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스의 아들로 아마샤 왕의 형제이며 요아스 왕의 손자. 유다왕 10대웃시야가 죽던 해(B.C.739)+11대요담(B.C.751~736)+12대아하스(B.C.742~725)+13대 히스기야(B.C.725~697)+14대므낫세(B.C.697~642)의 통치기간 중인 B.C.680년에 순교하기까지 약60년간 예언활동.
예레미야
B.C.650년경 유다 아나돗의 제사장 가문, 20세에 선지자 소명, 활동시기는 유다왕 요시야 왕 때(B.C.627)부터 예루살렘 멸망 때(B.C.586년 7,8월)까지, 즉 요시야(18년간)+여호아하스(3개월)+여호야긴(3개월)+여호야김(11년간)+시드기야(11년간)= 40년 6개월 동안 활동,
예레미야애가
에스겔
사독계열의 제사장 부시의 아들,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의 2차 침입 때, 3개월간 통치하던 여호야긴(B.C.597. 3개월 통치)이 포로로 잡혀간지 5년 후인 B.C.593년에 소명을 받고, 22년 뒤인 B.C.570년까지 예언활동, 주제:여호와삼마(‘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
다니엘
바벨론에 1차 포로로 잡혀간(B.C.605) 다니엘(벨드사살)은, 티그리스 강 기슭에서 마지막 환상을 본 고레스 3년(B.C.536)까지가 역사적 배경이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에윌므로닥-네르갈사레셀-라바시말둑-나보니두스-고레스 때까지 활동했다.
소선지서
(12)
호세아
북이스라엘 출신 브에리의 아들. 물질적 풍요하나 영적 빈곤의 시대인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던 때(B.C.793~782~753)를 배경으로 함. 사마리아가 함락(B.C.722)되고 포로로 잡혀감.
요엘
브두엘의 아들. 유다왕 요아스의 재위기간 중인 B.C.830년경 기록. 메뚜기 재앙(팟종이. 늣, 황충)
아모스
드고아 목자. 유다출신으로 벧엘로 이주하여 이스라엘에 대해 예언. 호세아와 동시대 선지지. 평화와 번영의 시기였던 유다왕 웃시야(B.C.783~742)와 이스라엘왕 여로보암2세(B.C.786~746)의 통치기간 중에 활동.
오바댜
에돔(에서 자손의 땅)의 멸망 예언. 오바댜의 예언과 유사한 성경은 아모스서(1,2장), 이사야서(13~23장), 예레미야서(46~51장), 에스겔서(25~32장) 이다.
요나
북이스라엘 가드헤벨 출신. 아밋대의 아들. B.C.765년과 B.C.763년에 역병 발생함.
니느웨(당시의 왕은 아슈르단 3세로 요나 당시 앗수르의 수도는 ‘갈가’였고, 니느웨는 B.C.700년경 수도로 됨)에 대한 예언. 엘리야가 살려준 사렙다 과부의 아들(왕상17:17~24). 엘리사가 예후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해 보냈던 소년(왕하9:1~6).
미가
모레셋(블레셋 가드 근처)출신. 이사야와 동시대 활동. 앗시리아(빌레셋3세. 살만에셀3세. 사르곤2세. 산헤립 등)가 고대 근동지역을 정복하려는 야망에 불타있던 시기. 요담(B.C.739~735)와 아하스(B.C.735~725) 히스기야(B.C.725~697)의 통치시대에 말씀을 받음. 미가는 이사야가 예루살렘에서 설교할 때 그곳에 종종 체류하며 설교했다(렘26:16~19). B.C.700년경에 메시야의 베들레헴(고대이름:에브라다)탄생을 예고.
⓫나훔
엘고스 출신. 앗시리아의 앗술바니팔(B.C.669~626)이 치리했던 때부터 니느웨 함락(B.C.612년)까지의 일을 기록. 북왕국 이스라엘이 함락된 지 약1세기가 지난 때로서 예레미야. 하박국, 스바냐의 활동기간과 동일(렘3:6;습1:1). 주제: 니느웨 성의 멸망을 예언.
⓬하박국
갈대아인이 강성해져, 나보폴라살 왕 때 앗수르를 함락 후 대바벨론 제국을 세움. 니느웨를 멸망시키고(B.C.612년), 1차로 이스라엘을 침입한 때(B.C.605년)에 기록함. 주제: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⓭스바냐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예언. 상류사회(왕족과 방백들)의 죄악상을 지적. 스바냐의 조상이 4대까지 기록된 것은 히스기야 왕과 같은 인물이
조상가운데 있기 때문. 유다왕 요시야(B.C.640~609)가 종교개혁을 하기 몇 해 전(B.C.627~626년경)에 기록. 앗수르의
에살핫돈과 앗술바니팔(B.C.668~626)의 치세 때 절정에 이르지만 사후에 국력이 쇠퇴하여 신흥세력인 바벨론의
공격(B.C.626)을 받아, 결국 메대와 바벨론의 연합군에 니느웨가 함락되고 앗수르가 멸망함(B.C.612년). 스바냐는 앗수르가 메대의 공격으로 스키티아족이 서부 아시아를 침공(B.C.625)할 것과 앗수르의 멸망을 예언함. 유다와 열방들에 임한 하나님 심판을 경고.
⓮학개
포로기간
중 바벨론에서 태어남. 바사왕 고레스(B.C.539~529)가 스룹바벨 인솔 하에 귀환 때(B.C.536) 예루살렘으로 옴.
스가랴보다 약2개월 먼저 사역 시작함. 6월부터 9월까지 4개월간 짧은 사역함. 스룹바벨, 여호수아, 스가랴와 함께 성전 재건에
힘씀.
⓯스가랴
제사장가문.
학개와 동시대 활동. 바벨론의 고레스왕 치하에서 1차 귀환 때(B.C.537) 귀국함. 스가랴의 예언 선포는 1차 귀환 이후
18년이 지난 해로서, 다리오 왕 2년 8월(B.C.520)부터 다리오 왕 4년 9월(B.C.518)까지 만2년에 걸쳐 예언활동.
70년간 포로생활(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포로로 잡혀간 때(B.C.605년) 부터 고레스 왕이 조서를 내린 때(B.C.538년) 까지를 말한다.
⓰말라기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자들이 성전 재건 후 시간이 흐르자 하나님을 향한 처음 열심을 잃고 타락함을 지적.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부자(父子)관계로 설명.
▶북이스라엘 멸망(B.C922~B.C.722년): B.C.722년 19대 호세아 왕(B.C.732~722) 때 앗수르왕 사르곤2세(주전722~705년)에게 멸망했다.
신 바벨론 제국 2대 왕인 느부갓네살 2세(B.C. 605-562년경). ‘느보(Nebo) 신(神)이 국경을 지켜주셨다’는 뜻.
그는 바벨론의 창설자이며 부왕(父王)인 나보폴라살이 당대 최강대국인 앗수르를 공격할 때 왕자로서 니느웨를 함락시키고 앗수르 제국을 멸망시켰다. 3년 뒤 앗수르의 세력이 약화된 틈을 노려 중근동의 패권을 차지하려던 애굽의 바로 느고(Pharaoh-Neco)가 앗수르 지역까지 진출했을 때 갈그미스(Carchemish)에서 애굽을 맞아 격퇴시킴으로써(B.C. 605년) 바벨론을 명실상부한 중근동 최고의 강대국 자리에 올려놓은 인물이다.
북 이스라엘의 예언자들
예언자란 누구인가?
예언자라고 하면, 흔히 미래를 점치는 사람을 떠올리곤 한다. 그러나 구약성경에서 예언자는 그러한 개념이 아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예언자들에 대한 다양한 설명이 가능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정의는 ‘하나님의 대언자’이다. 예언서를 읽다
보면, ‘사자언체’(messenger style)가 많이 등장한다. 사자언체란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와 같이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한다는 표현을 말하는데, 이러한 사자언체는 예언자가 전하는 메시지의 출처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율법에 그 기초와 근거를 둔다. 그런 점에서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였던 모세도 예언자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신명기 18장 18절에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모세가 선지자로 불릴 수 있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백성에게 전했기 때문이다.
구약의 예언자와 관련하여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히브리어 성경의 분류법이 기독교의 구약성경과 다르다는 점이다. 기독교인들이 사용하는 구약성경은 율법서, 역사서, 성문서, 예언서의 순서로 배열되어 있지만, ‘타낙’이라 불리는 유대인들의 성경은 율법서(토라), 예언서(느비임), 성문서(케투빔)의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 여기에 결정적인 차이는 기독교인들이 역사서로 부르는 책들이 타낙에서는 예언서에 포함된다는 점이다. 과거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가 유대교 전통에서는 예언서다. 그 이유는 예언이 미래의 일을 점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며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므리 왕조 시대(아합과 이세벨)의 예언자 _ 엘리야와 엘리사
구약성경은 남 유다를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한다.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
제국에 멸망한 이후에도 남 유다는 약 150년 이상 존속하였다. 남 유다도 바벨론에 의해 멸망했지만 70년 뒤에 그들은 예루살렘에 귀환하였고, 새로운 믿음의 공동체를 재건하였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의 역사가 남 유다를 중심으로 서술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북 이스라엘에 위대한 선지자를 보내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게 하셨다.
구약성경에서 위대한 선지자의 표상으로 등장하는 엘리야도 북 이스라엘에서 활동했다. 엘리야의 시대적 배경을 열왕기상은 이렇게 서술한다.
유다의 아사 왕 제삼십팔년에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니라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사마리아에서 이십이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 안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또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니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그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성문을 세울 때에 막내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열왕기상 16장 29-34절)
북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아합 왕과 왕후 이세벨은 온 나라가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기게 만들었다. 기원전 8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스라엘의 유물 가운데 ‘쿤틸렛 아즈루드’(Kuntillet Ajrud)와 ‘키르벳 엘 콤’(Khirbet el Qom)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있다. “사마리아의 여호와와 그의 아세라로 너를 축복하노라” 사마리아는 북 이스라엘의 수도인데, 위의 문구에서는 북
이스라엘이 섬기는 여호와와 아세라 우상이 부부 관계인 것처럼 느껴진다. 이만큼 북 이스라엘은 여호와 신앙에서 바알과 아세라
신앙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엘리야 선지자와 관련된 사건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도 갈멜산에서의 대결이다. 엘리야는 홀로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400명을 상대하였다. 이 대결에서 하나님은 엘리야가 쌓은 제단에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주셔서 여호와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심을 온 백성에게 선언하셨다. 이처럼 갈멜산에서의 사건은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였지만, 갈멜산에서의 승리 뒤에도 북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는 신앙으로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다. 그리하여 남겨진 사역을 위하여 엘리야의 후계자로 엘리사가 세워진다.
예후 왕조 시대(여로보암 2세)의 예언자 _ 아모스, 호세아, 요나
시간은 더욱 흘러 북 이스라엘은 이제 예후 왕조의 네 번째 왕인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죄악은 변함이 없었고, 하나님은 또다시 그들에게 예언자들을 파송하신다.
아모스 선지자가 여로보암 2세 때에 활동했던 선지자였다. 그런데 아모스 1장 1절에는 그를 소개하면서 “드고아 목자”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드고아 지역은 예루살렘 남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북 이스라엘이 아닌 남 유다에 속했다. 뿐만 아니라 아모스의 직업은 목자였다. 한마디로, 아모스는 북 이스라엘의 예언자 그룹이 아니었다. 그는 남 유다에 거주하던 목자였는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북 이스라엘로 올라가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그리고 그의 예언은 실로 통렬했다.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선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가 기뻐하는 바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아모스 4장 4-5절)
벧엘과
길갈은 당시 유명한 성소가 있던 곳이다.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곳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그런데 아모스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라고 조롱한다. 벧엘의 성소에서 어떠한 죄를 범하라는 것인가? 희생 제물과 십일조를 드리며 수은제와
낙헌제를 드리는 것이 아모스가 지적하는 죄의 내용이다. 아모스 선지자가 이처럼 독설을 내뱉는 이유, 곧 벧엘에서 드리는 제사까지도 이스라엘의 죄악이 되는 이유는 이스라엘에 팽배한 사회적 불의 때문이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팔며 힘 없는 자의 머리를 티끌 먼지 속에 발로 밟고 연약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아모스 2장 6-7절)
아모스 선지자의 언어는 이처럼 매서웠지만 그 안에도 희망은 담겨있었다. 다만, 북 이스라엘이 불의를 버리고 공의를 따라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했다.
너희는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리라 (아모스 5장 14-15절)
호세아 역시 북이스라엘에서 여로보암2세 때 활동했던 예언자이다. 아모스서가 주로 사회적 불의를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지적했다면, 호세아는 그들의 종교적 타락을 질타했다. 호세아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적 타락을 꼬집는 방식은 독특했다. 부정한 여인 고멜과의 결혼이다.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 (호세아 1장 2절)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음란한 여인 고멜을 아내로 맞이하였고, 그 사이에서 자녀를 낳았다. 고멜이 낳은 딸의 이름은 ‘로루하마’로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라는 의미고, 고멜이 낳은 아들의 이름은 ‘로암미’로 ‘내 백성이 아니라’는 의미다. 호세아는 선지자의 역할을 위해 이토록 고통스러운 결혼생활을 감내해야 했다. 그리고 호세아의 결혼 생활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데서 떠나 우상을 숭배하였던 이스라엘의 죄악이 하나님께 얼마나 큰 아픔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음녀와 같은 이스라엘, 과연 그들의 종교적 타락은 어디서부터 회복이 가능할까? 호세아는 그 시작점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선포한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 (호세아 3장 1절)
고멜의 음행이 이스라엘의 종교적 타락을 보여준다면, 그녀를 끝까지 품었던 호세아의 사랑은 이스라엘을 여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었다.
여로보암 2세때 활동하였던 북이스라엘의 예언자는 아모스와 호세아 외에도 요나가 있다. 요나서에는 그가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했던 내용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열왕기하에는 그가 활동했던 시기와 선포했던 메시지를 기록해두고 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열왕기하 14장 25절)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구약 성경의 전반적인 역사 흐름은 남 유다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성경이 묘사하는 북 이스라엘의 역사는 우상숭배로 점철되어 있으며 불의가 가득한 역사였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죄악은 결국 앗수르에 의한 국가의 멸망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구약성경의 이러한 흐름을 알고 있지만, 죄악으로 치닫는 북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도 기억해야 한다. 곧, 그들이 우상숭배에서 돌이킬 수 있도록 위대한 예언자들, 곧 엘리야와 엘리사, 아모세와 호세아와 요나를 북 이스라엘에 파송하셨다. 그리고 심지어 니느웨 성에 요나를 보내어 회개를 촉구하셨다. 비록 구원 역사의 흐름이 유다를 중심으로 흘러갔을지라도, 하나님은 북 이스라엘을 사랑하셨고 나아가 이방민족 니느웨도 긍휼히 여기셨다. 이것이 북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 예언서 없는 선지자
▪ 엘리야.엘리사 (대표적): 이적과 기사를 통해 하나님을 증거
▪ 아히아, 미가야등(기타): 단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선지자
◈ 북방 선지자의 활동
아히야: 실로에 있는 선지자 여로보암에 대하여 두거지 예언을 하였다. ▪하나는 솔로몬이 우상을 섬김으로 그 나라의 12중에 10을 여로보암에게 주시겠다 하였다(왕상11:29-33).
▪또 하나는 여로보암역시 우상숭배로 그 나라가 망할 것과 그 아들 아비야가 죽을 것을 예언(왕상14:1-16).
예후 (왕상16:1, 왕하 9:1-10:36)(대하19:2) ▪하나니의 아들. 엘리사가 기름부음. 북방남방 양국모두의 선지자로 활동
▪북방 이스라엘왕 바아사를 꾸짖고 멸망을 예언했다(왕상16:1-7).
--아합후손제거. 바알숭배자 몰살. 나중에 왕이 되었음 (예후왕조 시작)
--아합의 아들 북왕 요람을 병문안한 아하시야(아사랴)는 예후에게 죽음 당함 (대하22:6)
▪예루살렘에 돌아온 남방 여호사밧에게 악한자를 도왔다고 예후가 규탄하였다 (대하19장)
--유대왕 여호사밧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악인을 도운 행위를 비난했다(대하19:2).
▪예후가 북쪽 아합의 남은 가족과 남쪽 아히시야(6대)를 살해한 것은 여호와의 심판
엘리야의 활동/이적/예언 (1) 디셉 사람(왕상17:1).
(2) 아합왕에게 예언하기를 내 말이 없으면 수년동안 비가 내리지 않으리라 하고 그릿 시냇가에 숨어있을 때 여호와가 가마귀를 시켜 조석 식물을 날라다 주게했다(왕상17:1-7)
(3) 사르밧과부집에 유숙하는 중에 한줌의 보리가루와 적은 기름으로 여러 날을 먹었어도 없어지지 않게 하고 그 과부의 아들이 죽은 것을 다시 살려 주었다(왕상17:8-24)
(4) 아합왕 때에 왕과 백성이 바알우상과 아세라우상을 숭배함으로 견책하고 아합왕에게 참신과 거짓 신을 가려내자 하여 바알선지
4백명과 아세라의 선지 4백5십명을 데리고 갈멜산에 올라가 송아지로 재물을 삼고 각기 자기의 신에게 기도하여 불로 응답함을
보자하여 먼저 바알과 아세라 선지 850명이 정오가 지나도록 외쳤으나 응답이 없고 엘리야가 여호와한테 부르짖을 때 불이 내려와
제물과 도랑의 물까지 모두 태워 버렸다. 즉시 백성들을 시켜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 850명을 기손 시내로 끌고 내려가 모두
죽였다.(왕상18:19-40)
(5) 왕후 이세벨이 이 소식을 듣고 엘리야를 죽이려하므로 주의 천사가 어루만지고 식물을 주고 호렙 산굴에 있을 때는 여호와가 강한 바람과 지진과 세미한소리의 세가지로 보이시고 명령하시기를,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왕이 되게 하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왕이 되게하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네 대신 선지자가 되게하라 하셨다(왕상19:1-16)
--§설교요약: 세미한 음성
(6) 농부 엘리사가 경작하고 있을때 자기 겉 옷을 던져 따라오게 하였다 (왕상19:19-21)
(7) 아합이 나봇을 돌로 쳐 죽이고 포도원을 뺏었을 때 왕 앞에 나타나서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으리라 하였다(왕상21:17-19)
(8) 이스라엘왕 아하시야가 병들매 바알세붑에게 물으려 하였으나 엘리야는 왕이 죽을 것을 예언했다 (왕하1:9-16)
(9) 승천하게 되어 엘리사에게 세번이나 작별 인사를 하였으나 떠나지 않으므로 무엇을 구하느냐 물으니 당신의 영감을 배나 원한다
하므로 내가 승천하는 것을 보면 성취하리라 하고 겉옷을 떨어 뜨리고 홀연히 불 수레와 불말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는 회오리
바람을 타고 승천하였다 (왕하2:1-11)
(10) 그의 심정과 재능이 세례 요한과 비슷하다 하였다(눅1:17)
(11) 예수님이 변화하실 때에 모세와 같이 나타나서 주님과 말씀하셨다 (마17:3)
(12) 야고보는 간절히 기도하면 응답하여 주신다고 엘리야을 비유로 권면하였다(약5:17)
*그는 험상한 모습과 탈속한 옷차림,비호같이 빠른 걸음, 기근도 걱정하지 않을 정도의 건장한 모습, 굴에서도 살수있는 억센 습관이
그의 특색이었다. 여호와 신의 예배에 절대적인 선지자였고 국가 운명에 대하여 예민한 통찰과 염려를 한 애국적인 인물이며 구약
선지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엘리야의 이적 :
(1) 엘리야 에게서 떨어진 겉옷으로 요단 강물을 쳐서 갈라지게 하고 건너왔다(왕하2:13-14).
(2) 불결한 몸에 소금을 넣어 음료수를 만들었다(왕하2:20).
(3) 벧엘로 가는 길에서 아이들이 대머리라고 조롱할때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여 암곰 두 마리가 숲에서 나와 42명의 아이들을 찢었다(왕하2:23-24).
(4) 유대와 에돔이 동맹하여 모압왕과 싸울때 물이 없어 고생하는 것을 보고 물을 내어 그 지경에 가득하게 하였다(왕하3:20)
(5) 선지자의 생도의 아내에게 기름을 만들어 주어 빚을 갚게 하였다(왕하4:7)
(6) 사렙지방 여인에게 아들을 낳게하고 그 아들이 죽은 것을 다시 살렸다(왕하4:17,35)
(7) 우물 물의 독을 제거 하였다(왕하4:41). 그림 : 물을 고친 엘리사
(8) 바알살리사에서 보리떡 20개로 백명을 먹이고 남았다(왕하4:40-44)
(9)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쳐 주었다(왕하5:24눅4:27).
(10) 자기 종 게하시에게 문둥병을 주었다(왕하5:27)
(11) 물에 빠진 도끼를 떠오르게 하였다(왕하6:6).
(12) 자기 사환의 눈을 밝게하여 불말과 불 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호위한 것을 보여 주었다(왕하6:17).
(13) 아람 군사의 눈을 어둡게하여 사마리아로 인도하고 그 눈을 다시 밝게하여 사마리아 성중에 있는 것을 보게 하였다(왕하6:18-20).
(14) 엘리사가 죽은 다음 해에 어떤 사람이 죽은 시체를 엘리사의 무덤에 던져 놓았더니 그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는 순간 다시 살아났다 (왕하13:2-21) 엘리야의 예언
(1) 아람군사가 사마리아를 포위했을 때 물가가 폭동하여 배가 고파서 자식을 잡아먹는 자가 생겼다(왕하6:24-29)
(2) 엘리사가 곡가가 폭락할 것을 예언하였더니 주가 아람군대에게 병거와 병마의 소리와 군대의 큰 소리를 들리게 하시니 그 소리에 놀라 다 도망가니 예언대로 곡가가 폭락 하였다(왕하7:1-7,16)
(3) 하사엘이 아람왕이 되어 이스라엘 자손에게 행할 것을 예언함 왕하8:1-15)
(4) 선지자의 생도중 한명을 불러 길르앗 라못에 가서 예후 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될 것을 예언하게 하였다(왕하9:1-10)
(5) 임종에 이르러서도 이스라엘왕 요아스에게 아람을 세번쳐서 이길 것을 예언한 후 별세하였다(왕하13:18) 그는 천성이 청렴 강직했고(왕하5:15-16),엘리야는 왕가의 핍박을 받으면서 지냈으나 그는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한 관계로 왕가로부터 특미별 대우를 받았다.
그가 엘리야를 따른 것은 베드로와 비슷하고 이적을 많이 행한 것은 예수님의 비교할 수 있다.
미가야
▪아합왕 때의 예언자(왕상22:8, 대하18:7).
▪그는 아합에게 불리워 시리아와의 전쟁에 이스라엘이 승전하리라고 아첨하는 예언자들의 말에 반대하여 이스라엘이 패전하리라고 기탄없이 예언하였기 때문에 투옥되었으나 이스라엘의 운명은 그 예언대로 들어 맞았다.
엘리사의 활동: 엘리사의 부름 ▪엘리야가 하느님의 명령으로 엘리사를 불러 겉옷을 걸려 주어 후계자로 세웠다.
▪요단 강가에서 엘리야가 소원이 있는지 묻자 엘리사는 엘리야의 영감을 두 배로 갖고 싶다고 했다.
▪엘리야가 승천하고 그가 떨어뜨리고 간 겉옷을 주어 엘리야의 능력을 얻게 되었다. 엘리사의 이적들 ▪요단강을 건넘
▪엘리사가 물이 나빠 생산력을 잃은 한 성읍에 와 소금을 뿌리고 물이 다시 나오게 했다.
▪엘리사가 벧엘로 가던 도중 어린아이들이 자신을 욕하자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어린아이들을 저주했다 (암곰 2마리: 42명 죽임).
▪유다의 여호사밧과 에돔왕이 연합하여 모압을 정벌하던 도중 가축들을 먹일 물이 떨어지자 엘리사가 나서 제물을 바치고 물이 나오게 했다.
▪엘리사는 한 과부가 빚을 지고 아들들이 종이 될 위기에 처하자 과부가 유일하게 가지고 있던 기름을 늘려 그것을 팔아 빚을 갚게 했다.
▪수넴 여자의 아들이 죽게 되자 이적을 베풀어 그 아들이 다시 살아나게 했다.
▪길갈에서 어떤 사람이 독이 든 줄도 모르고 열매를 넣어 국을 끓여 대접했는데 엘리사는 이를 알아 밀가루를 솥에 넣어 독을 없앴다.
▪바알 살리사에서는 보리빵 20개와 햇곡식 이삭으로 100명을 먹이기도 했다.
▪나병 걸린 아람의 장군 나아만이 엘리사의 소문을 듣고 자신의 병을 고치러 오자 이스라엘 땅의 요단강에서 일곱번 목욕하게 하여 나병을 고치게 하였다.
▪엘리사 종 게하지에게 나아만의 나병을 옮기게 하여 벌을 받게 했다.
▪요르단 강에서는 한 예언자 무리가 엘리사를 위한 집을 짓기 위해 나무를 베다가 강물에 빠뜨린 도끼를 찾아주었다.
▪아람 군대가 이스라엘로 쳐들어오자 하나님에게 기도하여 아람 군대의 눈을 멀게 하여 성으로 유인한 뒤 배불리 음식을 먹이고 돌려보내어 아람과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도록 했다.
▪엘리사는 집에 원로들과 함께 있던 도중 자객이 자신을 해치러 오는 것을 미리 알고 피하기도 했다.
▪엘리사는 아람의 수도 다마스쿠스에서 훗날 아람의 왕이 될 하자엘을 만나 하자엘이 훗날 아람의 왕이 될 것을 미리 알려주었다. 그래서 그날 밤 하자엘은 자신이 모시던 아람 왕 벤 하닷을 살해하고 자신이 왕위에 올랐다.
▪엘리사는 님시의 손자이자 여호사밧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국의 새 왕으로 세운 뒤 혁명을 일으켜 요람 왕과 아하시야 왕, 이세벨과 아합의 아들들을 죽이게 했다. 엘리사의 죽음 ▪엘리사는 이스라엘 왕국의 여호아스 왕 시기에 죽었는데 그때도 아람과 이스라엘이 전쟁을 하던 때였다. 마침 여호아스 왕이 방문하자 엘리사가 여호아스 왕에게 땅을 치게 하였다.
▪그러나 여호아스 왕이 땅을 세번만 치자 "임금님께서 대여섯 번 치셨더라면, 아람을 쳐서 전멸시키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람을 세 번밖에 치실 수 없게 되었습니다." 라고 한탄하며 죽었다. [7] ▪사람들은 엘리사를 장사지내고 묻었으나 그 무렵 엘리사가 묻힌 곳에 모압 약탈대가 나타나 그곳에 주검을 묻으려던 사람들을 죽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떨어뜨리고 간 주검이 엘리사의 시체에 닿자 다시 살아나 제 발로 일어섰다고 한다.
호세아: •이스라엘의 배교/멸망/회복을 예언한 선지자
•여로보암2세때(북방전성시대) 부터 멸망때까지 활동
--남방의 이사야 선지자와 동시대에 활동
--성경에는 대선지서를 먼저 수록 (교재: 북방선지서 3개를 먼저 소개)
•이스라엘 나라의 죄악을 불륜에 빠진 아내와의 관계로써 예언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함을 나타내며 북쪽 이스라엘 나라의 죄악이 어떠함을 보여 주고 있다.
•창녀 고멜과의 결혼, 자녀이름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보임(1;4-9)
--첫째 아들 (이스르엘):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이다
--둘째 딸 (로루하마): 이스라엘 족속을 궁휼히 여겨서 용서하지 않는다 (유다족속은 구원)
--셋째 아들 (로암미): 너희는 내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않는다
•멸망경고 ⇒ 회개촉구를 무시하고 계속부패 (결국 앗수르에 멸망)
•나중에 남북이 함께모여 올리오리라(호1:11): 참고(렘 50:4, 겔 37:16-23)
--부분적: 열 지파 소수백성들이 유다민족 귀환시 한 무리가 되어 귀환
--궁극적: 하나님 자녀됨(북방백성:롬11:25,26)(이방인:벧전 2:10, P.Butler).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강조했다 (호4:6, 호6:3, 호6:6)
--우상을 섬기는 것은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호4:6)
--이사야: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11:9)
※강조점: 이사야(거룩), 호세아(사랑), 아모스 (공의), 요나 (이방구원)
아모스: •아모스는 이사야보다는 약간 앞서 호세아와 요엘과 요나와 같은 시대에 주를 섬겼습니다.
•이사야는 왕족으로 궁중에서 살았지만 아모스는 시골에서 농부로 생활했습니다.
•그는 유다 사람이지만 주로 벧엘에서 이스라엘을 향해 예언했습니다(7:10-15).
•주로 패역한 이스라엘에 공의로운 심판을 예언하고, 또 하나님의 사랑을 애가와 환상으로 보여 준다.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 하고 돌아오면 구원과 축복이 있음도 함께 예언 한다.
•아모스서와 호세아서는 동일한 대상과 주제의 메시지이지만 내용은 정반대입니다.
..호세아서: 하나님의 조건 없는 놀라운 사랑을,
..아모스서: 하나님의 공의를 전합니다.
▪예언의 말씀을 통해 멸망 예언 (주로 북이스라엘)
▪유다사람으로서 북방 여로보암2세의 타락을 공박 (호세아와 비슷한 시기)
▪주변국 멸망예언: 아람(다메섹), 불레셋, 두로, 에돔, 암몬, 모압등
▪북왕국 멸망예언: 최고 풍요기(앗수르 허약)의 극심한 영적타락에 회개촉구
▪강조한 메세지들: 유일신사상, 여호와의 날, 하나님의 공의를 강조하였다
---유일신 사상(심판예언): 열조의 따라가던 거짓것[헛것]에 미혹하였다 (2:4)
---여호와의 날: 그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 (5:18)
---하나님의 공의: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5:24)
▪남북의 회복: 다윗의 천막을 일으키고(12:1), 본토에 심으리니(12:15) §아모스설교요약
요나: •이스라엘의 숙적이며 이방나라인 앗수르에서 앗수르 멸망 예언함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을 원함을 요나의 예언을 통해 나타냄
▪주변국 멸망예언 (앗수르) ⇒ 멸망 늦쳐주심 (결국멸망)
▪하나님의 진리를 이방에 선포하는 이스라엘의 선교적 사명
▪여로보암2세때 앗수르의 도성 니느웨로 가서 멸망전에 회개촉구 사명
▪다시스로 도망했으나, 하나님의 뜻에 의해 결국 니느웨에 긍휼전달
▪요나의 앗수르 멸망예언 늦춰짐⇒나훔의 앗수르 멸망예언은 실현됨
오뎃
▪북왕베가가 남왕아하스와 싸워 이기고 유다포로를 끌고 올때 포로하였을때
▪사마리아의 선지자 오뎃이 유다 포로를 동족이니 돌려보내는 것이 마땅하다고 베가 왕에게 간 하여 돌려 보냈다(대하28:9).
율법서에 뒤이어 나오는 히브리어 성경의 두 번째 큰 구분은 예언서이다.
이 예언서는 "전기 예언서"와 "후기 예언서"라는 두
부류의 책으로 구분된다. 전기 예언서에 들어가는 책들은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하」이다.
「룻기」와 「역대 상하」는 "성문서"라고 불리는 세 번째 큰 구분에 속한다. 이 해설이 다루고 있는 후기 예언서는 "대" 예언서로
알려진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과 "열두 예언서," 곧 "소" 예언서라고도 하는 「호세아」에서 「말라기」에 이르는
책들로 구성되었다. "대" 예언서나 "소" 예언서라는 칭호에서 "대"와 "소"는 책의 길이를 말하는 것이지 그 중요성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70인역본에서나 대부분의 번역 성경에서는 「예레미야애가」와 「다니엘」이 예언서와 함께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들은 예언서와는 다른 성격의 책이기에 이 자리에서는 다루어지지 않는다(이 책들에 있는 '개론'과 '성경책 각 권의 이름과
순서'에 대한 해설을 보라). 히브리어 성경에서 이 책들은 성문서에 속해 있다.
선지자란
고고학적 증거나 성경의 자료들(왕하 10:19)은 고대
세계에서 선지자들이 여러 방면에 걸쳐 두루 활약하였음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우리는 구약에 등장하는 선지자만을 다루려고 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선지자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곧장 미래를
예고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을 머리 속에 떠올린다. 성경의 선지자들도 종종 장래 일을 예고하고는 했었다. 하지만 그런 예고가
선지자의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선지자"란 낱말은 그리스어에서 온 말로 신의 뜻을 사람에게 해석하는 신의 대변인을 가리킨다.
구약에는 선지자를 일컫는 용어들이 여러 가지가 있다.
"하나님의 사람"(왕상 17:18, 24)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왕하 4:9) "선지자"(왕상 13:11)
"신에 감동하는 자"(호 9:7) "선견자"(삼상 9:9-11) 등이 있다.
"선견자"란 말은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식별할 수 있는 자를 암시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선지자란 말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히브리어에서 선지자를 가리키는
말('나비')은 분명 "부르다"란 뜻의 아카드어에서 온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수동태인지(그럴 경우 뜻은 "부름 받은 사람"이
된다) 능동태인지는(그럴 경우 뜻은 "누군가를 부르는 사람"이 된다) 확실하지 않다. 성경의 선지자들이 무슨 일을 하였는지를
자세히 알고 싶으면 모세로부터 시작되는 성경 본문 자체를 살펴보지 않으면 안된다(신 34:10-12를 보라).
선지자의 역할
「출애굽기」는 두 구절(4:14-16; 7:1-12)에서
모세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백성 앞에 나서고 있는 것으로 묘사한다. 이 때 모세의 형 아론이 그의 선지자로 활약하고 있다. 모세가
말을 하면 아론이 그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 구절에서 선지자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사람이다. 구약은 여러
곳에서(삼상 3장; 사 6장; 렘 1:2-9; 겔 2-3장; 암 7:14-15) 선지자를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선지자는 모두 자기들이 하는 말이 자기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계시라고 확신하고 있었다(삼상
3:19-21; 왕상 22:19; 렘 1:9,12; 암 1:3; 3:7). 초기에 선지자들은 종종 하나님의 영(민
11:24-29; 삼상 19:19-24)의 힘에 붙들리는 "황홀경"에 취하는 경험을 하였다(삼상 10:10,13). 나중에
선지자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영에 충만하다거나 하나님의 영의 힘에 붙잡혔다고 단호히 선언하였다(겔 2:2; 11:5; 미
3:8).
초기 이스라엘 예언
구약에서 선지자로 불리는 주요 인물 중에는 아브라함과
모세와 미리암과 드보라와 사무엘과 나단과 엘리야와 엘리사가 포함된다.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선지자로는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와
갓과 실로 사람 아히야와 스마야와 훌다가 있다.
「신명기」는 모세를 이스라엘에서 가장 위대한 선지자로 간주하면서 예언 운동이
시작되는 뿌리가 모세로부터라고 말한다(18:15; 34:10-12). 모세 이후 중요한 인물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였던
사무엘이다(렘 15:1). 사무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 한두 세기 가량 지속되었던 느슨한 형태의 지파
조직(「여호수아」와 「사사기」의 개론을 보라)에서부터 사울이 다스리기 시작하던 왕조(약 주전 1030-1010년)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위치하고 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사울을 이스라엘의 최초의 왕으로 삼는 기름을 부었던 자가 바로 사무엘이다. 그러나
동시에 사무엘은 왕을 세워달라는 백성들의 요구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경고하기도 하였다(삼상 8:11-18). 하나님이 사울을
버리셨을 때(삼상 15:10-34) 사무엘은 다윗을 사울의 후계자로 삼아서 기름을 부었다(삼상 16:1-13).
그 때 이래 선지자들은 왕조와 밀접하게 연관되었다. 때로는
왕의 조력자가 되기도 하였고, 때로는 왕조의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사람이 되기도 하였다. 선지자 나단은 다윗에게 그 왕국이
영원히 존속되리라고 약속하기도 했지만(삼하 7:11-17; 대상 17:11-15), 동시에 다윗이 밧세바와 간통하고, 그 남편
우리아를 살해한 것을 두고 통렬하게 비판하기도 하였다(삼하 12:1-15). 그런 영향력을 활용해서 솔로몬을 다윗의 후계자로 삼는
일에 나서기도 하였다(왕상 1:11-40). 왕국이 분열되어야만 했을 때 실로의 선지자 아히야가 북 왕국 이스라엘의 첫 번째
통치자에게 기름을 부었다(왕상 11:26-39). 유다 출신으로 이름을 알 수 없던 한 선지자는 바로 그 왕이 벧엘에 금송아지로
만든 우상을 세웠다고 비난하였다(왕상 12:32-13:32).
참으로 「열왕기 상하」는 긴 부분을 할애하여 아합 왕의
통치(주전 874-853년) 때부터 시작된 주전 9세기의 북 왕국에 예언이 꽃을 피웠다고 가르치고 있다. 여기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사람이 엘리야(왕상 17-19; 21장)와 그 후계자 엘리사(왕하 2-9장; 13:14-21)로 이들은 모두 바알과 아세라
숭배와 그것을 추종하며 이방 신을 섬길 것을 주창하였던 선지자들에게 맞서 대항하였던 선지자들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선지자들이
우상숭배를 반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악하다고 판단된 왕조를 개혁시키고자 왕조를 무너뜨리는 일에도 직접 관여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상 생활 속에서는 왕이 남용하는 권력에 맞서서 힘없는 자들을 변호하는 일에 적극 나서기도 하였다. 때로는 주변 여러
나라들의 정치에 깊이 관여하기도 하였다.
이밖에도 이름을 알 수 없는 많은 선지자들이 있다. 이들은
"선지자의 제자들"(왕하 2:3,5)이라고 불리는 단체나 모임에 속했던 자들이다. 초기 사무엘 시대에는 선지자들이 무리를 지어서
몰려다니기도 하였다(삼상 10:5-13). 성경의 많은 구절들이 엘리야나 엘리사가 이같은 선지자의 무리들의 동의나 지원을
받았음을 지적하고 있다(왕하 2:3-18; 4:1,38; 5:22; 6:1). 그렇지만 또 다른 경우, 이믈라의 아들 선지자
미가야 같은 사람은 자기 개인에게 닥치는 신상의 위험을 무릅쓰고서도, 왕을 섬기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하던 선지자의 무리들에
정면으로 맞섰다(왕상 22:1-29; 대하 18:2-27). 이 이야기에서 미가야가 진실을 선포하고 있는 것을 보면 대략
400명에 이르는 다른 선지자의 무리들은 거짓을 말했다고 보아야 한다. 곧 선지자의 무리에 속했다는 사실 자체가 예언의 진실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선지자들이 백성들에게 다른 신을 좇으라고 강요하거나
마술 행위를 주창하거나 실현되지 않은 예고를 하였다면, 그런 선지자들은 정녕 배척받아야만 하였다(신 13장; 18:9-15).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선지자들이 서로 상반된 메시지를 전할 때 누가 참된 것인지를 식별해야 되는 문제가 있었다.
예언이 현실로 이루어지는지의 여부를 가지고 참과 거짓을 구별한다는 것은 충분한 근거가 되지 못했다. 선지자의 말을 들었던
사람들이 그것이 성취되는 것을 보게 되기까지에는 한평생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렘 28장).
정경적인 예언자
주전 8세기 중엽, 그리스에서 호머가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를 막 써냈던 직후, 이스라엘 예언에서는 새로운 현상이 일어났다. 이 현상은, 등장하자마자 전 지역을 지배하게 된
앗수르 제국의 부상과 동시에 나타났다. 최초로 선지자의 메시지가 책으로 보존되게 된 것이다. 이들 후대의 선지자들을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았던 사람들과 구분하기 위해서 우리는 종종 "문서 예언자", "고전적인 선지자", "정경적인 예언자"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이 선지자들은 더 이상 특정 왕이나 그 밖의 개인들의 운명에 대해서만 선포하지 않았다. 대신 이스라엘과 유다 전체를
상대로 선포하였다. 이 점에서도 그들은 초기 선지자들과 구별된다. 그 선지자들이 개인을 상대로 말씀을 선포할 때에는, 그들이
왕이건, 귀족이건, 제사장이건, 다른 선지자이건, 일반 백성이건, 하나님께서 그 당시 국제적인 정세에 깊이 관여하고 계신다는
인식에서 그렇게 하였다. 초기에 등장했던 선지자들마냥 그들도 왕조를 비난하고 왕조의 멸망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왕조에 맞서는 어떤
정치적인 행동에 능동적으로 가담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때때로 왕을 세우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지적하였다(호 1:4;
7:3-7). 그렇지만 일부 선지자들은 남북 왕국에서 둘 중 하나나 두 왕국 모두가 멸망할 것을 선포하는 것을 자기 사명으로
삼기도 하였다.
선지자들은 지도자들과 시민들에게 한 가지 중심되는 본질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셨으며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셨고, 보호했으며, 자신의 뜻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셨다. 특권에는 책임이 따랐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을 선택하신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였고, 자기 주변에 있는 자들을 보호해야 하였다. 선지자들이 지적한 문제는 여러 가지이다. 예배, 사회정의, 말과
행동의 진실, 우상숭배와 도덕적 타락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선지자들이 선포하였던 특별한 문제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들에게 있던
주된 관심은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고 시내 산에서 모세와 함께 맺었던 언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시행하라고 촉구하는 데 있었다.
예언서의 문학적 형태
예언서의 문학적 형태는 참으로 다양하다. 환상이 있고(예를
들어, 암 7:1),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는 심판과 구원의 메시지가 있으며, 이방 민족에 대한 심판도 있다(렘 46-51장; 겔
25-32장). 재판정에서 이루어지는 다툼이나 법적인 소송 형태로 된 구절도 있으며(미 6:1-5), 장례식의 애도문(암
5:2), 찬양(사 12장), 노래(사 5:1-3)도 있다.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부르시는 기록이나(사 6장; 렘 1장; 겔
1-3장), 상징 행동을 전하는 이야기도 있다(렘 13:1-14; 겔 5:1-4). 예언서 속에서 이런 메시지들이 어떤 원칙을
따라서 배열되었는지 항상 분명하지는 않다. 어떤 때는 이방 민족에 대한 심판 메시지에서 보듯이 공통되는 주제에 따라서 여러
구절들이 하나로 묶인다. 또 어떤 때는 동일한 역사적 상황에 관한 메시지가 하나로 연결되어 나올 경우 연대적인 순서에 따라서
배열되기도 한다(사 7-9장). 그렇지 않은 경우, 시간적으로는 서로 아무 상관이 없는 메시지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그래서, 예를 들면, 어떤 심판 메시지 뒤에는 동일한 청중에게 선포되었던 구원의 메시지가 뒤따라 나오기도 한다(미 3-4장).
선지자들의 메시지가 서로 다른 때에, 서로 다른 정황 중에 주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좇지 않을 때
선지자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해 있다고 선포하였다. 백성들이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올 때에 선지자는 희망과 위로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역사적 배경
예언서의 내용은 그 역사적인 맥락을 세심하게 주의하면서
파악하지 않으면 안된다. 각 책의 메시지가 하나님의 말씀이며, 누구에게 선포되었고, 언제 선포되었는지를 밝히고 있다(사 1:1; 호 1:1). 소
예언서 중 「요엘」, 「오바댜」, 「요나」, 「나훔」, 「하박국」, 「말라기」 여섯 책은 선지자의 이름 외에는 특별한 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책의 역사적 배경은 정확하지 않거나,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파악해야만 한다. 예언서의 머리말이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 언급하는 경우라도, 선지자가 언제, 무엇 때문에 예언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설정하기 위해서는 책의 특정한 구절들을 읽는
것이 도움이 된다(이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에 수록된 각 책의 주요 단락에 대한 요약은 이런 특정한 주제까지도 설명하고 있다).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선지자들의 메시지는 주전 8세기에서 4세기에 이르는 동안 고대 서아시아 지역을 차례로 지배하였던 앗수르,
바벨론, 바사라는 세 제국의 맥락에서 검토될 수 있다.
앗수르 시대 - (북왕국) 아모스, 호세아. (남왕국) 이사야, 미가
네 명의 선지자들이 8세기 앗수르 시대에 살았다. 초기에는
아모스와 호세아 두 명이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 예언을 선포하였다. 나머지 두 사람인 예루살렘의 이사야와 모레셋의 미가는, 남
왕국 유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소명을 받았다.
바벨론 시대 - 나훔, 하박국, 스바냐
나훔과 하박국과 스바냐는 주전 7세기에 속한다. 「나훔」은
주전 612년에 파괴된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가 앗수르 시대의 종말을 나타낸다고 말하면서 공박하고 있다. 하박국은 하나님께서
바벨론 사람들이 잔악하게 전쟁하는 것을 심판하시지 않고 내버려두셨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정의에 관련된 수수께끼에 대해서 묻고
있다. 그러면서 바벨론 제국의 시작을 표시하고 있다. 스바냐는 아마도 주전 621년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 이전에 벌어졌던 유다
사회 내부의 불의를 심각하게 비난하고 있는 듯하다. 예레미야도 7세기 말부터 6세기 초까지 예언하였기에 바벨론 시대에 속한다.
그런 까닭에 예레미야는 주전 586년 예루살렘의 멸망과 유다의 패망을 증언하고 있다. 같은 시기에 속하는 오바댜는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바벨론 사람들 편을 들었던 에돔 민족을 비난하고 있다. 6세기에 속하기는 선지자 에스겔도 마찬가지이다. 에스겔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자들을 향해서 자기 메시지를 선포하였다. 「이사야」 40-55장도 주전 538년 고레스 대왕이
바벨론의 포로였던 유다 사람들을 고향으로 귀환하게 하는 조서를 내리기 직전에 바벨론의 포로들을 대상으로 선포되었다. 사
56-66장은 주전 515년 제2의 성전을 다시 건축하려던 시기에 귀환한 포로들에게 선포되었다(이 부분의 저자에 대해서는
이사야서의 개론을 보라).
바사 시대 - 학개, 스가랴
「학개」와 「스가랴」는 바사 시대의 것이다. 주전 520년
그들은 유다 백성들에게 성전을 다시 세울 것을 고무하는 일을 성공적으로 시작하였다. 「말라기」는 대체로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개혁이 있기 바로 얼마 전인 5세기 중반에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슥 9-14장의 배경에 대해서는 확실한 것을 알 수가 없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시대를 5세기로 짐작하고 있다. 「요나」와 「요엘」의 연대를 결정하는 문제를 놓고서도 해석자들 사이에는
큰 견해 차이가 있다(각 책의 개론을 보라). 예언이 막을 내리게 된 때는 그리스 문명의 "황금기"(주전 500-400년)와
같은 시대이다. 이 때 이후, 예수가 탄생하기 전 대략 400년 동안 이스라엘에서는 더 이상 예언이 들리지 않았다. 신약의 예언에
대해서는 선지자를 보라.
기록자 : 마가, 기록 시기 : 주후 60년경, 성격 : 역사, 기간 : 3년 반 수신자 : 군단, 백부장 등의 라틴어가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방인들 특히 핍박 중에 있던 로마 교회의 성도들이 마가복음의 수신자였을 것이다.
로마 사람들이 메시아의
도래를 기대하지 않았으므로 마가는 메시아의 계보를 생략한다. 또한 그는 구약성경의 여러 예언을 생략하고 이방인 독자들을 위하여
요르단이 강이라는 것과(1:5) 올리브 산이 성전 맞은편에 있다는 것(13:3) 등을 설명한다.
이름 : 이 책의 이름은 이 책을 기록한 성도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망치’를 뜻하는 마가는 마리아의
아들이며(행12:12) 바나바의 생질이고 베드로의 믿음의 아들이다(벧전 5:13). 그는 복음서에서는 언급되지 않으며 사도행전에
8회 언급된다.
주제 : 주 하나님의 종의 사역
목적 : 나사렛 예수님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아버지의 뜻을 완전히 이루었음을 보여 주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도 그분처럼 섬겨야 함을 보여 주는 것
내용 : 마가복음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 언급하고는 곧바로 그분의 지상 사역을 기술하며 주로 그분의 일을 많이 말한다.
특히 마가는 하나님이 세상을 위하여 보내신 종으로서의 예수님의 행적과 수난 기록을 중점적으로 강조하며 구약의 인용이나 유대 풍습에
대한 묘사보다는 침례자 요한의 사역부터 주님의 사역의 끝부분까지를 간략하지만 매우 힘 있게 전달한다. 기록의 단순함과 평범함
때문에 마가복음은 ‘세상에서 가장 짧고 명쾌하며 놀랍고 동시에 가장 만족스런 역사 기록’이라는 평을 받는다. 마가복음은 16장,
678절, 15,171 영어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핵심 장 : 10장(그리스도의 사역의 목적),
핵심 절 :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아니하고 도리어 섬기며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느니라.”(10:45), 핵심 단어 : 곧장(42회), 핵심 구 : “곧 그분께서”(1:20)
마가복음의 그리스도 : 하나님의 의로운 종(사 53:11), 영적 교훈 : “그분의 놀라운 사역이 그분을 증명한다.”
06-08-2023(수) /
복음(福音) 유앙게리온(ĕuanggĕ- liŏn) εὐαγγέλιον, ου, τό
1. 좋은 소식에 대한 보상, 2. τὸ εὐαγ- γέλιον, 3. ὁ λόγος τοῦ εὐ.
발음
/ 유앙게리온(ĕuanggĕ- liŏn) 어원 / 2095와 3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복음(마 4:23, 막 16:15, 롬 1:1) 신약 성경 / 76회 사용
하나님의 아들예수그리스도복음의 시작이라. The beginning of the gospel about Jesus Christ, the Son of God.
1- 서언.
2-8 세례 요한의 전도.
9-13 예수의 세례받으심과 시험받으심.
14-15 최초의 갈릴리 전도와 제목.
16-20 최초의 제자 베드로, 안드레, 야곱, 요한을 부르심.
21-28 가버나움 전도. 회당에 있어서의 더러운 귀신들린 자를 고치신 일.
29-31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심.
32-34 일몰 후의 많은 치료.
35-39 새벽의 기도. 갈릴리 순회 전도 여행.
40-45 문둥병자를 고치심.
시작이란 헬라단어는 아르케라고 합니다. 아르케는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와 같은 의미로 사용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는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와 연결되지만 그 의미는 전혀 다릅니다. 창세기의 태초는 우주 만물의 시작이고, 요한복음의 태초는 하나님의 영원성, 선재성, 거룩성을 설명합니다.
[질문]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와 요한복음 1장 1절, 요한일서 1장 1절의 “태초”는 어떻게 다릅니까? 아니면 같은 시점입니까?
[답변] 이 질문은 성경해석을 위한 목표의 초점과 접근방법에 따라, 서로 다르다고 하는 학설과 같다고 하는 학설로 나누어집니다. 우선 본문들부터 보겠습니다.
창 1:1 (Genesis 1:1)
[개역성경]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히브리어] .$r,a;h; taew !yIm'V;h' tae !yhila> ar;B; tyviareB
[영어 KJV]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 and the earth.
[영어ASV]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요 1:1 (John 1:1)
[개역성경]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헬라원어] !En ajrch'/ ἦν lovgo", kai; oJ lovgo" ἦν pro;" to;n qeovn, kai; qeo;" ἦν oJ lovgo".
[영어 KJV]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영어 NIV]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영어 ASV]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요일 I:1 (John 1:1)
[개역성경]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헬라원어] ^O ἦn ajp! ajrch'", o} ajkhkovamen...
[영어 KJV] That which was from the beginning, which we have heard,
which we have seen with our eyes, which we have looked upon, and our
hands have handled, of the Word of life;
[영어 NIV] That which was from the beginning, which we have heard,
which we have seen with our eyes, which we have looked at and our hands
have touched--this we proclaim concerning the Word of life.
[영어 ASV] That which was from the beginning, that which we have
heard, that which we have seen with our eyes, that which we beheld, and
our hands handled, concerning the Word of life.
(*) 창 1:1에 있는 “태초”라는 용어는 히브리 원어로 tyviareB(베레쉬트)인데, 이것을 헬라어 ἐν
ἁρχᾖ(엔 아르케)로 번역했고(LXX), 거의 대부분의 영어 성경에서는 in the beginning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 용어를 한국어로는 동일하게 “태초에”로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이 “태초”(ἐν ἁρχή)라는 말은 요한복음 저자의
서신인 요한일서에는 앞프 아르케(ajp! ajrch)'"로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영어성경에서는 from the
beginning로 번역되었는데, 우리말로 “태초부터”입니다.
(*) 질문에 대한 결론부터 말하자면, 창세기의 “태초”와 요한복음, 요한일서의 태초의 의미는 동일합니다. 왜냐하면
“태초”라는 말(용어) 자체가 시간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창세기나 요한복음, 요한일서에서 말하고자하는 목표와 그 접근방식이
다른 것뿐입니다. 창세기의 목표의 초점은 창조(creation)에 관한 것이고, 요한복음의 목표의 초점은 그리스도의
구속(redemption)에 관한 것으로, 이 문제를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우선 어원학적인
접근(etymological approach)과 신학적인 접근(theological approach) 방법을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철학적인 접근은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아서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1. 어원학적 접근 (Etymological Approach)
(1) 전술한 바와 같이 창세기의 “태초”와 요한복음, 요한일서의 “태초”는 그 용어에 있어서 다른 단어들과 달리 별로
다양하게 사용되지 않고, 거의 대부분 모든 것들(시간, 장소, 질서, 계급 등)의 시작(beginning)과 첫째(the
first), 우두머리(head), 주권(sovereignty), 권세(power), 원리(principle) 등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모든 것의 첫째, 처음 곧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2) 이렇게 본다면, “태초”는 모든 것 즉 만물(피조물)의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학자들 간에 견해를
달리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창세기의 태초에 관하여는 이견(異見)이 없이 “시간”의 시작으로 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태초”에 관하여는 시간의 시작으로 보지 않고, “영원”과 관련시켜, 시간 이전, 영원의 아득한 어느
순간(momentum)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이는 몇 가지 이유에서 잘못된 견해라고 생각합니다.
1) 첫째로, 원어에 있어서 tyviareB(베레쉬트)나 ἐν ἁρχή(엔 아르케)는 분명히 시간의 시작의 한
지점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 tyviareB(베레쉬트)는 전치사 eB(베, in)와 명사인 tyviare(레쉬트,
beginning)의 합성어입니다. 여기에서 tyviare(레쉬트)는 영어 beginning(시초), former state(이전
상태), former times(전번), 그 종류의 첫째로서 시간에 관련해서는 first fruit(초실), first
born(장자)의 뜻으로, 위계(dignity)에 관련해서는 the first(첫째), chief(우두머리)등의 뜻으로
사용됩니다. 헬라어의 ἐν ἁρχή(엔 아르케)도 전치사 ἐν(엔, in)과 ἁρχή(아르케, beginning)로 되어있습니다.
여기서 ἁρχή(아르케)는 a beginning(시초), origin(기원), first cause(제1의 원인)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영원”은 헬라어로 αἰών(아이온)으로, 신학적인 의미로 존재의 기간(period of
existence)을 말할 때, 시간의 길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life(생명), life time(생명시간), life
itself(생명자체)로 영원성(eternity)을 의미합니다. 질적인 의미라는 뜻입니다. 고로 “태초”는 영원의 어느 한
지점(a point of eternity)이 아니라 “시간의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2) 영원과 시간의 개념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영원은 시간의 끝없는 연속이 아닙니다. 시간은 시작(알파)과
끝(오메가)이 있지만, 영원이란 그 본질부터가 다릅니다. 본질상 시간의 무한한 연속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초시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은 시간과 영원을 구별하지 못하고 혼동했기 때문에 영원을 시간의 연속으로
보고 구속을 논하다가 결국 구원사학파(Heilgeschichte School)로 낙인찍혔습니다. 영원은 시간의 연속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생명”(life) 곧 “영생”(eternal life)을 의미합니다. 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무시간”(timelessness)을 의미하는데, 이 표현도 완벽하다고 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원"(αἰών, 아이온)이란 시간을 제외시킨 것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것,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시간을 초월한 “생명”
곧 “영생”(eternal life)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3) 어원학적으로 “태초”는 시간의 시작, 시간의 시작점이지, 영원의 어느 한 지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영원의
본질을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영원과 시간은 본질상으로 다른 차원입니다. 말하자면, 시간은 인간에게도 관련이 되어 있는 것이지만,
영원은 하나님에게 관련된 말입니다. 물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은 있으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始終)을 사람으로는 측량할 수 없다(전 3:11)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원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가려면, 시간의 존재인 인간의 탈을 벗고 중생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여 “부활의 몸”이 되어야만 합니다.
2. 신학적 접근 (Theological Approach)
(1) 신학적으로 “태초”는 창세기나 요한복음에서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창세기의 “태초”가 시간의 시작점인
것과 같이 요한복음에서의 “태초”도 시간의 시작점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화육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화육되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던 예수님의 근본을 설명하기 위하여 선재하신 그리스도(preexistent Christ)라는
의미에서 로고스(λογός)를 논하고 있습니다. 이 로고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적 존재에, 그리고 레이마(ῥῆμα,
rJhvmato" Cristou)는 예수 그리스도의 현재적 존재에 적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현재적 실존뿐만 아니라,
시간 전, 즉 창세전에 선재하신 영원 적 존재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모세와 요한의 “태초”에 대한 목표(goal)와
접근방법(the method of approach)이 차별화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창조(주)에, 요한은 구속(주)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2) 물론, 출발점은 동일합니다. 곧 그 출발점이 “태초”인데, 이 태초의 의미는 모세(창세기)에게 있어서나
요한(요한복음)에게 있어서 다른 지점이 아니라 동일한 지점으로서의 출발점(starting point)으로 “시간의 시작점”을
의미합니다.
(3) 그러나 그 목표(goal)에 차이가 있습니다. 모세는 출발점으로서의 “태초”로 “하나님의 천지창조”에, 요한은
출발점으로서의 “태초”로 “그리스도의 구속”에 목표를 두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같은 출발점(starting point)에서
모세는 “천지창조”를 논하고, 요한은 구속주이신 “그리스도”를 논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4) 좀 더 신학적 논리로 말하자면, 모세는 “태초”에 관하여, 창조론적으로 접근하는 반면에, 요한은 구속론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동일한 의미로서의 출발점인 “태초”를 서로 다른 접근방법을 사용하여, 모세는 그 지점(태초)에서
천지창조의 시간과 공간의 세계로 진행하여 “창조역사”를 말하고 있고, 요한은 그 지점(태초)에서 시작하여, 영원 전에도 말씀으로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유추하여 그 분이 바로 선재하신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그리스도께서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하여 그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구속하시려고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구속역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태초로부터 영원 전에도
계시고, 육신이 되어 현재 우리 가운데에도 계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5) 다시 말하면, 모세는 “태초”가 아닌 영원의 세계에 스스로 계신 분(I AM THAT I AM, 출
3:14)으로서의 삼위일체 하나님(!yhila)께서 영원, 즉 창세전에 신의 회의(Divine Council)에서
내적교통(intra-communication)을 통하여, 가지고 계셨던 창조의 컨셉(concept)을 의논하시고, 이
프로젝트(project)를 가지고 창조를 시작하신 시점이 바로 “태초”인데, 이 태초마저도 하나님의 천지창조에 속한 것입니다. 이
“태초”가 창조세계와 구속세계의 출발점이 됩니다.
요 1:1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이 계신 시점이 시간의 시작인 태초에 비로소 계셨다는 뜻입니까? 그러나 “계셨다”(ἦν)는 단어는
미완료형(imperfect)의 부정과거로, 자존의 영구성, 영원성을 나타내는 말로, 영원 전뿐만 아니라, 그때로부터, 태초라는
시간의 시점에 계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시간의 시작인 태초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 태초가 창조되기 전에서부터 계신
분으로, 창조의 시점인 “태초” 바로 그 때에 계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관하여 존재론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계시론적 차원에서 개진하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미 전제하고
있는 말씀과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존재론적 차원에서 언급할 필요가 없고, 계시론적 차원에서 언급하는데, 이것이 성경계시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계심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하고 그의 나타내심, 즉 하나님의 계시의 차원에서 다루는 방식을 말합니다.
이 “태초”라는 시간적 시점에서 창조운동이 시작되었고, 구속운동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이 바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간으로서의 “하나님의 시간” (God's time)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시간은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시간을 초월한 영원한 시점, 즉 영원한 현재(eternal presence)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태초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출발점이 되는데, 이 지점에서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을 이해해야
합니다. 만일 이 시간적 시점에서 창조만을 내다보며 하나님의 구속사건의 근원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구속주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근본과 그의 구속의 역사를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시점이 하나님의 창조운동과 구속운동을 이해할 수 있는
출발점(starting point)이 되는 것입니다. 이 지점이 영원 가운데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이해하며, 시간과 공간에 들어오신
그리스도의 본질(근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빌 2:6).
(6) 다음으로 요한일서의 태초도 역시 동일한 “창조의 시점”으로 생명의 말씀의 현존하신 시점을 의미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뿐만 아니라 영원한 현재(eternal presence)로 계신 분으로 과거에도 계시고, 현재에도 계시고,
앞으로 오실 자이신 그리스도(계 1:8)를 증거 하기 위한 요한의 논법입니다. 요 1:1~2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라고 했는데, 말씀이 계신 동일한
시점에 하나님이 함께 계셨다고 하셨고, 그 때가 곧 “태초”라고 했으니 하나님이 창세전에 계시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창세전
영원히 계신 하나님께서 태초에 말씀과 함께 계셔서 그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시점이 곧 창세기의 태초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선재하신 하나님과 말씀과 그리스도가 만물을 창조하신 그 시점이 태초로, 바로 그 때에 하나님과 말씀과 그리스도가 함께
계셨고, 모든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으로부터, 그리스도로부터 창조되었다는 뜻입니다(요 1:3).
이 문제를 좀 더 확실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요한일서 1장 1절 본문으로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 이 말씀은 창세전에
있던 생명의 말씀(선재하신 그리스도)이 창조 시, 즉 태초부터(창조하신 그리스도) 계셨고, 재창조시에 나타나신 그리스도(성육하신
그리스도)로 이 모두가 동일하신 그리스도로,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분으로서의 그리스도(계 1:4, 8)를
증거 하기 위한 요한의 논법입니다. 여기서 특히 창조 시인 태초부터, 즉 역사 속에 나타나신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본문에서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손으로 ‘만진 바라’고 했습니다. 사실, 선재하신
그리스도(preexisting Christ)가 아니라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성육하셔서 나타나신 그리스도가 복음을 전하시고 몸소
사역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론 (Conclusion)
1. 창세기의 “태초" 요한복음, 요한일서의 “태초” 역시 시간의 시작점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태초라는 말
자체가 시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요한복음이나 요한일서에서 그리스도의 선재성에만 초점을 맞추었다면, “태초에”(έν
ajrch)이거나 “태초부터”(ajp! ajrch'") 있는 생명의 말씀이라고 할 것이 아니라, “창세전에”(pro; to;n
kovsmon) 말씀이 계셨다거나 “창세전에”(pro; to;n kovsmon) 계셨던 생명의 말씀이라고 했어야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이나 요한일서에서는 창조와 동시에 그리스도의 구속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태초에”(έν ajrch)와
“태초부터”(ajp! ajrch'")라고 언급한 것입니다.(cf. 요 17:5, 24; 엡 1:4; 마 13:35, 24:21,
25:34; 눅 11:50; 요 9:32; 롬 1:20; 엡 1:4; 벧전 1:20; 계 13:8).
2. 창세기에서 모세는 “태초”라는 시점에서 천지창조의 방향으로 전개하고 있고, 요한복음에서 요한은 같은 “태초”라는
시점에서 삼위일체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근본을 바라보며, 그 근본으로부터 성육하신 그리스도의 구속의 방향으로 전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또한 요한일서의
“태초부터”(ajp! ajrch'") 있는 생명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태초부터 계신 분으로, 우리가 처음부터(구약과
신약시대) “들은 바요, 본 바요, 손으로 만진 바라”고 해서 성육하신 성자의 신성(divinity)과 인성(humanity)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3. 모세는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창조론에, 요한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구원론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출발점은 같은 시점인 “태초”이지만, 모세는 그 태초에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요한은 그 태초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세계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다시 쉽게 설명하자면, 모세는 태초에서 창조세계 방향으로 전개하고 있고, 요한은 태초에서 말씀(λογός)이신
하나님(!yhila)으로 선재하셨던 그리스도로부터 성육하신 구속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방향, 즉 양면의 방향으로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가리켜 신학적인 전문용어로 “절대성의 태초”(Absolute Beginning)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태초와
요한의 태초는 동일한 것으로 전개방향과 목표가 다를 뿐입니다.
4. 결론적으로, 모세가 사용한 창세기의 태초와 요한이 사용한 요한복음의 태초는 같은 시점으로 “시간의 시작”(the
beginning of time)입니다. 단지 그들이 의도하고 있는 목표(goal)와 전개하는 방향이 다를 뿐입니다. 모세의
목표의 초점은 창조(creation)에, 요한의 목표의 초점은 구속(redemption/salvation)에 있기 때문에,
접근방법과 진행방향이 다를 뿐입니다.
(영원) 창세전 ⇠그리스도(선재) .................... ⇢ 구속 그리스도(화육) ⇢ 예수 ............ ⇢ (종말)
창세전에 계신 그리스도가 ............... ⇢ 태초에
(창세에)도 계심 창세전 영원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 ⇢ 말씀이 계속해서 존재해 오시며 바로
계시니라 창세, 즉 태초에 계셨다는 뜻
(선재의 X가 창조 시에도 계심)
...................... ⇢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그리스도
계셨으니 (창세전에) 께서
................ ⇢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곧 하나님이시라는 뜻
(요 1:1)
.................................................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그 분이 바로 그리스도(요 1:14) (성육신) (신약시대)
[요한일서]
(영원) 창세전 ⇠ ................말씀/그리스도 구속 그리스도(화육)⇢ 예수 ⇢............ (종말)
창세전의 생명의 말씀 ............... ⇢ 태초부터
창세부터 ...........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손으로 만진 바라 (요일 1:1) (성육하신 그리스도)
요한복음의 [태초에]와 창세기의 [태초에]
1. 요한복음은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수가 잘 요약되고 정리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의 기록의 목적대로(20:31) 복음서를 읽을
때,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믿고 생명을 얻되 풍성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을 통하여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히 12:8)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복음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분명한 믿음을
주고 있습니다.
2. 요한복음에서 강조하는 것은 그 목적대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절대적 진리입니다.
요한복음을 읽을 때, 우리는 어떤 구절에서도 믿음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란 공통점을 찾으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합니 다.
그래서 이 복음서는 먼저 육신으로 오신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란 선포부터 시작합니다. 왜 이렇게 선포해야 할까요? 그것은
당시의 영지주의가 신앙과 신학의 기반을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영적인 탁월한 인간과
일시적으로 결합해서 있다가 십자가 사건 전에 떠나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사도 요한이 에베소에서 가르칠 때에도 직접
반기를 들고 나섰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하나님이시며 인간이심을 의도적으로 강조하여 쓴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절대적으로 강조하면서 요한복음에 특별한 강조를 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나는
~이다”(I AM)라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에고 에이미)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양의 문이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는 포도나무이다”라고 강조함으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요 하나님이심을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길, 진리, 양의 문, 선 한목자, 부활, 영원 생명 되심을 믿고 의지합시다.
3. 이 목적을 드러내기 위해서 요한복음은 일곱 가지 표적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가나 혼인잔치, 둘째는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심, 셋째는 38년 된 병자를 고치심, 넷째는 오병이어의 이적, 다섯째는 물위로
걸으 심, 여섯째는 날 때부터 소경된 자 고치심, 일곱째는 죽은 나사로 살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표적을 행하신 다음에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때가 이르지 않았다"라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때는 무슨 때일까요? 물론 십자가의 죽으심의
때를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죽은 자가 살아나는 사건의 때를 말씀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표적 끝에 "때가 이르지
않았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4. 요한복음에서 일곱 가지 표적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먼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부터 시작하여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는 것으로 흘러가 끝나고 있습니다. 곧 일곱 가지 표적이 가나의 잔치 기쁨으
로 시작하는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곧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전제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나의
잔치는 우리에게 천국잔치의 모습을 공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천국의 복음을 전하시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설명을 의도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7가지 표적의 ‘7’이란 숫자가 바로
태초 곧 천지창조와 비슷한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첫 부분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시작하면서, 그 의미를
표적에 담아 하나님의 재창조사건을 전개하고 있는 듯 합니다. 곧 시작인 천지창조의 완성과 마침인 새 창조의 완성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되어진다는 신학적인 암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처음부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고 의지하고
찬양하고 감사하고 영광 돌리는 것이 신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5. 요한복음의 시작인 [태초에]와 창세기 1장의 창조와의 연관성을 유추해 봅시다.
창세기(브레쉬트)와 요한복음(아르케)과 요한일서(아르케)는 ‘태초에’로 시작합니다.
어쩌면 요한은 창세기를 떠올리면서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새로운 창세기를 쓰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복음의 사건을 창세기의
태초와 연관을 시키고 있습니다. 먼저 창세기의 처음 창조의 구조와 동일한 면을 요한복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요한복음의 “태초에” 라는 어귀를 연구하기 위해 창세기에 연결해 볼 수 있습니다.
곧 창세기는 요한복음의 진리를 그림자(상징)로
암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 뿐인 죄인의 마음에 오셔서 흑암을 밝히시고
공허한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는 구속사(redemptive history)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는 혼돈과 공허의 세상에 성령으로 운행하시면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 2절에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라고 할 때 흑암을 신학적으로 풀어낸다면 무엇을 상징할 수 있겠습니까? 혼돈과 공허와 흑암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죄인들의 땅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창조를 시작하신 장면은 성령을 보증으로 세우시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셔서 새 창조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가르키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과 창세기를 이렇게
연관시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태초의 첫째 날
하나님께서 태초 곧 첫째 날에 “빛이 있으라”고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누셨습니다(창 1:3-5).
(1) 그 빛과 또 다른 빛이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빛은 발광체가 있어야 존재합니다. 여기서 발광체는 태양입니다. 그래야
빛이 세워지겠지요. 그런데 태양은 몇째 날에 만들었습니까? 넷째 날에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첫째 날 만들어진 빛의 발광체가
무엇입니까? 이 빛(히, 오르)은 구체적인 발광체 현상보다는 에너지원으로서 능력이란 말로도 쓰입니다. “빛이 있으라(히,
하야)”는 말에서 “있으라”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이름에 쓰인 단어입니다. 곧 “빛이 있으라(히, 오르 하야)”는 명령 자체에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첫째 날의 빛은 참 광채이신 하나님에게서 나오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만물을
보살피시는 하나님의 생명력을 말합니다(Augustine).
시편
36편 9절에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라고 할 때, ‘광명(빛)’이 두 번
나오는데(히, 오르 오르) 먼저 나오는 빛은 빛의 원천이신 하나님 자신입니다. 거기서 흘러 나와 우리의 생명이 되는 또 하나의 빛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신적 능력과 만물을 창조하고 존재하게 하는 생명력입니다.
그런데
넷째 날 태양이 창조되기 전에, 채소가 이미 자라고 있습니다. 식물이 넷째 날이 아니라 셋째 날에 자라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태양빛을 받아 광합성을 해야 하는데 어찌된 일입니까? 이것은 감추어진 그 빛, 곧 그 근본적인 빛인 그 생명에
의해 자란 것입니다. 태양의 창조이전에 생물의 등장을 의도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 장의 빛의 창조는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드러 내고 있습니다.
밤에
속한 자는 영원한 어두움, 빛에 속한 자에게는 영원한 나라에 들이겠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고 신학적으로 풀어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둠을 밤이라고 하고, 빛을 낮이라고 했습니다. 낮은 성경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으며 밤은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해같이 빛나는 천국이 있고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는 밤을 상징적으로 말씀합니다. 요한계시록과 다른
성경에서도 이것을 극명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2) 요한복음은 빛과 생명을 동의어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신 그곳에 어둠이 공존하게 하셨지만
그 어두움을 몰아내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4절에서 “ 그 안에 생명이 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라고 말씀
하며,
5절에서는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이기지) 못하더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 시에 창조한 빛은 창조의
목적에서 볼 때, 완전한 빛이지만, 요한복음의 빛과 견주어 볼 때, 참 빛은 아닙니다. 참 빛을 위해 먼저 존재하게 한 것입니다.
참 빛의 힌트를 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빛이 실체이신 빛인데, 천지창조의 때에는 감취어진 빛이며, 그 실체의
빛이 왔다는 것을 요한복음 1장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9절에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알았을까요? 결코 알지 못했습니다. 10절에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라고 말씀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는 새 창조의 완성으로서 오신
것입니다.
(3) 창세기는 요한복음과
계시록을 향해 전진하고 있습니다. 이 창세기의 창조가 암시하는 새 창조의 완성은 요한 계시록 22장 5절에 등장합니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노릇 하리로다.” 그가
누구일까요? 보좌에 앉으신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태양 빛의 근원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으로만
진정한 생명이 있고 그 빛에 거하는 자, 곧 진리 안에 사는 자가 영생을 누리며 사는 자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는
빛이 있었으나 어둠이 공존했다는 것을 말씀으로 시작하지만, 요한복음에서 어떻게 완전한 참 빛이 등장하는가를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1장 9절) 라고 말씀하듯이 그 참 빛이 오셔서 어떻게
세상에 비추시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요한복음입니다.
(4) 첫째 날 세례 요한이 와서 그렇게 말하고 증거합니다.
1장
7절과 8절에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 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이 빛이 첫째 날 빛이 있으라 하셔서 빛이 있었던 의미를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태초의 둘째 날
(1)
그때에 물이 궁창 위와 아래로 갈라졌습니다. 물이 갈라지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구원받은 사건이 모세의 둘째 책 인 출애굽기에
나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택한 받은 사람만 살아납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10:1)에서는 물과 바다에 대해, 그것을
‘세례’라고 해석합니다. 선민들은 구름과 바다에서 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둘째 날에 궁창 위의 물(구름)과 궁 창 아래의 물로
나누셨습니다. 그것을 통과하는 것이 세례라는 것입니다. 세례의 의미는 모두 심판을 받아 죽고 하나님의 택함 받은 사람만 올라오는
것이 세례입니다. 과거의 사람은 죽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나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동시에 죄의 진노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를 말해줍니다. 그래서 노아 홍수 심판사건이 있었습니다(창6-7장). 그 심판 이후 이제는 땅을 물로 심판하지
않으신다고 언약하셨습니 다. 이 언약이 어떤 언약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궁창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을 부어 다 심판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안에 들어있는 자를 살리시려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의 실례가 바로 노아 방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았습니다(고전10:2).
홍해사건과
노아 방주사건을 종합한 것을 요한복음 1장 39 절 이하의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사건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세례를 받으셔야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요 의인이시기 때문에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지만, 죄인만 받는 세례를
직접 받으신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은 예수께서 자신을 죄인과 연합하시는 사건입니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이지만,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심으로 죄인의 자리로 내려오셔서 죄인들을 대표하고, 마치 노아시대에는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모든 물에 사람들이 죽어야 하듯이, 그렇게 심판받아 죽어야 마땅한 우리의 죽음을 대신하셔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2)
그래서 사도요한은 일부러 시간을 표현하면서 말합니다. 1장 29-30절에 “이틀 날”이라고 표현합니다. 곧 창조의 둘째 날이란
뉘앙스를 갖고 말씀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바로
둘째 날 회개의 세례를 받으심으로 죄인의 자리로 내려가신 것입니다.
(3) 세례는 죽으심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너희의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라고 질문합니다(막 10:38). 이는 예수님 자신의 비참한 죽으심을 미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주의 궁창에 의해 죽으심으로 궁창을 찢으셔서 그 모든 죽음을 담당하셨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성소와 지성소를 막는 두꺼운 휘장을 찢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이상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심으로 우리 영혼이 하나님의 성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은 특권이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그래서 예수께서 창세기의 둘째 날 궁창 위와 아래를 창조하셨는데, 요한복음의 둘째 날에는 그
궁창 위와 아래 물의 죽음의 세례를 받으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둘째 날에 세례를 받으심으로 하나님 나라로 옮겨진 것을
암시하는 것이 바로 창세기 둘째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뉘앙스를 담고서 “태초에”라는 말씀으로 시작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태초의 셋째 날
(1) 창세기의 셋째 날과 다른 성경의 표현을 찾아봅시다. 셋째 날에
물과 뭍이 나뉘어 육지와 바다가 창조되고,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가 창조 되었습니다.
상징적으로 말하면 요한이 쓴 계시록에서 바다는 악을 상징하며 나중에 바다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뭍(육지)은
나중에 새 하늘과 새 땅이란 표현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태초에 지음 받은 하늘과 바다가 동일하게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계시록 21장 1절에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고 말씀합니다. 창세기 1장 21절에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여기서 큰 물고기(히, 타닌)는 나중에 뱀, 혹은 바다 괴물과 비슷한 단어로 쓰입니다.
이사야
27장 1절에 “그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그 날에 날랜 뱀(타닌) 리워야단을 벌하시고 바다의 용(타닌)을 죽이십니다. 욥기 26장 12절에 “그는
능력으로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며 지혜로 라합을 깨뜨리시며”라고 말씀합니다. 또 이사야 51장 9절에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옛날 옛 시대에 깨신 것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타닌)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라고 말씀합니다. 물론 창세기
1장 21절은 고래나 물고기를 의미할 수 있지 만, 그러나 구속사 안에서의 바다라는 관점에서는 용이란 해석도 가능합니다. 바다에 큰
고기, ‘타닌’을 넣어두심으로 앞으로 일어날 다른 무언가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바다는 주로 ‘어둠’,
‘죄악’, ‘더러움’(계시록의 바다의 더 러운 짐승)을 상징하고 뭍(땅)은 생명있는 하나님 나라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생명 얻습니까?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바라봄(믿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29절의 [이튿 날]은 2일째이고, 1장 31절에 [또 이튿날]에는 3일째를 말하고 있습니다. 창조의 3일째처럼, 주님의
3일째 사건이 무엇입니까? 1장 35-36절에 “또 이튿날 요 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곧 죄와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는 세상에 어린 양이 오십니다. 구약의 제사
드리던 양이 아니라, 진정한 어린 양을 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복음의 선포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장 38절에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라고 말합니다. ‘너희들은 누구를 찾느냐?’고 물어보아야 정상인데 무엇을 구하느냐고 보신 것 입니다. 주님은 두
제자의 마음을 간파하시고 ‘누구를 좇느냐’ 보다, ‘무엇을 얻을 수 있느냐’를 물어보신 것입니다. 그랬더니 제자들이 ‘어디 계시오니까?’라고 말합니다.
이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무엇을 원하느냐?’라고 물어보신 것입니다. 왜요? 제자들은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 무언가를 배우는 선생으로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씀 합니다. 1장 39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날에 함께 거하니 때가 열시쯤 되었더라.”라고 말씀하면서, 예수님과 함께 거하는 시간에 그들이 변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유대인들은 어떤 순간을 강조할 때 시간을 기록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능력으로 복음이 깨달아지게 되는 시간은 예수께서
“와보라!” 하는 그 시간이었습 니다. 예수님과 함께 거하니 그들의 무지와 죄악이 새생명의 변화로 연결된 것입니다. 그래서 1장
40절에 안드레가 형 베드로에게 메시야를 만났다고 신앙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셋째 날입니다.
(3)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천지 창조의 모든 혼돈을 질서로 채우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3일째까지 창조하셨지만, 빈 공간(공허함)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 빈 공간을 채우십니다. 그래서 넷째 날은
첫째 날의 공간을 채우십니다. 첫째 날에 창조하신 빛과 어두움의 공간에, 넷째 날에 일월성신을 만드셔서 그 공간을 채워
넣으십니다. 또한 둘째 날의 하늘 궁창과 그 공허에 대해, 다섯째 날에 각각 생물, 새, 짐승을 채우십니다. 셋째 날 창조하신
육지와 바다와 식물의 공간에는 하늘과 땅의 짐승의 종류대로 온 땅의 공간을 채우신 후에, 마침내 모든 복을 주실 대상으로 사람을
만들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태초의 넷째 날
(1)
창세기의 넷째 날은 하나님께서 해와 달과 별들을 궁창에 채우십니다(창1:14-19절). 빛들을 궁창에 채우신 것입니다. 영적
의미를 찾는다면, 해와 달과 별을 만들어 비추게 하시듯, 우리를 빛 가운데로 부르셔서 이 빈 공간을 채우고 확장하는 순종의 삶을
말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요한복음의 넷째 날의 일은 무엇입니까? 안드레가 베드로를 베드로가 빌립을 그리고 나다나엘에게 주님을 증거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가는 역사를 보게 됩니다. 새 생명의 주님이신 메시아를 만난 자들이 빛이신 예수님을 증거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어두움에 속한 자들이 빛으로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넷째 날은 창세기에서 해와 달과 별을 채우듯이 생명의 주님이 증거되는 역사를 보게 됩니다.
태초의 다섯째 날
창세기의
다섯째 날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최초의 복으로 생육과 번성과 충만에 대한 말씀입니다(창 1:22-23) 이처럼 요한복음의 복도
아들의 생명으로 인한 영혼 구원이 더욱 번성하는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전도의 삶을 통하여 그들이 주님을 따르는
삶으로 사람 낚 는 어부가 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에서 증거하는 참된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다섯째 날의 복은 물고기와 짐승에게 생육과 번성과 충만의 복을 허락하셨다면, 요한복음에서의 복은 아들의 생명으로 인한 영혼
구원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습니 다. 영원구원에서의 축복도 창세기에서처럼 번성과 충만과 생육의 축복이 넘치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증거하는 생육과 정복과 충만의 복은 각자의 부르심에 대한 소망이 확실하고 주신 직분을 잘 감당하여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일어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사명을 감당하는 곳에 반드시 생명의 확장과 번성과 충만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말씀입니다.
태초의 여섯째 날
(1)
창세기의 여섯째 날에 가장 중요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땅의 짐승과 가축과 기는 모든 것을 만드시고, 하나님께서
자 기 형상대로 만드신 사람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셨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그 모양 대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창1:26-31).
사람의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된 사람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는 충만의 축복에
더하여 창조하신 것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복을 주셨고 또한 식물도 함께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를 마치시면서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고 하셨습니다. 또한 그것들을 식물로 함께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1:31)
(2)
요한복음의 여섯째 날은 복음 증거로 인한 영혼구원으로 예수께서 베푸는 세례를 말씀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복음증거로 인한 영혼
구원의 실례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베푸는 세례에 동참하심으로 인하여 세례요한은 이러한 광경에 대하여 말할 수 없는 기쁨이라고 했
고, 또한 이러한 사실을 신부를 취하는 신랑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요 3:29). 그리고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세례요한)
쇠하여야 하리라( 요3:30)”라고 말합니다. 이에 앞서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거듭남은 하나님의 형상의 근본적
회복(시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태초의 일곱째 날
(1) 하나님께서 태초의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하사 안식하셨습니다(창 2:3)
이
안식은 창세기와 출애굽기에서는 창조와 연관되어 말씀하지만, 신명기에서는 구원과 연관되어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날에 안식 하셨음이라.”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 5:15)”
(2)
마태복음에서는 안식의 주인이신 예수님께 오는 자에게 주시는 것이 안식이지만(마 11:28). 요한복음에서 안식은 그분 안에 거하는
것이며, 거룩함 속에 생명으로 역사하는 안식입니다. 안식의 개념은 주님이 내 안에 들어오심으로 내 속사람이 안식을 누리는
축복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라고 촉구하십니다(요 15:4)”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실 때, 우리 속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기쁨과 평안을 누리는 심령 천국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에 속한 안식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께서는 베데스다의 38 년 된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심으로 안식일에 그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이런 일을 행하는 것을 비난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안식의 새로운 의미도 말씀하신 것입니다.
9장에서도 안식일에 맹인을 고치시면서,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말씀하시고 그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9:5). 안식일이 우리에게 이런 진정한 자유를
준다면, 예수께서는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요 8:31-32).
(3) 창세기와 요한복음에서 각각 “다 이루었다”고 하십니다.
창세기
2장 1절은 천지 창조의 역사의 이루심을 말씀하고 있으며, 요한복음 19장 30절은 십자가에서 구원의 사역이 다 이루어진 것을
말씀 하고 있습니다. 천지 만물이 “다 이루니라”(창 2:1)와 예수께서 “다 이루었다”(요 19:30)는 말씀은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 이루시기 위하여 아버지의 품속에 계셨던(1:18) 말씀, 만물을
창조하신 그 말씀(1:3)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1:14).
창세기의
창조는 구속사 안에서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여지를 남겨 놓고 있습니다. 첫째 날은 밤이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여지를 남겨 놓으며, 둘째 날은 저주의 물이 없어지고 하나님께 가는 하늘을 막는 휘장이 찢어지는 여지를 남겨 놓으며, 셋째 날에 뭍이 드러나고
있습니 다. 이것은 모두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어떻게 향하는지를 보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참 빛이신 예수께서 오셔서 말씀하시고
행하심으로 이루 신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나와 내 영적 생활에 실제적 사건을 창조적 사건에서 다루고 있다면, 요한복음은 내 안에 천지 창조의
실제 적 사건을 이루시려고 우리 안에 오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한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천지 창조를 하신 후에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내 모든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을 암시합니다.
창조의 사건은
실제 십자가의 사건과 부활과 승천 그리고 영원한 안식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의 첫 순서입니다. 이런 창조의 사건들이 우리
가운데 일어나는 실제적이며 영적인 사건임을 보여주는 것이 요한복음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속사의 관점을 가지고 요한복음 첫 부분부터 가장 깊은 진리를 기록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생명을 얻되 풍성한 생명을 얻도록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거하는
삶을 삽시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한 것이 믿어지는 것이 하나님 백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태초 이전에도
계셨고, 만물을 창조하시고 타락한 우리를 구속하사 하나님 영원한 나라에 살게 하시되,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우리 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오셔서 모든 것을 이루셨습니다. 이를 믿고 그 영생을 얻되 풍성한 생명으로 살게 하시려고 요한복음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요한복음을 읽으며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만남으로 풍성한 생명을 누리며 살 수 있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마무리 합니다(1:1, 15:39)
15:39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물론 마가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것으로 마칩니다(16:19-20).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하나님의 아들(1:1, 3:11, 5:7, 15:39) 휘우 데우
바티칸 사본과 같은 대부분의 사본들에는 이 문구가 삽입되어 있으나, 시내 사본에는 생략되어
있다. 이런 사본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문구가 기재되어야만 했던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 많은 사본들이 이를 분명히
확증하고 있다. 2. 헬라어 원문에서 볼 때 바로 앞에 나오는 두 단어 곧 '예수 그리스도'(예수 크리스투)와 같은 어미를
가지고 있는 까닭에 시내 사본 필사자가 본의 아니게 본 문구를 빠뜨리고 기록했을 가능성이 크다. 3. '하나님의 아들'은
마가복음의 주요 주제로 등장한다(1:11; 3:11; 5:7; 9:7; 12:6; 13:32; 14:36, 61; 15:39).
테일러(Taylor)는 이와 관련해서 언급하기를 '분명히 이 칭호는 마가의 기독론에서 가장 근본적 요소가 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The Gospel According to St.Mark, p. 120). 실로 이 칭호는 본서의 서두와 마지막
부분(15:39)을 장식하는 대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한편 '하나님의 아들'이란 마가가 구약 신학적 배경과 당시 로마 문화적
배경을 절묘하게 융합(融合)시킨 표현으로서 이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두 관점에서 동시적으로 고찰해야 한다.
먼저 구약에서
이 용어는, 보통 명사로서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천사적 존재(창 6:1-4; 욥 1:6; 2:1) 또는 선택된 백성 전체(신
14:1; 렘 3:19; 호 1:10; 11:1)를 가리켰으나, 고유 명사로 사용되었을 경우에는 유일한 메시야의 칭호로서 예수께서
섬삼위 중 제 2위 되심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었다(삼하 7:14; 시 2:7).
한편 로마인들은 위대한 인간이나 영웅을 보통
인간과는 다른 신의 아들이라고 간주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용어는 아직 유일신 메시야 사상이 정립되지 않은 이방인들에게 일단 무리
없이 예수를 소개할 수 있는 이중적 용어였다.
예수 그리스도 / 에수 크리스투
본문에 제시된 '예수 그리스도'를 목적격으로 이해하는 학자도 있으나(Lenski)
오히려
주격으로 보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으로 해석하는 편이 더욱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마가가 의도하는 바는 수신자들인 로마
성도들이 익히 알고 있고 또 체험했던 그 복음의 근원이 바로 예수의 생애와 관련된 사건들에 있다는 것을 선포하고자 했던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본 복음서 곳곳에는 그들이 복음의 역사적 근원에 대해 무심(無心)했다는 사실이 은연중에 나타나고 있다.
여하튼 위의 사실의 결론으로 본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임을 확증할 수 있다.
여기서 '예수'는 히브리어로
'여호수아', '예수아' 등의 헬라식 이름으로서 '야웨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다(마 1:1). 이 이름은
예수의 사명의 요체(要諦)를 밝히며 인성(人性)을 강조하는 명칭으로서 예수께서 태어나시기 전 천사가 마리아에게 일러준 것이다(눅
1:31).
'그리스도'(크리스토스)란 '기름붓다'는 뜻의 동사 '크리오'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기름부음
받은 자'를 뜻한다. 그리고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쉬아흐'에서 '메시야'가 연유되었다(요 4:25). 이는 분명 직접적
호칭이 아니라 그리스도적 성격을 지닌 그분의 거룩한 직임(職任)을 강조한 것이며, 통상적으로 예수의 메시야성 및 그분의
신성(神性)을 나타내는 예수의 또 하나의 이름으로 불려지게 되었다(마 1:1).
복음 '복음'(유앙겔리온)이란 원래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을 의미했으나, 점차 '좋은 소식' 그 자체를 뜻하게 되었다.
특히 신약에서는 이 말이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의 삶과 죽음 및 부활을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마가는 바로 이 복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새로운 문학 양식, 즉 '복음'이란 유형을 창안한 것이다. 따라서 마가가 쓴 복음서의 주 내용이 '케뤼그마'(선포)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에 대해 혹자는 마가의 저술이 그리스도의 복된 소식을 선포라는 바로
그 복음을 내용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복음서(a Gospel)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Moul,Gospel of
Mark,p.8). 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및 부활의 사실은 복음의 근본이요, '시작'이 되며, 마가의 이 복된 메시지
속에 사도적인 선교가 지속됨을 시사하고 있다(Donald W.Burdick).
시작이라 헬라어 원문에서는 원래 이 말이 마가복음 제일 첫 말로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앞에서도 언급 했다시피 마가는 70인역(LXX)의 서론적 문구인 창 1:1의 '태초에'(엔 아르케)를 염두에
두고 '시작' 곧 '아르케'란 말을 본서 기록의 시발점으로 삼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새 역사의 시작 곧 복음의
시작을 알리는 팡파르로 삼고 있다.
특히 여기 '시작'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르케'에는 관사가 없으나 영역(英譯) 성경에는
관사 'the'(즉 the beginning)가 첨가되어 있어 이 '시작'이란 말에 대한 의미의 비중을 한층 부각시켜 주고 있다.
또한 본 구절의 '시작'이라는 말은 창 1:1과 요 1:1의 '태초에'란 말과 비교해 볼 때, 우리는 우주를 창조한 바로 그분이
인간 구원의 역사도 수행해 나가고 계심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우주 역사의 시작에 동참한 예수께서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새 시대를 시작하고 계신 것이다. 즉 '복음'이란 말과 이 '시작'이라는 말을 연결시킨 점에서 예수의 복음으로
말미암은 특별한 의미의 역사의 새로운 시작, 곧 단순한 시작의 전개가 아닌 영적 차원에서 완전히 새로운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신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암중(暗中)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5절.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자복하고(1843). 에코모로게오(ĕxŏmŏlŏgĕō) ἐξομολογέω
1. 약속하다, 2. 고백하다, 3. 인정하다 발음
/ 에코모로게오(ĕxŏmŏlŏgĕō) 어원 / 제1부정과거 ἐξωμολόγησα, 미래중간태 ἐξομολογήσομαι, 1537과 367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자복하다(마 3:6, 막 1:5, 행 19:18), 감사하다(마 11:25, 눅 10:21, 롬 15:9), 허락하다(눅 22:6), 자백하다(롬 14:11), 시인하다(빌 2:11, 계 3:5), 고백하다(약 5:16) 신약 성경 / 10회 사용
* 1537. 에크(ĕk) ἐκ
1. 모음 앞에서는 ἐξ, 2. 마태 2:15, 3. 요한 15:19 발음
/ 에크(ĕk) 관련 성경 / ~에서부터, ~에서부터 멀리, ~로 말 미암아, ~에게서 온(마 1:18) 신약 성경 / 916회 사용
기록되었으되(*, 게그랖타이 가르) - 이 다음에 나오는 인용문은 혼합형으로서 사 45:23과 49:18을 결합시킨
것이다. 바울은 기억에 의존하여 두 구절을 무의식적으로 혼합 인용했든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인용했을 것이다(Dunn). 아무튼 어느
방법이든 간에 구약성경의 권위있는 가르침을 인용하여 자기의 교훈을 뒷받침하는 것은 사도 바울의 글에서 종종 볼 수 있다. 이
인용문 역시 앞절(10절)에서 형제를 업신여기고 판단하는 이를 엄하게 책망하면서 결국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상기시킨 교훈에 대해 구약성경으로 인증(認證)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Hendriksen).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 조 에고, 레게이 퀴리오스) - 이 말은 선지서에서 자주 나타나는 관용구로서(민
14:28;사 49:18;렘 22:24, 46;겔 5:11;14:16;16:48;17:16;18:3;20:13), 반드시 성취될
중차대한 진리를 선언할 때 쓰는 표현이다. 이는 신약성경에서 주께서 중대한 말씀을 하시기 전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요 3:3, 5, 11;5:19, 24,25)라는 규칙적인 관용구를 사용했던 것과 흡사하다.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 이 구절은 70인역(LXX) 사 45:23의 문자적
인용이다. 다만 '여소몰로게세타이'(*, '자백하리라')와 '파사 글롯사'(*, '모든 혀')이 두 단어 순서가 뒤바뀌어 있을
뿐이다. 아무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준 이 예언의 말씀은(사 45:23) 여기서 구약성경의 원래의 의미 그대로 사용되었다. 즉, 한
분이신 지고(至高)한 하나님의 최종적 권위에 대항하는 자들은 모두 최후 심판시에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음을 무릎꿇고 인정할 것이다(사 45:21). 예컨대 남을 업신여기고 판단하는 행위는(10절)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신
심판의 영역을 침해한 것이다. 따라서 형제를 판단하는 일은 하나님의 권위에 반역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는 우상 숭배의 올무에 빠지는 행위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1:21-25). 그리고 '자백하다'(*, 여소몰로게오)라는
말은 통상적으로 70인역(LXX)에서 '인정하다', '자백하다', '찬양하다'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15:9;마 11:25;눅 10:21;Dunn). 이는 모든 사람이 최후에는 자기의 죄를 하나님께 숨김없이 자백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동시에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내용에 대해 모든 인류가 주께 찬양하며 경배하고 복종하게 됨을 나타낸다.
즉, 이 구절은 유대인들이 그렇게도 판단하는 이방인들의 회심(悔心)을 암시하면서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통치 행위인 구원과 심판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의 최종 목적이 자기들이 업신여기고 판단하는 이방인들까지 포함하고 있음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들의 회심이 이스라엘과 성경에 의해서 선포된 한 분 하나님께 대한 일종의
순종임을 상기시켜 주면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크신 구원 안에서 서로 받을 것을 촉구한 것이다. 아울러 사 45:23의
인용문이 빌 2:10, 11에서는 부활하시고 승귀(昇歸)하신 그리스도의 신분과 역할 속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자백'을
말할 때 사용된 반면 본절에서는 '하나님께 자백하리로다', 즉 하나님의 심판에 적용되어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볼 때 바울이
그리스도의 주권과 하나님의 궁극적 권위 사이에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려고 하는 자신의 통상적인 습관을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우리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 '죄'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마르티아스'(*)는 복수로 구체적이고도 상세한 '죄들'을 가리키며, '자백'은 구체적으로 죄를 깊이 생각하고 뉘우치며 진실하게
고백함으로 버리는 것을 가리킨다(시 32:1-5; 잠 28:13, Stott). 한편 '시하시며'의 헬라어 '아페'(*)는 빛의
탕감이나 '허물의 제거', '책임의 해제' 등과 같은 의미이며 '깨끗하게 하실'로 번역된 헬라어 '카다리세'(*)는 죄로 오염된
상태를 정화 시키는 것을 나타낸다. 이러한 묘사는 사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이며, 사죄의 권한이 하나님께 있음을
암시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통해 은혜로 죄를 사하여 주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구별되고 빛 가운데 사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신다(Stott, Smalley).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 본문은 하나님께서 죄를 자백한 자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근거를 나타낸다. '미쁘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토스'(*)는 약속을 잘 지키시는 '신설함'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죄사함을 약속하셨으며(렘 32:34; 미
7:19, 20) 그 약속을 충실히 이행하시는 신설한 분이다(시 89편; 롬 3:25; 고전 10:13; 딤후 2:13; 히
10:23; 11:11). 그러므로 미쁘신 당신의 성품대로 죄를 사하시겠다는 약속을 철저하게 지카셔서 죄를 자백한 자들을
용서하신다. 한편 '의로우사'로 번역된 헬라어 '디카이오스'(*)에 대한 견해는 네 가지이다. (1) 혹자는 십자가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tott, Ross). (2) 혹자는 언약 혹은 약속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ooke). (3) 혹자는 하나님의
본성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Dodd). (4) 혹자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통치와 지배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ultmann).
이러한 네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하나님은 자신의 의로움에 근거하여 고백한 죄인들을 사죄하신다(Barker).
복음(福音, 유앙게리온. ĕuanggĕliŏn. εὐαγγέλιον)이란 기쁜 소식(good news)이란 뜻입니다. 전쟁 중에 있었던 두 나라 사이에서 가장 기쁜 소식은 전쟁에 이겼다는 승전보(勝戰譜)라고 합니다.
마라톤의 유래가 이러한 승전보에서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기원전 490년 아테네와 페르시아의 전투에서 아테네의 밀리티아테스(Militiades)장군이 페르시아군을 격파했습니다. 이 승전보를 전하기 위해 필립피데스(Philppides)가 넓은 벌판(마라톤 평원)에서 아테네까지 36.75Km를 달렸다고 합니다. 승전보의 기쁜 소식을 전한 후 필립피데스는 쓰러져 죽었으나 그를 기념하여 시작한 것이 마라톤의 기원입니다.
성경에서 복음이란 죄를 지은 사람이 반드시 죽어야 할 때에 그 사람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말합니다. 따라서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겠습니다.
마가복음 1장에서 복음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5절)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둘째는 예수를 전하는 것입니다(7절)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셋째는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9-10절)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발음
/ 유앙게리온(ĕuanggĕliŏn) 어원 / 2095와 3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복음(마 4:23, 막 16:15, 롬 1:1) 신약 성경 / 76회 사용
* 2095. 유(ĕu) εὖ
1. 잘, 2. 좋게, 3. εὖ ποιεῖν : 좋게 행하다
발음
/ 유(ĕu) 관련 성경 / 잘, 좋게, 다행히(마 25:21, 눅 19:17, 행 15:29, 엡 6:3) 신약 성경 / 6회 사용
* 32. 앙게로스(anggĕlŏs) ἄγγελος, ου, ὁ
1. 사자, 2. 사람이 보낸 사신, 3. 하나님이 보낸 사자 : 메시아의 예고자
발음
/ 앙게로스(anggĕlŏs) 어원 / ‘소식을 가져 오다’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사자(使者)(마 1:20, 행 5:19, 약 2:25), 천사(마 13:39, 히 1:4, 계 1:1) 신약 성경 / 176회 사용
(도입 이야기) 마라톤의 유래
기원전 490년 그리스 마라톤 근처의 전쟁터에서 페르시아와의 전투에서 그리스의 승전보를 알리려 아테네까지 달려간 병사 페이디피데스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 바로 마라톤대회이다. 이 역사적인 달리기를 끝내고 페이디피데스는 쓰러져 죽었고 그가 달린 거리는 마라톤의 선례가 되었다.
1896년 그리스에서 올림픽경기가 시작되었을 때, 페이디피데스의 전설은 아테네의 마라톤교(橋)에서 올림픽 스타디움까지 40km(24.85마일) 달리기로 부활되었다.
마라톤은 전통적으로 올림픽의 마지막 경기종목으로 자리잡았는데 처음 조직된 1896년 4월 10일의 올림픽에서 그리스인에게 마라톤은 매우 중요한 경기였다.
첫 올림픽을 주최한 그리스는 그때까지 메달을 따지 못했으며 조국에 승리의 영광을 안겨줄 마지막 단 하나의 희망만
남아있었다. 마라톤교에는 25명의 주자들이 모였다. 운영관은 몇마디를 중얼거린 후 출발을 알리는 총을 쏘았고 레이스는 시작되었다.
"새단장을 한 고대 파나덴 스타디움의 골인지점에서 기다리는 관중의 흥분은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고 그리스의 사학자 퀘르세타니는
적고있다.
그리스 마루시마을의 집배원이자 군의장대 출신인 스피리돈 루이스(Spiridon Louis)가 2위그룹보다 7분빠른
기록으로 골인했다. 그의 기록은 2시간 58분 50초였다. 40km거리였으므로 마일당 7:11의 페이스로 달린 것이다. 경기가 모두 끝났을 때 9명의 주자가 골인했는데 그중 명이 그리스인이었다. 주최국은 열광했고 마라톤은 이렇게 태어나게 된 것이다.
마라톤의 기원과 역사
기원전 490년 아테네 VS 페르시아
아테네 동북쪽에 위치한 들판에서 아테네의 밀리티아테스(Militiades)장군이 페르시아군을 격파하였다. 이 승전보를 전하기 위해 필립피데스(Philppides)가 넓은 벌판(마라톤 평원)에서 아테네까지 달리기 시작하였다. 필립피데스의 달리기가 지금의 마라톤의 기원이다.
필립피데스가 실제 뛴 거리는 36.75Km 그렇다면 마라톤의 현재 거리는 어떻게 정해졌을까? 필립피데스가 40Km를 달린 걸로 알고 있지만, 정확한 거리는 36.75 Km입니다. 그 후 1896년 아테네에서 근대올림픽 제1회 대회가 열렸을 때 프랑스의 언어학자 미셸 브레알(Michel Breal)이 이러한 이야기에서 착안, 올림픽종목에 마라톤을 넣자고 주장하여 육상의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습니다. 그러나 올림픽 개최지의 형편에 따라 경주거리가 40 Km를 전후로 하여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왜 마가복음을 공부하는가?
마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역, 죽음, 부활을 속도감 있게 서술하며,
대체로 구주의 권능 있는 행적에 초점을 맞춘다. 그런 행적 중 으뜸은 속죄이며, 마가는 오랫동안 약속되어 왔던 메시야로서의
예수님의 핵심 사명인 속죄를 강조했다.
누가 마가복음을 썼는가?
복음서의 저자는 마가(또한 요한 마가라고도 불림)이다. 마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최초 제자들에는 속해 있지 않았으나, 나중에 개종하여 사도 베드로의 조력자가 되었으며, 베드로에게서 배운 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했을 것이다.
마가와 그의 모친 마리아는 예루살렘에서 살았으며, 그들의 집은 일부 초기 기독교인들이 모이는 장소였다.(사도행전 12:12 ) 마가는 첫 선교 여행을 떠나는 바나바와 사울(바울)을 돕기 위해 예루살렘을 떠났다.(사도행전 12:25; 13:4~6, 42~48 ) 이후에 바울은 마가가 로마에서 자신과 함께 있었다고 기록했으며(골로새서 4:10; 빌레몬서 1:24 참조), 마가를 성역 “일에 유익[한]”(디모데후서 4:11) 동반자로 칭찬했다. 베드로는 그를 “내 아들 마가”(베드로전서 5:13)로 언급함으로써 두 사람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시사했다.
마가복음은 언제, 어디에서 쓰였는가?
마가복음이 정확히 언제 쓰였는지는 알 수 없다. 마가는 주후 64년과 주후 70년 사이에 로마에서 이 복음서를 썼을 가능성이 있으며, 아마도 사도 베드로가 주후 64년경에 순교당하고 얼마 되지 않은 때였을 것이다.
마가복음은 누구를 위해, 왜 쓰였는가?
마가복음에는 아람어 인용문의 번역본, 라틴어 표현, 유대인의 관습에 대한
설명 등이 자세히 실려 있는 점으로 보아, 주로 로마인과 그 외 이방 국가 출신의 사람들, 그리고 대부분 로마와 로마제국 전체에
걸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로 구성된 독자를 대상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로마제국 전체에 걸쳐 여러 지역에서 교회의 다수
회원들이 신앙의 시련을 극심하게 겪던 시기에 마가가 베드로와 함께 로마에 있었던 것으로 믿는 이들이 많다.
마가복음 중 삼분의 일은 구주께서 생애의 마지막 주 동안 전하신 가르침과
그 기간의 사건들을 다룬다. 마가는 수난을 겪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결국에는 악과 죄, 죽음을 이기셨음을 증거했다. 이 증거는
구주를 따르는 사람들이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의미했다. 따라서 그들은 박해나 시련, 또는 심지어 죽음에 처했을 때에도 구주를
따랐다. 그들은 주님께서 자신들을 도와주실 것이며 그분이 하신 약속은 결국 성취될 것임을 알았기에, 자신 있게 견뎌 낼 수
있었다.
마가복음에는 어떤 뚜렷한 특징이 있는가?
마가복음은 갑작스럽고도 극적으로 전개되며, 사건들의 진행 속도를 빠르게 이어간다. 마가는 곧, 즉시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여 빠른 속도와 행동을 느낄 수 있게 했다.
마가복음의 내용 중 90퍼센트 이상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도 나오는 것이지만, 마가의 기록에는 종종 더 자세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서, 구주께서 보이신 연민과 그분의 주변 사람들이 보인 반응을 더 깊이 느낄 수가 있다.(마가복음 9장 14~27절을 마태복음 17장 14~18절과 비교해 본다)
예를 들어, 마가는 구주께서 성역 초기에 갈릴리와 그 밖의 지역에서 널리 열렬한 환대를 받으셨다고 언급했다.(마가복음 1:32~33, 45; 2:2; 3:7~9; 4:1 참조) 마가는 또한 조심스럽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부정적인 반응도 기록했는데, 그들의 반대는 회의적인 생각에서부터(마가복음 2:6~7 참조) 예수님을 파멸시키려는 음모에 이르기까지(마가복음 3:6 참조) 급속도로 커져 갔다.
마가복음에서 다룬 중요한 주제 중에는 예수님이 누구이며, 누가 그분의 신분을 이해했는지에 대한 질문뿐만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마가복음 8:34) 하는 제자의 본분도 포함된다. 또한 스스로 자라나는 씨의 비유(마가복음 4:26~27 참조), 데가볼리 지방에서 귀 먹은 사람을 고치신 일(마가복음 7:31~37 참조), 벳새다에서 맹인을 고치신 일(마가복음 8:22~26 참조)은 마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다.
개요
마가복음 1~4장 예수께서 침례 요한에게서 침례를 받으시고 나서, 복음을 전하며 제자들을 부르고, 기적을 행하는 일을 시작하시다. 그분이 자신에 대한 반대가 늘어나자 비유로 가르치시다.
마가복음 5~7장 구주께서 계속해서 많은 기적을 행하시며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보이시다. 침례 요한이 죽임을 당한 후, 예수께서 5천 명 이상을 먹이시고 물 위를 걸으시다. 예수께서 거짓 전통에 반하는 가르침을 주시다.
마가복음 8~10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속해서 기적을 행하시다. 베드로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간증하다. 구주께서 자신이 고통과 죽음 및 부활을 겪게
된다고 세 차례 예언하시지만, 제자들은 그분이 의미하는 바를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다. 그분이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겸손과
봉사에 관해 가르치시다.
마가복음 11~16장 구주께서는 생애의 마지막 주에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고,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겟세마네에서 고통을 겪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The beginning of the gospel about Jesus Christ, the Son of God.
복음이란 무엇인가?
복음(福音)이란 복된 소리를 말합니다. 복된 소리는 문제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해결책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배가 고픈 사람에게는 먹을 것을 넉넉하게 제공하는 것이지요. 몸이 아픈 사람에게는 아픈 부분을 치료할 수 있는 비법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먹을 것을 많이 제공해도 사람은 하루 세 끼를 계속 먹어야 합니다. 아픈 부위도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부위가 고통에 시달립니다. 그러나 사람의 영혼의 질병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복음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 중의 하나는 복음입니다. 그런데 복음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마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예수님일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그럼 비복음적이라고 한다면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님을 안
믿는다는 말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비복음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복음적인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다르거나 신자로서 그릇된 처신을 하는 것을 뜻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것들을 행하는
신자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빌 1:27)고
권면하였습니다.
복음은
정의하기 나름입니다. 좁은 의미로 ‘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하신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넓은
의미로 ‘복음은 예수님이 죄인들을 구출하기 위해 행하신 일과 그에 대한 죄인들의 올바른 반응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정의는 이해에 도움을 줄 수도 있고 혼란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주어야 할까요? 예수님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고 하셨고, 사도 바울은 빌립보 간수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행 16:31)고 하였습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마가복음 1장1절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바울도 “그리스도의 복음”(갈
1:7; 빌 1:27)이라고 불렀습니다.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16:15)는 명령은 예수님을 전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님과 복음은 한 묶음으로 제시되었습니다. 천사가 전한 “큰 기쁨의 좋은 소식”(눅 2:10)은 곧 그리스도의
탄생이었습니다(눅 2:11). 복음과 예수님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고후 11:4). 복음을 믿으라는 말이나
예수님을 믿으라는 말은 동전의 안팎과 같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을 받느냐고 물으면 복음의 정의에 따라 그렇다고도 할 수 있고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단순히 ‘주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정의했다면 ‘예스’ 대답이 나오고, 복음의 정의를 ‘예수를 믿는 것+예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라고 했다면 ‘노’가 될 것입니다. 전자는 그리스도만 믿으면 구원이라는 대답이고, 후자는 믿음+행위라야 구원이라는
대답입니다. 이 두 갈래의 엇갈린 주장들은 지금도 신학계와 교회에서 큰 논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복음의 의미를 바르게 알 수 있을까요? 가장 좋은 방법은 정의에 붙잡히지 말고 성경 본문 자체에서 해답을 얻는
것입니다. 정의는 신학자들이 내립니다. 그들은 나름대로의 신학 체계를 새워놓고 그 틀 안에서 성경의 개념을 정의합니다. 문제는
신학자들에 따라 정의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도움도 주지만 혼란도 일으킵니다. 우리는 학자의 소명을 받지 않은 이상
그들처럼 전문적인 많은 연구를 한 후에 비로소 어떤 결론에 이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일반 성도의 입장에서 성경 본문 자체를
공부하여 성경의 가르침을 하나씩 깨달아 가는 것이 좋습니다. 성경 본문을 내 앞에 놓고 상식적인 방식으로 읽어나가면서 조금씩
깨닫도록 힘쓰십시오. 상식적인 방식이란 문장을 대할 때 문맥이나 단어의 뜻이나 혹은 역사적 배경이나 주제나 중심 교훈이나 저자의
의도나 관련 구절 등을 살피는 것입니다. 이런 일에 전문적 지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필요하면 참고 서적이나 쉽게 쓴 좋은
강해서를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읽는 성경이 내게 가장 은혜로워야 합니다. 이제 로마서 1장에서 복음을
어떻게 진술했는지를 살피겠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6-17).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복음이 좋은 소식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복음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고 믿었기에 복음을 위해 목숨도 걸었습니다. 그는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복음 선교에 일생을 바쳤습니다. 그가 로마로 가려고 한
것도 오로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가 복음을 그처럼 귀하게 여긴 까닭이 무엇입니까?
첫째,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줍니다.
복음은
사람 차별을 하지 않습니다. “모든 믿는 자”라고 했습니다. 국경과 인종과 문화와 신분과 성별과 나이가 전혀 문제 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주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입니다. 사도요한은 믿으면 곧 영생(구원)이라는 말을 반복하여 강조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5)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
세상에
이처럼 공평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자’라고 하였고 ‘믿음에서 믿음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은혜 구원’이라고 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믿음만
있으면 선한 행위가 없어도 천국 간다는 식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선행은 타종교에서도 권장합니다. 물론 신자에게는 ‘복음에
합당한 삶’(빌 1:27)이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첫 구원에 관한 한, 유일한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주로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둘째,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인간은
타락한 존재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일어났던 아담과 하와의 타락을 믿지 않더라도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합니다.
또한 세상에서 인간을 죄로부터 구출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도 부정하지 못합니다. 이 세상은 죄의 세상입니다.
죄인들이 사는 곳이기 때문에 날마다 온갖 죄악이 범람합니다. 죄의 역사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복음으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런 능력은 하나님만 가지고 계십니다. 복음은 인간을
죄로부터 구출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주 예수를 믿는 자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자신의 체험으로 압니다.
바울이
로마로 가려고 작정한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 당시 로마는 거대한 제국의 수도였지만 오늘날의 대도시처럼 온갖 종류의 부패와
죄악이 넘치는 곳이었습니다. 인간은 한편으로는 높은 수준의 문화를 일으키는 매우 탁월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죄를
떠나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합니다. 직접 간접으로 죄에 물들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우주선을 타고 이 세상을 벗어난다고 하여도 죄를
안고 떠납니다. 인간 자신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본인은
우주선을 발사하는 플로리다의 Kennedy Space Center 지역에 삽니다. 집에서도 하늘로 치솟는 로켓을 자주
목격합니다. 그런데 지구의 궤도를 벗어났다 돌아오는 우주비행사들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죄인으로 떠났다가 다시
죄인으로 돌아옵니다.
바울은
로마 제국의 수도가 아무리 발달했어도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복음이라고 믿었습니다. 문화가 인간을 바꾸지 못합니다. 복음만이
인간을 변화시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인간의 구원을 위해 복음을 품고 로마로 향하였습니다. 우리도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고 믿는다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전할 것입니다.
셋째, 불의한 죄인에게는 하나님의 의가 필요합니다.
인간이
불순종으로 타락했을 때 두 가지 현상이 발생하였습니다. 하나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의 생명으로부터
단절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기다리는 것은 죽음입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하나님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소외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틀어져서
하나님의 생명을 누릴 수 없는 시한부 인생이 된 것입니다. 인간의 운명은 날마다 죽음을 안고 사는 불치병 환자와 같습니다. 인간은
날마다 자신의 관을 끌고 다닙니다. 그럼 살길이 없을까요?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할 수 있느니라” (마 19:27).
인간의
허무한 운명을 하나님은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 편에서 해야 할 일이지만 불가능한 일을 하나님께서 다 행하시고 믿으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복음, 곧 기쁜 소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죄가 없는 완전한 의로움입니다. 그런데 나는
스스로 완전한 의에 이를 수 없습니다. 나는 이미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자기 힘으로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일단 지은
죄는 용서받는 길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스스로 용서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인간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시 51:4).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럼
그 방법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어 모든 인간의 죄를 지고 대신 형벌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달렸던 십자가는 대속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치렀어야 할 죗값을 지불하시고 죄인들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이제 주 예수를 자신의 대속주로 믿으면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게 됩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의 완전한 의가 우리에게 입혀집니다. 그 순간부터 에덴동산의 삶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과 교제가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가지셨던 원래의 선한 뜻이 성취되게 합니다.
즉, 새 하늘과 새 땅의 안식으로 연결되는 새 창조의 삶입니다.
넷째,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됩니다.
♠ 복음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증언합니다. 죄인들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희생되었기 때문입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요일 3:1).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죄인들은 살고, 죄 없는 예수님은 죽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5:21).
하나님의 의는 죄 없는 예수님을 통해서 죄인들을 구원하는 십자가 사랑입니다.
♠ 복음은 예수님에게 인간의 죄를 씌워 죽게 하였듯이, 죄인에게는 예수님의 완전한 의를 씌워 마치 죄인이 죄 없는 자로 여겨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서 나타났다고 하였습니다.
♠ 복음은 죄인이 하나님의 의를 얻기 위해서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고 말합니다.
“일을
아니 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고 하시는”(롬 4:5) 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인간의 가치로 보면 이것은 오히려
불의한 일입니다. 일한 것이 없는데도 일한 것으로 간주하여 품삯을 지불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손해를 보는 편은
하나님입니다. 아들을 희생시키고 죄인을 풀어주는 것은 하나님의 놀랍고 기이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공의 개념으로
판단할 수 없는 차원의 사랑에서 연유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을 믿으면
예수님의 의가 나의 것이 됩니다. 이것이 죄인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근거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나는 예수님의 완전한
의로 덮여서 하나님의 눈에 전혀 죄가 없는 의로운 자로 보입니다. 이 일에 어떤 인간도 자신의 경건이나 선행을 내세울 수
없습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 구원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도록 계획되었습니다(엡 2:9; 고전 1:31). 그렇다면
우리도 바울처럼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롬 1:16, 표준새번역)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최근에 복음주의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지를 놓고서 많은 논의가 있어 왔다. 우리가 복음을 죄인들이 회개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메시지로 이해하든, 아니면 더 넓은 의미로 이해하든, 어쨌든 그런 논의가 진행되어 왔다. 때로는 두 진영
간에 의견이 대립되는 양상을 보였다. 한편에서는 상대 진영이 복음에 대해 “환원주의적임”을 지적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상대 진영이
복음을 희석시키며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간과하게 한다며 반격했다.
나는 우리가 몇 가지 사항을 주의 깊게 고찰함으로써 이 같은 혼란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다고 본다. 나는 이들 두 진영이—복음이란 하나님이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 죄인들을 자신과 화목하게
하신다는 좋은 소식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들을 “A”라 부르자)과 복음이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온 세상을 새롭게 하며
개조하실 거라고 하는 좋은 소식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들을 “B”라 부르자)이- 각기 상대방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말하고
있다고 본다. 달리 말해서, 나는 A와 B가 같은 물음에 대답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두 진영 모두가 자신들이
“복음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답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주의를 기울여 보면, 우리는 그들이 실제로는 두 개의 서로 다르되
동일하게 성경적인 물음들에 대답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두 가지 물음들은 이러하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달리 말해서,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해 믿어야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복음이란 무엇인가? 달리 말해서, 기독교의 좋은 소식 전체는 무엇인가?
A가 “복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을 때, 그들은 “사람이
구원 얻기 위해 믿어야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라는 뜻으로 이해하며, 죄인들을 대신하신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회개하고
믿으라는 부르심 등에 대해 말함으로써 이에 대답한다.
B가 “복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을 때, 그들은 “기독교의 좋은 소식 전체는 무엇인가?”라는 뜻으로 이해하며,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새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 말함으로써 이에 대답한다.
이들 양측이 왜 서로 긴장상태에 있는지를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새 창조에 대해 말함으로써 물음 (1)에 대답하면, A는 그 대답이 너무 광범위하기 때문에 십자가를 중심에서 밀쳐내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성경 속에서 어떤 사람이 “내가 구원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물었다면, 그 대답은 장차 오는
새 창조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였을 것이다.
하지만 때때로(심지어 종종) 성경은 새 창조라는 측면에서 ‘복음’에
대해 말하기도 한다. 따라서 죄인들을 대신하신 그리스도의 죽음만을 말함으로써 물음 (2)에 대답하는 것은, 그리고 다른 모든
것은 복음이 아니라고(단지 연관된 것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편협하다. 그것은 몸의 부활, 유대인과 이방인의 화해,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다른 많은 것들이 성경에서 제시하는 기독교의 “좋은 소식”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셈이다.
우리는 이들 두 가지 물음 중의 어느 것도 그릇되지 않음을, 그리고
이들 중 어느 것도 다른 것보다 더 성경적이지 않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성경은 이들 두 가지 모두에 대해 묻고 대답한다.
여기서 나는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물음들 모두가 적법하며 성경적인 이유를 성경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
성경은 ‘복음’이라는 말을 두 가지 서로 다른, 그러나 밀접하게
연관된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때로는 매우 넓은 의미로, 즉 죄 사함은 물론이고 죄 사함으로 인해 비롯되는 다른 모든
것들을(하나님 나라의 확립, 새 하늘과 새 땅 등을 포함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성취하시려는 모든 약속들) 묘사하기 위해
사용한다. 그런가 하면, ‘복음’을 매우 좁은 의미로, 즉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그분의 부활을 통한 죄 사함을 특별히 묘사하기 위해 사용하기도 한다. 그런 경우에는, 더 넓은 의미의 약속들은 그다지 고려되지 않는 것 같다.
다음은 성경에서 ‘복음’이라는 말을 좁은 의미로 사용한 사례들이다.
1. 사도행전 10장 36-43절: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베드로는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화평의 복음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는 복음을 특별히 가리킨다.
2. 로마서 1장 16-17절: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바울은 믿음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의와 ‘구원’이라는 측면에서
복음을 규정한다. 여기서 바울이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는 죄 사함(칭의)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이 로마서 전반에 걸쳐
분명해진다. 로마서에서 그의 초점은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 맞춰진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 나라의 일원이 되는가에 맞춰져 있으며,
바울은 그것을 ‘복음’이라 부른다.
3. 고린도전서 1장 17-18절: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바울이 보내심을 받아 전하는 복음은 “십자가의 도”이다.
4. 고린도전서 15장 1-5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마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고린도 교인들에게 바울이 전한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다. 다시 살아나신 예수께서 거듭하여 나타나신
것이 ‘복음’의 일부로 간주되어선 안 된다. 우리가 베드로에게, 열두 제자에게, 그리고 야고보에게 예수께서 나타나신 것을 전하지
않으면 복음을 말하지 않은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언급들은 부활이 실제적이며 역사적인 사건임을 확언하기 위한 것이다.
‘복음’이라는 말이 넓은 의미로 사용된 경우는 다음과 같다:
1. 마태복음 4장 23절: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이는 마태복음 기사에서 ‘복음’이라는 말이 처음 언급된 것이며,
따라서 여기서 우리는 이 용어의 의미와 관련한 윤곽을 엿볼 수 있다. 예수께서 전하신 “천국 복음”의 내용을 보완하려면 “천국”을
처음 언급한 17절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거기서, 예수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설교하셨다.
예수님이 전하신 천국 복음은 a) 천국이 다가왔고 b) 회개하는 자들이 거기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메시지였다.
2. 마가복음 1장 14-15절: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니라.”
첫 구절을 제외하면, 마가복음 기사에서 ‘복음’이라는 말이 여기서 처음 사용된다. 예수께서 선언하신 “하나님의 복음”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였다.
하나님의 복음은 a) 하나님의 나라가 다가왔고 b) 회개하고 믿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메시지이다.
3. 누가복음 4장 18절: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이것은 예수께서 공적 사역의 출발점으로 삼으신 구약성경 구절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여기서 ‘복음'(복된 소식)이라는 말은 이사야 61장에서 사용된 것처럼 하나님 나라 통치의 온건한 확립을 가리킨다.
4. 사도행전 13장 32-33절: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38절에서는 바울이 전한 복음이 “이 사람”을 통해서 얻는 죄
사함임을 분명히 밝힌다. 그러나 32-33절에서 ‘복음’은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루게 하신 약속이다. 조상들에게 주셨고 예수님 안에서 성취된 하나님의 약속은 죄 사함을 포함하되 이것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이처럼 신약성경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복음’이라는 말이 넓은
의미로도 사용되고 보다 좁은 의미로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넓게는 마태복음 4장, 마가복음 1장, 누가복음 4장, 사도행전
13장에서처럼,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약속들을 가리킨다. 죄 사함은 물론이고, 부활, 하나님과의 화목과 다른
사람들과의 화목, 성화, 영화,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 새 하늘과 새 땅 등에 대한 약속을 포함한다. 이 경우에, ‘복음’은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을 통해 보장되는 하나님의 복합적인 약속들 전체를 가리킨다. 우리는 이 넓은 의미에서의 복음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라 부를 수 있다. 좁은 의미에서는, 사도행전 10장, 로마서 전체, 고린도전서 1장과 15장에서 보듯이, ‘복음’이란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과 그분의 부활 그리고 회개하고 그분을 믿으라고 하는 초청을 특별히 가리킨다. 우리는 이 좁은 의미에서의
복음을 십자가의 복음이라 부를 수 있다.
이제 다른 두 가지 사실들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첫째,
‘복음’이라는 말의 넓은 의미는 좁은 의미를 당연히 포함한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사례를 보라.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는
달리,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선언하기만 하신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선언하시고, 거기 들어가는 방편도
선언하신다. 자세히 보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만 선언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라고 선언하셨다. 이것은 복음과 비복음 간의 결정적인 차이이다. 하나님 나라와 새 창조의 시작을 선포하되, 거기에 들어가는 방법, 즉 회개, 그리스도와 그분의 대속적 죽음을 믿음으로써 죄 사함 받는 것 등에 대해서는 선언하지 않으면, 이것은 비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사실,
그것은 나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새 창조에 속하게 될 소망을 전혀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천국 복음은 단지
천국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다. 천국 선언과 아울러 회개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거기 들어갈 수 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둘째, 신약성경이 그리스도를 통한 죄 사함에 관한 좁은 의미의
메시지를 ‘복음’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만일 그리스도를 통한 죄 사함만을 전하고 세상을 새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전하지 않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게 아니다”라는 식의 주장은 옳지 않다. 바울과 베드로 둘 다, 만일
그들이 예수님의 대속적 죽으심을 통한 죄 사함에 대해 전했다면 ‘복음’을 전했음을 기꺼이 인정했을 것이다.
만일 신약성경이 ‘복음’이라는 말을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 둘 다로
사용한다면, 우리는 이들 둘 간의-천국 복음과 십자가 복음 간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것이 그 다음 물음이며,
일단 우리가 그 물음에 답하면, 몇 가지 참으로 중요한 물음들에 대한 더 분명한 답을 찾기가 쉬워질 것이다.
그러면 천국 복음과 십자가 복음은 어떻게 연결될까? 천국 복음이 필수적으로 십자가 복음을 포함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언급했다. 하지만 보다 구체적으로,
십자가 복음이 단지 천국 복음의 일부인가, 아니면 그 이상인가? 전자는 후자의 핵심인가, 아니면 주변적인 것인가, 그 중심인가,
아니면 다른 그 무엇인가? 신약성경 기자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한 죄 사함이라는 특정한 약속에 ‘복음’이라는 말을
적용하는 반면에 넓은 의미의 복음에 포함되는 다른 약속들에는 ‘복음’이라는 말을 적용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들이 서로
화목할 수 있게 된 것이 내 복음이다”라는 바울의 말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십자가 복음이 천국 복음의 단순한 일부가 아님을 깨달음으로써 이
물음들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히려 십자가 복음은 천국 복음의 문이며 원천이며 씨앗이다. 신약성경 전체를
읽어보라. 그러면 당신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한 죄 사함을 받지 않고서는 천국의 각종 축복들을 받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 그 분명한 메시지임을 곧바로 알게 된다. 그것은 다른 모든 샘들의 원천이다.
성경 기자들이 전체 패키지(용서, 칭의, 부활, 새 창조 등)를
‘복음’이라 부르면서 그 원천적인 메시지도 ‘복음’이라 부르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넓은 의미의 복음의 축복들이 좁은 의미의
축복들(속죄, 용서, 믿음, 회개)을 통해서만 얻어지기 때문에, 그리고 전자가 후자를 통해 반드시 얻어지기 때문에 신약성경
기자들이 문/씨앗/원천이 되는 약속을 ‘복음’이라 부르는 것은 너무나 적절하다.
또한 신약성경에서 그 원천 약속을 ‘복음’이라 부르고 넓은 의미의
다른 개별적 축복들을 ‘복음’이라 부르지 않는 것도 너무나 적절하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들 간의 화해를 ‘복음’이라 부르지
않는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서도 ‘복음’이라 부르지 않는다. 하지만 속죄를 통한 용서를 ‘복음’이라 부르는 것은 그것이 다른
모든 축복의 원천이며 문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도출되는 몇 가지 중요한 사항들이 있다.
첫째, ‘복음’이 천국을 선언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옳지 않다. 복음은 천국 선언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천국과 아울러 거기 들어가는 방법까지 선언하는 것이다.
둘째, 십자가 복음이 복음이 아니라거나 복음보다 못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물음이 “구원받기 위해 믿어야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가?”라는 것인 한, 십자가 복음은 복음이다.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 바울과 베드로도 그렇게 말한다.¹⁾
셋째, 천국 복음이 복음의 덤 또는 복음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 또한 옳지 않다. 물음이 “기독교의 좋은 소식 전체가 무엇인가?”라는 것인 한, 천국 복음은 복음의 덤이 아니라 복음이다.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시고 바울과 베드로도 그렇게 말한다.
넷째, 어떤 사람이 단지 선한 일을 하고 “예수님의 본보기를
따른다”고 해서 그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그리스도인이려면, 천국의 축복에 참여하는 사람이려면, 먼저 문을
통과해야 한다. 문이란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가고 죄 사함을 받는 것이다. 천로역정에서 번연은 크리스천이 천상의 도성으로 가는
길에 만난 형식주의자와 위선자의 특성에 대해 말한다. 잠시 대화를 나눈 후에, 크리스천은 그들이 좁은 문을 통과하지 않고 벽을
넘어 길로 나섰음을 알게 된다. 결론은, 현재 이들이 아무리 잘 나아가더라도 이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며
천국 삶을 산다고 자처하는 자라도 회개와 죄 사함에 대한 믿음으로 예수께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다. 어떤 사람이 외관상 예수님처럼 살 수도 있지만, 속죄와 믿음과 회개의 좁은 문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는 벽을 넘었을 뿐이다.
다섯째, 비그리스도인들이 “천국 사역”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나는 믿는다. 사람들 간의 화해나 정의를 위해 일하는 비그리스도인은 선한 일을 하고 있지만, 그것이 천국 사역은
아니다. 왜냐하면 천국의 왕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는 C.S. 루이스가 틀렸다. 타쉬(Tash)의
이름으로 선한 일을 하고서 아슬란이 행복해할 거라고 기대할 순 없다.
여섯째, 그리스도인 개인이 행하는 것이든 교회가 행하는 것이든,
모든 선량한 사역의 궁극적 목표는 세상 사람들에게 좁은 문을 가리키는 것이어야 한다. 이 사실을 올바로 이해하면 강력한 선교
동기를 얻게 되며 세상에 대한 증인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게 된다. 예컨대, 당신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발소를 쇄신할 경우에,
당신은 이발소 주인에게 이런 식으로 말할 필요가 있다. “내가 이렇게 하는 건 아름다움과 질서와 평화와 같은 것들에 관심을 지니신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경이 말하고 내가 믿는 바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이 세상을 재창조하시고 페인트가
벗겨지거나 나무들이 죽지 않는 나라를 세우실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장님은 거기 속하지 못하실 것 같습니다. 죄
때문입니다. 사장님이 회개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한 그러합니다.” 그런 다음에 당신은 그에게 십자가 복음을 알려주어야
한다. 만일 당신이 이발소를 쇄신하고서 다가오는 천국을 선언한다면, 복음 선언에 미치지 못한다. 천국 복음은 천국과 거기 들어가는
방법을 함께 선언하는 것이다.
일곱째, 앞에서 설명했듯이, 소위 이머징 교회들은, 그들의 복음이
놀라운 것이라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복음에 관한 진정 놀라운 것을 완전히 놓치고 있다. 예수님이 왕이시며 사랑과 긍휼의 나라를
도래하게 하셨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소식이 아니다. 모든 유대인들도 언젠가 그런 일이 일어날 것임을 알고 있다. 복음의 정말
놀라운 사실은 메시아 왕께서 그분의 백성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다. 다니엘서의 인자, 다윗의 후손인 메시아, 그리고 이사야서의
고난 받는 종이 동일인으로 밝혀지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천국 복음과 십자가 복음이 결합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단순한 왕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왕이시다. 이머징 교회에서 제시하는 놀라운 복음은 전혀 놀라운 것이 아니다. 지겨운 것일 뿐이다.
여덟째, 지금까지 언급한 모든 내용은, 이 시대의 복음전도적,
선교적, 목회적 강조점이 십자가 복음(더 넓은 의미인 천국 복음의 문이요 원천인)에 놓여 있다는 결론으로 이끈다. 따라서 우리가
그것을 주목하게 하지 않는다면 나머지 모든 것은 나쁜 소식이며 도달할 수도 없는 것이 된다. 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이 최우선적으로 명하시는 말씀은 “회개하고 믿으라”이다. 실제로 복음(넓은 의미의 복음이든 좁은 의미의 복음이든)
자체 속에 포함된 유일한 명령은 “회개하고 믿으라”이다. 이것은 이 시대의 모든 이들에게 부여된 주요 의무이며, 따라서 우리의
설교에서도 주요 강조점이어야 한다.
1. 예수께서
그분의 기록된 말씀 중에서 ‘복음’이라는 말을 명시적으로 십자가 복음과 연결시키지는 않으셨지만, 그분은 매우 분명히 십자가
복음을 전하셨다(예, 막 10:45). 일반적인 측면에서 단어 연구는 유익하지만, 우리가 복음을 규정하고 성경 본문 속에서 복음에
대한 내용을 찾을 때 ‘복음’이라는 단어 자체에 너무 집착해선 안 된다. 그럴 경우에는, 요한은 복음에 대해 결코 말하지 않은
셈이 된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기록한 신약성경 책들에서 그 단어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순교자] 동정부부 유중철 요한(1779~1801)과 이순이 루갈다(1782~1802)
“순결한 사랑의 관계 속에서 이 두 고귀한 마음의 결합은 얼마나 행복하였던가!”
-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
이순이
루갈다는 1782년 한양의 유명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녀의 부친인 이윤하 마태오는 당대의
학자 이익의 외손으로, 처남인 권철신, 권일신 형제, 이승훈 등과 어울리다가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안에서 이순이의 모친도 자연스럽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는데, 어린 이순이는 일찍부터 모친에게서 글과
교리를 배웠습니다. 어려서부터 「효경」 등 경전을 배워 익힌 이순이는 학문과 지식이 탁월했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문필가 집안의
재능도 물려받아 그녀가 남긴 「옥중 편지」는 문장이 깊고 맑고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15세가
되던 1797년 어느 날, 이순이는 이미 오래전에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한 사실을 어머니에게 고백했습니다. 크게 놀란 어머니는
대견함과 현실적인 염려 사이에서 고민했습니다. 앞장서 삼강오륜을 지켜야 했던 양반 가문의 입장에서 보면 자식을 혼인시키지 않는
것은 일종의 패륜으로 여겨질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딸의 선택을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이라 생각한 어머니는 평소 언행이 갸륵하고
믿음이 깊었던 딸을 지지해 주었습니다. 어머니의 승낙이 떨어지자 이순이는 주문모 신부에게 동정생활을 결심하게 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주 신부는 이순이의 말을 듣는 순간 전주의 유중철을 떠올렸습니다. 2년 전 주 신부가 전주 유항검의
집에서 며칠 머무를 때, 유항검의 아들 중철이 아버지와 주 신부에게 동정생활을 하겠다는 결심을 밝혔기 때문입니다.
주
신부는 이들의 결심을 지켜 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주 신부 역시 조선 사회의 여론과 이목이 두렵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만약 멀쩡한 처녀 총각이 결혼하지 않는다면 ‘동정’에 관한 천주교 교리를 아는 사람들에게 당장 천주교 신자로 의심받기 십상이고,
결국에는 화가 닥칠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여러 궁리 끝에 주 신부는 두 사람이 동정을 지키며 살 수 있도록 아예 두 사람을
혼인시키는 것이 최상책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평소 유중철과 이순이의 신덕과 사람 됨됨이를 신뢰하였던 까닭에 부부로 맺어 주어도
오누이처럼 지내며 틀림없이 동정을 지켜 낼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입니다. 마침내 주 신부는 두 사람의 중매에 나섰습니다. 먼저
전주의 유항검에게 이순이를 소개하며 의향을 물었습니다. 유항검은 이순이의 집안을 잘 알고 있었기에 망설이지 않고 승낙했습니다.
이순이의 어머니도 흔쾌히 동의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의 혼인이 성사되었습니다.
동정부부 ② 유중철 요한(1779~1801) · 이순이 루갈다(1782~1802)
“어머님이 이 세상을 떠나실 때에는, 천하고 약한 자식인 제가 끝없는 행복의 화관을 머리에 쓰고 모든 천상 기쁨이 넘치는 마음으로 어머님의 손을 잡아 영원한 고향으로 모셔드리겠습니다.”
- 이순이 루갈다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
마침내
1797년 10월이순이의 집에서 혼례가 이루어졌습니다. 열아홉 살 유중철과 열여섯 살 이순이가, 겉으로는 부부지만 내막으로는
오누이처럼 살기로 약속하고 결혼식을 올린 것입니다. 당시 서류부가(?留婦家)라 하여 혼례를 올린 신부가 한동안 친정에 머무르던
풍습에 따라 이순이는 1년 동안 친정에 머물다가 이듬해 10월 전주의 시댁으로 내려갔습니다. 재회한 유중철과 이순이는 부모님 앞에
꿇어앉아 장엄하게 동정을 서약하고 오누이처럼 일생을 살기로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오누이로 지내며 동정을 지켜 살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의지가 약해지면 마음이 혼미해지고 본능적 욕구가 불쑥 치솟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마다 두 사람은 기도와
묵상을 통해 육신의 욕망을 극복해 갔습니다. 이들에게 일상은 매 순간이 자기 극복의 단련으로 이어지는 영신 수련의 삶이었습니다.
1801년
시작된 신유박해의 불길은 그 해 2월 이순이의 큰외삼촌인 권철신을 덮쳤고, 이 비보가 전주에 당도하기 무섭게 유항검이
체포되었습니다.
‘전라도 천주학의 괴수’라 소문난 유항검이고 보니 도무지 무사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유항검은 즉시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었고, 유관검과 유중철도 전주 감영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9월 17일, 유항검과 유관검은 전주 풍남문 밖,
지금의 전동 성당 터에서 능지처참 되었고 유중철은 큰칼을 쓴 채 무한정 옥에 갇혀 있게 되었습니다.
한편 유항검의 사형 판결
소식을 전해 들은 이순이와 가족들은 머지않아 닥칠 환난을 예감하며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칠 마음의 준비를 하였습니다.
9월
15일, 전주 감영의 포졸들이 몰려와 이순이와 가족들을 체포하였습니다. 이순이는 옥에 갇히면서도 지필묵을 챙겨 들었습니다. 언젠가
유항검 집안이 박해를 당하거든 박해의 상황을 소상히 기록해 두라는 주문모 신부의 분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9월 27일에는
옥졸들의 눈을 피해 어머니에게 유서와도 같은 편지를 써서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11월 14일, 옥졸이 옥에 갇힌 시동생 유문석을
불러냈습니다. 이순이가 그 까닭을 물었더니, 옥졸은 “관장의 명령이다. 유문석을 큰 옥으로 데려가서 제
형과 함께 가둘 것이다.”라고 답했습니다. 이순이는 유문석에게 “서로 잊지 맙시다!” 하고는, 가거든 형에게 같은 시간에 주님을
위해 목숨 바치기를 원한다는 말을 꼭 전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동정부부 ③ 유중철 요한(1779~1801) · 이순이 루갈다(1782~1802)
“나는 누이를 격려하고 권고하며 위로하오.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유문석이
떠나고 한 시간이 채 못 되어 유중철과 유문석 형제가 교수형을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유중철이 22세의 나이로 순교한
뒤, 옥중의 이순이는 그가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마침내 편지 한 장이 집에서
왔습니다. 그 편지에는 이러한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요한의 옷 안에서 자기 누이(아내 루갈다)에게 보내는 쪽지가 발견되었는데, 그
쪽지에는 ‘나는 누이를 격려하고 권고하며 위로하오.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뒤, 전주
관장은 이순이와 가족들에 대한 판결을 조정에 요청하였고, 조정에서는 곧바로 이를 담당할 관리를 전주에 파견했습니다. 그 결과
이순이를 비롯한 가족들은 유배형을 받았고, 이순이는 함경도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순이는 가족들을 대표하여 “우리들은 하느님을
공경하였으니 모두 국법대로 죽어야 마땅합니다.”하고 항의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간청에도 불구하고 이순이와 가족들은 결국
유배지를 향해 길을 나서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유배지로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전주에서
파견된 포졸들이 쫓아와 그들을 다시 체포하였습니다. ‘하마터면 치명의 큰 은혜를 받지 못하고 평생 죄인으로 살 뻔하지
않았는가!’라고 생각한 이순이는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다시 전주 감영에 당도한 이순이와 가족들은 서슬 퍼런 심문에도 다만 하느님을
공경하며 죽기를 원한다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이에 감사는 사형을 선고한 후 몽둥이로 정강이를 치고 칼을 씌워 옥에 가두었습니다.
전라 감사가 의금부에 장계를 올린 지 20일이 지나도록 이들을 처형하라는 기별이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이순이는 사형
집행을 기다리며 소일 삼아 친정 언니와 올케 등 다른 가족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순이는 편지에서 유배지의 관비가 되는
것보다 치명자가 되는 것이 가문의 영광이라며 “내가 죽는 것을 산 것으로 알고, 산 것을 죽은 것으로 알라”고 당부했습니다. 당시
순교자들은 ‘죽는 것이 사는 것’이라는 공통된 의식을 갖고 있었는데, 이는 ‘의(義)를 배반하고 사는 것은 천지의 죄인이라
살아도 죽은 것만 같지 않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사형 판결이 났습니다. 1802년 1월 31일, 이순이는
판결에 따라 가족들과 함께 숲정이라 불리는 전주의 형장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는데, 당시 그녀의 나이 스물이었습니다.
학생이 교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교수님, 사람이 죽는 준비를 하는 데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그거야 몇 분이면 되지”하고 교수가 대답했습니다. “천당 가는 준비를 하는데 얼마나 걸립니까?” “그것도 몇 분이면 되네. 예수님 곁의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는 잠깐 예수 믿고도 구원받지 않았나?” 그러자 젊은이는 “그렇다면 괜찮겠군요.” 하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저는 즐기다가 마지막에 가서 예수 믿으렵니다.” 그리고는 자리를 뜨는 것이었습니다. 교수는 학생을 불러 앉히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아, 내가 한 마디 묻겠네. 자네는 자네가 언제 죽을지 알고 있나?” “모르지요, 그야” “바로 그것이 문제 일세”
맑은 시냇물을 홀스타인종 젖소가 먹고 있고 건너편 언덕에선 살모사가 목을 축이고 있습니다. 같은 물을 마셨는데 잠시 후 그 물은 젖소에게서 우유가 되고 독사의 몸에서는 무서운 맹독으로 변합니다. 이 책임이 어찌 물에게 있다고 하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어떤이는 듣고 어찌할꼬하여 구원에 이르지만은 어떤이는 듣고 이를 갈더라 오히려 악해져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옥토와 같은 밭은 듣고 결실하여 100배의 열매를 거두어들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많은 선한 열매를 맺는 아름다운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천국 암호를 알고 있습니까?
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가 천국 문 앞에 서니, 한 천사가 그에게 암호를 대라고 했습니다. “나는 교회에 헌금을 많이 했습니다. 나는 도덕적으로 깨끗한 삶을 살았습니다. 어디에서나 나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천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가 물러가고, 외모가 훌륭한 다른 남자가 천국 문을 두드렸습니다. 천사가 암호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성직자로서 주님을 섬겼습니다.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의로운 일을 많이 했습니다. 유명한 기관들이 나에게 최고의 영예를 주었습니다.”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왕을 알지 못합니다.” 그 사람이 물러나자마자 할머니 한 분이 그 문에 이르렀습니다. 할머니는 허리가 구부정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의 두 눈은 반짝이고 있었고, 얼굴은 빛났습니다. 할머니는 손을 높이 들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피, 나의 대답은 오직 피라오. 할렐루야! 그 피가 나를 씻겨준다네!” 즉시 진주문이 열리고, 그 귀한 영혼이 천국으로 들어갈 때, 천국의 합창단이 할머니가 부르는 노래를 함께 불렀습니다. 우리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뿐입니다. 이것이 지금,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암호입니다.
발음
/ 에크세스티(ĕxĕsti) 관련 성경 / 옳다(마 12:10, 12, 막 12:14, 눅 6:9, 20:22), 가하다(고전 6:12), 합당하다(눅 14:3), 권한이 없다(요 18:31) 신약 성경 / 32회 사용
죄(266) 하마르티아(hamartia) ἁμαρτία, ίας, ἡ
1. 죄, 2. 고후11:7, 3. 요한 9:41
발음
/ 하마르티아(hamartia) 어원 / 26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죄(요 8:21, 롬 5:20), 불법(살후 2:3), 죄악(히 11:25) 신약 성경 / 173회 사용
* 264. ἁμαρτάνω
1. 하나님의 종교적 도덕적 법을 어기고 잘못하다. 2. 죄를 범하다
발음
/ 하마르타노(hamartanō) 어원 / [기본형] 미래 ἁμαρτήσω, 제2부정과거 μάρτω, 가정법 ἤμαρτον, 제1부정과거 ἡμάρτησα, 가정법 ἁμαρτή- σω, 과거분사 ἁμαρτήσας, 1[부정불변사]과 3313의 어간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죄를 범하다(마 18:15), 죄를 짓다(눅 15:18, 롬 6:15), 죄로 인하다(요 9:2), 범죄하다(롬 2:12), 죄가 있다(벧전 2:20) 신약 성경 / 43회 사용
인자가 땅에서...알게 하려 하노라 - 서기관들은 9절에서 예수께서 제시한
선택적 질문에 어느 한 쪽도 무책임하게 답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는 어느 쪽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타나는 말씀을 하실 수
있었다. 사실 예수께서는 먼저 인간적 측면에서가 아니라 신(神)의 관점에서 더 어려운 편, 곧 그들이 볼 수 없었던 죄 사함을
선택하셨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이제 모든 사람이 그가 실제로 죄를 사하는 권위와 능력을 소유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치유의 기적을 행하신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 심판의 날까지 기다리지 않고 지금 여기서 죄를 사하는 권리와
권능을 갖고 계실 뿐 아니라 그것을 행사하신다(Robertson).
인자(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 - 직역하면 '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로서 그리스도께서 즐겨 사용하신 자기 자신에 대한 메시야적 명칭이자 타인으로부터 쉽게 공격을 받지 않는 당신의
인성(人性)을 강조한 표현이다.
인자(호 휘오스 안드로푸) - 복음서에서는 이 용어가 90여회 나온다. 그 중 본서에만 26회 나올 만큼 인자 개념은 본서의 핵심 사상이다. 요한복음
12:34을 제외하고는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킬 때 사용하신 용어(6:5, 22;11:30;마 8:20;막 14:41;요
3:14)인 '인자'가 원문의 표현상 여자적(如字的) 의미로는 '사람의 아들'(son of man)이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스스로를 가리켜 '인자'라고 칭하신 데에는 다음과 같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1.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과 관계된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 3:13)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곧 그가 하나님이면서 인간의 몸을 입고 하늘로부터 지상으로 내려오신 것을 의미한다.
2. 이는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의미한다. 이것은
다니엘이 이상(異象)중에 본 '인자'가 장차 이 세상에 오실 메시야였던 점(단 7:13)에 의해서도 뒷받침되며 '네가
그리스도냐'는 대제사장들의 질문에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하신 예수의 대답(막 14:62)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3. 그러나 예수께서 인자로서의 종말론적 영광을 누리기 의하여서는 그 이전에 반드시 이 땅에서의 각종 수난과 죽임을 당하여야만 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었다(22:42).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정녕 열 두 영이나 더 되는 천사를 부릴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마 26:53) 시도 때도 없이 대적들로부터
당하는 각종 모욕과 수난을 감내해내셨는데(4:29; 11:53, 54; 20:20; 22:63-65; 23:11) 여기에
예수께서 자기를 가리켜 '인자'라 칭한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즉 '인자'란 인간으로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겸손한 예수의 모습(identity)은 물론,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의 거룩한 권위(authority)와도 관련되어 있다.
한편 이
용어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과 함께 마가가 즐겨 사용한 메시야 칭호이다. 그런데 이 호칭은 구약성경과
경외전(經外典)인 유대인들의 묵시 문학(黙示文學)에서 찾아볼 수 있는 용어로서, 특히 구약에서는 주로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시 8:4; 겔 2:1, 3, 6, 8; 단7:13, 14).
그리고 묵시 문학에서는 주로 여호와의 날 곧 종말에 천군
천사들을 대동하고 이 땅에 심판주로 임하실 메시야라는 뜻으로 전달되고 있다(Taylor, Grant). 그런데 마가복음에서
제시하는 바 이 '인자' 개념은 주로 심판주로서의 메시야란 의미와더불어 이 세상의 죄인을 지금 용납하시고 그 죄를 지금
사유(赦宥)하시는 하나님과 동등한 신분으로서의 메시야로 이해하고 있다(2:28; 14:62). 즉 그분은 심판의 시점까지 기다리시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당신의 직권(職權)으로 죄를 용서하시는 것이다(Robertson).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 이 구절의 첫 부분은 서기관들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보통 이해되고 있다. 그렇다면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라는 부분은 이제 서기관들이 아니라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삽입구가 된다. 그러면 여기서 말씀의 대상이 바뀌는 자연스럽지 못한 상황이 발생된다. 그러나 본문의 상황
설명이 옳은 것이라면, 예수께서는 아마도 어떤 몸의 동작 변화로 이야기의 대상을 바꾸었을 것이다. 한편 달리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본 사건의 종합적인 상황을 알고 있던 저자 마가가 상황의 급격스런 변화라는 어색한 표현 기법을 사용해서라도 독자들에게 본
사건의 전체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위와 같이 진술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위에서 말한 자연스럽지 못한 문제로 해결이
된다(Wessel).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서기관들의 태도에는 관심이 없었고 중풍병자에게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06-09-2023(목)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가복음 2장 / 죄를 사하는 권세(10절)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하노라. But that you may know that the Son of Man has authority on earth to forgive sins.
1-12 중풍병자의 치유.
13-17 세리 레위의 부르심과, 그 집에서의 식사의 자리에 있어서의 예수와 서기관들의 문답.
18-22 금식에 관한 문답과, 낡은 옷과 낡은 가죽 부대의 비유.
23-28 안식일에 관한 바리새인의 비난과 예수의 문답.
2:1, 가버나움 / 가버나움(Capernaum) : 위로의 촌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을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증명하면 이 문제는 해결 될 것입니다.
빛이 있으라! 하셨을 때 빛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 빛은 넷째 날 해와 달과 별의 빛과는 다른 빛을 말합니다.
하나님이란 히브리 단어가 복수형으로 우리말로 번역하면 "하나님들" 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히브리 문법은 특별한 복수명사로 모습은 복수이지만 단수형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하나님이라고 번역합니다. 하나님들이란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의 세 위를 말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고 선언하신 것이라면 중풍병자에게 네 죄를 사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당연히 하나님으로 명령할 수 있는 사죄의 선언이라고 하겠습니다.
또한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 마가복음 1장 1절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태초)"
요한복음 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요한일서 1: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요한일서 2: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사죄의 확신
이사야 38:17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창세기 서론
1. 표제
유대인들은
히브리어 성경의 첫 글자를 따서 창세기를 “브레시트”(bereshith,태초에)라고 부른다. 그러나 유대인의 탈무드에는 이 책을
“세계 창조의 책”이라고 하였다. “창세기”(創世記: Genesis)라는 이름은 70인역에서 번역한 것으로써, 헬라어
“게네시스”는 “기원” 또는 “근원”을 뜻하는 단어이다. 이것이 70인역에 처음으로 사용될 때, 그 의도는 그 책의 내용을
암시하기 위한 것이다. 부제로 자주 붙어다니는 “모세의 첫번째 책”이란 명칭은 히브리어 성경의 원본에 처음부터 붙어있던 것이
아니라, 여러 세기가 지난 뒤에 덧붙여진 것이다.
2. 저자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은 공히 출애굽 당시의 히브리인들의 위대한 입법자요, 지도자인 모세를 창세기의 저자로 간주해 왔다. 이러한 확신은
기독교 초기에 몇몇 이교적 반대자들에 의하여 약간의 도전을 받기는 하였으나, 18세기 중엽까지는 유대인이나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한
번도 심각하게 의심된 적이 없었다. 200여년 전부터 하나의 새로운 사조가 시작되어, 인간의 모든 사고 영역 가운데서 전통적인
신앙과 견해들은 일단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미지의 영역에서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고 발명해 냄으로써 이 세상의
생활의 방법을 많이 변경시켜 놓았다. 이와 같은 탐구 또는 취조(取調) 정신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비평적인 성질을 가진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의 기초로서의 성서의 확실성을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창세기는
근대에 있어서 비평적인 시험을 당한 첫 책이 되었으며 이러한 시험은 성경의 고등 비평 시대의 출발점이 되었다. 1753년에
프랑스의 궁중 의사 장 아스트뤼크(Jean Astruc)는‘추측’(推測)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는데, 거기서 그는 창세기에 나타나는
신격에 대한 각기 다른 이름들이 발견된 것을 지적하고, 이것은 창세기가 여러가지 자료들의 수집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아스트뤼크는 모세가 바로 그 자료들의 수집가요, 이 책의 편찬자라고 추측하였으나, 그의 후계자들은 이윽고 모세를 창세기의 편집자로
단정하였다.
비평적인 마음을 가진 신학자들은 창세기의 가정된 자료들을 각기 분리하고 그것들을 서로 다른 저자별로 분류하거나
적어도 그 자료들이 형성, 수집, 변화, 편집되어 마침내는 하나의 책으로 묶여졌을 것으로 추측되는 시기별로 자료들을 분류하기
위하여 근 200년 동안이나 애써 왔다.
이와 같은 비평적인 견해들을 추종하는 여러 학자들은 하나의 커다란 원칙에 있어서 의견
일치를 보았는데, 그것은 즉 이 책의 가치와 저자와 유래된 시기 등이 각각 다른 많은 문서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 자체 내에서도 어느 것이 어느 시기에 해당되는지에 대하여 광범위한 의견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엄청난 견해 차이는
비평적인 학자들의 가정(假定)의 기초가 얼마나 불확실하고 불건전한 것인지를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많은 비평적인 논쟁들의
거짓됨이 지난 100년간의 고고학적 발견들에 의하여 드러났다. 비평자들은 그들의 이론과 주장을 끊임없이 바꾸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의 다수는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창세기의 저자가 모세임을 아직도 부인하고 있다. 그들이 내세우는 이유들
중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각기 다른 이름 세 가지가 사용된 것은 이 책의 저자가 둘 이상임을 가리킨다.
특히 그 이름들이 각기 특정한 부분에
두드러지게 자주 사용된 것은 그 부분의 저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훼”(Yahweh) 곧 “여호와”(Jehovah)라는
이름이 사용되는 부분의 저자를 비평적인 학자들은 “야비스트”(Jahvist)라고 일컫고, “엘로힘”(Elohim) 곧
“하나님”이란 칭호가 주로 사용되는 부분의 저자를 “엘로히스트”(Elohist)라고 일컫는다.
그 외에도 창세기의 내용을 기록한
고대의 저자들 중에는 제사장 저자도 있었고, 또 그 모든 자료들을 편집한 편집자도 있었을 것이다.
2. 이 책에 포함된 이야기들이 여러 번 반복된 것은, 이미 존재하던 평행 자료들을 후대의 편집자가 한데 묶어 전체적인 하나의 이야기로 엮었으나, 근원이 다른 자료들을 사용한 사실을 숨기지 못한 결과이다.
3. 창세기의 이야기들 가운데 반영된 여건들은 시간적으로 그 당시와 부합하지 않고 오히려 휠씬 후기와 부합한다.
4. 지명(地名)을 사용함에 있어서, 초기에는 그렇게 불리우지 않은 지방들이 후기에 사용된 이름으로 일컬어졌다.
5. 고대 바벨론에 존재하던 창조, 홍수, 그리고 부조들의 생활에 관한 전설들이 성경 기록과 매우 흡사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현대
신학자들은 히브리인 저자들이 포로 기간 동안에 이러한 설화들을 바빌로니아인들에게서 빌어 와서 자기들이 믿는 일신론적인 형태로 새로
편집했다고 주장한다. 보수적인 그리스도인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써 이러한 견해들을 배격한다.
(1)
하나님, 주, 그리고 여호와 등의 성호(聖號)들은 히브리어 성경 전체를 통하여 별로 차별없이 사용되었으며, 비평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저자가 다른 사실을 나타내는 증거로 볼 수 없다. 70인역과 대부분의 고대 히브리어 성경 사본들, 그리고 근래에 발견된
이사야 두루마리 등에서는 어느 한 사본에 나타나는 “하나님”이란 칭호가 그 같은 구절의 다른 사본에서는 “주” 또는 “여호와”로
되어 있고, 또한 그 반대로 된 것도 찾아볼 수 있다.
(2)
설화들에 나타나는 반복은 그것이 바로 저자가 다른 여러 자료들을 사용한 증거라고는 할 수 없다. 모세의 책들의 통일성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허다한 성서 이외의 예증들로써 동일한 저자가 기록한 고대의 문학작품 및 심지어 현대의 작품들 중에서도 유사한 반복들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3)
고대의 역사와 여건들에 관한 지식이 점차로 증가함에 따라서 창세기의 저자가 그 당시의 형편에 대하여 정통한 정보를 갖고
있었으며, 따라서 부조들의 생활에 관한 서술은 그들의 시대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사실이 계속 드러나고 있다.
(4) 지명들은 경우에 따라서 독자들의 이해를 위하여 복사자(複寫者)들에 의하여 후대의 이름으로 대치되어 왔다.
(5)
바빌로니아인들이 히브리인들의 기록과 어느 정도 흡사한 전설들을 가졌다는 사실이 바로 한 민족이 다른 민족에게서 빌어왔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그 두 기록들에 대한 공통적인 근원이 있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따라서 창세기의 영감된 기록은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완전하고도 순수한 형태의 것이요, 바빌로니아인의 기록들은 동일한 사건들을 저열한 이교적인 배경 속에서
이야기한 것이다.
고등 비평가들이 그들의 이론을 내세우기 위하여 주장하는 것들을 구태여 논박하려고 대항할 필요는 없으나, 모세가 창세기의 저자임을 믿을 수 있는 증거를 포착하는 일은 퍽 중요하다.
출애굽기의
저자가 창세기의 저자였음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오경(五經)의 둘째 책은 첫째 책의 연속이요, 동일한 정신과 의도가 아주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출애굽기의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 책을 “모세의 책”(막 12:26)이라고 일컬으셨을 때에 분명하게
확증되었으므로, 그에 선행하는 책인 창세기 또한 모세의 기록인 것은 명백하다. 애굽인의 단어와 표현들의 사용, 그리고 요셉의
역사에 나타난 애굽인의 생활과 관습에 정통함 등은 모세가 받은 교육 및 경험과 조화를 이룬다. 창세기가 모세의 저술이라는 증거가
오경의 나머지 책들이 가진 증거보다는 덜 명백하고 덜 직접적이긴 하지만, 모세 오경에 시종 공통적인 언어의 독특성들과 신약의
증언은 다름아닌 모세가 성령의 영감하에 이 책을 기록했음을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세기로부터 몇 구절을 인용하신 사실은 그분이 그 책을 성서의 일부로 간주하신 분명한 증거가 된다. 창 1:27;
2:24을 인용하시면서 예수께서는 “(너희가) 읽지 못하였느냐”라는 공식적인 언사를 사용하셨다(마 19:4, 5).이것은 여기에
인용한 구절들이 여전히 구속력과 타당성을 가지는 진리를 내포하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예: 이혼에 관한 바리새인들의 질문과
예수의 대답(막 10:2-9; 창 1:27; 2:24).
다른 여러 경우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창세기에만 묘사된 사건들을 언급하심으로써 친히 이 책을 하나의 정확한 역사적인 기록으로 간주하셨음을 보여 주셨다(눅 17:26-29; 요 8:37 등).
또한 사도들의 기록들 가운데 발견되는 수많은 창세기의 인용구들은 사도들이 모세를 그 책의 저자로 확신한 사실과 그 책이 영감으로 기록된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롬 4:17; 갈 3:8; 4:30; 히 4:4; 약 2:23).
이러한 증거에 비춰볼 때, 그리스도인은 모세가 창세기의 저자임을 마음놓고 믿어도 좋다.
3. 역사적 배경
창세기는
B.C. 1500년경, 히브리인들이 아직도 애굽의 속박하에 있던 동안에 기록되었다. 이 책에는 실로 많은 세기들에 뻗쳐 통하는
세계 역사의 소묘(素描: sketch)가 포함되어 있다. 창세기의 초반은 우리가 역사에 관하여 상례적으로 생각하는 그러한 역사적인
배경 속에 넣어질 수가 없다. 우리는 모세가 기록한 것 이외에 홍수 이전의 세계의 역사를 아무것도 갖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화석들의 묵묵(默默)하고도 때때로 모호한 증언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고고학적인 기록들을 갖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홍수 이후에는 경우가 다르다. 고고학자들의 발굴은 창세기의 후반이 차지하는 기간 동안의 사람들과 그들의 관습과 정부의 형태 등에
관한 많은 기록들을 밝혀 내었다. 예컨대, 아브라함의 시대는 이제 상당히 잘 알 수 있게 되었으며, 이스라엘의 속박 기간 동안의
애굽의 역사는 비교적 정확하게 재구성될 수 있다. 이 시대 동안, 즉 아브라함으로부터 출애굽까지의 시대에는 고등한 문명이
만개(滿開)해 있었으며 특히 메소포타미아의 계곡과 나일 강의 제방 연변에는 더욱 그러했다. 북방에서는 헷 족속이 세력을 얻고
있었으며, 팔레스틴에는 군소(群小) 왕들의 지도하에 호전적인 민족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전반적인 관습은 이 모든 민족들의 암흑한
이교주의를 반영하고 있었다.
창세기의
부조들과 하부 및 상부 메소포타미아의 셈 족속들 사이에는 강한 인종적인 유대(紐帶)가 잠재해 있었다. 싯딤 골짜기에서의 왕들의
싸움(14장), 평지에 있는 도성들의 멸망(18, 19장), 그리고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대기근을 겪는 동안 애굽의 백성들을
보존한 일(41장)과 같은 초기의 큼직한 사건들 가운데서 부조들이 감당한 역할들이 소상하게 묘사되어 있다. 창세기의 인물들은
목자와 전사(戰士)로, 도회지 거주자와 광야의 유목민으로, 정치가와 망명객 등으로 나타난다. 그들의 경험을 기록한 이야기들은 그
책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아득한 고대의 열강(列强)들과 특히 히브리인들이 이따금씩 접촉하던 군소 백성들의 형편이 어떠했는지를
느끼게 한다.
애굽과
메소포타미아에 일어났던 위대한 문명들에 관해서는 창세기에 기록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 대한 증거는 부조들의 경험 가운데서
강하게 느낄 수가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정치적 혹은 사회적 진공 상태에 있는 화려한 격리 지대에 살지 않았다. 그들은 열국이
어울려 있는 사회의 부분이었으며, 그들의 문명과 문화 역시 주위의 다른 백성들의 그것과 크게 다른 것이 없었다. 다른 것이라고는
종교의 차이뿐이었다. 그들은 여호와의 진정한 경배자들 가운데서 남아 있는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었으며, 따라서 영감을 받은 저자
모세가 염두에 두고 있는 세계의 중심부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명백한 관찰과 인식은 자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유도하게
된다. 모세가 이 책을 기록한 주된 목적은 무엇이었던가?
4. 주제
창세기의
주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충성스런 작은 무리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취급하시는지에
관한 서술이요, 둘째는 하나님을 떠나서 그분의 교훈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빠진 타락의 심연을 묘사한 것이다. 창세기는 인간에게
허락된 최초의 영원한 계시이며, 신령한 기록이다.
이
책은 또한 교의적(敎義的)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는 이 세계와 그 안에 있는 삼라만상의 창조, 죄가 들어온 경로,
그리고 하나님의 구속의 허락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인간이 자유스러운 도덕적 존재요, 자유 의지의 소유자임을 가르쳐 주고,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것이 인간의 모든 재화(災禍)의 근원임을 가르쳐 준다. 또한 이 책에는 휴식과 예배의 날로서의 거룩한
안식일(安息日)을 준수해야 할 것과 결혼의 신성성과 가정 제도의 수립, 그리고 순종에 대한 보상과 범죄에 대한 형벌 등에 관한
교훈들이 주어져 있다.
이
책은 흥미있는 문체로 기록되어 있어서 젊은이들의 상상력에 호소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 속에 담긴 숭고한 도덕적인 주제들은
성인들을 위해서도 정신적 양식이 되며, 만인을 위한 교훈이 된다. 그리스도인이면 어느 누구도 그것의 연구를 게을리할 수 없고,
하나님의 자녀이면 누구나 그 속에서 광채를 발하는 모범적인 인물들을 본받아야 하는 책, 그 책이 바로 창세기이다.
5. 개요
Ⅰ. 천지 창조로부터 아브라함에 이르기까지 1:1-11:26
1. 천지 창조 1:1-2:25
(1) 창조의 6일간 1:1-31
(2) 안식일을 제정함 2:1-3
(3) 인간의 창조와 에덴 동산에 관한 세부적 설명 2:4-25
2. 타락의 역사와 그에 따른 결과 3:1-5:32
(1) 유혹과 타락 3:1-8
(2) 에덴에서 추방당함 3:9-24
(3) 가인과 아벨 4:1-15
(4) 가인의 후예들 4:16-24
(5) 아담으로부터 노아에 이르기까지 4:25-5:32
3. 대홍수 6:1-9:17
(1) 대홍수 이전의 타락상 6:1-13
(2) 방주 건조 6:14-22
(3) 홍수에 관한 이야기 7:1-8:14
(4) 노아의 언약 8:15-9:17
4. 노아로부터 아브라함에 이르기까지 9:18-11:26
(1) 노아의 아들들의 운명 9:18-29
(2) 국가 목록 10:1-32
(3) 바벨에서의 언어 혼란 11:1-9
(4) 셈으로부터 아브라함에 이르기까지의 세대 11:10-26
Ⅱ. 부조 아브라함과 이삭 11:27-26:35
1. 아브람 11:27-16:16
(1) 소명과 가나안으로의 여행 11:27-12:9
(2) 애굽에서의 경험 12:10-20
(3) 롯과의 이별 13:1-18
(4) 롯을 구출하고 멜기세덱을 만남 14:1-24
(5) 하나님과의 언약 15:1-21
(6) 하갈과의 결혼, 이스마엘의 출생 16:1-16
2. 아브라함 17:1-25:18
(1) 언약의 갱신, 아브라함이 할례를 시작함 17:1-27
(2) 아브라함과 천사들, 소돔과 인접도시들의 멸망 18:1-19:38
(3) 그랄에서의 체험, 이삭의 출생, 이스마엘 축출 20:1-21:34
(4) 아브라함의 극심한 시험 22:1-24
(5) 사라의 죽음과 장례 23:1-20
(6) 이삭이 리브가와 결혼함 24:1-67
(7) 아브라함의 후예들 25:1-18
3. 이삭 25:19-26:35
(1) 이삭의 아들들 25:19-34
(2) 이삭과 그랄의 아비멜렉 26:1-35
Ⅲ. 부조 야곱 27:1-36:43
1. 찬탈자 야곱 27:1-31:55
(1) 야곱이 속임수로 축복을 받음 27:1-46
(2) 야곱의 도망과 벧엘에서의 이상 28:1-22
(3) 야곱이 자기 아내들을 위하여 봉사함, 가족을 형성함 29:1-30:43
(4) 야곱이 라반으로부터 도망함 31:1-55
2. 이스라엘, 하나님과 겨루어 이김 32:1-36:43
(1) 야곱이 가나안으로 돌아옴, 브니엘의 체험 32:1-33:20
(2) 세겜에서의 수치, 가족 문제 34:1-35:29
(3) 에서의 후예들 36:1-43
Ⅳ. 구원자 요셉 37:1-50:26
1. 요셉과 그의 형제들 37:1-36
2. 유다의 타락 38:1-30
3. 요셉이 원칙 위에 굳게 섬 39:1-40:23
4. 요셉이 애굽을 구원함 41:1-57
5. 요셉과 그의 형제들 42:1-45:28
6. 야곱이 애굽으로 감 46:1-47:31
7. 야곱의 축복 48:1-49:33
8. 야곱과 요셉의 죽음 50:1-26
예수님의 보혈로 천국에 들어간다!
히브리서 9:12, 베드로전서 1:18-19
십자가의 피로 구속받아 천국에 입성한다.
히브리서 9:1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느니라.
베드로전서 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 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우리들이 교회다니면서 예수님을 믿으면 과연 우리들이 천국에 갈 수 있는가? 당연한 말을 질문한다면 별걸 다 물어보는구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여야 우리가 천국에 가서 영생할 수 있는가이다. 신앙새활은 여기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위의 말씀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이 우리죄를 사하여 정결하게 하여서 우리들이 새로운 피조물인 성도가 되었으니 하늘나라에서 영생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여주는 말씀입니다. 구약시대부터 인간이 죄를 범하면 양이나 염소나 송아지의 피로 죄씻음 받아 죄를 용서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죄를 용서받는 상징적인 방법이었다. 한마디로 피흘림이 없이는 더러운 죄에서 사함받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어서 천국에 간다면 천국에서 어떻게 생활 하는가를 요한계시록에서 보여주고 있다.
밧모 섬에 추방된 사도 요한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요한을 환상속에서 천국으로 데려갔을때 요한이 천국 본 광경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보좌에 둘러 서서 하나님의 어린양을 찬양하는 구속받은 무리를 보게 하셨습니다. 구속받은 성도들이 하늘나라에서 불렀던 노래의 주제는 한 마디로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신 주님의 보혈에 대한 구속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 4: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가 들은 바 나팔 소리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5:9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께서 죽임을 당하시고 주의 피로 모든 족속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가운데서 우리를 구속하사 하나님께 드리셨으며.
하늘나라에
있는 성도들이 우리 주님을 찬양할 주제가 많지만 가장 중요한 찬양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구속하셨다는 것입니다 구속이란
죄사함인데 이 찬양은 일찍이 십자가에서 못박혀 흘리신 그 보혈로 우리들을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었다는 찬양인 것입니다.
하늘나라로 올라간 성도들의 찬양의 주제는 자신들이 천국에서 수고 근심 걱정 사망없는 것에 대해 감사의 찬양을 드리고 있지만 이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통해 구속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천국에 올라간 모든 성도들께서는 자신들이 어떻게 구속을 받았는지 알게 되는데 그들은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구속을 받았다고 외칩니다. 천국의 보좌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주님의 보혈에 대한 감격적인 찬양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나라 성도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의 피로 구속을 받았다는 감격이 찬양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좀더 유추해 본다면 하나님의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을 받지 않은 사람은 결코 하늘에 있는 의의 문을 지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인해 구속을 받지 않은 사람은 결코 새 예루살렘의 진주 문을 지나다니지 못할 것입니다. 천국의 생명수 강물을 마실 수 없을 것입니다.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 먹지 못할 것입니다. 천국의 황금 길을 걸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물론 영광의 보좌에 가까이 갈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
보좌주위에는 찬양하는 모든 성도들 중에는 짐승의 피의 제사를 드림으로 천국에 온 사람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삶으로 천국에 도달한 사람도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
가운데 침례를 받고 기도를 하고 성모 마리아를 부르고 십자가를 붙들고 교회에서 성찬식을 하고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고 교황의
반지에 입을 맞추고 묵주의 구슬을 꿰고 성상들 앞에 무릎을 꿇고 길 거리 가난한 노인을 도와주는 것으로 인하여 천국에 온 사람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린양의 피로 구속을 받지 않은 한 어느 누구도 천국에 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배 주제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인한 구속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은 구속의 필요성과
주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구속의 충분성과 주님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은 구속의 진리를 살펴보겠습니다.
1.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에 의한 구속의 필요성
모든 사람은 반드시 구속받을 필요가 있는데 여기에는 세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기 때문 2. 죄가 우리를 구속하고 있기 때문 3. 지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
우리가 구속을 받아야 할 필요성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구속(redemption)이란 단어의 의미를 정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속을 받는다’는 의미를 사전에는 이렇게 정의되어 있습니다.
1 되사다 또는 회복시키다(to buy back, recover)
2 몸값을 지불하다(to ransom)
3 속죄하다 혹은 죄에서 구해내다(to atone for, deliver from sin)
왜 모든 사람들이 구속을 받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좀더 깊이 알아봐야 하겠습니다.
1.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십계명에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을 믿지 말것이며 어떠한 형상을 만들어 절하지 말 것, 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 것, 안식일을 기억할 것, 부모를 공경할 것, 살인 하지 말 것, 간음하지 말 것, 도둑질 하지 말 것,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말고 그리고 다른 사람의 소유를 탐내지 말 것 이라고 요약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지켜야 하는데 실제로 우리는
이 율법을 범하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지었다고 합니다. 어느 누구도 율법의 잣대에서 죄를 짓이 않았다고 자유로울 수 없으니 모든
인류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은 우리들이 죄인이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것을 봅시다.
(시편 14:2-3) 주께서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그들이 다 치우쳐서 다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도다
(로마서 3 :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이사야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길을 잃고 각각 자기 길로 갔거늘 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리고 유법을 범한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고 백성들에게 물었으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앞에서 율법을 범하면 당연히 벌을 받겠다는 대답을 약속했다.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할 것이요 온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신27:26)
바울도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동일한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행하지 않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니라(갈3:10)
인간이 하나님과 약속한 대로 저주를 받아야 하는데 물론 에덴동산에서 쫓겨날때부터 땀흘려 일을 해야 하고 해산의 고통을 당해야 하고 마지막은 사망의 저주를 받는 것이 율법을 범한 인간이 받아야하는 저주이다.
저주당한
인간이 율법의 구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우리는 정결하신 하나님께서 보실 때 다 그 분의
율법을 위반한 사람으로 마땅이 죽어야 할 죄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필사적으로 우리가 범한 죄를 속죄 받아야 우리가 저주를
피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구속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다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속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죽어야 하는 저주를 받을 수 있는 분은 사람이시면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인류 대신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저주 받으셨는가? 예수님이
곧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인데 이는 우리를 대신하여 예수님이 저주를 받으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나도록 자신이 십자가 형벌을 받아야만 하고 동시에 율법을 십자가에 못박으심으로써
우리를 향한 정죄를 율법적으로 온전히 제거하셨다는 것입니다.
(갈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속(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리는 모든 자는 저주받은 자라 하였느니라
(골2:13-14) 13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 모든 죄를 사하시고 14 우리를 거스리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셨으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율법의 저주에서 저와 여러분을 구속하셨기 때문에 율법이 더 이상 당신을 정죄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3:23-24) 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구속(속량)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느니라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할렐루야
구속은 특정한 교회나가는 것이나 사제앞에서 고해성사를 하는 것에나 선행에 있지 않습니다. 구속은 오직 한 곳 즉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에만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위에서 피를 흘리고 죽지 않았다면 죄사함의 구속은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골로새서1장 14절은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죄 사함을 얻었도다 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죄사함 받은 사람을 고후5:17 새로운 창조물 이라고 하고 또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1:12) 그분을 받아들인 자들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제부터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은 다 구속 받은 사람입니다. 당신은 그분의 십자가의 피로 인해 율법의 저주에서 구속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언젠가 하늘의 보좌에 서서 ‘주께서 주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사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라고 예수님께 노래할
것입니다. 이제 모든 사람들이 구속받아야 할 둘째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2) 죄가 우리를 결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 죄에 묶이지 않았던 분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시되 죄는 없으신 분이십니다(히4:15). 이 분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본래부터 죄인이며 스스로 원해서 다 죄에 묶여 있으며
죄에서 구속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통해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요8:32-36)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33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니라
이 말씀을 통해 죄의 종인 우리는 죄에서 자유롭게 되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죄는 우리를
결박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죄에 포로되어 죄의 노예로 팔린 것입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는데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사실입니다. (롬7: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우리는 죄의 노예로 있는데 그대로 있으면 사망을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즉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완료되면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구출되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의 속박 가운데서 죽는다면 둘째 사망인 불 못에서 영원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계20:14, 21:8).
그러나 우리는 아무 소망이 없고 죄의 노예로서 죄 아래 팔렸으며니 인간 누구도 죄의노예인 우리들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누군가가 죄값을 지불하여 주고 우리를 구속해 주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죄의 노예 시장에서 해방시킬 수 있겠습니까? 죄인이 아닌 존재만이 우리를 되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오직 하나님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거룩함과 공의와 주권 속에서 죄는 오직
피흘리는 것을 통해서만 죄가 용서되고 사면될 수 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레17:11) 이는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히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느니라 이 말씀을 통해 오직 피만이 죄를
속죄할 수 있다는 것과 이 일을 이루기 위해 누군가가 피를 흘려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죄인의 피는 결코 우리의 죄를 용서하거나 우리를 죄와 사망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습니다. 죄 없는 유일한 존재는
하나님뿐이므로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반드시 그분의 죄 없는 피가 흘려져야만 했습니다. 이것만이 우리를 구속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롬6:23)하였으니 죄에 속박된 사람들을 구속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사람이 되셔서 자신의
피를 흘리시며 죽으사 우리를 구속하셨다는 일이 정말 하나님께서 하신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로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인류죄를 속죄하기 위해 처녀마리아를 통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혈액 전문 의사들에 의하면 아기가 수태될
때에 자기 어머니로부터 피를 한방울도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말은 마리아는 죄인이므로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피를 한방울도
물려받지 않았으므로 죄인의 피는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피가 왜 중요한가는 레위기 17: 11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아담의 육체는 하나님께서 그의 코에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으시기 까지는 생명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생명을
불어 넣으니 그는 곧 ‘살아 있는 혼’이 되었습니다.
(창2:7)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을 그의 콧구멍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생령)이 되니라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사람의 어떤 부분이 죄를 범하는지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혼입니다.
히브리어 네페쉬는 창세기 2:7생명의 숨은 혼soul으로 번역되었으므로 우리가 육체의 혼 soul이 피에 있다고 말해도 틀린말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다시 말씀드리지만 만일 예수님께서 자신의 혈관 속에 마리아의 피를 단 한 방울이라도 물려받았다면 그 분의 피는 죄로 더럽혀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처녀 탄생은 700년 전에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이미 예언되었습니다.
(사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한 표적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처녀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오직
예수님의 처녀 탄생을 통해 그분은 반드시 더럽혀지지 않은 피를 지닌 채 사람이 되셨고 사람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만일 그분께서
죄로 더럽혀진 피를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다면 그런 피로 결코 죄인들을 구속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는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전혀
피를 주지 않았으므로 그분의 처녀 탄생은 하나님의 목적을 완벽하게 이루었습니다. 절대 무오한 성경은 예수님의 아버지가 하나님이신
사실을 증명합니다.
(눅1:30-32) 30 그 천사가 그녀에게 이르되 마리아야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호의를
입었느니라 31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예수라 하리라 32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요10:36) 아버지께서 거룩히 구별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인 내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으므로 너희가 그에게 네가 신성모독한다 하느냐?
이제 요약하면 하나님이 예수님의 아버지시며 아기를 수태한 어머니는 아기에게 전혀 피를 주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혈관 속에 들어 있는 피는 죄 없고 더럽혀지지 않은 깨끗한 피로 다 하나님의 피입니다.
하나님의 피는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셨던 예수님의 혈관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는 바로 하나님의 피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교회를 사셨다고 말합니다
어느 이단 딤 목사는 [그리스도의 피]라는 책에서 예수님의 붉은 피는 우리의 구원과 상관이 없다 라고 말합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어떤 영적인 의미도 지니고 있지 않다 라고 말합니다.
또한
맥아더 목사라는 자도 뻔뻔스러운 이단 교리로 말하기를 ‘예수님의 육신적 피는 사람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라고 단호히 말했다.
이들은 혈액전문 의사가 말한것도 믿지 않고 전혀 비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혈관에 있는 피는 하나님의 피였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죄를 범하여 죄의 노예가 된 인류를 구속할 수 있는 분은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서 죄사하여 주시는 길 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이 일을 이루셨습니까? 그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갈보리 험한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흠 없고 점없는 피를 흘리심으로써 이 일을 이루셨습니다. 할렐루야
(롬8:2)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시켰기 때문이라
(요8: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참으로 자유롭게 되리라
저는 어린양의 피로 구속을 받았기 때문에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기쁜날에 저는 하늘의 보좌 주위에 있는 무리들과 함께 예수님의 이름을 힘껏 찬양할 것입니다.
(계5:9) 주께서 죽임을 당하시고 주의 피로 모든 족속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서 우리를 구속하사 하나님께 드리셨으며
저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구속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저를 되 사셨습니다. 이렇게 저를 구속하기 위한 대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의 보배로운 피였습니다. 예수님은 저를 구속하시면서 자신의 보배로운 피를 그 값으로 지불하셨습니다.
(벧전 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저를 죄로부터 되사실 때에 바로 그 피를 몸값으로 지불하셨습니다.
그분께서 흘린 피가 없었다면 저는 여전히 죄의 노예 시장에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 소망 없이 영원히 버려졌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죽어야 했음은 누구나 다 아는 일입니다. 그렇다 치더라도 그죽음은 피를 흘리는 죽음이어야만 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결코 구원이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독살, 교수형, 질식사 같은 죽음을 당하셨다면 우리의 죄가
사면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구속도 구원도 속죄도 전혀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막10:45)고 말씀하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를 흘리지 않은 채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다면 결코 많은 사람의 대속물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죄에 묶여 있기 때문에 구속을 필요로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배로운 피가 우리를 구속하였습니다. 이제 모든 사람들이 구속을 받아야 하는 필요성과 연관된 셋째 기본적인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3). 지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이 구원받지 않은 상태로 죽으면 결국은 지옥 불 못에서 영원을 보내게 될 것임을 확실히 보여 줍니다. 죄를
지은자는 저주를 받는 것인데 땀을 흘리며 노동을 하고 해산의 고통을 당하고 육체의 죽음이 전부가 아니라 더 무서운 것은 지옥에서
영원히 불속에서 고통을 당하는 것인데 지옥의 저주를 알게된다면 반드시 지옥에 가지 않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구세주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으시는 것이다.
대신 속죄(代身 贖罪) 요한복음 1:29
다음날 요한이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이르되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하나님은 눈이 심히 정결하시므로 악을 보지 못하신다(합1: 13) 그러므로 누구라도 죄가 있는 사람은 그분 앞에 설 수 없다. 아담의 타락 이후에 하나님께서 죄 없는 짐승을 잡아서 그의 죄악에 대한 수치를 가리도록 옷을 만들어 주신 이후로(창 3:21) 죄인이 하나님 앞에 서려면 죄 없는 희생물을 대신 죽여 피를 흘려서 속죄가 이루어야만 함을 보여 주었다.
특별히
구약시대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는 소나 양 염소 등의 짐승을 끌고 성막 앞의 제사장에게로 간다(레 1:
2-9) 그리고 그 짐승의 머리에 안수하여 자기의 죄를 짐승에게 전가시키고 칼로 직접 짐승의 목을 찌른다. 그가 칼을 양의 목에 꽂는 순간 양은 비명을 지르고 피가 몸에서 튀겨 나온다. 이로써 죄인은 죄가 있으면 반드시 피를 흘리는 희생물이 있어야만 함을 뼈저리게 느낀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지 않고 그는 이 제물을 여러 조각 내서 번제 헌물 제단에 태워야 한다. 이것을 통해 죄인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그 이후에 뜨거운 지옥 불의 정죄가 있어서 불의 고통을 받아야 함을 깨닫는다. 이런 일은 또 유월절(출 12)과 속죄일(레 23:27-32)에도 이루어져서 사람의 죽음을 막기 위해 흠없는 어린양이나 소가 피를 흘리고 죽어야 했다. 그러나 이런 짐승의 희생은 죄를 온전히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죄를 덮는 역할을 하며 예표의 기능을 했을 뿐이다 (히 10: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이 세상의 모든 창조물 가운데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있는 존재는 단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주 예수님께서 스스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완전한 희생물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지옥의 고통을
다 담당해서 단 한번에 영원한 대신 속죄를 이루셨다(히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구약시대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제사장이라는 중보자가 있었으나 우리 주님께서 죽으실 때에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지면서 사람이 하나님께 직접 나갈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렸다(마 27:51, 히 6:19-20). 그분께서 단 한번에 세상의 모든 죄를 영원토록 제거하셨으므로 이제는 더 이상 다른 희생물이나 제사장이 필요 없다(히 10:18).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위에서 죽으심이 나의 죄값이라는 것을 믿는자는 지옥의 저주를 피할 수 있다. 지옥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많지만 성경은 지옥의 실존에 대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요한계시록 14:9-11) 셋째
천사가 그들을 뒤따르며 큰 음성으로 이르되 만일 누구든지 그 짐승과 그의 형상에게 경배하고 자기 이마 안에나 손 안에 그의 표를
받으면 바로 그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즙 곧 그분의 격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즙을 마시리라 그가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통을 받으리니 그들의 고통의 연기가 영원무궁토록 올라가는도다. 짐승과 그의 형상에게 경배하는 자들과 그의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낮이나 밤이나 안식을 얻지 못하는도다
(요한계시록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드러나지 않는 자는 불 못에 던져졌더라
우리가
방금 읽은 말씀들만 보아도 어린양의 피로 구속을 받지 못한 채 이 세상을 떠난 모든 사람들은 불타는 지옥에서 고통당한다는 사실을
입증하기에 충분합니다. ‘주께서 주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사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라고 예수님께 정직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만이 천국에 도착합니다. 피로 인한 구속이 없이는 결코 구원도 없으며 지옥을 피할 수도 없습니다. 이제 둘째 부분을
살펴봅니다.
2. 그 분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은 구속의 충분성
이 책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의 신분에서 벗어나 구속받을 시간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날 밤에 그 땅을 두루 다니시며 한 가지를 찾고 계셨습니다.
피가 문설주에 발라져있는지 없는지를 찾고 계셨다. 피를 바른집은 죽음의 천사가 넘어가고 피가 발랄져있지 않은 집은 장자가 죽임을
당하는 저주가 있었다.
(출12;13) 그 피가 너희가 거하는 집 위에 있어 너희를 위해 표가 되게 할지니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내가 이집트 땅을 칠 때에 그 재앙이 너희 위에 임하여 너희를 멸하지 아니하리라
각 집의 대문 위에 있던 단 한 가지만이 모든 맏아들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죽음을 저주를 피하는 일에 충분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직 어린양의 피만이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면하게 하기에 충분하고도 유일한 요소입니다. 물론 이 피는 주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그에게 그의 아들 이삭을 산으로 데리고 올라가 그를 피의 희생물 받치라고 말씀하신 날을 기억할 것입니다.
(창22; 7-8) 7 이삭이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하매 그가 이르되 불과 나무를 보시거니와 번제 헌물로 드릴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 하니
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 헌물로 쓸 어린양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친히 예비하시리라 하고
아브라함은
두 가지 즉 불과 칼을 손에 들고 있었습니다. 이삭은 물론 자기가 예정된 희생물이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자기 아버지의 손에 든
칼과 자기 아버지가 가져온 불을 보면서 이삭은 자신의 등에 놓인 나무의 무게를 느끼며 주위를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는데 헌물로 드릴 어린양은 어디 있습니까?’ 자 아브라함의 대답을 살펴봅시다
(창22: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헌물로 쓸 어린양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예비하시리라
위 구절을 읽어 보면 하나님께서 이삭을 대신하여 드릴 어린양을 준비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일이 정확히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희생물이 될 존귀한 어린양이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어린양으로 예비하셨습니다. 만일 이분이 사람이었다면 이분께서 흘린 피와 희생물이 된 이분의 몸은 우리의 죄와 하나님의 진노의
처벌에서 우리를 구속하기에 충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그 피는 반드시 흠이 없고 점 없는 이런 성질의
피를 가진 유일한 사람은 하나님의 어린양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 없습니다.
침례자 요한은 요단 강에서 허리 깊이의 물에 서서 둑에 늘어선 무리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면서 한 곳을 쳐다보았고 예수님께서 둑 아래로 내려오셔서 강으로 들어오시는 것을 보면서 곧바로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요1:29) 다음날 요한이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이르되.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요한은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갈릴리 사람을 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는 ‘세상 죄를 제거하는 유다 지파의 사자를 보라’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표현들도 다 예수님께 적용되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세상의 죄를 제거하실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사도는 이 일에 대해 분명하게 기록하였습니다.
(벧전 1:18-19)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들로부터 전통으로 물려받은 너희의 헛된 행실에서 너희가 구속 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썩을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양의 피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어떤 사람의 피나 희생적인 죽음도 세상의 모든 죄를 제거하기에 충분하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님이 흘리신 보혈만이 우리를 구속하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피를 찬양합시다. 이제 셋째 부분을 살펴봅시다
3. 그분의 십자가의 피로 인해 구속을 받는 진리의 말씀
제가 이 글을 쓰면서 인용하는 성경 말씀은 다 진리입니다.
(요17:17)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니이다
성경은
진리이기 때문에 저는 한 점의 의심도 없이 성경의 모든 장의 모든 말씀이 사실임을 믿을 수 있습니다. 저는 성경을 보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부활하사 하늘에 올리우신 후 예수님의 지위를 지금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은 존재로 자신의 아들을 들어 올리셨습니다.
(빌2: 9-1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있는 이름을 그분에게 주사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과 땅 아래 있는
것들의 모든 무릎이 예수라는 이름에 굴복하게 하시고 또 모든 혀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시라고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모든 이름 위에 오직 한 이름 즉 예수라는 이름만을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과 구원받지 못한 모든 사람들과 모든 마귀들과 모든 타락한 천사들과 모든 좋은 천사들이 오직 한 분
예수님에게만 무릎을 꿇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왜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영광과 명예를 예수님께
주셨을까요?
이 질문의 답은 제가 방금 인용한 구절의 문맥 그러므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위에서
방금 말한 사실에 기초하여 그러므로는 절대적인 진리 즉 예수님 이외의 어느 누구도 하나님에 의해 지극히 높여지지 않았고 우리의
구원자 이외의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갖지 않으며 하나님의 어린양 오직 그분의 이름에 온 세상 만물이
무릎을 꿇고 모든 존재가 모든 입으로 예수님을 주라 시인하는 이유를 보여 줍니다.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여기의 ‘그러므로’는 그 이유를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이제 그 앞의 네 구절을 살펴봅시다.
(빌2: 5-8) 너희 안에 이 생각을 품을지니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도 있던 생각이라.; 그분은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함을 강탈로 여기지 아니하셨으나 스스로 무명한 자가 되사 자기 위에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들의 모습이 되셨으며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체로서 본질적으로는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사실이지만 예수님의 이처럼 최고 위치와 지위에 높이셨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거나 그분의 권위를 찬탈하는 반역 행위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기 자신을 낮추어서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시고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구원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는 진리 다음에 ‘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분을 지극히 높이시고 ....’ 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죽기까지 복종하시지 않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십자가의 죽음이 그분의 십자가의 피를 흘리게 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에 복종하시며 자신의 십자가의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그분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있는 이름을 그분에게 주사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있는 것들로 하여금 다 예수라는 이름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또 모든 혀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는 주시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교수형으로 돌아가셨다던지 만일 예수님께서 독살되어 죽으셨다던지 만일 예수님께서 질식사를 당하셨다면 결코 아버지께서 그분을 그토록
높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 몸안의 피에는 우리를 구원하는 요소가 전혀 없습니다.
이러한 진술을 통해 이단
목사인 맥아더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실 필요가 없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피가 효력이 없다면 그분께서는
자신의 피를 단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도 여러 형태의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손과 발에 못이 박힌 상태에서
피를 흘리지 않고 죽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피 흘림이 없은 즉 죄들의 사면이 없다(히9:22)는 말씀은 하나님의 진리이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 즉 피를 흘리는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이런 사실이 절대 무오한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고 죽으신 후에는 로마병정이 창으로 옆구릴를 찔러서 자신의 피를 전 인류의 속죄를 위해 흘리신 것은 확신한 진리입니다.
맥아더목사의 교리는 순전히 이단 교리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는 죽음을 맞이하지 않으셨다면 가련하고 무능하고 희망없이 버려진 죄인들을 구속하는 일은 결코 불가능하였을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로 불변의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맥아더와 딤과 또 그들과 함께하는 다른 사람들의 사악한 이단 교리에도 불구하고 저는 저의 나머지 생애 동안 제가 값없이 구속받은 것을 계속해서 찬양할 것이며 그리고 하늘에서 영원히 그것을 찬양할 것입니다.
죄를 사하는 권세(權勢)가 있는 예수님 누가복음 5:17-26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시다(요 8: 58).
누가복음 5: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But I want you to know that the Son of Man has authority on earth
to forgive sins.’ So he said to the paralyzed man, ‘I tell you, get up,
take your mat and go home.’”
농구 선수들은 “삼중위협”(三重威脅)의 위치와 자세(“triple threat” position)의 힘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선수가 공을 가졌을 때, 슛을 하거나, 패스를 하거나, 골대 밑으로 몰고 가기 좋은 위치(位置)와 자세(姿勢)를 가리키는 말이다. 삼중 위협의 위치와 자세를 취한 선수는 수비 팀에 추가의 압력을 가한다. 여러 가지 능력(能力)을 발휘(發揮)할 수 있는 것은 항상 좋은 일이다. 예수님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훌륭한 설교자로 혹은 놀라운 기적을 행하는 자로 생각하였다. 그것들은 모두 맞는 말이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진정으로 주시려고 하는 것을 놓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가장 놀랍고도 중요한 선물은 인간의 죄를 사해주시는 권세이다.
누가복음 5:12-26
예수님이
어부들인 시몬과 야고보와 요한을 만나셔서 그들을 제자로 부르신 사건 (5: 1 -11)과 세리인 레위를 제자로 부르신 사건 (5:
27 -32) 사이에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두 병자를 고쳐주신 두 가지 사건(事件)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는 나병 들린 사람을 깨끗이 고쳐주신 일이고 (5: 12 -16), 다른 하나는 중풍병자를 고쳐주신 일이 되고 있다 (5: 17 -26).
병자를 고치는 일은 예수님의 사역에서 흔한 일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도움이 필요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한 동네에 계실 때, 한 나병 환자가 담대하게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간청하면서, 예수님이 “원하시면 [자기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을 나타내었다 (5: 12).
나병 환자를 만지는 것은 금지되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당시의 사회적 규범을 깨뜨리셨다.
먼저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시자, 곧 나병이 그에게서 떠났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더 많이 퍼지게 되자, “수 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신 일은 예수님께서 여러 성읍과 마을에서 가르치는 사역을 마치고 가버나움으로 돌아 오셨을 때 일어났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고, 그 자리에는 여러 곳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도 있었는데,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데려오려고 하였다 (5: 18).
그러나 그 집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집 안으로 들어 올 수 없었다.
절박함과 믿음은 그들로 하여금 비상한 방법으로 일을 하게 하였다.
그들은 중풍병자를 메고 지붕위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내어 천장에 구멍을 내고, 병자를 침상째 예수님이 앉아서 가르치고 계신 방 가운데로 달아 내렸다.
예수님은 그들의 행동을 방해가 아니라 기회로 보셨다.
사람들은 이미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시는 것을 많이 보았다.
그러므로, 중풍병자가 온전하게 고침을 받았다고 해서 당시 예수님에 대한 종교 지도자들의 태도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의 믿음에 근거(根據)하여 그같이 말씀하셨다.
분노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며, 예수님을 신성을 모독하는 자로 정죄하였다 (5: 21).
그 점이 바로 예수님께서 원하신 것이었다.
죄를 사해줄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병자를 고쳐주는 치료 자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실 뿐 아니라,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구세주가 되신다. 그 같은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입증(立證)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고 하시고, 중풍병자를 고쳐주셨다. 고침을 받은 중풍병자가 누었던 침상을 집어 들고 밖으로 나가자, 목격자들은 그들이 본 것에 놀라워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하였다.
믿음의 증거를 나타낸 사람들 누가복음 5:17-19
하루는 예수님이 집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는 사역을 하셨다. 마가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가버나움에 있는 집에서 일어난 일로 밝혀지고 있다(막 2:1 -12). 그 자리에는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여 그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때,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침상에 메워 가지고 와서 예수님께 고침을 받기 원하였다(막 2:3). 예수님이 앉아 계신 자리까지 들어갈 수 없음으로, 그들은 중풍병자를 지붕위로 메고 올라가, 예수님이 계신 곳의 천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렸다.
갈릴리 여러 지역을 다시며 전도하시며 병자들을 고치시던 예수님이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셔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졌다 (막 2:1).하루는 예수님이 그 집에서 가르치실 때,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 들었다. 그 자리에는 많은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도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1세기에 유대교에서 가장 크고 가장 보수적인 종파의 하나로 대표되었다.
또 다른 종파인 사두개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정치적인 세력과 권위를 행사한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유대지역과 갈릴리 전역에 흩어져있는 회당을 중심으로 큰 영향을 행사하였다,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을 권위 있는 성경으로 주장하였다.
그러나 율법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율법 자체가 요구하는 것 이상의 제한과 규칙들을 부과하는 율법주의(律法主義)에 사로 잡히고 말았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을 일반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율법의 진정한 해석자(解釋者)이자 보호자(保護者)로 여기며 주장하였다.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의 갈등은 일반적으로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을 무거운 전통의 짐으로 만들고 율법을 성경에 맞지 않고 부적절하게 해석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거부하신 것에 집중되고 있다.
“율법교사”라는 문구는 다른 맥락에서 서기관이라는 용어와 대략적으로 동일한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눅 15: 2).
서기관(書記官)으로도 불려지고 있던 “율법교사”들은 성경말씀을 기록하고 보관하는 일뿐 아니라, 성경말씀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성경전문가들로 인정을 받았다.
예수님이 가르치는 그 자리에는 많은 바리새인들이 와 있었는데, 누가는 그 같은 사실을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온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누가는 그들의 동기(動機)에 대해 아무 언급도 하지 않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율법적으로 예수님을 고소할 증거를 찾을 목적으로 찾아 온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 같은 사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라고 한 6장 7절의 말씀에서도 잘 입증되고 있다.
누가는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는 말로, 그 날에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치유의 능력이 함께 하셨다는 당연하게 들리는 말로 17절을 끝 맺고 있다.
누가 복음의 이방인 청중은 치유능력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다양한 이방 신들에 익숙해 있었다.
의사였던 누가는 예수님의 치유의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강조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예수님의 치유의 능력은 몸뿐만 아니라 영혼에도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5장 18 -19절
●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누가는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메고 [왔다]”고 했는데,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밝히지 않고 있다.
마가는 그 중풍병자를 “네사람”이 메워가지고 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막 2: 3).
그들은 소문을 듣고 구경 삼아 예수님을 보거나 그의 말씀을 들으려고 온 사람들이 아니라,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예수님을 꼭 만나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목적은 그들이 침상에 메고 온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에들여놓고자” 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있는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기 때문에 (막 2: 1), 중풍병자를 메고 온 친구들은 자기 친구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갈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전에 예수님이 병자들을 치유하시는 것을 직접 목격했거나, 그 같은 소문을 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어떤 경우가 되었든 간에, 그들은 중풍병자 친구를 침상에 메고 예수님께로 데리고 올만큼 예수님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었다.
중풍병자를 메고 온 일행이 집 앞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예상치 못한 문제에 봉착하였다.
그 집은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마가복음은 “문앞까지도들어설자라가없[을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였다고 밝히고 있다 (2: 2).
한 가지 아쉬운 점을 들자면, 그곳에 모인 군중들이 영적인 가르침을 듣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 온 사람들이라면, 중풍병자가 예수님한테 들어갈 길을 내줄 만큼 영적으로 민감할 수 있었을 터인데, 그렇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다른 한 가지 고무적인 사실은, 그같이 중풍병자를 메고 온 친구들이 문제에 직면했을 때 쉽게 단념하고 돌아서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에게는 친구의 병을 고쳐주어야겠다는 간절한 염원(念願)과 예수님께서 고쳐주실 수 있을 것이라는 강한 믿음이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갈길을얻지” 못하자, 네 명의 친구들은 병자를 메고 “지붕”위로 올라갔다.
당시 이스라엘의 주택들은 보통 평평한 지붕으로 지어져 있었고, 외부에는 계단이 나 있었다.
평평한 지붕은 가외(加外)의 생활공간(生活空間)으로 사용되어, 여름에는 바람이 부는 시원한 장소가 되었다.
그 같은 건물 구조는 시몬 베드로가 “기도하려고지붕에올라가니”라고 한 사도 행전 10 장 9 절에서도 암시되고 있다.
지붕들은 다양한 재료들로 덮여있었는데, 작은 집들은 초가 지붕을 사용하였는데 반해, 큰 집이나 고급(高級) 집들은 찰 흙으로 구운 타일이나 석회석 타일로 깔았다.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집은 지붕이 “기와”로 덮여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중풍병자를 메고 지붕으로 올라간 네 사람은 지붕을 덮고 있는 기와들을 벗겨내고 병자를 들어 내릴 만한 크기의 구멍을 내기 시작하였다.
반면에, 방안은 갑자기 시끄러운 소음으로 가득 차고 천정에서는 나무 조각들과 흙들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도, 집주인은 그들을 막으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 같은 실정으로 인해, 어떤 성경 주석자들은 그 집이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머무르실 때 거처하신 곳이었거나, 집 주인이 예수님과 가까운 측근이자 열렬한 후원자였던 것으로 생각한다.
그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세 복음서 (마 9: 1 -8; 막 2: 1-12; 눅 5: 17 -26) 모두 네 사람의 행동으로 인한 소동이나 집 주인의 반응을 묘사하지 않고 있다.
모든 초점(焦點)은 친구들의 끈기와 중풍병자의 필요, 그리고 특별히 그 사람들이 나타낸 놀라운 믿음을 보셨을 때 예수님의 반응에 집중되고 있다.
친구들의 행동은, 절박한 심정을 암시하고 있는 반면에, 실제로는 희망의 표현이 되고 있다.
그것은 중풍병자가 일상적인 방법으로 회복 될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뜻하는 일이 되고 있다.
예수님께서 1
세기 가버나움에 살았던 그 중풍병자에게 유일한 희망이 되셨던 것처럼, 그는 또한 오늘 날 자신의 힘과 방법으로 치료할 수 없는
죄의 병에 걸려 고통을 받으며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유일하고도 참된 소망이 되신다.
우리는예수님과예수님을찾고있는사람들사이에다어떤장애물들을놓고있습니까?
그리스도에대한우리의소망은사람들을예수님께로인도하려는우리의노력에어떤영향을미치고있습니까?
죄를 사함 받은 믿음 (누가복음 5장 20 -24절)
우리는 그날 네 친구들이 중풍병자를 얼마나 먼 곳에서 데려 왔는지 모른다.
우리는 또한 그들이 이전부터 예수님에 대해 어떤 것을 알고 있었는지. 만일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예수님이 다른 곳에서 어던 일을 행하시는 것을 보았거나 어떤 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들었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은 예수님이 병든 친구를 고쳐 주실 수 있다고 굳게 믿었고, 따라서 그를 예수님 앞에 데려 오기 위해서는 어떤 장벽이나 장애물도 극복하기로 마음 먹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목격한 것은 친구의 육체적 치유를 훨씬 뛰어 넘는 놀라운 것이 되고 있다.
누가복음 5장 20 -21절:
●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네 사람이 지붕을 뚫고 “병자를 침상째” 방으로 달아 내렸을 때,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있던 모든 사람들은 충격과 당혹감으로 지켜 보았을 것이 틀림없다.
예수님은 그 같은 상황 속에서 어느 누구도 보지 못한 것을 보셨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
그들의 믿음은 그들이 행한 일에서 분명하게 나타났다.
이 사건(事件)은 누가 복음에서 처음으로 복음서 저자가 사람들의 믿음과 예수님의 기적의 역사 사이의 직접적(直接的)인 연관성(聯關性)을 표현한 것이 되고 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라는 말은 침상을 메고 온 사람들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침상에 누워있던 병자의 믿음까지도 가리키는 말이 되고 있다.
그 같은 점은 성경의 다른 본문에서도 강조되고 있다.
야고보도 그의 서신에서 병의 치유와 죄의 용서를 믿음과 연결시키면서 “서로 기도하라”는 말로 중보기도의 힘을 강조하고 있다 (약 5: 15).
예수님은 침상에 매달려 내려온 중풍병자에게 관심을 돌리시고, 그를 쳐다보시면서 먼저 그를 “이 사람아”라고 부르셨다.
모든 사람들은, 특별히 지붕 위에 있는 네 친구는. 예수님께서 그 병자를 고쳐주실 것을 전적으로 기대하면서,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기다렸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상 외로,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명한 그 병자의 문제와 필요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셨다.
대신에, 예수님은 그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다.
우리는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이 처음에 예수님의 말씀에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궁금하게 여길 수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렇게 어렵고도 힘들게 찾아온 분명하고도 절박한 목적을 예수님께서 이해하지 못하신다고 생각하고 크게 실망했을 수 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먼저 해결해 주시려고 한 인간의 더 중요하고 절박한 문제와 필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의아하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이 사건을 기록한 복음서들은 그 병자와 친구들의 반응을 설명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군중들 속에 앉아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반응은 즉각적이고도 분노에 가득한 것이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 신성모독하는 자가 누구냐”라고 하며 “오직 하나님 외에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라고 강하게 정죄하며 힐문하였다.
그들이 그 같이 강한 반응을 보인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도, 선지자일지라도, “죄를 사하는” 권세가 없고, 죄를 사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예수님이 누가 죄를 사해주는지를 구체적으로 주장하지 않으시고,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으로 단순히 그 병자의 죄가 사함을 받은 사실을 밝히신 것이다.
반면에,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그 사람의 죄를 사해준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것은 맞는 말이지만, 종교지도자들의 생각과 책략을 아셨던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그같이 표현하셨을 수 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고 내린 결론은 예수님이 “신성모독”을 하였다는 것이다.
1세기 당시에 유대교 내에서의 신성모독에 대한 정확한 정의와 그에 따르는 처벌에 대한 문제는 성경학자들이 계속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주제가 되고 있다.
하나님을 조롱하거나 부정(否定)하는 행위나 말은 신상모독이 될 수 있었다.
고대 랍비의 일부 작품들은 율법에 대해 비방하거나 우상을 숭배하는 것을 신성모독 죄에 포함시키고 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문제로 삼은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을 한다고 하신 것과 하나님께 속한 명칭을 사용하신 일이 되고 있다.
한 예로, 예수님이 하나님과 자기는 아버지와 아들로 “하나이니라”고 하셨을 때, 종교지도자들은 신성모독을 한다며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하였다 (요 10: 30 -33).
또 다른 한 예로, 예수님이 공회 앞에서 재판을 받으면서 자신을 “그리스도”로 자백했을 때, 종교지도자들은 그것을 “신성모독”으로 규정하면서 예수님을 “사형에 해당하는 자”로 정죄하였다 (막 14: 61 -64).
본문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인해 “신성모독”을 했다고 믿었다.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사[할]” 권세가 있다는 그들의 생각은 맞는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정확하게 바로 그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죄를 사해주실 수 있으시다.
누가복음 5장 22 -24절:
●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누가는 예수님께서 그들 종교지도자들이 마음에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다 아시고 계신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 생각을 아[셨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그들 종교 지도자들이 무엇을 생각하며 어떤 결론을 내릴 것인지를 완전히 알고 계 셨음을 나타내주고 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반문하시면서, 그들의 질문에 대해 자신의 질문으로 대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그들에게 수수께끼 같은 질문을 생각해 보라고하셨다.
중풍병자와 같이 인간의 문제가 분명한 상황에서, 어떤 사람이 그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포하는 것과 그 사람에게 “일어나 걸어가라”고 지시하는 것 가운데서 어느 쪽이 말하기가 더 쉽겠는가?
말할 수 있는 면에서 분명한 것은, 누구든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외적 증거가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고 말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이는 모두가 그같이 한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즉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자주 자신을 “인자”로 지칭하셨다.
예수님은 인자라고 주장하는 것이 메시야로 주장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아셨다 (눅 21: 27).
순교 당하기 직전 자신의 신앙을 변호하는 설교를 할 때, 스데반은 환상으로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이를 묘사하였다 (행 7: 55 -56).
이 구절은 인자이신 예수님과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야를 연결시켜주고 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특별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메시아로서 자신이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알기를 원하였다.
아무리 많은 신학적 논쟁을 벌린다 할지라도 이들 종교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의 주장을 납득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논쟁의 여지가 없는 증거만이 충분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다음, 중풍병자를 향하여 그에게 직접 말씀하셨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예수님은 그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그에게로 찾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죄 사함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이 중풍병자는 치유를 받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그와 친구들이 참 믿음을 행동으로 보였을 때, 예수님은 그 사람의 가장 큰 필요인 죄 사함을 베풀어 주셨다.
겸손한 마음과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 오면, 예수님은 기꺼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
만일 당신이 그날 군중들 속에 있었다면, 중풍병자와 친구들이 행한 일에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당신은 어떤 필요를 예수님께 가져오고 싶습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믿음 (누가복음 5장 25 -26절)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 하셨을 때 그것을 신성모독으로 생각하였다.
군중들 가운데서도 그같이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을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또한 예수님처럼 죄를 사해주며 병을 치유하는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 그 중풍병자가 그들 앞에서 즉시 일어나,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 갔을 때 그들은 어떻게 반응하였을까?
누가복음 5장 25 -26절
●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었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라는 말에서 나타나고 있듯이, 중풍병자의 치유는 즉시 이루어졌다.
사람들은 그가 더 나아지는 것을 보려고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본문은 그 병자의 상태를 정확하게 밝혀주지 않고 있지만, 우리는 그의 상태가 침상에 누워 사람들에게 메워 올 만큼 나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누가는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는 짧은 말로, 그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났는지를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그 사람이 기쁨과 감격에 차서 자기를 데려온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나머지 군중은 그 치유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였는가?
누가는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놀라움과 두려움에 가득 차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것이다.
‘영광을 돌리다’ 혹은 ‘찬양하다’라는 말은 누군가를 칭찬하고 그의 평판을 높이는 방법으로 그의 위대함을 확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다음, 누가는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는 한마디 문장으로, 군중들이 말로 표현한 반응들을 요약하였다.
“놀라운 일”로 번역된 말은 어떤 것이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것 혹은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것을 가리킬 수 있다.
어느 쪽이 되었든, 군중들은 그들이 목격한 기이하고도, 경이로우며, 예상치 못한 사건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당신은 소망이 필요한 사람들로 누구를 알고 있습니까?
당신은 그들에게 예수님과 그의 소망을 알려주기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당신의 삶이나 당신과 가까운 사람의 삶에서 놀라운 일을 하신 때에 대해 적어보십시오. 그 사건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당신이 이해하는데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2장 1절부터 3장 6절까지는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5번의 논쟁이 연속해서 일어나는데 본문은 그 첫 번째 논쟁을 다룹니다.
예수님이
문둥병자를 고치신 후엔 어디를 가셔도 더는 감추실 수 없었습니다(1:45).
“수일 후에”다시 가버나움에 들어오시자 다시 “집에
계신 소문”이 퍼졌습니다(2:1).
문둥이를 불쌍히 여기신 대가로 사역하시기가 훨씬 불편해졌습니다. 예수님은 문둥이가 이처럼
사역을 방해하게 될 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역을 좀 더 쉽게 하려고 불쌍한 그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문둥이의 허물과
약점을 다 짊어지시고 모든 불편을 감수하신 채 사역하셨습니다.
문
앞에는 발 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로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셨습니다(2). 이
구절의 “도”는 노자 사상의 ‘도’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 말씀을 전하셨다’는 뜻입니다. ‘그 말씀’은 1장 15절에
요약되었던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이겠지요. 아무튼, 마가는 말씀의 내용은 밝히지 않고 말씀을 전하셨다는 사실만
담담하게 기록합니다.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신 후에 “전도”하겠다고 결심하신 일을 실행에 옮긴 것이지요(1:38a). 1장 33절과
비교하면 예수님의 태도엔 분명한 변화가 있습니다. 이전에는 몰려온 무리의 필요에 따라 병을 고쳐주시거나 귀신을 쫓아내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무리가 어떤 필요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왔든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전도하기를 결심하시며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1:38b)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신 것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제대로 수행하시는 중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여기에 소비자가 왕인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성도가
주목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소비자는 자신의 필요를 따라 선택하는 일에 익숙합니다. 필요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면 당연히
배제합니다. 그것이 소비자의 특권입니다. 그러다 보니 말씀을 듣거나 기도를 할 때도 자신의 필요를 채워주는지 아닌지에 따라
선택하기도 하고 배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도는 소비자가 아닙니다. 자신의 필요 중심으로 주님을 찾을 일이 아닙니다. 그분의
백성으로서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
단락에서 하나님 나라는 왕께서 말씀을 전하시는 모습으로 임하며, 백성은 그분의 말씀을 듣는 모습으로 반응합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이전처럼 계속 군중의 필요를 채워주는 일만 하신다면, 백성은 왕이 되고 예수님은 종인 이상한 나라가 건설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소비자의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나의 필요보다 하나님과 교회의 필요를 중심으로 생각해야 신앙의 기초가 바르게 놓일 수
있습니다. 자신의 필요를 중심으로 선택하고 배제하는 까칠한 소비자의 태도가 신앙 형성 과정에 작용한다면, 분명 그 신앙은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나고 말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을
전하시는 중에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왔습니다(3). 입구의 무리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자,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렸습니다(4). 유대 서민들은 보통 단층의 흙벽돌집에
살았습니다. 지붕은 평평하고 집 바깥에서 올라갈 수 있는 구조입니다. 지붕은 나무 들보를 놓고 짚과 흙(가끔은 기와와 흙)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뜯어내기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중풍병자가 누운 “상”은 짚으로 엮은 돗자리나 담요 같은 것입니다. 이들이 예수님께
나아온 방법은 유별납니다. 기발하고 창의적이긴 한데, 무례하고 황당합니다.
마가는
당시 집주인이나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조금도 기록하지 않습니다. 중풍병자와 네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지붕을
뚫는 동안 발생한 엄청난 소음과 군중의 소란에 대해서도 침묵합니다. 방안으로 흙이 떨어질 때 예수님의 말씀이 중단되고,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이 소동했을 텐데 이것에 대해서도 전혀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사건은 오직 예수께서 무엇을 보셨고, 예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기록되어 있습니다(5).
먼저
예수님은 “저희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사람은 믿음을 볼 수 없습니다. 행위를 보고 판단합니다. 내면을 보려고 노력할지라도
드러나는 겉모습을 통해 추측할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행위 중심에 있는 믿음을 보셨습니다. 이 장면은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는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만일 예수께서도 행위를 보셨다면, 말씀 집회를
방해한 그들은 진노를 당했을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예수님은 그들의 무례한 행위 속에서 오직 믿음만을 골라내어 보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이 또한 복음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의 믿음은 불순물이 많습니다. 신앙이라는 이름 속에 이기심이나 교만함이나 무례함이 붙어 있을 때가 많습니다. 헌신의 믿음 속에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숨어 있기도 합니다. 가장 거룩하게 구별한 예배 시간조차, 경배하는 그 마음에 온갖 잡생각이 섞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평소 생활의 행위는 말할 것도 없겠지요. 일부러 애쓰지 않아도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의 진노를 당할 만큼 매우
무례합니다. 철저하게 자신을 살필수록 믿음만을 보시는 우리 주님의 시선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주님께서
보신 믿음은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말로만 믿는다고 고백하는 형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정하신 믿음은 사회의 통념이나
인간관계의 예의를 뛰어넘을 만큼 역동성이 있었습니다. 그 믿음은 머릿속에 가만히 들어앉아 있는 관념이 아니었습니다.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과 제한을 뛰어넘어 행동하게 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 믿음은 부딪친 장벽 앞에 주저앉아 버릴 만큼 허약하지 않았습니다.
불가능한 상황을 돌파할 만큼 강력한 능력으로 작용했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생긴 사람은 예전과 같은 삶을 지속할 수 없습니다.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거기 앉아 있던 어떤 서기관들의 마음에 큰 충격을
줍니다(6).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7). 이날 죄
사함의 선포로 서기관들이 예수님과의 갈등을 시작합니다. 첫 만남에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신성을 모독하는 자라는 강한 인상을
남깁니다. 하나님의 고유 영역을 침범했으니, 지붕 뚫고 침범한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무례한 인물로 각인됩니다. 만일
예수께서 병만 고쳐주셨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병 고치러( 온 사람에게 느닷없이 죄 사함을 선포하심으로 스스로
논란거리를 만드셨습니다.
병자가 지붕을 통해
내려올 때,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반응에 주목했을 것입니다. 숨죽여 지켜보고 있는 긴장된 상황을 예수님은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신적 권위를 드러내실 절호의 기회로 사용하셨습니다. 먼저 “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중심에
아시고”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8). 사람은 다른 사람의 속생각을 추측할 수는 있으나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사람의 마음을 아십니다(왕상 8:39; 렘 17:9~10). 그런데 예수님이 사람의 생각까지도
아십니다. 물론 이것만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이라 말하기엔 부족함이 있습니다. 특별한 행동 속에서 믿음을 보는 일이나 특별한 상황에서
마음의 생각을 아는 일 정도는, 통찰력 있는 사람도 충분히 어느 정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죄 사함은 전혀 차원이 다릅니다. 죄 사함은 서기관들이 올바로 생각한 것처럼 오직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통찰력 있는 인간도 죄를 사해줄 수는 없습니다. 유대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메시아조차 죄 사함을 위한 중재 역할을 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서기관들은 오랫동안 율법을 연구하고서도 예수님의 본질을 꿰뚫어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러 오신 메시아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죄 사함을 선언하실 때 불쾌하게 생각했습니다. 사실 신성모독은
그들이 행하고 있었습니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9)는 질문은 관점에 따라 답이
다릅니다.
신앙의 관점에서는 죄 사함 선언이 어렵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선언하실 수 있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구속사에서도 천지
창조는 6일 걸렸는데, 죄 사함을 선언하기까지는 수천 년이 걸렸으니 죄 사함 자체가 더 어렵습니다.
일상의 관점에서는 죄
사함 선언이 더 쉽습니다. 병 나음은 즉석에서 확인할 수 있으나 죄 사함은 그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일상의 관점에서도 말하는
행위 자체는 둘 다 쉽습니다. 하지만 말한 대로 실현하는 일은 둘 다 인간에겐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관점에서 말씀하셨을까요?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사람인 주제에 죄 사함을 선언했으니 그것은
단지 ‘빈말’이라 여겼겠지요. 예수님은 빈말이 아님을 증명해 보이려 하셨습니다. 그들의 수준까지 내려가셔서, 일상의 관점에서
보다 말하기 어려운 일을 행함으로써 증명하려 하신 것입니다. 거동조차 할 수 없는 중풍병자에게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신
후에 그 말씀이 즉시 이루어진다면, 죄 사함의 선언 역시 즉시 이루어졌음을 유추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고 선언하셨습니다(10). 예수님은 문둥병자를 고치셨을
때,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먼저 제사장들에게 보이게 하셨습니다(1:44). 또 자신의 본질을 감추시던 주님께서 서기관들에게는
먼저 알려 주려 하십니다. 왜일까요? 구약의 선지자들은 메시아 시대가 오면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셔서 죄가 다시는
기억되지 않게 하실 것임을 예언했습니다(사 43:25, 44:22; 렘 31:34, 50:20). 짐승의 피를 통해 잠깐 죄가
사해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죄가 사해진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구원자가 되실 것도 이미 말씀하셨습니다(사 43:11). 종교
지도자들은 이러한 말씀들을 통해 예수님이 메시아이시고 하나님이심을 먼저 깨달아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따져 보면, 종교지도자들과 예수님 사이에 발생한 갈등은 예수께서 종교 지도자들을 미워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당신님의 말씀이 진실하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셔야 할 아무런 의무도 없으셨습니다. 또한, 왕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는
서기관들 중 몇을 즉석에서 중풍에 걸리도록 하심으로써 증명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님의 본질을 백성보다
먼저 깨달을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특권을 베풀수록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나쁜 인상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울지라도 예수님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이들처럼 됩니다. 예수님은 단지 뛰어난 인간에 불과하다는
선입견으로 접근한다든지, 예수님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가 나쁘면 율법 전문가라 할지라도 결국은 하나님 나라에 대적하는 적대 백성이
됩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하셨고, 그 말이 떨어지자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11~12a).
예수님의 말씀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의 그 권능 그대로 역사했습니다. ‘있으라’하신 말씀과 함께
천지 만물이 있게 되었듯이 말씀 그대로 되었습니다. 그러자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12b). 그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목격했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전엔
도무지 보지 못했던 메시아 시대의 한 단면을 맛보았습니다. 무엇보다 죄 사함이 이 땅에서 이루어진 사실을 확인하는 영광에
참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말씀을 듣는 백성들은 이 땅에서 죄를 사함 받는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병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지라도 불행하게
만들진 않습니다.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죄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죄인입니다. 죄를 지어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라 죄를 짓습니다. 깨끗하게 살려고 노력해도 돌아보면 지나온 삶은 죄와 허물투성입니다. 인류 최악의 소식은 이 죄를
인간 스스로 사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지우려 해도 지울 수 없는 죄의 비밀은 숨기려 해도 숨겨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애써도
자신의 양심은 속일 수 없고, 하나님은 더욱 속일 수 없습니다. 마음속에 몰래 숨긴 한 가지 죄 때문에 평생 불안한 마음으로 사는
사람도 많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도 그의 병보다 죄 사함이 더 필요함을 아시고 죄부터 사해주셨습니다.
참으로
두렵게 생각할 일은 이 땅에서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영원히 죄가 사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죄를 사함 받지
못하면 결코 하나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지옥에서 영원히 그 죄에 대한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복음은 이 땅에서 죄가
사해진다는 사실이 핵심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단번에 영원히 죄 사함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재림 때나
되어서야 죄 사함을 받는다면 이 땅에서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만이 하실 일을 하신
분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이신 그분을 믿고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오면 이 땅에서 죄를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사 1:18)
다윗은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 누구든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의 집에 계신다는 소문을 듣고 수많은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이 몰려와서, 집 앞은 발 디딜 틈도 없이 복잡했다. 그
와중에 네 명의 친구가 중풍병자를 데리고 와서 지붕을 뜯고 중풍병자를 달아 내려서 예수의 치유를 받게 되었다(1-12절).
예수께서 바닷가로 나가 무리를 가르치신 후에 세리인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제자를 삼으시고, 그의 집에 가셔서 세리들과 함께
식사하셨다(13-16절).
세례 요한의 제자들처럼 금식하지 않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대답하셨고(17-22절), 안식일에 밀밭의 이삭을 잘라먹은 것과 관련해서는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대답하셨다(23-28절).
안식일의 본래 의미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창조의 복된 상태를 누리는 것을 말힙니다. 또한 모든 생업을 중단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살아간다는 신앙 고백적 행동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율법적인 행위가 아니라 신앙의 본질과 관련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안식일은 장차 올 천국의 예표로 이해한다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천국의 기쁨을 미리 맛보는 거룩한 날로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안식일에 사람의 영혼을 구하는 일과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회복하는 일과 선한 일들을 행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예수의 병 고침의 사역은 안식일에 일어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안식일을 범했다고 정죄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을 피해서 병자들을 고쳐 주실 수도 있었을텐데, 바리새인들과의 격렬한 논쟁을 벌이면서까지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쳐 주신
사건들을 보면 안식일의 의미가 병자 치유의 사건과 관련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천지 창조에 기원을 둡니다. 하나님께서 제 칠일에 안식하셨으므로 우리도 안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를
하시느라 피곤하셔서 하루를 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식은 천지 창조 후에 피조 세계를 복 주시고 창조 질서를 보존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범죄 후에 이러한 안식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죄로 말미암아 안식이 깨진 것입니다.
구약 율법이 말하는
안식일의 의미를 살펴보면 출애굽기 22:11에서는 창조가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이지만, 신명기 5:15에 의하면 출애굽이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라고 합니다.
출애굽을 구원의 상징으로 본다면 죄악의 땅인 애굽에서는 안식이 없었으나 이제 죄악으로부터
구원받은 후부터는 새롭게 안식의 의미가 인식된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 후 안식이 깨졌으므로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진정한 안식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출애굽 사건이 증명해 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 주시면서 안식일 논쟁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안식일은 모든 죄의 문제가 근원적으로 해결되고 태초의 창조 질서가 회복되는 날이기 떄문입니다.
병과 죽음은 인간의 죄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고 마귀를 쫓아내는 일을 하는 것은 안식일을 죄로부터 거룩하게 만드는 구원 사역입니다. 죄로부터의 구원이 없이는 안식일이 없습니다.
06-10-2023(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가복음 3장 / 네 손을 내밀라(5절)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He
looked around at them in anger and, deeply distressed at their stubborn
hearts, said to the man, "Stretch out your hand." He stretched it out,
and his hand was completely restored.
1-6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다.
7-12 바닷가에 있어서의 군중과 치유.
13-19 12사도의 선정.
19-21 예수의 친속들이, 예수를 붙들러 오다.
22-30 서기관들의 비방과 예수의 대답.
31-35 새로운 영적 친족관계.
손(5495) 케이르(chĕir) χείρ, χειρός, ἡ
1. 손, 2. 마태 12:10, 3. 하나님의 손
발음
/ 케이르(chĕir) 어원 / 5494의 어간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손(막 3:3, 요 20:20, 계 14:14), 권능(행 4:28), 팔(요 21:18), 손짓(행 21:40) 신약 성경 / 178회 사용
* 5494. χειμών, ῶνος, ὁ
1.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날씨
2. 나쁜 날씨가 많은 계절
발음
/ 케이몬(chĕimōn) 어원 / χέω ‘붓다’의 파생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겨울(마 24:20, 요 10:22, 딤후 4:21), 풍랑(행 27:20), 궂은 날씨(마 16:3) 신약 성경 / 6회 사용
내밀라(1614) 에크테이노(ĕktĕinō) κτείνω
1. 뻗치다, 2. 퍼뜨리다, 3. 마태복음 26:51
발음
/ 에크테이노(ĕktĕinō) 어원 / 미래 ἐκτενῶ , 제1부정과거 ἐξέτει- να, 1537과 τείνω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내밀다(마 8:3, 막 1:41, 행 4:30), 펴다(마 26: 51), 대다(눅 22:53), 벌리다(요 21:18), 내려 놓다(행 27:30), 들다(행 26:1) 신약 성경 / 16회 사용
* 1537. ἐκ
1. 모음 앞에서는 ἐξ, 2. 마태복음 2:15, 3. 요한복음 15:19
발음
/ 에크(ĕk) 관련 성경 / ~에서부터, ~에서부터 멀리, ~로 말 미암아, ~에게서 온(마 1:18) 신약 성경 / 916회 사용
* τείνω
엿보다(3906) 파라테레오(paratērĕō) παρατηρέω스트롱번호3906
1. 가까이서 지켜보다, 2. 악의를 가지고 지켜보다, 3. 기회를 노리다
발음
/ 파라테레오(paratērĕō) 어원 / 미완료 παρετήρουν, 미완료중간태 παρετηρούμην, 제1부정과거 παρε- τήρησα, 3844와 503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엿보다(눅 6:7, 14:1), 지키다(행 9:24, 갈 4:10) 신약 성경 / 6회 사용
일어서라(1453) 에게이로(ĕgĕirō) ἐγείρω스트롱번호1453
1. 깨우다
2. 일으키다 3. 마태 8:25 발음
/ 에게이로(ĕgĕirō) 관련 성경 / 일어나다(마 2:14, 막 5:41, 행 12:7), 일어나게 하다(마 3:9), 깨우다(마 8:25),
살리다(마 10:8, 요 12:1, 행 10:40), 살아나다(마11:5, 막 6:14, 요 2:22), 내다(마 2:11),
일어서다(막 3:3), 깨다(막 4:27, 눅 8:24, 롬 13:11), 세우다(행 13:22, 23), 살다(고전 15:20, 43) 신약 성경 / 144회 사용
오늘 우리가 내밀어야 하는 손은 어떤 손인가?
첫째, 말씀을 지키지 못한 손(창세기 3: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둘째, 사람을 죽인 손(창세기 4:8)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요한일서 3:15 /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천하를 호령하던 알렉산더 대왕은 죽으면서 "내가 죽거든 두 손을 펴 관 밖으로 내어 놓으시오. 인생은 ‘공수래공수거’ 빈손 들고 왔다가 빈손 들고 가는 것임을 온 백성이 볼 수 있게 하시오." 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두 손을 꽉 쥐고 태어납니다. 그런데 세상을 떠날 때는 모두가 손을 편 상태로 세상을 떠납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인간은 두 손을 움켜쥐고 무엇을 잡으려고 태어났짐만 이 세상을 떠날 때에는 아무 것도 갖고 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손은 그 사람의 인격이며 그 사람의 직업이라고도 합니다. 선수(先手)는 손이 뽑힌 사람 실수(失手)는 손이 실패한 사람 조수(助手)는 손이 돕는 사람
손이 부족한다! 손을 뗀다! 손 쉽다! 손 안에 있다!
손은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주시는 선물입니다. 일찍이 희랍의 철학자 아낙사고라스는
"인간이 동물을 지배할 수 있음은 이 손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도구적 인간(호모 파베르, homo faber)' 이라고 정의합니다. 인간은 이 손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선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악한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손을 얼마나 능력 있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위인이 되기도 하고 범인이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손은 그 사람의 능력과 인격을 대표합니다. 그러므로 때로 문제 해결의 열쇠를 쥔 사람은 "내 손안에 있다"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모자랄 때 우리는 손이 모자란다고 말합니다.
어떤 일에 능한 사람을 우리는 선수(選手)라고 합니다. 선수란 뽑힌 손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과 관계를 끊을 때 손을 뗀다고 합니다.
본문에서 한 편 손이 마른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이 사람의 직업을 외경 ‘히브리인의 믿음’이라는 책에서는 "석수(石手)"이었다고 합니다. 석수는 손으로 돌을 다듬으며 일을 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손이 마른 상태라면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 일을 하다가 손을 다치게 되었을지 아니면 돌에 찍혔을 수도 있습니다. 또 망치를 치다가 손을 다쳤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 사람은 오른손을
다쳐서 한쪽 손이 불편했습니다. 한 손을 쓰지 못하자 그의 인생도 바뀌었습니다.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일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사람들을 만나는 일도 힘들어졌습니다. 악수를 하려고 하더라도 손을 내밀수가 없었습니다. 이 석수는 점점 사회 속에서
멀어져 갔고, 외톨이가 되어서 살아갔습니다. 육체적 핸디캡이 사회적, 인격적 핸디캡으로까지 번지게 된 것입니다.
한 순간에 모든 것이 바뀌어 버렸습니다. 인생이 그렇습니다. 한 순간에 우리 모든 것이 다 바뀔 수 있는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손 마름’ 이것은 이 석수에게는 인생에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 소망의 소식이 들렸습니다. 바로 ‘예수님’이라는 분이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떠들어 대는 것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도 고치고, 죽은 자도 살리고, 문둥병도 고치고, 그를 만난 사람들이 병든 자신의 모습에서 회복이 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회당을 찾았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회당을 찾으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기 때문입니다.
다 같이 1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예수님이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다는 것은 그 회당에 오신 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그 회당을 찾으신 것입니다. 회당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법을 가르치던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회당에서 모든 신앙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 회당에 들어가니깐 ‘손 마른 자가 있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손 마른 자가 ‘주님을 오실 것을 기대하며 회당에 와 있었던 ’ 것입니다. ‘문제’가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문제’ 있는 사람은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성경의 사례 / 웃시야 왕이
나라를 통치할 힘이 없었을 때에 그는 주님을 찾습니다.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웃시야 왕뿐만
아니라 히스기야 왕도 병으로 죽음에 이르자 그는 자신의 생명을 놓고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갑니다. 한나는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삶의
문제, 자식이 없어서 홀대받고 살아온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혈루병 걸린 여인도 주님을 찾았고, 문둥병 걸린 열 명의 사람들은 주님을 향해서 크게 외쳤습니다. 백 부장은 하인의 죽음 앞에서 주님을 찾아서 살려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문제 있는 인생은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또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문제없는 인생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문제를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살고 있습니까? 그 문제의 해결은 오직 하나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주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교회 올 때 문제를 갖고 와야 합니다. 삶의 문제, 영혼의 문제, 관계의 문제, 물질의 문제 등 그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와야 합니다. 나의 문제를 가지고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을 찾을 때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나아오라, 이것이 우리에게 주시는 첫
번째 메시지였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문제’가 아닌 다른 사람의 문제를 바라보며 나아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주 고약한
사람들입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의 문제에 대해서 함께 기도해 주고 근심해 주고 하는 좋은 의도가 아닌 ‘다른 사람의 문제’를 트집
잡기 위해서 회당을 찾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2절 말씀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누가복음 14장에서는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을 율법 교사, 바리새인들이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율법 교사, 바리새인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항상 교회에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초신자’가 아니라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좀 성경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교회를 어지럽히고, 문제를 일으킵니다. 교회법을 좀 안다는
사람들이 오히려 교회를 시끄럽게 하고 질서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게 만듭니다. 왜 그럴까요?
누구보다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잘 안다고 했던 ‘바리새인들’ 그들이 주시한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과연 이 손 마른 사람을 안식일에도 고쳐주는가’ 하는 것입니다.
안식일 율법이 있습니다. 안식일에는 어떠한 일도 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예) 안식에 규례를 보면 ‘의사가 무료로 병을 고쳐주는 것과
유료로 병을 고쳐주는 일 중에 어느 것이 안 되는 것일까요? 모두 안되는 일입니다. 무료든 유료든 아예 병을 고쳐 주는 일은
안됩니다. 그래서 다리가 삐었습니다. 찬물에 담가야 하지요? 안됩니다.
손을 베었습니다. 후시딘을 발라야 하지요? 안됩니다. 그러나 붕대를 감는 것은 됩니다.
무슨 차이일까요? 병을 치료해서는 안됩니다. 더 악화되는 것을 막는 것은 됩니다.
아이가 태어납니다. 아이를 낳아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낳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간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의한 자연적인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의지를 갖고 하는 모든 치료 행위를 유대인들은 ‘일’로 보았습니다.
아마도 회당에 있던 바리새인들도 ‘손 마른 자에 대한 치료 행위가’ 주일을 범한 만큼 중한 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손 마른 자를 고쳐 주게 되면 이 일은 ‘안식일을 범하는 일’로서 돌에 맞아 죽일 수도 있는 큰 범죄 행위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대목에서 바리새인들이 보지 못한 부분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들은 율법은 보았지만 ‘ 불쌍한 영혼’ 은 보지 못했습니다. ‘구원받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을 가진 한 영혼을 바라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주님이 그다음에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4절입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선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 이것에 그들은 집중하지 못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무엇이라 대답을 합니까? 전혀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할 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주장을 꺽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믿음도 ‘사랑’ 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우리는 배웠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그 사랑’ 이 없었습니다.
영혼을 향한 긍휼함도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의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로 나와야 하고, 다른 사람의 아픔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를 나와서 무엇을 보고, 느끼고 갑니까?
‘이번 주 아무개 집사님이 안색이 안 좋으시네,, 요즘 사업이 잘 안되신다고 하는데, 좀 힘든가 봐.. 기도해 줘야겠어.. 자식이 말썽을 피운다고 하는데 얼굴이 많이 말랐네... 기도해 줘야겠어.. ’
이런 모습이 좋습니까?
아니면 ‘이번 주에 가보니 아무개 권사가 예배드리는 모습이 영 아니야.. 나한테 이렇게 말을 했네.. 아주 교만이 싹이 트네요, 싹이 트여..
이렇게 다른 사람의 결점과 실수만 트집만 보고 갈 것입니까?
주님의 눈으로 보십시오, 우리는 주님의 눈이 필요합니다.
영혼을 사랑해야 합니다. 영혼을 향해서 긍휼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바로 이 마음, 이 열정, 이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른 사람의 아픔’을 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옳고 그름이 아닌 그 아픔을 위해서 함께 기도해 줄 수 있는 예닮의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바리새인들의 반응에 대해서 주님은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요?
이것이 우리가 배워야 할 부분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의도를 아셨습니다. 자신을 주시하고 있고, 또 손을 고쳐주면 고발해서 죽이려고 하는 것도 예수님은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눈이라는 것이 마음을 전달해 준다고 하잖아요? 눈빛을 보면 사람을 알수 있습니다
먼가 숨기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한다고 합니다.
눈을 보면 그가 나를 사랑으로 보는지 나를 가증하게 보는지, 또는 나를 트집 잡기 위해서 보는지 다 알 수 있습니다.
주님도 그들의 눈을 통해서 아마도 이미 그들의 의도를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의 지능을 다루는 아이큐가 있습니다. 아이큐가 높을수록 이성적인 활동이 더 높습니다.
또 이큐(EQ)라고 하는 것도 있습니다. ‘감성지수’라고 합니다. 감성지수가 높을수록 다른 사람의 심리나 마음을 잘 안다고 합니다.
아이큐보다 이큐가 사회생활에서는 더욱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이큐가 높은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읽습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말을 더 잘 파악합니다. 의도를 더 잘 파악합니다.
그래서 이큐가 높으면 다른 사람의 의도를 파악해서 거기에 적당히 대처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이큐가 높은 사람들이 자주 하는 실수가 있습니다. ‘ 다른 사람의 의도’를 알고 미리 그 사람을 역이용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나를 공격하는 사람을 역으로 공격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세상의 이치이고,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런 방법을 쓰는 것이 당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방법을 쓸 때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주님이 하신 것을 보십시오
자 그렇다면 우리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요?
주님은 자신을 고소하고 죽이려는 바리새인들의 의도를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어떻게 합니까? 3절을 읽겠습니다‘한가운데 일어서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손 마른 자를 향해서 ‘사람들 한가운데 일어서라’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보는 곳에 세우십니다. 주님은 사람들 주변으로 끌고 가서 조용히 말하며 그를 고쳐 주시지 않으셨고, 모든 사람이 보는 가운데 그 일을 행하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참 바보스럽습니다. 왜 굳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일까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5절을 보십시오 ‘네 손을 내밀라’ 그리고 그 손을 고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의도대로 해 주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는 사람들이 쉽게 범하는 실수가 있습니다.
그들의 의도를 알고는 그들의 의도를 역이용해서 그들을 칩니다. 그리고 통쾌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그것이 과연 주님의 뜻’입니까?
라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입니까? 다른 사람의 의도에 대한 나의 태도는 어떠해야 할까요?
그 의도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그 의도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대한 나의 태도는 ‘내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서 있는가’ 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 안에 주님의 길 가운데 서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의도와 무관하게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길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안식일에도 선을 행하는 것이고, 생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고 죽는 것에 나의 이익이나 불이익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 순간에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길을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늘 그러셨습니다.
“예수님을 판 가롯 유다가 주님을 잡기 위해서 겟세마네 동산을 로마
병사들과 함께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 분이 예수님이라는 표징으로 주님께 와서 ‘랍비여’ 하고 이마에 키스를 합니다. 이 행위는
벌써 로마 병사들과 짜 놓은 시나리오입니다. ‘내가 이마에 키스하는 자가 예수니라’ 그래서 그는 주님을 보고 주님께 이마에 키스를
한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어떻게 했을까요? 그런 가증한 행위를 하는 자를 향해서 손을 들어서 뺨을 쳤을 것입니다. ‘내가 너를 그렇게 가르쳤니?, 이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아니면 저주를 내뱉어 줄 것입니다. ’
그러나 주님은 그의 키스를 받으셨습니다. 그의 의도를 다 아시고도 말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바로 그 길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길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변의 어떤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이 나를 모함하고, 나를 위험 가운데
빠지게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늘 주님의 뜻 안에 서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십자가의 길에 서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시험에 빠지지 않는 모습이며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당당한 모습입니다.
늘 주님의 뜻 안에 서 있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오늘 주님은 손이 마른 자를 향해서 ‘네 손을 내밀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의 아픔을 내 앞에 내어놓으라는 것입니다.
너의 상처와 너의 부족함을 내게 내어 놓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진정으로 주님 앞에 내어 놓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말라버린 가슴입니다. 말라버린 영혼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마음, 영혼, 다른 사람을 향해서 긍휼히 여기지 못하는 마음, 우리 마음은 말라 버렸습니다.
그 마음을 내어 놓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손 마른 자처럼 우리들의 말라 버린 마음을 주님께 내어 놓을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 지라" 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한편 손 마른 사람' 그는 아주 심한 장애자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생각은 할 수 있었지만
그의 손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손이 말라 있었기 때문입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 가셨다가 한편 손이 마른 사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이
한편 손 마른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사실 거기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는 예수님이 한편 손 마른 사람을 고쳐 주시는가 안
고쳐 주시는가 엿보고 책잡기 위해서 온 바리새사람 몇이 있었습니다. 그런 환경 가운데 예수님께서 들어가셔서 손
마른 사람을 향하여 그 자리에서 일어서라고 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났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고 회당에 모인 사람들을 향하여 물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잠잠히 있었습니다.
성경에 기록한 대로 그 당시 바리새 사람들의 마음이 매우 완악한 것을 근심하셔서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 한편 손 마른
사람을 향하여 하시는 말씀이 "네 손을 내밀라" 하셨습니다. 물론 그 사람이 자기의 마른손을 그냥 내밀 수는 없었습니다. 그
동안 마음으로는 내밀고 싶었지만 손이 말을 듣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명령 따라 순종하고 내밀었더니 말라서 움직이지
않던 손이 힘을 얻어 앞으로 내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이 사람이 얼마나 놀랐을까요? 얼마나 감격했을까요? 얼마나
좋았을까요? 이 광경을 본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줄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 보세요. 손이 말랐던
사람이 그렇게 기뻐하고 좋아하는데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바리새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오히려 분이 가득해서 나가서
헤롯왕과 함께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하고 모의를 했다고 했습니다. 정말 이해하기 힘든 세상입니다. 병을 고침 받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안식일에 병을 고쳤다고 병고친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안식일에 회당에 오셔서 두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는 바리새 사람들의 잘못된 신앙을 시정하셨습니다. 다른 하나는 한편 손이 말라서 불행하게 지내는 사람의 마른 손을 고쳐서 온전한 손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이 시간 우리 가운데 계신 줄 믿습니다. 두 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일지라도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주님께서 오늘 우리 가운데 오셔서 여기 모인 우리에게 역시 두 가지 일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바리새 사람들이 그릇된 신앙을 시정하셨습니다. 바리새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바리새 사람들의 인상은 아주 악하고, 나쁜 사람이고, 외식하고, 교활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편견이지 바리새사람을 바로 알고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리새 사람들은 본래 율법을 열심히 읽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데도 보통 사람이상으로 열의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율법을 지킬 때 문자 그대로 모든 계명을 엄격하게 지키기를 힘쓴 것입니다. 가령
안식일을 지킬때도 넷째 계명에 써 있는 글자 그대로 지키려고 애썼습니다. 넷째 계명에 보면 그 날은 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남종이나 여종이나 누구를 막론하고 일을 시키지 말라고 했습니다. 심지어 집안에 유하는 손님이라도 일을 시키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 사람들은 안식일을 지키는데 문자 그대로 절대 무슨 일을 하지 않고 지키기를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바리새 사람들은 이렇게 율법을 문자대로 지키려고 힘쓰고 그대로 살려고 노력하다 보니까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처럼 살지 않게
되면 하나님을 잘못 섬기는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한번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걸어가다가 배가 고프니까 밀
이삭을 따서 비며 먹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밭의 밀이라도 배가 고플 때 이삭을 비벼 먹는 것은 율법이 허락해 주니까 죄로
인정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엄격한 문자주의자인 바리새 사람의 눈으로 볼때는 이삭을 비비는 것은 곧 타작하는 것인데 이것은
안식일에 일하는 것으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일을 하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 바리새
사람들의 이론이었습니다. 문자의 뜻만 알고,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는 그 근본 원리는 깨달아 알지 못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문자에 얽매어 사는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병자를 불쌍히 여겨 병을
고쳐주시는 것도 율법을 범하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날도 많은 사람 가운데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왔으니까 예수가 과연 안식일을 범해서 저 사람의 병을 고쳐주나 안고쳐주나 보고자 한 것입니다. 만일에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면
이것은 안식일에 대한 규례를 어기는 것이니까 그들을 정죄 할 수밖에 없는 이단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선입주견이라고 하는
것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여러분, 율법을 읽는데 문자에 표현된 그 뜻만 알고 그 뒤에 있는 율법의 정신을 잊어버리는 것을 보통으로 말해 문자주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고 하는
그 말 하나만 알았지 왜 일하지 말라고 하고, 무슨 이유로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정해 주셨는지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할 것이
무엇인지는 몰랐습니다. 다시말하면 이런 문자주의를 따르는 사람들은 모든 계명 배후에 있는 보다 더 깊은 의미와 원리 그리고 그
근본정신을 몰랐습니다. 여기서부터 바리새 사람들이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하면서도 잘못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바리새 사람들은 율법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해 가면서 누구든지 그대로 좇지 아니하고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다 잘못되었고 소위 이단이라는 판단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의견이 꼭 옳고, 우리의 해석이 절대로 틀림없다'라고
생각하는 이런 사상적 경향을 무엇이라고 말하는고 하니 독선주의하고 합니다. 영어로 self-righteousness라고 합니다. 이런 독선주의 사상을 가지고 바리새 사람들은 예수님의 하시는 일도 율법을 범하는 잘못된 사람 그러니까 이단이라고 판단을 내린 것입니다.
그 결과 바리새 사람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근본정신을 잊어 버렸을 뿐더러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 그 불쌍한 사람의 병을
고쳐 준 것에 대해서 기쁘고 감사하다는 생각은 하나도 없고 안식일에 일을 했다는 그 생각에만 사로 잡혀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정죄하기까지 된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바리새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나가서 헤롯왕과 의논을 했습니다.
헤롯왕은 근본적으로 모세의 율법을 대부분 믿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과 나가서 무슨 의논을 했어요?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는 모함을 했습니다. 언제요? 바로 안식일에 그런 의논을 했습니다. 분명히 들으세요. 사람이 독선적 신앙을
가지게 되면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라고 정죄하면서 사람 죽일 의논하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독선적인 신앙을 가지면 이처럼 조그마한 일로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안식일에 모의하게 됩니다.
더구나, 율법을 믿지도 아니하는 헤롯왕과 공모해서 죽이기를 의논하는 그 자체가 안식일을 범하는 얼마나 큰 죄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문자주의는 독선주의를 낳았고, 독선주의는 맹목적 신앙을 낳아서 사람들의 마음이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완악해진 것입니다. 결국 그들의 신앙은 도덕까지도 무시해서 사람을 죽이려고 음모를 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바리새 사람들이 처음에는 그렇게 악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열심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열심의 방향이 잘못 정하게 되어서 문자주의자가 되고 문자주의자가 독선주의자가
되고, 독선주의자가 맹목적 신앙주의자가 되어서 심지어 도덕까지 무시하는 신앙으로 들어가게 될 때 그 인자하신 주님께서도 그런
사람을 마음 아프게 보셨고 노하심으로 보셨습니다. 그래서 사복음서를 보면 가장 철저하게 책망하고 공박한
대상은 바리새 사람들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이처럼 왜곡되고 잘못된 길로 나아가면 그야말로 자기자신을 망칠뿐더러
그런 사람이 민족과 교회의 지도자가 되면 민족과 교회를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의
누룩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리새 사람의 누룩을 삼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바리새사람의 잘못된 신앙을 시정하시고 다음에는 손 마른 사람의 손을 고쳐 주셨습니다. 신앙성경의 외경 가운데 히브리인의 복음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이 손마른 사람은 본래 돌을 다듬는 일을 하는 석수(石手)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오른 손이 말 라버렸습니다.
신경이 죽고 혈맥이 통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석수일을 할 수 없게 되니까 빌어먹을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회당에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 그 말라버린 오른 손을 고치고 싶은 마음에서 회당에 들어 왔다고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 내용이 얼마나 사실에 가까운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다가 손이 말라버려서 손이 있기는 하지마는 쓰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회당에 오셔서는 언제나 이와 같이 사람을 고치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지체 중에 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의 이 손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 을 하려 할 때 이 손이 없이 할 일은 거이 없습니다.
농사하는 사람은 손으로 밭을 갈고, 손으로 씨를 뿌리고, 손으로 김을 매고, 손으로 추수를 합니다. 공장에서 물건을 만드는 것도 손으로 만듭니다. 집을 짓는 사람도 손으로 집을 짓습니다. 의사는 손으로 수술을 합니다. 간호사는 손으로 붕대를 감습니다. 미술가는 손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음악가는 손으로 악기를 연주합니다. 손 없이 할 일은 없습니다. 이 손이 얼마나 보배로운지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석공의 손이 말라 버렸습니다. 손으로 일하던 사람이 손이 말라버렸으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끔 되었습니다. 아무
쓸모없이 되어 버렸습니다. 결국 빌어먹는 가련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물론 이 자리에 실제로 손이 마른 분이 계시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의미에서 보면 내 손이 마르지 않았습니까? 사실 우리는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마른손의 장애를 가지고 있고 그 때문에 자신과 투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좋은 생각은 있지만
행동에 옮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꿈을 꾼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린드 버그는 대서양을 횡단하기 전에 그는 그것을 꿈꾸어
왔습니다. 토마스 에디슨은 머릿속에 언제나 전등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위대한 행동은 우리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나 꿈을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것은 실패입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을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행동에 옮기고 싶은
것이 얼마나 있습니까? 아직 기회를 얻지 못했다면 또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이러한 변명은 손이 말라서라는
말입니다. 생각은 좋은데 행동에 옮기지 못합니다. 이렇게 손 마른 사람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한 가운데 일어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병자의 충분한 주의력을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마른손에 대해서 말씀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묻지 않으셨습니다. "네 손을 내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혼자 힘으로
행동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여러 번 손을 써 보려 애써 보았지만 할 수 없었습니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할 수 있다는 생각과 할 수 없다는 생각이 함께 있습니다. "해야지"하고 말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 "너는 할 수 없어"라는 외침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힘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에게 "네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확신에 주의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이 과연 할 수 있을까하는 의심을 품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너는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까지 그는 손을 펴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믿음과 그의 믿음이 일치하는 순간 전에 할 수 없었던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러 번 "네 손을 내밀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러나 돌아서면 망설이고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우리는 옳은 일을 계획합니다. 언젠가는 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힘만 믿는 한 결코 그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손이 말라 있기 때문입니다. "네 손을 내밀라" 주님의 능력은 우리에게 행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그래서 이 손으로 봉사 할 수 있게 하십니다.
아버지가 두 아들을 향해서 하는 말이 "얘들아,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포도원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다 이 포도원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일해야 할 손이 있습니까? 손은 있지만 일
할 수 없는 손 마른손이 아닙니까? 과연 신령한 의미에서 내 손이 주님의 일을 하며 다른 사람을 봉사할 수 있습니까? 주를
위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손이 있습니까? 주를 위해서 교회를 받드는 일을 할 수 있습니까? 교회학교에서 봉사 할 수
있는 손이 있습니까? 구역에서 봉사할 수 있는 손이 있습니까? 성가대에서 봉사할 수 있는 손이 있습니까? 불쌍한 사람들
도와 줄 손이 있습니까? 영적으로 마른손을 가진 분은 없습니까? 어떤 분은 지방에서는 열심히 봉사했는데 서울에
와서 봉사의 손이 마르지는 않았습니까? 결혼 전에는 열심히 봉사했는데 결혼 후에 봉사의 손이 마르지 않았습니까? 청년
시절에는 열심히 봉사했는데 장년이 되면서 사업이 커지고 바빠지면서 그만 그 손이 말라 버리지는 않았습니까? 몇 해 전까지
만해도 주의 일을 잘 했었는데 금년에 와서 그만 그 손이 말라 버린 분은 안 계십니까? "네 손을 내밀라" 마른손을 주님앞에 내어 밉시다. 그래서 주님의 새로운 은혜와 능력을 받아서 일할 수 있는 손, 봉사할 수 있는 손을 가지시고 이 자리를 떠나시기 바랍 니다.
그리고 이 손은 예나 지금이나 기도하는데 많이 사용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내가 성소를 향하여 손을 들고 부르짖나이다"
라고 말씀했습니다. 옛날에는 기도할 때 손을 들고 기도했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대로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로
인도해 나올 때 아말렉 사람들이 와서 이스라엘과 싸웠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군대를 거느리고 아말렉과 싸울 때 모세는
높은 산에 올라가서 두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오래 기도하다 보니까 손이 피곤해서 손을 내렸습니다.
그랬더니 아말렉사람에게 여호수아의 군대가 불리해진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를 지켜보던 아론과 훌이 그 옆에 가서 모세의 두 손을
부축해서 계속해서 손을 들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 기도할 때 이스라엘 군대가 완전한 승리를 얻게 된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손을 모둡고 기도합니다. 손은 기도의 상징입니다. 우리의
기도의 손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기도의 손이 혹시 마르지는 않았습니까? 지금이야말로 모세가 두손을 내릴 수 없어던것과 같이
오늘 우리 한국의 예수 믿는 사람들도 문자 그대로 두손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왜요? 우리는 전쟁 가운데 있습니다. 부정과
부패와의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아말렉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손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아침과 저녁으로 여러분의
기도의 손이 하나님의 보좌를 향해서 올라갑니까? 수요 기도회 시간, 심야기도회 시간에 여러분의 손이 하나님을 향해 올라갑니까?
전에는 열심히 기도했는데 요사이는 그 기도의 손이 마르지 않았습니까? 우리 주님은 보시고 아십니다. 그런 손을 향하여 주님께서 이 시간 말씀하십니다. "네 손을 내밀라" 주님앞에 그 손을 내미세요. 그리고 그손에 새 힘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졸 때가 아니고 깨어 있어 기도할 때입니다. 더구나 이 손은 성도가 서로 교제하는데 씁니다.
갈라디아 2장 9절에 보면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예루살렘에 있는 지도자들과 같이 의논할 때에 그 경험을
기록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옛날 번역에 보면 오른손을 주어서 교제를 하였다 했고 우리가 읽은 성경에는 교제의 악수를 했다고
하였습니다(the right hand of fellowship). 교제의 악수, 성도들이 서로 가까이 사귈 때 그
표로써 서로 악수를 합니다. 손에 손을 잡고 악수를 합니다. 이 손은 성도의 교제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 다락방에서
기도하실떄 간절히 기도하신 제목 가운데 하나는 주를 믿는 사람이 다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 하셨습니다. 서로 다투지 말고
주를 믿는 사람이 다 아버지와 주예수께서 하나가 된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에베소서 4장에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굳게 지키라고 권면했습니다.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성령이 하나 되게 한 것을 굳게 지키라고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손에 손을
잡고 주안에서 하나되는 생활을 하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꼭 같아야 한다는 말입 니까? 그럴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됩니다. 우리는 서로가 다르면서도 서로가 존중히 여기면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퍽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주안에서 하나 된 것을 잊어버리고 이 성도의 교제를 끊으려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교회 성도님들 사이는 말할 것 없고 다른 교회라도 세계 어느 곳에 있든지 참으로 주님을
믿는 성도들과 서로 연락하고 교제를 갖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섬김을 위한 손이 무엇일까요?
기도하는 손 - 앨버트 듈러의 기도하는 손의 그림의 배경 이야기
화가의 꿈을 가진 두 청년이 있었는데 둘은 너무 가난해서 일을 하면서 그림을 배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주인공 뒤러의 친구 또는 동생 또는 형님이 뒤러에게
내가 돈을 벌어서 네 학비를 댈 테니 네가 열심히 그림을 배워서 나중에 성공하면 그때 내가 그림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학비를 대줘
뒤러는 미안했지만 그렇게 합의를 보고 열심히 미술 공부에 전념했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 또는 동생 또는 형님은 뒤러를 위해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뒤러는 성공한 화가가 됐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친구 또는 동생 또는 형님을 만났는데 그만 눈물을 펑펑 흘렸습니다. 일한다고 너무 고생한 나머지 손 마디가 휘어서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 친구 또는 동생 또는 형님은 뒤러를 보고 반가워하며 이렇게
기도했다지요.
하나님 저는 이제 그림을 그릴 수 없으니 제 친구 또는 형님 또는 동생 뒤러가 부디 더 성공한 화가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시 한 번 감동의 눈물을 흘린 뒤러는 그의 기도하는 손을 그렸고 명언을 남겼습니다.
기도하는 손이 가장 깨끗한 손이요 가장 위대한 손이요 기도하는 자리가 가장 큰 자리요 가장 높은 자리로다
알브레히트
뒤러는 1471년 독일의 남부 뉘른베르크 Nuerenburg에서 14 또는 18 형제자매 중 둘째 또는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애들 겁나 많죠? 아버지는 알브레히트 뒤러 아빠 Albrecht Durer the Elder로 이름이 같은데 헝가리 출신입니다. 성 뒤러는 원래 Türer 인데요 헝가리어로 Ajtósi, 헝가리어를 찾아보시면 문을 만드는 사람, 즉 아주 성공한
세공사였습니다. 그래서 애들도 많이 키울 수 있었겠죠?
알브레히트 뒤러의 대부는 엄청 유명한 안톤 코버거 Anton Koberger입니다. 안톤 코버거 성경을 출간한 엄청난 갑부 인쇄업자였습니다. 조금 실망인가요? 그
덕에 뒤러는 교육도 잘 받았고 네덜란드, 프랑스, 이탈리아 등으로 유학도 다녀왔습니다. 몇 번씩이나 말이죠. 뒤러는 20대에
이미 유명인사가 됐습니다. 두 번째 이탈리아 유학 중에는 원근법과 기하학, 신체 비율 등 엄청 체계적인 미술을 공부했습니다. 이때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만났던 것 같기도 하고요. 피렌체의 수학자 루카 파촐리 Luca Pacioli도 만난 것 같고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거장들로부터 제대로 배웠던 것 같습니다.
뒤러가 그린 기도하는 손은 1508년, 즉 37살에 그린 드로잉으로 원래 제목은 Studie
zu den Händen eines Apostels 독일어를 모르지만 사전 뒤적거려보니 사도의 손에 대한 연구로 해석이 되네요.
두 번째 이탈리아 유학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그렸습니다. 뒤러는 이 손을 파란 종이에 검은 잉크로 그렸는데요 이 작품은
곧바로 인쇄가 되었고 유럽 전역에 널리 퍼지게 됐습니다. 원작을 좀 더 자세히 보면 파란 조이는 원래 파란 종이가 아니라 뒤러가 파란 칠을 했는지 직접 만든 파란 종이입니다.
뒤러의 기도하는 손은 그가 전에 그렸던 다른 작품에서 똑같은 손 모양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너희가 곧 내 손이니라!
제2차 세계 대전으로 한 도시가 폭격을 당하면서 커다란 예수 그리스도의
동상이 크게 파손됐습니다. 잔해 속에서 동상을 찾은 주민들은 슬픔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 동상은 그들의 신앙과 그들 삶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내던,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상징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전문가들은 동상을 대부분 복원해냈지만 손은 너무 심하게 파손되어 복원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조각가를 고용해서 새로운 손을 만들자고 제안했지만 사람들은 그대로 놔 두고 싶어했습니다. 전쟁의 비극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결국 동상은 손이 없는 채로 남았습니다. 하지만 주민들은 예수 그리스도 동상 발판에 다음 한
마디 말이 적힌 푯말을 세웠습니다. “너희가 곧 내 손이니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손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심오한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구주에 대해 생각할 때 저는
손을 내미시는 모습을 상상합니다. 위로하고 치유하고 축복하며 사랑하기 위해 손을 뻗으시는 모습 말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신 적이 한 번도 없으십니다. 그분은 겸손하고 온유한 이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사람들 가운데에서 걷고 보살피시며 희망과
구원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분께서 필멸의 삶 동안 하신 일이며, 오늘날 우리 가운데서 살아 계시다면 하실 일입니다. 이는 또한 그분의 제자이자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회원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구주께서 보이신 완벽한 모범을 따를 때, 우리 손이 구주의 손이 되고 우리 눈이 구주의 눈이 되며 우리 마음이 구주의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손으로 감싸 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소금이며 빛입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여파로 독일은 분단되고,
황폐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병들고 죽어갔습니다. 저는 솔트레이크시티에 있는 교회에서 보낸 식량과 의복이 담긴 인도주의
물자들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지금까지도 저는 그 옷에서 나던 냄새와 복숭아 통조림의 달콤함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그런 물품 때문에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회원들은 그런 개종자들을 깔보기도 했습니다. 비아냥거리며 Büchsen Mormonen, 즉 “통조림 몰몬”이라 부르면서 증오했는데 그런 신회원들은 세상적인 필요 사항만 해결되면 교회에서 떨어져 나갈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몇몇은 정말 교회를 떠났지만, 많은 이들이 남았습니다. 그들은 교회에서
복음의 달콤함을 맛보았으며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의 품에 안겨 따스함을 느꼈습니다. 참으로 그들은 “집”을 찾았습니다. 서너
세대가 흐른 지금, 많은 가족들이 교회에 들어온 유래를 찾다 보면 그때 그 개종자들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자녀를 환영하고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복장이나
외모, 말투나 행동이 조금 다르더라도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를 모자란 사람으로 느끼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주위에 있는
그런 사람들을 북돋아 줍시다. 환영하는 손길을 내밉시다. 교회 안에 있는 우리 형제 자매들에게 인간미와 연민과 사랑을 특별히
듬뿍 부어 주어 그들이 마침내 집을 찾았다는 느낌을 받게 합시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려는 유혹이 들 때면 “세상을 사랑하사 모든 사람을 그에게로 이끄시려 자기 목숨을 버리기까지 하[신]” 구주를 기억합시다.
“그는 이르시기를, 너희 모든 땅 끝이여, 내게로 오라 …… 모든 사람이 서로 같은 특권을 가졌나니 아무도 금지 당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경전을 읽으면서 저는 구주께서 가장 혹독하게 꾸짖으신 대상은 주로 자신이 부유하고 권세 있으며 의롭다고 착각하여 자만심으로 가득했던 사람들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주께서는 기도하러 성전에 간 두 남자의 비유를 가르치신 적이
있습니다. 존경받는 바리새인이었던 한 남자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한 남자는 미움을 받던 세리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에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사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자비가 필요합니다.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대에 불려갔을 때 자신이 저지른 수많은 결점들에 대해 용서받고 싶지 않습니까? 구주의 품에 안기기를 열망하지 않으십니까?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다른 사람을 위해 베풀 줄 안다면 참으로 옳고 타당한 일입니다.
우리의 개인 생활이나 세상에서 죄를 수용하거나 악을 경시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때로는 열정이 지나쳐서 죄와 죄인을 혼동하고 성급하고 매몰차게 판단할 때가 있습니다. 현대 계시를 통해 우리는
“영혼의 가치가 하나님 보시기에 큼”4을
압니다. 우리가 우주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듯이 다른 영혼의 가치를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아버지께 참으로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그 사실을 이해하면 주위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조금씩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련과 슬픔으로 가득 찬 세월을 겪은 한 여성이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오래 된 20달러짜리 지폐와 같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구겨지고 찢어지고 더럽고 헤지고 흠집이 났죠. 하지만
이래 봐도 20달러 지폐예요. 아직 가치가 있죠. 그렇게 안 보이고 닳고 해졌더라도 제게는 여전히 20달러만큼은 가치가 있는
거예요.”
우리의 손은 위로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을 마음에 새기고, 연민을 품은 채 우리의 마음과 손을 사람들에게
내밉시다. 모든 사람은 각기 나름대로 어려운 길을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사람을
판단하기보다 지지하고 치유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슬퍼하는 이들과 함께 슬퍼하고,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로하라는
계명을 받았습니다.5
고통 받는 사람을 보며 그 사람은 그럴 만 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기독교인으로서 합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부활절 안식일은 구주께서 우리 모두가 짊어진, 심지어 고통 받아 마땅해 보이는 사람들의
고통과 고난과 질병까지도 기꺼이 짊어지셨다는 사실을 기억하기에 좋은 날입니다.6
잠언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느니라”7 사랑이 끊어지지 않게 합시다. 특히 위급한 상황에 처할 때 형제와 자매들 곁에 있어 줍시다.
우리의 손은 봉사할 수 있습니다
유태인 전래동화에는 같은 밭을 함께 일구던 아브람과 짐리라는 두 형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일과 수확량을 공평하게 나누기로 했습니다. 추수가 끝날 무렵, 짐리는 밤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아내와 일곱 아들을 부양해야만 하는 형이 수확량 중 절반만 가져가는 것이 불공평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혼자 사는 자신이 너무
많은 양을 차지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짐리는 옷을 입고 조용히 밭으로 나갔습니다. 자신이 수확한 곡식단 중에서 1/3을 가져다 형의 곡식단에 얹어 두고는 옳은 일을 했다는 뿌듯한 마음으로 침대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러는 동안에 아브람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혼자
살며 일을 거들어 줄 아들도 없는 가난한 동생 짐리가 걱정되었기 때문입니다. 혼자서 그토록 열심히 일한 짐리가 수확량 중에서
절반만을 가져가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아브람 생각에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조용히 밭으로 가서 자신이 수확한 곡식단 중 1/3을 가져다가 사랑하는 동생의 곡식단에 얹어 두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밭으로 간 두 형제는 둘 다 자신의 곡식단이 전과 같아
보여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두 형제는 그날 밤에 슬그머니 집을 빠져 나와서 전날 밤에 했던 일을 되풀이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서로를 발견하고 말았습니다. 형제는 서로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사랑과 고마운 마음이 복받쳐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연민의 정신입니다. 타인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고9타인의 행복을 추구하며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사람들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실천이 필요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실천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루 종일 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노래하는 편지나 시를 쓸 수도 있고, 사랑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를 수도 있으며, 사랑을 촉구하는
설교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을 행동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그 말은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 11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사랑에 대해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일생에 걸쳐
매일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군중을 피하신 적이 없습니다. 사람들 가운데 거하시며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가가셨습니다.
잃은 자들을 구출하셨습니다. 사랑으로 다가가라는 공과를 가르치기만 하고 실천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지는 않으셨습니다. 가르치기만
하신 게 아니라 또한 “약한 자를 [돕고] 처진 손을 일으켜 세우며, 연약한 무릎을 강건하게” 12하는 방법을 직접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완벽하게 보살피는 방법을 아십니다. 구주께서 내미신 손길에 닿은 사람들은 고양됩니다. 그 결과, 더 훌륭하고 강하고 나은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그분의 손이라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손은 구주의 손입니다!
구주께서는 사랑을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인
큰 계명이라 말씀하시며 우리의 생활, 가정, 지역 사회, 조국에서 추구할 분명한 우선 순위를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예쁘고 좋은 것들, 율법, 그리고 할 일을 적어 놓은 목록에만 마음을 빼앗기며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큰 계명을
소홀히 여긴다면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이며,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마치 바람에 날리는 물 없는 구름이나 열매 없는 나무일
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저 알맹이 없이
그분의 교회라는 껍질만 걸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우리의 가르침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랑이 없다면 선교 사업이나
성전 사업 또는 복지 사업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영을 창조하신 동기는 사랑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우리 죄를 대속하시도록 구주를 겟세마네 동산으로 이끈 힘도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은 구원의 계획을 이룩한 위대한 동기입니다.
행복의 근원이자 영원히 솟아나는 치유의 샘이며, 귀중한 소망의 분수입니다.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으로 사람들에게 우리 손과 마음을 내밀면 우리에게도 아주 훌륭한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 영이 치유되고 더 깨끗해지며, 강해집니다. 더 행복해지고 평온해지며, 성령의 속삭임에 마음을 더 활짝 열게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마음과, 그리고 그분의 아들을
선물로 주신 것을 제 온 마음과 영혼을 다하여 감사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모범, 흠 없고 비이기적인 희생에 감사드립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에 머물지 않으시고 무덤에서 일어나셨다는 사실이 기쁩니다! 그분은 살아계시며 그분의 권세와 복음을 인간에게
회복하고자 지상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어떤 남자와 여자가 되어야 할지를 완벽한 모범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요한복음 11: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돌을 옮겨 놓으라’ 말씀하셨지 죽은 오라비를 살려내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마르다가 말했습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부활이요 생명이신 분으로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중동의 더운 날씨 때문에 시체가 이미 부패하여 썩는 냄새가 나오자 믿음의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 4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며,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부활생명으로 믿으면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이다’는 뜻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부활이요 생명이었지만 이것이 드러나려면 믿음의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날에도 이미 부활이요 생명이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이것이 드러나려면 우리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마르다는 순종하여 돌을 옮겨 놓았습니다.
