은 자기 불만의 발산입니다.
      시기와 질투는 자기 노력을 포기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로 자기 된 바에 대한 감사와 만족이 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행복입니다.
      이러한 행복의 절정을 살아가는 인생이 신앙인입니다.

      본문에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억울하게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오직 복음만을 전하는 바울에게 왜 이런 어려움이 있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헌신하고 사는 자에게는 만사형통 해야 하는데 왜 이런 고난이 있는 것입니까? 사도행전을 자세히 읽어보면 바울은 이상하게도 얽혀서 법정에 서게 됩니다. 로마 총독 앞에서 생사 문제를 놓고 바울은 일장 연설을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한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이 말을 다 들은 베스도 총독은 "바울아, 네가 미쳤구나. 네 많은 지식이 너를 미치게 했구나." 이렇게까지 비난을 했습니다.

      고난도 당하고, 환난도 당하고, 핍박당하고, 매맞고, 투옥되고, 억울함을 당하고, 마침내는 미친 사람으로 취급되는 이 순간에도 그는 행복했습니다. 그러므로 훌륭하고도 놀라운 신앙을 이 순간에 간증하고 있습니다. "나와 같게 되기를 원하노라." 즉 여기 모인 모든 사람이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만족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당한 고난의 뜻을 알고 있었으며 미래적 의미도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내가 매맞은 것은 하나님 앞에 가서 훈장으로 바뀔 것이고, 오늘 내가 능욕을 당한 것은 하나님 앞에 가서는 영광으로 바뀌어질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날에는 이 모든 것이 자랑스럽게 될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미래를 알고 있었기에 행복했고 만족한 수 있었던 것입니다. 특별히 그는 믿는 바에 대하여 확실하고 절대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에 보면 "내가 믿고 내가 전하는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있으면 천벌을 받으리라" 했습니다. 내가 믿는바 십자가의 도리가 너무나 확실했기에 한 치도 양보할 수 없었고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전혀 있을 수 없다고 자신만만하였습니다. 이런 믿음을 지녔기에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이 믿기를 원한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또한 그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소중히 여길 뿐만 아니라 최고의 지식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3장에 보면 지금까지 그가 좋아하던 지식과 명예와 족보를 다 분토와 같이 여겼다고 했습니다. 즉 그가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 지식이 너무나 고상하기에 그 동안에 얻은 많은 지식은 다 배설물과 같이 여겼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부러운 얘기입니까? 그는 복음에 대한 지식의 완전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생각할수록 잘했고 그 감격이 넘쳐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자기가 행하고 있는 이 일은 영원히 가치의 것이고, 언제 생각해도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우리 교우들 중에 어떤 분들은 녹음해 놓은 설교 테이프를 한꺼번에 10개씩 사가는 것을 봅니다. 내가 들은 말씀이 너무 좋아서 다른 사람에게 꼭 들려주고 싶고, 내가 받은 그 감동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 그 마음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내가 들은 것을 얼른 잊어버리고 싶은 마음과 한 번 비교해 보십시오. 내가 들은 귀한 복음의 말씀을 꼭 누군가에게 전해야 하겠다는 그 마음이 바로 행복입니다.

      나의 나 됨, 은혜로 된 나, 현재 이대로의 나를 감사하고 감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앞에 있는 생명의 면류관을 바라보니 무한히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영광과 긍지와 자랑에 살았습니다.

      미쳤다는 말을 들어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고린도후서 5:13에 보면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그렇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미쳐서 일생동안 많은 고난을 당했지만 기뻐하며 살아갔습니다. 새 술에 취하고 그리스도에 붙들린 포로가 되어 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것뿐 아니라 더욱더 적극적인 자세로서 "당신뿐만 아니라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이 다 나와 같기를 바랍니다." 즉 나처럼 믿고, 나처럼 알고, 나처럼 행하고, 내가 가는 길을 여러분도 가기를 간절히 소원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아무 것도 부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전도가 있고, 여기에 선교가 있습니다. 우리는 전도할 때 적극적인 면이 없습니다. 내가 나가는 교회에 자신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한 번만 같이 가보자고 권면할 수 없습니까? 다른 말이 필요 없습니다. 어떤 분은 전도하라고 하면 성경을 잘 몰라서 전하지를 못하니 우선 성경공부를 하고 전도하겠다고 합니다. 설교는 목사가 할 일이지 여러분의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교회까지 데리고만 오면 됩니다. 내가 받은 은혜에 감격해서 이 은혜를 다른 사람도 깨달았으면 하는 안타까운 마음, 그것으로 전도는 끝나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벅차고 넘쳐서 외국까지 좇아가는 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여러분, 내 자녀도 나 같기를 바라고 내 친구도 내 마음 같기를 바란다면 얼마나 행복합니까? "나는 참으로 행복했다"가 아니라 "지금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행복할 것이다"가 아니라 "지금 이대로 더 바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나를 본받으라", 즉 나를 닮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쇠사슬에 매인 것을 제외하고는 다 나와 같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참 지혜 있는 표현이었습니다. 나와 같기를 바란다는 자체는 만족이요, 행복이었습니다. 여기에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 고치지 못할 과거를 후회하고 뉘우치고 있습니까? 아니면 벅찬 감격과 내 생애 최고의 절정을 누리며 벅찬 은혜에 살아가고 있습니까? 좀더 나아가서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이 되기를 바라며 살고 있습니까? 은혜 안에서 나의 나 됨에 감사하고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전하고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는 누구인가?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와 벤자민 비. 워필드(benjamin b. warfield, 1851-1921)등과 더불어서 세계 3대 칼빈주의자로 불리우는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대표적인 신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가 작고한지 이미 80년이 지났지만 그의 신학적인 영향력은 자신의 모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적으로 아직도 강력하게 미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그의 신학적 대작인 『개혁 교의학(gereformede dogmatiek)』은 여전히 정통적인 개혁신학의 기념비적 작품으로서 그 신학적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국내에서도 바빙크의 저술들을 소개하려는 노력은 박윤선 박사차영배 교수 이래로 지금까지도 간헐적으로 지속되고 있다.

      바빙크의 신학과 한국 장로교회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우리는 교의신학 수업 시간이나 교재들을 통하여서 그의 이름을 너무나 많이 들었고 보았기 때문에 전혀 그의 이름이 낯설지가 않다(박형룡박사는 빠빙크라고 발음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도 빈번하게도 참조되고 있다면 그의 신학적인 비중은 남다를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1955년 2월 25일(금) 오후 늦은 시간에 당시 암스테르담 시내를 흐르는 운하중 하나인 꺼이저스흐라흐트 가에 위치하고 있던 자유대학교를 방문한 박형룡 박사는 이사회실에 걸려 있는 아브라함 카이퍼와 헤르만 바빙크의 화상(portrait)을 가장 유심히 보았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헤르만 바빙크의 사상적인 배경 

      1. 헤르만의 아버지는 1834년 화란 국교회(nhk)에서 분리(afscheideing)하여 생겨난 기독교 개혁교단(cgk)의 목회자였다. 
      바빙크의 부모는 정통적인 신학과 화란적인 경건주의 혹은 청교도 운동인 나더러 레포르마치(nadere reformatie)의영향을 공히 받은 인물들이었다. 

      2. 바빙크는 kampen에 소재한 교단 신학교에 진학하여 1년만 공부하고, 보다 더 폭넓은 신학 공부를 하고 싶어서 당시 자유주의 신학의 아성이던 레이든 신학부로 옮겨간다.
      네덜란드 근대주의의 아테네라고 할 수 있는 leidse school에서 스콜턴 교수의 지도하에 근대 신학의 진수를 배우게 된다.

      존 칼빈과 종교개혁 이후 개혁신학(post-reformation reformed theology)을 발전적으로 계승하고자 하는 바빙크의 노력과 자기 시대의 문화나 학문과 끊임없이 대화의 고삐를 늦추지 아니하는 바빙크의 열정은 이미 젊은 시절에 노출되고 있다.
      레이든 대학교 신학부에서 <츠빙글리의 윤리>라는 연구로 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다. 

      3. 학위를 취득한 바빙크는 당시 신설된 자유대학교 신학부 교수로 청빙을 받았지만 거절을 하고, 자신이 속한 개혁교단의 목회자로 안수받고, 화란 북쪽에 소재하고 개혁신학교가 한 때 소재했던유서 깊은 소도시 프라너꺼르(franeker)에서의 1년간의 짧은 목회를 하게 된다. 이 목회 동안에도 그는 독일 철학 연구등을 쉬지 않았다.

      4. 개혁교단 총회는 바빙크를 깜뻔에 소재한 개혁파 신학교(theologische school te kampen)의교의학 교수로 임명한다.
      그는1883년 1월에 <거룩한 신학의 학문>이라는 주제의 취임 연설을 함으로 교수직에 취임한다.
      바빙크는 카이퍼의 거듭되는 초빙에도 응하지 아니하고,1902년까지 이 작은 교단 신학교에서 교의신학 교수로 머물게 된다.
      약 20여년 동안의깜뻔 신학교 교수 재직 기간 동안에 바빙크는 열정적인 강의를 통해서 개혁교단 목회자들을 양성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 동안에 최고의 결실이라고 한다면 바로 그의 대작(magnus opus)인 [개혁 교의학(gereformeededogmatiek),4vols.(kampen: zalsman, 1896-1901)]의 집필과 출간이라고 할 것이다.
      아마도깜뻔이라고 하는 전원적인 소도시에서 소규모의 신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직에 머물지 아니하였다면 이와 같은 대작은산출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바빙크는 1906-11사이에 2판 개정판을 출간하게 되는데, 이것이결정판이 되었다.
      그와 신학을 달리하는 레이든의 신학교수 베르코프(1914-95)는 바빙크의 주저에 대하여서 이렇게 평가한다:"
      4권으로 된 개혁 교의학은 지금까지도 네덜란드어를 읽을 수 있는 신학자들에게 지식들과 통찰들을 제공하는 보고(eine fundgrube von kenntnissen und einsichten)로 남아있다"(h.berkhof,200 jahre theologie,120).

      5. 바빙크가 깜뻔에서 교수하고 있는 동안 카이퍼에 의해서 주도된 또 한 차례의 교회 분열과 분열된 교회들간의통합이 이루어졌다. 1834년에 일어난 분열(afscheiding,영어로는 secession)에 이어서 1886년에 카이퍼의 주도로 일어난 분열(doleantie)로 nederduitsgereformeerde kerken이 조직되었고, 1892년에 양 교단은 통합 교단을 만들고 [화란 개혁교회 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1892-2004)]라고 이름하였다.

      1901년에 아브라함 카이퍼가 네덜란드의 수상이 되면서 부득불 자유대학교 신학부의 교수직이 공석이 되고, 바빙크는 네 번째의 카이퍼의 초청을 수락하여 카이퍼의후임자가 되게 된다. 바빙크는 1902년에 자유대학교에 부임하여 1921년에 갑작스러이 서거하게 되기까지 약 20년간을 교의신학 교수로 사역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에 바빙크는 신학적인 저술들 뿐 만 아니라 교육학이나 심리학에 대한 많은 저술들을 하게 되며,상원의원으로서 정치적인 활동도 하게 된다. 

      1. j. h. landwehr, in memoriam prof. dr h. bavinck(kampen:kok,1921) 

      2. v. hepp, dr herman bavinck(amsterdam:ten have,1921) 

      3. r. h. bremmer, herman bavinck en zijn tijdgenoten(kampen:kok,1966) 

      4. 유해무,<헤르만 바빙크>(서울:살림사,2004)


      바빙크
      "나를 돕는 것은 나의 학문도 아니요 교리학 책들도 아니다. 오직 신앙만이 나를 구원한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가 제 정신임을 분명히 밝힌 다음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라고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에 아그립바는 궁지에 몰리자 바울의 말을 농담조로 받아넘겼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그립바를 그리스도께 인도하기에는 시간이 걸릴지라도, 기꺼이 그 기회를 붙잡으려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아그립바와 자기의 말을 듣는 모든 사람이 자기의 결박된 것 외에는 자기와 같이 되기를 기도한다고 대답함으로 변호를 끝맺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자랑스럽게 여겨 신분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누구나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라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서로 말하기를, 바울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죄가 없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새롭게 부임한 총독 베스도와 분봉왕 아그립바, 그리고 그의 누이 버니게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25장에 이어 26장에서도 계속해 나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26장에서는 바울 자신이 과거 유대교 믿던 때의 이야기를 하면서 10절과 11절에서

      10.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투표를 하였고 11.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

      자신이 얼마나 기독교인들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심하게 기독교인들을 박해하였는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다메섹으로 가던 가운데 그가 그렇게 핍박하던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게 됨을 고백합니다.
      바울의 인생에서 예수님과의 만남은 그의 일생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 이후 바울은 그가 남은 생애를 어떠한 일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분명히 알게 됩니다.

      17절과 18절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바울을 선택하신 것은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보내서 그들의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시기 위해 그를 만나주셨고, 그가 회심하도록 하셨다는 것을 바울은 깨달았고 그는 남은 인생을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 목적을 따라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소명에 대해 거스르지 않고 심지어 죽음의 위기 앞에서도 회개를 외치며 자신이 해야 할 복음 전파 사명을 최선을 다해 감당하였습니다. 때로는 돌에 맞아 죽을 뻔 하기도 하였고, 자신을 잡으려고 하는 사람들로부터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죄인으로 잡혀 로마로 압송되기 위해 기다리는 고립된 상황 가운데 처하게 되었지만 그는 어떤 상황에 처해있더라도 예수님을 만난 이후 한결같이 최선을 다해 22절과 23절의 말씀을 실천에 옮기며 살았습니다.

      22.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23.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선지자들과 모세가 장차 되어질 것이라고 이야기 한 것 바로 구약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예수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한 이것을 바울은 죽도록 충성하며 이루어 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열심에 대해 총독 베스도는 바울이 많은 학문을 공부하여서 미친 것 같다며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바울을 조롱하지만 바울은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담대히 예수그리스도가 고난당하신 것과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신 것에 대해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위축되기 보다는 아그립바 왕에게 그가 전한 복음의 메시지에 대한 믿음의 결단을 촉구하는 말을 담대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예수님을 만난이후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신 목적인 이스라엘 사람들과 이방인들을 향해 복음을 전하라는 소명에 따라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던 바울이었기에 그 자리에 있던 아그립바 왕, 베스도 총독과 버니게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자리를 떠나면서 바울은 사형이나 결박 당할만한 행위를 한 사람이 아니라고 이야기 하며 돌아갑니다. 그리고 아그립바 왕도 베스도 총독에게 만약 이 사람이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않았으면 석방도 가능했을 것이라 말하여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한때는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던 핍박자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예수그리스도를 친히 만난 이후 바울의 인생은 완전히 변하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자신의 열심과 유익을 위해 살던 바울이었지만 그가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만나게 되었을 때 그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는 예수그리스도를 확실히 만난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목숨까지도 내어 놓고 열심히 그 말씀을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복음 전파를 위해 그의 일생을 바친 모습은 비단 바울에게만 요구되는 모습은 아닙니다. 성경은 구약에서도 그리고 신약에서도 우리가 이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살아가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선교의 명령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누가복음 24장 44절~47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44.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모세의 율법, 선지자의 글, 그리고 시편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시고 3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며,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을 기록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내용을 요약하시면서 바로 그 내용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복음이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있는 사도행전 26장 22절과 23절은 바울이 그의 소명으로 여기며 일평생 동안 이스라엘 사람들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그의 삶을 잘 요약해 줌과 동시에 이 말씀은 신약 성경 역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는 선교에 관해 기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고백을 통해 복음 전파에 대한 바울의 열정은 총독과 분봉왕 앞에서도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비록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도, 생명의 위협을 당한다 하더라도 그는 복음을 끝까지 전했습니다.

      이러한 복음에 대한 열정을 지닌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열정을 가지고 아프리카로, 남미로, 공산권 국가로, 이슬람권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떠나는 많은 선교사님들이 계십니다.
      그리고 비록 선교지로 나가지는 않았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또한 바울처럼 그리고 많은 선교사님들처럼 날마다 우리의 삶을 통해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선교사적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흔히 “선교”는 말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통해 주로 이루어진다고 여겨 왔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선교”가 총체적으로 이루어지는 사역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로 전해지는 복음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서, 우리의 존재를 통해, 우리의 직장, 가정 학교 등의 장소에서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무언의 방법으로도 복음이 전해 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하루 살아가는 동안 내가 있는 삶의 현장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나의 말 한마디 나의 행동 하나로 그 사람이 예수그리스도를 알아가게 된다면 우리는 선교사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라면, 자기 앞에 도사리고 있는 결박과 환난도 자신의 생명을 걸고 감수할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지금 처하고 있는 상황이 자신을 사랑하시고, 자신에게 참 생명을 주신 성령님의 뜻이라고 해석하였기에 그가 감옥에 격리되어 있던 시간 가운데에도 그는 담대히 아그립바 왕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바울의 말 한마디와 그의 행동은 믿지 않는 영혼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바라기는 이 시간 우리 모든 주님의 자녀들이 우리가 처한 상황을 바르게 해석하며, 마셔야할 쓴잔을 주님 안에서 기꺼이 마시고, 져야할 십자가를 외면하지 않고 우리가 좋은 여건에 처해 있든지 아니면 격리된 상황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늘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의 말과 삶을 통해 전파할 수 있는 복음 전파자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노동절 휴일을 맞이하는 오늘
      이방인을 위한 복음의 증인으로 부름 받았던 바울이 어떤 환경에서든지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려는 굳센 믿음 본받아 저희들도 복음의 증인으로 나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건강한 삶’의 본보기를 아십니까
      의사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고대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는 생물학자이자 예방의학의시조로서 “돈을 잃으면 적게 잃은 것이요 명예를 잃으면 많이 잃은것이요 건강을 잃으면 전부
      잃어버린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성도들이 주안에서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 건강의 비결입니다. 예방의학이란 병들기 전 예방한다는 것입니다. 전염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 예방주사를 맞듯이 병을 예방하고 건강을 지키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동물과 다른 영적 정신적 도덕적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인 정신의학자 폴 토르니에는 ‘건강을 해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첫째 남을 미워하는 마음과 증오심이 건강을 해치는 원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증오심으로 남을 미워하는 순간 오히려 자신이 큰 타격을 받아 질병에 걸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범죄하여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을 때라고 말했습니다.‘우리 몸속에는 기본적인 인간의 평화와 반대로 죄성 독성 악성이 존재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을 미워하는 순간 기본적인 즐거움과 기쁨을 악에게 도둑맞아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기본적인 평화와 기쁨을 도둑맞지 않고 보존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길 외에는 묘약이 없다는 것 입니다. 건강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자 노력하는 성도에게만 주어지는 최고의 선물인 것입니다.
      둘째로 주안에서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인간은 치료에 있어서 하나님의 동역자로 선택될 뿐이기에 병을 낫기 위해 치료의 본질과 수단을 혼돈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든, 금식을 하든, 병원에 가든,약을 먹든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이 고쳐주신다는 사실과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기에 매사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살 때 하나님이 주시는 참 평안으로 건강한 삶을 살게 됩니다.
      셋째, 주안에서 아름다운 꿈을 가질 때 건강해집니다. 퇴임을 앞둔 맥아더 장군에게 어느날 한 장교가 찾아와 건강의 비결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그는 “사람은 나이가 먹었다는 이유로 늙지 않는다. 사람은 꿈을 포기 했을 때 늙는다.세월은 피부에 주름살을 생기게 하지만 인생에 대한 꿈을 잃어버린 사람은 영혼에 주름살이 생기게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꿈을 갖는 사람은 얼굴에 기쁨이 넘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안에서 미소를 잃지 맙시다. 우리 한번 웃어봅시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주안에서 건강한 삶을 사시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09-05-2022(월) 

      황제의 판결(사도행전 25:15) 

      3절 / 베스도호의바울예루살렘으로 옮겨 보내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러라.
                           
      * 호의(5485) χάρις

      χάρις, ιτος, ἡ 

      1. 우아함,  2. 은총,  3. 은혜로운 행위

      발음 / 카리스(charis) 

      어원 / 546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은혜(눅 1:30, 행 4:33, 몬 1:3), 칭찬(눅 6:32, 34), 칭송(행 2:47), 은총(행 7:10), 호의(행 25: 3), 은사(고후 9:15), 기쁨(몬 1:7), 아름다움 (벧전 2:19, 20), 사랑스러움(눅 2:52), 감사 (눅 17:9, 롬 6:17, 고후 8:16, 골 3:16).
      신약 성경 / 156회 사용

      사람에게 호의(은혜)를 구하려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
      11절 /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사죄를 범하였으면 죽기를 사양치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의 나를 송사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누구든지 나를 그들에게 내어 줄 수 없삽나이다 내가 가이사 호소하노라.

      * 호소(1941) ἐπικαλέομαι

      ἐπικαλέομαι 941

      1. 부르다,  2.명령하다

      발음 / 에피칼레오마이(ĕpikalĕŏmai) 

      어원 / 제1부정과거 ἐπεκάλεσα, 미래 중간태 ἐπικαλέσομαι, 제1부정과거중간태 ἐπεκαλεσάμην, 완료수동태 ἐπικέκλημαι, 완료분사 ἐπικεκλ- μέηνος, 과거완료3인칭단수 ἐπεκέκ - λητο,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ἐπεκλή- θην, 1909와 256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부르다(눅 22:3, 행 2:21, 롬 10:12), 일컫다(행 4:36, 약 2:7), 일컬음을 받다(히 11:16), 상소하다(행 25:11, 26:32, 28:19),
      [명] 이름(마 10:3), 별명(행 1:23).
      신약 성경
      30회 사용


      벨릭스와 베스도 (Felix and Festus)

      벨릭스는 대략 AD 52년부터 60년까지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으로써 유대지방을 다스렸다.
      노예출신으로 자유민의 신분을 얻은 그가 유대의 총독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글라우디오 황제와의 친분으로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그의 형 팔라스(Pallas)의 지원 덕분이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벨릭스는 자신의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을 제거하기 위해 암살자까지 동원할 정도로 잔인한 인물이었으며, 또한 총독의 지위를 이용하여 뇌물과 여자를 탐하였던 탐욕스런 인물이었다.

      벨릭스 이후 몇 년 뒤 유대를 다스렸던 알비누스(Albinus) 총독도 벨릭스가 뇌물을 받고 심지어 반란에 가담했던 죄수들까지 풀어주었다고 불평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남아있는 모든 역자자료들이 벨릭스의 부정부패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가 사도 바울에게도 뇌물을 기대하고 그를 계속 붙잡아 두었다는 누가의 기록은 매우 정확한 것이었다(행 24:26).

      역사가 타키투스는 벨릭스가 '노예의 마음을 가지고 왕의 권세를 휘둘렀던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

      벨릭스는 낮은 출신 성분에도 불구하고 3명의 왕실 출신 아내들을 차례로 두었는데, 헤롯 왕가의 자손으로 헤롯 대제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막내딸이자 헤롯 아그립바 2세의 누이동생이었던 드루실라가 그 중의 한 명이었다(행 24:24).

      드루실라는 가문적 배경으로 인해 유대교인과 그리스도교인 사이의 분쟁에 대해 이미 자세히 알고 있었을 것이며, 아마도 남편 벨릭스에게도 이런 내용을 자세히 알려 줄 수 있었을 것이다(행 24:22). 당시의 상류사회에서 매혹적이고 발랄한 미모로 유명했던 드루실라는 수리아의 작은 왕국의 왕과 먼저 결혼했었지만, 16세가 되던 해 벨릭스의 유혹으로 남편과 이혼 한 후 벨릭스와 재혼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벨릭스와 드루실라에게 사도 바울은 의와 절제와 심판에 대해 강론하였다(행 24:25).

      당시 벨릭스는 '피의 대학살'을 통해 유대인들의 폭동을 진압한 사건으로 악명이 높았다.
      탐욕과 폭정을 일삼던 벨릭스는 결국 잔혹한 진압 사건에 대한 유대인 지도자들의 진정서가 로마 황제에게 전달되는 바람에 유대인들의 눈치를 보며 총독자리를 물러나 로마로 소환 당했다고 요세푸스는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정치적 배경은 왜 벨릭스가 임기를 끝내고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사도 바울을 석방하지 않았는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행 24:27).

      벨릭스의 형 팔라스는 글라우디오 이후 네로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다음에도 계속 영향력을 유지했고, 이 때문에 벨릭스는 로마로 소환된 이후에도 큰 형벌을 면할 수 있었다.

      벨릭스의 실정으로 혼란과 긴장이 감도는 유대지방에 새로 부임한 베스도는 전임 총독보다는 훨씬 지방민들에게 협조적인 인물로, 부임한지 3일만에 직접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유대 지도자들의 협조를 요청하였다(행 25:1). 원만한 통치를 위해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했던 베스도는(행 25:9) 비록 그 자신이 바울의 죄 없음을 확신하고 있었지만(행 25:25), 바울의 요청 때문이라는 명분으로 자신의 손에서 로마 황제의 법정으로 '뜨거운 감자'를 떠넘기고 자신의 사법적인 판결을 보류함으로써 유대인 사회와의 충돌을 조심스레 피해간다(행25:12).

      여러 인물들의 복잡한 정치적 배경과 정략적 계산 속에서도 세상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 주님의 계획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져 간다.

      What Equals 100%? What does it mean to give MORE than 100%? Ever wonder about those people who say they are giving more than 100%? We have all been in situations where someone wants you to give over 100%. How about achieving 101%? What equals 100% in life?

      Here's a little mathematical formula that might help you answer these questions:

      If:  
      A B C D E F G H I J K L M N O P Q R S T U V W X Y Z

      Is represented as: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Then : 
      H-A-R-D-W-O-R-K = 8+1+18+4+23+15+18+11 = 98%

      and 
      K-N-O-W-L-E-D-G-E = 11+14+15+23+12+5+4+7+5 = 96%

      But, 
      A-T-T-I-T-U-D-E = 1+20+20+9+20+21+4+5 = 100%

      AND, look how far the love of God will take you

      L-O-V-E-O-F-G-O-D = 12+15+22+5+15+6+7+15+4 = 101%

      Therefore, one can conclude with mathematical certainty that:

      While Hard work and Knowledge will get you close, and Attitude will get you there, it's the Love of God that will put you over the top!

      We have a question for groups c, d, and e ! How did you feel Thursday when Coach Linhares cancelled practice? A- So happy you were giving high fives.  B- A smile broke out from ear to ear. C-You were  somewhat disappointed.      

       How do you value practice? The correct answer is C.

       You must realize the value of practice! When practice becomes your friend, then you will have an opportunity for greatness. You will never know how good you can be until you are willing to become the greatest worker on the team.

       

      Your attitude will determine your altitude!! When you expect to be great you will push yourself towards that goal. You must never give in to a defeatist attitude. You will never have a bad race if you have properly prepared mentally, physically and spiritually. The only exceptions are injuries and sickness. There is a reason for great races and that reason is proper preparation.
       

      Only one runner will be #1 on the team. All runners can be great workers and have a great attitude. That’s the real value of  cc, everyone can be # 1 in work ethic and attitude.


      Extra stresses in you life will nullify all your hard work. You will need to eliminate extra stresses from your life like working and extra socialization. During Sept and Oct school and running provide more than enough stress. Good is no longer good enough!! You must strive for perfection. Our seniors need a sense of urgency, because this is your last chance for a great season.
            

      When you have a commitment to excellence you will do everything correctly. When we must constantly remind you to do things correctly it communicates one of two things. 1) You really don’t' believe us when we tell you something.  2) You are just hoping to be good, and it's not really that critical to you! If you are just hoping to get a state medal it's not going to happen

            

      When you are not doing one thing correctly it make us wonder how many other things you are not doing, like not eating correctly, getting rest every night. When you come to practice tired you will not improve!




















      로마서 (Pros Rhomaious) /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사도 바울의 서한


      지혜와 순결(로마서 16:19) σοφός, ἡ, όν 4680 

      σοφός, ἡ, όν 4680 

      지혜(소포스) σοφός
      σοφός, ἡ, όν 4680

      1. 현명한,  2. 지혜 있는,  3. 고린도전서 3:18

      발음 / 소포스(sŏphŏs)
      어원/ σαφής ‘깨끗한’과 유사
      관련 성경 / 지혜로운(마 11:25, 눅 10:21, 딤전 1:17), 지혜 있는(마 23:34, 롬 1:22, 고전 3:18, 약 3:13)
      신약 성경 / 20회 사용

      ἀκέραιος, ον 185

      미련한(아케이로스) ἀκέραιος
      ἀκέραιος, ον 185

      1. 순진한,  2. 죄 없는,  3. 단순한

      발음 / 아케라이오스(akĕraiŏs) - 악과 섞이지 않은, 순수한 
      어원 / 1[부정불변사]과 2767의 파생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순결한(마 10:16), 미련한(롬 16:19), 순전한(빌 2:15).
      신약 성경 / 3회 사용

      * 2767. κεράννυμι 
      1. 혼합하다,  2. 섞다,  3. 요한계시록 14:10

      발음 / 케란누미(kĕrannümi) 

      관련 성경 / 섞다(계 14:10, 18:6).
      신약 성경 / 3회 사용
      문안하라(782) ἀσπάζομαι

      문안하라(782) ἀσπάζομαι

      ἀσπάζομαι 
      1. 인사하다,  2. ~에게 인사하다,  3. 어떤 집에 들어갈 때

      발음 / 아스파조마이(aspazŏmai) 

      어원 / 제1부정과거 ἠσπασά- μην, 1[연합을 나타내는 불변사]과 4685의 추정된 형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문안하다(마 5:47, 막 9:15, 고전 16:19), 경례하다(막 15:18), 평안하기를 빌다(마 10:12), 안부를 묻다(행 18:22, 행 21:7),
      작별하다(행 21:6), 환영하다(히 11:13)
      신약 성경 / 59회 사용
      살피고 돌아서라!(17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σκοπέω 4648
      1. 돌보다,  2. 주목하다,  3. 감시하다

      발음 / 스코페오(skŏpĕō)

      어원/ 464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보다(눅 11:35), 살피다(롬 16:17), 살펴보다(갈 6:1), 돌보다(빌 2:4) 
      신약 성경 / 6회 사용
      ἐκκλίνω 1578

      1. 돌아서다,  2. 이탈하다,  3. 로마서 3:12

      발음 / 에크크리노(ĕkklinō)

      어원/ 제1부정과거 ἐξέκλινα, 1537과 2827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떠나다(롬 16:17), 치우치다(롬 3:12)
      신약 성경 / 3회 사용

      속지마라 - 미혹하느니라(18절)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ἐξαπατάω 1818

      1. 속이다, 2. 로마서 7:11,  3. 데살로니가후서 2:3

      발음 / 엑스파나오(ĕxapataō)

      어원 / 제1부정과거 ἐξητάτησα, 1537과 53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속이다(롬 7:11, 고전 3:18), 미혹하다(롬 16:18, 고후 11:3, 살후 2:3) 
      신약 성경 / 6회 사용

      승리를 확신하라(20절)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상하게 하시리라(4937)

      συντρίβω  4937

      1. 산산이 부수다,  2. 깨트리다,  3. 꺾어지다

      발음 / 순트리보(süntribō)

      어원 / 미래 συντρίψω, 제1부정과거 συ- νέτριψα, 완료수동태부정사 συντετ- ρῖφθαι, 완료수동분사 συντετριμμέ- νος, 제2부정과거 수동태 συνετρίβην, 미래수동태 συντριβήσομαι, 4862와 5147의 어간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상하다(마 12:20), 상하게 하다(눅 9:39), 깨뜨리다(막 14:3, 계 2:27), 꺾이다(요 19:36).
      신약 성경 / 7회 사용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려면? 문안하라(782) ἀσπάζομαι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려면?(마태복음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뱀은 사탄을 뜻하는데 어떻게 뱀을 높이며 슬기롭다고 말씀하실까?
      신앙생활을 하면서 오랫동안 궁금해 했던 구절이다.
      그리고 ‘과연 사탄이 슬기로울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 말씀은 중동 지방에서 널리 민간에 전해 내려오는 속담 중 하나였다.
      그래서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예화를 드신 거라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을 만나고 겪어 보았다.
      뱀같이 지혜로운 사람도 많이 만나 보았다.
      그러나 그 심중에는 비둘기의 순결함이 없는 악한 사람이 많았다.
      순결하기보다는 지혜로우면서 간교한 사람을 많이 본 것 같다.

      ‘광명의 천사로 나타나는 사탄의 모습을 경계하라’는 말씀도 이제는 이해가 된다.
      보기에는 정말 착한 하나님의 사람 같은데, 오히려 큰 피해를 주는 사람도 상대해 보았다.
      사도 바울은 특히 교회 안 지도층에서 미혹하는 사탄의 모습을 발견하고 경계하라고 말씀하신다.
      교회 내에서, 그리고 세상에서 영적 분별력이 없으면 미혹되기가 쉽다.
      하나님께 영적 분별력을 주시기를 간구해야겠다.

      순수한 마음만 가지고 열정적으로 전도하는 많은 성도들을 만나 보았다.
      길거리에서나 직장에서나 그들은 마음만 앞서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하고 오히려 미움 받는 존재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비록 사람들은 비난해도 하나님은 기뻐하셨을 것’이라고 위로를 했다.
      그러나 꼭 그럴까? 좀 더 지혜롭게 하는 방법은 없었을까?
      우리가 전도를 할 때 열정과 믿음만 가지고 한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효과가 있을까?

      지하철에서, 서울역에서 큰 소리로 전도하는 분들과 내가 무엇이 달랐을까 생각해 본다.
      좀 더 뱀같이 슬기롭게 하는 방법을 왜 생각해 내지 못했을까?
      순결한 마음만 가지고는 세상을 이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같이 해 본다.

      사탄의 제자들은 거짓을 아주 자애롭고 평화롭게 포장하고는 박수를 받으면서 자신의 뜻을 성취하는데, 나는 진리를 가지고도 박수를 받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종교의 지도자는 예수님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성경 말씀도 달리하고, 예수 이외에도 모든 종교가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종교 다원주의를 가지고도 ‘세계 평화’니 ‘가난한 자’니 ‘약한 자’니 ‘소외받는 자’니 포장하면서 칭찬을 받으며 목적을 달성하는데, 진리를 가지고도 제대로 전파하지 못하는 나에게는 잘한 것만 있는 것인가? 많은 반성을 하게 되었다.

      이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과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비둘기같이 순결한 마음을 갖되 그들을 이길 수 있는 뱀의 지혜도 갖추어야겠다는 반성을 한다.

      뱀처럼 지혜로워라

      세속적 수단에 의지하여 고달픈 현실을 영악하게 헤쳐나가도 된다고 여깁니다.
      뱀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에 비추었으니 일부 불법과 부정이 용납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양심과 행동을 도덕적으로 최대한 깨끗하게 행하려고 노력합니다.
      "뱀, 지혜롭게, 비둘기, 순결하게"
      네 단어의 뜻만을, 그것도 일반적인 의미만을 기준으로 자의적으로 해석한 결과입니다. 

      이 두가지 해석 내지 적용이 서로 조화가 안 된다는 점을 나중에 스스로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영악하게 행동하려다 보면 아무래도 거짓 불법 탐욕 시기 등과 타협하여 잘못을 범할 수 있고 그러면  윤리적으로 결코 순결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둘을 각각 따로 적용시키기로 작정합니다.
      세상 일은 지혜롭게, 교회 일은 순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문자적 부분적으로 해석했으니까 그 적용 실천도 문자적 부분적으로 합니다.
      그리고 어쨌든 말씀대로 살았으며 분명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간주합니다.
      그러다 세상에서 영악하게 행한 것이 신앙 양심에 조금이라도 걸리면 교회에서 더욱 열심히 충성함으로써 일말의 위로와 안식을 얻고자합니다.
      혹시라도 세상에서 지혜롭게 사는 것에 잘못이 있었다면 그렇게 헷갈리게(?) 가르치신 주님의 탓이 됩니다.  

      신구약성경에서 말하는 지혜는 항상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성령의 교통으로 신자에게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짓이나 불법과 타협하더라도 영악하게 현실의 고난을 이기고 안락을 취하라는 지혜를 주실 리가 없습니다.

      뱀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고대 유대인들이 가장 지혜로운(하나님의 지혜를 받았다는 뜻은 아니고 단순히 그 자체로) 짐승으로 여겼습니다.
      부정적인 의미로 연결해선 안됩니다.
      비둘기는 물론 순결과 평화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성경이 말하는 순결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순결해야 하고 그러면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지혜와 순결이 세속적 처세술이나 교회에서의 충성도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물론 ‘지혜’를 신자도 현실 문제를 극복해 나감에 믿음과 기도에만 집중하지 말고 이성적 분별력도 사용해야 한다고 적용하는 것은 틀리지 않습니다.
      단 그럼에도 반드시 순결해야만 합니다.
      거짓과 불법과 타협 관용해도 된다는 의미는 한 치도 개입시키지 않은채 이성적 지혜를 사용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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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의 터(로마서 15:20)

      강한 자(호 두나토스)

      δυνατός, ἡ, όν 1415

      1. 힘 있는,  2.누가복음 1:49,  사도행전 25:5,  3. δυνατός =δύνα- μαι: 나는 할 수 있다. ㉠ 딛1:9

      발음 / 두나토스(dünatŏs)

      어원/ 141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능한(막 9:23, 눅 24:19, 행 18:24), 강한(롬 15:1, 고후 12:10), 유력한(행 25:5).
      [명] 능력 (롬 9:22, 11:23, 고후 10:4), 권능(롬 14:4). [부] 능히(행 11:17, 롬 4:21).
      신약 성경 / 32회 사용

      연약한 자(호 아두나토스)

      ἀδύνατος, ον  102

      1. 힘 없는,  2. 불가능하

      발음 / 아두나토스(adünatŏs)

      어원/ 1[부정불변사]과 141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약한(롬 15:1), 할 수 없는(마 19:26), 하지 못하는(히 10:4)
      신약 성경 / 10회 사용

      기쁘게(아레스코)

      ἀρέσκω 700

      1. 기쁘게 하려고 애쓰다,  2. 기쁘게 하다,  3. 기뻐하다

      발음 / 아레스코(arĕskō)

      어원/ 미완료 ἤρεσκον, 미래 ἀρέσω, 제1부정과거 ἤρεσα, 아마도 14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기쁘게 하다(마 14:6, 막 6:22, 롬 8:8)
      신약 성경 / 17회 사용

      (도입 이야기)

      소경의 이기심
      어느 시각장애인의 간절한 소원은 두 눈을 떠서 세상을 보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간절하였던지 어느 날 부엉이가 찾아와서 시각장애인에게 이런 제안을 합니다.
      "나는 밤에만 활동하므로 낮에는 눈이 필요없지요.
      낮에는 당신이 내 눈을 사용하고 밤에는 내가 사용하면 좋겠지요.
      한 가지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밤에는 반드시 눈을 돌려주어야 합니다.
      시각 장애인이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밝은 세상이 보였습니다.
      얼마나 좋았을까요?
      낮 동안에는 눈을 사용하고 밤에는 부엉이에게 눈을 돌려줍니다.
      이렇게 여러 날 지내는 동안 시각장애인의 마음에 왜 바보 같을까?
      멀리 도망을 가서 낮에도 밤에도 내 마음대로 보면 될텐데....."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눈이 점점 흐려집니다.
      결국 집으로 돌아와서 부엉이를 만났지요.
      밤에 활동을 하지 못한 부엉이는 그동안 먹이를 얻지 못해서 기력이 약해졌습니다.
      부엉이는 시각장애인에게 "왜 이제 왔어요!"
      그리고 부엉이가 죽었습니다.
      시각장애인은 더 이상 낮에도 밤에도 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세상 모든 존재는 존재의 목적이 있습니다.
      존재의 목적을 무시하거나 외면할 때는 반드시 생각지도 못한 비극이 찾아올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전도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다른 사람이 복음이 전한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것을 남의 터에 집을 짓지 않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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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 자백하리라(로마서 14:11)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It is written :  As surely as I live, says the Lord, every knee will bow before me; every tongue will confess to God.

      ἐξομολογέω  1843

      1. 약속하다,  2. 고백하다,  3. 인정하다

      발음 / 에코모로게오(ĕxŏmŏlŏgĕō) 

      어원/ 제1부정과거 ἐξωμολόγησα, 미래중간태 ἐξομολογήσομαι, 1537과 367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자복하다(마 3:6, 막 1:5, 행 19:18), 감사하다(마 11:25, 눅 10:21, 롬 15:9), 허락하다(눅 22:6), 자백하다(롬 14:11),
      시인하다(빌 2:11, 계 3:5), 고백하다(약 5:16)
      신약 성경 / 10회 사용

      비판(로마서 14:1)  διάκρισις

      비판(로마서 14:1)  διάκρισις

      διάκρισις, εως, ἡ  1253

      1. 구별,  2. 싸움

      발음 / 디아크리시스(diakrisis)

      어원/ 125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비판(롬 14:1), 분별함(고전 12:10), 분별(히 5:14).
      신약 성경 / 3회 사용

      판단(로마서 14:4)  κρίνω

      판단(로마서 14:4)  κρίνω

      κρίνω 2919

      1. 나누다,  2. 판단하다,  3. 결정하다

      발음 / 크리노(krinō) 
      관련 성경 / 고발하다(마 5:40, 고전 6:6), 비판하다(마 7:1), 심판하다(마 19:28, 눅 19:22, 요 3:17, 계 18:8), 정죄받다(눅 6:37),
      판단하다(요 8:16, 롬 2:1), 다스리다(눅 22:30), 심판받다(요 3:18, 벧전 4:6, 계 20:12), 재판하다(요 18:31), 결의하다(행 3:13, 21:25),
      작정하다(행 20:16, 고전 2:2, 딛 3:12), 심문받다(행 23:6, 24:21, 25:20), 판단받다(롬 3:4, 고전 11:32), 정죄하다(롬 14:22),
      결심하다(고후2:1).
      신약 성경 / 115회 사용


      * 연약한(ἀσθενέω)
      ἀσθενέω  770

      1. 병약하다,  2. 육체의 약함으로 들다,  3. 모든 종류의 약함

      발음 / 아스데네오(asthĕnĕō)

      어원/ 제1부정과거 ἠσθένησα, 77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병들다(마 25:36, 요 11:3, 빌 2:27), 앓다(눅 9:2), 약하다(행 20:35, 롬 4:19, 고후 11: 21), 연약하다(롬 8:3), 거리끼다(롬14:21). [명] 병자(막 6:56, 요 5:3,7, 6:2), 병(눅 4:40), 약한 자(고전 8:9, 11, 12), 연약한 자(롬 14:1, 2).
      신약 성경 / 33회 사용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So then each one of us will give an account of himself to God.

      마태복음 12: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베드로전서 4:5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갈라디아서 6: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전도서 11:9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 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마태복음 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마태복음 18:23-35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누가복음 16:2
      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포렌식(Forensics)’
      고대 로마의 포럼(Forum)과 공공(Public)이 합성하여 나온 라틴어 입니다.
      포렌식이란 범죄수사와 관련된 모든 과학기술을 의미합니다.

      특히 요즘은 '디지털 포렌식(Digital Forensics)'이란 말을 많이 씁니다.
      이는 컴퓨터, 스마트 폰, 각종 전자기기 같은 디지털 증거물을 분석하여 범죄의 증거를 수집하는 과학수사 기술입니다.
      마치 시신을 부검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죽었는데 이 사람이 자살을 했는지, 타살을 당했는지 혹은 자살을 위장한 타살을 당했는지 시체를 부검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디지털 포렌식 수사를 하면 삭제 된 정보까지 다 회복시켜 범죄행위를 낱낱이 알 수 있습니다.
      범죄자는 자기의 범죄 사실을 숨기기 위해 무엇보다도 자기의 쓰던 컴퓨터나 스마트 폰을 없애거나 포렌식 수사를 하지 못하도록 기기를 불능화 하려고 합니다.

      반대로 수사관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범죄자의 컴퓨터나 스마트 폰을 확보하려고 합니다.
      왜 그럽니까? 거기에 기록이 다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범죄 증거를 찾기 위해 지문 채취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디지털 포렌식 수사가 더욱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펜실버니아 물리 통계학 박사이시고 명지대의 박영아 교수란 분은 사전투표와 본 투표간의 격차가 나오는 확률은 1000개의 동전을 던져서 모두 한 쪽만 나오는 확률과 같다고 했습니다.

      또한 서울대 통계학 명예교수시고 한림원 원장인 한국 통계학의 거장 박성현 교수는 이번 선거의 사전투표와 본 투표율의 차이는 신이 작정을 하고 도와줘야만 나오는 수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월터 미베인이란 미국의 학자가 있습니다.
      예일대와 하버드대를 나오신 분이고 현재 미시건 대학에서 정치학 교수를 하시고 있습니다.
      이 분은 특히 부정선거 탐지 전문가입니다. 지난 미국 대선 때에도 패배한 힐러리 클린턴 측에서 부정선거를 의심하고 이 분에게 조사를 의뢰했습니다.

      그러자 이 분이 “이번 선거는 부정선거가 아니다.”라고 연구의 결론을 내림으로 부정선거 논란을 잠재운 분입니다. 그리고 이 분은 과거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부정선거를 8건이나 발견했는데 모두 사실로 들어났습니다. 특히 이 분의 부정선고 폭로로 볼리비아에서는 대통령이 사임을 하기도 했고, 콩고를 비롯해 이라크도 폭동이 일어나 선거가 다시 치러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최근 한국의 총선이 ‘사기(Fraud)’라고 보고서를 내놨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 전(2020년 5월 10일)에는 한국 총선에 관한 2차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거기에 보면 한국의 총선은 “사기로 조작이 되었다(fraudulently manipulated)“라고 해서 큰 파장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총선에서 낙선한 분이 “이거 이상하다. 확인해 보자.” 하고 법원에 증거 보전 신청을 했습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개표기, 개표기 제어용 컴퓨터, 선거 관리용 서버를 보존해달라고 했는데 기각이 되었습니다. 안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컴퓨터 서버를 어디에서 임차했는데 5월 1일에 그 서버를 돌려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서버를 돌려주는데 포렌식 수사를 아예 할 수 없게 ‘디가우징(?)’이나 무식하게 드릴로 뚫어서 파기한다고 합니다.
      하여간 범죄자는 완전 범죄를 하려고 어찌하든지 자기의 범죄 증거를 없애려고 하고 반대로 수사관은 범죄의 단서와 증거를 확보하려고 합니다. 그래야 법정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상황을 내 자신과 한 번 대입해 봅시다. 내가 죄를 저질렀습니다. 사실 우리는 누구나 다 죄를 저지르는 죄인들입니다. 그 죄가 발각되면 큰일 납니다. 죄가 탄로 나면 명예도 잃고, 돈도 잃고, 감옥도 가야되고, 어쩌면 사형도 당할 수 있습니다. 고로 나는 죄를 부인해야 합니다. “나 안 그랬어요. 모르겠는데요.” 오리발을 내밀어야 합니다. 거짓말을 해야 합니다.

      이때 나를 수사하는 수사관이 증거 없이 “야, 너가 죄를 저질렀잖아.” 하고 범죄자와 범정에서 말싸움만 해가지고는 안 됩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증거를 가지고 와야 합니다. 만약 범죄자가 역적모의를 했다면 역적모의를 한 사람들의 통화 기록을 가지고 와서 법정에서 공개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증거도 없이 그냥 무턱대고 사람들을 심판하여 지옥을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이 미련한 놈아!” 하고 욕을 하고 무시하면 그 말 한 마디에 심판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반면 어떤 사람에게 목마를 때 물 한 컵을 준 것이 있으면 그에 대하여 상급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이때 벌을 받는 자나 상급을 받는 자가 너무 오래 된 이야기이기에 전혀 기억이 없습니다.
      과거에 내가 남에게 “이 미련한 녀석아!”라고 했는지 기억이 안 납니다.
      과거에 내가 남이 목마를 때에 냉수 한 컵을 대접했는지도 기억이 안 납니다.
      그러나 이때 예수님은 포렌식 수사를 통해 이러한 기록들을 다시 백업하여 공개까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상벌에 대한 심판이 누구도 인정할 수 있는 정의로운 심판이 되는 겁니다.

      우리 모두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게 됩니다.
      로마서 14:10-12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베드로전서 4:5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하나님이 “네 죄를 네가 알렸다.”고 하실 때 우리는 “주여, 저는 저의 죄를 모릅니다.
      기억이 전혀 안 납니다.
      저는 치매 환자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아- 실지로 기억이 안 나니까요. 이때 하나님은 증거를 대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양심이란 것을 끄집어냅니다. 마치 디지털 포렌식 처럼 지워진 기억을 되살려냅니다.

      그것을 우리가 보면 도저히 죄를 부인할 수 없습니다. 고로 “주여,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하고 스스로 자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어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자기의 죄를 하나님께 직고하는 것보다 이 땅에 살아 있을 때 하나님께 자기의 죄를 먼저 직고하는 겁니다. 즉 미리 회개하는 겁니다.

      이것이 복음이요. 아주 원초적인 복음입니다. 세례 요한도 외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님도 외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여러분, 하나님께 자기의 죄를 통회하고 자백하면 불쌍히 여김을 받습니다. 용서를 받습니다. 천국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어차피 들통 나고 직고해야 하는 죄를 자꾸 숨기려고 하고 오리발을 내밀면 가중처벌을 받습니다. 회개를 미루면 미룰수록 재앙은 더 커지게 됩니다. 반면 회개가 빠르면 빠를수록 하나님과 더 가까워집니다. 가장 미련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나는 죄를 안 지었다.”고 하고 오리발을 내미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다 죄인이라고 말씀했는데 나는 죄를 안 지었다고 하면 도리어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괘씸죄가 추가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올 때 죄를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해주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는 것이지 정죄하려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고로 지혜로운 자는 하늘나라에 가기 전에 모든 죄를 청산하고 갑니다. 그런데 인간이 자기 죄를 청산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욕심쟁이는 여전히 욕심을 부리고, 교만한 자는 계속 교만하고, 불평하는 자는 계속 불평하고, 못된 자는 여전히 못되게 말하고 행동합니다.

      이때 자기 죄를 청산하고 버릴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육체의 고난을 겪는 겁니다. 오늘 본문 1절입니다.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자기 죄를 그쳤음이라.” 사람이 모든 일이 잘되고 형통할 때에는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큰 고난을 당하거나 육체의 고난이 임할 때에는 자연스럽게 자기의 죄를 회개하게 됩니다.

      보통 사람들이 죽을 때 병들어 죽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대부분 육체의 고통이 따릅니다. 이게 성경적으로 무슨 뜻이냐 하면 바로 그 동안 지은 죄를 철저히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지은 죄를 모두 용서받고 천국에서는 의인의 상급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성경에 보면 전염병이 돌아서 많은 사람들에게 육체의 고통이 오고 병들 때에 사람들이 회개했습니다.
      죄를 그쳤습니다.
      그러자 전염병이 사라지고 하나님이 땅을 고치셨습니다.
      즉 자기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므로 하나님의 치료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에게 항상 좋은 것을 주시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왕이면 이 땅에서 하나님께 직고하는 것이 하늘나라에서 심판의 자리에서 직고하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가 변화가 됩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취조하는 수사관처럼 여겨졌으나 이제는 나의 죄를 변호해주는 변호사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변호를 들으시고 그 죄를 용서해주는 판사입니다.
      그리고 그 판사 분은 다름 아닌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에게 늘 기도하며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일상생활을 직접 보고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오늘은 이랬어요. 이 사람을 만나서 이랬고요. 이 일은 이렇게 정리했어요. 아버지가 순간마다 지켜주시고 도와주시니 항상 고마워요. 이제 잠 좀 자려고 합니다. 꿈속에서도 가르쳐 주실 것 있으면 한 수 가르쳐 주세요... 고주알 메주알... 이러쿵 저러쿵...”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 직고해야만 합니다.
      심판을 당할 때가 되어서야 직고하려면 너무 당황스럽고 위험합니다.
      죄는 미리미리 이 땅에서 가장 빠르게 직고하므로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다정하신 하나님과 사랑의 대화를 날마다 직접 해야 합니다.

      무엇을 직접 하나님께 고하기를 원합니까?
      하나님은 솔직하고 정직하게 고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내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고하십시오.
      너무 거창하게 말할 필요도 없고, 격식을 차리며 어색하게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이미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고, 그 아들과 함께 또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하나님께 직접 고하면 하나님은 또한 직접 들으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고함으로 이 어지러운 세상 중에서도 큰 위로와 잔잔한 행복을 얻기를 축원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사랑의 빚(로마서 13:8)

      빌린 돈은 갚을 수 있어도 받은 은혜는 갚을 길이 없다.

      χρόνος, ου, ὁ  5550

      χρόνος, ου, ὁ  5550

      1. 시간,  2. 유예

      발음 / 크로노스(chrŏnŏs)

      어원/ 불확실한 파생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때(마 2:7, 행 1:7, 벧전 4:2), 시대(행 17:30), 얼마간(행 19:22), 시간(11:32), 기회(계 2:21), 동안(막 2:19), 기한(눅 1:57),
      시대(행 17:30), 항상(행 20:18), 날(행 27:9), 영세(롬 16:25).

      καιρός, οῦ , ὁ  2540

      καιρός, οῦ , ὁ  2540  

      1. 때,  2. 달가운 때, 3. 옳은 때

      발음 / 카이로스(kairŏs) 

      어원 /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때(마 8:29, 눅 8:13, 딤후 3:1), 날(마 16:3, 눅 1:20, 고후 6:2), 세월(골 4:5), 연대(행 17:26), 틈(행 24:25), 현재(롬 8:18, 히9:9), 기회(갈 6:10), 항상(엡 6:18).

      갈라디아서 6: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신약 성경 / 86회 사용




      사랑의 빚이란 예수를 영접한 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는 갚을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빚을 잊지 말자!

      카네기가 어린 시절 엄마를 따라 식료품 가게에 가게 되었다.
      엄마가 물건을 사는 동안 그는 가만히 서서 체리 파는 할아버지 앞에 놓인 체리상자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주인 할아버지가 "먹고 싶으면 한 줌 집어 먹으렴" 이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는 말없이 가만히 할아버지만 바라볼 뿐이었다.
      카네기의 어머니도 "할아버지가 허락하셨으니 한 줌 집어도 돼." 라고 말했지만 그는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체리를 한 움큼 집어 그에게 내밀었다.
      그는 그제서야 고맙다고 말하며 두 손으로 체리를 받았다.

      집으로 돌아가며 어머니는 카네기에게 왜 할아버지가 집어주기 전까지 가만히 있었는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카네기가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 손이 저보다 훨씬 크니까요"

      할아버지와 같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잊을 수 있습니까?


      이웃을 사랑하자!(10절)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이웃을 사랑하는 기본적인 단계는 악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악을 행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9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이웃의 영역에 침범하지 말라
      성의 성역, 생명의 영역, 물질의 영역, 마음의 영역에 대해서 인정하라고 합니다.

      율법을 완성하라(8절)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마태복음18:23-35

      하나님 나라는 자기 종들과 회계를 하려고 하는 어떤 왕에 비길 수 있습니다. 왕이 회계를 시작하니, 1만 달란트 빚진 종 하나가 왕 앞에 끌려왔습니다.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자, 주인은 그 몸과 아내와 자녀들과 그 밖에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종이 엎드려서 무릎을 꿇어 ‘참아 주십시오. 다 갚겠습니다.’ 며 애원했습니다. 주인은 그 종을 불쌍히 여겨, 그를 놓아 주고, 빚을 완전히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1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나, 붙들어서 멱살을 잡고 ‘내게 빚진 것을 당장 갚아라.’ 라고 말했습니다. 그 동료는 엎드려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라며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매몰차게 몰아붙여 그 동료를 감옥에 가두고, 빚진 돈을 갚을 때까지 갇혀 있게 했습니다. 다른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딱하게 여겨서, 가서 주인에게 그 사실을 다 일렀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그 종을 당장 불러다 놓고 말했습니다. ‘이 악한 종아, 네가 간청하기에, 내가 네게 그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겼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리고 주인이 노하여, 그를 형리에게 넘겨 주고,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가두어 두게 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제자들에게 “(마 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고 하셨습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와서 “주님, 형제가 내게 죄를 지었을 때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 “일곱 번만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여라.”고 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은 490번까지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무제한으로, 끝없이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용서의 기준은 이 지상에 현존하는 사회법에서 도저히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용서법은 ‘하나님 나라의 법’에 따른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왕은 ‘하나님’, 종들은 ‘예수 믿고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될 자들’을, 그리고 ‘회계’는 하나님 앞에서 일생동안 자신들게 맡기워졌던 일들에 대해 결산하는 ‘심판의 자리’를 의미합니다.(고후5:10) 세상의 법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기준에 따라 선악간에 행한대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왕이 회계를 시작할 때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가 끌려왔다고 했습니다.

      1달란트는 당시 순금 34kg에 해당되는 금액으로 노동자 한 사람의 하루 품삯인 1데나리온의 약 6,000배에 상당합니다. 

      그러므로 1만 달란트는 오늘날 금액으로 환산하면 10억달러 이상일 것으로 평가됩니다.
      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의 증언에 따르면 유대 전역에서 거둬들인 1년 세금이 고작 800달란트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1만 달란트는 하나님께 대해 인간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큰 죄악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에 보면, “(마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는 기도가 있습니다. 이 말씀이 헬라어로는 “우리에게 빚는 자를 탕감하여 준 같이 우리의 빚도 탕감하여 주시옵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죄’를 갚아야 하는 ‘빚’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죄는 용서받기 전에는 죄로 남아 있습니다. 빚은 갚고 나면 더 이상 부채가 아닙니다. 자신이 지은 죄는 누구에게 전가할 수 없지만 부채는 제 삼자가 대신 갚아 줄 수도 있습니다. 죄는 죄를 낳고 부채는 부채를 낳는 악화 현상이 계속됩니다. 죄나 부채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무거워지고 증가되어 가는 것이 일반적 현상입니다. 부채를 채권자로부터 탕감받을 수 있듯이 죄도 하나님에 의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시되 기억조차 하지 아니하십니다.(사 43:25)

      하나님께서 정하신 죄에 대한 법은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하심으로 인간의 죄값을 치루시고 우리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은사”, 곧 값없이 주시는 선물로 영생,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엡1:7) 인간이 죄 사함을 받아 죄가 없다고 인정받는 것을 ‘의인(義認)이라고 합니다. 이 의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림이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인간의 죄는 스스로 해결할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써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2:22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네가 많은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내 앞에 그대로 있으리니.

      일만 달란트 빚는 자가 숨어오다가 발각되어 끌려왔습니다. 그에게 왕은 그 종 자신과 아내, 그리고 자식들과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 빚을 갚으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일만 달란트는 앞서 말씀드린 엄청난 금액으로 그 종이 자신을 비롯해서 가족들과 가진 모든 것을 다 처분해도 도저히 결코 갚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왜냐면 당시 노예 값은 기껏 많아봐야 10분의 1달란트 수준 이하였기 때문입니다. 다 갚으라는 왕의 명령에 종은 끝내 왕에게 호소하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시간을 기다려 주시면 다 갚겠다고 호소했지만 이는 가능성 있는 약속이 아니라 다만 왕의 형벌을 일순간이나마 모면해보려는 임기응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왕은 이를 불쌍히 여겨 완전히 그 빚을 탕감해주었습니다. 종의 간절한 호소에 감동되기보다는 오로지 왕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그 빚을 탕감해주게 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실 때 죄인의 간청에 따르기 보다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 그야말로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단번에 죄를 완전히 탕감, 사해주신 것입니다.(롬8:33) 이같이 죄인의 죄를 완전히 사해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 죄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 죄 사함을 위해 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요일4:10)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왕에게 전혀 상환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주시면 다 갚겠노라며 간청했던 것처럼, 죄인은 자신의 죄에 대해 용서를 진실히 구하는 간청이 있어야 합니다. 그냥 간청함도 없이 탕감해준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죄를 용서하되 죄를 회개하며 용서를 빌지도 않았는데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해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누가복음 17: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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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적 예배(로마서 12:1)

      로기코스 라트레이아

      * 3050. 영적인(λογικός)

      λογικός, ἡ, όν 3050

      1. 합리적인,  2. 영적인,  3. 로마서 12:1

      발음 / 로기코스(lŏgikŏs)

      어원 / 305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영적(롬 12:1), 신령한(벧전 2:2)
      신약 성경 / 2회 사용


      * 2999. 예배(λατρεία)

      λατρεία, ας, ἡ  2999

      1. 섬김,  2. 예배,  3. 요한복음 16:2

      발음 / 라트레이아(latrĕia)

      어원/ 300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섬기는 일, 예식(요 16:2, 히 9:6), 예배(롬 9:4, 12:1), 섬기는 예법(히 9:1)
      신약 성경 / 5회 사용

      * 3000. λατρεύω

      1. 섬기다,  2. 예배하다
      발음 / 라트레우오(latrĕuō)

      어원 / 미래 λατρεύσω, 제1부정과거 ἐλά- τρευσα, λάτρις ‘고용된 하인’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섬기다(마 4:10, 행 7:7, 딤후 1:3), 봉사하다 (빌 3:3), 받들다(행 26:7)
      신약 성경 / 21회 사용
      4983. 몸(σῶμα)

      σῶμα, ατος, τό 
      1. 신체,  2. 몸,  3. 시체

      발음 / 소마(sōma)

      어원 / 498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몸(마 5:29, 눅 11:34, 고후 4:10), 시체(마 14:12, 요 19:31, 유 1:9), 주검(눅 17:37), 육체(요 2:21, 히 13:11), 형체(고전15:37, 38, 40), 종(계 18:13).
      신약 성경 / 142회 사용

      * 4982. σώζώ

      1. 구원하다,  2. 구하다,  3. 구출하다
      발음 / 소조(sōzō) 

      어원 / 미래 σώσω, 제1부정과거 ἔσωσα, 완료 σέσωκα, 미완료수동태 ἐσῳζόμην, 현재 완료수동태 3인칭단수 σέῳσται, 완료수동분사 σεσῳσμένος,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ἐσώθην, 미래 수동태 σω- θήσομαι, 기본형 σῶς ‘안전’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구원하다(마 1:21, 요 12:27, 딤전 1:15), 구원 받다(마 9:21, 행 14:9, 딤전 2:4), 구원을 얻다 (마 10:22, 요 10:9, 고전 1:18),
      구하다(막 3:4, 눅 6:9, 9:56), 보전하다(눅 17:33), 낫다(요 11:12), 성함을 얻다(막 6:56), [명] 구원(행 27:20).
      신약 성경 / 107회 사용
      * 육체(σάρξ, σαρκός)

      σάρξ, σαρκός, ἡ  4561
      1. 육체,  2. 몸,  3. 인간이나 동물의 뼈를 덮고 있는 물질을 총칭

      발음 / 사르크스(sarx)

      어원/ 4563의 어간에서 유래한 듯함
      관련 성경 / 몸(마 19:5, 막 10:8), 육체(마 24:22, 요 8:15, 고후 1:17), 육신(마 26:41, 롬 1:3, 딤전 3:16), 살 (눅 24:39, 요 6:55, 56),
      육정(요 1:13), 육(요 3:6, 6:63, 고전 15:50), 골육(롬 11:14).
      신약 성경 / 147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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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방인의 사도(로마서 11:13)

      1절.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 그러므로 / οὖν 3767

      1. 그래서,  2. 말했던 바와 같이,  3. 거기에 응해서

      발음 / 운(ŏun)
      어원 / 3756과 445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그런즉(마 1:17, 롬 3:31), 그러면, 이에(요 1:22, 2:18), 거기에 대해서(요 4:9, 6:53), 실로 그러나(마 3:8, 요 9:18),
      그러므로(마 18:4).

      신약 성경 / 501회 사용 



      * 사도 / ἀπόστολος  652
      ἀπόστολος, ου, ὁ


      1. 고전 헬라어나 후기 헬라어에서의 ὁ ἀ.는 해양탐험의 대장을 나타내는 말이었는데 ‘보냄을 받은 자’란 의미가 있었다.
      2. 대의원
      3. 하나님의 사자

      발음 / 아포스토로스(apŏstŏlŏs)
      어원 / 64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사도(마 10:2, 눅 17:5, 롬 1:1), 사자(使者)(빌 2:25), 보내던 사람(행 15:33).
      신약 성경 / 80회 사용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의 권위를 증거하기 위하여 다른 사도들과의 관계에서 있었던 일을 소개했습니다.
      교회의 기둥이라 불리는 사도들과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며, 예수의 구제자인 베드로의 외식을 책망한 일 등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이 다른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로서 말미암았으며 베드로와 동등한 책임과 임무가 주어졌음을 강조함으로써 자신의 교훈의 권위를 세우고 이신득의의 교리를 강조했습니다.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

      1. 복음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올라감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복음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그 복음을 소개하였음을 밝혔습니다.
      바울의 받은 복음은 다른 사도들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로부터 직접 계시받은 것이기에 예루살렘에 있는 자들에게 증거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다른 사도들과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으므로 이방인들에 관해서는 다른 사도들보다 많은 계시를 받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후 삼 년 만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야고보와 게바를 만나고 십사 년 만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사도들을 만났음을 강조함으로써 자신이 전하는 교훈이 사람에게 배운 것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께로 말미암은 것임을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a. 이방인에게 나타난 표적을 고함(행 15:12)
      b. 사도들에게 바울을 소개했던 바나바(행 9:27)
      c. 바나바와 함께 예루살렘을 방문함(행 15:2)

      2. 이방인을 위한 사도직을 받은 바울

      바울은 베드로가 할례자의 복음 전도를 맡은 할례자의 사도라면 자신은 이방인의 전도를 맡은 이방인의 사도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사명이 베드로의 사명과 동등함을 밝혔습니다.

      그렇기에 교회의 기둥같이 여기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도 자신과 교제의 악수를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은혜를 사도들도 인정하였으므로 갈라디아에 있는 성도들도 자신의 사도권을 인정하고 교훈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a.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베드로(행 2:14)
      b. 이방인의 사도직을 영광스럽게 여김(롬 11:13)
      c.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함(고전 15:10)

      게바를 책망한 바울

      1.  게바의 실수

      바울은 게바가 실수하였을 때 자신이 그를 책망한 사건을 말함으로써 자신의 교훈의 권위를 증명해 보였습니다.
      게바가 안디옥에서 이방인들과 함께 먹다가 유대인들이 오자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그 자리를 피하였고, 그로 인해 다른 유대인들과 바나바도 실족하여 외식에 유혹되었음을 밝혔던 것입니다.
      게바의 이러한 행위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치 않은 행위였는데 이는 복음을 따르지 아니하고 유대인들의 율법을 따른 행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사도직을 대표하는 자로서 모범을 보 여야 했으나 오히려 할례자들을 두려워함으로 실수를 범하고 다른 사람들도 실족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a. 율법이 금한 이방인과의 교제(행 10:28)
      b. 유대인들의 비방을 두려워함(행 11:2-3)
      c. 유익하지 못한 규례(히 13:9)

      2.  바울의 책망

      게바의 실수를 목격한 바울은 그를 심하게 질책하였습니다.
      이방인들로 유대인과 같이 행할 것을 요구하여 복음의 걸림돌이 되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비록 베드로가 예수의 수제자로서 큰 권위를 지니고 있었지만 복음 진리 앞에서는 그의 행위가 책망받아야 함을 증거함으로써 율법주의적 행위에 대한 경계를 주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a. 예수 안에서 할례가 무익함(갈 5:6)
      b. 범죄자를 꾸짖음(딤전 5:20)
      c. 복음에 합당한 생활(빌 1:27)

      이신득의의 구원

      1.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

      바울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음을 교훈하면서 율법주의자들의 거짓 교훈을 반박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복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자가 다시 율법을 행하면 스스로 범법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는 것은 모든 사람이 죄의 영향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와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은 서로 공존할 수 없음을 바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a. 율법으로 죄 사함을 얻지 못함(행 13:38-39)
      b. 믿음의 법으로 의롭게 됨(롬 3:27-28)
      c.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빌 3:9)

      2. 믿음 안에서 사는 성도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고 선언하면서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고 이제 그리스도께서 자신 안에 사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성도가 사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구원을 얻은 성도는 율법에 얽매이지 아니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않아야 하는데, 이는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의 죽음이 헛된 죽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신학 사상은 그의 글에서 자주 나오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용어사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a.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해 삶(롬 6:11)
      b.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함(롬 6:4)
      c.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김(롬 7:6)

      결론

      바울의 사도들에 대한 행동에서 진리의 확신을 갖는 자의 담대함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비록 교회의 기둥과 같은 자들 앞에서도 그리스도께 받은 진리에 대해서 만큼은 조금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진리를 확신하는 데서 나오는 담대함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굳게 잡아 이러한 담대한 믿음을 소유하여야 합니다.
      세상의 어떠한 거짓 교훈이 공격해 올지라도 진리에 대한 확신으로 단호히 대처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를 왜곡시키려는 어떠한 시도 앞에서도 바울과 같이 담대하게 복음을 변증할 있는 용기와 능력을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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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로마서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부르다(ἐπικαλέομαι). 1941

      1. 부르다,  2. 명령하다

      발음 / 에피칼레오마이(ĕpikalĕŏmai)

      어원 / 제1부정과거 ἐπεκάλεσα, 미래 중간태 ἐπικαλέσομαι, 제1부정과거중간태 ἐπεκαλεσάμην, 완료수동태 ἐπικέκλημαι, 완료분사 ἐπικεκλ- μέηνος, 과거완료3인칭단수 ἐπεκέκ - λητο,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ἐπεκλή- θην, 1909와 2564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부르다(눅 22:3, 행 2:21, 롬 10:12), 일컫다 (행 4:36, 약 2:7), 일컬음을 받다(히 11:16), 상소하다(행 25:11, 26:32, 28:19),
      [명] 이름(마 10:3), 별명(행 1:23).

    • 신약 성경 /  30회 사용

    • 이름(ὄνομα). 3686
      ὄνομα, ατος, τό 

      1. 이름,  2. 마태복음 10:2,  3. 마태복음 1:21

      발음 / 오노마(ŏnŏma) 

    • 관련 성경 / 이름(마 1:21, 눅 1:5, 롬 1:5), 명칭(행 18:15)

    • 신약 성경 /  231회 사용

    • 죄를 범한 사람은 누구든지 심판을 받고 형벌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심판에서 그 형벌에서 구원을 받는 길이 있는데 그것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의 이름을 부르면 다 구원을 받는다고 해서 진짜로 주여, 주여 라고 부르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야 하고 그 의미를 알고 바르게 불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상수훈을 통하여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막다른 골목에 가서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주님의 심판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살려달라고 부르는 그런 부름이 아닙니다.
      미리 주님을 알고 그 이름을 부르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고 불러야 합니다.

      1.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임을 알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후 자기들 스스로 최초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것이 창세기 4장 25-2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라고 했습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임으로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하나님을 떠났을 때 하나님께서 다시 아담에게 아들을 주셨는데 그 이름이 셋입니다.
      셋이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에노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노스라는 이름의 뜻은 “죽은 사람” 혹은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경건한 후손인 셋이 아들을 낳았는데 왜 하필이면 죽은 사람 혹은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에노스라고 지었을까요?

        그들은 인생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100여년쯤 살면 죽으니까 당연히 인간이 죽는 줄 알지만 그 때는 1000여년씩이나 살던 시대이니까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잘 몰랐던 시대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셋은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알았고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 그런 이름을 지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죄를 범한 인생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알고 그 이름을 불러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인생은 죽는다는 것을 다 압니다.
        어제도 죽고 오늘도 죽고 매일매일 사람들이 죽어가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 사실을 다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로 이상한 일입니다.
        왜 죽는지도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고 그냥 죽어가는 사람들이 참 이상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함으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그 죄에서 나를 건져주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영원히 죽지 않고 산다는데 그 이름을 불러야하지 않겠습니까?
        뭐가 그렇게 바빠서 뭐가 그렇게 급해서 죽음 앞에 서 있는 인생이 그 죽음의 절벽 앞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2.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오직 주님밖에 없음을 알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알고 그 죽음에서 그 멸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노력들을 많이 했습니다.
        여러 가지 종교들도 만들어 보고 훌륭한 사람을 교주로 세워보기도 하면서 이 죽음에서 구원을 받는 길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에 예수님만이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요 영생에 이르는 길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구주가 되심을 고백하면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정말 간절하게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할 것입니다.
        오로지 한 길인데 다른 길이 없는데 대강 적당히 부를 수 없을 것입니다.

      3.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로마서 10장 14절에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믿음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전파하는 자가 있어야 들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전파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믿고 주님의 이름을 불러서 구원을 받는 사람들이 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할 때 중요한 것은 우리가 교회에 와서 무엇을 듣는가가 참 중요합니다.
        바른 설교를 듣는 사람은 바른 믿음을 가지는 것이고 바르지 못한 엉터리 설교를 듣는 사람은 엉터리를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교회의 교인들의 믿음은 엉터리들이 많습니다.
        많은 목사들이 엉터리 설교를 하니까 그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다 엉터리 믿음을 가지고 교회에 다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예수님을 믿으면 잘살게 되고 성공하고 부자가 된다고 믿습니다.
        목사들이 그렇게 설교를 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기도를 하면 100% 다 응답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목사들이 그렇게 설교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면 착한 사람이 되고 선한 일을 많이 한다고 믿습니다.
        목사들이 그렇게 설교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성경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자기들이 편리하게 만들어 낸 것이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교인들 모으려고 목사가 편한 대로 편집한 것이지 참 설교가 아닙니다.
        말씀대로 살아도 착한 일 많이 하면서 살아도 성공하지 못하고 잘 살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의 교인들이 많아도 세상은 더욱 악해져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이렇게 실수도 하고 어쩔 수 없이 죄도 지으면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주님 우리가 노력을 해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나는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지만 내 속에 있는 악한 것들이 오히려 더 나쁜 짓만 하게 만들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이나 받고 살게 합니다.

        이 죄악 된 세상에서 이 죄악 된 삶에서 구원을 받는 길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 대신 십자가에서 죽어주심을 믿는 믿음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나는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믿습니다.
        그 피가 나를 깨끗하게 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 믿음으로 주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4.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시편에 보면 많은 시들이 주님의 이름 하면 그 이름을 찬양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시8:1)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시63:4)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오리니”(시86:12)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나의 평생에 주의 이름을 송축하고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주의이름에 영광을 돌리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내 손을 들리라고 했습니다.
       
        이런 찬양이 없이 이런 감사 없이 이런 감격도 없이 환난 날에 구원만 받으려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염치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죽음이 있고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한 사람도 의로운 사람이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이 심판을 면할 수가 없고 형벌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 구원을 받고 크고 작은 심판에서 구원을 받고 영원한 형벌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임일 알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오직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주님 밖에 없음을 알고 부르시기 바랍니다.
      날 대신 죽어주신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부르시기 바랍니다.
      그 이름의 위대함 그 이름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며 부르시기 바랍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기독교 신앙이 다른 종교에서 가르치는 구원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우치는 말씀으로 구약 요엘서를 인용한 말씀입니다(2:32)

      첫째,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 눈으로 볼 수 없지만 그 이름을 부를 때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둘째,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간구하는 것입니다.

      “부르다”는 헬라어 단어는 “에피칼레오마이(ἐπικαλέομαι)” 라고 하며, “부르다, 일컫다, 호소하다, 간원하다.” 라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부르는 것은 그가 들을 수 있도록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기도는 속으로 할 수 있지만 부르는 것은 들리게 해야 합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주님을 불렀을 뿐 아니라 사람들이 그분의 이름을 부르리라는 것까지 예언했습니다(욜 2:32, 습 3:9, 슥 13:9).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또한 신약의 성도들에게 발견하는 일상적인 신앙의 모습입니다.(행 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오순절 날 성도들은 주의 이름을 함께 불렀으며 그 부름에 대한 응답으로 강한 바람과 같고 불과 같은 성령이 임했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을 때에도 주의 이름을 불렀습니다.(행 7: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신약의 모든 성도들도 주의 이름을 불렀습니다.(고전 1:2∼3)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주의 이름을 부르던 성도들을 핍박하던 사울은(행 9:14)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극적으로 만났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바울이 되어 그도 역시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성도들을 두 종류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침묵하는 그리스도인”이며, 다른 하나는 “부르짖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믿음의 사람은 부르짖음으로 응답 받고 그 응답에 따라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도록 허락하셨습니다.(행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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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은 자(로마서 9:27)

      κατάλειμμα, ατος, τό  2640

      1. 나머지,  2. 남은 것,  3. 로마서 9:27

      발음 / 카타라임마(katalĕim- ma)

      어원 / 264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남은 자(롬 9:27)

      * 2641. καταλείπω

      καταλείπω 2641
      1. 남겨 놓다,  2.버리고 가다,  3. 남겨 놓고 가다

      발음 / 카타레이포(katalĕipō)
      어원 / 미완료 κατέλειπον, 미래 κατα- λείψω, 제1부정과거 κατέλειψα, 제2부정과거 κατέλιπον, 완료수동 부정사 καταλελεῖφθαι, 완료 수동 분사 καταλελειμμένος, 제1부정과거 수동태 κατελείφθην, 2596과 3007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떠나다(마 19:5, 막 10:7, 히 11:27), 버리다 (막 14:52, 눅 5:28, 행 2:31), 두다(눅 10:40, 행 18:19, 딛 1:5), 나가다(요 8:9),
      놓다(행 6:2), 머물다(살전 3:1)

    • 신약 성경 / 24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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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은 자(שאר, λειμμα, λοιπος, remnant) 사상

      남은 자’는 히브리어로 ‘쉐아르’(שאר)라고 하고, 헬라어로는 ‘레임마’(λειμμα) 혹은 ‘로이포스’(λοιπος)라고 하고, 영어로는 ‘렘넌트(remnant)라고 합니다.

      ‘남은 것’ ‘남은 자’라는 뜻입니다.

      구약시대 노아 때에도 세상 모든 사람이 타락하여 물로 심판 받아 모두 죽게 된 가운데서도 의로운 노아와 그 식구들이 살아남아 있었습니다 (창 6:6-8, 눅 17:26-27, 벧전 3:20).

      롯 때에도 소돔성이 사람들이 타락하여 불로 심판받아 모두 죽게 된 가운데서도 의로운 롯과 그 식구들은 살아남아 있었습니다 (창19:29, 눅 17:28-29).

      아합왕 때에도 북이스라엘이 아합왕과 이세벨의 학정으로 모든 사람이 우상을 숭배하고 많은 신앙인들이 숙청당하는 가운데서도 우상숭배에 굴복하지 않고 살아남은 엘리야와 7,000명은 살아남아 있었습니다(왕상 19:18, 롬 11:2-5).

      포로기에도 이스라엘 백성과 유다 백성들이 우상숭배로 앗수르와 바벨론에 멸망한 가운데 사로잡혀간 자들 중에 하나님에 대한 유일 신앙을 가진 자들이 살아남아 있었습니다(사 6:13, 10:20, 11:10-12, 렘 23:1-4, 31:7-8, 단 1:8-9).

      하나님은 음란과 우상숭배로 타락했을 때 심판을 하면서도 언제나 신앙공동체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신실한 신앙을 가진 ‘남은 자’를 남겨두셨던 것입니다.

      요엘 선지자는 신약시대에도 ‘남은 자’가 있을 것을 예언했습니다.

      요엘 2:32에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욜 2:28-32, 행 2:1-21).

      사도 바울은 신약시대에도 남은 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11:5에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롬 9:27, 29).

      사도 요한은 종말에도 남은 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12:17에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계 6:6).

      구약시대에 모두가 우상숭배에 빠지고 앗수르와 바벨론에 멸망하여 사로잡혀 간 가운데서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지 않은 자들이 남아 있었고 그들이 돌아와 이스라엘의 신앙을 회복시키고 부흥시켰습니다.

      신약시대에 모두가 영적으로 침체되어 로마의 박해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진 예수님의 제자들이 남아 있었고 그들이 성령의 충만하여 초대교회를 세우고 확장시켰습니다.

      그처럼 종말에도 사탄의 온갖 핍박과 유혹에도 신앙을 지키는 자들이 살아남아 하나님 나라를 이룰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탄이 그것을 알기 때문에 참 생명력을 가진 ‘여자의 남은 후손들’ 곧 ‘남은 자’와 더불어 마지막 일전을 벌이기 위해 바다 모래 위에 선 것입니다.

      ‘바다 모래 위’는 용이 여자의 남은 자손과 싸우는 장소라기보다는 용이 여자의 남은 자손과 싸우기 위해 여자의 남은 자손을 공격하게 할 짐승을 부르는 장소라 할 수 있습니다.

      13장에 보면 두 짐승이 나옵니다.
      1-10절에는 바다에서 일곱 머리와 열 뿔이 달린 짐승이 나오고 11-18절에는 땅에서 두 뿔을 가진 짐승이 올라옵니다.
      용이 그 두 짐승을 이용하여 여자의 남은 자손들을 적극적으로 공격합니다. ‘용’은 사탄을 상징하고, ‘바다에서 나온 열 뿔 달린 짐승’은 적그리스도를 상징하고, ‘땅에서 올라온 두 뿔 가진 짐승은 거짓그리스도와 거짓선지자를 상징합니다. 적그리스도는 기독교를 박멸하려는 정치지도자들을 의미하고 거짓그리스도와 거짓선지자는 기독교를 타락시키는 종교지도자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모든 사람들이 타락한 가운데서도 하나님 나라를 세울 자들을 남겨 놓습니다. 사탄은 그들이 구원역사에 생명력을 가진 자들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그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적그리스도와 거짓선지자들을 앞세워 공격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른바 ’남은 자‘들은 결코 그들에게 굴복하거나 미혹당하지 않고 신앙을 지킵니다.

      남은 자들은 증거를 가지고 계명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요한계시록12:17에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라고 했습니다.
      ‘여자의 남은 자손’ 곧 이른바 ‘남은 자손’은 어떤 성격을 가진 자들이냐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입니다.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며 하나님의 계명을 가진 자들’인 것입니다.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라는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로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승천하신 분인 것을 믿는 믿음을 굳게 지키는 자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구주인 것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양보하지 않는 자들을 말하며 예수님이 구주인 것을 증언하기를 두려워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자들을 말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이 주되심을 부인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 자’라는 말은 하나님의 계명을 철저히 지키는 자를 말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계명을 양보하지 않고 지키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사탄이 이용하는 적그리스도의 박해와 거짓 선지자들의 유혹 속에서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하나님 계명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종말에 그런 자들이 하나님께 쓰임받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11:3에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고 했습니다 (11:5-6).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하며 영광을 누립니다. 요한계시록20:4에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고 했습니다 (14:12).

      신약 복음시대에도 남은 자가 있습니다.
      로마서11:5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남은 자는 교회 회복과 부흥을 위해 준비된 자들입니다.
      그 목적 때문에 하나님이 환난 가운데서도 보호하고 원하시는 때에 영적 권세를 주어 사역을 감당하게 합니다.
      그들의 특징은 예수님의 증거를 가지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입니다.
      어떤 상황과 형편과 처지에서도 예수 믿는 믿음을 양보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을 양보하지 않는 자입니다.
      우리가 모두 힘든 가운데 있지만 남은 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 신실한 신앙을 나타내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을 목적 하에 있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그 목적 때문에 우리를 어떤 상황에서도 지키신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약속어음

      아브라함의 예를 들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것은 현찰이 아니라 약속어음이었다고 말합니다.
      약속의 아들, 이삭이 태어나기까지 장장 25년이 걸렸습니다.
      이삭의 후손들이 가나안 땅의 주인이 되어 큰 민족을 이루기까지 수백 년이 걸렸습니다.
      출애굽 후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데 40년이 걸렸습니다.

      믿음이란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베풀어 주신 것 때문에 하나님을 지금도 신뢰하며, 미래에도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믿음이란 앞을 내다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소망은 인간의 바람이 아니라 믿음에 기초한 미래에 대한 확신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을 신뢰한다는 것이며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그분의 약속을 신뢰한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한다는 것은 약속의 성취를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닻을 내리며 미래에 대해 이같이 확신하는 것을 성경은 소망이라 일컫습니다.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의 삶을 통해 영광을 드러내시는 통로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과 신실하심을 드러내 믿음을 완성하시며, 당신의 약속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게 하심으로 소망을 완성합니다.

      이제부터 그러한 믿음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존재해 왔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믿음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대다수에게서 일관된 믿음,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보기란 힘듭니다. 이스라엘을 통해 믿음이 어떻게 그리고 누구를 통해 유지되고 전달되었는가를 살펴볼 것입니다. 그러면 새 이스라엘인 이 시대의 교회 모습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전 538년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 생활을 청산하고 귀향길에 오릅니다. 감격스런 귀환이었습니다. 믿음이 주는 교훈을 배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소망을 품는 법을 배운 것입니다. 이 교훈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터득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을 기꺼이 그리고 전적으로 신뢰하는 백성을 창조하시기 위해 계속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역경 속에서 자신들의 창조주이시며 공급자이시며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지 못한 이스라엘 민족의 실패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믿음의 학교를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출애굽 직후 광야에서의 이스라엘뿐 아니라 약속의 땅에 도달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끝없이 흔들렸습니다. 유혹이 밀려올 때마다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다른 신들과 세상의 좋아 보이는 것들을 추종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드러난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 중 남은 자들만이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했다는 사실입니다(시 106:6-43, 렘 7:23-26, 겔 20:5-31).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경고하셨듯이 이스라엘은 언제나 “패역한 백성”이었습니다(겔 2:3). 출애굽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상황적으로는 노예 생활에서 구원하셨지만, 영적으로는 죄의 노예 상태에서 구원하지 않으셨습니다(신 29:4, 사 6:9-10, 롬 11:7-8, 고후 3:14). 급기야 하나님께서는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셨듯이, 불신에 대한 형벌로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에서 추방하셨습니다. 시내 산 언약 또한 깨진 것입니다(출 16:28, 32:1-20).

      하지만 아담과 하와에게 옷을 입히시고 여자의 후손을 통해 구원을 약속하신 것처럼(창 3:15,20), 바벨론 포로 생활 또한 이스라엘 역사의 종지부를 찍는 사건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체험을 통해 우리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언약을 파기한 후에 처음으로 선언된 진리, 곧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다”(시 103:8)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 중에도 하나님은 심판이 아니라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은 이스라엘을 멸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패역하였기에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보존하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바벨론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귀환

      그러한 와중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안에 신실한 소수를 남겨 두셨습니다. 그들을 통해 당신의 약속을 이어가셨습니다. 불신이라는 죄에서, 불신으로 야기된 자멸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렘 31:1-40, 겔 36:22-38).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는 이스라엘을 깨끗케 하시는 것이었습니다(사 48:9-11). 바벨론 포로 사건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진노는 “남은 자들”을 불러 깨끗케 하였고, 그들의 믿음을 튼튼하게 세워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들어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음이라 이미 작정된 파멸을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

      하나님께서는 반역한 무리들이 회개하면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사1:19-27, 미 7:18-20).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회개와 관계없이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남겨두십니다. 그들이 바로 남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는 자들입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신실하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소망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남은 자들의 역사입니다.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음이라.” 참으로 무서운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이지만 그들이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남은 자만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남은 자들을 제외한 이스라엘은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습니다. 그들은 파멸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정의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예정인 것입니다.

      예레미야도 똑같은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내가 내 양 떼의 남은 것을 그 몰려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이 생육하고 번성할 것이며, 내가 그들을 기르는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잃어버리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23:3-4).

      하나님의 역사는 이렇게 인간의 잘잘못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섭리와 일하심을 통해 이어집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남은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새롭게 창조해나가십니다.

      남은 자들이 바벨론 포로생활을 마치고 귀환했을 때 조국의 상황은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약속하신 것과 전혀 달랐습니다. 538년의 귀환은 하나님의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방의 왕인 고레스의 정치적 책략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슥 1:1-4, 사 44:28-45). 그들의 귀환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제1차 귀환이 너무 미미했기에 에스라는 그보다 더 많은 무리를 이끌고 2차 귀환에 오른 스룹바벨에게 자신의 권한을 넘겨 주어야 했습니다(슥 1:11-2:2).

      하나님께서 찬란히 빛나는 독립국가로 세우셔서 이방 민족들을 다스리게 할 것이라는 기대는 보잘것없는 도시국가를 세우는 것으로 대체되었습니다. 그것도 주변 세력들과 투쟁을 벌인 끝에 폐허 위에 간신히 세워졌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바사 제국에 기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현실은 약속과 너무 달랐습니다. 해가 갈수록 상황은 더욱 절망적이었으며, 공동체의 사기는 완전히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며 이스라엘 예배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성전 재건 사업도 22년 동안의 온갖 고생 끝에 주전 516년에야 가까스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이고 초자연적인 개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바사 제국의 도움을 통해서였습니다(슥 6:1-12). 솔로몬 성전을 익히 알고 있던 사람들은 새 성전의 규모가 너무 보잘것없다는 생각에 눈물을 흘렸습니다(슥 3:1-6).

      그런데 예루살렘은 어수선하고 새 성전은 보잘것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학개와 스가랴와 같은 예언자가 나타나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을 버리시지 않았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언자들은 아직도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고 선포했습니다(학 2:5). 학개 선지자는 조금 있으면 하나님께서 땅과 모든 나라를 진동시키시고 모든 나라의 보물을 성전에 들이실 것이며 그 성전을 솔로몬의 옛 성전보다 더욱더 영광스럽게 하실 것(학 2:6-9)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스가랴도 같은 예언을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무리들은 소수였지만 하나님의 백성이었고, 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학 1:12-14). 현재의 상황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케 하지만 하나님은 약속을 잊지 않으셨습니다(슥 8:2-8). 믿음은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바벨론 포로생활 이후의 하나님의 백성 이야기는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역경 중에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려는 처절한 투쟁을 기록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학 1:1-2:9, 슥 1:16, 4:6-10, 6:15). 한쪽에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고, 다른 쪽에는 이러한 약속을 의심케 하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약속을 지키기 시작하셨습니다. 백성들이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기 시작했으며, 성전이 건축되었고, 예루살렘은 차차 안정을 되찾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일하고 계시다는 증거였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을 부분적으로 성취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중에 신실한 남은 자들은 믿음을 이어갔습니다. 상황을 바라보고 믿음을 저버리기보다 기대의 방향을 미래로 바꾸었습니다. 소망을 가진 사람들로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지금 불완전하게 성취될지라도 훗날 완전하게 성취될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했습니다”(히 11:13).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소망은 그분의 신실하심을 믿는 것에 기초합니다. 따라서 믿는 자는 현재 성취되지 않은 약속들이 미래에는 틀림없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새롭게 가져야 합니다. 약속은 성취될 것입니다. 오늘이 아니라면 내일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경을 당할 때 소망은 “영혼의 닻”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한 확신이 서면 현재의 고난을 인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소망을 갖는 것은 순진해서가 아니라 “믿는 자를 알기” 때문입니다(딤후 1:12). 그런 까닭에 이스라엘의 역사는 여호와를 변함없이 믿으라고 촉구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바뀌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일하셔서 백성들에게 믿음과 소망을 가르치셨듯이, 지금도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자를 창조하는 일을 계속하십니다.
      십자가 이후의 그리스도인들은 바벨론 포로 생활 이후의 남은 자들처럼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음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하신 모든 것이 성취될 미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 가운데 겪는 시련은 장차 다가올 하나님의 구속을 더욱 사모하게 만듭니다. 고난은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을 떨쳐 버리고 저 세상으로 우리의 시선을 향하게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며 우리 앞에 놓인 것을 굳게 확신할 때 고난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4)는 약속을 신뢰할 수 있는 발판이 됩니다.

      이사야 10:20-23에서 기억해야 할 단어는 남은 자 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안전을 추구하며 자기의 욕망을 좇는 이들은 패역한 백성이 되어 파멸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오직 소수의 남은 자들만이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며 약속을 소망으로 바라보며 믿음의 길을 달려갈 것입니다.


      남은 자 구원 (로마서 9:27-33) The Salvation of the Remnant

      1. 희망의 소수 (The Minority of Hope) (Romans 9:27-29)
       -  포로의 ‘남은 자’ (The remnant from the captivity)
       - 고난당하는 소수 (The suffering minority)
       - '거룩한 씨’ 희망 (‘The holy seed' of hope)

      “남은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으리니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이다” (이사야 37:31-32).

       2. 믿음의 소수 (The Minority of Faith) (Romans 9:30-33)
       - 믿음은 인간의 책임 (Human responsibility)
       - 행위가 아니라 믿음 (Faith, not works)
       - 거침돌 혹은 디딤돌 (Stumbling block or stepping stone)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이사야 28:16).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의 희망이다.
      You are saved by believing in Jesus Christ, who is the only hope of humanity.


      남은 자 구원 (로마서 9:27-33)

      하나님이 유대인의 경우, 예언하신 대로 ‘남은 자’만 구원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남은 자’ 구원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남은 자’를 구원하신다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이것이 우리의 생활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본문 27절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사야 10장 22절에 예언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통해서 이스라엘에 대한 진노를 시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때문에 이스라엘 나라가 망할 때에 오직 ‘남은 자’만 그 진노를 피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돌아올 때도 이스라엘 대중(majority)이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남은 자(minority)만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의 아들 ‘스얄야숩’이라는 이름을 통해서도 ‘남은 자가 돌아올 것이다’는 진리를 전했습니다(사 7:3).

      ‘남은 자’는 소수입니다. ‘남은 자’는 고난당하는 소수입니다.

      우리는 ‘남은 자’란 말만 들으면 구원받을 사람들이 소수일까, 다수일까 하는 질문부터 던집니다. 우리가 ‘남은 자’만 생각하면 소수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좁은 문’과 ‘좁은 길’을 생각해도 구원받을 사람들이 소수라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계시록 7장 9절을 보면 구원받을 사람들이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 즉 다수입니다.

      우리는 마침내 구원을 받을 사람들이 얼마나 될지 잘 모릅니다. 우리가 다만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모든 사람들을 한 사람도 빼지 않고 다 구원하실 것이라는 사실뿐입니다 (계 20:15; 21:27).