예수님은 눈을 들어 우러러 하늘을 보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신 것을 감사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기도는 둘러선 무리를 위한 것인데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을 믿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려면,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나려면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불신의 돌을 옮겨 놓아야 합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제가 이
말씀을 고시공부를 하는 가운데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가졌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했습니다. 현재 제 마음속에는
불신의 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이 시간 불신을 회개하고 불신의 돌을 옮겨 놓습니다. 제가 이 불신의 돌을 옮기고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보게 하실 줄을 믿습니다
봉사하는 손 - 토요일마다 교회 화장실을 청소하는 어느 교수 부인의 이야기
교제하는 손 - 주 일회 지역 사회의 어려운 집에 반찬을 만들어 제공하는 이야기
나는 어떤 손을 내밀어야 할까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손 마른 사람에게 그 손을 내밀라고 하셨을까? 왜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을까?
죽은 사람을 살리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셨던 예수님께서 그까짓 돌을 옮길 수 없으셨는가? 손 마른 사람의 손을 당장 정상으로 회복시킬 수 있으셨던 예수님께서 왜 그 손을 내밀라고 하셨는가? 능력을 경험하려면 먼저 내가 해야 할 몫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해야 할 몫이란 다른 사람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이지만 내가 해야 할 몫을 내가 해야만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 내가 해야 할 몫이 무엇인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해야 할 몫까지 주님이 해 주실 것을 기대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요행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능력의 은혜는 나의 몫에 따라 나타날 것입니다.
좋은(2570) καλός, ἡ, όν
καλός, ἡ, όν스트롱번호2570
1. 아름다운, 2. 좋은 유용한, 3. 흠이 없는
발음
/ 칼로스(kalŏs) 어원 /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좋은(마3:10, 막4:8, 요2:10), 아름다운(마7:19), 착한(마5:16), 마땅한(마15:26), 나은
(마18:8,9, 막9:45), 선한(요10:11, 고후8:21, 딤전1:8), 옳은(고전5:6), 잘하는(딤전3:13),
유익을 얻는(히13:9) 신약 성경 / 101회 사용
아가도스(18) ἀγαθός, ἡ, όν
아가도스(18) ἀγαθός, ἡ, όν
1. 선한, 2. 적합한, 3. 완전한
발음
/ 아가도스(agathŏs) 관련 성경 / 선(마 5:45, 롬 2:7), 물건(눅 12:18,19), 선행(행 9:36), 양심(행 23:1). [형]
선한(마 12:34, 19:16, 눅 6:45, 골 1:10), 좋은(마7:11, 눅 1:53, 요 7:12), 착한(마 25:21,
고후 9:8) 신약 성경 / 102회 사용
αγαθος아가도스의 선함이 하나님과 관계 맺는 인간 삶에서 펼쳐지는 행위를 통해 발견되는 비중이 더 크다면, καλος칼로스로서의 선함은 선함의 궁극인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에게 발견되는 발견체 자체로서의 존재론적 의미에 좀 더 할애된다.
칼로스와 아가도스 그리고 토브와 라아(선악이 아닌 좋음과 나쁨)
좋은(아가도스) 나무가 나쁜(포네로스)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칼로스)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 7:18)
아가도스와 칼로스의 관계를 조금만 더 살펴봅니다. 좋은(아가도스) 나무에서 아름다운(칼로스)의 열매가
맺힙니다. 여기서 아가도스는 칼로스의 근원이고 기둥입니다. 아가도스의 토대에서 칼로스가 드러납니다. 비유컨대 우리는
아가도스(좋은) 나무여야하고 거기서 맺히는 열매는 칼로스(아름다운)한 열매여야 합니다.
여기서 살펴보면 칼로스는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은 사람들의 결과물이라는 것은
타당합니다. 칼로스는 같은 말이라도 말을 듣는 사람의 상태에 따라 그에게 적합한 말을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칼로스 한 말이고 또
칼로스 한 열매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말이라 하더라도 상대의 상태에 따라 적절한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일컬어
칼로스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식과 교리, 그리고 율법과 옳고 그름은 상대의 상태나 형편과 상관없이 오로지 지식 그 자체만을 주장하고 드러내려
합니다. 이는 도리어 카코스합니다. 즉 말은 맞는 말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분명 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칼로스 하지 않고
카코스 하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칼로스와 카코스를 분별하는 사람은 고착되어 있지 않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어린아이에게 하는 말이
다르고 어른에게 하는 말이 다릅니다. 비록 다르지만 다르지 않습니다. 단단한 음식을 먹고 지각을 사용하는 이들의 몫입니다. 여기서
지각이라 함은 성숙한 센스요, 지성적이고 직관적인 판단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칼로스의 바탕에는 아가도스가 있어야 비로소 가능합니다. 따라서 아가도스가 ‘좋음’이라고 한다면, 칼로스는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번역 성서에는 아가도스도 칼로스도 good으로 번역하고 있고 그 의미를 크게 구분하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 그 뉘앙스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토브와 라아 이야기입니다. 히브리어 토브는 헬라어 아가도스가 그 상응어라 했는데, 그것은 제가 잠시
착각해 바꾸어 말한 것으로 아가도스가 아니라 칼로스로 바로 잡습니다. 70인역은 토브를 아가도스로 번역하는 게 아니라
칼로스(Good)로 라아는 카코스(Bad)가 아니라 포네로스(evil)로 번역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됩니다. ‘토브 베라아’는
好惡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여기서 好惡를 좋아하거나 미워하는 것으로 본다면 그건 조금 적절하지 않다고 여깁니다. ‘좋음과
나쁨’이란, 나의 성향에 따라 좋아하고 미워하는 걸 말하기보다는 생명의 관점에서 그것이 생명에 좋으냐 아니면 생명에
해로우냐(나쁘냐)입니다. ‘좋음과 나쁨’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도리어 선악이라는 말보다 원의에 가깝다고 여깁니다.
문맥에 따라서 토브와 라아는 선악으로 볼 수도 있고, 좋음과 나쁨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창세기 2장은
선악과로 보기보다는 ‘좋음과 나쁨의 열매’로 보는 것이 창세기1장의 토브를 ‘좋았더라’라는 흐름에 맞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육신의 눈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 읽힐 수밖에는 없다는 점도 이해는 할 수 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냐, 좋음과 나쁨을 알게 하는 나무로 볼 것이냐는 독자의 예민한 선택의 문제이기도 할 것입니다만, 저는 후자로 보여집니다.
토브와 라아를 선악으로 보아야 하는 경우도 문맥에 따라 있을 것으로 여깁니다만, 성서의 전체를 천천히 살펴보고 탐색해봐야 할
과제로 남깁니다.
동시에 이 나무에서 맺히는 열매는 먹지 말라는 게 성서의 말법, 곧 문법입니다. 좋음과 나쁨은 양식으로 삼는 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생명나무의 열매를 양식으로 삼아야 한다는 게 창세기의 대선언이라고 여깁니다. 좋음과 나쁨의 지식 나무에서 맺힌
열매는 정신의 양식이 아니라, 그냥 좋으냐 나쁘냐를 분별하여 좋은 것을 취하면 되고 나쁜 것은 버리면 되는 것이지 그것이 정신의
자양분을 삼는 먹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읽습니다. 그런데, 인생이 그러냐는 것이지요. 처음 사람은 좋음과 나쁨을
나누는 지식의 나무에서 맺히는 열매를 양식으로 삼고 살더라는 게 에덴의 이야기며 인생의 실존이라는 것이지요.
한 술 더 떠 사람들은 이를 선악으로 환원해서 열매로 먹습니다. 정신의 양식으로 삼습니다. 삶의 지표와 목적으로
삼습니다. 좋음과 나쁨으로 사람을 대하며 선악판단하려 합니다. 선악에 경도되는 것이지요. 좋음과 나쁨을 통해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버리면 되는 것을 왜 좋음과 나쁨의 지식을 양식으로 삼는 것인지, 인생이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계기가 거기서
발생합니다. 지금도 동산 중앙에는 명증하게 이 두 나무가 우뚝 서 있습니다.
왜 그럴까.
우리의 이기적인 처음 사람은 아는 것이 힘이기 때문에, 정보의 확충을 통해 지배력을 강화시키려는 권력욕구가
합해져서 선악의 지식을 열매로 삼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권력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지식이기 때문이고, 바로 좋은 것과 나쁜 것에
대한 지식을 양식으로 삼는 다는 것이지요. 하여 그곳에서는 선과 악 옳음과 그름, 시시비비가 끊임없습니다. 좋음과 나쁨을 아는
나무도 동산 중앙에 있는 까닭은 그 열매를 먹으라는 뜻이 아니요, 분별하라는 뜻일 따름입니다. 분별하는 것과 먹는다는 건 전혀
다른 얘기입니다. 도리어 생명나무에서 맺히는 열매를 양식으로 삼으라는 게 성서의 논법입니다. 물론 동산의 각종 나물의 실과를 먹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요.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아이를 낳아서 키워본 어버이들은 이 관계를 조금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여깁니다. 생명나무에서 맺히는
생명의 열매를 먹으면 우리의 영혼과 정신은 맑아지고 힘을 얻습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은 분별해서 어린아이를 돌보고 잘 자라게
하는 데 사용할 뿐, 그걸 양식으로 삼지는 않습니다. 육신의 양식조차도 몸에 좋은 것과 몸에 해로운 것을 분별해서 해로운 것은
버리고 좋은 것을 취하는 데 사용될 뿐입니다.
그의 양식은 어린아이의 생명이 자라면서 맺히는 열매를 그 정신과 영혼의 풍성한 양식으로 삼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손자손녀를 바라보며 기쁨을 얻는 걸 보면, 그들의 양식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손주들에게서 맺히는 생명의
과실들을 양식으로 삼으며 기쁨을 얻습니다. 어머니의 육아에 대한 수많은 지식은 아이에게 무엇이 좋고 무엇이 해로운 가를 분별하기
위한 지식이고 정보일 따름이지, 아이에게 어머니의 권력을 행사하고 그 지식으로 우쭐하거나 아이를 지배하고 통솔하기 위해 소위
모권, 어머니의 권세가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어머니에게 있는 그 모든 권력과 권세는 오로지 자녀의 생명을 지키고 키우는
데 있는 것이지, 권력을 향유하고 자녀들에게 그것을 휘두르며 즐거워하라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모든 권력과 권세는 바로 생명을
낳고 키우는 모권이 그 원형이 아닐까 합니다. 부권은 사냥을 통해 아내와 자녀들을 먹여 살리는 것에서부터 형성된 것인데, 어느
세대나 경제력과 권력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아내와 자녀를 살리고 돌보기 위한 사랑의 권세에서 지배의
권세로 타락한 것은 좋음과 나쁨을 알게하는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거리로 삼고자 하는 정신의 타락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요? 곧
소유와 이기주의의 발동 때문일 것입니다.
권세의 의미가 바로 그 같은 것에 있다는 점을 처음 사람은 모릅니다. 좋음과 나쁨의 지식나무 열매를 먹거리로 삼는
삶에서는 결국 사망의 열매를 맺힐 수밖에 없다는 게 성서의 진단입니다. 오로지 생명을 양식으로 삼는 이들에 의해 이 같은 것이
드러나고 진단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지식의 열매를 먹지말고 생명의 열매를 먹거리로 살으라는 게 성서의 한결같은 메시지 아닐까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창 6:2)
해설이 필요한 부분이겠지만, 간단히 하면 여기 사람의 딸들은 가인의 계보에 속한 사람의 딸들이고
하나님의 아들들은 셋의 계보에 속한 자손들로 보는 것이 타당하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천사의 타락으로 보려는 견해들이 있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성서엔 두 계보 이야기가 뚜렷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들(셋의 후손들의
정체성)이 가인의 후손들의 딸을 보고 아름다움(토보트)을 느꼈다는 것에서부터 아담이 겪었던 에덴의 혼돈이 재발한 것은
아닐런지요. 거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의 영성은 육체(바살, 싸르크)가 되었다는 지적이니 즉,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인데 하나님의
보시기에 아름답던 그 아름다움이 아니라, 다시 말해 생명의 관점에서 토브 혹은 칼로스 한 것이 아니라 육신의 정욕의 눈으로
아름다워보였다는 것, 거기서 영의 생각은 육신의 생각과 결합한 것이고 홍수심판의 근인과 원인이 된 것은 아닐런지요.
이 이야기는
침례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단순히 문장에서 토브를 사용했다는 것만으로 해설할 수는 없다고 여겨집니다. 바울이 지적하는 대로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는 말씀과 연관해서 생각해보면 영의 생각과 육신의 생각이 혼합되고 결국 영의 생각이
육신의 생각에 편입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신으로 마치는 이야기의 대목과도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유사한 개연성이 있다는 것이지요.
06-10-2023(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가복음 4장 / 좋은 땅(20절)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배와 육십배와 백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Others, like seed sown on good soil, hear the word, accept it, and produce a crop--thirty, sixty or even a hundred times what was sown."
좋은(아가도스) 나무가 좋은(칼로스) 열매를 맺습니다. 좋은(칼로스) 땅에 뿌려진 씨앗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누구나 좋은 열매를 기대합니다. 좋은 열매를 기대하려면 먼저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나쁜 나무에서는 결코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나무를 사람에 비유한다면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좋은 사람이란 말씀을 듣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한국의 경우 1885년 4월 5일 미국의 두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셀러의 입국과 더불어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습니다. 선교 100년 만에 세계에서 최대의 부흥을 일켰던 나라가 되었습니다. 138년이 지난 지금의 한국 교회는 점점 약화되고 있습니다. 가장 빨리 부흥과 성장을 경험하였지만 또한 가장 빨리 쇠퇴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제가 생각하기에는 복음의 기초가 너무 약했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 이렇게 간단 명료하게 복음을 외쳤건만 이제는 그와 같은 외침이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조롱과 비웃음이 되고 있습니다. 자동차의 급발진 사고처럼 복음의 급발진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그 까닭은 아가도스의 좋음이란 상대적인 것을 말합니다. 상대적으로 한국은 외부로부터 너무 많은 침략을 받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가장 어렵고 힘들 때 예수를 믿으면 잘 살고 복받는다는 가르침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올 수 있는 아주 좋은 미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잘 살고 급성장하므로 해외여행을 즐기고 거리마다 집집마다 자동차의 물결이 넘쳐나게 될 때 경쟁적으로 좋은 것을 보여주려는 아가도스에 대한 사랑이 앞뒤 분별없이 더 크고 화려하고 멋진 것에 푹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정말 좋은 것은 칼로스입니다.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고유의 가장 좋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세상의 소금이 되어 나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지라도 세상의 빛으로 드러나는 복음의 핵심이 믿음의 본질이 될 때 좋은 아가도스의 나무가 좋은 칼로스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칼로스 열매를 위하여 땅에 떨어져 죽는 한 알의 밀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린 학생들에게 선생님이 물었습니다. “작지만 들어 있을 건 다 들어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한 아이가 손을 들고 대답했습니다. “씨앗이요!” 그렇습니다! 씨앗 속에는 정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작은 씨앗 속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고 대답하는 아이들의 지혜가 참 놀랍지 않습니까? 씨앗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씨앗을 심는다는 것은 매우 신앙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농부는 싹이 날 것을 믿고 씨앗을 땅에 뿌립니다. 그리고 오래 기다리지 않습니까? 아무리 서둘러도 소용이 없습니다. 싹이 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씨앗 속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지만 믿고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치 어린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기다리는 것처럼...
어떤 학자들은 마태복음 13장이 복음서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장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왜냐 하면 이 부분에서 예수님의 사역의 전환점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 초기에는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회당을 장악하고 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핍박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바닷가로 나가셨고 사람들은 해변에 모여들었습니다. 넓게 트인 자연을 교실로 삼아 가르치기 시작하신 예수님의 첫 번째 교육 방식은 비유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아마 이 비유의 말씀도 멀리 들판에서 씨를 뿌리고 있는 농부를 바라보시면서 하신 것 같습니다.
팔레스타인에 있는 밭들은 길고 좁은 이랑으로 되어 있고 그 이랑들 사이에 보통 길이 나 있습니다. 예수님이 길 가에 떨어진 씨앗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 이랑들 사이 길에 떨어진 씨앗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한 이랑에 씨앗을 뿌리고 다음 이랑으로 넘어갈 때에 길에 씨앗이 떨어지는데 그 씨앗은 싹이 트지 못합니다. 땅이 딱딱하게 굳어 있어서 뿌리를 내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말씀이 선포될 때에 듣기는 해도 마음은 굳게 닫아 버린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 씨앗은 새들이 와서 먹어 버립니다.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진 씨앗도 있습니다. 토양이 좋지 않은 땅처럼 마음의 여유가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싹은 나옵니다. 그러나 그 싹이 금방 말라 버립니다. 복음의 말씀을 쉽게 받아들이는 것 같지만 얼마 못 가서 신앙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세상 일을 할 때에도 유행을 따라서 요란스럽게 시작하지만 얼마 못 가서 그 열정이 식어버립니다. 한 가지 일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채 떠도는 사람들이 이외로 많이 있습니다.
가시떨기 위에 떨어진 씨앗도 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많은 유혹을 받아서 결실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너무 분주해서 실패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너무 분주해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또 기도하는 것조차 잊어버렸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끊임없이 일은 하지만 이룬 것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나무꾼 두 사람이 장작을 팼습니다. 한 사람은 종일 쉬지 않고 장작을 팼고 다른 사람은 일하고 쉬는 것을 반복했습니다. 결과가 어땠을 것 같습니까? 결과는 쉬면서 일한 사람이 훨씬 더 많은 장작을 팼습니다. 쉬지 않고 장작을 팬 사람이 묻자 지혜로운 나무꾼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쉴 때에 도끼날을 갈았다네.”
그렇습니다! 날을 갈아야 합니다. 일하다가 쉴 때에는 기도와 말씀 묵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신앙의 결실을 가로막는 가시떨기를 제거해야 비로소 씨앗이 자라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특히 가시떨기가 무엇인지 분명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마 13:22 하반절)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사로잡히면 싹이 나더라도 제대로 자랄 수 없기 때문에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 밭은 어떤 밭입니까? 길 가와 같이 교만한 마음 밭은 아닙니까? 뿌리 내리기 어려운 돌밭은 아닙니까? 온갖 염려와 유혹에 사로잡힌 가시떨기는 아닙니까? 분명히 말하지만 씨앗에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복음 그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우리의 마음에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 어른들은 여간 애쓰지 않으면 좋은 밭의 상태를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틈나는 대로 김도 매어 주고 비료도 충분히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상태가 아주 좋은 밭이 있습니다. 특별히 퇴비를 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런 마음 밭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어린 아이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요즘은 아이들이 더 무섭다고 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저희가 자랄 때에도 문제는 있었습니다.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의 문제란 결코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어른들이 하는 짓을 보고 배운 것이 아이들의 문제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여간 어린 아이들이라고 하는 좋은 땅에 복음의 말씀이라는 씨앗을 심을 것 같으면 반드시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교회 학교의 부흥이 단순히 교회 학교의 부흥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인천의 어떤 고등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아주 놀랄 만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학교 학생 중에 태도가 불량하고 또 난폭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학생은 평소에 다른 학생들을 많이 괴롭혔습니다. 그 학생은 몸도 건장하고 싸움도 아주 잘하기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괴롭힘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평소에 당하기만 하던 학생들 몇 명이 힘을 합해서 그 학생을 공격했는데 맨손으로는 안 될 것 같으니까 흉기를 가지고 공격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의 아버지가 보여 준 태도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교무실에 찾아온 그 학생의 아버지는 선생님들 앞에 무릎을 꿇고서 자기가 자식 교육을 잘못해서 결국 이런 일이 생겼다고 오히려 사과를 했습니다. 그리고 가해 학생들을 처벌하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사정했습니다. 선생님들과 학생들 모두가 크게 감동을 받았고 그 후 그 학생도 변화된 모습으로 무사히 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요즘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문제 학생은 없다. 다만 문제 학부모가 있을 뿐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풍성한 결실을 원합니까? 그렇다면 먼저 좋은 밭을 준비해야 합니다. 어른들이 어린 아이들에게 본이 되어야 합니다.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더욱 겸손해져야 합니다. 말과 행동에 있어서 본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어린 아이들의 옥토와 같은 마음 밭에 말씀의 씨앗을 정성껏 심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땀과 피와 눈물이 요구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둘 것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확실히 믿고 그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복음의 씨앗을 어린 아이들의 마음 밭에 정성껏 심음으로 말미암아 장차 기쁨으로 그 단을 거두는 복되고 충성스러운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씨가 네 가지 땅에 뿌려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그 네 땅이란 “길가”(the path), “돌밭”(rocky
places), “가시떨기”(thorns) 그리고 “좋은 땅”(good soil)임. 이 네 땅 중에 네 번째 땅인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열매(“결실”)을 맺는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8절). 여기서 “씨”는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God)(눅8:11)이고 “씨를 뿌리는 자”는 “인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박윤선).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좋은 땅에 뿌려진 씨”란 제목 아래 네 가지 땅을 묵상하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 길가에
뿌려진 씨
마태복음 13:3-4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이 비유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3:19에 이렇게 그 비유의 의미를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즉, ‘길 가에 씨가
뿌려진 자’란 “천국 말씀”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듣긴 듣지만 깨닫지 못할 때 “악한 자”(the evil one)가 와서 그 뿌려진 말씀을 빼았긴 자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악한
자”란 누구입니까? 마가복음 4장 15절을 보면 저자 마가는 “사단”(Satan)이라고 말하였고 누가복음 8장12절을
보면 저자 누가는 “마귀”(the
devil)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왜 마귀 사단은 우리 마음에 뿌려진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서 빼앗는 것입니까? 누가복음
8:12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so that they may not believe and be saved) 우리 마음에서 하나님의 천국 말씀을 빼앗는 것입니다. 빼앗되 사단은 우리가 말씀을 들었을 때에 “즉시”(immediately) 와서 우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습니다(막 4:15). 박윤선 박사님은 “길
가”와 같은 마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길 가’와 같은 마음은 이 세상의 모든 악한 운동과 영향에 개방된 마음이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순종으로 섭취하려는 생각이 없다. 이것이
큰 병통이다”(박윤선).
즉, 길 가와 같은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순종 하려는 자세가 마음에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순종의 태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때문에 그 말씀을 깨달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지혜 있는 자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귀를 기울여 들으라[listen obediently(Harris)]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순종의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불순종의 자세로 그 말씀을 듣는 다면 물론 사단이 그 말씀의 씨를
우리에게서 빼앗아 갈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은 하나님을 불신하며 결국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계속해서 불순종하며서 교만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이 더욱더 강팍(완고)해져서 어느 누구의 사랑의 책망도 귀 기울여 듣지도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사단에게 그 들은 말씀을 빼앗기지 않으려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의
자세로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로 들을 때에 우리는 그 말씀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깨달은 말씀을 우리는 실제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그 말씀을 우리 마음에 간직할 수가 있습니다(잠 22:18). 그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간직하면 할 수록 우리는 더욱더 하나님을 신뢰할 수가 있습니다(19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므로 그 말씀을 우리 소유로
만들 때에(시 119:56) 우리의 믿음이 더욱더 자라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의 자세로 들으면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믿음은 자라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맏음은 점점 더 연약해 져서 점점 더 하나님을 의심하게 되고 결국에는 하나님을 불신하여 그의
계명에 불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길 가에 뿌려진 씨의 삶입니다.
둘째, 돌밭에 뿌려진 씨
마태복음 13:5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이 비유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3:20-21에서 그 비유의 의미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돌밭에 떨어진 씨는 말씀을 들을 때 기뻐하며 즉시 받아들이지만 그것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지 못하고 잠시 견디다가 그 말씀 때문에 고통이나 핍박이 오면 곧 넘어지는 사람이다”. 즉, ‘돌밭에 씨가
뿌려진 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지만 그 속에 뿌리가 없으므로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밀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입니다.
그래도 “돌밭에 뿌려진 자”는
“길 가에 뿌려진 자”와 달리 하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누가복음 8:13을 보면 “잠시 믿다가”(They believe for a while)라고 저자 누가는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믿음이 오래 못간다는 것입니다. 믿음(신앙) 때문에 오는 환난(고통)이나 박해(핍박)로 인하여 시험을 받을 때에 그는 넘어지고(막 4:17) 심지어 믿음을 “배반”합니다(눅8:13). 그 원인은
무엇입니까? 그 원인은 “그 속에 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마 13:21,
막 4:17). 이것이 바로 뿌리 깊지 못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영성”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성령님 안에서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뿌리 깊은 영성에 가운데 저자가 말한 내용 중에 흥미로운 말은 ‘뿌리 깊은 영성은 먼저 아래로 성장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입니다.
마치 나무의 뿌리가 땅 밑으로 성장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면서 저자는 이 말에 대하여 한 4가지로 요약하였습니다.
첫째로,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는 영성 “하나님의 나라는 작은 겨자씨와 같습니다.
작은 것에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은 성취, 성과, 결과에 가치를 두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존재”에 가치를 둡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하고 하나님께 의지하는 사람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특징은 영혼의 가치에 두는 것입니다.”
둘째로,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영성 빌립보서 2:7-8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셋째로, 자신을
감추는 영 “뿌리는 드러내지 않습니다. 뿌리를 깊이 내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넷째로,
보이지 않는 속사람을 돌보는 영성.
에베소서 3: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뿌리는 언제 깊이 내릴 수 있는지요? 그것은 시련 때 입니다. 하나님께서 시련을 주시기도 합니다. 모세는 40년동안 광야에서 그랬습니다. 나무는 겨울에
쉬면서 뿌리만 가꾸게 됩니다. 나무에게 겨울이 중요합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아주 힘들게 하여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존 번연도 그러했습니다. 고난은 축복입니다.
제 자신에게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고난을 낭비하지 말라.’”
뿌리 깊은 신앙(믿음)을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떠한 신앙의 핍박과 박해가 있다 할지라도 뿌리가 움직이지 않는(잠 12:3)
견곤한 믿음을 추구해야 합니다. 골로새서 2:6-7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현대인의 성경)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계속 그분 안에 사십시오.
그분 안에 깊이 뿌리를 박고 그분을 기초로 여러분의 인생을 건설하며 가르침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가 넘치는 생활을 하십시오”.
여러분, 우리가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가 넘치는 생활을 하려면 우리는 예수님 안에 깊이 뿌리를
박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
인생의 기초로 삼아야 합니다(고전 3:11).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행해야 합니다. 그리할 떄 우리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처럼 많은 환난 가운데서도
성령님의 기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주님을 본 받는 자들이 되며,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며 또한 우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질 수가 있을 것입니다(살전 1:6-8).
셋째,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
마태복음 13: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이 비유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3:22에 이렇게 그 비유의
의미를 말씀하셨습니다.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현대인의 성경) “또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는 말씀은 듣지만 이 세상 걱정과 재물에 대한 유혹 때문에 말씀대로 생활하지 못하는 사람을 말한다”. 즉, ‘가시떨기에 씨가
뿌려진 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나 그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즉, 그 말씀대로 생활하지
못하는 사람이 바로 가시떨기에 씨가 뿌려진 자입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대로 생활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바로 “세상의 염려(걱정)와 재물에 대한 유혹 때문입니다(마 13:22). 이 외에 “기타 욕심”(the desires for other things)(막 4:19)과 “항락에 기운”(쾌락)(pleasures)(눅 8:14)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대로 생활하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입니다.
“’가시떨기’와 같은 환경은, 그 좋은 씨가 섭취해야할 영양을 다 빼앗기 때문에 그것이 결실하지 못한다”(박윤선). 무슨 뜻입니까? 만일 저와 여러분의 마음이 가시떨기와 같다면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나 우리 마음이 이미 이 세상의 염려와 재물에 대한 욕심과 기타 욕심 및 쾌락에게 빼았겨서 그 말씀대로 살지못하므로 열매 맺는
신앙생활을 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이런 저런 세상의 염려든지 재물의 유혹이나 욕심과 쾌락에 우리 마음이 빼았겼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 수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염려하며 재물의 유혹과 욕심과 쾌락에 빠져서 하나님께 범죄할 것입니다.
박윤선 박사님이 말한 가시떨기와
같은 환경을 생각할 때 오래 전에 읽었던 영동 세브란스병원 암센터 소장인 이희대 의사의 “희대의 소망”이란 책이 생각났습니다.
그 분은 유방암 전문의면서 대장에서 시작된 암이 간과 뼈로
전이되서 10번의 재발을 겪은 암 4기 환자로서 생과 사를 넘나드는
고통을 겪는 암환자들에게 그 책을 썼는데 그 책에서 읽었던 글 중 암세포가 왜 무서운지에 대한 글을 소개합니다.
“암세포가 무서운 것은 끊임없이 자라나기 위해서 다른 세포들의 영향분을 혼자서 차지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것도 한군데서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리를 옮기면서 말이다. 암세포는 칼로리 섭취가 지나치게 많을 때 번식을 잘하는 경향이 있다. 암세포는 가만히 숨어 있다가 어느 순간 고칼로리 영양분을
낚아채서 독식하며 성장한다. 암세포가
다른 세포의 영양분을 독식하면서 성장하듯이, 그 생성 또한 끊임없는 욕심에서 비롯된다. 말하자면 암세포의 본질은 탐욕이다"(이희대).
마치 이러한
암세포처럼 세상의 염려나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 및 쾌락은 우리 마음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영향분을 빼았아 갑니다. 좀 더 성경적으로 말한다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 및 쾌락은 우리가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막으므로 우리로 하여금 그 말씀대로 생활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마태복음 13:22절을 보면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라고 마태는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막혀”라는 말은 영어로
“choke it”이란 말로서
그 의미는 ‘숨이 막히다, 질식시키다’, ‘목을 조르다’는 뜻입니다.
또한 영어 단어는 “strangle”로서 그
의미는 ‘목을 조이다’, ‘목 졸라 죽이다’입니다. 이렇게 한번
생각하면 좀 이해하기가 쉬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듣고 그 말씀을 머리에 넣었는데 그 말씀이 우리 마음으로 내려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가 우리 목을 조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 무엇인가는 바로 우리 마음에 있는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 및 쾌락입니다.
우리 마음에 이 세상의 염려과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 및 쾌락이 있다면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버리되 우리는 그저 입술로만 죄를 자백하고 회개해서는 안 됩니다. 그 이유는 만일 우리가 입술로만 그리한다면 우리는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마음이 막혀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생활하지 못할(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생활하기 위해선 우리는 우리 마음에 있는 마치 암세포와 같은 세상의 염려과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 및 쾌락을 다 버려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도 생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넷째, 좋은 땅에 뿌려진 씨
마태복음 13: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비유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3장 23절에서 그 비유의 의미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런 사람은 100배, 60배, 또는 30배의 열매를 맺는다”. 즉, ‘좋은 땅에 씨가 뿌려진 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열매를 맺는 자란 말입니다.
누가복음 8장 15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잘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을 가리킨다”.
“착하고 좋은 마음”(a noble and good heart)에서 ‘착하고 좋다’는 단어는 헬라어 원어를 보면 다른
두 단어이지만 그 의미는 ‘좋은’(good)이란 뜻입니다.
그렇지만 그 “좋은”
이란 의미를 좀 구분할 수가 있는데 두 번째 단어인 “좋은 마음”(good heart)이란 도덕적으로
똑바른[곧은, 고결(순결)한(noble)] 마음을 가리킵니다(Zodhiates). 그런가 하면 첫 번째 단어인 “착하고”란 단어는 “아름답다’ (beautiful)이란 의미도
있는데 그 의미에는 ‘건강하다, 바르다, 적합하다’(healthy, sound, fit)이란 의미가 내포되 있습니다(Friberg).
누가복음 8장 15절에 나와 있는 “착하고”란 개역개정 성경의 번역을 현대인의
성경에서 “바르고”라고 번역한 것을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두 단어를 구분한 이유는 좋은 땅에 씨가 뿌려진 자의
마음은 어떠한지 좀 더 정확하게 알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은 바르고 건강하되 하나님의 말씀 받기가 적합한
마음입니다. 또한 그 마음은 도덕적으로 똑바르고 고결(순결)한 마음으로서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저는 이 마음을
생각할 때 사도행전 17장 11절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현대인의 성경)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며 그것을 확인하려고 날마다 성경을 연구하였다”].
이 말씀이 생각난 이유는 누가복음 8장 1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착한 마음’의 영어 번역인 “a noble heart’를 생각할
때 사도행전 17장 1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이
“더 너그러워서”(개혁개정) 또는
“신사적이어서”(현대인의 성경)이라고 말씀하였는데 그 단어의 영어 번역이 “noble
character”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두 구절 말씀을 연관해서 묵상했을 때 오늘
마태복음 13장 8절과 2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좋은 땅”, 즉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뿌려진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이 무엇인지 좀 더 풍성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깨닫다(4920) - 이해하다, 통찰하다
συνίημι스트롱번호4920
1. 깨닫다, 2. 이해하다, 3. 통찰하다
발음
/ 수니에미(süniēmi) 어원 / 미래 συνησω, 제1부정과거 συνῆ- κα, 제1부정과거 가정법 συνῆτε, συ- νῶσιν, 제2부정과거 명령 2인칭복수 σύνετε, 4862와 ἵημι ‘보내다’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깨닫다(마 13:13, 막 4:12, 롬 3:11), 이해하다 (엡 5:17), 지혜가 있다(고후 10:12) 신약 성경 / 26회 사용
그 마음이란 ‘바르고 건강하되 하나님의 말씀 받기가 적합한 마음이요 도덕적으로 똑바르고 순결한
마음으로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마음인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확인하려고 날마다 성경을 연구(상고 – 곰곰히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마음이 이러한 마음이 되야 하지 않겠습니까?
작은 불꽃 하나가 큰 불을 일으키어 곧 주의 사람들 그 불에 몸 녹이듯이 주님의 사랑 이같이 한번 경험하면 그의 사랑 모두에게 전하고 싶으리
새싹이 돋아나면 새들은 지저귀고 꽃들은 피어나 화창한 봄날이라네 주님의 사랑 놀라와 한번 경험하면 봄과 같은 새 희망을 전하고 싶으리
친구여 당신께 이 기쁨 전하고 싶소 내 주는 당신의 의지할 구세주라오 산 위에 올라가서 세상에 외치리 내게 임한 주의 사랑 전하기 원하네
산 위에 올라가서 세상에 외치리 내게 임한 주의 사랑 전하기 원하네
열매 맺는 신앙인이 되고 싶은 마음으로 이 말씀을 다시금 묵상하며
맺고자 할 때 저는 오늘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 좋은 땅에 뿌려진 씨처럼 100배,
60배, 혹은 30배 열매를 맺고 싶습니다. 또한 우리 모두가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이 되어서 열매 맺는
신앙인이 되길 기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적합한 마음이 되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적합한 마음은 건강한 마음이요 바르고
순결한 마음입니다. 그러한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세로 듣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러한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의 뿌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깊이 내립니다. 그러므로 말씀(신앙)으로 인하여 어떠한 고통과 역경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고 견디며 이겨나아 갑니다. 그리고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은 세상의 염려와 재물에 대한
유혹 및 기타 욕심과 쾌락으로 인하여 말씀이 막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열매를 맺습니다. 이러한 열매를 맺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마태복음 7: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좋은(아가도스) 18
나쁜(포네로스) 4190
못된(사프로스) 4550
예수님의 사역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 하나님 나라의 선포(복음 전도) 둘째, 신유와 축사 셋째, 소외된 자들과의 교제(세리, 죄인 등)
이러한 사역은 하나님 나라와 밀접하게 연관된 것입니다. 특히 신유와 축사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임재의 증거를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천국)에는 슬픔과 눈물과 고통과 질병이 없습니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가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하여 실재적으로 이 땅에
임하였다(마 12:28, 눅 11:20). 우리는 예수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맛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를 영화의 예고편처럼 보여 주는 상징 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유명한 신학사인 죠지 래드는 풀코스의 정식 중 맨
먼저 나오는 스프를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성격에다 비교하였다. 그것은 실제적인 정식의 한 과정이다. 우리는 실제로 하나님 나라의
현장을 경험하고 있다는 말이다. 예수께서 수많은 신유와 축사의 능력을 베푸신 것은 하나님 나라가 실제로 현재 여기에 있다는
증거를 보여 주시는 행위인 것이다.
군대 귀신들렸다가 치유함을 받은 사람은 너무 감사해서 온몸과 마음을 바쳐서 예수를 따르기를 원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집으로
돌아가서 네가 당한 이 큰 일을 증거하라고 명령하셨다.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이 살던 삶의 현장을 사수하면서 복음을 전파하기를
원하신 것이다. 오늘날의 개념으로 말하자면, 주의 크신 은혜를 받고 목회자가 되겠다고 결단한 사람에게 자신의 직업 전선에서 성실한
삶을 살면서 복음 전파를 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더러운 귀신"이란 말씀이 마가복음에서 11구절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23, 26, 27. 3:11, 30. 5:2. 8, 13. 6:7. 7:25. 9:25
더러운(169) 아카다르토스(akathartŏs) ἀκάθαρτος, ον
1. 불순한, 2. 신성과 밀접할 수 없는, 3. 에베소서 5:5
발음
/ 아카다르토스(akathartŏs) 어원 / 1[부정불변사]과 2508 ‘정결하다’의 파생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더러운(마 10:1, 계 18:2), 깨끗하지 아니한 (행 10:14), 깨끗하지 못한(고전 7:14), 부정한 (고후 6:17) 신약 성경 / 32회 사용
귀신(4151) 프뉴마(pnĕnuma) πνεῦμα, ατος, τό
1. 불기, 2. 바람, 3. 숨 내쉬기
발음
/ 프뉴마(pnĕnuma) 어원 / 415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성령(마 4:1, 막 1:10, 눅 2:27), 심령(마 5:3, 눅1:17), 귀신(마8:16, 눅4:36,
요16:18), 마음(마26:41, 막8:12), 영혼(마27:50, 눅23:46, 요19:30), 중심(막2:8), 하나님의
말씀(행18: 5), 영(눅24:37,39, 엡1:17), 빛(엡5:9), 한마음(빌1:27), 기운(살후2:8),
바람(히1:7), 생 기(계11:11, 13:15) 신약 성경 / 379회 사용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안드로포스 엔 프튜마티 아카다르토)
“귀신”(프뉴마티)은 문자적으로 숨, 바람, 기운, 생명, 영혼, 영(spirit), 유령,
귀신, 성령(the Holy Spirit) 등의 다양한 뜻을 갖고 있다. 그리고 “더러운”(아카다르토)은 “불순한”, “더러운”,
“부정한” 등의 뜻으로 쓰인다. 직역하면 “부정한 영”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는 선한 의지가 완전히 결여되어 버리고 오직
약령의 지배하에서 자기 파괴적인 우울 증세를 보이는 상태를 의미한다(1:23 주석 참조). 이에 대해 공동번역은 “더러운 악령
들린 사람”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한편 누가복음 8:27과 본문에서는 악령들린 사람이 단수이다(안드로포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두
사람으로 묘사된다(마 8:28). 아마도 이같은 차이점은 마태는 그 보고가 상세한데 비해 마가와 누가는 그 둘 중 가장 대표될
만하고 특징적인(치명적인) 한 사람을 강조하고자 했던 차이일 것이다(Calven). 나머지 한 사람은 여기 소개된 자의 휘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Lenski).
마가복음에서 이 말은 11회 나오며, 누가는 이 말에 '귀신' 혹은 '마귀'라는 뜻을 가진
'다이모니온'()을 부가하여 사용하고 있으나(눅 4:33; 8:27; 10:17등), 의미상으로는 별 차이가 없다. 여기서 마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귀신'이라는 존재에 '더러운'이라는 형용사를 첨가한 데 있다. 이 '더러운 영'은 선한 의지와 도덕성이
완전히 상실된 그야말로 악의 실체가 되어버린 영의 상태를 의미한다.
실로 예수의 갈릴리 사역 초두(初頭)인 바로 이 안식일에 진리
전파 장소 한 가운데로 돌진해 온 자는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자로서 이는 구속사적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악한 영, 곧 마귀의 일을 파괴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요일 3:8). 한편 더러운 귀신들린 자의 첫반응은
'소리질러'(아나크라조)란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의 진리 전파 사역을 '방해하고'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한 것이다(눅
4:33). 현대 의학이나 심리학, 심지어는 현대 신학자들 중에서도어떤 이들은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농후(濃厚)하다. 즉 그들은, 귀신이란 정신병을 가진 어떤 사람이 정서적 불안 상태에서 충격을 받은 경우 혹은 정신이상자와
간질병자의 경우로 나타나는 증세를 가정(假定)해서 칭한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본 구절은 귀신의 존재와 성격에 대해 명백히 규명해
주고 있다(마 4:1-11, 주제 강해 '사단'(마귀)과 '귀신'참조). 이러한 귀신은 그리스도의 권위에 도전하고 그리스도의
일을 방해하며 사람들에게 극한 공포심을 안겨주는 것이다(벧전 5:8).
마태복음 4장
시험하는 자(호 페이라존)
- 사단의 성격을 나타내는 별명이다. 이용어는 신약 가운데 여기서 처음으로 사단이 죄짓도록
유혹하는 사악한 존재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런데 이 사단이 예수에게 접근하여 시험한 방법에 대한 학설은 대단히 많다. (1)
예수를 시험하는 제사장들을 마귀로 본 것이다(V. der Hardt, Venturini, Moller, Rosenmuller,
Kuinoel, Feilmoser). (2) 마귀에 의해서 연출된 묵시(Origen, Cyprian, Theodorus,
Olshausen, Heubner) . (3) 하나님에 의해서 연출된 묵시(Famer). (4) 예수의 상상에 의해서 생긴
갈등(Eichhorn, Dereser, Weisse). (5) 마귀에 의해서 자극된 예수의 갈등(Krabbe). (6) 예수의
내적생활에서의 사건을 상징적으로 표현(Neander). (7) 예수 자신이 경험치 못한 것을 비유적인 이이야기로 꾸민
것(Schmidt, Schleiermacher, Usteri, Alex, Schweizer, Baumgarten, Grusius)
(8) 순수한 신화(Strauss, De Wette, Gfrorer, Meyer)이다. (9) 자연 현상(Clericus,
Paulus, Gratz)이다.
위의 많은 학설들은 보편주의적인 세계관과 잘못된 그리스도관에서 비롯된 것들로서 기독교의 순수성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 사건은 메시야에 대한 그릇된 세속적 기대를 이용한 사단의 공격 중에서 실질적이고도 현실적인
사건이라 해야 하며, 이 시험은 마귀에 의해서 야기된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 대항한 사단은 사람이나, 천사 등의 모양을 하고
가시적(可視的)으로 출현했던 것으로 이해된다(대부분 보수 주석가들).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마가복음 1:21-28)
문명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귀신”을 옛날 이야기에나 나오는
허구적인 존재로 치부되기 쉽습니다. 오늘날처럼 과학 기술이 발전한 시대에 천사나 귀신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이 어린아이처럼 미숙하게 생각되기도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이 그 생명력을
잃게 된 중요한 원인들 중 하나는 성경의 이야기들과 우리 신앙 생활 가운데서 영적인 존재들 곧 천사들이나 귀신들을 쫓아내버린 것이다.”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세상은 크게 “보이는 세상(visible
world)”과 “보이지 않는 세상(invisible
world)”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보이는 세상은 우리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땅이며, 보이지 않는 세상은 영이신 하나님을
위시하여 온갖 종류의 영들이 존재하며 활동하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이야기들은 이 두 세상을 모두 섭렵하며, 또 그 두
세상을 채우고 있는 사람들과 영적인 존재들을 그 주인공들로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보이지 않는 세상(invisible
world)”과 그 세상을 채우고
있는 영들이야말로 많은 사건들 속에 진정한 주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도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와 “더러운 귀신”이
만나 격돌한 사건을 그리고 있습니다. 둘 모두 그 실체가 영적인 존재들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구경꾼에
불과합니다. 이 사건에서 귀신을 빼버린다면 오늘 본문 말씀은 전혀 의미가 없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보이지 않는 세상(invisible world)”을 이해하고 성경적인 세계관을 갖는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이라는 도시에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셨습니다. 회당(synagogue)이란 말 그대로 유대인들이
“모이는 곳”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이스라엘 전체에 걸쳐 오직 하나뿐인 성전(Temple)이 있었으며, 유대인들은
명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이곳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평소에는 안식일에 각자의 마을에 있는
회당에 모여서 성경 말씀을 읽고, 이를 가르치고 배우는 시간들을 가졌습니다. 유대인들에게 회당은 오늘날의 예배당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자, 사람들은 그 가르치심에 놀랐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22절은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서기관들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지는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권세가 있었고, 서기관들의 그것은 권세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세는 바로 이어지는 사건에서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귀신에게 명하시기를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자, 귀신이 그 말씀에 순종하여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지신 권세는
“영적인 권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서기관들은 이 불쌍한 사람을 사로잡고 있는 귀신을 쫓아낼 수가 없어서,
그냥 두고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이들에게 귀신을 제어할 수 있는 “영적 권세”가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과 귀신이 나눈 대화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본 귀신은 크게 소리를 질러 말했습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려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이에 예수님께서 귀신을 꾸짖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예수님과 더러운 귀신 사이에
대화를 보자면, 이 둘은 서로가 어떤 존재인 것을 분명히 알았으며, 또
서로를 향하여 말을 하고, 그 말을 듣고, 이에 반응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사람들은 다만 그들 눈 앞에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 놀라워할 뿐이었습니다. 우리가 보는 현실 세계에서 예수님은
갈릴리 시골 나사렛에서 온 가난한 목수의 아들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 곧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분이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실체입니다. 예수님을 알아본 귀신은
두려워서 떨며 비명을 질렀습니다. 마치 컴컴한
방에 갑자기 불을 켜면 어둠 속에서 활동하던 벌레들이나 쥐들이 황급히 몸을 감추듯이, 이 더러운 귀신
또한 예수님의 빛 앞에 그 정체가 밝히 드러나고 두려워 떨며 급히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권세로 더러운 귀신을 완전히 제압하시고, 이 귀신 들려 비참해진 사람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영적인 싸움을
싸우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며, 또
이 싸움을 위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일을 하신 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유대인의 회당에서였습니다. 회당은 유대인들이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거룩한 곳”이었습니다. 이
거룩한 곳에 “더러운 귀신”이 버젓이 드나들며 대놓고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이 결벽증으로 보일 만큼 “더러운 것”을 싫어하고 멀리하며 밤낮으로
손발을 씻었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예수님과는 달리 왜 유대인들은 이 더러운 귀신을 쫓아낼 수 없었을까요? 왜 회당에서 가르치는 서기관들의 말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권세가 없었을까요?
야고보서 4:7, 8절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이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마귀를 이기고 쫓아낼 권세를 갖게 되는지를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순복하고 마귀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걸림이 되는 마음 속의 죄들을 즉시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자복하는 것입니다. 늘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모하며,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 온 마음을 들여 생각하고 기도하며, 최선을 다해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 속에
마귀를 미워하고 대적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마귀를
싫어하고 멀리하게 됩니다. 마귀를 쫓아낼 권세를 갖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매우 연약했습니다. 이는 그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나 그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났다”고 책망하십니다 (마태복음 15:8). 이들의 이러한 영적 상태를 생각하면 서기관들의
가르침이 권세가 없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권세 (authority)”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예수님을 “권세 있는 자”라고 하며(22절), 또 귀신을 내어쫓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리켜 “권세 있는 새 교훈”이라고 합니다 (27절).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런 권세를 가지신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권세를 제자들에게도
주십니다.
마가복음 3:14, 15절에는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세우시면서 그들을 부르시는 세 가지 목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세 가지란?
첫째,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둘째,
보내사 전도하게 하시며, 셋째,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가 있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인 제자들이 귀신을 제어할 수 있는 권세를 갖는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이는 귀신 또한 어둠의 세계를 주관하는 일종의 영적 권세자(spiritual force of evil)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어둠의 세력을 무서워하는 대신 이를 대적하고, 제어하고, 내어쫓을
수 있는 권세를 가졌다는 것은 제자들의 신분이 “땅에 속한 사람(earthly
being)”에서 “하늘에 속한 사람 (heavenly
being)”으로 완전히 바뀌었음을 말해줍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함께 보이지
않는 세계를 통치하는 영적인 권세자들이 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우리가 어떻게 이 권세를 가질 수 있을까요?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하나님의 권세”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는 “하나님의 권세는 밝은 눈과 같다(Divine authority is like
the single eye)”고 말합니다. 어려운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밝은 눈”이란
마태복음 6:22절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밝으면 (If your eye is single - KJV) 온 몸이 밝을 것이요”라는 말씀에서 따온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께서
나를 똑바로 보시면서 나에게 어떤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권세에 순복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나로 사로잡으며 나의 밝은 눈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보이고, 귀신은 귀신으로 보이고, 빛은
빛으로 보이고, 어둠은 어둠으로 보입니다. 사랑할 것을 사랑하게
되고, 미워할 것을 미워하게 됩니다. 가까이 할 것을 가까이
하게 되고, 대적할 것을 대적하게 됩니다. 곧 하나님의 권세가
내 안에 살아있어서 마귀를 대적하고 제어하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세에 순복하여 마귀의 궤계를 분별하고 대적한
이야기들은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가장 대표적인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신 후 마귀에게 시험을 받은
것입니다. 40일 동안
금식하여 거의 죽음에 눈 앞에 보일 지경이 되신 예수님께 “시험하는 자” 곧 마귀가 나타나서 말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명하여 이 돌들에게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태복음 4:3). 몹시
배가 고프신 예수님께 이 마귀의 말은 참으로 큰 유혹이 되었을 것입니다. 저 같으면 아마도 벌써 돌멩이가
떡으로 보이고, 유혹하는 마귀가 천사로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시험하는 마귀에게 대답하셨습니다.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생명이 “떡”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과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에 달려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주관하시는 권세를 가지셨음을 잘 아시고 오직 이 하나님께 순복하셨습니다. 40일을 굶으신
상황에서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하나님 한 분을 경외하시고 그 말씀에 순종하시므로
예수님께서는 항상 밝은 눈을 가지셨습니다. 그리고 그 밝은 눈으로 마귀의 역사를 분별하고 대적하셨습니다. 심지어 마귀가 수제자
베드로를 통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러 가는 길을 막으려 할 때도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며 그를 책망하셨습니다(마가복음 8:33).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시며 그
뜻을 이루는데 온 몸과 마음을 드리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하나님의 권세에 순복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께는
마귀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정말 바늘 구멍만큼도 없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사로잡고 있는 하나님의 권세가
예수님께 밝은 눈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귀신이나 마귀의 존재를 믿지도 않으며, 또 자신들이 지금 마귀의 권세 아래 있음도 깨닫지 못한 상태로 살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이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권세”에 순복하지 않음으로 그들의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눈이
어두워졌을 뿐 아니라 영적으로 깊이 잠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를 악한
영들로부터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들로 회복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의 죄를 씻어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성령님은 우리로 여호와를 경외하게 하시는 영(이사야 11:2)이시며, 또 우리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하시는
영(로마서 8:15)이십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성령을 받을 때, 우리 영의 눈이 열리게 됩니다. 악한 마귀의 더러운 귀신을 분별하고 대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권세를
의지하여 영적인 싸움을 싸우는 권세자가 됩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에 관하여 잘
모르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요한복음 4:24), 예수님의 말씀 또한 영입니다 (요한복음 6:63). 우리가 싸워야 할 싸움 또한 영적 싸움이며, 우리가 싸워야
할 대적은 혈과 육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입니다(에베소서 6:12).
우리가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시는 예수님의 권세를 덧입고 이 영적 싸움을 능히 감당하는 “권세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귀신의 왕 바알세불 곧 사탄마귀는 이미 진 자다. 광야에서 금식하신 후 40일이 지난 시점에 예수님과 맞붙어서 3대 0으로 판정패
당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KO패 당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미
3대 0으로 판정승할 때부터 귀신을 쫓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12제자들과 70명의 제자들에게 위임했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귀신쫓는 권세를 위임해 주셨다. 예수께서는
공생애기간에는 판정승한 것으로 인하여 사탄마귀의 졸개들인 귀신을 쫓아내었고, 부활승천하신 후에는 KO승한 것을 바탕으로
모든 믿는 자들에게 그 권세를
위임했다. 그러므로 모든 믿는 자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낼 수 있으며, 쫓아내야 한다. 귀신이 쫓겨나가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데 필수적인 조건이기 때문이다(마 12:28). 귀신이 쫓겨나가지 않으면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는 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귀신을 쫓아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쫓아내야 하는가? 그리고 귀신을
쫓았는데도 그가
떠나가지 않을 때에는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가? 알고 보면 쉬운 일이지만 모를 때에는 당황할 수도 있다.
지피지기
백전백승(知彼知己 百戰百勝)
지피지기
백전백승(知彼知己 百戰百勝)
성도의 신앙생활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 중에는 귀신(鬼神, 다이모니온)이 있다. 그런데 성도들 중에는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분들도 있으며, 귀신이 얼마나 많이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몰라 귀신에게 당하고 있는 분들도 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듯이 귀신을 알아야 귀신을 대적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귀신이
어떤 존재이며 성도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잘 모르는 분들이 이외에 많은 것 같다.
그리고 귀신의 공격하고 있음을
알고서도 귀신을 그냥 방치함으로 귀신으로부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도 적잖게 있는 것 같다.
예수 이름으로 귀신아 나가라! 하고 명령하면 왜 귀신들은 순종할 수밖에 없는가?
성도들이 귀신들에게 나갈 것을 명령하면 왜 귀신들은 나가야 하는가? 나가지 않으면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가? 그들은 왜 성도들의 축사 명령에 그대로 순종해야 하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그러므로 귀신들도 자기들의 대장을 이긴 예수님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당신의 권세를 처음에는 당신
혼자 사용하셨지만, 이내 그러한 권세를 12제자들에게도 위임하셨다(마 10:1).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그리고 70명의 제자들에게
위임하셨으며(눅 10:1), 죽고 부활하신 다음에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그러한 권세를 위임하셨다(막 16:17).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는 예수께서 주어진 권세를 이용하여 귀신들을 쫓아낼 수 있다.
누가복음 10:1 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마가복음 16:17-1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왜냐하면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되기
때문이다(벧후 2:19).
베드로후서 2:19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신들은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
영계에도 엄연히 일정한 법칙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된다는 놀라운 법칙이다. 그런데
귀신들의 왕(지배자)인 마귀가 예수님과 한 판 붙어 싸웠을 때 마귀는 어떻게 되었는가? 마귀는 그때 예수님에게 3대 0으로 판정패
당했다(그리고 십자가에서 마귀는 완전히 패배당하여 사망과 음부의 열쇠마저 주님께 내어주어야 했다).
예수께서는 마 4장에서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신 후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그때 예수께서 마귀와 처음으로 한 판 붙으셨다. 그때만해도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예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던 날, 그도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들었을 것이이다. 아니면 자기의 부하들을 통해서 그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이 누군지를 잘 몰랐으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 싶어했다.
그래서 예수님께 질문을 던졌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 4:2)" 그때였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마귀에게 증명해 보이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사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은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한낱 피조물에게 시험을 받으시겠는가? 하지만
그 때에는 예수께서 사람으로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때 예수께서는 어떻게 해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는가?
그것은 "기록된 말씀"을 사용해서였다. 예수께서는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4:4)"고 댓구하셨기 때문이다. 그러자 마귀는 의식주의 유혹으로 예수님을 넘어뜨릴 수가 없음을
알고는 새로운 시도에 들어간다.
이제는 마귀도 기록된 말씀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넘어뜨리고자 시도한 것이다. 우선 그는 예수님을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웠다. 그리고 말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으니라(마 4:6)"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번에도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마 4:7)"이라고 말씀하면서 그를 물리쳤다.
최종적으로 마귀는 예수님을 지극히 높은 산으로 데리고가서 천하만국의 모든 영광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만일 내게 엎으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 4:9)"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저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으니라(마 4:10)"이라고 댓구하심으로 물리치셨다.
그러자 마귀가 예수님을 얼마동안 떠나야
했다. 마귀는 예수께 3대 0 판정패 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 자로서 마귀의 부하들은 예수님에게 복종해야 했던 것이다.
만약 그때 예수께서 마귀의 시험 가운데 하나라도 마귀의 말에 순종했더라면 큰 일 날 뻔 했다. 만약 그날 예수께서 돌로
떡을 만들어 먹었거나, 성전에서 뛰어내렸다면, 그는 마귀의 말처럼 천하만국의 모든 영광을 취했을 수는 있으나, 그때부터 예수님은
마귀의 종이 되어버리는 것이니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계에서는 누구의 말에 순종하는가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누구든지 순종한다면 우리는 순종하는 자의 종이 되기 때문이다. 즉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예수께서도 마귀의 말에 순종하고 말았으니, 예수님도 그만 마귀의 종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돌을
떡덩이로 만들어 먹을 수 있었지만, 결코 그 순간에는 마귀의 말을 듣지 아니했다. 예수께서 뛰어내리 때에는 천사가 와서 그를
받들어 지켜주실 것이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결코 뛰어내지지 않았다. 마귀의 말에 순종하지 않기 위해서다. 만약 마귀의 말에
순종했다면, 우리는 전부 마귀의 종이 되는 것이고, 그러면 마귀에게 진 자가 되어지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예수께서 어릴 적부터 기적을 행하셨고, 귀신을 쫓아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비록 예수께서 잉태될 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기는 했지만,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세례요한에게 공식적으로 세례를 받기 전까지
그는 아직 기름부음을 받지 못했다. 그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메시야로서 사역을 시작하지 아니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기 전까지, 예수님은 그 어떤 기적을 행하시지 아니했으며, 귀신을 쫓아내시지도
아니하셨다.
그런데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한 이후에 마귀에게 한 판 승부를 벌여서, 그 싸움에서 이기심으로 이제 마귀의 졸개들인 귀신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신 것이다.
어느날 예수께서 귀신들려 눈멀고 말못하는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자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게 되고, 보게 되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하여 예수께서 귀신의 왕(통치자)인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했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있다. 그중에 왜 우리 믿는 이들이 귀신을 쫓아낼 수 있게 되었는지를 알려주는 단서가 들어
있다. 그것은 마태복음 12:29의 말씀이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이 말씀에 나오는 "강한 자"는 귀신의 왕(통치자) 바알세불인 사탄 마귀(루시퍼)를 가리키며, 강한 자의 집 안에 있는
세간은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을 가리킨다.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낼 수 있었던 것은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의 힘을 빌린 것이 아니라,
그와 싸워서 이겼기 때문에, 그의 부하들인 귀신을 쫓아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님으로부터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는 성도들은 누구든지 귀신을 쫓아낼 수가 있는 것이다.
둘째, 예수 이름의 명령은 이미 승리한 명령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이 귀신들로 하여금 떠나갈 것을 명령하면, 귀신들에게 엄청난 타격이 가해짐으로 그들이 고통을 받기 때문이다(마가복음 5:7~9).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이는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우리가 귀신들에게 명령하면 영적 질서가 세워진다.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에게 복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권한을 위임하신 하나님으로 엄청난 징계가 임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우리의 말에 순종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순종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가? 그들에게 괴로움이 임한다. 나갈 때까지 더욱 더 큰 고통이 찾아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입에서 나가는 말씀과 명령이 칼이 되고 불이 되기 때문이다. 이제 명령하는 말씀이 칼이 되면, 칼은 밖으로 나가서
귀신에게 계속해서 엄청나게 타격을 가한다. 그리고 명령하는 말씀이 불이 되면, 귀신들을 태워버린다. 그러므로 그들은 우리가
떠나갈 것을 명령하면 명령할수록 고통을 받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한 번 내쫓으려고 했다면 계속해서 꾸짖어야 한다. 그가 떠나갈
때까지 말이다.
귀신에게 나갈 것을 명령할 때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며, 또한 어떻게 명령해야 하는가?
귀신을 쫓아낼 때에는 어쩡쩡한 태도나 부탁조로 말해서는 아니 된다. 그럼 어떻게 쫓아내야 하는가?
꾸짖어서 쫒아내야
한다(마가복음 1:25, 9:2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Be quiet!" said Jesus sternly. "Come out of him!
예수께서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When Jesus saw that a crowd was running to the scene, he rebuked the evil spirit. "You deaf and mute spirit," he said, "I command you, come out of him and never enter him again."
왜냐하면 예수께서도 귀신을 쫓아내실 때에 "꾸짖어"서 쫓아내셨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귀신도
인격체이므로 자신을 꾸짖는지 부탁하는지를 안다. 그러므로 귀신에게는 이제는 그가 사람 속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고지하고 그 사람에게서 떠나갈 것을 강력하게 요구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직접 귀신을 쫓아내실 때에도만 "꾸짖"었지만,
귀신이 역사하고 있는 현장과 대상에 대해서도 꾸짖으셨다. 특히 베드로의 장로가 열병에 시달리고 있었을 때에는 열병을
꾸짖으셨으며(눅 4:39), 심지어 자연의 기본적인 힘들 즉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잠잠하게 하기도 하셨다(막 4:39). 왜냐하면
질병과 바람 가운데에 귀신이 역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4:39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So he bent over her and rebuked the fever, and it left her. She got up at once and began to wait on them. 마가복음 4: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He got up, rebuked the wind and said to the waves, "Quiet! Be still!" Then the wind died down and it was completely calm.
명령하여 쫓아내야한다(마가복음 5:7~9)
귀신에게 떠나나갈 것을 명령하고 나간 다음에는 "다시는 들어오지 말라"고 다짐시키듯 명령해야 한다(막 5:7~9).
귀신이 잘 나가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귀신에게 떠나갈 것을 명령했으나 잘 나가지 않을 때에는 당황해서는 안 된다. 성경에 보면,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거나
12제자들이나 사도바울이 귀신을 쫓아낼 때에는 그냥 귀신이 순종하며 떠나갔는데, 나 자신이 명령했을 때에는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고 꿈쩍도 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럴 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때에는 귀신이 떠나가지 않는 이유를 다시 확인해보아야
한다. 귀신이 떠나지 않는 데에는 다음의 여러가지 이유들이 있어서다. 그때에는 그만한 이유들을 제거해주고 명령해야 한다.
첫째, 귀신들린 자가 회개하지 않은 죄를 갖고 있을 때 귀신은 잘 떠나가지
않는다.
죄를 완전히 인정하고 회개해야 떠나간다. 왜냐하면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기 때문이다(요일 3:8). 그러니 자기가
그 사람 속에 들어있을 합법적인 이유가 있는데 왜 떠나가려고 하겠는가? 그냥 버티려고 할 것이다.
둘째, 귀신들린 자에게 많은 귀신들이 들어있으면 귀신은 잘 안 떠난다.
그때에는 "너 말고 누가 더 있어?" 라고 물어보아야 한다. 군대귀신처럼 많은 귀신들이 들어있을 때에는 잘 떠나가지 않는 습성이 있다. 그때에는 "너 말고 다른 귀신도 함께 떠나 가~~"라고 명령해야 한다.
셋째, 귀신들린 자가 스스로 자기 안에는 귀신이 없다고 말하거나, 벌써 귀신들린 지가 몇 년쯤 되어서 귀신이 시키는 대로 거짓말을 하고 있을 때에는 귀신이 떠나가지 아니한다.
귀신은 계급이 높을수록 자기를 잘 감춘다. 이제 맨 밑의 귀신들은 금방 자신을 드러내지만, 오래된 높은 계급의 귀신은 어찌하든지 자신을 숨기려고 하기 때문이다.
넷째, 귀신이 그 사람 속에 들어갈 수 있는 합법적인 이유들이 있으면 안
떠난다.
예를 들어, 과거에 무당집에 살면서 그 집의 밥을 얻어먹고 살았다거나, 굿하면서 귀신에게 절을 한 일이 있다거나, 점을 친
일이 있다거나 하면 귀신들은 잘 안 떠난다. 그때에는 우상숭배한 죄를 직접 자신의 입으로 고백하고 시인한 뒤에 하나님께 분명하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 또한 자기 몸에 귀신이나 용같은 문신을 새기고 있거나, 용반지를 타고 있거나, 용바클을 허리띠로 차고
있거나, 집 안에 옛날에 귀신을 섬길 때에 사용하거나 간직했던 물건이 있으면 귀신은 잘 안 떠난다. 벽에 걸쳐져 있는 사진이
남아있을지라도 귀신은 잘 떠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과거에 귀신을 섬기거나 귀신을 섬길 때에 사용했던 물건이 있으면 전부
태워버리거나 없애버려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귀신은 잘 안 떠나간다.
다섯째, 귀신더러 떠나가도록 명령하는 축사자가 기도를 많이 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저쪽에 있는 귀신의 숫자가 내가 기도함으로 나를 돕도록 하늘에서 내려보낸 천사보다 숫자가 많을 때에
귀신들은 잘 안떠난다.
예수님께서도 변화산 아래에서 9명의 제자들이 자신은 왜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는지를 묻자, "기도 외에는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기도의 분량이 어느정도 되어야 한다. 그리고 강한 믿음을 소유해야 한다. 그러면
귀신이 저절로 겁을 먹고 떠나간다.
귀신이 잘 나가지 않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귀신도 사람의 눈을 통해 우리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에는 두 가지를 생각하면 된다.
첫째, 지체하면 할 수록 귀신은 고통이 더 가중 될 것이다.
"너는 내가 떠나가라고 명령했는데도 불구하고, 네가 떠나가지 않는다면 너는 떠나지 않을수록 더 괴로울 껄. 그러니 지금이라도 당장 떠나가는 것이 좋을 껄!"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귀신들에게 떠나갈 것을 명령했음에도 불구하고 귀신이 떠나가지 않는다면, 귀신은 그순간부터 고통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명령하는 그 말씀이 이 귀신에게는, 때로는 칼이 되어 귀신을 잘라버리고, 때로는
불이 되어 귀신을 태워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귀신이 떠나지 않더라도 급하게 마음을 먹지 말라. 느긋한 마음을 먹으라.
"네가 떠나지 않을수록 너는 더 고통을 받을 것이다. 너만 손해보는 거야"하고 생각하고 있으라라.
둘째, 귀신의 속임수에 놀라지 말라
감히 네가 누구에게 들어와서 이 장난질을 하는거야! 하고 생각하라.
이미 우리 성도는 예수님의 피로 죄를 씻었기에 죄사함을 받은 자요, 예수님에 대한 믿으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자녀들, 장차 하늘나라의 상속자가 될 자에게 감히 종(노예)인 주제에 말을 듣지 않고 버티는구나. 감히 겁도
없이 말이야! 라고 생각하라. 그들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이 가소롭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우리가 두려워하고 당황해하며
포기하면 귀신들도 우리들의 마음을 다 알고 더욱 겁을 상실한 자가 되어간다.
귀신은 영물이다. 귀신도 영물이기에 귀신같이 알고 있는 것이 있다. 그러나 이 놈들도 다 지식의 한계를 가지고 있는 피조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들도
영적 세계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에 일정한 법칙과 질서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들이 비록 능력있는 존재라도 자기의
권한 밖의 일을 결코 행할 수가 없다. 그러면 그들의 불법에 대한 심판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법적으로 사람을 점거하고 있을 때에는 과감히 쫓아버려야
한다. 그러나 가만히 놔두면 저놈도 사람의 몸 속에 기생하면서 살아가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먼저 지은 죄들이 있으면
회개하라. 그리고 우상숭배와 관련된 물건들과 문신을 찾아내어 제거하라. 그리고 과감히 그들에게 선포하라. 꾸짖으면서 나갈 것을
명령하라. 나가지 않을수록 자기만 손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그들에게 명령하라. 내가 떠나가라고 명령하는데도 그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징계가 임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꾸짖으라. 내 입에서 나가는 명령과 말씀이 저들에게 칼이 되고
꽃히고 불이 되어 태워버린다는 것을 기억하고 쫓으라. 그리고 단호하게 떠나갈 것을 계속 명령하라. 떠나갈 때까지. 그러면 어느
순간에 이르면, 버티다가 버티다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 후에 떠나가게 된다. 귀신도 상당히 끈질긴 놈이기도 하다.
그래서 믿음과 인내가 필요하며, 단호함이나 담대함이 필요한 것이다.
예수님은 귀신을 칭할 때 더러운 영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귀신은 영물이기 때문이다.
더러운 영( ἀκάθαρτον πνεῦμα)은 무엇을 의미할까? 유대인들은 사탄이나 옛뱀 또는 마귀를 더러운 영(the unclean spirit)라고 불렀다. 사탄은 주로 구약에서 말하는 악한 영이고 마귀는 신약에서 말하는 악한 영인데 같은 종류입니다.
사탄이나 마귀는 하나의 거대한 악한 영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 사탄안에 수많은 귀신들이 활동을 하고 있는데 귀신들이 세상에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유혹하고 꼬이고 미혹케하는데 적그리스도인
짐승과 거짓선지자와 거짓선지자를 따르는 이단들과 세상에서 악을 행하는 세상권세자인 군왕들이 가운데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공중 권세를 잡은 자의 휘하(麾下, 주장의 지휘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에베소서 2:2)
요한계시록 8:2 힘찬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이것들은 마지막 심판에서 마귀와 더불어 불과 유황못인 지옥에 던저질 것이라고 요한계시록 20:10에서 말씀하고 있다.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귀신은 더러운 귀신인데 이 더러운(á̓κάθαρτος, unclean)이란 뜻은 무엇일까? 단순하게 말하면 깨끗한(pure clean)의 반대뜻이다. 무엇을 깨끗하다고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순전하신 분이다.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거룩하시고 순전하시고 깨끗하신 분인데 마귀가 더러운 이유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떠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바로 더러운 것이요 악이요 죄라고 한다. 그래서 마귀는 하나님을 떠났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반대로 행하기 때문에 더러운 영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세상에서 거룩함과 더러움울 규정할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은 하나님편에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 반대편에 있는가에 달려있다. 그 외의 것으로는 무엇으로도 거룩함과 더러움을 결정한 기준이 없다.
그렇다면 더러운 영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마귀에게 속해서 사람들 가운데서 직접적으로 활동하는 마귀의 행동대원격인 귀신을 의미한다. 더러운 귀신은 사람에게서 나갔다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더러운 귀신은 사람안에 들어가기도 하고 나가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왜 나갔을까?
그것은 더러운 귀신의 특성 때문인데 우리가 옛말에 역마살이 끼었다고 하는데 사람이 한 곳에 진득하게 머물러있지 못하고 온 곳을 다 헤집고 싸돌아다니는 것이 역마살인데 이것은 떠돌아 다니는 귀신이란 뜻이다.
귀신은 한 자리에만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 저 사람을 옮겨다니면서 사람들이 죄를 짓게 만드는 일을 한다. 더러운 귀신이 이 사람 저사람을 찾아다닌다는 것은 이것이 사람의 마음을 자신의 집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귀신은 사람의 마음을 집으로 삼고 살아간다. 옛날 사람들은 귀신이 나무나 바위나 집이나 길에 붙어서 산다고 한다. 그러나 귀신은 결코 사람을 떠나서 살수 없다. 귀신이 거하는 집은 사람의 마음이다. 우리가
사복음에 보면 귀신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 뛰쳐나와서 예수님앞에 엎드려 살려달라고 소리지르는 장면이 종종 나오고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아 나오라고 명령하셔서 귀신들린 사람의 병이나 정신을 고쳐주셔서 멀쩡하게 만들어 주시는 사건이 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는 사건은 귀신이 사람의 마음을 거처로 삼고 있다는 증거이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시는 능력을 행하시기 전에는 이러한 사실을 입증해줄만한 어떤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더러운 귀신이 사람의 마음을 집으로 삼고 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게 해주셨다. 그런데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라고 주님이 말씀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더러운 귀신이 편히 쉴 안식처는 물없는 곳이란 뜻이다.
주님이 말씀하신 물없는(ἀνύδρων) 곳은 어떤 곳일까? 유대인들은 더러운 귀신이 물없는 곳 즉 모래사막이나 풀이 없고 황량한 황무지에 거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물없는 곳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사막이나 메마른 황무지가 아니다. 우리나라 무속인들도 귀신이 깊은 산속이나 오래된 고목에 거한다고 믿고 산의 바위아래나 고목나무 아래서 귀신을 부르는 고사를 지낸다. 무속인들이 귀신을 부르는 제사를 지내는 것은 더 강하고 센 귀신을 등에 업고 굿을 하기 위해서이다. 마귀나 귀신은 영물이기 때문에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어느 곳이나 다닐 수도 있고 이동할 수도 있지만 최종적으로 머무르는 집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들도 집을 떠나 여기저기 다닐수 있지만 최종적으로 집에 와서 안식을 누리고 쉼을 얻게 마련이다. 이런 경우처럼 더러운 귀신도 여기저기 옮겨다닐 수 있고 광야나 산에도 다닐수도 있고 하지만 쉴곳은 사람의 마음인데 예수님은 귀신이 쉴 곳은 물 없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물 없는 마음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물은 거룩함과 하나님의 은혜를 의미한다. 물없는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마음을 의미한다. 사람의 마음속에 물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들의 마음이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거부한 마음은 더럽고 황량하며 강퍅하고 사막과 같이 메마른 영혼이다. 더러운 귀신은 특성상 더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의 마음안에 거하기를 좋아한다.
더러운 이라는 것은 마태복음 15:19-20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귀신은 이런 더러운 생각과 같은 종류이기 때문에 더러운 마음을 가진 자 속에 들어가면 매우 편안함과 아늑함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율법적 정결의 함정이 있다
그런데 이 더러운 귀신이 한 사람으로부터 나가서 물없는 곳을 찾아다닌 이유는 이 사람의 마음이 어느 정도는 정결해졌다는 뜻이다. 여기서 한 사람은 바리새인들인데 바리새인들은 한때 모세의 율법으로 일시적으로 또는 반복적으로 지킴으로 그 마음이 정결케 되어지기도 했다. 율법이나 인간의 강한 의지나 노력도 어느 정도 어느 기간동안에는 마음을 깨끗이 할 수 있다. 개과천선한다는 말이 있는데 잘못 들어선 길을 버리고 착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겠다는 결의를 실천하여 마침내 정결한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죽을 힘을 다해 죄와 욕심을 억누를 수 있지만 인간은 깨지기 쉬운 그릇과 같기 때문에 한 번 방심하면 순간적으로 무너져 버린다. 그래서 율법이나 인간의 의지노력 수양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과거에 노름에 빠져서 가산을 탕진하고 나서 후회하며 다시는 노름을 하지 않겠다고 손가락을 잘라내었는데 나중에는 발가락으로 놀음질을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과거에 양도천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예수믿고 어떻게 하면 자신의 마음속에서 음욕을 없앨까 날마다 노력했는데 그 음욕이 없어지지 않아 어느 날 산기도중에 돌을 들어 자신의 음부를 쳐서 잘라버렸다고 한다. 그는 인간적인 노력으로 정결하게 되려다가 결국 이단 교주가 되고 말았다.
죄를 끊으려는 이 몸부림이 얼마나 처참한가? 그렇다고 해서 정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율법과 인간의 의지 수련은 어느 정도 효과는 있지만 결국 인간의 마음깊숙이 숨어 있는 욕망에 의해 무너지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신의 노력이나 율법 인내함으로 죄를 없이한다든지 거룩해지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무능함을 확인하는 비극이 되어진다.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으로 의로워지기 위해 발버둥을 쳤을 때 잠시마음이 깨끗해져서 더러운 귀신이 그들에게서 떠나간 것이다. 어쨌든 잠깐이지만 모세의 율법으로 깨끗해지기는 했기 때문이다. 율법으로 노력으로 수련으로 잠시 마음이 깨끗해진 사람에게서 더러운 귀신은 "어 이 사람이 마음이 깨끗해졌네" 하면서 귀신 적성상 맞지 않으므로 나와서 다른 더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으로부터 나간 더러운 귀신은 자신이 쉴만한 더러운 영혼을 찾고 찾아다니다가 찾지 못했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있다. 율법을 잘 지키고 수련으로 죄를 억누르고 도덕적이며 윤리적으로 마음을 깨끗케 한 사람으로부터 나온 더러운 귀신은 왜 다른 더러운 영혼을 찾지 못했을까?
이 세상에 더러운 사람들이 그렇게도 없었다는 이야기인가? 그런데 더러운 귀신이 쉴곳을 찾지 못했다는 뜻을 잘 생각해보자. 쉬기를(ἀνάπαυσιν. rest) 구하되(ζητοῦν. seeking) 그러나(καὶ. but) 찾지 못했다(μὴ εὑρίσκον. not finds)
여기서 쉬기를(아나파우시스. ἀνάπαυσιs)이라는 말은 막간 잠깐(intermission)의 의미가 있다. 우리가 막간을 이용해서 라는 말을 하는데 연극공연할 때 일 막이 끝나고 이 막이 시작되기 전 잠깐의 휴식시간인데 이 때 관객들은 음료수를 마신다든지 화장실에 다녀온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마음을 율법이나 도덕 또는 수련등으로 깨끗하게 청소하는 그 잠깐 사이에 더러운 귀신이 잠시 가 있을 곳을 찾고 있었다는 뜻이다. 즉
우리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집안을 청소하면서 애들아 잠깐 밖에 나가 놀다가 엄마가 청소 다하면 들어와라고 하실 때가 종종
있었다. 왜냐면 어머니 생각은 애들이 집안에 바글바글있으면 청소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방해가 되기 때문에 잠시애들한테
휴식시간을 주는 것이다. 더러운 귀신은 막간을 이용해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흥미있고 신나는 일들을 찾아 다녔는데 더러운 귀신이 찾아다닌 것은 악하고 못되고 더러운 마음을 품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충동질했던 것이다.
더러운 귀신들은 말 그대로 악동들이라고 할 수 있다. 못된 짓 악한 짓 아주 혐오스럽고 더러운 그런 쓰레기같은 자들을 찾아다니는 악동들이 바로 귀신들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더러운 귀신은 좋아할만한 그런 악하고 더러운 짓들을 하는 자들을 찾지 못했다고 했다.
귀신들도 다 종류가 있다. 예수님은 귀신들을 쫓아내실 때 그 앞에 귀신들의 특성을 붙여서 이름을 부르셨다. 벙어리귀신, 더러운귀신, 일곱귀신, 군대귀신, 꼬부라져 펴지못하게 하는 귀신등 예수님은 귀신들이 인간에게 정신병과 여러 가지 질병을 가지고 들어가며 귀신이 하는 일들을 병명을 통해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실 때 장님이 앞을 보기도 하고 벙어리가 말을 하기도 하고 경련을 일으키던 사람이 낫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정신이 온전하게 되며 병증들이 사라지게 되었다.
일곱 귀신(누가복음 8:2, 11:26)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일곱 귀신이란
귀신들도 다 특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귀신은 어떤 귀신인가?
바리새인들 즉 율법주의라는 외식과 위선의 귀신이며 교만과 사람차별이라는 귀신이 들어와서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구원의 길을 가로막는 지식적이며 고상한 죄악을 범하는 자들이다. 이렇게 겉으로는 율법을 지키고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것처럼 위선을 떨고 있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더러운 영혼을 가진 자들을 사냥하는 귀신을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여기에 있는 더러운 귀신은 양반 귀신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에서는 도덕군자요 법을 잘지키는 자요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떠받듬을 받는 자들속에 있는 위선과 그리스도의 진리를 대적하는 사악함을 우리 주님은 드러내고 계신다. 더러운
귀신은 자신이 쉴만한 곳을 탐색해봤지만 자신의 특성과 맞는 위선자들을 찾지 못하고 다시 나왔던 그 사람에게 찾아온 것이다. 또한
거짓말하는 귀신 음란한 귀신 시기질투하는 귀신 남을 비판하고 악담하는 귀신 자살하는 귀신등등 귀신의 종류는 매우 많은데 그
귀신들은 적성에 맞는 사람에게 들어간다.
우리가 살인을 행하는 사람들을 보면 갑자기 충동적으로 나쁜 짓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평소에 원망과 저주와 앙심을 계속 품고 있다가 귀신의 충동으로 들어와서 결국 끔찍한 악을 저지르게 된다.
어떤 죄든지 순간적으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죄된 생각을 계속 가지고 있으므로 언젠가 그 죄를 좋아하는 귀신이 들어와서 실제로 그 죄악을 짓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샤마니즘에 보면 죽은 사람이 귀신이 되어 구천을 헤매다가 사람들 속에 들어온다는 말을 무당들이 하는데 이것은 다 귀신의 속임수이다.
죽은
사람의 영혼은 결코 이 세상에 있을수 없고 단지 마귀의 하수인인 귀신이 죽은 자들의 흉내를 내어서 마치 전생이 있는 것처럼 죽은
영혼을 달래주어서 보내주어야 한다고 해서 마귀가 사람들에게 제사(섬김)을 받아먹으려는 수작이니 속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전생체험이나 무당이 죽은 자의 혼을 불러들인다는 초혼의식은 완전히 마귀의 장난질이다.
결코 무당이 죽은 부모의 영혼이나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올 수 없다.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의 영혼은 모두 하나님의 권한에 들어가서 심판을 기다린다. 그래서 죽은 자는 다시 세상에 불러올수도 머물수도 없다.
불교에서 49제를 하는 것은 구천에 떠돌아 다니는 죽은 사람의 혼이 49일째에 저승으로 가는데 잘 보내줘야 한다고 하면서 고인의 가족들에게 돈이나 절에 필요한 물건을 바치라고 한다. 죽은 영혼을 이용해서 돈벌어먹는 사람들이 누가 있는가 주변을 둘러보라! 실상 카톨릭에서는 죽은 자를 위해 선행을 하면 그가 지옥에서 연옥으로 올라온다고 거짓말을 하고 헌금을 뜯어낸다. 무당 점쟁이도 죽은 자의 혼을 달래기 위해 굿을 하면서 무지한 사람들에게 돈을 뜯어낸다.
만일 어떤 교회에서도 죽은 자를 위해 명복을 빈다든지 어떤 기념비나 기념회를 만들기 위해 헌금을 요구한다면 귀신의 짓거리이며 저주받을 일이므로 절대 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마귀의 하수인들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은 자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해서는 안되고 오직 살아있는 가족들이나 친척들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선행을 행해야 한다.
나갔던 귀신이 다시 돌아오다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 되었거늘"
귀신이 나왔던 사람에게 돌아가보니까 그 사람의 마음은 깨끗해졌는는데 비어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마음을 깨끗이 청소한 사람의 맹점은 그 마음에 주인이 없었다는 것이다. 빈집 빈 마음이라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아무리 모세의 율법과 구제와 금식과 기도로 자신들을 청소했지만 그 마음속에 진정으로 거룩한 하나님을 모시지 않고 빈 영혼으로 두었던 것이다. 깨끗이 청소되어 있는 정돈된 영혼에 주인이 없다는 사실은 더러운 귀신들에게 아주 구미가 당기고 굉장한 흥밋거리를 제공하는 상황이었다. 다시 일곱귀신을 데리고 들어간 이유는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깨끗하게 소제되고 정리된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온갖 더러운 것들로 다시 채우는 일이다. 세상사람들이 가장 흥미있고 매우 쇼킹한 뉴스는 너무나 착하고 도덕적이고 예의바르고 정의로운 사람이 갑자기 사기를 쳤다든지 뇌물을 받았다든지 혹은 성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그러면 뉴스에 토픽으로 장식된다. 고아원이나 장애자 시설을 운영하는 목사나 신부 혹은 스님이 횡령을 하고 아이들에게 몹쓸짓을 했다는 뉴스를 들으면 사람들은 매우 흥분하면서 그럴수가 있어 그게 사람이야 하고 난리가 난다. 겉으로 볼 때는 매우 착하고 법없이도 살 사람인데 사람을 죽이고 강간하고 강도짓을 했데 하는 것이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지적인 마음을 가진 자의 삶을 더럽고 음란하게 어지럽히는 것이 더러운 귀신들의 아주 재미난 활동인 것이다. 세상사람들에게도 매우 흥미로운 소식이 될 수 있다. 특히 거룩하고 의의 사자같이 보였던 교회 목사가 성추행이니 그룸밍 성범죄니 하고 뉴스에 나오면 사람들의 입에 매우 흥미로운 가십거리가 된다. 마치
어머니가 깨끗하게 집안을 청소했는데 철없는 자식들이 밖에서 놀다가 들어와서 흙뭍은 옷을 털지도 않고 더러운 손과 발도 깨끗해진
방안을 휘젓고 다니며 온갖 때를 뭍히면서 깔깔대고 재미있는 놀이라고 하듯이 난장판을 만들어 놓는 것과 같다.
얼마나 악동들인가?
지식으로 가득차고 윤리와 도덕으로 가득한 인격자들의 마음속에 들어와서 가지런히 정돈된 마음을 음란함과 탐욕으로 외식과 위선으로 더럽혀놓는 악동들이 바로 더러운 귀신들인 것이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도덕군자이고 법을 잘지키는 사람이라고 해도 예의범절이 뛰어나고 사람들앞에서 선비같고 점잖은 사람도 그가 혼자
있을 때 또는 그 마음속에 얼마나 더럽고 추한 것들이 들어있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면 나는 아니다라고 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 주님은 자기의 의와 자기의 의지 자기의 도덕과 자기의 법으로 스스로 깨끗하다고 자부하고 믿는 그런 사람들의 마음속에 더러운 귀신이 일곱이 들어가 상태가 전보다 더 악해졌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거짓과 위선 그리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은 점점 더 더러워져서 나중은 처음상태보다 7배나 더 악한 더러운 귀신들의 집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주님은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들을 귀 있는 자는 성령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말씀하신 귀신이야기를 들은 바리새인들과 율법주의자들 도덕군자들이 주님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듣고 주님을 잡아 죽이려고 이를 갈았던 것이다
주님은 율법주의자 외식주의자들에게 너희가 아무리 겉으로 법을 잘지키고 도덕적이며 모범적이고 착한 척하지만 너희들의 영혼은 7마리 더러운 귀신의 잡탕질하는 놀이터에 불과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의 영혼의 집에 주인을 모셔야 한다. 우리의 영혼의 주인은 우리 자신이 될수 없다. 왜냐면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쫓겨난 후부터 인간의 영혼은 쭉 빈집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마귀는 사람들에게 네 인생은 네 거야 하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속삭인다. 그래서 케세라 세라 네 인생이니 마음껏 즐겨라 하고 귀신은 속살거린다. 내가 내 영혼을 주인이라고 아무리 떠들어대고 내 인생은 내것이라고 아무리 소리질러봐도 소용없다. 내 영혼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는 사실은 누가 가르켜주지 않아도 바로 우리 자신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내가 왜 이러지? 내 마음은 그게 아니었는데 할때가 있다. 이러한 자책은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이 한다. 착한 것같은 사람도 악한 일을 저지른 사람도 자신의 뜻과 달리 행동하는 자기를 보고 놀랜다. 그것은 자신의 영혼의 주인이 자기가 아니라 누군가 있다는 뜻이다. 그 영혼의 주인이 더러운 귀신이라면 점점 점점 더 나빠져서 결국은 7귀신의 거처가 될 것이다. 7귀신은 단지 숫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회복될 수 없는 완벽한 악의 상태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혹시 일곱귀신이 들렸다고 해도 회생의 가능성을 있다. 일곱귀신이 들린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하나님으로 영접한 후에 놀라운 변화를 체험했다. 일곱귀신에 매여서 인생을 포기할 정도였던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의 부활을 가장 먼저 맞이했고 제자들에게 주님의 부활을 선포한 여인이 되었다. 우리의 영혼이 더러운 귀신의 집이나 난장판이 되지 않고 거룩한 하나님의 처소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 /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며 인간으로 오셨지만 죄가 전혀 없으시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으나 죄가 전혀
없으시기 때문에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지금은 하나님의 우편에서 우리의 중보자 그리스도 주가 되시고 장차 의인과 악인을
심판하시러 다시 재림하실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그리스도로 모시고 내 영혼의 집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다.
내 영혼에
거룩하신 예수그리스도가 거하시고 내 영혼의 주인이 되실 때 더러운 귀신들은 왔다가도 혼비백산 일곱 길로 도망가게 될 것이며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앞에 갈 때까지 더러운 귀신들은 우리의 영혼에 얼씬도 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의와 거룩함은 결코 도덕이나 율법 선행 수도 지식 인격으로 되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현 시대에 법을 집행하는 자들이 변태적행동과 탐욕으로 부끄러운 짓을 행하고 권력자들이 음란과 정욕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선생이 제자들을 대상으로 성폭행을 행하고 목사가 스님이 신부가 외간 여자들로 인해 수치를 당하는 것을 본다.
우리 자신이 이것을 행하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가 이러한 더러움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영혼속에 이 더러움이 깊이 숨어 있을 수가 있다. 더러운 귀신이 탐하고 유혹하는 더러움을 우리가 씻어낼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의 거룩함 밖에는 없다. 그리스도를 굳게 믿고 우리 영혼의 주인으로 붙잡아 모셔놓을 때 우리는 모든 더러움을 이겨낼 수 있고 어떤 종류의 귀신도 다 쫓아낼 수 있다.
더러운 귀신(The evil spirit)이란 더러운 영(The unclean spirit)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완전한 영으로 존재하는데 더러운 영은 하나님을 떠난 영이기 때문에 더럽다고 합니다.
그런데 귀신은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명칭으로 부릅니다.
축사(逐邪) / 귀신을 쫓아내는 것
쫓을 축(逐), 간사할 사(邪)
사귀(邪鬼)ㆍ사기(邪氣)를 물리쳐 내쫓음.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마태복음 12:43-45)
고양이는 영물(靈物)인가?
오래 전에 나온 미국 영화 “사랑과 영혼”(the Ghost)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억울하게 죽은 남주인공의 영이 사랑하는 애인
곁을 떠나지 않고 맴도는데 하루는 그녀 혼자 사는 아파트에 강도가 들었다. 자칫 강간당할 위급한 상황인데 애인은 전혀 낌새도 못
채고 있었다. 죽은 영으로선 그녀에게 그 사실을 도무지 알려 줄 길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 강도 앞에 고양이가 있어서 그 영이 고양이와 강도 사이에 들어가 고양이에게 자꾸 해코지를 했다. 고양이가 화가 나서
영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실체가 없는 영 대신에 강도의 얼굴을 할퀴게 되었다. 갑작스레 얼굴에 피가 나도록 깊이 할퀸 강도는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 말하자면 사람은 죽은 영혼과 전혀 교통을 못했지만 고양이는 알아봤다는 뜻이다. 그 장면을 보면서 서양인도
한국 사람처럼 고양이를 영물(靈物)로 간주하는가보다 생각했던 적이 잇다.
예수님은 지금 비유이긴 하지만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가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했지만 얻지 못했다고 한다. 그럼
영물인 고양이에게 들어가 쉬면 안 되었는가?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화 이야기다. 사탄이나 하나님과 교통(communication)이
가능한 영적인 존재는 만물 중에 인간뿐이다.
또 죽은 자의 영혼은 반드시 천국 아니면 지옥 둘 중에 하나로 가게 마련이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을 뿐이다.”(히9:27) 귀신이란 타락한 천사장 즉, 사탄이 하나님을 배역하고 영계에서 쫓겨날 때에 함께
동조했던 악한 천사들이다. 세상에 미련이 남았던 죽은 자의 영이 구천(九天)으로 가지 않고 이 땅에서 떠도는 것이 귀신이라는 것은
민간의 미신일 뿐이다.
귀신이 쉬려고 찾아간 “물 없는 곳”은 광야 사막을 뜻한다. 당시의 이스라엘에선 광야는 사탄의 본거지로 간주되었다. 비유이긴 해도
귀신이 광야로 갔지만 쉬지 못했다는 것은 이런 뜻이 된다. 한 귀신이 어떤 사람을 실컷 갖고 놀면서 더럽고 추하게 만들고 그
인생을 실패케 한 후에 자기 임무를 완수했다고 여기고 보스에게 찾아가 휴가를 신청했다. 그러나 그 우두머리 사탄은 겨우 그것으로 쉴
수 없다고 도리어 크게 야단치면서 네보다 더 강한 동료 귀신 여섯을 더 붙여줄 테니 어떡하든 돌아가 더 열심히 맡은 일을 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또 돌아와 보니 그 사람이 깨끗하게 소제되는 바람에 이젠 일곱 귀신이 들어가서 신나게 데리고 놀면서 그 자의
인생을 완전히 멸망시켰다는 것이다.
사탄과 그 졸개인 귀신들이 설치는 무대는 오직 인간과 인간이 활동하는 세상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간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게 만들고 세상을 더러운 죄악으로 만연케 하는 것만이 사탄과 귀신들의 존재 목적이다. 사탄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고 다닌다. 사탄의 식욕은 끝이 없다. 포만감을 절대 느끼지 않으며 활동을 쉬는 법이 없다. 신자로선 항상 깨어 경성하여
기도하며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대처해야 한다.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귀신 하나가 들어있을 때보다 일곱이 들었으니 얼마나 형편이 심해졌겠는가? 그러나
단순히 이전보다 일곱 배나 나빠졌다는 뜻이 아니다. 일곱은 완전 숫자, 더 이상 찰 필요가 없는 숫자를 뜻한다. 더 나빠지려야
나빠질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을 말한다. 나아질 가능성은 물론 소망마저 전무(全無)한 것이다. 도무지 구원될 수 없는 완전한
멸망이다. 그럼 대체 예수님은 누구를 대상으로 비유한 것이며, 또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지 궁금해진다.
완전히 멸망당할 자는 누구인가?
많은 신자들이 이 비유의 대상에 대해 한두 가지 오해를 하고 있다. 먼저 처음 예수 믿을 때는 귀신이 물러나갔다가 도덕적 종교적
죄를 많이 지으면 다시 일곱 귀신이 들어와 멸망한다고 여기는 신자들이 간혹 있다. 신자는 하나님에게 야단 징계는 맞지만 절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거기다 사단과 귀신이 신자를 훼방, 시험, 유혹은 해도 절대 망하게 하지는 않는다. 신자 내면에 들어와서
점거하고 마음 놓고 갖고 놀 수는 결코 없다.
또 예수님이 귀신들려 눈이 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주었는데 그 사람이 나중에 나쁜 짓을 많이 하는 바람에 다시 귀신이 들어갔다는
뜻도 아니다. 성경은 그 사람이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에 관해 침묵하고 있기에 성경이 말하는 바를 넘어 예단해선 안 된다. 더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이 영육 간에 어디를 고쳐주던 완전한 치유이며 다시 사탄에게 절대 넘겨주지 않는다. 다시 망하도록 놓아둘
양이면 처음부터 고쳐주지도 않으신다. 신자는 때로 사탄의 시험과 유혹에 넘어갈 수 있어도 영원한 멸망과는 영원히 거리가 멀다. 한
번 구원 받으면 그 구원이 결코 취소되지 않는다.
성경에서 의심나는 거의 모든 질문의 해답은 명료하게 혹은 어렴풋이 반드시 본문(text)과 문맥(context) 안에 포함되어
있다. 무엇보다 본문 내의 해답 혹은 힌트부터 찾아야 한다. 예수님은 마지막에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45절)고
말했다. 귀신이 쫓겨나간 그 사람은 한 개인이 아니라 복수의 사람들임을 의미한다.
그래서 일부 신학자들은 이스라엘 나라 전체를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를 하는 등 하나님 앞에 음란한
죄를 많이 지었지만 히스기야왕, 요시야왕, 바벨론 포로 귀환 후 느헤미야와 에스라 시절에는 죄를 회개하고 영적 부흥을 이뤘다.
그런 때에 귀신이 잠시 떠나고 깨끗이 소제되었지만 다시 죄악으로 타락하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는 것이다. 또 그처럼 앞으로의
세대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해석한다. 물론 일리가 있고 올바른 해석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얻은 해석은 다시 문맥의 의미와 비교해 보아야 한다. 이 말씀을 하시기 시작한 39절에서 예수님은 이미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니”라고 했다. 결론에서도 “이 악한 세대”라고 말했다. 한 문맥이나 이야기 안에 동일한 표현을
사용했다면 그 의미도 같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중에 일곱 귀신이 들어가 완전히 멸망할 세대가 직접적이고 일차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믿고 따르며 성전 제사를 열심히 수행했고 율법을 성실히 준행했다. 구제, 기도, 금식, 십일조에 능해 경건한
자들로 존경받았다. 거기다 유대 대중들을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는 자들로 오늘날로 치면 목사 선교사들이었다. 그런
자들에게 대체 어떻게 해서 일곱 귀신이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인가?
본문을 해석할 때에 흔히 범하는 우가 하나 있다. 소제되고 수리되었다는 표현에만 주목한다. 그래서 더 나빠진 나중 형편을 죄를
많이 지은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실제로 당대에선 가장 의로운 자들로 죄를 많이 짓지 않았다. 귀신이
나갔으니 당연히 깨끗해진 것이다. 예수님 표현대로 하자면 귀신이 스스로 나간 것이지 사람이 내어보낸 것이 아니다. 귀신은 사람의
내면이 깨끗하면 아예 들어오지 못한다. 더럽고 추하고 어두운 심령에 잘 들어가는 법이다. 특별히 세상과 담을 쌓고 외롭게 혼자
따로 떨어진 채 사는 자들에게 더 잘 들어간다.
본문의 해석의 키는 그 사람의 내면이 텅텅 비워졌다는 사실에 있다. 외롭게 격리된 자에게 귀신의 훼방이 심하다는 것도 결국은
내면이 비워졌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내면이 비워진 것은 하나님의 영으로 채워져 있지 않았다는 뜻이다. 만약 하나님의 영이
채워져 있었다면 일곱 귀신이 아니라 그 보스인 사단이 와도 절대 들어가지 못한다. 본문은 놀랍게도 하나님을 잘 알고 열심히
믿어도 그 내면에 하나님의 영이 채워지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인가?
상대방 코트에 넘어간 공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예수님께 데려와서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물었다(요 8:1-11). 간음한
여인은 그 자리에서 돌로 쳐서 죽이면 되었다. 구태여 물어볼 일이 아니었는데도 일부러 예수님 앞까지 끌고 온 수고를 한 까닭은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을 곤경에 빠트릴 작정이었다. 만약 예수님이 죽이라고 하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당신의 가르침을 스스로 위반한
위선자라고 몰아붙이고, 그 반대로 용서해주라고 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어긴 이단이라고 정죄할 판이었다.
예수님의 대답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것이었다(요 8:7). 죽이라고도, 살려주라고도
하지 않았다. 예수를 완전히 꼼짝 못할 함정에 빠트렸다고 믿었던 그들의 기대는 무참히 무너졌다. 주님은 절묘하게 도리어 그들에게 그
여인의 처분을 맡겼다. 공이 상대방의 코너로 넘어간 셈이다. 인간이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곤경에 빠트릴 수는 결코 없다. 너무나
교만하고 완악한 죄이다 못해 정말로 하늘에서 보시고 웃을 정도로 어리석은 짓이다.
예수님의 뜻은 “율법에 대해선 너희가 전문가이자 집행자가 아니냐? 그러니 너희가 알아서 처리하라. 실은 나한테까지 데리고 올 필요
없이 율법대로 바로 처리했어야 하지 않느냐? 또 너희가 그렇게 의롭다면 너희야말로 정죄할 자격이 있지 않느냐. 이 중에 너희
말고 이 여인을 정죄할 권한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럼 어떤 결과가 되는가? 누구라도 먼저 돌을 들고 치면 자신은
전혀 무죄한 성자가 된다. 반면에 돌을 들고 치지 않으면 율법을 수호해야할 자들이 오히려 율법을 어긴 죄인임을 인정하게 되는
셈이다.
실제로 벌어진 상황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물러갔다. 팽팽한 긴장과
갈등으로 가득 찼고 이제 곧 피가 튀는 비참한 장면이 연출될 상황이 너무나 싱겁게 종료되었다. 기세등등했던 그들이 왜 모두
물러가버렸는가?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으니 나도 그 중에 한 사람이라고 여겼을까? 아니면 이전에 지었던 크고 작은 죄들이
순간적으로 떠오르면서 회개하는 마음이 들었는가?
인간이라는 존재는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그리 선하지 않다. 아니 사실은 아주 위선적이고 치사하고 음흉하다. 지금 물러간 자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들의 의를 자랑하는 자들이었다. 시장에
나가면 모든 사람들이 칭찬하는 경건한 자들이었다. 스스로 회개를 쉽게 할 자들이 아니다.
복음서의 기록을 보면 그들이 예수님에 대한 모함을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또 자기들의 기득권 보호라는 내면의 동기는 철저히
감추었다. 아니 하나님을 위한다는 신념과 열정에 가득 차서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겼다. 평소에 미워하며 잡아 죽이지 못해 안달하는
상대인 예수에게서 네 자신의 죄부터 돌아보라는 한 마디를 들었다고 결코 쉽게 회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말을 듣게 되면 불에
기름을 붓는 꼴로 분노와 미움만 가중된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싫은 자가 말하면 그 옳은 말 때문에라도 더 미워진다.
잘 되라고 하는 부모의 진정어린 충고조차 반발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솔직히 저를 비롯해 우리 모두가 어려서부터 부모님 말씀을
하나도 어기지 않고 그대로 순종했다면 지금보다는 형편이 한층 나아지고 훨씬 더 훌륭한 사람이 되어있지 않겠는가? 미국 이민 와서
이런 고생도 하지 않고 말이다. 부모가 사랑으로 당부하는 지당한 말씀도 듣기는커녕 반발하는 것이 인간인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길 외에 어떤 소망이 있겠는가?
물러간 두 가지 이유
인간의 사고는 가장 최근의 일부터 떠오르기 마련이다. 이런 맥락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물러간 개연성 있는 이유를 두 가지
정도로 추정해볼 수 있다. 우선 죄송하지만 영화로 치면 R(성인) 등급의 이야기를 하겠다. 간음한 여인은 아무래도 얼굴이 예쁜
편이다. 한국의 한 뚱뚱하고 못난 노처녀 개그맨이 너무 외롭다 못해 집에 도적이라도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우스개를 했다. 못난
여인은 시집도 못 가는데 간음할 수는 없지 않는가?
어쨌든 예쁜 여인이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 왔으니 제대로 입지도 못하고 거의 벌거벗은 몸이다. 그런 여인이 지금 남정네들이 둘러싼
한 가운데 내동댕이쳐져 있다. 사람은 참으로 요상한 동물이다. 발레나 피겨처럼 짧은 치마를 입고 다리를 쩍쩍 벌리고 올려도
예술적 감동을 느끼는 반면에 노출 여부와 상관없이 이상야릇한 모습이나 상황에서 정욕이 발동된다. 어려서부터 사탕을 뺏거나,
속이거나, 훔쳐서 먹어야 훨씬 맛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성경은 그래서 죄를 화살이 과녁을, 즉 정도와 기준을, 벗어난 행동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지금 둘러싼 남정네들이 그 여인을 정죄하여 죽이려 들면서도 내심 그 여인의 몸매를 지긋이 감상하고 음욕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그중에는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가르칠 때에 참여했던 자들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예쁜 여인을 보고 음란한 생각을 품어도 이미
간음한 것이라는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음을 순간적으로 깨달았을 수 있다. 그 여인은 육체로 간음했지만 그들은 마음과 영혼으로
간음한 것이다. 그녀만 돌로 쳐 죽임을 당할 것이 아니라 그들 모두가 돌을 맞아 죽어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가능성이 높은 이유는 따로 있다. 율법에는 간음한 남녀는 둘 다 처형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성경에는 상대
남자에 대한 언급이 일절 없다. 남성을 우대했던 당시에 남자부터 돌로 처형했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예수를 모함에 빠트리려는
음모가 배후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여인을 술이나 미약으로 유혹했든지 간에 그 구체적 경과는 몰라도 여자만 잡혀온 것은 분명히
억울한 희생양이었다.
명색이 종교지도자들이었는데 그 생각이 얼마나 간사하고 치졸한지 모른다. 우선 그 여인의 생명과 인격은 정말 돌멩이보다 못하게
여겼다. 또 그녀를 돌로 쳐 죽이는 책임을 예수께 떠넘기려 했다. 아니면 예수를 일구이언하는 위선자로 매도하려 했다. 어떤 경우가
되던 예수를 죽일 수 있는 나름 타당한 근거를 쌓으려는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이 너희가 여인의 정죄를 책임지라고 하자 아무리 양심에 털이 난 자들이었지만 불현듯 심령에 찔림을 느낀
것이다. 만약 단순히 그녀를 보고 마음으로 음욕을 품었든지, 지난 죄들이 생각났다 치면 개인적 문제이므로 남들이 알아챌 리가
없다. 먼저 돌을 던지고 여인을 정죄하면 율법을 가장 잘 준행하는 자로 도리어 존경 받을 수 있다. 반면에 음모란 여러 명이
의논하는 법이다. 조금 전에 여자만 억울하게 죽음으로 내몰면서 예수까지 옭아매는 일석이조의 논의를 함께 했던 자들끼리는 서로의
잘못을 익히 알고 있다.
성경이 얼마나 정미한 기록인지 모른다. 어른부터 물러갔다고 한다. 어른은 나이든 장로, 즉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의미하는데
악하고 추한 모의에 함께 참여했던 자들로선 도무지 먼저 돌을 들고 칠 자신이 안 생긴 것이다. 율법 집행자들이 물러가니 구경꾼으로
따라온 대중들이야 더 머물 일이 없다. 어른이 직분과 상관없이 순전히 나이만 뜻한다 쳐도 여인을 보고 음심을 품는 것은 나이와
상관없고, 아니 늙은이가 더하다는 뜻이 된다. 노아 홍수의 심판 후에 하나님이 탄식했던 상황에서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8:21)
물론 그들이 여인을 보고 음심을 품었거나, 또 그 녀를 희생양으로 삼는 음모를 꾸몄다는 성경의 언급은 없다. 단순히 행간의 의미를
추적해 본 개연성 있는 추측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예수를 궁지에 몰아넣어 죽일 구실을 만들려는 음모를 꾸민 것만은
확실하다. 또 그래서 그들이 희미하게나마 양심에 찔려 물러 간 것은 오늘의 본문으로 치면 한 귀신이 물러간 것이다. 그들의 심령을
묶고 있던 사단의 사슬에서 일시적으로 풀린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가? 음모가 완전히 무력화되고 오히려 자신들의 죄를 어쩔 수 없이 인정하게 되었으니 씁쓸한 패배감,
낭패감, 수치감이 말할 수 없이 컸을 것이다. 예수에 대해 얼마나 이를 갈았을지 눈에 빤하다. 광분하여 예수를 더 심하게 대적하다
결국에는 십자가에 매달았다. 일곱 귀신이 들어가 나중 형편이 더 심해진 것이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아보지 못했고
알아볼 생각도 없었다. 그저 자기들 권세, 명예, 재물이 줄 것만 염려해 하나님 그분을 대적했다. 그들에게 기다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히 영원한 멸망 외는 없지 않는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
반면에 그 여자의 경우는 어떠했는가? 유대 율법으로 따져 그녀의 운명은 곧바로 죽음으로 끝나게 되어 있었다. 아예 모든 이의 관심
밖이었다. 본인도 이제 곧 돌팔매가 날아올 텐데 그 고통을 어찌 견뎌낼지 두려움에 사로잡혀 어쩔 줄 몰랐을 것이다. 어떡하든
머리에 돌 맞는 것은 피해보려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었는지 모른다. 벌거벗은 여인네들은 본능적으로 가슴을 가리는데 머리를
감싸고 있으니 더 야릇한 포즈가 되었을 것이다. 그 벌거벗은 몸 위로 남정네들의 끈끈한 시선이 지렁이처럼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기에 부끄러워서라도 혀를 깨물고 죽고 싶었을 것이다. 소망이라곤 단 한 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미 모든 미련을 포기했을
것이다. 어서 죽어 이 상황이 한 순간이라도 빨리 끝나기만 바랐을 것이다.
그런데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죽지 않고 살아나게 된 것이다. 새 인생을 덤으로 허락 받았다. 아마 유대 사회에서
간음한 여자가 처형 안 당한 최초의 사건일지 모른다. 어떻게 그런 기적이 가능했는가? 물론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여인 쪽에서 보면 모든 것을 버리고 완전히 벌거벗은 채 하나님의 처분만 기다렸다. 물론 자의로 그랬다기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몰리긴 했어도, 그 속마음은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철저히 자각하고 그 영원한 운명을 하나님의 손에
완전히 의탁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까지 자신들의 의로움을 자랑했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경건하다고 칭송 받았고, 율법을 해석 판단하고 집행하는 권세를
가졌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 앞을 떠남으로써 나중에 일곱 귀신이 들어가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다. 반면에 인간의 상식,
법률, 관습, 종교, 양심 어느 것으로 따져도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한 여인은 예수 앞에서 아무리 부끄럽고 치사한 모습이라도 끝까지
남아 있음으로써 천국의 영광스런 구원을 얻었다. 이 차이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인간이 진짜로 살고 죽음이 누구에게 달렸는지
깨닫겠는가?
하나님을 믿어도 예수를 믿지 않으면?
본문의 일곱 귀신의 비유가 뜻하는 것은 우선 지정의로 인식은 못해도 인간의 내면에 영이 자리하는 영역이 있다는 것이다. 또 그
영이 오히려 지정의를 통제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영은 비워있지 않고 반드시 사단 아니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이다. 결국
모든 인간은 두 종류로만 나뉜다는 것이다. 더러운 사단의 영에 조종을 받아서 영원한 멸망으로 달려가는 자와,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의 인도에 따라 밝고 빛나는 하늘나라로 한 걸음씩 걸어가는 자다. 하나님에 속했느냐, 사단에 속했느냐 둘 중 하나다. 그 중간
지대, 이것도 저것도 아닌 회색지대에 속한 자는 아무도 없다.
말하자면 지성, 도덕성, 종교성이 뛰어나서 세상에서 의인으로 칭송 받아도 하나님의 영이 그 속에 없으면 일곱 귀신이 들어가 완전히
멸망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도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필터를 통과하지 않고는 그 내면에 하나님의 영이 들어갈 수 없다. 그
여인처럼 주님 앞에 자신의 전부가 썩고 추했음을 진실로 고백하고 엎드리는 길 말고는 말이다.
일곱 귀신이 들었다고 해서 괴상한 말과 행동을 한다는 뜻이 아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실제로도 가장 경건한
자들이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심판권을 넘겨주었지만 차마 양심에 찔려 정죄하지 못했다. 그럼 자기들도 이미 죄인임을 시인했다.
가장 경건했던 그들마저 죄인이라면 모든 인간이 죄인이다. 따라서 인간은 인간을 절대 정죄하지 못한다는 것이 간음한 여인 사건의 또
다른 의미다.
그 장소에서 인간을 정죄할 수 있는 권세를 지닌 자는 오직 메시아 예수님뿐이었다. 그런데 그분 하나님조차 그녀를 정죄하지 않았고
오히려 용서하는 사랑을 베푸셨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음모에 억울하게 희생되었음을 아셨기 때문만은 아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이나, 그들의 음모에 부화뇌동하는 어리석은 대중들이나, 현장에서 간음하고 잡혀온 여인이나 모두가 똑 같은 죄인임을
아셨던 것이다. 인간이 너무나 연약, 무지, 무능 한데다 죄와 사단과 사망의 권세에 눌려 사는 진토 같은 존재임을 철두철미
아시기에 너무나도 불쌍하고 안타까이 여기셨던 것이다.
그분은 이 땅에 죄인을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다. 당신께서 택하신 자기 사람을 당신께서 죽기까지 사랑하셨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사실은 외면한 것이 아니다. 그들만 유독 저주하며 야단치셨지만 아무 관심이 없다면 상대도 않았을 것이다.
지도자들이니까 더더욱 안타까워 바로 서라고 꾸중한 것이다. 죽기 직전에도 그들이 자기들이 한 짓을 모른다고 성부께 용서를 구했다.
그들에게 죄 없는 자 먼저 치라고 말한 것도 음모했던 일에 양심의 가책을 조금이라도 느낀다면 진정으로 회개하라는 구원으로의
초대였다.
그들은 주님의 그 초대마저 거절했다. 자기들 음모가 들키고 양심에 찔려 물러 가긴했어도, 어쩌면 먼저 물러가는 그 조차 자신의
의이기에 내심 자랑스럽게 여겼을지 모른다. 엄밀히 따져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까지는 인정했어도 자기는
주위의 누구, 누구보다는 훨씬 낫다고 자부하는 자들이었다. 오늘 날에도 지성과 도덕성과 종교성이 뛰어나서 하나님까지는 인정해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엎드린 적이 없는 의로운 신자들에게 나타나는 동일한 행태이지 않는가?
예수 믿은 가장 큰 표적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치명적 잘못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몰라보았고 아예 알려고도 하지 않은 것이다. 예수님이 처음 그들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야단친 이유는 그들이 표적을 보기를 요구했기 때문이었다.(마12:38) 만약 진정으로 표적을 보기 원했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어떡하든 예수님의 메시아 됨에 시비를 걸려고 덤볐기에 악한 것이다.
인간적 수단이 고갈되면 기적을 구할 수밖에 없다. 신자는 표적을 구할 수 있고 또 구해야만 한다. 아니 기도의 의미 자체가
그러하다. “하나님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이지 않는가? 그래서 아무리
적은 모습이라도 기도가 응답되면 그것은 기적이다. 아니 죄에 찌든 추한 인간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며 기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저는 예수 믿기 전에 너무나 교만했다. 자존심이 하늘을 찔렀다. 그러니 기도라는 것을 해 본적이 전혀 없었다.
불쌍한 이웃은 아예 안중에도 없었고 부모 형제는 물론 내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한 적이 없었다. 예수님을 만나 심령이 완전히
깨어지고 난 후에 비로소 기도를 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기도하도록 만든 것이다. 기도하는 것 자체가 기적인 까닭이다.
그랬던 제가 지금 단상에서 설교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표적인가? 여러분을 만날 것은 계획은커녕 꿈도 꾸지 않았다. 저의
자격, 의, 공로, 노력, 능력 하나 들어가지 않았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이끄신 일이다. 당연히 하나님의 기적이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이 교회에 나오고, 주위의 성도를 만난 것도 기적이다. 나아가 지금의 아내나 남편이나, 죽도록 말 안 듣는 자식을 만난
것도 다 하나님의 기적이다. 하나님이 주신 기적이라면 정말로 귀하고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해야 한다.
가뜩이나 진정으로 사랑할 시간이 너무 모자라는 인생이니까 말이다.
예수 믿고 난 후에 얻은 가장 큰 표적이 무엇이겠는가? 신자가 되어 가장 수지맞은 것 말이다. 오늘의 본문으로 치면 절대로 일곱
귀신이 들어와서 나를 갖고 놀 수 없는 신분이 된 것이다. 주 예수 안에 있기에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것이라고는 이 세상에 어떤
것도 없는 것이다. 바로 그런 기적을 성경은 또 이렇게도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4:7-9)
세상에서 사방으로 우겨쌈은 당할 수 있으나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고 한다. 사단의 훼방과 시험과 유혹은 받을 수 있으나 절대로 그
노예로 묶여 조종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내면이 비워져 있지 않고 예수의 영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환난과 질병으로
고통이 끊이지 않고 인간관계에 상처 받고 억울한 누명을 쓸 수 있으며 죄에 빠져 추해질 수도 있지만 주님은 끝까지 용서하고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해주신다.
불신자나 신자나 도무지 해결책이 안 보이는 너무나 갑갑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그러나 불신자의 나락에는 자기 말고는
아무도 없다. 오직 흑암과 멸망과 죽음만이 기다린다. 여태 주인 행세하던 사단마저 또 한명 예수 믿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기뻐 날뛸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술, 마약, 섹스, 모든 수단을 써보다가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저 자포자기한 채
살아 간다. 유일한 위로인 술병을 끌어안고 말이다.
신자가 떨어지는 나락에는 절대 혼자가 아니다. 그곳에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 아니 이미 먼저 와서 기다리고 계신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 38년 된 행려병자, 12년간 혈루병을 앓은 여인, 귀신 들려 눈멀고 벙어린 된 자, 밤늦게 찾아온
니고데모, 거기다 죽은 지 나흘 되어 썩는 냄새가 나는 나사로의 무덤 안에도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는 비춰지고 있었다.
예수님은 절대로 일곱 귀신에 물려가도록 우리의 내면을 비워두지 않는다. 그분께 엎드리기만 하면 당신의 사랑과 긍휼로 채워주신다.
아니 예수를 처음 믿을 때 이미 성령님이 내주하셔서 영원토록 떠나지 않으신다. 그 이유는 우리더러 이제는 이전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새롭고도 거룩한 인생이 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소망과 기쁨이 되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앞에서 부모 권면만 제대로 따랐어도 미국에 이민 와서 이 고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만약 한국에 그대로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아직도 절망의 나락에 홀로 떨어져서 지난 실패를 한탄하고 세상을 불평하면서 술독에 빠져 지새웠을 것이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 당신께서 이 교회, 이 자리에 옮겨놓으신 것이다. 이 얼마나 큰 기적인가? 절대로 이전의 헛된 삶으로 되돌아가지
말고 당신께서 기뻐하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다.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가 도덕적 종교적으로 얼마나 의롭고 경건한지가 아니다. 착하게 살고 서로 사랑하는 것은 불신자도 할 수 있다.
신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래야만 하는 당위다. 물론 교회 안에서 그러도록 가르치고 훈련 받고 실천해야 함은
중요하다. 그러나 교회란 성도들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가득 채워서 그분의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곳이다. 성령의 충만을 받아서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해야만 한다.
예수님이 왜 신자더러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라고 하셨는가? 자신이 부인해지는 만큼 성령이 충만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할
것이 하나 있다. 그런다고 당장 현실의 문제가 해결되고 고통이 멈춰지는 것은 아니다. 오직 하나, 어떤 어려움을 만나도
담담해지게 된다. 흔들리지 않고 요동치지 않게 된다. 불신자처럼 자포자기에서 오는 담담함과는 그 차원이 전혀 다르다. 주님의
영으로 충만해 있기에 그분의 권세에 힘입어 죄와 사단과 사망 앞에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것이다. 또 현실에서 비록 우겨쌈을
당해도 주의 영이 함께 하기에 절대로 망하지 않음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선택된 인생을
삽니다. 그래서 인생은 선택이다라는 명제는 일견 옳아 보이죠. 관계를 맺을 사람을 선택하고 또 사건을 선택하고 진로를 선택하고
사물을 선택하면서 보다 나은 미래를 꿈꾸며 사는 것이 보편적 인간의 일상이라고 할 수 있어요.
심지어 인간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스스로에게 유리하게 결정지어지도록 종교행위를 빙자해서 열심히 빌기도 하죠. 아니 거의 대부분의 종교인들이 그러한 자신의 그
선택의 용이를 위해서 자신의 종교와 신을 이용하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유명한 셰익스피어의 소설 햄릿에 나오는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사느냐 죽느냐 거기에 대한 선택을 먼저 해야 돼요! 일단 죽음이냐 삶이냐를 선택을 해야 그
나머지 선택이 가능해질 수 있다 말입니다. 그렇게 살아있는 모든 인간은 삶을 선택한 사람들이에요.
소유 지향적 삶을
사는 사람들은요 그 소유라는 대상이 사라지거나 줄어들게 되면 상실감을 느끼게 되지만, 존재 지향적 삶을 사는 사람들은 그 소유의
변화에 의해서 수시로 행복과 불행에 따른 롤로코스트를 타지 않을 수 있어요. 존재가 소유를 지배해야지 소유에 의해서 인간존재가
끌려 다니면 안 된다는 거죠.
성경을 아는 사람들은 절대 여기에 넘어가면 안 돼요. 인간은 소유의 증대를 목표로 삼아서
살아서는 안 되고 인간 존재 자체의 그 가치와 질을 향상하는 것을 목표로 삶아야 한다라는 거죠. 그러나 성경은 그 모든걸 다
뭉뚱그려 죄라고 해요. 인간은 소유를 늘이고 성공을 추구하며 행복을 얻도록 창조되지도 않았지만, 자기 존재의 성숙과 발전과 향상을
위해 창조된 것도 아닙니다!
역사는 인간이 착해지고 순결해지고 헌신적인 사람으로 변해가는 과정이 아니라는 거예요.
스스로 신이 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죄성은요 자기 존재의 착함이나 선함등도 소유의 대상으로 끌어당겨요. 그래서 그것으로 자기를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그게 소유 지향적 삶이에요.
어떤 스님처럼 무소유의 삶을 자기의 소유로 삼기도 하고, 하느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청빈과 무소유는 그 무소유와 청빈을 소유하고자 하는 인간의 죄성이란 말입니다. 봉사나 구제 이런 것도
인간들은 소유로 붙들어요. 내 것! 내가 한 것! 그러니까 내가 칭찬받아야 할 일!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진짜 존재 지향적
삶을 선택할 수도 없을 뿐만이 아니라, 그 삶을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 낼 수도 없어요.
여러분 인간들이 선택을 하면서
살고 있다라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인간의 행위에는 별 관심이 없어요. 인간들에 행위, 사건화된
인간들의 행위에는 별 관심이 없어요. 성경이 관심을 갖는건 그러한 행위를 하는 그를 움직이는게 무엇인가를 아는 거예요. 그래서
나쁜 일 한 놈도 천국 가고, 착한 일 많이한 이가 지옥 가는 일이 성경에 그려져 있는 거예요.
(고린전13,3) 3 내가 비록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 준다 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하여 불 속에 뛰어 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모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게
낫땅이라는 뜻이거든요. 없다라는 뜻이에요. 헛거다. 내 모든걸 다 털어서 구제를 하는 행위 요만큼도 안 남기고 내 모든걸 전부
털어서 남을 돕는 행위란 뜻이에요. 그리고 남을 위해 내 몸을 불사르도록 분신이죠 이거? 불사르도록 내주는 헌신이 하느님의 사랑을
입고 그 사랑을 아는 이의 행위가 아니라면 전부 헛것이라는 거예요. 아니 헛것 정도가 아니라 그것 자체를 하느님이 '죄'라
그래요.
따라서 성도의 행위는 하나도 빠짐없이 하느님이라는 사랑의 본체를 증거하는 것이어야지,
하느님을 증거하는 것이어야지. 그러니까 내가 쇠해지고 망해지며 하느님이 드러나는 것이어야지! 그 자체의 그 성숙이나 발전이나
변화를 보여주는 용도여서는 안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가 드러난다 말입니다. 그가 높아지는 거예요.
성경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닌 인간의 자기평판, 자기인기, 자기 자랑 챙기기의 일환으로 드러나는 그 어떤 모양의 선한 모습도 전부 죄라고
규정해 버려요. 오히려 소유의 획득을 지향하는 기복주의자들이나 신비주의자들은 순진하기라도 하죠. 어떨 때 보면 귀엽잖아요.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거니까 순진하기라도 해요. 그 사람들은요.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이미 들키고나 있지만,
(에페소2,2) 2 여러분이 죄에 얽매여 있던 때에는 이 세상 풍조를 따라 살았고 허공을 다스리는 세력의 두목(마귀 귀신)이 지시하는 대로 살았으며 오늘날 하느님을 거역하는 자들을 조종하는 악령의 지시대로 살았습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육체와 마음에 원하는 것을 하는 자들이 다 귀신들린 자들이라는 거예요. 그게 착한 일이어도 귀신들린 자의 삶이란
말이에요. 하느님은 그들의 행위에 진노하신다라고 이야기한다 말입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이 무엇을 좋아하실 것인가 조차도 자신들의
선악구조로 지들끼리 합의하여 지키고 있는 거라 말이에요. 그걸 죄라고 해요. 오늘 본문의 일곱 귀신 이야기가 바로 그 이야기예요.
어떤
사람 속에 귀신이 살고 있었습니다. 귀신이라는 건 실제로 존재하는 마귀의 실체를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우리 속에 여전히 존재하는
자아 숭배의 삶. 나를 주인으로 하여 사는 삶. 그 자아 숭배의 삶인 그 마귀적 속성 전체를 귀신 마귀 사탄이라고 한다
말입니다! 실존하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그런 총합적인 개념을 마귀 귀신이라고도 해요.
어리석은 사람들이 귀신들림
이라는걸 입에 거품이나 물고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것 정도로 생각하죠. 헛것이나 보고 헛소리나 듣고 하는거 목소리가 막 애기
목소리로 나오고 이러는거... 그건 그냥 질병이라 그러는 거예요. 진짜 무서운 귀신들림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그건 병이에요.
물론 그러한 질병도 죽음의 증상이기는 해요. 그러나 정신 분열증 같은 류의 그 정신과적 질병만을 귀신들림으로 이해를 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거예요.
우리 인간들의 뇌세포는 무려 천억 개가 넘어요. 그 뇌세포들이 시냅스라는 연결장치로 이어져
있어요. 그 시냅스로 화학 전달 물질이 흘러서 정보가 전달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뇌세포 속에서 일을 하는 신경전달 물질 중에
도파민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 도파민이라는 것은 간단하게 말하면 모르핀 같은 역할을 해서 감정, 동기부여, 욕망, 쾌락 등에
영향을 미치죠. 이 도파민 분비 조절에 이상이 발생하면 사람에게 다양한 질환이 생기게 되는데요.
도파민의 분비가 너무
많아지면 조울증이나 정신분열증을 일으키고요. 도파민의 분비가 줄어들 경우에는 우울증을 일으키게 돼요. 따라서 귀신이 들렸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항 도파민제 주사를 한방 주면 차분해지게 됩니다. 주님이 귀신을 쫓아낸다라는 건 보다 본질적이며 근본적인 죄의
뿌리이자 본질의 총합을 부수고 밀어내는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축귀인 거예요.
예수님 당시 그러한 삶을 살던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었단 말입니다. 율법학자들이었단 말이에요. 지금 그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라 말입니다. 그
깨끗한 사람들에게 그 착한 사람들에게 그렇게 율법의 요만큼이라도 흠이 없었던 그 사람들에게 귀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니들이
일곱 귀신 들린 놈들이야 이놈들아' 이야기하는 거예요.
(루가18,11~14) 11 바리사이파 사람은 보라는 듯이 서서
'오, 하느님!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을 뿐더러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칩니다' 하고 기도하였다. 13 한편 세리는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다. 14 잘 들어라.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 간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세리였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
열심히 기도하며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도 꼬박꼬박 했고,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도 않았던 바리새인을 주께서 불의하다 그런데 주님께 가까이 오지도 못하고 감히 하늘도 우러러보지
못하고 멀찌감치 서서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주님이 불쌍히 여겨주시지 않으면 존재 자체가 불가능한 사람입니다"라고 면목없이 쭈그려
있는 사람 이 사람을 하느님이 의인이라고 한다구요.
"하느님 저는 하느님의 은혜가 없으면 존재 자체가 불가능한 자인데
어쩌면 좋습니까!"하고 면목 없는 자리에 서는 것을 하느님이 요구하신다 말입니다. 하느님 앞에 카운트되는건 그 사람의 행위가
아니에요. 그가 정말 인간이라는 피조물의 실체와 하느님이라는 존재의 위대함을 아느냐!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영생은
하느님과 하느님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하는 거예요. 아는 것! 그분이 누군지를 알면 내가 누군지를 알게 돼요.
그리고 나와 그분 사이의 그 갭을 이건 도저히 메꿔질 수 없는 갭을 누군가가 채워주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것을 알고 하느님의
은혜만을 꼭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영생이라고 하는 거예요. 주님은 그토록 열심히 종교행위를 했고 그토록 열심히 착한 일을
행했던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시기도 했어요.
(요한8,44) 44 너희는 악마의 자식들이다. 그래서 너희는 그
아비의 욕망대로 하려고 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였고 진리 쪽에 서 본 적이 없다. 그에게는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거짓말을 할 때마다 제 본성을 드러낸다. 그는 정녕 거짓말쟁이 이며 거짓말의 아비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마귀다 그런 뜻이에요. 그 착한 사람들에게 귀신들렸다 이렇게 착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자기의 영광과 가치와 자랑과 만족을 챙기기 위한 모든 시도가 귀신들린 자의 행위인 거예요. 그게 마귀의 행사인 거예요.
그러니까
착한 마귀 있다? 없다? 우리의 인간적 관점으로 봤을 때 착한 마귀 있어요? 마귀는 이 땅에서 광명한 천사로 보여지게 되어
있어요. 악당같은 마귀는 그건 미련한 마귀에요. 진짜 마귀는 착한 마귀로 보여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그 존재의 주도권을
귀신이 쥐고 있음을 알 수 있어요.
(마태12,43-45) 43 “더러운 영이 사람에게서 나가면, 쉴 데를 찾아 물
없는 곳을 돌아다니지만 찾지 못한다. 44 그때에 그는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야지.’ 하고 말한다. 그러고는 가서 그 집이
비어 있을 뿐만 아니라 말끔히 치워지고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45 그러면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 이 악한 세대도 그렇게 될 것이다.”
귀신이
사람의 허락도 안 받고 자기 마음대로 나갔다 들어갔다 하죠? 우리가 여기에서 그 귀신이 애초에 있던 곳에서 왜 나갔느냐를 밝히는
건 무의미한 수고에요. 왜냐면 성경이 그것을 밝히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이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인간이 귀신에 들고 나는 것에 전혀 관여를 할 수 없다라는 사실이에요. 지 마음대로 들어갔다 나갔다 한다 말입니다.
마치 감기를 비롯한 질병이 자기 마음대로 들어갔다 나갔다 하는 것과 비슷하고요. 도박이나 알콜이나 마약들의 중독들이 자기 마음대로 들어왔다가 나가는 현상과 비슷하기도 해요.
중독이라는
건 우리가 의지를 결단하고 노력을 하여 몰아낼 수 있는게 아닙니다. 중독이라는건 지가 찾아왔다가 지가 나가는 거예요. 그거를
알으라고 하느님이 우리에게 그런 것들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감기가 우리 허락 맡고 들어옵니까? 그리고 우리에게 통보하고 나가나요?
아니에요. 인간은 이렇게 늘 객체로 살게 돼있어요. 어떤 상황 어떤 사건 속에서도 인간은 주체로 행사를 할 수 없어요. 그렇게
무력한 존재에요. 인간은요. 오늘 본문 바로 위에 나오는 예수님에 말씀 한번 보세요.
(마태12,27~28) 27 내가
만일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면, 너희의 제자들은 누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말이냐? 그러니 바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28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영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보다시피 구원받기 전의 인간은요 마귀의 세간일 뿐이에요. 장롱 의자 흐흐... 테이블. 마귀집의 세간 그
세간은 스스로 움직이지도 못해요. 마귀가 놓는 곳에 있어야 돼요. 그리고 마귀가 사용하는 데로 그냥 사용당해야 돼요. 그게
세간입니다. 따라서 마귀의 세간(世間)이 행하는 모든 일은 그 모양이 아무리 깨끗하고 훌륭해 보여도 마귀의 행사에요.
그러므로
서두에서 말씀드렸던 죽느냐 사느냐 혹은 소유냐 존재냐 등의 질문에 대한 선택도 결국 인간이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거예요. 모든 인간들은 자기의 주인에 의해 선택을 강요당하며 살게 되어 있어요. 마귀의 세간은 마귀의 선택을 쫓아가게 되어 있는
거구요. 하느님 나라의 백성은 하느님의 선택을 쫓아가게 되어 있는 거예요.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 스스로의 의지와 결정으로 선택을 하며 살고 있다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내 주관으로 내 의지로 나는 내가 원하는 선택을 하면서 살고 있다?
연약하고
우매한 인간은요 늘 선택을 강요받으며 살아요. 그래서 아담 속의 인간은 늘 죄만 선택합니다. 이 세상은 마귀가 다스리고
있거든요. 그가 죄를 선택하라고 늘 선택을 강요하고 있어요. 그래서 모든 인간은 죽음의 길인 소유형의 삶을 선택하는 거예요.
주님은
그렇게 죄만을 선택하게 만드는 그 마귀를 결박하고 당신의 백성들을 마귀의 집에서 구출해 내기 위해 오신 거라 말이에요. 그리고는
그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게 만들어 버리는 걸 구속이라 그래요. 그런데 구원받은 성도가 선택하게 될 그 하느님의 뜻이
뭡니까?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를 믿는 것으로 수렴이 된다 말이에요.
그래서 성도의 선택은 늘 옛 자아가 망하는 쪽으로
점철이 되게 돼요. 그래서 우리들이 뭘 선택만 하면 망하는 거예요. 내 옛 자아가 죽는 쪽으로 하느님이 나를 끌고 가는 거예요.
내 선택을 바오로와 요한이 그 구속의 현실을 어떻게 표현하나 보세요.
(골로사이1,13~14) 13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시어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14 우리는 그 아들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속박에서 풀려났습니다.
(요한일3,8) 8 죄를 저지르는 자는 악마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악마는 처음부터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마가 한 일을 없애 버리시려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 사역은 마귀의 일을 멸하는 일 마귀의 세간을 늑탈해 내는 일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담 안에서 태어나는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은 전부 귀신들려 귀신의 세간으로 태어나는 거구요. 그들 중 창세전에 하느님의 택하심을
받은 하느님 백성들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그 마귀에게서 구출받게 되는 거예요. 그게 역사이며 구속사인 거예요.
(로마6,16) 16 여러분이 어떤 사람에게 자신을 종으로 넘겨 순종하면 여러분이 순종하는 그 사람의 종이라는 사실을 모릅니까? 여러분은 죽음으로 이끄는 죄의 종이 되거나 의로움으로 이끄는 순종의 종이 되거나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인간은 처음부터 죄에 순종하는 죄의 종으로 마귀의 세간으로 귀신들려서 태어나요. 그러나 그러한 귀신들린 자의 삶으로
하느님의 의가 은혜가 침노해 들어와서 그 귀신을 잡아 결박을 하고 귀신의 세력 그 죄의 세력에서 구출을 해내서 의의 종으로 순종의
종으로 만들어내 버리는 거예요. 그 어디에도 인간 측에서의 공로를 찾아볼 수 없어요. 모든게 하느님의 은혜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은혜에 의해서 침공을 당한 신자의 삶 속에서는 치열한 전쟁이 일어나요. 자기 자신의 신됨. 그래서 성도라는 이들의 삶은
이 땅에서 자기의 영광이나 인기나 스스로의 만족까지도 챙겨 살 수 없는 삶이 되고야 말아요. 그래서 힘들어요. 그걸 고난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항상 자기가 생각해도 이상한 선택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때 귀신이 결박된 거예요.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된게 귀신 씌운 거예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침공을 받지도 못한 자들이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는 아담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사랑과 헌신과 섬김과 봉사등을 흉내내는 경우가 왕왕 있어요. 그것을 오늘 본문이 깨끗이 청소되어 있다라고 표현하는
거예요. 깨끗이 청소되어 있어요.
귀신이 잠깐 나갔다 들어왔더니, 깨끗이 청소해 놨어 귀신이 어디 다른 거처가
없을까 하고 자기 마음대로 외출했습니다. 물 없는 곳 즉 은혜의 생수가 없는 곳을 찾아다니면서 다른 거처를 마련하고자 했는데 물이
없는 곳에는 귀신들이 전부 들어차 있어요. 이게 현 세상의 실체에요.
그래서 마땅히 쉴 곳을 찾지 못하고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왔더니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 있어요. 귀신은 그 사람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자기 친구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더 난장판으로 삽니다. 총 몇 마리? 여덟 마리. 그런데 왜 제가 일곱마리라고 했냐면 그건 숫자를 세는 산술적 표현이 아니라,
7이라는 완전수를 써서 그 최악의 상황을 그리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제가 일곱마리라고 한 거예요. 최악의 상황이 되더라는 거예요.
사람이
하느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오늘 본문의 표현대로 하자면 성령의 침입으로 그 마음이 은혜로 채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은혜를 모르는
상태에서 그냥 비워져 있는 상태에서 깨끗함을 흉내 내는 그 행위 고게 바리새인들이었단 말이에요.
예수님의 은혜의
필연성을 알지도 못하고 자기들의 제사 지냄, 율법 지킴, 구제, 봉사 이런 것으로 자기들을 드러내려고 했던게 깨끗함이거든요.
청소됨이에요. 그게 바로 일곱 귀신들린 행위라는 거예요. 오늘날 교회에 그게 얼마나 많습니까? 일곱 귀신 들린 인간들 얼마나
많아요? 착한 일곱 귀신 그걸 조심하라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불교나 동양철학 등의 참 선 같은 걸 한번 생각해
보세요. 참선이라는건요, 번뇌의 원천이 되는 마음을 아예 들어내버리는거 거든요. 그래서 그걸 몰아 무아라고 그래요. 번뇌의 원천이
되는 마음을 들어내는 거예요. 완전히 비우는 거죠.
거기에서 무소유의 삶이 나오고, 청빈이 나오고, 청결한 삶이
나온다는 거예요. 은혜를 알지 못하고 그러한 것을 시도하는 것이 일곱 귀신 들린 행위에요. 성경이 말하는 비움은 그런게 아닙니다.
성경이 성도에게 요구하는 비움은 성령으로 채워짐까지를 말하는 거예요. 은혜로 채워짐까지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채워지면서 비워져 가야지 이게 채워지지 않았는데 스스로 깨끗하게 청소하는걸 일곱 귀신 들렸다고 하는 거라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복음을 배워야 되는 거예요. 복음을 알아야 되는 거라 말입니다. 그런데 유대주의는 바로 그런 승려들의 비움과 같은류의
비움으로 자신들을 자랑하고 있었던 거예요.
본문 38절을 보면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이 이야기가 주어지고 있다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성경 박사들입니다. 성경연구가들이니까...
그리고
그 착한 행위 종교행위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람들이었어요. 거짓말 안 하겠다고 입을 스스로 꿰맸던 사람들이니까...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 아비는 마귀다! 너희들은 마귀의 세간이야! 그 말은 '넌 마귀야! 이 귀신아!' 그런 거예요. 귀신아.
주님은
그러한 거짓 비움과 거짓 깨끗함으로 다른 이들과의 비교 상대적 우월감을 누리는 그 교활한 행위를 뭐라고 그래요? 고 위에서
'성령 거역(훼방)'이라고 그러죠. 사제 말 안듣는게 성령훼방이 아니라... 그리고 그건 절대 용서함을 입을 수 없다라고 단호하게
못을 박아요. 이 이야기가 어디에서 연결이 되어 있는건지 아세요? 이 충돌의 발화지점은요 마태복음 12장 22~24절에 나오는
귀신들린 벙어리 치유 사건에서 연결이 되는 거예요.
(마태12,22~24) 22 그때에 사람들이, 마귀 들려 눈이 멀고
말을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를 고쳐 주시자, 말을 못하던 그 사람이 말도 하고 보게도 되었다. 23
그러자 군중이 모두 질겁하며, “저분이 혹시 다윗의 자손이 아니신가?” 하고 말하였다. 24 바리사이들은 이 말을 듣고,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마귀들을 쫓아내지 못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귀신들려서 눈
멀고 귀가 먼 사람에게 귀신을 쫓아주셨어요. 우리 이런거 읽으면서 또 모든 병은 다 귀신이 들어와서 그런 건가 보다 생각하면 안
돼요. 그건 하나의 상징이에요. 마귀의 세력하에 있는 자들은 반드시 죽음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는데 그 죽음의 증상으로 질병이
온다라는 것을 상징으로 이야기해주는 거지...
모든게 다 귀신이 들어와서 되는게 아니란 말입니다. 귀신한테 책임전가 시키지 마세요. 많이 먹어서 살찌는거고 그래서 병든거고 운동 안 해서 병드는 거예요. 무슨 귀신이에요.
귀신은
율법주의 율법주의자들은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귀신이 들려 눈이 멀고 귀가 먼 사람은 부정한 사람이구요 저주를 받은
사람들이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날 때부터 소경된 이를 가리키면서 이가 누구의 죄로 이렇게 된 것이냐고 물었던 거예요.
제자들까지도...
그런데 예수라는 사람이 그러한 저주받고 부정한 자를 율법과 행위의 법칙을 넘어서서 용서의 법칙에
의해 자기 마음대로 정한 자로 만들어 버린 거예요. 자기들 눈앞에서... 이건 지금 자기들이 주장하는 삶의 원리와 정 반대되는
삶의 원리가 지금 투입이 된거란 말입니다. 유대주의 자들에게 있어서 정(淨, 깨끗)함과 용서받음 이라는 건 인간 측에서의 열심과
노력이 근거가 되어야 하는 거였어요. 그게 유대주의잖아요. 율법주의.
그들은 그러한 노력과 열심을 내어놓지 못한 부정하고 더러운 자들은 다니엘서 7장의 그 심판주 그 인자가 그들은 구약에 능통한 사람들이었으니까... 그 심판주인 인자가 와서 심판을 해 버릴 거라고 굳게 믿었어요.
그런데
그 어떤 노력도 행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용서가 주어지냐 말이에요. 부정한 자에게 귀신들린 자에게서 어떻게 귀신이 나가냐
말이에요. 노력도 안했는데, 율법도 안 지켰는데, 여전히 부정한 상태인데 어떻게 니가 뭔데 와서 그를 깨끗하게 만들어 주냐는
거예요.
이 용서의 법칙. 덮어줌의 법칙. 이게 구원의 법칙인데... 이걸 이해를 못하고 왜 율법도 안 지키고 제사도
안 지낸 저 부정한 자를 니 맘대로 용서하냐는 거예요. 그들이 생각하고 기대해 왔던 인자이신 메시야는 그렇게 오시면 안 된다
말입니다.
그래서 그 바리새인들이 그 예수님의 축귀(逐鬼)사건을 바알제불을 힘입어 행한 사건이라고 한 거예요. 왜?
자기들 생각에 인자인 메시야가 와서 한 일이 아니면 마귀가 한거니까...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모독(훼방)’이라는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해서 언급을 하시는 거예요.
하느님을 향한 모든 죄와 훼방이 용서의 법칙에 의해서 선물로 덮이는 시대가 왔다는 거예요 모든 죄와 허물은 사해질 수 있다라는 전제가 떨어지고 있단 말입니다. 지금!
그
증거로 아무것도 행하지도 요구하지도 않은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이 쫓겨나가는 그림을 지금 보여준 거예요. 보라고 이게 표적이라고
이게 내 십자가 죽음에 의해 귀신은 이렇게 아무 너희들의 행함을 근거하지 않고 나가게 될 것이다 라는걸 그림으로 보여준 거예요.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이 왜 하느님처럼 선악과 따먹고 하느님처럼 강하게 된 인간들이 스스로의 노력과 힘과 의지를 묵살당한 채 수동적
양자의 모습으로 내려가야 하느냐 하고 반기를 든 거예요. 요게 귀신들린 자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은혜의 법칙에 조금이라도
흠집을 내는게 바로 성령훼방 사건이에요.
그러니까 알매니안 주의는 성령훼방자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인자를 거역하는건
사함을 받을 수 있다 그러죠? 그건 주님이 이사야서 53장의 예언대로 연약한 자로 감추어진 자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인간인
인자 예수를 못알아 보는건 괜찮아요. 어차피 감추어져 오셨거든요.
그러나 성령이 오셔서 이 분이 바로 이렇게 연약하고
감추어진 모습으로 온 이분이 바로 메시야이며 이분의 십자가 죽음이 실패가 아니라 바로 승리다라는걸 성령이 와서 가르쳐 주는 시대가
온다 말이에요. 은혜의 시대. 그때에도 '은혜가 무슨 말이냐?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착해져야지'라고 하는 자들은 성령을 못
받은 거기 때문에 성령모독(훼방)죄가 되는거고, 그들은 용서 못받는다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은혜의 법칙 덮어줌의 법칙 이걸 정말 절절한 눈물과 함께 이해 못한 사람은 아직 성령받은 사람 아닙니다. 착한 마귀에요.
고린도전서 15:45 “첫 인간 아담이 생명체가 되었다.”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살려주는 영이래요. 여기서 우리들은 ‘살려주는’ 이라는 단어를 주의 깊게 보셔야 돼요. 살려준다는 말은 인본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대단히 기분나쁜 말이에요. 우리가 길을 가고 있는데 누가 와서 내가 당신 살려줄까요? 그럼 뭐라 그러시겠어요. 나는 살아있는데? 무슨 소리 하는거냐? 니가 왜 날 살려줘? 이게 살아있다라고 착각하는 인간들이에요. 그래서 굉장히 기분 나빠해요. 살려준다라는 말을...
그런데 성경은 주님을 가리켜 살려주는 영이라 그래요. 그 말은 성령이 아니면 절대 자력으로 살아날 자가 없다란 뜻이에요. 그래서 살려주는 영이에요.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고는 내가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냈다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귀신은 성령에 의해서만 쫓겨나갈 수 있다라는 거예요. 성령에 의해서만. 우리의 노력으로 절대 안 된다는 뜻입니다. 성령에 의해서만 그리고 그 빈자리를 성령이 채워버리시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는 쫓겨나간 귀신이 일곱 귀신이 아니라 700귀신을 데리고 와도 못 들어오는 거예요. 성령이 그 안을 채우고 있기 때문에.
귀신이 쫓겨나간 삶이라는건 물론 처음부터 그렇게 된다는 말은 아니에요. 그러나 성령이 임한 자는 반드시 그렇게 완성이 되게 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의 삶이 귀신이 나간 성도의 삶이 세상적 관점으로 볼 때 고달프다 주님은 그걸 하느님 나라가 임한 자의 삶이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성령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거면 너희들의 삶에 이미 하느님 나라가 임했다라는 말이 그 말인 거예요. 하느님 나라와 사탄의 나라를 확
구별시켜 버리는 거예요. 존경받는 바리새인들의 삶이 사탄의 나라였다라고 확정지어 버리는 거예요. 거기에서. 그렇다면 메시야로
위장한 가짜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겠습니까? 이 세상 모든 이들이 반기는 모습으로. 우리들은 마귀를 너무 좋아합니다. 마귀도
아이큐가 있지 머리에 뿔 달고 찾아올 거 같으세요?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모습으로 와요. 그리고 가장 존경받을 만한 모습으로
옵니다.
고린후서 11:14-15 그러나 놀랄 일이 아닙니다. 사탄도 빛의 천사로 위장합니다. 그러니 사탄의 일꾼들이 의로움의 일꾼처럼 위장한다 하여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의 종말은 그들의 행실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흔히
있는 일이다라는 뜻이에요. 그거 뭐 큰일이다라고 생각해? 늘 있는 일이야. 야 사탄도 광명의 천사로 니들이 좋아하는 모습으로
오는데 사탄의 하수인들은 어떻겠느냐? 니들이 아주 존경할만한 모습으로 온다라는 뜻이에요. 흔히 있는 일이니까 당황하지 말어.
그러나
우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인간은 날 때부터 마귀의 종으로 오기 때문에 생래적으로요 마귀의 뜻을 좋아하게 되어 있어요. 날
때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마귀를 우호적으로 접대하게 돼요. 그래서 번영의 신약이니 뭐니 하면서 이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의 획득을 돕겠다라고 하는 오스틴 같은 사람들이 인기를 끄는 거예요. 광명한 천사니까... 그런데 더욱더 무서운건
마귀가 양의 탈을 쓰고도 온다는 거예요.
(마태7,15~17) 15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다. 16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거두어들이고,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거두어들이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이런 구절을 읽을 때 참 조심하셔야 돼요. 잘 들어보세요. 이거 읽어 드리니까 또 속으로 '거봐 좋은 열매를 맺어야 좋은 나무지' 이러고 있죠? 또 속으로...
자
마귀가 순결하고 연약하고 착하고 여린 모습 양의 탈을 쓴 모습으로 와서 그러한 것들로도 인간의 만족과 영광을 챙기게 독려한단
뜻이에요. '양의 탈을 입고 와서 양처럼 살아 그게 정말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일이란다 양처럼 살아 그리고 나를 봐 양처럼 살고
있잖아'하고 온단 뜻이에요.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알곡과 가라지를 추수때까지 놔두라 그런 거예요. 너희들은 판별 못한다고 우리는 여전히 선악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판단 못해요. 그래서 놔두라는 거예요. 추수는 내가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착하고 순결하고 열심있는 종교행위를 내어 놓는 사람들도 그게 좋은 열매인거 같잖아요? 사람들도 하느님의 은혜에 의해
선택된 사람이 아니면 지옥을 면치 못한다는 거예요. 그게 마태복음 7장의 '주님, 주님!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항변한 마귀의
자식들이죠.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들이 아무리 좋은 열매 비슷한 가짜열매를 내어 놓는다 할지라도 나는 안 속는다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게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을 뿐이다라는 어구속에 들어있는 진의(眞意)인
거예요. “니들이 지금 좋은 열매인 것처럼 남들은 세상이 다 속을 만큼 그렇게 열매들을 내어 놓고 있는데 니들이 원래 나쁜
나무인데 어떻게 좋은 열매가 맺겠니? 사람들은 다 속지만 나는 안속아.” 이 뜻이에요.
착한 일 많이 해라가 아니라
좋은 열매는 하느님이 맺는 거예요. 나무가 맺는다 그러잖아요. 요한복음에서. 니들이 맺는게 아니라 내가 맺을 건데 니들은 근사한
열매들을 갖고 와갖고 세상 사람들은 다 속이고 나에게 까지 갖고 왔구나. 그런데 니들이 원래 나쁜 나무인데 어떻게 좋은 열매가
맺니? 거짓말하지 마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완전히 꺼꾸로 읽고 있는거죠 성경을? 그래서 문맥이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 바로 위에서도 똑같이 나무와 열매 이야기가 등장하는 거예요. '바리새인들아 이 나쁜 나무들아 제발 착한척좀 하지
말아라! 니들이 일곱 귀신 들린 자들인데 뭘 좋은 열매를 갖고 왔다고 자꾸 이렇게 내미는거야. 이 나쁜 나무들아' 어떠세요?
일관성이 있죠.
마귀의 나라는 절대 마귀나라 백성들의 열심에 의해 정복이 안된다는 거예요. 그게 어떻게 마귀의 세력이
서로 충돌하여 분열을 일으키겠느냐? 그 말씀을 그래서 하신 거예요. 니들은 여전히 귀신들려 있는 자인데 귀신들려 있는 자들이
거기에서 지금 빠져 나왔다고 하는데 니들의 행사 또한 귀신들린 자의 행사야. 그런데 어떻게 그게 분열이 되겠니? 그런 뜻이에요.
귀신은 성령에 의해서만 나간다 은혜에 의해서만 나간다라는 거예요.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와 십자가 은혜에 의해서 죄에서 건짐을 받게 되는 구원의 이야기를 질병이 치유되는 사건으로 또 귀신이 나가는 것 등으로 알기 쉽게 설명을 해 주신게 예수님의 표적이며 행적이였던 거예요.
그래서
당연히 예수를 알아보는 자들은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이 나가, 벙어리가 말을 하고, 귀머거리가 듣게 되는 사건을 보면 예수의
은혜 그 은혜에 의해 쫓겨간 죽음. 이걸 알아먹어야 되는데 하나도 못알아 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인간의 공로와
열심을 배제한 예수님의 그 은혜사역을 가리켜서 마귀의 행사라고 비난한 거예요. '니가 마귀다'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착한
성도들은 제가 이런 설명하면 ‘저보고 마귀새끼라 그래요. 이단이라고’... '어쩌면 성경과 그렇게 똑같은지 몰라' 아주 무서워요.
성경을 잘 보면요.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믿는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표적을 이렇게 말씀하시는걸 볼 수 있어요.
(마르코16,17~18)
17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18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보세요 예수를 믿는 자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다 그러죠. 이 이야기가 그 이야기에요. 예수믿는 사람들은 전부 귀신 쫓아낼 수 있다 이런말 아닙니다. 전부 뭐 뱀 집어도 상하지 않고 독을 먹어도 죽지 않고 이거 아니에요.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에 의해서 세상 권세잡은 자들의 종으로 있던 사람들이 귀신들려 있던 사람들이 하느님 아들의
나라로 옮겨오는 역사가 일어난단 뜻이에요. 우리의 복음 전함의 행위에 의해서 그게 귀신이 나가는 거예요. 그리고 이상한 언어(새
방언)라는 것도 알아들을 수 없는 그런 말을 가르키는게 아니라 이 세상 사람들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하늘의 비밀인 하느님의
말씀이 올바로 이해되어지고 내 입을 통하여 전달되어진다는 뜻이에요.
예수를 믿는 자들의 말씀 선포에 의해 뱀의 세력이
물러간단 뜻입니다. 귀신이 쫓겨나간다는 말과 똑같은 말인 거예요.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는다는 말은 이 세상의 그 어떤
맹독이라 할지라도, 세상이 그 어떤 방법으로 공격해 온다 할지라도, 내 자식이 죽고 사업이 망하고 질병이 나에게 온다 할지라도 내
영원한 생명은 건드릴 수 없다!가 독을 마셔도 그를 해할 수 없다라는 뜻인 거예요.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낫게
된다라는 것도 역시 죽음의 대표적인 증상인 질병이 복음에 의해 정복이 될 것임을 보여주는 거예요. 병이 낫는단 뜻이 아니라,
死亡이 정복될 거라는 뜻이에요. 그까짓 병 안 나으면 어때요? 병이 낫는다고 신앙이 좋아져요? 천만의 말씀.
(사도행전10장,38)
38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신 일도 알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병을 마귀에게
눌린 상태라고 이야기한단 말입니다. 복음에 의해 마귀에게 눌린 이 상태가 해결된다가 병이 낫는다 뜻이란 말이에요. 그걸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 기적으로 잠시 보여줬던 거예요. 초대교회 때에. 이제 성경이 완성됐는데 그게 왜 우리에게 필요해요? 믿음이 이제
직접 오는데. 절대 우리는 그런 눈에 보이는 가시적 현상에 의해서 흔들려 다니면 안 돼요. 그건 믿음 없는 자의 대표적인
표징이에요.
믿음이 없으니까 자꾸 보여달라 그러는거 아니에요?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인데 자꾸 보여달라는 건
뭐예요? '나 믿음 없어요' 그리고 다니는 거예요. 믿음 없으니까 한번만 또 보여주세요. 보여줬어요 또 보여주세요. 잊어
버렸어요. 더 큰거 보여주세요. 그 전거로는 만족이 안돼요. 그래 점점 큰걸 봐야 돼요.
성경은 이 세상의 힘의 원리와 인본주의 속에서 벗어나서 십자가의 원리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걸 구원이라고, 그걸 귀신이 나가는 것이라고 그래요.
절대
어줍지 않은 착한 일 몇개 해 놓고 혹은 남이 존경할 만한 삶을 살아내어서 자신의 만족이나 인기나 평판을 챙기는 그런게 아니란
말입니다. 오히려 더 낮아지고, 비워지고, 부인되어서 연한 순처럼 겨자씨처럼 누룩처럼 감추어지고 쇠하여 져서 하느님이 영광을
드러내고 하느님의 흥함을 증거하는 자로 살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달라는
바리새인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라는 말씀을 하신 거예요. 요나의 표적이 뭡니까? '너희의 열심과
노력과 상관없이 내가 십자가를 지고 죽어서, 사흘 밤 낮을 스올에 갖혀 있어야만 너희의 죄가 너희를 누루고 있는 마귀가 물러날 수
있다. 그 방법 밖에 없다!‘가 요나의 표적이에요.
'너희들에게는 그 어떤 기적을 보여줘도 봐 지금 내가 귀신
쫓아냈는데 너희들 오해하고 나보고 바알제불이라고 그러잖아. 무슨 표적을 보여주니 거기다가 내가 너희에게 보여줄 표적은 이제
하나밖에 없어.’ 뭐예요? 내가 죽는길 밖에 없어요.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가 죽어서 이 뱀같은 왠수들이 살아나는 그 기적보다 큰 기적이 어디있습니까? 그런데 그걸 안다는 사람들이 무슨 기적을 그렇게 보여달라 그러세요?
은이빨이 금이빨로 바뀌는게 뭐 그렇게 대단한 기적입니까? 금가루가 쏟아지는게 뭐 그렇게 대단히 신기해요. 그 새끼들이 마귀새끼들인 거예요. 성경이 여태까지 우리 배운게 그거잖아요.
그런데
성령집회가 왠 말입니까? 거기 가서 뭐 하겠다는 거예요? 도대체. 눈에 보이는거 몇개 또 보고 싶다는거 아닙니까? 이 믿음 없는
사람들인 거예요. 귀가 막혀 있으면서 듣는 척 하고 앉아 있는 거예요. 이렇게... 이시대는 지금 이렇게 타락해 있어요. 정신
똑바로 차려야 돼요.
요한복음 1장을 보면 그렇게 하느님의 성령을 받은 이들 그래서 마귀에게서 부터 해방된 이들을
하느님께로 난 자들이라 그러죠? 하늘의 사람들이란 뜻이에요. 하느님에 의해 태어난 하늘의 사람 하느님의 아들들 구약에서 하느님의
아들들 하늘의 존재들, 천사들 나오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지금 그러한 하늘의 존재들이 됐단 뜻인데 그러면 한번 보자구요.
하늘의
존재들이 천사들이 이 땅에 내려와서 부동산 투기했다는 소리 들어 보셨어요? 그들은 우리를 수종들 그런 존재들이에요. 그런데도 그
하늘의 존재들이 이 땅에 천사들이 잠깐 내려와서 무슨 일을 행했는지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뭘 하다 갔나요? 하느님의
메신저로서만 살다 그냥 가는 거예요. 천사들이 자기의 인기 명예 이런 거 챙기기 위해 남을 경쟁자로 원수로 취급했던 적있습니까?
천사들이 자기 자식새끼 좋은대학 못들어갔다고 목매달아 죽는거 보셨어요? 그런데 왜 하느님께로서 난 하늘의 존재들이 왜 우리를
수종든다고 하는 그 천사들보다도 못하게 사냐구요.
그래서 성경이 반복하여 너희들은 땅의 것 보지 말고 위에 것을 찾으라 반복하여 외치는 거예요. 위에 것을 찾으라!
그렇게
하느님 나라의 존재들 하느님의 메신저로서만 존재하는 하느님의 백성들 그들의 삶을 천사들이 잠깐 보여줬기 때문에 그 천사들에게
날개가 있다라는 표현을 쓰는 거예요. 영이 날개가 어디 있어요? 꼭 그림 그려놓으면 그냥 날개를 이따만한 거 그려놔갖고 징그럽게.
닭털 같은거 덕지덕지 그려놓고 하느님의 메신저로서 그 뜻을 신속히 전달한단 뜻에서 상징적으로 날개라는 표현을 쓰는 거예요.
우리가 그런 삶을 살도록 되어 있단 말입니다. 지금.
그러면 그분이 이끄는대로 내 삶 속에서 하느님만 드러나면 돼요. 그게 메신저에요. 날개달린 천사. 그런데 전부 그 날개 말고 닭 날개 달고 막 날으려고 푸드덕 거리고 있으니까... 이게 날수가 없는 거예요.
(골로새
3,1-3) 1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2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3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귀신의 세계에서 죽고 하느님의 아들의 나라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인 거예요. 성도의 삶은 오직 하느님의 은혜와 영광만을 드러내며 찬양하는 자기부인의 삶,
십자가의 삶 즉 하느님 증거 지향적 삶이에요. 자기 존재 지향적 삶 아니에요. 하느님 증거 지향적 삶. 그게 진짜 존재 지향적
삶이에요. 나머진 전부 소유 지향적 삶입니다. 여전히 나라는 우상을 삶의 중심에 올려놓고 선악구조에 의한 이러저러한 행위들 몇개
내어놓고 나는 성숙했내 나는 발전했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삶을 살고 있네 이 딴 소리들 좀 하지 마세요.
도낀 개낀 이에요. 빽도로 나갈 수 있어요 그러다가. 그게 일곱 귀신 들린 자들의 삶이에요. 뭐가 더 났습니까? 50보 100보지. 둘 다. 도망가는 놈은 마찬가지예요.
더 낮아지시고 더 내려가세요. 그리고 더 벗으십시오. 그리고 더 털리셔야 돼요. 바보가 되란 뜻입니다.
발달장애아나
정신 지체아들이 암걸렸단 소리 들어보셨어요? 나는 우리 의사님한테 정신 박약아 들이 암환자로 보고된게 한 건도 없다란 소리듣고
깜짝 놀랬어요. '아 그거구나 이 시대는 너무 똑똑해서 고통을 받고 있는 거구나' 너무 똑똑해서. 옛날에 우리동네에 연탄지게
나르는 친구 이름이 성수였거든요. 그때는 늘 조금 모자라는 사람들이 이렇게 연탄지게를 날랐어요. 그죠? 그런데 저는 걔가 한번도
찡그리는걸 못봤어요. 늘 웃으면서 뭘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다니는데 늘 행복해. 밥주면 먹고, 날러 그러면 날러. 자 그러면 자
세상은 그를 바보라고 하지만...
하느님은 바로 그러한 바보들을 원하시는 거예요. '내 말만 들어! 그러면 행복할거야!' 그 자리로 내려가는 거예요. 우리 모두 바보가 됍시다.
더러운 이라는 것은 마태복음 15:19-20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Exorcism / 퇴마(退魔) ・ 구마(驅魔) ・ 축사(逐邪)
라틴어 Exorcismus를 그대로 영어화한 단어 교회 라틴어식으로는 '엑소르치스무스'라고 읽는다. 그리스어 exorkismos에서 라틴어로 유입한 단어 어원을 분석하면 '밖으로 나가겠다고 맹세를 받아내다.' 정도 의미가 된다. 그리스 등에서 사람에게 씐 귀신에게 "다시는 안 들어오겠습니다." 같은 식으로 맹세를 받아냄으로써 귀신을 몰아낸 문화에서 유래한 듯하다. 물론 그리스도교에서
이 단어를 받아들였을 때는 의미가 살짝 달라졌지만. 한자어로 구마술(驅魔術), 퇴마술(退魔術), 축마술(逐魔術) 등 여러 가지로
번역하며, 우리나라 무속용어를 사용하여 푸닥거리로 번역하는 경우도 있다. 일본에서는 원한 맺힌 귀신 원귀(怨鬼), 원령(怨靈)의 원(怨)을 풀어주어 저승으로 떠나도록 하는 제령(制靈)이라는 개념이 이와 비슷하다.
06-13-2023(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가복음 6장 / 목자 없는 양(34절)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가지로 가르치시더라. When Jesus landed and saw a large crowd, he had compassion on them, because they were like sheep without a shepherd. So he began teaching them many things.
목자없는 양과 같이(Like sheep without a shepherd)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When He saw
the crowds, He had compassion on them, because they were harassed and
helpless, like sheep without a shepherd.
본문에 앞서 사도들이 예수님의 명을 받아서 둘씩 짝을 지어 전도훈련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각각 흩어져 회개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낫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보고하는 데에 예수님은 제자들의 곤고함을 보시고 한적한 곳에서 쉬기를 당부하셨습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이동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달려가기 시작해서 배보다 앞서 다른 고을로 도착하였습니다. 이들을 보신 예수님은 그 무리들이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여러 가지로 가르침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들은 집을 떠나고 먼 곳까지 주님의 말씀을 들으러 왔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루하루가 시간시간이 고되었습니다. 이젠가 저젠가
하나님이 자기들을 구원해줄 메시야를 언제 보내주실까? 로마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이룩해줄 메시아는 어디계신가? 이런 마음조차 잊게
만드는 시간이 흘러 주님의 때가 이르렀습니다.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귀한 목자였습니다. 그것도 선한
목자.
양은 목자가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한 동물입니다. 왜냐하면 양의 특성 때문입니다.
첫째는 악성 근시 양의 시력은 아주 나쁘기 때문에 다니던 길도 찾지 못할 뿐만 아니라 먹어야 할 풀과 독초도 구분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둘째는 비공격성 양은 공경할 수 있는 뿔도 없고 강한 발도 없고 빨리 달릴 수 있는 다리도 없습니다. 산나운 짐승의 공격을 받으면 그 자리에서 잡혀 먹힐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는 연약함 양은 아주 약하기 때문에 비탈진 곳을 올라갈 때는 뒤에서 받쳐 주어야 하고 밀어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이와 같은 양을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라고 이끌고 다녀야 합니다. 목자가 없는 양들이 있다면 큰 위험에 곤경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목자 없는 양이란 위험천만한 상태를 나타내기도 하고 거짓 목자에게 속아 흩어진 양으로서 피폐한 영적인 상황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목자 없는 양이라는 표현은 민수기 27장 17절에 처음 나타납니다. “~여호와의 회중이 목자 없는 양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이 기도는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 말씀하신 후에 사랑하는 백성을 위한
중보기도였습니다. 의미심장하게도 하나님은 모세에게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택해 주셨습니다.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의
여호수아(Joshua)는 적들을 물리쳐 이스라엘을 보호하여 주었고, 젖과 꿀이 흐르는 복지(福地) 가나안 땅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무리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에게 목자 같은 이가 없었습니까? 제사장이나 서기관 혹은 바리새인들은 마땅히
종교지도자로서 무리들에게 목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실리를 추구하고 자신과 가문의 명예만을 생각한 이들은 진리를
저버리고 거짓 목자 노릇을 하였습니다. 정치적 영향력을 고수하려고 무리들의 안위와 평안을 져버렸습니다. 목자 없는 양은 살았으나
이미 죽은 존재나 다름없었습니다. 이 무리들은 살려고 예수님을 쫓아 다녔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처지를 아셨고 자신의 몸이 피곤하였음에도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불쌍하게
여기시고 진리로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목마름이었고 하나님 나라의 말씀에 대한
배고픔이었습니다. 참 안식도 없이 살았던 무리들에게 안식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마침내 육신의 배고픔을 해결해주셨습니다. 무리들은
지쳤고 목말랐으며 배고파했습니다. 단지 육신의 것만 이었을까요?
열왕기상 22장 유다 왕 여호사밧과 이스라엘 왕 아합이 동맹을 맺고 아람을 공격하려고 할 때 유다 왕 여호사밧은 먼저 여호와 하나님께 이 전쟁에 대해서 묻고자 합니다. 이때 여호와의 영과 거짓말 하는 영이 서로 경쟁하여 결국 거짓 선지자 시드기애 편에 많은 선지자들을 동조하도록 유도합니다. 그러나 미가야는 오직 여호와의 말씀만을 전하므로 아합 왕은 미가야 선지자의 예언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으려고 합니다.
매드 맥스(Mad Max: Fury Road, 2015)라는 영화가 새로 만들어졌습니다. 어린 시절에 봤던 것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멜 깁슨이 나왔던 그 영화는 리메이크 되어 올해 개봉되었는데, 목사라서 그런지 몰라도 제가 보기에 이
영화의 주제는 ‘구원 salvation’ 이었습니다. 핵전쟁 후 살아남은 사람들이 찾아야 할 곳 초록의 대지, 낙원, 구원의 땅.
하지만 황무지를 헤매고 거기 있다고 믿던 것이 사라진 때에 ‘Where must we go? 우리가 가야할 곳은 어디인가?’를
질문합니다. 구원의 소망이 어디 있냐고 감독은 영화를 통해 묻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구원을 향한 갈망을 하고 있는 영혼들의 외침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로마제국의 압제 하에서 오랜 동안 갈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울부짖음이 하늘에 닿았고 하늘 아버지의
귀에 울렸습니다. 때가 이르러 유대 땅에 오신 예수님은 압제받는 이스라엘, 죄로 신음하는 인류를 위해 자신을 드려 구원하셨습니다.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보이지 않는 자본주의 제국의 힘 아래, 경제논리라는 우상아래,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 아래 사람들이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비록 육신은 윤택하고, 삶은 나아진 것 같고, 남성과 여성, 노인과 어린이가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여기는
일들을 하지만 정말 그런지, 그것이 진정 진리에 맞는 일인지... 우리의 정신과 영혼은 평안하지도 풍성하지도 그렇다고 자유롭지도
않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교회는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 What should the Church do?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들에게 뭐라고 하실까요?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환난의 때요 인내의 때입니다. 주님의
역사를 기다립니다. 동시에 우리의 소망이 이룰 줄 믿고 전진해야 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 주의 강하심이 드러나기를 바라며,
우리의 부족함을 통해 주의 풍요하심이 나타내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잘못 행하고 있다면 돌이켜야 합니다.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음성을 듣고 나아가는 훈련을 계속해야 합니다. 율법은 우리로 죄를 알게 하고 죄에 대한 형벌이 있음을 알려주지만 우리를
죄에서 자유하게 하거나 구원해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 우리에게 의로 덧입게 하셔서 그리스도를
통해 영생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립니다.
교회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세상이 원하는 길로 가야 합니까?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가야 합니까? 무엇이 그것을
알려줍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뭐라고 하십니까? 자비와 긍휼의 사랑의 법을 따르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불쌍히
여기신 것처럼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대하십시오. 그들의 진리를 향한 갈급함을 예수의 이름으로 채워주십시오. 그것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거기 그 자리에 있어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보고 주님의 사랑을 간절히 사모하게 하십시오. 교회는 거기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거기 그 자리에서 주님의 사랑이 흘러넘치게 해야 합니다. 교회는 거기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주님의 일을 하여야 합니다. 흔들리지 말고 담담히 해야 할 일을 하나하나 이루어가면 거기 그 자리에서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안이 넘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설교 요약]
우리 주님은 우리인간을 한마디로 ‘목자없는 양’ (sheep without a shepherd)과 같다고 정의 하셨습니다. 오늘말씀을 통하여 ‘우리 인간은 누구인지?’ 깨닫고, 주님 안에서 참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선한 목자의 양으로써 복되게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무엇이 ‘목자없는 양같은 삶’ 입니까? 그 이유는 양의 특징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양은 다른 동물들에 비해 시력이 나쁘고,
분별력이 형편 없어서 잘 속아 넘어 갑니다. 그뿐 아니라, 양들은 중심을 잘 잡지 못하고 잘 넘어집니다. 방향감각이 없어서 쉽게
길을 잃어버리고 스스로 방어할 능력조차 없습니다. 거기다가 양들은 온순한듯 하지만 상당히 고집이 세고 이기적이어서 목자가 돌보고
인도해 주질 않으면 쉽게 제 멋대로 흩어져서 길을 헤메게 되는 것 입니다.
이러한 양의 특성을 통해 ‘목자없는 양의 상태’는 살아남을 가망성이 없는 절망이자, 죽음을 의미하는 것 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선한 목자를 따르는 양으로 살아갈수 있을까요?” (How are we able to follow the good Shepherd as His sheep?)
첫째, ‘우리가 양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We ought to recognize our spiritual condition as ‘sheep’): 이사야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52:6) 우리는
모두 그릇 행하여 고집부리며 제 갈길로 간 목자없는 양이라는 것 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었다고 자동적으로 그분을 잘 따르는
양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제 내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분을 나의 선한 목자로 모시고 살아간다면 동일하게 그분을
떠나서는 생존할수 없는 양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하는 것 입니다.
둘째, ‘예수님이 선한 목자되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We ought to trust Jesus as my ‘good Shepherd’):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 10:14~15)
라고. 여기서 주께서 ‘내 양은 나를 안다’ (my sheep know Me)라고 말씀 하십니다. 주님의 양은 그를 알아본다는
것 입니다. 어떻게요? 그것은 그분을 믿을 뿐 아니라, 믿고 따른 만큼 삶을 통해 그분이 선하심을 경험했기 때문일 것 입니다.
양으로서 목자의 음성을 식별할줄 알고, 목자가 평상시 자기를 어떻게 지켜주고 인도했는지를 경험함으로 그분을 더욱 더욱 신뢰해
나가는 것 입니다.
셋째,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점점더 알아가야’ 합니다 (We ought to know the will of our heavenly Father day by day): 선한 목자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무엇일까요? “ ~ 내가 온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10:10b) 고
주님은 말씀 하십니다. 우리를 구원할뿐 아니라, 더 풍성한 삶을 주시고자 함 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풍성한 삶일까요? 그
풍성함은 <이 땅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누리는 유업이 얼마나 풍성하고 영광스러운지를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깨닫고 누려나가는 것> 입니다.
바라건데 약속의 성령께서 성도 여러분의 영의 눈을 여셔서 ‘목자없는 양’같았던 우리 존재를 바라보게 하시고, 귀를 열어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마음을 열어 선한 목자를 삶으로 따르기를 결단하는 풍성한 삶 살도록 인도하시기를 간절히 축원
합니다.
세상의 많은 지혜자와 철학자들은 ‘인간은 누구인가?’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가 그들의 가장 큰 주제가
되어왔습니다. 그래서 유교의 시조라고 할수있는 공자는 그의 제자가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라고 질문했을때, “내가 지금의 삶도 모르는데 어떻게 죽음을 알겠느냐!” 고 솔직하게 대답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대표적인 책, <논어>에서 “아침에 도를 듣고 깨우쳤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朝聞道 夕死可矣)고 말했던 것 입니다. 인간 마음의 중심에는 참된 진리를 깨닫기 원하는 갈구가 강하게 요구되기 때문일 것 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우리의 인생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우리 주님은 우리인간을 한마디로 ‘목자없는 양’ (sheep without a shepherd)과 같다고 정의 하셨습니다. 오늘말씀을 통하여 ‘우리 인간은 누구인지?’를 주님의 말씀을 통해 깨닫고, 주님 안에서 참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선한 목자의 양으로써 복되게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우리 주님은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병든 자들의 모든 병과 악한 것을 고쳐 주셨습니다
(마. 9:35). 이런 상황속에서 주께서 그의 복음의 말씀을 듣고, 병고침을 받고자 몰려오는 무리들을 보실때 그들이 ‘목자없는
양과 같음을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음’을 오늘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과 상황은 다르지만, 매우 유사하게
주님의 마음을 표현한 복음서 말씀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마가복음 6장>인데, 저자 마가는 이렇게 주님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막. 6:34)
고. <막. 6:34>말씀의 배경은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자 빈들로 갔는데 저녁이 되고 날도 저물어서 먹을것이
없고 지쳐있을때 하신 말씀 입니다. 어떻게 본다면 그들의 육신의 배고픈것도 불쌍하지만, 그들의 인생전체가 갈곳을 몰라서 목자없는
양같이 방황하는 모습이 더욱 불쌍하다는 뜻이 될것 입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께서 베푸신 이적이 우리가 너무도 잘아는
<5병2어>의 기적인 것 입니다.
무엇이 ‘목자없는 양같은 삶’ 입니까?
왜 인간은 이런 목자없는 양의 불쌍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까? 목자없는 양과 같다는 뜻은 간단히 말하자면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산다는 뜻이 아니라, 얼마가지 않아서 (몇시간 혹은 하루나 이틀을 못넘기고) 죽음에 처하게 되는 매우
절망적이고 희망이 끊어진 상황을 뜻하는 것 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양의 특징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양은
다른 동물들에 비해 시력이 나쁩니다. 그말은 악한 짐승들이 가까이 다가와도 그들을 좀처럼 식별하지 못한다는 뜻 입니다. 더욱이
양은 분별력이 형편 없어서 잘 속아 넘어 갑니다.
양들은 중심을 잘 잡지 못하고 쉽게 넘어지고, 넘어지면 잘
일어나지 못합니다. 방향감각이 없어서 쉽게 길을 잃어버리고 스스로 방어할 능력조차 없습니다. 거기다가 심각한 것은 양들은 온순한듯
하지만 상당히 고집이 세고 이기적이어서 목자가 돌보고 인도해 주질 않으면 쉽게 제 멋대로 흩어지서 길을 헤메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양의 특성을 통해 ‘목자없는 양의 상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수 있는 것 입니다. 그것은 절망이요,
죽음 입니다. 왜냐하면, 안타깝게도 양의 특성상 그들 스스로는 야생에서 생존할수 있는 방어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
입니다. 따라서 양이 야생에서 살아 남기를 바란다는 것은 비유 하자면 태어난지 몇시간 않되는 새끼 새를 어미새의 돌봄없이
살아남기를 바라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우리는 이해해야 하는 것 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인간의 처해있는 상황이 본질적으로
이런 목자없는 양과 같다는 것 입니다. 살아 남을 가망이 없고 악한 짐승에게 속히 먹힘바 될수 밖에 없는 양이라는 것 입니다.
아무리 노력하고 애쓸찌라도 결과는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 입니다. 목자없는 양과 같이, 길잃은 양과 같이 죽음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
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요. 10:11~12)
라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만이 유일한 선한 목자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선언하시는 것 입니다.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목숨을 버린다는 것> 자체의 강조점 보다도, 바로 앞절에서 밝히신 <양들의 생명을
살린다>는데 그 진정한 중요점이 있는 것 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제가 성도여러분과 남은 시간 생각해 보기 원하는 것은 이것 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우리는 선한 목자를 따르는 양으로 살아갈수 있을까요?” (How are we able to follow the good Shepherd as His sheep?) 라는 것 입니다. 그것은,
첫째, ‘우리가 양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We ought to recognize our spiritual condition as ‘sheep’): 우리가 어떻게 선한 목자되신 주님을 따르는 양으로 살아갈수 있을것인가를 결정하는 첫걸음은 ‘내가 양과 같은 존재임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 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600여년전에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 죄악을 담당할 것임을 예언했던 이사야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52:6) 우리는
모두 그릇 행하여 고집부리며 제 갈길로 간 목자없는 양이라는 것 입니다. 그런데, 우리 크리스챤들 중에는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은,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된것은, 기쁘고 자랑스럽게 여기면서도 ‘내가 영적으로 예수님의 양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은근히 부끄러워하거나 거북하게 여기는 크리스챤들을 보게 됩니다. 마치 미국사람들 가운데 ‘Don’t be a sheep’이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 처럼, 이런 표현 가운데 <양이 된다는 것>이 <자기 판단력이 없고 스스로 독립성이 없이
의존적이고 시키는데로 따라만 하는 지적 능력이 부족한 자가 되는것>으로 비꼬고 비하하는 생각이 있는것 입니다. 양이 된다는
것이 한마디로 무능하고 바보같은 자로 살아가게 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 합니까? 다시말씀 드리지만 내가 예수님을 따르는 양으로 살것인가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은 ‘나를 포함한
우리 인간의 본질을 내가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을 것 입니다. 우리 크리스챤들이 분명히 이해해야하는 것은 ‘내가
예수님을 믿었다고 자동적으로 그분을 잘 따르는 양이 되는 것’이 아니다는 사실 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양과 같은 존재임을
자각함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내 스스로 내 뜻데로 나의 갈길로 가겠다고 고집피우며 제갈길로 갔던 양임을
시인하는데서 부터 시작 됩니다. 그리고 이제 내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분을 나의 선한 목자로 모시고 살아간다면 동일하게 그분을
떠나서는 생존할수 없는 양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하는 것 입니다. 양은 목자없이는 한시도 생존할수 없는 존재인 것 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이런 깊은 자신에 대한 자각이 있습니까?!
둘째, ‘예수님이 선한 목자되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We ought to trust Jesus as my ‘good Shepherd’): 만약 성도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자신의 선한 목자로 신뢰 하십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 10:14~15)
라고.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한가지 사실은 주께서 ‘내 양은 나를 안다’ (my sheep know Me)라고 말씀
하셨다는 것 입니다. 주님의 양은 그를 알아본다는 것 입니다. 어떻게요? 그것은 그분을 믿을 뿐 아니라, 믿고 따른 만큼 삶을
통해 그분이 선하심을 경험했기 때문일 것 입니다. 양으로서 목자의 음성을 식별할줄 알고, 목자가 평상시 자기를 어떻게 지켜주고
인도했는지를 경험함으로 그분을 더욱 더욱 신뢰해 나가는 것 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것은 내 삶에서는 목자되신 주님과의 인격적 관계성이 얼마나 형성되어 가고 있는지? 그로말미암아 나는
얼마나 그분을 신뢰해 가고 있는지를 스스로 자문해 보아야하는 것 입니다. 나는 다윗이 고백했드시 그 선한 목자로 부터 날마다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함을 받고, 그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말미암아 못된 짐승의 공격과 잘못된 길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받고 인도되어지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어보아야 합니다. 만약 이런 목자와의 깊은 관계와 신뢰를 누리는 삶의 경험이 내게
부족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목자가 내게 관심이 없어서도 능력이 없어서도 아니요, 그의 양인 내가 그분을
신뢰함으로 따르지 않은 까닭인 것 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분명히 도전하십니다. “또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마. 10:38) 라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인격적인 결단 가운데 날마다 그분을 따르지 않는 제자, 그의 양들이 있다는 것은 불행한 삶 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셋째,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점점더 알아가야’ 합니다 (We ought to know the will of our heavenly Father day by day):
제가 여기까지 ‘어떻게 우리가 선한 목자되신 예수님의 양으로 살아갈수 있을까?’에 대해 말씀 드렸지만, 여전히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속시원하게 ‘예수님의 양’이 되었음에 대한 확신과 감격이 부족하다면 그 중심에는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선한
목자로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함일 것 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그분의 뜻은 무엇일까요? 맞습니다.
우리를 살리고자 하심 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까? 한가지 안타까운 현실은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았다고 확신하는 성도들 가운데
적지않은 분들이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라고만 이해한다는 것 입니다. 그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은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 ~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요. 10:10) 그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것 입니다. 우리를 구원할뿐 아니라, 더 풍성한 삶을 주시고자 함 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풍성한 삶일까요? 그 풍성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통해 그분안에 감추인 모든 풍성한 복을 누리는
삶’인 것 입니다 (엡. 1:3~14). 구원받았다는 것이 ‘단순히 죽어서 천당간다’는 뜻이 전부가 아닌것 입니다. 구원은
풍성함으로 열매맺어 가는 것 입니다. 이 풍성함은 <이 땅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누리는 유업이 얼마나 풍성하고
영광스러운지를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깨닫고 누려나가는 것> 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선한 목자되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풍성한 삶을 현재 누려나가고
있습니까?
이제 2주후면 우리 선한 목자되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 양들에게 생명주시고자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신 부활절
입니다. 주님의 부활사건이 진정으로 우리 크리스챤들의 최고의 기쁨이요 승리의 사건이라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바로 이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을 통해 오늘 우리가 살펴 본데로 ‘왜 여러분과 제가 목자없는 양이었는지?’ ‘왜 우리 성도는 주님을 신뢰하며
따라가야 하는지?’ 그리고 ‘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더 깊이 알아가야만 하는지?’를 최종적으로 확증하고 깨닫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저는 앞으로 오는 2주에 걸쳐 주님의 부활사건의 의미를 살펴볼것 입니다. 바라건데 약속의 성령께서 성도 여러분의 영의
눈을 여셔서 ‘목자없는 양’같았던 우리 존재를 바라보게 하시고, 귀를 열어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마음을 열어 선한
목자를 삶으로 따르기를 결단하는 풍성한 삶 살도록 인도하시기를 간절히 축원 합니다.
마태복음 9:35-38, 목자 없는 양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가르치시는 것이 먼저다. 앞서 산상 수훈과 율법에 대한 해석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가르친다는 것은, 지적은 즐거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터득하게 한다는 것이다. 터득해야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이 가르침이 기초가 되어 천국 복음은 전파되는 것이다. 천국복음이라는 말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고, 복음을 받아들일 때 천국에 소속되는,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된다는 의미다. 그 나라의 왕은 하나님이시다. 즉 가르침과 전파, 배움과 전도는 연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두 사역은 결국 치유사역과도 연결된다. 순서상,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면, 자연스럽게 천국 복음에 대한 전파가 되고, 그 전파함은 결국 모든 병과 약한 것을 회복시켜가는 과정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사역이어야 한다.
9: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돌봐줄 부모가 있는데 어떤 아이들 부모가 없어서 돌봄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는 심정인 것이다. 다 목자가 있는데, 목자가 없어서 어찌할 바 모르는 양들을 본 것이다. 예수님의 특기가 제대로 다른 대상을 꿰뚫어보시는 것이다. 대상들의 상태를 본 것이다. 예수님의 사역의 사유가 명시되어 있다. 다른 사유가 없다. 긍휼히 여기는 그 마음이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스플랑크니조마이), “내적인 부분에서 감동이 오다” 라는 말이다. “기진함”은 ‘던지다’. ‘풀이 죽은’, 이렇게 번역되는 단어다. 던져진 양들이다. 학대받고 있는 상태가 포함되어 있다. “목자 없는 양 같다” 이 의미는 ‘목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양’ (프로바타 메 에콘타 포이메나) 라는 표현이다. 구약성경에서부터 중요한 비유로 알려진 내용이 에스겔 34장이다.
2절에, 자기만 먹는 목자, 양떼를 먹이지 않는 것이 나온다. 여기서의 목자는 지도자들을 말하는데, 당시 지도자들이 부패하고, 학대하는 모습을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지적하신다.
벧전 5:1-3절, 양무리를 쳐라. 억지로 하지 말고 ‘주장하듯’ 하지 말라. 여기에서 ‘주장하듯’ 하는 모습이 에스겔서의 학대와 비슷한 성격이다.
여기서
‘주장’이란, ‘권위의 남용’을 말한다. 학대성 목자가 신약시대 당시에도 있었는데, 베드로는 이를 염두한 것이다. 양순하고,
머리는 떨어지고, 공격력은 전혀 없고, 시각은 전방 9미터인 양들에게 돌을 던지고 막대기로 때리고, 소리치는 그런 목자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집어 던지기도 한다. 오늘날의 모습으로, 차별, 빈정거림, 모독, 비하감, 맹종과 충성 요구, 자신만 돈으로 특혜를 누림, 복수를 증대하기 위한 공공장소 이용 등의 모습을 교회 지도자들이 보여주고 있다.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4절에, 연약하고 병든자, 쫒기는 자, 잃어버린 자를 찾지도 않는다. 집 나갔으니 그만이라는 것이다. 못된 목자는 자기에게 책임이 없다고 하지만 그 책임을 하나님은 목자에게 묻는다. 집나간 양에게 묻는 것이 아니다. 8절에, 그렇다보니 양들이 노략거리가 되고, 들짐승의 밥이 되는 상황이 된 것을 지적하신다. 그 이유는 목자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15절과 16절에서 하나님께서 목자가 되셔서 그 양들을 직접 챙기시는 것을 표현하고 계신다. 마태복음 본문에서 예수님이 동일하게 그 심정을 말씀하신 것이다. 당시 지도자들인 제사장들, 사두개인들, 바리새인들을 생각하고 지적하신 것이다. 신약 성경에 당신이 목자되신 것을 나타낸 본문은 요한복음 10장에서의 선한 목자라는 표현을 하신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아시고, 돌보시고, 자신의 목숨을 다하신다는 표현으로 위로하신다.
어떻게 양무리를 돌봐야 할까?
먼저 먹인다. ‘네 양을 먹이라’ 라는 예수님의 베드로에 대한 지시는 요 21:15-23에서, 세 번의 지시가 나온다. 한 번은 일반적인 양치기의 동사 ‘포이마이노’를 사용했지만, 처음과 세 번째는 ‘보스코’, 즉 급양이다. 먹이는 것이다. 막 6:34에서 목자 없는 양같은 이야기를 하실 때, 그 앞에 오천명을 먹이신 것을 실제로 보여주셨다. 건강한 가르침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가난한 백성을 보신 것이 아니라 목자 없는 양떼로 보신 것이다. 목자가 있는 것이 더 중요하고 시급함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먹이는 것은 성도들의 영적인 빈곤상태를 채워주라는 것이다. 삶의 중심을 잃고 존재의 목표를 상실한 채 무의미한 체험을 반복하고 있는 그런 모습이다. 이런 모습이 측은한 것이다. 먹일 때는 분리해서 먹여야 한다. 겔 34:16-22에서 강한 자와 약한 자를 함께 두면 약한 자는 먹을 수 없다. 이를 분리해서 맞는 꼴을 먹여 주어야 한다. 치유한다. 목자는, 매일 매일 자신의 양을 막대기 아래로 통과하도록 한다. (겔 20:37) 그 과정에서 병의 징후, 상처, 체중의 감량 등을 점검한다. 직접적인 신체접촉으로 확인한다. 예수님도 직접적으로 손을 대시고, 만져주시고, 안수하시고 치유하셨다. 가장 고통받는 약한 자들을 돌보셨다.
양들을 지킨다. 이리들과 하이에나 심지어 사자와도 싸운다. 그래서 양 한 마리가 귀하지 않을 수 없다. 다윗이 죄를 지었을 때 예로 든 것이 삼하 12:7에서 딸 같은 양 한 마리를 잡아 먹은 것을 나단이 든다. 다윗은 알고 있다. 양 한 마리가 얼마나 소중한 지를. 예수님도 양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셨다.
잃으면 찾으러 간다. 찾아야 한다. 세계에는 약 10억 마리의 양들이 있는데, 각각의 양들은 어디에서든 특정한 목자와 반드시 연계되어 있다. 단 한 마리만 잃어도 잠을 이룰 수 없고, 이를 찾기 위한 모든 노력을 한다. 반드시 한 마리씩 센다. 이름을 지어주고, 모든 이름을 부를 때 양들이 알아듣는 것을 목격한다. 어떤 목자가 두 달이 지나서 지나는 양떼의 목자에게 잃은 양을 물을 때 그 말 소리에 자기 주인의 목소리에 대뜸 머리를 쳐들어 목자는 비명을 지르며 와락 끌어 안았다. 온 동네가 재회의 기쁨을 같이 나눈다. (양을 돌보는 참목자 중)
외톨이 되는 양은 파멸된다. 사탄의 먹이가 된다. 이리의 먹이가 된다. 그런 예수님께서 이들을 추수해야 하는 현장으로 보시고, 그 추수할 일꾼을 필요로 하신다.
9:3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에르가테스)이 적으니 9: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큐리오)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추수할 것이 많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신 분들이 많다는 것이다. 불신자들이 많지만 그 가운데에는 상당한 숫자의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해 들어야 할 사람은 여전히 많은데 그 사명을 감당할 예수님의 제자들의 수는 극히 제한되어 있다는 말씀을 하신다. 제자들을 주님께서 보내시듯이, 천국 복음 전파의 자발적 사명을 받고 살아가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필요로 하신다.
새로운 신자가 교회에 오게 되면, 이는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는 것으로 여기고, 그 새로운 가족을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 일을 맡기시는가를 봐야 한다. 이 부분에 대한 기도를 하는 교회의 표시는 새롭게 등록하는 분들에 대한 일꾼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주심에 대한 응답으로 보느냐이다.
주님은 우리의 목자가 되신다. 목자 없는 양같이 우리를 그냥 두시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양이다. 우리에게 목자가 없을 수 없다. 요 14장 16절, 성령으로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은 분명하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무엇일까요?
성경에 있는 모든 일을 했다 그럴 수도 없는 일이고, 착한 일을 많이 했다 그럴 수도 없을 것입니다. 4장 23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왜 오셨는지? 무슨 일을 하러 오셨는지 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기 위해서 , 천국복음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병들고 상한 자를 고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어지는 말씀이 권세있는 가르침, 소위 산상보훈의 말씀입니다. 산상보훈의 말씀이 끝나고 나면 권세를 직접행하신 열 가지 이적사역이 나옵니다. 권세있는 가르침과 권세를 직접 행하신 이 사역을 마무리하면서 9장 35절에서 또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셨는가? 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기 위해서, 천국복음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병들고 상한 자를 고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6장 7장 8장 9장을 가운데 두고 4장 23절의 말씀과 9장 35절의 말씀이 호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마태는 천국을 가르치신 사역 Teaching사역을 대단히 강조합니다. 마태복음은 5편의 예수님의 위대한 설교, 가르침으로 구성되어져 있습니다.
베이컨(B.W. Bacon)은 마태복음은 오경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구약이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5권의 책으로 시작했듯이 신약의 말씀은 마태의 5편의 설교로 시작되어지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1. 첫 번째 설교는 산상보훈입니다. 산에 올라가서 말씀하신 위대한 교훈이라고 하여 산상보훈이라고 하지요. 마태 5장 6장 7장입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면서 7장 28절에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라고 얘기합니다.
2. 마태복음 10장은 파송설교 혹은 사도설교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셔서 그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면서 하신 말씀 설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0장 전체는 파송설교입니다. 파송설교가 마쳐지고 11장 1절에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신 후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3. 세 번째 설교는 13장 천국 비유설교입니다. 다양한 천국에 관한 비유가 나옵니다. 그리고 이 비유를 마치면서 13장 53절에 예수님께서 이 모든 비유설교를 마치셨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4. 18장은 교리설교입니다. 18장 전체를 교리설교로 채운 다음에 19장 1절에 예수님께서 설교를 마치셨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5. 23장 24장 25장은 종말설교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군천사들과 함께 나팔불며 이 땅에 임하실 때에 어떤 일이 임하시며 우리는 어떻게 준비해야 될 것인가?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25장까지 종말설교를 마치고 26장 1절에 예수께서 이 모든 말씀을 설교를 마치셨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마태가 권세 있는 가르침, 산상보훈을 설교하신 다음에 친히 권세를 행하신 열가지의 놀라운 이적 사역을 배치한 것은 마태의 의도적인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신 것도 많은 표적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도 바로 천국을 가르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우리가 공부한 풍랑 사건을 두고 제자들이 뭐라고 반응합니까?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이기에 어떤 병에 걸렸든지 예수만 만나면 고침을 받는가? 하는 것이지요. 예수 그가 누구이기에? 죽은 자도 그를 만나면 살아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온 우주를 만드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창조주라는 것입니다. 자연도 그분께 순종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귀신들도 그분의 말씀 앞에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분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갈 때에 구원받을 수 있다. 이것이 천국복음을 가르치신 목적이었고 천국복음을 가르친 다음에 이적사역을 배치한 목적이었다고 하는 것이지요.
10장에서는 이 삼중사역을 제자들에게 위임합니다. 열 두 제자를 선택하여 세상에 보냅니다. 세상으로 파송하시며 보냄받은 자 사도들에게 다시 설교합니다. 그것이 사도설교 제 10장의 말씀입니다. 10장을 펼쳐보면 12제자가 나오는데 이름이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절에서는 12제자라고 얘기하다가, 2절에 12사도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2사도란 말이 본문 10장 2절 마태는 유일하게 한번 씁니다. 금방 제자라 그랬으면 제자라 그러면 될 터인데 왜 1절에서는 12제자라 그랬다가 2절에 와서는 12사도라 그랬을까요? 제자는 선생님을 배우는 사람입니다. 선생님을 배우고 선생님으로부터 그분이 가졌던 권세와 권세있는 가르침, 권세 있는 능력을 다 위임받아서 세상으로 보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제자들이지만 권세를 위임받아서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자들이란 뜻에서 사도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지요.
파송 설교를 하게 되는 배경이 오늘 9장 36절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제자들을 세운 목적이 여기에 나옵니다.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는 이유가 여기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가 나옵니다. 우리가 오늘 은혜 받고 세상으로 나아가 살아가야 되는 삶의 목적이 여기에 나오는 것입니다.
발음
/ 스프랑크니조마이(splangchnizŏmai) 어원 / 제1부정과거 ἐσπλαγχνίσ- θ ην, 미래 σπλαγχνισθήσομαι, 469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불쌍히 여기다(마 9:36, 14:14, 막 6:34, 눅 10:33), 측은히 여기다(눅 15:20) 신약 성경 / 12회 사용
무리의 어떤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서 그토록 불쌍히 여기셨나요? 이는 그들이 목자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했다고 했는데 그들의 목자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요? 그들의 목자는 누구였나요?
34절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고 많은 이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왈 "예수는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자였던 종교지도자들, 무리의 목자였던 바리새인들은 영적으로 무지했습니다. 그 심성은 사악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임하시는 하나님나라의 임재를 알지 못했습니다. 사단의 장난이라고 비판하게 되는 것이지요. 바리새인들은 권세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권세있는 가르침과 이적을 부인했습니다. 귀신 놀음이라고 비난한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이스라엘이 지금까지 목자라고 따랐으니 저들을 목자라고 섬겼으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불쌍하냐는 것이지요.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렸던 메시야가 임했는데도 불구하고 알 길이 없었습니다.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나라가 임하여 병든자가 고쳐지고 귀신이 결박당하는 모습을 보고서도 이것은 귀신의 장난이라고 비판하게 되는 것이지요.
"불쌍히 여기다"는 스프랑크니조마이 이 말은 신약성경 모든데 기록된 것은 아닙니다. 오직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공관복음에만 나옵니다. 마태에 5번, 마가에 4번, 누가복음에 3번 나와서 도합 12번 오직 공관복음에만 나오는 말입니다. "불쌍히 여기다" 스프랑크니조마이(splanchnizomai). 즉 하나님의 가슴 앓이,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 인간을 바라보는 그 마음이 스프랑크니조마이 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스프랑크니조마이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가슴속에는 스프랑크니조마이가 있었기 때문에 병든 자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을 고치신 것입니다. 그분의 스프랑크니조마이 때문에 귀신에 결박된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불쌍한 무리대신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스프랑크니조마이 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것입니다.
목자 없는 양
"목자 없는 양" 이라고 할 때 이 말씀을 듣고 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금방 알아들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많은 양을 본 적이 없습니다. 목자가 되어 본 적도 없습니다. 그리고 목자 잃은 양이 어떤 상태인지 상상조차 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조상때부터 양을 치던 유목민이었습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농사를 지었습니다. 예전에 부잣집을 천석꾼, 만석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에서는 양이 몇 마리, 소가 몇 마리, 낙타가 몇 마리, 염소가 몇 마리 이렇게 계산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많은 가축이 양이었습니다. 양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금방 알아듣습니다. 예수님께서 군중들을 바라보시며 목자 없는 양과 같도다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그 말이 무슨 얘기인지 알아 듣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천 년 전 그 당시 상황으로 또 지리적으로 그 나라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서 양이라고 했을 때에 어떤 이미지를 가졌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이 기록될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양하면 양은 매우 약한 동물이란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양은 제 몸 보호할 무기 하나가 없습니다. 날카로운 사자의 이빨도 없습니다. 힘센 황소의 뿔도 없습니다. 말처럼 뒷발질도 할 줄 모릅니다. 독수리처럼 날카로운 발톱도 없습니다. 조그마한 비탈진 길을 가려면 올라가질 못합니다. 뒤에서 목자가 밀어 주어야 됩니다. 어린 새끼 양은 아예 어깨에 매고 올라가야 언덕을 올라가야 했습니다. 양은 겁이 많은 동물입니다. 털이 많기 때문에 시냇물 소리만 들으면 냅다 도망갑니다. 시편 23편에 보면 우리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신다. 이 말씀은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는 말씀이지요.
양은 매우 어리석은 동물입니다. 매일 먹는 풀인데도 불구하고 이게 먹을 수 있는 풀인지 못먹는 풀인지 구분할 줄 모릅니다. 독초와 목초를 구분할 줄 모릅니다. 자기가 매일 다니던 길인데 그 길을 못 찾아옵니다.
개미는 자기가 다니는 길 바깥에 갖다 놓아도 제 집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양이란 동물은 자기가 매일 다니는 길인데 어디로 다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냥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양은 보기에는 깨끗해 보이지만 모든 가축 가운데 가장 지독한 냄새가 나는 어쩌면 가장 더러운 동물 중에 하나가 양이라고 합니다. 이게 인간이라고 하는 겁니다. 인간은 사랑의 대상이지 신뢰의 대상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가까이 가서 보면 냄새가 납니다. 덮어두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후벼파고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의 물은 급류입니다. 맹수는 많습니다. 산엔 온통 날카로운 가시투성이입니다. 길은 험악하지요. 목자가 없으면 양은 이 땅에 살아갈 길이 없는 것입니다.
목자의 임무가 무엇일까요?
안전한 길로 양들을 인도해 가는 것입니다. 이 풀은 못 먹는다. 독초와 목초를 구별해 주는 것입니다. 가파른 언덕을 오를 때 뒤에서 밀어줍니다. 가시덤불 피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맹수들이 덤비면 그들을 보호해 주는 것입니다. 풀을 뜯거나 그늘에 쉴 때 피리를 불어 편안하게 안내 해 주는 것입니다.
이 땅에 목자로 보냄을 받았다는 얘기는 예수님의 권세있는 가르침과 권세있는 설교와 권세를 직접 행하신 것처럼 우리도 위임받았다는 얘기는 무엇일까요? 이 세상에 있는 내 주변의 사람들을 천국길로 안내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말씀을 먹이고 세상의 더러운 유혹과 세상의 가치관을 먹이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험악한 이 세상 혼자 살아갈 수 없을 때 그들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엉덩이를 밀어주는 것입니다. 가시덤불 피할 수 있게 도와주듯이 이 세상은 유혹의 지뢰밭입니다. 전신만신 나를 찌르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들을 지켜주는 것입니다. 우는 사자처럼 택한 자를 삼키려고 덤벼듭니다. 악한 것들로부터 우리를 서로 보호해 주는 것입니다.
이런 양들이 목자를 잃는 다는게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양을 친다면 아침에 밥 먹고 "양치고 오겠습니다." 양 몇 마리 몰고 산에 가서 양을 치다가 저녁에 "양 치고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렇지 안다는 것입니다. 목자 한 사람이 많은 양떼를 이끌고 산으로 들로 갑니다. 짧으면 3개월 길면 6개월 어간동안 이 산 저 산을 찾아다니며 양을 기르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깊은 산속에 갔다가 목자가 병이 들기도 하고 불의의 사고로 목자가 죽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 양들은 목자를 잃어버려요. 맹수가 나타납니다. 도적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자 사자 도망가다가 언덕에 굴러 떨어져서 죽는 놈들, 도망가다가 가시덤불에 걸려서 온몸이 찢겨져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빠져나오지 못해서 매애~ 매애~ 울부짖고 있는 놈들, 맹수가 덤비니까 앞뒤 보지 않고 지칠 때까지 도망갑니다.
더 이상 뛸수도 없고 걸을 수도 없고 서 있을 수도 없어 뒤로 발랑 나자빠져서 네 다리를 하늘로 보고 바들바들 떨다 누가 일으켜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내장이 꼬여서 죽는 겁니다. 이게 목자 없는 양입니다.
가끔은 목자가 삯꾼 목자입니다. 도적떼가 나타난다든지 맹수가 나타나면 저 혼자 살기 위해서 양을 버려두고 도망갑니다. 그러면 목자 없는 양이 되는 것이지요. 이런 상황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여기 고생한다는 얘기는 헬라어 원문적으로 보면 몸이 갈기갈기 찢겨졌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도망가다가 나뭇가지에 찢겨지고 날카로운 바위에 걸려 찢겨지고 가시덤불에 찢겨져서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상태 이것을 "고생하며" 그랬습니다.
"기진함이라" - 힘이 다 빠질 때까지 도망가서 발랑 나자빠져있는 상태 그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때 신속하게 목자가 달려가서 양을 일으켜 주지 않으면 양은 그 자리에서 죽는 것입니다. 목자 없는 양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고 기록한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사역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역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사역일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이지요. 한 가지를 더 들라고 한다면 12제자를 만든 사역입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제자되라고. 제자를 삼으라고 주님 말씀하십니다.
가장 영광스런 이름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면 하나는 성도라는 이름이고 다른 하나는 제자라는 이름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흘리심 때문에 내가 구원받아 하나님 나라 백성 성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권세를 우리도 행하게 된 것입니다. 권세 있게 복음을 전하고 권세 있는 가르침, 권세를 나누며 이 땅에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된 것이지요.
만약 당신에게 이 땅에 살 시간이 1년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면 무슨 일을 하시다가 하나님 앞에 사시고 싶으십니까? 다만 한 두 달이 여러분에게 남은 마지막 시간을 보내야 한다면 여러분은 이 땅에 무슨 일을 하시다가 하나님 앞에 서시겠습니까? 아니 백년이 남았다면 여러분은 무슨 일을 하시다가 하나님 앞에 부름받아 서시겠습니까?
병든자, 마음상한 자, 귀신에 시달리는 자를 치료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모두 병이 들었습니다. 내가 가는 곳에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아니 나 때문에 속상하고 나 때문에 병든 자는 없는지, 나 때문에 마음상한 사람은 없는지, 그들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 앞에 용서받았다고 한다면 하나님 앞에 서기 전에 내가 용서해야 될 사람이 없는지, 용서를 선언해 주어야 될 사람이 없는지, 찾아서 그들에게 용서를 선언하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누군가 나에게 목사님 한소망교회 비전채플은 왜 세워야 합니까? 묻는다면 나는 대답이 동일할 것입니다. 천국복음을 권세 있게 전하기 위해서, 천국복음을 권세 있게 가르치기 위해서, 권세 있는 공동체로 바꾸어 드리기 위해서, 우리의 자녀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 하나님 앞에 영광스럽게 쓰임받는 권세 있는 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그들에게 꿈을 주기 위해서.
이웃을 더 잘 섬기기 위해서, 다음 세대에 꿈을 주기 위해서, 아픈 사람들을 치유하기 위해서, 이 민족의 영향력을 세계 모든 민족에게 나누기 위해서, 이것이 목양 사역이요, 추수 사역이요, 제자 사역입니다.
우리 모두는 양입니다. 약합니다. 어리석습니다. 예수 없는 우리의 삶은 목자 잃은 양과 같아서 이곳 저곳에서 찢겨지고 피흘렸지만 닦아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허둥대며 인생을 달려왔지만 쓰러지고 넘어졌지만 일으켜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 찾아오셔서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 권세를 위임하여 주셔서 너도 세상의 권세 있는 제자로 살아갈 수 있다 말씀하십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시간과 물질과 은사와 삶의 환경과 내 생애 모든 것을 투자하여 주님 하셨던 그 일들을 우리가 감당하다가 오늘 밤이라도 주님 날 부르시면 주여 제가 주님께서 내가 명하신 일을 감당하다 왔습니다. 내일이라도 천군천사와 함께 주님 이 땅에 임하시게 되면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제가 주께서 맡겨주신 사역 감당하다가 주님 오심을 기다렸나이다. 영광스런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민수기 27:17
그로 그들 앞에 출입하며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으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열왕기상 22:17
저가 가로되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이 무리가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그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역대하 18:16 저가 가로되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이 무리가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그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마태복음 9:36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마가복음 6: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But you say that if a man says to his father or mother: 'Whatever help you might otherwise have received from me is Corban' (that is, a gift devoted to God),
2878. 고르반(kŏrban) κορβᾶν
1. 고르반, 2. 예물, 3. 마가복음 7:11
발음
/ 고르반(kŏrban) 어원 / 히브리어 713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성전고(마 27:6), 고르반(막 7:11) 신약 성경 / 1회 사용
7133. 코르반(qorbân) קָרְבָּן
1. 제단, 2. 희생 제물, 3. 레위기 2:1
발음 / [ qorbân ] 어원 / 7126에서 유래, 연계형 :קָרְבַּן 관련 성경 / 예물(레 1:2, 27:9, 민 5:15), 제물(레 4:32, 겔 20:28), 희생(겔 40:43). [동] 드리다(레 2:12, 느 10:34) 구약 성경 / 80회 사용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종교 지도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씻지 않은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책망하였으나, 예수께서는 당시의 '고르반'이라는 제도의 폐단을 들어 외형적인 의식보다는 내면적인 마음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시고, 오히려 장로들의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참된 의미를 폐하여 버리는 행태를 책망하셨습니다(1-23절).
예수께서 두로
지경을 가셨을 때에 이방 여인인 '수로보니게' 여인이 귀신들린 자기의 딸을 고쳐 주시기를 믿음으로 간구함으로써 딸의 병이 고침을 받았습니다(24-30절).
예수께서 다시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렀을 때 귀먹고 어눌한 자를 만나서 그 사람의
귀에 손가락을 넣고 침 뱉아 그의 혀에 대시며 기도하심으로써 고쳐 주셨습니다(31-37절).
구약에서
'고르반'이란 "예물(레 1:2, 27:9, 민 5:15)", "제물(레 4:32, 겔 20:28), 희생(겔 40:43)"
이란 뜻으로 사용하였으며 동사로 사용될 때는 "드리다(레 2:12, 느 10:34)"라고 합니다.
신약에서는 유일하게 마가복음에서만 단 한번 사용되었으며 그 의미는 하나님께 바쳤기 때문에 부모님께 드릴 것이 없다는 것으러 잘못 사용되는 것을 꾸짖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떻게 왜곡했는지를 한 예를 들어서 설명하셨습니다.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 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10-13)
‘고르반’은 구약시대에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나 예물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르반,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라고 맹세하면, 그 물건은 아무도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드리는 예물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부모를 공경하지 하지 않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어떤 물건을 분명히
부모에게 드려야 하는데, 그것을 ‘고르반’이라고 말하므로, 부모에게 드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실은 하나님께도 드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마치 계명을 지킨 것으로 보였지만, 실상은 하나님도 속이고, 부모도 속이는 어처구니없는 행위를
자행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부모에게 드려야 할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고르반이라고 말했던 사람이 자신이 잘못했음을 뉘우치고, 그것을 다시 부모에게
드리려고 하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미 고르반이라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드려야지 부모에게 드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그와 같은 일을 많이 자행했다고 예수님께서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미쉬나’(*유대인의 구전 토라를 기록한 것으로 최초의 것)를 보면 후기 유대교에서 고르반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연로한 부모를 부양할 책임을 회피하였습니다. 교묘하게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재산을 지킨 것입니다.
어설픈 마음으로 고르반의 맹세를 생각해보면, 이것만큼 철저한 신앙의 행위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부모마저 낮추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을 가르켜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 혹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행하는 바리새인들을 비판할 뿐입니다.
그 이유는, 이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대에게 중요한 말을 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지적처럼,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모든 것이 허용되지는 않습니다.
가장 큰 계명의 첫 번째인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뜻도 동일합니다. 아니 그 의도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가장 먼저 깊게 고려되어야 할 존재론적 의미는, ‘나와 나의 관계’입니다. 나와 나의 관계가 건강하지 않거나, 함몰되어 있거나, 타락해 있거나, 망가져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더 적나라하게 말해서 그대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할 정도로, ‘나와 나’의 관계가 건강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 사랑’이라는 가장 큰 계명이 시작되고 완성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시대에 고르반 신앙이란 내가 드린 것만 주님의 것이 아니라 내가 드린 것은 나의 모든 것을 대표하는 것이므로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따라서 내가 드린 것과 내가 남아 있는 것을 구분할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므로 내가 사용하는 모든 것의 주인도 주님이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내 것을 사용하는 자세가 아니라 항상 주님의 것을 내가 사용하고 있다는 믿음의 자세가 나를 다스리고 세워가야 하겠습니다.
밖에서 들어가는 음식물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 오직 사람의 마음 안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 외형적인
형식을 아무리 제대로 갖추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외식적인 것에 불과하고 마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떠나 있다면 하나님에서 받지 않으시는
헛된 경배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인 마음을 보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유전과 율법에 따라서 외형적으로
손만을 씻는 것보다는 설혹 손을 씻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을 기뻐하신다.
마가복음 6장 전반부에는 예수님께서 고향, 나사렛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신 일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예수님께서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신 일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특히 예루살렘 산헤드린 공회(오늘날의 국회와 교단 총회를 합친 기관)에서 파견된
사람들과의 전통에 대한 논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여들었다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시비 거는 것은 거의 습관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왔다고 합니다.
어제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새벽, 해 뜨기 전에 갈릴리 호수 위를 걸으셔서, 제자들이 힘겹게 노를 젓는 배에 타시고는 게네사렛까지
가셨습니다. 게네사렛은 갈릴리 호수 북서쪽에 위치한 마을입니다. 예루살렘에서 게네사렛까지는 약 150km나 됩니다. 그 거리를
걸어서 가려면, 최소한 4-5일 걸립니다. 바리새인들과 몇몇 서기관들은 그 먼 거리를 걸어서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이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북쪽 갈릴리에서 사역하고 계셨을지라도, 그 소문이 이스라엘 남쪽에
위치한 유대 지방은 물론 수도 예루살렘에까지 퍼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은 계속 확장되어가는 예수님의
사역을 견제하기 위해서 제동을 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막을 수 없음은, 주님이 진리이시고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2.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사람들은 예수님의 일행을 면밀하게 관찰한 후에, 시빗거리를 찾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몇몇이 부정한 손,
씻지 않은 손으로 빵을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부정한(코이노스)’이라는 단어는 ‘구별하지 않다’라는 뜻입니다. ‘거룩’이
‘구별’이라는 뜻이니까, ‘구별하지 않은’ 것은 곧 ‘부정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그때만 사용하는 그릇이
있었습니다. 누룩이 없는 음식을 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릇을 구별하여 쓰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평상시에
쓰는 그릇을 깨끗하게 씻은 후에 안식일에 쓰는 것을 보고서, 그것이 틀린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 말이 틀린 것이 됩니다.
당시 이스라엘을 비롯한 중동지방에 사는 사람은 식사할 때에 숟가락과 젓가락, 또는 포크와 나이프와 같은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먹었습니다. 그래서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위생 관례였습니다.
그런데 바빌론 포로 이후에 그것이 거룩함에 이르는 정결 의식이 되어, 종교 행위가 되고, 그것이 이어지자 그들의 전통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손을 씻을 때도, ‘고인 물은 부정하므로, 흐르는 물에서만 씻어야 한다’와 같은 규정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손을 씻지도 않고 빵을 먹었습니다. 그것에 대해 시비를 거는데, 씻지 않은 손으로 빵을 집어 먹는 것은
‘비위생적이다’가 아니라, ‘비전통적이다’ 또는 ‘비신앙적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3절과 4절은,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이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 손을 제대로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았고, 시장에서
돌아오면 몸을 씻지 않고는 음식을 먹지 않았으며, 그 밖에도 지키는 여러 가지 전통이 있는데, 여러 그릇을 씻었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3-4절은 ‘괄호’로 묶여 있습니다. 마가복음이 기록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로마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또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알리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약의 언어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히브리어나
아람어는 다시 번역하며, 익숙하지 않은 유대의 풍속은 설명합니다.
‘보아너게(3:17)’는 ‘우레의 아들’,
‘달리다굼(5:41)’은 ‘소녀야 일어나라’라고 다시 번역합니다. 또한 ‘무교절의 첫날(14:12)’은 ‘유월절 양을 잡는
날’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손을 씻는 전통’을 로마 사람들 또는 이방인들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3-4절에 따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2절은 5절로 이어집니다.
5.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그들의 스승이신 예수님에 대한 비난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율법 지킴이들’이었을
것입니다.
본래 ‘손을 씻는 규례’는 제사장들이 제사를 집례할 때에만 적용되었습니다(출 30:18-21). 일상생활에는 그런 규정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장로들의 전통’이라는 명목으로 성경 말씀 외에 수많은 규정과 규칙을 만들고, 그것들을
열심히 지켰으며, 결국엔 그 규정을 어긴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까지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우리가 제사장은
아니지만, 제사장처럼 정결하게 하자”라고 순수한 헌신의 발로로 손을 씻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자 그 중심은 사라지고,
전통만 남아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우위에서 군림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유전 vs 하나님의 계명(6-13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주장에 어이가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29:13의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6.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외식하는 자’의 문자적인 의미는 ‘가면을 쓴 사람’입니다. 그리고 ‘입술’이 ‘말’과 ‘표면’, ‘형식’이라면, ‘마음’은
‘삶’과 ‘내면’, ‘본질’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비롯한 율법주의자들은 말로는 그리고 겉으로는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삶으로는 그리고 중심으로는 하나님과 동떨어져 있었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경험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의 말이 아무리 구구절절 옳아도 그 삶이 바르지 않으면, 그 말은 공기만 진동하는
공허한 울림만 됩니다. 왜냐하면 말의 소리나 겉의 소리보다, 삶의 소리와 중심의 소리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기 때문입니다.
7-8.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인 계명을 지키는 것처럼 보였을지라도, 실상은 그 계명을 백성들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삼았고, 하나님을 높이기보다 자신들을 높였던 것입니다. 특히 8절에 대조되는 두 동사가 있는데, ‘버리다’와 ‘지키다’입니다. 즉
그들은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은 버리고, 지키지 말아야 할 것은 지켰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버려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을
바르게 분별해서 순종하는 것이 신실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켜야 할 것과 버리는 것에 대해서 다시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9.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지키다’의 문자적인 뜻은 ‘세우다’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세워야 할 ‘하나님의 계명’은 세우지 않고, 대신해서 세우지
말아야 할 ‘장로들의 전통’을 세웠던 것입니다. 또 ‘저버리다’의 문자적인 뜻은 ‘옮기다’ 또는 ‘제거하다’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옮기거나 제거하지 말아야 할 ‘하나님의 계명’은 옮기고 제거하면서, 반대로 옮기고 제거해야 할 ‘장로들의 전통’은
옮기지도 않고, 제거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신앙은 제자리에 두어야 할 것을 두는 것이며, 치워야 하는 것은 치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떻게 왜곡했는지를 한 예를 들어서 설명하셨습니다.
(10-13)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 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고르반’은 구약시대에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나 예물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르반,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라고 맹세하면, 그 물건은 아무도 손대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드리는 예물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고 나니까, 부모를 공경하지 하지 않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어떤 물건을 분명히
부모에게 드려야 하는데, 그것을 ‘고르반’이라고 말하므로, 부모에게 드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실은 하나님께도 드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마치 계명을 지킨 것으로 보였지만, 실상은 하나님도 속이고, 부모도 속이는 어처구니없는 행위를
자행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부모에게 드려야 할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고르반이라고 말했던 사람이 자신이 잘못했음을 뉘우치고, 그것을 다시 부모에게
드리려고 하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미 고르반이라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드려야지 부모에게 드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그와 같은 일을 많이 자행했다고 예수님께서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내면, 죄악의 근원(14-23절)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함께한 장로들의 전통에 대한 논쟁을 일단락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4-16)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비롯한 장로들의 전통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열심히 씻었습니다.
그것이 신앙 행위가 될 정도로 열심히 씻었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에 손을 씻는 것은 위생적으로 굉장히 바람직합니다. 하지만 손을
열심히 씻는다고 해서, 그가 정결한 사람인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 성경에는 또렷하게 나타나 있지 않지만,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단수로 표현되어 있고,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은 복수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말한,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 17:9)”라는
말씀이 저절로 떠오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정결하게 해야 할 것은 손이 아니라 마음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의 진의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비유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18-1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
음식이 사람을 정결하지 못하게, 즉 부정하게 할 수 없는 것은, 사람이 음식을 먹었을 때 그것이 마음으로 들어가지 않고, 배(위)로 가서 다시 배설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선언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이 나옵니다. 그것에 마침표를 찍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사도 베드로가 고넬료 집을 방문했을 때, 사도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음식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자유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인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0-23)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사람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 음란에서 우매함까지, 12가지를 말씀하시는데, 정직하게 우리의 속을 들여다보면 우리도 이
조목들에서 자유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속이 악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고, 그런 것들은 방치하면서 겉사람만 정결하게 하려고
한다면, 점점 더 외식적인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권면합니다(롬 12:2).
우리가 어떻게 우리 속사람을 정결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우리의 힘으로 삼고,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마음에
두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정결하기 때문에, 그 말씀을 우리 속에 두면, 그 말씀이 우리를 정결하게 만듭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두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에게 드린다고 하는 이 말씀 이것을 여러분이
엉뚱하게 이용하여 여러분 편의대로 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신랑의 말씀대로
입니다. 신랑의 말씀대로, 신랑의 집안 가풍대로 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 시집 온 사람들이 예수를 닮아서 입맛도 닮아가야 되고 모습도
닮아가야 되고 모든 것이 신랑을 닮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부부간도 비슷해야
잘 산다고요. 김형제님하고 정집사님하고 두 분이 같이 앉아있네요.
봐요. 좀 돌아봐요. 저 양반들이 비슷하게 닮았어! 비슷하게 닮았다구요.
처음에 결혼하고서 안닮은 곳이 많아서 싸움하고 화가 나서 이불도 뒤집어쓰고,
너니 내니 한다고! 박집사님하고 저 김자매님하고 비슷하게 닮았거든! 보세요.
원래는 안 닮았었는데 살아가면서 비슷하게 닮아 가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닮아가요. 부부간에 틀림없이 닮습니다. 둘이
닮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게 여러분들 거짓말인 줄 압니까? 부부간에
성질도 닮아갑니다. 비슷하게 닮습니다. 봐요. 내 말이 거짓말인가?
전부 다 닮아갑니다. 남편이 그냥 상을 찡그리고 싸우는 사람은 부인도
슬슬 닮아가요. 그래서 아내를 보면 남편을 알고 남편을 알면 부인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르반이라고 하는 것은 저쪽에서 나를 닮아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저쪽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예수가 나를 닮아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를 닮아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내 차원에다 끌어내려 더러운 자리에다
모셔 놓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서 그 분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르반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어떤 부분만 드리지 마세요. 십일조 드리고, 주일날 한 시간 드리고,
저녁에 한 시간 드리고, 가끔가다 성경 한 장 드리고.... 그러지 마시고
여러분 전체를 다 드리세요. 여러분 전체 생애를 다 갖다 드리세요. 이것이
고르반입니다. 전부 다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것이 어디 있어요? 전부
다 드리는 겁니다. 그래야 예수믿는 것이 편해요. 그래야 제대로
믿어져 예배당에 들어가면 예수 믿는 것이고 예배당 밖으로 나가면
예수 안 믿는 것이고...이런 게 아니라, 생활전체가 예수 믿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예배드리는 이것만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저 바깥에
나가서 사는 모든 생활이 전부 다 하나님께 드리는 생활, 고르반의 생활,
이것이 돼야 된다─ 그런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고르반 하려거든 하는 말씀입니다. 원래의 고르반은 이런 것인데 인간들이
자기 편리한대로 고르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잘 기억을 하셨다가 여러분은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는 고르반 사상을 차용하지 마세요. 그것
빌리지 마세요. 그것 가져다가 사용하지 마세요. 지금 여러분들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고 이어요. 잘못된 고르반 사상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엉뚱하게 바리새인들의 고르반 사상을 가져다가
여러분이 빌려쓰고 있다 그 말입니다. 절대 그러지 마세요. 그러지
말고 여러분의 생활 전체가 모든 생활 전체가 주님께 다 드려지는 생활이
고르반 생활로, 하나님께 예물로 드리는 생활, 이 생활이 여러분들에게
정말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마가복은 다시 넘어 가세요. 마가복음
7장 8절 말씀을 제가 읽겠습니다. 읽어 나갈테니까 여러분들에게 지금까지
드린 고르반 사상을 잘 음미 해 보세요. 8절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다고 생
안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시니까 버렸어,─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은 지키느니라. > 그러니까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자기 생각,자기 주장을
내세우고 형식만 잘 갖추어졌으면 만족하면서 이것이 바로 고르반,고르반
했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사상입니다. 그 다음 말씀─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 버리는도다.』
이것을 실제 예를 들어서 제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자기 유전을
지키려고,자기들에게 내려오는 유전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린단 말입니다. 『너희가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모이기에
더욱 힘쓰라』고 그랬어요. 모이기에 더욱 힘쓰라고 했는데, 여러분이 모이기에
힘쓰십니까? 생각을 해 보세요. 요새 이자매님이 그냥 모이기에
힘을 내는데 조금 더 해야 돼. 조금 힘을 더 내야 돼. 주일날 낮에 한 번
나왔으면 됐지 뭐, 저녁에 또 나오고─ 아이구, 왜 이렇게 자주 모여!
수요일날 또 나오고! 하나님의 계명이 맞습니다. 알아 듣습니까?
자,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그 날이 가까음을 볼 수록 점점, 점점, 모이기에
더욱 힘쓰라고 했는데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 참석했으면 됐지─ 하고 자기
유전을 만들어 놓는 겁니다. 수요일 날, 아이구! 오늘은 심사가 불편한
데 집에 들어 앉아 있어야 되겠다, 자기 유전을 자기가 만드는 것입니다.
혼자 앉아서 고독을 씹느라고 하나님의 계명을 내어버리는 것입니다.
요새는 결혼식들이 하두 많아 가지고, 모이기에 힘쓰라고 그랬는데, 결혼식에서
요리 컴 하거든! 오라고 말입니다. 오집사님 뭐 괜찮아요? 더러 가셔도
돼요? 요리 컴,일요일 날만 되면 요리컴, 택일을 해도 꼭 그날 해.
왜? 그날이 제일이거든! 옛날에는 육십갑자 손가락으로
짚어 가지고 택일을 했습니다. 제가 육갑 잘 짚습니다. 사주팔자 보는
것 조금 잊어버렸는데 오운육기 가지고 보면 여러분들 정확하게
나와요. 다른 데 가서 보시지 말고 나한테 와서 보십시오. 잠깐 성경 덮어놓고
보면 되니까. 에이그, 목사님이 그런걸 아실라구? 내가 전에
대전역전 앞에 자리 깔아 놓고 그거 보려고 하던 사람이요. 제가 공부할
때 한문을 많이 했거든요. 공부할 때 아버지께서 그러셨습니다.
<너는 그것 공부해 가지고 대전역 앞에서 자리 깔아 놓고서 하는 것 그것
해라. 그 사람들 돈 많이 번다고 하더라.> 내가 그
때 그걸 했더라면 지금 돈 좀 벌었을 텐데 이 신세가 됐어. 뭔지
잊어 버렸네요. 아! 그렇지요. 좋은 날을
택해서 혼인합니다. 일요일 안 합니다. 월요일이든 수요일이든 아무
때든지 상관없이 길일을 택해서 결혼식을 했습니다. 불과 몇년전만
해도 그랬는데 요새는 뭐 얘기 할 것도 없이 일요일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예수믿는 사람들이 일요일 날 꼼짝없이 놀고, 놀고, 놀고
하거든? 그래서 가만히 보니까 놀고서도 잘 되네? 그러니까 불신자들도
일요일날로 결혼식하자 그렇게 된 것인데, 그 배경을 살펴보면 공중에 있는
마귀새끼가 예수쟁이들을 어떻게 하면 예배드리는데 방해를 해 볼까 궁리를
하다가, 꼭 택일을 일요일날로 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하나님이
모이기를 힘쓰라고 했고 주님께 경배하라고 했지만 어떻게 다 따라갈 수
있습니까? 적당히 해야지 그래서 오늘은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그러고서는 날라 가는 것입니다. 예식장으로요─! 요새는 또 놀러
다니는데 많이 있죠? 신나게 한바탕 흔들어대고 와야 일년을 견디는
사람들이 바로 현실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무주 구천동을 한 번 갔었어요.
우리 양형제님이 그냥 가자고 졸라! 그 바람에 갔었는데, 아이들 뭘 배워!
그러면서 너는 그런 거 하지 말라고 하면 아이들이 보고들은 것이 그것인데,
배운 것을 안하고 무얼 하란 말입니까? 아이구, 아버지는 도적질하면서
자식은 하지 말라고? 자기가 실제 실물 교육을 시켜 놓고 자식보고는 그런
것 하면 안 된다 그래요? 술 먹고 주정 실컷 하면서 자식보고
넌 술 먹으면 안 된다─! 아니 아버지가 실물교육을 시켰는데, 어릴
때부터 소꿉살이를 해도 흔들흔들하면서 <난 아버지다> 이러고
들어오는 데─! 아니 실물교육 시켜 놓고 하지 말래?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에 전부 그런 곳으로 나가떨어진다고! 이것이 바로 고르반
사상,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던 고르반 사상입니다. 이 만큼 드렸으면 됐지
뭘, 하나님 말씀 폐지해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편의대로 살지
말고 사생결단내야 합니다. 사생결단을 하고 신앙생활 이렇게 해야겠다하고,
신앙은 이 길로 걸어가야 되겠다... 말씀을 내가 반드시 지켜야 되겠다고
결심을 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적당하게 어물쩡하게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던 고르반사상을 여러분들 다 집어 내 버리세요. 그러지 마세요.
신앙생활도 하려면 그냥 멋들어지게 해야 될 것 아닙니까?
김형제, 그렇지? 야! 참 달라졌다. 참 달라졌네. 예배당에 가더니 달라졌어!
이래야 됩니다. 뭔가 달라졌어. 신경질만 더 내는 걸? 이거
곤란해요. 예배당에 가더니 사람이 확 달라졌어. 어떻게 달라졌어?
야! 얼굴이 쫙 풀려서 정말로 멋있어졌어. 그렇게 삐치던
사람이 삐치지도 않고 그렇게 이불 뒤집어쓰던 사람이 뒤집어쓰지도 않고,
그렇게 빡빡 우기던 사람이 우기지도 않고, 독살을 떨고 혈기를 띄던 사람이
그것도 안하지. 이렇게 변해서 사람이 바뀌어져야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보고 야! 참 멋있다고 할 것 아닙니까? 예수 믿으면서 할 것 다하고
끌려 다녀 봐요. 체, 예수믿는 것이 저 모양이야? 속으로 그런다고요.
특히 뒤돌아서서 그런다고요. 저게 예수믿는데... 그러면서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진짜 예수쟁이가 아녀. 그렇게 비웃는다구요.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먹으라고 해서 안 막는다고
하면 컵밑에 조금 따라가지고 먹이면서 하는 말이 요까짓껏 먹는 건 괜찮지?
야 야, 하나님도 요건 봐주쟎냐? 이번 한 번만해라. 하나님이
한번 봐준다고 해서 싹 마셨어! 그럼 먹여 준 사람이 뭐라고 그러는 줄
아세요? 에이, 미친 놈아!. 네가 예수 믿는 놈이냐? 예수믿는 사람은
그것도 딱자르는게 예수믿는 사람이야! 속으로 그래요. 참말로 여러분들
정신차리세요. 비웃음 받지 마세요. 예수 믿는 사람으로 딱 서십시오.
이자매님, 회사에서 예수 믿는 사람으로 딱─ 섰습니까?
「나, 예수 믿는 사람이다. 올테면 와라. 때려죽이겠다.」 그렇습니까?
예수믿는 사람은 꼿꼿하게 서서 나는 예수믿는 사람이니까 이런 것
안 해! 나는 예수믿는 사람이니까 밀씀대로 살꺼야! 이렇게 한 번
나가봐요.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야! 다르다. 확실히 다르다. 그 교회는 뭐가 있는 가봐」 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이 자매님을 보고서 그런 말이 나와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 교회는 뭐가 있는가봐─ 이래돼야 여러분이 힘 안들이고 전도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 믿으라고 떠들 필요가 없어요. 그렇게 되면
저절로 스스로 따라오니까─ 「 얘, 나도한 번 가 보자 」 하는 말이 저절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르반 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앞에
고르반된 사람이리는 말씀입니다. 우리 김형제처럼 말씀입니다. 「예수는
믿지만 오늘 딱 한 잔만 해! 」 그 결과는 위장병 걸리지요, 뭐. 그렇죠?
공개된 비밀이니까 얘기해도 괜찮은 일이지요? 예수 믿으면서도 다른
사람이 하니깐 한잔씩,한잔씩 하는 것입니다. 남는 것은 치질밖에
없어요. 남는 건 위장병밖에 안 남아요.
고르반이면 철저하게
고르반하 철저하게 드리는 것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내
인생 전부 다 하나님께 드렸으면 좋겠어요. 오늘 하루 주님께 드리는 이
시간을 우리 다른 데로 써 먹을 수 있어요? 내 인생을 전부 다 드렸는데...
이렇게 되어야 진실로 고르반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전부 다 핑계대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 딱 세워 놓고, 하나님의 계명은 다 폐해 버리고,자기
생각대로 나가는 것입니다. 이게 잘못된 고르반입니다. 여러분은
결코 그러지 마세요. 말씀 읽습니다. 10절 말씀... 여기 하는
말씀 좀 봐요. 뭐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가.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였거늘─』 그렇죠? 부모를섬기지 않는
사람은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부모를 훼방하고─ 어머니를 욕하고,아버지를
욕하는 사람은 죽이게 되어있어요. 이 성경말씀은 불효자를 죽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말씀은 옆에다 살짝 제껴 놓고서는 뭐라고
하느냐─ 11절 말씀을 읽습니다.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이렇게 말로만 다
해치워 버리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이런식으로 말로만 다 해치워 버리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레위기에 나옵니다. 출애굽기에도
나오고 신명기에도 나오요. 계속 나옵니다. 이렇게 귀한 하나님의
말씀을 쑥 잡아 빼놓고,레위기 1장 2절 그 말씀을 쏙 빼다가 하나님께
드림이라고 하는, 이 고르반이라고 하는 말씀을 제 필요한대로 사용하여 가로되
「하나님께 드리지 아니하고 어머니께 드리면 되나? 하나님을 더중하게
섬겨야지. 그러니까 어머니께 드릴 것을 하나님께 드렸으면 되는
거야. 어머니는 안 섬겨도 돼!」 하는 것입니다. 이 따위로 성경을
이용하여 제 이론을 펴 나가는 것, 그것이 곧 고르반 사상입니다. 바로
이것을 주님께서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이것을 제가 조금 더 부연
설명 드리겠습니다. 구원받고 나면 제일 빠지기 쉬운 게 뭐냐 하면
바로 이 고르반 사상입니다. 구원받고 나서 제일 빠지기 쉬운 사상입니다,
저를 따라 하십시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게 아니요, 내속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 자, 우리 조형제님
속에 누가 살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살고 계십니다. 그러면
조형제님은 죽었습니까, 살았습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분명히
죽었지요? 그러면 죽었다는 사람이 어떻게 여기와서 이 말씀을 듣고
계십니까? 이것이 우스운 얘기입니다만 처음에 거듭나고 나서 이 말씀을
잘 몰라서, 이해를 할수가 없어서 지금 잘못되어 가는 사람들이 무지하게
많이 있어요. 저는 이 생각만 하면 속이 아파요. 화가 슬그머니 난다니까요.
잘못 되어 가는 것을 보면 기가 막혀요. 「예수께서 내 속에 계시고
나는 죽었어. 그래서 나는 없어.」 그런 식으로 자기는 없답니다. 무조건
자기는 없다는 것입니다. 없어요? 없는데 왜 그러고 돌아다녀? 없는데
왜 그러고 다니느냐 말입니다. 자기가 없으면 어떻게 없다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습니까? 그게 바로 있다는 증거예요. 이것이 완전히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거듭난 후에 이렇게 되기가 아주 쉬워요. 제발 이
사상에 여러분들 빠져 들어가지 마세요. 그래가지고 어떻게 하느냐─
─ 목사님? ─ 예 ! ─ 한가지 물어 봐도 돼요? ─ 물어 보시요.
─ 나는 죽고 예수는 내 속에 들어 오셨죠? ─ 그렇습니다. ─ 그러면,
이제는 내가 죄를 짓습니까, 안 짓습니까? ─ 아! 죄 짓죠. 미워하잖아요?
─ 그러면 그게 죄 입니까? 나는 죽었는데 내가 죄졌습니까?
나는 죽고 예수만 사는데 이 속에서 나오는
게 예수님께서 하는게 아닙니까?
아이구, 사람잡네!
아니, 그러면 나는 죽었는데 왜 그런 더러운 게 나와?
이런 경우에 제 속이 터져 죽을 지경입니다. 그 사람은 신이 나요.
목사님보다 자기가 성경을 더 많이 안다고요. 나는 죽고 예수가 내
속에서 사신다는 말씀을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해가 안가서
결국은 고르반 사상이 됩니다. 고르반 사상을 현대 우리말로 표현하면
도덕폐기론이란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내 안에 계시니까 내가 아무 짓을
했어도 하나님과 교제가 원만하게 이루어졌으니까 다른 것은 아무렇게나
해도 죄가 아니고 하나님께 내 자신이 드려졌으니까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얘기하는 것이 바로 고르반 사상입니다. 딴 게 없어요. 하나님을 빙자
해 가지고 저 좋은 방향대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도덕폐기론, 고르반 사상입니다.
무서운 사상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위에 그런 사람들이 많아요.
어떤 사람이 저에게
전화를 했어요. ─ 목사님, 나 교회 안 나가렵니다. ─ 왜 안 나오실려고
합니까? 나오십시요. ─ 저는 목사님 설교 들을 게 없어서 못 듣겠어요.
─ 들을 것이 없으면 할 수 없지요. 어째서 그렇게 들을 것이 없습니까? 구체적인
말씀을 해 보시지요. ─ 목사님은 시간마다 복음은 전하지 않고 율법만 전하기
때문입니다. ─ 내가 어떻게 율법만 전했습니까? ─ 왜 자꾸만 하라,
하라고만 하십니까? 왜 사랑하라고 하고 왜
자꾸 열심히 하라고 합니까? 할 수도 없는 것을 왜 자꾸 하라고 하느냐
이 말씀입니다.
이렇게 주고받다가 제가 한마다 했습니다. 「신약성경의 서신서에
보면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사랑해라, 미워하지 말아라, 싸우지 말아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아라, 이런 말씀이 쭉 나오는데 그것도 모두 율법인가요?」
하고 내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이구 그것도 해석하기 나름이지요.
김목사처럼 해석을 하면 다 율법이 돼.」 그러더라구요. 그저 우리 집 아이들
같으면 종아리라도 후려치고 싶은 심정이지만 그럴 수도 없고 내 속만 터지는
거예요. 성경을 모르면 가만히나 있어! 그러면 중간은 갈 것 아닙니까?
똑똑한 척 하느라고 아는 척 하느라고 성서해석을 그 따위로 해 가지고
여러 사람 바보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또 물었습니다. 해결책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당신이
와서 설교를 한 번 해 보고, 내가 율법을 전하니까
당신이 복음을 더 잘 전하면 내가 물러서고 당신이 해야 될게
아니냐고 했더니 ─ 에이, 사람들이 안 믿어서 안돼. 그래서 제가 ,그럼
할 수 없지 어떻게 하느냐니까, 그 사람 하는 말씀이, 한 마디만 해 주고서
전화를 끊어야 되겠다고 하더군요. 그래 무슨 말씀이냐고 하니까 당신들은
전부 다 지옥 간대요. 그래서 내가 어째서 지옥 가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이 고르반 사상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지옥 가는 이유는 당신들은 완전성화가
못돼서 전부 다 지옥 간다고 했습니다. 그럼 성경에는 요한복음 3장에서
거듭나지 아니하면 천국못 가고, 거듭나면 천국간다고 했는데 그럼 거듭나는
것은 뭣에다 쓰느냐고 했더니 거듭나는 것은 기초라서 그것은 반드시 통과해야
될 문인데 그것만 가지고는 천국은 못 가고 지옥가는 것이랍니다.
거듭나는 것만 가지고 지옥갈 수 없고 거기까지 온 사람은 지옥가고 그 다음에 자기처럼 이렇게 완성이 돼야 그래야 천국을 간다고 합니다. 그럼 당신의 완성은 어떤 것이냐고 하니까, 나는 죄하고 의하고 그런 걸 떠났다고
해요. 물론-성화가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를 구속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거룩함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으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완전성화-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자기밖에는 그렇게 완전성화가 된 사람이 세상에
아직 없다는 어리석은 주장입니다. 하두 답답해서 제가 또 물었습니다.
그래 제가 또 물었읍니다.
그래 대한민국에 당신같은 사람이 또 하나 있는가, 없는가, 또 많이
있는가고 물었더니 세상에 암만 찾아봐도 자기밖에 없대요. 자기처럼 된
사람이 없다고 해서 하두 기가 막혀서 그럼 서울에 아무개 목사님도 내가
분명한 분인 줄로 알고 내가 존경하고 있는데 그 양반은 어떠냐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어─ 그 양반! 거기도 없어. 아직까지 못
찾았어. 거기도 비슷하게 하기는 하는데 그것도 아녀! 세상에 이런
오만 방자한 일이 있습니다. 이것이 고르반 사상이 잘못 들어가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참 뱃속 편하게 삽디다. 어떻게 사느냐?
죄가 전혀 안 나오는 겁니다. 왜? 나는 죽고 예수가
살기 때문에 죄가 전혀 안 나옵니다. 죄가 하나도 없습니다. 죄가
하나도 나오지 않습니다. 뭣을 해도 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것이니까요. 욕을
했어도 예수님이 하신 것이고 막걸리를 마셔도 예수가 마신 것이고 싸움을
했어도 예수가 싸운 것이고....! 예수가 해요? 하여간 무엇을 했어도
다 예수가 한 것이지, 왜 내가 한거냐 이겁니다. 다 예수가 한 것이라니
내가 그것을 이길수가 있어야지요. 이런 사람들은 이길 장사가 없어요.
이길 수가 없어서 잘 알았다고, 나중에 당신이 천국가고
혹시 내가 죽어 지옥가게 되어서 지옥에서 고통받게 되거든 나사로와
부자처럼 될터이니 그때 내가 물한바가지 달라고 하든 수고스럽지만 거절하지
말고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했어요. 그러고는 전화 끊었습니다.
이 고르반 사상은 잘못된 사상입니다. 그러고 나서 초기에 아주 그 사상으로
물들어 빠져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꼭 누구하고만
대화를 하느냐하면 속썩이는 사람, 그저 뭔가 생활도 안되고 골치 아프고
어려운 일 있는 사람, 그런 사람만 찾아 가지고 그 사상을 쏙 집어 넣는다구요.
─ 야! 속 썩이지
말어! 이 숙맥아. ─ 죄가 나와서 그러고 있지? ─ 그거 죄가 아니야!
그게 왜 죄냐? 성경을 봐라. 로마서 8장1절을 봐라. 그게
어디 죄냐? 그리스도안에서 죄는 전혀 없는 것이다. 제대로
믿어야 되는 거야. 정죄함이 없는 것인데 왜 율법에 매여 가지고 속을 썩이냐?
이렇게 되면 웬만한 사람은 한바퀴 휙 돌아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바퀴 돌고 나면 정신이 어리벙벙해져서 이제는 헤롱헤롱 세상이 말짱
거꾸로 보입니다. 거기 박자매님도 아마 슬쩍 그런 것 가져다 집어넣으면
신이 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편하게 살는지도 모릅니다. 하긴
그것도 편하긴 할 것입니다. 성경 볼 것도 없고 예배드릴 것도 없고 조심할
것도 없고, 그저 제 욕심차려서 돈 버는데 눈이 휘둥그래져서 벌고 돌아다니면서
할 짓 다하고 말입니다. 하여간 저는 양손 번쩍 들었어요. 그것이
바로 고르반 사상입니다. 아무리 책망해도 안 들어요. 들어먹지를 않아요.
왜 들어먹지를 않게 되었느냐 하면 이 고르반사상은 자기가 대한
민국에서 제일 최고봉에 올라가서 지금 신앙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자기를 가르칠 자격이 없어요. 그래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얘길
해도 안 들어요. 혹시라도 여러분이 이렇게 되지 마시길 바라고 큰 문제나
작은 문제나 그런 이론들이 여러분에게 들어 올때 여러분들이 알아서 잘라
버리세요. 여러분들이 구원받고서 하나님께 드림이 됐다─그러면서
부모나 형제에게 잘못한다는 것은 아직 드림이 안된 것입니다. 헛소리하지
마세요. 말씀을 찾겠습니다. 요한일서 4장 20절, 제가 읽겠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하고』 이게 바로 고르반 입니다. 하나님께 드렸다,
자기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그 말씀입니다. 고르반 했다 그 말씀입니다.
다시 읽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노라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것은 미워하면서도 그걸 합리화시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객관적으로 놓고 남의 얘기하듯 하니까 여러분이 지금 고개를 끄덕입니다.
자기가 실제 이 상황 가운데 들어가면 미워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를
못한다 이겁니다. 그렇게 미워하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으니까
그 미워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을 해 버립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 때문에 요한일서를 쓴 것입니다. 빛가운데 거한다고 하면서 어둠의
생활을 하기 때문에 요한일서를 쓴 것입니다. 요한일서─그냥 쓴게 아닙니다.
요한일서는 예수를 잘 믿어 하나님 안에 산다고 하면서 잘못된 삶을
살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 때문에 요한일서를 쓰면서 그들을 일컬어 적그리스도라고
찌르고 있습니다. 그 다음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는 것이라...
그렇죠? 앞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 못하는데 하나님께 다 드렸어?
그렇지를 않습니다. 하나님께 다 드렸다는 말은 이 전체를
다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에 저 사람이 내게 손해를 붙여도─ 군자는 물에
빠져도 헤엄 안친다는 말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참으로 생활이
하나님께 드림이 됐다면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여러분을 미워한다 할지라도 여러분은 결코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실제 생활입니다. 어려운 게 아니에요. 결코
어려운 게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여러분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여러분에게
가시처럼 한다 할지라도 여러분이 정말로 하나님께 드림이 되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면 그것은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왜? 그분이 날 사랑하신다─
하시기 때문에 나의 자신을 그분에게 다 드렸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나를
미워하는 게 합당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시기하는 게 합당한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이 그런 소리 들어서 합당한 사람이지요. 잔소리가 잘려
버립니다. 자기 변호가 없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익어져 가면 익어져 갈수록 여러분들이 느끼셔야 할 것은 자기 변호가 점점 없어집니다.
자기 변호가 잘라져 나가요. 자기 변호가 무슨 말인지 압니까? 자기를
변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코 자기 변호하지 않아요. 이것이
하나님께 드린 바 된 사람의 특징입니다. 문제 안돼요. 그러니까
나에게 형제가 이렇게 저렇게 불편하게 했어도, 가시 같아서 이렇게 했어도
나는 그를 볼 때마다 마음에 전혀 문제없이 「안녕하십니까?」 인사하고
지냅니다. 그러면 그것도 저쪽에서 꼴 보기 싫어 해! 속으로는
미워하면서도 인사는 잘하네 하고 속으로 미워합니다. 자기 속이 그러니까
남의 속도 그렇게 미움으로 가득찬 줄 아는 것입니다. 어느 책방엘 갔어요.
제가 시골에 가는 중이라서 책방에 뭘 좀 맡겨 놓고 시골에 갔다와서 책방에
들렸더니 어떤 아가씨가 있는데 이름이 신애정이래요. 그래서 애정이 많은
아가씨하고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 중에 주인양반이 넥타이를 삐딱하게
매고 들어 왔습니다. 부인이 보고서 아무 말도 안 했으면 좋겠는데 넥타이를
잘못 매고 다닌다고 핀잔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이 넥타이를
삐뚤게 매고 다니는 사람은 성격이 삐딱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하고 농담을
했어요.
옛날에 제가 그런 얘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무학대사가 이성계하고
사귀고 있을 때입니다. 무학대사가 바로 임금앞에 딱 섰더니 이성계하는
말이 <허허, 대사는 얼굴이 꼭 돼지새끼 같소> 그랬더니 무학대사가
껄껄 웃으면서 하는 말이 <하하, 임금님, 자기 속에 돼지가 들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볼 때 모두 돼지로 보이는 것입니다.>했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남을 미워 하니까 남도 자기를 미워하는 줄로 알아요.
아니, 말도 안되는 얘기예요. 말도 안되는 얘기하지도 마세요. 여러분들이
저를 미워하는 분들이 많이 있어요. 목사가 그전엔 설교도 잘하더니 요새는
못하고, 맨날 소리만 지르고...! 왜? 제 속에 돼지새끼가 들었으니까
남도 모두 돼지로 보이는 것입니다. 목사는 작금이 똑같은데 그럽니다. 미워하죠.
제가 언제 여러분이 저를 미워한다고 같이 미워하던가요? 마가복음 7장
조금 있으면 읽습니다. 흘기눈 뜨는거 나오는데 흘기눈 뜨다가 눈 빠져요.
흘기눈 뜨지 말아요. 자기가 흘기눈 딱 뜨니까 남도 그런 줄 아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파란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세상이 모두 다 파랗게
보이는 것입니다. 노란 안경을 쓰고 보면 노랗게 보이고.... 저거
어찌 저렇게 전부다 노렇지? 자기 눈에 노란 안경을 썼으니까 노랗게
보이는 것입니다. 자기를 볼 줄 알아야 해요. 자기를 볼줄 모르면
고집불통이 되어 자기만 옳은 줄 알아요. 그런 사람은 아무도 못 당해.
그러니까 그 고집불통이 무슨 말을 하면 무조건 O K 하는거야. 왜?
잘못 건드렸다간 원수가 될 판이니 누가 감히 겁나서 건드리질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잘못이 있어도 고치질 못해요. 아무도 잘못했다고
책망을 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사람은 모름지기 부드러워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10년,20년을 지내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를
발견하는 날이 있어야 되는데....그것 정말로 잘못된 것입니다. 여러분
조심하십시오. 고르반사상, 빛안에 거한다고 하면서 어둠을
행하는 사람─참 무서운 얘기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원만하게 맺어졌다고
말 하면서도 마음속에 시기가 가득하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아니하고, 기도하지
아니하고, 말씀읽지 아니하고 전도하지 아니하고 하면 서도 하나님과 관계가
원만하게 이뤄졌다고하는 이 사람은 다 헛 것입니다. 그 믿음 헛 것이라,
잘못된 것이라 이겁니다. 그래서 여기 말씀에서 하시는 말씀이 보이는 형제도
사랑 못하면서 하나님을 어찌 사랑하느냐,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정말로
보이는 형제를 미워하지 아니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입니다.
미워할 수가 없어요. 어떻게 미워해요? 어떤 분이 글을 썼는데 그걸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예수믿는 사람은 죄를 지으면 안된다고 야단을 치니까
어떤 분이, ─그러면 목사님은 죄를 안 짓습니까? ─안 짓습니다.
─안 미웁습니까? 지금 누구 안 밉습니까? 없어요? 그래서 목사님이
한참 생각을 해 보았답니다. 혹시라도 누구를 미워하고 있지 않은가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나서 대답이 ─나 지금 미워하는 사람이 없어요.
─거짓말.... 믿지를 않는 것입니다. 자기가 남을 미워하고 있으니 목사도
당연히 미워하고 있겠지 하고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날 보고도 그런 질문
직접하는 사람이 더러 있어요.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요.
─ 이 형제님
지금 누구 미워합니까? 안 합니까? ─ 아무도 미워하지
않습니다. ─ 그럼 죄 안졌단말이요? 사람이 어떻게 죄를 안
짓고 살아? 미워하잖아요? 지금! 지금
안 미워요? ─ (이형제가 고개를 설레 설레...) ─ 분명히 미워하면서도
안 미워하는거래요. 그렇죠?
이렇게 돼 버린 사람들이
자기가 미워하니까 남도 그런 식으로 미워하고 있는 줄 안다고....! 답답한
노릇입니다. 원 자매님, 지금 누구 미워합니까? 나 참 내가 이렇게
뚱뚱한 데 우리 이 형제라도 좀 날씬했으면 좋겠는데 똑같이 이래가지고
그냥 퍼져서 뵈기 싫어. 안 미워요? 그렇지 않지요. 워낙 호인이라서 미워할
수가 있어야지. 자, 이렇게 안 미워야 죄를 안 짓고 사는 것입니다.
죄를 안 짓고 사는 것인데 자기 속에 미움이 가득─ 이건 내가
성경공부하면서 그런 얘기했지만 처리를 받고 고생을 해도 신사처럼 처리를
받고 고생한 사람이 있고, 그냥 거지처럼 처리를 받고 고생을 하고 애를
먹고 고생을 하는 사람이 있다구요. 오집사님! 저소리 나보고 하는
소리지 그러시겠지요? 제발 신사되세요. 신사. 다 똑같은게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분이 속에 있는 그것 때문에 남도 똑 같은 게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마세요. 그렇게 하지 마시고 여러분 스스로가 잘못됐을
경우에는 내가 잘못됐구나를 알아야 됩니다. 남이 아무리 얘기를 해도 못알아
들어. 우리 식구가 와서 들었으면 꼭 좋겠는데 안 나왔구먼! 아무개가
와서 들었어야 되는 건데 안 나왔구먼! 이래서는 아니됩니다.
자기가 듣고 자기만 고치면 상대는 까짓 것 미워하거나 팔팔뛰거나 말할 필요가
없어! 그런데 자기가 안 됐으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고르반
사상, 이고르반사상으로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을 내가 표현한다면 냄비에다가
라면끓여 먹는 것과 똑같은 신앙생활을 한다구! 조금 제 입맛에 맞으면 팔팔팔팔
끓어! 그냥 팔팔팔팔 얼른 끓어! 마구 끓다가 조금 제 맘에 안들으면 ,
불이 다 꺼져가면, 뽀르륵 식어 들어가 버려! 이런 신앙생활을 한다구요...
조금 좋으면─ 아유! 목사님, 아구탕 사드릴께요, 어쩌구하는데 조금 입맛에
맞지 않으면─ 아구탕 좋아하지 마라, 목사야! 이게 바로 냄비 신앙입니다.
냄비신앙, 냄비신앙, 냄비신앙 할꺼요? 이자매? 냄비신앙!
조금만 입맛에 맞으면 보글보글 끓어! 사랑이 보글보글 끓어. 그것
엎질러지면 데어 죽어! 팔팔 금방 끓는 것 좋아하지 말아요. 팔팔팔팔
끓다가 조금 지나면 뽀르륵 식어, 싸악 식어! 내가 언제 끓었지? 아이구
정말 속터져서.... 뚝배기 신앙이되어야 합니다. 불을 때도 땐둥만둥,
그 놈 끓을려면 그냥 한 시간은 불을 때야 이게 끓는다구! 이게
좋은거요.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느긋하게 한 번 끓기 시작하는데 불을
끄고 상에다 딱 올려놓고 먹고 먹고 또 먹고 밥을 다 먹을때까지 끓어 가지고
뜨겁고 뜨겁고 또 뜨겁다구요. 이게 진짜 신앙입니다. 오집사님 알아
들어요? 앞으로 장마지면 마당에 물 퍼내야 할텐데 그렇게 되면 사─악
식는다구요. 그래가지구는 안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떠한 일이
벌어져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하나님과의 관계가 뽀르륵 끓었다가 식는
그런 신앙은 있을 수도 없고 바람직하지도 못합니다. 안 형제, 제발 냄비신앙
버리세요.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면 한없이 끓어서 불을 꺼도 그냥 끓어,
그냥 계속 끓어, 얼마나 멋있는 신앙인지! 김형제님, 알겠습니까?
뚝배기 신앙이냐, 냄비신앙이냐, 여러분 스스로 한 번 측정해보세요. 우리 박자매님은 냄비신앙일꺼요. 왜냐하면 부아가 났다하면 고독씹느라고
혼자 들어 앉아 있으니까... 그건 냄비신앙이라구, 냄비신앙! 뚝배기신앙은
부아가 나도 그저 할 일하고, 부아가 안 났을때도 할 일하고, 계속 자기
할 일하는 것입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문제를 삼지 않고 계속 진행하는
것입니다. 부아가 나도 난둥 만둥 입니다. 그저 난둥 만둥! 우리
김자매님처럼 난둥 만둥, 좋아도 좋은 둥 만둥, 그렇죠? 그저 조금 좋았다
하면 펄펄 끓었다가 조금 싫으면 뽀르르 식어 버리는거야! 우리 이 자매
제발 그러지 마세요. 요새 조금 끓는 중입니다. 지금 이제 끓을려고 시동이
걸렸어! 조금 보글보글하는 중이야. 뽀르르 식지 말어! 식었다 하면
쫓아가 버릴꺼야! 사실은 집이 어딘지도 몰라! 참, 목사하기 힘들어 못
해 먹겠어요. 세상에 자기네 집 좀 가르쳐 달라고 하면 왜 그렇게 뜸을
들이는지! 어떤 사람들은 1년이 가고, 2년이 가야 비로소 전화번호 알려
주는 사람도 있고, 이름 알려 주는 사람있고, 어떤 사람은 이름이 뭐냐고
했더니 눈을 이래 가지고 쳐다 봐! 왜? 내가 붙들을까봐? 시시한
소리 말어! 내가 그렇게 유치하게 안 붙들어. 그랬더니 나중에 하는 말이
「 왜 이름도 안물어 보고, 주소도 안 물어 보느냐? 」고 해요.
기가 막혀서 내가 하는 말이 「그 때 물어 보니까 눈을 이렇게 떴잖아요?
」
그 다음 말씀 읽습니다.
다시 읽어요. 20절 말씀, 다시 읽습니다. 이 고르반 사상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 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그렇죠? 21절,
『 우리가이 계명을 주께 받았으니─』 무슨 계명? ─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 할찌니라.』 입니다. 이 사랑이 동일하게 여기도 나오고,
저기도 나와야 되는데 자기 입맛에 닿는 사람만 좋아하고, 입 맛에 닿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 이건 곤란한 것입니다. 입 맛에 닿을 때는 좋아하고,입
맛에 안 닿을 때는 싫어하고! 항상 좋아하는 것입니다. 나처럼, 그렇죠?
까시씨가 끓든지 식든지, 상관없이 내가 사랑하쟎아! 상관없이 사랑한다니까?
이상하게 들을라! 마가복음으로 넘어 가세요. 이제는 12절 말씀,
읽습니다.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 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많이 행합니다. 그런 억지를 많이 행한다는 말씀입니다.
그 다음에 14절 ─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깨달으라고 했더니 자기 제자들이라도 깨닫지 못했어!
얼마나
속 터지고 답답한지 몰라요. 참 미련한 게 사람입니다. 15절 ─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 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 이것도 이제 고르반으로 써 먹는다고! 뭐든지 밖에서 들어 가는
건 더럽게 못 해! 그러니까 막걸리도 마셔, 마음대로 마셔! 이게
이제 고르반사상을 또 만드는 것입니다. 말씀을 편리하게도 이렇게
저한테 좋게 써 먹는 것입니다. 꺼꾸로, 거꾸로 써먹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16절, 『사람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시고, 17절─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 가시니 제자들이 그 비유를 묻자온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 참 답답하다는
말씀이죠. ─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 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 하느냐─ 먹는 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말씀이죠. 19절
─ 『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 가 』 ─ 먹는 것은
마음 속으로 안 들어가요. 배로 들어 가지요. 배로 들어 가는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배로 들어 갔다가 어디로 나가요? ─ 『뒤로 나감이니라』─ 하수도로 통해 나가고, 화장실로 통해서
나가지요. 『하심으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 이것이 사도 바울이 모든 식물을 다 먹을 수
있다고 말한 사상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20절, ─
16절.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17절.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그 비유를 묻자온대
18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19절. 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감이니라 하심으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 20절.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21절.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22절.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23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NIV
For from within, out of men's hearts, come evil thoughts, sexual immorality, theft, murder, adultery,
greed, malice, deceit, lewdness, envy, slander, arrogance and folly.
All these evils come from inside and make a man 'unclean.' "
현대인의 성경
거기서부터 악한 생각, 음란, 도둑질, 살인,
간음, 지나친 욕심, 악독, 속임수, 방탕, 시기, 중상 모략,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1. 어리석음, 2. 지각없음 발음
[ aphrŏsünē ] 어원 / 87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우매함(막 7:22), 어리석은 자(고후 11:17), 어리석은 것(고후 11:1), 어리석은 말(고후 11:21) 신약 성경 / 4회 사용
『광패』 ─ 이것은 미친 지랄하는 것입니다. 이 광패를 어리석은 것이라고
번역을 한 성경도 있습니다. 아주 지당한 말씀입니다. 어리석게 행하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광패의 헬라 원어는 afrosuvnh:(아프로쉬네)입니다. 생각없이 행한다,또는 어리석다는
뜻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요. 우리말 사전에는 [미친사람처럼 도의에
어긋나는 행위를 가짐]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말 번역에 광패라고
번역된 것은 생각없는 어리석은 행위를 아주 잘 표현한 것입니다. 그냥 감정대로
사는 것입니다. 기분내키는대로 사는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 청중과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한 수수께끼같은 말, 즉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어떻게 사람을 더럽히고, 또 더럽히는 것이 과연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사람' 또는 '사람 속'이라는
말은 곧 '마음'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마음이란 사람의 감정이나 사상 또는 생각 등의 근저(近著)이며 그러한 것들을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 인격의 중심부로 이해된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인간의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것의 대표격으로 악한 생각(evil
thoughts)을 지칭하신다.
'악한 생각'은 인간의 모든 부정과 악한 사상과 음모가곁들여진 의지적인 생각으로서 행동화된
죄악의 근간이 되는 것이다. 즉 바로 이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악한 생각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지를 12가지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이와 비슷한 언급이 로마서 1:29-31, 갈라디아서 5:19-21에서도 나온다.
평행 본문인 마 15:19에서는
6가지만 언급되었는데, 십계명의 제6. 7. 8. 9계명의 순으로 나열하고 있다. 반면 마가는 그러한 전통 계명의 순서와는
무관하게 나열하고 있다. 이를 재구성하여 살펴보면 음란, 간음, 음탕이다. 이 세 종류는 서로 비슷한 내용을 표현하고 있는데,
십계명 중 제 7계명에 상당하는 죄악이다.
한편 그 각각의 차이점을 살펴보면 '음란'(포르네이아이)은 일반적으로
부정한
성관게를 뜻하는 말로서 윤리적 측면이 강조되고, '간음'(*, 모이케이아이)은 기혼자와 관계되는 성범죄이며,
'음탕'(아셀게이아)은 모든 사람들이 갖는 성적 본능을 자제없이 노출시키는 공개적이고도 부끄럼을 모르는 성범죄를 말한다.
살인, 악독,
흘기는 눈, 훼방, 교만, 광패(狂悖). 이러한 것들은 사람을 향한 파괴적 언어와 행동을 가리키는 말로서 제 6계명이 상관되는
'살인'이라는 말로 압축시킬 수있다. 여기서 '악독'(포네리아이)이란 말은 노동, 아픔, 고통이란 뜻의 '포노스'에서
나온 것이다. 즉 고되고 아프게 하는 요인이 될 행위를 말한다.
'광패'(아프로쉬네)는 도덕적 판단력이 결여된 사람의 어리석음을 뜻한다(foolishness; AV,
RSV).
도덕질(클로파이)은 제 8계명,
속임(돌로스, '을가미', '덫'이란 뜻)은 제 9계명,
탐욕(플레오시아이) 은 좀 더 많이 가지려는 욕망은 제 10계명과 관련지어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이와 같이 사람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이 십게명에 사람과 판련된 6가지의 계명 중 부모와의 관계만 빼고 5계명 모두 포함되어 있어 마가 역시 십계명을 염두에 두고
서술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모든 조항들이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부정한 것의 '모두'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사람을 더럽게 하는 모든 것이 인간이 품은 마음에 있음을, 그리고 모든 부정의 원천은 사람의 마음임을 강조하기 위해 대표적으로
예시된 것일 뿐이다. 본절은 이와 같은 뜻을 결론적으로 말하고 있다. 요컨대 참으로 부정한 것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형식적인 정결 예식을 통해서 부정이 깨끗하게 되는 것이 아니며 손을 씻지 않고 먹는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도 못한다. 참으로
정결하게 하는 것은 손을 씻고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근본적 변혁인 회개뿐이다(욜 2:13).
뭐가 더러운가 구체적으로 나오지요. 이것이 바로 이제 고르반사상 즉,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하면서도 이 따위 짓들을 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는 것이라고 지금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이중에서 한 가지도
행하지 마세요.
21절,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악한 생각 많죠? 악한 생각, 때려 죽일 놈, 잡아
먹을 놈, 소 같은 놈, 여우 같은 놈,욕 하는 것, 이런 것입니다. 예수께서
악한 생각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씀하십니다. ─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여기 살인이 나왔는데 이 살인을 미워하는 것을 포함해서
살인이라고 말씀하고 계셔요. 미워하는 것을 말입니다. 남 미워 하면 살인하는
것입니다. 살인하고 살 것 같아요?
남 죽이고 내가 살겠어? 나도 같이 죽어요. 살인하지 말아요. 미워서 그냥 욕이 나올려고
할 때 꾹 참는 정도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미움 자체가
우리에게는 먼나라 얘기가 돼야하는 것입니다.
22절, 『간음과』,─ 간음하는 것─ 마음 속에 것까지 다루시는 것입니다.
『탐욕』과─ 탐욕이 뭐죠? 그냥 막 욕심내는 것, 먹을 만큼 먹었는데도
욕심이 나서 자꾸만 먹는 것입니다. 말씀이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고
하셨는데 인간은 자꾸만 욕심을 내는 것입니다. 배가 부른데도 자꾸만 먹는
것─ 여자들 조심 하십 시요. 이건 배가 불러도 자꾸만 먹어! 방에서도
먹고,부엌에 가서 또 먹고, 실컷 먹고 배가 아파가지고 배가 터질려고 해요.
하기는 짜장면 아홉그릇 먹은 사람도 있고, 냉면그릇에다 커피를 마시는 양반도
있긴 하지마는 탐욕스러운 것은 곤란한 것입니다. 먹을 만큼 먹으면
물러 날 줄을 알아야지요. 무슨 말씀인지 알아 들으십니까? 일용할
양식 달라고 기도하는 삶을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먹을 것,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악독』한
것입니다. 자기 맘에 안 들으면 이를 깨물고 독살을 떠는 것입니다.
우리 형제 자매들은 이러지 말아야지! 우리가 이렇게 악독을 사용하면
하나님께서 즐거워하지 않으십니다. 악독을 잘 품으면 여러분의 심신이
상해서 결국은 병들어 손해는 악독을 품는 사람에게로 돌아옵니다.
그 다음, 『속임과 』─ 살 살 속이는 것이지요. 진실되지 못하게,
자신의
일시적인 유익을 위해서 남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속임에서
그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속이는 것으로 연결되어져서 자신의 거짓된 것을
감추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체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감추고 외식하는 사람으로 나타나서는 안됩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 내어 놓아야 합니다.
이렇게
얘기를 하면 어떤 사람은 말씀을 잘못 들어서 이제부터는 자기 속에 있는
대로 함부로 마구 사는 것을 말하는 줄로 알고 그와 같이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슨 말씀인고 하니 마음속에 시기가 있으니 자기를 감추지 아니하고 있는 그대로
시기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미움이 있으니 마음속에 있는 미움을 감출
필요가 없이 있는 그대로 미워하고 욕을 하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 음란한
마음이 있으니 그것을 감출 필요가 없이 그대로 다 표현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가상적인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보고 느낀 것을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느냐 하면 말씀을 제대로 알아 듣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 분수를 지키지 못해서
그렇게 되는 수도 있습니다. 말씀을 해석한답시고 그런 식으로 말씀을 풀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빨리 가나안을 누릴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
정말로 큰 일날 사람들입니다. 성경 어디에 마구 있는대로 죄를 많이 지어야
빨리 가나안에 들어 간다는 말씀이 있는지 아무리 찾아 봐도 없던데요!
지금까지 지은 죄도 너무 크고 감당할 수가 없어서 분통이 터질
지경인데 빨리 성화되기 위해서 신나게 죄를 지어야 된다니 이런 망발이
어디 있습니까? 무식하면 무식한대로 입이나 다물면 좋겠어요.
성경을 잘못 풀다가 망한 사람들이 한 둘입니까? 그러면서 그것이 바로
자기있는 그대로 하나님앞에 내어 놓은 것인 줄 알고 잘못을 했어도 당당합니다.
게다가 남까지 가르쳐줘요! 있는 죄 없는 죄 다 실범을 해 봐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런 말씀이 아니라─
자신을 속이지 않고 하나님앞에 정직하게 선다고 하는 것은 바로 자신이
죄인이니, 정말로 말씀대로 살지를 못하니,그것이 속상하고 괴로워서 고통스러워
하는 태도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음탕한 것』─ 원어로는
아셀게이아( aselgeia)인데
정확한 의미는 <제 멋대로>입니다. 이것은 절제하는 것과 상당한 관계가
있습니다. 절제란 말씀은 되는 대로, 함부로 하는 것과 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조심하여 자신을 살피는 것을 말씀하고 있지요. 함부로
아무곳에나 주저 앉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방탕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몸을 아무렇게나 방임하는 것입니다. 유혹에서 자신을 조심하지 않고
끌면 끄는대로,밀면 미는대로, 그냥 흐르는대로 내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로 무서운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이렇게 방탕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청년들도 장년들도 노인들도 자신을 거룩함에
훈련하지 아니하고 아무렇게나 내 버립니다. 소돔과 고모라처럼, 화산으로
멸망을 맞았던 폼페이처럼 방탕이 극한에 이르렀습니다. 요즈음 거리를
지나다보면 퇴폐적인 시가의 광고물들이 사람들을,마음에 부끄러움을 모르는
마비된 사람들로 자꾸만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어린 학생들이 긴 담배를 물고
그 연기가 자신의 영혼과 몸을 좀 먹는지도 모르고 어른들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러고는 오늘 실컷 놀고,먹고,마시자는 것입니다.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덫에 아이들이 치어 버린 것입니다. 이 시대가 음탕한 음녀의
덫에 빠져 들어가는데 여러분도 함께 동참 하시렵니까? 음탕하면 자기자신도
집안도 망합니다. 아주 무서운 것이 음탕한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느냐? 하나님 말씀 에서 멀어지면 이렇게되는 것입니다. 말씀 따라서
경건한 삶을 살지 않으면 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에 집착하지
않으면 저절로 이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흘기는 눈』 ponhros
인데 뜻은 <악의에 찬>입니다.
그러니까 직역하면 악의에 찬 눈이라는 뜻이지요. 흘기는 눈은 악의에 찬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지요.
『훼방』
훼방이 무엇입니까? 상대방을 마구 거침없이 헐뜯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훼방하는 당신은 구원받고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예수믿는
사람이 어찌하여 그렇게 남을 비방하는 것입니까? 내가 제일 고통스러운
경우가 있는데 그 때가 언제인가 하면, 어떤 형제가 다른 형제를 비방할
때 제 마음이 제일 고통스럽습니다. 자기는 가장 옳고,남은 모두가 잘못하는
것 같지요. 내 자식은 모두가 착하고 흠이 없는데 남의 자식들은
하나같이 막난이요,버르장머리가 없게 보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남보다
내가 문제라는 것을 깨닫지를 못하면 여러분의 심령의 안식은 고사하고 날마다
풍랑의 연속입니다. 제발 깨달아 아십시요. 여러분이 지금 남을 훼방하고
있다는 것을...! 제발 여러분께 부탁드립니다. 남을 나쁘게 말하지
마십시요. 가장 좋지않은 것이 바로 남을 비방하는 것입니다. 좀
좋지 않은 행위를 한 사람이라도 결코 나쁘게 말하지 말고 좋게 평가해주십시요.