      ‘남은 자’ 구원 문제를 다룰 때에 구원받을 사람들이 소수인가, 다수인가 하는 문제는 이 정도로 정리하고 ‘남은 자’는 고통당하는 소수라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는 것이 고통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오는 것도 고통이었습니다. ‘남은 자’ 구원은 고통당하는 소수의 구원입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일제시대에 신사참배를 거부한 주기철 목사님 같은 분이 ‘남은 자’입니다. 6.25사변 때는 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 손동신 손동인이 공산당의 핍박에 굴하지 않은 ‘남은 자’입니다.

      초등학교 때 약 60명 급우들 중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저 혼자뿐이었습니다. 등치 큰 제 친구 김모씨는 저를 늘 핍박했습니다. 제가 땅바닥에서 뭔가를 그리고 있을 때 그는 제 머리에 오줌을 싸기도 했습니다. 저는 군대생활 중에도 신앙을 지키느라 두들겨 맞았습니다. 내무반장은 자기 주머니에서 끄집어낸 작은 성경책으로 제 머리를 툭툭 치면서 저를 괴롭혔습니다. 저는 그 때 ‘나 혼자 남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는 가정에서 혼자 예수님을 믿으실 때에 ‘나 혼자네!’라는 생각이 드시지 않습니까? 남편과 시댁 어르신들이 박해하실 때에 ‘나 혼자네!’ 하는 생각이 드시지 않습니까? 직장에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따돌릴 때에 ‘나 혼자네!’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괴롭지만 낙심하지 마십시오. 외롭지만 낙담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왕 중 왕’ 하나님이 창세전에 선택하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의 VIP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총애를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자신의 눈동자같이 지키십니다(슥 2:8). 여러분은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총애하시는 하나님의 선민(選民)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남은 자’입니다. 하나님은 ‘남은 자’를 구원하신다는 예언을 28절 말씀대로 “이루시고 속히 시행”하실 것입니다.

      29절에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사야 1장 9절에 예언된 말씀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씨”라는 단어입니다. “씨”는 얼른 보면 한 알이지만, 그 속에 수많은 열매가 들어 있습니다. ‘남은 자’는 소수이지만 그 속에 앞으로 구원받을 많은 사람들이 들어 있습니다. ‘남은 자’에게 벅찬 희망이 있습니다.

      이사야는 ‘그루터기’라는 말도 사용했습니다. 이사야 6장 1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둥치가 잘리고 그루터기만 남아 있어도 후에 그 그루터기가 움이 돋고 줄기가 뻗고 꽃이 피고 많은 열매가 맺힙니다. ‘남은 자’는 ‘거룩한 씨’와 ‘그루터기’입니다. 거기서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놀라운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여기에 감격과 희망이 있습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혼자 남아 있지만, 앞으로 나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거야. 내가 지금 우리 가정에서 혼자 예수님을 믿고 박해를 받지만, 앞으로 많은 우리 가족들이 예수님을 믿을 거야. 나의 많은 후손들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과 복을 받을 거야.”

      제가 양지 캠퍼스에서 가르칠 때에 어떤 여학생이 자신은 ‘나무의 썩은 그루터기 같다.’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여학생은 썩은 그루터기에서 움이 돋는 것을 보고 희망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썩은 그루터기가 움이 돋고 줄기가 뻗고 꽃이 피고 많은 열매가 맺힙니다.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박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 집안의 ‘거룩한 씨’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친구들 중에 ‘그루터기’입니다.
      여러분들을 통해서 여러분의 가족들과 여러분의 친구들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유다 족속 중에 피하여 남은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으리니 이는 남은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 산에서 나올 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이다”(37:31-32).

      하나님이 ‘남은 자’를 구원하시는 열정은 하루 밤에 앗수르 군대 18만 5천 명을 시체로 만드시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선민을 반드시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선택하신 사람을 자신의 눈동자 같이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선택하신 ‘남은 자’가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바울은 위에서 다수가 멸망하는 중에 남은 자를 구원하시고 그 남은 자를 추수의 ‘씨’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강조했습니다. 30절부터는 시각을 달리하여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 결코 인간의 책임과 무관한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결코 인간의 책임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공존합니다. 인간의 책임이 하나님의 뜻을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책임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본문의 앞부분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부각시켰는데 이제 여기서는 인간의 책임을 부각시켰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은 결코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잡한 기계의 바퀴들이 반대 방향으로 돌지만 공동의 목적을 이룹니다. 마찬가지로 얼른 보면 반대되는 진리도 서로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어 하나님의 구원 목적을 이룹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의 주권도 기쁘게 받아들이고, 회개하고 순종하는 인간의 책임도 기꺼이 감당해야 합니다.

      본문 30-31절을 보면 스스로 의(義)를 이루겠다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의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공을 쌓지도 않고 도를 닦지도 않은 이방인들은 의를 얻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이루어 놓으신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32절을 보면 유대인들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들의 행위를 의지하다가 거침돌에 부딪혔습니다. 33절에는 이사야 28장 16절 말씀이 나옵니다.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멸망의 수치를 당하지 않고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려 죽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우리의 죄는 예수님에게 넘어가서 예수님이 처리하시고, 예수님의 의는 우리에게 넘어와 우리의 의가 됩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의(義)의 전가(imputation)가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 때문에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의를 추구하던 유대인들은 거침돌에 걸려버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거침돌(stumbling block)이면서 동시에 디딤돌(stepping stone)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의롭게 사는 행위를 통해서 구원을 받겠다는 사람에게는 거침돌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이 주신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디딤돌입니다.

      지금도 스스로 노력해서 구원을 받겠다는 사람에게 그리스도는 여전히 거침돌입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습니까?’라고 하면서 ‘내가 뭔가 좋은 일을 해야 구원을 받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거저 받기만 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는 사람은 그리스도라는 거침돌에 걸려 넘어집니다. 스스로 구원을 받겠다는 사람은 다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길을 내시지 않으면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내신 길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요 14:6).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피난처(sanctuary)입니다(사 8:14).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선물을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은혜로 선택하신 사람입니다.

      의를 추구하는 노력을 하지 않은 자들이 의에 이르고 의를 추구하는 노력을 한 자들은 의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는 하나님의 길은 인간들의 길과 너무도 다릅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충격을 받습니다.

      ‘의는 믿음으로 얻는 것이다’

      이것은 이상해 보여도 하나님의 구원의 길입니다.
      이것을 거절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거절하는 자는 하나님을 하나님의 왕좌에서 끌어내리는 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이 되지 못하게 하는 무서운 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길이 인간의 길과 아무리 다르다 하더라도 인간의 길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여기에 구원이 있습니다.

      알렉산더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은 강제 노동 수용소에 감금되어 있는 동안 지칠 대로 지쳐서 간수들이 자신을 죽이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휴식 시간에 낯선 사람이 그의 옆에 앉았습니다.
      솔제니친은 전에도 그를 본 적이 없었고 후에도 다시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 낯선 사람은 막대기로 땅에 십자가를 그렸습니다.
      솔제니친은 그가 그린 십자가를 뚫어지게 내려다보면서 “나는 저기에 인간의 자유가 있음을 안다”고 말했습니다.
      솔제니친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우리를 위해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만 인간의 구원과 평화와 행복이 있습니다.
      20세기 문학계의 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대표적인 문인 솔제니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고난당하는 소수의 남은 자’를 구원하십니다.
      ‘남은 자’는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하는 ‘거룩한 씨’입니다.
      ‘남은 자’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남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의 희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남은 자’가 되었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양자의 영(로마서 8:15)

      갈보리 언덕에 세워진 예수님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사람을 두 종류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회개한 강도와 다른 하나는 회개하지 않은 강도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서는 강도라고 합니다만 헬라어 성경에서는 "레스테스(λῃστής) 폭도"라고 합니다.
      강도가 아니라 일종의 정치범과 같은 죄인을 말합니다.
      두 명의 강도 중에서 회개한 강도를 "디스마" 라고 하고 회개하지 않은 강도를 "게스다"라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성경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외경이란 책에서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λῃστής, οῦ, ὁ  3027

      1. 강도,  2. 폭도

      발음 / 레스테스( lēstēs)
      어원/ ληΐζομαι ‘노획하다’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강도(마 21:13, 막 11:17, 고후 11:26)
    • 신약 성경 / 15회 사용
    •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당시 사람들의 조롱을 살펴봅시다.

      (지나가는 사람들)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태 27:39-40).

      (대제사장, 서기관)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빠하시면 저를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두 강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회개한 강도)
      우리는 죄값에 의해서 십자가 형을 받지만 이 사람은 죄가 없도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하여 주십시오. (누가복음 23:42)

      종의 영(프뉴마 둘레이아스) πνεῦμα  δουλείας

      양자의 영(프뉴마 휘오데시아스) πνεῦμα  υἱοθεσίας

      1절 /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There is no condemnation!
      우덴 카타크리마(οὐδέν κατάκριμα)

      기독교 신앙은 자신이 죄인 됨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하신 로마서 3:10-12의 선언은 이신득의 곧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기독교 진리의 전제가 됩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인입니다.
      세상 법정에서는 죄를 많이 지은 사람, 적게 지은 사람, 끔직한 죄를 지은 사람, 좀 가벼운 죄를 지은 사람 등으로 죄인들을 구별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하나님 앞에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마치 밤중에는 촛불과 전등불이 그 밝기에 있어서 큰 차이가 나는 것 같지만, 밝은 태양빛 아래서는 둘 다 아무런 존재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이 가진 의로움이란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정에서 모든 인간이 “죄의 삯은 사망이라”(롬 6:23) 하신 율법에 의해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골고다 언덕 위에 두 강도 사이에 높이 세워졌던 주님의 십자가는 사실인즉 저와 여러분이, 아니 전 인류가 달려야 할 십자가인 것입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서 두 강도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처음에는 두 강도도 예수님을 조롱하고 욕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한 강도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강도는 모든 사람이 입에 거품을 물고 비웃고 욕하고 대적하는 마당에도 묵묵히 그 모든 모욕을 참으실 뿐 아니라 오히려 저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말할 수 없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분은 보통 분이 아니구나, 이 분이야말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구나.”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조상 적부터 신앙생활을 해 왔고 성경을 들어왔기 때문에 메시야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있었습니다. 비록 강도가 되었을망정 태어날 때부터 강도였던 것은 아니니까요. 그런데 십자가에 달렸을 때 성령님께서 이 강도의 영안을 열어 주셨던 것이지요. 그러자 이 강도는 비로소 십자가에 달려 고난당하시는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 강도는 다른 강도가 예수님을 비방하며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하였을 때 그 동무를 꾸짖었습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그런 다음, 그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즉시로 그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두 강도가 똑같이 흉악한 죄를 저질렀고 그 죄 값으로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며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구원을 받았고, 다른 한 사람은 멸망을 당했습니다. 두 사람이 시작은 같았으나 그 결과는 천양지차가 나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이 같은 결과가 나오게 된 원인이 무엇일까요?

      첫 번 째로, 회심한 강도는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이 강도는 예수님을 비방하는 동료를 향하여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고 나무랐습니다. “네가 일생에 지은 죄도 많은데 마지막 죽어가면서까지 이 거룩한 분을 비방하다니 너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어떻게 당하려고 그러느냐?”고 책망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마음이야말로 믿음의 기초가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함부로 죄를 짓지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물마시듯 죄를 짓는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존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존재하시며 불꽃같으신 눈으로 모든 인생을 살피십니다.

      이 강도는 하나님의 심판을 예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날 아무 준비도 없이 종말을 맞이한다는 사실이 두려웠으며, 바로 이 두려움이 그를 회개의 단계에 이르게 하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세상 유혹을 받아 죄 짓는 자리에 서게 되었을 때 엄위하신 하나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여러분을 죄 짓는 자리에서 떠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두려워 할 때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다른 한 강도는 십자가에 달려서도 사람들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그 강도는 그곳에 모여든 사람들과 한편이 되어서 예수님을 조롱하고 욕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그를 구해 줄 것도 아닌데 말이지요.

      그러나 회심한 강도는 사람들의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떳떳하게 예수님을 향하여 신앙을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인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 10:32-33)고 하셨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유익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생명의 샘이라.”(잠 14:27) 하신 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 째로, 회심한 강도는 자기가 받는 형벌을 정당하다고 인정했습니다.

      이 강도는 처음 십자가에 달렸을 때만 해도 억울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기보다 더 나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데 곁에서 고난 받으시는 예수님을 대하면서 그의 마음에 변화가 일었습니다. 과연 자기는 죽을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제 죄를 깨닫지 못하고 분위기에 편승해서 덩달아 예수님을 조롱하는 다른 강도를 보고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다.”고 했습니다.

      어느 임금이 감옥엘 시찰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죄수 한 사람 한 사람을 면담하면서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죄수들은 하나같이 죄가 없는데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왔노라고 하소연했습니다. 그런데 죄수 하나가 줄곧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는 정말 몹쓸 죄를 지었으므로 감옥살이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 그 임금은 그 회개하는 죄수의 등을 채찍으로 후려치면서 “너 같은 죄인은 결백한 사람만 있는 이곳에 있을 자격이 없다.”고 하면서 바깥으로 내쫓았다고 합니다. 지옥에 가면 이곳저곳에서 ‘억울하다’는 소리가 진동할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사람은 자기 죄를 인정하고 그 대가를 달게 받습니다.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재산을 달라고 하여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여 다 허비한 둘째 아들을 보십시오. 나중에 그가 빈털터리가 되어 들에서 돼지치기가 되어 쥐염 열매조차 배불리 먹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을 때, 드디어 회심하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가 아버지를 만나서 드린 첫 말씀은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이제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죄 지은 것을 원통히 여기고 눈물로 뉘우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세 번 째로, 회심한 강도는 예수님의 무죄하심을 믿었습니다.

      이 강도는 예수님에 대하여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예수님의 행적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고 있었는지는 모릅니다. 어쩌면 이 강도는 예수님께서 그를 저주하고 욕하고 비웃는 자들을 향하여 비난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고 그의 무죄하심을 믿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성령님께서 이 사람의 마음에 이와 같은 사실을 깨닫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죄가 있다면 우리의 구세주가 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죄인이 죄인을 속량할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무죄성은 구세주의 기본적인 자격 요건인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여자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셔서 탄생하셨으므로 죄가 없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독생자로 믿고 고백하는 것은 곧 예수님의 무죄하심을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무죄하신 예수님에게 온 인류의 죄를 다 걸머지게 하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대속의 죽음을 당케 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고난당하실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4-6)

      복음서를 읽어보시고, 거기 기록된 예수님의 모습을 마음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거룩하시되 우리와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고 죄인들의 친구가 되시는 주님. 인자하시고 사랑이 많으시되 속되지 않으시며 하나님의 아들의 위엄을 지니신 주님. 인격적이나 편협하지 않으신 주님의 모습을 대하면서 이 강도와 같이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네 번 째로, 회심한 강도는 예수님께 자신을 의탁했습니다.

      이 강도는 예수님을 향하여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는 감히 자기를 낙원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지 않고 단지 자기를 생각해 달라고만 했습니다. 어떤 식으로 기억하시든지 그것은 예수님께 다 맡겼습니다.

      로마 당국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고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배척당하시고 골고다 언덕 위에서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며 죽어 가는 예수님을 향하여 이 강도가 자기 영혼을 부탁하였다는 사실은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강도가 이처럼 예수님께 자신을 맡길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에게 더할 수 없는 행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직 생명이 남아 있을 때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사실처럼 이 강도에게 복스런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평생에 걸쳐서 예수님에 대하여 전해 들으면서도 마음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지내다가 멸망으로 떨어지는 마당에 이 강도는 십자가에 달렸던 짧은 시간에 구세주를 믿고 영생을 보장받았으니 복 받은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강도는 오랜 시간에 걸쳐서 사정하고 애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이 말을 하는 데는 아무리 천천히 말할지라도 십 초가 채 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이 강도는 영생을 얻었습니다. 친절하게도 예수님께서 그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영생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은 오랜 세월이 소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죽는 그 순간에 예수님을 영접하더라도 구원을 받게 됩니다. 기독교 교리에 관하여 많은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할지라도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잘 알지 못해도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0장 9절로 10절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하신 대로, 나사렛 예수를 주요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아직도 주님을 믿지 않으시는 부모님이 계시거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예수님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 하신 말씀과 같이, 우리는 일단 전하는 일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전할 때 처음에는 핍박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완고한 분들은 그러려면 부모 자식의 의리도 끊겠다고 협박하기도 합니다. 그렇더라도 계속 전하십시오. 그래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게 됩니다. 병상에 누워서, 임종을 기다리면서 여러분이 전해 주신 말씀을 기억하고 이 강도와 같이 예수님을 부르고 예수님의 손에 자신의 영혼을 의탁하게 될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이 강도가 지옥에 떨어지려던 순간에 회개하고 주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것은 비유컨대 불 가운데서 구원받은 것과 같습니다. 아니면 무너진 건물 무더기 속에서 건짐 받은 것과도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것과 받지 못한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보다 더 큰 것입니다. 하나는 영생이요 하나는 영벌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나도 좀 더 늙어서 예수님을 믿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는, 그것은 정말 위험하기 짝이 없는 생각입니다. 누구나 다 이 강도와 같은 행운을 만날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사람은 저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가 따로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6:2에 보니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이라는 시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강도에게는 십자가에 달려 죽어 가던 그 순간이 그에게 주어진 구원의 기회였으며, 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았던 것입니다. 반면에 다른 한편 강도는 그 마지막 기회를 놓쳐 버리고 멸망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한편,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는 기도 속에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 강도의 믿음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 나라는 지상의 나라가 아니요 영원한 천국을 말합니다. 다른 편 강도는 예수님을 비방하여 말하기를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죽어가는 마당에서도 이 세상에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단지 육신의 삶만을 바랐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잘되고 윤택한 생활을 영위해야 하겠지만, 그러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 나라여야 합니다. 로마서 14:17에 보니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 주 예수님께서 통치하시는 거룩한 나라요 영적인 나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께서는 이 땅의 축복보다 영적인 축복, 곧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더욱 큰 관심을 갖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 연후에 이 땅의 축복도 구하십시오. 이 순서가 올바로 되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진실된 성도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강도를 통해서 우리는 회개와 믿음의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둘 다 동일한 죄를 짓고 세상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 가는 순간에, 한 강도는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고, 또 한 강도는 끝까지 완악한 마음을 버리지 못하다가 멸망을 받고 말았습니다.

      구원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무조건적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인데도 받아 누리지 못한다면 이처럼 아쉽고 후회막급한 일이 달리 어디에 있겠습니까? 구원받는데 우리의 공로나 노력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진심으로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이 진리는 매우 단순하지만, 이 진리를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의 결과는 영생과 영벌로, 천국과 지옥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구원이 무조건적으로 주어졌다고 가벼이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얻은 구원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대가로 지불하고서 얻은 것입니다. 온 우주보다도 더 크고 막대한 대가를 지불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2:3에는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라고 한 것입니다.

      본문을 읽는 사람들은 누구나 십자가상에서 회심하고 구원받은 이 강도를 부러워할 것입니다. 이 강도는 정말 행운아입니다. 너무나 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성도님들이야말로 이 강도보다 수백배 수천배 더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강도는 불타는 건물잔재에서 겨우 건짐 받은 것에 불과하지만 성도님들께서는 이미 구원을 보장받고서 영원한 천국의 상급을 준비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니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성도님들 모두, 이 큰 구원의 은총을 받은 자답게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을까를 생각하시면서 봉사와 전도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종의 영에 붙잡혀 시달리던 저희들을 사랑하셔서 양자의 영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후로는 아버지 하나님의 은총을 힘입어 주의 거룩한 백성답게 살아가도록 지혜와 믿음을 더항 주시고
      마지막까지 인내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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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양자의 영

      곤고한. ταλαίπωρος

      ταλαίπωρος, ον  5005

      1. 비참한,  2. 고민하는,  3. 근심하는

      발음 / 타라이포로스(talaipōrŏs)

      어원/ 5007의 어간과 3984의 어간의 파생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곤고한(롬 7:24, 계 3:17).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한 책망
      -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새번역) 너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실상 너는, 네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

      신약 성경 / 2회 사용


      * 로마서 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깨달았노니 / εὑρίσκω
      εὑρίσκω  2147

      1. 찾다,  2. 우연히 발견하다

      발음 / 휴리스코(hĕuriskō)

      관련 성경 / 나타나다(마 1:18), 찾다(마 2:8, 눅 4:17, 요 1:41), 보다(마 2:11, 8:10, 막 14:37, 눅 8:35), 만나보다(눅 7:9), 얻다(마 10:39, 막14:55, 눅 15:32), 발견하다(마 13:44, 행 23:29), 만나다 (눅 2:46, 요 9:35), 보이다(눅 9:36, 행 5:23, 계 5:4), 이루다(히 9:12), 깨닫다(롬7:21), 발견되다(고전 15:15, 고후 5:3, 빌 3:9)

      신약 성경 / 176회 사용


      하나님의 율법의 기본 원칙은 무엇인가?

      로마서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하나님의 율법은 사랑으로 요약된다.

      마태복음 22:37-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율법과 우리의 관계가 분명해진다.

      마태복음 5:17-18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하나님의 율법은 의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제시한다.

      갈라디아서 2:15-16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전도서 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율법과 죄의 관계는 무엇인가?

      요한일서  3: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모든 율법을 다 지킬 필요가 있는가?

      야고보서 2:10-11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계명을 지키지 않고도 하나님을 알 수가 있는가?

      요한일서 2:4-6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율법의 목적은 무엇인가?

      로마서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을 지킴으로써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는가?

      로마서 3:27-31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613계명은 유대교에서 지키는 율법으로 유대민족의 출애굽과정에서 광야를 떠돌아다니던 시절 모세가 기록한 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을 세분화한 것이다.

      두 가지 버전이 있는데, "하라"는 긍정적인 형태로 된 계명 248개와, "하지 말라"고 하는 부정적인 형태로 된 금지 계명 365개로 편집된 버전과 모세오경의 순서대로 편집된 버전이다.

      성경순서대로 편집된 버전은 다음과 같다.


      창세기 (1~3계명)

      1. "생육하고 번성하라"(창 1:28).

      2. 모든 유대인 남자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창 17:10).

      3. 환도뼈의 큰 힘줄을 먹어서는 안 된다(창 32:32).

      출애굽기 (4~114계명)

      4. "이 달을 한 해의 첫째 달로 삼아서, 한 해를 시작하는 달로 하여라"(출 12:2).

      5.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니산 월 14일 오후에 흠이 없는 1년된 수양이나 숫염소를 잡아야 한다 (출 12:5-6).

      6. 유월절 양으로 바친 제물은 니산 월 15일 밤에 먹어야 한다(출 12:8).

      7. 유월절에 먹는 양고기는 날로 먹거나 삶아 먹어서는 안된다(출 12:9).

      8. 유월절 양고기는 다음 날까지 남겨서는 안된다(출 12:10).

      9. 유월절에는 누룩을 제거해야 한다(출 12:15).

      10. 누룩없는 떡(무교병)을 니산 월 15일에 먹어야 한다(출 12:18).

      11. 유월절 기간동안에는 누룩으로 만든 떡을 먹어서는 안된다(출 12:19).

      12. 유월절에는 조금이라도 누룩이 섞인 떡을 먹지 말라(출 12:20).

      13. 변절한 유대인이나 이교도들은 유월절 양을 먹지 못한다(출 12:43).

      14. 임시로 거주하는 타국인이나 고용된 타국인 품꾼도 유월절 양을 먹지 못한다(출 12:43).

      15. 유월절 희생 양의 고기는 집 안에서만 먹어야 한다(출 12:46).

      16. 양고기의 뼈를 꺾어서는 안된다(출 12:46).

      17.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유월절 양을 먹지 못한다(출 12:48-49).

      18. 처음 난 것은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출 13:2).

      19. 유교병(누룩있는 떡)을 먹어서는 안된다(출 13:3).

      20. 유월절 이레동안에는 무교병을 먹고, 유교병이나 누룩을 다 없애야 한다(출 13:7)

      21.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유월절 저녁 식사 자리에서 출애굽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한다(출 13:8).

      22. 나귀의 첫새끼는 어린 양으로 대속해야 한다(출 13:13).

      23. 나귀를 양을 통해서 대속하지 않으려거든 그 목을 꺾어야 한다(출 13:13).

      24. 안식일에 걸을 수 있는 거리의 한계에 관한 규정(출 16:29).

      25.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다"(출 20:2).

      26.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출 20:3).

      27. 우상을 만들지 말라(출 20:4).

      28.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출 20:5).

      29. 우상을 섬기지 말라(출 20:5).

      30.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는 안된다(출 20:7).

      31. 안식일을 기억하라(출 20:8).

      32. 안식일에는 가족이나 종이나 객이라고 할지라도 아무 일도 시켜서는 안된다(출 20:10).

      33. 부모를 공경하라(출 20:12).

      34. 살인하지 말라(출 20:13).

      35. 간음하지 말라(출 20:14).

      36. 도적질하지 말라(출 20:15).

      37. 거짓 증거하지 말라(출 20:13).

      38. 탐내지 말라(출 20:17).

      39. 너희는 나밖에 다른 신들을 섬기려고, 은이나 금으로 신들의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출 20:23).

      40. 제단을 다듬은 돌로 만들어서는 안된다(출 20:24-25).

      41. 제단에 올라가는 층계를 놓아서는 안된다(출 20;26).

      42. "히브리 종은 일곱째 되는 해에 자유케 하라"(출 21:2).

      43. 종의 보호에 관한 규정.

      44. 주인이 아내로 취하려고 산 여종이 마음에 안 들면 다시 그녀의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내야 한다(출 21:8).

      45. 그녀를 다시 파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출 21:8).

      46. 여종을 아들에게 주려고 샀으면, 그녀를 딸처럼 대하여 한다(출 21:9).

      47. 사람을 때려서 죽인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출 21:12).

      48. 부모를 때리거나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출 21:15, 17).

      49. 이웃에게 상해를 입힌 경우에 관한 규정(출 21:18-19).

      50. 종을 상해하거나 죽였을 경우에 관한 규정(출 21:20-21).

      51. 소가 받아서 사람을 상해한 경우에 관한 규정(참조. 출 21:28-32, 35-36).

      52. 소가 사람을 받아서 죽인 경우에 관한 규정(출 21:28-32, 35-36).

      53. 구덩이에 짐승이 빠진 경우에 관한 규정(출 21:33-34).

      54. 도둑에 관한 규정(출 22:1-4).

      55. 남의 농작물을 가축이 뜯어먹은 경우에 관한 규정(출 22:5).

      56. 불을 내서 이웃의 농작물에 피해를 입힌 경우에 관한 규정(출 22:6).

      57. 보관물에 대한 규정(출 22:7 이하).

      58. 서로 소유권을 주장하는 경우에 관한 규정(출 22:9).

      59. 맡긴 집짐승이 다치거나 없어지거나 죽거나 맹수에게 물려 죽은 경우에 관한 규정(출 22:10-11).

      60. 빌려 온 짐승이 다치거나 죽었을 경우에 관한 규정(출 22:14-15).

      61. 처녀를 꾀어서 건드린 경우에 관한 규정(출 22:16-17).

      62. 마술을 부리는 여자는 살려 두어서는 안된다(출 22:18).

      63. 함께 살고 있는 나그네를 학대하지 말라(출 22:21).

      64. 그들을 억압하지 말라(출 22:21).

      65. 과부와 고아의 보호에 대한 규정(출 22:22-25).

      66. 필요한 사람에게는 돈을 빌려주어야 한다(출 22:25).

      67. 돈을 빌려주었으면 빚쟁이처럼 독촉을 하지 말아야 한다(출 22:25).

      68.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이자를 받아서는 안된다(출 22:25).

      69. 재판장에게 욕되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출 22:28).

      70. 하나님께 욕되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출 22:28).

      71. 지도자들에게 욕되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출 22:28).

      72. 첫 것을 바치는 것에 관한 규정(출 22:29-30).

      73. "들에서 맹수에게 찢겨 죽은 짐승의 고기를 먹지 말라"(출 22:31).

      74. "근거 없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출 23:1).

      75. "거짓 증언을 하여 죄인의 편을 들어서는 안된다"(출 23:1).

      76. "다수의 사람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에도 그들을 따라가서는 안된다"(출 23:2).

      77. 다수의 사람들이 정의를 굽게 하는 증언을 할 때에 그들을 따라가서는 안된다(출 23:2).

      78. 다수를 따라야 한다(출 23:2).

      79. "가난한 사람의 송사라고 해서 치우쳐서 두둔해서도 안된다"(출 23:6).

      80.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의 나귀가 짐에 울려 쓰러진 것을 보거든, 그것을 내버려두지 말고, 반드시 임자가 나귀를 일으켜 세우는 것을 도와주어야 한 다"(출 23:5).

      81. "너희는 가난한 사람의 송사라고 해서, 그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려서는 안된다"(출 23:6).

      82. "거짓 고발을 물리쳐라. 죄 없는 사람과 의로운 사람을 죽여서는 안된다"(출 23:7).

      83. "너희는 뇌물을 받아서는 안된다"(출 23;8).

      84. 안식년에는 농경지에 아무것도 심어서는 안된다.

      85.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된다.

      86. 다른 신들의 이름은 불러서도(기억해서도) 안된다(출 23:13).

      87. 다른 신들의 이름은 입밖에도 내서도 안된다(출 23:13).

      88. "너희는 한 해에 세 차례 나의 절기를 지켜야 한다"(출 23:14).

      89. "너희는 나에게 바치는 희생제물의 피를, 누룩을 넣은 빵과 함께 바쳐서는 안된다(출 23:18a; 34:25a).

      90. "절기 때에 나에게 바친 기름을 다음날 아침까지 남겨 두어서도 안된다"(출 23:18b; 34:25b).

      91. 첫 열매 중 가장 좋은 것으로 바쳐야 한다(출 23:19a; 34:26a).

      92. "너희는 새끼 염소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아서는 안된다"(출 23:19b; 34;26b).

      93. 팔레스타인의 7 민족과 언약을 맺어서는 안된다(출 23:23).

      94. 팔레스타인의 일곱 민족에 속한 사람들은 히브리인들과 더불어 살아가지 못하도록 하여야 한다(출 23:34).

      95. "나에게 제물을 바치려거든, 너희는 흙으로 제단을 쌓고, 그 위에다 번제물과 화목제물로 너희의 양과 소를 바쳐라. 너희가 나의 이름을 기억하고 예배하도록,내가 정하여 준 곳이면 어디든지, 내가 가서 너희에게 복을 주겠다"(출 20:24).

      96. "채들을 궤의 고리에 그대로 두고, 거기에서 빼내지 말아라"(출 25:15).

      97. "그 상은 언약궤 앞에 놓고, 상 위에는 나에게 바치는 거룩한 빵을 항상 놓아 두도록 하여라" (출 25:30).

      98. 증거궤 앞에 쳐 놓은 휘장 밖에 올리브 기름으로 등불을 밤에는 늘 켜 두어야 한다(출 27:21).

      99. 대제사장의 예복에 대한 규정(출 28:2).

      100. 가슴받이가 에봇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출 28:28).

      101. 대제사장이 입을 옷은 목을 위하여 파 놓은 구멍의 둘레를 찢어지지 않도록 튼튼하게 만들어야 한다(출 28:32).

      102. 제사장만이 속죄의 제물을 먹을 수 있다(출 29:33).

      103. 제사장은 아침 저녁으로 분향단 위에 향을 피워야 한다(출 30:7-8).

      104. 분향단 위에다가는 향기로운 향을 피우는 일 이외에는 어느 것도 해서는 안된다(출 30:9).

      105. 회막 세금에 관한 규정(출 30:13).

      106. 제사장은 회막에 들어가기 전에 손발을 반드시 물로 씻어야 한다(출 30:19-20).

      107. 성별하는 기름을 만드는 방법에 대한 규정(출 30:25)

      108. 성별하는 기름은 아무에게나 부어서는 안된다(출 30:32a).

      109. 성별하는 기름을 만드는 방법으로 똑같은 기름을 만들어서 다른 용도로 사용해서는 안된다(출 30:32b).

      110. 사사로이 쓰려고 유향을 만드는 방법과 똑같은 방법으로 향품을 만들어서는 안된다 (출 30:37).

      111. 우상숭배자들과 언약을 맺어서 그들이 우상에게 바친 제물들을 먹게 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출 34:15).

      112. 안식일에는 밭갈이하는 철이나 추수하는 철에도 일해서는 안된다(출 34:21).

      113. "새끼 염소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아서는 안된다"(출 34:26).

      114. 안식일에는 불을 피워서는 안된다(출 35:3).

      레위기 (115~361계명)

      115. 번제(burnt offering 또는 holocaust)에 대한 규례(레 1장).

      116. 곡식제물에 대한 규정(레 2장).

      117. 곡식제물에는 누룩이나 꿀이 들어 있어서는 안된다(레 2:11).

      118. 모든 곡식제물에는 소금이 빠져서는 안된다(레 2:13a).

      119. 어떤 제물에도 소금을 빠뜨려서는 안된다(레 2:13b).

      120. 이스라엘 온 회중이 산헤드린의 잘못된 결정으로 죄를 범하게 되면 속죄 제물을 드려야 한다(레 4:13).

      121. 개인이 실수를 한 경우에도 속죄제물을 바쳐야 한다(레 4:27-28).

      122. 증인이 자기가 본 것이나 알고 있는 것을 사실대로 증언하지 않고 은닉하면 거기에 책임을 져야 한다(레 5:1).

      123. 속죄제물을 바쳐야 하는 경우

      124. 새를 속죄제물로 가져오면 그것은 다른 짐승을 제물로 가져온 경우와는 달리,제물을 바친 사람이 잡지 않고 제사장이 직접 그것의 목을 비틀어서 잡아야 하는데, 이 때 목이 떨어지게 해서는 안된다(레 5:8).

      125. 가난하여 속죄제물로 짐승이나 새를 바칠 수 없는 경우에는 밀가루를 바칠 수 있으나,이 때 제사장은 거기에 기름을 섞어서는 안된다(레 5:11).

      126. 또한 거기에 향을 얹어서도 안된다(레 5:11).

      127. 제물을 바치다가 실수하여 죄를 범하면 바친 것의 20 %에 해당하는 벌금을 지불해야 한다(레 5:15-16).

      128. 부정적인 계명(금지 계명)을 실수로 어긴 경우에도 속건제물을 바쳐야 한다(레 5:17-18).

      129. 다른 사람의 물건을 불의하게 취한 경우에 관한 규정(레 6:1-5).

      130. 남의 물건을 불의한 방법으로 취한 자는 모두 물어내야 한다(레 6:5).

      131. 제단의 재에 대한 규례(레 6:10-11)

      132. 제단의 불은 항상 피워져 있어야 한다(레 6:12).

      133. 제단의 불을 꺼뜨려서는 안된다(레 6:12).

      134. 곡식제물을 드리고 난 나머지는 제사장이 먹어야 한다(레 6:16).

      135. 제사장은 곡식제물에 누룩을 넣고 구워서는 안된다(레 6:17).

      136. 대제사장도 다른 사람들처럼 곡식제물로 밀가루를 드려야 하는데, 그는 매일마다 그래야 했으며, 그것으로 아침 저녁 빵을 구워 바쳐야 한다(레 6:20 이하).

      137. 제사장이 드리는 곡식제물은 아무도 먹지 못한다. 그것은 다 태워 버려야 한다(레 6:23).

      138. 속죄제물은 번제물을 드리는 장소에서 드려야 한다(레 6:25 이하).

      139. 성소에서 속죄해 주려고 제물의 피를 회막 안으로 가져왔을 때에는, 어떤 속죄제물도 먹어서는 안된다(레 6:30).

      140. 속건제물을 드릴 때의 규례(레 7:1 이하).

      141. 감사의 뜻으로 화목제물을 바치는 경우에는 빵을 곁들여 바쳐야 한다(레 7:11-12).

      142. 화목제물로 드린 것 가운데 감사제물로 바친 고기는 그 날로 먹어야 하며 다음 날까지 남겨서는 안된다(레 7:15).

      143. 화목제물로 드린 것 가운데 서원제물이나 자원제물로 바친 고기는 이틀째 되는 날까지 다 먹어야 하며, 사흘째 되는 날까지 그 희생제물이 남아 있으면, 불살라야 한다(레 7:17).

      144. 어떤 종류의 것이든(감사제물, 서원제물, 자원제물) 화목제물로 드린 고기 중 사흘째 되는 날까지 남은 것을 먹어서는 안된다(레 7:18).

      145. 어떤 종류의 화목제물이든 불결한 것에 닿은 고기는 먹지 말아야 한다(레 7:19a).

      146. 그리고 그것은 불에 태워야 한다(레 7:19b).

      147. 동물의 기름기는 먹지 못한다(레 7:23).

      148. 어떤 피든지 먹어서는 안된다(레 7:26).

      149. 제사장은 머리를 풀어서는 안된다(레 10:6),

      150. 그는 옷을 찢어 애도를 해서도 안된다(레 10:6).

      151. 제사장은 성전(성소)에서 일하는 동안은 밖으로 나가서는 안된다(레 10:7).

      152. 제사장은 성전(성소)에 들어가기 전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셔서는 안 된다(레 10:9, 11).

      153. 땅에서 사는 짐승들 가운데 새김질을 하면서 동시에 굽이 갈라진 것만 먹을 수 있다(레11:2-4, 7).

      154. 낙타, 오소리, 토끼, 돼지 등과 같이 새김질을 하지 않거나 굽이 갈라지지 않은 짐승은 먹지 못한다(레 11:4).

      155. 물 속에서 사는 동물 중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은 먹을 수 있다(레 11:9,12).

      156. 그러나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것은 먹지 말아야 한다(레 11:12).

      157. 새 가운데서 먹지 말아야 할 것(레 11:13).

      158. 곤충 가운데서 네 발로 걷는 날개 달린 것들은 먹지 못한다(레 11:21).

      159. 길짐승에 대한 규정(레 11:29 이하).

      160. 요리가 된 젖은 음식에 죽은 길짐승이 닿으면 그것은 먹어서는 안된다(레11:34).

      161. 먹을 수 있는 짐승이라도, 그 주검을 만진 자는 저녁 때까지 부정하다(레11:39).

      162. 땅에 기어다니는 길짐승은 먹지 말아야 한다(레 11:41-42).

      163. 과일이나 채소에 붙어사는 벌레는 먹지 알아야 한다(레 11:41-42).

      164. 물 속에 기어다니는 것들도 먹어서는 안된다(레 11:46).

      165. 흙에서 생긴 벌레는 먹지 말아야 한다(레 11:44).

      166. 산모의 정결 예식에 관한 규정(레 12:1 이하).

      167. 제의적으로 부정하게 된 사람은 거룩한 음식을 먹을 수 없다(레 2:6).

      168. 아이를 낳은 여인이 정결 예식을 위해 바쳐야 할 제물(레 12:6-8).

      169. 제사장이 나병의 여부를 확인하여야 한다(레 13:2).

      170. 백선이 머리나 턱에 생긴 경우, 백선이 난 자리만 빼고 털을 민 다음에, 백선이 생긴 그 환자를 이레 동안 격리시켜야 한다(레 13:33).

      171. 악성 피부병에 걸린 사람은 입은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야 하며, "부정하다, 부정하다" 외쳐야 한다(레 13:45).

      172. 천이나 가죽 제품에 곰팡이가 생긴 경우에 관한 규정(레 13:47-59).

      173. 악성 피부병이 나은 경우에도 제사장이 확인을 해야 한다(레 14:2, 3).

      174. 악성 피부병이 나은 사람은 이레 후에 모든 털을 다 밀어야 한다(레 14:9).

      175. 또한 그는 옷을 빨고 목욕을 해야 한다(레 14:9).

      176. 악성 피부병을 고침 받은 사람이 바쳐야 할 제물(레 14:10 이하).

      177. 건물에 생기는 악성 곰팡이에 관한 규정(레 14:34 이하).

      178. 성기에서 고름이 계속 흐르는 남자는 부정한 사람이며, 그와 접촉하는 모든 물건이나 사람도 부정하게 된다(레 15:1-12).

      179. 고름이 멎은 경우에는 정결례를 행해야 한다(레 15:13-15).

      180. 남자가 실수로 정액을 흘린 경우에 관한 규정(레 15:16-18).

      181. 월경에 관한 규정(레 15:19 이하).

      182. 여자가 계속 피를 흘리면 부정하게 여겨야 하며, 그녀와 접촉하는 사람도 부정하게 된다(레 15:2 이하).

      183. 그녀의 병이 다 난 다음에는 정결례를 행해야 한다(레 15:25 이하).

      184. 보통 때는 지성소에 들어가서는 안된다(레 16:2).

      185. 속죄일에 드리는 제사에 관한 규정(레 16 장).

      186. 희생제물은 성전(성소)에서만 드려야 한다(레 17:3-4).

      187. 짐승의 피는 땅에 묻어야 한다(레 17:13).

      188. 가까운 살붙이의 몸을 범하면 안된다(레 18:6).

      189. 아버지의 몸을 범하면 안된다(레 18:7).

      190. 어머니의 몸을 범하면 안된다(레 18:7).

      191. 아버지가 데리고 사는 여자의 몸을 범하면 안된다(레 18:8).

      192. 누이의 몸을 범하면 안된다. 누이가 아버지의 딸이든지 어머니의 딸이든지 그녀를 범하면 안 된다(레 18:9).

      193. 손녀나 외손녀의 몸을 범하면 안된다(레 18;10).

      194. 아버지가 낳은 딸의 몸을 범하면 안된다(레 18:10).

      195. 딸의 몸을 범하면 안된다(참조. 레 18:10).

      196. 아버지가 데리고 사는 여자가 낳은 딸을 범해서는 안된다. 즉 배다른 누이를 범해서는 안된다(레 18:11).

      197. 고모의 몸을 범해서는 안된다(레 18:12).

      198. 이모의 몸을 범해서는 안된다(레 18:13).

      199. 숙모의 몸을 범해서는 안된다(레 18:14).

      200. 숙모의 몸을 범하는 것은 삼촌을 부끄럽게 하는 것이다(레 18:14).

      201. 며느리의 몸을 범해서는 안된다(레 18:15).

      202. 형수나 제수의 몸을 범해서는 안된다(레 18:16).

      203. 데리고 사는 여자의 딸의 몸을 범해서는 안된다(레 18:17).

      204. 데리고 사는 여자의 손녀의 몸을 범해서는 안된다(레 18;17).

      205. 데리고 사는 여자의 외손녀의 몸을 범해서는 안된다(레 18:17).

      206. 아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내의 형제들을 첩으로 데려다가 살아서는 안된다(레 18:18).

      207. 여자가 월경을 하는 경우에는 그녀와 동침해서는 안된다(레 18:19).

      208. 자녀를 몰렉에게 바쳐서는 안된다(레 18:21).

      209. 동성 연애 금지에 관한 규정(레 18:22)

      210. 남자들은 짐승과 교접해서는 안된다(레 18:23).

      211. 여자들도 짐승과 교접해서는 안된다(레 18:23).

      212. 부모를 두려워하라(레 19:3).

      213. 우상들을 의지하지 말라(레 19:4).

      214. 쇠를 녹여 신상을 만들어서도 안된다(레 19:4).

      215. 제물로 바친 것들은 그 날로 다 먹어야 한다(레 19:6).

      216. 농작물이나 과수를 거두어들일 때 조금은 남겨 두어야 하며(레 19:9-10),

      217. 그것들을 다 거두어들여서는 안된다(레 19:9-10).

      218. 농작물을 거두어들일 때 조금은 남겨 두어야 하며(레 19:9),

      219. 그것을 다 거두어들여서는 안된다(레 19:9).

      220. 포도원의 포도를 조금은 남겨 두어야 하며(레 19:10),

      221. 그것을 다 거두어들여서는 안된다(레 19:10).

      222. 포도밭에 떨어진 포도는 그대로 남겨 두어야 하며(레 19:10),

      223. 그것을 다 주워서는 안된다(레 19:10).

      224. 훔치지 말라(레 19:11).

      225. 사기하지 말라(레 19:11).

      226. 속이지 말라(레 19:11).

      227. 거짓 맹세를 하지 말아야 한다(레 19:12).

      228. 이웃을 억누르지 말아야 한다(레 19:13).

      229. 이웃의 것을 빼앗지 말아야 한다(레 19:13).

      230. 품삯은 그날로 지불해야 한다(레 19:13).

      231. "듣지 못하는 사람을 저주해서는 안된다"(레 19:14).

      232. "눈이 먼 사람 앞에 걸려 넘어질 것을 놓아서는 안된다"(레 19:14).

      233. 재판관은 공정하지 못한 재판을 해서는 안된다(레 19:15).

      234. 누구도 편들어서는 안된다(레 19:15).

      235. 그는 반드시 공정한 재판만을 해야 한다(레 19:15).

      236. "남을 헐뜯는 말을 하고 다녀서는 안된다"(레 19:16a).

      237. 이웃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레 19:16b).

      238. "미워하는 마음을 품어서는 안된다"(레 19:17a).

      239. 이웃이 잘못을 하면, 반드시 그를 타일러야 한다(레 19:17b).

      240. 그리고 이렇게 하는데 있어서 그를 부끄럽게 해서는 안된다(참조. 레19:17a).

      241. 이스라엘 백성끼리 원수를 갚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며(레 19:18a),

      242. 앙심을 품어서는 안된다(레 19:18a).

      243.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레 19:18b).

      244. 가축 가운데서 다른 종류끼리 교미시켜서는 안된다(레 19:19).

      245. 밭에다가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씨앗을 함께 뿌려서는 안된다(레 19:19).

      246. "할례 받지 못한" 과일에 관한 규정(레 19:23)

      247. "거룩한 과일"에 관한 규정(레 19:24)

      248. 피째로 먹어서는 안된다(레 19:26).

      249. 점을 쳐서도 안 되며(레 19:26),

      250. 마법을 써서도 안된다(레 19:26).

      251. 관자놀이의 머리를 둥글게 깎아서는 안된다(레 19:27).

      252. 구레나룻을 밀어서는 안된다(레 19:27).

      253. 몸에 문신을 새겨서는 안된다(레 19:28).

      254. 성소를 속되게 하지 말라(레 19:30).

      255. 혼백을 불러내는 사람에게 가지 말아야 한다(레 19:31).

      256. 점을 치는 사람에게 가서도 안된다(레 19:31; 20:6).

      257. 어른을 공경하라(레 19:32).

      258. 길이나 무게나 양을 잴 때에 바른 기구를 사용하여야 한다(레 19:35).

      259. 그리고 정확하게 재야 한다(레 19:36).

      260. 부모를 저주하는 자는 사형에 처해야 한다(레 20:9).

      261. 남자가 그의 아내와 장모를 함께 취하면 그들은 모두 화형에 처해야 한다(레20:14).

      262. 이교도들의 풍속을 따르지 말라(레 20:23).

      263. 제사장이 주검을 만져 자신을 더럽혀서는 안된다.

      264. 그러나 가족의 주검은 만질 수 있다(제 264 계명; 레 21:1-4).

      265. 주검을 만져 부정하게 된 제사장은 제의적인 목욕을 한 뒤 그날 저녁에는 제사 음식을 먹을 수 있다(레 21:6; 22:7).

      266. 제사장은 창녀와 결혼해서는 안된다(레 21:14-15).

      267. 제사장은 부정한 여자와 결혼해서도 안된다(레 21:7).

      268. 제사장은 이혼한 여자와 결혼해서도 안된다(레 21:7).

      269. 제사장을 거룩하게 여겨야 한다(레 21:8).

      270. 대제사장은 어떤 주검에도 가까이 가서는 안된다(레 21:11).

      271. 대제사장은 가족의 주검에도 가까이 가서는 안된다(레 21:11).

      272 대제사장은 처녀와만 결혼해야 한다(레 21:13).

      273. 대제사장은 과부와 결혼해서는 안된다(레 21:14).

      274. 대제사장은 이혼한 여자와 결혼해서도 안된다(레 21:14).

      275. 아론의 후손 가운데 몸에(영구적인)흠이 있는 사람은 제사를 드리는 일을 할 수 없다(레 21:17).

      276. 일시적인 흠이 있는 제사장도 그것이 날 때까지는 제사 드리는 일을 할 수가 없다(참조. 레 21:17).

      277. 또한 이러한 사람들은 휘장 안으로 들어가거나 제단에 가까이 나아갈 수 없다(레 21:23).

      278. 부정하게 된 제사장은 제사를 드릴 수 없다(참조. 레 22:2).

      279. 그는 성물(聖物)을 먹을 수 없다(레 22:4).

      280. 제사장이 아닌 여느 사람들은 성물을 먹을 수 없다(레 22:10).

      281. 제사장이 데리고 있는 나그네나 품꾼도 성물을 먹을 수가 없다(레 22:10).

      282. 할례 받지 않은 제사장은 성물을 먹을 수 없다(참조. 레 22:10 이하).

      283. 제사장의 딸이더라도 여느 남자에게로 시집 간 사람은 성물을 먹을 수 없다(레22:12).

      284. "테벨"(tevel)은 먹지 말아야 한다(참조. 레 22:16).

      285. 흠있는 짐승을 거룩하게 해서는 안된다(레 22:19).

      286. 모든 제물은 흠이 없는 것이라야 한다(레 22:20-21).

      287. 제물에 흠이 생기게 해서는 안된다(레 22:21).

      288. 흠이 있는 짐승의 피를 제단에 뿌려서는 안된다(레 22:22).

      289. 흠이 있는 짐승을 잡아서는 안된다(레 22:22).

      290. 흠이 있는 짐승의 내장을 불살라서는 안된다(레 22:22).

      291. 거세(去勢)해서는 안된다(레 22:24).

      292. 이방인이라도 흠이 없는 짐승을 바쳐야 한다(레 22:25).

      293. 제물로 바치는 짐승은 난지 여드레가 지난 것이라야 된다(레 22:27).

      294. 제물로 짐승을 바칠 때, 어미와 새끼를 같은 날 잡아서는 안된다(레 22:28).

      295.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해서는 안된다(레 22:32).

      296.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해야 한다(레 22:32).

      297. 유월절 첫날은 쉬어야 한다(레 23:7).

      298. 유월절 첫 날은 생업을 위하여 일해서는 안된다(레 23:7).

      299. 유월절 기간 동안에는 계속 번제를 드려야 한다(레 23:8).

      300. 유월절 기간중 이레째 되는 날에는 다시 쉬어야 한다(레 23:8).

      301. 그날은 생업을 위해서 일해서는 안된다(레 23:8).

      302. 유월절 둘째 날에는 첫 곡식단을 제사장에게 가져가야 하고 제사장은 그것을 흔들어 바쳐야 한다(레 23:10).

      303. 첫 곡식 단을 바치기 전에는 거두어들인 곡식을 아무것도 먹어서는 안된다(레23:14).

      304. 첫 곡식 단을 바치기 전에는 볶은 곡식도 먹어서는 안된다(레 23:14).

      305. 또한 햇곡식도 먹어서는 안된다(레 23:14).

      306. 곡식단을 흔들어 바친 그 날부터 49일이 되는 때까지 매일매일 날을 세어야 한다(레 23:15).

      307. 오순절에는 햇곡식으로 만든 빵 두개를 바쳐야 한다(레 23:17).

      308. 오순절에는 쉬어야 한다(레 23:21).

      309. 오순절에는 생업을 위해 어떤 일도 해서는 안된다(레 23:21).

      310. 새해 첫날(일곱째달 초하루)은 쉬어야 한다(레 23:24).

      311. 새해 첫 날에는 일해서는 안된다(레 23:25).

      312. 새해 첫날은 살라 바치는 제물을 드려야 한다(레 23:25).

      313. 속죄일에는 금식해야 한다(레 23:27).

      314. 속죄일에는 살라 바치는 제물을 드려야 한다(레 23:27).

      315. 속죄일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된다(레 23:28).

      316. 속죄일에는 어떤 것도 먹거나 마셔서는 안된다(레 23:29).

      317. 속죄일에는 쉬어야 한다(레 23:32).

      318. 초막절 첫날에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레 23:35).

      319. 초막절에는 어떤 종류의 일을 해서도 안된다(레 23:35).

      320. 초막절 절기 동안 매일 살라 바치는 제물을 드려야 한다(레 23:36).

      321. 초막절 여드레째 되는 날에는 쉬어야 한다(레 23:36).

      322. 초막절 여드레째 되는 날에는 살라 바치는 제물을 드려야 한다(레 23:36).

      323. 초막절 여드레째 되는 날에는 생업을 위해 일해서는 안된다(레 23:37).

      324. 초막절 첫날에는 좋은 나무에서 난 열매와 종려나무 가지, 무성한 나뭇가지, 갯버들을 가져와야 한다(레 23:40).

      325. 초막절 기간에는 이레 동안 초막에서 지내야 한다(레 23:42).

      326. 안식일에는 땅을 놀려야 한다(레 25:4).

      327. 안식년에는 포도원을 가꾸어서도 안된다(레 25:4).

      328. 안식년에 저절로 열린 곡식들도 거두어 드려서는 안된다(레 25:5).

      329. 안식년에는 저절로 열린 과실들도 거두어 드려서는 안된다(레 25:5).

      330. 안식년을 일곱번 세어야 한다(레 25:8).

      331. 속죄일에는 뿔나팔을 불어야 한다(레 25:9).

      332. 50년째 되는 해(희년)를 거룩히 여기라(레 25:10).

      333. 희년에는 심거나 거두어서는 안된다(레 25:11).

      334. 희년에는 저절로 열린 포도를 거두어들여서도 안된다(레 25:11).

      335. 희년에는 저절로 맺힌 열매를 필요 이상으로 거두어들여서는 안된다.

      336. 무엇을 사거나 팔 때에 부당한 이익을 남겨서는 안된다(레 25:14).

      337. 속이지 말라(레 25:14).

      338. 말을 함부로 하여 이웃에게 상처를 주어서는 안된다(레 25:17).

      339.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한다(레 25:23).

      340. 희년에는 땅을 본래의 주인에게로 돌려주어야 한다(레 25:24).

      341. 성곽 안에 있는 집을 판 경우에는 일년 안에는 언제든지 다시 살 수 있지만, 일년이 지나면 그렇게 할 수 없다. 희년이 되어도 집은 본래의 주인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레25:29, 30).

      342. 레위 사람의 땅과 집에 관한 규정(레 25:32-34).

      343. 가난한 사람에게서 이자를 취해서는 안된다(레 25:36, 37).

      344. 가난하여 종이 된 동족(同族)에 대해서는 노예 부리듯 해서는 안된다(레25:39).

      345. 동족인 종은 팔 수 없다(레 25:42).

      346. 동족인 종을 심하게 부려서는 안된다(레 25:43).

      347. 종이 가나안 사람인 경우에는 그를 영원히 부릴 수 있다(레 25:46).

      348. 이교도들에게 동족이 종으로 팔려 갔으면, 값을 치르고 그를 다시 되돌려와야 한다(레 25:53).

      349. 조각한 석상에게 절을 해서는 안된다(레 26:1).

      350. 하나님께 사람을 바치기로 서원해 놓고 돈으로 바치는 경우에 관한 규정(레 27:2-9).

      351. 제물은 바꿔치기 할 수 없다(레 27:10).

      352. 바꿔치기한 제물은 본래의 제물과 바꿔치기한 제물 둘 다를 드려야 한다(레 27:10).

      353. 제물로 바치기로 했던 짐승 대신에 돈으로 바칠 경우에 대한 규정(레 27:9-14)

      354. 주께 바치기로 한 (또는 바친) 집 대신에 돈으로 바칠 경우에 관한 규정(레 27:14).

      355. 주께 바치기로 한 (또는 바친) 땅 대신에 돈으로 바칠 경우에 대한 규정(레 27:16).

      356. 짐승의 맏배 대신 더 좋은 것이라 하여 다른 것을 바쳐서는 안된다(레 27:26).

      357. 주께 바친 것은 무를 수 없다(레 27:28).

      358. 주께 바친 땅은 팔 수 없다(레 27:28).

      359. 주께 바친 땅은 무를 수도 없다(레 27:28).

      360. 가축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에 관한 규정(레 27:32).

      361. 십일조로 드려야 할 가축을 팔아서는 안된다(레 27:33).

      민수기 (362 - 413계명)

      362. 악성 피부병 환자와 고름을 흘리는 사람과 주검에 닿아 부정을 탄 사람은 모두 진에서 내보내야 한다(민 5:2).

      363. 하나님이 머물고 계신 진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민 5:3).

      364. 남에게 잘못을 한 사람은 그가 저지른 잘못을 고백하고 피해자에게 배상을 해야 한다(민 5:6,7).

      365. 아내의 간통을 밝히는 절차에 관한 규정(민 5:12-28).

      366. 아내의 간통을 밝히기 위해 바치는 제물에는 기름을 부을 필요가 없다(민 5:15).

      367. 그 제물에는 향을 얹을 필요도 없다(민 5:15).

      368. 나실 사람은 포도주와 독한 술을 삼가야 한다(민 6:3).

      369. 나실 사람은 포도를 먹어서는 안된다(민 6:3).

      370. 그는 마른 포도를 먹어서도 안된다(민 6:3).

      371. 나실 사람은 포도 씨를 먹어서도 안된다(민 6:4).

      372. 그는 포도 껍질을 먹어서도 안된다(민 6:4).

      373. 나실 사람은 머리를 깎아서는 안된다(민 6:5).

      374. 그는 머리를 길게 자라게 내버려두어야 한다(민 6:5).

      375. 나실 사람은 죽은 사람이 있는 방에 들어가서는 안된다(민 6:6).

      376. 그는 가족이 죽었을 때에도 죽은 사람이 있는 방에 들어갈 수 없다 (민 6:7).

      377. 나실 사람은 서약 기간이 끝나면 머리를 자르고 제물을 바쳐야 한다(민 6:13-14).

      378. 제사장은 매일마다 이스라엘을 축복해야 한다(민 6:23).

      379. 법궤는 제사장이 어깨에 메고 옮겨야 한다(민 7:9).

      380. 유월절을 지키지 못한 사람은 한 달 후에 다시 지켜야 한다(민 9:10).

      381. "두 번째 유월절"(또는 "작은 유월절")을 지키는 사람들은 누룩을 먹지 않고 만든 빵과 쓴 나물과 함께 유월절 양을 먹어야 한다(민 9:11).

      382. 그들은 다음 날 아침까지는 아무것도 남겨서는 안된다(민 9:12).

      383. 희생 양의 뼈를 부러뜨려서는 안된다(민 9:12).

      384. 성소에서는 날마다 나팔을 불어야 한다(민 10:8).

      385. 처음 거두어들인 곡식으로 만든 과자를 제사장에게 헌납물로 드려야 한다(민 15:18-20).

      386. 옷자락 끝에 술을 만들어 달아야 한다(민 15:38).

      387. 마음 내키는 대로 따라가거나 눈에 좋은 대로 따라가지 말아야 한다(민 15:39).

      388. 제사장과 레위인은 성소를 지켜야(보호해야) 한다(민 18:4).

      389. 제사장과 레위인은 각각 각자가 할 일을 해야 한다(민 4:19)

      390. 아무나 성소에서 일해서는 안된다(민 18:4, 22).

      391. 일반 사람이 성소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지켜야 한다(민 18:40).

      392. 짐승의 맏배는 제사장의 몫으로 바쳐야 하되, 사람과 부정한 짐승 가운데 처음 난 것들은 그것을 바치는 대신에 속전을 바쳐야 한다(민 18:15, 16)

      393. 정결한 짐승의 맏배는 속전을 받고 돌려주어서는 안된다(민 18:15).

      394. 회막 일은 레위인이 하여야 한다(민 18:23).

      395. 십일조는 레위인에게 돌아간다(민 18:24).

      396. 레위인도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민 18:26).

      397. 붉은 암송아지에 관한 규례(민 19:2).

      398. 죽은 사람이 있는 곳에 들어가는 사람은 부정을 타게 된다(민 19:14).

      399. 부정을 탄 사람은 물로 정결하게 하여야 한다(민 19:20).

      400. 아들이 없는 경우에는 딸에게 유산을 상속하여야 한다(민 27:8).

      401. 번제로는 날마다 아침과 저녁으로 1년된 숫양 한 마리씩 바쳐야 한다(민 28:3).

      402. 안식일에도 평상시와 같이 번제를 드려야 한다(민 28:9).

      403. 매달 초하루에는 수송아지 두 마리, 숫양 한 마리, 일년된 숫양 일곱 마리를 번제로 바쳐야 한다(민 28:11).

      404. 오순절(칠칠절)에 드려야 할 제물(민 28:26-31).

      405. 신년(새해)에는 나팔을 불어야 한다(민 29:1).

      406. 서약이 효력이 없어지게 되는 경우에 관한 규정(민 30:3-9).

      407. 서약한 것은 지켜야 한다(민 30:2).

      408. 레위 사람에게 그들이 거할 성읍을 주어야 한다(민 35:2, 7).

      409. 사람을 죽인 자를 그 자리에서 죽이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민 35:12).

      410. 살인 혐의자를 도피성에 보내는 것에 관한 규정(민 35:25).

      411. 살인 사건의 경우에는 혐의자에게 사형을 내리기 위해서는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한다(민 35:30).

      412. 살인자를 돈을 받고 목숨을 살려주어서는 안 된다(민 35:31).

      413. 대제사장이 죽기 전에, 도피성으로 피한 사람에게서 속전을 받고 그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서 살게 해서는 안 된다(민 35:32, 33).

      신명기 (414 - 613계명)

      414. 토라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재판관이 될 수가 없다(신 1:17).

      415. 재판관은 아무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신 1:17).

      416. 다른 사람의 것을 탐내서는 안된다(신 5:21).

      417. 하나님은 한 분이심을 선언하는 것에 관한 규정(신 6:4).

      418. 하나님을 사랑하라(신 6:5).

      419. 자녀에게 부지런히 주의 규례와 법도를 가르쳐라(신 6:7).

      420. 매일 쉐마를 암송하라(신 6:7).

      421. 경문(테필린)을 손에 매라(신 6:8).

      422. 경문(테필린)을 이마에도 붙이라(신 6:8).

      423. 집 문설주와 대문에 메주라(mezura)를 붙여라(신 6:9).

      424. 하나님과 예언자를 시험해서는 안된다(신 6:16).

      425. 가나안의 7 민족을 진멸해야 한다(신 7:2).

      426.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말라(신 7:2).

      427. 가나안의 7 민족과 결혼해서는 안된다(신 7:3).

      428. 이교도들의 신상을 불태우고, 그 위에 입힌 보석들을 탐내서는 안 된다(신7:25).

      429. 하나님이 증오하시는 것들을 집 안에 끌어들여서는 안된다(신 7:26).

      430. 먹을 것을 주신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들 드려야 한다(신 8:10).

      431. 나그네를 사랑해야 한다(신 10:19).

      432.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라(신 10:20).

      433. 하나님을 섬기라(신 10:20).

      434. 하나님에게만 가까이하라(신 10:20).

      435. 맹세할 일이 있으면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맹세하라(신 10:20).

      436. 이교도들이 신을 섬기는 장소는 어느 곳이나 다 허물어야 한다(신 12:2).

      437. 거룩한 것들을 없애서는 안된다(신 12:4).

      438. 예루살렘에 절기를 지키러 갈 때 제물을 가지고 가야 한다(신 12:6).

      439. 번제는 성전에서만 드려야 한다(신 12:13).

      440. 다른 모든 제물도 마찬가지로 성전에서만 드려야 한다(신 12:14).

      441. 마음에 원하는 대로 짐승의 고기를 성 안에서 먹을 수 있다(신 12:15).

      442. "두 번째 십일조"로 바친 곡식은 예루살렘 밖에서 먹어서는 안 된다(신 12:17).

      443. "두 번째 십일조"로 바친 포도주를 마셔서도 안된다(신 12:17).

      444. 기름도 마찬가지이다(신 12:17).

      445. 소와 양의 처음 난 것도 예루살렘 밖에서 먹어서는 안된다(신 12:17).

      446. 속죄제나 속건제로 드린 것도 성전 밖에서 먹어서는 안된다(신 12:17).

      447. 번제물로 드린 것은 먹어서는 안된다(신 12:17).

      448. 제물의 피를 뿌리기 전에 고기를 먹어서는 안된다(신 12:17).

      449. 첫열매로 바친 것은 일반 사람이 먹어서는 안된다(신 12;17).

      450. 레위 사람을 저버려서는 안된다(신 12:19).

      451. 짐승을 잡는 것에 관한 규정(신 12:20, 21).

      452. 산 짐승의 신체 중 일부를 먹어서는 안된다(신 12:23).

      453. 제물은 성전으로 가져가야 한다(신 12:26).

      454. 토라에 하나라도 더해서는 안된다(신 12:32).

      455. 토라에서 하나라도 빼서는 안된다(신 12:32).

      456. 우상의 이름으로 예언하는 자에게 귀를 기울이지 말라(신 13:1).

      457. 유혹하는 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신 13:7-10).

      458. 이방 신에게로 유혹하는 자를 증오하라(신 13:9).

      459. 그들을 죽여야 한다(신 13:9).

      460. 그들을 감싸주어서도 안된다(신 13:9).

      461. 그들의 잘못에 대하여 숨겨서도 안된다(신 13:9).

      462. 우상을 숭배하게 하는 자는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신 13:10).

      463. 우상을 숭배하게 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자세히 조사하고 잘 알아보아야 한다(신 13:14).

      464. 하나님을 섬기다가 우상에게로 빠진 성읍은 불살라야 한다(신 13:15).

      465. 그런 성읍은 다시 세워서도 안된다(신 13:16).

      466. 그 성읍에서 어떤 물건도 취해서는 안된다(신 13:17).

      467. 스스로 몸에 상처를 내서는 안된다(신 14:1).

      468. 죽은 사람을 애도한다고 머리를 밀어서는 안된다(신 14:1).

      469. 부정한 것은 먹어서는 안된다(신 14:3).

      470. 새는 그것이 정한 것인지 알아보고 먹어야 한다(신 14:11).

      471. 날개 달린 기어다니는 곤충은 먹어서는 안된다(신 14:19).

      472. 저절로 죽은 것을 먹어서는 안된다(신 14:21).

      473. "두 번째 십일조"에 관한 규정(신 14:23-27).

      474. 가난한 자를 위한 십일조에 관한 규정(신 14:28-29).

      475. 안식년에는 동족(同族) 유대인의 빚을 삭쳐 주어야 한다(신 15:2).

      476. 안식년이라도 이방인에게 준 빚은 받아야 한다(신 15:3a).

      477. 안식년에는 유대 동족의 빚을 삭쳐 주어야 한다(신 15:3b).

      478. 가난한 동족에게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신 15:7).

      479. 기쁜 마음으로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신 15:8).

      480. 안식년이 가까온다고 돈을 꾸어 주지 않으면 안된다(신 15:9).

      481. 종을 놓아줄 때에는 빈 손으로 보내서는 안된다(신 15:13).

      482. 그들에게 넉넉히 주어 내보내야 한다(신 15:14).

      483. 하나님께 바칠 짐승의 맏배를 부려서는 안된다(신 15:19a).

      484. 제단에 바칠 첫새끼 양의 털을 깎아서도 안된다(신 15:19b).

      485. 니산 월 정오가 지나서는 누룩이 들어 있는 빵을 먹어서는 안된다(신 16:3).

      486. 유월절 양의 고기를 다음 날까지 남겨서는 안된다(신 16:4).

      487. 유월절 양을 성전 이외의 곳에서 바쳐서는 안된다(신 16:5).

      488. 3대 절기는 기쁨으로 지켜야 한다(신 16:14).

      489. 모든 성인 남자는 일년에 세 차례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한다(신 16:16).

      490. 제물이 없이 성전에 올라가서는 안된다(신 16:16).

      491. 모든 성읍에는 재판관이 있어야 한다(신 16:18).

      492. 성전에는 나무를 심어서는 안된다(신 16:21).

      493. 어느 곳에도 석상을 만들어 세워서는 안된다(신 16:22).

      494. 흠있는 짐승을 제물로 바쳐서는 안된다(신 17:1).

      495. 산헤드린의 결정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신 17:10).

      496. 전통을 무시해서는 안된다(신 17:11).

      497. 이스라엘의 왕은 산헤드린에서 임명받아야 한다(신 17:15a).

      498. 외국 사람을 왕으로 세워서는 안된다(신 17:15b).

      499. 왕은 군마를 필요 이상으로 가져서는 안된다(신 17:16a).

      500. 왕은 이집트로 내려가서는 안된다(신 17:16b).

      501. 왕은 아내를 많이 두어서는 안된다(신 17:17a).

      502. 왕은 재물을 너무 많이 가져서는 안된다(신 17:17b).

      503. 왕은 율법 책을 복사해야 한다(신 17:18, 19).

      504. 레위 지파는 땅을 유산으로 이어받지 못한다(신 18:1).

      505. 레위 지파는 전리품을 취할 수 없다(신 18:1).

      506. 제사장은 제물의 특별한 부위들을 가질 수 있다(신 18:3).

      507. 처음 거둔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은 제사장에게 주어야 한다(신 18:4).

      508. 처음 깎은 양털도 제사장에게 주어야 한다(신 18:4).

      509. 각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각기 다른 시간에 일해야 한다(신 18:6-8).

      510. 점쟁이를 용납해서는 안된다(제 510 계명).

      511. 복술객을 용납해서는 안된다(신 18:10).

      512. 주문을 외는 사람을 용납해서는 안된다(신 18:10).

      513. 마법사를 용납해서는 안된다(신 18:10).

      514. 마술하는 사람을 용납해서는 안된다(신 18:10).

      515. 죽은 사람에게 물어 보는 사람을 용납해서는 안된다(신 18:10-11).

      516. 예언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신 18:15).

      517. 거짓 예언자를 삼가라(신 18:20).

      518. 우상의 이름으로 예언해서는 안된다(신 18:20).

      519. 거짓 예언자는 죽여야 한다(신 18:22).

      520. 여섯 개의 도피성을 마련해야 한다(신 19:3).

      521. 살인자를 동정해서는 안된다(신 19:13, 21).

      522. 이웃의 경계를 침범해서는 안된다(신 19:14).

      523. 한 사람의 증언만 가지고 재판해서는 안된다(신 19:15).

      524. 거짓 증언을 하는 자에게는 그가 이웃에게 해를 입히려고 했던 것과 똑같은 벌을 내려야 한다(신 19:19).

      525. 전쟁에 나가서 적군을 두려워하지 말라(신 20:1).

      526. 전쟁터에서 되돌려 보내야 할 사람들에 관한 규정(신 20:5-7).

      527. 전쟁을 하기 전에 먼저 평화를 제의하라(신 20:10, 11).

      528. 가나안의 7 민족을 진멸하라(신 20:16).

      529. 성읍을 점령할 때 나무들을 베버리지 말라(신 20:19).

      530. 범인을 알 수 없는 살인 사건에 관한 규정(신 21:1-9).

      531. 범인을 알 수 없는 살인 사건을 위해서 송아지를 죽인 험한 계곡에서는 일도 하지 말고 그곳에 씨도 뿌리지 말라(신 21:4).

      532. 포로로 잡혀 온 여인을 아내로 취해도 된다(신 21:10, 11).

      533. 그러나 그 여인을 팔아서는 안된다(신 21:14a).

      534. 그에게 힘든 일을 시켜서도 안된다(신 21:14b).

      535. 죽을 죄를 지어서 처형당한 사람의 주검은 나무에 매달아 두어야 한다(신 21:22).

      536. 그러나 그 주검을 밤까지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신 21:23).

      537. 그 주검은 그 날로 파묻어야 한다(신 21:23).

      538. 다른 사람이 잃어버린 것을 발견했을 때는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신22:1).

      539. 그리고 그것을 못본체 해서는 안된다(신 22:3).

      540. 이웃의 짐승이 길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면 주인을 도와 그 짐승을 일으켜 주어야 한다(신 22:4).

      541. 짐승에게 짐을 싣거나 내릴 때 도와주어야 한다(신 22:4).

      542. 여자는 남자의 옷을 입어서는 안된다(신 22:5a).

      543. 남자도 여자의 옷을 입어서는 안된다(신 22:5b).

      544. 새끼를 품고 있는 어미 새를 잡아서는 안된다(신 22:6).

      545. 새끼를 잡기 전에 먼저 어미 새를 날려보내야 한다(신 22:7).

      546.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야 한다(신22:8a).

      547. 그리고 집에서 사고가 나 사람이 죽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신 22:8b).

      548. 포도나무 사이사이에 다른 씨를 뿌려서는 안된다(신 22:9a).

      549. 그리고 거기에서 거둔 곡식도 먹어서도 안된다(신 22:9b).

      550. 소와 나귀에게 한 멍에를 메워 같이 밭을 갈게 해서는 안된다(신 22:10).

      551. 양털과 무명실을 함께 섞어서 잔 옷을 입어서는 안된다(신 22:11).

      552. 결혼의 성립에 대한 규정(신 22:13).

      553. 아내에게 그녀가 처녀가 아니었다고 하는 주장이 거짓으로 드러난 경우에 관한 규정 (신 22:14-18).

      554. 아내에게 그녀가 처녀가 아니었다고 거짓 누명을 씌운 사람은 평생 그 여자와 함께 살아야 한다(신 22:19).

      555. 성 안에서 한 남자와 다른 사람에게 약혼한 여자가 성관계를 가졌을 때에는 둘 다 돌로 쳐죽여야 한다(신 22:24).

      556. 그러나 성 밖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으면, 남자만 돌로 쳐죽여야 한다(신 22:26).

      557. 약혼하지 않은 처녀를 욕보인 남자는 그녀의 아버지에게 배상을 해야 한다(신 22;29).

      558. 그리고 그는 그녀와 결혼해야 하되, 그 여자와 이혼해서는 안된다(신 22:29).

      559. 신낭이 터졌거나 신(腎)을 베인 사람은 주의 총회 회원이 될 수 없다(신 23:1).

      560. 사생아는 주의 총회 회원이 될 수 없다(신 23:2).

      561. 유대인은 암몬 사람이나 모압 사람과는 영원히 결혼할 수 없다(신 23:3).

      562.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과는 평화 관계를 가지려고 해서는 안된다(신 23:6).

      563.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신 23:7a).

      564. 이집트 사람도 미워해서는 안된다(신 23:7b).

      565. 제의적으로 부정한 사람은 진(陳)에 들어갈 수 없다(신 23:10, 11).

      566. 화장실은 진 밖에 만들어야 한다(신 23:12).

      567. 군인은 무기와 더불어 삽을 항상 같이 가지고 다녀야 한다(신 23:13).

      568. 도망온 종을 되돌려 보내서는 안된다(신 23:15).

      569. 그리고 그들을 압제해서도 안된다(신 23:16).

      570. 이스라엘 자손은 창녀나 남창이 되어서는 안된다(신 23:17).

      572. 동족에게서 이자를 취해서는 안된다(신 23:20).

      573. 이방인에게는 이자를 받을 수 있다(신 23:21).

      574. 하나님에게 서원한 것은 지체함이 없이 지켜야 한다(신 23:21).

      575. 맹세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신 23:23).

      576.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가서 먹을 만큼 실컷 따먹는 것은 괜찮다(신 23:24a).

      577. 그러나 그릇에 담아 가면 안된다(신 23;24b).

      578. 이웃의 밭에 들어가서 이삭을 손으로 잘라먹는 것은 괜찮지만, 곡식에 낫을 대면 안된다(신 23:25).

      579. 이혼 증서에 대한 규정(신 24:1 이하).

      580. 이혼한 아내를 다시 아내로 맞아들여서는 안된다(신 24:4).

      581. 새신랑은 1년동안 집을 떠나지 못하도록 하여야 한다(신 24:5a).

      582. 그리고 그 기간 동안에는 그는 모든 의무로부터 자유하다(신 24:5b).

      583. 맷돌을 저당 잡아서는 안된다(신 24:6).

      584. 악성 피부병의 조짐이 보이면, 그것을 무시하지 말라(신 24:8).

      585. 담보물을 잡으려고 집에 들어가서는 안된다(신 24:10).

      586. 담보물은 그날로 되돌려 주어야 한다(신 24:12).

      587. 담보물을 그것을 잡힌 사람이 필요한 때에 즉시로 돌려주어야 한다(신 24:13).

      588. 품꾼에게는 그날로 품삯을 지불해야 한다(신 24:15).

      589. 혈연 관계가 있는 사람의 증언은 받아들여서는 안된다(신 24:16).

      590. 외국 사람과 고아에게 억울하게 재판해서는 안된다(신 24:17).

      591. 과부의 옷을 저당 잡아서는 안된다(신 24:17).

      592. 밭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잊어버리고 거두어들이지 않은 단을 다시 가서 취하여 와서는 안된다(신 24:19).

      593. 그것은 올리브 나무의 열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신 24:20).

      594. 형벌로 매를 맞을 경우에는 재판관은 매 맞을 사람을 자기 앞에 엎드리게 하고 죄의 정도에 따라 매를 때리게 해야 한다(신 25:2).

      595. 그러나 40대 이상 때려서는 안된다(신 25:3).

      596. 곡식을 밟으면서 타작하는 소의 입에 망을 씌워서는 안된다(신 25:4).

      597. 남편이 아들이 없이 죽은 경우, 그의 아내는 다른 사람과 재혼해서는 안된다(신 25:5a).

      598. 죽은 남편의 형제가 그녀와 결혼을 해야 한다(신 25:5b).

      599. 죽은 형을 대신해서 형수와 결혼하기를 거절하는 사람에 대한 규정(신 25:7-10).

      600. 음낭을 잡는 자를 보고도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신 25:11).

      601. 그에게는 동정심을 보여서는 안된다(신 25:12).

      602. 집에 크고 작은 두개의 되를 가지고 있어서는 안된다(신 25:14).

      603. "아말렉 사람이 너희에게 한 일을 기억하라"(신 25:17).

      604.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라(신 25:18).

      605. 그리고 절대로 그들이 한 일을 잊어버려서는 안된다(신 25:18).

      606. 햇곡식을 예물로 바칠 때 드리는 고백(신 26:5-10).

      607. 가난한 자들을 위한 십일조를 드린 것에 대한 고백(신 26:12-15)

      608. 십일조를 애곡하는 날에 먹어서는 안된다(신 26:14a).

      609. 그리고 제의적으로 부정한 상태에서 먹어서도 안된다(신 26:14b).

      610. 또한 그것을 죽은 자를 위해 사용해서도 안된다(신 26:14c).

      611. 하나님의 길을 따라 걸으라(신 26:17).

      612. 안식년 장막절에 모든 이스라엘 회중을 다 모아야 한다(신 31:12-13).

      613. 토라(율법)를 써서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신 3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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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의 삯

      7월 26일(화)
      죄이 삯(로마서 6:23)

      삯. 3800. ὀψώνιον

      ὀψώνιον, ου, τό  3800

      1. 급료,  2. 누가복음 3:14,  3. 고린도후서 11:8

      발음 / 옾소니온(ŏpsōniŏn) 

      어원/ 3795와 동일어로 가정되는 파생어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급료, 비용(눅 3:14, 고후 11:8), 삯(롬 6:23)

    • 신약 성경 / 4회 사용

    • * 3795. ὀψάριον
      ὀψάριον, ου, τό  3795

      1. 물고기,  2. δύο ὀψάρια,  3. 요 6:9. 공관복음서에서는 δύο ἰχθύας로 되어있음

      발음 / 옾사리온(ŏpsariŏn)

      어원/ 3702의 어간의 파생어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작은) 물고기(요 6:9), 생선(요 21:9, 10, 13)

    • 신약 성경 / 5회 사용
    • * 3702. ὀπτός
      ὀπτός, ἡ, όν 3702

      1. 구운,  2. 삶은,  3. 누가 24:42

      발음 / 옾토스(ŏptŏs) 

      어원 / ‘담그다’와 유사한 동사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구운(눅 24:42)

    • 신약 성경 / 1회 사용
    • 삯은 군사들이 복무하는 동안 받는 급료.
      군인은 철저하게 명령에 복종하여야 하듯 죄의 삯은 철저하게 죄에 복종하므로 얻는 댓가로 그 결과는 죽음이라는 것.

      은사. 5486. χάρισμα

      χάρισμα, ατος, τό  5486

      1. 선물,  2. 은사,  3. 부여된 은총

      발음 / 카리스마(charisma) 

      어원 / 548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은사(롬 1:11, 고전 7:7, 딤전 4:14), 선물(롬 5:16).
      신약 성경 / 17회 사용

      전쟁서 패망한 줄도 모르고 땅굴 속에서 '28년' 동안 숨어 지낸 일본 군인

      한 일본군이 적에게 목숨을 빼앗길까 두려워 28년 동안 땅굴 속에 숨어 살다 발각돼 세상에 존재를 드러냈다.

      1915년 일본 아이치현에서 태어난 요코이는 제2차 대전 발발로 1944년 괌에 일본군 병장으로 배치됐다.
      같은 해 미군이 괌을 점령하면서 일본군 2만 명이 전사했다.
      당시 살아남은 대부분의 일본군은 보급이 끊기면서 굶어 죽거나 항복했다.
      하지만 요코이와 동료 2명은 항복을 하는 대신 산속으로 도망쳐 땅굴을 파 숨어 살았다.
      이들은 낮에는 땅굴에 숨어있다가 밤이 되면 작은 물고기를 잡거나 열매를 따다 배를 채우곤 했다.
      군복이 낡아 찢어지자 요코이는 나무껍질의 섬유질로 직접 옷을 만들어 입기도 했다.
      열악한 환경 속에 같이 숨어 살던 동료 두 명은 8년 만에 목숨을 잃었다.
      요코이는 끈질긴 생존능력으로 28년을 땅굴에서 생존했다. '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지 말라'는 일분군의 전진훈(戰陣訓)을 지키기 위함이었던 것.

      요코이 쇼이치는 일본이 전쟁에서 패해 항복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1952년 종전했다는 미군의 전단을 발견했지만, 항복은 치욕이라며 계속 동굴 생활을 하기로 선택했다.
      그러던 1972년, 섬에 살던 주민들이 요코이의 모습을 보고 경찰에 신고하면서 그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나게 됐다.
      당시 요코이는 오랜 시간 사람과 대화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미 말하는 법을 잊은 지 오래였고, 동굴에서 숨어 살았던 탓에 똑바로 서서 걷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그는 3개월 동안 치료를 받은 후에야 언어능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후 일본으로 귀환한 요코이는 첫 인터뷰에서 "부끄럽게도 살아 돌아왔습니다"라고 말했다.

      여전히 자신을 군인이라 여긴 요코이는 살아서 나라로 돌아오는 것을 치욕이라 생각한다며 눈물까지 보였다.
      일부 현지 언론에서는 요코이의 탈영 의혹을 제기했으나 시민들은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그를 영웅이라 칭하며 환대했다.

      이후 요코이는 일본 정부에서 지급한 보상금으로 평범한 생활을 시작하며, 결혼하며 가정을 꾸리다가 1997년 83세 나이에 심장병으로 삶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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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表象)

      7월 25일(월)
      오실 자의 표상(로마서 5:14)

      이제까지 아담은 대표성(代表性)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본문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표상이란 단어에서 유추해야 하는 신앙은 아담을 통해서 보여주신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전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

      첫째는 아담은 선악과를 직접 따 먹은 것이 아니라 하와로부터 선악과를 받아서 먹었다(이사야 53:6)

      예수께서는 직접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지은 죄를 전가 받았다.

      이사야 53:6
      우리는 다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둘째는 아담은 죄를 범하므로 죄값을 받았다(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아담은 930세를 향수하고 죽었다(창세기 5:4-5)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 삼십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셋째는 아담은 흙에 생기가 들어가므로 산 영이 되었다(고린도전서 15:45)

      -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이 되었나니.

      예수께서는 성령이 마리아라는 흙속에 들어가서 생명이 되셨다.

      아담(흙 + 생기), 예수(마리아 + 성령)

      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마태복음 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라는 말과 창세기 2장 7절의『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그 흙으로 만든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라는 그 말과 아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특별히 누가『당신은 죄를 지었소이다, 죄인이요』이런 말을 하지 않아도 기독교인이면 다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생각한다. 다윗이 시편에서『하나님 앞에서 모두 죄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교회다니는 사람들은 대개 자기가 죄인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다 자기가 죄인이라고 생각하지만 무슨 죄를 졌기에 죄인인가 라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땅에서 일어나는 일, 세상에서 행한 자기 행위 만을 가지고 죄를 논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께 돌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도 알지못하는 사이에 다 죄인이 되었다. 나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교회의 가르침에 의해서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죄인이라고 생각한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은『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기 때문에 아담의 모든 후손들이 다 죄인이 되었다』 라고 가르친다.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그 후손들이 다 죄인이 되었다 라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인 것이다. 로마서 5장 12절에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이렇게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말을 한다. 로마서 5장 19절에『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있는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라고 사도바울이 말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5장 22절에 보면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라고 했다. 아담 안에서『모두 죽었다』 라는 것이다. 아담 한 사람이 범죄하므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고,『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왕노릇하게 되었다』라고 교회가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아담은 모든 사람의 비난의 대상이 된 것이다. 모든 세상 사람들을 다 죄인으로 만드는 그런 사람이 된 것이다. 교회다니는 사람이나 교회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우리가 왜 죄인인가? 라고 말을 한다면 아담의 원죄를 말한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그 후손들이 다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아담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아담의 후손이 죄를 전가받아서 다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신명기에 죄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율법을 주시면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식들 때문에 아비가 죽거나 아비 때문에 자식이 죽는 일은 있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예레미야 31장 30절에 보면『신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 이가 신같이 각기 자기 죄악으로만 죽으리라』했다. 에스겔서 18장 2-4절에 보면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비가 신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찜이뇨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라고 했다. 이 말은『아담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므로 모든 후손이 다 죄인이다』라는 말은 성립이 안된다 라는 것이다. 예레미야 31장 30절은『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주실텐데 새 언약은 옛 언약과 같지 않고 새 언약은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에 기록하고, 그 생각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 즉 하나님의 언약 속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들은 다 죽게되고 하나님의 언약 속에 들어온 사람들은 다 사는 것이지 너희가 말하는 대로 아비가 잘못해서 자식이 죽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인간이 아담 때문에 죄인이 되었고, 아담 때문에 내가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아서 죽는다』라는 생각은 전혀 아무런 근거도 없고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로마서 5장 12-21절에는 그런 뉘앙스가 많이 풍긴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다. 로마서 5장 12절을 살펴보면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에서『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라는 표현에서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말씀하고 있다. 즉『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생긴 것이 아니고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라고 말하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세상에 들어왔다』라고 말하는 것은 세상 밖으로 부터 들어온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다른 세상 밖이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나라 만이 존재했는데, 세상 밖으로 부터 들어왔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로 부터 죄가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잘못 이해하면 원래는 세상에 죄가 없었는데 죄가 세상 밖에서 들어왔다고 오해할 수 있다. 인간이 사는 세상은 죄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죄가 없다. 하나님 나라에서 죄가 발생하면 바로 쫒겨난다. 바로 쫒겨난 곳이 이 세상이며 그 하나님 나라에서 발생한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온게 아담을 통로로 해서 들어온 것이다. 세상 밖에서 아담을 통하여 세상 안으로 들어온 것이라고 사도바울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은 본래 죄가 없는데 죄가 들어와서 악한 상태가 되고 멸망당할 수 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생각은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창조의 목적이 있다고 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죄가 없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죄가 발생하면 하나님의 나라도 이 세상처럼 죄가 만연해서 더러운 하나님의 나라로 될 것 같은가? 아니고 죄가 쫒겨나는 것이다. 죄가 들어온 이 세상은 죄가 만연될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이 없는 상태로 창조된 것이다. 하나님은 죄와 더불어 함께 유하실 수 없는 분이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인데 왜 하나님이 안계시고 간섭을 하지않는가 반문할 수 있다. 이 세상은 감옥과 같은 곳으로서 하나님이 안계신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나타내신 것은 다 그림자로서 보여주신 것이다. 물리적 빛도 하나님의 빛에 대한 그림자이고,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에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신 것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신데 인간에게 보여지는 하나님으로 오신 것이다. 그 분이 예수님이시다. 그래서 이 세상은 죄가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세상 밖으로 부터 아담을 통로로 해서 세상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에서 이와 같이 라는 말은『아담을 통로로 해서 죄가 세상 밖으로 부터 세상으로 들어온 것 같이』라는 말이다. 모든 사람이 같은 방법으로 죄가 들어오게 된 것이다. 아담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므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 밖으로부터 세상으로 들어온 것 같이 모든 인간이 다 그렇게 죄가 들어왔으므로 아담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므로 범한 죄가 후손에게 전하게 된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은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는 말의 모든 초점을 에덴동산에 맞추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는 말을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우리에게 설명을 해 주는데, 12절에 『이러므로』라고 이야기한 것을 주목해야 한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말한다. 로마서 5장 6절에서 11절까지 살펴보면『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않고 선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정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리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 하느니라』사도바울이 로마서 5장 12절에서『이러므로』라고 말했는데, 앞에 있는 내용을 받는다. 앞에 있는 내용은 로마서 5장 6-11절의 내용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 우리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대속죄물로 주셔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 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에 조차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확정하셨다 라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라는 것이다.『하나님의 사랑하는 방법』이 바로『이러므로』라는 것이다. 『이러므로』는 앞 문장의 원인에 대해서 그 결과를 말할 때『이러므로』를 사용할 때가 많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러한 방법으로 라고 생각해야 한다.『이러므로(이러한 방법으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에서 즉, 앞의 로마서 5장 6-11절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가 대속제물로 인간을 대신해서 죽는 그런 방법으로 아담이 세상에 죄를 가지고 들어왔다는 것이다. 로마서 5장 14절에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범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모든 사람이 아담과 같이 죄를 가지고 이 세상에 들어왔으며, 아담은 대속제물인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방법으로 세상에 죄를 가지고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로마서 5장 14절에 아담의 후손은 아담과 같은 범죄를 짓지 않았다고 한다. 교회사람들은 아담 때문에 죄인이 되었다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되었다고 하는데, 아담의 후손은 아담과 같은 범죄(법을 어긴 것)를 짓지 않았다는 것이다. 로마서 5장 14절에서 아담의 후손들도 사망이 왕노릇 했다고 한다. 아담의 후손들이 아담과 같은 그런 범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사망이 저희들 위에 왕노릇 했다는 것이다. 즉 아담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해졌다. 아담과 같은 죄를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이 저희들 위에서 왕노릇 했다는 것이다. 아담의 후손들이 죽는 것은 아담 때문이 아니라 지신들의 죄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세상에서도 연좌제 같은 것을 없애고 있는데, 하나님을 연좌제를 하시는 분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는 말은 판박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는 도장을 찍을 때 같이 나오는 그런 의미의 판박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아담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내용을 다 무시하고 아담을 죄인의 대명사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와 그리스도는 하나다. 아담과 하와도 본래 하나다. 에베소서 5장 30-32절에서 사도바울이 아담과 하와의 관계는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에게서 하와가 나온 것에 대해서 아담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요, 하와는 교회를 상징한다고 말한바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아담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사도바울은『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하여 말하는데 이 비밀이 크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스도와 교회가 하나였는데,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에덴동산을 통해서 볼 때, 아담이 왜 세상에 왔는가? 자기 지체 즉 교회를 구하기 위해서 온 것을 말해준다. 그 지체가 왜 세상에 왔는가? 그 지체인 교회를 상징하는 하와는 교회사람들이 에덴동산에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만일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라고 하면서 이것이 큰 비밀이라고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아담은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아담은 죄의 대명사인데 그리스도는 구원의 대명사이다. 구원의 대명사는 모든 죄를 다 짊어지고 가신 것이다. 아담은 인간에게 다 죄를 주고 갔는데, 예수님은 죄를 다 가져가셨다 라고 한다면 서로 짝이 안맞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모든 죄를 다 짊어졌는데, 아담도 뭔가 다 짊어져야 맞는 말이다. 아담은 하나님 나라에서 죄를 짊어지고 최초로 육체 속에 들어와 육체의 생명체로서 죄의 통로 역할을 한 것이다.

       

      고린도전서 15: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기록된 바는 성경에 기록된 것같이 라는 것이고, 산영은 창세기 2장 7절에 생령이라는 말로, 생명체라는 의미이다.
      아담이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모든 책임을 지고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올 때, 육체 안에 들어가는 것은 흙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흙 속에 들어간 아담은 그 영이 죽은 것이다.
      영이 흙 속에 들어가면 영은 죽고 흙이 생명체가 된다.
      영들이 하나님의 처소를 벗어나서 하나님을 떠나겠다고 하니까,『가라』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처소를 벗게 하고 세상의 처소인 흙을 덧입혀 주는 것이다.
      하늘의 처소도 싫고 세상의 처소도 싫다고 입지 않은 영들은 말하자면 귀신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은 육체의 생명이 된 것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생령이라는 표현 때문에 혼란이 있는데, 생령은 살아있는 생명체를 말한다고 언급한 바가 있다. 다시 말해서 첫 아담은 육체적 생명체가 되었고, 마지막 아담은 살리시는 영이 되어, 영생을 얻게되었다 라는 말이다. 아담은 범죄한 자들의 육체적 생명체의 통로로,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는 영생의 통로로 된다는 말씀이다. 생명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같은 위치에서 바라보는 것이 맞는 말이다. 아담이 범죄한 영들의 책임을 지고 최초로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와서 자기를 따라 오는 모든 범죄한 영들이 종국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영생을 아담 안에서는 육체의 생명을 이어가게 하는 것이다. 육체의 생명을 얻지않으면 그리스도의 영생도 없는 것이다. 아담을 통한 육체의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약속하는 의미를 담고있다.