사람이란 누구나 실수가 있는 법이요, 또한 당신이 그런 실수에 빠지지
아니한다고 어찌 장담하시겠습니까? 훼방이 나오지 않도록 여러분의 입을
조심해서 지키십시요. 남을 훼방할 때 여러분이 벌써 그 사람보다 훨씬
나빠져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요. 남보고 구원받은 것이 저 모양이냐고
훼방을 한다면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 사람이나 당신이나 똑같은 사람
아닙니까? 막무가내로 남을 훼방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행위를 다 벗어 버리십시요. 자기를 모르는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교만』과─ 이것 역시 골치
아픈 것입니다. 주제파악을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날이 갈수록
겸손해지는 것이 정상인데 그렇지를 못하니 걱정입니다. 이 교만에 관해서는
다음에 기회있는대로 자세히 말씀드릴 것입니다.
『광패』 ─ 이것은 미친 지랄하는 것입니다. 이 광패를 어리석은 것이라고
번역을 한 성경도 있습니다. 아주 지당한 말씀입니다. 어리석게 행하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광패의 헬라 원어는 afrosuvnh:(아프로쉬네)입니다. 생각없이 행한다,또는 어리석다는
뜻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요. 우리말 사전에는 [미친사람처럼 도의에
어긋나는 행위를 가짐]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말 번역에 광패라고
번역된 것은 생각없는 어리석은 행위를 아주 잘 표현한 것입니다. 그냥 감정대로
사는 것입니다. 기분내키는대로 사는 것입니다.
음란하면
음란한 대로,미움이 나오면 나오는 대로, 탐욕과 악독과 속임이 절제없이 생긴
그대로 나타납니다. 미움이 한 번 시작되면 그 미움이 우리를 끌고
지옥불로 들어가서 한 바탕 난리를 치는 것입니다. 악독이 나오면 휙 돌아가지고
미친 지랄을 하는 것입니다. 정신을 차릴 수 없도록 펄펄 뛰는 것입니다.
정신 이상이 되어 옷을 벗고 다니는 사람만 불쌍하게 생각하지 말고 당신이 광패하지
않은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요. 그 다음 23절 말씀 ─ 『이 모든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먹고 마시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바로 사람 속에서 나오는 이런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입니다. 눈썹을 그리고 마스카라를 하고 아이샤도를 하고 입술에다
빨간 칠을 하고는 멋들어지게 하고 다니면 그런 것이 깨끗한 줄 압니까?
이런 더러운게 나오면 틀려 버린 것입니다. 이런 것이 나오면 참으로
사람이 더럽게 되는 것입니다.
고르반이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십일조란 수입의 1/10만 하나님의 몫이 아니라 모든 수입이 하나님의 것이지만 내가 아직도 미련하고 부족해서 모든 것을 다 드리지 못하고 최소한의 약속에 따라 1/10만 드립니다. 그러나 남은 것 모두가 하나님의 것입니다 라는 고백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제멋대로 고르반 신앙을 마치 전부 드린 것이라고 자부하며 자랑한 것입니다. 사단의
속임수에 나를 감추지 말아야 합니다. 거듭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어도 아들이기 때문에 때 거듭났기 때문에 더욱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징계하지요.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죄를 그냥 건너 뛰시는분이 아니십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이라는 한자 사자성어의 훈은 "지나칠 과(過), 같을 유(猶)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느 날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자장과 자하 중 누가 더 어집니까요?”공자가
“자장은 지나치고, 자하는 모자란다.”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자공은 둘 중에 누가 더 나은지를 알고 싶어 또 물었습니다. “그럼
자장이 더 낫다는 말입니까?”그 때 공자가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지나칠 과(過), 같을 유(猶), 아니
불(不), 미칠 급(及)으로“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공자를 비롯하여 옛 중국인들은
중용(中庸, golden mean)을 매우 강조하였습니다. 중용이란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고대
중국의 요 임금과 순 임금의 천하 통치의 정신을 도통(道統)이라고 하는데, 이 도통의 요체가 중용에 있으므로 이를 터득하고
실천하는 것이 군자의 도리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간적 욕심과 도덕적 본성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인간적 욕심이 없을 수 없으며, 형편없이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도덕적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욕심과 도덕적 본성을
다스리는 이치가 중용이라는 것입니다. 동양 철학에서는 중용으로 하늘의 뜻과 인간의 도를 설명합니다. 효도와 자식 사랑, 형제간의
우애, 가정의 화목, 이웃 사랑이 인간이 가야 할 도이고 그 도를 재단하고 다듬는 것, 즉 마름질 하는 것을 교라고 하는데 유교가
바로 그런 것을 가르칩니다.
중용은
동양철학뿐만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적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에서 중용을 μεσοτης라고 하는데, 그
뜻은 영어로 a middle or central position, 또는 a mean between two extremes, 즉
물리적으로는 중감지점을 의미하고 사상적으로는 두 극단의 중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산술적인 중간과 인간관계 속에서
생기는 중용을 구분하였습니다. 전자는 사물의 한가운데(the intermediate in the object)인데 비하여 후자는
우리들에게 대하여 꼭 알맞은 것(the intermediate relatively to us)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무튼 중용의
개념을 동서양 철학 모두가 모든 도덕 행위의 준칙, 지침으로 삼고 강조하여 인간이라면 마땅히 지켜야 할 덕으로 강조였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동양에서는 중용을 강조하는 사람은 인품이 고상하고 사상이 깊은 것처럼 생각하고 대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동양이나 서양에서 중용의 개념을 강조하는 사람은 예외 없이 무신론자입니다. 기독교적 중용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성경계시가
밝히 드러난 오늘날에는 하등에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중용이란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중용이야 말로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주장하면서 현대인의 삶의 방법에는 천국으로 가는 문이 닫혀 있고 기독교는 천국으로 가는
문이 죽은 뒤에 열린다고 잘못 가르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기독교를 잘 모르는 자가 중용으로 기독교를 설명하려고 하는
학문적 객기입니다.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중용의 가치를 강조할 수밖에 없고 중용의 가치는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게
대단한 설득력으로 작용합니다. 지금 한국을 포함하여 세계적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중용의 가치를 표방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문제를 이야기 하는 것은 기독교인들도 중용의 가치에 소위 은혜(?)를 받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기독교인들이 그런 가르침에 감동을 받는 것을 나무랄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복음을 바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혼란을 겪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 신앙에 극단적인 두 형태가 있습니다. 이 두 극단적 신앙형태는 사도 바울에
의해 지적된 것으로 표적신앙과 지혜신앙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을 표적신앙의 극단으로, 헬라인을 지혜신앙의 극단이라고 지적한
것입니다. 표적신앙과 지혜신앙이 왜곡된 신앙이라는 사실은 참 신앙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라는 토대에서 지적된
것입니다. 표적신앙이 체험과 감성의 극단이라면 지혜신앙은 이성적 극단입니다. 바울이 왜곡된 두 극단적 신앙 형태를 지적한 것은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바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나아가지 않고 복음을 중용의 가치로 왜곡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힘을 잃게 된 원인 중의 하나는 복음을
중용의 가치로 변질시켰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중용의 가치로 변질시킨 경우는 넓게 보아 지혜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신앙과 교회에서 표적신앙, 지혜신앙, 중용신앙 같은 형태의 신앙을 경계해야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복음은
변할 수 없고 인간의 존재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바울의 지적은 고린도교회에도 적합한 지적이고 현대 교회에도 적합한
지적입니다.
바울의 표적신앙과 지혜신앙에 대한 지적이 표적을 부정하거나 지혜 무용론은 아닙니다. 그리고 유대인은 표적을
구한다는 것이 모든 유대인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 다는 것도 모든 헬라인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일반적인 경향성에 대한 지적입니다. 바울이 지적하는 것은 기독교의 참 진리는 표적신앙도 아니고 지혜신앙도 아님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성경이 표적이나 지혜의 가치를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표적들이 성경에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표적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는 중요한 하나의 방편입니다. 그러니까 표적 자체를 나쁘다거나 인정하지
않거나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잠언이나 전도서 같은 성경은 지혜를 얼마나 강조하는지 모릅니다.
심지어 복음을 가리켜 하나님의 지혜라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지혜를 의인화해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본문을 잘 못 이해하면
성경이 표적과 지혜를 부정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는 사실은 성경 전체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를 하는
사람이라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표적신앙은 건전한 신앙이 아닙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표적의 부정적인
측면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지나치게 표적에 집착한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그들은 수도 없이 많은 표적을 보았고 경험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끊임없이 계속 표적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들의 신앙을 표적을 구하는 신앙이라고 하였습니다. 표적을 구하는 신앙은 건전한 신앙이 아니라는 뜻으로 바울이 이야기 한
것입니다. 우리는 왜곡된 표적신앙과 표적을 믿는 건전한 신앙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복음과 영적 생명에 대하여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이라면 누구나 그것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혼란하게 하는 것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표적신앙의 경향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기적적인 방법으로 한 순간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런 경향입니다.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기도하고 마음으로 바랍니다. 만약에 모든 것이 표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인간의
존엄성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표적 신앙은 주로 이단들이 갖는 신앙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이단들은 인간의 도덕적 책임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고 모든 것이 기적적으로 성취되기를 바랍니다. 이단들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표적신앙의 특징들이 우리들에게도 상당할
정도로 농후합니다. 우리 자신들의 신앙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음 깊은 곳에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의무와 책임보다는 기적으로 대박이
터지기를 기대하는 심리가 있습니다. 반드시 기복신앙이 아니라 건전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런 경향은 있습니다. 또한 그런 신앙을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기본적인 교훈의 토대에서 조금만 주의하여 생각하면 표적신앙이 얼마나
왜곡된 것인가를 쉽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모든 것을 생각하고 계획하고 판단하고 결단하여 행동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럴 능력을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그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되, 생각하고 계획하고
판단하고 결단하여 행동하며 믿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른 믿음의 질서입니다. 비근한 예로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지키려고 하지 않고 성경책을 중요시 하는 것도 일종의 표적신앙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말씀의 능력을 무슨 마술적
능력이라고 생각하여 외우고 읽기만 하면 능력이 나타나고 은혜를 받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기도의 능력이라는 말도 사실은 잘 못된
말입니다. 기도를 하기만 하면 무조건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간절히 오랫동안 하면 능력이 나타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기도는 노력하지 않는 대신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대화가 기도요,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연구하지 않으면서 기도 많이 해야 한다고 하는 주장은 영적으로 게으른 사람의 주장입니다. 표적 신앙은
미신적 신앙입니다. 표적 신앙은 방법과 수단을 신앙하는 형태를 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무엘상 2-4장에 보면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온갖 악행을 저지르면서 전쟁에 법궤만 가지고 나가면 이길 거라고 믿고 나갔다가 이스라엘 군인 4만 명과 함께
죽었고 법궤도 빼앗겼습니다. 그 사건은 법궤만 가지고 가면 전쟁에 이긴다는 생각은 미신이라는 것을 일깨워 준 사건입니다. 예배만
드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믿는 것도 미신입니다. 기도만 하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것도 미신입니다. 선교, 헌금,
봉사만 열심히 하면 모든 다른 잘못도 탕감된다고 믿는 믿음은 미신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에게‘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했습니다. 표적이 없으면 유대인들은 아무 것도 믿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러한 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아무 것도 보여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 요나의 표적은 노아의 표적이고 이스라엘이 출애굽 때
홍해에서 구원 받은 표적이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 표적을 의미합니다. 이런 표적을 주신 것은 이제 다른 표적을 구하지
않고도 하나님을 잘 믿고 살도록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인간은 종교적으로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표적을 추구하였습니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도 일종의 표적신앙이고 자본주의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학자가 학문적 업적에 집착하는 것도 표적신앙과 같은
것이고 목회자가 목회 성공에 집착하는 것도 표적신앙입니다. 선교사가 선교적 업적에 집착하는 것도 표적 신앙입니다. 표적 신앙은
십자가의 도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업적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영적 생명에 관심이 없고 성공의 방법에 집착하는 모든 인간 행위는
표적신앙과 같은 것입니다. 영적 생명은 종교개혁자들이 강조한 것처럼 예민한 신전의식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모든 생각과 의식이
집중되는 것이 영적생명 현상입니다. 하나님 없이 무엇을 생각하거나 시도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생각이 영적으로 살아 있는
것이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고 증거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 6:1)
He replied, "This kind can come out only by prayer."
4336. 기도(祈禱) - 프로슈케(prŏsĕuchē) / προσευχή
4336. 기도 - 프로슈케(prŏsĕuchē) / προσευχή
1. 기도, 2. 기도처
4336. προσεύχομαι
1. 기도하다, 2. 마가복음 1:35, 3. 누가복음 1:10 발음
[ prŏsĕuchŏmai ] 어원 / 디포넌트. 미완료 προσηυχόμην, 미래 προσεύξομαι, 제1부정과거 προ- σηυξάμην, 4314와 217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기도하다(마 5:44, 눅 1:10, 행 1:24), 간구하다(롬 8:26) 신약 성경 / 86회 사용
* 4314. 프로스(πρός)
1. ~에게 유리하게, 2. 가까이, 3. 향하여
발음
[ prŏs ] 어원 / 425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에게로(마 2:12), ~을 향하여(눅 22:56) 신약 성경 / 699회 사용
* 2172. 유코마이(εὔχομαι)
1. 기도하다, 2. 바라다 발음
[ ĕuchŏmai ] 관련 성경 / 원하다(행 26:29, 롬 9:3), 고대하다(행 27:29), 구하다(고후 13:7, 9), 기도하다(약 5:16), 간구하다(요삼 1:2) 신약 성경 / 7회 사용
3521. 금식 - 네스테이아( nēstĕia) / νηστεία, ας, ἡ
1. 금식, 2. 고린도후서 6:5, 3. 마태복음 17:21(어떤 사본에 /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이런 유가 나가지 아니하느니라.) 발음
[ nēstĕia ] 어원 / 352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금식(마 17:21, 행 14:23), 행 27:9), 먹지 못함(고후 6:5) 신약 성경 / 6회 사용
마가복음 9장에서는변화산 사건과 기도의 중요성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본문의 내용을 살펴봅니다.
9:1-8.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변화산으로 올라가셔서 영광의 모습으로 변화하여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셨다.
제자들은 심히 밝은 광채로 인하여 몹시 두려워하였다. 9:9-13.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변화산에서 본 것을 사람들에게 비밀로
하라고 당부하였고, 구약에서 예언되었던 엘리야는 이미 왔다는 사실을 밝혀 주셨다. 9:14-29. 산에서 내려와 보니 벙어리 귀신들린
자가 있었는데, 예수의 다른 제자들이 능히 고치지 못하였다. 예수께서는 믿음이 없는 이 세대를 한탄하시고 벙어리 귀신들린 자를
고쳐 주셨다. 제자들에게는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9:30-32. 갈릴리로 가시는 길에
다시 한번 인자의 고난과 부활에 대해서 가르치셨다. 9:33-37. 가버나움에 계실 때 제자들이 노중에 누가 크냐의 문제로 토론한
것을 꾸짖으시면서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는 먼저 남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함을 가르치셨다. 9:38-50. 요한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여러 가지 쿄훈을 주셨다.
본문에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있은 지 엿새 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지켜 보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변형되신 사건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쫓아내지 못한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을 예수님께서 추방하신 기적을 소개하며 논쟁을 벌이는 제자들에게 천국에서 큰 자에 관한 교훈과 믿는 자를 실족케 하는 자에게 형벌 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확실히 깨닫지 못한 제자들이 노중에서 누가 크냐고 쟁론한 사건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명예를 추구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은 자기를 낮추고 종의 자세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교만과 불손함을 제거하고 겸손한 성도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 나라와 반대적인 가치 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적인 가치
체계에서의 일등에는 관심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일등이 아니라 등수에 상관없이 항상 남을 섬기려고 하는 마음과 섬김의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는 언제나 꼴찌일 뿐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겸손하고 항상 남을 섬기는 자가
첫째 된 자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함이라고 말씀하셨고(막 10:45),
나는 너희 중에 섬기는 자로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 22:27).
하나님 나라는 서로가 섬기기를 힘쓰는 나라입니다. 많이
섬기는 자가 더 높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더 높다는 것은 세상적인 의미에서의 돈 이나 권력이나 명예가 높다는 것이 아니라 섬김의
정도가 높다는 말입니다. 타인들의 존경을 받기 위한 이기적인 목적으로 열심히 섬기는 자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섬김의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것은 타인들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을 속여서 자신이 섬김을 받고자 하는 마음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명령하신 섬김의 삶이란 철저한 자기 희생 정신과 이타적인 정신의 바탕 위에 세워진 섬김의 삶을 말합니다.
세상의 변화를 원하신다면 먼저 내가 섬김의 앞잡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가복음 9:29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 유(1085) 게노스 γένος, ους, τό
1. 혈통, 2. 같은 조상에서 나온 후손, 3. υἱοὶ γένους Ἀβραάμ
발음
[ gĕnŏs ] 어원 / 109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종(種)(마 13:47, 고전 12:10), 유(類)(마 17:21, 9:29), 족속(막 7:26, 행 7:19,
벧전 2:9), 문중(행 4:6), 친족(행 7:13), 후손(행13:26), 소생(행 17:28, 29), 종류(고전 14:10),
동족(고후 11:26, 갈 1:14), 자손(계 22:16). 신약 성경 / 21회 사용
기도(祈禱) - 대신관계(代神關係) / 마태복음 6:5-15 빌립보서 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금식(禁食) - 대아관계(代我關係) / 마태복음 6:16-18
이사야 58:6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예수께서는 손이 범죄케 하면 손을 찍어 버리고 눈이 범죄케 하면 눈을 찍어 버리라는 무서운 경고성 교훈을 하신다. 이러한
교훈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배울 수 있다. 첫째는 천국은 인간이 신체의 일부분을 잃고서라도 들어가야 할만큼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이란 사실이다. 둘째는 천국의 요구는 철저하고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단호한 결단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만약 예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실천하여, 우리가 범죄를 저지를 때마다 신체의 일부분을 잘라내야 한다면 우리 연약한 인간의 신체는 얼마 못 가서 한
군데도 남아 있지를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교훈은 천국이 참으로 소중한 곳이므로 모든 죄악으로부터 자신를 철저히 단절시키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고백을 합니다(마 16:16. 막 8:29). 이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시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9:1下).
첫째, 예수님의 재림 사건
1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시는 것’은 마태복음 16장 28절에는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에는
다양한 해석들이 있는데 그 이유는 이 구절의 해석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시는 것’, 즉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예수님의 재림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이렇게 해석하게
되면 ‘여기 서 있는 사람’인 제자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보게 된다는 결과가 나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예수님의 재림은
현재까지 이루어지지도 않았고 또한 이 당시 제자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해석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변형 사건
또
다른 해석으로는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시는 것’을 본문 2절 이후에 나타난 예수님의 변형사건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석하게 되면 문제는 시간상의 부적절함이 발생합니다. 예수님의 변형된 시간에 관한 정보가 2절에 나와 있습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엿새
후’의 기준이 되는 시점은 오늘 본문 이전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대화했던 날입니다. 이 날 6일 후 변화산상
사건만을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엿새 후에 일어날 사건을 염두에
두고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이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고 말했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셋째, 복음의 확산 및 전파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시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변형사건을 포함하고 나아가 대속적 죽음,
부활, 그리고 이로 인한 복음의 확산입니다. 복음이 전파되어 로마 제국까지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었으며 또한 이와 더불어 복음의
풍성한 결실을 맺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 일부는 일찍 순교하였지만 일부는 복음의 확산과 결실을 두 눈으로 본 후에
순교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2절에 나타난 예수님의 변형 사건은 포괄적 범위의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시는
것’ 중에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변화산 사건은 실로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근거로 몇 가지를 살펴보면 첫째는
예수님의 변형입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변형되셨느냐면 3절에 있습니다.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예수님의 옷만 광채가 난 것이 아닙니다. 이 구절에 평행구절인 마태복음 17장 2절을 보면 예수님의 얼굴도 함께 빛이 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예수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던 것만이 놀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놀라움의 근거 둘째는 과거 인물들의
현현입니다. 변화산에 누가 나타났느냐면 엘리야와 모세입니다(4절). 제자들이 엘리야와 모세를 보았다는 것은 환상이 아니라
실재였습니다.
엘리야는 북이스라엘 아합왕 때 활동했던 선지자로서 약 B.C. 850년경에 살았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죽지 않고
승천한 선지자였습니다. 모세는 약 B.C. 1500년경에 살았으며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모압 땅에서 죽었습니다(신 34:6).
엘리야 선지자가 승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났다는 것은 그 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죽었던 모세가 나타났다는 것은
모세가 부활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의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왜 이 변화산상에서 나타난 사람이 엘리야와
모세이었겠습니까? 여러 가지로 유추해 볼 수 있겠지만 그 중에 하나를 생각해 본다면, 이 두 사람은 무덤이 없다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승천했기에 무덤이 없음은 당연한 것이겠지만 모세는 육신이 죽어 장사되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신명기 34장이 모세의
죽음을 다루면서 무덤을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신명기 34장 6절입니다.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모세의 무덤의 위치를 알리지 않은 가장 큰 이유로 무덤의 우상화를 막기 위함이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아무튼 무덤이 없는
엘리야와 모세 두 사람의 변화산 등장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시고 영생하도록 하는 권세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상징성이 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엘리야와 모세, 두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후에 있을 부활의 미래적 사건의 현재적 증거입니다. 또한 우리 신자들에게 있을 죽음이후 부활과 영생을 보증하는 사건입니다.
이 당시 유대인이었던 제자들은 현재 우리보다 훨씬 더 놀랐던 것이 분명합니다. 6절 말씀이 제자들의 상태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예수님조차도
두려워 떠는 제자들에게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위대한 지도자 모세를 대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모세는 ‘토라(Torah)’라고 불리워지는 유대인들에게 절대적인 율법, 모세5경의 기자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십계명을
받았고 애굽의 바로 왕에 가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10가지 재앙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홍해를 가르고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오게 하는 등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았던 존경의 대상인 인물입니다. 그 모세를 제자들이 두 눈으로 본다는
것은 흥분을 감추기 어려웠음에 틀림없습니다.
제자들의 놀라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놀라움의 근거 마지막으로는 그들이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하나님의 현현이 구름 속에서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시어서 제자들에게 하셨던 선포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제자들에게 환청으로 들렸던 것이 아니라 실재 소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제자들에게 현현하시어 직접 말씀하셨던 이유 중에 하나는 제자들의 믿음과 그들의 마음의 상태를 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에 오기 직전에 예수님으로부터 들었던 부활의 가르침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았습니다.
마가복음 8: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 때까지 만해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완전히 이해하지도 믿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꾸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이적과 기사를 보는 신앙체험을 하더라도 우리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의 일에 맞추어 있지 않으면 곧
인간적이고 무의미하게 흘러가게 됩니다. 교회 일을 할 때에 아무리 열심을 가지고 땀을 흘릴지라도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으면
기쁨이 사라지고 분열과 문제를 초래하게 됩니다. 열정적인 베드로도 한 순간에 사탄의 사역자가 되듯이 우리는 항상 자신의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의 일에 벗어나지 않도록 긴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말씀을 듣거나 읽어도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예가 본문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서기관들을 포함한 유대인들은 11절 말씀대로
예수님보다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의 주장의 근거는 타당했습니다. 왜냐하면 말라기 4장 5절이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서기관을
포함한 완악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말라기 성경을 근거로 엘리야가 오기 전에는 메시아가
오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서기관들이 잘못 생각했던 부분은 엘리야가 이미 왔음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엘리야를 구약시대에 승천했던 선지자, 변화산에서 제자들이 보았던 그 엘리야로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말라기에서 언급한
엘리야는 바로 세례요한을 가리킵니다.
마태복음 17:11, 13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그제서야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말라기서에 나타난 엘리야는 누가복음 1장 17절에 있는 “엘리야와 심령과 능력으로” 왔던 세례 요한을 의미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을 깨닫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항상 우리는 보혜사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보아야 합니다. 더욱 더 기도하며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의 일에 맞추어져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날마다 말씀을 듣고 읽으면서 깨닫는 삶을 회복하여 혼돈의 땅에 질서의 소금과 빛으로 세워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 삶 속의 기도
성경에서 기도의 중요서에 대한 말씀
“쉬지 말고 기도하라”(데살로니가전서 5:1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베드로전서 4:7), “기도에 항상 힘쓰며”(로마서 12:12),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로새서 4:2)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는 우리의 신앙 생활 속에서 자주 잊혀지거나 뒤로 밀려나곤 한다.
예수님 삶 속의 기도(누가복음 5:15-16)
예수께서 기도하는 모습을 기록한 성경 구절들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먼저 누가복음 5장 말씀을 살펴보자. 이 때,
문맥과 배경, 즉 글의 흐름을 고려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특히 이 구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던
시기와 상황적인 환경에 대해 알 수 있으므로 눈여겨 보는 것이 좋겠다. 누가복음 5장 12절부터 13절은 간질병을 앓고 있던 자가
치유를 받는 모습을 묘사한다. 그 뒤를 잇는 15장 말씀은 예수께서 몰려드는 많은 사람들을 피해 물러나셨으나 끊임 없는 인파가
치유를 받기 위해 예수를 향해 몰려들었다고 이야기 한다 (누가복음 5:15). 이렇듯 예수께서는 몰려드는 인파로 인해 바쁜 나날을
보내셨다 – 요즘 보통 사람들보다 더 바쁜 생활을 하셨다고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기도 생활을
게을리하기 쉽다. 비슷한 상황 속에서 예수께서는 어떻게 반응하셨는지 살펴보자.
누가복음 5:1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예수께서는 바쁜 생활 속에서도 한적한 곳에 혼자 물러가사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으셨다. 이 짧은 구절을 통해서도 예수께서 기도를
얼마나 중요시 여기셨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같은 구절을 원문에서 읽어보면 문법적인 시제를 통해 예수께서 이와 같은 행동을
반복적으로 하셨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번역문은 간단한 기본적인 시제를 사용하여 마치 예수께서 과거에 한 번쯤 이와 같은
행동을 하셨던 것 같이 받아드려지기 쉬우나 예수께서는 반복적으로 한적한 곳으로 몸을 피해 기도를 드리셨다2. 좀 더 정확한 번역을 하자면 다음과 같다.
누가복음 5:15-16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예수는 [매번]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이렇듯 15-16절 말씀이 묘사하고 있는 것은 과거에 단 한 번만 일어났던 일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항상 인파에 쫒겨 바쁜 나날을
보내셨으나 이 와중에도 항상 기도를 위한 시간을 마련하셨다. 다시 말해, 예수께 기도란 “습관”과도 같은 것이었다. 기도 생활은
예수의 삶 속에서 높은 우선 순위를 차지하는 아주 중요한 부분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를 위한 사역으로 바쁜 와중에도
미루거나 게을리 하지 않으셨을 정도로 치명적인 부분이었다. 또한,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
기도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 만큼의 우선 순위가 주어지느냐가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도 할 시간이 충분했던 이유는, 기도의 중요성을 알고 이에 적당한 우선 순위를 두셨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모두 여러 가지 활동에 시간을 투자 한다. 시간이 있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을 포함한 모든
이에게는 하루에 24시간이라는 같은 양의 시간이 주어져 있다.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은 기도 생활이 우리의 삶 속에서 얼마나 큰
우선 순위를 차지하느냐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당신의 삶 속에 기도가 우선 순위인지 혹은 모든 하루 일과(일, 취침,
학교, TV 시청 등)를 마친 후 남는 시간을 차지하는지 생각해 보라. 예수님의 삶을 통해 볼 수 있듯이 기도는 우리 삶 속에
가장 높은 우선 순위를 차지해 마땅한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남는 시간”을 투자하지 말고, 기도를 위한 시간을 가장 먼저 고려하고 이를 위한 시간을 비워둘 수 있어야 하겠다.
2. 예수님 삶 속의 기도: 마가복음 1:35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시는 교훈적인 모습을 담은 구절이 또 있다 – 마가복음 1장 35절. 이번 또한
글의 흐름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21절은 예수께서 회당에서 가르침을 전파하시는 모습, 그리고 마귀를 퇴취하시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로 인해,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졌다 (28절). 회당을 나선 후 예수께서는 시몬의 집으로 향하시어
시몬의 장모를 치유하셨다 (30-31절).
마가복음 1:32-34
“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앞에서 살펴 본 구절에서와 같이 예수께서는 이 날 또한 바쁜 하루를 보내고 계셨다. 더군다나 다음 날은 먼 여행을 떠날 계획이
있었으며 예수의 소문이 사방에 퍼져 다음 날 또한 많은 인파에 쫒겨 바쁜 하루를 보낼 것이 분명했다. 36-37절은 예수를 찾는
많은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다.
마가복음 1:36-37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찾았다. 생각해보라. 바쁜 하루를 마치고, 또 하루의 바쁜 날을 앞두고 있는 상황 속에서 다음 아침 일찍
일어나 기도를 드릴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만약 누군가가 일찍 일어나 기도를 드린다 하면, 이 사람은 기도를 자신의 생활 속 가장
높은 우선 순위로 여긴다는 의미로 받아드릴 수 있지 않은가? 바로 예수님께서 그와 같은 분이셨다.
마가복음 1:35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예수께서는 다음 날이 아주 바쁜 하루가 될 것을 미리 알고 계셨다. 기도 할 시간이 많이 없을 것을 예감하시고 예수께서는 그 다음
날 아침 평소보다 “더욱 일찍” 일어나셔서 기도를 드렸다.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 – 하루를 시작하기에 참으로 좋은 방법이
아닐 수 없다. 당신의 하루를 시작하기에도 참 좋은 방법이 아닐까? 그 날의 고통과 압박에 대한 생각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대신
하나님께 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어떨까? 그리하면 하루 동안 하나님의 보살핌과 능력을 느끼고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길 것이다. 그러나 그리하기 위해서는 성경이 말하는 기도의 중요성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어 내실 수 있는 것들을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제대로 이해 한다면 다음 날 아침 기도를 하기 위해 일찍 일어날 의지가 생길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저 생각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신 것이 아니라, 기도를 우선적으로 중요시 여기셨기에 그러한 의지 또한 가능했던 것이다.
기도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중요한 것은 시간의 여부가 아니라 우선 순위이다.
예수님 삶 속의 기도 : 마태복음 14:23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담은 다음 구절은 마태복음 14장 말씀이다. 앞에서와 같이 글의 배경을 살펴보자. 이 날은 시작부터
아주 슬픈 날이었다. 예수께서 세례요한의 사형 소식을 접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사형에 대한 설명은 마태복음 1-11절 말씀
참고). 뒤를 잇는 14장 12절 말씀은 다음과 같다.
마태복음 14:12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아뢰니라”
더 나아가기 앞서 잠시 다음 상황을 고려해 보도록 하자. 만약 당신을 위해 항상 든든하게 뒤를 지켜주던 친척이 사형을 당했다면
당신은 기분이 어떻겠는가? 아마도 슬픔에 젖어 한 동안 혼자 떨어저 있고 싶을 것이다. 예수님 또한 같은 마음이셨다.
마태복음 14:13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
세례요한의 사형 소식을 접하기 전까지 예수께서는 혼자만의 시간을 계획하고 계시지 않았다. 소식을 접한 후, 충격에 쌓여 이후
결정된 계획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긴 시간을 보내지 않으셨다. 그를 기다리는 인파에 동정심을 느끼시고 그들을 치유해 주셨다
(마태복음 14:14). 치유는 물론 기적을 행하시어 그들의 배를 채워주시기까지 하셨다 (마태복음 14:15-21). 22절은 그
이후 일어난 일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마태복음 14: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여기서 “즉시”란 자신을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식량을 제공해 주신 후를 뜻한다. 예수께서는 즉시 제자들을 “제촉”하셨다고 하는데
여기서 “제촉”이란 그리스어에서 “anagkazo”라는 단어의 과거 시제로서 “억지로라도 어떠한 일을 시키다”라는 뜻을 담고
있으며 신약 성서에서 아홉 번이나 쓰인 단어이다 (참고: “Vine’s dictionary of New Testament
Words).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달가워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배에 태워 건너편으로 보내셨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사람들 또한 돌려보냈다. 예수께서는 왜 제자들을 “제촉”하시어 그들을 멀리 떨어뜨려 보냈을까? 그 이유는 23절
말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마태복음 14: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그 이유는 바로 예수께서 혼자 머물러 “기도”를 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예수의 하루 하루에서 기도가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구절이다. 기도를 하기 위해서라면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은 물론 제자들과 인파를 제촉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기도는 단연 예수님의 삶 속에 최고의 우선순위를 지켰다. 우리는 이와 같은 성경 말씀을 새겨듣고 우리의 삶
가운데 기도의 중요성을 일깨워야 한다.
예수님 삶 속의 기도: 누가복음 6:12-13
성경 말씀을 하나 더 살펴보도록 하자. 누가복음 6장에서 예수님의 기도 생활의 중요성은 물론 기도 내용을 눈여겨 보도록 하겠다. 정확한 기도 제목은 알 수 없지만,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어느 정도 짐작은 할 수 있다.
누가복음 6:12-13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예수께서는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정확히 기도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는 기록되어있지 않지만 그 다음
날 아주 중대한 결정을 내리셨음에 미뤄보아 열 두 제자의 임명이 기도 제목 중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결정을 내리기
전 하나님께 기도를 할 필요성을 느끼셨다면, 우리들 또한 이런저런 선택을 하기 전 하나님께 기도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우리 자신의 제한된 지식으로 결정에 도달하기보다
하나님께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 간구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 하나님께서는 최선의 결정이 무엇인지 알고
계심은 물론 이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 또한 알고 계신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를 알려주실 성령 또한 가지고 계신다. 그러므로 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것인지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기도를 통해 도움을 요청할 것인가 이다.
하나님을 위한 우리의 사역 문제 또한 같은 문제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위해 좋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고민
할 필요는 없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제한된 지식을 가진 우리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려주실 것이다. 이 중 몇 가지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사랑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직접
당신에게 열심히 기도하라고 말씀하시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 이는 이미 성경에 적혀있는 조언이자 명령이다. 사랑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좀 더 세부한 결정 – 어느 곳에 가서 하나님을 위한 사역을 할 것인가 – 등의 문제는 하나님께 직접
의논하고 하나님의 의견을 여쭈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결정을 내리기 전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기도를 통해
간구하도록 한다. 하나님께서는 정작 당신을 다른 곳에 보내거나 다른 일을 하도록 하고싶어 하실지도 모른다. 직장에 빗대어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사와도 같다 – 최고의 결정권을 가진 상사 말이다.
예수님 삶 속의 기도: 마태복음 26:36-44
다음 보기는 잘 알려진 마태복음 26장 36절부터 44절의 말씀이다. 이 부분은 예수께서 구속되어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밖히시기 직전의 상황을 그리고 있다. 36절 부터 시작하도록 하겠다.
마태복음 26:36-38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예수께서 슬퍼하신 이유는 앞으로 어떠한 일들이 일어날 지 미리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께 아주 힘든 시기였음과 동시에
우리에게 치명적인 일이 일어난 시기이기도 하다 – 우리의 구원이 달린 예수님의 희생이 이루어진 시기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이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셨는가? 다음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자.
마태복음 26:39-44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인류 구원을 위한 또 다른 방법이 있는지 물으셨다. 이에 대한 기도를 무려 세 번이나 드렸다. 이 상황에서
예수님의 마음가짐은 참으로 좋은 본보기를 제공한다.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께서는 먼저 자신의 희망 사항을 하나님께 내려
놓았다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이와 동시에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셨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여기서 배울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희망 사항을 하나님께
간구할 때, 하나님께서 이를 꼭 이루어주셔야됨은 물론, 우리가 원하는 시기와 방법에 맞추어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셔야 한다고
오해하는 자들이 많다. 이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할 때만 사실이 된다.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성경은 많은 예를 기록하고 있다. 반대로,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음은 물론 성경이 이야기하는 약속들과 일치하지 않는 것들의
예도 찾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일종의 차를 가지고 싶어 한다고 가정해보자. 성경에는 내가 그 차를 소유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보여주는 구절이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내가 그 차를 꼭 가져야만 하며, 그래야 마땅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물론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내가 어떠한 차를 원하는지 하나님께 나의 희망사항을 간구하는 것은 올바른
기도인가? 그렇다! 내가 그 차를 소유하는 것이 정작 좋은 일인지 좋지 않은 결과를 나을 것인지 하나님께 여쭈어 보는 것은 올바른
기도인가? 물론이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좋고 완벽하다고 (로마서 12:2),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아끼신다고 (베드로후서
2:7) 이야기 하는 성경 말씀을 믿어야 할까? 이 말씀들을 믿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든 믿고 따라야 할까? 물론이다! 예수께서
하신 그대로 말이다. 예수께서 기도를 통해 간구한 것은 이루어 질 수 없었다. 그러나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께서는 자신의
희망사항(“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더욱 더 간절히 바랬다.“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올리신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예를 본받아, 우리 자신의 희망사항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기 전에 흠잡을 데가 없는 하나님의 완벽한 뜻이 이루어지기를
더욱 더 간절히 바랄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보기로 돌아가보자면, 비록 예수께서 기도를 통해 간구한 것들이 이루어질 수는 없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기도를 무시하신 것을 아니다. 누가복음은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한 기록을 제공한다.
누가복음 22:41-43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하나님께서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힘을 더해주기 위해 천사를 보내주셨다. 가끔 우리는 우리 자신이 희망하는
것들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을 깨닳곤 한다(로마서 12:2). 만약 우리가 희망하는 것들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힘을 더해주실 것이다.
다음 구절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기도를 통해 용기와 힘을 얻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요한복음 18:3-11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예수께서 원하셨던 가장 큰 희망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었다. 이에따라 예수께서는 어느 순간에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따르셨다 – 우리 또한 이를 본받아야 하겠다. 예수님의 본보기를 따르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하셨듯
기도를 통해 힘을 얻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아시고 슬픔에 가득차 계셨으나 기도를 한 후
힘을 얻어 정작 잡혀가실 때에는 대담함과 굳은 의지를 보여주신다. 자신을 고문 할 자들을 만나러 가는데에는 대담함과 굳은 의지가
필요하기 마련이다. 두려움에 쌓인 자는 자신의 책임을 다른 이들에게 미루고 이러한 힘든 상황에서 벗어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두려워 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찾는 자들을 직접 찾아가셨음은 물론 제자들의 안전까지도 책임지셨다. 게다가
베드로로 인해 뜯겨진 하인의 귀까지 치유해 주기까지 하셨다(누가복음 22:51). 이 모든 힘 – 대담함과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굳은 의지는 오로지 기도를 통해 얻어진 결과이다.
예수님 삶 속의 기도 결론
예수 그리스도의 삶 속에 기도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기도를 하기 위해서라면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은 물론 제자들과 인파를 제촉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기도를 통해 결정에 도달하고, 어려움을 극복하셨다. “시간이 남으면 기도하라”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반대로
예수께서는 바쁜 와중에도 기도할 시간을 마련하셨다. “우리 자신의 뜻에 따라 최선의 방법을 따르라”는 세상적인 조언과는 반대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빌립보서 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마가복음 3:14-15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 '열 둘'이라는 숫자가 신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특히 '열 둘'은 임의적인 숫자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것이 분명하다(마 19:28;눅 22:30). 그런 점에서 그들 12명의 제자들은 새 이스라엘의 보좌에 오를 12족장과 같은
영광을 얻었음이 분명하다(계 21:14, 15). 사실 앗시리아(B.C. 722)와 바벨론(B.C. 586)에 의해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래 현재의 이스라엘은 두 지파 내지 두 지파 반으로 만 구성되어있다. 그런 점에서 특히 이 12제자 선택은 이스라엘이
종말의 때 곧 메시야 시대에 열두 지파의 백성으로 회복되고 완성되리라는 예언서와 묵시 문학에 터잡은 기대와 관련되었다고 볼 수
있다(사 11:11, 16; 27:12; 35:8-10; 49:22; 60:4, 9; 66:20; 겔 39:27; 미7:12 등). 그렇다면 열
두 제자는 전체 이스라엘에 대한 예수의 요구를 상징할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구원에 대한 그의 약속을 상징하기도 한다.
마가는 열 둘의 종말론적 기능을 역사적인 과제로 확대시킴으로써 그런 이해를 받아들였다. 이 역사적 과제는 분명히 예수의 일을
지속시키는 것이지만, 열 둘이 구분에 의해 파송되고 또한 예수의 뒤를 이어 교회의 중추적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점에서 예수의
일과 구별된다(Gnilka). 한편 마가는 이 선택된 제자들을 대개 '열 둘'이라 칭한데
비해(16절; 4:10; 6:7; 9:35 - 헬라어 원문에는 '열 둘'로 묘사되었으나 개역 성경은 이를 '열 두제자'로 번역하였다.)
마태는 '열 두 사도'(마 10:2) 또는 '열 두 제자'(마 10:1; 11:1; 20:17)로 표현하였다. 여하튼 마가는 이 '열
둘'이라는 칭호를 통해 그들을 단순히 예수를 좇는 무리들과 구분하고 있다. 그런데 본문의 '세우셨으니'(에포이에센)란
직역하면 '만드셨으니'로서 이를 근거로 본 구절을 '창조하셨으니'로 번역하기도 한다(Lohmeyer). 즉 이 12제자 선택은
예수의 구속사적 관점에서 새로운 역사적 실체의 탄생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다(Taylor, Grant). 물론 나름대로 의미있는
번역이기는 하지만 본 구절은 단순히 열 둘을 '임명하셨으니'로 번역하여 예수께서 12제자를 공식적으로 임명하셨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있게 - 열 두 제자가
세워진 목적은 세 가지였다. 특별히 본문에서 목적 의식을 분명히 드러내는 헬라어 접속사 '히나'(...하기 위해')의 2회
반복적 사용은 12제자 선택에 있어서 예수께서 확실한 목적을 두시고 행하였음을 보여 준 것이라 하겠다.
첫째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둘째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세째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실' 목적이었다.
실로 그 열 두
제자들은 하나님의 아들과 가장 가까운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했다. 즉 그들은 예수와 함께 살고 그와 대화하며 그에게 배워야
했다. 마가복음을 보면 예수께서 대부분의 시간을 그의 제자들을 훈련시키는데 할애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제자들의 훈련은
예수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그들은 보냄을 받아야 했다(6:7). 즉 그들은 보냄 받은 자, 곧 '사도'(아포스톨로스)로서의 사명을 온전히 수행해야 했다. 또한 제자들의 사역은 복음을 전하며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이었다. 이 귀신 축출은
원래 예수께서 지니신 권능으로서(1:26) 이제 사단의 왕국을 몰아내고 당신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부름받은 제자들에게
부여(附與)되고 있는 것이다(마 10:8). 이렇듯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일과 귀신을 쫓는 일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예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구원은 사단과 그의 일당들을 멸하시고 당신과 구원받은 자들과의 다함없는 교제를 완성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기도(마태복음 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 나의 원대로(2309) θέλω
1. 원하다, 2. 마태복음 19:21, 3. 마태복음 5: 40. 발음
[ thĕlo ] 어원 / 미완료 ἤθελον, 미래 θελήσω, 제1부정과거 ἠθέλησα, 제1부정과거 수동태 가정법 θεληθῶ, 138의 변형에서 유래한 강세형인 듯
관련 성경 / 원하다, 바라다, 기뻐하다, 지지하다, 좋아하다(마8:2, 막1:40, 눅5:39, 마15:28, 27:15).
신약 성경 / 209회 사용
* 아버지의 원대로(4771) σύ
1. 당신, 2. 너, 3. 마태복음 2:6 /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발음
[ su ] 관련 성경 / 너, 당신(마 2:6) 신약 성경 / 1066회 사용
조금 나아가사 - 누가복음에서는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눅
22:41)라고 되어 있다. 아마 그 거리는 30-50m 사이의 짧은 거리였을 것이다. 따라서 깊은 밤중에 극한 심적 갈등을
겪으시며 간구하시는(히 5:7) 예수의 기도 소리는 제자들의 귀에 또렷이 들렸을 것이며 그 애타는 심정은 그들 제자들의 마음에
넉넉히 전달될 수 있었을 것이다.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 유대인의 기도 자세에는 서서 두 손을 들고 하는
기도(막 11:25), 무릎 꿇어서 하는 기도(행 7:60; 엡 3:15)등이 있다. 실로 주께서 머리를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였다는 것은 자신을 완전히 비운 절대 겸손의 표시로서 성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이고 적극적인 복종의 표현이다.
내 아버지여(파테르 무) - 마가는 아랍어적인 표현인 '아바(Abba)
아버지여'로 기술함으로써 그 호소의 뜨거운 호소의 뜨거운 정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진정 최후의 순간을 눈 앞에 둔 예수가 바라볼
수 있는 최선의 대상은 당신을 이 땅에 내려보내셨으며 또한 십자가의 쓴잔을 마시게 하실 성부 하나님 밖에는 없었다.
만일 할만하시거든 - 평행 구절인 막 14:36에는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로 되어 있다. 이는 하나님의 주관적인 '의지'를 나타낸 말로서 예수의 전적 순종 의식이 내포되어 있다. 즉
인성(人性)으로서의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뜻'이 자신의 죽음 이외에 또다른 그 무엇이 있다면 차라리 그것을 이뤄 달라는
애타는 호소를 하고 계신 것이다.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 '잔'은 구약 성경에서 축복이건(시
23:5) 저주이건(시 11:6; 75:8; 사 51:17, 22) 하나님에 의해 전달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의
'잔'은 분명 사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전달되는 잔을 예수께서 자발적으로 마시는 것을 의미한다(요
10:17, 18; 18:11). 한편 예수께 있어서 이 '잔'은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서 예수께서 친히 감당하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이 야심에 찬 요청을 하려고 왔을 때, 다가오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이 말을
사용하여 '나의 마시려는 잔'(20:22)이라고 하신 바 있다. 물론 이는 단순한 생물적 죽음 이상의 의미로서 하나님과의
단절이라는 영적 고통도 내포하고 있다(27:46). 이와 더불어 본문의 '지나가다'라는 동사는 유월절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출 12:23에서는 죽음의 사자가 이스라엘의 집에는 재앙을 내리지 않고 '지나가는'라는 장면이 나온다. 따라서
'지나가다'는 말은 죽음의 재난을 피한다는 의미와 함께 하나님의 안전한 보호를 소망하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 예수의 인성(人性)에 의한 불안과 고뇌에
찬 갈등의 시간이 다하고 신성(神性)에 의한 전적인 순복(順服)이 이뤄낸 궁극적 결론이다. 즉 예수께서는 당신의 의지를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굴복시킴으로써 그잔을 마시기로 결연히 다짐하신 것이다.
이제 예수의 기도의 주제는 이 '잔'을
마실터인데 충분히 그 고난의 잔을 마실 수 있도록 아버지께서 능력을 더하여 주십사는 것으로 변하게 된다(눅 22:43 /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한편
성부 하나님은 성자의 이 순결한 호소에 '부활'로 응답하신다(히 5:7, Homer A. Kent Jr.).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마가복음 14:36.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 나의 원대로(2309) * 나의 원대로(2309) θέλω
1. 원하다, 2. 마태복음 19:21, 3. 마태복음 5: 40.
* 아버지의 원대로(5101)
요한복음 5:3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 나의 원대로(2307) θέλη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2307
1. 뜻, 2. 뜻하는 바, 3. 마태복음 6:10 /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 아버지의 원대로(2307)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 이 말씀은 19절의 내용을 결론적으로 재설한 것이다. 이것은 그의 행사, 곧, 안식일에도 병자를 고치신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변증하신 말씀이다. 그의 행사가 정당한 이유는, 그가 자행자지 하시는 것이 아니고 순전히 그를 보내신 이, 곧,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듣는대로) 실행하시기 때문이다. "심판한다"는 말(*)이 여기서는 그의 재림시의 종말적인 것을 가리키지 않고, 그의 복음을 통하여 살릴 자를 살리시는 주권행위를 가리킨다(3:18).
θέλη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2307
1. 뜻, 2. 뜻하는 바, 3. 마태복음 6:10 /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발음
[ thĕlēma ] 관련 성경 / 뜻(마 7:21, 눅 12:47, 고전 1:1, 엡 1:11), 원(마 26:42, 요 5:30), 원하는 것(엡 2:3) 신약 성경 / 62회 사용
1. [인간의 뜻에 대하여] 고전7:37, 벧후1:21, [예수의 죽음을 갈망하는 유대인의 뜻에 대하여] 눅 23:25. 2.[하나님의 뜻] 엡 1:11, 벧전 3:17, διὰ θελήματος θεοῦ: 하나님의 뜻대로, 롬 15:32, 고전 1:1, 고후 1:1, 8:5, 엡 1:1, 골 1:1, 딤후1:1 등.
βουλή, ῆς, ἡ
스트롱번호 1012
1. 뜻, 2. 결의, 3. 사람의 결정
발음
[ bŏulē ] 어원 / 101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의견(행 27:12), 뜻(눅 7:30, 행 2:23, 고전 4:5), 결의(눅 23:51), 사상(행 5:38), 결심(행 27:42) 신약 성경 / 12회 사용
뜻풀이부
1.
뜻, 의도, 의향, 동기, 고전 4:5.
2.결의, 결정.
a.
사람의 결정, 눅 23:51, 행 5:38, 27:12.
b.
하나님의 결정, 눅 7:30, 엡 1:11, 히 6:17.
βουλή 계획
06-17-2023(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가복음 10장 / 부족한 것(21절)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Jesus looked at him and loved him. "One thing you lack," he said. "Go, sell everything you have and give to the poor, and you will have treasure in heaven. Then come, follow me."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정말 한 가지만 부족한 것을 말하셨을까요?
본문의 병행구를 모두 종합하여 살펴보면(마 19:16-30, 막 10:17-31, 눅 18:18-30) 한 가지만 부족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런 질문을 하였던 사람의 정체는 "젊은 사람, 재물이 많은 사람, 세상 지위를 가졌던 사람" 이라고 합니다. 아직도 젊고 돈도 많고 세상 지위도 있는 사람이 영생과 선한 일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천연기념물과 같은 존재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오늘의 현실은 재물이 많고, 지위도 있고, 아직도 젊은 사람들은 참 만족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정치인들 중에서 선하고 영생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을 만나보셨나요? 젊음을 즐기는 청춘들로부터 어떻게 선한 을 계속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을 알고 있나요? 세상 재물에 풍성한 사람이 유산을 상속하기 위하여 법적인 절차를 따라 상속세를 납부하며 자녀들에게 물려주려는 사람을 보셨나요?
오늘의 현실은 참 어둡고 답답합니다. 많이 부족한 사람들이 오직 한가지만 부족한 줄 착각하고 자기의 삶을 즐기는 세상에서 믿음의 길을 선택하고 그 길을 묵묵히 갈 수 있는 순수한 믿음을 아직도 사모하고 기대하시는지요?
이제는 다른 누구를 통하여 진리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진리의 길을 따라 가므로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인공으로 일어서야 하겠습니다.
세상을 뒤집는 진리 혁명을 위하여 당당하게 일어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태복음 19:16-30 / 어떤 사람(그 청년이. 22절))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마가복음 10:17-31 / 한 사람,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고로
누가복음 18:18-30 / 어떤 관원이 큰 부자인고로
청년(젊음), 큰 부자(재벌), 관원(세상 지위) 세상에서 부족한 것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으로 오직 한 가지 선한 것이 무엇인가? 영생이 무엇인가?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을 비롯하여 유대인 사회에 전통적인 신앙은 하나님을 잘 믿으면 세상에서 부자로 살아갈 수 있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잘못 믿는 사람들이라고 비웃음을 받는 사회이었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서 예수를 잘 믿으면 부유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사고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여전히 한국사회에서도 같은 맥락을 찾아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다.
부족한 것(5302) 휘스테레오(hüstĕrĕō) ὑστερέω
1. 너무 늦게 오다, 2. ~을 요하다, 3. 모자라다 발음
[ hüstĕrĕō ] 어원 / 제1부정과거 ὑστέρησα, 완료 ὑσ- τέρηκα, 제1부정과거 수동태 ὑστερή- θην, 530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부족하다(마 19:20, 눅 22:35, 고후 12:11), 궁핍하다(눅 15:14), 떨어지다(요 2:3). [명] 궁핍(히 11:37) 신약 성경 / 16회 사용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 누가에는 “한가지 남은 것”이라 하나 뜻은 같은 것이다. 전절의“ 다 지키었다이다”의 대귀가
된다.
랍비들의 기록에 카니나(Chanina)가 죽을 때 죽음의 천사에게 “네게 율법책을 가져와 거기 거룩한 것중에서 내가 미쳐
실행치 못한 것이 있나 보아 달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 부자 청년에게 부족한 한가지는 율법이 아니라 재물이었다. 물론 그에게도
많은 부족이 있었겠으나 재물이 그에게는 우상이었고 영생의길을 가로 막는 치명적 상처였다. 그의 회의도 불안도 여기서 나왔고,
그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지 못하게 한 것도 재물 때문이었다. 이 한가지 부족은 사람을 따라 같이 않을 것이다. 이 한가지 죄를
발견하고 제거하지 못하면 영생을 얻지 못한다. “이는 충고가 아니라 명령이었으며,강압적이었으나 이 영혼의 성격을 따른 개인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수많은 수종자들에게 예수께서는 이 명령을 같이 주신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재물을 소유하면서 온전한 자가
있을것이고 모든 것을 가난한 자에게 주고도 온전치 못한 자도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명하신 것은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줄 것과, 예수를 따를 것 두가지였다. 중심 문제는 후자였으나 전자는 그 조건이었다. 전자를 실행하지 못하면 후자는
시작되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세상의 빛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빛이 먼저 되라고 하므로 세상은 점점 더 어둠에 짓눌려 간다.
예수께 와서 이혼 문제에 대하여 질문했을 때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는 대원칙을 세워
주셨습니다(1-12절).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에 데리고 오자 제자들이 귀찮게 여기고 막았으나 예수께서는 어린이를 사랑하사
안수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13-16절). 예수께서 길에 나가셨을 때 한 사람이 달려와 영생에 대하여 질문했을 때 그
사람이 재물이 많음을 아시고 가진 재산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나를 좇으라고 하시므로 그 사람은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17-22절). 나중에 제자들과 있을 때에 부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는 사실을
말씀하셨다(23-31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다시금 인자의 고난과 부활을 예언하셨다(32-34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메시야의 왕국에서 고위 관직을 요구했으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무지를 책망하시고 섬김의 삶과 인자의 대속물 되심을
강조하셨다(35-45절). 여리고에 이르렀을 즈음엔 소경 바디매오를 고쳐주셨다(46-52절).
본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갈릴리 사역과 예루살렘 사역을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갈릴리
사역(1-8장)과 은둔 사역(9장), 그리고 베레아를 중심으로 하는 본장이 마가복음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본장에서는
이혼에 관한 논쟁과 영생에 관해서 묻는 부자 청년의 어리석음과 제자들의 무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본장을 통해 재물 때문에 영생의 길을 포기한 청년의 어리석음을 보았습니다. 이와 유사한 모습이 우리에게는 없는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께 헌신하는 데 있어 방해가 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간에 우리는 그것을 멀리하는 결단을 내려야 주님을 따를
수가 있습니다.
예수에 대한 호칭에는 하나님의 아들, 주, 그리스도, 다윗의 아들, 그리고 인자 등 여러 가지 호칭이 있습니다. 인자란 주로
예수께서 자기 자신을 가리킬 때 썼던 호칭이라는 점에서 독특합니다. 예수께서는 인자에 관해 많이 말씀하셨다. 구약과 랍비
전승에서 메시야를 인자라고 호칭한 경우가 없다.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에서도 이상할 만큼 예수에 대해서 인자란 호칭을 쓰지 않았다.
그러므로 인자 말씀은 예수의 진정한 말씀이다. 바울이 이상하게도 예수를 인자라고 부르지 않았는데, 바로 그 사실이 바울은 인자
말씀을 잘 알고 있었으며,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인자라고 하신 뜻을 보존하기 위함이었음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된다. 인자란
말은 직역하면 사람의 아들이다. 그런데 아람어에서는 숙어적으로 쓰여서 어떤 한 사람 즉, 불특정한 어떤 사람을 나타낸다.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인자라는 말 앞에다가 항상 정관사를 붙인다. 그 인자,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의 아들을 가리킨다. 여기서 인자가 누구인가에 대해 학자들이 많이 토론했는데, 결론은 다니엘 7장에 나오는 메시야를
가리킨다는 것이었다. 다니엘 7장의 메시야는 영광스런 모습으로 구름을 타고 오는 인자(사람의 아들)이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 인자를
가리키셨기 때문에 항상 정관사를 붙여 그 인자라고 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신을 인자라고 말할 때에는 메시야적인 자기 이해를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
부자가 천국께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보다 어렵다는 예수의 말씀은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에게 커다란 도전이다. 그러나
삭개오나 고넬료와 같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부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전혀 들어가지 못한다고는 볼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약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도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부자를 그대로 천국에 입장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부자의 마음과 재물을 모두 받으심으로써 부자를 부자 아니게 만든 다음에 천국으로 불러들이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한 부자가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주님께 물었을 때, 주님은 가진 소유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좇으라고 그 사람을 초청하십니다. 이것은 영생과 하나님 나라로의 초청입니다. 부자는 자기가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신다고 느끼고 슬픈 기색으로 주님을 떠나갔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부자를 실족하게 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주님은 부자가 자기 의의 관점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철저한 자기 부인을 요구합니다. 주님의 요구는 부자로 하여금 그의 진정한 사랑이, 하나님의 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재물에 있음을 보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뭔가를 구체적으로 요구하시기까지는 착각 속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부자를 사랑하셔서 말씀하셨습니다(21). 재물을 사랑하는 한, 율법을 지키는 종교적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 나라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율법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수 있습니까?
그리고 제자들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수 있습니까 ? >라고 하는 질문입니다.
이 핵심적인 질문에서부터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고자하시는 핵심 메시지가 결정됩니다. 예수님께서 예수님께 갑자기 찾아온 부자 청년과 예수님을 줄곳 따라온 제자들에게 < 영생, 하나님 나라가 어떤 사람에게 주어지는지? 그리고 영생,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질문에 대답해주신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갑자가 찾아온 부자 청년은 <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돌아갔고 >, 줄고 따라온 제자들은 < 심히 놀라고 두려운 마음으로 > 예수님을 쫓고 있습니다.
먼저 왜? 그들이 했던 질문에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그렇게 만족스럽지 못한 조금은 당황스러운 반응을 보였을까?를 먼저 생각해보아야합니다.
바로 그것은 < 그들이 질문을 했을때는 그들이 기대했던 대답이 있었을 것이다 >는 사실입니다. 부자 청년과 예수님의 대화속에서 부자청년은아주 자신감 있게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합니다. 그러나 결국 부자청년은 예수님의 대답에 아주 자신감없이 돌아갑니다. 무언가? 예수님에게서 내가 기대하고 만족할만한 대답을 얻지 못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제자들과 예수님의 대화속에서 부자 청년과의 대화의 장면을 옆에서 보면서 자신들은 부자청년과 달리 <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르고 있다 >는 이 놀라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지 없이 예수님께서 제시한 대답을 듣고는 < 이해할수 없다, 동의가 되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부자청년은 예수님께 질문하고 대답하는 과정에서 그는 신앙적이고 종교적인 자신감에 가득찬 찬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자심감이 예수님께서 <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하게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질문하고 대답하는 과정에서 다른 이들과 다를 자신들은 예수님의 제자로써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르고 있다는 제자로써의 자부심으로 <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하게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이들의 < 숨은 동기와 의도 그리고 기대 >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 부자청년과 예수님의 대화 >나 <제자들과 예수님의 대화>속에서 숨은 동기와 의도 그리고 기대를 찾는 것이 아주 재미있는 묵상포인트 , 관전 포인트가 될것입니다.
보통 우리가 재미있는 영화들을 볼때면 감독이 의도적으로 다음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복선>이라는 것을 깔아 놓습니다. 그래서 감독이 주고자 하는 숨은 동기와 의도 그리고 기대가 드러나도로 합니다. 그러나 쉽게 그 복선을 찾기가 힘듭니다. 대체로 무대 소품이나 등장인물을 대사를 통해서 작가가 심어 놓은 복선을 찾아 낼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대화의 내용을 보면서 구체적인 숨은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먼저 부자청년과 예수님과의 대화입니다. 오늘 본문의 부자청년과 예수님과의 대화는 마태복음 19장 누가복음 18장에도 기록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다른 복음서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이 사람은 부자이고 청년이었으며 관원이었습니다. 그는 부유한 젊은 관원이었습니다. 이 부유한 젊은 관원은 상당한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열심과 신념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서 < 달려와 꿇고 앉았습니다. > 이것은 그가 갖고 있는 < 신앙적인 열심과 종교적인 인격 >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 선한 선생님 ! 선한 랍비여 ! >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우리가 볼수 있는 것은 < 예수님을 선하다고 말하고 예수님을 랍비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달리 볼수 있는 것은 <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지 않고 있다 >는 점입니다. 바로 이점이 이 부유한 젊은 관원이 예수님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를 알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원을 주시는 주로 보지 않고 한수 가르쳐주시는 종교적인 선생으로 유대적인 훌륭한 선생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 그가 아직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구원과 영생을 이해하기 쉽지 않은 자신의 종교적인 신앙으로 구원에 다가서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인상적인 것은 < 내가 무엇을 하여야 >라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말하고 부자청년은 < 영생을 무엇을 하여야 얻을수 있는 것 >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질문을 예수님께서서 원하시는 질문으로 바꿔 본다면 < 선하신 주님이시여, 내가 당신을 믿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 >라고 말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부자 청년은 < 예수님은 누구이신지 보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하는지 >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부자 청년이 이해하고 있는 영생. 자신이 기대하고 있는 영생이 있었습니다.
< 자신이 무엇을 해야만 얻을수 있는 영생, 자신이 예수 선생처럼 선함을 이루어야만 영생의 길을 알수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여전히 < 율법적인 의과 율법적인 선 >을 알고 지키고 행해야만 그것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유대적인 영생관에 매여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유대교적 영생은 선을 알고 선을 행하는 것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생각합니다. < 은혜의 구원이 아니라 행위의 구원입니다. >
그래서 부자 청년은 예수님에게서 구원이 주어진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예수님에게서 구원을 얻는 선함을 한수 배우고자 한수 터득하고자 나아온것입니다.
그러한 의도를 하셨던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 왜? 나를 선하다 하느냐 ? 선하신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 > 이것은 예수님의 유도 질문과 같은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선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부자청년의 고백을 이끌어내기 위한 유도질문입니다. < 네가 계명을 아나니 > 라고 말씀하시면 < 십계명 >을 이야기하십니다. < 영생을 얻기 위해서 선하신 하나님이 주신 계명들 알고 지키는 것이 있지 않느냐 ? >라고 하는 일반적인 유대적 구원관에서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도된 대답, 부자 청년의 반응을 보려고 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된 대답입니다.
그 대답에 부자청년은 < 내가 다 지켰다 > 라고 대답합니다. 부자청년의 대답을 숨은 의도와 동기를 파악하면 다음 같이 바꿔서 말할수 있습니다.
< 제가 어려서부터 선함을 알고 선함을 지키기 위해서 십계명도 알고 지켰습니다. 그래서 이정도면 영생을 얻기에 어떻습니까? 선생님이 생각하시기에 제가 영생을 받기에 충분한가요? 이 정도면 영생을 얻기에 부족한것이 없지 않습니까? 또 제가 부자로써서 복을 받고 있는 것을 보면 아시잖습니까? >
그당시에 랍비들은 < 부자가 되면 하나님의 선함과 복이 임했다 >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부자가 되었다면> 충분히 하나님의 인정과 복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인정하는 부자로써 겉으로 보기에도 영생을 얻기에도 충분해보이고 자신 스스로도 계명을 다 지켰다고 자심감 있게 말하는 이 부자 젊은 관원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 오히려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 하시면서 예상밖의 21절-22절의 말씀을 주십니다.
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22.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주셨을까요?
부자 청년이 하나님의 계명이 선한줄 알고 지키고 복은 받았지만 진정으로 영생은 이것만으로 충분치 않다고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이땅에서 물질적인 복받음이나 이땅에서 율법행함이 영생의 조건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고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 나눠주어도 하늘의 복의 기대와 만족으로 > 살수 있는 사람이 영생을 얻을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땅의 소유권을 하나님께 이전시킬수 있는 그 사람이 바로 영생을 얻을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땅의 소유에 매이지 않을수 있어야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오늘 이 본문에서 오해한다. < 예수님은 부자를 싫어하시는가? 예수님은 우리가 부자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는가? 그렇다면 예수 믿는 사람은 항상 가난하게 살아야하는가 ? >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당시 유대인들이 부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잘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오해가 생깁니다.
오늘 본문에도 마치 예수님께서 부자를 아주 부정적으로 보는 것처럼 보입니다. < 재물이 있는자나 부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 마치 약대가 바늘귀에 나가는 것이 더쉬울만큼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어렵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23.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24.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25.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바로 이 본문은 마치 < 부자들을 당황스러게 하거나 부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을 하시게 되는 예수님 당시의 유대적인 배경을 이해해야합니다. 그당시 유대인들은 재물이 많고 부자가되는 것을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자가 되고 관원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영생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의 부자들은 악착같이 부를 모아야서 사람들에게 자신이 부자인 것을 자랑했습니다. 그것으로 자신의 종교적인 신앙이 이정도 된다고 생각하는 교만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 부자가 되는 것은 자신이 더 율법적인 구원에 가까워진다고 생각하는 사회적인 통념 종교적인 관념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시대적인 상황을 알고 있는 예수님께서 그 시대를 일종에 풍자한것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일종의 과정법으로 그 시대의 부자들에게 충격요법으로 < 약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만큼 어렵다 >라고 말한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예수님의 이 충격적인 선언이 조금 과하다 생각해서 <약대>라는 히브리어 단어 < 카멜론>을 다른 비슷한 발음인 < 카밀론 >으로 바꾸어 발음했습니다. < 카밀론 >이라는 뜻은 < 밧줄 >이라는 뜻입니다. < 밧줄이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 >이라고 바꾸어서 읽었습니다.
실제로 부자의 의미는 < 가진자, 잘사는 사람 >의 의미보다는 < 하나님 나라보다는 이땅의 소유에 집착하는 자 >라고 볼수 있습니다. 여전히 이땅에 소유의 집착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소유나 복을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게 들어갈수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 찾아온 부자 청년이 바로 그런한 사람의 대표적인 모습니다.
이러한 부자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에 대해서 충격적인 선언을 들은 제자들은 두가지 마음이었습니다. < 아니 이럴수가? 그렇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르는 우리는 해당사항이 있는 것 아닌가? 아니야 더 많은 보상이 있을 거야 ? >하는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숨은 동기와 의도 그리고 기대로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말합니다. <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수 있습니까?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는데 ... >라고 말합니다.
그러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27.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바로 하나님의 구원을 우리가 무언가 해야 얻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얻을수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부자 청년과 제자들의 공통점은 < 영생과 구원을 위해서 무언가 해야... 무언가 보여주야 얻는다고 하는 유대교적 이해>를 벗어나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구원의 조건은 인간의 조건이나 가치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다 하시는 놀라운 은혜이면 놀라운 능력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삶은 <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31.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무엇을 해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전적인 능력에 달려 있는 일입니다.
그 당시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가족 중심의 유대교 공동체를 포기하고 그들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위해 가족을 뒤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육체적인 자족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가족의 일원으로 영접될것입니다. 그 결과 핍박과 박해가 주어지지만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복도 주어집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놓여있는 기대이며 보상입니다. 현세에서 하나님의 나라 백성과 가족이 되는 보상이며 내세에서는 영적인 부요함에 참여하는 영생을 보상받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것이 있다면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그러나 많은 첫째들이 말째들이 되고 말째들이 첫째들이 될 것이다. 그릇된 보상의 기대에 대한 경고입니다. 또한 자동적으로 첫 번째 자리를 확보하지 못한다고 하는 분명한 선언입니다.
1. 영생과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조건과 가치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 영생과 하나님 나라는 인간 스스로의 선함, 부요함, 완전함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2. 영생과 하나님 나라는 소유권을 이전하는 것이며 소유권 포기를 의미한다. - 재물에 매이지 않고 재물에 대한 관점을 전환을 요구하신다. -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얻는 자는 내것을 내것으로 주장하지 않으려 한다.
3. 영생과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세상적 기대를 거부하고 거절한다. - 무엇을 하여야 .. 무엇을 얻을수 있습니까? 라고 말하지 않는다. - 누구를 믿어야 됩니까? 말한다.
4. 영생과 하나님 나라는 세상적인 우열의 순위와 관련하지 않는다. - 율법의 완벽함 / 부자의 축복 / 순서상의 먼저
금수저와 흙수저 이야기
사회의 계급은 금수저와 흙수저로 나뉘는데, 금수저는 좋은 가정환경과 조건을 가지고 태어난 운 좋은 사람들인 데 반해 흙수저는
부모의 능력이나 형편이 넉넉지 못해 경제적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하는 운 나쁜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즉 개인의 노력이 아니라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부에 따라 인간의 계급이 결정되는 사회의 불공평한 면을 꼬집는 신조어다.
태어나기 전부터 인생이 결정된다니, 젊은 친구들 입장에서는 보면 억울한 것이 당연하다. 가만 생각해 보니 연봉이 적은 것도,
외모가 뛰어나지 못해 주목받지 못하는 것도, 친구보다 잘나가지 않는 것도 모두 부모 탓인 듯싶기도 하다.
세상에는 태어나기 전부터 결정돼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가는 많은 사람이 있다. 아프리카 난민들은 갓난아이에게 맞힐
백신 하나 구할 길이 없어 자식이 죽어 가는 것을 지켜봐야 한다. 동남아 가난한 어린이는 한 끼를 해결하기 위해 학교에 가는 대신
동생과 함께 쓰레기통을 뒤진다. 조상 누군가에게서 물려받은 유전인자로 인해 평생을 약과 씨름하며 고통 속에 살아가야 하는 이도
있다. 이런 생을 원해서 태어나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
반면 우리는 흙수저라 해도 가진 것이 너무 많다. 우선 건강한 신체를 가지고 태어났다. 부모님과
사랑하는 가족,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친구들이 있다. 잘사는 국가, 깨끗한 거리에 살고 있으며, 아프면 언제든 병원에 갈 수
있고, 약을 사 먹을 수도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운 좋게도 우리가 노력하지 않았음에도 태어나면서 거저 얻게 된 특혜들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자살률은 몇 년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의 두 배를 넘는 수치로 압도적 1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행복지수도 여전히 하위권이다. 물질은 넘쳐나지만 정신은 늘 배고프고 빈곤하다. 왠지 나만 손해 보는 것 같고
억울한 일투성이니 당연히 불행할 수밖에 없다. 행복은 결코 물질에 있지 않다.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이 없으면 어떤가. 나보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한 끼 식사를 나눌 수 있고, 지구 반대편 누군가를 위해 작은 금액이라도 후원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진정한 금수저이며 행복이 아니겠는가?
금도끼와 은도끼 이야기
정직한 사람이 복을 받는다는 ‘금도끼 은도끼’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옛이야기들은 대부분 가난하더라도 착하게 열심히 살아가다 보면 잘살게 되리라는 교훈과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더 이상 이런 얘기를 믿지 않는 것 같다.
청년층을 중심으로 ‘금수저’와 흙수저’라는
신조어가 유행하고 있다고 한다. 노력보다 부모의 배경에 따라 장래가 결정된다는, 젊은이들의 현실 자조적인 생각에서 나온
표현이다. ‘금수저’는 돈 많고 능력 있는 부모를 둔 사람을 가리키는 반면, ‘흙수저’는 돈도 배경도 변변찮아 기댈 데가 없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이 말은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다’라고 하는 영어 관용 표현으로부터 나왔다.
은은 값진 귀금속이면서 독극물에 닿으면 검게 변하는 특성이 있어 예로부터 고급 식기로 사용돼 왔다. 이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은수저는 부의 상징으로 여겨졌기에, 날 때부터 ‘은수저를 물고’ 있었다는 것은 곧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의미가 되었다.
여기서
유래하여 처음 ‘은수저’라는 말이 집안 좋은 이들을 지칭할 때 사용되다가 은보다 금이 더 가치가 높다는 데서 곧 ‘금수저’란
말로 대체되었다. 이어서 ‘금수저’에 대비하여 부모로부터 물려받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흙수저’라는 말이
추가로 만들어진 것이다. 인터넷에는 금수저 연예인 명단과 함께 자신이 흙수저 계층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표까지
돌아다니고 있다.
언어는 사회의 거울이라고 한다. 특히 유행하는 신조어는 우리 사회가 직면한 현실과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생각을 꾸밈없이 비춰준다. 그것이 ‘금수저’와 ‘흙수저’로 상징되는 부의 편중과 대물림 현상이라는 것이 가슴 아프다.
금수저와 흙수저의 근본적인 차이
흙수저는 어릴 때부터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회사에 들어가라"라는 말을 듣고 자랍니다. 금수저는 어릴 때부터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회사를 만들어라"라는 말을 듣고 자랍니다.
흙수저의 교육의 목적은 열심히 공부해서 일류 대학에 들어가서 스펙을 쌓은 후 일류 회사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금수저의 교육의 목적은 열심히 공부해서 일류 대학과 일류 회사에 들어갈 수 있는 인재를 고용하는 것입니다.
흙수저는 그 회사의 최고의 일원이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금수저는 그 회사의 최고의 사장이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흙수저와 금수저는 왜 이렇게 각기 다른 목표를 갖게 되었을까요?
부모가 갖고 있는 생각의 틀안에서 아이가 자랐기 때문입니다.
참된 믿음의 세 가지 요소 - 지. 동. 신(지식, 동의, 신뢰 / knowledge, agreement, trust)
원제 : What Faith Is and Is Not
“저는 믿어요, 믿는다고요. 그게 어리석지만, 믿는단 말이에요.” 고전적인 크리스마스 영화인 ‘34번가의
기적’(Miracle on 34th Street, 1947)에서 어린 수잔 워커가 말했던 유명한 대사다.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문화에서 흔히 믿음을 어떻게 묘사하는지 잘 보여 준다. 캄캄하여 앞이 보이지 않아도 도약해 보는 일, 아무 근거도 없지만 한번
신뢰해 보는 일이 세상이 말하는 믿음이다.
하지만 믿음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의 개념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성경은 믿음을 설명할 때 비이성적이거나 어리석은 결단으로 말하지 않는다. 맹목적인 신념이라든가 하나님과
친밀하다고 여기는 주관적인 느낌으로 말하지도 않는다. 그러한 느낌이나 신념을 믿음이라고 한다면, 그 믿음은 수많은 군중 가운데
알아보지도 않고 아무나 한 사람을 골라내 그 사람에게 심장절개술을 맡기는 일이나 다름없다. 어떤 기준으로 봐도 그건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단순히 어리석은 행동일 뿐이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무엇일까?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정통 기독교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를 구별함으로써 답변해 왔다. 그리고 세 요소를 설명하기 위해 세 가지 라틴어 단어를
일반적으로 사용해 왔다.
지식을 의미하는 ‘노티티아’(notitia) 동의를 의미하는 ‘아센수스’(assensus) 신뢰를 의미하는 ‘피두키아’(fiducia)
지식 / 노티티아(notitia)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의 첫 번째
요소는 노티티아, 즉 지식이다. 이는 진정한 믿음이란 어떤 내용, 이를테면 지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어떤 내용을 포함한다는
의미다. 결코 공허한 대상을 맹목적으로 신뢰하는 게 믿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믿음은 근본적인 사실에 대한 지식을 토대로
한다. 우리는 이 요소를 성경의 여러 본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그러한 본문은 흔히 ‘~을 믿나이다’라는 문형으로
표현되며, 이어서 특정 종류의 교리적 진술을 제시한다.
이에 대한 좋은 예문으로 로마서 10장 9절을 들 수 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그(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밝힘으로써 믿음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요한복음 20장 31절도 믿음의 내용을 이렇게 명시한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러한 예문에서
우리는 믿음에 교리적 내용이 수반되고 있음을 본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믿음은 특정 진술을 믿는 일을 우선적으로 의미한다. 앞선
예문에서 그 진술은 “하나님께서 그(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으로 각각
주어진다.
동의 / 아센수스(assensus)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의 두 번째 요소는 아센수스로 불리는 동의다. 이
요소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지식이 객관적으로 사실일 뿐 아니라 그로부터 개인적으로 유익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지성적인 확신을
의미한다. 어떤 내용을 단순히 아는 지식만으로는 믿음이 되기에 부족하다. 우리는 그러한 내용이 사실이며 또한 우리의 필요를 실제로
만족시킨다고 믿어야만 한다. 이러한 믿음의 요소는 요한복음 5장 46-47절, 8장 31-38절. 45-46절, 10장
37-38절과 14장 11절 등의 본문에 묘사되어 있다.
신뢰 / 피두키아(fiducia)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의 세
번째 요소는 피두키아, 바로 신뢰다. 이 요소는 지금까지 언급한 세 가지 요소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요소가
빠지면, 믿음은 그저 지성적인 활동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마치 예수님에 관한 사실은 알고 있어도 그 사실을 진리로 받아들이기는
싫어 결국 그분을 거절하고 마는 귀신들의 ‘믿음’과 같다(약 2:19; 마 8:29). 따라서 이 요소는 복음에 제시된 그대로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신뢰하고 자신의 구원을 위해 그분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마음이라 할 수 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라든가(요 3:15-16; 롬 9:33; 10:11) 그분을 의지하는 믿음(시 71:5-6; 잠 3:5-6), 그분을
바라보는 믿음(요 6:40; 히 12:1-2), 또는 그분께 우리 자신을 맡기는 믿음(딤후 1:12; 마 11:28; 시
37:5) 등을 설명하는 본문에서 이 요소를 확인할 수 있다.
믿음의 세 가지 요소에 대한 예화
다음에
소개하는 예화를 한번 생각해 보자. 먹을 음식도 마실 물도 없이 매우 광활한 지뢰밭 한가운데 갇힌 세 사람이 있다. 이중에 한
명은 마구잡이로 한 길을 선택해 별다른 생각 없이 그 방향을 따라 나선다. 물론 이 경우는 믿음이 아니라 서두에서 언급했던
어리석은 행동을 보여 주는 예시가 된다. 다시 말하지만, 참된 믿음은 지식에 근거하고 있으며 결코 맹목적일 수 없다.
이어서
다음 상황이 벌어진다. 곧 헬리콥터 한 대가 지뢰밭에 남겨진 두 사람 위로 날아오더니 거기에 타고 있던 조종사가 어느 길로 그
밭을 통과할 수 있는지 알려 준다. 그러자 두 사람 중 한 명이 그 조종사의 말을 따라 망설이지 않고 지뢰밭 사이를 헤쳐 나간다.
이 경우 또한 믿음의 예시가 될 수 없다. 물론 이번에는 (조종사가 알려 준 정보에 대한) 지식과 (그 정보를 사실로 간주하고
현재 상황에 도움이 되겠다고 여긴) 동의에 근거한 행동을 보여 준다. 그러나 그 행동은 (알지 못하는 조종사가 알려 준 불확실한
정보에 따른) 부족한 지식에 근거하고 있기에 여전히 맹목적이다. 따라서 이 경우에도 믿음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는,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대상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가 결여되어 있다.
이제는 최종적으로 남겨진 사람이 몇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떻게 지뢰밭의 탈출 경로를 조종사가 알게 되었는지, 왜 자신을 도와주려고 하는지, 또 얼마나 확실히 그
지뢰밭을 무사히 통과하도록 조종사가 안내할 수 있는지를 확인해 본다. 나아가 자신이 아는 지인 중에 조종사가 알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도 알아본다. 심지어는 조종사가 알려 준 방향으로 돌멩이를 던져서 폭발물이 정말 없는지도 테스트해 본다. 이런 모든 과정을
거친 후에야 그 사람은 충분한 지식을 확보해서 헬리콥터 조종사의 말을 신뢰할 수 있는지를 결정하게 된다. 이처럼 지식(노티티아)과
그 지식에 대한 동의(아센수스)에 근거하고 있는 신뢰(피두키아)가 비로소 참된 믿음을 완성한다. 이러한 믿음은 전혀 어리석지
않으며, 오히려 전적으로 이치에 부합하다고 할 수 있다.
행함으로 증명되는 믿음
믿음의 세 가지
요소가 모두 주어졌을 때, 그 모든 요소는 필연적으로 바른 행함을 통해 드러난다. 위에서 소개한 예화를 다시 생각해 보면,
우리는 마지막에 남겨진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그 믿음이 진실하다거나 또는 부족하다고 판단하게 된다. 만일 그 사람이
원래 서 있던 자리에 그대로 남기로 결정하여 헬리콥터 조종사의 말을 거부한다면, 혹은 자기 스스로 생각한 방향을 따라 길을
나서기로 한다면, 그는 조종사의 말을 실제로 믿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헬리콥터 조종사의 말을 진정으로 신뢰한다면,
그는 조종사가 알려 준 방향을 따라 길을 나설 것이다. 그리고 조종사의 인도를 따라갈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이 가진 믿음의
진정성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노티티아, 아센수스, 피두키아가 모두 갖춰졌을 때, 참된 믿음이 이뤄진다.
그리고 참된 믿음이 형성되면, 바른 행함이 필연적으로 뒤따른다. 바른 행함은 믿음을 구성하는 부분이 아니라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결과다. 즉 믿음만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수단이지만 그 믿음은 결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반드시
바른 행함을 통해 그 존재를 드러내게 마련이다.
수요성서학당 # 19(10-21-20)
믿음이란 기준을 바로 세우는 것(하박국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NIV) See, he is puffed up; his desires are not upright-- but the righteous will live by his faith. (KJV) Behold, his soul which is lifted up is not upright in him: but the just shall live by his faith. (NASB) Behold, as for the proud one, His soul is not right within him; But the righteous will live by his faith.
믿음에 대해서 말씀을 소개하기 전에 최근 제가 경험했던 한 사례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어느 의사는 방문하는 환자들을 대할 때마다 할렐루야! 아멘! 하나님의 은혜! 감사합니다! 이런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의사가 이런 기독교 용어를 자주 사용하면 마치 믿음이 좋구나! 이렇게 생각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가족 중 누가 자기 집 근처에 약국을 시작했는데 진찰을 받은 환자들의 약 처방전을 동의도 없이 그 약국으로 보냅니다. 원래 약국은 환자가 지정하는 약국으로 처방전을 보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환자들이 D약국에서 60% 정도 라고 합니다. 결국은 가족이 운영하는 약국을 위하여 이미 지정된 약국을 마음대로 변경한 것입니다. 마치 믿음이 좋은 것처럼 기독교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일을 처리하는 것은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는가? 과연 이런 것이 믿음일까?
결론부터 소개합니다.
" 믿음이란 기준을 바르게 정하는 것이다!"
이제부터 성경을 함께 찾아보겠습니다.
1st. 하박국 2:4b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But the righteous will live by his faith.)
"믿음"이란 단어에 "그" 라는 정관사가 있습니다. "그" 라는 정관사가 사용될 때는 "믿음" 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일부분을 말합니다. 제한된 믿음을 말합니다.
킹제임스 한글 성경에서는 "그 믿음"을 "자기 믿음"이라고 번역합니다. 믿음의 기준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믿음의 기준이 사람이 될 때부터 이미 복음에서 어긋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믿음을 히브리어로 "에무나" 라고 합니다. 에무나의 뜻은 "진실" "성실"입니다.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은 "진실하게 살리라" 또는 "성실하게 살리라" 진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방법도 진실해야 합니다. 잘못된 방법을 사용하는 믿음은 진짜 믿음이 아닙니다.
로마서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For in the gospel a righteousness from God is revealed, a
righteousness that is by faith from first to last, just as it is
written: "The righteous will live by faith.)
믿음의 기준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세워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를 따라야 합니다. 복음이란 하나님의 의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이익과 유익을 따라 살아갈 때는 이미 복음의 의를 벗어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의 활동 무대를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구분합니다. 남 유다에서 활동했던 선지자들은 "오바댜, 요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라고 하겠습니다. 북 이스라엘에서 활동했던 선지자들은 "요나, 아모스, 호세아" 라고 하겠습니다.
하박국서의 특징은 지혜문학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특이한 용어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시기오놋(3:1)" "영장(3:19)"과 같은 전문 음악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미루어 레위 자손으로 측정합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주된 관심은 "하나님의 정의"라고 하겠습니다. 왜 이 세상에서 의로운 사람이 고난을 받고 살아야 하는가?
하박국 선지자의 대답은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무관심하신 분이 아니다. 다만 인간의 좁은 생각과 의견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지 않는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반드시 하나님의 공의는 나타날 것이고 실현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미국에서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현 대통령 트럼프를 지지해야 하느냐? 아니면 바이든을 지지해야 하느냐? 이런 의견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사람들은 누구를 선택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조금 더 많은 사람을 선택해야 합니다.
한국에서는
현 대통령 문재인과 여당을 지지해야 하느냐? 아니면 우파 정당을 지지해야 하느냐? 이런 의견이 충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사정은 너무 한쪽으로 치우쳤습니다.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언론에서 국민들에게 장확하게 알려야 합니다. 사법부에서는
잘못된 것을 법대로 판단하여 어느 쪽으로도 치우칠 수 없도록 법질서를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도 입법부와 사법부와 행정부 심지어
치안을 맡은 경찰과 나라를 지켜야 하는 군부까지도 때로는 판단이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만 열심히 해야 한다는 의견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또한 반대로 이제는 기도할 때가 아니라 거리로 나가서 행동해야 할 때라고 주장합니다.
미국이나 한국 물론 다른 나라들도 비슷한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분명한 믿음의 정의가 요구되는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생각 때문에 "믿음은 가치 기준을 바르게 세우는 것" 이라고 서두에 소개했습니다.
역사가 토인비는 이제까지 인류 역사에서 발생했던 문명들이 외부의 침략에 의해서 무너지고 망한 것이 아니라 내부의 부정과 부패에 때문에 무너지고 망했다고 강조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미국의 문명고 한국의 문명도 무너질 때는 외부의 침략적인 전쟁보다는 내부의 부정과 부패에 의해서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국의 경우 기독교 인구 비율이 전체 인구의 20-25%라는 것을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기독교 인구가 전체 인구의 1/4 정도라고 한다면 부정과 부패가 세상을 주도하는 것을 용납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여러분 북한과 남한의 가장 큰 차이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체재를 갖고 설명하려고 합니다. 물론 체재는 북한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김일성주의라고 하겠습니다. 남한은 자유민주주의라고 합니다. 그런데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한 마디로 "공감(共感)"이라고 합니다. 영어로 표기한다면 Sympathy, Empathy 라고 하겠습니다. 공감대(共感帶)를 Bond of Sympathy 공감이란 단어의 뜻은 1. 다른 사람의 의견(意見)이나 주장(主張)에 대하여 자기(自己)도 똑같이 느끼는 것. 2. 다른 사람의 기쁨과 슬픔에 대하여 자기도 같은 감정을 같는 것.
예를 들면 아직도 남한에서는 어려운 이웃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어느
동네에 자기 집을 온갖 쓰레기로 채워놓고 어느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모두가 외면하는 사람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자
기관의 사회복지사와 정신과 의사를 비롯하여 동네 부녀회와 청소 업체에서 발벗고 나서 그 사람은 병원으로 안내하여 검사를 받게
하고 입원하여 정신과 치료를 받게 하면서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모두가 힘을 모아 쓰레기가 선더미처럼 쌓였던 집을 깨끗하게
청조하고 정리한 후 심지어 새로운 가구까지 들여놓고 다시는 이웃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삶을 살아가지 못하도록 관심을 갖고 문제를
해결하는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공감이란 것이 있구나! 하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이런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미국이나 남한 모두 먼저 주를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 가치 기준을 바르게 세워야 할 때라고 하겠습니다.
2nd. 데살로니가후서 3:2b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 For all men have not faith.)
세상에는 다양한 종교가 있습니다. 특히 불교와 이슬람교와 기독교를 세계삼대 종교라고 합니다. 일반적인 분류이지만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은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생명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일반적인 분류에 에 따라 신앙생활을 할 경우의 믿음과 생명으로 믿는 것은 분명하게 다릅니다. 생명의 믿음이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먼저 생각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3rd. 마태복음 5:26-30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믿음에는 기준이 있습니다. 그 기준이란 첫째는 도덕, 둘째는 상식, 셋째는 양심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 66권 중에서 마태복음 5장, 6장, 7장을 산상복음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4장, 15장, 16장, 17을 다락방 복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의 기준을 바르게 찾고 정하려면 먼저 산상복음과 다락방 복음을 다시 읽어야 합니다.
4th. 고린도전서 12:9a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To another faith by the same Spirit.)
기독교를 생명으로 믿는 성도들은 믿음을 일반적인 믿음이 아니라 은사로 받은 믿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고린도교회는 다양한 은사가 많은 교회이었습니다. 그런데 은사를 받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분쟁하는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 당파를 만들었습니다(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방언의 종류에 따라 분쟁했습니다(어떤 방언을 하느냐?)
- 김종수목사님(태능 영세교회), 천국 방언(사랑합니다! 미안합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 왜 방언이 필요한가? (어느 농촌교회의 목회자와 가정부의 아들)
5th. 누가복음 17:6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And the Lord said, If ye had faith as a grain of mustard seed, ye might
say unto this sycamine tree, Be thou plucked up by the root, and be thou
planted in the sea; and it should obey you.)
겨자씨 한알 만한 믿음이라고 하였는데 겨자씨는 모든 씨앗들 중에서 가장 작은 씨앗을 말합니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다면 아마 채송화 씨앗처럼 아주 작은 씨앗이라고 하겠습니다. 만일 겨자씨 한 알을 방바닥에 떨어트린다면 마치 먼지처럼 보일 것입니다. 이렇게 작은 씨앗만한 믿음이 있다면 뽕나무가 뿌리채 뽑혀 바다에 던져질 수 있다고 합니다.
6th. 디모데전서 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Holding on to faith and a good conscience. Some have rejected these and so have shipwrecked their faith).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양심을 버리면 그 믿음은 파선한 믿음입니다.
7th. 야고보서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As the body without the spirit is dead, so faith without deeds is dead.)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죽은 믿음이란 결국 믿음이 없다는 것이 아닐까요? 죽은 믿음은 무엇일까요?
8th. 베드로전서 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
Receiving the end of your faith, even the salvation of your souls.)
죽은 믿음이란 영혼 구원을 받을 수 없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구약의 하박국서는 소선지서에 속한 책으로 3장으로 구성된 비교적 내용이 짧은 말씀입니다. 하박국이란 이름의 뜻은 "포옹하다" 라고 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의 활동 무대를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구분합니다. 남 유다에서 활동했던 선지자들은 "오바댜, 요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라고 하겠습니다. 북 이스라엘에서 활동했던 선지자들은 "요나, 아모스, 호세아" 라고 하겠습니다.
하박국서의 특징은 지혜문학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특이한 용어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시기오놋(3:1)" "영장(3:19)"과 같은 전문 음악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미루어 레위 자손으로 측정합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주된 관심은 "하나님의 정의"라고 하겠습니다. 왜 이 세상에서 의로운 사람이 고난을 받고 살아야 하는가?
하박국 선지자의 대답은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무관심하신 분이 아니다. 다만 인간의 좁은 생각과 의견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지 않는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반드시 하나님의 공의는 나타날 것이고 실현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미국에서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현 대통령 트럼프를 지지해야 하느냐? 아니면 바이든을 지지해야 하느냐? 이런 의견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사람들은 누구를 선택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조금 더 많은 사람을 선택해야 합니다.
한국에서는
현 대통령 문재인과 여당을 지지해야 하느냐? 아니면 우파 정당을 지지해야 하느냐? 이런 의견이 충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사정은 너무 한쪽으로 치우쳤습니다.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언론에서 국민들에게 장확하게 알려야 합니다. 사법부에서는
잘못된 것을 법대로 판단하여 어느 쪽으로도 치우칠 수 없도록 법질서를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도 입법부와 사법부와 행정부 심지어
치안을 맡은 경찰과 나라를 지켜야 하는 군부까지도 때로는 판단이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만 열심히 해야 한다는 의견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또한 반대로 이제는 기도할 때가 아니라 거리로 나가서 행동해야 할 때라고 주장합니다.
미국이나 한국 물론 다른 나라들도 비슷한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분명한 믿음의 정의가 요구되는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생각 때문에 "믿음은 가치 기준을 바르게 세우는 것" 이라고 서두에 소개했습니다.
역사가 토인비는 이제까지 인류 역사에서 발생했던 문명들이 외부의 침략에 의해서 무너지고 망한 것이 아니라 내부의 부정과 부패에 때문에 무너지고 망했다고 강조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미국의 문명고 한국의 문명도 무너질 때는 외부의 침략적인 전쟁보다는 내부의 부정과 부패에 의해서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국의 경우 기독교 인구 비율이 전체 인구의 20-25%라는 것을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기독교 인구가 전체 인구의 1/4 정도라고 한다면 부정과 부패가 세상을 주도하는 것을 용납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여러분 북한과 남한의 가장 큰 차이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체재를 갖고 설명하려고 합니다. 물론 체재는 북한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김일성주의라고 하겠습니다. 남한은 자유민주주의라고 합니다. 그런데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한 마디로 "공감(共感)"이라고 합니다. 영어로 표기한다면 Sympathy, Empathy 라고 하겠습니다. 공감대(共感帶)를 Bond of Sympathy 공감이란 단어의 뜻은 1. 다른 사람의 의견(意見)이나 주장(主張)에 대하여 자기(自己)도 똑같이 느끼는 것. 2. 다른 사람의 기쁨과 슬픔에 대하여 자기도 같은 감정을 같는 것.
예를 들면 아직도 남한에서는 어려운 이웃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어느
동네에 자기 집을 온갖 쓰레기로 채워놓고 어느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모두가 외면하는 사람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자
기관의 사회복지사와 정신과 의사를 비롯하여 동네 부녀회와 청소 업체에서 발벗고 나서 그 사람은 병원으로 안내하여 검사를 받게
하고 입원하여 정신과 치료를 받게 하면서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모두가 힘을 모아 쓰레기가 선더미처럼 쌓였던 집을 깨끗하게
청조하고 정리한 후 심지어 새로운 가구까지 들여놓고 다시는 이웃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삶을 살아가지 못하도록 관심을 갖고 문제를
해결하는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공감이란 것이 있구나! 하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이런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미국이나 남한 모두 먼저 주를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 가치 기준을 바르게 세워야 할 때라고 하겠습니다.
코로나 19 때문에 파트리스교회가 후원하는 기관들의 후원을 멈추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갖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후원을 받는 기관의 책임자의 말이 흔들렸던 제 마음과 생각을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도록 멈추게 했습니다. "너무 많은 후원자들이 더 이상 후원을 할 수 없다"며 후원을 끊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코로나 19에 의해서 어려움을 겪는데 파트리스교회마저 끊어야 하겠는가? 정말 끊어여 하는가?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후원을 계속해야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적은 믿음과 큰 믿음
믿음이 자은 자들은 누구인가?
첫째, 염려와 근심에 사로잡힌 자(마태복음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믿음이 적은(a little faith)
둘째, 문제에 당면했을 때, 무서워 하는
사람(마태복음 8: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셋째, 두려워하는 사람(마태복음 14: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믿음이 큰 사람은 누구인가?
첫째,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마태복음 8:10)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 이만한 믿음 (Great Faith)
둘째, 주인을 아는 사람(마태복음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닙니다. 내가 아닌 것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여러분 손에 손톱이 있습니다. 발에는 발톱이 있습니다. 손톱과 발톱이 누구 것인지 아십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손톱과 발톱이 내 손과 내 발에 있기 때문에 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착각입니다. 왜 착각이냐 하면 내 것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손톱과 발톱이 내 말을 듣습니까? 내 삶의 내 생명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내 삶의 내 생명의 주인은 내가 아닙니다. 그럼 누가 주인입니까?
개들의 주인이 있는 것처럼 인생의 주인도 있습니다. 그 주인은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예수를 설득하는
믿음을 보며 그과부가 큰믿음을 가졌다고 칭찬하면서 그딸을 고쳐 주었다 (마 15:21-28)
(예화) 바람 몸살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바람 몸살이란 나무를 옮겨서 이식할 때 옮겨진 곳에서 정착하여 뿌리를 내리려면 악력(握力)이 4배로 필요하다고 합니다. 악력(握力, 쥘 握. 힘 力. Grip)이란 "물건을 쥐는 힘"을 말합니다.
성경적 믿음이 내 삶에 뿌리를 내리려면 얼마의 힘이 필요할까요? 나무가 4배의 악력이 필요하다면 사람은 그 보다 더 강한 힘이 필요합니다. 제 생각에는 대략 10배가 더 필요하다고 환산하면 약 40배의 힘이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성경적인 믿음을 내 삶에 적용하려면 성령의 힘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령은 악력이 필요한 사람에게 권능을 주십니다.
구원을 위해 믿음이 요구된다면 왜 구원을 행위로 볼 수 없는 걸까요? 믿음은 행위가 아닙니까?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의 형벌을 대신하신 분이시며(고후 5:21),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신 구주이시고(요 1:29), 그분은 우리 믿음의 저자이자 완성자이십니다(히 12:2). 구원의 행위는 완전한 삶을
사시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시며,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온전히 이루신 일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행위가 구원을 얻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딛 3:5).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엡 2:9).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롬
3:10). 이 말은 제물을 드리고, 계명을 지키며, 교회에 출석하고, 세례를 받으며, 선행을 통해 구원받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하다” 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기준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롬 3:23; 마 19:17; 사
64:6).
성경은 구원이 조건적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지 않으십니다. 구원의 한 가지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거의 200번이나 믿음이 구원의 유일한 조건이라고 선언합니다(요 1:12; 행 16:31).
어느 날,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질문했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님은 즉시 그들에게 믿음에 관해 지적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8-29). 이 질문은 하나님께서 어떤 것들을 요구하시는지(복수형)에 관한 것이었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단수형)은 하나님이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은혜는 우리가 얻거나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11:6에 따르면, 어떤 “행위”는 은혜로 된 것이
아닙니다. 즉, 일꾼이 돈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은혜는 단순히 거저 받는 것으로 노력하여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구원은 은혜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행위에 의한
것이라면 은혜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롬 4장 참조ㅡ아브라함의 구원은 그가 행한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누군가 익명으로 $1,000,000짜리 수표를 여러분에게 보냈다고 가정해 봅시다. 돈은 여러분의 것이지만 수표에는 여전히 여러분의
서명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름을 서명하는 것으로 수백만 달러를 번 것은 아닙니다. 서명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자신의 노력이나 사업을 통해 백만 장자가 되었다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백만 달러는 하나의 선물이었고 이름을
서명하는 것으로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은 하나님의 관대한 선물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그 선물에 합당한 행위로 간주될 수는 없습니다.
참된 믿음은 육에 속한 행위를 중단하는 것이기에 행위가 아닙니다. 진정한 믿음은 예수님을 향한 것이며 우리를 위해 그분이 일하시는 것입니다(마 11:28-29; 히 4:10).
한 걸음 더 나아가 참된 믿음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 수 없는 것이며,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행위로 간주될 수 없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 6:44). 구원의 능력과 그 은혜로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마태복음 19:21.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온전하고자 할진대 - '온전하다'는 뜻의 헬라어 '텔레이오스'(5046)는
도덕적으로 완전하다거나 무죄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인 신적인 완전에 도달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이는
인간의 자의지(自意志)에 따른 결과로서의 완전이 아니라 처절하게 자신의 무능과 부족을 통감하고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依托)함으로써 이뤄질 수 있는 완전이다(5:48; 빌 3:12). 한편 본문에서의 이 말은 좀더 특수하게, 그 청년이 목표로
삼고 있는 영생에 이르는데 조금도 핍절함 없는 완벽한 상태, 즉 절대적인 자기 부인(self-denial)과 철저한 순종 및
완전한 자기 의뢰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τέλειος, α, ον
1. 목적을 달성한, 2. 히브리서 9:11, 3. 로마서12:2
발음
[ tĕlĕiŏs ] 어원 / 505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온전한(마 5:48, 고전 13:10, 약 1:4), 장성한 (고전 14:20, 히 5:14). [부] 온전히(빌 3:15, 약 1:4) 신약 성경 / 19회 사용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 예수의 온전케 하는 계명은 겉으로는
구약의 율법에서 벗어난 것 같이 보인다(Banks). 왜냐하면 구약의 어떠한 구절에서도 본문의 이 명령을 규정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람이 재물과 하나님을 함께 온전히 섬길 수 없음을 잘 알고 계셨다(6:19-24). 더구나 사람은
본성적(本性的)으로 탐욕(貪慾)스런 존재이기 때문에 재물이 많을수록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의지하게 됨으로써 차차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땅에의 욕심이 많으면 하늘에로의 관심이 적어지게 됨을 아시고 그 부유한 청년이 그의 재물을
다나누어 줌으로써 진정한 영생의 삶을 누릴 수있는 방법을 알게 하시고자 하셨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청년은 율법에 나타난 모든
외적인 계명들을 다 준수하려고 했지만 율법에 대한 형식적인 순종의 차원에 머무르고 말았다. 즉 그는 자신의 소유를 가난한 자들에게
다 나누어주는 적극적이고 전적인 자기 포기를 수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지금까지 소극적이고도 수동적으로 행한 수 백 가지의
율법 준수는 전혀 무가치한 것이 되고 말았다. 한편 소유를 다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명령은 다가오고 있는 천국에 관한
임박한 종말의식(終末意識)을 갖고 있지 않는 사람에게는 도저히 실천 불가능한 것이다. 새하늘과 새땅(계 21:1)이 다가옴을
깨닫지 못하고 그곳에서의 참 보화를 소망하지 못하는 한 소유물들을 더욱더 굳게 움켜 잡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의
요지는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것이 아니라, '와서 나를 좇으라'하는 데에 있다. '가서, 팔아, 나누어
주라'(휘파게 폴레손 카이도스)는 천국과 영생의 실체이신 예수를 좆는 제 1 전제 조건이었고, 온전함을 얻기 위한 단
한가지의 필요한 일이었다. 이와 같이 예수의 절대적 명령에 따라 '가서', '팔아', '나누어줄' 때 동시적으로 그에게 내적
변화가 수반될 것인데, 그 내적 변화는 바로 그가 지금까지 율법을 순종하면서도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온몸과 뜻과
정성으로 행하지 않았음을 깨닫고 겸손히 회개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 13:44-46에서 예수께서는 천국을 '밭에
감추인 보화'나 '극히 값진 진주'로 비유하셨다. 이는 결국 본문의 '하늘에서 보화'란 이 부자 청년이 찾아헤매는 바의 영생의
삶을 의미한다. 그의 마음이 지상의 재물에서 해방되는 그 순간부터 그는 구원을 얻게 되리라고 하는 의미로, 예수께서 그 즉석에서
영생의 삶을 보장하시는 말씀이다. 실로 자기 보물이 있는 그곳에 자기 마음과 소망(所望)과 미래가 있는 것이다(6:19-21).
와서 나를 좇으라 - 가서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예수의
명령은 궁극적으로 예수를 따르는 제자직(discipleship)과 연결되고 있다(Lane). 즉 하나님의 뜻, 계명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은(17-19절) 바로 참 생명의 주인이시요 인간을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따르는 상호 협력적인 위치에 서는 것이다.
결국 그에게있어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바로 율법의 형식적인 행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 즉
자아(自我)의 전적인 포기를 수반한 복음에의 참여를 통해서만 가능해 진다.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은총을 통한 승리'라고 규정지을
수 있다. 본문에서 볼 수있는 바대로 예수께서는 수시로 사람들을 그의 제자로 부르셨으며 다음과 같은 제자의 길을 제시하셨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16:24) 따르라고 말이다. 이 말씀처럼 구원의 기쁨을 얻고
예수의 사람이 되려는 자는 자기의 것을 다 내어 버림으로써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 즉 세속적(世俗的)인
기대와 세상적인 인연에서 해방되어 오직 예수께 자신의 전부(부, 희망, 삶 등)를 맡기고, 그분과 더불어 죽고 더불어 사는
일체적(一體的)삶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갈 2:20). 이는 제자가 될 수 있는 또 하나의 크고도 힘든 장벽이자 조건이 되는
조항이다.
과연 예수님은 선한 분이 아닌가?
마태복음 19:16-17에 보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영생을 얻는 방법에 관해 묻는 내용이 있습니다.
16 ¶ 보라, 어떤 사람이 나아와 그분께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이까? 하매 17 그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한 분 곧 [하나님]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다만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거든 명령들을 지키라, 하시니.
17절에서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한 분 곧 [하나님]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라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이 자기는 선하지 않다고 하면서 오직 하나님만 선하다고 했으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고 합니다.
얼핏 보면 그 저자의 주장이 맞는 것 같은데 이를 어떻게 성경적으로 바르게 설명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하셨는가?
요한복음 10장 11-14절에서 그분은 자신이 선한 목자라고 무려 3번이나 말씀하십니다.
11 나는 선한 목자니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기 생명을 주거니와‥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아노라.
마태복음 19장에서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응답은 결코 자신이 선하지 않기 때문에 나온 반응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하나이시며 선하시기 때문에 그분이 행한 일들은 모두 다 선합니다.
요한복음 10:30-33
30. 나와 내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시니라. 31. 이에 유대인들이 돌을 집어 다시 그분을 치려 하거늘 3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시되, 내가 내 [아버지]로부터 나온 많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일들 중의 어떤 일 때문에 너희가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하시매 33. 유대인들이 그분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 하는 것은 선한 일 때문이 아니요 신성모독 때문이니 곧 사람인 네가 네 자신을 [하나님]으로 만들기 때문이니라, 하매
마태복음 19장에서 예수님은 이 사람의 감추어진 내면의 위선에 대해 지적하고 있습니다.
“너는 나를 단지 사람으로만 생각하면서도 하나님께만 속하는 호칭을 내게 붙였다. 하지만 그런
마음으로 이런 호칭을 내게 붙이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너희 유대인들이 그런 마음으로 이런 호칭을 쓸 때에는 거기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비록 그 호칭이 내게 적합하지만, 너희는 그 호칭의 참된 의미대로 무한대의 완전함을 가진 분, 즉 신성을 가진
하나님으로서의 의미로 그것을 나를 위해 사용하지 않았다. 너희는 단지 내게 아첨하려고 그 호칭을 사용하였을 뿐이다. 강조해서
말하지만 너희 마음이 시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첨하려고 아무 뜻도 없이 하나님께만 속하는 그런 호칭을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자신의 선한 속성이나 신성을 부인하시려고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사람의 은밀한 속 중심을 살피시는 예수님께서 아무 생각 없이 하나님께 속한 호칭을 사용하여 아첨하려는 이
사람을 반박하고 그 위선을 드러내시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떤 교훈을 주십니까?
“너희가 알지 못하는 사실이 있다. 내가 바로 유일하게 선한 이 즉 하나님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의 신성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사실 하나님만 선한(good) 분일까요?
성경에는 사람들 중에도 선한 자들이라고 불린 여러 명의 기록이 나옵니다.
잠언 2:20-21
20 이로써 네가 선한 자들의 길로 걸으며 의로운 자들의 행로들을 지키리니 21 이는 곧바른 자들이 땅에 거하며 완전한 자들이 그 안에 남을 것이기 때문이라.
눅 23:50은 아리마대 요셉을 가리켜 선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행 11:24는 바나바를 가리켜 선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 외에도 시 37:23; 112:5; 잠 12:2; 13:22; 14:14; 미 7:2; 마 12:35 등은 선한 사람에 대해 언급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하나님만을 선하다고 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만이 모든 선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은 여기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자신의 신성에 대해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이슬람 소책자의 저자는 성경 문맥에 상관없이 한 구절을 따다가 사람들을 속이려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심지어 “하나님은 없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맥을 보면 그런 말을 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어리석은 자가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하나님]은 없다, 하였도다. 그들은 부패하여 가증한 일들을 행하였으니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시14:1).
사실 이런 수법은 사이비 이단 종파들이 흔히 쓰는 수법입니다.
성경 문맥은 무시한 채 자신들이 필요한 성경의 한두 구절만을 취해서 마치 모자이크 조각을
이어 붙이듯이 자신들의 교리를 위한 체계를 만들고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영적으로 사악한 무리들이 쓰는 이런 고질적인 수법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는 성경을 종합적이고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이해하고 문맥의 흐름에 따라 바르게 읽고 해석하는 습관을 정착시키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 책자의 저자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저질 수법으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9장의 본래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선함의 근원인 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아첨하는 호칭을 붙이는 자에게 “도대체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느냐?”고 반문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슬람에 대해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그들의 신 알라에게는 아들이 없습니다.
즉 그 알라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하나님처럼, '삼위일체가 아니라 아버지 홀로 존재하는, 성경 기록과 상관없는, 사람이 만들어 낸 짝퉁 신'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 이 세 분이 한 하나님이신 참 하나님입니다.
하늘에 증언하는 세 분이 계시니 곧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시라. 또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요일 5:7).
사물(事物)의 본질(本質)
고대
그리스에서 사물의 본질은 '에이도스(ĕidŏs. εἶδος)'라고 불렀다. 플라톤에게 있어 칼리아스와 소크라테스라는 개체들의 본질은 결국 '인간'이었다.
플라톤에게는 개체의 고유성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던 셈이다. 반면 경험 세계를 강조했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칼리아스의
본질과 소크라테스의 본질은 서로 다른 것이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는 다음과 같이 간단히 정리될 수 있다. 플라톤에게는
모든 인간들이 인간이라는 하나의 본질을 공유한 것으로 사유되었다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모든 인간이 자신만의 고유한 본질을 가진
것으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두 사람 모두 '본질'이라는 것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서양 철학은 니체 혹은
비트겐슈타인의 등장 이후에야 사물의 '본질'이란 단지 우리 인간의 가치가 투영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통찰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동양의 사유 전통에서는 본질이라는 것이 하나의 언어적 관습에 불과하다는 통찰이 2,000여 년
전부터 이미 상식적인 견해의 하나였던 점이다. 이것은 과거 동양의 철학자들이 본질이라는 것이 얼마만큼 인간의 삶을 억압하는지
이미 성찰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자신이 사물들에 본질을 부여했다는 것을 망각하고, 인간과 무관한 절대적인 본질이 있다는 사실에
집착하는 것, 이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중국의 장자나 인도의 나가르주나가 서양 철학자들 가운데 니체 혹은 비트겐슈타인과 비교되곤 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1491. εἶδος, ους, τό
1. 형상, 2. 종류, 3. 실질적으로 보는 것
발음
[ ĕidŏs ] 어원 / 149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형체(눅 3:22), 용모(눅 9:29), 형상(요 5:37), 모양(살전 5:22), 보는 것(고후 5:7) 신약 성경 / 5회 사용
본질(本質)은 그것이 그것으로서 있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사람과 성전과 무화과나무의 본질을 이해해야 한다. 사람은 사람으로 있기 위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한다. 무화과나무는 무화과 열매를 맺어야 한다. 성전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다(이사야 56:7)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5287. ὑπόστασις, εως, ἡ
1. 본질적 성질, 2. 확신
발음
[ hüpŏstasis ] 관련 성경 / 본체(히 1:3), 실상(히 11:1), 믿던 것(고후 9:4) 신약 성경 / 5회 사용
1096. γίνομαι
1. ~이 되다, 2. 탄생되다, 3. 마태복음 21:19 발음
[ ginŏmai ] 관련 성경 / 되다(마 1:22, 막 4:19, 눅 1:2), 되게 하다(마 4:3, 막 1:17, 고후 5:21), 이루다(마 5:18,
6:10, 눅 1:38), 내다(마 6:16), 일어나다(마 8:24, 막 4:17), 베풀다(마 11:20),
행하다(마 11:21,23), 나타나다(행 8:13), 맺다(마 21:19), 나다(마 25:6, 막 9:7, 눅 3:22),
생기다(마23:15, 요 5:14), 계시다(마 26:6, 막 4:10), 임하다(마 27: 45, 막 15:33), 이르다(막 1:4,
눅 10:32), 당하다(막 5:16, 딤후 3:11), 드러나다(막 6:14), 오다(막 6:21, 요 1:17), 차다(눅 2:6,
9:51), 만들다(행 19:26), 가다(행 27:33), 거하다(고전 2:3), 있다(마 18:12) 신약 성경 / 670회 사용
본질(本質)이란 무엇인가?
- 근본(根本), 원리(原理), 개념(槪念)
사람들은
본질을 중요시 여긴다. 본질은 어떤 사물이나 현상의 밑바탕에 있다고 여겨지는 가장 중요한 무언가이다. 이를 '근본'이라 말하기도
하고, '원리'라 말하기도 하고, '개념'이라 말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 본질(근본=원리=개념)을 바탕으로 대상과 현상을
파악하려고 한다. 혹은 이 본질을 알면 세상의 진리를 깨달을 것이라 생각한다.
'말(언어)'의 환유적 성질 때문이다.
사람은
'말'을 만들때 자신이 경험한 것의 일부를 강조하거나 확대한다. 이를 소리로 전환해 '말'을 만든다. 가령 어떤 사람이 거대한
동물을 보았는데 그 동물의 다양한 특징 중 '코가 길다'라는 것이 가장 인상에 남았다. 그 사람은 나중에 그 동물을 '코가 긴
것'이라고 기억할 것이고, 누군가에게 그 경험을 말할때 '코가 긴 것'이라고 강조할 것이다. 이를 짧게 압축하면
'코길이=코끼리'가 된다.
사람은
어떤 대상을 기억할때 전체를 다 기억하지 못하고, 부분을 가져와 기억하고, 이 부분을 가지고 유추해 전체를 재구성한다. 이를
신경과학에서 '맥락부호화' 과정이라고 말한다. 부분의 '부호'가 전체에 '맥락'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다.
언어학에서
이 맥락부호화를 '환유'라 말한다. '환유'는 어떤 사람이 어떤 대상을 지칭할때 그 부분을 가지고 지칭하는 언어적 행위를
말한다. 가령 어떤 건물을 가르키며, "저 노란 건물 봐봐"라고 말하는데 이는 말하는 사람이 '노란색'을 강조해 건물 전체를
가르키는 것이다.
사람은
말을 만들때 혹은 말을 할때 '환유'적 태도를 갖고 있다. 이 환유적 태도는 어떤 대상을 즉각적으로 알아보기 위한 부분을
취함으로서 생긴다. 이 과정에서 대상이나 현상의 어떤 중요한 부분을 가져오는데 이때 가져온 바로 그것이 점차 '본질'로서 여겨진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보통 '본질'은 대상과 현상을 가르키는 '말' 안에 내포되어 있다.
'본질'은
하나의 대상에 내포되어 있거나 여러 대상의 공통 성질로서 존재한다. 하나의 대상에 내포되어 있을때는 본질이 어떤 대상 안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고, 여러 대상의 공통 성질로서 존재할때는 본질이 초월적으로 포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에 대한 태도가 달랐고, 공자와 노자의 본질에 대한 태도도 달랐던 것은 아닐까 싶다.
근대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데카르트는 자신의 존재가 '생각'에 있음을 강조했다. 데카르트에게 '생각'은 대상을 쪼갤 수 있는 능력이었다.
데카르트의 이 쪼개기 생각 능력은 후일 과학혁명의 철학적, 방법적 바탕이 된다. 이 바탕이 미술에 영향을 미쳐 근현대 미술이
탄생했고, 디자인이 형성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 대상이나
현상에선 본질을 찾지 말아라. 대상과 현상의 전체성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중요한 것은 본질이 있냐 없냐가 아니라 본질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구별능력이다. 즉 '본질이란 무엇이가'를 두가지로 요약하면 첫째는 쪼갤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할 줄 아는
것이다. 둘째는 쪼갤 수 있는 것에서 본질을 찾는 것이고 쪼갤 수 없는 것에선 본질을 잊는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Have faith in God, Jesus answered.
무화과나무 비유 / 마태복음 21:18-22. 마가복음 11:12-14, 20-24
* 본질을 알고 있는가?
1. 성전의 본질 2. 무화과나무의 본질 - 이스라엘 나라의 본질 3. 믿음의 본질
"하나님을 믿으라(에케테 피스틴 데우. εχετε πιστιν θεου) "는 말씀의 배경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출발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갈릴리 지역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겨졌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성전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더불어 베다니에서 나오실 때 마침 시장하시므로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무엇이 있을까 하고 가까이 가셨으나 잎만 무성하므로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가셨을 때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깨우치셨습니다.
날이 저물 무렵 성전 밖으로 나올 때 제자들은 아침에 저주했던 무화과나무가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는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나무가 말랐나이다"하고 말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시며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왜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의 상과 의자를 엎어버리셨습니까? 왜 멀쩡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까?
무엇이든지 그 본질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성전의 본질은 "기도하는 곳"입니다. 무화과나무의 본질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이 세상에 살면서 어떤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열매를 맺고 있었는가? 누구나 육체를 위한 자식 농사와 더불어 예수를 믿는 믿음의 열매가 무엇인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더구나 신앙생활에서 기도는 항상 삶의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과연 기도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응답받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메아리가 되어 사라지는 기도가 아니라 반드시 열매로 맺혀지는 기도 생활이 신앙생활의 즐거움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도 늘 하던 기도가 새로운 재미와 삶의 즐거움을 제공하는 열매맺는 기도로 드려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따라서 기도자의 신앙의 기초가 하나님을 믿는 마음에서 튼튼하게 세워져야 한다는 교훈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강조하신 말씀들을 살펴봅니다.
첫째는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갈라디아서 3: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을 믿으면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하십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로마서 4:3)
둘째는근심하지 말라(요한복음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세상에는 근심거리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 어떤 근심과 걱정도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물리쳐야 할 적과 같습니다.
발음
/ 피스티스[ pistis ] 어원 / 398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믿음(마 8:10, 롬 1:8, 히 10:22), 도(행 6:7), 충성(갈 5:22), 신앙(빌 1:27, 히 6:1) 신약 성경 / 243회 사용
데오스(2316)
[ thĕŏs ] θεός, οῦ , ὁ, ἡ
1. 하나님, 2. 사도행전 28:6, 3. 요한복음 1:1
발음
/ 데오스[ thĕŏs ] 어원 /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하나님(마 3:9, 눅 1:30, 행 2:11), 신(행 7:40, 43), 주(행 8:22, 10:33, 롬 10:17), 아버지(고후 1:3) 신약 성경 / 1318회 사용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가르치셨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은 그의 전능하신 능력과 무한히 선하심을 의심 없이
신뢰하는 것이다. 엄숙한 선언에 뒤이어 예수님은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 속으로 던지우라고 하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과장법을 사용하여 말씀하셨다. 한 가지 조건은 부정적으로는 의심없이 그리고 긍정적으로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인데 그러한
기도는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신앙은 이스라엘의 부족한 신앙과 대조되었다. 그러므로 기도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게 하는 두드림이 되기 때문에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무엇이든지 기도로 구한 것은 이미 받은 줄로 믿으라고
훈계하셨다.
온전한 믿음을 회복하는 비결
믿음으로 행하라(야고보서 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믿음 얻도록 간구하라(데살로니가전서 3:10)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려 함이라.
믿음을 위하여 꾸짖으라(디도서 1:13)
이 증거가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 이는 저희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케 하고.
예수만 바라보라(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하나님을 믿으라(마가복음 11:22-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을 믿으라. 마귀를 믿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라. 세상을 믿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라 하신다. 또 돈을 믿지
말고, 자기 재주를 믿지 말고, 수단 방법을 믿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시란다.
어느 날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어떤 자매를 보고 "하나님
공경하고 예수 믿으세요"하니까 "아니, 나는 안 믿어요"
한다. "뭘 믿으려고 안 믿어" 하니 "내가 나를 믿지요"한다.
"아니! 여보 자매, 그거 무슨 소리요, 내가 나를 믿다니 자매가
무엇인데요?" 자매가 아무리 안다고 해도 눈앞에 눈썹이 몇 개인
줄도 모르면서, 또 아무리 잘났대도 콧구멍 두 개와 입 구멍만
막으면 팩팩하다 십 분 후에 눈알이 나와서 죽을 터인데 그것을
믿다니...... 그런 망령된 소리를 하지 말고 피조물 된 인간은 조물주(하나님)를
믿어야 된다고 전도하였다.
그 자매뿐만 아니라 오늘 이 세계와 이 강산이 요 모양이 되는
것은 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기를 믿는다는 무신론자들과
인본주의자들 때문이다.
아니 무신론자들과 사회주의자들만이 하나님을 부인하고
반역하는 것이 아니라 소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계심을
증거하는 자들 가운데서도 말과 붓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전하면서도 실제 생활로는 무신론자의 행동을 하는 것을 볼 때에
한심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 세상에 계실 때 베다니에 가셨다가 예루살렘으로 오시는
길에 잎사귀가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시장하시어 열매를
찾으셨으나 잡수실 만한 실과가 없으므로, 이제 후로는 네 열매를
따먹을 사람이 영원히 없으리라 하시고 그곳을 떠나 그 이튿날
그곳을 다시 지나가실 때에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모두
말라진 것을 보고, 베드로가 기억하고 여쭈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임의로 말랐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시장하신데 잡수실 것이 없어서 감정으로
무화과를 저주하신 것인가? 그렇지 않다. 40일 동안 금식하셔도 돌로
떡을 만들어 잡수시는 시험을 이기셨으니 그것은 자기를 위한
감정은 절대로 아닌 것이다. 아니 오늘날 우리에게 하나님을 믿게
하기 위한 것임을 나는 믿는다.
속담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
무화과나무 / 탁쉬(taqsh) & 빅클(bickle)
無(없을 무) 花(꽃 화) 果(열매 과). 꽃 없이 열매를 맺는 나무다.
꽃이란 찬란한 자신의 영광스런 때인데, 그런 자랑이나 뽐냄이 없이도 묵묵히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무화과는 꽃이라는 최고의
영광을 피우지 않고서도 열매라는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낸다.
영광을 드러내지 않는 겸손함에 배울 것이 많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서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열정의 진액을 모으고 뭉쳐놓는다.
사실 이때는 무화과가
열리는 때가 아니었다. 제자 마가만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마가는 연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가가 알고 있는 '무화과의 때'는 시즌(season), 곧 정규 수확 철이다. 잎이 막 무성해지면 앞으로 무화과 열매가
달린다는 표시로 작은 마디로 된 알맹이가 열린다. 이게 아랍어로 “탁쉬”(taqsh), 히브리어로 "파게" 그리고 수확철에 열리는 것을
“빅클”(bickle), 히브리어로 "테헤나"
히브리어로는 각각 “파게”, “테헤나”라 부른다.
탁쉬는 일꾼들이나 꼬마들이 배고플 때 따먹는다. 돈을 받고 팔만한 상품은 아니지만 허기를 달래는 데에는 그만이다. 탁쉬는 참
무화과 열매인 빅클이 만들어지기 전에 다 떨어진다. 하지만 잎사귀와 함께 탁쉬가 열리지 않으면 시즌이 와도 빅클이 맺히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이를 아셨던 것이다. 마가도 이를 알았기에 자신있게 기록했던 것이다. 탁쉬가 열리지 않았으니 '참 무화과의 때'가
와도 열매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잎사귀만 아름다우면 뭣하나. 무화과는 열매로 모든 것이 판단되는데… 열매가 없는
무화과는 더 이상의 소망이 없다.
탁쉬로 일컬어지는 이런 무화과를 요한계시록 6:13에 나오는 “선 과실(무화과)”라고 했다.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과실이 떨어지는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
선 무화과의 '선'에 관해 영어성경의
해석은 다양하다. 설익은(unripe), 때에 맞지 않는(untimely), 늦은(late), 겨울철의(winter) 등등.
그러나 이 “선”을 ‘회오리바람 선(颴)’ 혹은 '부채바람 선(扇)'으로 본다. 이는 요한계시록 6:13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해석이 아닐까?
탁쉬는 약하다. 비바람이 불면 와르르 떨어져 버리니 대풍 앞에서야 어찌 견디리오. 탁쉬는 핍박과 고난과 역경을 이길 힘이 없다.
그 전에 먼저 주님의 시장하심을 들어주었어야 했다. 그게 탁쉬의 쓰임 받음이다.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한 탁쉬는 결국 역경과
고난이 오면 제 나무에서 다 떨어지고 만다.
하나님 앞에 전혀 쓸모가 없는 영혼이라면 어찌 될까? 작은 일에서부터 쓰임을 받아야 큰 일에도 쓰임을 받는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가 큰 일에도 성실과 충성을 다하기 때문이다. 나 비록 작을 지라도 정녕 주님께 쓰임 받고 싶다.
무화과나무는 팔레스타인 풍경에선 빠질 수 없는 나무다. 가지를 넓게 펴 그늘을 제공한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 그늘에서 쉬는 것을 보았다(요 1:48)고 하신 것처럼 길 가는 행인에게 쉼을 준다. 무화과 열매도 먹을 수 있었으니 더위와 주림을 면하게 해주는 유익한 나무다. 그 그늘 아래 겉옷 깔고 누워 무화과를 한 입 베면 쌓인 피곤함을 제법 털 수 있었으리라.
한때 무화과나무 잎 모양이 어떠할까 궁금해 찾아 사진을 찍어뒀다. 이유는 소박하다. 인류가 맨 먼저 만들어 입은 옷이 무화과나무 잎이 아닌가. 비올 때 쓰곤 했던 토란 잎과 비슷하거나 더 클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더라. 신구약을 통틀어 성경에는 무화과에 관한 구절이 57군데다.
무화과는 세 종류다. 같은 나무지만 무화과가 익는 계절을 따라 봄 무화과, 여름 무화과, 가을 무화과로 부른다.
봄 무화과가 제일 맛이 좋다. 어찌나 맛이 좋은 지 보는 즉시 손에 따서 먹을 정도라고 이사야서는 기록한다(28:4).
여름 무화과는 더운 여름에 익는다. 빨리 익기에 과일처럼 두고두고 생으로 먹기보단 건포도처럼 말려서 먹는다. 아비가엘이라는 총명한 여자는 위기 중 다윗을 설득하며 내놓은 예물 중 하나가 “무화과 뭉치”라는 여름 무화과다(삼상 25:18). 또 삼일 밤낮 광야에서 사경을 헤맨 소년에게 정신을 차리라며 내놓는 특효약이 “무화과 뭉치”였다(삼상 30:12).
가을 무화과는 가을에 반쯤 익었다가 초봄에 마저 익는다. 겨울 우기가 지나고 강이 마르기 시작할 즈음 짙은 푸른색의 약간 긴 모양의 무화과가 익는다. 아가서 2장의 무화과가 이 무화과다.
“유독 무화과나무만이 꽃이 없다. 꽃이라는 최고의 영광을 피우지 않고서도 열매라는 귀한 작품을 만든다.” 영광을 드러내지 않는 겸손과, 그럼에도 열매 속에 영광(꽃)을 담아내는 충성을 다하는 나무다. 또 “무화과나무처럼 맡은 직분에 성실하자.”고도 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강조점은 예수께서 저주하셨던 무화과나무와 관련된다. 이때는 주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전 예루살렘으로 마지막으로 향하던 때다. “그 능하신 권능으로 나무를 저주할 필요가 있었겠나? 다른 때에 다른 사람이라도 열매를 얻지 않았겠나? 어쨌든 두렵다는 것이 일반의 생각이다.” 하지만 예수의 혈기 내심도 괜한 일 하심도 아니라고 한다. “이는 하나님의 의도를 이해한다면 우주라는 물질세계를 다시 확인하게 하는 사건이다.”
무화과나무의 최후처럼 우주의 최후도 그와 같다고 본다. 자기 일을 다 이루신 분이 하늘로 귀환할 때 “아무 것도 없는”(막 11:13) 무화과나무(우주)는 더 이상 존치되어야 할 가치가 없다. “성경의 모든 것을 무화과나무로 보여 주셨다. 주님은 우리 영혼과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을 모두 무화과나무로 보여줬다.”
주님께 쓸모가 없는 것이 무화과나무다. 아담이 선택 받고 남은 네피림도 무화과나무다. 사울은 왕으로서 유지될 수도 있었으나 우상에게 절하므로 무화과나무가 되어버렸다. 소돔과 고모라처럼 이 세상이 아무리 화려하고 거창해도 무화과나무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지 않는 어떤 것도 무화과나무다.
무화과나무의 사건을 “세상을 향하신 최후의 설교”라 했다. 이제 주님이 가셨으니 언제든 끝날 수 있는 우주(무화과나무)의 실상을 말씀하신 것이다. “무화과나무에 기대할 것이 없는 것같이 우주와 그 안의 것을 기대치 말고 그날이 속히 올 줄 알고 현재 모시고 있는 성령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무화과나무는 팔레스타인 풍경에선 빠질 수 없는 나무다. 가지를 넓게 펴 그늘을 제공한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 그늘에서 쉬는 것을 보았다(요 1:48)고 하신 것처럼 길 가는 행인에게 쉼을 준다. 무화과 열매도 먹을 수 있었으니 더위와 주림을 면하게 해주는 유익한 나무다. 그 그늘 아래 겉옷 깔고 누워 무화과를 한 입 베면 쌓인 피곤함을 제법 털 수 있었으리라.
어떠한 하나님을 믿을 것인가?
1. 열매를 찾으시는 하나님을 믿으라
나무 한 그루라도, 풀 한 포기라도 자기의 사명을 감당치 못하면
저주를 받는 것이다. 너희들도 특별한 은총을 받고도 주님의 열매가
없으면 버림을 받게 하신다는 공의로우신 하나님, 심판의 주님,
두려우신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이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느니라. 죄많은 세계를 홍수로 멸망시키시고,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유황불로 심판하시고, 일본의 죄악을 원자탄으로
징계하시고, 한국의 죄악을 38선으로 가로막아 놓으신 것이다.
삼손의 죄악은 결국 삼손이 눈이 뽑히고 연자 맷돌을 돌리게
하셨고, 웃시야 왕의 교만한 죄악은 문둥병이 들어 죽게 하셨으며,
헤롯의 교만은 몸에 충이 먹어 죽게 했다.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나 국가나 민족의 죄악을 저울로 달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믿을 때에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2.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믿으라
무화과나무의 이적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에게 구하여 얻은
능력이다. 너희들도 기도하여 구한 것은 이미 받는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받으리라.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임을 믿으라. 너희들이 악할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너희들에게 더욱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을 믿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하나님의 존재를 여러 가지로 증거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 몇
가지를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지으신 만물을 보아 알 것이다(롬 1:20). 본능으로 알 수 있고
자연과 인생의 조직, 피조물을 보아 조물주를 아는 것이다.
다섯째,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알게 된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게 되고,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께
모든 소원을 아뢰고, 거룩한 뜻을 분별하게 되고, 죄를 자복하게
되고, 능력을 구하여 얻으며, 하나님의 섭리로 위험과 실패와
사망에서 구함을 받는 체험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내가 어떤 노인에게 전도하였더니 "여보, 예수쟁이들만
하나님을 공경하시오? 우리도 다 하나님을 공경한답니다. 하나님이
우순풍조(雨順風調)로 오곡백과를 주어서 다 잘 산답니다" 하고
말한다. 그래서 나는 "노인장, 하나님을 어떻게 공경하시오?"
하니 "나는 해 뜨는 데로 향하여 소변도 보지 않지요" 한다.
그것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떤 생활을 하는가? 열매를 보아 그 나무를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생활태도
1. 철두철미한 회개의 생활을 하여야 한다
신구약의 모든 성도들 가운데 참된 하나님을 믿는 자는 먼저
회개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였다. 다윗을 보시라. 한때 인간성을
가지고 정욕을 이기지 못하여 무서운 죄를 짓고 타락했었으나
나단의 책망을 듣고 겸손히 용상에서 내려와 부스러진 심정으로
침상을 적시고 요를 적시는 눈물의 회개를 밤마다 하였던 것이다.
바울의 회개와 베드로의 회개! 하여간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을
참으로 믿을 때 죽었다 살아나는 철저한 회개를 경험한 것이다.
어거스틴도 그러하였고 존 번연과 루터가 그러하였다. 아직도
회개가 철저치 못한 연고이다. 한 사람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2.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사람은 양심생활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빛이시니 털끝만치도 어두움이 없나니 하나님과
사귀었다 하면서도 어두운 데 거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라 하였다.
사람들이 볼 적에는 점잖고 의롭고 깨끗하게 사는 것 같으나 혼자
있을 때는 별 짓을 다하는 것은 아직도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까닭이다.
외식하는 바리새 교인과 서기관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고 양심적으로 살지 않음으로 주님에게 얼마나 책망을
들었는가? 그 반대로 하나님의 사람 요셉을 보시라. 형님들의
미움을 받아 팔리어 이국 타향에 가서 보디발 장관의 가정에 총무로
충성되게 봉사할 때에 장관의 부인이 날마다 유혹하여도 듣지 않고
말하기를 주인께서 나를 신용하여 가정의 모든 것을 맡기셨으나
당신만은 맡기지 않았는데 어찌 감히 이런 일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요 하고 거절할 때에 달려들어 옷을 붙잡고 더욱
유혹함으로 붙잡힌 옷을 벗어버리고 달아났다. 그랬더니 부인이
모함하여 잡히게 되고 감옥에 들어갔으나 그 정조를 지킨 것은 그가
하나님을 참되게 믿은 결정이 아닌가?
오늘날 하나님을 믿고 일한다 하면서도 양심을 버리고 개인의
편리와 안일을 위하여 이리저리 좌우하는 생활로 신앙의 정조를
더럽히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을 생각할 때에 안타깝기 끝이 없는
것이다.
내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너희에게 경계로서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선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사람들이 그 양심을 버렸으니 그 믿음을
의논컨대 파선한 배와 같으니라(딤전 1:9).
물고기가 물 안에 있으면서도 물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땅에
사는 인간들이 땅덩어리가 돌아가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너무 지중하여 무감각하게 지내는 인간들
중에서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자는 밥 한 그릇을 대할 때나 물 한
잔을 대할 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려고 해서 난 것이 아니요 살려고 해서 사는
것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어머니 복중에 있을 때 신기하고
오묘하게 지음을 받아 열 달 동안 그 속에 있다가 나올 때에 배꼽줄
하나 가지고 나왔지만 나오자마자 그것을 똑 잘라 버리니 정말
핏덩어리로 된 것을 젖으로 먹여주시고, 입혀 주시고, 보호하여
주신 그 사랑을 어찌 감사하지 않으랴.
이웃집에서 떡국 한 그릇을 얻어먹고도 감사를 몇 번이나 하면서
날 때부터 지금까지 아름다운 세계에서 봄에는 백화가 만발하고,
여름에는 녹음방초(錄陰芳草) 우거지고, 가을에는 오곡백과가
풍성하고, 겨울에는 백설강산이 은세계를 이루어 보기 좋고, 놀기
좋고, 살기 좋게 축복하시었건만 우리는 얼마나 조물주께 감사를
하였는가? 캄캄한 밤중에 수렁에 고무신 한 짝을 빠뜨리고 헤맬
때에 누가 성냥 한 개비를 켜서 밝혀 주면 아이고 이 양반 고마워라
하면서도 낮에는 태양으로 변함없이 비추어 주시고 밤에는 달과
별로서 밝게 해 주시는, 그 빛을 주시는 조물주 하나님께는 얼마나
감사하였는가? 배은망덕하는 인간들을 다 멸망시킬 것이로되
자비와 긍휼로 무조건 사랑하심을 깨닫는 자는 행복스러운 인간인
것이다.
또한 우리의 육체를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독생자까지 주신 그
사랑, 어찌 다 말로 형언하리오. 주를 사랑하고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에게는 일만 가지 일이 다 합동하여 유익하게
하시므로 행복과 순경(順境)에서만 감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자는 불행과 역경 중에서도 항상 감사의 생활을 하는 것이다.
어떤 독실한 신자 노인이 있었다. 그가 쌀 한 가마니를 외상
맡아다가 마루에 두었더니 그날 밤에 도적이 와서 홀랑 가져다
버렸다.
그의 마누라는 도적을 욕하면서 야단을 치는데 영감님은 "마누라,
너무 떠들지 마시오. 나는 쌀 한가마니 잃어버렸는데 다섯 가지
감사가 생기는구먼" 한다. "원, 저런 영감두, 무엇이
감사하단 말이요" 하니 "보라구, 우리는 쌀 한 말도 얻기
힘든 집에서 한 가마니나 외상으로 얻게 된 신용을 얻었으니
감사하지 않은가? 또 감사할 것은 남은 도적질하면서 사는데 우리는
도적질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오. 또한 그것 모두 다 우리가
잘못했지, 그것을 방안에 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마루에 두어
실패하였으나 결국 좋은 경험을 얻었으니 감사하고, 또한 육신의
양식은 잃어버렸어도 영혼의 양식은 잃지 않았으니 감사하고, 또
외상으로 얻어온 쌀이라도 남의 것을 잃어버리지 않고 내 것을
잃었으니 감사하지 않소?" 하며 찬송을 불렀다 한다.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감사 안할 것이 없고 감사 안 하는
사람에게는 감사할 것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사람은 강하고 담대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종이가 약하지만 벽에 붙어 있게 될 때는 강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 인간은 몸도 약하고 마음도 약하고 의지도 약하지만 만세 반석
되시는 하나님께 신앙으로 의지하여 하나님과 나와 그리스도의
피로 반죽하여 콘크리트를 할 때 강하고 담대하게 되는 것이다.
다윗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여 골리앗을 물매 돌 한 개로 쳐서
죽이고, 엘리야는 하나님을 믿어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하고 3년 6개월간
비가 오지 않게 하였고 다시 기도하여 비가 쏟아지게 한 것이다.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하나님을 믿어 유대 민족을 하만의 손에서
위기 일발에 구원하여 낸 것이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것이
없느니라.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행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이보다
더욱 큰 것도 행하게 하리라(요 14:12).
5.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사람은 항상 기도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깨어 기도하고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고 기도와 간구와
감사함으로 하나님과 교통하고 생활을 하는 것이다.
효자 효녀는 무엇이든지 부모님께 문의하고 보고한다. 불효
자식은 무엇이든지 다 제 맘대로 자행자지(自行自止)한다. 부모님이
무엇을 좀 알고 싶어서 이번 일이 어찌되었느냐, 아까 왔던 사람이
누구이냐 하고 물을 때 "아이구, 그것은 알아서 무엇하겠소.
어서 진지나 잡수시고 낮잠이나 주무시구려. 원, 노인네들은 별
간섭을 다 하시려고 드시네" 하면 부모님들은 그만 쑥 들어가
손을 비비면서 "이거 왜 여지껏 살아서 이 수모를 받고 있을꼬"
하면서 뒷방에서 한숨만 짓는다. 물론 늙은 부모님은 아무 것도
몰라도 자식들이 하는 것을 알고 싶어하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그런 뒷방 늙은이가 아니시다. 무엇이든지
기도로 그에게 문의하고 보고하면 대소만사(大小萬事)를 최선으로
인도하여 주실 터인데, 불신앙의 무리들은 무엇이나 제 뜻대로 하여
하나님을 섭섭하게 하며 자신의 불행을 초래하는 것이다.
호흡이 끊어지면 죽는 것이다. 우리의 영적 교통의 기도 호흡이
두절되면 벌써 죽어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자가 되는 것이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결단코 범치 아니하리라(삼상
12:23).
살아 계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공의로우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말단 사정을 다 아시는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을 믿어 참된 회개로 죄사함 받고 성령을 받아 빛
가운데서 양심적으로 살며, 항상 기도와 감사와 희락과 화평으로
살며, 극히 강하고 담대하여 악마와 세상과 죄악과 싸워 날마다
백전 백승하는 개선장군이 되시기를 바라는 바이다.
하나님을 믿으라(마가복음 11:2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어떤 목사님이 가난한
달동네에 사시는 할머니 성도님을 심방가게 되었습니다. 그날은 추운 겨울날이었는데 할머니는 얼마나 가난하든지 방에 불도 넣지
못하고, 오돌오돌 떨고 있었습니다. 방에 벽지도 신문지, 광고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할머니 손을 붙들고 간절히
기도를 해 드리고 집을 나올려고 하면서 방을 다시 한번 둘러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벽에 이상한 딱지가 하나 붙어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까 그것은 딱지가 아니고 수표였습니다. 보통 수표도 아니고, 0이 굉장이 많은, 아파트를 한 채 살 수 있는 거액의
수표였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할머니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할머니, 이 수표를 왜 여기다 붙여 놓았습니까?” “응, 내가
파출부하면서 한 할아버지를 돌봐 드렸는데, 그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고맙다고 저걸 내게 줘서 버리기도 아깝고 해서 기념으로 붙여
놓았지, 뭐” 목사님이 깜짝 놀라서 말했습니다. “할머니, 저게 수표라는 거에요. 돈이에요. 저 돈이면 큰 아파트 한 채 살 수
있어요” 할머니는 깜짝 놀랐습니다. 저 종이 한 장이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는 어마어마한 돈이라는 것을 그제야 알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목사님의 도움으로 할머니는 그 수표로 좋은 아파트를 사서 입주하여 편안히 여생을 보내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앞에 할머니가 거액의 수표를 벽에 붙여 놓고 판자촌에서 오돌오돌 떨고 있는 것처럼 우리도 능력의 하나님을 제껴 놓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슬픔에 잠겨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저희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이 말씀은 단 두 마디
밖에 되지 않지만, 지금까지 수 많은 사람들에게 어마어마한 희망과 확신을 심어준 말씀입니다.
Ⅰ. 믿음의 능력(20-23)
20절을 봅시다.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이 아침에 성전 앞을 지나가다가 무화과 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았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예수님이 전날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말했습니다. “랍비여 보소서, 저주 하신 무화과 나무가 말랐나이다” 전날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14절에
보면 잎만 무성하고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를 예수님이 무섭게 저주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열매없는 무화과 나무는 당시 이스라엘의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상징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크고 화려한
헤롯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때 자부심을 느끼고 자기들의 믿음이 대단한 것처럼 착각했습니다. 이렇게 성전이 크고 멋있고, 성대한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크신 능력이 나타나리라 믿었습니다. 실제로 이 성전 짓는데 80년이 소요되었습니다. 만 명의
인부들과 천 대의 마차, 천 명의 사제들이 동원 되었습니다. 공사 완공 후, 수소 300마리를 제물로 바쳤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처럼 웅장한 성전에서 힘이 나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 앞에
서 있는 무화과 나무를 뿌리채 마르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성전 건물이 아무리 크고 화려해도 거기서 능력이 나오는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제사의식이 아무리 성대해도 그들 내면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이 없으면 아무런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능력을 부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하셔서 뿌리채 마르게 하신다고 경고하십니다. 우리도
겉으로 드러나는 의식이나 형식으로 우리를 치장한다고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실제적인 믿음이 없으면 메마른 무화과 나무처럼
심령이 말라 비틀어져서 아무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 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2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Have faith in God. 성전 건물을 믿지 말고, 거대한 조직이나, 돈을 믿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이나 경력, 타이들 의존하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권세가 어디서부터 옵니까? 하나님께로 부터 옵니다. 능력이 어디서 나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죄
사함의 권세,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 우리 가정과 민족을 새롭게 하는 능력, 다 하나님께로 부터 옵니다. 우리 하나님은 말씀 한
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죄와 사단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신 분이십니다. 죽음의 권세를 파하시고 승리를 주신
분이십니다.
로마서 4:17절에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라”고 했습니다. 시편
121:1-6절에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우리 손에 당장 돈이 없고
나를 밀어주는 사람 하나 없고, 내가 비빌 언덕이 없어도 문제되지 않습니다. 나의 도움이 되시고, 나의 능력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한 분을 믿고 의지할 때 얼마든지 기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며칠 후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게 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비롯해서 남은 제자들에게 남겨주실 수 있는 최고의 유산은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자리에 관심이 많았고, 예수님에게 뭔가 인간적인 도움을 기대했습니다. 자리에서, 권력에서 힘이 나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것 주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런 인간적인 보장을 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예수님은 그런 것들을 주실
수도 있으신데 일부러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들을 주면 그런 것들을 붙들고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것 보다 더 본질적인 것, 더
근원적인 것, 모든 축복과 능력의 쏘스가 되시는 하나님 자체를 붙들고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를 비롯해서 제자들이
하나님만을 믿게 되었을 때 후에 얼마나 놀라운 능력을 체험했습니까?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가다가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때 베드로와 요한이 외쳤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베드로와 요한이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을 때 앉은뱅이에게 믿음으로 도전하였습니다.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때
앉은뱅이가 일어났습니다. 룻다에서 중풍병으로 고생하던 애니아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욥바에서 죽은 도르가를 살렸습니다. 성전 앞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여 3천명, 5천명을 회심시켰습니다. 베드로는 어떤 타이틀도 없었습니다. 그가 가진 교회 건물도
없었습니다. 동원할 수 있는 자금력이나 조직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을 때, 그는 두려울 것이
없었고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도 오직
하나님을 믿을 때 다른 외적 조건이 다 열악할지라도 능히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에 연재되고 있는 한국시각장애인선교연합회 신인식(57세) 이사장의 간증을 보고 참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경상도
의령,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나 4살 때 술래잡기를 하다 이마를 뭔가에 부딪혀 실명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도 아파서 병상에 누워
계시고, 자신은 실명해서 앞을 못 보니 얼마나 절망이 되었겠습니까? 너무 많이 울고 눈물을 많이 흘려서 눈물도 말라 버렸다고
했습니다. 청소년기에는 결핵 말기에 신경성 폐렴까지 걸려서 치료를 위해 약을 4년 동안 14만알, 주사를 매일 한 대씩
1400대를 맞았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불우한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이 분은 하나님을 믿고 운명에 도전했습니다. 초등학교때 부터
껌팔이, 볼펜팔이, 신문배달, 전화교환원, 학교 숙직, 드럼 연주 아르바이트를 하며 인생을 개척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시각장애인을 위해 귀로 듣는 잡지인 <사랑의 메아리>를 창간하였습니다. 1994년에는 <종달새 전화도서관>을
개원하여서 시각장애인들이 전화만 하면 매일 신문기사를 읽어주고, 주간지, 월간지 등을 음성으로 들려주는 일을 시작한 것입니다.
장애인들이 히말라야산에도 등정하도록 후원해 주고, 해병대 병영체험도 몸소 실천하였습니다. 공부도 열심히 해서 서울장신대를
졸업하고, 미국 faith 신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였으며, 대구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피아노, 드럼, 트럼펫 연주가
수준급이고, 노래는 성악가도 놀랠 정도의 실력입니다. 전 세계 20여개국에 다니며 집회를 하였습니다. 그가 최근에 쓴 책
『꿈꾸는 자의 무한도전』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안개 속을 거닐고 있습니까? 별거 아닙니다. 일곱
블록을 가득 채우는 안개라도 담으면 물 한 컵 분량 밖에 되지 않습니다. 절망은 가장 게으른 선택입니다. 불행에 절망하지 말고
희망으로 기도하십시오. 믿음으로 기적을 구하십시오” 그는 눈에 보이는 것 아무 것도 없고, 손에 잡히는 것 하나 없고, 의지할 것
하나 없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Have faith in God”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랬을 때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위대한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하나님께 대한 믿음,
그것이 우리의 최고 자산이요, 위대한 가능성입니다. 이 하나님을 믿으면 불가능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어떤 일까지 할 수 있습니까? 2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일반적으로 산은 거대해서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는 자의 특권이 무엇입니까? 그 거대하고 견고한 산을 향해서도 외칠 수 있습니다. “산이여,
들려서 바다에 던져져라” 이렇게 말하고, 이것이 이루어질 것을 믿으면 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옛말에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 말을 아주 복음적인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태산이 아무리 높다한들 하나님보다 높지 않습니다.
하나님 아래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집어 던지시면 산 아니라 한 나라도 바다에 집어 던져 버리실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4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직후 바로군대가 철병거 6백대를 이끌고 뒤쫓아 왔습니다. 오늘날 같으면 탱크 600대를 몰고 뒤쫓아 온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에 대항할 수 있는 무기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애굽 군대를
다 물에 던져 빠져 죽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15:1,2절에서 모세는 이렇게 찬양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하나님은 세계 최강의 군대도 다 들어서
바다에 던지우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홍해도 건너게 하시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바다에 빠뜨리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노라 하지만 실제로 그 마음에 믿음이 없습니다. 거대한 산 아니라, 작은 언덕만 만나도 두려워서 벌벌 떨고 호들갑을 떱니다.
그러나 살아 계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산도, 들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능력의 심히 큰 것이 우리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고후 4:7). 우리 하나님은 얼마든지 산도 들려서 바다에 던지울 수 있고, 뽕나무도
뽑아서 바다에 심으실 수가 있습니다(눅17:6).
신인식
목사님은 그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사람들은 해 봤자 안 될 일 뭐 하러 힘을 쓰냐 라고 말합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계란으로 바위를 치면 깨진 계란의 흔적이라도 바위에 남지 않겠습니까. 단번에 될 수 없겠지만 끝없이 하다보면
언젠가는 되지 않겠습니까? 낙수물이 바위를 뚫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실제로 그 분이 고등학교 들어갈 때 시각장애인은 일반고에
입학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혈혈단신 대구에서 서울까지 올라가서 물어 물어서 정부청사에 가서 문교부 장관을 만나게 해 달라고
졸랐습니다.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자,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또 그 다음 날에도 계속해서 찾아갔습니다. 마침내 장관을
만나서 시험을 보게 해 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물론 그때 바로는 법이 시행되지 않았지만 나중에 법이 개정되어서 지금은 시각
장애인이 일반고도 가고, 판사도 임용되고, 대기업도 들어가고 각 분야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있는
사람과 믿음없는 사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믿음없는 사람은 계란으로 바위를 칠 엄두를 내지 못하지만, 믿음 있는 사람은 과감하게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깨진 계란 자국만 남기지만 나중에는 바위가 깨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차사순 할머니 이야기 아십니까? 전북 완주에 사시는 이 할머니는 손주 손녀들을 직접 자기 손으로
운전해서 유치원에 데려다 주기 위해서 운전면허에 도전했습니다. 70이 다 된 나이에 운전면허 시험에 도전하는 것이 무모하게
보였습니다. 실제로 959번 시험에 떨어졌습니다. 시험보기 위해 지출한 인세만 500만원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포기치 않고
도전해서 960번 만에 합격했습니다. 이 할머니의 도전정신에 감동받은 승용차 회사에서 무료로 차도 한 대 선물해 주고, 승용차
광고모델로 출연하여 ‘올해의 광고모델상’을 받기까지 하였습니다. 아직까지 운전면허증 못 따신 사모님들, 다음 주부터 당장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못할 것이 없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우리 모두 거룩한 뻥쟁이가 됩시다”라고 하였습니다. 거룩한 뻥쟁이. 참 좋은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우리가 하는 말들이 뻥을 치는 것 같고, 얼도 당토 않는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뻥은 반드시 현실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위대한 성경선생이 될 것입니다. 우리 2세들이 세상을 변화시킬
영적 거장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개척하고 있는 캠퍼스들이 복음으로 정복될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처럼
믿음의 말을 선포하고 승리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의심을 극복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마음에 의심치 않으면 그대로 되리라” 야고보서
1:6절에서도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마음에 파고드는 의심과 불신, 부정적인 생각,
인간적인 생각을 이겨낼 수 있습니까?
Ⅱ. 기도의 능력(24-25)
2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우리가 사단이 심는 의심을 극복하고 확신가운데 도전하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의심의 먹구름이 물러가고 마음에
서광이 비쳐 옵니다. 기도할 때 절망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기고, 도전하고자 하는 의욕이 솟구쳐 올라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어 기도할 때 위축된 마음이 풀리고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는 자신감과 열정이 생겨납니다. 또 기도할 때 이미
받은 줄로 믿어야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히11:1).
제이 필립스(J.
B. Philips) 목사님이 쓰신 책 중에 『너의 하나님은 너무 작다 (Your God is too small)』이란 책이
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너무 하나님을 작은 분으로 제한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능히 산도
들어서 바다에 던지우시고, 죽은 자도 살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작은 하나님으로 제한시키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자꾸 믿음의 말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부르짖어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는 우리의
하나님이 너무 작게 느껴집니다. 하나님이 막연하고 추상적이고 관념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르짖어 기도하게 되면 크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을 우리 마음에 느끼게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공급받는 파이프라인과 같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신기하게도 길을 보여 주시고, 용기와 담대함과 지혜를 부어
주십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연결된 파이프 라인이 막히고 녹슬어서 하늘의 능력이 공급되지 않기 때문에 지치고 낙심되고 주저
앉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할 때 신기하게도 힘이 솟구치고 의욕과 열정이 생겨나게 됩니다. 우리가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엘리야가 기도하자 3년 반 동안 메말랐던 이스라엘 땅에 비가 쏟아지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을 때 온
교회가 기도하자 감옥 문이 열리고 베드로가 유유히 걸어 나오게 되었습니다. 히스기야가 금식하며 기도하자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서
앗수르 군대 185000명이 순식간에 죽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인생 살다 보면
기가 막힐 때가 많습니다. 물질문제, 건강문제, 자녀문제 등 우리를 가로 막고 있는 산을 만날 때 힘이 빠지고 기가 막힙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기가 막힐 때 기도합니다.
삼기라고 들어보셨습니까? 기가 막힐 때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기가 막힐 때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난다!
우리가
문제 앞에서 낙심하지 말고 절망하지 말고 기도합시다. 예례미야 33:3절은 말합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우리가 또 한 가지 우리의
기도 파이프라인을 막히게 하는 것이 불편한 인간관계입니다. 내 마음에 누군가 미워하는 사람, 서운한 사람이 있으면 기도의 문이
닫힙니다. 그래서 25절에 보면 기도할 때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우리의 허물도 사하여
주시고 기도도 응답해 주십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인생의 능력의 쏘스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굳게 믿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굳게
붙들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우리도 거룩한 꿈을 꾸고, 꿈을 선포하고, 도전해서 꿈을 성취하는 거룩한 꿈쟁이, 뻥쟁이들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막 11:22)
오늘 저는 “하나님을 믿으라”는 제목으로 여러분과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보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 자리에 모여서 입술로 고백하고 감사하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이 반드시 살아계신 것하고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찾으므로 하나님이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께
소원을 해도 될까 말까 한데 하나님께서 직접 나 살아있는 것을 믿어라. 나 찾으면 상 받는 줄 믿으라. 누가 안 믿겠어요? 저도
오늘 상 받기 위해서 저도 오늘 이 자리에 계신 것을 믿고 또 하나님께서 저의 기도에 간구에 응답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1. 믿음의 요소
우리가 믿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몇 가지 지켜야할 요소가 있습니다. 전부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는데 뭘 믿는 것입니까? 네
믿음을 좀 보여다고 하면 참 난처하지요. 믿음을 보여줄 수 없으니까. 여러분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말하지
세상을 믿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 훌륭한 대통령이 계셔도 우리가 대통령을 위해서 목숨을 걸 수가 없고 부모님이 계셔도
전력을 다해서 부모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환경에도 완전히 믿을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의심치 않고 믿을 수 있는 조건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왜 그처럼 믿을 수 있느냐.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어야 믿을 수 있지 못하면 실력이 모자르면 믿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알고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1장 22절로 23절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좀처럼 마음에 확실히 믿을 자신이 없지요. 너무 위대한 일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누구든지 라고 말했는데 나보고 너는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고 다른 사람은 좀 힘들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좋겠는데 너나 다른
사람이나 누구든지 똑같이 이 산더러 들리어 저 바다에 던져지라 하고 그리고 자기 말한 것을 믿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 믿음이 얼마나 큰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보통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힘을 믿음 속에 가지고 있다는 것을 주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삶에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고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원하시는데 시편 11편 4절에 보면 “야훼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야훼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라고 말씀하셔서 주님이 항상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못하실 것이 없는 하나님인 것을 우리가 늘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지전능, 무소불능하신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막에서 길을 만드시고 홍해도 가르시고 요단강도 말씀으로 갈라놓으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길을 여시면 막을 자가 없고 하나님이 막아 놓으면 열 자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도 살리시고 없는 것도 있게 만드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장 37절에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서 읽고
묵상하고 그 말씀을 생활에 사용하면 능치 못하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생각으로 항상 바라보고 믿고 입술로 고백하고 그 모든 일들이
기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바라봄의 법칙을 따라서 우리가 매일같이 소원하는 것을 바라보고 그다음 그 하나님이 이루어 주실 줄
믿고 입술로 고백을 하고 흥얼거리고 다니면 그 일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생애 속에서 다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생각하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분, 그렇게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 그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이 하나님께서는 나를 뜨겁게 사랑하시고 내가
기도하면 좋은 일을 이뤄주시기를 원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능치 못하신 것을 알고 하나님이 나를 뜨겁게
사랑하사 내가 원하는 것을 이뤄주시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면 믿을 수가 있어요. 스바냐 3장 17절에 보면 “너의 하나님 야훼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전능자, 무엇이든지 능치 못하심이 없는 전능자라는 것을 알고 그 다음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 이 말의 의미를 우리가 전적으로 받아 주기가 힘듭니다. 하나님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여러분, 그런 경험이 여러분 일생에 한두
번은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제가 어릴 때 어머니 손잡고 우리 외가집에 가는데 외가집에 외할머니가 뛰어 나와서 나를 끌어안고
기쁨을 이기지 못하며 나를 안고 막 흔들면서 ‘아이고~ 용기야 잘 왔다. 많이 컸구나!’ 그렇게 나를 좋아해주는 외할머니가
계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언제나 기뻤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일이 여러분 생애 속에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을 너무 좋아해서 기쁨을
이기지 못하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한다. 하나님이 위대하신 하나님이 체면도 차라지 아니하시고 이렇게 하시느냐.
이렇게 하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 성전에 함께 모였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고 기쁨을 이기지 못하십니다. 여러분 보시고
하나님이 너무너무 기뻐하시고 ‘그래, 날 찾아 왔구나. 날 보러 왔구나. 잘 왔다. 잘 왔어.’ 잠잠히 사랑하시며 우리로 말미암아
즐거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2절에 보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이런 말씀을 우리가 조합해서 볼 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위대한 일을 행해 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수가 있습니다.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힘이 있으니까 믿을 수 있고 우리를 너무너무 좋아해서 발을
굴리고 기뻐 외치시는 이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어주실 줄 안즉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 알아보라.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 사람 입의 말 믿지 말라. 알아봐~ 흉악한 사람이다. 못 믿는다. 믿음이란 앎으로 생기고 모르면 못
믿습니다.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이웃을 잘 알면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심스러우면 믿을 수가 없습니다. 알고 믿는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오늘 우리 하나님을 알고 있으므로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실 줄
믿습니다.
2.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막힌 담
그런데 우리가 또 하나 알아야 될 것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막힌 담이 있으면 기도가 응답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가로막힌 담을 헐어버려야 돼요. 하나님은 사랑하셔서 여러분과 나 사이에 있는 담을 헐어버리기를 스스로 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허물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될 계명을
주셨습니다.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계명은 옛날에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주신 것이 이 계명이지만 우리에게도
굉장히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우리도 스스로 마음속에 세워놓고 비춰 보아서 십계명에 어긋나는 것을 늘 회개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방향을 제시해 주는 하나님의 계명이기 때문에 쓸데없는 것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게 쓸데있는 것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가, 잘못한 것을 깨달아 알려면 십계명을 앞에 두고 생각을 하면 쉽게 우리 잘못을 알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지켜야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여러분은 이미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사이 좋게 지내려면 계명을 지켜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헐어야 되는 것입니다. 계명을 지켜야 구원받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당신 계명 지켜야 구원 받소.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계명은 우리가 행동이 하나님 뜻을 거스리느냐. 받아들이냐를 보여주는 계명이지 구원을 받는 조건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가로놓인 계명이 10개가 있고 그 계명을 우리가 살펴보아서 하나님과 어긋나는 것은 그 자리에서 회개해 버리면
돼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실(요일 1:9)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쉽게 예수님의 보혈로 청산해 버리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가로놓인 계명은 나 이외에
다른 신들을 내게 두지 말라. 우리가 다른 신들을 주면 그를 치우고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우상에 절하지 말라. 셋째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 넷째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이것 다 조금도 어렵지 않습니다. 십계명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가 그 담을 스스로 만드는 것인데 어렵지가 않아요. 다른 신을 여러분 섬기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잖아요. 다른
신 섬기고 여기 와서 하나님 섬기는 분 없잖아요. 우상을 일부러 만들어 놓고 절하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의 이름을 장난삼아
사용하는 사람은 가끔씩 있을지 몰라도 우리 전체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라. 유대인들은 토요일날
안식을 지키나 우리는 예수님이 주일날 세상을 떴다가 부활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부활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특별히 토요일날 안식을 지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주님이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주일날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입니다. 그 다음 나와 이웃과의 관계 계명을 우리가 알고 지키는데 네 부모를 공경하라. 부모 공경은 다 하지요. 살아계실
때 더 공경하면 좋겠지만 세상 뜨고 난 다음에 더 공경이 되는 것입니다. 어버이 섬기기를 우리가 잊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살아계실 때 섬기는 것이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아무리 울고 통곡을 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의 집을 탐하지 말라. 말라 말라 하는데 우리가 이런 것들은 마음에
곧장 회개하고 통회하고 자복하고 돌이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은 여러분을 지옥에 보내려고 하나님이 주신 계명이
아니라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긋남이 없이 깨끗하고 좋은 관계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구원은
예수님을 믿으므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이므로 절대로 타협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을 받지만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가지기 위해서 우리 행위를 정결케 하는 것이 십계명이기 때문에 십계명은 여러분의 발을 깨끗이 해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이외에도 우리가 기도하는 중에 혹은 말씀 읽는 중에 성령이 마음속에 가책을
주십니다. 성경께서 이것은 버려라. 이 길로 가지 마라. 내가 지시하는 길로 가라. 여러 가지 여러분에게 고요하고 잠잠하게
성령께서 말씀을 해주시는데 그 성령의 꾸짖으시는 말씀은 그 자리에서 고백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기도응답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을 헐어버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도응답을 주시고자 해도
하나님이 좋지 않게 여기시는 일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막혀 있으면 하나님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대로
회개하면 씻으시고 하나님이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상 이상 하나님은 기도를 응답해 주시기를 원하시고 우리는
기도응답을 좀 많이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 동안에 수천 번 수만 번이라도 기도응답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 응답을 주시므로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세상에 증명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응답은 내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증거하는데 참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응답을 많이 받게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고 성경에 믿음이 응답받기 위해서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만사 제켜 놓고 하나님 먼저 모시고 하나님 기뻐하는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다른
좋아하는 것을 비교해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제켜 놓고 그것을 먼저 하면 하나님이 기뻐 안 하시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친구가 있는데 친구가 모든 다른 무엇보다도 나를 좋아해서 나와 같이
일을 도모하기를 원하시면 그 친구 정말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친구가 있는데 자기 좋아하는 일 다
먼저 해놓고 난 다음에 쓸데없는 시간에 날 기뻐하고 받아주면 없는 것보다는 낫지만 마음에 별로 좋지 않습니다. 제가 50년
목회해 오면서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는데 목사님 중에 아주 우리가 한때는 좋았던 사이를 가졌던 친구가 있습니다. 그도 밤중에라도
내가 오라고 하면 뛰어오고 나도 밤중에라도 나를 보고 와달라고 하면 옷 갈아입고 그 집으로 갑니다. 그렇게 아주 다정한 친구인데
세월이 흘러가고 난 다음에 어떻게 되었는지 그 사람이 나를 멀리하는 것 같고 나도 그 사람을 멀리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도 점심
먹자고 전화를 해놓으면 그 점심 먹는 것은 한 달이나 두 달이나 지나야 될까 말까 합니다. 자기 좋은 일 한다고 시간 안
내놓거든요. 며칠 전에도 나에게 조목사, 우리 모여서 한번 점심 같이 하자. 내가 같이하지. 시간 내줘. 내가 알아볼게.
알아보기는 뭘 알아봐요. 지금 나 안 알아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친구보다 좋은 친구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러므로 그 친구는 내
좋은 친구들 다 만나보고 시간이 여유가 있으면 만나볼 것입니다. 박수쳤다고 그 사람 나에게 화낼지 모르니까 박수치지 마십시오.
먼저 하고 나중한다. 좋은 것을 먼저하고 좋지 않은 것을 나중에 하는 것은 우리 생활에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하나님을 먼저 좋아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두 번째로 제켜
놓고 신앙생활하는 일이 없도록 제가 간절히 부탁합니다. 우리가 성수주일하기가 굉장히 힘든 것은 사실이에요. 친구들이 놀러가자고
특별히 말하든지 심방가자고 하든지 다른 어떤 쇼핑을 가자고 하든지. 그 날이 주일입니다. 야~ 오늘 주일이기 때문에 나는 못
간다. 예배드리고 가야 된다 하면 언제 그렇게 깊이 신앙이 들어왔노? 친구도 모르냐? 두고 보자! 아이고 알아줘~ 이해해줘~ 나
이해 못해! 그러면 성수주일을 포기하고 그 친구하고 같이 갈 때가 가끔 있어요. 저는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과 다르잖아요.
나는 목사고 여러분은 평신도니까. 여러분은 그 친구를 따라가는 친구가 많이 있어요. 그냥 가면 좋은데 나에게 허락받기 위해서
전화를 내게 합니다. 오늘 친구가 꼭 나가자고 하는데 목사님 갔다 오겠으니 용서해 주십시오. 하나님께 용서 빌어야지 왜 내게
용서를 빕니까? 그러면 제가 고약한 소리만 좀하고 말지요. 성수주일 안 하고 답답할 때는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하고 잘된다
잘돼! 그래도 한번만 눈감아 주십시오. 내가 눈 감는다고 좋지는 않지요. 그러나 하나님께 기도하면 용서는 해주시겠지만 그 일을
자주하면 하나님 나중에는 용서도 안 해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 예배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대단히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를 우리가 착실히 드리므로 하나님을 중요시 여기는 것을 온천하에 나타내는 것입니다.
주일날은 우리가 예배 드리는 날입니다. 더구나 오늘 성찬예배 드리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날입니다. 그리스도의 깨어진 몸을 먹고
흘리신 피를 마시고 예수님이 내 안에 내가 예수님 안에 들어간다는 이 예배는 정말 중요한 의식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 23절로
24절에 보면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나가서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것은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하나님이 우리 예배를 굉장히 기뻐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십니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는 이 모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드리면 예배 중에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번에 제가 대만에 가서 성회를 인도하고 왔습니다만 내가 알지 못하는 오랜 옛날에 나의 집회에
참석했다가 병이 나은 대만 사람들 여러명이 제게 와서 인사를 하는데 나는 본적이 없어요. 기억이 안나요. 그러나 그분들은 내가
싱가폴에서 집회할 때 왔다. 말레이시아에서 집회할 때 왔다. 그런 먼 곳에 기도를 받으러 와서 기도를 받고 병이 깨끗이 낫고
건강하게 되어서 낫게 됨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하고 얼마나 주님을 기뻐하는지 몰라요. 그러한 사람들을 볼 때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 주님께 받은 은혜를 기뻐하고 감사드리면 얼마나 즐거워하실까 마음에 감격이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정말 인산인해라고
하더니만 인산인해로 사람들이 모여 왔어요. 주님을 사랑해서... 그래서 말씀을 증거하는데 내가 평안한 것은 주지사에게
물어봤습니다. 나 한시간 이상해도 괜찮습니까?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열 시간이고 설교해도 좋습니다. 그러니까 옛날로 돌아가면
마음에 평안하게 증거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마음에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사람들이 내게 와서 말하기를 원로목사님이 아니고
원래목사님이다. 여기서는 원로목사님으로 하지 말고 원래하던 식으로 해주십시오. 그래서 그대로 해줬지요. 원래 하던 대로 오래하고
전부 기도하고 나은 사람들 앞에 불러다가 간증을 시키고 원래대로 하니까 참 재미있고 좋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예배시간에는
원래대로 안할 것이니까 조심하십시오. 그러나 우리가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을 귀중하게 여긴 만큼
우리를 귀중하게 여겨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활 속에 십일조를 꼭 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십일조는
율법시대에 하던 것이라 안 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내가 십일조를 꼭 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안 내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라고 성경에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십일조를
내면 다른 사람에게 십일조를 내라고 큰소리 할 수 있는데 저는 예수님을 알고 난 이후로 십일조를 도둑질한 경험이 기억이 안
납니다. 언제나 10분의 9, 10분의 8 이렇게 냈을 때가 많지 도둑질한 적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물질적으로 필요할 때
기도하면 얼마나 담대한지 모릅니다. 주님 보세요. 내가 주님보다도 물질을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 십일조 꼭 드린 것 주님
기억하지요? 내가 지금 돈이 필요하니까 그만한 돈을 주님 좀 주십시오. 내일까지요. 너무 기다리지 말고 주십시오. 그날에 꼭
생겨나요. 내가 하나님께 물질 구해서 못 받은 적이 없어요.
말라기 3장 10절에 “만군의 야훼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십일조를 드리면 축복을 받겠다고 한 것입니다.
내가 개척할 때 예화로 종종 드는 유화문씨와 이초희씨 전도에 대한 것을 오늘도 기억합니다. 하루는 주일날 아침에 이초희씨가
머리에 무엇을 이고 왔어요. 그때는 교인수가 적으니까 다 내려주고 악수하고 인사하는데 이게 뭡니까 하니까 십일조입니다. 무슨
십일조를 머리에 이고 옵니까? 쌀입니다. 쌀이요? 열어보니까 쌀 반, 진흙 반 그렇게 되었어요. 무슨 쌀 십일조가 진흙이 많습니까
하니까 주저 앉으면서 울기 시작해요. 그래서 내가 등을 두드려 주면서 ‘울지 말고 말하라고 기도해 줄테니까 말하라고.’ 이
교회에 주의 종이 인도하는 대로 나와서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십일조 드리라고 해서 꼭 내게 생긴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렸는데
이번에는 어제 저녁에 우리 남편이 10년동안 술주정뱅이가 술 끊었다는 말을 듣고 친구들이 축하한다고 함경북도 도청에 나가는
친구들이 모여서 쌀 한가마니를 선물로 주었어요. 다른 것 선물로 줄 것이 없으니까 쌀을 한가마니를 주었는데 그때 가마니는 이런 큰
가마니가 아니고 이런 조그마한 부대다가 보따리도 아니고 부대입니까? 부대에 줬어요. 그 쌀을 보고 난 다음 얼마나 오랫동안
쌀구경을 못했든지 기겁을 했어요 그 부인이... 그래서 그 쌀을 안고서 너무 기겁을 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하는데 성령께서 마음속에
십일조, 십일조, 이중에 십일조는 내꺼다. 십일조. 아이구 가난이 얼마나 원수고 미움인데 또 가난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그릇가지고
오너라 이것 십일조 떼자! 그러면서 십일조를 부어놓고 난 다음에 기도를 하니까 너무 아까워서 도로 넣자. 하나님이 뭐 이렇게
오랫동안 우리가 쌀 못 먹었는데 이것 먹는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벌 주겠느냐. 도로 부어놓자. 또 도로 부어 놓았다가 아니야
아니야~ 하나님이 그 무서운 가난을 도로 우리에게 주면 어떻게 하느냐. 그래서 도로 갖다 놓았습니다. 초저녁에 붓기 시작한 것이
새벽기도할 때까지 부었다 넣었다. 우리 보기에는 우습지만 얼마나 절실한 것입니까? 그래서 새벽기도 시간이 늦어질까 싶어서 입구를
묶지 아니하고 그대로 머리에 이고 오다가 눈물이 눈을 가려서 도랑에 걸려서 자빠졌어요. 이 논바닥에 다 흩어졌어요. 그 논바닥에
진흙하고 다 끓어 모아서 울면서 이제 진흙 반, 쌀 반 해서 가져와요. 그것을 가지고 그렇게 우는데 나중에는 그 울음에 마음이
감동되어서 나도 울고 그도 울고 주위에 오는 사람들도 울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는데 하나님이 그 진흙에 섞인 쌀을 받으시고 난
다음 그 다음부터 그 집이 점점 생활이 부요해져서 나중에는 우리 교회에서 사라졌어요. 잘 사는 동리로 이사를 가서 잘 사는 동리
교회로 나가고 우리 교회는 옛날교회로 바이바이 당하고 말았습니다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진흙 반, 쌀 반 된 십일조도 기쁘게 받으시고
난 다음 내가 축복해 주었는데 그 축복이 그 집에 이르렀어요. 나중에 그 집 아홉 명의 아들 중에 두 사람은 주의 종이
되었어요. 하나님이 얼마나 같이 하시는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로 역사하려면 반드시 십일조를 하나님 앞에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십일조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개인 소득의 십일조는 물론, 회사 이윤의 10%를 사회에 기부하는 사장님도 계셨어요. 미국
한인사회에서 입지전적 인물로 통하는 ISI의 설립자 김진수 대표는 개인 소득의 십일조는 물론,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기업 환경
속에서도 회사 수익의 10%를 꼭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가 이처럼 하나님 중심의 경영으로 나아가자, 하나님께서 도와 주셔서 자기
집안 한 구석에서 홀로 창업했던 회사가 500명을 거느린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현재 사업에서 은퇴한 그는 자선재단을 설립해서
연간 20만 달러를 후원하고, 또 비즈니스 선교로 제2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병원의 의사는 십일조 수술을 해요. 돈
많은 사람에게는 돈을 받고 돈 없는 사람에게는 십일조만큼 공짜 수술을 해줘요. 그래서 공짜수술을 받는 10%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축복을 해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십일조를 드리는 모습들은 다양하지만 그 마음은 동일합니다. 십일조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나의 얻는 모든 수입의
10분의 1은 주인에게 돌려드린다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여러분, 십일조를 꼭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4. 믿고 구하라
그 다음에 믿고 기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다 이렇게 했으니 알아서 해주십시오. 하나님이 알아서 안 해주십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꼭 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없는 것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지 아니하면 없습니다. 꼭 하나님께 구하는데
보통 구해서 될 것도 있고 좀 열심히 뜨거운 마음으로 구할 것도 있는데 보통은 여러분, 자고 깨고 일하면서 마음속에 기도하면
응답해 주시는 기도가 많습니다. 저는 낯 씻다가도 하나님 알지요? 낯 씻고 있으면서 내가 기도한 것 응답해 주십시오. 자기 전에
침대 올라가기 전에 하나님께 ‘하나님, 꼭 응답해 주십시오.’ 어제 저녁에도 올라가면서도 나 피곤해서 쉬어야 되겠는데 ‘간단히
하겠습니다. 하나님, 내일 아침 설교할 때 목소리가 청명하게 나오게 해주시옵소서.’ 오늘 아침 목소리가 청명하잖아요. 기도를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평시에 평범하게 늘 말하는 것으로 해도 되는 것입니다. 좀 열심히 하려면 다른 일 치워 놓고 시간 내어서
하고 아주 긴박하고 답답한 일을 당했을 때는 금식기도가 굉장히 효과가 있습니다. 다 제켜 놓고 오산리기도원으로 가서 금식으로
기도하면 그것은 굉장히 효과가 있습니다. 저는 답답한 일을 당했을 때 금식기도 하고 나면 마음이 평안해지고 꼭 응답이 와요.
그래서 믿고 구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1장 24절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하나님과 관계가 나쁘지 않고 좋은데 하나님 내 기도 들으신다고 믿고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응답이
와요. 우리 기독교는 기도응답의 종교인 것입니다. 기도응답 받지 못하는 종교가 무슨 효과가 있겠습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우리는 기도로써 섬기면서 나갈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돌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2장 29절로 30절에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하나님을 죽도록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고 계신 것을 여러분이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43장 1절로
4절 우리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야훼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야훼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하나님께서 보통 사랑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물을 통할 때도, 불을 통할 때도, 물 가운데서 불 가운데서 너와 같이 하여 건져 주겠다. 성경말씀 거짓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닌지라 식언치 아니하시고 인생이 아니신지라 거짓이 없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때 여러분 진실로 그 마음을 열어놓고 말씀하시는 것이므로 적당히 넘기려고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여러분께서는 하나님께 사랑받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고 사랑하는 것 훨씬 이상으로 하나님께 사랑받고 있습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하나님께 사랑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이 사랑하고 살아계시다는 것을 늘 입술로 중얼거리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은 날 사랑하시고 계신다.
마틴 루터는 종교개혁을 추진하면서 수많은 위험과 박해에 직면했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탁자에
손가락으로 “그는 살아 계시다! 그는 살아계시다!(Vivid! Vivid!)”라고 늘 기록을 하고 읽었습니다. 대다수가 교황의
편이었고 모든 상황이 자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그는 자기 힘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삶의
어려운 순간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그 말씀을 늘 외웠습니다. 여러분께서 어려운 일을 당하시면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 하나님이 나와 같이 계신다. 자기에게 말을 하는 것은 굉장히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주관하고 계심을
믿으면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한번은 마틴 루터가 완전히 종교개혁을 실패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자기를 따르던 사람들이
배반해 나가는 사람들이 많고 교황이 분노해서 군대를 동원해서 그를 체포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가 완전히 기가 죽어서
힘을 다 잃고 있는데 부인이 저쪽 방에서 통곡을 하고 울고 있다 말입니다. 그래서 불행에 불행이 다가왔나? 왜 이러느냐?
일어나서 가보니까 부인이 초상난 집 수의를 입고 발을 뻗고 통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보! 누가 세상을 떴어? 이럴 수가
있느냐. 내가 이렇게 고통을 당하는데 또 가족 중에 누가 세상을 뜨다니 하나님이 이럴 수가 있느냐고 하니까 아니에요 아니에요~
모든 것이 끝났어요. 뭐가 끝났느냐. 하나님이 세상을 뜨셨다구요. 무슨 장난 같은 소리를 하느냐 하나님이 세상을 떠나셨다니! 나는
당신만 믿고 사는데 당신이 이런 것을 아직까지 본 적이 없는데 당신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이 세상을 뜨지 않고서야 이렇게 당신이
초상집 상주처럼 행동할 수가 있습니까? 당신을 보니 하나님이 세상을 뜨셨어요. 아이고 하나님 이 세상 떴으니 우리는 어떻게 사노?
그 부인이 머리가 좋지 않습니까? 나보다 아이큐가 좋은 것 같아. 다른 설교하는 것보다 효과가 더 발생 되었어요. 당장 하나님께
회개하고 일어나서 용기와 힘을 가지고 종교개혁을 계속해서 오늘 종교를 개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데 왜 죽은
하나님을 모신 것처럼 힘이 빠졌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살아 계시죠? 결코 힘을 놓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이 여러분
보고 하나님 세상 떴구나. 저 사람 행동하는 것 보니... 이렇게 말하면 절단입니다. 하나님은 돌아가실 수가 없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여러분이 섬기는 하나님이 너무 꾀죄죄하고 적은 것같이 보입니다.
하나님이 크신 하나님 같으면 가슴을 펴고 크신 하나님을 모신 사람으로서 당당하게 살아야 될 것인데 꾀죄죄 해서 하나님 믿으면
그렇게 꾀죄죄하고 있느냐. 네 하나님 얼마나 꾀죄죄하기에 네가 그 모양이냐. 그렇게 사람들이 말하거든요.
필립스(J.B. Philips) 목사님이 쓴「네 하나님은 너무 작다」라는 책은 “20세기 교회를 움직인 100권의 책” 중에
하나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 책에서 ‘현대 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크신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라고 지적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인생의 크기는 당신이 믿는 하나님의 크기에 따라 결정된다.”
하나님이 크십니까? 그러면 이제부터 크신 하나님 모신 행동을 하고 꾀죄죄하게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구하거들랑 굵직하게 구하십시오. 하나님이 크게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주의 종들이 우리는 적은 교회를 자랑한다. 큰 교회를 자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속으로 실제 양심적으로는
큰 교회를 사랑하는데 큰 교회가 안 되니까 적은 교회를 사랑한다고 말을 하는데 큰 교회를 세워서 교회 중에 들어오는 수입을 약한
교회들하고 나누면 좋지 않겠습니까? 큰 꿈을 아예 꾸고 목회를 하려면 큰 하나님이 축복해 주신다고 입을 넓게 열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가난한 교회와 연약한 성도들과 많이 나누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 내 제자 중에 한 사람 큰 꿈을 꾸고서 나가서
교회를 개척해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우리 교회 있을 때도 열심히 일 잘했어요. 그런데 우리 교회 조금 못 미칠 만한 교회를
지었었습니다. 짓고 난 다음에 빚을 잔뜩 졌는데 그 빚을 못 갚으니까 하는 말이 뭐냐면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고
목사님이 설교하는 것을 듣고 나는 입을 열었는데 너무 크게 열어가지고 입이 찢어져서 지금 고생을 하고 있다. 내가 감동을
받았어요. 입이 찢어질지라도 입을 크게 한 번 열어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도 자기가 잘못 믿었다는 말은 안하고 입을 넓게 열라고
해서 넓게 열었는데 그만 찢어져서 지금 피가 나고 어려운데 아물면 된다고... 아물면 되는데 하나님이 아물게 해줄실 줄 저는
확실히 믿습니다. 크게 믿어서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적게 믿고 어려움을 당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홍해수가 갈라지는 것이 항복하여 들어가서 종이 되는 것보다 낫지 않습니까? 여러분, 필립스 목사님이 책에서 기록한 대로 인생의
크기는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의 크기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므로 여러분이 큰 하나님, 좋은 하나님을 섬긴다면 여러분 크게 좋게
구하고 믿고 의지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게 해주실 것입니다. 능력이 한이 없으시고 사랑이 넘치시는
하나님을 마음속에 믿고 계시면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그대로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은 왜 기도 응답 안
해주십니까? 또 안 해주시겠지? 어렵지? 안되겠지?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능력이 한이 없으시고 사랑이
넘치시는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기 때문에 이 성경구절을 생각하고 기도하세요.
이사야 40:28-31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야훼,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야훼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왜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라고 했느냐면
독수리는 회갑이 되면 새로 옷을 입습니다. 독수리가 회갑이 되면 바위에 올라가서 햇빛이 비취는데 아무것도 안 먹고 햇빛을 보고
눈을 반짝반짝 하고 있으면 털이 다 떨어져 나옵니다. 몸에서 털이 떨어져 나가고 날개쭉지는 입으로 찢고 바위에 쳐서 떨어뜨리고
나중에는 완전히 통닭처럼 되버립니다. 그러면 도로 새털이 나요. 또 새털이 나고 깃털이 나서 자기가 보니 조금 날만하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가는 것입니다.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않는 것은 야훼를 앙망하는 자는 주님을 쳐다보고
주님을 기다리는 자는 낭패, 실망, 절망이 다 사라지고 새로운 꿈과 희망과 용기가 생겨나서 새로운 능력으로 새로운 인간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한 사람들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7-8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분명한 목표를 갖고
계속해서 구하십시오. 그리하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기부왕으로 불리는 폴 마이어(Paul J. Meyer)는 “목표 설정을
통해 성공에 이른다”고 말합니다. 그 원리는 보험 세일즈를 했는데 나이 27세에 백만장자가 된 것은 목표를 두고 낙심하지
아니하고 항상 목표를 마음속에 꿈꾸고 감사한 결과에 27세에 백만장자가 된 것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이루는 열쇠는 바로 목표
설정에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위해, 가능한 한 많은 방법으로, 가능한 한 오랫동안, 가능한 한
많은 좋은 일을 하기 위해서 부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너 혼자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기 위해서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많은 삶을 위해서 가능한 한 많은 방법으로 가능한 한 오랫동안 가능한 한 많은 좋은 일을 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수익의 50%를 하나님을 위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다는 약속을 평생 지켜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가족은 전
세계에 40개 이상의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데, 세계적으로 30개가 넘는 사역단체와 자선단체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생생하게 꿈꾸고, 열렬하게 소망하고, 진실하게 믿고, 열정적으로 행동하면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반드시 이루어진다.”
내가 늘 여러분에게 말씀하는 것 한 가지인 것입니다.
바라보고 꿈꾸며 뜨거운 마음으로 믿으며 입으로 확신하면
이루어진다. 그가 늘 말하는 것은 제가 마음속에 재밌게 읽기도 합니다. Whatever you vividly imagine,
ardently desire, sincerely believe, and enthusiastically act upon must
inevitably come to pass! 분명하고 올바른 목표를 가지고 믿음으로 구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놀라운 응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응답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본질
序 論
인간의 본질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는 점에 있다.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계시요 하나님의 완전하신 덕을 반영하는 거울 이지만 모든 피조물 가운데 유독 인간만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요 가장 높고 부요한 신적 계시이다.
창세기 첫장에서 우리는 인간 창조의 유독성(惟獨性)을 발견 한다. 하나님 께서 다른
동물들을 창조 하실때는 '각기 그 종류 대로' 만드 셨으나(21,24,25절), 유독 인간만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 하셨다.
창1:26에서 보는 바와 같이 26절의 주동사는 복수 이다. 많은 학자 들이 이
복수에 관하여 다양한 해석을 시도 보편적으로 삼위 일체를 함의(含意) 하는 것으로 석의 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26절은 또한
인간 창조에 앞서 신적 협의(協議)가 있었다는 사실을 시사 하기도 하는데 이점은 인간 창조의 유독성을 다시금 드러 낸다. 왜냐
하면 다른 아무 피조물에게서도 인간 창조시 나타난 것과 같은 표현을 결코 발견 할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서의 인간에 관해 잠시 고찰해 봄으로써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목표로 하는 우리의 삶에
도움을 얻고자 한다.
本 論
1. [形象](셀렘,ࠎࠌࠕ )과 [貌樣](데무드, ࠛࠂࠍࠃ )]의 성경적 용어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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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형상을따라우리의모양대로우리가사람을만들고" (창1:26).
위의 본문 에서 [形象](셀렘,ࠎࠌࠕ )과 [貌樣](데무드, ࠛࠂࠍࠃ )]이라는 말이 교대로 사용 되어 있다. 이 사실에 대하여 형상과 모양을 별개의 개념으로 구분 하려는 시도가 있으나 그것은 공허한 일이다.
히브리 원문을 보면 '형상'과 '모양'이란 두 표현 사이에 아무런 접속사가 없다. 그러나
칠십인경과 라틴 벌게이트 역(Vulgata)에서는 και와 et라는 접속사가 첨가 되어 있다. 그래서 '형상'과 '모양'이 전혀
다른 별개의 내용을 가리키는것이 아니냐 하는 인상을 주고 있다.
그러나 히브리 본문에 나타난 데로는 '형상'과 '모양'이란 두 표현 사이에 아무런 본질적
차이를 발견할수 없다. 이와 같은 점은 본문과 더불어 다른곳에 나타난 관련 귀절들의 용례(用例)를 살펴 보면 더욱 분명히 드러
난다. 창1:26에서는 [形象](셀렘,ࠎࠌࠕ )과 [貌樣](데무드, ࠛࠂࠍࠃ )]이란 용어가 둘다 사용 되었으나, 27절 에서는 단지 [形象](셀렘,ࠎࠌࠕ )이란 단어만 사용 되었고 반면 창5:1에서는 [貌樣](데무드, ࠛࠂࠍࠃ )]이란
용어만 사용 되었다. 그리고 창5:3에서는 두 용어가 다시금 사용 되었으나 1:26과는 역순(逆順)으로 표현 되었다. 그리고
9:6에서는 다시금 '형상'이란 말만 사용 되었다. 만일에 인간 존재의 상이한 국면들을 묘사 하기 위하여 이 두 용어들이 사용
되었다고 한다면 우리가 살펴 본바와 같이 이 두 용어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교호적(交互的)으로 사용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용어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고 말할수 없다. 칼빈도 기독교 강요에서 그와 같은 용법은 히브리 인들의 관습
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즉 히브리 인들의 어법에는 반복이 많이 사용 되고 있는데 한가지 사실을 표현하기 위하여 종종 두 낱말을
쓸때 가 있는데 이를 연구법(parallelism, 聯句法)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두 용어가 비록 일반적인 의미에서 유사어로 사용 되었다고 할찌라도 양자 사이에 개념의 차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형상'에 해당하는 히브리말 [形象](셀렘,ࠎࠌࠕ )는 "새기다"(to carve)혹은 "탁마(琢磨)하다"(to cut)는 의미를 가진 어근 으로 부터 유래 되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동물이나 인간을 조각한 모양을 묘사 하기 위하여 사용 되었다고 할수 있고 '모양'에 해다되는 [貌樣](데무드, ࠛࠂࠍࠃ )라는
말은 "비슷하다"(to be like)는 의미를 가진 어근으로 부터 파생 되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의 '모양'이란 말은
형상이 닮았다는 사실을 강조 하고 있다고 할수 있다. 이와 같이 '형상'이란 말이 강조 하는 바는 하나님은
원형이시고(dearchetype)인간은 그 모형(de ectype)이라는 사실이요 '모양' 이란 말은 그 상(象)이 모든 면에
있어서 원형과 일치 한다는 것을 강조 한다. 따라서 두 용어의 연구법(parallelism, 聯句法)적 용례로 부터 추론 할수
있는 사실은 것은 그와 같은 표현 양식을 통해서 인간이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란 관념이 드러 난다는 점이다.
2. 성경 신학적 관점(본문의 문맥을 통해서 나타난)을 통해서본 [形象](셀렘,ࠎࠌࠕ )과 [貌樣](데무드, ࠛࠂࠍࠃ )]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의 의미
26절과 27절은 인간 창조에 대해 말하고 있다. 즉 이 두절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들 계획과 목적을 세우신 사실(26절)과 사람을 만드신 사실(27절)을 언급하고 있다.
먼저 26절을 원어를 직역해서 살펴 본다면 아래와 같다.
그리고하나님께서말씀하셨다
우리가 만들자
사람을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양처럼
그리고 그들로 다스리게 하자
그 바다의 고기를, 그리고
그 하늘의 새를, 그리고
그 육축을, 그리고
그 땅 모두를, 그리고
그 땅위에서 기는 모두를(26절)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른 동물과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대로 지으려는 목적은 어디에 있었는가? 이 목적은 26절 후반절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후반절은 "그들로다스리게하자"로 시작 된다. 즉 [다스리게] 하는것이 사람을 지은 목적이다. 하나님께서
그들로 다스리게 하려는 것이 무엇인가? 다섯개의 목적어가 나열되어 있는데 이것들은 이제껏
엿새동안 지음받은모든 동식물을 총 망라한 표현이다. 이러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시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
하셨다. 이 사실은 27절이 잘 말해 주고 있는데 이를 직역 하여 보면
a. 그리고하나님께서창조하셨다그사람을
b. 그의형상대로
b.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대로
a. 그분께서창조하셨다그를 (상반절)
남성과여성(으로)
그분께서창조하셨다그들을(하반절)
26-27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과정에 대해서 알만한 단서는 찾을수가
없다. 그런 단서는 창세기2:7에 가서야 발견할수 있는데 반면 창2:7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려는 계획과 목적등 여기서
알수 있는 내용이 생략 되어 있다. 이렇듯 같은 주제를 다루면서 그 내용에 차이가 생기는것은 기록자가 말하려는 의도 또는 촛점이나
강조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27절에서 강조 하고자 하는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첫째: 누가 사람을 창조 하셨으며,
둘볁: 지음 받은 사람은 어떠한 존재 인가 하는점이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창조 하셨다'는 언급을 세 번씩이나 되풀이 함으로써 사람을 창조한
분은 바로 하나님 이시라는 사실을 크게 강조 하고 있다. 그 다음 사람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대로
지음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부각 시키고 있다.따라서 우리가 사람의 존재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얻으려면 무엇 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의 의미를 파악해야 할것이다.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견이 있으나 문맥에 가장 알맞는 것을 살펴 보고자 한다. 우선 이 표현은 사람에게만 적용되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본문에서
사람을 다른 동물과 구별 지을수 있는 독특한 차이점을 찾은 다음 그것을 이 표현과 연관 시켜 본다면 차이점은 단 한가지 인데
그것은 인간은 "다스리느"존재로 지어 졌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는 표현은 인간의
"다스리는역활"과 연관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대로' 지으셨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사람을 '다스리는 자'로 세우셨다느것을 의미한다. 적어도 이문맥에서는 이런 의미로 이해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6절에서도
살펴본 바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대로'지으시려는 목적은 만물을 다스리게 하려 하심이었다. 이러한
문맥적 이해가 타당 하다는것을 입증해 줄만한 성경 안팎의 증거들이 있다.
고대 근동 에서는 '신(神)의 형상'이라는 표현에 대한 개념이 분명하였다. 왕이 가진
권위와 그의 통치는 신의 권위와 통치를 대신하는것으로 간주 되었고 이런 의미에서 왕은 신의 권력을 그대로 소유 하고 있는 이른바
신의 복사본(copy)인 것이다. 그리고 복사본(複寫本)이란 원형을 본뜬 것이므로 '형상'(image)이라는 표현으로 나타
내었다. 따라서 '신의 형상' 이라는 표현은 다름아닌 '왕'을 지칭하는 것이다. 일차 독자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가나안으로 이끌어
가는신은 하나님 이시다. 그렇다면 일차 독자들에게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는 표현은 '왕'이라는 개념으로 이해
되기에 충분하다. 온 세상에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다스림을 나타낼 형상 으로서 사람을 창조 하셔서 그로 하여금 세상
만물을 다스리도록 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 께서는 자신의 다스림을 나타 내시려고 인간(남자와 여자)을 왕으로 세우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뜻데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데로 다스림 으로써 그분의 다스림을 피조물 세계에 반영 하도록 지음
받은 것이다. 이제까지의 논술을 몇가지의 성경적인 증거를 통하여 입증한다면
첫째 증거는: '다스리다'는 동사 "라다"(radah)의 쓰임을 통해서 이다.
이 동사는 구약 성경의 여러곳에 나타 나느데 '다스리다'라는 의미로 쓰일 경우에는 특이
하게도 왕의 다스리는 행위를 묘사 하고 있다(왕상4:24; 사14:6; 겔34:4; 시72:8; 110:2). 따라서 이 동사가
창세기 1:26, 28에서 선택된 것은 아담의 다스리는 행위가 통치의 행위 임을 시사 하는것이다.
두 번째 증거는: 성경 전체에 비추어 볼때 아담은 분명히 왕의 역활을 수행했다는 사실을
들수 있다. 우리가 아느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세가지 직임(職任)은 왕직, 제사장직, 선지자직이다. 이것은 두번째 아담으로서 갖는
직임이다. 바꿔 말하자면 그리스도 께서 이 세 직임을 행하시는것은 첫 사람 아담이 인류의 대표로서 그런 직임을 행하는 일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인류의 대표로서 그 직임을 맡아 행하셨던 것이다. 이런 까닭에
그리스도를 가리켜 두째 아담이라고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고찰을 통해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는 점을 살펴 점을
살펴 보았으나 어떤 점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닮았는지 창조 기사 가운데 정확히 나타나 있다고 확언(確言) 할수는없지만 그럼 에도
불구 하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유사성(類似性)을 어느 정도 발견 할수 있다고 보는데 창1:26에서 볼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피조물에 대한 통치(dominium)를 인간 속에 나타나는 신(神)형상 발현(發顯)의 한
국면으로 추론 할수 있는것이다.
3. 조직신학 관점(성경 전체적인 흐름을 통해서 나타난)을 통해서본 [形象](셀렘,ࠎࠌࠕ )과 [貌樣](데무드, ࠛࠂࠍࠃ )]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의 의미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무엇인가에 대하여는 각 교파에 따라 견해가 다르다.
그래서 대표적으로 로마 교회와, 루터파, 의 견해를 간략하게 고찰한후 개혁파 교회의 견해는 여러 신학자들(죤칼빈, 칼바르트,
에밀 부룬너, 벌 카워)의 의견을 검토해본후 박형룡 박사의 교의 신학에 있는 내용을 빌어서 조직신학 관점에서의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 관하여 논술 하고자 한다. 하지만 본인이 신학적 지식의 짧음으로 인하여 여러 신학자들의 깊은 사상을
올바른 관점(저자의 의도와 논술 목적)에서 제대로 이해 했는가? 하는 문제는 의문의 여지가 있음을 시인한다.
1) 로마교회의견해
로마 교회는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자연적 하나님의 형상(Imago Dei)과 초 자연적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구분한다.
① 자연적인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 하실때 영혼의 영성, 의지의 자유, 육체의 불사성(不死性)같은 어떤 자연적인 은사들을 인간에게 주셨는데 이것들이 자연적인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이라고 한다.
②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인간은 위에서 말한 자연적 은사를 통해서 자연적 의(義)를 소유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식욕, 정욕등 열등한 성향이 있으며 이것들은 그 자체가 죄는 아니나 죄를 위한 기회 또는 연료가 되기 쉬우므로 하나님은 이것을
방지 하기 위하여 초 자연적인 은사를 덧붙여 주셨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주어진 은사 곧 초자연적인 은사로 말미암아 [原義]가
주어 졌으니 이것이 곧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이라고 한다. 로마 교회는 이와 같은 주장으로 말미암아
범죄후의 인간 상태를 본래 창조된 대로의 인간은 원의(原義)가 없었으나 또한 죄도 없었고 다만 죄의 결과를 낳기 쉬운 경향을 가진
것 뿐이었는데 범죄후 인간은 다만 원의가 상실 되었을 뿐이어서 범죄한 인간은 창조된 때와 같은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범죄후 인간의 전적 부패 교리를 부정하게 되는것이다. 이러한 로마 교회의 견해는 타락의 원인 설명이 곤란하며 범죄후 인간 상태의
심각성을 간과(看過)할 위험이 있다.
2) 루터파의견해
루터파의 견해는 일반적으로 사람안에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좁은 의미에서
제한 하여 이것을 사람의 [原始的 義]와 동일시[同一視]하며 이것이 타락을 통하여 전적으로 잃어 졌다고 결론한다. 즉 루터파는
[靈的 特質](Spiritual qualities)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이라고 말한다. 이때 [靈的 特質]이란 참
지식(知識)과 의(義)와 성(聖)을 가리키며 이것은 또한 [原始的 義]라고 불리워 진다. 결국 루터파의 [原始的 義]는 로마
교회의 그것과 같은 개념으로 보아서 틀림 없다. 이렇게 볼때 루터파가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로마 교회가
범죄후에 잃어 버렸다고 말하는바 [原始的 義]만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잃어 버린 후에도 범죄한 인간이 동물과 똑같은 상태로 저너락 되지 아니한 이유를 설명할수가 없게 되다.
3) 개혁파교회의견해
① 죤 칼빈(John Calvin)의 견해.
위대한 종교 개혁자 죤 칼빈(1506-1564)의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론에 대한 이해를 고찰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던지는데 인간안에어느곳에서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발견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를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자리 잡고 있는 좌소는 인간의 영혼속이다"라고 말하면서도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과 광채가 빛나지 않는곳은, 심지어 육체를 포함하여 인간속의 어느 곳에도 없다"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오는 세상에서 온전히 회복 될때에 영혼 뿐만 아니라 육체도 온전히 회복 될것이라고 했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원래적으로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를 "아담이 부여 받은 순결성은 이 단어로(하나님의 형상(Imago Dei))표현 된다. 라고 하면서 골로새서3:10과
에베소서4:24에 근거하여 칼빈은 결론 짓기를 인간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원래 참된 지식, 의로움,
거룩성을 포함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타락 하기 전에는 인간은 완전한 상태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소유 하고
있었으나 인간의 타락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 엄청난 파괴적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칼빈에게 있어서 타락한 인류의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 관하여 어떤
입장을 취하는가? 그는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철저하게 도말되었다(utterly defaced), 파괴
되었다(destrroyed)고 종종 말하므로 타락후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 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취하는것 같이
보이지만 자세히 연구 해보면 타락한 인간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안에 있다고 주장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그래서 칼빈은 그의 독자들에게 그들이 미워하는 자들 마저도 사랑하라고 권하면서 그 이유를 "그 사람의 악한 의도를 생각할것이
아니라 그들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쳐다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수 있는데 인간의 타락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 끼친 영향력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그는"하나님의
형사어이 전적으로 사라져 버리거나 파괴된것이 아니라고 인정 하더라도 죄로 인한 오염이 너무나도 심하여 이제 남아 있는것은
끔찍하게 기형적이된 형상일 뿐이다"고 했다.
이렇게 부패하고 오염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성령의 역사와 하난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새롭게 되어 질수 있으며,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완전히 회복되어 지는 때는 장차 오는 삶이 도래 할때
비로서 완성된다.
② 칼 바르트(Karl Barth)의 견해
이제 우리는 최근의 신 신학자 이며 신 정통주의의 아버지로 불리워 지는 칼
바르트(1886-1968)의 견해를 살펴 보려고 한다. 칼 바르트에게 있어서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이성과 지성속에서 발견 되지 않는다. 그는 창 1:27을 주해 하면서 "위의 본문이 너무도 명백하게 가르치는 내용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존재의 형상과 모습은 인간 존재가 대면(confrontation)속에 있다느것을 암시 한다. 인간과 인간 즉 남자와 여자
사이의 연결은 대면의 관계를 말한다."
바르트는 이러한 대면적 관계를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이러한 동일한 대면적 관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도 존재 하기 때문이다. 즉 "진정한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을 살도록 규정 지어 졌다는 사실은 인간의 피조적 존재는 만남의 존재라는 사실 - "나"와 "너", "남자"와 "여자"사이의 -
속에 분명한 상응점을 갖고 있다. 바로 이러한 대면 속에 인간됨이 있으며 이러한 인간됨 속에 인간의 창조주를 닮은 모습이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인류 역사속에서 인간이 실제로 정결한 상태에서 부패된 상태로
전락 하게된 인류 타락의 역사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즉 "타락"후에도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상실될수 있는 여지가
없다고 그는 말한다. 타락의 역사성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순전히 관계성으로만 이해 하려는 바르트의
입장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 미친 타락의 엄청난 영향력과 그 형상의 갱신의 절실한 필요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런 점에서 바르트의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론은 성경적 인간론과는 많은 거리가 있다.
③ 에밀 부른너(Emil Brunner)의 견해
바르트와 동시대 인물이며소위 변증법적 신학을 대표하는 에밀 부룬너(1889-1966)의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론을 고찰 하는것이 유익하리라 본다. 바르트 처럼 부룬너도 아담의 역사적 실존성과 인간 타락의
역사성을 배격한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관계성의 모든 영역,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책임성, 하나님과의 교제의 가능성속에서 발견 되어 진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자신을 스스로 영화 롭게 하기를 원하시고 자신을 나누워 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의
부르심에 대하여 감사와 반응적 사랑으로 반응하는 피조물이 되기를 원하신다. 따라서 사랑은 부룬너의 인간이해와 인간 존재 목적
이해의 중심부에 놓여있는개념이다. 또한 구약 성경에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지음 받았다"는 뜻은 인간은 결코
상실할수 없는 그 무엇을 갖고 있다는 의미이다. 심지어 죄를 지었을 때도 인간은 그것을 상실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이러한 사실은
신약 성경의 두귀절(고전11:7; 약3:9)에서도 가르친다고 말했다 그래서 타락한
인간도 실제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이라는 점을 강조 한다. 그러나 부룬너의 이러한 견해에는 몇가지 심각한
의문이 제기 되는데 첫째: 타락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부룬너는 결국 첫 아담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을 배격하는 것이며 따라서
제2아담이신 예수의 역사성에 대한 심각한 회의를 제기 하게 된다는 점이다. 둘째: 타락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그의 입장은 결국 그가
주장하고 있는 창조와 죄 사이의 구분에 대해서도 회의를 품도록 한다. 세째: 인간의 죄악성 에도 불구 하고 형식적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그대로 유지 되었다고 주장하는등의 몇가지 문제점을 갖는다.
④ 박형룡(朴亨龍)박사의 견해
개혁파 여러 교회는 칼빈의 발자취에 따라 다른 교파들보다 훨씬더 포괄적인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의 관념을 가진다. 즉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독점적으로 사람의 이성적 성질(理性的 性質)로
구성된다는 견해와 이것이 전혀 그의 창조주의 도덕적 일치(道德的 一致)로 구성된다는 견해 사이의 중간적 입장을 취하여 둘을 다
포함한다.
그러므로 위의 여러 견해들을 종합하고 요약하면 아래와 같은 몇가지 개혁파 입장에서본 사람안에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 관하여 요약 할수 있는데
a. 인격 혹은 영혼에서
즉 그의 단순성, 영성, 불현성, 불사성 등의 품질들과 지(知), 정(情), 의(義)등의 심력(心力)들과 자의식및 자결성의 권능에서 자연적 신형상이 나타났다.
b. 원의(原義)에서
사람이 창조 되었을때 참된 지식, 의, 거룩을 나타낸 그 본성(本性)과 지성적 도덕적 완의(完義)혹은 원의에서(엡4:24; 골3;10)도덕적 신형상이 나타났다.
c. 신체에서
그 물질적 실체에서가 아니라 영혼의 영생에 참여 하는 적당한 기관과 하등 피조물계에 주권을 행사하는 기구로서의 신체에서 외면적 신형상이 나타났다.
d. 지상 주권에서
사람의 지상 주권에서(시8:5-6;계5:10) 권위적 신형상이 나타 났다.
⑤ 하문호 교수의 견해
하문호 교수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 관하여 말하기를
a. 좁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좁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한마디로 말해서 범죄후에 잃어 버린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으로서 [참 지식, 義, 聖)(엡4:24; 골 3:10)등을 말한다.
b.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범죄 후에도 아직 남아 있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으로서 다른 동물들에게서 발견 할수 없는 理性,과 知識과 良心, 그리고 만물 통치권등 이 그것이다.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통하여 영적 생명을 가진 결과로 이너간은 다음과 같은 동물이 누리지 못하는 특권을 소유 하게
되었는데 바로 인간은 영생의 가능성을 가진 특권을 누리게 되었고, 하나님과 교통할수 있는 특권을 가지게 되었으며, 만물을
주관하는 특권을 가지게 되었다.
4. 타락한인간도여전히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다.
어떤 이들은 인간이 죄악으로 타락 했을때 전적으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상실하였고 더이상 신(神)형상의 소유자로 볼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창5:1은 그와 같은 주장에 대하여 아무런 근거도 제공하지
않는다. 사실 본문은 타락한 이후에 일어난 사건의 기록임에도 불구 하고 아담에 대하여 여전히 하나님의 모양으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을 진술하고 있다. 만일 그 당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전적으로 상실되어 버蓡린 상태라고 한다면 본문은 아마도
그와 같이 깃술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인간의 타락 으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더럽혀
졌다(Cf. 창6:5; 롬7:18)고는 생각 할수 있으나 타락 이후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전적으로 상실해
버렸다고 주장할수는 없다. 만일 그렇게 주장한다면 그것은 성경 본문이 말하지 아니하는 것을 주장하는 격이 되고 만다.
창5:3에서는 1:26의 용례와 같이 두 단어가 함께 사용되고 있으나 어순은 역(逆)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또다시 우리의
주목을 끄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아담의 아들인 셋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과 모양으로 지음 받았다고 진술되어 있지
아니하고 단지 아담이 그의 모양을 따라 그의 형상대로 출생한 아들의 아버지가 되었다고만 기술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타락 후에 비록 죄로 말미암아 부패(腐敗)되고 오염(汚染) 되기는 했으나 여전히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고 할수 있다면, 아담의 아들인 셋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이라고 추론 할수 있다. 그러므로 이
귀절들은 타락후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전적으로 잃어 버렸다는 주장에 대하여 아무런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범죄한 이후에도 인간이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는 사실은 창세기
9장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 난다. 1절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은 다시 반복된다. 그리고 이제 동물들이 인간을
두려워 할것이라는 사실이 계시 되어 지고(2절), 인간은 동물의 고기를 먹을수 있도록 허락 되었다(3절). 그러나 피채로 먹는
행위는 금지 되어 지고(4절) 또한 사람을 죽인 동물이나 사람을 살해한 자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그 생면의 피를 요구
하신다(5절). 이와같은 맥락 속에서 우리가 다룰 주제와 깊은 연관을 가진 6절이 나타나게 된다 "무릇사람의피를흘리면그피를흘릴것이니이는하나님이자기형사대로사람을지었음이니라" 즉
살인이 죽음 으로써 처벌 되어질 만큼 가중한 죄로 지목 되는이유는 살해된 자가 하나님을 반영하는 존재 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가 사람을 죽였다고 할때 그 행위는 단순히 한 사람의 생명을 손상 시키는 정도에 머무르는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 도전
하는셈이 되는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파멸시키는 행위는 발鱁로 인간을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 하신
창조주에 대한 범죄 행위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때 이 귀절들은 타락한 인간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함의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이러한 신(神)형상과 관련된 신약의 중요한 귀절 가운데 하나는 야고보3:9절
말씀이다. 야고보는 우리의 혀로 말미암아 야기되는 죄의 문제를 취급 하는중 동일한 문맥에서 혀는 하나님을 찬양하기도 하고 또한
사람을 저주 하기도 한다고 하면서 이러한 사실이 인간의 죄악된 자기 모순 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왜 이와 같은 일들이 상호
모순 된다고 말할수 있는가? 본문은 그 이유를 분명히 제시한다. 즉 우리가 저주하는 바로 그 대상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음받은 피조물들 이기 때문에 사람을 저주 한다는것은 사실에 있어서 그들을 자신의 모양 대로 창조 하신 하나님을 저주 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연구 하고자 하는 주제와 관련하여 특별히 주목 해야 할점은 "지음 받음"으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의 시상이다. 이 동사는 " ---이 되다." 혹은 "만들어 지다"는 의미를 가진 γινομαι의 완료형 분사
γεγονοται로서 헬라어의 완료 시제는 "결과가 계속 되어 지는 과거 행위"를 묘사 하는데 사용된다. 따라서 본문의 내용은
"인간은 과거 어느 시점에 하나님의 모양을 따라 지은바 되었고 지금도 여저너히 그 모양 속에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이와 같이 야고보 3:9은 우리가 저주하는 인간이 비록 죄로 인하여 오염(汚染) 되었다
해도 - 전적 부패로 표현 될수 있을 만큼 - 신(神)형상이 전적으로 제거 되어지지는 아니하였고 여전히 하나님의 모양 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함의 하고 있다.
結 論
신약의 여러 귀절들은 타락 이후의 인간에 대하여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로의 회복이 요청 되는 존재로 묘사 하고 있으며(엡4:22-24, 골3:9-10), 또한 그와 같은 귀절들은 인간의
영적이며 도덕적인 갱신(更新)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이루워져 가는 점진적 과정임을 시사 하고 있다. 그 뿐
아니라 신약이 가리키는바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의 목적은 우리가 더욱 더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요 혹은 더욱더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닮는것이다(롬8:29; 고후3:18; 골3:9-10; 엡4:22-24).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우리 안에 회복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은 신 형상이 우리속에 왜곡 되어 있음을 의미 하는 것이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타락한 인간 일찌라도 인간이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가운데 있다는 것을 성경이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성경이 가르치는 또다른 국면은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을 옳바로 반영하지 못한다는사실이다. 왜곡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정적인(statisch)성질의 것이 아니라 동적인(dynamisch) 것이며 우리가 향해 나가야할 종말적인 목표라고
할수 있다. 우리는 아직 마땅히 되어 져야할 완성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아니다. 우리는 지금 성령에 의하여 점점
하나님을 온전히 반영할수 있도록 변화 되고 있는 중이며 미래에 언젠가는 온전히 하나님을 반영하게 될것이다. 이와 같은 하나螱의
형상 에로의 갱신은 우선적으로 구속의 과정 속에서 성령의 내적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워지는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우리의 노력을 함의
하는 것으로 신약에 나타나 있다. 즉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새롭게 되는일은 직설적(indicative)으로
묘사될 뿐 아니라(골3:10), 동시에 명령적(imperative)인 요구로 나타낱다(엡4:24; 5:1).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의 회복은 은사일 뿐 아니라 중요한 성도의 과제이다. 그러면서 성경은 성화의 최종 목적은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는 데 -물론 신인 합일(神人 合一)의 의미는 아니지만- 있다. 그것은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을 반영하게 된다는
의미 로서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신 그리스도와 같이 온전히 될것이라는 표현인데 이를 종말론적 언어로서 묘사 하고
있다(고전15:49; 요일3:2).
參 考 文 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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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의 본질은 무엇이며, 본질을 잃어버릴 때 일어나는 일(마태복음 21:12~22)
예수님이 다윗성인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 예수님은 말씀대로 겸손히 어린 나귀를 타시고, 사람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실 분이라고 외쳤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자 마자, 성전으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다. 상상 하지 못한 예수님의 행동이다. 성경 안에서도 이렇게 행동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행동하셨을까?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예수님은 성전의 본질, 성전의 역할, 성전의 본모습을 알고 계셨다. 그러나 지금 성전은 그 성전의 본질과 역할과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다. 성전이 성전 되기 위해서는 본질과 본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 성전의 모습을 한마디로 '강도의 소굴'이라고 표현하셨다. 그러나 원래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다. 강도의 소굴을 뒤집어 엎어야, 다시 '기도하는 집'으로 회복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님께 나왔다. 예수님은 그들의 기도(요청)을 들어주시며, 고쳐주셨다. 예수님이 바로 성전이시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나와서 기도하고, 예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사람들이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화를 내며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님은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마태복음 21장 16절 하반절, 시편 8편 2절 인용 다윗의 시라고 기록된 시편 8편에는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셨다고 기록되었다.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으로 원수들을 잠잠하게 하셨다.
온 땅이 알고, 또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도 알고 외치는데, 어찌 종교 지도자들은 모를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의 말씀에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예수님은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머무셨다.
베다니는 '번뇌하는 자의 집' 또는 '가난한 자의 집'이란 뜻이다.
예수님은 거기서 마지막 사역을 남겨두시고 번뇌 하셨다.
가난한 자들은 거기서 예수님을 만났다.
성전의 본질을 회복하라(마가복음 11:15~19)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일이 두 번 있다. 한 번은 공생애 초기, 그리고 오늘 본문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예루살렘 입성 후에 있었다. 성전 안에서 매매하고 환전하는 사람들에 대해 큰 분노를 표출했다. 어떻게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는가? 구체적 장소는? 실내가 아니다. 이방인의 뜰, 특히 그 뜰을 둘러싼 행각을 의미한다.
막 11:17 만민의 기도하는 집 vs. 강도의 소굴
제물: 졸업식장 앞의 꽃장사처럼, 먼 곳에서 제사드리러 오는 사람들을 위해 제물을 판매한 것은 좋으나 제사장들과 결탁하여 흠있는 제물을 유통했고 성전세 : 유대인의 세겔로 로마 화폐를 환전해서 내도록 했는데 수수료가 무척 높았다. 예수님이 문제 삼은 것은 매매와 환전 자체를 문제 삼은 것이 아니다.
성전의 기능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고 기도하는 집인데, 그 모든 것이 사라져 의식만 남아 있고 利權과 탐욕으로 가득찬 제사장들만 남았기 때문이다. 도둑도 아닌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다.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곧 하나님의 성전이다'라고 하시는데, 성전으로서의 우리는 그 본질을 잘 간직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성전의 본질을 어떻게 회복해야 할까?
1. 성전은 거룩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3:17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것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 내 몸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기 때문에 내 몸과
영혼에 유익하지 않은 술과 담배를 끊으려 할 뿐이다. (우리 몸에 유익하지 않은 다른 것들도 금해야 한다.)
2. 만민의 기도하는 집
마가복음 11:17 성전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우리 각자 뿐만 아니라 공동체로서의 교회도 있다. 성전의 기능은 예배와 기도다.
이른 아침에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예수님은 시장하셨다.
길가에 한 무화과 나무를 보시고 예수님은 거기로 가셨다.
그러나 무화과나무에는 잎사귀밖에 아무것도 없었다.
예수님은 나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21장 19절
예수님이 말씀을 하시자 무화과나무가 곧 말라버렸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행동과 결과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여 물어보았다.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마태복음 21:20-2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첫째, 믿음으로 의심하지 않고 기도하면 그대로 이뤄진다.
무엇이든지 믿고 기도하는 것은 다 받는다.
둘째,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나무이다.
예레미야 8:1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이스라엘)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하나님은 다시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이다.
본질(本質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사물 자체의 성질이나 모습.
본질을 잃어버릴 때, 그 자체로 타락한 것이며, 변질된 것이다. 성전이 기도하는 집으로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강도의 토굴이 된다. 본질의 역할을 다 하는 것만이, 존재의 이유인 것이다. 성전의 본질은 바로 기도하는 집이다. 하나님과 만남의 장소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만나길 원하셔서 이 땅에 성전을 세우시고, 성전을 보고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과 소통하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길 원하셨다. 이것이 바로 성전의 기능이다. 그러나 성전에서 하나님은 사라지고, 경제 활동만이 남았다. 사람들이 자신의 먹고 사는 것을 해결하기 위한 경제 활동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 성전은 그렇게 존재할 수 없다. 그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며, 하나님과의 만남의 집이며, 하나님으로 가득한 집이다. 하나님을 만날 때, 경제 활동을 포함한 모든 삶이 질서를 찾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성전을 회복하길 원하셨다.
본질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인간이란 하나님과의 관계 없이는 무의미한 존재임을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 하나님과의 소통,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 바로 인간의 삶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전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성전에서 경제 생활을 영위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타락한 이스라엘(인류)을 새롭게 하려고 하십니다. 성전, 기도하는 집, 하나님과 소통하고, 대화하는 집,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사는 삶으로 부르십니다.
믿음으로의 전환된 계기 - 앤드류 머레이
앤드류 머레이는 남아프리카의 네델란드 개혁교회 목사였으며 그가 저술한 많은 책은 지금까지도 인기를 얻고 있다. 그런 그도 그리스도인이 된 지 10년 후에 똑같은 발견을 했다. 1895년에 그는 이런 간증을 했다.
"말하자면 나는 일에 있어 그 누구보다도 열성적이고 열심이었으며, 그 누구보다도 나의 일을사랑했습니다. 그러나 항상 내 마음은 만족이 없었으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불안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내 작은 방에서 가만히 앉아 생각에 잠기던 일이 기억납니다. '뭐가 문제일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나를 의롭게 하셨다는 걸 알고 있지만 나의 섬김에는 능력이 없지 않은가?' 나의 생각, 나의 말, 나의 행동, 나의 불충성, 이 모든 것이 나를 괴롭혔습니다. 주변 모든 사람들이 나를 가장 열심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나의 삶은 불만족스러웠습니다. 나는 최선을 다해 노력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신앙 생활 초기 10년과는 대조적으로 지금 내게 주신 것을 간단하게 말하는 것이 더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처음으로 나는 자신을 매일 하나님 앞에 성령으로 채워질 그릇으로 내어 놓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분은 영원하신 하나님으로서 그분의 일을 내게서 꼭 이루시겠다는 복된 확신을 심어 주셨습니다. 내가 날마다 배우는 교훈이 있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것을 행하시며, 모든 것 속에서 역사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He is not the God of the dead, but of the living. You are badly mistaken!
산자의 하나님(데오스 존톤)
데오스(2316) θεός, οῦ , ὁ, ἡ
1. 하나님, 2. 사도행전 28:6, 3. 요한복음 1:1
발음
/ 데오스 [ thĕŏs ] 어원 /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하나님(마 3:9, 눅 1:30, 행 2:11), 신(행 7:40, 43), 주(행 8:22, 10:33, 롬 10:17), 아버지(고후 1:3) 신약 성경 / 1318회 사용
"산 자의 하나님"이란 말씀에서 "산 자"는 살아 있는 자(자오. zaō. ζάω)"를 말합니다. 이때 살아있다는 것은 육체적 생명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 즉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어떤 제자가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하고 간청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마 8:21-22).
따라서 산 자는 살아있는 자의 삶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살아있는 사람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호흡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사람의 호흡은 기도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영양 섭취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사람의 영양 섭취는 곧 영의 양식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활동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사람의 활동이란 세상에서는 자기 직업에 따라 일을 하지만 영원한 생명의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쌓아야 할 상급을 위한 활동을 해야 합니다. 그 활동이란 봉사와 섬김과 희생과 헌신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와 같은 호흡과 영양 섭취와 활동의 근거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일을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세상 일을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분법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무슨 일이든지 주님을 사랑하는 믿음으로 실천할 때 그 사랑이 머무는 곳에 하나님은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 회퍼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강도 만난 자와 함께 계시고
강도 만난 자의 속에 계신다고깨우쳤습니다.
따라서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곧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근원적인 의미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분리하는 것은 이분법적인 사랑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셨던 가르침처럼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사랑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께 하듯 행함으로 실천적 사랑의 일군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존톤(2198) ζάω
1. 살다, 2. 로마서 7:1-3, 3. 다시 살게 되다 발음
/ 자오
[ zaō ] 관련 성경 / 살다(마 4:4, 눅 2:36, 롬 7:1), 살아 계시다(마 16:16, 26:63, 요 4:57), 살리다(요 6:58, 롬 1:17, 고전 9:14), 살아나다(행 20:12). [명] 살아있는 말씀(행 7:38).
포도원(290) 암페론(ampĕlōn) ἀμπελών, ῶνος, ὁ
1. 포도원, 2. 고전 9:7. 비유적으로 사용된 경우, 3. 마 20:1이하
발음
/ 암페론[ ampĕlōn ] 어원 / 28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포도원(마 20:8, 눅 20:16), 포도(고전 9:7) 신약 성경 / 23회 사용
상속자(클레로노모스. klērŏnŏ- mŏs) κληρονόμος, ου, ὁ
1. 상속자, 2. 마태복음 21:38, 3. 히브리서 1:2
발음
/ 크레로노모스[ klērŏnŏ- mŏs ] 어원 / 2819와 3551와 어근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상속자(마 21:38, 막 12:7, 눅 20:14, 롬 4:13, 딛 3:7, 히 11:7), 기업(基業)으로 받는 자(히 6:17) 신약 성경 / 15회 사용
I.
상속자, 후사. [문자적으로] 마 21:38, 막 12:7. [비유적으로] a.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경우] 히 1:2. b. [신자들을 가리키는 경우] 롬 8:17, 갈 4:7, 히 6:17, 약 2:5.
우크 에스틴 호 데오스 네크론 알라 데오스 존톤 휘메이스 운 폴뤼 플라나스데
개역개정 27.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새번역 27. 하나님은 죽은 사람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이시다. 너희는 생각을 크게 잘못 하고 있다. 우리말성경 27. 하나님께서는 죽은 사람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이시다. 너희가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다. 가톨릭성경 27.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포도원의 비유를 말씀하셨다(1-12절). 그 후에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어 넣기 위하여 몇 가지 질문을 시도한다. 세금 납부의 문제과 부활의 문제에 관하여 질문했으나
예수께서는 놀랍고도 지혜로운 답변을 하셨다(13-27절). 마지막으로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율법 중의 최고 계명이 무엇인가를
질문하자 예수께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대답하셨다(28-34절). 모든 답변을 다 하신 후에 예수께서는 그들을 향해
질문하신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했는데 어째서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었다(35-37절).
그리고 예수께서는 외식하지 말 것을 경고했고, 한 과부의 초라한 헌금 속에 담긴 정성스런 마음을 칭찬해 주셨다(38-44절).
예수님은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특히 지도자들의 잘못, 종교와 정치의 다른 면 그리고 신앙
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내용들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정화 사건과 바로 다음 장의 예루살렘 멸망 예언
사이에서 교량적인 역할을 합니다.
예수께서는 수많은 율법 조항들의 핵심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정의하셨습니다. 율법의 조항들을 형식적으로 지키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사랑이 있어야 함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와 관련하여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일 뿐인데, 그 이유는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강조했습니다(요일 4:20). 하나님 사랑은 형제 사랑을 통해서만 증명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형제를 사랑하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경우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믿음은 보이지 않으므로 행함을 통해서 믿음이 드러나야 한다는 야고보의 가르침과 유사합니다(약 2:17-18). 형제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 사랑이 드러나게 됩니다. 나의 이웃과 나의 형제 속에 그리스도께서 계신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강도 만난 자와 함께 계시고
강도 만난 자의 속에 계신다고설명합니다.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곧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근원적인 의미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예수의 교훈을 균형 있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아무래도 하나님 사랑에 좀더 비중을 두는 사고
방식에 익숙해져있습니다. 많은 기독인들이 하나님 사랑이라는 근거 위에서 비로소 이웃 사랑이 가능해진다고 생각합니다. 논리적인 측면에서는
하나님 사랑이 먼저이겠지만 현실적인 삶의 현장에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동시적이고 불가분리적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 사랑을
우월시하는 사고 방식은 교회를 위한 봉사는 하나님 사랑이고 그 밖의 세상적인 일들을 위한 봉사는 이웃 사랑이라는 이원론적 사고
방식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교회만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세상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의 것이며, 교회에만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도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웃 사랑이 있어야 하고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는 두 가지 반문을 하시면서 예수는 왜 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는지를 두 가지 이유로 말씀하셨다.
첫번째는 성경을 잘못 이해했다
두번째는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죽음을 극복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이 능력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먼저 두 번째 이유와 더불어 그 첫 번째 이유를 각각 보충 설명하였다.
사두개인들은 부활 후에도 결혼이 다시 시작되는 것으로 잘못 추측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활한 사람들의 삶에는 정혼도 결혼도 없다. 다만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이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불멸의 존재가 될 것이다.
사두개인들은 하나님께서 죽음 후에 전적인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실 것과 그와 관련된 눈에 보이는 모든 어려움을 해결하실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의 질문은 부당한 것이다.
사두개인들은 알지 못하여 부활에 대한 이해가 오경에는 없는 것으로 단언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는 질문을
하시면서 모세의 책 즉 모세 오경에 호소하셨다. 그리고 불붙는 가시나무 떨기에 대해서 말씀하셨다.(출3:1-6) 이 사건 속에서
하나님은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확언하시면서 모세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셨다. 그들은 비록 오래
전에 죽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살아 있으며, 약속을 지키는 하나님으로서 그들과 계속적으로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신
말씀이었다. 이것은 죽으면 끝이라고 이해한 사두개인들의 이해대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확증하는 것이라고 예수는 결론을 내렸다. 만일 그들이 죽은 후에도 살아 있지 않거나 죽음이 끝이라면 그는 진실하지 못한 하나님일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함이 바로 육체적 부활을 보증해 준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예수의 대답은 분명히 죽음 이후의
살에 대한 사실을 확증한 것이었다. 이것은 육체적 부활도 있을 것이라는 것을 입증하기에 충분한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마가가
기록한 예수의 마지막 교훈은 그들이 부활과 죽음 후의 삶을 부인한 것이 얼마나 심각한 잘못이었는가를 강조하신 것이다.
마태복음 8:22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3498. 죽은 자(네크로스. nĕkrŏs) νεκρός, ά, όν
1. 죽은, 2. 마태복음 28:4, 3. ㉠ 죽은 것 같은
발음
/ 네크로스[ nĕkrŏs ] 어원 / 기본형 νέκυς ‘시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죽은(마 10:8, 막 9:9, 롬 1:4), 헛것인(약 2:20) 신약 성경 / 128회 사용
누가복음 20:38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현대인) 하나님은 죽은 사람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새번역) 하나님은 죽은 사람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이시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
마태복음 8:21-22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제자 중에 또 하나가(헤테로스 데 톤 마데톤) - 이 어구는 19절에
어급된 서기관 역시 예수의 제자에 속한 자였음을 암시해 준다. 즉 '또 하나'란 말의 원어 '헤테로스'(another)는
신약성경에서 '알로스'(다른 하나의, 같은 부류 내의 또 하나의)와 같은 의미로 쓰이는데, 이는 분명, 앞절의 서기관 외에 또
하나의 제자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제자'란 자신의 전(全) 삶을 예수께 헌신하고 다른 모든 생활을 모두 다 내팽개치는
사람만을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라 예수께 신앙을 고백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를 의미하는 것(요 6:66)으로 볼 수
있다(19절). 왜냐하면 제자로 지칭되고 있는 이 사람은 자기 부친을 먼저 장사(葬事)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으며, 이런 요청이
거절당하기 이전에 이미 제자로 불리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께 질문을 던진 두 사람 중에서 한 사람 곧 서기관은
예수의 제자가 아니고 다름 한 사람 곧 제자로 지칭되고 있는 이 사람만이 예수의 제자였다고 단정지을 수 없으므로 둘 다 예수의
제자에 속했던 자들로 보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주여 나로 먼저 - 이 두번째 사람은 예수께로 소명받은 제자가 추구해야 할 우선
순위를 혼동하고 있었다. 그는 두 가지 욕망, 곧 예수를 따르고 싶은 열정과 자시의 의무를 등한히 하고 싶지 않은 소망 가운데서
망설이고 있었다. 실로 앞절의 서기관은 열정적이고 지나치게 자신의 믿음을 표현한 반면 이 삶은 매우 소심한 신앙 태도를 보였다.
진정 그는 제자의 길이 차선(次善)의 신앙으로써가 아닌 최선의 신앙으로써 상황을 초월하여 예수를 좇는 것임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내 부친을 장사하게 - 당시 예수는 전도의 걸음을 재촉하고 계셨다. 그런데 이
제자는 전도보다 먼저 자신의 부친을 장사하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1) 연로한 아버지를 섬기다 그가 죽으면
전도의 길을 따라나서겠다고 한 것 (2) 실제 아버지가 죽었기 때문에 잠시 가서 장례식에 참석하겠다는 뜻 이는 큰 문제가 아니다. 핵심은 그 어떤 경우라도 전도 사업에 우선하는 더 중요한 일은 없다는 사실에
있었다. 즉 이 제자는 무엇이 더 급하고 중요한 문제인가를 혼동하였던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의 율법의 의하면 부모에 대한
효성(孝誠)의 척도는 제 5계명에 그 근거를 두고 있으며 자기된 자는 반드시 자기 부모의 장례식에 참석해야 하는 것이 그 당시의
문화적 배경이었다(출 20:12; 신 27:16). 물론 나이든 부모를 노후에 봉양하는 것 역시 장례에 관계된 의무 못지 않게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이같은 개인적 효도보다 더 우선되는 인생의 최고 급선무(急先務)는 그리스도 복음의 선교 사역이다.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 이를 잘못 이해하게 되면 기독교란 부자(父子) 윤리조차 무시하는 불효 막심한
반(反) 도덕적인 종교란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실로 이 말씀은 인륜과 도덕을 초월하여 계신 그리스도의 초월성을 이해한 다음,
설명되어야 하는 말씀이다. 더욱이 교리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필연적 과정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죽음 이후의 장례 절차에 대해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실로 예수께서는 인간적 윤리를 알지 못하거나 또는 무시해서 이처럼 비윤리적인 것처럼 보인 용어를 선택한신
것이 아님을 우리는 우선 전제하고 있어야 한다. '죽은 자'란 말의 의미를 살펴보면 그 뜻을 두 가지로 제시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죽었다는 말을 (1) 어떤 사물에 대한 무관심을 나타내는 말 (2) 그 사물이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 따라서 세상에 대하여 죽었다,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롬 7:4), 죄에 대하여 죽었다(롬
6:11) 세상이나 율법, 죄 등이 우리 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는 뜻이 되며, 이는 우리가 그런 것들에서부터
자유롭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여기에서 이 말을 사용하였던 것도 이와 같은 의미로 우선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즉
'내일에 무관심한 자, 곧 영적인 사망자들 그리고 죄안에 죽어 있어 우리와 관계없는 자들'로 하여금(엡 2:1) 죽은 자들을
돌보게 하라는 것이다.
즉 영적으로 죽어버린 자들이 육적인 죽음을 맞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적
근심에서 자유한 상태로 복음 선교에 참여해야 했다. 예수께서는 이 제자의 우유 부단한 면을 간파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함을 가르치기 위해 이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이러한 맥락에서 "아비나 어미를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10:37)라고 재차 가르치신 바 있다. 정녕 죽은 자를 돌보는
일은 좋은 것이나 예수를 따르는 일은 이보다 더 좋은 더 영원한 일이다(Chrysostom).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 11: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헬라어로 보면 “εγω ειμι η αναστασις και η ζωη”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을 믿으면 죽어도 살 수 있고,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뜻이죠. 즉, 예수님을 믿을 때에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다! 라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이 말이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인들에게 생명의 주관자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라는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서 ‘내가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는 존재이다’라고 이야기를 하니까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유대인들에게 이 예수는 이단이요 신성모독자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요한복음 1:1에서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예수님은 이단도 아니고 신성모독자도 아니고 바로 너희가 믿고 섬기는 그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이렇게 선포를 하는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까? 네! 맞는 말이죠.
오늘은 이 부활에 대해서 함께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크게 두 가지 종류의 부활이 나옵니다.
하나는 불완전한 부활이구요 하나는 완전한 부활입니다.
불완전한 부활은 죽었다가 살아나지만 또다시 죽음을 맞이하는 부활입니다.
이를 완전한 부활과 구분한다면 소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반면 완전한 부활은 죽었다가 살아난 후 완전히 죽음에서 자유로워지는 부활입니다. 다시 죽지 않는 부활이죠.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진정한 의미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완전한 부활의 대표적인 예가 오늘 본문의 말씀에 등장하는 나사로이고 완전한 부활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먼저 불완전한 부활에 대해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나사로와 그의 누이인 마르다, 마리아는 예수님과 매우 친분이 두터웠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살았던 동네의 이름은 ‘베다니’라는 곳인데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3km 지점 정도에 위치한 마을입니다. 예루살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오실 때마다 자주 나사로의 집에 방문을 하시고 신세를 지기도 하셨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나사로의 집에 방문하면 마리아는 그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마르다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기느라 분주했지요.
베다니는 히브리어로는 ‘베트-아니’인데 이는 ‘가난한 자의 집’, 혹은 ‘고뇌 자의 집’이란 뜻입니다. 이름만 들어도 어떤 동네인지 아시겠지요?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살았던 동네입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나사로가 병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소문을 들으셨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나사로의 병을 고치러 가신 것이 아니라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계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로가 죽은 이후에야 비로소 나사로가 있는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빨리 안 가시고 이틀을 더 머무셨을까요? 왜 나사로가 죽기까지 기다리셨을까요?
예수님이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당시의 사람들과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니까 바로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가 달려 나와 예수님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하죠. 요한복음 11장 21절입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예수님! 왜 이제야 오셨습니까? 빨리 오셔서 우리 오라버니의 병을 고쳐주셨더라면 우리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텐데!”라는 원망이 섞인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 안에는 예수님이 병을 치료할 수는 있어도 죽은 사람은 살리지 못한다라는 생각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11장 23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그러자 또 마르다가 대답합니다.
11장 24절입니다.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갑자기 왜 마지막 날 부활의 때가 등장하는가? 마르다는 바리새파적인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 중에서도 바리새파 사람들은 마지막 때의 부활과 천사와 영혼의 존재를 믿었지만 사두개파 사람들은 이를 믿지 않았습니다.
마르다는 이렇게 유대적인 부활신앙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능력이 지금 당장 자신의 눈 앞에서 나타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마르다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요한복음 11:25-26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마지막 날에도 너희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겠지만 지금 내가 생명의 능력으로 너희 오라비인 나사로를 살려주겠다!” 라는 말이죠.
예수님이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했지만 마르다는 이 말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잘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사로 무덤의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할 때에도 마르다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11장 39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님! 이미 시체가 부패하기 시작해서 냄새가 납니다! 죽은 것이 확실하니 돌을 옮기는 그런 헛수고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러자 예수님께서 얼마나 답답하셨던지 이렇게까지 말씀하십니다.
11장 40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내가 한 말을 좀 믿어라!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죠.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기도를 하시고 나사로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 라고 큰 소리로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이고 수건을 얼굴에 싼 채로 걸어 나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진짜로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우리가 이 부분만 보고 마르다가 참 믿음이 없는 사람이다! 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마르다는 매우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해서도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을 할 정도의 사람입니다. 거의 베드로급의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지요.
다만, 한 가지, 이 대목에서 실수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능력을 자신의 지식과 경험으로 한계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 불가능한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의 때에 사람들이 살아날 것이다!라는 바리새적인 신학 지식, 그리고 이미 시체가 부패하기 시작하여 생명이 완전히 끊어졌다는 생물학적인 지식을 가지고 예수님의 능력을 한계지은 것이죠. 아니, 아마도 자신의 지식을 뛰어넘는 이 부분을 생각조차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많은 신학적 지식을 듣고 보고 배웁니다.
신앙의 연수가 쌓여가고 신학적 지식이 늘어갈수록 우리는 내가 아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나의 지식 안에 가두어버리죠.
하나님의 능력을 나의 지식으로 제한해 버립니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변하지 않는 분이라는 말은 A라는 상황에서 항상 B로 행동하시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우리를 향한 자비와 사랑 등 하나님의 성품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항상 어떤 상황에서 똑같이 행동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A라는 똑같은 상황에서 하나님이 때로는 B로 행동하실 수도 있고 때로는 C로 행동하실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중요한 것은 가장 선하고 좋은 길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이며 우리를 향한 사랑과 자비하심에는 변함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내 생각으로 제한하지 말고 항상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합니다. A라는 상황에서 나에게 B로 응답하셨던 하나님이 다른 사람에게는 C로 응답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내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판단과 행동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때로는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길로 나를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자,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마르다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놀라운 방법으로 나사로를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까도 말씀을 드렸지만 이것은 불완전한 부활 즉 소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살아난 나사로는 다시 죽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부활, 완전한 부활은 무엇인가?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부활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후에 다시는 죽음을 맞이하지 않는 그런 부활이죠.
이에 대해서 매우 잘 설명하고 있는 말씀이 바로 고린도전서 15장 51-54절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우리는 마지막 나팔이 울리는 순간에 홀연히 다 변화됩니다. 이것이 바로 완전한 부활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몸은 썩고 죽는 몸입니다. 이 몸이 마지막 나팔이 울리는 순간 썩지 아니할 몸, 죽지 아니할 몸으로 변화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완전한 부활이죠.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마지막 나팔은 뭘까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도요한에게 계시를 보여주십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알려주신다고 하시면서 먼저 일곱 인으로 봉인된 두루마리를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그 두루마리의 봉인들을 하나씩 떼시는데요, 이 봉인이 하나씩 떼어질 때마다 특정한 사건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첫 번째 인을 떼니까 흰 말과 그것을 탄 자가 등장하는데 그가 활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합니다.
두 번째 인을 떼니까 붉은 말과 그것을 탄 자가 등장합니다. 그는 땅에서 평화를 제하고 서로를 죽이게 합니다.
세 번째 인을 떼니까 검은 말과 그것을 탄 자가 등장합니다. 그는 손에 저울을 가지고 있는데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은 극심한 기근을 의미하는 것이죠.
네 번째 인을 떼니까 청황색 말과 그것을 탄 자가 등장합니다. 그의 이름은 사망이고 음부가 그 뒤를 따르는데 그들이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생명 있는 것들을 죽입니다.
다섯째 인을 떼니까 순교자의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서 하나님께 자신들의 피를 갚아 달라고 탄원을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순교자의 수가 차기까지 잠시 동안 쉬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여섯째 인을 떼니까 큰 지진이 나고 해가 검어지고 달이 온통 피 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집니다.
일곱째 인을 떼니, 일곱 천사가 일곱 나팔을 들고 등장합니다.
첫 번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와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버리고 각종 푸른 풀도 타 버렸습니다.
두 번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 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지매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졌습니다.
세 번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 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샘에 떨어지니 물의 삼분의 일이 쓴 물이 되어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네 번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타격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추임이 없고 밤도 그렇게 됩니다.
다섯 번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무저갱을 열어 그 구멍에서 큰 화덕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와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로 말미암아 어두워지며, 황충이 연기 가운데로부터 땅 위로 나와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을 괴롭힙니다.
여섯 번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된 네 천사가 놓임을 받아 사람 삼분의 일을 죽입니다.
이제 몇 번째 나팔이죠? 일곱 번째 나팔, 즉 마지막 나팔입니다.
일곱 번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하나님의 비밀이 성취되어 사람들이 홀연히 다 변화되어 더 이상 죽지도 않고 썩지도 않는 몸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재림 전 마지막 때에 우리에게 이루어질 일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거 아십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만 부활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부활합니다. 요한복음 5장 29절 말씀입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즉, 더 이상 썩지 않고 죽지 않는 부활이 이루어지고 난 이후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고, 천국으로 가게 됩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은 더 이상 썩지 않고 죽지 않는 몸을 가지고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죽지 않는 몸으로 영원히 괴로움을 당하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초대교회에서 부활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했던 가장 중요한 교회의 중심 메시지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자들이 만났기 때문에 교회가 세워졌고 우리가 주일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안식일은 주일이 아니라 토요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주일에 모여서 예배를 드릴까요?
바로 예수님께서 안식일 다음 날인 주일에 부활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진정한 안식을 완성하셨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초대교회 때부터 사람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일에 함께 모여 모임을 가졌습니다.
이것이 전통이 되어 우리도 주일에 함께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죠.
우리 교회는 주로 1년을 주기로 하는 절기를 지킵니다.
부활절이라는 절기가 있는데요, 전통적으로 우리는 이 부활절을 춘분 후 만월이 지난 바로 다음 주일로 지킵니다.
음력이죠. 그래서 매년 부활절의 날짜가 조금씩 바뀝니다.
우리는 부활절을 맞이하기 전에 사순절이라는 절기를 보냅니다.
이 사순절은 40일 동안 지키는 절기인데 원래 초기에는 부활절에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훈련을 받는 기간이었습니다.
세례를 받기에 가장 좋은 날은 부활절이죠. 따라서 초기 교회에서는 부활절에 세례를 주었고 그 전에 세례를 위한 교육과 훈련을 실시하였습니다.
사순절에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교육과 훈련을 받았고 다른 교인들도 이에 동참하며 함께 금식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함께 기쁨으로 부활절에 세례를 행하였습니다.
이처럼 초기 사순절은 세례와 매우 깊은 관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릴 때에 유아세례를 받았고 성인세례를 받는 사람들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사순절의 초점이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고 참회하고 이에 동참하는 의미로 조금씩 변화되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을 하시면서 주신 새 계명, ‘서로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따라 서로를 용서하고 용납하는 그런 문화가 사순절 기간에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참회와 회개로 끝나는 절기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서로를 사랑하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는 절기로 사순절을 지키면 참 좋겠지요?
이러한 사순절 절기는 40일 동안 지키는데요, 7주간입니다.
그런데 좀 이상하죠? 7주간이면 49일이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40일이 될까요?
먼저 사순절은 월요일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재의 수요일이라고 하는 수요일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면 2일이 빠져서 47일이 되지요.
그리고 7주간 중에서 주일은 다 뺍니다. 그러면 7일이 빠져서 딱 40일이 됩니다.
그렇다면 주일은 왜 뺄까요?
1년 주기로 부활주일은 한 번이지만, 사실 매 주일이 작은 부활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일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여 기뻐하고 축하하는 날이지 슬퍼하거나 참회하는 날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주일은 빼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사순절에서도 주일을 제외할 만큼 초대교회부터 항상 교회의 중심은 예수님의 부활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예수님의 부활이 미래적으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한다는 사실 외에 지금 현재의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크게 두 가지의 의미가 있는데요,
먼저 첫 번째로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목도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라고 전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렇게 반응을 합니다.
“아니, 어떻게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느냐?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아라!”
그러면 제자들이
“예수님은 사람이 아니라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죽음에 매여 계실 수 없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며 예수님께서는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 주셨다!”
이렇게 증언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사람들이 또 묻습니다.
“아니, 그렇다면 왜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셔서 죽임을 당하셨는가?”
그러면 제자들이
“바로 우리의 죄 때문이다. 한 사람 아담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죄가 들어왔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었는데, 예수님께서 그런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완전한 제물로 단번에 하나님께 드리셨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설명을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시작으로 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예수님이 어떤 존재이신지, 더 나아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사역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우리에게 알게 해줍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예수님은 우리와 가까이 있지 않은, 그저 멀리서 우리를 지켜보기만 하시는 분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는 사실은 완전한 권세와 능력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권세와 능력으로 지금도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죠.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삶에 어려움이 닥칠 때에 이 사실을 의심할 수 있습니다.
아니, 예수님이 나와 함께하시면 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지? 내가 이렇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
이런 경험들 다들 있으시잖아요?
그런데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초대 교회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이 지금도 이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사실에 의심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초기 기독교는 로마에 의해서 엄청난 박해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1차 박해는 로마의 네로 황제라는 사람에 의해서 발생했는데, 로마에 발생한 대 화제를 기독교인들의 소행으로 뒤집어 씌웠습니다.
그래서 이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사도들 대부분이 이 때에 순교를 하게 되지요.
이렇게 매우 힘겨운 박해가 겨우 지나갔는데 또 A.D.90년경 로마의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또다시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사람들의 공포는 더욱 극심했습니다.
왜요? 이미 1차 박해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저희 때만 해도 학창시절에 매를 맞았습니다. 어떤 때에는 여러 명이 매를 맞는 경우가 있었지요. 그런데 매를 처음 맞는 사람이 더 공포스러울까요? 아니면 뒤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이 더 공포스러울까요?
당연히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매를 맞고 픽픽 쓰러지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이 계속 증폭되는 것이죠.
기독교인들이 처음 네로에 의해 박해를 받을 때에는 박해가 무엇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견딜 수 있었죠.
그런데 또다시 그런 박해가 시작되자 사람들이 시작부터 너무 겁에 질려버렸습니다.
그런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기록한 책이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무섭고 두려운 책이 아니라 힘과 용기를 주는 책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사도요한이 기록했는데요, 당시 사도요한은 복음을 전하다가 밧모 섬이라는 곳에 유배되어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사도요한에게 예수님께서는 제일 먼저 환상 중에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시며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런 모습을 하고 계셨습니다.
일곱 금 촛대 사이에 계시면서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흰
양털 같은 머리와 털을 하시고 불꽃 같은 눈을 하고 계셨으며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음성은 많은 물소리 같으며
오른손에는 일곱 별이 있고 입에서는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았습니다.
여기서 일곱 금 촛대는 무엇일까요?
당시 소아시아 지역에 있었던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오른 손에 있는 일곱 별은 무엇일까요?
일곱 교회의 사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일곱 금 촛대 사이에 계시며 일곱 별을 오른 손에 쥐고 계신다는 것은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교회와 성도들을 보살피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 1:17-20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나는 살아 있다! 그리고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내가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라구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너희의 눈에 보이는 그 로마의 황제, 도미티아누스가 아니다! 전에 죽었었지만 지금은 부활해서 살아 있는 내가 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으며 일곱 교회와 일곱 교회의 사자들을 보살피고 있다!
이런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기독교는요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만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계십니다.
이 세상의 어떤 왕이나 대통령이나 권력자나 기업가나 강대국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지금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이 세상의 왕은,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 바로 우리 믿음의 선조들의 신앙고백이었으며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에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하실, 그리고 지금도 살아 계셔서 나의 삶과 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 나는 살아있는 자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내가 가졌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다”
그 부활이요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삼고, 예수님과 끝까지 동행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 Be on guard! Be alert! You do not know when that time will come.
▣ 그 날을 준비하라
이솝우화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사자와 당나귀, 여우 셋이서 힘을 합해 사냥을 했습니다. 그리고 사냥한 것을 나누는데, 사자가 당나귀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당나귀는 똑같이 셋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랬더니 사자는 공평하지 못하다 하면서 당나귀를
잡아먹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번에는 여우한테 나누어 보라고 합니다. 그러자 여우는 대부분을 사자 몫으로 돌리고 자기는
쥐꼬리만큼 가졌습니다. 그때서야 사자는 흡족해 이제야 공평하게 되었구나 말합니다. 사자가 여우에게 묻습니다. "너는 어떻게 해서
이런 지혜를 생각해 냈느냐" 그러자 여우가 대답하기를, "어떻게는 뭘, 당나귀 죽는 것보고 생각해 냈지". 남에게
일어난 일을 보고 내게 일어날 일을 생각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가를 보고 우리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미리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준비하여야합니다. 다른 사람이 병에 들었습니까? 그것을 보면서 우리도 병들
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준비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우리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을 알고
준비하셔야 합니다.
성경전체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귀중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날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그 날' 이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창세기 7장
11절입니다. "노아가 육백세 되던 해 이월, 그 달 십칠일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 창들이 열려" . 여기서
그 날은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시는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마가복음13장 19절에서 예수님은 "그 날들은 환난의 날이
되었음이라, 하나님의 창조하신 창조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그 날 역시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심판하실 날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심판의 날인 그 날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 종말은 언제 오는가
먼저 종말에 관해 두 가지로 묘사하고 있다. 우리말로는 똑같으나 영어로는 두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하나는 마지막 날들(last days)이고 다른 하나는 마지막 날(the Last Day)이다. 처음에
말한 것은 예수님의 초림에서 재림 때까지의 모든 기간을 말하고 두번째 말한 것은 예수님의 재림의 때(말세지말)를 말한다. 우리는
흔히 두번째 말한 것만을 말하기 때문에 혼돈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면 두번째 말한 말세지말은 언제인가?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그 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30절)고 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의 관심은 그 날을 꼭 알고 싶어한다. 그래서 교회사를 보면 여러 번 주님의 재림의 날을 예언하여 물의를 일으킨 소위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있었다. 최근 한국에서 물의를 일으킨 다미선교회의 시한부 종말론 주장을 기억하고 있다. 주님께서 아무도
모른다고 했는데 자기들은 안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단이다. 이런
시한부 종말론은 인류역사 6000년이란 잘못된 역사관과 왜곡된 성경 해석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면 종말이 언제 올지 전혀 알 수
없다는 말인가? 초대교회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에도 종말론에 관한 혼란이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종말)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살전
5:1∼2) 그러나 바울의 이런 경고에도 불구하고 종말에
관한 혼란은 해결되지 않았다. 그래서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권면한다. “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살후 2:2) 그러면서
종말의 징조에 대해서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나니”(살후
2:3)라고 예언하고 있다. 비가 올 때에는 먼저 바람이 불고,구름이 끼고,날씨가 후텁지근하듯이 종말에도 먼저 여러 징조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마태복음 24장에는 네 가지 징조를
말하고 있다. 첫째는 거짓 그리스도가 일어날 것이고 둘째는 민족이 민족을,나라가 나라를 대적해 일어나고,셋째는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게 되고,넷째는 불법이 성함으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될 때에야 끝이
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마 24:14).
▣ 반드시 성취될 재림
우리는
이제 생각해 보자! 예수님이 땅위에 오시리란 구약의 예언 회수는 456회인데, 주님의 재림 예언 회수는 신구약에 도합
1518회(신약에만 300회)라고 하는 사실을! 456회 예언된 예수님의 초림(初臨)은 성취되었는데, 1518회나 예언된 재림은
성취되지 않을까? 우리는 몇 천 번이라도 대답하기를, 그 약속은 이루어진다고 할 것이다. 하나님은 약속을 그대로 지키시는
어른이시다. 그의 약속은 곧 사실과 같은 것이며, 진리자체이다. 그는 여러 천년을 앞두고, 약속하시며, 기약이 이르면
성취하신다.(계1:7-)
▣ 목숨의 소중함
마태복음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신약
성서는 종말론적 관심이 옥중에서 해방을 기다리고, 밤중에 새벽을 기다림같이 열망적입니다. 재림에 관련된 곳이 318번이나 썼고
천국과 지옥과 부활과 영혼 구원문제는 백주의 태양처럼 강렬한 현실이었습니다. "온천하를 얻고도 네 영혼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현세주의자에게 주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너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하시고 말세에 사람들이
노아 때처럼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마24:38)하는 현세가 전부이며, 유물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의 가치관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말세 인간들은 예수 재림을 기롱합니다(벧후3:3). 복음적 신앙을 오히려 반사회, 반문명, 반지성, 혹은 피안주의니
현실도피니 하는 낙인을 찍어 냉소하는 풍조를 만듭니다. 그것도 진화론 공작과 함께 악마의 반성서적, 반내세적, 반종말적정신 풍토
조성을 위한 고등공작의 가장 성공한 케이스입니다. 오늘도 영적인 세계를 알고 깨어 근신하며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깨어 있으라(그레고레이테. γρηγορειτε. Be alert!. Keep watch!)
1127. 깨어 있으라(그레고레오. grēgŏreʹō) γρηγορέω
1. 깨어 있다, 2. 정신차리고 있다, 3. 마태복음 24:43
발음
/ 그래고리오[ grēgŏreʹō ] 어원 / 제1부정과거 ἐγρήγορα, 145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깨어 있다(마 24:43, 막 13:34, 눅 12:37), 일깨다(행 20:31, 계 3:2, 3), 깨다(살전 5:6, 벧전 5:8, 계 16:15) 신약 성경 / 22회 사용
깨어 있다, 경성하다.
a.
[문자적으로] 마 24:43, 26:38, 40, 막 13:34, 14:34,37, 눅 12:37, 39.
b. [상징적으로] 정신차리고 있다, 지켜보고 있다, 마 24:42, 25:13, 26:41, 막 13:35, 37, 14:38, 행 20:31, 고전 16:13, 살전 5:6,10, 벧전 5:8, 골 4:2, 계 3:2, 3, 16:15.
마태복음 24:42-43a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마태복음 25:13 / 그 날과 그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사도행전 20:31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고린도전서 16:13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요한계시록 3:3 / 회개하라!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요한계시록 16:15 / 자기 옷(행실)을 지키라!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베드로전서 5:8 / 마귀가 삼킬 자를 찾느니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골로새서 4:2 /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미혹(4105) πλανάω
1. 길을 잃게 하다, 2. 그릇되게 인도하다, 3. 길을 잃다
발음
/ 프라나오[ planaō ]
어원 / 미래 πλανήσω, 제1부정과거 ἐπλά- νησα, 수동태 완료 πεπλάνημαι, 제1부정 과거 ἐπλανήθην, 410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길을 잃다(마 18:12,13), 오해하다(마22:29, 막12:27), 미혹받다(마24:4, 고전6:9),
속다(고전15:33, 딛3:3, 약1:16), 속이다(갈6:7), 속다(고전15:33, 딛3:3, 약1:16), 속이다(갈6:7,
요일1:8), 미혹되다(히3:10, 5:2, 벧후2:15), 미혹하다(계13:14), 유리하다(히11:38), 꾀다(계2:20,
12:9) 신약 성경 / 39회 사용
마가복음 13장 내용 분해 13:1-4. 성전 본 후 제자들과 한 문답.
13:5-13. 이 세상의 끝, 즉 재난의 올 일의 예언과 경고, 격려.
13:14-23. 대환난, 즉 예루살렘의 멸망과, 그것이 예표하는 세상의 끝.
13:24-27. 영광 주의 재림, 즉 재림의 그리스도의 지상 현현.
13:28-32. 무화과나무의 비유.
13:33-37. 주의하고, 깨어 있으라는 경고.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을 예언하셨다(1-2절). 감람산에 올라가사 제자들에게 종말에 일어날 여러 가지 현상들에 대하여
예언하셨다. 각처에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고 전쟁과 지진이 일어나고 복음이 만국에 전파되고 해와 달과 별의 권능이 흔들릴 때
인자가 구름 타고 영광 중에 온다고 말씀하셨다(3-27절). 그리고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구체적인 종말의 때는 알지
못하지만 대략적인 때는 알 수 있을 터이니 깨어 있으라고 경고하셨다(28-37절).
마가복음 13장은 이스라엘의 멸망과 세상 종말에 있을 사건을 복합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의 운명을 예언하신 후에
감람산에서 성전을 바라보시면서 마지막 날에 일어날 사건들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예언을 감람산에서 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감람산 강화라고도 합니다.
구약의 메시야 예언은 초림과 재림을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 사람들은 메시야가 한번 오는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메시야의 예언은 초림(初臨)과 재림(再臨)으로 구분합니다.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는 두 산을 멀리서 바라보면 하나의 평면에 나란히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와 같이 구약은 초림의 메시야와 재림의 메시야를 하나의 평면적 화폭에다 동일하게 묘사한 것입니다. 마가복음 13장에서 묘사된
종말의 성격도 이와 비슷합니다. 일반적으로 종말(終末)이란 메시야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모든 기간을 말합니다. 그러나 역사의 끝에 오는 우주적 종말도 역시 종말이라고 합니다.
마가복음 13장은 이와 같은 두 가지 성격의 종말을 동일한 화폭에다 평면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은 주후 70년에 일어난 사건이고, 해와 달이 빛을 잃어버 리는 일은 우주적 대종말 사건을 말합니다. 두 가지를 한
화폭의 동일한 평면 위에 묘사하였기 때문에 종말의 사건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를 종말의 시대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종말의 시대가 언제 끝날지는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항상 종말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종말론적 신앙 즉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깨어 있다는 신앙은 오늘이 아닌 지금이 종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마지막처럼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늘 깨어서 기도하며 늘 깨어서 등과 기름을 준비하는 일에 부족함이 없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시대가 어둡고 사회가 혼란스러울 때는 항상 종말론이 득세했다. 현세적인 암울함을 미래적인 희망으로 견뎌내려는
몸짓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종말론은 대체로 현실도피적인 종말론이었다. 그것은 성경적인 종말론적 신앙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종말이 구체적으로 언제라고 주장하는 모든 시도들 역시 배후에는 현실도피적인 종말론이 도사리고 있다. 성경적인 종말론은 언제
종말이 오든지 동일한 신앙과 동일한 삶을 살아가며, 항상 종말을 소망하며 내일 종말이 오는 것처럼 살아가는 신앙과 삶이다.
5절. “주의하라”(플레페테, 조심하다, 경계하다)
가르침 전반에 나타난 경계하라는 외침이다.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메시야의 이름을
사칭하며 다니는 자들을 주의하라고 경고하셨다. 위기 시기에는 많은 거짓 메시야들이 일어날 것이며,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여 “내가
그로라”라고 주장할 것이다. 신성에 대한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 자신의 자기 계시의 형식 속에 표현되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할 것이다.
7-8절. 두 번째로 예수께서는 전쟁과 천재지변이 일어난다고 해서 종말이 왔다고 생각하는 잘못에 대해 경고하셨다. 전쟁에 대해서 그리고
전쟁의 소문이 멀리서 들을 때마다 놀라서 하던 일을 멈추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목적 아래서 일어나는데 이것들은 인간이 번역과 죄의 결과로서 허락된 전쟁을 포함하고 있다. 종말 이전에
얼마 동안의 기간이 지속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각 시대마다 각 시대의 전쟁과 천재지변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일어난다. 인간이 역사는 새로운 메시야 시대의 출현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마가복음에 나오는 독특한 타국에 나간 집주인의 비유는 계속해서 깨어 있을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깨어 있다는 것은 맡은 일에 충실한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예수는 비유를 이 비유를 문지기와 다른 종들 사이의 구분 없이 그의 제자들에게 적용하셨다. 그들은 모두
영적인 위험과 기회들에 대해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책임이 있다.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을 대표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문제점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았고, 율법을 알고 있으되
행하지 않았으므로 멸망까지 받았습니다. 사람이 알고도 행치 않는 것은
모르고 죄를 짓는 것보다 더더욱 하나님의 심판을 무섭게 받습니다.
행하지 않는 믿음은 헛것이라 했습니다(약 2:). 우리가 말세에 대한 교훈을 받았으므로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로서 경건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참다운 뜻이 무엇인지를 기억하면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자세로 살려면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42-43,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주님 오시는 날은 신부된 교회와 신랑되신 예수님의 만남으로 성경은 비유하고 있습니다(마 24; 계 19;). 마태복음 25장에는 열 처녀 비유로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등불에 기름을 미리 준비하고 켜서 신랑이 언제라도 오시면 맞이할 준비를 잘 하였던 관계로 마침내 신랑이 오셨을 때 맞이하였다는 비유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5: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누가복음 21: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골로새서 4:2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대환난시에 공중휴거를 믿고 있으나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또한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불현듯이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지식이 겸하고 믿음 안에서 영감이
밝아져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될 것을 알고 주께서 강림하신 것도
도적같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살전 5:4-5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
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라는 말씀에서 증거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로 영안이 밝아져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주님을 기다리는 밝은 영감으로 두려움이나 갑자기 임하시는 공포가 아니라 소망 가운데서 환난을 겪으나 뜻을 알고 상급을 향하여 인내하고 주를 바랄 것입니다.
바울은 구원의 확신과 그 구원이 하나님의 계시로 인하여 얻어진 은혜임을 찬양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엡 1:). 그럼에도 깊은 신앙인의 영감된 교훈을 해주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구원이 알미니안주의자들처럼 우리의 의지로 불안하게 결정되기 때문에
조심하라는 의미가 아니라,하나님의 구원을 경건하고도 귀하게 여기면서
우리에게 역사하신 구원의 완성을 얻을 때가지 교만하지 말고, 영적으로 잠자지 말고, 떨림으로, 즉 감사와 경건과 조심 가운데서 주의 거룩하신
은총의 구원을 달성해 나가라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로 종말에 가까워가는 징조들이 일어나는 이 시대에, 베드로의 권면을 듣고 새로운 결심과 기도가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베드로후서 3:11-13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이 말씀을 가슴으로 받아서 주의 임하심을 간절히 사모하며 신앙인의 참다운 승리를 가져오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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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다, 2. 들보, 3. 큰 건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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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lĕpō ] 관련 성경 / 보다(마 5:28, 눅 6:41, 요 1:29), 보게 되다(마 12:22), 뵙다(마 18:10),
주의하다(마 24:4, 막 8:15, 눅 21:18), 삼가다(막 4:24, 눅 8:18), 보이다(막 8:23), 조심하다(막 13:9,
고전 8:9), 돌아보다(눅 9:62), (눈이)밝아지다(요 9:7). 신약 성경 / 133회 사용
말세에 나타날 징조들(디모데후서 3:1-5)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말세에 나타날 징조들로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무정하며, 사나우며, 쾌락을 좋아하며, 경건의 능력보다도 경건의 모양만 갖추는...."
정말
2천 년 전에 기록된 말씀이지만 요즈음의 세태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갈수록 메말라가는 인심과 이기적인 성정,
돈이 최고가 되는 세상, 이해관계가 조금이라도 복잡해지면 칼부림이 일어나고, 겉으로만 거룩한 척 경건의 모양만 갖추는
신앙... 말씀은 정확하게 그것을 가리키고 있다.
저희가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가라사대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하며 때가 가까왔다 하겠으나 저희를 좇지 말라 난리와 소란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니라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 누가복음21:8-11
예수님과 함께 있는 제자들은 말세의 나타날 징조에 대해 물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많은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로라... for many shall come in my name, saying,I am Christ
수많은 사이비 종교 집단의 가장 큰 특성은 바로 교주인 "자기가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 '안ㅇ홍'도,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신천지 증거장막 성전 '이ㅇ희'도 모두 자기가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다. 신천지
이ㅇ희는 죽지 않는다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요즘은 그가 나이 늙고 죽을 것 같으니 너무 수고해서 하나님이 데려갈 것
같다고 했다는데... 그것을 믿고 추종하는 신도들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성경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성경 말씀은 안 믿고 왜
그의 말은 믿느냐는 것이다. 성경은 누구나 죽음은 정해져 있다고, 사람이면 다 죽는다고 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브리서9:27)
사람이면
누구나 정해진 죽음을 피해갈 수가 없다. 그가 죽지 않으려면 늙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이ㅇ희는 구순이 다 된 힘 없는
인간이다. 신천지는 처음부터 사람을 포섭하기 위한 전략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드러내지 않고 미혹하고, 서로 가까워지면 말도 안되는
왜곡된 복음을 이야기하며, 본격적으로 수개월 간의 교육을 통하여 교인으로 등록하기 때문에, 신천지라는 곳을 인지할 시점이면 이미
빠져 나올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복음이 정확히 서 있지 못하면 그냥 끌려가는 줄도 모르게 빠져버리고, 교주가 하는
행태도 분간을 할 수 없는 그런 지경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정말 정말 안타깝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세 때가 되면 당신의 자리에
앉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하셨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국가간의 전쟁은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제1,2차
세계대전과 6.25 한국 전쟁 등, 그 수많은 전쟁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다. 물론 그렇지 않아도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불청객이지만, 전쟁은 평화로움을 깨고 좀 더 향유할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간다.
기록된
말씀에 따르면 말세가 가까우면 국가간의 전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의 상황은 지금까지의 평화무드에서 냉전
상태로 점점 흘러가는 느낌이다. 언제 어느 곳에서 국지적인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그런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성경은 마지막
때가 되면 세계대전 즉,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난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
예루살렘에 있는 황금돔, 즉 이슬람의 모스크로 사용 중인 황금사원 자리를 두고 전쟁의 기운이 싹트고 있다. 그 자리는
유대인이나, 이슬람이나 기독교나 모두의 성지다. 원래 그곳은 창세기 22장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려던 그
자리이기 때문에, 또 솔로몬 성전,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다가 AD 70년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게 함락당한 자리라, 유대인은 그
자리에 이제 제3성전을 지으려고 모든 것을 준비해 놓았다. 통곡의 벽은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의 서쪽 벽이다. 이슬람은 그 자리가
이슬람의 창시자 마호멧이 승천한 자리라고 한다. 지금은 그들이 모스크로 사용하고 있다. 기독교는 그 자리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자리다. 그래서 그곳은 세 종교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지구온난화, 이상 기후, 화산, 지진, 쓰나미, 전염병...
지구는 지금 몸살을 앓고 있다.
오존층이
구멍이 크게 생기고 기후환경 문제로 곳곳에서 화산과 지진과 쓰나미가 발생한다. 남극과 북극에서는 지구 온난화로 여의도 수십 배
만한 빙하가 갈라지고 흘러내린다. 한반도에도 이젠 겨울엔 예전처럼 눈이 안오고 있다. 과거보다 더 잦은 이상 기후로 지구
곳곳이 고통스럽다. 또 지진은 언제 우리 가까이에 또 나타날지 모른다. 안전하다는 우리나라도 최근 동해안에서 지진의 기운이
조금씩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이젠 남의 나라 이야기로만 치부할 때가 넘었다. 아직도 아프리카에서는 기근으로 고통받고 있고, 지금
팬더믹으로 퍼져 나가는 코로나와 같은 온역으로 세계가 긴장하고 있다. 이 유행병은 전에 없이 확산되는 감염병인 것 같다.
앞으로도 이 뿐만 아니라 또 무슨 유행병이 또 다가올지 모른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말미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 누가복음21:29-36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사람들은 이 시대를 보면서 ‘말세(末世)’라고 말한다. 말세에
나타날 징조를 조금씩 체감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직접적으로 피부로 다가옴을 느끼지 못한다. 갈수록 우리 마음이
굳어져 간다는 뜻이다. 그리고 거기에 더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외면하며 농담으로 아주 우습게 여겨버린다. 그래서 더더욱 이
말세가 다가오는 시점에 그 마음에 영원에 대한 울림이 오고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복된 사람들인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마음이 굳어지고 피폐해져 가는 것을, 또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는 자들을 예견하시고, 말세가 되면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게 되는지 말씀하고 있다.
먼저 이것을 알찌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 베드로후서3:5
*기롱 : 실없는 말로 시시덕거림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약속했다고? 웃기고 있네, 오늘도 어제처럼 해가 떴고 수천 년 전 처럼 변함없이 잘 돌아가고 있는데 무슨 말세같은 소리야? 그래 자주 듣던 소리로 좋게 표현한 말이다.ㅎ
시편 73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 시편73:16-19 -
제발 우리 모두는 절대로 ‘저희’ 안에 들어가지 말자.
말세의 징조에 관하여
오늘날 한국 교회에 난무하고 있는 비 성경적인 시한부 종말론에 대하여 교회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올바른 성경적인 종말론을 확립하여야 할 시급한 과제를 안고 있다는 것이 모두의 공통된 견해라고 생각된다. 말씀을 올바로 알지 못할때 이단 사상에 동요되며 미혹받을 수 밖에 없음을 명심하고확고한 성경관과 말씀에 기초한 올바른 신앙관이 요구되는 것 이다.
제한된 지면을 통하여 종말에 대한 전체적인 부분들을 살펴볼 수 는 없고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종말론의 한 부분인 말세의 징조들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3.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때에 이런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6.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7. 민족이 민족을,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8.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9. 그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10. 그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3.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태복음 24:3-14)
성경에서 말세(last times, 카이로스 에스카톤)에 대한 개념은 매우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세상끝의 마지막 한 시점일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재림에 이르기까지의 전 기간을 가리키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종말의 성격이 현재,과거,미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성경에서 징조(sign, 세메이온),특히 시대의 징조는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키거나 재림을 선행하는 사건들이나 상황들을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되어진다.
말세에 나타나는 징조들을 구분하여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면,1.하나님의 은총을 증거하는 징조들 1)모든 나라에 복음이 선포됨 먼저 말세,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parousia)이전의 대 사건들에는 첫째,복음이 모든 민족과 국가들에 전파되어야 함을 보여준다.(마24:14,막13:10,롬11:25)
*1)이 징조에 관하여는 이미 구약이 예견하여 구약의 예언자들은 말세가 곧 시작될 것이며 그때에 성령이 모든 육체 위에 부어질 것 이며(욜2:28) 땅의 모든 끝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라고 예언하였다.(사52:10,42:6,40:5)
*2)또한 복음서에서도 그리스도는 재림이 일어나기 전에 모든 나라에 복음이 전파되어야 할 것이라고 가르치셨다.(마24:14, 막13:10)
*3)이것은 전 세계 인류 한사람 한 사람에게 복음이 전파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말씀은 각 나라마다 복음을 접할 수 있게 되어 복음의 영향력을 받는 때를 말한다고 볼 수 있으며 복음은 모든 민족들에게 결단을 요청하는 하나의 증거물로써 세상의 모든 나라들이 직면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민족에게 복음의 선포"는 재림의 하나의 분명한 징조인 것이다.