      표상(表象). 5179. 투포스(τύπος) 

      τύπος, ου, ὁ  5179

      1. 찍힌 자리,  2. 모형,  3. 형성된 것,  4. 그림자

      발음 / 투포스(tüpŏs)
      어원 / 518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자국(요 20:25), 형상(행 7:43), 양식(행 7: 44), 모형(롬 5:14), 본(롬 6:17, 살후 3:9, 벧전 5:3), 본보기(고전 10:6, 11) 
      신약 성경 / 15회 사용

      * 5180. 투푸토(τύπτω)

      1. 때리다,  2. 치다,  3. 마태 24:49
      발음 / 투프토(tüptō)
    • 관련 성경 / 때리다(마 24:49, 눅 12:45, 행 18:17), 치다 (마 27:30, 눅 22:64, 행 23:3), 상하게 하다(고전 8:12)
    • 신약 성경 /  13회 사용

      오실. 3195  멜로(μέλλω)

    • 1. ~에 일어날 것이다,  2.  ~하려고 하다,  3. ~하게 되어 있다

      발음 / 멜로(mĕllō)

      관련 성경 / 임박하다(마 3:7), 오다(마 12:32, 16:27), 하려 하다(마 2:13)
      신약 성경 / 109회 사용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

      창세기 2:7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그 흙으로 만든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아담은 흙 속에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가므로 살아있는 혼이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후손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은 역시 혼을 갖는다.
      아담이 죄로 인하여 죽은 것처럼 모든 사람들도 역시 죽음을 경험해야 합니다.
      죽음이란 죄의 결과라고 합니다.





      창세기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기독교인은 누구나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죄인이라고 생각하지만 무슨 죄를 지었기에 죄인인가 라는 것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땅에서 일어나는 일, 세상에서 행한 자기 행위 만을 가지고 죄를 논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께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죄는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기 때문에 아담의 모든 후손들이 다 죄인이 되었다."고 가르칩니다.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그 후손들이 다 죄인이 되었다 라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로마서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로마서 5: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있는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고린도전서 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아담 안에서모두 죽었다는 것은 아담 한 사람이 범죄하므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고,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왕노릇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모든 사람의 비난의 대상이 된 것이다. 모든 세상 사람들을 다 죄인으로 만드는 그런 사람이 된 것이다. 교회다니는 사람이나 교회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우리가 왜 죄인인가? 라고 말을 한다면 아담의 원죄를 말한다.

       

      아담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아담의 후손이 죄를 전가받아서 다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신명기에 죄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율법을 주시면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식들 때문에 아비가 죽거나 아비 때문에 자식이 죽는 일은 있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예레미야 31장 30절에 보면『신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 이가 신같이 각기 자기 죄악으로만 죽으리라』했다.

      에스겔서 18장 2-4절에 보면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비가 신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찜이뇨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

      이 말은『아담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므로 모든 후손이 다 죄인이다』라는 말은 성립이 안된다 라는 것이다.

      예레미야 31장 30절은『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주실텐데 새 언약은 옛 언약과 같지 않고 새 언약은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에 기록하고, 그 생각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 즉 하나님의 언약 속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들은 다 죽게되고 하나님의 언약 속에 들어온 사람들은 다 사는 것이지 너희가 말하는 대로 아비가 잘못해서 자식이 죽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인간이 아담 때문에 죄인이 되었고, 아담 때문에 내가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아서 죽는다』라는 생각은 전혀 아무런 근거도 없고 잘못된 것이다.

      로마서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는 표현에서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말합니다.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생긴 것이 아니고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말하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세상에 들어왔다고 말하는 것은 세상 밖으로 부터 들어온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다른 세상 밖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나라 만이 존재했는데, 세상 밖으로 부터 들어왔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로 부터 죄가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잘못 이해하면 원래는 세상에 죄가 없었는데 죄가 세상 밖에서 들어왔다고 오해할 수 있다.
      인간이 사는 세상은 죄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죄가 없다.
      하나님 나라에서 죄가 발생하면 바로 쫒겨난다.
      바로 쫒겨난 곳이 이 세상이며 그 하나님 나라에서 발생한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온게 아담을 통로로 해서 들어온 것이다.
      세상 밖에서 아담을 통하여 세상 안으로 들어온 것이라고 사도 바울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창조의 목적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죄가 없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죄가 발생하면 하나님의 나라도 이 세상처럼 죄가 만연해서 더러운 하나님의 나라로 될 것 같은가?
      아니고 죄가 쫒겨나는 것이다.
      죄가 들어온 이 세상은 죄가 만연될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이 없는 상태로 창조된 것이다.
      하나님은 죄와 더불어 함께 유하실 수 없는 분이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인데 왜 하나님이 안계시고 간섭을 하지않는가 반문할 수 있다.
      이 세상은 감옥과 같은 곳으로서 하나님이 안계신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나타내신 것은 다 그림자로서 보여주신 것이다.
      물리적 빛도 하나님의 빛에 대한 그림자이고,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에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신 것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신데 인간에게 보여지는 하나님으로 오신 것이다.
      그 분이 예수님이시다.
      그래서 이 세상은 죄가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세상 밖으로 부터 아담을 통로로 해서 세상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아담을 통로로 해서 죄가 세상 밖으로 부터 세상으로 들어온 것 같이 모든 사람이 같은 방법으로 죄가 들어오게 된 것이다.
      아담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므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 밖으로부터 세상으로 들어온 것 같이 모든 인간이 다 그렇게 죄가 들어왔으므로 아담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므로 범한 죄가 후손에게 전하게 된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12절)

      로마서 5장 6절에서 11절까지 살펴보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않고 선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정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리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 하느니라.

      사도 바울이 로마서 5장 12절에서『이러므로』라고 말했는데, 앞에 있는 내용을 말합니다.
      앞에 있는 내용은 로마서 5장 6-11절의 내용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 우리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대속죄물로 주셔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 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에 조차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확정하셨다 라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라는 것이다.『하나님의 사랑하는 방법』이 바로『이러므로』라는 것이다. 『이러므로』는 앞 문장의 원인에 대해서 그 결과를 말할 때『이러므로』를 사용할 때가 많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러한 방법으로 라고 생각해야 한다.『이러므로(이러한 방법으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에서 즉, 앞의 로마서 5장 6-11절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가 대속제물로 인간을 대신해서 죽는 그런 방법으로 아담이 세상에 죄를 가지고 들어왔다는 것이다. 로마서 5장 14절에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범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모든 사람이 아담과 같이 죄를 가지고 이 세상에 들어왔으며, 아담은 대속제물인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방법으로 세상에 죄를 가지고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로마서 5장 14절에 아담의 후손은 아담과 같은 범죄를 짓지 않았다고 한다. 교회사람들은 아담 때문에 죄인이 되었다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되었다고 하는데, 아담의 후손은 아담과 같은 범죄(법을 어긴 것)를 짓지 않았다는 것이다. 로마서 5장 14절에서 아담의 후손들도 사망이 왕노릇 했다고 한다. 아담의 후손들이 아담과 같은 그런 범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사망이 저희들 위에 왕노릇 했다는 것이다. 즉 아담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해졌다. 아담과 같은 죄를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이 저희들 위에서 왕노릇 했다는 것이다. 아담의 후손들이 죽는 것은 아담 때문이 아니라 지신들의 죄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세상에서도 연좌제 같은 것을 없애고 있는데, 하나님을 연좌제를 하시는 분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는 말은 판박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는 도장을 찍을 때 같이 나오는 그런 의미의 판박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아담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내용을 다 무시하고 아담을 죄인의 대명사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와 그리스도는 하나다. 아담과 하와도 본래 하나다. 에베소서 5장 30-32절에서 사도바울이 아담과 하와의 관계는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에게서 하와가 나온 것에 대해서 아담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요, 하와는 교회를 상징한다고 말한바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아담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사도바울은『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하여 말하는데 이 비밀이 크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스도와 교회가 하나였는데,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에덴동산을 통해서 볼 때, 아담이 왜 세상에 왔는가? 자기 지체 즉 교회를 구하기 위해서 온 것을 말해준다. 그 지체가 왜 세상에 왔는가? 그 지체인 교회를 상징하는 하와는 교회사람들이 에덴동산에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만일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라고 하면서 이것이 큰 비밀이라고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아담은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아담은 죄의 대명사인데 그리스도는 구원의 대명사이다. 구원의 대명사는 모든 죄를 다 짊어지고 가신 것이다. 아담은 인간에게 다 죄를 주고 갔는데, 예수님은 죄를 다 가져가셨다 라고 한다면 서로 짝이 안맞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모든 죄를 다 짊어졌는데, 아담도 뭔가 다 짊어져야 맞는 말이다. 아담은 하나님 나라에서 죄를 짊어지고 최초로 육체 속에 들어와 육체의 생명체로서 죄의 통로 역할을 한 것이다.

       

      고린도전서 15: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기록된 바는 성경에 기록된 것같이 라는 것이고, 산영은 창세기 2장 7절에 생령이라는 말로, 생명체라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아담이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모든 책임을 지고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올 때, 육체 안에 들어가는 것은 흙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흙 속에 들어간 아담은 그 영이 죽은 것이다. 영이 흙 속에 들어가면 영은 죽고 흙이 생명체가 된다. 영들이 하나님의 처소를 벗어나서 하나님을 떠나겠다고 하니까,『가라』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처소를 벗게 하고 세상의 처소인 흙을 덧입혀 주는 것이다. 하늘의 처소도 싫고 세상의 처소도 싫다고 입지 않은 영들은 말하자면 귀신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은 육체의 생명이 된 것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

      생령이라는 표현 때문에 혼란이 있는데, 생령은 살아있는 생명체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첫 아담은 육체적 생명체가 되었고, 마지막 아담은 살리시는 영이 되어, 영생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담은 범죄한 자들의 육체적 생명체의 통로로,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는 영생의 통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생명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아담이 범죄한 영들의 책임을 지고 최초로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와서 자기를 따라 오는 모든 범죄한 영들이 종국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영생을 아담 안에서는 육체의 생명을 이어가게 하는 것이다.
      육체의 생명을 얻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영생도 없습니다.
      아담을 통한 육체의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약속하는 의미를 담고있습니다.







      7월 23일(토)
      복(福) 있는 사람(로마서 4: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Blessed is the man whose sin the Lord will never count against him.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 방법 / 도 사 등 기 덮어버리다

      1. 도말하신다(시편 51:9)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Hide your face from my sins and blot out all my iniquity.


      2. 기억하지 않는다(이사야 64:9)

      여호와여 과히 분노하지 마옵시며 죄악을 영영히 기억하지 마옵소서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 .
      Do not be angry beyond measure, O LORD; do not remember our sins forever. Oh, look upon us, we pray, for we are all your people.


      3. 등 뒤로 던져 버린다(이사야 38:17)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내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내 모든 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Surely it was for my benefit that I suffered such anguish. In your love you kept me from the pit of destruction; you have put all my sins behind your back.


      4. 덮어버린다(시편 85:2)

      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저희 모든 죄를 덮으셨나이다.
      You forgave the iniquity of your people and covered all their sins. Selah

      5. 사하신다(골로새서 2:13)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When you were dead in your sins and in the uncircumcision of your sinful nature, God made you alive with Christ. He forgave us all our sins.










      7월 22일(금)
      믿음의 법(로마서 3:27)

      믿음의 법은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 것이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게 하므로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지 못한다.

      율법 : 행위(行爲) 2041. 에르곤(ἔργον)

      ἔργον, ου, ὁ 2041

      1. 행위,  2. 히브리서 4:3,  3. 표시

      발음 / 에르곤(ĕrgŏn) 

      관련 성경 / 행실(마 5:16, 딤전 5:10, 벧후 2:8), 행위(마 11:2, 요 3:19, 롬 2:15), 일(마 26:10, 눅 24:19, 롬 13:12), 사무(막 13:34),
      역사(요 5:36), 소행(행 5:38), 사업(롬 14:20, 계 2:19), 공적(고전 3:13, 14), 실천함(약 1:25), 이룸(약 1:4), 지음(히 1:10), 행함(롬 2:6).
      신약 성경 / 169회 사용

      믿음의 법 : 은혜(恩惠). 카리스(χάρις) 5485.

      χάρις, ιτος, ἡ 485

      1. 우아함,  2. 은총,  3. 은혜로운 행위

      발음 / 카리스(charis)
      어원 / 546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은혜(눅 1:30, 행 4:33, 몬 1:3), 칭찬(눅 6:32, 34), 칭송(행 2:47), 은총(행 7:10), 호의(행 25: 3), 은사(고후 9:15), 기쁨(몬 1:7), 아름다움(벧전 2:19, 20), 사랑스러움(눅 2:52), 감사 (눅 17:9, 롬 6:17, 고후 8:16, 골 3:16).
      신약 성경 / 156회 사용

      * 5463. 카이로(χαίρω)

      1. 기뻐하다,  2. 안녕,  3. χαῖρε

      발음 / 카이로(chairō)

      관련 성경 / 기뻐하다(마 2:10, 고후 6:10, 빌 4:10), 즐거워하다(마 5:12, 눅 19:6, 벧전 4:13), 평안하다 (마 27:29, 눅 1:28, 요 19:3),
      즐겁다(눅 15:5), 문안하다(행 15:23,  23:26), 기쁘다(고전 7:30, 요이 1:4), 기쁘게 하다(고후 7:7) 
      신약 성경 / 74회 사용



      1. 율법의 행위로는 결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20절)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인간 존재의 부패함은  목구멍은 열린 입술이요 혀로는 끊임없이 속이고,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는 사람의 말의 악함과 부패함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그 마음에 담은 악, 죄의 경향성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마음에서 나온 말들이 실제 행위를 통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발은 피를 흘리는 데 빠른, 해서는 안 될 일들을 지금 하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되는 부패함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죄악이 바로 하나님을 두려함이 없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결론은 하나님 앞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인간의 부패하고 타락한 상황이라고 하겠습니다.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19절)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 앞에 온 세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23절)

      성경은 인간에게 소망이 없음을, 인간의 행위에 의로움의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완전히 타락하고 부패한 상태에 있는 인간에 대해 가감 없이, 에누리 없이, 드러내고 나타냅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인간이 어떤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연약함만 깨달을 뿐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죄인됨을 깨달을 뿐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한 이후에 인간의 상태는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율법, 계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백성은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며 이렇게 살아갈 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계명이요 율법입니다.

      그것은 그들을 괴롭게 하기 위해서, 혹은 고통스럽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원해서 주신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행복한 삶은 무엇일까요?

      말씀대로 사는 것 아닙니까?

      말씀대로 살 수만 있다면 우리는 그 안에서 가장 행복한 삶을 살 것입니다.

      물론 말씀대로 사는 것이 힘들고 어렵다고 해도 말씀대로 사는 사람의 삶은 환경과 상황에 상관없이 하나님 안에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죄성 때문에 그렇게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완벽하게 지키며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런 연약한 존재임을 자각하고 주님을 의지할 뿐인 것이죠.

      그러므로 율법을 통해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서 결코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것을 믿었고, 이것을 통해 자신들의 의로움을 자랑했습니다.

      자신들의 행위로써 얼마든지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과연 죄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어떻게 행위로써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율법을 통해 의롭게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한계만 드러낼 뿐입니다.

      그래서 20절 마지막 부분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을 통해, 계명을 통해, 말씀을 통해 나의 나 됨, 죄성을 깨달을 뿐입니다.

      내 힘의 한계와 부족을 여실히 느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내 힘으로는 결코 이 말씀을 지킬 수 없음을….

      아무리 내가 노력하고 애써도 내 힘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그 겸손함을 배울 뿐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조그만 남보다 낫다고 생각하면, 조금이라도 충만하게 되면, 조금이라도 무엇인가로 채워졌다고 느끼면…

      금방 교만해집니다.

      그리고 나를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정죄하기 시작합니다.

      율법은, 말씀은 우리를 겸손케 합니다.

      내 힘으로는 주 뜻대로, 주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손을 드는 것입니다.

      주의 힘으로, 주의 능력으로 살 수 있기를…

      그리고 그 힘으로 사는 사람들은 결코, 자신을 자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도 겸손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결코 행위로써 완전할 수 도, 완전해질 수도 없는, 결코 의롭다 인정함을 받을 수 없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2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1절에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으로는 결코 우리가 의롭게 될 수 없다,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없다, 행위로서는 한계에 이를 수 밖에 없다 했습니다.

      다만 율법을 통해서 우리의 죄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요, 우리의 한계를 발견할 뿐입니다.

      율법으로는 결코 우리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로운 존재가 될 수 없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행위를 통해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자 하지만 그 행위로써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게 회복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죄된 인간이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로의 회복은 행위로써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으로 우리가 의롭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 합니다.

      다른 방법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의>입니다.

      24절은 이것을 좀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 가운데 있고 결코 하나님의 의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는 상태인 것은 앞에서도 설명했습니다.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님께 이를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옳은 행위를 통해,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도 안됩니다.

      아무리 수많은 선한 행위를 했을 지라도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심을 통해 그 죄로부터 우리를 구속> 하셨습니다.

      <구속으로> 로 번역된 ‘아폴뤼트로세오스απολυτρωσεως’ 의 원형 ‘아폴뤼트로시스(απολυτρωσις)’ 는 ‘~로부터(from)’ 라는 분리의 개념을 나타내는 전치사 ‘아포 (åπo)’ 와 ‘풀어줌’ 이라는 의미를 지닌 ‘뤼트로시스(λύτροsis)’ 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인간을 얽어 매고 있던 죄와 죽음의 속박에서 완전하게 분리하여 해방시키는 것>을 뜻합니다.

      이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의 몸을 대속 제물로 바친 것입니다.

      즉 자기의 무죄한 몸을 ‘속전(購錢)’ 으로 십자가에 바치고 인간을 사온 것입니다(딤전 2:6).

      예수님은 자기 몸을 십자가에 제물로 바치고 대신 우리를 그 값으로 사온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인간의 죄를 씻음 받기 위해서는 흠 없는 유월절 어린양의 대속의 피가 필요했죠(출 12: 1-13).

      하지만 이는 완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이신 무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를 죄와 죽음의 세력에서 온전히 해방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성육신하신 무죄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피를 흘려 인간을 구속하셨던 것입니다(마 20:28 ; 고후 5: 15).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구속입니다.

      24절<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우리의 구원이 우리 자신의 노력이나 행위와 무관하게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 번역된 ‘디카이우메노이δικαιουμενοι’는 ‘디카이오오(δικαιόω)’의 현재 수동태 분사이며, <의롭다고 취급되다>, <의롭다 함을 얻다>(NASB, being justified ; NIV, are justified)’ 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를 값 주고 사셔서 우리를 죄를 속해주셨다는 것을 믿는 자들,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는 자들을 <의롭다 칭해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칭의>입니다.

      로마서의 주제가 바로 <이신칭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죄에서 구속을 받고, 사함을 받고 의롭다고 칭해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값없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를 대신 지셨고 우리의 죄를 사하셨다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는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즉, 오직 믿음으로써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신칭의입니다.

      놀라운 것은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 곧 <칭의>를 통해 우리는 신분이 바뀝니다.

      앞에서 죄의 한계,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완전한 부패와 타락으로, 아무리 스스로의 힘으로 그것에서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그 죄의 아들, 죄의 종의 신분에서 이제는 신분의 변화가 생기는 것입니다.

      죄인의 신분, 죄의 종에서 이제는 <의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 <의인의 신분>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죄로부터 완전한 사면을 받은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이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로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값없이 주어진 선물, 곧 은혜로 말미암아 된 것입니다.

      그래서 24절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라고 말합니다.

      그 은혜로 의롭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구약 성경을 통해 증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21절에 <율법과 선지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를 획득하게 된다는 사상이 구약에 이미 나타나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도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고(창 15 :6), 바울이 증거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롬 1: 17)>는 말씀도 구약에 이미 나타나 있습니다(합 2:4).

      하나님께서는 구약 성경을 통해서 이미 의인이 되기 위한 길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뿐임을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믿었던 유대인들의 얼마나 율법을 오해하고 있는 것인지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결코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서 그것을 지키는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됨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무시하고 왜곡해서 스스로 율법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해 자신들의 한계를 인정하고 오직 믿음만이 하나님께 인정함을 받을 수 있음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통해 의롭게 된다고 여겼고 이것을 자랑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을 그렇게 자랑스럽게 여겼던 이들이 그 율법의 온전하게 지키지 못하고 외식과 형식에 치우쳤던 것입니다.

      그래서 겉으로 드러난 행위로 자신들을 드러내려 했습니다.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멀고 겉으로 드러낸 행위로써 자신들의 의로움을 드러내려 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행위를 통해 우리의 의를 드러낼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마음 중심입니다.

      동기입니다.

      아무리 겉으로 의로운 척, 바른 척 해도 그 중심이 하나님에게서 멀면 그것은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연약함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내가 온전해졌고, 또 앞으로도 온전해질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주시고, 그 믿음을 통해 의인의 신분, 의로운 존재, 하나님께 인정받은 존재가 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위대함입니다.

      믿음의 놀라움입니다.

      3.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지 않고 오히려 굳게 세운다(31절)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화목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불화하게 된 우리를 친히 제물이 되셔서 죽으심으로 화목케 하셨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의 모든 죄를 씻으셨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자기 의로우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죄에 대해서 반드시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죄인된 인간을 위해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하심으로 심판의 의를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대신 그를 믿는 자마다 의롭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니 철저하게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의이며, 구속이며, 구원인 것입니다.
      그러니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 어떤 법으로도, 행위로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믿음의 법, 오직 믿음으로만 얻은 의요,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을 받은 유대인에서 이제는 온 백성으로, 모든 열방으로 확대되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의 하나님에서, 이방인의 하나님으로 확대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을 부를 수 있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이루어진 의로 말미암아 되어진 일입니다.

      중국 교회의 지도자 워치만 니의 책에 나오는 이야기

      예수 믿은 지 얼마 안 되는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가 하루는 기차 여행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동석한 세 사람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카드놀이를 하기로 하고 그 형제에게 함께 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중하게 사양했습니다.
      그러니까 세 명 가운데 한 사람이 "카드놀이 할 줄 모르십니까?" 라고 묻더랍니다.
      형제가 조용히 웃으며 "할 줄은 알지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럼 손은 두었다가 무엇을 하시게요?"
      즉시 돌아온 반문에 그 형제가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손은 제 손이 아니라서요. 달리 할 일이 있어서요."
      세 사람은 의아해하며 물었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러자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자기가 최근 예수 믿게 된 동기와 신앙을 간증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자신의 몸이 주님의 몸이 되고 자신의 손도 주님의 손이 되었는데, 아무래도 주님의 손으로 카드놀이 하는 것을 그분이 기뻐하지 않으실 것 같아 사양한다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의 대답은 무엇보다 성경적인 거룩함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 줍니다.
      거룩은 무엇을 안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물론 손으로든 입으로든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손으로 입으로 몸으로 하나님의 일을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시간과 존재를 하나님의 일에 드려 보십시오.
      죄를 지을 여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가운데 삶의 진정한 기쁨을 느껴 보십시오.

      ​행위로써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행위로써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연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죄의 영향을 받는 연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그 죄의 영향, 죄인의 신분에서 구속하셨습니다.
      죄인의 신분인 우리를 피로 값 주고 사셨습니다.





      7월 21일(목)
      이면적(裏面的) 유대인 로마서 2:29


      유대인 : 율법을 받았고 할례를 행하는 사람 / 선민(선민) - 12절, 13절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이방인 : 율법을 받지 못했으며 할례를 행하지 않는 사람 - 14절, 15절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 내 복음 - 16절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참 유대인 : 이면적 유대인

      유대교의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승에 의하면 할례를 받은 사람은 비록 지옥문 옆에 앉았을지라도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아브라함이 책임져 준다는 교훈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모세를 통해 율법을 받은 백성들이요, 할례를 통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특수 민족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아무리 잘못을 저질러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보장되었다는 우월감을 가진 이유로 이런 사상이 전해 내려온 것 같습니다.

      이러한 우월감과 특권을 누리려면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율법을 지켜야 하는데 실생활에서 율법을 받은 자답게, 또 할례를 받은 자답게 살지 못하면서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을 자랑하면서 이방인들을 향해서는 몹시 경멸하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이와 비슷한 신앙생활을 즐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나는 모태 신앙이다.
      또는 나는 몇 대째 기독교 집안이라고 자랑하면서도 신앙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을 향해 세례 요한은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이 율법을 받은 백성이라는 자부심만 가졌지 자기들이 받은 율법을 지키지도 않은 유대인들의 죄악을 지적하며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와 구원을 받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세 부분으로 구분합니다(2:17-29)

      1. 형식적 율법(17-24)
      2. 형식적 할례(25-27)
      3. 이면적 유대인, 마음에 받은 할례(28-29)

      1. 형식적 율법(17-24) 

      유대인들은 여러 가지로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애급에서 종살이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은혜로 애급으로부터 구출해주셨으며 홍해 바다를 육지 같이 건너게 하셨으며 40년 동안 만나로 먹이시고 불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신 것을 체험했던 백성들입니다. 그리고 지도자 모세를 통해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과는 완전히 구별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으며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율법은 지키지 않고 자부심만 갖고 이방인들을 깔보는 유대인들을 향해 사도 바울이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17절부터 20절까지는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자부심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과 대조되는 유대인이라는 이름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유대인이란 율법과 하나님과 연계된 민족으로 그들이 가진 율법과 하나님은 바로 자기네들의 자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가르치는 율법사나 선지자들을 통해 율법의 교훈을 배우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선한 것을 좋게 여기는 자들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자들이라 믿었습니다.
      또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를 알고 있으므로 영적으로 어두운데 있는 소경 된 자들에게 빛이 되어주어 길을 인도하는 자들이며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고 아이들과 같은 자들의 선생이라는 자부심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자부심을 가진 유대인들에게 공격을 퍼붓기를 남을 가르치는 자가 자신은 가르치지 못하느냐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남에게 가르치기를 도적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우상 숭배하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네가 도적질을 하며 간음하며 심지어 우상에게 드려진 물건들을 도적질하느냐고 질책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가진 백성이라고 율법을 자랑하고 또 하나님을 자랑하면서도 그 율법을 지키지 않고 오히려 율법을 범하니 이런 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을 무시하고 천대했지만 율법이 있다고 한 유대인이 율법을 지키지 않고 율법을 범했으니 이것을 보는 이방인들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꼴이 되었다고 질책하고 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남쪽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므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나라로 포로로 잡혀가 종의 생활을 하게 했는데 이런 일을 통해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결과가 되었던 것과 같은 그런 점들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한의 백성들은 정신적인 자유를 누리면서 분산된 정신과 사상으로 갈등 구조를 형성합니다.
      북한의 주민들은 정신적인 자유를 누리지 못했기 때문에 정신적 장애를 갖고 자기 의지와 판단을 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2. 형식적 할례(25-27)   

      유대인들은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난지 8일만에 할례를 행했습니다.
      물론 맨 처음 할례가 시행될 때에는 아브라함은 99세에 이스마엘은 13세에 할례를 행했던 것입니다.
      할례는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지키고 순종하겠다는 결단의 징표로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할례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켜 행할 때에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이라고 자부심을 갖고 있는 그들이 앞부분에서 지적된 대로 율법을 지키지 않았으니 할례가 무익하다는 사실을 25절에서 27절까지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자신을 이방인과 차별화 하기 위해 할례를 받지 못한 자들을 두고 무할례당이라고 경멸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지만 만일 율법을 범하면 할례가 아무 의미가 없어서 할례를 받지 못한 무할례당이나 마찬가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할례란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겠다는 전제 아래 받은 징표이므로 만일 무할례자가 할례는 받지 않했지만 언약을 지킨다면 그는 무할례자가 아니라 바로 할례자나 다름없게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무할례자가 온전히 율법을 지키면 할례자나 다름없게 될 것이므로 율법을 지키지 않은 할례자 유대인들을 오히려 비판하지 않겠느냐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3. 이면적 유대인, 마음에 받은 할례(28-29)

      누가 참 유대인이며 누가 참 할례자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1장 16절에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네들만 구원을 받고 이방인들은 구원받지 못하는 존재들인양 믿고 있었지만 그런 것은 하나남의 뜻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잘못된 자부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혈통상 유대인이 참 유대인이 아니라 마음으로 율법을 받아 그 율법을 지켜 행하는 자가 참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외과적으로 할례를 받은 자가 참 할례자가 아니라 참 할례자는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드려 죄 사함 받은 자가 참 할례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6 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했는데 사도 바울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혈통과 상관없이 복음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어질 한 구원의 역사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문이 이방인에게도 열린 것은 신약시대부터 되어진 것이 아니라 구약시대에도 이미 그 문이 열려 있었던 것입니다. 요나의 경고를 받고 회개했던 니느웨 사람들이 이방인이었으며 룻과 욥이 이방인이었습니다.
      유대인으로 태어나서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구원이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마땅히 믿고 행해야 할 것을 행함으로 구원이 이뤄지는 것임을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참 그리스도인 즉 참 신자가 되라는 교훈입니다.
      우리들은 오늘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유대인들이 갖는 대단한 자부심을 소개받았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기도 유대인이지만 자기 동족들이 자부심만 가졌지 내적으로 참 유대인이 되지 못한 그들의 죄악들을 폭로하며 그들이 그런 죄악에서 벗어나 참 유대인 그리고 참 할례자가 되기를 기원했던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을 향해 퍼붓는 그 공격을 우리들의 신앙생활과 연관시켜 우리들의 신앙을 점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죄 사함을 얻게 하는 세례를 받은 자들을 그리스도인 또는 성도라 부릅니다.

      당신은 참 그리스도인이십니까?
      예라는 대답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참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참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길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고 받은 그 말씀을 몸으로 실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남이 잘 못을 저질렀을 때에 남을 가르치고 충고했던 그대로 내가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남이 잘못했을 때에 비록 그를 두고 충고를 직접 못했다 하더라도 내 마음에 그가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참 성도답지 못하다고 마음에 걸렸다면 나는 그런 행동을 내가 삼가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교인인가?

      나는 성도인가?
      성도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사람으로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사도행전 19:21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마게도냐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사도 바울이 로마로 가려는 것은 서바나로 가려는 것이었다.
      서바나로 가려면 로마교회가 바울을 전적으로 지원하며 후원이 필요하였다.

      로마서 15:23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스페인)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24.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줌을 바람이라.

                                                                                         

      7월 20일(수)

      복음(福音)의 능력(能力) 로마서 1:16-17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2098. 복음(복음) εὐαγγέλιον

      εὐαγγέλιον, ου, τό 

      1. 좋은 소식에 대한 보상,  2. τὸ εὐαγ- γέλιον,  3. ὁ λόγος τοῦ εὐ.

      발음 / 유앙게리온(ĕuanggĕ- liŏn)
      어원 / 2095와 3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복음(마 4:23, 막 16:15, 롬 1:1)
      신약 성경 / 76회 사용

      * 32. 앙겔로스, ἄγγελος
      ἄγγελος, ου, ὁ 

      1. 사자,  2. 사람이 보낸 사신,  3. 하나님이 보낸 사자 : 메시아의 예고자

      발음 / 앙겔로스(anggĕlŏs)
      어원/ ‘소식을 가져 오다’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사자(使者)(마 1:20, 행 5:19, 약 2:25), 천사 (마 13:39, 히 1:4, 계 1:1)
    • 신약 성경 /  176회 사용
    • * 2095. 유(εὖ)

      1. 잘,  2. 좋게,  3. εὖ ποιεῖν: 좋게 행하다

      발음 / 유(ĕu)

    • 관련 성경 / 잘, 좋게, 다행히(마 25:21, 눅 19:17, 행 15:29, 엡 6:3)
    • 신약 성경 / 6회 사용
    • 1411. 능력(能力) δύναμις.
      δύναμις, εως, ἡ

      1. 힘,  2. ἰδίᾳ δ. ~의 권능으로,  3. ἐν δ.: 권능으로
      발음 / 두나미스(dünamis)
      어원 / 141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권세(마 6:13, 행 4:7), 권능(마 7:22, 막 6:5, 행 1:8), 능력(마 13:54, 눅 1:17, 롬 1:4), 재능(마 25:15), 권능자(막 14:62),
      뜻(고전 14:11), 힘 (고후 1:8, 8:3, 히 11:11), 세력(히 11:34).
      [동] 능하다(막 9:39, 눅 19:37), 강하다(고전 15:43), 힘있다(계 1:16)
      신약 성경 / 119회 사용
      * 1410. 두나마이. δύναμαι

      1. 할 수 있다, 2. 마태복음 6:24,  3. δύ- νασθαι... εἰ σελθεῖν

      발음 / 두나마이(dünamai)
      어원 / 수동. 디포넌트. 현재2인칭단수 δύ- νῃ와 δύνασαι, 미완료 ἠδυνάμην과 ἐδυνάμην, 미래 δυνήσομαι, 제1부정과거 ἠδυνήθην과 ἠδυνάσθην, 불확실한 유사 어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할 수 있다, 능히 하다(마 3:9, 10:28, 막 2:7, 9:28, 눅 1:20, 3:8)
    • 신약 성경 / 210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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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서

      배경

      본서의 기록 연대는 A.D.57년 이른 봄으로 추정되고 있다.
      바울은 이때 제3차 전도 여행중이었는데 그는 예루살렘의 가난한 신자들을 위해 이방인 교회들이 모금한 헌금을 예루살렘에 가지고 가려던 중이었다.

      15:26에 의하면 바울이 본서를 쓸 때는 이미 마게도냐와 아가야 교회의 헌금을 받아 가지고 고린도에 도착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본서는 바울이 고린도에 3개월 체류해 있는 기간 동안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징

      바울의 사상은 '이신득의(以信得義)'이다.
      유대인은 물론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상을 의미한다. 바울은 이 교리를 본서에서 아주 명쾌하게 논리적으로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이신득의'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단편적인 것이 아니라 구원은 물론 죄책과 거듭남과 성화와 성도의 견인까지 포함하는 포괄적인 것으로 그 의미하는 바가 크다. 바울은 특별한 단어들을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말하면서 인간의 죄를 위해 희생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 의도적인 문체를 사용하였다. 바울이 다른 서신에서보다 본 서신에서 자기를 소개할 때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사도성에 대해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복음에 부여되는 하나님의 의를 말하고 있다. 즉 인간의 행위로는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으며,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복음에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본 서신이 조직 신학의 총체는 아니라 할지라도 기독교 교리의 핵심 교리를 말하고 있다. 본 서신은 서신서이면서도 신학적인 성격을 띤 논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위대한 로마서는 종교 개혁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던 것을 알 수 있다. 바울이 본 서신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성령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목적

      바울은 본 서신을 로마 교회 방문을 위하여 기록하였다. 바울이 로마 교회를 방문하려 한 것은 자기가 받은 영적인 은사를 로마 교회의 성도들에게 알리기 위함이었으며, 이로 인해 그들의 믿음이 강하여지고 또 서로 힘을 얻기 위해서였다. 특히 본서에는 이신득의의 신앙원리를 가장 극명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이 원리는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이루어 놓으신 의를 믿음으로서만이 모든 인간은 죄에서 자유로울 수가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구조

      바울 서신의 특징적인 구조는 교리편과 생활편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1~11장 : 교리 /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이 무엇인가?

      12~16장 : 실천편 /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교리편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무엇이냐?"를 밝히고 있는 데 반해 실천편에서는 "하나님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를 밝히고 있다. 전자는 "믿음에 의한 삶"이라면, 후자는 "믿음에 의한 섬김"이다.

      바울 서신들 중에서 처음에 위치한 로마서는 구원에 관한 바울의 신학을 짜임새 있게 기록하였고 아울러 구원 받은 성도로서의 마땅히 행할 바에 대한 실천적 권고를 담고 있다.

      이러한 깊이 있는 내용과 체계적인 전개로 말미암아 본서는 "바울의 복음서"라고 불리워진다.
      즉 복음서가 예수의 삶과 행적을 사실 그대로 기록한 것이라면, 본 로마서는 예수의 탄생과 사역들의 의의를 성도의 구원 과정과 연결하여 설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서는 질문과 응답의 형식으로 먼저 현재의 상황에 따른 구원의 필요성을 이야기하고 계속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 칭의(稱義), 성화(聖化) 등에 관하여 설명한다.

      특히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이신득의(以信得義)의 신앙 진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본서는 크게 3부분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1:1~8:39 / 인사와 더불어 구원의 필요성과 이에 이르는 방법
      9:1~11:36 / 이스라엘의 과거, 현재, 미래 상황을 이야기하며 하나님의 의가 역사 가운데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가
      12:1~16:27 /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고 구원을 얻게 된 백성이 그 은혜에 대한 감사로써 마땅히 해야 할 의의 실천과 이에 따른 변화된 삶



      1. 표제

      바울이 이 편지서를 기록했을 때 원래는 아무런 표제가 붙지 않았던 것 같다.
      바울이 로마에 있는 신자들에게 보내는 단순한 한 통의 편지였다.
      그러나 이윽고 이 서신은 초기의 사본들에게 붙여진 “로마인들에게”(헬, Pros Rhomaious)라는 표제로 알려지게 되었다.
      후기의 사본들은 좀 더 확대된 표제 곧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사도 바울의 서한”이라는 표제를 갖게 되었다.
      이 표제는 오늘날에도 몇개의 영역(英譯) 성경에서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2. 저자

      사도 바울이 이 편지서의 저자라는 사실이 심각하게 의심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로마로 보내진 원래의 편지에 로마서 제16장은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며 그것은 아마도 바울이 한동안 일한 적이 있는 에베소(행 19장)에 보내진 별개의 편지일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이러한 이론은 주로 16장에 열거된 사람들의 명단의 길이에 그 근거를 두고 있으며 또한 바울이 아직 한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 도시인 로마에 그토록 많은 친구들을 알고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리라는 추측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그 당시로 말하자면 제국의 각처에서 사람들이 로마로 자연스럽게 이주하던 때이므로 바울이 세계의 수도인 그 도시에 많은 친구들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더욱 이 모든 초기의 사본들이 제16장을 그 편지서의 온전한 부분으로서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현대의 보수적인 입장은 이 편지서 전체가 사도 바울의 로마의 신자들에게 쓴 것으로 믿고 있다.

      바울은 다소(Tarsus)에서 출생한 유대인이었다.
      그는 바리새인의 위대한 교사인 가말리엘의 수제자로서 전통적인 교육을 받았다.
      다른 모든 유대인 소년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하나의 직업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피장”(천막 만드는 사람)이었다.
      예루살렘에서 첫 순교자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할 때 그는 현장에 있었으며, 그 광경은 분명히 젊은 사울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이 젊은 바리새인은 예수 그리스도와 정면으로 대면하게 된다.
      그의 기적적인 회심이 있은 다음에 그는 침례를 받고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받는다.
      그후 그는 아라비아로 물러나서 연구와 준비에 몰두하고 3년이란 세월을 보내었다.
      그는 그의 고향 다소에서 3년을, 안디옥에서 1년을 보낸 다음 성령의 지도를 받아 이방인들을 위한 위대한 선교사가 되었다.
      3차에 걸친 선교 여행을 통하여 그는 많은 교회들을 세우고 또 편지서들을 썼다.

      그는 로마의 시민권과 헬라의 교육과 히브리의 종교를 한 몸에 종합한 매우 갖춰진 선교사로서 그의 위대한 사업을 위한 최고의 자격을 구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모든 인간적인 자질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받은 은혜와 사도권만을 신뢰하며 복음 사업에 임하였다(롬 1:5).

      희생과 고난으로 점철(點綴)된 여생을 다 보낸 다음에 그는 죽음으로써 자신이 전한 기별을 증거하였다.
      네로 황제의 결정에 의하여 그는 참수형에 처해졌으며 지하 묘지(catacomb)에 장사되었다고 전해진다.

      3. 역사적 배경

      로마서는 제3차 선교 여행 동안에 바울이 석달 동안 체류한 고린도에서 기록된 것이 확실시된다(행 20:1-3 참조).
      많은 학자들은 이 시기가 A.D. 57-58년의 겨울일 것으로 믿고 있으나 또 더러는 그보다 좀 이른 시기로 보는 이들도 있다.
      이 편지서가 고린도에서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가이오(롬 16:23; 고전 1:14)와 에라스도(롬 16:23; 딤후 4:20)에 대한 언급과 고린도의 동쪽 항구인 겐그레아의 교회에서 특별한 봉사를 하고 있는 것으로 바울이 묘사하는 뵈뵈에 대한 추천(롬 16:1)등으로 말미암아 증명되고 있다.

      이 편지서를 기록할 당시에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그리스도인 가운데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교회들로부터 거둔 의연금품을 가지고 팔레스타인으로 막 돌아가려는 참이었다(롬 15:25, 26; 행 19:21; 20:3; 24:17; 고전 16:1-5; 고후 8:1-4; 9:1, 2).

      그 사명을 다한 후에 바울은 로마를 방문하여 그곳으로부터 계속해서 스페인으로 여행하고자 했다(행 19:21; 롬 15:24, 28).
      바울은 로마 제국의 수도에 있는 그리스도 교회를 방문하고 싶은 마음을 여러 번 가졌으나 아직 한번도 방문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롬 1:13; 15:22).

      그러나 이제는 아시아와 헬라에서의 그의 선교 사업을 마쳤다고 생각해서(롬 15:19, 23), 그는 이탈리아의 사업을 강화하고 스페인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하기 위해 서쪽으로 옮겨 가고자 애쓰고 있었다. 이러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바울은 로마에 있는 신자들의 축복과 협력을 받고자 희망하였다.

      그리하여 불원간 그 도시를 방문할 것을 기대하면서 그들에게 이 서한을 써 보내게 되었다. 이 편지를 통하여 바울은 매우 강하고 분명한 어조로써 그의 복음의 위대한 원칙들을 개괄하고 있다(롬 1:15; 2:16).

       4. 주제

      이 편지서의 주제는 인간의 보편적인 죄악성죄인인 인간이 용서를 받을 뿐만 아니라 완전하고 성결하게 될 수 있는 하나의 길을 마련하시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은혜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 “길”이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시고 영원히 살아 계셔서 인간을 회복하시고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바울이 이 편지서를 기록할 때 그의 마음 속에는 유대화주의자들과의 논쟁 가운데서 야기된 여러가지 문제들이 꽉 차 있었다.
      그는 그 문제들 중에서 기본적인 것들을 다루면서 죄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에 관하여 광범한 예증들로써 대답하고 있다.

      먼저 바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간에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므로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스런 이상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롬 3:23).

      이것에 대해서 어떠한 핑계도 댈 수 없는 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간에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상당한 계시를 받았기 때문이다(롬 1:20).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다 정죄아래 있는 것은 의당한 일이다. 게다가 죄된 인간은 이러한 곤경으로부터 자신을 건져낼 능력이 도무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의 타락한 형편하에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롬 8:7).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려는 율법주의적인 시도들은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의 연약성과 구주의 필요성을 인식하기를 거절하는 이른바 오만한 자기 의(義)에 빠지게 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구제책을 강구하실 수 있으시다. 그분은 이것을 당신의 아들의 희생을 통하여 마련하셨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믿음, 곧 그의 죗된 과거를 덮어주기 위해 이미 마련된 것을 받아들이는 믿음과 그로 하여금 의의 생애를 살도록 인도하시고자 제공된 능력을 받아들이는 믿음을 행사하는 것, 오직 그것 뿐이다.
       이것이 이 편지서의 첫 부분에 전개된 바울의 복음이다. 그 나머지 부분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과 그리스도 교회 신자들을 취급하는 문제들에이 복음을 실제적으로 적용시키는 면을 다루고 있다.

      5. 개요

      Ⅰ. 서론 1:1-15

           1. 인사 1:1-7
           2. 개인적인 부언 1:8-15

      Ⅱ. 교리적인 주석 1:16-11:36

           1.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교리 1:16-5:21
             (1) 믿음으로 얻어지는 의 1:16, 17
             (2) 의에 대한 보편적인 필요 1:18-3:20
               ① 이방인들의 실패 1:18-32
               ② 유대인들의 실패 2:1-3:20
             (3) 그리스도 안에서 마련된 의 3:21-31
             (4) 구약의 교리인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4:1-25
             (5) 칭의의 복스런 결과 5:1-11
             (6) 칭의의 효과와 아담의 타락의 결과의 대조 5:12-21

           2. 믿음으로 말미암는 성화의 교리 6:1-8:39
             (1) 죄에 대해 죽고, 새 생애로 부활함 6:1-11
             (2) 율법과 죄의 속박에서 벗어남 6:12-23
             (3) 죄에 대한 율법의 관계 7:1-13
             (4) 육과 영 사이의 갈등 7:14-25
             (5) 성령 충만한 생애 8:1-39

           3. 이스라엘의 선택 9:1-11:36
             (1) 이스라엘의 거절에 대한 바울의 유감 9:1-5
             (2) 거절의 정당성 9:6-13
             (3) 하나님의 뜻은 의심할 수 없음 9:14-29
             (4) 거절의 원인이 된 이스라엘의 불신 9:30-10:21
             (5) 이스라엘의 궁극적 회복 11:1-36 

      Ⅲ.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교리의 실제적 적용 12:1-15:13
       
          1. 그리스도인의 자아 희생 12:1, 2
           2. 교회의 구성원으로서의 그리스도인 12:3-8
           3. 다른 사람들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관계 12:9-21
           4. 국가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관계 13:1-7
           5.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빛-사랑 13:8-10
           6. 재림이 가까움 13:11-14
           7.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상호 관용이 필요 14:1-15:13

      Ⅳ. 결론 15:14-16:27
         
           1. 개인적인 부언 15:14-33
           2. 여러 사람들에 대한 인사 16:1-16
           3. 거짓 교사들에 대한 경고 16:17-20
           4. 바울의 동료들과 대필자의 인사 16:21-23
           5. 축도와 송영 16:2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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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이비드 마틴 로이드 존스(David Martyn Lloyd-Jones)
      1899. 12. 20. - 1981. 3. 1
      영국의 의사 출신의 복음주의 설교자
      존 스토트와 함께 한국교회에 가장 영향력이 많았던 목회자.

      거룩함과의 만남

      로이드 존스는 기독교에 대해 불붙는 논리(logic on fire)라고 불렀다. 이는 인간의 감정에 호소하는 감상적인 설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과 만나는 경험을 통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열정적인 집중을 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들이 주장해야 하고, 또한 알아야 하며, 체험해야 하는 것은 어떤 일들을 하고 안 하는 것들에 대한 일반적인 아이디어나 행위들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아는 것만이 우리들의 목표이어야 합니다. 그 이외의 것은 모두 그리스도인의 목표 미달입니다.(복음의 핵심, 132쪽.).

      "종교오락"에 대한 거부

      마틴 로이드 존스는 사회에서 출세한 사람들이 간증하는 일부 개신교 교회들의 모습들에 대해 "종교오락"이라는 말을 썼다. 즉, 교인이라는 소비자들의 니즈에 맞게 설교하고 목회하는 종교서비스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설교의 의미를 훼손시킬 수 있음을 꿰뚫어본 것이다.

      간증자로 초대되는 사람들 중에는 해군 제독이나 육군 장성처럼 특별한 직함을 가진 이들도 있고, 야구선수나 연극배우, 영화배우, 가수처럼 대중에게 잘 알려진 이들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복음을 설명하고 설교하는 일보다 그런 이들의 간증 듣는 일을 훨씬 더 가치 있게 여깁니다. 제가 이 모든 것을 ‘오락’이라는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음을 눈치 채셨습니까? 저는 이런 일들이 당연히 오락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설교에 등을 돌리고 이런 오락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설교와 설교자 26).

      신학에 대한 존중

      로이드 존스는 설교는 신학적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즉 설교자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학문인 신학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설교를 잘하는 방법을 배우려고 하거나, 교인들에게 교회생활과 사회생활을 열심히 하라고 가르치는 현대교회의 문제점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특별히 조직신학과 교회사를 그의 설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부흥에 대한 견해

      로이드 존스는 성령의 부으심이 말씀 선포로만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령의 불을 끄는 행위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부흥운동이 성령의 기름부으심이며, 칼빈주의가 만일 메소디즘과 함께 하지 않으면, 지성주의와 스콜라주의로 흐른다고 경고하였다. 그렇게 함으로 신앙고백이 성경을 대체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질 수 있다고 경고하였다. 그는 열광주의 즉 감정 조절이 한되는 상태를 옹호하며, 이것을 칼빈주의자들이 반박한다고 주장하였다.[1]


      로이드 존스의 저서로는

      • 목사와 설교, CLC
      • The Miracle of Grace, 은혜와 기적, 백합출판사, 1987
      • 영적 침체와 치유, 이용태 역, 기독교문서선교회(CLC), 2001
      • 하나님 나라(복있는 사람)
      • 사도행전 강해시리즈(승리하는 기독교 등, 복있는 사람)
      • 설교와 설교자(복있는 사람)
      • 내가 자랑하는 복음, 복있는 사람, 2008
      • 로마서 강해, 기독교문서선교회
      • 청교도 신앙 그 기원과 계승자들 (The Puritans: Their Origins and Successors) 서문강역, 생명의 말씀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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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로버트 웜즐리 스토트(Rev. John Robert Walmsley Stott)
      1921. 4. 27 - 2011. 7. 28
      성공회 사제로 기독교 복음주의 운동의 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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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거스틴



      ‘톨레 레게’(tolle lege)

      “나는 내 자신을 깊이 응시하여, 나의 가장 깊은 은닉된 장소에서 창피한 기억들을 모두 꺼냈다. 내 마음이 볼 수 있도록 진열하였다. 그 순간 거대한 폭풍이 바로 그 기억들을 강타하였다. 내 눈에서 눈물이 한없이 흘러나왔다. 나는 그 기억들을 구역질하듯 모두 토해냈다. 옆에 있었던, 알리피우스부터 급히 뛰쳐나왔지만, 나는 울기 위해서 혼자 있어야만 했다. 나는 더 깊은 곳으로 떨어져 이동하여, 그의 존재가 나를 방해하지 않았다.”

      <고백론> 8권 28단락a

      ‘톨레 레게’tolle lege.

      이 라틴어 표현은 ‘취하여 선택하여라!’란 의미다. 취사선택하라는 신의 목소리이자 동시에 눈물로 정화되고 변화된 어거스틴 자신의 목소리였다. ‘톨레’tolle는 고속도로의 톨게이트tollgate에서도 알 수 있듯이, ‘벌금을 부과하다; 사용료를 지불하다’란 의미다.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가기 위해, 특정한 고속도로를 상용했기 때문에, 그 사용료를 지불해야한다. 라틴어 ‘톨레레’tollere는 ‘선택하다; 집어 들다;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다’란 의미다. ‘레게’lege는 ‘읽다’란 라틴어 동사 ‘레게레’legere에서 파생한 단어로 더 근본적인 의미는 ‘선택하다; 추리다’란 의미다. ‘톨레 레게’tolle lege를 번역하자면, ‘(한 가지 원칙을 선택하여) 집어 들고 (그 선택한 것을 너의 삶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말로 알려라!’란 의미다.

      어거스틴이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듣고 분연히 일어섰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들었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고, 기뻐 날 뛰었다. 그는 신적인 무엇이 그를 움직인다고 생각하여, 성서를 ‘들어올려’ 아무렇게나 펼쳐진 성서의 첫 문장을 ‘읽었다.’ 그는 사막의 수도자 안토니우스도 이런 식으로 소리를 들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였다. 안토니우스가 들은 소리를 이것이다. ‘너는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였다. 어거스틴이 성경책을 들고 펼쳐 읽었다.

      “낮에 행동하듯이, 단정하게 행합시다.

      호사한 연회와 술취함, 음행과 방탕, 싸움과 시기에 빠지지 맙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십시오.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꾀하지 마십시오.”

      ​그가 읽은 내용은 <로마서> 13.13-14였다. 어거스틴이 이 구절을 읽자, 빛이 등장하여 그를 감쌌다.

      어거스틴은 과거의 어거스틴이 아니라 미래의 어거스틴이 되었다. 그의 삶은 단정端正해졌고, 타인과 경쟁하여 제압하려는 삶이 아니라, 더 나은 자신이 되기 위해 투쟁하고 수련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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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 11. 10-1546.2. 18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교수
      본래 아우구스티노회 수사였던 루터는 로마 가톨릭교회면죄부 판매가 회개가 없는 용서, 거짓 평안(예레미야 예언자의 가르침을 인용함)이라고 비판했으며, 믿음을 통해 의롭다함을 얻는(der Rechtfertigung durch den Glauben) 이신칭의를 주장했다.

      칭의를 통한 개인 구원의 새 시대를 열어주었다.
      면죄부 판매를 비판한 루터는 1517년 95개 논제를 게시함으로써 당시 면죄부를 대량 판매하던 도미니코회 수사이자 설교자 요한 테첼에 맞섰다.

      1520년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모든 주장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받았지만, 오직 성경의 권위를 앞세우면서 성서에 어긋나는 가르침들을 거부하였다.

      1521년 보름스 회의에서도 마찬가지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카를 5세로부터 같은 요구를 받았으나 거부함으로써 결국 교황에게 파문당했다.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교 교회 정문에 95개 논제를 게시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것으로 종교 개혁이 시작되었다.
      루터의 종교 개혁은 당시 종교와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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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 웨슬리(John Wesley, 1705. 8. 31 ~ 1791. 8. 31)

      영국 개신교계에서 감리교 운동을 시작한 인물로, 영국과 미국의 감리교 창시자다.
      영국국교회(Church of England)에서 안수를 받았으며 신학자이며 사회운동가이다.
      또한 웨슬리의 사역과 저술은 감리교의 활동만이 아니라 19세기 성결 운동과 20세기 오순절 운동 및 기독교 사회복지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신학공부와 목회활동

      차터하우스 학교와 옥스포드 대학교에서 공부한 존 웨슬리는 옥스퍼드 링컨 칼리지의 교수(fellow)가 되었으며, 1725년에는 부제가, 1728년에는 사제/장로목사가 되었다.

      잉글랜드국교회인 잉글랜드 성공회 사제이었던 아버지 새뮤얼 웨슬리의 교구에서 사제로 사역한 후 1729년 옥스퍼드로 돌아와 신성회(Holy Club)를 지도하였다.

      신성회는 신학 공부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경건을 연마하기 위한 모임이었으며, 동생 찰스 웨슬리가 처음 시작하여 조지 휫필드도 가입하였고, 존 웨슬리도 가입한 후 모임을 지도하게 되었다.

      존 웨슬리는 동생 찰스 웨슬리와 함께 아미리카 식민지 조지아로 건너가 2년 동안 선교를 했지만 실패했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다.
      영국으로 돌아온 후 웨슬리는 아메리카로 건너가는 동안 만났던 모라비아 교도들과 교류하였다.
      이후 독일을 방문해 모라비안 교회와 독일 경건주의 교회들을 돌아보기도 했다.
      1738년 5월 24일, 웨슬리는 복음적 회심을 경험하였다.
      웨슬리는 이날의 일기에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라고 기록하였다.
      이즈음 웨슬리는 모라비아 교도들과 결별하고 스스로의 사역을 시작하였다.

      전도여행과 사회개혁

      웨슬리의 사역은 조지 휫필드처럼 교회라는 울타리 밖으로 나가는 사역이었다.
      하지만 휫필드가 예정론의 칼빈주의적 감리교를 지향했던 것과 달리 웨슬리는 자유의지론을 바탕으로 하여 아르미니우스주의와 가까운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브리튼섬 전역과 아일랜드를 다니면서 웨슬리는 자신이 가는 곳마다 소모임인 속회를 조직하여 소모임 안에서 신자들이 훈련 받고 양육 받을 수 있게끔 했다.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웨슬리가 평신도 설교자를 세워 자신처럼 나라 곳곳을 다니며 선교하게 했다는 사실이다.
      웨슬리의 지도 아래, 감리교도들은 교도소 개혁과 노예해방 등 당시 사회적으로 중요한 이슈를 이끌고 개혁하였다.

      신학사상

      웨슬리는 비록 조직신학자는 아니었지만 신학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해 주장하였고, 칼빈주의의 이중 예정론에 맞섰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인 내면에 하나님의 사랑이 깊게 자리한다면, 이를 바깥으로 표출하여 사회적 성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웨슬리의 신학은 공교회주의를 바탕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가시적으로 표현되는 수단인 성례전과 예전을 존중하는 성공회 고교회주의(High church,Anglo-catholic)와 개인의 종교경험을 존중하는 복음주의가 균형 있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웨슬리는 은총의 수단(means of grace)을 통해 신자들이 변화할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경험할 수 있음을 역설하였다.

      감리교와 잉글랜드 성공회 요한 웨슬리의 회심

      전생애를 통틀어 웨슬리는 잉글랜드 성공회 성직을 유지하였고, 영국에서 감리교 운동은 단지 침체된 영국 성공회를 개혁하는 내부의 신앙 운동이라 하였으나, 미국 감리교회에서 목사를 안수할 감독을 웨슬리가 파송하며 미국에서는 분리적 태도를 취했다.

      웨슬리 사후 영국 감리교는 미국 감리교회처럼 영국 성공회로부터 독립하여 자체적인 교단을 형성하였으며, 감리교로부터 사회운동을 강조하는 구세군, 성결교, 오순절 운동 등이 생겨났다.

      웨슬리는 "영국에서 제일 사랑받는 사람"이라고 흔히 묘사되곤 한다.

      요한 웨슬리의 회심

      저녁기도, 루터의 로마서 주석

      1738. 5. 24
      이른 아침 존 웨슬리는 성서를 묵상하는 중에 성서 구절 하나를 우연히 읽게 되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베드로후서 1:4

      이 날 오후 웨슬리는 세인트 폴 교회에서 있었던 저녁 기도회에 참석하였다.
      이때 찬양대는 푸셀의 "오! 깊은 곳으로부터 주님께 나아갑니다(Out of the deep have I called unto thee, O Lord)"를 불렀다.
      이 곡은 마음의 고뇌와 거룩한 열망에 휩싸여 있던 웨슬리의 영적 상태를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었다.

      저녁이 되자 웨슬리는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올더스게이트 거리(Aldersgate Street)의 네틀턴 코트(Nettleton Court)에서 모이는 모라비아 교도의 기도회에 가기 위해 저녁 기도회에서 빠져 나와 성서를 펴니 "네게 하나님의 나라가 멀지 않도다"라는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기도회 장소에 도착한 웨슬리는 뒷자리에 앉아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는 것을 들었다.

      "그러므로 믿음만이 우리를 의롭게 하며 성령으로 외적인 선한 사역을 기뻐한다면, 불신앙은 창세기 3장에 나오는 대로 낙원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그랬듯이 죄를 짓게 하고 육체를 낳으며, 외적인 악한 사역을 기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요한복음 16장 8-9절에 "그분이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점을 깨우쳐 주실 것이다. 죄에 대하여라고 한 것은 사람들이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불신앙은 모든 죄의 뿌리요, 수액이며, 최고의 기도이다.
      그러나 믿음은 우리를 변화시켜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우리 안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8시 45분, 마지막 구절을 읽는 소리를 듣는 순간 웨슬리는 마음이 따듯해지는 경험을 하였다.
      존 웨슬리가 중생의 은혜를 체험하고 회심한 것이다.
      웨슬리는 이날 저녁에 일어난 일을 다음과 같이 일기에 썼다.

      "저녁에 나는 별로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올더스게이트 거리에 있는 한 신도회에 참석하였는데 거기에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다. 8시 45분 경에 그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시는 일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내 마음이 이상하게 따듯해지는 것을 느꼈다(I felt my heart strangly warmed).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있으며,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만을 믿고 있음과, 내 죄를 아니 내 죄까지를 다 거두어 가시고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얻었다."

      웨슬리는 곧 마음에서 경험한 것을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간증하였고 밤 10시쯤 되어서는 신도회 회원들과 함께 동생 찰스에게로 가 이 기쁨을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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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서신서(General Epistles) (06-25-2022 ) 야고보서,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




      07-19-2022(화)

      믿음의 도(유다서 1:3) / 그 믿음

      4102. 믿음의 도. πίστις
      πίστις, εως, ἡ 

      1. 믿음,  2. 신실성,  3. 엄숙한 약속

      발음 / 피스티스(pistis)
      어원 / 3982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믿음(마 8:10, 롬 1:8, 히 10:22), 도(행 6:7), 충성(갈 5:22), 신앙(빌 1:27, 히 6:1)
    • 신약 성경 / 243회 사용
    • * 3982. πειθώ
      πειθώ

      1. 확신을 가지게 하다,  2. 설복하다,  3. 끌어들이다

      발음 / 페이도(pĕithō)

    • 관련 성경 / 권하다(마 27:20, 행 13:43, 고후 5:11), 신뢰 하다(마 27:43, 빌 1:14, 3:4), 믿다(눅 11:22, 행 26:26, 롬 2:19),
      인정하다(눅 20:6), 따르다(행 5:36, 37, 롬 2:8), 옳게 여기다(행 5:40), 화목하다(행 12:20), 권면하다(행 18:4, 19:8), 권유하다(행 19:26), 순종하다(히 13:17), 확신하다(롬 8:38, 고후 2:3, 빌 2:24), 의지하다(고후 1:9, 히 2:13)
    • 신약 성경 /  52회 사용

    •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유다서 1:1-4)

      유다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들이 신약 성경에 8명이 있는데 유다서는 예수님의 형제인 유다에 의해 쓰여진 책입니다.
      1절부터 4절까지에는 이 편지를 쓰게 된 목적이 기록되어 있는데 거짓 교사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으므로 그들과 힘써 싸워 믿음을 지키라고 권면하기 위해 이 편지를 쓴다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유다가 이 편지를 쓸 당시에 거짓 교사들이 거짓 진리를 가지고 성도들의 믿음을 혼란스럽게 했던 것과 같이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도 여러 가지의 거짓 가르침으로 성도들의 믿음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거짓 교사들과 힘써 싸워 믿음을 지키라는 권면을 받는 우리들은 현 시대에 우리들의 교회 주변에서 우리들의 신앙을 위협하는 거짓 가르침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 성경과 대조해보고 성경에 어긋나는 것을 가르치는 거짓 가르침과 힘써 싸워 우리들의 믿음을 지켜나가시기를 원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편지를 보낸 자와 받는 자의 소개(1-2)
      2. 편지를 쓰는 목적(3-4)


      1. 편지를 보낸 자와 받는 자의 소개(1-2)

      1절에 보면 편지를 보낸 자가 자기를 소개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의 형제라고 하면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이 그 야고보가 누구인지 다 알 정도라고 한다면 그 당시에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였던 야고보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의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다서를 기록한 유다도 예수님의 동생이 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6장 4절에 보면 예수님의 형제가 소개되는데 야고보, 요셉, 유다, 그리고 시몬 이라고 소개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께서 살아 계신 동안에는 그의 형제들인 야고보나 유다가 자기의 형인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메시야인 것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돌아가신 후에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야고보서를 기록한 자가 되었고 유다도 자기를 소개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하며 또한 이 유다서를 기록하는 큰 일꾼이 된 것입니다.

      유다가 자기를 소개하기를 구세주 되신 예수님의 동생이라고 소개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의 종이란 주인의 소유물에 불과한 존재였는데 자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자기의 관계는 형과 동생의 관계가 아니라 죄인과 죄를 사해주는 메시야와의 관계요 주인과 종의 관계인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편지를 받는 자에 대해 소개하기를 부르심을 입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받아 읽을 자들이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세상에서 나와 하나님께로 온 자들이라 했습니다. 즉 죄 값으로 죽어 마땅한 죄인들이었으나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어 그리스도를 통해 죄 사함을 받고 그리스도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는 자들이며 또한 교회 안에 슬며시 들어온 현재의 이단자들에게 미혹되지 않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철저한 보호를 받는 성도라는 것입니다. 2절에서 유다는 이 편지를 받아 읽을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긍휼과 사랑 그리고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참 평화를 풍성하게 해 달라고 기원하고 있습니다.

      2. 편지를 쓰는 목적(3-4) 

      3절에서 편지를 쓰게 된 경위를 밝히기를 본래는 성도들이 얻은 현세의 구원과 주님 재림시에 누리게 될 영원한 구원에 대해 더 자세히 써보내기를 간절히 원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본래 마음먹었던 계획을 바꾸어 성도들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내용으로 써보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4절에서 이렇게 주제를 바꾸어 써보내게 된 이유를 밝히고 있는데 그 이유란 교회 안에 몇몇 이단 사상을 가진 자들이 들어왔기 때문이라 한 것입니다. 모든 사단의 세력들이 다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런 자들은 심판을 받기로 정해진 자들인데 이들은 경건한 삶을 버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이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왔다고 하였습니다.

      유다가 이 편지를 쓸 당시에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이단 사상이 바로 영지주의(Gnosticism)란 것이었는데 이들은 누구보다 영적으로 많이 알고 누구보다 신령하여 많이 깨달았다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은혜가 크신 분이시므로 인간이 어떤 죄악을 저질러도 다 용서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이 육체가 원하는 본능대로 살아도 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죄가 커야 은혜가 더 크다고 하여 오히려 비도덕적인 삶을 살도록 조장했으며 육체적 범죄행위를 그들의 이론으로 정당화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육신의 행위는 인간의 고귀한 영혼에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육체적인 쾌락을 즐기는 방종의 생활을 하였고 다른 사람들을 이러한 죄악의 구렁텅이에 끌어드렸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들은 성도들이 살아야 할 정결한 삶과 정 반대 되는 사상을 가지고 교회 안에 들어와 성도들을 미혹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이단 사상을 가진 자들은 주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자체를 부인했으므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도 믿지 않았고 죄를 사해주는 구세주로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즉 교회 안에서 성도들과 함께 신앙 생활을 하고는 있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불신자였으며 오히려 신자들이 불신자가 되도록 믿음에서 끌어내리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죄 값으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들을 주님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으로 죄 사함을 얻어 구원되었으니 이 귀한 은혜를 귀히 알고 자신을 모든 죄로부터 지켜 주님 재림시까지 흠 없고 티없는 정결한 삶을 살아나가야 하는 것이 성도들의 마땅한 삶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할 성도들을 향해 오히려 육신이 원하는 것을 자제하지 말고 본능대로 살아도 된다고 가르치는 자들이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 왔으니 유다는 이 일을 교회가 당하는 큰 위기로 알고 그런 이단자들의 정체를 폭로하고 성도들이 그런 이단 세력과 힘써 싸워 이미 받은 구원을 지켜나가도록 편지를 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우리에게 주신 본문 말씀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교훈은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온 이단 사상을 경계하고 단번에 받은 믿음을 지켜나가라는 교훈입니다. 유다는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온 이단 사상의 정체를 폭로하고 믿음을 지켜나가도록 이 편지를 써 보냈는데 우리들은 어떤 편지를 써서 보내야 할까요?

      첫째는 교파주의 위기

      하나님의 뜻은 다 같은 말을 하고 분쟁이 없이 다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장과 교리를 달리하는 교파는 날로 늘어만 가고 있으며 나눠지는 자체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리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파가 존재하는 사실을 마음 아파하는 것이 아니라 교파가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드리고 있는 현실이 바로 큰 위기인 것입니다. 성경에 어긋나는 구원관이나 예배관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교회 조직과 다른 이론을 가진 모든 교파주의는 단번에 받은 믿음에 큰 위기가 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 지에는 상관없이 각 교파에서 가르치고 있는 모든 가르침을 성경을 통해 걸러보지 않고 그대로 믿고 받아드리는 일은 정말 큰 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몸이 하나요 성령이 하나입니다. 그리고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한 소망 가운데 온전히 합해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에 의해 믿음이 하나를 이뤄나가야 한다고 우리들은 편지를 써보내야 합니다.

      둘째는 세속 주의의 위기

      세속 주의란 영적인 교회를 세상적으로 몰고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믿음의 목표는 죄 사함 받아 현세에도 구원받고 주님 재림시에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 영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생의 복보다는 이 세상의 세속적인 복을 강조하여 하늘나라의 소망보다는 세상에의 소망을 심어주는 사상이 바로 세속주의 신앙입니다. 그리고 세속주의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대로 따라가는 사상입니다. 예배도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사람 중심으로 바꾸어 가는 것입니다. 이런 세속주의는 결국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피아노를 드려오게 하였고 요사이는 오케스트라까지 동원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속주의는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는 주님의 명령인 주의 만찬을 예배에서 빼내고 헌금은 더 많이 강조되어 영적 공동체인 교회에서도 돈돈돈 하도록 영적 교회를 부패시킨 것입니다. 요사이는 여성 파우어가 강한 이 세상 추세에 밀려 여자들을 목사와 장로를 시키며 동성연애자를 교회에서 추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도 목사 안수를 해주어야 하는지를 토론하고 있는 실정에 이른 것입니다. 이런 세속주의는 예언 기도를 끌어들여 예언을 해주고 돈을 받기에 이르렀으며 병 낫도록 기도해주고 돈을 받기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 무슨 일보다도 최우선 순위에 두어야 하는데 이런 세속 주의는 불가피하다는 본인의 판정에 따라 예배를 등한히 할 수 있는 것으로 믿게 하고 예배의 내용 자체를 열린 예배라는 명목으로 사람 중심으로 점점 세속화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세속 주의는 다시 말씀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우리들은 편지를 써서 보내야 합니다.

      셋째는 율법주의의 위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후에도 구약의 율법 사상을 끌어드리는 위기입니다. 만인 제사장이 선포된 이 때에 목사가 까운을 입고 제사장같이 계속 남아 있으면서 목사에게만 축복권이 있다고 주장해오고 있는 것은 기독교의 진리를 파괴하는 위험한 사상입니다. 또 예배당을 성전이라 부르며 신성시하는 것은 성도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는 복음의 기초를 무너뜨리는 위기인 것입니다. 헌금을 많이 내게 하기 위해 말라기서나 구약의 사상을 끌어드리는 것은 성도들이 복음으로 얻은 구원의 은혜를 율법의 속박으로 다시 돌아가게 하는 위기인 것입니다. 교회 안에 율법적인 사상들이 들어와 있음에도 전연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 바로 큰 위기인 것입니다. 복음이 아닌 율법적인 것은 교회에서 다 추방되어야 한다고 우리들은 편지를 써서 보내야 합니다. 교파주의의 신앙, 세속주의의 신앙, 그리고 율법주의와 힘써 싸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단번에 주신 귀한 믿음을 지켜나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거짓 교사들의 패망(유다서 1:5-16)


      유다서 1절부터 4절까지에서는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와 성도들의 믿음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 거짓 교사들과 힘써 싸워 믿음을 지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본문은 성도들의 믿음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 그 거짓 교사들은 결국 망하고 말 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유다가 지적하고 있는 이 거짓 교사들은 비록 그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 있지만 몸만 교회 안에 들어와 있지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오히려 믿는 자들을 신앙에서 떨어져 나가도록 유혹하는 사단의 세력들이었던 것입니다. 그 누구도 이 사단의 세력에 말려든다면 결국 그도 사단의 세력 안에 들어가게 되므로 사단이 망할 때에 함께 패망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하나님 앞에 범죄 하므로 패망했던 실제적인 예를 들어가며 거짓 교사들은 과거의 모든 범죄자들이 패망했던 것과 같이 패망하고 말 것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오늘의 본문에서 지적하고 있는 거짓 교사들을 경계하여 본래 받은 순수한 믿음을 지켜나가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생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패망한 역사적인 세 사건의 예(5-10)
      2. 패망한 역사적인 세 인물의 예(11)

      3. 거짓 교사의 정체(12-16)

      1. 패망한 역사적인 세 사건의 예(5-10)

      유다는 구약 성경에 나타난 세 사건을 예로 들면서 범죄자들은 결국 망하고 말 것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의 사건은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다 죽었던 사건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시고 광야 40년 동안 만나로 먹이시며 바위에서 물을 내셨으며 홍해 바다를 건너되 육지 같이 건너게 하셨으며 불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수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면서도 조금만 불편한 일이 생기면 차라리 애굽에서 그대로 종살이 한 것이 나을 뻔했다고 모세에게 불평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하나님을 불신했던 200만 300만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다 죽게 하시고 오직 믿음이 있는 여호수아와 갈렙만을 살리셔서 가나안땅에 들어가도록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두 번째의 예는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의 예입니다.
      베드로 후서 2장 4절에도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의본문 6절에서는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었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창조하시고 그들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셨으나 그중 어떤 천사들은 교만해져서 자기가 맡은 책임과 지위를 지키지 않고 자유롭게 떠난 천사들을 범죄한 천사들로 간주하고 그들을 심판 때까지 영원히 묶어두었다고 한 것입니다. 아무리 그 존재가 천사일지라도 범죄한 천사는 엄하게 벌하신다는 증언인 것입니다.

      세 번째의 예는 소돔과 고모라 멸망의 예입니다.
      세 번째의 예는 창세기 19장에 기록된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사건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은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았다고 했는데 요사이 일반화되고 있는 동성간의 성적인 범죄를 지적한 것입니다. 창 6장 4절에도 천사들이 사람인 여자들과 접촉하여 자식을 낳았다고 했는데 천사들과 사람들간에 접촉한 색도 다른 색이려니와 여자와 여자 그리고 남자와 남자간의 색도 다른 색인 것입니다.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다른 육체와 성적인 범죄를 저지르므로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의 질서를 무시한 소돔과 고모라가 형벌을 받은 예를 들면서 이 것은 우리의 거울이 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유다는 위의 세 사건을 소개하면서 거짓 교사들은 이 세 사건을 잘 알면서도 그들과 똑같이 하나님의 질서를 어지럽혀 육체를 더럽히며 하나님의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훼방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유다는 거짓 교사들이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훼방하는 일이 잘못된 일임을 9절과 10절에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9절에서 예로 든 천사장 미가엘과 모세의 시체에 대한 내용은 성경에 나와 있는 내용이 아니고 성경에 들어가지 못한 다른 문서인 위경(Apocrypha) 중 모세의 승천(The Assumption of Moses)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그 내용은 사단은 모세가 살인자라는 이유로 모세의 시체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였고 천사장 미가엘은 분명히 사단을 비난하고 판결할 수 있는 위엄과 권세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사단에 대해 비방하거나 고소를 하지 않고 오직 모든 심판은 하나님께 맡긴다는 의미로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비방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진 천사장 미가엘도 비방하지 않았는데 거짓 교사들은 쉽게 남을 비방하고 무엇이든지 훼방하니 거짓 교사들은 무엇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이성이나 자제력이 없고 오직 자기의 육적인 본능으로만 살고 있으니 이로 인해 멸망 받게 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2. 패망한 역사적인 세 인물의 예(11)

      유다는 11절에서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좇아 멸망하느니라 했습니다. 첫째의 인물은 가인입니다. 가인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대로 제사를 드리지 않고 자기 생각으로 제사를 드린 불순종한 자였으며 동생을 죽인 자 즉 남에게 해를 끼치는 자였습니다. 두 번째의 인물 발람은 자기의 물질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 숭배와 음행에 빠지도록 했던 자였습니다. 세 번째의 인물 고라는 모세와 아론의 권위에 도전하여 반역했던 자였습니다. 유다는 거짓 교사들은 가인이나 발람이나 고라와 같은 자들이므로 그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3. 거짓 교사의 정체(12-16)

      유다는 거짓 교사들이 어떤 존재들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 성도들이 탄 사랑과 친교의 배를 파선시키는 암초와 같으며, 지도자라 하면서 양들을 먹여 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몸만 살지게 하는 목자라 했습니다. 또 거짓 교사들은 비를 뿌려주지 못하는 바람에 불려 가버리는 구름과 같이 기대했던 자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존재들이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이 당연히 맺어야할 열매를 전연 맺지 못하는 뿌리까지 뽑히고 뽑혀야할 존재들이라 했습니다. 또 거짓 교사들은 바닷물이 들어왔다 나가면 해변에 더러운 쓰레기들을 두고 나가듯이 거짓 교사들은 그들의 삶 속에 오직 수치스럽고 더러운 것들만 생산해 내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예비 된 캄캄한 흑암에 들어갈 유리 하는 별들이라 했는데 이 내용은 역시 성경이 아닌 다른 문서 에녹서(Enoch)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에녹서에서 에녹은 세상에 돌아다니다가 하늘의 일곱 별이 결박되어 불 속에 든 것을 보게 되어 천사 우리엘에게 무슨 죄로 저렇게 되었느냐고 물으니 천사가 대답하기를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별들로 그 죄가 다 타기까지 만 년을 매어 있어야 한다고 대답했다는 내용입니다. 유리하는 별들이란 자기의 위치를 지키지 못하고 빛을 환하게 비춰주지 못하는 떠돌아다니기만 하는 쓸모 없는 별들을 말하는 것으로 이 별들이 영원히 예비 된 캄캄한 흑암에 들어가야 하듯 거짓 교사들도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고 자기들의 욕심만 채우고 아무 쓸모 없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임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14절부터 16절까지의 내용도 성경이 아닌 다른 문서인 에녹서를 인용한 것인데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예언하기를 주님께서 수많은 천사들과 함께 재림하셔서 모든 불경건한 자들이 행한 경건치 못했던 일과 하나님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정죄하고 심판하시기 위해 임하셨다고 했습니다. 심판을 받을 그들은 원망하는 자들이며, 불만을 말하는 자들이며 정욕대로 행하는 자이며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며 또 아첨하는 자들이라 했습니다. 이들이 주님의 심판을 받듯이 거짓 교사들도 같은 죄를 짓고 있으므로 심판을 꼭 받게 될 것을 힘주어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교훈은 거짓 교사들이 지은 그런 죄를 경계하여 파멸을 면하라는 경고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오늘 본문 내용에서 어떤 자들이 심판을 받았는지 역사적으로 증거를 받았으며 그 누구든지 심판을 받은 자들과 똑같은 죄를 지은 다면 예외 없이 심판을 받게 될 것에 대한 경고를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다른 제사를 드린 가인이 심판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체험하고도 조금만 어려움이 생기면 하나님을 불신하고 과거로 돌아가려고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판을 받았던 것입니다. 자기의 자리를 지키지 못한 천사가 심판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별들이 심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어기고 다른 색으로 간음하다가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 받았으며 남에게는 어떤 해가 되든지 자기의 욕심만 채우는 발람이 패망했습니다. 또 지도자를 모함하고 배신한 고라가 심판을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누구든지 패망한 자들과 같은 죄를 지은 다면 패망하고 말 것을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범죄한 일로 패망한 자들이 지었던 같은 죄를 우리들도 지을 수 있는 것들이어서 유다가 범죄치 말라고 강력하게 경고하는 것으로 풀이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들의 생각과 달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하고 하나님을 불신한 자들이라면 그들이 아주 큰 숫자인 200만 300만이라도 버리시며 그 신분이 천사일지라도 버리신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깨달았습니다. 세상이 다 범죄하면 세상을 다 물로 아니면 불로 심판해버리시는 하나님이시지 너무 많은 숫자가 같은 범죄를 저질렀으므로 환경을 참작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심을 알았습니다.

      심판 받아 마땅한 거짓 교사들이 저질렀던 범죄에서 우리들은 해방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딸들이라 할지라도 거짓 교사들이 지었던 같은 죄를 짓는다면 거짓 교사가 망할 때에 우리들도 그들과 함께 망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불순종, 불신,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 자기만 아는 이기심, 불평 불만, 육의 욕심대로 사는 것, 불 경건한 삶, 자기의 위치를 지키지 못한 삶, 자랑이나 아첨하는 삶, 강퍅한 말을 하는 입, 하나님의 은혜를 배신한 삶, 이런 모든 삶은 하나님께 범죄한 삶이 되므로 주님 재림시에 심판을 면치 못하는 삶인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도록 유혹하는 사단에 도전하여 이런 유혹을 이겨내는 승리의 삶을 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도들에게의 권면(유다서 1:17-25)

      마지막 부분에서는 성도들이 믿음을 지켜나가는데 꼭 필요한 귀한 권면이 주어져 있습니다.
      이 지구상에 거짓 선지자나 이단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지만 자기가 이단이라거나 자기가 거짓 선지자라고 양심 선언을 하는 경우는 한 건도 없는 것입니다.
      거짓 선자자의 정체가 언제 다 들어 나게 될까요?
      주님 오실 때까지는 이 세상에 존재한 수많은 교파나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모두 자기가 정통이요 자기가 하나님이 보내신 참 선지자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재림시에는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가 분명히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

      스가랴 13:4-5절에 보니 주님 오시기 전까지는 거짓 선지자들이 선지자로 위장하기 위해 선지자들이 입었던 털옷을 입었으나 주님 재림시에는 털옷도 입지 않으며 자기 스스로 자기를 소개하기를 자기는 선지자가 아니라 농부라고 고백할 것이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속일 수 있지만 주님 재림시에는 속일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모든 거짓은 자취를 감추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직 거짓 선지자가 기승을 부릴 마지막 시기이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거짓 선지자의 유혹에 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소개받는 우리 모두는 거짓 선지자가 우리 주변에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들을 경계하여 주님 오실 때까지 우리들의 순수한 믿음을 지켜나가시기를 기원합니다.

      본문을 네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기롱하는 자들이 있을 것임을 기억하라(17-19)
      2. 자신을 건축하라(20-21)
      3.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고 불에서 끌어내라(22-23)
      4. 하나님의 찬양(24-25)

      1. 기롱하는 자들이 있을 것임을 기억하라(17-19)

      기롱한다는 말의 뜻은 조롱한다는 뜻인데 이는 하나님을 조롱하고 성도들을 조롱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말세에 거짓 선지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사도들이 전에 했던 말을 기억하라고 유다는 성도들에게 권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베드로 그리고 사도 요한은 그들의 편지에서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 경계하도록 미리 말한바가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가 나타날 것을 예고한 유다는 다시 거짓 선지자들의 특성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말세에 나타날 거짓 선지자들은 경건은 모르고 자기의 욕심대로 사는 자들이며, 교회와 교인을 갈라놓는 당을 짓는 자들이라 했습니다. 또 그들은 교회에 들어와 있으나 성령은 없는 자들이라 했습니다. 성령이 없다는 말의 뜻은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믿지 않은 다는 말입니다. 교회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구원도 심판도 믿지 않은 불신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말세에 교회에 나타나게 될 것을 몇몇의 사도들이 미리 말한 바가 있는데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2. 자신을 건축하라(20-21) 

      유다는 성도들이 믿음의 도를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거짓 선지자와 힘써 싸워 이겨야 하므로 거짓 선지자와 힘써 싸워 이길 수 있는 네 가지 길을 권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라고 했습니다. 거룩한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이 기초가 된 믿음을 말합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는 믿음도 많기 때문에 그런 믿음과 구별하기 위해 거룩한 믿음이라 한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가 나타났을 때에 모래 위에 세운 집이 무너지듯 무너지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로 단단하게 다져진 기초 위에 자신을 세워나가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늘 가까이하여 자기가 가진 믿음을 말씀과 대조하고 말씀에 따라 실행하라는 것입니다.

      다음은 성령으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거짓 선지자와 싸워 이길 수 있는 두 번째의 길은 성령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기도한다는 말의 뜻은 자기 욕심만을 채우려는 기도 말고 성령을 충만하도록 채우려는 기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에 합하는 기도이며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의지하는 기도를 말합니다.

      그 다음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킨다는 말의 뜻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자신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는 울타리가 되어주시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이 세상 아무 것도 지켜주는 울타리가 되어줄 수 없을 것이므로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지 말고 늘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만 머물러 있으라는 뜻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된 긍휼은 재림시에 성도들에게 베풀어주실 긍휼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재림시에 주님께서 베푸실 긍휼을 소망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소망을 가진 자는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어 승리의 자리에 들 수 있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고 불에서 끌어내라(22-23) 

      22절부터 23절에서는 거짓 선지자들로부터 유혹되었거나 유혹될 성도들에게 사랑을 베풀라는 권고인 것입니다. 바로 앞부분에서 거짓 선지자들을 대항하여 싸워 이기려면 자신을 단단히 무장하라고 권면했는데 이렇게 자신을 지키기 위해 단단히 무장했으면 이제는 자기 이웃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을 구출해내라는 것입니다. 첫째는 거짓 선지자의 유혹을 받아 비 진리를 진리라 믿고 오히려 진리를 의심하는 이웃들에게 냉대만 하지 말고 사랑과 긍휼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에게 유혹된 자는 거짓 선지자들이 불에 탈 때에 함께 불에 타고 말 것이기 때문에 불에서 그들을 구원해 내라는 권고인 것입니다. 불에서 그들을 구원하는 길이란 비 진리에 빠져 있는 자들을 조심스럽게 접촉하여 비 진리의 삶에서 빠져 나와 진리를 다시 믿게 하라는 권면인 것입니다. 물에 빠진 자를 건져 낼 때에 조심스럽게 건져내지 않으면 둘이 다 빠져 죽는다는 것을 생각하며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미 빠져 들어간 자를 접촉할 때에 조심스럽게 두려움을 가지고 접촉하면서 구출해 내라는 권고입니다.

      4. 하나님의 찬양(24-25)

      유다는 거짓 선지들로부터 성도들을 지켜주셨고 앞으로도 지켜주실 하나님께 찬양하는 말로 유다서를 끝맺고 있습니다. 유다는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거짓 선지자들의 위험 속에서도 성도들을 능히 보호하시어 아무런 거침이 없게 하실 하나님으로 찬양하고 있습니다. 또 주님 재림시에 성도들을 하나님의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능력이 있으신 하나님으로 찬양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가장 큰 소망은 주님 재림시에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는 것이요 그 자리에 서기 위해서는 그 자리에 설 때까지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셔야 하기 때문에 모든 악으로부터 성도들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성도들을 흠 없게 바로 서게 하실 하나님으로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다는 마지막 절인 25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히 함께 하시기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일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또 주님의 보혈의 공로로 많은 천국 백성들이 천국에 입성하므로 큰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를 영원히 누릴 분이심을 찬양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교훈은 주님 재림시에 하나님의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바로 설 수 있도록 믿음을 지켜나가라는 교훈입니다. 그리고 이런 믿음을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자신을 바른 믿음의 사람으로 건축해나가라는 교훈인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명에도 지식도 권세도 부귀도 다 중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세상에서 이름 있는 자들의 장례식은 오히려 더 허망한 생각이 들게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가졌던 아무 것도 그를 죽음 앞에서는 쓸모가 없다는 허무한 생각을 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장례식에 갈 때마다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장례식을 아무리 화려하게 거행하고 장례식에서 죽은 자의 약력을 아무리 아름답고 꾸며주어도 그런 것들은 죽은 자의 영혼을 구원하는데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또 장례식을 집례하는 자가 고인의 영혼이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고 선포한다고 하더라도 그 선포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 무엇이 죽은 자의 영혼이 주님 재림시에 천국에 입성하도록 해주는 것일까요? 그것은 살아 있는 동안에 가졌던 본인의 바른 믿음과 바른 실행만이 자신의 영혼이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살도록 보장해주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유다는 우리들에게 권하기를 바른 믿음으로 자신을 세워나가라고 한 것입니다. 바른 믿음으로 자신을 세워 나가는 자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 흠 없게 즐거움으로 설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떻게 자신을 세워나가라고 했나요?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워나가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어떤 교파나 어떤 유명한 신학자가 제시한 믿음 말고 하나님의 말씀이 인정한 믿음 위에 우리들 자신을 건축해 나가야 합니다. 말씀과 대조하여 세상이 준 믿음은 하나씩 버려나가므로 거룩한 믿음으로 바꿔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성령으로 기도한다는 말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은 주님의 기도를 생각하면 됩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실행하기 위함이었으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채우기 위함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한 기도 말고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성령께서 원하는 삶을 살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늘 충만하도록 성령의 기도로 우리들을 건축해나가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 유다는 우리들에게 늘 하나님 안에 거하여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을 늘 받을 수 있는 자들이 되고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늘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는 삶으로 우리 자신의 믿음을 건축해 나가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렇게 믿음을 세워나가야 하겠습니다. 또 이런 믿음으로 자신을 무장한 우리 모두는 비 진리에 빠져 있는 영혼들에 관심을 갖고 그들을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받게 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귀한 삶을 사시어 주님 재림시에 하나님의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바로 살 수 있으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1. 부르심을 입은 자(유다서 1:1-2)

      유다서는 67년경에 유다에 의해 쓰여진 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유다는 자신을 야고보의 형제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야고보란 이름이 여러 곳에 있지만 여기서 야고보라고 지칭한 인물은 야고보서를 기록한 주님의 형제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유다는 야고보와 함께 주님의 육신적인 형제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본서를 기록한 유다는 사도 중에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주의 복음을 위해 많은 사역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 서신을 쓴 목적은 많은 이단자들과 복음을 대적하는 무리들이 복음을 방종 주의와 혼돈하여 진리를 흐리게 하고 있으므로 이것을 엄히 경계하고 성도들로 구원을 위해 끝까지 싸우게 하려는데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유다의 축복 기도

      유다는 이 서신의 서두에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 대하여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더욱 풍성할 것을 축원해 주고 있습니다.
      유다는 부르심은 입은 자들에 대하여 두 가지 특권을 말씀해 줍니다.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은 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자들을 복음으로 부르십니다.
      이들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받은 그의 백성들입니다.

      이들에 대하여 로마서 9:10 이하에서 사도 바울은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는데 하나님의 택하심에서 오는 부르심은 야곱의 경우처럼 에서는 미워하셨기 때문에 부르심에서 제외되고 야곱은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사람의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따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그 뜻을 알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를 부르심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 목적을 위해 그 무한하신 지혜와 권능으로 조금도 차질 없이 계획하셨고 또 조금의 실수도 없이 그 뜻을 이루신다는 사실입니다.
      신명기 29:29에서 이르시기를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께 속한 일'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오묘함을 알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에게 주어진 환경과 지혜 안에서만 생각하기 때문에 이사야 55:8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그의 생각으로 모든 일을 섭리하시기 때문에 결코 후회함이 없으십니다.
      바울은 로마서 1:30에서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내가 부르심을 받은 것은 이같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와 판단에 다라 결정되어 실행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확고한 믿음을 가져야 하며 늘 그 은혜 가운데서 감사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따질 수 있는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이런 완벽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찾아온 것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뢰하고 그의 뜻대로 이루어질 수 있기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 분의 뜻은 언제나 나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시는 일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분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

      유다는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두 가지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을 얻기 위해 창세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에 의해 지켜져 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에도 하나님의 지키심에 의해 내가 세상에 태어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나나 여러분은 지난날 고려 시대나 이조 시대에 태어났어도 좋을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옆집 부자집 주인의 아들이나 앞집 권세 있는 집주인의 딸로 태어날 수도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 가문의 혈통을 통해서 내 부모님에 의해서 내가 세상에 태어날 것을 이미 예정하셨으며 그런 모든 일들을 이루시기 위해 나를 지켜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이 이 땅에 전파되기 이전의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것은 이같은 하나님의 지키심의 섭리에 의한 필연적인 일인 것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앞으로도 이같은 하나님의 지키심으로 나의 구원을 온전히 이루어 주실 것이란 사실입니다. 이런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지키심은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어 천국에 이르기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끝까지 지키심을 입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 깊이 새겨 늘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생애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07-18-2022(월)

      네 영혼이 잘 됨같이(요한삼서 1:2)

      영혼(5590). 푸쉬케(psüchē) ψυχή

      ψυχή, ῆς, ἡ

      1. 영혼,  2. 생명력,  3. 혼

      발음 / 푸쉬케(psüchē)
      어원 / 559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목숨(마 2:20, 막 8:35, 롬 11:3), 영혼(마 10: 28, 눅 12:20, 고후 12:15), 마음(마 11:29, 막 14: 34, 행 14:22), 생명(막 3:4, 요12:25, 행 20:10), 힘(막 12:33), 뜻(행 4:32), 인(행 27:37), 영(고전 15:45), 혼(살전 5:23, 히 4:12), 명(벧전 3:20), 심령(벧후 2:8), 사람(행7:14, 롬 13:1)
      신약 성경 / 103회 사용

      * 5594. ψύχω

      1. 차게하다,  2. 싸늘하게 하다. 수동: 차게 되다,  3. 싸늘해지다

      음 / 프슈코(psüchō)
      관련 성경 / 식어지다(마 24:12)
      신약 성경 / 1회 사용

      겉(1854) 에코(ἔξω)

      1. 밖에,  2. 마가 11:4,  3. οἱ ἔξω 밖에 있는 사람들
      발음 / 에코(ĕxō)
      어원/ [장소의 부사] 1537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밖으로(마 21:17), 외인(막 4:11), 겉(고후 4:16), 밖(마 5:13, 막 3:31, 눅 1:10), 바깥(마 26:69, 막 1:45), 외국(행 26:11)
      신약 성경 / 63회 사용

      * 1537. 에크(ἐκ)

      1. 모음 앞에서는 ἐξ,   2. 마태 2:15,  3. 요한 15:19

      발음 / 에크(ĕk)
      관련 성경 / ~에서부터,  ~에서부터 멀리,  ~로 말미암아, ~에게서 온(마 1:18)
      신약 성경 / 916회 사용


      후패(1311). διαφθείρω

      1. 파괴하다,   2. 파멸시키다
      발음 /  디아프데이로(diaphthĕirō)
      어원 / 완료수동분사 διεφθαρμένος, 제2부정과거수동태 διεφθάρην, 1225와 535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좀먹다(눅 12:33), 낡아지다(고후 4:16), 부패하다(딤전 6:5), 깨지다(계 8:9), 망하다(계 11:18), 멸망시키다(계 11:18)
      신약 성경 / 6회 사용

      * 1225. διαβάλλω

      1. 적의로 고소하다,   2. 비난하낟,  3. 참소하다

      발음 / 디아발로(diaballō)
      어원/ 제1부정과거수동태 διεβλήθην, 1223과 90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밀고되다, 들리다(눅 16:1)
      신약 성경 / 1회 사용


      * 5351. φθείρω

      1. 파괴하다,  2. 파멸하다, 3. 썩히다

      발음 / 프데이로(phthĕirō)
      어원 / 미래 φθερῶ, 제1부정과거 ἔφθει- ρα, 완료 수동태 ἔφθαρμαι, 수동태 분사 ἐφθαρμένος, 제2부정과거 수동태 ἐφθάρην,
      미래수동태 θαρήσομαι, φθήω ‘소비하다’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더럽히다(고전 3:17, 15:33), 멸하다(고전 3:17), 해롭게 하다(고후 7:2), 부패하다(고후 11:3), 썩어지다(엡 4:22),
      멸망하다(유 1:10)
    • 신약 성경 /  9회 사용

    • 속(2081) ἔσωθεν

      1. 안으로부터,  2. 안에
      발음 / 에소덴(ĕsōthĕn)
      어원/ [장소부사] 208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속에는(마 7:15), 속에서(막 7:21, 23), 안에는(마 23:25, 27, 눅 11:7), 안으로는(마 23:28), 속은(고후 4:16), 속도(눅 11:40)
      신약 성경 / 12회 사용

      * 2080. ἔσω

      1. 안으로,  2. 내부에

      발음 / 에소(ĕsō)
      어원 / [장소부사] 1519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안에(마 26:58, 막 14:54, 요 20:26), 속에(롬 7:22, 엡 3:16), ~안에(고전 5:12), 안으로 (막 15:16)
    • 신약 성경 /  9회 사용
    • *1519.  εἰς

      1. ~안으로,  2. ~에게.  3. ‘가다’ 라는 동사나 어느 장소를 향한 동작을 포함하는 동사들의 뒤에서. ㉠ 성 안에 가서

      발음 / 에이스(ĕis)
      관련 성경 / 결과가 ~이다(마 2:1)
      신약 성경 / 1768회 사용

      새롭도다(341).
      ἀνακαινόω

      1. 《반》διαφθείρειν: 새롭게 하다,  2. 갱신하다,  3. 고린도후서 4:16

      발음 / 아나카이노오(anakainŏō)
      어원 / 303과 2537의 파생어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새롭다(고후 4:6), 새롭게 하심을 입다(골 3:10)
    • 신약 성경 /  2회 사용

      * 303. ἀνά

      1. 위에,  2. ἀνὰ μέσον,  3. ~가운데
      발음 / 아나(ana)
      관련 성경 / 층대(행 21:35)
      신약 성경 / 13회 사용
    • * 2537.  καινός
      καινός, ἡ, όν

      1. 새로운,  2. 쓰지 않은,  3. 알려지지 않은 
      발음 / 카이노스(kainŏs)
      어원 /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새(마 9:17, 눅 5:36, 계 2:17, 마 13:52, 막 2:21, 고후 5:17), 새로운(고후 5:17, 계 21:5), 새로 되는(행 17:21)
    • 신약 성경 /  42회 사용
    • * 새로운(네오스) νέος
      νέος, α, ον

      1. 새로운,  2. 상징적으로 쓰일 경우. ㉠ 고전5:7. ㉡ οἶνος ν.: 새 술,  3. ἐνδύσασθαι τὸν ν.: 새사람을 입다

      발음 / 네오스(nĕŏs)
      관련 성경 / 젊은(요 21:18, 행 5:6, 딤전 5:11). [명] 젊은이(딤전 5:1, 14), 젊은 자(눅 22:26)
      신약 성경 / 24회 사용



    • 영혼이 잘 된다는 것은 속 사람이 잘 된다는 것이라고 하겠다.
      겉 사람은 주로 외적인 기준으로 평가한다.
      예를 들면 그가 입고 있는 옷, 그가 살고 있는 집, 그가 사용하는 자동차와 같은 것들이다.
      반면에 속 사람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준이 없기 때문에 가늠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속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유지되는 사람이므로 영적 생활을 어떻게 하느냐에 의해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이다.
      왜냐하면 나는 외할아버지를 보지 못했다.
      그렇다고 외할아버지가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나의 어머니의 아버지가 외할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이다.