2)이스라엘의 회심.(슥12:10,슥13:1,롬11:25-29) *4)
롬11:26의 "온 이스라엘"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택하신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를
의미하며 여기서 "충만"(pleroma)은 종말론적 의미를 가지며 결국 이스라엘의 많
은 수가 세상 끝날에 주님께 돌아옴을 의미한다 하겠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은 이스라엘의 충만함이 구원을 얻는 일 속에 성
취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의 충만한 숫자의 구원에 대한 징조 자체가 그리스도의 다
시 오시는 시기에 관해 정확하게 예측해 주지는 못하며 이 징조는 다만 이방인의
충만한 숫자가 모여지는 것 처럼 유대인들도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
간 동안 계속적으로 기독교로 개종하게 될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유대인들의 개종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다시오심이
확실하다는 징조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유대인을 향한 교회의 선교적 사명이 얼마나 중요
한가를 깨닫게 해 주는 것이다.
하나님께 반역하는 징조들
1. 환난
환란은 하나님의 왕국에 대항하는 원수들에 의한 대적의 표시인 것 이다. 이 환란은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예레미야와 다니엘)에 의해 예언되었다.(렘 30:7,단12:1) *5)
신약에서는 에루살렘의 멸망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과 세상 끝날에 관한 문제가 서로 혼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마 24:3-51,막 13:3-37, 눅 21:5-36의 예수님의 종말론적 말씀은 먼 미래에 발생 할 사건들과 가까운 미래에 발생할 사건(예루살렘의 멸망)을 함께 묶어 선포하고있는데 여기서 예루살렘의 멸망은 세상의 종말에 대한 예표인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환란의 징조가 단지 세상 끝에만 국한되어 발생한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며 오히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을 환란의 때로 특징지우는 것이 바람직 하다 하겠으며 환란의 징조 역시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에 관하여는 정확한 날자를 추산해 주지는 못하는 것 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이 존속하는 동안 계속적인 환란을 겪어야만 하는 것이며 환란의 징조는 우리로 하여금 깨어 각성하게끔 하며 그리스도인들이 환란과 박해를 만나게 될때 이 것은 그리스도의 다시오심이 점점 가까와 오고 있음을 알리는 징조인 것이다.
2. 배도
하나님의 왕국에 반항하는 시대의 또다른 징조는 "배도"로써 배도는 이미 구약에서언급을 하고 있는데 이는 이스라엘이 광야 시대에 대 규모적 배역하는 일로 말미암아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음을 맛보게 된 것이다. 또한 사사 시대,남북 왕국 시대에도 계속적으로 이스라엘의 배도와 패역함 때문에 이스라엘이 멸망,포로로 끌려가는 비침한 결과가 초래하였음을 역사서와 예언서속에서 우리는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신약 성경에는 두가지 측면에서 배역하는 일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첫째는 교회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는 일에서 점점 멀어지제 되는 배도함들이 계속적으로 일어날 것을 말하였고,둘째는 예수님의 재림 사건(Parousia) 바로 직전에 최종적 대규모 배도함이 발생할 것에 대하여 신약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마 24:10-12, 24). 따라서 배도하는 일은 말세의 징조들중에 하나이나,배도 역시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를 정확하게 추정해 주지는 못한다. 우리는 다만 이 시대속에서 믿음안에서 굳게 서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기도하면서 항상 준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3. 적그리스도(Anti Christ)
하나님을 대적하는 징조로써 가장 현격한 징조는 "적 그리스도의 출현"이다. 적그리스도(anti christ)는 그리스도의 자리를 대신 취하는자, 그리스도의 모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를 반대하는 자로 설명되며 적그리스도는 어떤 사물이 아닌 인격적인 존재로서 설명할 수 있다. 이 징조 역시 구약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데, 예를 들면 네 짐승에 관한 다니엘의 꿈속에 언급되고 있는 "작은 뿔"(단 7:24-26),*6) "북방왕"(단 11:36)에 관한 기록들이 있다.우리는 적그리스도에 관한 신약의 가르침은 이미 구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으며 안티오커스 에파네스(antiochus epiphanes:헬라 지배시 유대의 폭군)나 디도(titus: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로마 장군)는 장차 올 적 그리스도의 모형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살후 2:3 이하의 "불법의 사람"의 출현은 적 그리스도와 동일시 할 수 있는데 이 불법의 사람은 큰 배도 사건후에 나타나며, 이는 하나의 인격체이며, 숭배의 대상이며, 불법의 사람은 대의 명분을 나타내기 위하여 속임수와 기적과 거짓 가르침을 사용하게 될 것 이나 그리스도의 재림시 완전히 무너뜨림을 당할 것이다. 따라서 다른 징조들처럼 적 그리스도라는 징조도 교회의 역사를 통하여 면면히 나타나고 있으며 각 시대는 각 시대 특유의 적 그리스도적 행위가 나타나고 있기에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결정적인 적 그리스도 한명의 출현을 예기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적 그리스도와 그들의 가르침과 행위들에 대하여 조심하고 경성하기를 게을리 해서는 안될 것이다.
3.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키는 징조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반영하는 징조들에는 전쟁과 지진과 기근들이 있다. 예수님의 말씀에도 이런 징조들이 언급되고 있다(마 24:6-8, 눅 13:7-8, 21:9-11) . 전쟁과 지진과 기근들의 징조 역시 이미 구약에 그 선례를 갖고 있는데 "민족이 일어나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항하리라"라는 말씀은 사 19:2, 대하 15:6에서 인용된 문구인 것이다. 구약에서는 역사속에 하나님이 간섭하시는 사실을 묘사하기 위해 지진이 종종 언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사 5:4-5, 시 18:7, 시 68:8, 사24:19,사 64:1) *7) 기근에 대한 예언은 렘 15:2, 겔 5:16-17, 겔 14:13에 언급되고 있다. 이러한 징조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증표들이나 그렇다고 해서 전쟁,지진,기근등과 같은 재난때문에 죽거나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의 진노의 특별한 대상들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데 그것은 실로암의 망대가 무너져 죽은 자들에 관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해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것 이다.(눅 13:4) *8) 그러나 이러한 징조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증표들이라는 뜻은, 현 세상이 하나님이 저주 아래 놓여 있으며(창 3:17)하나님의 진노가 끊임없이 사람들의불 경건함과 악함을 향해 하늘로부터 나타나고 있다는 의미인 것 이다(롬 1:18) *9) 즉, 이러한 징조들은 우리로 하여금 참 재판장이 문 앞에 서 계시다(약 5:9)는 심판의 임박성이라는 진리를 깨닫게 해 주는 것으로 우리는 이러한 징조들이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사이의 기간을 특징지워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결론
지금껏 많은 사람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를 계산하여 예언하였으나 모든 예언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날과 그 시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고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마 24:36-44, 막 13:21,22) 자기의 죽을 날자를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것처럼 이 세상의 종말이 임할 날자는 우리들 중에 아무에게도 계시된 바 전혀 없다. 그러나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은 그날이 갑자기 임할 것과(고전 15:52. 마 24:27) 그날이 언제 임할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벧후 3:4.마24:48-51.계 16:15)
우리는 앞 부분에서 말세의 여러가지 징조들을 살펴보았는데 분명한 것은 말씀과 시대의 징조들이 주의 날이 가까운 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사실이나 그 시기와 일자를 정하는 것은 위험하기 그지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재림의 징조들에 관하여 언급은 하고 있지만 재림의 시기에 있어서 구체적인 일시에 대하여는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 계시되지 않는 것, 기록되지 않는 것은 우리는 알 수 없으며 오히려 침묵하는 것이 성경적이다. 우리는 재림의 시기를 모르므로 깨어 기도해야 할 것이고 깨어있는 자만이 슬기로운 처녀와 같은 신앙이 될 것이다. 이제 교회는 올바른 종말론적 신앙을 교인들에게 성경적 시각에서 정립해 주어야 할 것이며 누구든지 "기록된 말씀 밖으로" 나갈 때, 그것은 파멸의 길이라는 것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계 22:18-19절의 경고를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말씀에 그 무엇을 가하지도 말고 감하지도 말라는 엄숙한 명령과 무서운 경고는 "때가 가까운" 지금에 해당되는 경고인것이다. 교회는 이런 시점에서 성도들에게 건전한 성경관을 확립해 주어야 할 것이며 시한부 종말론에 대한 적극적인 대책으로 교회가 올바른 말씀 교육을 해야 한다. 모쪼록 우리 모두는 주님의 재림을 기억하고 세상의 깊은 죄악의 잠에서 깨어나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하고 있는 "시작된 종말"과 "완성될 종말"이라는 차원에서 현재라는 삶속에서 조화있는 신앙을 소유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 이다.
*참고 성경:
1.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2. "여호와게서 열방의 목전에서 그 거룩한 팔을 나타내셨으므로 모든 땅 끝까지도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사 52:10) 3.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막 13:10)
4.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슥 13:1) 5. "슬프다 그 날이여 비할데 없이 크니 이는 야곱의 환난의 때가 됨이로다 마는그가 이에서 구하여 냄을 얻으리로다"(렘 30:7) 6. "그가 장차 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자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며 성도는 그의 손에 붙인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단 7:26) 7. "땅이 깨어지고 깨어지며 땅이 갈라지고 땅이 흔들리고 흔들리며....(사 24:19) 8.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눅 13:4) 9.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롬 1:18) 10.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계 16:15)
말세 징조에 관한 성경 구절 — 주의 재림을 맞이하는 길을 찾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이를 통해 마지막 때에 주님이 돌아오시면 말씀을 하여 문을 두드리심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맞이한 자는 환란 전 휴거 되어 주와 함께 잔치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아래의 글을 통해 더 자세한 내용과 구체적인 실행의 길을 찾아보십시오.
말세 징조에 관한 성경 구절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마태복음 24: 3)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마태복음 24: 7-8)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태복음 24:37-39)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마태복음 24:21)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요엘 2:30~31)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 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 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요한계시록 16:12~13)
『말세가 도래하면서 각국이 불안정하고 정치가 혼란하며, 기근, 전염병, 수해, 가뭄이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인간 세상에 재난이 있고 하늘도 재앙을 내린다. 이것이 말세의 징조다.』
『모든 재난이 연달아 임하고 있다. 각국 각 지역에 재난이 일어나고 있으며, 전염병, 기근, 수해, 가뭄,
지진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이미 한두 곳의 문제도, 하루 이틀에 끝날 문제도 아니다. 재난 지역이 점점 넓어지고 그
심각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이 기간에는 각종 충해(蟲害)까지 연이어 발생하고,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현상도 도처에서 나타날
것이다. 이는 모두 만국 만민에 대한 나의 심판이다. 』
『세계 각 나라 각 지역에서 지진과 기근, 온역, 그리고 갖가지 흉년이 빈번해지고 있다. 내가 각 나라 각
지역에서 크게 역사할 때 이런 흉년은 창세 이후의 그 어떤 때보다 더 심하게 일어날 것인데, 이것은 내가 만민에게 내리는 심판의
시작이다. 하지만 내 아들아, 안심하여라. 그 어떤 재앙도 절대 너희에게 닥치지 않을 것이며, 내가 너희를 보호할 것이다(앞으로
너희는 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살기에 그 어떤 재난의 고통도 겪지 않음을 뜻함). 너희는 나와 함께 왕이 되어 만국
만민을 심판하고, 나와 함께 우주 땅끝에서 영원히 아름다운 복을 누릴 것이다. 이런 말은 모두 응할 것이고 또한 곧바로 이루어질
것이다. 나는 시일을 끌지도 않고 일 처리도 아주 빠르니 조급해하며 속 끓이지 말라. 내가 너에게 베풀어 준 복은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다. 이것이 나의 행정이다. 모든 사람은 나의 모든 행사로 말미암아 나에게 순종하고, 끊임없이 환호하고 끝없이
기뻐 뛸 것이다.』
2. 환란 전 휴거 되어 주와 함께 잔치에 참석하는 길
관련 구절: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눅 12:40)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계 3:20)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계 3:3)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계 16:15)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계 2:11)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요 10:2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 7:7~8)
관련된 말씀:
『하나님의 자취를 찾으려면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음성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의 새
말씀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음성이 있고, 하나님의 자취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행사가 있으며, 하나님의 선포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나타남이 있고, 하나님이 나타나는 그곳에 진리, 길, 생명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하나님의 자취를 찾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다”라는 말을 간과하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진리를 얻고 나서도 하나님의 자취를 찾았다 생각지 않고,
그것을 하나님이 나타난 것으로 인정하지도 않는 것이다. 이 얼마나 심각한 실수인가! 하나님이 사람의 관념대로 나타날 리도 없고,
사람의 요구에 따라 나타날 리는 더더욱 없다. 하나님은 자신의 선택과 계획, 그리고 자신의 목표와 방식에 따라 사역을 한다. 그는
어떤 사역을 하든 사람과 의논할 필요가 없고, 사람의 의견을 구할 필요도 없으며, 모든 사람에게 일일이 알릴 필요는 더더욱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이자 모든 사람들이 마땅히 알아야 할 바이다. 하나님이 나타난 것을 보고 하나님의 발걸음을 따르고자
한다면 먼저 스스로의 관념에서 빠져나와야 하며, 하나님께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고 지나치게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나아가
하나님을 너의 범주 안에 한정하거나 너의 관념 속에 가두지 말아야 한다. 대신 하나님의 자취를 어떻게 찾아야 할지, 하나님이
나타난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새로운 사역에 어떻게 순종해야 할지를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해야 할 일이다.
사람은 모두 진리가 아니며 또 진리를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해야 할 일은 오직 찾고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뿐이다.』
『이런 일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우리 각 사람이 먼저 알아야 할 진리는 성육신한 이상 하나님의
본질이 있고, 성육신한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성육신한 이상 해야 할 사역을 가져오고, 하나님이 성육신한
이상 하나님의 어떠함을 나타낼 것이다. 성육신한 이상 사람에게 진리를 가져다주고, 생명을 베풀고, 길을 가리켜 줄 수 있다.
하나님의 본질을 갖추지 않은 육신이라면 분명히
하나님이 아니다. 이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확실하다.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 맞는지 알아보려면 그가 나타내는 성품과 말씀으로
확인해야 한다. 바꿔 말해서, 하나님이 입은 육신인지 혹은 참도인지 확인하려면 반드시 그의 본질로 판별해야 한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입은 육신인지 아닌지의 핵심은 그 본질(사역, 말씀, 성품 등 훨씬 다양한 측면)에 있지 겉모습에 있지 않다는 말이다.
겉모습을 살피느라 그 본질을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사람이 무지몽매한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이상 단계마다 하나님의 발자취를 바짝 따라야 하고, ‘어린양이 어디로 가든지 따라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런 사람이라야 진정으로 참도를 찾고 구하는 사람이고, 성령의 역사를 아는 사람이다. 글귀나 이치만을
고집스레 지키는 자는 모두 성령의 역사에 의해 도태될 자이다. 하나님이 시기마다 새 사역을 전개하므로 시기마다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시작이 생기는 것이다. 사람이 단지 “여호와는 하나님이다” 혹은 “예수는 그리스도이다”라는 어느 한 시대에 적합한 이런 진리만
지킨다면, 사람은 영원히 성령의 역사를 따라갈 수도, 얻을 수도 없다. 하나님이 어떻게 사역하든지 아무런 의심도 없이 바짝
따라간다면, 사람이 어찌 성령에 의해 도태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지 성령의 역사임을 확신하고, 아무런 걱정 없이
성령의 역사에 협력하여 하나님의 요구대로 한다면, 사람이 어찌 징벌받을 수 있겠느냐?』
06-22-2023(목)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가복음 14장 / 이제는 자고 쉬라(41절)
세번째 오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Returning the third time, he said to them, "Are you
still sleeping and resting? Enough! The hour has come. Look, the Son of
Man is betrayed into the hands of sinners.
(도입 이야기)
기회의 신 카이로스(KAIROS)의 뒷머리가 대머리인 이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의 아들 카이로스의 모습은 무척이나 독특합니다. 앞머리는 숱이 무성한 대신 뒷머리는 대머리이며, 어깨와 양발 뒤꿈치에는 날개가 달려있을 뿐만 아니라 양손에는 저울과 칼을 들고 있습니다.
신화의 등장 인물의 모습은 대부분 은유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카이로스의 앞머리가 무성한 이유는 그를 발견한 자가 그의 머리채를 쉽게 붙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그의 뒷머리는 대머리이기 때문에 머리카락을 붙잡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발에 날개가 달려있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고 합니다. 한번 지나가면 다시는 잡을 수 없는 것 그것을 기회(機會. 틀 기, 모일 회)라고 합니다.
프란체스코 델 로시(Francesco del Rossi)의 프레스코화의 일부분입니다.
카이로스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저울과 칼 인데요, 그것은 기회가 다가왔을 때 해야하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1-2. 율법학자(서기관)들의 예수 살해의 기도.
3-9. 어떤 여인이, 주께 향유를 붓다.
10-11. 유다가 적과 내통하고, 주님을 팔 약속을 하다.
12-16. 유월절의 식사의 준비.
17-21. 최후의 유월절의 식사. 주님을 배반할 자가 있을 것을 말씀하시다.
22-25. 성찬 예식의 제정.
26-31. 감람산으로 가시는 도중, 제자들 특히 베드로가 실족(실패)할 것의 예고.
32-42. 겟세마네의 고민과 기도.
43-52. 예수의 체포와 제자들의 도주.
53-65. 공회(유대의 종교 재판)에 있어서의 예수의 재판.
66-72. 베드로가,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하다.
"이제는 자고 쉬라" 이제는 자고 쉬라. 기회는 지나갔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가실 때 예수님께서는 혼자 가지 않으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세 번째’라는 말은(41절) 앞서 두 씩번이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할 것을 당부’하셨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잠만 잤습니다. 그러자 ‘이제는 자고 쉬라. 기도할 기회가 지나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심각하게 기도하셨던지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었다고 합니다(눅 24:44). 지금 예수님은 심각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깨어 있으라고 부탁하신 것도 잊어버리고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얼마나 답답하고 절박하셨으면, 잠자는 제자들을 두 번이나 깨우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을까요. 그러나 제자들을 잠에 골아 떨어지고 시간은 흘러서 예수님을 잡으려는 사람들이 겟세마네 동산에 몰려왔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 이상 기도할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기도하고 싶어도 기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기도할 수 있는 기회가 지나가버렸습니다.
기도하기 좋은 시간을 잊고 지내셨다면 바로 지금이 기도할 가장 좋은 시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기도하는 일에 집중해야 하겠습니다. 더 이상 기도 할 수 없는 병든 몸이 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기도할 수 없는 위급한 상황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 더 이상 기도할 수 없는 죽음의 문이 열릴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기도는 아무 때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못하면 내일 하고, 내일 못하면 모래에 하고 모래에 못하면 글피에 하려고 합니다. 더구나 금년에 못하면 내년에 하려고 합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기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기도하고 싶어도 기도하지 못하는 날이 반드시 온다고 경고 합니다.
기도도 필요한 때에 해야지, 아무 때나 생각나는 때에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해야 소용이 없고 하나마나 한 긴박한 상황이 다가오고 있다고 합니다.
기도만이 아닙니다. 헌신하는 것도, 봉사하는 것도, 섬기는 것도, 때가 있습니다. 때를 놓치지 말고 기회가 있을 때에 그 기회를 잘 사용할 줄 아는 지혜로운 믿음의 사람으로 그 자리에서 일어납시다. 그리고 기도 합시다! 헌신합시다! 봉사합시다!
‘이 시대는 악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에게 주어진 기회를 잘 살리십시오.’ (에베소서 5:16, 공동번역 성경) 오늘이 내게 주어진 '카이로스의 마지막 시간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마지막 기회를 잘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마가 14:32. 너희는 여기 앉았으라(2523) 카디조(kathizō) καθίζω
1. 앉게 하다. 2. 임명하다. 3. 요한복음 19:13
발음
/ 카디조 [ kathizō ] 관련 성경 / 앉다(마 19:28, 눅 22:30, 고전 10:7), 타다 (막 11:2, 요 12:4), 머물다(눅 24:49), 임하다(행 2:3, 18:11), 세우다(엡 1:20). 신약 성경 / 46회 사용
깨어 있으라(그레고레이테. γρηγορειτε. Be alert!. Keep watch!)
1127. 깨어 있으라(그레고레오. grēgŏreʹō) γρηγορέω
1. 깨어 있다, 2. 정신차리고 있다, 3. 마태복음 24:43
발음
/ 그래고리오[ grēgŏreʹō ] 어원 / 제1부정과거 ἐγρήγορα, 145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깨어 있다(마 24:43, 막 13:34, 눅 12:37), 일깨다(행 20:31, 계 3:2, 3), 깨다(살전 5:6, 벧전 5:8, 계 16:15) 신약 성경 / 22회 사용
삼세번(三-番)의 미학
일생삼회 : 인생에 세 번 기회를 만나다
숫자에 대한 의미나 상징성은 주로 홀수에 집중돼 나타난다. 홀수는 양수(陽數)이기
때문에 중시된 것이다. 예컨대 우리나라의 세시풍속을 보면 1월 1일인 설날, 3월 3일인 삼짇날, 5월 5일 단오, 7월 7일 칠석,
9월 9일 중구일(重九日)'제비가 따뜻한 강남으로 돌아간다는 날) 등 모두 홀수가 중첩된 날이다. 이들 숫자는 양수로서 잡귀를 능히 물리칠 수 있다고 한다. 즉 사람들의 삶이
잘되기를 방해하는 잡귀들을 물리칠 수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이런 숫자 가운데서도 우리 민족은 유난히 셋과 백을 좋아한다.
단군신화에 나타난 숫자, 셋의 의미
유행하는
화투놀이 가운데 고스톱의 기본점수도 3점이다. 이런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이들 숫자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어서 좋아하는
것일까. 숫자에 대한 상징이나 의미부여는 요즘 와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런 모습은 바로 우리 민족의 시원을 보여주는
‘단군신화’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단군신화에는 흥미롭게도 숫자 삼(三)이 많이 등장하는데, 삼 혹은 셋에 대한 우리 민족의
애정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먼저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올 때 풍백,
우사, 운사가 거느리는 삼천의 무리와 천부인(天符印) 3개를 들고 왔다고 한다. 풍백 등은 바람과 비 등 자연의 움직임을 관장하는
인물이다. 이런 자연현상을 관장하는 주술사를 대동한 것은 이 시기의 중요한 생업이 농경이라는 점을 알려주는 대목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왜 3명의 인물을 데리고 왔는가. 바로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이 바로 세 분야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웅녀가 사람이 되기를 위해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말라고 했는데, 삼칠일(三七日) 만에 사람이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여기에서 7일이 세 번 중첩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시공간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인간으로 둔갑하기 위해서는 바로 세 번의
주기가 필요하다. 이것은 바로 삼(三)이라는 숫자의 의미가 바로 완성된다는 뜻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셋의 상징성, 무엇을 의미하나
왜
우리 민족이 셋(三)을 주목하는가 하는 것에 대해 의문이 들만하다. 삼은 실상 일(一)과 이(二)의 합이다. 즉 양과 음의
합이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일과 이는 스스로 아무런 역할도 못하고, 생산적인 능력도 갖추지 못한다. 이 둘이 합해져야만
생산이 가능하게 되는데, 이때 생산된 것이 바로 삼이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음양의 조화를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 삼이라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삼은 남녀간의 결합으로 생산된 자식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셋에
대한 활용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예컨대 승패를 결정짓기 위해서 우리는 삼세판을 한다. 세 판을 통해 승패가 결정되며, 그것은
완전한 승리를 뜻한다. 또한 심마니들이 산삼을 발견했을 때 “심봤다”를 외치는 것도 세 번이다. 이 세 번의 외침은 산삼이
완전하게 자신의 소유가 되었음을 알리는 행위다.
민간신앙으로 연결된 셋의 상징
이러한 습속은 최근까지도 삼신신앙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아기가 태어나면
삼신상을 차려놓는데, 7일마다 세 번을 해놓는 풍속이 전승돼왔다. 이것은 아기가 잔병에 걸리지 않고 잘 자랄 수 있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갓 태어난 아기가 하나의 생명을 갖게 될 수 있는 기간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기간 동안 금줄을 치는
것인데, 이것은 삼칠일 동안 아기의 면역력이 떨어져 쉽게 병을 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의 경험을 통해서 얻어낸 삶의
지혜이면서 동시에 셋의 상징성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한 삼신상에 메를 세 그릇 올려놓는 것도 이런 사정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강원도 지방에서는 흥미롭게도 3월 3일, 삼짇날을 삼신날이라고 하여 삼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이 역시 셋이라는 숫자를 근거로
삼은 민간신앙임을 알 수 있다.
전통적인 어선을 만드는 과정에서도 삼,
셋의 의미가 중시되고 있다. 남해안 지방에서는 배를 만들 때가 대개 3월이라고 한다. 배가 완성되어 진수식을 행할 날이 결정되면,
그 전에 선주가 3일 동안 배에서 잠을 잔다. 그 이유는 이 기간에 배를 관장하는 서낭이 현몽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배서낭이 정해지면 배내림날에 무당을 불러 3일 동안 풍어를 기원하는 굿을 하게 된다. 이처럼 배를 만들어 진수하는 과정까지 셋은
신성한 숫자로 중시되고 있다. 특히 셋은 풍요를 가져다주는 상징적이자 주술적인 숫자임을 암시한다.
이외에도
삼재가 끼었을 때 쓰는 부적에 머리가 세 개인 매를 그려서 액을 물리치는 습속도 있다. 그리고 사람이 죽었을 때도 염라대왕의
사자가 잘 데리고 가기를 기원하면서 사자상(使者床)에 짚신, 밥, 북어를 각각 3개씩 올려놓는다. 이것은 저승사자가 3명이기
때문이다. 저승사자가 3명이라는 것은 바로 죽음을 완전하게 마무리한다는 의도도 숨겨 있다고 하겠다.
설화에 나타난 셋의 의미
우리나라에서
전승되는 설화에서도 셋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 내용이 많다. 제주도의 시조신화에서도 고을나, 부을나, 양을나 세 시조가 땅에서
태어나 세 처녀를 맞이해 결혼한다. 그리고 첫째 날 제일도, 둘째 날 제이도에, 셋째 날 제삼도에 거처를 삼아 오곡의 씨를 뿌리고
마소를 기르기 시작한 후에야 세상은 완전한 형태를 갖추게 된다고 했다. 즉 3일이 지난 후에 세상을 온전하게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굿에서 전승되는 무가(巫歌)에서도 셋은 매우 중요한
요소다. 일반적으로 좋은 일이 있기를 기원하는 재수굿에서 구연되는 ‘제석본풀이’에서 아들 삼형제가 등장한다. 이들 삼형제는 중과의
상징적인 행위, 예컨대 손목을 잡는 방식 등으로 당금애기가 낳은 자식들이다. 당금애기는 대가집의 무남독녀였는데, 집에 아무도
없을 때 찾아온 중에 의해서 임신하게 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가족들이 그녀를 쫓아내자, 당금애기는 중을 찾아가 해산을 한다.
다른 이야기에서는 홀로 삼형제를 낳았다고 한다. 이 아이들이 아비 없는 자식이라고 놀림을 당하자, 당금애기에게 아버지가 누구인가
알려달라고 한다.
그 후 아들은 아버지를 만나게 되어 삼형제는 제석이
되고, 당금애기는 삼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제석을 칭할 때 일반적으로 ‘삼불제석’이라고 하는 이유도 삼형제인 까닭에서다. 이들
삼형제는 당금애기가 삼신으로 자리잡은 것처럼 인간의 수명과 재복, 자손 번창을 담당하는 신으로 좌정했다. 이들 삼형제는 인간이
살아가는데 갖춰야 할 가장 필요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삼재부
민담의 경우에도 주인공이 행복을 차지하기 위해서 거쳐야 할 고난을 세 가지로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셋째 딸이 가장 똑똑한 인물로 표현되는 경우도 많다.
예컨대
‘구렁덩덩 신선비’ 이야기에서 뱀신랑과 결혼해 무수한 고초를 겪으면서 행복을 쟁취하는 여성이 바로 셋째 딸이다. 유행가에도 보면
‘최진사댁 셋째 따님이 가장 예쁘다던데’라는 가사가 나오는데, 이 역시 우리 민족의 셋에 대한 관념을 명쾌히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하겠다. 그런 뜻으로 본다면 셋은 완전함, 혹은 완결됨을 뜻하는 숫자로 이해해도 틀림이 없다.
백(百), 완성되고 완전함을 뜻하는 숫자
백도
셋이라는 숫자에 비해 만만치 않은 의미와 상징을 지니고 있다. 백은 단지 수로서 100의 의미만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개념보다는 불완전한 것이 완전하게 이루어짐을 뜻한다. 예컨대 아기가 태어난 가장 먼저 하는 통과의례로 백일이 있다.
이것은 영아에서 하나의 인간적인 존재로 들어섰다는 것, 또는 죽지 않고 100일을 견디고 새로운 존재로 자리잡게 되었음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는 잔치인 것이다. 이때 백일떡을 100집에 나누어주면서 얻어온 천으로 옷을 만들어 입히게 되면 아기는 건강하게
100살까지 살 수 있다고 하는 속신도 있다.
백에 대한 표현도
단군신화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고 싶어할 때 환웅이 제시한 금기, 즉 햇빛을 보지 말라고 한 기간이
원래는 100일이었다. 여기서의 백은 숫자의 개념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동물의 탈을 벗고 인간으로 환생할 수 있기 위한
기간으로의 제시이다.
동물이 인간으로 변신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이야기는 오래 전부터 민담으로 전해져왔다. 그 대표적인 동물이 바로 여우라고 하겠다. 여우가 예쁜 여자로 둔갑해 남성들을
유혹한다. 그 이유는 바로 사람들의 간을 먹고 완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다. 이때 먹어야 할 간의 수가 바로 100개다.
100개를 먹어야만 사람이 될 수 있는데, 여우는 항상 1개를 놓치는 바람에 사람이 되지 못한다.
여기서
백이라는 수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셀 수 있는 개념이기보다는 꿈이나 희망의 숫자로 표현된다. 우리나라에서 전승되는 대개의
설화에서는 백을 이루지 못한 숫자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충청남도 지방에서 전승되는 ‘황팔도 전설’의 경우도 좋은 예이다.
황팔도라는
가난하지만 지극한 효자가 살았는데, 어머니가 중병에 걸린다. 용한 의사가 개 100마리를 먹여야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처방을
내린다. 황팔도는 산신으로부터 호랑이 가죽과 둔갑책을 얻게 된다. 이를 이용해서 호랑이로 변신해 매일 밤 개 한 마리씩을
구해오다가 부인의 방해로 마지막 한 마리를 구하지 못하게 된다. 황팔도는 호랑이로 남게 되고, 어머니도 죽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의 백은 완성시킬 수 없는 불가능한 숫자임을 알 수 있다. 백을 얻으면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얻을 수 있으나, 백까지 오르지 못하기 때문에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 백은 완성과 완전함을 얻기 위해서 꼭
필요한 숫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언약이라는 개념은 성경 전체의 일관된 주제 개념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셨고, 노아와도 언약을
세우셨고, 모세와도 언약을 세우셨고, 다윗과도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특히 모세와의 언약은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된다는 언약의 성격이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출 19:5-6). 언약의 증거를 위하여 언약의 피를 뿌렸습니다(출 24:8). 인간들은
연약하여 수없이 언약을 깨뜨렸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약에 신실하시고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언약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피 흘림은 언약의 피로서 언약의 완성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피
흘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모든 신자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피 흘림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인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이지만, 이를 언약의 관점에서 보자면 예수의 보배로운 피 흘림에 의한 언약의
제사를 통하여 언약을 완성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은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은 왕이 되고 신자들은 백성이 되어
더불어 교제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에서 예수의 선포는 언약 그 자체보다는 하나님 나라가 강조된 것입니다. 하지만
궁극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언약이라는 개념이나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은 거의 동일한 개념이라 하겠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지극히 사랑했기 때문에 삼엄한 경비망을 뚫고서 예수의 재판 장소까지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게 되자 세 번씩이나 예수를 부인했습니다. 닭 울음소리를 들은 베드로는 자신의 나약함에 대하여 한없이 통곡했습니다.
그날 새벽은 닭 울음소리와 베드로의 울음소리가 뒤엉켜서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회개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변화는 갈릴리
호수 가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에 시작되었습니다. 회개하고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베드로는 변화하여 목숨을 걸고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를 당했다고 전해진다. 우리에게도 베드로와 같은 철저한 회개와
부활의 주를 만나는 체험이 있어야 한다.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의 모습은 연약함 투성입니다. 호언장담하던 베드로와 모든 제자들이 주님을 버리고 도망갑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하기까지 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주님을 팔았습니다. 그러나 여기 한 여인의 행동이 빛납니다. 주님은 그녀의 행위를 믿음의 행위로 여기셨습니다. 그녀는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께 자기의 전부를 드렸습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의 측근이라거나, 교회에서 중요한 직분을 가졌다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복음을 깨닫고, 진실로 주님을 사랑하여, 진실로 주님을 위해 자기를 드리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렇게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까?
이제는(3063) 로이포스(lŏipŏs) λοιπόν, ἡ, όν
1. 남은. 2. 나머지. 3. 다른 발음
/ 로이포스[ lŏipŏs ] 관련 성경 / 마지막(고후 13:11), 끝(엡 6:10, 빌 4:8, 살전 4:1) 신약 성경 / 55회 사용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가복음 15장 / 보고 믿게 할지어다(32절)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찌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Let this Christ, this King of Israel, come down now
from the cross, that we may see and believe." Those crucified with him
also heaped insults on him.
보고(3708) 호라오(hŏraō) ὁράω
1. 보다. 2. 마태복음 28:7. 3. 누가복음 1:22
발음
/ 호라오[ hŏraō ] 관련 성경 / 보이다(마 8:4), 알리다(마 9:30), 주의하다(마 16:6), 보다(눅 1:22, 요 1:18, 고전 9:1) 신약 성경 / 449회 사용
믿게 하라(4100) 피스튜오(pistĕuō) πιστεύω
1. 믿다. 2. 신뢰하다
발음
/ 피스튜오[ pistĕuō ] 어원 / 미완료 ἐπίστευον, 제1부정과거 ἐ- πίστευσα, 완료 πεπίστευκα, 과거완료 πεπιστεύκειν, 수동태완료형 πεπί- στευμαι, 제1부정과거 ἐπιστεύθην, 410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믿다(마 8:13, 눅 1:45, 벧전 1:8), 맡기다(눅 16:11, 갈 2:7, 딛 1:3), 의탁하다(요 2:24, 딤후 1:12), 맡다(롬 3:2, 고전 9:17) 신약 성경 / 243회 사용
한글 성경은 “보다”라는 단어를 그냥 단순하게 번역하였지만 원문 속으로 들어가면 '보다'라는 의미를 좀 더 상세하게 사용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1. 호라오(ὁράω) '보다'
눈으로 보다, 마음으로 보다, 인지하다, 알다, 경험하다. 깨닫다 라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요한복음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한복음 1: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요한복음 3:11 진실로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 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2. 블레포’(βλέπω)
자발적인 관찰이라는 의미로 ‘경험으로 알다, 마음의 눈으로 보다, 이해하다, 생각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한복음 5:19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과학은 눈으로 본 것을 증명하는 학문이라고 하면 철학은 눈으로 보고 느낀 것을 이성적으로 분석하는 학문이라고 하겠습니다. 반면에 신앙이란 눈으로 본 것이 아닐지라도 마음으로 보고도 그 실체를 확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리더스다이제스트사가 펴낸 <세계상식백과>에 있는 기록에 따르면, 피지 군도의 작은 섬 '베카'라는 곳에서는 '음베테'라고 불리는 고승과 그 제자들에 의해 불 위를 걷는 의식이 행해진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직경 4.5 내지 6m 정도의 구덩이를 1 내지 1.5m 깊이로 파냅니다. 통나무를 그 안에 잔뜩 쌓고 그 속에 돌을
집어넣습니다. 통나무가 타들어 가면서 돌이 차곡차곡 쌓이게 됩니다. 준비가 완전히 끝나면 '음베테'는 돌 위에 마른 잎을
뿌려봅니다. 그러면 금방 불길이 일어납니다. 돌이 달구어진 것입니다. 이윽고 고승과 제자들은 돌 위를 천천히 걸어다니다가 나오는데
상처 하나 생기지 않습니다.
이와 비슷한 의식이 스리랑카 콜롬보 북쪽의 작은 어촌에서도 매해 벌어진다고 합니다.
또한 남부 인도의 일부 촌락에서도 해마다 벌어지는데 특히 '우다이푸르' 마을이 유명하다고 합니다. 불구덩이- 보통 8㎡ 에 1m
깊이-에 불이 준비되면 어찌나 뜨거운지 구경꾼은 10m 안으로는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서양의 과학은 중화상을 입지
않고 어떻게 사람들이 불 위를 걸어다니는지에 대해 합리적으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의사들이 피지섬과 스리랑카에서 불 위를
걸은 사람들을 조사해 보았으나 발바닥에 화상은 전혀 없었으며 발바닥 피부의 감각도 정상이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이런
일이 세계 어느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면 그 옛날 다니엘 때에도 있을 수 있었겠지요. 다니엘이 불구덩이를 태연히 거닐다가 상처
하나 없이 나왔다는 기록에 대한 입장을 다시 정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람이 불구덩이 속을 손끝 하나 상하지 않고 걸어다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과 그럴 수는 없다고 믿는 사람으로 말입니다.
'믿는다'라고 했던 것이 이제는 '안다'가 되어
버렸고, '안다'고 했던 것이 '믿는다'가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많은 기적을 베푸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눈으로 본 유대인들 중에도 믿지 않는 자가 많았습니다. 그들이 믿지 않은 것은 믿지 않으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믿지 않으려는 마음을 가진 자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알 수가 없습니다. 믿지 않는 자에게는 앎이 허락되지 않는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바로 믿는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옵타노마이(ὀπτάνομαι)는 응시하다, 보여지다'( 눈으로, 향한 것처럼, 관찰하다. 나타내다라는 의미로 관심을 가지고 보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 요1:50-5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3. 에이도(εἶδω)는 수동적이거나 우연한 바라봄으로 ‘겉을 보고 깨닫다, 지식을 갖다, 확신하다, 발견하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에이도는 ‘우상’이라는 ‘에이돌로’(εἴδωλο)에서 유래되었으며, 우상이란 눈에 보이는 형태, 외모를 보고 확신해 버리면 그것이 우상이 된다는 것을 의미 한다.
. 요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 요1:47-48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 데아오마이(θεάομαι)는 가까이서 보다, 지각하다, 주목하다, 보고 배우다, 방문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32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5. 블레포’(βλέπω)는 자발적인 관찰이라는 의미로 ‘경험으로 알다, 마음의 눈으로 보다, 이해하다, 생각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5:19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성경 원어에서 이렇게 다양한 의미로 상황에 따라 다르게 표현하고 있는데는 분명히 저자의 전달하고자 하는 깊은 의도가 분명이 담겨 있다.
"보다"라는 단어의 의미는 첫째로 응시하는(ὀπτάνομαι) 단계에서 둘째로 보이는 그대로 보고 판단해 버리는(εἶδω) 단계로 셋째로 자세히 보아(θεάομαι) 경험과 마음으로 아는(βλέπω) 단계로 넷째로 데아오마이(θεάομαι)는 가까이서 보다, 지각하다, 주목하다, 단계에서
다섯째로 깨닭아 알게 되어(ὁράω ) 인지하는 단계로의 그 깊음의 변화로 설명할 수 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의 심문을 마친 후에 빌라도에게 넘겼고, 빌라도도 예수를 심문하였다(1-4절). 빌라도는 예수의 죄
없음을 알고 명절에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전례를 이용하여 석방하려고 했으나 무리들의 충동에 못 이겨서 예수 대신 바라바를
석방한다(5-15절). 로마 군병들이 예수에게 자색 옷과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희롱한다(16-20절).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골고다로 끌고 간다. 가는 중에 구레네 시몬이란 사람에게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했다. 그리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옷을
제비뽑아 나누었다. 사람들은 예수를 비웃었다(21-32절).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고 돌아가셨다. 이때 성소 휘장이
갈라지고 한 백부장이 신앙 고백을 한다(33-41절). 아리마대 요셉이란 사람이 예수의 시신을 장사지낸다(42-47절).
마가복음 15장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으심에 관한 내용을 소개합니다. 가룟 유다의 배반으로 대제사장에게 잡힌 예수님은 새벽에
빌라도에게로 호송되었습니다. 유대인 공회는 사형을 집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빌라도의 힘을 빌어 예수님을
처형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의 죄목을 발견하지 못했고 그래서 무죄 석방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무리들에게 만족을 주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빌라도가 아무리 나는 무죄하다 하며 손을 씻어도 모든 후세의 기독교인들은 예수께서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신앙고백을 하므로 아직도 빌라도의 이름은 모든 성도들의 입에서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메시야를 십자가 처형시킨 것이 아니라 무죄한 평범한
사람을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십자가 처형시켰다고 해도 빌라도의 죄악은 마찬가지 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빌라도로부터 사형 판결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처형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사람들은 당장 십자가에서 내려와 당신이 메시야가 되심을 증명해 달라고 합니다. 메시야가 되심을 보고 믿게 해 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어떤 믿음이 가장 바람직한 믿음일까? 첫째, 보지 않고 믿는 것 둘째, 보고 믿는 것 셋째, 보고도 믿지 않는 것 넷째, 보지도 않고 믿지도 않는 것
여러분은 어떤 자세가 가장 바람직한 믿음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성경은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논쟁에 대한 결론입니다.
그렇다면 보는 것과 믿는 것과 아는 것의 관계를 생각해 봅니다. 보는 것을 아는 것이라고 한다면 보지 못한 것은 모르는 것입니다. 보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한다면 보지 못한 것은 믿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는 것은 곧 믿는 것이며 아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사실을 눈으로 보고 믿으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역사적인 사실은 이미 이루어진 사건이므로 믿는 것이 당연합니다. 굳이 눈으로 보는 것만을 믿는다고 고집하는 것은 그 사람의 사고가 경직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도 이 세상에는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눈으로 보는 것만을 믿으려는 어리석은 신앙이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없어도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지혜로운 신앙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당부합니다.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뵈어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서 성소 휘장이 찢어진 일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성소 휘장은 지성소를 막는 커튼이었다. 지성소는 일 년에 한
번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거룩한 곳이었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의 제사로 말미암아 지성소가 만인 앞에 공개되었다. 죄
때문에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들어가는 것 외에는 어느 누구도 들어갈 수 없었던 지성소가 예수의 십자가 제사 이후에는 만인에게
공개되어 누구라도 들어갈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로 드린 영원한 제사로 인해 죄 씻음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지성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는 누구나 대제사장처럼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모두가
제사장과 같은 자격을 얻었다. 이것이 만인 제사장론의 한부분이다.
어느 곡예사의 외줄 타기
1859년 6월 30일, 프랑스의 줄타기 곡예사 샤를 블론딘(Charles Blondin)이라는 사람이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이아가라 폭포 위를 건너가는 도전을 시도했습니다. 수면에서 48미터나 되는 높이에 설치된 외줄을 타고 장대 하나로 몸의 균형을 잡으면서 335미터 길이의 밧줄 위를 걸어간 것입니다.
40파운드 무게의 막대기로 균형을 잡은 채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내딛던 블론딘이 마침내 맞은편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러자 숨을 죽이고 지켜보던 수많은 관중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치며 환호를 보냈습니다. 블론딘은 관중들의 열광적인 환영에 보답이라도 하듯, 또 다시 뒤로 걸어서 건너기도 하고, 안대로 두 눈을 가리고 건너기도 하고, 자전거를 타고 건너기도 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나이아가라 폭포를 자유자재로 오갔습니다.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모든 묘기를 마친 블론딘은 지켜보던 사람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누군가를 등에 업고도 이 나이아가라 폭포를 건너갈 수가 있다고 믿습니까?” 그러자 관중들은 “그럼요. 믿습니다!” 하고 열광하며 환호했습니다. 그러자 블론딘은 다시 외쳤습니다. “그럼 누가 제 등에 업히겠습니까? 여러분 중에 제 등에 업혀서 이 폭포를 건너갈 사람 한 분만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관중들이 침묵에 빠졌습니다. 혹시라도 블론딘과 눈이 마주칠까봐 애써 시선도 외면했습니다.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블론딘은 관중 가운데 있던 한 남자에게 “당신은 날 믿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지목받은 사람이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기꺼이 당신 등에 업히겠습니다.” 하며 그에게 업혔습니다. 그 남자를 등에 업은 블론딘은 이전 어느 순간보다 더 신중하게 로프에 올라 한 발 한 발 내딛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를 등에 업고도 나이아가라 폭포를 건넜습니다.
이것을 본 관중들은 믿을 수 없는 장면에 더욱 뜨겁게 환호하고 박수 치며 열광했는데, 그때 그들이 모르고 있었던 사실이 하나 있었습니다. 블론딘의 등에 업혀 폭포를 같이 건넌 사람이 해리 콜코드(Harry Colcord)라는 사람인데, 그는 다름 아닌 블론딘의 매니저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은 말이나 머리로만 믿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을 만큼 믿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관중들은 그의 묘기를 직접 자기들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몇 번씩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면서 믿는다고 큰소리쳤지만, 어느 누구도 그의 등에 업혀서 같이 폭포를 건너갈 마음은 없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믿습니까?” “예, 믿습니다!” “그럼 오십시오.” 그러나 아무도 안 왔습니다. 그런데 그때 한 사람, “당신은 나를 믿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 믿습니다.”라고 대답하며 업힌 그의 매니저, 블론딘의 질문 앞에 믿는다고 대답하며 그의 등에 업히고 같이 건넜던 콜코드만이 거기 있던 모든 사람들 중에서 진짜로 그를 믿은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을 가리켜 ‘크리스천’ 또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크리스천을 가리키는 또 다른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믿는 사람’(believer)입니다. 그러니까 크리스천은 곧 믿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믿는다’는 말에는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삼위일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인 것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믿느냐? 너는 나를 진짜로 믿느냐?” 우리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를 오늘 점검하고, 예수님은 우리가 진짜 믿음을 갖도록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고다이바 부인(Madam Godiva)은 11세기
영국의 코벤트리 시(Coventry)의 영주(領主)인 레오프릭(Leofric)백작의 부인이었다. 어느 날 백작부인은 영주의 혹독한
세금징수로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백작에게 몇 번씩이나 세금을 감면해 주기를 간청한다. 그러나 백작은
“당신이 알몸뚱이로 말을 타고 코벤트리 시내 거리를 한바퀴 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는 어림도 없는 일이야!”라고 퉁명스럽게
내뱉는다.
백작 부인은 곰곰이 생각을 가다듬다가 “공중의 행복을 위하는 일이라면” 알몸으로 말을 탄들 어떠랴 하는
심정으로 말을 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코벤트리 시의 시민들은 이 소식을 듣고 감격한 나머지 부인이 말을 타고 거리를 돌 때에는
어느 누구도 창문을 굳게 닫고 내다보지 않기로 결의를 하였다.
고다이바 부인은 긴 머리카락을 이용해 앞을 가린 다음
알몸으로 말을 타고 느릿 느릿 시내 거리를 돌기 시작 했다. 시민들도 약속대로 말을 타고 거리를 누비는 고다이바 부인을 엿보는
사람하나 없는 듯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호기심 많은 재단사 톰(Tom)이라는 사나이만은 시민들과의 약속을 어기고 창문 틈으로 그
부인의 알몸을 엿보았다. 그 순간 그 톰이라는 사나이는 그만 두 눈이 멀어버렸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그
진위(眞僞)와는 관계없이 고다이바 부인은 ”공중의 행복을 위한“(pro bono publico) 숭고한 행동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일화의 주인공이 되었고 양복 재단사 “엿보는 톰(Peeping Tom)”은 졸지에 영원히 “관음증이나 호색한”의 대명사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우리는 이 얘기에서 몇가지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고다이바부인은 알몸을 공개했다. 알몸은 지순한 순결을 상징하는 것이기에 이의 공개는 순진무구한 무한 봉사를 상징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공인(公人)들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이 고다이바부인이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공인이란 고다이바 부인처럼 공중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존재다. 여기서 우리는 어느 한사람이 공직에 나가기 위해서는 어떤 수치스러움도 없는 알몸으로 나서야 한다는 교훈을 얻는다.
어떤
수치도 옷으로 가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높은 공직에 오를수록 그 사람에 대해서는 가혹하리만큼 높은 도덕성을
요구한다. 요즈음의 국회에서 공직취임 예정자를 앞에 앉혀 놓고 그 너울을 사정없이 벗겨 내는 것도 그 일환이라 할 것이다. 자신의
수치스러움을 겹겹의 옷으로 감싸고 있어서는 공직에 취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서서히 깨닫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도 점점 더 이러한 사회로 성숙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면서 공중의 행복추구가 사명일 수밖에 없는 정치인들의 벌거벗은 모습을 우리는 아직 보지 못하고 있다는 아쉬움만이 남는다.
그렇다면
톰이라는 사나이가 부인의 알몸을 문틈으로 엿본 행위로 인해 하늘의 벌을 받았다는 뜻은 또 무엇일까? “엿본 톰”은 호색한의
대명사처럼 쓰고 있지만 호색한이기 때문에 하늘의 벌을 받았다고 보여지지는 않는다. 그가 벌 받은 것은 “신의성실(信義誠實)이라는
법률의 기본 철칙을 어겼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는 법률의 대원칙을 어기고서야 어찌 벌을 받지 않을 수
있을까? 주민들 간의 약속이 바로 법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법을 교묘히 어길 수 있는 사람이 언제나 유능한 사람이 되고 자신의 부끄러움을 화려한 옷으로 잘도 감싸 안은 사람이 출세하는 사회에 대한 경종이 바로 고다이바 부인에 대한 얘기가 아닌가 싶다.
믿음을 지키는 원칙 3가지 DSS / Divide(나누라), Search(찾으라), Show(보여주라)
첫째, 성경을 나누라(Divide) '진리를 바르게 나눌(=Divide) 줄' 알아야 합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킹제임스흠정역성경 딤후2:15)
('Study to shew thyself approved unto God, a workman that needeth not to be ashamed, rightly dividing the word of truth.'-영어KJV성경 딤후2:15)
전세계 인류를 인본주의적 구분이 아닌 성경기록에서 말하는 구분으로 나누면, 이방인(=그리스인)과 유대인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라는 세그룹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각각의 그룹들(이방인,유대인,하나님의 교회)에게 주신 말씀들이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어떤 분들의 경우, 성경의 기록내용들은 '모두가 믿음을 소유한 신약교회시대의 성도들에 해당하는 내용이다.'라고 생각하여 한결같이 나에게 모두 영적으로 적용해야 된다는 식의 주장을 펼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실은 그렇지가 않은데도 말이지요.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추구하나'(킹제임스흠정역성경 고전1:22)
'우리(=하나님의 교회)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노니 그분은 유대인들에게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요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로되'(킹제임스흠정역성경 고전1:23)
말씀을 먼저 바르게 나눌 줄 알려면, 다음 '2가지 측면들'을 잘 이해한 다음 늘 숙지하고 계셔야 합니다.
<'시대구분, 수신자, 전해지는 복음'> 의 측면에서
(1) '십자가사건 이전(=구약율법시대)'인지? '십자가사건 이후(=신약교회시대)'인지? 그리고 그리스도의 공중재림시 '하나님의 교회'의 휴거이후 시작되는 '환난기시대'인지?를 먼저 구분해야 합니다.
(2) 그리고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인지?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인지? '하나님의 교회'를 대상으로 한 것인지? '환난성도'(=환란기를 거쳐 행위로 입증하며 믿음을 갖게 되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인지?를 구분해야 합니다.
환난기의 다시 선포될 '왕국복음'과 '천사의 영존하는 복음'(계14:6)인지? 를 구분해야 합니다.
(4) 바울이 선포한 '그리스도의 복음'인지?(고전15:1, 3-4) 아니면 '다른 복음'(갈1:6,8,9;고후11:4)인지?
(5) 환난기를 지나, '천년왕국'에 관한 말씀인지? 이후의 '새하늘과 새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인지?도 잘 나누어 살펴야 합니다.
<'구원(=save)을 말할 때의 그 대상을 분별'> 하는 측면에서
신.구약성경전체를 놓고 영과 혼과 몸(살전5:23)의 보존(=preserve)과 함께 구원을 살펴 볼 때, '(고전5:5;요3:1-15)'과 '(벧전1:9)'과 '(마24:22)'중 어떤 구원(=save)을 말하는 것인지도 경우에 따라 잘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영혼몸
둘째, 성경을 탐구하라(Search)
아무리 훌륭한 목사나 전도자 또는 교사에게 배운것이라도 믿음의 경주자는 '믿음의 경기법칙인 성경기록'을 늘 잘 이해하고 마음에 두고 있어야 하는데,
믿음의 경주법칙이 스스로 명확하지 않을 때는 <이름 모를 베레아(=Berea)의 어느 성도>가 그랬던 것처럼
'~그것들이 (과연)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기록들을 탐구(=Search)하라'는 원칙을 기억해서 습관적으로 몸에 베도록 해야 합니다.(요5:39;행17:11)
이 원칙 또한 모든 성도들의 경우에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라. 너희가 그것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로 생각하거니와 그것들은 곧 나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들이니라.'(킹제임스흠정역성경 요5:39)
(' the scriptures; for in them ye think ye have eternal life: and they are they which testify of me.'-영어KJV성경 요5:39)Search
'이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던 자들보다 더 고귀하여 온전히 준비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므로'(킹제임스흠정역성경 행17:11)
('These were more noble than those in Thessalonica, in that they received the word with all readiness of mind, and the scriptures daily, whether those things were so.'-영어KJV성경 행17:11)searched
셋째, 성경을 보여주라(Show)
우리 각 자신이 아무리 말에 능숙한 달변의 사람이라도 우리가 만나는 누군가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깨닫아 알게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성경기록들을 직접 보여 주는(=Show,Shew) 것'임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대개의 경우, 이때 불신자의 변화가 가장 효과적으로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이 방법이 '성경의 권위'대신 '사람'을 신뢰하지 않을 수 있는 이땅에서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기록이 무어라 말하느냐? ......'(킹제임스흠정역성경 갈4:30;롬4:3;롬11:4)
('Nevertheless what saith the scripture?
Cast out the bondwoman and her son: for the son of the bondwoman shall
not be heir with the son of the freewoman.'-영어KJV성경 갈4:30)
'이는 그가 성경 기록들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보여 주며 힘 있게 유대인들을 확신시키되 공개적으로 그리하였기 때문이더라.'(킹제임스흠정역성경 행18:28)
('For he mightily convinced the Jews, [and that] publickly, shewing by the scriptures that Jesus was Christ.')
'그러나 내가 진리의 성경 기록에 적힌 것을 네게 보여 주리니...'(킹제임스흠정역성경 단10:21)
('But I will shew thee that which is noted in the scripture of truth: ...')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고(Divide), 탐구하고(찾고, Search) 성경기록들을 가지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주는(Show,Shew)' 성경신자요 교사요 전도자들이 모두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P.S.
참고로, 신약성경중 '사도행전'은 말 그대로 사도들을 통해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신 '역사서'입니다.
역사서는 역사적인 사실을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으로 그 목적을 대부분 달성합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은 주님의 몸된 '하나님의 교회'에 주신 '건전한 교리에 대한 최종적인 지침서'가 아닙니다.
이런 이유들로 사도행전을 읽으시다가 교리적으로 잘 이해가 안되시는 부분들이 일부 생기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이때 주로 바울서신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받으셔야 '건전한 믿음의 도리'에서 미끄러지지 않습니다.
신약교회가 지켜야 할 건전하고 참된 교리는 '이방인들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이 기록한 서신서들'로 온전히 기록되었습니다.
일부 다른 서신서들을 포함한 바울서신서들을 부지런히 읽고 마음에 새겨서 '건전한 교리에 합당 것들만'을 말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딛2:1,딛1:9,딤전1:10,딤후4:3)
일부의 많은 목회자들과 일부 많은 거짓교사들이 지금까지 그러했 듯이 '역사서와 교리서'를 바르게 나누지(divide rightly) 않고 마구 섞어서 자기 맘대로 해석하고 인용하면 할수록 '마귀는 춤추며 좋아할 것'입니다.
06-24-2023(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가복음 16장 / 가서 뵈오리라(7절)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But go, tell his disciples and Peter, 'He is going ahead of you into Galilee. There you will see him, just as he told you.'
"가서 뵈오리라"는 주제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거기서 그를 너희가 뵈오리라(에케이 아우톤 옾세스데. εκει αυτον οψεσθε)."
거기서 뵈오리라는 말씀에서 "거기서"는 "갈릴리(Galilee)"를 말합니다. 갈릴리는 어부이었던 제자들의 생업의 현장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신다는 것은 생업의 현장을 복음의 현장으로 회복시켜야 할 의무와 책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예수를 영접한 후에는 이전에 땀의 결정체가 얼룩진 생업의 현장은 세속의 일자리라고 생각하여 그 자리를 떠나려고 합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생업의 현장을 먼저 찾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구원 받아야 할 수많은 영혼들이 아직도 복음을 모르고 살아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갈릴리'라는 지명의 뜻은 "둥글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사람의 마음과 생각이 둥근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모난 것이 좋을까요? 예수를 영접한 후에 마음과 생각이 모가 나서 상대방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언어와 비난하는 말을 벌지 못한 사람들을 주위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는 곳이 갈릴리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을 위하여 두 개의 장소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첫째는 삶의 자리(Place of Life. Sitz im Leben. locus vitae) 둘째는 죽음의 자리(Place of Death. Sitz im Tod. locus mortis)
삶의 자리는 현재 내가 주로 생활하고 활동하는 장소를 말합니다. 생업의 현장, 가정, 교회 라고 하겠습니다.
죽음의 자리는 내가 마지막 임종을 맞이할 장소를 말합니다. 이제 곧 내가 죽음의 문을 넘어가야 할 순간이라면 과연 나는 지금 내 모습 이대로 주님앞에 당당하게 나갈 수 있겠느냐? 하고 자신에게 질문을 해야 할 것입니다.
어느 권사님이 일생동안 예수를 믿는다고 하며 교회와 가정 이외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죽음의 그림자가 점점 더 가깝게 다가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마디 마디가 류마치스 고통으로 걷는 것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과연 이대로 죽으면 주님께서 내게 무엇이라고 하실까? 하는 생각을 하는 순간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여러 날을 고민하며 기도하던 중 한 가지 생각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프리카 지역에 원주민을 위한 교회를 세우는데 5천불이면 가능하다는 어느 선교사의 이야기를 듣고 아들이 운영하는 회사에 매점이 있는데 그 매점에서 일을 해야 하겠다고 생각한 후에 아들을 찾아가서 너희 회사 매점에서 일을 하도록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아들이 내가 5천불을 드릴터이니 편하게 쉬라고 하더랍니다. 이 어머니가 아들에게 그러면 그것은 네가 세우는 것이 내가 세우는 것이 아니다. 결국 어머니가 아들의 회사 매점에서 하루종일 일을 하고 월급을 받았습니다. 그 월급을 모으고 모아서 드디어 5천불이 되었을 때 원주민 동네에 교회 하나를 세웠습니다. 하나를 세운 후에 욕심이 일어나 하나 더 세워야지 하고 두번째 교회를 세우도록 도왔습니다. 이렇게 시작해서 1년이 지날 무렵 그 몸에 지독한 고통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그때에 비로서 아, 이것이 부활 신앙이구나 하며 크게 기뻐하며 감사했다고 합니다.
거기서 뵈오리라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들이 소홀하게 생각할 수 있는 장소를 말합니다. 이제부터는 그와 같은 장소를 찾아가야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교회에서 사람들이 가장 찾아가기 어려운 장소가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 앞에 보여지는 자리를 선호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기피하는 자리와 장소를 찾는 것이 부활신앙을 내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 토요일마다 교회 화장실만 맡아서 청소하는 교인이 있었다고 합니다. 무려 그 일을 3년을 계속했는데 도대체 그 사람이 누구인가 하고 추적한 결과 어느 대학 교수의 부인이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대학교 교수의 부인이 그런 일을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나 부활 신앙으로 거듭나면 얼마든지 좋아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4:2 그리고 맡은 자들의 구할 것으 충성이니라.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에게 하나의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부활의 소식을 다른 제자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제자들과 베드로”라는 말은 베드로를
구별하는 마가의 독특한 표현으로 마가의 자료의 상당 부분이 베드로로부터 나온 것임을 반영하는 증거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탁월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세 번이나 예수를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받아 열 한 제자의 무리 속에 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 법에 의하면
여인들은 신빙성이 있는 증인으로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부활의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없는 제자들은 사람이 죽으면 무덤에 안장되고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죽으셨던 예수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리리로 가신다는 말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도마와 같은 제자는 주위에서 여러 사람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할 때에도 나는 직접 예수님의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에 손을 넣어보아야 믿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부활이란 사건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처음 사건이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는 과제라고 하겠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 신앙에는 부활 신앙이 많이 약화되어 있습니다. 부활 신앙은 하나님을 생명의 주인으로 믿는 신앙으로 부활 신앙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를 바라보고 미래 속으로 뛰어들어가는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부활 신앙은 죽을 운명의 인간이 영원히 죽지 않는 새로운
존재로 변화하여 살아갈 수 있다는 새로운 생명에의 소망의 신앙입니다. 그래서 부활 신앙은 창조 신앙과 연결되며, 부활 신앙은
하나님께서 죽음 가운데 있는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는 창조 신앙으로 부활에서 구속 사역과 창조 사역은 하나로 만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의 부활을 부인하지만 강력한 증거들이 많이 있습니다.
첫째는, 빈
무덤 예수의 제자들의 부활 소식의 전파를 막기 위하여 당시의 로마 당국자들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예수의 빈 무덤의 증거를 뒤엎을 수는 없었습니다.
둘째는, 부활 예수의 현현(顯現)
예수께서는 여인들에게와 열한 제자들에게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에게와 오백여 형제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한두 명의 사람들만 보았다면 환상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도 있겠지만 오백여
형제들에게 일시에 나타난 사건은 도무지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습니다.
셋째는, 부활 후의 예수의 행적(行跡) 예수께서는 문이
잠긴 제자들의 방에 바람처럼 나타나셨습니다. 부활한 영체라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넷째는, 제자들의 변화(變化) 제자들이 실제로 부활의
주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면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순교를 각오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담대한 제자들의 모습은
부활의 주님에 대한 간접적인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여 오늘날도 예수님의 부활은 계속 증거되어야 합니다. 다만 부활을 믿는 믿음의 증인들에 의해서 분명하게 보여주고 증거하는 일에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섯 가지 양심
1. 깨끗한 양심(a Pure Conscience)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시24:3-4)
2. 선한 양심(a Good Conscience)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1:19).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3:16)
3. 찔림 받은 양심(a Stricken Conscience)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요8:9)
4. 더러워진 양심(a Defiled Conscience)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딛1:15)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7:1)
5. 악한 양심(an Evil Conscience)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10:22)
6. 화인 맞은 양심(a Sealed Conscience)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4:1-2)
예수님이 누우셨던 자리는 비어 있었지만, 무덤은 비어 있지 않았습니다. 무덤 안에는 한 청년이 흰 옷을 입고 은총의 편인 우편에
앉아 있었습니다. 마가는 이 청년이 누구인지를 설명하지 않았지만, 그의 어조를 통해 그가 천사임을 밝힙니다. 그는 전형적인 천사의
어투로 말을 시작합니다. “놀라지 말라”.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 왔으나 예수님의 시신이 있지 않은 무덤을 보며,
당황하고 있던 그녀들에게 놀라지 말라는 근엄한 목소리는 큰 안도감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적 메시지를 대언하는 천사가 이어서
자신들에게 전해줄 메시지에 대해 기대감을 가졌을 것입니다.
놀라지 말라는 메시지에 이어 천사는 지금의 상황에 대해 여성들에게 설명합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천사가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말하는데, 이는 예수님을
경멸하거나 무시하는 의미가 담겨 있는 표현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사렛 예수가 못박혔던 십자가 형벌은 당시 존재하는 처형 가운데 가장
수치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나사렛 예수’라는 표현을 통해 불명예스러움의 끝에 서 있는 예수님을 묘사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부활을 의미하는 ‘그가 살아나셨다’는 것은 영광의 끝에 서 있는 예수님을 묘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극적인
대조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비참함을 완전히 역전시키는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천사는 이제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 그녀들에게 예수님께서 누우셨던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눈으로 보라고
말합니다. 빈 무덤을 확인하는 증인으로 세 여성이 세워졌습니다. 유대의 사회에서 증인을 세울 때는 최소 두 명 이상이
요구되었습니다. 그래서 세 명이 이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여성이었다는 점은 당시
상황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성의 증언이 효력이 없던 이 시대상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부활의 가장 중요한
증인으로 세 명의 여성을 선택하셨다는 것은 시대의 상식을 넘는 하나님의 방식이었습니다.
위로와 부활의 사실을 설명한 천사는 그녀들에게 이제 부활의 증인이 되어, 제자들 앞에 나설 것을 명령합니다.
너희는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가서 예수님이 전에 말씀하신 대로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서 거기서 그들을 만나실 것이라고 알려 주어라.
여인들은 예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하여 안식 후 첫 날 새벽에 무덤으로 갔습니다(1-3절). 무덤에 도착해 보니 무덤 입구에
막아 두었던 돌이 굴려져 있고 무덤 안에는 흰옷을 입은 한 청년이 있었고 그 흰옷 입은 청년은 나사렛 예수의 부활의 소식을 전해
주었으며, 베드로에게 예수께서 먼저 갈릴리로 가신다는 소식을 전해 줄 것을 당부했습니다(4-8절).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막달라
마리아 에게 먼저 보이셨고,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부활 소식을 전했습니다(9-11절). 그 후 시골로 가던 두 제자에게도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셨으나 다른 많은 예수의 제자들은 처음에는 이러한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12-13절). 그 후 예수께서 열한
제자들이 음식 먹을 때에 나타나사 믿음 없고 완악함을 꾸짖으시고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14-18절).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승천 하셨고, 제자들은 말씀을 전파했습니다(19-20절).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인류의 첫 열매로서의
의미를 지닐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모든 근거와 기반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에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생전에 많은 이적들과 가르침을 베푸셨고, 로마의 사형 집행장에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율법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나무에 달려 돌아가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 예수의 부활은 예수의 생전에 가르치셨던 그 가르침이 옳았다는 하나님의 인정이다. 예수께서는 부활을 통하여 자신의
가르침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증명하였다.
이삭이
헤브론에서 아브라함을 장사지낸 후 자신이 거주하던 브엘라헤로이로 돌아갑니다. 흉년이 들어 그랄로 이동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살다가
야곱과 에서를 낳게됩니다. 야곱과 에서 역시 부모님과 함께 브엘라헤로이에서 청년기까지 보냈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에서가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파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브엘라헤로이는 위의 지도에 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곳은 브엘세바에서 애굽으로 가는 길목에 위
치하며, 브엘세바와의 거리는 약90km 정도가 됩니다.)
2. 그랄
야곱이
그랄로 이동했다는 사실은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이삭이 흉년으로 인해 그랄로 이주했을 때 같이 같을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후에도 계속 부모님과 같이 살았으니 중간에 독립을 했다다가 다시 합쳤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3. 브엘세바(창27:1~28:4절)
이삭이 아비멜렉과의 계약 후 브엘세바에 정착했을 때 야곱과 에서도 같이 이곳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야곱이 리브가와 짜고 에서의 축복을 가로채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4. 벧엘(창28:10~22절)
야곱은 에서의 축복을 가로챈 후 꽁지가 빠져라 벧엘까지 도망을 칩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드디어 이삭의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언약을 맺습니다.
5. 하란(창29장~31:16절)
하란에
있는 삼촌인 라반의 집에서 머물게 됩니다. 이곳 '하란'이라는 지역은 고대 오리엔트 왕국 중 하나였던 미탄니 왕국의 수도 였으니
야곱은 국경을 넘어 타국으로 망명을 갔다고 봐야하나요? 아무튼 야곱은 이곳에서 무려 20년 동안 목축을 하며 많은 가축과
아내들과 자식들을 얻게 됩니다. 참고로 하란에 있을 때 등장하는 '밧단아람'이라는 지명은 우리나라로 치면 '도(道)'에 해당하는
행정구역입니다. 그러니 엄밀히 따지면 하란은 행정구역상 밧단아람 안에 속해 있는 도시인 것입니다.
6. 길르앗 산지(창31:17-55절)
성경에는
'길르앗 산' 이라고 등장 합니다. 야곱이 도주했다는 소식을 듣고 라반이 부랴부랴 쫒아서 야곱과 마주친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이
산은 어떤 특정한 산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고 이 일대의 산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정복시대에 훗날 도피성으로 지정된
길르앗 라못일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위의 지도에도 길르앗 라못(라못 길르앗)에서 라반과 마주친 것으로 표시가 되어
있습니다. 이곳에서 라반과 언약을 맺고 떠나게 됩니다.
7. 마하나임(창32:1-21절)
사실 마하나임의 정확한 위치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얍복강을 건너기 전에 이곳에서 하나님의 군대를 만났다는 것을 통해 얍복강 보다는 북쪽에 있는 지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8. 브니엘(창32:22-33:15절)
야곱이 밤에 가족들을 모두 얍복나루 건너로 보내고 자신도 건너려 할 때 하나님(의 사자)이 나타나 밤새 씨름을 하고 이긴 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9. 브니엘 맞은편
성경에 장소가 나오지는 않지만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을 하여 이긴 후 얍복강을 건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근거는 야곱보다 먼저 강을 건넜던 가족들과 함께 에서를 맞이 했다는 것입니다. 이 지역의 명칭은 나오지 않습니다.
10. 숙곳(창33:17)
에서와 헤어진 후 야곱은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 서쪽으로 이동하다가 숙곳에서 잠시 머무릅니다. 위 지도의 6번 위치가 숙곳입니다. 7번은 왜 표시를 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11. 세겜(창33:18-34:31절)
드디어
야곱은 요단강을 건너 세겜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아브하람이 헤브론의 막벨라 굴을 산 이후 공식적으로 히위 족속인 하몰의 아들
세겜에게 이곳의 땅 일부를 사게됩니다. 하지만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에게 강간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야곱의 아들인 시므온과
레위가 이들을 모두 죽이는 보복 사건이 일어납니다. 결국 야곱의 가족들은 재차 보복을 당할 위험이 있어 이곳을 떠나게 됩니다.
12. 벧엘(창35:1-15절)
이곳에서 다시 한 번 다시는 야곱이라는 이름을 쓰지 말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쓰라는 명령을 받게됩니다.
13. 베들레헴(에브랏)(창35:16-20절)
아마도 벧엘에 있는 동안 이삭의 임종을 듣게 되었던것 같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이삭이 거주하던 헤브론(기럇 아르바)으로 가던
중 임신 중이었던 라헬이 베냐민을 낳고 죽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야곱은 가던 길을 멈추고 베들레헴에서 라헬의 장례를
치르게 됩니다.
14. 헤브론(기럇 아르바)(창35:27-29절)
야곱은 헤브론에 도착해서 에서와 함께 이삭의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이곳에서 머무르게 됩니다. 그리고 요셉의 이야기로 넘어가게 됩니다.
15. 브엘세바(창46:1-4절)
요셉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은 야곱은 애굽으로 내려가던 중 브엘세바에 들러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게 됩니다.
16. 애굽(고센)(창46:5~)
야곱과
그의 일행이 애굽 땅에 들어가게 되고, 이집트의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센 땅에 거주할 것을 허락하게 됩니다. 그리고 야곱은
죽을 때 까지 이곳에서 살게 됩니다. 그리고 죽은 후 그의 유해는 요셉과 그의 형제들에 의해 헤브론의 막벨라 굴에 장사지내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야곱의 여정이었습니다.
야곱의 장례식
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하여 - 요셉은 야곱이 죽기 전에 개인적으로 자기에게 부탁하여 맹세시킨 사실을 이제 성실히 지키려 하고 있다(47:29).
내가 파서 둔 묘실 - 야곱은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산 막벧라굴을
언급하면서(23:20) 그것을 자기가 팠다고 하였다. 이것은 야곱이 막벨라에 있는 그 굴을 확장하였거나 자기의 묘실을 미리
준비하여 놓았음을 암시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 요셉은 애굽의 총리로서 중요한 직책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자리를 비우기 위해서는 왕의 특별한 승인이 필요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야곱의 장례 행렬은 그
규모가 컸으며 장지가 애굽의 국경 밖이었기 때문에 요셉은 스스로 왕의 인허를 원했다고 볼 수도 있다.
* 장사하다(6912) 카바르(qâbar) קָבַר
1. 묻다
2. 니팔형 : 묻히다
3. 피엘형 : 묻다
발음
/ 카바르[ qâbar ] 관련 성경 / 장사하다(창 23:19, 왕상 13:31, 호 9:6), 묻다(왕상 2:31), 장사되다(신 34:6, 삿 10:5,
왕상 15:8), 매장하다(시 79:3, 렘 16:4), 장사지내다(전 8:10), 매장되다(왕상 2:34, 렘 16:6),
묻히다(욥 27:15, 렘 8:2, 20:6) 구약 성경 / 133회 사용
아버지 야곱이 돌아가시자 요셉이 아비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맞추었다고 했습니다. 요셉은 어려서 남달리 사랑을 받고 자랐기에 감정이 풍부하고 부모에 대한 애정과 존경심이 대단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 장례 준비
야곱의 장례식은 크게 세 가지 방법으로 치러졌습니다. 첫째 애굽의 방식과 가나안 방식 및 다른 이방인들의 방식을 모두
수용했습니다. 여기서 향료를 넣었다는 것은 시체가 썩지 않도록 미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당시 애굽 장의사의 기능은 세계
최고수준이었습니다. 한번 미라를 만들면 수천년씩 보존되었다고 합니다. 애굽에는 못 가 보았지만 영국 대영 박물관에 가보면 애굽에서
발굴해 온 미라가 사람 형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 3절에 보면 시신에 향료를 넣는 일에 며칠
걸렸다고 했습니까?(40일) 그리고 따로 애곡하는 기간으로 70일을 정해서 온 애굽 사람이 이방인 야곱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보통 왕이 죽으면 72일간 문상 기간을 가졌답니다. 야곱은 총리의 아버지였기에 70일간 애도의 기간을 잡았던 것 같습니다. 아마
당시에도 모든 애굽 사람의 몸에 향료를 넣었을리 없고 적어도 귀족층 이상의 사람들에게만 향료를 넣었으리라 추측할 때 야곱의
장례식은 애굽 국부의 죽음에 버금 갈 정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은 후 호화로운 장례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마는 쓸쓸한 장례식보다는 얼마나 유족들에게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또
자녀들의 입장에서는 마지막 효도하는 모습도 되는 것이며 후손들에게 조상에 대한 경애심과 자랑스런 긍지를 갖게 하는데 큰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봅니다. 또 장례 광경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자기도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교훈을 얻게도 할 수 있기에 사치스럽게까지야
할 필요는 없지만 어느 정도 준비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평상시 내핍을 강조했던 요셉의 정신과 어떻게 보면 어울리지 않는 모순감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장례 절차를 갖게 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첫째 애굽의 예법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어느
위치 이상의 관직을 가진자는 수준에 맞는 장례식을 치루어야 했을 것입니다. 만약 요셉이 가나안의 방식으로 장례를 치루어 애굽인들을
참여하지 못하게 했다면 요셉에게 은혜 입은 사람들을 섭섭하게 했을 것입니다,
요셉은 굳이 종교나 문화의 충돌을 피하고 현지의 관습을 무시하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 요셉으로서는 족장시대가 마친 것을 나타내는 의식도 은연 중 내포 되었다고 본다면 그렇게 성대한 장례식을 치룰 만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를 여윈 그 슬픔의 와중에서도 신하로서의 예의를 잊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야곱의 유언을 받들어
가나안 땅 조상의 묘실에 장사하고 오겠다고 정중한 허락을 요청했고 충분한 예우를 갖추었습니다. 요셉은 실로 겸비하고 충직한
인물이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요셉은 아버지와 맹세를 지키기 위하여 500km나 되는 장지까지 가기 위하여
모든 준비를 다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돌아가신 분과 생전에 맺은 약속일지라도 분명히 지켜야 합니다.
2. 장례 행렬(창50:7-14)
7-9절에 보면 야곱의 장례 행렬에 수행한 애굽인들의 목록이 나옵니다. 요셉의 가족은 물론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궁의
장로들과 애굽땅의 모든 장로들까지 따랐다고 했습니다. 실로 장엄한 장례식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사람의 영향이 얼마나 지대한
가를 알 수 있습니다. 창43:32절을 참고하면 17년전 요셉이 총리가 된지 8년이 지난 후에도 애굽인들은 히브리 사람들과
부정하다고 식탁을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셉 한 사람의 높은 인격으로 인하여 모든 애굽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나 한사람의 신자다운 삶이 많은 불신자들을 변화시킵니다.
나 때문에 교회가 부흥되게 합시다. 10-11절을 보면 요셉은 요단강을 건너자 가나안의 장례 방식을 거행했습니다. 무작정
길을 가다 한번 더 애곡 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시리아인들 사이에는 사람이 죽었을 때 타작마당에서 일주일동안 애곡하는 풍습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그런 풍습으로 미루어볼 때 요셉은 그곳에서 가나안 방식으로 한번 더 장례를 치룬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요셉은 야곱의 장례식이 모든 사람에게 평화와 희망을 주기를 원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이방 예식과 서로 충돌하며 꼭 고집을 부리는 것은 평화로운 방법이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이
세상 사람과 불필요한 마찰은 일으킬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철학만 확고하면 문제는 없습니다. 요셉은
원주민들과 행여나 충돌이 없기를 바라고 지중해 길이 아닌 광야 길을 멀리 돌아 요단을 건넜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길은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와 일치 했습니다.
3. 애굽으로 돌아 온 요셉
바로에게 아버지 야곱을 장사한 후 "다시 오리이다“(5)했던 요셉은 야곱을 조상의 묘실인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고 ”자기
형제와 호상군과 함께 애굽으로 돌아왔더라“(14)고 했습니다. 요셉이 다시 돌아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가나안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이제 족장시대가 끝났고 애굽에서 강성해진(숫자적으로) 이스라엘 공동체를 통해 새로운 신앙적인 윤리관을 정립해야 할
과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이 있습니다. 이제는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를 통해 그 믿음을
실천해야 할 과제가 남았던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받은 상처들을 치유 받고 용서를 선언하며 새로운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한국교회도 이제 개교해 중심에서 벗어나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이요, 공동체라는 회복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야곱이 죽은 후 형제간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아 있었듯이 오늘 한국교회에 남은 과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성도
간에, 교회 간에 막힌 담이 헐어져야 합니다. 한국의 초대교회는 유고와 불교 및 우상종교의 잔재가 기독교 속으로 파고들거나 남아
있어서 모이면 논쟁을 하고, 서로가 상처를 주었습니다. 종교적 열심은 있었으나 본질적인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러한 현상은
오늘까지도 연장되어 오며 회의만 하면 싸우고 논쟁하여 서로 갈라지고 찢어졌습니다. 야곱의 죽음으로 족장시대가 물러가고 형제문제,
민족문제로 확대되어 가는 공동체 의식이 공고해져가야 했습니다.
내가 죽고 희생하므로 전체가 살고, 교회가 부흥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간다면 기꺼이 한 알의 밀알이 되고져 하는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전환 되어야 합니다. 이제 성경을 앞에 놓고 눈물로 자신의 문제를 쏟아 놓을 수 있는 체질 개선이 한국교회에도
시급합니다. 인본주의적 자아의식을 강조했던 유교사상은 기독교적 체질 개선에 엄청난 장애를 지금도 가져오고 있습니다. 오즉 하면
공자가 죽어야 내가 산다고 했겠습니까? 열 두 아들에게 남은 것은 용서였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끝부분은 요셉이 영원히 형제들을
용서하는 선언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죄악 세상에 내려오신 예수님의 선언이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나 혼자 우상 숭배와 싸우고
불의와 싸우려고 하지 맙시다. 우리는 집단적으로 어떻게 남의 연약한 부분을 채워줄 것인가를 생각하고 협력해야 합니다. 서로가
작은 허물을 물고 늘어지면 안 됩니다. 함께 기도하며 풀어야 합니다. 파벌시대는 지나가야 합니다. 내 정의(正義)가 아무리 옳다고
해도 공동체를 깨뜨리려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이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지혜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풀어나가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의 생각을 새롭게 합시다. 새로운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하여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합시다. 애급에서
이스라엘을 성장시켰던 하나님의 깊은 뜻을 묵상해 봅시다.
댓글목록
야곱이 애굽 고센땅에서 147세에 죽는다. 요셉은 애굽의 의사들에게 향 으로 40일이 걸려 야곱의 시신을 처리하게
하신다. 그리고 애굽사람들은 야곱을 위하여 70일간을 애곡하엿다. 그리고 곡하는 기간이 끝나자 요셉은 바로에게 말하여 자기
아버지의 유언대로 가나안 땅에 있는 조상의 묘에 장사하고 돌아올수 있도록 부탁을 한다. 바로 왕은 요셉의 부탁을 들어주고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고 돌라오라 하며 애굽 바로왕의 모든 신하와 바로궁의 원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원로와 요셉의 온 집과 그의 형제들과
그의 아버지의 집이 함께 가나안 땅 헤브론 으로 올라갔다.
보통 나라의 대통령이 죽으면 국장으로 장례식을 치룬다. 그런 국장의 규모도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곱의 장례식의 규모와는
비교가 되질 못한다. 지금 야곱의 장레식은 애굽 전 나라의 국장의 규모를 넘어선다, 그것도 국가의 경계를 넘어 매장지가 외국이다.
이동수단이 좋지를 않았던 그 시절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애굽에서 가나안 헤브론 까지 따라간 행렬 이었는지 상상이 간다. 애굽의
모든 신하들과 국가의 유력한 지도자들이 다 수행한 장례식이다. 단순한 야곱의 허리에서 난자들의 가족장이 아니라 애굽을 넘어
가나안땅에 있는 사람들까지 애곡을 하는 국제적 장례식을 치루게 하셨다. 성경에서 나오는 장례식 가운데 이렇게 거칭힌 징례식을 치룬
인물이 없다.
왜 하나님 께서는 야곱의 인생을 이렇게 까지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장례를 치루면서 그 수많은 사람들을 가나안 혜브론 까지
따라가게 하여 모든 사람들의 이목을 받게 했으며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식구들에게 아버지 야곱의 장례식을 치루면서 무엇을 말씀해 주고
싶으셨는가 생각해 보게 하신다.
야곱이 130세에 애굽의 고센땅에 이주를 할때 브엘세바 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 이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말씀하신다.
애굽으로 내려 가는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애굽 에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너와 함꼐 애굽으로 내려 가겠으며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것이다. 이 말씀을 하나님께 직접 받은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기 할아버지 아브라함 에게 약속하신 아브라함의
씨로 된 큰 민족을 이룬 이스라엘이 지금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을 떠나 지만 언젠가는 반듯이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돌아온다는
믿음을 가지고 고센 땅으로 요셉과 바로의 초청을 받아 내려 간것이다.
야곱은 죽어서 시신으로 가나안 땅 헤브론 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 많은 사람들이 애굽 에서 가나안 헤브론 으로 오면서 아버지
야곱에게 전수 받은 믿음인 언젠가 애굽에서 출애굽 하는 큰 민족이 된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오는 장면을 지금 아버지 야곱이 죽어
장례식으로 이렇게 시청각으로 보이고 있는 것이다. 너무나 큰 규모의 장례식 이라 어느 누구도 이런 규모의 사람들이 애굽에서
가나안 까지 이동 할 수 있다는것을 미리 보여 주는 대목이다.
야곱은 죽어서도 그의 장례식 까지 하나님 께서 남은 자식들과 수 많은 사람 들에게 " 내가 여호와 인줄 알게 하리라 ":
하는 메세지를 보내고 있는 인생으로 하나님 께서 쓰고 계신다. "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것이로다 "
하는 시편기자의 고백처럼 하나님 께서는 성도들의 죽음을 귀히 보고 계신다 지금 야곱의 죽음은 하나님 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친히 이루시는 하늘의 메세지를 야곱의 장례식을 통해 미리 보여 주고 말씀해 주고 계시다. 이를 지켜본 요셉이 그의 죽음
앞에서 마지막 유언이 아버지 야곱의 유언과 똑같은 유언을 남기며 이 화려한 애굽이 아니라 하나님꼐서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척박한
가나안 땅을 그리며 사모하며 요셉의 일생도 마감하는 모습을 본다.
지금 나도 이 땅에서 나그네로 거류민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순례자의 길을 가고 있다. 언젠가 이 땅에서의 마지막을 다할때 나도
야곱 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나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늘의 메세지로 사용되기를 소망해 본다. 그리고 내가 가야할 " 새
하늘과 새 땅 " 을 늘 바라보며 사모하며 나의 삶이 다하는 그 순간 까지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그런 믿음의 사람으로 오늘도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는 자가 되기를 결단하게 하신다..
야곱의 장례식(창세기 50:5-6)
“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 에 내가 파 놓은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내가 다시 오리이다 하라
하였더니 바로가 이르되 그가 네게 시킨 맹세대로 올라가서 네 아버지를 장사하라."
야곱은
아들 요셉의 인도로 가나안을 떠나 애굽에 와서 살다가 죽게 되었습니다. 애굽에 왔을 때에 그는 바로 왕에게 고백했습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창 47:9). 인생은 야곱처럼 나그네 세월을 살다 죽는 것입니다. 오늘 야곱의 죽음을
통해 교훈을 받습니다.
1. 그는 신앙적 유언을 남겼습니다(5절)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나를 장사하라"고 했습니다. 비록 애굽에 와서 죽음을 맞았지만, 자신은 고향 가나안에 묻히고 싶다는 소망을 후손들에게 남긴
것입니다. 요셉은 이 유언을 따라 시신을 가나안 땅으로 모시고 가서 장사지냈습니다.
성도는 신앙적 유언을 남겨야 합니다. 죽기
전에 하늘나라를 간증하십시오. 후손 들이 예수 믿도록 강조하십시오. 하나님을 섬기며 살라고 유언을 남겨야 합니다.
2. 그는 죽음을 준비했습니다(5절)
"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서 둔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내가 다시 오리이다 하라 하였더니." 그가 이미 묘실을 파서 준비해 놓은 것을 봅니 다. 자기 장지까지 분명히 밝혔습니다. 창세기 47장 29-30절에
"이스라엘이 죽을 날이 가까우매 그의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 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허벅지 아래에 넣고 인애와 성실함으로 내게 행하여 애굽에 나를 장사하 아니하도록 하라.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고 하였습니다. 미리 장례를 준 비한 것입니다. 인생 누구나 결국 죽습니다. 사전에
죽음을 준비하 십시오.
3. 그는 영광스러운 죽음을 맞았습니다(3절, 6절, 9절)
애굽인들이 그를 위해
칠십일을 울었습니다(3절). 애굽 왕이 장례를 배려했습니다(6절). 장례에 많은 사람이 따라갔습니다. 장례가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9절). 요셉의 지위 때문이라 짐작 되지만 야곱이 큰 인물이었기에 많은 이가 애도한 것입니다
4. 그는 약속의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니
죽어도 고향 땅에 매장할 것을 고집한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천국이 약속의 땅입니다. 애굽이 아무리 좋아도 영주지는
아니었습니다. 가나안을 소망한 것입니다. 야곱은 살아있을 때도 위대한 신앙의 모습을 보였지만, 죽어서도 후손에게 가나안의 비전을
던져주고 갔습니다. 우리도 약속의 땅 천국을 바라보며 임종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이긴 자 야곱의 장례식(창세기 50:1-26)
하나님을 이긴 자 야곱도 그 생을 마감합니다.
야곱의 죽음(1절)
1. 인간의 보편적 죽음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하나님을 이긴 자 야곱도 죽음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2. 죽음의 이별은 늘 슬프다
요셉은 슬픔이 복받쳤습니다. 몸을 굽혀 아버지 야곱에게 입을 맞춥니다. 야곱의 임종을 본 요셉 : 이것은 기도의 사람 야곱에 대한 하나님의 기도 응답이었습니다. 브엘세바에서 예배드리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야곱에게 나타나 아들 요셉이 야곱의 죽음의 순간을 지킬 것임을 계시한 적이 있습니다(창 46: 4). 아버지 야곱이 147세의 만수를 누렸어도 이별은 슬펐습니다.
야곱의 장례 절차(2-8절)
1. 이집트의 장례식을 따르다.
시신은 부패를 막기 위해 의사들이 몸에 40일 동안 향을 넣었고 향 재료를 넣게(2절) ; “하나트”(히)=dorq의 유명한 미이라 제작 방식을 말함.이집트사람들은 70일 간 애곡합니다.곡하는 기한(4절) ; 고인을 추모하는 애도 기간= 애곡은 보통은 7일, 특별한 사람은 30일(신 34:8), 또는 70일 진행. 따라서 야곱의 경우 국장(國葬)급의 장례였음).
이 일을 통해 요셉이 애굽 사람들로부터 인정 받는 지도자였음을 알게 됩니다.
왜 이집트 장례식을 따랐을까?
(1) 요셉은 애굽 국가 지도자이므로 국가 장례 예우를 따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이런 장례 의식은 아버지 야곱을 가나안까지 옮겨가기에 적합한 방부처리로 활용될 수 있었습니다. (3) 부활과 상관없는 장례 절차 : 장례 절차와 법 자체는 부활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따라서 믿지 않는 가족들과 장례 절차를 가지고 옥신각신하거나 너무 다투지 말아야 합니다. 슬픔 당한 가족의 입장을 존중하고 배려함이 중요하고 오히려 장례가 불신자들을 전도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4) 화장이든 매장이든 미이라로 만들든 부활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5) 그렇기 때문에 살아생전 사랑의 교회 옥한흠 목사는 곽선희 목사와 더불어 자신들은 사후(死後) 화장할 것이라고 자주 공포하였었는데 사랑의 교회가 옥 목사 장례를 매장으로 일방적으로 처리해버린 것은 성도들과 일반인들에게 까지 아주 안 좋은 관례를 남긴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장례 유언조차 뒤집는 말과 행동과 앞과 뒤가 다른 자들이라는 조롱을 당할 수 있기 때문에 좀 더 신중하게 결정을 내려야 했었다고 봅니다.
요셉은 아버지를 가나안 땅 막벨라 굴에 모시기를 원하다
가나안 땅 막벨라 굴에 묻히기를 소망한 것은 야곱의 뜻이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을 가나안 땅에 모시기를 청합니다. 요셉이 이집트 신하들을 통해 바로에게 아버지 야곱의 가나안 장사를 간청한 일에 대해 바로는 그 일을 허락합니다. 야곱은 애굽 땅에서 17년을 더 살았습니다. 요셉은 그 이전 22년을 애굽에서 살았습니다. 실로 39년 만에 이제 요셉은 고향 땅을 밟는 것입니다!
가나안 장례 행렬
바로는 많은 장례 위원들을 딸려 보냅니다. 요셉은 존경 받는 애굽 지도자였습니다.
요셉의 애굽 복귀를 위한 안전 장치 많은
장례 위원과 요셉의 가족들과 형제들과 친척들이 함께 가는 가운데 애굽의 많은 장례 위원이 함께 가나안에 동행하고 어린자녀들과
양떼와 소떼는 고센 땅에 두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요셉을 애굽으로 귀환하게 하려는 담보요 안전 장치이기도 했습니다.
야곱의 장례 풍경(9-14절)
1. 규모가 대단한 장례
전차와 마병까지 동원된 지도자급의 대단히 규모가 큰 장례식이었음을 알게됩니다.
☞ 호상군(14절) : 장례를 위해 함께 온 사람들, 즉 장례를 위해 참여한 유가족과 애도객, 군사, 신하 등 참석자 전원을 말함
2. 요셉은 효자
요셉은 요단강 건너편아닷 타작 마당에 이르자 타작 마당에서 7일 동안 애곱합니다. 이를 보고 그곳 사람들은 애굽에 큰 슬픔(“아벨 미즈라임”, “애굽의 슬픔”이라는 뜻)이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유언대로 막벨라 굴에 장사한 효자였습니다.
야곱의 죽음과 장례를 통해 본 본문의 적용과 교훈
인간은 죽음의 때가 기다리고 있음을 늘 기억해야 한다(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사람은 참 미련합니다.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교만하게 나댑니다. 심지어 죽음이 목전에 다다른 사람조차 죽음을 가볍게 여깁니다.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히 9:27).
야곱의 장례 행렬은 여호와 하나님을 증거하는 표상
당시 애굽은 세계 최고의 문명 국가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신앙이란 나일강 악어에게 귀걸이, 팔찌를 채워주고 성스러운 음식을 악어에게 바치며 무당들이 악어에게 무릎을 꿇고 절하는 풍습이 있을 정도로 문화적으로는 미개한 상태였습니다. 동물 고기, 심지어 사람 고기는 먹어도 악어 고기는 입에 대지 않았을 정도입니다.(역사가 헤로도투스). 굳이 막벨라 굴로 향하는 야곱의 장례식은 이들 애굽 사람들에게 대단히 흥미로운 장례식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것은 누구든지 슬픈 일이기는 하나 죽음 너머 또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이 우둔한 악어 신앙을 가진 애굽 사람들게 야곱의 죽음은 암묵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소망 없는 이들처럼 슬퍼하지 말 것(데살로니가전서 4: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왜 유다지파를 선택하셨을까?
예수님은 왜 유다 지파로 오셨는가?
요한복음 6:38-40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여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아들을 세상에 보내기로 작정하시고 세밀한 계획을 하셨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옛 언약(구약)의 시대에서 새 언약(신약)의 시대로 넘어가는 분수령이 되는 예수님의 초림은 사람의 몸으로 오셔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열두지파를 각각 주목하여 보셨을 것이다.
열두지파의 시작이 되는 창세기로 가보자, 야곱의 열두 아들중 요셉은 형제들의 시기와 질투 때문에 죽을 뻔한 상황을 맞는다. 그때 두 형 루우벤과 유다가 요셉을 구하여 생명을 지키고 이스마엘 사람에게 팔려가도록 하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 한다. 르우벤은 맏아들로서의 책임에 최선을 다한 것이다.
세월이 흘러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고 오랜 기근과 흉년에 식량이 떨어진 야곱은 아들들을 애굽으로 보내어 식량을 사오게 한다. 이 과정에서 요셉은 동생 베냐민을 데려오도록 일을 꾸며 형들을 아버지에게 돌려 보낸다. 베냐민을 데려가야 하는 상황에서 르우벤과 유다가 아버지에게 간청하는 부분을 보자
창세기 42:37 르우벤이 그의 아버지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내 두 아들을 죽이소서...
창세기 43:8~9
유다가 아비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것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그의 몸을 담보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 그를 물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유다가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르우벤의 모습에서는 제물에 죄를 전가하는 구약의 모습이 나타나고 유다에게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난다.
아버지 야곱은 이 일이 있은 후 유다를 형제의 대표로 삼는다.
창세기 46:28
야곱이 유다를 요셉에게 미리 보내어 자기를 고센으로 인도하게 하고 다 고센 땅에 이르니...
유다지파의 특별함은 민수기에서도 잘 나타난다. 민수기 14:24 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가나안을 정탐했던 12명중 하나였던 갈렙이 바로 유다지파였고 출애굽 1세대에서 유일하게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이 바로 여호수아와 갈렙인 것이다.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자기 백성을 천국으로 인도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유다지파의 후손으로 보내신 이유를 조금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유다지파라는 사실에 대하여 좀더 심도있게 살펴보자. 예수님은 진짜 유다지파의 후손인가? 우리는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고 아버지의 성을 따른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이라 말할 수 있는가? 요셉은 단지 법적인 아버지일뿐 아닌가.... 예수님은 요셉으로부터 어떤 유전자도 물려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다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을 유다지파라 할 수 있는가?
예수님의 족보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데 하나는 아브라함에서 부터 내려오는 것이고, 하나는 요셉에서 부터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분명 예수님의 족보인데 전혀 다른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름들을 살펴보면 공통으로 만나는 시점이 다윗이다. 즉 다윗의 여러 아들중 솔로몬의 줄기와 나단의 줄기로 나뉜다는 사실이다.
마태는 예수님의 법적 아버지 요셉이 솔로몬의 후손으로서 법적 유다 자손인 것을 서술하였다면 누가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나단의 후손으로서 유전학적 유다 자손인 것을 증명한 것이다.
이 명백한 사실 앞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성경안에서의 열두지파의 이름이 일치하지 않고 계속 바뀌고 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장자까지도 르우벤에서 유다로 바뀌었다. 나의 이름은 생명책에 견고하고 뚜렷하게 남아 있는가 아니면 서서히 흐려지고 있는가..... 지금 이시간.... 하나님은 각 사람을 주목하여 살피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유다지파를 선택하신 저울로써 우리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합당한지 달아보고 계신다. 예수님을 아무 지파에나 보내지 아니하심같이 아무나 예수님의 신부가 될수 없다.
예수께서 왜 요셉이 아닌 유다의 후손으로 오셨을까?
먼저 창세기 전체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4가지의 중대사건 (1-11장) 1) 창조 (1-2장) 2) 타락 (3-4장) 3) 홍수 (5-9장) 4) 바벨탑 (10-11장) 2. 4분의 위대한 믿음의 족장 (12-50장) 1) 아브라함 (12-23장) 2) 이삭 (24-26장) 3) 야곱 (27-36장) 4) 요셉 (37-50장) -- (38장만 유다와 다말의 사건을 기록함) 요셉의 이야기는 창세기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럼 요셉의 삶을 생각해 보자. 요셉은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 때문에 형들의 미움을 받게 되어 애굽의 노예로 팔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요셉은
신앙으로 모든 것을 인내해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흉년이 들어 기아에 허덕이던 자기 형제들과 아버지를 초청해 윤택한 삶을 누리도록
배려했다. 형들에 대한 분노나 원한을 갖지 않고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섭리와 뜻으로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돌보아 주었던 자이다.
야곱의 12 아들 중에서 가장 온전하며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창세기에서 예수의 성품을 가장 닮은 자가 바로
요셉이다. 요셉은 그리스도의 예표가 된다고 불 수 있으며 그 후손을 통해 그리스도가 오심을 기대해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유다를 생각해 보자. 유다의 기사는 창세기 38장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유다의 생각과 말과 행동들이 창37-50장의 요셉의 사건 내용 중에 포함되어 있다.
1. 유다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매사에 좋은 의도로 생각하고 제안해 일하는 자였다.
유다는 야곱의 첫째 아내인 레아를 통해 낳은 넷째 아들이며,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창 29:35). 아버지
야곱이 요셉에게 심부름 시켜 들에서 양치는 형들을 찾아가게 했다. 그러나 그 형들은 요셉이 오는 것을 보고 그를 죽이려고
모의했다. 주동자는 둘째 시므온이었고(창42:24), 셋째 레위 역시 동조했다(창34:25, 49:6-7). 그러나 맏형 르우벤은
그는 죽이지는 말고 광야 구덩이에 넣으라(창37:21)고 명했다. 요셉은 구덩이에 빠져 형들에게 살려달라고 애걸하며 외치는
상황에 놓치게 됐다. 이 때 동생 요셉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찬 유다는 애굽으로 향해 지나가던 행상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자는 제안을 하게 되었고 요셉은 애굽에 팔리게 되었다. 형들은 집에 돌아와 아버지 야곱에게 동생 요셉이 짐승에 잡아먹혔다고
거짓말했다. 아들 요셉이 정말 죽은 줄 알았던 야곱은 대성통곡하며 슬퍼했다. 그리고 요셉은 애굽의 바로의 신하 시위 대장
보디발에게 팔리게 되었다.
곧 이어 창세기 38장에는 유다의 이야기로 이어가게 된다.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서 내려가서(떠나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에게로 나아가니라.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취하여 동침하니(1-2절)”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본문만 보면 유다의 잘못된 점들만 보이게 된다. 첫째는 그가 형제들을
떠났다는 것이며 둘째는 그가 이방 여인을 보고 동침했다는 사실이다(참고:창6:2). 그러나 여기서 왜 유다가 형제들을 떠나야만
했던 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유다는 형제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을 것이며 아버지 야곱에게 슬픔의 고통을 안겨준 장본인이라는 깊은
죄책감에 빠졌던 것이다. 왜냐면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자고 모의했던 것과 구덩이에 던지자고 했던 것들은 다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유다의 제안이었던 애굽에 팔자는 제안만이 결과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참고:확바#11, 도마의 사건).
2. 유다는 회개할 줄 아는 겸손한 자였으며. 같은 잘못을 다시 범치 않는 자였다.
창세기
38장의 중요 내용은 유다가 여행을 가게 되었고 창녀와 관계를 하게 됐다. 그 후 자기의 며느리 다말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은
유다는 그녀를 임신케 한 사람이 자기임을 알고 “그(며느리 다말)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라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창38:26)” 라고 말한다. 유다는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말하면서
회개하는 정직하고 겸손한 모습을 보여 준다. 또한 다시는 같은 죄를 범치 않겠다는 결단과 이를 실천해 나갔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참고: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 남편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이게 하는 것과 비교)
예수께서 성경에
나타난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욥, 요셉, 여호수아, 사무엘, 다니엘)을 통해 오시지 않으시고, 왜 죄와 허물 많은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다윗을 통해 오셨을까? 그 답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2:17)”,.“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5:20)”, “그런즉 -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롬6:1-2)”라는 말씀에 있다. 큰 죄를 범한 괴수라 할지라도 담대함과 용기를 가지고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던 것이다.
3. 그후 유다는 형제(남)를 위하여 자신을 담보로 내 놓았던 자이다.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작정한 유다는 자신을 위해서라기보다 형제와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며 살아간 사람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며 그리스도의 삶을 닮아가는 자의 삶이었다.
야곱의
열 아들이 흉년이 들어 양식을 구하려 애굽에 처음 내려갔을 때 요셉은 친 동생인 베냐민을 데려오게 하기 위해 시므온을 담보로
삼아 옥에 가두고 다른 형제들은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그 후 아들들은 베냐민을 꼭 데려가야 한다고 요청하지만 야곱은 이를
거절한다. 이 때 “유다가 아비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베냐민)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것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그의 몸을 담보 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 그를 물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창43:8-9)”라고 말한다.
이
말을 들은 야곱은 베냐민과 함께 자녀들을 애굽으로 보낸다. 이들이 양식을 얻어 다시 돌아가게 될 때, 요셉은 베냐민과 함께
지내기 위해 베냐민의 자루에 자기의 촛대를 숨겨 넣어 다시 잡혀오게 만든다. 이 때 유다는 총리 요셉에게 “청컨대 주의 종으로
아이를 대신하여 있어서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아이는 형제와 함께 도로 올려 보내소서. 내가 어찌 아이와 함께하지 아니하고 내
아비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비에게 미침을 보리이까(창44:33-34)” 라고 요청한다.
곧
요셉은 감동을 받고 자신을 형들에게 알린다.(창45:1). 분명 유다는 형제(남)를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정신으로
살아간다. 즉 남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려는 위대한 헌신의 사람으로 변한다. 이로써 유다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그의 몸을 담보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을 예표해 준다. 이는 죄범하기 쉽고 죄범한 우리에게 더 큰 위로와 소망과 용기와
결단을 가져오게 하며 거룩한 삶으로 승화시켜 가는데 더 큰 힘이 되는 것이다.
야곱이 창세기 49장에 임종을 앞두고 12자녀에게 장차 될 일을 예언하는 내용을 살펴보자.
창세기
49장에는 야곱이 생의 마지막을 앞에 두며 12자녀들을 불러 예언해 준다. 이 중에서 시므온과 레위에게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네 혼아 그들의 모의에 참예하지 말찌어라 (5-6절)”고 경고한다. 그러나 요셉에게는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22절)”라 말씀하므로 요셉의 무성한 가지가 담을 넘어 이웃 형제에게 유익이 된다는
말씀이며,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 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24b절)” 라고 말씀해준다.
여기서 성경학자들에 따라 ‘이스라엘의 반석’이 누구인가에 대하 견해가
각각 다르다.
어떤 이들은 요셉 자신이라고 말하기도 하며 또 다른 이들은 그로부터 목자가 나도다 라고 했으니 요셉의 후손들로
목자의 역할을 한 여호수아, 드보라 사무엘, 기드온, 입다 등을 말한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이들은 선한 목자(The
Shepherd)를 예수 그리스도로 보며, 요셉을 통해 그리스도를 예표로 말해준다고 주장한다.
우리말 성경에는
예수가 요셉의 후손으로 오시는 것처럼 되어 있지만 영어 성경들 KJV, NIV, RSV에는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 즉 이스라엘의 반석의 힘을 입음이니다”라고 되어 있다.
But his bow remained steady, his strong arms stayed limber, because of the hand of the Mighty One of Jacob, because of the Shepherd, the Rock of Israel.
요셉의 후손으로 예수가 오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의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힘으로 요셉이 능한 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유다에 대해서는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찌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창 49:8)”.
”홀(왕의 지팡이)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예수)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10).
유다의 후손을 통해 예수가 오심을 말해주고
있다.
물론 요셉은 그의 삶에서 예수의 모형으로 볼 수 있으나, 죄범한 가운데 즉시로 회개하며 결단하고 성화되어 가는 삶을
살아가는 유다의 삶이 참된 성도의 모범을 보여준다.
“그는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며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왜 유다지파를 선택하셨을까?
실로(7886)
실로- 팔레스타인의 지명 이름
실로- 메시아, 그리스도의 별칭
실로- 행복한, 번성하다, 안전한(욥 3:26)
1. 실로=메시아(그리스도)
“실로가 오실 때까지 홀(笏)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법을 주는 자가 그의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니 그에게 백성이 모이리로다.”(창 49:10)
이
구절은 대언자 야곱의 예언으로 '실로'가 메시아(그리스도)이심을 보여 줍니다. 유다 지파에서 '그리스도'가 나신다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유다 지파의 사자이십니다(계5:5). 야곱의 예언은 히브리서 7:14절을 통해 확증되었습니다.
“우리 [주]께서 유다에게서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히 7:14).
2. 실로. 주의 집(성막)이 있던 곳.
실로는 주의 집(성막)이 있던 곳입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로 사사 시대까지 계속해서 '주의 집'(성막)이 실로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던 모든 기간에 그들이 자기들을 위하여 미가가 만든 그 새긴 형상을 세웠더라.”(삿 18:31)
“그때에 그들이 이르되, 보라, ... 실로에서 해마다 {주}의 명절이 있도다, 하고”(삿 21:19).
“{주}께서 다시 실로에서 나타나셨으니 {주}께서 실로에서 {주}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신을 계시하셨더라.”(삼상 3:21)
실로는 주의 집이 있던 도시의 이름(지명)입니다.
그럼
대언자 예레미야는 주께서 이스라엘을 '실로같이' 되게 하겠다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유다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실로란 도시가
어떻게 되었는지 다 압니다. 그들은 블레셋과 싸우기 위해 주의 집에 있던 언약궤를 가지고 전쟁터로 갔다가 블레셋에 패하면서
전리품으로 빼앗겨 버렸습니다. 그 날 대제사장 엘리가 죽고, 그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었습니다. 그 날부터 '실로'에 있던
주의 집은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주의 언약궤가 없는 집은 더이상 주의 집이 아니었고 사람들은 거기로 올 일도 없게 되었습니다.
빼앗긴 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 오는데는 무려 100년 4개월이 걸렸습니다. 블레셋에서 7개월만에 언약궤는 기럇여아림의 아니나답의
집으로 왔고, 사무엘의 전 생애와 사울의 전 생에 동안에도 계속 기럇여아림에 있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다윗이 이것을 옮기려다
실패(웃사의 죽음)함으로 오벳에돔의 집에 약 3개월 있다가 율법에 따라 레위 제사장들이 궤를 메고 예루살렘으로 가져왔습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예레미야 26:6,9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이 집을 실로같이 되게 하고 이 도시를 땅의 모든 민족들에게 저주거리가 되게 하리라, 하라.”(렘 26:6)
“어찌하여 네가 {주}의 이름으로 대언하여 이르되, 이 집이 실로같이 되고 이 도시가 황폐하게 되어 거주민이 없으리라, 하느냐? 하며 온 백성이 {주}의 집에 모여 예레미야를 대적하니라.”(렘 26:9)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침공으로 실로에서 언약궤를 잃고 주의 집이 황폐하게 되었듯이 이번에는 바빌론의 침공으로 예루살렘에서 주의 집이 불타
없어져 버립니다. 성전의 보물은 모두 바빌론으로 옮겨집니다. 주의 집에 있던 주의 영은 성전을 떠나버립니다(겔11:23).
주님께서 실로의 장막을 버리셨듯이 예루살렘의 성전도 버리신다는 말입니다.
“실로의 성막 곧 친히 사람들 가운데 두신 장막을 버리시고”(시 78:60)
“오직 너희는 실로에 있던 내 처소 곧 내가 처음에 내 이름을 둔 곳으로 이제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사악함으로 인하여 내가 그곳에 어떻게 행하였는지 보라.”(렘 7:12).
주께서 전에 실로에 있던 주의 집을 버리신 것같이 이번에는 예루살렘에 있는 주의 집을 버리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그들은 역사를 통해 배우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조상들은 '언약궤'를 들고 전쟁에 나가면 승리할 줄로
알았지만 패했습니다. 지금 그들은 예루살렘의 성전을 믿고 유다는 절대 망하지 않을 것이다, 패배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믿지만
예루살렘은 바빌론에 멸망하고 성전은 불타고 황폐하게 됩니다. 그들은 법궤나 성전을 믿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주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실로에 행한 것 같이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 곧 너희가 신뢰하는 이 집과 내가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준 이곳에 행하겠고”(렘 7:14)
주께서는 이전에 실로에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예루살렘에서도 똑같이 행하실 것임을 대언자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셨고, 그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실로가 오시기까지(창 49:10)의 의미는?
왕들과 치리자들과 그리스도를 산출함 창세기
49장 10절은,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홀(忽)은 왕권, 혹은 왕국의 홀을 가리킨다.
시편 45편 6절은,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라고 말한다.
나라의 상징인 홀은 그리스도의 왕의 권위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10절에 있는 홀은
그리스도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왕권을 의미한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않는 것은 왕권이 그리스도로부터 결코 떠나지 않을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7626. 홀(芴. 笏) - 규(圭) / 쉐베트(
[ shêbeṭ ] שֵׁבֶט
1. 막대기. 2. 레위기 27:32. 3. 규
발음
/ 쉐베트[ shêbeṭ ] 어원 / 어미활용 שִׁבְטִי, 복수 שְׁבָטִים, 연계형 שִׁבְטֵי, ‘가지치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통치자(창 49:10), 지파(창 49:28, 수 3:12, 대하 6:5), 매(출 21:20, 욥 21:9),
막대기(레 27:32, 대상 11:23), 지팡이(삿 5:14), 채찍(삼하 7:14,시 89:32), 창(삼하 18:14),
징계(욥 37:13), 철장(시 2:9), 권세(시 125:3), 몽둥이(사 14:5), 작대기(사 28:27), 규(圭)(겔21:10,
암 1:5) 구약 성경 / 190회 사용
히브리 시는 짝을 지어 구성된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치리자의 지팡이」는 「홀」과 동의어이다. 틀림없이
여기서 치리자는 그리스도이다. 이 구절에서 치리자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입법자를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법을 만드는 분이시다. 그분은
지팡이와 홀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왕권의 권위와 지팡이와 홀을 가진 치리자이시다. 이 구절은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 발 사이」라는 말은 씨나 후손을 가리키는 시적 용어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유다의 후손들을 의미한다. 이것은 유다 지파에 언제나 왕이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역대상 5장 2절에 따르면 유다가
왕권을 가지며 치리자가 그의 후손으로부터 나온다.(창세기 라이프 스타디, 메시지 99)
실로를 가짐
이
권위는 실로가 오시기까지 계속될 것이다. 실로라는 단어는 「평화를 가져오는 자」라는 뜻이다. 대부분의 훌륭한 성경 교사들은
실로가 재림하시는 그리스도를 의미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재림하실 때 평화의 왕으로서, 평화를 가져오는 분으로서 오실
것이다. 그때에는 온 땅에 평강이 충만할 것이다.
또한 창세기 49장 10절은,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백성은 나라와 동등하다.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는 모든 나라들이 그분에게 굴복하고 그분에게 복종할 것이다. 이사야
2장 1절부터 3절과 11장 10절은 주님이 재림하시는 천년 왕국의 시작부터 모든 나라들이 그리스도에게 복종할 것임을 나타낸다.
그들은 하나님의 교훈을 받기 위하여 그분에게 나아올 것이다.
평강을 가져다주는 자로 오시는 그리스도
창세기
49장 10절은 실로가 오시기까지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않으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않으시리라고 말한다.
실로는 평강을 가져다 주는 자를 의미한다. 합당한 왕국은 평강의 영역이다. 당신에게 평강이 없다면 당신은 사실 왕국 안에 있지
않은 것이다. 왕은 평강을 주는 자, 평강을 가져다 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왕께서 다시 오실 때 그분은 온 땅에 평강을
가져다주는 위대한 실로로서 오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을 우리의 실로로서 누리기 위해 그날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우리는
오늘 그리스도를 실로로 누릴 수 있다.
가족 생활의 예를 깊이 생각해 보라. 어떤 의미에서 가족 생활은 소동으로 가득한
폭풍 이는 바다이다. 폭풍이 언제 올지 우리는 전혀 모른다. 나는 여러 해 동안 가족 생활이라는 바다를 항해해 오고 있으며,
그것이 종종 매우 소란하다는 것을 증거할 수 있다. 마태복음 14장에서 우리는 폭풍 이는 바다 위에서의 제자들의 체험에 대해
읽는다(마 14:22-23). 예수님은 기도하시기 위해 산으로 올라가려 하셨을 때 그분의 제자들을,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셨다(마 14:22). 저녁이 되었을 때 배는 풍랑에 뒤흔들리고 있었다. 마침내 그곳 산 위에서 기도하신 후 주님은 바다
위로 걸어서 배 안에 있는 제자들에게로 오셨다(마 14:25). 그분이 배 안으로 들어가셨을 때 바람이 그쳤다(마 14:32).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예수가 계신 곳에는 폭풍이 전혀 있을 수 없으므로 폭풍은 멈추었다. 폭풍은 우리를 두려워하지 않지만
하늘에 속한 왕을 두려워 한다. 비록 폭풍이 우리를 괴롭힐 수는 있지만 그분이 파도 위를 걸으시므로 그분을 괴롭힐 수는 없다.
소란한 가족 생활의 바다 가운데서 우리는 구걸하는 식으로 기도해서는 안 된다. 대신 권세를 사용하여, 『주님, 당신이 바다 위를
걷고 계십니다. 당신은 왕이시요 당신에게는 권세가 있습니다. 이제 저는 이 소란한 상황을 이기기 위해 당신의 권세를
사용합니다.』라고 기도해야 한다. 이와 같이 기도하기를 힘쓰라.
하나님의 눈에 승리는 얻은 바 되었고 왕국은 이 땅에
있으며 평강이 여기 있다. 모든 것이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환경을 주목하지 말아야 한다. 마태복음 14장 28절에서
베드로는,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말했다. 베드로는 마치, 『주님, 만일 주시라면 제게
말씀을 주시어 저를 당신에게 오게 하소서. 당신이 바다 위를 걷고 계시니 저 역시 바다 위를 걸을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
같다. 주님은, 『오라.』고 말씀하셨고 베드로는 배 밖으로 나가 예수께 가려고 물 위를 걸었다(마 14:29). 베드로에게는 배
밖으로 뛰어나가 파도 위를 걸을 수 있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환경을 주목하기 시작했을 때 그의 믿음은 사라졌으며 그는
가라앉기 시작했다. 베드로의 체험은 우리의 환경을 주목하지 말고 주님의 말씀에 서라는 교훈이다. 믿음은 그분의 말씀에 서는
것이다. 믿음은 환경에 기초를 두지 않는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에 기초를 둔다. 만일 당신이 배 밖으로 뛰어나가 주님의 말씀 위에
선다면 많은 문제들이 해결될 것이다. 당신은 구걸하는 기도들을 너무 많이 하였다. 구걸하는 대신 환경에게 명령을 발하여, 『나는
네가 나를 어지럽히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 예수님이 왕이시요, 왕국은 그분의 것이며, 그분은 실로이시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환경에 평강을 두어야 한다.』라고 말하라.
종종 우리는 골치거리들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그것들을 받아들였었다. 이것은
전적으로 심리적인 문제이다. 간교한 자인 사탄은 당신을 공격하기 전에 먼저 심리적인 방법으로 당신을 접한다. 욥은,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라고 말했다(욥 3:25). 욥의 어려움들이 그에게
임하기도 전에 그는 그러한 어려움들에 대해 생각하였고 그것들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어떤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당신이 이미 그것을
받아들였음을 뜻한다. 두려울 때마다 당신은 즉시, 『사탄아, 나를 떠나라. 나는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이 두려움을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말해야 한다. 두려움은 사탄의 호출 카드이다. 만일 당신이 그의 호출 카드를 받아들인다면 사탄 자신이 올
것이다. 모든 두려움은 호출 카드이다. 사탄은 당신에게 실지적인 어려움을 보내기 전에 먼저 그 어려움에 대한 두려움을 보낸다.
사탄의 두려움의 호출 카드를 받아들이지 말라. 그것을 내버리라. 이것은 영적인 전쟁에 관계된 문제이다. 어떤 형제들은 그들의
직장을 그만두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이 두려움을 받아들이고 나서 며칠 후에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해고되는 것에
대한 생각을 받아들이지 말고, 『사탄아, 나는 결코 해고되지 않을 것이다. 다른 모든 사람이 해고된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고용될
것이다. 왕국 안에 있으므로 나는 이 두려움을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라. 그리스도께서는 승리를 얻으셨으며 그분의 승리의
결과는 왕국이다.
열국의 복종과 순종
창세기 49장 10절은 실로가 오시기까지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천년 왕국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는 실로로서 두 번째 오실 것이며 모든 백성들은 그분께
복종하고 순종할 것이다. 원칙상, 그것은 오늘도 동일하다. 그리스도의 권세와 왕국이 지배하는 곳에 백성들의 복종과 순종이 있을
것이다.
Rueben was the first born, and his tribe is said to represent the powerful energy of everything that comes first
Forum
Are you the first born in your family? What are the positives and negatives about being the first-born or a younger sibling?
The symbol for the tribe of Rueben is the Mandrake flower, pictured above.
2. Simeon
Simeon's Hebrew name:
שִׁמְעוֹן (Shim'on,)
Did you know
The Tribe of Simeon is said
to be associated with aggressiveness and anger- and the lesson that we
should manage our own anger appropriately.
Forum
What helps to calm you down when you are feeling angry or upset?
The symbols for the tribe of Simeon are both the sword and the castle, shown above.
3. Levi
Levi's Hebrew name:
לֵוִי (Levee)
Did you know?
The Tribe of Levi is said to
be connected the idea of serving a higher calling and doing good things
in the name of God. Members of this tribe beame the Priests of Israel
and were not given their own land as the other Tribes did.
Forum
What are some actions that you have taken in your life that have benefited others?
The symbols for the tribe of Levi are both the water pitcher and
the Priest breastplate. The water pitcher was used by the Priests to
wash thier hands before or during rituals- a metal one is shown here.
The
Priests wore a special breastplate that included the names and stones
standing for each tribe of Israel. A drawing of what they may have
looked like is shown here
4. Judah
Judah' Hebrew name:
יְהוּדָה (Yehudah)
Did you know?
The tribe of Judah is said
to be connected to the importance of leadership. It's symbol, the lion,
is shown below in the official emblem of Jerusalem.
Forum
What was a time in your life where you showed leadership or witnessed leadership?
5. Dan
Dan's Hebrew name:
דָּן (Dan)
Did you know?
"Dan" means "to judge" in Hebrew. The tribe of Dan is said to be connected to the importance of Justice in the world.
Forum
What do you see as an injustice in the world and what is something that you can do to help stop it?
The symbols for the tribe of Dan are the scales of justice, shown
above. This means that justice should be as fair and equal as a
perfectly balanced scale.
6. Naphtali
Naphtali's Hebrew name:
נַפְתָּלִי (Naftalee)
Did you know?
Naphtali is considered to be
the tribe of the "free spirit." It is connected to the importance of
individuality and independance. Naphtali's symbol is the gazelle- a fast
animal that runs free, pictured below.
Forum
What was the most adventurous thing you have ever done? Was it easy? Difficult? Scary? Exciting?
7. Gad
Gad's Hebrew name:
גד (Gad)
Did you know?
Gad is considered to be the
"warrior" tribe. They are connected to the idea that people need to be
ready to protect their freedoms and beliefs. Unsurprisingly, their
symbol is a military camp, shown below.
Forum
What is something in your life that you would protect? Examples might include your family, your freedom, or the safety others.
8. Asher
Asher's Hebrew name:
אָשֵׁר (Asher)
Did you know?
Asher is connected to the feeling of happiness- of not just getting what you need, but enjoying life as a whole.
The Tribe of Asher made its fortunes from olive oil, and in fact, the symbol of the Tribe of Asher is the olive tree, pictured below.
Forum
When was a time where you went above and beyond to make someone happy? How did it make you feel?
9. Issachar
Isasachar's Hebrew name:
יִשָּׂשכָר (Yissakhar)
Did you know?
The tribe of Issachar is known as the scholary tribe. Stufying and learning provide wisdom, clarity and direction.
Their symbol is a banner of the sun, moon, and stars, shown below.
Forum
What was something that you had difficulty learning at first, but were eventually able to understand by studying and practice?
10. Zebulun
Zebulun's Hebrew name:
זְבוּלֻן (Zevulun)
Did you know?
The Tribe of Zebulun is
known as the Tribe of the businessperson. It is said that his role is to
find God in the everyday physical objects around us.
Since the tribe of Zebulun derived its money from its ports and access to the sea, it's symbol is a ship., pictured below.
Forum
What is something you own that is
important to you? What kinds of special memories do you have that you
think of when you see it?
11. Joseph (Ephraim/ Menasheh)
Joeph's Hebrew Name:
יוסף (Yosef)
Ephraim's Hebrew name:
אפרים (Ephraim)
Menasseh's Hebrew name:
מנשה (Menasheh)
Did you know?
Joseph was Jacob's favorite son. There is a whole story about his brother's jealousy and the dangers of playing favorites.
Joseph
went through such difficult times in his life but was able to overcome
them and succeed. Therefore. His tribe is known as one that reminds us
that life can have hard times but we can have the strength to keep
going.
Joseph's Tribe is unique since it is made up of two "half tribes" descended from his sons, Ephraim and Menasheh.
Forum
When was a time in your life where
you faced a lot of difficulty but were able to keep going? What helped
you to make it throught the hard times?
The Tribe of Joseph is symbolized by wheat stalks, shown above.
This is because of the wheat in Joseph's dream that helped him save the
people of Egypt from famine.
12. Benjamin
Benjamin's Hebrew name:
בִּנְיָמִֽן (Binyamin)
Did you know?
The Tribe of Benjamin is known as the "hungry ones." They are said to look for more and more spiritually uplifting activities.
Their symbol is the wolf, an animal that goes after its prey as the Tribe of Benjamin would seek out God in everything.
Forum
What is something that you have never done before that you think would make for a special experience?
“죽기 직전의 사람은 의식과 무의식의 전이와
인지 전환을 경험한다. 죽음이 임박하면 자아뿐만 아니라 자명했던 지각, 주체적이고 자신과 연관돼 있던 지각 능력도 후퇴한다.
그럼에도 이렇게 후퇴한 자아 역시 우리가 반응하고 본능에 충실한 것처럼 어떤 것에 반응하는 패턴을 보인다. 또 다른 세계, 다른
의식 상태, 다른 의미 경험, 그리고 다른 경험 방식이 등장한다. 이 모든 것은 세계관이나 신앙과는 무관하다. 인지 전환은 존재,
관계, 존엄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변하게 한다. 죽음은 하나의 과정이다.” _본문 30쪽에서
흔히들 죽음 하면
‘생물학적으로 숨이 끊기는 순간’ 정도로만 생각하지 죽음이 얼마나 복잡한 과정인지를 잘 알지 못한다. 죽음은 육체가 소멸되는 것 그
이상의 사건으로,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우리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이 일어난다. 죽음은 의식과 무의식의
사이를 수시로 넘나들다가 종국에는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는 ‘변혁’의 과정이다. 여기서 변혁이란 지각과 사고의 주체이자 본능을
조절하는 중심체로서 ‘자아’가 자신에게 속했던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전혀 다른 의식과 지각 차원으로 침잠해 가장 본질적인
정신적 과정인 ‘포괄적 존재’로 편입되는 불가피한 변화로, 현존재가 자아로서 존재하는 마지막 순간에 맞이하는 사건이다. 자기중심적
주체로 구체화되었던 육체가 죽는 것이다. 이로 인해 자아에 내재하는 인지 능력뿐만 아니라 자아로서 겪었던 모든 경험이 상실된다.
죽음은 인간의 의식이 변화되는 이 마지막 변혁의 순간(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통과 이후)에 비로소 서서히 자기 모습을 드러낸다. 이처럼
죽음의 과정에서는 ‘육체의 죽음’의 앞서 ‘자아의 죽음’이 시작되는데, 자아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환자가 넘나드는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경험을 저자는 ‘내적 임종’ 과정으로 이해한다. 이 과정에서 환자는 어떤 거대한 존재에 흡수되거나 삼켜질 것 같은 소멸의
불안(불안의 근원, 원초적 불안)을 보이며, 외경심을 불러일으키는 전율적인 공포(누미노제)에 압도당하기도 한다. 이와 함께
식은땀을 흘리며 몸이 떨어져나갈 듯한 통증과 오한을 느낄 수도 있다. 이때에도 환자는 여전히 들을 수 있고, 외부의 자극이나
소리에 민감하고,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말로 혹은 비언어적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기도 한다. 환자의 내적 과정에 동행한다는
취지에서 저자는 죽어가는 이들의 불안 경험이나 상징적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불가능하지만 그들에게는 일반적인
반응들을 선별해내는 작업을 수행했는데, 그들의 낯선 몸짓과 조각난 언어, 불편한 외침 등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유추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환자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에게도 임종 과정은 힘들고, 낯설고, 이질적이다. 죽음에 대한 준비나 배움이 없다면
환자 못지않게 가족의 불안과 두려움도 커질 수밖에 없다. 임종 환자의 깊은 반半의식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하고 그들의
육체적 정신적 현실을 함께하고자 노력한다면, 죽음의 순간이 단지 고통으로만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사례 1 황혼에
접어든 암스튜츠 부인은 밤이면 항상 경기를 일으키고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자신이 느끼는 불안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죽어가는 사람이면 누구나 어둠에 집어삼켜져 소멸하는 경험을 할 수 있으니 특별히 어둠을 무서워하지 말라고 설명했다.
다행히 그녀는 다시 진정되었고, 켜놓았던 수면등을 꺼버렸다. 5일이 지나자 부인에게는 수면등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고, 그녀는
분명 죽음이 더 가까이 다가옴을 직감하고 있었지만 평온을 유지했다. 그녀의 인지 능력은 분명히 더 이상 자아와 연결되지 않았지만
동시에 자아로부터 부정적인 것이 더 이상 표출되지도 않았다. _본문 86쪽에서
사례 2 50대 중반의
츠바이펠은 죽기 이틀 전에 이미 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보였다. 눈을 부릅뜬 채 벽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고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왜 그토록 벽만 뚫어지게 쳐다보는지 수 없었던 가족은 큰 혼란에 빠졌다.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다 했는데도 나아지지 않았다. 내게 아이디어 하나가 떠오른다. 그와 똑같은 자세로 그가 응시하는 벽을 바라본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회색 벽이 눈에 띈다. 회색 벽 안에서는 모든 윤곽들이 사라져버리는 것 같고, 소름이 돋는 느낌이 든다.
나는 계속해서 음침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벽을 쳐다본다. 츠바이펠도 나와 비슷하게 느끼고 있나? 그에게 말을 건다. “츠바이펠 씨, 당신은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뭔가에 ‘붙들린’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소름 끼치게 하는 거대한 무엇에 말입니다.” 그 순간 나는 뼈에 사무치는 신음소리에 입을 닫고 만다. 침묵이 이어지고 다만 배 속에서 나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마침내 그의 신음소리가 사라진다. 용기를 내어 다시 한 번 대화를 시도한다. “츠바이펠
씨, 당신이 바라보는 대상은 우리에게는 좀 혐오스럽지만 당신에게는 좋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보는 벽에 이름을
붙인다면 아마도 애정이 넘치고 사랑스러운 눈길로 당신을 바라보는, 신성한 이름을 가진 신이 아닐까 싶은데요.” “으…….”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워 있는 츠바이펠의 입에서 새로운 신음소리가 나온다. 그리고 그의 눈가에는 눈물이 고인다. 그 눈물은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고 있다는 의미일까? 그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그의 눈물을 닦아주고 한동안 그곳에 있으면서 다시금
확신한다. 그는 긴장을 풀기 시작한다…. 그는 평온한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죽기 바로 직전에 다시 한번 눈을 떴는데, 뭔가를 두려워하거나 응시하는 눈길이 아닌 행복감에 젖은 눈길이었다고 한다. 전혀 다른 존재를 바라보고 응시하는 눈길이었다고 한다. 난 그를 인도했다고 확신한 다. 그는 더 이상 불안에 떨지 않고 경련을 일으키지 않은 채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_본문 87~89쪽에서
고통 속에서의 존엄 존엄한 삶의 마무리란 무엇인가
요즘
전 세계에서는 ‘죽을 권리’를 찾아 안락사가 합법인 나라로 ‘임종 원정’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올해 초 스위스 내
안락사 주선 비영리기관인 디그니타스에 따르면 2012년부터 2016년까지 96개국의 7,764명이 안락사를 신청했고, 이 중
한국인 신청자는 모두 18명이라 한다. 아시아에서는 가장 높은 수치다. 현재 스위스를 비롯해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콜롬비아, 캐나다 등 6개 국가에서 안락사를 허용하고 있다. 올해 미국의 뉴욕 주가 안락사를 합법화하고 영국도 이를 추진하겠다는
보도가 잇따르면서 안락사로 상징되는 죽을 권리를 향한 움직임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국내에서는 연명치료 중단이라는
소극적 의미의 안락사 법안이 2018년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말기환자가 연명의료 대신 호스피스 완화 의료를 선택해 임종 과정에
겪게 될 여러 고통을 적절히 조절하며 편안하게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관련 인프라 구축이
부족하다는 지적과 함께 환자의 정신적 안녕과 삶의 마무리에 대한 준비는 미흡하다는 우려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저자는 환자 육체의 병리적 특성뿐만 아니라 그의 희망, 절망, 가치관까지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그들이 좇는 영성까지
수용해야 존엄한 삶의 마무리가 완성되는 것임을 거듭 강조한다. 더불어 저자는 ‘죽음’이라는 단어의 무게만큼이나 무거운 ‘존엄’의
문제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독자에게 던지며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죽음은 ‘선택’의 문제에 앞서 ‘수용’의 문제”이다. 스스로
주인공이 되는 죽음, 삶이 자신의 것이었듯 삶의 마지막에 있는 죽음 또한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삶의 마지막
존엄이 완성된다. 존엄한 죽음은 성숙한 인격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삶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 우리는 얼마만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인간다운 죽음’ 즉 존엄사는 인간의 마지막 존엄에 대한 문제를 은폐하는 모토가 되어버렸다. 왜냐하면
여기서 존엄이 자아의 기능성과 자유로운 결정 능력에 의해 정해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기능 중심적 자아가 죽음 앞에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 자아 스스로 생을 내려놓는 가운데 좋은 죽음이 증명된다면 그 또한 어떻게 될까? 오직
자아 안에 자율과 기력이 남아 있을 때에만 존재하는 존엄과 한 인간의 본질 안에 있는 존엄 간의 실제적인 구분은 그리 중요하지
않고 단지 개념적으로 구분할 뿐이다. 후자, 즉 인간의 본질로서 존엄은 삶에서 겪는 고통과 죽음에서도 엄연히 존재한다. 말하자면
후자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줄곧 존재한다. 이와 달리 존엄사 대부분은 환자 스스로 결정하는 죽음으로,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권리와 요구에서 비롯한다. 하지만 자아 안에 있는 존엄과 자기 결정은 인권과 의무
요구와 마찬가지로 별개의 것이다. _본문 220~221쪽에서
▣ 작가 소개
저자 : 모니카 렌츠 스위스
장크트갈렌 종합병원 정신종양학 의사이자 FSP스위스심리학자연맹 소속 심리치료사. 취리히대학교에서 정신병리학, 신학, 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7년간 임종을 앞둔 환자의 정신적 스트레스와 우울, 불안 같은 심리적 증상을 진단, 치료, 관리하는 의사로
일하면서 셀 수 없이 많은 죽음을 목도했다. 특히 그녀를 죽음의 문턱으로 이끌었던 사고의 경험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인간의
존엄과 정신성이 무엇인지, 죽음 앞에 놓인 개인의 비극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편안히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했다. 죽음 분야의 최고 전문가가 된 그녀는 〈원초적 불안과 원초적 신뢰 사이Zwischen Urangst und
Urvertrauen〉〈죽어가는 자들의 증언Zeugnisse Sterbender〉〈인간-관계를 추구하는 존재Der
Mensch-ein Wesen der Sehnsucht〉등 수십 편의 논문들을 발표하며 전 세계 학술 세미나와 워크숍들로부터 많은
초청을 받고 있다. 현재에도 존엄한 죽음과 성숙한 임종 문화를 위한 호스피스 및 고통완화 의학 연구에 매진 중이다.
역자 : 전진만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한 후 독일 빌레펠트 베텔신학대에서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를 공부했으며, 독일 트리어대학교에서 철학?신학
박사과정을 마쳤다. 현재 독일어 강의를 하고 있으며, 출판기획자 및 번역가로서도 활동하고 있다. 『안녕하세요, 교황입니다』『왜
우리는 행복을 일에서 찾고, 일을 하며 병들어갈까』 등을 옮겼다.
▣ 주요 목차
서문
1장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일어나는 일들
2장 죽음의 문턱을 건너다 죽음은 하나의 과정이다 죽음의 문턱에서 :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통과 이전 죽음의 문턱에서 :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통과 순간 죽음의 문턱에서 :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통과 이후 통합 통증이 아니라 통합 평온 죽어가는 사람 모두가 평온을 경험하는가
3장 존재를 뒤흔드는 불안의 경험 원초적 불안이란 우리의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자아가 없으면 불안도 없다 원초적 불안이 드러나는 순간 불안의 흔적들로부터의 자유
4장 죽어가는 사람은 듣고 있다
5장 죽어가는 자의 언어 상징적 체험들 상징의 해석들
6장 무엇이 죽음을 가로막고 인도하는가 불안 대결 운명의 거부와 수용 가족과의 화해 마지막 성숙 죽음 앞에서의 겸손
7장 존엄한 죽음과 그에 동반한 문제들 임종 과정에서의 지각 변화 현세와의 이별 임종 준비의 방향성 “그렇게 죽고 싶지 않습니다” 고통 속에서의 인간 존엄 존엄한 죽음, 무엇이 위협인가 비밀과 최후에 대한 질문들
부록 68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죽음 전이〉 연구 조사 주 / 참고문헌
__________________________ 창세기 50장 /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5절)
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서 둔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내가 다시 오리이다 하라 하였더니.
'My father
made me swear an oath and said, "I am about to die; bury me in the tomb
I dug for myself in the land of Canaan." Now let me go up and bury my father; then I will return.' "
야곱의 장례식과 요셉의 죽음
창세기는 모두 50장으로 구성된 원역사(1-11장)와 구속사 즉 족장의 역사(12-50장)를 소개한 말씀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가정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가정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창세기는 세상을 창조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정을 어떻게 만들어 가시는가를 보여주신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세상을 창조한 이야기는 창세기 1~2장에서 간략하게 소개한 후에 3장부터는 아담과 하와의 가정이야기를 시작으로 그 후손들의 가정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가정 이야기로 시작된 창세기는 야곱의 가정 이야기로 막을 내립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의 가정이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함으로 깨어졌다면 창세기를 마무리하는 본문의 말씀은 깨진 가정이 어떻게 회복되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20절).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야곱에게 12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야곱의
자신의 인생길이 험악한 세월을 살아왔다고 애급 왕 바로 앞에서 말했습니다. 야곱의 험악한 인생이 형들의 시기와 질투로 인해 노예로 팔려
수 십년을 고생한 요셉에 의해 평탄한 인생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깨진 가정이 회복되는 역사는 하나님께서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역사를
통해 가능했음을 말씀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지 못함으로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온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는 미련하고 연약하고 끊임없이 범죄하고 넘어지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의 미련함을 지혜롭게
하시며, 우리의 연약함을 강하게 하시고, 우리의 범죄한 영혼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로 죄사함 얻게 해 주셨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는 결코 짧지 않은 하나님의 능력의 손 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50:1~14. 야곱의 장례식 50:15~21. 요셉과 형제간의 화목한 이야기 50:22~26. 요셉의
유언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
야곱의 장례식은 애굽의 전통적 관례에 준하여 국장으로 성대하게 치러졌습니다.
요셉의 명에 따라 장례준비만 40일이나 걸렸으며, 장례는 70일장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더운 열대 지방에서 70일간 장례가
진행되었지만 그 시신이 상하지 않은 것은 고도로 발달된 미라 기술 덕분이었습니다. 애굽에서는 일찍부터 왕족이나 귀족이 죽으면 그
시신이 썩지 않고 영원히 보존하기 위한 목적으로 미라를 만드는 기술이 발달했습니다. 40일간의 장례준비와 70일 동안 국장으로
아버지 야곱의 장례를 치룬 것을 보면, 당시 요셉이 애굽땅에서 얼마나 높은 지위에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70일이 지나 야곱의 출관일이 다가오자 요셉은 애굽의 바로에게 아버지 야곱의 장지가 이집트 애굽땅이 아니라, 이스라엘 가나안 땅임을 알리고 허락을 구합니다. 5절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 놓은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내가 다시 오리이다 하라 하였더니”
요셉은 사람을 시켜 바로에게 아버지 장례를 치루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오겠다고 말합니다. 이에 바로의 허락을 받은 요셉이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는데, 그때 장례행렬이 얼마나 웅장했는지를 7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셉이 자기 아버지를 장사하러 올라가니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원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원로와 요셉의 온 집과 그의 형제들과 그의 아버지의 집이 그와 함께
올라가고 그들의 어린 아이들과 양 떼와 소 떼만 고센 땅에 남겼으며 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 올라가니 그 떼가 심히 컸더라”
바로의 모든 신하와 궁의 원로들 뿐만아니라, 애굽 땅의 모든 원로들까지 장례식에 참석하려고 가나안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또한
바로왕은 애굽의 총리로서의 요셉의 명예를 존중해 주기 위해 병거와 기병까지 동원시켜 장례를 더욱 성대하게 치루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이는 요셉이 애굽에서 왕과 원로들과 백성들에게 얼마나 큰 신뢰와 존경을 얻고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장례를 모두 마치고 애굽으로 돌아왔을 때, 요셉의 형들은 과거에 저지른 자신의 죄로 인한 보복이 두려워 요셉에게 아버지 야곱이 살아있을 때에 한 말을 기억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17절입니다.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요셉의 형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과거의 죄에서 아직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요셉 때문에 애굽의 고센땅으로 옮겨 산지 17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도 말입니다. 그렇다면 지난 17년 동안 요셉의 형들은 이전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물질적 풍요를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들이 지은 죄 때문에 불안과 걱정, 염려와 근심 속에서 살아온 것입니다.
옛말에 ‘때린 놈은 다리를 못 뻗고 자도, 맞은 놈은 다리를 뻗고 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죄를 지으면 마음이 불안해서 잠도
편히 못 잔다는 말입니다. 허나 이 말도 말 그대로 옛말이 되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오히려 때린 놈이 자기 목소리를 높이고,
죄책감은커녕 자신을 변호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심지어는 범죄자들의 ‘인권’을 운운하면서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삶을 두 번
죽이는 일조차 벌어지는 세상입니다.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 한마디면 아무리 흉악한 죄를 저질렀더라도 가볍게 처벌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흉흉하고 각박한 세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에 비해 요셉의 형들은 자신들이 지은 죄에 대한 댓가를 17년 동안 톡톡히 치루며 살았습니다. 요셉은 형들이 자신에게 저지른
범죄의 댓가를 자신이 갚으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맡겼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처벌하지 않은 것은 악을 선으로 바꾸사 많은
백성들의 생명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로 인해, 또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로 인해,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어찌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무엇이 내 감정을 다스려 줄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주관하고 계신다는 사실,
공평과 정의의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판단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며 살 수 있도록
우리를 진리의 길로 이끌어 줍니다.
요셉은 110세를 살고 이 세상을 떠납니다. 유언으로 남긴 요셉의 말은 언젠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나아갈 때, 자신의
해골을 메고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애굽이 자신의 부귀와 영화를 보장해 준 땅이었지만, 자신의 시신이 애굽이 아닌 가나안
땅에 묻히기를 원했습니다. 이는 요셉의 궁극적인 삶의 지향점이 이 세상이 아니라, 이 세상 넘어 영원한 세상에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가정을 세우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요셉처럼 영원한 약속의 땅을 삶의 지향점으로 삼고 살아가는 이들을 통해 아름답게 결실됩니다. 오늘
우리들의 가정 또한 결코 짧지 않은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의지할 때,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내가 살고 나의
가족이 사는 생명의 역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내용개요]
구속사의 서곡과 같은 한 시대를 살았던 족장들의 시대는 야곱과 요셉을 끝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라 더욱
웅장하고 드라마틱 한 하나님의 구속사를 시작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본장은 세계의 시작을 알리며 시작한 창세기를 족장의 죽음과
함께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며 끝맺고 있다. 야곱이 죽은 후 요셉은 그를 가나안 막벨라 굴에 매장한다(1-14절). 이때 아버지가
죽은 후 요셉의 보복을 두려워하는 형제들에게 요셉은 다시 한번 사랑으로 용서한다(15-21절). 이윽고 마지막 족장 요셉도 후일
후손들이 애굽을 떠날 때 자신을 아버지와 같이 조상의 땅에 묻어 달라는 유언과 함께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침으로(22-26절)
창세기를 마감하고 있다. 이는 족장 시대의 마감이자 출애굽으로의 새 전환점이 전개될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강 해]
본장은 창세기에 대한 대단원입니다. 즉 본장에는 야곱의 장례식과 그의 사후 발생한 이스라엘 공동체의 결속, 그리고 요셉의 죽음
등이 언급되었습니다. 창세기는 태초의 시작이라는 웅장한 주제로 시작되었으나 그 마지막은 슬픈 죽음의 사건들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야곱이 위대한 신앙의 선진이었고 요셉 또한 탁월한 제상이었지만, 이들 역시 유한한 인간으로의 인생 마감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전능자 하나님 앞에 모든 인생은 한낱 풀과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창50장은 야곱과 요셉의 훌륭한 신앙과 그들의
생애를 축복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구약의 족장 중 아브라함과 이삭은 가나안 땅에서 죽고 야곱과 요셉은 타향인 애굽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그들은 다같이 가나안의 막벨라 굴에 장사되었다. 이는 야곱과 요셉의 강력한 유언 때문이었다. 특히 요셉은 후일 후손들의
출애굽을 예견하고 그때 자신의 유해를 함께 가지고 가라고 유언했다. 족장들의 이 같은 가나안 땅에 대한 집착은 그 땅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언약의 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이란 오직 가나안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 전체를 통하여
나타나는 약속의 땅 사상으로 오늘날에는 종말론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예표하고 있다. 성도들의 삶의 궁극적 소망과 목표는 지상
유토피아가 아니라, 종말의 심판과 하나님이 세우실 하나님 나라에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야곱과 요셉의 죽음이 생의 마감이면서
동시에 종말론적 의미의 새 삶의 시작이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고난은 새 세계를 향한 전진의 과정 세계의 시작을 알리는 창조 기사와 함께 시작했던 창세기는 본장에서 야곱와 요셉의 죽음이라는
슬픈 이야기로 끝을 맺고 있다. 어찌 보면 하나님의 원대한 창조 역사가 실패로 돌아간 느낌이 든다. 그러나 야곱과 요셉의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번창한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새로운 탄생을 향한 1막의 끝일 뿐이다. 이처럼 성도들의 삶에 닥치는 불행과
고통은 끝이 아니라 더 큰 축복을 향한 새로운 시작이며 하나의은 역사하심이 펼쳐지는 곳임을 교훈하고 있다. 이것은 고난받으며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에게 힘과 소망을 주는 교훈이다. 즉 암울하고 희망이 사라져 버린 것 같은 현실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은
당신의 새로운 계획을 진행하여 나가고 계시다는 말이다.
축복(1288) 바라크(bârak) בָּרַךְ
1. 무릎을 꿇다. 2. 하나님께 기원하다. 3. 피엘형 בֵּרֵךְ
발음
/ 바라크[ bârak ] 관련 성경 / 문안하다(삼상 13:10), 무릎을 꿇다(대하 6:13, 시 95:6), 찬송하다(창 9:26, 왕상 1:48,
시 113:2), 복을 받다(창 24:31, 삼하2:5, 시 72:17), 축복하다(창 27:33, 민 23:11, 왕상 8:66),
칭찬하다(삼상 25:33), 복이 있다(삼상 25:33, 룻 2:19, 20), 찬양하다(삼하 18:28, 왕상 5:7, 시 106:48),
송축하다(왕상 8:15, 스 7: 27), 복되다(출 20:11, 잠 5:18), 복을 주다(사 19:25, 출 20:24, 신 15:6),
복을 얻다(창 12:3, 시 128:4), 복을 내리다(출 23:25, 신 28:8), 은혜를 베풀다(신 7:13),
저주하다(왕상 21:10, 13), 욕되게 하다(욥 1:5), 복을 빌다(욥 31:20), 자랑하다(시 10:3), 욕하다(욥 2:9),
풍부히 주다(신 14:24), 축사하다(삼상 9:13), 인사하다(왕하 4:29), 축하하다(시 49:18),
꿇리다(창 24:11), [명] 찬송(신 33:20, 시 135:21, 욥 1:21), 복된자(사 65:23), 축복(민 23:20),
복(대상 4:10), 안부(왕하 10:15) 구약 성경 / 256회 사용
__________________________ 창세기 49장 / 후일에 당할 일(1절)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의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Then Jacob called for his sons and said: "Gather around so I can tell you what will happen to you in days to come.
창세기 49장은 야곱이 임종하기 전에 열두 아들들에게 축복하며 예언하는 말씀으로 ‘후일에 당할 일(what will happen to you in days to come)’이라고 언급한 것은 이스라엘 역사를 궁극적인 시각에서 먼 장래를 내다보면서 예언한 것을 암시합니다.
창세기 49장의 내용은 두 부분으로 설명합니다.
49:1-27. 야곱의 열 두 아들들에 대한 예언적 미래에 관한 말씀 49:28-33. 예언을 마친 야곱은 마지막으로 자신을 애굽 땅이 아니라 조상이 묻힌
가나안 막벨라 굴에 장사지낼 것을 부탁하는 말씀
예언적 암시가 가계에 흐르는 저주와 같이 운명론적으로 조상의 어떤 행위가 후손에게 저주로 흘러간다는 것은 아닙니다. 야곱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서 미래의 가나안 정복과 정착을 내다볼 뿐 아니라 더 영광스러운 미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열두
아들은 순서대로 언급되는 것은 아닙니다. 레아의 여섯 아들이 나오고, 라헬의 하녀(빌하)의 아들(단), 레아의 하녀(실바)의
두 아들(갓, 아셀), 라헬의 하녀가 낳은 다른 아들 납달리, 마지막으로 라헬의 두 아들 요셉과 베냐민이 소개됩니다.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 그리고 요셉에 대한 예언은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나머지 아들들에 대한 내용은 아주 단순합니다.
야곱은 구속사의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 갈 열두 아들에 대한 미래를 언급하므로 이제까지 족장들을 이끄심과
같이 이후의 이스라엘 민족 또한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주권적 섭리로 인도할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죽은 줄로 알았던 자신의 11번째 아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소식을 흉년에 곡식을 사러 애굽에 갔던 자신의
아들들로부터 들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130세의 야곱은 거의 20년 만에 아들 요셉과 재회의 기쁨을 누린 이후부터 애굽의 고센
땅에서 살았습니다(창 47:28, 창 37:2; 창 42:46; 창 45:6; 창 41:53-54). 애굽에서 17년의 세월을 보낸 야곱은 이
세상에서 생을 마칠 즈음에 12명의 아들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아들들에게 유언을 하게 됩니다.
창세기 49장은 야곱의
유언이자 그의 아들들에게 내린 축복의 말입니다. 야곱이 유언은 단순한 유언이 아닌 예언이었습니다.
야곱은 1절에서 “너희가 후일에
당할 일을 너희에게 이르리라”고 말했습니다. 후일에 당할 일에 관한 예언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구절이 10절입니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규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나무 가지, 지파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무 가지의 뜻을 내포하고 있기에 막대기나 지팡이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통치자에게 어울리는 막대기라면 왕의 손에 들고 있는 금홀을 연상하게 합니다. 10절은 야곱이 아들 유다에게 내린
축복입니다. 실제로 유다 지파에서 다윗이 나왔으며 예수님 역시 다윗의 후손으로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실로가 오시기까지’는 바로
예수님께서 오시기까지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조건 없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약속의 땅으로 부르시고,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하셨는데 이를 통해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경륜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언약의 말씀 가운데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애굽 시대를 맞이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훗날 야곱과 그의 아들들이 애굽의 고센 땅으로 이주했던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단계적으로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은 야곱이 죽기 전 그의 축복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축복을 통해 장차
유다 지파로부터 메시아가 오실 것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야곱의 유언은 축복이자 예언으로써 결코 무의식중에 했던 말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의 유언은 야곱의 아들들의 삶을 반영한 미래에 있을 축복이었습니다.
28절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야곱이 아들들에게 축복을 하되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습니다. 이는 이 땅에서 누리는 인간의 복은 나 자신이 어떻게 사느냐에
달렸음을 보여줍니다. 의롭게 살아가는 자는 의의 결실을 보게 되고 악을 행하는 자는 악행에 따른 결과를 보게 됩니다. 이 땅에서도
이렇듯이 죽은 후에도 우리는 각자의 행위에 따른 결과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셈하시는 하나님, 상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야곱의 유언에는 축복만 있지 않습니다.
야곱의 첫째 아들부터 셋째 아들에게 했던 야곱의 예언의 내용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르우벤은 야곱의 맏아들입니다. 아무리 그가 능력이 있고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고 하더라도 패륜범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3절). 4절에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란 아버지 야곱의 아내 라헬이 죽자, 라헬의 여종으로서 야곱의 첩이었던
빌하와 동침한 것을 가리킵니다. 창세기 35장 22절 이후를 보면, 르우벤의 패륜범죄를 야곱이 들었지만 성경에는 야곱의 어떤
반응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야곱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어서 할 말을 잃었을 것입니다. 만약에 율법이 제정된 이후였다면
르우벤은 반드시 돌에 맞아 죽어야 했습니다(레 18:18, 29; 레 20:11; 신 21:18-21). 야곱은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르우벤에게 탁월하지 못할 것이라며 축복을 하지 않았습니다.
르우벤처럼 야곱 생전에 야곱을 매우 힘들게 했던 둘째 아들 시므온과 셋째 아들 레위에게도 야곱은 축복을 하지 않았습니다. 7절을
보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2번이나 말하고 있습니다.
시므온과 레위가 아버지를 괴롭게 했던 사건은 창세기 34장 그들의 누이
디나가 강간당한 일에 대한 세겜 성읍 사람들에게 잔인한 피의 보복입니다. 이것은 그 이전 야곱의 형 에서로부터 받았던 위협이나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겪었던 고생과는 비교할 수 없는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속한 가족과 모든 사람들의
생명이 위험에 처하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시므온와 레위가 주축이 되어 벌어진 피의 사건이었기에 야곱은 유언에서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6절)라고 했으며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 것과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 것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어질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야곱의 이 예언대로 시므온은 민수기 26장 14절을 보면 지파 인구조사에서
가장 적은 22,200명으로 집계 되었는데 이는 12지파 합계 약 60만 명에 각 지파 평균의 절반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리고 시므온 지파는 가나안 정복이후 땅을 기업으로 받을 때 몇 성읍밖에 할당받지 못했으며 훗날에 그마저도 유다지파에 병합되고
말았습니다. 레위 지파는 가나안 정복이후 아예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했으며 여러 지파의 땅에서 흩어져 살았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
각자가 현재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미래가 결정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야곱의 첫째부터 셋째 아들까지 아버지
야곱에게 큰 누를 끼쳤기에 자연스럽게 넷째 아들 유다가 장자의 권리를 계승한 것입니다.
13절 스불론부터 21절 납달리까지 야곱의 축복의 특징은 아들들의 출생 순서가 아니며, 레아로부터 태어난 아들들 2명, 레아와
라헬의 여종으로서 각각 야곱의 첩이 된 실바와 빌하로부터 태어난 아들들로 축복이 이어집니다. 나귀, 뱀, 암사슴처럼 동물들을
비유한 야곱의 축복이 있으며 섬김, 통치(심판), 우위(추격), 명예(왕의 수라사 담당) 등의 축복이 있습니다. 이는 야곱이
말대로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한 것입니다.
22절부터 27절까지는 야곱이 라헬로부터 얻었던 아들 두 명에 대한 축복입니다. 막내 베냐민에게는 다른 아들들처럼 분량대로 짧게
축복한 반면에 요셉에게는 유다처럼 다섯 절의 분량으로 많은 축복을 해 주고 있습니다. 22절에는 무성한 가지라는 표현으로 번성의
축복을 하고 있습니다. 단지 무성한 가지가 아니라 샘 곁에 있는 무성한 가지로써 비가 오지 않더라도 안정적으로 수분을 공급받아
담을 넘어갈 정도로 번성할 것이라는 축복입니다. 요셉은 형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많은 역경을 겪었지만 어느 순간에라도 하나님의 뜻에
벗어난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을 뿐더러 형들조차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들이고 이스라엘의 미래를 위해 하나님께서 미리 자신을 애굽의 총리로 삼으셨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요셉은 현실의 어려움만을 보지
않았고 현실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의 짧지 않은 손을 보았습니다. 이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던 아버지 야곱이 요셉에게 전능자의 손을
입음이라고 축복합니다. 24절에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고 되어 있는데 히브리어 원문에는 ‘손’
명사가 전능자 옆에 배열이 되어 전능자의 수식을 받고 있습니다. 전능자의 손은 곧 하나님의 손이며 그 손은 짧지 않은 손임을
요셉이 몸소 체험하였던 것입니다. 야곱은 25절에서 요셉 지파는 하나님의 손의 도우심을 받을 것이라고 축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이 짧지 않음을 신뢰하는 자에게는 한없는 복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5절입니다.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로다
복이라는 단어를 5번이나 사용하면서 하나님의 복이 있을 것이라고 야곱은 예언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야곱이 아들들에게 했던
축복처럼 누구로부터 축복을 받든지 우리 각자 분량대로 축복을 받지 않겠습니까? 우리 각자의 분량대로 하나님으로부터 미래에 복을
받는다면 현재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주님이 보여주신 것처럼 현재에 소외된 이웃과 고통 속에서 열병을 앓고 있는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아끼고 살피면, 미래에 주님께서 시몬의 집을 방문하여 그의 가정에 어려움을 해결해 주신 것처럼 나의 가정에
방문하셔서 내가 어려울 때 그 문제를 기적처럼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셈하시는 하나님, 상주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현재에 제쳐둘 것들을 제쳐두는 절제의 삶,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의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럴
때 야곱이 육체적 죽음을 앞두고 했던 마지막 고백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라"(29절)처럼 이 땅에서 평안하게 육체적 죽음을
맞지 않겠습니까?
야곱의 열두 아들 축복
49장은 야곱이 임종하기 전에 자신의 열두 아들을 향해 축복하면서 예언하는 내용입니다. ‘후일에 당할 일’이라고 언급한 것을 볼 때, 이스라엘 역사를 궁극적인 시각에서, 먼 장래를 내다보면서 예언한 것임을 암시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가계에 흐르는 저주와 같이 운명론적으로 조상의 어떤 행위가 후손에게 저주로 흘러간다는 말은 아닙니다. 야곱은 여기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서 미래의 가나안 정복과 정착을 내다볼 뿐 아니라, 더 영광스러운 미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열두 아들은 순서대로 언급되는 것은 아니고, 레아의 여섯 아들이 먼저 나오고, 라헬의 하녀(빌하)의 아들(단), 레아의 하녀(실바)의 두 아들(갓, 아셀), 라헬의 하녀가 낳은 다른 아들 납달리, 마지막으로 라헬의 두 아들 요셉과 베냐민이 나옵니다. 여기서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그리고 요셉에 대한 예언은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나머지는 매우 단순합니다.
르우벤은 장자로서 다른 형제들보다 두 배의 상속(장자의 몫)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는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힘으로써 장자의 권리를 박탈당했습니다(창 35:22).
시므온과 레위는 세겜에서의 잔인한 복수극으로 인하여 마찬가지로 장자의 권리를 넘겨주게 됩니다(창 34).
지도자의 자리는 유다가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본래 그의 이름은 레아가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뜻으로 지었지만, 야곱은 여기서 그의 이름이 형제들로부터 칭찬을 받을 것이라는 의미로 확장하고 있습니다(8). 그리고 유다의 모습은 강한 사자와 같은 모습입니다(9). 홀은 왕의 통치권을 상징하고 유다에게서 왕들이 나올 것이며 그것은 실로(메시아를 가리킬 것이다)가 오시기까지 그럴 것입니다. 야곱은 여기서 종말론적인 미래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장차 메시아의 시대는 풍성하고 포도주가 넘치는 여유로움이 있을 것입니다(11~12).
스불론은 해상 무역을 통해서 부자가 될 것이라고 야곱은 예언합니다. 잇사갈은 풍요로움과 사치를 좋아해서 자신의 자유를 삶에 필요한 물질적인 것과 기꺼이 바꿀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래서 이 부족은 전쟁 포로 같이 강제 노역에 붙여지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은 잇사갈이 자기의 능력을 자기를 위해서 쓰지 않고 가나안 족속을 위해 일하고 음식과 안식을 얻을 것이라는 내용을 포함합니다.
단은 비록 제일 작은 지파가 되겠지만, 이스라엘 전체를 위해서 정의를 베풀 줄 아는 지파가 될 것입니다. 단 지파에 대한 예언에 속할 수도 있지만, 야곱이 자손 지파들에 대한 예언을 하다가 하나님께 감동되어서 나온 구원에 대한 외침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단 지파에 대한 예언이라면 그들이 거두게 될 큰 승리를 의미할 것입니다. 갓은 약탈자들로부터 습격을 받지만 용감하게 싸워 물리칠 것입니다. 국경을 둘러싼 전쟁이 갓의 운명이 될 것이라는 암시가 깔려 있습니다.
아셀은 비옥하고 많은 것을 생산하여 왕에게 기쁨이 되는 진상품을 바치게 될 것입니다. 납달리는 자유로운 산악 백성이 될 텐데, 승리의 소식을 전하는 사자가 되리라는 암시가 있습니다. ‘놓인 암사슴’은 특별히 전쟁터에서 신속함과 민첩함을 의미합니다(21). ‘아름다운 소리’를 발한다는 것은 좋은 소식 곧 복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셉보다 베냐민을 먼저 다룬다면, 베냐민은 큰 성공을 거두어 자기 재산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유다가 사자 새끼에 비유되었다면, 베냐민은 이리(늑대)에 비유되는데(27), 이것은 사자만큼이나 탐욕스러운 동물이지만, 보통 자기가 먹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동물을 죽입니다. 베냐민은 이렇게 풍족하게 땅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요셉에 대한 야곱의 축복은 독특하고 깁니다. 요셉은 샘(우물) 곁에 심긴 포도나무에 비유되는데 그 가지가 번성해서 담을 넘어갈 만큼 되었습니다. 그의 번성은 대적들로부터의 공격의 빌미가 될 것이지만(23), 요셉은 전능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목자요, 반석이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능력으로 견딜 것입니다(24).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온다’라는 표현은 오히려 ‘이스라엘의 반석이고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힘이 나온다는 의미로 읽힐 수 있습니다.
축복이라는 단어가 5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요셉에게 주어진 축복은 너무나 커서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땅보다 더 좋을 것입니다. 요셉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모든 미움과 적대를 이겨냈듯이 그의 후손들도 그럴 것입니다. 사실상 야곱은 앞에서 요셉의 두 아들을 자기 아들로 입적함으로써 요셉에게 두 몫을 주게 되는데 이것은 비록 유다가 지도자의 명분을 얻었으나 요셉이 실질적으로 르우벤이 빼앗긴 장자의 상속을 받았음을 뜻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야곱(이스라엘)을 통해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조상을 준비시키셨습니다. 이 열두 지파로 구성된 이스라엘 자손은 결국 아브라함의 언약을 추진해야 할 사명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이 복을 땅의 모든 족속에게로 흘려보내는 일입니다. 예언을 마친 야곱은 이제 다시 자기의 자식들에게 자신을 아브라함과 사라, 그리고 이삭과 리브가, 또 자신의 아내인 레아가 묻힌 약속의 땅, 막벨라 굴에 장사하라고 명하고 임종을 맞습니다.
야곱의 믿음을 보여줍니다. 아들들과 그 후손들을 향한 예언을 하면서 하나님의 하실 일과 언약을 성취하실 신실함에 대한 그의 믿음을 드러냅니다. 바로 이런 믿음의 완숙함에 이르게 되어 마지막을 맞게 되는 성도는 참으로 복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 우리에게도 이렇게 아름다운 임종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죽음에 당당히 맞서는 바람직한 임종
근대 호스피스의 창시자인 시슬리 사운더스는“사람은 혼자서 살 수가 없으며 가족의 죽어가는 모습은 기억 속에 남아 있게 된다. 임종환자 관리 전문가들은 내 어머니의 임종 관리는 잘못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는 무지에서 그랬다고 하더라도 45년이 지난 지금에도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대부분의 환자가 임종을 맞이하는 모습은 변한 것이 없다.
의학적인 기구의 사용이나 처치로 흔히 통증과 불편 속에서 생명이 연장되고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 작별 인사말을 나눌 기회조차 박탈하고 있다”고 말했다.
스물두살 된 데이브 풀커슨에게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여자친구와 같이 조깅을 하는 도중에 승용차에 사고를 당했다. 중환자실에서 가족들은 그를 세 시간 동안이나 만날 수가 없었다. 가족을 만날 때까지 그는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더구나 면회가 2시간마다 한사람씩 단 5분간만 허락되었다.
결국 실망한 여자친구는 집으로 가고 대기실에서 잠이 들었던 부모들은 나중에 간호사가 깨워서 사망하였다는 말만 들었을 뿐이었다. 2002년 5월 이런 문제에 대하여 전문가 및 작가가 미국 간호학회지에 임종관리에 대한 글을 발표하였다. 그들은 건강관리팀과 병원직원, 풀커슨의 가족 들 사이에 의사교류가 없어서 가족의 사망에 따른 고통이 더 컸음을 아쉽게 생각하였다. 의사소통이 불충분하면 어 떤 환자는 숨을 거둘 때까지 과잉진료를 받거나 불충분한 치료로 통증에 시달리며 사망한다고 하고, 어떤 경우는 의 사나 간호사의 상반되는 지시로 인하여 혼란에 빠져 임종 을 준비하지도 못한다고 기술하였다. 산소마스크보다 아편유사제가 더 효과적 심장마비로 인한 사망이 줄고 수명이 증가하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연장되고 있다. 이러한 추세에 편승하여 임종 마지막 주, 마지막 날, 마지 막 시간의 생명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또 어떻게 하면 편 안하고 평화롭고 아름다운 임종을 맞게 할 수 있는지 이해 하려는 욕구가 증가하게 되었다. 미국의 노인병학회에서는 1996년에 30개 이상의 건강관리 단체로부터의 보고를 기 초로 하여 임종관리에 있어서 아홉 가지 원칙을 만들었는 데 이는 1) 신체 및 정신적 징후의 완화 2) 환자의 존엄성 유 지 3) 환자가 원하는 처치 4) 부적절한 과잉진료 피하기 5) 환자와 가족이 함께하는 시간 제공 6) 환자에게 가장 질 높 은 삶의 제공 7) 가족의 재정부담 경감 8) 환자에게 보험 급 여 범위 알리기 9) 사별가족 보살피기 등이다. 지난 7월에 발간된 간호에 관한 다른 글을 보면 클리블랜 드에서 호스피스 책임자로 일하는 엘리자베스 포드 피토락 은 사망이 임박해서 일어나는 변화와 치료에서 증세의 완 화를 목표로 하는 시기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사망, 즉 모든 주요 장기의 기능부전은 10~14일에 걸쳐서 오며 빠르 면 24시간 이내에도 발생할 수 있다고 피토락 여사는 쓰고 있다.“보통 죽어가는 환자는 탈수상태가 되며 음식물을 삼 키기가 어렵고, 말초순환이 감소하며, 피부에 땀이 나서 차 고 끈적끈적하게 되며 만지면 차게 느껴진다. 그러나 차다 고 담요를 덮어주라는 것이 아니다. 왜냐 하면 대부분의 임종환자는 팔다리의 어느 부위에 아주 작은 무게라도 더해지는 것을 견딜 수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라고 그녀는 기술하고 있다.
폐에 물이 차게 되면 환자는 즉시 숨을 헐떡이게 된다. 그러나 산소를 투여한다고 산소부족을 해결해 줄 수는 없는 것이라고 피토락 여사는 말한다. 오히려 창문을 열고 부채나 선풍기로 환기를 시키고, 침대 주위의 공간을 확보하여 주며 아편유사제를 투여하여 환자의 숨찬 느낌이나 불안을 제거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삼키는 것이 어려워서 먹거나 마시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튜브영양법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그러나 죽어가는 환자는 보통 배고픈 줄을 모른다. 그리고 수액이나 영양 공급의 중단은 혈중에 키톤체가 쌓여서 무통성 다행감(analgesic euphoria)을 느끼게 된다. 이 때 소량이라도 포도당을 정주하면 이런 다행감을 길항한다고 하였다. 더구나 죽어가는 환자에게 경구로 음식물을 투여하는 것은 구토나 흡인 등을 유발하여 더욱 힘든 임종을 맞게 된다. 피토락 여사는 탈수로 섬망에 빠진 환자는 수액 정주가 도움이 될 수도 있으나 죽어가는 환자에게는 부종, 오심, 통증 등을 유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편유사제 투여시 신부전으로 배출이 안 되어 혼돈, 근경축, 경련 등이 발생하면 수액을 투여하거나 약물투여를 중단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임종전 6시간, 8%만 의식 유지
누군가가 임종이 가까워지면 여명이 삼 개월 정도가 남았더라도 내향적으로 되고 대화가 줄게 된다. 이런 경우 사랑하는 사람을 거부하는 것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죽어가는 사람이 외부의 세계를 떠나서 내부 명상에 집중하게 된다. 그러므로 전문가들은 환자가족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일부러 기다렸다가 대화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100명의 암으로 인한 임종환자를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56명은 사망 일주일 전에 의식이 있었고, 44명은 졸린상태였으며 혼수상태는 없었다. 최후의 6시간 동안에는 8%만이 의식이 있었고, 42%는 졸린 상태였고, 나머지 50%는 혼수상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다. 사망시간이 가까워지면서 입주위의 근육은 이완되고, 분비물이 고여서 목이나 가슴에서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죽음의 그르렁거림’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때에도 흡인을 시도하는 것은 성공하기도 어렵고 불편만 가중시킬 뿐이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는 환자를 모로 눕히거나 머리쪽의 침대를 높게 해주거나 필요시에는 분비물을 줄여주는 약물을 투여할 수 있다. 죽어가는 환자는 신음하듯이 숨을 쉴 수도 있으나 이것이 통증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언제나 적절한 진통이 이루어져야 하며 그래야 의사소통을 효과적으로 하고, 평화롭게 임종할 수가 있다. 그리고 진통제가 사망시간을 앞당긴다는 증거는 없다고 하였다. 환자들이 자신이 죽을 것인가를 물으면 성실하게 답변하고, 살아남은 가족들은 별일 없을 것이라고 안심시키는 일이 단순히 “이제는 죽어도 된다”고 하는 것보다 도움이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환자가 소리나 빛에 더 이상 반응할 수 없을 지라도 듣는 감각은 마지막까지 남아 있어서 임종하는 환자가 듣기를 원하지 않는 말은 환자 가까이에서 하여서는 안 된다. 환자가족들은 흔히 죽음이 임박한 환자에게 어떠한 조치도 이를 되돌릴 수 없을 때 의사가 환자를 방치하였다고 불평을 자주 하는데, 환자 가족들은 의사들도 환자를 더 이상 치유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상실감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2~3년전 미국 내과 학회지에는 완화의료(palliative medicine)의 대가인 뉴욕 마운트 사이나이 메디컬 센터의 마이어와 모리슨 박사 그리고 워싱턴 의대 벡 박사는 자신이 치료하는 환자가 좋아지지 않을 때 의사는 죄책감, 불안감, 좌절감, 부적절감 등을 느낀다고 하였다. 그래서 의사들은 이러한 감정을 표시하기보다는 환자로부터 철수하게 된다고 하였다. 어떤 의사들은 살 수 있는 환자를 위해서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낫다고 합리화하기도 한다고 마이어 박사는 말한다. 피토락 여사는“환자가 사망하게 되면 남은 가족을 포기하지 말고, 방을 떠날 때는 반드시 가족을 위로하는 말을 잊지 말며, 환자 가족들이 원하는 만큼 시간을 준 후에 다른 곳으로 운구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아름다운 마무리, 웰다잉(Well-Dying)을 위해
죽음을 준비하며
삶과 죽음에 대한 물음은 인간으로 살아가는 한 가장 중요한 문제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죽음을 애써
외면하거나 부정하고 때론 혐오하는 태도마저 보이곤 합니다. 그 때문에 죽음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고 '현실'로서의 '죽음'을
끝까지 미루다 갑자기 자신이나,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직면하게 됩니다. 특히 현대사회에서는 핵가족 단위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어
당황과 고통에 휩싸여 허둥대다가 자신의 삶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채 황망하게 생을 마치게 되는 것이 지금 우리의 실정입니다. 따라서
임종자는 존엄하게 생을 마치고, 가족이나 의료진은 그 임종자가 편안하게 마지막 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안내하고 돕는 것이
중요합니다. 죽음 또한 우리의 삶의 한 과정이며, 죽음이 있기에 유한한 우리 삶은 더욱 소중하고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은 태어나
평생 성장합니다. 죽음은 그 마지막 성장의 기회입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 섰을 때 비로소 평상시 외면했던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나는 누구인가? 인생의 의미란 무엇인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인가,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이 있는가? 신은 정말 있는가? 있다면 어떤 분인가? 등의 질문을 쏟아냅니다. 죽음을 앞두고 이런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는 일은 매우 바람직한 태도이기에 죽음을 마지막 성장의 기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남은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자신의 삶과 죽음을 깊게 성찰할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마음가짐
•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진정한 삶이 무엇인가 조용히 떠올려봅니다.
• 자신이 떠난 다음 남은 가족에게 누가 안 되도록 주변을 잘 정리합니다.
•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마무리가 안 된 인간관계가 있다면 그 사람과 화해합니다. 당사자를 만날 수 없다면 자신의 마음속에서라도 그 사람과 맺힌 마음을 풀고 털어냅니다.
• 종교가 있다면 신앙생활에 더 충실하게 임합니다.
• 유언장을 작성하고, 원하는 장례방법을 가족들과 상의합니다.
• 죽음 이후의 삶이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사후의 삶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준비합니다.
• 아직 남은 능력으로 이웃에게 베풀 수 있는 일이 있는지 생각해보고 실천에 옮겨봅니다.
• 무의미한 연명치료에 집착하지 않으며 사전의료의향서를 작성해둡니다.
임종 48시간 전에 나타나는 증상
• 숨을 가쁘고 깊게 몰아쉬며, 숨을 불규칙하게 쉽니다.
• 가래가 끓다가 점차적으로 깊게 천천히 쉽니다.
• 체온이 점차 떨어지며 손발이 차가와 지고, 식은땀을 흘리며, 점차 피부색이 퍼렇게 변합니다.
• 맥박이 약해지고 혈압이 떨어집니다.
• 대소변을 의식하지 못하고 항문이 열려 대소변을 봅니다.
• 의식이 점차 흐려져 혼수상태에 빠집니다.
• 눈으로 보일 정도로 나날이 쇠약해져 갑니다.
• 음식에 대해 관심을 잃고 묽은 음식조차 삼키기 어려워집니다.
임종 시 돌봄
1. 임종이 다가오는 증상을 알아두고 임종 때 가족에게 알리고 함께 합니다.
• 미리 누구에게 누가 연락할지를 명단과 전화번호를 준비해 둡니다.
• 청각은 가장 마지막까지 지속되는 감각임으로 경박한 말은 삼가도록 합니다.
•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도록 하며, 하고 싶은 말을 환자에게 합니다.(감사의 말, 용서를 비는 말, 환자의 대신하여 더 열심히 잘 살겠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 마지막 인사의 말 등)
2. 환자가 가능한 말씀을 하실 수 있도록 돕습니다.
• 임종 전에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 적개심이 있는 사람과는 용서하고 화해하도록 합니다.
• 사후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 대해 표현하도록 합니다.
• 유언을 안 했다면 의식이 저하되기 전에 유언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3. 환자를 계속적으로 돌봅니다.
• 의사와 함께 현재 투여중인 약물을 변경해야 할지 상의합니다.
• 이 시기에는 의료진과 상의하여 기본적인 약만 사용하고 나머지는 모두 중단합니다.
• 환자를 깨끗하게 합니다.
•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체위를 2시간에 한번 씩 변경해 드리고, 등맛사지를 해줍니다.
• 드실 수 있으면 식사를 제공하지만 사래가 들리면, 호흡곤란이나 폐렴에 걸릴 수 있으니 무리해서 드리지 않습니다. 사래가 들리면 물보다는 걸쭉한 죽이나, 순두부, 젤리가 좋습니다.
• 환자에게 편안하고 위엄 있게 있을 수 있도록 환자 주변과 집안을 청결하게 정돈합니다.
4. 환자의 종교에 맞게 영적인 돌봄을 제공합니다.
• 종교적 상징물이나 성물(십자가, 염주 등)을 환자가 보거나 손에 지니게 합니다.
• 환자가 원하는 성가나 불경 테이프(연도테이프), 명상 음악 등을 조용하게 틀어놓습니다. 단, 1시간이상 틀어놓지 말고, 중간 중간 휴식시간을 둡니다.
• 환자가 원하는 기도나 종교예식을 실시합니다.
5. 임종 후에 가족의 할 일과 준비물에 대해서 미리 준비합니다.
• 임종한 후에는 환자가 특별한 감염성 질환이 없다면 임종 후 가족들이 시신 옆에 머무르면서 충분하게 작별의 시간을 갖는 것이 좋습니다.
• 물수건으로 고인의 몸을 닦아주고 배설물이 나오면 처리해서 가능한 한 청결하게 유지합니다.
• 환자복을 벗기고 준비한 옷(평소에 환자가 좋아하던 옷)으로 갈아입힙니다.
• 머리를 빗기고 턱받이를 해줍니다.
• 고인의 자세가 뒤틀리지 않게 바르게 해줍니다.
• 마지막 인사 혹은 추억을 갖는 시간을 갖거나 종교 의례를 행합니다.
• 정해놓은 장례식장에 전화해서 시신을 장례식장으로 운구하게 합니다.
사별 후에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아직 이 세상을 살아가야하는 가족이나 이웃들에게 중요한 변화를 가져옵니다. 즉 고인이 사망한
후 남은 이들은 크나큰 상실의 슬픔, 슬픔으로 인해 건강이 나빠질 뿐 아니라 고인을 대신해서 해야 할 역할변화에 당황스러워하며
힘겨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별의 고통은 사회적 지지와 자신의 노력으로 부정적인 면에 그치지
않고 보다 성숙된 인간으로 성장하게 하는 역할을 하게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중요한 시기에 자칫 치명적인 건강악화로 빠질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예방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 슬픔은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은 인생을 살아가는 누구나 겪는 정상적인 것입니다. 슬픔은 건강하지 못함도 질병도 아닙니다. 약하다거나 무능하다는 표시는 더더구나 아닙니다. 따라서 슬퍼할 만큼 슬퍼하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 슬픔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슬퍼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아주 좋은 어떤 것을 가졌었다는 표시입니다. 사람은 소중한 것을 잃고 나서야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했는지를 깨닫습니다. 이러한 고통을 통해 무언가를 잃기도 하지만 얻기도 합니다. 슬픔은 고통스럽지만 또 다른 삶의 세계로 적응하도록 하는 목적을 가집니다.
• 슬픔이 언제 끝날지, 어떻게 슬퍼할지는 사람의 얼굴만큼 다릅니다. 그때까지 자신에게 온유하게 대해주고 스스로를 잘 보살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 슬픔은 전 존재가 치유 받아야 할 상처입니다.
삶이 산산조각 났다고 느낄 때, 전존재가 치유 받아야 합니다. 몸이 아프고, 우울하며, 사람들을 만나기 싫고, 두렵거나 불안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정상적인 생활을 못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 슬픔은 진정한 공감, 울음, 장례 등의 애도 행사 등으로 표현될 때 치유 받습니다.
고인의 가치를 충분하게 인지하고, 소중하게 간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의 아픔을 아무런 판단 없이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그런 친구나 사별전문가, 상담자를 적극적으로 찾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적당한 사람이 없으면 일기쓰기나 글쓰기를 통해서 아픔을 토해내셔야 상처가 치유됩니다.
아름다운 임종
최근 웰다잉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사회적으로는 아직 편안하고 아름다운 임종 분위기 형성이 미흡하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서울의대가 월드리서치센터인에 의뢰해 일반인 1241명, 환자 1001명, 환자가족 1008명, 의료진 928명을 대상으로
'호스피스·완화의료'에 대해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아름다운 임종을 맞이하고 있다고 답한 평균 점수는 58.3점으로 나타났다.
해당 조사는 한국의 임종 현황에 대한 인식부터 호스피스·완화의료에 대한 국가 정책에 대한 동의 여부, 지원활동 참여의향에 대한 부분 등 다양한 주제를 포함했다.
'누구나 행복하고 의미있게 살다가 편안하고 아름답게 임종하는 사회'를 100점, '모두가 불행하고 무의미하게 살다가 괴롭고
비참하게 임종하는 사회'를 0점이라고 가정해 점수를 산출한 결과 58.3점의 평균이 도출됐으며, 일반인은 65점, 환자
59.9점, 환자가족 58.1점, 의사 47.7점의 평균이 나왔다.
일반인과 환자는 평균 점수보다 높았지만 환자가족과 의사는 평균보다 낮은 점수가 도출됐다.
이와 함께 아름다운 삶의 마무리를 위해 중요한 요인으로 일반인(22.4%)과 환자(22.7%)는 '다른 사람에게 부담주지 않음'을
1위로 꼽았지만, 환자가족(25.9%)과 의사(31.9%)는 '가족이나 의미 있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1위로 답했다.
현명한 장례를 위한 고려 사항들
죽음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느닷없이 당한다. 가족이 오래 병을 앓아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한다 해도 죽음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잠든 새, 간병 중, 짧은 순간에 닥친다.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가는 그 아득한 단절감 앞에 우리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가족이 떠난 후 우리는 장례식이라는 열차에 올라탄다. 별일 없다면 대개 3일 동안 정신없이 달려야 한다. 그동안 정신을
차려야 고인과 제대로 이별하고 충분히 애도할 수 있다.
그 방법을 알아보자.
【임종 전】
사전상담을 받아놓는 것이 좋다. 가족이 장례 전 과정을 소상히 알고 직접 실행할 것이 아니라면 전문 장례지도사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생전에 상조회사를 정해놓는 것이 바람직하다. 가격이 너무 비싸지 않고, 그동안의 이력을 볼 때 바가지를
씌우지 않는 곳을 선택한다. 사전상담을 통해 매장이나 화장 여부, 봉안당이나 장지, 전국 장례식장 현황과 사용료, 조문객
식음료대, 제단 꽃장식, 제사 음식 등을 알아보고 정해야 한다.
【1일 차】 의료기관에서 임종할 경우 병원 원무과에서 사망진단서를 7부 정도 발급받는다. 자택에서 임종할 경우에는 지체 없이 관할 경찰서에 신고하고 검사지휘서를 수령해야 한다. 장례업체 콜센터에 연락해 안내받을 수도 있다.
조치를
취한 후 장례지도사와의 상담을 통해 장례식장을 정하고 운구 차량으로 고인을 이송한다. 화장, 매장 등 장법에 따라 장지를
결정하는데, 화장 시 화장 예약을, 매장 시 장지 예약을 한다. 그 후 장례 일정(입관 및 발인 시간 등)을 정하고 견적을
확인한다. 또 빈소에 차릴 영정사진, 제단, 제사상 등을 결정하고 가족, 친지, 지인에게 부고 문자를 발송한다.
【2일 차】
장례지도사 및 장례관리사(도우미)와 협의해 음식을 정한 후 조문객을 맞이한다. 입관식은 고인의 몸을 깨끗이 씻겨드리고 수의를
입힌 후 관에 모시는 절차다. 입관실에서 진행되며 보통 1시간 정도 걸린다. 고인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입관식이 끝나면 제사를 지낸다. 종교의식을 진행할 수도 있다. 차량, 운구 인원, 발인제 지낼 장소 등 장지로 이동하기
전에 필요한 사항을 점검한다.
【3일 차】
발인 전 장례식장 비용을 정산한다. 미사용 물품은 반납하고 상조회사 비용도 정산한다. 개인 물품을 챙기고 빈소를 정돈하며 개인
짐을 정리한다. 발인은 장례식장에서 장지로 떠나는 과정이다. 발인 전 제사상을 차려 추모의식을 갖는다. 종교마다 발인식과 함께
종교 예식을 진행하거나, 영결식장으로 이동해 별도로 진행하기도 한다. 발인식을 마치면 관을 운구하여 장의차량에 모신다. 유족의
규모에 따라 버스와 리무진을 다 쓰거나 버스 혹은 리무진만 쓸 수도 있다. 장지에 따라 화장장 또는 묘소로 이동한다.
화장하는
경우 예약 시간 30분 전까지 화장장에 도착해 접수 절차를 마쳐야 한다. 사망진단서(시체검안서), 검사지휘서, 고인의
주민등록등본을 각 1부씩 준비한다. 화장이 시작되면 유족대기실에서 대기한다. 소요 시간은 1시간 30분 정도인데, 이때 종교별
추모의식을 지내기도 한다. 화장이 끝나면 유골을 한지로 감싸 준비한 유골함에 모신다. 그 후 유골 안치를 위해 이동한다. 안치
방법은 봉안당, 봉안담, 봉안묘, 수목장, 해양장 등이 있다.
매장하는 경우 관을 장지로 운구한다. 공원묘지 등을
이용할 경우 서류 접수 후 직원의 안내를 받는다. 정해진 묘역으로 이동해 미리 파놓은 묘지 광중(구덩이)에 관을 모신다. 광중과 관
사이를 흙으로 채워 평지와 같은 높이가 되도록 한다. 그 후 흙을 쌓아 봉분을 만든다. 평토제, 성분제 같은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봉분 조성 후 종교별로 추모의식을 진행한다. 매장의 경우 봉분묘, 평장묘, 문중묘, 공원묘원 등에 고인을 모신다.
【장례 후】
자택에서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초우제, 재우제, 삼우제를 치른다. 사망일로부터 30일 이내에 사망자의 주소지와 관할
읍면동 행정복지센터에 신고한다. 개인묘를 설치할 경우 30일 이내에 사후 신고해야 한다. 가족묘, 문중묘, 법인묘는 설치 전
사전허가를 받아야 한다.
사망자의 상속 재산은 ‘안심상속 원스톱서비스’를 신청하면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방문록이나
SNS 등을 확인한 후 조문이나 위로를 전한 분들에게 답례 문자를 발송하고, 고인의 유품을 정리한다. 경우에 따라 전문 청소업체를
쓰기도 한다.
장례와 행정 절차를 마쳤다고 해서 고인에 대한 기억이나 흔적조차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고인은 마음속에 있다. 사랑의 기억은 남기고 나쁜 기억은 털어버린다. 슬픔을 살아갈 힘으로 만드는 것은 오직 남은 이의 몫이다.
아름다운 임종(원제:Romantic Death)
제1부
죽음, 제2부 달(月), 제3부 장(葬)으로 나누어진 본서는 단순히 장례란 영업차원이 아닌 죽음후의 세계를 향한 꿈과 소망을
담아 성실하게 설파해 나간 본 책자는 아름다운 임종에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할 당위성을 그만이 가진 특유의 철학과 사색을 통해
비단실처럼 엮어 냈다.
“나는 죽음에 관해서는 미화론자이다. 인간의 마지막은 아름답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누구나 살아가는 존재이면서 점점 죽어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스로 불행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면 불행한 인생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죽음이 불행한 사건이라면 우리가 살아가는 것도 불행한 것이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더욱 행복하게 살아가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별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러나 그 슬픔은 실은 죽음 그 자체의 슬픔이 아니고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슬픔인 것이다. 죽음 그 자체의 슬픔과 이별의 슬픔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앞으로의 장례식은 이별의 슬픔과 함께 아름다운 죽음,
행복한 죽음의 이미지도 연출될 것이다.”
“나는 죽음을 미화하고 싶다. 그러기 위한 수단인 장례를 어떻게 디자인할 것인가에
대해 계속 연구해 왔다.“
”죽음을 미화한다고 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미화한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죽음이 있을때
비로소 아름다운 삶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이란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인류의 영원한
친구 달을 떠올렸다. 고대인들이 달을 사후의 혼이 가는곳이라고 생각했다. 달은 혼이 재생되는 중계점이라고 생각해 온것이다. 이어서
달을 본거지로 하는 그의 거대한 구상이 펼쳐지는 것이다. 바로 "Moon Heartopia"의 탄생이다.
그리고 장례식장의 디자인 문제에 이르러 “도시속의 장례식장은 사람들에게 죽음의 이미지로 다가오기 쉬우므로 천상의 아름다움을
연상시키는 예술적인 디자인을 해야 할 것이다. 또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 보다는 장엄한 쪽이 바람직할 것이다.“라고 소신을 밝힌다.
그는 나아가 현장에서 일하는 장례지도사들이 고인의 죽음을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장례식을 어떻게 연출하여야 할 것인가를 설파하기도 한다.
어쨌든 본서는 장례업무에 정통하면서 인간의 죽음을 가치있고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저자의 꿈인 동시에 오늘날 장례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의미있는 장례식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여야할 당위성에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주요목차
죽는 순간에 무엇이 일어나는가
우주비행사들의 큰변화
자살자가 본 사후세계
탄생과 죽음을 초월한 무한의 인생
달을 노래한 시인들
달빛은 혼의 연금술사
사후의 혼이 찾아 가는 길
인류의 문화는 묘지에서 시작되었다
산 자가 죽은 자에게 할 수 있는 것
죽음의 이미지 트레이닝
하토피아의 프레젠테이션
장례식장의 디자인
__________________________ 창세기 48장 / 나도 안다(19절)
아비가 허락지 아니하여 가로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But his father
refused and said, "I know, my son, I know. He too will become a people,
and he too will become great. Nevertheless, his younger brother will be
greater than he, and his descendants will become a group of nations."
창세기 47장 마지막 부분에서 야곱은 자신이 죽게 되면 어떻게 장례를 치뤄야 할 지에 대해 요셉에게 당부합니다. 자신을 애급에
묻지 말고 고향 땅 이스라엘 땅에 묻도록 부탁하자 요셉은 그대로 순종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으로 47장이 막을 내렸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요셉은 야곱이 병환 중에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야곱의
임종이 가까와졌다는 사실을 안 요셉은 그가 애굽에서 낳은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리고 야곱을 찾아갑니다. 이때 야곱은 온 힘을 다하여 침상에서 일어나 앉습니다. 야곱의 다른 아들들을 모두 불러놓고 유언을 남기기 전에 야곱은 그가 가장 사랑했던 아들 요셉과
요셉의 아들 므낫세, 에브라임 앞에서 꼭 남겨야 할 말을 합니다(48:3-4).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야곱이
그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에게 남긴 말이 무엇입니까? 루스에서 만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루스라는
지명은 벧엘의 옛 지명입니다.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도망가다가 루스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꿈에 하나님을 만났고 그
꿈속에서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꿈에서 깬 야곱은 그 곳의 이름을 벧엘 곧 하나님의 집이라 불렀습니다.
루스에서 받은 하나님의 약속은 실제로 야곱의 삶 가운데 하나씩 성취되어졌습니다. 야곱은 벧엘에서 만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요셉과 그의 두 아들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받은 약속의 말씀의 내용이 이렇습니다.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이제 죽을 날이 얼마남지
않은 야곱이 그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인 요셉과 자신의 손자 므낫세 ,에브라임에게 무엇을 남겨줄 수 있겠습니까? 재물이라면 요셉이
야곱보다 더 많고, 가축이라면 온 가축이 요셉의 소유가 되었으며 온 땅과 사람들이 다 요셉의 땅이요, 요셉의 종이 되었는데 그에게
무엇을 남겨줄 수 있겠습니까? 야곱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요셉에게 유산으로 남겨줍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야곱이 요셉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유산으로 남겨준다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자식에게 남겨준다는 것은 마치 구약이나 신약의 말씀중에 자녀에게
큰 축복을 가져다주는 구절을 한 구절 선택해서 그 구절을 새로 산 성경책 앞에 쓰고 '사랑하는 아빠가' 라고 쓰는 것처럼 느끼실
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당시 요셉은 읽을 성경책이 없었습니다. 구약이 책으로 존재하기도 전에 야곱과 요셉은 살았습니다. 야곱의
손에는 들고 읽을 성경책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로지 입으로만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의 입을 통해 이삭에게 전해졌습니다. 아브라함으로 부터 전해받은 하나님의 말씀에 이삭이 직접 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더해져 하나님의 말씀은 야곱에게 전해졌습니다. 이제 야곱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이 벧엘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말씀을 더해 요셉에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셉과 그의 두 아들을 축복하는 야곱의 유언에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5,16절입니다.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입으로 이삭에게 전해졌습니다. 하나님이 또한 이삭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의 말씀을 야곱에게 입으로 전했습니다. 그 말씀을
전해들은 야곱은 그 자신이 벧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이삭에게 주신, 그리고
야곱에게 주신 말씀은 이제 요셉과 므낫세, 에브라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왜 성경이 계속해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자꾸 언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아브라함에게 직접 듣지 못했어도, 이삭의 생전에 그에게서 듣지 못했어도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우리 손에 주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말씀을 자녀들에게 들려주고 그들이 말씀안에서 자라나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자녀들이 아브라함, 이삭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은 알아도 그 말씀을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지
못하는 것은 벧엘에서 만난 하나님의 말씀을 구전으로 전해주는 아버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입으로 전해줄 벧엘에서
만난 하나님의 말씀의 경험이 있습니까? 성경의 약속의 말씀이 우리 자녀들에게 살아있는 하나님의 약속이 되려면 그것을 벧엘에서 친히
경험하고 입으로 직접 들려줄 아버지, 어머니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48장에서 야곱은 그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에게 자신이 전해받은 말씀,
스스로 받아 평생토록 간직해온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유언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4절에서 야곱이 하나님의
말씀을 언급했는데, 실제로 야곱에 벧엘에서 받은 하나님의 말씀은 여기에서 언급되지 않은 한가지 말씀이 더 있었습니다.
창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아마 야곱은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은
벧엘이 있는 가나안 땅인데 이제 나는 이곳 애굽에서 죽게 되는구나. 나를 이끌어 가나안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는 말씀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인가?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은 성취되지 않는
것인가?' 성취되지 않은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하며 야곱이 의도적으로 그 구절을 이곳에서 생략한 것이겠습니까? 혹시라도 야곱이
그렇게 생각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는 약속의 말씀은 야곱에게서 성취되지 않았을 지라도 그 약속은 이제 요셉과 그의 후손에게 유효한 약속임을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확실하게 각인시켜주고 있습니다. 야곱의 입을 빌려 하나님은 요셉에게 말씀하십니다. 21절입니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또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나는 죽으나
하나님의 약속대로 너희를 인도하여 나에게 약속하신 그 땅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실것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이 있습니까? 그것이 성취되지 않음에 실망하고 있습니까?
나와 나의 가족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될 것으로 도저히 여겨지지 않습니까? 우리가 오늘 그 가능성을 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소망이 도무지 보이지 않는 그곳에 서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히 성취될 것입니다. 요셉이 종살이 할 그 때에 그 누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이라 믿었겠습니까? 야곱과 그의 모든 가족이 기근으로 인해 이집트 땅으로 가게 된 때에 누가 가나안땅을
상상이나 하였겠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종살이로 신음에 지쳐있을 때 누가 야곱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이나
하였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약속과는 다르게 환경과 상황을 넘어서서 반드시
성취됩니다. 하나님은 식언하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은 지금 우리의 처한 환경이나 우리가
직면한 절망과 낙담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나는 죽으나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될 것입니다.' 주의 약속을 붙잡는
소망의 하루가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 창세기 47장 / 고센 땅(1절)
고센(Goshen) : 접근함
'고센((Gôshen. גֹּשֶׁן) '이란 '접근함'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데, 하나님께 가까이함 즉 접근함이란 신앙의 염원을 담고 있는 지명이라고 할 수 있다. 애굽이라는 세계
초강대국의 한 켠에, 양식 찾아 먹고 살기위해 온 이민자의 무리들을 하나님께서는 함께 하심으로 그들을 복되게 하셨다.
야곱의 70가족이 애굽으로 이주한 것과 고센 땅에 거하게 된 과정 속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사적 경륜이 담겨 있습니다. 애굽으로 이주한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의 ‘고센’ 땅에 거하게 됩니다. 요셉은 자기 가족들이 살 곳으로 살기 좋고 편리한 애굽의 유명 도시가 아닌 ‘고센’ 땅을 선택하였습니다.
요셉은 형들 가운데 다섯 명을 택하여 바로 왕을 만나도록 하였는데, 이 때 형제들은 바로 왕에게 “종들이 이곳에 우거하러 왔사오니 청컨대 종들로 고센 땅에 거하게 하소서”(창 47:4)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우거’는 한자로 붙어살 우(寓), 살 거(居)로 ‘남의 집에 임시로 사는 것’, 또는 ‘타향에서 임시로 사는 것’을 뜻합니다. 히브리어로는 ‘구르’인데, 마찬가지로 ‘임시로 잠시 머무는 것’이란 뜻입니다(창 12:10, 35:27). 즉 애굽은 그들이 영원히 거주할 장소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온 것은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창 15:13)라는 횃불 언약의 성취를 위해서 온 것이었지만, 언젠가는 횃불 언약에 따라 다시 애굽에서 나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왜 요셉은 이스라엘 백성이 임시 거주할 땅으로서 ‘고센’을 선택하였을까요?
1.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것
고센 땅은 애굽 본토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곳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우상 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순수한 신앙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고센으로 가지 않고 애굽의 편리한 도시로 갔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쉽사리 애굽 문화에 물들고 다신론적 우상 종교들로 인하여 신앙의 순수성에 큰 타격을 입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과 아비의 권속들에게 만약 바로가 “너희의 업이 무엇이냐” 묻거든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대답하라고 미리 말해두었습니다(창 46:33-34). 그 이유는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창 46:34下) 여기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가증히’는 히브리어로 ‘토에바(tôwʽêbâh. תּוֹעֵבַה)’로서 ‘구역질나다, 혐오하다, 몹시 싫어하다’는 뜻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목축에 대한 강한 경멸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목축업에 종사하고 있던 이스라엘은 상대하기 싫은 천박한 민족으로 알려져, 애굽 사람들은 그들과의 혼인을 아주 꺼리고, 고센 지역과 왕래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자연히 고센 땅에만 거하는 고립된 상태가 되어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신앙의 순수성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8441. 가증히(토에바. tôwʽêbâh) תּוֹעֵבַה
1. 질색. 2. 창세기 43:32. 3. 열왕기상14:24
발음
/ 토에바[ tôwʽêbâh ] 어원 / 858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가증히 여김(창46:34), 꺼리는 일(신12:31), 싫어하는 바[것], 미워함(출8:26, 잠6:16,
20:10), 싫어함(잠13:19), 부정(창43:32), 미움(잠24:9, 29:27), 미운 물건(렘16:18).[형]
가증한(레18:30, 겔6:11, 말2:11) 구약 성경 / 117회 사용
* 8581. תָּעַב
1. 피엘형 ׃תִּעֵב
2. 몹시 싫어하다
3. 몹시 싫어하게 되다
발음
/ 타아브[ tâʽab ] 관련 성경 / 마땅치 않게 여기다(대상21:6), 가증하다(신7:26, 욥15:16, 겔16:52), 싫어하다(욥9:31,시5:6, 암5:10), 미워하다(욥19:19, 신23:7, 미3:9), 미움을 받다(사49:7). 구약 성경 / 22회 사용
1657. 고센(Gôshen) גֹּשֶׁן
1. 히브리인들이 야곱 때부터 모세 때까지 거주하던 애굽의 땅 ‘고센’
2. 유다 지파의 영역과 이웃하고 있던 성 ‘고센’
발음
/ 고센[ Gôshen ] 어원 / 애굽어에서 유 관련 성경 / 고센(창45:10, 46:28,34, 47:27, 50:8, 출9:26, 수10:41, 11:16, 15:51). 구약 성경 / 15회 사용
세상 속 아름답고 복된 ‘고센’ - 이민의 땅, 믿음의 관점, 섭리적 은혜 -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과 늘 함께 하신다. 애굽에서는 요셉과 함께 하셨고, 고센으로 이주해간 야곱의 자손들과도 함께
하셨으며, 훗날 출애굽의 여정부터 가나안에 이르는 광야길에도 함께 하셨다.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은 시공간을
초월해서 당신의 자녀들과 함께 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 그곳은 복 받는 땅이 된다. 비록 거친 사막광야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그곳은 거룩한 땅이 된다. 마치 모세의 훈련장이었던 미디안의 거친 땅 떨기나무아래도 하나님이 계심으로 거룩한
땅이 되지 않았는가?
이민의 땅 애굽에서 서슬 퍼런 바로왕의 권세와 모진 핍박과 고난이 있어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고센 땅에는 하나님의 구별된
은혜가 넘쳐났다. 애굽이라는 세상한복판에서 작고 초라해 보이는 이민자들이었을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그곳, 고센은 축복의
땅이었다. 고센 땅은 요셉과 관계가 있다. 요셉이 아버지와 형제들을 이집트로 초청하여 이민생활을 시작할 때, 바로 왕으로부터
그들의 거주지를 나일강의 마지막 부분인 비옥한 델타지역 즉 고센 땅을 선물로 받았던 것이다.
'고센'이란 '접근함'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데, 하나님께 가까이함 즉 접근함이란 신앙의 염원을 담고 있는 지명이라고 할 수
있다. 애굽이라는 세계 초강대국의 한 켠에, 양식 찾아 먹고 살기위해 온 이민자의 무리들을 하나님께서는 함께 하심으로 그들을
복되게 하셨다. 낯선 타국의 이민자로서 살아가지만, 저들은 고센을 믿음으로 아름다운 땅, 비옥한 땅으로 변화시켰던 것이다.
섭리안에서 꿈을 해석하라
고센은 요셉의 꿈이 실현된 곳이다. 요셉은 형들과 부모 앞에서 자신이 꾼 꿈을 당당히 말했다. 하나님께서 주신 꿈인 줄
확신하였고 언젠가는 그 꿈이 이뤄질 것으로 믿는 믿음이 있었다. 두 가지 꿈을 꾸었는데 고센에서 모두 성취가 되었다. 밭에서
곡식을 묶는데 형제들의 단이 요셉에게 절을 하더라는 것과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그에게 절하더라는 꿈이다.
요셉의 꿈으로 인해 형들은 시기가 나서 흥분했지만, 그 아비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다. 요셉은 이처럼 자신이 꾸는 꿈으로
인하여 그는 형들로부터 ‘꿈꾸는 자’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이는 아주 조롱하는 말이었다. 그 조롱하는 질투가 그를 형제들로부터
죽음 같은 배신과 고통의 길을 가게 만들었다. 형제들은 요셉을 죽임으로, 자기들의 손으로 하나님의 꿈을 무효화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결국 요셉을 미디안 상인에게 노예로 팔리게 하였고, 오히려 꿈의 성취를 이루는 섭리의 과정이 되게 하셨다.
인생의 복잡한 일들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쓰임 받지 못할 이유가 없다. 하나님의 꿈은 음모로 깨어지지 않는다. 이집트 땅
고센에서 하나님의 그 꿈은 아름답게 실현되었던 것이다. 요셉이 22년 만에 형들이 자기 발아래 엎드렸을 때, 그는 17살 때
꾸었던 꿈을 기억해 냈다. 그 꿈에 대한 기억들은 그의 지나온 모든 고난을 하나님의 간섭아래 있게 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은 놀랍고
틀림없는 분이시다. 인간은 잊어버려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잊어버리지 않으신다. 인간은 경솔히 여겨도 하나님께서는 귀중히 여기신다.
광야 같은 이민의 땅에서도, 꿈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잊지 않을 때, 고난조차도 꿈의 성취를 위한 아름다운 간증거리가 되게 하는
것이다.
하늘의 별을 바라보라
이스라엘 자손들은 고센 땅에서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이루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주실 때 제일 눈에 번쩍한 말씀이 바로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말씀이었다. 75세된 그에게 자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명받은 지 10년이 지나도록 자녀에 대한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처음 하나님께
질문을 한다.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요구에 동의하지 아니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이 이를 믿었는데, 하나님은 이를 의로 여기셨다. 믿음의 사람은 의인이다. 육신의 눈으로
볼 때는 별이었지만 믿음의 눈으로 볼 때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해 주신 후손임을 보았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고살기 힘든 가나안에서 400년을 지났더라도 장정만 60만 대군이 되는 약 300만 백성이 되기는
불가능한 일이다. 4대 할아버지를 생각해 보고, 집안에 얼마나 많은 자녀들이 있었는지를 살펴보면 금방 답이 나온다. 대부분 집안에
1000명 넘기가 힘들 것이다. 이에 비해 야곱의 4대손은 고센 땅에서 장정만 60만 대군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비옥한 땅
고센으로 이들을 불러들여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신 것이다. 70명 야곱의 가족이 이민을 오듯이, 우리자신들도 비록 작고
초라해보일지라도, 하나님을 믿으며 땅을 쳐다보고 낙심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기적 같은 은혜는 반드시 우리를 부흥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예비하시는 은혜를 기대하라
고센은 요셉을 선발대로 미리 보내시어 장차 이스라엘 백성이 400년을 지낼 땅을 미리 준비토록 하셨다. 요셉은 형들을 22년
만에 만나 자신이 요셉이라 밝히고 방성대곡하였다. 요셉은 형들에게 다음과 같이 간증한다. 그들이 자신을 이곳에 팔았으나, 근심할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신 것이다.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당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이었다.
요셉자신도 알지 못했던 보디발 집에서 종살이할 때도, 또 옥중에 있을 때도, 또 총리로 있으면서 7년 풍년에 곡식을 넉넉히
사들인 후 7년 흉년을 준비하고 있을 때에도, 자기 삶에 간섭하시고 섭리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모든 크레딧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는 것이다.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 있어도, 섭리적 은혜를 바라고 기대하는 것이 삶의 승리를 가져온다. 섭리적
은혜(Providential Grace)가 무엇인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까지 하나님의 간섭과 인도가 그치지
않는다는 믿음의 표현이다. 그러한 믿음과 은혜가 고센을 중심해서 이스라엘을 발흥케 한 것이다. 그냥 두었으면, 복수의 칼날과
핏빛이 난무했을 고센 땅이 은혜의 땅이 된 것은 바로 이 믿음 때문이다. 우리의 삶의 자리가 그렇게 되어야 한다.
약속의 땅, 천국의 소망
고센은 야곱이 생의 마지막 17년간을 지낼 수 있었던 땅이었다. 요셉이 17세 될 때까지 함께 지냈던 야곱은 그의 생애
마지막(130-147세) 17년을 사랑하는 아들과 고센에서 지낼 수 있었다. 야곱은 제일 사랑하던 아들 요셉이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이렇게 살아 일국의 총리로 있는 모습만 보아도 행복했을 것이다. 두 손자를 품에 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흡족했을 것이다.
바로왕 앞에서 그동안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말했던 야곱이, 양식이 없어 구걸하듯 찾아왔던 야곱이 이제 더 이상 먹는 걱정,
입는 걱정, 사는 걱정이 필요 없게 된 곳이 고센이다. 그곳에서 야곱의 말년은 그야말로 안식의 연수였다. 참으로 마음고생,
육체고생을 많이 했으나 고센에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야곱은 평안히 노후를 안식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열 두 아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서 그들을 축복하며 임종하며 그의 시신을 조상들이 있는 헤브론 막벨라 동굴에
안장할 것을 부탁하였다. 그는 비록 고센 땅의 평안을 누리고 있지만, 결코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믿음의 땅을 잊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이것이 야곱이 이 땅에서의 마지막 여생을 평안히 지난 비결이 될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좋아도, 아무리
누려도, 약속의 땅 천국의 소망을 품을 때, 진정한 안식과 평안의 복을 누리는 것이다. 나의 삶의 지경인 고센이 그러해야 할
것이다.
용서와 관용, 용납
마지막으로 고센은 용서의 땅이었다. 형들이 요셉에게 행한 악을 인정하면서도, 아버지 사후 자신들의 안위를 염려하는 형들을
온전히 용서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사, 하나님께서 이를 사용하신 것임을 형제들에게 확정한 것이다. 사단마귀는
요셉의 형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대하신 꿈’을 이루지 못하도록 온갖 음모를 꾸몄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음모조차도 선으로 바꾸시는
엄청난 일을 하신 것이다.
오래전 아미쉬 마을의 학교에 어떤 사람이 총을 들고 난사하여 어린아이들과 여러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 아미쉬 형제들은 철저하게 주님의 말씀 그대로 순종하고 사는 평화주의자들이었다.
모든 이들이 아미쉬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할까 주시했다. 예상대로 이들은 희생당한 아이들을 묻으면서 "이들은 천국에 갔다"고
서로 위안하며, 총기를 난사하고 자살한 찰스 로버츠 4세를 용서했다. 특히, 살인자 로버츠의 장례에 참석했던 75명 중 절반이
아미쉬 마을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저들이 함께 눈물을 흘리며 애도하는 모습을 보고, 장례를 집전하던 목사님도, 그의 가족들과
친구들도 모두 눈물바다가 되었다. 그리고 사건이 발생한지 열흘 만에 그 사고 현장의 학교건물을 다 철거하고 밭으로 만들었다. 그
건물을 볼 때마다 좋지 않은 미움의 기억들이 생길까봐 다른 곳에 건물을 짓기로 하고 철거하였다.
용서를 통해 고센 땅은 비록 애굽의 작은 지역에 불과했지만, 열두 형제의 가족들이 무럭무럭 먹고 자라며 하나님의 날을
예비하고 준비하는 거룩하고 구별된 장소가 되었다. 이민사회에서 가족 간에도 용납과 관용이 어려운 환경들이 있음을 본다. 그러나
용서하고 용납하고 관용하고 이해하는 것이 모두가 사는 길이다. 자신의 영혼이 살고, 가정과 가문이 살고, 교회가 살고 지역이 사는
길이다.
애굽의 고센 땅처럼, 미국이라는 나라의 한켠 땅에서 이민자의 삶을 살고 있다. 잘사는 길이 무엇일까?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들이 고센처럼 되기를 소망한다. 세월이 흘러도, 태평양을 건너던 그 꿈을 잊지 말자. 고난도 섭리 안에서 해석하자. 어렵고
힘이 들어도 땅을 보지말고, 머리를 들고 하늘의 뭇별들을 바라보라.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치지 않음을
믿음으로 구하라. 이땅이 아무리 좋아도 야곱처럼 돌아갈 곳, 천국을 잊지 말라. 마지막으로 이민의 삶은 척박하다. 자기중심적인
이기주의가 팽배하다. 그러나 용서와 용납과 관용이 모두를 살리는 길임을 기억하며 힘써 용서하라. 하나님께서 고센처럼 복을 주시고
누리게 하시었다가, 훗날 천국에서의 영화(Glorification)에 드는 복도 부족함 없이 누리게 하시리라.
고센 땅과 약속의 땅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아들 이삭까지
내려놓는 믿음을 보인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창 22:17)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이 약속을 잊지 않으시고 요셉을 통해 야곱
일가를 이집트 고센 땅에 정착시키셨다. 이 땅은 이집트 왕 파라오가 판단할 때 이집트 땅 중에서 노른자위 땅이었다(창 47:6).
가나안 땅 뿐 아니라, 나일 강 덕분에 곡식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던 이집트까지도 기근으로 황폐해졌다. 그러나 야곱 일가는
요셉을 통해 양식을 공급하시는 하나님 덕분에 그 시기에도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공급하신 이집트 땅에서 그 백성은 이집트 사람들과 구별되게 살아야 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그들의 직업이 목축업이라고
이집트 왕 파라오에게 말하라고 시켰다.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기” 때문에 고센 땅에서 구별되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창 46:34). 야곱은 아들 요셉에게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창 48:21) 하신다고 축복한다. 이 때 성경본문은 야곱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이스라엘이라고 표기한다. 요셉도 죽을 때
그의 형제들에게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창 50:24)고 말한다. 이는 이집트 땅이 이스라엘 백성이 영원히 머무를 것이 아님을 뜻한다.
그들에게는 가야 할 약속의 땅이 따로 있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는 복을 주셨다.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가득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창 9:7)는 복을 주셨다. 하나님은 이삭으로 하여금 야곱에게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도 주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창 28:3-4)는 복을 빌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주하며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다(창 47:27).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께서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창
48:3-4)는 약속을 주셨음을 요셉에게 기억시킨다. 이는 이집트 땅이 약속의 땅이 아님을 뜻한다. 이집트 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일시적으로 사용한 수단에 불과하다.
요셉 시대의 사람들이 다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다.”(출 1:7)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 가운데 이루어졌다.
그런데 고센 땅에 거주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 사는 동안 고센 땅의 풍요를 맛보면서 점점 더 이집트에 집착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들은 이집트를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이집트를 다스리게 되었다(출 1:8). 그의 판단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은 세계대제국 이집트 백성보다 더 많고 강한
백성이 되었다(출 1:9).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 자신을 이집트 백성과 구분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집트 왕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 백성’이라고 부르며 이집트 백성을 ‘우리’라고 부름으로써 둘을 서로 구분한다. 그는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출 1:10)고 두려워했다.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을
그의 적으로 여겼기에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였다(출 1:11). 이는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창 15:13)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는 코브라가 왕관에
있는 파라오가 뱀의 후손으로서 여자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일이다(창 3:15).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센 땅을 선물로 주셨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뱀의 후손이라는 이집트 백성의 정체를 깨닫지 못했을 때
하나님은 파라오를 통해 그 사실을 깨닫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이집트의 비옥한 땅을 이로 바꾸어 사람들과 짐승들을 괴롭히실 때
이스라엘 백성도 동일한 고통을 겪었다. 이 재앙을 통해 그들은 그들이 의지했던 옥토가 그들을 괴롭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기 시작하신다.
06-01-2023(목)
난해 성경절 / 이스라엘은 애굽에 430년 동안 거주했는가?
갈라디아서 3: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430년의 시발점이 아브라함 때부터인가 애굽에 거주하기 시작한 때부터인가의 문제다. 만일 아브라함 때부터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제로 애굽에 거주한 기간은 훨씬 짧아지게 된다.
우리의 판단을 어렵게 하는 두 종류의 성경 절들이 존재한다. 창세기 15:13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아브라함의 자손을 괴롭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출애굽기 12:40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지 사백삽십년”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도행전 7:6
애굽에서 종노릇한 것이 400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스데반은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씨가 다른 땅에 나그네 되리니 그 땅 사람이 종을 삼아 사백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이런 기록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애굽에 거주한 기간, 즉 종노릇한 기간이 400-430년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또 한 편의 기록들을 보면 아브라함 시절부터 출애굽까지를 포함한 것이 430년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갈라디아서 3:15-18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 이야기이다. 따라서 430년의 시작도 아브라함을 기점으로 잡는 것이 자연스럽다. 창세기 15:13에 보면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아브라함의 자손을 괴롭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어디까지가 이방인가? 그 당시는 가나안도 애굽의 일부로 알려져 있었으므로 가나안 생활도 애굽생활로 간주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창세기 15:16에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4대 만에 가나안으로 돌아오도록 되어 있다. 그 4대 란 출애굽기 6:16에
보면 레위 - 고핫 - 아므람 -모세를 말하며 대략 50세에 아들을 낳았다고 치더라도 230년도 채 되지 않는다. 이렇게 계산하
면 애굽에 실제 거주했던 기간은 200-230년 정 도가 된다. 그러나 그럴 경우, 처음 애굽에 내려올 때 70여 명에 불과하던
야곱의 후손들이 4대 215년 만에 어떻게 200여 만명으로 증가할 수 있었는지는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다.
430년의 기간에 대해 두 가지 주장이 있다.
전자는 아브라함부터 출애굽까지를 430년으로 보는 견해 후자는 순수한 애굽
체류기간만 430년이라는 주장이다.
성경의 문맥과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도 어느 한쪽에 결정적으로 유리한 증거를 얻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기산점이 언제이든지간에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는 430년 동안의 이스라엘의 유랑생활이 끝나는
시점이었다.
애굽에서 요셉에게 낳은 아들이 두 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의 도합이 칠십명이었더라. With the two sons who had been born to Joseph in Egypt, the members of Jacob's family, which went to Egypt, were seventy in all.
애급에 거주한 야곱의 자손들은 모두 칠십 명이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시작한 가족들이 애급에서 430년 동안 지내며 무려 장정만 60만 명이 되어 애급에서 나오게 됩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언약 때문입니다.
창세기 12:1-2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창세기 46장은 족장이라는 한 개인을 중심으로 구속사를 이끌어 가시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중심으로 구속사의 새로운
역사를 펼쳐가는 모습을 소개하기 위하여 언약의 후손들이 큰 민족으로 성장하기 위하여 애급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소개합니다.
야곱은 가족들을
데리고 애급으로 들어가는 도중에 브엘세바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지냈으며 하나님은 벧엘의 축복을 다시 언약하셨습니다.(1-7절). 이때 함께
애급으로 이주한 식구는 총 70명이었습니다(8-28절). 야곱이 고센에 도착한 후 요셉이 올라와 20년 만에 극적인 상봉을 하고
야곱의 일족이 고센 땅에 정착할 준비를 합니다다(29-34절).
야곱을 따라 애급으로 이주한 사람들의 족보를 열두 아들을 중심으로 소개합니다. 그런데
애굽으로 이주한 사람의 숫자에 대해서는 성경에서 약간씩 차이가 납니다.
26절에는 66명으로 야곱 자신과 며느리들을 뺀 숫자이며
27절과 출애굽기1:5에는 70명으로 야곱 자신과 요셉, 요셉의 두 아들을 포함시킨 숫자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7:14에는 75명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27절에 기록된 70명 외에 요셉이 애굽에서 낳은 요셉의 다섯 명의 후손을(창 50:23) 더 한 숫자로 추정됩니다.
특히 본문에서는 70인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70이란 '하나님, 승리, 안식'을 뜻하는 7과 10이라는 '완전'수가 합쳐진
숫자입니다. 따라서 본문 통해서 저자는 야곱의 가족들이 애급으로 이주한 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주도 아래 이스라엘을 번성시키시기
위함임을 암시하려고 합니다.
과거 이방 땅에서 많은 고초를 겪었던 야곱은 다시 애급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것에 큰 두려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브엘세바에서
제단을 쌓고 희생을 드릴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함께하시고 축복하실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성도들의 고난 속에서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비록 애급과 같이 낯설고 어려운 곳으로 갈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그 곳은 축복과 번영의 땅이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 또한 역경 가운데서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복을 주시며 한 백성들의 총회가 야곱에게서 나오고 왕들이 야곱의 허리에서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35:11). 하나님의 말씀은 야곱에게 꿈만 같은 약속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야곱은
속임수를 써서라도 원하는 것을 쟁취하려는 인생이었으나 그의 꿈은 언제나 신기루 같아서 손에 잡힐 듯하면 이내 멀어져 다시 치열하게 그
꿈을 좇아 수고하는 험난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을 만난 이후에는 자신의 꿈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좇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었기에 허황된 꿈이 아니라 반드시 성취될 꿈이라고 믿었겠지만, 수십 명에 불과한
야곱의 가정이 어떻게 큰 민족이 되고 나라를 세울 것인가 하는 것은 도무지 야곱의 머릿속에서는 그려지지 않는 꿈이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까? 아직도 확신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까? 이제부터는 믿고 확신함으로 인생의 남은 여정을 새로운 기대를 갖고 매일의 삶이 주 안에서 즐겁고 복된 행복자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숫자 칠(7)의 상징: 유다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숫자
사람들은 '행운' 하면 제일 먼저 숫자 7을 생각한다. 동양에서는 죽은 자의 영혼이 육체에서 풀려나 자유로워지는 데는 일곱 단계의 시간 단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7일 단위로 모두 일곱 번 제사를 지냈다.
7은 그리스 신화에서도 중심을 이루는 수였다. 아폴로가 세상에 나온 날은 7일이었다. 로마인들에게 7은 길한 수였고 행운의 수여서 원형경기장에서 벌어지는 경기에서 많이 쓰였다. 또한 중국에서 7은 여자의 수로 일컬어지는데, 중국인은 칠삭둥이는 살 수 있어도 팔삭둥이는 살지 못한다고 믿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속죄의식을 치를 때 피를 일곱 번 뿌렸다. 결혼식도 7일, 추모기간이나 큰 축제도 7일간이었다. 불교에서도 석가모니는 7년 동안 구도의 고행을 했으며, 명상 수행에 들어가기 전에 보리수 나무를 일곱 바퀴 돌았다. 극락은 일곱 천계로 돼 있으며, 현세에 성불을 이루기 위해서는 일곱 가지 종교적 품행이 요구됐다.
유다인들에게 '7'이라는 숫자는 매우 중요하다. 1주일 중에 7일째 되는 날이 안식일이다. 또한 7년째 해에는 밭을 갈지 않고 묵혀 쉬게 한다. 그리고 49년째 되는 해는 대단히 경사스런 해로 희년(禧年)이라고도 표현한다. 구약성경에서도 노아의 방주에 짐승들이 들어간 7일 후 홍수가 땅을 덮었으며, 노아는 땅에 물이 걷히고 나서도 7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보냈다.
"그는 이레를 더 기다리다가 다시 그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보냈다"(창세기 8:10).
그러나 7이 반드시 희망과 행운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숫자 7이 인간의 일곱 가지 죄악을 가리키기도 한다.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마르 7, 22).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숫자 7은 완전수이다. 예를 들면 파스카 축제와 무교절에 대한 설명에서 7이란 숫자가 자주 나온다(레위기 23:6-8). 또한 7이란 숫자는 순결한 신앙(로마서 11:4)이나 완전한 안식을 의미한다. "사실 일곱째 날에 관하여 어디에선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히브리서 4:4).
칠 년째 되는 해는 땅에 안식을 주지 않으면 안됐다. "그러나 일곱째 해는 안식년으로, 땅을 위한 안식의 해, 곧 주님의 안식년이다. 너희는 밭에 씨를 뿌려서도 안 되고 포도원을 가꾸어서도 안 된다"(레위기 25:4). 따라서 칠 년마다 농사짓던 밭을 묵히는 규칙이 있었다.
예수님은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하신다.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1-22).
요한묵시록에는 거의 각 장마다 일곱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그리스도교에서 성령의 칠은과 7성사 등 일곱은 매우 중요한 숫자로 돼 있다. 이처럼 일곱은 '완성'을 나타낸다. 요한묵시록에 나오는 일곱교회는 곧 교회의 보편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6이란 숫자의 의미
6은 통상 인간의 수, 사단의
수로 알려져 있습니다. 인간과 뱀은 모두 6번째 날에 만들어졌고 하나님의 완전수 (특히 영적인) 7에서 하나가 부족한
불완전수기에 그렇다고 합니다. 6에 대해 성경에서 찾다 보면 이런 해석은 타당성이 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제6번째 인물은 다름
아닌 뱀입니다-삼위일체 하나님(3), 아담(4), 이브(5), 뱀(6). 요한계시록에 뱀은 사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계
12:9, 20:2). 욥기에서 욥의 이름이 6번째로 등장하는 장면 또한 사단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욥 1:9)”.
하나님은 죄를 범한 인간에게 6일간 수고하며 일할 것과 7일째 되는 날엔 하나님을 기억하고 경배하며 모든 수고에서 안식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십계명 중 제6계명은 인간이 인간에게 범할 수 있는 가장 심각한 범죄인 ‘살인’을 다루고 있습니다. 인류
최초로 살인을 저지른 가인의 자손들은 창세기 4장에 6대손까지 열거됩니다.
남 왕국에서 왕의 자손들을 모두 죽이고 통치했던
아달랴는 6년간 통치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 여호야다는 7년째 되던 해에 아달랴를 제거하고 자신이 숨겨준 왕족 중 유일한 생존자인
요아스를 왕위에 올립니다.
이렇게 가인이나 아달랴처럼 마귀나 적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6이란 숫자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느브가넷살의
금으로 만든 신상은 높이가 6 규빗, 넓이가 6규빗이었습니다(단 3:1). 다윗이 맞섰던 골리앗은 키가 6 규빗에 한 뼘이었다고
나오며(삼상 17:4), 6개의 갑옷과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놋 투구, 비늘 놋 갑옷, 놋 각반, 놋 단창, 창, 방패(삼상
17:5-8). 이중 창 날은 철 600세겔이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3장에 나오는 적그리스도의 수는 666입니다.
바로는 이집트를 떠난 이스라엘을 추격할 때 선별된 병거 600대와 함께 쫓아갑니다(출 14:7).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이집트의 음식을 그리워하며 불평하는데 모두 6가지의 음식을 열거합니다. 생선, 오이, 참외, 부추, 파, 마늘(민 11:5). 이에
비해 약속의 땅에서 나오는 소산물에 대한 약속은 7가지가 열거됩니다. 밀, 보리, 포도, 무화과, 석류, 감람나무, 꿀(신
8:8).
말년에 우상숭배를 한 솔로몬이 한 해에 거둬들인 세금은 금 666달란트였고(왕상 10:14), 금으로 만든 큰 방패
200개에는 각각 600세겔의 금이 들어갔으며(왕상 10:16), 왕의 보좌로 향하는 계단은 6개였다고 나옵니다(왕상
10:19).
신약에서 예수님이 마귀에 들렸다고 모함당한 기록은 모두 7번 나오는데 요한복음 8장에 연이어 2번 나온 것을 고려하면 모두
6번의 독립된 기록이 나옵니다(마12:24; 막 3:22; 눅 11:15; 요 7:20; 요 8:48, 52; 요 10:20). 이처럼
6과 7은 교묘하게 서로 얽혀있는 경우를 종종 발견하게 되는데 이런 성향은 온전한 인간이자, 완전한 하나님이셨던 예수님께도
두드러지는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12명과 예수님을 합치면 13으로 6 + 7입니다(13은 통상 배반, 배신을 의미하지만
하나님과 관련된 수이기도 합니다. 우리 주님의 생애를 적은 4복음서인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중 예수님의 족보가 나오는 복음서는 마태와 누가입니다. 통상적으로 마태는 ‘왕’이신 예수님을 강조하며, 마가는 ‘종’으로
오신 예수님, 누가는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 그리고 요한은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님의 관점으로 쓰인 책이라고 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족보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것은 ‘왕’과 ‘사람’에겐 족보가 있지만 ‘종’과 ‘하나님’에겐 족보가 없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런데 마태와 누가에 적혀있는 족보의 기록을 살펴보게
되면 여러 면에서 참 흥미롭습니다. 마태는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총 42세대라고 서술하는데(마 1:17), 42는 7 x 6입니다. 즉 하나님과 인간의 수가 합쳐진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의 온전함을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인간 아브라함의 믿음에서 시작한 하나님의 탄생이기에 6과
7의 조합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에 비해 누가는 하나님으로 시작해서 예수님으로 끝나는 족보에 총 77명의 이름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의 아들로 끝나는 족보에 ‘77’이란 수보다 더 적합한 수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7(70)이란 숫자의 의미
“3이란 숫자를 생각하니 베드로의 3번의 부인과 3번의 고백 사이에 예수님의 3개의 못자국도 떠오르게 하시네요. 다시 만났을
때 사랑하느냐 물어보시는 주님의 손과 발에 못자국을 베드로는 어떤 마음으로 보았을까 떠올려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지난번에 올린 “3이란 숫자의 의미”에 대해 받은 코멘트입니다. 그러고 보니 골고다 언덕엔 3개의 십자가만 있었던 게
아니라,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힌 주님의 몸에도 3개의 못이 박혔습니다. 양손(혹은 손목)과 두발목을 관통한 3개의
못은 4개의 상처를 남기고 옆구리의 찔린 상처까지 더하면 5가 됩니다. 하나님이(3) 세상을(4) 사랑하신 은혜의 죽음이(5)
십자가였음을 다시 묵상하자니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문에 나오는 7개의 간구도 3개는 하나님에 관한 것, 4개는 사람들에 관한
것이었음이 상기되었습니다(마 6장 9-13).
그래서 오늘은 성령의 수이면서 안식과 영적 완전함과 완성을 뜻하는 7에 대해 적으려 합니다. 7은 성경에 자주 등장할 뿐만
아니라 너무도 중요한 숫자이기에 3처럼 일일이 다 적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래서 주요 포인트만 적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6일간의 창조 사역을 마치시고 7일째 되던 날 안식하셨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하는
창세기 1장 1절은 7단어의 히브리어(바라싯 바라 엘로힘 에트 하샤마임 워에트 하아레스)로 구성되어 있으면서 총 28개(7×4)의
히브리 알파벳으로 되어 있습니다(בְּרֵאשִׁ֖ית בָּרָ֣א אֱלֹהִ֑ים 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 – 히브리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나열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구절이 하나님의 수
7과 세상과 창조물의 수인 4의 곱셈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 한치의 오차도 없는 성경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4에 대한 자세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숫자 7은 지난 글에 적었던 것처럼 숫자 3과 같이 일하는 경우를 꽤 발견하는데(자세한 내용은 여길
눌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숫자 10과도 그러합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7단어의 히브리어로 구성된 창세기 1장 1절은 10단어의
영어(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 and the earth)로 번역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다 하나님이 데려가신 에녹은 아담의 7대손이었고 심판의 홍수에서 구원을 얻은 노아는 10대손이었습니다(10에 대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그는 정결한 동물은 암수 일곱씩 방주에 들였으며(창 7:2), 방주에 들어간 7일 후에 홍수가 지면을
덮었습니다(창 7:10). 노아라는 이름이 성경에서 7번째로 등장하는 부분은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입니다.
이런 7과 10을 더한 17은 부활 승리를 의미하는 중요한 숫자입니다(17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직접 이름을 지어주시거나 바꿔주신 이름이 몇 번인지 궁금해서 찾아본 적이 있었는데, 적어도 제가 찾은 것으로는 모두 17번이었습니다. 이 발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또한 7과 10을 곱한 숫자인 70도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7년의 가뭄과 7년의 흉년을 맡아 관장하던 요셉의
초청으로 에굽으로 야곱과 함께 내려간 가족의 수는 모두 70명이었습니다(출1:5). 야곱이 죽자 요셉은 그 몸을 40일간 향으로
처리하게 했고 에굽인들은 70일간 애곡했습니다(40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사역을 도울 70장로를 세우는데(출24:1), 에스겔서에도 70장로가 나오고(겔8:11)
예수님도 생명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70인을 세워 둘씩 짝지어 내보내십니다(눅10:1-17). 그런 반면에 적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아비멜렉은 아버지에게서 난 70명의 형제를 한칼에 죽입니다(삿 9:56). 40이란 수가 주로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개개인의
시험 및 연단의 기간을 뜻하는 수라면, 70이란 기간은 한 나라의 시험 및 연단의 어떤 기간을 뜻합니다. 이스라엘만 우상숭배로
바벨론에 멸망당했다가 70년의 포로 기간이 끝난 후 돌아와 다시 나라를 재건한 게 아닙니다. 이사야서에는 두로에 대한 70년
예언도 나옵니다. 두로는 70년간 잊혀질 것이나 70년 후에는 창녀처럼 노래하고 그 70년이 찬 후에 여호와께서 두로를
찾아오시리니 다시 값을 받고 지면에 있는 모든 나라와 음란을 행할 것이라고 합니다(사 23:15-17). 개역개정은 이 부분을
‘하나님이 돌보신다’로 번역했지만 이것은 잘못된 번역입니다. 성경에서 쓰이는 ‘하나님이 방문하신다(visit), 찾아오신다’는
표현은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시려고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천사가 직접 방문하는 것을 뜻하며 그것은 복된 약속의 성취일 수도
있고(약속의 자녀인 이삭이나 에굽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의 경우), 은혜와 구원(룻 1:6), 죽음(민 16:29), 혹은 심판의
때가 임한 것일 수도(출 20:5, 32:34) 있습니다(킹제임스 영어성경에서 ‘visit’을 찾게 되면 모두 80번 나오는데
구절들을 일일이 읽어보는 것도 유익할 것입니다). 다니엘서에 의하면 이스라엘에 죄와 허물이 그치고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 환상과 예언이 응하여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시기까지의 70주, 혹은 70개의 7일이 정해져 있습니다(단
9:24). 다니엘이 바벨론의 포로 기간 가운데 받은 이 예언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입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주님은 내게 죄를 범한 형제를 7번은 용서해야 하는 거냐고 묻는 베드로에게 70의 7번이라도 용서해주라고 하십니다(마18:22).
7은 또한 은혜의 수인 5와도(5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함께 일해서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상징하는 12를(12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이루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담은 창세기 1장과 2장엔 ‘창조’란 단어가 5구절에 걸쳐 7번
나옵니다(창1:1, 21, 27(3번), 2:3, 2:4). 킹제임스 영어 성경에서 “사랑하는 아들(beloved son)”을
찾게 되면 11번 나오고(11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아들들”이란 복수형까지 포함하면 12번 나온다는 걸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예수님을 향한 ‘내 사랑하는 아들(my beloved son)’이란 표현은 정확히 7번 나온다는 것입니다.
모세 5경에도 7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첫째로는 여호와의 7절기가 있습니다(여호와의 7절기에 대한 글은 절기마다 시리즈로 올렸는데 서론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7절기 중 무교절은 7일간 무교병을 먹으며(레23:6) 오순절은 초실절부터 7번의 안식일을 센 다음 날, 즉 50일이(50에 대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되는 날을 기념하는 절기로 성령이 강림하신 날이기도 합니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에녹이 태어나고 하나님이
에녹을 데려가신 날 또한 오순절이라고 하는데 전승이니 권위 있는 내용은 아닙니다. 그리고 나팔절은 7번째 달의 첫날이며 장막절은
7번째 달 15일부터 7일을 셉니다(레 23장). 레위기에는 7이 들어간 구절이 57번 나오는데,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제사장
직분으로 섬기기 전에 7일간 거룩히 구별해야 했습니다(레8:31-36). 속죄절에는 대제사장이 속죄소에(긍휼의 자리) 7번 피를
뿌려 속죄해야 했는데(레16:14) 이는 완전한 그리스도의 피의 속량을 나타냅니다(히 9:12). 성소에 있던 금으로 된 등잔대의
7줄기의 빛도 사람의 혼을 비추는 하나님의 완전한 빛을 상징합니다.
또한 7일마다 7번째 날에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던 하나님은 레위기에서 7년마다 땅에 안식년을 주어 씨를 뿌리거나 포도원을
가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레25:4). 그리고 7번의 안식년, 즉 7년마다 오는 안식년을 7번 계수해서 49년이 된 다음 해인
50년은 희년으로 거룩하게 하여 자유를 공포해야 했고 각자 자기 소유지와 가족에게로 돌아가야 했습니다(레25:8-10).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귀한 법은 모두 영원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예표하는 것들이기에 지켜졌어야 하지만 아쉽게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70년 바벨론의 포로기를 통해 땅이 그동안 도둑맞았었던 안식년을(7년마다 취해야 하는 안식년 70번은 490년의
불법의 세월에 해당합니다) 누리게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대하 36:21).
7과 6의 관계도 하나님의 수와 인간의 수의(6에 대한 자세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합계에서 오는 독특한 의미가 있습니다.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서의 첫 전투였던 여리고성을 하나님은 매일 한
번씩 6일을 돌되 7일째 날에는 7번을 돌고 함성을 지르라고 하십니다(수 6:3-4). 즉, 여리고 성은 7 제사장들이 7 나팔을
메고 총 ’13번’을 돌고 무너져내린 게 됩니다. 연약한 인간을 통해 일하신 하나님의 승리의 역사를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
마태복음 1장의 아브라함부터 시작하는 예수님의 계보는 14세대씩 3그룹으로 묶인 42대인데, 7과 6의 곱셈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42는 예수님의 완전한 신성과 온전한 인성을 잘 나타내는 숫자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12 제자를 두셨는데, 주님까지
합치면 13이 되며 그중 한 제자가 배반합니다. 이처럼 13은 타락과 배반의 숫자이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13이란 숫자가 처음
나오는 구절은 창세기 14장 4절인데, 12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던 5 나라가 13년째가 되었을 때 배반해서 4 나라와 전쟁을
일으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 대적하는 도시의 상징인 바벨론의 시조는 니므롯인데, 함의 13대손입니다(창 10:9-10).
에스더가 여왕으로 있을 때 하만은 왕을 속여 첫째 달 13일에 모든 유대인들을 죽이라는 왕명에 서명하도록 했고 이를 시행할 날짜는
열두째 달 13일이었습니다(에3:12-13). 마가복음 7장 21-22절에 주님은 부패한 마음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히는
13가지의 죄악들을(악한 생각, 음란,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독, 속임, 음탕, 질투, 비방, 교만, 우매함)
열거하십니다.
솔로몬은 7년간(왕상 6:38) 성전을 지었고 일곱째 달 절기에 궤를 메어 선전의 내소인 지성소로 들였는데, 7일과 7일
도합 14일을 절기로 지켰습니다(왕상 8장). 성경엔 7과 2를 곱한 14란 수도 자주 발견되는데, 14는 구원과 속량을 뜻하는
숫자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계보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대,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14대,
그리고 바벨론 이후 그리스도까지 14대로 총 3번의 14대가 나옵니다(마1:17). 마태복음의 기자가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의
족보를 하나님의 완벽한 구원 및 속량을 나타내는 14대로 3번 나눠 적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부터 7년 전에 하나님이 사람의
이름을 두 번 부르신 기록이 성경 전체에 정확히 7번 나온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던 적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이름을 2번씩
7번 부르셨기에 이름의 수로는 14번이 됩니다. 그때 받았던 조명을 2018년에 적었는데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눌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7은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님 중 성령의 일하심이 두드러지는 숫자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7영, 하나님의
7눈 등을 떠나서 특별히 성령의 기름 부음이 두드러지는 책은 7이란 숫자로 엮어져 있음을 느꼈기 때문입니다(개인적으로 에스겔,
요한복음, 요한계시록). 4 복음서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많은 기적을 담고 있지만, 특별히 요한복음은 7개의 기적을 다루고 있고
7에 대한 숨은 진리가 곳곳에 박혀 있는 놀랍고도 경이로운 책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조명은 2018년에 올린 ‘7 I Am, 7
기적, 7 증인’이란 글에 있으니 여길
눌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에는 7이란 숫자가 36구절에 걸쳐(킹제임스 영어성경) 54번 나오는데, 등장하는 순서대로
적자면, ‘7교회, 7금촛대, 7별, 하나님의 7영, 7등불, 7봉인, 7뿔과 7눈(하나님의 7영)을 가진 죽임당한 양, 7천사,
7나팔, 7천둥, 7머리에 10뿔이 달렸는데 머리마다 7왕관을 쓴 용, 7머리에(그 여자가 앉은 7산과 7왕) 10뿔이(10왕)
달렸는데 뿔마다 10개의 왕관을 쓴 짐승, 7재앙, 하나님의 진노를 담은 7금대접입니다. 에스겔 같은 경우는 여호와의 말씀과
환상이 임한 후 7일간 충격 가운데 놀라 있었다고 나오고(겔3:15-16), 7년째 되던 해 다섯 번째 달 10일에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하나님께 물으려고 에스겔에게로 나아왔다는 기록이 있으며(겔20:1), 천년왕국이 임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7년간 전쟁
무기들을 태우고 7개월 동안 전쟁으로 죽은 시체들을 묻어 땅을 정결케(깨끗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겔39:9, 12).
천년왕국의 기간에 세워질 에스겔의 성전엔 7계단, 7규빗과 70규빗의 측량이 나오고, 7일동안 매일 염소, 수소, 그리고 숫양의
피를 올려 7일 동안 제단을 정결케 하고 제사장들을 거룩히 구분하라고 합니다(겔 43:25-25). 스가랴에도 7눈을 가진 한
돌(슥 3:9)과 7등잔과 7 관(슥 4:2), 그리고 온 세상을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7눈(슥4:10)이 나옵니다.
욥에게는 7아들이 있었고, 고난을 받고 있던 그를 3친구가 방문했을 때 7낮과 7밤을 침묵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그들은
속죄로 7숫양과 7수소를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려야 했습니다. 나만 장군은 요단강에 7번 몸을 담은 후 나병이 나았는데 레위기
14장에 나병에 걸렸다가 나은 사람에 대한 규례를 보면, 새 2마리를 가져다가 한 마리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고 한
마리는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의 피를 찍어 나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7번 뿌린 후 놓아줍니다(레 14:2-7). 그 후
정결함을 받은 자는 자기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은 후 진영에 들어와 자기 장막 밖에 7일을 머문 후 7일째 되는
날에 온몸의 모든 털(머리털, 수염, 눈썹)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은 후 정결하게 됩니다(레14:8-9). 그리고 8일째
날에는(새로운 시작, 거듭남, 재생을 의미하는 8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흠 없는 어린 숫양 2마리와 1년 된 암양 1마리, 고운 가루 3/10 에바에 기름 섞은 소제물과 기름 한
록을 속건제와 속죄제로 드리는데, 제사장은 그 기름을 왼쪽 손바닥에 따른 후 오른쪽 손가락으로 찍어 여호와 앞에 7번
뿌립니다(레14:10-16). 이 외에도 집에 생기는 나병에 대한 규례와(레 14:34-57) 몸에 유출병이 생길 때의 규례도
숫자 7과 연관해서 비슷한 과정들을 거칩니다(레 15:13-28).
마태복음 13장에서 7개의 비유를 들어 하나님의 나라(왕국)를 설명하셨던 주님이 십자가 선상에서 말씀하신 횟수는 총
7번인데, 가상칠언으로 불립니다. 주님은 또한 막달라 마리아에게서 7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막16:9). 이런 주님의 족보는
누가복음 3장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끝나는데, 정확히 77명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성경
전체에서(영어 킹제임스 성경) ‘하나님의 사람(man of God)’을 찾으면 총 77번 등장한다는 걸 발견한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12사도를 뒀던 신약의 초대교회에는 7집사가 선출됩니다(행6:3).
7. 8. 9의 성경 숫자의 개념
◎ 7 수론(數論)
7을 나타내는 말에는 일곱을 의미하는 기수 쉐바(שבע)와 일곱째를 의미하는 서수 쉐비이(שבי)가 있다. 더불어 이것을 어근(語根)으로 하는 단어로는 충만하다는 뜻의 사바(שבע) 맹세하다는 뜻의 샤바( שבע)를 들 수 있다. 7에 해당하는 헬라어 알파벳은 제타(ζ)’이다. 고대 헬라어 문헌에서 일곱은 성취된 기간 또는 완전히 완성된 기간의 상징이다.
바벨론인에게 있어 7은 충만과 전체의 뜻이다. 7이라는 값을 가지는 일곱 번째 히브리어 알파벳은 ‘무기’(weapon, Arms)를 상징하는 자인(ז)이며, 헬라어 알파벳은 제타(ζ) 이다. 7은 하늘의 상징수인 성부, 성자, 성령을 의미하는 3과 땅의 상징수인 동서남북을 의미하는 4를 합한 수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창 2:2-3, 8:6, 15:1).
구약시대의 7은 매우 신성한 의미로 사용됐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구속사역의 완성을 인하여 우주창조 후 7일째 안식하였으며(창 2:1-2), 이를 기념하여 일곱째 날을 안식일로 특별하게 성별했다(출 20:10, 신 5:14). 또한 성별된 기간으로 무교절은 칠일동안 지키도록 되어 있다(레 23:6-8). 완전한 속죄의 상징으로 제물의 피를 속죄소 앞에 일곱 번 뿌리기도 했다. (레 16:14, 19). 온 세상을 두루 감찰하시는 여호와의 눈도 일곱이라고 되어 있다. (슥 4:10). 신약 성경에서 7은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 순결한 신앙(롬 11:14), 완전한 안식(히 4:4), 온전한 믿음(히 11:30) 등을 의미한다. 또한 완전하신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을 나타내기도 한다(계 1:4, 1:16, 2:1, 5:1, 6, 6:8-11장, 15:1).
참고로 70이란 수의 값을 가지는 열여섯 번째 히브리어 알파벳은 ‘눈’(eye)을 상징하는 ע‘아인’이며, 헬라어 알파벳은 ο‘오미크론’이다. 성경에서 70은 죄로부터의 완전한 회복과 구원을 상징하는 숫자 70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엘림에 있는 물샘 열둘과 종려 70주는 이스라엘 백성을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께서 세우신 열두 제자들과 칠십 문도와 상징적인 관련을 갖는다.(출 15:27, 마 10:1-2, 눅 10:1). 이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70년 만에 회복되었다. (대하 36:21, 렘 25:11-12, 렘 29:10, 단 9:2). 또 하나님은 다니엘 선지자를 통해서 ‘칠십 이레의 기한 동안에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원히 속하여진다.’ 고 예언하시기도 했다. (단 9:24).
성경에 <7> 또는 <일곱>이란 숫자가 나타나는 경우는 아래와 같다.
“하나님의 세상 창조 작업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쳤다.” (창 2:2)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7> 배나 받는다.” (창 4:15)
“노아의 방주(方舟)에 나오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이었다.” (창 7:2)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7>년 동안 라반에게 봉사하였고” (창 29:20)
“바로가 본 하수에서 올라온 살찐 암소가 <7>마리였고” (창 41:2)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날 때 절을 <7>번 하였으며” (창 33:3)
“애굽의 흉, 풍년이 각각 <7>년씩이고” (창 41:47-54)
“무교절과 장막절은 각각 <7>일간씩 지키고” (출 12:16-18)
“병가(病家)에서 새 두 마리의 피를 <7>번씩 뿌려 정결케 했고” (레 14:48-51)
“여리고 성이 제<7>일에 <일곱>번 도니 무너졌고” (수 6:12-16)
“삼손의 머리털 <7> 가닥을 깎으니 힘이 없어지고” (삿 16:13-19)
“엘리야의 하인이 <7>번 기상을 예보했으며” (왕상 18:43-44)
“땅에 <7>년 기근이 오고” (왕하 8:1-3)
“나아만이 요단강 가에서 <7>번 목욕하니 병이 나았으며” (왕하 1:10-14)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싫어하시는 것이 육 <7>가지니 곧” (잠 6:16)
“앗수르 사람이 우리 궁전을 밟으면 <7> 목자(牧者)로 치겠다 하고” (미 5:5)
“그 날에 <일곱> 여인이 한 남자를 붙들고 당신 이름으로 수치를 면하고자 하고” (사 4:1)있다.
스가랴서와 다니엘서는 <7>이라는 숫자가 강조되어 있으며, 창세기 12장 2-3절에는 계약(契約)의 <7> 부분이, 그리고 출애굽기 6장 6-8절에는 이스라엘의 <7>중(重) 약속이 나타나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의 <7>수의 공통의는 ‘신적충만(神的充滿 : divine fullness)’과 ‘만족(滿足 : satisfaction)’ 그리고 ‘완성(完成 : perfection)’과 ‘완전(完全 : completion)’이다.
◎ 8 수론(數論)
8을 나타내는 말에는 여덟을 뜻하는 기수 שמנה‘쉐모네’와 여덟째를 뜻하는 서수 שמיני‘쉐미니’가 있다. 숫자 8에 해당하는 헬라어 알파벳은 η‘에타’다. 여기서 파생된 영어식 표기가 ‘octa’이다. 참고로 8각형은 ‘octagon’이며, 피아노의 5도 음정을 ‘octave’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4의 배수인 8은 중복과 강조의 효과를 나타내는 경우가 있다. 사방팔방(四方八方), 사고팔고(四苦八苦), 사통팔달(四通八達)등이 그 예다. 바벨론에서 8은 천국의 수로 인식돼 있다. 왜냐하면 바벨론 신은 탑 모양으로 세워진 신전의 8층에 기거했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고대인들은 8을 행운을 불러오는 특별한 수라고 여겼다. 8은 근원으로 회귀하는 의미와 7이 준비하고 성취한 것을 완성하는 의미를 갖는다. 8은 신적인 완전수 3과 은혜의 수 5의 합으로 부활을 상징한다. 뿐만 아니라 중세 신학자들은 예수의 헬라식 표기인 Ιησούς‘이예수스’( 10+8+200+70+400+200)가 888이라는 값을 가지기 때문에 성스러운 수로 인식하기도 했다.
8이라는 수의 값을 가진 히브리어의 여덟 번째 알파벳은 ‘담’(wall, partition}, ‘울타리’(fence)라는 의미를 가진 ח‘헤트’이며, 헬라어 알파벳은 η‘에타’다. 또 ח‘헤트’는 ‘죄에서 다시 깨끗하게 한다.’는 구원과 재창조를 의미하는 8이란 숫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죄로 인해 막힌 담을 허시고 구원의 길을 여신 예수와도 그 뜻이 일맥상통한다. 성경에서 8은 구세주를 통한 구원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노아의 가족 8명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홍수 심판에서 방주를 통해 구원받았다. (창 6:1-7:8, 벧전 3:20). 태어난 지 8일 만에 행하는 할례는 범죄 함으로 더러워진 피를 뽑아내어 깨끗하게 한다는 구원을 상징한다. (창 17:10-14, 23-27, 레 12:3, 눅 2:21).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주님은 7일째 안식일이 지난 첫날 부활하셨다. (마 28:1-6, 막 16:1-6, 눅 24:1-8). 때문에 숫자 8은 안식 후 첫날인 새 안식일, 곧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날인 주일이 됐다. (요 20:1-10). 참고로 80이라는 수의 값을 가지는 히브리어의 열일곱 번째 알파벳은 ‘입’(mouth)을 상징하는 פ‘페’이며, 헬라어 알파벳은 π‘피’이다. 성경에서 <8> 또는 <여덟>이란 숫자가 나타나는 경우는 아래와 같다. “노아의 방주에서 구원을 얻은 자가 <여덟> 명이었다.” (벧전 3:20)
“남자는 난지 <8>일 만에 할례(割禮)를 받았다.” (창 17:12)
“제 <8>년에 다시 파종(播種)할 수 있었다.” (레 25:22)
“압돈이 이스라엘의 사자가 된지 <8>년에” (삿 12:14)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8>년 동안 섬겼다.” (삿 3:8)
“여호람이 예루살렘에서 <8>년 동안 통치했다.” (대하 21:20)
“유다 왕 여호야긴이 잡혀 갈 때는 바벨론왕 <8>년이었다.” (왕하 24:12)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8>수는 ‘부활’과 ‘새 시작’ 즉 ‘새로운 질서(秩序)’를 뜻한다.
◎ 9 수론(數論)
9를 나타내는 말에는 아홉을 뜻하는 기수 תשע‘테샤’ 또는 תישיע‘티쉬아’와 아홉 번째를 뜻하는 서수 תשיעי‘테쉬이’ 가 있다. 헬라어로는 έννέα‘엔네아’와 아홉 번째를 의미하는 έννατος‘엔나토스’를 들 수 있다. 9는 8에 1을 더한 수로, 천상의 완전함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고통과 수난을 상징하기도 한다. 피타고라스학파는 9라는 수가 완전한 수로 여겨지는 10에서 1이 모자라기 때문에 불길한 수라고 여기기도 했다. 또한 성스러운 수인 3이 강화된 의미를 갖기 때문에 완성의 수로 받아들여진다. 우리 민족에 있어서 숫자 9는 조화와 완벽의 상징으로 여기는 3을 3배한 수로, 어떤 한정된 범위 내에서는 가장 완전한 수이며, 가장 큰 수로 여겨진다. 완벽한 수는 아니지만 아직도 채워야할 것이 있다는 여유와 기대감을 갖게 하는 숫자다. 예를 들어 9는 더없이 높은 지고의 수이다. 아주 큰 키를 구척장신(九尺長身)이라 하고, 매우 먼 하늘을 ‘하늘 구만리’ 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많음을 뜻하는 구사일생(九死一生)과 깊음을 뜻하는 구중궁궐(九重宮闕 : 깊은 궁궐)등도 9의 의미를 잘 표현해주고 있다. 9는 3의 3곱으로 구약성경에서 일곱 번 나오며, 심판과 종국, 완성을 의미한다.
9라는 수의 값을 가지는 히브리어의 아홉 번째 알파벳은 뱀을 상징하는 ט‘테이트’이며, 헬라어 알파벳은 θ‘데타’에 해당한다. 예수님은 아홉 또는 아홉과 관련된 개념을 죄인 하나의 회개와 연관시켜 설명한다. 곧 아홉이라는 개념은 잃어버린 하나가 돌아 올 때까지는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마 18:12-13, 눅 15:4, 7). 잃어버린 자, 곧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시간도 이스라엘 시간으로는 제 구 시다. (막 15:34, 마 27:45-46). 또한 숫자 구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는 성령, 곧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은 아홉 가지 열매를 나타내기도 한다. (갈 5:22). 참고로 90이라는 수의 값을 가지는 열여덟 번째 히브리어 알파벳은 낚시바늘(fish-hook) 또는 물고기를 낚는 갈고리(fishing hook)를 상징하는 צ‘짜디’이다.
성경에서 <9> 또는 <아홉>이란 수사(修士)가 나타나는 경우는 아래와 같다.
“호세아 제<9>년에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를 취하고 이스라엘을 사로 잡아갔고” (왕하 17:6)
“히스기야 제<9>년에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포위하였고” (왕하 25:1)
“시드기야 제<9>년에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포위하였고” (렘 39:1)
“에스겔은 제<9>년에 여호와의 말씀을 받았다.” (겔 24:1)
이러한 <9>는 <3>의 3곱이며, 그리고 구약성경에 단 <7>번만 나오고 있다. 구약성경의 <9>수는 ‘심판(審判:judgment)’ ‘종국(終局:finality)’ 완성(完成:completion)을 의미한다.
창세기 42:24 요셉이 그들을 떠나 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취하여 그들의 목전에서 결박하고.
발음
/ 샤마[ shâmaʽ ] 관련 성경 / 듣다(창 3:10, 신 5:23, 슥 8:9), 준행하다(창 22:18, 렘 35:10), 순종하다(창 26:5,
신 30:2, 사 1:19), 들어가다(삼하 19:3), 청종하다(신 4:30, 수1:17), 받다(잠13:8),
들어보다(렘18:13,19), 들리다(왕상1:45, 시26:7, 렘51:46), 예언하다(렘23:25, 29:8),
비방하다(애3:61), 분간하다(삼하14:17), 차지하다(왕상21:16), 복종하다(렘42:13), 따르다(창27:8),
알다(신28:49), 용납하다(느13:27), 깨닫다(렘5:15), 드리다(미7:7), 부르다(삼상3:10),
반포되다(에2:8), 소집하다(삼상15:4), 불러모으다(삼상23:8), 알리다(사45:21), 소리지르다(겔27:30), 소리를
내다(대하5:13), 공포하다(렘4:5, 50:2), 전파하다(렘31:7), 모이다(암3:9),소리내다(암4:5),
찬송하다(대상16:42, 느12:42), 이르다(사42:9), 증인(삿11:10, 잠21:28), 소문(느6:6). 구약 성경 / 1159회 사용
◈ 是日也放聲大哭(시일야방성대곡)
1905. 11. 20 황성신문 논설
장지연
지난번
伊藤(이등) 후작이 내한했을 때에 어리석은 우리 인민들은 서로 말하기를, "후작은 평소 동양 삼국의 鼎足(정족) 안녕을
주선하겠노라 자처 하던 사람인지라 오늘 내한함이 필경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공고히 부식케 할 방책을 권고키 위한 것이리라" 하여
인천항에서 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민 상하가 환영하여 마지 않았다. 그러나 천하 일 가운데 예측키 어려운 일도 많도다. 천만 꿈밖에
5조약이 어찌하여 제출되었는가. 이 조약은 비단 우리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삼국이 분열을 빚어낼 조짐인즉, 그렇다면 이등 후작의
본뜻이 어디에 있었던가?
2
그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대황제 폐하의 聖意(성의)가 강경하여 거절하기를 마다하지 않았으니 조약이 성립되지 않은 것인 줄 이등 후작
스스로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슬프도다. 저 개 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大臣(대신)이란 자들은 자기 일신의 영달과
이익이나 바라면서 위협에 겁먹어 머뭇대거나 벌벌 떨며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기를 감수했던 것이다. 아, 4000년의 강토와
500년의 사직을 남에게 들어 바치고, 2000만 生靈(생령)들로 하여금 남의 노예 되게 하였으니, 저 개 돼지보다 못한 외무대신
朴齊純(박제순)과 각 대신들이야 깊이 꾸짖을 것도 없다 하지만 명색이 參政(참정)대신이란 자는 정부의 수석임에도 단지
否(부)자로써 책임을 면하여 이름거리나 장만하려 했더란 말이냐.
3
金淸陰(김청음)처럼 통곡하여 문서를 찢지도 못했고, 鄭桐溪(정동계)처럼 배를 가르지도 못해 그저 살아남고자 했으니 그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제 폐하를 뵈올 것이며, 그 무슨 면목으로 2000만 동포와 얼굴을 맞댈 것인가.
4
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 2000만 동포여, 노예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檀箕(단군기자) 이래 4000년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히브리서 5:7-10
사람이 한 평생을 살아가노라면 많은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슬픔에도, 기쁨에도 외로움에도 억울함에도 안타까워서 흘리는 눈물이 있으며 그리고 동정의 눈물과 답답함의 눈물도 있을 것입니다. 아마 눈물 없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과학적으로 눈물을 분석하면 눈물샘에서 분비되는 약한 알칼리성의 액체인 물방울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 눈물속에는 과학으로 발견할 수 없는 수 많은 종류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버리우즈라고 하는 사람은 눈물은 강철을 녹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알칼리성분의 액체에 지나지 않지만 무쇠 같은 마음을 움직이고 녹이는 데는 이 눈물을 능가할 힘이 별로 없는 것같습니다.
테니슨은 '신부'라는 그의 저서에서 그대의 숨길 수 없는 눈물 때문에 그대를 사랑했노라고 했습니다. 이는 눈물이 에로스적인 애정의 의미를 담았을 때에는 무한한 애정의 웅변이 되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렇듯 눈물은 인류역사 속에서 불완전한 인간의 각종 감정을 표현하는 가장 강한 것으로 이용되어 불완전하지 않은 분이 있다면 단연 예수님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완전하신 분이였던 예수님도 눈물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과연 예수님께서도 눈물을 흘리셨을 까요? 흘리셨다면 몇 번이나 흘리셨을까요? 그것에 대한 해답은 그분의 일생을 따라
다녀보지 않고서는 말할 수가 없겠습니다만 예수님의 생애가 기록된 복음서를 통해서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복음서를 통해서는 예수님께서 일생을 사시는 동안에 세번 우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첫번째는 요한복음 11장 35절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사랑했던 나사로의
죽음을 보고 우신 것입니다. 이것은 연민의 정에서 나오는 동정의 눈물입니다.
두번째는 누가복음 19장 14절에 있는데 죄의 값으로 멸망당해야 할 예루살렘을 보고 우셨습니다. 이것은 자기민족을 향한 동족애의 눈물이었습니다.
세번째는 히브리서 5장 7절에 나오는 대로 겟세마네 에서의 고난 앞에서의 눈물이었습니다. 이 눈물은 인류 구원을 위한 사명의 눈물이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일생을 통하여 세번의 눈물을 보이셨는데 그렇다면 성도 된 우리의 삶 속에는 어떤 눈물이 있어야 할까요?
성도이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눈물을 쏟을 수는 없습니다. 흘려야 할 눈물이 분명히 따로 있습니다.
1. 참회의 눈물
시편 6장6절에 다윗의 참회가 눈물 속에는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띠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이 눈물은 다윗이 아차 실수로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난 뒤 선지자를 통하여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난 뒤 하나님께 통회하며 자복하는 참회의 눈물을 이야기합니다.
밤마다 침상을 띠우며 요를 적셔내니 얼마나 많은 눈물이 흘렀겠습니까? 이
참회의 눈물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있어 그의 왕위가 더욱 견고해졌고 가문은 빛날 수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있으면서도 그들이 흘린 참회의 눈물이
있었기에 그들은 귀환할 수가 있었습니다.
베드로 역시 주님을 부인한 자신의 모습에 대해 참회의 눈물이 있었기에
강력한 복음의 전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순간순간 짓는 죄에 대해 참회하는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한 밤중의 침상에서 때로는 기도하는 골방에서, 때로는 새벽의 성전에서라도 이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영국의 시인인 무어의 작품 '낙원'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선녀가 낙원의 문을 통과하기 위해 땅위에서 가장 용감하고 유명했던
한 애국전사의 마지막 피 한방울을 가지고 갑니다. 그러나 낙원의 입구에서 그것으로는 안된다고 거절당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기구한 운명으로 생애를 마치는 한 여인의 마지막 한 숨을 가지고 갑니다. 그러나 역시 거절당하고 맙니다. 선녀는 마지막으로 한 노인의 참회의 회개의 눈물을 가지고 갑니다. 이때 비로소 낙원의 문은 열렸습니다. 나라를 위한 피흘림이나 이웃의 동정이나 희생으로 열 수 없었떤 낙원의 문이 참회의 눈물로 인해 열렸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유명한 스펄전 목사는 마른 눈으로 천국에 갈 수 없다(No comming to heaven with dry eyes) 라고 하였다.
로마서 3장 10절에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하며 인간의 죄를 열거해 놓았습니다.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혀는 속이믈 베풀고,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며, 발은 피흘리는데 빠르고, 눈에
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라고 합니다. 우리의 삶이 무엇하나 죄에 연계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 무엇하나 죄에 연계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참으로 이 죄의 자리에서 벗어나려면 참회의 눈물의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삶과 온몸으로 지어 버린 죄에 대하여 참회개의 눈물을 흘려 보지도 못한 채 오늘까지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해오시고 있다면 그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믿음의 맛으
모르고 기독교를 가진 것이며 천국의 기쁨없이 천국의 길에 서 있는 것이며
주님의 고난을 이해하지 못한 채 십자가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2. 감사의 눈물
시편 기자는 103편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니"라고 성도가 길이 기억하여야 할 은혜가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누가복음 7장 36절 이하에 옥합향유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시몬이라고 하는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자기집에 초대합니다. 그때 같은 마을에 사는 한 여인이 흐르는 눈물과 자신의 고귀한 머리칼로 먼 길을 걸어오신 예수님의 발을 씻기고 그렇게 아끼던 향유가 든 옥합을 깨어 예수님께 부어 드립니다. 주변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으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을 칭찬하셨습니다.
이 여인에게는 자신의 삶에 구원이라는 생기를 불어넣어 주신 예수님께서 대한 뜨거운 감사가 있었기에 눈물이 있었으며, 헌신이 있을 수가 있었으며
귀한 물질이라도 아낌없이 주님께 드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성도에겐 감사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감사의 눈물은 아무에게나 있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다음의 두가지 사실을 감격의 은헤로 가진 자만이 감사의 눈물을 가질 수 있으니 그 첫째는 그리스도를 알기 전의 나의 모습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죄인이요, 멸망과 저주를 지고 살며 영벌과 지옥의 길에 있던 나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그리스도를 만나 후의 나를 알아야 합니다. 죄의 사람이 구원의 사람으로 되었으며 멸망과 지옥의 사람이 영생과 천국의 사람이 되었으며 썩어질 몸이 부활의 권세를 입으며 말세심판에 따라 환란의 고통에 가야 할 내가 공중에서 주님과
혼인잔치를 치루는 신부가 되었으며 천하디 천한 내가 가장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실패와 고통이 나날들이 눈동자 같이 지키시는 하나님의 성품에서 성공과 평강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무엇을 보셨을까요? 무엇이관대 나를 사랑하셔서 이런 축복을 주시는지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라도 단 한번 사람을 통하여 입은 은혜일망정 은혜를 잊는 사람처럼 못된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만가지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받은 은혜가 없는 것처럼 사는 우리는 아니었습니까?
감사는 모든 축복과 은혜의 근본입니다. 감사라는 말은 헬라어로 '유카라스테오'라고 하는데 이 말 안에는 축복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으니 참 축은 감사에서 비롯된다는 것이요, 기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 감사하는 신앙에 이를 때 참 기쁨을 누리는 것이며 은혜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으니 감사는 은헤가 임할 때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 감사가 넘치면 하염없는 눈물이 나도 모르는 새에 흐르는 것입니다. 이 맛을 모르고는 주를 위해 충성도 이웃을 위해 봉사도 할 수 없습니다. 감사의 눈물이 마르지를 마시기 바랍니다.
3. 동정의 눈물
요한복음 11장에서는 나사로의 죽음과 소생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사로가 죽어 장사된 자리에서 주님은 함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 눈물은 참으로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애도하는 눈물이요 사랑하는 가족의 슬픔을 함께 나누는 동정의 눈물이었던 것이빈다. 세상의 사람들도 이웃의 슬픔에 함께 슬퍼할 줄 아는데 하물며 한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신앙생활하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이 동정의 눈물은 필수의 눈물입니다. 현재의 눈물을 함께 나누어 흘릴 수 있어야 합니다.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헤디슨 테일러는 영혼을 사랑할 수록 눈물이 많아지고 눈물이 강물되어 흐를 때 하나님의 응답은 속히 실현된다고 눈물의 위력을 이야기합니다.
시편 126편에는 울며 씨를 뿌린지가 기쁨으로 단을 거둔다고 합니다. 이웃의 영혼을 위해 복음을 전하며 흘리는 눈물을 반드시 하나님께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에는 말세의 현상을 이야기합니다. 말세에는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이웃에 무정하며 감사도 없고 교만하여 원한을 품지 않는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정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눈물이, 동정의 눈물이 메마른 시대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혼이 저주와 멸망에 있어도 눈물을 흘릴 줄 모릅니다. 그 육체의 삶에 곤고를 당해도 자비의 눈물조차 말라버렸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 속에 그들을 바라보며 뜨거운 눈물 흘림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눈물이 말라버린 세대를 따라 살지 말고 참회의 눈물로 구원의 반열에 굳게 서서 하루하루의 생활에 감사하며 감격의 눈물로 찬송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이웃의 고난을 나의 고난으로 나누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동정의 눈물을 가지고 천국의 기쁨이 충만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탈무드 :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
어느
날 하나님께서 천사들에게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을 찾아오게 했습니다. 맨 처음 천사는 다이아몬드를, 두 번째 천사는 젊은 여인의
아름다움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두 가지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않으셨는데 세 번째 천사가 가지고 온 ‘죄인들이
참회할 때 흘린 눈물을 담은 그릇’을 보시고 매우 흡족하게 여기시며 “네가 가장 귀한 것을 가져왔도다.”라고 칭찬하셨습니다.
▣ 눈물의 힘
중국 난징에는 마음놓고 울 수 있는 '눈물 방'이 등장하여 성업 중이라고 합니다. 시내 한 호텔에 문을 연
'쿠바'에는 하루 평균 10명의 손님이 찾아와 속상한 마음이 풀릴 때까지 울고 간다고 합니다. 요금은 1시간에 50 위안(약
7500원)으로 고춧가루와 마늘 등 눈물이 나오도록 도와주는 최루 촉진제와 울다가 감정이 격해지면 손님들이 마음대로 던질 수 있는
유리잔이나 인형 등도 비치해 놓고 있다고 합니다.
눈물은 인간에게 주어진 고귀한 액체입니다. 사람을 눈물 흘리게
만드는 감정에는 170가지나 된다고 합니다. 눈물은 인간의 순수한 감정에서 흘러내리는 마음의 이슬이며 감정의 샘물이고 양심의
표현입니다. 사람은 슬퍼도 울고, 기뻐도 울며, 분을 이기지 못해 울고, 상대방의 공격을 중지시키기 위해서도 울고,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서도 웁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자기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의 표현이 울음이고, 자기의 생을 다 마치고
떠날 때 눈물을 흘리게 함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고 떠납니다. 눈물은 인간의 존재 양식이며 알게 모르게 항상 눈물을
흘리면서 삽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 '정서적 눈물'을 흘리고, 마늘이나 양파의 냄새를 맡으면 '자극적 눈물'이 나며, 하품을 할
때처럼 ‘자연발생적 눈물’을 흘리고, 때로는 감정이 결핍된 ‘하얀 눈물’을 흘리며 삽니다.
우리 조상들이 사용했던
눈물에 대한 표현은 다양합니다.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을 체(涕), 남 몰래 흘리는 눈물을 설(洩), 갈라져 흐르는 눈물을
사(泗), 눈물이 방울져 흘렀을 때 환, 콧물과 더불어 흘리는 눈물을 이, 펑펑 쏟는 눈물을 누(淚), 눈물을 눈 가장자리에
고여두고 흘리지 말아야 하는 눈물을 루라 했습니다. 실험실에서 사람의 눈물을 분석한 결과 물이 90%, 소금이7%, 단백질이
2%, 점액소가 1%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똑같은 눈물이라도 어떤 경우에 흘리느냐에 따라 그 화학적 성분이 다르다고 합니다. 마늘
냄새를 맡고 흘린 눈물보다 슬플 때 흘린 눈물에 단백질이 많고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 중 어느 쪽이 흥분하느냐에 따라 눈물의
성분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화를 내 교감신경의 흥분으로 눈물을 흘리면 수분이 적고 나트륨이 많게 되며, 슬프거나 기쁠 때
부교감신경의 흥분으로 눈물을 흘리게 되면 수분의 양만 많아진다고 합니다.
어떤 눈물이든 눈물에는 힘이 있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정화하는 힘이 있습니다. 눈물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정서 순화를 뜻하는 '카타르시스' 효과가 있습니다.
비극(悲劇)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면 불안. 긴장감 따위가 해소돼 정서가 순화되며 마음의 정화(淨化)가 일어납니다. 프로이드에
따르면 현대인이 마음의 병에 걸리면 울어야 할 때에도 울지 못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눈물이 없는 사람은 불행하다고도
말합니다. 눈물에는 감정 냉각 효과가 있습니다. ‘비누로 몸을 씻고 눈물로 마음을 씻는다’는 말처럼 눈물을 많이 흘리면 마음이
깨끗해집니다. 울고 나면 가뭄에 기다리던 비가 내린 것같이 마음이 촉촉히 젖고 희망이 움트고 삶의 윤기가 넘쳐흐릅니다. 눈물은
더러운 마음을 깨끗하게 해 주는 세정제와 같습니다. 눈물이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긍정적인 사고를 지니고 뇌에 더 많은 산소가
공급되어 정신을 맑게 해준다고 합니다. 성경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눈물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위력은 총과 칼, 번뜩이는
예지와 분별력보다 눈물입니다. 눈물은 흡인력과 영향력이 있습니다. 풍부한 경험과 지식, 세계적인 견문과 탁월한 지휘 능력, 순수한
열정과 복잡한 업무 처리 능력보다 더 강한 의지와 힘이 눈물 속에 있습니다. 눈물은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영롱한
새벽이슬과 같아서 얼은 마음을 녹이는 힘이 있고, 각오와 결심을 새롭게 하는 힘이 있으며, 메마른 가슴에 긍휼과 사랑, 인애를
채우는 힘이 있습니다. 모니카의 눈물의 기도는 탕자 어거스틴을 성 어거스틴으로 변화시켰습니다.