      영혼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겉 사람을 중요시하고 겉 사람을 외면하는 사람의 종말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에서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곧 영혼을 위한 말씀이며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영혼이 잘 된다는 것은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성경에서 영혼이 잘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인가?

      첫째는 구약시대에는 선지자들입니다.
      둘째는 신약시대에는 사도들입니다.
      사도들의 대부분은 죽임을 당하고, 죽음의 위협과 굶주림과 매 맞음 속에서 예수를 증거했습니다.
      셋째는 초대교회 시대에는 수 많은 순교자들입니다.        

      영혼이 잘된 사람이란 어떤 사람들인가?

      첫째는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요한복음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둘째는 예수님의 제자(누가복음 14:33)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셋째는 이 세상 것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요한일서 2:15-17)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니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넷째는 세상에서 자랑을 받을 수 없는 사람(누가복음 16:15)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영혼이 잘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으로 이러한 사람들은 악한 것을 외면하고 선한 것을 본 받는 길을 따라갑니다.

      영혼이 잘 되려면 바른 신앙을 유지해야 합니다.
      바른 신앙이란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날마다 주님을 닮아가는 일에 하나가 되어 세상을 하나님의 것으로 회복하는 일에 보탬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종교는 없지만 영적 존재는 믿는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수요성서학당 #. 14(09-16-20)

      겉 사람과 속 사람(고린도후서 4:16, 에베소서 4:22-24)

      고린도후서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은 날로 새롭도다.
      Therefore we do not lose heart. Though outwardly we are wasting away, yet inwardly we are being renewed day by day

      공동번역 /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낡아지지만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 /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비록 우리의 겉 사람은 쇠약해 가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와지고 있습니다.

      새번역
      /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 겉 사람 속 사람을 구별하는 기준은 "시간" 이라고 하겠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겉 사람은 누구나 약하여지고 쇠하여 갈 것입니다.
      반면에 속 사람은 정신을 차리기도 하고 철이 들기도 하고 반성하며 후회하면서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려고 결단합니다.

      - 옛 사람 새 사람을 구별하는 기준은 "신앙" "거듭남" "중생" "구원" 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원을 받은 후에도 내 안에서 옛 사람의 삶의 습관이 나를 힘들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모습을 일컬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탄식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케 된 후에는 "나의 달려 갈 길을 다 가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렇게 고백합니다.

      * 자연인의 반대는 "문화인" 또는 "문명인"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사람이다.
      자연인의 겉 사람은 육체의 소욕을 따라가는 사람
      자연인의 속 사람은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

      * 자연인과 문화인 그리고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겉 사람은 동일한 모습이다.
      모두 시간이 지날수록 육체는 쇠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속 사람은 목적과 추구하는 것이 다르다.
      속사람은 새로워 집니다.
      어떻게 새로워 집니까?
      자연인의 속 사람은 "정신을 차린다" "철이 들었다"
      그리스도인의 경우는 "회개" "깨닫는다"고 합니다.

      에베소서 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You were taught, with regard to your former way of life, to put off your old self, which is being corrupted by its deceitful desires;
      to be made new in the attitude of your minds;
      and to put on the new self, created to be like God in true righteousness and holiness.





















       용어                          영어                                      성구          헬라어                  의미





      겉 사람

          outward man, outwardly, outer man

        고후 4:16

           ἔξω

             육에 끌리는 사람

      속 사람

          inwardly, inward man, inner man

      고후 4:16

           ἔσω

             영에 끌리는 사람

      옛 사람

          the old man, the old self   

      엡 4:22  

        παλαιός

              중생 이전의 사람

      새 사람

          the new self, the new man

      엡 4:24

         καινός

               중생 이후의 사람

      대부분의 설교자는 겉 사람은 옛 사람이며, 속 사람은 새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하게 읽어보면 옛 사람과 새 사람은 거듭난 후에 나타나는 삶의 양식으로 옛 사람의 삶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상태가 지속되므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겉 사람과 속 사람이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모습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나 구원 받지 못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삶의 양식으로 겉 사람은 육체 끌리는 삶의 양식이라면 속 사람은 영에 끌리는 삶의 양식 즉 선한 양심에 의하여 갈등하며 고민하는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NEET족 ; Not in Education, Employment, Training
      (한국어로 방콕족)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철저한 무가치함과 무능력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철저한 무가치함을 깨달은 자는 자신에게 선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오직 죄 지은 것만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전율한다.
      자신의 철저한 무능력을 깨달은 자는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한 없이 슬퍼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구원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한없는 사랑과 은혜에만 의지한다.

      무덤 속의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부패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부활한 것은 “나사로야 나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된 것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자는 자기도 그렇게 구원받았음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자이다.
      죽은 시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사로는 무덤에서 걸어 나온 후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몸은 수의로 칭칭 감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예수께서는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난 자는 자기가 구원 받기 전에는 물론, 구원 받은 후에도 행한 것이라고는 죄짓는 것 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한다.
      그리고 그는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베드로처럼 절규한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율법주의자와 행위주의자들

      어떤 형태로든 자기의 의를 주장하는 자들은 아직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할 수 없는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 믿는다고 말하는 이교도들일 뿐이다.
      그들이 참으로 예수를 믿고 거듭나는 때는 자신의 철저한 무가치함과 무능력을 깨닫고 겸손히 고백하는 때이다.
      그 때가 어서 왔으면 참 좋겠다.
      그러면 하늘나라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그들로 인해 큰 기쁨의 잔치가 열릴 것으로 믿는다.

      인생을 살면서 많은 선생님을 만납니다.
      선생님들의 역할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선생님이 내 인생에서 중요한 존재는 아닙니다.

      ‘박군의 마음’ 이라는 전도지

      박군이라는 청년에게 전도를 하는 내용인데 박군의 마음속에 있는 일곱 가지 악한 성향, 짐승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일곱 짐승이 차지하고 있는 마음을 주님이 온전하게 들어오심으로 일곱 짐승이 다 나가고 아름답고 선한 마음이 되는 것을 설명한 전도지입니다.

      영적 전쟁을 아주 쉽고 간단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아마 이 전도지를 처음 만든 사람은 영적으로 많이 열려진 사람일 것입니다.

      그 일곱 가지 짐승의 마음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수다쟁이 영 / 개구리

      말이 많은 사람은 그 사람의 안에서 개구리가 쉬지 않고 개굴개굴 하고 울어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개구리는 입에 관련된 것으로 설명됩니다(요한계시록 16:13).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말이 많은 사람은 절제하지 못하고 수없는 말들을 입에서 쏟아냅니다.
      그리하여 영적 에너지를 잃게 하고 주변에 악한 기운으로 가득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이들은 침묵을 배우고 입술로 주님을 찬양하고 높여야 합니다.

      주님께 받은 은혜를 나누는 대화가 있는가 하면, 세상을 사랑하고 세속에 깊이 물든 대화가 있습니다.
      덕을 세우는 말이 있는가 하면, 남을 비방하고 또는 상처가 될 수 있는 날카로운 말도 있습니다.
      다툼이 있는 곳에는 절제되지 못한 말들이 있습니다.

      성경 곳곳에 말의 중요성이 나옵니다.
      축복의 말은 반드시 축복으로 돌아오지만 저주의 말을 하면 나쁜 저주가 임합니다.
      이것이 혀의 권세입니다(잠언 18:21).
      말한 대로 열매를 맺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둘째, 교만의 영 / 공작새

      공작새가 그 날개를 활짝 펴서 자랑을 하듯이 교만의 영을 가진 이들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자기가 선하고 지식이 많으며 영적이라고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이들은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뿐 아니라 교만은 스스로를 높이는 것입니다.
      과거에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이 이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들의 왕국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또 다시 대홍수가 일어나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높은 탑을 쌓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그분의 말씀과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 없이도 잘 살수 있다고 믿으며 사는 사람이 교만한 사람입니다.

      불신앙이 가장 큰 교만의 죄입니다.

      하나님을 안 믿으면 지옥에 가지요. 이 사실이 부당한가요?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이 사람들 안에는 있습니다.
      하나님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심지어 공산당들도 죽을 위기를 만나면 어떻게 하는 줄 아세요?
      "하나님, 잘못했어요. 하나님, 제발 한번만 살려주세요!" 이렇게 나옵니다.
      무신론자라도, 부처를 섬기는 사람이라도 죽기 직전엔 하나님을 찾아요.
      그러나 하나님을 거역하고자 하는 악독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순순히 그분을 따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거절하는 것입니다. 

      잠언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셋째, 간교한 영 / 뱀

      뱀은 간교한 영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창세기 3:1).

      간교한 영의 사람은 지혜가 많고 머리가 좋아서 말을 잘 하며 사람들을 잘 속입니다.
      잘못을 해도 상대방이 그것을 추궁하면 교묘하게 변명하여 오히려 상대방이 잘못한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 영은 “배신의 영”과도 연결되어 있으며 “유혹의 영”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강자 앞에서 약하며 약자 앞에서 잔인합니다. 영안이 열린 이들에게 이들은 뱀의 형상으로 보이게 됩니다.

      야곱은 속임수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겨우 한 끼 먹을 팥죽으로 형의 장자의 명분(권리)을 빼앗았습니다.
      그의 지혜는 분명히 타고난 것입니다.
      하지만 바르게 사용하지 않을 때, 그것은 악한 영의 도구가 됩니다.
      간사하게 부리는 꾀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에 다듬어져야 합니다.
      야곱은 그로 인해 험한 세월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골로새서 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넷째, 음란한 영 / 염소

      염소는 성적으로 더러우며 정욕이 강하다고 합니다.
      성적으로 문란한 이 시대에 음란을 피해가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과거에 비해 생활이 많이 편리해졌습니다.
      과거에 없던 것들이 새로 생겨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따른 문제도 심각한 문제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편리한 도구들은 우리의 생활을 풍성하게 해줍니다.
      정보를 빠르게 얻을 수 있어요. 하지만 이것이 문제입니다.
      죄를 짓는 데에도 쉽고 빠릅니다.
      음란과 세속에 빠지는 죄는 지금 매우 심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베드로전서 4: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다섯째, 혈기의 영 / 호랑이(사자)

      사자 또는 호랑이는 분노의 영 또는 화의 영을 상징합니다.
      속에서 폭발적으로 분노와 혈기가 일어나는 이들은 속에 호랑이나 사자가 으르렁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성질이 강하고 사나워서 가까이 하기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베드로전서 5:8)

      성경에서 최초의 살인 사건은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돌로 쳐 죽인 것입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왜 죽였을까요? 미움과 혈기를 참지 못해서 죽였습니다. 

      따돌림과 괴롭힘이 학교에서 왜 일어날까요? 혈기 내는 영이 사람 안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에베소서 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디모데전서 2:8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여섯째, 탐욕의 영 / 돼지

      돼지의 영을 “탐욕의 영”이라고 합니다. 돼지의 영이 내 안에 들어오면 끊임없이 욕심을 부리며 그 욕망으로 인하여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아무리 가진 것이 많이 있어도 남들에게 자기가 가진 것을 주려고 하지 않으며 더 많이 얻으려고 합니다.

      나발이란 사람은 부자이었지만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데 인색했습니다. 굶주린 다윗과 그의 일행을 먹이기는커녕 조롱하는 말로 다윗을 노하게 했지요. 그리고 어떻게 되었나요? 그는 몸이 돌처럼 굳어져 며칠 후 죽었습니다.

      누가복음 12: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골로새서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일곱째, 게으름의 영 / 거북이

      거북이와 같은 게으름의 영의 지배를 받으면 항상 나태하고 게을러서 모든 것을 미루며 일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사명을 받았어도 제대로 감당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악하고 게으른 종아(You wicked, lazy servant!)” 라는 책망의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25:26∼30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 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46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죄의 종류와 마귀의 역사는 수도 없이 많지만 이 죄들은 사람의 마음 안에 자리잡고 있는 대표적인 일곱 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who wants all men to be saved and to come to a knowledge of the truth.

      베드로후서 3:9
      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The Lord is not slow in keeping his promise, as some understand slowness. He is patient with you, not wanting anyone to perish, but everyone to come to repentance.

      디도서 3:4-6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새 사람은 도덕과 윤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으로 새롭게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람 즉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사모하고 기도하며 그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시편 104:30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에베소서 4: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시편 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골로새서 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요한계시록 21:5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수요성서학당 #. 14(09-16-20)

      겉 사람과 속 사람(고린도후서 4:16, 에베소서 4:22-24)

      고린도후서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은 날로 새롭도다.
      Therefore we do not lose heart. Though outwardly we are wasting away, yet inwardly we are being renewed day by day

      공동번역 /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낡아지지만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 /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비록 우리의 겉 사람은 쇠약해 가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와지고 있습니다.

      새번역
      /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 겉 사람 속 사람을 구별하는 기준은 "시간" 이라고 하겠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겉 사람은 누구나 약하여지고 쇠하여 갈 것입니다.
      반면에 속 사람은 정신을 차리기도 하고 철이 들기도 하고 반성하며 후회하면서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려고 결단합니다.

      - 옛 사람 새 사람을 구별하는 기준은 "신앙" "거듭남" "중생" "구원" 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원을 받은 후에도 내 안에서 옛 사람의 삶의 습관이 나를 힘들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모습을 일컬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탄식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케 된 후에는 "나의 달려 갈 길을 다 가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렇게 고백합니다.

      * 자연인의 반대는 "문화인" 또는 "문명인"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사람이다.
      자연인의 겉 사람은 육체의 소욕을 따라가는 사람
      자연인의 속 사람은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

      * 자연인과 문화인 그리고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겉 사람은 동일한 모습이다.
      모두 시간이 지날수록 육체는 쇠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속 사람은 목적과 추구하는 것이 다르다.
      속사람은 새로워 집니다.
      어떻게 새로워 집니까?
      자연인의 속 사람은 "정신을 차린다" "철이 들었다"
      그리스도인의 경우는 "회개" "깨닫는다"고 합니다.

      에베소서 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You were taught, with regard to your former way of life, to put off your old self, which is being corrupted by its deceitful desires;
      to be made new in the attitude of your minds;
      and to put on the new self, created to be like God in true righteousness and holiness.





















       용어                          영어                                      성구          헬라어                  의미





      겉 사람

          outward man, outwardly, outer man

        고후 4:16

           ἔξω

             육에 끌리는 사람

      속 사람

          inwardly, inward man, inner man

      고후 4:16

           ἔσω

             영에 끌리는 사람

      옛 사람

          the old man, the old self   

      엡 4:22  

        παλαιός

              중생 이전의 사람

      새 사람

          the new self, the new man

      엡 4:24

         καινός

               중생 이후의 사람

      대부분의 설교자는 겉 사람은 옛 사람이며, 속 사람은 새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하게 읽어보면 옛 사람과 새 사람은 거듭난 후에 나타나는 삶의 양식으로 옛 사람의 삶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상태가 지속되므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겉 사람과 속 사람이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모습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나 구원 받지 못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삶의 양식으로 겉 사람은 육체 끌리는 삶의 양식이라면 속 사람은 영에 끌리는 삶의 양식 즉 선한 양심에 의하여 갈등하며 고민하는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NEET족 ; Not in Education, Employment, Training
      (한국어로 방콕족)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철저한 무가치함과 무능력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철저한 무가치함을 깨달은 자는 자신에게 선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오직 죄 지은 것만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전율한다.
      자신의 철저한 무능력을 깨달은 자는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한 없이 슬퍼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구원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한없는 사랑과 은혜에만 의지한다.

      무덤 속의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부패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부활한 것은 “나사로야 나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된 것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자는 자기도 그렇게 구원받았음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자이다.
      죽은 시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사로는 무덤에서 걸어 나온 후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몸은 수의로 칭칭 감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예수께서는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난 자는 자기가 구원 받기 전에는 물론, 구원 받은 후에도 행한 것이라고는 죄짓는 것 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한다.
      그리고 그는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베드로처럼 절규한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율법주의자와 행위주의자들

      어떤 형태로든 자기의 의를 주장하는 자들은 아직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할 수 없는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 믿는다고 말하는 이교도들일 뿐이다.
      그들이 참으로 예수를 믿고 거듭나는 때는 자신의 철저한 무가치함과 무능력을 깨닫고 겸손히 고백하는 때이다.
      그 때가 어서 왔으면 참 좋겠다.
      그러면 하늘나라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그들로 인해 큰 기쁨의 잔치가 열릴 것으로 믿는다.

      인생을 살면서 많은 선생님을 만납니다.
      선생님들의 역할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선생님이 내 인생에서 중요한 존재는 아닙니다.

      ‘박군의 마음’ 이라는 전도지

      박군이라는 청년에게 전도를 하는 내용인데 박군의 마음속에 있는 일곱 가지 악한 성향, 짐승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일곱 짐승이 차지하고 있는 마음을 주님이 온전하게 들어오심으로 일곱 짐승이 다 나가고 아름답고 선한 마음이 되는 것을 설명한 전도지입니다.

      영적 전쟁을 아주 쉽고 간단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아마 이 전도지를 처음 만든 사람은 영적으로 많이 열려진 사람일 것입니다.

      그 일곱 가지 짐승의 마음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수다쟁이 영 / 개구리

      말이 많은 사람은 그 사람의 안에서 개구리가 쉬지 않고 개굴개굴 하고 울어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개구리는 입에 관련된 것으로 설명됩니다(요한계시록 16:13).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말이 많은 사람은 절제하지 못하고 수없는 말들을 입에서 쏟아냅니다.
      그리하여 영적 에너지를 잃게 하고 주변에 악한 기운으로 가득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이들은 침묵을 배우고 입술로 주님을 찬양하고 높여야 합니다.

      주님께 받은 은혜를 나누는 대화가 있는가 하면, 세상을 사랑하고 세속에 깊이 물든 대화가 있습니다.
      덕을 세우는 말이 있는가 하면, 남을 비방하고 또는 상처가 될 수 있는 날카로운 말도 있습니다.
      다툼이 있는 곳에는 절제되지 못한 말들이 있습니다.

      성경 곳곳에 말의 중요성이 나옵니다.
      축복의 말은 반드시 축복으로 돌아오지만 저주의 말을 하면 나쁜 저주가 임합니다.
      이것이 혀의 권세입니다(잠언 18:21).
      말한 대로 열매를 맺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둘째, 교만의 영 / 공작새

      공작새가 그 날개를 활짝 펴서 자랑을 하듯이 교만의 영을 가진 이들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자기가 선하고 지식이 많으며 영적이라고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이들은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뿐 아니라 교만은 스스로를 높이는 것입니다.
      과거에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이 이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들의 왕국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또 다시 대홍수가 일어나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높은 탑을 쌓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그분의 말씀과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 없이도 잘 살수 있다고 믿으며 사는 사람이 교만한 사람입니다.

      불신앙이 가장 큰 교만의 죄입니다.

      하나님을 안 믿으면 지옥에 가지요. 이 사실이 부당한가요?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이 사람들 안에는 있습니다.
      하나님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심지어 공산당들도 죽을 위기를 만나면 어떻게 하는 줄 아세요?
      "하나님, 잘못했어요. 하나님, 제발 한번만 살려주세요!" 이렇게 나옵니다.
      무신론자라도, 부처를 섬기는 사람이라도 죽기 직전엔 하나님을 찾아요.
      그러나 하나님을 거역하고자 하는 악독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순순히 그분을 따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거절하는 것입니다. 

      잠언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셋째, 간교한 영 / 뱀

      뱀은 간교한 영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창세기 3:1).

      간교한 영의 사람은 지혜가 많고 머리가 좋아서 말을 잘 하며 사람들을 잘 속입니다.
      잘못을 해도 상대방이 그것을 추궁하면 교묘하게 변명하여 오히려 상대방이 잘못한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 영은 “배신의 영”과도 연결되어 있으며 “유혹의 영”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강자 앞에서 약하며 약자 앞에서 잔인합니다. 영안이 열린 이들에게 이들은 뱀의 형상으로 보이게 됩니다.

      야곱은 속임수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겨우 한 끼 먹을 팥죽으로 형의 장자의 명분(권리)을 빼앗았습니다.
      그의 지혜는 분명히 타고난 것입니다.
      하지만 바르게 사용하지 않을 때, 그것은 악한 영의 도구가 됩니다.
      간사하게 부리는 꾀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에 다듬어져야 합니다.
      야곱은 그로 인해 험한 세월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골로새서 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넷째, 음란한 영 / 염소

      염소는 성적으로 더러우며 정욕이 강하다고 합니다.
      성적으로 문란한 이 시대에 음란을 피해가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과거에 비해 생활이 많이 편리해졌습니다.
      과거에 없던 것들이 새로 생겨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따른 문제도 심각한 문제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편리한 도구들은 우리의 생활을 풍성하게 해줍니다.
      정보를 빠르게 얻을 수 있어요. 하지만 이것이 문제입니다.
      죄를 짓는 데에도 쉽고 빠릅니다.
      음란과 세속에 빠지는 죄는 지금 매우 심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베드로전서 4: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다섯째, 혈기의 영 / 호랑이(사자)

      사자 또는 호랑이는 분노의 영 또는 화의 영을 상징합니다.
      속에서 폭발적으로 분노와 혈기가 일어나는 이들은 속에 호랑이나 사자가 으르렁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성질이 강하고 사나워서 가까이 하기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베드로전서 5:8)

      성경에서 최초의 살인 사건은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돌로 쳐 죽인 것입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왜 죽였을까요? 미움과 혈기를 참지 못해서 죽였습니다. 

      따돌림과 괴롭힘이 학교에서 왜 일어날까요? 혈기 내는 영이 사람 안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에베소서 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디모데전서 2:8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여섯째, 탐욕의 영 / 돼지

      돼지의 영을 “탐욕의 영”이라고 합니다. 돼지의 영이 내 안에 들어오면 끊임없이 욕심을 부리며 그 욕망으로 인하여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아무리 가진 것이 많이 있어도 남들에게 자기가 가진 것을 주려고 하지 않으며 더 많이 얻으려고 합니다.

      나발이란 사람은 부자이었지만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데 인색했습니다. 굶주린 다윗과 그의 일행을 먹이기는커녕 조롱하는 말로 다윗을 노하게 했지요. 그리고 어떻게 되었나요? 그는 몸이 돌처럼 굳어져 며칠 후 죽었습니다.

      누가복음 12: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골로새서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일곱째, 게으름의 영 / 거북이

      거북이와 같은 게으름의 영의 지배를 받으면 항상 나태하고 게을러서 모든 것을 미루며 일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사명을 받았어도 제대로 감당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악하고 게으른 종아(You wicked, lazy servant!)” 라는 책망의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25:26∼30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 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46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죄의 종류와 마귀의 역사는 수도 없이 많지만 이 죄들은 사람의 마음 안에 자리잡고 있는 대표적인 일곱 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who wants all men to be saved and to come to a knowledge of the truth.

      베드로후서 3:9
      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The Lord is not slow in keeping his promise, as some understand slowness. He is patient with you, not wanting anyone to perish, but everyone to come to repentance.

      디도서 3:4-6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새 사람은 도덕과 윤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으로 새롭게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람 즉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사모하고 기도하며 그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시편 104:30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에베소서 4: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시편 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골로새서 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요한계시록 21:5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미국의 '탈종교'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
      그러나 제도권의 종교를 이탈한다고 해서 '신(神)' 또는 영적인 것에 대한 관심까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종교와 영적인 것의 구분이 선명해지고 있다.
      퓨리서치센터가 최근 미국인의 신에 대한 믿음을 분석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사람들이 "신을 믿는다"고 말할때 오늘날 그것이 뜻하는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퓨리서치센터가 미국내 성인 4,729명에게 물었다. 신뢰도는 95%(오차범위 ±2.3%)다.

      신을 믿는다는 게 곧 종교를 갖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최근 미국에서는 종교 기관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고 있지만 이러한 추세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미국인이 어떤 영적인 힘 또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인식하고 있다.

      퓨리서치센터에 따르면 미국인 10명 중 9명(88%)은 신 또는 어떤 형태로든 강력한 영적 존재가 있다는 것을 믿는다.

      이를 좀 더 자세하게 나눠보면 응답자의 56%가 "성경에 있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답했다.
      반면 32%는 "어떤 형태로든 강력한 영적 존재 또는 힘을 믿는다"고 응답했다.

      신이라는 존재도 어떤 형태의 강력한 힘도 믿지 않는다고 응답한 미국인은 10%에 불과했다.

      이는 종교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을 어떤 종교 기관에도 속하지 않았다고 말한 응답자 10명 중 7명(72%)은 "하나님 또는 어떤 형태로든 강력한 영적 존재를 믿는다"고 답했다.
      즉, 신이라는 존재는 믿지만 종교에 얽매이지 않는 미국인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신 또는 영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은 젊은층 보다는 노년층에게 더 강했다.

      우선 '성경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응답은 18~29세(43%), 30~49세(49%), 50~64세(67%), 65세 이상(65%) 등 연령이 높을수록 비율이 높았다.

      하지만, '어떤 형태의 강력한 힘 또는 존재를 믿는다'는 응답은 18~29세(39%), 30~49세(37%), 50~64세(28%), 65세 이상(26%) 등 젊을수록 반드시 종교적인 신이 아니어도 영적인 존재의 인식과 믿음은 더 강했다.

      미국인의 일상은 영적인 것과 상당히 밀접한 것으로 조사됐다.
      응답자의 절반(48%) 가량이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신 또는 영적인 존재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미국인들은 왜 신이나 영적인 존재를 믿을까?

      10명 중 7명(77%)은 "신이나 영적인 존재가 나를 보호한다"고 응답했다.
      또 '신이나 영적인 존재가 자신에게 보상을 해주기 때문(67%ㆍ중복응답 가능)', '신이나 영적인 존재는 사람들이 행한 대로 심판을 하기 때문(61%)' '징벌을 하기 때문(40%)'이라는 답변도 있었다.

      그만큼 인간은 신 또는 거대한 영적인 존재보다 기본적으로 연약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셈이다.

      이번 퓨리서치센터의 보고서를 분석해보면 분명한 것은 영적인 것에 대한 믿음과 관심은 분명 높지만 종교에 얽매이지 않는 미국인들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그만큼 종교사회학계서 일컫는 'SBNR(Spiritual But Not Religiousㆍ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는 않다)'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SBNR 부류의 특징은 삶에 있어 영적인 생활은 매우 중요하게 여기지만 종교적 형식이나 신념에 얽매이지 않는다.

      하트포드신학교 스콧 섬마 교수는 "특히 SBNR을 추구하는 부류는 밀레니얼 세대로 구성돼 있으며 종교적 테두리 안에 갇히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며 "반면 명상이나 요가 등을 통해 매우 실제적으로 영적인 삶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전했다.

      최근 이들은 정치적으로도 미국내 주요 유권층으로 부상하고 있다.
      대부분 자유주의적 사고를 가진 부류로 동성결혼, 낙태 등의 이슈에 대해서도 진보적인 성향을 띤다는 게 특징이다.

      퓨리서치센터는 미국이 기독교 국가라는 인식이 강한 만큼 기독교인만 따로 추려 질문을 던졌다.

      우선 개신교인 10명 중 8명(80%)은 "성경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답했다.
      반면 "어떤 형태로든 강력한 영적 존재를 믿는다"(18%), "아무 존재도 믿지 않는다(1%)"는 응답도 있었다.

      반면 "성경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가톨릭교인은 69%에 그쳤다.
      "어떤 형태로든 강력한 영적 존재를 믿는다"(28%), "아무 존재도 믿지 않는다(2%)"는 답변은 개신교 보다 높았다.

      미국내 유대교인은 "어떤 형태로든 강력한 영적 존재를 믿는다"(56%)는 응답자가 가장 많았고 성경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답변은 33%에 그쳤다.

      미국인들이 성경의 하나님이 아닌 영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다는 것은 종교에 국한되지 않는 인식이 강해지고 있다는 것임을 엿볼 수 있다. 특이한 점은 이러한 현상이 개신교 내에서도 점차적으로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기독교 여론조사 기관인 바나리서치그룹은 신앙은 있지만 교회에는 출석하지 않는 사람을 조사한 결과 자신을 '개신교인'이라고 밝힌 응답자의 10%가 "예수를 사랑하지만 교회에는 가지 않는다"고 답했다. 일명 '가나안 교인(교회를 '안 나가'는 교인을 일컫는 신조어)'인 셈이다. 이는 2004년 당시 조사결과(7%)와 비교했을 때 3% 포인트 증가했다.

      주목이 되는 부분은 이들이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보다 오히려 더 굳건한 신앙을 견지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다'라는 응답은 가나안 교인(93%)이 가장 높았다.
      이어 교회 출석 교인(90%), 일반인(59%) 순이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존재'라는 대답도 가나안 교인(94%)이 교회 출석 교인(85%)보다 높았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한 존재'라는 대답 역시 가나안 교인(95%)이 교회 출석 교인(92%)보다 높게 나타났다. 이는 종교 기관에 속해 있는 것이 반드시 신앙, 믿음 또는 영적인 이해 증진을 보장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세계에서 가장 종교적인 나라는 어디일까? 

      갤럽인터내셔널(Gallup International)과 WI시장조사네트워크(WI Network of Market Research)가 65개국 65,000여 명을 상대로 실시한 종교 관련 설문 조사 결과가 발표되었습니다. 가장 종교적이지 않은 나라는 중국이었습니다. 응답자의 90%가 자신이 무신론자이거나 비종교적인 사람이라고 답해 압도적인 차이로 1위에 올랐죠. 응답자의 4분의 3이 같은 대답을 한 스웨덴, 체코 등이 뒤를 이었습니다. 중국은 유서깊은 종교적 전통을 지닌 나라지만, 수십 년에 걸친 공산당 집권으로 인해 무신론적 유물론이 빠르게 확산된 것으로 보입니다.
      스웨덴과 같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경우, 최근 들어 세속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나 부활절은 여전히 인기있는 명절이지만, 실제로 진지하게 종교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수는 줄어들고 있는 것이죠.

      중국과 홍콩이 예외로 두드러지기는 하지만, 아시아는 종교적인 지역입니다. 응답자의 절반 정도가 무신론자, 또는 비종교인이라고 답한 지역은 서유럽과 오세아니아 정도입니다. 서유럽에서도 특히 영국과 네덜란드는 비종교인이 많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현대 무신론의 발원지라 할 수 있는 프랑스는 오히려 순위에서 밀렸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무신론자, 또는 비종교적인 사람의 비율이 65%로 나온 것은 상당히 의외입니다.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에서는 그 비율이 19%에 불과했지만요.

      이번 조사는 국적 이외에 다른 요소들이 어떻게 종교에 대한 태도와 연결되어 있는지도 살펴보았습니다. 나이별로 살펴보니 34세 이하의 응답자들이 나이 든 응답자들보다 종교적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교육 수준을 잣대로 보니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가장 종교적인 것으로 나타나기는 했지만, 모든 교육 수준별 집단에서 종교를 가진 사람이 무신론자보다 많았습니다. 소득 수준 중상위 집단과 상위 집단에서는 종교적인 사람의 비율이 50% 이하였지만, 하, 중하에서는 70%였습니다. GDP가 높은 나라가 덜 종교적이라던 퓨리서치센터의 조사 결과와 비슷한 부분입니다. 이 조사에서 예외는 중국과 미국 정도였죠.

      세계 전체를 보면 여전히 종교를 가진 사람의 수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6대 4 정도로 더 많습니다. 특히 신앙심이 깊은 지역은 아프리카와 중동이죠. 동유럽, 아메리카, 아시아가 그 뒤를 잇습니다. 특히 젊은 세대에서 종교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는 추세를 볼 때, 종교적인 사람들의 수는 앞으로도 증가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 갤럽 조사에서 가장 종교적인 나라는 태국으로 드러났습니다. 응답자의 94%가 종교를 갖고 있다고 답했죠. 2,3,4,5위는 아르메니아, 방글라데시, 그루지아, 모로코가 차지했습니다. (워싱턴포스트)



      사람만이 영적 존재로 창조

      이 땅의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서 오직 사람만이 영적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창세기 1:26).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형상을 따라 그분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닮도록 그분의 형상으로 지으셨고 그분처럼 기능하도록 그분의 모양대로 지으셨습니다.
      우리는 개나 고양이, 원숭이, 개코원숭이 같은 동물들과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적 존재입니다.

      창세기에 나와 있는 창조의 이야기를 보면, 어떻게 모든 동물과 식물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생겨났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창조한 데 있어서는 두 가지 용어를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첫째는 창세기 1:27에 있는 “창조하시되(created)”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창 1:27)

      둘째는 창세기 2:7에 나오는 “지으시고(formed)”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창조하다”와 “짓다”라는 이 두 용어가 종종 호환되어 사용되기도 하지만, 둘은 다릅니다.
      뜻만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한 그분의 본래의 목적 곧 그분의 계획과 비전을 묘사하시는 데 있어서도 다르게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형상을 따라 그분의 모양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하셨을 때, 누구도 창조된 사람을 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의 영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창조된 사람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하나님 안에 존재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육신의 몸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콧구멍에다 생명의 호흡을 불어 넣으셨다”고 말씀합니다(창 2:7, 한글킹제임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영인 인간(the spirit-man)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그의 육신의 몸으로 들어갔으며, 그러자 사람이 생령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사람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입니다.
      당신은 영이지, 육신의 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영의 참된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4:4에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영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개발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말씀을 통해 세워지고 말씀을 통해 유지됩니다.

      베드로전서 2:2(한글킹제임스)은 말씀합니다.
      “갓난 아기들로서 순수한 말씀의 젖을 사모하라. 이는 너희가 그것으로 인하여 자라게 하려 함이니라”

       

      Karl Barth

      하나님의 형상을 설명하면서 이는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적 존재임을 설명합니다.
      좀더 설명하자면 영혼이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형성된 것으로서 만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이루어지면 그 영혼은 잘 되는 것이고 만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그 영혼은 죽거나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잘된다는 것은 속사람이 잘된다함인데 속사람이 잘된다 함은 하나님과 잘 지낼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될 때 영혼이 잘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께서는 내 이름을 불러 주시고 내가 하나님을 자주 찾아 만나 뵈옵고 하나님께서도 나를 찾고 만나실 때 나와 하나님 사이는 좋아지게 됩니다만 바로 이때 내 영혼이 잘 되고 있다함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총의 품안에 있고 하나님이 내 영혼 가운데 임마누엘 하시어 서로가 서로의 안에 있을 때 내 영혼은 잘되고 있습니다. 내가 영으로 주를 사랑하고 주님이 나를 사랑하실 때 내 영혼은 현재 잘 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 다른 것이 없어도 살아도 하나님 없이는 견딜 수 없을 때 내 영혼은 잘되고 있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됨이 있다면 영혼의 못됨도 있습니다.
      영혼의 못됨이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을 아예 생각하거나 상정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도무지 의식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산다면 내 영혼은 황폐해지고 피폐해져서 내 영혼은 못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도무지 의식하지도 않고 하나님과 담을 쌓고 살아간다면 그 영혼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여 영혼 속에 거미줄이 쳐져 있고 문이 잠궈져 있어 하나님 없이 살아간다면 그저 세상살이에 아등바등하여 살아간다면 그 영혼은 못되어도 한참 잘못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주님 앞에 나아가 기도로 긴밀한 대화와 소통을 하고 어떤 일이 있을 때에도 주님께 물어보고 말씀과 음성을 듣고 순종하며 하나님께로부터 복과 은총을 많이 받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도 마음과 정성으로 봉헌하며 기뻐하며 늘 감사하며 찬송하면서 살 때 아울러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며 살 때 우리 영혼은 잘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오직 하나님을 소망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사랑으로 사랑하며 살 때 바로 그 영혼은 잘되고 있는 것입니다.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가 잘 되고 육체도 강건하기를 원하노라”

      영혼이 잘되면 범사도 자동적으로 잘 되고 육체도 자동적으로 잘된다함일까요?
      마치 앞바퀴 돌아가면 뒤바퀴가 굴러가듯이 그런 어떤 기계적인 상호작용을 말할까요?

      아닙니다. 영혼이 잘 될 때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되는 것이니 하나님께서 자신과 친한 그 사람에게 영향을 미쳐서 하는 모든 일을 범사를 잘되게 하여 주시고 육체도 강건하게 해 주신다 그 말입니다.

      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노라 바로 앞에는 “사랑하는 자여!”가 먼저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그래서 그 영혼이 잘되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모든 전반적인 것을 다 잘되게 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보통 사람들은 관계를 맺고 삽니다.
      사면에 팔방의 관계를 맺고 삽니다.
      물질과 관계도 있습니다.
      시간과의 관계도 있습니다.
      자신이 자신과의 관계도 있습니다.
      자신의 몸과 관계도 있습니다.
      사람과 관계도 있습니다.
      부모와의 관계도 있고 자식과의 관계도 있고 아내와 남편의 관계도 있습니다.
      사람의 행복이 어디서 오느냐 무슨 소유를 더 늘리는데서 오는 좁은 것이라기보다는 사람이 맺고 있는 관계들이 원활하게 잘 이루어질 때 거기서 인간은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이루어질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랑하시어 그가 맺고 있는 모든 관계를 잘 소통하게 해주십니다.
      이를 보통 만사형통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은혜에 감사하고 살면 그 하나님께서 좋아하시고 감격하시어 “사랑하는 자여!” 부르시면서 그가 맺고 있는 모든 관계 즉 범사가 잘 되게 하시고 몸, 육체와의 관계도 잘 이루어지게 해 주신다 그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서 웰빙을 누리고 행복을 누리고 사는 길이 바로 오늘 말씀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수직적인 관계, 즉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하여 영혼이 잘됨을 추구하는 일입니다.
      수직적인 관계가 잘 이루어질 때 이 땅에서 사면팔방으로 맺고 있는 모든 관계도 잘 되어지는 것입니다.
      요한 장로가 교회에서 악한 자로 인하여 고통당하는 가이오를 위로하기 위하여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이 성경 구절을 좀 더 알기 쉽게 영문성경을 번역한다면

      “나의 사랑하는 친구여, 나는 기도하노니
      내가 네가 영적으로 잘 되어 있는 것을 아는 것과  같이 모든 일이 잘 되고  건강하기를 원한다”   


      성경에서 영혼이 잘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인가?

      1. 구약시대 :
      선지자들 - 삶 전체가 하나님에 의함 : 사무엘, 미가야, 예례미야, 에스겔등  

      2. 신약시대:

        사도들 : 대부분이 죽임을 당하고, 죽음의 위협과 굶주림과 매 맞음 속에서 예수를 증거함
        순교당한 자들 : 로마시대 이후 수없이 순교 당함
        개혁교회시대

        1) 개혁자들 : 죽음을 하나님께서 초월시킨 사람들이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

        2) 전도자들 : 예수를 믿는다는 것 때문에 죽임을 당할 수 있는 곳에서 전도하는 전도자들이야 말로 영혼이 잘된 사람들이 아닌가?       

      영혼이 잘된 사람이란 세상과 어떤 사람들인가?

      (1)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2)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33).”

      (3) 이 세상 것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니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

      (4) 사람들에게 자랑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눅 16:15)”

      창세기에 나타난 다섯 가지 하나님의 사랑

      첫째,  하나님의 이름(여호와)을 알려주신 사랑(창세기 2:4)

      창조시 하나님은 엘로힘 하나님이었다.
      엘로힘은 누구나 부를 수 있는 신의 이름이다(=신의 이름 엘).
      이스라'엘', 벧'엘', 임마누'엘'의 '엘'이 바로 '신'이다. 바'알', '알'라와 같은 이방신도 '알'('엘')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신을 자기 백성에게 알릴 때에는 여호와라고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성경에 여호와는 모두 6,823번 나타난다.
      이때 여호와라는 이름은 모두 정확하게 자기 백성에게 자신을 계시할 때 쓰였다.
      '엘'은 평범한 이름이다.
      세상에 아버지는 많으나 아무나 나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아무나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없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찾아오시고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셨다.
      우리와 친히 관계를 맺으시는 여호와로 나타나신다.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말로 처음 나타나셨다.
      여호와는 거룩한 이름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이름(발음)을 제대로 부르지 못하였다.
      여호와라는 명칭을 제대로 부르지도 못하였다.
      괜히 송구스러워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쓰고도 제대로 부르지 못하고 하나님을 '아도나이'라고 불렀다.
      우리 성경에 '주님'으로 번역된 그 말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신을 먼저 들어내신 분이다. 부모도 아기에게 맨 먼저 아빠, 엄마부터 말을 가르친다.

      사람들은 자신과 수준이 안 맞으면 속으로 '넌 알 필요도 없어'하며 무시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을 먼저 오픈하셨다.
      자신을 드러내셨다.
      '하나님의 먼저 사랑'이 사람이 범죄 한 이후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이유가 되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바울은 로마서 10장 9절에서 네가 네 입으로 예수를 주라 시인하라 했다.
      즉 창세기 2장 4절의 '여호와 하나님'(=아도나이 하나님) 즉 '주님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은 하나라고 분명히 못 박고 있다. '나의 주님이 바로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다!

      둘째, 사람을 위해 동산을 배려하신 사랑(창세기 2:5-6)

      하나님은 낙원을 주시는데 그것은 사람을 위한 준비였다.
      사람이 없을 때에 동산은 아직 초목과 채소가 없었다.
      사람이 있을 때에 이런 것들은 의미가 있다.
      주인공이 있어야 케익이나 꽃이 의미가 있다.
      주인공 없이 꽃다발을 들고 다니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나님은 먼저 사람을 만드시고 자신이 만드신 동산으로 사람을 데려가셨다.
      들의 초목이나 밭의 채소는 1장에기록된 풀과 씨 맺는 채소나 열매 맺는 과목과는 다르다.
      2장의 이 말은 땅을 일구고 수고해야 먹을 수 있는 곡물이나 떨기나무, 관목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이런 것들을 두지 않았다.

      이 말씀은 에덴동산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인간 타락 이전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일하지 않고도 얻을 수 있는 열매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천국의 모습은 지금과 다를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천국은 상상할 수 없는 곳이다.
      그저 다르다는 것만은 확인할 수 있다.
      타락하여 무너진 세상에 살면서 천국을 가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저 상상으로 바라볼 뿐이다.
      천국 간증은 상상이다. 즉 거짓이다. 상상은 자신 만이 간직해야 된다.
      남에게 퍼뜨릴 때 문제가 발생한다.
      천국을 조금이라도 상상해보고 싶다면 말씀 안에서 타락 이전의 이 에덴동산을 보고 상상해보라.
      성경은 타락된 지금 세상과 조금 다른 에덴동산을 살짝 알려준다.

      셋째, 창조주 하나님은 사람을 다른 피조물과 다르게 지으셨음을 알려주신 사랑(창세기 2:7)

      사람은 본래 흙이었다.
      흙이 가진 17가진 주요 성분이 사람 몸에도 그대로 있다.
      사람도 다른 생명처럼 육체이다.
      육체로는 다른 생물과 별 다를 것이 없다.
      생령이 아닌 죽은 육체는 그래서 구루터기나 다름없다.
      그저 썪어서 흙으로 되돌아간다. 하지만 다르다.
      사람은 하나님이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셔서 생령이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빚어 지으셨다(히브리어 '야차르').
      '야차르'는 토기장이가 흙으로 무엇을 만들 때 쓰는 단어이다.
      토기장이는 의미 없이 아무렇게나 질그릇이나 토기를 만들지 않는다.
      분명한 목적이 있다.
      특별한 목적 즉 예술가가 아무렇게나 작품을 만들지 않는다.

      그 목적이란 성경에 보면 첫째 인간의 찬양을 받기 위함이요(사 43:21)
      둘째 하나님은 야곱을 '야차르'하였기에 잊지 않겠다(사 44:21)
      심지어 복 중에 '야차르'하기 전에 예레미야를 알았다(사랑했다) 했다.
      하나님이 알면 하나님이 사랑한 것이다(렘 1:5).
      하나님은 '나는 아이라 말할 줄 모른다'고 변명하는 예레미야를 안다(사랑한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우리의 수명도 '야차르' 하였고(시 139:16), 악인도 '야차르' 하였다(왕하 19:25).
      하나님이 성도를 '야차르'하였다.
      가정을 '야차르'하였고, 교회를 '야차르'하였다.
      선한 목적의 '야차르'였다.
      하나님은 선한 것은 선한 뜻에 맞게, 악한 것은 악한 것에 맞게 '야차르' 한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데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한 목적이 있다.
      여러분을 구원하시고 여러분 가정 교회를 주신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선한 '야차르'를 믿는 다면 두려움이 없어진다.

      넷째, 사람의 주거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창세기 2:8-14)

      에덴동산은 '기쁨의 장소'라는 뜻이다.
      즉 참기쁜 곳이라는 뜻이다.
      그 위치는 정확하지 않다.
      위치가 중요하지 않다.
      인류가 죄 지은 이후로 에덴은 사라졌다.
      이제 에덴은 지역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만 회복된다.
      참기쁨은 예수 안에 있다.

      15 가지 지리적인 언급 가운데 14 가지가 현재시제이다(지금 거기 있다는 뜻).
      과거에 있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지금거기 있는 것이다. 두 강은 지금도 있다. 따라서 에덴의 과거 위치를 일부 짐작하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무너진 실락원을 지금 굳이 찾아본 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다섯째, 하나님의 사랑은 언약 사랑임을 알리심(창세기 2:15-17)

      하나님 사랑은 무절제한 사랑이 아니다. 관계된 사랑이다. 아무런 언약이 없는 하룻밤 사랑이 아니라 질서가 있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로 표현하고 있다. 15절서 8절을 반복하신 이유는 중요하다는 의미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선악의 구별을 아는 유일한 생명체다. 그래서 인간에게만 죄라는 개념이 있다. 에덴동산에 언약의 징표를 두신 이유는 하나님과의 사랑은 무분별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관계가 깨져버리면 생명도 깨진다. 단순 연애와 부부의 차이(무분별과 언약의 차이)를 구별하라. 쥐새끼가 고구마 훔쳐 먹고 죄책감을 가지는가? 강아지가 사람 물고 죄책감을 가지는가? 강아지는 또 문다.

      행복은 믿음과 순종에서 온다!

      우리를 빚으신('야차르'하신) 그분께 순종하는 것이 기쁨이요 복이요 완전한 행복, 완전한 평화, 완전한 사랑을 체험하는 길이다. 일방적 사랑이 열매를 맺으려면 그 사랑을 상대방이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짝사랑하신다!

      그 사랑이 맺어지려면 간단하다.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간단한 것을 못해 방황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랑을 만드신 하나님의 사랑보다 더 귀하고 값지고 짜릿한 사랑이 어디 있겠는가. 세상의 짜릿한 사랑은 즐기면서 하나님과별거하려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가. 누구 때문인가?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바로 그 존재, 사단이다! 하지만 누가 그 사랑을 끊으리요. 하나님 본체가 사랑이다.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호 1장 23-2장 1절/14장 4절) 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사랑하겠다고 했다. 그런데도 이 사랑을 외면하는 그들은 누구인가. 그렇게 세상의 쾌락이 달콤한가!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면 동물만도 못하다. 아니 못한게 아니라 추악하고 패역하다. 고릴라는 하나님을 대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마귀의 유혹으로 타락한 사람은 마귀처럼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다. 고릴라보다 더 못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부모 빰을 치거나 방망이로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은 극형에 처한다. 패역한 자식이기 때문이다!

      원숭이보다도 고릴라보다도 못나게 살아갈 것인가?
      값진 사랑을 하며 살아갈 것인가!
      하나님은 창세전에 우리를 부르셨다.


      에베소서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로 사랑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사랑하시는 예수 안에서 거져 주셨다.

      이 비밀한 사랑을 알아야 사랑은 완성 되는 것이다!

      창조하다(바라)
      창세기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So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he created him; male and female he created them.

      창조하다(바라. bârâʼ) בָּרָא 
      새기다, 조각하다, 창조하다
      순수한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의미 


      짓다(야차르)
      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the LORD God formed the man from the dust of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fe, and the man became a living being.

      짓다(야차르, yâtsar ) יָצַר   
      형성하다 

      어떤 물체의 형태, 모양을 강조하는 것을 의미


      만들다(아사)
      창세기 1:16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God made two great lights--the greater light to govern the day and the lesser light to govern the night. He also made the stars.

      만들다(아사, âsâh) עָשָׂה    

      노동하다, 만들다, 생산하다

      창조된 물질로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드시는 것을 의미 


      만드시다(바나)
      창세기 2: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Then the LORD God made a woman from the rib he had taken out of the man, and he brought her to the man.

      만들다(바나, bânâh) בָּנָה

      짓다, 세우다, 쌓다






















       용어                          영어                                      성구          헬라어                  의미





      겉 사람

          outward man, outwardly, outer man

        고후 4:16

           ἔξω

             육에 끌리는 사람

      속 사람

          inwardly, inward man, inner man

      고후 4:16

           ἔσω

             영에 끌리는 사람

      옛 사람

          the old man, the old self   

      엡 4:22  

        παλαιός

              중생 이전의 사람

      새 사람

          the new self, the new man

      엡 4:24

         καινός

               중생 이후의 사람

      대부분의 설교자는 겉 사람은 옛 사람이며, 속 사람은 새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하게 읽어보면 옛 사람과 새 사람은 거듭난 후에 나타나는 삶의 양식으로 옛 사람의 삶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상태가 지속되므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겉 사람과 속 사람이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모습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나 구원 받지 못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삶의 양식으로 겉 사람은 육체 끌리는 삶의 양식이라면 속 사람은 영에 끌리는 삶의 양식 즉 선한 양심에 의하여 갈등하며 고민하는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NEET족 ; Not in Education, Employment, Training
      (한국어로 방콕족)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철저한 무가치함과 무능력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철저한 무가치함을 깨달은 자는 자신에게 선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오직 죄 지은 것만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전율한다.
      자신의 철저한 무능력을 깨달은 자는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한 없이 슬퍼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구원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한없는 사랑과 은혜에만 의지한다.

      무덤 속의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부패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부활한 것은 “나사로야 나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된 것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자는 자기도 그렇게 구원받았음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자이다.
      죽은 시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사로는 무덤에서 걸어 나온 후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몸은 수의로 칭칭 감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예수께서는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난 자는 자기가 구원 받기 전에는 물론, 구원 받은 후에도 행한 것이라고는 죄짓는 것 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한다.
      그리고 그는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베드로처럼 절규한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율법주의자와 행위주의자들

      어떤 형태로든 자기의 의를 주장하는 자들은 아직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할 수 없는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 믿는다고 말하는 이교도들일 뿐이다.
      그들이 참으로 예수를 믿고 거듭나는 때는 자신의 철저한 무가치함과 무능력을 깨닫고 겸손히 고백하는 때이다.
      그 때가 어서 왔으면 참 좋겠다.
      그러면 하늘나라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그들로 인해 큰 기쁨의 잔치가 열릴 것으로 믿는다.

      인생을 살면서 많은 선생님을 만납니다.
      선생님들의 역할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선생님이 내 인생에서 중요한 존재는 아닙니다.

      ‘박군의 마음’ 이라는 전도지

      박군이라는 청년에게 전도를 하는 내용인데 박군의 마음속에 있는 일곱 가지 악한 성향, 짐승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일곱 짐승이 차지하고 있는 마음을 주님이 온전하게 들어오심으로 일곱 짐승이 다 나가고 아름답고 선한 마음이 되는 것을 설명한 전도지입니다.

      영적 전쟁을 아주 쉽고 간단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아마 이 전도지를 처음 만든 사람은 영적으로 많이 열려진 사람일 것입니다.

      그 일곱 가지 짐승의 마음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수다쟁이 영 / 개구리

      말이 많은 사람은 그 사람의 안에서 개구리가 쉬지 않고 개굴개굴 하고 울어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개구리는 입에 관련된 것으로 설명됩니다(요한계시록 16:13).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말이 많은 사람은 절제하지 못하고 수없는 말들을 입에서 쏟아냅니다.
      그리하여 영적 에너지를 잃게 하고 주변에 악한 기운으로 가득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이들은 침묵을 배우고 입술로 주님을 찬양하고 높여야 합니다.

      주님께 받은 은혜를 나누는 대화가 있는가 하면, 세상을 사랑하고 세속에 깊이 물든 대화가 있습니다.
      덕을 세우는 말이 있는가 하면, 남을 비방하고 또는 상처가 될 수 있는 날카로운 말도 있습니다.
      다툼이 있는 곳에는 절제되지 못한 말들이 있습니다.

      성경 곳곳에 말의 중요성이 나옵니다.
      축복의 말은 반드시 축복으로 돌아오지만 저주의 말을 하면 나쁜 저주가 임합니다.
      이것이 혀의 권세입니다(잠언 18:21).
      말한 대로 열매를 맺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둘째, 교만의 영 / 공작새

      공작새가 그 날개를 활짝 펴서 자랑을 하듯이 교만의 영을 가진 이들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자기가 선하고 지식이 많으며 영적이라고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이들은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뿐 아니라 교만은 스스로를 높이는 것입니다.
      과거에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이 이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들의 왕국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또 다시 대홍수가 일어나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높은 탑을 쌓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그분의 말씀과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 없이도 잘 살수 있다고 믿으며 사는 사람이 교만한 사람입니다.

      불신앙이 가장 큰 교만의 죄입니다.

      하나님을 안 믿으면 지옥에 가지요. 이 사실이 부당한가요?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이 사람들 안에는 있습니다.
      하나님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심지어 공산당들도 죽을 위기를 만나면 어떻게 하는 줄 아세요?
      "하나님, 잘못했어요. 하나님, 제발 한번만 살려주세요!" 이렇게 나옵니다.
      무신론자라도, 부처를 섬기는 사람이라도 죽기 직전엔 하나님을 찾아요.
      그러나 하나님을 거역하고자 하는 악독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순순히 그분을 따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거절하는 것입니다. 

      잠언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셋째, 간교한 영 / 뱀

      뱀은 간교한 영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창세기 3:1).

      간교한 영의 사람은 지혜가 많고 머리가 좋아서 말을 잘 하며 사람들을 잘 속입니다.
      잘못을 해도 상대방이 그것을 추궁하면 교묘하게 변명하여 오히려 상대방이 잘못한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 영은 “배신의 영”과도 연결되어 있으며 “유혹의 영”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강자 앞에서 약하며 약자 앞에서 잔인합니다. 영안이 열린 이들에게 이들은 뱀의 형상으로 보이게 됩니다.

      야곱은 속임수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겨우 한 끼 먹을 팥죽으로 형의 장자의 명분(권리)을 빼앗았습니다.
      그의 지혜는 분명히 타고난 것입니다.
      하지만 바르게 사용하지 않을 때, 그것은 악한 영의 도구가 됩니다.
      간사하게 부리는 꾀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에 다듬어져야 합니다.
      야곱은 그로 인해 험한 세월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골로새서 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넷째, 음란한 영 / 염소

      염소는 성적으로 더러우며 정욕이 강하다고 합니다.
      성적으로 문란한 이 시대에 음란을 피해가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과거에 비해 생활이 많이 편리해졌습니다.
      과거에 없던 것들이 새로 생겨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따른 문제도 심각한 문제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편리한 도구들은 우리의 생활을 풍성하게 해줍니다.
      정보를 빠르게 얻을 수 있어요. 하지만 이것이 문제입니다.
      죄를 짓는 데에도 쉽고 빠릅니다.
      음란과 세속에 빠지는 죄는 지금 매우 심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베드로전서 4: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다섯째, 혈기의 영 / 호랑이(사자)

      사자 또는 호랑이는 분노의 영 또는 화의 영을 상징합니다.
      속에서 폭발적으로 분노와 혈기가 일어나는 이들은 속에 호랑이나 사자가 으르렁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성질이 강하고 사나워서 가까이 하기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베드로전서 5:8)

      성경에서 최초의 살인 사건은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돌로 쳐 죽인 것입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왜 죽였을까요? 미움과 혈기를 참지 못해서 죽였습니다. 

      따돌림과 괴롭힘이 학교에서 왜 일어날까요? 혈기 내는 영이 사람 안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에베소서 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디모데전서 2:8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여섯째, 탐욕의 영 / 돼지

      돼지의 영을 “탐욕의 영”이라고 합니다. 돼지의 영이 내 안에 들어오면 끊임없이 욕심을 부리며 그 욕망으로 인하여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아무리 가진 것이 많이 있어도 남들에게 자기가 가진 것을 주려고 하지 않으며 더 많이 얻으려고 합니다.

      나발이란 사람은 부자이었지만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데 인색했습니다. 굶주린 다윗과 그의 일행을 먹이기는커녕 조롱하는 말로 다윗을 노하게 했지요. 그리고 어떻게 되었나요? 그는 몸이 돌처럼 굳어져 며칠 후 죽었습니다.

      누가복음 12: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골로새서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일곱째, 게으름의 영 / 거북이

      거북이와 같은 게으름의 영의 지배를 받으면 항상 나태하고 게을러서 모든 것을 미루며 일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사명을 받았어도 제대로 감당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악하고 게으른 종아(You wicked, lazy servant!)” 라는 책망의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25:26∼30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 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46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죄의 종류와 마귀의 역사는 수도 없이 많지만 이 죄들은 사람의 마음 안에 자리잡고 있는 대표적인 일곱 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who wants all men to be saved and to come to a knowledge of the truth.

      베드로후서 3:9
      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The Lord is not slow in keeping his promise, as some understand slowness. He is patient with you, not wanting anyone to perish, but everyone to come to repentance.

      디도서 3:4-6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새 사람은 도덕과 윤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으로 새롭게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람 즉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사모하고 기도하며 그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시편 104:30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에베소서 4: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시편 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골로새서 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요한계시록 21:5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07-16-2022(토)

      온전한 상(요한이서 1:8)

      공명(共鳴; Resonance) /  물리학적, 공학적 용어
      - 특정의 고유진동수를 지닌 물체가 그와 같은 진동수를 가진 힘을 주기적으로 받을 경우 진폭과 에너지가 크게 증가하는 현상을 가리키며, 공진(共振)이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공명을 일으키는 진동은 소리, 기계적 진동과 같은 역학적 진동도 있고, 전자기파 등의 전기적 진동 등 매우 다양한데, 공명현상이 일어나면 원래 세기가 약했던 파동도 큰 힘으로 증폭이 될 수 있다. 이 같은 공명현상은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불편하게 작용할 수도 있지만, 도리어 이를 이용하여 개발된 문명의 이기들도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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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붕괴되기 직전 뒤틀리는 타코마 대교. ⓒ Free Photo

      군대의 행진으로 무너진 다리들

      우리 생활 주변에서도 공명현상은 자주 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세탁기의 탈수 과정이다. 세탁물을 고속으로 탈수시킬 경우에는 세탁기가 심하게 움직이는 경우는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탈수 과정이 끝나서 세탁통의 회전 속도가 줄어들게 되면 세탁기가 점점 움직이다가, 어느 순간 크게 흔들리면서 그 후 멈추게 된다.

      세탁기의 세탁통이 돌아갈 경우 회전속도에 따라 세탁기에 규칙적인 충격을 가하게 되는데, 통이 빠르게 회전할 때에는 세탁기의 고유진동수와 달라서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하므로 흔들림이 별로 없다. 그러나 회전 속도가 줄어들면서 세탁기의 고유진동수와 일치하게 되는 순간, 공명이 일어나 크게 흔들리는 것이다.

      탈수과정에서의 공명은 세탁기를 크게 흔드는 정도이지만, 공명현상이 심해지면 다리가 무너지거나 건물이 흔들릴 정도로 큰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 공명현상으로 멀쩡하던 다리가 붕괴되는 일은 역사적으로 여러 차례 있었다.

      먼저 1850년에 프랑스에서 발생한 앙제다리(Angers Bridge) 사고를 예로 들 수 있다. 478명의 군인들이 일제히 발을 맞추며 앙제 다리를 걸어가다가 공명이 일어나 다리가 무너져 버렸는데, 이 사고로 226명의 군인들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하였다.

      그 이전인 1831년 영국 맨체스터에서도 군인들의 행진에 의해 다리가 붕괴되는 비슷한 사고가 있었다. 만약 군인들이 일사분란하게 발을 맞추어 행진하지 않고, 그냥 무질서하게 걸어갔더라면 공명현상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다리가 무너지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여러 사람들의 발맞춤으로 인한 공명이 건물을 흔들리게 한 일은 몇 년 전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났는데, 서울의 한 고층건물이 갑자기 흔들리게 되어 많은 사람들이 황급히 대피하는 소동이 빚어졌던 것이다.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조사 결과 그 건물의 피트니스 센터에서 실시했던 태보운동의 공진이 원인이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즉 피트니스 센터의 수강생 23명이 강사의 구령에 맞추어 태보를 하면서 발을 구르는 동작을 반복하였는데, 여기서 발생한 진동수가 건물의 고유 수직진동수와 일치하면서 공명현상이 발생하여 건물이 흔들렸던 것으로 결론 내려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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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분자의 공명을 이용하는 전자레인지. ⓒ Free Photo

       

      바람에 의한 공명으로 무너진 타코마 대교

      군대 등의 인위적인 발맞춤으로 공명이 발생한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현상 즉 바람에 의한 공명으로 튼튼한 다리가 갑자기 무너진 사건이 지난 1940년에 미국에서 발생하였다.

      미국 워싱턴 주의 타코마 해협에 놓여있었던 타코마(Tacoma)대교는 미국의 현대적 토목기술을 동원하여 시속 190km의 태풍에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견고하게 설계하여 건설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완공 된지 석 달 만에, 시속 70km 정도의 바람에 힘없이 무너지고 말아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다리의 붕괴 과정을 목격한 워싱턴 대학 교수의 말에 따르면, 길이 840m인 타코마 대교가 가운데부터 좌우로 비틀리기 시작하더니, 한 시간쯤 후부터 다리가 엿가락처럼 휘어지고 파괴되면서 무너져 내렸다고 한다. 토목기술자들은 다리를 붕괴시킬 정도에는 턱없이 약한 바람에 다리가 무너진 사실에 경악했는데, 그 원인을 상세히 조사해본 결과, 바람에 의한 공명현상이 그 원인으로 밝혀졌다.

      타코마 대교는 양쪽 교각에 연결한 케이블에 다리가 매달려 있는 현수교로서, 바람이 불 때마다 약간의 흔들림이 생겼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람에 의한 진동이 다리 자체의 고유진동수와 일치하면서 공명에 의하여 흔들림이 점점 커졌고, 결국은 다리가 버티지 못하고 붕괴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다리를 건설할 경우 설계 단계에서부터 이런 데에 대한 보완을 철저히 하게 되었다.

      위의 예들을 보면 공명현상은 교량, 건물 등을 위험하게 만들거나 사람들에게 불편을 끼치는 것으로만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거나 일상생활에 편리하게 적용되는 경우도 매우 많다.

      TV나 라디오의 채널 선택, 물 분자의 진동으로 음식을 데우는 전자레인지(Microwave oven), 사람 몸의 상태나 질병을 진단하는 MR(Imagnetic Resonance Imaging) 장비 등은 모두 공명현상을 이용하여 개발된 것이다.

      음식을 데우거나 조리하는 데에 사용되는 주방의 필수 가전제품인 전자레인지 역시 공명현상을 이용한 대표적인 예이다.

      영어로는 마이크로웨이브 오븐(Microwave Oven)이라 불리는 전자레인지는, 물 분자의 고유진동수에 해당하는 마이크로파를 가해줌으로써 음식 속의 물 분자가 공명운동을 할 때 생기는 마찰열로 조리하는 것이 그 원리이다.

      전자레인지의 핵심 부품인 마그네트론은 마이크로파를 만들어내는 장치인데, 여기서 발생하는 마이크로파는 전자기파의 일종으로서, 그 파장이 적외선보다는 길고 텔레비전 방송의 전파보다는 짧다.

      마이크로파는 공기, 유리, 종이 등은 투과하지만 금속에는 반사되고 물에서는 흡수된다.

      따라서 전자레인지에는 금속으로 된 용기를 사용하면 안 되는 것이다.

      산소원자 하나에 수소원자 두 개가 공유 결합한 물 분자는 104.5도의 각도를 이루는 형태이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중성이지만 부분적으로는 전기적인 극성을 띠게 된다.
       
      따라서 외부에서 전자기장이 가해지면 각각의 물 분자는 그 영향을 받아서 운동을 하게 되는데, 마이크로파에 의해 공명된 물 분자들은 고속으로 회전하면서 인접의 물 분자와 마찰열을 발생시킨다.

      빵이나 밥, 채소, 육류 등 음식물은 대부분 물을 포함하기 때문에, 그 마찰열로 손쉽게 음식물을 가열하고 조리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 몸의 상태나 질병 등을 진단하는 데에도 공명현상은 유용하게 활용된다.

      큰 병원에서 볼 수 있는 MRI(Magnetic Resonance Imaging), 자기공명 영상장치 역시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공명현상을 이용한 것이다.

      다만 다른 전자기기와는 달리 원자핵의 자기공명, 즉 강한 자기장에 놓인 수소 원자핵이 공명하면서 방출하는 전자기파로 영상을 만든다.



      온전한(4134) πλήρης

      πλήρης, ες

      1. 가득찬,  2. 마가 6:43,  3. 누가 5:12

      발음 / 프래레스(plērēs)
      어원 / 413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찬(마 14:20, 막 6:43), 충실한(막 4:28), 충만한(눅 4:1), 심히 많은(행 9:36), 가득한(행 13:10, 19:28), 온전한(요이 1:8)
      신약 성경 / 16회 사용

      * 4130. πλήθω

      1. 채우다,  2. 영향을 주다,   3. 완수하다

      발음 / 프래도(plēthō)
      관련 성경 / 가득하다(마 22:10, 눅 4:28, 행 5:17), 적시다(마 27:48), 충만함을 받다(눅 1:15, 41), 차다(눅 1:57, 2:6, 22), 채우다(눅 5:7), 충만하다(행 4:8,31, 13:9)

      상(3408) μισθός

      μισθός, οῦ, ὁ

      1. 품삯,  2. 보수,  3. 보응

      발음 / 미스도스(misthŏs)
      관련 성경 / 상(마 5:12, 막 9:41, 계 22:12), 삯(마 20:8, 눅 10:7, 벧후 2:15), 값(벧후 2:13)
      신약 성경 / 29회 사용

      여호와께서 “온전한 상”을 주시다

      하나님께서 충실한 ‘룻’에게 주신 “온전한 상”은 확실히 생각있는 사람들이 여호와의 존재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확인하며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그분에게 가까이 나아가도록 움직여야 함이 분명합니다.

      룻기는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충성을 바치는 사람들을 위하여 행동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알려 줍니다.
      더우기 그것은 하나님의 목적은 결코 실패하지 않음을 증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 ‘다윗’과 동일한 영을 가질 수 있고,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너의 승리로 인하여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 기를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 바 기름부음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 오른손에 구원하는 힘으로 그 거룩한 하늘에서 저에게 응락하시리로다.” 시편 20:5-6

      미혹하는 자(πλάνος) 4108


      πλάνος, ον

      1. 그릇되게 인도하는,  2. 속이는 자,  3. 디모데전서 4:1
      -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발음 / 프라노스(planŏs)
      어원 / 불확실한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속이는 (자)(마 27:63, 고후 6:8), 미혹하는 (자)(요이 1:7)
      신약 성경 / 5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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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스라이팅(gaslighting effect)

      가스라이팅이란 상대방의 심리·상황 등을 조작해 스스로 의심하게 만들고, 타인의 정신을 지배·조종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가스라이팅 또는 가스등 효과는 심리적 조작을 통해 타인의 마음에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키고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만듦으로써 그 사람에게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패트릭 해밀턴의 연극을 원작으로 한 1944년 미국의 영화 〈가스등〉에서 유래한 말이다.

      잭이라는 남성이 자기 아내 벨라를 억압하는 이야기다.
      잭은 보석을 훔치기 위해 윗집의 부인을 살해했다.
      하지만 보석을 찾기 위해서는 불을 켜야 했고, 그 건물은 가스등을 쓰기 때문에 불을 켜면 가스를 나눠 쓰는 다른 전등불이 어두워지거나 깜빡여서 들킬 위험이 있었다.
      이 때문에 잭은 벨라가 의심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집안의 물건을 숨기고 그녀가 물건을 잃어버렸다고 몰아가며 타박한다.
      잭이 위층에서 불을 켜고 집안을 뒤질 때마다 벨라가 있는 아래층은 불이 어두워지고 인기척이 났고, 그럴 때마다 잭은 그것도 벨라가 과민반응하는 것이라고 몰아간다.
      처음엔 반신반의하던 벨라도 이게 지속되자 자기 자신에게 의구심을 갖게 되고, 점점 무기력과 공허에 빠지게 되어서 결국 남편 잭만을 의지하게 된다.
      하지만 경찰인 브라이언의 등장으로 결국 잭의 범죄가 발각된다는 내용.
      1944년에 '샤를르 보와이에'가 , 잉그리드 버그만벨라(영화에서는 폴라로 이름이 바뀜) 역을 맡아 영화화되었고,
      한국에도 '가스등' 이라는 제목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여기서 잭이 벨라의 판단력이 비정상적이라고 몰아가고, 이에 벨라가 수긍하는 행태에서 본따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졌다.

      상대방의 자주성(自主性)을 교묘히 무너뜨리는 언행을 말한다.
      주로 '상대방에 대한 간섭', '상황적 연출과 조작', '귀인 오류' 등의 행위를 벌여 피행위자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든다.
      스라이팅이란 스스로의 판단력을 의심하도록 만들어서, 판단을 다른사람에게 의존하도록 만드는 행위를 의미하는 말로, 학술적인 용어는 아니며, 일종의 유행어 성격을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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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Z세대는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를 통틀어 지칭하는 대한민국의 신조어이다.


      MZ세대

      MZ세대는 한국에서 밀레니얼 세대 Z세대를 합쳐 부르는 말이다.

      밀레니얼 세대는 X세대와 Z세대 사이의 인구통계학적 집단이다.
      일반적으로 1981년부터 1996년까지 출생한 사람으로 정의한다.
      전기 밀레니얼(1981년~1988년)과 후기 밀레니얼(1989년~1996년)로 구분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밀레니얼 세대는 베이비붐 세대와 초기 세대의 자녀들이다.

      밀레니얼 세대는 전 세계적으로 출산율이 감소하는 시기에 태어났으며, 이전 세대들보다 더 적은 수의 자녀를 두고 있다.

      밀레니얼 세대는 최초의 글로벌 세대이자 인터넷 시대에 성장한 첫 세대로 묘사되어 왔다.
      이 세대는 일반적으로 인터넷, 모바일 장치 및 소셜 미디어의 사용 증가와 친숙함을 특징으로 들 수 있으며, 이러한 이유로 디지털 원주민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전 세계의 밀레니얼 세대는 직장 생활을 시작한 이후 상당한 경제적 혼란을 겪었다.
      많은 세대들은 대공황의 여파로 노동 시장에서 초기에 높은 수준의 청년 실업에 직면했고, 10년 후 COVID-19 대유행으로 인해 또 다른 불황을 겪었다.

      Z세대는 밀레니얼 세대와 알파 세대의 사이에 있는 인구통계학적 집단이다.
      연구원들과 대중 매체들은 1990년대 중/후반과 2010년대 초 사이 출생자를 Z세대로 본다.
      Z세대의 구성원들은 대부분 X세대의 자식들이다.

      Z세대는 어릴 때부터 인터넷과 휴대용 디지털 기술에 접근하여 성장한 최초의 사회 세대로서 디지털에 정통하지 않더라도 "디지털 원주민"이라고 불렸다.
      또한 스크린 타임이 어린 아이들에 비해 청소년들에게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가장 뚜렷하다.

      각 세대 등장 배경

      M세대

      이 인구통계학적 코호트의 구성원들은 밀레니엄 세대로 알려져 있는데, 그 이유는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밀레니엄 세대로 바뀌기 때문이다. 작가 William Strauss와 Neil Howe가 슈트라우스를 창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우 세대론은 밀레니얼 세대를 명명하는데 널리 인정받고 있다.

      1993년 8월, 광고 시대 사설은 당시 X세대와 다르게 정의된 13-19세(1974~1980년 출생) 청소년을 묘사하기 위해 Y세대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밀레니얼 세대는 베이비붐 세대의 자손이고 1980년대 초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출생률이 증가했으며, 세대의 큰 규모 때문에 에코붐 세대라고 불리기도 한다. 미국에서는 1990년 8월에 출산율이 정점을 찍었고 선진국의 소규모 가정으로의 20세기 추세가 계속되었다. 심리학자 진 트웬지는 2006년 저서 제너레이션 미(Generation Me)에서 밀레니얼 세대를 '미 세대'로 묘사했다. 제안된 이 그룹의 대체 이름에는 인터넷 세대, 9/11 세대 등이 있다.

      미국의 사회학자 캐슬린 샤푸티스는 밀레니얼 세대를 부메랑 세대 또는 피터팬 세대로 분류했는데, 그 이유는 구성원들이 성인기로의 통과의례들을 그들 이전의 세대들보다 더 오랫동안 지연시키는 경향 때문이다. 또한, 이전 세대보다 더 오랜 기간 부모와 함께 사는 구성원들에 대한 경향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킴벌리 파머는 높은 주거 비용과 고등 교육, 그리고 노년층의 상대적 풍요를 이러한 추세를 이끄는 요인이라고 주장한다.

      Z세대

      Z세대라는 이름은 Y세대(밀레니얼 세대)부터 알파벳 순서를 이어받아 X세대에 이은 2세대라는 점에서 유래했다.

      이 세대의 다른 이름으로는 i세대 국토안보부 세대, 인터넷 세대, 디지털 원주민, 네오디지털 세대, 인터넷 세대, 100년대, 포스트 밀레니얼 세대 등이 있다. 인터넷 세대라는 용어는 인터넷의 대량 채택 이후에 탄생한 첫 세대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심리학 교수이자 작가인 장 트웬지는 2006년 밀레니얼 세대에 관한 책의 제목으로 iGeneration(줄여서 iGen)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나 출판사에 의해 거부당했다. 그 당시에는 아이팟과 아이맥 컴퓨터는 있었지만 아이폰과 아이패드는 없었다. 트웬지는 나중에 그녀의 2017년 책 iGen에 이 용어를 사용했다. 이 이름은 2009년 인구학자 셰릴 러셀에 의해 만들어졌다.

      퓨리서치센터가 2019년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구글 트렌드에 올라온 다양한 명칭을 조사한 결과 미국에서는 Z세대라는 용어가 압도적으로 인기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메리엄-웹스터 사전과 옥스퍼드 사전은 모두 Z세대에 대한 공식 엔트리를 가지고 있다.

      일본에서 코호트는 디지털 네이티브로 기술된 이전 코호트에서 한 단계 벗어난 네오디지털 네이티브로 기술된다. 디지털 네이티브는 주로 텍스트 또는 음성으로 통신하는 반면, 네오디지털 네이티브는 비디오, 비디오 전화 및 영화를 사용한다. 네오디지털 네이티브는 PC에서 모바일로, 그리고 텍스트에서 비디오로 변화를 강조한다.

      주머(Zoomer)는 아이러니하거나 유머러스하거나 조롱하는 어조로 Z세대를 지칭하는 비공식 용어이다.베이비붐 세대를 가리키는 부머라는 용어와 Z세대의 "Z"를 결합했다. 이에 앞서 2000년대에는 특히 활동적인 베이비붐 세대를 묘사하기 위해 주머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2018년, Zen Z 청소년을 조롱하는 4chan 인터넷 밈에서 "Zoomer"라고 불리는 ‘Wojak' 캐리커처를 통해 사용되면서 현재의 Zoomer의 인기는 급상승했다. Merriam-Webster의 기록에 따르면 Z세대라는 용어는 적어도 2016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Z세대라는 용어는 2021년 10월 메리엄 웹스터 사전에 추가되었다.






      07-15-2022(금)

      구원의 증거(요한일서 5:11)

      구원 받은 증거가 있습니까?
      구원 받은 확신이 있습니까?

      증거와 확신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사전적 의미를 소개합니다.

      증거(證據) : 증거 증(證), 의지할 거(據) / Evidence. Testimony
      - 어떤 사실(事實)을 증명(證明)할 수 있는 근거(根據).

      확신(確信) : 굳을 확(確), 믿을 신(信) / Conviction. Confident
      - 굳게 믿음. 또는 그러한 믿음.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제 호주머니에 2만불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믿습니까?
      2만 불이 있다는 것은 자기 확신입니다.
      2만불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확신하려면 호주머니에서 2만불을 꺼내서 보여주면 됩니다.
      2만불이 나의 것이라고 한다면 내 마음대로 그 돈을 사용해야 합니다.
      만일 그 돈을 사용하지 못한다면 내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증거와 확신을 확인하려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첫째는 내적 증거(경험과 주장)
      둘째는 외적 증거(성경과 인정)

      예를 들면 나는 구원을 받았다고 증거할 때 그 증거는 자기 경험입니다.
      그 경험을 확신시켜 줄 수 있는 것이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한일서는 당시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므로 이 편지를 그들에게 보내어 구원을 확신하도록 격려하고 위로하였던 말씀입니다.

      예전에 교회 재정부에서 있었던 사례를 소개합니다.
      어느 사업을 하는 집사님 부부가 당시 감사헌금을 드렸는데 봉투에 그 금액이 10만원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재정부에서 헌금 계수를 하던 중 봉투에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은 것을 알고 즉시 그 집사님에게 연락했습니다.
      그러자 그 집사님은 내가 분명히 봉투안에 수표를 넣었다고 말합니다.
      재정부원 중에 누군가 그 수표를 가져간 것처럼 생각되어 모두 난처한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오후 봉투에 수표를 넣었다는 집사님이 재정부장에게 전화를 하여 "제가 큰 실수를 했습니다. 수표가 식탁 위에 있습니다. "

      그 전화로 인하여 재정부원들에 대한 의심도 해결되었고 그렇게 확신하던 집사님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도 확인되었습니다.

      확신이란 주관적인 것입니다.
      증거는 객관적인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이란 내가 모태 신앙으로 태어나서 지금까지 교회에 출석하며 교회에서 직분을 맡아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증거일까요? 아니면 확신일까요?
      확신입니다.
      그러나 내가 신앙생활하는 것을 내 가족들이 보고 내 주위 사람들이 보고 있습니다.
      주위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신앙생활을 할 뿐만 아니라 주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신앙으로 섬긴다면 그것은 증거가 될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을 구원의 증거로 무장해야 합니다.
      어떻게 구원의 증거로 무장할 수 있을까요?

      1절을 읽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예수께서 그리스도 즉 구세주가 되심을 믿는 것입니다.
      성경은 객관적인 증거입니다.
      내가 믿는 것은 주관적인 확신입니다.
      주관적인 확신이 객관적인 말씀과 일치할 때 그것이 증거가 될 것입니다.

      1절을 다시 읽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구원의 증거는 예수님께서 구세주가 되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구원의 증거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 부모가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모든 자녀들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사랑으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렇게 고백한 것은 베드로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했습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떠나 갈릴리 바다에 나가 밤새도록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이상하게도 그 날 밤 물고기가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노련한 어부가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물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것이 기적입니다.
      이런 기적은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기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편으로 던지라고 하셨을 때 누가 그물을 배 오른편으로 던지라고 하였는지 모르고 직업 정신에 따라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졌습니다. 그 순간 그물에 물고기가 가득하게 잡혔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습니다.
      그 베드로에게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묻습니다.
      구원의 증거는 믿음을 사랑으로 승화시키여만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이 현재 살고 있다는 것, 자신에게 생명력이 약동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일만큼 희열을 느끼는 일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몸은 건강하게 모든 역할을 다 하되 삶의 실제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야 말로 비극이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다시 태어났다는 사실, 영적으로 거듭났다고 하는 사실, 죄와 멸망의 현실로 부터 구조받았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필수적으로 가져야 할 통찰력이며, 기쁨의 원천인 것입니다.

      1.구원의 확신에 대한 잘못된 오해

      구원의 확신은 우리의 노력이나 만족감을 근거로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심령에 보내시는 일종의 표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혈통,가족의 신앙, 가문,(요1:13)

      2) 성경 지식(요3:10)

      3) 예배 참석(요4:20)

      4) 여러 활동, 사역(마 7:22)

      5) 감정적인 변화, 또는 체험(행 8장의 시몬)

      2.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됩니다.

      이것을 회심이라고 하며 회심은 회개와 믿음으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1) 회개는 죄로부터 돌이키는 것을 말하며 다음과 같은 것을 내포합니다.

      1)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눅18:13)-지식

      2) 죄에 대한 통회(시51:1-4)- 감정

      3) 죄로부터 떠나고자 하는 마음(요6:37)-의지

      (2) 믿음이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해서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셨으므로 이제 우리의 죄가 용서되었음을 믿는 것입鎨. (사53:4-6)

      3. 구원을 확신하는 길

      (1) 말씀의 증거(객관적 증거)

      1) 하나님의 약속(행16:31-32)- 이 구원은 궁극적으로 누구의 약속입니까?

      2)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히 9:28전반)

      3) 성령의 인치심(엡1:13)- '인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 삼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삼중적 증거는 가장 확실한 확신의 길입니다.

      (2) 생활의 증거 (주관적 증거)

      1) 주 되심의 고백(고전12:3)- 생활의 전 영역에 걸쳐 그 분의 주인되심을 인정.

      2) 우리의 관심사(롬8:5)- 세상적인 것에서부터 영적인 일로 관심이 바뀜.

      3) 성품의 변화(갈 5:22-23) -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성숙함을 발견하게 됨.

      4. 구원의 확신에 대한 올바른 순서

      구원을 받았다면 왜 기쁨이 없나?
      왜 감정적인 변화가 오지 않는가?
      다른 사람들은 있는데 왜 내겐 없는가? 등의 걱정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구원을 받을때 이렇게 느꼈다. 눈물이 솟구쳤다. 뭔가 확 뜨거운 것을 받았다'등의 체험은 모든 사람에게 일률적으로 찾아오는 표준적인 증거는 아니며, 사람의 개성에 따라 당시의 환경에 따라 여러가지로 다를 수 있습니다.
      또 감정의 변화는 구원받은 사실에 잇따라 생기는 법이지 '기쁨이 생긴 다음에 구원받은 것을 알게 되었다'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 요한복음 4:50절에서 신하가 아들의 회복을 확신한 근거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구원의 확신도 이와같이 사실(요 5:24,10:28)을 믿고 받아들였을 때(믿음) 기쁨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언제나 기쁘고 좋은 것만 지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심한 갈등과 괴로움을 더 많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또 다른 증거일 수가 있습니다.


      07-14-2022(목)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요한일서 4:6)

      미혹(4106). 플라내(πλάνη)

      πλάνη, ης, ἡ

      1. 배회 / 4108의 여성형,  2. 잘못,   3. 미혹
      발음 / 프라내(planē)
      관련 성경 / 유혹(마 27:64, 엡 4:14), 간사(살전 2:3), 미혹(살후 2:11, 벧후 3:17, 요일 4:6), 어그러짐 (유 1:11), 그릇됨(롬 1:27)
      신약 성경 / 10회 사용

      * 미혹의 영 : 유혹의 영, 간사한 영

      진리(225). 아래데이아(ἀλήθεια)

      ἀλήθεια, ας, ἡ 

      1. 진실성,  2. 진실 (반) ψεῦδος,  3. 일반적 진리

      발음 / 알래데이아(alēthĕia)
      어원/ 227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참(마 22:16), 사실(막 5:33), 진리(요 1:14, 4:24, 롬 2:2), 실상(요 16:7), 과연(행 4:27), 참 됨(행 26:25), 진실하심(롬 15:8), [동] 진실 하다(롬 15:8), 참되다(롬 3:7)
      신약 성경 / 109회 사용

      * 227. ἀληθής

      ἀληθής, ἑς 

      1. 진실한,  2. 참된,   3. 요한복음 4:18(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발음 / 알래데이아(alēthēs)
      어원 / 1[부정불변사]과 299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참된(요 8:13, 벧후 2:22), 참(요 5:32)
      신약 성경 / 26회 사용

      * 2990. λανθάνω

      1. 숨어 있다,  2. 눈에 띄지 않다,  3. 마가 7:24

      발음 / 란다노(lanthanō)
      관련 성경 / 숨기다(막 7:24, 눅 8:47), 알지 못하다(행 26:26), 잊다(벧후 3:5, 8).
      [부] 부지중에(히 13:2)
      신약 성경 / 6회 사용


      영들이라고 해서 아무 영이나 다 믿지 말고, 다만 그 영이 하나님게 속한 것인지 아니면 악령인 사탄에 속한 것이지, 즉 진리의 영인지 아니면 거짓 영 곧 미혹의 영인지를 잘 분별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일서 4:1-3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 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요한일서 4:6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사도 요한은 여기서 성도들에게 이 세상에 있는 영들을 다 믿지 말고 먼저 그 영이 어디에 속하였는지 즉 그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속하지 않은가 분별하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씀은 곧 우리가 지금 말하거나 경험하고 있는 영들이나 혹은 영적 은사들이 하나님께로부토 온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영들에게서 온 것인지를 잘 분별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요한의 말씀을 통해서 이 세상에는 하나의 영 곧 진리의 영인 성령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많은 다른 영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앞에 일어나고 있는 영적 은사나 영적 사실들을 볼 때 먼저 그 영(적 은사)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아닌 다를 실재들로부터 온 영인 가를 잘 분별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 말은 곧 그 영이 어디로부터 온 영인지 즉 그 영의 출처, 즉 그 영의 근원을 먼저 알아봐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성령의 근원적 출처 곧 성령이 어디로부터 오는 영인지를 잘 말씀해 주셨다. 즉 성령은 하나님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우선 우리는 이 세상에는 많은 영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영들을 그 특성에 따라서 크게 다음 셋으로 대별할 수 있다.

      1. 악령(惡靈) : 미혹의 영,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영들(spirits) 곧 사탄(satan/devil).
      2. 정령(精靈) : 선과 악의 구분이 없는 초자연적/정신적인 실재들로서, 무속(shaman) 적인 정령(精靈), 혹은 동양 철학에서 말하는 기(氣)와 같은 실재들.
      3. 성령(聖靈) :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오는 신령하고 거룩한 영 곧 진리 의 영, 즉 진리와 사랑과 평화와 지혜의 영(9가지 선한 열매를 맺게 하는 영, 갈 5:2-23).


      영을 분별하는 5가지 방법

      1. 성령의 은사는 감정과는 상관없다

      요한복음 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The wind blows wherever it pleases. You hear its sound, but you cannot tell where it comes from or where it is going. So it is with everyone born of the Spirit.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는 우리의 감정이나 느낌과는 별개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 받은 증거로써 감정의 극치를 기대하지만, 성경은 오히려 성령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바람을 보지 못하지만 바람이 무엇을 하는지는 알 수 있다.
      비록 우리가 바람을 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이 마음에 역사할 때에 그것을 볼 수 없지만, 그분의 능력은 조용한 가운데 새로운 생명을 가져다 준다.
      비록 우리가 성령의 역사를 보거나 만지지는 못할지라도, 그분께서 해놓으신 결과를 볼 수는 있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변화된다면, 우리의 생애가 성령의 임재하심을 증거하게 될 것이다.

      성령의 임재는 우리의 느낌이나 감정에 의존하여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임재하심은 오직 변화된 생애를 통해서만 분명하게 확증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온전히 자신을 비우고 마음 속의 우상과 죄를 버린다면, 그리스도의 영께서 우리의 마음 속을 충만하게 채우실 것이다.
      오직 이러한 사람들만이 성령의 선물을 받을 수 있는데,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자랑치 아니할 것이며, 오직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것이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심이라." 고린도전서 2:10, 12

      우리가 하나님의 영을 받았을 때에, 우리는 어떤 황홀하고 자극적인 느낌을 얻기 보다는, 오히려 침착함과 예리한 판단력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생애를 바치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서와 생애를 생각해 보자. 그분처럼 성령이 충만하였던 사람이 있는가? 그분의 생애는 감정적 환희와 흥분으로 차있는 생애가 아니었다. 오히려 희생과 봉사로 점철된 생애였다. 그분께서는 죄와 불의를 거절하셨으며, 병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고 치료해 주시는 생애를 사셨다. 그분께서는 성령이 충만하신 결과로 거룩한 삶을 사셨던 것이지, 자신에게 성령이 임하셨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구제와 치료를 베푸신 것이 아니었다. 그분께서는 단 한번도 자기 자신을 위하여 성령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셨으며, 오직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에만 성령의 능력을 구하셨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성령 충만함은 하늘 아버지의 뜻을 조용하면서도 진지하게 행하는 순종의 삶으로 표시되었다. 그분의 삶은 사랑과 희생과 극기와 자아부인으로 꼴지워졌다. 마찬가지로 진실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도, 이성적인 분별력과 하나님의 진리가 감정과 느낌을 지배해야 한다. 진리는 건전한 상식 위에 세워지며, 질서 있는 가정생활을 통하여 다른 영혼들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허락하시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복음의 효과적이고 신속한 전파이다. 성령의 은사가 개인의 신앙적 만족감을 얻는 수단으로 사용되서는 않되며,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도 안된다.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정해 주신다는 마음의 안정감을 얻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서도 안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성령의 은사를 교회에게 허락하신 이유는 구제와 봉사를 통해서 복음의 효과적인 전파를 위해서 주셨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잘못 사용되고 있는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교훈하면서, 다음과 같이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에게 충고하고 있다.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해서 하고 ...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고린도전서 14:26,33,40.

      2. 은사를 받기 위해서 무엇을 얼마나 해야 됩니까?

      고린도전서 12: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All these are the work of one and the same Spirit, and he gives them to each one, just as he determines.

      성령의 은사는 우리의 선택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복음의 전파를 위한 당신의 뜻과 섭리에 따라서 어떤 사람을 도구로서 사용하고자 하실 때에 주어지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 당신의 필요와 목적에 따라서 준비된 인간에게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이다.
      우리가 성령을 부리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우리를 부리신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성도들을 통하여 기적을 행하신다.
      우리는 성령의 기적과 은사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다.
      그러나 기적이나 은사의 필요성과 그것이 행하여 지는 장소와 시간과 환경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달려 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기적이 행사되어야 하는 최적의 시간과 장소와 환경을 알 수 없다.
      언제, 어느 때, 어떠한 환경에서 하늘 아버지의 기적이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우리에게는 하늘이 주시는 능력을 시기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는 영적 지혜가 부족하며, 또한 성령의 은사와 기적을 간구하는 우리의 기도가 이기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과 성령의 기적적인 은사를 구할 때에 예수께서 하셨던 기도를 본받아야 한다.

      주님,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성령의 은사를 간구하는 저의 소원을 들어 주시옵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3. 기적은 구원의 증거가 아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9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The coming of the lawless one will be in accordance with the work of Satan displayed in all kinds of counterfeit miracles, signs and wonders.