눈물은 인간의 신체를
건강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18세기말 프랑스의 화학자 라부아지에가 눈물에 관한 최초의 과학적 분석을 시도한 이래 과학자들은
눈물에 대하여 연구한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세인트폴램지'의료원의 '윌리엄 프레이'박사는 눈물은 체내의 독성을 제거, 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밝혔습니다. 미국 '미테소타'대학 연구팀의 연구는 눈물에 있는 로이신인케팔린은 인체 내에서 자연적인 진통효과를 내는
호르몬인 엔도르핀과 같은 것으로 이 물질은 양파를 썰 때 나오는 물리적인 눈물에는 없고 슬프거나 기쁠 때 나오는 감정적 눈물에만
있다고 했습니다. 일본의대의 요시노 신이치 명예교수는 "운다는 것은 웃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울면 '내추럴
키라'(NK) 세포가 활성화되어 면역기능이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남자가 여자보다 장수하지 못하는 이유도 여자보다 눈물을 덜
흘리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눈물은 영적인 힘이 있습니다. 눈물은 종종 천국을 볼 수 있게 해주는
망원경입니다. 스펄전 목사는 "마른 눈으로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라고 했습니다. 순수한 눈물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합니다.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흘렸던 다윗의 눈물(시 6:6), 고난 속에서 흘렸던 욥의 눈물(욥 16:20), 죽음의 절망속에서
흘렸던 히스기야 왕의 눈물(사 38:5), 고난 당하는 민족의 아픔 때문에 흘렸던 예레미아 선지자의 눈물(애 1:2), 죄인들을 위해
흘리신 주님의 눈물(히 5:7) 등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어 눈물 흘리는 자들에게 용서와 치유, 회복, 기쁨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 34:18)”
이 세상에는 많은 눈물이 있습니다. 슬픔의 눈물,
아픔의 눈물, 반가움의 눈물, 환희의 눈물, 참회의 눈물, 억울한 눈물, 남몰래 흘리는 눈물, 승리의 눈물, 생리적인 눈물 등이
있습니다. 이런 많은 눈물 가운데 가장 값진 눈물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모든 눈물은 그 자체로 값진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으로 대신할 수 없는 귀중한 것입니다. 값지고, 값 싼 것을 구별할 수 없습니다.
눈물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하는데 첫째는 자기를 위해서 우는 눈물이요, 또 하나는 남을 위해서 우는 눈물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한 번도 우시지
않았습니다. 가난해서 먹을 게 없어도 아무리 매를 맞아도, 가시관을 쓰시면서도 울지 아니하셨고, 십자가를 지시면서도 예수님은 울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을 위해서 우셨습니다. 나보다 더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 더 고통을 받는 사람, 더 외로운
사람, 병든 사람, 슬픈 사람을 위해서 우는 눈물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크게 두 번 우셨습니다. 죽은
나사로의 무덤에서 우셨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우셨습니다.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실 이유가 하나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위해서 울지 아니하셨습니다.
본문의 배경을 보면, 예루살렘 부근 베다니에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의 가족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주님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다른 동네에서
전도하고 계실 때, 나사로가 병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로 오지 못하셨고 그 사이 나사로는 죽었고 죽은지 나흘이 되어
벌써 시체에서 냄새가 나는데 그때서야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마르다와 마리아와 많은 조문객들도 웁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도 우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묻혀 있는 돌무덤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신 후 “나사로야 나오너라”라고
말씀하실 때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되어 냄새나는 몸을 이끌고 걸어 나오는 장면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 < 예화
/ 탈무드 :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 > 어느 날 하나님께서 천사들에게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을 찾아오게 했습니다. 맨
처음 천사는 다이아몬드를, 두 번째 천사는 젊은 여인의 아름다움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두 가지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않으셨는데 세 번째 천사가 가지고 온 ‘죄인들이 참회할 때 흘린 눈물을 담은 그릇’을 보시고 매우 흡족하게 여기시며 “네가 가장
귀한 것을 가져왔도다.”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자비와 긍휼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눈물을 흘렸다는
것은 바로 약한 자, 슬퍼하는 자, 병든 자, 죽음을 앞에 놓고 절망에 빠져있는 자에게 자비와 긍휼을 보여주심을 의미합니다. 이
긍휼이라는 것은 동정심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조건 없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긍휼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제사보다 긍휼을 원하십니다. 긍휼은 고난당한 자와 함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우는 것입니다. 그들이 당한 상황 속에 함께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가슴속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우는 자와 함께 울고,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할 줄 아는 사람, 그게 참된 믿음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앞에서 누군가가 생명이 관계된 일로 울면 주님의 마음이 약해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눈물에 함께 참여하면서 그들의 슬픈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회당장 야이로라 하는 사람의 딸이 병들어서 죽어갈 때, 예수님 앞에 달려와서 고쳐주시기를 원합니다. 그 말을 들으신
예수님이 회당장의 집으로 갔는데 가는 도중에 딸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신 후
집으로 들어가 죽은 어린아이에게 손을 대시며 “달리다굼,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하니 금방 아이가 살아났습니다.
또한
누가복음 7장에 보면 나인성의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내용이 있습니다. 죽은 아들의 상여를 뒤따라가며 통곡하는 과부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우는 모습을 보더니 가까이 가셔서 여인을 향하여 “울지 말라”고 달래시면서 관에 손을 대시며, 관속에
누워있는 시신을 향하여, “청년아 내게 네게 명하노니 일어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때 이 청년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하나님은 눈물에 약하십니다. 그래서 눈물에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한나의
눈물의 기도에 사무엘을 주셨고 다윗의 눈물의 기도에 그를 왕위에 오르게 하셨고 히스기야의 눈물의 기도에 그의 생명을 15년
연장하셨고 베드로의 회개의 눈물에 부활 후 제일 먼저 그에게 나타나시고 그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랑하는 가족,
즉 남편과 아내 자녀를 위해 눈물로 하나님께 아뢰어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보시고 우리의 가족을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눈물이 있는 곳에 용서가 있고, 화해가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시기와 질투로 은 이십에 노예상인들에게 팔리고 애굽의 보디발 장군의 집으로 팔려갔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보디발의 가정총무가 되고 나중에는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그는 하나님께 계시의 지혜를 얻어서 7년 풍년동안 양식을
저장했다가 7년 흉년을 대비했습니다. 그래서 애굽 사람들은 지혜로운 요셉 덕에 굶어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서 양식이
떨어져 양식을 위해 애굽에 온 자기의 형들을 보고 골방에 들어가서 막 울었습니다.
요셉은 예수님의 이전의 사람이지만
그는 십자가 정신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베냐민을 끌어안고 울었고 다른 열 명의 형들을 끌어안고 울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용서가
되었고, 화해를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마음에도 평안이 왔고, 불안에 떨었던 열 명의 형들이 다 편안한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눈물이 있는 곳에 화해가 있습니다. 야곱과 에서가 만나서 서로 끌어안고 실컷 울더니 원수가 친구로, 형제로 바꾸어졌습니다. 눈물은 이처럼 위대한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눈물과 은혜는 정비례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은혜 많은 사람에게 눈물이 많습니다. 찬송만 불러도 눈물, 성경만 읽어도 눈물, 설교만 들어도 눈물, 기도만 해도 눈물이 쏟아지는 사람은 은혜가 충만하고 사랑이 많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에 우는 날이 많았습니다.(히5:7) 십자가를 지고 만민의 죄를 사하는 희생제물이 되시려 눈물
흘려 기도했습니다. 사명 감당을 위한 기도, 그리고 사랑하는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함께 우셨던 주님, 멸망해 가는 예루살렘을
바라보고 우셨던 주님이셨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면서 우셨습니다. 왜 우셨습니까? 그들을
회개코자 보냈던 선지자들을 외면하고 돌로 쳐 죽이고 직접 오신 예수님을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얼마 후 하나님의 진노로 이
성이 다 멸망하리라는 것을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나라는 경제적인 위기로 인한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또한 북한의 미사일 발사로 인한 갈등의 최고조에 있습니다. 이러할 때 우리의 눈물이 필요합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슬픔을 당한
우리 이웃을 위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예수님처럼 우리의 눈물의 기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우셨던 것처럼 이웃을 위해 눈물을 흘리십시오. 그 눈물은 우리의 마음에, 그리고 내 이웃의 마음에 천국을
만들어줍니다. 슬픔을 나눔으로 기쁨을 회복하는 능력이 되고, 고통을 나눔으로 영광을 회복하는 능력이 됩니다.
우리가
흘리는 눈물에는 공짜가 없습니다.(시편126:5-6) 내 죄를 통회하면서 흘리는 회개의 눈물이나, 내 이웃을 위해 흘리는
눈물이나,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흘리는 눈물, 이 거룩한 눈물에는 절대로 거저가 없습니다. 우리가 눈물을 흘린 만큼 언젠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한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주님의 놀라운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 예화 / 탈무드 :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 > 어느 날 하나님께서 천사들에게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을 찾아오게
했습니다. 맨 처음 천사는 다이아몬드를, 두 번째 천사는 젊은 여인의 아름다움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두 가지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않으셨는데 세 번째 천사가 가지고 온 ‘죄인들이 참회할 때 흘린 눈물을 담은 그릇’을 보시고 매우 흡족하게
여기시며 “네가 가장 귀한 것을 가져왔도다.”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예화 / 일본 승려 양관화상
일본에
양관화상이란 저명한 승려가 있었습니다. 그가 어느 집 불량한 아들을 데리고 3개월간 한 방에서 생활하게 되었는데 스님은 3개월이
지나도록 꾸중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이 아들도 조금의 뉘우치는 구석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아들을 맡긴 아버지도
스님의 무관심과 침묵에 불만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3개월이 지나고 스님이 절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집 아들이
스님을 전송하러 나왔습니다. 스님이 신발 끈을 메다 말고 그 집의 아들에게 좀 도와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아들이 허리를 구부려
신발 끈을 메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손등이 뜨거웠습니다. 스님의 두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후로 그 집의 아들은
스님에게 감화되어 새 사람이 되어 바르게 살았다고 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변화될 수없는 강퍅한 인간일지라도 눈물이
있는 곳에는 변화가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눈물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고, 길이 없는 우리 인간을 위해 흘리신
눈물입니다. 우리 주님의 눈물을 본받아
우리 자신과 가정을 위해, 우리의 이웃을 위해,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눈물 흘려 기도함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눈물에는 신비한 힘이 있다
시카고 지역에서 거리의 깡패들을 전도하기로 유명한 분이
있다. 그의 이릉은 클로넬 클라크(Colonel Clark of Chicago)다. 그런데 그에게 붙여진 불명이 있는 데, 눈물의
사람이라는 별명이다. 그만큼 그는 눈물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깡패. 술주정뱅이. 쓰리꾼 이런 사람들을 5-600명씩 모아
전도를 했는데, 말은 산만하고 어리숙하였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가 전한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다.
시카고
지역에는 유명한 목사님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유명한 목사님들이 와서 설교해도 별 감화를 받지 않았다. 그런데 이들은
클라크씨가 와서 말씀을 전하면 항상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 그만큼 클라크는 감화력이 있는 말씀으로 다가갔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그의 눈물이었다고 한다. 말은 어둔하였지만 진심에서 나오는 눈물이 빗나간 저들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한
번은 눈물이 많기 때문에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눈물을 흘리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의 결심대로 눈물이 멈추긴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부터는 감화와 은혜로움이 사라졌다. 결국 그는 다시 하나님께 기도하여 눈물을 되돌려 달라고 강청해서 다시 눈물을
회복했다고 한다.
사실 눈물을 양이나 물리적 가치를 따지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눈물은 미소한
액체이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큰 힘이 있다. 특별히 하나님께 향한 눈물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고 개인이나 국가의 운명을
바꾸는 위대한 힘이 있다.
어떤 분은 “눈물이 없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은 도둑에게 돈 가방을 맡기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만큼 눈물이 없는 사람의 마음은 메마르고 강팍하기 쉽다는 뜻이다.
반대로 눈물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할 뿐
아니라 자신의 마음도 부드럽게 한다. 눈물이 있는 온정이 있다. 그 마음이 감성적이다. 타인이나 상황에 대하여 선한 마음을
갖는다. 그러므로 막힌 담을 헐고 서로를 이해하고 하나 되게 한다.
예수님에 대한 기록을 보면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우셨다는 기록은 세 번 이상 기록되어 있다. 특별이 예수님은 겟세마네에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히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라고. 간절한
기도에 뜨거운 눈물이 있었던 분이셨다는 뜻이다. 물론 예수님의 웃음이 기록되지 않은 것은 웃음이 없으셔서 그렇게 기록된 것은
아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마음이 부드럽고 감성적이셨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살면서 선지자
예레미야와 같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흘리는 눈물은 무엇보다 소중하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편
126:5-6절)”라고. 눈물이 기쁨의 열매를 맺게 하는 요소라고 하겠다.
같이 우는 것의 즐거움만큼 사람들의 마음을 결합시키는 것은 없다. - 루소 그대에게 눈물이 있다면 지금 그 눈물을 흘릴 준비를 하라. - 셰익스피어 나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야누스이다. 한 얼굴은 웃고 다른 얼굴은 울고 있는 것이다. - 키에르케고르 남자가 온갖 말을 다하여도 여자가 흘리는 한 방울의 눈물에는 당하지 못한다. - 볼테르 눈물 속에서는 갈 길을 못 본다. - W. 베넘 눈물도 역시 유용(有用)하다. 눈물로써 강철을 녹일 수 있다. - 오비디우스 눈물에도 그만한 쾌감은 있다. - 오비디우스 눈물은 눈의 고상한 언어이다. - 로버트 헤리크 눈물은 성수(聖水)이다. - 셰익스피어 눈물은 슬픔의 말없는 언어이다. - 볼테르 눈물은 아무리 막으려 해도 흘러내린다. 또한 흘러내림으로써 영혼을 진정시킨다. - 세네카 눈물은 인생을 살리고 땀은 가난을 구한다. - 서양 속담 눈물은 천만 단어의 말보다 힘있는 웅변이다. - 워싱턴 어빙 눈물을 흘린 일이 없는 젊은이는 멋이 없는 자이며, 웃음이 없는 노인은 어리석은 자이다. 눈물이 많은 것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이다. 보는 사람이 없으면 눈물은 말라버린다. - 세네카 사실 우는 것은 괜찮다. 울음으로써 우리는 분노를 해소하고, 눈물은 흐르는 시냇물처럼 우리 가슴을 씻어낸다. - 오비디우스 숙녀의 눈물은 무언(無言)의 웅변이다. - 버몬트와 플레처 아내는 세 가지의 눈물을 가지고 있다. 괴로움의 눈물, 초조의 눈물, 거짓의 눈물. - 네덜란드 속담 여자의 눈물보다 더 빨리 마르는 것은 없다. - 토마스 풀러 여자의 눈물에 감동하지 말라. 여자들은 눈이 울도록 가르쳤다. - 오비디우스 우는 것도 일종의 쾌락이다. - 몽테뉴 우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거만한 자를 경멸하라. - 에드워드 영 우리는 우니까 슬퍼지고, 도망가니까 무서워지고, 웃으니까 즐거워지는 것이다. - 제임스 랑게 웃어라, 그러면 이 세상도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그러면 너 혼자 울게 되리라. - 윌콕스 웃음과 눈물은 똑같은 감각의 수레바퀴를 돌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자는 바람의 힘이요, 후자는 물의 힘이다. - 올리버 웬델 홈즈 웃음도 눈물도 그렇게 오래 가는 것은 아니다. 사랑도 욕망도 미움도 한 번 스치고 지나가면 마음속에 아무런 힘을 미치지 못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어네스트 도슨 인간은 눈물을 흘림으로써 세상의 죄악을 씻어낸다. - 도스토예프스키 일하는 물은 눈물뿐이다. 젊었을 때 울지 않는 자는 야만인이요, 늙어서 웃지 않는 자는 얼간이다. - 산타야나 젊음엔 눈물이 있으나 슬픔이 없고, 노년엔 슬픔이 있으나 눈물이 없다. - 룩스 하나님은 인간들이 눈물이 없는 보이지 않는 땅을 볼 수 있을 때까지 눈물로써 그들의 눈을 씻기신다. 함께 우는 것만큼 사랑의 마음을 결합시키는 것은 없다. - 루소 흐르는 눈물은 괴로우나 그보다 더욱 괴로운 것은 흐르지 않는 눈물이다. - 아일랜드 속담 너는 누구의 아들이냐?
미국 테네시 주의 한 작은 마을에서, <벤 후퍼>라는 아이가 태어났다. 날 때부터 아주 작은 체구였고,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생아였다. 마을 사람들은 자기 자녀들이 그런 벤 후퍼와 어울려 노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아이들도 그를 놀리며 멸시했다. 벤 후퍼가 12살이 되었을 때, 마을의 교회에 젊은 목사님이 부임했다. 그는 그때까지 단 한 번도 교회에 가 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 목사님이 가는 곳마다 분위기가 밝아지고 사람들이 격려를 받는다는 소문을 듣고서는 꼭 한 번 교회에 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교회에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매번 사람들을 의식해 예배 시간에 늦게 들어가 슬그머니 뒷자리에 앉았다가 축도 시간이 되면 다시 슬그머니 빠져나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주일, 벤 후퍼는 목사님의 설교에 너무나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감동에 젖어 눈을 감고 말씀을 되새기고 있는데, 벌써 그 사이에 예배가 끝나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별 수 없이 벤 후퍼도 사람들 틈에 끼어 나오면서 목사님과 악수를 하게 되었다. 목사님은 12살 된 어린 소년 벤 후퍼를 보고 미소를 짓더니 “네가 누구 아들이더라?” 하고 물었다. 깜짝 놀란 사람들이 모두들 숨을 죽이고 흥미로운 시선으로 일이 어떻게 될 것인가 궁금해 하며 목사님을 쳐다보았다. 그렇지만 목사님은 조금도 당황해하지 않고, 다시 환한 얼굴로 벤 후퍼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래, 네가 말하지 않더라도 나는 네가 누구 아들인지 알겠다. 너는 네 아버지를 닮았기 때문에 금방 알 수가 있어!” 목사님은 계속해서 말했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그러니 하나님의 아들답게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고개를 숙이고 돌아가는 벤 후퍼의 등에 대고 목사님은 말해주었다. 세월이 흘러 그 벤 후퍼가 테네시 주의 주지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 취임식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때 그 목사님을 만나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던 그날이 바로 테네시 주의 주지사가 태어난 날입니다.”
벤 후퍼는 1870.10.13. Newport, Cocke County에서 태어났다. 생부는 르무엘 후퍼 박사였고 생모는 Sarah Wade였다. 혼외 결혼으로 태어난 벤은 출생신고를 할 수 없었고 주위의 눈총도 따가웠으리라 생각된다. 그래서 엄마는 세 도시를 전전하며 아기를 데리고 이사를 다닌다. 세 번째 도시 녹빌에서 엄마는 아들 벤을 감독교회가 운영하는 성 요한 고아원에 맡긴다. 그 후 9살이 되자, 벤은 자기 친부 후퍼 박사에게 합법적으로 양자로 입적되었다. 그 때부터 벤은 후퍼 라는 성을 가지게 되었고, 그 후부터 친부에게서 양육되었다. 후에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법대에 진학해서 변호사가 되었고 나중에는 테네시주 주지사가 되어서 2번 더 재선에 성공했으며 상원의원으로도 2번이나 임기를 마쳤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권면하는 것이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라.(벧전4:11)”
하나님 닮기를 원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말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는 사실이다.
▣ 자신을 안다는 것
누군가 헬라 철학의 대가 탈레스에게 물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입니까?” 그는 “자신을 아는 일”이라고 답했습니다. 또 “가장 쉬운 일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더니 “남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더 배웠다고, 더 많이 가졌다고 잘난 척하지 마십시오. 별것 아닙니다. 남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입니다. 무책임합니다.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인디언 슈익스라는 사람은 “남의
이야기를 하려면 그 사람의 신발을 신고 1주일은 걸어다녀 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좀
더 진실하게 나를 드러낸다면 다 같이 보잘것없는 인간이요, 부족한 죄인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나은 것이
별로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철학자가 될 수는 없으나 이런 깨달음이 너무 늦게야 찾아오는 것이 인생의 아쉬움입니다.
그래서 꽃말에 맞게 장례식장엔 국화, 어머니날엔 카네이션, 성탄절엔 포인세티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장미, 부활절엔 백합꽃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고 태어난 나를 상징하는 단어는 무엇인가? 나를 상징하는 말을 만들어 갑시다.
▣ 너는 누구냐?
어느 날 14세의 소녀 소피가 이름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편지를 받는다. 그 편지에는 짤막하게 "너는 누구냐?"라고만 적혀 있었다. 소피는 거울을 들여다 보며 "너는 누구?"라고 자문해 본다. 그리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른다니 좀 이상하지 않나 하는 의문을 품는다.
'게다가 자기 얼굴인데도 자기가 결정하지 못한다니 그럴 수 있어? 친구는 내가 고를 수 있는데 내 얼굴은 내가 고르지 못한다. 인간이 된다는 것도 내가 선택한 게 아니다.' 이렇게 생각한 끝에 소피는 〈인간이란 뭣인가?〉하는 의문을 처음으로 품게 된다.
다음날 그녀는 또 한장의 괴상한 편지를 받는다. 이번에는 그냥 "세계는 어디에서 왔는가?"라고만 적혀 있었다. 그런 걸 누구든 알턱이 없지 않나 하고 웃어넘기려다 문득 생각한다. 세계가 어디서 왔는지를 전혀 물어보지도 않는 채로 산다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는가고.
그런지 며칠 후에 그 이름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긴 편지가 왔다.
이번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 '사람이 사는 데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이냐?'고 굶주린 사람에게 묻는다면 먹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
다.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은 따스함이라 대답할 것이고, 외로운 사람은 벗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본조건이 모두 충족된다 하더라도, 그래도 사람들에게 절실한게 있을까? 그렇다. 사람은 모두 먹어야 하고, 사랑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밖에도 절실한 게 있다. 우리는 누구인가, 왜 살고 있는가를 알고 싶어하는 절실한 욕구를 우리는 갖고 있다…."
〈철학자로부터의 이상한 편지〉라는 부제가 붙은 [소피의 세계]
는 이렇게 시작된다. 노르웨이의 작가 요스타인 골델이 쓴 이 책은
미국에서는 대학의 철학 부독본으로까지 채용되고, 일본에서는 7백페이지 가까이나되는 두꺼운 책인데도 60만부나 팔렸다.
그것은 고대신화로부터 칸트 마르크스 프로이트를 거쳐 현대의
우주론에 이르는 철학의 역사에 관한 얘기책이다. 그게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가 된 것은 마치 14세 소녀를 위한 미스터리 소설처럼 알기 쉽고도 흥미롭게 엮어진 때문에서만이 아니다.
불확실한 시대를 살고있는 우리에게 사고의 원점에 돌아가서 "당신은 누구인가?"하는 기본문제를 풀도록 일깨워주고 있기 때문이다.
"너는 누구냐?" 하는 물음에 대해 당장에 나오는 해답은 "나는 한국인"이다. 그러나 "한국인은 누구냐?"고 재차 물을 때 여기 만족스럽게 해답을 내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무도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해보지 않았으며, 또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은 채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라는 의문사다. 사람에게 지혜를 불어넣어 주는 것도 [왜]라는 의문이다. 그런 [무엇]과 [왜]라는 의문을 티끌만치도 품지 않은 채 우리는 마냥 달리고 있다.
그나마 앞을 향해 달리고 있는지 아닌지조차 우리는 조금도 의심치 않고 있다. 고 대 희랍의 철학자 탈레스가 어느 날 우주의 신비로움을 생각하며 하늘을 쳐다보며 걷다 발을 헛디디고 물에 빠졌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발 밑에 있는 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하늘을 안다는 것이냐?"며 비웃었다.
우리는 지금 발 밑에만 정신이 팔려서 먼 산에서 무슨 비구름이
몰려오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 빛을 보기 위해서 눈이 있고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귀가 있다. 그리고 생각을 하기 위해 사람에게는 머리가 있고 마음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도 머리를 쓰지 않고 있다.
모두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는 방향감각을 잃었으며, 어디로 가야 하는가 하는 목적의식도 잃고 있다. 오늘의 세계는 물론이요, 내일의 인류에 대해서 불안을 느끼지 않는 것은 우리 한국인뿐인 것만 같다.
한마디로 우리는 생각하는 버릇을 잊고 있다. 그만큼 우리는 철학을 멀리하고 있다. 우리는 마치 과학 또는 과학적 기술만이 행복에
이르는 우리의 길을 비춰주는 유일한 등불인 것처럼 여기고 있다.
분명 과학은 우리나라의 고도성장의 기둥이 된다. 그것은 세계화를 서두르는 우리의 추진력이 되어준다. 그러나 과연 고도성장이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어 줄 것인지, 또는 이른바 세계화가 우리의 아이덴티티를 어떻게 바꿔놓을 것인가하고 의문을 품어보는 사람이 없다.
우리는 21세기를 향해 잘 달리고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그러나 21세기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엉뚱하게 다를지도 모른다. 여기대해 대답해 줄 수 있는 철학자가 우리나라에는 없다.
또 [소피의 세계]가 우리나라에서 번역된다 해도 과연 몇부나 팔릴지 의심스럽다. 우리가당면하고 있는 가장 큰 위기는 바로 이런 데 있다.
우리는 지금 걸음을 멈추고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사는가?] [나는 제 길을 걷고 있는가?]고 한번쯤만이라도 돌이켜 생각해 보아
야 한다. 우리는 지금 엉뚱한 길을 걷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05-31-2023(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창세기 45장 / 나는 요셉이라(3절)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능히 대답하지 못하는지라. Joseph said to his brothers, "I am Joseph! Is my father still living?" But his brothers were not able to answer him, because they were terrified at his presence.
요셉은 형제들에게 자기의 정체성을 드러냈습니다. "나는 요셉이라(I am Joseph!)"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 하지 못하고 모든 사람들을 물러 가라고 한 후에 큰 소리로 울었는데 그 울음 소리가 바로의 궁중까지 들렸다고 합니다.
열 일곱 살에 애급의 노예로 팔려와서 설흔 살에 애급의 총리가 되었고 칠 년의 대풍을 맞이하여 대기근을 준비한 후 이제 기근의 때가 이 년이 지났을 무렵입니다. 아직도 기근의 때가 오 년이 남았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나이까? "하니 형들은 놀라서 아무 말도 못하고 요셉은 형들에게 "가까이 오소서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며 당신들이 애굽에 판자라 당신들이 나를 애굽이 팔았다고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보다 먼저 보내셨다"고 말합니다(1-5절).
유다의 간곡한 호소는 그동안 형들이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들이 아버지와 베냐민까지도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했습니다.
요셉이 얼마나 큰 소리로 울었는지 애급의 모든 사람들에게 들리고 바로의 궁정에도 들렸다고 합니다. 그동안 가족과 떨어져 타국에서 홀로 지내며 가졌을 그리움도 힘든 세월을 보낸 아픔도 다 녹아져 내리는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이제까지 죽었다고만 생각한 요셉이 그것도 애굽의 총리가 되어 살아있었다고 하니 형들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자기를 애급에 팔았다고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고 그들을 안심시킵니다. 그리고 요셉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합니다.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먼저 보내셨다고 말합니다.
오늘의 장면은 보는 우리들도 감격스럽지만 가장 우리의 마음이 녹아져 내리는 것은 요셉이 형들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말할 때입니다.
우리들도 살아 오면서 어떤 상황이나 어떤 사람들로 인해서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가지고 살아서 우리들의 마음에 씻어질 것 같지 않은 상처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모든 상황이 다 해결되고 그 사람이 용서를 구하지 않아도 우리의 마음에 상처가 치유되고 맺혔던 것들이 풀어 지는 것은 그 모든 일을 나에게 허락하신 것은 하나님이시라고 믿고 확신할 때입니다.
그리고 오늘 요셉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자기를 애급에 먼저 보내셨다고 그 모든 일을 해석하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이 그 일들을 허락하신 이유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고통과 어려움을 허락하신 것은 하나님의 이런 뜻이 계시기 때문이였다고 하나님의 섭리를 바르게 해석할 때에 우리의 모든 상처는 씻어지고 회복될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두 개의 렌즈는 현미경과 망원경입니다. 나를 바라볼 때는 현미경을 사용하는 것처럼 살펴보고 세상을 바라볼 때는 저 멀이 있는 것까지도 볼 수 있는 망원경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의 크신 섭리안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오늘도 나의 갈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생각하고 감사하므로 오직 주님만 바라봅시다.
요셉은 "이 땅에 이 년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앞으로 오 년동안 추수를 못할 것이라 하나님께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후손들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먼저 보내셨으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보내셔서 애굽의 통치자로 삼았으니 속히 가서 아버지에게 요셉이 애굽의 주가 되었으니 지체말고 오셔서 나와 가까운 고센 땅에 계시면 앞으로 오 년 흉년동안 내가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족을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고 합니다(6-11절).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은 한 사람 요셉으로 인해 그 형제들도 자기들에게 죄책감을 주던 그 일이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것을 알면서 얼마나 감사와 안도감을 느꼈을까요?
하나님의 섭리를 먼저 깨달은 사람은 많은 사람을 유익하게 하고 많은 사람들을 자유케 할 수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으로 우리의 삶을 해석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어둡게 하고 우리를 속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랜 세월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얽매임을 당하고 살게 합니다.
우리는 매 순간 깨어 있기 위해 기도하여야 하며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말씀을 알기 원합니다. 성령께서 늘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수 있도록 지혜를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삶을 성령으로 충만하여 살기를 원합니다.
요셉은 이제 당신들이 보고 들은 것을 다 아버지에게 전하고 속히 모시고 오라고 하며 베냐민을 안고 울고 베냐민도 웁니다. 요셉이 형들을 입맞추고 우니 그제야 형제들이 요셉과 말을 합니다(12-15절).
하나님은 인간적이고 이기적이고 부족하기만 했던 이 가정의 모든 허물을 용서하시고 상처들을 회복시키시고 모든 것을 축복으로 바꾸셨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셨습니다(로마서 8:28).
우리들도 이 은혜를 우리의 삶속에서 발견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모든 일에 감사하고 살기를 원합니다.
자신의 모습을 감추어 오던 요셉은 더는 북받치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자신의 정체를 형제들에게 밝혔습니다. 그 순간 걷잡을 수
없는 울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 울음에는 그동안의 서러움, 그리움, 감사함, 감격 등 모든 감정이 다 고스란히 담겨 있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울었던지 그 울음소리는 바로의 궁중에까지 들렸습니다. 이제 요셉은 자신의 정체를 밝혔지만, 형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지, 아니면 지은 죄로 인해 두려워서인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놀라서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던 형들에게 요셉은 자신이 누구인지 가장 명확히 알 수 있는 한 말을 했습니다. “당신들이 애굽에 판자라”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형들은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형들은 자신들만의 비밀로 꼭꼭 숨겨두었을 텐데, 그 사실을 아는 것으로 보아 분명 애굽에 팔려간 당사자인 요셉임을 의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형들의 죄를 추궁하고자 이 일을 얘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문 5~8절이 이를 잘 말해줍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요셉은 형들의 죄를 추궁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화해를 위한 시도였습니다.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면 가장 두려워할 자들은 바로
요셉을 죽이려 했던 형들이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애굽의 총리자리면 복수가 별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충분히 힘을 가진
자리였습니다. 형들은 ‘요셉이 살아있었구나’ 하는 안도감도 잠시 ‘이젠 죽었구나!’ 하는 근심과 두려움이 밀려들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자신이 정체를 밝히면 형들은 분명히 이 일로 큰 근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힐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먼저 이 이야기를 꺼내 안심시켜야 할 필요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라는 말로 안심을 시킵니다.
그리고 15절에 보면, 요셉이 형들과 일일이 다 입을 맞추고 부둥켜 안고 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분명 요셉은 과거 형들의 잘못을
용서했고 진정한 화해를 이루려 하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장면입니다. 이 일후에 형들은 드디어 요셉의 본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본문이 “그제서야 형들이 요셉과 말을 시작했다”라고 적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요셉은 형들과 화해를 이룰 수 있는 원동력이 된 중요한 한 고백을 합니다.
그 고백은 바로 요셉을 애굽으로 보낸 것이 형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고 애굽의 총리자리에 서게 해 주신분도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입니다. 뒤이어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으로 보낸 이유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하는데, 7절입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물론 결과가 좋다고 형들의 죄가 합리화될 수는 없겠지만, 요셉의 말의 핵심은 형들의 그 죄를 포함한 그 어떤 악도 하나님의 섭리를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비록 형들의 악한 목적과 부당한 행동을 통해 인생의 절박한 위기를 경험했지만, 어느 때나
한결같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섭리를 믿어왔다는 것을 본인의 지나온 삶과 또 고백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분명히 요셉은 아무리 이해 못할 극한 어려움에 부닥쳐도 요셉 자신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일을 이루어가실 것을 믿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한 인생을 결코 무관심속에 방치하지 않으시고 주권과 섭리 가운데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짧지 않은 손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정이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는 용서할 수 없을 것을 같은 그 사람을
용서하고 화해를 이루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마치 요셉이 걸어왔던 길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마치 부당함이 인생을 덮는 것
같고,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 벽이 되어 인생을 막막함으로 끌어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왜 없겠습니까? 힘겨운 상황을 마주하며
마치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멈춘 것 같고, 내 인생을 수수방관하는 것 같아 답답함을 느낄 때도 왜 없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하나님은 무관심 속에 관망만 하시는 결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요셉의 인생을 통해 구원의 역사의 그림을 그리셨던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삶을 통해서도 섭리 가운데 구원의 역사의 그림을 그려가고 있습니다. 당장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져도, 그럼에도 부당함 속에서도 인생을 선하게 인도하시는 우리의 하나님이 계시고 또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셈하시고 상주시는 심판이 반드시 있음을 믿고, 의와 절제의 삶을 구현해가고 또 눈물 속에서도 뿌려야 할 씨를
뿌린다면, 언젠가 요셉의 고백처럼 ‘이 자리는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낸 자리’라는 것을 선명히 보고 고백할 그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주어진 그 자리가 한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보내진 자리임을 깨닫고 고백할 수 있는 하루이길 간절히 바랍니다.
마태복음 1:1-3a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야곱의 열 두 아들들 중에서 장사는 "르우벤"이었습니다. 그런데 왕의 족보에는 장자 '르우벤'의 이름이 기록된 것이 아니라 넷째 아들 "유다"의 이름이 소개되었습니다. 유다가 장자의 서열에 오른 이유가 무엇일까요?
12지파의 선봉이 된 유다 지파
12지파의 캠프(진)에서 선봉은 유다지파. 그래서 민수기에 보면, 민수기 1장에 인구조사를 할 때에는 장자 르우벤 지파부터 실시합니다. 그러나 민수기 2장에서 진배치를 할 때는 유다 지파부터 먼저 합니다.
민수기 2:3 동방해 돋는 쪽에 진 칠 자는 그 진영별로 유다의 진영의 군기에 속한 자라 유다 자손의 지휘관은 암미나답의 아들 나손이요.
성막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세 지파씩 진을 치는데 유다지파는 동쪽 해 돋는 편에 진을 치게 합니다. 이 ‘동쪽’은 해 돋는 쪽으로 12지파 중 가장 중요한 자리를 의미합니다.
민수기 2:9 유다 진영에 속한 군대로 계수된 군인의 총계는 십팔만 육천사백 명이라 그들은 제일대로 행진할지니라.
진이 행진을 할 때도, 동쪽 유다 진영이 가장 선봉에 서서 행진합니다.
제일 앞장 서서 갔다는 것은 바로 십자가 신앙을 말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바로 십자가 신앙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주님 따라가더라도 멀찍이 따라가는 자가 아니라 앞장 서는 자들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장자적인 복을 누리는 자의 특징은 항상 주의 일에 앞장선다는 것입니다.
다른 형제들이 머뭇머뭇 거릴 때, 두 번 모두 유다가 앞장서서 몸을 던진 이후, 그의 자손들인 유다지파는, 이스라엘 12지파의 선봉장이 되었습니다. 앞장서서 가는 선봉부대가 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7:5 유다 지파 중에 인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유다 지파가 장자의 반열에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단 지파가 탈락한 이유
요한계시록 7장에 천상에 가보니 단지파가 빠졌습니다. 왜 단 지파가 천상교회에서 빠졌을까요?
창세기 49:17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단 진영(단, 납달리, 아셀)은 출발하면 제일 뒤에 가서 붙습니다(민수기 2:31).
단의 진영에 속하여 계수함을 받은 군인의 총계는 십오만 칠천육백 명이라 그들은 기를 따라 후대로 행진할지니라 하시니라.
뒤에 따라오는 사람 특징이 무엇인지 압니까? 항상 부정적이 되어 앞서 가는 사람 뒤통수를 치기 쉽습니다. 그러다 보면 나중에 교회에서 떠나고 없어요. 따라서 단지파는 요한계시록 7장 천상교회에서 빠졌다고 하겠습니다.
여러분, 항상 주님의 일을 할 때는 앞장서서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유다와 같은 장자적 복을 주실 것입니다.
유다가 누린 장자적인 복이 어떤 복입니까?
첫째, 찬송이 되는 복(창세기 49:8)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찌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라는 이름의 뜻은 "찬송"입니다 물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인물이란 뜻이지만 다른 형제들로부터 부러움을 사고 칭송을 받는다는 뜻도 포함됩니다.
누군가 장자처럼 책임과 희생을 다한다면 그는 그 가문의 영예요, 형제들의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유다는 그렇게 자기 가문을 일으켰습니다. 예수 믿고 장자적인 신앙에 눈을 떠서 가문을 일으키고, 교회를 일으키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 권세를 갖는 복(창세기 49:9)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사자는 권세를 말합니다. 능력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5:5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예수님을 가리켜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라고 했는데 유다 지파 사자 예수님이 가지신 권세와 능력은 죄와 마귀의 권세를 깨드리고 승리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장자는 권세와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죄와 마귀의 권세를 깨뜨리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형제들에게 본이 되고,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적용 이야기) 쌀가마니 질수록 더 잘 진다. 우리가 무거운 것 짐이라고 들지 아니하면 힘이 남아 있을 것 같지만, 점점 힘이 없어집니다. 반대로 무거운 것 지다 보면 힘이 더 생기고 더 무거운 것도 질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 앞에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까? 큰 책임을 지는 직분자일수록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셋째, 다스리는 권세(창세기 49:10)
규(왕의 지휘봉)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이 규(홀. 笏)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말은 유다 지파에서 왕이 이어지겠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유다 지파에서 다윗과 그 자손들이 왕통을 잇게 됩니다.
그러나 풀핏 주석에 이 규(홀)는 이 땅의 왕권 이상으로 하나님의 성역에 참여할 수 있는 권세라고 합니다.
* 홀(笏) : 홀 홀 * 규(圭) : 홀 규 옥으로 만든 홀(笏). 위 끝은 뾰족하고 아래는 네모졌다. 옛날 중국에서 천자(天子)가 제후를 봉하거나 신을 모실 때에 썼다. 우리나라에서도 임금이 국가 제사 때 사용했다. 殿下冕服【九章 永樂元年欽賜之制】 圭圭以靑玉...
누가복음 19:11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
"므나의 비유"에서 한 므나 받아서 열 므나 남긴 종은, 열고을 다스리는 권세를 차지합니다. 므나의 비유는 오늘날 ‘직분의 비유’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직분 즉 '성역 참여권'을 말합니다. 우리가 어떤 책임을 지느냐에 따라 거기에는 그 만한 특권이 주어지게 됩니다. 하늘나라에서 10고을, 5고을 다스리는 왕권이 주어집니다.
넷째, 유다가 받은 가장 큰 복(창세기 49:10)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실로가 무엇일까요?
1. ‘실로’는 평화와 안식을 의미합니다. 실로는 살렘(salem)이란 말과 같은 어근으로서 평화를 의미합니다. ‘실로가 오시기까지’란 말은 달리 말하면 ‘평화롭게 하시는 자가 오실 때까지’ 란 말입니다. ‘안식을 주시는 자가 오실 때까지’ 란 말입니다.
2. '실로’의 또 다른 의미는 <보냄을 받았다>는 뜻 즉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3. '실로'는 아들을 의미 실로가 오시기까지란 달리 말하면 '아들이 오시기까지'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유다의 아들이요, 다윗의 아들이요 인자 곧 사람의 아들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장차 오실 메시아를 ‘실로’란 애칭으로 사용했습니다.
만약에 이 대목이 없다면 야곱의 생애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렇게 고생해서 고작 기근을 피해 고향산천을 떠나는 일 밖에 없습니다.
그 고난과 연단의 세월을 어떻게 보상받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자기 입술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지 아니했다면 “야곱의 생애는 일생 고생만 하고, 불행했다”고 단정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한 순간 그리스도 예언을 위해, 그의 평생에 연단하신지도 모릅니다.
예수가 없는 인생, 예수가 드러나지 않는 생애는... 절대로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비록 깨어지고 부서졌더라도 예수를 말하고 증거하는 생애라야 성공한 생애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증거하는 가정이 명문 가정이 될 것입니다. 야곱은, 바로 ‘예수 비전’을 가문의 장자적 사명을 이어갈 유다에게서 본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세상의 꿈과 야망을 이루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 아니라면자기의 그 꿈과 야망이 이뤄질 수록 삶은 더 허무해 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비전 그 가운데 <가장 큰 비전인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낼 수 있다면 자신이 아니더라도 자식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비전이 있다면 그 비전은 바로 축복 중에 축복이요. 내 생애에 가장 큰 비전인 것입니다. 이때부터 이스라엘 12지파는 그들의 민족성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바로 ‘실로를 기다림’이었습니다. 어떤 어려움을 만나도 그것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역사의 시작이었으며 전부였습니다.
다섯째, 유다가 받은 세상적인 복(창세기 49:11-12)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의 이는 우유로 말미암아 희리로다.
과수원 주인이 소를 사과나무에 매지 않습니다. 그것도 ‘가장 좋은 가지’에 더더욱 매지 않습니다. 농부는 자식만큼이나 나무를 아끼는데, 어떻게 맬 수 있습니까? 이 말은 그만큼 물질적인 복이, 아끼지 않을 정도로 풍족하겠다는 뜻입니다.
포도 농사 얼마나 잘 되었으면 옷을 포도주에 빨겠습니까? 우유를 얼마나 마셨으면 이빨이 희겠습니까? 그만큼 풍족한 물질적인 복을 누리겠다는 말씀입니다.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 될 줄 믿습니다.
왕권의 축복을 받은 유다(창세기 49:8~12)
유다는 히브리어 예후다의 헬라어
표기로 뜻은 '칭송 받는다'이며, 유대인들이 흔히 쓰는 이름 가운데 하나이다. 신약에서도 많은 유다를 볼 수 있다. 갈릴리 사람
유다 (행 5:77), 주님의 형제 유다(마 13:55; 막 6:3), 야고보의 아들 유다(눅 6:16; 행 1:13), 다메색의
유다(행 9:11, 사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소경 되어 다메섹 성읍에 끌려가 머문 집), 예수님의 제자 중 가룟인 유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선조 가운데도 유다가 있었다(눅 3:30).
유다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족장시대 말기의 야곱과 레아 사이에서 태어난 넷째 아들로 요셉을 제치고 메시아의 조상으로 약속 받은 자였다.
흔히 신앙의 계보는 신앙적인 인물로 계승되었는데 본문의 유다의 경우는 예외라 할 수 있다. 본문에 나오는 유다는 비열한 면도
있었으나 야곱이 죽기 전에 12 아들을 위해 축복 기도한 예언대로 주권을 이어받은 후사가 되었다.
첫째, 다윗의 조상 유다
1. 야곱의 아들 유다(창 29:31~35)
야곱은
네 명의 여인에게서 12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첫 아내인 레아에게서 여섯 아들과 한 딸, 레아의 몸종 빌하에게서 두 아들,
라헬의 몸종 실바에게서 두 아들, 둘째 아내인 라헬에게서 두 아들 모두 12명이었다. 서열로 보아 장남은 분명히 르우벤인데
서모였던 빌하와의 통간으로 장자의 명분이 무효가 된 것이다. 야곱의 둘째와 셋째 아들인 시므온과 레위는 공모하여 세겜에서 대학살 극을 벌인 주역이므로 자격 상실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보니 왕권은 넷째 아들 유다에게 넘어 갈 수밖에 없었다. 야곱은 12남 1녀를 낳았으므로 유다는 복잡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였고 문제도 많았었다. 야곱이 나이 늙어서 12자녀들에게 축복을 빌 때 넷째 아들인 유다에게 실제적인 장자의 권위가 주어졌다. 오늘
본문 중에서 두 가지 면의 왕권에 대한 예언인데, 창 49:8~12 중 8절을 보면, 첫째로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라고 했다. 둘째로 9절에서 "유다는 사자
새끼로라"에서 볼 것은 장차 올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지파가 될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2. 다윗의 조상 유다(룻 4:18~22)
유다가
다윗의 조상이 되는 과정은 신앙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특이한 과정을 거친다. 유다의 맏아들 엘이 죽음으로 며느리인 다말은 당시
풍습에 따라 시동생인 오난을 통해 대를 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난이 이에 불응하므로 죽음을 당하자, 유다는 막내 아들도
죽음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일부러 다말을 멀리하게 했다. 이에 그녀는 딤나에서 창녀로 변장하고 시아버지인 유다와 관계를 맺어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는데, 그 중에 베레스가 다윗의 9대 조상이 되었다. 다윗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은 곧 메시아의 조상도 되었다는
뜻인데 어찌 이런 일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가정에 있으며, 기독교 윤리관에도 합당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교훈으로
제시되는가? 흔히 메시아의 가계는 가장 고결한 신앙의 가계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메시아가 죄악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육신을
입고 역사 속에 오심으로 모든 인간적인 것까지도 포용하시는 크신 뜻을 수용하는 면을 보게 되고 우리는 그것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비천한 자, 죄악에 찌든 인간도 때로는 높이 들어 쓰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볼 수 있다. 우리도 역시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구원받았으므로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보답하는 삶이 되도록 해야 한다. 오늘 본문의 유다를 보아도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서 물론 문제도 있고 부족함이 많지만 보다 나은 지도력을 발휘했고 행동하였기 때문에
인정되었다. 하나님은 할 수 없는 것. 없는 것 받으시는 분 아니라 있는 그대로, 겸손한 태도로 순종하는 자 찾으시고 일을 내게로
일하게 하신다. 없는 것, 할 수 없는 것 하라고 하지는 않는다.
둘째, 예수의 조상 유다
1. 메시아 탄생이 예언됨(창 49:10)
10절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여기서
홀이나 치리자의 지팡이는 왕권이나 통치권을 상징하는 휴대용 작은 막대기를 말한다. 또한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유다의
후손으로 태어날 다윗의 왕가에서 영원한 왕권이 계승된 것을 말하고 이러한 축복이 유다 지파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시기에
대해서는 "실로가 오시기까지"라고 했는데 실로는 지명일 수는 없다. 실로(안전을 주시는 자, 중보자)는 메시아를 상징하는 단어로,
예수 그리스도는 유다의 후손으로 오셔서(마 1:1~16) 유다 왕족을 견고케 하셨다(계 5:5). 뿐만 아니라 다윗을 통한 하나님의 왕족이 건설될 때에는 다른 주변의 나라들도 복종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다윗 왕국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룩하는 하나님 나라 왕국에 대해 온 세상 사람들이 복종하게 된다.
2. 유다의 성품과 신앙
동생
요셉은 인격, 신앙, 윤리 도덕면에서 거의 온전 성을 지녔으나, 그의 형 유다는 어린 동생 요셉을 애급의 상인들에게 팔자고
제의했던 매정한 자였고 그의 며느리 다말과의 약속을 어기고자 했던 비열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윤리나 도덕적인 면에서도 있을
수도 없고 이해도 안가는 면이 많은 자이므로 단점이 많은 그가 사실 그리스도의 조상이 될 만큼의 성품이나 신앙의 소유자는 못
된다. 그러나 그에게도 장점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사실은 어린 동생을 형제들이 미워하여 죽이고자 할 때 형제들을 설득하여
요셉을 상인들에게 팔게 하므로 생명을 구한 셈이 되었다. 가나안에 기근이 심해 다른 형제들과 애급에 식량을 구하러 갔다가
총리대신이었던 요셉의 책략에 의해 베냐민을 붙잡아 두고자 할 때에 베냐민 대신 자신이 종이 되겠다고 간청하므로 희생정신을
발휘했다. 어쨌든 유다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강한 지도력을 가지고 문제들을 원만하게 해결하였다. 유다에게는 다른
형제들에게서 볼 수 없는 지도력과 책임감뿐만 아니라 희생정신을 발휘하고 과거의 동생 요셉에게 행한 일을 회개하면서 신앙의 열매를
거둔 자이기도 하다. 이런 것들이 야곱의 넷째 아들이면서 장자의 명분은 물론 이요 지도자요 메시아의 조상이 되게 한 이유였다. 후에
유다는 야곱과 함께 애급에 정착하여 평안히 살았는데 야곱은 유다를 축복할 때 그를 사나운 사자로 비유하면서(창 49:9) 그의
후손으로부터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리라는 축복의 예언을 하였는데, 결국 유다는 자랑스러운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르는
영광을 차지하였다. 뿐만 아니라 솔로몬 왕 이후에 위기를 당할 삔 했으나 다윗 왕가의 정통성을 계승한 남 유다 왕족을 건설하여
그리스도의 계보를 이어가는 귀한 사명을 감당했다.
하나님은 교활했던 야곱을 이스라엘로 사용하셨듯이 문제가 많았던 유다이지만
지도력과 희생적인, 책임감을 인정해 그리스도의 계보를 이어가는 중요 인물로 쓰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함이었다. 오늘 우리
자신 약점도 많고 문제도 많지만 신앙적인 바른 자세로 헌신하고자 하면 하나님 나라 사역에 귀히 쓰임 받는 귀한 일꾼들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장자의 명분이 요셉에게 있다고 하는데 여러 서적에서는 유다에게 있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와 예수님의 관계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이 또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요?
1. 유다와 요셉의 관계는 보다 넓게 보셔야 합니다.
장자의 명분이란 하나님 나라의 계통을 점령하고 복 받는 이름입니다.
야곱의 혈통적 장남은 르우벤입니다. 대상 5:1에서도 이 점을 다시 한번 분명히 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출생 순서로만 본다면
르우벤은 장남입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이 첫 출생이었으나 장자의 명분에 따라오는 복을 받지 못했고 에서도 장자였기 때문에 통째로
굴러오는 장자의 명분에 따라오는 복을 일없이 받을 줄 알았다가 야곱에게 팥죽 한 그릇에 뺏기는 생각 못 할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런 사실에서 우리는 장자의 명분이 어떠함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 복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어 장자로 내려오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삭과 같이 하나님께서 미리 약속하시고
장자가 아닌 다른 아들에게 변경시켜 주실 수도 있으며, 에서와 같이 장자의 명분을 망령되게 여기는 경우 다른 아들에게 넘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요셉의 경우, 그의 신앙행적은 과연 열두 아들 중 실질적으로 장남이었습니다. 요셉의 경우는,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제일 높이 들어쓰려고 꿈으로 두번이나 계시해 주셨으니 이미 장자의 명분이
요셉에게로 가도록 되어 있었고 또한 그 예언대로 요셉이 17세 이후 아버지를 떠나 애굽으로 들어갔고 이후 애굽을 구한 다음 야곱의
집 전체를 구하는 순서로 걸어가게 됩니다.
두말 할 것 없이 요셉은 야곱시대에 야곱의 12아들 중에 '그 역할과 기능'으로
본다면 뚜렷히 장자를 감당했으며 이 공로를 그대로 인정하신 것이 바로 12지파 중에서 요셉은 분깃도 2배를 주어 요셉의 두 아들이
그 삼촌들과 같은 서열에서 12지파 중 2지파를 차지하였고 야곱의 원래 12아들 전체 중에서도 장자의 명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유다는, 요셉과 달리 이스라엘의 앞날을 두고는 영원한 구원의 지파가 될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 당대만으로 비교한다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유다에게는 장차 이스라엘의 영원한 구원을 두고는 요셉과 비교할 수 없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야곱 시대만으로 볼 때 유다는 요셉과 비교될 수 없었습니다. 다른 형제와 약간 표가 날 몇몇 장점은 있었으나
전체적으로는 12아들 중에 하나였고 요셉은 12아들 중에 단연 하나밖에 없는 대표였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당대에 외부적으로 표시가
나는 면으로는 그러했지만 유다에게는 장차 예수님의 구원계통이 되고 이스라엘의 왕정국가 전체를 통치하는 이스라엘의 영원한 장자가 될
수 있는 움싹이 있었습니다.
반면에 요셉은 야곱 당대만 본다면 비교할 수 없는 신앙의 사람이었으나 요셉의 신앙은 '자손으로 이어지며 자라가는' 신앙의 성질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요셉 한 사람이 자기 당대에 신앙의 사람으로는 성경역사 전체를 통해 어느 인물보다도 성자의 모든 요소를 다
가졌지만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모든 것을 다 주지 않았는데 그 중에 제일 대표적인 것이 후손으로 이어지며 점점 자라가는 신앙의 면을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오늘 나타난 것과 함께 그 나타날 앞날의 움싹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오늘로 예를 든다면, 손양원목사님이나 김현봉목사님과 같은 분은 그분들 자신의 단독 성화와 경건면을 본다면 참으로 기독교 역사상 한
세대에 한 사람 날까 말까 하는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자신들의 시대에 자신들이 할 일을 다 하고 끝이났으며 그
뒤로 이어지는 복음역사가 없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나 칼빈과 같은 사람은 아주 대표적으로 자기 자신의 신앙도 신앙이지만 그의
신앙은 믿음으로 계속 이어지는 계통적 은혜가 있어 그의 신앙 후손으로 세계교회를 옳고 바르게 잡고 나올 수 있었던 역사는 기독교
2천년 역사에 그 유례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냥 평범해 보이는 유다가 어떤 면에서 역사로 이어지면서 가면 갈수록 그 신앙의 실상이 크게 나타나게 되고 다윗과 그 자손 예수
그리스도까지 구원의 유다지파라는 이름으로 늘 나타나게 되었는지는 다른 기회에 크게 연구해 볼 제목일 것입니다.
야곱의 장자권이 유다에게 이어진 이유
하나님이 항상 장남이 아니고 차자만 축복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장남입니다. 그러나
육신적으로 는 아담이 장남 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말씀 속에서 탕자도 차남이지만 회개하고 돌아왔을때 아버지가 인장반지(가락지)를 끼워
주므로 유산을 차자에게 주신다는 암시를 하게됩니다. 중동지방은 반지를 건너주는 것이 상속권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야곱의 쌍둥이형인 "에서"는 분명히 장자의 지위로서 아버지 이삭의 유산을 받을 위치에 있었으나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업수히 여기다가 야곱에게 빼앗겨 버렸습니다. 그가 사냥갔다가 집에 돌아와 배가 고프니깐 집에서 여자이이 처럼
팥죽을 끓여먹는 야곱더러 그 팥죽 좀 달라고 하니까,장자의 신분이 너무나도 크고 부러운 야곱은 그 명분을 내게 팔면 팥죽을
주겠노라고 하니까 형 에서는 "그까짓꺼 장자의 명분을 주어도 괜찮다고 장난 처럼 여기고 또 그렇게 말했다고 장자가 바뀌겠느냐 하며
그렇게하자고 하여 우습게 보고 그랬다가 졸지에 장자의 명분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그 이후에 이삭이 늙어 눈이 어두어 에서에게 사냥한 별미를 달라하고 그리하면 아브라함으로 부터
하나님의 약속 받은 복을 안수 하겠다고 하니까 에서가 사냥하러 간사이에 야곱의 아내 아이들 어미 리브가가 야곱을 더 사랑하므로
야곱더러 에서로 분장하여 염소고기를 아버지에게 드려 하나님의 주신 복이 할아버지 아브라함으로 부터 내려오는 것을 안수 받으라 하매
야곱이 그렇게 하여 복을 받아 버렸습니다. 그 이후에는 형 에서는 다시는 그 복을 돌이키지 못했습니다.
또 야곱의 장자인 르우벤은 계모를 범하여 장자의 명분을 놓쳤습니다. 열두 아들의 장자인데 정욕을
못다스려 계모를 범하므로 아비 야곱의 미움을 샀습니다. 이처럼 장자의 명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지구상에서 하나님께
선택 받은 장자 민족입니다. 그러나 실상 그들이 구세주가 나타나자 복음을 배척하므로서 졸지에 천국 먼저 들어가는 장자의 기득권을
이방민족에게 빼앗겨 버렸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먼저 된자가 나중되고 나중 된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이 응하게 됐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가 됐으면 그 직임을 소흘히 여기면 안됩니다. 항상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된 신분으로서 귀하게 여겨야합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 아들을 보내어 피흘려 죽게하시고 그 피값으로 산 영혼이므로 소흘히
여겼다가는 큰일입니다. 항상 자기를 거룩히 구별하여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 고통의 핏값으로 산 영혼을 핍박하였다가는 그
받는 저주를 다 감당 해야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작은 것 부터 큰것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비밀이 있어 누구든지
예수께 순종하면 그 과거나 미래나 장래를 알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나 세계 인류 역사나 장래나 현재일을 능히 분별하여 알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훤히 바라다 볼수 있게 해 주십니다.
이러한 이치는 회개하여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에 있습니다. 성경 구약은 예수를 위해 비유로 기록된
글이지만 또한 사실 있었던 일로서 하나님은 이렇게 이루어 나가시는 것입니다. 장자의 명분을 빼앗긴 야곱의 형 에서나 복음을 받지
못하는 이스라엘 민족은 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우습게 여기다가 그렇게 된 결과입니다.
르우벤은 서모 빌하와 통간하는 범죄로 인하여 장자권을 인정받지 못했으며,여동생 디나의 강간당한 복수를 시므온과 레위도 역시 세겜족속을 불시에 습격하여 남자들을 멸망시키는 실수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유다는 이후에 요셉과 다시 만나는 과정에서 자신을 베냐민의 대신으로 내어주려는 마음을 가지고 야곱에게 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로써 그리스도의 그림자를 살필 수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생을 옆에서 지켜보고 평가를 내린 것이 야곱의 마지막 축복속에 나타납니다. 그 속에서 유다가 장자권 구원의 줄기로 나타날 것을 보여줍니다. 야곱의 예언속에 르우벤과 시므온, 레위의 결격사유가 나타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유다를 들어서 구원계통으로 삼아 내려가는 것이니 사실 앞의 여러가지 실수들은 그렇게 큰 의미를 가지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구원계통을 이어가는데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여주신 것에 불과합니다.
장자권은 세 가지 요소 1. 두 배의 몫의 땅 2. 제사장의 직분 3. 왕의 직분
르우벤이 첫째 아들이었지만 자신의 더럽혀짐으로 인하여 장자권을 잃어 버렸습니다(창 49:3-4, 대상 5:1) 그래서 두 배의 몫의 땅은 요셉에게로 갔습니다. 이것은
그의 순결함으로 인한 것입니다(창 39:7-20). 그런 이유로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각각 땅의 분깃을
받았습니다(여호수아 16장과 17장). 자기의 두 아들을 통하여 요셉은 좋은 땅의 두 몫을 상속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장자권의 제사장
직분의 몫은 레위에게로 갔습니다(신 33:8-10).
출애굽기를 보면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것을 보고 모세가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출 32:26)고 했을 때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나아갔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레위 지파가 제사장 직분의 몫을 받을수 있었던거죠.
장자권의 또 다른 몫인 왕의 직분은 유다에게 주어졌습니다(창 49:10, 대상 5:2). 유다가 왕의 직분의 분깃을 받을수 있었던
이유는 요셉이 그의 형제들의 모의 아래서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유다는 그를 돌보았습니다.(창 37:26). 그는 또한 어려운 때에
베냐민을 돌보았습니다(창 43:8-9, 44:14-34). 아마도 이러한 이유로 왕의 직분이 유다에게로 넘어갔을 것입니다. 유다의 뜻은
찬양이며 주님께서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함을 통하여 나셨습니다.
르우벤은 자신을 더럽힘으로 인하여 장자권을 잃어버렸구요. 요셉은 순결함으로 인하여 두 배의 몫의 땅을 상속 받았고 레위는 자신을
주님께 절대적으로 분별함으로써 제사장의 직분을 얻었으며 유다는 자기의 고통당하는 형제들을 돌아봄으로써 왕의 직분을 받았습니다.
참고로 주 예수님이 요셉 아닌 유다로부터 나신 것은 마태복음1장 2 ,3절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유다는..." 그로소 메시아인 예수그리스도 가 찬송 하리로다..유다 에게 탄생하셨습니다.
♦ 5월 30일(화) 주와 동행 365 / 제150일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창세기 44:1∼34 ♦ 묵상을 위한 주제 :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16절) ♦ 성구 :
유다가 가로되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어떻게 우리의 정직을 나타내리이까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적발하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종이 되겠나이다.
요셉은 동생 베냐민의 자루에 은잔을 넣게 합니다. 가나안을 향해 떠났던 형제들을 뒤쫓아 온 요셉의 청지기는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을 찾아냅니다. 형제들은 성으로 돌아와 우리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어떻게 우리의 정직을 나타내리이까? 하며 하나님이 우리들의 죄악을 적발하신 것이라고 탄식합니다.
지난 이십 년 간 쌓여 왔던 형제들과의 관계를 풀기 위한 요셉의 마지막 시험이 진행됩니다. 요셉은 마지막 시험을
통해 형제들간의 우애를 확인하고자 합니다.
본문의 내용은 두 단락으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요셉은 돌아가는 형제들의 자루에 돈을 넣었고 특히 베냐민의 자루에 은잔을 넣어
보낸 후에 도둑으로 몰린 베냐민을 억류시키려고 합니다(1-17절). 둘째는 이때 유다가 나서 베냐민과 베냐민을 잃은 후 얻게 될 아버지의
슬픔을 대신하여 자신이 종이 되겠노라고 나섰습니다(18-34절).
베냐민을 둘러싼 형제들의 우애는 마침내 요셉을 감동시켰으며 궁지에 빠진 베냐민을 위한 유다의 탄원은 요셉을 감동시켰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회개와 사랑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학자들은 유다의 이 탄원이야말로 구약에서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웅변이라고 지지합니다.
훗날 유다가 실제적인 야곱 가문의
장자가 되었고, 오실 메시야의 조상으로 선택받은 것은 결코 이 사건과 깊은 연관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지은 형제들과 요셉 사이의 불화를
씻고 화해를 도모하고자 한 것과 그 화해를 위해 자신을 내어 놓으려는 희생 행위는 곧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해를 이루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일을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삶과 닮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사건을 계기로 유다는
오실 메시야의 조상으로, 오실 메시야의 예표로 구속사의 한 정점에 서게 됩니다.
이와 같이 남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는 자는 오히려 자신까지도 살게 됩니다.
거룩한 성도들은 이 세상을 살아갈동안 세상의 재물과 권세만을 아까워할 때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 나라와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고 희생할 때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눅17:33).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오늘도 생명을 살리는 영적인 삶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주와 동행 365(제150일) 오늘 읽어야 할 말씀 역대하 10∼12장 요한복음 11:30∼57
♪ 찬양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창세기 44장 /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16절)
유다가 가로되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어떻게 우리의 정직을 나타내리이까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적발하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종이 되겠나이다. "What can we say to my lord?" Judah replied. "What
can we say? How can we prove our innocence? God has uncovered your
servants' guilt. We are now my lord's slaves--we ourselves and the one
who was found to have the cup."
지난 이십 년 간 쌓여 왔던 형제들과의 모든 은원 관계를 풀기 위한 요셉의 마지막 시험이 진행되고 있다. 요셉은 이 마지막 시험을
통해 형제들간의 우애를 확인하고자 한 것이다. 요셉은 돌아가는 형제들의 자루에 돈을 넣어, 특히 베냐민의 자루에 은잔을 넣어
보낸 후, 도둑으로 몰린 베냐민을 억류시키려 한다(1-17절). 이때 유다가 나서 베냐민과 베냐민을 잃은 후 얻게 될 아버지의
슬픔을 대신하여 자신이 종이 되겠노라고 나선다(18-34절). 베냐민을 둘러싼 형제들의 우애는 마침내 요셉을 감동시키게 된다.
궁지에 빠진 베냐민을 위한 유다의 탄원은 요셉을 감동 시켰다. 거기에는 참된 회개와 사랑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유다의 이 탄원이야말로 구약에서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웅변이라고 주장한다. 뒤에 유다가 실제적인 야곱 가문의
장자가 되었고, 오실 메시야의 조상으로 선택받은 것은 결코 이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 왜냐하면 죄지은 형제들과 요셉 사이의 불화를
씻고 화해를 도모하고자 한 것과 그 화해를 위해 자신을 내어 놓고자 한 희생 행위는 곧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해를 이루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일을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삶과 닮은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사건을 계기로 유다는
오실 메시야의 조상으로, 오실 메시야의 예표로 구속사의 한 정점에 서게 된 것이다.
누명으로 인해 곤경에 빠진 형제들을 살린 것은 유다의 희생 정신이었다. 만일 모두들 자신의 목숨이 두려워 나서지 않았다면 결코
요셉의 마지막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남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는 자는 오히려 자신까지도 살게 되는 것이다.
성도들도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자신이 가진 세상의 재물과 권세만을 아까워할 때 모든 것을 잃어버림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오직
하나님 나라와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고 희생하는 자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눅17:33).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Whoever tries to keep his life will lose it, and whoever loses his life will preserve it.
요셉은 자신이 꾸민 전략대로 형제들의 진실성을 다시 시험해 봅니다. 그는 베냐민의 자루에 은잔을 넣게
했습니다(2절). 베냐민은 요셉과 마찬가지로 한 어머니 라헬에게서 태어났고 요셉이 떠난 후에 야곱의 총애를 받아왔기 때문에 그렇게
함으로써 형들의 시기심, 우애, 책임감등을 시험해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2) 결백을 증명하려는 형들
청지기는 요셉의 형제들에게 '어찌하여 악으로 선을 갚느냐?'(4절)라고 문책하였습니다. 이에 그들은 '뉘게서
발견되든지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우리 주의 종이 되리이다'(9절)라고 하면서 그들은 결백을 증명하고자 했습니다.
물론 그 상황이 애매하게 죄인 취급을 당하고도 변명할 여지조차 없게 되어버린 상황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작은 돈 몇 푼에 자기들의 생명과 자유를 쉽게 포기하고 노예의 자리를 택하는 것은 옳은 일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자기의 결백을
주장하는 것은 좋으나, 자신의 생명이나 자유를 포기해 가면서까지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3)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
결과적으로 요셉의 형들은 애매하게 '악으로 선을 갚는다'는 오명을 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바른
길로 가게 하시려고 종종 시험을 주십니다. 그리하여 그 시험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고 회개를 촉구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돈(은잔)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밝혔습니다(43:23).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험 가운데서도 피할 길을 주시며 은밀한
중에 은혜를 채워주시는 것입니다(고전 10:13).
(2) 형제애(창 44:11-17)
베냐민의 자루에서 잔이 발견되었을 때(12절) 형제들이 보여준 태도와 반응에서 우리는 그들이 요셉에게 살의를 가지고 그를 팔 때와는 전혀 다른 뜨거운 형제애를 가지고 있을 발견하게 됩니다.
1) 옷을 찢는 형제들(13절)
요셉의 형제들은 전혀 상상치도 못했던 상황에 직면하여 몹시 놀라며 슬퍼하였습니다. 옷을 찢는 것은 그 당시
근동 지방에서 자신의 극한 슬픔과 절망감을 표현하는 행위였습니다(37:34, 왕상 21:27). 그들이 베냐민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이처럼 절망적인 비통감에 사로 잡힌 것은 그들이 베냐민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나타내 주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2) 돌아오는 형제들(13절)
요셉의 형제들은 옷을 찢는 감정적 비통에만 그치지 않고 모두 다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요셉의 청지기의
제안(10절)에 따라 베냐민만 버리고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자루에서는 잔이 발견되지 않았기에 책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베냐민을 희생시킴으로써 자신들이 살고자 하는 꾀를 부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시 짐을
꾸려 베냐민을 위하여 돌아옴으로 자신들의 자유와 생명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사랑이 있음을 행동으로 증명한 것입니다(고후
2:8, 8:8, 요일 3:18).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고자 함이로라(고린도후서 8:8, 개역개정 성경)
3) 연대 책임을 말하는 유다(16절)
유다는 재차 애굽을 방문할 때 형제들의 인솔자였기 때문에 모든 것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물론 시험을 위해
꾸며진 일이지만 베냐민을 제외한 다른 형제들에게는 죄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정직을 주장하면서도 과거에 그들이 요셉에게 행한
죄를 드러내면서 베냐민을 살리는 대신 그들이 모두 종이 되겠다고 하여 형제애를 입증하였습니다.
(3) 회개에 합당한 열매(창 44:14-34)
본문에서 유다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변명과 술수로 그 상황을 모면하고자 하지 않고 자신과 형제들의
현재까지의 상황을 회고하며 자기들의 과거에 범한 죄를 사실적으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회개하였다는 증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죄를 솔직하게 고백함(16절)
유다는 자기들이 지은 죄를 솔직하게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종들의 죄를 적발하셨다는 유다의 고백은 과거
그들이 지은 죄를 숨기지 않고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말입니다(42:21, 22, 28). 어떤 사람이 진실로 회개하였느냐의 여부는
그에게 자신의 죄에 대한 입술의 고백이 있느냐, 없느냐로 증명되어질 수 있습니다.
2) 아버지를 염려함(18-31절)
유다와 형제들은 베냐민의 죽음으로 인해서 아버지 야곱에게 미칠지도 모르는 무서운 결과에 대해서 심히
염려하였습니다. 유다는 자기의 탄원 속에서 아버지의 형편에 대해 애절한 모습으로 실감 있게 묘사하면서(22, 31절) 아버지에
대한 극진한 효도를 보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요셉을 애굽으로 팔아 아버지의 가슴에 못을 박은 과거의 죄를 회개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3) 자신의 희생을 제안함(32-34절)
유다는 베냐민을 위해서 자신이 희생을 감수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33절). 자신이 죄의 대가를 감당하고
베냐민을 살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유다의 행동은 아버지와의 약속 때문이기도 했지만 참된 회개 없이는 불가능한 행동이었습니다.
회개는 슬퍼하고 뉘우치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의 행동은 참으로 의로운 것이었습니다.
(4) 유다의 탄원(창 44:18-34)
유다는 베냐민을 살리기 위해서 요셉에게 격조 높은 탄원을 했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훌륭한 간청으로서 성경 역사상 그 의의가 빛나고 있습니다.
1) 지극히 겸손한 것이었다(18절)
유다는 요셉은 '내 주여'라고 칭하면서 자신은 종의 위치에서 상전에게 말할 때처럼 겸허한 자세로
간청했습니다. 우리는 그의 말보다도 더 예의 바르고 겸손한 말을 생각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의 모든 말이 겸손하고 예의가
바르기에 요셉의 심금을 울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듣는 사람이 전혀 화를 낼 수 없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2) 거짓이 없이 진실하였다(19-26절)
유다의 탄원은 변명이나 꾸밈이 없는 솔직하고 진실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궤변적인 방법이나 논쟁적인 설득을
하려 들지 않고 그저 있는 사실을 그대로 설명하였습니다. 거짓 없는 진실한 말은 어떤 논리적이고 수사적인 말 보다도 더욱 힘이
있는 것입니다.
3) 비통함을 표시하였다(27-32절)
유다는 베냐민을 그 아비가 그토록 사랑하는 이유를 이야기했습니다. 베냐민의 어미가 죽었고 그 형제가 죽었다는
사실을 말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베냐민을 데리고 가지 아니하면 그 아비가 흰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된다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유다의 애끓는 심정이 매우 감동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4) 자기희생을 보여주었다(33, 34절)
유다는 베냐민 대신에 자기가 종신토록 종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탄원은 자기 자신의 생명과 이익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부친과 동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자기희생적인 간청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인을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의
모형인 것입니다.
3. 나가면서
유다의 희생적인 사랑은 위기의 상황 속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마련해 주고 있습니다.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족을 위한 그의 결정은 극적인 반전을 가져오게 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사랑이 결국 모든 고난을 극복할 수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는 말씀처럼, 우리의 희생적 사랑 역시 우리 삶에 찾아오는 고난을 극복할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유다를 기억 하며 우리가 함께 사랑을 베풀며 살아갈 때 여전히 이 땅에는 소망이 있습니다.
창세기 43:30 요셉이 아우를 인하여 마음이 타는듯 하므로 급히 울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
창세기 42:24 요셉이 그들을 떠나 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취하여 그들의 목전에서 결박하고.
7356. 라함(racham) רַחַם
1. 자궁. 2. 처녀
발음
/ 라함[ racham ] 어원 / 735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은혜(창 43:14), 사랑하는 마음(창 43:30), 위하는 마음(왕상 3:26), 긍휼(신 13:17,
느 9:27, 28, 시 51:1), 불쌍히 여김(왕상8:50, 슥 1:16), 자비(대하 30:9), 긍휼하심(시 25:6),
은혜(느 1:11), 태(창 49:25, 잠 30:16, 사 46:3), 처녀(삿5:30) 구약 성경 / 6회 사용
창세기 43:14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라함)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창세기 43:30 요셉이 아우를 인하여 마음(라함)이 타는듯 하므로 급히 울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
* 7355. רָחַם
1. 사랑하다. 2. 피엘형. 3. 푸알형 ׃ רֻחַם 자비를 얻다 발음
/ 라함
[ râcham ] 관련 성경 / 사랑하다(시 18:1), 긍휼히 여기다(신 13:17, 왕하 13:23, 사 49:10), 자비하다(시 116:5),
불쌍히 여기다(왕상 8:50, 시 103:13, 사 27:11). [명] 자비(렘 6:23, 애 3:32), 긍휼(겔 39:25, 합 3:2),
로루하마(호 1:8), 루하마(호 2:1) 구약 성경 / 47회 사용
요셉의 형통
요셉은 예수님의 모형으로 예수님과 많이 닮아 있다.
성경에 등장한 인물들은 흠을 가진 믿음의 소유자들이었다. 새로운 인류의 시작을 알렸던 노아의 실수, 아브라함과 이삭은 아내를 누이로 속여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려고 했던 시도, 야곱의 속임수, 그리고 유다와 며느리 다말과의 관계에서 주어진 오점, 성경의 인물들에게 나타난 잘못을 숨기지 않음으로 모든 인간은 죄를 용서받아야 하는 자로 그리고 있다. 그렇게 인간은 죄에서 자신을 구원할 구속자의 필요성을 대두시킨다. 그러나 한 인물 요셉은 다르다. 성경은 요셉에게 있어서만큼은 잘못을 드러내고 있지 않다. 있다면 형들의 행위를 아버지 야곱에게 고자질하는 정도다. 왜 요셉만큼은 예외적으로 다루는가? 요셉은 예수님의 모형으로 예수님과 많이 닮아 있다. 요셉은 형들의 잘못으로 고난의 길을 걸어가게 되지만 결국 가족을 흉년으로부터 구원하는 자가 된다. 어떻게 요셉은 예수님의 모형이 되는가?
청지기로의 삶
요셉의 가장 큰 특징은 그의 삶에 있어서 언제나 2인자로서 살아갔다는 점이다. 한번도 일인자로 살지 않았다. 아버지 야곱의 아들로 아버지의 보호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의 편애와 요셉의 꿈으로 인해 형들의 미움을 받게 되고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을 만나자 형들은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려 애굽의 보디발 집안의 종이 된다. 보디발로부터 인정을 받은 요셉은 보디발 집안의 총무로 일하게 된다. 그러다가 보디발 장군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쳤으나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게 되는데 간수들의 인정을 받아 감옥 안에서는 자유로운 자가 되어 감옥 안에서 간수를 대신하여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된다.
요셉은 꿈꾸는 자였고 꿈을 해몽하는 자이기도 했다. 당시 술 맡은 관원과 떡 굽는 관원의 꿈을 해몽하였는데 그대로 되고, 애굽의 통치자 바로의 꿈을 해몽해 줌으로 일약 애굽의 이인자 총리가 된다.
바로의 꿈은 7년간의 풍년과 7년간의 훙년에 관한 것이었다. 요셉은 앞으로 주어질 일들을 관리하는 자로 바로로부터 총리 임명을 받는다.
이러한 요셉의 생애를 보면 한번도 주인으로서 산 적이 없었고 주인의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의 삶을 산 것으로 등장한다. 성경은 요셉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인간이 걸어가야 할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인간은 하나님의 청지기로 창조함을 받았으나 인간은 청지기의 삶을 버리고 스스로 주인의 삶을 살고자 함으로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타락한다.
예수님은 자신이 가르쳐 주신 기도(주기도문)를 통해 창조시 주어진 인간 본연의 삶 곧 청지기의 삶의 회복을 말씀하고 있다. 곧 창조주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바로 다스리며 사는 삶에 대한 기도가 주기도문에서 보여진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은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아버지(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음을 밝히고 마침내 자신이 아닌 아버지가 원하던 일 곧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다.
형통한 자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오해되고 있는 용어가 형통이란 용어이다. 물론 형통이란 용어를 사전적 의미로 보면 잘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 용어를 내가 잘 되는 것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다. 형통이란 용어가 요셉의 삶 속에 등장한다. 그것도 요셉의 가장 고통스런 삶 속에서 등장한다. 요셉이 종으로 팔려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총무로 일할 때와 누명을 쓰고 감옥에 있었을 때 요셉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형통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형통이란 용어는 요셉의 자유로운 삶과 연관이 있다. 그 자유는 주인 보디발이 허용아래 주어진 것이였고, 감옥 안에서는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다. 요셉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보디발의 눈과 감옥의 간수들의 눈에 들어 자유로운 삶을 보장받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는 허용된 범위 안에서의 자유였다. 보디발 장군의 아내로부터 유혹을 받게 되었을 때 요셉은 단호하게 그것은 허용된 일이 아니라고 거절함으로 누명을 쓰고 감옥으로 가게 된다.
형통이란 용어는 다스리는 삶과도 연관된다. 요셉에게는 언제나 다스리는 일이 주어진다. 보디발 집안을 다스리는 총무로, 감옥에서 간수들이 하는 일을 대신하여 처리하는 자로, 그리고 마침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애굽의 왕 바로의 일을 대신하여 애굽을 다스리는 자가 된다.
다스리는 자는 자유롭게 판단하고 느끼며 일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요셉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자신의 판단에 의해 행할 수 있는 다스리는 자의 형통함을 누리며 살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형통이란 용어가 복이란 의미와 만났을 때 어떠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가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성경은 남을 복되게 하는 자가 형통의 의미라고 푼다. 보디발 집안이 요셉 때문에 복을 받게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요셉은 언제나 자신이 자유롭게 행하던(다스리는) 일들을 통해 요셉의 유일한 윗 사람 주인(일인자)를 복되게 하는 자로 등장한다. 아버지를 기쁘게 하고, 보디발 집안을 복되게, 그리고 감옥의 간수들을 자유롭게, 그리고 애굽의 왕 바로의 영역을 넓혀주게 된다. 마침내 요셉으로 인하여 아버지 야곱의 집안을 흉년으로부터 구원하는 일을 하게 된다.
남을 복되게 하는 형통한 자로 요셉은 예수님의 모형이 된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 그렇게 함으로 죄인된 인간을 창조주 하나님께 인도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에게 들어가게 하신 최대의 형통한 자 구원자인 것이다.
구원자 요셉
흉년이란 환경에서 강조되는 것은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죄로 인해 죽게 되었다는 의미와 상통한다. 요셉은 야곱의 가족을 죽게 될 상황에서 구원한 자가 되었다. 그 과정은 형제들로부터 은 20에 팔리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예수님은 인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게되는 일은 가롯 유다가 제사장들에게 은 30에 판 일로부터 구체적으로 시작된다. 이런 면에서 요셉은 예수님의 모형으로서 닮아 있다. 인간들의 눈으로 보면 요셉의 실패였고 예수님의 실패였다. 그러나 놀라운 반전이 일어난다. 과정은 힘들었지만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어 가족을 구원하는 자가 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나 부활하여 인류를 구원하는 자가 된다.
요셉의 형들은 양식을 구하기 위해 애굽에 왔다가 총리가 된 요셉을 만난다. 형들은 이제는 죽는구나 했을 때 요셉으로부터 놀라은 말을 듣는다. “당신들은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세기 45:5-7)
이러한 일이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계획된 것이라는 이야기다. 요셉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길을 인간의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본 것이다. 요셉은 형들의 뉘우치는 말을 듣고 용서한 것이 아니라 형들을 이미 용서한 가운데 형들을 대하고 있는 것이다. 형들은 요셉의 이러한 용서를 불안해 하다가 아버지 야곱이 죽게 되자 다시 요셉에게 자신들의 생명을 구걸한다. 그러자 요셉을 울면서 이미 그것은 용서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신 일임을 상기시킨다.
예수님이 인류를 구원하는 일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계획된 일이었다. 때가 차매 예수님은 사람으로 태어나시고 인류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인간을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인간을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서게 만들었다는 의미로 부활하셨다. 이제부터 용서받기 위해 인간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용서받았음을 확인하기 위해 십자가 앞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성경에서 요셉만큼 예수님의 모형으로 닮아있는 자는 없다.
메시아 모형 여호수아
‘여호수아’는 히브리어로 하나님의 첫 글자인 ‘여’와 ‘구원하다’는 뜻을 가진 ‘야솨’가 합쳐진 글자로 “하나님(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다. 여호수아는 에브라임 지파의 정탐꾼으로 본래 이름은 ‘구원’이란 뜻의 ‘호세아’였는데, 모세가 여호와의
이름을 더하여 여호수아라고 불렀다.
“이는 모세가 땅을 정탐하러 보낸 자들의 이름이라 모세가 눈의 아들 호세아를 여호수아라 불렀더라(민 13:16)”
마태복음 1장 25절에 요셉은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낳은 아들의 이름을 ‘예수’(Jesus)라고 하였는데, 하나님의 아들로 성육신하신 메시아이시다.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여호수아’의 헬라어로 표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다 지파 다윗의 후손이지만, 여호수아는 유다 지파 사람이 아니고 에브라임 지파 사람이다. 에브라임은
형제들의 미움을 받아 종으로 팔려 갔던 요셉이 이집트에서 총리가 된 후 이집트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과 결혼하여 낳은 둘째
아들이다. 요셉이 나중에 형제들과 아버지 야곱을 다시 만난 후에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하고자 하였다.
요셉은 장남인 므낫세를 야곱의 오른편에, 차남인 에브라임은 왼편에 세웠는데, 야곱이 팔을 엇바꾸어 오른손을 펴서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므낫세의 머리에 얹고 축복을 하였다(창 48:15). 요셉이 야곱의 손을 들어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려고
하였지만, 야곱은 “그의 아우가 더 큰 자가 되리라(창 48:19)”고 하면서 에브라임을 축복하였다.
에브라임은 요셉의 차남이었지만,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받았다. 여호수아는 에브라임의 10대손이다(대하 7:20-27
참고). 에브라임이 이집트에 태어난 이스라엘의 1세대라면 10세대인 여호수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한 것이다.
여호수아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그 땅을 점령하여 12지파에게 분배해
줌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한 사람이다.
대홍수 심판에서 방주를 통해 구원을 받고 새로운 인류의 역사를 시작한 노아는 아담의 10대손이다. 대홍수 이후에 바벨탑을
쌓음으로 언어가 혼란케 되고 온 세상에 흩어지게 된 인간들을 다시 하나님의 구원으로 세계로 인도하기 위해 선택된 아브라함은 노아의
아들 셈의 10대손이다. 노아와 아브라함, 그리고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구원 도구로 죄악의 물결을 넘어 새로운 역사를 시작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성경에서 여호수아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 광야에 들어와 아말렉 족속의 공격을 받았을
때였다. 이때 모세는 산에 올라가 손을 들고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아말렉과 싸운 용사였다(출
17:8-16). 그리고 여호수아는 가데스 바네아에서 에브라임 지파의 정탐꾼으로 유다 지파의 갈렙과 함께 약속의 땅 가나안
정복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보고를 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점령한 여호수아는 왕도 제사장도 아니었지만, 왕적 능력과
특권을 갖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었으며 12지파에게 땅을 분배함으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였다.
이런 점에서 여호수아는 메시아적 대리자로서 왕적 직무를 탁월하게 수행하였다.
성경 전체를 보여주는 요셉 스토리
모세는 다른 캐릭터보다 요셉에게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창세기를 기록했다. 이는 아담이나 노아뿐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같은 족장들의 중요성을 생각해 볼 때에도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창세기 이후로 성경 전체에서 요셉이 그리
중요하게 거론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 놀라움은 더 커진다.
그렇다면 요셉 이야기를 과연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왜 그 이야기가 창세기에서 그처럼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일까?
많은
크리스천들은 요셉 이야기가 어떻게 창세기의 서사라든가 전체 구속사에 기여하고 있는지를 잘 파악하지 못한다. 흔히 개혁주의 전통에
속한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어떻게 교차하는지를 예증하기 위해 요셉 이야기를 활용하곤 한다. 주로 창세기
50장 20절 본문에 집중해서 말이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
구절을 염두에 두고 요셉의 인생을 해석해야 한다. 하나님의 주권은 창세기 37장에서 50장에 이르는 긴 본문의 중심 주제일 뿐
아니라, 요셉 스스로가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해석하도록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창 45:1-9).
하지만
요셉 이야기를 예컨대 양립주의(compatibilism) 교리를 설명하기 위한 스토리로만 축소시켜 읽는다면, 그의 인생이 성경
전체의 줄거리에 얼마나 풍성하게 기여하는지를 놓치게 된다(참고로 양립주의란, 하나님의 결정과 인간의 자유가 양립할 수 있다고 믿는
견해이다). 하나님은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언약의 약속을 이행하시는 섭리를 독자한테 보여 주기 원하셔서 자신의 주권이 요셉
이야기 전반에 나타나도록 하셨다. 따라서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어떻게 그분의 약속이 이루어지는지를 드러내는 인물인 셈이다.
이러한 관점을 가질 때, 우리는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에 요셉이 어떻게 독특한 기여를 하고 있는지를 볼 수 있게 된다.
갈등의 해결을 드러내는 이야기
창세기는
언약 백성의 생존과 순결을 위협하는 일련의 사건들을 계속해서 소개한다. 곧 37장에서 50장에 이르는 내용을 읽어 보면, 야곱과
그 자녀에게 온갖 종류의 시련이 들이닥치며 더할 나위 없이 끔찍한 상황이 연출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1. 가인과 아벨의 관계를 상기시키는 가족 간의 분열과 다툼이 다시금 언약 백성의 생존을 위협한다(창 37장; 참고 4장).
2. 이방 민족과 통혼하여 드러나게 된 불의가 언약 백성의 순결을 위협한다(창 38장; 참고 12:10-20).
3. 세계적인 기근이 발생하여 언약 백성이 위태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창 42:1-2; 참고 3:17-19; 12:10; 26:1).
그런데 하나님은 요셉을 사용해서 아브라함 가문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이 갈등을 해결하신다.
1. 요셉은 형제들에게 받은 대로 복수하기보다 관대한 용서를 베풂으로써 그들과 화해하고 가족 간의 연합을 이룬다(창 45:1-15).
2. 요셉은 그의 가족을 고센 땅에 정착시켜 이방 문화의 영향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한다. 그리하여 애굽인의 미움을 받지 않게 된 가족은 이방 민족과 통혼하지 않고 그 땅에서 한 민족을 이루게 된다(창 46:33-34).
3.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행정 능력을 발휘하여 심각한 기근으로부터 가족의 생명을 지킨다(창 41:25-35; 47:13-26).
결국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언약 백성을 위협하는 문제를 역전시키신다. 곧 용서를 통해 다툼을, 의를 통해 불의를, 그리고 지혜를 통해 기근을 해결하신다.
약속의 성취를 나타내는 이야기
더 나아가 창세기 37-50장은 하나님이 어떻게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부분적으로 성취하시는지를 보여 준다(창 12:1-3).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열방에 은혜를 베푸신다. 보디발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아 자기 집을 그에게 다 맡긴다. 이에 하나님은 요셉 때문에
보디발에게 복을 주신다(창 39:4-5). 그리고 요셉은 또다시 바로의 집에서도 총리가 된다(창 41:40). 그 결과 열방에
복이 미친다. 요셉이 심각한 기근 중에도 애굽인과 각국 백성에게 양식을 제공했기 때문이다(창 41:56-57).
또한
하나님은 아브라함 자손으로 번성하게 하겠다는 약속을 요셉을 통해 성취하신다. 일단 요셉이 그의 가족을 고센 땅에 정착시키고 나자,
아브라함 자손은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게 된다(창 47:27). 이 생육하고 번성한다는 표현은 창세기 전체에
걸쳐 등장하지만, 지금 이 경우에는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제까지는 하나님이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그 백성에게 명령하거나(창
1:28; 9:1, 7; 35:11) 그와 같이 되리라고 약속하셨지만(창 16:10; 17:2, 6; 22:17; 26:4,
24), 이번에는 처음으로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이 현실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즉 동일한 표현이 여기서는 직설법으로 서술되었다.
요셉의 리더십 하에 아브라함 자손이 실제로 번성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 왕에 대한 약속도 요셉을 통해 실현되기
시작한다. 창세기 37장에 소개된 요셉의 꿈은 장차 그가 수행할 통치자의 직분을 예견한다. 곧 애굽의 궁정에서 요셉이 차지하게 될
위치를 암시한다. 더군다나 그가 입었던 ‘채색옷’은 왕가의 의복을 상징한다(삼하 13:18). 따라서 이 장에 앞서 예언되고
모형론적으로 제시되었을 뿐 아니라 언약의 약속으로 언급된 통치자(창 17:6, 16; 35:11), 즉 아브라함 자손을 통해
나타나리라고 기록된 왕의 도래를 기다려 온 독자들에게는 창세기 37장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장에서부터 소개되는 요셉이 그
예견을 더욱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왕에 대한 약속을 기억하는 독자들이라면, 요셉을 보며 이렇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이후 왕궁에서 높은 직위에 오르게 된 요셉
이야기는 단지 하나님이 그의 결백을 입증해 주셨다는 내용을 주제로 삼지 않는다. 그 이야기는 아브라함 자손을 통해 인간의 통치가
회복되게 하려는 하나님의 언약에 그분 자신이 얼마나 신실하게 역사하셨는지를 보여 주는 증거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 자손이 한
나라를 이루고 그로부터 통치자가 나올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요셉은 바로 그 통치자를 보여 주는 첫 번째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복을
열방에 전해 주는 새로운 인류의 모습을 드러낸다. 곧 사랑받는 아들이자, 섬기는 왕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보여 준다.
그렇다면
이 모든 내용이 하나님의 섭리와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비록 모세는 창세기 37-50장 이야기의 중심 무대에 요셉을 세웠지만,
사실상 그 무대의 주인공은 하나님 자신이시다. 그 이야기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요셉이 어떻게 성취하는지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이 버림받은 한 사람을 통해 어떻게 자신의 언약을 지키고 그 약속을 성취하시는지를 보여 주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언약의 성취 여부는 인간의 악한 행동마저도 자신의 선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실 수 있는 주권자의 손에 달려 있다(창
50:20). 그래서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모든 위협적인 상황을 역전시키고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성취해 나가신다.
이와
같은 요셉 이야기는 단지 창세기의 마지막 에피소드가 아니다. 그보다도 창세기의 전체 스토리가 안고 있는 갈등에 대한 해결책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 창세기는 형제를 미워하는 사건으로부터 형제에 대한 용서로, 그리고 가족의 생명을 위협하는 기근으로부터 가족이
재회하여 잔치를 벌이는 축제로 독자들의 걸음을 인도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보게 만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이야기
이러한
관찰은 요셉이 과연 장차 나타날 메시아에 대한 ‘모형’(type)인지, 즉 하나님이 의도하신 예시적인 인물이 맞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지난 교회사에서 수많은 성경 해석자들은 요셉이 그리스도의 모형이 맞다고 설명해 왔다. 요셉과 그리스도 간에 존재하는
명백한 유사점 때문이다.
예를 들면 요셉도 사랑받는 아들로서 형제들에게 배척을 받았으며 그러한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과정을 통해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셉과 예수님의 상관성을 드러내는 유사점은 그게 전부가
아니다. 요셉의 인생은 그보다 더욱 직접적인 방식으로 메시아의 모습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를 사용하여 언약의 약속을
성취하고 죄인에게 내려진 저주의 결과를 무효하게 만드시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창세기는 야곱이 유다를 위해 축복한
내용이 이미 요셉의 삶에서 모형론적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창 49:8).
이 축복에서 야곱은 유다의 후손으로 장차
오실 왕을 묘사하는데, 그 이미지가 요셉의 인생에 펼쳐진 장면과 너무도 흡사하다. 여기서 유다의 형제들이 그 앞에 절하게 된다고
언급되는데, 이처럼 절을 한다는 표현은 요셉의 꿈에서 형제들이 그에게 절을 하는 모습을 묘사하기 위해 이미 세 번 사용되었고(창
37:7, 9, 10), 또한 그들이 애굽의 궁정에서 실제로 요셉에게 절을 하는 모습을 기술하기 위해서도 세 번 사용되었다(창
42:4; 43:26, 28). 이처럼 창세기 49장 8절에서 열한 명의 형제들이 한 사람 앞에 절을 하는 이미지는 지금까지
들려준 요셉 이야기를 요약하는 한 편의 그림과 같다. 이런 유사점은 의도적인 장치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장차 나타날 메시아의
모습이 어떠할지를 궁금해 하는 독자들은 바로 이 야곱의 축복에서 힌트를 얻게 된다. 곧 메시아가 요셉과 같은 모습을 보여 주게
되리라는 답변을 얻는 것이다.
이처럼 요셉과 유다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내용은 이 구절만이 아니다. 사실
모세는 요셉 이야기 전체에 걸쳐 두 인물을 자주 병행시켜 놓았다. 예를 들어 가장 결정적인 세 차례의 대목을 살펴보면 그들이
중심인물로 등장한다. 곧 서론 부분에서(창 38-39장), 절정 부분에서(창 44-45장), 그리고 야곱의 예언 부분에서(창
49장) 그렇게 등장하는데, 이 단락들은 요셉 이야기만이 아니라 창세기 전체 스토리의 백미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요셉과
유다는 서로 엮여 있다. 따라서 야곱의 예언에서도 두 사람은 장차 나타날 이스라엘의 왕을 함께 예시한다.
이처럼 모세는
요셉이라는 모형론적 인물을 통해 유다의 후손으로 오실 미래의 왕을 묘사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메시아를 통해 절정에 이르게 될
이스라엘 역사의 거시적인 스토리 안에 요셉 이야기를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또한 이로써 우리는 성경을 읽으며 그의 이야기를 다시금
돌아보게 된다. 이는 모세가 그의 독자들로 하여금 종말론적 의미를 지닌 왕적 인물로서 요셉을 바라보도록 뚜렷한 장치를 설정해
두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셉 이야기는 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고, 미래에 일어날 하나님의 사역을 보여 주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미래의 소망을 제시하는 이야기
창세기 37-50장은 단지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내용만이
아니라 그분의 약속에 관한 내용이기도 하다. 이 본문에서 하나님은 요셉을 사용하여 인류에게 내려진 저주의 결과를 역전시키고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성취해 나가신다. 하나님은 모든 게 불리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 자기 가족에 의해 노예로 팔려 나간 한
사람을 들어 자신의 권능을 펼쳐 보이신다.
아마도 모세는 자기 형제들에게 버림받은 보잘것없는 한 인생을 통해 불가능한
일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고자 요셉 이야기에 그 많은 분량을 할애했을지 모른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죄인에게 임할
저주를 완전히 역전시키며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실 미래의 진짜 요셉(a coming Joseph)을 기대하도록 그 많은 분량을
할애했을지 모른다.
이런 점에서 요셉 이야기는 성경의 전체 스토리를 보여 준다. 즉 고난을 통해 영광으로, 비하를 통해 승리로 나아가는 스토리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리하여 그 이야기에서 우리는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영광을 함께 바라보게 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창세기 43장 / 요셉의 앞에 서니라(15절)
어느 스승이 자기 제자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제자가 반가워서 뜯어 보았더니 "사람, 사람, 사람, 사람 그리고 사람" 이라고
사람이라는 말만 5번 적혀 있었습니다. 아무리 해석하려고 하여도 해석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스승을 찾아가서 무슨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스승은 제자들에게 대답하기를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냐? 사람다운 사람이라야 사람이지"라고 했습니다.
족장의 역사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집니다. 창세기 37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1-2a).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 아비의 우거하던 땅에 거하였으니.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야곱의 약전이란 야곱의 계보 즉 족보를 말합니다. 따라서 창세기 37장부터는 야곱이 주인공으로 소개됩니다. 그런데 창세기를 읽어보면 마치 야곱 보다는 요셉이 주인공처럼 나타납니다. 야곱이 드러나지 않았을지라도 창세기 43장은 요셉의 이야기가 아니라 야곱의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야곱을 믿음의 사람들에 비유한다면 요셉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요셉의 앞에 서는 것은 곧 주님 앞에 서는 것과 같습니다. 요셉의 앞에 서기 위해서 야곱은 아주 중요한 것을 결단합니다. 그것은 베민을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창세기 43:14)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야곱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은 베냐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이 그토록 사랑했던 라헬이 낳은 두 아들 요셉과 베냐민이었는데 요셉을 오래 전에 잃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동생 베냐민이 남았습니다. 시므온은 애급에 인질로 잡혀 있습니다. 만일 이번에 아들들이 식량을 구하려고 애급으로 갔다가 베냐민을 잃는다면 남은 생애가 마치 음부에 떠러진 것과 같은 삶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먹을 양식이 없게 되므로 하는 수 없이 포기합니다.
여러분, 내가 포기할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아직도 포기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더 심한 고통을 겪지 말고 일찍 포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야곱은 포기하기 전에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모두 사용하려고 합니다. 본문 11절에서 13절입니다.
그들의 아비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러할찐대 이렇게 하라 너희는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그릇에 담아가지고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예물을 삼을찌니 곧 유향 조금과 꿀 조금과 향품과 몰약과 비자와 파단행이니라. 너희 손에 돈을 배나 가지고 너희 자루 아구에 도로 넣여 온 그 돈을 다시 가지고 가라 혹 차착이 있었을까 두렵도다. 네 아우도 데리고 떠나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
* 약전(8435) 톨레다(tôwledâh) תּוֹלְדָה
1. 세대. 2. ׃ לְתוֹלְדֹחָם 종족을 따라. 3. ׃ מֵפֶר תּוֹלְדֹת 족보 발음
/ [ tôwledâh ] 어원 / 320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내력(창 2:4, 36:1), 계보(창 5:1), 족보(창 6:9,10:1, 25:19), 자손(창 10:32, 대상 26:31), 세대(창 25:13), 종족(민 1:20, 대상 5:7, 7:4) 구약 성경 / 39회 사용
* 3205. 야라드(yâlad) יָלַד
1. 낳다. 2. 분사 여성형 יוֹלֶדֶת 어머니. 3. 보다 발음
/ 야라드[ yâlad ] 관련 성경 / 낳다(창 4:18, 출 21:4, 호 1:3), 해산하다(출1:19, 왕상3:18, 미5:3), 배다(민11:12),
나다(민26:59), 출산하다(삿13:2,3), 순산하다(사66:8), 새끼낳다(겔31:6), 해산하게 되다(창35:16),
산고를 겪다(렘13:21), 시행되다(습2:2),출생하다(전7:1, 욥11:12), 해산을 돕다(출1:16),
양육하다(창50:23), 아이를 갖도록 하다(사66:9). [명] 계통(민1:18), 출산(창16:2,30:9),
산기(사26:17), 어미(잠17:25), 아들(왕상3:26, 대상14:4), 산파(창35:17, 출1:15) 구약 성경 / 468회 사용
창세기 41:54-57 요셉의 말과 같이 일곱해 흉년이 들기 시작하매 각국에는 기근이 있으나 애굽 온 땅에는 식물이 있더니. 애굽 온 땅이 주리매 백성이 바로에게 부르짖어 양식을 구하는지라 바로가 애굽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요셉에게 가서 그가 너희에게 이르는대로 하라 하니라. 온 지면에 기근이 있으매 요셉이 모든 창고를 열고 애굽 백성에게 팔쌔 애굽땅에 기근이 심하며. 각국 백성도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들어와 요셉에게 이르렀으니 기근이 온 세상에 심함이었더라
기근(7458)
♦ 5월 29일(월) 주와 동행 365 / 제149일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창세기 43:1∼34 ♦ 묵상을 위한 주제 : 요셉의 앞에 서니라(15절) ♦ 성구 : 그 사람들이 그 예물을 취하고 갑절 돈을 자기들의 손에 가지고 베냐민을 데리고 애급에 내려가서 요셉의 앞에 서니라. So the men took the gifts and double the amount of silver, and Benjamin also. They hurried down to Egypt and presented themselves to Joseph.
“요셉의 앞에 서니라(Stood before Joseph)” 우리는 언제인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욥기 2장 1절에는 이와 같은 광경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서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와서 여호와 앞에 서니.
족장 시대에 욥은 동방 우스 땅에 의로운 사람이라고 소문이 났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로운 사람이 정말일까 하며 사탄은 하나님을 찾아와 욥을 테스트하자고 제안합니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의 생명은 건드리지 말고 모든 것으로 테스트 하라고 허락합니다.
요셉은 형제들에 의해서 그의 꿈을 테스트받습니다. 그렇지만 요셉은 형제들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들을 기근에서 구원하시려고 나를 먼저 애급으로 보내셨다고 말합니다. 원망과 불평할 수 있는 분명한 사실 앞에서도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할 수 있는 요셉의 믿음이 부럽습니다.
드디어 요셉의 형제들은 애급의 총리가 된 요셉 앞에 엎드려 절을 합니다. 예전에 형들의 곡식단이 요셉의 단에 절을 하였다는 꿈을 이야기한 것 때문에 미움의 대상이 되었던 그 때를 회상하며 요셉은 북받쳐오르는 눈물을 흘린 후에 다시 형제들 앞에서 내가 요셉이라고 자기의 정체를 드러냅니다.
기근이 더욱 심해지고 애급에서 가져 온 양식이 다 떨어진 형제들은 야곱에게 간곡히 사정하고 유다가 자기의 목숨으로 책임 지겠다고
함으로 간신히 베냐민을 데리고 양식을 구하기 위하여 다시 애굽으로 내려 갑니다(1-13절).
형제들을 다시 만난 요셉은 반가워하며
그들을 환대하고 야곱의 안부를 묻다가 동생 베냐민을 보고 감격에 겨워 혼자 통곡합니다(14-30절).
베냐민은 모친
라헬에게서 난 유일한 혈육이며 막내이기 때문이었으며 다시 마음을 진정시키고 형제들 앞에 나타난 요셉이 그들을 나이 순서대로 앉히자
형제들은 서로 이상히 여기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들은 요셉을 알지 못했습니다(31-34절).
가나안 땅에 기근이 계속되어 앞서 사온 양식이 떨어지자 야곱의 가족들은 다시 애굽으로 양식을 사러 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총리인 요셉의 제안대로 베냐민을 동반하지 않고는 애굽에 내려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때 주저하는 야곱을 유다가 나서서
아버지를 설득하여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에 양식을 사러 갔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요셉의 호의에 힘입어 국빈 대접을 받게 됩니다.
요셉은 세계를 다스리던 애굽의 총리 대신이었고 형제들은 이국 땅 가나안에서 온 초라한
나그네였습니다. 따라서 총리인 요셉이 보잘 것 없는 형제들을 환대하는 것은 대단히 파격적인 행동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 열두
형제가 한자리에 모이도록 한 것은 구속사의 대줄기인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시고자 하는 섭리를 보여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타난 열두 형제의 모임은 애급과 가나안까지, 더 나아가 영적 이스라엘인 성도들의 공동체까지 이어지는 택함받은 자들의 공동체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 또는 뜻만이 공동체 형성의 유일한 중심임을 드러내므로 이스라엘 공동체는
궁극적으로 믿음의 공동체로 확산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단 기근 속에서 양식이 다 떨어진 형제들은 다시 양식을 구하기 위해 애급으로 가고자 하였으나 베냐민을 못 데려가게 하는 야곱의
반대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러나 이때 유다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야곱에게 호소함으로 아버지를 설득했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넘겼던 사례를 생각하면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의 제안은 굉장히 충격적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은 무력이나 간계가 아니라 자신을 던지는 희생적인 사랑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과거에 형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요셉이
자신들을 다스리는 자가 되지 못하도록 죽이고자 하였으나, 결국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아버지의 노여움과 총리가 된 요셉 앞에 무릎을
꿇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베냐민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바치려는 유다의 태도는 모든 가족을 살렸습니다.
인간 적인 무력과
간교한 거짓으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는 실패를 볼 것이지만, 올바른 방법과 사람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훗날 주님 앞에 서게 되는 그 날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서게 될 것인지 생각해 보셨는지요? 지금의 내 모습이 훗날 주님 앞에 설 모습입니다. 지금을 벗어난 미래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훗날 나의 모습을 기대하기 전에 지금 나의 모습을 거룩한 말씀 앞에 세워 놓고 예리한 성령의 눈으로 점검할 수 있는 지혜와 믿음을 기도합시다.
* 주와 동행 365(제149일) 오늘 읽어야 할 말씀 역대하 7∼9장 요한복음 11:1∼29
♪ 찬양 /날마다 주와 버성겨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데도
17세기의 일입니다. 런던 대화재가 있은 뒤, 저 유명한 세인트 폴 대성당을 재건하고자 그 설계를 맡았던 크리스토퍼 렌이 하루는 채석장을 찾아 돌을 다듬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토닥토닥 돌을 쪼고 있는 한 사람에게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짜증난다는 듯이 몹시도 퉁명스럽게 대답합니다. "보면 모르오 ? 돌을 다듬고 있지 않소." 또 한 사람에게 같은 질문을 합니다. "보면 모릅니까 ?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벌어 먹고 사느라고 이 고생을 합니다." 다시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봅니다.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소 ?" "저요 ?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있습니다. 저는 사실 죄를 짓고 감옥에 있을 때, 거기서 돌 다듬는 기술을 배웠습니다. 전과자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감옥에서 나와 자유로운 몸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짓기 위하여 돌을 다듬고 있습니다."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데도 이렇듯 대답은 천양지차입니다.
같은 형제들일지라도 요셉과 같은 인물이 있고 전혀 다른 기질의 형제들이 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은혜를 입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나는 어떤 자녀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요셉입니까? 가룟 유다입니까? 욥과 같은 사람입니까? 오늘의 삶이 나를 결정합니다.
♦ 5월 30일(화) 주와 동행 365 / 제150일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창세기 44:1∼34 ♦ 묵상을 위한 주제 :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16절) ♦ 성구 :
* 주와 동행 365(제150일) 오늘 읽어야 할 말씀 역대하 10∼12장 요한복음 11:30∼57
♪ 찬양 /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5월 31일(수) 주와 동행 365 / 제151일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창세기 45:1∼28 ♦ 묵상을 위한 주제 : 나는 요셉이라(3절) ♦ 성구 :
* 주와 동행 365(제151일) 오늘 읽어야 할 말씀 역대하 13∼14장 요한복음 12:1∼26
♪ 찬양 /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6월 1일(목) 주와 동행 365 / 제152일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창세기 46:1∼34 ♦ 묵상을 위한 주제 : (1절) ♦ 성구 :
* 주와 동행 365(제152일) 오늘 읽어야 할 말씀 역대하 15∼16장 요한복음 12:27∼50
♪ 찬양 /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6월 2일(금) 주와 동행 365 / 제153일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창세기 47:1∼31 ♦ 묵상을 위한 주제 : 고센 땅(1절) ♦ 성구 :
본문에는 “고센 땅”이란 단어가 자주 사용됩니다(1절, 4절, 6절, 27절). 그리고 라암세라는 좋은 땅도 소개됩니다(11절).
* 주와 동행 365(제149일) 오늘 읽어야 할 말씀 역대하 17∼18장 요한복음 13:1∼20
♪ 찬양 /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6월 3일(토) 주와 동행 365 / 제154일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창세기 48:1∼22 ♦ 묵상을 위한 주제 : 나도 안다(19절) ♦ 성구 :
* 주와 동행 365(제149일) 오늘 읽어야 할 말씀 역대하 7∼9장 요한복음 11:1∼29
♪ 찬양 /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순
월
일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148
5
28
주일
설교 묵상 및 봉사와 섬김
149
5
29
월
창세기 43:1∼34
요셉의 앞에 서니라(15절)
150
5
30
화
창세기 44:1∼34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16절)
151
5
31
수
창세기 45:1∼28
나는 요셉이라(3절)
152
6
1
목
창세기 46:1∼34
칠십 명(27절)
153
6
2
금
창세기 47:1∼31
고센 땅(1절)
154
6
3
토
창세기 48:1∼22
나도 안다(19절)
정탐군 / 라갈(7270) râgal. רָגַל
1. 걷다. 2. 옷을 빨기 위해서 밟다. 3. 피엘형 : 비방하며 돌아다니다 발음
/ 라갈[ râgal ] 관련 성경 / 모함하다(삼하 19:27), 허물하다(시 15:3), 정탐하다(삿 18:2, 대상 19:3, 신 1:24, 수 7:2). [명] 정탐(창 42:9, 수 2:1) 구약 성경 / 26회 사용
극심한 가뭄으로 먹을 것이 떨어지자 야곱은 자신의 아들들에게 애굽으로 내려가서 양식을 구해오라고 부탁하는데, 애굽은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기근을 만나 피난했던 곳입니다.
그래서 야곱도 기근을 만나자 그의 아들들에게 애굽에 내려가 곡식을 얻어오라고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애굽은 가나안 땅에 기근이 있을 때마다 도움을 얻을 수 있는 풍요의 땅이었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약속의 땅인 가나안은 말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지, 실제로는 항상 우물을 찾아 이동해야 하고 또 우물을 찾는다고 해도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어야 하는 척박하고 메마른 땅이었습니다(26:17-25).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적당히 내리지 않으면 살기가 쉽지 않은 땅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메마르고 척박한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에게 기업으로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납득하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차라리 풍요의 땅 애굽이나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이 온 땅을 촉촉이 적셔주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약속의 땅으로 주셨다면 훨씬 납득하기가 쉬웠을 것입니다.
그렇다면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이처럼 척박하고 메마른 땅을 택한 백성들에게 기업으로 약속하신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애굽이나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자기 백성들에게 주실 만한 능력이 없어서입니까?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어떤 땅이라도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처럼 척박한 가나안 땅을 자기 백성들의 기업으로 약속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 세상은 어떤 곳이라도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참된 안식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죄로 오염되어 부패한 이 세상은 아무리 지상 낙원이라고 불리는 곳이라 해도 사람들에게 참된 안식을 줄 수 없습니다.
설령 안식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그것은 영원히 계속될 수 없습니다.
왜입니까?
이 세상은 너무 자주 변할 뿐만 아니라 영원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코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땅에 만족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들이 바라보며 소망해야 할 땅은 이 지상에 있는 땅이 아니라 그들의 영원한 본향인 '하나님나라' 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그 누구도 이 땅을 자신의 본향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분들은 자신이 이 땅에서 잠시 머물다가 떠나가야만 하는 외인이요 나그네라는 의식을 가졌습니다(히 11:13).
그분들이 진정으로 찾았던 안식처 곧 본향은 언제나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히 11:16).
여러분, 이 땅 어디에도 '진정한 안식처'는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이 땅에서 잠시 머물다가 떠나가야만 하는 나그네인 것입니다.
우리의 본향은 오직 하늘에만 있습니다(빌 3:20).
.
6절에 요셉의 형들은 애굽으로 양식을 사러 와서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 앞에 엎드려 절했습니다.
이는 요셉이 소년 때에 꾼 꿈을 통하여 계시된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였습니다(37:6-9).
요셉이 꿈을 꾸고, 그 꿈을 이야기했을 당시에는 그 꿈이 허황되고 불가능한 일인 것처럼 보였었지만, 지금 요셉 앞에 엎드려 절하는 형들의 모습은 바로 요셉의 꿈의 성취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계시하시고 그 계시를 반드시 성취시키심으로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실제로 성경을 보면 계시된 하나님의 예언 가운데 성취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예언은 모든 것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성취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예언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성취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전지 전능하사 못 이루실 것이 없고 또한 신실하셔서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아직까지 남아 있는 종말론적 사건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와 같은 예언들도 반드시 성취될 것이기에 우리는 세상에서 고난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더욱 견고하게
믿음을 지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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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절에 요셉은 형제들에 대하여 꾼 꿈을 생각했다고 말씀하는데, 요셉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그 꿈을 늘 가슴에 품고 있었기에 형들이 자신 앞에 엎드리는 모습 속에서 그 꿈이 바로 이때를 보이신 것임을 바로 깨달았던 것입니다.
또한, 요셉이 모진 고난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 고난 가운데에도 분명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고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꿈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확신이 때가 되자 영광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또한, 요셉이 그러한 마음을 가졌었기에 형들에 대한 분노와 미움을 이기고 그들을 사랑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꿈을 붙들고 삶으로써 믿음 안에서 선으로 악을 이겼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들이 세상 속에서 고난을 당할 때, 악인들에게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낙망하지 않고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요셉과 같이 하나님의 뜻과 약속의 말씀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그 뜻이 이루어 질 것을 믿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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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절에 요셉은 형제들에게 받은 돈을 그 자루에 도로 넣게 했습니다.
이는 자신의 사랑하는 부모와 형제들에게 먹을 양식을 주면서 돈을 받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요셉의 이러한 행동에서 죄인들에게 값없이 참 생명의 양식이 되시는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했습니다.
요셉이 형제들에게 육체를 살리는 육의 양식을 값없이 거저 주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혼을 살리는 영의 양식이신 예수님을 값없이 거저 믿게 하심으로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여러분, 만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생명 값을 요구하셨다면, 이 세상의 누가 그 값을 지불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러한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 또한 다른 사람에게 값없이 은혜를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반드시 대가를 받아야만 남에게 무엇을 주지만, 그러나 성도는 값없이 받았으므로 값없이 주는 은혜의 원리를 따라 행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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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28절에 요셉의 형들은 곡식 자루에 돈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혼이나서 떨며', 곧 얼이 빠진 사람처럼 두려움에 떨면서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하며 탄식합니다.
그들은 이 때문에 자신들이 화를 당하게 되었다고 판단했습니다.
여러분, 요셉은 형들을 위하여 돈을 받지 않고 양식을 주었지만,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할 때에, 그들은 애굽 총리가 자신들을 해하려고 일부러 그와 같은 일을 꾸몄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두려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어떠했을까요?
매우 기뻐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들도, 하나님의 섭리 앞에서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 기뻐하여야 할 일을 도리어 두려워하게 됩니다.
형들이 애굽 총리가 요셉이고 그래서 양식을 거저 준 것을 알지 못하였던 것과 같이, 우리 또한 하나님이 자신의 아버지가 되시고 모든 일 가운데 은혜를 베푸심을 깨닫지 못한다면 모든 일에 두려움과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그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위기 상황 속에서 불안해하고 두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성도는 언제나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확신하는 가운데 담대하게 모든 상황에 대처하는 용기와 믿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창세기 41장 / 하나님이 그 하실 일(25절)
요셉이 바로에게 고하되 바로의 꿈은 하나이라 하나님이 그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 Then Joseph said to Pharaoh, "The dreams of Pharaoh are one and the same. God has revealed to Pharaoh what he is about to do.
"하나님이 그 하실 일(What God will do)"이란 꿈으로 장차 일어날 일을 알려 주신 것을 말합니다.
오랜 고난의 세월이 지나고 하나님께서 요셉을 위하여 예비해 주신 영광의 자리에 앉게 됩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요셉이 마침내 애급의 총리가 되는 사건을 소개합니다. 애급 왕 바로가 꿈을 꾸지만 아무도 해석하지 못하고 마침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게 됩니다(1-13절). 바로 앞에 불려 나온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바로에게 그 꿈이 온 땅에
닥칠 칠 년의 풍년과 칠 년의 흉년을 예고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14-36절). 바로는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요셉을 총리로
임명합니다(37-45절). 총리가 된 요셉은 현명한 방법으로 7년 대흉년으로부터 온 땅의 백성들을 구합니다(46-57절).
대기근으로 부터 많은 백성을 구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은 요셉을 바로 앞에 서게 하셨으며 가나안의
기근으로 파탄에 빠질 야곱 즉 장차이스라엘이 될 자들을 구하시려는 계획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본문에서 요셉은 바로의 꿈을 정확히 해석할 뿐만 아니라 다가올 흉년을 대비할 방법까지 알려주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바로는 요셉이 하나님께서 함께하는 사람임을 깨닫고 그를 애굽 온 땅을 다스리는 총리 대신으로 임명했습니다. 바로가 요셉에게
준 인장 반지는 고대 근동 지역에서 통치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최종 결재권을 상징하는 반지라고 합니다. 또한 바로가 요셉에게 입힌 세마포와
금 사슬은 귀한 신분을 상징하는 것이며, 그를 버금 수레에 태운 것은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경의를 표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요셉은 명실 공히 애급 땅에서 바로 다음 가는 막대한 권력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요셉의 이와 같은 영광은 고난 속에서
믿음을 지킨 성도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을 대표하는 것이며, 특히 고난과 죽음 뒤에 부활과 승천으로 영광을 얻게 되며 만물을 다스릴
권세를 얻게 될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예표합니다(히 2:8).
형제들에 의해 애급으로 팔려갔던 요셉, 그리고
애급에서 감옥에 갇혔다가 총리로 부상하는 일련의 과정들은 그리스도의 화육, 자기 비하, 고난, 그리고 부활과 승천이라는
과정의 한 예시가 된다고 하겠습니다.
요셉의 꿈 해석대로 복직된 술 맡은 관원장은 만 이 년이 지난 후에 바로의 꿈으로 인해 비로소 요셉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술 맡은 관원이 복직된 후에 곧 풀려 날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생각대로 풀려난 것이 아니라 이 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반응이 없었으므로 술 맡은 관원장과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있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 년이란 시간은
요셉이 극적으로 애급의 총리가 되기 위한 준비 기간이었으며 가장 적합한 시기를 기다린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도들의 기도가
당장 이루어지지 않을 때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듣지 않거나 이루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가장 적당한 시기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온전한 믿음이란 때를 기다리는 인고의 세월도 포함되는 것임을 요셉의 고난과 영광을 통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요셉처럼 믿음으로
기다리는 자가 마침내 구원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교훈합니다.
1절에 만 2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꾸었다고 말씀하는데, 이는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된지 만 2년이 지났다는 뜻입니다.
이때는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 온 지 13년이나 지난 때로, 이제는 요셉도 자신이 꾸었던 꿈이 결코 이루어 질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할 만큼 시간도 지났고, 처지도 절망적이었습니다.
30세가 된 요셉에게는 그 꿈이 성취될 수 있는 어떠한 여지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금 한낱, 노예의 신분에 감옥에 갇힌 죄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요셉이 완전히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 빠져 있을 때, 드디어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적인 시각으로는 어떠한 가능성도 보이지 않는, 그래서 절대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되어지는 그 순간이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 뜻을 이루시는 가장 적절한 시기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 말씀이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성취됩니다.
비록 오랜 시간이 지나고 모든 상황이 절망적으로 흘러갈지라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이라면 반드시 성취되고야 맙니다.
앞에서 살펴본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그는 백세가 되어 전혀 소망이 없을 때에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들 이삭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다는 칭찬을 받은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현실은 사울왕에게 쫓겨 광야와 타국을 전전하다 일생을 마칠 수밖에 없을 것처럼 암울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뜻대로 그는 유다와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삼하 5:1-5).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어떠한 순간에도 낙심하거나 절망해서는 안됩니다.
비록 이 땅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고, 감당할 수 없는 극한 고난과 역경을 당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크고 놀라운 뜻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이요 절차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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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절에 애굽 왕 바로가 마음이 번민하였다고 말씀합니다.
바로는 너무나도 생생한 꿈을 두 번이나 반복하여 꾸었고, 그는 그것이 장차 이루어질 일에 대한 몽조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 뜻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심히 근심했습니다.
여러분, 바로는 거대한 제국 애굽의 왕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애굽인들에게 신으로 여겨질 정도로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절대권력을 가진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짤막한 꿈 앞에서 심히 근심하며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습니다.
바로 왕의 이러한 모습에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받습니다.
아무리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라도, 아무리 많은 재물이 있는 자라도, 아무리 탁월한 지혜를 소유한 자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오늘날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로 깨닫게 하시기 때문입니다(요 14:26).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는 분으로서 이전 세대 사람들이 전혀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알리십니다(고전 2:9.10).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요 선물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오직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여 그 뜻대로 살아가기에
힘써야 하는 자들임을 항상 기억하고, 요셉처럼 어떤 시험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믿음의 사명, 곧 달려갈 길을 끝까지 달리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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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절에 바로는 일단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 하더라”는 말로 요셉을 인정하며 높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요셉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만일 요셉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는 자신의 의나 능력을 자랑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요셉은 16절에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은 지금 하나님의 도구로만 쓰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것을 '대행 사상'이라고 하는데, 이는 요셉이 철저하게 '하나님 대행 사상'을 소유했음을 알게 해 줍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하나님 대행 사상은 오늘 본문의 요셉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수많은 하나님의 종들의 모습 속에서도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 대행 사상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블레셋의 골리앗 장군과의 싸움에서 “너는 칼과 창을 가지고 나오지만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간다” 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전쟁은 여호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므로 자신은 지금 도구로만 쓰여지고 있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철저한 하나님 대행 사상입니다.
또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던 선지자들의 한결된 사상이기도 했습니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서서 예언의 말씀을 전하지만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자신들은 철저히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 그들에게 전하는 대행자로 서 있을 뿐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대행 사상은 하나님의 종들의 일치된 생각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의식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어떤 일을 할 때에 ‘내 지식으로, 내 힘으로’ 한다고 생각하고 또 실제적으로 그렇게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하나님 없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나 자신을 의지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모든 일을 함에 있어 나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도구로만 쓰여지고 있다는 의식을 철저하게 가져야만 합니다.
사도베드로는 이것에 관해 베드로전서 4:11에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철저히 하나님 대행 사상을 갖고 그렇게 행해야 할 것입니다.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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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52절에 요셉의 두 아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 중 장자의 이름은 므낫세이고 차자의 이름은 에브라임으로 모두 히브리식 이름이었습니다.
요셉은 비록 45절에 바로로 부터 ‘사브넷바네아’ 라는 애굽식 이름을 얻고, 또 애굽 출신 아내를 얻었지만 자신의 아들들의 이름만큼은 히브리식 이름으로 지었습니다.
이는 요셉이 비록 우상 숭배의 중심부인 애굽 궁궐에서 생활하며 바로 다음의 높은 직위를 얻었을지라도 자신이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인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잊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바로 이런 점이 요셉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지속적인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잃지 않을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물질적으로 사회적으로 성공하게 된 성도들이 가장 빠지기 쉬운 위험이 바로 교만입니다.
마치 그 모든 성공이 자신의 지식과 능력으로 된 것처럼 교만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뿐만 아니라 결국은 그 성공에 도취되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마는 경우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쉽게 패망하는 이유입니다.
교만하여지면 더 이상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없게 되고 하나님이 없이는 더 이상 그 성공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위치에 처하든지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시오 축복의 근원되심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해석(6623) 피트로운(pithrôwn) פִּתְרוֹן
1. 꿈의 해몽, 2. 해석, 3. 창세기 40:5
발음
/ 피트론[ pithrôwn ] 어원 / 662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꿈의) 내용(창 40:5), 해석(창 40:8, 12, 18), (꿈의) 뜻(창 41:11) 구약 성경 / 5회 사용
* 6622. 파타르(pâthar) פָּתַר
1. 미완료형 יִפְתֹּר .2. 해석하다, 3. 설명하다 발음
/ 파타르[ pâthar ] 관련 성경 / 해석하다(창 40:22, 41:12,15). [명] 해석(창 40:16) 구약 성경 / 9회 사용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던 요셉을 위해 이제 하나님께서는 영광의 길을 예비하기 시작합니다. 창세기 40장은 꿈 때문에 고난을 당하게 된
요셉이 꿈을 통하여 애급 왕 바로에게 나갈 수 있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합니다.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요셉은 함께 갇힌
두 전직 관원장의 시중을 들게 됩니다(1-4절). 어느날 그들이 동시에 꿈을 꾸었으나 무슨 뜻인지 몰라 고민하는 그들을 위해
요셉이 꿈을 해석해 줍니다(5-19절). 요셉의 해몽은 그대로 이루어졌고(20-23절), 훗날 요셉이 바로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일의 시작과 끝이 시종 일관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다는 것과 두 관원장들의 꿈과 요셉의 꿈 해석은 하나님의 섭리라고 하겠습니다.
계시란 무한한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역사하심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을 위해 하나님께서 직접 자신과 자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실 목적으로 드러내신 것을 의미합니다. 계시의 종류에는 그 방법에 따라 자연 계시와 초자연 계시가 있고 내용에
따라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로 구분합니다.
인간의 구조와 자연 현상을 통해 전달되는 계시를 자연 계시라고 하며, 하나님께서 자연 현상에 개입하셔서 특별한
방법으로 계시하시는 것을 초자연 계시라고 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꿈은 자연 계시에 해당되는 것으로 하나님은 꿈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과 지시를 계시하신 사례가 성경에 자주 소개됩니다.
일반 계시는 자연 법칙, 인간 정신, 역사 등 일반적인 방편을 통해 계시하는 것이며, 특별 계시는
일반 계시로 불충족한 특별히 하나님의 구속 계획과 관련되어 나타납니다.
특별 계시는 구속사의 시작과 더불어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데
그중에 가장 정수가 바로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하나님의 바른 계시를 이해하는 유일한 표준은 오직 성경이어야만 합니다.
꿈 때문에 고난을 받았던 요셉은 본문에서 꿈을 계기로 애급 왕 바로에게 나아가는 인생의 반전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전에 자신의 꿈
이야기를 형제들에게 하였다가 애급으로 팔려 오는 신세가 되었던 요셉에게 다시 다른 이의 꿈 사건과 관련하여 전화위복의 전기를
맞게 된 것은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이 생각지 못한 상황과 방법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요셉과 같이 하나님이 주신 꿈과 소망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간직하는 자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성공의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여 나를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나를 괴롭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 때문에 주저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당당하게 일어나서 주 예수를 영접하고 믿을 때 가졌던 마음과 계획을 지워버리지 말고 다시 드러내어 그것이 열매가 될 때까지 믿음의 본분을 바르게 감당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나의 영원하신 기업
먼저 1-4절에 요셉이 옥에 있을 때, 애굽 왕을 가까이에서 섬기는 두 관원장이 어떤 연유로 옥에 갇히게 되었고, 친위대장의 명령으로 요셉이 그들의 시중을 들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하나 순서에 따라 계획된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형들을 통해 요셉을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게 하셨고, 그중에서도 애굽 왕 바로의 친위대장인 보디발의 집에 가게 하셨습니다.
또한 부도덕한 보디발의 아내를 통해 요셉을 옥에 갇히게 하셨고, 거기서 간수장의 신임을 얻어 옥을 다스리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또 이번에는 때를 맞춰, 애굽 왕을 가장 측근에서 섬기는 두 관원장을 옥에 보내시어 요셉과 만나게 하셨습니다.
이로써 요셉은 애굽 왕인 바로 곁으로 한 발자국 더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어느 날 갑자기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삼으신 것이 아니라, 요셉에게 수많은 역경을 주시고, 그를 통해 연단시키시고, 그 자격이 되었을 때 그를 위대한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따른 과정과 순서를 통해 점차적으로 그를 사명에 합당한 자로 이끌어 가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이루심에 있어서 '때와 순서를 따라' 하나하나 이루어 나가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때로 마음이 조급하여, 이런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고 기다리지 못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는 그것이 곧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낙심하여, 심지어 하나님께서 살아계시지 않는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우리의 간구에 응답하시기 위해 이미 계획을 세우시고 그 계획들을 하나하나 이루어 나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당장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지지 않고 축복이 임하지 않는다고 원망하거나 낙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인내로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때를 참고 인내하며 스스로의 믿음을 키워 나갈 때, 하나님의 응답과 축복은 임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조급해하지 말고, 이미 응답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믿고 기다리는 참 믿음의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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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절에 요셉과 함께 옥에 갇혀 있던 두 관원장이 근심한 이유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꿈'을 '자신의 미래에 대한 신의 계시'라고 생각했는데(욥7:14; 단 2:1-13), 어느 날 두 관원장은 이상한 꿈을 꿉니다.
그런데 그들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들이 꾼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찌될지 모르는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근심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두 관원장의 근심에서 '모든 인간들이 겪고 있는 불안감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내일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또한 죽음 이후에 자신에게 어떤 운명이 닥쳐올 것인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무당이나 점술가 등에게 가서 점을 치기도 하고 우상을 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두 관원장에게 아무도 그 꿈을 해석해 줄 사람이 없었듯이, 세상 가운데에는 어디에도 사람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을 해소시켜 줄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두 관원장에게 꿈을 꾸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셨듯이, 사람의 내일을 결정하시는 분도 역사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꿈의 해석이 하나님께 있다고 한 요셉의 고백과 같이 사람의 미래를 아시는 분도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대상 29:12)
그러므로 사람이 자신의 미래를 알기 위해서 누구에게 물어봐야 하겠습니까?
바로 하나님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당 또는 점술가나 우상, 철학자나 과학자에게 가서 자신의 미래에 대한 해답을 구하려 한다면 그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모든 궁금함을 풀어주시기 위해 한 권의 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책입니다.
성경에는 인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죽음 이후의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이 나와 있습니다.
또 여기에는 인생의 발걸음을 바른 길, 구원의 길로 인도해 줄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인생의 문제에 해답을 얻지 못해 답답할 때나, 자신의 미래로 인해 근심이 될 때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 불안과 근심이 서서히 걷히고 미래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얻게 될 줄 저는 확신 합니다. .
이어지는 9~19절에,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이 꿈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 서슴없이 술 맡은 관원장은 사흘
후에 전직이 회복되어 다시 바로 앞에 나가게 되고, 떡굽는 관원장은 사흘 후에 처형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자세하게 꿈을 해석해
줍니다.
물론 후에 요셉의 꿈 해석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맞았습니다.(20-23절)
그런데 성경을 보면 요셉이 어려서부터 남달리 지혜가 뛰어났다거나 학식이 높았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또 꿈 해석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쌓았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도대체 어디서 그러한 지혜를 얻어서 누구도 설명하지 못하는 관원장들의 꿈을 그렇게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었을까요?
그 유일한 해답은, 요셉이 하나님을 경외했다는 데서 찾아야 합니다.
암 3:7에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고 말씀합니다.
또 잠 9:10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관원장들의 꿈을 정확하게 해석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이런 요셉과 같은 지혜가 우리에게도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앞에 어떤 고난이 오더라도 잘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도 요셉처럼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한다면, 요셉과 같이 모든 고난을 슬기롭게 대비하여 이겨나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슬픔과 불행을 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고난이 닥쳐올 때 그들에게 알게 하시고 대비하게 하십니다.
단지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삶에 있어서, 이해할 수 없고 풀 수 없는 문제에 직면했을 때 당황하거나 다른 곳에 가서 해답을 찾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고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회개하고 바른 믿음으로 서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놀라운 지혜를 허락하셔서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일들을 깨닫게 하시고 모든 일을 슬기롭고 지혜롭게 해결해 나갈 수 있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오늘 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해석할 자가 없도다 - 당시 애굽에는 신탁(神託)임무와 꿈 해석 등을 전문으로 하는 박사와 술객 등이 있었다(41:8). 그러나 지금은 갇힌 몸이라 그들을 면회할 길이 없다는 두 관원장의 하소연이다.
해석은 하나님께 - 일찍이 하나님이 주신 꿈(37:5-9)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요셉은 두 관원장의 꿈 역시 하나님께로부터 기인한 초자연적 성격의 꿈이라는 것을 신앙의 내적 확신을 통해 분명히 믿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러한 주장은 다신론자인 애굽인들에게도 꿈을 주관하는 어떤 신을 의미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공감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청컨대 내게 고하소서 - 당시 애굽에서 꿈 해석은 고도의 학문적 기술을 요하는
난해한 분야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일개 비천한 이방인 종의 입에서 이처럼 확신에 찬 질문이 나왔다는 사실은 화려한 경력과 학식을
가졌을 관원장들에게 분명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다.
'주체철학의 신학적 접근과
북한선교 이해'
개회예배에서 '만물의 주 예수 그리스도' 제하의 말씀을 전한 최태협 목사는 "김일성 주체사상은 한마디로 철저한 인본주의"라며
"우리의 신앙을 바탕으로 세뇌되어 있는 북한 주민들의 주체사상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고, 먼저 이 땅에 와 있는 탈북민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할까를 고민하며, 더 나아가 어떻게 북한 선교를 할 수 있을까 꿈꿀 수 있기를 바란다"고 격려했다.
'주체철학의 신학적 접근과 북한선교 이해 -몰트만 신학을 중심으로'를 주제로 발표한 이춘영 박사(장신대)는 "주체사상의 '주체'는
인간의 '주체'는 빼고, '수령'의 주체성만을 강조함으로써 인간의 운명 문제에 대한 해답을 수령의 사회정치적 생명의 부여를 통한
영생에 귀결시켰다"며 "주체철학의 주체성은 인민대중의 수뇌부인 수령의 유일무이한 통치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강압적 기능을 갖기에
그 안에 영속하는 생명력이 없다"고 분석했다.
몰트만의 신학에 대해서는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이 인간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하면서 하나님 중심의 주체성은 그 속에 영생하는 생명력이 있다"며
"주체철학이 유한한 인간이 자신의 영속성을 넘어 무한한 영속 존재를 전제한 수령을 통해 역사가 진보한다는 무신론적 희망 안에서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했다면, 몰트만 신학은 인간이 하나님 없이 유토피아를 향해 자신의 상황을 추월할 수 있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면서 종말론적 기독교의 희망을 제시한다"고 말했다.
이어진
토론 시간에 '북한사회의 종교성과 선교'를 주제로 발표한 박광일 목사(아름다운꿈의교회)는 "북한은 주체사상이라는 유물론적
세계관에 기초한 종교적 논리와 수령의 위대한 영도력, 인민적 풍모를 중심으로 한 우상화교육과 이를 실천하기 위해 충성하는
충성분자로 세뇌시키고 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 지역은 과거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렸던 자랑스러운 곳이며 지금도 그 이름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는 기도의 용사들이 남아 있을 것을 기대하며 평양의 대부흥운동을 회복시킬 사명을 위해 충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한 사람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 다음 단계'를 주제로 발표한 정형신 목사(뉴코리아교회)는 "국내 입국한 3만 탈북민 중
40%에 달하는 이들이 기독교인이며, 그중 200여 명 가까운 이들이 목회자이거나 신학생이다.
탈북민교회만도 80개 이상이
세워졌다"며 "그러나 1만 명 탈북 기독교인들 중 가나안 성도의 비율은 60% 이상이며, 탈북 사역자들의 50%가 현장을
떠났으며, 탈북민교회 중 25%가 없어졌다"고 탈북민 기독교의 상황에 대해 밝혔다.
정 목사는 △탈북민교회 목회자 가정 살리기
운동 △탈북민교회 및 목회자들을 선교의 범주에서 볼 것 △탈북민교회 개척운동 △탈북민교회와 한국교회의 동역 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을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오랜 시일 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고 정의의 칼을 빼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사 세계만방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또
우리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 이 기쁜 역사적 환희의 날을 이 시간에 우리에게 오게 하심은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만방에 정시(呈示:
꺼내 보임)하신 것으로 저희는 믿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이로부터 남북이 둘로 갈리어진 이 민족의 어려운 고통과 수치를 신원(伸寃: 원통한 일을 풂)하여 주시고, 우리 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기를 기도하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원치 아니한 민생의 도탄은 길면 길수록 이 땅에 악마의 권세가 확대되나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은 이 땅에 오지 않을 수밖에 없을 줄을 저희들은 생각하나이다.
원하옵건데, 우리 조선독립과 함께 남북통일을 주시옵고, 또한 우리 민생의 복락과 아울러 세계평화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에 의지하여 저희들은 성스럽게 택함을 입어 가지고 글자 그대로 민족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그러하오나 우리들의
책임이 중차대한 것을 저희들은 느끼고, 우리 자신이 진실로 무력한 것을 생각할 때 지(智)와 인(仁)과 용(勇)과 모든 덕(德)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 이러한 요소를 저희들이 간구하나이다.
이제 이로부터 국회가 성립이 되어서 우리 민족의 염원이 되는, 세계만방이 주시하고 기다리는 우리의 모든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며,
또한 이로부터서 우리의 완전 자주독립이 이 땅에 오며, 자손만대에 빛나고 푸르른 역사를 저희들이 정하는 이 사명을 완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이 회의를 사회하시는 의장으로부터 모든 우리 의원 일동에게 건강을 주시옵고, 또한 여기서 양심의 정의와 위신을 가지고 이 업무를 완수하게 도와주시옵기를 기도하나이다.
역사의 첫걸음을 걷는 오늘의 우리의 환희와 우리의 감격에 넘치는 이 민족적 기쁨을 다 하나님에게 영광과 감사를 올리나이다.
이 모든 말씀을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받들어 기도하나이다. 아멘
자료 출처 / 1948년 5월 31일 제헌의회 속기록
시편 136편에 나타난 감사의 내용을 보면 감사 고백의 원리가 우리의 일반적인 감사고백과 다름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표현이 26번 반복된다. 본문의 시편 기자는 창조 사건, 출애굽 사건, 광야 사건, 가나안 전쟁 사건 등을
나열하면서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고백한다. 감사 내용이 기적의 사건이나 결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고 그
사건을 일으키신 하나님을 향해 감사하고 있다. 하나님이 모든 일의 주관자요 섭리자라는 것을 인정하며 고백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주로 조건적인 감사를 한다. 예컨대, "시험에 합격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병을 낫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대학이나 좋은 직장에 들어가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사건과 결과에 대한 감사를 할 때가 많다.
물론 이런 감사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감사고백은 우리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감사, 사건과 결과에 초점을 맞추어 고백하는
감사일 수 있다.
그런데 시편 136편에 나타난 감사는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와 같이, 사건과 결과에 대한 감사가 아닌, 그
사건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초점을 두는 감사이다.
감사는 헬라어로 '엑소몰로게오마이'이다. 이 단어는 '말과 행동, 습관에 동의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하신 일을 전적으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감사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조건적으로만 고백하는 감사는 진정한 감사가 아니다. 진정한 감사는 사건과 결과와 상관없이 그 일을 행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의 고백을 할 수 있다. 감사는 환경과 조건에 따른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초점을 두고 하나님을 향해 감사고백을 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가 감사 기도할 때, 기도의 방향을 바꿀 필요가 있다. 우리는 주로 감사기도 내용의 핵심이 하나님이 해주신 '그것'에
맞춰져 있다. 그런데 시편 136편에는 "~을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로 표현되어 있다. 얼핏 보면 비슷해 보일 수 있으나
분명히 다르다. 감사의 방향을 문제해결에 두는 것이 아니라, 감사의 방향을 하나님께 두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감사는 문제해결에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방향을 두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고난 중에도 감사,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의 고백을 할 수 있다.
창세기 39: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여호와께서 - 이후 애굽에서의 요셉의 성공은 족장들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언약(15:13-16; 26:4; 28:14)이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성취된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언약의 신을 강조하는
여호와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Quarry).
형통한 자(이쉬 마츠리아흐) - '사람'을 뜻하는 '이쉬'와 '번성하다'란
뜻을 지닌 동사 '찰레아흐'의 사역형 분사가 합쳐져 '번영의 사람'이란 의미이다. 이것은 요셉이 하는 일마다 눈에 띄도록 현저하게
나아지는 현상을 말한다. 이러한 현상은 그 주위 사람들에게 분명히 요셉과 함께 하는 어떤 신적 축복과 가호가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감지케 했다.
창세기 39:3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그의 범사에 - 문자적으로 '그가 하는 모든 일에'란 뜻. 이는 요셉이 모든 일에 신실하였음과 그 위에 하나님의 특별하신
축복이 따랐음을 보여 준다. 이처럼 성도는 어디서든, 또한 어떤 형편에 처하든 진실된 삶을 통해(골 3:22; 23; 딤전 6:1)
이방인의 빛과 소금이 되어 그들로 그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해야한다(마 5:13-16; 롬 14:18; 벧전
2:12).
창세기 39:23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전옥은...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 하나님의 신뢰를 받는 자가 사람의 신뢰와 인정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호와께서...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 성도가 당하는 고통과 괴로움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의 보호 역시 더 깊고 세밀한 곳까지 임하신다. 따라서 성도에게 임하는 모든 일은 합력하여 결국 선을 이룬다(롬 8:29).
성서가 말하는 형통함
가난을 묵상할 때, 우리가 반드시 확인해야 할 핵심적인 것 가운데 하나는 형통함입니다. 과연 어떤 것을 형통하다고 생각하고 믿고 있을까요? 다시 말해 신앙을 통해, 혹은 기도를 통해 무엇을 구하고, 무엇을 바라고 있을까요?
참 자아를 추구한다는 것은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가장 기본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참된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택하는 길은
합리화라는 방어기재를 발동시키는 것입니다. 가장 흔한 것이 '다들 그렇지 뭐'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지적하면 불 같이
화를 내는 사람들도 이럴 때는 꼬리를 내리고 자신을 폄하하는 것입니다. '나 같은 게', 만일 그런 분들이 언제나 스스로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간다면 그는 오히려 영적인 사람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자기부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잘못된
모습을 보고 그것을 인정해야 하는 순간에만 그런 태도를 취하는 것은 은혜의 순간을 저버리고, 죄의 법을 계속해서 따르겠다는 의지의
천명이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자신이 생각하는 형통함이라는 것이 기독교 신앙을 선택했음에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
다르지 않음을 발견하는 이 일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의 여정에 들어가는 출발점이라는 것을 명심하면서 성서가 말하는 형통함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형통함
놀랍게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형통함이라는 단어를 늘 사용하지만, 성서가 말하는 형통함의 의미에 대해서는 문외한입니다. 그렇다면 성서가 말하는 형통함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요?
어린
시절 우리는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 당시로서는 문제라 여겼던 상황들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쉬운
예로, 무서운 개가 있어도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는 그 개가 그다지 두렵지 않습니다. 평소 자신을 못살게 굴던 아이가 있어도
아버지와 손을 잡고 있을 때는 오히려 그 아이에게 큰 소리를 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누구라도 이런 식의 크고 작은
경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형통함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형통함 역시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우리의 삶 속에 일어난 어떤 문제도 문제가 되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성서가 말하는 형통함을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아 보입니다. 또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 역시 어렵지 않아 보입니다.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기도를 통해
주님과의 동행을 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서가 말하는 형통함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그것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주님과 동행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어렵습니다. 그 과정에는 주님 이외에는 그 어떤 희망도 존재하지 않는 극한
가난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과의 동행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스스로 원한다고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누구든 대책 없는 무방비 상태에서 오직 주님만을 신뢰하는 믿음을 입증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진 절망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전심으로 그분을 붙잡고 모든 것을 의탁할 때 주님과의 동행이라는 형통함이 비로소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형통함
그 과정을 잘 보여 주는 성서의 인물이 있습니다. 요셉입니다. 요셉의 인생을 면밀히 살펴보면 어떻게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되고, 또 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족장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다른 아들들의 시샘을 받을 정도로 유복했습니다. 그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꿈을 형들에게 스스럼없이 이야기할 정도로 천진무구한 아이였지만, 형들에게 그의 꿈 이야기는 그가 입고 있는 채색옷과 더불어
단순한 시샘을 넘어 살의를 불러일으킬 정도의 불쾌하기 이를 데 없는 불공평한 처사였습니다. 결국 이방 사람들의 노예로 팔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성서를 읽는 이들은 그 당시 요셉이 받았을 충격과 실의를 간과하며 요셉의 이야기를 읽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우리는 요셉의 이 시기를 깊이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정말 사심이 없었습니다. 형들을 무시하려는 의도
역시 없었습니다. 자신이 받았던 특혜를 의식할 정도로 성숙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형들을 사랑했고, 형들을 위해 기꺼이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그토록 믿고 사랑하던 형들은 요셉이 생각하는 것처럼 믿을만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형들은
아버지의 편애에 상처 입고 분노에 사로잡혀 있는 승냥이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배신은 아픈 상처를 남기고,
분노를 일으킵니다. 하지만 분노는 때로 현실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요셉도 그랬을 것입니다. 어린 소년에게 노예의 삶은
녹녹치 않았을 것입니다. 폭력과 굶주림이 주조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거기에 더해 족장의 아들이었던 그의 자존심이 그를 더 힘들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모멸감이야말로 인간이 감내하기 어려운 아픔이기 때문입니다. 억울함과 모멸감은 그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에게는 자신에게 닥친 힘든 일상을 타개할 아무런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가 의지하려는 모든 사람들이 그가 신실하고 형통하기 때문에
그를 배신하였을 것입니다.
마침내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는 절망의 상태에 다다랐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마찬가지로 그는 극한 가난에 도달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경우와 달리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유일하게 남은 하나님이라는 희망을 붙잡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희망을 붙잡은 그 순간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동시에 요셉은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창 39:2).
어릴
적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주인공이 탐관오리를 만나 위기에 처합니다. 옥에 갇히고 마침내 목숨이 날아갈 위험에
처합니다. 망나니가 칼을 내리치려는 바로 그 순간 "암행어사 출두요!"라는 외침과 함께 암행어사가 나타나 주인공을 구합니다.
영화를 보던 사람들은 "암행어사 출두"라는 외침을 듣는 순간 함께 박수를 쳤습니다. 그 박수 소리가 새삼스럽습니다. 바로 이
대목이 그리스도인들이 관객들처럼 박수를 쳐야 하는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형통함은 여호와께서 함께하시는
순간 자동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알아야 할 성서적인 형통함이 바로 이것입니다. 요셉에게는 변함없이 인생의 높은 파고가
닥칠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더 이상 인생의 높은 파고를 아랑곳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형통함과 신실함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모든 일(범사)이 형통해집니다. 범사에 형통함은 곧 범사를 하나님께 맡기고, 범사에 코람데오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일이 마냥 좋지만은 않습니다. 우리는 심각한 얼굴로 우리의 삶이 코람데오의 삶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죄의 법에
사로잡힌 욕망의 존재인 인간에게 코람데오의 삶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에덴동산을 떠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숨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기사에서 괄목할 만한 일 가운데 하나는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 사건입니다. 보디발은 당대의
최고 권력자 가운데 하나였고, 그의 아내 역시 당대 최고의 미녀였습니다. 그런 아름다운 여인이 혈기왕성한 젊은이를 유혹합니다.
더구나 그 여인은 주인이기도 합니다. 그런 여인의 유혹을 이기고 명령을 따르지 않는 일은 아무리 초인적인 인간이라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불가능한 일을 해냅니다. 자신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는 불륜을
저지를 수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인간의 편에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신실한 삶을 살아내야 하는 과제로
작동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극한 가난 속에서 자신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일을
형통케 하심을 보았습니다. 요셉의 편에서 할 일은 신실한 삶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서적 형통함과
신실한 인간의 삶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어느 것이 먼저도 아니고, 어느 것이 나중도 아닙니다. 그것은 동전과 마찬가지로
하나입니다. 오늘날 범죄한 목사들이 이 사실에 주목할 수 있다면 그 어떤 것으로도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할 수 없을 것입니다.
형통함과 가난
여기서
주목해야 할 또 다른 한 가지는 형통함이 가난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난은 단순히 성서적 형통함의
관문으로서 기능할 뿐만 아니라 형통과 함께 갑니다. 요셉의 기사에서 '형통'이라는 단어가 3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은
보디발의 집에 있을 때,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그가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고 있을 때입니다. 그 이후에는 형통이라는 단어가 더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형통이 사용되었을 때 요셉은 가난한 자였습니다. 애굽의 총리가 되어 부자가 되었을 때는 형통이라는
단어가 더 이상 등장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오랜 기간 훈련을 받은 요셉이 하나님을 저버리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권력자가 된 요셉에게 하나님은 더 이상 필요치 않았습니다. 범사를 능히 자기 손으로 담당하고 처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높은 자리에서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일은 제아무리 훈련된 사람에게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요셉의 기사를 읽어 내려가지만 요셉이 애굽의 제사장의 딸과 혼인한 일은 하나님 보시기에 그리 좋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 야곱의 기사에서 야곱이 아내를 얻고자 먼 곳에 사는 외삼촌 라반의 집에까지 가야 했던 사실을 통해서도
분명해집니다. 그와 대조적으로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았던 에서의 선택이 잘못된 일임을 성서 기자는 감추지 않았습니다. 또 요셉은
흉년과 기근이라는 자연재해를 이용해 많은 땅을 바로의 것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물론 어쩔 수 없이 권력자의 편에 선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요셉이 애굽의 총리였다 해도 그가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했다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난민으로 만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우리는 성서가 말하는 형통함이 가난과 함께 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형통한 나라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있는 성령의 인도하심은 하나님 백성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도
형통함으로 그들을 인도합니다. 그러나 부하려 하는 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지 않는 부자들은 형통함에서 벗어나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져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것이 성서의 일관된 견해입니다(딤전 6:9 참조).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든지 찬송가의 가사처럼 만사형통합니다. 하지만 그 길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맡기면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텐데, 그것을 믿지 못하고 모든 것을 내 생각대로 하려 들고, 조금만 어려움에
부딪혀도 하나님이 나를 떠나신 게 아닌가, 의심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형통함을 구하는 우리의 마음은 일관됩니다.
하지만 헛된 형통을 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이 엄연한 사실을 먼저 받아들여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으로 형통함은 가난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형통함의 관문으로서, 그리고 형통함을 지속하는 방편으로서 가난은 그야말로 필수불가결합니다. 결론적으로
성서적 의미에서 가난과 관련 없이 이루어지는 형통함은 있을 수 없습니다. 가난 없는 형통함을 구하는 마음이 바로 부하려 하는
자들의 마음이라는 것을 마음에 새기고 기꺼이 가난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신실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형통한 삶
형통한 삶 우리는 세상에서 형통한 삶을 살기 원합니다. 무엇을 하든 계획대로 잘 진행되어 원하는 바를 이루길 원합니다.
‘형통’의 사전적 의미는 ‘모든 일이 뜻과 같이 잘되어 감’입니다. 만사형통은 만사 즉 모든 일이 뜻대로 잘되는 것을 말하는데
세상에서 말하는 형통은 성공이고 번영이며 소위 잘나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세상 살다 보면 어떻게 만사가 자기 뜻대로 잘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자신의 바램일 뿐 그렇게 평생 살아가면서 매사 모든 일이 다 형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만사형통을
바랍니다. 그래서 온갖 종교를 만들고 자신에게 만족을 주는 신을 찾고 윗사람과 연결고리를 찾아 줄을 대려 하고 형통을 방해하는지
점을 보고 예언을 받고자 하며 대책을 간구합니다. 하물며 교회에 나와서도 같은 목적을 가지고 소원을 빌며 기도하고 하나님께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떼를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은 세상에서 말하는 형통과 다릅니다. 요셉을 보면 ‘형통’이란 어떤 것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꿈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인도하실지를 기대하며 살다가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결국 애굽에 노예로 팔려 갑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애굽으로 팔려 가 종살이를 하는 요셉을 두고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시니 형통하다’ 라고
말합니다. 당시 요셉은 전혀 이해 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귀한 아들로 사랑받고 하나님으로부터 꿈을 받고…. 그런데 현실은
형들의 시기, 질투로 노예로 팔려 갑니다. 누가 이를 형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요셉은 자신이 팔려 간 집의 주인이자
애굽 왕의 친위대장인 보디발의 아내에게 유혹을 받자 하나님 앞에서 순결을 지키려다가 보디발의 아내에게 모함까지 받아 감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정말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때도 성경은 ‘하나님이 감옥에 있는 요셉과 함께하시니 요셉이 형통하다’ 고 합니다. 이처럼 요셉의 삶의 모든 이야기를 알 때 이해가 되지만 사건 하나하나 일어날 때마다 너무나 힘들고 이해가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그 사건 속에 여전히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면 그것이 형통입니다.
즉,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은 바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내게 주어진 환경과는 상관없이 그분의 뜻에 순종되어지고 그분만을 끝까지 신뢰하며 그분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삶을 형통이라고 합니다. 성경적 형통은 내 삶이 기준이 아닙니다. 세상적 가치관도 기준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든 것이 그 기준입니다.
순간순간의 사건들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쉬지 않고 졸지 않으시며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일하고 계시며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 함께
하시는 순간순간들이 모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영광 받으시는 우리의 삶의 열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억하고 명심해야 할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떠한 환경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믿고 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서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우리의 신앙이, 삶이 어려울 때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하나님만을 믿고 우리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로 충성하여 형통케 되어지는 우리 모든 교우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환경 따라 반응 않고 주님의 주권 인정하는 것이 형통한 삶
우리는 형통을 좋아한다. 보편적으로 형통함이란 모든 일이 뜻대로 잘돼 가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형통은 세상이 말하는 것과 다르다. 성경적인 형통은 하나님과 함께함을 말한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사람의 집에 있으니.”(창 39:2) 성경에서 요셉을 형통한 자라고
했지만, 그의 인생은 배신과 억울함의 연속이었다. 환경은 그러했지만, 요셉은 늘 하나님과 함께하므로 환경에 따라 반응하지 않았고
환경이 그를 주장하지 못했다.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과 함께하므로 환경에 지배받지 않았다.
환경에 따라 반응하지 않고 주님께 반응하는 삶,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주님을 따라 어디든지 따라가며 요동하지 않는 삶, 이것이 형통한 삶이며 주님의 신부가 되는 삶이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 사람과 같은 곳에 시선을 둔다. 세상의 복과 형통의 개념을 그대로 신앙생활에 적용함으로써 말과 행동이 달라진다.
세상 사람과 별반 다름이 없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오히려 질타의 대상이 된다. 세상에서의 복의 개념은 소유,
편안함, 높음 등 외적 능력에 있지만, 성경적 복은 ‘하나님과의 친밀의 정도’다.
문제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먼저 바뀌어야 할 가치관이 바뀌지 않고 세속적 관점을 가진 채로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가 많다는 점이다. 그렇다 보니 혼돈에 빠진다.
소유의
개념에서 존재의 개념으로 가치관이 바뀌지 않으면 신앙생활에서 여러 오해와 불신으로 성장과 성숙이 어렵다. 미혹과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이다.(막 2:22)
하나님과
함께하는 신앙인은 초막도 궁궐이나 천국이 된다. 신앙인은 하나님과 함께함으로써 환경을 초월한다. 환경에 따라 흔들리는 자는 아직
어린 자다. 우리는 하나님만으로 기뻐하는 자가 돼야 한다. 세상과 나는 간곳없고 구속한 주님만 보여야 한다. 이것이 형통이다.
신앙인은
환경에 지배받지 않고 환경을 다스리며 살아간다. 다스림이란 누림을 말한다. 어떠할 때라도 마음이 요동치지 않고 평안을 유지한다.
그래서 물 가운데 지날 때 물이 침몰치 못하고, 불 가운데 지날 때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사르지 못함을 고백하게
된다(사 43:2). 가난하다고 해서 위축되지 않고 부하다 해서 교만하지 않으며 질병 중에도 찬양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환경에 따라 산다. 심지어 사람을 환경, 즉 소유로 판단한다. 외적으로 초라해도 주님 모시고 사는 자는 천국이 그의 마음에 있다. 아무리 부요한 자라도 주님 없는 사람은 지옥이다. 형통한 자는 주님과 함께하는 자다.
주님과 함께하는 형통한 삶을 위해 우리가 가장 먼저 바꿔야 하는 것은 가치관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그의 나라에 합당한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 천국의 가치관은 무엇을 얼마나 소유했느냐가 아니라 존재 자체의 생명과 사랑이다.
신앙인은 살아가는 법이 다르고 목적이 달라야 한다. 신앙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사는 그 이상의 것이다. 유한한 이 땅 삶의 어떠함에 목적을 두지 않고 더 높은 영원을 향해 가야 한다.
우리가
천국의 시민이 되고서도 여전히 이 땅의 가치관을 따라 살며 예전의 것(명예, 물질, 권력, 편함)을 구함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고서도 오이와 참외, 부추, 파, 마늘, 고기 등 먹은 것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형통함을 누리기 위해 갖춰야 할 덕목은 ‘감사’다. 주님은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다. 우리가 이 말씀을
알고 있어도 감사하지 못함은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 우리의 가치관이 세속적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항상 최상의 것을 허락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자신이 기쁘고 좋은 일에는 감사하지만, 조금만 어려운 일이
생겨도 ‘왜 하필 내게 이런 일이 생기냐’고 불편해한다. 감사는 만족스러운 조건에 따라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존재의 정결, 즉 형상 회복에 있다. 하지만 물질계에 사는 우리는 존재보다 소유를 귀하게 여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관점으로 해석해 오해가 생긴다.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주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삼아 맡기고 의지함으로써 시작된다. 나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뜻을 기대하며 최상의 가치로 여겨야 한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은 ‘존재함에 감사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존재에 가치를 두고 존재함으로 많은 것을 경험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
신앙인의 형통은 하나님과 함께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내면이 주님의 것으로 채워져야 한다. 이것이 내면의 회복, 즉 형상 회복이다.
성도는 이를 목적으로 살아야 한다. 신앙인은 내가 가진 어떤 것이나 환경의 영향에 따라 흔들려선 안 된다. 존재함에 감사하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야 한다.
형통은 하나님의 섭리에 참여하여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혜가 필요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대부분 사람에게 기적적인 은혜 없이도 버티고 살아갈 수 있는 일반
은혜를 주십니다. 주님께서 바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일깨워주신 은혜가 바로 그 은혜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바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하신 삶이 풍족하고 건강하고 평안한 삶이 아니라 불치의 병을
안고 사는 삶이라는 점입니다. 바울이 생각할 때 없었으면 좋은 불치의 병을 주님께서 족한 은혜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바울 개인의
체험만이 아니고 진정한 참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든 하나님 백성의 체험입니다.
창세기 37장에서 시작된 요셉의 이야기는 창세기 50장까지 계속됩니다. 그런데 창 38장에 유다의 이야기가 끼어 있습니다.
성경이 야곱의 생애를 다루다가 갑자기 요셉의 이야기로 흐름을 바꿉니다. 성경이 구속의 역사라는 점을 생각할 때 이렇게 역사의
흐름이 바뀌는 것은 마치 요셉을 약속의 계승자로 취급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약속의 계승자, 즉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아닙니다. 요셉은 예수님의 모형이기는 하지만 예수님의 조상은 아닙니다. 요셉과 유다는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간섭으로 일생을 산 인물이고, 유다는 창 38장에 의하면 제멋대로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요셉에게서는 많은 교훈을 받지만 유다에게는
별로 교훈을 받지 못합니다. 이 없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특별히 간섭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적인 일생을 살았고, 유다는
제멋대로 살았는데도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 극명하게 대조되는 두 인물을 통해 우리에게 주는 하나의 메시지를
줍니다. 요셉이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의 총리가 되어 가족과 애굽과 세계 많은 사람을 구하였는데, 유다도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꿈 있는 백성은 망하지 않는다는 태마의 주인공으로 요셉을 제시합니다. 요셉이 꾼 꿈을 그의 비전으로
취급하며 긍정적인 꿈을 가지고 위대한 미래를 바라보라고 합니다. 꿈을 품고 그 꿈이 성취되도록 노력할 것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요셉은 긍정적인 꿈을 꾼 사람이 아닙니다. 요셉을 꿈꾸는 자라고 한 것은 그의 형들이 요셉에 대해 비아냥거리며 한 말입니다. 그는
긍정적인 생각을 한 적도 없고 비전을 가슴에 품은 적도 없습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의 특별하신 간섭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요셉을
통해서 우리가 받을 수 있는 메시지는 임마누엘, 즉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신 은혜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유다를 통해서
우리가 받는 메시지도 역시 임마누엘입니다.
은혜는 인간의 행동과 태도를 통해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조건에 대한 고려 없이
주어지기 때문에, 어떤 행동을 할 때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한 행동이 엄청나게 중요한 일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좋은 일로 그렇게 되면 복이 되지만, 자기에게 화가 되고 저주가 될 일을 아무 생각 없이 할 수도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 보면 어떤 여자는 매우 값 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부었는데 그것이 예수님의 장례를 위한 것이 되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이 미워서 팔아버렸는데 그 요셉이 자기들의 생명을 구원할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은혜의 차원에서 보면 형들이 요셉을
팔았으므로 그들이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관점은 형들을 용서한 요셉의 관점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형들이 요셉을
팔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보존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섭리 차원에서 보면 형들이 요셉을 팔았음에도 불구하고 언약을
보존하시고 그들을 살려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는 자들이 아무리 하나님의 뜻을 꺾어보려고 해도 하나님의 뜻을 꺾을 수
없고 오히려 결국 인간의 고집과 뜻이 꺾이고 맙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볼테르는 철저한 무신론자로서 장차 이 세상에 모든 성경은
쓸모없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이라고 장담하였지만 그가 죽고 난 다음 그의 집이 성경을 출판하는 성서공회가 되었습니다.
요셉의 생애를 생각할 때 결과를 보면 형통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형들에 의해서 팔렸고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종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형통은 종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종의 신분으로 일이 잘 풀렸다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형통이 아닙니다. 심지어 성폭력범으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성경은 요셉이 감옥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형통했다고 합니다. 노예의 신분이나 죄수의 신분으로 지내면서 형통했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으로서는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요셉의 형통을 이야기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요셉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는 면에서 요셉의
형통을 이야기합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어 가는 일에서 자신의 역할을 잘 감당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요셉의 역할은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보딜발에게도 하나님을 드러냈고,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할 때도 하나님을 드러냈고, 간수에게도 하나님을 드러냈고,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에게도 하나님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바로에게도 그리고 애굽의 모든 술객과 바로의 신하들과
보좌관들에게도 하나님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자기를 팔았던 형들이 양식을 사러 왔을 때도 하나님을 드러냈습니다. 요셉이
온갖 역경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드러냈으니 요셉이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 아니냐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야기를 거꾸로
하면 안 됩니다. 성경은 요셉이 대단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드러내서 하나님이 그를 높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시므로 그렇게 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보디발이 요셉의 행동에서 요셉의 위대함을 본 것이 아니라 그가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을 보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요셉의 사건에서 그의 주위에 등장하는 가족에서부터 보디발이나 그의 아내나
간수나 두 장관이나 바로나 그의 신하들은 요셉의 뛰어난 점이 아니라 그와 함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사실을 형통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창 39:2,3)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The LORD was with Joseph and he prospered, and he lived in the house of his Egyptian master.
창세기 39장에서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요셉의 삶의 특징을 "형통한 자가 되게 하셨다"라고 합니다. '형통한 자(a prosperous man)'란 요셉이 형통하기를 기도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셉을 형통하도록 이끄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내가 노력하고 기도하여 형통한 길을 걷고자 합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형통은 내가 노력한 결과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고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형통하다'라는 히브리어 단어를 "차라흐(tsâlach. צָלַח)" 라고 하는데 그 뜻은 "잘 되어가다"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하는 일마다 자연스럽게 잘 되거가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술맡은 관원장과 떡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주었는데 그 결과 감옥에서 풀려나와 애급의 총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극심한 시련에도 불구하고 좌절하지 않고 범사에 승리하는 삶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주도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열일곱의 나이에 형제들에 의해서 낯선 머나먼 타국 땅에 종으로 팔려왔습니다.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는 종의 신분은 열일곱이란 나이에 그것도 부모의 특별한 사랑을 받으며 곱게 자라난 요셉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특별히 아는 사람 하나 없이, 말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곳에서 찾아오는 외로움과 두려움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절망감을 가져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이렇게 만든 형제들을 생각하면 주체할 수 없는 분노와 억울함으로 인해 잠을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 이런 형편에 놓여진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을 포기하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모든 것을 자포자기 할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 어디를 봐도 요셉이 절망하고 삶을 포기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욱 하나님을 신뢰했을 뿐만 아니라 보디발의 집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보통 사람들과 달리 절망적인 순간에도 체념하지 않고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요셉의 자세야말로 나중에 애굽의 총리라는 영광의 자리에 이르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많은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습니다.
여러분은 이처럼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돈, 질병, 실패, 무기력 때문일까요?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이야말로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미래에 대한 소망이 없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살고 싶은 의욕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살하는 사람은 어려움을 당한 사람이 아니라 삶의 희망이 사라진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진 사람은 어떠한 절망적인 상황도 능히 극복하고 마침내는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요셉은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이 모든 어려움을 사라지게 하고 영광의 날을 맞이하게 할 것이라는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있었기에 절망을 극복하고 마침내는 형통한 삶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요셉이 믿고 의지했던 그 하나님은 또한 지금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때 요셉과 같이 모든 고난과 역경도 능히 극복하고 형통한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이 말씀을 의지하여 내게 닥쳐온 모든 역경과 고난과 아픔과 절망적인 상황을 이 말씀에 의지하여 믿음으로 극복하는 승리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3절에 요셉의 주인인 보디발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했던 보디발이 요셉으로 인해 하나님을 인정하고 영광 돌렸음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이 진실되고 성실하게 살아야할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진실되고 성실하게 살지 못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도리어 하나님을 멸시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도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가 곧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도, 또한 가리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매사에 진실되고 성실하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7절에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러한 보디발의 처의 유혹은 표면적으로만 보면 욕정에 사로잡힌 부도덕한 여인의 성적 유혹이었지만, 그 배후에는 요셉을 넘어뜨리려고 하는 사탄의 역사가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요셉을 넘어뜨리기 위한 사탄의 역사가 시작된 시점입니다.
그 시점은 요셉이 형통할 때였습니다.
당시 요셉은 더 이상 노예의 신분이라고 볼 수 없는 자리에 올라 있었습니다.
애굽 최고의 권력자 중의 한사람이었던 친위대장의 집에서, 9절에 나타난 것 같이 요셉이 가장 높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사탄은 보디발의 아내를 통해 요셉을 유혹한 것입니다.
이처럼 사탄의 유혹은 주로 성도가 형통할 때 찾아옵니다.
왜냐하면 성도가 형통할 때 신앙의 경계를 소홀하기 쉬우므로 유혹하기도 그만큼 쉽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에덴동산에서 사탄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던 시기가 언제였습니까?
바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안에서 최고의 만족과 기쁨을 누리며 형통한 삶을 살고 있을 때였습니다.
또 다윗이 간계로 자신의 충신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자신의 처로 삼았던 시기는 언제였습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그를 유다와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시고 그 주변국들과의 전쟁에서 연전연승하게 하셔서 이스라엘이 최고의 영화를 누리던 시기였습니다.
이처럼 사탄은 성도가 주로 형통할 때 찾아와 성도를 유혹하여 넘어뜨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하여 형통하게 될 때 자고해서는 안 되며 더욱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언제 사탄의 유혹이 찾아와 신앙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축복을 앗아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도는 그 모든 유혹을 이기고 더 큰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로 나아갈 수 있도록 확고한 믿음과 깨끗한 양심을 항상 잃지 말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7절과 10절, 그리고 12절을 보면 요셉에 대한 보디발 아내의 유혹이 얼마나 집요하고도 끈질긴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보디발 아내의 유혹은 한 번으로 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10절에 보면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다” 고 했습니다. 또한, 그녀의 유혹은 자신의 욕구를 관철시키려고 강도도 갈수록 점점 더 강력해 졌습니다.
7절에 그녀는 처음에는 눈짓을 하다가 12절에 요셉의 옷을 잡고 요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성도에 대한 사단의 유혹도 이렇듯 집요하고 끈질깁니다.
성도가 아무리 단호하게 그 유혹을 뿌리쳐도 사탄은 성도를 넘어뜨리기 위한 유혹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탄의 유혹을 받을 때 그것을 한두 번 뿌리쳤다고 해서 결코 방심해서는 안됩니다.
사탄은 성도들을 넘어뜨려 멸망으로 인도하기까지 10번 아니라 100번이라도 계속해서 우리를 유혹할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열 번 찍어 넘어가지 않는 나무가 없다” 는 말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한 가지 일에 집중하면 성공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렇듯 유혹이 계속되다보면 아무리 신실한 자라 할지라도 그 유혹에 넘어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항상 말씀과 기도로 사탄의 유혹에 단호하게 대처해야만 합니다.
서로 힘을 모아 주 안에서 교제하며 의지하며 이 모든 유혹들을 이겨 나가야 합니다.
교회는 바로 이러한 도움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예수님께서 세우신 것이기도 합니다.
어찌하든지 합력하여 믿음을 지키고 선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계대결혼(繼代結婚) / 이스라엘의 계대결혼법(Lex Leviratus)
정의(定義)
신명기 25:5-10에는 형제 중한 사람이 무자한
후 죽은 경우, 다른 형제가 죽은 형제의 아내를 취하여 아들을 낳아 그 가문의 대를 잇게 해 주는 규례가 나온다. 이를 가리켜
소위 계대결혼(繼代結婚, Levirate Marriage)이라 하는데 ‘리비르’(Levir, '남편의 형제‘)란 말에서 유래한
용어이다. 이를 우리는 ’수혼‘(嫂婚 ) 형사취수제도(兄死取嫂制度)라고도 일컫는다.
역사적 배경(歷史的 背景)
계대결혼 풍습은 고대 앗수르와 힛타이트 그리고
가나안족 사이에도 퍼져 있었다. 성경에는 유다와 다말 기사에서 최초로 언급되어 있는데(창 38:1-11) 그것이 가나안 족속들의
영향을 받았는것인지에는 분명치 않다. 아무튼 계대결혼이 성문화 된것은 모세의 율법에서이다. 이후 이러한 울법을 좇아 계대 결혼이
행해진 대표적인 경우로는 롯과 보아스의 결혼을 둘 수 있다(룻 4:1-17)
목적(目的)
계대 결혼의 근본 복적은 후사가 없이 죽은 형제를
위하여 아들을 낳아 줌으로서 죽은 자의 이름이 끊기지 않고 또한 기업을 보전하게 하려는 데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제도는
부수적인 효과도 가져왔으니 곧 남편과 사별한 후 의지 할 곳 없는 미망인을 도울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 뿐아니라 이는
이스라엘 여인이 이스라엘 가운데 안주하지 못하고 전전하다가 이방 남자를 만나 몸을 의탁하게 되는 불행도 방지해 주었다.
이스라엘의 경우 순수한 여호와 신앙을 보존하고 타락한 이방 문화에 전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족외혼(族外婚)을 금지하였는데
(창24:1-9, 출 34:16, 신 7: 3-4) 계대결혼 제도는 이에 일조하였던 것이다. 어떻든 계대결혼의 근본 목적은 모든
사회생활이 혈연공동체 단위로 유지되던 고대에 형제들끼리 서로가 서로의 혈통과 가문을 보호해 주려는데 있었다.
시대적 변천(時代的 變遷)
계대결혼제도는 시대에 따라 약간씩 다른 형태가
되었다. 먼저 유다와 다말 기사에서는 무조건 시행해야 하는 의무 조항처럼 표현되어 있으나(창 38:8) 신명기 율법에서는
본인이 원치 아니할 경우 거부 할 수도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때 두 사람은 공식적인 절차를 거쳐 성읍 장로들의
인준을 받아야 했으며, 형제의 본분을 다하지 못한 데 대한 모욕도 함께 당하였다(신 25:7-10).
이를 가리켜 소위
‘할리차(Halitzah)의식’이라 했는데 이스라엘 사회에서 형제의 가문과 기업을 보전해 주는 일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잘 보여
준다.
다음으로 보아스와 룻의 경우에서 우리는 계대결혼 범위가 죽은 자의 형제뿐만이 아니라 그 친족에게까지도 확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룻 2:20, 3:12, 13: 1-12).
이상에서 보듯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른 형태를 띄기는 하지만
계대결혼의 근간은 형제 사랑과 공동체의 정신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 근본정신을 이해하지 못한 체 계대결혼을 부도덕한 제도로
공박하거나 이로 인해 여호와의 거룩성을 부인하려 드는 자들에게 진정한 이해의 길을 제시해 준다.
영적 의의(靈的 意義)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계대결혼제도를 허용하신
데에는 일찍이 아브라함과 맺으셨던 언약이 관련되어 있다. 즉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창 13:16) ‘ 라고 약속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중에는 후사가 없이 대(代)가 끊어지는 가문이 생긴다는 것은
여호와의 약속과는 상치되는 일이었다. 이에 여호와께서는 계대결혼을 통해 이러한 사태를 방지하게 하신 것이다.
한편 유다와 다말, 룻과 보아스의 계대결혼에 의해
계속적으로 이어진 다윗의 혈통에서 훗날 예수님이 탄생하신 것은 놀라운 여호와의 섭리가 아닐 수 없다(마 1:1-16). 이처럼
그 옛날 계대 결혼을 통하여 명맥이 유지되는 혈통에서 전 인류의 구속자이신 예수님이 나신 것으로 영적으로 죄로 인해 마땅히
끊어져야 할 전 인류의 생명의 계승이 예수님의 구속사역으로 인하여 영원히 계승 될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들이 이혼 못 한 진짜 이유
고대사회에는 형사취수(兄死娶嫂)의 풍습이 실로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고구려를 비롯해 흉노 등 중앙아시아는 물론 중동, 유럽,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등지에서도 형사취수의 관습이 있었다.
고대
유대 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유대의 전통에 따르면, 형제의 아내와 성적으로 관계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된다(‘레위기 18:16). 그러나 예외적인 경우에는 형사취수가 허용된다.
신명기 25:5-6 형제
가운데 누군가 죽었는데, 아들이 없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죽은 형제의 아내는 시집을 떠나 다른 가문에 시집가는 법이 없다.
남편의 형제들 가운데 한 사람이 그 형수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이 옳다. 그리하여 그 여성이 재혼관계에서 얻은 큰아들은, 이미 죽은
형제의 아들로 삼아야 한다. 이로써 죽은 형제의 혈통이 대대로 보존되게 할 일이다.
알고 보면
히브리 사회에서 형사취수의 전통은 뿌리가 매우 깊다. 창세기 38:8절에도 유사한 내용이 발견된다. 유다의 둘째 아들
오난은 자식을 두지 못하고 일찍 죽은 형의 혈맥을 이어주기 위해 미망인이 된 형수와 관계를 맺는다. 이러한 행위는 유대의 오랜
전통이었다.
성서 연구자들은 형사취수 제도의 경제적 의미를 강조한다. 이 결혼에서 태어난 큰아이는 사망한 혈통상의
아버지가 가졌던 세습 권리를 물려받았다. 정확히 말해, 망자(亡子)가 큰아들이었을 경우에 그 아이의 상속분은 망자가 받을 몫의 두
배로 오히려 확대된다. 이로써 망자의 가문이 별문제 없이 유지될 수 있었다. 망자의 부인 역시 시동생과 재혼함으로써 여생을 걱정
없이 살 수 있다.
형사취수 제도가 강제 결혼은 아니었다. 형수든 시동생이든 어느 한쪽이 그 결혼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으면 ‘할리차(halitzah)’라는 의식을 거행함으로써 형수에 대한 부양 의무를 포기할 수 있다.
일종의 ‘사회보장’ 제도
유대
사회도 그렇지만, 형사취수 제도는 족내혼의 전통이 강한 사회에서 성행했다. 그런데 유대 사회와는 달리 대개의 경우 망자의 부인이
죽은 남편의 형제들 가운데서 배우자를 선택할 권리를 가졌다. 누구든 망자의 부인의 점지를 받으면 반드시 그녀와 결혼해야 했다.
이
점에서 2세기말, 고구려 왕실에서 일어난 한 가지 사건이 주목된다. 고국천왕(재위 179~197)이 후계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당장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잡음이 크게 일어났다. ‘삼국사기’는 그 책임을 왕비 우씨에게 전가한다. 우씨는 왕의 사망 소식을
숨긴 채 야밤에 시동생 발기와 연우의 처소를 차례로 방문했다. 자신의 재혼 상대자를 스스로 물색한 것이다.
‘삼국사기’는
우씨의 이러한 처사를 맹비난한다. 발기의 입을 빌려, 우씨는 남녀 간의 예절도 모르고, 왕위의 결정이 하늘의 뜻에 달려 있다는
이치도 모른다고 했다. 그날 밤 발기는 우씨의 결혼 제의를 거절했기 때문에 왕좌를 놓치고 만다.
우씨의 처사를 유교적
도덕 기준으로 재단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우씨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할 만하다. 그녀의 심야 방문은 왕비족 전체의 정치적
명운이 달린, 그야말로 막중한 협상이다. 고국천왕의 둘째 아우 연우(산상왕· 재위 197~227)는 옥좌에 오르면서 우씨를 왕비로
선택했다. 말 그대로 형사취수한 것이다.
권력 싸움에 진 발기는 형수의 패륜을 탓하며 반란을 꾀했지만 실패한다.
그는 적국 한나라로 망명해 재기를 노리지만, 그것 역시 실패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런 비극의 씨앗이 우씨라는 여성의
잘못이라고 할 순 없다. 그것은 당사자 개개인의 이해관계와 한·중 양국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맞물려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은 독립된 경제 주체로 활동하기가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남편이 일찍 사망했고, 설상가상으로 단 한 명의
아들도 남기지 못했다면, 여간 큰 타격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형사취수 제도는 망자의 부인을 위한 든든한 사회보장제도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느 나라에서든 형사취수 결혼에서 태어난 장남은 망자의 가계를 계승했다. 그는 망자의 상속분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생부(生父)의 재산에 대해서는 상속권이 없었다. 예외는 있다. 만약 생부가 별도의 재산을 그 아들에게 주기를 원할 경우 사회가
이를 허가했다.
형사취수 제도는 일차적으로 혈손이 끊어진 형제의 가문을 지속시키려는 사회적 장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뜻밖에 경제적 위기로 내몰린 여성의 생존권을 보장하려는 공동체의 노력이기도 하다. 이 문제를 더 깊게 파고들면, 여성의
결혼지참금에 관한 사회적 합의이기도 하다. 신부가 결혼 당시 가져온 지참금이 끝까지 신랑 집안의 재산으로 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서양에서도 이혼은 쉽지 않았다. 이혼은 공공의 이익에 반대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부부 중 일방이 ‘순결의
의무’를 저버렸다는 점이 명백할 때만 이혼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하늘이 맺은 것을 사람이
풀지 못한다.’ 이런 기독교 정신이 지배적이었다. 이혼을 가로막는 현실적 장애 요인은 신부가 결혼식 때 가져온 막대한
지참금이었다. 누구도 그 재산을 선뜻 돌려주려고 하지 않았다.
헨리 8세가 이혼하려던 까닭
영국
헨리 8세(재위 1509∼1547)의 말썽 많았던 이혼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의 왕비 캐서린은 본래 헨리 8세의 형 아서 왕자의
아내였다. 그런데 아서가 결혼한 지 20주 만에 병으로 죽었다. 부왕 헨리 7세(재위 1485~1509)는 캐서린이 모국
스페인에서 지참금으로 가져온 황금 20만 두카트를 반환하기 싫었다. 황금에 눈먼 부왕 때문에 헨리 8세는 형수와 결혼했다.
그들의
결합은 교회법상 근친상간에 해당한다. 그런데도 로마 교황 율리우스 2세(재위 1503~1513)는 한쪽 눈을 감았다. 그들의
결혼은 합법적인 것이 되었다. 그러나 얼마 뒤 중대한 문제가 발생한다. 왕비 캐서린의 소생은 메리 공주만 살아남았다. 게다가
캐서린은 나이가 들어 왕자의 출생을 기대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헨리 8세와 측근들의 고뇌가 깊어졌다. 만일 메리
공주를 유럽의 다른 왕가에 시집보내면 장차 영국의 왕위 계승권이 그쪽으로 넘어갈 것이었다. 헨리 8세가 후사를 정하지 못하고
사망한다면, 왕위계승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영국은 왕위를 물려받을 왕자가 필요했다. 헨리 8세는
이혼을 서둘렀으나, 교황청의 입장은 난처했다. 첫째, 전임 교황이 예외적으로 그들의 혼인을 허락했는데, 이를 번복하자니 교황청의
체통이 손상된다. 둘째, 캐서린의 친정 조카 카를 5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스페인 국왕이다. 그가 이혼에 반대했기 때문에,
교황청은 정치적으로 부담을 느꼈다.
애당초 헨리 8세는 교황파로 분류됐다. 독일의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자
이에 강력히 반발한 이가 헨리 8세다. 당시의 교황 레오 10세(재위 1513~1521)는 헨리 8세의 태도에 감명을 받아,
‘신앙의 보호자’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그러나 이혼 문제로 사정이 달라졌다. 헨리 8세는 종교개혁을 원하는 일부
성직자 및 귀족들의 지지에 기대 ‘수장령(Acts of Supremacy)’을 선포했다. 이에 일부 귀족들이 반발했다.
대법관으로서 신교도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토머스 모어와 존 피셔 주교가 대표적이었다. 모어는 ‘유토피아’의 저자로 우리에게 알려진
유명한 작가다. 성난 헨리 8세는 모어 등을 처형했다. 크게 실망한 교황 클레멘스 7세(재위 1523~1534)가 헨리 8세를
파문했다.
영국 왕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는 영국의 가톨릭 수도원을 해산했다. 국토의 6분의 1을 차지했던 수도원의 토지가 한순간에 교황의 통제를 벗어나 국왕에게 귀속됐다. 교황청과 왕권의 대립은 극한에 도달했다.
사실 헨리 8세의 종교적 성향은 무난했다. 그는 인문주의자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와 유사했다. 교리상으로는 교황청과 충돌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이혼 문제로 교황청과 대립하다 ‘영국국교회’의 독립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그는 자신의 마음대로 앤 불린(재위
1533~1536)과 재혼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헨리 8세는 전후 6명의 왕비를 맞이해 둘은 참수하고 둘은 추방하는 등
결혼 생활이 순탄하지 못했다. 그토록 염원하던 왕자도 얻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열 명의 왕자보다 믿음직한 한 명의
공주가 있었다. 처녀왕 엘리자베스 1세(재위 1558~1603)다. 그녀가 통치한 45년 동안 영국은 유럽 최강국의 지위를
확보했다.
여성의 ‘이혼권’ 보장한 이슬람
헨리 8세 때부터 세력이 점차 커진 청교도는 이혼을 용인했다. 청교도 가문 출신으로 17세기 영국 문단을 빛낸 존 밀턴도 이혼을 인간의 당연한 권리로 보았다. 그는 배우자 간의 성격, 기질의 차이도 이혼 사유로 간주했다.
1670년
영국 의회는 존 매너즈 경과 앤 피에르퐁 부인의 이혼을 인정했다. 1752년 프러시아(독일)의 계몽군주 프리드리히 2세(재위
1740~1786)는 결혼을 사적인 계약이라 못 박았고, 이혼을 허락하는 법률도 제정했다. 프랑스에서도 대혁명 이후에는 이혼이
합법화됐다. 1809년, 나폴레옹 황제(재위 1804~1815)는 황후 조세핀과 이혼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상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이혼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영국에서는 이혼소송비가 200파운드였다. 평범한 시민들로서는 만져보지도 못할 거금이었다.
게다가
19세기 중반까지도 유럽의 여성들은 법적, 경제적으로 독립된 존재가 아니었다. 법률은 배우자의 간음, 유기 행위, 또는 잔인함을
이유로 이혼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그러나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로서는 법의 혜택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이슬람문화는 달랐다. 그들은 중세부터 여성에게도 이혼할 권리를 인정했다. 여성도 얼마든지 이혼 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다. ‘코란’이 보장하는 떳떳한 권한이었다. 여성은 이혼에 따른 물질적 보상을 요구할 수도 있었다.
배우자인
남성이 생활비를 제대로 가져오지 않거나, 성적으로 나태할 경우에 이혼을 요구할 수 있었다. ‘성적 나태한 경우’란 부부 사이에
4개월 이상 성관계가 없을 때를 말한다. 이 밖에도 남편이 아내를 정신적, 육체적으로 학대하거나 남편이 다른 여성과 결혼을 원하는
것이 분명할 때도 아내는 이혼 소송을 청구할 수 있었다.
‘이슬람 성법’(샤리아)은 이혼의 범주를 다양하게
정의했다. 의절을 비롯해 협의 이혼, 재판상이혼, 또는 서약으로 세분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혼이 법률적 효력을 발휘하기에 앞서
3개월의 숙려 기간을 설정하기도 했다. 이슬람 문화에는 우리가 전혀 상상하지 못한 놀라운 점들이 있다.
지참금을 지켜라
생각해보면 영국 왕실은 스페인 공주 캐서린이 가져온 막대한 지참금을 탐냈기 때문에 남편이 죽은 그녀를 헨리 8세와 결혼시킨 거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부의 지참금은 여성의 이혼 및 재혼을 가로막는 사회적 장치였다.
전통
시대 중국에서는 시집가는 딸에게 다양한 형태의 지참금을 지급했다. 지참금은 토지, 보석, 현금, 의복, 바느질 도구, 생활용품 등
매우 다양했다. 지참금은 딸에게 주는 일종의 상속이었다. 지참금을 지급하고 남은 재산은 아들들에게 골고루 나눠주거나, 그들이
공동으로 이용하게 했다.
중국 여성들은 지참금으로 가져온 재물을 처분할 권리가 있었다. 그들은 시집이 경제적 위기에
처하면 그것을 매각해 집안을 도왔다. 가져온 지참금이 많으면 많을수록 가정 내에서 여성의 지위는 높았다. 조선 시대에도 이와 같은
풍속이 있었다.
사정은 유럽도 비슷했다. 각국의 왕실과 명문 귀족들은 딸에게 막대한 지참금을 줬다. 1661년
포르투갈 왕실은 캐서린 공주를 영국의 찰스2세(1660~1685)에게 시집보내면서 지참금으로 인도와 모로코의 2개 도시를 주었다.
수녀원에 딸을 들여보낼 때도 지참금을 들려 보냈다. 또 집안을 계승할 아들이 없으면 사위에게 집안의 토지를 몽땅 물려주면서
대신에 처가의 성(姓)을 쓰도록 요구했다.
시집갈 딸에게 지참금을 지급하지 않으면 약혼이 취소된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슬픈 리어왕’에도 당시의 그런 풍습이 반영돼 있다. 극중 리어 왕이 막내딸 코딜리어에게 의절을 선언하자 공주에게
청혼했던 버건디 공작은 지참금 없는 그녀를 데려갈 수는 없노라고 한 것이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인들은 지참금이란
딸에게 미리 재산을 상속하는 것쯤으로 이해했다. 미처 지참금을 받지 못한 딸들은 어떻게 됐을까? 그들은 아버지가 사망하면 영지를
상속할 수 있었다. 만약 결혼한 부부가 자손을 낳지 못했을 경우, 아내의 지참금은 그들의 사후에 친정에 귀속됐다. 이 점은 조선
시대의 풍습과 일치한다.
흥미롭게도 크리스마스 때 선물을 나눠주는 것으로 유명한 니콜라스 성인은 본래 양말에 황금을
넣어줌으로써 가난한 여성이 결혼지참금을 마련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한다. 니콜라스는 터키가 아직은 기독교 사회였을 당시 자선
행위로 이름난 가톨릭교회의 주교다.
산업혁명이 풀어준 ‘족쇄’
일찍이 맹자는 ‘일정한 재산이 있어야 사람의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有恒産 有恒心)’고 말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가난한 사람들로서는 꿋꿋한 지조를 지키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과연
물질적 안정은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다. 생산성이 낮은 사회일수록 재산 상속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산업혁명 이후
생산성이 꾸준히 개선되고 소득이 대폭 증가한 것은 참으로 다행이다. 그로 인해 인권의식이 강화돼 우리는 과거의 족쇄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게 되었으니 말이다.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But Er, Judah's firstborn, was wicked in the LORD's sight; so the LORD put him to death.
유다(Judah) 역대상 4:1-43
유다 + 본처(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 = 엘, 오난, 셀라 유다 + 다말(유다의며느리) = 베레스, 세라
유다 ⇨ 베레스(유다가 며느리 다말 사이에 난 아들) ⇨ 헤스론(헤스론가족의 시조) ⇨ 람⇨ 암미나답(아미나답 : 모세의형 아론의 장인,딸 엘리세바) ⇨ 나손 ⇨ 살몬 ⇨ 보아스(아내 룻) ⇨ 오벳 ⇨ 이새 ⇨ 다윗 ... ⇰ 예수 그리스도
야곱의 넷째 아들로 레아의 자식이며 유다 지파의 시조이다(창 29:35). 아내는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로 그녀와의 사이에서 엘, 오난, 셀라 등 세 아들을 낳았다(창 38:1-5). 며느리 다말과의 사이에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다(창 38장). 그는 다윗의 조상이 되었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다(마 1:1-16. 눅 3:23-33). 그는 요셉을 죽이려는 형들의 제안을 바꿔 상인들에게 팔도록 설득한 사람이며(창 37:26-27), 애굽에 곡식을 사러갈 때도 아버지 이스라엘을 설득하여 베냐민과 함께 애굽에 갈 수 있었고(창 43:1-10) 또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발견된 후에도 형들을 대변하는 대변자 역할을 했다(창 44:18-34).
예수 그리스도가 유다 지파를 통해 오실 것이라는 예언을 야곱으로부터 들었는데(창 49:8-12) 그것은 마침내 성취되었다(마 1:2; 눅 3:33; 히 8:7-13; 계 5:5; 22:16).
다말(Tamar)
유다의 장자인 엘의 아내이다(창 38:6). 엘이 죽은 후 계대결혼 풍습을 따라 시동생이던
오난의 아내가 되었다(창 38:8). 하지만 오난은 형수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이 자신의
아들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땅에 설정했고 결국 이를 악하게 여기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이셨다(창 38:9-10). 그 후 셋째 아들 셀라가 장성하였는데도 자신을 그에게 아내로
주지 않자 다말은 창녀로 가장하여 유다에게 나아갔다(창 38:14-18). 그리고 유다를
통해서 결국 베레스와 세라 쌍둥이의 어머니가 되었다(창 38:29-30). 그녀의 이름은
유다 지파의 계보와 그리스도의 족보 중에 실려 있다(룻 4:12; 대상 2:4; 마 1:3).
* 엘(Er) : 엘은 유다의 맏아들로 다말과 결혼하였으나 하나님께서 그의 악함을 보시고 그를 죽이셨다(창 38:7).
* 오난(Onan) : 유다의 둘째아들. 그의 맏형인 엘(Er)이 죽자 오난은 당시의 관습과 아버지의 뜻에 의해 형의 아내인 다말과 동침하였다(창 38:7-8). 죽은 남자의 형제가 미망인을 수태시켜서 후손을 잇게 하고, 태어난 아이에게 그의 형제의 이름(그의 유산의 몫)이 전달되도록 하는 것은 당시 관습이었으며, 이 제도는 후에 모세로 말미암아 성문화되었다(신 25:5-10; 참고, 룻 4장).
(오난의 죄) 오난은 “아들을 낳아도 그가 자기 아들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형수와 동침할 때마다 형의 이름을 이을 아들을 낳지 않으려고 정액을 땅바닥에 쏟아 버리곤 하였다”(창 38:9, 표준새번역). 이와 같은 오난의 의도적이고 반복적인 행위는 아마도 자신이 장차 받게 될 유산의 몫이 줄어들 것에 대한 염려와 탐욕에서 기인한 것이었을 것이다. 이런 오난을 하나님께서는 죽이셨다(창 38:8-10).
* 셀라(Shelah) : 셀라는 유다가 가나안 여인 수아에게서 낳은 셋째 아들이다(창 38:5-26). 이로부터 셀라 가족이 나왔다(민 26:20).
* 베레스(Perez) : 베레스는 유다(시아버지)와 다말(며느리) 사이에서 태어난 쌍둥이 중 하나이다(창 38:29). 베레스의 계보에서 다윗 왕이 나왔고 메시아가 나왔다(마 1:3 ; 눅 3:33). 룻과 보아스는 장로들과 백성들로부터 “다말이 유다에게서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는 축복의 말을 들었다 (룻 4:12).
* 세라(Zerah) : 세라는 다말이 유다에게 낳은 쌍둥이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창 38:30; 46:12; 대상 2:4). 다윗과 예수님의 조상인 베레스의 형제이다(마 1:3). 유다 지파 ‘세라 가족’은 그의 후손을 가리키는 말이고(민 26:20; 수 7:17; 대상 27:11, 13) 여리고 성의 정복 과정에서 범죄하여 돌에 맞아 죽은 아간도 세라 족속이었다(수 7:16-26).
유다 가문의 부끄러운 이야기
오늘 본문은 요셉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중간에 어울리지 않게 잘못 편집된 듯하게 끼어져 있는 단편입니다.
그러나 구속사적 측면에서 오늘 본문은 메시야의 혈통을 잇는 계보를 보여 주고 있고, 또 한편으로는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의 도덕적
타락상에 물들어 가는 모습을 통해 애굽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의도적인 기록으로 볼 수
있습니다.
1절에 당시 유다는 헤브론에 살고 있는 형제들과 따로 떨어져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는 아둘람 성읍에 거주하고 있었음을 통해 여기서 유다의 집안에 닥친 불행의 한 원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유다가 자기 부모형제에게서 떠나 있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유다가, 경건했던 아버지 야곱과 비록 요셉을 팔아버릴 정도로 완악했지만 그래도 지극히 부패하고 타락했던 가나안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을 섬기는 형제들과 함께 있었다면 신앙적으로 그렇게 나태해지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가 가나안 여인과 결혼을 하려고
했을 때 아버지와 형제들이 잘못을 지적하고 충고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랬다면 그에게 불행이 닥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같은 신앙을 가진 부모와 형제들에게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의 신앙이 나태해져도, 그가 잘못된 결혼을
해도, 잘못을 일깨우고 바른 믿음의 길로 인도할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그 결과 불행을 피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러한 유다의 모습을 통해, 성도는 믿음의 형제들과 함께 거할 때에 죄의 유혹을 이겨내고 올바른 믿음을 지닐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받아 의롭게 된 성도들이 다시 죄악된 삶에 빠지지 않도록 서로 의지함으로써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교회를 중심으로 자주 모여야 합니다.
주일 예배 뿐만 아니라 함께 모여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배우며 찬송하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하다못해, 같이 모여 차 한 잔을 마시며 대화하고 교제를 나누는 것까지도 성도들에게는 매우 유익한 일입니다.
그것을 통해 성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앙적으로 성숙해지고 죄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독불 장군이 없듯이 신앙에도 독불 장군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임을 소중하게 여기고, 다른 성도들과의 교제를 소중하게 여기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7절에 유다 집안에 찾아온 첫 번째 불행은 장자였던 엘이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다가 자녀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임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본문은 엘이 어떤 악을 행했는지 자세히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10절에 비추어 볼 때 성적인 범죄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우리는 이와 관련해서 또 하나의 사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15절 이하에서 엘의 아버지인 유다가 며느리인 다말을 창녀로 알고 그녀와 동침했다는 것입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유다는 평소에도 창녀와 관계를 가졌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인 유다와 장자인 엘의 성적인 타락, 이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아버지 유다의 성적인 범죄가 그것을 보고 자란 장자 엘에게 그대로 전달된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의 말과 행동이 자녀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잘 보여 줍니다.
교육학에서 '어린이의 최초의 학교는 가정이며 최초의 교사는 부모'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자녀는 그 부모의 행동을 그대로 보고 배운다는 뜻입니다.
자녀들의 삶의 교과서는 부모의 '말과 행동' 그 자체입니다.
통계적으로 볼 때 가정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 중에는 어려서 아버지가 어머니를 자주 때리는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우리 생각에 어릴 때 어머니가 맞는 것을 보며 자란 사람은 커서 아내를 때리지 않을 것 같은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버지의 행동을 그대로 답습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자녀는 부모의 말과 행동을 그대로 배우며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범죄자의 가정에서 범죄자가 많이 나오고, 선한 자의 가정에서 선한 사람이 많이 나오는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자녀를 바른 신앙의 사람으로 키우려면 부모 자신이 먼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행동해야 합니다.
부모가 주일에 교회 빠지고 놀러 가고, 거짓말과 음란한 행동을 하는데 자녀가 제대로 자랄 리가 있겠습니까?
결코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부모가 먼저 매일 말씀과 기도 생활에 열심을 내고 모범적인 신앙의 자세를 갖는다면 하지 말라고 해도 자녀들은 저절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모범적인 사람으로 자라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신앙적인 나태함이 찾아올 때나, 죄의 유혹이 찾아올 때, 자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죄악된 행동을 장차 자신의 자녀들이 그대로 답습할 것을 생각한다면 그러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과 사람 앞에 바로 서서 자녀들에게 부끄럽지 않고 자녀들의 좋은 신앙적 스승이 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8절에 엘이 죽자 그의 동생 오난이 그의 형수인 다말과 혼인하게 되는데 이는 고대에는 형이 자식이 없는 상태로 죽으면 아우가
형수를 통해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을 형의 이름으로 상속시키는, 공인된 관습으로 계대법, 또는 수혼법이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볼 때에는 말도 안 되는 법으로 보여 지지만 이 법은 모세 때 율법으로 성문화되었습니다.
신명기 25:5-6입니다.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이러한 법이 생겨난 가장 큰 이유는 유산의 상속 때문이었습니다.
아들의 유산이 며느리가 다른 사람과 재혼함으로 잃어버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난은 그의 형 엘이 아들이 없이 죽었기 때문에 그의 형수인 다말과 결혼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형수인 다말과 결혼한 오난은 자신을 통해 낳게 될 자녀가 엘의 기업을 받을 것임을 알고 이기적인 마음에 계대 의무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보시기에 악행한 오난 또한 죽음으로 형벌을 받게 됩니다.
갑작스럽게 두 아들을 잃은 유다는 11절에서 다말에게 수절하고 친정에 가서 셀라가 장성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다의 이 말은 변명과 구실에 불과하였습니다.
유다는 다말과 결혼한 두 아들이 모두 죽은 사실을 통하여 그의 마지막 아들인 셀라도 죽을까 염려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말은 어찌할 수 없이 유다의 말을 듣고 친정으로 돌아가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다말은 시어머니가 죽고, 또 셀라가 장성했음에도 자기를 셀라의 아내로 주지 않자 시아버지 유다가 양털을 깎기 위해 딤나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창녀로 변장하였습니다.
다말이 이렇게 한 이유는 성인이 된 셀라를 유다가 자신의 남편으로 주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이제는 궁여지책으로 유다를 통해서라도 자식을 얻을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나안이 성적으로 얼마나 문란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며느리가 시아버지와 동침하여 아들을 낳을 생각을 할 수 있습니까?
어찌되었던 다말을 알아보지 못한 유다는 그녀를 창녀로 알고 그와 동침하고 맙니다.
시아버지 유다를 속인 다말은 자신과 동침한 대가를 요구합니다.
그래서 유다는 동침한 대가로 나중에 염소 새끼를 주기로 하고 그 담보물로 도장과 그것에 달린 끈과 지팡이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뒷날 대가를 지불하고 담보물을 되찾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친구를 통해 담보물을 찾으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임신에 성공한 것을 안 다말이 잠적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담보물 찾는 것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석 달쯤 후에 다말이 음행으로 인해 임신하였다는 말을 듣고 유다는 크게 화를 냅니다.
그러나 끌려 나온 다말을 통해 그녀와 동침한 남자가 다름 아닌 유다 자신임을 알고 그는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다시는 그녀를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유다를 통해 다말은 쌍둥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것은 유다의 부끄러운 역사인 동시에 메시야의 족보로서 중대한 뜻을 지닙니다.
우리는 간혹 성경을 통해서도 충격적인 내용을 접할 때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창세기 38장입니다.
그것도 메시야의 조상인 유다에게서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죄악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가증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들에게 무조건적인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범사에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유다의 며느리 다말의 열망은 정당한가?
다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나오는 5명의 여자중에 하나이다. 그녀는 야곱의 12아들중 네째 아들인 유다의 큰 며느리이다. 유다에게 세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엘과 오난과 셀라이다.
다말은 엘의 아내로 유다가문에 시집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성경의 기록에 보면 다말의 출신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말(תָּמָר 타마르 to be erect )이란 이름의 뜻은 종려나무(palm-tree) 라는 뜻이며 "똑바로 선" 이란 뜻도 있다. 다말은 레위의 딸이라는 설이 있고 또한 가나안여자라는 설이 있는데 가나안 여자라는 설이 맞을 것이다.
다말은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된 여자중에 하나이다. 다말은 가나안 여자이며 라합은 여리고성의 여자이고 룻은 모압여자이며 우리야의 아내와 마리아이다.
그런데 다말에 대해 이야기하기전에 먼저 유다를 살펴봐야하겠다. 유다는 아버지 야곱을 따라 여호와 하나님의 신앙을 이어받아 믿음으로 살지 않고 세속적으로 살았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것은 유다의 결혼이었다. 유다는 수아라고 하는 가나안 이방여자를 취하여 애를 낳았다. 이것은 정식결혼이 아니라 정욕적인 불장난으로 이방여자와 놀다가 그만 임신을 하게 되자 그냥 살림을 차린 격이 된 것이다. 그것도 아둘람에 가나안 이방사람 히라라는 친구에게 놀러갔다가 우연히 만난 여자와 동침하여 아이를 배게 한 것이다. 그래서 유다에게 일말의 양심이 있어서 그 여자를 버리지 않고 아내로 삼고 아들을 셋이나 낳았다. 유다는 자신의 결혼을 아버지 야곱과 의논하지 않고 그만 이방친구와의 불장난으로 결정해버린 것이다. 불신앙적인 결혼은 가정의 고통과 슬픔을 가져다 주었다. 이러한 근본도 없는 무질서한 가정에 다말이 시집을 오게 된 것이었다.
유다의 장자의 이름은 엘( עֵר )이다. 그 이름의 뜻은 awake, watchful이다. 하나님을 뜻하는 el( אֱלֹ)이 아니라 er이다. 어쩌면 하나님은 큰 아들 엘을 통해 유다에게 이방의 풍습에 빠지지 말고 정신차리고 깨어서 여호와 하나님을 잘 섬기라는 경고였을 것이다.
이미 하나님은 유다의 혈통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오시게 할 작정이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마도 유다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여전히 이방 가나안의 죄된 풍습에 젖어 방탕하며 살았을 것이다.
아버지의 죄악을 아들이 닮는다. 엘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했고 그래서 하나님이 죽이셔야만 할 정도록 엘은 부도덕하고 악했다.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했다고 했다.
무슨 의미인가? 이것은 고의적으로 악의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 자가 악을 행하는 것은 세상에서 악하다고 할 수 있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잘 알고 있는 자가 세상의 온갖 악을 행하는 것은 세상에 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항하여 악을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은혜를 체험한 자가 세상의 죄악을 행하면 이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다. 그런데 엘의 악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요나단의 탈굼에 보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엘은 그의 아내의 아름다움이 혹시 아기를 낳으면서 해쳐질까 아이를 임신하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아라비아 문서에 보면 엘은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하지 않고 부적절한 관계를 했는데 그것은 가나안의 풍습을 따라 남색을 즐겼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남색은 그저 어긋난 성적방탕을 너머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정면으로 도전하는 사실상 하나님의 백성의 번성을 막아서는 사단의 악행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엘이 더이상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방인들보다 더한 죄악을 행하여 하나님을 공개적으로 모독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죽이셨다.
고린도교회에서 음행하는 자들에 있는데 바울은 그들을 사단에게 넘겨줘서 육신은 멸하고 영혼은 주예수의 날에 구원얻게하실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악을 행하면 하나님은 즉시 육신을 멸하신다. 대신 그 영혼이 회개하고 구원받게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다말은 유다가문에 시집와서 아들을 낳지 못하고 과부가 되었다. 그 당시 풍습에 따라 계대결혼을 했다. 즉 엘의 동생 오난이 자기 형수인 다말에게 장가들게 된 것이다. 그런데 오난은 자기 자손을 위해 형수와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형의 씨를 위해 결혼한다는 것이 불만이 되어서 그만 땅에다가 설정을 하게 된다.
오난( אוֹנָן Onan)이라는 이름의 뜻은 strong onan 이란 의미가 있다.
아마도 오난은 매우 정력적인 남자였던 것같다. 그래서 충분히 형을 위해 자손을 잇게 해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것이 되지 못한다는 불만을 품고 자식을 낳지 못하게 하려고 땅에 정자를 쏟아버린 것이다. 그래서 후에 그의 이름인 오난을 따서 오나니즘( onanism 자위) 즉 자위라는 단어가 생겼다. 오난은 형 에르와 반대로 매우 남성적이며 진취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유약한 형의 가문을 이어주는 씨받이의 역할을 자신이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매우 불쾌하고 억울해 했던 것같다. 자신의 여자를 갖고 싶었고 자신의 가문을 세우고 깊었던 것이다. 인간적으로는 이해가 되지만 그 당시 믿음의 계보를 세워나간다는 의미에서 볼 때 오난은 하늘의 장자권보다 세상의 가문을 세우고자 하는 욕망이 앞선 것이다.
야곱은 하늘의 장자권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유랑길을 떠났는데 오난은 자신에게 찾아 온 장자축복을 세상의 가문을 세우는 것보다 못하게 여긴 것이다.
오난은 에서와 같이 여호와의 장자권을 발로 차버린 망령된 자였던 것이다. 이것은 가문의 자손을 이어주어야 하는 신성한 의무에 대한 반역이었다. 더구나 하나님은 유다의 가문을 통해 메시야를 보내시기로 작정하시지 않았는가? 오난은 자신을 통해 메시야가 오시는 길을 열지 않고 막아버린 사단의 계략에 넘어간 것이다. 결국 오난의 이기적이고 무모한 행동은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에 대적하는 죄악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의 유익이나 자신의 소유를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한다.
형수와 결혼하는 것이 지금은 부적합하게 보이지만 그 당시는 풍습이었고 하나님의 자손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다.
비록 인간적으로 부당하다고 느껴도 하나님의 뜻을 위해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오난의 이러한 이기적인 행동에 노하셔서 그를 죽이셨다.
* 셀라(Shelah) : 요청, 간구
창세기 38:11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버지 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의 아버지 집에 있으니라"
셀라( שֵׁלָה request )의 이름의 뜻은 요청 간구라는 뜻이 있다. 어쩌면 다말은 셀라가 장성하기까지 기다리며 유다의 집안에 대를 이어주려고 마음을 먹었을 것이다. 셀라는 아직 결혼할 나이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유다는 며느리 다말을 친정으로 가서 지내라고 했다. 그러나 내심은 여자가 집안에 잘못 들어와서 세명의 아들이 다 죽을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서 모든 불행과 사건들이 잊혀지는 것처럼 보였다. 유다는 그의 아내 수아가 죽자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다시 가나안친구인 아둘람 사람 히라를 찾아가 욕망을 풀어보려 했다. 유다는 아직도 과거의 못된 버릇을 끊지 못했던 것이다. 가나안 땅에 있는 창녀를 찾아간 것이다. 그 때 친정에 있던 다말은 그의 시부인 유다가 딤나에 올라왔다는 말을 듣고 과부의 옷을 벗고 창기의 옷으로 갈아입고 얼굴을 가리고 시부 유다를 만나러 간 것이다.
다말은 그의 시부가 세째 아들인 셀라를 자신에게 주지 않을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시부의 씨를 받아 유다가문에 자손을 보려고 작정을 했던 것이다.
용감한 것일까? 무모한 것일까?
다말의 속임수에 시부인 유다는 넘어갔다. 다말이 창녀인줄 알고 화대를 주고 동침을 한 것이다. 동침을 한 후에 다말은 유다에게 화대를 받을 때까지 약조물을 요구했다. 그 약조물은 유다의 도장과 끈과 지팡이였다. 이것은 다말이 화를 면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다말은 이 약조물로 인해 화를 면하고 명실공히 유다의 자손을 얻게 되었고 자손을 낳게 되었다. 비로소 다말은 유다가문에 들어가서 여자로서 자손을 이어가는데 성공한 것이다. 유다는 나중에 자신과 동침한 창녀가 바로 며느리 다말인 것을 알고 이렇게 고백하며 결국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게 된다
창세기 38:26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이 후에 유다는 큰 충격을 받고 다시 그의 아버지 야곱과 형제들에게 돌아오게 되며 야곱의 장자로서 역할을 하게 된다.
나보다 옳도다( צָֽדְקָ֣ה מִמֶּ֔נִּי 짜드카 미메니 She is more righteous than I ) 여기서 옳다(צָדַק 짜다크 righteous)는 의롭다는 뜻이다. 윤리적으로는 근친상간이지만 하나님앞에서는 옳다 의롭다는 뜻이다.
실상 유다는 하나님의 계보에서 후손을 물려주지 못하는 것은 씻지 못할 죄가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셀라가 죽을까봐 두려움으로 다말을 쫓아냈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유다는 그의 아버지 야곱과 네 명의 여자들사이에서 태어난 배다른 형제들간의 알력과 시기질투와 아버지 야곱의 편애로 인해 매우 실망해서 막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후사를 목숨을 걸고 내려했던 다말사건을 통해 충격을 받아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에게도 돌아갔고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자고 했을 때 죽이지 못하도록 했고 애굽의 기근시에도 장자로써 앞장서서 아버지와 형제들을 보호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유다는 자신보다 다말의 열정이 하나님앞에 더욱 의롭다고 고백한 것이다.
이 고백은 유다의 육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메시야의 길을 준비하신 하나님의 감동으로 자신도 모르게 터져나온 고백이며 자백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불륜을 저지르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라는 말은 절대 아니다.
이러한 경우는 그 당시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되어진 것이고 절대 일반화 할 수 없는 사건임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
왜냐면 이단교주들이 종종 이러한 비인륜적인 방법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거짓말하며 그들의 부도덕과 불합리를 신성화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다말이 쌍둥이 아들을 낳았는데 베레스와 세라이다.
베레스(פֶּרֶץ breach )는 위반, 침해, 파손 결함 이라는 뜻이 있고 세라( זֶרַח rising)는 기상, 소생, 부활의 뜻이 있다. 다말은 불의한 유다가문에 들어와서 메시야의 계보를 잇기 위해 인간의 도리를 위반했지만 꺼져가고 망해가는 유다집안을 다시 소생시키고 메시야의 혈통을 예비한 여인이었다.
다말의 열성은 무엇이었을까? 단지 칠거지악을 면하려는동양적인 사명감을 가진 여인네의 객기인가? 아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과 인간의 법칙을 깨시고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그것도 처녀의 몸에서 잉태케 하셔서 이 세상에 오셨다. 오직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우리는 다말의 이름의 뜻인 종려나무에서 예수님의 예루살렘입성을 환영하는 무리들의 손에 들려 수없이 흔들지는 종려나무 가지를 연상할 수 있다. 다말은 작은 종려나무이며 그녀는 연약한 몸으로 그리스도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종려나무이며 그 길을 예비하도록 하나님은 다말에게 올곧은 정조와 유다가문을 위한 여인의 지조를 주셨다.
하나님이 다말에게 주신 유다 가문의 대를 잇고자 하는 열정과 뚝심은 처녀 마리아를 통해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열정이요 순수함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영광스럽게도 마태복음 첫장 3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혈통적 조상으로 여성의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2472. 꿈(하롬. chălôm) חֲלֹם
1. 꿈, 2. 복수형으로 쓰일 경우: 하찮은 일. 발음
/ 하롬[ chălôm ]
어원 / 249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꿈(창 37:9, 삼상 28:6, 욜 2:28), 꿈꾼 것(렘 23:27, 32), 꿈꾸는 자(렘 27:9). [동] 현몽하다(창 20:3, 31:24)
구약 성경 / 65회 사용
* 2492. חָלַם
1. 살찌다, 2. 강건해지다, 3. 꿈을 꾸다, 4. 회복하다, 5. 세우다
발음
/ 하람[ châlam ] 관련 성경 / (꿈을) 꾸다(창 37:6, 단 2:1, 렘 29:8), 꿈을 꾸다(창 41:5, 욜 2:28), 강하여지다(욥 39:4), 치료하다(사 38:16), [명] 꿈꾸는 자(신 13:1, 3, 5) 구약 성경 / 29회 사용
채색옷(케토넷 파심)
- '긴 웃옷'을 뜻하는 '케토넷'과 '손' 혹은 '발' 을 뜻하는 '파스'의 복수형으로서 '손이나
발까지 내려오는 겉옷'(삼하 13:18, 19)을 의미하는 '파심'이 합쳐져 '소매 달린 긴 겉옷'을 나타낸다. 대체로 이 옷은
아마포로 만들었는데 제사장들이 입던 옷(출 28:4; 레 8:7; 스 2:69)과 흡사했던 것 같다.
* 히브리인의 전통에 의하면 채색옷을 입는 경우는 아버지의 상속권을 이어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는다, 따라서 토라에 전적으로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을 일컫는 것이라고 한다.
36:8에서 서로의 소유가 많아지자, 에서는 스스로 가나안을 떠나 세일 산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의 아버지가 거류하던 가나안 땅에 그대로 거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둘이 서로 대조가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원래는 장자인 에서가 가나안에 거하여야 할 것인데, 그는 거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떠나갔고, 타국을 떠돌아다니던 야곱은 결국 가나안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그곳을 떠나지 않은 것은 가나안이 살기 좋은 곳이어서가 아니라 그곳이 약속의 땅이란 것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한 에서는 제 욕심대로 갔고, 야곱은 탕자였으나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돌아 왔습니다.
에서는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았지만 그것을 떠나서도, 스스로 자신의 복을 포기한 것입니다.
37장에서 야곱의 아버지 이삭이 죽고, 에서가 세일 산으로 떠나가고, 명실공히 그의 시대가 되어 그가 상속자가 되고, 지배자가 되며, 그의 시대가 시작 됩니다.
진정한 의미의 야곱의 시대가 시작되었기에 오늘 본문 2절에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하면서 글을 이어 갑니다.
그런데 야곱의 족보를 말하면서 요셉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후의 일이 요셉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 이지만 창세기를 기록한 모세는 요셉의 모든 행적을 야곱의 역사로 취급합니다.
그 이유는 요셉이 이룬 모든 역사 가운데 그의 아버지 야곱이 생존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2장-50장까지에는 네 명의 족장이야기로 이루어졌지만 족보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족보로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또한 믿음을 고백할 때에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
오늘 본문인 37장부터 마지막 장인 50장까지는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어집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는 요셉이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것과 17세가 되어 하나님께서 주신 두 가지의 꿈을 이야기한 것 때문에 형들의 시기와 미움을 받고 결국에는 애굽으로 팔려 가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야곱은 요셉을 다른 자녀들보다도 더욱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요셉에게만 채색 옷을 지어 입히는 등 편애합니다.
야곱이 요셉을 특별히 더 사랑했던 이유는 그가 야곱이 사랑했던 라헬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알렸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형들을 고자질한 것은 그 형들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형제의 잘못을 덮어주고 감싸주는 것이 형제애입니다.
결국 이러한 요셉의 행위와 아버지 야곱의 편애는 다른 형제들로부터 요셉을 질투와 미움의 대상이 되게 했습니다.
형제들의 질투와 미움은 자신들의 잘못을 고자질하는 요셉에 대한 미움과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요셉에 대한 시기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요셉을 제외한 야곱의 아들들은 요셉을 미워할 뿐만 아니라 요셉의 언사를 불편해 했습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요셉이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은 밭에서 곡식 단을 묶을 때 요셉의 곡식 단을 향하여 다른 형제들의 곡식 단들이 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꿈을 꾸었는데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요셉에게 절하는 꿈이었습니다.
꿈을 꾼 요셉은 그것을 가족들에게 모두 말했습니다.
눈치가 없는 행동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형제들에게 질투의 대상인데 자신이 형들을 다스리는 자가 된다고 하니 그 형들이 심사가 얼마나 뒤틀렸겠습니까?
요셉의 꿈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로 주신 계시였지만, 지혜롭지 못해서 이 꿈으로 인해 오히려 형들에게 더욱 미움을 받는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루는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불러 세겜에서 양을 치고 있는 형들에게 다녀오라고 심부름을 보냅니다.
그래서 요셉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여 세겜으로 갔습니다.
세겜에 도착한 요셉은 형들을 만나지 못하고 들에서 방황하다가 형들이 도단으로 목초지를 옮긴 것을 알고 그 곳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힘겹게 도착한 도단에는 요셉을 해하기 위한 형들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형들은 멀리서 요셉이 오는 것을 보고 그가 도착하기 전에 그를 해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음모는 요셉을 죽여 구덩이에 던지고 아버지에게는 요셉이 짐승에게 잡혀 먹혔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도착하기 전에 형제들이 꾸민 잔인한 음모는 제일 맏형인 르우벤에 의해서 실행되지 못했습니다.
르우벤은 그래도 한 핏줄인데 어떻게 죽일 수 있냐면서 다른 형제들에게 죽이지 말고 그냥 구덩이에 던질 것을 제의하였습니다.
그는 요셉이 밉기도 했지만 제일 맏형으로서 또한 동생 요셉을 보호해야하는 의무도 동시에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붙들어 채색 옷을 벗기고 들에 있는 구덩이에 던졌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때마침 도단을 지나가던 미디안 상인들에게 요셉을 은 20개에 팔았습니다.
당시 노예의 평균값은 은 30개 였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그러한 평균적인 값도 못 받고 팔려갔단 것은 실제로 그가 아직 소년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영적인
의미로 볼 때 평균값에도 못 팔려 간자가 결국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구원하는 자가 된다는 놀라운 역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의 장자인 르우벤은 동생 요셉의 생명을 구원할 마음은 있었지만 요셉이 팔려 갈 당시 그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려 간 후에 돌아온 르우벤은 요셉이 없어진 것을 몹시 괴로워하면서 옷을 찢고 울부짖었습니다.
르우벤의 이러한 울부짖음에는 장자로서 동생에 대한 책임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슬픔을 생각하며 큰 죄책감을 느낀 데서 나온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온 형제들은 요셉의 채색 옷에 숫염소의 피를 묻혀 야곱에게 요셉이 짐승에게 잡아먹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말을 들은 야곱은 옷을 찢고 굵은베로 허리를 묶고 큰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요셉이 죽은 것으로 믿게 하려는 아들들의 계략에 속아 고통당하고 있는 야곱의 모습은, 그가 이삭을 속여 축복을 가로챘을 때 에서가 슬퍼하며 울던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속이는 자였던 야곱은 그 죗값으로 그의 일생을 통해 속임을 당하는 자로 살아갔습니다.
외삼촌에게 당했고 이제는 그 자식들에게 당합니다.
또한 그는 아버지 이삭의 편애로 자신이 겪어야 했던 수많은 아픔이 있었음에도 그는 또 다른 편애하는 아버지가 되어 그 가정을 깨어지게 만들고 십수년간 또 아픔과 고통의 나날들을 보내게 됩니다. .
말씀을 마칩니다.
매사에 성실하고 의로운 생활을 하던 요셉은 아버지의 편애와 그 마음은 어떠했던 형들의 잘못을 고자질하는 것으로 인해 다른 형제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됩니다.
사람이 미움을 받는 데는 반드시 어떠한 원인이 있게 마련입니다.
성경 히브리서 12장 14절은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우리 예수님이 자신의 몸을 희생시키시면서 까지 화평을 이루셨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오늘 하루 모든 사람들과 화평을 이루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일반적인 꿈과 특별한 꿈
우리가 경험하는 꿈은 일반적인 꿈과 특별한 꿈으로 나눌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일반적 꿈이든 특별한 꿈이든 아무런
이유 없이 꿈이 생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인 꿈도 지친 육체나 마음의 치유나 회복의 관점에서 그 작용을 이해할 수 있듯이,
특별한 꿈도 무언가 특별한 꿈이 주는 의미가 있는 것만은 사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꿈은 반드시
해석의 단계를 거쳐야만 그 사명을 다 한다고는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자연스러운 것이 좋습니다. 간밤의 꿈의 내용이 생각나지도
않는데 그것을 기억해 내려고 애쓰는 일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여러 날을 두고 잊혀지지 않는 꿈들도
종종 있습니다. 이럴 때 사람은 자연적으로 그 꿈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해지고 또 꿈으로부터 무언가 교훈을 받으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꿈의 해석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심리학적 접근
꿈에 대한 해석이라 하면 누구든지 프로이드(Sigmund Freud)와 융(Karl G. Jüng)이 끼친 학문적 공헌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프로이드 이전까지는 인간의 정신을 단순히 의식으로만 해석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후에는 인간의 의식을
현재의식과 무의식으로 분류하고 무의식 세계의 중요성을 새롭게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프로이드는 특히 정신질환자들을 치료함에 있어서
그들이 경험한 꿈에 대한 해석을 활용하는 것이 크게 도움이 된다는 점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꿈과 인간의 무의식 세계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특별히 인간의 꿈은 성욕과 생활력의 근원으로서의 리비도(libido)의 작용에 기인한다는 점을 세상에
발표하였습니다.
프로이드의 제자인 융은 프로이드가 주로 성적인 리비도에 관련시켜 꿈을 해석한 것과는 달리, 꿈에는 인간 심층 내부의 정신적인
에너지와의 긴밀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Karl G. Jüng, The Practical Uses of Dreams
Analysis in Collective Works, Vol. 16).또 그는 인간 무의식 속의 깊은 영역에는
집단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의 세계가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집단무의식이란 개인의 무의식의 한계를
뛰어넘어 그 개인과 관계되는 집단의 공동 의식 세계를 의미한다고 보는데요, 융은 이 집단무의식을 통해서 마침내 인간 정신의 원천에
도달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 그가 ‘개체화’(Individuation)라고 부르는 인격 완성의 단계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위와 같은 학문적 전통에 서있는 심리학자들과 정신분석학자들에게 있어서 꿈이란 인간 내면의 무의식의 활동을 이해하는 하나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그들은 무의식이 꿈을 통해 나타나는 상징적인 언어를 통하여 언제나 현재의식과 만나고 또 이를 돕기 원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꿈에 나타난 무의식적 원리를 잘 이해하고 또 올바른 해석을 통해 현재의식에 적용하게 될 때,
인간은 자신과 또 자기가 속해 있는 공동체를 위해 강력한 내적 안내자를 만나게 될 것이라는 점을 그들은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사적 접근
초대교회에서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예언과 꿈과 환상 등의 직감적인 기능들을 통해 많이 나타났다는 점을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의 직계 제자들인 사도 교부들(Apostolic Fathers)에 있어서도 꿈 해석의 전통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직접적인 계시 주장과 극단적인 예언 활동 그리고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던 몬타누스주의(Montanism)가
주후 200년경에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되었지요. 그리고 3-4세기로 접어들면서 고대교회는 개별적이고 자유로운 성령의 인도를
추구하기보다는 교권제도의 발전이 그 자리를 대체하게 되었고, 성례전적 영성이 개인적 영성을 압도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제롬(Jerome)은 이단사설을 억제하고 교권제도를 수호하기 위해 가르치기를, 개인적인 꿈과 환상보다는
전통적인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올바른 신앙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도심과 형식적인 교회 의식을 떠나 개인적으로
하나님과의 자유로운 영교(靈交)를 추구하기 원하는 자들이 사막과 산 속에 수도원들을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중세교회는 오랜 동안 프라토-어거스틴(Plato-Augustine) 유형의 실재론적인 영성 이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3세기에 이르러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세계관을 다시 도입하게 되자, 꿈은 단순한 자연
현상으로서 신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보는 견해가 학문적으로 우세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스콜라철학의 후기의 경향으로서,
르네상스의 영향을 힘입어 유명론(Nominalism)이 크게 부상하게 되자 신앙과 이성의 간격은 더욱 벌어지게 되었지요. 그러자
신비롭고 반이성적으로만 여겨지던 꿈에 대한 해석 문제는 신앙을 다루는 주제에서 완전히 밀려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만을 정통적 신앙의 권위로 인정하던 16세기 종교개혁교회들은 자연히 꿈에 대한
해석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17세기 유럽의 개신교회들은 교리 논쟁과 피비린내 나는 전쟁으로 지쳐 있었고, 때마침
불어 닥친 계몽주의의 소용돌이는 교회와 전통적 신앙을 합리주의적 비판으로 거의 질식시키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18세기에 경건주의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대면하는 경건의 능력을 강조하여 교회에 생명력을 불어넣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는 19세기에 이르기까지 계몽주의의 영향이 가시지 않아, 꿈과 같은 신비적이며 비합리적인 주제는 신학의 냉소거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대에는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의 영향으로 인해, 꿈에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경향성이 꿈에 대해
부정적인 전통적 신학의 흐름에 도전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학적 접근
그러면 과연 꿈에 대한 연구가 과연 신학의 큰 주제 가운데 하나로 자리 매김할 수 있을 것인지가 궁금해집니다. 사실 융의
심리학적 이론은 신학적으로는 ‘현대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쉴라이엘마허(Schleiermacher)의 종교론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쉴라이엘마허에 의하면, 종교의 본질이란 신에 대한 절대의존의 감정(absolute dependance
feeling)이라고 풀어낼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신에 대한 의식과 인간의 자아의식의 구분은 신과 인간이 분리되어 있는
상태에서만 가능해지는데, 여기서 신의 존엄성과 인간의 부족함이 비교되어 죄(罪)라는 관념이 생기게 되겠죠.
마찬가지로 융의 심리학적 표현에 의하면, 죄성이란 무의식의 심연(深淵)으로부터 분리된 현재의식이라고 설명될 수 있겠습니다.
융은 집단무의식의 차원을 넘는 곳에 인간의 현재의식으로서는 알 수 없는 영적인 영역이 있음을 인식하였고, 그에게 있어서 그 영역은
인간 정신의 신적(神的)인 핵이며 신성(神性)의 영역으로서 이른바 ‘초월적 무의식’이라고 부를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그의
이론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생래적(生來的)인 지각으로서의 신성(神性)이 인간 속에 내재한다는 성경의 진술을 확보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롬 1:19-20
꿈에 대해 신학적으로 가장 설득력을 지닐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역시 꿈에 나타나는 치유와 회복의 기능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기능은 단순히 신체적, 심리적인 차원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목표를 지닌 것으로 설명될 수 있으며,
이렇게 될 때 이와 같은 목표는 곧 인간 내면의 영적인 치유와 회복을 중시하는 기독교 성화론(聖化論)의 이상과도 일치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에서 꿈을 다룬다면, 그리스도인들이 꿈을 대하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는 꿈의 올바른 해석으로 얻어지는
교훈을 통해 자신의 영적 성화의 길을 추구하는 일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배본철, 「52주 성령학교」, 190). 실제로 필자가
만난 여러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에 의하면, 그들은 꿈을 통해 자신들의 내적 삶과 외적 삶 사이의 막힌 담을 헐게 되고, 또 꿈을
해석할 때 그들의 영적 가치관을 하나님의 뜻과 일치시킬 수 있기 때문에, 범사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에 대한 지혜와
통찰력을 얻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특별한 꿈에 대해서는 어떨까요? 이타적인 목적의 꿈, 특히 복음전파나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한 목적의 꿈이 성경과
교회사의 기록 속에 많이 나타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필자는 많은 이들의 증언을 통해, 이와 같은 목적의 꿈이 오늘날도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종종 주어지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그들에게 꿈을 통해 주위 사람들의 필요나 영적인
상황을 알려주시곤 합니다. 이럴 때 그들은 꿈에 나타난 대상자들을 위해 기도하거나 복음을 전하거나 상담을 하거나 또는 직접 물질로
돕곤 합니다. 또 그들이 복음을 전하는 증인으로서의 삶을 다짐하며 살아갈 때, 성령께서 복음 전할 대상자들을 꿈속에서 보게
하시고 그들을 위해 언제 또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를 지시하실 때가 종종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경험은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꿈을 통해 나타나는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만일 이러한 고백들이 진정 신학적 가치를 지닌
것이라면, 꿈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 신학의 인간론 내지는 성령론의 범주에 삽입될 필요를 요청 받게 될 것이라고 봅니다.
현재 꿈 해석에 관한 현대의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의 많은 연구 결과들은 이미 일부 신학계와 영성운동에서 크게 환영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꿈 해석의 신학적 적용을 지지하는 이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일반적인 꿈은 적절한 해석과 함께 할 때
영적 성화를 향한 친절한 안내자이며 또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더욱 깊이 나눌 수 있는 통로가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타적인 목적의 특별한 꿈이 복음에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다가온다고 보는데, 이를 통하여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세계 복음화를 완수하기 위한 증인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꿈 해석의 전통은 고대교회의 몬타누스주의 정죄와 교권제도 발생 이후 현재까지 교회사 속에서 줄곧 외면을 당해왔습니다. 그러나
이미 진보주의 신학계에서는 꿈 해석에 관한 융의 이론을 적극 도입해 왔으며, 현대의 치유사역과 영성운동에서도 이 이론을
실제적으로 적용하는 사례가 높아가고 있습니다. 융의 이론은 마치 신학계의 진보와 보수 사이를 갈라놓은 격이 되어서, 진보 측에서는
이를 적극 수용하는 반면 보수 측에서는 이를 명백히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이 주제에 대해 고조되는 관심과 질문은
현대의 기독교가 꿈 해석이라는 주제에 대해 적어도 책임성 있는 신학적 평가를 내려야만 할 때라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고 봅니다.
교회의 세속화 - 요셉의 꿈
요셉의
꿈의 이야기는 믿음을 꿈과 동일시하면서, 요셉처럼 큰 꿈을 꾸면 하나님이 이루어 주셔서 크게 성공할 수 있다고 설교하는 주제의
메인 메뉴이다. 요셉의 꿈은 번영신학과 맞물려 적극적 사고, 긍정적 사고를 믿음으로 동질화하면서 인기있는 단골 주제이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요셉의 꿈의 이야기와 현대의 성공의 개념에서 말하는 요셉의 꿈의 이야기는 너무나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현대의 자기계발 이론을 요셉의 꿈 이야기에 대충 끼워맞춰, 요셉처럼 큰 믿음을 가지고 큰
꿈을 꾸면 성공한다는 교훈은 성경의 본래적 가르침을 변질시키고, 자기의 입맛에 맞게 왜곡시켰다.
성경의
본래적 의미를 말하지 않고 인간의 생각대로 성경을 해석(사람의 계명)하여 가르치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한다. 지금 이단들이
그렇게 성경을 해석하고 있지 않은가? 요셉의 꿈의 이야기를 성경이 말하는대로 해석하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멋대로 해석하면
그릇된 길로 가게 된다.
막 7:7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막 7:8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요셉의 꿈의 배경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의 타락한 우상숭배지에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부르시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다. 그리고 복을 주시며 자손이
번성하고 가나안 땅을 선물로 받게 되리라고 약속하신다. 그러면서 한가지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을 아브라함에게 하신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애굽에서 430년 동안 종살이 할 것이라는 계획이었다. 창세기의 400년은 정확한 기간은 430년이지만(출 12:40, 41;갈 3:17) '사 대'(16절)란 말과 맥을 맞추기 위해 대략적으로 사용된 예언적 숫자이다.
창 15: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창 15:14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창 15: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창 15:16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출 12:40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지 사백삼십 년이라
출 12:41 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애굽으로 보내셔야 했는가? 그냥 가나안 땅에 계속 살면 안되었는가?
당시의 가나안 땅은 여러부족으로 나뉘어져 있어서 전쟁이 잦았으며, 성적인 타락, 우상숭배와 인신제사 등의 악한 풍습이 있던 곳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철저히 가나안의 부족들과 종교, 문화, 풍습들과 분리되어야만 했다.
창 24:3 내가 너로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나의 거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창 28:1 이삭이 야곱을 불러 그에게 축복하고 또 당부하여 이로되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고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여호와의 군대로 만들기 위해서 단련시키고 훈련시키고자 애굽을 임시 거주 장소로 계획하셨다. 그리고
그러한 여호와의 군대로 만들어 가나안 족속의 죄악이 관영할 때 심판의 도구로 쓰면서 그 땅을 주시고자 작정하셨다. 가나안 족속은 악을 상징한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들을 멸절하며, 그들의 종교와 문화와 풍습을 멀리해야 했다.
고대에
있어서 가나안 사람의 풍산(豊産)의 제사는 다른 어느 민족보다도 더 상스럽고 비열하였다. 그 때문에 이스라엘의 강한 유일신
신앙도 항상 부도덕한 우상신, 불결한 여신, 뱀, 비둘기, 황소의 우상, 기타 더러운 자연물 숭배에 오염될 위험성이 다분히
있었다. 판테온의 주신(主神) 엘은 탐욕,비천,난폭,범죄의 영웅이었다. 그는 피비린내 나는 폭군이며 부친의 왕위를 빼앗고,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고, 또 딸의 목을 베었다. 이와 같은 폭행에도 불구하고 엘은 `해(年)의 아버지' `인간의 아버지'라고
불리워 제신의 조상으로 되었다. 가나안 사람이 일반적으로 숭배한 바알은 엘의 아들인데, 가나안 사람의 판테온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는 뇌신(雷神)인데, 그 목소리는 폭풍우 때 천지에 반향하였다. 바알. 아나스, 아스다롯, 아세라의 세 여신은 모두 성욕과
전쟁의 파트론(Patron)이며, 동시에 매춘부의 우상이기도 하였다. 모두 부도덕하고 부패와 더러움이 심한 것이며, 그 우상은
신자의 생활을 파괴로 몰고 갈 위험성이 다분히 있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사람은 가나안 사람을 전멸시켜야만 했었다. 그것은하나님의 명령이었다(신 7:2-4). 하나님은 그것으로 가나안 사람의 사악을
벌하고(창 15:16,레 18:25,신 9:3,4,18:12), 또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을 더럽히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출 23:31-33,34:12-16). 이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공의의 그릇이었다
출 23:24 너는 그들의 신을 경배하지 말며 섬기지 말며 그들의 행위를 본받지 말고 그것들을 다 깨뜨리며 그들의 주상을 부수고
레 20:23 너희는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의 풍속을 따르지 말라 그들이 이 모든 일을 행하므로 내가 그들을 가증히 여기노라
그래서 하나님이 직접 가나안 족속을 심판하실 것이고, 이스라엘은 그 심판의 도구가 될 것이며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에게 선물로 주어질 것이다. 드디어 아브라함의 손자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이 태어나고 성장하자 그 예언의 성취가 임박하게 되었다.
출 23:23 내 사자가 네 앞서 가서 너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에게로 인도하고 나는 그들을 끊으리니
출 23:28 내가 왕벌을 네 앞에 보내리니 그 벌이 히위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을 네 앞에서 쫓아내리라
요셉의 꿈과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
요셉이
태어나고 청년으로 성장하자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예언은 성취를 이루고자 기지개를 편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아들들 중에서
요셉을 택하여 자신의 계획을 이루고자 하신다. 요셉을 택한 이유는 요셉의 믿음이 특별히 좋아서도 아니고, 요셉이 뭔가 특별해서도
아니다. 요셉이 야곱의 특별사랑을 받았지만 그것이 그가 선택받은 요인이라 할 수 없다. 오히려 요셉이 선택받은
것은 하나님의 작정과 주권적 의지이다.
창 37:3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과 작정을 이루시고자 요셉에게 꿈으로 힌트를 주신다. 앞으로 일들이 어떻게 진행될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요셉은
하나님이 주시는 힌트가 꿈으로 나타나 역사의 중심부에 서게 될 것을 암시하였다. 하지만 요셉은 그 꿈의 의미가 정확하게
무엇인지 깨닫지는 못한다. 요셉은 솔직한 탓인지, 형들의 과실을 부친에게 일러바치곤 하였기 때문에 형들의 시기와 미움을 받았다. 그는 총명하고 영리했기 때문에 형제들을 멸시하는 버릇도 있었다. 오히려 그 꿈을 함부로 형제들에게 말하여서, 오히려 형제들의 미움을 받는 계기가 된다.
창 37:6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꾼 꿈을 들으시오
창 37:7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창 37:8 그의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의 꿈과 그의 말로 말미암아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창 37:9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꿈을
꾸기 이전부터 아버지의 편애를 받았던 요셉은 당연히 형제들의 미움을 받았겠지만, 꿈을 통해서 그 미움이 더욱 커졌을 것이고,
이렇게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는게 하나님의 작정과 계획을 이루는데 도구가 되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형제들이 요셉을 미워하여
종으로 팔았고, 그 결과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기 때문이다.
요셉의 꿈의 의미
요셉이 꿈을 꾼 것은 자기가 미래를 준비하고자 큰 뜻을 품으며, 크게 성공하고자, 큰 믿음을 가지고 꿈을 꾼 것이 아니라는 것에 본질이 있다. 요셉의 꿈은 아브라함에게 예언하신 약속이 이제 성취할 때가 되었다는 힌트이고, 그 예언의 성취를 위해 요셉이 선택되었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셉에게 성취의 때가 왔음을 알리는 의미에서 꿈으로 알려주신 것이지, 요셉이 원대한 포부와 희망을 가지고 크게 성공하기 위해 자기 스스로가 꿈을 꾼 것이 아니라는 것에 핵심이 있다.
그러나
요셉 자신은 정작 그 꿈의 의미를 잘 모른 것 같다. 형제들이 자신에게 절한다는 형식적인 의미가 아니라, 왜 이러한 일들이
자신에게 일어나야 되는지, 앞으로 큰 민족을 이룰 이스라엘의 운명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본질적인 의미를 잘 몰랐던 것 같다.
그러나
요셉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 수 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며 많은 고생을 하면서 정차 하나님이 자신에게 보여주신 꿈의 본질적인
의미를 깨닫기 시작한다. 애굽왕 바로가 꿈을 꾸고 요셉이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그 꿈을 해석하고, 실제적으로 바로 왕의 꿈들이
실제 현실적으로 성취되어가며, 풍년과 앞으로 닥칠 엄청난 기근을 경험하면서, 그리고 형제들이 곡식을 사러 애굽에 온 것을 보면서
점차 하나님이 보여 주신 꿈의 의미를 깨달아 가고 있었다.
그래서
요셉은 곡식을 사러 온 형제들을 시험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눈물을 흘리며 형제들을 용서한다. 그리고 형제들의
미움과 자신이 애굽에 팔린 것 배후에는 하나님의 큰 섭리와 작정이 있음을 알린다. 10대 후반에 가족을 떠나 애굽의 종으로
팔려가 수많은 고생과 어려움을 겪으며 마침내 30세가 되었을 때 비로소 요셉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보여주신 꿈의 본질적인 의미를
깨닫게 된다.
창 45: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창 45: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요셉을 애굽의 아버지, 주, 통치자로 삼으셔서 야곱과 그의 자녀들이 애굽에 정착할 수 있도록 선발대로 보내신 것이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데에는 많은 시간과 아픔을 통과해야만 했다. 요셉이 종으로 팔렸을 때 얼마나 형제들을 미워하고
원망했을까? 꿈을 보여주신 하나님을 얼마나 저주하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을까? 보디발의 아내에게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을 앞두고 얼마나 자신의 인생을 탄식했을까? 우리도 하는 일마다 안될 때 그렇게 하지
않은가? <하나님! 왜 나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하시나요?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신 분인가요? 하나님이 나를
버린것 아닌가요?> 우리는 요셉이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지 잘 모른다.
이처럼
요셉이 하나님의 주권으로 선택되면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역사의 중심 인물로 우뚝 섰지만, 그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에게 꿈을 해석하는 능력과 탁월한 행정능력을 주시어 애굽에서 총리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하셨다.
요셉은
자신의 능력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하나님의 귀한 선물임을 깨닫고 다시 믿음의 자리에 굳게 선다.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관여하심을 보았기 때문에 요셉의 마음은 형제들을 향한 원망과 미움을 묻어버리고, 점점 여유로워지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 굳건히 선다. 모든 위기의 고비고비마다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자신을 이끌어가심을 체험하며,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원대한 계획과 뜻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형제들을 만났을 때 복수를 하지 않고, 하나님의 작정과
주권의 큰 틀안에서 자신의 인생과 형제들의 운명을 너그러이 바라보고 용서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애굽에 정착하는 야곱과 자녀들
애굽에서
곡식과 선물을 가지고 돌아온 아들들이 요셉이 살아있다는 말을 전하자 야곱은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주저한다. 과거에 아브라함은
가뭄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큰 낭패를 당할 뻔하였던 곳이었고 애굽은 우상숭배지였으며, 혹시 모르는 위험한 일들을 예상했기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주저하는 야곱에게 하나님은 애굽에 내려가면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으며, 다시 애굽을 나와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겠다고 약속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 때부터 가지고 계셨던 작정과 계획이었다.
창 46:2 그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창 46:3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창 46:4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드디어 야곱은 모든 가족을 데리고 애굽으로 내려가 정착한다. 드디어 아브라함에게 예언하셨던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 요셉과 야곱을 통해 성취되었다.
창 47:27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주하며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
창 47:11 요셉이 바로의 명령대로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들에게 거주할 곳을 주되 애굽의 좋은 땅 라암셋을 그들에게 주어 소유로 삼게 하고
창 47:12 또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들과 그의 아버지의 온 집에 그 식구를 따라 먹을 것을 주어 봉양하였더라
요셉의 꿈의 결론
요셉은
그가 섬긴 바로의 집 일에 열심이었지만, 그의 신앙은 애굽 사람에게 동화되는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바로가 준 온 제사장의 딸
아스낫을 아내로 맞아 두 아들을 얻었다. 장남은 므낫세(잊어버림)라 하여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둘째 아들은 에브라임(창성함)이라 하여 "하나님이 나로 나의 수고한 땅에서 창성하게 하셨다" 라고
했다(창 41:51, 52). 그는 이방에 있으면서 홀로 자기 신앙의 순결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부친의 전 종족을 고센의
격리된 땅에 정착시키므로서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종교적 순결을 지켰다. 역경에서 불평하지 않고 조급하게 굴지 않고,
유혹에서 의를 지키고 항상 그 놓여진 지위에서 직무에 충실했고, 주인의 유익에 충성했고, 자기를 학대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고,
진심으로 그들을 사랑하고 화평을 이루었다.
요셉의
꿈은 현대의 교회 강단에서 외치는 것처럼 큰 뜻과 큰 믿음과 큰 꿈을 꾸면 크게 성공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큰 야망, 큰
꿈, 큰 환상은 나의 이기적인 욕망이지, 하나님이 근원적으로 주시는 것과는 차이가 많다. 나의 야망과 나의 꿈과 나의 환상
나의 성공에 하나님을 맞추어고자 하는 발상은 자기계발 모델과 긍정적 사고와 적극적 사고에서 나온 것으로 요셉의 꿈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인본주의적 발상이다. 오히려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과 뜻에 나의 생각과 뜻을 맞추어, 나를 바꾸고 변화시키는
것이다.
요셉은 아브라함 때부터 작정된 하나님의 계획을 위해 하나님의 주권으로 선택되었으며, 하나님이 꿈을 통해서 요셉에게 하나님의 계획과 작정과 뜻을 보여주시고자 했다.
요셉은
하나님으로부터 꿈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받았지만, 그 의미를 깨닫을 때까지는 많은 고통과 어려움의 시간을 헤쳐나가야
했다. 그리고 요셉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자신을 통해 성취되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에게 다가온 죽음의 고비와 역경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요셉은 하나님의 계획과 주권적 뜻이 고통과 어려움과 함께 올 때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복종하였다. 요셉은 고통을 원망하지 않고 믿음으로 승화시켰다. 요셉은 자신에게 오는 고통을 통해 더욱
인격적으로 성숙해졌으며,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성장했다. 이것이 요셉의 꿈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우리는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과 주권적 뜻이 고통과 어려움과 함께 올 때, 그것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거부할 것인가?
자신에게 고통과 역경이 다가올 때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니이다> 라는 믿음의 고백을 할 것인가? 아니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소서>라고 할 것인가? 그대들의 믿음은 달면 하나님을 찾고, 쓰면 하나님을 버리지 않을 수
있는 믿음의 경지에 있는가? 입술로는 <주여! 주여! 믿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찾지만 정작 하나님의 뜻이
고통과 함께 나에게 찾아올 때 <할렐루야 아멘> 할 자들이 얼마나 있겠는가?
요셉의 꿈의 핵심은 <하나님의 뜻이 고통과 함께 주어질 때 거부하지 않고 나를 통해 이루어지니이다>라는 진정성이 있는 신앙고백에 있다.
나이순으로 정리해 본 요셉의 일대기
1세 : 야곱나이 92~93세경에 요셉낳음 10세 : 이때 동생 베냐민을 얻게됨(야곱나이 103세. 라헬죽음) 10세-17세 : 아버지야곱의 편애적 사랑으로 나서기 좋아하고 자랑하기 좋아하고 말하기 좋아함. 야곱은 요셉을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신앙의 계보를 잇기위해 고운자색옷을 입힘 17세 : 형들의 모함에 애굽으로 보디발 장군의 집으로 노예로 팔려나감(이때 야곱나이 110세) 17세-30세 : 이때에 형들에 대한 자신의 모습을 되새겨보며 그의 성품의 전환적 계기를 갖게되어 아무리 억울한 일이 있어도 참고 인내함 25-7세 : 보디발 장군 아내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힘 28세 : 감옥에서 두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줌 30세 : 왕의 꿈을 해석해주어서 이후 애굽의 국무총리가 됨(창세기 41:46) 31-37세 : 7년 풍년 기간에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통해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낳음 38세(?) :
흉년이 찾아옴. (첫해 흉년에 야곱 아들들이 애굽에 1차 방문?(첫해 흉년) (형들이 다시 찾아오게 되고 결국 요셉이 자신을
밝히면서 흉년이 다섯해가 남았다고 말함. 그러나 사실상 형들의 첫 방문과 두번째 방문 사이에 어느 정도의 기간이 흘렀는지는 확실치
않음. 39세 되는 해 1월에 방문해서 12월경에 다시 찾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기에.) 39세 : 야곱형제들의 2차 애굽방문 2년째 흉년(창세기 45:6) 39세 : 아버지와의 해후(야곱은 바로 앞에서 자신의 나이를 130세라고 밝히고 있음(창 47:9), 이사실은 야곱의 나이 92(93?)세경에 요셉을 낳았음을 의미) 45세 : 7년 흉년이 끝남(38~44세까지 7년 흉년 지속) 56세 :
요셉의 두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에게 147세인 야곱이 팔을 어긋하여 축복함. 그 이후 야곱의 12아들이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이루지만, 레위지파가 하나님의 성전에 관련된 직무를 맡는 특별 임무를 맡으면서 다른 지파들에서 성별되었고,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두 지파를 형성하게 됨. 아버지 야곱은 147세로 죽음(창 47:28)(애굽에서 17년간 살았음) 110세 : 요셉 죽음
성경인물 / 요셉(Joseph) 그는 더하실 것
성경에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무수히 등장하지만, 누구나 어떤 결함을 지니고 있었다. 아브라함도 그렇고 모세도 그렇고 바울도 그렇다. 그러나 전
생애를 통하여 거의 결함을 찾아볼 수 없는 인물이 있다. 그것은 요셉이다. 그래서 요셉은 여러 가지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창세기 37장 이후 후반부는 요셉의 이야기로 길게 장식되어 있는데, 이해하기 쉽게 어린시절, 청년시절,
총리시절, 이렇게 세 단계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자.
● 어린시절
야곱이 하란 외삼촌의
집에서 살고 있을 때,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낳은, 야곱의 12 아들 중 11번째 아들이다. 라헬은 결혼 후에 오래도록 자녀를
출산하지 못했으나, 하나님께서 그녀를 생각하시고 태를 여셔서 요셉을 낳는다.
라헬은 이 아들을 낳고,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하고, 또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말하면서 이름을 요셉이라고 지었다.
‘요셉’은 히브리말로,
‘씻다(없애다)’라는 뜻과 ‘더하다’는 뜻의 단어에서 비롯되었다.
요셉은 야곱이 늘그막에 사랑하는 아내 라헬에게서 얻은 아들이었기 때문에, 유달리 사랑을 많이 받았던 모양이다. 흔히 말하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스러웠을 것이다.
그런데 부모의 편애는
다른 자식들에게 큰 상처를 주게 된다. 자식의 입장에서 가장 못마땅한 것은 차별을 받는 것이다. 더욱이 의, 식, 주로 인해
차별받게 되면, 사람은 참으로 비참함을 느끼게 된다. 요셉은 형들과 구별되게 채색옷을 입고 다녔다. 양치기를 하는 다른 형들의
의복과 얼마나 구별이 되었겠는가? 차별대우를 받게 되면, 자식은 부모를 원망하기도 하지만, 사랑을 독차지하는 형제에 대해 미움과
증오를 갖게 된다. 그리고 이미 가인과 아벨에게서도 확인했듯이, 사랑받는 형제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어한다.
“저 놈만 없으면 부모님이 나를 이렇게 대하지는 않을 텐데...”
피해의식을 가진 자녀들은 자신들이 사랑받지 못하는 원인을 대개 자신 밖에서 찾으려 한다. 그러나 야곱의 다른 아들들이 요셉처럼 아비의 사랑받지 못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성경은 야곱의 아들들의
행적에 대해 숨김없이 기록하고 있다. 야곱은 가나안땅에 정착한 후 얼마되지 않아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잃게 된다. 베냐민을
낳다가 난산으로 죽은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경황 중에 야곱이 상심하고 있을 때, 맏이 르우벤이 서모 빌하와 통간했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빌하가 누구인가? 죽은 라헬의 몸종으로서, 야곱의 첩이 되었는데, 단, 납달 리가 그에게서 태어났다. 서모와 통간하는
장자의 이같은 행실을 전해들은 아버지 야곱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둘째 시므온과 셋째 레위는, 세겜 땅에서 디나의 일로 세겜
일족을 잔인하게 학살하여 그 아비의 마음을 심히 근심시켰다. 그때 장성한 다른 아들들도 함께 그 성을 약탈했다. 요셉이 열일곱일 때
그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함께 양을 치고 있었는데, 이복형제인 이들이 나쁜 일을 저질렀던 모양이다. 이들의 과실을
요셉은 숨김없이 솔직하게 아비에게 알렸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요셉은 솔직담백한 성품을 가진 아이였으며, 다른
형제들의 열등감과 피해의식에 대해 깊은 배려를 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고, 또 다른 형제들의 잘못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죄로 물들지 않은 깨끗한 심령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장성한 아들들이 이러니 야곱은 더더욱 요셉을 편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요셉이 형제들의 미움을
받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아마 꿈 때문인 것 같다. 요셉은 자신이 꾼 꿈을 숨김없이 부모형제에게 다 말했다. 인간의 불행은
뜻하지 않은 말 한마디에서 비롯될 때도 많다. 요셉이 별 생각없이 자랑스럽게 한 말 한 마디 때문에 형제들은 그를 더욱 미워하게
된다.
사랑받지 못하는
자녀들은 쉽게 동질감을 갖고 의기투합하게 된다. 한번은 다른 지방에서 형제들이 양떼를 치고 있을 때, 아버지의 명으로 요셉이
파견되었다. 형제들과 양떼가 다 잘 있는지 알아보고 오라는 것이었다. 요셉이 형들이 있는 곳에 당도했을 때, 멀리서 채색옷을 입은
요셉이 오는 것을 보자, 형들은 질투심에 불타 요셉을 죽이기로 모의한다. 결국 요셉의 채색옷을 벗기고 구덩이 처넣은 다음, 마침
그곳을 지나던 미디안 상인들에게 은 이십개를 받고 노예로 팔아 넘긴다.
이처럼 요셉의 어린 시절은 아비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으나, 동시에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아 이방인에게 팔려가는 고난을 당하게 된다.
● 청년시절
성경에 등장하는 신앙의
인물들치고 순탄한 생애를 보낸 사람은 없다. 비교적 순탄하게 일생을 마친 이삭도 죽을 고비를 여러번 넘겨야 했다. 요셉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 야곱의 환난은 하나님께서 야곱의 성품을 고쳐 이스라엘로 만드시기 위한 사랑의 채찍이었다면, 요셉에게는
징계해야 할 점이 크게 없었는데도 엄청난 인생 세파에 시달려야 했다. 그것은 아마도 큰일을 하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훈련시키셨던 모양이다.
요셉이 미디안 상인에
의해 애굽에서 팔려간 곳은 바로의 경호대장인 보디발의 집이었다. 요셉은 하루아침에 귀한 아들에서 낯선 이국땅의 노예 신세로
전락했다. 그러나 종살이를 하면서도 신실하고 부지런히 노력하는 아름다운 청년 요셉을 주인은 늘 흡족하게 생각했다. 어떤 일이든
요셉은 자신의 손에 닿는 것은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보디발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셔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다.
보디발은 그런 요셉을 심복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길 정도로 신임했다. 그런데, 보디발의 아내는 이런 요셉에게 흑심을
품고 유혹을 했다. 매력 있는 청년 요셉에 대해 유부녀인 보디발의 아내는 빗나간 사랑의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남편이 높은 직책에
있었던 보디발의 아내는 분명히 고독했을 것이다.
보통 자신의 일에
성공한 사람들이 일과 가정, 모두에 충실한 경우는 드물기 마련이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화려하게 보이는 삶도 내적으로는 허전하고
고독할 수 있다. 보디발과 그 아내는 분명히 금실이 좋은 부부는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진실한 사랑을 갖고 있는 부부가
다른 이성에게 실제적으로 유혹하는 행동을 할 가능성은 적다. 보디발의 아내는 성공한 남편과 풍족한 재산을 지니고 다른 이의
부러움을 받는 삶을 사는 여인이었으나, 사실 행복은 조건보다 마음 상태가 중요하다. 그녀는 자신의 허전한 마음과 권태로움을 채워줄
상대로 요셉을 택했던 것이다.
그녀는 여러번 요셉을
유혹했다. 그런데도 요셉은 유혹에 빠지지 않았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 젊고 활기 넘치는 요셉이 유혹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할 수 있다. 보디발의 아내는 막무가내였다. 남녀관계는 도망치면 더 따라가는 심리가 있는 모양이다. 어느날
그녀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요셉의 옷을 붙잡고 침실로 가자고 꾀었다. 그러자 요셉은 황급히 손을 뿌리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런데 그만 그녀의 손에 요셉의 옷이 벗겨지고 말았다. 그러자 그녀의 사랑은 순간 미움과 증오로 돌변하고 말았다.
사람들은 보통 사랑과
미움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한다. 자존심이 상할대로 상한 보디발의 아내는 결국 요셉에게 복수를 했다. 결국 그 소동으로 요셉은
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런데 보디발은 아내의 말을 완전히 믿지는 않은 것 같다. 아내의 말대로라면 애굽법으로 당장 처형되어야
하는데, 보디발은 요셉을 감옥에만 가두었다. 아내의 보고에 뭔가 석연찮은 것이 있었을 것이고, 또 요셉이 평상시 주인의 총애와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호하셨기 때문에 감히 누구도 손댈 수 없었던 것이다.
하여튼 요셉은 열일곱에
종으로 팔려와서 서른이 될 때까지 13년간을 보디발 집안의 종노릇과 감옥살이 등 시련의 기간을 보낸다. 그러나 이 기간 요셉은
불평하지 않는다. 결고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여 생애에 죄의 오점을 남기지 않았다. 감옥살이 가운데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며
철저히 여호와 하나님을 의뢰하였고, 감옥살이 중에도 그 절망의 장소에서 최선을 다해, 옥중 죄수의 제반 사항을 담당 처리한 성실한
삶의 태도를 보인다. 연단을 통해 요셉은 자신을 정금과 같이 빛난 존재로 성숙시켜나갔던 것이다.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는 정결한 그릇으로, 축복의 통로로 자신을 준비시켜 나갔던 것이다.
● 총리시절
드디어 때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13년간의 연단을 통해 요셉이 준비되었을 때, 그를 사용하시기 위해 감옥에서 이끌어 내신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어느날 애굽왕 바로가 꿈을 꾸게 하신다. 너무나 생생하면서도 지워지지 않는 꿈이었다. 앞으로 칠년간 엄청난 풍년이 들 것과,
7년이 지난 후 7년 풍년을 집어삼킬만한 지독한 흉년이 들 꿈이었다. 그러나 애굽의 어떤 술객도 박사도 그 꿈을 해몽할 수
없었다. 감옥에 있을 때 꿈 해몽을 해 주어 복직되었던 술맡은 관원장의 추천으로 드디어 요셉은 감옥에서 벗어나게 된다.
바로왕을 비롯, 애굽의
모든 술객, 박사, 대신들 앞에선 요셉은 빛나는 존재였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요셉의 지혜를 그 누구도 따라올 수가
없었다. 바로가 그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겨우
서른의 나이에 요셉은 당시 세계 최강국의 하나였던 애굽 전체를 다스리는 총리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리하여, 7년 풍년 기간동안
잘 준비하여, 7년 대기근 때 중동 전체를 살려내게 된다.
요셉의 이 놀라운
역량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그는 모세처럼 애굽의 학문을 수학하지도 않았으며, 다니엘처럼 갈대아의 문학을 배우지도 않았다. 요셉의
지혜는 배워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맡은 것이었다. 역경의 연속 속에서도 성실함과 신실함을 잃지 않은 이 청년을
하나님께서는 기쁘게 사용하신 것이다. 인간이 자기 힘으로 배워서 얻을 수 있는 지식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지혜는 무한하다. 인생의 고비고비마다 여러분이 배운 세상 지식으로 모든 것을 제대로 바르게 판단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로부터 지혜를 얻을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는 신실하고 성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되시기 바란다.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사서 열일곱에 애굽으로 팔려 갔다. 사랑받던 아비와 작별 한마디 없이 팔려왔으니 그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파란곡절을 겪은 끝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으나,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장자가 태어났을 때,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고 하여, 장자의 이름을 므낫세(잊어버리게 하다)라고 불렀다. 얼마나
고향이 그립고 아버지가 그리웠으면 자식의 이름을 이렇게 지었겠는가! 둘째 에브라임의 뜻은 ‘창성하게 하다’는 뜻이다. 요셉은
외로움과 고초와 번민으로 시작했던 애굽 생활을 변화시켜, 창성함으로 갚아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심정으로 둘째 아들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 이름을 통해 애굽은 자신의 영구한 도성이 아니라 단지 ‘수고의 땅’에 불과하며,
자신에게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약속의 땅’이 주어져 있음을 은연중 드러내고 있다. 풍요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기에 이 땅은 단지
‘수고의 땅’에 불과하다.
우여곡절 끝에 요셉의
부친 야곱과 그 자녀들, 온 가족 70명은 애굽으로 이주하게 된다. 그리고, 야곱은 애굽에서 산 지 17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요셉의 형제들이 그 아비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하고 요셉에게 말을 전한다.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 하라” 형제들은 17년 동안이나 극진한 대접을
받아왔는데도, 여전히 요셉의 마음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저지른 죄의 결과를 두려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하나님과 요셉 앞에 그 죄를 회개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죄가 용서를 받았다고 확실히 믿을 수 없었다. 사랑을 베풀어도 그
마음을 믿어주지 않는 것처럼 안타까운 일은 없다. 요셉이 그 말을 듣고 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요셉은 이와 같이 자기를
믿지 못하는 형제에 대해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었다. 그는 형제들에게 말했다.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요셉은 말년에 자신의
굴곡많은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무슨 생각을 가졌을까? 그는 죄지은 형들을 당연히 단죄하지 않고 오히려 형들을 위로했다. 그것은
요셉이 자신의 일생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마치 나 자신이 하나님인양 처신할
때가 많다. 타인의 죄에 대해서도 내 판단의 잣대로 마음대로 단죄하려고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사실 인간은 누구도 다른 이를
단죄할 수 없다.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시다. 요셉은 그 인간의 한계를 분명히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모든 것이 감사와 은혜였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아주 담담하게 맞으며 일가 사람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했다. “나는 이제 죽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너희를 찾아오시어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약속한 땅으로 올라갈 것이다. 그러니 잘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올라가는 날 내 뼈를 가지고 가거라.”
요셉은 죽음 안에서도
희망과 자유를 지니고 있었다. 인생의 가장 큰 고통인 죽음에 대해서도 자유로운 것은 그가 평생을 가지고 있던 굳건한 믿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요셉은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했다. 믿음을 간직한 채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께신 가나안 땅에 묻힐 것을 소원했다. 가나안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었다. 우리가 마지막 날을 맞이한다면 가족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남기겠는가? 삶의 끝을 접어야 하는 순간, 마지막으로 소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삶이 끝나는 날이 있음을,
그리고 내가 묻힐 땅과 마지막 옷이 입혀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죄와 심판이지만, 영원한 이별 역시 인간의
마음을 애통하게 한다. 그러나 죄와 심판보다 더 큰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심을 믿어야 한다. 그 믿음 안에서 새로운 희망이 싹트고
재회의 기쁨을 가져오게 할 것이다.
요셉의 사랑은 말할 것도 없이 신앙에서 비롯된다. 그는 독실한 신앙인이었다. 히브리서 11장 22절에 이렇게 쓰여 있다.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해 명하였으며.” 요셉이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성자의 반열에 그 불후의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은 그가 독실한 신앙인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승리의
생애를 마치게 된 원동력은 신앙에 있었다. 그가 역경을 헤치고 나아간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두려운
불화살을 막을 수 있게 된 것도 신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이상 중에 보여주신 하나님의 계시를 굳게 믿었기 때문에 모든 고난을 능히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도덕적 용기, 아량, 예지 재능은 모드가 신앙에서 비롯되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증조할아버지 아브라함과 할아버지 이삭과, 아버지 야곱에게 하신 언약을 잠시도 잊지 않았다. 그리하여 가나안 땅이야말로 이스라엘
민족이 살아야 하는 고장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요셉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윽고 그 약속의 땅으로 돌아갈 것을 예언하고, 지기
뼈를 운반해 갈 것을 지시했다. 그의 뼈는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를 지나 드디어,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점령하고 각 부족이 각각 분깃을 받게 되었다. 하나님의 약속이 완전히 이루어지자 세겜 땅에 안장되었다.
요셉은 인간적 온유함과 성실, 그리고 여호와 제일주의의 신앙으로 언제 어디서나 만인에게 인정받는 인생을 살았다. 우리도 주위로부터 인정받을만한 삶을 살아서 결과적으로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하겠다.
에서 곧 에돔의 대략이 이러하니라. This is the account of Esau (that is, Edom).
(현대인의 성경) 에돔이라고도 하는 에서와 그 후손에 대한 이야기는 이렇다. (새번역) 에서 곧 에돔의 족보는 다음과 같다. (공동번역) 에돔이라고도 불리는 에사오의 계보는 아래와 같다.
아브라함이 죽고 이삭의 역사가 시작되기 전에 그두라의 소생과 이스마엘의 족보가 소개된 것처럼(창 25:1-18), 오늘 본문은 야곱의 시대가 끝나고 요셉의 시대가 시작되기 전에 에서의 족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1-19절에는 세일 산에 거주한 에서의 후손들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고, 20-30절에는 호리 족속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31-43절 부분에는 고대 왕국 시대에 통치한 에서의 후손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이처럼 이방 족속의 계보를 기록한 이유는 장차 하나님의 구원이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전 인류를 향한 것임을 예시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살펴보면 이삭과 리브가의 사이에서 태어난 맏아들 에서가 세일 땅에 정착한 후 번성하여 한 민족을 이룬 사실이 족보의 형태로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창25:23에서 말씀하신 대로 리브가의 태중에 '두 민족'이 있다고 하셨던 말씀이 성취되어 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야곱의 후손도 중요했지만, 더 넓은 의미로 에서의 후손 역시 두 민족을 이루신다는 하나님의 예언이었다는 말씀입니다.
2-5절까지를 살펴보면 에서는 세명의 아내에게서 다섯 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는 야곱의 아들들만큼은 못한 수였지만 후일 그들 후손의 수는 야곱의 후손의 수와 거의 비슷해집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후손의 수가 아니라 그들의 이름이 성경에서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제외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후부터 성경 속의 주요 인물, 역사 사건들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의 예정이나 선택이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택하실 때 야곱같은 사람도 선택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생애를 살펴볼 때 결코 그 사람이 선한 사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에서의 경우가 바로 그러합니다.
로마서 9:13에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는 말씀과 같이 에서는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지 못한 사람이었는데 앞에서 살펴본 대로, 그는 어려서부터 믿음이 없었고 그의 생활자체가 당연히 선택받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행동을 창세기 본문들을 통해 다시 한 번 살펴보면
1) 25:34에 자신의 장자권을 동생에게 팥죽 한 그릇에 팔아 버렸고
2) 26:34에 이방 여인들을 아내로 맞은 것도 잘못된 것이지만, 게다가 그들을 하나님의 신앙으로 이끈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문화에 젖어 삶으로써 부모를 근심하게 한 불효를 행했습니다.
3) 36:6에 더욱이 물질이 많게 되자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을 버리고 이방 땅으로 갔던 것 등입니다.
이 모든 것을 살펴볼 때 하나님께서 야곱을 택하신 것도 그 행위가 선했기 때문이 아닌 것처럼, 에서를 버리신 것도 그 행위가 선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예정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억울하게 버리신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어제나 오늘이나 그 원칙에 변함이 없으십니다.
오늘 우리가 택함을 받은 것도 나의 공로가 아닌 것처럼,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지 못한 사람도 선한 사람을 버리신 억울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불신앙의 사람, 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은커녕 자손 대대로 저주를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에서의 가문에 복을 주셨습니다.
그 후손들에게 내리신 축복은 바로 오늘 성경 말씀에 기록된 에서의 족보에 잘 나타나 있는데 먼저 자손을 번성케 하여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낳은 이스마엘의 경우도 비록 서자였지만 하나님께서 그 자손을 번성케 하셨던 것처럼 에서의 자손도 크게 번성케 하여 주셨습니다.
또한, 물질적으로도 복을 주셨습니다.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와 아버지 이삭을 모시는 동안 에서와도 함께 지내게 되었는데 하나님은 야곱의 육축만 많게 하신 것이 아니라 에서에게도 축복하셨습니다.
그래서 함께 거할 수 없을 만큼 그들의 소유가 많아졌습니다.
더 나아가 왕국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야곱의 자손인 이스라엘은 출애굽과 광야의 여정을 거쳐 오랜 후에 가나안 땅에 돌아와 이스라엘 왕국을 세웠지만 에서의 자손은 오늘
본문 31절에 보시면 일찍이 왕국을 이루었고 그것은 마침내 에돔이라는 강대국으로 이르게 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지난날, 에서에게만 베푸신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당연히 버림받아 마땅한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에게 긍휼과 자비를 변함없이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에서가 택하심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불행스럽게만 일생을 보내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에
그 자손들에게 약속하신 축복에 동참하게 하신 것처럼,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오늘 날 하나님을 부인하는 무신론자들, 물질을
신으로 섬기는 배금주의자들이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보다 육신의 삶에 있어서 에서의 가문처럼 잘살게도 번성하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이 일에 우리는 때로 많은 의문을 갖기도 합니다.
시편 기자도 시편 73편에서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넘어질 뻔하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는 어찌하든지 그들을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거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었음을 기억하고 더 큰 믿음위에 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7절에 야곱과 에서는 그들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에서는 모든 가족들과 재물과 짐승들을 이끌고 세일 산에 거했습니다.
이곳의 현 위치는 예루살렘의 서쪽 약 14km 지점으로 가나안을 벗어난 사해 남쪽의 아라바 산악 지대입니다.
이후부터 세일은 하나님 백성들의 성인 예루살렘과 대비되는 이방 땅의 성으로 자주 등장하게 됩니다.
에서는 세일 산에 정착하고 그의 후손들 대대로 삶의 근거지가 되었습니다.
또한 31절에 이스라엘에 왕이 있기 전에 이미 에돔 땅에는 왕들이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동안 에돔 족속은 독립된 나라를 이루면서 정치 경제 모든 부분에서 이스라엘보다 발전된 상태에 있었고 외형적인 번영과 풍요를 누렸습니다.
32절 이하에 나오는 왕들은 에돔의 기틀을 닦은 왕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에돔왕국을 훌륭히 발전시킨 왕들 입니다.
39절의 바알하난과 하달 시대에 와서야 이스라엘에 첫 번째 왕인 사울이 등극하게 됩니다.
이어지는 40절 이하에는 에돔의 왕들에 이어 족장들에 대한 소개가 비교적 소상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왕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업적이나 신상에 관한 언급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다만 어떠한 인물들이 족장이었는가에 대한 소개만이 나올 뿐입니다.
이것은 다음 장에서 시작되는 야곱의 후손들을 중심한 구속사의 전개를 위해 한 시대를 마무리한다는 의미에서 소개한 것으로 보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창세기 36장은 에서의 후예에 대해서 장황하게 열거하고 있습니다.
이는 창세기에 기록된 마지막 이방 족보로서 장차 일어날 이방 민족들의 침략에 대한 그 배경적인 설명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에서는 모든 부분에서 야곱보다 나은 조건을 타고 났지만 믿음이 없었기에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에 속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에서의 삶을 바라보면서 스스로의 믿음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오늘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But Er, Judah's firstborn, was wicked in the LORD's sight; so the LORD put him to death.