      어떤 기적이나 은사도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구원을 평가하는 절대적인 증거나 기준으로 사용되어서는 않된다. 기적을 행하였고 경험하였던 사람들 중에서도 결국에는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과 반역적인 삶을 산 결과로 인하여 멸망받았던 예를 성경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어떤 은사가 누구에게 발견되느냐에 따라서 서로의 영적 상태를 판단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과 믿음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시험 기준을 살펴보자. 예수께서는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말씀하셨다(마태복음 7:20).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갈라디아 5:22,23). 성령의 열매는 증오가 아니라 사랑이며, 불만과 낙담이 아니라 희락이고, 분냄과 근심과 스스로 지어낸 불화가 아니라 화평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은 자들에게 하늘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따라서 성령의 은사를 풍성하게 내려주신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이다.

      4. 영을 분별하는 5가지 방법

      우리는 성령의 은사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령의 은사는 오늘날 이 시대에도 나누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은사를 분석하고 사용할 때에 한가지 잊어서는 안될 것이 있다.
      성경은 마지막 시대에 사단이 진리에 굳게 닻을 내리지 못한 사람들을 혼동시키기 위해서 성령의 역사를 위조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마지막 시대에 나타나는 사단의 활동은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으로 특징지워질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데살로니가후서 2:9).

      사단의 활동이 매우 기만적인 이유는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자칭하" 고 있으며,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기 때문이다.(고린도후서 11:13,14).
      그 기만이 너무나 놀라운 것이기 때문에 성경은 "택하신 자들"까지도 미혹당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마태복음 24:24).

      이러한 말씀들은 성령 은사를 추구하는 교회나 성직자들을 모두 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인가? 아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교회와 모든 종교적 체험, 그리고 모든 기적을 시험해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바울이 말했듯이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기 위해서 말이다(데살로니가전서 5:21).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에게 주는 사도 요한의 또 다른 충고를 들어보라.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요한일서 4:1

      그렇다면, 성경은 영을 시험하는 판단 기준으로서 어떤 것을 제시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은 5가지 성경절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율법에 순종하는 삶(이사야 8:20)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이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 아침빛을 보지 못하고."

      성령의 참 은사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는 삶을 살 것이며, 자신이 믿는 바가 성경의 진리에 일치해야 한다.
      성경의 진리를 올바로 이해하고,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순종하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둘째, 예언은 성취되어야 한다(예레미야 29:9)

      "선지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응한 후에야 그는 진실로 여호와의 보내신 선지자로 알게 되리라."

      어떤 사람이 예언하는 은사를 받았으면, 그가 예언하는 바가 정확하게 성취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열매를 맺어야 한다(마태복음 7:20)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어떤 사람이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면, 그의 성품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대표자로 설 수 있을 만큼 풍성한 성령의 열매를 맺고 있어야 한다. 가정에서 부부 싸움을 하고, 자녀들에게 짜증을 내며, 모든 금전 문제에 있어서 엄격한 정직을 유지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이 방언을 하고 병 고치는 은사를 행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하늘에서 내려온 은사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러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 그를 잘 알고 있는 믿지 않는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감화를 끼칠까? 아마도 사람들은 그가 가지고 있는 두가지의 다른 양면을 보면서 하나님의 복음에 대하여 이상한 혼돈을 갖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람에게 성령의 은사를 내려 주심으로써 복음을 전파하고 증거하실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그러한 사람은 혹시 자신이 다른 영을 받았을 가능성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하늘은 위대한 성령의 능력을 받기에 적합하게 준비된 사람들에게만 하늘의 거룩한 선물을 준다. 거룩하게 변화된 성품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에게 하늘의 위대한 능력을 위탁하였을 때에 복음 전파사업에 어떠한 혼돈과 위험이 따르게 될지를 생각해 보라.

      넷째, 성육신 사건을 믿는다(요한일서 4:2-3)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리 이것이 곧 적 그리스도의 영이니라."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우리와 같은 육체로 오셔서 시련과 고통 중에서 승리하셨던 것처럼, 진실한 그리스도인들도 그분의 모본을 따라서 죄와 시험을 승리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 영을 분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죄와 유혹에 대하여 승리하는 생애를 살아야 하며, 그러한 가르침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이어야 한다. 거룩한 생애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거룩한 하늘의 선물이 내려지게 된다.

      다섯째, 예수 믿음을 지키는 것(요한계시록 14:11-12)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사도 요한 역시 앞에서 이사야가 말했던 영의 구별법에 동의하고 있다. 마지막 시대에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인내로서 고난을 통과하면서 나오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에 관한 계시를 보면서, 사도 요한은 그들의 신분을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것은 영을 분별하는 분명한 기준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기적과 은사를 무조건 하나님의 영의 은사라고 보아서는 않된다는 것이 이 질문에 대해서 성경이 말하는 대답이다. 성경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충고는 모든 기적과 은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험하고 판단하여 유익을 얻으라는 것이다.

      5. 은사 경험자들이 가장 유의해야 할 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 자체는 영원불변하지만, 진리를 이해하는 우리의 지식과 경험은 잘못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된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진리를 검증하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를 기준점으로 해서 우리가 가진 지식과 경험을 판단해 보아야 한다. 즉, 우리의 지식과 경험으로 진리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서 우리의 지식과 경험을 시험해야 한다.

      그러나 사단은 경험을 진리 위에 놓으려고 애쓴다. 우리의 경험은 그것이 올바른 진리의 테두리 안에서만 가치있는 것이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같은 사건을 관찰했을 때, 각기 다른 경험을 이야기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진리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경험은 우리가 어떤 교단에 속했으며, 어떤 사람에게 성경은 배웠느냐에 따라서 크게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진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항상 동일하다.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고 있다는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경험을 설명한다.
      A) 나는 어떤 놀라운 기적을 경험을 하였다.
      B) 그런데, 나는 나의 경험과 매우 흡사한 경험을 성경에서 발견하였다.
      C) 그러므로 나의 경험은 진리이다.
      이와 같은 3단 논법에 의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성령의 은사로 받아 들인다. 이러한 논리의 전개는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리지만, 자신의 경험이 초대 교회의 경험과 비슷하다고 해서 자신들의 경험이 진리 안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단도 기적을 일으킬 수 있으며, 성령의 역사를 위조할 수 있고, 사람의 감정을 조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험이 최고의 증거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진리는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한 "영"에 의해서 진리를 척량하려고 한다. 바울은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아니하고." 데살로니가후서 2:10,11. 하나님의 진리인 성경 말씀을 깊이 연구하라. 그것만이 마지막 시대에 펼쳐지는 사단의 대기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성령)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니라." 요한복음 14:15~17. 사도 요한은 여기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의 계명(commendment, 명령)을 순종할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에 대한 순종이야말로 자신의 경험을 시험할 수 있는 최종적인 판단 기준이며, 동시에 성령을 받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자신의 경험과 느낌, 그리고 자신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지식이 어떠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바를 단순한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순종의 생애를 사는 것이야말로 그 사람을 지배하는 영을 분별하는 최고의 기준이다.


      사도 요한이 말씀한 것 같이 영들을 어떻게 분별해야 하는가? 즉 어떤 것이 참된 영 곧 진리의 성령이며 어떤 것이 악령/미혹의 영이고, 또한 어떤 것이 무속적/샤먼적인 정령들인가를 분별할 수 있는가?

      사도 요한은 우리게 중요한 영의 분별 법을 암시해 주고 있다. 그가 제시하는 영의 분별법은 먼저 영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속하지 않은가를 불별하는 일이다. 그리면 영들이 하나님께 속했나 속하지 아니한가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가?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라...>

      사도 요한에 의하면 하나님께 속한 영 곧 참된 령인 성령과 미혹의 영의 구별은 그 영이 육체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구별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참 영과 거짓 영의 구별은 바로 이 세상에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시고 한 인간으로 사신 예수님, 곧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의 삶과 그리고 그의 말씀/교훈과 밀접하게 연결된다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사실 때, 언제나 성령 충만함 속에서 사셨으며, 즉 성령 충만의 삶을 사셨으며,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의 영의 사람 곧 성령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와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고로 성령을 받은 사람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마음을 가져야 하고 그의 인격을 본받아야 하고, 그분의 교훈 곧 그분의 사상을 지녀야 하고, 그분의 말씀대로 사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요컨대, 성령 충만자는 그의 삶과 인격에서 성령/진리의 영의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의 냄새/향기가 나야하고 그의 흔적이 보여야 한다는 말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빛/광채가 비쳐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결론에 도달 할 수 있다.
      참 영과 거짓 영, 성령과 악령,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 거룩한 하나님의 영과 무속적인 정령들과의 구별은 바로 그 영이 예수 그리스도마음/영과 관련되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즉 그 영이 진리와 사랑과 평화와 지혜의 사람 예수 그리스시도의 마음을 갖게 하며, 또한 그분의 빛과 향기를 발하게 하느냐 못하느냐로 구별된다는 사실이다.

      내가 참으로 성령을 받은 사람인가 받지 못한 사람인가, 그리고 내가 진정 성령 충만자인가 이닌가를 어떻게 부별할 수 있는가?
      바로 우리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 마음이 있는가 없는 가로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가 나지 않는 가로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빛과 향기가 나지 않는 다면, 그것은 참 영인 진리의 성령을 받지 못하였거나 그러지 않으면 진리의 영이 아닌, 미혹의 영이나 무속적인 정령을 받지 않았나 잘 살펴보아야 한다.
      동시에 우리가 성도들에게 성령을 받으라, 성령 충만을 입으라고 말할 때, 아무 영이나 받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진리의 성령, 곧 예수 그리스시의 마음 영과 동일한 참 성령을 받으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거짓 선지자나 적 그리스도는 아주 먼데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주변에, 우리 교회 안에, 아니 우리 속에도 숨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분명하게 알려주시고 친히 보여주신 성령 곧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을 올바로 전하지 않고, 성령을 이 세상에 흔이 있는 어떤 기이한 현상의 영이나 무속적 영, 아니면 우리를 미혹케하는 거짓 영 즉 자기 만족적이고 감각적인 흥분만 조장하는 미혹의 영들과 혼동케 하거나 혹은 그런 행위를 자행하는 일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거짓 선지자나 적 그리스도의 하나로 전락하게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마태복음 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 략질 하는 이리라.....
      (20절)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리라.

      요한일서 2:18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 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느니라.

      요한이서 1:7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예수님은 산상수훈 끝부분에서,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경고하셨다.
      그리고 그 거짓 선지자들은 겉으로는 아주 선한 양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속심에는 사람들의 재산을 노략질하는 이리와 같은 자들이기 때문에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고 말씀하셨다(마 7:15).

      또한 마태복음 24장에서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주면서 할 수 있는 대로(모든 수단을 다해서)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혹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마 24:24).

      한편 사도 요한은 그가 쓴 첫 번째 편지에서, 말세에는 많은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을 예고했다.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이때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요일 2:18).

      그리고 또한 그는 그들 즉 거짓 선지자나 적그리스도들이 말하고 보여주는 영들을 다 믿지 말고, 오직 그 영들이 하나님께 속한 참 영인가, 아니면 마귀에게 속한 거짓 영인가를 잘 분별해야 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요일 4:1).

      위의 말씀들은 오늘날 우리의 마음을 매우 무겁게 압박하는 말씀들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 주변에 수많은 자칭 그리스도, 자칭 선지자/예언자, 자칭 예수, 자칭 메시야, 자칭 감람나무, 자칭 보혜사 등 수많은 위선자들과 사이비 종교 지도자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서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사도 요한이 지적한 위의 말씀들은 바로 오늘의 우리 한국 사회와 교계를 향해서 하신 말씀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가 참 선지자며 거짓 선지자 또는 적그리스도인지를 구별하는 기준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열매로써 알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마 7:20).
      즉 누가 참 선지자며 누가 거짓 선지자인지를 구별하는 표식(기준)은 바로 그들의 열매, 곧 그들의 삶과 행동을 보아서 알 수 있다는 말씀이다.
      그들의 삶과 행동이 예수님이 가르쳐주시고 모범으로 보여주신 참 영적 지도자의 삶과 행동과 일치하고 있으면, 그들이 이 시대의 참 하나님의 종들 혹은 참된 영적 지도자로 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거짓 선지자 혹은 거짓 그리스도 즉 적그리스도로 보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한편 예수님은 우리의 영적 전쟁에 있어서 우리의 적 곧 원수가 먼 곳에 있지 않고 바로 우리 가까이에 있음을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래서 “사람의 원수가 바로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6)고 말씀하셨다(마 10:36).

      그러면 오늘의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 생각해 보자. 오늘의 우리 교계와 사회에서 참 선지자는 누구며 그리고 거짓 선지나 혹은 적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그리고 또한 우리는 오늘의 우리 교계와 사회에서 어떻게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 혹은 적그리스도를 구별해 낼 수 있을까?

      일찍이 본회퍼 목사는 주님의 십자가의 대가로 얻어진 지극히 소중하고 값비싼 은혜값싼 은혜처럼 선전하고 남발하는 행위는 교회의 치명적인 적으로서, 모든 교회가 대향해서 싸워야 할 대상이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값싼 은혜란 오늘날 교회에서 철저한 회개 없이도 믿기만 하면 죄가 사해진다고 말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제자 됨이 없이도 의롭게 된다고 말하며, 또한 값싼 축복을 남발하는 행위들이다.

      이러한 행위들은 기독교의 근본 진리/신앙을 왜곡시키고 교회를 병들게 하며 교회의 발전을 크게 저해하기 때문에 교회의 무서운 적으로서 적그리스도적 행위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러한 각도에서 오늘의 우리 교회와 사회에서 거짓 선지자와 적그리스도는 과연 어떤 사람들인가 살펴보자.

      1.  거짓 선지자 혹은 적그리스도의 일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지 않고 자신이 그리스도 혹은 구세주 또는 보혜사라고 말하는 자들이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썼다.

      “거짓말 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요일 2:22).

      2.  하나님의 말씀/복음을 올바로 전하지 않고, 왜곡되게 전하는 자,
      즉 예수님의 복음이 아니라 자기 멋대로 만든 복음 곧 자기복음을 전하는 자도 적그리스도 에 해당한다.

      3.  교회의 분열과 파쟁을 일으키며 교권싸움으로 하나님의 교회(기독교)의 신성한 명예를 실추시키고 하나님의 교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자들도 적그리스도에 해 당한다.

      4. 값싼 은혜를 남발하며, 물신숭배(Manmonism)와 기복신앙(Baalism을 조장하는 자들도 적그리스도에 해당한다.

      5. 금전으로 교권을 잡으며, 금전으로 학위를 사며, 금전으로 교회를 사고파는 자들도 적그리스도에 해당한다.

      6.  충실한 영성훈련과 수준높은 신학교육을 하지 않고 신학교를 마구 세워서 저질의 하나님의 종들을 양산하는 자들도 적그리스도에 해당한다.

      7. 하나님의 종으로서 성결한 삶을 살지 않고 비윤리적인 행위나 삶으로 하나님의 교회/기독교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잃게 하는 자들도 적그리스도에 해당한다.

      오늘날 우리 모두는 깊이 성찰해야 한다.
      내가 과연 누구며 어디에 속한 사람인가를 숙고해보아야 한다.
      내가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만한 참 주님의 종인가, 아니면 구약의 바알 선지자들 처럼 하나님의 뜻은 외면하고 사람들의 귀에만 좋게하는 값싼 은혜를 남발하는 거짓 선지자는 아닌가. 오늘날 나는 과연 주님의 복음이 지닌 깊은 영적 진리들을 바로 이해하고 올바로 전하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의 본래 의도와는 아주 다르게 내멋대로 전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또한 나는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류에 편승하여 잘못된 일인줄 뻔히 알면서도 용기있게 항거하거나 단호히 거부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병들게 하고 또한 그의 신성한 명예를 실추시키는 적그리스도적 행위들을 해오지는 않았는가 반성해 보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부지중에라도 그러한 적그리스도적 행위들에 연루되었다면 오늘 이시간부터 즉시 그 일을 중지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침체에 빠진 우리의 교회를 다시 일어서게 하며 새로운 도약과 생기를 불어넣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소아시아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신앙은 삼위 하나님과 구원에 관한 내용을 핵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넓게는 모든 사상이나 철학이나 역사나 예술이나 문학이나 경제나 정치나 문화가 다 신앙의 활동영역입니다.
      그런 분야에 대해서는 믿음의 관점에서 연구하고 분석하여 나름대로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은 단순히 학문적 연구와 분석의 대상으로만 취급할 수 없습니다.
      영은 눈으로 볼 수 없고 감각적으로 만질 수도 없습니다.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영에 대해 분별하는 것은 세심한 주의가 요구됩니다.

      사도 요한이 영을 다 믿지 말고 분별하라고 한 것을 보면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영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가지고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영을 볼 수는 없습니다. 영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영이 아닙니다. 만약에 영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면 볼 수 있습니다. 천사나 하나님의 사자가 사람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는 경우에 눈으로 볼 수 있는데, 그런 때도 눈에 보이는 그 모습은 영의 본래의 모습이 아닙니다. 영은 모습이 없습니다. 그래서 영에 대한 문제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 영의 문제에 대해 바르고 건전한 지식과 깨달음이 없으면 아주 잘못될 위험이 있습니다.

      성경은 영이 직접 나타나거나 활동하지 않고 사람이나 지식이나 사상이나 문화나 그 외의 여러 것들을 통해서 활동한다고 가르칩니다. 성령의 활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베소서 1장 21-22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 영역에 대해“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고 하였는데, 이는 곧 예수의 영인 성령의 활동 영역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활동 영역은 곧 악한 영의 활동 영역이기도 합니다. 성령은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일하시지만 악한 영은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허물기 위해 일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뿐 아니라 만물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분별해야 하고 또한 악한 영의 활동도 분별해야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 점을 매우 강조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활동 영역은 교회 안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모든 영역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특별히 교회 안에서 활동하는 악한 영을 경계해야 합니다. 악한 영의 활동은 언제나 성령의 사역을 빙자하기 때문입니다. 악한 영은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방법을 이용하고 성령께서 소중히 여기시는 것들을 모방하여 성도를 속이고 기만합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성령께서 사도들과 예언자들을 사용하여 일하셨기 때문에 악한 영은 거짓 사도와 거짓 예언자를 교회에 투입하는 전략을 사용하였습니다.

      오늘날은 목사나 장로 같이 교회 안에 영향력 있는 지도자를 이용하여 교회를 허무는 도구로 이용하는 것이 악한 영의 방법일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가 외부의 공격 보다는 내부로부터의 공격에 더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는데 이는 다 악한 영의 전략에 의한 것입니다. 성령께서 교회를 세워 가시는데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증거와 가르치는 것인데 악한 영도 그 방법을 이용하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입니다. 구약에서는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왕들을 이용했고 초대교회에서는 선지자나 예언자나 사도나 교사를 이용했습니다. 요즘은 두 말 할 것 없이 목사나 선교사나 장로나 그 외에 영향력 있는 지도자나 능력이나 신비한 체험 같은 것을 이용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말씀을 통하여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분별해야 합니다. 악한 영은 초대교회 때만이 아니라 이미 구약에서도 활동하였습니다. 구약에는 하나님께서 주로 “예언자들”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전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언자들의 특징은 자신이 전하고 보여주는 것은 자신의 지혜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변하는 것으로 자처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참 선지자뿐 아니라 거짓 선지자도 같은 주장을 하기 때문에 누가 악한 영의 지배를 받는지 또는 진리의 영의 지배를 받는지 잘 분별해야만 했습니다.

      엘리야 시대에는 하나님과 바알 중 참 신과 거짓 신을 가리기 위한 갈멜산에서의 대결이 있었고 그 대결에서 하나님이 참 신이심이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악한 영은 언제나 노골적으로 바알이 참 신이라고 주장하는 방법만을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이 참 신이라고 주장하면서 거짓 선지자 노릇을 하기도 합니다(cf. 왕상 18:6-12). 거짓 선지자의 특징은 언제나 왕이나 백성들에게 좋은 말만 하는 것이고 참 선지자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말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 아합이 유다 왕 여호사밧에게 미가야에 대하여, 그는 한 번도 내게 좋은 말은 하지 않고 악한 말만 하기 때문에 미워한다고 하였습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 되게 전하면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습니다. 진리만 전하면 사람들이 싫어하는 이유는 사람은 누구나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위로하고 칭찬하고 용기를 주는 말을 좋아합니다. 세상 살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이유로 죄를 책망하고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메시지를 싫어합니다. 경제적인 용어를 빌리자면 영적 “수요(需要)”가 그렇습니다. 진리를 간절히 듣기 원하는 수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 축복, 성공, 위로, 형통, 치유, 능력, 체험 같은 메시지는 수요가 많아서 그런 메시지를 전하는 교회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입니다. 진리만 전하는 교회는 문을 닫아야 할 지경입니다.

      초대교회에 가현설 자들은 예수님의 인성을 믿지 않았고 육체의 부활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가현설 자들은 지식도 많고 수사학에도 능했기 때문에 많이 배우지 못한 성도들이 변론으로는 그들을 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성도들은 거짓 교사나 거짓 선지자들과의 논쟁에서 그들을 이길 만큼 학문과 설득력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이긴 것은 그리스도의 승리에 참여한 때문이고 또한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악한 영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복음을 이상한 사상과 그릇된 가르침과 일치시키려는 교묘한 악한 영이 전략적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악한 영은 복음을 적극적인 사고방식이나 긍정적인 생각 같은 것과 일치시키려고 합니다. 복음을 형통과 축복, 성공 지향적인 복음으로 재 설명하려고 합니다. 병 고치는 복음, 기적을 행하는 복음, 성공을 약속하는 복음, 사회개혁주의 복음, 그 외에 별의별 형태의 복음이 많습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 사도 요한은 ‘미혹의 영’이라고 하였습니다. 미혹의 영은 우리가 들으면 흥미가 있고 구미가 당기고 관심을 끌게 하는 것들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진리에는 그런 달콤한 것이 없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신데 사람들은 진리를 싫어하기 때문에 마치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참 신이신 하나님을 싫어하여 자기들의 마음에 맞는 하나님을 만들어 섬겼듯이 요즘 교인들 중에는 자기 마음에 맞는 성령을 만들어 이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이상한 기적이나 체험하게 하는 영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악한 영이 교회를 어지럽게 하고 성도들을 미혹하는데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성령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악한 영은 목사도 이용하고 선교사도 이용하지만 가장 효과적이고 강력한 방법은 성령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악한 영이 교회를 무너뜨리는데 이보다 강력하고 효과적인 방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이 진리의 영인지 미혹의 영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달콤하고 흥미롭고 내 입맛에 맞으면 악한 영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악한 영의 결정적 증거는 계시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악한 영은 전략적으로 복음을 왜곡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성경적”또는 “말씀 중심”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에 철저한 것 같은 방식으로 말씀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악한 영은 우리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교묘한 방법으로 자신을 감추기 때문에 세심하게 주의하지 않으면 속기 쉽습니다. 악한 영을 분별하는 데도 결정적 시금석은 사랑입니다. 서두르지 말고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보면 악한 영은 교묘한 엘리트 의식의 교만을 드러냅니다. 뿐만 아니라 악한 영은 이기적이기 때문에 절대로 진실한 사랑을 나타내지 못합니다. 악한 영도 사랑을 강조하지만 그 사랑이 진실하지 않다는 것은 사람보다 은사나 능력이나 깨달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진리의 영은 절대로 사람을 무시하지 않지만 악한 영은 은근히 또는 노골적으로 사람을 무시합니다. 진리의 영은 사람을 겸손하게 하지만 악한 영은 영적 교만으로 사람을 무시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런 특징이 바로 계시의 말씀을 듣지 않는 증거들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고 지혜의 영이시고 분별의 영이십니다. 모든 성도들이 이 진리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악한 영을 분별하고 은혜와 진리 가운데 진실 된 사랑을 실현하여 교회마다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요일 4:6-


      07-13-2022(수

      마귀의 일(요한일서 3:8)

      일(2041). 에르곤(ἔργον)

      ἔργον, ου, ὁ

      1. 행위,  2. 히브리서 4:3,  3. 표시

      발음 / 에르곤(ĕrgŏn)
      관련 성경 / 행실(마 5:16, 딤전 5:10, 벧후 2:8), 행위(마 11:2, 요 3:19, 롬 2:15), 일(마 26:10, 눅 24:19, 롬 13:12), 사무(막 13:34),
      역사(요 5:36), 소행(행 5:38), 사업(롬 14:20, 계 2:19), 공적(고전 3:13,14), 실천함(약 1:25), 이룸(약 1:4), 지음(히 1:10), 행함(롬 2:6)
      신약 성경 / 169회 사용

      마귀의 일을 다른 말로 "마귀의 사업"이라고도 합니다.

      원시 복음(창세기 3:15) Original Gospel, Protevangelium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

      창세기에서 처음으로 예언된 메시아(창 3:15)는 최초의 복음이었습니다.
      이것을 원시복음(Protevangelium, Proto - ‘원래의’, evanglium - ‘기독교복음’)이라고 합니다.

      마리아의 몸에서 출생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메시아 예언은 실현되었습니다(마 1:18∼23, 2:11).
      이제 남은 메시아 예언은 부활 후 하늘로 오르신 예수님께서
      다시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란 예언입니다(마 24:30, 26:64, 막 13:26, 14:62, 눅 21:27, 행 1:11, 계 1:7).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아담과 하와가 따 먹음으로
      죄와사망이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사망으로 망하게 된 것을 그대로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의 담을 허시고 다시 낙원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약속해 주신 것이
      바로 원시 복음인 것입니다.

      첫째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우리가 모두 죄인이 된 것입니다(원죄).
      둘째 아담인 예수님이 우리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 모두는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롬 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표하여 죽으신 것은 결국 우리 모두가 각자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신 것이며 그로 인하여 우리는 영원한 형벌을 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구원받기 위해 해야 할 것이 꼭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믿음이 있을 때에 우리는 구원의 기쁨과
      죄에서 해방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으며
      우리의 신앙생활은 보다 활기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성경에 기록된 족보는 4복음서 중에 마태복음 1장에 아브라함부터 예수에 이르기까지 기록되었으며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족보가 없고 누가복음 3장에서 예수께로부터 하나님에 이르기까지
      남자가 낳은 후손들의 대략이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족보는 남자가 낳은 후손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 15절에서 말하는 여자의 후손이라 기록한 말씀이 단 한곳 마태복음 1장 16절에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셨다는 것입니다.
      이에 관하여 자세한 내용을 누가복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눅1:25-36).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유일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아브라함의 후손을 낳은 남자가 아닌 여자가 있었으니
      다윗의 후손 (마1:16) 야곱이 낳은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로 그에게 (마 1:18)
      성령이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그를 덮으시리니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여기 ‘덮으시다’라는 뜻은 감싸다라는 뜻으로
      닭이 알을 품듯(창 1:2)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심과 같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동정녀의 몸에 잉태되시고 나신 것은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으로 죽은 자 가운데 계신 예수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것과 같다

      어쨌든 여자의 후손은 약속의 말씀대로(미 5:2. 눅 2:4. 마 2:11)
      떡집이라 일컫는 베들레헴에서 나셨고(호 11:1. 마 2:15)
      약속의 말씀대로 애급으로 피신하셨다가(마2:23)
      약속의 말씀대로 나사렛에서 성장하셨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께서(고전 15:3)
      성경대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고전 15:4)
      성경대로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사단의 권세 아래 놓인 세상과
      그리스도 안으로 불러냄을 받은 자들과의 전쟁이라 할 것이다

      사단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이기신 세상을 다시금 회복하려고 안간힘을 다할 것이다.
      또한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계 17:17)
      하나님께로부터 권세를 받아 다스릴 환란까지이다.
      얼마남지 않은 마지막 시간이 될 것을 아는 그들은 끝까지 하나님의 일을(계 2:9. 13:6. 16:9. 11. 21)
      훼방할 것이며 회개치 않고(계 20:14) 불 못을 선택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최후의 날이 임하기까지 복음의 말씀을 변질시키고 왜곡하여
      진리에서 비켜서도록 할 것이다.

      그 하나는 동정녀에 관하여서이고
      둘은 창조론에 대적하는 진화론이며
      셋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부정하는 종교다원주의이며
      넷은 홍해바다에 길을 내신 일이며
      다섯은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축소하려는 미련한 자들의 대적이며
      여섯은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형벌을 부인하는 일이며
      일곱은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이다

      그러므로 그들은(마 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으켜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고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그러므로 그 어떤 유혹에도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며
      처음 듣고 믿은 복음의 말씀인 ‘십자가의 도’에서 떠나지 말고 오히려 굳게 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사랑의 대상자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창조하신 후, 마지막으로 사람을 지어 하나님 대신 세상을 통치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시도하는 순간 인간은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인간은 죽음에 이르게 되었고, 그로인해 영원히 살도록 창조된 자가 그만 구원이 필요한 자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사랑하시기에 사랑의 대상자인 사람들을 향해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않으실 수 없었습니다. 죄로 인하여 사람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에 하나님께서는 한가지 특이한 약속을 주십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 창세기 3:15.

      인류를 죄악에 빠뜨린 뱀에게 한 말입니다. 뱀은 사실 뱀의 모습으로 나타난 마귀를 말합니다. 마귀는 여자의 후손의 발뒤꿈치를 상하게 하겠지만,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으깰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성경에서 모든 인류는 남자의 후손입니다. 창세기에도, 역대기에도, 마태복음에도, 누가복음에도 모든 인류는 남자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두 남자를 통해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여자의 후손이 딱 한명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마귀는 예수님 십자가에 매달아 죽게 하였지만, 예수님을 죽음에 가둬 두지를 못했습니다. 즉 머리를 상하게 하려 시도하였지만 예수님께서 죽었다 살아나시는 부화사건을 통해, 겨우 발뒤꿈치만 상하게 한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반면, 부활을 통해 마귀는 자신의 궁극의 무기인 죽음이라고 하는 무기가 깨지는 것 보아야 했습니다. 즉 머리가 으깨어져 버린 것이지요. 죽음으로도 어쩔 수없는 마귀는 이제 예수 이름 앞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의 형편없는 상태는 예수의 이름을 가진 모든 자들 앞에서 동일하게 적용되는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즉 예수를 품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구원이 임한 것이지요.

      이것을 원시복음이라 부릅니다. 여자의 후손, 즉 남자의 몸을 빌지 않고 처녀의 몸에서 태어난 인간이 모든 인간을 구원할 것이라는 최초의 구원 예언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왜 하필 처녀의 몸에서 태어난 자라 할까요?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죄가 없어야 합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바로 죄가 유전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죄의 유전은 남자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즉 남자의 몸을 타고 태어난 모든 인간은 죄인인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을 위해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구원의 길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피의 대속 제사입니다. 다른 죄없는 생명체가 대신 죽음으로써 생명을 대신하면 된다는 것이지요.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레위기 17:11).

      즉 죄를 없애는 방법은 바로 대속의 제사였습니다. 대속이란 죄를 ‘대신 속한다’는 뜻입니다. 제사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죄인을 위해 대신 죽어줄 제물이었습니다. 이때 사용되는 대속 제물의 조건은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어린 양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하나 생깁니다. ‘짐승이 인간을 대신해서 죽을 수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럴 수없다라고 말합니다. 상식적으로도 당연히 그럴 수 없지요. 그래서 제사에 사용되었던 희생양은 그저 상징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는 예표라고 부릅니다. 즉,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어린 양이란, 죄도 없고 허물도 없는 사람 제물을 뜻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죽을 수 있는 구원자는 다음과 같은 자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1. 인간을 대표해서 죽어야 하므로 사람이어야 한다.

      2. 죄도 없고 허물도 없어야 하므로, 남자의 피를 받으면 안된다

      3. 죽음을 이겨야 한다. 즉, 그저 대신 죽는 것으론 부족하고 죽었다가 살아나야 한다.

      이러한 존재를 보내 주겠다는 약속이 바로 창세기 3:15절의 원시복음인 것입니다.

      죄인이 아닌 인간이 될 수있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인간이기 위해서 인간의 육신을 받아야 한다

      2. 죄가 없기 위해서 남자의 피를 받으면 안된다. 죄는 남자를 통해서 유전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기 위해 구원자는 우선 남자의 몸을 받지 않고 여자에게서만 태어났어야 했습니다. 인간의 몸에서 태어나야 인간이 되어 인간을 대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죄가 없는 순결한 영혼이어야 했고, 죄와 죽음을 이기는 능력을 가져야 했으므로 그 영은 하나님으로부터 와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자가 처녀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남자의 후손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이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구원자는 완벽하게 인간이면서, 또한 완벽하게 하나님이어야 했던 것입니다.

      아무도 믿지 않을 사실, 믿음을 주기 보다는 오히려 조롱거리가 될 수 밖에 없는 사실, “처녀가 애를 낳은 것이 우리가 모시는 구원자라네”라고 하는 이야기가 당당하게 성경에 자리 잡을 수밖에 없었던 사연은 바로 대속제물의 조건을 만족시켜야 하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최초로 복음의 약속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타락한 이후, 즉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와 뱀에게 벌주시는 종말론적 심판의 광경을 보이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심판의 선언 속에 하나님은 긍휼을 잊지 않으셨다. 여인의 후손을 통한 구원 약속을 주셨기 때문이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마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3:15) 여기서 구원에 관한 중요한 진리를 발견한다.

      첫째, 우리 구원을 인간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전적 능력으로 이루신다는 선언을 본다. 사람의 노력의 보태기로 이루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구원의 역사를 본다. 진정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단독역사로만 가능하다. 우리의 구원도 전적인 은혜로 되는 것이지 나의 어떤 장점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 원리는 역사속에 일관하게 나타난다. 신약의 구원 역시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여신 것처럼 우리 마음을 여실 때 믿게 되고 회개하고 구원을 받는다.

      둘째, 그의 구원은 마귀와의 단절로 이루어진다. 마귀의 말에 귀가 솔깃하여 독을 마시듯이 자기 것이 되어버린 인생은 하나님이 마귀와 원수가 되게 하심으로서 구원이 성립되게 하신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마귀와 대적하는 입장에 서있는 전쟁터에 있는 것이다. 기회를 엿보고 있는 일곱 마귀의 역사를 대적해야한다. 평강의 하나님이 속히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리라는 약속을 받고 있는 자들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할 일은 주님이 마련하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여 입는 일만이 남았다.

      마지막으로 구원이란 연합을 가리킨다. 하나님과의 연합이 구원이란 말이다. 마귀와 원수가 되고 하나님과 연합한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던 신분이 오직 주님을 따르는 신분으로 바꾸어진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 그리스도 안에서의 승리 자리로 올라가는 것이 구원이다.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죄에서 건짐 받는 초보적 부분에서 하나님과 떨어질 수 없는 연합의 자리로 나가는 것이다.

      이 예언은 정말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바로 이 3가지 절대적 요소를 골자로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적 은혜로 구원받은 자이다. 우리는 마귀와의 대적하는 용사로서 부름 받았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영원한 연합을 함으로서 우리의 구원이 완성됨을 안다. 이 놀라운 원시복음의 골자가 내 속에 있는지를 살피자. 정말 내가 믿는 복음이 바로 이것 향해 나가고 있는가?



      원시복음(元始福音, Protoevangelium)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박윤선 박사는
      (1) 사람과 마귀(계 12:9, 20:2)가 서로 원수되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것,
      (2) 사람이 마귀와 원수 된 상태가 구원이라는 것,
      (3) 여자 후손과 뱀 후손이 상호적대행위를 계속한다는 것,
      (4) 택한 백성구원은 그 백성이 마귀머리 상하게 함으로 성립된다는 네가지 중요 요소를 지적했다.

      여자 후손은 택한 백성 대표할 메시아가 나실 것을 가리킨다(사 7:14, 마 1:23, 갈 4:4).
      원시복음을 포함 에덴동산의 일을 기록한 창 1-3장은 구속사의 네 과정을 암시하고 있다.

      1. 창조적 은혜와 축복 :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만물 가운데, 생존환경에 적합한 지 구와 그 안에 동물·식물을 만드시고, 인간은 하나님 형상에 따라 하나님 모양대로 남녀로 디자인하여, 손수 빚어 만들어 자신의 생기를 불어넣어 생명이 되게 하시고, 가정을 이루게 하시고, 생육 번성 땅에 충만, 정복, 다스림, 이름을 짓는 명명권(命名權)을 주셔서 그것들을 누리며, 생명과 선악과로 아담과 하와의 언약, 교제, 소통하시고, 순종과 영광 받으시고, 그들을 영원히 살게하심은, 한마디로 창조적 축복의 은혜요, 감사 찬송 기쁨의 주제다(창 1:1-28, 2:15-17, 19, 23, 사 43:7, 21)

      2. 창조질서를 어긴 인간 범죄 :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형상대로 모양대로 지음받은 정체성, 축복을 누림을 받은 사명, 하나님 축복의 약속을 잊고, 아담은 한 몸된 아내 보호 돌봄 간수하는 남편 역할을, 하와는 한 몸된 남편 돕는 내조 배필로서 협의하는 아내역할 등한하고, 하나님을 언약 어기고, 하나님과 대화보다는 다스려야 할 뱀을 대화 상대로 자기와 동격에 두어, 하나님 말씀보다 뱀말에 귀 기울임으로, 뱀에게 틈탈 기회를 주었다(시 1:1-2, 엡 4:27). 결국 하와는 하나님 금하신 선악과를 먼저 따먹고 아담으로 먹게 해서, 부창부수(婦唱夫隨)를 범죄했다. 그 죄 결과는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고, 그들이 대표하는 온 인류에게 비극을 가져다주었다(롬 5:12).
       
      3. 하나님께서 미리 경고하신 심판(창 2:17) :

      인간의 죄의식, 수치심, 핑계, 하나님 원망, 노고(勞苦), 죄성(罪性), 사망의 실존적 변화와 에덴동산에서 쫓겨남, 저주받은 땅 경작, 하나님 한탄하신 죄악관영(貫盈)한 생의 정황 변질로, 하나님 관계, 인간 관계, 자연 관계의 훼손, 실존과 상황이 사람과 악한 사탄마귀의 영적 전투상태 전시상황으로 바뀌었다(창 3:7-19, 22-24, 4:7, 6:5-6).

      4. 무조건적 은혜 원시복음(창 3:15)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구원을 선포하셨다.
      뱀 후손과 여자 후손 적대 관계는 궁극적으로 여자 후손이 승리하나, 피흘림을 통해서다.
      피흘림은 수치(羞恥) 가림, 죄 씻음이다.
      여자 후손 피흘림으로 그가 대표하는 백성들 죄씻음, 죄가려줌, 궁극적 승리를 가져오게 됨을 하나님 손수 실천해 보여 주셨다(창 3:21, 레 17:11, 힙 9:22).

      그러나 뱀 후손은 하나님 허락 하에 제한받는 힘으로 최후 심판때까지 여자 후손 공격하기를 멈추지 않음으로, 하나님 자녀는 하나님 절대의존 신앙과 그 열매인 예배와, 삶의 자리에서 죄를 다스림 죄와 더불어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창 4:7, 욥 1:6-12, 마 4:1-11, 눅 22:31-32, 힙 12:4).
      그래서 모이기를 힘씀, 믿음의 선한 싸움(딤전 6:12, 힙 10:25), 하나님의 전신갑주 영적무장을 취하라 한다.
      악한 사탄마귀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 두루 찾아 헤매고 다니지만, 성령의 검 하나님말씀과 성령 안에서 함께 더불어 기도 교제로 마귀를 대적하면 물러가고, 마귀 물리친 다음 하나님을 의지 가까이함이 영전의 필승전법 이다(엡 6:10-20, 힙 4:12, 약 4:7-8, 벧전 5:7-8; 신 4:7, 시73:28, 145:18).

      원시복음은 구약의 메시야 예언(사 7:14)과 그 메시야의 피흘림(창 3:21, 4:4, 15:6-18, 9-14, 출 12:13, 24:1-8, 레 17:11, 사 53:4-6) 두 방면으로 예언되어 오던 것이, 신약의 때가 되어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로 성취되었다(마 1:16, 23, 눅 1:34-35, 2:10-11, 요 4:25, 19:30, 갈 4:4, 31). 이 구원사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계획, 완성, 우리에게 적용된 것인데, 하나님 말씀을 듣고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믿음으로 영접할 때, 성령께서 우리 영혼에 인 치심으로 중생 구속(救贖) 영생을 얻고, 하나님 자녀의 영, 권세, 명분받아 하나님 아바아버지라 부르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후시가 되게 하신 것이다. 이 구속사는 에덴동산 실낙원에서 새하늘 새땅 복락원에 이르기까지 한결 같다. 구원받은 하나님 자녀는 ‘나 같은 죄인 구원하시기 위해서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선택하사 나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나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내게 그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며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기를 소원해야한다(요 1:12-13, 갈 4:4-7, 엡 1:4-14). 원시복음이 결국 내 구원 위함이라 믿어짐으로, 모세가 죽기전 이스라엘자손을 축복하고 불렀던 찬양을, 천국 갈 때까지 나도 부르지 않을 수 없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오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신 33:29).

       

      단에게 내린 저주인 동시에, 타락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입니다. 다시 말해, 여자의 후손 중에서 메시아가 태어나 인류를 구원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원시복음’(Original Gospel)

      원시복음이란 최초의 복음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최초로 메시아,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된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신약에 4복음서가 있듯이 구약에는 원시복음이 있습니다. 


      그러면 원시복음의 핵심은 무엇인가? 

      아주 중요한 3가지 핵심 메시지가 있습니다. 


      1. 그리스도가 여자의 후손으로 와서 마귀를 멸한다는 것입니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사단과 여자의 후손이 원수관계, 곧 적대관계가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마귀를 멸할 여자의 후손은 누구인가? 그는 분명 인간입니다. 하지만 보통 인간이 어떻게 영물인 사단을 이길 수 있는가? 사단을 이기려면 사단보다 더 강해야 합니다. 결국 사단을 이길, 여자의 후손은 성육신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결국 원시복음은 여인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를 예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 가운데서 메시야가 태어나 마귀를 멸하시고 인간을 구원할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요일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 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또한 여자의 후손 가운데서 그리스도가 태어난다는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더욱 구체적으로 예언되었습니다. 

      (사 7:14)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 예언대로 처녀에서서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난 분이 누구인가? 

      (마 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 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늘 고백하는 대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요, 구원자인 것입니다. 

      그러면 왜 메시아는 ‘여자의 후손’이어야 하는가? 다시 말해 왜 처녀가 낳아야 하는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할 자는 아담의 후손, 즉 남자의 씨로 태어나면 안됩니다. 왜요? 아담의 혈통을 타고 난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원죄 아래 있고 그 죄로 인해 저주와 심판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롬 5:12)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그래서 성경은 구원자로 오실 분은 여자의 후손, 즉 처녀에게 태어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이 예언대로 예수님께서는 동정녀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어 탄생하셨습니다. 인류를 대대로 묶고 있던 원죄와 상관없이 의롭고 순전하고 거룩한 사람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일하게 죄 없는 사람입니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이 예수님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메시아이심을 믿습니다.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또한 하나님은 사단에게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사단과 적대관계를 가지고 싸우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예언대로 예수님은 사단과 크게 세 번 싸우시는데 두 번은 이미 싸우셨고 한 번은 앞으로 싸우실 것입니다. 


      첫 번째 사단과의 싸움은 언제였는가? 

      세례를 받은 후 광야에서 40일 금식기도를 한 후 사단으로부터 받은 3가지 시험입니다. 예수님은 이 시험을 말씀으로 다 물리치시고 승리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단이 지배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마 4:17)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두 번째 싸움은 언제였는가? 

      십자가에 고난당하심입니다. 십자가의 수난 당하심은 사단과의 영적 싸움입니다. 이 싸움이 처음에는 예수님이 지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승리하셨습니다. 

      세 번째 싸움은 언제 있게 되는가? 

      예수님의 재림 때 치러질 싸움입니다. 이 싸움에서 사단은 완전히 패하게 되며, 영원히 유황불에 갇히게 될 것입니다. 

      (계 20:10)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여자의 후손으로 오셔서 마귀를 멸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2. 사단이 발꿈치를 상하게 함은 예수 십자가의 고난을 말합니다.

      (창 3:15)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사단이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에게 발꿈치를 물리는 고통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단의 계략 가운데서 십자가에 고난당하심을 뜻합니다. 실제 사단은 예수님을 상하게 하기 위해 집요하게 역사했습니다. 무엇보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습니다. 

      (요 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수제자 베드로에게는 예수를 부인할 생각을 넣었습니다. 대제사장들에게는 예수를 죽이려는 생각을 넣었고 거짓 증인들에게는 고소할 생각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빌라도에게 예수를 정죄하여 십자가에 내어 줄 생각을 넣어 주었습니다. 사단은 메시아를 죽임으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무산시키려 했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때는 헤롯을 사주하여 2살 이하의 죄 없는 아기들을 학살하게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려는 예언의 성취입니다. 

        

      3. 예수님이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하심은 부활과 속죄를 말합니다. 

      (창 3:15)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여자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님이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사단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합니다. 하지만 발꿈치는 신체 기능면에서 크게 중요치 않은 부분입니다. 따라서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는 것은 비록 해를 당하지만 치명적이지는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여인의 후손이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것은 치명적인 상처를 준다는 것입니다. 머리는 아주 중요한 부위로써 한번 상하게 되면 거의 회복 불능의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됩니다. 이 말을 실감 있게 표현하면 예수님이 ‘사단의 머리통을 박살낸다.’는 것입니다. 

      이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하셨습니다. 사단과 그의 왕국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원수 사탄의 세력을 꺾고 승리하셨습니다.

      (골 2: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히 2: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지금 활동하고 있는 사단도 머리에 치명상을 입은 사단입니다. 우리의 사단과의 싸움은 이겨 논 싸움입니다예수 이름으로 나가면 사단은 꼼짝 못합니다. 사단은 ‘예수 십자가’에 대한 악몽,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 이름으로 사단을 대적하기를 바랍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 끝났다면 이것은 예수님의 패배요, 사단의 승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죄를 이기고 사망을 이기고 사단을 이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에게 치명상을 입히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고전 15: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 15: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살이 찢기시고 물과 피를 다 쏟으신 다음 선포하셨습니다. 

      (요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예수님은 속죄의 피 흘리심으로 죽었던 우리의 영혼을 살리셨고 가시와 엉겅퀴의 저주에서 해방시키셨으며, 온갖 질병에서 구원하시는 일을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속량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셨습니다. 

      (갈 4: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사 속죄를 이루시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구주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4. 이 원시복음에서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을 봅니다.

      원시복음은 수천 년 전의 메시아 예언의 약속입니다. 수많은 선지자들이 메시아 예언을 했습니다. 이 약속이 과연 어떻게 성취되었는가? 드디어 때가 찼을 때 하나님이 그 아들을 구원자로 보내주셨습니다. 

      (갈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여기 ‘때가 찼다’는 것은 메시아를 보낼 적기가 됐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언은 더딜지라도 반드시 이루어짐을 믿으십시오. 성경의 나머지 모든 예언도 그대로 이루어 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틀림없습니다. 

      (마 5:18)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 24:35)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방금 전 말씀에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원시복음의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다는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께서 여인의 후손으로 성육신하여 오신 것입니다.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 성취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원시복음에서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을 보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죄악 세상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인가? 사랑하는 아들을 그 참혹한 십자가에 내어주신 이유가 무엇인가? 저 사망의 음부에 당신의 아들을 사흘씩이나 가두어두신 이유가 무엇인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과 저를 죄에서 건지시고 구원과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열심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나님의 이 열심이 아니라면 어찌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었으리요. 하나님의 열심은 지치지 않으십니다.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이루십니다. 이 사랑으로 나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여러분도 사랑하는 자식을 잃어버렸다면 이런 열심으로 찾을 것입니다. 결코 포기 하지 않을 것입니다. 끝까지 찾을 것입니다. 

      우리도 이 하나님의 열심을 본받기를 원합니다. 이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 마음에 불붙기를 원합니다. 

      이 하나님의 열심이 사도바울에게 불붙었습니다. 

      (고후 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과연 바울은 어떤 일에 열심이었는가? 영혼 구원을 위한 열심입니다. 각 사람을 정결한 처녀로써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중매하고자 하는 열심입니다.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의 신부로써 혼인 잔치에 들어가게 하려는 열심입니다. 바울에게 불붙은 하나님의 열심은 1세기에 소아시아와 유럽 전 대륙을 십자가로 물들게 했습니다. 

      우리도 이 하나님의 열심을 회복하기를 원합니다. 이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 마음에 불붙기를 원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피가 헛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은 세상의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열방의 모든 족속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 하나님의 사람들을 일으키시고 계십니다.


      마귀의 일을 멸하려 오신 예수 그리스도

      영생하는 문제에 있어서 제일 큰 시험은 미혹입니다.
      ‘미혹’이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프라나오’이고, 히브리어로는 ‘타아’라는 단어입니다.

      미혹이라는 단어에 대한 뜻은 ‘속이다’,‘꽤다’,‘유혹한다’,‘사기 치다’,그 다음에‘길을 잃게 하다’,‘방황하게 하다’,‘유리하게 하다’, 바른 길을 가지 못하도록‘옆 걸음치게 하다’, 더듬게 하다’.‘오락가락 하다’

      신약 성경에 36번, 구약 성경에 19번 사용됩니다.(인터넷 다국어 성경 검색 결과)
      그런데 이 미혹이라는 단어가 들어있는 곳마다 굉장히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들이었습니다.

      창세기 3장 1절에서 5절 말씀에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창조하시고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만들고 그들에게 3대 축복을 줬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백성이 번성하도록 했고,
      그 다음에 모든 만물을 정복하도록 했고,
      그리고 통치하며 다스리도록 했는데 창세기 3장 1절에서 5절까지에 보면 마귀가 하와에게 말씀으로 미혹을 하므로 그 축복을 놓치게 되고 맙니다.

      첫 번째로 이 미혹에 걸려들었는데 속이는 거였습니다. 즉, 사기 쳐서 길을 잃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물을 다스리며 영생해야 할 아담과 하와가 미혹이라고 하는 덫에 걸려 영생을 놓쳤습니다. 이것이 알파적인 역사입니다. 이제 마지막 때도 역시 말씀을 가지고 미혹하는데 그 미혹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입니다.

       

      거기에 보면 옛 뱀이라는 마귀가 무엇으로 미혹을 했냐면 말씀을 가지고 미혹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미혹을 할 때에 이기지 못하고 그 미혹에 걸려 발목이 잡힐 때에 영생의 길이 막혀버리고 죽음이 왕 노릇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고 하셨는데 이는 말씀으로 시작하신 하나님이 말씀으로 마치겠다는 겁니다. 말씀으로 시작하실 때 뭐가 옆에 끼어드느냐? 마귀의 미혹이 끼어듭니다. 그와같이 마지막에도 똑같이 말씀 미혹이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지막에 말씀으로 이기는 자가 될 때 이 몸이 죽지 않고 영생한다고 하는 것이 알파와 오메가 역사입니다. 첫 아담이 영생을 놓쳤는데 무엇 때문에 놓쳤느냐면 미혹 때문에 놓쳤습니다. 그래서 여기 본문 7절에 보면 ‘자녀들아’라고 말을 하고 있는데 그 단어가 ‘테크나’인데 이는 ‘어린 자녀’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연세가 있고 나이가 들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테크나’입니다. 나이만 들었지 하나님이 볼 때는 철부지 어린아이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내가 철이 든 것 같은데 저분이 볼 때는 철부지요. 나도 저 사람의 말 들어보면 너무 철부지에요. 그래서 철부지끼리 모여 놓으니까 지지고 볶고 자기가 옳다고 머리를 숙이지 않고 굽히지도 않고 하는데 늙을수록 고집이 센 것은 다 오늘날 철부지들이 하는 짓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테크나’라고 하면서‘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미혹이라고 하는 것은 영생에 방해거리가 되고 옆 걸음치게 하여 영생의 바른길을 가지 못하게 하고 길을 잃게 하는데 이것이 미혹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마지막시대에도 우리가 예수 십자가 피로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지만 말씀으로 미혹을 이겨야 영생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기고 또 이기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마지막 천국에 관한 말씀을 하시면서‘이겨라, 지켜라, 기다리라, 싸워라,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의의 투구를 쓰라’는 말씀을 했습니다. 그런데 구원 받은 우편 강도가 전신 갑주를 입었거나 구원의 투구를 쓰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구원은 이런 것이 하나도 필요 없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오시는 주님 앞에서는 까다롭고 조건들이 많이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 영생한다고 하는 것이 그리 호락호락하게 그저 누워서 떡 먹기처럼 쉬운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 여기에 ‘미혹을 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을 보니까 반드시 미혹이 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시편 95편 10절 1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고향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의 지팡이로 홍해를 가르고 하늘의 만나와 반석의 생수를 마시게 하였지만 그 백성들을 향하여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마음이 요동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말씀을 히브리서 3장 10절에 인용하기를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노하셔서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라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들중 20세를 기준으로 하여 다 광야에서 쓰러뜨려 버리고 20세 이하 어린 것들이 장성해서 여호수아와 갈렙의 인도로 가나안땅으로 들어갔습니다. 광야에 다 눕혀진 그들이 하늘의 신령한 만나도 먹었고, 반석의 생수도 마셨으나 광야에 쓰러진 것은 미혹에 걸려 넘어졌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미혹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암보다 더 무섭고 고혈압보다도 더 무섭고 당뇨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미혹입니다.

       

      오늘날 육체의 생명을 끊는 무서운 질병이 있다면, 오늘날 내 영혼의 영원한 안식의 축복을 못 받게 하고 망치게 하고, 죽이는 역사가 미혹입니다. 그런데 그 미혹을 우리가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가 중요한데 그 이기는 것에 대하여서는 오늘날 교인들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오늘날 내 자식이 공부를 좀 못하면 좋은 학교에 못 갈까 걱정을 하고 있고, 내 사업이 잘 못되어 수입이 적으면 생활에 어려움이 올까봐 걱정을 하고 있지 내 영혼이 망가뜨려져서 영생에 방해되는 일이 있을까 염려하며 노심초사하는 분이 얼마나 있습니까? 여러분, 내가 사업에 미혹이 돼서 돈이 날아 가서 오는 생활의 미혹도 있습니다. 사기꾼을 만나서 돈을 날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은 물질의 미혹입니다. 여러분, 꽃뱀을 만나가지고 많은 젊은이들이 쓰러져서 젊음을 탕진하고 넘어지게 하는 사랑의 미혹이 있습니다. 그것이 더 나가면 영적인 문제까지 다치지만 육체를 망가뜨리는 미혹도 많이 있는데 제일 귀하고, 제일 무서운 것은 내 영혼을 망가뜨려서 영생에 방해되는 미혹인데 여러분 주위에도 얼마든지 그 미혹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세를 만난 우리 성도들에게 미혹에 걸려들지 않도록 하라고 본문 7절 상반 절에 말씀 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5절에 예수님께서도 제자들 데리고 감람산에 올라가 앉아셨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나는 그리스도라고 하며 많은 사람을 미혹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난리와 난리 소문, 전쟁에 대한 소문이 있지만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면서 오히려 “미혹을 주의하라”고 했습니다. 이 미혹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지 몰라요. 여러분, 제가 늘 이런 얘기합니다. 보살이 목탁을 치고 와서 미혹을 하면 우리가 안 넘어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내가 주의 사자라고 하고, 권사요 장로요 목사라고 하면서 성경 가지고 미혹하면, 말씀에 굳게 서지 않을 때 백발백중 흔들리지 아니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무엇보다“미혹을 주의하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24절에 보면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가지고 와서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라고 보여주면서 택한 자들이라도 미혹을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봐 보십시오. 미혹은 얼마나 많은 이적기사를 가지고 광명한 천사 모양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무방비 상태인지 모릅니다. 신천지가 덤벼들어도 막아내지 못하고 그냥 피하라고만 합니다. 여러분, 신천지 단체들은 전에는 감춰놓고 활동했는데 이제는 드러내놓고 합니다. 우리는 그냥 덤벼들 때에 쉬쉬 하고 못 가게하고 막습니다. 목사님들을 막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자녀가 거기에 빠질 때는 어떻게 막겠습니까? 성도들에겐‘가면 안 된다’고 하면 될지 모르지만 여러분의 자녀가 거기 빠져 들어갔을 때엔 어떻게 막아내겠습니까? 순천의 어떤 목사 아들이 갔다가 아버지가 하도 ‘야 이놈아 목사 아들이 신천지에 빠져가지고 되겠냐?’고 해서 다시 돌아왔는데 와서 딱 아버지의 설교를 들어보니 죽은 설교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내가 영생하려면 신천지에 가야 되겠다고 가버렸답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난번에 호남 쌀이 와서 팔아줬지요? 그 목사 사모가 신천지에 빠져서 교인을 데리고 가버렸습니다. 목사가 죽을려고 그랬어요. 우리 교단입니다. 어떻게 막아내겠냐 말이에요. 그것이 미혹입니다. 넘어갈 때는 내가 확신을 가졌으니까 넘어가고 진리인 줄 아니깐 넘어가는 겁니다. 그러나 바른 말씀의 잣대를 가지고 가서 붙어보고 대화해보면 진리가 아닌 것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오늘 여러분,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고 했는데 이렇게 미혹은 영생하는 길의 방해가 미혹입니다. 우리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의 미혹도 물질에 손해가 있고 인격에 손해가 있지만 영생의 미혹은 말씀을 가지고 들어옵니다. 오늘 여러분, 꼭 여러분은 미혹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갖기를 바랍니다. 그럼 미혹을 이길 수 있도록 한다면 뭡니까? 말씀 밖에는 없다 이 말입니다. 말씀을 정확하게 아는 길 밖에 없습니다. 영생의 길을 미혹하는데에 뭘 가지고 오냐면 말씀을 가져오기 때문에 말씀을 가지고 물리쳐야 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말씀 자체가 그리스도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말씀이에요. 그런데 말씀자체이신 예수그리스도에게도 마귀가 말씀을 가지고 시험하러 왔다니까요. 마태복음4장에 나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뭐라고 마귀를 물리쳤습니까? “성경에 기록하였으되”라고 하면서 말씀으로 물리쳤습니다. 그 마귀가 하나님의 아들인 줄 알면서 말씀이신 그리스도에게 말씀을 가지고 와서 예수를 미혹을 하니까 예수님께서도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말씀을 정확하게 붙드는 방법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정확한 말씀을 붙들려고 하면 정확하게 가르치는 스승을 만나야 되고 그래야 말씀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 이 말입니다. 우리는 씨름 선수나 레슬링 선수나 양궁 선수가 아니라 우리는 말씀의 선수가 되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깜짝 놀랄 일입니까? 아니 그 놈의 마귀가 예수님이 말씀자체이신 하나님의 아들인 줄도 알면서 성경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성경 가지고 치고 들어오면 오락가락 안 하겠습니까? 오락가락하게 하는 것이 미혹이거든요. 그래서 여러분들은 중요한 이 미혹에서 벗어나는 준비가 말씀 속에서 완벽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미혹을 이기면 어떻게 되느냐? 7절 하반절에 보면 ‘의롭게 되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의로움’이라는 말은 헬라어로‘디카이오스’ 라는 말인데 공의로움, 옳음, 진실함이라는 말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참으로 의로운 분입니다. 의로우신 주님께서 영생할 우리에게도 의로워지라고 요구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동인교회 성도들이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은 귀가 나팔같이 열려야 되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예수님이 성경을 풀어줄 때에 마음이 뜨겁지 않더냐 라고 했는데 말씀을 들으면서 졸릴 시간이 어디 있으며, 다른 데 마음을 둘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왜냐면 말씀자체가 불이기 때문에 말씀이 들어올 때 내 마음이 막 뜨거워져야 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여러분들에게 의로우신 주님께서 당신과 같이 우리도 의로워지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3장 3절에 보면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케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제가 늘 이런 말씀하지요? 세탁기에 보면 액체 세제가 있고 또 분말 세제가 있는데 아무리 액체가 좋고 분말이 좋아도 그 세제는 우리 죄를 씻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경죄, 중죄, 어떤 큰 죄라도 죄를 씻는 것은 예수의 피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피와 말씀으로 내가 단장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 의로운 자가 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여기에 보니까 주의 깨끗하심과 같이 우리도 깨끗하게 되어야 된다고 했는데 무엇으로 깨끗하게 되냐면 피와 말씀으로 깨끗하게 되어야 합니다. 요한1서 2장 28절에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가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도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설교가 주의 강림하실 때 내가 서야 될 자인 줄로 믿고 이 말씀을 들어야 됩니다. 기독교가 얼마나 말씀을 붙들고 있지 못하기에 주의 강림은 그저 몇몇 기독교인들의 소리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절대적으로 여러분은 그의 강림하실 때에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 부끄럽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지금 주님 오실 징조들이 세계에서 자꾸 자꾸 일어나고 있습니다. 나는 우리 교단 목사님들이나 장로님들을 보면 아주 벽창호 같은 분들이 많이 있어 보이더라고요. 우리는 진리가 원하는 대로만 달려가야 되지요? 진리가 원하는 대로 내가 가야됩니다. 주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도 담대함을 얻어야 되고 그 앞에 부끄럽지 않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기 때문에 미혹을 주의하도록 성도들에게 가르치고, 그의 성결하심과 같이 우리도 성결하도록 준비를 시켜야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게 뭐냐면 주의 강림을 중요시해야 됩니다. 그때에 여러분은 담대하게 서기를 바랍니다. 사람도 사람 앞에 설 때에 뭔가 문제가 있으면 주저주저하는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정당당히 설 수 있도록 요한일서 2장 18절을 마음에 되새기기를 바랍니다.

      본문 8절에 보면 죄를 짓는 자마다 마귀에게 속한 자라고 하면서 “이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고 했는데 이 ‘처음’이란 단어가 ‘아르케’로 ‘태초’입니다. 

      루시퍼는 성경 어디에도 없고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 맞네요!’라고 하는 그룹이 있고, ‘성경을 배운대로 가르쳐야 된다’고 하는 그룹도 있어요. 여러분, 잘못 배운 것을 고쳐주면 감사하게 생각해야죠. 아주 저에게 돌질하는 목사도 있었고, 쌍수를 들어서 환영하는 목사도 있는데 언제나 둘이에요. 예수님의 열두제자 중에도 뭐라 했습니까?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열두 제사들에게 ‘이 중에 하나는 마귀니라’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쓰임을 받느냐가 제일 중요합니다. 그래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이 있는데 그것이 무슨 말씀인지 압니까? 무엇 때문에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합니까?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이 마귀라는 단어 자체가 ‘디아볼로스’인데 그 뜻이 뭐냐면 ‘헐뜯는다, 거짓말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의 아들 된 자들에게 미혹을 가져옵니다. 여러분, 마귀의 일을 없이하려고 주님이 오셨다고 그랬는데 마귀의 일이 뭡니까? 마귀의 일이 미혹입니다. 그래서 영생을 뺏는 거예요. 영생을 뺏는데는 뭘 가져와야 돼요? 미혹을 가져와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마귀의 하는 일을 멸하기 위하여 주님이 이 땅에 오셨다고 했습니다. 주의 백성들에게 자꾸 미혹이 오니까 먼저 예수 십자가 피로 죄 씻음을 받게 하고 이제 마지막에는 이 죄악 세상을 심판합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보면 주님이“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그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9장 28절의 말씀을 보면“그리스도께서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들리신 봐가 되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고 했죠. 첫 번째는 어디에요? 갈보리 산 언덕에서 죄인을 위하여 죽으실 때가 첫 번째고, 이제 죄인을 심판하러 오실 때가 두 번째입니다. 그래서 초림의 주님은 죄인을 위하여 오셨고, 재림의 주님은 죄인을 죽이러 오신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죄인이 영생하게 되는 일은 마귀의 하는 일을 없이 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하는 일인 미혹이 없어지면 뭐가 없어집니까? 죽음이 없어집니다. 인간이 아무리 배우고 아무리 도를 닦고 아무리 일을 많이 해도 이 영생 문제만은 인간이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마지막 세상 끝 날에 영광의 주님이 구름타고 이 땅에 오시는 날, 전 세계 인류를 미혹하던 마귀를 없이 하실 때에 그 미혹을 이긴 자들에게 안식의 복과 참 영생을 누리게 하는 것이 기독교 마지막 최후 최대의 역사인데 그것이 주의 재림과 함께 이루어지게 됩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나타나신 것은 그 마귀의 일을 없이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귀의 하는 일이 미혹인데 여기 ‘일’이라는 단어가 ‘엘곤’으로 마귀의 ‘사업’ 입니다.
      그럼 마귀가 무슨 사업을 잘해요? 어느 시장에 찾아다니면서? 성도들이 모인 시장에 와 가지고 마귀의 사업을 하는데 그 마귀의 사업인 미혹하는 그 일을 멸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면 주님이 오셔야 되는 것입니다.

       





      07-12-2022(화)

      나의 자녀들아(요한일서 2:1)

      하나님의 아들/ 벤 후퍼(Ben Hooper) 1870. 10. 13. Newport, Cocke County

      생부는 르무엘 후퍼 박사였고, 생모는 Sarah Wade였다.
      하지만 후퍼는 혼외 결혼으로 태어난 벤은 출생신고를 할 수 없었다.
      그의 엄마는 세 도시를 전전하며 아기를 데리고 이사를 다니다, 마지막 세 번째 도시 녹빌에서 엄마는 아들 벤을 감독교회가 운영하는 성 요한 고아원에 맡기게 된다.
      그 후 9살이 되자, 벤은 자기 친부 후퍼 박사에게 합법적으로 양자로 입적되었다.
      그 때부터 벤은 후퍼 라는 성을 가지게 되었고, 그 후부터 친부에게서 양육되었다.
      후에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법대에 진학해서 변호사가 되었고, 나중에는 테네시주 주지사가 되어서 2번 더 재선에 성공했으며, 상원의원으로도 2번이나 임기를 마쳤다.

      미국 테네시주 어느 작은 마을에 벤 후퍼(Ben Hooper)라는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체구가 작고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사생아였습니다.
      친구들은 놀리며 멸시하였습니다.
      12살이 되었을 때 젊은 목사가 교회에 부임해 왔습니다.
      설교에 많은 사람들이 격려 받는다는 소문을 듣고 후퍼는 교회에 몰래 몰래 가곤 했습니다.
      예배당에 늦게 들어가 뒷자리에 있다가 끝나면 빨리 빠져 나오곤 했습니다.

      몇 주가 지난 어느 주일입니다.
      후퍼가 설교의 감동에 젖어 있는 사이에 예배가 끝난 것입니다.
      할 수 없이 교인들 틈에 끼어 나오면서 목사님과 인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후퍼를 보고 말합니다.
      "누구 아들이더라?"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졌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환한 얼굴로 말합니다.
      "네가 누구 아들인지 알겠다. 아버지를 닮았기 때문에 금방 알 수 있어.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네 모습을 보면 알 수 있거든!"

      당황하며 빠져나가는 후퍼의 등을 향해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답게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세월이 흘러 벤 후퍼는 테네시주의 주지사가 되었습니다.
      후퍼는 주지사가 된 후에 "목사님을 만나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던 그 날이 바로 제가 테네시 주의 주지사가 태어난 날입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주지사에 두 번씩이나 당선되는 좋은 날을 보게 된 것입니다.

      누구나 그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고, 삶의 스타일을 알 수가 있고 교양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성 프랜시스가 처음에 은혜를 받아서 그저 주님의 일 만 하고, 옷도 해주면 가난한 사람에게 갖다주고 이렇게 되니까 자기 아버지는 크게 낙심하였습니다.

      아버지는 큰 부자요 포목상 주인이었는데 이 애가 커서 자기의 사업을 계대(繼代)할까 생각했는데 사업을 할 생각은 안하고 돌아다니면서 기도하고 주의 일만하고 도무지 자기가 하라고 하는 일은 안 한단 말입니다.

      책망해도 쓸 데 없고 때려도 쓸 데 없어요, 마지막에는 성이 나서  "이놈, 내 아들 된 것을 아주 파면해 버리겠다!"고 호적에서 빼버리고 그 때 법관에게 가서 그 말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법관도 할 수 없이  "이제는 아무개의 아들이 아니라"고 호적에서 빼도록 선언을 했습니다.

      그 때에 성 프랜시스가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자기 입었던 옷을 다 벗어서는 자기 옆에 계신 아버지에게 다 놓으면서  "아버지 이것 받으세요, 이 앞으로는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입니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탈무드에 보면 남자의 인생은 일곱 개의 단계로 나누어 변화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 한 살은 임금님, 모두 모여 왕을 섬기듯 비위를 맞추어 주고 성질을 부려도 받아준다.
      2. 두살은 돼지, 진흙 속을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한다.
      3. 열살은 어린 염소, 깔깔거리거나 떠들어대거나,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4. 열여덟 살은 말, 성장하여 자기 힘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어 한다.
      5. 결혼하면 당나귀, 가정이라고 하는 무거운 짐을 지고 뚜벅뚜벅 걸어가지 않으면 안된다.
      6. 중년은 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하여 사람들의 호감을 얻지 않으면 안된다.
      7. 노인은 원숭이, 아이들과 같이 되는데, 아무도 관심을 가져 주지 않는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를 맛보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두가지의 큰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첫째, 삶의 변화
      둘쨰, 신분의 변화

      그런데 먼저 변화되는 것은 신분의 변화입니다.
      신분의 변화는 순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삶의 변화는 점짐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치 아이가 태어나는 것은 순간적이지만 성장하는 것은 오래걸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변화된 신분은 놀라운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으로 바뀌어 졌습니다.

      이 신분의 변화는 우리에게 축복의 삶을 약속합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녀만의 특권을 누리는 것입니다.



      07-11-2022(월)

      하나님은 빛이시라(요한일서 1:5)

      하나님은 빛(φῶς)이시라는 말씀을 다양하게 해석합니다.
      대표적인 해석은 "광명, 계시, 분리"(Calvin)
      "진실, 정의"(Hutter)
      "지혜, 사랑, 영광"(Bengel) 등으로 살펴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빛'이라고 할 때 그 빛은 마치 태양의 일곱가지 색이 합하여 "빛"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모든 속성이 일치하여 보다 넓은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는 다양한 빛을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달빛" "별빛" "등불" "횃불" 등과 같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착함(19) ἀγαθωσύνη

      ἀγαθωσύνη, ης, ἡ  19

      1. 착함,  2. 올바름,  3. 너그러움

      발음 / 아가도수네(agathōsünē)
      어원 / 1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선함(롬 15:14), 양선(良善)(갈 5:22)
      신약 성경 / 4회 사용

      * 18. ἀγαθός

      ἀγαθός, ἡ, όν

      1. 선한,  2. 적합한,  3. 완전한

      발음 / 아가도스(agathŏs)
      관련 성경 / 선(마 5:45, 롬 2:7), 물건(눅 12:18,19), 선행(행 9:36), 양심(행 23:1).
      [형] 선한(마 12:34, 19:16, 눅 6:45, 골 1:10), 좋은(마 7:11, 눅 1:53, 요 7:12), 착한(마 25:21, 고후 9:8)
      신약 성경 / 102회 사용

      의로움(1343) δικαιοσύνη

      δικαιοσύνη, ης, ἡ

      1. 의,  2. 정의, 

      발음 / 디카이오수네(dikaiŏsünē)
      어원 / 134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의(마 3:15, 눅 1:75, 고후 3:9), 의로움(고전 1:30, 엡 5:9).
      [동] 의롭다(롬 3:25, 26)
      신약 성경 / 92회 사용

      * 1342. δίκαιος

      δίκαιος, αία, ον

      1. 올바른,  2. 법대로 사는,  3. 누가 1:6

      음 / 디카이오스(dikaiŏs)
      어원/ 134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의로운(마 1:19), 옳은(마 23:28, 27:19), 무죄한(마 27:24), 마땅한(빌 1:7), 공의로운(살후 1:5),
      [명] 의로운 자(마 5:45), 의인(마 9:13, 10:41, 벧전 3:12), 공의(요 7:24), 의( 골4:1)
      신약 성경 / 79회 사용

      * 1349. δίκη

      δίκη, ης, ἡ

      1. 형벌,  2. 정의의 신

      발음 / 디케(dikē)
      어원 / 1166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임
      관련 성경 / 정죄하기(행 25:15), 공의(행 28:4), 형벌 (살후 1:9, 유 1:7)
      신약 성경 / 3회 사용

      * 1166. δεικνύω

      1. 보이다,  2. 마태 4:8


      발음 / 데이크누오(dĕiknüō)
      관련 성경 / 보이다(마 8:4, 막 1:44, 딤전 6:15), 가르치다(마 16:21), 지시하다(행 10:28)
      신약 성경 / 33회 사용


      진실함(225) ἀλήθεια

      ἀλήθεια, ας, ἡ

      1. 진실성,  2. 진실 《반》ψεῦδος,  3. 일반적 진리

      발음 / 아레데이아(alēthĕia)
      어원/ 227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참(마 22:16), 사실(막 5:33), 진리(요 1:14, 4:24, 롬 2:2), 실상(요 16:7), 과연(행 4:27), 참 됨(행 26:25), 진실하심(롬 15:8), [동] 진실하다(롬 15:8), 참되다(롬 3:7)
      신약 성경 / 109회 사용


      * 227. ἀληθής
      ἀληθής, ἑς

      1. 진실한,  2. 참된,  3. 요한 4:18

      발음 / 아레데스(alēthēs)
      어원/ [부정불변사]과 299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참된(요 8:13, 벧후 2:22), 참(요 5:32)
      신약 성경 / 26회 사용

      * 2990. λανθάνω

      1. 숨어 있다,  2. 눈에 띄지 않다,  3. 마가 7:24

      발음 / 란다노(lanthanō)
      관련 성경 / 숨기다(막 7:24, 눅 8:47), 알지 못하다(행 26:26), 잊다(벧후 3:5, 8).
      [부] 부지중에(히 13:2)
      신약 성경 / 6회 사용



      빛(포스) 5457. φῶς

      φῶς, φωτός, τό

      1. 빛,  2. 마태 17:2,  3. 빛을 내는 물건

      발음 / 포스(phōs)
      어원 / φάω ‘반짝이다’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빛(마 4:16, 눅 8:16, 딤전 6:16), 불(막 14: 54), 불빛(눅 22:56), 등불(요 5:35, 행 16:29), 광채 (행 12:7), 광명(고후 11:14)
      신약 성경 / 73회 사용

      등불빛(루크노스) 3088. λύχνος

      λύχνος, ου, ὁ

      1. 등,  2. 누가 11:36, 3. 마태 6:22

      발음 / 루크노스(lüchnŏs)
      어원/ 3022의 어간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등불(마 5:15, 눅 11:33, 벧후 1:19, 계 21:23)
      신약 성경 / 14회 사용

      * 3022. λευκός, ἡ, όν

      1. 빛나는,  2. 흰,  3. 마태 5:36

      발음 / 류코스(lĕukŏs)
      어원 / λύκη ‘빛나다’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흰(마 5:36, 요 20:12, 계 1:14), 백마(계 19:11)
      신약 성경 / 25회 사용

      횃불(람파스). 2985 λαμπάς

      λαμπάς, άδος, ἡ

      1. 횃불,  2. 등

      발음 / 람파스(lampas)
      어원 / 298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등(마 25:1,4, 요 18:3), 등불(행 20:8, 계 4:5), 횃불(계 8:10)
      신약 성경 / 9회 사용

      * 2989. λάμπω

      1. 바치다,  2. 빛을 발하다,  3. 마태 5:16

      발음 / 람포(lampō)
      관련 성경 / 비치다(마 5:15, 고후 4:6), 비치게 하다(마 5:16), 빛나다(마 17:2, 행 12:7)
      신약 성경 / 7회 사용



      07-08-2022(금)

      경건한 자(베드로후서 2:9)

      2152. 경건한. εὐσεβής
      εὐσεβής, ές


      1. 경건한,  2. 경의심이 강한,  3. 헌신적인
      발음 / 유세베스(ĕusĕbēs)
      어원 / 2095와 4576의 어간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경건한(행 10:2, 22:12, 벧후 2:9)
    • 신약 성경 / 3회 사용
    • * 2095. 잘, εὖ

      1. 잘,  2. 좋게,  3. εὖ ποιεῖν: 좋게 행하다
      발음/ 유(ĕu)
      관련 성경 / 잘, 좋게, 다행히(마 25:21, 눅 19:17, 행 15:29, 엡 6:3)
      신약 성경 / 6회 사용

      * 4576. 경의를 표하다, σέβομαι

      1. 경의를 표하다,  2. 예배한다,  3. 숭배한다


      발음 / 세보마이(sĕbŏmai)
      관련 성경 / 경배하다(마 15:9, 막 7:7), 경건하다(행 13: 43, 17:4, 17), 경외하다(행 18:7, 13), 위하다(행 19:27)
      신약 성경 / 10회 사용

      94. 올바르지 못한, ἄδικος

      1. 올바르지 못한,  2. 불공평한,  3. 부정직한
      발음 / 아디코스(adikōs)
      어원/ 1[부정불변사]과 134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불의한(마 5:45, 벧후 2:9). [명] 악인(행 24:15)
      신약 성경 / 12회 사용


      *1349. 형벌, 정의의 신. δίκη

      1. 형벌,  2. 정의의 신, 
      발음 / 디케(dikē)
      어원/ 1166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임
      관련 성경 / 정죄하기(행 25:15), 공의(행 28:4), 형벌 (살후 1:9, 유 1:7)
      신약 성경 / 3회 사용

      * 1166. 보이다. δεικνύω

      1. 보이다,  2. 보이다,  3. 마태 4:8
      발음 / 다이크누오(dĕiknüō)
      관련 성경 / 보이다(마 8:4, 막 1:44, 딤전 6:15), 가르치다(마 16:21), 지시하다(행 10:28)
      신약 성경 / 33회 사용


      미국 플로리다주에 사는 한 보물사냥꾼 가족이 대서양 해저에 가라앉은 스페인 배에서 100만 달러(약 11억 6700만원)어치 보물을 인양했다고 영국 가디언이 27일(현지 시각)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보물사냥꾼인 슈미트 일가는 대서양에서 1715년에 침몰한 스페인 배에서 최근 금화 51개와 12m 길이 금줄을 건져냈다. 발견된 금화는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를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은 소수뿐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인양을 지휘한 브렌트 브리즈번은 보물을 찾은 장소가 300년 전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 스페인으로 향하던 배 11척이 플로리다 해안에서 허리케인을 만나 침몰한 곳으로, 마이애미에서 북쪽으로 약 210km 떨어진 해안 앞바다라고 밝혔다.

      침몰한 함대는 400만 달러(약 46억 6600만원) 상당의 화물을 싣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브리즈번은 말했다.
      그는 또 2010년 유명한 보물사냥꾼 멜 피셔로부터 이 지점에 대한 수색권을 구매했고, 이후 슈미트 일가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과 하청 계약을 체결했다고 설명했다.

      미국 연방법과 플로리다주 법률에 따라 플로리다주는 주 박물관에 전시하기 위해 보물의 20%를 가져간다.
      나머지는 계약에 따라 브리즈번의 회사와 슈미트 일가가 나눠 갖게 된다.



      “경건한 자에게 주시는 복”

      경건이란 성결, 기도, 예배, 봉사, 금식, 구제 등 우리 신앙생활의 전반적인 행함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믿음에는 반드시 행함이 따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죽은 믿음입니다.

      경건이란 말이 성경에서 구약에서 9, 신약에서 48 구절로 나타납니다.
      (한글개역 성경 인터넷 검색 '경건')

      경건은 우리에게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얼마나 말씀대로 순종하느냐?
      얼마나 회개하여 세속에 물들지 않느냐?
      얼마나 이웃을 사랑하며 돌보았느냐?
      얼마나 하나님 앞에 기도하느냐?
      얼마나 주를 위해 충성했느냐?
      이런 내면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참된 신앙이 경건입니다.
      성경은 이 경건한 자에게 주시는 복이 큽니다.

      경건한 자에게 어떤 복을 주실까요?

      1. 보호해 주십니다.

      벧후 2:9에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그랬습니다. 이 세상에 시험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경건한 자는 주님이 지켜주십니다. 시편 34:7을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가 지키는데 누가 해할 수 있겠습니까?

      다니엘이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니까 하나님께서 악한 원수들과 사자굴에서도 지켜 주셨습니다.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게 해주십니다. 어느 시골길을 가던 버스가 핸들고장으로 고개에서 굴렀습니다. 차는 이리 받고 저리 받고 박살이 나고 많은 사람들이 다쳤습니다. 그런데 어느 성도는 그렇게 평안하기만 하더랍니다. 그리고 아무 다친 곳이 없이 나오게 되엇습니다. 누가 지켜주신 것일까요? 하나님을 잘 경외하면 하나님이 지켜 주십니다.

      2. 높여주십니다.

      잠 8:17에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높이니 하나님께서 왜 높이지 않으시겠습니까? 요셉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높이니 하나님께서도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높여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낮고 낮게 오셨지만 그토록 높이 되심도 하나님을 높였기 때문입니다. 경건의 본을 보여주셨어요. 그래서 딤전3:16에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했습니다. 이것이 경건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이고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써서 경건에 이르기를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3. 성령을 주십니다.

      예수 믿는 자에게 성령이 계십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하심은 경건한 자에게 있습니다.
      눅 2:25에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했습니다.
      날마다 주님을 기다리며 성전에서 기도하던 시므온에게 성령이 충만하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성령 충만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초대교회 성도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날마다 기도하고 찬송하며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이 성령의 불이 천하각국에서 온 경건한 사람들에게 붙었습니다. 경건이 그 충만한 은혜의 기초였습니다.

      4. 지도해 주십니다.

      경건한 요셉에게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경건한 마리아에게도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알려 주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백부장 고넬료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다가 천사가 나타나 욥바에 있는 시몬을 청하라고 해서 청하여 예수 믿게 되고 예배하니 성령이 임했습니다.
      이처럼 경건한 자에게 성령의 지도와 인도가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보혜사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곁에 오셔서 지도해주십니다.
      우리 입은 하나님께 묻고 우리 귀는 하나님을 향해 쫑긋해 있어야 합니다.
      이 복은 경건하게 기도하는 자가 받는 복입니다.

      5. 다스려 주십니다.

      백부장 고넬료를 보면 많은 것을 깨닫게 됩니다. 행 10:7에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종졸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그랬는데 한편 '종졸'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트라티오테스'는 '군사'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많은 것을 깨닫습니다.

      고넬료가 자신도 가족도 하인들도 군사들도 다 이방인인데 어떻게 온 가족을 그렇게 복음화시키고 하인들과 군인들까지 그렇게 하나님 경외하는 사람들을 만들었는가 하는 것은 참으로 감동적인 사실입니다. 신앙이란 강제로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바로 경건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입니다. 기도하고 사랑함에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 다스려 주십니다. 기도해 보세요. 가족이 따라옵니다. 부하들이 순종합니다. 하인들이 섬깁니다. 우리에게 기도와 사랑이라는 경건이 있을 때 다스려지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사랑만 가지고도 가능합니다. 기도만 가지고도 가능합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를 가지면 다스려지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6. 범사에 유익합니다.

      오늘 읽은 딤전4:8에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 잘 경외하면 이 땅에서도 천대에 이르기까지 복을 주십니다.
      창세기 5장을 보면 경건한 아담의 후예 셋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900세 이상을 건강하게 살았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장수한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서 경건함도 그 중요한 방법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약속하신 여인의 후손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날마다 메시아를 갈망했고 여인의 후손으로 오는 자손 낳는 일에 힘썼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완전한 메시아사상입니다. 메시아가 오면 우리의 죄와 고난을 대신 담당하신다는 것은 그들의 상식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메시아의 고난을 묵상하고 그 고난에 동참함을 기뻐할 것입니다.

      이 주님의 고난의 복음이 놀라운 치료와 강건의 복이 됩니다. 주님이 고통당하심으로 나는 나음을 입었다는 믿음을 가지면 치료가 임합니다. 치료의 광선은 이 치료의 복음을 믿을 때 주어집니다. 진정 경건한 사람은 일반 고통이라도 주님이 주신 고통이라면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 고통을 주님을 생각하며 조용히 느낍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놀라운 치료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7. 영원히 기억하십니다.

      딤전 6:18-19에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했습니다. 경건이 내세에까지 유익하다는 말씀입니다. 막10:30에 예수님께서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딤후 3:12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했어요. 세상 사람들과 같이 살면 그들에게 환영을 받겠지만 그렇게 살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세속화된 종교에 매력 갖지 마세요. 우리는 그렇게 살지 않기 위해 출애굽한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7)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를 위해 세상에 오셔서 우리 믿음의 본이 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경건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우리 모두 본을 보여주신 주님처럼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참으로 경건한 성도가 되어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받고 하늘과 땅의 온갖 아름다운 복으로 가득하시기 바랍니다.



      자기 존중, 자기 사랑(Self-esteem) - 자존심(自尊心) Paide

      Self-esteem을 한국말로 번역하면 자기존중, 혹은 자기 사랑 그렇게 될 겁니다.
      사람들은 어려서 부터 이 셀프 이스팀이 높아야 한다.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이유는 self-esteem이 낮아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 반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자기 사랑과 자기 존중이 너무도 커서 모든 죄악의 원인이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현상은 종말이 가까와 올수록 더욱 강하게 나타날 것이라고 합니다.
      요즘 사회 현상들을 보십시요.
      자기 사랑, 자기 존중이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극단적 이기주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오늘 2절 말씀에 보시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이런 내용들을 읽어보면 오늘날 사회현상들을 잘 묘사해서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요즘 사람들 가만 보세요!
      다른 사람들은 다 상관없다!
      자기만 좋으면 된다!는 식으로 살아가지 않습니까?
       
      이것은 이웃을 사랑하라!
      섬김의 종으로 살아라!
      주님의 말씀과는 전혀 상반되는 가치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도 그렇게 자기사랑에 도취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여러분 기억하십시요.
      자기사랑은 결국은 자기파멸입니다.
      자기 사랑에 도취되어 멸망한 존재가 무엇입니까?
      바로 사탄입니다.
      참된 자기사랑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안에 충만하게 고일때 참된 자기사랑과 이웃사랑이 함께 실철될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은 없고 자기 사랑에 빠져서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는 겁니다.
      교회를 다닌다 하는 사람들 중에도 간혹 그런 사람들을 보게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하나님 면전에서도 싸우고 다투고 그러는 사람들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맘대로 되지 않으면 주님의 몸되신 교회를 훼방하는 불량배들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안에 있으면 교회는 절대로 성장할수 없구요.
      하나님을 뜻을 이루어 드릴수도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알수있다 그럽니까?
      오늘 5절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서서 네가 돌아서라”

      경건의 모양은 있어요. 겉으로는 예배도 드리구요. 찬송도 하구요. 기도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경건의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 자들은 결국 어떻게 된다 그럽니까?
      6절에 보시면, 욕심에 이끌린다 그러구요.
      7절에 보시면,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한다 그랬구요.
      8절에도 보시면,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이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받은 자들이다 그럽니다.
       
      경건의 능력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성품이 삶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성령의 열매들이 관계 가운데 드러나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삶 속에서 날마다 경건의 능력이 뭍어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진리안에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것이 참된 하나님 사랑이요. 참된 믿음의 삶입니다.


      07-07-2022(목)

      신의 성품(베드로후서 1:4)

      (도입 이야기)

      매우 추운날 새벽 3시에 한 선교사 지망생이 면접시험을 치르러 선교국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8시가 되어서야 시험관이 도착했고, 그 시험관은 아주 쉬운 문제를 내었습니다.
      영어 문제로 “제빵업자(Baker)라는 단어를 써보시오.”,
      수학 문제로는 “2의 두배는 얼마요?”
      그는 초등학생 수준의 문제같은 것을 내어 주는 것이 이해가 안갔지만 Baker라고 쓰고, 또 2의 두배는 4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시험관은“참 잘하셨습니다.
      합격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이 시험관은 선교위원회에서 그 선교사 지망생을 극진히 칭찬하면서 그가 선교사의 자격을 너무 잘 갖추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첫째, 극기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추운날 새벽 3시에 오라고 했는데 아무런 불평이 없었습니다.

      둘째, 시간을 엄수했습니다.

      셋째, 다섯시간을 기다리는 인내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넷째, 어린이 시험문제로 시험을 보는데도 기분 나쁜 표정 한 번 짓지 않고 겸손하게 시험을 치르고 합격했습니다.

      우리가 요구하는 선교사로서의 자격요건을 다 갖추었으므로 기꺼이 선교사로 파송할 것을 추천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기뻐 사용하시는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오늘 사회와 교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바보스러워 보일지 몰라도 돌아서서는 모두가 마음속 깊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존경하게 되는 사람이 바로 이런 이타적인 사람, 인내의 사람, 진실된 사람, 겸손한 사람입니다.

      밀레의 ‘만종’은 현재 프랑스 파리에 있는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되어있다.
      ‘만종’은 미국인 토마스 애플턴 (Thomas G. Appleton)이 밀레에게 의뢰하여 1857년부터 1859년까지 2년간 제작된 작품이다.
      그 당시 밀레 나이가 45세였다.
      하지만 작품을 부탁했던 토마스는 그것을 찾아가지 않았다.
      당시 너무나 궁핍했던 밀레는 이 작품을 단돈 600프랑, 지금으로 약 90유로, 한화로 약 12만원이라는 헐값에 팔고 말았다.
      밀레의 ‘만종’은 그 후에 미국미술협회에 팔렸다가 프랑스의 백화점 재벌 알프레드 쇼사르(Alfred Chauchard)가 프랑스의 자존심을 걸고 80만 프랑이라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다시 사들여 1891년 1월 드디어 프랑스로 돌아왔다.
      처음엔 누구도 쳐다보지 않던 이 작품은 보면 볼수록 묘한 아우라가 느껴지는 그림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받는 명화가 되었다.

      그런데 밀레의 만종은 그림에서 보여주는 평온함과는 달리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은 매우 격동의 세월이었다.
      18세기 후반에 시작된 산업혁명은 유럽 전역을 산업화로 변화시키고 있었고 자본가는 더욱 더 부를 축적하게 되었고 노동자는 점점 더 피폐한 삶을 살게 되어 사회주의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또한 7월 혁명과 2월 혁명을 겪은 요동치는 시대였다.
      그런 시대적인 상황에서 완성된 이 작품에는 작가 밀레가 바라보는 현실에 대한 자신의 복잡한 마음이 담겨져 있는듯하다.

      일반적으로 ‘밀레’라고 알려진 그의 정식이름은 장-프랑수아 밀레(Jean-Francois Millet)이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자란 밀레는 어릴 적 목사님으로 부터 신앙과 문학, 라틴어를 배웠다.
      그는 19살에 그림을 배우기 시작하여 후에 ‘바르비종파’(The Barbizon School)를 만들어 활동했다.
      이 화파는 프랑스 파리의 근교 ‘바르비종’에 모여 전통적인 화풍의 형식을 따르지 않고 시골의 농부들을 그리는 화가들의 모임이다.

      작품, ‘만종’(晩鍾)의 원제는 ‘랑젤뤼스(L’Angelus’)인데 카톨릭의 ‘삼종기도’ 즉 아침, 점심, 저녁 하루 세 번 드리는 기도를 의미한다.
      만종은 저녁에 드리는 기도로 하루 일과를 마친 부부가 멀리 교회에서 들려오는 종소리를 들으며 기도하는 모습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작품은 가로가 55.5cm이고, 세로가 66cm 그리 크지 작품인지만 그 울림은 어떤 작품보다 크게 울려 많은 사람들에게 평온함과 위로를 전해준다.


      첫째, 믿음(信)

      믿음은 '신뢰, 확신, 확실성'
      어떤 대상이나 사실이나 진리에 대해서 가지는 확신이요, 나아가 다른 사람이 그 사람에 대해서 '신뢰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둘째, 덕(德)

      업적이나 타고난 재능, 또는 '탁월, 뛰어남'
      한자로 덕은 생각이 크고 넓은 사람, 다른 사람이나 일이나 사물에 대해서 크고 넓은 생각을 가져 품어주는 것을 뜻합니다. 

      셋째, 지식(智識)

      지식의 기본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넷째, 절제(節制)

      ‘강한, 지배하는, 억누르는, 자제하는’에서 유래했으며, 자기 자신이나 어떤 것에 대한 '지배권'을 의미합니다.
      즉 절제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상대를 고려하고, 그리고 다음을 생각하여 스스로를 억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죄인들에 대하여 그때그때 하고픈 대로, 즉 하나님의 대쪽 같은 성품과 기준대로 했더라면 죄인들과 이 세상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다섯째, 인내(忍耐)

      절제가 외적인 일이라면 인내는 내적인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참고 또 참으시는 분입니다. 

      여섯째, 경건(敬虔)

      하나님의 본질적인 신성, 거룩, 구별, 신비함 등을 뜻하는 말입니다. 

      일곱째, 형제우애(兄弟友愛)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입니다. 

      여덟째, 사랑(愛)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이지요. 


      ‘스티븐 코비` 박사가 지은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왜 이 책이 나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서론 부분에 나옵니다. 

      미국 독립 기념 200주년을 앞두고 스티븐 코비 박사를 비롯한 일단의 컨설턴트 그룹이 미국의 장래를 위해 이색적인 연구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지난 200년 동안 성공을 다룬 연설, 논문, 책자, 신문보도 등을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성공이 무엇인지를 연구했습니다.
      수년에 걸친 조사와 연구 끝에 그들은 주목할 만한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그것은 미국의 건국 이후 초기 150년 동안에는 성공과 관련해 성품윤리(Character Ethics)가 강조 되었으나, 이후 50년 동안에는 성격윤리(Personality Ethics)가 강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성품윤리>는 성공을 위해서는 기본 원칙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그 원칙은 언행일치, 겸손, 충성, 절제, 용기, 정의, 인내, 근면, 소박, 수수함, 황금률과 같은 덕목들입니다.

      이러한 성품윤리의 원칙에 근거해서 성공을 거둔 대표적인 인물이자 그의 자서전을 통하여 이것을 확실하게 남겨놓은 사람은 미국 건국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인 ’벤자민 프랭클린‘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성공을 가져오는 기본 조건이 외적 성격 중심의 사고(Personality Ethics)로 바뀌었습니다.
      즉 내적인 성품보다는 대인관계, 대중적인 이미지, 태도와 행동, 기법과 기술, 연설법, 차림새 등이 성공에 더 크게 작용한다고 본 것입니다. 