여호와의 목전(in the sight of the Lord)"
유다 가문의 부끄러운 이야기
창세기 38장은 요셉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중간에 시아버지 유다와 며느리 다말의 근친 상간이란 이야기가 마치 잘못 편집된 듯하게 소개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구속사적 측면에서 본문은 메시야의 혈통을 잇는 계보를 보여 주고 또 한편으로는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의 도덕적
타락상에 물들어 가는 모습을 통해 애굽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을 보여 주기 때문에 의도적인 기록이라고 하겠습니다.
유다의 집안에 찾아온 첫 번째 불행은 장자였던 엘이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다가 자녀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임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엘이 어떤 악을 행했는지 자세히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10절에 비추어 볼 때 성적인 범죄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엘의 아버지인 유다가 며느리인 다말을 창녀로 알고 그녀와 동침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인 유다와 장자인 엘의 성적인 타락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아버지 유다의 성적인 범죄가 그것을 보고 자란 장자 엘에게 그대로 전달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부모의 말과 행동이 자녀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잘 보여 주는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당시 사회제도는 형제 중에서 결혼을 하였으나 후사가 없이 남편이 죽게 되면 그 동생이 형수와 동침한 후 후사를 이어가도록 하는 계대결혼이란 제도가 있었습니다.
유다에게는 '엘'과 '오난'과 '셀라'라는 세 아들 있었습니다. 장자 엘의 부인은 다말이었는데 엘이 죽은 후에 동생 오난이 형수 다말과 동침한 후에 후사를 잇지 못하도록 땅에 설정하므로 이것이 여호와의 목전(in the sight of the Lord)에 악이 되어 죽고 말았습니다. 유다는 셀라를 다말에게 보내지 않고 오히려 다말을 친정에 가서 셀라가 더 성장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셀라마저 죽을 것이 두려워서 이렇게 행한 것이었습니다.
얼마후 시아버지 유다가 딤나라는 곳으로 양털을 깎기 위하여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다말은 얼굴을 가리고 마치 몸을 파는 여자처럼 길가에 앉아있다가 유다와 동침을 합니다. 이때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에게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약조물을 받았습니다. 다말이 잉태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유다는 다말을 불살라 죽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다말은 내가 잉태한 것은 이 약조물의 주인 때문이라고 말하므로 유다는 다말의 잘못이 아니라 내가 아들 셀라를 그에게 주지 않은 탓이라며 더 이상 다말과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 성경에 이와같은 근친상간의 이야기가 진솔하게 소개되었을까요?
아무리 계대 결혼의 권리가 있다 할지라도 간계로 시아버지와 간음한 다말의 행동도 하나님 앞에서 명백한 범죄라고 하겠습니다. 다말이 서슴지 않고
잘못된 방법을 쓴 것은 당시 성 도덕이 문란한 가나안의 문화 속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와 다말의 근친 상간은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구속사적 의미를 나타냅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인도하신 것이 노예 생활을 하도록
징계하신 것이 아니라 가나안의 타락한 삶으로부터 선민의 순수성을 보존하시기 위한 배려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메시야를
보내심으로 인간의 죄를 무한히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도덕과 윤리와 가치가 붕괴되는 오늘의 시대에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삶의 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교육학에서 '어린이의 최초의 학교는 가정이며 최초의 교사는 부모'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자녀는 그 부모의 행동을 그대로 보고 배운다는 뜻입니다.
자녀들의 삶의 교과서는 부모의 '말과 행동' 그 자체입니다.
통계적으로 볼 때 가정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 중에는 어려서 아버지가 어머니를 자주 때리는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우리 생각에 어릴 때 어머니가 맞는 것을 보며 자란 사람은 커서 아내를 때리지 않을 것 같은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버지의 행동을 그대로 답습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자녀는 부모의 말과 행동을 그대로 배우며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범죄자의 가정에서 범죄자가 많이 나오고, 선한 자의 가정에서 선한 사람이 많이 나오는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자녀를 바른 신앙의 사람으로 키우려면 부모 자신이 먼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행동해야 합니다.
부모가 주일에 교회 빠지고 놀러 가고, 거짓말과 음란한 행동을 하는데 자녀가 제대로 자랄 리가 있겠습니까?
결코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부모가 먼저 매일 말씀과 기도 생활에 열심을 내고 모범적인 신앙의 자세를 갖는다면 하지 말라고 해도 자녀들은 저절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모범적인 사람으로 자라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신앙적인 나태함이 찾아올 때나, 죄의 유혹이 찾아올 때, 자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죄악된 행동을 장차 자신의 자녀들이 그대로 답습할 것을 생각한다면 그러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과 사람 앞에 바로 서서 자녀들에게 부끄럽지 않고 자녀들의 좋은 신앙적 스승이 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8절에 엘이 죽자 그의 동생 오난이 그의 형수인 다말과 혼인하게 되는데 이는 고대에는 형이 자식이 없는 상태로 죽으면 아우가
형수를 통해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을 형의 이름으로 상속시키는, 공인된 관습으로 계대법, 또는 수혼법이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볼 때에는 말도 안 되는 법으로 보여 지지만 이 법은 모세 때 율법으로 성문화되었습니다.
신명기 25:5-6입니다.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이러한 법이 생겨난 가장 큰 이유는 유산의 상속 때문이었습니다.
아들의 유산이 며느리가 다른 사람과 재혼함으로 잃어버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난은 그의 형 엘이 아들이 없이 죽었기 때문에 그의 형수인 다말과 결혼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형수인 다말과 결혼한 오난은 자신을 통해 낳게 될 자녀가 엘의 기업을 받을 것임을 알고 이기적인 마음에 계대 의무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보시기에 악행한 오난 또한 죽음으로 형벌을 받게 됩니다.
갑작스럽게 두 아들을 잃은 유다는 11절에서 다말에게 수절하고 친정에 가서 셀라가 장성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다의 이 말은 변명과 구실에 불과하였습니다.
유다는 다말과 결혼한 두 아들이 모두 죽은 사실을 통하여 그의 마지막 아들인 셀라도 죽을까 염려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말은 어찌할 수 없이 유다의 말을 듣고 친정으로 돌아가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다말은 시어머니가 죽고, 또 셀라가 장성했음에도 자기를 셀라의 아내로 주지 않자 시아버지 유다가 양털을 깎기 위해 딤나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창녀로 변장하였습니다.
다말이 이렇게 한 이유는 성인이 된 셀라를 유다가 자신의 남편으로 주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이제는 궁여지책으로 유다를 통해서라도 자식을 얻을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나안이 성적으로 얼마나 문란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며느리가 시아버지와 동침하여 아들을 낳을 생각을 할 수 있습니까?
어찌되었던 다말을 알아보지 못한 유다는 그녀를 창녀로 알고 그와 동침하고 맙니다.
시아버지 유다를 속인 다말은 자신과 동침한 대가를 요구합니다.
그래서 유다는 동침한 대가로 나중에 염소 새끼를 주기로 하고 그 담보물로 도장과 그것에 달린 끈과 지팡이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뒷날 대가를 지불하고 담보물을 되찾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친구를 통해 담보물을 찾으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임신에 성공한 것을 안 다말이 잠적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담보물 찾는 것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석 달쯤 후에 다말이 음행으로 인해 임신하였다는 말을 듣고 유다는 크게 화를 냅니다.
그러나 끌려 나온 다말을 통해 그녀와 동침한 남자가 다름 아닌 유다 자신임을 알고 그는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다시는 그녀를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유다를 통해 다말은 쌍둥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것은 유다의 부끄러운 역사인 동시에 메시야의 족보로서 중대한 뜻을 지닙니다.
우리는 간혹 성경을 통해서도 충격적인 내용을 접할 때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창 38장입니다.
그것도 메시야의 조상인 유다에게서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죄악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가증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들에게 무조건적인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범사에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창세기 38장은 요셉의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갑자기 시아버지 유다와 며느리 다말의 근친 상간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유다는 계대
결혼에 대한 의무를 이행치 않았기 때문에 며느라 다말은 친정에 머물면서 시아버지가 딤나에 양털을 깎으러 왔다는 소식을 듣고 얼굴을 가리고 시아버지와 동침을 합니다. 이때 다말은 시아버지에게 약조물을 요구하여 "도장과 끈, 지팡이"를 받았습니다. 얼마 후 다말이 임신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시아버지 유다는 다말을 끌어내어 불사르라고 엄하게 말했지만 다말이 제시한 약조물이 유다의 것임을 알고 그가 옳다. 내가 셀라를 그에게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며 더 이상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계대 결혼이란 가문의 혈통을 중요시했던 고대 근동에서 후사 없이 죽은 형제의 대를
이어주기 위하여 형제나 친족 중의 하나가 죽은 형제의 부인과 결혼하여 후사를 이어주는 제도를 말합니다.
오난이 죽은 것도 이 의무를
성실하게 이행하지 때문이었으며, 막내 아들 셀라가 오난처럼 죽을까 두려워하여 다말에게 주지 않은 것도 유다의 잘못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계대 결혼의 권리가 있다 할지라도 간계로 시아버지와 간음한 다말의 행동도 하나님 앞에서 명백한 범죄라고 하겠습니다. 다말이 서슴지 않고
잘못된 방법을 쓴 것은 당시 성 도덕적으로 문란한 가나안의 문화 속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다와 다말의 근친 상간은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구속사적 의미를 나타냅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인도하신 것이 그들로 노예 생활을 하도록
징계하신 것이 아니라 가나안의 타락한 삶으로부터 선민와 순수성을 보존하시기 위한 배려입니다.
둘째로 불륜 관계에서 메시야를
보내심으로 인간의 죄를 무한히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세계선교교회 최운형 담임목사 취임식이 지난달 11일, 동 교회 성도들과 나성영락교회 성도들이 하객으로 대거 참석한 가운데 동 교회에서 열렸다.
담임목사에 취임한 최운형 목사는 인사말을 통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는 말씀을 하신 것을 항상 심중에 새기며 기도하는 목회자로서 하나님과 성도들을 더욱 사랑하는 목회를 하겠다”고 말했다.
설교를 맡은 림형천 목사는 “안디옥 교회”(행11:19-26) 제목의 설교를 통해 훌륭하게 목회하던 부목사를
담임목사로 보내는 것이 딸을 시집보내는 마음과 같다고 서두를 꺼 낸 후, “동 교회가 새 담임목사와 함께, 항상 하나님만 의지하는
교회, 선교에 열정을 가진 교회, 지도자와 평신도가 화합하는 교회,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내는 교회가 되라”고 강조했다.
권면에 나선 이기홍 목사(남가주교협 증경회장)는 “목회자도 성도 모두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뛰어나고 인품이 훌륭하고 헌신에
불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취임식은 사회 안맹호 목사, 기도 이재국 장로, 찬양대의 찬양, 설교 림형천 목사, 문답 및 공포 Mike
Livingston 목사(District Superintendent of Missionary Church Western
District), 봉헌송 나성영락교회 교역자 일동, 광고 차효삼 장로, 축도 서정운 박사(전 한국 장신대, 미주장신대 총장)가
각각 순서를 맡았다.
최운형 목사는 한국 장신대를 졸업하고 플러신대 목회학박사과정 중에 있으며 대구 삼덕교회, 서울 홍광교회, 나성영락교회를 각각 섬겨왔다.
[뉴스앤조이-박요셉 기자] 노란 머리 20대 청년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늘은 낮에 왔네요." 최운형 목사(청년밥상 문간)가 반갑게 손님을 맞았다. 인근 입시 학원에
다니는 학생인데, 거의 매일 저녁을 먹으러 온다고 최 목사는 말했다. 청년은 쑥스러운 듯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식권을 내밀고
자리에 앉았다. 최 목사는 청년 앞에 김치찌개를 내왔다.
청년밥상 문간은 메뉴가 김치찌개 하나다. 1인분에
3000원. 계란 프라이, 어묵, 김 등을 추가하고 싶으면 각각 500원을 더 내야 한다. 밥은 무료로 준다.
3000~4000원이면 한 끼를 든든히 해결할 수 있다. 최 목사는 지난해 10월, 굶고 있는 청년들을 돕기 위해 서울 은평구
연서시장 인근에 식당을 차렸다.
최운형 목사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미국 세계선교교회 담임목사였다. 그는 2004년 미국
LA 나성영락교회에서 부목사로 지내다가 2010년 세계선교교회에 담임으로 부임했다. 교인 300여 명이 모이는 교회에서
안정적으로 목회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해 돌연 교회를 사임하고 한국에서 식당을 개업한 것이다.
이제는 말씀 대신
밥을 먹이고 있는 최 목사를 5월 22일 청년밥상 문간에서 만났다. 그는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선배 목사들은 사랑과 관심 등을 의미한다고 말하지만, 나는 교회가 이웃들에게 실제적인 필요를 채워 주라는 뜻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최운형 목사는 비교적 평탄한 목회 인생을 걸었다.
하지만 20년간 전임 사역자로 일하면서 들었던 생각은 회의와 반성이었다. 매년 연봉이 오르고 일반인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임금을
받으면서 삶이 윤택해지는 것이 부끄러웠다. 수십 년간 강단에서 메시지를 전해 왔지만, 설교는 해마다 어려워졌다.
"설교자도 양심이 있다. 물론 내 삶과 상관없이 교인들에게 신앙적으로 권면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게 잘 안 됐다. 나는 매일
먹을 거 입을 거 등등 걱정이 많은데, 어떻게 교인들에게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라고 할 수 있겠나. 앞으로 정년까지 20년은 더
목회해야 하는데, 더는 할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목사직 자체를 내려놓으려 했다. 더 이상 목회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일을 찾아보려고 고민하던 차에 지난해 3월, 소셜미디어에서 '청년식당 문간'을 소개하는 기사를
읽었다. 고시원에서 한 젊은이가 굶어 죽었다는 기사를 본 이문수 신부가 서울 성북구에서 3000원짜리 김치찌개 식당을 차렸다는
내용이었다. "이거다!" 최 목사는 바로 한국으로 달려가 이 신부를 만나 2호점을 열고 싶다고 했다. 신부는 흔쾌히 허락해 줬다.
'문간'이라는 이름도 그대로 사용하게 하고, 영업 노하우도 전수해 줬다.
그다음은 교회와 가족에게 오랫동안 품은
생각을 꺼낼 차례였다. 교인들은 최 목사가 갑자기 사임 의사를 밝히자 당황했다. 장로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느냐며 사임을
철회해 달라고 했다. 최 목사의 아내조차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 했다. 평생 강단에서 설교만 해 온 사람이 주방에서 앞치마를 두르는
모습이 선뜻 그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최 목사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최 목사는 지난해 8월
세계선교교회를 공식 사임하고, 10월 청년밥상 문간을 개업했다. 시장 인근에 있는 당구장을 빌려 내부를 개조했다. 한국에서
부목사로 지내면서 관계를 쌓은 몇몇 교인이 취지에 공감해 공사비를 지원해 주거나 자원봉사로 도와주었다. 일요일에도 영업한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청년밥상 내부. 미적 감각이 있는 주방장이 아담하게 꾸몄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식당
문을 연 지 7개월. 다양한 사람이 문간을 넘는다. 최운형 목사는 청년뿐 아니라 직장인, 혼자 사는 노인, 집에서 음식을 할 수
없는 사람 등 여러 유형의 손님이 식당을 찾는다고 말했다. 특별히 목사라고 밝히지 않았는데도, 손님들은 어떻게 알았는지
"목사님"이라고 부른다. 말없이 밥만 먹고 가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최 목사를 붙잡고 자기 이야기를 꺼내는 손님도 있다.
한
30대 청년은 매일 청년밥상 문간에서 밥을 먹는 단골이다. 로스쿨을 나온 그는 변호사가 되고 싶었지만 시험에 네 번 낙방했다.
그는 현재 시험을 포기하고 재택 아르바이트를 하며 근근이 생활하고 있다. 최 목사는 "어느 날 청년이 계산을 마치더니 갑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자리에 앉아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눴다. 이후 그는 그냥 자신을 소개하고 싶었다고 말하며 가게를
떠났다"고 말했다.
백설기를 한 상자 가져다준 손님도 있었다. 40대 후반 여성인데, 매주 일요일 오후 4시만 되면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그는 서울 서초구에 있는 식당에서 일한다고 했다. 일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숙식하며 근무하다가 토요일 저녁에
퇴근하고 귀가한다는 것이다. 5개월간 꾸준히 식당을 찾은 그가 어느 날 최 목사에게 떡을 주며 "오늘은 졸업하는 날"이라고
말했다. 건강이 안 좋아져 더는 가게에 올 수 없게 됐다고 했다.
손님들은 저마다 달랐다. 한 60대 남성은 밥을
먹고 나면 "오늘도 큰 용기를 얻고 간다"며 90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나간다. 옆 가게에서 옷을 파는 또 다른 손님은 장사가
안된다며 매일같이 와서 외상으로 점심을 먹었다. 가끔은 빈 통을 가져와 물을 한가득 담아 가기도 한다.
"그들을 직접 대하고 이야기를 나누면 교회에서 느껴 보지 못한 감정을 경험한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이제야 알겠더라. 나는 60대 손님이 말한 '용기'가 무엇인지, 왜 30대 청년이 갑자기 자기 이야기를 꺼냈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평범한 한 끼 식사가 이들에게 무언가를 채워 줬구나 생각한다."
개업 이후 계속 적자였던 청년밥상 문간은
지난달 겨우 흑자를 달성했다. 몇 만 원밖에 안 되는 수익이지만, 6개월 만에 흑자를 내겠다는 1차 목표는 이룬 셈이다. 최
목사는 다음 달부터 3000원짜리 식권 200매를 인근 보건소와 파출소, 초등학교에 배포해, 지역사회를 도울 계획이라고 했다. 3000원짜리 김치찌개. 다시마, 생강, 파 뿌리, 양파 등으로 육수를 우렸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돈을 더 내면 어묵, 김, 라면 사리 등을 추가할 수 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최운형
목사는 오늘날 교회가 세상과 등을 돌린 채 자신들끼리 잔치를 벌이는 것 같다고 했다. 최 목사가 교회에 있을 때 가장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말은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었다. 그는 "하나님은 교회가 하나님나라를 누리지 못하는 이들을 안타까워하며 돕기를
바라고 있는데, 우리는 언제부턴가 교회 문을 닫고 우리끼리 잔치를 벌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교회가
주민들에게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목회 패러다임이 빠르게 변하는 시대다. 목회자들이 사역을 꼭 교회에서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전통 교회를 떠나서 바깥에 있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새로운 시도가 계속됐으면 좋겠다."
김치찌개에 밥 무제한…배고픈 이웃에게 복음의 통로 미국서 안정적 목회 대신 말씀 살아내고자 따밥 개업 사역 취지에 공감한 동역자들 덕분에 7호점까지 키워 최운형 목사는 앞으로 10년간은 3,000원짜리 김치찌개의 가격을 올릴 계획이 없다고 말하며 웃었다.
갈수록
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서민들의 한숨이 짙어졌다. 웬만한 식사 한 끼에 만원이 훌쩍 넘어가면서 밥값이 부담스러워 편의점에서
간편식으로 끼니를 때우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이마저도 남들보다 주머니 사정이 더욱 얄팍한 취준생이나 독거노인들은 망설일 수밖에
없는 팍팍한 현실이다.
그런데 여기, 단돈 3,000원으로 두둑이 배를 불릴 수 있는 곳이 있다. 2018년부터 최운형 목사가 운영해온 식당 ‘따뜻한 밥상’(이하 따밥)이 그 주인공.
단일 메뉴인 김치찌개에 밥과 반찬이 무제한인 따밥은 최 목사가 소외된 이웃을 위해 개척한 사실상 ‘교회’나 다름없다.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장사가 아닌 목회를 하고 있다”는 그를 만나봤다.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라 쌀쌀한
초겨울에 접어들던 지난달 중순. 서울 연신내역 인근에 위치한 따밥에 들어서자 앞치마를 두른 최 목사가 기자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인터뷰에 앞서 3,000원짜리 김치찌개의 맛이 궁금해 주문하니 금세 눈앞에 푸짐한 상이 차려졌다.
맛 또한 반전이었다. 칼칼한 국물에 큼지막한 두부와 돼지고기를 듬뿍 넣은 김치찌개, 윤기 좌르르한 흰쌀밥과 짭조름한 콩나물 무침이 입맛을 한껏 돋우었다. 믿기 힘든 저렴한 가격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따밥에서는 돼지고기를 듬뿍 넣은 김치찌개에 흰쌀밥과 콩나물 무침이 무한 제공된다. 따밥에서는 돼지고기를 듬뿍 넣은 김치찌개에 흰쌀밥과 콩나물 무침이 무한 제공된다.
“지금이야말로 형편이 어려운 이들을 위한 식당이 필요한 때입니다. 모든 것이 풍족한 요즘 시대 밥 굶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보여도, 여전히 끼니 걱정을 하는 분들이 많아요. 가뜩이나 코로나19로 힘들어진 사람들은 더욱 그렇죠.”
지난 20여년 동안 구슬땀으로 일궈온 안정적인 목회 기반을 뒤로하고 따밥을 개업한 이유에 대해 최 목사는 이 같이 밝혔다.
4년 전 그가 주위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 세계선교교회 담임목사직을 내려놓고 한국에 건너와 인심 좋은 밥집 사장님이 된 건 순전히 성경 말씀 때문이었다.
“어느
날 문득 ‘교회 주변엔 왜 가난한 사람이 많을까?’란 회의가 들었어요. 제가 늘 목회철학으로 삼고 강단에서 외쳐온 말씀이 바로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구절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건데…. 이제 이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겠다고 생각했죠. 높은 연봉과
성도들의 존경을 꿈꾸는 겉만 번지르르한 목회자가 아닌, 이웃의 필요를 채워주는 목회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더 이상
교회에 머무르지 않고 세상에서 믿음의 도전을 이어가기로 결단한 최 목사. 때마침 소셜미디어를 통해 이문수 신부가 오픈한 ‘청년식당
문간’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가슴이 뛰었다. 내용인즉슨 고시원에서 한 젊은이가 굶어 죽은 사연을 듣고 이 신부가 서울에
3,000원짜리 김치찌개 식당을 차렸다는 것이다.
그길로 곧장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최 목사는 한달음에 이
신부를 찾아갔다. 그리고 2호점을 허락받았다. 다만 청년뿐만 아니라 남녀노소 누구든지 발을 들일 수 있도록 상호를 청년식당 문간
대신 따뜻한 밥상으로 지었다. 2018년 따밥이 태동한 순간이다.
그러나 출발은 녹록하지 않았다. 평생 목회의 길만
걸어온 그가 하루아침에 밥집을 꾸리기란 쉬울 리가 없었다. 주방장은 불성실한 태도로 한 달 만에 내보내야 했다. 또 ‘아무리
3,000원이지만 맛이 이게 뭐냐”며 질타하는 이도 있었다.
결국 최 목사는 직접 칼을 들었다. 김치를 숙성하는
방법부터 양념과 육수 제조까지 밤낮으로 연구하고 요리하며 레시피를 개발했다. 눈물겨운 노력 끝에 6개월 무렵부터 따밥은 동네서
‘가성비 좋은 맛집’으로 입소문을 타기 시작, 하나 둘 손님이 늘었다.
하나님은 장사 초반 적자로 인한 빚도 한순간에
해결해 주셨다. 따밥의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일면식도 없던 세 명의 성도가 선뜻 후원금을 건네면서다. 그는 “따밥은 빚 없는
가게일 뿐만 아니라 흑자로 전환한지도 오래”라며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고백했다.
따밥이 흑자를 내는 또
다른 비결은 십시일반 모아진 사랑의 손길 덕분이기도 하다. 과거 최 목사가 부목사로 몸담았던 홍광교회 교인들이 봉사자로 일손을
보태준 데다가 따밥의 취지에 공감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섬겨줘 인건비가 절약되기 때문이다.
식자재 또한 매달 기적처럼
채워지고 있다. “신기하게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쌀이 떨어진 적이 없어요. 한 달에 쌀이 많게는 200kg씩 소모될 때도
있는데 그래도 어디선가 계속 쌀을 보내와요. 그중에 절반은 익명이라 누군지도 모르지만 참 감사한 분들입니다.”
일련의
응답들이 하나님의 응원으로 느껴졌다는 최 목사는 “가난한 자와 주린 자를 먹이는 게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따밥은 잘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며 “만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밥이 망한다면 이유는 딱 하나다. 그만큼 세상이 살기 좋아진 것인데 이 또한 행복한
일”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서울 연신내역 인근에 위치한 최 목사의 따뜻한 밥상(1호점)에서 손님들이 식사를 하고 있다. 서울 연신내역 인근에 위치한 최 목사의 따뜻한 밥상(1호점)에서 손님들이 식사를 하고 있다.
따밥은 장사가 아닌 ‘목회’ 최 목사의 하루는 분주하다. 식당 문을 여닫는 오전 9시부터 저녁 8시까지 쉴 틈이 없다. 자연스레 교회 강대상에선 미처 다 느낄 수 없었던 성도들의 고단한 삶을 온몸으로 체감했다.
“평일에
열심히 노동하니 일요일 아침엔 피곤해서 일어나기가 힘들더라고요. 그러면서 주일에 성도들이 얼마나 지극한 정성으로 교회에
나오는지를 깨달았죠. 동시에 힘겹게 예배에 나온 교인들을 조금 늦었다고 책망하진 않았는지 스스로를 돌아보고 회개했습니다.
목회자들은 영적 갈급함을 갖고 교회에 출석한 성도들을 고맙게 여기고 진심을 다해 설교해야 합니다.”
현재 따밥 문을
두드리는 손님은 하루 약 50명~80명으로 1인가구 청년부터 청소년, 어르신까지 다양하다. 그런데 “매시간 홀 좌석이 70%만
차게 해달라”는 최 목사의 기도제목이 독특하다. 이는 따밥의 존재 목적이 분명함을 방증한다.
“어떤 유튜버가 우리
식당을 찍어 올렸는지 한 3일간 전국 각지에서 손님이 몰려든 적이 있었어요. 처음에는 저도 장사가 잘 되니 기뻤죠. 그러던 하루는
우리 따밥의 ‘찐 단골’인 어르신이 예전에 나눠드린 공짜 쿠폰을 갖고 오셨더라고요. 그래서 하나 딱 남은 자리로 안내해 드렸더니
그냥 가시는 거예요. 얻어먹는 밥인데 괜히 자리 차지하는 게 미안하시다며….”
당시 최 목사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건 아니다 싶었죠. 따밥이 문전성시를 이뤄도 정작 소외된 이웃이 들어올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겠어요. 그때부터 기도해온 게
‘손님이 적당히 오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방송사들로부터 몇 번 따밥을 소개하고 싶다고 연락도 받았지만 다 거절했어요. 따밥은
너무 유명해져도 안 돼요. 우리는 영리를 추구하는 게 아니니까요.”
최 목사의 배려는 이 밖에도 식당 곳곳에
묻어나있다. 대표적인 게 500원만 내면 라면과 계란프라이·어묵·햄 등을 추가할 수 있는 ‘혼자사리’다. 대개 식당들의 사리
추가가 1,000원부터인데 이조차도 반으로 쪼갠 것이다. 500원 만큼의 짐이라도 더 덜어주고픈 바람에서다.
물론 최 목사도 고충이 없는 건 아니다. 특히 무한리필로 제공되는 밥과 반찬을 지나치게 이용하는 손님을 볼 때면 그야말로 수련이 따로 없다.
“구제가
말은 쉽지 실천이 힘들어요. 예를 들면 가끔 밥을 탐욕스럽게 산처럼 쌓아서 갖다 드시는 분이 있어요. 반찬도 몇 번이고 추가해서
담고. 그러면 저도 사람인지라 ‘왜 이렇게 많이 먹지?’라고 잠시 불평하다가도 다시 초심을 다잡죠. 반대로 고마워하는
사람들에게는 조금이라도 더 퍼주려는 제 모습을 보면서 저부터 날마다 깨지고 다듬어지는 훈련을 받습니다.”
지나온 모든 순간이 은혜라는 최 목사는 오랜 시간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 감동적인 손님도 많다고 전했다.
“일주일에
세 번은 오던 청년이었죠. 매번 후드티만 입던 친구가 하루는 말끔한 정장 차림이길래 내심 의아했어요. 그런데 계산할 때 그
청년이 대뜸 ‘감사하다’며 ‘취업을 준비하면서 따밥에서 큰 위로와 용기를 얻었다. 덕분에 취직에 성공했다’고 꾸벅 인사를
하더라고요. 그 순간 얼마나 기쁘던지요. 따뜻한 밥상이 누군가의 인생에 격려가 된다는 게 참 놀랍습니다.”
최근에는 따밥에 감격한 한 청년이 100만원과 함께 4,000원짜리 쿠폰 25개를 최 목사의 손에 쥐어주었다. 소중한 후원금 덕분에 25명의 새로운 손님들이 따밥으로 초대될 예정이다.
“매일
아침 ‘오늘은 누구를 먹일까?’란 생각으로 출근하는 것도 즐겁지만, 따밥은 하나님께서도 무척 기뻐하시는 사역임을 믿습니다. 제가
개업한 이래로 지난 4년간 단 하루도 아파서 가게 문을 닫아 본 적이 없거든요. 코로나19는 고사하고 몸살 한 번 걸린 적
없었는데 마치 하나님이 제게 ‘너는 이 자리를 지키라’고 말씀하시는 겉 같았습니다.”
한편, 따밥은 현재 최 목사가
운영하는 1호점을 필두로 서울 각지와 창원, 시흥 등지에 7호점까지 체인을 내는 열매를 맺었다. 눈여겨볼 대목은 2~7호점 주인이
모두 목회자들이란 점. 경제적으로 여유치 않은 이웃을 돕는데 동역하기로 뜻을 모은 사람들이다.
최 목사는 이들에게
레시피와 운영 노하우를 전수해준 건 물론 정착 지원금을 내어주며 물심양면으로 응원했다. 그리고 두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는
목회자·전도사·선교사 등 사역자들만 따밥을 차릴 수 있다는 것. 둘째는 김치찌개 가격을 올리지 말 것이다.
최 목사는
“호기심이나 이익을 목표로 따밥을 열겠다는 사람들에게는 절대 허락하지 않는다. 따밥은 평범한 식당을 너머 사복음서의 말씀을
증거할 사역지이기 때문”이라며 “2~7호점 목회자분들 역시 나름의 색깔을 갖고 따밥을 운영하고 있다. 주위의 걱정과 반대를
무릅쓰고 소신껏 펼친 따밥 사역에 동참해준 이들에게 고맙다”고 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무리 계산기를
두드려봐도 따밥의 수지타산이 안 맞는 거예요. 그래서 높아진 물가에 비례해 김치찌개 값도 올리라고 말하지만 저는 앞으로 한 10년
정도는 그럴 계획이 추호도 없습니다. 물가가 오른다고 서민들의 생활수준이 나아지나요? 오히려 더 힘들어져요. 이들을 위해 생겨난
따밥은 장사가 아니라 ‘목회’입니다.” 따밥에서는 밥과 반찬이 무한리필이다.
출처 : 아이굿뉴스(http://www.igoodnews.net)
김치찌개로 '복음' 전하는 목사 "꼭 교회일 필요는 없잖아요"
3000원 김치찌개집 '따뜻한 밥상' 최운형 목사
잘나가던 미국 담임목사 그만두고 한국서 개업
"한 몸 되라는 성경 실천…나누는 삶 더 행복"
"밥이 무한 리필이라 그런지 밥을 무지하게 많이 드십니다. 이제 밥 굶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처럼 보여도, 여전히 끼니 걱정을 하는 분들이 많다는 걸 느낍니다."
메뉴는 김치찌개 하나. 1인분에 3000원. 밥은 무료에 무한리필. 각각 500원만 추가하면 계란 프라이, 어묵, 김까지 든든하게 먹을 수 있는 곳. 최운형(52) 목사가 운영하는 '따뜻한 밥상'(구 청년밥상 문간)이다.
▲ '따뜻한밥상'을 운영하는 최운형 목사가 17일 오후 서울 은평구 소재 가게에서 < UPI뉴스 >와 인터뷰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17일 서울 은평구 연서시장 인근 '따뜻한 밥상'을 찾았다. '사장님' 최운형 목사는 앞치마를 두른 모습으로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최 목사가 따뜻한 밥상을 차리기 시작한 지 만 2년이 다 됐다.
최
목사는 2018년 미국에서 안정된 담임목사직을 내려놓고 귀국해 식당을 열었다. 그는 2004년 미국 LA 나성영락교회에서
부목사로 지내다 2010년 세계선교교회 담임 목사가 됐다. 교인 300여 중견 교회에서의 안정적 목회 생활이었다.
그러나 어느날 문득 회의가 느껴졌다. 가난한 사람들, 불평등을 겪는 사람들을 찾아가 위로하고 친구가 되라는 성경의 핵심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가.
"좀
더 현장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곳이 꼭 교회일 필요는 없잖아요. 전부터 밥집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손님을 맞이하고 밥을 차려 드리고, 배웅도 해드리고, 그런 현장 사역을 꿈꿨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돈도 없고 실력도 없어서
엄두가 안 났습니다."
목회의 진로를 고민하던 그때 소셜미디어에서 한국의 이문수 신부가 운영하는 '청년식당 문간'
소개 기사를 봤다. 이 신부가 고시원에서 한 젊은이가 굶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서울 성북구에 3000원짜리 김치찌개 식당을
차렸다는 내용이었다. 최 목사는 미국에서 '바로'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날아왔다. 이 신부를 만나 2호점을 열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이 신부의 허락을 받았다. 2018년 8월 세계선교교회를 공식 사임하고, 10월 '청년밥상 문간'을 개업했다.
자리
잡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목사직 사임부터 교인들의 반대에 부닥쳤다. 자금도 부족했고, 음식점 운영에 관한 경험도 없었다.
김치찌개를 맛있게 만드는 데 시간이 걸렸다. 최 목사는 '2년만 버티자'고 마음먹었다. 6개월이 지나자 비록 몇만 원이었지만
흑자가 났다.
한 번 온 손님들이 잊지 않고 꾸준히 가게를 찾았다. 최 목사는 "손님의 70% 이상이 한 번 오셨던
분들"이라고 했다. 그는 "저녁때 가끔 오시는 한 여성 손님은 '이 집이 없어질까 봐 불안하다'고까지 하신다. 걱정하지 말고
열심히나 오시라고 했다"라며 웃었다. 예전에 한국에 있을 때 인연을 맺었던 교우들이 자원봉사로 도와주고 있어 지금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고 했다.
보다 많은 이들이 들르게 하려고 상호도 '따뜻한 밥상'으로 바꿨다. 최 목사는 "처음에
'청년밥상 문간'일 때는 아무래도 나이 드신 분들이 청년을 위한 곳인 줄 알고 쉽게 못 오시는 게 있었다. 그런데 '따뜻한
밥상'으로 바꾸자 훨씬 연령층이 다양해졌다"고 한다.
얼마전 경남 창원에 2호점까지 생겼다. 최 목사는 "작년에 경남
창원 목사님들이 가게를 하고 싶다고 하셨다. 돈을 후원하고 요리법을 알려드렸다. 그렇게 지지난주에 새로 문을 열었다. 똑같은
로고와 콘셉트"라고 말했다. 내년 봄쯤 3호점도 생길 전망이다. "최근 목회자들에게 식당과 관련한 연락을 많이 받는다"고
했다. 최 목사는 "기왕에 시작했고, 이런 공간이 유익하다고 판단되는 만큼, 한 5호점까지 생겼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비쳤다.
▲ 따뜻한 밥상을 운영하고 있는 최운형 목사가 17일 오후 서울 은평구 소재 가게에서 김치찌개를 만들고 있다. [문재원 기자]
최 목사는 "동네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에 자부심도 느끼고, 자주 찾아오던 청년이 다른 지역에 취직했다며 마지막으로 와 인사를 하고 갈 때는 마음이 따뜻해진다"고 했다.
최 목사의 소망은 '같이 잘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목회할
때 가장 마음이 아팠던 게 기독교가 '우리가 한 몸'이라고 하는 성경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었어요. 그렇게 한 몸임을
강조하면서도 고통을 함께하지 않아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런 식당을 하는 것은 그런 그런 성경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죠. 목사가 꼭
교회 강단에 서야만 복음을 전하는 건 아니죠."
최 목사는 이웃과 함께하기 위한 계획도 갖고 있다. "제대로 된 밥을 못 먹고 끼니를 거르는 아이들을 초대해서 법을 먹이는 것"이다. "코로나19 탓에 못하고 있는데, 상황이 좀 나아지면 바로 초대할 생각"이다.
이런
식당을 운영하는 걸로 생계가 가능할까. "적은 금액이지만 제 월급 정도는 나와 생활이 가능합니다. 미국 식구들은 같이 안 오는
조건으로 따로 생계를 해결하고 있고. 지난 2년간 반지하 월세 살다가 지난주에 지상으로 이사했어요."
코로나19발 불황 시대에 적자 안보는 게 어디인가. 그래도 남는 건 별로 없을 듯하다. 최 목사는 "모두가 힘든 시기라서 찌개에 고기를 더 많이 넣어드린다"며 웃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사람을 여호와께 드리기로 서원하였으면 너는 그 값을 정할찌니. Speak to the Israelites and say to them: 'If anyone
makes a special vow to dedicate persons to the LORD by giving equivalent
values.
서원(5088) 네데르(neder) נֶדֶר
1. 맹세, 2. 서원한 것
발음
/ 네데르 [ neder ] 어원 / 어미활용 נִדְרִי, 복수형 נִדְרֵי ,נְדָרִים,5087서 유래 관련 성경 / 서원(창 28:20, 민 30:2, 잠 20:25, 레 7:16, 민 15:3, 시 116:18), 서원제(레 22:18, 민 29:39, 신 12:6), 서원물(신 12:11, 26) 구약 성경 / 60회 사용
27:1-8. 인신서원의 환산, 즉 인신으로써 한 서원의 환산.
27:9-13. 생축서원의 환산, 즉 생축에 의한 서원.
27:14-15. 가옥서원의 환산, 즉 가옥에 의한 서원의 환산.
27:16-25. 토지서원의 환산, 즉 전답에 의한 서원의 환산.
27:26-29. 헌물 정가에 관한 부언(26-27 첫 새끼의 환산, 28-29 영구 봉헌물).
27:30-33. 십일조의 규정(소산물과 과실 및 소와 양의 십분의 일에 대하여).
27:34- 결어.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치는 십일조에 관한 규례가 나타난다. 모든 소산의 십분 일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바쳐야 했던 것이다. 원래 십일조는 이스라엘만의 독특한 규례가 아니라 당시 고대 근동 사회에서 널리 시행되던 제도였다. 그러나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수탈하는 데 활용하던 고대 근동의 제도와 달리 이스라엘의 십일조는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에 대한 자발적인 헌금의
성격을 띠고 있다. 성경에서는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전리품의 십일조를 바친 것이 처음으로 등장하며,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께
십일조를 약속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성문화된 것은 본장에 나타난 모세의 율법을 통해서이다. 신약에서는 십일조에 관한 예수님의
구체적인 언급이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초대교회에서 교회의 운영과 지도자의 생계를 위해 십일조를 강조한 전통에 의해 현대에서도
십일조는 성도들의 당연한 의무로 여겨지고 있다.
레위기 27장은 "서원에 대한 규정"을 강조합니다. 서원(誓願)을 히브리어로 "네데르(neder. נֶדֶר)" 라고 합니다. '네데르'란 "맹세" 또는 "약속한 것"을 의미합니다. 더구나 서원은 의무가 아니라 주로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나 간구에 대한 응답을
믿음으로 자발적으로 약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원을 하면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서원의 목록에는 "사람, 생축, 집, 땅(부동산)"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그들의 소유를 모두 팔아 바치겠다고 서원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밭을 팔아 돈을 받은 후에 순간적으로 유혹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모든 것을 바친다고 한 것 때문에 부부가 동시에 죽고 말았습니다.
1. 서원 예물로 사람을 드리는 경우(27:1-2)
사람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할 경우에는 직접 드릴 수 없으므로 성별과 나이에 따라 돈으로 환산하여 드리게 했습니다. 그 때 성소에
드린 돈을 속전(贖錢)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속전은 20~60세 되는 남자는 은 50세겔 여자는 은 30세겔이고, 5~20세되는
남자는 은 20세겔 여자는 은 10세겔이고, 60세 이상되는 남자는 15세겔 여자는 10세겔이고, 1개월~5세 되는 남자는 은
5세겔 여자는 은 3세겔입니다.
2. 짐승으로 서원하는 법 (9-13절)
생축을
드리기로 서원했으면 다른 생축으로 바꾸어 드릴 수 없습니다. 만일 더 좋은 다른 짐승으로 드리려 할 때는 전에 드리기로 한
짐승은 드려진 채로 두고 새로 드리려 하는 짐승을 또 드려야 합니다. 3. 가옥으로 서원하는 법 (14-15절)
자기
집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한 경우에는 짐승과 마찬가지로 제사장이 그 집의 우열을 따라 값을 정하고 그 정가를 속전으로 드려야
합니다. 만일 자기가 그 집에서 계속 살려고 하면 배상금조로 정가에 5분의 1을 더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그 집이 자기 소유가
되었습니다 (14-15절).
4. 토지로 서원하는 법 (16-25절)
토지를
드릴 경우에도 두락수(斗落數)대로 속전으로 드립니다. 보리 한 호멜지기에 은 50세겔로 계산하여 드립니다. 호멜(Homer)은
고체의 측정 단위로서 한 호멜은 230ℓ 정도 됩니다. 한 호멜지기는 230ℓ 정도의 씨앗을 뿌릴 수 있는 면적을 말합니다. 5. 처음 난 생축에 대한 규정 (26-27절).
생축의
첫새끼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것을 자기 것으로 삼거나 팔아서도 안되지만 서원 예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26절).
6. 헌물(獻物)에 대한 규정 (28-29절).
여호와께
아주 바쳐진 것은 그것이 사람이든 생축이든 가옥이든 토지이든 물건이든 서원 예물도 드릴 수 없습니다. 속전으로 대신 드릴 수도
없습니다. 사람과 생축은 죽여야 하고 성읍과 가옥과 물건은 파괴해야 하고 토지는 황무하게 내버려 두어야 합니다.
7. 십일조에 대한 규정 (30-34절).
땅의
10분의 1은 서원 예물로 드릴 수 없습니다. 땅의 10분의 1 은 토지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토지에서 나는 모든 소출의
십일조를 말합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몫으로 성소에 드려야 할 성물로 구별한 것이기 때문에 서원 예물로 드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서원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시고 아직도 그 서원에 대해서 책임과 의무를 감당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속히 정리한 후에 마음을 편하게 다스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읽어야 할 말씀 사무엘상 10-12장 누가복음 9:37-62
레위기 27장은 레위기 전체에서 상당히 애매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실 레위기는 26장으로 끝나야 가장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모세가 이 레위기를 다 기록한 이후에 다시금 추가적인 규례를 넣어야 하는 상황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중간에 넣을 수 없어서 제일 뒤에 부록형식으로 첨부한 것이죠.
그러면 오늘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서원
무르기 규례”입니다(2, 9절). 서원이란 “하나님께 대한 약속 또는 맹세”를 의미합니다. 즉 어떤 긴급한 상황이 있을 때, “이
어려움을 해결해주시면 제가 ~를 드리겠습니다.” 하고 하나님께 약속하는 것이 서원입니다. 아니면 어떤 문제가 발생했다기보다는
단순히 신앙과 헌신의 표현으로 서원할 수도 있습니다(시 132:2-5). 어떤 경우든 서원이라고 하는 것은 자원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헌신해 드릴 수 있습니까? 레위기 27장은 그 목록으로 사람, 생축, 집, 땅을 드릴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1. 서원 예물로 사람을 드리는 경우(27:1-2) 2. 서원 예물로 생축을 드리는 경우 먼저 사람을 드리는 것과 관련한 규례를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의 1절과 2절을 보십시오.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사람을 여호와께 드리기로 서원하였으면 너는 그 값을 정할지니
하나님은
누군가가 사람을 여호와께 드리기로 서원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드릴 수도 있고, 자기 자식을 드릴 수도 있습니다.
사람을 바친다는 말은 몰렉에게 제사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사람을 제물로 드린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사람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은 두 가지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는 한나가 사무엘을 나실인으로 바쳐서 그로 제사장 직무를
행하도록 한 것처럼 하나님께 자신의 노동력을 헌신해 드리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돈을 드려서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무를 드리는 것하고, 나무의 열매를 드리는 것하고 비교할 수가 있습니다. 방식은 다르지만 결국 똑같은 헌신인 것입니다.
돈을
드려 헌신하는 방식이 레위인들을 하나님께 바치는 행위에서 잘 나타났습니다. 출애굽할 때 어린양의 피로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가
구속함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와 생축의 첫 새끼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하나님께서 장자들
대신에 레위인들을 받으셔서 레위인들로 하여금 성막과 제사의 일을 섬기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레위인들이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들보다 수가 적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자란 만큼, 한 사람당 오 세겔씩 내도록 하여 헌신하도록 하셨습니다(민
3:44-51). 즉 하나님께서는 돈으로 드리는 것을 레위인으로 대속하여 헌신해드리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민수기 말씀을 보면 그 돈을 일컬어서 ‘속전’이라고 표현합니다.
“모세가 레위인으로 대속한 이외의 사람에게서 속전을 받았으니”(민 3:49)
속전이라는
단어는 돈을 주어 그 사람을 노예 됨에서 해방시켜주는 무르기 규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오늘 레위기
본문에서 사람을 바칠 때 돈을 대신하여 드리는 것은 일종의 무르기로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는 행위인 것입니다. 곧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후 속전을 지불하여 무름으로써 다시 자기 생업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돈을 속전으로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가 헌신했다고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물질적인 헌신이 나실인의 경우만큼이나 성소를 섬겨
가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소가 잘 돌아가기 위해서는 노동력보다는 사실상 돈이 더 많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노동력은 이미 헌신된 레위인들로도 거의 충분합니다. 그러나 돈은 늘 부족하죠.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드릴 때 무르는 방식으로
헌신을 하도록 하셔서 돈을 드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오늘 레위기 27장 전체가 바로 이러한 무르기를 통한 헌신에 포인트가
있습니다. 서원할 때 제사장이 값을 정하는 것도 다 이 무르기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사람을 드릴 때,
제사장이 어떻게 가격을 정합니까? 사람의 경우는 제사장 마음대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정해주셨습니다(레
27:3-7).
본문의 내용을 보면 대체적으로 남자가 여자보다 1.5배 또는 2배 비싸고, 연령대에 따라서는 한창 일할 수 있는
20-60세 연령대가 가장 비싸고, 연소하고나 연로할 경우에는 가격이 낮아집니다. 그래서 20-60세 사이의 남성이 가장 비싸며,
그 값이 무려 50세겔이나 됩니다. 1세겔이 노동자 한 달 월급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측되는데, 50세겔이면 오늘날의 1억 정도
됩니다. 일반평민이 1억 정도 벌려면 평생 뼈 빠지게 일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50세겔을 드린다는 것은 사실상 자신의 인생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남자가 왜 여자보다 값이 비싼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역할
면에서 남자가 여자보다 더 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동일한 하나님의 형상이지만,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과학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서는 노동력과 군사력을 제공할 수 있는 남자가 훨씬 가치 있게 여겨졌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 가격은 아마도 그 당시 노예 시세를 반영하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런데 8절에 보면 가난한 자들을 위한 예외규정이 주어집니다. 8. 그러나 서원자가 가난하여 너의 정가를 감당치 못하겠으면 그를 제사장의 앞으로 데리고 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값을 정하되 그 서원자의 형세대로 값을 정할지니라
다른
서원 예물의 경우는 예외규정이 없는데, 사람을 바칠 때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예외규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서원 예물은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그냥 드리면 되는 것이지만, 사람을 드리는 것은 생돈 수 천 만원을 새로 마련해서 드려야 하는
것이므로, 만일 가난할 경우에는 그것을 도무지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런 예외규정을 두지 않으셨다면,
가난한 자들은 도무지 자신을 헌신해드리는 서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로우시게도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도 서원할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2. 서원 예물로 생축을 드리는 경우
9. 사람이
예물로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 생축이면 서원물로 여호와께 드릴 때는 다 거룩하니 10. 그것을 변개하여 우열간 바꾸지 못할 것이요 혹
생축으로 생축을 바꾸면 둘 다 거룩할 것이며 11. 부정하여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지 못할 생축이면 그 생축을 제사장 앞으로 끌어 갈
것이요 12. 제사장은 그 우열간에 정가할지니 그 값이 제사장의 정한 대로 될 것이며 13. 그가 그것을 무르려면 정가에 그 오분
일을 더할지니라
생축을 드리기로 서원할 때는 그냥 “양 한 마리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지정하여
서원합니다. 예를 들면 “다음 달에 태어나는 양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라고 서원하는 것이죠. 그러면 그 약속을 함과 동시에
다음 달에 태어난 양은 이미 하나님의 것으로서 거룩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기한이 되어 서원을 갚을 때 그것을 변개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간사해서 긴급한 상황에서는 아낌없이 드리겠다고 서원하지만, 나중에 실제로 드릴 때는
아까운 마음이 들어서 좀 값이 덜나가는 양으로 바꾸어 드리고 싶은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할 경우 더
손해가 있게끔 하셨습니다. 원래 드려야 할 것과 바꾼 것 두 마리 다 드리도록 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약속했으면 꼼수부리거나
잔머리 굴리지 말고 그 약속을 철두철미하게 지켜야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정한 짐승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제사장이 값을 정해서 알려줍니다. 그러나 부정한 짐승은 제물로 쓰일 수 없기 때문에 제사장이 그것을 가지고 있다가 다른 사람에게
팔아야 할 것입니다. 만일 정한짐승이든 부정한 짐승이든 서원을 무르고 그 생축을 다시 집으로 데려오고자 한다면, 정해진 값의
1/5을 추가하여 드려야 합니다. 1/5은 우리가 속건제 할 때 배웠듯이 배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서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되고, 서원을 했으면 반드시 지켜야 하고, 어기면 그에 대한 배상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서 서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레위기 27장이 서원 무르는 것을 무조건 나쁜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무르기를 하라고 요구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사람을 드리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될
것이고, 특별히 부정한 짐승을 드리는 경우도 여기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정한 짐승을 드릴 때는 서원자가 정가의 120%를
내고 무르는 것이 더욱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입니다(27절 참조). 그래서 성급하게 서원했다가 자신의 욕심 때문에 약속을 취소하는
나쁜 무르기가 있는가 하면, 그 헌물을 성막이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무르기 하여 돈으로 드리는 좋은 무르기가 있는 것입니다.
둘 다 무르는 것이기 때문에 120%를 내야 하지만, 그 동기에 따라서 성격이 많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3. 서원 예물로 부동산을 드릴 경우 14. 사람이
자기 집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면 제사장이 그 우열간에 정가할지니 그 값이 제사장의 정한 대로 될 것이며 15. 그 사람이
자기 집을 무르려면 정가한 돈에 그 오분 일을 더할지니 그리하면 자기 소유가 되리라 16. 사람이 자기 기업된 밭 얼마를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면 두락수대로 정가하되 보리 한 호멜지기에는 은 오십 세겔로 계산할지며17. 그가 그 밭을 희년부터 구별하여
드렸으면 그 값을 네가 정한 대로 할 것이요 18. 그 밭을 희년 후에 구별하여 드렸으면 제사장이 다음 희년까지 남은 연수를 따라 그
값을 계산하고 정가에서 그 값에 상당하게 감할 것이며 19. 밭을 구별하여 드린 자가 그것을 무르려면 정가한 돈에 그 오분일을
더할지니 그리하면 그것이 자기 소유가 될 것이요
집이나 밭을 헌신해드릴 경우도 제사장이 먼저 값을 정해야 합니다. 집은
제사장이 보고 적절한 가격을 매기면 되지만, 땅은 파종하는데 필요한 씨앗의 양으로 그 가격을 정합니다. 보리 한 호멜로 파종할 수
있는 구역의 경우는 희년까지 50세겔로 정해집니다. 희년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면 가격이 많이 싸질 것이고, 희년 다음해에
드렸다면 50세겔 그대로가 될 것입니다. 희년을 기준으로 값을 매기는 이유는 희년까지만 무르기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희년이
되어서도 무르지 않을 경우 그 밭은 영영히 제사장의 기업이 됩니다.
20. 그가 그 밭을 무르지 아니하려거나 타인에게 팔았으면 다시는 무르지 못하고 21. 희년이 되어서 그 밭이 돌아오게 될 때에는 여호와께 바친 성물이 되어 영영히 드린 땅과 같이 제사장의 기업이 될 것이며
그래서
이 규례는 서원자로 하여금 희년 전까지 이 밭을 무르도록 강력히 권장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정말 하나님께 자신의 땅을
온전히 헌정해드리기를 원하는 사람은 희년에도 무르지 않겠지만,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120%의 속전을 지불하여 희년에 무르기
해서 하나님께 헌신해드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헌신해드린 후에 (헌신해드렸더라도 밭의 관리와 경작은 서원자 본인이
해야 합니다.) 잔머리를 굴려서 손해 보지 않겠다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버리는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아주
나쁜 것으로서 무를 수 있는 권리마저 박탈당하는 벌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자신에게 손해가 없도록 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밭을
드리면 어떻습니까? 만일 헌신해드린 밭이 자기 밭이 아닐 경우는 희년이 되면 서원자가 무조건 그 정가를 주고 무르기 해야 하며,
무르기 한 후에 그 밭은 원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22-24절을 보시면...
22. 사람에게 샀고 자기 기업이 아닌
밭을 여호와께 구별하여 드렸으면 23. 너는 정가하고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희년까지 계산하고 그는 너의 정가한 돈을 그 날에
여호와께 드려 성물을 삼을지며 24. 그 밭은 희년에 판 사람 곧 그 기업의 본주에게로 돌아 갈지니라
결국 핵심은
헌신해드리기로 서원했으면, 정말 서원대로 드리든, 정해진 가격의 120%를 지불하여 무르든, 아니면 어떤 방식으로든 그 서원을
갚아야만 하고, 또 갚을 수밖에 없도록 하나님이 규정하신 것입니다. 서원하면 헌신하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손해를 덜 보겠다고
꼼수를 부릴수록 더 많은 손해를 봐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 것이 억지로라도 헌신을 받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하며,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는 신앙의 표이기 때문에, 그러한 경외함을 배우도록 하시기
위해서 이렇게라도 헌신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께 대한 신의를 지켜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벌금이 무서워서 헌신할 것이 아니라,
환난 날에 응답하신 그 은혜를 깊이 깨닫고 기억하면서 감사와 자원함으로 헌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4. 서원 예물이 될 수 없는 목록 - 생축의 첫 새끼, 십일조
26절부터는 서원 예물로 드릴 수 없는 목록을 언급합니다.
26. 오직
생축의 첫새끼는 여호와께 돌릴 첫새끼라 우 양을 물론하고 여호와의 것이니 누구든지 그것으로는 구별하여 드리지 못할
것이며 27. 부정한 짐승이면 너의 정가에 그 오분 일을 더하여 속할 것이요 만일 속하지 아니하거든 너의 정가대로 팔지니라 ...
30.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 31. 사람이 그 십분 일을
속하려면 그것에 그 오분 일을 더할 것이요 32. 소나 양의 십분 일은 막대기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째마다 여호와의 거룩한 것이
되리니 33. 그 우열을 교계하거나 바꾸거나 하지 말라 바꾸면 둘 다 거룩하리니 속하지 못하리라
26절부터 언급되는 생축의 첫
새끼나 십일조 같은 것들은 워낙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서원 예물로 드릴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의무적으로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원해서 서원하여 드렸든, 십일조와 같이 의무적으로 드려야 하는 것이든 상관없이 그 헌물이 하나님께 바쳐졌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것으로서 거룩한 것입니다. 그리고 서원 예물과 동일하게 생축의 첫 새끼와 십일조의 경우도 그 정가의 120%를 드려서
다시 무를 수가 있습니다(본문의 ‘속하다’는 단어가 ‘무르다[가알]’라는 단어임). 특히 부정한 생축의 첫 새끼는 서원예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무를 것을 권장합니다. 그러나 서원자가 무르기를 원치 않으면, 제사장이 자신이 정한 가격으로 다른 사람에게
팔아야 합니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특별히 십일조를 드릴 때, 서원 예물 드릴 때와 마찬가지로 잔머리를 굴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소나 양의 십일조를 드릴 때 보다 값이 떨어지는 것으로 드리고 싶은 것이 인간의 죄악된 본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예 소나 양의 십일조 드리는 방법을 정해주셨습니다. 소나 양을 랜덤하게 일렬로 줄을 세워놓고 지나가게 하면서 열 번째로 지나가는
것을 (그것이 열등한 것이든 우등한 것이든 상관없이) 십일조로 드려야 합니다. 만일 우등한 것이 걸렸는데, 그것을 열등한 것으로
바꾸면 둘 다 바쳐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을 요약하면 서원은 반드시 지켜야 하고, 어기거나 잔머리를 굴리면 더 큰
손해를 보게 되며, 헌신해 드릴 때는 성소의 필요에 따라서 서원한 그대로 드릴 수도 있고, 또는 속전을 지불하여 무름으로써 헌신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5. 아주 바쳐진 것은 무를 수 없음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전체문맥의 흐름을 떠나서 전혀 다른 의미의 헌신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사실상 매우 놀라운 것이고, 또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28)오직 여호와께 아주 바친 그 물건은 사람이든지 생축이든지 기업의 밭이든지 팔지도 못하고 속하지도 못하나니 바친 것은 다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함이며(29)아주 바친 그 사람은 다시 속하지 못하나니 반드시 죽일지니라 28-29절은
아주 바쳐진 헌물을 이야기합니다. 원어로 ‘헤렘’이라는 단어인데 이미 21절에서 한번 사용되었습니다. 즉 밭을 헌신해드렸는데,
희년이 되어서도 무르지 않으면 영영히(헤렘) 바쳐진 땅이 되어 무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헌신해드리는 것이 다 똑같이 헌신해드리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등급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헌신해드릴 때 그냥 드릴 수도
있고, 아주! 드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아주 드리는 경우에는 다시 무를 수가 없습니다. 지극히 거룩한 것으로서
제사장의 소유가 되거나, 또는 성막에서 거룩한 용도로만 사용되어야 합니다. 만일 그것이 세속적인 용도로 사용될 때에는 반드시
폐기처분하든지 죽이든지 해야 합니다. 또는 본질적으로 거룩하게 될 수 없는 사물이나 생명체는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지는 그 즉시로
죽여야 합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께 부정한 인간을 아주 바친다는 것은 곧 그 인간의 소멸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불 가까이에 나무를 가져다놓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이 ‘헤렘’이라는 단어가 잘 보여줍니다. ‘헤렘’은 이중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봉헌’이라는 뜻도 있지만, ‘완전히 멸망시키다, 진멸하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 두 의미가 연결되어
있는데, 이 사실이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잘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성과 그 가운데 모든 물건은 여호와께 바치되 기생 라합과 무릇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살리라 이는 그가 우리의 보낸 사자를 숨겼음이니라”(수 6:17) 원어에
보면 ‘물건’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그냥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바치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물건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과
생축을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기생 라합만 살리는 표현을 보십시오). 그런데 이 구절에서 ‘바치다’라는 단어가 원어로 보면
‘헤렘’이라는 단어입니다. 표준새번역이 이것을 잘 번역했습니다. “이 성과 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전멸시켜서, 그것을 주께 제물로 바쳐라. 그러나 창녀 라합과 그 여인의 집에 있는 사람은 모두 살려 주어라. 그 여인은 우리가 보낸 정탐꾼들을 숨겨 주었다.”(수 6:17,표준새번역) 여리고
성의 모든 사람들과 생축, 모든 사물들을 하나님께 아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과 생축을 어떻게 하나님께 드립니까? 그들의
목을 따서 제물로 하나님께 바쳐드립니다. 한편 생명체가 아닌 보물들과 물건들은 여호와의 곳간에 구별하여 드려야 합니다. 이렇게
여리고에 있는 모든 것은 다 여호와께 아주 바쳐진 것으로서 지극히 거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절대로 건드리면 안 되는
것이고 절대로 무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열하게도 아간이 간사하게 그것을 숨겨서 탈취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임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앞에 서원 예물의 경우는 꼼수를 부리거나 속여서 취하거나 하면 벌금을 무는 것으로 끝이지만, 아주
바쳐진 것을 건드릴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진노하셔서 엄벌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사람을
하나님께 아주 바친다”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의 목을 따서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나안 족속들이 얼마나 큰 죄들을 지었습니까?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진멸하여 나에게 바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족속만 원수가 아니라 모든 인간이 다 죄인이므로 다 하나님의 원수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하나님께 아주 드린다는 것은 그
자체로는 좋은 의미인데, 문제는 우리가 다 죄인이기 때문에 그것이 곧 우리에게는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생들을 떠나 계시고, 이스라엘 성막 가운데 임재하셨어도 겹겹으로 싸서 텐트로 가려서 보지 못하도록 하신 이유가 우리로 죽임당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29)아주 바친 그 사람은 다시 속하지 못하나니 반드시 죽일지니라 그래서
이 말씀은 정말 자기 자신이나 자식을 죽여서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이 아니라, “정말 나에게 온전히 헌신하고 싶냐? 그러나 너희는
죄인이기 때문에 지극히 거룩한 나 하나님의 소유가 될 수가 없다. 안 그러면 너희가 죽어야 된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로운 것은 더러운 죄인이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질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론이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진 것에서 잘 나타나는 것입니다. 전적타락하고 부정한 인간에 불과한 아론이 어떻게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져서 지극히
거룩한 대제사장이 되었습니까? 아론이 하나님께 아주 바쳐지게 되면 그냥 거기서 죽어버려야 정상인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아론 대신에
수송아지를 대신 죽이심으로 아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의에 대하여는 산자로 여겨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은
모형과 예표이기 때문에 사실은 아론도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지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진짜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지는 일은 구약의
모든 모형의 실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참으로 신약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온전히
아주 드려진 자들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졌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우리 대신 하나님께
아주 드려지셔서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처형당해 죽으셨습니다. 자신의 목을 따서 하나님께 제물로 드림으로써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분을 모두 삭히시고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부활하셔서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우리를 이 2000년 전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속에 집어넣으셔서 우리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게 하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게 하셔서 우리로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의에 대하여는 하나님께 대하여 산자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지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요한계시록 말씀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계 5:9) 그래서
우리는 예수의 피 값으로 아주 하나님께 바쳐진 자들이기 때문에, 신약의 성도들은 서원할 레야 서원할 수가 없습니다. 죽을병에
걸려서, “하나님 살려주시면 제 인생을 하나님께 바쳐드리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과 흥정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럴 때는 서원할 것이 아니라, 그동안 하나님의 것인데 배은망덕하게 자기 마음대로 살았던 죄를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졌습니다. 그리고 한번 드려졌기 때문에 절대로 무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 속한 자는 영영히 하나님의 것이 되었고 그의 손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이 어떻습니까? 오늘날 우리가
아간이 했던 짓을 우리도 하고 있지는 않는지 우리는 심각하게 우리 자신에게 자문해보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적당히 신앙
생활하는 것, 잔머리 굴리면서 꼼수를 부리면서 적당히 헌신하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심각한 죄인지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 정신 나가면 “예수 믿기 전이 좋았지... 차라리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그런 마음까지도 품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를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38)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39)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 10:38-39) 우리 신앙의 자동차에는 후진기어가 없습니다. 오직 전진만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가 어떤 은혜인지,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께 드려졌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이고 축복인가 하는 것을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 나누는 삶의 행복과 기쁨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바울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로마서 12:1-2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정말 우리가 성령충만함을 받아 심령이 변화되어 새롭게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거룩한 산 제사로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해드릴 수 있기를 원합니다.
레위기 전체의 규례는 출애굽 2년 1월에 한달 동안 시내산에서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기록한 내용입니다. 이제 그 계시가 본 장으로 끝을 맺습니다. 26장이 레위기 전체의 결론에 해당된다면 27장은 레위기 전체의
부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27장은 서원에 대한 규례입니다. 1-8절은 사람으로 서원하는 법, 9-13절은 짐승으로 서원하는 법,
14-15절은 가옥으로 서원하는 법, 16-25절은 토지로 서원하는 법, 26-27절은 처음 난 생축에 대한 규정,
28-29절은 헌물(獻物)에 대한 규정, 30-34절은 십일조에 대한 규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원(나다르)은
헌신하다 다짐하다 맹세하다 의 뜻입니다. 서원은 사람이 하나님께 무엇을 하겠다고 자원하여 맹세하는 것을 말합니다. 서원의 내용은
사람일 수도 있고 가축일 수도 있고 가옥일 수도 있고 토지일 수도 있습니다. 무엇을 서원하든지 서원하는 자는 하나님과 교제를
통해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서원의 속전은 성전과 제사장 생활 유지에 사용됩니다.
1. 사람으로 서원하는 법 (1-8절)
사람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할 경우에는 직접 드릴 수 없으므로 성별과 나이에 따라 돈으로 환산하여 드리게 했습니다. 그 때 성소에
드린 돈을 속전(贖錢)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속전은 20~60세 되는 남자는 은 50세겔, 여자는 은 30세겔 5~20세되는
남자는 은 20세겔, 여자는 은 10세겔 60세 이상되는 남자는 15세겔, 여자는 10세겔 1개월~5세 되는 남자는 은
5세겔, 여자는 은 3세겔
규정된 값을 지불할 수 없는 극빈자는 제사장이 그 형편과 능력에 따라 정해준 대로 해야 합니다(2-8절). 그 속전의 차이는 인격의 차이가 아니고 노동력에 따라 정한 차이입니다. 세겔 (Shekel)은 금이나 은의 무게
단위인데 당시에 화폐의 단위로 사용되었습니다. 한 세겔은 11.4g입니다. 구약에서 은 30세겔은 노예 한사람 값이었습니다.
세겔은 왕궁에서 쓰는 세겔이 있고 성전에서 쓰는 세겔이 있고 일반인이 쓰는 세겔이 있었는데 각각 중수가 달랐습니다. 왕궁에서 쓰는
세겔은 일반인이 쓰는 세겔의 2배였고 성전에서 쓰는 세겔은 일반인이 쓰는 세겔에 5분의 1을 더한 무게입니다.
서원은
자기 능력과 형편에 맞추어서 해야 합니다. 체면이나 명예욕 때문에 분수에 지나치게 했다가 지키지 못하면 위선죄가 됩니다. 명예와
영괌심 때문에 과도하게 서원하면 오히려 범죄하기 쉽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범죄하게 됩니다(행 5:1-11). 반대로
능력이 충분한데도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해서도 안됩니다(고후 9:6-7). 하나님은 물질의 액수보다도 그 마음과 그 마음을 행위로
옮기는 믿음을 보십니다 (막 12:41: 44). 그러므로 서원은 경솔하게 하거나 억지로 하다가 지키지 못한다면 안됩니다. 진실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2. 짐승으로 서원하는 법 (9-13절)
생축을
드리기로 서원했으면 다른 생축으로 바꾸어 드릴 수 없습니다. 만일 더 좋은 다른 짐승으로 드리려 할 때는 전에 드리기로 한
짐승은 드려진 채로 두고 새로 드리려 하는 짐승을 또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드리려 하는 짐승이 나귀와 같이 부정하다고 규정된
짐승일 경우에는 하나님께 드려질 수 없으므로 제사장이 그 짐승에 해당하는 값을 매기고 서원자는 그 정가(定價)를 속전으로 드려야
합니다. 혹 서원자가 그 부정한 짐승을 다시 물려받아 집으로 가져갈 경우에는 그 짐승의 가치에 5분의 1을 더 드려야 합니다.
한번
서원한 것은 이미 하나님께 바쳐진 것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한번 서원한 것은 바꿀 수 없습니다. 서원은 자발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신23:21-23). 그런데 그것을 철회하거나 자기 손익에 의해 변경시킨다고 하면 하나님을 멸시하고 경홀히 여기는 죄가
됩니다. 시편15:4에는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 라고 했고, 전도서5:4에는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말라 하나님은 우매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라고 했습니다.
3. 가옥으로 서원하는 법 (14-15절)
자기
집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한 경우에는 짐승과 마찬가지로 제사장이 그 집의 우열을 따라 값을 정하고 그 정가를 속전으로 드려야
합니다. 만일 자기가 그 집에서 계속 살려고 하면 배상금조로 정가에 5분의 1을 더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그 집이 자기 소유가
되었습니다 (14-15절).
사람이든
생축이든 가옥이든 토지이든 그 값을 정하여 드리되 그것을 계속 자신이 소유권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 값의 5분의 1을 더 드려야
합니다 (13,15,19절). 그것은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충분히 보상해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서원하여
드린 것은 이미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업이 됩니다. 성소 유지와 제사장 생활에 사용됩니다. 곧 하나님의 것에는
손해가 가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4. 토지로 서원하는 법 (16-25절)
토지를
드릴 경우에도 두락수(斗落數)대로 속전으로 드립니다. 보리 한 호멜지기에 은 50세겔로 계산하여 드립니다. 호멜(Homer)은
고체의 측정 단위로서 한 호멜은 230ℓ 정도 됩니다. 한 호멜지기는 230ℓ 정도의 씨앗을 뿌릴 수 있는 면적을 말합니다.
50세겔은 한 호멜지기에서 50년 동안 얻을 수 있는 소출을 값으로 정한 것입니다. 그것은 한 호멜지기에 매년 한 세겔씩 드린다는
말이 됩니다. 그 토지를 무르려면 정가에 5분의 1을 더해서 드려야 합니다. 만일 그 토지를 무르지 않거나 다른 사람에게 팔게
되면 희년 때에 자기에게로 돌아오지 않고 성물이 되어 제사장 기업이 됩니다. 그리고 드리려 하는 토지가 자기 기업이 아닐 경우에는
매년 나누어 드리지 않고 일시불로 드립니다. 그 정가는 자기 기업일 경우와 같은 방법으로 하되 한 세겔을 20게라로 계산해야
합니다. 게라(Gerah)는 세겔의 20분의 1로서 약 0.57g에 해당합니다 (16-25절).
사람이나
짐승이나 가옥도 마찬가지이지만 토지에 대한 서원법을 보면 하나님께서 서원을 얼마나 신중히 다루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서원을 신중히 해야 합니다. 경솔히 하다가는 그것이 오히려 올무가 될 수 있습니다. 잠20:25 함부로 이 물건을 거룩하다
하여 서원하고 그 후에 살피면 그것이 그물이 되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서원을 하지 않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서원을 하고 지키지
않는 것은 죄가 됩니다 (민30:2). 그러므로 서원하고도 갚지 못하는 것은 서원하지 않은 것만 못합니다 (전5:5). 그러나
그것이 서원을 하지 말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진실한 서원을 들으시고 복을 주십니다. 시편61:5에 하나님이여 내 서원을
들으시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의 얻을 기업을 내게 주셨나이다 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감동을 소멸하지 말고 믿음으로
서원하되 믿음으로 한 서원은 손익을 생각지 말고 끝까지 믿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5. 처음 난 생축에 대한 규정 (26-27절).
생축의
첫새끼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것을 자기 것으로 삼거나 팔아서도 안되지만 서원 예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26절). 하나님께서 출애굽 사건과 관련하여 사람이든 짐승이든 처음 난 것은 유월절 밤에 죽을 데서 살려 주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13:3에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그래서 원래 하나님의 것을 다시 서원 예물로 드리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정하다고 규정된 짐승들이
있는데 그것도 서원 예물로 드릴 수 없습니다. 부정한 짐승은 나귀, 약대, 사반, 토끼, 돼지 등을 말합니다 (출13:13,
레11:3-8). 부정한 짐승을 드리기로 서원 한 경우에는 제사장이 정한 그 짐승의 정가의 속전을 드리든지 아니면 그 짐승을
정가대로 다른 사람에게 팔아서 그것으로 속전과 배상금(5분의1)을 드려야 합니다 (27절). 이 내용은 11-13절에서 언급된
내용입니다.
하나님께 당연히 드려져야 할
것으로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서원하거나 은혜받는 수단으로 서원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위선에 속을 수 있으나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속지 않습니다. 그것은 부정한 것을 드리는 것과 다를 것이
없어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6. 헌물(獻物)에 대한 규정 (28-29절).
여호와께
아주 바쳐진 것은 그것이 사람이든 생축이든 가옥이든 토지이든 물건이든 서원 예물도 드릴 수 없습니다. 속전으로 대신 드릴 수도
없습니다. 사람과 생축은 죽여야 하고 성읍과 가옥과 물건은 파괴해야 하고 토지는 황무하게 내버려 두어야 합니다.
여호와께
아주 바친 그 물건 은 하나님께 구별하여 예물로 드려진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멸망키로 정한 것들을 말합니다. 바친
그 물건 은 히브리어로 헤렘 인데 그 뜻은 저주를 받은 것 없애기 위해 바쳐진 것 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 아주 바쳐진
것이란 하나님께서 파멸하기로 결정한 대상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법에 의해 죽임 당할 자로 지목된 자들과 그 소유들을
말합니다. 이를테면 우상 숭배자나 신성 모독자들, 그리고 그들이 기르는 짐승이나 그들이 거하는 성읍이나 그들이 경작하는 토지나
그들이 사용하는 물건 등을 말합니다. 실례로 우상을 숭배했던 가나안 족속과 여리고성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물건들(수6:17,
7:1-5), 미스바로 모이라는 이스라엘 회중의 결의를 반대하고 모이지 않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삿21:9-10),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이스라엘의 진행을 방해했던 아말렉 족속들(삼상15:2-3)을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멸망을 선고하신 것으로 신앙적 헌신을 나타내려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 옳지 못한 것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사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마치 사울왕이 진멸하라고 한 짐승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겠다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하나님은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기름 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을 원하십니다 (미6:7, 삼상15:22-23).
7. 십일조에 대한 규정 (30-34절).
땅의
10분의 1은 서원 예물로 드릴 수 없습니다. 땅의 10분의 1 은 토지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토지에서 나는 모든 소출의
십일조를 말합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몫으로 성소에 드려야 할 성물로 구별한 것이기 때문에 서원 예물로 드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 소출들을 무를 수는 있었는데 그러려면 그 소출에 해당하는 정가를 속전으로 내고 그것에 배상금조의 5분의 1을
더해서 드려야 합니다 (30-31절). 한편 짐승을 십일조로 드릴 때는 모두 우리에 가두었다가 내어 보내면서 열번째에 걸리는
짐승을 드려야 하는데 그 걸리는 짐승의 우열을 교계(탐색)하거나 다른 것으로 바꾸어 치우면 두 마리 다 드려야 합니다. 그럴 경우
속전으로 대신할 수 없습니다 (32-34절).
소득의
십일조는 모든 소득의 대표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며 모든 소득이
하나님의 은혜로 얻어진 것임을 고백하는 것이며 앞으로도 은혜로 채워 주실 것을 바라보는 행위입니다(시 24:1, 대상 29:14,
창 2:16-17).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자에게는 은혜를 넘치도록 부어 주신다고 했습니다(고전 9:7-9, 말 3:8-12,
신 28:1-7). 그래서 십일조를 하는 것은 저축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전 11:1, 마 6:20). 그러므로 십일조는 즐거움으로
드려야 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드려야 합니다(스 1:4, 고후 9:7). 그것을 신앙을 가장한 위선으로 사용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십일조를 자기 의도대로 사용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표로, 그리고 하나님께 은혜를 입기 위해 서원을 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하나님께 서원을
하므로 직면했던 문제들이 해결되고 복을 받았던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삼상 2:20-21, 삿 11:30). 우리도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 앞에 바로 살아가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결단들이 감정이나 흥분이나
욕망이나 위선에 의해서가 아니라 진실한 신앙에 의해서 되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찌니 목상이나 주상을 세우지 말며 너희 땅에 조각한 석상을 세우고 그에게 경배하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 Do not make idols or set up an image or a sacred
stone for yourselves, and do not place a carved stone in your land to
bow down before it. I am the LORD your God.
1-2 우상과 안식일에 관한 경계.
3-13 하나님께 순종(복종)하는 자에게 약속된 축복.
14-39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에게 대한 형벌.
40-46 장래에 있어서의 백성의 회개와 하나님의 권고의 예언.
레위기 26장은 결론 부분으로 계명의 준수에 따른 축복과 저주를 말씀합니다. 그런데 축복과 저주는 동일한
형식에 따라 나타납니다. 땅의 축복과 원수로부터의 보호에 관한 것으로 이 두 가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 땅은 언약의 증표이며 생명의 근거
땅을 빼앗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실하고 생명의 근거를 박탈당하는
것이므로 더 이상 이스라엘 민족이 존재할 수 없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계명의 준수는 근본적으로 언약 공동체의 생존과 직결되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원수로부터의 보호하심
이스라엘은 소수 민족으로 주변의 가나안 원주민이나 강대국으로부터 끊임없는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원수들의 침략 역시 민족의 생존과 직결된 것이었으며, 하나님 외에는 방어 수단이 전무했습니다.
따라서 계명
준수는 민족의 생존과 직결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축복과 저주의 형식은 구속사 속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종말에
나타날 하나님 나라는 가나안 땅의 완성이며, 죄와 사망의 권세는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원수들의 침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의 표현인 계명 준수는 오늘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나타나고, 그 믿음은 종말의 구원과 영원한 축복을 결정하는
유일한 요소가 됩니다.
하나님은 계명 준수에 따른 축복과 저주를 명하시면서 죄로 인해 저주받은 경우에 회개를 통해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악하고 연약함을 미리 아셨기 때문입니다.
본장에서는 이처럼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고 참으시는 자비하신 여호와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편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회개의 길은 오늘날 죄에 빠진 성도들에게도 주시는 동일한
은혜이기도 합니다. 성도가 비록 지금 죄에 빠져 하나님의 심판 앞에 놓여 있을지라도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면
하나님은 사랑으로 용서하시고 다시 축복의 자리로 인도하실 것임을 교훈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죄를
짓지 않으려는 노력파 더불어 죄에 대한 회개를 망설이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
'우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엘릴'은 '아니다'(not, no, nor, never)란
뜻의 '알'에서 파생된 말 곧 '없음'(nothing), '공허함'(vanity), '아무 것도 아님'(thing of
nought)등의 뜻이다. 이것은 우상의 속성을 한마디로 잘 보여주는 말이다. 한편 한글 개역 성경에는 '우상'(偶像)으로,
그리고 영어 성경에는 'idol' 혹은 'graven image'로 한결같이 번역되어 있는 우상은 본래 히브리어 성경에는 다음
20가지 단어로 나타나는데, 그 모두가 우상의 헛된 속성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명칭 및 관련 성구 어근(어근)의 의미
1. 아웬(사 66:3) 존재하지 않음 : 아무것도
2. 엘릴(사 2:8) 아님, 텅빔, 헛됨, 덧없음
3. 헤벨(렘 10:8) : 쓸데없음, 무가치함
4. 세멜(대하 33:15) : 모양이 없음
히브리어로 우상을[아웬]이라고
발음을 하는데 그 뜻은 헛되고 공허한 것, 우상의 집, 거짓, 사기, 불법, 불법을 행하는 자들, 불행, 역경, 재난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어 [세멜]의 뜻은 조각된 우상, 초상을 의미합니다. 헬라어로[에이도스]라고 발음을 하는데 그 뜻은 우상을
의미합니다.
'엘릴(אֱלִיל)', 즉 '아무것도 없는 것', '헛된 것'이라는 뜻의 단어가 쓰였다. 이 외에도 '마세카(מַסֵּכָה, 부어 만든 것)', '페셀(פֶּסֶל, 새긴 것)', '테라핌(תְּרָפִים, 드라빔)' 등이 있다. 신약성경에는 '형상'이라는 뜻의 헬라어 '에이도스(εἶδος)'에서 파생된 '에이돌론(εἴδωλον)'이 우상, 거짓 신을 가리키는 단어로 기록됐으며, 이 단어가 영어 아이돌(Idol)의 어원이다.
우상의 종류와 우상을 섬긴 결과
출애굽기20:1-6절
오늘 본문을 이해하려면 모세가 하나님의 인도와 함께 하시는 은혜로 출애굽 하여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셔서 육지 같이 건너 광야를
거쳐 삼 개월 만에 시내 산에 도착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 앞에 장막을 치고 3일 후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오늘은 1, 2, 3계명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드리기 전에 우상의 종류와 우상을 섬긴 결과에 대해
전해드리겠습니다.
1.우상의 원어적인 의미
히브리어로 우상을[아웬]이라고 발음을 하는데 그 뜻은 헛되고 공허한 것, 우상의 집, 거짓, 사기, 불법, 불법을 행하는 자들,
불행, 역경, 재난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어 [세멜]의 뜻은 조각된 우상, 초상을 의미합니다. 헬라어로[에이도스]라고 발음을 하는데
그 뜻은 우상을 의미합니다. 헬라어로[에이돌로라테리아]는 우상숭배를 의미합니다.
2.우상의 종류와 명칭
몰렉(레18:21), 밀곰(왕상11:33), 몰록(행7:43), 바알(왕상18:40), 바알세붑(왕하1:16), 바알세불(마10:25), 아스다롯(삼상12:10), 아세라(출34:13), 벨(사46:1),
그모스(왕하23:13), 금송아지(출32:4-35), 므로닥(렘50:2), 느보(사46:1) 느후스단(왕하18:4), 일월성신(신4:19), 숙곳브놋(왕하17:30), 네르갈, 아시마(왕하17:30), 니스록(사37:38),
닙하스, 다르닥(왕하17:31), 림몬(왕하5:18), 아드람멜렉(왕하17:31),
이집트의 모든 우상들(출12:12), 기윤(암5:26), 쓰스, 허매(행14:12), 그리스의 알지 못하는 우상(행17:23),
아데미(행19:24), 다곤(삼상5:2-5), 짐승(계13:1-18) 마르둑 등 이상의 우상들은 다산, 풍년을 준다는 것입니다.
3.우상을 만드는 재료
금(출32:3), 은, 동, 철, 나무(신29:17), 돌(신4:28),
4.우상숭배의 대상이 된 것들
야곱의 외삼촌 라반의 집 우상 드라빔(창31:19), 금송아지(출32:4), 놋뱀(왕하18:4), 일월성신(왕하21:5),
천사(골2:18), 벽에 그린 우상들(겔8:10), 수염소(레17:7), 동물숭배(롬1:23), 에봇(삿8:27) ,
사람(행14:11), 우상조각상(민33:52), 배와 그물과 어망(합1:16), 바다, 재물(마6:24), 사탄, 마귀,
귀신(신32:17,시106:36, 고전10:20), 탐심(골3:5)
5.우상에게 바치는 제물과 제사방법
자녀를 우상에게 바쳤다(신12:31), 금송아지 앞에 번제와 화목제를 바치고 먹고 마시며 뛰놀았다(출32:6-25) 이스라엘
백성들이 싯딤에서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며 모압 여인들이 바알브올 우상에게 제사를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을 해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셨다(민25:1-3절) 향을 피웠다(렘1:16) 우상에게 기도를 했다(욘1:5) 찬양을 하였다(단5:4) 춤을
추었다(출32:18-19) 모든 악기를 동원해서 금신 상 앞에서 연주를 함(단3:5-7) 입을 맞춤(왕상19:18), 무릎을 꿇고
절함(왕상19:18) 북 이스라엘 왕이 유다와 같이 절기를 정하고 제사장을 아무나 세우고 벧엘에서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다(왕상12:32)
6.우상을 세운 곳
왕궁에, 산당에(레26:30) 은밀한 곳에(신27:15) 집에(창31:19)
7.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
우상의 형상을 만들거나 섬기지 말라(출20:4-5) 우상의 이름을 부르지 말고 우상을 없애라(출23:13-24)
8.우상을 섬기는 이유
마음이 우준하여(롬1:21-25) 우상숭배자들과 교제함으로(민25:1-3) 이방여인과 혼인함으로(왕상11:6) 사탄에게 이단에게 이교도에게 미혹이 되어.
9.우상을 섬기면 안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에(고후6:16)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우상을 섬긴 죄가 3-4대 이른다(출20:5) 하나님의 나라에 못 들어감(갈5:21) 저주를
받는다(신27:15) 하나님이 버리신다(왕상9:6-9) 올무가 된다(삿2:3) 사막이 된다(겔6:5-6) 바벨론 포로가
된다(행7:43)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망한 이유가 바로 우상숭배 한 결과다.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망한다(겔6:11)
유황불 못에 들어감(계21:8) 망한다(신30:17-18) 저주를 받음(신11:28) 심판을 받음(신32:15-26)
10.현대의 우상들
고사지내는 것, 우상 앞에 절하거나 신발을 벗거나 향을 피우거나 제물과 헌물을 바치면 안 된다.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으면 안
된다. 토정비결, 조각한 우상에게 절하거나 옷을 입히거나, 나무에 금줄을 치거나, 점치거나, 운세를 보거나, 띠 맞추기, 이사 날
자를 액이 꼈다고 피하거나, 굿을 하거나, 묘를 이장을 하면 자손들에게 해롭다거나, 조상을 섬기거나, 제사를 지내거나
바위나 나무에 빌거나, 돌하르방 코를 만지면 아들을 낳는다거나, 해, 달, 별에게 절하거나 기도하거나, 자녀나 남편이 우상시
되거나, 사탄의 음악에 빠지거나, 약물이나 마약에 중독이 되거나, 알콜 중독이 되어 알콜을 의지하거나, 아이돌이 우상이 되거나,
삼위일체 하나님 외에 다른 피조물을 섬기면 다 우상숭배에 해당이 됩니다.
본문 성경 하나님의 말씀인 십계명 1, 2, 3 계명으로 결론을 내겠습니다.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우상을 마음에 두지도 말고 절하거나 섬기지도 말라는 뜻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천사, 일월성신) 땅에 있는 모든
것과 물속에 있는 것 등(물고기 형상이나 용왕 등)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 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태초에 에덴동산에서 사탄(뱀)이 하와를 미혹 할 때 너희가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유혹을 했습니다(창3장)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 교만이며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의 위치에 놓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고 위하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사무엘 선지자의 말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버리고 미스바에 모여 기도를 드릴 때 블레셋이 침략해 왔으나 사무엘 선지자가
백성들의 요구대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어린양으로 온전한 번제를 하나님께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블레셋군대를 치셔서 패하게
하셨습니다(삼상7장)
솔로몬이 말년에 이방여인들을 후궁으로 맞이하며 우상을 섬기도록 허락해서 솔로몬 왕이 타락한 내용을 보면 솔로몬 왕의 후궁이
700명이었는데 왕비들이 솔로몬이 시돈의 우상 여신 아스다롯, 암몬 자손의 신 우상 밀곰을 섬기게 하였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을 떠나자 하나님께서 두 번이나 솔로몬에게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경고를 하셨는데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음으로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내가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복여로보암에게 주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윗을 위하여 아들 대에 가서 나라를 빼앗는다고 말씀하시며 나의 종 다윗과 나의 뺀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네 아들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솔로몬도 다윗처럼 처음에는 하나님을 잘 섬기다가 이방 여인들을 후궁으로 삼아 그 여인들이 섬기는 우상을 왕궁에서 감람산에서
섬기도록 허락함으로서 솔로몬의 사후에 나라가 반으로 갈라져서 북이스라엘은 10지파가 나라를 세워 수도는 사마리아,남쪽 유다 나라는
두 지파가(유다, 베냐민)나라를 세우고 수도는 예루살렘입니다.
우상을 섬기면 3-4대를 멸하시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는 천대 즉 3만 년 은혜를 베푸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과 축복이 여러분과 자자손손에게 내려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 안에는 두 부류의 사람
1. 율법 아래 있는 사람 2. 은혜 아래 있는 사람
은혜 아래 있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엄청난 복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고 감사와 찬송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되지만,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복을 받고자 하는 것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항상 정체성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이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킬 수 없는 말씀을 던져 줌으로 인간의 실상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자기 본질을 아는 자는 말씀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말씀이 떨어지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게 됩니다.
죄인은 복 받는 길을 알려주어도 행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죄인이 복을 받고 산다는 것은 오로지 하나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 주실 때입니다. 가나안 땅은 은혜로 살아가는 곳입니다. 은혜를 모르면 가나안에서 살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은혜로 살아간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26:14-15. 그러나 너희가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여 이 모든 명령을 준행하지 아니하며 내 규례를 멸시하며 마음에 내 법도를 싫어하여 내 모든 계명을 준행하지 아니하며 내 언약을 배반할진대.
1-13, 순종의 축복
* 1-2 / 지켜야 할 계명 14-39, 불순종의 저주 40-46, 회복의 언약
순종의 계명 세 가지(1-2)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 조각한 것이나 주상을 세우지 말며 너희 땅에 조각한 석상을 세우고 그에게 경배하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 너희는 내 안식일을 지키며 내 성소를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1.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 하나님 중심의 삶이 무너진다.
2. 안식일을 지키라 예배의 시간을 확보하라
3. 성소를 경외하라 예배의 장소를 확보하라
하나님을 향한 초점을 정확하게 맞추며 살아가라
그러면 먼저 첫 번째 단락부터 살펴보겠습니다.
1. 2계명과 4계명 하나님께서는 이제까지 모세를 통해 모든
규례와 법도를 다 말씀해주셨는데, 상벌규정을 말씀하시기에 앞서서 대표적인 계명 두 가지를 다시금 명하십니다. 사도바울이
빌립보서에서 말한 것처럼, 중요한 내용일 경우에는 반복해서 말하는 것이 말하는 자에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듣는 사람에게는 더욱
안전합니다(빌 3:1). 그러면 여기서 명해지는 계명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상숭배 금지 계명(1,2계명)과 안식일
계명(4계명)입니다. (1)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 목상이나 주상을 세우지 말며 너희 땅에 조각한 석상을
세우고 그에게 경배하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2)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나의 성소를 공경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것은
마치 부부가 결혼식을 해서 언약을 맺을 때, 혼인 서약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남편에 대한 아내의 의무가 정말 많지만, 결혼식 할
때는 그 모든 의무를 다 언급하지 않고, 가장 중요한 것만 언급합니다. 그것은 바로 “정절을 지키면서 남편만을 사랑하고
공경하며, 남편만을 섬기면서 살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상숭배 피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하나님만을
예배하라고 지금 명하시는 것입니다.
축복(26:3-13)
1. 때에 맞는 비(3-5)
(3)너희가
나의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 (4)내가 너희 비를 그 시후에 주리니 땅은 그 산물을 내고 밭의 수목은 열매를 맺을지라 (5)너희의
타작은 포도 딸 때까지 미치며 너희의 포도 따는 것은 파종할 때까지 미치리니 너희가 음식을 배불리 먹고 너희 땅에 안전히 거하리라
4절에서
‘시후’라는 말은 원어로 보면 ‘때’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곧 제때에 비를 내려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농사를 지을 때는
두 번의 비가 꼭 필요한데, 새로 파종하는 가을(10-11월)에 큰 비가 필요하고, 다 자란 곡식들이 풍성한 결실을 맺기
시작하는 늦겨울과 초봄(3-4월)에 약한 비가 필요합니다. 적절한 때에 내리는 적절한 강수량은 곡식의 품질과 생산량을 놀랄만하게
높이지만, 때에 맞지 않는 비는 도리어 아주 파괴적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풍요와 번영을 허락해주십니다.
2. 평화(6-8)
(6)내가 그 땅에 평화를 줄 것인즉 너희가 누우나 너희를 두렵게 할 자가 없을 것이며
내가 사나운 짐승을 그 땅에서 제할 것이요 칼이 너희 땅에 두루 행하지 아니할 것이며 (7)너희가 대적을 쫓으리니 그들이 너희
앞에서 칼에 엎드러질 것이라 (8)너희 다섯이 백을 쫓고 너희 백이 만을 쫓으리니 너희 대적들이 너희 앞에서 칼에 엎드러질 것이며
두려움 없이 눕는다는 것은 사방이 트인 들판에서 아늑하고 안전하게 누워있는 그림을 연상시킵니다. 곧 온
땅에 약탈자들이 없고, 전쟁이 없게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팔레스틴 땅은 지정학적으로 전쟁이 가장 많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든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시고 원수들이 망하게 하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평안히 누울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희 다섯이 백을 이기고 백이 만을 이길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전쟁의 용사이신 여호와께서
친히 싸우심으로 전세가 아무리 불리해도 절대로 지지 않는 것입니다.
3. 번성(9-10)
(9)내가 너희를 권고하여 나의 너희와 세운 언약을 이행하여 너희로 번성케 하고 너희로 창대케 할 것이며 (10)너희는 오래 두었던 묵은 곡식을 먹다가 새 곡식을 인하여 묵은 곡식을 치우게 될 것이며
“창대케 한다”는 단어도 수적 증가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입니다. 그런데
옛말에 “자식 많이 낳으면 거지꼴 못 면한다.”는 말이 있죠.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식을 많이 낳아서 번성하게 되면,
가난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열 명씩 스무 명씩 낳는데도 풍족합니다. 어느 정도로 풍족하냐 하면, 묵은 곡식이 계속 쌓여서
버리게 될 정도로 풍족한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축복입니다.
4. 임재하심(11-13)
(11)내가 내
장막을 너희 중에 세우리니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하지 아니할 것이며 (12)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니라 (13)나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어 그 종된 것을 면케 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 내가 너희 멍에
빗장목을 깨뜨리고 너희로 바로 서서 걷게 하였느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계명을 잘 지키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그들 가운데 장막을 세워 그들 가운데 거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받는 축복의 최고봉에 있는
것으로서 최상의 축복입니다. 너희 중에 행한다는 말은 동행한다는 뜻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였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과 동행하시며 그들과 교제 나누시고 그들을 인도하시며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언약의 목표가 성취될
것입니다. 언약의 목표는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목표를 위해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속박에서 건져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목에 있는 멍에와 굴레를 부수셨습니다. ‘멍에’는 황소의 등에 얹은 무거운 십자형 나무를 의미하는데, 황소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기 위한 것입니다. 노예들은 늘 무거운
짐을 날라야 하기 때문에 등이 휩니다. 그리고 주인 앞에서 굽신거려야 하기 때문에 결국 새우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등과 목에 있는 멍에를 부수셔서 그들의 짐을 가볍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신분을 존귀케 하여 똑바로
서서 당당하게 걷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출애굽의 은혜를 다시금 상기시키시면서 그들로 하여금 이러한 축복의 약속을 받도록
계명을 지킬 것을 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축복을 누릴 것인지 아니면 누리지 못할 것인지는
그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계명을 지키지 않고, 불순종한다면, 이런 축복들이 그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될
것입니다. 축복을 못 받는 것은 둘째 치고 오히려 엄청난 저주를 받게 될 것입니다. 어떤 저주를 받게 되는지 이제 저주 단락을
살펴보겠습니다.
저주(詛呪)
저주단락은 축복단락과 대칭되면서도 독특한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양이 2배 이상
많습니다(신명기의 경우는 3배 이상 많습니다). 그리고 축복단락에서는 “너희가 순종하면”이라는 조건이 맨 앞에 한번만 나오지만,
저주단락에서는 처음에 “너희가 불순종하면”이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저주단락이 시작될 때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너희가 불순종하면(대항하면)...”의 표현이 반복됩니다(14, 15, 18, 21, 23, 27절).
저주가 다섯 가지인데,
그것이 축복의 경우처럼 동시적으로 한꺼번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번에 하나씩 주어지고, 그 다음에 회개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회개하지 않으면 점층적으로 그 강도와 잔혹성을 세게 하여 벌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너희 죄를 위해 너희를 칠
배나 더 징치하리라”라는 표현의 반복이 잘 보여줍니다(18, 21, 24, 28절). 7이라는 숫자는 완성, 또는 온전함을
의미하는데, 그러므로 일곱 배 강하게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는 말은 그들이 죄를 고집할 때 각각의 새로운 단계에서 징벌의 수위를
매번 파격적으로 끌어올리실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저주 단락이 어떻게 시작됩니까? 14절과 15절을 보십시오. 14절과 15절을 보면, 그들이 불순종하는 것이 무지나 연약함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14)그러나 너희가 내게 청종치 아니하여 이 모든 명령을 준행치 아니하며(15)나의 규례를 멸시하며 마음에 나의 법도를 싫어하여 나의
모든 계명을 준행치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배반할진대 여기서
‘청종’이라는 단어는 그 말하는 사람을 존중하고, 그 말하는 내용의 중요성을 알고서 경청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청종치
아니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멸시하는 이유는 그 규례를 마음에서부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싫어한다’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싫어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라, 성경에서 오직 9번만 사용된 아주 독특한 단어입니다(오늘 본문에서만 5번 쓰임). 이 단어는 “배설물로 취급하다.
싫어하거나 경멸하여 버리다. 낙태를 해버리다.”등의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마치 아주 철없는 아이들이 부모의 말을 잔소리로
여겨서 그 잔소리를 들을 때 그 말을 매우 싫어해서, 부모에게 대항하고 달려들듯이,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규례와
명령을 싫어하고 듣기를 거부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곧 언약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만을
사랑하고 서로의 의무를 다하기로 서약했는데, 이 여자가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우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남편이 얼마나 그
아내에 대하여 진노하며 분노하겠습니까? 특히 이스라엘은 그냥 아내가 아니라, 벌거벗겨진 채로 버려졌던 핏덩어리였는데, 하나님께서
데려다가 양육한 여자였습니다. 이제 어엿한 처녀가 되어서 처녀 이스라엘과 결혼 해주신 것인데, 이 여자가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다른 남자와 만난다면, 그것은 그냥 악한 것이 아니라, 아주 역겹고 배은망덕한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약을 배반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갚으십니까?
26:16-17. 질병과 쇠약해짐, 전쟁에서 패배, 대적의 압제, 약탈을 당함
1. 놀라운 재앙(13-17)
‘놀라운 재앙’이란, 놀랍도록 엄청난 재앙이라는 뜻이 아니라, 느닷없이 갑작스러운 재앙이라는 것입니다. 재앙은 예고 없이
옵니다. “평안하다, 평안하다” 할 때에 갑작스럽게 임하는 것입니다(살전 5:3). 그렇기 때문에 이 재앙이 더욱 무서운
것입니다. 그 재앙은 바로 질병과 쇠잔하게 되는 것입니다. 언급되는 질병은 폐병, 열병, 시력감퇴질병(백내장, 녹내장), 식욕상실
& 기력쇠진의 질병입니다. 한두 명이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민족적으로 이렇게 되면... 국가 전체가 쇠약해져서 결국
대적들의 밥이 되고 말 것입니다. 여호와의 보호막이 걷혀지게 되자, 이스라엘은 적들에게 두들겨 맞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파종을 열심히 해도, 대적들의 약탈로 인해서 그것을 얻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 대적에게 패하고, 대적들의 압제 하에 있게 되고,
얼마나 마음이 약해지고 두려움에 사로잡혔는지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언약적 저주가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그대로 성취가 되었습니다.
”(13)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14)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붙여 그 들로 노략을 당케 하시며 또 사방 모든 대적의 손에 파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치 못하였으며(15)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매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삿 2:13-14)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마자 타락했는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범죄 할 때마다 대적에게 패하게 하시고 압제 당하게 하시고 약탈을 당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2. 극심한 흉년(18-20)
이스라엘이 이런 비참한 처지에 있게 되었으면 응당 회개해야 할 것인데, 이스라엘이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재앙의 강도를 일곱 배나 높이시는 것입니다. 18절부터 보시면... (18)너희가
그렇게 되어도 내게 청종치 아니하면 너희 죄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칠배나 더 징치할지라(19)내가 너희의 세력을 인한 교만을
꺾고 너희 하늘로 철과 같게 하며 너희 땅으로 놋과 같게 하리니(20)너희 수고가 헛될지라 땅은 그 산물을 내지 아니하고 땅의
나무는 그 열매를 맺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벌을 칠 배나 더하시는데, 두 번째 저주의 내용은 바로 흉년의 재앙입니다. 그것은
19절에 보는 것처럼 그들의 세력으로 인한 교만을 꺾으시기 위한 하나의 방편입니다. 풍년으로 나라가 부요하게 되고, 군사력이
강하게 되면, 교만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교만을 처참하게 깨트리시는데 그들이 누리던 풍요와 번영을 치심으로써 깨트리시는
것입니다. 하늘이 철과 같이 되고 땅이 놋과 같게 되면 농사가 도무지 되지가 않습니다. 하늘은 비를 내리지 않을 것이고 땅은
식물을 내지 않을 것입니다. 가난과 배고픔이 있으며 나라의 경제가 마비될 것입니다. 이 재앙도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그대로 성취가 되었습니다. 엘리야가 아합 왕에게 흉년을 선언하자 삼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흉년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엘리야를 섬긴 사르밧 과부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12)저가
가로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무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왕상 17:12) 물론 사르밧
과부는 하나님의 은혜로 양식을 공급받아 살 수 있었지만, 아마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굶주림으로 죽어나갔을 것입니다. 이렇게
엄청난 재앙을 당했으면 이제는 회개해야 하는데, 이스라엘이 고집을 부립니다.
3. 들짐승 재앙(21-22)
(21)너희가
나를 거스려 내게 청종치 않을진대 내가 너희 죄대로 너희에게 칠배나 더 재앙을 내릴 것이라 (22)내가 들짐승을 너희 중에
보내리니 그것들이 너희 자녀를 움키고 너희 육축을 멸하며 너희 수효를 감소케 할지라 너희 도로가 황폐하리라
입니다. 우리는 동물원에서 사자나 곰과 같은 야생동물을 보기 때문에 이 재앙이 얼마나 무서운
재앙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사자나 곰과 같은 아주 위험한 짐승들이 온 마을에 창궐해서 돌아다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재앙이 되겠습니까?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생짐승들로 인해서 공포에 떨게 될 것입니다. 특히 아이들과 노인들이
수시로 찢겨죽는 일이 발생하여 인구가 대폭적으로 감소하게 될 것이고, 가축들 같은 경우는 아예 씨가 마를 정도로 다 잡아먹히게 될
것입니다. 생존자들은 집밖을 나가는 것을 무서워하기 때문에 길에 사람이 없어 황량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무서운 재앙을 이
율법을 받는 1세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친히 경험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이 광야 길에서 고생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불평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불뱀을 보내셔서 많은 사람들이 물려죽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도 간헐적으로 야생동물의
재앙을 내리셔서 그들을 징치하셨습니다(왕하 2:24, 17:25-26). 그런데도 이스라엘이 고집을 부리면 이제 어떤 재앙이
임합니까? 네 번째 저주가 임합니다.
4. 도륙, 염병, 극심한 식량난(23-26)
(23)이런 일을
당하여도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를 대항할진대 (24)나 곧 나도 너희에게 대항하여 너희 죄를 인하여 너희를 칠배나 더
칠지라 (25)내가 칼을 너희에게로 가져다가 너희의 배약한 원수를 갚을 것이며 너희가 성읍에 모일지라도 너희 중에 염병을 보내고
너희를 대적의 손에 붙일 것이며 (26)내가 너희 의뢰하는 양식을 끊을 때에 열 여인이 한 화덕에서 너희 떡을 구워 저울에 달아
주리니 너희가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 하리라
네 번째 묶음의 저주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대적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했기 때문입니다. 25절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자신의 원수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왜냐하면 언약을
배반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3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싫어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을 싫어하였기 때문입니다(레 26:15).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이 자기에게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시고, 자기를 간절히 찾는 자에게 만나주십니다. 반대로 자기를 멸시하는 자를 멸시하시고, 자기를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시고, 자기를 대적하는 자를 대적하십니다. 이것은 인격과 인격 사이에 항상 있게 되는 원리인 것입니다. 물론 이런
원리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심으로 우리에게 대한 자기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영원히
변함이 없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오해해서 죄를 지으면서 살아도 예수의 공로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를 향해서 사랑의 미소를
짓고 계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식이 담배 피다 아버지에게 걸렸는데 아버지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근거로 해서 아버지가 나를 향해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자기를 안아줄 것을 기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도 악하게 죄를 범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진노하시고 미운 감정을 나타내시고 교만한 우리를 물리치십니다(약 4:6-10). 그러나 우리가 우리 죄의 악함을 깨닫고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회개한다면, 하나님은 자비와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다시 본문을 돌아와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대적했을 때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을 대적하시고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십니다. 하나님께서 네 번째로 내리시는 저주는 칼입니다. 이것은
전쟁의 패배로 군인들만 도륙당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인들도 칼로 도륙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 칼로 배약한 원수를
갚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전쟁에 대한 두려움으로 시골을 떠나 성읍 안으로 가서 안전을 확보하려고 할 것인데,
하나님은 그때 역병이 돌게 하셔서 성읍 안에서 죽게 하시고, 결국 대적에게 점령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치시고자 하시면
피할 길이 없습니다. 어떠한 대책과 방도도 다 소용이 없습니다(계 6:15). 그리고 그들이 의뢰하는 양식의 지팡이를 끊으실
것입니다. 얼마나 양식이 핍절한지 열 명의 여인에게 양식을 배급하는데, 그 열 명의 여인에게 돌아간 양식의 양이 한 솥에 다 찔 수
있을 만큼 아주 작은 양인 것입니다. 그러니 늘 배고플 수밖에 없죠. 그런데도 회개하지 않으면 이제 마지막 재앙이 내려질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재앙의 절정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그 잔혹성과 비참함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5. 자식을 고기로 먹음, 우상과 함께 파멸됨, 대적의 포로로 잡혀감, 대적의 땅에서 칼로 도륙 당함(27-39)
(27)너희가 이같이 될지라도 내게 청종치 아니하고 내게 대항할진대 (28)내가 진노로 너희에게 대항하되 너희 죄를 인하여 칠배나 더 징책하리니 (29)너희가 아들의 고기를 먹을 것이요 딸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
극심한
기근이나 대적에게 둘러싸여 양식이 전혀 없게 되어졌을 때, 부모가 자식을 죽여서 그 자식을 양식으로 먹는 일이 있게 됩니다(신
28:53-57). 이것이 얼마나 충격적인 일입니까? 우리가 어머니 사랑하면... 너무 아름답고 감동적인 것이어서,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높다 하리요 어머님의 은혜는 가이 없어라”라고 노래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어머니가 자기 살겠다고 자식을 죽여서
고기로 먹게 되는 일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존엄성마저 완전히 상실한 모습입니다. 신명기 말씀을 보면 그 어머니가 자기
자식을 먹는데, 다른 사람에게 뺏길까봐 심지어 자기 가족들에게도 뺏기지 않으려고 몰래 먹게 된다고까지 언급합니다. 이것보다 더
끔찍하고 충격적인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그대로 성취가 되었던 것입니다.
“(26)이스라엘
왕이 성 위로 통과할 때에 한 여인이 외쳐 가로되 나의 주 왕이여 도우소서(27)왕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를 돕지 아니하시면
내가 무엇으로 너를 도우랴 타작마당으로 말미암아 하겠느냐 포도주 틀로 말미암아 하겠느냐(28)또 가로되 무슨 일이냐 여인이
대답하되 이 여인이 내게 이르기를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오늘날 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먹자 하매(29)우리가 드디어 내 아들을
삶아 먹었더니 이튿날에 내가 이르되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먹으리라 하나 저가 그 아들을 숨겼나이다(30)왕이 그 여인의 말을
듣고 자기 옷을 찢으니라 저가 성 위로 지나갈 때에 백성이 본즉 그 속살에 굵은 베를 입었더라”(왕하 6:26-29)
그리고 이 일은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도 일어났습니다(애 2:20, 4:10).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이런 끔찍한 일을 당하게 하신 뒤에 그들을 우상과 함께 죽이십니다.
(30)내가 너희의 산당을 헐며 너희의 태양 주상을 찍어 넘기며 너희 시체를 파상한 우상 위에 던지고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할 것이며 여기서
“파상한 우상”은 원어로 보면 ‘우상의 시체’라는 뜻입니다. 즉 우상의 시체위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시체를 던지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노한 남편이 간음을 행한 아내와 그 간부를 함께 죽이는 것과 같은 맥락에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31절부터
보시면... (31)내가 너희 성읍으로 황폐케 하고 너희 성소들로 황량케 할 것이요 너희의 향기로운 향을 흠향치
아니하고(32)그 땅을 황무케 하리니 거기 거하는 너희 대적들이 그것을 인하여 놀랄 것이며(33)내가 너희를 열방 중에 흩을
것이요 내가 칼을 빼어 너희를 따르게 하리니 너희의 땅이 황무하며 너희의 성읍이 황폐하리라 ... (36)너희 남은 자에게는 그
대적의 땅에서 내가 그들의 마음으로 약하게 하리니 그들은 바람에 불린 잎사귀 소리에도 놀라 도망하기를 칼을 피하여 도망하듯 할
것이요 쫓는 자가 없어도 엎드러질 것이라(37)그들은 쫓는 자가 없어도 칼 앞에 있음 같이 서로 천답하여 넘어지리니 너희가 대적을
당할 힘이 없을 것이요(38)너희가 열방 중에서 망하리니 너희 대적의 땅이 너희를 삼킬 것이라(39)너희 남은 자가 너희 대적의
땅에서 자기의 죄로 인하여 쇠잔하며 그 열조의 죄로 인하여 그 열조 같이 쇠잔하리라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대적들의 포로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가운데 대부분은 굶어죽거나 칼에 도륙당해 죽을 것이고 일부 생존자들은 포로로 잡혀가며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어 더 이상 제사를 드릴 수 없게 되고, 성읍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처럼 황폐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대적의
땅에서도 칼이 끊임없이 따르게 하셔서 끔찍한 살육 당하게끔 하실 것이고, 몸과 마음이 지속적으로 쇠잔하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끔찍한 재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34-35절에 다음을 말씀하십니다.
(34)너희가 대적의 땅에 거할 동안에 너희 본토가 황무할 것이므로 땅이 안식을 누릴 것이라 그 때에 땅이 쉬어 안식을 누리리니 (35)너희가 그 땅에 거한 동안 너희 안식시에 쉼을 얻지 못하던 땅이 그 황무할 동안에는 쉬리라
하나님은
갑자기 땅의 안식을 언급하십니다. 이 말씀은 두 가지를 보여주는데, 첫째는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땅을 혹사시키면서
욕심대로 살았는지를 증거 해줍니다. 그러므로 땅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악한 청지기를 쫓아내시고, 땅으로 하여금 그동안 혹사당한
것에 대한 보상을 한꺼번에 받도록 하십니다. 땅은 안식을 누리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적의 땅에서 고통을 당하며 점차로 소멸될
것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것은 회복의 메시지도 전해줍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포로기간이 바로 땅의 밀린 안식년
기간만큼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490년 동안 70번의 안식년을 안 지켰으므로 그들의 포로 기간이 70년으로 한정되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본문에서 열거된 무시무시한 재앙들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그대로 성취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BC 586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살육을 당했으며,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그 남은 자들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이 형벌이 어찌나 극심했는지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이 애가를 지어
노래했습니다. “(20)여호와여 감찰하소서 뉘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 여인들이 어찌 자기 열매 곧 손에 받든 아이를 먹으오며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어찌 주의 성소에서 살륙을 당하오리이까(21)노유는 다 길바닥에 엎드러졌사오며 내 처녀들과 소년들이 칼에
죽었나이다 주께서 진노하신 날에 죽이시되 긍휼히 여기지 아니 하시고 살륙하셨나이다(22)주께서 내 두려운 일을 사방에서 부르시기를
절기에 무리를 부름 같이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날에 피하거나 남은 자가 없었나이다 내 손에 받들어 기르는 자를 내
원수가 다 멸하였나이다”(애 2:20-22)
적용
이스라엘의 멸망은 두 가지를 보여줍니다.
첫째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어떠한지, 언약을 배반한 죄인들을 향한 여호와의 질투와 복수심이 어떠한지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이
받은 끔찍한 저주들은 지옥형벌의 그림자요 모형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아니한 모든 사람들에게 여기
기록된 형벌보다 더 끔찍한 형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둘째로 이스라엘의 멸망은 하나님이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이 언약에는 언약적 저주도 포함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겁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하신 모든 재앙을 다
이스라엘에게 내리셨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재림의 때를 약속하시고 최후의 심판과 지옥형벌에 대해
경고하셨습니다. 그것은 겁주시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가 악하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의
기회가 있는 오늘 하루 동안 참되게 회개하며 예수를 믿고,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스라엘의
멸망의 역사는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경계로 기록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고 잔혹하게 복수하시는
하나님, 질투하심으로 원수를 갚으시는 하나님이 바로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에만 이런 하나님이고 신약에 와서는 용서와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으로 바뀌신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고,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표현이 신약성경에서도
나옵니다. 여전히 두렵고 엄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우리를 사모하신다는 말씀을 허투루 들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그러므로 깨어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깨달아야 하며, 죄와
싸우는 삶을 살아야 하고, 죄 가운데 있다면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두려움으로 복종할 뿐만 아니라,
더더욱 이러한 우리의 죄에 대한 무한한 분노와 복수를 우리대신 예수 그리스도께 쏟아 부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그 끔직한 고통을 당하셔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주셨음을 알고, 그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고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은혜 안에서 우리의 정과 욕심을 못 박고 더욱 감사와 사랑으로 하나님께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재앙들이 그들에게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마지막 재앙은 그 잔혹성이 이루 말 할 수 없을 만큼의 엄청난 재앙입니다.
축복과 저주의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에게 교훈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가. 계명 순종을 장려하기 위한 방편
첫째로
이 규정들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계명을 순종하도록 장려하기 위한 도구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러한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들이 무엇을 느꼈겠습니까? 아마도 그들은 즉시로 모세를 통해서 주신 이 율법의 규례들이 얼마나 엄중한
말씀이며 심각한 말씀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축복을 들으면서 “정말 순종하면서 살아서 복을 받아야 되겠구나”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고, 저주에 관한 내용을 들으면서 (정신이 바짝 들어서) “정말 계명을 어기면서 살면
끝장이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법에 처벌규정이 있는 것은 처벌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처벌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하여 그들로 법을 지키며 살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시는 말씀은 “그렇기 때문에 너희가 나의 규례와 법도를 청종하고 순종하면서
살아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동일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약의 성도들에게도 순종을 장려하시기
위해서 이러한 방법을 동일하게 사용하십니다. 신약에도 상급에 대한 약속의 말씀, 그리고 불순종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마 5:11-12, 딤후 4:7-8, 빌 3:14, 갈 6:7-8, 엡 5:5-7). “(7)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8)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히 6:7-8) 이것은
행위구원론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면 복을 받고 상급을 받지만, 불순종하고 죄를 고집하면 결국 저주를 받고 망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성화의 삶을 지속적으로 살아가도록 독려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축복과 저주의 말씀에
있어서 구약과 신약의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축복과 저주의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선 구약에서 약속된 복은
이 땅에서의 풍요와 번영입니다. 그러나 신약에서 약속된 복은 다른 복입니다. 그런데 많은 목회자들이 그것을 모르고 레위기나
신명기의 축복과 관련된 말씀을 그대로 가져와서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적용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잘 믿고,
주일성수 잘하고, 십일조 잘하면, “들어가도 복 받고 나가도 복 받고... 건강하고 사업 잘되고 자식 좋은 대학가고...” 등등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의 가시적인 모형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영적인 축복과 행복을 이 땅의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풍요와 번영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의 교회는 구속사적으로
보면 아직 어린 교회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초등학문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어린 아이들에게 맞는 교육방법이
있습니다. 우리가 작은 아이들에게 “말 잘 들으면 돈 100만원 줄게”라고 말하면 통하질 않습니다. 오히려 아이들에게 “말 잘
들으면 마이쭈 사주고, 말 안 들으면 맴매 맞는다.”라고 말하면 통합니다. 반대로 어른들에게 “마이쭈 사줄 테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 그러면 그것은 상대방을 우롱하는 것이 됩니다. 신약교회는 예수님 잘 믿으면 이 땅에서 건강해지고 부자가 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런 사탕발린 복음을 들으면... 화가 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약교회가 이런 본문을 문자 그대로
취하여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신약의 장성한 교회는 이제 알 거 다 아는 그런 나이가 되었기 때문에 그런 저급한 것보다 한 차원
높은 것 그리고 궁극적 차원의 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에는 물질적이고 가시적인 복이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넘치게 채워주시는데, 그 채워주심도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복입니다. 다만 각 사람의 분수에 맞게 허락하시는데, 따라서 부해도 가난해도 신약의 성도들은 자기 형편에
얼마든지 자족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신약의 성도들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복은 그런 세속적인 복이 아닙니다. 무엇이 우리에게
있어서 궁극적인 복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이 우리의 상급이 되시고, 그분 안에서 주어진 구원이 최고의 상급이며, 그분
안에서 장차 주어질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는 최고의 상급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에서부터 이미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축복의 끝, 축복의 절정에서 이미 하나님이 이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신약의 성도들은 이 놀라운
복을 이 땅에서부터 이미 받아 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 받은 것이 아니라, ‘아직 아니’의 측면이 있어서 장차 받게 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할” 그런 것입니다(고전
2:9).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복을 사모하면서 성화의 삶을 살아가며, 이 땅에서 어떠한 고난과 어려움이 임해도 인내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 율법은 행위언약이다
둘째로 오늘 본문 말씀은 시내산 언약이 행위언약임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마치 아담의
선악과 금령과 비슷합니다. 지키면 살고 어기면 죽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 모든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살고, 또 많은 복을
받지만, 그러나 어기면 형벌을 받습니다. 죽임당하고 멸망당하는 것입니다. 그냥 죽이시는 것이 아니라 가장 잔혹하게 형벌하셔서
죽이십니다. 마지막 재앙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은 자식을 고기로 먹게 하시고, 원수의 포로로 잡혀가서 온갖 고생하다가 거기서 칼에
도륙당해 죽게 하시는 것입니다. 특히 자식을 고기로 먹게 하시는 것은 완전히 인간됨을 상실하게 되는 처지로까지 떨어뜨리시는
것인데, 정말 충격적인 형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구약의 재앙은 구약의 복이 그러했던 것처럼 궁극적인
지옥형벌에 대한 서막이요 모형일 뿐입니다. 죄 가운데 있는 인생들에 대해 복수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영원한 지옥형벌을 예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바로 하나님 앞에서 짓는 죄가 얼마나 큰 죄이며 얼마나 큰 형벌이 있으며, 하나님
없이 죄 가운데 사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인생인지를 분명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행위언약 아래서 모든 인생들은 다
죽을 죄인으로 하나님 앞에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면 복 받지만,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이상일 뿐 전적타락한 인간이 이
율법을 결코 지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졌지만, 사실상 모든 인류가 율법의 저주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 율법을 통해서 사람들은 자신이 저주아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사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율법은 결국 율법의 몽학선생 역할을 위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저주아래 있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나아가게끔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를 다
당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율법의 모든 계명을 다 지켜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는 값없이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얻어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을 다 받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여 주심으로 이제 신약의 성도들은 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러면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어도 상관이 없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율법에서 해방되어 법 없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거하는 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율법은 우리 마음에 새겨진 율법을 말합니다. 구약은 율법이 마음 밖에 명해집니다. 율법만 명해지고, 그것을
지킬 수 있는 성령의 은혜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약은 성령님의 은혜로 마음 안에 기록됩니다. 따라서 신약의 성도들은 성령에 의해
거룩하게 함을 입고, 마음에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나서 자원하여 기쁨으로 율법을 순종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신약의 성도들도 때때로 계명을 어기며 죄를 지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죄를 지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노하시고, 또 친히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징계하듯이 그렇게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언약인데, 이러한 은혜언약이
오늘본문에서도 잘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 상벌 규정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 - 회개를 위한 징계
셋째로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맺은 언약은 근본적으로 은혜언약이라는 사실을 오늘 본문이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린양의 피로 이미 구원받았고,
율법은 감사의 규범으로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불순종할 때 내리시는 저주는 결국 징계인 것입니다. “(18)너희가 그렇게 되어도 내게 청종치 아니하면 너희 죄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칠배나 더 징치할지라”(레 26:18) 여기서
‘징치한다’는 말은 ‘징계하다, 훈육하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언약적 저주들이 처벌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형벌이
아니라, 그들로 회개하여 돌이키도록 하기 위한 징계라는 것입니다. 만일 이 저주들이 처벌을 목적으로 했다면, 불순종한 즉시로
모두 진멸 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장에 다 진멸하지 않으시고, 매 단계마다 회개의 기회를 주시고, 또 남은 자를
두시고 회개할 때까지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징계를 받고서도 죄를 고집하게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더 세게 징계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도 고집보다 하나님의 고집이 더 세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그 하나님 앞에 항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열거되는 저주들이 과연 징계가 맞나 싶을 정도로 너무나 혹독하고 잔혹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너무
가혹하게 징계하신다”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렇게까지 코너로 몰지 않으면 도무지 회개할 생각을 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완악함과
강퍅함에 놀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면서 오늘 본문 말씀이 곧 우리를 향한 말씀이라는 것을
깨달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녀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범하면 그 죄에 대해서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징계하실 때는 아주 뼈아픈 징계를 내리시는 것입니다. 건강을 치시기도 하시고, 사업이 망하게 하기도 하시고, 여러 가지 사건과
사고로 어려움에 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영적으로 침체에 빠진 상태에서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가리시고 진노와
미움의 얼굴을 대하게 하셔서 짓이기는 고통을 당하게도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서 자신의 원수라고
호칭하시고 그들을 싫어하신다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사랑의 징계이고, 미워하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지만, 그러나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우리가 도무지 회개할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혹독하게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징계를
받을 때 그 징계를 경홀히 여겨서도 안 되고, 또 그 징계로 낙심하여 절망에 빠져서도 안 됩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매를 맞았을
때 울면서 다시 부모 품에 안기려고 나아오는 것처럼 그렇게 주님 품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언약을 배반하고 불순종하게 될 때 받게 되는 저주와 형벌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비참한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궁극적으로
지옥의 형벌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행위언약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 본문에 대한 바른 해석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그렇게만 볼
수 없고, 한편으로 은혜언약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 언약적 축복과 저주의 본문은 순종을 권장하기 위한 목적의 말씀이며, 또한
언약적 저주조차도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상반되는 것 같은 두 가지 측면을 공히
강조하면서 봐야지, 한쪽만 말하거나 두 가지를 섞어버리거나 하면 굉장히 이상한 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1. 축복의 성취
그러면
저주 단락을 배우기 앞서서 지난주에 배운 축복의 말씀이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어떻게 성취되는지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축복이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 성취되었다는 것이 놀라운 은혜인데, 왜냐하면 전적타락한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타락해버렸고, 언약을 배반하여 우상을 숭배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언약적
저주가 다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언약적 저주만 임하고 축복은 하나도 못 받았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다윗과
솔로몬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은혜로 이 축복을 경험합니다. 왕 한 사람의 경건과 순종함을 통해서 온 이스라엘이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전쟁에서의 승리 - “다메섹 아람에 수비대를 두매 아람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삼하 8:6)
평화
- “(24)솔로몬이 하수 이편을 딥사에서부터 가사까지 모두 다스리므로 하수 이편의 모든 왕이 다 관할한바 되매 저가 사방에
둘린 민족과 평화가 있었으니(25)솔로몬의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안연히 살았더라”(왕상 4:24-25)
번성 - “유다와 이스라엘의 인구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많게 되매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였으며”(왕상 4:20)
풍요 - “왕이 예루살렘에서 은을 돌 같이 흔하게 하고 백향목을 평지의 뽕나무 같이 많게 하였더라”(왕상 10:27)
성전건축
- “(10)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매(11)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12)그 때에 솔로몬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캄캄한데 계시겠다
말씀하셨사오나(13)내가 참으로 주를 위하여 계실 전을 건축하였사오니 주께서 영원히 거하실 처소로소이다 하고”(왕상
8:10-13)
솔로몬의 고백 -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저가 무릇 허하신 대로 그 백성 이스라엘에게 태평을 주셨으니 그 종 모세를 빙자하여 무릇 허하신 그 선한 말씀이 하나도 이루지 않음이 없도다”(왕상 8:56)
물론
이런 평화와 번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다윗도 솔로몬도 허물과 약점이 있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다윗과 솔로몬은 그나마 괜찮은 왕이었지만, 대부분의 왕들은 앞서서 언약을 배반하고 우상숭배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사느냐 죽느냐 하는
것이 사실상 그들의 왕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에 달려 있는 것인데, 왕들이 앞서서 우상숭배하니 그 결말은 안 봐도 비디오인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의 궁극적인 성취는 보통 인간 왕을 통해서는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참 신이시오
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과 솔로몬은 바로 이 그리스도의 모형이요 그림자였습니다. “(24)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에게 다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 그들이 내 규례를 준행하고 내 율례를 지켜 행하며(25)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 열조가 거하던 땅에 그들이 거하되 그들과 그 자자손손이 영원히 거기 거할 것이요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 왕이 되리라(26)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케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27)내 처소가 그들의 가운데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겔 37:24-27) 바로 다윗의 이름으로 오시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를 다 받으심으로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우리를 속량하시고,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고, 그리스도에게 허락된 모든 언약적 축복을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었으면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 나라의 행복을 미리 받아 누립니다. 그래서 성도의 육신은 고난으로 말미암아 점점 후패해갈지라도
성도의 마음속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이 있고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누리는
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예비하신 축복은 눈으로도 보지 못했고,
귀로도 들어보지 못했고, 사람의 생각으로도 상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축복입니다. 이 궁극적인 축복의 성취는 주님의 재림의 때에
이루어집니다.
“(2)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3)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4)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2-4) 이때는 영육간의 완전한 풍요와 번영이 있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셔서 언약의 목적인 “너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는 목적을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은혜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성도들에게 있어서 복을 받을 것이냐 저주를 받을 것이냐,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는 율법을 준행하느냐 준행하지 않느냐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어 그분과 연합하느냐, 아니면 믿지 아니함으로 그분밖에 있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우리가 믿음에 있는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였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 우리 안에 계심을 스스로 알고 깨닫고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버리운 자입니다(고후 13:5). 그러면 본격적으로 오늘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계명의 말씀을 준행하지 않는다면 다섯가지 묶음의 저주가 임하게 됩니다. 16절부터 보시면... 2. 첫 번째 저주 - 질병, 약탈, 패배, 압제 (16)내가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곧 내가 너희에게 놀라운 재앙을 내려 폐병과 열병으로 눈이 어둡고 생명이 쇠약하게 할 것이요 너희의
파종은 헛되리니 너희의 대적이 그것을 먹을 것임이며(17)내가 너희를 치리니 너희가 너희 대적에게 패할 것이요 너희를 미워하는
자가 너희를 다스릴 것이며 너희는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리라 첫 문장의 시작이 의미심장합니다. “내가 이같이 너희에게 행할
것이다...” 곧 불순종과 배반행위에 대해 묵과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5. 너희의 타작은 포도 딸 때까지 미치며 너희의 포도 따는 것은 파종할 때까지 미치리니 너희가 음식을 배불리 먹고 너희의 땅에 안전하게 거주하리라
안전한 거주의 축복(의식주에서 주의 복)
6. 내가 그 땅에 평화를 줄 것인즉 너희가 누울 때 너희를 두렵게 할 자가 없을 것이며 내가 사나운 짐승을 그 땅에서 제할 것이요 칼이 너희의 땅에 두루 행하지 아니할 것이며.
사나운 짐승을 제할 것이다(자연, 환경의 축복) 칼이 없어질 것이다
7. 너희의 원수들을 쫓으리니 그들이 너희 앞에서 칼에 엎드러질 것이라 전쟁의 승리
9. 내가 너희를 돌보아 너희를 번성하게 하고 너희를 창대하게 할 것이며 내가 너희와 함께 한 내 언약을 이행하리라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한다
저주 6가지
20. 너희의 수고가 헛될지라 땅은 그 산물을 내지 아니하고 땅의 나무는 그 열매를 맺지 아니하리라. 수확하지 못하는 것
33. 내가 너희를 여러 민족 중에 흩을 것이요 내가 칼을 빼어 너희를 따르게 하리니 너희의 땅이 황무하며 너희의 성읍이 황폐하리라. 흩어진다. 주거 불안정
25. 내가 칼을 너희에게로 가져다가 언약을 어긴 원수를 갚을 것이며 너희가 성읍에 모일지라도 너희 중에 염병을 보내고 너희를 대적의 손에 넘길 것이며
자연과 환경의 해
17. 내가 너희를 치리니 너희가 너희의 대적에게 패할 것이요 너희를 미워하는 자가 너희를 다스릴 것이며 너희는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리라.(참조 25절) 내가 칼을 너희에게로 가져다가 언약을 어긴 원수를 갚을 것이며 너희가 성읍에 모일지라도 너희 중에 염병을 보내고 너희를 대적의 손에 넘길 것이며 염병, 인육을 먹는 것
17. 내가 너희를 치리니 너희가 너희의 대적에게 패할 것이요 너희를 미워하는 자가 너희를 다스릴 것이며 너희는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리라 (돌보심 - 치심)
불순종의 저주(14-19)
7개의 재앙
18절 / 또 만일 너희가 그렇게까지 되어도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면 너희의 죄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일곱 배나 더 징벌하리라
징벌(히브리어) -
40-46절 회복의 언약
40. 그들이 나를 거스른 잘못으로 자기의 죄악과 그들의 조상의 죄악을 자복하고 또 그들이 내게 대항하므로. 41. 나도 그들에게 대항하여 내가 그들을 그들의 원수들의 땅으로 끌어 갔음을 깨닫고 그 할례 받지 아니한 그들의 마음이 낮아져서 그들의 죄악의 형벌을 기쁘게 받으면.
42. 기억하리라
내가 야곱과 맺은 내 언약과 이삭과 맺은 내 언약을 기억하며 아브라함과 맺은 내 언약을 기억하고 그 땅을 기억하리라
하나님이 나를 알고 나를 기억하는 믿음을 주옵소서!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레위기 25장 / 희년(10절)
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찌며. Consecrate the fiftieth year and proclaim liberty
throughout the land to all its inhabitants. It shall be a jubilee for
you; each one of you is to return to his family property and each to his own clan.
1-7, 20-22 안식년에 대하여.
◎ 50년 마다 지켜야 할 회년에 대하여.
8-10 자유를 공포할 것.
11-13 파종하지 말것.
14-19 이웃과의 매매에 대하여.
23-34 토지를 물러줄 것.
35-38 동족을 사랑하여 이식을 취하지 말 것.
36-55 몸을 판 자의 속량.
레위기 25장에서는 두 가지 해에 대한 규례를 말씀합니다. 첫째는 안식년입니다(1-7절) 둘째는 희년입니다(8-55절)
7676. 안식년. 샤바트(shabbâth) שַׁבָּת
1. 안식일, 2. 한 주일 발음
/ 샤바트(shabbâth) 어원 / 767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안식일(출 16:23, 느 9:14, 암 8:5), 안식(레 25:4, 신 5:14), 안식년(대하 36:21). [동] 안식하다(레 25:2, 신 5:14) 구약 성경 / 11회 사용
2. 사람에 대한 은혜(6-7절) 안식년의 소출은 너희의 먹을 것이니 너와 네 남종과 네 여종과 네 품군과 너와 함께 거하는 객과. 네 육축과 네 땅에 있는 들짐승들이 다 그 소산으로 식물을 삼을찌니라.
3. 하나님에 대한 신뢰(21절)
명하여 제 육년에 내 복을 너희에게 내려 그 소출이 삼년 쓰기에 족하게 할찌라
희년의 은혜 가난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출발을 약속하는 은혜
안식년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은혜를 경험하는 해
1. 자유를 공포하라(10절)
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찌며.
종들에게는 자유를, 내 기업은 내 소유로 돌아오게 하라
땅은 원래 사람의 것이 아니라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 희년의 의미라고 하겠다.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23절) 구속의 은총을 주시는 하나님( 절) 구속(고엘)의 대상은 네 가지 고엘 - 기업을 회복시켜 줄 자
1. 땅(23-28절, 24-25절)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찌니.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
2. 가옥(29절)
성벽 있는 성내의 가옥을 팔았으면 판지 만 일년 안에는 무를 수 있나니 곧 그 기한 안에 무르려니와
3. 채무(35-38절)
네 동족이 빈한하게 되어 빈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 너는 그를 도와 객이나 우거하는 자처럼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되.
4. 종(39-41절)
18-22절
네가 내 법을 지키면(순종하면) 내가 지켜주실 것이다. 땅은 그 산물을 내리니 너희가 배불리 먹고 거기 안전히 거하리라. 혹 너희 말이 우리가 만일 제 칠년에 심지도 못하고 그 산물을 거두지도 못하면 무엇을 먹으리요 하겠으나. 내가 명하여 제 육년에 내 복을 너희에게 내려 그 소출이 삼년 쓰기에 족하게 할찌라. 너희가 제 팔년에는 파종하려니와 묵은 곡식을 먹을 것이며 제 구년 곧 추수하기까지 묵은 곡식을 먹으리라.
결론 55절 /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품군이 됨이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나의 품군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오늘 읽어야 할 말씀 사무엘상 4-6장 누가복음 9:1-17
희년(禧年) 요벨(yôwbêl) יֹבֵל
기쁠 희(喜) : 口(입 구)
+
壴(악기 이름 주)
𠂉(-)
+
干(방패 간)
+
丨(뚫을 곤)
당시 고대 근동 사회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제도가 등장하는데, 바로 희년 제도이다. 희년
<요벨>은 어원상 숫양의 뿔을 뜻하는데 이는 희년의 시작을 알릴 때 숫양의 뿔로 만든 나팔을 부는 데서 유래 된
명칭이다. 희년은 칠 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후의 다음해로 오십 년이 되는 때를 말한다. 이때도 안식년과 같이
노동이 금지되고 땅을 휴경해야 한다. 그러나 희년이 갖는 독특성은 모든 채무가 탕감되고 매매되었던 토지가 원주인에게 돌아가고 종
되었던 자들이 자유인이 된다는 데 있다. 언약 공동체만이 지닌 이러한 희년 제도는 몇 가지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 모든 소유가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제도
땅이나 인간이나 모든 물질은 원래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므로 사람이 주인이 될 수
없다. 그러기에 희년이 되면 하나님이 원래 수여한 상태대로 돌려놓아야 하는 것이다.
둘째, 공동체의 유지를 위한 것
공동체
내에서 토지의 매매나 채무, 종이 생기는 것은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다. 이는 경제적인 부가 평등하게 분배되지 않고 특정한 곳으로
몰리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경제적인 불평등은 공동체간의 갈등을 초래하고 하나 됨을 파괴한다. 따라서 희년 제도는 경제적인
원인으로 공동체가 파괴되는 것을 방지하고 경제 정의를 실현하는 제도인 것이다.
셋째, 구속사에서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을 예표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안식을 얻고 하나님이 세우실 새로운 낙원에서 누릴 무한한 축복의 현세적
경험이 바로 희년인 것이다.
희년 제도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갈등을 미연에 방지하고 언약 공동체 내에 경제적인
평등을 실현하려는 제도이다. 이러한 경제 정의와 평등의 원리는 오늘날 사회에서도 성도들이 지키고 실현해야 할 원리이다. 성도들은
자신이 소유한 물질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가난한 자를 외면하는 것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희년의 정신을 어기는 것이다.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물질을 허락하심은 물질이 필요한 자들을 위해 베풀도록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가난한 자를 물질적으로 돌보아야 하며, 경제적으로 불평등한 현대 사회 속에서 경제적인 평등과 정의를
실현하는 데 힘써야 한다.
칠 월 십 일은 속죄일이니
희년이 시작되는 구체적인 날자에 대한 지적이다. 희년은 그 해의 속죄일(종교력 7월 10일,
민간력 1월 10일)에 시작되었는데 이는 먼저 속죄가 선행되어야만 기쁨과 해방, 그리고 자유의 회복이 선포되는 하나님의 은총이
임한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교훈해 준다. 한편 '속죄일 규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16장 주석을 참조하라.
나팔을 크게 불지며
유대 종교력으로 7월 10일, 즉 속죄일이 되면 전국에서 일제히 나팔을 불어 희년의 도래를
선포했다. 그러므로 희년 벽두에 울려 퍼지는 여기 이 나팔 소리는 마치 여호와의 시내 산 강림시 울려 퍼졌던 나팔 소리와도
같이(출 19:16) 언약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현존(現存)을 알리고, 자유를 잃은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며, 땅의
휴식과 더불어 농민들이 노동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됨을 선포하는 은총의 나팔 소리였다. 한편 여기 이 '나팔'은 양의
뿔로 만들어진 곡선형의 긴 나팔을 가르키는데, 그 소리는 은은한 저음으로 길게 울려 퍼졌다(23:24).
제 오십 년 ... 자유를 공포하라 - 희년이 갖는 가장 중요한 역사적 의의는 바로 자유의 선포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자유가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인간의 현실 속에 분명하게 작용하는 역사적 해방 사건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 자유의 내용을 세분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노예 상태로부터의 해방(39-55절) 둘째, 잃어버렸던 기업의
회복(13절-34절) 셋째, 노동으로부터의 안식과 토지의 휴경 (11절) 넷째, 빚의 탕감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느 누구에게 속할 수 없고, 땅 또한 하나님의 것으로서 어느누구에게 영속되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편 여기서 '자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데로르'의 기본 개념은 '재빠르게 움직이다'(move lapidly)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창공을 재빠르게 날아다니는 제비류(a kind of swallow)의 비행으로부터 연유된 말이다.
그러므로
자유는 일차적으로는 육체적인 모든 구속과 억압, 그리고 영적으로는 모든 죄와 사망의 사슬로부터 해방되어 '그리스도의 품
안'이라는 창공에서 마치 제비같이 재빠르게 훨훨 날아다니는 것, 바로 그것이다.
너희에게 희년이니 -
'희년'(禧年, Jubilee)에 해당하는 희브리어 '요벨'은 '수양의 뿔'(ram's
horn)이란 뜻으로, 곧 수양의 뿔로 만든 나팔을 불어 희년의 시작과 자유를 선포했던 사실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한편 구약의 이
희년 제도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선포로 말미암아 마침내 죄와 사망과 마귀의 사슬에서 해방되어 참된 기쁨과 안식,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될 것을 상징한다(눅 4:18,19).
땅으로 안식하게 하라
땅을 놀게 버려두라라는 말인데 땅이 소득의 유일한 근거인데 어떻게 놀릴 수가 있었을까? 자동차 10부제도 지키려고 마음먹어도 기분내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물며 땅을 일년이나 묵히다니 땅을 놀린 다른 예인 유럽의 중세때 돌려짓기와 비교하면 차이가 무엇인가?
돌려짓기는 지력회복이 목적이지만 안식년은 하나님 앞에서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것이다(4절).
부수적인 효과도 있겠지만 지력회복이 주목적이라면 7년 만에 쉬는 것은 너무 길다. 도라지를 옮겨심지 않으면 지력이 약해져서 몇 년
만에 썩어버린단다.
같은 농작물을 연속해서 심지 않고 바꾸는 것이나 퇴비를 충분하게 넣어줌으로 이것을 방지하는 방법도 있으므로 안식년의 주목적은
지력회복이라고 볼 수 없다.
소출에 차이가 있다. 돌려짓기는 땅을 놀림으로 지력을 유지함으로 연작하는 것보다는 분명히 더 나은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안식년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소출을 많이 주겠다고 약속하셨다(21)
안식년에 땅을 버려두는 것은 종과 품꾼과 객과 들짐승들을 위한 것이다? (O, X)
X; 땅(4)과 이스라엘 백성(6절의 '너')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결국 안식년에는 일정한 부분에서는 주인과 종의 구분이 없어진다. 물질과 노동에 집착하지 않는 연습을 하는 셈이다.
우리도 때로는 바쁜 일상에서 물러나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에 시간을 써야한다. 재물에 집착하지 않는 훈련도 필요하다.
너의 곡물의 스스로 난 것이나 열매를 거두지 말라(5)면서 안식년의 소출은 너희의 먹을 것(6)이라면 말이 맞지 않는데?
안식년의 소출이란 씨를 뿌리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난 곡식이나 열매를 가리키는 말이며 이것을 먹어도 좋다는 뜻이다(6,12). 다만 특정한 사람이 거두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개방된 것이다.
안식의 개념이 다음과 같이 발전하고 있다. 첫 안식의 주인공은 하나님, 그 다음 안식의 주인공은 사람, 이제 안식의 주인공은 땅이다. 도대체 안식의 마지막 목표가 무엇인지 본문을 근거로 설명해 보자.
안식의 목표는 희년이다. 모든 자에게 자유가 선포되는 것, 아마 마지막 안식은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과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것이 될 것이다. 안식년이 소출을 즐기는 점에서는 주인과 종과 짐승의 차이마저
없애버리는 해라면
禧年(유비레타, jubilee)은 더욱 확대되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기쁨이 넘치는 해이다. 노예상태에서 해방, 잃어버렸던 땅과
기업을 되찾음, 노동으로부터 해방이다. 해방을 당하는 사람이나, 보내는 사람이나 모두 기뻐하는 해이다.
하나님을 기뻐하지 못하는 사람은 재산의 손실을 몹시 슬퍼하게 될 것이다. 물질에, 재산 축적에 너무 관심을 기울이지 말고
하나님과 더불어 살라.
나팔을 부는 7월 10일은 49년째인가 50년째인가? 새로운 날을 알리는 나팔이라면 1월에 불어야지 7월에 부나? 1일에 불지 왜 10일에 부나?
50년 째 7월 10일이다. 원래 나팔을 부는 날 7월 1일이다. 종교력으로 7월이지만 실제로는 신년 첫달이다. 신년이 왔다고 바로 희년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열흘이나 기다려야했다. 속죄일을 기다리는 것이다.
바로 이 과정에서 진정한 자유와 기쁨은 속죄일에 온다는 것을 깨닫게 했을 것이다.
희년에 파종하지 않으면 그 전 안식년까지 연속 2년간 농사를 짓지 않는 셈인데 뭘 먹고 살지?
하나님 은혜로 살 수 있나 없나 확인해보라는 것이다. 믿고 따르는 자에게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땅을 살 때에는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일까? 이스라엘 사람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돈이 되는가'를 제일 먼저 생각한다. 기업도 그렇고 개인도 땅을 투기의 대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희년이 몇 년 남았는가를 따졌다.
즉 내가 몇 년 동안 사용할 수 있는가를 먼저 생각했다. 결코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나중의 일이지만 안식년은 말할 것도 없고 희년도 끝내 지켜지지 않는다. 누가 희년을 기뻐할 수 없었을까?
사장님, 대지주, 많은 종을 거느린 주인. 부나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인간세상이 결국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가난하고 약한 자를 돌아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안식년 제도가 없다할지라도 우리의 삶 속에서 그 정신이 구현되어야 한다. 각종 임금제도는 최대한으로 노동력을 짜내는 방법이 연구되지만 모두가 함께어울려 사는 방법이 먼저 연구되어야 한다.
능력없는 사람도 충분하게 고려된 임금체계가 연구되어야 한다.
거래를 할 때 희년의 년수를 감안하는데 속이고 말고 할 게 있을까(17)? 다 아는 사실 아닌가?
원어의 기본의미는 '억압하다' '분노하다'이다. NKJV은 'do not oppress,' NIV는 'do not take advantage of'로 번역하였다. 희년의 년수에 상관없이 강자의 뜻대로 거래를 하지 말라는 뜻이다.
날씨가 맑을 날이 거의 없는 영국에서는 아침 인사가 Good morning이 되었다. 우리 조상들의 관심사는 '밤새 안녕'과 '진지'였다. 이스라엘의 '샬롬'이라는 인사는 '안녕하십니까?'와 같은 말이다.
이스라엘이 차지한 가나안은 우리보다 더 많은 이민족이 짓밟은 곳이며 농산물이 그리 풍성한 곳이 아니다. 이스라엘을 하필 이런 곳으로 인도하여 땅을 차지하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가?
배부르고 안전하게 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법도와 규례를 지켜 행하는 것임을 알게 하시려고(18-19). 잠시만 하나님을 벗어나면 스스로의 힘으로 안녕을 유지할 수 없는 곳에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라는 것이다.
물을 충분하게 가두어두고 필요할 때마다 가져다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늑대들(이민족)이 우글거리는 가운데 넣어놓고 '하나님만 의지할래 네 힘으로 막아볼래?' 하시는 셈이다.
하나님 외에 의지할 것이 많은 사람은 인간적으로 복이 많아 보이지만 진정한 행복을 누리기는 어렵다.
6년째에 충분한 소출을 보장해 주었음에도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은 안식년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서 토지는 강제로 안식년을 얻게된다. 토지가 어떻게 안식년을 누렸을까?
(스스로 답을 생각해본 다음에 다음 구절을 참고할 것. 레 26:34-36, 41-45, 대하 36:21, 렘 29:10)
이스라엘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감으로.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대하 36:21).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렘 29:10).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사람의 근본되는 목적이기도 하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는지 본문에서 근거를 찾아보자.
사람 사이에 바른 관계를 가지는 것(17, 36, 43). 적어도 이 본문에 따르면 형제를 억압하지 말 것, 형제를 돌아볼 것, 종이 된 동족을 엄하게 부리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역이 반드시 성립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사람과의 관계마저 바를 수밖에 없다.
장기판에는 일수불퇴란 말이 있고 고스톱 판에는 낙장불입이란 말이 있다. 오락이나 노름판보다 하나님의 법이 왜 이렇게 더 물렁하나? 왜 언제든지 물려주라고 하는가?
너희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기 때문이다(23). 너희가 가진 그 무엇이 절대적인 것이냐?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매사에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아야한다는 뜻이다. 땅도 하나님의 것이요 사람도 하나님의 것이다.
내 마음대로 해도 좋은 것이 아니다는 생각만 분명해도 사람 사이의 많은 문제는 저절로 해결된다.
성벽이 없는 지역의 가옥은 안되지만 성벽 안에 있는 가옥은 영구히 소유할 수 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의도일까?
성벽안에 있는 가옥은 어떤 면에서 고급주택이다. 희년이란 제도가 부자를 위한 제도가 아니다.
성벽안에서는 아무리 거주지를 넓혀도 크게 넓힐 수 없다. 제한된 범위 안에서 재산의 축적을 허용하는 셈이다. 그래도 레위인의 것은 영구히 살 수 없다.
흔히 하는 말로 돈놀이를 해서는 안된다. 형제에게 이자를 받지 말라(36)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은행은 문을 닫아야하나?
본문은 착취나, 고리대금을 통하여 가난한 형제(35)를 착취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오히려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라'는 것은 최소한 형제다움(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라는 말이다.
가난한 형제를 착취하지 말고 함께 살도록 도와주어야하는 이유는 같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주는 것'이 어떻게 같은 의미가 되는가?
필연적인 선후관계. 부자관계가 회복되면 아버지의 것이 동시에 아들의 것이 된다. 양자를 들였으면 다음에는 필요한 것을 주는 것이 당연하다. 출애굽해서 가나안을 준 것은 범죄한 인생을 불러내어 하나님의 나라에 들일 것에 대한 상징이다.
같은 하나님의 자녀가 너무 가난하게 되면 도와주어야 한다(35-38). 그래도 안되면?
사야한다. 일을 시켜서라도 돌보아야한다. 희년까지 생계를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동족 이스라엘은 영원한 종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일시적인 종도 안된다.
종으로 사서라도 종으로 다루지 말고 품군처럼 대우하라는 것은 여전히 형제를 돌아보라는 것이다. 특히 다른 민족에게 팔려가서 영구히 종이 되는 것을 금하는 것이다.
능력이 없는 동족을 철저하게 도와 주어도 돕는 사람이 기분 나쁘지 않으려면 무엇을 잊지 않아야할까?
자신들이 노예생활 하던 곳에서 하나님께서 공짜로 구해 주었음을 기억해야한다(38, 42, 55).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좀 다르게 살아야한다. 기도, 찬송, 예배가 다른 것이 아니라. 삶의 기준이 좀 달라야한다.
이방인을 샀을 경우에는 영구히 종으로 삼을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과 유대인을 이렇게 차별하면 되나?
인격적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냐 아니냐의 차이이다. 지금도 이런 차이는 상존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여전히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아주 쉬운 길을 열어놓으신 이상 이것은 비난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레위기 25장. 안식년과 희년. 은혜의 해.
안식년의 규례를 보게 됩니다(1~7).
안식년 규정은 미래에 소망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이 규정은 수고로운 노동, 살면서 안게 되는 빚과 같은 인생의 무거운 짐들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나는 안식이 올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바라보게 하였습니다. 또한 이것은 현실적으로 부유한 계층의 형성이나, 빚진 자들의 몰락을 막기 위한 장치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땅의 안식년인데, 땅을 그저 죽은 사물로 보지 않고, 인격화하여 말합니다. 땅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입니다. 7년째 안식년에는 조직적인 파종과 수확이 금지되었습니다(5). 하지만 사람들은(동물들까지도) 밭과 포도원에서 마음대로 가져다 먹을 수 있었습니다. 지주나 종들이나 똑같았습니다. 땅은 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자신의 생계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안식년 마다 뼈저리게 배우게 하신 것입니다. 또한 땅은 하나님의 것이며, 땅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공급이며, 그 풍성함은 나누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기억해야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년을 제대로 지킨 증거는 별로 없습니다.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단지 히스기야 때 지켜졌을 가능성이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왕하 19:29; 사 37:30). 나라가 망한 후 하나님께서는 지키지 않은 안식년을 소급해서 억지로 시행되게 하셨습니다(대하 36:21). 포로기 이후 구약과 신약 사이에 안식년이 지켜진 증거들이 있습니다. 인간이 이렇습니다.
희년은, 7번의 안식년을 지낸 다음 해인 50년째 해를 말합니다. 이것은 메시야 시대의 모형으로서 기능합니다. 사회에서 실패한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기회를 주고, 그들의 실패를 통해서 이익을 얻은 사람들에게는 얻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희년은 백성들에게 자기 소유가 일시적임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이 땅의 소유가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자기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지켜주심을 신뢰하고 삽니다. 희년의 규정에서 가장 기본적인 원리를 55절이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종들이 됨이라.” 땅만이 아니라 백성들도 결국은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법을 오늘날 적용할 때, 모든 소유가 일시적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욕심을 위해서 거짓을 행하며,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가면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희년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소망이 되었다면, 우리에게도 소망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종과 억압의 시대는 언젠가 반드시 끝나는 날이 있으며, 그리고 영원히 자유할 날이 오고 있습니다. 희년은 자유의 날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인 것을 알고, 자기의 것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사람, 내 배를 채우기보다는 가난하고 외로운 자의 가슴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으로부터 하나님의 나라는 진정한 자유의 나라로 이 땅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희년의 가르침입니다. 내 소유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청지기이며, 나그네일 뿐입니다. 모두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 각 사람에게 때로는 많게도 하시고, 적게도 하십니다.
하나님의 안식을, 우리의 안식이 되게 하셨으니,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안식을 나누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이 땅에 있다가 없어질 것에 욕심 부리고 가지려 하기보다, 기꺼이 하나님의 것을 나누려고 하는 마음을 갖게 하옵소서. 조금 더 넉넉하고 부요한 마음으로 오늘 하루도 하나님 앞에서,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안식년을 지키려고 한다면 반드시 제기되는 질문이 있습니다. 안식년에는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 6년동안 열심히 농사지어
열매와 곡식을 먹었는데, 농사짓지 않는 일곱째 해, 안식년에는 무엇을 먹을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하나님이 미리
대답해주십니다. 20-21절입니다.
“만일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가 만일 일곱째 해에 심지도 못하고 소출을 거두지도 못하면 우리가 무엇을 먹으리요 하겠으나 내가 명령하여 여섯째 해에 내 복을 너희에게 주어 그 소출이 삼 년 동안 쓰기에 족하게 하리라”
여섯째 해에 곡식과 열매를 거두고 나면, 그 곡식과 열매로 여섯째 해를 나고, 그 다음해인 안식년까지 먹어야 하며, 안식년
다음해인 여덟째 해에 파종하여 곡식을 거두기까지도 여섯째 해의 곡식으로 버텨야 하는데 하나님이 그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여섯째 해에 내 복을 너희에게 주어 그 소출이 삼 년 동안 쓰기에 족하게 하리라”
안식년을 갖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안식년을 지나고 농사를 지어서 소출을 얻기까지 3년을 살아가기에 충분한 소출의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하나님은 안식년이 일곱번 지나고 난 그 다음해 즉 오십년째 해를 희년으로 지키라고 명령하십니다. 10-12절입니다.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그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가꾸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이는 희년이니 너희에게 거룩함이니라”
한글 성경에 나오는 ‘희년(禧年)”이라는 뜻은 한문으로 복이라는 의미의 희(禧)와 해의 의미인 년(年)을 써서 복된 해라는
의미입니다. 희년에는 종에게 자유가 선포되고 가난과 여러가지 이유로 빼앗겼던 땅과 소유지가 회복되는 해이기 때문에 복된 해,
축제의 해입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규례가 13절 이하에 설명되고 있습니다. 13-17절은 토지가 본래의 주인에게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23-28절은 기업으로 물려받은 땅에 대해서, 29-34절은 성안과 성밖에 있는 가옥에 대해서,
35-38절은 가난한 채무자에 대해서, 39-46절은 종으로 팔린 이스라엘 사람과 이방사람에 대해서, 47-55절은 실제 사례를
들어 희년의 규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안식년과 마찬가지로 희년에도 농사나 파종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일곱번째 안식년이 지난
희년을 지낼 때는 4년을 육년째 해의 소출로 먹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계산으로는 전혀 가능해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은
50년째 해를 희년, 복된 해, 해방과 자유의 해, 축제의 해로 선포하십니다.
안식일, 안식년, 희년이 가능한 이유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공급하심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6장에서 하나님은 광야로 나와
먹을 것이 전혀 없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적으로 먹을 것을 공급하셨습니다. 전혀 먹을 것이 없는 광야에서 하늘로부터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하신 것입니다. 광야를 행군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댈 곳은 오직 하나님 뿐이었습니다. 그들이 일곱째 날
안식일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여섯째 날 일곱째 날까지 공급해주시는 하나님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일곱째 되는 날
쉬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여섯째 날에는 만나를 이틀치 먹을 만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일곱째 날에 만나를
거두려고 들판에 나갔던 사람들은 모두 허탕을 치고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그 공급하심을 신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리는 안식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은 헛수고를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공급하심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은 안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안식을 명령하시는 것은 안식을 위해 미리 준비하셨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길로, 우리 머리에 이해되지 않는 명령을 내리신다고 해도 거기에는 이미 하나님의 정확한 공급하심과
예비하심이 계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주일이라는 시간속에 일곱째 날을 정하셔서 쉼을 얻고 안식을 누리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쁨을 누리게 하십니다. 이를 위해 여섯째 날에 주의 공급하심을 예비하십니다. 하나님은 칠년째 되는 해에 쉼과
안식을 우리를 위해서 명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여섯째 해에 충분히 공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명령에 순종하면, 내가
살아가는 땅, 환경, 관계, 주변 사람들 까지도 쉼과 복을 얻습니다. 하나님은 50년째 되는 해에 희년을 선포하십니다.
시간과 사람, 땅과 자연, 그 안에 깃들어 있는 모든 것의 소유권을 지니신 하나님께서 땅과 사람과 그 안에 있는 것들을 얽매이고
있던 모든 것에서 부터의 자유를 선포하십니다.
가난으로부터의 자유,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원래의 소유, 땅, 가옥이
회복되고, 하나님이 한 개인과 가정, 가문에게 부여하신 원래의 목적과 계획대로 질서가 회복되고 자유가 회복되기를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 치밀하게 준비하시고 예비하십니다. 안식년, 희년의 규례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우리들에게 쉼을 주십니다.
자유를 주십니다. 우리에게 참 해방을 주십니다. 모든 굴레와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를 선포하십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자신이 자라나신 고향 나사렛에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사, 이사야 (사61:1이하)의 한 구절을 찾아서 읽으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희년)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누가복음 4:18-21)
그리고는 회당에 있는 모든 자들이 다 주목하고 있을 때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희년을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예비하심이 있으니 걱정 하지 마라’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 살아갈 걱정 때문에 짓눌리고,
목매어, 억압과 굴레속에 살아가는 자들에게 선포하십니다. ‘내가 공급한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과 기업의 은혜를 다
잃어버리고 죄의 노예로, 욕망의 노예로, 돈의 노예로, 가난과 질병의 노예로, 권력과 명예의 노예로 신음하며 살아가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예수님이 선포하십니다. ‘쉼을 얻으라, 자유를 얻으라,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 8:36)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의 해, 해방의 해, 회복의 해, 구원의 해, 새로운 시대, 희년을
선포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이 이끄시는 쉼과 안식의 자리로 나아가십시다. 안식년, 희년의 자리로 나아가십시다.
주님이 이끄시는 그곳에 주님의 예비하심이 있습니다. 주님의 공급하심, 주님의 능력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안식년과 희년의 규례를 통해서 쉼없이 살아가는 우리 인생에 안식을 주시는 분이, 우리에게 공급하시고
예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게하시고 깨닫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희년을 선포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안식과 쉼이 우리 인생가운데 풍성하게
하여주옵소서. 바둥거리며 우리 힘으로 살려고 하는 우리의 버거움을 내려놓고 주님의 공급하심과 예비하심을 바라보며 은혜의 날,
은혜의 해를 누리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누리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쉼과 안식, 평안과 기쁨, 회복의 은혜가 오늘
누군가에서까지 흘러가는 복된 날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레위기 24장 / 순결한 기름(2절)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감람을 찧어 낸 순결한 기름을 켜기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말고 등잔불을 켤찌며. Command the Israelites to bring you clear oil of pressed olives for the light so that the lamps may be kept burning continually.
감람 - 팔레스틴 지역에서 많이 자생하던 기름용 나무로 제사장, 왕, 선지자 등의 임명시 사용되는 순결한 기름이나 혹은 하나님의 거룩한 일에 소용되는 관유(8:2)등을 만들때 주로 사용되었다.
순결한 기름 - 여기서 '순결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자크'는 '투명한'(transparent) 혹은
'빛나는'(bright)이란 뜻이다. 곧 이것은 다른 이물질(異物質)이 전혀 섞이지 않은 순수하고 깨끗한 상태를 의미한다.
순결한(자크. 2134)
[zak] זַךְ
1. 정결한.
발음
/ 자크[ zak ] 어원 / 214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순결한(출 27:20, 레 24:2), 순수한(출 30:34), 정결한(욥 11:4, 16:17, 레 24:7), 청결한(욥 8:6, 잠 20:11), 깨끗한(욥 33:9, 잠16:2, 21:8) 구약 성경 / 11회 사용
* 2141. זָכַךְ
1. 순결하다. 발음
/ 자카크[zâkak] 관련 성경 / 깨끗하게 하다(욥 9:30), 깨끗하다(애 4:7) 구약 성경 / 4회 사용
따라서
일상 생활에서 흔히 사용되는 기름은, 감람 나무의 열매, 잎, 가지 등을 함께 으깨어서 만든 반면, 하나님을 섬기는데 사용된
순수한 기름은 오직 감람 열매만을 부수어서 짜낸 순결한 기름이었다(출 27:20).
끊이지 말고 등잔불을 켤지며 - 이것은 일차적으로 제사장이 성소 안에서 제사 활동을 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하고 또한
하나님의 성소를 빛 가운데 보존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여기서 끊이지 말고 불을 켜라는 명령은 하루 24시간 계속적으로 불을 켜라는
뜻이 아니라, 매일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저녁 무렵 불을 켠 후 다음날 아침까지 그 불을 꺼뜨리지 말고 잘 간검하라는
의미이다(출 27:20, 21). 한편 빛은 영적으로 복음을 상징하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행동이 계속되고
있음과 또한 역설적으로는 성도들이 복음의 진리를 밝히는 등대 구실을 하여야 함을 암시해 준다(마 5:14-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성막에 대한 규례 24:1-9 / 성소의 두 기구 24:1-4. 등잔불(등대, 메노라) 24:5-9. 진설병
24:10-22.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한 혼혈아이에 대한 처분을 중심으로 하는 인과응보의 원칙에 대한 말씀
24:10-16, 23.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할 자의 처형.
24:17-22. 살인 상해에 대한 배상의 규정.
24장은 성막에 대한 규례
등불과 진설병의 구속사적 의미.
성막의 기구들에 대한 규례는 이미 앞에서 언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장에서는 등불과 진설병에
대해 다시 한번 언급하고 있다. 이는 등불과 진설병이 구속사에서 그리스도를 예표하기 때문에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성소에는 원래
일곱 개의 등불이 놓여 항상 불을 밝혀야 한다. 이것은 죄로 인해 죽음의 어두움에 처해 있는 인간에게 구원의 빛을 밝힌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다. 또한 등불을 밝히는 기름은 성령을 의미하며 오늘날에도 성령은 끊임없이 복음의 빛을 밝혀 구원을 이어 가심을 말해
준다. 한편 진설병은 여섯 개씩 두 줄로 열두 개를 놓았다. 이것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헌신을 의미한다. 따라서 진설병은
하나님의 계획을 위해 자신을 드리신 그리스도의 헌신을 상징하고 있다. 또한 속죄 의식을 담당하는 제사장에게 공급되는 진설병은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며(요 6:35), 자신을 내어 줌으로 인간들을 구원하시고 생명을 주신
예수님의 사역을 예표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한 자는 외국인이든 본토인이든 돌로 쳐죽이라고 명령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는 생명의 근원이며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거부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은 비단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거나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죄를 짓는 자는 행동으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생활 속에서 자신의 행위가 혹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고 영광을 가리우지 않는지 돌이켜 조심해야 할 것이다.
먼저
2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등불을 밤 시간동안에 계속해서 켜둘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5절에서
9절은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하는 떡 열두개를 하나님 앞에 항상 진설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을 영원토록 잘 관리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성소의 구조상 떡은 등잔대의 정면에 놓여있습니다. 그리고 이 등잔불이 떡상의 떡을 항상 비추도록 하나님의 명령하신
것을 볼때, 이것은 분명 빛의 상징인 하나님과 떡의 상징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적인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함을 나타내는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성경은 이 관계를 언약으로 설명합니다. 즉 오늘의 말씀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맺은 언약이 영원함을 눈으로
보여주는 상징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3절, 8절, 9절에서 영원한 규례, 영원한 언약이라고 강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모습을 매일 매일 봄으로, 그리고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매일 신경써서 관리함으로 하나님의 임재로 인해 이스라엘이 살아갈수
있음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것입니다.
10절이하의 말씀을 읽으면 좀 이해가 어렵습니다. 갑작스럽게 한사람의 이야기로 집중하고 있는데다가 그 결과는 처참하기 때문입니다. 전형적인 구약의 엄격하고 무서운 하나님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런데
말씀의 구조를 자세히 보시면 하나님이 이야기 하고 싶으신 것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를 죽여라, 받은대로 갚아주어라” 라는 것이
아님을 알수 있습니다. 만일에 하나님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를 죽이라는 것이라면, 14절로 끝내시면
됩니다. 율법대로 죽었기에 더 고민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말씀에서 끝내지 않고 계속 말씀을 이어갑니다.
17절, 사람을 죽인자는 반드시 죽는다 18절, 짐승을 죽인자는 짐승을 갚아주어야 한다. 19절 이웃을 다치게 하면 나도 다쳐야
한다.. 무슨말입니까? 우리의 행동에 분명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를 넘어서서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는 행동을 했다면,
그것을 원상복구해야할 책임이 있다는 말입니다. 분명 이 말씀들은 죽여라 물어주어라 상하게 해라에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결과가 있으니, 사람의 생명을 해하지 말아라, 짐승을 함부러 죽이지 말아라, 남을 이유없이 해하지 말아라라는 말에 방점이
있는 것입니다. 결과는 확실하지만 그 결과로 우리를 겁박하시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라, 그 결과를 우리가 경험하지
않게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사실을 더 알려주십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울타리가 어디까지인가? 라는 사실입니다. 22절의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거류민에게든지 본토인에게든지 그 법을 동일하게 할 것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
하나님의
법은 혈통적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유효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그 백성과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동일하게 유효합니다.
하나님의 법이 동일하게 유효하다는 이 말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법이 적용된다는 사실은 그가 하나님의 관심속에 있다는
중요한 반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눈에 불신자 같고, 우리의 생각에 교회에 다녀서는 안될것 같은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자녀인
나와 함께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관심속에 있는 사람이라는 해석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이 불신자를 나에게
붙여주셨을까요? 왜 우리의 신앙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을까요? 오늘의 말씀을 통해 그들을 해석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관심속에 있음을 우리를 통해 알려주기 위해서라는 것도 생각해볼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살리심과 그에 따르는 책임에 방점이 있고, 그 법이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하는 모든 이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이 사실속에서 등잔불과 떡을 묵상해보기 바랍니다. 그러면 무엇이 보일까요?
그것이
바로 슬로밋의 아들이 하나님을 모독함으로 죽은 사건입니다. 유대인의 전승에 이 슬로밋의 아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 타국인의
장막터는 순수 이스라엘 혈통을 가진 자들의 장막터와 약간 떨어져 있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아버지의 혈통을 따라야 하는 관례상 이
여인의 아들도 타국인의 장막터에 장막을 쳤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좋은 곳은 아니었겠지요. 그래서 이 이들이 단지파의
지역에서 장막을 치려 했습니다. 어머니의 신분으로 보면 당연히 단지파에 들어갈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파
사람들에게 거부되었고, 결국 자신의 권리를 되찾고자 단지파의 어떤 사람과 격하게 싸우던중 하나님의 이름까지 모독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이 아들이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을 모독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아이러니 하게도 믿음이 과도하게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지경까지 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과 달랐던 겁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됨을
가치있게 여긴것이 아니라 자녀됨으로 얻는 권리만을 가치있게 여기고, 그 권리만을 요구한 것입니다.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겉은
신앙인인데 마음은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가져야할 거룩함, 정결함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매일 매일을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결과론적인 은혜와 복을 경험하는 것을 믿음의 최우선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됨, 그 자체가 주는 기쁨이 우리의 믿음의 시작이요, 전부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를 매일
경험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보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로, 오늘 이 시간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마음으로
삶을 해석할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권리가 주는 욕심에 빠져 믿음의 본질이신 주님을 잊어버리는 미련함을 버리고,
믿음의 기초이신 하나님을 만나는 이 새벽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레위기 24장의 구조
1절-9절, 등잔불과 진설병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성막 기구 중의 등반대와 등잔불, 그리고 진설병 상과 진설병을
관리하는 규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깨끗한 감람유를 가지고 오면 그것으로 등잔불을 켰으며, 아론과 제사장들은
등잔불을 계속 관리해야만 했습니다. 또, 진설병은 고운 가루로 떡을 굽고 열 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 두 덩이의 떡을 진설병 상에
올려 둡니다. 7일마다 떡을 교체하고 그 떡은 아론과 그의 제사장들이 먹어야 했습니다.
10절-16절, 신성모독과 처벌
이스라엘 여인과 애굽 남자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저주하며 이스라엘
사람과 싸웠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를 돌로 쳐서 처벌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저주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이고, 그 결말은 사형이기 때문입니다.
17절-23절, 각종 상해죄의 처벌
하나님께서는 또 사람을 죽인 자, 짐승을 죽인 자, 이웃에게 손해를 입힌 자 등에
대한 처벌과 관련된 여러 규정들을 말씀해 주십니다. 이 같은 규정의 말씀 후,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한 자를 진영 밖에 끌고 나가서
돌로 쳐서 죽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레위기 24장
1절-4절, 당신의 빛을 꺼트리지 마십시오
성소 내부에 있는 중요한 성물들 중에 하나는 등잔대와 그 등잔대로 켜는
등잔불이었습니다. 이 등잔불은 항상 켜져 있어야 한다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등불을 위해서는 순결한 감람유를
사용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기억하게 하는 순결한 감람유로 등잔의 불을 켰고, 그
불은 꺼트리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성소의 자리에 임재해 계시고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모든 백성들이
기억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신약 시대에는 우리 주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어두워진 세상에 빛을 비추시고 우리를
빛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고 빛이 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빛을 꺼트리지 말고,
세상에 빛을 비추는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갑시다.
5절-9절, 거룩한 떡을 함께 나누십시오
성소 안에는 등잔불과 더불어 진설병 12개와 그것들을 담는 상이 있었습니다. 12개의
떡들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하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으신 여러 언약들을 의미합니다. 이 떡들은 아론과
그의 자손들만 먹을 수 있었는데, 그들이 이스라엘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이 떡을 먹음으로써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서로 교제하며
동행한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생명의 떡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 안에 진정한 영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해 찢으신 주님의 몸을 기억하며 성만찬을 통하여 예수님과 온전한 교제를 지켜 나가야만 합니다. 거룩한
떡을 서로 나눌 때, 우리 안에 예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17절-23절, 눈은 눈으로 그리고 이는 이로
하나님께서는 악을 행하는 자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에 대한 규정을 주셨습니다.
그중에 특히 동해보복법이라고 부르는 규정을 주셨습니다. 이 규정은 해를 받은 대로 처리하는 법으로, 눈을 다치게 했다면 가해자의
눈을 상하게 하는 처벌규정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고 죄를 제거하라고 명령하셨기에, 동해보복법을 통하여 처벌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완성이 되시는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고, 원수를 축복하고 기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원수를 내가 갚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친히 원수를 갚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며 모든 처리를 하나님께 맡기는 지혜로운 성도가 됩시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가 공포하여 성회를 삼을 여호와의 절기는 이러하니라. Speak to the Israelites and say to them: 'These are
my appointed feasts, the appointed feasts of the LORD, which you are to
proclaim as sacred assemblies.
구약의 절기는 그림자이며 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골로새서 2:16-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 폄론(貶論) : 낮출 폄(貶), 논할 론(論) - 남을 깎아 내려 헐뜯음. 또는 그런 말. / 폄훼(貶毁)
안식일의 의미 - 천국을 경험하는 날 세상에서 안식의 맛을 누리지 못한 사람은 천국에서 안식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메누하 מְנוּחָה스트롱번호4496
1. 휴식, 2. 안식처, 3. 평안히 발음
/ 메누하[ menûwchâh ]
관련 성경 / 쉴 곳(창49:15, 시132:14, 미2:10), 위로(룻1:9), 평안한 곳(시132:8),
봉안(대상28:2), 거한 곳(사11:10), 안식(사66:1), 머뭄(슥9:1),태평(왕상8:56), 평안(대상22:9),
병참(렘51:59).
여호와의 절기와 세상의 절기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절기는 "과거의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라면 여호와의 절기는 "구속의 목적을 성취하려는 것" 이라고 하겠습니다. 레위기 23장은 유대인의 7대 명절을 말씀합니다. 모든 절기의 기본 정신과 신앙은 "안식일"에서 출발합니다. 안식일의 목적은 창조의 완성을 위한 재창조의 쉼이라고 하겠습니다.
나팔절(喇叭節) The Feast of Trumpet. 로슈 하샤나 나팔절 - 재림(再臨) 주님 다시 오시리라! 그리스도의 신부(열 처녀의 비유), 휴거
속죄일(贖罪日) Day of Atonement. 욤 키푸르 속죄절 - 심판(審判), 심판하리라! 알곡과 죽정이로 구분할 것이다. 신부(거룩한 세마포 예비)
초막절(草幕節) Feast of Tabernacles. 수콧(Sukkot) 초막절 - 새 하늘과 새 땅(新天地), 새 예루살렘, 천년왕국이 임하리라!
“절기”를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하그”와 “모에드” 라고 합니다.
2282. 하그(châg) חָג
1. 축제, 2. 희생 제물
발음
/ 하그(châg)
어원 / 2287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절기(출 10:9, 왕상 12:32, 말 2:3), 절일(출 32:5, 민 28:17, 시 81:3), 희생(시 118:27)
구약 성경 / 62회 사용
* 2287. חָגַג
1. 선회하다, 2. 춤을 추다, 3. 절기를 지키다
발음
/ 하가그(châgag)
관련 성경 / 지키다(출 12:14, 나 1:15, 슥 14:16), 구르다(시 107:27), 춤추다(삼상 30:16). [명] 성일(시 42:4), 절기(출 5:1, 23:14, 신 16:15).
구약 성경 / 16회 사용
“하그”는 “춤춘다” “순환한다”는 의미다. 매년 그맘때가 되면 예외 없이 절기가 돌아오며 주기적으로 순환하는 속성을 두고 불리는 명칭이다. 축제의 성격을 띠고 있기에 축제의 기본 요소인 춤춘다는 단어가 사용된 것이다.
4150 모에드(môwʽêd) מוֹעֵד
1. 정한 때, 2. 시간의 한 점, 3.시간의 공간
발음
/ 모에드(môwʽêd)
어원 / 325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계절(창 1:14), 기한(삼상 13:8, 시 102:13), 때(출 23:15, 수 8:14, 습 3:18),
회막(출 27:21, 레 24:3, 왕상 8:4), 성막(출 35:21, 40:2), 회막문(출 40:12, 민 16:18, 27:2),
성회(레 23:2,37, 겔 46:11), 절기(레 23:37, 민 29:39, 대하 8:13, 호 2:11), 절기제(민 15:3),
회중(민 16:2, 시 74: 4), 시기(민 28:2, 렘 46:17), 군호(삿 20:38), 날(삼상 13:11),
시간(삼상 20:35), 한 해(왕하 4:16), 회당(시 74:8), 기약(시75:2), 절기의 날(애 2:7, 호 9:5). [동]
돌아오다(왕하 4:17), 정하다(욥 30:23, 시 104:19).
구약 성경 / 223회 사용
* 3259. יָעַד
1. 지적하다, 2. 예레미야 47:7, 3. 사무엘하 20:5
발음
/ 야드(yâʽad)
관련 성경 / 상관하지 아니하다(출 21:8), 정하다(렘 47:7, 미 6:9), 주다(출 21:9),
만나다(출 25:22, 29:42, 느 6:2), 모이다(민10:3, 왕상8:5, 시48:4), 뜻이 같다(암3:3),
가다(느6:10), 서로약속하다(욥2:11), 거역하다(민14:35), 소환하다(욥9:19), 다투다(렘49:19, 50:44),
놓이다(렘24 : 1).
구약 성경 / 29회 사용
“하그”는 “춤춘다” “순환한다”는 의미다. 매년 그맘때가 되면 예외 없이 절기가 돌아오며 주기적으로 순환하는 속성을 두고 불리는 명칭이다. 축제의 성격을 띠고 있기에 축제의 기본 요소인 춤춘다는 단어가 사용된 것이다.
“모에드”는 “특별하게 정해진 시간”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정하신 “모에드”에 따라 공생애 사역을 하셨다.
요한복음 2:4,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성경은 이 절기를 ‘여호와의 절기’라고 밝힌다(레위기 23: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가 공포하여 성회를
삼을 여호와의 절기는 이러하니라. (Speak to the Israelites and say to them: 'These are
my appointed feasts, the appointed feasts of the LORD, which you are to
proclaim as sacred assemblies.)
이스라엘 민족의 절기가 각 민족의 절기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왜 그럴까요?
첫째, 이스라엘의 절기는 여호와 하나님이 직접 제정하셨다. 따라서 과장이나 꾸밈, 조작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둘째, 사건과 절기의 순서가 다르다.
즉, 다른 민족의 절기는 사건이 발생한 뒤 그 사건이 일어난 날짜를 기념해 생겨났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경우 먼저 절기가 만들어지고 그것에 맞춰 사건이 발생했다. 이스라엘 최대 절기인 유월절을 예를 들어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애급에 대한 10가지 재앙 중 마지막 ‘장자의 죽임’이 임할 날짜를 이스라엘 민족에게 미리 알려주셨다. 그리고 재앙을
피할 수 있도록 집집마다 양을 잡아 그 피를 인방과 설주에 바르도록 하셨다. 죽음의 신이 이스라엘의 집에 넘어가도록 정하셨고 이를
유월절로 제정하신 것이다.
레위기 23장엔 이스라엘의 7개 절기가 언급돼 있다.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칠칠절, 나팔절, 속죄절(대속일), 초막절 등.
이는 하나님이 진행하실 인류 구속사의 파노라마를 보여준다. 절기에는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과 프로그램이 암호화돼 있다.
유월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무교절은 그리스도의 친교를, 초실절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칠칠절(오순절)은 그리스도와 성령의 임무 교대를, 나팔절은 그리스도의 강림을, 대속죄일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초막절은 그리스도의 심판을.
본절은 본장 전체의 서론 부분으로 본장의 내용이 여호와의 절기에 관한 것임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민 28,29장과
본장에는 구약 시대에 지켜진 이스라엘의 공식 절기가 거의 모두 열거되어 있는데, 절기를 이처럼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절기들을 통하여 인류의 역사에 직접 개입하시는 당신의 구원 행동을 백성들에게 깨우쳐 주고 둘째, 각 절기가
갖고 있는 상징적 의미 및 구속사적 중요성을 백성들에게 일목요연하게 가르치기 위함이다.
성회(미크라 코데쉬)
'거룩한 모임들'이란 뜻으로 앞으로 언급될 모든 절기를 총칭하는 말이다.
히브리인들은 이 날에 아무 노동도 하지않고, 안식일처럼 거룩하게 여호와의 은혜와, 구원을 찬양하고 기념하면서 지냈다.
여호와의 절기
'절기'(모에드)는 '지정하다'(appoint), '만나다'(meet),
'소집하다'(summon), '고정하다'(fix)란 뜻을 가진 '야아드'에서 파생된 말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키라고 특별히 그 시기를 정해놓은 '축제일'(festival)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축제일은 단순한 휴식이나 육체적 쾌락을
위한 날이 아니라, 영적 각성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하여 하나님께 헌신하는 날이다.
이스라엘에는 민간력과 종교력이 있는데 본문은 종교력으로 표시되어 있다. 종교력으로 1월은 민간력으로 7월이고, 태양력으로는 3, 4월에 해당한다. 수확기도 우리와 다르다.
1월에 보리(봄), 3월에 밀, 5월에 여름실과, 6월에 포도, 7월(가을)에 밭갈기, 8월에 파종, 9-11월은 겨울이다.
제사에 사용되는 용어를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레위기를 읽을 때 어려움이 있다. 제사의 분류는 어떤 기준으로 나눠 놓은 것인지 생각해보자.
하나님께서 명하신 절기는 전부 몇 개인가? 또, 절기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적당한 이름을 생각해내든지 아니면 작명을 해보자.
안식일(3, 매주) 7대 절기 : 유월절(5, 1월 14일), 무교절(6, 1월 15-21), 첫 이삭을 바치는 날(10, 초실절), 50일 되는 날(3월 10일 경, 칠칠절, 맥추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일,
장막절(7월 15-22, 수장절, 초막절).
3대 절기는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
이스라엘의 각종 절기는 무엇하는 날인가? 절기를 지키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성회로 모이는 것(2, 3, 4, 7, 8, 21, 24, 27, 35, 36, 37) 일하지 말라(3, 7, 8, 21, 25, 28, 31, 32, 35, 36)는 것도 답이 되겠지만 성회로 모이는 것을 정답으로 하는 것은 일하지 않는 것은 안식의 소극적 표현이고
성회로 모이는 것은 안식의 적극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일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성회(축제의 성격을 띤)로 모여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2절을 보면 성회가 중요한 것을 알 수 있다.
성탄절의 주인공은 당연히 예수님이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예수님 대신에 산타가, 교회대신에 백화점이 더 주인공 같이 행세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절기에는 누가 주인공일까?
모든 절기는 여호와의 절기다(2). 여호와께서 제정하시고 여호와께서 하신 일을 기억하기를 바라고, 여호와께 감사를 드리고,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절기의 목적은 여호와와 관계를 회복, 유지, 발전시키는 것이다.
일주일씩 지키는 절기는?
무교절(8, 다음 제 7일이 안식일), 초막절(36, 다음 제 8일이 안식일)
가장 중요한 절기이며 가장 먼저 제정되었으며 특정한 날을 정하지 않고 계속 지켜야 하는 절기는?
안식일 : 가장 기본적인 절기이다. 하나님과 함께 안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이기 때문이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6일 동안 열심히 일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누린 그 기쁨을 함께 누리는 날이며 그 안식을 잃어버린 우리에게는 다시금 되찾을 영원한 안식을 바라보며 맛을 보는 날이다.
두 번째로 제정되었으며 어린 양의 피를 보고 죽음의 천사가 그냥 지나간 것을 기념하는 절기는?
유월절 : 어떠한 사람인가라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피를 바른 집안에 있기만 하면 그가 어떤 죄인이었건 상관없이 살아났다는 것은 우리의 구원이 바로 그런 것임을 잘 보여준다.
나의 공로나 선함 때문이 아니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피, 즉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여 구원을 얻게 되었다.
세 번째로 제정되었으며 이스라엘이 출애굽 시에 다급하여 빵을 부풀리지 못한 채 나온 것을 기념하는 절기는?
무교절 : 딱딱한 무교병을 일주일씩이나 먹으면서 과거의 그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다. 이런 행사가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고, 한 민족으로 단단하게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잊었다는 것은 정말 불가사의다.
자신의 능력이나 노력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주시기를 기도하자. 유월절과 무교절은 연속되는 것이기 때문에 나중에는 서로 혼동되어 나타난다.
'기한에 미쳐' 란 말은 '특정한 날짜가 되거든'이란 뜻이다. 특정한 날짜가 명시된 절기는 어떤 것이 있는가?
1월 14일 : 여호와의 유월절 1월 15-22일 : 여호와의 무교절, 첫날(15일, 무노동)과 일곱째날(21일)은 성회로 모임, 7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 것과 화제를 드릴 것, 7월 1일 : 나팔절, 신년 축제일이다. 7월 10일 : 속죄일 7월 15-22일 : 수장절, 초막절, 장막절; 한 해의 결실을 저장하고 자신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절기이다.
1월 1일부터 30일까지 전혀 일하지 않아야 하는 날은 며칠인가?
5일 : 7, 14, 15, 21, 28로 네 번의 안식일과 무교절 첫날(15일)이다.
첫 이삭을 드리는 제사의 시기를 알 수 있는 말은 11절에 '안식일 이튿날에'라는 말이다. 이 안식일은 어느 안식일을 가리킬까?
무교절의 끝에 있는 안식일이다. 결국 세 절기가 붙어 있는 셈이다.
첫 이삭을 드릴 때 드린 제사도 번제, 소제, 전제로 만만치
않은데 50일이 지나서 또 새 소제를 드리라는 데 함께 드리는 제사는 더욱 성대하다. 새 소제(고운가루 에바 10분의 2)를
누룩을 넣어 구운 떡 두 개를 요제로 드리고,
번제(어린 양 7, 젊은 수소1, 수양2)를 화제로, 전제, 속죄제(수염소1), 화목제(어린 수양2)를 드린다. 이중과세에
세율이 너무 높은 것 아닌가? 11절의 첫 이삭과 19절의 첫 이삭은 같은 걸까?
다르다. 아무래도 전자는 작은 추수같고, 후자는 큰 추수인 것 같다 : 수확기를 아는 유대인들에게는 이렇게만 해도 알아듣지만 우리에게는 다소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전자는 초실절로 보리,
후자는 칠칠절(五旬절, 맥추절)로 밀을 수확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하나님은 이유없이 이렇게 제사를 드리라는 분은 아니다. 제사의 종류만 다른 것이 아니라 후자의 경우에는 성회로 모이라고 하고
더구나 추수 때의 유의사항이 따로 기록된 것을 보아도 더 큰 추수인 것을 알 수 있다. 이 예물을 드리고 추수를 시작했을까? 추수를 마치고 이렇게 드렸을까? 제물이 많은 것은 제사장을 위함인가(20)?
위의 제사에서 드리는 제물이 많은가? 적은가?
개인이 드리는 제사라면 나중 제사는 제물이 많은 편이다. 공동체에서 드리는 제사라면 그리 많은 것은 아니다. 제사는 제물이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거의 잊혀져가는 것이지만 예전에는 집안의 어른이 먼저 숟가락을 들기 전에 아이들이 숟가락 드는 일이 없었다. 이런 풍습은 이어가도 좋은데...
흔히 누룩은 죄를 상징하는 것이라서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으로 설명하는데 여기 번제를 드릴 때 함께 드리는 떡은 누룩을 넣어서 구운 것이다(17).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암소는 번제에 사용할 수 없지만 화목제에서는 허용한다. 제사의 성격에 따라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것이다. 고생하던 날을 기억해야 하는 무교절에는 무교병을 먹으라고 하셨지만 이 제사는 하나님께 드리지만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절기이기 때문에 번제가 아닌 요제로 흔들어 드리고(17, 20) 제사장에게로 돌렸다(20). 하나님께서 자신의 입장대신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신 것이다. 이혼의 문제도 본래는 허용된 것이 아니지만
여인을 위하여 허용한 것이다(마 19:8).
수확기는 일년 중 가장 즐거운 날이다. 이런 때일수록 가난한 자를 돌아보아야 한다.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하여 떨어진 것이나 모퉁이를 그냥 버려두라는 것도 고마운 말씀이지만
그보다는 깔끔하게 추수해서 돈이나 현물로 돕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가난한 자의 체면, 노력을 위함이다. 남을 도울 때에도 도움을 받는 사람의 입장을 최대한 고려해야한다. 주는 사람이야 자랑스러울지 몰라도 받는 사람 편에서는 결코 자랑스럽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 아닐까?
1월 7일이 안식일인데 7월 1일을 안식일로 삼으라면 요일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만약 한 달을 30일로 잡으면 7월 2일이 안식일이 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어떻게 해결하면 될까?
특정한 날의 요일을 먼저 고정시키고 일년을 364일로 하면 된다. 윤달처럼, 윤주를 넣던지.
스스로 괴롭게 하는 게 어떻게 하는 것일까? 자해?
죄를 회개하며 근신하는 것 : 좋고 편안한 환경을 떠나 거친 음식과 거친 환경에서 지나는 것, 625음식이라면서 주먹밥을 나누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안식일이 아닌데도 일하지 않는 날은 무교절 첫날이다. 그 외에 또 있는가?
7월 10일 속죄일이다.
스스로 괴롭게 하는 날은 언제이며 즐거워하는 날은 언제인가? 비교하면 무슨 차이가 가장 커 보이는가?
스스로 괴롭게 하는 날은 7월 10일 하루인데 즐거워하는 날은 7월 15일부터 일주일간이다.
구약에서 나팔을 부는 경우는 전쟁이 일어났을 때나 특정한 날임을 선포하는 경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소집하는 경우에도 나팔을 불었다(출 19장). 7월 1일에는 무슨 이유로 나팔을 불고 기념하라고 했을까?
신년의 도래를 알리는 나팔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한 해를 기쁨으로 맞이하는 절기이다. 희년에도 나팔을 불었다. 모든 것이 원상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종으로 팔린 사람이 놓여나고 빼앗겼던 땅도 돌아오는 날이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에도 나팔 소리가 울려퍼질 것이다.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알린다.
37-38절을 근거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을 두 종류로 나누어 보자.
절기예물(단체로, 의무) 일반예물(개인적, 수시, 자원); 개인적인 헌신과 작정에 따르는 것.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 가지와 무성한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즐거워하라(40)는 것은 어떻게 즐거워하라는 말인가?
과일은 먹고 다른 가지로는 초막을 짓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라는 말이다. 찬송할 때 종려 가지를 들고 흔들었던 적이 있다. 이 초막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지낸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내가 바로 5파운드야!' 학기초만 되면 이렇게 자신의 별명을 소개하는 선생님이 계셨다. 5파운드는 야구 배트를 가리키는 말이다. 별명만 듣고도 아이들은 주눅이 들어버렸다.
폭력교사는 아니고 학생주임으로 지혜로운 분이었다. 하나님께서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고 하시는데 본문에서 이 말이 주는 느낌은?
문맥을 무시한다면 강압적이고 고압적인 느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맥에서 본다면 결코 아니다. 가난하고 불쌍한 자를 결코 잊지 않으시며 돌아보시는 분이란 뜻이다(22, 43).
하나님께서 이렇게 폼을 잡고 나서면 가장 두려운 것은 가난하고 힘없는 자를 돌아보았는지 살펴 보아야 한다.
민수기 28, 29장에도 절기에 관한 상세한 기록이 있다. 하나님께서 성경의 곳곳에서 절기에 대한 말씀을 자주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절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끼고 확인하라는 것이다 : 대부분의 절기가 출애굽과 관련되어 있다. 심지어 추수 감사도 '우리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땅을 주셔서...'라는 것이 중요한 부분이다.
우리의 생각 속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워하셨다는 감사가 끊이지 않아야 한다. 기념하라는 말씀이 많이 나오는 것과 동일하다. 특정한 날을 기억함으로 흐트러진 공동체의 결속력을 다지고, 영적으로 각성케하는 것이다.
가정에서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될 수 있다. 가정을 위해서라도 기념일을 잊지않고 챙기는 것이 좋다.
앞에서 각종 제사는 예수님과 관련이 있음을 보았다. 본문의 각종 절기도 예수님과 어떻게 관련되고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는 예수님의 피를, 무교절의 무교병은 세상에서
연락(宴樂)대신 거친 길이라도 걷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해준다. 나팔절의 나팔소리는 예수님의 재림 때 울려 퍼질 나팔소리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면 초실절에 하나님께 바치는 첫 이삭은 다음 구절을 참고해서 예수님과 관련지어보자.
사 53:2, 눅 2:7; 보리 이삭은 곡식 중에서는 별로 볼 품이 없는 축에 속한다. 고전 15:20; 첫 열매를 뒤이어 많은 곡식을 거두게 된다. 마 28:1, 요 20:19, 행 20:7; 예수님을 안식 후 첫날에 부활하셨고 이 날을 기념하여 주일이 되었다. 첫 이삭을 바치던 날이 바로 안식일 다음 날이었다.
1에바는 약 23ℓ, 1힌은 약 3.7ℓ
1. 안식일 2. 유월절 3. 무교절 4. 초실절; 첫이삭(보리) 단을 바치는 절기(유월절 절기 중의 안식일 다음날)
안식일 다음 날 첫 수확한 곡식의 첫 이삭 한단을 흔들어 드릴 것, 번제(수양), 소제(기름 섞은 고운가루 에바 10분의 2),
전제(포도주 4분의 1 힌)를 아울러 드릴 것, 제사장이 드림, 드리기 전에는 떡이든지 볶은 곡식이든지 생 이삭이든지 먹지 말 것 5. 칠칠절 (맥추절, 오순절) : 밀의 수확과 관련
새 소제(고운가루 에바 10분의 2)를 누룩을 넣어 구운 떡 두 개를 요제로, 번제(어린 양 7, 젊은 수소1, 수양2)를 화제로, 전제, 속죄제(수염소1), 화목제(어린 수양2)를 요제로(다섯 가지 제사를 드린다15-21) 6 나팔절 : 신년도래 (나팔 부는 절기는 뭐야? 어떨 때 나팔을 불렀지?) 7. 속죄일 : 7월 10일 8. 장막절(수장절, 초막절) : 광야에서 장막생활을 기념하는 절기
유월절(逾越節) Passover. 페사흐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리신 마지막 재앙으로 인하여 애굽인들의 장자가 죽임을 당한데 반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문설주에
바른 피에 의해서 구원함을 받음으로 재앙이 지난 것을 기념하는 축제이다(레위기 23:5)(민수기 28:16)(신명기 16:1).
절기의 시작은 1월 14일 저녁부터 시작되었다(레위기 23:5).
이 때 준비한 흠없고 1년된 어린 숫양을 14일에 무교병과 쓴 나물을 함께 먹었다(출애굽기 12:3-8).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를 말하며 이와같이 그리스도와 함께 죄인들의 연합을 의미한다.
유월절 희생양은 흠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시하고 갈보리 십자가의 대사건을 상징한다(마태복음 26:2) (다니엘 7:26).
다니엘 7:26 그러나 심판이 시작된즉 그는 권세를 빼앗기고 끝까지 멸망할 것이요.
마태복음 26:2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
무교절(無酵節) The Feast of Unleavened Bread. 하그 하마쵸트
애굽으로부터 급히 빠져 나왔던 이스라엘 백성이 누룩없는 무교병을 먹으며 고생을 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축제이다(출애굽기 23:15) (레위기 23:6).
무교병은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희생과 봉사를 의미한다(출애굽기 12:16-20).
절기의 시작은 1월 15 - 21일까지 7일간 번제와 속죄제를 드린다(민수기 28:19-24). 7일간 무교병을 먹고 2일간은 곡식단을 흔들고 매일 번제를 드렸다. 그리고 첫날
과 마지막 날은 성회로 모이고 노동을 금했다(출애굽기 12:15-20).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성도들을 위해 찢기심과 그의 부활에 대한 상징이며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생명과 부활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주는 것으로 나타낸다(에베소서 1:21-22)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무교절은 죽으신 예수님께서 무덤에 안장된 사흘의 기간을 의미합니다.
초실절(初實節) Feast of Firstfruits. 비쿠림
첫 곡물(보리 수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첫 곡식단을 봉헌하는 축제이다(레위기 23:10) (출애굽기 23:16).
이 절기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다음에야 지켜질 수 있었다. 왜냐하면 광야에서는 농사를 짓지 않았으므로 수확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안식일 다음 날에 그리스도는 부활하셨다(마가복음 16:2). 그리스도는 부활의 첫 열매로서 성도들의 부활의 보증이 되심을 나타낸다(로마서 8:23). 하나님께 바쳐진 첫 이삭단은 성도와 교회를 암시한다.
절기의 시작은 무교절 후(안식일 다음 날)에 곡식의 단을 거두어 흔들고 번제와 소제를 드리며 예물을 드리기 전에는 먹지 말아야 한다(레위기 23:13-14). 이는 신약교회의 이방인의 추수를 상징한다(로마서 11:25) (요한계시록 14:4)
초실절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맥추절(麥秋節) The Feast of Harvest. 칠칠절, 오순절. Pentecost. 칵 학카칠
초실절을 드린 후 7주(50일째) 되는 날의 절기이다. 구약의 맥추절 또는 칠칠절인 절기가 신약적 의미로 변화되어 완성된 것이 오순절이다.
곡물 수확의 마지막 날로 지정하였고 곡식의 첫 열매(밀 수확)를 바치는 봄 절기인 축제이다(출애굽기 34:22) (레위기 23:15) (신명기 16:8).
절기의 시작은 안식일 다음날 초실절 후에 50일 째에 소제로서 떡을 흔들고 번제, 속죄제, 화목제와 요제를 드렸다. 이 날은 성회로 공포되고 노동을 못하게 하고 오직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의 은총만을 사모할 수 있도록 하였다(레위기 23:21).
신약에서는 성령강림절이라고 불리운다. 예루살렘 회심의 유형이며 갈보리 십자가의 첫 열매를 의미하며 마지막 때의 대추수를 상징한다.
오순절은 성령강림 때에 임하시는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나팔절(喇叭節) The Feast of Trumpet. 로슈 하샤나
역사적으로 이 축제는 시나이 반도를 기념하며 나팔을 불어 성회에 모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축제이다(레위기 23:24) (민수기 29:1).
절기의 시작은 유대교 일력으로 7월 1일 시행되었는데 이 날은 안식일이었고 그들은 성회로 모여 여호와께 화제를 드렸다.
이스라엘의 재결합에 의미를 두고 있다. 7 이라는 숫자의 신성에 의한 인간력 새해 시작을 기념하는 날이다.
절차는 일반 월삭보다 더 큰 규모의 희생제사를 거행했다(민수기 29:6). 나팔을 불어 알리고 번제와 소제와 속죄제를 드렸다.
이 절기의 나팔소리는 마지막 날에 공중강림과 휴거를 상징한다(데살로니가전서 4:14-17) (요한계시록 11:14-19).
나팔절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속죄일(贖罪日) Day of Atonement. 욤 키푸르
이스라엘의 죄들이 사함받은 날로 그날은 금식하며 일년 중 가장 기쁜 날의 축제이다(레위기 16:3)(레위기 23:27)(민수기 29:7).
절기의 시작은 유대인 일력의 7월 10일 안식일날로 성회에 모이고 노동을 금했다. 이 속죄일의 집행자는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이스라엘의 속죄를 위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레위기 16:34). 이스라엘의 현재의 비애와 미래의 기쁨을 말하며 온 백성의 죄를
속죄하며 성소를 정결하게 하였다(히브리서 9:12-14).
절차는 모든 백성은 금식하고 쉬며 번제와 소제를 드리고 속죄를 위한 염소를 잡아 피를 뿌리고 아사셀 염소는 광야로 보냈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예표하며 마지막 때 남은 자들의 대속죄와 지상재림을 상징한다(마태복음 24:30)(요한계시록 19:11-21).
초막절(草幕節) Feast of Tabernacles. 수콧(Sukkot)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천막생활을 인도하고 보호하신 은혜를 기념하는 축제이다(출애굽기 23:16) (레위기 23:34) (민 수기 29:12) (신명기 16:13).
절기의 시작은 7월 15 - 21까지 7일간 계속되었고 그 다음날은 안식일이었다.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려나무나 감람나무 가지를 취하여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했다(레위기 23:40). 토지 소산의 과일 추수를 마칠 때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새벽에는 해맞이와 관련된
의식과 아침에는 현수의식 그리고 밤에는 축제의식을 가졌다.
절차는 초막에서 7일간 거주하며 매일 번제와 소제를 드리고 여덟 번째 날에는 성회로 모인다. 이스라엘의 메시야왕국(천년왕국)에 대하여
상징한다(다니엘 9:24) (베드로후서 2:9) (데살로니가전서 4:16-17) (마태복음 24:42-44) (요한계시록 20:3-6).
초막절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임하시는 예수님의 의미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레위기 22장 / 성물(2절)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그들로 이스라엘 자손이 내게 드리는 성물에 대하여 스스로 구별하여 내 성호를 욕되게 함이 없게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Tell Aaron and his sons to treat with respect the
sacred offerings the Israelites consecrate to me, so they will not
profane my holy name. I am the LORD.
제사장의 음식은 여호와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 중 제사장의 몫으로 구별한 것들입니다. 제사장의 몫으로 구별되었다고 해서 제사장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사장이라도 부정하게 된 사람은 성물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제사장이 부정하게 되는 경우는 백성들이 부정하게 되는 경우와 다르지 않습니다. 제사장의 가족과 식솔은 성물을 먹을 수 있었고, 성물을 먹을 수 없는 사람이 모르고 성물을 먹게 되었을 경우에는 속건제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바쳐진 성물을 더럽히는 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22:17-33. 제사에 바쳐지는 제물에 대한 규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물로 바치는 것을 제사장이 먹을 수 있는 것은 "지성물"이라고 합니다. 제사장과 그의 가족들이 먹을 수 있는 것은 "성물"이라고 합니다. 레위인은 기업을 받지 않기 때문에 백성들이 바친 제물 중에서 하락된 것을 먹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레위기 22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인 1-16절은 제사장의 음식(성물) 규례입니다.
제사장의 음식은 여호와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 중 제사장의 몫으로 구별한 것들입니다. 제사장의 몫으로 구별되었다고 해서 제사장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사장이라도 부정하게 된 사람은 성물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제사장이 부정하게 되는 경우는 백성들이 부정하게 되는 경우와 다르지 않습니다. 제사장의 가족과 식솔은 성물을 먹을 수 있었고, 성물을 먹을 수 없는 사람이 모르고 성물을 먹게 되었을 경우에는 속건제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바쳐진 성물을 더럽히는 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부분 17-33절은 제사에 바쳐지는 제물에 관하여 말씀합니다.
이 단락에서 반복되는 표현은 “열납되도록”이라는 말입니다(19, 20, 21, 23, 25, 27, 29절).
'기뽐을 주다', '받아들이다'란 뜻의 '라차'에서 유래한 말로, 제물을 드리는 자가 그 제물을 통하여 '하나님께 참된 즐거음 드릴 수 있도록' 드리라는 의미이다.
흠없는 수컷
여호와께 드려지는 모든 희생 제물이 갖추어야 될 기본적인 조건이다. 이러한 조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지
않고 자기 자신이 자원하여 드리는 경우에도 적용되어졌다. 첫째,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 둘째, 자원하여
드리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순수한 신앙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
이와 같은 것은 오늘날 성도
역시 자원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때, 거룩한 마음과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흠 없는 정결한 상태로 오직 하나님만 위하여
자신을 드려야 함을 암시한다(롬 12:1).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제물이 무엇이며 기뻐하지 않는 제물이 무엇인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제물은 흠이 없고 온전한 제물입니다.
이것은 단지 제물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온전한 마음에 관한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은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제사이기에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해야 합니다.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는 온전해 질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만 가능합니다. 온전하신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의 삶과 예배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물이 될 수 있습니다.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는 제사장
시므온은 나이가
42세인 제사장이다. 어느 날 그는 나귀를 타는 중에 실수로 떨어졌는데 불행히도 다리가 심하게 부러져 영구히 불구자가 되었다.
신체의 문제로 인해 그는 레위기 규정을 따라 더 이상 제사장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규정에 의하면 앞을 보지 못하거나
다리를 절고 손발이 부러진 불구자는 ‘흠’을 지닌 이유로 제사장으로서 성소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집에서
한가로이 하루하루 보내던 시므온은 삼촌인 제사장 엘리에셀이 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시므온은 오래도록 그를 존경했으며 깊은
교분을 나누었으나 그 장례에 참여할 수 없었다. 레위기 규정상 제사장은 직계 가족의 장례만 참여하고 집행할 수 있으며 그 외에는
어떠한 장례식도 참여하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레위기 21~22장은 이러한 제사장의 자격과 의무를 다룬
규정이다. 이것은 제사장이라는 주제로 8~10장과 대칭을 이룬다. 8~10장이 제사장 위임과 더불어 제사장들의 첫 제사와 실패한
제사를 이야기하고 있는 반면, 21~22장은 제사장의 자격과 준수사항, 그리고 결격사유가 되는 신체적 흠과 그들이 분별해야 하는
짐승의 흠에 관해 다룬다.
제사장의 장례와 결혼 규정
시체는 전염성이 강하므로 장례의 절차를 진행하는
사람들이나 전쟁에서 시체와 접촉한 사람들에게 필연적으로 중대한 오염을 유발했다(민 19:11~22). 따라서 성소의 직무를 위해
구별된 제사장들은 장례식을 집행할 수 없음은 물론 장례에 참여하는 자체가 금지되었다.
다만 일반 제사장들은 직계
가족들의 장례는 치를 수 있었으나(레 21:1~4) 가장 높은 거룩성을 유지해야하는 대제사장에게는 그마저 엄중히 금지되었으며,
심지어 부모의 장례조차 허용되지 않았다(레 21:10~12). 일반 제사장들의 경우 그의 집안에서 출가한 여자는 이미 다른 집안의
가족이므로 그녀의 장례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직계 가족 중 미혼인 여성들의 장례는 그가 모두 책임져야 했다. 마찬가지로
1~4절에서 제사장의 아내의 장례가 언급되지 않은 것은 시집 온 그녀는 당연히 제사장의 직계 가족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21:4은
해석상의 논란이 있는 구절이다. “제사장은 그의 백성의 어른인즉 자신을 더럽혀 속되게 하지 말지니라”는 문장에서 ‘어른’ 혹은
‘주인’을 뜻하는 히브리어 바알(baal)은 ‘남편’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에 근거하여 혹자는 남편된 제사장이 자신의 아내의
집안사람의 장례에 관여해서 제사장이 부정케 되는 일이 없도록 금지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경우 ‘백성’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암(am) 범위는 아내의 집안으로 제한된다.
그러나 4절은 1절과 평행을 이루는 구절이다. 1절이 제사장이 백성의
장례에 참여하지 말라는 원론적 금지 조항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4절 또한 포괄적인 금지 규정일 것이다. 즉 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의 장례에 관여하거나 참여해선 안 된다. 이때 바알은 ‘남편’보다는 ‘백성의 어른’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따라서 이
구절에는 제사장이 백성의 장례에 관여하여 자신을 더럽히면 백성 전체를 더럽히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의미가 내포된 듯하다.
5~6절
또한 장례 관행과 관련된 규정으로, 레위기 19:27~29과 신명기 14:1의 규정과 관련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장례 때
머리털을 밀고 수염을 깎는 것이 허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스 9:3; 욥 1:20; 렘 7:29; 16:6; 겔 27:31).
하지만 제사장들에게는 직계 가족의 장례를 치를 때에도 이런 두발 모양이 허용되지 않았다. 대제사장들은 금지된 애곡 행위, 곧
옷을 찢고 머리를 푸는(10절) 행위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해선 안되었으나 일반 제사장이라면 가능했을 것이다. 참고로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신 14:1)는 명령에서 금지된 면도 방법은 이방의
관행으로 보인다. 한편, 몸에 상처를 내고 문신하는 애곡 행위는 일반 백성과 제사장 모두에게 허용되지 않았다(렘 41:5;
48:37).
정리하자면, 이스라엘에서는 몸을 베거나 눈썹 사이 이마 위 털을 밀거나, 몸에 상처를 내는(문신) 애곡
행위는 이방 관행으로 전적으로 금지되었다. 반면에 머리털을 밀고(깎고) 그것을 풀고 수염을 깎고 옷을 찢고 베옷을 입으며 재를
머리에 뿌리는 관행은 허용되었다. 일반 제사장은 더 엄격해서 머리털을 밀고 수염을 깎는 것이 금지되었고, 다만 옷을 찢고 머리를
푸는 애곡은 허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제사장은 그 어떤 애곡 행위도 금지되었다. 제사장들에게 적용되는 결혼 규정 역시
엄격했다. 일반 제사장들은 창녀나 이혼녀와 결혼할 수 없었는데(아마 과부는 가능했던 것으로 보ㅇ니다), 또한 그만큼 자신의 딸도
철저히 관리해야 했다(9절). 그러나 대제사장은 반드시 처녀를 아내로 삼아야 했다(7절, 13~14절).
제사장의 흠과 짐승의 흠
이어지는
단락은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가려면 갖추어야 하는 신체적 자격요건에 관한 것이다(레 21:18~20). 흥미롭게도 제사장이 성막 내
업무를 처리할 수 없게 만드는 신체적 흠들 12가지(레 21:18~20)와 희생에 부적격한 짐승의 흠들 12가지(레
22:22~24)가 나란히 명시된다. 이 특징들은 지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할 수 밖에 없으나 주목해야할 점은 이 중 네 가지
흠만이 제사장과 희생 짐승에게 공통적이고 나머지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과 짐승의 생물학적 차이와 신체에 나타나는
증상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제사장과 짐승의 흠의 목록이 각각 12가지인 이유는 아마도 12라는 숫자가 ‘완전성의
의미’를 지녔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흠들이 굳이 각각 12가지로 제한된다고 볼 필요는 없으며 이 목록을 기준으로 흠의 목록은 더
세부적으로 확대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컨대, 겉으로 볼 때 손상이 되거나 장애를 지니지 않았으나 삐쩍 마른 가축이라면 속병에
걸린 것으로 판단되어 제물에서 제외되었을 것이다. 또한 목록에 없으나 청각 장애가 있거나 손발이 하나 없는 제사장이 고난도의
성소 업무를 수행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흠을 가진 모든 짐승은 제물로 바쳐질 수 없었는데, 다만 자원의 화목제의
경우는 더한 지체나 덜한 지체를 가진 짐승이 허용되었다(23절). 자원의 화목제의 규준이 다소 완화된 이유는 아마 그것이 감사할
일이나 서원의 이행과 같은 특별한 이유가 없이 마음에 우러나와 바치는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짐승의 흠이
제사장의 흠에 관한 규정과 나란히 등장하는 것은 구성상 어울리지 않지만 이는 의도적 배치임이 분명하다. 제사장에게는 제물로
희생되는 짐승을 검사할 최종 책임이 있기 때문에 짐승의 흠의 목록이 제사장 규정에서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럽다. 제사가 드려지는
성막과 제사를 집행하는 제사장, 그리고 제사에서 바쳐지는 희생 제물 모두 흠 없이 거룩해야 했다. 레위기 21~22장은 흠 없는
짐승을 요구하는 1~7장의 동물 제사 규정과 제사장직의 위임과 그 직무의 자격을 제시하는 8장의 내용을 보완하고 있다.
얼핏
장애인이나 신체에 흠이 있는 사람을 차별하는 것처럼 보이는 율법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레위기 제사법에 의하면 분명 ‘흠’은
제물로서 큰 결격사유였지만 이는 제사장에게 요구되는 신체 조건을 명시한 것뿐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아니다. 레위기
21:22~23은 이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들은 제사장의 직무에서만 배제되었을 뿐, 제사장 가족의
일원으로서 모든 혜택을 동등하게 누렸다. 다만 그들은 성소의 직무에서 배제된다. 다시 말해 모든 제사장 가족들은 백성들이 바친
성물들을 가족 별로 공평히 나누어 가졌던 것이다. 한편, 구약의 훈육은 많은 경우 실물적 교훈과 상징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여기서도 동일한 원리에 의해 신체적 흠을 불완전성의 상징으로서 하나님의 거룩에 합당하지 않게 여겼을 뿐이다.
여기에
더해 제사장이 성막 내에서 섬세하고 과중한 업무를 수행하느라 육체적·정신적 피로에 시달렸다고 추정해볼 수 있다. 신체적 장애로
인해 자칫 제의적 실수를 할 가능성도 있으니 그들을 직무에서 배제한 것은 일종의 배려일 수 있다. 장애인의 군 입대를 막는 것이
이들에 대한 차별이 아니듯이 장애인에게 제사장의 역할을 맡기지 않았다 해서 이를 차별이라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이것은 단순히
실제적 역할과 흠의 상징성의 문제였다. 물론 신약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약의 교훈을 위해 설정된 이 모든 임시적인
차별의 장벽들이 사라졌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서면 장애와 흠을 지닌 존재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갈 자격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제사장의 성물 음식 섭취 규정
레위기
22:1~16은 성물을 먹을 수 있는 제사장의 자격에 대한 규정이다. 제사장이 먹는 성물 음식은 지성물과 일반 성물로
나뉘었는데(레 21:22) 아마 여기서 성물이란 제단에 바쳐진 지극히 거룩한 음식을 가리킬 것이다. 몸이 부정케 된 제사장은
성물과 접촉하거나 성물을 먹을 수 없었으며 이 규정을 어기면 ‘제명’당하는 징벌이 뒤따랐다(3~10절). 여기에는 나병 환자,
유출 환자, 시체를 만진 자, 정액이 유출된 자, 기는 짐승의 사체를 만진 자(참조. 레 11:29~31, 41~43), 그리고
오염원에 접촉된 자와 자연사한 짐승이나 찢겨 죽은 짐승의 사체를 먹는 자들이 포함된다.
이런 이유들로 부정을 탄
제사장은 목욕을 한 뒤 저녁까지 기다려야 다시 정결케 된다. 부정한 상태에서 성물 음식을 먹음으로써 그것을 더럽히는 것은 중대한
범죄 행위다(9절). 그러나 이 규정은 부정케 된 제사장이 음식을 전혀 먹을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들은 제단에 오르지 않고
성전에 바쳐진 다른 음식 봉헌물들, 예를 들어 추수의 감사 예물과 같은 일반적인 음식은 먹을 수 있었다.
일반인들과
제사장 집의 손님, 제사장이 잠시 고용한 일꾼은 성물 음식을 먹을 자격이 없었다. 그러나 제사장의 종과 그의 자녀들은 제사장의
식구로 간주되어 성물을 먹을 수 있었다(11절). 제사장의 딸이 출가하면 시댁의 일원이 되므로 성물을 먹을 권리를 박탈했으며 혼인
관계가 중단되어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 경우에는 그 권리가 회복되었다(12절). 일반인은 성물 음식을 섭취할 수 없다는 것을
거듭 강조함과 더불어 주어진 추가 지침 한 가지는 실수로 그것을 먹는 경우 이는 성물 침해죄에 속하기에 속건제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이때 죄인은 성물에 20%를 더하여 갚고, 이어서 숫양 한 마리를 성소에 바쳐야 했다(14절). 그러나
의도적으로 성물을 먹은 자에게는 그 죄에 합당한 형벌이 주어질 것이다(15절). 이 경우에 해당하는 형벌은 명시되어있지 않으나
성경의 다른 구절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의 직접 심판에 의한 ‘죽음’이나 ‘제명’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지막으로
제사장들의 유념해야할 몇 가지 추가적인 제의 규정들이 주어진다. 먼저 가축의 새끼가 태어나면 칠일 동안 어미와 같이 있게 하고
팔일 째부터는 희생으로 바칠 수 있다(22:27). 이것은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칠일이 지나 팔일 째에 할례를 해야하는 규정과
병행을 이루고 있는데(창 17:12; 21:4; 눅 1:59; 2:21) 짐승의 경우 “어미와 같이 있게 하라”는 요구사항에서
분명히 가축에 대한 인격적 배려가 깃들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인격적 배려는 바로 뒤잇는 규정에서
명백해진다. 암컷 가축을 잡을 때 어미와 새끼를 같은 날에 잡아서는 안된다(28절). 이어지는 규정은 화목제의 고기를 먹는 규정의
반복이다(28~29절). 유독 첫날 고기를 모두 먹어야 했던 감사의 화목제만 나타나는데, 이것은 아마도 감사의 화목제 고기를
자칫 이튿날까지 먹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특별한 주의를 주기 위함일 것이다. 반면에 다른 화목제 고기들, 즉 서원의 화목제와
자원의 화목제(특별한 감사한 일이 없이 자원해서 감사의 마음으로 바친 화목제)의 경우 이튿날까지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이
중대한 제사장 규정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의 속성을 강조하시고 또한 자신이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임을 상기시키면서
끝을 맺는다(22:31~33).
귀찮은 것이 아니라 감사 감격해야 옳다; 여호와와 자신들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먼저 살펴야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에게서 만은...'이라는 말은 나와 특별한 관계가 있다는 말인데
다른 분도 아닌 하나님께서 나와 특별한 관계에 있다고 강조한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런 일인지 모른다. 훌륭한 목사와 성도간의 관계는 헌신을 요구하고 그 헌신을 받아들이는 관계이다.
해준 게 없다고 자식 앞에 비굴한 부모보다는 해준 것도 없으면 자식 앞에 당당한 부모가 보기 좋다. 당당하게 '너에게는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이 내게는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모른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권위를 세우신다는 것은 뒤집어보면 나를 자녀로 인정하신다는 뜻이다. 홍길동이 온 천하를 헤집고 다니게된 원인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형을 형이라고 불러보지 못한 탓이다.
그에게 유일한 소원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불러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네게는 아버지라고 불려야겠다'고 한다면?
짐승들을 빨리 살을 찌우기 위해서 거세시키는 경우를 금함(24); 짐승이든 사람이든 이런 방식을 하나님께서는 좋아하시지 않음; 국화 기르는 것이나 과일나무를 기르는 것도 어떻게 본다면 비슷한 현상인데?
제사장(祭司長) כֹּהֵן
코헨(3548) kôhên / כֹּהֵן
1. 제사장, 2. 대제사장, 3. 왕 발음
/ 코헨 [ kôhên ] 관련 성경 / 제사장(창 14:18, 레 14:18, 대하 31:19, 스 6:9, 7:12, 24) 구약 성경 / 752회 사용
말라크(4397) malʼâk מַלְאָךְ
1. 보내진 자, 2. 하나님의 사자, 3. 천사 발음
/ 마라크[ malʼâk ] 어원 / ‘대리로 파견하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사자(使者)(창 16:7, 삿 2:1, 시 34:7), 천사(창 19:1, 삼하 24:16, 대하 32:21), 왕(삼하 11:1), 사신(사 14:32, 33:7), 파견자(나 2:13) 구약 성경 / 212회 사용
3549. כָּהֵן
1. 제사장, 2. 스가랴 7:12 발음
/ 카헨 [ kâhên ] 어원 / 아람어 관련 성경 / 제사장(스 7:12, 16, 21) 구약 성경 / 8회 사용
3550. כְּהֻנָּה
1. 제사장직, 2. 제사장의 임무, 3. 제사장의 역할 발음
/ 케훈나 [ kehunnâh ] 어원 / 3547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제사장 직분(민 3:10, 수 18:7, 느 13:29), 제사장(출 40:15) 구약 성경 / 14회 사용
* 3547. 카한(kâhan) כָּהַן
1. 예시하다, 2. 사제가 되다, 3. 피엘형 כִּהֵן
발음
/ 카한 [ kâhan ] 관련 성경 / 제사장 직분을 행하다(출 28:41, 겔 44:13), 제사장이 되다(호 4:6), 제사장 직을 행하다(출 31:10, 39:41) 구약 성경 /23회 사용
__________________ 레위기 21장 / 백성의 어른(4절)
04-01-2023(토) 사순절 제34일
제사장은 그의 백성의 어른인즉 자신을 더럽혀 속되게 하지 말지니라. He must not make himself unclean for people related to him by marriage, and so defile himself. He shall not defile himself as a relative by marriage among his people, and so profane himself.
레위기 21장과 22장은 제사장에 관한 규례입니다. 21장에서는 제사장이 지켜야 할 규례 22장에서는 제사장이 먹어야 할 음식 즉 성물에 관한 규례
제사장은 하나님의 성소를 섬기고 돌아보는 직무를 맡은 직분입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인하여서 왕 같은 제사장들이 되었다는 사실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전 되어진 하나님의 백성들을 우리가 섬기고 또 돌아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들로 인도할 수 있는 그러한 사명을 받은 자가 왕같은 제사장이라는 칭호를 받은 저와 여러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삶에 그러한 사람의 삶의 모습과 삶의 자리는 그렇지 않은 사람과 사실 같다'라고 말할 수 없겠습니다.
어떻게 구별되어야 하고, 어떤 인식의 차이가 있으며 또 어떤 목표를 갖고 있는지,
오늘의 말씀은 구약성경 레위기 속에서도 얼마든지 신약의 이 시대의 성령의 세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큰 도전이 된다' 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서 왕 같은 제사장 하나님의 성전을 섬기는 저와 여러분의 생애가 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거룩함의 기준이 높을수록 사랑으로 배려합니다
레위기 21장은 제사장이 지킬 규례입니다.
레위기 21, 22장은 제사장이 지킬 규례입니다. 제사장은 백성의 어른입니다. 대제사장은 형제 제사장들 중에서 으뜸입니다. 제사장들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림과 동시에 백성들로 하여금 거룩하게 살아가도록 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제사장들이 하나님 앞에서, 백성들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씀합니다.
레위기 21:1-9절은 제사장이 스스로 더럽히지 말아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아론의 혈통을 이어받은 제사장들에게 알려라. 너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러라.”
“제사장은 누구든지, 백성의 주검을 만져 자신의 몸을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가장 가까운 살붙이, 곧 어머니나 아버지나 아들이나 딸이나 형제의 주검은 괜찮다. 또한 시집가지 못하고 죽은 친누이의 주검도 괜찮다. 그 여자에게 남편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의 주검을 만져 몸을 더럽히는 것은 괜찮다. 그러나 제사장은 백성의 어른이므로, 스스로 더럽혀 욕되게 해서는 안 된다.
제사장은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같이 하거나, 구레나룻을 밀거나, 제 몸에 칼자국을 내서는 안 된다. 그들은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들이니,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주께 제물을 살라 바치는 이들, 곧 하나님께 음식을 바치는 이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거룩하여야 한다.
제사장은 창녀나, 이미 몸을 버린 여자와 결혼해서는 안 된다. 이혼한 여자와도 결혼하지 않아야 한다. 제사장은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제사장을 거룩하게 생각하여야 한다. 그는 너희가 섬기는 하나님께 음식제물을 바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제사장은 너희에게도 거룩한 사람이다.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나 주가 거룩하기 때문이다.
제사장의 딸이 창녀 짓을 하여 제 몸을 더럽히면, 제 아버지를 더럽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그 여자는 불태워 죽여야 한다.”
제사장이 지킬 규례들
1. 제사장은 백성의 시체를 만져서 자신의 몸을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물론 어머니나 아버지나 아들이나 딸이나 형제의 시체에 접촉하는 것 허용
→또한 시집가지 못하고 죽은 친누이의 시체에 접촉하는 것도 허용
2. 제사장은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같이 하면 안 된다.
3. 제사장은 자기 수염 양쪽(구레나룻)을 밀면 안 된다.
4. 제사장은 제 몸에 칼자국을 내서는 안 된다.
5. 제사장은 하나님께 대하여 거룩해야 한다.
6. 제사장은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해서는 안 된다.
7. 제사장은 창녀나, 이미 몸을 버린 여자와 결혼해서는 안 된다.
8. 제사장은 이혼한 여자와도 결혼하지 않아야 한다.
☞ 제사장은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9. 제사장의 딸이 창녀 짓을 하여 제 몸을 더럽히면,
제 아버지를 더럽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그 여자는 불태워 죽여야 한다.
레위기 21:10-15절은 대제사장이 지킬 규례입니다.
제사장들이 스스로 자신을 더럽히지 말도록 명령한 내용과 동일하게 시체에 접촉하지 말하는 명령입니다. 제사장에게 하신 명령보다 더 엄격합니다. 이유는 하나, 형제 제사장들의 으뜸이 되는 대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형제 제사장들 가운데서 으뜸되는 대제사장은, 임명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부었고, 또 예복을 입고 거룩하게 구별되었으므로,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으며 애도해서는 안 된다. 그는 어떤 주검에도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가 죽었을 때에도, 그 주검에 가까이하여 몸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대제사장은 절대로 성소에서 떠나서는 안 된다. 그가 섬기는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혀서는 안 된다. 그는 남달리, 하나님이 기름부어 거룩하게 구별하고,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주다.
대제사장은 처녀를 아내로 맞이하여야 한다. 과부나 이혼한 여자나 이미 몸을 버린 여자나 창녀와 결혼해서는 안 된다. 그는 다만 자기 백성 가운데서 숫처녀를 아내로 맞이하여야 한다. 그래야만, 그는 더러워지지 않은 자녀를 자기 백성 가운데 남기게 될 것이다. 그를 거룩하게 한 이는 주다.”
대제사장이 지킬 규례들
1. 대제사장은, 임명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부었고, 또 예복을 입고 거룩하게 구별되었으므로,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으며 애도해서는 안 된다.
2. 대제사장은 어떤 주검에도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
3. 대제사장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가 죽었을 때에도, 그 주검에 가까이하여 몸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4. 대제사장은 절대로 성소에서 떠나서는 안 된다.
5. 대제사장은 그가 섬기는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혀서는 안 된다.
6. 대제사장은 처녀를 아내로 맞이하여야 한다.
7. 대제사장은 과부나 이혼한 여자나 이미 몸을 버린 여자나 창녀와 결혼해서는 안 된다.
8. 그는 다만 자기 백성 가운데서 숫처녀를 아내로 맞이하여야 한다.
레위기 21:16-24절은 아론의 자손 중에 육체에 흠이 있는 자들에 대한 규례입니다.
“너는 아론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대대로, 너의 자손 가운데서 몸에 흠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음식제물을 바치러 나올 수 없다.
몸에 흠이 있어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는 사람은, 곧 눈이 먼 사람이나, 다리를 저는 사람이나, 얼굴이 일그러진 사람이나, 몸의 어느 부위가 제대로 생기지 않은 사람이나, 팔다리가 상하였거나 손발을 다쳐 장애인이 된 사람이나, 곱사등이나, 난쟁이나, 눈에 백태가 끼어 잘 보지 못하는 사람이나, 가려움증이 있는 환자나, 종기를 앓는 환자나, 고환이 상한 사람 들이다.
제사장 아론의 자손 가운데서 이처럼 몸에 흠이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주께 가까이 나아와 살라 바치는 제사를 드릴 수 없다. 몸에 흠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음식제물을 바치러 나올 수 없다.
그러나 그 사람(몸에 흠이 있는 아론의 자손)도 하나님께 바친 음식, 곧 가장 거룩한 제물과 거룩한 일반제물을 먹을 수는 있다. 다만 몸에 흠이 있으므로, 그는 휘장 안으로 들어가거나 제단에 가까이 나아와, 내가 거룩하게 한 물건들을 더럽히는 일만은 삼가야 한다. 그것들을 거룩하게 한 이가 바로 나 주이기 때문이다.”
제사장 아론의 자손 가운데서 몸에 흠이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주께 가까이 나아와 살라 바치는 제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몸에 흠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음식제물을 바치러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몸에 흠이 있는 아론의 자손들도 하나님께 바친 음식, 곧 가장 거룩한 제물과 거룩한 일반제물을 먹을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께 음식 제물을 드릴 수 없는 자들 즉몸에 흠이 있는 자들의 목록
1. 눈이 먼 사람
2. 다리를 저는 사람
3. 얼굴이 일그러진 사람
4. 몸의 어느 부위가 제대로 생기지 않은 사람
5. 팔다리가 상하였거나 손발을 다쳐 장애인이 된 사람
6. 곱사등이나 난쟁이
7. 눈에 백태가 끼어 잘 보지 못하는 사람
8. 가려움증이 있는 환자
9. 종기를 앓는 환자
10. 고환이 상한 사람
제사장은 백성의 어른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른이란 성숙함이 기준입니다. 제사장을 라틴어로 폰티팍스(pontifax)라고 합니다. '폰티팍스'의 어원은 "다리를 놓는 사람"을 말합니다. 다리의 용도는 계곡과 계곡 사이를 연결하여 보행자들이 편하게 다닐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피조물과 창조주 사이에 다리가 되어 사람이 전능자를 쉽게 찾아갈 수 있도록 길 안내를 해야 합니다. 만일 제사장이 어른스럽지 못하면 사람들은 길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레위기 21장은 구약시대 제사장이 지켜야 할 규례들을 말씀합니다.
21:1-8. 제사장된 자는 스스로 더럽혀 욕되게 해서는 안될 것.
21:9. 제사장의 딸이 음행했을 때의 벌.
21:10-15. 제사장은 몸을 더럽혀서 안될 것.
21:16-24. 제사장은 신체 완전해야 할 것.
제사장의 개인적 정결 규례는 크게 세 가지로 말씀합니다.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서 백성들을 대표한다는
면에서 제사장에 대한 이런 규례는 언약 공동체 전체의 대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시체 접촉 금지는 죄에 대한 정결을
의미합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죽음은 죄에 대한 심판의 결과라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시체 접촉 금지는 범죄에 대한 단호한 경고를 뜻합니다.
수염이나 털을 깎지 않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을 의미합니다. 동양 사상에서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이란 말처럼 "부모로부터 물려 받은 몸의 터럭 하나라도 감히 훼손해선 안 된다."는 정신을 생각나게 합니다. - 효경(孝經), 첫 장의 구절
부정한 여자 또는 이혼한 여자와 결혼하지 말라는 규례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회의 기초
공동체로서 가정이 건전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래야만 언약 공동체 전체가 조화롭게 유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약 백성으로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해야 하지만 특별히 레위기 21장에서는 제사장은 백성의 어른이므로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더욱 정결해야 할 것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오늘날 하나님의 제사장인 성도들도 백성의 어른처럼 정결한 삶을 유지하므로 세상 사람들에게 믿음의 본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만일 성도들이 정결하지 못하고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 문제가 많다면 "예수 믿는 너희들이나 잘 해라!" 비난을 받게 되어 복음을 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도들이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모범이 될 때 우리가 전하는 말씀이 더욱 힘있게 전파될 것입니다. 날마다 거룩한 삶과 거룩한 질서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굳게 세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너 주의 사람아
21:1-12. 제사장의 장례식
참석 규례 21:13-15. 제사장 결혼규례 21:16-24. 제사장 신체 조건에 대한 규정
제사장들 중에서도 대제사장은 성결을 위해 지켜야 할 규례가 더 엄격했습니다. 예를 들면 대제사장들은 직계존비속에 대해서는 시체에 접근할 수 있었지만(2절), 대제사장들은 예외를 인정하지 않았다.(11절)
이와 같이 구약의 율법은 하나님을 섬기는 거리에 따라 성결에 대한 요구의 정도가 달랐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신약시대 이후로는 이러한 구분이 다 무너졌다.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든지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대제사장의 신분의 변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성도라면 누구나 대제사장 신분으로 성결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생긴 것이다. 그래야 거룩하신 하나님과 더불어 깊이 교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나의 막힘 담을 허물어 주신 그곳에 우리의 교만과 죄악으로 다시금 불결함이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으로 언제나 주의 말씀을 따라 성결함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나는 오늘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결한 삶을 살고 있는가 반추하게 되었다.
세상의 유혹과 시험이 몰려올 때 우리는 도저히 우리의 힘으로 그것들을 이겨낼 힘이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하나님의 선한 손이 우리를 도울 뿐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인 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성결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오직 기도와 말씀으로 사는 길 밖에 없는 것이다.
나에게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늘 기도와 말씀 묵상으로 성결함을 잃지 말아야겠다.
신명기 14:1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
에스겔 44:20 그들은 또 머리털을 밀지도 말며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도 말고 그 머리털을 깎기만 할 것이며
레위기 19:27-28 머리 가를 둥글게 깎지 말며 수염 끝을 손상치 말며
레위기 10:6 모세가 아론과 그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이르되 `너희는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아서 너희 죽음을 면하고 여호와의 진노가 온 회중에게 미침을 면케 하라 오직 너희 형제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의 치신 불로 인하여 슬퍼할 것이니라
이사야 15:2 그들은 바잇과 디본 산당에 올라가서 울며 모압은 느보와 메드바를 위하여 통곡하도다 그들이 각각 머리털을 없이 하였고 수염을 깎았으며
이사야 22:12 그 날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명하사 통곡하며 애호하며 머리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 하셨거늘
예레미야 16:6 큰 자든지 작은 자든지 이 땅에서 죽으리니 그들이 매장되지 못할 것이며 그들을 위하여 애곡하는 자도 없겠고 자기 몸을 베거나 대머리 되게 하는 자도 없을 것이며
예레미야 48:37 각 사람의 두발이 밀렸고 수염이 깍였으며 손이 베어졌으며 허리에 굵은 베가 둘렸고
아모스 8:10 너희 절기를 애통으로, 너희 모든 노래를 애곡으로 변하며 모든 사람으로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게 하며 모든 머리를 대머리 되게 하며 독자의 죽음을 인하여 애통하듯 하게 하며 그 결국으로 곤고한 날과 같게 하리라
미가 1:16 너는 네 기뻐하는 자식으로 인하여 네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할지어다 네 머리로 크게 무여지게 하기를 독수리 같게 할지어다 이는 그들이 사로잡혀 너를 떠났음이니라
제사장은 달랐다! 제사장의 자격과 의무
고난도 성소 직무 수행 제사장, 함부로 울지도 먹지도 못했다
신체조건부터 결혼자격까지 흠이 없는 엄격한 규정 통해 하나님 거룩성 드러내는 책임 강조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는 제사장 시므온은
나이가 42세인 제사장이다. 어느 날 그는 나귀를 타는 중에 실수로 떨어졌는데 불행히도 다리가 심하게 부러져 영구히 불구자가
되었다. 신체의 문제로 인해 그는 레위기 규정을 따라 더 이상 제사장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규정에 의하면 앞을 보지
못하거나 다리를 절고 손발이 부러진 불구자는 ‘흠’을 지닌 이유로 제사장으로서 성소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집에서
한가로이 하루하루 보내던 시므온은 삼촌인 제사장 엘리에셀이 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시므온은 오래도록 그를 존경했으며
깊은 교분을 나누었으나 그 장례에 참여할 수 없었다. 레위기 규정상 제사장은 직계 가족의 장례만 참여하고 집행할 수 있으며 그
외에는 어떠한 장례식도 참여하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레위기 21~22장은 이러한 제사장의 자격과 의무를
다룬 규정이다. 이것은 제사장이라는 주제로 8~10장과 대칭을 이룬다. 8~10장이 제사장 위임과 더불어 제사장들의 첫 제사와
실패한 제사를 이야기하고 있는 반면, 21~22장은 제사장의 자격과 준수사항, 그리고 결격사유가 되는 신체적 흠과 그들이 분별해야
하는 짐승의 흠에 관해 다룬다.
제사장의 장례와 결혼 규정 시체는
전염성이 강하므로 장례의 절차를 진행하는 사람들이나 전쟁에서 시체와 접촉한 사람들에게 필연적으로 중대한 오염을 유발했다(민
19:11~22). 따라서 성소의 직무를 위해 구별된 제사장들은 장례식을 집행할 수 없음은 물론 장례에 참여하는 자체가
금지되었다.
다만 일반 제사장들은 직계 가족들의 장례는 치를 수 있었으나(레 21:1~4) 가장 높은 거룩성을
유지해야하는 대제사장에게는 그마저 엄중히 금지되었으며, 심지어 부모의 장례조차 허용되지 않았다(레 21:10~12). 일반
제사장들의 경우 그의 집안에서 출가한 여자는 이미 다른 집안의 가족이므로 그녀의 장례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직계 가족 중
미혼인 여성들의 장례는 그가 모두 책임져야 했다. 마찬가지로 1~4절에서 제사장의 아내의 장례가 언급되지 않은 것은 시집 온
그녀는 당연히 제사장의 직계 가족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21:4은 해석상의 논란이 있는 구절이다. “제사장은 그의
백성의 어른인즉 자신을 더럽혀 속되게 하지 말지니라”는 문장에서 ‘어른’ 혹은 ‘주인’을 뜻하는 히브리어 바알(baal)은
‘남편’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에 근거하여 혹자는 남편된 제사장이 자신의 아내의 집안사람의 장례에 관여해서 제사장이 부정케 되는
일이 없도록 금지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경우 ‘백성’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암(am) 범위는 아내의 집안으로 제한된다.
그러나
4절은 1절과 평행을 이루는 구절이다. 1절이 제사장이 백성의 장례에 참여하지 말라는 원론적 금지 조항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4절 또한 포괄적인 금지 규정일 것이다. 즉 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의 장례에 관여하거나 참여해선 안 된다. 이때 바알은
‘남편’보다는 ‘백성의 어른’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따라서 이 구절에는 제사장이 백성의 장례에 관여하여 자신을 더럽히면 백성
전체를 더럽히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의미가 내포된 듯하다.
5~6절 또한 장례 관행과 관련된 규정으로, 레위기
19:27~29과 신명기 14:1의 규정과 관련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장례 때 머리털을 밀고 수염을 깎는 것이 허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스 9:3; 욥 1:20; 렘 7:29; 16:6; 겔 27:31). 하지만 제사장들에게는 직계 가족의 장례를
치를 때에도 이런 두발 모양이 허용되지 않았다. 대제사장들은 금지된 애곡 행위, 곧 옷을 찢고 머리를 푸는(10절) 행위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해선 안되었으나 일반 제사장이라면 가능했을 것이다. 참고로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신 14:1)는 명령에서 금지된 면도 방법은 이방의 관행으로 보인다. 한편, 몸에 상처를 내고
문신하는 애곡 행위는 일반 백성과 제사장 모두에게 허용되지 않았다(렘 41:5; 48:37).
정리하자면,
이스라엘에서는 몸을 베거나 눈썹 사이 이마 위 털을 밀거나, 몸에 상처를 내는(문신) 애곡 행위는 이방 관행으로 전적으로
금지되었다. 반면에 머리털을 밀고(깎고) 그것을 풀고 수염을 깎고 옷을 찢고 베옷을 입으며 재를 머리에 뿌리는 관행은 허용되었다.
일반 제사장은 더 엄격해서 머리털을 밀고 수염을 깎는 것이 금지되었고, 다만 옷을 찢고 머리를 푸는 애곡은 허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제사장은 그 어떤 애곡 행위도 금지되었다. 제사장들에게 적용되는 결혼 규정 역시 엄격했다. 일반 제사장들은 창녀나
이혼녀와 결혼할 수 없었는데(아마 과부는 가능했던 것으로 보ㅇ니다), 또한 그만큼 자신의 딸도 철저히 관리해야 했다(9절).
그러나 대제사장은 반드시 처녀를 아내로 삼아야 했다(7절, 13~14절).
제사장의 흠과 짐승의 흠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가려면 갖추어야 하는 신체적 자격요건에 관한 것이다(레 21:18~20). 흥미롭게도 제사장이 성막 내
업무를 처리할 수 없게 만드는 신체적 흠들 12가지(레 21:18~20) 희생에 부적격한 짐승의 흠들 12가지(레
22:22~24)가 나란히 명시된다.
이 특징들은 지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할 수 밖에 없으나 주목해야할 점은 이 중 네 가지
흠만이 제사장과 희생 짐승에게 공통적이고 나머지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과 짐승의 생물학적 차이와 신체에 나타나는
증상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제사장과 짐승의 흠의 목록이 각각 12가지인 이유는 아마도 12라는 숫자가 ‘완전성의
의미’를 지녔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흠들이 굳이 각각 12가지로 제한된다고 볼 필요는 없으며 이 목록을 기준으로 흠의 목록은 더
세부적으로 확대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컨대, 겉으로 볼 때 손상이 되거나 장애를 지니지 않았으나 삐쩍 마른 가축이라면 속병에
걸린 것으로 판단되어 제물에서 제외되었을 것이다. 또한 목록에 없으나 청각 장애가 있거나 손발이 하나 없는 제사장이 고난도의
성소 업무를 수행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흠을 가진 모든 짐승은 제물로 바쳐질 수 없었는데, 다만 자원의 화목제의
경우는 더한 지체나 덜한 지체를 가진 짐승이 허용되었다(23절). 자원의 화목제의 규준이 다소 완화된 이유는 아마 그것이 감사할
일이나 서원의 이행과 같은 특별한 이유가 없이 마음에 우러나와 바치는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짐승의 흠이
제사장의 흠에 관한 규정과 나란히 등장하는 것은 구성상 어울리지 않지만 이는 의도적 배치임이 분명하다. 제사장에게는 제물로
희생되는 짐승을 검사할 최종 책임이 있기 때문에 짐승의 흠의 목록이 제사장 규정에서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럽다. 제사가 드려지는
성막과 제사를 집행하는 제사장, 그리고 제사에서 바쳐지는 희생 제물 모두 흠 없이 거룩해야 했다. 레위기 21~22장은 흠 없는
짐승을 요구하는 1~7장의 동물 제사 규정과 제사장직의 위임과 그 직무의 자격을 제시하는 8장의 내용을 보완하고 있다.
얼핏
장애인이나 신체에 흠이 있는 사람을 차별하는 것처럼 보이는 율법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레위기 제사법에 의하면 분명 ‘흠’은
제물로서 큰 결격사유였지만 이는 제사장에게 요구되는 신체 조건을 명시한 것뿐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아니다. 레위기
21:22~23은 이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들은 제사장의 직무에서만 배제되었을 뿐, 제사장 가족의
일원으로서 모든 혜택을 동등하게 누렸다. 다만 그들은 성소의 직무에서 배제된다. 다시 말해 모든 제사장 가족들은 백성들이 바친
성물들을 가족 별로 공평히 나누어 가졌던 것이다. 한편, 구약의 훈육은 많은 경우 실물적 교훈과 상징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여기서도 동일한 원리에 의해 신체적 흠을 불완전성의 상징으로서 하나님의 거룩에 합당하지 않게 여겼을 뿐이다.
여기에
더해 제사장이 성막 내에서 섬세하고 과중한 업무를 수행하느라 육체적·정신적 피로에 시달렸다고 추정해볼 수 있다. 신체적 장애로
인해 자칫 제의적 실수를 할 가능성도 있으니 그들을 직무에서 배제한 것은 일종의 배려일 수 있다. 장애인의 군 입대를 막는 것이
이들에 대한 차별이 아니듯이 장애인에게 제사장의 역할을 맡기지 않았다 해서 이를 차별이라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이것은 단순히
실제적 역할과 흠의 상징성의 문제였다. 물론 신약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약의 교훈을 위해 설정된 이 모든 임시적인
차별의 장벽들이 사라졌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서면 장애와 흠을 지닌 존재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갈 자격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제사장의 성물 음식 섭취 규정 레위기
22:1~16은 성물을 먹을 수 있는 제사장의 자격에 대한 규정이다. 제사장이 먹는 성물 음식은 지성물과 일반 성물로
나뉘었는데(레 21:22) 아마 여기서 성물이란 제단에 바쳐진 지극히 거룩한 음식을 가리킬 것이다. 몸이 부정케 된 제사장은
성물과 접촉하거나 성물을 먹을 수 없었으며 이 규정을 어기면 ‘제명’당하는 징벌이 뒤따랐다(3~10절). 여기에는 나병 환자,
유출 환자, 시체를 만진 자, 정액이 유출된 자, 기는 짐승의 사체를 만진 자(참조. 레 11:29~31, 41~43), 그리고
오염원에 접촉된 자와 자연사한 짐승이나 찢겨 죽은 짐승의 사체를 먹는 자들이 포함된다.
이런 이유들로 부정을 탄
제사장은 목욕을 한 뒤 저녁까지 기다려야 다시 정결케 된다. 부정한 상태에서 성물 음식을 먹음으로써 그것을 더럽히는 것은 중대한
범죄 행위다(9절). 그러나 이 규정은 부정케 된 제사장이 음식을 전혀 먹을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들은 제단에 오르지 않고
성전에 바쳐진 다른 음식 봉헌물들, 예를 들어 추수의 감사 예물과 같은 일반적인 음식은 먹을 수 있었다.
일반인들과
제사장 집의 손님, 제사장이 잠시 고용한 일꾼은 성물 음식을 먹을 자격이 없었다. 그러나 제사장의 종과 그의 자녀들은 제사장의
식구로 간주되어 성물을 먹을 수 있었다(11절). 제사장의 딸이 출가하면 시댁의 일원이 되므로 성물을 먹을 권리를 박탈했으며 혼인
관계가 중단되어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 경우에는 그 권리가 회복되었다(12절). 일반인은 성물 음식을 섭취할 수 없다는 것을
거듭 강조함과 더불어 주어진 추가 지침 한 가지는 실수로 그것을 먹는 경우 이는 성물 침해죄에 속하기에 속건제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이때 죄인은 성물에 20%를 더하여 갚고, 이어서 숫양 한 마리를 성소에 바쳐야 했다(14절). 그러나
의도적으로 성물을 먹은 자에게는 그 죄에 합당한 형벌이 주어질 것이다(15절). 이 경우에 해당하는 형벌은 명시되어있지 않으나
성경의 다른 구절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의 직접 심판에 의한 ‘죽음’이나 ‘제명’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지막으로
제사장들의 유념해야할 몇 가지 추가적인 제의 규정들이 주어진다. 먼저 가축의 새끼가 태어나면 칠일 동안 어미와 같이 있게 하고
팔일 째부터는 희생으로 바칠 수 있다(22:27). 이것은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칠일이 지나 팔일 째에 할례를 해야하는 규정과
병행을 이루고 있는데(창 17:12; 21:4; 눅 1:59; 2:21) 짐승의 경우 “어미와 같이 있게 하라”는 요구사항에서
분명히 가축에 대한 인격적 배려가 깃들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인격적 배려는 바로 뒤잇는 규정에서
명백해진다. 암컷 가축을 잡을 때 어미와 새끼를 같은 날에 잡아서는 안된다(28절). 이어지는 규정은 화목제의 고기를 먹는 규정의
반복이다(28~29절). 유독 첫날 고기를 모두 먹어야 했던 감사의 화목제만 나타나는데, 이것은 아마도 감사의 화목제 고기를
자칫 이튿날까지 먹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특별한 주의를 주기 위함일 것이다. 반면에 다른 화목제 고기들, 즉 서원의 화목제와
자원의 화목제(특별한 감사한 일이 없이 자원해서 감사의 마음으로 바친 화목제)의 경우 이튿날까지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이
중대한 제사장 규정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의 속성을 강조하시고 또한 자신이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임을 상기시키면서
끝을 맺는다(22:31~33).
1. 본문은 제사장과 대제사장이 삶의 영역에서 어떤 기준을 충족시킴으로 하나님의 거룩함과 영광을 드러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들은 백성의 지도자로서 백성들보다 더 높은 거룩함의 기준이 요구되는데 이것은 신약의 원리와도 동일합니다(딤전 3:1~13; 고후 4:1~2).
일반 제사장을 위한 장례와 결혼(1~9), 대제사장의 경우의 장례와 결혼(10~15), 모든 레위인들을 위한 봉사의 자격 요건(16~24) 에 대한 규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즉 삶의 전반에 있어서 특별히 레위인과 제사장들은 높은 수준의 거룩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직계 가족이 아닌 한, 죽은 자로 자신을 더럽혀서는 안 됩니다(1~6). 이 말은 이방 특히 가나안 백성들처럼 애도해서는 안 되고(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하거나 수염 양쪽을 깎거나 살을 베는 행위) 시체를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5). 대제사장의 경우는 직계 가족, 자신의 부모의 죽음이라고 할지라도 그 시체로 몸을 더럽힐 수 없다는 더 높은 기준이 요구되었습니다(11). 그는 이런 일로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는 애도 행위도 할 수 없고 계속해서 성소에 머물러야 했습니다(10,12). 왜냐하면 대제사장은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행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왜 죽음이라는 사건에 대해서 제사장이나 대제사장이 이런 방식으로 요구받는 것일까요? 이스라엘에서 죽음은 우선적으로 사람을 하나님께로부터 분리시킨 저주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창 3:19). 하지만 제사장과 대제사장은 이 죽음의 시간에도 언약의 영원한 소망을 나타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의 결혼 문제가 다루어집니다. 일반 제사장은 ‘기생이나 부정한 여인’ 또는 남편으로부터 ‘이혼당한 여인’을 아내로 취할 수 없습니다(7). 또 제사장의 딸이 창녀가 되면 그것은 아버지를 모독하는 것으로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9). 대제사장의 경우에는 자기 백성 가운데서(이스라엘) 처녀와만 결혼할 수 있었습니다(13~15). 이들은 세습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직분이었다는 점에서 결혼을 통한 경건한 자손을 얻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졌을 뿐 아니라, 일반 백성에게도 결혼 자체가 신성한 것이라면 이들 제사장들에게는 더더욱 그래야 했을 것입니다. 죽음과 함께 결혼이 제사장의 삶의 중요한 규례로 제시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결혼은 하나님과의 언약에 비교되는 신성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의 자격 요건에 대한 규정이 이어집니다(16~23). 제사장은 제물과 마찬가지로 흠이나 결점이 없이 온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창조의 완전함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18~20절은 제사장의 육체의 온전함의 목록들을 제시합니다. 제사장들이 이렇게 온전함을 요구받는 것은 백성들의 온전함과 거룩함을 요구해야 하는 자들로서 당연한 것입니다.
7. 사도 베드로는 온 교회가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말했습니다(벧전 2:4~10). 그러니 당연히 모든 성도는 세상이 가지고 있는 기준을 능가하는 거룩함과 온전함을 요구받습니다. 이것은 육체적인 차원의 것일 뿐만 아니라, 영적인 차원의 것입니다.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은 비록 구약의 제사장은 아니지만, 성도들보다 더 높은 수준의 거룩이 요구됩니다. 슬픔을 당했을 때에도 믿음의 소망을 드러내야 할 것이고, 결혼 생활에 있어서도 모범과 언약의 순결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 공동체인 교회에게 이런 거룩의 질서와 조건을 여전히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도여. 거룩하십시오!
21장의 대상은 제사장들이다. 제사장에게만 따로 적용할 규례가 필요한가?
제사장은 일반인보다 더 엄격한 기준이 요구되었다. 목사는 좀 더 엄격한 기준을 자신에게 적용하면서 살아야 한다.
'나도 인간이다' 이런 소리를 가급적 하지 않아야 한다. 다만 이런 자세는 스스로 다짐하는 것이어야 바람직하다. 성도들은 '목사도 인간이다'고 말해주는 것이 도움이 될 때가 많을 것이다.
제사장들이 백성 중의 죽은 자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지 말라는 것인가?
그 머리를 풀지 말며 그 옷을 찢지 말며 어떤 시체에든지 가까이 말 것(10-11). 일반적인 장례 절차에 참여치 말라는 것이다. 그래도 조금 먼 친척이 있을 수 있고, 가까운 친구가 죽었을 경우도 있는데 이런 일에
전혀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는 것은 너무 하지 않은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입장에 서는 것이 제사장의 할 일이다. 목회자는 개인적이고 가정적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리인이라는 신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제사장이라도 장례식에 참석하고 슬픔을 표할 수 있는 경우는 어떤 때인가?
골육지친인 경우에 허용 부모, 자녀, 형제, 출가하지 아니한 친자매의 경우에는 허용되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하나님이 아니라 최소한의 예외는 허락하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하나님께서 양보할 때도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제사장이라도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는 대상 중에 아무래도 빠진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아내 : 이 경우에는 당연직인가? 아내는 한 몸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별도의 사람으로 다루지 않았다.
제사장들은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하지 말며 그 수염 양편을 깎지 말며 살을 베지 말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4-5)
(수염 양편을 깎는다는 말의 원어적 의미는 긴 수염의 끝을 둥글고 짧게 자른다는 뜻이다)
이교도들의 우상숭배와 관련이 있는 행위이다.
제사장이 일반인과 달라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백성의 어른이기 때문(4)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는 자(6) 여호와께 거룩한 자(7) : 여호와를 위하여 특별하게 구별한 자라는 뜻이다.
실제로 아론이나 그 아들들이 거룩할 이유가 없다. 아론만 해도 얼마나 어리석을 짓을 한 사람인가? 백성들이 요구한다고 해서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장본인 아닌가!
그럼에도 아론과 그 아들들이 거룩한 것은 자신들의 공로가 아님을 보여주는 말씀은? 8절. 거룩한 하나님께서 그렇게 여기라고 하시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여기시기 때문에 거룩할 뿐이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가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신 덕분에 우리 모두를 거룩한 자로 여기시기 때문이다.
이혼당한 여인이 부정한 여인인가? 그러면 억울한 사람은 없을까?
제사장은 모든 일에 순결해야한다는 의미이지 이혼한 여인을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이혼 당한 여인이란 부정한 이유로 버림받은 경우를 가리킨다. 영국의 황태자가 사랑한 사람이 하필이면 미국의 이혼녀이었다.
미국사람이라는 것도 싫은데 이유야 어쨌거나 이혼한 사람을 왕비로 모시는 것이 싫다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나님의 의도는 제사장이나 제사장의 가족은 순결해야한다는 것이다. 순결해야하는 이유는?
우리의 결혼 생활이 나아가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사장의 딸은 더욱 조심하여야한다. 잘못하면 벌을 더 받는다. 옳은 처사인가?
사리분별이 가능한 경우에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 어릴 때는 구별하는 것이 그리 옳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구별이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
목사나 장로의 자녀가 그럴 수 있느냐는 말이 들리지 않게 잘 키우는 것이 좋겠지만 너무 강조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대제사장은 제사장보다 더 엄격한 규정이 적용되었다. 예를 든다면?
부모의 상도 치르지 말라(11) 대제사장이 제사장보다 다른 점은 무엇인가? 기름부음을 받고, 예복을 입은 점(10). 하나님과 가까운 정도에 따라 규정이 더 엄격해 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스스로 하나님과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그 만큼 더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대제사장은 부모의 상도 치를 수 없다. 이것은 너무 비인간적이거나 몰인정한 처사가 아닌가?
적어도 대제사장은 인간적이 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백성을 대신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세상의 어떤 일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일이다.
우리 목사님의 부친이 위독해서 수요일 예배시간이 다가오는데도 목사님께서 부친 곁에 머물러 있으니 예배 시간에 목사가 여기 있으면 되느냐고 억지로 쫓아낸 부친의 모습이 생각난다.
대제사장의 아내는 순결한 처녀이어야한다. 제사장의 경우보다 더 엄격한가?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왜 그럴까?
어차피 제사장 중에서 대제사장이 되는 법이니까. 다시 말하면 총각으로 대제사장이 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규정을 통해서 강조하는 것은 대제사장의 결혼이 아니라 흠이 없는 가정생활을 영위해야한다는
뜻이다.
원만하고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는 기초가 흠없는 처녀와의 결혼일 것이다. 성도들은 육체적인 순결에도 노력해야한다. 그것이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가정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남자의 순결도 마찬가지다.
장애자를 이렇게 차별해도 되나(17-21)?
인격적인 차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직분에 대한 성결함을 강조하는 의미이다. 다른 일, 즉 먹는 것으로는 차별하지 않는다(22). 제사장이라는 직분을 그만큼 소중하게 여기라는 뜻일 뿐이다.
한국 교회가 현재 어려움에 처한 원인이 이것과 관련이 있다. 공부 잘하고 똑똑한 아들은 법대, 상대 보내고, 실력이 못한 아들은 신학교에 보낸 결과가 교회의 질적 저하를 초래한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한다는 것과 일맥상통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참고로 '장애자'의 상대어는 '정상인'이 아니라 '비장애인'이라고 한다. 장애인도 동등한 인격을 가진 자로 대하자는 뜻의 좋은 표현이다.
국가 간에도 그렇고 정당간에도 마찬가지인데 대화를 할 때 특히 신경을 쓰는 것이 상대방에서 대화의 상대자가 누구냐라는 것이다.
상대는 장관급인데 이쪽에서 국가 원수가 나간다는 것은 굴욕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본문과 무슨 상관이 있는 말인가?
거룩한 하나님을 상대로 하는 제사장은 거룩해야한다. 억지로라도 거룩해야 한다.
목사는 영적인 아버지인가?
어떤 목회자가 회의 석상에서 그리고 설교 중에 자기 자신을
“영적인 아버지”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 과연 사람에게 (개신교 목사에게) 영적인 아버지라는 표현을 적용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요? 영적인 지도자라면 몰라도 영적인 아버지라는 표현이 자꾸 맘에 걸립니다.
성경에 “영적인 아버지”라는 표현은 단 한번 나오더군요.
“우리를 낳아준 아버지가 견책해도 우리가 그를 존경한다면 영적인 아버지께 복종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은 더욱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히브리서 12:9 - 공동번역)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히브리서 12:9 - 개역개정)
[답변]
우선
그 목사님께서 어떤 구체적인 상황에서 그 말씀을 하셨는지 설명이 안 되어 있는데다, 또 어떤 의도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본인이
아닌 이상 정확하게 알기는 힘듭니다. 그러나 질문자님께서도 이미 생각해 본대로 성경에 나타난 의미에 따라 과연 그렇게 주장해도
합당한지 아닌지는 추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선
히브리서 12:9의 영의 아버지(the Father of spirits)는 바로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목사님이 이런
의미로는 결코 그 말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그 목사님이 이 말씀의 뜻처럼 교인들에게 어떤 징벌을 가하면서 하나님
대신에 벌을 주는 것이라는 뜻으로 사용했다면 정말 큰 일입니다.
대신에 목사님은 아마도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쓴 편지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 4:15)고 한 말씀을 염두에 두고 한 말씀인 것 같습니다. 바울은 사실상 자기를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영적인 아버지”가 된다고 말한 셈입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는 네 개의 당파(1;12)가 있을 정도로 분쟁이 심했습니다. 성도들을 실질적으로 양육하는 이는 하나님이신데(3:7)
하나님의 사역자에 불과한 인간 지도자를 추종하고 경배했었습니다. 아직 영적 분별력이 미숙한데다 인간적인 이기심과 시기심이
작용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영적 성장의 진정한 주관자는 하나님이시고 당파의 주역이 된 자신과 아볼로는 단지 그분의
종이란 사실을 강조했습니다.(3:8,9)
이어서
간곡한 어조로 인간적인 교만과 분파주의를 버리고 화합하여 일치될 것을 권합니다.(4:1-21) 그런데 자신이 다른 지도자들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는 입장에서 그 권고를 하고 있음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 “영적인 아버지”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설립자(교회를 낳은 아버지)인 자신의 위치와 특권을 강조하기 위한 뜻이 아니라 부성애적 사랑에 바탕을 둔
표현이었습니다.
바울이 “일만
스승”과 “많지 않는 아비”를 대비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즉 말씀을 교리에 비추어 가르치기만 하는 목회자는 얼마든지 많지만
정말 아비의 심정으로 성도의 유익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며 한 사람씩 따뜻하게 참 사랑으로 섬기는 목자는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10장에 예로든 것 같은 선한 목자는 바울 당시나 지금이나 아주 드문가 봅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자신을 스스로 선한 목자라고 높이는 표현은 더더욱 아닙니다. 지금 서로 교만해지고 시기심으로 분쟁에 휩싸인 고린도
교인들의 상태가 너무 안타까워 정말 아버지의 심정으로 간절하게 권한다는 뜻입니다. 감정적 동정이나 율법적 훈계와는 거리가 먼
권면입니다. 그 바탕에는 아주 따끔한 질책과 너무나 넓은 자비가 동시에 깔려 있습니다. 실제 아들에게 하는 아버지의 훈계의 성격에
비추어 보면 바울이 왜 이런 표현을 사용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이제 답변은 다 나온 셈입니다. 정말 바울과 같은 입장이라면 그런 표현을 써도 되겠습니다만,
그래도 고린도 교회의 예처럼 아주 특별한 경우에 한해서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질문 가운데 “회의석상에서 설교 중에 주장하고
있다”라는 말씀이 자꾸 신경 쓰이게 합니다. 자주 사용하여 마치 목사는 다 그렇다고 주장하거나, 스스로 자기를 높이려는 시도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4,15)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 놓습니다. 또
아비는 아들을 알고 아들도 아비를 아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구태여 서로 아비나 아들이라고 주장할 이유가 하등 없습니다.
영적인 권위는 지도자가 스스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를 때에 자연적으로 세워지는 법입니다.
자신은
모든 것을 희생하더라도 오직 복음의 진리를 정확하게 가르치겠다는 헌신을, 또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라고 권하는
열정과 정말로 자기 아들 같이 사랑하고 섬기겠다는 심정을 강조하기 위해 목사님들이 “영적인 아버지”라고 표현하는 경우는 있을
것입니다. 진짜 진짜로 –강조했습니다- 그렇다면 크게 문제 삼을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그 의도한 뜻이 아래와 같은 경우에 해당된다면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목사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되었다. 복음을 전한 전도자의 입장이 아니라 구원을 받는데 결정적인 역할과 힘을 발휘했다. 자기가 아니었다면
결코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문자 그대로 복음을 잉태케 해 준 아버지다. 바울의 표현대로 하자면 복음의 씨를 심고 물을 주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자라게 했고 구원 받을 믿음을 실제로 목사가 심어 주었다.
목사의 영적인 권위는 신성불가침이며 어느 누구에게도 제약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을 잘 섬기려면 목사부터 잘 섬겨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축복도 많이 받는다. 하나님을 경배하기 이전에 인간 목사를 경배해야 한다.
그래서
앞으로의 영적 지도와 권면과 징계를, 성경 말씀을 가르침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아버지의 명령으로
알아서 절대 순종해야 한다. 나아가 목사가 하는 어떤 일에도 반대나 불만이 있어선 안 된다. 그리고 정말 아들이 아버지를 섬기듯이
모든 면에서 목사를 정성스레 섬겨야 한다.
한마디로
바울은 하나님의 종의 입장에서 오직 성도의 유익을 위해 섬기고 또 성도를 하나님 안에서 거룩하게 세우려는 애끓는 심정에서 자신을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그에게는 말씀으로 가르치거나 사랑으로 섬기거나 간에 정말 혼자서 일만 스승을 감당하고도 남을 열정과 정성과
진심이 있었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레위기 20장 / 반드시 죽어야 할 죄(2절)
03-31-2023(금) 사순절 제33일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또 이르라 그가 이스라엘 자손이든지 이스라엘에 거류하는 거류민이든지 그의 자식을 몰렉에게 주면 반드시 죽이되 그 지방 사람이 돌로 칠 것이요. Say to the Israelites: 'Any Israelite or any alien
living in Israel who gives any of his children to Molech must be put to
death. The people of the community are to stone him.
20:1-5. 몰렉 숭배에 대한 형벌
20:7-8. 거룩하라는 명령
20:6, 9-21, 27. 박수를 추종하는 자, 부모를 저주하는 자, 또는 여러가지 음행에 대한 형벌
20:22-26. 다른 국민과 달리 거룩하라는 명령
죽어 마땅한 사람이 되지 말고 살아 마땅한 삶이 됩시다!
죽어야 할 죄를 짓지 말고 살아야 할 거룩을 회복하자!
몰렉(Molech) 몰록(Μόλοχ, מֹלֶךְ)은 고대 근동의 신이다. 가나안과 페니키아에서 숭배되었으며, 북아프리카 및 레반트 문화와 연관이 있다. 바빌로니아 지방에서는 명계의 왕으로, 가나안에서는 태양과 천곡의 신으로 알려졌다.
고대 가나안 주민들이 섬기던 신 중의 하나로서, 그를 예배하는 데 어린이를 희생제물로 바치는 일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를 특별히 무섭게 여겼다(레 20:2, 렘 32:35). 몰록(왕상 11:7)이란 이름의 꼴은 옛 그리스어 번역본을 따른 것이다. 본디 이 신은 '멜렉'(임금)이라고 불렸는데(밀곰), 히브리 본문을 전해 내려오던 유다 사람들이 이 이름의 자음에다 부끄러움을 뜻하는 히브리 낱말('보셋')의 모음을 붙여서 '몰렉'(레 18:21)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로써 이스라엘의 '임금'이신 여호와(시 93:1, 97:1, 99:1, 사 52:7)에서
'여호와 또는 하나님이 통치하신다'고 옮긴 문장은 '여호와 또는 하나님이 임금이시다'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를 셈족
지역에서 지하 세력들 특히 불의 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신과 혼동하지 않게 하려고 한 듯하다.
몰록 종교 의식은 특히 주전
8-7세기에 이스라엘에도 들어왔다. 사람들은 정해진 예식을 거행하여 제물을 몰록의 통치 영역인 불에 바침으로써 이 신을 섬겼다.
아이들도 몰록에게 제물로 바쳤다(레 18:21, 신 18:10, 왕하 16:3, 23:10, 렘 7:31, 32:35, 겔 16:20-22).
‘몰록’은 암몬족의 신인데 '그모스'와 마찬가지로 어린아이들을 인신제사로 바쳤던 신으로서 제사 의식 중에는 어린아이를 불 위로 걷게 하거나, 또는 불에 달군 기둥 위를 걷게 하는 잔인한 의식이 있었습니다.
유대의 자료에는 ‘이 혐오스러운 종교적 관행은 매우 무시무시하게 진행되었음'을 기록하였습니다.
카르타고의 ‘타니트 신전’은 이 신을 섬기는 신전이었는데, 신전 안에서 제물로 바친 새끼 양이나, 염소의 제물 보다 많은, 어린 아이들을 태운 뼈를 담은 항아리가 출토되기도 하였습니다.
신접한 자와 박수
(오보 & 이드오니)אוֹב אוֹ יִדְּעֹנִי
신명기 18장 9-14절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가나안 족속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 받지 말 것을 강조하는 금령을 선포하고 있다. 이 중에 10-11절은 아래와 같이 아홉 가지 부류의 사람들을 제시하고 있다.
“10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11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여기에
언급된 아홉 가지 부류의 사람들 중에 “신접자”와 “박수”가 레위기 19:31; 20:6에도 언급되어 있다. “신접자”와 “박수”가
누구이며 어떠한 종교사적 배경이 있길래 디아스포라 공동체에서 엄금하고 있는지, 그리고 신명기에 기명된 아홉 가지 사람들 중에 유독
이 두 부류의 사람들만 레위기에 언급되어 있는지 궁금하다.
더 나아가 오늘날 한국의 전통종교들에 속하는 무속에 대해서 지극히
혐오하고 금기시하는 기독교인들의 태도는 얼마나 성서적인가를 물어 보려고 한다.
위의 모든 용어들은 개역개정에 나타난 단어들인데 새번역과 공동번역과 천주역은 각기 다르게 번역하고 있다. 히브리어 원어로 “신접자(神接者)”는 אוֹב(오브)이고 “박수”는 יִדְּעֹנִי (이드오니)이다.
신접자(神接者) 178. אוֹב
1. 물병
2. 점장이 발음
[ ’ôwb ] 어원 / 복수 אוֹבוֹת, 1과 동형에서 유래[아버지라는 말을 떠듬거리며 말한다는 점에서 유래된 것 같다] 관련 성경 / 신접한 자(레 19:31, 삼상 28:3, 사 29:4), 신 접자(신 18:11) 구약 성경 / 17회 사용
박수. 3049. יִדְּעֹנִי스트롱번호3049
1. 선지자
2. 예언의 영 발음
[ yiddeʽônîy ] 어원 / 304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박수(레 19:31, 삼상 28:3, 대하 33:6), 마술사(사 8:19), 요술(사 19:3) 구약 성경 /11회 사용
* 3045. יָדַע
1. 보다
2. 지각하다
3. 사사기 13:21 발음
/ 야다
[ yâdaʽ ]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사무엘상 28:7)
사울은 블레셋의 침공으로 인하여 깊은 고민에 빠졌다. 자신을 위해 기도해주고 지도해 주던 사무엘이 죽었고 의지할 자가 없다는
생각에 더욱 크게 절망한 것 같다. 사울은 제사장들을 대량 학살하는 사건(22:18, 19)으로 인하여 '우림과 둠밈'이라는 계시
수단을 자신의 경쟁자인 다윗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이 때는 영적으로 어두운 때였다. "선지자로도
꿈으로도...대답지 아니하는 때"였다. 이러한 계시(啓示)의 단절은 악한 인물 또는 악한 시대에 대한 징벌의 성격을 띠는
것으로서(6절; 3:1), 여기서는 곧 하나님께서 사울과 함께 하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을 확증해 주는 객관적 증거이다.
이러한 때 일수록 하나님의 신앙을 회복하는 기회로 삼았어야 하는데 사울은 신접한 여인을 찾아 나눔으로 자신을 더욱 나락으로 떨어트렸다.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이같은 사울의 명령은 하나님께서 금하시고(레 19:31), 또한 사울 자신이 세워놓은 규범(3절)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아무튼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의 계시가 완전히 단절된 상황에서, 비신앙적 인물인 사울이 필연적으로 택할 수 밖에 없는 방법이었다. 한편
여기서 '신접한'은 문자적으로 '혼령을 다스리는'이란 의미로, 곧 '신접(新接) 한 여인'이란 죽은 자의 혼령을 통해 미래의 일을
알아보는 자를 가리킨다(레 19:31).
사울이 접신녀(接神女)를 찾아가서 문의한 이 사건은, 사울의 집권 초기에
그가 이스라엘 사회에서 모든 박수와 무당들을 쫓아낸 것(3절)이 그 자신의 확고한 신념에 따른 행동이 아니었음을 증명해 준다.
사울은 (1) 하나님의 계명(출 22:18; 레 19:31; 20:27; 신 18:10-14)을 충실히 지켜야 된다는 신념이나,
(2) 또는 초혼술(超魂術)은 철저하게 미신적이어서 신뢰의 대상이 못된다는 신념 등에 따라 박수와 무당을 축출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울은 다만 이스라엘 사회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무엘과,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신앙으로 막 발돋음해
가던(7:2, 5-11) 이스라엘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인간적 목적에 따라 그같은 정책을 시행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엔돌'(Endor)은 '거주의 샘'이란 뜻이다. 그 위치는 다볼 산(Mt. Dabor) 남쪽 약 6.4km, 소(小) 헬몬 산
북쪽 경사 지대이다. 그리고 '수넴'으로부터는 북동쪽으로 약 6~7km 정도의 지점으로 추정된다. 오늘날에도 소 헬몬산 경사
지대에 '엔돌'이란 마을이 있는데(수 17:11), 무당들이 거처하기에 좋은 많은 동굴들이 있다고 한다(Robinson,
Thompson, Stanley).
1. 사울이...변장하고
옷은 곧 그 사람의 신분을
상징한다는 점(18:4)에서, 사울은 왕의 표시가 되는 일체의 복장과 장식물을 제거하고 완전한 평민의 복장을 취했던 것 같다. 즉
아무도 자신을 이스라엘의 왕 사울로 알아보지 못하도록 변장을 했던 것이다. 변장한 채 엔돌의 신접한 영인을 찾아가는 사울의
모습에서 그의 철저한 타락상을 볼 수 있다. 한편 미신적(迷信的)인 발상에서 무당이나 점장이를 찾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언급하신 바
있는 영적 간음 행위이다(레 19:31; 신 18:9-14). 그러므로 성도들은 급박한 상황이 닥칠 때일수록 더욱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고 성경 말씀에 근거한 상담과 기도에 힘쓰는 등 끝까지 신앙적인 자세를 지켜야만 할 것이다.
신접한 여인이
사울의 청을 거절하자, 사울은 자신이 복술 행위를 적발키 위해 찾아온 싸람이 결코 아님을 밝힘으로써 그 무녀를 안심시킨다. 그러나
사울은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이라며 자신의 목적을 달성키 위해 하나님께서 가중히 여기시는 복술 행위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요청하는 등 그의 완악해지고 굳은 심령의 타락 상태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2. 신접한 술법으로
히브리
원문대로 번역한다면 '유령' 혹은 '그것을 불러내기 위한 도구'를 의미한다(3절). 한편 '술법'은 '점을 치다'란 의미가 있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로(겔 21:29; 미 3:6), 바로 이 동사에서 본서 6:2에서도 나타나는 '복술자'(卜術者)라는 단어가
나왔다(신 18:10; 사 3:2; 슥 10:2). 따라서 사울은 지금 신접한 여인에게 '복술'(卜術) 행위를 요청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복술 행위는 하나님께 가증한 행위로서, 율법에서 철저히 금지시킨 행위였다(신 18:10-14; 레 19:31;
20:27).