      이 연구 끝에 코비 박사 등은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라는 프로그램 개발에 나섰고, 후에 같은 제목으로 책을 출판했습니다.

      코비 박사가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는 건강한 미국을 위해서는 본래의 성품윤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이 아버지가 아끼던 나무를 잘라놓고 그것을 하인에게 떠넘길 수도 있었으나 정직하게 잘못을 고백했다든지, 미국의 16대 대통령인 링컨이 소년 시절 빌려온 책에 문제가 생겼을 때 수십 리 길을 걸어가 용서를 빌었다든지 하는 얘기가 성품윤리를 대변하는 일화들인데, 코비 박사 등은 이러한 성품윤리가 회복되면 건강한 미국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면서 윤리라기보다는 일종의 처세술에 가까운 성격윤리가 활개 치는 시대에도 성품윤리 원칙에 따라 살면 성공한다는 한 사례를 소개했습니다.

      그는 바로 J. P. 모건(John Pierpont Morgan : 1837,4,17~1913,3,31)입니다.
      그는 미국과 세계 금융의 중심지인 뉴욕 맨해튼의 월스트리트(Wall Street)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자 독보적인 성공을 거둔 사람입니다.
      그가 활동할 당시 월스트리트는 시장이 불완전한데다가 투기꾼들의 농간으로 크고 작은 금융사고가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모건은 그 나름의 사업 윤리를 통하여 마침내 성공했을 뿐 아니라, 월스트리트의 문화를 바꾸었습니다. 

      그의 성공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성공의 요인이 무엇이냐는 것이죠. 이에 대한 그의 대답은 “경제적 신용이 아니라 성품의 신용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모건은 “신용이 없는 사람과는 그가 비록 예수님 나라에서 발행한 채권을 내놓아도 거래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즉 성품, 사람의 내면적인 가치가 성공의 열쇠였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좀 더 구체화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표현했습니다.
      무뚝뚝하고 융통성이 없어 보이는 ‘철물점 주인’같은 사람들이나 그런 지도자들보다, 멋진 옷을 빼입고 세련된 말투에 친절한 웃음을 짓는 ‘보석상’ 같은 사람들이 점점 더 활개치고 있지만, 진정한 성공을 거두는 것은 겉으로는 무뚝뚝하게 보이나 진실하고 정직하고 신실한 사람이라는 것이고, 또 이런 사람들이 성공하는 사회라야 건강한 사회라는 것입니다.

      “신의 성품에 참예한다”
      하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참예한다”는 말은 오늘 본문에 코이노노스(κοινωνος)라고 되어 있는데요.
      이 말은 ‘코이노스(κοινος)와 코이노니아’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코이노스’는 형용사로서 '공통의(common)'를 의미하며, 명사로서는 '동료, 동역자, 파트너', 그리고 어떤 것의 '공유자'를 의미합니다.
      이 말이 상업용어로 쓰일 때는 ‘동업자, 사업 파트너’라는 뜻입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 베드로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에 대해 언급할 때 이 말이 쓰였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신앙적인 문제와 연관이 되어서 ‘그 신과의 연합’, 나아가 ‘같은 신에게 예배하고 제사하는 사람들끼리의 연합’을 뜻하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마태복음 23:30, 고린도전서 10:18에 나타납니다. 

      특히 고전 10:20에서는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즉 우상 제사와 연관되는 것은 우상과 귀신들과의 친교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용어가 되어 ‘피로 맺은 혈맹’을 뜻하는 말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신의 성품에 참예한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과 연합한 자가 되었다는 것과 성도들끼리도 하나로 연합되었다는 의미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과의 연합이라는 것이 단순히 법적인 것이나 의미상의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연합된 자에게는 그 증거가 나타나는데, 그것이 곧 하나님의 성품을 나누어 가지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죄와 죄에 대한 심판에서 구원받은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은혜로 이 땅의 것 몇 가지 얻고 만족하는데서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장차 갈 천국을 보장받은 것만도 아닙니다. 정말 감당할 수 없는 크고 놀라운 복은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속성을 주님으로부터 받아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며 살아갈 수 있는 너무나 특별한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이죠.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읽지는 않았습니다만, 3절에 보면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4절에 우리가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은 하나님의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0절에서는 “그러므로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하지만, 기껏해야 육신의 부모를 닮는 것이 전부일 수 있는 우리가 주님을 닮은 사람,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아버지도 그렇게 닮는다면, 그리스도의 보혈로 나의 아버지가 되신 하나님, 아니 애초부터, 원래부터 나의 진정한 아버지이신 하나님, 바로 그 아버지를 내가 닮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여러분도 놀랍고 또 감사하지 않으십니까? 우리가 육신의 아버지를 닮는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를 닮을 수 있게 되었다니까요!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 하나님의 성품을 닮을 수 있는 자, 하나님의 성품을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하나님을 닮은 성도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하나님을 닮을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가 비평을 잘하면 자녀들은 부정적인 성격을 닮게 된다. 악의와 오기에 찬 부모의 모습을 자주 보며 자란 자녀는 난폭한 성품을 배운다. 그러나 자주 격려를 받으며 성장하는 자녀들은 자신감이 넘친다. 칭찬을 받으며 자란 자녀는 감사할 줄 아는 성품을 배운다. 자녀는 부모가 하는 대로 닮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는 아이들에게 좋은 본을 보여주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어느 분의 글입니다. 이 글처럼 자녀가 그 부모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부모를 닮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똑 같은 원리가 하나님 아버지와 여러분 사이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와 더욱 가까워져서 하나님을 더 많이 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대로 하나님의 믿음을 닮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에 대한 전부를 믿으십시오. 그리하여 믿음의 비밀과 믿음의 능력을 다지시기 바랍니다. 나아가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신뢰는 받는 사람, 보증수표와 같은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덕을 닮으시기 바랍니다. 용기 있는 사람, 칭찬받으며 존경받는 사람, 생각과 마음이 넓은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지식 있는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을 아는 지식, 구원 등 하나님의 계획과 하시는 일에 대한 지식, 이 세상과 인간에 대한 지식과 그리고 그 지식에서 나오는 이해와 사랑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절제하십시오. 성경이 기록될 당시 이 말은 성적 문제에 관련된 참을성, 감각적인 충동에 대한 통제력, 그리고 음식과 음주의 향락을 삼가는 것에 관한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거룩한 성령님과 주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조절하시기 바랍니다. 

      인내하십시오. 어떤 경우에도, 지독한 괴로움과 고통의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확고하고 변치 마시기 바랍니다. 

      경건하십시오. 하나님을 경외하고 매 순간, 모든 장소에서 하나님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형제 자매를 사랑하십시오.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시오. 성도들과 나아가 다른 사람들을 한 배에서 난 친형제자매처럼, 한 핏줄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랑하십시오. 십자가로 대변하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받고 체험한 자로서, 희생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저는 설교를 시작하면서 <성격윤리>와 <성품윤리>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 시대는 그의 내적인 자질, 인격, 성품이 어떠하냐 하는 것보다, 대인관계와 처세술이 뛰어난 사람이 성공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본 대로 미국의 장래를 위하여 성품, 인격, 그 사람의 내적인 조건이 성공의 열쇠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처럼, 오늘 성경이 말하는 것도 그와 같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얼마나 닮았는가?” 즉, 그의 내적인 자질과 성품과 인격이 하나님 아버지를 닮은 정도가 곧 성공의 척도라는 것입니다.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 하나님의 속성을 그대로 자신의 내적인 모양새가 됨으로서, 하나님과 세상에서 진정한 성공자가 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에게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라고 권고하시며 이 일에 더욱 힘쓸 것을 요구하십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베드로후서 1:5-7)

      성경은 하나님이 빛이시며 우리도 빛이라고 말합니다(마 5:14, 엡 5:8).
      하나님이 거룩이시므로 우리도 거룩하라고 명합니다.
      다른 곳에서는 평강의 하나님이 지금 친히 우리를 거룩케 하고 계신다고 말합니다(히 12:9-10, 살전 5:23, 히 2:11).
      또한 하나님만 의이신데, 성경은 우리도 위치적으로나 성분적으로 하나님의 의가 될 수 있음을 계시합니다(롬 4:25, 고후 5:21, 마 5:20, 계 19:7-8).

      성품의 변화는 모든 성도에게 숙제처럼 여겨집니다.
      경험과 능력이 많아도 성품이 따라주지 못하면 온전치 못합니다.
      신의 성품을 닮아 가는데 유익한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일까요?

      1.신의 성품(Divine Nature)

      성도를 신의 성품에 참여토록 부르십니다(벧후1:4).
      이는 하나님처럼 전지전능한 존재가 되게 하신다거나, 내 기질과 내 성격보다 조금 더 나은 성품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죄로 인해 무너진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것을 말하고, 인간이 아닌 하나님께 기원을 둔 구별되고 거룩한 성품(Divine Nature)으로 변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2.신기한 능력(Divine Power)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Divine Power) 때문이라고 가르칩니다(벧후 1:3).
      이는 하나님을 삶에서 인격적으로 깊이 알아갈 때 주어지며(벧후 1:3,요 15:7),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주어집니다(엡 5:18b).
      곧,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고, 그 다스리심에 온전히 따를 때 신기한 능력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3.신령한 삶(Divine Life)

      성도는 경건에 속한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고(벧후 1:3), 신령한 집이요, 거룩한 제사장으로 살게 됩니다(벧전 2:5).
      여기서 신령함이란 하나님의 영이 동행하시는 삶입니다.
      신령한 삶을 사는 성도는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Fruit of Holy Spirit)를 맺으며(갈 5:22-23;사랑,희락,화평,오래참음,자비,양선,충성,온유,절제), 늘 하나님과 동행해야만 잘 맺을 수 있습니다(요 15:5). 

      말씀 적용  

      1.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라
         변화의 원동력은 나 자신의 경건과 훈련이 아닌 성령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2. 성령을 위하여 심으라
         성령으로 심기를 힘써야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신다는 영적 진리를 기억해야 합니다(갈6:8)

      3. 계속 자라가라
         실패했을지라도, 더딜지라도, 포기하지 않으면 거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갈6:9).

       신의 성품(Divine Nature)을 향하는 것은 성령의 열매(Fruit of Holy Spirit)다. 신기한 능력(Divine Power)으로, 신령한 삶(Divine Life)을 살아가라.


      구약의 성막 구조

      성막문(청색, 자색, 홍색, 흰색) -  번제단 - 물두멍 - 성소 - 지성소
      구원의 문(예수) 구원의 복음 - 번제단(제물로 태운다) 회개의 복음 - 물두멍(




      07-06-2022(수)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베드로전서 5:3)

      (도입 이야기)
      박태준박사의 성가대 지휘자
      김성섭장로님의 주일학교 부장

      장로(πρεσβύτερος) 4245
      πρεσβύτερος, α, ον

      1. 나이가 많은,  2. 옛 사람들,  3. 장로

      발음 / 프레스부테로스(prĕsbütĕ- rŏs)
      관련 성경 / 장로(마 15:2, 막 14:43, 벧전 5:1), 어른(요 8:9), 늙은이(행 2:17, 딤전 5:1), 늙은 여자(딤전 5:2), 선진(히 11:2)
      신약 성경 / 66회 사용


      본이 되라”(투포스) 5179. τύπος, ου, ὁ 

      1. 찍힌 자라,  2. 모형,  3. 형성된 것
      발음 / 투포스(tüpŏs)
      어원 / 518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자국(요 20:25), 형상(행 7:43), 양식(행 7: 44), 모형(롬 5:14), 본(롬 6:17, 살후 3:9, 벧전 5:3), 본보기(고전 10:6, 11)
      신약 성경 / 15회 사용

      본이 되라투포스라는 단어로 "똑같은 모양을 나오게 하는 주물” 이란 뜻





      1941년 1월 6일
      에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연두교서에서 발표한 4가지 자유
      1. 언론 및 표현의 자유(Freedom of Speech and Expression)
      2. 종교의 자유(Freedom of Worship)
      3. 결핍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Want)
      4. 공포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Fear)


      07-05-2022(화)

      영광의 영(베드로전서 4:14)

      영광(榮光)

      독사(dŏxa) δόξα / 광명, 영광, 광채, 위엄
      - 도케오(dŏkĕō ) δοκέω : 생각하다, 알다


      마태복음 5:3-10(팔복)

      3. 심령이 가난한 자  - 천국이 저희 것
      4. 애통하는 자 - 위로를 받을 것
      5. 온유한 자 -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 배부를 것
      7. 긍휼히 여기는 자 -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
      8. 마음이 청결한 자 - 하나님을 볼 것
      9. 화평케 하는 자 -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
      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 - 천국이 저희 것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 현재형(3절, 10절)
      다른 여섯 가지 복은 모두 미래형(4절, 5절, 6절, 7절, 8절, 9절)


      육의 생각을 영의 생각으로 돌리기

      “성령님은 육신의 연약함을 입고 있는 우리를 잘 아십니다. 죄된 본성에 기반을 둔 자아로부터 파생되는 부정적 생각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아에서 나오는 영의 생각으로 교체해 달라고 성령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롬 8:5~6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5. For those who are according to the flesh set their minds on the things of the flesh, but those who are according to the Spirit, the things of the Spirit.
      6. For the mind set on the flesh is death, but the mind set on the Spirit is life and peace, (NASB)

      죄책감, 우울감, 소외감 등의 느낌은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느낌에 영향을 가장 크게 미치는 것은 그 사람의 세계관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슬플 일이 아닌데 어떤 사람에게는 슬픈 일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각 사람의 세계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관은 생각의 경향을 갖고 오는 생각의 집합(mind set)입니다.

      거듭난 이후에도 죄된 본성에 기반을 둔 자아와 그리스도 예수에 기반한 새로운 자아 사이에 계속된 전쟁이 있습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생각하는 방식을 바꿔야만 합니다.
      생각하는 방식이 느낌을 결정하고, 그 느낌이 태도와 행동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울하다고 느끼면, 우울하다고 느끼게 하는 생각이 그 느낌 뒤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우울감을 쫓아내고 싶다면, 이 외에도 내 생각과 태도와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감정을 몰아내고 싶다면 감정과 싸울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 그에 합당한 영의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을 언급한 것은 우리가 더 나은 생각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이성 영역에 생각을 던집니다.
      그 생각은 보통 육신의 갈망을 채우는 유혹(temptation)입니다.
      하나님도 영을 통해 생각을 던집니다.
      그 생각은 영의 갈망을 채우는 영감(inspiration)입니다.
      우리가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믿음으로 올바른 생각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결국 올바른 생각을 선택하기 위해 말씀이 필요한 것입니다)

      엡 6:11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Put on the full armor of God so that you can take your stand against the [devil]’s [schemes].

      바울은 에베소서를 통해 마귀의 간계에 대해 얘기합니다.
      간계의 헬라어 원어는 “메쏘데이아”입니다.
      영어 단어 method의 근원입니다.
      이 메쏘데이아의 어근은 “호도스”로 “길(way, road)”을 뜻합니다.
      간계의 영어 번역은 생각/계획/책략을 뜻하는 scheme인데, 이 단어는 생각의 덩어리와 관련이 있습니다.

      마귀 또한 사람의 잠재의식 영역 가운데 육신의 생각을 불러일으킬 생각의 덩어리를 확보하고자 애를 쓰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생각의 덩어리는 방향성을 지니기 때문에 그 어근에서 보는 것처럼 “길(way)”과도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마귀의 헬라어 원어는 “디아볼로스”입니다. “디아”는 “~를 통해서”란 의미이고, “볼로”는 “던지다(to throw)”란 의미입니다. 원어적으로 보면 마귀는 어떤 목표물을 향해 벌어진 틈을 통해 참소를 던지는 자입니다.

      이런 원어적 의미를 갖고 “마귀의 간계”를 보면, 약한 틈을 통해 육신의 생각을 던져 고착화시켜 길을 냄으로 원활하게 사람을 조정하려는 것이 곧 마귀의 간계인 것입니다. 두려움, 슬픔, 염려, 걱정의 느낌은 모두 생각에서 옵니다. 이 감정을 이기려면 이런 감정을 생산하도록 부추기는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굴복시켜야 합니다.

      만일 TV를 볼 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만한 프로그램이 나왔다면 그 프로그램에 분개하며 부정적 영향과 싸우려 하지 말고 좋은 채널로 돌리면 됩니다. 이와 동일하게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키는 생각이 들어왔다면 그 부정적 생각과 대항하여 싸우려 하지 말고 진리에 근거한 좋은 생각으로 돌려야 합니다.

      바울은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을 언급합니다. 이는 육신의 생각(mind set)으로 인해 부정적 영향을 받을 때 이 생각과 싸울 것이 아니라 영의 생각(mind set)으로 돌릴 수 있음을 내포합니다. 하나님은 내주하시는 영을 통해 이것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선택하고 성령님은 도우십니다. 할렐루야!

      육신의 생각은 사망입니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어느 누가 사망을 선택하고 싶겠습니까? 모든 사람은 생명과 평안을 선택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현실은 크리스챤마저도 자기 파괴적인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은혜를 받고서도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키는 생각을 붙들며 삽니다.

      성령님은 육신의 연약함을 입고 있는 우리를 잘 아십니다. 죄된 본성에 기반을 둔 자아로부터 파생되는 부정적 생각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아에서 나오는 영의 생각으로 교체해 달라고 성령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진리에 기반한 영의 생각으로 채널 돌리듯 돌리면 나쁘고 낡은 옛 자아의 생각은 더이상 호소하지도, 유혹하지도, 영향도 못미치는 것을 봅니다.

      고후 10:3~5
      3.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4.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5.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우리는 날마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육신의 생각을 교체 가능한 영의 생각으로 바꿔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특별히 HAGAH의 시간을 갖기 전에 아래와 같은 기도를 하고 기도한 내용대로 마음을 모아 HAGAH를 하면 성령님께서 틀림없이 말씀을 통해 도와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주님. 제 생각 가운데 자유롭게 오셔서 영의 생각을 던지실 수 있도록 마음 중심으로 성령님을 초대합니다. 제 모든 생각 기관의 주인으로 성령님을 모십니다. 성령님께서 제가 갖고 있는 모든 재료와 하나님의 말씀을 재료 삼아 생각 영역에 빛을 비춰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제 온 마음을 성령님께 엽니다. 로마서 8장의 말씀을 암송이 아닌 HAGAH할 때 영의 생각을 던져주옵소서. 잠재의식 영역 안에 있는 모든 육신의 생각을 영의 생각으로 교체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롬 8:5~6>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1.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으로 말미암지 않은 모든 것은 육신의 일이라고 했는데 롬 8:6에서 그로 말미암은 “육신의 생각”은 사망임을 알려줍니다.

      비오스, 프쉬케 모두 유한한 생명을 갖고 있고, 조에 만이 무한한 생명을 갖고 있습니다. 즉 영으로 말미암지 않은 모든 것은 유한한 생명을 갖고 있습니다. 무한한 생명, 즉 영원한 생명을 갖고 있지 않은 모든 것은 결국 유한한 생명, 즉 사망입니다.

      아무리 좋은 생각, 결과라 할지라도 무한할 것 같지만 그것이 영으로 말미암지 않은 것이라면 결국 유한합니다. 이는 언젠가는 사라집니다.

      <벧전 1:23~25>
      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을 다시 언급한 베드로는 모든 육체(사르크스, 로마서 8장의 육신)가 풀과 같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영원한 것은 생명이요, 영인 하나님의 말씀(요 6:63)이라고 알려줍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란 구절을 읽을 때, 악하고 나쁜 생각만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HAGAH-R8 Day3 (1)에서 나눴던 것처럼 그 어떤 좋은 것이라도, 탁월한 것이라도 생명의 영으로 말미암지 않은 모든 것은 육신의 생각입니다.

      이 육신으로 기인한, 다른 말로 생명의 영으로 말미암지 않은 모든 것은 결국 언젠가는 사라집니다. 하나님 나라에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영으로 말미암은 것만 영원하며 하나님 나라에 보존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서 8장을 볼 때 아래의 대결 구조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생명의 “영” vs. 사망의 “육신”

      로마서의 “생명”은 창세기의 “생명 나무”, 로마서의 “육신”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벗어난 자들은 선한 일 vs. 악한 일, 선한 생각 vs. 악한 생각…의 패러다임으로 살아갑니다. 유치원 들어가기 전부터 배우는 것은 이거 하면 안돼요, 이건 잘했어요…의 선악과 패러다임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나라의 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차원이 다른 세계의 법입니다. 그것이 로마서 8장에 나오는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가져 오는 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서 8장에서 “악한 생각 vs. 선한 생각”…의 패러다임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생각 vs. 영의 생각”…의 패러다임으로 끌고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인간의 도덕적 기준에 맞는 선하고 악한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인 영으로 기인했느냐 아니냐와 영으로 말미암지 않은 모든 것은 사망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이 세상 모든 것은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모두 사라지지만… 주의 말씀은, 주의 영은, 주의 생명은… 주의 영으로 말미암은 모든 것은 사람의 기준으로 볼 때 아무 것도 아니고 약해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영원히 남습니다.

      2. 생각은 세계관과 관련있습니다

      롬 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For the mind set on the flesh is death, but the mind set on the Spirit is life and peace, (NASB)

      어떤 생각이 문득 들어옵니다. 그리고 사라질 수 있습니다. 휘발성처럼 사라진 생각은 내게 영향을 못미칩니다. 그런데 동일한 생각이 들어오고 또 들어와 사라지지 않고 쌓이면 그 생각은 내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합니다. 생각이 쌓여 내 안에 집합을 이룬 것을 mind set이라고 합니다. 휘발성 처럼 사라지는 생각이 아닌 덩어리를 이룬 생각은 특정 관점을 생성합니다. 방향성을 갖고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 부분이 발전하면 한 사람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이룹니다.

      롬 8:6에 나오는 “생각”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는 “프로네마”입니다. “프렌”에서 온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생각” 중에서도 반복되는 생각, 그래서 어떤 방향과 경향을 띤 생각을 강조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 원어를 가장 잘 반영한 NASB는 생각을 “mind set”으로 번역했습니다.

      물리학을 처음 공부할 때 배우는 F = ma (힘을 = 질량 X 가속도)를 떠올리면 모든 질량은 힘을 갖는다는 가장 기본적인 물리 법칙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휘발성처럼 사라지는 생각은 내게 힘을 미치지 못하지만 쌓여져 덩어리가 된 질량이 있는 생각은 내게 힘을 미칩니다. 그런데 그 쌓인 생각이 육신으로 말미암은 것이면 결국 사망이지만, 그 생각의 덩어리가 말씀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그것은 영원한 생명(조에)이자 평안입니다.

      육신의 생각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영이요, 생명인 하나님의 말씀 뿐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선하고 악한 생각이란 패러다임이 아닌 육신과 영의 생각이란 기준으로 보면 결국 영으로 말미암지 않은 모든 것이 육신의 것이요 사망이기 때문에 영으로 말미암은 것의 기준을 알아야 합니다. 이를 알려면 결국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생명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육신의 생각은, 육신의 mind set은 견고한 진과 관련이 있습니다.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영역으로 뭉쳐있기 때문에 아무리 큰 은혜를 경험한다 하더라도 잠재의식 영역에 형성된 mind set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바뀌질 않으면 특정 은혜로 변화를 받은 것 같지만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가장 치열한 영적인 전쟁은 바로 이 mind set이란 잠재의식의 땅에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HAGAH란 방법을 통해 잠재의식마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시려고 한 것입니다.










      07-04-2022(월)

      선한 양심을 가지라(베드로전서 3:16)

      4893. 양심(sünĕidēsis) συνείδησις
      συνείδησις, εως, ἡ

      1. 의식,  2. 양심
      발음 / 수네이데시스(sünĕidēsis)
      어원 / 4894의 연장형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양심(요 8:9, 고전 8:7, 히 9:9), 깨닫는 일(히 10:2), 생각함(벧전 2:19)
      신약 성경 / 30회 사용

      * 4894. συνείδω

      1.  완전하게 보다,  2. 깨닫다,  3. 이해하다

      발음 / 수네이도(sünĕidō)
      어원/ 4862와 149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알다(행 5:2, 14:6), 깨닫다(행 12:12, 고전 4:4)

      - 4862. σύν 
      1. 함께,  2. ~와 같이,  3. 함께 남다
      발음 / 순(sun)
      관련 성경 / 함께, ~와, 더불어(마 25:27)
      신약 성경 / 128회 사용

      - 1492. εἴδω 
      1. 보다,  2. 별을 보다,  3. 누가 7:22
      발음 / 에이도(ĕidō)
      관련 성경 / 보다(마 2:2, 막 1:10, 요 1:39), 알다(마 2:16, 막 10:42, 요 9:25), 뵙다(마 28:17), 보이다(막 12:15), 당하다(행 2:31, 13:36),
      시인하다(딛 1:16), 알리다(눅 2:15), 의논하다(행 15:6)





      신약성경에서 언급되는 “양심”은 “도덕적 깨달음”이나 “도덕적 의식”을 의미하는 헬라어 "쉬네이데시스"를 번역한 것입니다.
      양심은 한 사람의 행동과 생각, 말이 옳고 그름의 기준을 따르거나, 혹은 거스를 때 반응합니다.

      구약성경에는 신약성경의 쉬네이데시스와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 히브리어 단어가 없습니다.
      “양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없다는 것은 개인적이기 보다 공동체적이었던 유대인의 세계관 때문일 것입니다.
      히브리인은 자신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 개인으로서가 아닌 조직적으로 관련된 언약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여겼습니다.
      다시 말해서, 히브리인 민족 전체가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한, 히브리인은 자신의 입장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떳떳했다는 뜻입니다.

      신약성경의 개념은 본질적으로 좀 더 개인적이며, 세 가지의 중요한 사실을 수반합니다.

      첫째, 양심은 인간이 자기평가를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양심이 “선했거나” “깨끗했던” 여러 경우들에 대해 언급합니다 (사도행전 23:1, 24:16, 고린도전서 4:4).
      바울은 자기 자신의 말과 행동을 점검하며 그것이 자신의 도덕과 가치 체계에 합당한 것인지 살폈습니다.
      물론 그 도덕과 가치 체계는 하나님의 기준에 바탕을 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양심은 그의 마음의 온전함을 입증했습니다.

      둘째, 양심이 어떤 것을 증언한다.

      바울은 이방인들이 비록 모세의 율법을 가지지는 못했지만, 그들 마음 속에 하나님의 율법이 새겨졌음을 증언해주는 양심을 가졌다고 말합니다(로마서 2:14-15).
      바울은 또한 자신이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 (로마서 9:1)과 사람들을 다룰 때 거룩함과 신실함으로 행했다는 것(고린도후서 1:12)을 증언하며 양심에 호소합니다.
      바울은 또 양심을 통해 자기 행동이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의 양심에 모두 분명히 드러남을 알게 된다고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5:11).

      셋째, 양심은 개인의 가치 체계의 종입니다.

      미숙하거나 나약한 가치 체계는 나약한 양심을 낳는 반면, 제대로 알고 있는 가치 체계는 옳고 그름에 대한 확고한 인식을 낳습니다.
      크리스천 삶에서 성경적 진리에 대한 적절치 못한 이해로 인해 개인의 양심이 조종당하고, 직면한 문제에 대해 불균형한 죄책감 및 수치심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 성숙하게 되면 양심이 강건해집니다.

      이러한 양심의 마지막 기능은 바울이 우상들에게 제물로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과 관련하여 가르칠 때 언급됩니다.
      바울은 우상이 진짜 신은 아니므로 음식이 제물로 바쳐졌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고린도 교회의 일부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했고 그러한 신들이 실제로 존재했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미숙한 신자들은 양심에 잘못된 편견과 미신적 관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신들에게 제물로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을 꺼림칙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약 양심이 나약한 형제들이 제물로 바쳐진 음식 먹는 행위를 정죄한다면, 좀 더 잘 아는 자들이 자기들의 음식 먹을 자유를 포기해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여기서의 교훈은, 우리의 양심이 성숙한 믿음과 이해로 말미암아 거리낌이 없다고 해서, 더 강한 양심에서 비롯되는 자유를 행사하여 나약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을 실족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볼 수 있는 양심에 대한 또 다른 언급은 마치 뜨거운 철로 지져진 것과 같이 “화인을 맞거나” 무감각하게 된 양심에 대한 것입니다(디모데전서 4:1-2).
      그러한 양심은 단단해지고 굳어져서 더 이상 아무것도 느끼지 못합니다.
      화인 맞은 양심을 가진 자는 더 이상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모든 것이 괜찮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속이고 스스로를 죄에 방치하며, 다른 사람들을 아무 감정 없이 무감각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과 늘 좋은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마음을 늘 새롭고 부드럽게 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양심이 약한 자들을 크리스천의 사랑과 긍휼로 대하며 배려해야 합니다.



      07-02-2022(토)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베드로전서 2:2)

      순전하고 신령한
      순전한 / ἄδολος

      아도로스(adŏlŏs) - 순수한, 성실한, 속일 수 없는

      신령한 / λογικός

      로기코스(lŏgikŏs) - 영적인, 합리적인

      로마서 12:1(영적)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사모하라(ἐπιποθέω) : desire

      에피포데오(ĕpipŏthĕō) - 간절히 사모하다

      고린도후서 5:2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07-01-2022(금)

      믿음의 결국(베드로전서 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NIV. for you are receiving the goal of your faith, the salvation of your souls.

      결국(結局) : 일의 끝장 / 맺을 결, 판 국                          

      5056. 테로스(tĕlŏs) τέλος : 끝, 결말, 마지막
      τέλος, ους, τό 

      1. 끝,  2. 마지막,  3. 결말
      발음 / 테로스(tĕlŏs)
      어원 / 기본형 τέλλω ‘제한하다’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끝(마 10:22, 24:6, 막 13:13, 눅 21:9), 마지막(롬 6:21,22, 고전 15:24), 결말(마 26:58, 약 5:11), 결국(고후 3:13),
      관세(마 17:25, 롬 13:7), 마침(롬 10:4), 목적(딤전 1:5), 말세(고전 10:11)
      신약 성경 / 40회 사용

      NIV : the goal of your faith(믿음의 목표)        
      KJV : the end of your faith(믿음의 마지막)                    
      NASB : the outcome of your faith(믿음의 결과)



      06-30-2022(목)

      믿음의 기도(야고보서 5:15)

      신약 성경에 믿음(faith)이란 단어가 무려 231번이나 나옵니다.
      예수를 믿고 나서 가장 갈망하는은사 중 하나는 단연 믿음의 은사일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믿음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고, 믿음만 있으면 못할 것이 없을 것 같은 그런 강한 인상을 받습니다.

      염원(念願) : 생각염(念), 원할 원(願)

      늘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간절히 바람.
      또는 그런 소원

      기도(祈禱) : 빌 기(祈), 빌 도(禱)      

      신명에게 빎. 또는 그 의식

      로마서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 말씀(레마) - 4487 ῥῆμα

      1.말하여 진 것,  2. 예언,  3. 명령
      발음 / 레마(rhēma)
      어원 / 448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말씀(마 4:4, 눅 1:37, 행 5:20), 말(마 5:11, 행 2:14, 고후 12:4), 일(눅 2:15, 행 5:32)
      신약 성경 / 68회 사용

      * 4483. 헤오(ῥέω)
      1. 말하다,  2. 지시하다
      발음 /  헤오(rhĕō)
      관련 성경 / 말하다(마 2:15, 5:21, 12:17, 24:15), 이르다(롬 9:12)

      히브리서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5287)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1650)

      5287. 실상 - 후포스타시스(ὑπόστασις)

      5287. 실상 - 후포스타시스(ὑπόστασις)

      ὑπόστασις, εως, ἡ 

      1. 본질적 성질,  2. 확신
      발음 / 후포스타시스(hüpŏstasis)
      관련 성경 / 본체(히 1:3), 실상(히 11:1), 믿던 것(고후 9:4)
      신약 성경 / 5회 사용

      '후포스타시스'는 '후포'(아래, sub)와 히스테미(ἵστημι, histemi, 서게 하다, 확립하다)

      * 후포(~에 의하여). 5259.
      ὑπό 

      1. ~에 의하여,  2. 마태 1:22,  3. 마태 17:12
      발음 / 후포(hüpŏ)
      관련 성경 / «속격» 의하여, 말미암아(마 1:22, 눅 2:18)
                        «대격» 아래, 밑에(마 8:9, 행 4:12)
      신약 성경 / 220회 사용

      * 히스테미(서게하다) 2476

      ἵστημι

      1. 놓다,  2. 세우다,  3. 내세우다
      발음 / 히스테미(histēmi)
      관련 성경 / 서다(마 2:9, 막 9:1, 요 1:35), 세우다(마 4:5, 행 6:6, 롬 3:31), 데리고 가다(마 18:16), 서 있다(마 20:6), 두다(마 25:33),
      멈추다(행 8:38), 작정하다(행 17:31), 그대로 두다(고전 7:37), 확정하다(고후 13:1), 대적하다(엡 6:13), 앉다(약 2:3), 일어서다(계 11:11)신약 성경 / 154회 사용

      * 후포스타시스 - 아래에 서게하다 즉 받침대를 의미한다.
      꽃을 위한 받침대, 책을 위한 받침대,
      이렇게 발전하여 믿음을 위한 받침대가 곧 후포스타시스로 실상(실체)이라고 하겠다.

      1650. 증거 - 엘렝코스(ἔλεγχος)

      1. 증거,  2. 유죄 증명,  3. 견책
      발음 / 엘렝코스(ĕlĕngchŏs)
      어원 / 165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책망(딤후 3:16), 증거(히 11:1)
      신약 성경 / 1회 사용

      * 1651. 엘렝코(ἐλέγχω)

      1. 빛으로 가져오다,  2. 증명하다,  3. 견책하다
      발음 /  엘렝코(ĕlĕngchō)
      어원 / 미래 ἐλέγξω, 제1부정과거명령 ἔ- λεγξον, 제1부정과거부정사 ἐλέγξαι, 제1부정과거수동태 ἠλέγχθην,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권고하다(마 18:15), 드러나다(요 3:20), 책망하다(요 16:8, 딛 1:9, 계 3:19), 책잡다(요 8: 46), 꾸짖다(딤전 5:20, 딛 1:13),
      정죄하다(약 2:9), 경책하다(딤후 4:2), 꾸지람을 받다(히 12:5), 책망을 받다(눅 3:19, 엡 5:13), 가책을 느끼다(요 8:9)
      신약 성경 / 17회 사용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Juan Carlos Ortiz)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는 1934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출생했다.
      독실한 부모 밑에서 성장한 그는 20세 때부터는 아르헨티나 전역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온 세계에 영향을 주었던 아르헨티나의 영적갱신 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 특히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의 ‘믿음 교회’(Faith Tabernacle)의 목회 성공은 그를 일약 세계적으로 유명한 목회자로 만들어 주었다.
      그 후 그는 1974년 스위스의 로잔 대회에 주강사로 초청을 받아 설교를 했으며, 이를 계기로 그의 영향력은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제3세계의 지역을 넘어 동구권을 포함한 다른 지역에까지 퍼져 나가게 됐다.
      오르티즈 목사는 처음에는 오순절 계통의 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했으나 후에는 장로 교회에서 시무하였으며 많은 교회를 개척했다.
      그는 장로 교파를 비롯, 여러 복음주의 교파뿐만 아니라 나아가 일반 사회에서까지 폭넓은 명성을 얻고 있는 종교 지도자로 알려져 있다. 지금도 그의 메시지는 라디오나 텔레비전을 통해 라틴 아메리카 등지에 전해져 여러 저자들에 의해 인용되고 있다.







      06-29-2022(수)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야고보서 4:8)

      가까이 하라(1448) 엥기조(ἐγγίζω) 믿음의 기도(야고보서 5:15) 

      1. 접근하다,  2. 누가복음 7:12,  3. 마태복음 21:1
      발음 / 엥기조(ĕnggizō)
      어원 / 미래 ἐγγιῶ , 제1부정과거 ἤγγισα, 완료 ἤγγικα, 145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가깝다(마 3:2, 막 1:15, 행 7:17), 가까이 오다(마 21:1, 막 11:1, 눅 18:35), 가까이 하다(눅 12:33, 약 4:8),
      가까이 가다(눅 24:28, 행 9:3, 히 7:19), 이르다(빌 2:30).
      [부] 가까이(눅 15:1)
      신약 성경 / 42회 사용

      누가복음 7:12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마태복음 21:1
      저희가 예루살렘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 1451. 가까운(엥구스) ἐγγύς

      1. 가까운,  2. Σαλίμ: 살림에 가까운,  3. 사도행전 9:38
      발음 /  엥구스(ĕnggüs)
      어원/ 비교급 ἐγγύτερον, 최상급 ἔγγισ- τα, 기본동사 ἐ. τοῦ ‘조르다’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가까이(마 24:32, 눅 21:30, 요 11:18, 엡 2:13)
      신약 성경 / 31회 사용

      한국의 경우


      1. 이슬람화 / 한국인 이슬람 신자 약 4만명
         사원 17개, 기도처(무살라) 123개
         유학생 지원 : 본국에서 한국인 여성과 결혼 할 때 총각 증명서 발급
         외국인 이슬람 신자 11만명

      2. 중국화 / 차이나 타운 30개
         유학생 수 : 7만 1천 67명
         외국인 유학생의 비율 44.4%
         3년 거주 후 지방 선거권 부여

      3. 정치적 / 우파와 좌파의 대결
          현재 50:50
        
       
      무분별한 차이나타운 전국에 30개 "과도한 특혜 사회문제 유발"

      춘천 대규모 차이나타운 건설이 논란이 되고 있는 가운데, 우리나라에 이미 30곳이 넘는 차이나타운이 존재하거나 추진중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

      현재 정부의 무분별한 인허가로 인해 차이나타운이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수년간 중국계 조선족, 한족 등을 포함하여 중국에서 건너온 외국인들이 급증하여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데, 국내 곳곳에 이들의 집단 거주지가 속속 정부의 인허가 또는 묵인 속에 건설되고 있어 향후 큰 문제로 비화될 전망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차이나타운은 다음과 같다.

      자양동 차이나타운, 신길동 차이나타운, 대림동,가리봉동,구로동 차이나타운, 독산동 차이나타운, 봉천동 차이나타운, 흑석동 차이나타운, 종로구 명륜동 차이나타운, 일산 차이나타운, 연희동 차이나타운, 연남동 차이나타운, 신길동 차이나타운, 인천 차이나타운, 평택시 차이나타운, (중국인 60만명 이주 준비)

      수원 팔달구 차이나타운, 안산시 원곡동 차이나타운, 시흥시 정황동 차이나타운, 강원도 정동진 차이나타운 개발중, 대구 중구 차이나타운, 대구 달서구 차이나타운, 부산시 차이나타운

      전남 진도 차이나타운 (천만평 땅에 17조원 투자해 건설중) 전남 여수 차이나타운 (전략적으로 확보) 전남 광양 차이나타운 (전략적으로 확보) 제주도 차이나타운 (신제주 차이나타운)

      서귀포 차이나타운, 한라산 자락 차이나타운, 제주도 애월읍 상가리 (34만평 건설중), 춘천에 대규모 차이나타운 공사 예정(최근 문제됨) ,경기도 포천 차이나타운 (추진중) 등이다.

      중국계들은 다른 나라로 이주해 가서도 현지 문화와 동화되지 못하고 자신들만의 폐쇄적인 문화를 유지하려는 습성을 갖고 있어, 현지 국가의 각종 이권을 장악하고 수익금은 사회에 환원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차이나타운

      다문화 가정에게 대한 과도한 특혜도 논란이 되고 있다.

      대형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는, 조선족을 포함한 다문화 가정과 국내 체류 외국인 (영주권자 포함)에 대해 우리나라 정부가 너무나 과도한 특혜를 줬기 때문에, 대한민국 국민이 역차별 당하고 있다는 비판이 수도 없이 나오고 있다.

      이미 많은 곳에서 우리나라 정부와 지자체가 이들 조선족과 다문화 가정에게 주는 혜택이 믿어지지 않는다며 조목조목 리스트를 정리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제 국내 거주 외국인에 대한 말도 않되는 특혜 때문에 오히려 대한민국 사회 구조가 왜곡되고 비뚤어진다는 평가가 나오기에 이르렀다.

      어떤 특혜가 있는가?

      외국인이 국내 3년 거주시 지방선거권 부여하는 점은 치명적이라는 평가다. 단지 3년을 거주한다고 투표권을 주는 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렵다는 것. 이는 우리나라의 정체성에 위협을 가져올 수 있는 심각한 문제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공무원시험 다문화전형 특혜, 운전면허및 자격증 국비지원 등은 우리나라 청년들의 취업 전선에 역차별을 주고 있다. 특히 공무원과 자치 경찰 등은 국가관과 애국심이 투철해야 하는 데, 자신들이 중국인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중국계 조선족이 대거 공무원과 경찰로 편입될 경우, 결국 향후 치명적인 문제가 야기 될 수 있다.

      부동산도 문제다. 외국인에 대한 공공분양및 공공임대 우선순위, 부동산 담보 대출 무제한은 서울 경기 일대 집값 상승의 주범으로 분석되고 있다. 최근 수년간 서울 경기 부동산이 폭등하는 이유 중 하나로 중국계 자금이 해당 지역 부동산을 싹쓸이 했던 것이 그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그 배경에는 정부의 과도한 금융 혜택이 있다는 것이다.

      부동산을 취득할 때 무제한 담보대출을 한다는 것은, 중국계 자본은 자신들의 돈이 없어도 은행 대출만으로 서울 시내 부동산을 매입한다는 것인데, 이는 고스란히 서울 수도권 부동산을 중국인들에게 내주고 가격을 폭등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외국인에 대한 불공정한 특혜는 한 두가지가 아니다.

      취득세 양도세 재산세 지원, 투기 관리지역 취득가능, 대출이자 특별할인, 은행 예금이자 6%이상 지급, 외화송금수수료 할인, 통신비 외료비지원, ATM 수수료 면제, 국공립 어린이집 및 병설 유치원 0순위, 보육로, 육아 도우미 비용 지원, 학습지 비용 및 학원비 지원, 고등학교 및 대학교 등록금 할인 및 장학금 지원, 기숙사 우선배정, 중국인들은 무료로 대학 다닐 수 있는 혜택 등 이루말할 수 없는 특혜들을 주고 있다.

      이러한 법률 및 조례 등으로 현재 오히려 내국인의 역차별이 이뤄지고 있다는 분노가 치솟고 있는 가운데, 이러한 법안들을 대거 통과시킨 정부와 국회의원에 대한 책임론이 불거지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 나와 있는 조선족의 숫자는 공식적으로 70만, 비공식 (불법체류자 포함) 300만에 육박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쉽게 말하면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 중에서 노동력을 갖고 있고,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대한민국에 들어와 있다는 얘기다.

      이들이 한국 사회에 동화되지 않고, 무수히 건설되는 차이나타운에서 자체적인 이익집단으로 성장할 경우, 결국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혼란을 가져올 수 밖에 없다는 우려가 나오는 대목이다.

      고향을 떠나 먼 곳에 와서 현지에 동화되고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자긍심을 심어주는 일도 분명 필요하다. 그러나 정부는 이들의 표를 의식한 나머지 과도하게 느슨한 다문화 정책으로 사회혼란을 가중시킬 것이아니라, 앞으로 더 이상의 불법적인 이주를 금지하고, 불법 체류자에 대해서는 엄하게 다스리는 등 질서를 잡는 일이 서로를 위해 합리적인 정책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한편 복수의 정치,외교 전문가들은 "국내 거주 중국계의 표를 의식했던 여권 후보가 각종 선거에서 참패하는 현상은 이미 돌아선 대한민국의 민심을 나타낸다." 라며 "정부가 감성적인 광고 등으로 국민의 눈물샘을 자극해서 비뚤어지고 무분별한 다문화 정책을 쏟아내는 방식은 앞으로 거센 국민적 저항과 직면할 것" 이라고 입을 모았다

      출처 : 파이낸스투데이(http://www.fntoday.co.kr)

      세계최대의 독특한 프랜차이즈 상륙?
      차이나타운이 한국에 왜 이렇게 많이 생겼지? 없는 동네가 없습니다.
      ㅡㅡㅡㅡㅡ
      _한국엔 이미 조선족 80만명 거주..
      _광진구 자양동 차이나타운
      _영등포구 신길동 차이나타운
      _영등포구 대림동 차이나타운
      _영등포구 가리봉동/구로동 차이나타운. (중국 한족이 접수)
      _금천구 독산동 차이나타운
      _관악구 봉천동 차이나타운
      _관악구 흑석동 차이나타운
      _종로구 명륜동 차이나타운
      _일산 차이나타운
      _연희동 차이나타운
      _연남동 차이나타운
      _신길동 차이나타운
      _독산동 차이나타운
      _인천 차이나타운
      _평택시 차이나타운...(중국인 60만명 이주)
      _수원 팔달구 차이나타운
      _안산시 원곡동 차이나타운
      _시흥시 정황동 차이나타운
      _강원도 정동진 차이나타운 개발중....
      _대구 중구 차이나타운
      _대구 달서구 차이나타운
      _부산시 차이나타운
      _전남 진도 차이나타운 (천만평 땅에 17조원 투자해 건설중 )
      _전남 여수 차이나타운 (전략적으로 확보)
      _전남 광양 차이나타운 (전략적으로 확보)

      중국 자본이 제주도 접수중
      _제주도 차이나타운 (신제주 차이나타운)
      _서귀포 차이나타운
      _한라산 자락 차이나타운
      _제주도 애월읍 상가리 (34만평 건설중)

      ㅡ법무장관후보 조국. 사모펀드에 중국자본 6천억 유입 의혹
         조국의 임명강행은 중국의 자유진영에 대한 침략행위!
      ㅡ스마트 가로등사업(몰래카메라내장)수주관여. 모니터링중... (177건 관급공사 수주)
      ㅡ한국지하철 무료 Wi-Fi. 중공 화웨이 5G 설치. 도청중...
      ㅡ카톡도 중국꺼.. 사용자제 요망(톡방 멤버 아니라도 엿듣기 가능)

      ㅡ한국대학에서 중국유학생 성적 2.5이상 장학금 다 주고
      ㅡ외국인 특혜로 마구잡이 입학허가 (우리 애들은 어릴때부터 입시를 준비해도 명문대 들어가지 못하는데...)
      ㅡ4년 졸업하면 영주권 주고
      ㅡ비싼 암치료 해주고
      ㅡ촛불집회 동원하고
      ㅡ한국국적 주고 투표권 주고....ㅠㅠ
      이제 지자체 뿐만 아니라 대통령도 출마할 수 있는 법도 만들것임

      ㅡ지난 70년간 뼈빠지게 일해서 세계 10대 무역강국 만들어
      중국 시진핑에게 갖다 바치는 중.....

      ㅡ반중친미
      ㅡ반중친미 반중집회에 참여합시다
      ㅡAnti-China (중공)
      - Anti Communist (중국공산당)

      7년간 무슬림 유학생들과 함께 살아온 주민들은 왜 '돌변'했을까








      06-28-2022(화)
      위로부터 난 지혜(야고보서 3:17)

      지혜(4678) 소피아


      4678 συγκακουχέω 

      1. 지혜,  2. 마태복음 12:42
      발음 / sŏphia
      어원 / 468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지혜(마 11:19, 롬 11:33, 고후 1:12, 마 12:42, 눅 11:31, 골 2:23)
      신약 성경 / 51회 사용

      * 4680. 소포스(σοφός)
      σοφός, ἡ, όν


      1. 현명한,  2. 지혜있는 ,  3, 고린도전서 3:18
      발음 / 소포스(sŏphŏs)
      어원 / σαφής ‘깨끗한’과 유사
      관련 성경 / 지혜로운(마 11:25, 눅 10:21, 딤전 1:17), 지혜 있는(마 23:34, 롬 1:22, 고전 3:18, 약 3:13)
      신약 성경 / 20회 사용

      탈무드에 나오는 "갈비뼈 도둑"이라는 예화를 보면 인류 최초의 여성은 아담의 갈비뼈를 1개 훔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로마 황제가 어떤 랍비의 집을 방문하여 그에게 물었다.
      "신은 도둑이다. 어째서 남자가 잠들고 있는 사이에 남자의 허락도 받지 않고 갈비뼈를 훔쳐 갔는가?"
      랍비가 대답을 못하고 있는데 그의 딸이 곁에서 대화에 끼어 들었다.
      "황제의 부하를 한 사람만 빌려 주십시오. 조금 곤란한 문제가 생겨, 그것을 조사 시키는데 쓰려고 합니다."
      황제가 물었다.
      "그건 별로 어려운일이 아니지만 도대체 그 문제란 무엇인가?"
      "어젯밤 도둑이 집에 들어와서 금고 하나 훔쳐 갔습니다.
      그 대신에 도둑은 금 그릇을 두고 갔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했는지 조사해 보고 싶어서 입니다."
      "그것 참 부럽구나. 그런 도둑이라면, 내게도 들어 왔으면 좋게는데!"
      그러자 랍비의 딸은 이렇게 말했다.
      "그럴 겁니다. 그것은 결국 아담의 몸에서 일어난 일과 똑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갈비뼈를 하나 훔쳐 갔지만, 이 세상에 한개의 갈비뼈 보다 값진 여자를 남겼습니다."

      하나님이 최초의 여자를 남자의 머리로 만들지 않았던 이유는 남자를 지배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발로 만들지 않았던 것도 남자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지혜는 참과 진리가 무엇인가를 알게 하는 것이며 인간의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깨우쳐 주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지혜를 명확하게 구별하여 이해를 도운 성경의 인물을 본다면 그는 야고보 사도이다.
      그는 야고보서 3장에서 '세상의 지혜와 위로부터 임하는 지혜'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기록했다.
      세상적인 지혜는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擾亂)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야고보서3:16-17)
      위에 제시된 두가지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에게서 주어진 지혜는 쉽게 구분한다면 어두움과 빛, 멸망과 영원한 생명에 관한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느 돈 많은 유대인이 병들어 죽게 되었다.
      그 사람이 유서를 작성했다.
      아들은 타지에 나가있었기 때문에 아들에게 주는 유서를 그의 종에게 남겼다.
      유서에는 두 가지 조건이 적혀있었다.

      “첫째, 나는 내 아들에게 이 유서를 전하는 충실한 노예에게 전 재산을 남긴다.
      둘째, 내 아들에게는 내 모든 것 가운데 한 가지만을 고르게 하라.”

      노예는 너무나 기뻤다.
      아들이 올 때까지 주인의 재산을 잘 관리하였다.
      그리고 그 유서를 랍비에게 보이고 증인으로 삼았다.
      아들이 돌아왔고 노예는 랍비와 함께 주인 아들에게 갔다.
      랍비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아버지가 죽을 때 유서를 남겼는데 당신에게는 단 한 가지밖에 남기지 않았고 나머지는 모두 이 노예에게 준다고 했습니다.
      당신은 아버지의 소유 중에서 무엇을 고르겠습니까?”

      젊은 아들은 한참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이 노예를 갖겠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모든 재산을 다시 이어받게 되었다.
      아들은 유서 속에 담긴 아버지의 뜻을 알았던 것이다.

      건강한 삶의 지혜

      전국시대의 명의였던 편작에게 의사 지망생이 찾아왔다.
      “저도 선생님처럼 유명한 의사가 되고 싶습니다.”
      젊은이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 본 편작이 말을 이었다.
      “온 천하를 다녀서 약이 될 수 없는 풀들을 뜯어 오너라”

      젊은이는 산야를 헤매고 다녔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선생님 온 천하를 다녀봐도 약이 되지 않는 풀이 없군요. 그냥 돌아가겠습니다”
      명의가 되겠다는 꿈을 포기하고 돌아서는 젊은이를 편작이 불러 세웠다.

      “그래 됐어, 하찮은 풀도 약으로 볼 줄 아는 것을 보니 유능한 의사가 될 수 있겠어”
      편작은 젊은이를 제자로 받아 들여 의술을 가르쳤고 훗날 젊은이는 편작의 뒤를 잇는 당대 명의로 이름을 날렸다는  일화가 있다.

      약(藥)이라는 한자어도 풀이라는 뜻의 ‘초두 머리’ 밑에 즐거움이라는 뜻의 ‘’을 쓴다.
      치료의 기쁨을 안겨주는 풀이 바로 약이라는 뜻이다.
      들풀 하나도 유심히 살펴 쓰임새를 찾던 옛 사람들의 지혜가 아쉽다.
      건강에 대한 정보와 지식이 홍수를 이루고 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지혜가 부족한 시대임에 틀림없다.
      건강에 대한 지식도 중요하지만 건강한 삶의 지혜를 터득해야 할 때다.


      藥 : 약 약, 뜨거울 삭, 간 맞출 략(약)

      艹(초두머리 초) + 樂(노래 악)

      현명한 왕

      아라곤 스페인 왕이 어느 날 10여 명의 신하들을 이끌고 민정 시찰을 나갔을 때의 일이다.
      어느 보석상 앞을 지나다가 진열장안을 들여다보니 좋은 보석이 많아서 왕은 신하들과 함께 보석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왕은 주인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보석 하나를  사가지고 신하들과 함께 그 가게에서 나왔다.
      그런데 얼마쯤 갔을까, 보석상 주인이  헐레벌떡 뛰어 와서는 " 폐하 말씀 드리기 대단히 죄송하오나 폐하께서 다녀가시고 저희 가게에서 가장 값비싼 다이아몬드 하나가 없어졌습니다." 고 조아리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크게 당황을 하며 신하들을 모두 데리고 보석상으로 되돌아갔다.
      왕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주인에게 부탁했습니다.
      "큼직한 항아리에 소금을 절반 정도 넣어 가지고 오시오."
      가게 주인은 잠시 후에 소금 항아리를 왕 앞에 갖다 놓았습니다.
      그러자 왕은 신하들에게 명령했습니다.

      "지금부터 한 사람씩 차례대로 자기 주먹을 이 항아리 안에 넣고 속에 있는 소금을 잠시 휘젓다가 꺼내시오!"
      신하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왕의 명령대로 실행하였습니다.
      왕은 주인에게 탁자 위에 그 소금 항아리를 쏟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다이아몬드가 그 소금 속에 섞여 있는 것이 아닙니까?
      현명한 왕의 기지로 보석을 찾았을 뿐 아니라 그것을 훔쳤던 신하에게는 아무도 모르게 자기 잘못을 뉘우치도록 해주었던 것입니다.


      지혜(智慧), 명철(明哲), 지식(知識)의 차이

      - 지식은 아는 능력
      - 지혜는 행하는 능력
      - 명철은 분별하는 능력

      지식(비나)이란?
      아는 능력

      비나 / 
      בִּינָה

      스트롱번호 998
      1. 이해,  2. 총명

      발음 : 비나(bîynâh)
      어원 : 99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지식(신 4:6), 총명(대상 22:12, 욥 34:16, 사 29:14), 명철(대하 2:12, 잠 2:3, 23:23), 지혜(욥 39:26, 잠 7:4, 23:4),
      지각(사 27:11), 뜻(단 8:15)
      구약 성경 : 37회 사용

      잠언 2:3 /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and if you call out for insight and cry aloud for understandin.

      세상에서는 학문을 비롯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지혜(호크마)란?
      행하는 능력


      호크마 / חָכְמָה

      스트롱번호 2451

      1. 숙련,  2. 지혜, 3. 다양한 학식
      발음 : 호크마(chokmâh)
      어원 : 244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지혜(출 28:3, 삼하 20:22), 슬기(출 35:26), 유능한 기술자(대상 28:21)
      구약 성경 : 153회 사용

      출애굽기 28:3 / 너는 무릇 마음에 지혜 있는 자 곧 내가 지혜로운 으로 채운 자들에게 말하여 아론의 옷을 지어 그를 거룩하게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Tell all the skilled men to whom I have given wisdom in such matters that they are to make garments for Aaron, for his consecration, so he may serve me as priest.

      인생의 경험이 많은 노인들은 어떤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자기의 경험에 비추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방법을 찾아내는 것을 말합니다.

      지혜는 영적, 도덕적 능력을 모두 포함합니다.

      명철(테부나)이란?
      분별하는 능력


      테부나 / תְּבוּנָה

      스트롱번호  8394

      1. 지식, 2. 욥기 32:11
      발음 :테부나(tebûwnâh)
      어원 : 99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총명(출 31:3, 왕상 4:29, 겔 28:4), 분별력(신 32:28), 명철(욥 12:12, 시 49:3, 잠 2:2), 지혜(욥 26:12, 시 136:5),
      통달(사 40:14), 지각(옵 1:7). 능숙함(시 78:72, 호 13:2). [형] 명철한(잠 10:23, 20:5)
      구약 성경 : 42회 사용

      잠언 2:2 /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turning your ear to wisdom and applying your heart to understanding.

      모양이 같은 쇠뭉치를 보고 어떤 사람은 그것이 납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것을 고철이라고 합니다.
      정확한 구별을 위하여 자석을 사용하듯이 명철이란 사물을 보고 그 본질을 정확하게 분별하는 것을 말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러한 용어를 설명하려고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였다.
      예를 들면,

      첫째는 히브리어 원전에서(잠언 2:2~3)

      “호크마”를 ‘지혜’,
      “비나”를 ‘지식’,
      “테부나”를 ‘명철’
      이 단어들은 동사형 명사(동사에서 만들어진 명사)라고 보시고 동사의 뜻을 알면 명사의 의미가 풍성해질 것입니다.

      “호크마”의 동사형은 “하캄”으로 지혜롭다, 지혜롭게 행동하다는 뜻
      “비나”와 “테부나”는 “빈”이라는 동사에서 온 것으로 모양은 판이하나 히브리어에서 어미나 접두어를 붙여서 명사로 만든다고 보시면 이해가 쉬울 듯

      동사 “빈”이란 의미는 ~사이를 식별(구별)하다는 의미로서 즉 구별하고 식별할 수 있으니  지식이나 이해 혹은 깨달음 등으로 될 수 있을 것이고 통찰력이 있어야 되는 문제이니 명철로 더 나아가 지혜로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하캄”과 “빈”은 내용을 들여다보면 동의어에 가깝습니다.
      우리말에선 식별과 지혜는 별개처럼 정의 되지만...
      통상적으로 어떤 단어를 얘기할 때 ‘이것이다’라고 번역하지만 여러 뜻이 있고 심지어 우리말의 하나의 단어에서 여러 의미가 있듯이...  그래서 문맥 안에서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원전문맥으로 들어가 보면

      [1절~2절] 아들아! 하고서 ‘임’(만약~ 한다면),
      [3절] ‘키 임’(그래서 ‘만약~ 한다면),
      [4절] ’임’(만약~ 한다면),
      [5절] ‘아쯔’(then)로 귀결이 됩니다.

      아들아! [1~4절]까지 만약~ 한다면, [5절]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5절을 사역하면 “여호와의 경외를 구별할(빈) 것이고 // 하나님의 지식을 찾을 것이다”
      결국 역으로 말하면 1장의 내용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머리,시작)이어늘
      (1:7) 이는 먼저 여호와 경외 곧 하나님 지식을 찾음으로 파생되는 모든 것 즉 지혜, 지식, 명철 등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실 때 특히 시편이나 잠언 등에서 자세히 보시면 단어나 문장 두 개를 나란히 놓습니다.
      반복 구절처럼 놓는데 그들의 특성입니다.
      이렇게 하므로 뜻을 풍성히 하거나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는 두 개의 내용을  함축하는 것으로써 각자의 뜻으로 보는 게 아니라 서로 잡아주어 하나의 내용으로 보셔야 합니다.

      [2절]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3절] 지식을 불러 구하며 //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5절] 여호와의 경외와 하나님의 지식도 나란히 놓였음을 볼 수 있고...
        그러므로 여기서 지혜와 지식과 명철은 위에 언급된 것처럼 개별적이나 서로 합하여 풍성과 강조를 더한 하나의 뜻으로 보아야 할 듯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지혜는 사건의 해결 능력

      우리가 이 세상의 유혹이나 삶의 문제들 앞에서 넘어지지 않고 승리해 나갈 수 있는 지혜는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옵니다.

      명철(insight or understanding)은  사물에 대한 통찰력과 이해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묵상할 때” 명철함이 스승보다 그리고 노인보다 더 뛰어나다고 말합니다(시 119: 99-100). 

      스승은 세속적 지식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세상 지식은 영적 지식과는 다릅니다.
      아무리 세상의 박사 학위를 가진 자도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십자가의 구속과 복음에 대한 영적인 일을 이해할 수 없지만, 초등학교 밖에 안 나온 크리스천이라도 성령님께서 깨우치시면 복음의 깊은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노인은 이 세상의 갖가지 경험을 다 한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세에 밝고 인생사는 법을 잘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고 묵상하는 사람은 공부를 많이 한 스승보다, 지혜와 명철이 뛰어났던 것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창 41:39).
      다니엘과 세 친구는 바벨론의 모든 자보다 모든 학문과 재주 뿐 아니라 지혜와 총명이 훨씬 뛰어났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외과 의사이며 "Think Big"(크게 생각하라)의 저자인 벤 카슨은 학창 시절부터 매일 잠언을 하루에 1장씩 읽었다고 합니다. 잠언을 읽으면 삶의 참된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는 “140억개의 뇌세포는 우리가 마주치는 모든 것을 수용한다”고 말하면서 어떤 것을 뇌에 입력하느냐가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저속적인 책들이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는 세상적인 대중매체를 입력하느냐,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뇌 속에 입력하느냐 하는 것은 어떤 인생을 사느냐를 좌우하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많은 지식보다 또 어떤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지혜와 명철입니다. 이러한 지혜와 명철을 갖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마음속에 내면화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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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혜는 상황에 맞게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잠언 9:10)
      -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wisdom, and knowledge of the Holy One is understanding.

      지식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잠언 1:7)
      -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knowledge, but fools despise wisdom and discipline.

      명철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예레미야 9:24)
      -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찌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에 행하는 자인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but let him who boasts boast about this: that he understands and knows me, that I am the LORD, who exercises kindness, justice and righteousness on earth, for in these I delight," declares the LORD.

      1. 지혜(智慧)
      히. 호크(chokma), 헬. 소피아(sophia), 영. 위즈덤(wisdom)

      관찰, 경험, 반성에 의해 얻어지는, 적절한 생활에 대한 지식과 감정을 말한다.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며(고전 2:6,7),
      머릿속 지식이 아니라 행동으로 이어져야 하는 총체적 삶의 양식으로,
      하나님에의 신앙과 복종을 지혜의 중심으로 생각했다(시 111:10; 잠 1:7,9:10).

       ①.  습득한 지식을 이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②.  미래형(未來形)이다.
       ③.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을 통하여 얻는다(잠 8:12)

       2. 명철(明哲)
      히. 비나(beenah), 헬. 순네시스(sunesis), 영. 언더스텐딩(understanding)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예리한 분별력(욥 6:30,32:9),
      어떤 주제를 예리하게 파악하고 이해하는 지적 능력(욥 6:24,15:9,18:2,23:5)
      지혜에 이르는 길을 하나님께서 '깨달으신다'(욥 28:23)는 말을 이 단어로 표현하고 있다.

       ①. 지식과 지혜를 이용하여 사물의 성질을 분별하는 것이다.
       ②. 현재형(現在形)이다.
       ③. 거룩하신 자를 알고(잠 9:10), 악을 떠나는 것이다(욥 28;28)

      * 예레미야 9:24, 여호와를 아는 것 

      3. 지식(知識)
      히. 다드(daath), 헬. 그론시스(gnosis), 영. 나리지(knowledge)  

      사물에 관한 명확한 인식이나 판단.
      어떤 사물에 관하여 알고 있는 것 또는 그 내용을 이르는 것.
      인간의 심리적 3요소(지정의, 知情意) 중 하나, 지식 없이는 인간답게 살아갈 수 없다.

       ①. 사물을 있는 그대로만 파악하여 습득하는 것이다.
       ②. 과거형(過去形)이다.
       ③. 절제가 없으면(벧후 1:6), 사람을 교만하게 한다(고전 8;1)

       '지혜'와 '명철'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었으며, '명철'은 '지혜'의 대구(對句, 비슷한 어조나 어세를 가진 것으로 짝을 맞춘 글귀)로 사용되고 있다. (잠언 4:5,7, 7:4, 9:10, 16:16; 욥 28:12, 20, 28; 1:20; 사 11:2).

       ①.  모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다(잠 1:7,9:10; 시 111:10).
       ②. 모두 하늘로서 내리시는 선물이다(전 2:26).
       ③. 모두 긴밀한 관계에 있다(잠 18:15,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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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크마” - ‘지혜’
      “비나” - ‘지식’
      “테부나” - ‘명철’




      06-27-2022(월)
      믿음과 행함(야고보서 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믿음(4102) - 피스티스(πίστις)

      πίστις, εως, ἡ 

      1. 믿음,  2. 신실성,  3. 엄숙한 약속
      발음 / 피스티스(pistis)
      어원 / 398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믿음(마 8:10, 롬 1:8, 히 10:22), 도(행 6:7), 충성(갈 5:22), 신앙(빌 1:27, 히 6:1)
      신약 성경 / 243회 사용

      * 3982 - 페이도(πειθώ)

      1. 확신을 가지게 하다,  2. 설복하다,  3. 끌어 들이다
      발음 / 페이도(pĕithō)
      관련 성경 / 권하다(마 27:20, 행 13:43, 고후 5:11), 신뢰 하다(마 27:43, 빌 1:14, 3:4), 믿다(눅 11:22, 행 26:26, 롬 2:19),
      인정하다(눅 20:6), 따르다(행 5:36,37, 롬 2:8), 옳게 여기다(행 5:40), 화목하다(행 12:20), 권면하다(행 18:4, 19:8), 권유하다(행 19:26), 순종하다(히 13:17), 확신하다(롬 8:38, 고후 2:3, 빌 2:24), 의지하다(고후 1:9, 히 2:13)
      신약 성경 / 52회 사용

      행함(2041) - 에르곤(ἔργον)

      ἔργον, ου, ὁ

      1. 행위,  2. 히브리서 4:3,  3. 표시
      발음 / 에르곤(ĕrgŏn)
      관련 성경 / 행실(마 5:16, 딤전 5:10, 벧후 2:8), 행위(마 11:2, 요 3:19, 롬 2:15), 일(마 26:10, 눅 24:19, 롬 13:12), 사무(막 13:34),
      역사(요 5:36), 소행(행 5:38), 사업(롬 14:20, 계 2:19), 공적(고전 3:13,14), 실천함(약 1:25), 이룸(약 1:4), 지음(히 1:10), 행함(롬 2:6)
      신약 성경 / 169회 사용


      믿음(信)과 행함(行)
      고린도후서 13:5a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Examine yourselves to see whether you are in the faith;
      test yourselves.

      믿음 : 그 믿음(the fa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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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브리서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5287)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1650)

      5287. 실상 - 후포스타시스(ὑπόστασις)

      5287. 실상 - 후포스타시스(ὑπόστασις)

      1650. 증거 - 엘렝코스(ἔλεγχος)

      ὑπόστασις, εως, ἡ 

      1. 본질적 성질,  2. 확신
      발음 / 후포스타시스(hüpŏstasis)
      관련 성경 / 본체(히 1:3), 실상(히 11:1), 믿던 것(고후 9:4)
      신약 성경 / 5회 사용

      '후포스타시스'는 '후포'(아래, sub)와 히스테미(ἵστημι, histemi, 서게 하다, 확립하다)

      * 후포(~에 의하여). 5259.
      ὑπό 

      1. ~에 의하여,  2. 마태 1:22,  3. 마태 17:12
      발음 / 후포(hüpŏ)
      관련 성경 / «속격» 의하여, 말미암아(마 1:22, 눅 2:18)
                        «대격» 아래, 밑에(마 8:9, 행 4:12)
      신약 성경 / 220회 사용

      * 히스테미(서게하다) 2476

      ἵστημι

      1. 놓다,  2. 세우다,  3. 내세우다
      발음 / 히스테미(histēmi)
      관련 성경 / 서다(마 2:9, 막 9:1, 요 1:35), 세우다(마 4:5, 행 6:6, 롬 3:31), 데리고 가다(마 18:16), 서 있다(마 20:6), 두다(마 25:33),
      멈추다(행 8:38), 작정하다(행 17:31), 그대로 두다(고전 7:37), 확정하다(고후 13:1), 대적하다(엡 6:13), 앉다(약 2:3), 일어서다(계 11:11)신약 성경 / 154회 사용

      * 후포스타시스 - 아래에 서게하다 즉 받침대를 의미한다.
      꽃을 위한 받침대, 책을 위한 받침대,
      이렇게 발전하여 믿음을 위한 받침대가 곧 후포스타시스로 실상(실체)이라고 하겠다.




      후포스타시스 / 

      “삼위일체”에서 ‘위(位)’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후포스타시스’라는 용어의 주가를 높여놓은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보통 ‘실체(實體)’로 번역됩니다.
      그래서 삼위일체에서 ‘체(體)’에 상응하는 용어일 것 같은데요, 아닙니다.
      ‘체’에 상응하는 용어는 ‘우시아’입니다.
      이때 우시아는 “본질”을 의미하지요.
      삼위일체에 상응하는 그리스어 용어를 그대로 풀어내자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은 각각 다른 분이나 본질적으로는 같은 분이시다

      ‘본질’은 무엇이고 ‘같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후속 논의가 여전히 남아있지만 신학자가 아닌 우리들은 사변적인 영역에 들어가지 말고“일체”를 간단히 “통일체”로 이해하고 신앙생활하는 것이 유익하다.  

      ‘실상’이 바로 ‘휘포스타시스’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이다”

      우리나라 말이지만 여전히 미궁 속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성경 번역은 기본 의미가 아닌, 파생적 의미에서 해법을 찾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휘포스타시스에는 동적인 개념이 들어있는데 이 점을 드러낼 때는 “실체”가 아닌 “기체”(基體)로 번역합니다.
      어떤 것을 형성하고 완성하는 출발점 내지 토대라고 할까요?
      이러한 방향으로 해석하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는 이런 뜻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을 실현해가는 토대와 같은 것이다”

      믿음의 행위의 하나인 기도를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다 아시는데 왜 기도로 아뢰어야 합니까?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역사(役事)의 재료(토대)가 된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전자는 “확신” 비슷한 의미로,
      후자는 “증거” 비슷한 의미로 번역합니다.
      객관성과 관련 있는 “증거”(엘렝코스)로 번역했을 때 이 구절이 말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상반절이 형이상학 개념과 관련되어 있다면  하반절은 인식론 개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애초 믿음에는 주관성이 강해서 객관성이 강한 ‘증거’과 연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생물학에서 세포핵을 관찰할 때 염색을 하지요. 그렇게 보이게 된 세포핵은 엄격히 말해 원래 세포핵은 아닙니다. “염색약에 물든 세포핵”이지요. 하지만 이것은 세포핵에 대한 증거가 되지요.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는 것도 비슷합니다.
      믿음이라는 염색약이 들어갔지만 염색약 같은 믿음도 증거의 요소가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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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위일체(三位一體) 

      삼위일체는 성경적인 교리인가? 

      삼위일체에 관하여 성경은 무엇을 가르치는가?
      삼위일체는 성경적인 교리인가?
      기독교의 삼위일체 개념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그것을 완벽하고 충분하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는 설명은 고사하고 그것을 완벽하게 이해하기가 불가능한 개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존재 방식은 우리와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보다 한없이 위대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기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아버지,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 모두 하나님이시라고 가르칩니다.

      성경은 또한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라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삼위일체 내의 서로 다른 위격(인격)들의 관계에 대해 몇 가지 사실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그것은 인간의 생각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삼위일체가 사실이 아니거나 성경의 가르침을 근거로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삼위일체는 한 하나님께서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세 하나님을 제안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기 바랍니다.
      이 주제를 공부할 때, “삼위일체”라는 단어가 성서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단어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이 용어는 세 위격의 하나님을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된 것입니다.
      세 위격은 같이 공존하시고, 함께 영원하신 위격들로서 한 하나님을 구성하십니다.
      진짜 중요한 점은 “삼위일체”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개념은 성경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삼위일체에 대해 언급하는 내용들입니다.

      1.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신 6:4; 고전 8:4; 갈 3:20; 딤전 2:5).

      2. 삼위일체는 세 위격들로 구성됩니다(창 1:1, 26; 3:22; 11:7; 사 6:8, 48:16, 61; 마 3:16-17, 28:19; 고후 13:14). 

      창세기 1장 1절에서, 복수형의 히브리어 “엘로힘”(Elohim)이 사용되었습니다.
      창세기 1장 26절, 3장 22절, 11장 7절, 그리고 이사야 6장 8절에서, 복수 인칭 대명사인 “우리”가 사용되었습니다.
      ‘엘로힘’(하나님들)이라는 단어나 인칭 대명사 “우리들”은 복수 형태인데, 두 개 이상의 것들을 분명하게 지칭하는 히브리어입니다.
      이것이 삼위일체에 대한 명쾌한 주장은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복수적 측면을 나타내줍니다.
      하나님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 ‘엘로힘’은 명확하게 삼위일체 개념을 허용합니다.

      이사야 48장 16절과 61장 1절에서, 아들은 아버지와 성령에 대해 언급합니다.
      이사야 61장1절을 누가복음 4장 14-19절과 비교해 보십시오.

      마태복음 3장 16-17절은 예수님의 세례 사건을 묘사합니다.
      이 구절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성부 하나님께서 아들을 기뻐하신다고 선포하시는 동안 성령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 위에 강림하십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과 고린도후서 13장 14절은 삼위일체 내에서 서로 구별되는 세 위격을 보여주는 예가 됩니다.

      3. 삼위일체의 세 위는 서로 구별됩니다. 

      구약 성경에서, “여호와”(the LORD)는 “주”(the Lord)와 구별됩니다(창 19:24; 호 1:4).
      여호와 하나님은 한 아들이 가지십니다(시 2:7, 12; 잠 30:2-4).
      성령님은 여호와(민 27:8)와 하나님(시 51:10-12)과 구별됩니다.
      성자는 성부와 구별됩니다(시 45:6-7; 히 1:8-9).

      신약에서 예수께서는 보혜사(돕는 분)이신 성령님을 보내시는 것에 대하여 아버님께 말씀드리십니다(요 14:16-17).
      이는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아버지나 성령으로 여기지 않으셨음을 보여줍니다.
      이 외에,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아버지께 말씀하시는 모든 다른 경우들을 살펴보기 바랍니다.
      그분(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삼위일체의 다른 분이신(다른 위격이신) 아버지께 말씀하셨습니다.

      4. 삼위일체의 세 위는 하나님입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이십니다(요 6:27; 롬 1:7; 벧전 1:2).
      아들은 하나님이십니다(요 1:1, 14; 골 2:9; 히 1:8; 요일 5:20).
      성령은 하나님이십니다(행 5:3-4; 고전 3:16).

      5. 삼위일체의 세 위는 긴밀한 관계입니다. 

      성부는 다른 위에서 발생하지 않았으며, 성자는 성부로 부터 영원히 발생하셨으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 부터  영원히 방출하셨습니다.이것은 내부의 관계로서 삼위일체 그 어느 분의 신성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유한한 우리의 마음으로 무한하신 하나님에 관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아들에 관한 참조로는 누가복음 22:42, 요한복음 5:36, 그리고 요한일서 4:14을 보십시오.
      성령에 관한 참조로는 요한복음 14:16, 14:26, 15:26, 16:7, 그리고 특히 요한복음 16:13-14)을 보십시오.

      6. 삼위일체의 세 위는 서로 다른 과업들을 갖습니다. 

      성부는 우주 생성의 궁극적 원천 또는 원인(고전 8:6; 계 4:11)이시며, 하나님의 계시(계 1:1), 구원(요 3:16-17), 그리고 예수님의 인간으로서의 사역들(요 5:17. 14:10)의 궁극적인 원인이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일들을 일으키십니다.

      성자는 성부께서 다음과 같은 일들을 하실 때의 대리자이십니다.
      우주의 창조와 보전(고전 8:6; 요 1:3; 골 1:16-17); 하나님의 계시(요 1:1, 16:12-15; 마 11:27; 계 1:1), 그리고 구원(고후 5:19; 마 1:21; 요 4:42). 아버지는 그의 대리자 역할을 하는 아들을 통하여 이 모든 일들을 수행하십니다.

      성령은 성부께서 다음과 같은 일들을 수행하시는 수단입니다.
      우주의 창조와 보전(창 1:2; 욥 26:13; 시 104:30); 하나님의 계시(요 16:12-15; 엡 3:5; 벧후 1:21); 구원(요 3:6; 디도서 3:5; 벧전 1:2);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들(사 61:1; 행 10:38). 따라서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일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수행하십니다.

      삼위일체를 실례를 들어 설명하려는 많은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중적인 설명은 그 어떤 것도 완전히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계란(또는 사과)의 예에서, 껍질, 과육, 그리고 씨앗이 사과의 부분이며 사과 자체가 아닌 것처럼, 또는 달걀의 예에서 껍질, 흰자, 그리고 노른자는 달걀의 부분이며 계란 그 자체는 아니라는 점에서 삼위일체를 설명하지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하나님의 부분들이 아니며 또한 그들 각각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러한 설명은 삼위일체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없습니다.

      물의 실례는 다소 나아 보이지만, 여전히 삼위일체를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액체, 기체, 그리고 얼음은 물의 형태들입니다.

      아버님, 아들, 그리고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형태들이 아닌, 각자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이러한 실례들이 삼위일체의 그림을 제공할지는 몰라도, 그 그림은 완전히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은 한정적인 실례에 의해 온전히 묘사될 수 없으십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 교회의 역사를 통틀어 분열을 초래하는 쟁점이었습니다.
      삼위일체의 핵심적 측면이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에 제시되어 있지만, 몇 가지 부차적인 쟁점들은 명쾌하게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이시고, 아들도 하나님이시고, 성령도 하나님이시지만, 오직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만 존재하십니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성경적 교리입니다. 

      이 사실 외에서의 쟁점들은 어느 정도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본질 부분은 아닙니다.
      우리의 한정된 생각으로 삼위일체를 완전히 정의하려고 하는 것 보다는,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무한하게 높으신 그분의 본성에 초점을 맞추며 섬기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로마서 11:33-34).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삼위엘체라는 개념과 기능은 분명히 성경적인 근거를 갖는다.

      삼위일체(三位一體)                    

      1. 삼위일체의 용어와 형성

      이단들은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성경에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성경에 없다.
      그러나 삼위일체라는 개념과 그 용어는 분명히 성경적인 근거를 갖는다.

      성경은 하나님이 유일하신 한분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에 대해서 분명히 하나님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삼위하나님은 상호교류와 상호구별된다는 성경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이것을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성경 기록을 그대로 요약하고 정리하는 가운데 삼위일체라는 이론이 정립되어진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공동번역] 그 아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란한 빛이시요, 하느님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하신 분이시며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인간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셨고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표준새번역] 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요, 하나님의 본바탕의 본보기이시요자기의 능력 있는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죄를 깨끗하게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현대인의성경] 그 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며 하나님의 본성을 그대로 나타내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능력 있는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며 죄를 깨끗게 하시고 하늘에 계시는 위대하신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개역]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휘포스타시스)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KJV] Who being the brightness of [his] glory, and the express image of his person, and upholding all things by the word of his power, when he had by himself purged our sins, sat down on the right hand of the Majesty on high;

      [NIV] The Son is the radiance of God's glory and the exact representation of his being, sustaining all things by his powerful word. After he had provided purification for sins, he sat down at the right hand of the Majesty in heaven.

      [RSV] He reflects the glory of God and bears the very stamp of his nature, upholding the universe by his word of power. When he had made purification for sins, he sat down at the right hand of the Majesty on high,   

                                                

      히브리서 1:3에서 “휘포스타시스”(confidence essence, nature, person)라는 단어가 나타나는데 이 단어의 뜻은 “본질, 본체, 실체, 실상”이라는 뜻을 갖는다. 다시 말하여 예수님은 성부하나님의 “휘포스타시스”인 것이다.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본질은 동일하다는 이 단어가 삼위일체라는 단어를 탄생하게 한다.  

      이 단어는 단순한 유사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본질이라는 뜻이다.
      또한 히브리서 외에도 빌립보서 2:6에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체, 본질임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몰프헤)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몰프헤”라는 단어는 “휘포스타시스”와 동일한 뜻을 가진다.
      즉 “본체, 본질, 형상”이라는 뜻이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이시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아니하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본질에서 동등하다는 결론을 갖음으로서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AD 318년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장로 아리우스는 예수그리스도가 "비존재로부터 피조되었으며, 존재하지 않았을 때도 있었다"고 주장하며 유사본질이라고 주장함으로서 알렉산더 감독과 대립하여 초대교회를 분열시켰다.

      아리우스 장로는 알렉산드리아교회의 중요한 인물이었는데, 쉽게 말하자면,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고, 예수를 피조물로 보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선조라고 보면 맞다.

      알렉산드리아 지방의 주교인 알렉산더감독은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하였으며, 알렉산더 감독이 죽은 후에 그 서기였고 집사였던 아타나시우스가 아리우스를 상대로 힘겨운 토론을 하여 결국 승리를 갖게 된다.

      결국 아타나시우스가 예수가 하나님의 동일본질이며, 피조물이 아니라는 것을 토론을 통하여 입증하고 승리함으로서 삼위일체의 초석이 니케야회의를 통하여 정립되었던 것이다.

      삼위일체, 바로 알고 계신가요? 

      1. 요 1:1; 마 3:16-17

      삼위일체, 교인이라면 얼마나 귀에 익숙한 어휘입니까?
      그런데 솔직히 얼마나 난감한 어휘인지요?
      기독교의 핵심적 진리에 속한다는 것은 알지만 막상 설명하라면 말이 막히는 진리, 그것이 ‘삼위일체’란 진리입니다.
      그리고 문제는, 설명한다고 하는 많은 기독교인이 삼위일체를 양태론이나 삼신론 식으로 설명한다는 점입니다.
      양태론과 삼신론은 모두 삼위일체에 대한 잘못된 이론으로서 실제로 ‘이단’인 이론들입니다. 

      그렇다면 삼위일체니, 양태론이니 골치 앓을 것 없이 그저 열심히 믿으면 된다고 해야 할까요?
      그러나 믿음만 있으면 된다는 태도는 기독교의 건강한 신앙이 항상 ‘믿음의 열정(fervor of faith)’과 ‘진리에 대한 바른 이해(right understanding of truth)’의 균형에 의해 유지되는 사실과 역행합니다.

      이 균형은 정확히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과 ‘진리’의 균형입니다(요 4:24).
      ‘열심’이라면 이단 추종자들도, 공산주의자도 다 갖는 것인데 그들의 문제는 ‘진리에 대한 이해’가 없다는 점입니다.

      ‘삼위일체’는 어떤 진리입니까?

      삼위일체는 하나님께서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내 보여주신 ‘하나님의 본질적 구조’에 대한 진리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존재구조’ 안에 분명한 ‘세 분’이 계시며, 그 세 분은 깊은 관계성 안에서 ‘한 분’이시라는 것, 그것이 삼위일체입니다.
      이러한 삼위일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내어 주신 하나님의 ‘본질적 구조’에 대한 진리이기에 매우 중대한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누구신가를 알려면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하나님 자신에 대한 진리를 우리에게 알려주실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는
      (1)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를 위하여 필수이기 때문이며,
      (2) 기독교인으로서의 ‘바른 삶’을 위하여 필수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는 ‘기독교인으로서의 바른 삶’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합니다.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나타내시고 계시하신 진리 중 필요 없다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정확한 일조량의 햇빛이 지구에 닿게 하셨겠습니까?
      지구 위의 생명체들이 그것을 통해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사실을 계시하셨을까요?
      믿는 자들이 그 진리를 통해 생명 있는 자들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진리의 내용을 바르게 알려는 ‘진지함’ 없이 그저 자기 생각대로 믿어도 된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고 무지한 고집일 뿐입니다.

      성경은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마 5:5).
      성경이 말하는 ‘온유’는 배워야 할 것을 배우려는 자세를 포함합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하나님의 삼위일체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라고 물으면 다수의 교인이 ‘유일신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유일신’이라고 하는 순간 그들의 머릿속을 장악하고 있는 생각은 “단독적 주체의 신,” 그저 영원부터 영원까지 ‘싱글’인 신, ‘영원한 솔로’인 신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러한 ‘영원한 솔로’로서의 유일신은 정확히 이슬람의 알라신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제 알아볼 것이지만, 성경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러한 ‘영원한 솔로’의 신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그저 ‘단독적 주체’로, 즉 ‘영원한 솔로’로 생각하는 교인은 삼위일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요?
      가장 흔한 이해가 삼위일체를 하나님의 ‘세 면(面)’이나 하나님의 ‘세 역할(function)’로 보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아버지, 아들, 성령이란 ‘한 분 하나님’의 ‘세 면,’ 혹은 ‘세 역할’일 뿐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한 남자’가 집에서는 아버지, 직장에서는 과장님, 교회에서는 집사님인 것과 같다는 식의 설명을 들은 적이 있는지요?
      마치 한 남자의 ‘원맨쇼’처럼 말입니다.
      혹시 주일학교에서 그런 식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본 적이 있는지요?
      유감스럽게도 그 ‘원맨쇼의 하나님’ 설명은 정확히 ‘이단’에 속하는 이론입니다.

      교회사를 보면, 2세기에 사벨리우스(Sabellius)라는 사람이 그런 식으로 삼위일체를 가르쳤습니다.
      그는 ‘한 분 하나님’이 구약에는 ‘아버지’로, 신약에는 ‘아들’로, 교회시대에는 ‘성령’으로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단독적 주체의 하나님’이 역사 안에서 ‘세 역할’을 했다는 것이지요.
      아버지, 아들, 성령을 단순히 한 하나님의 세 면(세 양상, 세 역할)으로 본다고 해서 그의 이론을 ‘양태론(Modalism)’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성경의 삼위일체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교회의 지도자들(교부들)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교회 교부들은 사벨리우스의 양태론을 반(反) 성경적 이단으로 단죄하였습니다(AD 262).   

      우리는 진정한 삼위일체는 양태론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한 단독적 주체의 신이 ‘세 역할’을 하는 그런 신관이 아닙니다. 
      성경이 증언하고 교회가 ‘정통’으로 유지해온 삼위일체론에 의하면, 하나님의 존재구조 안에는 참으로 ‘세 분’이 계십니다.
      ‘세 분’ 아버지, 아들, 성령은 ‘단독적 신’의 세 면이 아니고, 각자가 자신의 주체성(selfhood)을 가지신 분명한 ‘세 주체들(three Persons)’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 대화, 일 등을 나누시는 ‘인격적 관계(personal relationship)’ 안에 있는 분들이신 것입니다.    

      아버지, 아들, 성령 각자가 자신의 ‘개별적 정체성’을 가진 ‘주체’시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 마태복음 3장 16-17의 예수님 세례 장면입니다.

      이 세례 장면에서 삼위일체 안의 ‘아들(Son)’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위한 세례를 받으십니다.
      그런데 거기에 누가 나타나십니까?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또 다른 분이 나타나시는데 하늘의 음성으로 나타나시는 ‘아버지(Father)’이십니다.
      주목할 것은, 예수님의 세례 장면에 아버지, 아들, 성령 세 분이 ‘동시에(simultaneously)’ 나타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각 분께서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현현(顯現)하여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증거가 사벨리우스의 양태론 이단과 어떻게 다른지 보시는지요?
      사벨리우스 말대로 ‘솔로’인 단독신이 어떤 때는 아버지로, 어떤 때는 아들로, 어떤 때는 성령으로 혼자 ‘원맨쇼’를 했다면, 마태 3장에서와 같이 아버지, 아들, 성령이 ‘동시에’ 각자의 신분으로 현현(顯現)하실 수는 없겠지요.

      이 마태 3장의 예수님 세례 장면은 그래서 양태론이 거짓인 것을 증명하는 중요한 성경 말씀입니다.

      이러한 성경적 증거 때문에 2세기의 현명한 교부들이 양태론을 이단으로 단죄했던 것입니다. 

      양태론에 반(反)하는 다른 성경의 증거들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예수님은 자신과 아버지를 존재적으로 분명하게 구별하십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향해 기도도 하시며(요 17:5), 자신의 뜻과 아버지의 뜻을 구별하시기도 합니다(눅 22:42).
      또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셨다는 구절은 성령과 아들(예수님)을 구별하는 말씀입니다(막 1:12). 

      ‘삼위일체’란 언어는 성경에는 없는 언어지만 위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삼위일체의 ‘내용’은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습니다.

      ‘원죄’라는 말이 성경에 없지만 원죄의 진리가 성경 전체에 흐르듯이 말입니다.
      성육신’이라는 말이 성경에 없지만 성육신에 대한 진리가 성경 전체에 있듯이 말입니다.
      삼위일체’란 용어는 3세기의 터툴리안(Tertullian)이 양태론을 반박하기 위하여 처음 사용하였습니다. 

      주목할 것은, 삼위일체의 진리는 이미 구약에서 힌트와 암시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구약에서 자신의 복수성과 단수성을, 즉 삼위일체적 특징을 나타내셨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주 ‘우리(we, our)’라는 표현을 쓰십니다(창 1:26; 사 6:8).
      또한 놀랍게도 ‘하나님’을 뜻하는 히브리어 ‘엘로힘’은 정확히 ‘하나님들’입니다.
      즉 단수가 아닌 복수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 1절도 정확히 하면 “태초에 하나님들(엘로힘, Gods)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입니다.
      그리고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전 12:1)”는 말씀의 ‘창조주’는 히브리 원어에서 ‘에쓰보레카’로서 ‘창조주들(Creators)’입니다.
      즉 “창조주들을 기억하라”입니다.
      그런데 구약은 하나님이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라는 것도 아울러 강조해 가르칩니다(신 6:4).

      자유주의 신학자 중에는 하나님의 복수적 표현인 ‘엘로힘’을 삼위일체와 무관한 것으로 해석하지만, 구약과 신약 전체의 전후관계와 문맥 안에서 볼 때, ‘엘로힘(하나님들)’은 삼위일체적 계시의 용어로 충분히 볼 수 있다는 것이 복음주의 신학의 해석입니다. 

      요즘 이단들에 대한 경계를 많이 하는데 막상 ‘정통교회’에 속해 있다는 교인은 이슬람의 알라(Allah)신과 성경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적 차이를 모르고 있습니다.

      당혹스런 사실이지요. 알고 보면 삼위일체는 기독교 진리의 근본이며 근간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성육신의 진리,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셨다”는 속죄의 진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이시다”라는 기독론적 진리는 모두 삼위일체의 진리에 서 있는 것들입니다.

      과연 삼위일체는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위해 가장 근본적이며 중대한 진리인 것입니다.
      본 장에서 저는 특히 양태론(Madalism)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아버지, 아들, 성령 각 분이 참으로 서로 구별되는 분들임을 말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 ‘세분들’이 어떻게 ‘한 분’이신지 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2.  신명기 6:4, 요한복음 17:5 

      하나님의 존재구조 안에 참으로 ‘세 분’이 계시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그 다음의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결국 ‘세 하나님들(three Gods)’을 가르치느냐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단호히 ‘아니오’입니다.
      기독교 신학은 ‘세 하나님들’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습니다.
      그 표현은 삼신론(tritheism)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삼신론이란 쉽게 말해서 서로 분리된 ‘세 신들’을 말합니다. 
      즉 각자가 자신의 주체성을 가진 세 신들이 ‘서로 따로 노는’ 식으로 존재한다는 이해의 신론입니다.
      따라서 삼신론에서는 만일 한 신이 없어져도 다른 ‘두 신들’의 존재에는 이상이 없습니다.
      이러한 삼신론은 정확히 힌두교에서 발견되며(부라마, 비쉬누, 시바), 몰몬교에서도 볼 수 있는 신관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삼위일체는 삼신론과는 전혀 다른 신론임을 이제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독교의 신학은 아버지, 아들, 성령은 분명한 ‘세 분’이시지만 그분들은 ‘함께’ 분명한 ‘한 분’이시기도 하다고 가르칩니다.
      즉 3 = 1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역으로 1 = 3임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아버지, 아들, 성령이 ‘분명한 세 분의 주체들’이시면서 동시에 ‘한 분(one)’이시란 말입니까?

      ‘한 분’이신 분이 어떻게 동시에 ‘세 분’이시라는 것입니까?

      삼위일체의 진리는 알고 보면 다양성(diversity)과 일체성(unity)의 관계를 말하는 문제입니다.
      주목할 것은 ‘3의 요소(threeness)’가 모여 ‘일체 됨(oneness)’을 이루는 것은, 즉 다양성(diversity)이 일하여 일체성(unity)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 속에 충만히 들어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 만물이 하나님의 능력(power)과 신성(divinity)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합니다(롬 1:20).
      바울의 말대로 자연은 하나님의 여러 면 - 하나님의 능력, 지혜, 아름다우심 등 - 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자연이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도 많이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연을 주시해 볼 때 자연 안에는 ‘3의 요소’가 모여 ‘일체성’을 이루는 것으로 차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환경인 ‘3차원 세계’는 물질, 시간, 공간이라는 ‘3 요소’로 되어 있습니다.
      우주의 물리적 세계를 지배하는 힘은 강력, 전자기약력, 만유인력으로 되어 있습니다.

      요즘 과학자들은 전자기력과 약력을 본질적으로 하나의 힘으로 봅니다.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되어 있으며,
      공간은 가로, 세로, 높이로 구성돼 있습니다.
      음악에서 장조의 으뜸화음은 도, 미, 솔 ‘세 음’의 화음입니다.
      미술에서 물감의 삼원색은 빨강, 노랑, 파랑입니다.
      우리의 생태계는 육지, 바다, 대기 3 요소입니다.
      이렇게 자연이 ‘이상하게’ 3의 요소를 드러내며 그 ‘3의 요소’가 함께 일하여 의미 있는 ‘일체성’을 이루는 것은 단지 우연일까요?
      아니면 바울의 말대로 자연이 하나님의 신성(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면일까요?   

      신학에서 자연이 드러내는 3과 1의 면들을 ‘삼위일체의 유비’라고 합니다.
      자연에서 발견되는 삼위일체의 유비들은 결코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정확하게 대변하지는 않습니다.
      때로 자연 안의 유비(analogy)를 잘못 사용하여 삼위일체에 대한 곡해를 낳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삼위일체를 물의 기체, 액체, 고체로 설명하거나, 달걀의 노른자, 흰자, 껍질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런 유비로 삼위일체를 설명하면 흔히 양태론적으로 빠져 혼란이 발생합니다.
      이러한 유비의 위험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자연 안의 ‘3의 요소’와 그것이 이루는 ‘일체성’의 신비는 삼위일체에 대한 무시할 수 없는 ‘흔적’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다양성’이 모여 ‘일체성’을 이루는 실체를 유기체(organism)라고 합니다.
      그라이더(J. Kenneth Grider) 교수께서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을 ‘유기적 일체성(organic unity)’으로 강조합니다.
      ‘유기적 일체’의 특징은 한 부분이라도 없으면 ‘전체’가 마비되고 없다는 것입니다.
      물질, 시간, 공간 중 하나라도 제거하면 ‘삼차원세계’ 전체가 없어져 버립니다.
      육지, 바다, 대기 중 하나라도 없애면 ‘생태계’ 자체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주목할 것은, 하나님의 존재구조에서 아버지(Father), 아들(Son), 성령(Holy Spirit) 각 분은 유기적으로 다른 분들과 관계되고 연결되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재적으로(ontologically) 한 분이 안 계시면 다른 두 분도 계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능적으로(functionally) 한 분의 일은 다른 두 분과의 관계 안에서만 있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세 분’이 ‘한 분’이시라고 할 때 그 ‘한 분’은 유기적 차원에서 ‘한 분’이신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아버지’의 일은 결코 ‘아버지 홀로’의 일이 아니며, ‘아들’의 일도 결코 ‘아들 홀로’의 일이 아닙니다.
      ‘한 분’의 일은 항상 ‘다른 분들’과 ‘함께’ 이루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창조도 ‘세 분’의 합동적 일이며(창 1:1-28; 요 1:3), 구원의 일도 ‘세 분’이 ‘함께’ 이루신 것입니다(요 3:16).

      삼위일체에서 중요한 신학적 용어가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라는 말입니다.

      ‘페리코레시스’는 ‘돈다(go round)’는 뜻의 희랍어로서 ‘상호투과,’ 혹은 ‘상호교통’을 의미합니다.
      아버지, 아들, 성령 세 분은 존재적으로, 기능적으로 ‘상호 교통’과 ‘상호투과’의 관계에 있다는 진리입니다.

      한 예로 육지, 바다, 대기는 서로 ‘상호투과’적 관계에 있습니다.
      ‘육지’는 대기에서 물을 내려주어 생명을 유지하며, 대기의 물은 바다가 줍니다.
      바다는 또 끊임없이 육지로부터 공급을 받습니다.
      남자가 여자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룬다는 진리도(창 2:24) 육체적, 정신적으로 서로 주고받으며 하나 되는 ‘상호투과’적 진리입니다.
      나무의 뿌리, 줄기, 잎에서 각 부분은 다른 부분과 연결되어서만 자신의 정체성을 갖습니다.
      (‘나무’의 예는 양태론적으로 이해되기 쉬워 조심해야 합니다)
      삼위일체에서 아버지, 아들, 성령 ‘각 분’은 ‘따로 분리된’ 분이 아니고 항상 유기적으로 다른 ‘두 분’의 본질을 나누어 받아 자신의 정체성을 갖는 분입니다.
      중세의 현명한 신학자들은 그래서 삼위일체를 나타내는 도형을 그렸습니다.

       

       Trinity - Good4Joy

      위의 도형에서 외곽선은 두 분 사이의 ‘구별’의 선입니다.
      즉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영어 “IS NOT"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것은 “아버지는 아들이 아니시다,” 혹은 “아들은 아버지가 아니시다”를 뜻합니다.
      그러나 내부의 선은 ‘동일화’의 선입니다.
      본질에서 ‘하나님’이시라는 점에서 모든 분들이 “IS," 즉 “하나님이시다”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도형은 한 편으로는 양태론을 피하며 다른 편으로는 삼신론을 피하는 좋은 도형입니다.
      ‘셰마(들으라)’라고 하는 신명기 6장 4절은 놀랍게도 하나님의 복수성과 단수성을 모두 천명하는 구절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엘로힘’으로서 ‘하나님들’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우리 ‘하나님들(복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단수)”라는 선언입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존재구조는 이처럼 ‘분명한 3분’께서 유기적으로, 페리코레스적으로 연결되시어 ‘분명한 한 분’을 이루고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한 분 되심’은 ‘도’라는 단순한 단수의 하나가 아니고 ‘도’와 ‘미’와 ‘솔’이라는 다양성이 만들고 있는 ‘풍요한 하나 됨’의 한 분 되심입니다.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피아노 건반에서 도, 미, 솔 ‘세 음’을 함께 쳐 화음을 들려줍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 소리는 하나입니까, 여럿입니까?”하고 묻습니다.
      눈치가 빠른 분은 “둘 다입니다”하고 대답을 하지요.
      (완전한 유비는 아니지만 도움이 됩니다) 아버지, 아들, 성령 세 분이 함께 ‘풍요한 한 분’을 이루고 계신 진리는 놀랍기만 합니다. ‘아들’ 예수께서는 그래서 영원부터 영원까지의 삼위적 영광을 함축하는 기도를 아버지께 하십니다:
      “아버지, 세상이 있기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누렸던 그 영광으로 지금 아버지 앞에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소서(요 17:5).”

      삼위일체가 얼마나 중대한 성경의 하나님에 대한 진리인지 ‘감’을 좀 잡으셨는지요?
      삼위일체의 진리는 기독교의 신관을 이슬람의 단독주체적 신관과 구별되게 하며, 모든 이단들의 잘못된 신관과 구별되게 하는 중대한 성경의 진리입니다.
      이단들의 공통적 특징은 ‘모두’ 성경적 삼위일체론에 서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증인은 단독유일신을 주장하며, ‘지방교회’라는 이단은 양태론을 가르칩니다.
      몰몬교는 삼신론적 신관을 갖고 있습니다. 이제 다음 글로 삼위일체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3. 요한복음 3:16, 요한일서 4:16 

      교회의 삼위일체론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요?
      머리 좋은 신학자들이 원탁에 둘러앉아 짜낸 이론인가요?

      신학자 몰트만(Jurgen Moltmann)은 삼위일체에 대한 결정적 계시자는 다른 분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지적했습니다.
      구약에서 이미 암시적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복수성과 단수성(삼위일체의 본질), 그것의 의미를 예수께서 오셔서 밝히 드러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누구십니까?
      예수는 삼위일체의 한 멤버이십니다.
      삼위일체에서 ‘아들(Son)’이신 분입니다.
      삼위일체는 말하자면 삼위일체의 멤버이신 분이 세상에 오시어 드러내 주신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아버지(Father)’의 존재를 분명하게 해 주셨고,                         
       예수님 자신이 ‘아들(Son)’이심을 밝히셨고,                       
       보혜사 성령(Holy Spirit)을 소개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이 삼위일체이심을 명백하게 알게 된 것입니다.
      몰트만(Moltmann)은 그래서 삼위일체에 대한 바른 이해는 예수 그리스도에서 출발하여야만 옳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한 분’보다는 ‘세 분’에서 시작하는 이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는 누구십니까?

      그는 태초부터 하나님의 삼위일체 존재구조에서 ‘아들 하나님(God the Son)’으로 계신 분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님을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창조의 일을 누가 하셨느냐고 하면 어떤 사람은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아들’이신 예수님도 창조의 일을 하셨음을 분명히 합니다(요 1:3).
      성령께서도 자신의 몫을 하셨습니다(창 1:2).
      창조는 아버지, 아들, 성령 삼위의 ‘합작’입니다.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살리는 ‘구원의 일’도 역시 삼위(三位)의 합동적 일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구절인데 놀랍게도 삼위일체적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 보내시는 아버지(Sender)                             
       독생자를 주셨으니 ------------------- 보내심을 받은 아들(The Sent)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 믿도록 돕는 성령(Helper)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라 -----> 삼위일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축복)

      기독교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진술의 의미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여기서 ‘인간이 되신 하나님’은 ‘아버지, 아들, 성령’ 세 분 전부가 아닙니다. 
      여기서 ‘인간이 되신 하나님’은 ‘아들 하나님(God the Son)’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고 할 때, 그 ‘인간이 되신’ 주인공은 ‘아들 하나님’이십니다.
      그 ‘아들’도 분명한 하나님이시기에(요 1:2)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진술은 참인 것입니다.
      그 아들이 인간이 되신 것은 ‘아버지’가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구원의 일을 완성하실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도우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일”은 역시 아버지, 아들, 성령 세 분의 합동적 일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16)”고 선포합니다. 이 선포가 삼위일체와 직결된 중대한 진리임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몰트만(Moltmann)은 하나님이 오직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시기에 이러한 선언이 가능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사랑이시라”는 말의 시제는 현재형인데 이 현재형은 영원성을 함축합니다. 즉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도 하나님은 본질에서 사랑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아버지, 아들, 성령 사이의 사랑입니다. 몰트만(Moltmann)은 절대유일적 신은 본질에서 사랑일 수 없음을 지적합니다. 왜냐하면 이슬람의 알라(Allah)같은 절대유일신은 창조 전에 ‘홀로’이기에 사랑할 대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한다면 자기 자신을 해야 하는데 그것은 나르시시즘(narcissism), 즉 ‘자기애’ 이상이 되지 못합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참 창조주 삼위일체 하나님은 본질에서 사랑이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절대 단독자가 아니고 삼위일체시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가 창조하신 세상을 움직이는 중요한 원칙이기도 합니다. 동물들의 본능 속에 심어져 있는 ‘사랑의 원리’는 매우 놀랍습니다. 단단한 호두껍질은 마치 ‘사랑’처럼 속 알갱이를 보호해 줍니다. 태양열은 ‘사랑’처럼 적당한 온기로 우리에게 내리쬐어 줍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인간 피조물 안에는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긍휼의 힘’이 있습니다! 

       

       

       

         알고 보면 삼위일체의 사실은 기독교의 모든 중대한 진리들의 근거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성육신(incarnation)’은 삼위일체 없이 설명이 안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대속(代贖)의 힘’을 가진 십자가라는 것도 삼위일체를 통해서만 사실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의 십자가도 대속(代贖)의 십자가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고찰했듯이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것도 삼위일체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진리입니다. 기독교가 선포하는 복음, 그것은 오직 구원이 삼위일체의 합작이기에 있을 수 있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신 분이 ‘하나님 자신’이시라는 사실이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낮춤의 하나님’이시며, ‘희생의 하나님’이시며, ‘긍휼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삼위일체가 사실이 아니면 십자가를 중심으로 한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이해들이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삼위일체를 가르치다 보면 받게 되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 아들, 성령 세 분이 모두 하나님의 신분을 가진 분이라면 어느 분에게 우리가 기도를 해야 하느냐는 질문입니다. 제가 언급했던 그라이더(J. K. Grider)교수께서 정확히 이 문제를 수업시간에 다루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분의 강의와 또 제가 그 후 공부한 내용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엄밀히 아버지, 아들, 성령 모두 하나님이시기에 어떤 분에게 기도해도 신학적 오류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공중기도를 할 때는 흔히 아버지, 하나님, 주님 등의 좀 더 대표적이며 포괄적인 명칭이 적절하다고 보겠습니다. 개인적 기도에서는 이러한 명칭들 외에 ‘예수님’께 직접 기도를 하는 것도 좋습니다. 인간이 되어 오신 중보자가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때 ‘성령’을 부르며 기도하는 일은 드문데 실제로 성령님께 기도하는 것이 잘못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역할은 ‘아버지’와 ‘아들’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일이기에 성령님은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을 부르는 것으로 만족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할 때는 실상 삼위일체 전체를 대상화하는 것이기에 성령님도 포함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특정한 분에게 기도하던지 간에 궁극적으로는 항상 ‘삼위(三位)’ 전체께 기도를 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를 부르며 기도할 때 우리는 이미 ‘아들’을 통하여, ‘성령’ 안에서 아버지를 부르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 기도를 할 때, 우리는 이미 ‘아들을 보내주신 아버지’에 대한 감사 안에서 그 기도를 하는 것이며, 또 성령의 도움으로 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분을 부르며 기도할 때 다른 분들이 섭섭하실까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요. 어떤 분에게 기도를 드리던지 기독교의 기도는 항상 ‘삼위일체 하나님’ 전체께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에 관한 다른 질문은 아버지, 아들, 성령 사이에 어떤 위계질서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현재 복음주의의 어떤 신학자들은 삼위(三位)의 존재적 동등설을 주장합니다. 즉 아버지, 아들, 성령 사이에 지위적으로 높낮이가 전혀 없다는 관입니다. 그러나 어떤 신학자들은 ‘지위의 차이’를 주장합니다. 그들은 아버지, 아들, 성령 세 분은 ‘하나님의 신분’이라는 점에서는 동등하지만, 위계질서에서 ‘아버지’의 우선됨(the primacy of the Father)이 있다고 합니다. 즉 ‘아버지’가 삼위일체 안에서 으뜸이시며 지도자급의 존재시라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의 증거가 ‘위계질서의 실재’ 쪽으로 더 강하게 말하고 있다고 보는 신학자입니다. ‘아들’ 예수께서 항상 아버지의 지도력과 권위를 인정하신 것이 한 증거입니다. ‘아들’께서 역사 안에 오시어 분명하게 하신 것이 인간의 ‘불순종의 역사’를 깨고 ‘순종의 역사’를 시작하신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정확히 ‘불순종의 아들들’의 자리에서 떠나 ‘순종의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은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을 천명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우선성에 대한 성경의 증거라고 봅니다.

       

       

       

         삼위일체의 진리는 하나님 자신께서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 자신에 대한 ‘놀라운 사실’입니다. 삼위일체는 그저 이론적 유희나 즐기라고 주신 지식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삼위일체의 진리를 알게 될 때, 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참으로 우리의 기쁨과 힘과 생명이 되도록 하나님은 이 진리를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이해를 통해 우리는 나 같은 죄인을 위해 하나님께서 참으로 인간이 되신 것을 압니다. 그 하나님께서 참으로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을 압니다. 이런 깨달음과 반응이 우리의 마음 중심에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삼위일체의 영광을 우리에게 드러내 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다소 길게 3차례에 걸쳐 삼위일체의 진리를 설명하였습니다. 이러한 저의 ‘노력’은 삼위일체 진리의 중요성에 대한 저의 인식 때문입니다. 모쪼록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의 생각 속에 성경의 삼위일체 진리가 새로운 이해로 뿌리내리기를 바라며, 또한 그 이해와 함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감사가 더욱 마음속에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목회적 시각으로 본 삼위일체론 교육                                    
        - 기독교강요 1권 13장을 중심으로-

       

      0. 들어가면서

      A. 고대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의 용어 해석(I,13,1-6)

      1.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해석

      2. 삼위에 대한 해석

      3. 새로운 신학적 용어들의 필요성과 한계

      B. 성자와 성령의 인격과 신성

      1. 성자의 인격과 신성

      a. 성자의 인격

      b. 성자의 신성

      2. 성령의 인격과 신성

      3. 삼위의 구별성과 일체성(16-20)

      a. 한 분 하나님

      b. 삼위이신 하나님

      C. 칼빈의 삼위일체론 대적들(21-29)

      1. 세르베투스

      a. 세르베투스는 위격(位格)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b. 세르베투스는 범신론적인 오류에 빠졌다

      2. Valentinum Gentilem

      a. 성부만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

      b. 이들은 성자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c. 이들은 성부와 성자의 차이점을 신성의 양으로 구별한다

      d. 칼빈의 반격

      D. 나가면서

       

       

       

        0. 들어가면서

       

      기독교인들이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왜 중요할까? 첫째는 성경의 하나님을 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믿는다는 것은 우상숭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인간은 자기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 이해에 따라 그들의 삶의 양식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는 일과 하나님의 백성답게 하는 일은 같이 가기 때문이다. 특별히 고도의 사고(思考)를 요구하는 삼위일체론은 그 지역 기독교인들의 삶의 양태를 결정하는 것이다.

      한국교회 성도들이 거의 대부분 양태론에 빠져 있다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이다. 그 원인은 교회 지도자들이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피조물 속에서 설명근거를 가져와서 설명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즉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피조물에서 예를 가져와 설명을 시도하다가 결국 양태론에 빠졌다는 말이다. 후론하겠거니와 칼빈은 이런 시도의 위험을 간파하고 자신은 그렇게 설명하지 않는다고 했다. 말하자면 한국 기독교인들은 상당한 부분 삼위일체 하나님을 왜곡되게 이해하고 있거나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데서는 기독교인으로서 바른 정체성을 기대하기가 힘들다. 인간 이성으로 하나님을 정확하게 이해한다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다. 작은 인간 이성으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크신 하나님을 모두 파악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런 무리한 시도는 결국 인간이 하나님을 정의하고 심판하는 오류에 빠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 최소한 성경이 계시하는 내용을 바로 이해해 보려는 자세는 요구되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마술신앙에 빠진 한국교인들은 이런 일에 태만히 한 것이다.

      칼빈이 삼위일체를 설명한 내용으로 보면 그가 성도들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한 것을 볼 수 있다. 크게는 칼빈의 기독교강요 자체는 삼위일체를 가르치는 교과서로 볼 수 있다. 그는 사도신경의 구조를 본받아 기독교강요를 삼위일체론적으로 형성했다. 제 1권은 창조주 하나님을, 제 2권은 구속주(救贖主) 하나님을, 제 3장은 구속을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성령 하나님을 다룬다.

      우리의 관심은 칼빈이 좁은 의미에서 삼위일체론을 어떻게 이해했고 또 어떻게 설명했는가 하는 것이다. 칼빈의 신관은 기독교강요 제 1권 10장에서 13장까지 인데, 10-12장까지의 내용은 13장에 나오는 삼위일체론의 양의 절반을 조금 넘는다.이것은 칼빈이 신론을 설명하면서 삼위일체론에 관심을 집중시켰음을 의미한다. 그는 여기서 먼저 고대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을 정리하면서 자기 나름대로 삼위일체론을 설명하고(I,13,1-6) 그 다음 그는 성경의 증거에 근거하여 성자와 성령의 신격과 신성을 설명한다(I,13,7-13).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삼위일체론의 대적들을 비판하면서 다시 바른 삼위일체론을 설명한다(I,13,14-29). 그가 이 교리를 설명하는 내용을 보면 성도들이 이해하기에 쉽도록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는 목회적인 시각으로 삼위일체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또

      칼빈이 기독교강요에서 삼위일체론을 열거한 과정은 그의 교육방법을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A. 고대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의 용어 해석(I,13,1-6)

       

      칼빈은 먼저 고대 교부들의 삼위체론을 간단히 점검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고대교부들이 삼위일체론을 설명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언급한 용어는 ‘하나님의 본질’, ‘삼위’, ‘위격’ 등이다. 칼빈은 이런 용어들을 차례로 설명하면서 한편으로는 고대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을 점거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성경 구절에 근거하여 그 내용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1.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해석

       

      그러면 칼빈은 ‘하나님의 본질’(essentia Dei)을 어떻게 설명할까? 우리는 그가 두 가지로 설명함을 볼 수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이 하나님은 인격(人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건전한 상태로 지키시기 위하여 그의 본질에 대해서는 별로 말씀하시지 않으시지만,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속성들로써 인간의 어리석은 상상을 모두 제거하시고 또한 인간의 마음의 대담무쌍함을 억제하시는 것이다”(I,13,1). 물론 칼빈은 여기서 ‘하나님이 인격이시다’라는 말을 직접 표현하지는 않는다. 칼빈이 여기서 하나님의 동작과 행위를 표현한 것을 보면 그가 인격임이 드러나는 것이다. 즉 칼빈은 하나님이 인격이심을 전제하고 하나님의 본질을 설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런 인격성은 ‘하나님의 적응성’을 설명하면서도 드러난다. “유모가 어린 아기들을 대할 때에 흔히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렇게 우리에게 맞추어서 말씀하신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만큼 그렇게 지능이 모자라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주목할 만한 것은 칼빈이 여기서 세속 철학의 비인격적인 범신론을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옛날 어떤 사람은 ‘우리가 보든 것이든, 보지 못하는 것이든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다’라고 매우 그럴듯해 보이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는 신성이 세계의 모든 개체에 주입되어 있다는 식으로 상상했다”

      그 다음 칼빈은 하나님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의 속성을 두 가지 언급한다. 그것은 ‘무한하심’(immesitas)과 ‘영적임’(spiritualis natura)이다. “하나님의 무한하심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잣대로 그를 재지 못하도록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며, 또한 그가 영이시라는 사실은 그에 관한 어떤 세속적이며 육신적인 상상에 빠지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칼빈은 이런 하나님은 인간이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분이심을 말하는 동시에 그의 편재성을 말하여 인간 이성의 한계를 벗어난 분임을 지적한다. 이 설명 속에서도 하나님은 인격이심을 암시한다.

      요컨대 칼빈은 하나님의 본질을 설명하면서 그가 인격이라는 것과 그는 인간의 이성의 능력을 벗어난 무한하신 분임을 지적한 것이다. 즉 그는 하나님이 인간 이성을 초월하는 크신 분임을 독자들에게 인식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술신앙에 빠져 하나님을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용하는 미성숙한 교인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것이다.

       

      2. 삼위에 대한 해석

       

      칼빈은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 설명한 다음 하나님은 한 분이지만 이 하나님은 구별된 삼위로 존재하심을 설명한다. “그는 자신을 유일하신 한 분으로 선언하시는 한편, 동시에 세 분의 위격으로(삼위로) 구별되게 바라보도록 그렇게 자신을 계시하신다” 칼빈은 이 같은 사실을 ‘하나님 안에 세 본체가 계신다’라고도 표현한다.

       

       

       

       

       

       

       

      그 다음 칼빈은 세 분이 구별된 분임을 설명한다. 우선 그는 성부와 성자는 구별됨을 설명한다. 그는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은 “그 본체의 형상”이라고 말씀하는 히브리서 1:3을 인용한다. 그는 이런 표현 속에는 성자와는 다른 어떤 특질이 성부에게 있음을 의미한다고 말하여 이 두 분은 구별됨을 지적한다. 그러면 성부와 성자는 어떤 관계에 놓여 있을까? 칼빈은 성자 안에서 성부가 자신을 온전히 표현한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이 두 사이의 관계를 설명한다. “그러나 성부께서는 비록 그가 그의 고유한 특성을 통해 아들과 구별되지만 성자 안에서 전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셨기 때문에, 그가 성자 안에서 자신의 본체를 나타내셨다고 주장하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된다.” 위의 내용을 도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칼빈은 성령 역시 성부와 구별되는 분임을 지적한다. “그가 성부와 다른 분이신 것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는 여기서 성령과 성부의 구별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성령은 하나님인 동시에 이 하나님 안에 있는 세 본체 가운데 하나임을 말한다.

      이와 연관하여 칼빈은 고대 교부들의 ‘위격’ 내지 ‘본체’ 이해를 설명하면서 동방 교부들과 서방 교부들은 이 점에서 일치함을 지적한다. 칼빈에 의하면 라틴 교부들은 ‘위격’이라는 말에 persona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그것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subsistentia(실재)이고 희랍 교부들은 ‘하나님 안에 세 얼굴이 계시다’(προσωπα in Deo esse)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그 의미는 동일하다고 한다(I,13,2).

      지금까지 내용을 도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신약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성령이 성자를 드러낸다면, 결국 성자 뿐 아니라 성자가 반영하는 성부의 본체도 성령 안에서 반영된다고 볼 수 있다. 칼빈은 여기서는 이 문제를 언급하지는 않았다.

       

      3. 새로운 신학적 용어들의 필요성과 한계

       

      칼빈은 ‘삼위일체’, ‘위격’과 같은 용어들을 만들어 성경의 진리를 설명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본다. 특히 대적들에게 대답하려고 할 때 이런 용어들이 매우 유용함을 지적한다. “즉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의 확실한 규범을 성경에서 찾고, 마음의 생각과 입으로부터 나오는 일체의 말을 여기에 순응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고 난해한 성경의 내용들을 보다 명백한 말로 설명하는 것을 누가 못하게 하는가?”(I,13,4). 즉 칼빈은 거짓 교사들을 폭로하기 위해 ‘삼위일체’, ‘위격’과 같은 표현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겼다. 이를테면, 칼빈은 아리우스에 대항하여 ‘호모우시오스’(동일본질)라는 용어가 효과적으로 작용했고 사벨리우스에 대항하여 ‘위격’ 곧 ‘한 분 하나님 안에 삼위가 일체로 계심’이라는 용어가 효과적이었음을 지적한다.

      그럼에도 칼빈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한다면 ‘삼위일체’ 또는 ‘위격’이라는 용어는 잊혀져도 좋다고 생각한다(I,13,5). 말하자면 이런 용어들은 진리를 인식하는데 도구 역할을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용어 문제를 두고 고대의 수많은 교부들은 일치하지 않았음과 이들이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매우 주저하며 신중했음을 지적한다.(Inst I,13,5). 칼빈은 어거스틴도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주저했음을 지적한다. “즉 그는 이와 같은 중대한 문제를 논하기에는 인간의 말이 빈곤하기 때문에 ‘휘포스타시스’라는 용어를 부득불 사용하게 되었으나 이러한 용어로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이시라는 것을 설명할 수 없고, 다만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실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묵과하지 않기 위해 사용한 것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칼빈은 이들이 새로운 용어들을 사용하는 것이 필요함을 인식하도록 설득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고대 교부들이 당시에 등장한 여러 대적자들과 싸울 때 이런 용어들이 있었더라면 더욱 효과적으로 물리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이를테면 아리우스에 대항하여 성부와 성자의 본질이 같음을 말하면 아리우스의 정체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그 본질이 동일하시다고 주장해 보라. 그러면 이 변절자의 가면을 벗길 수 있을 것이다” 또 사벨리우스 곧 성부와 성자, 성령의 명칭은 신격의 구별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벨리우스에게 ‘하나님의 본질 안에 삼위가 있다’라고 주장하면 그의 공허한 다변을 억제케 함을 지적했다.

      그 다음 그는 삼위일체론을 정리한다. “본체들의 하나됨” 그리고 “한 본질 안의 셋이 있다는 것은 삼위일체의 세 위격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가 위에서 언급한 자기의 삼위일체론에 기초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분 하나님이시나 성자는 성부가 아니며 성령 또한 성자가 아니며 그들 각자는 서로가 어떤 특성에 의하여 구별된다”

      칼빈은 지금까지의 내용을 마지막 절에서 자기의 삼위일체론을 요약 정리한다.

      1) “위격”은 하나님의 본질에 속하며 세 “위격”들은 상호 관계하며 각기 비공유적 특성으로 서로 구별된다.

      2) 실재인 “위격”은 본질과 분리될 수 없으며 특별한 표지가 있어서 본질과 구별된다. 칼빈은 이 말을 다시 설명한다. “그래서 나는 세 실재는 상호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각자의 특성에 의하여 서로 구별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3) 각 위에게 고유한 것은 어떤 것이라도 전달될 수 없다.

      b. 성자의 신성 

      칼빈은 요한복음 1장 첫 부분에 기록된 내용이 성자가 하나님이심을 매우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성자의 신성을 강조한다. “요한은 이 말씀에 견고하고 영원하신 본질을 부여하고 그에게 고유한 것이 있음을 인정하며, 또한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심으로 우주의 창조자가 되셨는가를 명백히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모든 계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로 불리는 것이 마땅하듯이, 이 하나님의 실체를 지니신 이 말씀은 최고의 자리 곧 모든 예언의 원천의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그 이유는 이 말씀이 불변하시며 하나님과 영원히 동일하시고 바로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성자의 신성과 위격을 동시에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리고 칼빈은 ‘성자의 신성’을 논하면서(I,13,7) 성자가 성부에게서 나왔음을 두 번이나 강조하며 그의 신성과 동시에 위격성을 보여준다.

      칼빈은 또 “말씀의 영원성”(I,13,8)을 논하면서 성자가 시간을 초월해서 영원 속에 계신 분임을 말함으로써 그의 신성을 증거한다. 그는 창조 기사를 설명하면서(창 1:3)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기 이전에 이미 그 말씀이 존재하고 계셨음을 지적한다. 칼빈은 성자에게는 시작이 없다는 것을 요한복음 17장을 인용하여 증거하고 요한복음 1장 1-3절을 언급하면서 그의 영원성을 증거하여 그의 신성을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부와 성자 사이의 관계와 그의 신성에 대해 요약 정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한 번 굳건히 정리할 수 있다: 시간의 처음 이전에 하나님에 의해 나셨고, 영원히 그와 함께 거하셨다. 이로써 이 말씀의 영원성, 그의 참된 본질 그리고 그의 신성이 증명되는 것이다.”

      그 다음 칼빈은 구약성경이 성자가 하나님임을 증거하는 구절로 고개를 돌린다.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 하신 말씀이라는 구절이 그의 신성을 입증한다는 사실을 언급한 다음이사야 선지자의 말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과 하나님의 고유한 속성 가운데 하나인 최고의 권능을 지니신 분으로 제시한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신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칼빈은 또 예레미야의 발언 곧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 23:5-6)는 구절과 “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받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살 것이며 이 성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는 이름을 얻으리라”(렘 33:16)는 구절이 성자께서 영원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제시한다고 말한다.(I,13,9). 칼빈은 또 에스겔이 말하는 ‘여호와 삼마’(겔 48:35)라는 표현과 모세가 말하는 ‘여호와 닛시’라는 표현 등은 여호와가 그리스도임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I,13,9.).

      흥미로운 것은 칼빈이 구약에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천사)’를 그리스도와 연결시킨다는 것이다(I,13,10). 그는 기드온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가 그로부터 희생제물을 받는다는 사실에서(삿 6:11,12,20,21,22; 7:5,9), 그리고 삼손의 부모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천사’가 하나님이라는 사실 속에서(삿 13:16,18,20,22,23), 호세아서를 인용하여 야곱이 씨름한 그 천사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호 12:5)이라는 사실 속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창조함을 받은 천사가 아니라, 충만한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이심을 말한다(I,13,10). 칼빈은 또 스가랴서 2장에 나오는 ‘다른 천사를 보내시는 천사’(슥 2:3)가 만군의 여호와임을 말하며 이사야의 발언 곧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사 25:9)고 했는데 이 여호와의 천사가 바로 그리스도임을 말한다.

      그 다음 칼빈은 신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문제로 눈을 돌린다(I,13,11). 그는 사도들이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내용 곧 성육신 사건을 증거하는 모든 구절들이 그의 영원한 신성을 증거함을 말한다(I,13,11). 이를테면, 바울이 로마서 9:32-33에서 이사야서 8:14를 인용하며 예언이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고 말함을 주목하고 그리스도가 만군의 여호와임을 천명한다. 칼빈은 이사야서 45:23을 인용하는 로마서 14:10-11 내용 속에서도 그런 내용을 본다. 또 시편 68:18을 인용하는 에베소서 4:8에서, 이사야 6:1을 인용하는 요한복음 12:41에서, 시편 102:25을 인용한 히브리서 1:10에서, 시편 97:7을 인용하는 히브리서 1:6에서 그런 내용을 본다. 칼빈은 사도들이 구약의 이런 내용들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하는 것은 성경을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칼빈은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시오(시 102:13), ‘온 땅과 모든 섬들을 다스리시는 것으로 말씀하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로 본다(시 97:1).

      그 외에 칼빈은 요한이 말씀을 하나님이라고 선포한 내용(요 1:1,14), 바울이 그리스도를 가리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롬 9:5)이라고 말한 내용,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심판대에 앉는다는 내용(고후 5:10), 또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었다(딤전 3:16)는 내용, 그만이 모든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딤전 1:17)는 내용,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빌 2:6-7)라는 내용, 요한이 예수를 가리켜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이라”(요일 5:20)는 내용,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행 20:28라는 내용, 도마의 고백(요 20:28) 내용 속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본다.(I,13,11).

      그뿐 아니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사역 속에서 그의 신성을 본다(I,13,12). 그는 그리스도의 창조와 섭리 사역은 그의 신성을 보여준다고 한다. “섭리와 권능으로 온 우주를 다스리시며 그의 능력의 명령으로 만물을 붙드신다는 것은 - 이는 사도가 그리스도의 사역을 말씀하는 것인데(히 1:3)- 오직 창조주만이 행하는 일인 것이다”나아가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죄하심 속에서(사 43:25; 마 9:6), 사람의 마음의 은밀한 생각을 꿰뚫어 보는 일 속에서(마 9:4; 요 2:25) 그의 신성을 본다. 또 칼빈은 예수께서 스스로 베푸신 이적 속에서 그의 신성이 드러나지만, 그가 제자들에게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병자를 낫게하며, 귀신을 내어 쫓는 권능을 주셨다는 사실 속에서(마 10:8; 막 3:15; 6:7) 그의 신성이 드러난다고 말한다(I,13,13).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 교회의 서고 무너짐인 것처럼 그것을 규명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사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삼위의 신성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다음과 같은 벤델의 말은 주목할 만하다. “누구든지 삼위의 신성을 부인하면 그리스도의 신성을 마멸시키며 이와 더불어 기독교 신학의 모퉁이 돌을 내칠 뿐 아니라 복된 믿음을 저버리게 된다”

      우리는 칼빈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거하는 내용이 동시에 그의 인격을 보여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성자의 신성과 그의 인격은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위의 내용을 요약하면 칼빈은 성자가 성부에게서 나오셨다는 것과, 성자가 인격인 동시에 하나님임을 성경 구절을 통해 쉽게 설명했다는 것이다. 즉 칼빈은 이성에 의해 철학적인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설명하지 않고 성경 계시 중심으로 설명을 시도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오직 성경’이라는 종교개혁 원리에 충실했다고 본다.

       

      2. 성령의 인격과 신성 

      칼빈은 성자에 대한 내용에 비해 성령의 신성에 대해서는 그렇게 많이 논하지 않는다(I,13,14-15). 그런데 그는 성령의 인격성과 신성을 정확하게 가르친다. 칼빈은 성령의 인격성과 신성을 동시에 설명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논하기로 한다.

      칼빈은 성령이 창조 사역에 관여하셨음 속에서 그의 신성이 드러난다고 하는 동시에 문장 표현을 통해 그의 인격성을 암시한다. “그는(모세)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혹은 형체가 없는 물질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고 보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보도는 우리가 지금 지각하고 있는 우주의 아름다움이 성령의 능력 덕분에 힘있게 보존되고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우주가 그런 아름다움으로 장식되기 전부터 성령께서 그 혼돈 덩어리에 관여하셨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칼빈의 발언도 성령의 인격성과 신성을 잘 반영한다. “성경이 성령께 속한 임무로 가르치고 또 경건한 자들이 실제로 성령께서 행하시는 것으로 느끼는 일들 - 세상에 가득하여 만물을 지탱시키고, 자라게 하고, 하늘과 땅에서 만물을 살리는 등의 일들 - 은 피조물이 행하는 일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것이다. 또한 성령께는 한계로 정해진 것이 없기 때문에 그는 피조물들의 범주에 속하지 않으시며, 만물에게 생기를 주입시키시고 본질과 생명과 움직임을 불어넣어 주시는 데에서 그의 신적인 위엄이 드러나는 것이다”

      칼빈은 성령의 중생시키시는 사역 속에서도 그의 신성과 인격성을 보여준다. 그는 성령의 중생시키는 사역을 설명하면서 성령의 독자성을 지적할 뿐 아니라 이 사역이 하나님께만 속한 기능임을 지적한다. “그런데 성경은 곳곳에서 성령께서 중생을 일으키시는 분으로, 그것도 빌려온 능력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중생을 이루시는 분으로 말하고 있고, 또한 중생뿐만 아니라 미래의 영생을 베푸시는 주체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 칼빈은 성도들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일, 칭의와 성화 그리고 은사를 분배하는 성령의 사역을 설명하면서 성령의 독자적인 위치와 그의 신성을 설명한다. 끝으로 칼빈은 성령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으로서 그 분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만일 성령께서 하나님 안에 계신 실체가 아니시라면, 선택과 의지가 그에게 있다는 식으로는 결코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성령께 신적 권능이 있음을 매우 분명하게 가르치며, 또한 그가 본체로 하나님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칼빈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성령이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성경 구절을 언급함으로써 그의 신성을 증명한다(I,13,15). 먼저 칼빈은 ‘하나님의 성전’을 ‘성령의 전’과 동일시 한다는 데서(고전 3:16-17; 6:19; 고후 6:16) 그의 신성을 본다. 동시에 칼빈은 베드로가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책망할 때 사용한 성령의 명칭에서도(행 5:3-4) 그와 같은 것을 본다. 또 칼빈은 사도들이 하나님을 지칭하는 구약성경 구절을 신약에서 인용할 때 그 분을 성령으로 표현하는 것 속에서도 그의 신성을 본다(사 6:9; 행 29:25-26; 벧후 1:21; 사 63:10). 그 외에 칼빈은 성령에 대한 범죄를 설명하면서 그 분이 하나님임을 증거한다(I,13,15).

      위의 내용은 칼빈이 성령을 증거할 때 사변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오직 성경을 주목하여 그의 신성을 증명해 낸다. 여기서도 그는 ‘오직 성경’이라는 종교개혁의 원리에 충실함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런데 칼빈은 여기서는 성자를 설명할 때와는 달리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온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의 관심은 오직 성령의 신성에 집중한다.

       

      3. 삼위의 구별성과 일체성(16-20) 

      칼빈은 삼위일체에서 성자와 성령이 어떤 분인지를 각각 성경의 증거로서 규명한 다음 세 분 사이의 관계를 설명한다.

       

      a. 한 분 하나님 

      칼빈은 하나님이 한 분임을 증명하기 위해 세례와 믿음을 설명한다. 세례는 한 분 하나님 이름으로 베풀어진다는 것이다. “세례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안에서 자기 자신을 완전히 명확하게 보여주신 한 분 하나님의 이름으로 베풀어질 것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본질 안에 삼위 - 한 분 하나님이 오직 이 분들 안에서 알려지신다 - 가 거하신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게 인식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칼빈은 믿음이 오직 한분 하나님과 관계함을 지적하는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는 명령은 우리가 한 믿음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믿는 것과 연결되어 성자와 성령이 하나님의 본질임을 추론해 낸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오직 한 분이시라는 것이 이미 확실하게 세워진 원리이므로, 우리는 말씀과 성령이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이시라고 결론짓게 되는 것이다”

       

      b. 삼위이신 하나님 

      한 마디로 칼빈은 여기서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은 구별되는 분들임을 설명한다. 칼빈은 이 구별을 설명하기 위해 먼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의 말을 인용한다. “한 분 하나님을 생각하자마자 즉시 삼위의 광채에 싸이게 되고, 삼위를 구별하여 보자마자 곧바로 다시 한 분 하나님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이 구별을 설명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단어들 자체가 진정한 구별을 시사하여,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의 사역들에 따라서 이 이름들로 다양하게 불리는 그 명칭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우리는 여기서 칼빈이 양태론과 삼신론을 동시에 경계함을 볼 수 있다.

      성경에는 한 꺼 번에 세 분 곧 성부, 성자, 성령이 구별된다고 말하는 구절이 없기 때문에, 칼빈은 우선 성경에서 성부와 성자가 구별되는 것을 말하는 내용을 언급하여 그 구별을 규명해 낸다(슥 13:7; 요 5:32; 8:16; 1:3; 히 11:3). 특별히 성부가 성자를 이 세상에 보내신 사실을 언급하여 이 두 분이 구별됨을 규명한다(요 1:18; 17:5). 그 다음 칼빈은 성령이 아버지에게서 나온다는 사실과(요 15:26; 14:26) 예수께서 다른 보혜사(요 14:16)를 보내신다는 구절을 언급하며 세 분이 구별됨을 보여준다.

      칼빈은 다시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 세 분의 순서를 중심으로 세 분이 각기 다른 위격임을 보여주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주제를 논하면서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사람들의 일에서 나온 비유를 사용하는 것이 위험함을 지적한다는 사실이다. 먼저 칼빈은 하나님의 사역을 중심으로 그 순서에 대해 말한다. “모든 활동의 시작과 모든 일의 근원과 원천은 성부께 있고, 또한 지혜와 경륜과 모든 일의 질서 있는 시행은 성자께 있으며, 또한 그 활동의 능력과 효력은 성령께 있다는 사실이다”칼빈은 사람들이 먼저 성부를, 그 다음은 그에게서 나온 지혜인 성자를, 마지막으로 두 분에게서 나온 성령 곧 하나님의 계획과 작정들을 시행하는 능력을 생각한다고 말함과 동시에 고대 교회가 가르친 삼위 간의 관계를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자께서는 오직 성부께로부터 오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께로부터 동시에 나오신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칼빈의 목회적인 교육 자세를 볼 수 있다. 그는 성도들이 이것을 잘 이해하기 위해 연거푸 비슷한 내용으로 설명하고 있다.

      칼빈은 성부, 성자, 성령이 구별될 뿐만 아니라 이 셋은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설명한다. “성자는 성부와 함께 한 하나님이시다. 그 이유는 그는 동시에 성부와 한 성령을 가지기 때문이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영이므로 성부나 성자와 전혀 상관 없는 다른 존재가 아니다”라고 한다. 칼빈은 삼위일체 세 분의 관계와 각각의 고유성에 대한 내용을 명확하게 가르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각기 세 분에게는 고유한 특성이 있다는 것과 더불어 각 본체(위격) 안에 온전한 신적 본성이 거하시는 것이다”

      칼빈은 마지막에서(I,13,20) 지금까지 삼위일체 교육 내용을 요약 정리한다. 먼저 알아야 될 것은 하나님이라는 단일하고 유일하신 본질이며 그 다음 그 안에 삼위 혹은 세 본체가 계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 분 사이의 관계를 설명한다. 이 말은 칼빈은 각 부속품의 특성을 잘 설명한 뒤에 그 부속들이 저절로 서로 맞추어져 몸통 전체를 이루게 하듯이 성도들이 하나님의 본질, 세분의 위격의 특성 그리고 그 각각의 관계를 잘 설명하여 성도들의 머리속에서 저절로 삼위일체가 종합될 수 있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아래 도식과 같은 그림이 그려지도록 만든다는 말이다. 그리고 칼빈은 여기서 매우 목회적인 발언을 한다. “그러므로 알아서 유익이 되는 내용을 간단히 제시할 것이니, 진지함을 정말로 사랑하며 또한 주어진 믿음의 분량대로 만족하는 이들은 이를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칼빈은 지금까지 내용을 도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C. 칼빈의 삼위일체론 대적들(21-29)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칼빈이 자신의 삼위일체론을 열거한 다음, 항목을 정해 놓고 대적들을 비판한다는 점이다. 아마 그 당시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세력들이 교인들을 미혹했기 때문에 목회적인 차원에서 교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 같다. 칼빈은 이 부분에서 앞에서 언급한 자기의 삼위일체론을 매개로 하여 이단들을 비판하면서 교인들에게 삼위일체론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칼빈은 모든 이단의 근원이 사탄임과 이단들의 핵심 공격 내용이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부인하는 동시에 각 위격의 구별을 부정하는데 있음을 먼저 집고 넘어간다.그리고 칼빈은 처음부터 삼위일체론의 대적을 간헐적으로 언급한다. 이를테면 그는 범신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그런 사상을 비판한다. “고대의 어떤이는 ‘우리가 보는 것과 또 보지 못하는 것 모두가 하나님이시다’라고 그럴 듯한 말을 했다. 이 말에 의하면 그는 세계의 모든 부분에 신성이 침투해 있다고 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칼빈은 마니교의 이원론적 오류를 지적하고 지나간다. “저들은 두 원리를 가정함으로써 악마를 하나님과 거의 동등한 지위에 놀려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칼빈은 양태론을 비판한다. 또 그는 성자의 신성과 관계해서는 그것을 부인하는 유대주의를 대적으로 삼고 그들의 문제점을 논한다. 우리는 여기서 칼빈이 정식으로 비판한 그의 대적들만 분석하고 평가하려고 한다.

       

      1. 세르베투스 

      칼빈은 세베르투스의 반(反)삼위일체론을 비판하면서 먼저 자신의 삼위일체론을 일목요연하게 열거하고 하고 넘어간다. 마치 칼빈은 비판의 표준을 제시라도 하는 듯이 그렇게 한다. “한 분 하나님의 본질은 단일하며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 그 본질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연장된다는 것, 그러나 반면에 성부의 고유한 속성이 성자와 다르며, 성자의 고유한 속성이 성령과 다르다는 것을” 칼빈에 의하면 이런 삼위일체론만 구비되면 아리우스와 사벨리우스는 물론 고대의 잘못된 이단들의 입을 막을 수 있다고 한다.(I,13,22).

       

      a. 세르베투스는 위격(位格)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면 칼빈은 세르베투스의 문제점은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칼빈은 세르베투스가 위(位)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연고로 반삼위일체자가 된 것으로 판단한다. 칼빈은 지적하기를 세르베투스는 “하나님의 본질 안에 삼위가 존재하신다고 이야기하면 결국 하나님이 셋으로 분리되신다는 것이 되는데, 이 세 가지 연합은 하나의 상상인데 이는 하나님의 단일성과 모순되기 때문이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세르베투스가 삼위일체를 믿는 자들을 “Trinitarios”라고 부르며 이들이 무신론자들이라고 비난한 것을 주목한다.이것은 세르베투스가 고대 교부들이 창안한 위격(位格)이라는 이 단어를 바로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칼빈은 또 세베르투스의 주장을 묘사하되 “그는 위(位)들은 하나님의 본질 속에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요 우리에게 이런저런 형식으로 하나님을 나타내 주는 특정한 외형적인 관념들이라고 주장하였다. 태초에는 말씀과 성령이 본래 동일했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 구별이 없었는데,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으로서 나오시고 성령이 하나님으로부터 또 다른 하나님으로 나오신 후부터 구별이 생겨났다는 것이다”라고 했는가 하면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었고, 그의 관념의 반영이었으며, 또한 성령은 그의 신성의 그림자였다는 식으로 설명하기도 했으나”라고 열거했는데, 이것은 양태론과 같은 것이다.

       

      b. 세르베투스는 범신론적인 오류에 빠졌다 

      칼빈은 세르베투스가 위격을 무시한 것은 결국 범신론에 빠진 연고로 그렇게 되었음을 주목한다. 즉 세베르투스가 범신론적인 오류에 빠진 나머지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비판한다. “결국 그는 마치 우리 속에도 실체로 있고, 또한 나무와 돌 속에도 있는 그 동일한 영이 하나님의 일부분인 것처럼, 분배의 양식에 따라서 보면, 하나님의 일부분이 성자에게나 성령에게 있는 것이라고 선언하여, 그리스도와 성령의 신성을 무(無)로 돌려버리는 것이다”(Inst I,13,22).

      칼빈은 세르베투스가 위(位)란 단순히 “하나님의 영광의 가시적인 현현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을 주목하고 요한복음 1:1과 요한복음 17:5에 근거하여 성부와 성자 위격이 실재함을 규명해 낸다. 그리고 칼빈은 성령의 위격을 부인하는 세르베투스의 발언에 대항하여 그가 범신론적 오류에 빠진 결과 그렇게 주장함을 주목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저주스러운 것은 성자와 성령을 다른 피조물들과 구별하지 않고 완전히 뒤섞어 놓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본질 속에는 여러 부분들의 구분이 있는데, 그 각 부분이 하나님이시라고 공공연히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특히 신자들의 영들이 하나님과 똑같이 영원하며 본질이 동일하다고 진술하며, 다른 곳에서는 사람의 영혼뿐만 아니라 다른 피조물들에게까지도 본질적인 신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칼빈이 본 세르베투스의 문제점이 그가 성자와 성령을 피조물과 혼합시켰다고 지적한 니이젤의 말은 매우 적절한 것이다.

      한 마디로 칼빈에 의하면, 세르베투스가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이유는 그가 위격의 의미를 몰랐고 동시에 범신론적인 오류에 빠져 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2. Valentinum Gentilem 

      a. 성부만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 

      칼빈은 여기서 괴물이라고 표현한 이 인물의 이름을 거론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칼빈 선집(OS)의 편집자를 통해 그의 이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 반(反) 삼위일체론자인 발렌티눔은 무엇을 주장했을까? 칼빈이 묘사한 내용을 언뜻 보아도 이 괴물은 종속론자가 아니면 아리우스의 추종자임을 알 수 있다. 칼빈이 묘사한 그의 정체는 다음과 같다. “어떤 악당들이 세르베투스의 불경스러움의 혐오와 수치를 피하기 위하여 삼위가 계시다는 것을 고백하지만, 거기에 단서를 붙이기를, 홀로 참되고 정당한 하나님이신 성부께서 성자와 성령을 만드시고 그들에게 자기 자신의 신성을 전입시켰다” 칼빈은 이 괴물의 종속론적인 발언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성부가 유일하게 본질 수여자(essentiator)라는 점에서 성자 및 성령과는 구별된다” 다음과 같은 발언도 여기에 속한다. “우선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흔히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신다는 사실을 논지로 삼고, 이를 근거로 하여 오직 성부만이 정당한 의미에서 하나님이시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칼빈은 여기서 이들을 비판하면서 성부와 성자가 동등한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다.

       

      b. 이들은 성자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위에서 본 대로, 칼빈에 의하면, 이들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고 단지 성부의 신성을 전입(轉入) 받은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칼빈은 이들이 어리석게도 그리스도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를 한 위격(位格)의 아들로 생각한다고 오해함을 비판한다. 그리고 이들은 위격(位格, persona)의 의미를 모름을 통해 이런 오류에 빠짐을 간접적으로 지적한다. 이에 대해 칼빈은 이들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는 하나 성부만이 참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나누어지지 않는 본질의 단일성’(simplex essentiae unitas)을 보지 못한 연고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칼빈은 성부만이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결국 성자는 하나님의 지위에서 내던져지고 만다고 본다.

      칼빈은 이들에게 대항하여 성경의 증거를 통해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명확하게 설명한다. 칼빈은 구약을 인용하는 신약의 기자들이 이해한 내용을 매개로 하여 구약의 하나님이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임을 증거함을 지적한다. 이를테면 요한이 이사야서 6:1에 나오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단정하는 것이라든가(요 12:41),바울이 이사야가 말씀하신 하나님이 바로 그리스도라고 증거한 내용(롬 9:33), 그리고 바울이 이사야서 49:18과 45:23에 나오는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해석한 것을 주목하며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규명한다. 그리고 칼빈은 히브리서가 시편을 인용하여 그가 창조자이심(히 1:10; 시 102:25-26)과 천사의 경배를 받으실 분()히 1:6; 시 97:7)임을 지적함을 통해 그가 하나님임을 보여준다.

      또 칼빈은 구약 성경의 ‘여호와’라는 이름이 그리스도에게 적용될 수 있으며 성부로부터 신성이 전이(轉移)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존하신 분이며 이사야가 말하는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 44:6)는 구절은 그 하나님이 바로 그리스도임을 지적한다. 칼빈이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창조자이신 성자는 자존하시며 성부로부터 신성의 본질을 전입 받은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이런 설명은 성경의 통일성과 사도들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을 전제한다. 우리는 칼빈의 설명에서 사변적인 논리 장난이 전혀 보이지 않고 오직 성경에 근거하여 자기가 주장하는 펼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들이 그런 잘못된 주장을 하는 것은 그들의 사고방식이 범신론적인 데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c. 이들은 성부와 성자의 차이점을 신성의 양으로 구별한다 

      칼빈은 발렌티눔이 성부와 성자 사이의 차이점을 본질의 양의 차이로 봄을 주목한다. 칼빈은 이들이 성자가 본질(essentia)을 부분적으로 공유한다고 여기며 신성을 부분적으로만 소유하는 성자를 반신(反神)으로 만든다고 비판한다. 또 이럴 경우 하나님의 본질을 찢어놓는 오류를 범한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칼빈은 만일 이들이 “성부가 본질을 성자에게 주시면서도 여전히 유일한 하나님으로 남아 계시고 그에게 신적 본질이 그대로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결국 “그리스도는 상징적인 하나님, 곧 겉모양과 이름은 하나님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아닌 존재가 되어 버릴 것이다”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고 지적한다. 즉 성부가 성자에게 자기의 신성을 부어주면 그만큼 성부에게는 신성이 부족할 텐데 그럼에도 성부가 온전한 하나님으로 남는다면, 성자에게로 신성이 흘러들어가지 않게 된다는 말이다. 칼빈은 여기서 이들의 자가당착을 포착한 것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이들이 존재론적인 사고방식에 빠진 나머지 위격의 구별과 각 위격의 특성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칼빈은 이들의 경우 성자가 신적인 본질을 부여받은 것이라면 그것을 빼앗길 경우에는 하나님이 아님을 주목한다. 그 결과 칼빈은 이들이 명목상으로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를 하나님으로 보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이에 대항하여 칼빈은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을 소개하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이들의 오류에 빠지지 않게 한다. “성부와 성자는 모두 신적 본질을 전체로서 완전하게 공유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본질에 관해서는 성부와 성자 사이에 구별이 없는 것이다”

       

      d. 칼빈의 반격 

      칼빈은 이런 이단에 대항하여 삼위 세 분 모두 하나님임을 성경을 통해 규명한다(I,23,24). 먼저 칼빈은 성부만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이 이단에 대항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임을 성경 구절로 규명해 낸다. 그 다음 삼위 세 분이 하나님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창조의 능력과 명령할 수 있는 권세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공통되는 것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I,23,24). 또 칼빈은 요한복음 4:24에 나오는 “하나님은 영이시니”라는 구절이 성부, 성자, 성령께 동등하게 적용된다고 말함으로써, 세 분 모두 하나님임을 말한다.

      칼빈은 이들이 위격과 본질 사이의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여, 즉 각 위(位)가 신적 본질 가운데 자기 자신의 분리된 몫을 지니고 있다면 삼신론(三神論)에 빠질 것으로 비판한다(I,13,25). 이들을 비판하기 위해 칼빈은 먼저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을 언급하고 그들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하나님의 본질이 하나이며, 따라서 성자와 성령의 본질이 낳은 바 된 것이 아니지만, 성부께서 순서상 첫째가 되시고 또한 바로 앞에서 논의한 바대로 그가 친히 그의 지혜를 낳으셨으므로, 성부를 가리켜 신성 전체의 시초요 근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단서가 없는 그냥 하나님은 나신 바 되지 않으신 분이요, 또한 성부 역시 그의 위격에 관한 한 나신 바 되지 않으신 것이다”(I,13,25). 그리고 칼빈은 이들이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을 오해하여 그것을 ‘사위일체’로 비웃음을 지적한다. 이들은 세 위격과 본질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이에 대항하여 칼빈은 “우리는 위격을 본질과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고, 각 위들이 그 본질 내에 머물러 있는 상태에서 서로 구별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I,13,25)라고 말한 다음, 만일 이들의 주장대로 위격이 본질과 분리되었자면 삼신을 하나로 결합하는 것과 같은 결과가 생길 것이라고 말한다. 칼빈에 의하면, 이들의 삼위일체론은 결국 한 하나님과 두 피조물의 결합인 것이다.

      그 다음 칼빈은 이들이 생트집을 잡는 문제들에 대항하여 대답한다. 이를테면 이들은 성경에서 그리스도가 성부보다는 위상이 낮은 것으로 표현한 구절을 대며 종속론적인 발언을 하나 칼빈은 성경 내용에 근거하여 그들의 발언에 쐐기를 박는다(I,13,26).

      그리고 칼빈은 마지막으로 이들이 교부들을 잘못 인용하는 것을 점검하고 비판한다. 먼저 이들은 이레니우스를 잘못 이해하고 이용했다는 것이다. 이레니우스의 경우 이들과는 달리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칼빈이 요약한 이레니우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레니우스의 진술의 요점은 바로 이것이다. 그리스도의 아버지 이외에는 성경에서 다른 하나님을 선포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하며, 따라서 다른 신을 상상하는 것은 그릇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높이시는 그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외에는 다른 하나님이 없다는 사실을 그렇게도 자주 강조하는 것이 전혀 놀랄 일이 아닌 것이다 …… 곧 그 옛날 족장들에게 나타나셨던 그 하나님은 다른 분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이셨다고 말이다”

      또 칼빈은 이레니우스의 저서(Adv. haer.) 3권 6장을 인용하여 “성경에서 절대적인 의미로 아무런 단서 없이 하나님으로 불려지시는 분은 진실로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으로 불려지신다”라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을 명확하게 말한다. 칼빈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임을 주장하는 이레니우스의 글을 계속 인용하면서 그의 신성을 주장한다.

      또 칼빈은 이 대적들이 터툴리안의 글을 잘못 이해했음을 지적하고 터툴리안의 글을 소개하며 삼위일체 속의 성자가 하나님임을 증명하고 있다. “한 분 하나님이 존재하시며 경륜에 따라 그의 말씀이 존재하신다. 하나님은 본질의 단일성을 통해 유일하신 하나님이며 그럼에도 그 단일성은 그들의 신비로운 사역을 통해 삼위일체로 질서를 이루신다. 세 분은 상태에 따라서가 아니고 단계에 따라, 본질에 따라서가 아니라 형식에 따라, 능력에 따라서가 아니라 위격들의 수에 따라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여러 교부들을 언급하면서 그들이 한결같이 삼위일체를 확증함을 지적하는 동시에(이레니우스, 유스티누스, 힐라리우스, 이그나티우스, 어거스틴) 아리우스가 고대의 인정을 받는 저술가를 인용하지 못함을 지적하여 그의 가르침은 정통성을 유지하지 못함을 암시한다.(I,13,29).

      칼빈은 자기의 삼위일체론을 마무리하면서 목회자로서 성도들을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의도를 내비친다. “자 이제 경건한 독자들은, 지금까지 교리에 대한 순전한 믿음을 왜곡시키고 어둡게 만들기 위하여 사탄이 사용해 온 온갖 비난들이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서 반박된 것을 인식하리라 믿는다”(I,13,29).

       

       

      D. 나가면서

       

      1. 칼빈의 기독교강요 1권 13장에 나오는 삼위일체론은 단순히 하나의 삼위일체론을 설명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나름대로 삼위일체 교육 방법이 반영되어서 여기에는 칼빈의 목회 정신을 볼 수 있다. 그는 먼저 고대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을 소개한 다음, 그것을 성경 구절을 동원하여 성도들이 손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2. 칼빈의 삼위일체론은 근본적으로는 서방교회를 따르나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를 잇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는 크리소스툼의 저서를 읽으면서 동방교회 신학과 만난 것으로 판단된다.

      3. 칼빈의 삼위일체론은 매우 성경적이다. 매우 사변적인 내용을 성경 구절을 통해 성도들이 쉽게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다.

      4. 칼빈은 당시의 대적들의 문제점을 자세하게 열거하고 비판함을 통해 성도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했다. 이것은 매우 목회적인 것으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칼빈의 이런 자세는 막연하게 복음만 전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식으로 사역하는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 무언의 암시를 하고 있다. 담임목사들은 자기 주위에 등장하는 이단들을 정확하게 분석해서 성도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해야 된다는 말이다.

      5. 우리는 칼빈을 통해 삼위일체론을 효과적으로 가르치는 요령을 습득하게 된다. 1) 즉 먼저 우리는 세 분이 위격 내지 인격이심을 성경구절을 통해 규명해 낸다. 2) 그 다음 세 분이 하나님임을 성경 구절을 통해 설명한다. 3) 마지막으로 성부와 성자의 관계, 성부와 성령의 관계 그리고 성자와 성령 사이의 관계를 구체적인 성경 구절을 통해 규명한다. 그리고 성도들이 자연스럽게 그 마음속에서 이 세 분의 관계를 조립토록 해야 한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본질’, ‘위격’, 그리고 ‘세 분의 관계’가 삼위일체를 바르게 이해하는 관건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이 세분의 사역 곧 창조, 섭리, 보존 등이 어떻게 이루어지며 그런 사역이 우리의 삶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 가르쳐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삼위일체 하나님은 성도들의 개인의 삶과 연결되어 이원론에 빠지지 않고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신앙생활의 성공 여부는 이 삼위일체 하나님과 성도 간의 인격적인 관계에 달려 있는 것이다. 칼빈은 이런 면에서 매우 모범적으로 삼위일체론을 가르친 것으로 평가된다.

      참고서적

       

      1) 1차자료

       

      -Joannis Calvini, OS III. Chr. Kaiser: Monachii in Aedibus, 1967.

      -Johannes Calvin, Unterricht in der christlichen Religion. übersetzt von O.Weber, Neukirchener Verlag, 1984. 3. Aufl.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ed. bz John T. McNeil. tr. bz Ford Lewis Battles in LCC vol. XX(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67. 4th. printing.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tr. by Henry Beveridge. Grand Rapids: Eerdmans, 1989.

      -Jean Calvin, Institution de la religion chrétienne. Aix-en-France: Edition Kerygma/ Charols: Editions Exelsis, 2009.

      -죤 칼빈, 『基督敎綱要』 上, 中, 下권 김종흡 신복윤 이종성 한철하 공역. 서울: 생명의말씀사, 1994. 14쇄.

      -존 칼빈, 『기독교강요』 in 세계기독교고전 44. 원광연 역.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3.

       

      2) 2차 자료

       

      -François Wendel, Calvin. Ursprung und Entwicklung seiner Theologie. Neukirchen: Neukirchener Verlag, 1968.

      -Wilhelm Niesel, Die Theologie Calvins. München: Chr. Kaiser Verlag, 1938,

      -요셉 하트이안 편저, 『칼빈의 조직신학 해석』 한국칼빈주의연구원 편역. 서울: 기독교문화협회, 1986.

      -Ford Lewis Battles, Interpreting John Calvin. Grand Rapids: Baker Books, 1996. 

       




       

      B. 성자와 성령의 인격과 신성

       

      칼빈은 삼위일체를 설명함에 있어서 위의 내용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는 성경의 역사 속에 계시된 삼위 하나님의 활동을 점검하고 위의 내용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로 보건대 칼빈의 삼위일체론에서 특이한 것은 삼위일체 내부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역사속에 계시된 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관찰하여 그 내용을 설명한다는 것이다. 즉 칼빈의 경우 먼저 교부들이 전수해준 ‘내재적 삼위일체’를 설명한 다음, ‘경륜적 삼위일체’를 설명하면서 전자를 확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결국 성자와 성령의 신격과 신성에 대한 내용을 점검하는 문제와 연관된다.

      칼빈이 여기서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은 성자와 성령 두 분 다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둘은 서로 다른 분임을 드러내려고 한 것이다. 그는 이것을 철학적인 사색을 통해 드러내려고 하지 않고 성경의 증거를 통해 이것을 드러내려고 한다. 이런 시도 속에서 그가 기독교인들에게 구체적인 해당 성경 구절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을 쉽고 효과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고대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을 능가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삼위의 하나님이 인격이심을 강조해야 되는 이유는 성경의 하나님이 이방신들과 다른 점이 인격성에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하나님의 인격성이 무시되면 범신론에 빠져 무신론으로 둔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칼빈이 열거한 내용 속에서 성자와 성령이 각기 다른 인격임과 동시에 두 분이 하나님임을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1. 성자의 인격과 신성

       

      a. 성자의 인격

       

      칼빈은 여기서(I,13,7-13) ‘성자가 인격이다’라는 말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그의 사역 내지 행동을 묘사함으로써 그가 인격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칼빈은 사도들과 솔로몬의 말을 참고하면서 성자가 만물을 창조하시고 유지하시며 섭리하신다는 말에 근거하여 성자가 인격임을 드러낸다. “사도들은, 세상이 성자로 말미암아 지음을 받았으며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셨다고 가르친다(히 1:2-3)” 칼빈은 전도서 8장에 나오는 ‘지혜’와 연관하여 성자가 인격이심을 암시한다. “지혜가 만세 전에 성부로부터 나와서 만물을 창조하고 하나님의 모든 사역을 통할하였다고 소개한 것이다(잠 8:22)” 잠언서의 이 발언은 성자가 하나님인 동시에 인격임을 암시하고 있다. 칼빈은 요한복음의 한 구절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5:17)라는 구절도 잠언서의 ‘지혜’에 대한 내용과 연관됨을 지적하면서 성자가 인격이심을 분명하게 말한다.

      그 외에 아래에서 논하겠지만 칼빈이 구약이 증거하는 여호와 또는 여호와의 사자가 구약속의 그리스도로서 인격임을 말하는가 하면 구약의 많은 구절들이 여호와가 그리스도임을 증거한다는 것을 주목하는 내용은 성자가 한 분의 인격임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2. 본질과 인격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삼위일체에서 “삼위”는 휘포스타시스라는 단어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세 휘포스타시스가 존재한다는 개념으로 발전되어짐에 따라 세 인격(위격, person)이라는 의미가 되어진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본질은 하나이다. 그러나 성자도 한 휘포스타시스이고 성령도 한 휘포스타시스로써, 세 휘포스타시스가 존재한다. 이러한 용어에서 처음에는 본질과 인격이라는 단어가 혼동되어 사용되었다. 다시 말하면 세 인격(위격)이 존재하며, 이 세 인격(위격)은 동일한 한 본질(본체)을 공유한다.                          

      실제로 고전적 삼위일체가 정립되는 과정에서 본체와 본질이라는 단어가 상당히 혼동을 일으켰다. 이 "휘포스타시스"가 셋 존재한다는 의미로서, “인격”이라는 개념으로 바뀌어가게 되는데, 헬라어가 라틴어로 바뀌는 과정에서 서방의 교부들, 특별히 어거스틴은 이 “휘포스타시스”라는 헬라어를 번역함에 있어 라틴어 “페르소나”(persona)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된다.  이 용어적인 차이에서 양태론이 나타나는 계기가 되어지는데, “페르소나”라는 단어는 배우가 여러 가지 가면을 쓰고 연극(일인다역)을 한다는 뜻에서 일인다역의 양태론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동방교회의 신학자들은 서방교회가 즐겨 사용한 '페르소나'를 피하고 그 대신 '휘포스타시스'라는 말을 사용했다. '페르소나'의 본래의 뜻이 가면(mask)이므로 그 말을 삼위에 적용시킬 때, 사벨리우스주의라는 오해를 받을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체를 의미하는 말로서 '우시아'를 사용했다. 한 '우시아'에 세 '휘포스타시스'가 있다고 했다.” (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59쪽)                    

      서방교회에서 휘포스타시스라는 용어가 페르소나로 번역되고 인격이라는 의미가 되자,  동방교회에서는 본질을 뜻하는 용어로 “우시아”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되고, 동방교회에서는 "한 우시아(본질)에 세 휘포스타시스(위격)가 있다"라고 정의되었고, (미아 우시아 트레이스 휘포스타시스) 서방교회에서는 우시아라는 용어 대신에 “한 숩스탄시아에 세 페르소나가 있다”고 정의가 된다.(우나 숩스탄티아 트레스 페르소나)

       

       

      페르소나는 영어로 person이 되고, 우시아는 essence로 번역되어지며, 숩스탄시아는 substance가 되어진다. 서방교회에서는 ‘휘포스타시스’를 ‘페르소나’(헬라어 프로소폰)라고 라틴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동방교회는 헬라어를 사용했고, 서방교회는 라틴어를 사용하였는데, 로마사람들에게는 ‘우시아’는 잘 이해되지 않는 언어였고, 헬라인들에게는 ‘페르소나’라는 단어가 잘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말은(프로소폰: 라틴어 페르소나의 헬라어) 불행하게도 사벨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하여 오용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을 형식적으로만 믿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란 자체 안에 있는 관계명칭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 외부세계와 가질 때 가지는 명칭뿐이라고 했다. 이름은 셋이나 실제는 한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는 당시 로마 교회 안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페르소나' 대신에 '프로소폰'이라는 말을 썼다. 이 말을 쓰면서 그는 삼위가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한 실체를 가진분이 아니라, 기능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때로는 아버지로, 때로는 아들로, 때로는 성령으로 나타나서 특유의 기능을 발휘하나, 하나님과 별개의 휘포타시스를 가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렇게 말하면서 하나님은 한때는 창조자로, 한때는 구속자로, 한때는 생명의 부여자로 나타났다는 것이다.”(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98페이지)   







      1650. 증거 - 엘렝코스(ἔλεγχος)

      ἔλεγχος, ου, ὁ 

      1. 증거,  2. 유죄증명,  3. 견책
      발음 / 엘렝코스(ĕlĕngchŏs)
      어원 / 165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책망(딤후 3:16), 증거(히 11:1)
      신약 성경 / 1회 사용

      * 1651. 증명하다 - 엘렝코(ἐλέγχω)

      ἐλέγχω 

      1. 빛으로 가져오다,  2. 증명하다,  3. 견책하다
      발음 / 엘렝코(ĕlĕngchō)
      어원 / 미래 ἐλέγξω, 제1부정과거명령 ἔ- λεγξον, 제1부정과거부정사 ἐλέγξαι, 제1부정과거수동태 ἠλέγχθην,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권고하다(마 18:15), 드러나다(요 3:20), 책망하다(요 16:8, 딛 1:9, 계 3:19), 책잡다(요 8: 46), 꾸짖다(딤전 5:20, 딛 1:13),
      정죄하다(약 2:9), 경책하다(딤후 4:2), 꾸지람을 받다(히 12:5), 책망을 받다(눅 3:19, 엡 5:13), 가책을 느끼다(요 8:9)
      신약 성경 / 17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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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6-25-2022(토)

      6. 25 72주년 기념일
      6. 25는 북에서 남침한 전쟁입니다.
      전교조를 중심으로 주사파들은 남에서 북으로 침략했다고 가르칩니다.

      전환금지치료법 : 성전환을 한다고 주장해도 부모가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것
      - 전환 치료(Conversion therapy)

      세계 3대 악처 / 소크라테스(크산티페), 모차르트(콘스탄체), 톨스토이(소피아)

      악처는 태생부터 악인인가, 아니면 누가 악처를 만드는가?
      세계 3대 악처라고 하면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부인 <소피아>
      고전 음악의 대가인 모차르트의 부인 <콘스탄체>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부인인 <크산티페>

      우리에게 이렇게 전설적이고 훌륭한 위인들의 부인들이 왜 이래?
      톨스토이의 걸작 ‘안나카레리나’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행복한 가정은 서로가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각자의 이유로 불행하다.”
      아마도 이 구절은 톨스토이 본인의 경험담일지도 모른다.

      <소피아>는 톨스토이를 따르는 제자들에 대한 질투와 유산문제로 자살하겠다고 협박하며 톨스토이의 애를 태웠다.
      끝내 참다못한 톨스토이는 가출하여 <아스타포보>역에서 죽게 되었고, 그녀는 남편을 내 쫒아 죽게 만든 악처가 되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녀의 질투심과 톨스토이에 대한 협박이 나쁜 결과를 가지고 오게 한 악처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그러나 소피아는 남편을 도와 ‘전쟁과 평화’를 6번 씩 옮겨 적는 등, 톨스토이의 작품은 그녀의 손을 통해 태어났다.
      톨스토이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대단한 악필이었지만 그녀만은 그의 글을 알아 볼 수 있었다.
      톨스토이는 방탕한 바람둥이였지만 출산과 육아는 소피아만의 문제로 억척스레 가정을 지켜온 장본인이었다.

      <콘스탄체>. 모차르트의 아내도 악처로 회자되는 인물 중에서 빠지지 않는다.
      그녀의 악행은 매우 심한 낭비벽이었다.
      남편 사후 6명의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라지만, 모차르트의 자필 악보나 서책을 팔아서 생활했다.
      남편이 죽고 새로운 남자 ‘닛센’과 재혼을 한 이유로 악처로 불려졌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말로는 “콘스탄체는 교양이 높고 가사에도 열심인 밝은 성격의 여성”이라고 한다.
      무엇보다도 모차르트 자신이 아내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편지를 많이 남기고 있었다.
      사실 당대 음악가의 아내 모두 악처라는 평을 들었고, 다만 우리에게 바하의 아내 <빌케>, 슈만의 아내 <클라라>만이 현모양처로 남아있으니 후대의 콘스탄체의 평가는 박한 것이 아닌가.

      소크라테스의 부인 <크산티페>
      친구 좋아하는 소크라테스에게 친구들 앞에서 바가지로 머리에 물을 쏟아 부은 사건은 유명해서 많은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고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전혀 화를 내지 않고 “벼락 뒤에는 비가 내리기 마련이지.” 라는 명언이 유명하게 전해져 온다.
      그리고 아내에 대한 몇 개의 명언이 또한 유명하다.
      “새미는 행복하다. 왜냐하면 말을 하지 않는 아내가 있기 때문에.” 
      “꼭 결혼하세요. 좋은 아내를 가지면 행복해 질 수 있고, 나쁜 아내를 가지면 나처럼 철학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과 잘 해내면 누구와도 잘 할 수 있습니다.”

      시련 / 시험 試,  불릴 練, 익힐 練, 단련할 練


      1. 겪기 어려운 시험(試驗)과 단련(鍛鍊)
      2. 신앙()이나 결심()을 시험()해 보는 일.
      3. 의지나 사람 됨을 시험하여 봄

      작은 시련은 작은 믿음을 형성한다.
       예를 들면 작은 시련이란 원인과 결과를 알 수 있는 것이다.
       탕자의 비유에서 작은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을 것을 미리 받은 후에 아버지의 집을 떠났다.
       그 결과 작은 아들의 생활은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 굶주린 배룰 채우며 아버지의 집을 생각했다.
       차라리 이제부터는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서 아들이 아닌 품군으로 살기로 작정한다.
       그러나 아들을 기다리던 아버지는 너는 잃었다가 다시 찾은 내 아들이라고 하며 반갑게 맞아주셨다.
       이와 같이 인과관계가 분명한 시련을 작은 시련이라고 한다.

      큰 시련은 큰 믿음을 형성한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은 100세에 귀한 아들을 얻었다.
       그 아들 이삭을 하나님은 번제의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다.
       아브라함은 왜 상속자가 될 아들을 번제의 제물로 바치라고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와 같이 원인과 결과를 알 수 없는 시련을 큰 시련이라고 하며 튼 시련을 거친 후에 비로서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다.
       
      믿음이 시련이란?
      믿음이 진실한가 아니면 거짓인가를 검증해야만 드러나게 된다.

      믿음의 시련(야고보서 1:3) 1383. 시련 - δοκίμιον, ου, τό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줄 너희가 앎이라.
      because you know that the testing of your faith  develops perseverance.

      1383. 시련 - δοκίμιον, ου, τό

      δοκίμιον, ου, τό 

      1. 추정,   2. 시련,   3. 순수한
      발음 / 도키미온(dŏkimiŏn)
      어원 / 1382의 파생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시련(약 1:3, 벧전 1:7)
      신약 성경 / 2회 사용

      * 1382. 시련 - 도키매(δοκιμή)
      δοκιμή, ῆς, ἡ 

      1. 인정받는 성질 즉 품성,  2. 시련
      발음 / 도키매(dŏkimē)
      어원 / 1384와 동일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연단(롬 5:4, 빌 2:22), 증거(고후 2:9, 9:13, 13:3), 시련(고후 8:2)
      신약 성경 / 7회 사용

      * 1384. 인정된 - 도키모스(δόκιμος)
      δόκιμος, ον

       

      1. 인정된,  2. 존경 받는
      발음 / 도키모스(dŏkimŏs)
      어원 / 138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칭찬을 받은(롬 14:18), 인정함을 받은(롬 16:10, 고전 11:19, 고후 10:18), 인정된(딤후 2:15)
      신약 성경 / 7회 사용

      * 1380. 생각하다 - 도케오(δοκέω)
      δοκέω 

      1. 생각하다,  2. ἐδό κουν πνεῦμα θεω- ρεῖν: 그들은 귀 신을 보는 것으로 믿었다
      3. εἴ τις δοκεῖ σοφὸς εἶναι: 만일 누가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한다면
      발음 / 도케오(dŏkĕō)
      관련 성경 / 생각하다(마 3:9, 눅 17:9, 요 11:13), 주관하다(막 10:42), 알다(눅 1:3, 요 20:15, 행 15:28), 가결하다(행 15:22),
      유력하다(갈 2:6), 보이다(고전 12:22), 여기다(고후 11:16)
      [명] 생각 (마 17:25, 21:28, 요 11:56), 의견(눅 10:36)
      신약 성경 / 63회 사용


      지금 ‘광야’를 걷고 있나요?
      광야는 고통의 장소가 아니라 연단과 훈련의 장소입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상황은 다르지만 누구든 ‘광야의 시간’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절망의 광야, 슬픔의 광야, 실패의 광야, 불안과 염려의 광야, 고통의 광야 등 이유와 목적을 알 수 없는 곳에 갇힐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광야는 결코 고통과 형벌의 장소가 아니라 훈련의 장소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무능을 철저히 깨달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광야에서 나오게 하시고 사용하십니다.

      다윗에게도 광야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사울 왕과 그의 추종 세력을 피해 13년간 광야로 숨어다녔던 그에게 광야의 시간은 ‘연단과 훈련의 시간’이었습니다.

      시편 57편은 이런 과정에서 나온 다윗의 대표적인 기도 시입니다.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을 때 쓴 시입니다.
      당시 사울 왕이 보낸 수색대가 곳곳에 깔려 있어 다윗은 눈에 띄기만 하면 즉결처분을 당할 수밖에 없던 때였습니다.
      공포와 불안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하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윗은 이런 절체절명의 순간에 하나님의 날개 그늘에 피해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겠다는 시를 썼습니다.
      시편 57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어둡고 좁은 동굴에서 주님의 날개 그늘에 피하겠노라고 기도하는 다윗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돌보심은 독수리의 날개와 같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 날개‘는 영원한 안식을, ‘날개 아래 거하는 삶’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다윗에게 매일의 삶은 위협이었습니다.
      다윗이 그를 따르던 몇 사람과 사해 절벽에 있는 아둘람 굴에 숨어 있을 때, 갑자기 동굴 입구에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습니다.
      사울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그들을 알아보지 못한 채 등을 보이고 앉습니다.
      다윗의 측근은 사울을 죽일 절호의 기회를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원하는 대로 하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이 세우신 사울에게 손을 대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다만 사울의 옷의 한 부분을 잘랐습니다.
      다윗은 밖으로 나간 사울에게 “당신이 굴에 있을 때 당신을 죽이라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당신을 해할 마음이 없습니다.
      "이 옷자락이 그 증거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시편 57편에서 가장 강력하고 아름다운 표현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7, 8절)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는 ‘두 발로 흔들림 없이 서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대적자들을 물리쳐주시고 자신을 안전하게 지키실 것을 확신한 마음입니다.
      고난과 죽음의 공포 가운데서도 흔들림이 없이 오직 주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새벽을 깨우리로다’는 절망 중에 탄식하고 있는 백성들에게 희망의 새벽을 알리겠다는 다윗의 선언입니다.

      신비롭게도 다윗의 탄식은 찬양으로 바뀝니다.
      다윗은 찬양하면서 영적인 눈이 열려 무한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을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적인 찬양으로 기도를 마무리합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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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서신서(General Epistles) 
      일반서신서

      야고보서,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유다서

      일곱 개 서신서는 개별 교회가 아닌 전체 교회를 향해 말한다.
      때문에 일반서신서(General Epistles)로 칭한다.
      이 서신서들은 또한 실질적인 문제들, 예를 들면 조직 내 지도력, 근면함, 공평함, 좋은 관계, 그리고 효과적인 소통 등에 일관된 관점을 가지고 있다.   

      일반서신서는 당시 로마제국에서 크리스천들이 당면한 과제, 즉 어떻게 험한 세상에서 올바르게 예수를 믿고 따를 것인지를 반영한다. 초기 교회는 노예 생활, 차별, 부자와 권력자들의 학대 같은 문제를 겪었다.
      이 서신서들은 거친 말과 대인 갈등도 다룬다.
      인간적인 욕망과 하나님을 의지하려는 마음 사이에 일어나는 긴장, 하나님께 순종할 때 발생하는 세상 권력과의 마찰에 대한 두려움도 다루었다.  

      대체로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삶과는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세상에서의 삶과 노동에 단절감과 소외감을 느끼고 있었다.
      현대 크리스천들도 일터에서 비슷한 갈등을 겪는다.
      이를 달리 해석하면,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그 어떤 삶의 영역보다 자기 일터에서 더욱 주님을 섬길 기회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얘기다. 

      오늘날 사회는 기업, 정부, 교육 사업, 비영리 사업, 재택근무를 통해서 큰 결과를 달성해 간다.
      그렇더라도 대부분의 직장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목적, 예를 들자면 공익을 위한 섬김, 타인의 유익을 위한 봉사, 헌신적인 인간관계, 정의 확산, 인격 개발 등의 일에 부합되지 못한다.
      크리스천들은 자신이 추구하는 주님을 따르는 일과 일반 직장에서 추구하는 이윤의 극대화 같은 서로 다른 역할 때문에 큰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다.
      로마제국의 많은 분야들이 신자들에게 매우 적대적이지는 않았듯이, 비록 의도적으로 악을 추구하는 직장이야 별로 없지만, 직장에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여전히 도전이 될 수 있다.
      일반서신서는 당시 세상에서 힘겹게 살아가던 신자들을 위해 쓰였기 때문에, 현대 크리스천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일반서신서는 이와 같은 실질적인 관심사들을 우선적으로 다룬다.
      이 서신서들은 크게 다음 두 가지 원칙 위에서 다양한 사안들을 취급한다.

      1. 우리는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
      2. 우리는 궁핍한 자들을 돕기 위해 일해야 한다.   

      일반서신서는 이 두 가지 원칙에서 21세기 일터에도 적용 가능한 놀랍게도 실질적인 활용 지침을 도출해 낸다.
      어쩌면 그리 놀랄일은 아닌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실 곳으로 로마제국을 선택하셨듯이, 현대 일터를 그분의 임재 장소로 선택하고 계시니까 말이다.

      야고보서

      야고보서는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과 궁핍한 자들을 돕기 위해 일해야 한다는 ‘행동(실천) 중심의 관점’을 보여 준다. 진정한 믿음이 있고 진실로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우리 믿음은 궁핍한 자들을 돕는 다양한 행동으로 나타날 것이다. 바로 이 관점 덕분에 야고보서가 탁월한 실용적 지침으로 돋보인다.

       


        야고보는 하루하루의 삶과 영적 성장 사이의 깊은 관계를 강조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하나님은 일상생활에서 겪는 고난과 역경들을 우리의 신앙 성장에 특별히 활용하신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2-4). 일터에서의 문제와같은 “여러 가지 시험”은 성장의 밑거름이 될 수 있지만, 야고보는 특별히 앞서 말한 극심한 고난과 역경들이 “믿음의 시련”으로 이어진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렇다면 우리 일터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시련으로 이어지는도전에는 어떤 종류가 있을까? 그중 하나는 종교에 대한 반감이다. 각자처한 상황에 따라,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믿음은 일터에서 편견, 구직 제한, 해고, 신체적 상해, 죽음에까지 노출될 수 있다. 설사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압박을 가하지 않더라도, 신자로서의 정체성이 앞길을 가로막는다는 생각에 신앙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도 있다.


         또 다른 종류의 시련은 윤리적인 것이다. 우리는 도둑질, 사기, 정직하지 못함, 불공정 거래, 내 배를 채우기 위해 또는 내 앞길을 위해 남을 이용하는 행위 등을 통해 믿음을 저버릴 수 있다. 직장생활에서의 실패가 또 다른 시련이 될 수 있는데, 이는 너무 충격이 커 자칫 신앙이 흔들릴 수도 있다. 예컨대 정리해고나 일반적인 해고를 당하고 나면 너무도 황당하여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비롯해서 지금까지 믿고 의지한 모든 것들을 회의적으로 보게 된다. 아니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터로 부르셔서 큰 성공을 약속하시지 않았는가’ 혹은 ‘우리가 그분께 충실했으니 성공시켜 주시는 것은 마땅하지 않은가’ 하고 물을 수 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결국 믿을 수 없고 심지어 존재하시지 않는다는 생각까지 할 수 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하나님이 과연 우리의 필요를 계속 채워주실지 의심할 수도 있다. 일과 관련된 이 모든 도전들이 믿음의 시련이될 수 있다.


         일터에서 우리의 믿음이 시련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될까? 인내하라!(약 1:3-4) 야고보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라고 말한다(약 1:5). 위기를 넘기면 넘길수록 우리는 단단해지며,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기보다 하나님의 도우심에 기쁨을 느낀다.

       


        야고보서는 지혜를 논하면서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는 원칙에서 시작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우리가 업무상의 결정, 기회에 대한 평가, 동료나 고객에 대한 신뢰, 자원 투자 등에서도 하나님께 지혜를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운가? 심지어 야고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를 주실 것을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치 말라’고까지 일러 준다(약 1:6). 즉, 우리의 문제는 일터에서 하나님께 너무 많은 도움을 기대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너무 적게 기대한다는 데 있다(약 1:8).


         바로 이 점을 반드시 포착해야 한다.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시는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의심한다면, 당신은 야고보가 말하는 “두 마음”을 품은 자다. 어쩌면 아직 그리스도를 믿고 따를 것인지 아닌지를 결단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것은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약 1:8) 것이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기여할 수도, 심지어 자기 자신도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약 1:7).

       

        야고보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갖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광대한 로마제국 전역에 흩어져 사는 수신자들이 이미 겪는 시련을 너무나 잘 알았다(약 1:1-2). 그러나 그는 신자의 삶이란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시작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야고보서 1장 9-11절에서 야고보는 이를 경제 영역에 즉각 적용한다. 당신이 부유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노력으로 그것을 얻었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자기 능력에 의지한다면, 비록 한창 사업을 진행하는 도중일지라도 당신은 이내 쇠진해질 것이다. 반대로 혹 당신이 가난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냉대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도리어 하나님께서 ‘일으켜 세우실 것’을 기대하라.

       

        실패나 성공의 원인은 당신이 어쩔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이다. 불경기, 기업 매각, 재배치, 흉작, 차별대우, 태풍 피해, 혹은 다른 온갖 요인으로 생계를 위협받게 된 사람들이 그 증인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직장에서 경제적으로 성공하리라고 약속하지도 않으셨지만, 그렇다고 실패하도록 만드시지도 않는다. 오히려 실패와 성공을 모두 다 사용하셔서 악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인내력을 기르길 바라신다. 야고보서 2장 1-8절이 역경의 시기에 하나님을 찾도록 우리에게 당부하는 구절이라면, 9-11절은 성공의 때에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고 되새겨 준다.


         비록 야고보가 하나님의 선과 세상의 악을 대비시키기는 해도, 우리는 천사 편에 있고 세상 사람들은 마귀 편에 있다는 식의 상상을 하게 하지는 않는다. 이 점을 주목해야 한다. 대신 선과 악을 나누는 것은 크리스천의 마음 중심에서 비롯된다고 밝힌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약 1:14). 

       

         그는 지금 교우들을 향해 말한다. 이에 따라서 우리는 교회는 선하고 세상 일터는 악하다는 정의를 섣불리 해서는 안 된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사기 행각 따위가 벌어지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교회에도 추문이 생기곤 한다. 이처럼 악은 양쪽 영역에 모두 존재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두 영역에서 모두 선을 나타낼 수 있다.


         크리스천 공동체는 가난한 자들을 돕는 하나님의 도구 가운데 하나다. 가난한 자들을 돕는 하나님의 약속은 그분의 후하고 너그러우심을 직접 경험한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해서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모든 후하고 너그러운 베풂과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약 1:17, NRSV). 이것은 하나님이 곧 우리를 채워 주시는 궁극적 근원이시며, 또한 신자들은 하나님을 대신해 궁핍한 자들을 채워줄 책임이 있다는 두 가지 진리를 확인시켜 준다.


        야고보는 ‘경청’할 수 있는 실천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크리스천들은 사람들(약 1:19)과 하나님의(약 1:22-25) 말을 모두 경청해야 한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 무슨 기술이라도 습득하려는 양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는’(약 1:21) 하나의 길로써 경청해야 옳다.

       

        흥미롭게도 야고보는 성경 말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것까지도 자신의 악을 제거하는 한 수단임을 시사한다. 그는 남들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경우에 잘 듣는 걸 말하는 게 아니라, 그냥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지 못하게 막는 오만과 분노를 없애 준다고 말한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0-21).

       

        달갑지 않은 말들, 곧 거슬리는 말, 비판의 말, 묵살의 말을 남들이 건네면 안 그래도 스트레스가 넘치는 일터에서 분노로 응수하기가 십상이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입지가 더 나빠지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증거를 믿지 못할 것이다. 화를 내거나 직설적인 말로 자신을 방어하기보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우리의 입지를 지켜야 한다.


         이런 조언은 모든 유형의 일과 일터에 적용된다. 경청은 비즈니스 서적에서도 중요한 리더십 기술 가운데 하나다.[1] 사업체들은 고객, 직원, 투자자, 공동체, 주주들의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사람들의 진정한 필요를 채워 주려면, 조직체는 자신들이 채워 주길 바라는 그 필요 대상자들에게 귀를 기울여야 옳다. 이 사실은 마치 로마제국이 그랬듯, 곤경과 박해 속에서도 우리의 일터가 하나님의 일을 위한 옥토가 될 수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위의 진리는 충성된 일의 두 번째 원칙, 곧 궁핍한 이웃의 유익을 위해 일하는 것을 다루게 해 준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 이것은 첫 번째 원칙, 곧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때 따라오는 자연스러운 결과다.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남들의 유익을 위해서도 자유롭게 일하게 된다. 반대로 하나님을 신뢰한다면서 궁핍한 이웃을 돕지 않는다면, 이는 하나님을 진정 신뢰하지 않는 것이라고 야고보는 지적한다. 야고보가 말했듯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다(약 1:27). 신앙은 신뢰를 뜻하며, 신뢰는 행동의 밑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야고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께서 여러 소외계층에게 직접 실천해 보이신 모습을 잘 알기 때문이다. 또 야고보는 하나님나라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특별한 자리에 관한 주님의 가르침(약 2:5; 눅6:20)을, 보물을 “땅에 쌓아” 썩혀 버림에 대한 경고(약 5:1-5; 마 6:19)와 결부시킨다.


         이 진리는 우리의 일터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왜냐하면 남의 필요를 채우는 것은 성공적인 일터의 으뜸가는 표상이기 때문이다. 그 일터가 기업이든, 교육의 장이든, 건강 관리든, 행정 공무든, 전문직이든, 비영리직 또는 다른 무엇이든 간에 말이다. 성공적인 조직체는 그 소비자, 직원, 투자자, 시민, 학생, 고객 또는 다른 주주들의 필요를 채우기 마련이다. 물론 이것이 야고보의 중점 사안은 아니다. 그는 빈민과 약자들의 필요에 각별히 관심을 기울이기는 하되, 그럼에도 여전히 실용적이다.한 조직이 사람들의 진정한 필요를 채울 때,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것이다.


         야고보는 두려움을 계속 직시하고 믿음의 시련을 직접 맞닥뜨리라고 요청한다. 당신이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시련에 직면한다면, 하나님은 그 시련을 통해서 궁핍한 자들을 돌보는 당신의 역량을 배가시켜 주신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되지 말라”(약 1:22). 만약 당신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궁핍한 자들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당신은 자신을 속이는 거라고 야고보는 풀이한다. 그건 진정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왜?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일하지 않고 있다면, 아마 당신 자신의 유익을 위해 일하느라 너무 바쁘기 때문일 테니 말이다. 그리고 만약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서 일한다면, 아마도 하나님이 당신을 돌볼 것이라는 믿음이 없어서이리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일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아서다. 혹은 야고보가 말하듯,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7). 야고보는 예수님의 가르침을(특별히 다양한 소외계층과 가난한 자들을 실제로 돌보신 것을) 경험했기에 이런 통찰력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것은 특별히 예수님이 가난한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그들의 것이라고 가르친 사실(약 2:5; 눅 6:20)이며, 아울러 “이 땅”의 썩어질 재물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약 5:1-5; 마 6:19)를 언급하는 부분에서도 야고보의 암시를 발견할 수있다.


         이것은 성공적인 조직의 첫째 조건을 충족시키기 때문에 우리 일에도 직접 적용할 수 있다. 성공적인 조직은 손님, 고용인, 주주, 주민, 학생, 고객과 다른 주주들의 요구를 충족시킨다. 야고보는 사실 처음부터 이런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지는 않았고,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주요대상으로 삼았다. 그래도 이 원칙은 적용할 만하다. 어떤 조직이 사람들의 진정한 필요를 채워 줄 때가 바로 하나님이 함께 역사할 때이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기업의 고객 서비스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크리스천들이 ‘기업에게 고객 대접을 받을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줄 때 오히려 더 큰 창조력이 필요하며, 하나님의 베푸시는 손길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어, 어떤 크리스천 그룹이 베트남에서 사회 · 경제적으로 가장 취약한 계층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 그곳에 가구 공장을 설립했다. 그 공장을 통해 하나님은 가구가 필요한 해외 고객들과 전에 실직자였던 지역 노동자들의 필요를 동시에 채워 주셨다.[2]


         이와 비슷한 사례로, 글로리아 닐런드(Gloria Nelund)가 이끄는 트릴링크 글로벌(TriLinc Global)도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개발도상국 내 창업을 돕는 투자회사다.[3]


         크리스천들의 의무는 각자의 직업을 통해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사회 구조와 정치 · 경제적 시스템은 빈민들의 필요를 채워 주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크리스천들도 이런 구조와 시스템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기까지, 우리에게는 빈궁한 사람들의 필요뿐만 아니라 부유층과 권력자들의 필요도 채워 줄 책임이 있다.