3. 사람을 불러 올리라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내는 행위를 가리킨다. 11절 주석참조.신접한 자와 박수 - 3절; 레 19:31 주석 참조.
•신접한 여인의 행위
1. "내가 누구를...불러 올리랴?"
이같은 무녀의 질문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음부관을 반영하고 있다. 즉 고대 히브리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경건한
자나 불경건한 자를 막론하고 일단 모두 '스울'(Sheol) 즉 '음부'(陰部)라고 부르는 지하 세계로 들어가 휴식을 취한다고
보았다. 아마도 이러한 생각은 시체가 땅 속에 묻히는 것과 관련되어 파생된 단순한 개념인 듯하다(창 27:35). 그러나
계시(啓示)가 점진 완료된 신약 시대의 관점에서 엄밀히 말하면, 죽은 자 중 성도는 낙원으로 가 위로와 안식을 누리고, 불신자는
지옥으로가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이지, 어떤자도 음부에서 단순한 휴식을 취하지는 않는다(눅 16:19-31).
반면
고대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이나 천사는 땅 위의 어느 공간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므로 죽은 자의 세계 또는 죽은
자의 혼과 교통할 수 있다고 믿는 접신녀(接神女)는 '스올'(음부)로부터 죽은 자의 혼(魂)을 불러 올릴 수도 있다고 한 것이다.
2. 여인이 사무엘을 보고 이 접신녀(接神女)가 실제로 사무엘을 보았는지에 대한 해석은 구구하다. 그러나 그 해석은 크게 다음 몇 가지로 분류된다.
(1) 실제로 사무엘의 혼이 임한 것을 무녀가 보았다는 견해(Josephus, Klein, Keil, Lange)
이
견해는 여러가지 맹점이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 성도 특히 선지자의 영혼을 무당의 술수에 이용되도록 하실 리 없으며 둘째, 혼이
땅에서 올라왔다는 13절의 언급은 성도들의 영혼은 하늘로 올라간다는(전 3:21; 눅 16:22, 23) 성경적 개념과는
배치되며, 오히려 접신술(接神術) 등과 같은 거짓 사상과 합치된다(사 29;4)는 점 등에서 잘못됐음이 분명하다.
(2) 거짓 혼이 사무엘의 혼인양 행세하면서 나타난 것을 보았다는 견해(Luther, Calvin, M. Henry, Grotius, Patrick)
이 견해가 가장 타당한 것 같다. 실제 사무엘의 혼이 아닌 사무엘을 가장한 사단의 어떤 형상을 봤음이 분명하다.
(3)
본문의 '사무엘' 앞에 '이름'이라는 단어가 필사자의 실수로 탈락됐을 것으로 간주하고, 그 무녀(巫女)는 사무엘의 어떤 형상을 본
것이 아니라 다만 사울의 입에서 나온 '사무엘'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뿐이라는 견해(Hertzberg)
이 견해는 뚜렷한 근거 없이 원문 중 '보고'를 '듣고'로 변경시켜야 되는 문제가 있다는 점에서,
(4) 그냥 아무것도 본 것이 없으나 거짓으로 본 척했을 뿐이라는 견해(Smith).
이 견해는 첫째, 12절의 '사무엘을 보고'는 무당의 말이 아닌 본서 저자의 언급이며 둘째, 영매(靈媒)등은 주관적 혹은 심리적으로 어떤 형상(혹은 환상)을 보기도 한다는 점 등에서 볼 때 타당성이 없다.
한편,
무녀가 유령같은 것을 보고 놀랐을 때, 사울이 그녀에게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고 물은 것을 통해 그 때 사울은 아무 형상도
보지 못했음을 시사해 준다. 사실 그 무녀가 어떤 형상을 본 것은 초자연적 혹은 심리적 현상이었기 때문에, 사울이 아무것도 못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여기 사울의 이 질문은 사울이 무당이 위치했던 곳과 어느 정도 격리되어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울과 무당이 각기 다른 방에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
3. 내가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여기의
'신'은 형태상으로는 복수이나 단수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그 무녀는 자기가 본 어떤 형상에 대한 자신의 두려움을 반영하기
위하여 한 혼의 형상만을 보았으면서도, 그것을 복수 곧 '장엄 복수'로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 '신'이란 단어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 '신'은 항상 어떤 '신'(god) 장체만을 의미치 의미치 않는다. 즉 이말은 '신적인 존재' 곧
'영'(靈)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어떤 '영적인 존재' 곧 '유령'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사무엘 유령의 정체 한편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는 사울의 요청(11절)으로 접신녀가 불러 올린 사무엘에 대한 해석은 매우 어려운 난제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특히,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라는 표현처럼 성경 기자는 여기서 마치 실제의 사무엘이 등장하여 말하는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에 있어서 성경 기자는, 사무엘을 흉내내어 나타났고 그 이름을 빙자하여 말하고 있는 악령을 편의상
간결하게 '사무엘'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이때 악령은 초혼술(招魂術)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영매(靈媒)인
접신녀(接神女)의 입을 통해서 말하고 있었다.
아무튼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접신녀와 초혼술(招魂術)의
정체를 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먼저 초혼술을 행사하는 접신자는 우선 강신(降神)이라고 하는 특수한 심령적 경험을 통과한
사람으로서, 죽은 자위 혼을 불러 일으켜 현실의 인간과 의사 소통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매개체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것이 소위
초혼술(招魂術)이라고 불리우는 일종의 이교적 사술(邪術)형태이다. 그러나 초혼술은 다음과 같은 성경적 근거에서 악령의 역사이며,
사단의 속임수이다.
(1) 초혼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즉 성경은 사람이 죽게 되면 그 혼은 즉시 지상의 세계와
차원이 다른 처소(천국 혹은 지옥)로 옮겨지고 지상의 세계와 교통하지 못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눅 16:19-31; 23:43;
고후 5:1). 따라서 초혼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결코 죽은 자의 혼이라 볼 수 없고, 다만 죽은 자의 혼을 가장한 사단 혹은
귀신의 역사에 불과할 뿐이다.
(2) 초혼자는 사단의 역사를 위해 동원된 도구 역할을 하는 셈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초혼자는 사람들로하여금 하나님과의 바른 교제를 방해하며 미혹하게 한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결코 용납해서는 안된다(신
18:10, 11). 즉 성경은 신접자, 초혼자, 무당 등을 존재 자체부터 정하고 있는 것이다(출 22:18; 레 19:31;
20:27; 신 18:10-14). 결국 이런 이유로 여기서 접신녀가 불러 올린 사무엘은 진짜 사무엘의 혼이 될 수 없다. 즉
'땅에서 올라온 그 신'은 루터(Luter)나 칼빈(Calvin)이 말한대로 사무엘의 형체를 입고 나타난 사단적 유령(곧 사단의
부림을 받은 귀신)으로 보아야 한다.그 모양이 어떠하냐 사울의 이같은 질문은, 무당이 실제로 사무엘의 형상을 보았는지의 여부를
확인키 위한 것이다. 따라서 이때 사울은 무당이 사무엘을 봤다는 언급에 대하여 일말의 의심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아무튼,
사울은 자기 앞에 나타난 악령을 진짜 사무엘의 영으로 착각하고 그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14절). 그러다가 자기가 기대하던 해결책은 얻지 못하고 대신 악령으로부터 자신의 멸망에 대한 예언을 듣게
되자(16-19절), 그는 (1) 큰 두려움의 엄습과 (2) 육체적 탈진으로 땅바닥에 길게 엎드러지고 말았다. 이것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자행 자지(自行自止)하던 타락자 사울 왕이 머지 않아 비참한 종말을 맞이할 것에 대한 하나의
전조(前兆)였다.(31:1-6).
첫째,
신접술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방법이다.
신명기 18:9-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둘째,
신접술로 나타난 사무엘은 사울의 경배를 받았다.
14절,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그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
이것은 인간에게는 합당치 않은 일이라고 본다. 그가 진짜 사무엘이었다면, 그의 발 앞에 엎드렸던 고넬료에게 일어서라고 한
베드로처럼 말하였을 것이라고 본다(행 10:25-26).
셋째,
하나님께서는 후에 사울의 그 행위를 정죄하셨다.
역대상 10:13-14, “사울의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돌리셨더라.”
넷째,
신접술에 의해 올라왔다고 하는 사무엘이라는 영은 땅에서 올라왔다.
13절,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그러나 의인은 하늘의 안식에 들어간다. 전도서 3:20-21,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시편 73:24,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구약 성도도 죽은 후에 영광에 들어갔다. 또 하늘에 올라간
의인의 영은 다시 땅으로 내려올 수 없고(눅 16:26), 또 하나님께서 악령의 활동인 신접술에 의해 사무엘을 땅으로 내려보내실
리도 없다.
다섯째,
악령도 강한 추측으로 어느 정도 미래를 예측하며 예견하기도 한다.
무당들도 신기한 일을 하며 어느 정도 미래를 예측하며
예견한다. 마태복음 24:11, [종말의 징조들 중에]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20-25절]
사울이 갑자기 땅에 온전히 엎드러지니 이는 사무엘의 말을 인하여 심히 두려워함이요 또 그 기력이 진하였으니 이는 그가 종일
종야에 식물을 먹지 못하였음이라. 그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러 그 심히 고통함을 보고 그에게 이르되 여종이 왕의 말씀을 듣고 나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왕이 내게 이르신 말씀을 청종하였사오니 그런즉 청컨대 이제 여종의 말을 들으사 나로 왕의 앞에 한 조각
떡을 드리게 하시고 왕은 잡수시고 길 가실 때에 기력을 얻으소서. 사울이 거절하여 가로되 내가 먹지 아니하겠노라. 그 신하들과
여인이 강권하매 그 말을 듣고 땅에서 일어나 침상에 앉으니라. 여인의 집에 살진 송아지가 있으므로 그것을 급히 잡고 가루를 취하여
뭉쳐 무교병을 만들고 구워서 사울의 앞에와 그 신하들의 앞에 드리니 그들이 먹고 일어나서 그 밤에 가니라.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만난 것은 그를 더욱 절망케 했을 뿐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거짓된 신비주의는 참된 해답이 아니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범죄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회개하고 오직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해야 한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회개에 있다. 사울에게는 철저한 회개가 없었다. 사람이 죄를 범할 수는 있으나 회개가 중요하다. 회개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다. 물론 회개는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우리는 다 부족한 자이므로 때때로
실수하고 넘어질 수 있으나 죄를 깨달을 때 그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청산하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다.
둘째로, 우리는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담대히 행해야 한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두려워 떨었고 철저히 회개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에 신접한 여인에게 찾아갔다. 죄인은 위기 상황에서
두려워 떨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그럴 때에 더욱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믿음은 위기 상황에서 빛을
발하는 법이다. 우리에게 닥친 세상의 모든 일들은 영적 전쟁과 같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길은 다른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 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담대히 행하자.
사전의
정의에 의하면 “신접하다”란 “몸에 귀신이 내려 접하다”란 뜻이다. “박수”는 한자어가 없는 순수한 우리말로서 “남자무당”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이 두 가지 용어는 אוֹב אוֹ יִדְּעֹנִי (오보 오 이드오니)라고 나란히 병접되어 함께 언급되기
때문에 그 한글번역어들을 특정하여 살펴 보기로 하자.
(오보 오 이드오니)אוֹב אוֹ יִדְּעֹנִי
신8:11
레19:31
레20:6
개역
신접자나 박수
신접한 자와 박수
신접한 자와 박수
개정
신접자나 박수
신접한 자와 박수
접신한 자와 박수무당
새역
귀신을 불러 물어 보는 사람과 박수
혼백을 불러내는 여자 / 점쟁이
혼백을 불러내는 여자와 마법을 쓰는 사람
공역
도깨비 또는 귀신을 불러 물어 보는 자
죽은 사람의 혼백을 불러 내는 여인이나 점장이들
죽은 사람의 혼백을 불러내는 여인들과 점장이
천역
혼령이나 혼백을 불러 물어 보는 자
영매들과 점쟁이들
영매들과 점쟁이
NKJ
a medium or a spiritist
mediums and familiar spirits
A man or a woman who is a medium, or who has familiar spirits
NRS
who consults ghosts or spirits
mediums or wizards
A man or a woman who is a medium or a wizard
“신접자”,
“귀신을 불러 물어 보는 사람”, “도깨비를 불러 물어 보는 자”, “혼령을 불러 물어 보는 자”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명사
אוֹב (오브)는 성경에 17회 언급되며 오경에는 레19:31; 20:6, 27; 신18:11의 네 구절에만 나온다. 이 명사는
사무엘상서 28장에 네 차례나 언급되는데 사울이 사무엘을 불러올려달라고 אוֹב (오브)에게 부탁하는 장면에
나온다(삼상18:3, 7, 7, 8, 9). 그 אוֹב (오브)는 אֱלֹהִים (엘로힘)이 지하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다고 사울에게 말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는 망자의 혼을 불러내는 영매였던 것 같다. 오늘날에서 이러한 행위를 하는 자를
“무당”이라고 부른다.
이
단어와 병행하는 יִדְּעֹנִי (이드오니)는 성경에 11회 언급되는데 오경에는 3회 나온다(레19:31; 20:6, 27;
신18:11; 삼상28:3, 9; 왕하21:6; 23:24; 대하33:6; 사8:19; 19:3). 위의 도표에서 보듯이 이
단어는 “박수”, “박수무당”, “점쟁이”, 마법을 쓰는 사람”, “귀신을 불러 물어 보는 자”, “혼백을 불러 물어 보는 자”,
“점장이들”, “점장이”, “점쟁이들” 따위로 다양하게 번역되었다. 영역본들은 spiritist, familiar
spirits, one who has familiar spirits, wizards 따위로 번역했다. 명사 יִדְּעֹנִי
(이드오니)는 ‘알다’란 동사 ידע (야다)에서 파생했기에 남들이 모르는 어떤 것을 알고 있다고 알려진 데에서 비롯한 용어였을
것이다. 이 단어는 항상 אוֹב (오브)와 함께 나란히 언급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아마도 יִדְּעֹנִי
(이드오니)는 אוֹב (오브)의 단짝이거나 배우자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우리말로 ‘무당’의 남자 동료를 ‘박수’라고
부르는 관습이 이에 해당할 수 있을 것 같다.
박수는
굿거리에 직접 나서서 의례를 집행하며 춤과 노래를 부르기도 하지만 굿거리에 직접 나서지는 않고 여무(女巫)가 춤을 추는 동안
3현 6각을 다루는 잽이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제정일치시대의 박수는 무당과 더불어 사제권과 왕권(王權)을 지닌 권력자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제정일치가 이루어졌던 시대의 단군· 동명왕· 박혁거세· 남해 등을 박수로 간주한다. 가나안의 종교문화에서 권력자로
군림하던 샤먼으로서의 무당과 박수는 정교가 분리되던 시대에 왕의 조력자로서 신전을 관리하는 관직으로 정해졌으며, 지방에서는
산당에서 일하는 무속 샤먼으로 행세했을 것이다. 이들은 신전들과 지방성소들과 산당들에서 접신하는 종교현상을 보이면서 신들이 뜻을
전달하는 일을 하였다. 또한 이들은 권력자들이나 왕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길흉을 점쳐주거나 통치를 위한 지배이데올로기를
창출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성경은
국가신전과 지방성소와 산당들의 종교적 관례가 모두 거짓 신탁을 내리면서 혹세무민하는 악습을 금지하고 있다. 성경으로 말씀예배를
드리던 디아스포라 공동체는 잘못된 우상종교의 미신과 폐단을 척결하고 오로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시내산에서 주신 말씀에
의거하여 말씀공부와 말씀예배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야훼의 말씀을 진리의 도로 내세웠다.
오늘의 교회 안에 기독교인들이
은사를 받아서 말씀 없이 예언하고 길흉을 점치고 돈을 받고 축복권을 남발하는 행태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이들은 기도원이라고
간판을 붙인 곳에서 성행하지만, 건전하다고 자부하는 일반교회들의 목회자들 중에서 종종 무당이나 박수처럼 신비함을 가장한 거짓신탁과
축복권을 남발하는 자들도 많이 있다. 더 나아가 정치적인 목적을 위하여 일부 정치권력자들과 야합하여 하나님을 빙자하여 말씀을
신탁처럼 내뱉고 성도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까지도 속이는 종교인들이 근자에 기독교에서 나타나고 있다. 성경은 말씀 이외의 어떠한
신비한 행위도 교회 안에서 금지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을 빙자하고 사칭한 자에게는 무서운 징벌이 기다리고 있음을 두려워해야
한다.
‘몰록’의 우상은 소의 머리에 사람의 모습을 하였는데, 두 손을 펴고 직립하여 서 있거나,
단상에 걸터앉은 것도 있었으며, 그 몸과 단은 속이 비어있으며, 제전이 있을 때는 그 속에 불을 지펴서 그 몸체을 뜨겁게 달군
뒤에, 제사장은 어린아이의 아버지에게서 아이를 받아 우상의 두 손 위에 놓고 태워 죽게 하였으며, 이때 아이의 아버지에게 아이의
곡성이 들리지 않게하기 위하여 북을 울리도록 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이
신을 섬기는 것에 대해 모세 시대부터 바벨론 유수 기간까지 약 900여년간 선지자들이 경고 해 왔던 기록들이 성경 곳곳에
기록되어 있으며, 특별히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철저히 진멸하였던 가나안의 나라나 성읍들이 이러한 신들을 섬기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심판’를 받은 것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 신에게 제사를 드렸던 곳이 후에는 죽은 짐승들의 사체를 버리고, 온갖 오물을 버리는 곳이 되어 이를 불태우는 연기가 밤낮 타오르게 되었으며, 구더기와 온갖 벌레들이 서식하고 악취가 풍기는 불쾌한 곳이 되었습니다.
제사지냈던 장소의 이름은 ‘게벤 힌놈’ 곧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란 뜻으로써 신약성경에서 예수께서 ‘지옥’ ( 헬 : gevenna 게엔나 )으로 불렀던 곳입니다.
< 레 18:21 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케 말아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
아리러니컬 하게도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이러한 신들을 섬겼던 가나안 민족들을 처절하고 냉정하게 응징하였던 심판의 도구가 되었었으나, 그 후손들은 오히려 그 신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들이 처절한 심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학자들 간에는 앞에 열거된 모든 신들이 바벨론의 니므롯 ( 담무즈 Tammuz )이
신격화되어 퍼져나간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 신들의 이름이나, 신상의 모양, 인신제사법 등이 유사하며, ‘신들의 아내들’의 명칭
또한 동일하거나, 니므롯의 아내 ‘세라미스’에게서 나온 이름들인 것을 볼 때 사단의 ‘은밀’하고 ‘통일된’ 계략들이 인류 역사
속에 얼마나 뿌리깊게 역사되어 왔는지를 성경과 역사는 알려 주고 있습니다.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또 이르라 무릇 그가 이스라엘 자손이든지 이스라엘에 우거한 타국인이든지 그 자식을 몰렉에게 주거든 반드시 죽이되 그 지방 사람이 돌로 칠 것이요. 3 나도 그 사람에게 진노하여 그를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이는 그가 그 자식을 몰렉에게 주어서 내 성소를 더럽히고 내 성호를 욕되게 하였음이라. 4. 그가 그 자식을 몰렉에게 주는 것을 그 지방 사람이 못본체하고 그를 죽이지 아니하면 5. 내가 그 사람과 그 권속에게 진노하여 그와 무릇 그를 본받아 몰렉을 음란히 섬기는 모든 사람을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라 >
레위기 20:6-8 / 접신자를 따르는 자의 죄(신접자, 오보트, 박수 이데온) 죽은 자의 신을 불러내어 미래를 알아내는 힘 영매 즉 죽은 자의 혼을 사용한다.
신명기 18:9-1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레위기 20:9 / 부모를 저주하는 죄
부모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주셨다. 에베소서 6:1-2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계명이니.
옳으니라 - 자연스럽다, 자연법 순종하라 - 내적인 자세 공경하라 - 외적인 자세 약속 있는 첫 계명 - 신적 계명
유대인의 경영자는 직원을 선택할 때 먼저 부모와 인터뷰를 진행한다. 먼저 부모와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한다.
레위기 20:10-
로마서 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1. 본문이 언급하는 죄의 종류를 크게 나눈다면 몇 가지인가?
우상숭배, 성범죄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빠뜨리기 쉬운 죽을 죄가 한 가지 더 있다. 무엇일까? 그것은 범죄행위를 방관하는 죄이다(4).
당연히 말해야하고 행동해야할 때 말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 것도 사형에 해당하는 죄이다.
2. 몰렉은 암몬족의 신으로 머리는 황소이며 몸통은 사람인 청동우상이다. 밑에서 불을 때면 뜨거워진 팔에 유아를 얹어서 죽게하는 방식으로 섬겼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서 죽어야할 자는 어떤 자들인가?
몰렉에게 자식을 주는 자와 그것을 방관하는 자. 현대판 몰렉은 무엇일까? 몰렉보다 더욱 잔인한 우상은 어쩌면 돈이다. 돈 때문에 남편이나 아내를, 혹은 자녀나 부모를 죽이는 일이 가끔 보이는 것이 우리 사회이다.
말씀대로 우리 이웃이 그렇게 하면 돌로 쳐야 하나? 그렇게 죽어야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구약의 율법을 지금 우리가 문자 그대로 시행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3. 몰렉에게 자녀를 주는 것이 어떻게 성소를 더럽히고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 되나?
이스라엘의 자녀는 곧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자녀를 마음대로 다른 곳에 팔아먹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밥그릇을 허락도 없이 덜어서 자녀에게 주면 노발대발하실 것이다. 밥 몇 숟가락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4. 그 지방 사람이 몰렉숭배자를 돌로 쳐서 심판을 하면 하나님도 그를 백성 중에서 끊으리라고 말씀하신다. 사람들이 나서서 심판하면 하나님은 좀 빠지셔야하는 것 아닌가?
사람들의 심판과 상관없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말씀이다. 사람들이 돌로 치거나 치지 않거나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
결국 사람들의 심판이 진짜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 진짜 심판이다. 하나님의 심판에 사람들이 동조하는 것일 뿐이다.
5. 신접한 자, 박수를 추종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음란한 짓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우상숭배는 두 가지 측면에서 간음이다. 1)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스라엘이 다른 신들을 그렇게 쉽게 추종한 것은 그런 신들을 섬기는 과정이 음란한 탓이다.
물론 본인들은 그것을 결코 음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술? 사랑? 자유? 라고 말하겠지만 실상은 음란이다. 2) 영적인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과 맺은 관계를 파기하는 것이며 곧 하나님의 사랑을 배신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6. 여호수아를 통해서 가나안 주민을 전멸시키시는 이유는 극심한 우상숭배 때문이었다. 사방에 우상이
널려 있는 상태에서 이스라엘 백성만 유독 그런 행위에 물들지 말라고 경고하시는 것이다.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명령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나는 너희를 거룩케하는 여호와니라; 너희는 특별히 내 백성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야 애인을 줄줄이 꿰차고 다니든 말든 손가락질도 하고 웃기도 하겠지만 내 애인이 바람피우는 것은 용납하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 때문이다. 예수 믿는 우리에게는 이런 하나님이 계신다. 그래서 구별된 삶을 살아야한다. 불행한가? 애비없이 제 마음대로 사는 고아가 부러워 보이는가?
7.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행위는 왜 이렇게 무서운 것인가?
보이는 부모(형제)를 공경(사랑)하지 못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도 공경할 수 없기 때문이다(요일 4:20). 부모를 저주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저주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 (잠 30:17)
8.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장 큰 벌은 '백성 중에서 끊쳐지는 것'이다. 내 백성이 아니라는 말이다. 본문에서 이와 비슷한 다른 표현을 찾아보자.
무자하리라(21); 단순히 자식이 끊어진다는 의미 이상으로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다는 의미이다.
9. 성범죄에 대한 10-21절의 내용은 18장에서 상세하게 언급한 내용이다. 반복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두 본문을 자세히 비교해 보자. 차이점이 있는지?
형벌에 대한 부분이 추가되어 있다; 처벌규정이 덧붙여져 있는데 예외없이 사형이다. 성범죄를 왜 이렇게 중벌에 처했을까? 성 윤리가 모든 윤리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너지면 다른 것은 볼 것도 없다.
역으로 성적인 유혹이 그만큼 집요하고 매력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위험한 것을 왜 인간에게 주셨는가? 잘 쓰면 그만큼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이다. 남용, 오용이 잘못이지 약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10. 남매 간에는 하체를 보는 것만으로도 죽을 죄가 되는가(17)? 한 집안에서 살면서 실수로 보게되면 어떡하지?
여기서 본다는 것은 성관계를 가진다는 말의 완곡하게 표현한 것일 뿐 단순하게 본다는 의미가 아니다.
11. 경도(생리)중인 여인과 동침하는 것이 죽을 죄가 되는 것은 피근원을 드러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은 아무도 피를 먹지말라고 하면서 피를 소중하게 여겼던 사상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비정상적인 성관계를 금지하는 규정들은 오늘날에도 존중되어야하지만 이 문제만은 조금 다르게 다루어져야한다고 본다. 무슨 차이점이 있어서?
다른 모든 관계는 정상적인 성관계를 맺을 수 있는 관계가 아니지만 이 경우는 정상적인 부부의 관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피에 대한 개념이 달라졌으므로 문자 그대로 적용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윤리적인 탈선의 문제도 아니요 형법에 저촉되는 일도 아닌 종교의식상의 부정이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성의학자들의 의견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심리적으로 불안정할 수 있음에 주의하고
의학적으로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으나 몸이 약해져 있는 상태이므로 조심스럽게 대해야한다는 것 같다.
12. 여기에 언급된 이런 성범죄가 사형에 해당할 정도로 심각한 범죄인 이유가 무엇일까?
가정파괴범이기 때문이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최초로 인간에게 준 제도이다. 이것을 파괴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창조를 허무는 일이다. 강도, 강간범에게 가정파괴범이란 말로 그들의 범죄의 심각성을 지적해낸 법관은
법에도 없는 이 말을 처음 사용해서 칭찬을 많이 들었다. 가정을 허무는 것은 단순히 한 가정의 일이 아니라 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기 때문에 심각한 범죄행위가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가장 소중하게 만든 작품을 깨뜨리는 일임을 잊지 말아야한다.
13. 예전에 유행하던 '지구를 떠나거라'는 말은 웃음을 주는 표현이었지만 잘 생각해보면 웃을 일만은 아니다. '죽어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본문에서도 이와 같은 표현이 있다면?
땅이 토하여 내리라(22), 무자하리라(21),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18); 다 답이 될 수 있겠으나 전자가 더 좋은 답이라고 본다.
14. 하나님이 거룩한 것이야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까지 꼭 거룩해야 하나?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기 때문이다; 소유란 자녀요 아내인 관계를 말한다. 너희로 나의 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라(26).
당시의 가나안 풍속과 이스라엘이 지켜야하는 성적인 자세는 너무나 다르다. 그런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자. 현대인들이라고 해서 이런 점에서는 옛날보다 더한 것도 없고 덜한 것도 없는 것 같다.
우리 주변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성적으로 문란하고 우상이 들끓고 있다. 이런 가운데서 성도는 어떤 삶을 지녀야할지 의견을 나누어 보자.
15. 가나안 원주민들이 이스라엘에 의해서 철저하게 죽음을 당하거나 쫓겨나야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만 편애하셨기 때문이 아니란 증거가 본문에 있는가?
이런 계명을 어기면 이스라엘도 쫓겨나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점이다(22); 가나안 족속들이 쫓겨난 것은 결국 그들이 저지른 범죄행위의 대한 심판이다.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땅을 주시려고 그랬다고 볼 수도 있지만
심판의 측면에서 보아도 틀림없는 일이다. 그렇게 될 것을 하나님께서는 미리 알고 계셨을 뿐이다(창 15:16).
16. 가나안 땅은 우리나라에 비해서도 척박한 땅이요, 농사에 적합한 비도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는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상징적으로 천국을 가리킨다. '예수가 지옥에 있다면 나는 지옥으로 가겠다'는 것은 루터의 말이다.
진정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은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가나안보다 더 비옥한 땅은 천지삐깔이다.
17. 왕처럼 귀한 분이 특별히 귀한 것을 따로 보관해놓고 보고 또 보면서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 본문에 있다.
하나님에게 이스라엘이 그러했고, 또 우리가 그러하다. 우리말로는 별로 실감이 나지 않는데 어느 단어일까?
소유; 세굴라( )라는 단어인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소중한 존재로 여기시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단어이다.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 3:17b)는 표현에 가장 잘 어울리는 표현이다.
레위기 20장은 하나님께서 가증스럽게 여기시는 흉악한 범죄들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흉악한 범죄들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잔인한 형벌을 강조하셨을까요?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가나안 즉 세상의 악한 풍습을 따르고, 우상을 숭배하며, 근친상간 등의 죄악을 행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며 용납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거룩(카도쉬)이란 죄악으로부터 떠나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문제만이 아닙니다. 거룩(카도쉬)이란 영원한 삶과 죽음의 문제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레위기 20장에서 흉악죄를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합니다.
첫째는 몰렉 숭배의 죄(20:1-5) 몰렉이란 머리는 소의 형상이며 몸은 사람의 모습을 갖춘 암몬 사람들이 섬기는 우상을 말합니다.
둘째는 접신자를 따르는 죄(20:6-8) 접신자는 무당을 말합니다. 미래가 불투명한 시대를 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미래를 알고 싶어하는 강열한 욕망이 있습니다. 믿음이란 미래를 알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볼 수 없고 알 수 없지만 미래를 인도하는 주가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18:9-1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셋째는 부모를 저주하는 죄(20:9)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부모님을 하나님의 대리자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인 주 안에서 부모를 순종하라(내적인 자세), 공경하라(외적인 자세)고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6:1-2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계명이니.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는 자녀들에게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는 것은 보이는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는 가르침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도 진리의 말씀에 따라 거룩한 주의 백성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옳으니라 - 자연스럽다, 자연법 순종하라 - 내적인 자세 공경하라 - 외적인 자세 약속 있는 첫 계명 - 신적 계명
유대인의 경영자는 직원을 선택할 때 먼저 부모와 인터뷰를 진행한다. 먼저 부모와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한다.
레위기 20:10-
로마서 12:1-2
하나님의 백성은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를 받습니다(2b~6). 우상숭배의 결과는 ‘백성 중에서 끊으리라’는 것입니다(3, 5, 6). 자녀를 산 채로 바치는 몰렉 제사는 가장 잔인하고 저속하고 역겨운 이방 종교를 대표하는 것입니다. 이런 금지된 제사에 대한 처벌은 돌로 치는 것입니다(2). 이것은 공동체 전체에 악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기에 엄중한 처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만일 공동체가 이 처벌을 행하지 않는다면(4) 하나님께서 친히 그를 백성 중에서 끊어내시겠다고 하셨습니다(5).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서 자행되고 있는 성적인 타락에 대해 정죄하십니다(9~21). 하나님은 가정이 파괴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간음은 사형입니다(10). 근친상간(11~12)의 경우도 사형으로 처벌해야 합니다. 결혼 관계를 위반하는 것은 어떠한 이유에서든 잘못입니다.
동성애 역시 생명을 위한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범하는 가증한 죄로 사형에 해당합니다(13). 14절은 아내와 장모를 함께 취하는 경우를 다루는데 여기 ‘취한다’고 한 단어는 사실상 결혼 관계를 암시하는 말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공동체가 이런 관계를 용인하지는 않았겠지만, 가나안의 문화를 닮아가는 것을 하나님은 엄격히 금하시고, 그들을 불에 태워 죽이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수간의 경우도 하나님의 창조 질서의 위반으로 사형에 해당합니다(15~16).
하나님의 백성은 거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도 가나안 사람들이 그 땅에서 토해냄을 받은 것과 같이 되고 말 것입니다(22~23).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약속이 온전히 성취될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24). 그들은 자기들의 하나님과 같이 거룩해야 합니다(25~26). 그러므로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삶이 거짓 종교들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하고, 그런 거치는 자들을 돌로 쳐서 제거해야 할 것을 명하십니다(27)
거짓 종교는 언제나 저속하고 역겨운 삶으로 인도합니다. 하지만 참된 종교는 거룩한 삶으로 인도합니다. 본문은 무서운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죽음의 형벌을 초래하는 죄악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금지 규례와 함께 처벌 규정, 즉 범죄에 대한 형량이 함께 기록된 것은 단순히 처벌이 목적이 아닌, 하나님의 구원의 의지도 함께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소극적으로는 개인의 구원을 이루어갈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악의 세력을 대항하고, 하나님 나라의 공의와 사랑을 세상에 알려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닮고 따라가는 것은 곧 죽음입니다.
__________________ 레위기 19장 / 하나님을 경외하라(14절)
03-30-2023(목) 사순절 제32일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맹인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Do not curse the deaf or put a stumbling block in front of the blind, but fear your God. I am the LORD.
경외하라(3372) 야레(yârêʼ) יָרֵא
1. 떨다
2. 두려워하다
3. 민수기 14:9.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 발음
/ 야레[ yârêʼ ] 관련 성경 / 두렵다(창18:15, 삼하7:23, 말4:5), 두려워하다(창19:30, 신5:5, 왕하10:4),
경외하다(출1:21, 왕상1:50, 대상16:25), 놀라다(합3:2,사57:11, 시106:22), 공경하다(레19:30),
두렵게 하다(느6:13, 삼하14:15, 느6:19), 내놓다(욥32:6), 보다(사60:5), 위험하다(신8:15),
두렵다(시47:2), 엄위하다(시65:5, 66:5), 기이하다(시139:14), 지존하다(시111:9).
[명]위엄(출15:11, 시68:35), 두려움(시76:12, 사18:2) 구약 성경 / 293회 사용
하나님을 경외하라( fear your God)
하나님의 속성 중에서 피조물인 우리들이 도저히 본받을 수 없는 속성이 있는가 하면 본받을 수 있는 속성도 있습니다. 본받을 수 없는 속성은 "영원, 전지전능, 무소부재"와 같은 절대적 속성입니다. 반면에 본받을 수 있는 속성은 "사랑, 거룩, 의"와 같은 속성은 상대적 속성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너희는 거룩하라, 너희는 의를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오늘의 본문에서 너희는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하셨을까요? 애급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착해야 할 땅은 이방인들의 문화와 제사가 거룩한 백성들을 유혹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레위기 19장에서 사회생활에 관한 다양한 규례들을 소개합니다.
레위기 19장에 소개된 규례들은 수직적이며 수평적 규범이 동시에 강조됩니다. 이것은 당시 고대 근동 사회와 형식적인
면에서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용 면에서는 뚜렷한 구별이 나타납니다.
고대 근동의 규범은 수직적 관계가 수평적 규범으로 전환될
때 그 중개자인 신관이나 족장이 신을 대신하여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따라서 이들은 사회의 규범보다 위에 있어 개인의 의지에 따라
사회를 통치합니다. 그러나 레위기 19장에 나타난 모세 율법은 수직에서 수평의 규범으로 전환할 때 중개자가 없고 모든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하나님 앞에서 동일하게 취급됩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그들의 통치자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규범의 내용도 개인의 의지가
아니라 정의라는 규범에 의해 제정된 것입니다. 따라서 모세 율법은 정의와 평등이라는 내용 면에서 고대 근동의 다른 규범보다 우월성을
갖습니다.
본장은 언약의 공동체 내에서 지켜야 할 인간과의 규범에 대해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로 결론을 맺고 있다. 이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 이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이웃에 대한 사랑은 곧 나에
대한 사랑이며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타인을 대할 때 마치 그리스도를 대하듯이 대하고 또한 그를 영접할 때
그리스도께 하듯이 영접하고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보이는 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다.
본문 1절에서 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룩한 삶을 요구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거룩하십니다.
그에 따라 거룩하신 하나님께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이스라엘의 책무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답게 그에 부합되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지켜야할 규례를 전하게 하십니다.
관련하여 오늘 본문은 크게 3가지 종류의 규례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1절부터 8절까지는 ‘부모님과 하나님을 대하는 규례’이며,
9절부터 18절까지는 ‘이스라엘 공동체 내에서의 규례’이고, 19절부터 36절까지는 ‘개인 규례’에 관한 내용입니다. 먼저
3절입니다.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하나님께서 요청하신 거룩한 백성의 첫 번째 책무는 ‘부모를 경외하는 것’이었습니다. 참고로 이와 유사한 내용이 십계명중 제5계명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두 규례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본문의 경우 ‘경외하라’라는
동사가 쓰인 반면 십계명에서는 ‘공경하라’는 동사가 쓰였다는 점입니다. ‘경외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례’는 주로
‘하나님’을 목적어로 하는 동사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부모’가 목적어입니다. 곧 부모의 권위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강조하며 공경의 차원을 넘어 부모를 경외하라는 뜻입니다.
아울러 거룩한 백성의 첫 번째 책무가 ‘부모를 경외하는 가정내 규례’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은 ‘진정한 거룩’은 가정으로부터,
부모자녀간의 바른 관계로부터 출발해야한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예배당 안에서의 거룩한 모습은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배당 밖에서의 거룩, 곧 가정 내에 진정 거룩한 모습이 있는지 여부는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쉽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백성의 첫째 요건으로 ‘부모를 경외하는 것’, 곧 ‘신앙 안에서 부모와 자녀가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첫 번째로 요청하고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청하시는 거룩한 백성의 두 번째 책무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3절)’, ‘우상 숭배하지 않는 것(4절)’, ‘화목제를
잘 이행하는 것(5-6절)’ 으로 대표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가리켜 ‘우리의 안식일’이
아니라 ‘나의 안식일’임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곧 안식일이라는 시간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일은
단순히 ‘휴일’이 아니라 ‘주님의 날’입니다. ‘주님을 경배하며 주님께 예배드림을 위해 하나님께서 구별해 놓으신 날’입니다.
거룩한 백성임을 인지하며 거룩한 백성답게 살아가려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주일을 절대 경홀히 여기지 않습니다. 거룩한 백성임의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은 우상을 숭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것들을 올려놓고 숭상하지
않습니다. 아울러 화목제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순종이 요구되는 영역에서까지도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합니다. 거룩한
그리스도인은 자기중심적 사고를 탈피하여 삶의 아주 작은 영역 속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을 실천해 나갑니다.
이제 9절부터 18절까지는 ‘이스라엘 공동체 내에서의 규례’에 관한 내용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사회윤리’에 대한 내용입니다. 9절에서 10절입니다.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실천해야할 기본적인 ‘사회윤리’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배려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공동체내에는 가난한 사람 뿐 만 아니라 나그네와 같은 외국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곡식을 다 수확하지도
말고 땅에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포도 열매를 다 따거나 떨어진 열매를 줍지 말라 명령하십니다. ‘탐욕적인 삶’이나 ‘인색한
삶’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합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은 도둑질이나 거짓말로 이웃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11절), 이웃의 재산을 강탈하거나 약자의 것을
착취하지도 않아야합니다(13절). 공의로 재판하며(15절), 이웃에 대해 험담하거나 이웃의 생명을 담보로 이익을 취해서도 안
됩니다(16절). 타인을 미워하는 마음을 품어서도 안 되며, 이웃이 잘못을 하면 반드시 타일러야만 합니다(17절). 서로 앙심을
품거나 원수를 갚아서도 안 됩니다(18절 전반절). 결국 이 모든 사회윤리의 근간은 한 문장으로 요약 될 수 있는데 바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입니다(18절 하반절).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과 이웃을 동일시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동시에 ‘내 이웃’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내가 ‘이웃’ 으로 규정하지 않는 ‘낯선 타인’ 또한 ‘하나님께서 만드신 존재’임을 인식하며 존중하려 애를
씁니다. 사랑하려 노력합니다. 더 나아가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원수’까지 사랑하며 ‘나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려합니다(마 5:44). ‘죄인이었던 나’를 사랑으로 품어주신 사랑의 하나님을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나처럼 사랑하며
원수까지도 품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기 원하는 아니 닮아야만 하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요청되는 모습입니다.
이제 19절부터 36절까지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개인의 삶의 영역에서 실천해 나가야 할 ‘신앙윤리’입니다. 19절입니다. “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지어다 네 가축을 다른 종류와 교미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은 종이 다른 가축을 교미시키거나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씨앗을 함께 재배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아울러 두 재료를 섞어 짠 옷감으로 만든 옷도 착용하지 말라 하십니다. ‘거룩’은 ‘구분’입니다. 하나님께서
‘구분’해 놓은 것을 ‘지키는 것’ 또한 ‘거룩’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종간(種間)의 혼합을 금지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 또한 일상의 삶에서 ‘거룩을 실천해나가는 것’입니다.
아울러 20절부터 22절까지는 다른 남자와 정혼한 여종과 동침했을 경우 속건제를 드리는 규정이며, 23절부터 25절까지는 과목을
먹는 규정에 관한 내용, 26절부터 36절까지는 점이나 술법, 머리가를 둥글게 미는 것, 문신 등에 대한 금지 규례이며, 노인을
공경하며 거류민들을 사랑할 것과 공평한 저울과 추의 사용에 대한 규정이 계속해서 언급됩니다. 모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구분’해 놓으신 규례들을 준수하라는 내용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구분해 놓으신 것을 존중하며 그 규정들을 일상의 삶에서 준행합니다. 마지막 절인 37절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모든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끝나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한 지식적 앎으로 생각하며 축적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삶속에서 행동으로 구체화시켜 나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새로운 한 날을 또 허락하셨습니다. 부르심에
합당한 거룩한 삶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입증함으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임을 직시하며 오늘도 구별된 삶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삶으로 준행해 나아간다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드러나기 마련이며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선순환의 역사는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시며 하나님의
구분된 명령을 삶속에서 실행해 나가심으로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우리 모두에게는 큰 기쁨이 넘치는 복된 하루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저희를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삼아주심을 감사합니다. 저희들에게 허락하신 이 하루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준행함으로 거룩한 자녀답게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시고 세상 사람들의 눈에 이 땅에 거룩한 주의 자녀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그들에게도 거룩한 삶의 의미를 깨우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될 수 있도록 복음의 문을 열어주시옵소서.
일상생활 속의 거룩(1-8절) 레위기 18-20장은 하나님의 백성의 윤리적 기준, 즉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18장의
마지막 절의 마지막 부분이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입니다. 그리고 19장에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또는
“나는 여호와이니라”가 15번이나 나옵니다. 그래서 18장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윤리적으로 정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 19장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은 일상에서도 거룩한(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도 거룩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누군가에게 “학생다워라”,
“의사다워라”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 말을 듣는 사람이 이미 학생이고, 의사이기 때문입니다. 학생이 아닌 사람에게 학생다우라고
말할 수 없고, 의사가 아닌 사람에게 의사다우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에게 “너희는 거룩하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가 이미 거룩한(구별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 거룩한 삶, 구별된 삶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3)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이 말씀은 십계명 중, 제5계명과 4계명에 상응하는 명령입니다. 십계명에서는
‘부모를 공경하라’라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경외하라’라고 말씀합니다. ‘공경하다’는 ‘무겁게 여기다’의 의미인데, 그 무거움은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부모를 경외를 경외하고, 부모를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도 경외하는 사람이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또한 안식일을 구별하여 지키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은 자신의 모든 삶과 모든 시간이 하나님을 향해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그리스도인)이 거룩해진다는 것(구별된다는 것)은 일상의 삶에 신실한 것입니다.
(4) 너희는 헛된 것들에게로 향하지 말며 너희를 위하여 신상들을 부어 만들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이 말씀은 십계명의 제1계명과 2계명에 상응하는 명령입니다. 고대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사람들이 하나님 한분만을 섬기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해서 ‘우상’을 만들고, 섬기는 이유는 모두 ‘자기를
위해서’입니다. 자신이나 가족이든, 부귀영화든, 건강이든, 입신양명이든, 인간관계든 그 무엇이든지, 그것을 우상으로 삼는 것은
오직 ‘자기를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신상(우상)들을 만들지 말아야 할 이유가 ‘너희를 위하여_우리를
위하여’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라는 신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우상’을 만드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 한 분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5-8)
너희는 화목제물을 여호와께 드릴 때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리고 그 제물은 드리는 날과 이튿날에 먹고 셋째 날까지 남았거든
불사르라 셋째 날에 조금이라도 먹으면 가증한 것이 되어 기쁘게 받으심이 되지 못하고 그것을 먹는 자는 여호와의 성물을 더럽힘으로
말미암아 죄를 담당하리니 그가 그의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화목제물을 먹는 문제는 7:15-18에도 동일하게 나와 있습니다. 화목제는
일종의 잔치 제사입니다. 잔치의 큰 특징 중의 하나는 참석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제물 드림을 통해서 드렸습니다. 제물 중에서 번제물은 모두 태워서 드렸습니다. 그래서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소제, 속죄제, 속건제의 제물은 하나님 앞에서 태워서 드리는 부분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제사장의 몫이었습니다. 그런데 화목제물은
기름과 피는 하나님께 드리고, 제사장에게는 앞 가슴살, 오른쪽 뒷다릿살을 주고, 나머지는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몫이었습니다. 화목제에는
그냥 감사해서 드리는 ‘감사제’, 어떤 서원이 있어서 드리는 ‘서원제’, 자원해서 드리는 ‘자원제(낙헌제)’ 등이 있었습니다.
‘감사제’로 드리는 제물은 당일에 다 먹어야 했고, ‘서원제’와 ‘자원제(낙헌제)’는 그다음 날까지 먹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셋째 날에도 먹으면 드린 화목제는 무효가 되었습니다. 화목제의 제물은 흠 없는 소나, 양이었습니다. 만약 화목제물을 소로
드렸다면, 제사장분을 빼고도 약 300kg(500근) 정도 남는다고 합니다. 그 정도의 양이면, 최소한 1,000명이 먹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이틀 만에 다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해가 떨어지고 나면 다음 날이 됩니다. 만약 오후 2시쯤에
제사를 드렸다면, 해가 떨어지기 직전일 것입니다. 그러면 만 하루 만에 다 먹어야 합니다. 가족은 물론 일가친척이 먹어도 다 먹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웃과도 나누어 먹고, 잘 모르는 사람과도 나누어 먹고, 심지어 감정이 좋지 않은 사람과도 나누어 먹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누어 먹는 것이 거룩하게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회생활 속의 거룩(9-18절) 9-18절에서는 사회생활 속의 거룩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9)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하나님께서는
곡식을 추수할 때 땅에 떨어진 알갱이는 줍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혹시 추수하는 사람이 최대한 조심해서 땅에 알갱이를 떨어뜨리지
않도록 할까 봐 아예 밭모퉁이는 추수하지 않고 남겨두도록 했습니다. 그것은 추수하는 일꾼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함이 아니라, 농사를
지을 땅이 없는 고아와 과부를 비롯한 가난한 사람들과 이방인(거류민, 나그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룻이 시어머니와 함께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와서 보아스의 밭에서 곡식을 주웠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하게(구별되게)
사는 것은 자신의 수입 중에는 이웃을 위한 몫도 있음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일깨워주시는 것입니다.
(10)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포도 농사에서 수확할 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매달 첫째 주일을 ‘나눔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나눔주일의 의미는 내가 여유가 있기 때문에 이웃을 돕기 위해서 여분의 새
물품을 가져온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 개인이 가져오는 쌀 한 봉지, 라면 한 봉지, 기름 한 병, 통조림 한 통 등은
가난해서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 전체의 필요에 비하면 미미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삶과 신앙에 하나님의 풍성함을 경험하게 해
줍니다. 우리가 시장에서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서 먹거리를 구입한다는 것은 내 마음과 삶에 이웃을 위한 공간이 있다는
의미이고, 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을 위해 구입한 먹거리가 집 안 한쪽이나 자동차
안에 있는 것을 자녀나 가족이 보는 것은, 삶에 이웃을 위한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수백 마디의 말로 교육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나눔주일은,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가져온 물건을 받는 사람보다
우리에게 훨씬 더 풍성한 의미를 줍니다.
(11-12) 너희는 도둑질하지 말며 속이지 말며 서로 거짓말하지 말며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은 상대가 가진 것을 자신도 가질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자신이 갖게
되는 것을 바른 절차, 정당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가지려고 하기 때문에 바르지 않은 것이고, 틀린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이 누려야 하는 것을 누리지 못하기도 하고, 그 비용을 대신 감당하기도 합니다. ‘속이다’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
마땅히 정직해야 할 상황에서 거짓되게 행하는 것입니다. 또한 ‘거짓말하다’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약속을 깨뜨리거나 상대를 속이는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은 맹세하는 자신보다 더 위대하다고 생각되는 존재의 이름으로 맹세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고서 상대를 속이거나 거짓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멸시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속이거나 거짓을 위한 맹세로 인하여 결코 더럽게 사용될
수 없는 이름인 것을 상기시켜 주는 것입니다.
(13) 너는 네 이웃을 억압하지 말며 착취하지 말며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
이
말씀은 힘이 있는 사람이 그 힘으로 이웃의 삶을 더 힘들게 만들고, 더 많은 것을 취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약 품꾼에게
주어야 할 삯을 주인이 아침까지 갖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더 늘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품꾼은 삯을 받지 못하면 밤새 그
가족들이 굶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행위는 거룩한(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을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4)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맹인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다른
사람이 가진 장애나 선천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것으로 인해 상대를 경멸하거나 헐뜯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거룩한
백성의 품격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 역시 나와 함께 사회를 구성하고, 함께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15)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
법은 유전무죄나 무전유죄도 아니고, 유전유죄나 무전무죄도 아니며, 공평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야 법이 법다워지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공평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16) 너는 네 백성 중에 돌아다니며 사람을 비방하지 말며 네 이웃의 피를 흘려 이익을 도모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돌아다니지 않고서도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것은 바르지 않는 일이고, 돌아다니면서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것은 더 바르지 않은 일입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하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 사실을 모르지 않으십니다.
(17)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 그러면 네가 그에 대하여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은 형제자매를 미워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는데,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일 때도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라고 증거합니다. 이미 그 마음에서 극도의 증오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사람은
‘심(心)보를 바르게 한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바르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웃의 삶도 바르게 인도한다고
하십니다.
(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원수를 스스로 갚으려고 하는 것이 바르지 않는 것은, 인간의 분노는 100%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도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9)”라고 말씀하십니다. 원수를 갚는 것은 사람의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르게 정리해 주실 것을 믿는 사람만 하나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맡기는 것은 믿음입니다.
또한 원수갚음을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를 바르게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에게 ‘너희는 거룩하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거룩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인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 중 본받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심, 무소부재하심, 영원하심 등은 우리가 본받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랑하심, 의로우심, 거룩하심 등은 본받을 수 있는 것이기에 우리에게 ‘사랑하라’, ‘의를 행하라’, ‘거룩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하신 말씀을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거룩하라.” 오늘 하루도 거룩한 삶, 구별된 삶을 살기 위해서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십시다. 그것이 거짓이 난무한 세상에서 진리의 통로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너희는 거룩하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은 애굽 사람들이나 가나안 땅 사람들과는 다른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속적인 가치관을 따라 살지 않고 구별된 삶을 신실하게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또한 그 구별된 삶이 일상에서 구별된 것임을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하시고, 나의
소유와 수입에는 이웃의 몫도 있음을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이웃과 함께 살아가야 함도 되새기게 하시고,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해야 함도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주님을 향해 눈을 듦으로 거룩한 삶,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은혜의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화목제 고기를 아끼지 마라
블레셋이
다시 유다를 침략했다. 헤브론 인근 마을에 살던 조나단은 애국심에 불타 전쟁터로 달려갔다. 전투는 치열했다. 철병거를 앞세워
진격한 블레셋의 공세에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패배를 앞둔 절박한 순간, 때 아닌 폭우가 쏟아져 블레셋의 철병거가 무용지물이
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마침내 유다가 승리했다. 조나단은 무사히 전쟁터에서 고향으로 귀환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전쟁을 극적으로
승리함으로써 그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나단은
기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의 표시로 각각 번제의 양과 화목제의 소를 준비해서 성전으로 올라갔다. 양은 번제로 하나님께
바치고, 소는 화목제로 하나님께 바친 뒤 마을 사람들과 잔치를 베풀기 위한 제물이었다. 번제는 전체를 태워 하나님께 드리나,
화목제는 내장 부위의 기름 덩어리와 콩팥, 그리고 간엽을 떼 드리면 되었다. 화목제 규정을 따라 소의 몸통 중에 가슴과 오른쪽
뒷다리는 수고한 제사장의 몫으로 드리고 제사장은 다른 제사장들과 함께 그것을 나누어 먹었다. 나머지 몸통의 고기는 모두 조나단이
가져와 마을 사람들을 위해 잔치를 벌인다.
마을
사람 전체가 화목제의 잔치에 초대되었다. 그날 소를 화목제로 바친 조나단은 그다지 부유하지는 않아 평소 소고기를 먹을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는 비싼 소고기에 욕심이 발동해 사람들 몰래 왼쪽 뒷다리 둘을 잘라 뒷마당의 선선한 창고에 걸어놓았다. 이로 인해
초대된 사람들의 몫은 크게 줄었다. 평소 여러 사람의 간증이 쏟아지고 고기도 실컷 먹으며 기쁨이 넘쳤던 화목제 잔치와는 사뭇
실망스러웠다.
그런데
놀랍게도 며칠 후 마을 사람들은 조나단이 갑자기 앓더니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망의 원인으로 그가 화목제물의 고기를 몰래
숨겨 놓아 규정을 어겼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돌았으며 가족들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끊어짐’(제명)의 형벌의 원칙을 따라 가족묘에
그를 묻지 않았다고 알려졌다. 이로써 그는 영원히 공동체로부터 제명되었다.
레위기 19장에서 왜 화목제 규정이 다시 등장하는가?
접대자
조나단이 화목제 규정을 모르는바가 아니었다. 감사의 화목제 고기는 당일에 모두 먹어야 하고 식탁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은 정결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고기 욕심에 눈이 멀어 뒷다리 둘을 몰래 감춰놓은 것이다. 만일 이 고기를 당일에 먹지 않고 다음날 먹는다면
율법은 이에 대해 매우 엄중한 ‘끊어짐’(제명)의 형벌을 경고한다(레 7:21). 이틀간 먹을 수 있었던 서원과 자원의 화목제와
달리 감사의 화목제의 유통기한은 하루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레 7:15~18). 하나님께서는 만일 사람들이 실컷 먹고도
고기가 남게 되면 정한 날짜가 지난 그 고기는 모두 태워서 없애라 하셨다(레 7:19).
묘하게도
이 규칙이 레위기 19장에서 다시 등장한다(5~8절). 다시 한번 화목제 고기 유통기한의 준수가 강조되고 있으며 제명의 형벌이
경고되는 것이다. 레위기 19장에 화목제 규정이 다시 등장하는 것은 매우 생뚱맞아 보인다. 왜냐하면 레위기 19장에 나열된 수
많은 법들은 대체로 윤리법들과 약자 보호법, 그리고 사회 정의와 관련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레위기 18장과 20장의
가족 보호법 사이에 끼인 19장은 대체로 동포 이웃과의 조화로운 공동체적 삶을 지시하는 사회윤리법이라 할 수 있다. 그 이유를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화목제 고기에 대한 탐욕을 버리고 공동체와 이웃을 위해 아낌없이 베풀라는 강조를
위함이다. 즉, 이 화목제 규정은 공동체의 화합과 일치에 찬물을 끼얹는 탐심과 욕심을 버리라는 명령이다.
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법들: 레위기 19장
레위기
19장의 법들은 대체로 인권과 관련한 것들이다. 예를 들어 19장에는 다양한 약자 보호법과 더불어 거짓과 불의한 상거래, 그리고
정의의 왜곡을 경고하는 법들이 나타난다. 가난한 사람들과 외국인 거류민(나그네)을 위해 밭과 과수원의 작물 중 일부는 거두지
말고 남겨두어야 한다(9~10절). 이웃을 억압하지도, 착취하지도 말며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주지 않는 일은 없어야
하며(13절), 장애인을 잘 보살피고(14절) 나그네(거류민)를 학대하거나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34절). 또한 사회적 정의를
위해 도둑질 및 거짓말(11절), 상거래 과정의 속임수(36절), 그리고 재판의 왜곡과 무고한 피흘림에 대해 강력히
경고한다(15~16절).
보다
적극적으로는 원수를 갚지 말고 이웃과 동포를 자신과 같이 사랑할 것이며(17절) 어르신들을 잘 공경할 것을 권면한다(32절).
공동체에 대한 이러한 배려는 자연의 지평으로 확대되어 과실수를 심을 때 탐욕에 가득 차 아직 어린 나무로부터 열매를 훑어내지 말
것을 명령한다(23~25절). 더불어 사람들을 현혹하여 공동체의 신앙적 정체성을 혼란케 하는 사악한 이교적 관행들, 즉 점술과
마법을 금지하고 이방의 가증한 장례 문화나 딸에게 매춘행위를 시키는 것과 같은 음란한 사회적 관행을 금지한다(26~29절).
오히려 백성들은 그런 이방의 종교와 관행들을 거부하고 여호와 예배를 위해 지정된 때(안식일)와 장소(성소)를 잘 지켜야
한다(30절). 그러나 이러한 레위기 19장의 법들은 체계나 통일성 없이 무작위로 나열된 것처럼 보이므로 학자들은 오랫동안 이
법들의 논리적 연결성과 구조성을 찾는 데 애를 먹었다. 당장에 학자들이 찾아낸 것은 레위기 19장이 십계명을 토대로 작성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19장에서 안식일 준수와 우상 숭배 금지가 가장 선두에 등장하는 등, 19장은 십계명 중 대부분을 언급하며 그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논의를 확장한다. 이런 점에서 레위기 19장은 십계명의 주석이라 볼 수 있다. 19장을 자세히 살피면,
우리는 이 장에 제1계명부터 제10계명에 이르는 십계명 전체가 흩어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지난
호에서 우리는 레위기 19장을 둘러싸고 있는 18장과 20장은 가족 보호법으로 볼 수 있음을 밝힌 바 있다. 이것들은
윤리법들이다. 19장도 마찬가지로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한 사회 윤리법들로 구성된다. 물론 엄밀하게 보면 19장이 윤리
규정만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다. 의식법으로 볼 수 있는 화목제물의 고기를 먹는 기일 준수의 요구(5~8절), 3년간 과실수 열매의
수확 금지(23~25절) 등 몇 가지 제의법들(ritual laws)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따라서 많은 학자들은 18~20장
전체를 윤리법의 목록으로 보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이러한 제의법들 또한 윤리적 목적을 내포하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앞서 말한 대로 화목제 고기를 즉시 나누지 않고 보관하다
상하게 하는 것은 탐욕의 죄라 할 수 있다. 이어지는 9~10절은 가난한 사람들과 나그네를 위해 추수 때 논밭의 이삭과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를 줍지 말라는 명령인데, 이런 문맥을 고려해 볼 때 화목제 고기에 대한 경고는 분명히 고기를 아낌없이 나누라는
의도일 것이다. 이것이 공동체의 선을 도모하고 공동체가 한 몸, 한 가족으로 세워지게 한다. 한편 3년간의 과실수 수확 금지에는
자연에 대한 배려와 존중의 의도, 나아가 생태학적·윤리적 교훈이 묻어있다. 4년째 과일은 수확해서 성전에 바치고 백성들은 5년째
과일부터 즐길 수 있다. 이것은 자연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지만,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만일 어린 과실수를 일찍부터
훑어내면 부실한 과실수가 되어 결국 공동체 전체의 손해를 초래할 것이다. 레위기 18장에서 월경 중인 아내와 동침하지 말라는
명령(19절)도 아내에 대한 인격적 존중이 깃들어 있다고 볼 수 있고 또한 지나친 성적 욕망의 통제와 절제를 위함일 수 있다.
레위기 18~20장 전체의 법의 취지는 이와 같이 윤리적 목적에 경도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물론
분명히 순수하게 의식적인 것으로 보이는 규정들도 나타난다. 백성들은 여호와의 거룩을 훼손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 거룩한 것은
정결해야하므로 그들은 가축의 이종교배를 금지하고 밭에 두 종류의 씨를 뿌리거나 두 종류의 옷감으로 옷을 만드는 것과 같은 이질적인
것들의 ‘혼합’은 금지된다(19절). 또한 백성들은 머리를 둥글게 깎거나 수염 끝을 잘라서는 안 된다(27절). 정통 유대교
신자들은 오늘날에도 이러한 머리모양을 고수한다. 아마 이런 두발 규정은 이어지는 28절 장례에서의 애곡에 대한 규정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평소에 장례식을 연상케 하는 머리를 해서는 안 된다(욥 1:20; 렘 7:29; 겔 27:31).
또한 죽은 자를 위해 하나님의 창조물인 자기 몸을 해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몸을 스스로 베거나 몸에 문신을 새겨서는 안
된다(레 19:28; 참조. 신 14:1). 이것들은 이방의 장례식에서 실천된 제의적 관행들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러한 지침들도
하나님의 질서를 엉망으로 만드는 동성애나 수간을 금지하는 것처럼 본질상 이방과의 구별을 위한 윤리적 지침으로 경도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문신을 새기거나 칼로 베는 등, 하나님의 주신 몸을 학대하는 것도 비윤리적이라 이해할 수 있다. 한편, 거룩한 삶은
사회 정의 및 이웃 사랑과 깊은 관련이 있다. 거룩은 사랑 안에서 구체적인 실제로 표현되어야 한다. 거룩한 백성은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가 온전한 것처럼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시며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이 자녀의
삶이라 하셨다. 온전함은 거룩의 핵심적 개념이다. 거룩한 삶이란 만인을 사랑하는 삶이다. 신약은 그것을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 눅 6:31)는 황금률로 규정했다. 거룩한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사회적 약자를 돌보고,
이웃을 돕는 자가 되어야 한다. 레위기 19장에 가득 찬 사회 정의와 인권을 위한 법에서 확인되듯이 하나님 백성된 고용주는
회사원들의 복지를 돌보고 넉넉한 임금을 지불하여 최저 생계를 보장해 줄 수 있어야 하며(엡 6:9; 골 4:1; 딤 6:2) 또한
노동자는 최선을 다해 고용주와 회사를 위해 일해야 하며(엡 6:5; 골 3:22; 딤 6:1; 딛 2:9) 다른 사람의 일을
마치 자신의 일처럼 돌보아야 한다(빌 2:4).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웃을 보살피기 위해 폭압적 불의에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사회적 약자와 장애인, 소외된 사람을 돕고 그들과 더불어 사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이것이 탐욕과 이기심을 극복하는 삶이다.
자비로운 추수법을 통해 본 약자 보호법
레위기
19장 9~10절은 자비로운 추수 규정이다. 이 법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밭모퉁이의 곡식을 추수하지 말라고 권하면서 나아가
바닥에 떨어진 이삭들을 줍지 말고 남겨둘 것을 명령한다. 또한 이 법은 과실수를 일차 수확 후 남은 과일까지 샅샅이 거두는 행위를
하지 말라고 금지한다. 과실수는 따고 남은 것이 있는가 하면, 수확 중에 바닥에 떨어진 것도 있다. 농장주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
이것들을 다시 훑어가는 탐욕을 부려선 안된다. 율법은 이삭과 과일을 얼마나 남겨둬야 하는지 명시하고 있지 않다. 율법은 사랑과
자비의 자발적 실천을 강제하지는 않는다. 법은 개개인이 자신의 양심에 따라 능동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자비심이
충만했던 사람은 관례적 기준보다 몇 배나 많은 이삭을 떨어트려 놓거나 모퉁이에도 많은 곡식을 남겨 놓았을 것이다. 룻기에서 성실한
룻의 모습을 본 보아스는 일꾼들에게 곡식 다발에서 일부러 뽑아낸 곡식을 바닥에 많이 흘려놓으라는 지시를 내린다(룻
2:15~16). 주인은 밭에 이삭을 넉넉히 남겨둘 뿐 아니라 낫질을 하지 않는 모퉁이 구역을 넓게 산정하며 가지에 많은
포도송이를 남겨두는 자비심을 품어야 한다.
자비로운
추수법에서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이 법이 곡식과 포도원의 포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다양한
재산을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특히 소, 양, 염소와 같은 가축을 많이 길렀고, 무화과나무나 감람나무와 같은 여러 가지 과실수도
길렀다. 그들은 전 재산에 이 같은 율법을 적용하여 자선과 구제를 위해 가난한 자들을 상대로 나눔을 실천해야 했을 것이다. 이때도
율법은 단지 권장사항일 뿐 개인이 율법을 지키지 않거나 교묘히 악용한다 해도 제재할 수 있는 법적 수단은 마땅치 않았다.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법과 제도라 해도 인간이 마음으로 순종하여 자발적으로 따르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들을 것이다!’라고 약속하신다. 이것은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직접 그들의 보호자가
되신다는 의미다.
6918. 거룩한(카도쉬. qâdôwsh) קָדוֹשׁ
1. 거룩한
2. 욥기 6:10. 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라..
3. 레위기 21:6. 그들의 하나님께 대하여 거룩하고 그들의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 것이며 그들은 여호와의 화제 곧 그들의 하나님의 음식을 드리는 자인즉 거룩할 것이라 발음
/ 카도쉬
[ qâdôwsh ] 어원 / 694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거룩한(출19:6, 삼상2:2, 사4:3). [명] 성민(신7:6, 14:2,21), 성도(신33:3,
시16:3), 성일(느8:9,10,11), 거룩한 자(시78:41, 사5:19, 호11:9), 성소(시46:4),
성전(시65:4), 거룩하신자(사12:6, 30:11, 호11:12). [부] 거룩히(레 21:8, 신 23:14) 구약 성경 / 116회 사용
* 6942. קָדַשׁ
1. 거룩하다
2. 신성하다.
3.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사람에게 사용되어 발음
/ 카다쉬
[ qâdâsh ] 관련 성경 / 거룩하다(출29:21, 사29:23, 학2:12), 빼앗기다(신22:9), 성별하다(느3:1),
준비하다(렘22:7, 미3:5), 예비시키다(렘51:27,28),구별하다(민8:17, 대상26:27), 드리다(대상18:11),
빼앗다(대상18:11), 예비하다(렘12:3), 깨끗하게 하다(삼하11:4). [명] 성물(레22:2, 대상26:28),
성회(욜1:14, 2:15), 성호(레22:32), 성소(대하26:18, 겔7:24), 거룩한 자(사29:23) 구약 성경 / 171회 사용
하나님 창조질서 왜곡하는 부적절한 성범죄 경계하다
사회적 안전과 질서 유지하는 공동체의 ‘가족관계’ 보호하는 데 초점 맞추고 있어
레위기 11~15장과 18~20장의 관계: “너희는 거룩하라”
▲ 김경열 목사(총신대 강사)
레위기
11~15장이 의식적 정결법이라면 18~20장은 윤리적 정결법에 속하는데, 이것들을 각각 ‘정결법’과 ‘성결법’으로 칭하기로
하자. 흥미롭게도 레위기 11장 44~45절의 ‘너희는 거룩하라’는 명령은 레위기 20장의 마지막 부분(25~26절)에서도
나타난다. 따라서 우리는 레위기 11~20장 전체가 동일한 목표, 즉 “너희는 거룩하라”는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레위기 11~15장이 의식적 정결을 통해 거룩을 구현한다면, 레위기 18~20장은 윤리적 정결을 통해 거룩을 구현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의식적 정결을 유지함으로써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야 한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은 윤리적 정결의 삶을 삶으로써 거룩한 백성의
자격을 유지해야 한다. 그 사이에 레위기 16~17장이 끼어있다.
여기서
속죄일은 이스라엘의 국가적 속죄와 회복을 위한 가장 중대한 제의 시스템이다. 만일 백성들이 의식적으로 부정하게 되어 그들의
거룩이 훼손되고 상실된다면 그들은 몸을 정결케 하고 속죄제를 드림으로써 거룩을 회복해야 한다(레 11~15장). 정결법에 지정된
정결 의식을 치르지 않은 자는 ‘제명’이라는 형벌을 받는데(레 15:31) 이 문제는 속죄일까지 이어질 수 있다. 윤리적 삶을
사는 데 실패하여 거룩함을 상실한 인간에게는 사형과 제명이라는 결과가 기다리고 있다(레 18~20장).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서
심판을 유보하시면 그들은 즉각 회개와 더불어 속죄의 기회를 얻을 수 있고, 특별히 속죄일은 마지막 회개의 자리가 될 수 있다.
연중에 해결되지 못한 그들의 모든 죄는 최종적 속죄일에 짐승의 피와 아사셀 염소 의식을 통해 사해지고 성전 역시 전면적 정화를
이룸으로써 그들은 마침내 원래의 거룩성을 회복하고 처음의 자리로 돌아간다.
윤리적 성결을 위한 법
레위기
18~20장의 구성이 흥미로운 것은 19장을 사이에 두고 18장과 20장이 주로 불법적 성관계들을 금지하는 규정들로
이루어져있다는 점이다. 18장은 구체적 대상들이 명시된 대가족 안에서 금지된 근친상간과 그 외 불법적 성관계들을, 20장은 그런
금지된 성관계에 대한 징벌들을 자세히 규정한다. 그런 불법적 행위는 땅이 토해낼 만큼 대단히 역겹고 문란하며 그에 따른 형벌은
가혹한 죽음이다. 한편, 18장과 20장 사이에 있는 19장은 대부분 십계명을 비롯하여 사회 정의에 초점을 맞춘 다양한 윤리적
조항들로 채워져 있다. 한편, 여기서 금지된 것은 단순히 근친간의 성관계를 의미하는가 아니면 근친간의 결혼 관계인가? 이 표현
자체는 일시적·충동적 성적 행위인 것처럼 보이지만 구약의 율법은 남녀의 혼전 순결을 명령하므로 성관계와 결혼 관계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 즉 근친 간에는 결혼은 물론 어떠한 성관계도 금지된다. 18장과 20장에서 불법적인 것으로 금지된 행위들을 목록으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근친상간의 금지
다음과
같은 근친상간의 관계가 금지된다: 1)어머니; 2)계모; 3)누이; 4)손녀; 5)이복누이; 6)고모; 7)이모; 8)숙모;
9)며느리; 10)형수나 제수; 11)한 여자와 그녀의 딸; 12)한 여자와 그녀의 손녀; 13)아내의 누이(처형이나 처제);
14)장모. 18장에 나열된 근친의 대상 중 흥미롭게도 친딸과 장모가 빠져 있다. 장모는 18장에는 누락되어 있지만 20장에는
나타나고 있으므로 18장에서도 당연히 포함된다고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딸은 그렇지 않다. 17절에 딸이 명시되지만 이 경우는
자신과 혈연관계가 아닌 딸을 가리킨다. 아마 딸은 가장 역겨운 사례인 어머니를 명시함으로써 자동으로 그 아래 포함되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이집트 왕가에서는 혈통 보존을 위한 남매간의 결혼이 일상적이었다. 그러나 레위기법은 친누이든 의붓 누이나 배다른 누이든 그녀와의
결혼 혹은 성관계가 금지된다. 핵가족을 넘어 대가족 내에서는 3촌까지 혼인이 금지된다. 그러나 4촌부터는 결혼이 가능했다.
실제로 구약에서는 족내혼의 전통에 따라 4촌간의 결혼이 성행하여 그런 부부가 많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이웃 나라들에서는
남매혼 뿐 아니라 근친혼이 성행했다. 특히 이집트와 로마의 왕가에서는 혈통 보존을 위해 근친혼을 장려한 결과 유전병을 지닌
자녀들이 많이 태어났다.
물론
레위기 18장의 율법이 주어지기 전인 족장 시대에는 금지된 결혼을 묵인하는 장면들이 나타난다. 우선 친 남매가 아닌 배다른
남매간의 결혼이 허용되었다. “그는 정말로 나의 이복누이로서 내 아내가 되었음이니라”(창 20:12)라는 아브라함의 진술에서 이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아브라함의 형제 나홀은 조카인 밀가를 아내로 맞았다(창 11:27~29). 야곱의 장자였던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 빌하와 관계를 맺었으며,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를 속여 집안의 혈통을 잇는 행위를 저질렀는데, 레위기 법에서는 아버지의
아내와 며느리와의 성관계 금지를 나란히 배치하여 이를 어길 경우 사형에 처할 것을 명한다(레 20:11~12). 레위기 법은
이러한 모든 행위들을 금지한다. 카미카엘(C. M. Carmichael)에 의하면 레위기 18~20장의 법들은 족장들 사이의
이러한 풍속들을 배경으로 작성되었는데 그런 행위들을 이제는 불법으로 규정하면서 그에 관한 법률적인 금지 규정을 만든다. 레위기는
이러한 관례들을 가나안과 이집트의 풍습으로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성경의 관점을 따르면 오히려 족장들 역시 이 지역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아브라함이 이복누이와 결혼했던 지역이 우르 땅, 즉 메소포타미아였다는 것은 당시 그러한 결혼이 그
지방의 관행이었음을 시사한다.
다른 유형의 성관계들의 금지
그
밖의 다른 유형의 금지된 성관계들이 몰렉 희생의 금지와 더불어 추가된다: 1) 월경 중인 아내; 2) 이웃의 아내; 3) 몰렉에
자녀 바치기; 4) 동성애; 5) 수간. 월경 중인 아내와 잠자리를 금하는 데는 부정을 탄 상태라는 제의적 이유도 있겠지만(레
15:24) 아마도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 아내에 대한 배려 역시 자리 잡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금지된 모든 사악한
성관계들을 이집트와 가나안의 관행으로 볼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어머니나 딸, 혹은 이웃의 아내와의 성관계는 보편적
금기사항이었다. 어떤 사람은 고대 근동 지역에서 수간과 동성애가 자행되었다는 증거가 매우 희박하다고 주장하지만 이에 대한 증거가
다수 존재한다. 예를 들어, 히타이트 법전은 양, 소, 돼지, 개와의 수간은 금했으나, 말과 나귀와의 수간은 금하지 않았다.
그러나 구약은 어떤 형태의 수간이든 여러 곳에서 죽음의 형벌과 더불어 금지하고 있다(출 22:19; 민 35:16~21; 신
27:1). 한편, 가나안의 신화에서는 신들과 동물의 교접이 일상적으로 벌어졌으며 구약은 가나안에 만연했던 동성애 풍습을 고발하고
있다(창 19:4~8; 삿 19:22). 수간 행위를 히브리어로 테벨(tebel)이라 하는데 이것은 ‘문란한 일’로 번역되었으나
의미상으로 볼 때 그보다는 ‘뒤틀림’ 혹은 ‘혼합’에 가깝다. 금지된 모든 성관계 역시 개념상으로는 일종의 테벨이라 볼 수
있다. 즉 수간, 동성애, 그리고 여타의 금지된 성관계들은 모두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엉망(테벨)으로 만드는 짓이다.
이웃의
아내와의 간음과 수간은 오늘날까지도 통하는 보편적 금기사항이지만, 동성애에 대한 현대 그리스도인의 인식은 크게 변하고 있다.
그러나 동성애는 항구적, 본질적 도덕법으로서 구약뿐 아니라 신약에서도 엄격히 금지된다(롬 1:26~27; 고전 6:9; 딤전
1:10). 동성애는 문화와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달리 해석할 여지가 있는 문제가 아니라 간음과 근친상간 및 수간, 음행, 그리고
우상숭배와 더불어 동일한 범주의 항구적인 불법행위다. 여기서 동성애만 별개의 문제로 제외하려는 시도는 대단히 잘못된 의도적인
본문의 곡해다.
몰렉 숭배와 접신술사 및 박수무당
몰렉(molek)은
‘몰록’이라고도 불리는데 아마 ‘밀곰’과 더불어 동일한 신의 명칭으로 보인다. 어떤 사람은 몰렉에게 실제로 자녀를 불살라 바쳤을
리가 없다고 주장하나, 성경의 수많은 증거는 그런 사악한 관행이 실제로 존재했음을 말해준다(신 12:31; 18:10; 왕하
16:3~4; 렘 7:31; 19:5; 32:35; 겔 16:21; 사 57:5~9; 30:33). 중요한 것은 므낫세 치하의
타락상에서 볼 수 있듯이 몰렉 제의와 같은 자녀 희생제가 사악한 종교적 관행들, 즉 사술, 요술, 신접술, 점술을 동반한다는
것이다(대하 33:2~6). 접신술은 고대 중동에서 광범위하게 실행된 종교 행위였다. 영매들과 심령술사들은 귀신들, 특히 망자
의식을 통해 죽은 자의 혼령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 접신술은 영매에게 혼령이 들어와 메시지를 전하는 동양의 접신 방식이
아니라 망자의 혼령을 불러내어 그와 대화를 나누며 메시지를 전달하는 영매술을 의미한다(예, 삼상 28장의 엔돌의 무녀가 사무엘의
혼령을 부르는 장면). 구약에서 점과 마술을 사악한 행위로 취급한다. 그 이유는 인간이 점을 통해 미래를 예측한 뒤 적절한 예방
조치나 마술을 통해 미래의 일을 자기 뜻대로 조종하려 하기 때문이다. 점술을 통해 “길흉을 말하며” 미래를 미리 알아내려는 인간의
시도는 사악했다. 마술과 사술로 하늘의 시간표를 바꾸고 운명의 조작을 시도하는 것과 같았다. 이는 곧 역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다.
그렇다면
20장에 나열된 금지된 성관계의 목록에 몰렉 숭배와 초혼술의 금지 명령이 끼어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구약의 여러 증거들을 통해 볼
때 몰렉에게 자녀를 희생시키는 것이 가나안의 점술 및 초혼술(망자 의식)과 깊이 결부되어있었기 때문일 것이다(신 18:10;
왕하 17:17; 21:6; 대하 33:6). 이 경우 몰렉은 지하 세계의 신으로 추측된다. 몰렉에게 자녀를 바침으로써 죽은
조상의 혼령을 불러내는 의식이 진행되었다는 추론이다. 세 가지 측면에서 몰렉신을 위한 자녀의 희생은 가족 파괴적 악행이다. 첫째,
거짓 신을 상대로 사랑하는 자녀를 희생시킨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둘째, 이 행위는 가족에게 약속된 언약의 ‘씨’를 바치는
셈이다. 셋째, 이 관행은 죽은 자가 살아있는 가족의 삶을 통제한다는 점에서 사악하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이 사악한 관행들의
금지명령이 가까운 가족 간의 성적인 문제를 다룬 법들과 나란히 배열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레위기 18장과 20장에 등장한 성적 범죄의 목록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 범주로 정리해볼 수 있다. 이 목록에 포함된 범죄들은
모두 부적절한 성 범죄의 일종으로 간주될 수 있다. 몰렉 신 숭배를 넓은 의미에서 성 범죄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 이유는 실제로
몰렉 신 숭배를 ‘몰렉을 따라가 매춘을 한다’, 즉 몰렉을 ‘음란히 섬긴다’고 표현하기 때문이다: 1) 악신과의 금지된 혼음;
2) 사람과의 금지된 성관계; 3) 동물과의 금지된 결합. 이런 일들은 이집트 족속과 가나안 족속들 사이에서 행해지던
풍속이었다(레 20:3, 24). 그 일로 그들은 땅에서 징벌을 당하여 멸절당했다. 그런 가증한 행위는 이스라엘 백성과 땅을 모두
‘더럽힌다.’ 땅은 이스라엘 역시 토해낼 것이고, 이런 불법적인 성관계를 맺은 자는 ‘끊어질 것이다’(레 20:26~28).
이
모든 것들은 결국 공동체 안에서 ‘가족 관계’를 보호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족은 사회의 기본 단위임과
동시에 사회적 안전을 위한 초석이다. 남자와 여자에 대한 제사장의 관점의 중심에는 세계와 사회의 질서는 결혼과 대가족에 기반하고
있다는 믿음이 존재했다. 즉 각 가족의 안정성을 기반으로 사회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레위기 19장의
공동체의 유대를 위한 다양한 사회 윤리법들이 가족 보호법인 레위기 18장과 20장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__________________ 레위기 18장 /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5절)
03-29-2023(수) 사순절 제31일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Keep my decrees and laws, for the man who obeys them will live by them. I am the LORD.
규례(2706) חֹק
1. 제한된 것, 2. 과업, 3. 경계 발음
/ 호크 [ chôq ] 어원/ 271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녹(창47:22), 법(창47:26), 규례(출12:24,레6:22), 수효(출5:14), 법도(출15:25,
왕상3:14), 율례(출18:16, 민30:16, 수24:25), 소득(레6:18, 레10:13), 몫의 음식(민18:8),
명령(레10:15, 잠8:29, 습2:2), 경계(욥26:10), 한계(욥38:10, 잠8:29, 렘5:22), 명령(시2:7,
148:6), 일(잠31:15), 한량(사5:14), 일용할 양식(겔16:27), 지경(미7:11). [동]
작정하다(욥23:14). [형] 정하다(욥23:12), 필요하다(잠30:8) 구약 성경 / 129회 사용
* 2710. חָקַק
1. 자르다, 2. 조각하다, 3. 윤곽을 그리다 발음
/ 하카크
[ châqaq ] 관련 성경 / 새기다(사49:16), 그리다(겔4:1, 23:14), 있다(잠8:27), 정하다(잠8:29),
쓰다(사30:8),만들다(사10 : 1), 쪼아내다(사22:16), 세우다(잠8:15), 씌어지다(욥19:23). [명]
통치자(창49:10), 방백(삿5:9), 규(민21:18, 시60:7,108:8), 법(신33:21, 잠31:5), 다스리는
자(삿5:14), 율법(사33:22) 구약 성경 / 19회 사용
레위기 18장은 그리스도인의 성생활에 대한 교훈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거룩한 성도가 되기 위하여 성생활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매우 잘못된 생각을 갖는 것은 성경적인 사고가 아닙니다. 성경은 성생활을 금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성생활 즉 이교 문화권에서 성행했던 성생활과 문화를 철저하게 금하고 있습니다(3절).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그러므로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Keep my decrees and laws)"고 하셨습니다(4-5절)
"너희는 내 법도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규례(호크)는 "제한된 것"을 의미합니다. 법도(미쉬파트)는 "판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는 것은 성생활의 대상은 제한되었다는 것을 판단하여야 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을 정의할 때 "섹스하는 인간(호모 섹수스, homo sexus)" 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셨을 때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고 땅을 점령하고 번성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남자와 여자의 성생활은 더럽고 추한 것이 아닙니다.
레위기 18장에서는 성 범죄에 관해 아주 단호하게 금하며 애굽과 가나안의 풍습을 좇지 말라고 합니다. 당시 근동 사회에서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는 범죄가 성 범죄였습니다. 근친 상간과 간통 및 강간은 다툼과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였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 범죄를 강력히 금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는 성적으로 순결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방인들과 구별될 것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성 범죄가 가져올 공동체간의
갈등과 분열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 범죄로 인해 일어나는 갈등은 당사자간에 다툼과 미움을 불러일으키고 결국 공동체는
분열되어 하나로 합쳐질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동성애자들의 잘못된 방법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은 비성경적인 주장입니다. 사람은 사랑하되 잘못된 방법은 바르게 고칠 수 있는 길을 가르쳐야 합니다. 쾌락을 위한 삶이 아니라 주 안에서 함께 즐거워할 수 있는 생명의 길을 찾아가야 하겠습니다.
본문에서 가르치는 교훈을 소개합니다.
6-18절. 근친상간에 관한 죄 가정을 철저하게 지켜야 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기 위한 것 현대 가정의 붕괴는 막장 드라마와 같은 현상이 사람들을 자극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현대 과학은 근친 결혼은 기형아 출산율이 높아지고 있다고 알려주고 있다. 고대 사회는 대가족 사회에서 자주 발생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19절. 일방적인 성행위에 대한 경고 너는 여인이 월경으로 불결한 동안에 그에게 가까이 하여 그의 하체를 범하지 말지니라.
20절. 간음에 대한 경고 너는 네 이웃의 아내와 동침하여 설정하므로 그 여자와 함께 자기를 더럽히지 말지니라.
21절. 자녀 학대에 대한 경고 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하게 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22절. 동성애에 대한 경고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자유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사람은 동성애를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랑이라고 강조하고 가르친다.
로마서 1:26-27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고린도전서 6:9 간음, 탐색, 남색.....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못하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Do you not know that the wicked will not inherit the
kingdom of God? Do not be deceived: Neither the sexually immoral nor
idolaters nor adulterers nor male prostitutes nor homosexual offenders.
23절. 수간에 대한 경고 너는 짐승과 교합하여 자기를 더럽히지 말며 여자는 짐승 앞에 서서 그것과 교접하지 말라 이는 문란한 일이니라.
1-5. 애굽이나 가나안의 악습을 따르지 말라는 말씀.
하나님께서는 오랜 애굽 생활로 인해 그 곳의 풍속에 익숙해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애굽의 풍속을 본받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또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갈 가나안은 우상 숭배와 음란한 성적 행위가 극에 달해 있었으므로 쉽게 죄악에 물들 가능성이 있어 그 땅에 들어가기 전부터 가나안의 풍속과 규례를 좇지 말라고 명하십니다(1-3).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신의 법도와 규례를 지킬 경우에 그로 인하여 살게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4-5).
하나님께서는 오늘 날 성도들에게도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요구하십니다.
6-20. 근친간의 음란에 대한 경계
하나님은 가장 먼저 가족간의 성행위를 금하셨습니다. 어미와의 성행위와 계모와의 성행위, 남매간의 성행위, 형수나 제수와의 성행위를 금지 시켰습니다(6-11).
하나님께서는 친척간의 성행위를 금하셨습니다. 고모와 백모, 그리고 숙모에 대한 간음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범하는 것과 동일한
패륜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자부와 손녀, 그리고 외손녀와의 성행위는 상위 위계자로서 파렴치한 행위이며, 혈족간의 위계 질서를
스스로 파괴하고 인격적 권위와 윤리적 황폐를 초래하는 만행입니다(12-18).
월경 중인 여자와 성교를 급하신 하나님께서는 타인의 아내와 통간하여 그로 자기를 더럽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타인의 아내와
통간하는 행위는 주님께서 명하신 혼인의 순결을 더럽히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권위 및 질서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므로 철저히
금해야 합니다(19-20).
근친 성교와 결혼이 성행했던 고대 사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육적 순결의 필요성을 가르치셨습니다.
21-23. 몰렉 숭배, 기타 가증히 여길 죄
하나님은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케 말도록 하셨습니다. 몰렉은 암몬 민족의 국가 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암몬 신에게 자신의 자녀를 바치는 것은 이스라엘의 구속주요 왕이신 여호와께 대한 불충이었습니다(21).
하나님께서는 동성 또는 짐승과의 교합을 금하셨습니다. 동성 연애는 하나님의 본래적인 창조 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이 짐승과 교합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존엄성을 스스로 유린하는 반인간적인 죄악입니다(22-23).
24-30. 이러한 일로 말미암아 몸을 더럽히는 자는, 가나안 거민처럼 멸절되리라는 경고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의 가증한 풍속을 멀리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들의 행위와 풍습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가증한 일로 그것을 행하면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고 경고하셨습니다(24-29).
하나님의 명령에 언제나 철저하게 순종하는 것이 거대한 죄악의 물결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자신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 명령을 지키고 너희 있기 전에 행하던 가증한 풍속을 하나라도 좇음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는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30절).
레위기 18장에서는 성 범죄에 관해 아주 단호하게 금하며 애굽과 가나안의 풍습을 좇지 말라고 합니다. 당시 근동 사회에서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는 범죄가 성 범죄였습니다. 근친 상간과 간통 및 강간은 다툼과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였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 범죄를 강력히 금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는 성적으로 순결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방인들과 구별될 것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성 범죄가 가져올 공동체간의
갈등과 분열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 범죄로 인해 일어나는 갈등은 당사자간에 다툼과 미움을 불러일으키고 결국 공동체는
분열되어 하나로 합쳐질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성 범죄는 다른 죄보다 더욱 엄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 범죄는 인간 속에 거하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모독이며
파괴이기 때문입니다. 존엄하게 지어진 인간을 쾌락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인간을 짐승과 같이 취급 하는 행위가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인간의 성을 상품과 같이 팔고 사는 세태는 성적 타락으로 인해 심판 받은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욱 심각한 수준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서
성도들은 성적 타락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순간의 쾌락 뒤에 임할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기억하며
결코 자신과 상대방을 짐승과 같은 존재로 만들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거룩(聖) Holy
- 카도쉬, 코데쉬
이사야 6: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제사법은 관계의 회복 정결법은 생명의 회복 성결법은 거룩의 회복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다. 피를 함부로 쏟거나 먹거나 할 수 없다.
레위기의 주제 - 하나님은 생명이시다! 하나님은 거룩이시다! (하나님은 빛이시다!)
인간은 왜 사랑해 후손을 낳고 죽는 것일까?
생물이라면 본능적으로 당연히 하는 일이 아니냐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과 죽음은
섹스를 하는 생물에게만 나타나는 숙명적인 현상이다. 섹스의 즐거움이 있는 대신에 죽음의 고통이 있는 게 바로 인간이다.
무성생식을 하는 아메바 같은 하등동물에는 죽음도 사랑도 없다. 예를 들어 아메바는 환경만 적당히 주어지면 자신의 몸을 둘로 갈라 또
다른 자신을 만들어 낸다. 이때 만들어진 두 개체는 같은 유전 정보를 갖는 복제품이다. 물론 아메바도 언젠가는 죽는다. 하지만
자신의 몸에서 갈라져 나간 복제품이 대를 이어 수억 년 동안 계속 복제품을 남기게 된다.
인간은 왜 이런 편한 방법을 놔두고 섹스와 죽음을 택하게 되었을까? 유성생식은 무성생식보다 다양한 자손을 만들 수 있어 환경
변화에 적응하기 쉽다는 게 지난 수십 년 동안 유력한 학설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기생충, 박테리아, 바이러스 같은 기생생물의
침입에 대한 방어 수단이라는 학설이 주목을 받고 있다.
정자와 난자는 우리의 몸이 만들어 낸 가장 신선한 세포이다. 비록 몸은 바이러스나 기생충에 감염됐다 하더라도 정자와 난자는
감염되는 법이 없다. 그래서 새로 태어난 아기는 기생충에서 자유로운 것이다. 유전자의 입장에서 보면 낡고 병든 ‘생존 기계’에
목을 매느니 차라리 낡은 기계는 버리고 새로운 기계를 만들어 쓰는 게 더 유리한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바이러스 같은 기생충과의 전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이러스는 지금도 인류를 위협하는 최대의 적이다.
1918년의 스페인 독감은 1년 동안 유럽에서 2천 1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무서운 에이즈로 일부 아프리카 국가의 평균
수명은 거의 절반으로 뚝 떨어진 상태다.
우리의 몸에는 지난 수십억 년 동안 기생충과 전쟁을 벌여 온 상처와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조상이 기생충과 맞서 싸우면서
습득해 유전자를 통해 물려준 면역 체계가 그것이다. 천연두에 대한 면역 능력이 없었던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컬럼버스의 미 대륙 발견
이후 유럽인들이 퍼뜨린 천연두에 맥없이 쓰러져 몰살당하다시피 했다.
때로는 기생생물이 우리 몸 속에 들어와 우리 몸의 부속품이 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인체 세포의 에너지 생산 기관인
미토콘드리아이다. 세포 내의 발전소로 불리는 미토콘드리아는 수십억 년 전 인간이 하찮은 하등동물이었을 때 우리 몸에 기생해 살림을
차렸다. 세포 내 기관 가운데 유일하게 미토콘드리아만이 자신의 유전 정보를 지닌 핵을 갖고 있다는 것이 기생의 증거다. 다행히
미토콘드리아가 엄청난 에너지를 만들기 때문에 우리는 걷고 뛸 수 있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를 통해서도 인간의 염색체에는 박테리아 유전자와 비슷한 유전자가 200개나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유전자들은 인간이 아직 하등한 무척추동물이었을 때 박테리아 감염 과정에서 우리 몸에 들어와 살림을 차린 것이다. 우리의 몸은
박테리아와 하등동물의 유전자를 짜깁기해서 만든 셈이다.
때로는 바이러스가 여러 숙주를 옮겨 다니면서 다른 생물의 유전자를 사람한테 옮기기도 한다. 또한 바이러스는 우리 몸에 들어와서
유전자를 망가뜨리기도 하지만 잠자고 있는 유전자의 스위치를 켜는 일도 한다. 인간은 바이러스에 맞서 면역 체계를 만들어 전쟁을
벌여 왔지만 한편으로는 바이러스가 돌연변이와 진화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어렸을 적에 똥구멍을 가렵게 했던 기생충도 우리 몸에 꼭 해로운 것만은 아니다. 긁적거리면 어머니는 요충약을 먹였다. 요충은
항문을 가렵게 하지만 그다지 위험한 기생충은 아니다. 일부 의사는 우리 몸이 이 기생충과의 싸움을 통해 조금씩 전투력을 향상시키기
때문에 유아기 때는 오히려 우리 면역 체계의 훌륭한 스파링 파트너가 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처럼 기생생물은 인간을 몰살시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을 진화시켰고 성을 발명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남자가 먼저
만들어졌을까 아니면 여자가 먼저 만들어졌을까? 어떻게 보면 닭과 달걀 같은 문제로 보이지만 여자가 먼저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
옳다. 성경에는 아담의 갈비뼈를 빼서 이브를 만들었다고 하지만 과학적으로 보면 이브의 갈비뼈를 빼서 아담을 만들었다고 보는 편이
맞다.
태아는 자궁에서 임신 8주가 되기까지 성기에 차이가 없다. 임신 8주가 지나면서 Y염색체에 존재하는 TDF라는 고환 결정 유전자의
스위치가 켜지고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이 만들어져야 태아는 남성의 특징을 갖게 된다. 하지만 여아의 경우는 Y염색체가 없기
때문에 원래 인체의 설계도가 계획한 대로 태아가 만들어진다. 사람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기차에 비유한다면 여자는 원래의 궤도를 따라
그대로 달리다 보면 만들어지는 것이고 남자는 궤도를 수정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의 기본형은 여성이고 남성은
옵션형이다.
성’(섹스)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이다.
진화론에서는 섹스의 본질은 생존에 있으며, 종족의 유지가 그 목적이라고 한다. 분명한 것은 성욕은 생존과 함께 인간의 2대 욕구로써 인류의 문명을 발전시킨 동력이 되어 왔다. 오늘날에는 법적으로 성에 관한 선택권을 부여하는‘성적 자기결정권’을 프라이버시권리로 인정하게 되었으니 성의 천국이 되었다. 현대인은 성을 종교로 믿는 경향이 있으며, 티머시 켈러는 이를 ‘거짓 신’이라고 부른다. 성생활에도 왕도는 없으므로 그 방법을 터득하고 알맞게 개발해야 한다. 오늘날 결혼이라는 ‘제도’와 자연으로서의 ‘사랑’: 그 계곡에서 많은 사람들이 방황하고 있다.
섹스는 인간의 ‘기본적 욕구’이다.
성욕은 인간의 기초적인 ‘자연적 욕구’로써 죽음과 함께 가장 강력한 욕구이다.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성욕을 먹고 입는 욕구, 부와 명예의 욕구와 함께 인간의 3대 욕구로 들고 있다.
김정운 교수는 행복을 구체화할 수 없다면 가짜라고 비판하면서 ‘자는 것’ : 잠자리가 좋아야 행복해진다고 한다. 인간은 동물적 존재로써 섹스를 한다. 기본적으로는 종족 보존을 위한 본능으로 신이 인간에게 내려준 선물이다. 그런데 인간만이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 언제든 섹스를 할 수 있다고 한다.
쇼펜하우어는 남녀 간의 사랑이란 아무리 별나라의 신비함을 간직하고 있더라도 그 본질은 성욕을 충족시키는데 있다고 했다. 1960년대 이후 우리나라에도 성 혁명의 바람이 불어 닥쳐 혼전 섹스가 증가하고 성윤리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성은 본능이 아니라 ‘충동’이라고 프로이트는 말했다. 그 이유는 동물은 종족 보존을 위해 본능적으로 섹스를 하지만, 인간은 쾌락을 위해 충동적으로 섹스를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성을 (성적) 쾌감을 느끼기 위한 유희의 수단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생식을 위한 성행위는 1%에 불과하고, 99%는 쾌락을 위해 한다는 통계가 있다.
그렇지만 성은 남녀 사이에 신비함이 숨어 있어 성은 신비함을 가지고 있으며, 섹스는 성교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진정한 사랑은 육체적 사랑에 그치지 않고, 섹스가 정신과 육체가 합일되는 교량역할을 하는 데 그 가치가 있는 것이다. 육체와 정신이 하나가 되는 상태가 황홀감을 주는 최고의 행복이다. 그러므로 성의 올바른 기능을 통해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건전한 사랑을 키워가는 것이 지속적인 행복을 누리는 길이다.
성은 여러 가지 ‘순기능’을 한다.
다른 동물들은 번식을 위해서 일정한 시기에만 섹스를 하는데, 인간은 시도 때도 없이 섹스를 즐긴다. 하나님의 섭리를 배반한 것인가, 아니면 쾌락을 누리도록 진화한 것인가? 섹스를 하면 옥시토신이 대량으로 혈류에 유입되어 오르가즘을 느끼게 되는데, 이로 인해 심신에 기쁨과 건강을 가져다준다. 이는 부부관계를 돈독하게 할 뿐 아니라 사랑이라는 감정 이상의 상태에 도달한다.
진화심리학자 데이비드 버스는 사회조사를 한 후 인간이 섹스 하는 이유가 자그만 치 237가지나 된다고 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육체적 쾌락, 황홀감, 섹스의 재미, 발정상태, 애정표현 등을 들고 있다. 이러한 이유들은 애정표현의 수단이란 것을 제외하면 결국 쾌락을 추구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 느낌은 순간적인 것으로 다시 평상으로 돌아간다. 이러한 느낌을 계속 유지하려고 하면 섹스 중독이 되고, 과한 섹스는 건강을 해칠 뿐 아니라 반사회적 행위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기능을 최대한 프라이버시로서 누리되, 사회적 문제가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우려야 한다. 가정 내에서 부부 간에 이루어지는 것은 건전한 섹스이지만, 가정 밖에서 불법적으로 이루어지는 섹스는 바람직하지 않다.
한 사회조사에서‘성생활이 삶과 인간관계에 얼마나 영향을 미친다고 봅니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대다수의 사람들이 성생활이 행복지수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건전한 성생활을 통해 행복지수를 높이는 것이 행복으로 가는 중요한 방법이다.
‘성적 자기결정권’이 기본적 인권으로 인정되다.
이제 성은 더 이상 단순한 방사(房事)가 아니라 자유의사에 따라 성을 누릴 수 있는 개방된 세상이 되었다. 오늘날에는 법적으로 성에 관한 선택권을 부여하는‘성적 자기결정권’을 프라이버시 권리로 인정하게 되었으니 성의 천국이 되었다.
성인 만남 사이트 애슬리 매디슨에는 Life is short. Have an affairs.(인생이란 짧다. 바람을 피워라.)라는 광고가 실려서 세상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칸트는 혼외정사나 매춘이 상대방을 목적 자체로 존중하지 않고 대상화하기 때문에 정당화될 수 없다고 한다. 이는 성이 이성 사이에 사랑을 매개로 이루어져야 할 신성한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제 섹스는 사랑을 전제로 한다거나 섹스를 하면 책임을 저야 한다는 것은 윤리적 요구일 뿐 법적으로 책임을 묻기 어렵게 되었다. 우리나라 헌법재판소는 형법상 간통죄를 위헌으로 결정함으로써 간통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 결정이 나왔을 때 많은 남성들이 갈채를 보냈다고 한다. 다만 결혼을 한 다음에는 부부는 순결의무를 다하기 위해 배우자 이외의 사람과 간통을 한 경우에는 민법이 손해배상을 인정하고 있을 뿐이다. ‘하루 밤만의 자유’라는 소설책을 읽어보니 ‘오직 하루 밤의 자유를!’이 그 주제다. “당신의 몸은 나의 일기장이다. 열어라. 읽어라. 그것이 진정한 세계사다.”라고 끝을 맺는다. 그 본체는 성적 자유가 아니라 성적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성적 자기결정권은 법과 도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인정되며, 불륜은 인정되지 않는다.
성이 ‘거짓 신’의 위치에 오르다.
섹스는 인간의 기본적 욕구로서 자연현상의 일부이지만, 일부일처제라는 결혼제도에 의해 합법적으로 인정되는 범위 안에서만 인정되고, 혼외정사는 불륜이고 불법이다. 그런데 행복해지려면 억압된 성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성 혁명이 제기된 후 섹스는 행복의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면서 일부 사람들은 성적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 그 대상을 찾아다니고 있으며, 성산업이 이를 부채질하고 있다.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의 소설 ‘레오퍼드’에서 주인공인 공작은 사랑을 “1년간 타오르는 불과 그 후 30년간의 재”라고 정의하고 있다. 남아있는 30년의 지루함을 풀거나 성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새 파트너를 찾아 나선다. 그래서 간통이 행하여지고, 심지어는 성매매를 하게 된다. 나아가 불꽃이 꺼지면 새 파트너를 만나기 위해 이혼까지 불사한다. 다시 인간사회는 ‘소돔과 고모라의 시대’로 돌아가고 있는가? 현대사회는 탐욕의 문화에 젖어 있고, 성을 우상으로 숭배하는 경향이 있다. 현대인들은 성을 종교로 믿는 경향이 있으며, 티머시 켈러는 이를 ‘거짓 신’이라고 부른다. 인공행복을 통한 섹스는 그 신성성을 잃게 되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파탄을 맞게 되어 끝내 불행을 초래하게 된다. 성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벗어나야 비로소 자유함을 느낄 수 있고, 내면의 평화가 깃들게 되어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성에도 과유불급의 원칙이 적용된다. 성도덕이 바로 서고, 성행위를 절제함으로써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가야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쿨리지 효과’는 인간에게도 적용된다.
결혼을 하면 남편은 옛날 애인이 아니고 아저씨로 변한다고 한다. 열정적인 사랑은 식어가고, 여성들은 사랑을 목매어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대화는 안 통하고 섹스는 줄어들고, 집안은 절간처럼 변해간다.
챈들러의 표현에 따르면, “첫 키스는 마법이고, 두 번째 키스는 친밀함이지만, 세 번째 키스는 일상”이라고 한다. 미국 전 대통령 쿨리지는 영부인과 함께 양계장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영부인은 농부에게 수탉은 어떻게 그 많은 수정란을 만들어내는지 묻자 매일 수십 번씩 수정을 한다고 하자 그 사실을 대통령에게 전해 달라고 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대통령은 매번 같은 암탉을 상대하느냐고 물으니 매번 다른 암탉이라고 농부가 대답하니 미소를 지으면서 이 사실을 영부인에게 말해달라고 했다. 이처럼 ‘참신함’이 성적 욕망과 능력에 영향을 준다는 이론에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쿨리지 효과’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그래서 성적 욕구라는 자연현상과 일부일처제라는 제도 사이에 갈등이 일어난다.
가메야마 사나에는 불륜을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고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사실”일 뿐이라고 하면서 불륜은 사적 행위로 누구도 손가락질 할 자격이 없다고 했다.
부부 관계 사이에도 아무리 서로 사랑을 한다고 하더라도 계속 새로운 변화와 자극을 주지 않으면 쿨리지 효과가 적용된다는 사실은 엄연한 현실이므로 이러한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 항상 노력을 해야 행복한 결혼생활을 지속할 수 있다.
성생활에 ‘왕도’는 없다.
부부 사이에 가장 행복감을 주는 것은 성행위를 통해 얻는 쾌감이라는 점에는 누구도 부정 못할 것이다. 그래서 성이 부부생활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불만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이혼의 사유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성에도 쾌락적응 현상이 나타나므로 이를 극복하는 것이 결혼생활의 중요한 과제다. 남녀 사이에는 그 본성상 성적 태도에 차이가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생물학적으로는 남녀 사이에 성감대의 분포나 오르가즘에 도달하는 시간과 만족을 느끼는 형태에 있어서 차이가 있으므로 성생활에 있어서 남녀 사이에 항상 간극이 있기 마련이다. 오르가슴이나 성적 만족은 성교를 통해서만 얻는 것이 아니고, 로맨틱한 터치만으로 흥분시킬 수 있다. 키스는 그 자체만으로 두 영혼이 동화되는 과정이고, 성감대의 접촉만으로도 성적 흥분을 느낄 수 있다. 부부는 남성과 여성 사이에 성감대나 성감정의 차이점을 잘 이해하고, 협업하는 정신으로 접근하고 실행해야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성행위의 횟수나 성행위 시간이 성의 만족도나 행복감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부부 사이에 성생활을 지속하면서 성적 쾌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친밀도가 중요하고, 결국 두 사람이 그 방법을 터득하고 개발해야 한다. 성적 문제는 정신적 문제로서 성행위가 목적이 아니라 즐기는데 집중하라고 엘리스·하퍼는 권고한다. 성생활에도 왕도는 없다. 서로 한 마음으로 노력하고 협력한 길밖에는. 사랑이란 이처럼 협업으로 이루어지고, 노력으로 극복하는 것이다.
‘불륜과 사랑 사이’에서 사람들은 방황하고 있다.
‘불륜’이란 사전적 의미로는 윤리에 어긋난다는 말이다. 기혼자가 다른 이성과 섹스 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금지되고 있다. 그런데 법률이 이를 간통죄로 규정하여 처벌의 대상으로 만들었으며, 그 배경에는 종교들이 일부일처제를 요구하면서 간통을 금지시킨 규범이 있다. 결혼은 일상으로 무료함과 공허함을 탈피하기 위해 성적 일탈을 통해 쾌락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는데, 불륜 역시 이러한 본능이 시키는 짓이다. 처벌과 비난 그리고 이혼이라는 위험성을 무릅쓰고 불륜을 계속 하는 이유는 금기를 깨는 스릴과 쾌락 때문이다. 불륜하면 영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생각난다. 사진작가 킨 케이드는 메디슨 카운티에 지붕이 있는 다리를 찍기 위해 갔다가 가정주부인 프란체스카를 만나 4일간의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은 뜨겁고 흡족했다. 킨 케이드는 떠나기 전날 함께 떠나자고 청하지만 프란체스카는 유부녀로서 가정을 지키기 위해 이를 거절한다. 그는 그녀의 선택을 받아드리고 홀로 떠난다. 결혼이라는 ‘제도’와 자연으로서의 ‘사랑’: 이상과 현실이 충돌하는 현상이다. 그 계곡에서 많은 사람들이 헤매고 있다. 어디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평가는 달라진다. 두 사람의 진솔한 사랑에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고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 영화가 회자되는 이유는 가정과 사랑 사이에 놓인 ‘건널 수 없는 다리’를 건넌 모습에서 대리만족을 얻었기 때문이 아닐까? ‘내로남불’: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속설이 규범과 현실의 간극을 잘 표현하고 있다.
__________________ 레위기 17장 /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14절)
03-28-2023(화) 사순절 제30일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어떤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하였나니 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것의 피인즉 그 피를 먹는 모든 자는 끊어지리라. because the life of every creature is its blood. That is why I have said to the Israelites, "You must not eat the blood of any creature, because the life of every creature is its blood; anyone who eats it must be cut off."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the life of every creature is its blood)
1818. 피(담, dâm) דָּם
1. 피, 2. 유혈 살해, 3. 포도즙(창세기 49:11, 신명기 32:14) 발음
/ 담 [ dâm ] 어원 / 182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피(창 4:11, 왕하 3:22, 겔 35:6), 산혈(레 12:4,5,7), 살인(시 26:9), 살육(겔 5:17),
피투성이(겔 16:6,22), 피 값(겔 3:18), 죄(겔33:6), 핏빛(욜 2:31), 피 흘린 자[죄](레 17:4,
신 21:8), 피흘리기를 즐기는 자(시 59:2) 구약 성경 / 360회 사용
창세기 49:10-11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신명기 32:14 소의 엉긴 젖과 양의 젖과 어린 양의 기름과 바산에서 난 숫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밀을 먹이시며 또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게 하셨도다.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1-9. 희생 동물을 잡는데 대하여.
10-16. 피를 먹지 말라시는 경계.
레위기 17장에서는 짐승을 먹을 때 피와 함께 먹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금령은 노아 홍수 후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주신 규례에서 이미 언급한 것입니다(창 9:4-5).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이미 피에 대한 금령이 레위기 1-7장 및 11장에서 소개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다시 소개되는 것은 제사장에겜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모든 백성들이 범하지 말아야 할 계율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는 성경에서 피는 생명을 상징합니다.
피를 먹는 것은 생명을 취하는 것이며, 모든 생물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권한에 대한 침범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본 금령은 짐승만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생명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성경에서 피는 속죄를 의미합니다.
피를 흘림으로 속죄가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피를 먹는 것은 속죄의 효과를 무효화 시키며
거부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피의 금령은 그리스도의 피 흘림을 통한 속죄를 상징하며 그 은혜를 거부하는 자는 멸망할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식용으로 짐승을 잡을 때 반드시 먼저 하나님 앞에 예물로 드리라고 합니다. 이것은 백성들이 먹고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무리 자신이 생계를 위하여 수고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얻은 물질을 자기 노력의 대가로 여기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암시합니다.
성도들은
세상에서의 모든 수확을 통해 하나님의 베풀어 주시는 은혜라는 것을 깨닫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더욱 큰 은혜로
채워 주실 것입니다.
피는 생명을 지켜주지만 예수님의 피는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 주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여 무너지는 세상의 가치를 바르게 세워가는 일에 밑거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최근
요아킴은 전염병으로 양떼를 많이 잃었다. 그로 인해 일부 하나님께 제물로 쓸 여유는 있으나 식용으로 양을 잡아먹을 처지는
아니었다. 그래서 요아킴은 요즘 마을 밖 야산으로 사슴 사냥을 나간다. 오후 늦은 시간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커다란 사슴을 잡는 데
성공했다. 요아킴은 아직 숨이 붙어있는 사슴의 목을 따 피를 모두 빼냈다. 그리고 흙으로 피를 덮었다.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생명을 상징하는 피는 먹어선 안되고 피를 빼내 땅에 흘려 흙으로 덮으라 명하셨기 때문이다. 흥에 겨워 돌아오는 길에 요아킴은 바위
위에 죽은 산양 한 마리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병들어 죽었거나 독사에 물려 죽었을 것이다. 고기를 덤으로 얻게 된 행운일
수 있으나 요아킴은 그 산양의 사체를 두고 산을 내려왔다. 율법에서 자연사한 짐승이나 들짐승에 찢겨 죽은 짐승은 먹지 못하도록
금지했기 때문이다.
피를 금지하는 레위기 17장
요아킴이
말한 율법들은 레위기 17장에 집약되어 있다. 여기에서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첫째, 17장에서 화목제 규례가
추가로 주어지는데(3~9절) 뒤이어 느닷없이 ‘피’의 의미와 기능에 대한 설명이 등장한다. 왜 화목제에 관한 문맥에서 ‘피’에
관해 설명하는 것일까? 둘째, ‘일반 도살’의 문제다. 레위기에서 화목제라는 제의 도살 후 평민들이 고기를 먹는 것이 허용된다.
그렇다면 과연 가축을 제단이 아닌 자신의 집에서 잡아먹는 일반 도살이 가능했는가? 17장의 규정은 언뜻 그런 일반 도살을 금지하는
것으로 보인다(2~6절).
결론부터
말하자면 레위기 17장은 궁극적으로 11절의 의미와 기능을 설명하기 위해 쓰였다. 이 장에는 서로 무관해 보이는 법들이 일관성
없이 산발적으로 등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17장의 전체 구조와 관찰되는 법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a. 합법적인 화목제 도살(1~7절) b. 합법적인 제의적 도살(8~9절) c. 피의 의미와 기능(10~12절) d. 사냥한 짐승의 섭취 방법(13~14절) e. 스스로 죽은 짐승의 섭취 금지(15~16절)
이 법들은 서로 무관한 듯 보이지만 실은 피의 문제와 서로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피 섭취를 금지하는 10~12절이 17장의 중심에 놓여 있으며 다른 법들이 대칭 구도로 배치되어 있다. 첫
번째 법(1~7절)은 이스라엘 백성은 진영 안이든 밖이든(들판에서) ‘염소 신’에게 화목제로 바치기 위해 가축을 도살해선 안
된다는 규정이다. 두 번째 법(8~9절)은 이스라엘인과 이방인 모두 하나님의 성소가 아닌 곳에서 번제와 다른 제사들을 드리지
말아야한다는 규정이다. 여기서 3~4절은 모든 짐승의 도축은 반드시 성소에서 이루어져야한다는 뜻으로 보인다. 그로 인해 고대로부터
랍비들은 오랫동안 이 문제로 논쟁을 벌였다. 사냥한 짐승의 고기는 허용되지만 가축의 일반 도살은 레위기에서 전면 금지된 것인가
하는 쟁점에 대해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두 갈래로 나뉜다. 레위기 후대 저작을 따르는 대다수 학자들은 신명기에서는 일반 도살이
허용되었는데 후대의 레위기 법이 이것을 금지하고 고기를 먹기 위한 모든 도축을 성소로 제한했다고 주장한다. 즉 레위기 법에서는
고기를 먹기 위해서는 언제나 짐승을 성소에 끌고 온 뒤 화목제로 도살해서 드려야 한다. 이 견해는 각 사람의 성읍 내에서(아마
들판에서도) 짐승을 잡아 그 피를 땅에 흘려 흙으로 덮은 뒤 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일반 도살법(신명기 12장)과 정면으로
대치되며, 역사서에 기록된 합법적으로 짐승을 잡아먹는 일화와도 모순된다(예, 삼상 14:31~35). 그들은 이에 대한 답변으로
처음에, 그리고 원래는 세속에서 일반 도살이 허용되었으나(신명기), 포로기 이후에 제사장 그룹들이 제의 체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레위기의 편집과 새로운 법들의 창안) 금지시켰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다른 설명들이 가능하다. 보수적 입장의 학자들은 환경 변화로 인해 법이 개정되었다고 본다. 레위기 17장의 법은
성막이 매우 근접해 있던 광야를 배경으로 주어진 반면, 신명기 12장의 법은 가나안 땅 중앙에 놓인 성전과 멀리 떨어져 있던
성읍을 배경으로 주어졌다는 것이다. 가능한 견해 중 하나다. 그러나 광야 시절에도 고기를 먹을 때마다 성소에서 잡았다는 생각은
적절치 않다. 집에서 기른 비둘기는 그런 제한이 없다. 또한 제단에 올릴 수 없는 흠을 가진 짐승은 버렸을까? 그런 짐승은 집에서
얼마든지 잡아서 먹었을 것이다. 또한 들짐승의 사냥은 허용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가축의 일반 도살이 광야에서도 가능했다는
결론이다. 그러므로 3~9절은 번제나 화목제, 특히 화목제를 드리려고 사적인 제단이나 불법적 성소로 달려가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다. 일반 도살은 그와 별개로 당연히 전제되고 있다.
피의 의미와 기능, 그리고 피 섭취의 금지(10~12절)
세
번째 법은 피에 대한 규례다. 여기서 왜 피에 대한 경고와 교훈이 화목제에 관한 문맥에서 갑자기 나타나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해볼
수 있다. 특히 11절에서 피가 생명이라는 진술과 더불어 피의 속죄 기능이 설명된다. 왜 피의 의미와 기능이 이때 진술된
것일까? 분명 4절에 비추어볼 때 1~9절의 합법적 제사에 대한 법은 피가 어떤 제단에 돌려지는가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3~7절이 오직 화목제 문제만 집중적으로 다루는 이유를 추론해 볼 수 있다. 아마도 고기가 주요 목적 중
하나였던 화목제는 가장 사적인 성격이 강해 피를 잘못 취급할 가능성이 컸을 것이다. 그런 위험은 다른 제사에서도 물론 발생할 수
있었기 때문에 8~9절에서는 “번제와 제물을 드리되”라는 말로 다른 제사들을 포괄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경고의 강조점은
3~7절의 화목제에 놓여 있다. 10, 14절의 경고대로 이때 자칫하면 피를 제대로 쏟지 않고 고기를 먹을 위험이 컸다. 또한
7절이 암시하듯이 짐승을 가지고 사적인 제단이나 불법적인 우상의 제단으로 향할 가능성이 컸을 것이다. 그러나 그 피를 더 이상
그런 개인 제단이나 우상의 제단에 뿌려선 안 된다. 결론적으로 화목제의 주요 목적 중 하나가 제물로 드린 고기를 나누어 먹는
것이었던 만큼 피를 다룰 때 실수하기 가장 쉬운 제사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화목제에서 피와 관련된 잘못이나 범법 행위가
자행될 가능성이 가장 컸으므로 피 취급방식을 엄중히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10~12절을
보면 피의 의미와 기능을 설명하는 11절을 중심으로 10절과 12절에는 피를 먹지 말라는 경고가 주어진다. 전체적인 흐름상
10절은 앞의 희생 짐승들과 관련된 피의 섭취 금지와, 그리고 12절은 이어지는 사냥한 짐승과 자연사한 짐승의 피 섭취 금지와
연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사냥한 짐승의 피와 자연사한 짐승의 고기 섭취 금지(13~16절)
정결한
야생 동물의 사냥이 허용되어 네발짐승뿐 아니라 새도 사냥할 수 있었는데 이때 사냥한 짐승의 고기를 먹기 전에 그 피를 모두 땅에
쏟은 뒤 흙으로 덮어야 했다. 여기서 피가 남아있는 고기를 피 채 먹지 말라는 경고가 다시 한 번 주어진다(13~14절).
사냥한 짐승의 섭취는 가축의 일반 도살이 오래전부터 허용된 관행이라는 분명한 암시다. 아마도 짐승을 사냥했을 때 고기를 피가 있는
채로 먹게 될 확률이 가장 높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15~16절은 도살된 짐승이 아닌 스스로 죽은 짐승이나 찢겨 죽은 짐승의
섭취를 금지한다. 이러한 짐승과 접촉한 자 역시 부정결해졌다는 점에서 이 규정은 마치 짐승의 사체와의 접촉을 금하라는 경고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는 피의 문제가 초점이 된다. 이러한 짐승들의 사체에는 모두 피가 남아있으므로 결국 이런 짐승의 사체를
먹는다면 고기와 더불어 피를 먹는 셈이다. 요약하자면 레위기 17장의 법들은 모두 피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이 장은 피의
의미와 기능을 설명하면서 피의 섭취를 금지하는 10~12절을 중심으로 피 문제로 실수하지 않도록 짐승의 불법적인 제의 도살을
금지하고, 사냥한 짐승의 고기를 먹기 전에 반드시 피를 쏟아내도록 하며, 스스로 죽은 짐승의 고기에는 여전히 피가 남아있으니
섭취하지 않도록 한다.
피는 곧 생명, 생명을 속하는 피 (11절)
11절을
제대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왜냐하면, 육체의 생명은 그 피 안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그것을 너희를 위해 제단에 주었는데,
이는 너희 생명을 속죄하기 위함이다. 이는 그 피가 그 생명으로 대속하기 때문이다.” 11절은 구약 성경에서 유일하게 피의
기능을 알려주는 대목인 만큼 매우 중요하다. 이 구절의 히브리어 원문에 의하면 피에 관해 다음과 같은 순서로 세 가지 명제를
도출할 수 있다. 1) 짐승의 피는 생명이다 2) 피는 제단에 귀속된다 3) 피가 대속을 한다. 여기서 이 세 명제의 적용 범위는
뒤로 갈수록 좁아진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첫 번째 명제는 모든 짐승의 피에 해당되며 사냥감도 예외는 아니므로 사냥한 짐승의
피 역시 절대 먹어선 안 된다. 두 번째 명제는 그 범위가 희생 짐승으로 좁혀진다. 즉 희생으로 바쳐지는 짐승의 피는 결코
불법적 제단이나 다른 곳에서 임의대로 처리되어선 안 되고, 반드시 제단으로 돌려져야 한다. 마지막 세 번째로 그렇게 바쳐진 어떤
희생짐승의 피는 대속의 효과를 불러온다. 여기서 많은 학자들은 11절에서 제시된 피의 의미와 기능은 모든 희생 짐승에 적용된다고
본다. 일단 피의 기능과는 별개로 피의 의미, 즉 피는 곧 생명이므로 제단에 돌려져야한다는 원칙은 화목제 짐승을 포함한 모든 희생
제물에 적용된다. 나아가 희생 짐승을 포함한 모든 짐승의 피는 곧 그것의 생명과 같은 것으로 간주된다(14절). 따라서 모든
짐승의 피가 곧 그것의 생명이라는 것이 모든 짐승의 피가 인간 생명을 위해 대속을 만든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기능은
대속의 희생 짐승들에 제한되는 것이다.
결국
피의 대속 기능은 대속의 제사인 속죄제와 속건제를 포함하여 아마도 인간의 기본적 죄성을 속죄하는 번제에 적용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화목제는 결코 죄 때문에 드리는 제사가 아닌 축제와 잔치의 제사였기에 대속의 기능이 있었는지 매우 의심스러우며
구약 전반에 그런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다.
신약에서의 피의 문제
구약은
생명을 상징하는 피를 먹지 말도록 한다. 그러나 피 섭취의 금지는 신약에서도 항구적으로 계승되는 규정인가? 사도행전 15장
20절과 29절에서 예루살렘 공의회는 교회 내의 유대파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발생한 율법 준수 논쟁에서 잠정적으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금지령을 내렸다. 1) 우상의 더러운 것(제물) 2) 피 3) 목매어 죽인 것 4) 음행. 음행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먹는
것과 관계가 있다. 우상에 바쳐진 음식과 피가 금지됨은 물론 목매어 죽인 것 역시 그 고기 안에 피가 담겨있다는 점에서 피
금지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사도행전 15장에서 정한대로 피는 영구적으로 금지되었다면서 선지 해장국을
먹지 않는다. 우선 음행의 금지는 본질에 관한 규례이자 신약으로 이어지는 불변의 도덕법이다. 그러나 먹는 것은 외적인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더 이상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고 교훈하셨다(막 7:14~23). 바울 또한 이
정신을 이어받아 신자들은 원칙적으로 이제 모든 음식으로부터 자유하다고 선포한다(롬 14:15; 고전 10:25~26). 바울은
심지어 우상의 제물마저도 알고 먹는 것은 주의해야 하나 시장에서 모르고 사서 먹을 경우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음식은 이제
무엇이든 스스로 속된 것은 없으되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 속된 것일 뿐이다(롬 14:14).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 악할 뿐이다(롬 14:20).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은 모두 선하며 단지 감사함으로 받으며 버릴 것이 없다(딤전
4:3~4). 필자는 피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피의 대속을 완성한 이상 짐승의 피에 더 이상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__________________ 레위기 16장 / 아사셀 염소(8절)
03-27-2023(월) 사순절 제29일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 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 He is to cast lots for the two goats--one lot for the LORD and the other for the scapegoat.
레위기 16장은 레위기 신학의 핵심이 되는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단 분해 1-28. 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행해야 할 속죄일의 의식.
29-34. 칠월십일은 1년에 1차씩 속죄의 대 안식일로써 지키라는 명령.
유대인의 달력 7월에는세 가지 중요한 절기가 있는 달입니다(양력 10월 경에 해당). 7월 1일은 새해(로쉬 하샤나) 7월 10일은 대속죄일(욤 키퍼) 7월 15일은 초막절(수카)
아사셀 염소(Scapegoat)란 "떠나보냄"이란 뜻으로 대속죄일에 두 마리 염소 중 제비를 뽑아 한 마리를 광야로 보내는 염소를 말합니다.
대제사장은 두 염소를 성막안 북편 번제 희생을 잡는 곳에 둔 후(1:11. 16:7)에 항아리속에서 제비를 뽑았습니다.
"칼피(Calphi)"라고 부르는 항아리(urn) 속에는 똑같은 크기나 모양를 가진 두 개의 제비가 들어 있었는데, 각각의
제비에는 '여호와를 위하여(라 예호와)'라는 글과 '아사셀을 위하여(라 아자젤)'라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대제사장은
백성들 앞에서 항아리를 흔든뒤, 두 손을 넣고 한 손에 하나씩 제비를 집어 두 마리의 염소들 각각의 머리 위에 그 제비를 놓습니다.
이때 그 머리 위에 '여호와를 위하여(la-JEHOVAH)'라는 제비가 얹힌 염소는 그 목에 붉은 천을 두른 후 여호와께
속죄제로 드렸고, '아사셀을 위하여(la-Azazel)'라는 제비가 얹힌 염소는 그 뿔에 붉은 천을 맨 후 무인지경의 광야로
내보냈습니다(The Preacher's Homiletic Commentary, Vol.III. p. 200-201).
아사셀 염소가 광야로 나가 모든 백성들 앞에서 사라질 때 백성들은 그들의 죄가 완전히 사하여졌다는 것을 확인하고 소리높여 환호합니다. 이러한 예식은 메시아가 모든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신 것을 상징하는 예표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속죄제도 우리의 모든 죄를 근본적으로 없애줄 수는 없습니다. 일 동안의 죄만 사하는
것입니다. 제사의 유효 기간이 일 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이듬해 짓는 모든 죄를 사하기 위해서는 또 그 다음해 7월 10일 대속죄일에 역시
같은 방법으로 속죄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이 제사는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해서 드려졌습니다.
이 제사는 우리의 죄를 영원히 씻어줄 만한 능력은 없기 때문에 불완전한 제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이 제사는 더 이상 드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으로서 그의 몸을 속죄희생의 제물로 드리셨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7:27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브리서 9: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히브리서 9: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히브리서 10: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베드로전서 3:18a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여, 나를 위하여 영원한 속죄의 제물이 되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신 주님을 기다리는 믿음으로 날마다 내 삶의 자리에서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활을 바르게 감당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하며 축복합니다.
초막절(5521) 수카(çukkâh) סֻכָּה
1. 오두막, 2. הַג הַסֻּכּוֹת 회막의 축제, 3. 레위기 23:43 발음
/ [ çukkâh ] 관련 성경 / 우릿간(창 33:17), 초막(레 23:42, 느8:14, 욘4:5), 야영(삼하11:11), 장막(삼하22:12, 왕상20:12, 시18:11), 굴(욥38:40), 원두막(사1:8),천막(사4:6, 암9:11) 구약 성경 / 31회 사용
5799. 아사셀(ʽăzâʼzêl) עֲזָאזֵל
1. 보냄의 염소 : 속죄의 염소. 레위기 16:8
발음
/ 아사셀(ʽăzâʼzêl) 어원 / 579와 23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아사셀(레 16;8,10, 26) 구약 성경 / 4회 사용
뜻풀이부
1.명사
보냄의 염소: 속죄의 염소. 레16:8,10, 26.
* 579. אָנָה
1. 도달하다, 2. 만나다, 3. 참석하다. 발음
/ 아나(’ânâh) 관련 성경 / 넘기다(출 21:13), 미치다(시 91:10), 임하다(잠 12:21), 시비하다(왕하 5:7) 구약 성경 / 4회 사용
* 235. אָזַל
1. 구르다, 2. 회전하다, 3. 떠나다 발음
/ 아잘(’âzal) 관련 성경 / 다하다(삼상 9:7), 줄어지다(욥 14:11), 돌아다니다(렘 2:36), 돌아가다(잠 20:14), 거래하다(겔 27:19) 구약 성경 / 5회 사용
아사셀 염소(Scapegoat)란 "떠나보냄"이란 뜻으로 대속죄일에 두 마리 염소 중 제비를 뽑아 한 마리를 광야로 보내는 염소를 말합니다.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뽑되
제비(lot)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고랄'(gôwrâl. גּוֹרָל)은 '돌처럼 거칠다'(be rough as
stone)란 기본개념을 갖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의 제비 도구가 작고 매끈한 모양의 자갈(pebble)이었음을 암시합니다.
제비(1486)(고랄, gôwrâl) גּוֹרָל
1. 제비, 2. 어떤 사람에게 몫으로 할당된 것 발음
/ [ gôwrâl ]
어원 / 복수 גּוֹרָלוֹת ,גּוֹרָלִים, ‘거칠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제비(레 16:8, 수 17:14, 21:5), 제비 뽑힌 자(대상 24:7, 25:9), 제비 뽑음(레 16:8, 민 26:55, 수 14:2)
구약 성경 / 77회 사용
한편,
대제사장 아론은 두 염소를 성막안 북편 번제 희생을 잡는 곳에 둔 후(1:11; 16:7), 항아리속에서 제비를 뽑았다.
칼피(Calphi)라 불리우는 이 항아리(urn) 속에는 똑같은 크기나 모양를 가진 두 개의 제비가 들어 있었는데, 각각의
제비에는 '여호와를 위하여'(라예호와)라는 글과 '아사셀을 위하여'(라아자젤)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대제사장은
백성들 앞에서 항아리를 흔든뒤, 두 손을 넣고 한 손에 하나씩 제비를 집어 두 마리의 염소들 각각의 머리 위에 그 제비를 놓았다.
이때 그 머리 위에 '여호와를 위하여'(la-JEHOVAH)라는 제비가 얹힌 염소는 그 목에 붉은 천을 두른 후 여호와께
속죄제로 드렸고, '아사셀을 위하여'(la-Azazel)라는 제비가 얹힌 염소는 그 뿔에 붉은 천을 맨 후 무인지경의 광야로
내보냈다고 한다(The Preacher's Homiletic Commentary, Vol.III. p. 200-201)
‘아사셀’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완전한 제거’ 또는 ‘내어놓음’이라는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이제 대제사장은 이 염소에게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죄를 담당시키고,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냅니다. 한 마리의 염소가 죽어서 속죄소 위에 피를 흘림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짓는 1년치의 죄가 이미 다 사해졌는데, 왜 또 이 염소에게 안수해서 죄를 담당시킵니까?
레위기 16장 8절에
보면,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라고 했습니다. 여호와를 위하는
염소의 피는 속죄소 위에 뿌려져서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정결케 합니다.
두 번째 염소, 즉 아사셀을 위한 염소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그들의 눈앞에서 떠나가는 사실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준비된 염소입니다.
대제사장이 7월 10일에 아사셀을 위한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면 어떻게 됩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일 년 동안 짓는 모든 죄가
아사셀을 위한 염소의 머리로 넘어갑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장면을 지켜봅니다. 그 후에는 미리 정해 놓은 사람이 그
염소를 끌고 광야의 무인지경으로 갑니다. 그 염소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앞에서 점점 멀어져갈 때, 염소에게 옮겨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죄도 그들의 눈에서 점점 멀어져갈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 가면 그 염소가 영영 보이지 않게 되겠죠. 그리고
그 염소는 나중에 악한 짐승에게 잡아먹혀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 내 죄를 짊어진 염소가 보이지
않는구나. 내 시야에서 영영히 사라졌구나. 그러면 내 죄도 염소와 함께 영영히 나를 떠나갔구나. 이제 더 이상 내 죄를 찾아볼
수가 없네!’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이 염소는 우리의 죄를 완전히 제거하는 염소라고 해서 ‘아사셀을
위한 염소’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 염소는 백성들의 죄가 그들의 눈앞에서 떠나가는 것을 보고 믿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준비된
염소입니다.
사람들이
그 염소를 자세히 주목하면 자기에게 죄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자기 죄를 지고 가는
속죄제물을 주목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자세히 주목합니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 죄인처럼 여겨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금방울소리와 같은 이 복음을 귀로 듣고 믿든, 우리 죄를 담당한 예수님을 말씀 속에서 눈으로 보고 믿든, 대속물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가 사해졌다는 믿음을 주시고 싶어하십니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시편 103:10~12)
동쪽과 서쪽은 영원히 만날 수 없는 방향입니다. 아사셀을 위한 염소가 우리의 죄를 지고 우리 눈앞에서 사라졌듯이,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우리가 다시는 볼 수 없는 곳으로 옮기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대속죄제는 끝이 납니다. 그러나 이 속죄제도 우리의 모든 죄를 근본적으로 없애줄 수는 없습니다. 1년 동안의 죄만 사하는
것입니다. 제사의 유효 기간이 1년입니다. 그러면 그 이듬해 짓는 모든 죄를 사하기 위해서는 또 그 다음해 7월 10일에 역시
같은 방법으로 속죄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 제사는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약 1500년 동안 계속해서 드려졌습니다.
그러나 이 제사는 우리의 죄를 영원히 씻어줄 만한 능력은 없기 때문에 불완전한 제사였습니다.
아사셀을 위한 염소의 역할은 무엇이었는가?
레위기 16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숫염소 둘을 준비하여, 대속죄일의 정결
예식에서 각각 역할을 담당하도록 합니다(5절). 어떤 염소가 어떤 예식에 사용될지를 결정하기 위해 대제사장은 제비를 사용했는데,
이는 여호와가 선택하신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런 다음 두 염소를 구분하기 위해 제비를 뽑고 각각에 제비 표를 붙였습니다(8절).
“여호와께 속한” 제비를 받은 염소는 여호와를 위한 염소로서, 부정과 죄들을 성소에서 정결케 하기 위해 속죄제로 드려졌다(참조
15-19, 25절). “아사셀에게 속한” 제비를 받은 다른 염소는 여호와 앞에 드려졌다. 그러나 그것은 여호와께 희생 제물로
드려지지 않고, 산 채로 여호와께로부터 광야의 아사셀에게 보내졌다(10절). “속죄”가 그 살아있는 염소에 대하여 행해졌는데,
대제사장이 그 염소의 머리 위에 양손을 얹고 이스라엘의 도덕적 죄를 고백함으로써 그 염소에게 옮긴 후 그것이 그 모든 악을
진영으로부터 짊어지고 나감을 의미했다(20-22절).
아사셀에 관한 각양한 견해들 :
“아사셀이 누구이며, 아사셀을 위한 염소는 무엇을
대표하는가?”이다. “아사셀”의 의미를 그것의 어원을 근거로 알려고 수없이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아사셀”(히브리어
아자젤[‘Aza’zel])에 대한 일반적인 영어 번역 “도망의 염소”(Scapegoat; 엣-아젤[‘ez-’azel]에서
파생함)는 확실하지 않으며, 레위기 16:10(“보낼지니”)에 비추어 볼 때 그 의미가 맞지 않기 때문에 이 번역을 받아들일 수
없다. 아사셀에게 속한 염소는 아사셀에게 보내졌다. 따라서 이 구절을 “아사셀” 대신에 “도망의 염소”(Scapegoat)로
읽으면 그 염소에게 속한 염소[goat for Scapegoat]가 그 염소[Scapegoat]에게 보내졌다는 말이 되어 버린다.
많은 학자들은 “아사셀”을 황폐한 곳, “제거”의 의미, 신 등으로 해석하였다. 널리 알려진 유대인의 견해는 아사셀을 귀신으로
본다(예를 들어, 에녹 1서 9:6; 10:4, 5, 8, 아브라함의 묵시서; 들염소, 염소-귀신, 인적이 없는 곳에 있는
귀신들과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레 17:7; 사 13:21; 34:14; 눅 11:24; 계 18:2 등을 비교하라). 아사셀이
귀신이라는 견해를 지지하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재림교인들을 포함하여)은 이 살아있는 염소를 귀신의 왕이며 하나님의 대적(大敵)인
사단의 상징으로 본다.
그러나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견해로 보면 사단이 죄를 대신 짊어지는 것처럼 되므로 이를 반대하고,
소위 “도망의 염소”를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성문 밖에서 고난당하신 그리스도(히 13:12; 그러나 11절은 아사셀을 위한
염소와는 상관이 없는 문맥임을 보여준다)의 상징으로 해석하기를 선호한다.
아사셀을 위한 염소는 제물로 희생되지 않았음 :
“아사셀”의 정체를 밝히는 단서는 한 염소는 여호와께 속하고 다른
염소는 아사셀에게 속했다고 말하는 레위기 16:8-10이다. 아사셀은 한 염소를 소유할 수 있는 여호와가 아닌 다른 독립적인
존재를 가리키는 고유명사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살아있는 염소는 아사셀에게 바쳐진 제물이 아니다. 오히려 이
“운반-염소”(tote-goat)는 죄를 제거하는 이 비(非)희생 정결 예식에서 이스라엘의 죄를 광야에 있는 아사셀의 영토로 멀리
실어다 버리는 “쓰레기 운반 트럭” 같은 기능을 한다(참조 5절; 이 경우에는 “속죄제”로 번역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의 “마당”에다 그러한 유독성 쓰레기 한 짐을 쌓아 놓는다면, 이는 정말로 못된 행위이다. 이런 점에서, 이 예식을 명하신
여호와께서는 아사셀을 이스라엘의 죄의 창시자로 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 죄들은 그것들의 근원으로 되돌려진다.
아사셀이 죄의 창시자로서 사람들을 유혹하여 죄 짓게 한 후(창 3장; 계 12:9), 그들이 용서 받았는데도 그들을 비난하는
사단(계 12:10; 위증자에 대한 처벌을 말하는 신 19:16!
-21과 비교하라)을 대표한다면 위의 논리에는 타당성이 있다.
“‘여호와의
염소’는 여호와께 속했고, 따라서 여호와께 드려졌으며, 그것은 또한 인간의 죄를 위해 죽으신 분 곧 여호와(요 8:58;
10:30)이신 그리스도(히 13:11-13)를 상징했다.
여호와와 여호와의 염소 사이에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고 본다면 아사셀에게
속한 염소도 아사셀을 대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Roy Gane, Leviticu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4], 290).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는 분임 :
여호와께 속한 염소는 그분께 제물로
드려졌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의식 체계 너머에 있는 실재를 가리키는 더 높은 수준의 상징 즉 “표상”에서 이 염소는 여호와 곧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를 대표한다(요 1:29; 히 13:11-13). 이렇게 높은 차원의 관점에서 볼 때,
아사셀의 영역인 광야로 산 채로 추방된 염소가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에서 그의 몫을 담당하고 결국 그런 죄들을 배후에서 조종한
자로서 그 책임을 짊어질 자 곧 사단(아사셀)을 상징한다고 말하면 의미가 통한다. 죄는 그것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에게 되돌려지고,
그는 자기가 속한 곳으로 보내진다. 이로써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일종의 속죄가 이뤄지는데(레 16:10), 이는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가로막아 온 죄의 장본인(사단)을 그들 가운데서 깨끗이 제거함으로써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참조 민 25:7, 8, 13). 그러나 이 속죄의 국면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제공하신 속죄(우리를 대신한
그분의 희생을 받아들일 때 그분이 우리의 모든 허물을 짊어!
지신다)와는 달리 대속이 없다. 사단은 우리의 죄와 관련하여 그 자신의 몫 때문에 죽을 것이며,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는 분이시다.
대속죄일에 아사셀을 위한 살아있는 염소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그 근원으로 되돌림으로써 이스라엘 공동체를
정결케 하기 위해 진영에서 그들의 죄들을 짊어지고 나갔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결국 유혹과 악한
무고(誣告)로부터 해방될 것인데(계 20:1-3), 사단이 그들에게 이러한 계략을 사용한 데 대한 책임을 지고 처벌을 받을
때이다.
1.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2.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3.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레위기 16장은 레위기 신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자비하심, 이스라엘의 용서의 필요성, 그리고 정결과 속죄에 대한 강조가 레위기 16장에 소개됩니다. 속죄의 핵심은 “대속죄일”에 거행되는 의식에서 발견됩니다. 특히 1-10장이 하나님과 교제를 지속하는 개인적인 방법을 제시한다면, 16장은 공동체 전체의 관점에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속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속죄일은 일 년 중 가장 거룩한 날입니다. 대속죄일은 이스라엘 달력으로 일곱째 달의 열째 날로, 양력으로는 10월 초순에 해당합니다(욤 키퍼). 속죄일의 주요 목적은 죄와 부정으로 더럽혀진 회막의 부정을 정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일 년에 단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전 백성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으로써 죄로 인해 분리되었던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를 화해시켰던 절기입니다. 그러나 한 개인의 속죄제나 속건제가 아닌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위한 대속죄일 규례입니다.
나답과 아비후를 먼저 언급하심으로 죄의 심각성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인간이 고안한 인본주의적인 예법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예배법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믿음의 필요성을 속죄일의 의식보다 더 분명하게 묘사하는 그림은 없습니다.
11-15장에서 모든 사람은 예외없이 부정에 노출되어 있음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본래 만드셨던 사람, 아니 더 나아가 피조 세계 전체가 타락한 상태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음식, 질병, 성, 아무에게도 보일 수 없는 가장 은밀한 부분까지, 인간은 모든 부분에서 부정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부정을 가진 인간은 결코 하나님 앞, 성소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다스림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죄의 치명적인 결과이며, 죄는 결코 하나님과 만날 수가 없게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부정을 면하기 위해서, 제사는 필수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이 모든 부정과 죄에 대하여, 민감하게 하나님께 사죄하며 부정을 제거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럴 실력도 능력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부정의 상태로 하나님의 성소와 회막에 나아가며, 부정한 상태로 하나님의 진 안에 머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만 부를 뿐입니다.
속죄일에 행하는 의식의 주요 목적은 부정한 예배자들이 부지중에 오염시킨 성소의 모든 부정을 정결하게 하는 것에 있습니다(16:16, 19).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임재가 지속적으로 이스라엘의 성소에 머무르도록 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지성소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바로 이 날 대제사장은 자신의 죄부터 회개하며, 온 백성의 회개를 인도하여, 전 공동체를 죄의 사슬로부터 해방시킵니다. 그저 한 번의 행사로 마치는 절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백성과 자연의 총체적인 공동체가 재차 건강한 공동체로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바로 이 대속죄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한 대제사장은 그 죄를 속하기 위해 장차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민감하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조차도 죄사함과 회개, 그리고 정결에 대한 깊은 이해와 처절한 자기 인식이 없습니다. 철저히 모든 죄를 제거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간절하심과 대충 얼버무리려 하는 인간의 완악한 마음에는 큰 간격이 있습니다. 1-16장에서 다룬 예배자의 삶이 철저한 거룩과 정결의 삶인 것을 제대로 배웠다면,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그리고 오늘 나의 모습을, 시대적인 흐름 앞에서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거룩해야,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교제하기 원하시며, 우리와 영원한 안식을 함께 누리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거룩할 것을, 죄에서 멀어질 것을 요구하십니다. 단순하게 착하게 살면 좋겠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고 정결하여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삶을 살라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마음을 주옵소서. 그리하여 오늘도 죄를 멀리하게 하시고, 거룩을 더욱 사모하게 하옵소서.
속죄(3725) 키푸르(kippûr) כִּפֻּר
1. 구속, 2. 속죄, 3. 구원 발음
/ 키푸르[ kippûr ]
어원 / 3722에서 유래[복수형으로만 쓰임] 관련 성경 / 속죄(출 30:10), 속전(출 30:16), 속죄일(레 23:27, 25:9), 속죄제(민 5:8). [동] 속죄하다(출 29:36, 레 23:28, 민 5:8) 구약 성경 / 8회 사용
* 3722. כָּפַר덮다 카파르
1. 덮다, 2. 전면에 퍼지다, 3. 머리로 덮히다 발음
/ 카파르
[ kâphar ] 관련 성경 / 칠하다(창 6:14), 속죄하다(출 30:10, 신 32:49, 겔 45:17), 알다(사 47:11),
용서하다(겔 16:63), 마치다(단 9:24), 속량하다(신21:8), 풀다(창 32:20), 속죄하게 하다(레 17:11),
사하다(대하 30:18, 시 78:38), 폐하다(사 28:18) [명] 속죄제(느 10:33, 겔 43:26), 속죄물(출 29:33) 구약 성경 / 101회 사용
아사셀 염소(the scapegoat)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죄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더러운 죄를 가지고
거룩하시고 온전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속죄’는 레위기의 가장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로 다루고
있습니다.
‘속죄’라는 말은 ‘덮는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지은 죄에 대하여 그 대가를 치르고 속량(贖良)받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지을 때마다 속죄제를 드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죄일이 필요했던 것은 이스라엘의 제의에서 백성의 모든
죄를 완전하게 속죄하기 위해서는 평일의 속죄제와 속죄일의 속죄제가 모두 필요했습니다. 평일에는 죄가 드러나거나 깨닫게 될 경우
속죄제를 드려야 했습니다. 반면에 속죄일에는 일년 동안 해결하지 못하고 누적된 죄들을 한꺼번에 용서함 받아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속죄일은, 미해결된 백성의 모든 죄와 성전의 지성소까지 누적된 죄를 철저히 닦아내는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속죄일에는 평일에 용서받지 못한 백성의 모든 죄와 그로 인해 누적된 성소의 오염을 깨끗이 청소함으로써 온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속죄가 이루어졌습니다.
성전은 매년 한 번 이루어지는 대대적 청소를 통해 원래의 거룩한 상태로 유지하고 성전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었습니다. 속죄일의 철저한 청결을 거쳐 다시 거룩해진 성소는 여호와의 지속적인 임재를 유지했습니다. 이 점에서
이스라엘에게 있어 속죄일은 이스라엘백성들의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날이었던 것입니다.
속죄일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속량해 주시는 날 입니다.
레위기 10장에 보면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이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로 제사를 드리다가 불에 타서 죽은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잘못하면 죽임을 당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문제는 매우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어느 누구라도 담대하게
성소에 나아가서 제사의식을 거행하기에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지성소에는 정한 날만 들어가고, 절차를 거쳐 들어감으로써 죽음을 면하라는 것’입니다. 즉 마음대로 들어가고 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론이 성소에 들어가려면 수송아지로 속죄제물을 삼고 숫양으로 번제물을 삼고
거룩한 세마포 속옷을 입으며 세마포 속바지를 몸에 입고 세마포 띠를 띠며 세마포 관을 쓰고세마포 옷은 거룩하기에 죄로 더러워진 몸을 씻고 세마포 옷을 입어야’ 했습니다.
속죄일에는 세 번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들어갈 때(14절)
우선 자신의 죄와 가족들을 위하여 수송아지로는 속죄제를, 수양으로는 번제를 드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위임식 때 입었던 화려한
예복은 벗고, 몸을 씻고,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겸손의 표현이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이
없다는 자각의 표현이었습니다. 하얀 세마포는 겸손과 정결을 상징하는 옷입니다.
아론은 이처럼 먼저 자기 자신과 그 가족을 위한 속죄제의 수송아지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두 번째 들어갈 때
수송아지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들어가 손가락으로 속죄소 동쪽에 뿌리고, '앞'에 일곱 번
뿌립니다. 이렇게 피를 속죄소 위에 뿌리는 것은 십계명의 돌비, 곧 율법의 정죄가 하나님께 상달되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속죄소의 피가 우리의 죄를 덮어주고 가리워 줌으로 언약궤 위에 그룹들 사이에 계신 하나님께서 그 피를 보시고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앞에" 뿌리는 것은 그 율법의 정죄가 인간을 괴롭히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것을 뜻합니다.
세 번째 들어갈 때(8절)
염소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갑니다.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 뽑힌 염소를 잡아(8절) 백성을 위한 속죄제를 드리랴고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속죄소 위와 앞에 일곱 번 뿌렸습니다. 염소의 피를 취하여 지성소를 위하여 뿌리고 회막을 위하여도 피를
뿌렸습니다.
이와 같이 대제사장은 세 번에 걸쳐 지성소에 들어가 자신과 그의 가족, 그리고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리고 나올 때까지는 백성은 물론, 일반 제사장들까지도 회막문 밖에서 기다려야 했습니다(17절).
지성소에서 대속죄를 마친 후 대제사장은 회막 앞뜰에 있는 번제단을 속죄해야 합니다. 그는 염소의 피를 번제단 네 귀의 뿔에
바르고(18절) 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그 위에 일곱 번 뿌려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에서 단을 성결케 했습니다(19절). 이렇게
함으로써 대속죄일의 제사가 끝나고, 백성들은 일 년간 범죄한 모든 죄를 속죄 받았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년 7월 10일이면 자신들의 허물과 잘못을 회개하면서 나머지 남은 364일의 기간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 것을 다짐했습니다.
보통 때는 피 뿌리는 것만으로 사람들을 위한 속죄가 이루어졌습니다(4장). 그러나 속죄일에는 그와 아울러 상징적이면서 현실적으로
죄를 없애는 예식이 거행되었습니다. 곧 백성의 모든 죄를 염소에게 짊어지워 그 염소를 광야로 내몰아 거기서 죽게 하는 것입니다.
피를 뿌리는 것과 염소를 광야로 내보내는 일은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행위를 암시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3:24-26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으롭다 하려 하심이라”
또한 레위기 16장을 배경으로 히브리서 9-10장이 가르쳐주고 있는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제물로 드려 죽으심으로써 사람이 바치는 모든 제사에 종지부를 찍은 속죄 행위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속죄일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죽으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단번에 죄 사함을 받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원죄에 대하여 우리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 받고 하나님께서는 의롭다고 인정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단번에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놀랍고 측량할 길 없습니다. 그러나 한 번 목욕한 사람도
발은 더러워질 수 있습니다. 날마다 죄를 자백함으로 깨끗함을 받고, 자신의 삶속에서 계속 이어지는 믿음의 선순환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죄를 위하여 단 번에 십자가에 죽으사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그 피로 우리를 거룩하다 하시고 양자 삼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구원받은 자녀로, 이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 하시고, 거룩하게 살게 하시고, 구별되게 사는 주의 백성 되게하여 주옵소서.
하지만 연약한 육신을 입은 몸으로 죄를 짓고, 범죄할 때 마다 더러워진 발을 씻고, 손을 씻듯 주 앞에 나아가 회개하고 용서함
받음으로 용서받은 기쁨으로 날마다 새롭게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 되게하여 주시고, 이제는 더 이상 같은 죄를 반복하여 죄 가운데
빠지는 일이 있지 않도록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__________________ 레위기 15장 / 부정한 자(2절)
03-25-2023(토) 사순절 제28일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몸에 유출병이 있으면 그 유출병을 인하여 부정한 자라.(2절) Speak to the Israelites and say to them: 'When any man has a bodily discharge, the discharge is unclean.
1-15 유출병과 그 결례.
16-18 설정의 부정.
19-30 부인의 유출의 부정과 결례.
31-33 본장의 결론.
3절. 그 유출병으로 말미암아 부정함이 이러하니 곧 몸에서 흘러 나오든지 그것이 엉겼든지 부정한즉.
유출병(조브) זוֹב
1. 흐름, 2. 유출병 발음
(zôwb) 어원 / 210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유출병(레 15:2, 3,15,33), 유출(레 15:13,25,30, 레15:25). 구약 성경 / 13회 사용
* 2100. זוּב
1. 흐르다. 2. 시편 78:20, 3. 레위기 15:25
발음
/ 주브(zûwb) 관련 성경 / (물을) 내다(시78:20), 흘러나다(시105:41,사48:21), 쇠약하다(애4:9),
흐르다(출3:8,레20:24, 겔20:6), 유출하다(레15:19). [명]백탁병자(삼하3:29), 유출(레15:25),
유출병(레15:2, 민5:2). 구약 성경 / 41회 사용
1329. 몸, 바사르(bâsâr) בָּשָׂר
1. 살, 2. 살아있는 몸의 살, 3. 가축의 살코기 출 16:12 발음(bâsâr) 어원 / 131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살(창 2:21, 시 27:2, 슥 14:12), 몸(창 2:24, 출 30:32, 레 14:9), 육체(레 17:11,
민 16:22), 혈육(창 6:12, 시 56:4), 생물(창 7:21, 민 18:15), 고기(창 9:4, 출 12:8, 레 16:27),
포피(창 17:14, 레 12:3), 하체(레 6:10), 육신(창 6:3, 신 5:26, 대하 32:8, 잠 14:30),
전부(사10:18). 구약 성경 / 270회 사용
* 1319. בָּשַׂר
1. 기뻐하다, 2. 피엘형 בִּשַּׂר .기쁜 소식으로 즐겁게 하다 발음
/
[ bâsar ] 관련 성경 / 전하다(삼하 18:20, 사 41:27, 렘 20:15), 전파하다(삼상 31:9, 삼하 1:20), 소식을
전하다(대상 10:9), 선포하다(대상 16:23), 소식(왕상 1:42, 삼하 18:26, 31), 공포하다(시 68:11). 구약 성경 / 24회 사용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12 지파가 진을 치고 있는 진중의 중심인 성막을 임재의 처소로 삼으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존귀하신 하나님의 거룩이 손상되지 않게 그들 역시 삶의 전반에 거룩이 요구 되었다
그래서 더러워진 자가 정결하게 되는 속죄를 위하여 5대 제사(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제도를 가르쳤고 이어서 삶의 정결을 위해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배우게 하셨으며(11장) 산모 정결법(12장)과 문둥병 정결법[13, 14장)을 명하셨습니다. 레위기15장은 은밀한 성생활에서 유발되는 정상적인 유출 또는 비정상적인 유출에서의 정결법을 말씀합니다.
여기서 유출이란 체내 분비물 유출을 말하는데 15장 전체를 놓고 보면 네 가지 분비물 유출로써 남자에게 관련된 두 가지와 여자에게 관련된 두 가지를 소개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정상적인 체내 분비물 유출인 경우와 비정상적인 유출로 구분합니다. 남성의 경우 정상 유출은 15:16-18 여성의 경우 정상 유출은 15:19-24에서 다루고 있으며
남성의 경우 비정상적인 유출은 15:2-15에서 여성의 경우 비정상적인 유출은 15:25-30에서 다룬다.
이것들은 모두 남녀 성생활과 관련된 유출이면서 생식기에서 일어나는 배출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한 것이 있다. 성병으로 인한 비정상적 유출은 부정한 것이라고 하겠지만 자녀 생산을 위한 유출이나 혹은 남녀의 정상적인 성행위에서 나오는 사정(유출) 뿐만 아니라(15:16-18) 스스로 설정하는 오난이즘(자위. 창 38:9. 레 15:16)까지도 모두 부정하게 보며 물로 씻는 정결을 요구하는 것을 보면서 왜 하나님은 이렇게 드러내고 싶지 않은 은밀한 부분까지도 정결을 요구하시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는 위생적으로도 자기 백성들의 건강한 삶을 위해 정결을 요구하신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한편 분비물 유출과 관련하여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출애굽기의 말씀에서 유추해보면 분비물 사정[유출]이나 심지어 대변(똥) 기타 몸의 유출물로 자신이 부정하게 되지 말라 하시는데 (여기서 대변의 문제는 자신의 변을 자신의 눈으로 봄으로써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거룩한 전쟁을 앞두고 진을 더럽힌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경우 하나님을 만난다거나 전쟁에 출정하는 것 같은 중요한 일을 앞에 놓고 있을 때 여인을 가까이 하지 말라 하시는 것들이 모두 여기에 관련하여 이해하게 되는데 이는 당시 바알 숭배를 추구했던 이교도들과 정반대되는 것이다.
이교도들은 자신들의 신전에서 신전 창기들을 통해서라도 성적 에너지 방출과 같은 분비물 유출을 통해 신인합일[神人合一]을 추구한 것에 반해 야훼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만나거나 함께 하는 일을 앞두고 거꾸로 성적인 억제나 절제를 통해 정결을 도모하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친밀성을 고양시켰던 것을 감안하면 분비물 유출을 다루고 있는 레위기 15장의 말씀들은 당시 만연한 이교도들의 우상숭배로부터 자기 백성을 보호하며 여호와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게 하신 방도로도 이해하게 된다(민 25:1-9).
그런데 자기 백성들의 보건 위생적인 생활과 하나님과 함께하는 중요한 일을 위해 주신 이런 유출 관련 정결 법 및 거룩과 속됨을 구별하는 레위기의 많은 정결 법들이 예수님 시대에 이르러는 일반 백성들을 가장 극심하게 억압하는 율법으로 작용하게 되는데 예수님은 이에 대해 스스로 정결 법을 위반하는 행위를 하시면서 까지 이런 정결법의 굴레에 매여서 제대로 숨도 쉴 수 없는 당시 사람들에게 출구를 제시하신다.
그의 생애와 교훈과 사역을 보여주는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문둥병자를 친히 손으로 만져 치유하심으로 자신이 스스로 부정한 자가 되시기도 하며(마 8:1-4) 12년간 혈루병[유출병]으로 고생한 여인이 자기의 옷자락을 만지는 것을 다 아시면서도 허용하시는 것을 통해 자신도 함께 부정한 자가 되시고(마 9:18-26) 심지어 죽은 지 며칠이 지난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이 시체로 들어있는 부정한 상여의 관을 접촉하면서까지 죽은 자를 살려내시고(눅 7:11-17) 또 부정한 것들과 접촉하는 이러한 행위를 통하여 우리에게 매시야[그리스도]로 오신 그를 통하여 그리고 그 분 안에서 레위기가 말하는 모든 정결예법의 시효가 만료되었음을 보여주신다.
그가 친히 부정한 것들에 접촉하는 것 뿐 아니라 부정한 자들이 자신을 만지고 접촉하는 죄인들에게 접촉당하심으로써 모든 부정한 자들을 정결케 하시는 새로운 길을 열어주신 것인데 구약에서 자기 백성에게 엄중한 정결법을 요구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이 결코 이룰 수 없는 정결의 자리에 이르게 하시기 위해서 친히 사람의 몸으로 찾아 오시고 율법 아래 나시어 이 모든 것을 이루어주셨다.
흠도 티도 없는 가장 거룩하신 주님께서 나 같이 부정한 죄인을 정케 하시기 위해 나의 모든 부정을 한 몸에 뒤집어쓰시고 스스로 부정한 자가 되시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례위기 법전이 요구하는 모든 정결예법을 단 번에 완성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날 정결케 하시는 이 은혜를 힘입어 오늘도 삶의 현장에서 세상을 주님의 것으로 세워가는 일에 바르게 쓰임받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1. 부정한 곳에 접촉함으로 부정하게 되는 이차적인 경우(하루만 부정)는 제외하고 일차적으로 부정한 경우(7일 부정)를 몇 가지 언급하고 있는가?
5가지;
1) 유출병이 있는 자(1-12),
2) 설정함으로 부정을 입은 자(16-18),
3) 불결을 앓는 여인(19-24),
4) 유출병이 있는 (남)녀(25-26, 27절은 남자를 가리킴),
5) 불결한 여인과 동침한 자에게 관한 것(32-33).
2. 부정한 경우를 의미상으로 분류한다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겠다.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
1) 실제로 불결하고 죄이기 때문에 부정; 남녀가 유출병이 있는 경우, 회복된 후 정결례를 행하기까지 부정함
2) 죄를 상징적으로 가르치는 경우(출산이나 생리의 경우)나, 의식법상 부정하다고 간주되는 경우(설정);
실제로 불결하거나 죄는 아니지만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기에는 의식상으로도 문제가 있다고 여겨지는 경우, 일정 기간 부정함. 식사 도중에 화장실 얘기하는 것이나 어른들 앞에서 방귀를 뀌는 경우처럼
무슨 큰 죄가 되거나 나빠서라기보다는 의식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요즈음 아이들은 '생리적인 현상을 어떡하라고?' 하면서 대든다.
3. 유출병이란 것은 구체적인 병명이 아니라 몸에서 비정상적으로 흘러나오는 병을 총칭하는 말이다. 여인의 유출은 19절부터 언급하고 있으므로 2-3절의 유출병은 남자의 병이다. 그렇다면 현대식으로 하면 무슨 병일까?
성병(임질); 성병의 증상을 잘 모르기 때문에 대답을 잘 못할 것이다. 현대인은 성병이라면 으레껏 매독이나 에이즈를 떠올리겠지만 매독은 신대륙을 발견하고 정복자들이 날뛰던 시대에 본격적으로 창궐하기 시작했고
에이즈는 최근에야 등장한 것이다. 성경시대에는 임질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현대의 성병과 비교하면 병 축에 들지도 않는 것이지만.
매독만 해도 좋은 치료약이 발명되었기 때문에 요즈음은 잠잠한 듯 싶으나 한 때는 공중화장실은 성병 치료를 위한 안내문이
도배되다시피 했었다. 무서운 질병이었다. 자기만 해로운 것이 아니라 후손에게까지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는 무서운 질병이었다.
두뇌가 없는 아이처럼 심각한 장애를 유발시킨다. 이름은 제일 아름다운지 모른다. VD라고 하는 데 비너스의 병이란 뜻이다.
우리말로 매독이란 것도 매화꽃의 독이란 말로 미화되어 있다. 위대한 예술가들이 단명한 원인으로 곧잘 지목되는 병이다.
이제 더 무서운 AIDS로 대체되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건강한 부부관계를 유지하는 것만이 예방을 위한 최선의 길이다.
4. 부정한 자가 되면 옷을 빨고 몸을 씻고 저녁까지 기다려야한다. '옷을 빨고'란 표현이 몇 번 나오는가? 물이 그리 흔한 곳도 아닌 데 이렇게 열심히 빨 수 있었을까?
10번 (5, 6, 7, 8, 10, 11, 13, 21, 22, 27); 부정한 짓을 않으면 이렇게 많이 빨 일이 없지! 일단 부정하게 되면 무조건 빨아야하고 몸을 씻어야한다.
바리새인들이 손씻지 않는 제자들과 싸움을 했던 것을 보면 이것이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 지 알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옷을 어디에 빨아야 하는가? 어린양의 피에 빨아야한다
(계 2:4, 3:7, 22:14).
5. 왜 저녁까지 부정하다고 할까?
하루의 시작이 저녁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에게 저녁은 하루의 끝이기도 하고 시작이기도 하다. 해가 지는 것을 보면서 드디어 나의 부정이 끝나는구나 라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면 새로운 저녁을 맞는 느낌이 우리와 좀 다를 것 같다.
아마 저녁에 중요한 일이 많았을 것이며 즐거운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었을 것이다. 분을 품어도 저녁까지 품지 말라던가!
6. 유출병과 문둥병을 비교해보면?
유출병;내부적인 질병이지만 겉으로 봐서(타인이 보기에)는 멀쩡하다. 문둥병;내부적인 질병이면서 겉으로 확연하게 드러난다.
겉과 속을 다 정결하게 유지하라는 분부이다. 보이는 죄도 무섭지만 남이 알지 못하는 나 혼자만이 아는 것까지 정결케 하여야한다.
7. 유출병이 있는 자는 전염병을 옮기는 병원균이나 마찬가지다. 이 사람은 주변을 온통 부정하게 만들 수 있다. 이 사람으로 말미암아 이차적으로 부정하게되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무슨 느낌이 드는가? 혹은 이와 관련하여 무엇이 생각나는가?
1) 유출병 있는 자의 침상에 접촉하는 자
2) 유출병 있는 자의 몸에 접촉하는 자
3) 유출병 있는 자의 침이 묻은 자
4) 유출병 있는 자의 몸 아래 닿았던 것에 접촉한 자
5) 그런 것을 옮기는 자
6) 유출병 있는 자가 물로 손을 씻지 않고 만진 자
7) 유출병 있는 자가 만진 질그릇과 목기
이런 곳에 접촉하더라도 깨달았을 때 부정하다. 유출병은 겉으로 드러나는 병이 아니다. 본인이 부정하다고 자수하지 않으면 주변 모든 사람을 부정하게 만들 수 있다.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면 부정한 것이 아니다(5:3).
가급적이면 꼼짝 않고 있는 것이 좋겠다. 돌아다닌다면 주변을 온통 부정하게 만들어버린다. 차라리 부정하지 않도록 미리 노력하는 것이 좋겠다. 누구처럼 고백성사가 싫어서 나쁜 짓 하지 않는 것처럼.
8. 아무리 유출병이 있는 사람이라도 만져야할 사람이 있다면 어떡하나? 애기 젖이라도 먹여야하면 어떡하지?
손을 씻으면 된다.(11) 세심하게 신경을 쓰고 계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너무나 인간적인 하나님이시다!
9. 이렇게 부정하게 된 물건이나 장소는 어떻게 하나?
우선 병자가 나아야된다.(26) 그 다음에는 언급이 없다? 저녁까지 부정!
10. 유출병이 깨끗해지면 정함을 받는 절차는 무엇인가?
1) 7일을 계산하여 옷을 빨고 흐르는 물에 몸을 씻을 것이요(13)
2) 제 8일에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새끼 둘을 취하고 그 하나는 속죄제로, 하나는 번제로 드릴 것(14)
다른 속죄제와 비교하면 극히 간단하다. 가난한 자가 드리는 제사를 드리라는 것이다. 온 천지를 부정하게 만드는 자신의 부정함에 비하면 정결례는 너무 간단하다.
11. 설정이란 원어의 의미는 남녀간의 정상적인 성관계를 말한다. 부부간의 성행위에서의 설정도 왜 부정하다고 할까?
원래 부부의 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었지만 범죄한 이후 인생 자체가 저주 아래 놓여버린 탓이다. 어떻게 보면 가장 동물적인 행동이기에 종교의식상 부정한 것으로 취급한 것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자는 여자를 가까이 하지 말라는 것이다(삼상 21:4, 출 19:15). 주 안에서 거듭난 우리는 그렇게 부정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 사람을 부부간에 그렇게 만드신 분이 하나님인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 둘 사이에 엄청난 비밀을 묻어두신 분도 하나님인데? 처음에는 그랬지. 어쨌든 범죄의 무서움을 말하고 있다. 모든 복이 일순간에 저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예수님께서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으셨다.
12. 유출병이 있는 남자와 유출이 있는 여자 중에 어느 쪽이 더 부정할까? 무슨 근거로?
남자; 유출병이 있는 남자가 만진 것(물로 손을 씻지 않고 만진 자, 유출병 있는 자가 만진 질그릇과 목기; 11-12)은 부정하게 되는 반면에 유출이 있는 여자가 만진 것에 대한 언급은 없으며,
정하게 되는 과정에서 여자는 '옷을 빨고 흐르는 물에 몸을 씻으라'는 말이 없어서 남자가 더 부정한 것 같기도 하다. 여자의 유출은 대체로 정상이지만 남자의 유출은 비정상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더 죄가 많은 것이다.
13. 생리로 인해서 부부관계는 최소한 얼마간 금지되어야 하는가?
칠일(19); 이 기간에는 임신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혹시 된다면 비정상적인 아이가 태어날 가능성이 많단다. 이런 점을 감안해서 주신 말씀인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그런 의식이 항상 살아 있기가 쉽지 않다. 유대인들은 이런 규정들로 인하여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래도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을 섬겼다는 것은 정말 불가사의다. 아니면 이런 하나님을 고의로 버렸는가?
14. 동침하다가 생리의 시작을 알게된 경우는 어떻게 되나?
생리중인 여인과 동침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레 20:18)는 규정과 비교해보면 24절(여인과 동침하여 그 불결에 전염되면 칠 일 동안 부정할 것)이 바로 이런 경우를 가리키는 경우일 것이다.
15. 이렇게 세밀하게 부정한 경우를 언급하면서 부정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부정한 상태로 그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장막에 나아옴으로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어른을 모시고 살면 이런 제약이 많은 법이다. 그럼 어떻게 하나? 나 편하라고 어른을 버려?
그런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하면 이것은 엄청난 손실이다. 달리 설명하면 이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결코 잊지 말라는 당부라고 하겠다.
16. 여자의 생리현상을 부정하다고 하면 되나?
실제로 부정해서 부정한 것이 아니라 종교의식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부부간의 설정과 출산도 부정하다고 하는 판이니 서럽게 여길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생명의 상징인 피를 흘린다는 점과 자신의 느낌으로도 정하다는 느낌을 갖지 못하는 심리적인 이유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런 느낌을 가질 이유가 없다.
귀신과 관련된 일(제사, 배타는 일)에 여자를 뺀 이유도 이런 식으로 부정하다고 여긴 탓이 아닐까?
어떻게 보면 종족보존이라는 사명을 위하여 여성이 다소간 희생당한 측면도 있고 보호받은 측면도 있는 것 같다.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이 그 고토에 거할 때에 그 행위로 그 땅을 더럽혔나니 나 보기에 그 소위가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의 부정함과 같았느니라' (겔 36:17)
17. 부정하게 되는 경우를 너무나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부정함을 방지하기 위한 노력을 엿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부정함에 대한 거부감이 어떤지를 알 수 있다.
식구 중에 이렇게 깔끔하고 까다로운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피곤할까? 이런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가 지녀야할 태도는 무엇인가?
예수님께 감사; 예수께서 이런 규정을 충족시키시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 깨끗한 존재로 세우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삶도 얼마나 고달플까?
부정에 대한 이런 모든 의식법적 규례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충족되었으므로 더 이상 의미가 없다.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과 영적 교훈을 잘 알아서 수용해야한다
남자에게 부정한 유출병(1-2)
유출병은 일종의 성병으로 정액이나 더러운 피가 몸에서 흘러 나오는 즉 방탕한 성생활의 결과로 생기는 질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이스라엘은 몸과 마음이 깨끗해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생활 또는 성기능도 항상 정결해야 하고
정상적으로 유지해야 했습니다(1-2).
유출병자와 접촉된 자와 기구 정결례(3-12)
하나님은 유출병을 앓는 병자 뿐 아니라 유출병자와 접촉한 침상, 의자, 안장 등도 다 부정하며 그 부정한 물건과 접촉한
사람까지도 부정하다고 규정하셨습니다. 유출병자로 인하여 부정하게 된 자는 그 옷뿐만 아니라 그의 몸도 물로 씻어야
합니다(3-12)
유출병자의 정결 의식(13-15)
유출병에서 치료함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몸을 씻고 옷도 7일 간에 걸쳐 빨아야 합니다. 이는 병균이 옷에 붙어 있다가 옷을
통해 다시 옮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유출병이 그치고 성결의 기간을 마친 후 자신의 부정을 속함받기 위해 제물을
제사장에게 가져가고 제사장은 그를 위해 속죄제와 번제를 드려야 했습니다(13-15).
설정한 자의 정결 의식(16-18)
설정이란 말은 남자의 정액이 분비되는 것을 말합니다. 남녀의 성관계를 통한 정액의 방출도 의식적으로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설정을 한 자는 저녁까지 기다린 후 몸과 옷을 씻음으로 부정을 제거했습니다. 정수가 묻은 옷이나 가죽은 물에 빨았습니다. 동침한 남녀는 물로 씻도록 했습니다(16-18).
여인의 유출 정결례(19-33)
여자의 월경은 피와 연관되어 의식적인 불결로 간주되어 월경 중에 있는 여인과 접촉한 자와 그 여인이 누웠던 자리와 앓았던
자리도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어 옷을 빨고 물로 씻어야 했습니다. 그 여인은 부정의 기간이 지난 후 비둘기 두 마리를 속죄제와
번제를 드려 속죄해야 합니다(19-29).
일단 부정해졌던 자가 공동체의 일원으로 복귀하려면 속죄제를 드려 정결케 되고 난 뒤 일정 기간의 연단을 거치고 난 후에야
비로소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부정해진 사람이 그냥 공동체 안에 머물게 되면 그 곳에 속한 모든 사람을 부정케
만들어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기 때문이었습니다(30-31).
죄를 범했을 경우 먼저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악이 온 교회와 성도들을 더럽히게 됩니다.
부정한 병과 규례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당신의 백성들도 거룩할 것을 요구하신 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32-33).
주께서 주신 오늘!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명심하고 부정한 모습들을 살펴 언제 어디서나 주 안에서 정결하게 살아가길 원합니다.
__________________ 레위기 14장 / 정결케 되는 날(2절)
03-24-2023(금) 사순절 제27일
문둥 환자의 정결케 되는 날의 규례는 이러하니 곧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These are the regulations for the diseased person at the time of his ceremonial cleansing, when he is brought to the priest:
6883. 차라아트(tsâraʽath) צָרַעַת
- 하나님께서 치심으로 얻은 병 즉 하나님께서 치셨다. 얻어 맞았다!
정한 산 새 두 마리 -
여기서 '정한새'는 율법적으로 부정하다고 판결받은 새 종류 이외의 모든 들새를 지칭한
것이다(11:13-19). 완치된 문둥병자의 정결 예식을 위해 준비된 정한 산 새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죽여 그 피를 취하고,
다른 한 마리는 '백향목 나무가지에 우슬초 줄기와 더불어 홍색실로 묶어'(Mishna) 그 죽은 새의 피에 몸을 적신 후 넓은
들판으로 날려 보냈다. 한편 여기서 피를 흘리며 죽어간 새는 일차적으로 문둥병자의 부정을 속하기 위한 희생 제물로서의 의미를
갖지만(Keil), 영적으로는 범죄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인류의 죄짐을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상징한다(The Preacher's Homiletic Commentary, p. 182).
반면 들판으로 날려보낸 새는 일차적으로
문둥병자가 그 병과 부정에서 해방되어 자유케 된 것을 의미하며(Lange), 구속사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모든
성도들이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되어 영생을 얻게 될 것을 상징한다(Matthew Henry).
백향목 -
레바논의 특산물로서 위로 곧게 뻗어 품위가 있어 보이며, 강하여 좀이 잘 먹지도 않고 잘 썩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광택과 향기가 아름다우며 오래 보존되는 특징을 가진 귀한 나무이다. 이같은 나무가 문둥병자의 정결 의식에 특별히 사용된
것은 문둥병이 죄의 부패성을 상징하는 반면, 이 백향목은 죽음을 극복한 생명의 능력 또는 생명의 영속성을 상징하기
때문이다(Keil Delitzsch, p. 386).
홍색실 -
'홍색'은 붉은 피 색깔을 나타낸다. 따라서 일차적으로 이 홍색실은 그 건강한 피 색깔로 인해 '회복된
혈색'(Matthew Henry, Lange), 혹은 '활기찬 생명의 신선함'(Keil)을 의미한다. 나아가 구속사적으로 본절의
홍색실은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은 구원의 능력을 상징한다(수 2:18).
우슬초 -
고대 근동 지역의 담벽에 흔히 자라는 박하초 식물로 그 냄새가 향기롭다(왕상 4:33). 그러므로 이것은
일차적으로 문둥병자가 그 병의 악취로부터 해방되었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Lange, Matthew
Henry). 나아가 성경에서 이 식물은 주로 희생제물의 피를 뿌릴 때 사용되었는테, 죄 및 부정으로부터 정결케 하는 능력을
상징한다(시 51:7). 한편 후일 히브리 기자는 백성을 대표한 모세가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한 후, 이스라엘 백성을 정결케 하는
예식 때(출 24:6-8) 물과 피와 붉은 양털 및 홍색실을 취하여 뿌렸다는 사실을 증거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바로 문둥병자와도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깨끗케 하여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다는 놀라운 복음을 설파하였다(히 9:19, 20).
거룩하게 되는 방법 첫째는 제사를 통하여 둘째는 제사장을 통하여 - 하나님의 인정에 의한 것
정결케 되는(2893) 토호라
[ ṭohŏrâh ]
טָהֳרָה
1. 청정, 2. 세정 관련 성경 / 정결(레 13:7, 15:13), 깨끗함(레 13:35), 정함(레 14:32), 정결하게 함(민 6:9, 대상 23:28, 겔 44:26), 결례(레 14:23, 느 12:45)구약 성경 / 13회 사용 14장의 문단 구성
1-20. 나병의 정결케되는 규례의 순서
21-32. 가난한 자의 정결케 되는 규제
33-53. 집안 나병과 그 처치
54-57. 결론
문둥병 환자의 정결 의식
범죄한 백성들에게 제사를 통해 속죄의 길을 열어 주신 하나님은 문둥병으로 인해 공동체에서 제외된
자들에게도 성결 의식을 통해 복귀의 가능성을 열어 주셨습니다. 문둥병이 죄의 결과로 인식되었다는 점에서 본장에 나타난 문둥병 정결
의식은 속죄 의식을 상징한다고 하겠습니다. 문둥병자를 위한 정결 의식을 위해 산새 두 마리, 백향목, 홍색실, 우슬초 등을 준비합니다. 이 준비물들은 구속사에서 볼 때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예표합니다. 산새 두 마리는 각각 대속의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백향목은 성경에서 생명과 번성을 의미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영생과 축복을 말합니다. 그리고 홍색실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미하며, 물을 뿌려 정결하게 하는 우슬초는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죄가 씻겨졌음을 상징합니다. 문둥병 환자의 정결 의식을 통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예표합니다.
문둥병은 당시 의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에는 가장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특히 전염되는 특성 때문에 모든 사람들로부터
멸시당하고 배척받았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문둥병자에게도 정결함을 받고 공동체에 복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에게도 생명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하나님께 나와 회개하면 용서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세상에서의 삶에서 죄에 빠졌을 때도 낙심하지 말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용서받고 위로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표준새번역 “사람들이 악성 피부병에 걸린 환자를
제사장에게 데려가면”
그 당시 나병은 천형(天刑)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죄의 결과였습니다. 그러기에 부정한 나병환자는 진 밖에서
혼자 따로 살아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병환자 스스로가 제사장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제사장에게 가야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역으로 이야기 하자면 비록 천벌을 받아 징계를 받고 있는
죄인일지라도 신앙공동체는 그를 외면할 것이 아니라 늘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중죄를
짓고 감옥에 수감되어 격리되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물론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나!’ 하며
그를 정죄하며 비난의 화살을 퍼부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삶에서는 주님을 비롯한 우리 그리스도인들 모두의 이름이 걸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런 뉴스를 접할 때마다 범인(凡人)의 경우보다 더 분개하곤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천형(天刑)을 받은 큰 죄인일지라도 공동체가 그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가
회복될 때까지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고 끝까지 품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 하나님 앞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죄인 된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낮고 낮은 이 땅에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영혼 돌봄을 위해 자신의 몸이 십자가에서 갈기갈기 찢기시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주님의
사랑이 있었기에 죄인이었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런 우리이기에 비록 우리 눈에 큰
죄를 지은 그리스도인일지라도 우리는 결코 그를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정죄하며 그를 마음으로부터 완전히 밀어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회복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죄로부터 그를 회복시켜주시는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그 일에 증인이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우리는 죄에 빠졌었던 그리스도인을 계속 정죄함으로
그를 우리 마음으로부터 분리해낼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회복시키실 그 날을 기대하며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으로 그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10절부터 20절까지는 나병이 나은 자가 드리는 네 가지 제사 - 속건제, 속죄제, 번제, 소제 - 의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속건제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 혹은 다른 사람에게 져야할 의무에 대해 부적합한 행위를 했거나 그 의무를
거부했을 때 요구되는 제사입니다. 그에 대한 잘못을 용서받기 위해 드려지는 제사가 바로 속건제입니다. 이와 더불어 나병환자의
정결예식에는 속죄제가 포함되었습니다. 나병은 하나님의 진노에 의한 것이었기에 정결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했습니다.
그러기에 반드시 속죄제가 드려져야 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속건제와 속죄제가 저지른 과거 죄에 대한 청산 절차라면, 번제와 소제는
이제 하나님께 새롭게 헌신하고 봉사할 것을 다짐하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본문의 제사란 오늘 날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원형입니다. 우리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영적 나병환자 아닙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결한 삶을
살아가야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토록 싫어하시는 죄를 아직도 반복해서 저지르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일을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우리가 누리게 된 영생을 기뻐하는 축제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해 통회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속건제와 속죄제의 날로 기억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죄에 대한 통회함을 넘어 하나님의 자녀다운 성결함으로 새로운 한 주간을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결단의 날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를 통해 다시금 겸비함과 거룩함을 회복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21절부터
32절까지는 가난한 나병환자가 낫게 된 후 드리는 제사에 대한 소개가 있습니다. 특별히 제물과 관련, 우리는 본문 내용을 통해
그가 상대적으로 값이 덜 나가는 제물로 제사를 드릴 수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인들과 제물은 달랐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에게도 제물을 요구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라고 해서 면제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속
깊은 배려이셨습니다.
제사는 오늘날의 예배로, 제물은 헌물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헌금을 통해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다시금 기억하게 되고, 마음에 새기게 됩니다. 이는 곧 우리가 물질에 빼앗겼던 마음을 다시금 주님께로
모으게 하는 구심점 역할을 합니다. 가난하면 오히려 돈에 더 집착하게 되고, 돈의 마력에 (魔力) 끌려가기 십상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상대적으로 값이 덜 나가는 제물일지라도 가난한 자에게도 제물을 요청하셨던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더 가난한 자리로
이끌어 가시고자 함이 아니라 헌금을 통해 그의 심령을 하나님 나라로 채워주심으로, 돈의 마력에 빠지지 않도록 하시기 위한 특별하신
배려였던 것입니다.
둘째 단락인 33절부터 53절까지는 집에 발생한 나병 색점으로부터 정결하게 되는 지침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 거주하는 집에서 나병이 발생했을 경우 이를 처리하는 규례입니다.
약속의 땅에서 지은 집도 나병 발생의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흡사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임인 교회와
비슷합니다. 신앙 공동체인 교회는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즉 약속의 땅에 들어선 사람들의 집합체입니다. 하지만 죄라는
것이 언제 그 공동체에 파고들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교회공동체의 지체인 우리 각 자가 먼저 죄에 대해 깨어있어야 합니다. 아울러
교회라는 집 또한 노출된 죄로부터 공동체를 정화해 나갈 수 있는 순결의 능력을 잃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 함께 나누신 말씀들을 기억하심으로, 오늘 한 날을 주님 안에서 넉넉함과 겸비함, 헌신과 순결의 삶을 살아가시는, 사랑하는 우리 교우님들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__________________ 레위기 13장 / 제사장이 진단하여(3절)
03-23-2023(목) 사순절 제26일
제사장은 그 피부의 병을 진찰할찌니 환처의 털이 희어졌고 환처가 피부보다 우묵하여졌으면 이는 문둥병의 환처라 제사장이 진단하여 그를 부정하다 할 것이요. The priest is to examine the sore on his skin, and if
the hair in the sore has turned white and the sore appears to be more
than skin deep, it is an infectious skin disease. When the priest
examines him, he shall pronounce him ceremonially unclean.
레위기서의 목적은 첫째, 거룩한 백성 둘째, 거룩한 나라
거룩한 백성은 거룩한 삶이 요구됩니다. 거룩한 삶을 위하여 1-10장 / 제사법 1-7장 : 제사의 방법과 규례 8-10장 : 제사장을 위한 규례
11-16장 / 정결법 11장(47절) : 음식에 대한 것 12장(8절) : 산모의 출혈 13장(59절) : 나병 14장(57절) : 나병
관련 성경 / 부정하다(레 11:25, 민 19:14), 더럽히다(민 6:12, 시 79:1, 겔 22:3),
더러워지다(레 18:25, 시 106:39, 미 2:10), 부정하게 하다(레 22:5),더럽다(왕하 23:10,13, 사 30:22 [명] 부정(레 15:32, 5:3)
레위기
13~14장은 표면에 발생한 악성 번식의 진단과 그 처리 방식에 대한 규정이다. 13장은 사람의 피부에 발생한 악성 번식들의
증상과 진단법이 설명되고 14장은 그로부터 정결함을 되찾는 복잡한 절차들로 채워진다. 먼저 두 가지 이유에서 ‘문둥병’(한글개역)
혹은 ‘나병’(개역개정), 즉 ‘한센병’이라는 번역은 오류다. 첫째, ‘문둥병/나병’이라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짜라아트(tsa-ra-at)는 ‘벽이나 물건의 표면에 번지는 악성 곰팡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벽이 문둥병에 걸릴 수는 없으니
짜라아트를 ‘문둥병/나병’으로 옮기는 것은 적절치 않다.
둘째,
사람의 피부에 발생된 짜라아트의 증상들은 나병(한센병)과는 거리가 멀다. 많은 학자들이 지적한대로 사람의 피부에 나타난
짜라아트는 불에 덴 피부에 나타나는 증상을 포함해(레 13:24~28) 매우 다양한 양상의 피부병들을 가리킨다. 대표적인
증상으로는 피부가 눈처럼 하얗게 일어나며 피부 발진(색점)으로 붉게 부풀어 오른 종기, 전염성이 있는 피부 발진, 머리털이 빠지며
생기는 머리의 피부염을 비롯한 피부 질환들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편의상 ‘나병’이라는 말을 사용하겠지만, 사람 피부의
짜라아트는 악성 피부병, 건물이나 사물의 표면에 나타나는 짜라아트는 악성 곰팡이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이러한 악성 표피
질환은 보건위생학적인 부정결이 분명하나 그보다 더욱 중요하게는 제사장에 의해 제의적인 부정결로 판정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악성 피부병과 악성 곰팡이 증상들
악성
피부병, 즉 나병의 증상들 중에 대표적인 것이 피부가 군데군데 하얗게 변하는 피부 발진인데 이때는 털도 덩달아 희어지기 때문에
마치 피부에 눈이 내린 것처럼 보이게 된다. 예를 들어 저주를 받은 미리암(민 12:10)과 나아만(왕하 5:27)에게서
공통적으로 나병의 전형적인 증상으로 “나병이 발하여 눈같이 되었다”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일단 나병의 증상이 발견되면 제사장이
악성 여부를 판정하는데 현대 의학적 방법으로 표현하자면 질환의 양성과 음성을 판정하는 것과 비슷하다. 음성 판정이 내려지면 추방을
면하고 자신의 거처에서 일련의 정결 의례를 치러야 하지만, 악성 판정이 내려지면 그 즉시 추방된다. 여기서는 지면상 악성
피부병과 악성 곰팡이의 종류들과 증상들을 설명할 수 없다. 이 증상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종류들로 나뉜다: (1)나병증상과
진단(13:2~17); (2)치료된 종기의 감염(13:18~23); (3)화상과 피부 감염(13:24~28);
(4)옴(13:29~37); (5)어루러기(13:38~39); (6)비정상적 대머리(13:40~44). 이것들에 대해서는 필자의
저서 <레위기의 신학과 해석>을 참고하라. 건물벽이나 옷, 가죽 등의 사물 표면에 발생한 악성 곰팡이는 청색 얼룩점이나
홍색 얼룩점 여부에 의해 판정된다. 악성 번식의 진단과 판정, 그리고 정결 절차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표 참조>
한편,
나병에 걸린 사람의 피부는 마치 송장과 같다(민 12:12). 즉, 나병은 죽음에 속한 증상이므로 부정하다. 또한 나병과 송장의
연관성은 시신과의 접촉으로 부정결해진 사람을 위한 정결 규례(민 19:1~13)와 나병 환자의 정결 규례(레 14:4~7)의
유사성을 통해 암시된다. 마찬가지로 악성 곰팡이가 핀 건물이나 사물 역시 무덤과 그 안에 있는 물건을 연상케 한다.
사람의
경우 최종적으로 악성 번식으로 판정되면 추방된다. 그는 즉각 진 밖으로 추방되는데, 병이 완치된 후에는 진영 내로 복귀가
가능하다. 다만 그때에는 네 단계에 걸친 매우 까다롭고 복잡한 정결 절차가 요구된다(레 14:1~32). 그것에 대한 상세한
도표와 설명도 필자의 책을 참고하라.
유출병들과 정결례(레위기 15장)
정결법의
마지막 주제는 남녀 생식기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유출병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생명의 기운이자 씨앗인 피와 분비물, 그리고
정액의 유출은 곧 생명이 빠져 나간다는 의미다. 신체의 유출은 생명에서 멀어지고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신호이기에 부정하게
여겨졌다. 유출병을 다룬 레위기 15장은 크게 남성의 만성 유출과 설정(1~18절), 그리고 여성의 만성유출과
월경(25~30절)으로 나뉜다. 한편, 유출병으로 인한 부정결의 이차, 삼차 감염의 양상과 그것에 따른 조치는 굉장히
복잡하다(필자의 저서의 도표를 참고하라).
(1)남자의
만성 유출과 설정(1~18절): 남자의 성기로부터 발생하는 유출은 정액 유출과 만성 비뇨기 질환에 의한 유출로 나뉜다. 첫 번째
유출병인 몸(즉, 성기)에서 액체가 흘러나오는 증상(3절)은 성기로부터 분비물이 나오는 임질과 같은 성병일 가능성이 있다. 두
번째는 성기에 분비물이 끼어 배뇨에 지장을 주는 증상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비뇨기 질환으로 인한 유출은 장기간 지속되는 것이
특징이다. 유출병을 앓던 남자의 유출이 중단되면 그날로부터 7일을 기다린 후에 옷을 빨고 목욕을 한다. 그리고 8일 째에 그는
성소에 올라가 속죄제와 번제로 비둘기 두 마리를 바친다. 여기서 핵심은 속죄제인데, 그는 유출병으로 인해 그 자신뿐 아니라 성소
역시 더럽혀졌기에 속죄제의 피로 그러한 오염을 씻어낸다. 한편, 남자의 성기로부터의 설정은 두 가지로 나뉜다. 몽정처럼 불가항력인
설정과 정상적인 성관계에 의한 설정이다. 두 경우 모두 하룻동안 부정케 된다. 당일에 목욕을 한 뒤 저녁까지 기다렸을
것이다(18절).
(2)여자의
만성 유출과 월경(19~24절): 여자의 자궁 출혈 또한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매달 생리적 현상으로 찾아오는 월경과 다른
하나는 비정상적으로 계속되는 자궁 출혈이다. 월경이 찾아오면 여자는 7일간 부정한 상태로 지낸다. 이 기간은 대략 여성의 평균적인
월경 기간과 일치한다. 본문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으나 추정컨대 7일째 되는 날 여자는 옷을 빨고 목욕을 한 뒤 그날 저녁이면
정결을 회복한다. 이때 성소에 올라가 희생을 드릴 필요는 없었다는 점에서 이어지는 만성 자궁 출혈에 비해 부정결의 정도가 낮았다.
월경 중인 여자와 잠자리를 할 경우 심각한 결과가 초래된다. 본문은 남자가 여자와 마찬가지로 7일간의 부정결 기간을 겪어야한다고
명시한다. 7일째 되는 날, 본문에 역시 언급되지 않으나 그는 옷을 빨고 목욕을 해야 했을 것이다. 한편, 여자의 만성 출혈은
상태가 더욱 심각하다(25~30절). 이것은 여자의 성기로부터 출혈이 오래 지속되는 상태를 가리킨다. 월경으로 인한 정상적인
출혈을 넘어 장기간 지속되는 이러한 만성 자궁 출혈은 의학적 관점에서 볼 때 혈루증일 가능성이 크다. 자궁 출혈이 지속되는 동안
환자인 여자는 부정결한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월경과 마찬가지로 접촉을 통해 부정결이 감염된다. 출혈이 멈추면 그로부터
7일을 더 기다린 뒤 본문에는 언급되지 않지만 옷을 빨고 목욕을 해야 했을 것이다. 월경과는 달리 8일 째에 그녀는 반드시 성소에
비둘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올라와 속죄제와 번제를 드려야한다. 이러한 사실은 만성 자궁 출혈이 월경보다 훨씬 더 강한
부정결이었음을 말해준다. 무려 12년 동안 만성 자궁 출혈을 앓던 복음서의 혈루증 앓던 여인에 대한 이야기는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할 때 그녀의 절실함이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정결법의 의의
정결법에
관해 한 가지 풀어야할 숙제는 왜 자연스러운 출산과 생리, 그리고 정상적인 성관계를 더럽게 여겼느냐는 것이다. 출산과 월경의
문제는 앞서 어느 정도 설명한 바 있는데 출산과 성 관계가 그 자체로는 더러운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 창조의 축복이었으나 다만 그런 행위 뒤에 발생한 신체로부터의 피와 정액의 유출 때문에 부정을 유발했다. 앞서 말한 대로
이것은 ‘생명력의 소실’이므로 부정하게 여겨진다. 성경신학적 관점에서는 이 문제를 포함한 레위기 11~15장의 부정결들은 아마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의 범죄로 인해 몸과 자연의 창조질서가 다소 어긋난 결과로 보아야할 것이다.
정액이
부정결을 유발하기 때문에 하나님 면전에, 즉 성소에 올라갈 때나 거룩한 전쟁을 수행할 때는 부부간의 성관계가 금지되었고(출
19:15; 삼상 21:4~6; 참조. 삼하 11:11), 몽정을 해도 그 사람을 진 밖으로 내보냈다(신 23:10). 바울이
기도에 집중하려 할 때 부부가 방을 따로 쓰도록 권면한 이유도(고전 7:5)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방의 제의에서 성관계는
성소 내에서 중요한 제의 중 하나로 실행되곤 했다. 수메르 사회에는 ‘성혼례’(sacred marriage rite) 제도가
있었는데 신당의 꼭대기 층에서 새해를 맞을 때마다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며 선택된 여자 사제와 도시 국가의 통치자인 왕이 혼인식을
거행하고 성관계를 가졌다. 그러나 구약은 인간의 성 행위를 철저히 인간의 영역으로 제한했다. 성소에서는 어떠한 성 행위도
금지되었으며 각자의 처소에서 성 행위를 한 후에는 성소에 접근할 수 없었다. 자녀의 출산은 창조의 질서 내에서 하나님의 축복으로
허용되는 것이지 성소에서의 제의적 성행위라는 수단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 자체는 하나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선물이지만
인간에 의해 최상의 쾌락을 위한 수단으로 오용될 위험은 상시 존재했다. 그로 인해 하나님 앞에 특히 집중해서 나아갈 때는 일시적인
성적인 절제가 요구되는 것으로 보인다.
정결법의
정-부정 구분은 기본적으로 제의 신학에 의한 것이지만 그 배경에는 보건-위생학적 관심이 결부되어 있다. 먹지 못하도록 금한
짐승들 중 일부는 비위생적인 곳에 서식하며, 월경을 겪는 여자의 일시적인 격리와 산모의 장기 격리는 그녀의 신체적 회복을 위한
배려이기도 하다. 또한 악성 피부병과 곰팡이는 강한 전염성과 번식력으로 인해 그 오염원이 차단되거나 파괴되었다. 유출병 환자의
활동 제한과 부분적 격리는 병원균의 감염을 차단하고 불결한 신체적 상태를 청결케 하여 환자가 조속히 회복되도록 하기 위한 조치일 수
있다. 그러나 레위기의 정-부정의 진단은 언제나 그런 보건 위생학적 조치 이상의 제의적·신학적 개념에 의한 것이다. 앞서 강조한
대로 ‘부정 탔다’는 것은 그런 위생적 개념 이상의 정신적·관념적 개념으로, 부적절하고 흉조를 예감케 하는 상태를 말한다.
이미
논의한 바와 같이 정결법의 목적은 ‘거룩’에 있다. 신약에서 정결법의 형식은 모두 폐지되었지만 그 본질적 취지는 율법을 통해
계승된다.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5~16; 참조. 벧전 2:9). 바울은 신자들의 모임인 교회를 ‘성전’이라 칭하면서 그 영적인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께서 그를 멸하실 것이라 경고한다(고전 3:16-7). 그러므로 신자는 거룩한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세상과는 구별된
정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 바울은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는 레위기의 정결법을 영적·윤리적 교훈으로 바꾸어 재적용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후 6:17). 음식법은 폐지되었으므로 먹는 문제로
하나님의 사역이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 만물이 모두 깨끗하고 부정한 음식이란 없으며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 악할 뿐이다(롬
14:20). 하나님의 백성은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해야 한다(고후 7:1).
이렇게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사람은 귀하게 쓰이는 그릇이 되어 주인이 기쁘게 사용하고 모든 선한 일을 하기에 합당한 사람이 될
것이다(딤후 2:21). 이렇듯 신약에서는 신체적·외적 정결성과 완전함보다는 내면의 도덕적 정결성과 완전성이 산 제물로 드려지는
신자의 표준이 된다.
1. 부정한 것(불결성) 13장-15장 / 부정하다 53회 반복 사용 죄는 부정한 것
이사야 64:6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로마서 3:23)
2. 전염성
레위기 13:5-8 칠일만에 제사장이 그를 진찰할찌니 그의 보기에 그 환처가 변하지 아니하고 병색이 피부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제사장이 그를 또 칠일 동안을 금고할 것이며. 칠일만에 제사장이 또 진찰할찌니 그 환처가 엷어졌고 병색이 피부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피부병이라 제사장이 그를 정하다 할 것이요 그는 옷을 빨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 그러나 정결한 여부를 위하여 제사장에게 보인 후에 병이 피부에 퍼지면 제사장에게 다시 보일 것이요. 제사장은 진찰할찌니 그 병이 피부에 퍼졌으면 그를 부정하다 진단할 것이라 이는 문둥병임이니라.
야고보서 1:15 욕심 - 죄 - 장성한즉 - 사망
47-59절 / 의복
3. 격리
45-46절 문둥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우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 밖에 살찌니라.
4. 불살라야 해결
52. 그는 그 색점 있는 의복이나 털이나 베의 날이나 씨나 무릇 가죽으로 만든 것을 불사를찌니 이는 악성 문둥병인즉 그것을 불사를찌니라
55. 그 빤 곳을 볼찌니 그 색점의 빛이 변치 아니하고 그 색점이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부정하니 너는 그것을 불사르라 이는 거죽에 있든지 속에 있든지 악성 문둥병이니라. 57절. 그 의복의 날에나 씨에나 무릇 가죽으로 만든 것에 색점이 여전히 보이면 복발하는 것이니 너는 그 색점 있는 것을 불사를찌니라.
문둥병을 불사름으로 해결하듯 죄에 대한 것도 불사름에 의해서 해결 요한계시록 20:14-15
요한계시록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마가복음 9: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문둥병의 감정법
1-8 피부병(발진 또는 색점)에 의한 감정법.
9-17 난육(생살)에 의한 감정법.
18-23 종처에 의한 감정법.
24-28 화상에 의한 감정법.
29-37 모발환처에 의한 감정법.
38-44 색점과 대머리에 의한 감정법.
45-46 문둥병자의 격리.
47-59 의복에 생기는 나병과 그처리.
문둥병의 공동체적 의미.
율법에 나타난 정결 규례 중에서 본장에 나타난 문등병에 관한 규례가 가장 상세히 다루어졌다. 이는 당시
문화에서 문둥병은 개인만이 아니라 공동체에 심각한 상황을 야기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첫째로 당시에 문둥병은 접촉만으로도
전염되는 병으로 인식되었고 치료가 거의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문둥병 환자가 발생한 경우 공동체 전체에 전염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철저히 격리시키거나 추방시켜야 했다.
둘째로 천형의 병으로 여겨지던 문둥병은 죄에 대한 신의 저주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문둥병이 발생한 경우 공동체 전체가 신께 제사를 통해 용서를 구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공동체 전체에 대한 신의 저주를 면하고자
하였으며 또한 자신들의 죄의 요소를 제거하는 계기로 삼아서 전체 공동체의 성결성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본장에 나타난 문둥병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문둥병의 발생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위기를 보여 준다. 따라서 제사장은 문둥병 유무를
철저하게 가려내어 하나님께 속죄의 의식을 드렸던 것이다. 그러므로 문둥병에 관한 규례는 단순히 위생학적인 전염병 예방의 내용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시키는 죄에 대한 엄중한 경고를 의미한다.
본장에 나타난 문둥병은 당시 사람들에게 죄의 대가로 여겨졌다. 따라서 문둥병 환자를 격리하는 것은 죄로부터 다른 사람들을
보호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와 같이 죄는 문둥병처럼 타인에게 전염되는 특성을 지니며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함을 교훈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죄에 대해 심각함을 깨닫지 못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죄에 오염되어 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죄악의 모든 요소들로부터 철저히 자신을 보호하고 악한 자와는 절대로 관계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또한 죄에
대해서는 아주 단호한 자세로 싸워야 하며 죄가 될 수 있는 것들은 그 모양이라도 버리는 결단력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질병은 나병입니다. 나병 관련 단어가 83회나 등장합니다. 성경에서 나병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때는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에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라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모세는 거부합니다. 그 불순종으로
모세의 손은 나병에 걸립니다. 그러나 그 즉시 하나님은 나병에 걸린 모세의 손을 치유하심으로 나병 같은 불치병도 고칠 수 있는
전능자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도 나병에 걸렸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대리자였던 모세가 구스 여자와 결혼한 것을 비방함으로써 하나님이 주신
모세의 권위를 훼손시킨 것에 대한 하나님의 벌이었습니다. 열왕기하 5장에는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문둥병에 걸렸다가 치유받은
나아만 장군에게 보상금을 요구했다가 나병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역대기하 26장에는 블레셋을 정복하고 교만해진 웃시야 왕이 제사장의
규례를 어기고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 향단에 분향하는 범죄를 저지름으로 인해 나병에 걸렸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 곧 그의 권위와 경륜과 주신 규례에 대한 불순종이 있을 때, 형벌로 주어진 병이 나병입니다. 모든 병이 그렇지만 특히 나병이 더욱 더 부정한 질병으로 해당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본문 1~2절을 보시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만일 사람이 그의 피부에 무엇이 돋거나 뾰루지가 나거나 색점이 생겨서 그의 피부에 나병 같은 것이 생기거든 그를 곧 제사장 아론에게나 그의 아들 중 한 제사장에게로 데리고 갈 것이요’
오늘 본문에서 나병으로 번역된 단어, ‘차라아트’는 악성피부병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피부질환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2절의 ‘나병’에 1)이 있는데 아래를 보면, ‘넓은 의미로 악성피부병을 뜻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병은 한센씨병, 또는 한센병이라 부릅니다. 나병을 한센병이라 부르는 이유는 1873년 노르웨이의 세균학자이자 의학자인
아우메우에르 게하르트 한센(Armauer Gerhard Henrik Hansen, 1841-1912)이 나병 바이러스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이후 나병 치료를 위한 연구가 본격화 되면서 1941년에 'DDS (Diamino-Diphenyl
Sulfone)'라는 특효약이 발명되어 한센병은 완치가 가능한 질병이 되었습니다. 나병이란 말이 역사적으로 질병보다는 멸시,
격리, 차별, 편견의 의미를 담고 있었기 때문에 현재는 나병이라 하지 않고 한센병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한센병에 대한 설명이라기 보다는 악성피부병에 대한 내용입니다. 본문 2~42절까지는 주로 오늘날의 마른
버짐이나 기계충, 피부손상과 관련이 있고, 47~59절은 곰팡이 세균과 관련된 증상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나병으로
불리는 한센병은 곰팡이나 일반 세균이 아닌 특정 쪽팡이 세균과 관련이 있는 질병입니다. 따라서 나병, 즉 한센병으로 번역되어 있는
오늘 본문의 단어를 보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악성피부병입니다. 하지만 당시 고대 사회에서는 악성피부병과 한센병을 구분할 수
없었기에 피부에 생긴 단순한 문제를 제외하고는 모두 한센병으로 불렀습니다.
문제는 한센병을 부정한 병으로 보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한센병에 걸린 사람을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여기서 부정하다는
말은 단지 질병의 확산을 막기 위한 방지 차원에서 격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 저주받은 자로 취급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이로인해 한센병에 걸렸다고 판단된 사람은 의료적 격리가 아닌 사회적 격리, 종교적 격리, 비인격적 격리를 당해야만
했습니다.
이것을 오늘 내 실존에 비추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율법적으로 볼 때, 한센병에 걸린 사람은 부정한 사람입니다. 부정한 사람은 거룩한 공동체에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절대로 나아갈 수 없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부정한 사람이요 거룩한 공동체에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이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절대로 나아갈 수 없는 사람은 실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습니다. 본래 우리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지 못해
영원히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고보니 율법으로는 우리가 바로 한센병 걸린 자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만 했습니다. 본문 45~46절입니다.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를 반복하면서 혼자서 그것도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 살아야만 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셨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고쳐주셨습니다. 그 은혜로 우리는
정결한 존재가 되었으며, 더 이상 격리되어 혼자 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의 마음속에 한 가지 사실이
각인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감사입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열 명의 한센병에 걸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을 우연히 만난 열 명은 소리높여 자신을
긍휼히 여겨 달라고 외쳤습니다. 이에 주님은 그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에게 가서 너희 몸이 깨끗케 되었음을 보이라
하셨습니다. 그 길로 열 명은 제사장에게 가서 한센병이 치료되었음을 확증받았습니다. 그 가운데 9명은 각자 자신의 길로
가버렸으나 1명만이 다시 주님께 돌아와 치유받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했습니다. 이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7:17~19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한센병에서 고침 받고 감사한 마음을 표현한 사람과 감사하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주님은 감사를 표현한 한
사람에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은 이 한 사람뿐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감사를 표현한 것을 믿음으로 보셨으며, 그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감사는 이처럼 귀한 것입니다. 감사는 곧 믿음이요 감사는 곧 구원받은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한때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을 핍박하던 사울이 회심하고 돌이켜 주님을 핍박하던 자에서 주님을 위한 사명자로 살아갈 때, 그는 주님이
걸어가신 좁은 길, 고독한 길을 걸었습니다. 편한 세상길을 포기하고 남들 가지 않는 험한 길을 걸어갔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기에, 나도 그렇게 사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의 좁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한센병에 걸린 자와 같은 나를 고치시고 구원해 주신 주님께 삶으로 감사를 드리는 오늘 하루가 되시길 원합니다.
__________________ 레위기 12장 / 정결케 되는 기한(4절)
03-22-2023(수) 사순절 제25일
그 여인은 오히려 삼십 삼일을 지나야 산혈이 깨끗하리니 정결케 되는 기한이 차기 전에는 성물을 만지지도 말며 성소에 들어가지도 말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출산 자체를 부정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출산 때 나오는 산혈을 부정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정해진 기간이 지나면 산혈이 깨끗하게 된다고 합니다. 즉 출산의 산혈이 사람을 부정하게 만들고, 그래서 정결하게 되기까지의 기한을 채워야 한다고 합니다.
출산의 산혈이 왜 산모를 부정하게 하는 것일까요? 성경의 다른 본문들을 통해 그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피는 곧 생명이라고 말씀합니다. 산모가 해산할 때 피를 많이 흘리게 되는 것은 곧 산모의 생명이 많이 소실되는 것이고, 산모로서 정상적인 몸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그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를 부정하다고 말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피나 체액의 유출에 대해서는 15장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또 한 가지, 출산 시 산혈이 산모를 부정하게 한다는 것은 창세기 3장에서 범죄한 하와에게 하나님이 주신 형벌을 생각나게 합니다.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을 더하셨는데, 출산은 하나님의 명령이요, 복임에도 불구하고 타락한 인간은 그 명령을 순종하고, 복을 누림에 있어서 죄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게 된 것입니다.
큰 고통을 수반하게 되었고, 많은 피를 흘리며 생명의 위협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피를 많이 흘려서 생명의 위험을 경험하며 출산하는 이 일은 첫사람의 죄, 곧 원죄를 생각하게 하고, 우리가 죄의 영향 아래 있음을 기억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부정하게 된 산모가, 정결해지기까지의 시간을 보낸 후에 하나님께 나와 번제와 속죄제를 드려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해산의 산혈로 부정하게 된 것은 단순히 시간이 지나면 정결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해산의 피로 부정하게 된 것을 제사로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나의 피로 부정하게 된 것을 나를 대신하는 희생제물의 피로 깨끗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부정한 것,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하게 해주셨음을 오늘 말씀을 통해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8절에 보면 가난한 사람에게는 번제로 어린양이 아니라 비둘기 두 마리로 대신하게 하였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후에 비둘기 두 마리로 제사하였다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이 아주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셨음을 알 수 있지요.
예수님께서는 가장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셨고, 율법 아래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해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 안에 이 죄와 부정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깨끗해집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깨끗해지는 것이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깨끗하게 되기 위해 번제와 속죄제를 드린 것처럼, 우리 역시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여 회개하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하여야 하겠습니다.
1. 아들을 낳으면 7일간 부정 (경도할 때와 같다)하고, 33일이 지나야 산혈이 깨끗하게 된다(40일 동안). 여자를 낳으면?
2×7일 간 부정하고, 66일이 지나야 산혈이 깨끗하게 된다. 80일 간의 휴식.
2. 해산한 여인이 성물을 만지거나 성소에 들어가지 말아야한다는 것은 평소에는 성물을 만지거나 성소에 들어간다
좁은 의미로 성물은 성소에 들어 있는 기구를 말하는 것이지만 넓게는 하나님께 드려진 모든 예물을 가리킨다.
성소도 마찬가지로 넓게는 예배나 제사를 위해서 설치한 성소 주변의 뜰까지 포함하는 의미이다. 예배까지 참석하지 말라는 명이다.
3. 아들이든 딸이든 한 생명이 태어나는 것은 축하할 일이 아닌가? 그런데 왜 부정하다고 하는 걸까? 예전 풍습이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출산하면 대문에 걸어두는 것을 금줄이라 한 것과 닮은 점이 있지 않을까?
사람들의 접근을 금지하는 역할 기본적으로 산모와 태아를 보호하기 위하여 사람들의 접근을 막아야할 필요가 있다.
정결케 되기까지 성물을 만지거나 성소에 들어가지 말라는 것은 '모든 일에 열외'라는 표현과 다름 아니다. 모든 의무에서 벗어나 쉬어야하기 때문이다.
충분한 육체적, 정신적 휴식을 위하여 심지어 남편조차 접근하지 못한다. 하나님께 대한 의무마저 면제다. 부정한 여인은 함부로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만지지도 못한다.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상책이다. 산모가 따뜻한 방에 누워서 바람도 쇠지 않고 한 달(40일)을 지나는 것이 몸을 회복하는 데 아주 요긴하다.
이 때 산후 조리를 잘못하면 평생 병을 얻게된다. 무리하게 일을 해서는 안된다라고 명하는 것보다 아예 부정하다하여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출산한 본인의 건강 회복을 위해서 훨씬 유리하다.
출산한 여인이여! 한달 동안 여왕처럼 지낼지어다. 이 말과 한달 동안 부정하다는 말은 동일한 결과를 가져온다. 군대서 한창 고생스럽게 훈련 받는 중에 험한 말로 '너 이리 나와봐' 하면서 빼내서 쉬게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아는 훈련병을 만나서 말이다. 다만 불러낼 때 말을 좀 거칠게 해야한다.
여인에게 해산의 고통을 더한 하나님의 의도(창세기 3:16) 출생 자체는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엄청난 복이기도 하면서 고생의 시작이기도 하다.
출생을 마냥 기뻐할 수만도 없는 것이, 원래는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었지만 타락한 이후 고통이 더해 졌다. 홍수 이후 인간의 수명이 짧아지는 것이 하나님의 원하심이다.
이렇게 일그러진 모습으로 오래 사는 것을 원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 에덴 동산의 회복을 앞당기려는 것이다. 해산의 고통은 떠나버린 인간을 다시 자녀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고통을 상징하는 것이다.
바울은 한 생명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하는 것을 해산의 고통이라고 표현했다(갈 4:11). 범죄한 인간을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삼기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시고 그가 십자가에 달려 고통 당함을
차마 바로 보지 못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바로 이 해산의 고통이다. 여인들은 뱀의 머리를 부술 후손을 낳는다는 생각으로 해산의 고통을 이겨야했다.
이 고통에 담긴 의미를 이해한다면 여인에게 해산의 고통은 곧 구원의 길이기도 하다(딤전 2:15). 그런만큼 부정한 기간이란 해산의 고통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범죄한 이후 여인의 후손을 통해서 완전한 구원을 이루시기까지 하나님의 편치 못한 심경을 담고 있는 기간이다.
4. 여자를 낳으면 부정함과 산혈이 깨끗하여지는 기간이 왜 더 길까?
남자를 출산한 경우와 여자를 출산한 경우 신체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 좀 알아봐야겠다. 아마 산부인과 의사를 만나는 것이 좋겠다. 차이는 없을 것이란 예상이다.
친구 부인이 둘째 딸을 낳을 때 시어머니가 제주도에서 포항까지 와서 병실을 지키다가 딸이라는 말을 듣고 바로 제주도로 돌아가 버렸다. 남편이란 친구는 날마다 술집에서 헤롱거리고 산모는 산모대로 울어서 눈이 퉁퉁 붓고...
어쩌면 딸을 낳은 뒤의 이런 정신적인 차이조차 감안하지 않았을까?
선악과를 용감하게 따먹은 것이 여자이었음도 감안하지 않았을까?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차이점이 있다는 암시가 아닐까? 사실은 남자와 여자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이족(다른 민족)이나 마찬가지다.
레위기 27:2-7을 보면 사람의 값이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 이런 점이 감안되었을 것이다.
남자아이는 할례 받는 대신 여자아이는 기간이 늘어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드려야할 유향이 없으면 다른 노력이 좀 더 필요한 것(레 2)을 감안하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자아이도 어릴 때 할례를 받은 셈이다.
5. 아이들의 포경 수술을 반대하는 무리가 있다. 괜히 쓸데없이 사람을 학대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건강상 해야한다고 떠들어서 수술이 유행처럼 번지게 할 때는 언제고, 불필요한 고통을 주는 짓이라고 하지 말라니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할지 모르겠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건강상 이유가 아니라 민족의 정체성과 관련된 중요한 일이니 고민할 것도 없겠다. 일생 중 고통이 가장 적고 수술하기도 수월한 때가 언제일까?
생후 8일 째 아픔도 적고 피도 쉽게 응고된단다.
6. 경도 즉 생리에 대하여 '어떤 여인이 유출을 하되 그 유출이 피면 칠 일 동안 불결하니 무릇 그를 만지는 자는 저녁까지 부정할 것'(레 15:19)이라고 한다.
생리현상을 불결하다(2)고 말하는 것은 종족 보존에 대한 사명을 지닌 여성에 대한 모독 아닌가?
외형상 피 흘림을 부정한 것으로 다룸으로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까지 보호하는 측면이 있다; 본인
스스로도 불결하다는 느낌을 가지게 됨으로 몸을 정하게 하겠지만 부부관계마저 멀리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남자의 시도 때도 가리지 않는 성욕으로부터 일정기간 피할 수 있다. 세상의 좋은 것은 다 먹었을 왕들이 일찍 죽는 것은 거의
대부분 많은 여자들을 거느린 탓이다. 죽을 줄도 모르고 열심히 종족 보존에 힘쓰는 것을 일정기간 강제로 쉬게 만드는 것이다.
만약 생리도 소변보듯이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었더라면 남자들의 수명은 지금보다 훨씬 더 단축되었을 것이다.
7. 정하게 되기위해서 일정한 기한이 지나야하고 기한이 차면 제사를 드려야한다는 것은 이중 과세(?)가 아닌가?
정결케 되기 위한 기한이 있는 경우 기한이 차면 저절로 정결케된다. 다만 자녀를 낳은 여자의 경우 부정한 기간이 긴데도 제사를 드려야하는 것이 그 기간이 본인의 건강회복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8. 기한이 차거든 번제로 1년 된 어린 양과 속죄제를 위하여 집 비둘기 새끼나 산비둘기를 드려야한다. 가난한 여자는?
아무리 가난해도 생략해서는 안된다. 만약 힘이 미치지 못하면 집 비둘기 새끼 둘이나 산비둘기 둘을 가져다가 하나는 번제로 하나는 속죄제로 드려야한다. 헌금할 돈이 없는데 10원이라도 반드시 해야한다면 어떤 느낌인가?
그 10원이 진짜 10원을 의미한다면 이것은 대단히 고마운 일이다. 그렇게 작은 것도 기쁘시게 받으신다면 누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드리는 사람의 마음이다.
사람들끼리 이런 표현이 사용될 때는 10원이 문자대로 10원이 아닌 게 문제다.
9. 감사와 경배의 의미로 드리는 번제 예물은 어린 양이고 죄를 속하기 위한 속죄제물은 집비둘기 새끼나 산비둘기라는 것은 아무래도 제물이 바뀐 느낌이다.
죽을 죄를 지은 사람이 용서받기 위해서 내야하는 몸값과 그 용서에 감사해서 선물을 드리는 경우를 가정해서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제물이 바뀐 느낌이 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바가 무엇일까?
만약 속죄제물이 어린 양이라면 가난해서 제사드리지 못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고 제물을 함부로 다른 것으로 바꿀 수도 없다. 최소한의 제물로 속죄의 길을 열어줄테니 누구나 오라는 것이다.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예수는 믿어야한다'는 하나님의 요구라고 생각된다. 정말 간단한 방법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두신 것이다. 그런 다음 감사와 예배는 자신의 형편을 감안해서 드리라는 것이다.
10. 해산한 여인의 부정은 아이 때문일까? 피를 흘렸기 때문일까?
피를 흘렸기 때문; 경도할 때, 산혈이 깨끗하리니 등의 표현을 보면 그렇게 말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해야겠다.
출생은 누구나 기뻐하는 경사스런 일이다. 그러나 성경은 반드시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범죄한 이후에도 1000년 가까이 살던
우리 조상들의 수명을 십분의 일로 단축시켜버린 하나님의 뜻을 기억해야 한다.
이 땅에 천년만년 잘 먹고 잘 살아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우리 인간들끼리 본다면 기뻐할 일이지만 하나님을 기억하면 마냥 기뻐할
일은 아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라고 말한다(시 51:5).
우리 인생 자체가 저주 아래 있기 때문에 진정한 기쁨은 예수의 피로 속죄받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구속사적인 입장에서 보면
해산 자체는 부정한 일이다. 인간적인 삶에서 볼 때는 물론 경사스러운 일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면도 인정하시기 때문에 자녀를 복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레위기는 전통적으로 유대인이 다섯 살쯤 된 자녀에게 가르치기 시작하는 모세 오경의 첫 번째 책이라고 한다. 성경의 첫 번 째 책인 창세기가 아니라 레위기를 자녀에게 첫 번째 성경 교육으로 시작한다는 것은 레위기의 비중을 그만큼 중시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실제로 레위기는 중요한 예배와 섬김의 지침서이자[1-10장 21-27] 생활 지침서로서 정하고 부정한 음식 문제부터 시작해서[11장] 오늘의 말씀인 산모 정결법[12장] 그리고 이어지는 문둥병이나 유출 병의 정결법과[14. 15장] 심지어 침실 내밀한 곳에서 이뤄지는 성생활이나 성윤리 도덕의 문제까지도 세세하게 다루고 있다.[18. 20장]
따라서 이 책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먼저 하나님께 향한 바른 예배[제사]를 강조하고 또 예배 후에는 공동체 안팎에서 거룩한 예배자로 살도록 요구한다.
오늘의 말씀으로 주신 산모 정결법은[레 12장] 출산한 여인의 하혈[출혈]과 관련하여 주시는 말씀인데 출산 후 출혈이 얼마나 가는지 인터넷 검색창에 쳐보니 출산 후에도 길게는 2주간 하혈을 하며 몇 달간 지속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산모를 부정하다고 규정한 것은 출산과정에서 나오는 출혈 때문으로 보는데[12:2] 이 산혈이 깨끗해지는데 필요한 기간이 아들일 경우 7+33일, 딸일 경우 14+ 66일로써 이 기간 동안에는 성물을 만질 수 없고 성소에도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이 정결을 위한 기간이 차면 산모는 정결례를 위해 번제와 속죄제를 드리는데 이는 일년 된 어린 양과 비둘기를 회막문 제사장에게로 가져가 속죄제를 드리고 그리고 나서 산혈이 깨끗하리라고 한다.
그러나 어린 양을 드릴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으면 비둘기 두 마리를 가져가 하나는 번제물로 하나는 속죄 제물로 삼아 드려서 속죄가 되게 하라고 하신다.
앞선 말씀에서 죽은 시체의 부정에 대해서 말씀하셨다면 오늘의 말씀에서는 아기를 출생시킨 산모의 부정과 정결 기간을 말씀하신다. 결국 죄와 저주아래 놓여 진 인간은 출생에서부터 죽음까지 부정이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가 보다
최초의 인간이 자신의 존재와 이유가 되는 창조자보다 뱀[사단 마귀]를 선택하고 반역한 이후 인간은 죄와 저주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으며 이 저주의 굴레를 풀어줄 구원자를 필요로 하게 되었는데 그는 바로 여자의 출산을 통해 이 땅에 오실 여자의 후손 이었다[창 3:15]
따라서 죽은 것들의 부정에 대해서 말하는 어제의 말씀이나 출산의 부정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오늘의 말씀들이 결국은 죄와 저주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비참함과 그 인간을 죄와 저주로 부터 풀어주실 구원자 - 여자의 후손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희망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 같다.
여성이 출산 후 자신의 정결을 위해 번제와 속죄제를 드려야 하는 제사 제도에서도 자신을 온전히 정결케 하실 구원자를 기다리는 희망을 담고 있는데 마침내 그 구원자 - 여자의 후손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탄생하셨을 때 예수님을 출생시킨 산모 마리아도 오늘의 말씀과 같은 똑같은 정결규례를 이행하였다.[눅 2:22-24]
이제 우리와 똑같이 태어나신 예수님을 통해 출생부터 죽음까지 부정의 굴레를 떠날 수 없는 인간에게 희망의 태양이 비쳐 온 것이다.
특별히 오늘의 말씀에 나타난 산모의 정결예법에서 여아 출산의 경우 남아 출산보다 갑절의 정결기간을 필요로 하며 두문불출 집에만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하시는데 이는 남아선호 사상이 강했던 고대 농경사회의 배경에서 생각해 보면 자칫 소훌 하게 방치될 수 있는 여아를 보호하시고 배려하신 차원에서 산모가 집밖으로 나가지 못할 긴 기간을 정하신 것 같다.
여성들은 사람을 계수하는 숫자에도 넣어주지 않았던 당시 풍습을 생각해보면 남아를 출산하지 못하고 여아를 출한했을 경우 출산의 수고와 고통에 대해 대우받지 못하며 또 자칫 소훌 하게 보호될 수 있는 여아에 대해 충분한 보호가 되도록 산모가 집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정결기간을 남아보다 두 배를 더 갖게 하신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집안에만 있어야 하는 산모는 그만큼 긴 기간을 자신의 몸을 잘 추스르며 또 출생된 아이의 보호에 정성을 쏟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이를 출산한 산모의 정결법을 가르치는 오늘의 말씀 속에서 산혈을 깨끗하게 하는 정결기간을 두므로 하나님 앞에 정결을 도모하는 것은 물론 산모와 출생된 아이들 특히 여아들을 보호하신 우리 하나님의 자상하신 성품을 본다.
왜냐하면 산모가 남아를 출산하거나 여아를 출산하는 것은 산모 자신의 뜻이 아니라 이 세상에 남녀의 성비를 균등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숨은 섭리도 이 속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네 인생이 살아가는 모든 삶의 영역 세세한 부분까지도 간섭하시며 특별히 약자를 동정하고 배려하시는 좋으신 하나님 되심을 오늘의 말씀에서 확인하게 된다.
[말씀에 응답하는 기도]
때가 차 매 아들을 보내시되 여자의 후손으로 출생하게 하셔서 [갈4:4] 죄와 저주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희망을 주심을 찬양합니다.
특별히 산모들이 아이들을 출산할 때 여아는 남아보다 갑절의 정결기간을 주셔서 보호와 배려의 기간으로 삼게 하신 자비하심을 보면서 나도 항상 약한 자를 동정하고 배려하는 신앙과 삶이 되게 하옵소서.
__________________ 레위기 11장 / 먹을 만한 생물(2절)
03-21-2023(화) 사순절 제24일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육지 모든 짐승중 너희의 먹을만한 생물은 이러하니. Say to the Israelites: 'Of all the animals that live on land, these are the ones you may eat:
Speak to the sons of Israel, saying, 'These are the creatures which you may eat from all the animals that are on the earth.
먹을 만한 생물(Something Edible)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구별하라고 하셨을까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급에서 430년 노예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 무엇을 먹어야 할지 알지 못했습니다. 노예는 오직 주인이 제공하는 음식만 먹고 살아야 했습니다. 애급에서 나온 후에 광야 40년 동안은 하늘에서 내려준 만나와 메추라기만 먹고 살았습니다. 무려 500년 동안 스스로 무엇을 찾아서 만들어 먹어야 할지를 알지 못한 백성들에게 다양한 짐승들과 다양한 물고기들과 다양한 조류들과 다양한 곤충들을 볼 때 무조건 잡아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먹어야 할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미리 지정하고 그 규정에 따라 먹을 것만 잡아서 먹도록 배려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구별하는 것을 "카도쉬" 즉 "거룩"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고 식성이 다르기 때문에 먹는 것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몸에 병이 있을 때는 담당 의사로부터 먹어야 할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현대인들에게 먹을 것과 먹지 못할 것을 통한 공통된 목표는 같습니다.
레위기 11:44-45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바 기어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디.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이 어떤 것이냐가 아니라 "거룩"을 유지하라고 하셨습니다. "카도쉬"라는 히브리 단어를 구별이라고 하는 것의 의미는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구별하는 것이 곧 거룩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먹느냐? 무엇을 먹지 않느냐? 이러한 것을 구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맛 있는 먹거리가 어떤 사람에게는 맛이 없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에게는 체질에 맞지 않는 음식이지만 또 어떤 사람에게는 체질에 맞는 음식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레위기 11장에서 강조하는 것은 "거룩(코데쉬, qôdesh. קֹדֶשׁ )" 입니다. 그렇다면 '거룩'이란 무엇일까요? '거룩'이란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11:44-45)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바 기어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태어난 사람이 어떻게 거룩한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을까요? "거룩(코데쉬)"의 어원은 "카다쉬(qâdâsh. קָדַשׁ )"라고 합니다. '카다쉬'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사람'을 말합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사람을 '거룩하다' 또는 '신성하다'고 일컫습니다.
구약시대에 규정한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오늘의 시대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법이 시대에 따라 바뀐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거룩"을 유지하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느 미국 교회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 광고 시간에 어느 나이 많은 여자 교인이 지난 주간에 담배를 끊었다고 알리며 모두 축하합시다 하고 말했습니다. 모든 교인들이 함께 손뼉을 치며 즐거워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목사님이 "나는 아직도 담배를 끊지 못했는데 저 부인이 담대를 끊었다는 것은 놀라운 소식입니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로마서 2:11)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골로새서 3:25b)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야고보서 2:9) "그들이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치 아니하시고 오직 참으로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누가복음 20:21)
무엇을 먹는냐 먹지 않느냐가 아니라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따라 믿지 않는 사람을 긍휼히 생각하여 주님을 영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일에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1. 거룩하다, 2. 신성하다, 3.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사람에게 사용되어 발음
/ 카다쉬(qâdâsh) 관련 성경 / 거룩하다(출 29:21, 사 29:23, 학 2:12), 빼앗기다(신 22:9), 성별하다(느 3:1),
준비하다(렘 22:7, 미 3:5), 예비시키다(렘51:27,28),구별하다(민 8:17, 대상 26:27), 드리다(대상 18:11),
빼앗다(대상 18:11), 예비하다(렘 12:3), 깨끗하게 하다(삼하 11:4). [명] 성물(레 22:2, 대상 26:28),
성회(욜 1:14, 2:15), 성호(레 22:32), 성소(대하 26:18, 겔 7:24), 거룩한 자(사 29:23). 구약 성경 / 171회 사용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과 구별된 삶을 사는 것 첫 번째는 흠이 없는 제물을 하나님 앞에 제사로 드리는 그 제사를 통해서 이방인들과는 구별된 삶을 살았습니다. 두 번째는 먹을 수 있는 음식 가운데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구별해서 먹을 수 있는 것만 먹는 그런 일들을 통해서 이방인과의 삶과 구별된 삶을 그들이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잘 구별해서 먹을 수 있는 것만 먹어야 하는데, 그러면 정말 먹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4가지 영역으로 나눠서 말씀을 구체적으로 하십니다.
1. 포유류(땅의 짐승) 땅에 있는 것 중에는 굽이 갈라지고, 되새김질을 할 수 있는 동물은 다 정결한 짐승이기 때문에 너희가 먹어도 좋다. 예를 들면, 소나, 양과 같은 동물입니다. 굽이 갈라지긴 했지만, 되새김질을 할 수 없는 동물은 부정하다. 그런 동물은 먹지 말라! 대표적 예시가 돼지입니다. 또는 굽은 갈라지지 않았지만, 되새김질을 할 수 있는 동물이 있는데, 그런 동물들도 부정하다. 그런 동물들도 먹지 말라! 대표적인 것이 낙타, 토끼 같은 동물입니다.
2. 어류 물에 사는 물고기에 대해서는 먹을 수 있는 것을 딱 지정해 주셨습니다.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물고기 강에 살던, 바다에 살던 상관없이 지느러미가 있고, 비늘이 있는 것은 정결한 물고기이기 때문에 너희들이 먹어도 좋지만, 만약에 지느러미가 없다든지, 비늘이 없는 고기는 부정한 고기이기 때문에 너희들이 먹어서는 안 된다.
3. 조류 공중 영역 하늘의 영역에서는 먹지 말아야 할 것을 지정해 주십니다. 주로 맹금류입니다. 독수리라든지, 매라든지, 올빼미라든지, 부엉이라든지 그 중에는 박쥐도 들어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절대 부정한 것이기 때문에 절대
4. 곤충 날개가 있고, 4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땅을 기어 다니는 곤충은 부정한 것이기 때문에 절대 먹지 말고, 날개도 있고, 4발이 있지만, 그러나 땅에서 뛸 수 있는 곤충! 메뚜기라든지, 귀뚜라미라든지 이런 것은 정결한 곤충이기 때문에 너희가 먹을 수 있다.
특별히 어떤 동물이던 간에 배로 땅을 기어 다니는 뱀이라든지, 지네라든지, 악어도 거기에 들어갑니다. 그런 것은 다 부정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은 먹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구별해 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왜 어떤 짐승은 정결하고 어떤 짐승은 부정한 것일까? 왜 어떤 짐승은 먹을 수 있는데, 왜 어떤 짐승은 먹을 수 없는 것일까?
도대체 그 기준이 무엇일까? 하나님은 어떤 기준을 가지고 저것은 먹어도 좋고, 저것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일까?
사실 생각이 많습니다. 크게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그 동물들을 다 만드셨기 때문에 어떤 동물이 인간의 몸에 건강에도 좋고, 먹어서 몸에 의로운지를 하나님이 다 아신다.
그리고 어떤 동물이 먹으면 인간의 몸에 해롭고, 건강에 안 좋은지도 하나님은 다 아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에 도움이 되고, 건강에도 유익한 그런 동물들은 다 먹을 수 있게 하셨고, 인간의 몸에 해롭거나, 건강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는 그런 동물들은 먹지 말라고 했다. 이런 생각입니다.
지금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안식교 교인들이 그렸습니다. 안식교 교인들은 지금도 그렇게 믿고, 그렇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생각은 그것이 먹을 수 있는 것은 우리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이고, 먹을 수 없는 것은 우리 건강에 해롭기 때문이다. 그것이 의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나 입증인 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 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부정하다고 이야기하셨기 때문에 부정한 것이고, 하나님께서 정결하다고 말씀하시니깐 정결한 것이지! 그것이 의학적으로 그런 근거가 있어서, 과학적으로 그런 근거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냥 하나님이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믿고 우리는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여겨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여겨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의로워 진 것이지!
우리의 내면에 의로움이 있어서 의로워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말씀하시니깐 의로운 것입니다.
그런 것처럼 정결 동물이나, 부정한 동물도 그런 이유에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구약시대에 엄격한 규정했던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먹지 안 않아야 할 음식 신약 시대에 오면 폐지가 됩니다. 먼저 마가복음 7:15~16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그러니깐 어떤 음식이든 다 먹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부정한 음식이라고 그래서 그것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부정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고, 정결한 음식이라고 해서 그것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정결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음식이든, 상관이 없다. 음식이 우리를 부정하게 만들거나, 정결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 10:10~15
15. “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베드로가 12시 기도 시간에 기도하러 옥상에 올라가서 기도를 하려고 하니깐 배가 너무 고픈 것입니다. 그때 마침 환상 중에 먹을 것이 가득 담긴 바구니가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세히 들여다보니깐 레위기에서 먹어서는 안 되는 동물들만 가득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베드로야! 일어나서 잡아먹어라! 베드로가 어떤 생각을 했겠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시험하시나 보다! 저런 것들은 먹을 수 있는 동물들이 아닙니다. 레위기 말씀에 의하면 저런 동물들은 먹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한 번도 저런 동물을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내가 깨끗하게 한 것을 네가 속되다고 말하지 말라! 내가 정결케 한 것을 네가 부정하다고 말하지 말라! 이미 하나님은 뭡니까? 모든 것을 다 정결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4:4~5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어떤 음식도 그것이 부정한 음식이든, 정결한 음식이든 상관없이 우리가 기도하고 먹으면, 그 기도로 인해서 다 정결한 음식이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음식이든 우리가 감사함으로 기도하고 먹으면, 어떤 것이든 먹을 수 있다.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약에 와서는 이렇게 다 폐지될 수밖에 없었던 문제를 왜 구약시대에서는 그처럼 하나님께서 엄격하게 구별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키라고 명령하신 것일까? 도대체 하나님은 어떤 생각과 어떤 의도로 그렇게 하신 것일까?
하나님의 백성은 이방인들하고는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해야 될 일이 있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모든 것을 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그것을 잘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구별해서 사는 것이 구별된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훈련하고, 가르치려는 목적으로 먹는 것 가지고, 이것은 먹을 수 있는 것이고, 이것은 먹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그런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해야만 하는 것이 있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지킬 줄 알아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약시대에 그들이 제사를 통해서 이방인들과 구별된 삶을 살았고,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먹지 못하는 음식을 구별하는 것을 통해서 이방인과 다른 구별된 삶을 살았는데 아니 이것이 다 폐지된 다음에 오늘 우리는 무엇으로서 이방인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느냐? 이 과제가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미 제사 제도나, 먹는 문제는 폐지가 되었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제사 대신에 예배를 드립니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될 것은 제사 대신에 예배를 드리는데 그 예배가 오늘 이렇게 모여서 드리는 예배가 다가 아닙니다. 그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예배의 모두가 아닙니다. 로마서 12:1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기서 말하는 영적 예배라고 하는 것은 영으로 드리는 예배라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드리는 삶을 통해서 드리는 예배가 영적인 예배다.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드리는 예배와 그것을 구별하기 위해서 사도바울이 그것을 영적인 예배라고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것을 잘못 이해해서 영적 예배는
영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도 영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굳이 영적 예배라고 표현한 것은 이렇게 우리가 모여서 예배만이 예배가 아니라, 우리들이 일상에 돌아가서 우리들의 삶으로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그 예배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예배가 영적인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라는 것을 통해서 구별된 삶을 살았습니다. 제사에서 어떤 것이 부정하고, 어떤 것이 거룩하냐? 구별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제물 가운데 흠이 있는 것은 부정한 것이고, 흠이 없는 것은 정결한 제물이 됩니다. 그것으로 구별을 했습니다. 먹거리를 통해서는 하나님이 먹을 수 있다고 한 음식은 정결한 음식이고, 먹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한 것은 다 부정한 음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구약시대에 이것은 정결하다. 저것은 부정하다는 그 근거는 다 제사 적인 것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우리는 그런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다 폐지가 되었기 때문에 또 먹는 문제도 다 폐지되었기 때문에 다 무엇이든지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우리들에게는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그래서 제사를 드리지 않고, 삶으로서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에게는 제이적은 부정과 정결함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삶으로서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어떤 것이 필요하냐? 삶 속에서 우리가 사는 행위로 나타나는 윤리적인 측면에서 무엇이 정결한 것이고, 무엇이 부정한 것이냐?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떤 삶이 부정한 삶이고, 어떤 삶이 정결한 삶이냐! 이것을 잘 분별해서 정결한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정결한 삶이냐? 어떤 것이 부정한 삶이냐? 여러 가지가 있지만, 크게 3가지를 우리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절제된 삶입니다.
절제된 삶은 정결한 삶이고, 무절제한 삶은 부정한 삶입니다. 왜 절제된 삶은 정결한 삶이고, 무절제한 삶은 부정한 삶이냐? 우리가 고린도전서 14:33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
이것을 뒤집어 이야기하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요?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그 질서의 하나님을 화평이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거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너희도 거룩 하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어떻게 표현하느냐? 고린도전서 14:40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이다. 그러니 너희도 거룩 하라! 어떻게? 너희도 품위 있게! 질서 있게 살라는 것입니다.
질서 있게 사는 것이! 절제함을 가지고 사는 것이! 그것이 정결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절제가 있는 삶이 무엇입니까? 먹고 싶다고 해서 아무거나 먹지 않는 것입니다. 하고 싶다고 해서 무엇이나 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할 수 있다고 해서 생각 없이 되는대로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절제입니다. 그런데 무절제라는 무엇이냐?
질서가 없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먹고 싶으면, 뭐든지 다 먹는 것입니다. 원숭이 골도 먹고, 박지도 잡아먹고 끝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절제한 삶입니다. 하고 싶으면, 참지를 못하고 무엇이든지 다 해야 합니다. 끝까지 다 해봐야 합니다.
바람 피고 싶으면 바람 피고, 외도하고 싶으면 외도하고, 동성애 연애를 하고 싶으면 동성애 연애를 하고 질서가 없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정한 삶입니다. 말하는 것도 다른 사람의 입장과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해서 해야 할 말인지, 하지 말아야 말인지 생각하며 말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말! 내 입으로 내가 말하는데 누가 뭐라고 하느냐! 그래서 하지 말아야 말! 못 할 말!
그냥 다 쏟아 부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절제한 삶입니다. 그렇게 사는 삶이 무엇이냐? 부정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어떤 면에서 구별이 되어야 하느냐? 바로 이렇게 절제가 있는 삶! 삶의 품격이 있고, 질서가 있는 그런 삶으로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과 구별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섬기는 삶은 정결한 삶이고, 섬김을 받는 삶은 부정한 삶입니다. 왜 그러느냐?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교만에서 나온 생각이고, 섬기려고 하는 삶은 겸손에서 나오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부정한 것이고, 섬기는 것은 정결한 것이다. 하는 것을 우리가 조금 더 설명하기 위해서 생각하려고 합니다. 인간이 섬김을 받기를 원하는데, 그 뿌리는 교만해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얼 만큼 섬김을 받으면, 만족할까? 얼 만큼의 섬김을 받으면 더 이상 원이 없을까? 이사야 14:12~14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마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제일 마지막 부분을 보시겠습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그러니깐 하나님처럼 돼서, 섬김을 받는 것! 거기까지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욕심이 끝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교만도 끝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까지 가야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욕망도 부정한 것이고, 인간의 교만도 부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러분들이 잘 아는 것처럼 요한복음 13장에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섬겨주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발을 그냥 씻겨 주신 것이 아닙니다. 계기가 있었습니다. 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는지! 누가복음 22:24~27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너희들은 누가 섬김을 받아야 하느냐를 두고 다투고 있는데, 예수님은 너희 중에 섬김는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섬김을 받을 수 있는 자가 있다면, 예수님인데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나는 너희들 중에 섬기는 자로 있다. 그러시면서 마가복음 10:45 절에 아주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십자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십자가를 통해서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것입니다. 인간을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하는 것입니까? 죄로부터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는 부정한 것이고, 구원은 정결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무엇으로 설명하느냐? 섬김으로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섬김은 정결한 것이고, 섬김을 받는 것은 부정한 것입니다. 그러면 섬긴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항상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상대방을 배려해주고, 상대방을 도우려고 하는 것이 섬기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는 것은 항상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고, 자기 입장에서 말하고, 모든 사람이 다 자기중심적으로 움직여지는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 모든 사람이 그렇게 움직여주기를 바라는 것들 그것이 섬김을 받으려고 그러니 우리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과 어떤 면에서 구별된 삶을 살 수 있느냐? 섬김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섬김을 받으려고 하기보다는 섬기려고 하는 그런 자세로 사는 사람들이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그렇게 인정을 해줘야 합니다. 그래야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정직하게 사는 것입니다. 진실하게 사는 것은 정결하게 사는 것이고, 거짓되게 사는 것은 부정하게 사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
시편 33:4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가 행하시는 일은 다 진실하시도다”
하나님은 정직하고, 진실하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거룩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진실을 요구하시고, 정직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라는 존재는 전혀 다릅니다.
요한복음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거짓의 근원이 누구냐? 마귀라는 것입니다. 거짓이 어디서부터 온 것이냐? 거짓의 뿌리가 어디냐? 마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부정한 영입니다.
그 마귀가 부정한 영이라는 것을 신약성경에서는 여러 가지로 이야기를 합니다.
마가복음 1:23, 1:26
“23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26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우리가 무엇으로서 믿지 않는 사람과 구별된 삶을 살겠습니까? 정직하고, 진실하고!믿지 않는 사람과 다른 것이 무엇이냐? 주일날 성경책 가지고 교회에 오는 것 그것 외에는 그들과 다른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무절제한 삶을 산다는 것은 레위기 적인 말씀으로 하면,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금한 그 음식을 먹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그런 삶도 하나님이 부정하다고 그것을 먹지 말라는 그 음식을 우리가 먹고사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못 하게 사는 것도 결국 우리가 부정한 음식을 먹으며 사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를 통해서, 먹는 것을 가지고 구별된 삶을 살았다면, 오늘 우리는 절제된 삶으로, 섬기는 삶으로, 정직하고 진실한 삶으로 구별된 삶을 살아내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구원받았다는 것이 자랑스럽습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자랑스럽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별된 삶을 사는 것도 자랑스러워야 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별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은혜를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가지고 구별된 삶을 살았던 것처럼 우리들은 절제된 삶! 섬김의 삶! 정직한 삶을 통해 구별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거룩한 백성의 정결한 삶(레 11~15장)
정결과 부정결의 교훈은 ‘거룩’의 주제와 연결되어 있다
레위기 11장은 부정한 짐승의 문제를 다룬 ‘음식법’ … 상징과 실제의 세계 혼동하지 말아야
▲ 김경열 목사(총신대 강사)
돼지를 먹지 못한 구약 백성들
이스라엘
땅에 혹독한 기근이 찾아왔다. 곡식과 과일은 거둘 것이 없었고 가축마저 떼죽음당해 식량 부족으로 온 나라가 아우성이다. 기근의
고통은 신실한 요아킴과 그의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들판에는 산양, 야생염소, 사슴, 비둘기, 참새, 등등 아직 더러 있었으나
특히 멧돼지들이 많이 보였고 녀석들이 굶주림에 식량을 찾아 마을 어귀까지 내려오곤 했다. 그러나 요아킴과 마을 사람들은 굶주림
속에서도 멧돼지만은 잡지 않았다. 멧돼지만이 아니라 야생 새들 중 독수리와 따오기와 같은 새들, 그리고 기근을 함께 버티고 있던
가축들인 낙타와 노새도 끝까지 잡아먹지 않았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율법에서 엄중히 식용 금지된 부정한 짐승이기 때문이다. 율법에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징계로 찾아온 대기근 속에서 요아킴과 백성들은 크게 회개하며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율법을 준수하려 애를 썼다.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단비가 내렸다. 대지를 적시며 땅이 살아나고 온갖 생명이 힘차게 다시 약동했다. 순종하는 백성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은혜를 내려주신 것이다.
왜 어떤 짐승들은 식용 금지되었는가?
소위
‘정결법’이라 불리는 레위기 11~15장은 모든 짐승들을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으로 분류하는 한편(11장) 인간과 사물의 다양한
부정결한 상태를 정의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한다(12-15장). 부정결의 문제는 결국 ‘거룩’이라는 주제와 결부되어 있다. 거룩한
백성은 곧 정결한 백성이기 때문이다. 레위기 11~15장의 주제를 장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1장, 정-부정 동물과
음식법; 12장, 산모의 출산 후 부정결; 13-14장, 악성 표피 질환의 부정결, 15장, 신체의 유출들의 부정결.
왜
어떤 짐승이 부정하고 사람과 사물의 어떤 상태가 부정한가? 오래도록 학자들은 이 문제를 놓고 씨름해왔는데, 주로 레위기 11장의
연구에 주력해왔다. 그들은 오랜 연구 끝에 결국 레위기 11장은 11~15장의 전체적 맥락 속에서 파악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과연 레위기 11~15장을 관통하는 부정결의 근원적 원리(rationale)는 무엇인가? 레위기 11장에 대한
다양한 이론들을 살피면 그 답이 발견된다. 특히 레위기 11장은 강단에서 가장 흔하게 풍유적(알레고리) 해석으로 설교되는
본문이므로 각별한 주의가 요망된다.
레위기
11장은 신명기 14장과 더불어 부정한 짐승의 문제를 다룬 ‘음식법’이다. 오늘날도 유대인들은 여전히
‘코세르’(kosher)라는 이름으로 이를 준수하고 있다. 레위기 11장은 음식 관련 규정과 더불어 사체 접촉의 부정결이라는
주제를 다루는데 양자는 밀접히 결부되어 있다. 짐승은 음식으로 허용된 짐승(정결한 짐승)과 금지된 짐승(부정결한 짐승)으로
나뉜다. 이때 짐승의 구분은 구약의 세계에서 허용된 상징을 통해 교훈을 주기 위한 목적을 가질 뿐 부정하고 흠이 있는 짐승이
내재적·존재론적으로 열등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시고는 보시기에 좋았다 하셨다(창세기 1장).
따라서 구약을 읽을 때는 상징의 세계와 실제의 세계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예를 들어 독수리는 경우에 따라 부정적인 상징으로
쓰이기도 하고, 긍정적 상징으로 쓰이기도 한다. 레위기 11장(신 14장)에서는 먹지 못할 새로 가장 먼저 언급될 만큼 부정한
생물의 대표 격이며, 신명기 28장 48~51절에서는 장차 이스라엘을 침공할 흉악한 민족을 상징하지만, 출애굽기 19장 4절(신
32:11)에서는 이스라엘을 시내산까지 이끌어주신 하나님의 완벽한 보호와 인도하심에 대한 상징물로 사용된다. 또한 나귀와 낙타는
부정한 짐승이었지만 짐을 부리는 가축으로 매우 귀한 재산이기도 했다. 부정한 짐승은 순전히 먹는 것과 관련해 그 상징성 때문에
부정하게 여겨졌다. 부정한 짐승들은 몇 가지 신체적 특징과 기준에 의해 판정되거나 짐승들의 목록으로 범주화된다. 그동안 동물을
정-부정으로 구분하는 기준에 대해서는 많은 이론들이 제시되었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
a) 보건-위생학적 설명: 부정한
짐승은 비위생적이며 건강에 해롭다는 주장이다. 일부 유대교 랍비들의 해석으로, 제칠일 안식일 교회가 이를 따른다. 어떤 랍비들은
일부 동물들은 서식 환경이 불결하다는 이유로 금지된다고 말하기도 하고,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물고기는 탁한 물에서 살고,
체액이 차기에 먹으면 몸에 해롭다. 또한 육식조류의 피는 탁하고 진하므로 이것을 먹으면 마음이 잔인해지고 몸에서 검은 빛깔의
체액이 분비된다. 미생물학이 발달한 근대에 이르러 부정한 짐승들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통해 돼지고기는 선모충균이 가득하고 토끼는
야토병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보건-위생학적 설명이 힘을 얻었다. 이런 견해의 문제점은 금지된 짐승들 중에는 영양이
뛰어나고 위생적으로도 문제가 없는 것들이 많고 반대로 허용된 짐승들 중에도 건강에 좋지 않은 것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허용된 초식성 반추동물 중에도 위험한 기생충의 숙주역할을 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돼지를 비롯한 금지 동물뿐
아니라 닭이나 염소 등도 불결한 생활습성을 가졌다. 위생을 기준으로 음식의 정-부정을 판가름했다면 ‘독초’는 왜 부정한 음식에
속하지 않는지 설명할 길이 없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건강을 고려하여 주신 법이기에 이 법은 계속 유효하다는 주장은 신학적
문제를 내포한다. 신약은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구분을 완전히 폐기했다. 제칠일 안식일 교회는 레위기 음식법의 항구적
유효성을 주장하지만 예수(막7:14~20)와 사도들(행10:9~16)의 가르침을 볼 때 이는 더 이상 효력이 없음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증진하기 위해 주신 법을 나중에는 스스로 제거했다는 설명은 납득하기 어렵다. 물론 음식법 외에 다른 정결의식에
관한 율법들, 말하자면 출산한 여인을 장기간 격리시키고, 곰팡이와 피부병을 취급할 때는 청결을 엄격히 요구하고, 질병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사체를 멀리하게 하는 조치에는 보건 위생학적인 의도가 엿보인다. 그러므로 음식법에도 그런 위생학적 고려가 전혀
없었다고는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보건-건강학·위생학적 설명은 이미 제시된 여러 난점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 규정에
대한 포괄적인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레위기의 정결법에서 정결과 부정결은 보건 위생적 개념을 일부 포함하기는 하지만 그 이상의
고도의 신학적 개념이다.
b) 상징적(풍유적) 해석: 정결하고
부정한 짐승의 구분은 그것들이 지닌 상징성 때문에 주어졌다. 정결한 짐승들은 의인으로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행동양식을 나타내며,
반대로 부정한 짐승들은 죄인들의 모습을 나타낸다는 식의 해석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유순한 초식 동물을 먹고 난폭한 육식 동물은
피해야 한다. 갈라진 굽은 의와 불의의 구분을 상징하고 새김질은 회상을 표시한다. 파괴적 습성을 가진 쥐는 혐오스럽고, 족제비는 입
모양을 볼 때 소문내기의 상징이다. 지느러미와 비늘을 가지고 강한 물살에 저항하는 물고기는 인내와 절제를 상징한다. 이와 같은
해석이 오래도록 한국교회 강단에서 여과 없이 전달되었다. 그러나 풍유적 해석법은 현대의 성경 해석학에서 매우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어 더는 주석가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근거없는 해석은 주관성이라는 함정에 빠지기 쉽다. 예를 들어 한국교회에서는
흔히 갈라진 굽은 신약과 구약의 말씀을 상징하고 새김질은 말씀의 묵상을 상징한다는 해석이 흔히 통용된다. 그러나 갈라진 굽은 선과
악을 상징하고 새김질은 선악의 분별을 상징한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둘 중 어느 것이 옳은 것인가? 이와 같이 풍유적 해석은
명확한 기준이 없기에 주관성을 피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성경 해석이야 교인들에게 감동과 은혜만 되면 문제가 없다는 식의 태도로는
이단의 창궐을 막을 수 없다.
그
외 금지된 동물이 이방의 제의에서 제물로 바쳐졌다는 ‘이방 제의 기원설’이 있으나 이스라엘의 이웃 나라들에서 공통적으로 소,
양, 염소가 주 제물이었다는 점에서 잘못된 주장이다. 또한 ‘생태학적 설명’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생태적 환경이
부정한 짐승들이 인간에게 도움을 주지 못했기 때문에 배척되어 결국 금지된 짐승으로 법제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일한 생태적
환경에 사는 이웃 나라들이 그런 짐승들을 허용했다는 것은 이런 설명을 수용하기 어렵게 한다. 학자들에게 가장 인기있고 매우 중요한
이론은 다음의 구조주의적 설명이다.
질서는 정결, 무질서는 부정결로 간주하는 구조주의적 설명
구조주의에
입각한 메리 더글러스는 ‘부정결’과 ‘오염’은 질서를 벗어난 것, 변칙적이고 자리를 이탈한 상태, 그리고 흠이 있는 불완전한
상태라고 주장했다. 그와 반대로 정결한 것은 원래의 자리에 있는 상태, 정상적인 것, 그리고 흠이 없는 완전한 상태를 말한다.
정결과 더불어 거룩 또한 적합한 질서를 일컫는 개념이다. 모든 동물은 하늘, 땅, 수중의 각 영역에 맞는 신체 구조와 이동 방식을
지녀야 한다. 예를 들어 정한 것으로 분류되는 짐승, 물고기, 새, 그리고 곤충은 저마다 삶의 영역에 부합하는 신체 구조와
이동방식을 가졌다. 더글러스에게 있어 모든 생물은 창세기 1장의 자연 생태계에 적합한 신체 구조와 이동방식을 가져야 하며, 이
기준을 벗어난 것은 무엇이든 “변칙적인 것”이기에 부정하다.
(1) 지상(땅): 정상적인
지상 동물에게는 갈라진 굽과 새김질이 필수다. 예컨대 굽이 갈라지지 않은 발(paw)은 펑퍼짐한 모양의 손과 같다. 즉 규칙을
이탈해 손이 발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신체적 특징을 가진 개, 고양이, 호랑이 등의 짐승들은 부정하다. 날거나
걷지 않고 기는 동물 역시 물고기나 새, 짐승 중 어느 것으로도 분류할 수 없으므로 자동적으로 배제된다. (2) 공중: 예를 들어, 새 중에 공중과 수중의 두 영역을 넘나드는 것은 질서를 어지럽히므로 부정하다. 새에는 구체적인 신체 기준이 적용되지 않고 20종류의 목록이 제시된다. (3) 수중: 정상적인
어류에게 요구되는 지느러미와 비늘을 가진 물고기만이 정결하다. 따라서 상어나 갈치처럼 지느러미가 없는 어류는 부정하고, 해삼,
낙지, 멍게, 조개류는 자동으로 배제된다. 또한 이들은 기어서 이동하는 종들이다. 수중에서 기는 동작은 정상적인 이동 방식이
아니므로 부정하다. (4) 기는 것: 어느 부류에도 속하지 않는 애매한 동물들은 부정하다. 땅, 물, 공중을 불문하고 기어 다니는 짐승들은 물고기도, 짐승도, 새도 아니기 때문에 모두 부정하다.
결국
더글러스에게 있어서 부정한 동물이란 정상적인 신체 형태와 이동 방식을 벗어난 변칙적인 것들이요 정결한 동물들은 그러한 요건을
갖춘 것들이다. 이러한 음식법의 표준과 정-부정 동물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온전하고 완전하신 분임을 증언한다. 그것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완전성, 정결성, 통일성을 인식시킨다. 더글러스의 새로운 견해에 성경학자들의 반응은 열광적이었으며 지금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이론은 많은 반론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이동 방식의 변칙성(anomaly) 설명에 대한 집요한
비판이 이어졌다. 이것이 전 동물계에 일관성 있게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가축의 경우 굽의 갈라짐은 논외로 하더라도
새김질은 신체적 특징이나 운동방식과는 무관하며, 음식섭취와 관련이 있다. 물고기의 비늘 역시 운동방식과 아무 상관이 없다. 부정한
새들이 공중과 물을 오가며 이동할 것이라는 주장도 추론에 불과하다. 11장의 목록에 있는 20가지의 새들 중 많은 것이 어떤
종인지 알려지지 않았으므로 그 새들 전부가 다이빙을 하고, 수영을 한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활환경은
물이 드문 고지대였으므로 그들에게 익숙한 조류는 대부분 오히려 강이나 호수의 생태적 습성과 거리가 멀었을 것이다. 게다가 공중을
나는 새는 모두 땅을 걸어 다니므로 두 영역을 넘나드는 변칙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따라서 더글러스의 기준은 일관성이 없다.
무엇보다 왜 지상의 짐승다운 짐승의 표준이 갈라진 굽과 새김질로, 또한 수중의 짐승의 표준은 마땅히 지느러미와 비늘로 결정되었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이런
답변들에 만족하지 못한 일련의 구약학자들은 정-부정을 가르는 가장 설득력 있는 이유를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생명과 죽음의 두
축이다. 우리는 지면상 이 문제를 다음 호에서 다루기로 하자. 동시에 그 생명-죽음의 두 축이 어떻게 레위기 11장의 음식법과
나머지 12~15장에 이르는 모든 정결법에 일관되게 적용되는지 살펴볼 것이다. 우리는 생명-죽음을 기준으로 나뉘는 정결과 부정결의
교훈이 결국 ‘거룩’을 가르치기 위한 레위기의 중대한 신학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먹을 수 있는 것(something edible)
육지의 모든 짐승 중에서 1. 먹을 만한 것은 무엇인가? 2. 일반적인 특성은 무엇인가? 3. 왜 그런 짐승들만 먹으라시는가?
1) 굽이 갈라져서 쪽발이 되고 되새김질 하는 것 : 소, 양, 염소, 사슴, 노루 2) 대체로 풀을 먹고 사는 동물이며 평화로운 짐승들이다. 3) 구별된 삶과 묵상하는 삶을 통해 평화로운 삶을 영위할 것은 요구하신다. 먹을 수 없는 이유를 생각할 때마다 갈라졌느냐, 되새김질을 하느냐를 따져야한다. 당연히 사람에게도 갈라졌느냐 되새김질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갈라지는 것의 의미는 거룩(구별)을 뜻하고, 되새김질은 묵상을 뜻한다. 그렇게 하노라면 자연스럽게 모든 사람과 평화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사반 : 토끼 비슷한 초식 동물 토끼 : 실제로는 되새김질을 하지 않는다. 그냥 모양만 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물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먹을 만한 것은 어떤 것이며 그것이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을지 생각해보자?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
지느러미는 물고기가 방향을 잡아서 나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다. 살아가는 방향이 분명해야하고 때로는 물을 거슬러 나갈 줄도 알아야한다. 한 곳에 머물러 있거나 타의에 휩쓸려 가는 삶은 안된다.
비늘이 없는 것은 땅에 기는 짐승과 비교할 수 있다(뱀장어류). 진흙에 깊이 박혀 있거나(조개류) 물 밑 깊은 곳에서 공격적이고 음흉하다. 미꾸라지의 파고 들어가는 성질은 유명하다.
끊는 물에 미꾸라지와 두부를 함께 넣으면 미꾸라지가 두부에 파고 들어가서 익어버리기 때문에 마치 백찜에 속을 넣은 것같이 된다나! 반면에 비늘이 있고 지느러미가 있는 물고기는 대체로 수면 가까이에서 활발하게 움직이며 산다.
가끔은 수면으로 뛰어오르기도 하고. 하늘을 바라보면 살아야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비슷한 점이 많다.
곤충 중에서 먹을 만한 것 무엇인가? 왜 그럴까?
날개가 있고 땅에 뛰는 다리가 있는 것 : 날개가 있는 데 기는 것은 가증하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았으면서도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맥빠진 모습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증하게 여기신다.
뛰는 다리란 땅에서 살되, 땅에 속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땅에 발을 디디긴 하되 빠지지는 말라는 것이다. 귀뚜라미는 날개가 없음에도 정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 먹을 수 있는 짐승과 먹어서는 안 되는 짐승을 구분합니다. 굽이 갈라지고 새김질하는 짐승은 정하기에 먹을 수 있습니다. 둘 중의 하나만 해당하는 낙타, 토끼, 돼지는 먹을 수 없습니다. 불완전하다는 것입니다.
비늘과 지느러미를 가진 물고기도 먹을 수 있습니다. 비늘과 지느러미를 완벽한 물고기의 조건으로 본 것입니다.
독수리, 타조, 올빼미처럼 먹이를 탈취하는 조류는 먹을 수 없습니다. 날개가 있으면서 동시에 네발로 기어 다니는 곤충도 부정합니다. 메뚜기처럼 날개가 있어도 네 발로 뛰는 것은 먹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부정한 짐승의 사체를 만지거나 접촉해도 부정합니다. 이처럼 정한 것과 부정한 것 (clean vs. unclean)에 대한 규정이 복잡하고 엄격합니다.
레위기 11장에서 알려주는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습니다.
첫째로, 특별한 기준이 없고 하나님께서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임의로 정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순종을 요청하셨다는 것입니다. 정한 것과 부정한 것 사이에 뚜렷한 기준이 없는 것을 고려한 해석입니다.
둘째는, 본문의 부정한 짐승들은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 민족의 제사에 사용된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그러니 먹을 수 없습니다. 돼지가 대표적인데, 그렇다면 바알신의 상징인 소고기도 금해야 했기에 일관성이 없습니다.
셋째는, 의학이 발달한 근래에 제기된 의견으로 위생상의 이유라는 것입니다. 세균을 옮기기 쉽거나 박테리아 등을 갖고 있는 위험한 짐승들이라는 것입니다. 상하기 쉽고 종종 전염병을 일으키는 돼지가 대표적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 부정한 짐승이 건강상 해롭다는 지적이 없다는 것이 함정입니다.
네 번째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는 견해입니다. 구약의 율법에서는 온전한 것(wholeness)과 창조 섭리에 맞는 자연스러운 것(normality)을 중요시 합니다. 레위기 11장에서 정한 것으로 분류한 것들은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또한, 먹이를 새김질하는 짐승을 정한 것으로 구분한 것은 하나님 말씀을 새김질하듯이 묵상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식입니다. 상징적인 해석은 그럴듯하지만, 비약이 있고 주관적입니다.
어느 한 가지 의견만 지지하거나 고집할 것도 아닙니다. 어떤 견해가 맞는지를 두고 집요하게 연구할 것도 아닙니다. 본문 자체가 명확한 입장을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11장의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의 구분이 만고불변의 진리라면 하나님께서 정확한 기준을 제시하셨을 것이니 본문의 규정을 현대에 맞출 필요도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너희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입니다(레 11:44-45).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임의적 명령이든, 이방의 풍습을 따르지 말아야 했든지 위생상의 이유나 상징적인 의미에서든지 11장의 규정을 지켜야 했습니다. 당시에는 그것이 몸을 더럽히지 않고 하나님 백성에 걸맞은 거룩한 삶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거룩함”은 무엇일까요? 우리 몸을 스스로 더럽히는 것들은 없는지요? 구약의 이스라엘이 먹는 것으로 거룩함을 유지했다면 우리는 무엇을 갖고 거룩함을 지켜야 할까요? “거룩함”이라는 단어를 붙잡고 오늘 하루를 살아 봅시다.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레 11:44)
For I am the LORD your God. Consecrate yourselves therefore, and be holy, for I am holy. (Lev 11:44)
하나님 아버지 구약의 복잡한 규정을 지키지 않아도 하나님 백성으로 거룩함의 길을 걷게 하소서.
정결한 짐승 섭취를 통해 거룩한 백성의 신분 유지하다
생명은 질서, 죽음은 무질서에 속해 … 죄의 증상으로 나타난 부정결 씻어 내는 속죄제 필요
앞선
글에서 우리는 왜 어떤 동물이 정결하고 다른 동물은 부정한지 여러 견해를 살펴보았다. 나아가 우리는 왜 산모는 부정하게 여겨졌고
나병(정확히는 악성 피부병)과 신체의 유출증은 부정한지를 질문해볼 수 있다. 정결과 부정결이 구분되는 기준은 생명과 죽음이라 볼
수 있다. 이 견해의 장점은 음식법뿐 아니라 레위기 11~15장 정결법 전체에 잘 들어맞는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생명과
죽음은 각각 질서와 무질서를 가리킨다. 죽음은 곧 하나님의 부재이자 거룩의 부재를 나타내며, 부정한 것이다. 생명이 제거된
자리에는 죽음이 들어온다. 하나님과 결합된 인간은 생명 안에 있기에 거룩하고, 하나님 없는 인간은 죽음의 영역에 속하니 부정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금지된 짐승과 새들 중 대다수는 피를 내면서 죽음을 유발하는 육식동물, 죽음의 찌꺼기와 사체를 먹는
청소동물(scavengers), 그리고 돼지와 같은 잡식성 동물들이다. 다른 한 부류들로는 멧돼지와 육식 조류와 같이 고대
이스라엘인들 사이에서 악마의 거주지로 간주되었던 황량한 광야와 황무지에서 사는 것들이다. 죽은 자를 부르는 강신술과 관계된 동물들
역시 부정하다. 예를 들어 이사야 65장 2~7절에서 이스라엘인들은 마술, 강신술을 동원해 집회를 열면서 돼지고기와 가증한
짐승의 국물을 먹는다. 한편 죽음은 강력한 부정결의 근원이므로 사체와의 접촉은 피해야 했다. 심한 피부병은 사체의 피부를
연상시키고, 악성 곰팡이가 핀 건물은 습한 지하나 무덤과 상태가 비슷하기 때문에 부정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신체적 유출은 생명의
액체가 몸에서 빠져 나가기 때문에 부정했을 것이다. 둘 다 남녀 생식기로부터의 유출과 관련되어 있다. 여성의 자궁 출혈과 남성의
정액 유출 및 비뇨기 질환으로 인한 유출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와
같이 모든 정-부정을 구분하는 근거는 ‘생명’과 ‘죽음’일 수 있다. 11~15장을 ‘생명’과 ‘죽음’으로 완벽하진 않지만 거의
일관성 있게 설명할 수 있다. 생명에 속하고 생명과 가까운 것은 정결하고, 죽음에 속하고 죽음과 가까운 것은 부정결하다. 더불어
더글라스의 견해인 질서와 무질서를 생명과 죽음에 적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곧 생명은 질서에 속하고 죽음은 무질서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부정결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특히 속죄제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이것은 특히 레위기 12~15장의 부정결의 증상들이 죄와 관련되어
있다는 유추를 가능하게 만든다. 추정컨대 부정을 유발하는 신체적 유출의 배경과 기원은 창세기 3장의 인간이 저지른 최초의 범죄로
거슬러 올라간다. 다시 말해 인체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부정결과 그와 비슷한 사물의 부정결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발생된
신체적·자연적 변화로 인한 증상일 가능성이 있다. 죄의 증상으로 나타난 부정결을 씻어 내기 위해 속죄제가 요구되는 것이다.
레위기 11장: 정-부정 동물(음식법)과 사체 접촉
창세기
1장을 비롯 성경 전반의 우주관은 하늘, 땅, 수중으로 삼중적인데, 레위기 11장의 자연계는 4중으로
구분된다(공중/지상/지표면/수중). 땅을 지상과 지표면으로 세분화하면 생물들을 네 영역에 분포시키는 것이다. 특이하게 11장에는
자연계를 구분하는 경우 외에도 의도적으로 4배수의 숫자를 사용하고 있다. 경계선에 있는 동물 4종(4~7절); 금지된 조류
20종(13~19절); 허용된 곤충 4종(20-22절); 금지된 기는 동물 8종(29~30절). 각 영역별로 부정한 짐승들의
목록이 주어진다. 앞서 말한 대로 부정결을 판별하는 기준은 생명과 죽음이다.
지상의
짐승 중에 사냥하는 짐승과 사체를 먹는 짐승, 잡식성 짐승은 부정하다. 생명-죽음이라는 기준에 따라 제일 먼저 초식 동물이
허용되며, 그것을 토대로 반추 동물(소, 양, 염소)의 공통점인 갈라진 굽과 새김질이 표준으로 결정되어 자연계 전체에 적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때 경계선에 위치한 네 부류의 짐승들에 유의해야 한다(4~7절). 언제나 진짜와 비슷한 가짜가 더 위험한 법이기
때문이다.
수중
생물 중 바닥을 청소하는 종류는 우선 배제된다. 수중에서 기는 짐승들은 수중 밑바닥에 널브러진 죽은 어류의 잔해를 섭취할뿐더러
수면 밑을 배로 쓸고 다니거나 그곳에서 산다. 수중을 헤엄치는 물고기는 지느러미와 비늘을 모두 가지고 있지만 지상 동물과 달리 이
둘 중 하나만 가진 물고기는 정결한 동물로 분류되지 않는다. 더글라스가 말한 대로 육상 동물과 수중 동물에게 신체적 기준을
적용한 데는 짐승의 흠을 판별한 것과 마찬가지로(레 22:17~25) ‘완전성’이라는 교훈을 가르칠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더글라스의 구조주의적 설명에 오류는 있을지언정 그녀가 발견한 ‘신체적 완전성으로서의 거룩’이라는 개념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니 결국 ‘생명과 죽음’을 기준으로 정-부정 동물을 구분했고, 거기에 신체적 완전성의 원리가 덧붙여진 것이 분명하다. 그래야
동물의 굽과 새김질, 비늘 지느러미와 같이 정결한 짐승에게 요구된 신체적, 생태적 특징이 설명된다.
공중의
새에도 같은 기준이 적용되어 주로 육식 조류와 사체를 먹는 습성을 가진 조류, 물고기를 잡아먹는 새들이 부정하게 여겨졌다. 다만
금지된 조류들 사이에서 별다른 신체적 공통점을 찾아볼 수 없어 금지된 조류 20가지를 목록으로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13~19절). 이 조류들의 정확한 종류가 무엇인지는 알 길이 없고 현대의 번역 성경들뿐만 아니라 고대의 역본들도
천차만별이다. 지표면을 기는 짐승을 부정하게 여긴 것은 아마도 사체와 뼈가 깔린 지표면을 쓸고 다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표면이
부정한 영역으로 취급되는 또 다른 이유는 음부(스올)의 접촉면이기 때문이다. 구약에서는 기본적으로 지하를 의미하는 음부를 망자의
세계로 인식한다. 즉 지표면은 죽음의 잔해들이 널려있고, 동시에 사체가 묻혀있는 지하 세계와 맞닿아있다. 따라서 두더지나 쥐처럼
땅속을 드나드는 짐승들 또한 기는 것의 범주에 포함되어 가증하게 여겨지는 듯하다. 곤충류는 새처럼 나는 생물임과 동시에 기는
것으로 분류되어 부정하지만, 네 종류의 메뚜기는 발로 뛰는 특징 때문에 허용된다(20~22절).
이
음식법의 목적은 정결한 짐승의 섭취를 통해 거룩한 백성의 신분을 유지하는 것이다(레 11:44~45). 한편 레위기 11장은
부정한 짐승의 섭취를 금지함과 동시에 부정을 유발하는 짐승의 사체와의 접촉 역시 금지하고 있다. 이때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
사체 모두 접촉이 금지된다. 만일 접촉이 발생하면 하루의 시간이 지난 뒤 목욕하고 옷을 빤 뒤 저녁까지 기다려야 한다. 참고로
인간의 시신의 경우 훨씬 강력한 부정결의 근원으로서 송장과 접촉한 사람이나 물건과 접촉되면 그것들도 부정케 된다.
레위기 12장: 산후 정결법
자녀를
출산한 여인은 부정하게 여겨졌는데 이것은 아이를 낳은 것 자체가 아니라 그로 인해 발생한 자궁 출혈 때문이다. 이어서 거론되는
악성 피부병(13~14장) 및 신체의 유출(15장)과 더불어 이러한 부정은 당사자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연적 또는 불가항력적으로
발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경의 법은 그것들을 부정한 상태로 간주한다. 출산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창조 명령에
따른 행위임에도(창 1:26~28) 그로 인한 출혈은 부정하게 여겼다는 것은 언뜻 매우 부당한 조치로 보인다. 그러나 알고 보면
여기에는 오경의 신학적 배경이 놓여 있다. 11장과 달리 12~15장은 대부분 인간의 몸에서 발생되는 부정한 증상들을 다룬다.