         야고보는 또 앞서 말한 두 가지 기본 원칙을 부자 및 권력자 선호주의에 대한 경고로 사용한다. 그는 둘째 원칙, 곧 ‘가난한 이들의 유익을 위해 일하기’를 갖고 2장을 시작한다.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약 2:8-9).

       

        말하자면, 우리가 부자와 권력자들을 선호한다면, 그건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 자신을 섬긴다는 점에서 죄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부자와 권력자들은 그들의 부와 권력의 일부를 우리에게 뿌려 줄 잠재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와 달리, 빈민들은 우리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고, 필요한 것들만 잔뜩 내보인다. 야고보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부유하고 옷 잘 입은 사람이 교회에 오면 특별 대우를 받는 반면, 가난하고 허름한 차림의 사람은 멸시받기 십상이라는 실례를 든다. 그러니까 교회 출석이라는 간단한 것에서부터, 가난한 사람들은 환영의 인사말에 굶주려 있다는 말이다. 반면 가는 곳마다 환영받는 부자들은 아쉬울 게 없다.


         야고보는 또 레위기 19장 18절, 곧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성구를 들어, 부자들은 반기고 챙겨 주면서 빈민은 깔보고 얕보는 행위는 살인이나 간음보다 더 나을 것이 없는 반율법적 행동이라고 지적한다(약 2:8-12). 그렇게 함으로써 이웃을 섬기지 않거나 심지어 가난한 사람을 이웃으로조차 여기지 않는다는 의미다.


         야고보는 교회 모임을 언급한 것이었지만, 여기에도 직장에 적용할 부분이 있다. 일터에서 우리는 우리를 도울 사람들, 또는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분별할 수 있다. 건강한 일터라면 이것은 단순히 강조점의 문제다. 그러나 사람들이 권력 다툼을 하느라 서로 치고받는 역기능적인 직장에서는 약한 사람 편에 서 주는 용기가 필요하다. 특정 계층선호주의를 배격하다 보면, 특히 사회에 깊이 뿌리박힌 편파주의, 곧 인종차별, 성에 대한 고정관념, 또는 종교적 편견 등에 부딪칠 경우 더군다나 위험하다.


         야고보가 시사하는 ‘타인의 유익을 위해 일하기’ 원칙 적용에는 은연중 하나님 신뢰의 원리가 결부된다. 우리가 정말로 우리의 공급 능력을 확대하려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부자와 권력자들에게 빌붙고 싶은 유혹을 그다지 받지 않을 터이다. 또 일터나 학교에서 비주류 사람들과 어울려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야고보는 그리스도를, 그리고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까지 선행을 하라고 권하지는 않는다. 야고보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선행이 어떻게 가능한지 가시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빈민들 자신이 날마다 이 진리를 살아 낸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약 2:5). 이것은 산상수훈이나 평지 설교 (마 5:3; 눅 6:20)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에 빗댄 것일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어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가능하다. 자신을 의지할 이유가 없어서 그들은 하나님 의존하기를 더 잘 배워 왔다고 할 수 있다.

      참믿음은 언제나 실천으로 이어진다(약2: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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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고보는 2장에서 일이라는 주제를 좀 더 세부적으로 다룬다. 그는 예외 없이 “일”(헬라어로 ergon; ‘행함’이라는 뜻도 있음 - 옮긴이 주)이라는 단수형보다는 “일들”(erga)이라는 복수형을 사용한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야고보가 단수형이 아니라 복수형을 쓰는 데는 다른 의미가 있을 거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ergon[에르곤]’과 ‘erga[에르가]’는 단지 같은 단어의 단수형과 복수형일 뿐이다.[4]

       

      [5] 야고보는 이 단어를 써서 누군가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온정의 일들부터, 벼논의 수확을 꾸준히 늘리는 등의 일선 업무까지 그려 낸다. 그가 복수형을 사용한 것은 크리스천의 일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기대를 보여 준다. 일(행위)에 중점을 둔 야고보 서신의 논조는 큰 논란을 불러오곤 했다. 루터는 야고보서 2장 24절(“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말씀을 읽고서, 이것이 갈라디아서 2장 16절(‘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과 배치되는 것이라 생각해, 야고보를 싫어하게 된것으로 유명하다. 다른 개혁가들은 루터의 견해를 공유하지는 않았으나, 이후 루터의 이의 제기는 개신교가 야고보서를 보는 지배적인 관점이 되었다.[6]

       

      [7] 여기서 루터의 야고보서 논쟁을 길게 논할 수는 없지만, 야고보가 주장하는 일(행함)이 개신교에서 반대하는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약 2:21, 24-25)과 조화를 이룰 수 없는지 질문해 볼 수는 있다.


         야고보 자신이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야고보서 2장 14절은 틀림없이 논쟁 중심부에 있으므로, 본서의 2장 1-13절에 앞서 이 부분을 먼저 생각해 볼 것이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야고보는 자신의 이 질문에 직설적으로 자답한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 그리고 ‘죽은 믿음’에 관해 신중하게 고른 에피소드에서, 누군가 이웃이 헐벗고 일용할 양식도 없는데 평안히 잘 가라는 빈말을 해 주는 경우를 언급한다(약 2:15-16). 야고보는 당연히 그리스도를 믿는 자(하나님을 신뢰하는자)는 궁핍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도와주리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날마다 일을 하다 보면 주변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줄 기회가 생긴다. 원하는 물건을 찾지 못하는 고객을 간단히 도와줄 수도 있고, 도움이 필요한데도 도움 요청하기를 겁내는 신참 동료를 찾아내는 경우처럼 단순한 것일 수도 있다. 야고보는 이런 연약한 자들, 혹은 소외된 자들에게 각별히 관심을 가지라고 권고하고 있으니, 일터에서 그런 대상이 누군지를 가려내는 연습이 우리에게는 꼭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야고보서의 핵심이다. 야고보는 일(행함)과 믿음이 상충된다고 상상하지 않는다. 믿음(신뢰)이 없다면 선한 행위도 없기 때문에 ‘행함으로 의롭게’ 될 수는 없다. 야고보의 말은, 일들(행함) 없이도 믿음이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온전한 구원에 이르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의미다. 야고보는 행함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한다. 바꿔 말하면, 그건 전혀 믿음이 아니라는 뜻이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크리스천들을 향한 야고보의 명령은, 주님께 대한 신앙 대신 다른 궁핍한 이들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라는 게 아니다. 심지어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에 덧붙여 그러라고 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한 결과로써 궁핍한 자들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는 것을 기대한다.[8]


        크리스천의 믿음은 언제나 실천으로 이어진다는 통찰은, 일터 현장에서 큰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영적인 것이 곧 실천적인 것이므로, 우리는 세상을 영적인 것과 실천적인 것으로 나눌 수 없다. 야고보는 2장 22절에서 말한다. “네가 보거니와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그렇기에 우리는 결코 “나는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다닌다. 그렇지만 나는 내 행함(일)과 믿음은 별개의 문제”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런 믿음은 죽은 것이다. 야고보가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약 2:24)라고 말한 것은, 매일 활동에서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헌신을 행동으로 이루어 내야 할 과제를 던진것이다.


         야고보서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과 궁핍한 자들에게 유익을 주는 일이라는 기본적인 두 원칙을 실제로 적용한 예를 보여 준다. 야고보서 2장 14-26절에 대한 이 같은 우리의 평가를 전제로, 이런 적용이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완성이라는 관점, 야고보 시대에 유효했고 우리 시대에도 큰 교훈을 주는 이 관점을 유지하고 계속 진행해 나갈 것이다.

      혀를 길들이라(약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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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고보는 ‘듣기’에 대한 실천 지침을(약 1:19-21) ‘말하기’에도 적용한다. 야고보서 3장 1-12절에서 그는 자못 맹렬한 단어를 사용한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약 3:6, 8). 또 구약 잠언 말씀에서 혀가 생명을 주관하는 권세를 가졌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으며(그 예로 잠 12:18 -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는 자가있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 같으니라”). 혀가 죽음까지 불러올 수 있다는 점도 잘 알았다.

       

        교회에서 가혹한 말로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점을 제대로 주의하지 않는 크리스천들도 많다. 일터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는 부주의를 범하지는 않는가?(약 3:9; 창 1:26-27) 직장 내 정수기 옆에 모여서 나누는 수다, 뒷담화, 희롱, 경쟁자에 대한 경멸과 같은 일로 상처받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으며, 또 상처를 안 입혀 본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이기적 욕망을 해결하는 길(약3:13-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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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고보서 3장 14절 - 4장 12절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의존의 원칙과 궁핍한 자들을 섬기는 원칙을 기술한다. 늘 그렇듯이 야고보는 순서를 바꾸어서 섬김을 먼저 논하고, 신뢰는 나중에 다루었다. 여기서 야고보는 먼저 이기적 욕망(selfish ambition)을 꾸짖는 것으로 시작해, 뒤이어 하나님께 대한 복종을 권고한다.

       

      이기적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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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적 욕망은 화평하게 하는 일을 가로막는다(약3:16-4:11).  이기적 욕망은 다른 사람을 돕는 일과 반대 개념이다. 야고보서 3장 16절 말씀에 그것을 적절하게 요약했다. “시기와 이기적인 욕망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한 일이 있을 뿐입니다”(현대인의 성경). 야고보는 이런 이기적 욕망을 극복하는 실질적 방안으로 화평하게 하는 일(peacemaking)을 강조한다.[9]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3:18). 그 전형적인 방법으로 곡식을 수확하는 경우를 들어 강조하면서 일터를 암시하고, 몇 가지 화평하게 하는 일들을 나열한다. 피해를 입은 자들을 위해 슬퍼하는 것(약 4:9), 스스로 낮아지는 것(약 4:10), 비방과 기소와 판단을 자제하는 것(약 4:11), 그리고 자비와 진실(약 3:17)이다. 직장에서 일하는 크리스천들은 일터에서 이 모든 것을 실천할 수 있다.

       

         하나님께 복종함으로 이기적 욕망을 극복할 수 있다(약4:2-5).  이기적 욕망은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도 다툼과 싸움을 일으킨다. 야고보는 그것이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규명한다.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4:2-3).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할 수 없다. 흥미롭게도 우리가 하나님께 의존하지 않는 이유는 다른 사람을 섬기기보다 자신의 기쁨을 원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두 가지 원칙을 완전한 하나로 묶는다. 야고보는 하나님 없이 부와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 믿는 유혹을 ‘세상과의 간음’이라는 말로 비유한다(약 4:4-5).[10]

       

      다른 사람들을 위해 투자하라 (약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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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음의 비유를 쓰기는 했지만, 야고보는 전반적으로 이기적 욕망에 관해 말한다. 일터에서 우리는 자신의 성공을 위해 다른 사람을 디딤돌로 쓰려는 유혹을 받는다. 우리가 동료나 부하 직원의 실적을 가로챌 때, 승진을 위해 경쟁 직원에게 정보를 숨길 때, 자리에 없어서 자신을 미처 방어할 수 없는 사람한테 자신의 잘못을 전가시킬 때, 누군가의 어려운 상황을 자신의 기회로 이용할 때, 우리에게는 이기적 욕망의 죄책이 있다. 야고보는 이것이 다툼의 한 근원이라고 지적한다.

       

        역설적이게도 이기적 욕망은 성공을 촉진시키기보다 오히려 지연시킨다. 조직에서 높은 지위에 오를수록 성공을 위해 남들을 더 많이 의지하게 된다. 일이란 게 부하 직원들한테 떠맡길 만큼 간단할 수도 있고, 국제팀에서 조정해야 할 만큼 복잡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만약 당신이 앞서려고 남들을 밟고 간다는 평판이라도 나돈다면, 누가 당신의 리더십을 믿고 따르겠는가?

       

         자기 형상대로 모든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창 1:27), 모든 사람을 위해 죽도록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고후 5:14)께 복종하는 것이 해결책이다. 우리 자신에 앞서 남들을 섬기는 데까지 야망을 낮출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이다. 당신의 권위와 전문성이 더 높아지길 원하는가? 좋다. 다른 동료들의 권위와 장점을 추켜올리며 돕기 시작해 보라. 성공하고 싶은가? 좋다. 주변 사람들이 성공하도록 투자하라. 역설적이지만 다른 사람의 성공을 위한 투자는 자신을 위한 최고의 투자가 될 수 있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교(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의 엘리자베스 던 교수와 하버드경영대학원(Harvard Business School)의 마이클 놀턴, 이 두 경제학자는, 우리 자신을 위해 돈을 쓰는 것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 투자하는 것이 훨씬 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고 말한다.[11]

       

      크리스천이라고 앞날을 다 통제할 수 없다(약4: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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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야고보는 두 원칙들의 새로운 적용의 하나로 옮겨 가면서 사업상의 예측에 대한 경고를 다룬다.[12] 지금까지와는 달리 이제는 먼저 하나님을 신뢰하는 원칙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정신이 번쩍 드는 말로 시작한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3-14).

       

        마치 단기 사업계획에 선고를 내리는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의 사전계획이 그가 우려하는 관심사는 아니다. 앞날에 무엇이 일어날지를 우리가 통제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점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다음 절에서 야고보가 말하려는 진짜 포인트를 엿볼 수 있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약 4:15).

       

        문제는 계획 자체가 아니라, 미래가 우리 손안에 있는 양 계획하는 태도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자원, 능력, 관계, 시간 등을 지혜롭게 활용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우리가 돈으로 할 수 있는 최상의 계획을 세워 실행하더라도, 그 결과는 얼마나 예측 불가능한지 대다수의 사업가들이 잘 안다. 어떤 주식회사의 연간보고서든 10-20쪽에 달하는 지면 가득 회사에 닥칠 위험요소로 가득하다. “우리 주식 가격은 회사가 통제할 수 없는 어떤 불특정 요인 때문에 크게 변동할 수도 있다.”


         오늘날의 일반 회사들과 마찬가지로 예측할 수 없는 일에는 적절히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을 야고보는 명확히 밝힌다. 그럼 어째서 야고보는 세상의 일반 사업체들이 그토록 잘 아는 것을 신자들에게 상기시키는 것일까? 아마도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노라면 예측할 수 없는 삶과 일에 대해서도 면역력을 얻을 거라고 때때로 착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이다. 야고보는 크리스천들이야말로 더욱 지속적으로 재평가하고, 적응하고, 조정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계획은 조정 가능해야 하고 상황 변화에 맞추어 실행해야 한다. 언뜻 보면, 이것은 단순히 사업 실행의 좋은 예다. 그렇지만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면, 이것은 영적인 문제이고 단순히 시장 조건에 대응하는 필요를 떠나 하나님의 인도함을 따르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야고보의 훈계를 다시금 주의 깊게 받아들여야 한다. 크리스천 리더십은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계획과 조치에 강제로 따르도록 하기보다, 먼저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과 인도하심을 우리 삶에 적용하는 것이다.

      부당한 권력 남용과 노동 착취 (약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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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야고보는 다른 사람의 필요를 위해 섬겨야 한다는 원칙으로 다시 돌아간다. 야고보서 5장을 시작하는 그의 말은 준엄하다. 그는 ‘부유한 자들에게’ 경고한다.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약 5:1). 금고 안에 빛나는 금은보화와 옷장 안의 화려한 옷들은 언제나 빛날 것처럼 보이지만, 야고보는 그들의 재물이 이미 썩기 시작했다고 단언할 만큼 심판이 임박했음을 확신한다.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약 5:2-3). 그들의 사치하고 허랑방탕한 삶은 오직 도살의 날을 위해 ‘살찌는’ 데까지만 이어질 뿐이다(약 5:5).


         이들 부자들은 어떻게 그들의 부를 획득했는지, 그리고 부를 획득하고 나서 무엇을 했는지 안 했는지에 따라 파멸당할 운명이다. 야고보가 불의한 사업 관행을 강하게 꾸짖는 것을 보노라니 구약 성경의 교훈이 떠오른다.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약 5:4; 레19:13).[13] 일꾼의 손에 있어야 할 돈이 사업주의 금고 안에 쌓여 있는 것이다. 그들은 부를 비축했고 주변의 필요한 자들을 외면했다(약 5:3).


         사업주는 특별히 일꾼들에게 임금을 지불하는 데 바지런해야 한다. 공평한 임금 지불에 대한 분석 연구는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의 범위를 벗어나지만, 야고보가 ‘사기 쳐서 남기는 임금’(약 5:4, NRSV)이라고 한것은 이 특정 지주들의 권력 남용을 꾸짖는 것이다(개역개정에는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으로 번역했다 - 옮긴이 주). 일꾼들이 마땅히 삯을 받아야 하는데도 권세 있는 부자는 법적 처벌을 용케 피해 가면서 지불하지 않을 길을 발견한 것이다. 그런 부자는 흔히 사법체계를 무력화시킬 수단을 갖고 있어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부당한 권력을 남용하기가 너무나 쉽다.

       

        부자들의 권력 남용에는 직원들을 독립 계약자(independent contractors)로 잘못 분류하거나 미숙련자로 분류해 낮은 임금을 지급하게 만드는 부정확한 업무 배치, 같은 일이지만 여자 혹은 소수민족을 고용해서 다른 사람보다 낮은 임금 지급하기, 어른들도 꺼리는 위험한 일을 어린이들에게 시키는 아동 노동학대 등등이다. 권력 남용은 소위 표준관행이라는 이유로도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된다.


         야고보는 이와 같이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한 자들을 단죄한다(약5:5).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한 삶이 과연 무엇인지를 말하기는 좀 복잡하지만, 수많은 크리스천들에게도 도전이 된다. 이 대목에서 야고보의 주된 관심은 빈민들이 잘 사는 것이므로, 우리 자신에게 물어볼 가장 적절한 물음은 이런 것일 터이다. “내가 사는 방식이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가? 아니면 더 가난하게 하는가? 나의 돈 씀씀이가 사람들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돕는가, 아니면 사람들을 빈곤 속에 머물게 하는가?”

      추수의 날을 기다리며(약5: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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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고보는 인내, 정직, 기도, 죄 고백, 병 고침에 대한 다양한 권면으로써 서신을 끝맺는다. 늘 그랬듯이 이런 것들은 진실한 행함(일들)으로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해야 하는 원칙 또는 하나님께 의존한다는 원칙 가운데 하나 또는 둘 모두에 호소한다. 그리고 여태 해 왔듯이 야고보는 이를 일터에 직접 적용한다.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인내하라

         야고보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증거를 일터로 비유하면서 5장을 시작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약 5:7-8). 그러고는 위의 말에 메아리치는 경구로 마무리한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약 5:17-18).


         일터에서의 인내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한 형태인데, 매우 힘든 일이다. 일은 어떤 결과를 얻으려는 것인데, 그렇지 않다면 일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 만큼 일을 하지 않고서도 결과를 움켜쥐려는 유혹은 항상있다. 만약 내가 돈을 투자한다면, 빨리 부자가 되고 싶어 하지 천천히되고 싶어 하겠는가? 내부자 거래, 폰지 사기(Ponzi scheme), 슬롯머신에 생활비를 날리는 도박 등은 그런 조급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만약 승진하고자 한다면 상사의 눈에 들도록 별의별 수단을 동원하지 않겠는가? 그것은 중상모략, 신용 위조, 험담, 팀 와해로 이어진다. ‘만약 내가 할당량을 채워야 한다면, 엉성하게 빨리 해치워서 생산라인의 다음 사람한테 문제를 전가시키면 되지 않을까?’ 이런 것들은 개인의 도덕적 문제로 끝나는 정도가 아니라, 직원이 자신의 이익을 도모할뿐더러 제품의 질도 나빠지는 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진실만을 말하라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 받음을 면하라”(약5:12).


         항상 진실만을 말하는 사람들이 근무하는 직장을 상상해 보라. 단순히 거짓말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사실 그대로 가장 정확히 이해한 것을 듣고 말한다면? 맹세와 서약도 필요 없고, 소급 해명이 없어도 되고, 허위 진술과 사기에 대한 별도의 계약 조항도 따로 필요 없을 것이다. 판매자가 제품에 대한 모든 정보를 항상 제공한다고 상상해 보라. 또 계약서 내용은 모든 당사자들에게 늘 명료하게 전달되고, 사장과 상사들은 수하 직원들에게 돌릴 공을 명확하게 돌린다고 상상해 보라. 업무 관련 정보를 교묘히 감추기보다 언제나 명확한 대답을 하여 그림처럼 정확하게 전달한다고 상상해 보라. 현재의 직장에서 성공하겠는가? 만일 모두가 최대한 정직해진다면 성공할 수 있겠는가? 성공의 정의가 바뀌어야하는 것 아닌가? 이 주제에 대해서는 TOW 웹사이트 핵심 주제 코너에서 ‘진실과 거짓’ 부분을 보라.

       

      구하라, 하나님께

         야고보는 기도 얘기를 하면서 하나님 의존 원칙으로 되돌아간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약 5:13),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 하나님께 구하라”(약 1:5). 야고보는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아뢰라고 우리에게 요청한다. “하나님, 저는 생산에 차질을 빚게 된 이 실패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릅니다. 상사에게 이 문제를 이야기하기 전에 주님께 먼저 도움을 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마다 우리가 기대한 그대로 응답하겠노라 보장하시지는 않지만, 우리의 필요를 능히 채워 주실 수 있다. 많은 크리스천들은 이상하게도 매일 직장에서 부대끼는 특정 이슈들, 상황, 사람들, 필요, 두려움과 의문에 관해 마지못해 기도한다. 하나님의 구체적인 인도하심을 (심지어 특정 결과를 위해 간구하라는 야고보의 권면도) 자꾸만 잊어버린다. 그는 우리에게 믿음을 가지라고,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삶에서 실제로 응답하시리라고 말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서로 죄를 고백하라

         야고보는 서로 죄를 고백함으로써 치유를 받도록 하라고 권고한다(약5:16). 일터에서 가장 흥미로운 말은 ‘서로’다. 여기서의 전제는 사람들이 단순히 하나님께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 죄를 짓는다는 것이며, 일터에서의 경우는 분명히 그렇다. 우리는 매일 생산과 업무 수행의 압박, 시간의 제약을 받고, 종종 귀 기울이지 않은 채 행동하고, 반대 의견을 무시하고, 불공정하게 경쟁하며, 자원을 독차지하고, 귀찮은 정리를 옆 사람에게 떠넘기고, 내 욕구불만을 동료들 탓으로 돌리곤 한다. 우리는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다.

       

        유일한 치유의 길은 서로 죄를 고백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동료의 성과를 부정확하게 비판함으로써 그가 승진에서 제외되었다면, 단지 하나님께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뿐 아니라 직장에서도 그 죄를 피해자에게 고백해야 한다. 그 손상을 정말 바로잡기 원한다면, 해당 부서의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죄를 고백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동기로 죄 고백과 병 고침을 원하는가?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의 필요를 섬길 수 있다. “너희가 알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 것임이라”(약 5:20). 사망에서 누군가를 구원하는 것은 아주 깊고 절실한 필요를 채워 주는 섬김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죄인이기 때문에) 아마 우리 역시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사망에서 구원받도록 다른 누군가도 지금 우리를 돕고 있을 것이다.

       

      베드로전서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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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드로전서는 예수님께 충성했기 때문에 비방을 받고, 거짓 고소를 당하고, 신체적으로 학대받는 사람에게 쓴 서신으로(벧전 2:12, 18-20; 3:13-17;4:4, 14, 19), 여기서 베드로는 어떻게 크리스천이 자신의 고난을 세상을 위한 섬김으로 바꾸어 살도록 부름받았는지 설명한다.

       

         그리스도는 그분을 알지 못하는 세상에서 그분을 따르도록 우리를 부르셨다. 우리는 낯선 이곳에 머무는 나그네이며, 여기는 우리의 진정한 집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가지 시험”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벧전 1:6). 그러나 베드로는 우리가 이 세상의 희생양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을 세상에 가져오는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부른다(벧전 2:5). 크리스천의 일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면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그분의 왕국을 회복할 때까지 세상을 축복하는 일이다.

       

      나그네요, 제사장으로 세상을 섬기다 (벧전1: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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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신 서두에서 베드로가 수신자들에게 쓰는 “나그네들인, 택하심을 입은 이들”(벧전 1:1, 새번역)이라는 본 구절은 베드로 서신 전체를 관통하는주된 메시지의 전조로 보인다. 이 구절은 ‘나그네들’과 ‘선택받은’이라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 왕국의 시민이라면, 당신은 나그네다. 당신을 둘러싼 현재 이 세상은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은 외세 지배 아래 있는 것이다. 당신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동안, 당신의 진정한 왕국 시민권은 ‘하늘에 간직돼’ 있다(벧전 1:4). 어떤 나라에 잠시 거하는 나그네들처럼, 당신도 당신이 사는 땅의 통치자들의 총애를 반드시 누리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 스스로 오셨지만 “사람에게는 버린 바”(벧전 2:4) 되셨다. 마찬가지로 그분 왕국의 모든 시민들도 같은 대우, 곧 사람들에게 버린 바 되는 상황을 예상해야 한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동안 이 낯선 땅에 머물도록 우리를 부르셨다(벧전 1:15-17).


         정치적 은유로 말하고는 있으나, 베드로는 일터의 용어를 들고 있다. “행위”(벧전 1:17), “은이나 금”(벧전 1:18), “불로 연단”(벧전 1:7), “깨끗하게 하여”(벧전 1:22), “집으로 세워지고”(벧전 2:5) 등등. 베드로가 일터 용어를 사용한 까닭은 우리가 일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주변 노동세계 가운데서 우리가 주님을 따를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해서다.


         ‘나그네’라는 말의 의미를 설명한 뒤, 베드로는 또 다른 용어 ‘선택받은’(벧전 1:1)을 사용한다. 만일 당신이 크리스천이라면, 당신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다. 당신이 임시로 거주하는 이 나라의 제사장이 되기 위해서다.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 베드로전서 2장 9절에서도 제사장의 타이틀 또는 ‘왕 같은 제사장직’은 거듭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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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은 희생제사를 드렸고 이스라엘을 축복했다

       

        더 나아가기 전에 고대 이스라엘에서 제사장이 된다는 게 무엇을 뜻했는지 알아야 한다. 제사장에게는 주로 두 가지 역할이 있었으니, 예루살렘 성전에서 희생제사를 드리는 것, 그리고 제사장적 축복 선언이었다.[14]

       

      [15]제사장들은 희생제사 의무를 감당하기 위해 성소나 성전의 내실로 들어가야 했고, 대제사장의 경우 매년 한 번씩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 있어야 했다. 대리적 축복 선언을 하기 위해 그들은 하나님 당신을 대신하여 말해야 했다. 이 두 가지 직무를 수행하려면 모두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가야 했다.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 앞에는 불순하거나 부정한 것은 아무것도 용납될 수 없기에 결국 각별한 정결 또는 성결은 필수적이었다.[16] 

       

        그러면서도 제사장들은 순번제로 돌아가며 자기 차례에 섬겼고(눅1:8) 주된 생계 수단으로 일반 직업에 종사했다. 그들은 일상생활에서 격리될 수도 없었지만, 세상의 더러움과 부패에도 불구하고 정결을 유지해야만 했다.

        

       

      우리는 이 시대 제사장이다.

        베드로가 크리스천들이 “거룩한 제사장”(벧전 2:5)과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으로 부름받았다고 한 것은 모든 신자가 자신을 전임 목회자로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전도자나 선교사가 되는 것이 선택받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성취하는 최선의 길이라는 의미도 아니다. 무슨 일로 생계를 유지하든, 크리스천들은 그 가운데서 순결하고 거룩한 삶을 산다는 뜻이다.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주변 사람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릴 수 있고, 하나님의 복을 전달할 수있다. 베드로는 직설적으로 말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하려 함이라”(벧전 2:11-12).


         물론 크리스천들이 유대인 제사장들과 똑같은 희생제사를 드리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동물을 죽여 바치지 않는다. 대신 우리 주님이 앞서하신 것과 같은 희생제사를 드린다. 즉 궁핍한 자들의 유익을 위한 자기 희생이다. 베드로는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라고 말한다. 이것은 ‘영적 희생’(벧전 2:5) 즉, 궁핍한 자들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선한 청지기로 드리는 것을 뜻한다(벧전4:10).


         우리는 날마다 일터에서 크든 작든 이런 자기희생의 기회를 만난다. 이는 베드로전서 1장 3절-2장 10절을 요약한 것으로, 사도 베드로가 수신자들을 왜 ‘선택받은 나그네들’(NRSV)이라고 불렀는지 내력을 알 수 있다. ‘나그네들’이라는 용어에는, 우리가 본향이 아닌 낯선 땅, 부정부패가 만연한 곳에서 외국인으로서 우리의 소명을 살아 낸다는 뜻이 담겨 있다. ‘선택받은’이라는 말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 ‘왕 같은 제사장들’은 특별히 자기희생을 통해서 세상에 복이 되는 제사장의 소명을 지녔음을 확인시켜 준다.

      세상 권세자들 아래서의 고난 (벧전2:13-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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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천의 노동 환경에서 나그네와 제사장으로서의 부르심을 수행한다는 것은 어떤 일일까? 베드로는 이것을 외국인과 종인 수신자들에게 주는 직접적인 지침으로 말한다. 비록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은 우리에게 ‘자유인’(벧전 2:16)으로 살아갈 권리를 부여해 주지만, 땅의 외국인들로서의 우리는 우리가 사는 나라가 어디든 그곳의 모든 시민법과 제도를 존중하고 순종해야 한다(벧전 2:13-14). 비록 베드로가 어떤 부류의 일꾼들이라고 밝히지는 않지만, 분명히 수신자들의 다수를 이루는 ‘종들’에게 자신이 받는 대우가 정당하든 부당하든 어떤 주인에게도 순종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은 예견된 일(벧전 4:12)이며, 오히려 보복하지 않고 그리스도 고난의 자취를 따라 고난을 감당할 기회를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벧전 2:21).

       

        주의할 것은 여기서 베드로는 부당한 수난을 말하는 것이지, 우리 자신의 무능, 오만, 무지로 인해서 겪는 어려움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정당한 형벌이라면 순복하는 맘으로 받아야 한다. 사실 당신은 위의 권위에 불복할 자유가 없다. 비록 당신이 생각하기에 올바르다고해도 그렇다. 당신이 승진, 임금 인상, 창이 있는 사무실, 수준급의 의료보험 제도 혜택을 받을 만한 충분 조건을 갖추었는데도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어쩌면 고용주가 당신을 의도적으로 기만하고, 시간 외 근무를 강요하고, 상사의 잘못을 당신에게 뒤집어씌워 징계를 가할 수도 있다.

       

        반면 당신 또한 아프지도 않으면서 병가를 내고, 개인 물품을 사면서 회사에 전가시키고, 회사 사무용품을 슬쩍 챙기거나 업무 시간에 빈둥거리는 것 같은 일로 고용주가 당신을 속인 것만큼 그렇게 윤리적으로 회사를 속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나으니라”(벧전 3:17).

       

        하나님은 뺏기는 만큼 도로 취하라고 가르치지 않으신다. 당신이 속은 만큼 남을 속인다고 해서 당신의 행위가 덜 악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적대적인 업무 환경일지라도 오직 선을 행하도록 당신을 부르셨다(벧전2:20).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라’(벧전 3:9). 오히려 크리스천들은 심지어 불의하고 부당한 권위도 존중해야만 한다.


         왜 그런가?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옹호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듯이(벧전 2:21-25), 우리는 제사장으로 사람들을 축복하도록 부름받았지, 우리 자신을 옹호하도록 부름받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는 권위에 도전하시고 권세를 사용하는 데 주저함이 없으셨지만, 베드로는 여기서 복음의 전체 개요를 다시 말하지는 않았다. 특별히 예언서와 같은 다른 성경의 경우, 억압적이고 불법적 권위에 대해서는 저항하라고 하나님이 강조하셨다.

       

        항복이 항상 순종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도 공공연하게 불순종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임으로써 권위에 복종할 수도 있다. 이 대목과 그의 서신서 전체를 통해 베드로는 오로지 그리스도의 자기희생 모범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지도자들과 따르는 자들을 위한 지침들(벧전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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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드로는 이제 ‘장로들’(elders;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는 헬라어 어원에서 온 영어식 표현 ‘presbyters’나 ‘bishops’가 익숙하다)이라고 칭한 교회 리더들에게 지침을 준다. 이것은 또한 다른 사람을 섬기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어 일터에 있는 지도자들에게도 훌륭한 조언이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 자원함으로 하며”(벧전 5:2). 돈에 대한 탐심을 품지 말라(벧전5:2).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본을 보이라(벧전 5:3).

       

        베드로는 잠언 3장 34절을 인용하면서 젊은이들에게 (아니, 사실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하고 겸손을 권유한다. 이것이 유독 베드로전서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 확대 설명을 하지는 않겠다. 단지 오늘날 일터에서 널리 활용하는 종의 리더십 개념을 베드로가 잘 알고 있었음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예수님의 탁월한 종의 리더십이 전수될 수 있었겠는가?(벧전 4:1-2, 6)

       

      베드로후서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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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드로후서는 거룩한 삶과 고난을 견디는 인내의 필요성에 관해 야고보서와 베드로전서에서 이미 보았던 여러 주제들을 강화한다. 여기서는 이 부분을 반복해서 다루지 않고, 일의 신학에 대한 강한 도전을 주는 베드로후서 3장에서만 그렇게 할 것이다. 만일 “현재의 하늘과 땅은 심판 날에 모든 경건치 않은 사람들을 불로 멸망시키기 위해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존되고 있는 것”(벧후 3:7, 현대인의성경)이라면, 오늘날 우리의 일은 그 가치가 무엇인가? 대럴 코스덴(Darrell Cosden)의 중요한 책에서 제목을 빌려 살펴본다면, 이 땅에서의 노동은 하늘에 무슨 유익이 있는가?[17]

       

      이 땅의 끝, 영원의 시작(벧후3: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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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이 땅에서 하는 일은 하나님과 관련이 있을까?[18] 대럴 코스덴은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다. 그의 논쟁의 핵심인 예수님의 몸의 부활은 (1) 물질 세상의 선함을 확인시켜 주고, (2) 지금 세상과 새 창조 세계 사이의 연속성을 보여 주며,[19](3) 아직 완전히 구현되지 않았지만 이미 시작된 새 창조의 표징이다.  우리의 노동은 궁극적인 가치가 있다. 구속받고 성화된 우리의 수고의 열매는 하늘을 그 본향으로 삼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3장은, 코스던의 일의 신학에서 두 가지 필수불가결한 면모들 즉 (1) 창조물의 타고난 선, 그리고 (2) 지금의 세상과 다가올 창조 세계의 연속성에 대한 질문을 떠올려 주는 것 같다.
       

        베드로는 여기서 악을 심판하는 역사에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조롱하는 불법자들에게 맞선다(벧후 3:3-4). 그러면서 현재 세계와 미래 세계의 연속이 결여된 듯한 모습을 보이는데, 그것은 우주의 종말 또는 소멸을 뜻하는 것 같기도 하다.

       

      1.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 3:7).
      2.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 3:10).
      3.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벧후 3:11).
      4.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벧후3:12).
      5. 그러나 우주의 종말이 눈에 보이듯 너무나 가깝다고 속단하지는 말라.[20] 베드로가 사용하는 종말의 이미지는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독자들에게 확증해 주는 구약 성경의 예언적 계시에서 흔히 찾아볼수 있다. 구약 성경의 예언서들과 제2성전 시대 유대 문학은 모든 의인의 정화와 악인의 멸망을 언급할 때 불의 이미지를 은유적으로 사용했다.[21]

      [22]

         베드로후서 2장 7절, 10절과 3장 12절을 종말묵시문학의 관행적 흐름안에서 읽어 보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녹아 버리는 이미지를 하나님이 선과 악을 구별하시는 과정의 은유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23]

       

        이것은 베드로가 첫 번째 서신에서 불의 이미지를 어떻게 사용했는지 보여 준다. 즉 수신자인 성도들도 역시 금을 제련하는 것과 같은 시련을 거칠 터인데, 이 불 시련을 통과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칭찬과 영예를 얻으리라는 진리를 상기시켜 주었다(벧전 1:5-7). 이 구절들은 문자 그대로 하늘과 땅이 소멸될 것을 강조한다기보다 모든 악이 궁극적으로 단절될 것임을 말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베드로는 ‘녹아 버리다’, ‘불에 풀어지다’, ‘심판’, ‘예비된 불’ 같은 용어로 세상을 변화와 시험의 면에서 조심스럽게 표현한다. 더글러스 무(Douglas Moo)는 베드로후서 3장 10-12절에서 사용된 ‘불에 녹아 버리다’는 헬라어 ‘lu?[루오]’가 멸절의 의미가 아니라, 급격한 변화를 뜻한다고 해석하면서 그 대안으로 ‘undone’(풀린 상태의 또는 미완의 - 옮긴이 주)이라는 번역을 제안한다.[24]

       

         베드로는 노아 시대를 언급하면서(벧후 3:5-6) ‘물의 넘침’을 완전한 멸절로 풀이하는 해석을 경계한다. 그것은 세계의 존재 자체의 끝이 아니라 인간의 악을 정화하는 의미였다. 노아와 가족, 소유와 방주 속 동물에 국한된 인간의 선은 보존되었고, 생명도 물리적 지구에서 다시 시작되었다.


         끝으로, 궁극적 미래에 대한 베드로의 긍정적인 비전을 물질계 질서의 쇄신으로 묘사한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3). 이것은 보잘것없고 육체를 벗어난 저세상이 아니라 ‘하늘’과 ‘땅’을 포함한 새로운 우주다. 베드로후서 3장 10절에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라는 말씀이 있다. 드러난다고 했지 파괴된다고 하지 않았다. 불타고 난 후에도 여전히 ‘일들’이 남아있으리라는 뜻이다. 이상은 본 베드로후서가 현재 일의 영원한 가치에 관한 신학의 주된 근간이라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본 서신이 그런 신학으로 일관되어 있다는 얘기다.

       

        우리가 원하는 만큼 충분히 상세하지는 않지만, 베드로후서는 현재 땅에서 하는 일과 미래에 경험할 일 사이에 모종의 연속성이 분명히 있다고 말한. 모든 악은 결국 소멸되지만, 모든 의로운 것들은 영원한 본향에서 새 창조를 맞이할 것이다. 불은 소멸하면서 더불어 정화시킨다. 풀어짐(용해됨)은 일의 끝을 가리키지 않는다. 하나님을 위해 행한 일은 오히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참된 결말을 이끌어 낸다.

      요한일서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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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록 야고보서와는 무척 다른 상황에서 기록되기는 했지만, 요한일서도 역시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행위인 ‘행함’이 없는, 그런 믿음이 가능한지 도전한다.[25] 요한일서 2장에서 요한은 하나님을 진실하게 안다는 것은 성화된 인격과 행동, 하나님께 대한 순종으로 명백히 나타난다고 말한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3-6).


         요한일서는 재차 야고보서와 보조를 같이하면서 궁핍한 자를 돌보는것을 하나님을 바로 아는 지식에서 나온 행동으로 간주한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요일 3:17) 한 걸음 더 나아가 요한일서는 믿음과 행함 사이의 관계를(요한의 용어로는 ‘하나님을 아는 것’과 ‘순종하는 것’ 사이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요한은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지는 것(요일 2:8-11), 하나님께 사랑받게 되는 것(요일 3:16; 4:7-10, 16, 19-20),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의 자녀가되는 것(요일 2:29; 3:1-2, 8-9),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가는 것(요일 3:14) 등의 다양한 이미지를 사용하면서, 하나님께 순종하기 전의 우리 실상을 보여주는 동시에 순종이 가져오는 결과까지 설명해 준다.  요한에 의하면, 올바른 삶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요 그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일 4:7-10).


         요한은 이런 과정의 결과로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할 수 있다’(요일 1:7)고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의 대속적인 희생제사를 통해 우리를 질적으로 다른 존재가 되게 하여, 우리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대로 행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우리는 단지 이따금 한 번씩 빛을 켜 놓는 사람들이 아니다. 새로운 삶의 양식으로써 계속 빛 가운데 걷는 사람들이다. 이로써 직장 윤리에서도 직접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프로테스탄트(개신교) 사상 및 생활에서 오랫동안 경시해 오다가 최근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 하나가 ‘덕 윤리학’(virtue ethics)이다.[26]

       

        덕 윤리학은 규율을 정하고 즉각적인 결정의 결과를 계산하기보다 장기적인 도덕성 함양에 중점을 둔다. 규율과 명령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요일 5:3). 즉, 좀 오래 걸린다 해도 도덕성을 먼저 형성해 두어야 그런 규율들을 준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 긴 논의는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겠지만, 요한의 ‘빛 가운데 걸어가기’라는 개념은 덕성으로 접근하는 라이프스타일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우리가 하는 것(일)은 필연적으로 우리의 됨됨이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TOW 웹사이트 핵심 주제 코너에서 ‘윤리’ 부분을 보라.

       

         빛의 은유에서 우리가 특별히 적용할 한 가지는, 우리의 직장생활이 열려 있어야 하고 투명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행동을 빛으로부터 감추려 하기보다 면밀하게 검토하고 행하자는 얘기다. 빛 가운데 행하면서 투자자를 속이지 않고, 품질 기록을 허위로 조작하지 않으며, 동료를 험담하지 않고, 뇌물을 갈취하지 않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요한일서 1장 7절은 요한복음 3장 20-21절 말씀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의 되풀이다. 보다 자세한 논의는 이 시리즈 3권 《일하는 크리스천을 위한 사복음서 · 사도행전》 4장 부분을 보라.

       

         롭 스미스(Rob Smith)는 아프리카 빅토리아 호수에서 사용할 배를 만드는 비즈니스 선교사역체를 이끌고 있다. 그는 지역 관리들로부터 자주 뇌물을 요구받는다고 한다. 그런 요청은 언제나 비밀리에 이루어진다. 그런 지불에는 영수증도 없고 거래 기록은 어디에도 남지 않는다. 스미스는 이런 요청들을 빛 가운데로 가져가기 위해서 요한복음 3장 20-21절을 사용해 왔다. 그는 뇌물을 요구하는 관리들에 이런 식으로 말하곤 한다. “저는 이런 식의 지불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이에 대한 문서 작성을 위해 대사님이나 경영책임자를 불러들이고 싶습니다.” 그는 이런 전략이 뇌물에 맞서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뇌물이 비윤리적이기는 해도 시장 및 이익 확장의 도구가 된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지만,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조지 세라핌(George Serafeim)의 연구에 따르면, 뇌물 증여는 사실 장기적으로 회사 수익을 감소시킨다.[27]


         이와 관련하여 요한일서에서는 하나님 나라에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 반드시 전임 사역자가 될 필요는 없다고 역설한다.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소위 ‘영적’ 사역이라고 불리는 설교와 전도를 하면서 월급을 받지는 않지만, 모든 크리스천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행위로써 빛 가운데 행할 수 있다(요일 3:18-19, 24). 그런 모든 행위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하며, 따라서 매우 영적이고 의미가 깊다. 이와 같이 교회에서하는 일이 아닌데도 가치가 있는 것은, 그것이 전도의 기회를 잡을 수도 있는 곳인 데다 선교기금으로 쓸 수 있는 임금을 받는 곳일뿐더러 주변 사람들을 섬김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친교를 구현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일터가 이웃 사랑의 가장 실천적인 수단인 까닭은 멀고 가까운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주는 물자와 봉사를 창출해 내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동은 하나의 영적 소명이다.


         이런 의미로, 요한일서는 우리를 다시금 야고보서로 이끌어 간다. 두 책 모두 크리스천의 삶에서 순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하며, 이것이 어떻게 일의 신학에서 하나의 요인으로 포함되는지 보여 준다. 일터에서든, 어디에서든,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할 수가 있다. 궁핍한 자들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목숨도 주셨던 그리스도를 본받기 때문이다.

      요한이서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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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이서는 일반서신서들의 전반적인 틀과 들어맞고 그리스도 안에서 일과 삶에 관한 자체적 통찰을 제공해 준다. 짧은 서신이지만 실천적 지침들로 가득하다.

       

      진실함으로 대하라(요한이서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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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함이 빠진 사랑의 위험성(요한이서 1-6)

       

         요한의 각 서신서는 “진리”(truth; 진실)와 “사랑”의 개념을 하나로 묶어서 다루는 게 특징이다(요일 3:18; 요이 1, 3절; 요삼 3절). 이 개념이 가장 확장되고 발전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요한이서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너의 자녀들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 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요이 3-5절).
       

         요한에 의하면, 사랑에 진리를 더하면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우리와 함께할 수 있는 환경이라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종종 진실이 빠진 사랑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추구한다. 일터에서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을 하면서, 진실을 말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잘못된 믿음으로 불편한 진실은 가리거나 숨긴다. 혹은 진실을 말하면 평강이나 은혜보다 악감정이나 충돌이 일어날 것이라고 걱정한다. 딴에는 긍휼을 베푼다고 생각하면서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언제나 진리와 함께 출발해야 한다. 사랑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로 오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진리의 완전한 구현이시다. 말하자면, 사물 본연의 모습을 잘 아시는 하나님은 그분의 지식을 사랑으로 감싸 그분의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 주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만약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한다면, 허위와 회피 혹은 거짓말이아닌 진실에서 시작해야만 한다. 진실을 말하노라면 충돌을 일으키거나 자신 혹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어지럽힐 수 있다. 그렇지만 진정한 은혜와 긍휼과 평강은 현실과 맞닥뜨리고 어려움의 수고를 거쳐 진정한 해결점에 다다를 때에 절실하게 다가온다.


         제너럴 일렉트릭사 CEO 잭 웰치는 직원들의 업무 성과에 대해 진실하면서도 노골적인 평가를 내리는 그의 관행 때문에 논쟁의 중심에 섰던 사람이다. 그는 매월 회사가 기대하는 바를 직원들이 얼마나 충족시켰는지 본인에게 알려 주었다. 그리고 일 년에 한 번씩은 그들이 최고의 성과를 올렸는지, 아니면 이런저런 부문에서 개선이 필요한 중간 정도의 성과를 보였는지, 혹은 해고의 위험에 처한 최하위 성과를 보였는지도 말해 주었다.[28]이런 관행을 가혹하다고 간주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웰치는 그것을 사랑의 표현이라고 봤다.


      거짓 친절을 베푸는 관리자야말로 가장 나쁜 관리자다. 나는 (나긋나긋하게 잘해 주기만 하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당신이 친절한 관리자이니 훌륭한 관리자라고 생각해요? 그럼, 내 말을 들어 봐요. 당신이 영원히 그 자리에 있지는 않겠죠. 안 그래요? 승진을 하든지 은퇴하겠죠. 그리고 당신 후임으로 새 관리자가 와서 당신 부하였던 직원을 보고는 이렇게 말할 거요. “이런, 경력에 비해 실력이 너무 부족하군요.” 그런데 이제 그 직원이 쉰 살도 넘고, 삶의 다른 선택지도 별로 없다고 합시다. 그럼, 당신은 그 직원한테 뭐라고 할 건가요? 이젠 집에 가서 쉬라고 할 건가요? 그게 어떻게 친절인가요? 그렇게 되면 당신은 가장 잔혹한 관리자가 되는 겁니다.”[29]

       

       

      진실함에는 대가가 따른다 (요이7-11)


         요한은 우리에게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다’(요이 7절)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진실을 말하다가는 속임수로 이득을 챙기는 자들과 충돌할 것이다. 이런 난관에서도 진실을 말할 것인가, 아니면 속이는 일에 참여할 것인가? 만일 속이는 편을 택한다면,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정직한 사람들이 아님을 인정하는 셈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이 시리즈 1권 《일하는 크리스천을 위한 모세오경 · 역사서》 3장의 “출 20:16” 부분과 6장의 “신 5:20” 부분을 보라.


         미국의 전 조폐국장 에드 모이(Ed Moy)에게는 이런 일화가 있다.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 회사 차량을 개인적으로 사용한 경우와 공적으로 사용한 경우의 유지비 보고서를 늘 구별해서 기록했다. 그때까지 회사에서는 집에서 직장으로 갈 때만 개인 용도로 처리하고, 나머지는 (심지어 개인적 여행일지라도) 회사 공용으로 처리하는 관행이 있었다. 그런데 에드가 이렇게 사적 용도를 정직하게 구분하자 그의 상사는 마치 그를 해고할 듯이 나무랐다. “우린 보수도 시원찮고, 이렇게 하는 편이 더 수입을 올리는 길일세. 자네 보고서는 동료들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있어.” 그러자 에드는 이렇게 답했다. “원하신다면 저를 해고하실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런 작은 일로 거짓말하는 사람이 부하로 있길 원하십니까? 그 부하의 영향력이 올라간다면 어떻게 그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우여곡절 끝에 에드는 그 직장을 계속 다녔다.[30]

       

         속이는 자들이나 거짓 교사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할 것인가? 에드의 예에서 우리는 그런 계약을 파기시키는 것만이 최선은 아니라는 것을 알수 있다. 우리는 단순히 그 자리를 피하기보다 계약을 유지하며 진실을 말함으로써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게다가 만일 우리가 거짓을 일삼는 모든 사람들과 계약을 파기한다면, 누가 남게 될 것인가? 심지어 우리 자신조차 말이다.

      얼굴을 맞대고 소통하는가(요이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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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은 대면하여 계속 대화하고 싶다는 말로 본 서신을 마무리한다.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대면하여 말하려 하니 이는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하려 함이라”(요이 12절).

       

        아마도 전달하려는 의사를 편지로 써서 간접적으로 전하는 경우에는 오해가 생길 수 있다고 깨달은 듯하다. 이것은 비록 거리 때문에 서로 대면하는 것이 어렵다 할지라도 대면하여 직접 말하는 편이 더 효과적이라는, 세심한 의사소통에 관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해 준다. 21세기 일터는 개인 의사소통에서 훨씬 더 복잡한 도전이 기다린다. 오늘날 원거리 소통에는 화상회의, 전화, 문자 메시지, 편지, 이메일, 소셜 미디어 등등의 다양한 옵션이 있다. 

       

        그러나 효과적인 소통은 여전히 메시지의 성격에 적합한 미디어를 요구한다. 예를 들어서 이메일은 주문하는 데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지만 업무평가 내용을 전달하는 데는 아마 그렇지 못할 것이다. 더 복잡하고 더 감성적인 메시지일수록, 더 직접적이고 사적인 수단이 필요하다. 인텔 상무였던 팻 겔싱어(Pat Gelsinger)의 말을 들어 보자.


      내게는 나만의 규칙이 있다. 만일 한 가지 주제로 네다섯 번쯤 이메일을 주고받았다면, 나는 더 이상 이메일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 후에는 전화를 사용하거나 직접 만난다. 어떤 문제를 빨리 해결하지 못한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한쪽은 냉정함을 잃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당신이 가장 직설적으로 말한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대방을 무능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는 의사전달 수단 때문일 수 있다. 이것은이 문제를 설명하는 데 중요한 요소다.[31]
       

          잘못된 소통 수단은 쉽게 오해를 살 수 있고, 진실 전달에 실패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뿐인가, 잘못된 수단은 사랑을 전하는 데도 실패할 수있다. 그래서 바른 소통 수단을 선택하는 일은 우리 동료들에게 진실을 전하고 사랑을 보여 주는 데 필수적이다. 힘든 대화라도 존경과 온정으로 소통해야 하며, 달갑지 않은 사람과 소통할 때는 특히 그렇다. 마음이 불편하거나 불쾌할 때라도 얼굴을 맞대야 한다.

      요한삼서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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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이서와 마찬가지로 요한삼서도 짧아서 여러 장으로 나누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노동에 적용할 수 있는 두 구절이 있다.  

      험담은 이제 그만(요삼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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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은 가이오라는 이름의 ‘동역자’(요이 8절)에게 이 서신을 보냈다. 요한은 서신을 통해서 개별적으로 접근한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2절).

       

        그는 동역자의 육체(강건)와 영혼에 관심을 나타낸다. 동료를 단지 일꾼으로서만이 아니라 전인적으로 본다는 그 자체로, 이것은 일터에서 중요한 교훈이다. 그런 다음 요한은 일한 것에 맞게 대우받지 못하는 예로 자기 자신을 든다. 회중의 일원 가운데 디오드레베를 거론하면서 교회의 권위를 약화시키려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한다’고 요한은 말한다(요삼10절). 세 서신서 모두에서 요한은 주로 진리와 사랑에 함께 관심을 둔다 (요삼 1절). 그런데 디오드레베는 이와는 정반대로 증오 가운데 거짓 언행을 일삼았다. 다음 번역에서 요한의 고통이 더욱 생생하게 느껴진다. “내가 가면, 그가 하는 일들을 들추어내겠습니다. 그는 악한 말로 우리를 헐뜯고 있습니다”(요삼 10절, 새번역).


         디오드레베가 신자라는 사실은 고통을 가중시킨다. 여기서 크리스천이 되었다는 자체만으로는 우리가 완전해질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디오드레베는 자신이 옳다고 여겼을 것이 틀림없다. 우리가 거짓 비방이라고 인식하는 그것을,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경고로 알려 주어 그들 자신을 방어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법하다.

       

         일터에서 의견을 내놓으면서 자신이나 남들에게 좋지 못한 인상을 끼친 적이 있는가? 다음과 같은 간단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면, 남들의 시각으로 자신을 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누군가에 대해서 말할때 그가 한 방에 같이 있더라도 똑같이 말할 자신이 있는가?’ 만일 여기에 부정적인 대답이 나왔다면, 우리는 당사자에 대한 거짓 인상을 심어 줄수 있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나쁜 인상을 줄 수 있다. 요한이 디오드레베에 대해 말하는 것은 비방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편지가 교회에서 회람될 것을 잘 알았고, 디오드레베가 자신의 불평을 듣고 반응할 것에 대해 마음을 열어 놓고 있었다.
       

         반대자에게 기회를 주어서 자신의 불평에 대응하도록 한 것은 요한이 진실과 사랑을 하나로 묶은 본질적 요소다. 디오드레베에 대한 요한의 불만을 전한 것은 반대자에게 설명이나 자기변호의 기회를 마련해 준것이다. 오늘날 같은 강도로 반응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대중 매체에 의해서 퍼져 가고, 수많은 공인들이 자행하는 ‘언론재판’과는 어떻게 다르다고 볼 수 있을까?


         이 원칙은 개인뿐만 아니라 단체에도 적용할 수 있다. 여러 사람을 폄하하는 것은 한 개인을 비방하는 것보다 행여 더 나쁘지는 않더라도 마찬가지로 나쁘다. 사실 일터에서 생기는 온갖 종류의 불공정한 대우는 그들을 열등한 혹은 위험한 그룹으로 낙인찍으면서 시작된다.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곧 특정 상황의 진실을 발견하려는 쪽에 서서 편견과 연대 죄에 대한 거부 발언을 할 기회가 왔다는 신호다.


         요한이 칭찬하는 데메드리오는 이 편지를 전달하는 형제로, 그 또한 흥미롭다. 요한은 데메드리오를 가이오와 그의 교회 앞에 높임으로써 자신의 지도자로서의 영향력을 행사한다. 요한은 데메드리오의 진실한 삶과 교회의 신자들에게 존경받는 삶을 칭찬한다. 일터에서 리더들은 (설사 표면상으로 복음이 승인받지 못할 때도) 그들의 권력과 영향력을 진실, 정의, 사랑, 그리고 긍휼이라는 목표를 향해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소통을 잘하려면(요삼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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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서신도 요한이서와 동일한 생각으로 끝을 맺는다. 요한에게는 지금 펜과 먹으로보다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을 법한 소통 내용이 있다(요삼 13-14절). 그러나 요한삼서는 우리 일상을 약간 색다른 시각으로 바라본다. 바로 마지막에 요한이 이렇게 덧붙인다. “너는 친구들의 이름을 들어 문안하라.” 사람의 이름을 거들며 말하는 것이 소통상 필요하다는 점과 그런 소통이 개인적인 터치를 증대시킨다는 점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대다수는 일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대면한다. 복도를 지나며 가볍게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과도 어느 정도는 소통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름을 불러 가며 인사할 정도로 잘 아는 대상은 몇 명일까? 당신은 상사의 바로 위 상사, 그 위 상사, 또 그 위 상사의 이름을 아는가? 아마도 알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 일터의 쓰레기통을 비우는 사람의 이름은? 당신과 의견 충돌이 있는 사람의 이름도 부르며 인사하는가? 어떤 시점에 필시 당신의 도움이 필요할지 모를 회사 신참 직원들의 이름은 익혔는가? 이름을 모르는 데다 익히는 것도 귀찮아 하면 사람들에 대한 당신의 존경과 온정의 수위가 여실히 드러날 터이다. 요한은 각 사람의 이름으로 그에게 인사를 할 정도로 충분한 배려심이 있다.

      유다서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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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다의 이 짤막한 서신서는 바로 역기능적인 한 일터, 즉, 경건치 못한 지도자들 탓에 엉망이 된 교회를 그린 놀라운 그림으로 시작한다. 교회마다 고유의 문제들이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유 4절)과 이단(‘고라의 반란’ - 유 8절) 등과 같은 이슈들이다. 다른 문제들은 권위 부정, 중상모략(유 8절), 폭력(‘가인의 길’), 탐욕(발람의 실수, 유 8절) 등등, 세속적인 일터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다.[32]

       

        최악의 권력 남용은 자기 양 떼를 희생시켜 가며 자기 배를 채우는 지도자들에 의해 저질러진다. “그들은 겁 없이 너희와 함께 먹는다. 그들은 자기 자신만 기르는 목자다”(유 12절, NRSV). 유다는 탐욕스런 교회 지도자가 자신을 위해서 교회 재정을 유용하는 경우를 언급하는데, 이는 탐욕스런 경영진이 보고이익과 자신들의 상여금을 유지하려고 회사 연금 기금을 횡령하는 것, 혹은 사무실 직원이 업무 시간에 웹 서핑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모든 악한 일에 관해 유다는 교회와 마찬가지로 일터에도 놀라운 명령을 하고 있으니, 바로 긍휼히 여기라는 것이다.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유 22-23절).

       

        유다는 악한 일에 강하게 대응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불이나 두려움이나 더럽혀진 육체 같은 이미지 표현을 볼 때, 유다의 긍휼은 유약함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긍휼은 엄격하다. 그 긍휼의 소망은 단순히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는 것이다.


         이 엄격한 긍휼은 직장 상황에 따라 필요해진다. 누군가 사기를 치거나, 동료를 괴롭히거나, 고객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가볍게 넘어갈 수없는 문제다. 더 큰 악으로 발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단순히 설욕하여 대갚음하는 징계를 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어느 누구도 소망이 없는 사람은 없다. 경건한 지도자는 각 개인을 존중하고, 어떤 징계로써 그를 다시 일원으로 맞아들일지 현명하게 판단해야 한다.

      일반서신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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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서신은 두 가지 원칙에서 시작했다.
      1.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함
      2. 궁핍한 자들의 유익을 위해서 일할 수 있도록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함

      이 두 가지 원칙은 믿음의 삶에서 일터를 이해하는 신학적 통찰과 일터를 위한 여러 가지 실천적 지침의 기저를 이룬다(특히 야고보서에서).

      여기 두 가지 질문이 있다.
      1. 우리는 이 두 원칙을 믿고 있는가?
      2. 우리는 실제로 이 원칙들을 직장생활 속에 적용하고 있는가?

      우리는 두 가지 원칙을 믿고 있는가?

       

      우리는 일터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상황을 겪는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과연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분으로 믿을 수 있을지 의심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확신하거나 장담한다.
      하나님을 신뢰해 온 듯한 사람들의 필요가 채워지지 않는 예가 있다는 것도 잘 안다.
      직업, 집, 은퇴 자금, 심지어 삶 자체를 상실하는 사람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결코 기대하지 못했던, 혹은 전혀 가져 보지 못했던 좋은 것을 얻기도 한다.
      새로운 기회가 생기고, 작은 노력이 큰 성공을 거두기도 하고, 투자한 일이 잘되기도하고, 낯선 사람이 내 필요를 채워 주기도 한다.
      우리의 진정한 필요를 하나님께서 채워 주리라고 믿는 게 옳은가?
      일반서신은 이 심오한 질문에 확고한 답을 얻기까지 씨름하게 만든다.
      이 씨름은 아마 일생 동안 계속될지 모른다. 하지만 부정하는 것보다 씨름하는게 더 낫다.

      궁핍한 자들의 유익을 위해서 일을 해야 한다는 원칙 또한 미심쩍기는 마찬가지다.
      “모든 사람들은 주로 자신의 부를 증대시키기 위해서 일한다”라는 경제의 기본 원리와 충돌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사회 전반에 팽배한 ‘자기 자신만을 생각해라’라는 태도와도 충돌한다.
      우리는 (만약 우리에게 그럴 능력이 있다면) 우리가 제대로 보수를 받고 있는지 증명해 달라고 요구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우리의 노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제대로 유익을 끼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증명하려 하는가?

      우리는 두 가지 원칙을 일터에 적용하고 있는가?   


      우리는 자신의 필요를 채우는 일을 스스로 점검하면서,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능력을 신뢰하는 정도를 가늠해 볼 수 있다.
      혹시 우리 자신을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존재로 만드는 지식을 비축하고 있는가?
      미래에 대한 안전감을 주는 고액의 퇴직금 혹은 고용계약서를 요구하는가? 날
      마다 해고의 두려움을 안고 출근하는가?
      가족과 공동체를 소홀히 여긴다는 강박관념을 느끼며 일하는가?
      다른 여지가 없다는 불안 탓에 굴욕, 분노, 업무 미숙과 건강에 문제가 있는데도 맞지 않는 일을 계속하고 있는가?
      엄격한 원칙은 없으며, 이런 행동 중 (강박 상태를 제외하고) 일부 혹은 전부는 특정한 상황에서 현명하고 적절할 수 있다.

      일터에서의 행동을 보고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는지 알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는지가 하나님을 얼마나 깊이 신뢰하는지를 읽어 내는 가장 탁월한 지표다.
      나는 주변 사람들이 일을 잘할 수 있게 돕는가?
      혹 그가 나보다 앞서갈 가능성이 있더라도 그리하는가?
      내 자리를 잃을 위험을 무릅쓰고도 동료들, 고객들, 납품업자들, 그리고 힘없고 어려운 자들을 지원하러 나서는가?
      선택 가능한 범위 안에서 나 자신의 유익보다 궁핍한 자들의 유익을 위해 일하는 편인가?


      유다서가 상기시켜 주듯이 우리는 매일 일터에서 이런 원칙을 적용할 무거운 책임이 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영적 민감성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와 우리 일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의 육신적 결과의 문제다.
      그렇지만 그 책임은 판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긍휼한 마음을 갖기 위함이다.
         

      일반서신은 일의 개념을 재정립할 과제를 제시할 뿐만 아니라 누구를 위해 일해야 하는지를 재정립하는 과제도 준다.
      만일 우리 필요를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우리 자신이 아닌 그분을 위해서 일할 수 있다.
      하나님을 위해서 일할 때, 남을 섬기게 된다.
      남을 섬길 때 우리는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그러면서도 하나님나라의 시민으로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복을 가져오게 된다.
      우리의 일을 통해 세상에 들인 하나님의 복은, 세계가 우리의 참된 집이 되도록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다음 발걸음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일한다(벧후 3:13) .

       

      서신서(書信書) The Epistles


      1. 명칭


      ‘서신서’(書信書, the Epistles)란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이 로마제국 전역에 흩어져 있던 여러 지역의 초대교회 공동체 또는 특정 개인에게 신앙의 도움을 주기 위해 써 보낸 편지들 중, 성령께서 초대교회 성도뿐만 아니라 이후 세대의 모든 성도들의 신앙의 근거가 되게 하시고자 특별히 영감하신 편지들로서, 훗날 신약 정경(正經, Canon)으로 채택된 로마서에서 유다서까지의 21권의 책을 가리키는 명칭입니다.

      27권의 신약성경이 기록된 시기는 A.D.50-100년 어간이나 이것들이 교회의 공식적인 정경으로 인정된 것은 대략 300년이 지난 A.D.397년의 칼타고 공회(Councils of Cartago)에서였습니다. 또한 이 27권의 신약정경 중 21권의 책이 서신서로 불리게 된 것은 알렉산드리아의 교부 제롬(A.D.346-420)에 의해서입니다.

      제롬은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였을 뿐 아니라 헬라어를 모르는 자들을 위하여 신약성경도 라틴어로 번역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벌게이트역’(Vulgate譯)입니다. 이 ‘벌게이트역’ 성경에서 제롬은 로마서에서 유다서까지를 한 부류로 묶어 이름을 붙였는데, 그것이 곧 서신서였습니다. 그리하여 A.D.150년경의 순교자 저스틴이 명명한 ‘복음서’(the Gospel)란 명칭과 마찬가지로 ‘서신서’란 명칭은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의 모든 교회에서 통용되는 명칭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서신서는 성도들이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교회의 일원이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삶의 원리와 지침들을 제공해 주는 책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근간이 되는 교리 전반을 다른 성경의 어떤 부분들보다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큽니다. 한편 복음서와 사도행전이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와 복음의 확장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증거한 것이라면, 서신서는 그러한 역사적 사건들을 성도의 삶과 연결하여 구체적으로 적용시킨 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 분류


      서신서를 분류하는 가장 일반적이고 전통적인 방법은 저자별로 분류하는 것인데, 서신서 중 바울이 기록한 13편의 서신을 ‘바울서신’이라고 부르며 그 이외의 저자들이 기록한 8편의 서신들은 통칭하여 ‘공동서신’, 혹은 ‘일반서신’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서신은 수신자 또는 수신지역의 이름을 따서 그 책의 제목이 지어진 반면, 공동서신은 수신자를 반영한 이름인 히브리서를 제외하고는 모두 그 책의 기록자의 이름을 따라 그 제목이 붙여졌습니다.

      그밖에 각 서신이 지니는 내용과 용도 및 기록 배경상의 특징에 따라 구분하면 아래의 도표와 같습니다.

       

      * 서신서의 분류(저자별) *

       

      구분

      책명

      저자

      수신자

      바울
      서신

      로마서

      바울

      로마교회

      고린도전서

      고린도교회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갈라디아교회

      에베소서

      에베소교회

      빌립보서

      빌립보교회

      골로새서

      골로새교회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교회

      데살로니가후서

      디모데전서

      디모데

      디모데후서

      디도서

      디도

      빌레몬서

      빌레몬

       

      구분

      책명

      저자

      수신자

      공동

      서신

      (일반
      서신)

      히브리서

      미상

      유대인성도들

      야고보서

      야고보

      유대인성도들

      베드로전서

      베드로

      유대인성도들

      베드로후서

      유대인성도들

      요한일서

      요한

      전체교회성도들

      요한이서

      전체교회성도들

      요한삼서

      가이오

      유다서

      유다

      유대인성도들

       



        * 서신서의 분류(특징별) *

       

      구분

      서신 종류

      기준

      교리서신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기독교의 구원론,기독론,교회론 등의 주요교리들을 집중적으로 다룸

      재림서신

      데살로니가전.후서

      종말론, 재림 집중적으로 다룸

      옥중서신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바울이 로마 옥중에서 기록함

      교회서신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일곱교회에 보낸 서신

      목회서신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에베소와 그레데교회 목회자에게 보낸 서신

      회람서신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여러 사람이 돌려가며 읽을 것을 염두에 두고 쓴 서신

      추천서신

      빌레몬서, 요한삼서

      편지를 전한 사람을 소개하거나 보증하기 위해 작성한 서신

      답변서신

      고린도전.후서, 빌립보서

      어떤 문제에 대해 답변하는 형식

       

       

      3. 기록의 요소들

       

      * 발신인

      히브리서의 발신인이 누구인지 분명치 않은 것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서신들은 본문 서두에 발신인이 분명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 서신 중에는 바울과 함께 한두 명의 발신인이 더 언급되어 있는 것이 있는데, 이들은 바울과 함께 동역한 자들로서 바울의 편지를 통해 안부를 전했거나 아니면 바울의 편지를 대필했거나 협조했던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 수신인과 전달경로

      고대의 서신에서는 대개 수신인에 대해서 간략히 언급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당시 서신들이 오늘날처럼 공공 우편기관을 통해 전달된 것이 아니라 신뢰할 만한 전달자를 통하여 수신인에게 직접 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몰론 당시 로마제국은 공식적인 우편업무를 보았지만 사적 교신은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부유한 이들은 이 일을 위한 노예를 거느렸으며, 사도들은 자신의 동역자나 여행하는 성도의 편에 편지를 부쳤던 것입니다.
      로마서는 여집사 뵈뵈에 의해 전달되었으며, 빌립보서는 에바드로디도에 의해 전달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대필자

      오늘날과 같이 종이나 인쇄술이 발달하지 못한 고대 사회에서는 대필자라는 전문직업인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종이 대용으로 사용되었던 양피지나 파피루스 위에 글을 쓴다는 것은 전문적인 숙련이 요구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글을 모르는 문맹인들이나 좀더 세련된 글을 쓰기 위해서도 전문적으로 편지를 받아쓰는 자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서신서 중에도 대필자에 의해 기록된 서신들이 있는데, 이 경우는 단순한 전문 직업인이라기보다는 교회의 일원으로서 특별히 선택된 일꾼들이 대필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는 실루아노(실라)에 의해 대필되었으며(벧전 5:12), 바울 역시 대필자를 시켜 기록하게 했습니다(롬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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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약 27권 중 21권이 서신으로 분류된다.
      즉 신약의 3/4이 서신이다.
      가장 이른 서신 (아마도 갈라디아서- 49년)은 가장 이른 복음서 (아마 마가복음- 59년) 보다 10년은 더 빠른 것으로 보인다.
      서신서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떻게 각 지역 교회에 전파되었으며, 그 후 개체 교회는 어떻게 특별하면서도 다양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가이다.
      따라서 서신서는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복음을 그 핵심 주제로 한다.

      1. 서신서의 장르

      서신서는 바울이나 베드로, 요한 혹은 무명의 성도의 신학을 집대성한 논문(theological treatise-compendum)으로 우선적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먼저 1세기 특정한 수신자에게 특정한 상황과 문제에 대한 설득, 경고, 책망, 권면, 영적인 목회적 가르침을 위한 글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따라서 역사적 정황을 연구하는 것은 서신서 이해의 기초요 중요한 열쇠가 된다.

      구체적인 상황에서 쓰여진 상황문서들(occasional documents)이다. 여기서 우리는 제한된 자료와 정보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닌다. 하지만 특정한 교회의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하려는 신약 서신 저자들의 신학적인 사상을 우리는 충분히 찾고 체계화 할 수 있고 해야만 하기에 바울 신학, 요한 신학, 베드로 신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별로 주저할 필요가 없다. 이것에 대한 반대 견해는 오래 전에 아브라함 카이퍼에게서 볼 수 있는데 그는 성경 저자들을 결코 신학자라고 부를 수 없다고 한다. 이유는 신학은 신학보다 앞서 형성된 교리(dogmas)와 분리해서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며, 교리는(제도적인) 교회 생활이 낳은 산물이기 때문이다.

      성경 자체는 신학이 아니며 신학에 기초를 제공한다. 하지만 계시의 도구로서 바울의 신학적 사고의 틀이 사용된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이 말은 성경의 인간적인 요소가 강조되는 것으로 오해하면 곤란하다. 반대로 인간이 계시 전달의 도구화되었음을 강조하기에 하나님의 활동은 더욱 주도적이고 특별해 진다(참고. 게핀, 1992:29, 31).

      서신은 상황적이되 신학적이다. 서신서 연구는 과제신학적(task theology)이다. 즉 어떤 과제의 해결을 위해 저자의 신학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체계화하는 것이다. 바울이 현대의 신학박사보다 못한 영성과 지적인 능력을 가졌겠는가? 바울은 다른 성경 저자보다 더 조직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확증하는데 더 많은 관심을 쏟은 것이라기보다는 구속 사역을 해석하는데 더 관심을 쏟은 것이다.

      환언하면 바울의 관심은 구속역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그 절정을 이룬 것을 믿고 그 구속 역사를 설명하는데 있었다. 하나님은 계시 전달에 있어서 바울의 교육적 배경과 성격을 유기적으로 사용하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바울은 기독교 자료를 조직적으로 다룬 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참고. 박형용, 1992:6. In 리차드 게핀. '부활과 구속' 추천문. 엠마오). 편지는 시간을 두고 문제를 파악한 후 세밀하고 주도면밀하게 논리를 전개해 갈 수 있는 좋은 매체였다. 따라서 저자의 논리와 신학을 우리는 체계화 할 수 있다.

      1.1. 용어 : 서신인가 아니면 편지인가?

      "Light from the Ancient East"(1927, 1965)에서 Gustav Adolf Deissmann은 많은 파피루스를 연구한 후에 서신(epistle)과 편지(letter)를 철저히 구분하여 그 중 하나를 선호하나(물론 이 구분에 타당한 지적이 있다) 우리는 교차적으로 사용하기로 한다. Deissmann에 의하면(참, 사적인) 편지(real letter)는 비문학적인 것으로 일반 회중이나 후대 사람들을 상대로 쓴 것이 아니라, 그 편지를 직접 받을 특정 개인이나 집단만을 위해 쓴 것이다.

      반면에(공적) 서신(epistle)은 일반 회중을 대상으로 한 예술적인 문학형태, 또는 문학의 한 종류이다. Deissmann은 모든 바울 서신을 letter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다. 바울 서신과 비교하면 벧후, 요일은 훨씬 더(회람용, encyclical) 서신에 가깝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epistle이란 용어 안에는 편지로서 갖추어야 할 정확한 형태나 요소가 없다는 뜻이 암시되어 있다.

      1.2. 주후 1세기의 서신:

      1세기에 학생들은 초등교육을(혹은 12-15살) 받을 때부터 편지를 쓰는 교육을 받았다. 전문 편지 작성자를 위한 지침서도 있었다. 1세기에는 상업, 법률, 군사, 행정 등 여러 가지 목적으로 서신이 이용되었다. 따라서 시대의 아들인 바울-베드로-요한 역시 그 당시의 서신의 형태(특히 personal-private letter)와 특징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서신서 역시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차원을 배제한 서신서 분석은 무의미하다.

      신약 서신서와 그레코-로마(Greco-Roman)의 서신들 간의 유사점을 연구하며 설득의 기술을 분석하는 것은 매우 유용하다. 물론 신약 기자들이 그 형식에 메이지 않고 자유롭게 변화를 주며 서신의 주요 내용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삼아 초대 교회에 전한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형식과 틀을 빌려 사용했지만 그 내용은 기독론적인 요소가 강하다는 것이다.

      2. 서신의 형식

      일반적인 헬라의 서신은 인사말, 감사말, 본론, 마지막 인사말로 구성된다. 신약 서신에는 그 당시의 다양한 문학적인 전통들을 수용했는데, 예를 들면, 당시의 수사학 양식들, 설득 양식 등을 사용했다. 바울-베드로-요한 서신의 형식은 일반적으로 아래와 같다: 서신이면서도 서신의 형태를 벗어나는 책도 있다. 히브리서, 특히 히 1-10장은 그리스도의 우월성과 그리스도 신앙을 지킬 것을 강조하는 설교 양식이다(히 13:22, '권면의 말'). 그리고 요한일서와 계시록도 다르다.

      서론(Preamble)- 송신자, 수신자, 인사말(빌레몬서 1-3)
      Formula valetudinis(수신자의 행복과 관련된 말): 건강을 기원하고 감사의 말을 함 (4-7)
      주요 논의를 소개함(Body-opening) (8-11)
      본론적 논의(Main argument or body) (12-20)
      논의의 결론(Body-closing) (21-22)
      결론: 인사, 때로는 특정한 말의 첨가, 결론적인 고별 인사(23-25)

      신약 서신은 고전 수사학적 형식을 일부 따른다(참고. 정태현, 1996:124-127):

      (1) 서론(exordium 혹은 prooemium): 청중의 주의를 끌어 그들이 좋은 뜻으로 연설의 내용을 받아들이도록 준비시키는 짧은 말.
      (2) 연설 가운데 부분은 목적 제안(propositio)과 이성적 추론(rationes)으로 이루어진다.
      1. 목적 제안(propositio): 연설이 얻고자 하는 목적을 제시하는 기능. 목적 제안은 두 가지 요소로 세분화 될 수 있다:
      1.1. 세부설명(partitio): 강조하고 싶은 부분들을 자세히 설명함.
      1.2. 사건 개진(narratio): 목적 제안에 맞춰 사건의 흐름을 진행함.
      2. 논증(argumentatio): 여러 가지 증명을 끌어내는 기능. 반증(refutatio)은 반 대자의 견해를 반박하기 위한 논증.
      (3) 귀결(peroratio): 결론(conclusio)에 해당하는 부분인데 논증에서 제시된 증명들이 이제 분명히 옳다는 것을 천명하는 짧은 끝맺음이다. 연설자는 여기서 청중이 자신의 견해에 동조하는 판단을 내려 주기를 요청한다. 귀결은 두 가지 기능을 한다: (가) 목적 제안과 결론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나) 논증의 요지를 간추려 반복(recapitulatio)한다.

      갈라디아서의 경우 서론(1:6-10), 사건 개진(1:10-2:14), 목적 제안(2:15-21), 논증 혹은 증명(3:1-4:31), 그리고 마지막 부분(5:1-6:10)은 권고문(paraenesis)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인사말(1:1-5)과 추신(6:11-18)이 앞뒤를 장식한다. 물론 모든 서신에 이런 형태가 정확히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야고보서는 실로 서신의 형식이 거의 없고 히브리서도 진짜 편지 형식에 분류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공공 설교인지 논란이 된다.

      3. 서신이 읽혀진 방식

      빌레몬서 그리고 요 2-3서와 같은 몇몇 개인적인 서신을 제외하고는 서신들은 주로 예배 중에 크게 읽혀지도록 의도되었다. 그 이유는 사도의 부재 중 서신이 그 사도를 대신하여 말씀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며, 그 당시는 기록된 문서의 시대라기보다는 구전의 시대였기에 하나의 편지(책값은 비싸고 인쇄술이 발전되지 못함)로 여러 사람이 듣고 말로 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초기 기독교의 선교활동의 수단이 편지이다. 따라서 서신이 낭독될 때 청중이 잘 그리고 오래 기억할 수 있도록 수사학적인 기교를 사용했는지 연구할 필요가 있다(예. 헬라어 표현의 중복 등).

      4. 서신서의 수사학적인 기교

      수사학이란 무엇인가? 고전적인 의미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진리가 거짓에 의해 가리지 않도록 말을 잘해야 한다는 동기에서 정의하기를 "화자가 청자를 위해 설득을 위한 가능한 모든 수단을 연구하는 학문"을 지칭한다.

      고전수사학자들은 따라서 말하는 사람이 청중에게 보여주는 신뢰도(ethos), 그리고 청중의 감정에 대한 호소 (pathos), 또한 논리 정연한 주장 (logos)을 잘 조화시켜서 전하려는 진리를 잘 배열하고, 완전히 외운 다음에, 적절한 언어를 구사해서, 잘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사용한 고전 수사학이 1세기에 유행했는데 주로 4가지 요소들을 포함한다: 서론(exordium)→ 사실 진술(narratio)→ 논증(probatio)→결론(peroratio) (참고. H.D. 베츠의 '갈라디아서 주석'. 한국신학연구소의 국제성서주석 시리즈 중).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고전 수사학의 3가지 종류:(Kennedy, G.A. 1984. New Testament interpretation through rhetorical criticism.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1972. The art of rhetoric. Princeton University Press; Vernon K. Robbins. 1996. Exploring the texture of texts. Trinity Press International; Burton Mack. 수사학과 신약성서- 나단출판사 한국 저자의 책으로는 수사학적 성경해석의 이론과 실제- 현경식/이성호 공저- 성서연구사를 참고하라).

      a. 법률적이고 변증적인 수사학- judicial-forensic: 법정에서 과거의 사건에 대한 변론과 판단을 청중에게 설득하는 것.
      b. 정치적이고 심의적-의도적인 수사학-deliberative: 공공집회나 정치적인 변론이 이루어지는 장소에서 청중들로 하여금 어떤 행동들을 미래에 취하도록 설득함.
      c. 의식적-제의적 수사학-ceremonial-epideictic: 공공예배나 의식에서 어떤 인물 (덕)이나 사건을 칭송하거나 책망하여 청중들에게 현재의 어떤 견해와 전망을 갖도록 설득하는 것.

      서신을 해석함에 있어서 이것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함이 균형잡힌 해석을 위해 중요하나 먼저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서신, 하나님의 설득으로서의 서신(NT epistles as God's divine persuasion)으로 보아야 한다.

      참고로 현대 수사학(modern rhetoric)은 이런 법정적, 정치적, 의식적인 범주를 너머 모든 인간의 언어적 및 비언어적 행동을 그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 따라서 소설, 시, 연극, 영화, 광고, 신문 기사, 음악, 사회 현상 까지도 그 대상으로 삼는다. 모든 인간의 이야기 속에는 그 주장하는 바의 이념적인 동기가 포함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따라서 이야기에는 가치 중립적인 것이 있을 수 없다고 본다. 화자의 세계관이 전제되어 있기에. 또한 화자가 청자를 설득하는 기술로 보지 않고 더 나아가 화자와 청자가 불확실한 그 무엇에서 확실한 것으로 해결해 나가는 과정으로, 해결해 나가도록 돕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청중은 설득의 대상이 아니라 결정의 참여자이다.

      따라서 수사학은 인간의 의사소통에 사용된 모든 수단들을 묘사하고, 분석하고, 해석하고, 평가하는 작업을 말한다. 화자의 의도, 내용의 분석, 본문의 구조와 문학적 기교를 분석, 화자와 청자의 사회-역사적 배경, 그리고 설득을 통한 화자의 결정과 실행 등을 종합적으로 연구하는 사회수사학은 개혁주의 서신 해석에 유용한 기여를 한다.

      수사학적 해석을 문학적인 해석 혹은 자유주의적 해석 방법으로 여기고 일방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바른 태도가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말씀을 하나님의 종들이 인간의 언어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 한 것이기에 인간의 언어를 분석하는 수사학적 비평은 적절하고 유용하다. 이를 통해서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1세기 서신서의 수신자들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와 그 영향력을 더 잘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사회-수사학을 길게 소개하는 이유는 최근의 서신서의 해석 경향 중 가장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이것이기 때문이다. 즉 역사 비평 방법만으로 연구하던 전성기는 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역사비평의 주요 관심은, 예를 들어, 이것이 바울의 것인가? 이 편지는 이전에 어떤 자료들을(기독교의 찬송, 케리그마, 교리문답 등) 모집한 것인가? 구전자료 혹은 주변의 다른 나라의 서신과의 종교사학파적 비교 등.

      5. 로마제국 안에서 서신을 통한 복음의 전파의 용이성

      통일된 로마제국은 발달된 교통망(예. 리챠드 보컴 등: holy internet)을 갖추어서 비교적 빠른 시일 안에 서신이 전달되었다. 그리고 언어적으로는 코이네 헬라어가(비교: 고전 헬라어는 좀 더 학적이고 고급) 보편적으로 사용되어서 언어적인 문제는 거의 없었다. 그 어느 시대보다 1세기 로마 제국은 복음이 효율적으로 증거되는 기반이 조성된 시기였다. 여기서 1세기의 여행에 대해 살펴보자. 로마 제국 시대에 하루 도보 여행길은 보통 32km 정도였고 급사(急使)들은 80km까지 여행 할 수 있었다.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은 현대인과 똑같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여행했다. 사업과 정부의 공무, 제의적인 순례, 순전히 관광적인 차원 등 여러 이유가 있었다. 육상여행은 고대에서 가장 자연스럽지만 안락하지 못한 여행의 형태였다. 하지만 1세기의 육로 여행은 어느 시대보다 안전하고 편안한 여행으로 평가된다. 네로 시대에 런던에서 로마까지 육로로 가는데 28일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로마의 군대가 효과적으로 이동하기 위해서 도로가 건설되었다. 로마의 도로망은 2차 세계대전 후 주간(州間) 간선도로가 발전되기 전까지는 견줄만한 것이 없었던 독보적인 것이었다. 빗물이 잘 빠져나가도록 가운데 부분이 약간 더 높았으며, 도로 양끝에는 도랑과 연석을 놓았다. 로마의 도로는 폭이 최소 8피트였고 평지에는 대개 10-12피트의 폭이 일반적이었고, 대도시로 진입하는 도로의 폭은 30-40피트였다.

      여행을 위해 통행증이 발급되었는데, 특히 공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제한되었다. 여행을 위한 숙박시설로 여관이 잘 발달되었지만, 대개 친구 혹은 친구의 친구 집을 숙박 장소로 이용했다. 여행 날씨는 5-10월 사이가 선호되었다. 그리스인과는 달리 로마인과 유대인은 해상여행을 그리 선호하지 않았다. 나폴리에서 알렉산드리아까지 배로 여행하는데 9-27일이 소요되었는데, 바람과 일기에 따라 결정되었다(참고. 앨버트 벨, 2001:469-481). 참고로 holy internet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복음서를 특정 공동체로 한정하는 것을 반대한다. 헬라어가 사용되는 모든 지역에로 전달되는 그 범위가 수신자의 범위로 본다. 하지만 특정 수신자의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이 주장이 설득력 없이 보인다.

      6. 서신의 특성

      a. 성격상 인격적(personal)이나 사적(private)인 것이 아니다. 물론 예외적으로 아주 사적인 것도 있기는 하다. 공적인 헬라시대의 사업서신(business letters)은 아니지만 교회에 주어 보내어진 것이기에 공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바울의 경우 그의 동역자들을 공동 송신자로 언급함으로 공적인 특성을 더욱 강조한다(고전 1:2; 고후 1:1; 갈 1:1; 참고. 크리스챤 베커, 1998:43).

      b. 대화와 현존 (먼저 편지로 만나고 조속한 시기에 실제적 방문-현존- 롬 15:22; 빌레몬서 21절): 마치 송신자가 독자 가운데 있는 것처럼 말하는 방식을 택한다. Koskenniemi가 주후 400년까지의 헬라 편지를 연구하여 이 두 요소를 강조했다. 대화적 특성이 있지만 더 나아가 문학적인 기교와 세련됨으로 정제된 대화이기에 일상 대화 보다 더 문학적이다.

      c. 설교체: 강한 감정과 애정, 목회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
      d. 계획적이지만 형식주의적이지 않다: 보통 헬라편지의 중요한 한 가지 특성은 전형적이고 비인격체적인 특성이다. 심지어 가장 친근한 가족과 친구간의 서신에서도 의식적이고 상투적인 틀을 유지했다. 반대로, 신약 서신에서는 건조하고 의미 없는 형식을 제거해 버린 것을 새로운(기독론적인) 내용으로 본다.

      7. 서신서 해석의 원칙

      (1) 사회-문화-정치-종교-역사적 상황을 본문과 보조 자료를 사용하여 재구축하라. 주로 저자와 수신자(유대인인지 헬라인인지)와의 친분관계, 그리고 수신자가 처한 사회문화적-교회적 형편에 주목하라. 이때 성경 사전이나 주석, 그리고 신약 서론 책을 참조할 수 있다(특히 유용한 것은 Martin, R.P. 1997. Dictionary of Paul and his Letters. IVP와 Hawthorne, G.F. 1993. Dictionary of the later New Testament and its developments. IVP).

      (2) 기초적인 역사적 배경을 숙지한 후 편지를 전체로 읽는 것 즉 쉬지 말고 두 번 정도 완독하여 전체의 감과 맥을 잡아야 한다. indicative(예. 롬 1-11장 상황 진술, 권면, 책망 등)→ imperative(예. 롬 12장)→ promise(롬 16:25-26)를 고려하라.
      (3) 논리의 흐름을 따라 사고의 시작과 마감이 분명한 좀 더 세부적인 단락으로 나누어 살펴보라.

      (4) 문학적 이해가 필요하다. 즉 핵심단어와 반복되는 용어, 그리고 수사학적 표현을 중심으로 연구하라.
      (5) 신학적 이해가 필요하다. 특히 구약의 인용을 통한 계시사의 전진, 그리고 기독론적인 은유 혹은 그레코-로마의 문화에 반하는 기독교적 강조 등에 주의를 기울여 보라.

      (6) 유비를 통한 적용을 해석(hermeneutics가 아니라 interpretation)의 마지막 단계로 해야 한다. 서신 역시 성령의 감동으로 된 영감된 말씀이기에 모든 시대의 교회에 그 적합성을 가지고 있다.

      (6) 단계와 연관하여 서신서 메시지의 현대로의 적용의 원칙을 살펴보자- what it meant에서 what it means로 넘어오는 다리: 실제로 학자들이 1세기의 의미를 연구하는데서 그치고 그 현대적 적용에 대해서 소홀히 했기에 교회 안에서 서신서를 통해서 제기되는 실제적인 문제들에 대한 모호함이 여전히 많이 남아있다. 적용은 더 어렵고 기도를 요하는 작업일 수 있다.

      이 작업을 윤리학자들의 몫으로만 남겨 둘 수 있는가? 오히려 적용이 성경적 원리에 대한 정확한 통찰에서 나오지 않고, 교회-교단의(신학적) 색깔-전통 혹은 한국적인 유교적 관습 등에 지배받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시대에 진리와 규범이지만 문화적 상대성(cultural relativity)으로 인해서 1세기 서신의 내용을 문자적으로 21세기에 적용할 때 무리가 따를 수 있다.

      아래의 두 예를 보아도 적용이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안다:

      (1) 딤전 5:23: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이것을 음주를 허용하는 본문으로 볼 수 있는가?

      (2) 고전 14:34-35/ 딤전 2:9-15: 지금도 여성이 교회에서 설교하는 것 혹은 여성 안수를 금지하는 것인가?

      이런 질문을 염두에 두고 적용을 위한 몇 원칙들을 살펴보자:

      (1) 1세기의 상황과 유사한 상황 속에 우리가 산다면 그 본문의 신학적 내용과 윤리적인 명령들은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말씀이다(예. 고난 중에서도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한다). 서신서에서 일관되게 죄로 규정하는 것(음란, 동성애, 방탕…)은 여전히 늘 죄이다. 하지만 지나친 확대 적용은 금물이다. 고전 6:1-11에 세상 법정에 송사하지 말라는 것을 두 크리스천의 사업상 문제가 발생했을 때도 적용하지 말아야 하는가?

      (2) 유사성이 아주 약하거나 없는 경우에는 어떠한가?
      갈 5:2-6에서처럼 성도에게 할례를 강요하는 일이 한국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이 경우에 이 말씀은 21세기 한국 교회에 어떻게 적용되는가?
      이때는 what it meant에 근거하여 적용의 구체적인 유비가 아니라 성도의 삶에 주는 원리를 도출해야 한다.

      이 원리는 지역, 시간, 상황을 초월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 할 것은 무차별적으로 이 원리를 아무 상황에 적용할 수 없고, 그래도 유사한 상황에서만 적용 가능하다.
      예를 들면, 바울이 이방 신전의 축제에 참여하거나 거기에 바쳐진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라고 할 때, 이것은 귀신과 사귀는 것이기에, 21세기에는 한국 교인들의 삶 중에서 점성술, 사술, 사주팔자, 심령술 등에 적용할 수 있다.

      사실은 여기서도 유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시대와 장소에 규범적인 문화를 주시지 않아서 이런 적용은 아주 애매할 때가 많다.
      성경에 언급되지 않은 낙태나 인터넷 범죄를 위해 우리가 어떤 성경 구절을 인용할 수 있나?
      이때 우리는 창조-타락-구속-재창조의 완성이라는 성경적인 세계관 혹은 교리의 도움을 받아서 전체적인 성경에서 먼저 보고 우리의 구체적인 상황을 보는 지혜도 필요하다.

      참고할 책

      Du Toit, A.B. 1985. Guide to the New Testament V. Pretoria : NGKB.

      Malherbe, A.J. 1988 Ancient epistolary theorists. The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Malina, B.J. & Pilch, J.J. 2006. Social-science commentary on the letters of Paul. Minneapolis : Fortress Press.

      골든 피 & 드글라스 스튜어트. 2001.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성서유니온

      J. 크리스챤 베커. 1998. 사도바울. 한국신학연구소.

      앨버트 벨. 2001. 신약 시대의 사회와 문화. 생명의 말씀사.
















      성경 시대의 마지막 시대는 사도들이 주님의 뒤를 이어 복음을 전한 초대 교회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는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신 30년경부터 마지막 사도인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때인 100년까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나서 30년부터 50년까지 약 20년동안 구전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쳤습니다.

      그 후에 바울이 다메섹에서 회심하였으며, 그는 3차에 걸친 전도 여행을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50-64년 동안 바울 서신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기간에 야고보서와 베드로전후서가 기록되었으며,

      베드로의 증언을 토대로 해서 마가가 마가복음을 기록했습니다.

       

      특히 바울서신중 데살로니가전.후서와 갈라디아서는 매우 비슷한 시기인 AD53년과 AD55년에 각각 기록이 되었다고 봅니다.

      이에 대한 근거로, 데살로니가교회는 바울이 2차 선교여행을 하며 약 1달동안 머물면서 설립했다는 점(행17:1-10)과 

      바울이 또 세번(1,2,3차)의 선교여행을 통해서 갈라디아의 교회들을 방문하고 디모데와 함께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였다.(행16:6)는 점입니다.

      그래서 바울서신들중 기록연대로 볼 때 가장 먼저인 서신은 2, 3차선교여행과정과 전후상황들을 모두 고려하여 볼 때,

      데살로니가전.후서를 기록한 후에 바로 이어서 갈라디아서를 기록한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70년부터 90년 사이에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그리고 사도행전이 기록되었으며,

      90년 후부터 100년 사이에 요한 서신과 요한계시록이 기록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주님께서 승천하신 30년부터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100년까지의 기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신약성경의 4복음서가 기록된 연대를 보면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이 성경기록연대 순서대로 나열된 것이 아닌 것을 아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4복음서중에서는 가장 먼저 기록된 서신은 마가복음이면, 바울서신서들중 가장 먼저 기록된 서신서로는 데살로니가전.후서와 갈라디아서이며, 그중 바울의 선교여행의 정황상  데살로니가전.후서가 갈라디아서를 앞선다고 보여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