12장은 산후 출혈, 13~14장은 문둥병으로 불려온 악성 피부병(건물과 사물의 표면에 발생하는 곰팡이를 포함한다), 그리고
15장은 생식기로부터의 액체가 빠져나가는 증상들을 부정하게 취급한다. 그것은 월경을 포함한 자궁 출혈과 정액의 유출, 혹은 비뇨기
질환으로 인한 유출이다. 더글라스는 11장의 해석과 같은 맥락에서 이러한 신체적 유출이 부정한 이유는 완전한 담지체인 몸이 체액
소실로 인해 불완전해지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몸으로부터 ‘생명의 액체’가 빠져나간 결과라 할 수 있다. 둘 다
남녀 생식기로부터의 유출과 관련되어 있다. 일단 이러한 액체는 몸으로부터 빠져 나가는 순간 접촉을 통해 2차, 3차 감염을
일으키는 유출물이 된다.
이와
같이 산모가 부정을 타는 이유는 출혈 때문이라 할 수 있는데 달리 보면 그녀는 출혈과 더불어 생명을 내줌으로써 죽음에 다다르는
과정을 거쳐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킨다. 즉 산모는 죽음과 생명의 중간 상태에 놓인 존재이기에 부정하게 된다. 12장의 산모의
부정결과 정결에 관한 규례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표 참조>
레위기
12장의 가장 큰 난점은 출산한 아이의 성별에 따라 부정결한 상태가 지속되는 기한에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남자 아이를 낳으면
산모는 7일간 부정한 상태로 있다가 8일 째에 아이를 할례한다(2~3절). 이때 본문에는 생략되어 있으나 다른 사례들에 비추어볼 때
산모의 부정함은 목욕과 더불어(아마도 옷 세탁을 포함) 깨끗이 씻길 것이다. 그러나 산모는 그로부터 33일이 지나야 비로소
완전히 남은 산혈이 완전히 깨끗해졌다(4절). 그러나 이 기간에는 성소에 접근이 제한되고 성물을 만지는 것이 금지될 뿐(4절),
집안에 격리되지 않고 별다른 제약 없이 일상생활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성소 접근을 금지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일상생활에도 어느 정도의 제한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남아를 출산한 산모가
완전히 정결해지기까지는 총 40일간이 소요되었다. 여아를 낳았을 때는 그 기간이 두 배로 늘어난다. 목욕과 더불어 마무리되는 일차
부정결의 기간은 14일이며, 그 후 66일 동안은 성소 접근이 금지되었다. 완전한 정결을 위해 총 80일이 소요되는 셈이다.
이
같은 차이가 발생하는 원인은 아직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는데 이에 대해 그 동안 다양한 설명들이 시도되었다. 여아를 낳으면 실제로
출혈 기간이 더 길다는 의학적 근거를 제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여아가 미래의 산모인 이유로 여아는 매달 운명적으로 부정결의
고통을 겪는 미래의 산모라는 점이 고려되어 두 배의 기간이 요구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의견은 고대에서의 남녀의
차이 때문이라는 견해다. 고대 이스라엘의 가부장 체제 속에서는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했으며, 몸값도 반값이었다는 것이다(레
27:2~7). 그러나 반드시 부정결한 정도가 높은 쪽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사람의 시체는 돼지의
사체보다 더럽지만, 사람과 돼지의 가치는 정반대다. 결국 어느 것도 남아와 여아 출산 사이의 차이에 대한 명쾌한 답변은 되지
못한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든 출산을 마친 여인을 장기간 격리시키고 그녀의 활동을 제한한 배경에는 산모의 육체적 회복과 감염 방지를 위한
배려가 숨어있었을 것이다. 만일 여아의 경우 산모의 출혈이 더 오래 가고(남아의 두 배에는 훨씬 못 미칠지언정) 그만큼 회복에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 사실이라면 그 기간을 넉넉히 두 배로 할 것을 법제화했는지도 모른다.
오랜
기간이 지나 산혈이 완전히 깨끗해진 뒤 산모는 마지막으로 성소에 제사를 드리러 올라와야 한다. 이때 도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번제를 위한 어린 양 한 마리와 속죄제를 위한 집비둘기나 산비둘기 한 마리가 요구된다. 그러나 가난한 여자의 경우 번제의 어린
양을 비둘기로 대체하여 비둘기 두 마리로 약소한 제사를 바쳤다(레 12:8). 복음서에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출산한 뒤 8일 만에
할례를 하고, 정결 기간을 지낸 후 희생제를 바치러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온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눅 2:21~24). 그녀가
비둘기 두 마리를 바친 점으로 미루어볼 때 예수님은 매우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셨을 것이다.
여기서
속죄제는 그녀의 부정결로 제단이 더럽혀졌기에 필수며, 번제는 아마도 자녀 출산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드렸을 것이다. 번제에 관한
규정이 앞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순서상 번제를 먼저 드렸을 것이다. 이것은 이 희생제에서 출산에 대한 감사가 우선되어야 함을
암시한다. 그러나 사실은 뒤에 드려진 속죄제가 더 중요했다. 성소를 오염시킨 그녀의 부정결을 씻어내야 했기 때문이다.
__________________ 레위기 10장 / 다른 불(1절)
03-20-2023(월) 사순절 제23일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Aaron's sons Nadab and Abihu took their censers, put fire in them and added incense; and they offered unauthorized fire before the LORD, contrary to his command.
성경을 읽을 때 어떤 사건에 대한 이해가 매우 중요합니다. 사건을 이해하는 방법은 "대립 사건(對立 事件)" 또는 "유사 사건(類似 事件)"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아벨의 죽음과 같은 것과 비교할 때 "유사 사건"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아이 성을 공격하고 실패했을 때 아간이 죽임을 당하는 것은 "대립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레위기 10장은 제자상 위임식 후에 첫번 제사를 마친 후에 아론의 두 아들이 여호와께서 명하지 않은 불을 사용하므로 여호와 앞에서 불이 나와 나답과 아비후가 죽고 말았습니다.
왜 제사장으로 임명을 받은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와가 명하지 않은 다른 불(unauthorized fire, strange fire)"을 사용하였을까요? 여호와가 명하지 않은 불이란 위임식 때 하늘에서 불이 떨어졌습니다(9:24).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지르며 엎드렸더라."
제사장의 임무는 이때 떨어진 불을 잘 관리하여 제사 때마다 그 불을 사용해야 합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명하지 않은 다른 불이란 단 위의 번젬물과 기름을 태웠던 불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던 불을 말합니다. 그 결과 나답과 아비후는 불에 타 죽고 말았습니다(10:2).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축복의 불과 저주의 불을 생각해 봅니다. 축복의 불이란 "제물을 태우는 여호와 앞에서 나온 불"을 말합니다(9:24). 저주의 불이란 "나답과 아비후를 태웠던 불"을 말합니다(10:2).
왜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와께서 명하지 않은 불을 사용하였을까요? 그 이유를 레위기 10장 9절에서 찾아봅니다.
"너나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너희 사망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영영한 규례라."
본문에 의하면 나답과 아비후가 포도주나 독주를 마셨기 때문에 다른 불을 사용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향단에 불을 피울 때는 번제단의 불을
향로에 담아 향단에 옮겨서 분향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답과 아비후는 여호와께서 명하시지 아니한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습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죽자 모세는 웃시엘의 아들들인 미사엘과 엘사반을 불러 회막 성소 앞에 있는 두 시체를 옮겨 장사되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아론과 그의 두 아들을 불러 슬픔의 표현을 금지시키고 여호와의 진노가 온 회중에게 미침을 면케 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 닥칠 때에도 그러한 상황을 허락하신 주님의 손길을 인정하며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참고 견디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제사장은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제사장들은 그들의 직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성결해야 했으며 특히 포도주와 독수를 마시지 말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정신이 맑아야 거룩한 것과 속된 것,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바르게 구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백성들을
온전히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답과 아디후의 심판 사건 직후에 주신 것입니다. 노아도 술 취함으로 범죄하였던 것 처럼 신앙
생활을 파괴하는 독약이 되는 포도주를 멀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주님께서 주신 오늘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이 재앙을 물리치는 길이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잊지말아야 하겠습니다.
제사장들에게는 제사의 음식을 먹어야 하는 규례가 이미 주어져 있었습니다. 모세는 그것을 명했지만, 회중의 죄를 위한 제사의 고기를 아론과 두 아들들은 먹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이 일로 인하여 노했지만, 이 제사에는 자신들의 죄악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생각해서 속죄제물을 먹지 않았다고 한 아론의 대답을 모세는 합당하게 여겼습니다.
나답과 아비후의 불순종과, 엘르아살과 이다말의 불순종은, 모두 동일한 불순종이지만, 질적인 차이는 완전히 다릅니다. 제사장의 직무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떻게 서야 하는 것을 알고, 더욱 더 거룩하고자 한 엘르아살과 이다말의 말은 모세를 납득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하나님의 법이 막무가내로 무조건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욱 중요한 마음을 주님께 어떻게 드리느냐에 따라 이러한 융통성은 발휘됩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가지고 왔다는 것은, 바울 사도의 언어로 하면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일 것입니다(갈 1).
사람들은 자기의 방법, 자기의 불, 자기 생각이 하나님의 옛 방식이나 인기 없는 방법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 이런 것은 언뜻 보기에 대수롭지 않아 보이고 사소해 보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천사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아야 한다고 사도 바울이 선언한 바와 같이 심각한 일입니다. 자기의 방법과 방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보려고 하는 모든 헛된 시도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예배와 삶과 행동과 모든 판단의 기준은, 나의 판단과 경험과 생각이 결코 아닙니다. 모든 기준은 오직 성경이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뿐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삶 속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판단하는 모든 것의 기준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옵소서. 내 눈에 좋은 것을 택하거나, 내가 보기에 옳다고 여기는 것을 옳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 하나님께서 이것을 인정하실까?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계속하여 물으며,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오늘 이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오늘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하옵소서.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 -
대제사장 아론과 그 아내 엘리세바 사이에는 네 아들, 곧 나답과 아비후, 및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있었습니다(출 6:23). 네 아들들 중에서 나답과 아비후는 제사장 직무를 잘못 감당하여 여호와의 불로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셋째
아들인 엘르아살이 후일 아론의 뒤를 이어 대제사장이 되어 레위 족속의 어른이 되었습니다(출 6:25; 민 20:28). 향로(마흐타) -
이것은 성소 안에 설치된 분향단에 아침과 저녁마다 새로이 향을 사를 때 사용되는 불씨를
번제단에서 향단까지 옮기는데 쓰이던 금제 그릇을 가리킨다. 성경의 다른 부분에는 '불똥 그릇'(출 25:38),
'통'(출 27:3; 38:3)이라고도 합니다.
다른 불 -
직역하면 '이상한 불'(strange fire)인데 이 불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불을 가리키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명하신 불, 즉 번제단의 제물이 타는 불이 아닌 '일반 불' 또는 다른 불"을 의미하는
듯합니다(The Preacher's Homiletic Commentary).
나답과 아비후는 분향할 불로는 오직 번제단의
불만을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어긴 것은 여호와의 규례를 멸시하는 행위이며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죄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지 않는 불순종의 죄로 인하여 나답과 아비후는 저주의 불에 의해서 죽고 말았습니다. 왜 나답과 아비후가 이런 잘못을 행하였는지 추측하게 하는 말씀은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라고 당부한 것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한편 나답과 아비후가 이러한 죄를 범하게된 이유 중의 하나는 그 날 독주를 마신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왜냐하면 이 사건 이후 곧
독주 금지 규례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9절). (Matthew Henty, Harrison).
여호와의 불
모든 제사가 마무리되었을 때 여호와의 불이 제단 위의 번제물을 불살랐습니다. 여호와의 불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단 위의 번제물을 사르는 여호와의 불을 보고서 백성들은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사 후에 여호와의 불로 임재하신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하나님께서 목도하고 계실 뿐 아니라 영광을 받으시는 제사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광경을 본 제사장들과 백성들이 어찌 함부로 제사를 드렸겠습니까?
신약의 사도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산 제사를 마무리하셨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불같이 임하심을 목도하였기에 그들은 온전한 예배의 삶을 드렸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27:50-51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그러므로 오늘날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한 자들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의 의미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성령께서 임재하고 계심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은 그 마음에 진실함으로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몸 된 공동체의 제사장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예배는 공적인 예배이면서 아울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드리는 참 제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레위기 10:1-2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하나님의 불이 번제단의 제물을 사른 바로 그날, 즉 아론과 모세가 백성들을 축복한 바로 그날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자기 향로에 다른 불로 향을 태우다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마치 이 장면은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 교회가 부흥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 앞에 밭을 팔아서 드리고도 죽었던 두 사람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떠 올리게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가 부어진 후에 사람들은 그 영광을 자신의 의로 바꾸려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것에 대해서 철저하게 응징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결코 인간의 의로 대신할 수 없는 것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후에 가장 많이 범죄하는 것이 바로 교만의 죄입니다. 자신 마치 특별하거나, 어떤 의로운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것을 결코 참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진 후에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사탄이 태초에 아담에게 역사했던 그 교만의 더러운 물을 거듭난 주의 자녀들에게도 부으려 하는 것입니다.
나답은 '관대하다'라는 뜻이며, 아비후는 '아버지는 그이시다'라는 뜻으로 오늘날 자유주의와 권위주의(율법주의)자들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 교회를 무너뜨리는 나답과 아비후들이 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시대에 편승하여 적당주의로 격하시키거나, 그리스도인의 특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불은 영광의 불이시면서 동시에 소멸하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은 서로 다른 속성이 아니라 거룩이라는 하나의 속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은 거룩함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그 거룩함을 더럽히는 죄에 대해서는 소멸하시는 불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마주한 자들에게 나타나는 반응은 경외함도 있지만 동시에 그 영광을 잊어버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홍해의 기적과 광야에서 반석의 물을 마시며,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부르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마주한 자들이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모두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기적과 은혜를 체험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면서도 죄를 짓기에 빠른 발(감사하지 못하고 늘 불평하는 입술, '다오다오'하는 만족하지 못하는 탐욕,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 자신을 자랑하기 바쁜 자 등)이 아닌지 항상 스스로 살펴야 할 것입니다.
__________________ 레위기 9장 / 축복(23절)
03-18-2023(토) 사순절 제22일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Moses and Aaron then went into the Tent of Meeting.
When they came out, they blessed the people; and the glory of the LORD
appeared to all the people.
22.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필하고 내려오니라. 23.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 축복(祝福) 1288. 바라크(bârak) בָּרַךְ
1. 무릎을 꿇다, 2. 하나님께 기원하다, 3. 피엘형 בֵּרֵךְ
발음
/ 바라크(bârak) 관련 성경 / 문안하다(삼상 13:10), 무릎을 꿇다(대하 6:13, 시 95:6), 찬송하다(창 9:26, 왕상 1:48,
시 113:2), 복을 받다(창 24:31, 삼하2:5, 시 72:17), 축복하다(창 27:33, 민 23:11, 왕상 8: 66),
칭찬하다(삼상 25:33), 복이 있다(삼상 25:33, 룻 2:19, 20), 찬양하다(삼하18:28, 왕상 5:7, 시 106:48),
송축하다(왕상 8:15, 스 7: 27), 복되다(출 20:11, 잠 5:18), 복을 주다(사 19:25, 출 20:24, 신 15:6),
복을 얻다(창 12:3, 시 128:4), 복을 내리다(출 23:25, 신 28:8), 은혜를 베풀다(신 7:13),
저주하다(왕상 21:10, 13), 욕되게 하다(욥 1:5), 복을 빌다(욥 31:20), 자랑하다(시 10:3), 욕하다(욥 2:9),
풍부히 주다(신 14:24), 축사하다(삼상 9:13), 인사하다(왕하 4:29), 축하하다(시 49:18),
꿇리다(창 24:11), [명] 찬송(신 33:20, 시 135:21, 욥 1:21), 복된자(사 65:23), 축복(민 23:20),
복(대상 4:10), 안부(왕하 10:15) 구약 성경 / 256회 사용
여호와의 영광(榮光)
כָּבוֹד스트롱번호3519
1. 무거움
2. 영광
3. 사무엘상 4:21
발음
/ 카보드(kâbôwd) 어원 / 351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재물(창 31:1), 영화(창 45:13, 삼상 6:5, 시 8:5), 영광(창 49:6, 출 33:18, 대하 1:11,
에 5:11), 존귀(잠 15:33), 귀(貴)(대상29:12, 잠 3:16), 존영(잠 11:16), 영예(잠 25:2, 29:23),
위력(사 8:7),심령(시 108:1). 구약 성경 / 199회 사용
* 3513. כָּבַד
1. 무겁다
2. 대부분 비유적인 용법으로 쓰임
3. 영광스럽다 발음
/ 카바드(kâbad) 관련 성경 / 쫓겨나다(욥 30:8), 상하다(시 109:16), 낙심하다(단 11:30), 근심하다(겔 13:22). 구약 성경 / 113회 사용
영광(榮光) = 불 화(火) + 덮을 멱(冖 . 冪) + 열 십(十) + 사람 인(人)
영광. 1391. δόξα, ης, ἡ
1. 광명
2. 위엄 3. 누가복음 2:9 발음
/ 독사(dŏxa) 어원 / 1380의 어간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영광(마 4:8, 막 8:38, 눅 2:9), 광채(행 22:11), 영화(榮華)(요 17:5). 신약 성경 / 166회 사용
* 1380. δοκέω
1. 생각하다
2. ἐδό κουν πνεῦμα θεω- ρεῖν: 그들은 귀 신을 보는 것으로 믿었다
3. εἴ τις δοκεῖ σοφὸς εἶναι: 만일 누가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한다면 발음
/ 도케오(dŏkĕō) 관련 성경 / 생각하다(마 3:9, 눅 17:9, 요 11:13), 주관하다(막 10:42), 알다(눅 1:3, 요 20:15,
행 15:28), 가결하다(행 15:22), 유력하다(갈2:6), 보이다(고전 12:22), 여기다(고후 11:16). [명] 생각
(마 17:25, 21:28, 요 11:56), 의견(눅 10:36) 신약 성경 / 63회 사용
하나님의 영광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질문 / 신약 성경을 읽다보면 “영광”이라는 말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눅 2:20)
-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눅 9:31)
-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7:22)
상기 구절의 영광이 각기 다른 의미인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영광을 어떻게 이해하고 또 어떻게 구분해야하는지 궁금합니다.
영광(榮光)은 하나님만의 광채
먼저 아셔야 할 것은 “영광”이라는 용어는 오직 하나님과 그분의 역사에만 적용됩니다. 그 의미는 쉽게 말해 하나님께 도저히 가까이
범접할 수 없는 거룩함이나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의 찬란한 광채가 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간혹 인간이나 물건에도
영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앞뒤 문맥만 잘 살피면 금방 하나님의 영광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의 영광이 가장 잘
드러나는 예를 구약과 신약에 각각 하나씩 들어보겠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 율법을 받았을 때에 그분의 영광의 광채가 그 얼굴에 반사되어서 백성들이 보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꺼풀에 광채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출 34:30)
또 예수님이 베드로를 비롯해 제자 셋을 데리고 변화산에 올랐을 때입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마 17:1,2)
하나님의 영광은 빛으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그 거하시는 온 시온 산과 모든 집회 위에 낮이면 구름과 연기,
밤이면 화염의 빛을 만드시고 그 모든 영광 위에 천막을 덮으실 것이며.”(사 4:5)
구름과 연기와 화염의 빛을 “그 모든
영광”이라고 합니다. 구름이나 연기로도 그 영광을 드러내었다는 뜻입니다.
결국 영광이란 하나님의 임재를 실제로 느꼈을 때의 인간 인식의 총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분의 실체가 임재하면 그
앞에 설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분은 더럽고 추한 것과는 절대 공존할 수 없는 소멸하는 불이십니다. ‘불’이라는 표현도 사실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인간의 언어로 표현한 것일 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이 죽지 않고도 당신을 인식할 수 있는 형태나
상황으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18,19)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자 원했지만 직접 그분을 보고 살
자가 없기에 바위틈에 숨게 하고 당신의 모든 선한 형상으로 모세 앞에 지나게 했습니다. 모세가 본 것은 얼굴이 아니라 그분의
등이었습니다.(23절)
말하자면 인간이 본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의 모든 선한 형상입니다. 그분의 얼굴이 아니라 등입니다.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에 모세의 얼굴에 반사된 광채도 단순히 그분을 인식토록 만든 수단으로써 빛이 동원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 나타나시든 하나님이 당신을 드러내고 싶으면 인간이 그분의 임재를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게끔 하십니다. 그래서
A. Richardson 이라는 신학자는 “영광이란 하나님의 지상(地上) 임재(臨在)를, 주로 빛으로 나타나는, 인간이 인식한
것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용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Bengel은 더 명료하게 “영광은 하나님의 신성이 드러나는 것이다”(The
Glory is the Divinty manifests.)라고 정의했습니다.
영광은 바로 하나님 자신
그러나 영광을 단지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할 수 있는 빛 같은 물리적 현상에만 제한시켜 이해해선 많이 부족합니다. 영광은 그분의
속성 전체를 망라한다고 봐야 합니다. 쉽게 비유하면 이러합니다. 아주 의로운 사람이나 특정 분야의 최고 전문가를 만나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우리말로 ‘아우라’라고 표현하듯이 왠지 모르게 뒤에서 빛이 나는 것 같고 큰 권위가 느껴집니다. 실제로 빛이
나거나 물리적 힘이 작용한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이 쌓아온 그 모든 성품이나 실력, 나아가 그 인격체 자체가 아우라인 것입니다.
사람에게서도 이러할진대 정말로 하나님을 대면하고 그분과 교제, 동행한 체험이 있다면 그분에게서 느끼는 아우라는 인간의 언어로는
도무지 설명하지 못합니다. 영광이라는 한 단어로 밖에는 말입니다. 영광은 그분의 임재는 물론 동행하심을 직접 겪고 난 이후에 그분
전체를 한 마디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래서 영광은 하나님에게만 속하지만 곧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 간섭하셔서
그들로 당신을 알게 했던 그 모든 신앙체험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영광이라는 뜻입니다. “어느 나라가 그 신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렘2:11) 이스라엘이 당신께서 간섭하신 내용을 제대로
안다면 도무지 우상을 숭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시8:1) 하늘 위에
영광을 두셨으니 하늘의 별빛으로도 이해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쉽게 설명하기 위한 비유입니다. 동일 내용을 평행구절로 반복하는
것은 히브리어의 대표적 수사법입니다. “주의 이름‘과 ”주의 영광“은 동의어입니다. 주의 이름 즉, 그분의 모든 속성을 온 땅과 온
하늘, 우주 만물에 드러내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마6:13) 여기서 영광은 그분의
그분다우심, 그분의 모든 속성이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지지
않는다.(immortal)”(롬1:23)고 형용했습니다.
요컨대 영광은 하나님 당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에게서 고귀한 성품, 권세, 힘 등이 다 없어져도 여전히
인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서 당신의 품성, 권위, 능력 등이 다 합쳐져서 겉으로 드러나는 아우라 즉, 영광이 사라지면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Calvin은 “우리가 그분을 알 때 그분의 영광을 본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곳은?
비록 영광이 하나님 당신이라고 말할 수 있어도 구체적으로는 인간이 인식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반드시 빛,
구름, 연기 같이 물리적 양상을 갖출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종교적 관념으로 머무는 것도 아닙니다. 당신의 백성과 당신
사이에서 반드시 지정의적 반응이 수반되는 영적 교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신자가 그분의 영광을 맛보면 반드시 1)
그분의 그분다우심에 대한 경외감과, 2) 피조물인 인간으로서 그분 앞에 서게 되는 겸비함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영광을 보고 지각할 수 있는 경로는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창조와 그 피조물에 드러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롬1:20) 아름답고 위대한 자연을 바라볼 때에 분명히 창조주 하나님의 손길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또 그
모든 것들이 완벽하게 운행되는 모습을 볼 때에 그분의 숨결을 들을 수 있습니다. 창조와 창조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마지막으로 인간을 만드신 후에 심히 좋았다고 말했습니다. 당신의 뜻대로 완벽하게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인간은 당신의 형상대로 만드셨는데, 당신의 영광스런 속성을 인간에게도 부여했다는 뜻입니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고전1:17) 하나님에게만 적용될 영광을 인간도 일부 갖고
있기에 인간을 숭배해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과 영으로 교통할 수 있고 이 땅을 그분 대신에 다스려야 할 책임을
맡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할 수 있는 둘째 대상은 예수님과 그 십자가입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9,14,17)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다 드러내었다고 합니다.
성경은 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어 죄인을 구속하는 사역을 완성하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표현합니다. 외적으로는 비천한
모습으로 죽으셨기에 찬란한 광채가 나는 상태와는 전혀 반대이지만 앞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이 온전히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독생자를 죽이시더라도 죄인을 너무나 사랑하시어 구원하시겠다는 뜻은 도무지 인간의 생각과 다른 오직 그분만의
성품이기에 영광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또 그 구원의 은혜를 맛본 자는 그분에 대한 경외감과 자신에 대한 겸비함을 절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는”(눅24:26)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스승의
참혹했던 십자가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자 부활하신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풀어서
설명해주었습니다. 또 그래서 예수님은 죽기 전날 밤에 제자들을 위한 기도를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17:1)라고 시작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곳은 바로 예수님의 재림 때입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눅21:2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믿음의 시련을 견뎌낸 성도들에게는 독생자의 영광으로 덧입히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3:21)
천국에서 부활한 성도는 영광스런 육체를 입게 될 것입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골3:4) 부활한 성도도 주님과 함께 강림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창조와 재림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그 십자가는 성령의 간섭으로 신자의 영이 거듭나야
비로소 그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신자 속에 내주하신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영과 교통함으로써 그분의 영광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또 그런 자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성경 말씀을 읽고, 기도를 하며, 찬양과 예배를 드리는 중에, 아니 평소에도 하나님에 대해 묵상하는 중에 그분의 영광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하나님이 바로 내 앞에 서있다는 인식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삶과 인생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 위대한 능력, 신비한 섭리, 완전하신 인도, 또 장래에 보여주실 비전 등을 깊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저절로 그 자리에 무릎 꿇고 엎드리게 됩니다. 외적 예배의 형태를 갖춘다는 것이 아니라 신자의 심령이 완전히 낮아진다는
것입니다. 또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으로 자신의 심령과 삶에 가득 채워지기를 소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분 뜻대로 순종하여
그분의 일에 쓰임 받고 싶어지며 실제로 그렇게 실천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사역에 함께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 신자가 그에 합당한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온전하고도 절대적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자연히 그분에 대한 경외와 소망과 믿음과 사랑이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주장하게 됩니다.
반드시 거창한 종교적 의식이나 업적으로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영광을 돌리는 것은 그분의 뜻이 세상에 구현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했듯이 사탄의 미혹된 영혼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하여 죄에서 구원
받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가장 큰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뿐 아니라 그분의 영광을 보려고만 해도, 하나님 외의 어떤 다른 존재나 대상을 경배해선 안
됩니다. 특별히 사람들과 자신을 높이는 그 어떤 것이라도 완전히 제거되기 전까지는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언제나 질투의 하나님으로 다가옵니다.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이니라.”(출34:14)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당신만의 십자가 사랑으로 사랑하셨기에 절대적 배타적 사랑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신자는 무엇을 먹든 마시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1항 대로 “사람의 첫째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영광의 구체적 예들
지금껏 설명 드린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근본 개념을 갖고서 질의하신 세 구절의 구체적 의미를 살펴봅시다.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눅2:20)
본문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그분의 그분다우심을 온전히 실감했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는데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신 일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객관적 사실만 수긍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의 놀라운 권세를 보고 들으면서 그
분을 향한 경외심으로 충만해졌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목자들은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했습니다. 또 천사가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며
두려워 말라고 했습니다. 나아가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평화라고 찬송했습니다. 그래서 그
천사들의 말대로 베들레헴에 가서 보니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낳아 강보에 안고 있음을 목도했습니다.(2:8-19) 이 모두가
환상이나 공상이 아니라 실제 체험이었을 뿐 아니라 그러는 와중에 너무나 놀라운 하나님의 권세에 온전히 붙들려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 현장에 있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밤중에 천사가 나타나서 찬란한 빛 가운데서 메시아 탄생에 대한 예언을 합니다. 또 그
예언을 보증하기 위해서 하늘에서 천군이 내려와 웅장한 찬양을 합니다. 헨델의 메시아 합창곡보다 더 장엄하고 경건하게 들렸을
것입니다. 또 그 예언대로 실제로 일어났으며 아기 예수를 보는 순간 틀림없이 천사의 예언대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평강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에게 감사와 찬양과 경배를 올려 드릴, 즉 그분께 모든 영광을 돌려드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눅 9:31) 본문의 영광도 같은 의미입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기도할 때에 실제로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휘어져 광채가 나더니 무든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29,30절)였습니다. 성경에 구체적 묘사가 없지만 베드로를 비롯한 세 제자가 본 것은 천국의 영광이었습니다.
지상세계와 전혀 다른 광채와 위엄이 아름답게 눈앞에 펼쳐졌던 것입니다.
변화산 기사의 첫 머리는 “이 말씀을 하신 후에 팔일 쯤 되어”(28절)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대로 실현되는 것을 제자들에게
보여주려고 산에 올라갔다는 뜻입니다. 바로 앞에 있는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27절)라는 말씀입니다. 제자 중 일부가 죽기 전에 천국의 영광을 볼 수 있다고 말했으니 세 제자가
본 것은 실제 천국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장엄했으면 베드로가 산 밑으로 내려가기 싫다고 말했을까요?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7:22)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제자들을 위해 중보 기도한 내용입니다. 그 기도의 시작이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죄인을 구원하는 일이 하나님의 영광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영광을 제자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제자들도 동일한 사역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이 진리의 영인 성령을 통해 복음의 비밀 깨닫게 되고, 또 성삼위 하나님이 하나가 된 것 같이 하나가 되며,
비록 세상에서 미움을 받으나 진리로 이겨내며, 하나님이 당신을 세상에 보낸 것 같이 저들도 세상으로 보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신
것입니다. 또 세상 사람들이 복음의 진리를 전하는 제자들을 볼 때에 아버지의 이름과 당신의 십자가 사랑을 알게 해달라고 하면서
기도를 마쳤습니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삽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7:23-26)
요컨대, 하나님의 영광은 당신께서 인간 앞에 당신다우심을 직접 나타내실 때에 인간이 보고 듣고 느끼게 되는 장엄함과 거룩함을
말합니다. 그분의 현현(顯現)은 천사나 빛과 구름 같은 가시적 매개체를 통해, 혹은 말씀과 기도 같은 신자와의 불가시적인
영적교통을 통해 드러납니다.
어떤 경로가 되었던 그분을 실제로 만나 그분의 마음을 읽게 된 신자는 그분을 향한 사랑과 소망으로 충만해집니다. 또 마땅한 감사와
찬양과 경배를 올려드리며 그분 뜻대로 순종하게 됩니다. 이것 외의 어떤 반응도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그분의
영광을 실제로 본 것도 아닙니다.
레위기 1장부터 7장은 다섯 가지 제사에 관한 말씀입니다. 레위기 8장부터 10장은 제사를 집례하는 제사장에 관한 말씀으로 8장에서는 제사장의 위임식, 9장에서는 제사장이 집례하는 첫번째 제사에 대하여, 10장에서는 제사장이 여호와께서 명하지 않은 다른 불을 사용하여 제사를 드렸을 때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죽는 사건을 소개합니다.
레위기 9장의 내용을 소개합니다.
1-6. 아론과 그 아들들의 임직식의 헌물에 대한 모세의 명령
7-14. 아론이 자기를 위해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다.
15-21. 백성을 위해 속죄제, 번제, 소제, 화목제(수은제, 감사제)를 드리다.
22-24. 제사장이 백성을 축복하매 하늘에서 불이 임하여 번제를 사르다.
칠 일 간의 위임식을 끝낸 아론과 그 아들들이 제사장으로 취임하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모세가 제사를 지낸 위임식과
달리 취임식부터는 아론이 직접 제사를 드리기 시작한다. 모세는 아론에게 제사장의 직무를 시작하도록 명하였다(1-7절). 이에
아론은 자신을 위하여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고(8-14절) 백성들을 위하여 속죄제와 화목제를 드렸다(15-21절). 이때
하나님께서 불로 단 위의 제물과 기름을 사르셔서 취임을 인정하는 증표를 주셨다(22-24절).
레위기 8장에 소개된 제사장 임직에 대한 계속입니다. 7일 동안의 위임식을 마친 제사장은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렸습니다. 이는 제사장이 위임된 후 하나님께 드린 첫 제사로서 제사장들을 위한 제사, 온 회중을 위한 제사, 모세와
아론의 축복과 불로 나타난 여호와의 영광 등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중에서도 아론이 드린 첫 제사는 아론이 신적 권위를 갖고서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중재자로 출발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론은 제사장으로 선택된 후 칠 일 간의 위임식 행사를 통해 속죄제를 드리고 스스로를 정결케 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장에서는 취임식 행사로 아론에게 다시 속죄제를 드리도록 요구하고 있다. 이는 몇 가지 측면에서
구속사적 의미를 보여 준다.
첫째는 끊임없이 요구되는 속죄 제사를 통해 인간의 철저한 부패와 죄성을 보여 주고 있다. 즉 인간은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언제나 지중에 존재하므로 오직 하나님 외에는 소망이 없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둘째는 끊임없이 드려야 하는
속죄제는 구원에 있어 인간의 노력이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보여 줌으로써 완전한 대제사장인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을 나타내고 있다.
예수님의 대속은 자신을 단번에 드림으로 모든 구원을 이루시고 짐승의 희생 제사를 온전히 이루신 것이다. 한편 아론이 백성들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린 것은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 구원 사역의 유일한 중보자이심을 예표하고 있다.
칠 일 간의 위임식 행사를 통해 끊임없이 자진을 정결케 한 아론은 취임식을 맞아 다시금 속죄제를 드려야 했다. 인간은 연약하고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자랑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음을 교훈해 준다. 따라서 성도들은 매일의 삶 속에서 자신의 죄를 돌아보아 회개하여야 하며,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오직
그의 구원과 은혜만을 바라보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1) 아론에게 헌제를 지시하는 모세(1-2)
모세는 제사장들의 위임식 후 팔 일째 되는 날에 아론과 그 아들들과 이스라엘 장로들을 불러모으고 아론으로 하여금
대제사장으로서 첫 제사를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대제사장인 아론도 하나님 앞에서 항상 자신의 죄를 사함받아야 하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1-2).
2) 제사의 순서(3-6)
아론이 자기와 백성을 위하여 드리는 제사의 순서로 첫 번째로 드리는 속죄제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있는 죄를 용서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번째로 드리는 번제는 속죄받은 자로서의 온전한 헌신을 나타냅니다. 마지막으로 드리는 화목제는 하나님과 백성의
진정한 교제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축복에 감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3-4)
.
모세가 아론에게 명령한 것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였습니다(5-6).
3) 아론 자신을 위한 속죄제와 번제(7-14)
위임식이 끝난 아론은 대제사장으로서의 백성의 죄를 위한 속죄제를 드리기 전에 자신을 위한 속죄제를 먼저
드렸습니다(7-11). 그 이유는 죄의 문제가 해결된 후에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의 고백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위해 속죄제를 드린 아론과 그 아들들은 번제를 드렸습니다. 번제의 향기를 하나님께서 향기로운 제사라고 하셨듯이, 번제는 속죄함을 받은 하나님 백성의 헌신과 성결과 충성스러운 삶을 상징합니다(12-14).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도 회개해야 할 죄인이기 때문에 완전하고도 영원한 그리스도의 중보가 필요한 것입니다.
4) 백성을 위한 제사 (15-21)
아론은 자신을 위해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고 난 후 백성을 위해 속죄제와 번제와 소제, 그리고 화목제를 드렸습니다(15-21).
5) 손을 들어 축복함(22)
아론은 하나님과 백성 간의 중보자로서 그 모든 제사가 하나님께 기쁘게 열납되었다는 의미에서 백성을 향해 손을 들어 축복하였습니다. 축복을 선포하는 자는 제사장이지만 축복을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22).
6) 하나님의 영광(23-24)
아론은 대제사장으로서 첫 직무를 끝마치고 모세와 함께 회막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모세와 아론은 회막에서 나와
백성에게 축복하였습니다. 그때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제사장으로 위임된 아론의 첫 직무를 기쁘게
받으셨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의 축복 행위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그리고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모두
태웠습니다(23-24).
주께서 주신 오늘!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시한 모세 그리고 순종한 아론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던 것 처럼 나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길 원합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제사장 취임식을 하고 8일이 지났습니다(1절). 모세가 이들을 불러 예배를 시작하게 합니다. 위임식 이후 8장
35절에서 ‘ 칠 주야를 회막 문에 머물면서 여호와께서 지키라고 하신 것을 지키라 그리하면 사망을 면하리라 내가 이같이 명령을
받았느니라 ’ 고 했던 모세의 명령을 온전히 지켜 회막 문 밖으로 나가지 않던 7일이 지나 첫 번째 행보를 시작합니다.
제사장이라는 신과 인간의 중재자로서 그들은 먼저 하나님과 완전한 만남을 마친 후, 사람에게 나아갔음을 교훈 삼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분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새로운 직분을 임명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은 ‘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
고 선언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가 그렇게 잘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모세보다 나은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아닌 척 위선을 뒤집어쓰지도 말고, 그대로 포기해 버리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먼저 우리가 하나님과 만나는 것을 최우선적으로
하기 원하십니다.
모세가 아론에게 속죄제와 번제를 드려야 한다고 한 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예배이기도
합니다. 아론은 자신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다리 역할을 하는 제사장으로 위임받았음에도, 여전히 모세의 말을 따라 자신을 위한
예배를 준비합니다. 우리도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소유된 백성이라는 거창한 명칭에 취하지 말고 예수님
말씀을 따라 바른 예배를 드려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아론은 먼저 속죄제를 드립니다. 8장의 임직식에서 이미
속죄제와 번제를 드렸음에도 재차 드려야만 했습니다. 그토록 중요한 고백이었습니다. 8절부터 11절입니다. 제사장의 속죄제는
일반적인 속죄제가 간, 기름, 콩팥만 번제단 위에 얹어서 태웠던 것과 달랐습니다. 기름, 콩팥, 간을 번제단 위에서 태울 뿐
아니라 나머지 고기와 가죽도 이스라엘 진영 밖 재를 버리는 곳에서 다 태웠습니다. 나아가 제물의 피를 손가락에 찍어서 제단 네
뿔에 바르고 제단 밑에 쏟아 버렸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이 ‘ 세상을 바꾸고 신과 마주하게 돕겠다 ’ 는 명분을 들어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자가 아니라, 스스로를 가장 먼저 죄 사함이 필요한 존재로 여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속죄제의 제물이 흠
없는 수송아지였다는 것은 아론이 하나님과의 독대 이후 처음 드린 예배에서 출애굽기 32장에 있던 사건, 하나님 계명을 받으러 간
모세를 기다리지 못하고 백성에게서 모은 황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었던 것, 을 떠올려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 은혜
없이는 이 자리에 설 수 없는 ‘ 만성적 우상 제작자 ’ 임을 잊지 말아야 했습니다. 제물의 피로 제단 네 뿔에 찍고 밑에 쏟아
대속물의 흔적이 예배에 선명히 드러나야 했습니다. 속죄제를 드리고 나서, 아론은 번제를 시작합니다. 12절부터 14절입니다. 숫양
머리나 각을 뜬 사지를 태운 후 그 위에 내장과 정강이를 씻어서 태웠습니다. 속죄제를 드림으로 죄를 용서받았을 뿐 아니라,
번제를 통해 자기 인생을 헌신하겠다고 다짐한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에 대한 감사 고백으로서의 속죄제와 헌신을
소망하고 결단하는 번제를 마친 아론은 백성을 위한 제사를 시작합니다. 15절부터 22절은 이 제사들을 통해 백성을 위한 염소를
가져다가 속죄제를 통해 죄 용서를 선언하고, 번제를 통해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고백하고 결단하며, 소제를 통해 이것이 매일의 순종과
헌신으로 증명되어야 함을, 화목제를 통해 그 결과로 받기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과 참된 교제의 기쁨임을 전했다고 합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예배는 온 백성의 철저한 준비와 긴장감 속에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백성에게 제물을 준비하게
합니다. 이 제사는 한 사람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숫염소를 가져와 속죄제를, 흠 없는 송아지와 어린양을
가져와 번제를, 수소와 숫양을 가져와 화목제를, 기름 섞은 소제물을 가져와 소제를 드렸습니다(3-4절). 아론과 자녀들이 임직식을
마치고 회막 문에서 하나님과 독대하던 때는, 백성들도 거룩한 두려움과 떨림으로 기다려야 했습니다. 23절에서도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 기다림이 지나야 하나님 영광의 임재 구름을 영접합니다.
모든 과정에서 불순한 부분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결코 예배를 완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를 기억하며 우리가 주일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하는지, 하루를 거룩한 두려움과 떨림으로 조심하는지, 그리하여 주일을 제외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여섯 날이
삶의 예배로 드려지고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던 예배의 명령들을 하나씩 실천합니다.
예배는 약속으로 시작해 축복으로 맺습니다. 4절은 여호와의 영광이 ‘ 오늘 ’ 나타날 것이라 예언하고 6절은 여호와의 영광이 ‘
너희에게 ’ 나타날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16-17절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루어진 약속은 확실한 축복을 전합니다.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한 내용은 민수기 6장 24-26절에 있습니다. ‘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
오늘도 예배를 준비하고, 예배자로 살아가는 모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분명한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지켜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얼굴을 우리에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확실히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 얼굴을
우리에게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복과 안전, 은혜와 평강은 예배를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24절에는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 제물을 태우는 것을 온 백성이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막연하지 않았습니다. 예배를 드린 날, 영광이 불로 제단 위 번제물과 기름을 태웠습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피를 쏟아 자신을 제물
삼으셨던 예수님을 닮기 위해 스스로를 제단 위에 두는 모든 이에게 주시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불이 반드시 임하시고, 제단
위에 올려둔 인생을 성령의 불길로 태우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온 백성이 찬송 부르며 주님께 굴복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8-29절입니다. ‘ 28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
죄(罪) = 넉 사(四) + 아닐 비(非) / 하마르티아(hamartia) ἁμαρτία
불법(不法) 요한일서 3: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Everyone who sins breaks the law; in fact, sin is lawlessness.
불의(不義) 요한일서 5:17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All wrongdoing is sin, and there is sin that does not lead to death.
불선(不善) 야고보서 4:17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Anyone, then, who knows the good he ought to do and doesn't do it, sins. 불신(不信) 요한복음 16:9, 마가복음 16:16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in regard to sin, because men do not believe in me;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Whoever believes and is baptized will be saved, but whoever does not believe will be condemned.
불순종(不順從)
에베소서 2: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in which you used to live when you followed the ways of
this world and of the ruler of the kingdom of the air, the spirit who is
now at work in those who are disobedient.
에베소서 5:6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Let no one deceive you with empty words, for because of such things God's wrath comes on those who are disobedient.
디도서 1:6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찌라. An elder must be blameless, the husband of but one wife, a man whose
children believe and are not open to the charge of being wild and
disobedient.
ἁμαρτία, ίας, ἡ 266
1. 죄. 2. 고린도후서 11:7 / 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
발음
/ 하마르티아(hamartia) 어원 / 26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죄(요 8:21, 롬 5:20), 불법(살후 2:3), 죄악(히 11:25). 신약 성경 / 173회 사용
* 264. ἁμαρτάνω
1. 하나님의 종교적 도덕적 법을 어기고 잘못하다.
2. 죄를 범하다
발음
/ 하마르타노(hamartanō) 어원 / [기본형] 미래 ἁμαρτήσω, 제2부정과거 μάρτω, 가정법 ἤμαρτον, 제1부정과거 ἡμάρτησα, 가정법 ἁμαρτή- σω, 과거분사 ἁμαρτήσας, 1[부정불변사]과 3313의 어간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죄를 범하다(마 18:15), 죄를 짓다(눅 15:18, 롬 6:15), 죄로 인하다(요 9:2), 범죄하다(롬 2:12), 죄가 있다(벧전 2:20). 신약 성경 / 43회 사용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개념
1. 죄의 본질
죄에 대한 잘못된 생각과 견해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죄를 물질적 몸의 특징, 진화되지 못한 동물성, 존재의 부정 혹은 제한, 단순한 결핍, 실재(實在)하지 않는 착각, 정신의 불건전한, 병적 상태, 선에 대한 필요한 대립 원리, 사람의 이기심, 인간의 자아 적 의식의 투쟁 등으로 보는 것들이 그러하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는 죄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다.
요한일서 3:4은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죄”라는 히브리어 “하타”는 “표적을 빗나가다, 실패하다”이라는 뜻이며, 이와 관련된 용어들은 아바르(벗어나다, 위반하다), 파솨(반역하다, 위반하다), 솨가(잘못을 범하다, 길을 벗어나다)등이 사용되었다.
신약에서도 하마르티아, 포네로스, 아디키아, 파라바시스등의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들은 “악, 불의, 부정, 위반”등의 의미를 갖는다.
즉 죄는 단순히 사회의 도덕적인 기준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을 말하며, 그 기준에 부족한 것이나 그것을 어기는 것을 말한다.
시편 51: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이 죄이므로, 죄는 하나님 앞에서의 문제이다. 특히,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인격과 속성과 권위를 반영하므로, 죄는 그 성격상 하나님의 인격과 속성을 모독하는 것이요 그의 권위를 침해하는 것이다. 여기에 죄의 사악성과 심각성이 있다.
창세기 39:9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이 죄이므로, 죄는 항상 적극적 성격을 가진다. 소극적 죄, 태만의 죄도 결국 하나님의 법을 어긴 죄가 된다. 또한, 죄와 죄가 아닌 것, 둘 중에 하나라는 선(線)이 분명하다. 그 둘 사이에 중립지대는 없다.
▶ 원죄(原罪, original sin)
원죄(原罪)란, 아담이 지은 죄를 가리키는데, 우리는 이러한 의문이 생길 수가 있다. 창세기 시대에 아담이 저지른 그의 실수 때문에 왜 내가 하나님께 죄인이 되며, 아담이 지은 죄로 인하여 나까지도 죽어야만 하는가?
무엇보다도 나는 결코 선악과를 먹은 적이 없다. 그러므로 내가 죄인이라는 것은 억울한 일이라고 항변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지은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로마서 5:12-14 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하나님은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창세기 2:16-17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에는 “먹지 않으면 죽지 않는다.”는 반대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다. 아담은 하나님께 지음을 받은 첫 사람으로서, 온 인류를 대표하는 것이다.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당부는 아담과 하나님만의 관계가 아니라, “인류 전체와 하나님과의 관계적인 언약”이었다. 아담은 모든 인류를 대표하여 하나님과 언약하였다고 보는 것이 바로“언약적 대표설”이라고 부른다.
만일 그 실과를 먹으면 죽게 되며, 그 실과를 먹지 않으면 영원히 죽지 않게 되는 언약인 것이다. 이 사실은 로마서 5장이 증거 할 뿐만 아니라, 죄와 정죄와 죽음의 보편성이 증거 한다. 성경은 분명히 죄의 보편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로마서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에베소서 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죄는 죄책(罪責)과 부패성(오염)으로 구성된다. 다시 말하여 우리에게 “원죄(原罪)”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죄책과 오염”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란 물질명사가 아니라, 관계(關係)를 의미한다. 죄책이란, 하나님의 법을 어겼다는 “법적 책임”을 가리키는데, 좀 더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도덕적으로 비난 받아야 마땅하다는 사실 둘째,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
죄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죄책(罪責)이다. 특히 원죄에 의한 죄책을 우리는 "원시적 죄책(Original Guilty)" 이라고 한다. 또 부패성이란, 죄인이 가지고 있는 죄악 된 성질(죄성, 罪性), 죄를 향한 경향성(傾向性) 혹은 연약성(軟弱性)을 가리킨다. 아담의 첫 범죄의 죄책의 전가(轉嫁)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범죄로 인한 인성의 부패성이 모든 인류에게 전달되었다. 즉 원죄의 결과가 오염된 죄 성을 초래한다. 그것을 우리는 원시적 오염(Original pollution)이라고 부른다.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시편 14: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고린도후서 11:3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시편 51:5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다윗의 이와 같은 고백은 곧 죄성(罪性)을 의미한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죄성을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하였다 에베소서 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우리는 진노의 자녀이었다고 한다. 이것은 이미 부패와 오염된 죄성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창세기 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이사야 64:6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시편 58:3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 자범 죄(自犯罪, actual sin)
자범 죄(自犯罪)란, 원죄의 부패성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실생활 속에서 짓는 죄를 가리킨다. 원죄와 자범 죄는 몇 가지 측면에서 서로 구별된다.
첫째, 인과(因果)의 관계가 있다. 원죄는 원인이요 자범죄는 그 결과이다. 그러므로 원죄는 하나이지만, 자범죄는 여러 겹(sins)이다.
둘째, 인식의 측면에서도 서로 다르다. 원죄는 모든 사람에게 다 인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신앙자들은 그것의 존재를 빈번히 부정하지만, 자범죄의 존재는 일반적으로 인정된다. 물론 오늘날 진화론의 영향으로 사람들의 죄의식이 많이 상실되어 있다. 진화론자들은 사람의 죄를 동물성의 잔재(殘在) 정도로 간주하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께 대한 악으로 보기보다는 단순히 다른 사람들에 대한 악 정도로 생각한다.
셋째, 죄책의 측면에서도 서로 다르다. 원죄는 본성의 죄로서 죄책을 포함하지만, 자범죄는 자신의 의지적 악행이기 때문에 더 큰 죄책을 가진다고 본다.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은 과거와 현재와 장래의 모든 죄로부터 사함을 받는다. 그것은 “죄책”에 대해서 면책되어짐을 뜻한다. 그러나 거듭난 그리스도인들도 그 “죄성”은 갖고 있다. 즉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여도 알게 모르게 죄를 지을 수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인은 죄를 지어도 하나님과의 법적 신분적 상태는 변하지 않는다.
로마서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우리는 소위 칭의적 상태(의롭다고 부르심)를 유지하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효력이 유지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죄를 기뻐하지 않으시며, 성경은 죄와 심판에 대하여 징계와 책망의 차이가 있음을 밝히 증거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48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고 말씀하셨다(눅 12:47, 48).
또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고후 5:10)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골 3:25)이라고 하였고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고전 3:15)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행한 대로 보응하실 것이라고 증거한
바울 사도의 증거도 죄와 심판의 차등(差等)을 전제한다(롬 2:6).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롬2:6) “
2. 구약과 신약에서 나오는 죄의 개념
* 구약성경에서의 죄의 개념 8가지
죄에 대한 성경적 개념은 신구약 성경에서 죄에 대해 사용된 단어들에 관한 연구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성경에 나오는 '은혜(grace)'를 나타내는 단어에 비해서 죄에 대한 용어는 상당히 많이 있다.
'은혜'를 표현하기 위해서 오직 세 가지의 단어가 사용된다. 구약성경에 있는 첸(chen)과 체세드(chesed), 신약성경에 있는 카리스(charis)이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구약성경에는 죄를 나타내는 최소한 8개의 기본 단어가 있으며, 신약에는 최소한 12개의 기본 단어가 있다. 그 모든 단어들이 죄에 대한 교리에 있어 기본적인 개념의 틀을 제공하고 있다.
1. 챠타(Chata) - 표적을 벗어난 것
죄에 대한 모든 형태의 단어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이 단어는 구약 성경에 522회 사용되고 있다. 이 단어의 기본적인 뜻은 '표적을 벗어난 것(to miss the mark)' 으로 헬라어 하말타노(hamartano)와 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그러나 '표적을 벗어난 것'은 '다른 표적을 쏜 것' 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올바른 표적을 맞히지 못해서 죄를 짓는 것은 잘못된 표적을 맞힌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즉 이 단어는 '수동적인 벗어남의 개념(a passive one of missing)' 뿐만 아니라 '능동적인 쏨의 개념(an active one of hitting)'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도덕적인 죄악, 우상숭배, 의식적인 죄를 지칭할 때 사용된다.
2. 라(Ra) - 파멸시킴(breaking up)' 혹은 '폐허로 만듦(ruin)
구약성경에서 444번 나오는 이 단어는 헬라어 카코스(kakos) 및 포네로스(poneros)에 상응하는 단어로, '파멸시킴(breaking up)' 혹은 '폐허로 만듦(ruin)' 이라는 기본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단어는 때때로 재난(calamities)을 의미하기도 하고 많은 경우에 '사악한 것(wicked)'이라고 번역된다. 이 단어는 또한 '도덕적으로 그릇된 것(something morally wrong)' 은 물론 '손상을 입히는 것(something injurious)' 도 의미한다(창 3:5, 38:7, 삿 11:27). 이사야 45:7에서는 하나님이 빛과 어둠, 평안(well-being)과 라(ra, 환난)도 창조하신 분으로 언급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이 구절에 나오는 단어가 재난 및 다른 사악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이러한 이해가 사실이라면, 이것은 비록 죄를 짓는 것에 대한 책임은 창조주가 아닌 피조물에게 있을지라도 사악한 것을 포함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파샤(Pasha) - 반역하는 것(to rebel)
이 단어가 보통 '배반(transgression)' 이라는 단어로 번역되고 있을지라도 이 단어가 가지고 있는 기본 개념은 '반역하는 것(to rebel)' 이다. 열왕기상 12:19, 열왕기하 3:5, 잠언 28:21, 이사야 1:2을 보라.
4. 아원(Awon) - 부정(inquity, 죄악)과 죄책(guilt, 저주)이라는 개념
이 단어는 히브리 사상에서 서로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부정(inquity, 죄악)과 죄책(guilt, 저주)이라는 개념(삼상3:13)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단어이다. 이 단어가 '고난당하는 종(사53:6, the Suffering Servant)' 및 '훼방하는 죄(a defiant sin)' 와 관련하여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라.
5. 샤가그(Shagag) - 잘못한 것(to err), 길을 잃어버린 것(to go astray)
이 단어는 '잘못한 것(to err)'이나 양 혹은 술 취한 사람이 보여주는 모습과 같은 '길을 잃어버린 것(to go astray)'을 의미하는 단어이다(사 28:7). 이 단어는 실수를 언급하는 단어인데, 그 실수를 범하는 사람은 그 실수에 대해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율법에서 이 단어는 길을 잃은 사람이 율법에서 어떤 명령을 했는지 알아야 할 책무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단어이다.
6. 아샴(Asham) -고의적인 죄와 고의가 아닌 죄에 대한 죄책(intentional and unintentional guilt)
이 단어는 거의 대부분 레위기, 민수기 및 에스겔서에 나와 있는 성막 및 성전의 의식과 관련하여 사용되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의 죄책감이 이 단어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개념이다. 이 단어는 속죄제와 속건제를 지칭할 때 사용되는 단어로서 '고의적인 죄와 고의가 아닌 죄에 대한 죄책(intentional and unintentional guilt)'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된다.
7. 라샤(Rasha) - 사악한 것(wicked)
이 단어는 출애굽 전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시편, 에스겔, 그리고 지혜서(the Wisdom literature)에 주로 나타나는 단어이다. 이 단어의 뜻은 '의로운 것' 의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악한 것(wicked)'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이러한 단어 연구를 통해서는 우리는 구약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죄에 대한 개념의 3가지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다.
1. 죄는 많은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죄에 대해 사용된 단어의 다양성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죄가 특별히 어떤 죄의 형태인지를 인식할 수 있었다.
2. 죄는 율법과 반대되는 입장에 서 있는 것으로, 궁극적으로 죄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다.
3. 불순종에는 긍정의 개념과 부정의 개념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데, 그 개념은 부정의 개념에서 '좋은 일을 하지 못한 것(omission)' 뿐만 아니라 긍정의 개념에서 '그릇된 일을 한 것(commission of wrong)'도 강조하는 개념이다. 죄는 '표적을 벗어난 것' 뿐만 아니라 '그릇된 표적을 쏜 것'을 의미했다.
* 신약성경에서의 죄의 개념 12가지
1. 카코스(Kakos) - 나쁜 것(bad)
'나쁜 것(bad)'을 의미하는 단어로, 이 단어의 부사형은 때때로 '육체적으로 나쁜 것(physical badness)'
즉 질병(disease)을 의미하기도 하지만(막 1:32), 이 단어의 형용사형은 보통 '도덕적으로 나쁜 것(moral badness)'을 지칭합니다(마 21:41, 24:48, 막 7:21, 행 9:13, 롬 12:17, 13:3-4,10, 16:19, 딤전 6:10).
2. 포네로스(Poneros) - 악한 것(evil)
이 단어는 '악한 것(evil)'에 대한 기본적인 용어로, 거의 대부분 '도덕적 죄악(moral evil)'을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되고(마 7:11, 12:39, 15:19, 행 17:5, 롬 12:9, 살전 5:22, 히 3:12, 요이 11), 악한 영이라 불리는 귀신을 지칭할 때에도 이 단어가 사용된다(눅 11:26, 행 19:12).
3. 아세베스(Asebes) - 경건치 않은 것(godless)
'경건치 않은 것(godless)'이라는 뜻을 가진 이 단어는 거의 대부분 베드로후서와 유다서에서 경건치 않는 배교자라는 표현으로 나타난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경건치 아니한 자라고 지칭된다(롬 4:5, 5:6).
4. 에노코스(Enochos) - 죄책(guilt)
이 단어는 '죄책(guilt)'을 의미하는 단어로 대개 자신의 범죄가 죽기에 마땅한 경우를 지칭할 때 이 단어가 사용된다.
(마 5:21-22, 막 14:64, 고전 11:27, 약 2:10).
5. 하말티아(Hamartia) - 표적을 빗나가는 것(missiong the mark)
이 단어는 죄에 대해 가장 흔히 사용되는 단어로서 신약성경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약227번 등장하는 단어이다. 어떤 작가가 죄에 대해 한 가지 용어만을 꼭 사용해야 한다면 그는 이 단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이 단어가 은유하고 있는 원래 뜻은 '표적을 빗나가는 것(missiong the mark)'이다.
그러나 구약 성경에서의 챠타(chata)처럼, 이 단어는 부정형의 개념뿐만 아니라 '그릇된 표적을 맞추는 것(hitting some wrong mark)'이라는 긍정형의 개념도 포함하고 있는 단어이다. 복음서에서 이 단어가 사용될 때, 이 단어는 거의 대부분 용서 혹은 구원을 언급하는 문맥에서 발견된다(마 1:21, 요 1:29). 이 단어와 관련된 다른 몇 개의 중요한 참고구절로는 사도행전 2:38, 로마서 5:12, 고린도전서 15:3, 고린도후서 5:21, 야고보서 1:15, 베드로전서 2:22, 요한일서 1:7, 2:2, 요한계시록 1:5이 있다.
6. 아디키아(Adikia) - 의롭지 못한 어떤 행동(any unrighteousness conduct)
이 단어는 넓은 의미로 '의롭지 못한 어떤 행동(any unrighteousness conduct)'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과 관련해서(롬 1:18), 돈과 관련해서(눅 16:9), 인간 육신의 지체와 관련해서(롬 6:13, 약 3:6), 행위와 관련해서(살전 2:10) 사용되는 단어이다.
7. 아노모스(Anomos) - 법과 질서가 없는 것(lawless)
'불법(iniquity)'이라고 번역되는 이 단어는 '법과 질서가 없는 것(lawless)'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단어는 넓은 의미로 법을 어기는 것과 관련되어 사용된다(마 13:41, 24:12, 딤전 1:9).
종말론적 사상과 관련하여 이 단어는 불법의 사람, 즉 적그리스도를 언급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살후 2:8).
8. 파라바테스(Parabates) - 법을 위반하는 것
범죄자(transgressor)'를 의미하는 이 단어는 보통 특별히 '법을 위반하는 것' 과 관련해서 사용되는 단어이다(롬 2:23, 5:14, 갈 3:19, 히 9:15).
9. 아그노에인(Agnoein) - 무지한 우상숭배(ignorant worship)
이 단어는 참된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에 대한 '무지한 우상숭배(ignorant worship)'를 언급할 때 사용되는 단어인데(행 17:23, 롬 2:4), 그러한 무지는 사람을 죄인의 상태로 만든다(히9:7).
10. 플라나오(Planao) - 비난받아 마땅하기까지 길을 잃는 것(to go astray in a culpable sense)
'비난받아 마땅하기까지 길을 잃는 것(to go astray in a culpable sense)'이 바로 이 단어가 의미하는 것이다(벧전 2:25).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속일 수 있다(그들을 길을 잃게 하는 것)(마 24:5-6);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속일 수 있다(요일 1:8); 그리고 사단은 만국을 미혹으로 이끕니다(계1 2:9, 20:3,8).
11. 파라프토마(Paraptoma) - 타락해 나가는 것(falling away)
이 단어가 가지고 있는 개념은 '타락해 나가는 것(falling away)'으로서, 대부분의 경우에 의도적인 타락에 대해서 사용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이 단어를 로마서 5:15-20에서 6번 사용하고 있다. 마태복음 6:14, 18:35, 고린도후서 5:19, 갈라디아서 6:1, 에베소서 2:1, 그리고 야고보서 5:16을 보라.
12. 히포크리시스(Hypocrisis) -
이 단어는 세 가지 개념을 함께 가지고 있다.
(1) 어떤 사람이 계시를 그릇되게 해석하는 것(to interpret falsely as an oracle might do);
(2) 어떤 사람이 거짓된 행동을 꾸미는 것(to pretend as an actor does);
(3) 그릇된 것으로 알려진 해석을 따르는 것(to follow an interpretation known to be false). 종말의 때에 거짓 선생들은 거짓된 해석을 할 것이고, 거짓된 행동을 꾸밀 것이며,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가르침을 좇게 될 것이다(딤전 4:1-2). 외식하는 자들은 처음에 그들 자신이 미혹되어서 그릇된 것을 옳게 만들고, 나중에는 다른 사람까지 미혹하게 된다. 이것이 이 죄의 치명적인 속성이다.
신약성경의 단어 연구로부터 몇 가지 결론이 도출될 수 있다.
(1) 죄는 '존재하는 어떤 뚜렷한 기준'을 어기는 것이다.
(2) 궁극적으로 모든 죄는 하나님에 대해 의도적으로 반역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표준을 어기는 것이다.
(3) 죄악은 여러 가지 형태를 가지고 있다.
(4) 인간의 책무는 분명하며 모든 인간들은 그 책무를 뚜렷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그 책무를 다하지 않는 것도 큰 의미에서 죄라고 말할 수 있다.
죄의 가장 중요한 성격은 '하나님과 반대방향을 지향하는 것(that it is directed against God)' 이다.
우리는 죄에 관한 단어연구를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시기에 죄가 얼마나 치명적인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하박국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하박국 1:13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3. 성경에서 말하는 '죄'(sin, 罪)란,
죄 - 히브리어로 하타아(핫타스) 죄 - ‘άμαρτία’(하마르티아) / 목표에서 벗어난 것
1) 화살이 과녁의 목표에 미달하는 것 2) 과녁의 목표를 더 지나쳐 빗나가 버린 것
이 의미는 화살이 과녁을 맞추지 못하고 벗어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지칭하는 과녁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는 것이 죄이며, 이단이므로 죄와 이단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담의 죄를 단순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은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으로써는 정당한 기준 점이 없으므로 죄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표현이며,정확히 표현하자면 그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고 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이기에 죄가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사람의 본분에서 벗어나는 것이고(전도서 12:13)
성경과 진리의 영이라는 과녁을 이탈하는 것이다.
*사람이 지음을 받을 때 하나님의 뜻을 적중 시킬 존재의 목적을 가지고 창조 되었다.(창 1:26-27)
그럼에도 인생은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에 부족하고 빗나가 버렸다. 바로 그 상태가 죄이며, 불행이다.
죄는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는 것(도덕적인 관념과는 다르다.) 죄는 과녁을 맞추지 못한 것 죄는 부주의로 범한 과실까지도 포함됨(모르고 지은 죄) 죄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을 말함 죄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파괴하고 이반하여 자기 임의대로 행동하는 것(롬 8:6-8).
죄에 대해 변함없이 적대하시는 하나님은, 그 의로움과 그 완전한 공의라는 속성 때문에 죄를 용납하실 수 없다. 세상 죄는 어린 양(예수님)의 어깨위에 지워졌으며(요 1:29)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은 그 십자가에 쏟아졌다. 그러기에 십자가의 피 아래에서만 인간은 비로소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그래서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행 4:12, 요 14:6)
죄가 실재(實在)하듯 지옥도 사실이며 심판도 사실이다.(히 9:27. 계 20:10. 계 21:8. 롬 3:23. 롬 6:23. 요일 1:9)죄와 지옥과 심판은 서로 별개가 아니라, 하나이다.
죄는 무엇을 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이다.(마 8:21-22) 죄는 윤리나 도덕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나타난 죄의 여러 현상보다 더 깊고 본질적인 문제이다. 죄는 아버지를 등지고 나가는 탕자와 같다. 죄는 만왕의 왕께 반역하는 태도입니다. 창조주이신 만주의 주를 거절하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 근원이 되시는 분을 일부러 잊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원수 되는 것이다. 죄는 자기중심적인 마음과 생각이며 삶의 태도이다.(자아) 죄는 항상 육체적이며 동물적이며 본능적입니다.(자아), 유다서1:10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지만 신적 형상을 잃고(본능과 탐심만이 생명을 추동[推動]하는) 짐승이 된 것이다.
죄는 늘 육체-중심적이며, 물질적이며, 권력적이다.
죄는 항상 외모-지상주의 적이며 쾌락적이며 이기주의적이다.
죄는 개인-이기주의, 집단-이기주의, 국가-이기주의로 나타난다.
죄는 항상"먹음직도 하고, 보암직 도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창세기 3:6)특징이 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위한 육체적 욕구와 에너지로 움직여지는 모든 가치들이다.
요일 2:16의 말씀은 창세기3:6절과 하나가 된다.
인간의 삶 그 자체가 거의 전부 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죄는 그 자체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다.
죄는 다양한 현상으로 나타나지만 그 본질은 하나이다.
딤후3장1절-5절에서 나타나는 현상과 갈5장19-21에서 열거되는 것들이다.
또, 보이지 않는 - 영이신 전능자 앞에서 보이는 사람(목사나 교주)을 높이 세우는 것은 아론의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것(출32:)와 똑같다. 자기를 높이는 목사나 이단 사이비 교주들은 우상이다.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을 믿음의 본보기로 추겨 세우고 설교의 례[例]와 간증의 본보기로 삼는 행위 역시
죄는 하나의 세력이다. 욕심, 시기, 미움, 증오등과 같이, 악의 힘, 어둠의 힘이고, 타오르는 열정이다.
죄는 지옥이 지옥 되게 하는 원소이며 지옥을 불타오르게 하는 에너지원(源)이다.(약 3:6)
* 죄는 자기의 의를 나타내기 위한 순종도 죄다(롬10:2-3) - 자존심, 체면, 자기생각
마 5:45-47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만 해도 안 된다.) - 원수 사랑해야
*죄와 관계된 성경구절
약 4:17, 약 2:9, 롬 14:23, 삼상 12:23, 요 8:24-27, 16:9, 롬 12:11, 잠 21:4, 신 15:7-11, 렘 48:10
*죄의 종류
바이스 - 음주(중독), 마약 복용(자기가 자신에게)
크라임 - 율법 상의 죄 - 도적, 상해, 살인, 사기
씬(sin) - 종합적인 죄(하나님을 떠날 때)
4. 죄란 무엇인가?
1. 죄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죄라고 말할 때 살인, 강도, 간음, 사기 등 외형적인 범죄를 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외형적인 범죄뿐만 아니라 교만, 질투, 증오, 시기, 탐욕, 음욕 등도 내적인 죄라고 지적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죄 없는 자가 있을까?
성경은 인류 모두 죄의 구속을 받고 있는 죄인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롬 3:10). 아무리 선하고 의로운 일을 행한다 할지라도 율법아래선 죄인이며,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죄 없는 이가 없다고 말씀한다. 기독교적인 신앙관에서는 죄에 대해 인간의 전적타락(Total Depravity)을 믿고 있다. 인류는 죄의 영향에 의해 온갖 부패와 불의, 불행, 질병 등을 영육 간에 불행한 고통을 겪게 되었고, 종국에는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창3:16-19, 롬6:23).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그 사는 날이 짧은데다가, 그 생애마저 괴로움으로만 가득 차 있다.”(표준 새 번역, 욥14:1)죄의 기원과 종류모든 인류가 죄인일 수밖에 없는 사실은 타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선하게 창조된 인류가 마귀의 유혹과 인간의 선택으로 죄가 들어왔다는 것이다(창3:1-13).
즉 죄는 사단에게서 기인하였고 인간에게 죄를 짓도록 사단이 유혹했다.
타락에서 기원된 죄는 외적인 범죄뿐만 아니라
그 근원(분노, 욕심, 교만 등)까지 죄로 규정하고 있다.
불신자나 초신 자의 경우 왜 모든 인류가 죄인지에 대해 반문할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 자체가 죄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요16:9).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일을 행하는 모든 행위를 죄라고 규정하고 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 인해 모든 인류는 죄를 가지고 태어나게 된다(시 51:5).
이것을‘원죄’(Original Sin)라고 구분한다. 원죄는 한 사람의 순종치 않음으로 발생한 죄악이다.
또한 원죄는 아담이 인류에게 남긴 상속 물로 인류의 가장 보편적인 죄악이며 모든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왔다(롬5:12). 이 원죄의 속박의 틀을 깨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즉 한 사람의 죄악으로 사망이 들어왔던 것을 한 사람의 희생으로 의롭게 될 수 있게 됐다(롬 5:15-21).
한편 아담 이후 인간들은 수많은 죄악을 범하게 됐는데 이를 ‘본죄 혹은 자범 죄’(Actual Sin)라고 불린다. 자범 죄는 한 개인이 원죄의 영향을 받아 스스로 고의적으로 짓는 범죄를 가리킨다. 그러나 자범 죄는 ‘살인, 강도, 사기, 간음 등’ 외부적인 생활의 죄와 ‘교만, 질투, 증오, 육욕, 사욕 등’ 마음으로 짓는 내적 생활의 죄로 구분된다.
죄의 본질과 특성인류에게 원죄를 선사한 아담이 지은 죄는 무엇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죄가 들어왔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두지 않으셨거나 선악과만 없었다면
죄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일부로 인류가 죄를 짓도록 만들기 위해 동산 가운데 선악과를
두신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과연 그럴까?
아담의 죄는 금단의 열매를 따먹은 것이 죄라기보다는 불순종이 죄의 원인이 된다.
인간에게 자유의지(선택권)를 주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에덴동산을 지킬 것과
선악과를 먹지 말 것을 명령하셨다. 그러나 사단의 유혹에 넘어간 인간은 교만과 욕심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게 된 것이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셨을 때
그들은 잘못을 타인에게 전가시키는 죄를 범하였다.
죄의 특성은
① 전염성이 강하다는 점이다. 아담 한 사람의 죄가 온 인류에 전가됐으며, 죄는 주변 사람들을 쉽게 오염시킨다. ② 불치의 병(사망에 이르는 병)과 같다.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가 없었다면
완치되기 어려운 병처럼 용서받기 어렵다.
③ 고리의 빚과 같다. 죄는 빚처럼 갚지 않으면 견딜 수 없으며,
고리의 이자처럼 불어나듯 죄를 용서받지 못하면 다른 죄까지 불러온다(눅 7:41, 마 6:12).
④ 족쇄와 같다. 법을 어기면 벌을 받아야 하듯 죄를 범하면 반드시 그에 따르는 대가를 치루어야 하며,
심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요일 3:4).
⑤ 사단의 노예로 만든다. 죄를 진 모든 인간은 사단의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롬 6:17-18).
그렇다면 전적 부패한 인간은 죄로부터 어떻게 자유로워 질수 있는가?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다고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달을 수는 있지만 치유하거나 속죄 받지는 못한다.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와 그를 믿음으로써 죄 용서함을 받고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다(롬 3:25, 고후 5:21).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과 회개만이 죄에서 해방될 수 있다.
2. 죄의 본질 4대 요소
① 불순종(不順從)
죄의 본질은 불순종이며, ‘믿음과 신뢰의 결핍’에서 나오는 것으로 불신에서 파생된 죄악이다. 특히 불순종은 하나님의 법에 대한 이탈, 지나침(반항, 계명위반)으로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의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함으로써 징계를 받았다(아담, 사울 등).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롬 5:19)
② 불법(不法)
하나님께서는 죄악 된 인류를 구원의 방편으로 율법을 주셨다. 하나님의 법이든 사람이 만든 법이든 주어진 법을 어기는 것은 죄이다. 법을 알면서 어겼거나 법이 있는 줄도 모르고 어기게 된 경우도 불법에 해당된다(눅 12:47,48, 롬 2:12).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요일 3:4)
③ 불의(不義)
가장 근본적인 불의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하나님과 관계,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가 올바르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시 50:6, 신 24:13). 또한 선지자시대에는 의가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돕는다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단 4:27, 암 5:12)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9)
④ 불신(不信)
불신은 불순종과 배반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받고도 믿지 못하는 죄다(요 16:9). 불신은 범사에 믿음을 좇지 않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교훈을 따라 행치 않는 것을 의미한다. 불신앙은 모든 죄의 원천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이다.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롬14:23)
<용서받지 못하는 대죄>
성경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모든 것들, 선을 행하지 않고 악한 행동과 생각들을 죄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모든 죄악들을 속죄 받을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구속은혜와 회개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회개하고 기도해도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있다. 요한일서 5장에는 ‘사망에 이르는 죄’와 ‘이르지 않는 죄’가 있는데, 전자는 기도할 필요가 없고 후자의 경우 하나님께 기도로 간구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16-17절).
죄악 가운데도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는 죄와 그렇지 못한 죄가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① 성령 훼방 죄 : 성령의 사역을 방해하는 행위로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있고 비방·모독하는 죄(마12:31)② 성령 거역 죄 : 성령의 인도를 거부하고, 성령의 사역을 부정(불신)하는 참람 죄(마12:32)
③ 성령 배반 죄 : 하나님의 말씀과 내세 능력, 은사 등을 맛보고 성령에 참여했다가 배교하는 죄
(히6:4-5, 10:26-27)
<죄를 이기는 비결>
▲ 죄에서 떠난 성결의 삶을 살아라.
거룩과 순결의 삶을 가는 성도는 세상의 모든 죄악과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과 성결의 삶을 살면 죄가 왕 노릇하지 못한다(롬 1:4, 약 3:15-18, 4:8)..
▲ 육신의 정욕에 순종하지 말라
죄악 된 인간은 육체적인 욕망으로 인해 죄를 짓게 되며, 성경은 육체의 욕망 15가지를 제시하고 있다(갈 5:19-21). 육신의 정욕은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지 못하도록 방해하지만 이에 순종해서는 절대 안 된다(요일 2:16). 영혼을 거스리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벧전 2:11).
▲ 의의 병기로 만들어야 한다.
성경은 우리의 육체를 불의의 병기로 만들어 죄를 짓지 말고 의의 병기로 만들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도구로 사용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씀한다(롬 6:13). 하나님의 의의 병기가 되기 위해서는 기도와 간구, 말씀으로 무장해야 한다(히 6:13-18).
3. 파멸로 이르게 하는 7가지 죄악
인간을 파멸로 이르게 하는 내적인 죄악을 크게 7가지로 규정하고 있다.
외적인 살인, 강도, 강간, 사기 등은 아니지만 외부적인 죄악의 근원이 되고 있다.
또한 내적인 7가지 죄악은 현대인으로 하여금 영적인 죄악을 저지르게 만들고
하나님을 멀리하도록 만드는 가장 심각한 죄악들이다.
1) 교만(Pride)
교만은 신앙적으로 하나님을 의존하고 복종하기를 거부하며 영광을 자기에게 돌리는 행위로 ‘겸손’의 반대되는 것이다. 성경은 교만을 죄의 근원이며 본질로 간주하였다. 또한 교만은 극단적으로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일종의 자기 숭배의 죄악이다. 지나친 우월감으로 인한 교만은 이웃(교인)과 나, 더 나아가 하나님과의 사이에 벽을 쌓는 죄악이다. 중세스콜라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루시퍼가 교만하게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보좌를 높이려는 시도를 했을 때 최초로 교만이 나타났다(사 14:12-14)고 말했다. 즉 교만은 마귀가 타락한 원인이었고,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를 타락하게 한 주요 수단이다. 잠언에서는 교만을 패망의 선봉이라고 말하고 있고(잠 16:18), 예수님은 사람의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더럽게 하는 악덕 중의 하나로 지목하고 있다(막 7:22).
▲성경어원 : 교만(게아, 잠 8:13), 거만(가아와), 장점을 뽑아내는 것(가온, 잠 16:18)으로 신령한 지혜에 유해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대표적 인물 : 느부갓네살(단 4:30,37),
2) 탐욕(Greed)
탐욕, 탐심은 이기심을 살찌우는 죄악으로 인간을 물질의 노예가 되게 만든다.
성경은 탐욕을 일만 악의 뿌리라고 규정하고 있고(딤전 6:10),
십계명에서는 10번째 계명으로 탐욕하지 말 것을 명령하셨다.히브리인들은 ‘욕망은 영혼을 충동질하여 다른 사람들과 다른 사물들에 미치도록 만든다.’고 생각했다. 구약성경에서는 율법으로 탐심을 금하고 있다(출 20:17). 사도행전 20:33, 디모데전서 6:9, 로마서 7:7에서는 ‘강렬한 욕망이 그릇된 방향으로 가면 돈에 집중될 수 있다’고 지적하며, 탐욕은 돈을 사랑하는 것(금전욕)과 동일시하였다(딤전 6:10).탐욕이란 단어는 종종 악한 것의 목록 속에 들어 있는 비도덕성과 관련되며(엡4 :19), 신약에서는 본질적으로 으뜸가는 우상숭배로 표현하고 있다(엡 5:5, 골 3:5). 또한 터무니없는 욕심(눅 12:15), 법을 어기고 남의 것을 탐내는 것(출 20:17), 소유할 권리가 없는 것을 가지려는 노력(딤전 6:10) 등을 의미한다.
▲성경어원 : 이웃의 소유를 탐내는 것(하마드, 신 5:21), 부당한 이득을 탐내는 것(베차, 잠 28:16), 이기적인 욕심(아와, 잠 21:26), 강렬한 욕망(에피뒤미아, 행 20:33), 무지비한 자기 주장(플레오넥시아, 고후 2:11).
▲대표적 인물: 아간(수 7:16-26), 발람(벧후 2:15)
3) 분노(Wrath)
분노 그 자체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지만, 분노를 통제하지 못했을 때는 범죄가 발생하였다. 최초의 분노 자 가인은 제사문제를 경쟁관계로 인식하고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 받은 것에 격분해 동생을 살인하게 됐다. 가인의 상황을 예로 볼 때 분노의 원인은 내 자신 속에서 발생하며, 분노가 일어나는 것은 죄의 소원을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분노는 인간관계를 경쟁관계로 인식케 만들며 항상 폭력을 유발하게 만든다.구약에서 분노에 부들부들 떠는 난폭한 주먹은 신적 권위를 주제넘게 사칭하는 것으로 여겨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시 37:8-9). 그래서 맹렬한 격분은 이스라엘에 있어서 금지되고 거부되었다(창 49:5-7). 신약에서는 인간의 분노와 그 실행에 대해 강력히 금지하고 있다. 이런 가르침은 산상수훈에서 잘 나타난다(마 5:9,21,22). 분노는 본질적으로 성도를 성화(聖化)하지 못하게 하며, 궁극적으로 영화(榮化)하지 못하게 막는 걸림돌과 같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분노의 해소 방법으로 기도와 용서를 제안하고 있다.
▲성경어원 : 성나다, 화를 내다(카챂, 사 8:21), 흔들리다, 격동하다(라가즈, 신 2:25)
▲대표적 인물 : 가인(창 4:3-16)
4) 음욕(Lust)
성경은 모든 음행과 정욕을 죄로 규정하고 있다.
무절제한 정욕(색욕)은 선한 생활을 파괴할 뿐 아니라 죄의 종이 되게 하며,
고난과 파멸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잠언 기자는 “여인과 간음하는 자는 무지한 자라 이것을 행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망하게 하며 상함과 능욕을 받고 부끄러움을 씻을 수 없게 되나니”(잠6:32-33)고 말씀하고 있다.
특히 성경은 음행을 믿음으로 대항해 직접 싸워야 하는 죄악이기보다는 피하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 만큼 연약한 인간이 음행의 죄를 떨쳐버리기 어렵다는 것을 반증한다(고전 6:18). 또한 음행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도의 몸(성전)을 오염시키는 일과 같다. 방탕한 마음에서 생기는 음욕은 식을 줄 모르며 급격히 오염되는 특성이 있다. 성경에서 음행으로 인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했고(유 7), 모압 여인과 음행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임을 당했다(민 25장). 한편 성경에서는 단순한 육체적인 관계만이 아닌 신앙적인 배교행위까지 영적 음란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성경어원 : 음탕함과 부절제함, 외설스러움, 육욕(아셀게이아, 갈 5:19). 아셀게이아는 육욕과 관계되는 의미로 공공의 예의를 지키지 못하고 범하는 호색스러움을 의미한다.
▲대표적 인물 :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창 19장)
5) 탐식(Gluttony)
인간을 죄악으로 유혹하는 3대 욕구를 물욕, 성욕, 식욕이라고 한다.
식욕은 가장 쉽게 저지를 수 있는 죄악으로 에서는 식탐으로 인해 장자 권을 팔았다.
탐식은 절제하지 못하는 탐욕스러운 인간의 모습을 극명하게 나타내는 모습으로
성경에서는 책망되고 있는 악습으로 지적하고 있다(잠 23:21). 고대 히브리인들은 배나 육체는 열정이나 탐욕의 중심이 되는 곳으로 보았다.
그래서 배를 의미하는 ‘베텐’(욥 20:20)이 탐욕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탐식이라는 것은 우리를 순간적인 유혹에 굴복시켜 버리게 만들고, 파멸시키는 죄악이며, 가장 저지르기 쉬운 죄악이다. 성경은 탐식이 탐욕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악하고 게으른 자들이 지닌 특성(롬 1:29, 잠 21:26)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절제하지 못하는 식욕은 육체를 부담스럽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며, 서서히 육체를 파괴시켜 나가는 죄악이다. 또한 탐식은 육체만 파괴하는 것만 아니라 영성을 파괴하는 죄악이기도 하다.
▲성경어원 : 탐식을 뜻하는 파고스(마 11:19, 딛 1:12)는 ‘배만 위하는 게으름 장이’, ‘나태한 배’, ‘태만한 탐식가’ 등으로 사용됐다.
▲대표적 인물 : 에서(창 25:29-34, 히 12:16-17)
6) 질투(Envy)
질투, 시기는 자기의 가능성을 제한시키며, 일상적 삶을 빼앗아 가는 죄악이다. 결국 자신의 삶을 파괴시키는 것이다. 성경은 질투가 죄악 된 행동의 동기가 되어 분쟁과 분열, 미움, 살인까지 가져온다고 말하고 있다(고후 12:20, 갈 5:21). 질투는 사랑의 반대행위로 이웃이나 타인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생겨난다(고전 13:4). 질투는 타인에 대한 불순한 내적 감정을 의미하며 본질적으로 죄이다. 질투는 타인에 대한 시기로 증오로 발전하게 되고, 대립하게 됨에 따라 참된 그리스도인의 교제에 걸림돌이 된다(고전 13:4). 그래서 예수님은 외적인 행위가 따르지 않더라도 생각과 태도만으로 죄가 된다고 말씀하셨다(마 5:21-31).질투를 의미하는 히브리어(키나)와 헬라어(젤로오, 행7 :9)는 감정이 오로지 한 가지에만 신경을 쓰는 것을 말한다. 지나친 질투는 결국 타인뿐만 아니라 본인 자신의 삶을 파괴시키는 죄악입니다. 질투를 극복할 수 있는 완전한 해결책은 사랑이다. 이웃을 사랑하고 축복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나태라는 말을 행동이나 노동을 싫어하는 것, 태만한 것, 게으른 것, 느린 것, 부지런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신학적인 면에서는 행동이나 정신적인 사물(事物)에 대한 게으름을 의미하는 것 뿐 아니라 교회의 활동에 대해 냉담하고 적극적이지 못한 것도 의미한다. 나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태만의 죄로 단테는 ‘게으름은 사랑을 포기한 죄악’이라고 말했다. 잠언은 나태한 자를 한없이 게을러 늘 잠자는 자로 묘사하고 있다. 결국 나태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사용하고 그 소명을 수행하는 일에 게으르거나 불순종하는 것이다. 나태한 사람은 행동을 요구하는 어떤 상황에 반응치 못하고 어떤 목적도 없는 말을 분주히 분에 넘치게 말한다. 또한 나태는 일상생활과 함께 신앙생활을 파괴시키는 죄악이다. 사단은 성도를 죄의 그림자에 머물게 하기 위해 성경 보기 싫은 나태, 기도하기 싫은 나태, 전도하며 봉사하기 싫은 나태 등 영적 태만을 주입하려고 애를 쓴다. 그래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항상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을 하셨다.
▲성경어원 : 비생산적, 무익한, 비효과적인, 텅빈(알고스, 마1 2:36),
▲대표적 인물 : 미련한 다섯 처녀(마 25장)4. 죄는 과녁에서 빗나감
죄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하타아트’와 헬라어 ‘하마르티아’를 살펴보면
‘과녁을 쏘아 맞출 수 있는데 맞추지 않는 오만한 행위’를 뜻한다.
즉
①표적을 쏘아 빗나가다(이탈)
②표적을 지나쳐가다(과도)
③표적에 못 미치다(미달) 등으로, 죄는 알고 있는 의무의 태만을 의미한다(약 4:17).
5. 무엇이 죄인가?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할 때 “나쁘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죄”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정해놓은 기준(목표)’에 반하는 모든 것을 죄라고 정의한다.
히브리어에 있어서 죄를 나타내는 3대 용어는
A) [불의] 아-와(아벤)(에벨) : [악을 행하다], [불의를 행하다]
B) [허물] 페솨 [파-솨] : [거역, 반역]
C) [죄] 헤-트 :[과녁을 벗어나다, 실패하다]
-----------------------------------
A) [불의]
[아-원]이 원어로서, [악을 행하다], [불의를 행하다] 등을 뜻하는 동사[아-와]에서
온 명사 ⇨사악한 행위. 의도적, 의식적, 악의 성질, 또는 동기와 내용
의(옳지)롭지 않은 행위, 악한 행위, 의롭지 않은 의식(생각), 동기 등 -- 대개의 도덕적 기준에서 벗어난 것.
B) [허물]
원어 페솨[파-솨] [거역, 반역]을 의미하는 동사 에서 온 명사로서, 여기서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 죄로 생각되고 있다(창 31:36, 왕상 12:19, 사 1:2, 호 8:1).
창 31:36 야곱이 노하여 라반을 책망할새 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 허물(페솨)이 무엇이니이까 무슨 죄가 있기에 외삼촌께서 내 뒤를 급히 추격하나이까
왕상 8:50 주께 범죄한 백성을 용서하시며 주께 범한(파솨; 반역한, 거역한) 그 모든 허물을 사하시고 그들을 사로잡아 간 자 앞에서 그들로 불쌍히 여김을 얻게 하사 그 사람들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게 하옵소서
왕상 12:18,19 18 르호보암 왕이 역꾼의 감독 아도람을 보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쳐죽인지라 르호보암 왕이 급히 수레에 올라 예루살렘으로 도망하였더라. 19 이에 이스라엘이 다윗의 집을 배반(파솨)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더라
호 8:1 나팔을 네 입에 댈지어다 원수가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에 덮치리니 이는 그들이 내 언약을 어기며 내 율법을 범함(파솨 ; 반역한, 거역한)이로다.
“의(옳지)롭지 않은 행위, 악한 행위, 의롭지 않은 의식(생각), 동기 등등으로 대개의 도덕적 기준에서 벗어난 것”이 [불의](아원)라면 [허물](페솨)(거역, 반역)은 보다 <근본>을 배반하는 일들이다.
예를 들면 나라에서 정해 놓은 <사회 도덕규범>을 범하는 것이 [불의](아원)이며, 나라의 헌법에 반역함{[허물](페솨)(거역, 반역)}은 <그 나라를 배반하는 것>이다.
또 다른 예: 과거 5공 당시 사기행각, 강도행각, 거짓, 살인 등등의 범죄(도덕적인 것 거역)는 죄 값을 치루면 되지만, 당시의 ‘반공법위반’은 <대한민국 자체를 배반>하는 것으로 “헌법을 거역하는 행위”로 규정되었다.
‘도덕법 위반’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죄가 ‘반공법위반’으로 <국가 반역> 죄에 해당하는 것.
(반공법 위반은 도덕법으로 근거한 “악행”[아-원]이 아니다.)
이에 비하여 히브리 원어 [헤-트 af] <죄>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C) [죄]
[헤-트 af]와 그 여성 형 [핫타-아]그리고, 가장 많이 씌어진 꼴로는 [핫타-스]인데 (창 4:7 기타 빈출), 하말티아 (헤-트, 하말티아) : [과녁을 벗어나다, 실패하다]
창 4:4-7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헤-트)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욕망)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욕망)를 다스릴지니라
창 18:20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헤-트)악이 심히 무거우니
왕상 8:50 주께 범죄(헤-트)한 백성을 용서하시며 주께 범한 그 모든 허물(파-샤)을 사하시고
그들을 사로잡아 간 자 앞에서 그들로 불쌍히 여김을 얻게 하사
그 사람들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게 하옵소서
<죄>라는 단어의 원뜻이 “과녁을 벗어나다”라면 “과녁이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 풀이부터 해야 할 것이다.
그 다음에 “왜 벗어났는가”에 대한 문제 해결점으로 접근 해 본다.
첫째 <과녁>.
“목표물”, 또는 “하고자 하는 목적”. 혹은 “필연적으로 해야 되는 일”
이 “목표”는 “하고자 하는 어떤 목적”이며, 이는 인간(人間)이 “하고자 하는 어떤 목적”이
아니라 신(神)이 “하고자 하는 어떤 목적”이다. 곧 “Will of God”이다.
이 “죄의 개념”에서 “과녁에서 벗어나는 원인”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목표물이 보이지 않았던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목표물을 보려하지 않았던지’
그것도 아니면 ‘목표물이 오해 됐던지’,
둘째 <목표물의 내용>.
성경에서 사용되는 “화살이 맞추어야할 <목표>”는 신(神)이 “하고자 하는 어떤 목적”이다.
어떤 자의 말처럼 “저절로 우주가 생겨나고, 저절로 발전되어지고,
그리고 현재 저절로 존재되고 있다”고 한다면 “저절로 생겨났으니 저절로 우주가 없어진다.”고 해야 한다.
(‘저절로’는 ‘진화’란 뜻)
논리가 옳은가?
“하고자 하는 어떤 목적”의 그 내용은---
신은 모든 우주 만물을 창조 하실 때 분명히 어떤 목적에 의해서, 계획하시고,
그리고 그 계획대로 완성하시고, 또한 온전한 완성을 위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 “신의 계획된 내용”을 기록한 성경은 신(神)이 “하고자 하는 어떤 목적”이다.
신은 우주 만물이 생겨나기 전부터 ‘그리스도의 출현을 계획’하셨고,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라고 기록됨은
<인간의 영원한 구원>이 신(神)의 궁극적 목표가 됨을 설명하는 구절이 된다.
요 17: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신은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고 살게 하는 생기(生氣)를
그 코에 불어 넣으니 <생령>이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흙으로 짓고 +생기=생령-이것은 사람 만드는 공식이다.
아마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혼이 있는 모든 생물’을 만드는 하나님의 공식일 것 같다.
이런 공식에 의해 창조된 사람은 보기에는 좋았지만 ‘영원 할 수 있느냐’에 문제점이 있다.
죽지 않고 거의 천년을 살아온 창세기 5장에 기록된 ‘사람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상상 해 본다. 행복했을까?? 불행했을까? 어떻게, 왜 ‘행복하고 불행 했을까’
<하나님의 목표>는 “신(神)이 특정 피조물과 영원히 거하는 것”이다.
“영원히 거하는 존재”는<신(神)이어야만 한다.>는 필연적인 조건이다.
신(神)만이 영원하다. 신(神)이 아니고는 영원 할 수가 없다.
모든 짐승들은 ‘죄를 범하는 범죄’라는 것이 없다.
그 이유는 짐승들에게는 어떠한 율법도 주신일이 없기 때문이며,
율법이 주어 졌다 해도 그 율법을 지킬만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은 ‘지킬 능력이 없는 대상’에게<지켜야 할 법을 주셨다>고 할 수 없다.
사람에게만 그런 능력이 있고, 사람만이 주어진 율법을 “지키던지, 안 지키던지”일 뿐이다.
‘신의 목표에서 벗어난 자’들 중에 짐승들은 없다.
짐승은 신의 목적과 무관하게 지음을 받았기에 짐승에게는 <죄>가 없다.
짐승을 지은 신의 목적은 “잡혀 먹히기 위함”
즉 ‘짐승들은 신과 함께 영원히 거할 계획’이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짐승들이 어떻게 태어나든, 어떻게 자라나든, 그 짐승이 동료를 몇이나 물어 죽였던지,
혹은 사람을 몇 명이나 잡어 먹었던지 - “신의 과녁에서 벗어나는 짐승은 없으며,
신의 과녁(목적)과는 무관 한 짐승들이다.”
사람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아니 했다”면 얼마의 기간 동안
에덴에서 살 수 있을는지는 알 수 없으나(6000년? 아니면 6억년?) 신과 영생하지는 못한다.
혈과 육은 신과 영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죽을 수 있게 된다.
혈과 육을 가지고는 결코 신의 세계로 갈 수 없다.
혈과 육을 가지고 있으면 신의 목표에서 벗어 난 것이다.
혈과 육이 없어야 신의 세계로 갈 수 있는 조건이 된다.
혈과 육을 가진 사람 자체가 신의 목표에서 벗어 난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혈과 육을 가지고 있는 동안(산혼)신의 영을 받아서
<혼과 영(신)의 결합>이라는 <새로운 피조물>이 신으로부터 출생되고,
혈과 육을 가진 사람이 혈과 육을 포기하여 죽을 때
‘혈과 ’육은 흙으로부터 왔으니 본디의 본향인 흙으로 귀향하고,
영은 신으로부터 왔으니 본디의 본향인 신에게로 귀향한다.
단 귀향 때는 결합된 혼과 같이 간다.
혼과 영의 결합은 독립된 하나의<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선악과를 먹은 것 자체가 <원죄>라고 알고, 그렇게 믿고 있다.
그런 가르침을 누구로부터 오랫동안 받아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원죄>라는 단어는 없으며 또한 ‘선악과를 먹은 것이<원죄>’라고
기록된 성경도 없다.
<원죄>란 뜻은
성경은 ‘한 사람 아담의 범죄를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 왔고, 죄로 인하여 사망이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창 6:2-4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4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육체가 됨”은 “하나님의영이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다”는 결론이다.
육체가 되고, 영의 존재가 결혼 생활과 인간의 삶을 사는 것은 육적 존재가 됨이다.
성경에는 ‘사망에 이르는 죄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가 있다고 기록되고 있다.
요일 5:16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아-와()와 페샤(허물)로 불리는 죄는 사함이 가능할지 모르나
헤-트(죄)는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도 사함이 못되는 “신의 목표에서 벗어 난 것”이 된다.
“신의 목표에 도달하는 길”은 여러 조건들이 있을 것이다.
그 중에 가장 초점이 되는 것은---
혈과 육을 가진 사람이 육신에만 매어 살 때 신의 목표에서 벗어 난 것이다.
혈과 육을 가진 사람이 육신에만 매어 살 때 <죄> 이다.
혈과 육을 가진 사람이 육신에만 매어 살 때 <원죄>가 드러난다.
이 죄에서의 해결은 육적이 아니라 “혈과 육”을 초월 할 수 있는
“신의 과녁(목표)에 맞는 신의 영을 받는 것”만이 해결책이다.
6. 죄, 죄인, 죄의 진정한 본질을 드러낸다.
죄는 거역이다.
곧 선과 악 사이에 하나님께서 두신 경계인 율법을 밟고 넘어가는 것이다.(시 51:1, 눅 15:29)
죄는 죄악이다.
곧 금지된 것으로 명시가 되었던 안 되었던 간에 본질적으로 그릇된 행동이다.
죄는 잘못이다.
곧 옳은 데에서 벗어나는 것이다.(시 51:9, 롬 3:23)
죄는 목표를 벗어나는 것이다.
곧 하나님의 기준을 충족하는 데에 실패한 것이다.
죄는 범죄이다.
곧 하나님의 권위의 영역 안으로 자신의 의지가 침입하는 것이다.(엡 2:1 허물)
죄는 불법이다.
곧 영적인 무정부상태이다.(딤전 1:9)
죄는 불신이다.
곧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모욕하는 것이다.
죄는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1. 죄는 율법을 범하는 것
요한일서 3: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2. 죄는 그것이 행동이든지 상태이든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일치되어야 할 것이지 부족한 것이다.
3. 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적의를 가진다.
모든 사람은 두 가지를 충족시키고 있기 때문에 죄인이다.
첫째 있는 그대로의 상태가 죄인으로 규정된다.
이는 의가 없는 모든 인간의 타락한 상태이다.
모든 인간의 자연적 상태가 바로 죄의 상태이다.(롬 5:12)
시 51:5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 39:5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
죄는 인간의 본성이다. 즉 인간은 죄를 타고 난다.
그러나 누구든지 구원받으면 옛 사람은 새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며 변화된
새 성품은 하나님의 본성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벧후 1:4)
둘째 죄는 행동이다.
죄의 성품이 표출되는 것, 즉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이 바로 죄들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모태에 있거나, 갓 태어나거나 죽기 직전의 사람이나
누구든지 죄인의 상태에 있으며 죄들을 행하고 있기 때문에 죄인인 것이다.
인간은 허물과 죄 가운데 죽은 상태에서 태어나서, 죄와 더불어 살다가, 죄와 하나가 되어
하나님 앞으로 심판 받으러 돌아간다. 태어날 때부터 진노의 자녀이며 불순종의 자녀이다.(엡 2:1-3)
죄는 아담을 통해서 세상에 들어 왔으며 그 죄는 사단과 함께 온 것이다.
약 1:14-15
롬 5:12
사 14:12-14
죄는 하나님에 대항하여 비방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의심하는 것이다. 로마서1장은 죄 있는 인간의 모습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롬 1:29-31)
그 외에도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롬 3:23, 5:12, 3:10
첫 사람 아담이 지은 죄는 불순종이다.
아담은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담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죽는다는 사실도 믿었다.
그런데 그는 죄를 지었다. 바로 죄는 알면서 짓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아담이 지은 죄는 불순종이다. 롬 5:12,14,16,17,18,19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롬 5:12-19
죄는 세상에 들어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만약 이브에게서 죄가 끝났다면 죄가 세상에 들어오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브는 아담 없이 혼자서 자녀를 낳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담의 의도적인 죄는 세상으로 들어와 사람들에게 전수되었다.
지금도 아담 안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서 죄는 계속되고 있다.
시편 51:5 - 이제 모든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롬 1;29-31, 갈 5:19-21, 골 3:5,8, 딤전 1:9-10, 고전 6:9-10, 막 7:20-23
50여 가지의 죄들이 기록되어 있다. -
바울은 죄인들의 상태를 이렇게 말한다.
딛 1:15, 딤전 4:2, 전 7:20, 시 39:5 롬 3:4, 요일 1:8,
과녁에 미치지 못한 화살이 하나님의 의에 미치지 못한 인간과 같다.
나무에 열린 열매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그 나무는 그 열매의 이름에 따라 그 나무로 불려 진다.
그 이유는 그 나무 안에 그 열매를 맺게 하는 씨가 있기 때문이다.
유전 되는 것 가운데는 외양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성품, 성씨, 성격, 말씨, 행동 등도 부모를 통해 유전된다.
비물질적인 것이 유전되는데 그 가운데 핵심이 죄(의 성품)이다.
그런데 정작 결단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요 16:9에 죄에 대하여 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요 3:18에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 3:36에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피를 거절한 사람들은
스스로 참으로 구원받을 길을 거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일 1:7에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7. 사망에 이르는 죄(요한일서 5:16-17)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사망에 이르는 죄(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체험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실수로 혹은 일시적인 미혹에 빠져서 죄를 범할 수 있다.
그런 죄는 회개하면 즉시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사함을 얻지 못하는 죄가 있는데 그것을 마 12:31-32에서는 "성령을 훼방하는 죄"로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를 거역했을 때는 아들의 중보로 사함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 아들 되시는 예수님을 거역했을 때는 성령님의 중보로 사함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 그러나 성령님을 거역하면 더 이상 중보자가 없기 때문에 사함 받을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이다.(현재시대)
*성령을 훼방하는 가장 흔한 죄 중의 하나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을 부인하는 것이다.
제일 두려운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이다.
왜냐하면 성경을 믿지 못하면 하나님을 무시한 죄가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면
하나님을 업신여긴 죄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령훼방죄가 된다.
사망에 이르는 죄의 또 하나의 유형은 히 6:4-6, 10:26-27에 기록되어 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 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고 했다.
*받은바 은혜를 배신하는 행위는 회개하여 사함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십계명 가운데 제1계명부터 제4계명을 범하는 것 - 우상숭배 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죄, 사망에 이르는 죄 (마 22:37-39)
요한계시록 22:18-19 18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19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 구원받지 못함
악(惡)
하나님께 불순종, 윤리적으로 부패한 행동, 영적으로 악의 본체는 마귀(요한복음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You belong to your father, the devil, and you want to
carry out your father's desire. He was a murderer from the beginning,
not holding to the truth, for there is no truth in him. When he lies, he
speaks his native language, for he is a liar and the father of lies.
죄(罪)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불신으로 인간을 항상 욕심과 거짓과 미움에 갇혀 살게 만들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알려하지 않는 것 -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것(노력 없는 상태)
- 영적으로 짐승인 상태 (시편 49:12, 20)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But man, despite his riches, does not endure; he is like the beasts that perish.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A man who has riches without understanding is like the beasts that perish.
번제를
뜻하는 히브리어 '올라'( )는 '올라가다', '실어 올리다', '높이다'라는 뜻의 '아라'( )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위로
드려지는 제사', '위로 올라가는 제사'를 뜻한다. 이러한 단어의 의미는 불에 태워진 희생 제물의 향기가 하나님께 상달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2) 제물의 종류
번제에 사용된 제물은 수송아지, 수양, 수염소, 혹은 비둘기인데, 이 모든 제물은 반드시 흠없고 일년 된 수컷임을 그 특징으로 하였으나 비둘기에 대해서만은 수컷이나 암컷 중 어느 것을 드리라는 특별한 지시가 없다.
3) 번제의 방법
① 헌제자가 제물이 될 짐승을 끌고 회막문 여호와 앞으로 나아온다.
② 헌제자의 손을 제물의 머리 위에 얹고 안수한다.
③ 헌제자가 제물을 잡아 피를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그 피를 번제단 사면
에 뿌린다.
④ 헌제자가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뜬다.
⑤ 제사장은 그 뜬 각과 머리와 기름, 그리고 물로 씻은 내장과 정강이를 단 위
에서 불 사른다.
이러한 방법은 양과 염소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였으나 비둘기의 경우는 달라서 제사장 혼자서 머리를 비틀어 끊고 단 위에 불사르며 피는 단 곁에 흘리고 멱통과 창자 등은 재 버리는 곳에 버리고 몸은 쪼개어 단 위에서 불살랐다.
4) 번제의 목적
번제의
목적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그 첫번째는 '속죄를 위한 것'(레1:4,16:24)인데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속죄제와 속건제가 죄를
속하기 위해 드려지는 제사라는 점을 들어 이 목적을 등한시 여기거나 그냥 지나쳐 버리려 하지만 번제의 주된 목적은 성경이 밝히
말해 주고 있는 대로 '속죄를 위한 것'이다. 번제의 두번째 목적은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헌신에 대한 표현'이다. 이러한 목적은
창2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순종에서 잘 나타나는데 그는 자신의 순종과 믿음의 증명을 위해 자신의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려
하였고, 그러한 믿음과 순종을 인정하신 여호와께서는 그를 위해 미리 준비해 놓으신 양을 제물로 삼아 번제를 드리게 하심으로
아브라함의 헌신과 믿음을 인정하셨다.
5) 번제의 영적 의미
번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구원의 희생을 상징'함과 동시에 그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헌신하고 그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아갈 것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번제의 영적 의미는 한마디로 '그리스도의 희생과 성도들의 헌신'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속죄제를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모든 잘못된 것을 제거하여 정결케 하고 이제는 전적으로 헌신을 상징하는 번제를 드립니다. 번제는 온 삶과 생명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는 헌신을 의미합니다.
보잘
것 없는 사람을 하나님과 백성들의 중재자로 세워주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 은혜를 생각하면 죽기까지 충성하기로 헌신을 다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도 목사 안수를 받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크고 감사하여 눈물이 핑 돌았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저드슨(1788-1850)이
대학을 거쳐 신학교를 졸업하자 보스톤시에 있는 상류층의 교회에서 부목사로 와 달라는 초빙을 받았습니다. 그의 동료 친구들은 모두
부러워하며 집의 어머니와 누이도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저드슨은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해외선교에 쓰시려고 부르셨습니다. 내가 이곳에 남아서 일을 해도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지만 나는 부분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됩니다. 나는 주님께 전체로 순종하렵니다."
안일한
자리를 물리친 저드슨은 결국 철통같은 불교의 나라 미얀마(버마)에 선교사로 갔습니다. 그곳은 너무나도 어려운 곳이었기에 목숨을
바칠 각오로 일했으나 처음의 한 사람을 전도하여 세례를 베푸는데 무려 6년간의 갖은 고생을 다 했습니다. 저드슨은 오랜 기간을
버마의 감옥에서 지나기도 했고 죽음과 질병의 고비도 몇 번이나 넘겼습니다. 그러나 저드슨의 거룩한 헌신은 5만 명이라는 크리스천을
미얀마(버마)땅에 탄생시키고 전세계의 크리스천들의 마음에 꺼지지 않는 횃불을 밝히 켜 놓은 것입니다.
제사장은 자신의 욕망이나 정욕을 죽이고 마침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일꾼입니다. 제사장이 되어 임직을 행하기 전에 먼저 희생을 각오하는 번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진정 헌신의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헌신의 사람이 됩니다.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딤전 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 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일꾼으로 세워 주신 은혜를 감사하게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죽도록 충성하며 헌신하기를 다짐하십시오.
하나님은 자기 일꾼들이 온전히 헌신하시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은 일꾼이 뒤를 돌아보면 안됩니다.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소제를
뜻하는 히브리어 '민하'( )는 '분배하다', '수여하다'라는 의미의 어근 '마나'( )에서 유래한 것으로 '헌물', '조공',
'희생 제물'을 뜻하는데 특별히 '피 없는 곡물 제사'에 사용되어 말 그대로 '소제', 또는 '피 없는 곡물 제사'를 뜻한다.
2) 제물의 종류
소제에
드려진 제물의 종류는 모두 네 가지였다. 그 첫째는 '고운 가루'로서 여기에는 '기름'과 '유향'이 첨가된다. 둘째는 누룩을
넣지 않고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 만든 '무교병'으로서 무교병을 만드는 방법은 '화덕에 구운 것'(레2:4)과 '번철에
부친 것'(레2:5), 그리고 '솥에 삶은 것'(레2:7)의 세 가지였다. 소제물의 세번째는 '처음 익은 곡식'이었으며, 네번째는
'첫이삭'이었는데 특별히 첫이삭을 소제물로 드릴 때는 볶아 찧은 것에다 기름과 유향을 드려야 했다.
3) 소제의 방법
소제를 드리는 방법은 제물을 제단으로 가져오기 전에 집에서 제물을 준비하는 것에 더욱 주목해야 하는데 그것은 제물을 준비하는 과정 자체가 소제를 드리는 방법에 속하기 때문이다.
첫째, 고운 가루의 소제물일 경우에는 그 위에 기름을 붓고 유향을 놓은 후 제사장에게로 가져오는데 제사장은 고운 가루 한 줌과 모든 유향을 취하여 기념물로 제단 위에 불사른 후 나머지는 자신의 음식으로 취한다.
둘째는,
무교병을 소제물로 삼을 경우인데 이 때는 화덕에 구운 것과 솥에 삶은 것은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 만들고, 번철에 구울
경우에는 고운 가루를 누룩 없이 기름과 섞어 구운 후 조각으로 나누고 그 위에 기름을 붓는다. 이러한 무교병의 소제물 역시
제사장에게로 가져가면 제사장은 그것 중 기념할 만큼만 취하여 여호와께 화제로 드리고 나머지는 자신의 음식으로 취하였다.
셋째는,
첫이삭을 드릴 경우인데 이 때는 반드시 그 곡식을 볶아야 하며 그 위에 기름을 붓고 유향을 더한 후 제사장에게로 가져가야 하며
제사장은 그중 얼마와 모든 유향을 취하여 여호와께 화제로 드린 후 나머지는 자신의 음식으로 취하였다(이때의 나머지에 대해 성경의
특별한 언급이 없지만 소제물이 제사장의 음식으로 주어졌다는 일반적인 규례를 따를 때 첫이삭의 소제물 역시 제사장의 음식으로 주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한편 이러한 모든 소제물에 반드시 지켜야 할 법칙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모든 소제물에는 누룩과 꿀을
넣지 말고 반드시 소금을 치라는 것이었다.(레2:11,13)
4) 소제의 목적
소제의 목적 역시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첫째는 우리가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물질을 공급하여 주시고 보호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 감사하며 경배 돌리기 위함이며,
둘째는 자신의 땅을 가지고 있지 않은 제사장과 레위인에게 음식을 제공하여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5) 소제의 영적 의미
소제의
영적 의미는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영적 양식의 공급자가 되실 뿐만 아니라 자신 스스로 생명의
떡이 됨을 상징하는 동시에(요6:32-35), 이러한 영적 양식과 일용할 육적 양식까지도 공급받는 성도들이 드려야 할 감사의
의무를 상징한다. 한편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는 명령은 '영원한 계약'을 상징하는 '소금'(민18:19,대하13:5)을
통해 제사 드리는 자가 하나님과의 영원한 계약 관계에 있음을 깨닫게 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제사 드리는 자를 결코 버리지 않을
것과 제사 드리는 자는 그 계약법을 지켜야 할 영원한 의무가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렇듯 하나님과의 영원한 계약 관계에 있는
자는 죄악과 세상의 유혹에서 떠나야 하는데 이러한 사실은 죄악을 상징하는 '누룩'과 달콤한 세상의 유혹을 상징하는 '꿀'을 모든
소제물에서 제하라는 하나님의 준엄하신 명령으로 주어졌다.
화목제를
뜻하는 히브리어 '제바흐 쉐라밈'( )은 '동물을 살육하다', '죽이다', '제사 드리다'라는 뜻의 '자바흐'( )에서 파생된
'도륙', '희생물'을 뜻하는 '제바흐' )와 '완전한', '정다운', '공평한', '평화로운'을 뜻하는 '솨렘' )에서 파생된
'쉐라밈'( )의 합성어로서 그 의미는 '사람이 하나님과의 완전한 관계', 또는 '평화로운 관계를 얻고자 하는 희생 제물'이라는
의미이다.
2) 제물의 종류
⑴
소와 염소 : 흠 없는 것으로서 암컷,수컷 구별 없이 어느 것이든 가능하다. 그러나 전부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 그리고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허리 근방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드리도록
되어 있었다.
⑵
양 : 소와 마찬가지로 흠 없는 것으로 하되 암,수 어느 것이든 가능하였고, 어린 양을 드릴 수도 있었다. 양의 경우 역시 양의
기름만을 드리되 미려골(등심뼈 또는 척추)에서 베어 낸 기름진 꼬리와 내장에 덮인 것과 모든 기름진 두 콩팥과 간에 덮인 기름과
꺼풀만을 콩팥과 함께 드릴 수 있었다.
3) 화목제의 방법
화목제를 드리는 방법은 번제의 방법과 거의 유사한데 그 순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헌제자가 제물이 될 짐승을 끌고 여호와 앞으로 나아온다.
② 헌제자의 손을 제물의 머리 위에 얹고 안수한다.
③ 헌제자가 제물을 잡아 피를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그 피를 번제단 사면에 뿌린다.
④ 헌제자가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그 속의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콩팥과 그 위의 기름과 허리 근방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것을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그것들을 받아 제단에서 불사른다.
⑤ 제물의 가슴은 '요제'로 제물의 우편 뒷다리는'거제'로 흔들어 제사장의 음식으로주어지는데 제사장과 가족들은 그것을 그날에 다 먹어야 하며 남은 것은 불에 태워야 했다.
4) 화목제의 특색
화목제는
다른 제사와는 달리 두 가지의 특색이 있었다. 그것은 첫째로, 의무적인 제사가 아닌 '선택적인 제사'로서
'자원함으로나'(레7:16), '서원함으로'(레7:16,삼상1;21이하), 그리고 '감사함으로'(레7:15)드리는 제사였으며,
둘째로, 화목 제물의 고기를 헌제자도 먹을 수 있는 일종의 축제 형식의 제사였다는 점이다(레7:15-21)
5) 화목제의 영적 의미
화목제의
영적 의미는 화목제의 성격이 드러내는 바 그대로 하나님과 죄인을 화목케 하는 '화목 제물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상징'과(롬 3:25, 엡 2:13 ,골 1:20),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는 성도들의 친교인 '성만찬에 대한
예표'이다(고전 10:16)
헌신을
상징하는 번제의 수양을 드린 후에 따 다른 수양, 곧 위임식 수양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속죄제, 번제, 화목제의 제사를 드릴
때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제물 위에 안수하였습니다. 모세는 위임식 수양을 잡고 그 피를 취하여 아론의 오른 귓부리와 오른 손
엄지가락, 오른 발 엄지가락에 피를 발랐습니다. 그의 아들들에게 같은 예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이것은
제사장들의 귀도, 손도, 발도 하나님을 위하여 성별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먼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오른 귓부리에 피를 바른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제사장은 먼저 귀를 성별 하여 하나님의 명령하심에 귀를 기울여야 함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귀로
하나님의 말씀만 들으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마귀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가 타락하였습니다.
가룟 유다도 마귀의 음성에 귀 기울였다가 하나님의 아들을 팔아먹는 배신자가 되었습니다.
사람은
듣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가 따로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그런 귀가 있습니까? 오직 주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언 5:1-8 내 아들아 내 지혜에 주의하며 내 명철에 네 귀를 기울여서. 근신을 지키며 네 입술로 지식을 지키도록 하라. 대저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나중은 쑥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같이 날카로우며. 그 발은 사지로 내려가며 그 걸음은 음부로 나아가나니. 그는 생명의 평탄한 길을 찾지 못하며 자기 길이 든든치 못하여 그것을 깨닫지 못하느니라. 그런즉 아들들아 나를 들으며 내 입의 말을 버리지 말고. 네 길을 그에게서 멀리하라 그 집 문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
오른
귓부리에 피를 바른 후에 오른손 엄지가락과 오른발 엄지가락에 피를 발랐습니다. 손과 발은 행위를 나타냅니다. 특히 오른 쪽은
힘과 능력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자신에게 주신 힘과 능력을 다하여 주님만을 위하여 행동하겠습니다 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 피는 제사장들의 옷에도 뿌려졌습니다. 관유와 피가 그들의 옷에 뿌려짐으로 그들의 입는 예복이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없다면 우리가 결코 거룩하게 될 수 없음을 가리켜 주는 것입니다.
모세는 화목제물과 소제물을 아론과 그 아들들의 손에 두어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게 하였고 모세가 그들의 손에서 취하여 단 윗 번제물 위에 불사르니 이는 향기로운 냄새를 위하여 드리는 위임식 제사였습니다.
위임식 수양으로 드리는 화목제물 가운데서 모세의 응식은 무엇이었습니까? 수양의 가슴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위임식 광주리의 떡과 함께 회막 안에서 삶아 먹고 나머지는 불사르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모든 의식을 마치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성막은 아무나 다가설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거룩한 영역을
침범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거룩한 제사 의식을 수행하기 위해 위험한 곳에서 일하였습니다. 이곳은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곳이었습니다. 이제 이들은 그 안에서 머물 수 있는 안전한 통과가 주어졌습니다.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제사장들은 거룩한 곳과 비거룩한 곳, 삶과 죽음 사이의 중보자로서 살게 된 것입니다.
위임제는
제사의 종류가 아닙니다. 제사장을 세우는 위임식 제사를 의미합니다. 이 의식은 7일간 계속되었습니다. 제사장은 7일 동안
회막에서 나오지 못합니다(33,34). 성막에는 의지나 쉴 곳이 없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7일 동안 그들은 편히 누워서 잠도 못
자고 철야를 하면서 지냈을 것입니다. 매일 수송아지 한 마리로 속죄제를 드리고, 아침저녁으로 어린양 한 마리씩으로 번제와 소제를
겸하여 바쳤을 것입니다(출 29:36-39).
이와 같이 7일 동안 위임식이 거행된 것은 제사장의 직분이 얼마나 거룩하고 큰 직분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후일에 대제사장은 최고의 권위자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인간의 중보자는 영원하지 못하다는 흠이 있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내주신 영원히 살아 계신 대제사장이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히브리서 4:14-16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 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속죄제 : 하나님의 계명을 범한 죄에 대한 제사 속건제 : 손해를 입힌 것에 대한 보상을 위한 제사
속죄제(Sin Offering)는 하나님의 계명을 범한 죄에 대한 제사를 말합니다. 속죄제의 제물은 신분에 따라 그 종류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제사장은 "흠 없는 수송아지"(4:3) 온 회중은 "수송아지"(4:13) 족장은 "흠 없는 수염소"(4:23) 평민은 "흠 없는 암양이나 암염소"(4:28) 이 외에도 가난한 자는 "산비둘기"나 "집비둘기"를 제물로 드릴 수 있었으며(5:7), 이보다 더 가난한 자는 고운 가루 에바 십분의 일을 제물로 드릴 수 있습니다(5:11)
속죄제의 영적인 의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무덤에 장사되었을 때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여자들이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찾아갔을 때 무덤은 열려 있었고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어찌하여 산자를 죽은자 가운데서 찾느냐?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라고 일러주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자들이 제자들에게 달려가 부활의 사실을 알렸을 때 사도들은 믿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제자들에게 체험되지 않은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제자들에게 신앙 사건화가 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도 속죄제의 제사를 통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나의 신앙으로 사건화하지 못하면 도저히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2023년 전 갈보리 언덕에서 일어났던 십자가 사건은 곧 주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신 사건이었으며 주님의 부활은 곧 나를 위한 부활 사건으로 인정할 때에 신앙의 사건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종말에 나타날 메시야의 구원사건( Salvation
Event) 이라고 합니다.
3) 속죄제의 방법
① 헌제자가 제물이 될 짐승을 회막문 여호와 앞으로 가져온다.
② 헌제자의 손을 제물의 머리 위에 얹고 안수한다.
③ 헌제자가 제물을 잡아 피를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그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성소 앞에 일곱 번 뿌리고 향단 뿔에 바른 후 회막 앞과 번제단 밑에 전부 쏟는다.
④
희생 제물의 모든 기름과 콩팥을 번제단 위에서 불사른 후 그 나머지 부분은 진 바깥 재 버리는 정결한 곳에서 나무 위에 놓고
불사른다. 그러나 아론과 그 아들들을 위한 속죄제는 진 밖에서 불사르지 않고 다리와 고기를 회막 뜰에서 구워 먹도록
하였다(레6:24-27)
1) 어의
속죄제를
뜻하는 히브리어 '하타트'( )는 '과녁에서 벗어나다', '죄를 짓다', '속죄물을 드리다', '속죄하다'를 뜻하는 '하타'(
)에서 파생된 것으로 '하나님의 법에서 벗어난 죄로부터 청결과 속죄함을 얻기 위하여 드리는 제사'를 뜻한다.
2) 제물의 종류
속죄제의 제물은 범죄자의 사회적인 위치에 따라 달랐다.
① 제사장 -- 흠 없는 수송아지를 드림(레4:3)
② 온 회중 -- 수송아지를 드림(레4:13)
③ 족장 -- 흠 없는 수염소를 드림(레4:23)
④ 평민 -- 흠 없는 암양이나 암염소를 드림(레4:28)
이 외에도 가난한 자는 산비둘기나 집비둘기를 제물로 드릴 수 있었으며(레5:7), 이보다 더 가난한 자는 고운 가루 에바 십분의 일을 제물로 드릴 수 있었다(레5:11)
3) 속죄제의 방법
① 헌제자가 제물이 될 짐승을 회막문 여호와 앞으로 가져온다.
② 헌제자의 손을 제물의 머리 위에 얹고 안수한다.
③ 헌제자가 제물을 잡아 피를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그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성소 앞에 일곱 번 뿌리고 향단 뿔에 바른 후 회막 앞과 번제단 밑에 전부 쏟는다.
④
희생 제물의 모든 기름과 콩팥을 번제단 위에서 불사른 후 그 나머지 부분은 진 바깥 재 버리는 정결한 곳에서 나무 위에 놓고
불사른다. 그러나 아론과 그 아들들을 위한 속죄제는 진 밖에서 불사르지 않고 다리와 고기를 회막 뜰에서 구워 먹도록
하였다(레6:24-27)
4) 속죄제와 속건제의 차이
속죄제의 목적은 '범죄에 대한 용서'를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목적은 속건제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 둘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첫째는, 범죄의 성격적 차이로서 속죄제가 하나님께 범죄한 자, 즉 '율법을 범한 죄'를 위한 제사였던 반면에, 속건제는 인간에게 범죄한 죄, 즉 '도덕적인 범죄의 대속을 위한' 제사였다.
둘째는, 속죄제는 속건제와는 달리 '범죄한 일을 배상할 수 없는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제사였던 반면, 속건제는 '배상이 가능한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제사였다는 점이다.
5) 속죄제의 영적 의미
속죄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신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상징한다. 그리스도는 실로 속죄 희생의
어린 양이 되셔서(벧전1:19) 모든 인류의 대속물이 되셨는데, 그의 죽음의 장소는 속죄제 희생 제물이 진 바깥 정결한 곳에서
불살라진 것처럼 예루살렘 성 바깥의 골고다 산상의 고통스런 십자가였다.
Q :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사건은 이미 2016년 전에 일어났던 고대 사건인데요. 이 고대의 사건을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전도로 믿게 하려면 쉽지 않는 줄 압니다. 어떻게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고대 사건을 현재의 우리에게 적용시켜 믿게
하는 것이 가능한지요?
A :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무덤에 장사되었을 때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여자들이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찾아갔습니다. 무덤에 가보니 무덤은 열려 있었고 큰 돌은 굴려져 있었습니다. 그때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천사가 말합니다.
“어찌하여 산자를 죽은자 가운데서 찾느냐?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자들이 제자들에게 달려가 그 부활의 사실을 흥분하여 알렸을 때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보여, 믿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분명히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확실한 사건이었지만 그것이 제자들에게 체험되어지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그들에게 신앙 사건화가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은 신학적으로 말한다면 “종말에 나타난 메시야의 구원사건”( Salvation
Event)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과거의 사건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2016년 전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나를 위한 죽음의 사건이 되고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바로 나를 위한 부활 사건으로
적용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신앙사건화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사건이 나를
위한 신앙사건화가 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중재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사건은 2023년전 고대의 사건입니다.
우리와는 엄청난 시간적인 갭이 있습니다. 고대의 구원의 사건이 우리에게 생생하게 믿어지려면 성령님이란 중개자가 필요합니다.
중매자는 전혀 알지 못하는 남남의 관계를 가장 가까운 부부의 관계로 연결시킵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영이시기에 고대의 예수님과 현재의 우리를 연결시켜줍니다. 성령님은 하늘의 예수님과 땅의
우리들을 연결시켜줍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역사로 감동 감화하시면 그리스도의 사건이 바로 현재 나를 위한 사건으로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고 그리스도의 죽음이 나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게 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이 내생명과 절대적인 관계에 임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리스도가 나의 구세주요 주인으로 믿고 고백하게 연결시켜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절 후에 성령님이 강림해서
그리스도의 사건을 믿게 하기 위해 이 땅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 성령님은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그리스도의 영이신 것입니다. 중매의 영이십니다. 전도하면 성령님이 역사하여 고대의 십자가 사건이
나를 위한 사건이었다고 의심 없이 믿게 하는 것입니다. 이게 기적입니다.
첫 번째 부류의 사람은 헬라인들
헬라인이란 혈통적으로 그리스 인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헬라인이란 지혜와 지식을 숭상하는
부류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요즈음 말로 헬라인을 정의한다면 세상 고등 교육을 잘 받은 지성인이라는 말입니다.
이들은 십자가를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십자가를 foolish하다, 즉 미련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십자가는 미련한
것이기에 그 십자가 안에는 참된 지혜를 찾을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십자가를 경멸합니다. 그들은 철학을 통하여
사물의 근본을 밝히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지성적인 눈에는 십자가는 천하기 그지없습니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은 유대인들
유대인들은 이성으로 논리를 추구하는 것을
좋아하기보다는 신앙으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기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22절에서 헬라인은 지혜를 추구하지만 유대인들은
표적을 찾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기다릴 때에도 메시야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진짜 메시야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척도도 메시야로서의 표적을 행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는 유대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전혀
메시야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분입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규하면서 하나님께
원망하면서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신 예수를 메시야라고 볼 수가 없지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메시야는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로마를 뒤집어 엎어 버리고 이스라엘의 영광을 되찾아 주는 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기대를 우리 주님 예수에게서 유대인들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범죄자의 한 사람으로 수치스럽게 맥없이 나무 위에서 죽었던 나사렛 출신의 목수를 유대인들이 어떻게 메시야로 믿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형틀에 달리어서 죽었습니다. 그런 수치스러운 십자가를 우리들은 자랑합니다. 왜냐고요? 23절과
24절 말씀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18절에 기록되어 있는 데로 십자가의
도, 즉 십자가의 메시지는 현재 영적으로 멸망 당하여 있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현재에 얻어 가지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누구입니까? 오늘 우리들에게는 2천년이라는 시간의 갭이 있어서 십자가가
미화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의 이미지는 오늘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는 아름답고 고상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 당시의 십자가는
그야말로 처절한 십자가입니다. 피를 흘리면서 고통 스럽게 죽어 가는 처형대라는 말입니다. 그런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가는 예수를
바라 보면서 그를 주님이라고 부를 수가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 십자가에 못박혀서 피흘리면서
고통스럽게 죽어 가는 예수를 저주 받은 자로 보았습니다. 십자가에서 절규하면서 죽어가는 예수를 바라보면서 예수께서 주님이시다 라는
고백을 하는 무리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 저 뒤에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인데, 그것이 무엇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피흘리며
죽어 가는 예수의 모습 속에 무엇이 나타나 있습니까? 오늘 본문 24절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십자가 저 뒤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첫 번째로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어떤 능력입니까? 나의 죄를 사하는 능력이 십자가입니다. 인생들이 죄를 지어서
죄에 매여 살게 되었습니다. 그 죄의 속박과 죄의 권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막강한 힘과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죄인들이 그런
죄의 속박을 부수고 죄의 권세로부터 탈출하도록 만들어 주는 권세가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18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되어져
있습니다:십자기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는 죄를 멸하는
능력입니다.
인류의 과학기술 문명이 발달하여서 로켓을 쏘아서 지구를 벗어 나서 달로 그리고 태양계 밖으로 까지 나갈 정도가 되었습니다. 로켓이
지구를 벗어 나기 위해서는 지구가 끌어 당기는 중력을 뿌리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힘이 없으면 로켓은 땅으로 떨어
집니다. 굉음을 내면서 로켓이 하늘로 솟아 올라가는데, 몇 분 동안 중력을 뿌리치는 가속도를 내면 지구의 중력이 영향력을 미치지
않는 무중력 상태에 들어가게 되지요.
십자가에 나타난 능력은 우리를 나락으로 잡아 당기는 죄악의 권세를 뿌리치는 능력입니다. 죄의 권세는 우리를 유혹하면서 나락에
떨어지도록 우리를 잡아 당깁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죄의 권세를 이겼습니다. 더 이상 죄의 권세가 우리를 억압하지
않는 그런 상태에 진입해 있습니다.
두 번째로 십자가 위에는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났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빠진 인류를 바라보시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두가지의 속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 이 두가지는 서로 대척하는 속성입니다. 하나님이 속에 가지고 있는 공의라는 속성은 인류를 그대로 멸망시키라고 주장하시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속에 가지고 계시는 다른 속성인 사랑은 인류를 구원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딜레마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모두 충족시킬 묘책이 있겠습니까? 그 방법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고민이 해결되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자신의 딜레마에서 빠져 나오는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도 100% 만족시켰고 하나님의 사랑도
100%만족시켰습니다. 어떻게 십자가가 그런 일을 했습니까?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독생자입니다.
독생자라는 말은 하나님과 독특한(unique) 관계를 맺고 있는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뿐이면서 하나님과 독특한 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리면서 죽었습니다. 왜 그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는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인류가 지었던 죄값을 청산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는 죄를 짓지 않았지만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지고서 십자가에서
피흘리고 죽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었습니다. 그냥 우리가 지은 죄를 말로 면죄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하나 뿐인
아들이 죄인인 우리를 대신하여서 피흘리고 죽었기에 그 댓가로 우리의 죄가 사하여졌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리심으로써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었습니다.
또한 십자가 사건은 하나 뿐인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죽일 정도로 하나님이 죄에 빠진 인류를 사랑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사건입니다.
로마서 5:8절에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는 인류를 구원하려는 감추어진 하나님의
지혜가 들어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여러분과 저에게는 십자가는 더 이상 수치스러운 물건이 아닙니다. 그
십자가는 여러분과 저를 죄와 죽음과 영원한 지옥의 심판에서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입니다.
세 번째로 십자가를 통하여 죄를 멸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지혜를 체험한 성도들에게 우리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전도입니다. 21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되어져 있습니다: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세상에서 솟아난
지혜인, 유교, 도교, 불교, 또한 스스로 계시의 종교라 자처하는 이슬람교도 그들 자체의 지혜로는 결코 십자가를 수용할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을 결코 세상 지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먼저 깨닫고 믿고 안 자들이
전도를 통하여 십자가의 도를 전수 할 때에 영혼을 구원할 수가 있습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를 깨우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라도 땅끝까지, 우리 주님이 가라 하는 곳으로 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면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라는 명령은 우리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전도사역을 통하여
세상 불신자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참 미련한 방법이지만, 전도 외에는 사람의 영혼을 구원할 방법이 없습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영혼이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올해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표어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소서 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가지고 이방 불신 세계로
가지 않기에 많은 사람들이 지옥 불 속으로 들어갑니다. 교회에 성령 불이 꺼져 가고 있기에 수 많은 사람들이 지옥 불 속으로
들어가고 있음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다시금 교회가 성령으로 불타 오르기를 바라고 소원할 뿐입니다.
십자가는 죄를 멸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를 죄의 늪에서부터 건져 올리는 능력이 십자가 위에 나타나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자랑입니다. 더 이상 그것은 수치가 아닙니다. 십자가에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우리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가 나타나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 땅에서의 모든 우리의 삶을 끝내고 영원 세계에 들어 갈 때에도 우리는 십자가를
의지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땅 위에서 생겨난 인간의 지혜로는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를 헤아려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전도를 명하셨습니다. 지금도 우리 주님의 바람 같은 성령은 교회 밖, 불신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불고 있습니다.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교회 밖에 살고 있습니다. 학문을 연마하며 지혜를 추구하며 사는 지성인들의
가슴속에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께서 들어가실 수가 있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처럼 신앙적인 체험을 구하는 사람들의 심령 속에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는 들어 가실 수가 있습니다. 주님 명령 따라서 내가 깨달아 알게 된 십자가의 도를 불신 이웃들에게
전하는 우리의 삶이 되어야겠습니다.
올 한 해 동안 미련하기도 하고 우직한 방법인 개인 전도를 통하여 적어도 한 영혼을 구원하는 우리들이 되어야겠습니다. 복음을 전해야 하는 타겟을 정하고 기도한 후에 복음을 전하기를 바랍니다.
제사장의
위임식 제사 가운데 가장 먼저 드려야 하는 제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속죄제입니다. 제사장에게 왜 속죄제가 필요할까요? 제사장은
남을 위한 속죄를 위해 중보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속죄를 입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속죄제의 수송아지를 끌어오니 아론과 그
아들들이 수송아지의 머리 위에 안수하였습니다. 자신들의 모든 죄를 수송아지에게 전가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짐승이 죽는 것은
자기 죄 때문이라는 것을 분명히 자각해야 했습니다. 죄없는 짐승이 죽어 가는 동안 제사장은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며,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성결해야 한다는 것을 마음에 굳게 결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위임을
위한 속죄제는 수송아지의 피를 향단의 네 뿔에 바르지 않고(레 4:3-12절의 속죄제의 규정과 다르다) 오히려 바깥의 번제단의 네
뿔에 바르고 그 다음에 남은 피는 제단 밑에 쏟았습니다. 이와 같이 피는 장막 내부로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이는 이들이 아직은
제사장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임직식의 기간이 칠일간이었음을 볼 때(8:33) 이들은 아직은 제사장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제물의 피를 장막 내의 향단으로 가지고 가지 않고 바깥 제단에다 발랐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일꾼으로 부르실 때에도 먼저 그의 죄를 용서하여 주셨던 것을 봅니다.
사 6:7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왜
이사야 선지자에게는 숯불을 입에 대었을 까요?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부정한 입술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먼저 그의 입술을 정결케 하신 것입니다.
레위기에서
계속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거룩”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려면 무엇보다 거룩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성화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우리가 십자가의 보혈로 정결함을 받은 후에 성화된 삶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서는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며 기도를 힘써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장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을 세속으로부터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속건제(贖愆祭) / 바칠 속(贖) . 속죄할 속(贖), 허물 건(愆), 제사 제(祭)
Guilt Offering Trespass Guilt
히브리어 / 아샴 <보상, 배상, 죄책> 817. אָשָׁם.
1. 잘못
2. 죄짓게 하는 것
3. 속건제
발음
/ 아샴(’âshâm) 어원 / 81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죄(창 26:10, 잠 14:9), 속죄제(레 5:6), 속건제(레 5:16), 속건제물(민 6:12), 죄값(민 5:7, 8), 죄(시 68:21), 죄과(罪過)(렘 51:5).구약 성경 /46회 사용
이사야 53:10 - 그 영혼을 속건 제물.....
속건제(Trespass Offering)
1. 어의
속건제를
뜻하는 히브리어 '아솸'은 '죄'(Sin)가 아닌 '범죄'(Guilt),'범법'(Tresspass),
'손해'(Damage)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회적인 죄', 또는 '도덕적인 죄를 용서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를 뜻한다.
2. 속건제의 제물
속건제의
제물은 범죄의 형태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어 이러한 제물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너무나도 복잡하고 광범위하다. 그러므로
각각의 범죄에 대한 속건 제물에 대해서는 레 5:14, 6:7, 7:1-10, 14:1, 15:2을 참고하도록 하되 이러한 여러
가지 제물을 요약하면 '흠 없는 일년된 수양', '범죄물과 그 범죄물의 오분의 일을 더하여 본인에게 주는 일',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둘'이나, '고운 가루 에바 십분의 삼'과 '기름 한 록' 등이다.
3. 속건제의 영적 의미
속건제는 성도가 신앙생활 가운데서 범하기 쉬운 죄를 범했을 때 드리는 제사로서 그러한 범죄는 진리를 배반하거나 하나님을 배반하는 죄,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거나 성령의 사역을 거스리는 죄가 아닌 '실수와 실족의 범죄'를 뜻한다.
그러므로 속건제는 구원에 관련된 원죄에 대한 회개나 기도가 아닌 날마다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짓게 되는 육적인 죄, 즉 '자범죄에 대한 회개와 기도에 대한 상징'이다.
레위기는
여호와께 드려야 할 5 대 제사의 규례로서 시작된다. 그런데 이러한 레위기의 시작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왜냐하면 건축된
성막의(출 40:17) 주된 목적이 제사였고, 따라서 성막이 완성된 지금 그곳에서 드려질 제사의 규례가 주어지는 것은 당연한 논리요
순서이기 때문이다.
제사의
종류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 5 대 제사로 분류하기도 하고 6 대 제사로 분류하기도 한다. 이러한 차이는 제사장의 위임식 때
거행하는 위임제를 여기에 포함시키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른 차이인데, 여기서는 5 대 제사만을 거론할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제사장의 위임식 때 행해진 위임제는 모든 이스라엘에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제사장의 위임에만 관련된 것으로 보고, 모든 이스라엘이
행해야 할 나머지 5 대 제사, 즉 '번제와 소제', '화목제와 속죄제' 그리고 '속건제'에 대해서만 살펴보기로 한다.
__________________ 레위기 10장 / (23절)
03-20-2023(월) 사순절 제23일
1-7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을 드려, 소멸되다.
8-11 제사장의 음주에 관한 훈계
12-15 소제 및 화목제(감사제, 수은제)의 제사장의 응식에 대하여
16-20 아론의 아들이 속죄제의 규례를 범하여 모세에게 견책되다.
잘못 드린 제사[레 10장]
[내용개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제사장이라는 축복된 사명을 받았다. 그러나 그 축복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주어지는 것이었다. 본장은
취임 첫 날 아론의 두 아들이 죽는 비극적인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이 갖는 의미를 보여 주고 있다. 아론의 아들 중
나답과 아비후는 명하지 않은 불로 분향하다 불에 태워 죽음을 당하였다(1-7절). 이 일을 계기로 하나님은 제사장은 제사시
음주를 금하고 거룩한 음식은 반드시 단 옆에서 먹도록 명하셨다(8-15절). 또한 나답과 아비후의 일로 두려워한 나머지 속죄
제육을 먹지 않고 불사른 엘르아살과 이다말에 대한 모세의 견책이 나타난다(16-20절).
[강 해]
본장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의 축복과 불순종의 저주라는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엿볼 수가 있습니다.
모처럼의 성스러운 임직식을 끝내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구별된 아론의 두 아들 즉 나답과 아비후가 자의로 분향하던 중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 죽었습니다. 본장에는 이 형벌 사건과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제정된 제사장의 음주에 관한 훈계, 제사장의 몫으로 돌린
소제와 화목제에 관한 규정, 제사장 엘르아살과 이다말의 범과에 대한 모세의 견책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학주제]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 본장에는 취임식 첫 날에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죽는 사건이 나타난다. 제사장은 성소의 등불을
켜고 끌 때 향을 살라 바쳐야 하는데 그때 사용되는 불은 반드시 번제단에서 취해야 한다. 그런데 나답과 아비후는 다른 불로 향을
사르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음을 당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제사장들이 명하지 않은 불로 향을 태웠다는 이유로
죽음을 당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율법이 갖는 의미를 보여 준다. 그것은 생명의 구원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축복 속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혈통적 조건 때문이 아니라 율법에 대한 순종 때문임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 영적 이스라엘의 조건 또한 외적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임을 말해 준다.
[영적교훈]
본장에서 하나님은 나답과 아비후의 사건을 계기로 제사장의 음주에 대한 금지를 명하셨다. 나답과 아비후는 자신들의 막중한 임무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육체적 정욕을 제어하지 못하였기에 죽음을 당한 것이다. 이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 모든 일에 절제하고 정결케 하여야 함을 교훈해 준다. 성결하신 하나님께서는 몸과 마음이 깨끗한 자를 택하여 자신의 일을
위하여 쓰시기 때문이다.
__________________ 레위기 9장 / 축복(23절)
03-18-2023(토) 사순절 제22일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Moses and Aaron then went into the Tent of Meeting.
When they came out, they blessed the people; and the glory of the LORD
appeared to all the people.
22.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필하고 내려오니라. 23.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 축복(祝福) 1288. 바라크(bârak) בָּרַךְ
1. 무릎을 꿇다, 2. 하나님께 기원하다, 3. 피엘형 בֵּרֵךְ
발음
/ 바라크(bârak) 관련 성경 / 문안하다(삼상 13:10), 무릎을 꿇다(대하 6:13, 시 95:6), 찬송하다(창 9:26, 왕상 1:48,
시 113:2), 복을 받다(창 24:31, 삼하2:5, 시 72:17), 축복하다(창 27:33, 민 23:11, 왕상 8: 66),
칭찬하다(삼상 25:33), 복이 있다(삼상 25:33, 룻 2:19, 20), 찬양하다(삼하18:28, 왕상 5:7, 시 106:48),
송축하다(왕상 8:15, 스 7: 27), 복되다(출 20:11, 잠 5:18), 복을 주다(사 19:25, 출 20:24, 신 15:6),
복을 얻다(창 12:3, 시 128:4), 복을 내리다(출 23:25, 신 28:8), 은혜를 베풀다(신 7:13),
저주하다(왕상 21:10, 13), 욕되게 하다(욥 1:5), 복을 빌다(욥 31:20), 자랑하다(시 10:3), 욕하다(욥 2:9),
풍부히 주다(신 14:24), 축사하다(삼상 9:13), 인사하다(왕하 4:29), 축하하다(시 49:18),
꿇리다(창 24:11), [명] 찬송(신 33:20, 시 135:21, 욥 1:21), 복된자(사 65:23), 축복(민 23:20),
복(대상 4:10), 안부(왕하 10:15) 구약 성경 / 256회 사용
레위기 1장부터 7장은 다섯 가지 제사에 관한 말씀입니다. 레위기 8장부터 10장은 제사를 집례하는 제사장에 관한 말씀으로 8장에서는 제사장의 위임식, 9장에서는 제사장이 집례하는 첫번째 제사에 대하여, 10장에서는 제사장이 제사를 잘못 집례했을 때에 관한 말씀입니다.
아론의 첫 번째의 직무 수행[레 9장]
1-6 아론과 그 아들들의 임직식의 헌물에 대한 모세의 명령
7-14 아론이 자기를 위해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다.
15-21 다음으로 백성을 위해 속죄제, 번제, 소제, 화목제(수은제, 감사제)를 드리다.
22-24 제사장이 백성을 축복하매 하늘에서 불이 임하여 번제를 사르다.
[내용개요]
본장에서는 칠 일 간의 위임식을 끝낸 아론과 그 아들들이 제사장으로 취임하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모세가 제사를 지낸 위임식과
달리 취임식부터는 아론이 직접 제사를 드리기 시작한다. 모세는 아론에게 제사장의 직무를 시작하도록 명하였다(1-7절). 이에
아론은 자신을 위하여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고(8-14절), 백성들을 위하여 속죄제와 화목제를 드렸다(15-21절). 이때
하나님께서 불로 단 위의 제물과 기름을 사르셔서 취임을 인정하는 증표를 주셨다(22-24절).
[강 해]
본장은 레8장에 소개된 제사장 임직에 대한 계속입니다. 7일 동안의 위임식을 마친 제사장은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렸습니다. 이는 제사장이 위임된 후 하나님께 드린 첫 제사로서 제사장들을 위한 제사, 온 회중을 위한 제사, 모세와
아론의 축복과 불로 나타난 여호와의 영광 등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중에서도 아론이 드린 첫 제사는 아론이 신적 권위를 갖고서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중재자로 출발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학주제]
취임식 제사. 아론은 제사장으로 선택된 후 칠 일 간의 위임식 행사를 통해 속죄제를 드리고 스스로를 정결케 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장에서는 취임식 행사로 아론에게 다시 속죄제를 드리도록 요구하고 있다. 이는 몇 가지 측면에서
구속사적 의미를 보여 준다. 첫째는 끊임없이 요구되는 속죄 제사를 통해 인간의 철저한 부패와 죄성을 보여 주고 있다. 즉 인간은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언제나 지중에 존재하므로 오직 하나님 외에는 소망이 없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둘째는 끊임없이 드려야 하는
속죄제는 구원에 있어 인간의 노력이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보여 줌으로써 완전한 대제사장인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을 나타내고 있다.
예수님의 대속은 자신을 단번에 드림으로 모든 구원을 이루시고 짐승의 희생 제사를 온전히 이루신 것이다. 한편 아론이 백성들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린 것은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 구원 사역의 유일한 중보자이심을 예표하고 있다.
[영적교훈]
칠 일 간의 위임식 행사를 통해 끊임없이 자진을 정결케 한 아론은 취임식을 맞아 다시금 속죄제를 드려야 했다. 인간은 연약하고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자랑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음을 교훈해 준다. 따라서 성도들은 매일의 삶 속에서 자신의 죄를 돌아보아 회개하여야 하며,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오직
그의 구원과 은혜만을 바라보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1) 아론에게 헌제를 지시하는 모세(1-2)
모세는 제사장들의 위임식 후 팔 일째 되는 날에 아론과 그 아들들과 이스라엘 장로들을 불러모으고 아론으로 하여금
대제사장으로서 첫 제사를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대제사장인 아론도 하나님 앞에서 항상 자신의 죄를 사함받아야 하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1-2).
2) 제사의 순서(3-6)
아론이 자기와 백성을 위하여 드리는 제사의 순서로 첫 번째로 드리는 속죄제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있는 죄를 용서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번째로 드리는 번제는 속죄받은 자로서의 온전한 헌신을 나타냅니다. 마지막으로 드리는 화목제는 하나님과 백성의
진정한 교제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축복에 감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3-4)
.
모세가 아론에게 명령한 것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였습니다(5-6).
3) 아론 자신을 위한 속죄제와 번제(7-14)
위임식이 끝난 아론은 대제사장으로서의 백성의 죄를 위한 속죄제를 드리기 전에 자신을 위한 속죄제를 먼저
드렸습니다(7-11). 그 이유는 죄의 문제가 해결된 후에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의 고백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위해 속죄제를 드린 아론과 그 아들들은 번제를 드렸습니다. 번제의 향기를 하나님께서 향기로운 제사라고 하셨듯이, 번제는 속죄함을 받은 하나님 백성의 헌신과 성결과 충성스러운 삶을 상징합니다(12-14).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도 회개해야 할 죄인이기 때문에 완전하고도 영원한 그리스도의 중보가 필요한 것입니다.
4) 백성을 위한 제사 (15-21)
아론은 자신을 위해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고 난 후 백성을 위해 속죄제와 번제와 소제, 그리고 화목제를 드렸습니다(15-21).
5) 손을 들어 축복함(22)
아론은 하나님과 백성 간의 중보자로서 그 모든 제사가 하나님께 기쁘게 열납되었다는 의미에서 백성을 향해 손을 들어 축복하였습니다. 축복을 선포하는 자는 제사장이지만 축복을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22).
6) 하나님의 영광(23-24)
아론은 대제사장으로서 첫 직무를 끝마치고 모세와 함께 회막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모세와 아론은 회막에서 나와
백성에게 축복하였습니다. 그때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제사장으로 위임된 아론의 첫 직무를 기쁘게
받으셨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의 축복 행위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그리고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모두
태웠습니다(23-24).
주께서 주신 오늘!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시한 모세 그리고 순종한 아론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던 것 처럼 나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길 원합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제사장 취임식을 하고 8일이 지났습니다(1절). 모세가 이들을 불러 예배를 시작하게 합니다. 위임식 이후 8장 35절에서 ‘ 칠 주야를 회막 문에 머물면서 여호와께서 지키라고 하신 것을 지키라 그리하면 사망을 면하리라 내가 이같이 명령을 받았느니라 ’ 고 했던 모세의 명령을 온전히 지켜 회막 문 밖으로 나가지 않던 7일이 지나 첫 번째 행보를 시작합니다. 제사장이라는 신과 인간의 중재자로서 그들은 먼저 하나님과 완전한 만남을 마친 후, 사람에게 나아갔음을 교훈 삼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분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새로운 직분을 임명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은 ‘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
고 선언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가 그렇게 잘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모세보다 나은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아닌 척 위선을 뒤집어쓰지도 말고, 그대로 포기해 버리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먼저 우리가 하나님과 만나는 것을 최우선적으로
하기 원하십니다.
모세가 아론에게 속죄제와 번제를 드려야 한다고 한 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예배이기도
합니다. 아론은 자신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다리 역할을 하는 제사장으로 위임받았음에도, 여전히 모세의 말을 따라 자신을 위한
예배를 준비합니다. 우리도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소유된 백성이라는 거창한 명칭에 취하지 말고 예수님
말씀을 따라 바른 예배를 드려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아론은 먼저 속죄제를 드립니다. 8장의 임직식에서 이미
속죄제와 번제를 드렸음에도 재차 드려야만 했습니다. 그토록 중요한 고백이었습니다. 8절부터 11절입니다. 제사장의 속죄제는
일반적인 속죄제가 간, 기름, 콩팥만 번제단 위에 얹어서 태웠던 것과 달랐습니다. 기름, 콩팥, 간을 번제단 위에서 태울 뿐
아니라 나머지 고기와 가죽도 이스라엘 진영 밖 재를 버리는 곳에서 다 태웠습니다. 나아가 제물의 피를 손가락에 찍어서 제단 네
뿔에 바르고 제단 밑에 쏟아 버렸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이 ‘ 세상을 바꾸고 신과 마주하게 돕겠다 ’ 는 명분을 들어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자가 아니라, 스스로를 가장 먼저 죄 사함이 필요한 존재로 여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속죄제의 제물이 흠
없는 수송아지였다는 것은 아론이 하나님과의 독대 이후 처음 드린 예배에서 출애굽기 32장에 있던 사건, 하나님 계명을 받으러 간
모세를 기다리지 못하고 백성에게서 모은 황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었던 것, 을 떠올려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 은혜
없이는 이 자리에 설 수 없는 ‘ 만성적 우상 제작자 ’ 임을 잊지 말아야 했습니다. 제물의 피로 제단 네 뿔에 찍고 밑에 쏟아
대속물의 흔적이 예배에 선명히 드러나야 했습니다. 속죄제를 드리고 나서, 아론은 번제를 시작합니다. 12절부터 14절입니다. 숫양
머리나 각을 뜬 사지를 태운 후 그 위에 내장과 정강이를 씻어서 태웠습니다. 속죄제를 드림으로 죄를 용서받았을 뿐 아니라,
번제를 통해 자기 인생을 헌신하겠다고 다짐한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에 대한 감사 고백으로서의 속죄제와 헌신을
소망하고 결단하는 번제를 마친 아론은 백성을 위한 제사를 시작합니다. 15절부터 22절은 이 제사들을 통해 백성을 위한 염소를
가져다가 속죄제를 통해 죄 용서를 선언하고, 번제를 통해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고백하고 결단하며, 소제를 통해 이것이 매일의 순종과
헌신으로 증명되어야 함을, 화목제를 통해 그 결과로 받기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과 참된 교제의 기쁨임을 전했다고 합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예배는 온 백성의 철저한 준비와 긴장감 속에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백성에게 제물을 준비하게
합니다. 이 제사는 한 사람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숫염소를 가져와 속죄제를, 흠 없는 송아지와 어린양을
가져와 번제를, 수소와 숫양을 가져와 화목제를, 기름 섞은 소제물을 가져와 소제를 드렸습니다(3-4절). 아론과 자녀들이 임직식을
마치고 회막 문에서 하나님과 독대하던 때는, 백성들도 거룩한 두려움과 떨림으로 기다려야 했습니다. 23절에서도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 기다림이 지나야 하나님 영광의 임재 구름을 영접합니다.
모든 과정에서 불순한 부분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결코 예배를 완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를 기억하며 우리가 주일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하는지, 하루를 거룩한 두려움과 떨림으로 조심하는지, 그리하여 주일을 제외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여섯 날이
삶의 예배로 드려지고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던 예배의 명령들을 하나씩 실천합니다.
예배는 약속으로 시작해 축복으로 맺습니다. 4절은 여호와의 영광이 ‘ 오늘 ’ 나타날 것이라 예언하고 6절은 여호와의 영광이 ‘
너희에게 ’ 나타날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16-17절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루어진 약속은 확실한 축복을 전합니다.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한 내용은 민수기 6장 24-26절에 있습니다. ‘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
오늘도 예배를 준비하고, 예배자로 살아가는 모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분명한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지켜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얼굴을 우리에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확실히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 얼굴을
우리에게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복과 안전, 은혜와 평강은 예배를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24절에는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 제물을 태우는 것을 온 백성이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막연하지 않았습니다. 예배를 드린 날, 영광이 불로 제단 위 번제물과 기름을 태웠습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피를 쏟아 자신을 제물
삼으셨던 예수님을 닮기 위해 스스로를 제단 위에 두는 모든 이에게 주시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불이 반드시 임하시고, 제단
위에 올려둔 인생을 성령의 불길로 태우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온 백성이 찬송 부르며 주님께 굴복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8-29절입니다. ‘ 28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
__________________ 레위기 8장 / 위임식(22절)
03-17-2023(금) 사순절 제21일
또 다른 수양 곧 위임식의 수양을 드릴쌔 아론과 그 아들들이 그 수양의 머리에 안수하매. He then presented the other ram, the ram for the ordination, and Aaron and his sons laid their hands on its head.
위임식(委任式) 4394
또 다른 수양 곧 위임식의 수양 제사장 위임식을 위해 준비한 두 마리의 수양 중(2절) 이미 한 마리는 번제로
드렸고(18절) 이제 이것은 위임식용 화목제 제물로 드릴 나머지 한마리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 수양을 '위임식의 수양' 혹은
'위임제의 수양' 이라고 불렀다. 한편, 위임식 제사 곧 위임제(委任祭)에 대해서는 7:37 주석을 참조하라.
4394. מִלֻּא
1. 완성, 2. 박음. 3. 봉헌
발음
/ 밀루(millûʼ) 어원 / 439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동] 물리다(출 25:7, 35:9), 가공하다(대상 29:2). [명] 위임식(출 29:22, 레 8:22, 33, 레 7:37). 구약 성경 / 5회 사용
* 4390. מָלֵא
1. 타동사 채우다, 2. 창세기 1:22, 3. 출애굽기 16:32
발음
/ 마래(mâlêʼ)
위임제
이 제사는 1-7장 사이에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이미 출 29:19-30에서 계시받았기 때문에 여기에 함께 기록되었다.
한편, 위임제(委任祭, the Consecrations)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밀루임'은 '채우다'(fill),
'봉헌하다'(consecrate)란 뜻의 '말라'에서 파생된 말이다. 따라서 위임제란 여호와의 제단 위에 제사 예물을
드리도록 손에 무엇인가를 채워주는 의식을 가리킨다(출 29:29; 대상 29:5; 대하 29:31). 즉 위임제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수 있는 자로 제사장을 성별하는 의식을 가리킨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여호와의 거룩한 제사장으로
성별되기 위하여 제물을 손에 채워 여호와께 드리는 특수한 제사를 의미한다(Keil). 이런 의미에서 위임제는 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등과는 달리 제사의 한 종류가 아니라, 이러한 기존의 여러 제사 방법을 통하여 '성직(聖職) 임명'이라는
특수한 목적을 이루는 특별 제사이다. 한편 제사장 위임식에 대한 보다 자세한 규례는 출애굽기 29:19-28의 주해를 참조하라.
제사장 위임식의 일곱 가지 절차(레위기 8:1-36)
아론(모세의 형)과 그 아들들(나답, 아비후, 엘르아살, 이다말)의 제사장 위임식을 말씀하셨는데 이 위임식에는 일곱 단계의 절차가 있었습니다.
1. 온 회중을 회막앞에 모음(1-5절)
2. 제사장을 물로 씻김(6절)
3. 예복을 입힘(7-9절)
4. 기름을 부음(10-12절)
5. 제사를 드림 속죄제(14-17절) 번제(18-21절) 위임제(22-29절)
6. 하나님과 교제의 음식을 먹음(31-32절)
7. 칠일동안 성막 안에 머무름(33-36절)
※제사장과 교회: 예수님은 더 뛰어나신 제사장입니다.(히4:14-19:14) 따라서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였듯이(출19:6) 그리스도의 지체인 신약교회도 제사장 나라입니다.(벧전2:5,9, 계1:6절) 구약시대에 제사장들이 특별히
구별된 예복을(레8:7-9) 입었듯이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도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옷 입으며(살전5:8) 친절과 겸손과 인내로
옷 입어야 합니다.(골3:12) 특히 제사장 위임제에서 17절에 보면 가죽을 불살랐다고 했는데 가죽은 언제나 제사장
몫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임명될 때 드리는 제사는 제사장을 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부분을 불태웠습니다. 아들들을 위하여 드리는
번제, 위임제(8:18-21)에서는 두 마리의 숫양이 필요했는데(8:2) 그 가운데 한 마리는 번제물로(인간의 죄에 대한 속죄
물로), 한 마리는 위임 제물로 바쳤습니다. 이때 숫양의 피를 제사장의 귀와 손과 발에 발랐는데(23-24) 이는 거룩한 성별과
온전한 헌신을 상징한 것입니다. 첫 번째 제사장의 위임식은 모세가 집례 하였고 7일 동안 거행했습니다. 7일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제사장으로 구별되었는데 신약의 성도들도 하나님께 예배드린 후에는 세상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바울도 사도로 부름을 받고서 자신이
거룩하게 구별되었다고 했습니다.(롬1:1절)
오른 귓부리... 오른손 엄지... 오른발 엄지 -
화목 제물로 잡은 수양의 피를 제사장의 이러한 신체 부위에 바르는 것은 곧
하나님께 대한 제사장의 전적 순종과 헌신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보여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손과 발의 엄지 가락을 잃으면
그는 힘을 쓸 수 없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삿 1:6). 따라서 손과 발, 특히 그중에서도 오른손과 오른발의 엄지는 힘을
나타내며 여기에 피를 바른 것은 이것으로 열심히 봉사해야 하는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귀는 대체적으로 '예속'을
의미하는 신체 부위이다. 그러므로 고대 근동에서는 어떤 사람의 귀에 구멍을 뚫으면 그는 일평생 상전에게 소속된 사람으로서 충성을
다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였었다(21:6). 그러나 여기서 제사장의 귓부리에 화목제물의 피를 바른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깊게 듣고서 그 말씀대로 철저히 순종하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적 행위로 이해함이 보다 타당하다(Wycliffe).
단 위의 피와 관유를... 옷에 뿌리라 -
수양의 피 중 단 위에 뿌리고 남은 피를 또다시 거룩한 목적에 쓰이는
관유(7절)와 섞어 제사장의 옷에 뿌렸다. 이처럼 피 섞은 기름을 제사장들의 옷에 뿌린 것은 피에 의해 그 옷을 입는 제사장의
죄가 가리워지며, 기름에 의해 거룩히 구별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제사장이 안수를 받는 과정은 레위기 8장에 일곱 가지 절차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8장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어 나오는 말씀이 있는데,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심과 같았더라”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이 매 단계마다 기록되어 있는데, 총 7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안수식 준비 단계
레위기 8장 1~4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안수식 준비를 위해서는 총 세 가지를 갖춰야 합니다.
첫째는 안수 받을 대상자입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입니다. 둘째는 준비물입니다. 제사장에게 입힐 의복, 제사장에게 부을 관유라는 기름, 속죄제를 드릴 수송아지, 번제와 화목제를 드릴 숫양 두 마리, 그리고 제사장이 먹고 하나님께 일부는 태워 드릴 무교병 떡 한 광주리입니다. 셋째는 이스라엘 온 회중을 불러 회막 문 안에 모이게 하는 일입니다.
8장 3절에 “온 회중을 회막문에 모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인구가 300만명이 넘는데 어떻게 다 모일 수 있겠습니까? 회중 가운데 지도자들이 모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사장의 안수식이 은밀하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공개적으로 진행되는 일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두 번째 단계는 씻음과 입힘의 단계
레위기 8장 5~9절에 따르면 모세는 물두멍의 물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씻깁니다. 그리고 아론에게 속옷을 입힌 후 겉옷을 입힙니다. 그런데 물로 씻길 때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벌거벗긴 채로 씻겼겠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의 의복가운데는 속옷 안에 입는 ‘고의’(속바지)가 있는데, 이것을 입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씻긴 후 입힌 속옷은 흰색 원피스입니다. 일반 제사장은 이 흰색 속옷을 입고 띠를 띠고 직무를 수행하면 됩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은 흰색 속옷을 입고, 그 위에 청색 겉옷을 입습니다. 그리고 에봇을 걸치고, 열 두 개의 보석이 박힌 판결 흉패를 가슴에 붙입니다. 이 흉패에는 주머니가 있어서 우림과 둠밈을 보관합니다. 제사장이 하나님의 뜻을 물어볼 때 쓰는 도구입니다. 그리고 머리에 관을 씁니다. 관에는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새겨진 금띠가 둘려 있습니다.
대제사장 의복의 특징은 ‘영광스럽고 아름답다’(Glory and Beauty)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백성들 앞에 하나님을 대표하고, 하나님 앞에 백성들을 대표하는 중보자이기 때문에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의복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의복을 제대로 갖춰 입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성막 안에서 아무 것이나 입고 일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관유라는 기름을 붓는 단계
모세는 관유를 취해 성막에 바르고, 번제단 뿔에 일곱 번 뿌리고, 번제단, 물두멍 등 성막의 모든 기구에 바르고 아론의 머리에도 기름을 붓습니다. 그러면 아론과 그의 아들들, 성막의 모든 기구가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 외에 다른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바벨론의 마지막 왕 벨사살은 여호와의 성전에서 가져온 기름 바른 기명들을 사용해서 술을 마시다 그 날 밤 죽고 말았습니다. 모세가 아론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장면이 시편 133편 2절에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관유를 부으면 수염을 적시고, 옷을 적시는데, 그 모습이 매우 아름다웠던 것입니다. 관유는 향내가 매우 깊습니다.
네 번째 단계는 속죄제를 드리는 단계
레위기 8장 14~17절까지로, 수송아지 한 마리로 속죄제를 드리는 단계입니다.
속죄제는 여호와의 금령을 모르고 범한 죄를 속하기 위한 제사입니다. 흠 없는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고 모세가 죽입니다. 그리고 그 피를 번제단 뿔에 바르고 남은 것은 번제단 밑에 쏟고 내장 기름은 다 태운 후 나머지는 진 밖으로 가지고 나가 불태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지중에 여호와의 금령을 범한 죄들을 용서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제사장의 속죄제인 경우, 분향단의 뿔에도 피를 바르고 분향단 밑에도 일곱 번 뿌리는 절차가 필요한데, 제사장 안수식에서의 속죄제는 이런 과정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번제단을 중심으로만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온 회중이 밖에서 다 지켜보는 가운데 행해졌기 때문입니다. 공개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이토록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다섯 번째는 번제를 드리는 단계
숫양 한 마리로 번제를 드리는 단계입니다. 번제는 알고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한 제사입니다. 부지중에 지은 죄는 속죄제, 알고 지은 죄는 번제를 통해 용서받는데, 이는 모든 종류의 죄를 다 속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여섯 번째는 화목제를 드리는 단계
숫양 한 마리로 화목제를 드리는 단계입니다. 레위기 8장 22~29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화목제의 특징은 고기를 드리는 사람이 먹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화목제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안수식의 화목제는 ‘위임제’(Offering of Consecration)라고 합니다. 그러면 왜 ‘위임’을 의미하는 단어(Dedication이나 Delegation)를 사용하지 않고, ‘성별’이라는 의미의 단어(Consecration)를 사용했을까요? 그것은 모세가 자기 권한을 아론에게 분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아론을 구별하여 택하시고 세우시는 것이기 때문에 ‘성별’(Consecration)을 사용한 것입니다.
화목제를 드리기 위해서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숫양 머리에 안수하고 모세가 잡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그 피를 세 군데 바릅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오른쪽 귓부리와 오른손 엄지, 오른발 엄지에 바릅니다. 이는 제사장들이 바른 말을 듣고, 옳은 일을 행하고, 좋은 곳에만 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성도들은 바른 소리를 듣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착한 사람도 “이 사람 나쁜 사람이다!”라는 말을 몇 번만 듣게 되면 그 사람이 나쁜 사람으로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나쁜 말을 들으면 선입견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귓부리에 피를 발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손으로 도적질과 같은 나쁜 일을 하지 말고 선한 일을 행해야 합니다. 또 발로 좋은 곳을 향해 가야 합니다. 그리고 남은 피는 모두 제단 주위에 뿌립니다.
그리고 나서 세 가지를 태웁니다. 내장 기름과 광주리의 무교병 떡 세 개와 우편 뒷다리를 태웁니다. 원래 일반적인 화목제에서 제사장은 두 가지 고기를 먹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가슴 고기와 우편 뒷다리 고기입니다. 그런데 위임제에서는 가슴 고기만 먹고 우편 뒷다리는 하나님께 태워드립니다. 이것은 제사장이 먹는 몫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이 먹고 사는 것은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내가 노력해서 벌었지! 하나님이 해 준 것이 무엇이냐?”고 말합니다. 그런데 병이 들어 아파서 입원하면 내가 노력해서 번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 먹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일곱 번째는 무교병을 먹는 단계
레위기 8장 30~31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가슴 고기를 먹고 광주리에 남은 무교병을 먹는 단계입니다. 그런데 그냥 먹는 것이 아니라 모세가 관유와 피를 섞어 제사장의 옷에 뿌린 후 먹게 합니다. 온전한 거룩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교제가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7일 동안 회막 문 안에 거하며 위임식의 절차를 반복적으로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졸속으로나 은밀하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공개적이고 또한 신중하게 진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사장 안수식의 세 가지 영적 의미
제사장의 안수식 일곱 가지 절차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거룩한 분
인간은 제멋대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막말을 하고 건방진 자세로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죄를 가지고 접근할 수 없습니다. 모세와 아론과 같은 사람들이 기름을 바르고 피를 바르고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갔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진실함과 거룩함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을 접견할 때도 무턱대고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에 합당한 예의를 갖추는 것입니다. 인간인 대통령에게도 예절을 갖춰야 한다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막말을 하고 제멋대로 행동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레위기 10장에 아론의 두 아들이 현장에서 즉사한 이유는 자기 멋대로 하나님께 접근하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둘째, 인간은 어느 누구도 자기 스스로의 능력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것
자기 힘으로 접근하려고 하면 현장 즉사입니다.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중보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 죄로 오염된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를 이루기 위해서는 구별된 대제사장의 희생제사가 필요하다는 것
구약 시대에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중보를 하는 사람이 대제사장 아론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론은 예표이고,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 된 인간 사이를 중보해서 하나님께 나아가 교제할 수 있도록 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십니다.
공자, 석가모니, 모하메드가 아무리 훌륭하고 탁월한 종교인이었다 해도 그들은 중보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이 계신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분과 교제하며 살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애굽기 29장은 제사장의 위임식(Ordination)
위임식은 특별한 의식을 통해서 제사장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게
함으로써 새로운 거룩한 영역에 들어가게 한다. 그들은 사람들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일을 하기위해 남들과 구분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들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며 그 일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또 어떻게 그 일을 수행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위임식은 손을 채우다(Fill his hands), 지원하다(Support)라는 뜻이 있다. 제사장으로 위임한다는
말은 그의 손을 채운다는 뜻이다. 그에게 권위와 능력을 부여함으로써 기능을 채우게 한다. 모세는 그들에게 안수하여 능력을
부여하였다. 위임식은 제사장을 회막 문으로 데려다가 옷을 입히는 것으로 시작되며 7일간 진행된다.
위임식은 4단계로 나누어 지는데
첫째 단계에서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의복을 입고(29:4-9) 둘째 단계에서는 수송아지를 속죄제물로 바치며(29:10-14)
세째 단계에서는 수양을 번제로 바치고(29:15-18) 네째 단계에서는 다른 수양하나를 위임식을 위한 희생의 제물로 바친 후 그
희생의 고기를 하나님 앞에서 먹는다(29:19-41).
3차례의 제사를 살펴보면 먼저 속죄 제물(Sin Offering)로
제단(Altar)을 정화시켜 제단이 가장 거룩한 곳이 되게 한다. 이 곳에 수송아지의 피를 단의 네 귀퉁이 뿔에 바르고 제단의
밑에 피를 쏟음으로써 제단을 정결케하는 의식을 마친다.
두번째는 번제(Burnt Offering)로 아론과 그 아들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수양 전체를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로 바쳐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한다.
세번째는 위임식을 위한 수양을
잡아 속죄 제물 때 피를 바르는 것과는 달리 피를 제단과 제사장에게 뿌린다. 이는 피의 의식(Blood Rite)으로
불린다(출 24:6, 8). 이 피의 의식을 통해 제사장은 부정한 영역에서 거룩한 영역에 속한 자로 바뀐다.
3차례의 제사는
속죄제와 번제를 거쳐 화목제를 드린 후 거룩한 음식을 먹는 순서로 발전한다. 출애굽기 29장이 제사장의 위임식에 관한 지침을
지시한다면 레위기 8장은 이 지침을 시행하는 것을 기록한다. 위임식은 제사장을 거룩하게 하는 의식이다. 따라서 희생의 제물로
사용되는 동물은 흠이 없고 완전해야 한다. 그들이 입는 의복도 거룩해야 한다. 그들은 옷을 입기위해 회막문 앞으로 나와야 한다.
회막의 입구는 제단과 성막 사이에 위치한다. 제사장들은 이 곳에서 의식을 행했다. 제사장의 위임식은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보는
가운데 행한다. 그들은 의복을 입기 전에 먼저 몸을 씻어야 한다. 몸 전체를 물에 담가 씻는지 아니면 손과 발 만을 씻는지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몸을 정결하게 한 후 아론이 옷을 입고 그의 아들들이 차례로 옷을 입는다. 옷을 입은 후에는 모세가 그들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다. 기름을 붓는 행위는 그 사람에게 특별한 신분을 부여하는 정결의식으로 왕과 선지자들이 기름부음을 받았다.
출애굽기 29:20 피를 아론의 오른쪽 귓부리와 그의 아들들의 오른쪽 귓부리에
바르고 그 오른손 엄지와 오른발 엄지에 바를 것을 명하셨다.
레위기 14장에 기록된 문둥병 환자의 정결의식과 같다.
귀와
손과 발에 피를 바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삶에서 행위로 반응하고 삶의 방향을 올바로 정립해야 하는 것을
상징한다.
제사장의 위임식과 문둥병 환자의 정결의식이 같은 이유는 무엇일까? 제사장과 문둥병 환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성경은
분명 의학서적이 아니다. 그런데 왜 성경에서는 문둥병 환자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이며 자세히 기록하는가?
문둥병은 가장 무서운
전염병이며 인간의 모든 신경조직을 파괴시키는 병으로 회복의 가능성이 희박한 절망의 병이다. 문둥병에 걸린 사람은 공동체에서
분리되어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지 못한다. 비록 살아있지만 죽은 자와 같은 어두운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 모두는 죄로 인해 몸이
썩어가는 문둥병 환자이다. 우리가 문둥병을 치유받고 정결의식을 거쳐 거룩해지지 않으면 공동체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문둥병
환자의 정결의식의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먼저 제사장이 진 밖으로 나가 문둥 환자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진찰한다. 그것은 예수님이 진 밖에 있는 우리를 만나기 위해 찾아 오시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정한 산 새
두마리를 잡는다. 한마리는 죽음을 당하고다른 한 새는 산채로 취하여 들에 놓아 날아가게 한다. 죽은 새는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하며 산 새는 우리 믿는 자들을 상징한다.
죽은 새의 피에 의해 살아있는 새가 정결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생명을 얻었다. 그러나 그 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우리에겐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이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삶의 변화이다. 삶의 변화가 없이는 완전히 치유된 것으로 볼 수 없다.
우리 모두는 제사장이다. 그러나
제사장은 그냥 자동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위임식이라는 정결의식을 거쳐야 한다. 특히 피뿌림과 기름부음이 없으면 제사장이 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로부터의 구원과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어야 하며 삶의 변화가 필요하다. 삶의 변화가 없이 어떻게
남들과 구분된 삶을 살며 제사장의 거룩한 직무를 수행할 수 있겠는가? 결국 우리가 문둥병 환자라고 생각하던 아니면 제사장이라고
생각하던 우리에게 요구되는 요구사항은 같다.
나병 환자의 정결예식(레위기 14:1~20)
제사장의 진단(1~3절) 제사장이 행하는 정결 의식(4~8절) 환자가 행하는 정결의식(9절) 정결함을 받을 자가 드리는 속건제(10~18절) 하나님의 백성이 된 후에 드리는 속죄제와 번제와 소제(19~20절)
레위기 13장 - 나병의 종류와 진단과 조치법 : 나병의 영적인 의미
13장과
14장은 나병(문둥병, 한센병) 을 다루는 장입니다. 구약 성경에 기록된 나병은 피부병의 일종으로 전염성이 강하고, 사람의
피부에 발생될 뿐 아니라 의복, 그릇이나 집 안의 벽 등에 발생되는 것으로 나옵니다. 나병에 관해서 아는 바가 없어서 나병과
관련된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그 중에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한센병연구소의 채규태 교수님의 글을 비롯해서 위키백과, 서초구
보건소의 의학자료를 비롯해서 여러 가지 자료를 검색해 보았습니다. 그 중에 한센병 질환자의 사진 자료는 너무나 끔찍해서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견디기 힘들만큼 끔찍합니다. 가톨릭의대 채규태 교수님의 글을 읽으면 구약에 기록된 나병에 대한 기록은 현대의
한센병과는 거리가 멀다는 견해를 보입니다.
성서에는 특히 구약성서에는 나병에 관한 기록이 많다. 위에서도 언급한 <출애굽기 4:6>의 나병에서부터 <루까 17:22>의 열명의 나환자에 이르기 까지 약 50회 정도 언급된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손에 문둥병이 들어 마치 흰 눈이 덮인 것 같았다 <출애굽기 4:6>는 문둥병은 오늘날 우리가 보는 나균 감염으로 발생하는 문둥병(leprosy, Hansen's disease, 한센병)과는 다른 것으로 생각되며, 탈락성 피부염의 일종으로 보인다. 성서가 희랍어로 번역될 때, 히브리어인 zaraath, Tsraath(unholy, unclean)에 해당되는 말이 희랍어에는 leprosy 였다. 여기에 사용한 문둥병이라는 용어는 사람 뿐 아니라 집이나 옷에 생기는 깨끗하지 못한 질환을 뜻하고 있음을 성서에서 찾아 볼 수 있다<레위기 13장, 사람에 생긴 문둥병, 옷에 생긴 문둥병 레위기 13:47-59, 집에 생긴 문둥병 14:33-57>. 따라서 구약의 문둥병은 오늘날 우리가 진단하고 치료하는 전염병의 일종인 한센병(나병, 문둥병)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한센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질병이므로 하느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면 너무나 가혹한 처사임을 분명히 인식하여야 한다.
가톨릭의대 한센병연구소 채규태 교수의 글 중에서
이와
같은 의학자의 견해를 참고하며 오늘 본문의 말씀의 내용을 분해해 보겠습니다. 글의 말미에는 나병과 관련된 영적인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2~23절 : 사람의 피부에 생긴 나병(심각한 피부병) 24~28절 : 화상에 난 나병 29~39절 : 환부에 생긴 나병, 옴, 피부 어루러기 등 40~44절 : 대머리에 난 나병 47~59절 : 털옷, 베옷, 가죽 옷 등에 발생한 나병
새번역에서는
한글개역성경에서 문둥병으로 번역했고, 개역개정에서는 나병으로 번역한 단어를 백선, 악한 피부병 , 곰팡이 등으로 번역하였기
때문에 헷갈릴 수 있는데 채규태 교수님의 글에서도 볼 수 있듯이 현대인이 생각하는 한센병과 구약에 기록된 문둥병, 나병이 거리가
멀다는 것들을 고려해서 번역한 용어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성경에서
수많은 질환들이 등장하지만 그 중에서 특정 질병에 대해 가장 자주 등장하고,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설명하는 질병은 나병(문둥병,
한센병)이 유일하다 생각됩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은 나병에 대해서 이렇게 집중적으로 중요하게 다루시는 것일까요? 여러 질병
가운데 가장 더럽고, 부정하고, 전염성이 강한 질환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전염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나 세균처럼 주위 사람들에게
악한 질병을 퍼트리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엄격히 격리하고 차단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나병(癩病, Leprosy) 또는 한센병(Hansen's disease; HD)은 미코박테리아의 일종인 나균(Mycobacterium leprae)과 나종균(Mycobacterium lepromatosis)에 의해 발생하는 만성 감염병이다. 처음 감염되었을 때는 아무 증상이 없고, 이 잠복기는 짧으면 5년, 길면 20년 가량 지속된다. 증상이 발현하면 신경계, 기도, 피부, 눈에 육아종이 발생한다. 이렇게 되면 통각 능력을 상실하고, 그 결과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신체 말단의 부상 또는 감염이 반복되어 썩어 문드러지거나 떨어져 나가서 해당 부위를 상실하게 된다. 체력의 약화와 시력의 악화 또한 나타난다.
위키백과 나병에 대한 정의
그런 까닭에 나병에 걸린 사람은 진영 안에서 살지 못하고 초기에 제사장이 진단을 하는 기간 동안에도 엄격하게 격리해서 관찰하는 기간을 두게 하셨고, 나병으로 확진 판정을 받게 되면 진영 밖으로 내보내서 혼자 생활해야 했습니다.
45. 악성 피부병에 걸린 사람은 입은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야 한다. 또한 그는 자기 코밑 수염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 하고 외쳐야 한다.
46. 병에 걸려 있는 한, 부정한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되므로, 그는 부정하다. 그는 진 바깥에서 혼자 따로 살아야 한다."
구약 성경에 기록된 나병에 걸린 대표적인 사람들
구약 성경은 심각한 피부질환인 나병을 영적인 문제와 연결해서 다루고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나병에 걸린 사람들은 누가 있을까요?
1. 모세
구약
성경에서 최초로 나병에 걸린 것으로 표현된 인물은 모세입니다. 출애굽기 3장에서 하나님이 호렙산에서 떨기나무 불꽃으로
부르십니다. 그 때부터 하나님은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서 바로에게 내 백성을 보내라 명하라 하시지만 모세는 끝까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역하며 따를 수 없다고 반항하는 내용이 기록된 장면에서 등장하는 구절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거역한 모세에게 나병이라는
이적을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출애굽기 4:6~7 6. 여호와께서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의 손에 나병이 생겨 눈 같이 된지라7. 이르시되 네 손을 다시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다시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의 손이 본래의 살로 되돌아왔더라. 2. 미리암
하나님이
세우신 모세를 대적한 미리암에서 나병이 발병합니다. 민수기 12장 전체가 미리암에게 하나님이 진노하사 나병이 발병하게 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장입니다. 그 사건의 발단은 모세가 아내 십보라가 죽은 후에 구스 여인인 흑인여자를 두번째 아내로 맞아들인 일에
대해 미리암과 아론 두 사람이 모세를 심하게 비방한 사건입니다. 4절에 보면 하나님이 모세, 아론, 미리암 세 사람을 지명하여
부르십니다. 그런 후에 벌어진 사건입니다.
민수기 12:1~13
1.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2.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4. ○여호와께서 갑자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에게 이르시되 너희 세 사람은 회막으로 나아오라 하시니 그 세 사람이 나아가매. 5.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로부터 강림하사 장막 문에 서시고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시는지라 그 두 사람이 나아가매. 6.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7.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8.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9. 여호와께서 그들을 향하여 진노하시고 떠나시매. 10. 구름이 장막 위에서 떠나갔고 미리암은 나병에 걸려 눈과 같더라 아론이 미리암을 본즉 나병에 걸렸는지라. 11. 아론이 이에 모세에게 이르되 슬프도다 내 주여 우리가 어리석은 일을 하여 죄를 지었으나 청하건대 그 벌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소서. 12. 그가 살이 반이나 썩어 모태로부터 죽어서 나온 자 같이 되지 않게 하소서. 13.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하나님이여 원하건대 그를 고쳐 주옵소서.
미리암에게
나병이 발병한 원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대리자로 세우신 모세를 비방하고, 모세보다 자신을 높이려한 미라임의 교만과 모세의 권위를
무시한 태도로 말미암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론이 미리암을 위해 기도한 구절을 보면 12절에 나병이 걸려서 중증으로 심각해지면
살이 썩어문드러지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지경까지 악화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리암의 경우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영적인 교만과
거역하는 태도가 직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웃시야 왕
남유다 왕국의 왕 중에서 나병에 걸린 유일한 왕이 웃시야 왕입니다.
역대하 26:16~19
16.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17. 제사장 아사랴가 여호와의 용맹한 제사장 팔십 명을 데리고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가서. 18. 웃시야 왕 곁에 서서 그에게 이르되 웃시야여 여호와께 분향하는 일은 왕이 할 바가 아니요 오직 분향하기 위하여 구별함을 받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이 할 바니 성소에서 나가소서 왕이 범죄하였으니 하나님 여호와에게서 영광을 얻지 못하리이다. 19. 웃시야가 손으로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 하다가 화를 내니 그가 제사장에게 화를 낼 때에 여호와의 전 안 향단 곁 제사장들 앞에서 그의 이마에 나병이 생긴지라.
웃시야
왕의 이마에 나병이 발병하게 된 이유는 미리암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그를 쳐서 징계하심으로 발병하였습니다. 성소 안에
있는 분향단은 오직 제사장만 할 수 있게 법을 정하셨는데 마음이 교만하여 하나님의 법도를 무시하고 거역한 웃시야 왕은 악행을
저지르다가 하나님의 진노에 징계를 당한 것입니다. 이 경우에도 나병이 영적인 교만과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거역의 경우에 발병한
것을 볼 수 있죠.
5. 엘리사 선지자의 시종 게하시
엘리사
선지자 시대에 아람 왕국의 장군 나아만은 나병을 고침 받으려고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옵니다. 그는 많은 예물을 가지고 엘리사를
찾아와서 나병을 고침받기를 구합니다.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 선지자에게 한 행동은 14장에서 나병 환자의 정결례를 다룰 때 조금 더
소상히 설명을 하기로 하고, 여기선 게하시의 행동에만 초점을 맞추겠습니다.
열왕기하 5:15~16, 20~27
15. ○나아만이 모든 군대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의 앞에 서서 이르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청하건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하니
16. 이르되 내가 섬기는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그 앞에서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더라 나아만이 받으라고 강권하되 그가 거절하니라
20.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스스로 이르되 내 주인이 이 아람 사람 나아만에게 면하여 주고 그가 가지고 온 것을 그의 손에서 받지 아니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그를 쫓아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받으리라 하고
21. 나아만의 뒤를 쫓아가니 나아만이 자기 뒤에 달려옴을 보고 수레에서 내려 맞이하여 이르되 평안이냐 하니
22. 그가 이르되 평안하나이다 우리 주인께서 나를 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지금 선지자의 제자 중에 두 청년이 에브라임 산지에서부터 내게로 왔으니 청하건대 당신은 그들에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주라 하시더이다
23. 나아만이 이르되 바라건대 두 달란트를 받으라 하고 그를 강권하여 은 두 달란트를 두 전대에 넣어 매고 옷 두 벌을 아울러 두 사환에게 지우매 그들이 게하시 앞에서 지고 가니라
24. 언덕에 이르러서는 게하시가 그 물건을 두 사환의 손에서 받아 집에 감추고 그들을 보내 가게 한 후
25. 들어가 그의 주인 앞에 서니 엘리사가 이르되 게하시야 네가 어디서 오느냐 하니 대답하되 당신의 종이 아무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
26. 엘리사가 이르되 한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이할 때에 내 마음이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이냐
27. 그러므로 나아만의 나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 하니 게하시가 그 앞에서 물러나오매 나병이 발하여 눈같이 되었더라
엘리사
선지자는 나아만 장군이 강권하며 예물을 바치는 것을 끝까지 거절합니다. 그런데 게하시는 물욕, 탐욕에 눈이 어두워서 선지자의
뜻을 거스르고, 독단으로 재물을 청하여 받게 됩니다. 그 게하시의 거스름에 대한 징벌로 나병이 그에게 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병을 통해서 주시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나병의 특징을 꼽아보겠습니다.
첫째, 나병은 잠복 기간이 깁니다.
5년에서 20년에 걸쳐 오랜 잠복기간을 거친 후에 발병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교만이나 거역한 태도는 평상시에는 마음 속에 깊이 잠재되어 있고, 노출되지 않는 상태일 수 있습니다. 그러다
어떤 게기에 부딪히게 될 때 드러나게 되죠. 미리암이 그랬고, 게하시가 그렇습니다. 웃시야 왕은 그가 하는 일들이 잘 되고,
강성해질 때 그 속에 잠재되어 있던 교만이 두드러지게 솟아나와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왕이 직접 제사장의 일까지 침범하여
직접 수행하고자 했죠.
둘째, 발병이 되면 신경이 마비되어 무감각하게 됩니다.
양심이
마비되면 무감각하게 됩니다.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을 저지르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을 일컬어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고 합니다.
양심이 화인 맞은 자, 저주받은 자라고 하죠. 영적으로 나병에 걸리면 나타나는 증상이 이렇습니다. 죄 짓기를 밥먹듯이 하게 되면
누구나 똑같은 경로를 거쳐 양심이 마비된 파렴치한이 됩니다.
셋째, 전염성이 강합니다.
현대의
한센병은 대한 치료제가 개발되어 있기 때문에 치료제를 복용하면 며칠 안에 99%의 균이 사멸되기 때문에 전염성이 강하지 않다고
합니다. 구약 시대는 치료제가 없었고, 하나님의 징계로 인한 질병이었으며 진영 안에 두지 않고 진영 밖으로 쫓아냈던 것은 전염성이
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병에 걸려서 중증이 되면 살이 썩어서 심한 악취가 나고, 얼굴이나 손발 등이 썩어서 떨어져 나가고
악종이 생기는 등 사람의 형체가 보기에 고통스러울정도로 변하기 때문에 고립된 독신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적인 죄악의
전염성솨 강력한 파괴력을 상정적으로 보여주는 질환이었던 거지요.
이러한
까닭에 사람을 부패하게 만들고, 영적으로 파멸에 이르게 하는 가시적인 질병으로 나병이 성경에 등장하고, 나병에 대한 강력한
경계심을 갖게 함으로써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더러운 것과 접촉하지 않음으로 거룩함, 성결함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깨닫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참고로
첨언하자면 나병, 문둥병은 공관복음에 기록되어 있지만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짊어지시고 희생제물로 피를 뿌리신 후에는
요한복음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나병-문둥병에 대한 기록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율법
시대에 부정하다, 더럽다 정죄받은 것들이 모두 예수 안에서 해결된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아간다면 더 이상 문둥병, 나병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죄에 빠지지 않기를 힘서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
교만함, 거역하는 불순종의 죄는 각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레위기 14장(1~20) : 나병환자의 정결예식과 제사장 위임식의 비교
레위기 14장 1~9절 나병 환자의 1단계, 10~32절 2단계 정결 예식의 절차에 대한 말씀을
상고해 보았습니다. 그 중에 특히 2단계의 속건제 제사를 드리는 방법과 절차를 보면 오른쪽 귓볼, 오른손 엄지, 오른발 엄지에
피를 바라는 장면에서는 제사장 위임식에서 숫양을 드리는 위임제에서 같은 일을 했던 것을 떠올릴 수 있었죠. 나병 환자가 병에서
고침 받았을 때 드리는 정결 예식이 왜 이렇게 제사장 위임식과 유사한가에 대해 흥미를 끌게 되었는데요. 이번 글에서는 이 두 가지
예법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닮아있는가에 대해 복습을 겸해서 다루어보려고 합니다.
첫째, 나병 환자의 정결 예식
나병에 걸린 사람은 제사장의 진단을 받은 후에 나병으로 판명이 날 경우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들의 공동체 안에서 함께 생활할 수
있는 자격을 박탈당하고 진영 밖으로 쫓겨나서 혼자 살아야 했습니다. 진영 안과 밖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이냐, 아니면
이방인과 같이 자격 없는 자들인가를 가르는 중요한 분기점이 됩니다. 나병 환자는 미리암, 엘시사 선지자의 시종 게시하, 웃시야
왕처럼 하나님을 거역하여 치명적인 죄를 저지른 자에게 하나님이 진노하사 내리는 천형과 같은 질병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대적하거나 혹은 하나님이 위임하여 세우신 직분을 맡은 사람을 대적하고 거역할 경우에 징벌적인 의도에서 발병한 병이 곧 성경에
기록된 나병의 성경적인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나병 환자의 정결예식은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고, 언약 백성의 반열에서 쫓겨난 사람이 다시 언약 백성의 지위를 회복하고, 하나님
앞에 거룩한 제사장과 같이 세움을 받는 과정을 보여주는 예식이지요. 나병환자의 영적인 지위는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진영
밖 -> 1단계 정결예식 -> 진영 안으로 들어옴. (언약 백성의 지위, 신분을 회복함) 2차 정결예식 >
회막에 들어갈 수 있는 지위를 회복 > 회막에서 2단계 정결예식 -> 거룩하고 정결함을 입은 사람으로 제사장처럼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이 될 수 있게 됩니다.
정결 예식을 받은 나병 환자의 삶의 여정은 아래와 같이 됩니다.
진영 밖 -> 진영 안 -> 회막 안 -> 하나님 앞에 선 거룩한 삶
나병 환자가 진영 밖에 추방되어 살아가는 모습은 언약 밖에 있던 이방인의 영적인 신분과도 같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에 대해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11~15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특히
에베소서 2장 12절을 보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방인으로서 이스라엘 나라 밖에 있던 약속의 언약에 대해 밖에 있던 외인이었던
이방인 성도들을 13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14절에 언약 백성과 이방인 사이에 있던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헐어 15절에 이 둘(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 그리스도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셨다 라고 강해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28~29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이
과정이 위에 그림으로 도식을 그려놓은 것처럼 나병 환자가 진영 밖에 있다가 흐르는 물 가운데 오지그릇 안에서 잡은 피와 물을
백향목 가지에 묶은 우슬초에 피를 묻혀 일곱번을 뿌린 후에 진영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과 영적인 원리가 같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레위기 14:6~8
6 그렇게 한 다음에, 제사장은 백향목 가지와 홍색 털실 한 뭉치와 우슬초 한 포기와 그리고 그 살아 있는 나머지 새를 가져다가, 생수가 섞인 죽은 새의 피에 찍어서, 7 악성 피부병에 걸렸다가 정하게 된 그 사람에게 일곱 번 뿌린다. 그런 다음에, 제사장은 그에게 '정하다'고 선언하고, 살아 있는 새는 들판으로 날려보낸다. 8 정하다는 선언을 받은 그 사람은 옷을 빨고, 털을 모두 밀고, 물로 목욕을 하면, 정하게 된다. 그리고 진으로 돌아온 뒤에, 그는 이레 동안 장막 바깥에서 살아야 한다.
둘째, 제사장 위임식의 절차와 순서
그러면 이제 복습을 겸해서 이미 공부하였던 레위기 8장 제사장 위임식의 2단계 순서를 간략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제사장 위임식도 두 단계로 진행되는데 1단계를 물로 씻고 제사장의 옷을 입혀주는 일입니다. 그런 후에 2단계로 속죄제, 번제, 위임식 숫양 제사, 곡식제사를 드립니다.
1단계 제사장 위임 예식 - 물로 몸을 씻기고 거룩한 제사장의 옷을 입힙니다.
6. ○모세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물로 씻게 하였다.
7. 모세는 아론에게 속옷을 입혀 주고, 띠를 띠워 주고, 겉옷을 입혀 주고, 에봇을 걸쳐 주고, 그 에봇이 몸에 꼭 붙어 있도록 에봇 띠를 띠워 주었다.
8. 모세는 또 아론에게 가슴받이를 달아 주고, 그 가슴받이 속에다가 우림과 둠밈을 넣어 주었다.
9. 모세는 아론의 머리에 관을 씌우고, 관 앞쪽에 금으로 만든 판, 곧 성직패를 달아 주었다. 이렇게 모세는 주께서 명하신 대로 하였다.
12. 그리고 또 모세는, 거룩하게 구별하는 기름 가운데서 얼마를 아론의 머리에 붓고, 그에게 발라서, 아론을 거룩하게 구별하였다.
13. 모세는 아론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들에게 속옷을 입혀 주고, 띠를 띠워 주고, 머리에 두건을 감아 주었다. 이렇게 모세는 주께서 명하신 대로 하였다.
가장
먼저 그들에게 번제단과 성막 사이에 있는 물두멍의 물로 그들의 몸을 씻기고, 거룩한 세마포로 만든 제사장의 옷을 입혀줍니다.
대제사장인 아론에게는 제사장 옷 위에 에봇을 입히고, 가슴에 흉패를 붙이고, 제사장의 관을 씌우고, 기름을 그의 이마에 붓고
발라주지요. 그의 아들들인 일반 제사장에게는 물로 몸을 씻기고 하얀 세마포로 지은 제사장의 옷만 입혀줍니다. 이 과정은 나병
환자에게 물로 몸을 씻은 후에 옷을 빨아서 입게 한 일과 유사합니다.
2단계 짐승의 희생 제사를 드리는 의식
모세는 먼저 수송아지로 제사장을 위한 속죄제를 드립니다. (14~17절)
그런 다음에 숫양으로 번제를 드립니다. (18~21절)
숫양 한 마리로 위임식 제사를 드립니다.(22~29절) 이때 곡식제사를 함께 드립니다.(26절)
22. ○그렇게 한 다음에, 모세는 위임식에 쓸 또 다른 숫양 한 마리를 끌어 오게 하였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숫양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23. 모세는 그 제물을 잡고, 그 피를 얼마 받아서, 아론의 오른쪽 귓불과 오른쪽 엄지손가락과 오른쪽 엄지발가락에 발랐다.
24. 모세는 또 아론의 아들들을 오게 하여, 그 피를 오른쪽 귓불 끝과 오른쪽 엄지손가락과 오른쪽 엄지발가락에 발랐다. 모세는 남은 피를 제단 둘레에 뿌린 다음에,
위임식을
위해 숫양 한 마리를 제사 드렸다고 기록된 22~29절에서 특히 27절에서 곡식 제사로 드린 제물을 흔들어서(요제) 바치는
제물로 드렸다는 구절과 29절에 모세가 숫양 제물의 가슴고기를 흔들어서 바치는 제물로 드렸으니 이 고기는 모세의 몫이라는 표현을
빌면 위임식으로 숫양을 드리는 제사는 속건제 규례에 따라 드린 제사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다시 정리해 봅니다. 제사장 위임식의 희생제사 드린 순서는 아래와 같습니다.
속죄제 -> 번제 -> 위임식을 위한 속건제, 곡식제사(소제)
나병 환자를 위한 2차 정결 예식에서 제사를 드린 순서(레위기 14장 12~20절)
속건제 -> 속죄제 -> 번제, 곡식제사
12 제사장은 숫양 한 마리를 끌어다가, 그것을 기름 한 1)록과 함께 속건제물로 바치는데, 그것은 주 앞에서 흔들어 바치는 제물이므로, 제사장은 그것들을 흔들어야 한다.
13 제사장이 그렇게 하고 나면, 정하게 되려는 그 사람이 속죄제물과 번제물을 잡는 바로 그 장소 곧 거룩한 곳에서, 나머지 숫양 한 마리를 잡는다. 속건제물은 속죄제물과 마찬가지로 제사장의 몫이 된다. 그것은 가장 거룩한 것이다.
14 제사장은 속건제물의 피를 받아다가 정하게 되려는 사람의 오른쪽 귓불과 오른손 엄지와 오른발 엄지에 발라야 한다.
19 부정한 상태에서 이제 정하게 되려는 그 사람의 죄를 속하여 주려고, 제사장은 속죄제물을 바친다. 그렇게 한 다음에, 정하게 되려는 그 사람이 번제물을 잡으면,
20 제사장은 번제물과 곡식제물을 제단에 바친다. 이렇게 하여, 제사장이 그의 죄를 속하여 주면, 그는 정하게 된다.
제사 드리는 순서는 다르지만 공통점은 양쪽 다 속건 제물의 제사를 바칠 때 희생 양의 피를 발라서 오른쪽 귓볼, 오른손 엄지, 오른발 엄지에 바르게 하신다는 점입니다.
제사장 위임식에서 마지막에 하는 것은 피와 기름을 뿌리는 것이었습니다. 레위기 8장 30절
30. ○또 모세는 거룩하게 구별하는 기름과 제단에 있는 피를 가져다가, 아론, 곧 제사장 예복을 입은 아론에게 뿌렸다. 그는 또 아론의 아들들, 곧 제사장 예복을 입은 그의 아들들에게도 뿌렸다. 이렇게 하여 모세는, 아론과 그의 옷 및 그의 아들들과 그들의 옷을 거룩하게 구별하였다.
나병 환자에게 속건 제사를 드릴 때 기름을 바르는 장면(레위기 14장 15~18절)
15 그런 다음에, 제사장은 기름 한 록에서 얼마를 덜어, 왼손 바닥에 붓고,
16 오른쪽 손가락으로 왼손 바닥에 부은 기름을 찍어, 그 손가락에 묻은 기름을 주 앞에서 일곱 번 뿌린다.
17 그리고 제사장은 손바닥에 남아 있는 기름을, 정하게 되려는 그 사람의 오른쪽 귓불과 오른손 엄지와 오른발 엄지에, 이미 발라 놓은 속건제물의 피 위에 덧바른다.
18 그리고 나머지 기름, 곧 제사장의 손바닥에 남아 있는 기름은, 정하게 되려는 사람의 머리에 바른다. 그리고 나서, 제사장은, 주 앞에서 그 사람의 죄를 속하여 주어야 한다.
레위기
8장 30절에서 위임식 속건제 제사를 종결할 때 피와 기름을 제사장에게 뿌리는 의식을 행한 것처럼 나병 환자를 정결하게 하는
정결 예식 중 속건제 제사를 드릴 때 피를 바르고, 기름을 뿌리고, 발라주며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 의식을 했습니다. 제사장의
속건제나 나병 환자의 속건제나 동일하게 피와 기름을 뿌리고 발라주었습니다.
이방인인
우리는 원래 진영 밖에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약속 받은 언약 밖에 있었던 사람이고,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에서
살았습니다. 그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희생으로 말미암에 그의 피로 나병 환자와 같은 소망 없는 존재인 우리가 죄에서
구원을 받아 정결함을 받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방인 성도는 유대인과 동등한 신분과 자격을 부여받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회막
앞에서 하나님 앞에 선 자로서 기름(성령) 부음을 받은 거룩한 세마포 옷을 입은 존재로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처럼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기 위해 성막 안 성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과 신분과 권한을 부여받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원리에 대해 히브리서는 아래와 같이 해설해 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9~25절
19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서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20 예수께서는 휘장을 뚫고 우리에게 새로운 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휘장은 곧 그의 육체입니다.
21 그리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시는 위대한 제사장이 계십니다.
22 그러니 우리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우리는 마음에다 예수의 피를 뿌려서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맑은 물로 몸을 깨끗이 씻었습니다.
23 또 우리에게 약속하신 분은 신실하시니, 우리는 흔들리지 말고, 우리가 고백하는 그 소망을 굳게 지킵시다.
24 그리고 서로 마음을 써서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합시다.
25 어떤 사람들의 습관처럼, 우리는 모이기를 그만하지 말고, 서로 격려하여 그 날이 가까워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힘써 모입시다.
19절에서 "지성소"를 한글 개역, 개역개정은 "성소"로 번역했는데 다른 한글 번역본은 "지성소"로 번역을 했더군요. 휘장이 찢어진 것은 마태, 마가, 누가 복음에 공통적으로 기록된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마가복음15:38절)
말씀을 가리키는데 이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 막는 휘장입니다. 그러므로 이 휘장이 찢어짐으로 대제사장이 매년 7월 10일
대속죄일 절기에 한번만 들어갈 수 있었던 지성소에 대제사장이 아닌 일반 제사장된 이들도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음을
설명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의 피 뿌림을 받고, 물로 정결하게 씻음 받은
사람들이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고, 거룩한 세마포 옷을 입은 제사장 같은 이들만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는 규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비유를 하자면 제사장 위임식을 거친 제사장이나 나병 환자였다가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이 1단계, 2단계 정결
예식을 치른 후에(물로 씻음받고, 피 뿌림, 기름 부음을 받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었던 것과 같이 거룩함을 받고,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다는 걸 알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나병 환자가 병이 나은 후에 본래의 생활로 복귀하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2단계 정결예식 가운데 2단계 정결 예식을 다룬
내용입니다. 오늘은 2단계 정결 예식의 과정과 절차에 초점을 맞추어서 말씀을 깊이 있게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어제 상고했던 1단계 정결 예식 가운데 몇 가지 점을 복습을 겸해서 짚어보고 싶습니다. 어제 밤에 잠들기 전에 1단계 정결 예식을 머리 속으로 곱씹어 보는 중에 두 가지 부분이 새롭게 깨달아졌습니다.
1단계
정결 에식은 물이 흐르는 곳에서 진행합니다. 흐르는 물이란 고인 물, 즉 오염물질이 고여있는 썩은 물이 아니라 오염되지 않고,
살아있는 생명의 물이라는 뜻이 있을 것입니다. 두 마리의 새 중에서 한 마리는 그 물이 담긴 오지 그릇 안에서 잡아서 피를
흘립니다. 이 피를 백향목 나무 가지에 우슬초를 붉은 홍색실로 묶은 후에 피를 정결함을 받을 사람에게 일곱번 뿌리죠. 즉 제사장이
피를 뿌림으로써 생명을 희생한 그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때 나병 걸렸다 나은 사람이 죄 사함을
받는 것은 타율적인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피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신약의 성도가 죄와 저주에서
놓임 받음을 믿는 것과 같지요. 일방적인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런
다음에 더려워진 옷을 빨고, 몸에 난 털을 모두 면도해서 밀어버리게 합니다. 그런 후에 온 몸을 깨끗한 물에 몸을 담가 씻게
하지요. 이 과정 중에서 몸에 난 털을 모두 밀어버리라고 하신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왜? 털을 밀어버리라고 하셨을까?
그러자 이어지는 한 단어가 있었습니다.
한 터럭조차 남김 없이!
이
뜻이구나. 나병에 걸렸던 육신입니다. 나병에 걸리게 만들었던 죄와 악행입니다. 그 모든 것에 대한 연결 지점이 될만한 것은 한
터럭조카도 남김이 없어야 한다. 이런 의도의 말씀이 아니었을까. 과거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완전히 떨쳐버리되, 지극히 사소한
것까지도 완전히 끊어라. 완전한 절연, 완전한 단절의 의미가 아닌가. 그런 후에야 진영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다.
이렇게
제사장을 통해서 정결 의식을 받은 나병 환자였던 사람은 꿈에도 그리워하던 진영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허락 되었습니다. 그러나
집에 도착했지만 안에 들어갈 수는 없지요. 칠일을 밖에 머물다가 칠일 째 되는 날 다시 옷을 빨고, 몸에 난 털을 모두 밀고,
목욕을 하는 일을 거치라 하십니다.
같은
행동을 두 번 반복하게 하십니다. 이중의 단절, 이중의 절연. 과거의 죄악에 결탁되었던 삶에서 완전히 돌이키라는 말씀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피를 뿌림으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죄와 저주에서 벗어나 자유함을 누리는 것은 타율적으로, 외부에서 일방적으로
임하는 은혜입니다. 이렇게 죄사함 받은 사람이 옷을 빨아 입고, 몸에 난 털을 밀고, 몸을 씻음으로 거룩하게 하는 것은 자율적인
거룩한 삶을 이루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를 나타냅니다. 성막 뜰에 있는 번제단에서 희생 제사를 통해 피 흘림으로 죄를 속죄 받으면 그
다음에 번제단과 성막 사이에 있는 물두멍에서 손과 발과 얼굴을 씻고, 때로는 목욕을 합니다.
즉 희생의 피의 은혜로 죄사함 받은
후에 죄와 단절된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는 열심과 노력이 뒷받침 되어야 하죠. 그런 후에 성소에 들어가면 상에 진열된 무교병
떡을 먹고, 등잔대에는 기름에 불을 켜고, 분향단에서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거룩한 향을 피워올리죠. 하나님 앞에서 날마다 하나님의
얼굴을 뵈며 말씀을 귀기울여 듣고, 그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상고하며 실천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나병 환자였던 사람의 1단계 정결 예식은 성막 뜰 안에 있는 번제단과 물 두멍에서 이뤄지는 것들을 진영 밖에서 동일한 영적인 원리로 한번 체험하게 하신 것이라는 것을 말씀을 상고하는 과정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둘째, 2단계 정결예식(10~32절) : 속건제, 속죄제, 번제
두
번째 단계의 정결 예식을 위해 하나님은 4가지 제물을 준비하라 명하십니다. 즉 짐승의 희생 제사를 드릴 숫양 두 마리, 암양 한
마리를 준비하라 하시고, 곡식 제사를 드릴 기름에 섞은 고운 밀가루 십분의 삼 에바, 기름 한 록을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참고로, 에바는 고체 용량을 나타내는 단위이고, 록이나 힌은 액체의 용량을 나타내는 단위입니다. 1록은 0.54리터(약 두 홉
반)
10. 여드레째 되는 날에, 그는 흠 없는 숫양 두 마리와, 흠 없는 일 년 된 어린 암양 한 마리와, 곡식제물로 바칠 기름 섞은 고운 밀가루 십분의 삼 에바와, 기름 한 록을 가져 와야 한다. 11. 그를 정하게 할 제사장은, 정하게 되려는 그 사람을 그 제물들과 함께 회막 어귀, 주 앞에 세운다.
숫양
두 마리와 암양 한 마리는 무슨 제사에 쓰일 제물일까요?
숫양 한 마리는 속건제용
제물이고, 암양 한 마리는 속죄제용 제물이며, 남은 숫양 한 마리는 속죄제용 제물로 쓰이게 됩니다.
속건제 제사는 무조건 숫양을 한 마리를 드립니다.(레 5:15, 18) 다른 짐승 제물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속죄제는
수송아지(제사장, 온 이스라엘 회중), 족장은 숫염소, 일반 평민은 암염소 또는 암양을 드립니다.(레4장) 그런데 경제적으로
빈곤한 사람은 새 2마리로 대신할 수 있고, 여기에도 못 미치면 곡식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곡물로 바칠 수 있습니다.
번제는 소, 염소, 양이나 가리지 않고, 가능한데 다만 수컷이라야 합니다. 이에 힘이 못 미치면 산비둘기, 집비둘기 새끼 등의 날짐승도 가능합니다.
화목제는 소, 양, 염소 세 가지만 가능한데 성별은 무관합니다.
이런 제사별로 사용되는 제물의 종류를 기억하고 있다면 숫양 두 마리, 암양 한 마리를 준비하라는 말씀을 읽으면 아, 무슨 무슨 제사를 드리라는 것이구나 라고 유대인들은 즉각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제물을 준비한 후에 그 사람으로 하여금 드디어 성막 울타리 문을 지나 번제단 앞에 설 수 있었습니다. 나병 환자라면 진영 안에
들어올 수도 없었으니 성막 울타리 안에 들어간다는 건 꿈도 끌 수 없었을테니 당사자로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격에 눈물이 쏟아지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1) 나병 환자의 정결 제사 중 첫번째 제사가 속건제입니다.
제사장은
숫양 한 마리를 끌어와 기름 한 록과 함께 속건 제물로 바칩니다. 속죄제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 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입니다. 반면 속건제는 하나님 뿐 아니라 사람에 대한 범죄에 대한 죄를 용서 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를 말하지요.
12 제사장은 숫양 한 마리를 끌어다가, 그것을 기름 한 록과 함께 속건제물로 바치는데, 그것은 주 앞에서 흔들어 바치는 제물이므로, 제사장은 그것들을 흔들어야 한다.
13 제사장이 그렇게 하고 나면, 정하게 되려는 그 사람이 속죄제물과 번제물을 잡는 바로 그 장소 곧 거룩한 곳에서, 나머지 숫양 한 마리를 잡는다. 속건제물은 속죄제물과 마찬가지로 제사장의 몫이 된다. 그것은 가장 거룩한 것이다.
14 제사장은 속건제물의 피를 받아다가 정하게 되려는 사람의 오른쪽 귓불과 오른손 엄지와 오른발 엄지에 발라야 한다.
나병이
단순히 육체의 피부병이 아니라 영적인 죄를 의미하는 질환을 상징한다고 보는 이유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속죄제를 드리기에
앞서서 속건제를 먼저 드려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 뿐 아니라 사람에 대한 죄를 먼저 사함받지 않으면 안된다는 뜻이 되겠죠. 본인이
상처, 피해를 준 사람과 먼저 화해가 필요함을 보여주는 근거가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3절에 "나머지 숫양 한 마리를 잡는다."
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는 표준새번역, 새번역의 오역이라 생각됩니다. 개역한글, 개역개정, 공동번역, 우리말성경 등 타
한글번역본은 "그 어린 숫양"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12절과 13절에서 제사장이 흔든다는 것은 곧 요제로 드린다는 말인데
속건제로 드린 제물은 제사장의 몫이 된다는 것을 부연 설명한 것으로 숫 양 두 마리 중에 한 마리를 산 채로 요제로 드려서
제사장의 몫으로 차지하고, 남은 한 마리 숫양을 잡아서 피를 흘리는 제물로 삼는다는 게 아닙니다. 숫양 두 마리 중에 한 마리는
속건제로 드리라는 말씀을 "나머지 숫양 한마리"라고 번역해서 혼란을 일으킨 오역일 뿐입니다.
14절에
속건제로 드린 숫양의 피를 받아서 정결함을 받을 사람의 오른쪽 귓볼, 오른손 엄지, 오른발 엄지에 피를 바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과정은 레위기 8장 22~23절에서 숫양으로 제사장 위임식 제사를 드리는 장면에서 동일하게 등장합니다.
오른
쪽 귓볼과 오른쪽 엄지 손가락, 오른 쪽 엄지 발가락에 피를 발라서 거룩하게 하신다는 것은 과거의 죄인된 삶에서 단절하였으니
앞으로는 또 다시 악한 말에 귀를 기울이고, 죄를 저지르는데 손과 발을 바쁘게 놀리지 말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이고,
거룩한 일에, 순종하는 일에 손과 발을 부지런히 놀리며 살아가라는 뜻이 있는 것이겠지요. 삶이 지향하는 방향과 뜻과 가치관에
하나님 말씀 중심으로 완전히 새롭게 변화받아야 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 봅니다.
그런 다음에 기름 한 록을 준비하게 하셨던 그 기름을 발라주라 명하십니다.
15 그런 다음에, 제사장은 기름 한 록에서 얼마를 덜어, 왼손 바닥에 붓고,
16 오른쪽 손가락으로 왼손 바닥에 부은 기름을 찍어, 그 손가락에 묻은 기름을 주 앞에서 일곱 번 뿌린다.
17 그리고 제사장은 손바닥에 남아 있는 기름을, 정하게 되려는 그 사람의 오른쪽 귓불과 오른손 엄지와 오른발 엄지에, 이미 발라 놓은 속건제물의 피 위에 덧바른다.
18 그리고 나머지 기름, 곧 제사장의 손바닥에 남아 있는 기름은, 정하게 되려는 사람의 머리에 바른다. 그리고 나서, 제사장은, 주 앞에서 그 사람의 죄를 속하여 주어야 한다.
16절에
그 기름을 손가락에 찍어 주 앞에서 일곱번 뿌리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주 앞에서"란 어느 대상을 말할까요? 성소 안에 있는
휘장이나 기물에 뿌리는 건 아닌 것이 확실합니다. 평민 개인을 위한 희생 제사는 모두 번제단 앞에서 이루어지니까요. 성소 안에
들어가지 않지요. 구체적으로 기름을 뿌리는 대상이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이러지는 구절을 통해서 유추해 보면 정결함을 받을 사람을
대상으로 기름을 일곱 번 뿌리라는 뜻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무방하다 생각됩니다.
기름을
일곱 번 뿌린 후에 그 기름을 오른쪽 귓볼, 오른쪽 엄지 손가락, 오른쪽 엄지 발가락에 피를 발랐던 곳에 덧바르라 하십니다.
그런 후에 남은 기름을 머리에 바르라고 하십니다. 대체 나병에서 회복된 사람이 무엇이길래 레위기 8장 30절에 제사장 위임식
말미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그들이 입은 제사장 옷에 기름을 뿌려 거룩하게 하라 명하셨던 그 일을 이들에게도 하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이
단계에까지 이르고 보면 14장에서 나병 환자의 정결 예식에는 뭔가 다른 뜻이 들어있다는 확신이 듭니다. 나병 환자란 한센씨 병이
든 특정한 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심각한 나병에 걸려 살이 썩어져 나가고, 감각이 무뎌져서 아픔조차 느끼지 못하는 썩어
문드러진 하나님의 백성 전체에 대한 상징이라는 걸 말입니다. 레위기 14장의 나병에 걸려 부정한 자는 특정인이 아니라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아 구원을 받은 모든 언약 백성 전체를 상징하는 존재이며 영적으로 부패하고 썩어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이들을
부르셔서 피 뿌려주시고, 기름을 뿌려주시고, 발라주시고, 머리에 기름을 부어주심으로 거룩한 제사장 나라를 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2단계에 걸친 정결 예식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시는 말씀이 아닌가!
(2) 속죄제를 드리고, 번제를 드릴 때 곡식 제사를 함께 드린다(19~20절)
속건제를 드린 후에 속죄제를 드리게 하십니다.
19 부정한 상태에서 이제 정하게 되려는 그 사람의 죄를 속하여 주려고, 제사장은 속죄제물을 바친다. 그렇게 한 다음에, 정하게 되려는 그 사람이 번제물을 잡으면,ㅋ 20 제사장은 번제물과 곡식제물을 제단에 바친다. 이렇게 하여, 제사장이 그의 죄를 속하여 주면, 그는 정하게 된다.
위의
19절과 20절을 보시면 속죄제를 드리는 것을 설명한 말씀을 보면 "제사장은 속죄 제물을 바친다"는 한 구절로 끝내 버립니다.
세부적인 설명이 없죠. 또한 번제로 드릴 숫양 한 마리를 잡으면 20절에 기름 섞은 고운 밀가루 십문의 삼 에바를 번제물과 함께
번제단에 바친다 라고 간략히 기술하고 넘어갑니다. 즉, 속건제 -> 속죄제 -> 번제+소제 순서로 제사를 드리되 나병
환자의 정결 제사 중에 핵심은 속건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이렇게 네 가지 제사를 드리고 나면 나병을 앓았던
환자는 드디어 하나님 앞에 정한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됩니다. 참으로 길고도 먼 여정이었습니다.
나병 환자의 2단계 정결예식의 초점이 속건제에 맞춰져 있다는 것은 바로 이어지는 21~22절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1 그러나 가난해서 그렇게 많은 것을 바칠 수 없는 사람이, 자기의 죄를 속하려 할 때에는, 그는, 제사장이 흔들어 바칠 속건제물로는 숫양 한 마리를 가져 오고, 곡식제물로 바칠 기름으로 반죽한 고운 밀가루는 십분의 일 에바만 가져 오면 된다. 기름은 마찬가지로 한 록이다.
22 힘이 닿는 대로,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가져다가, 한 마리는 속죄제물로, 다른 한 마리는 번제물로 바치면 된다.
숫양
두 마리, 암양 한마리를 감당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규례가 21절부터 32절까지 이어집니다. 속건제로 드릴 숫양은
그대로 유지하고, 속죄제, 번제를 드릴 제물은 새 두 마리로 대체합니다. 또한 기름 섞은 고운 밀가루는 십분의 삼 에바에서 십분의
일 에바로 줄여도 된다고 하십니다. 변동이 없는 것은 속건제를 드리는 숫양 한마리와 기름 한 록입니다.
25~29절은
13~18절의 과정을 되풀이 하는 내용입니다. 다시 말하면 속건제 제물로 숫양을 잡고, 그 피를 정함을 받을 사람의 오른쪽
귓볼과 엄지 손가락, 엄지 발가락에 바르고, 기름을 그 사람에게 일곱 번 뿌린 후에 오른쪽 귓볼, 엄지 손가락, 엄지 발가락에
바르고, 남은 기름을 머리에 바릅니다. 그런 후에 속죄제와 번제는 새 두 마리로 대신합니다. 피를 통해서 말씀을 듣는 귀와 말씀을
순종할 손과 발을 거룩하게 하고, 그 위에 기름 - 성령을 부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정결함을 받은 사람으로서 성령의
이끄심에 순종하여 거룩한 제사장과 같은 삶을 살라는 것에 모든 초점이 맞추져 있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나병 환자 단계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살지 못하고 진열 밖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몸은 썩어문드러지는 불치병에 걸려있고, 부정한 존재라 감히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과 동등한 삶을 살 수조차 없는 비참한 존재였습니다. 이는 이방인 불신자의 영적인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1단계의 정결 예식 단계
나병
환자처럼 영원히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이방인 불신자인 우리에게 하나님은 영원한 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의 피를 힘입어 죄 사함을 받고,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침례(세례)를 통해서 물로 씻어 목욕함으로써
정결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진영 밖에 머물러 있던 사람이 진영 안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 속으로 들어갈 자격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 부름받은 신자의 단계입니다.
2단계 정결 예식 단계
하나님은 제사장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숫양 두 마리와 암양 한마리, 고운 밀가루와 기름을 준비하라 하십니다.
지금은
정결하게 되었으나 과거의 우리는 나병을 앓던 썩어 문드러진 더럽고 부정한 자들이었습니다. 세상에서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던 때의
모든 더러움과 허물, 죄와 악행을 단절하고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그의 말씀을 부지런히 상고하고 연구하며 배우기를 힘쓰다가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야 할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야 할 것을 알면서도 제대로 그런 삶을 살지 못하는 비루한 존재가 바로 우리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귀에 기름을 발라주시고, 깨달은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손과 발에도 기름을 발라 주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머리에 기름을 발라주셨죠. 머리에 기름을 바른다는 것은 곧 제사장의 이마에 기름을 붓는 것과 다름 없지요. 거룩한
성령의 사람으로 세워주신 것입니다. 과거에는 진영 밖에 있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존재였지만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고, 그 분에게 기름을 부어 세움을 받은 정결하고 거룩한 신분으로 새롭게 태어났음을 인증을 받았습니다.
나병을 앓던 사람이 진영 밖에서 살다가 제사장의 부르심을 받고, 진영 안으로 들어온 후에 성막 문 어귀에서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는 거룩한 사람으로 세움을 받는 이 모든 과정은 이방인 출신의 모든 신앙인들의 영적인 여정을 보여주는 한 폭의 그림이 아닌가.
구약에서 회개라는 단어가 사용된 말씀
욥기 42: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시편 7:12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제사장의
위임식
제사장의
위임식
모세에 의해서 아론과 그 아들들을 데려다가 몸을 씻기고 예복을 입힌 후에 기름을 붓고 발라주는 의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이렇게 위임을 받은 제사장을 위해 세 가지 위임식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러한 위임식 제사를 통하여 제사장은 하나님과 백성 앞에서
기능과 자격 및 특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위임식 제사를 통해서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
받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할 영적인 제사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속죄제(14-17절)
제사장의
위임식 제사 가운데 가장 먼저 드려야 하는 제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속죄제입니다. 제사장에게 왜 속죄제가 필요할까요? 제사장은
남을 위한 속죄를 위해 중보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속죄를 입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속죄제의 수송아지를 끌어오니 아론과 그
아들들이 수송아지의 머리 위에 안수하였습니다. 자신들의 모든 죄를 수송아지에게 전가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짐승이 죽는 것은
자기 죄 때문이라는 것을 분명히 자각해야 했습니다. 죄없는 짐승이 죽어 가는 동안 제사장은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며,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성결해야 한다는 것을 마음에 굳게 결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위임을
위한 속죄제는 수송아지의 피를 향단의 네 뿔에 바르지 않고(레 4:3-12절의 속죄제의 규정과 다르다) 오히려 바깥의 번제단의 네
뿔에 바르고 그 다음에 남은 피는 제단 밑에 쏟았습니다. 이와 같이 피는 장막 내부로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이는 이들이 아직은
제사장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임직식의 기간이 칠일간이었음을 볼 때(8:33) 이들은 아직은 제사장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제물의 피를 장막 내의 향단으로 가지고 가지 않고 바깥 제단에다 발랐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일꾼으로 부르실 때에도 먼저 그의 죄를 용서하여 주셨던 것을 봅니다.
사 6:7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왜
이사야 선지자에게는 숯불을 입에 대었을 까요?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부정한 입술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먼저 그의 입술을 정결케 하신 것입니다.
레위기에서
계속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거룩”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려면 무엇보다 거룩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성화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우리가 십자가의 보혈로 정결함을 받은 후에 성화된 삶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서는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며 기도를 힘써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장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을 세속으로부터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2. 번제(18-21절)
먼저 속죄제를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모든 잘못된 것을 제거하여 정결케 하고 이제는 전적으로 헌신을 상징하는 번제를 드립니다. 번제는 온 삶과 생명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는 헌신을 의미합니다.
보잘
것 없는 사람을 하나님과 백성들의 중재자로 세워주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 은혜를 생각하면 죽기까지 충성하기로 헌신을 다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도 목사 안수를 받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크고 감사하여 눈물이 핑 돌았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저드슨(1788-1850)이
대학을 거쳐 신학교를 졸업하자 보스톤시에 있는 상류층의 교회에서 부목사로 와 달라는 초빙을 받았습니다. 그의 동료 친구들은 모두
부러워하며 집의 어머니와 누이도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저드슨은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해외선교에 쓰시려고 부르셨습니다. 내가 이곳에 남아서 일을 해도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지만 나는 부분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됩니다. 나는 주님께 전체로 순종하렵니다."
안일한
자리를 물리친 저드슨은 결국 철통같은 불교의 나라 미얀마(버마)에 선교사로 갔습니다. 그곳은 너무나도 어려운 곳이었기에 목숨을
바칠 각오로 일했으나 처음의 한 사람을 전도하여 세례를 베푸는데 무려 6년간의 갖은 고생을 다 했습니다. 저드슨은 오랜 기간을
버마의 감옥에서 지나기도 했고 죽음과 질병의 고비도 몇 번이나 넘겼습니다. 그러나 저드슨의 거룩한 헌신은 5만 명이라는 크리스천을
미얀마(버마)땅에 탄생시키고 전세계의 크리스천들의 마음에 꺼지지 않는 횃불을 밝히 켜 놓은 것입니다.
제사장은 자신의 욕망이나 정욕을 죽이고 마침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일꾼입니다. 제사장이 되어 임직을 행하기 전에 먼저 희생을 각오하는 번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진정 헌신의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헌신의 사람이 됩니다.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딤전 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 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일꾼으로 세워 주신 은혜를 감사하게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죽도록 충성하며 헌신하기를 다짐하십시오.
하나님은 자기 일꾼들이 온전히 헌신하시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은 일꾼이 뒤를 돌아보면 안됩니다.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3. 화목제(22-29절)
헌신을
상징하는 번제의 수양을 드린 후에 따 다른 수양, 곧 위임식 수양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속죄제, 번제, 화목제의 제사를 드릴
때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제물 위에 안수하였습니다. 모세는 위임식 수양을 잡고 그 피를 취하여 아론의 오른 귓부리와 오른 손
엄지가락, 오른 발 엄지가락에 피를 발랐습니다. 그의 아들들에게 같은 예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이것은
제사장들의 귀도, 손도, 발도 하나님을 위하여 성별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먼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오른 귓부리에 피를 바른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제사장은 먼저 귀를 성별 하여 하나님의 명령하심에 귀를 기울여야 함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귀로
하나님의 말씀만 들으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마귀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가 타락하였습니다.
가룟 유다도 마귀의 음성에 귀 기울였다가 하나님의 아들을 팔아먹는 배신자가 되었습니다.
사람은
듣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가 따로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그런 귀가 있습니까? 오직 주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언 5:1-8 내 아들아 내 지혜에 주의하며 내 명철에 네 귀를 기울여서. 근신을 지키며 네 입술로 지식을 지키도록 하라. 대저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나중은 쑥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같이 날카로우며. 그 발은 사지로 내려가며 그 걸음은 음부로 나아가나니. 그는 생명의 평탄한 길을 찾지 못하며 자기 길이 든든치 못하여 그것을 깨닫지 못하느니라. 그런즉 아들들아 나를 들으며 내 입의 말을 버리지 말고. 네 길을 그에게서 멀리하라 그 집 문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
오른
귓부리에 피를 바른 후에 오른손 엄지가락과 오른발 엄지가락에 피를 발랐습니다. 손과 발은 행위를 나타냅니다. 특히 오른 쪽은
힘과 능력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자신에게 주신 힘과 능력을 다하여 주님만을 위하여 행동하겠습니다 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 피는 제사장들의 옷에도 뿌려졌습니다. 관유와 피가 그들의 옷에 뿌려짐으로 그들의 입는 예복이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없다면 우리가 결코 거룩하게 될 수 없음을 가리켜 주는 것입니다.
모세는 화목제물과 소제물을 아론과 그 아들들의 손에 두어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게 하였고 모세가 그들의 손에서 취하여 단 윗 번제물 위에 불사르니 이는 향기로운 냄새를 위하여 드리는 위임식 제사였습니다.
위임식 수양으로 드리는 화목제물 가운데서 모세의 응식은 무엇이었습니까? 수양의 가슴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위임식 광주리의 떡과 함께 회막 안에서 삶아 먹고 나머지는 불사르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모든 의식을 마치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성막은 아무나 다가설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거룩한 영역을
침범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거룩한 제사 의식을 수행하기 위해 위험한 곳에서 일하였습니다. 이곳은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곳이었습니다. 이제 이들은 그 안에서 머물 수 있는 안전한 통과가 주어졌습니다.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제사장들은 거룩한 곳과 비거룩한 곳, 삶과 죽음 사이의 중보자로서 살게 된 것입니다.
위임제는
제사의 종류가 아닙니다. 제사장을 세우는 위임식 제사를 의미합니다. 이 의식은 7일간 계속되었습니다. 제사장은 7일 동안
회막에서 나오지 못합니다(33,34). 성막에는 의지나 쉴 곳이 없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7일 동안 그들은 편히 누워서 잠도 못
자고 철야를 하면서 지냈을 것입니다. 매일 수송아지 한 마리로 속죄제를 드리고, 아침저녁으로 어린양 한 마리씩으로 번제와 소제를
겸하여 바쳤을 것입니다(출 29:36-39).
이와 같이 7일 동안 위임식이 거행된 것은 제사장의 직분이 얼마나 거룩하고 큰 직분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후일에 대제사장은 최고의 권위자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인간의 중보자는 영원하지 못하다는 흠이 있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내주신 영원히 살아 계신 대제사장이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히브리서 4:14-16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 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__________________ 레위기 8장 / 제사장 위임식
03-17-2023(금) 사순절 제21일
내용개요
본장에서부터는 제사를 전담할 제사장의 위임식에 관한 기록이 나타난다. 출애굽기 29장을 통해 제사장의 임명이 이루어졌으나 이제 성막이
완성되고 제사에 관한 규례가 완성된 시점에서 본격적인 제사장의 활동이 시작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아론 일가에 대해 제사장
위임식을 거행하도록 명하셨다(1-9절). 이에 모세는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관유를 붓고 위임식을 위해 속건제와 번제, 화목제를
드렸다(10-29절). 그 후에 아론 일가는 성막 안에서 칠 일을 지내며 위임식 행사를 함으로 제사장 취임의 모든 준비를
끝냈다(30-36절).
강해
레위기 8장은 출애굽기 29장에 기록된 모세의 규정을 전제하며, 레1-7장까지의 모든 제사 규정을 성취한 내용입니다. 특히 본장은 아론과
그의 자손들이 제사장으로 성별되는 위임식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제사장 위임식은 이미 모세가 시내 산에서 지시받은
규례로 제사 제도가 규정되기 전에는 시행될 수 없었기 때문에 유보되다가 성막이 건립되고 제사 제도가 완비된 후에 시행되게 된
것입니다
신학주제
위임식 제사의 의미는 제사장이 갖는 중요한 위치를 나타낼 뿐
아니라 구속사에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갑습니다.
먼저 기름 부음의 예식으로 성경에서
기름 부음을 받을 수 있는 신분은 왕과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와 같이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특별한 역할을 담당한 자에게만 가능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곧
세상의 왕이며 죄를 대속하실 대제사장이시며 복음을 전할 선지자로 오실 것임을 예표한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속죄제는 대속 의식을 담당할 제사장이
먼저 성결해야 함을 가리키며 순결하신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번제는 제사장이 먼저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헌신을 맹세하는 것으로,
자신을 대속의 제물로 바친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합니다.
그리고 화목제는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를 중재하기 위해 제사장이 먼저
하나님과 화평해야 함을 말하며, 대속으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화해시킨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합니다.
영적교훈
자신을 대속 제물로 드림으로 모든 희생 제사를 완성하신 그리스도를 힘입어 오늘날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었습니다(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따라서
본장에 나타난 제사장 규례는 영적 제사장인 성도들에게도 해당된다고 하겠습니다. 죄악 된 세상을 향하여 복음을 전파해야 할 성도들은 먼저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하며 맡겨진 사명을 위해 전적으로 헌신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언제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뻐하는 자가 될 때 자신의 삶을 통해 죄악으로 더러워진 세상을 정결케 하는 제사장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__________________ 레위기 7장 / 제사법에 대한 추가 법규
03-16-2023(목) 사순절 제20일
레위기 7장 내용 분해
1-10. 속건제의 규례 11-34. 화목제 희생의 규례
* 22-27.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
35-38. 제사법의 부언
본장은 다섯 가지 제사에 대한 최종 결론으로 희생 제물에 관한 처리 규정과 제사장의 분깃에 대해 말씀합니다. 속건제와
속죄제의 제사 규례와 제사장의 분깃에 대한 설명(1-10절) 화목제 희생 고기에 관한 규례와 제사장의 분깃에 대한 설명(11-34절) 특히 부정한 자는 화목제 희생 고기를 먹지 못하게 하는 금령이 강조됩니다. 하나님은 이
제사에 관한 규례를 이스라엘 자손 대대로 지ㅣ라고 말씀합니다(35-38절)
레위기 7장에는 6장에 이어 속건제 및 화목제의 규례가 언급되어 있으나, 이 제사들에 있어서 제사장의 몫과 그 제물을 먹는 규례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특히 제사 제도에 대한 규정이 주는 의미는 하나님께 제사하는 모든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구약 제사의 현대적 의미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중심이며 생명의 근거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임재에 상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헌신을 표시하는 제사는 공동체의 핵심적인 행위이다. 제사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하나로 묶고
축복과 충성을 약속하는 증표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구약에 나타난 제사는 비록 현대에 이르러 그 형식은 사라졌다 할지라도 내용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끊임없는 희생 제물을 요구하는 제사는 자신의 몸을 단번에 드려 모든 희생 제사를 완성시키신 그리스도에
의해 폐기되었다. 그러나 매일의 삶 속에서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는 영적 제사는 성도들이 드려야 할 제사
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전적인 헌신을 표시하는 구약 제사의 영적 계승이며, 그것을 통한 속죄와 축복은 현대의
성도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본장에서 부정한 자는 화목 제사의 제물을 먹지 못하게 금하고 있다. 원래 화목 제물은 공동 식사를 통해 모두가 나눠 먹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부정한 자는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음식을 먹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화목 제물이 뜻하는 하나님과의
친교와 축복에 들어가지 못함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시므로 죄 있는 자와 함께 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비록
구원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범죄한 자는 하나님의 축복을 얻지 못함을 교훈해 준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언제나 자신을 돌아보아 죄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죄를 지었을 때 지체 말고 하나님께 회개함으로 축복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속건제에 관한 규정
7 “허물을 속하는 속건제에 관한 규정은 이렇다:
2 속건제의 제물은 대단히 거룩한 것이므로 제단 북쪽의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잡아야 한다. 제사장은 그 피를 받아 단 사면에 뿌리고
3 내장을 덮고 있는 모든 기름과 기름진 꼬리와
4 두 콩팥과 그 위에 덮여 있는 허리 부분의 기름과 간에 덮여 있는 간 꺼풀을 떼어내어
5 제사장은 이 모든 것을 제단에서 불로 태워 나 여호와에게 화제로 바쳐야 한다. 이것이 허물을 속하는 속건제이다.
6 이 제물은 매우 거룩한 것이므로 거룩한 곳에서 제사장들만 먹도록 하라.
7 “속죄제와 속건제에 다 같이 적용되는 규정은 이렇다. 그 제물의 고기는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의 몫이다.
8 번제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그 제물의 가죽을 갖도록 하라.
9 화덕에 구운 소제물과 솥이나 철판에서 만든 소제물은 그것을 드린 제사장의 몫이다.
10 이 밖의 모든 다른 소제물은 기름을 섞은 것이든 마른 것이든 모든 제사장들이 똑같이 나눠 먹어야 한다.”
화목제에 관한 규정
11 “나 여호와에게 드릴 화목제의 규정은 이렇다:
12 만일 사람이 화목제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고자 하면 그는 누룩을 넣지 않고 기름을 섞어서 만든 빵과 누룩을 넣지 않고 기름을 발라 얇게 구운 과자와 고운 밀가루에 기름을 섞어 만든 과자를 감사의 희생제물과 함께 드려야 하며
13 또 누룩을 넣고 만든 빵도 화목제의 그 감사제물과 함께 드려야 한다.
14 그리고 각 예물 중에서 하나씩 제단 앞에서 들어올려 나 여호와에게 바친 다음 그것을 화목제의 피를 뿌린 제사장에게 주도록 하라.
15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린 화목제물의 고기는 그 날에 다 먹어야 하며 다음날까지 조금도 남겨 두어서는 안 된다.
16 “그러나 만일 누가 감사의 예물이 아닌 서약이나 자원의 예물로 화목제를 드리면 제사장은 제사를 드린 그 날에 그 제물을 먹어야 하지만 남은 것이 있으면 다음날까지도 먹을 수 있다.
17 그렇지만 3일째까지 남은 것은 전부 불로 태워야 한다.
18 만일
3일째 되는 날에 그 화목제물의 고기를 조금이라도 먹으면 나 여호와는 그 제사를 받지 않겠다. 그것은 제물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 제물을 드린 자에게도 아무런 유익이 없고 오히려 더러운 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 제물을 먹는
자는 그 죄의 대가를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이다.
19 “만일 그 제물의 고기가 부정한 것에 접촉했으면 그것을 먹지 말고 불로 태워 버려라. 이 화목제물의 고기는 의식상 깨끗한 자만 먹을 수 있다.
20 그러나 부정한 자가 나 여호와에게 바친 이 화목제물의 고기를 먹으면 그는 자기 백성 가운데서 제거될 것이다.
21 만일 사람의 부정이든 부정한 짐승이든 무엇이든지 부정한 것을 만진 후에 나 여호와에게 바친 화목제물의 고기를 먹는 자는 자기 백성 가운데서 제거될 것이다.”
기름과 피는 먹지 못한다
2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23 “너는 소나 양이나 염소의 기름을 먹지 말라고 백성들에게 일러라.
24 저절로 죽은 동물이나 맹수에게 찢겨 죽은 동물의 기름이 다른 목적을 위해서는 쓰일 수 있으나 너희가 그것을 먹어서는 안 된다.
25 누구든지 나 여호와에게 불로 태워 바친 희생제물의 기름을 먹는 자도 자기 백성 가운데서 제거될 것이다.
26 새의 피든 짐승의 피든 피는 절대로 먹지 말아라.
27 무슨 피든지 피를 먹는 자는 자기 백성 가운데서 제거될 것이다.”
제사장들의 몫
28 여호와께서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29 “누구든지 나 여호와에게 화목제물을 드리려고 하는 자는 자기 손으로 직접 그 제물을 가져오라고 백성들에게 말하라.
30 그 사람은 그 제물의 기름과 가슴을 나 여호와에게 가져올 것이며 제사장은 그 가슴을 제단 앞에서 흔들어 요제로 나 여호와에게 바치고
31 그 기름을 단에서 불로 태운 다음 그 가슴은 아론과 그 자손들에게 주어야 한다.
32-33 그리고 그 제물의 우측 뒷다리는 들어 올려 나 여호와에게 거제로 드린 다음 그 화목제물의 피와 기름을 드리는 제사장이 갖도록 하라.
34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는 화목제물 중에서 흔들어 바친 가슴과 들어올려 바친 뒷다리는 내가 제사장들에게 주었으므로 이것은 항상 그들이 차지해야 할 몫이다.
35 나 여호와에게 불로 태워 바친 이 제물 중에서 가슴과 우측 뒷다리는 아론과 그 자손들이 제사장으로 위임되던 그 날에 그들의 몫으로 정해진 것이다.
36 그들이 위임되던 날에 나 여호와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것을 그들에게 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들이 대대로 차지할 몫이다.”
37 이것은 번제와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와 위임제와 화목제에 관한 규정으로
38 여호와께서 시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물을 드리라고 명령하신 그 날에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발음
/ 하마르티아(hamartia) 어원 / 26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죄(요 8:21, 롬 5:20), 불법(살후 2:3), 죄악(히 11:25). 신약 성경 / 173회 사용
* 264. ἁμαρτάνω
1. 하나님의 종교적 도덕적 법을 어기고 잘못하다.
2. 죄를 범하다
발음
/ 하마르타노(hamartanō) 어원 / [기본형] 미래 ἁμαρτήσω, 제2부정과거 μάρτω, 가정법 ἤμαρτον, 제1부정과거 ἡμάρτησα, 가정법 ἁμαρτή- σω, 과거분사 ἁμαρτήσας, 1[부정불변사]과 3313의 어간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죄를 범하다(마 18:15), 죄를 짓다(눅 15:18, 롬 6:15), 죄로 인하다(요 9:2), 범죄하다(롬 2:12), 죄가 있다(벧전 2:20). 신약 성경 / 43회 사용
♦ 3월 15일(수) 사순절 제19일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레위기 6:1∼30 ♦ 묵상을 위한 주제 : 죄가 드러나는 날(5절) ♦ 성구 : 무릇 그 거짓 맹세한 물건을 돌려보내되 곧 그 본물에 오분 일을 더하여 돌려보낼 것이니 그 죄가 드러나는 날에 그 임자에게 줄 것이요.
레위기 6장은 1장에서부터 5장에 언급된 다섯 가지 제사의 결론이라고 하겠습니다.
6장의 내용을 분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6:1∼7. 재산권을 침해한 자가 드려야 할 속건제 6:8∼13. 번제와 화목제 6:14∼23. 소제 6:24∼30. 속건제를 드리는 절차와 방법
따라서 6장에서는 제사의 원인만이 아니라 절차와 방법까지 상세한 규례를 언급하므로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삶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 묵상할 주제는 “죄가 드러나는 날(the day the sin is revealed)”입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죄인뿐입니다. 첫째는 현장에서 간음 중에 붙잡혀 온 드러난 죄인입니다. 둘째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처럼 드러나지 않은 죄를 지니고 있는 죄인
죄가 드러나지 않았다고 하여 죄가 작은 것도 아닙니다. 성 프란시스는 “하나님은 얼마나 위대하시며 나는 그 앞에 얼마나 죄인인가를 좀 깨닫게 해주세요!” 라고 날마다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육체의 죄들이 밝히 드러나는 그 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내 안에 감추어진 죄를 자복해야 합니다.
죄는 먼저 생각으로 시작합니다. 마치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길 생각을 했던 것처럼......... 이와 같이 사람은 먼저 죄를 생각하고 그 다음에 행동으로 옮깁니다.
결국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몸뿐만 아니라 몸을 사용하는 마음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 보혈의 공로로 인하여 주홍 같은 우리의 죄는 희어졌으며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멀리 옮기셨습니다. 마치 컴퓨터의 delete 삭제 버튼을 누른 것 같이 깨끗이 지워주셨습니다. 죄인을 의인으로 여겨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크게 다가오면 올수록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가가면 갈수록 우리의 죄에 대한 반응은 더욱 더 예민해지게 됩니다.
죄가 있던 그 자리에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자리를 잡으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새로운 생명의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도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에서 행복한 믿음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7장-27장 / 거룩한 삶,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방법, 공동체 생활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성결법전 17, 제사를 통한 거룩 18-22, 가정과 사회를 통한 거룩 23-25, 절기를 통한 거룩 26, 축복과 저주를 통한 거룩 27, 서원을 통한 거룩
해리슨(Harrison) 레위기는 기독교 신앙과 교리의 기초를 다루는 가장 중요한 말씀이다.
제사 드리는 방법에 따른 분류
1. 요제(Wave Offering, 테누파) 8573. תְּנוּפָה
1. 흔듦
2. 손을 내두름
3. 특별의식. ׃חֲזֵה תְנוּפָה 흔들어 드리는 제물
발음
/ 테누파(tenûwphâh) 어원 / 513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요제(출 29:24, 레 7:30, 민 6:20), 요제물(출 29:27, 민 18:11). [동] 흔들다(레 7:34, 민 6:20, 사 19:16).
구약 성경
30회 사용
농산물을
제물로 드릴 때 사용하는 제사 방법이다.
히브리어 '테루마'는 "앞뒤로 움직이다", "흔들다"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 '노프'의 힢일형에서 유래된 말이다. 탈굼에서는 이 단어를 "일어서다", "들어 올리다"는 동작을 나타내는 의미로 해석하였다. 마쏘라
사본에서는 이 동사의 힢일형이 "들어 올리다"는 의미와(사 10:15) "흔들다"는 의미로(사 19:16) 모두 사용되었다.
제물을 드리는 방법에는 화제, 거제, 요제, 전제가 있었는데, 요제는 그 중 하나였다. 제사의 종류는 번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소제가 있었다.
요제로
드려진 제물들은 다음과 같다. 곧 화목 제물로 드려진 동물의 가슴
부분(레 7:30, 9:21,10:14-15,민 6:20,18:18), 성막 장식용으로 바쳐진 보석류(출 35:22, 38:24), 위임식
수양의 가슴과 넓적다리 부분(29:22-26, 레 8:25-29), 칠칠절에 드린 누룩 넣은 빵과 곡식의 첫 열매와 어린 양
두마리(23:11-14, 17, 20), 문둥병의 정결예식에 사용된 어린 수양과 감람유(14:12, 24)등이다.
여러 종류의 제물들을 한꺼번에 요제로 드린 경우도 있었던 것 같다(출 29:22-24, 레 8:25-27). 또한 요제는 '순결을 판단하기 위한 소제' 때에도 사용되었다(민 5:25).
민수기
8:11,15, 21절에서 아론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요제'로 레위인을 여호와께 드렸다고 나타나 있다. 요제는 하나의 의식
행위였으며, 요제로 인하여 제물들이 여호와께 헌납되었다. 그러나 요제의 정확한 의미와 성격은 명백히 밝혀져 있지 않다. 아마도
요제를 드릴 때는, 먼저 제사장이 봉헌자의 손바닥 위에 요제물을 얹어 놓은 다시 봉헌자의 손에서 제사장의 손으로 옮겨 놓고
제사장이 앞뒤로 흔드는 절기를 따랐던 것 같다(민 6:19-20). 제사장이 자신의 예물을 요제로 드릴 때는 요제물을 처음부터 자기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흔들었을 것이다.
요제물을 앞으로 내미는 행동은 여호와께서 제물을 다시 제사장에게 주는 것을 의미한다.
2. 거제(擧祭, Offering, 테루마) 8641. תְּרוּמָה
1. 헌납
2. 요제
발음
/ 테루마(terûwmâh) 어원 / 731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제물(출 25:2, 삼하 1:21), 요제물(출 29:27), 성물(레 22:12, 민 5:9), 예물(출 36:3,
신 12:17, 겔 20:40), 거제(민 15:19, 신 12:6, 느 10:39), 거제물(민 18:8, 느 12:44),
뇌물(잠 29:4), 봉헌물(말 3:8) 구약 성경 / 76회 사용
제물을 들어서 제사 드림. 제물을 번제단 위에 높이 들어올렸다가 아래에 내려놓는 제사로, 하나님께 바쳤다가 제사장이 다시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을 의미하는 데서 생겨났다(레 7:14,민 15:19, 신 12:6)
3. 화제(火祭, Fire Offering, 이솨) 801. אִשָּׁה
1. 희생
2. 이 단어는 모든 종류의 희생 제물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며 특히 종교적 의식을 나타내는 문구에서 빈번하게 사용된다
발음
/ 이솨(’ishshâh) 어원 / 78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화제(火祭)(출 29:18, 레 8:21, 민 15:3, 출 30:20, 레 7:5, 민 29:6), 화제물(레 4:35, 신 18:1, 수 13:14) 구약 성경 / 65회 사용
발음
/ 네쉐크(neçek) 어원 / 525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전제물(창 35:14, 민 6:15), 전제(출 29:40, 왕하16:13, 욜 1:13). [동] 붓다(민 4:7), 부어 만들다(사 41:29, 렘 10:14, 51:17). 구약 성경 / 21회 사용
창세기 - 선택(12:1-2)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The LORD had said to Abram, "Leave your country, your people and your father's household and go to the land I will show you. I will make you into a great nation and I will bless you; I will make your name great, and you will be a blessing.
출애굽기 - 구원(3:10)(19:5-6)
3: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So now, go. I am sending you to Pharaoh to bring my people the Israelites out of Egypt.
19:5-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Now if you obey me fully and keep my covenant, then out of all nations you will be my treasured possession. Although the whole earth is mine, you will be for me a kingdom of priests and a holy nation.' These are the words you are to speak to the Israelites."
레위기 - 성화(11:44-45), 베드로전서 1:15-16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I am the LORD your God; consecrate yourselves and
be holy, because I am holy. Do not make yourselves unclean by any
creature that moves about on the ground. I am the LORD who brought you up out of Egypt to be your God; therefore be holy, because I am holy.
베드로전서 1:15-16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But just as he who called you is holy, so be holy in all you do; for it is written: "Be holy, because I am holy.
성(聖) = 귀 이(耳) + 입 구(口) + 북방 임(壬)<크다> / 맡길 임(任) <맡기다> 속(俗) = 풍속 속(俗) / 사람 인(人) + 굴곡 곡(谷) <막히다>
민수기 - 연단(2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The LORD said to Moses, "Make a snake and put it up on a pole; anyone who is bitten can look at it and live.
신명기 - 경고(6:4-5)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Hear, O Israel: The LORD our God, the LORD is one.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strength.
고린도전서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So whether you eat or drink or whatever you do, do it all for the glory of God.
로마서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If we live, we live to the Lord; and if we die, we die to the Lord. So, whether we live or die, we belong to the Lord.
5대 거룩
1. 거룩한 하나님(레위기 19: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Speak to the entire assembly of Israel and say to them: 'Be holy because I, the LORD your God, am holy.
- 요한일서 1:5, 하나님은 빛(어두움은 죄)
2. 거룩한 제사장(레위기 21:4)
제사장은 백성의 어른인즉 스스로 더럽혀 욕되게 하지 말지니라. He must not make himself unclean for people related to him by marriage, and so defile himself.
3. 거룩한 땅(레위기 18:27, 20:24)
너희의 전에 있던 그 땅 거민이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고 그 땅도 더러워졌느니라. for all these things were done by the people who lived in the land before you, and the land became defiled.
내가 전에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 내가 그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너희에게 주어 유업을 삼게 하리라 하였노라 나는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 But I said to you, "You will possess their land; I will give it to you as an inheritance, a land flowing with milk and honey." I am the LORD your God, who has set you apart from the nations.
4. 거룩한 백성(레위기 10:10)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 You must distinguish between the holy and the common, between the unclean and the clean. - 분별하는 것
5. 거룩한 구세주(히브리서 10: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The law is only a shadow of the good things that are
coming--not the realities themselves. For this reason it can never, by
the same sacrifices repeated endlessly year after year, make perfect
those who draw near to worship.
파루스의 승리
BC 3세기, 그리스 북부에 피루스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전쟁 전문가로 주변에 많은 나라를 정복한
풍부한 경험과 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어
로마에도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하지만, 피루스의 신하인 키네아스는
로마와의 전쟁이 국력을 크게 소모할 것으로 생각해
왕을 찾아가 말했습니다.
"폐하, 로마와 전쟁을 해서 이긴 다음에는
무엇을 하실 것입니까?"
"우리가 로마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그리고 왕은 시칠리아, 아프리카 북부 카르타고에 이어
마케도니아 전역을 지배할 수 있게 된다며 흥분하며 말했습니다.
대답을 들은 뒤 키네아스는 '그다음에는?'이라는
질문을 던지자 왕은 말했습니다.
"키네아스, 주변의 나라들을 모두 정복하면
우린 정말로 편히 앉아서 인생을
즐길 수 있을 거라네."
모든 정복에 성공한 뒤에야 편히 쉬겠다는
왕의 대답에 키네아스는 답했습니다.
"폐하, 원하는 것이 그것이라면 전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린 지금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피루스 왕은 키네아스의 말을 듣지 않고
2만 5,000명의 군인과 20마리의 코끼리를 이끌고
로마를 침공했습니다.
격렬한 전쟁이 끝난 후,
피루스 왕은 승리를 얻었지만, 코끼리는 다 죽고
군인들도 4분의 3이나 죽어 남은 병력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패배나 진배없는 승리를 표현할 때
'피루스의 승리'라고 합니다.
무모하게 계속되는 전쟁은
아무리 노력하고 수고해도 결국 돌아오는 것은
패배뿐입니다.
매우 소중한 것으로 생각했던 승리의 전유물이
사실은 아무 쓸모없는 것으로 판명 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에서
무엇이 헛되고 참된 것인지 깨닫고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 오늘의 명언
물을 빤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바다를 건널 수 없다.
스스로 헛된 바람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
- 존 포웰 -
절기를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하그'와 '모에드'다. 하그는 '춤춘다' '순환한다'는 의미다. 매년 그맘때가 되면 예외 없이 절기가
돌아오며 주기적으로 순환하는 속성을 두고 불리는 명칭이다. 축제의 성격을 띠고 있기에 축제의 기본 요소인 춤춘다는 단어가 사용된
것이다. 모에드는 '특별하게 정해진 시간'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정하신 '모에드'에 따라 공생애 사역을 하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요 2:4)
성경은 이 절기를 '여호와의 절기'라고 밝힌다(레 23:2). 이스라엘 민족의 절기가 각 민족의 절기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왜 그럴까?
첫째, 이스라엘의 절기는 여호와 하나님이 직접 제정하셨다. 따라서 과장이나 꾸밈, 조작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둘째, 사건과 절기의 순서가 다르다. 즉, 다른 민족의 절기는 사건이 발생한 뒤 그 사건이 일어난 날짜를 기념해 생겨났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경우 먼저 절기가 만들어지고 그것에 맞춰 사건이 발생했다. 이스라엘 최대 절기인 유월절을 예를 들어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애굽에 대한 10가지 재앙 중 마지막 '장자의 죽임'이 임할 날짜를 이스라엘 민족에게 미리 알려주셨다. 그리고 재앙을 피할 수
있도록 집집마다 양을 잡아 그 피를 인방과 설주에 바르도록 하셨다. 죽음의 신이 이스라엘의 집에 넘어가도록 정하셨고 이를 유월절로
제정하신 것이다.
레위기
23장엔 이스라엘의 7개 절기가 언급돼 있다.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칠칠절, 나팔절, 대속일, 초막절 등. 이는 하나님이
진행하실 인류 구속사의 파노라마를 보여준다. 절기에는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과 프로그램이 암호화돼 있다.
유월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무교절은 그리스도의 친교
초실절은 그리스도의 부활
칠칠절(오순절)은 그리스도와 성령의 임무 교대
나팔절은 그리스도의 강림
대속죄일은 그리스도의 속죄
초막절은 그리스도의 심판
여호와의 3대 절기와 이스라엘의 농사
1. 여호와의 3대 절기
이스라엘의 농사는 하나님의 농사의 그림자이다.
또한 농사의 목적은 알곡을 수확하기 위함이듯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경작하시는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아들들을 얻기
위하심이다(고전9:10). 세상농사의 종류가 다양하듯이 하나님의 농사에도 여러 종류가 있어서 각 시대별로 다른 복음의 씨가
뿌려진다(눅16:16). 또한 농사의 끝에는 부활을 의미하는 추수의 때가 있다(계14:6-7).
여호와의 3대 절기는 하나님의 3가지 농사를 예표한다. 여호와의 3대 절기로는 출23:14-16에서와 같이 '무교병의 절기'와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두는 '맥추절'과 연종에 모든 수확을 거두어 저장하는 '수장절'이다.
<무교절, 유월절>
· 무교절은 율법시대를 예표한다.
· 율법시대는 애굽에서 마지막 유월절날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 시작되었고, 어린 양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유월절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마감되었다.(출12:7-11, 요13:1)
· 또한 주님은 삼일 후 초실절날 약속에 따라 부활의 첫 열매로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무덤에서 일어나셨다(고전15:23).
<맥추절, 칠칠절, 오순절>
· 맥추절은 교회시대를 예표한다.
·
교회시대의 농사는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50일째가 되던 오순절날 성령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오심으로 시작되었다(행2:1-3). 또한
교회시대는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두는 의미의 맥추절에 성령의 첫 열매(롬8:23,약:18,계14:4)가 하늘로
수확됨으로서 마쳐질 것이다.
· 마13:39에서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 때에는 추수꾼을 보내어 가라지는 불사르고 알곡(영어성경은 '밀'로 표현됨)은 곳간에 거두어진다(마13:30).
<수장절, 초막절, 장막절>
· 수장절은 천년왕국시대를 예표한다.
·
연종에(세상나라의 끝) 모든 농사의 작물을 거두고 초막을 짓고 일주일동안 안식을 하게 된다. 또한 이 절기는 출애굽한 조상들이
광야에서 초막생활을 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로 행하여진다(레 23:39-43). 초막은 결핍이나 초라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특별한 보호와 지켜주심을 의미한다(시27:5).
·
일시적인 광야생활을 지나 약속의 땅에 들어가 안식하였던 것과 같이 일시적인 천년왕국 후에는 영원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광야에
거할 때 바위에서 물이 솟아 나오고 불기둥이 그들을 비쳐주었지만 영원한 약속의 땅에서는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발원하는 생명수가 있을
것이며(계22:1-2) 어린양이 우리를 비추어주는 등불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이다(계21:23).
2. 이스라엘의 농사의 4가지 주요작물
이스라엘의 농사는 하나님의 농사를 예표한다. 이스라엘의 농사에는 4가지 주요 작물이 있다(대하2:15, 계6:6). 이는 밀과 보리, 그리고 기름과 포도주이다.
<보리와 밀; 곡물농사>
· 곡식농사는 보리와 밀이 있으며 보리는 가난한 자를 위한 것으로서 밀의 대용작물 혹은 그림자에 해당한다. 또한 보리농사는 율법시대를, 밀농사는 교회시대를 예표한다. 주님께서는 초실절에 보리농사의 첫 열매로 부활하셨고 성령의 첫 열매는 밀농사의 첫 열매(출34:22)가 거두어지는 맥추절에 있을 것이다(출23:16).
· 또한 추수시기별로 구분해 볼 때 추수를 시작할 시기에 얻는 첫 열매와 본격추수기와 추수가 끝날 무렵의 이삭줍기추수가 있다 (출23:19, 룻2:23).
·
여호와께서는 곡물의 첫 열매에 관한 제사의 방법을 지시하실때 곡물에 따라 다른 방법을 주셨다. 보리의 첫 열매는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께 가져가 요제로 드리고(레23:10-12), 50일이 지난 후 밀의 첫 열매는 가루를 내어 누룩을 넣어 떡 두 개를
만들어 제사장에게 드려 여호와께 요제로 드려야 한다(레 23:16-17, 20).
·
또한 레23:22에서는 밀을 추수할 때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또 떨어진 것을 줍지 말라고 하셨다. 이는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한 것으로 남기라 하셨으니 이는 이삭줍기 추수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레위기 23장에서는 밀 추수의 3종류를 언급하였지만
보리는 오직 첫 열매만 언급이 되어 있음을 기억하자.
<포도와 올리브; 열매농사>
· 포도주틀은 주님께서 재림하신 후 행하시는 악인에 대한 심판을 의미한다(사63:3, 욜3:13, 계14:20).
· 올리브 농사는 이스라엘의 농사중 마지막 작물이다.
또한 올리브 열매에서 얻어지는 감람기름의 주목적은 태워져 빛을 발함이다. 광야시절 여호와의 장막 안에는 감람유 등불은 항상 빛을
발하였다. 마지막 농사인 감람열매는 천년왕국의 농사 즉 영원한 복음의 열매인 것이다. 광야의 장막 안 등대에서는 감람유가 항상
태워져 여호와의 영광을 나타냈듯이 영원한 복음은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며 만물을 지으신 여호와를 경배하라"는 내용을
갖는다(계14:6-7).
<작물별 추수시기>
· 보리농사의 추수는 4-5월에 있다.
· 밀농사의 첫 열매는 5-6월에 시작된다. 이후 추수기는 3개월 정도 지속되어 이삭줍기로 마쳐진다.
· 포도의 수확은 8-9월에 있게 된다. 또한 포도주틀을 밟는 시기와 밀의 추수(타작마당)의 시기는 맞물린다(민18:27,30).
· 올리브열매의 수확은 연종에 있어 9월 중순-11월 중순경이다. 올리브열매의 타작은 포도수확 이후에 있다(사24:13).
위와 같은 모든 농사들이 끝나면 작물들은 거두어져 저장되고 다음해의 새 농사가 준비되는것 처럼, 영원한 복음을 끝으로 인간경작의 농사는 종결되고 새로운 시대인 새하늘과 새땅의 시대가 도래하게 되는 것이다.
3. 곡물의 제사방법
레위기 23장은 여호와의 절기에 대하여 상세한 규례를 소개한다. 그 중에서 보리농사의 첫 열매인 초실절(9-14절)과 밀농사에 해당하는 오순절(15-22절)에 대하여 살펴보자.
<초실절>
· 보리의 첫 이삭 한 단이 거두어져 제사장에게로 주어지며, 제사장은 안식일 이튿날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어 요제를 드린다.
· 주 예수님께서는 초실절에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로 부활하셔서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눅22:69,히12:2).
<오순절>
· 보리의 초실절 이후 50일을 계수하여 새 소제를 드리는데, 이는 밀의 첫 이삭(20절)을 빻아 고운가루로 만들고누룩을 넣어 떡 두 개를 만들어 첫 요제로 여호와께 드린다(17절). 누룩으로 구워진 떡은 죄의 성정(누룩은 죄악을 상징함)을 지니고 있는 인간을 의미한다. 또한 떡 두 개는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대표한다.
· 주님의 부활이후 50일째 날이었던 오순절 날에 120 문도에게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교회시대의 농사가 시작되었다. 이제 밀농사의 추수 때가 이르러 성령의 첫 열매가 인류 가운데 처음으로 구속함을 입게 될 것이다(계14:4).
·
율법시대가 출애굽시의 유월절에 시작하여 주님이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유월절에 이중적으로 이루어진 것과 같이, 교회시대도 역시
2,000년 전 오순절 날에 성령강림으로 시작하여 어느 한 맥추절(오순절)날에 인류 가운데 첫 구속함을 받은 첫 열매(약1:18,
계14:4)가 거둠어 짐으로 이중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 밀의 첫 열매는 보리의 첫 열매와 같이 여호와께 요제로 드려진다. 즉 성령의 첫 열매는 주님처럼 하나님의 보좌로 부활·휴거되어 대환난시에 하늘에서 거하는 자들(계12:12,13:6)이 되는 것이다. 이후 밀의 추수는 세상나라의 끝(마13:30,39) 시기에 주님이 구름을 타고 강림하실 때에(마24:29-30) 구름 위에서 낫을 휘두루매 곡식이 공중으로 거두어지는 것이다(계14:14-16, 살전4:14-17, 살후2:1-3,7-8).
· 이스라엘에서는 농부가 사는 집과 밭의 중간지점에 곳간을 지어놓고 수확된 알곡을 곳간에 저장한다. 마찬가지로 교회시대의 알곡성도는 하늘과 지상의 중간지점인 공중으로 모이게 되는 것이다. 또한 밀의 이삭줍기 추수는
주님이 지상에 재림하셔서 이 세상의 모든 권세와 정사를 멸하신 후(고전15:23) 천년왕국이 시작되기 직전에 있게 된다. 땅에
남겨진 밭의 모퉁이와 떨어진 낱알들은 이삭줍기 추수로 거두어짐과 같이 늦게 익어진 성도는 땅에 남겨지나 천년왕국 직전 이삭줍기의
추수에 이기는 자로 부활·휴거되어 1,000년간 주님과 함께 열국을 통치하게 된다. 이와같이 알곡은 익는 순서에 따라 거두어지게
되는 것이다.
주님은
자신을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셨다(계22:16). 일출 직전에 나타날 때 깨어 있는 자들만이 새벽별을 볼 수 있는 것처럼, 깨어
있는 성도들은 주님을 첫 열매의 자격으로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두운 때는 대환난기이며 일출은 천년왕국 시대인 것이다.
피그말리온 효과 / 교사기대효과, 로젠탈효과, 실험자효과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는 교육심리학에서 심리적 행동의 하나로 교사의 기대에 따라 학습자의 성적이 향상되는 것을 말한다. 로젠탈 효과(Rosenthal effect), 교사 기대효과(Teacher expectancy effect), 실험자 효과라고도 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조각가인 피그말리온은 조각에 심취하여 삶 전체를 조각에만 몰두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피그말리온은 자신이 이상형으로 생각하는 여인을 조각상으로 만들고자 결심했습니다.
그렇게 완성한 조각상은 너무나 완벽하고 아름다웠습니다. 너무나 아름답게 조각된 조각상에 자신도 모르게 점점 빠져든 피그말리온은 차가운 조각상에 마치 살아있는 여인인 것처럼 진심으로 대했습니다. 이것을 올림포스산 위에서 측은하게 지켜본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아들 에로스를 보내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피그말리온은 사람이 된 아름다운 여인에게 '갈라테이아(Galatea)'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유래된 심리학 용어로 '피그말리온 효과'가 있습니다.
일이 잘 풀릴 것이라고 기대하면 잘 풀리고, 안 풀리겠다고 생각하면 정말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는 자기 충족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과도 같은 말이라고 합니다.
번제단과 성막 뜰(출애굽기
27:1-21)
출애굽기 27:1-8 번제단에 관한 규정
구약에서 제사(祭祀)를 위한 세 가지 필수적인 요소가 있다.
첫째는 제사장(祭司長) 코헨(kôhên) 3548 כֹּהֵן - 제사장, 대제사장
관련 성경 / 제사장(창 14:18, 레 14:18, 대하 31:19, 스 6:9, 7:12, 24)
구약 성경 / 752회 사용
둘째는 제물(祭物) 제바흐(zebach) 2077 זֶבַח - 살륙, 희생,
어원/ 207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제사(창 31:54, 출 12:27, 민 15:5), 희생(창 46:1, 레 3:1, 신 12:11), 제물(레 19:6, 신 18:3), 제육(祭肉)(잠 17:1), 잔치(겔39:17, 19), 제사를 드림(삼상 10:8) 구약 성경 / 162회 사용
* 2076. 자바흐(zâbach) זָבַח
1. 살륙하다, 2. 제사드리다, 3. 피엘형 זבַּח
발음
/ 자바흐(zâbach) 관련 성경 / 희생을 드리다(출 8:27, 13:15, 호 4:14), 드리다(출 20:24, 신 16:5, 대하 30:22),
잡다(신 12:21), 제사드리다(신 16:2, 삼상 1:4, 대하 30:22), 제사하다(왕상 13:2, 삼상 16:2, 시 106:37),
예비하다(겔 39:19), 잡아드리다(신 15:21) 구약 성경 / 134회 사용
셋째는 제단(祭壇) 미즈베하(mizbêach) 4196 מִזְבֵּחַ
- 제단
어원 / 2076에서 유래(자바흐 / 자바흐(zâbach) זָבַח )
관련 성경 / 향단(출 40:5, 26, 레 4:7), 번제단(레 4:7), 제단(민 16:39, 왕상 1:53, 시 84:3).
히브리서 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브리서 5:5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 하셨고.
히브리서 5: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히브리서 6: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히브리서 4: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찌어다. 히브리서 9:11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히브리서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브리서 2:17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제물(祭物)
로마서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에베소서 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요한일서 2: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히브리서 10: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9:23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찌니라.
예수님은 제단(祭壇)
로마서 11:3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레위기 3:2 그 예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회막 문에서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제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
레위기 4:25 제사장은 그 속죄 희생의 피를 손가락에 찍어 번제단 뿔에 바르고 그 피는 번제단 밑에 쏟고.
레위기 4:30 제사장은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 번제단 뿔에 바르고 그 피 전부를 단 밑에 쏟고.
시편 84:3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출애굽기 25-26장은 성막과 그 내부에 관한 것이었지만, 27장은 희생제물을 드리는 제단과 그에 따른 제사도구들에
관한 것이다. 이 단은 제물을 태워 드리는 단이기 때문에 ‘번제단,’ 놋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놋단’이라 부른다. 그러나 전체를 놋으로 만든
것은 아니고, 조각목으로 사방 5규빗(2.25m), 높이 3규빗(1.35m) 크기로 제작한 다음 놋으로 싼 것이다. 넓이는 1.5~1.6평
정도이다.
번제단에 필요한 도구들, 곧 재통, 부삽, 대야,
고기갈고리, 불 옮기는 그릇, 그물, 고리, 등은 모두 놋으로 만들어졌다. 놋은 십자가를, 조각목은 버림받은 인간을 상징한다. 제단은 하나님께
속죄예물과 감사예물을 바치는 곳이다. 버림받은 인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감싸질 때 비로소 속죄함을 받고 감사할 이유를 갖게 된다.
모세가 광야에서 죽어가는 자들을 위해서 놋뱀을 만들어
세웠고, 또 그것을 바라본 자들이 죽다가 살아났듯이, 번제단과 그것의 부속기구들을 모두 놋으로 만든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능력을 상징하는
것이다.
민수기 21장 5-9절을 보면,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다가 불뱀들에게 물려 죽어가고 있었는데, 그들이 잘못을 깨닫고 회개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아 세우게 하였다.
8-9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조각목은 죄로 인해서 버림받은 인간을 상징한다고 했고,
놋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한다고 했다. 조각목이 놋으로 감싸지듯이 죄를 범한 인간일지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능력을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는 자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된다. 민수기에서 불뱀에 물린 자들을 위해서 놋뱀을 만들어 세운 것은 고대 근동과 그리스 로마세계에서 뱀은
치유의 상징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놋뱀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예표였다고 볼 수 있다.
번제단의 네 모퉁이는 뿔 모양으로 만들어졌는데,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을 상징 한다. 고대근동에서는 뿔을 신성과 힘과 권세의
상징으로 여겼다.
레위기 4장 25절을 보면, “제사장은 그 속죄제물의 피를 얼마 받아다가, 손가락으로 찍어서 번제단의 뿔에 바르고, 나머지
피는 번제단 밑바닥에 쏟아야 한다.”고 되어 있다. 제물을 번제나 화제로 바치기 전에 그 제물의 피를 제단 모퉁이 뿔에 발랐던 것이다(레
4:18). 이 의식은 단을 깨끗케 하는 예식이었다.
레위기 8장 15절을 보면, “모세는 그 수소를 잡고, 그 피를 얼마 받아다가 손가락으로
찍어서 제단의 뿔에 두루 돌아가며 발랐다.”고 했고, “그렇게 하여서, 모세는 제단을 깨끗하게 하였으며, 또 나머지 피는 제단의 밑바닥에 쏟아서
제단을 속하여 거룩하게 하였다.”고 했다.
희생제사에서 제물의 피를 제단 뿔에 바르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가 갖는 속죄능력을 상징하는 것이다. 또
제단 뿔을 붙잡고 탄원을 하면 억울한 누명이나 실수로 인해 범한 죄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사면을 받을 수도 있었다(왕상 1:51).
성도는 어떠한 죄를 범했을지라도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고 회개하면 그 죄를 사함 받고 구원받는다는 것의 예표였던 것이다.
새찬송가
268장에서 잘 표현되었듯이,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하는 것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이다.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27장 9-19절은 성막 뜰에 관련된 내용이다. 성막
뜰의 크기는 남쪽과 북쪽이 각각 100규빗 곧 45미터, 동쪽과 서쪽이 각각 50규빗 곧 22.5미터로써 306평 정도이다. 울타리는 5규빗 곧
2.25미터 높이로 세마포로 쳤다. 기둥은 5규빗 곧 2.25미터마다 하나씩 세웠고, 각 기둥은 놋받침을 만들어 받쳤다. 그러니까 성막 뜰의
경계를 표시할 울타리를 치는데 2.25미터 기둥 60개, 놋받침 60개, 2.25미터 폭 세마포가 126미터 필요했다. 또 각각의 기둥에는
은갈고리와 은고리와 놋말뚝들을 필요로 했다. 성막의 뜰은 하나님의 구속사역이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속죄를 위한 제사가 드려지고, 회개와 씻음이
이뤄지는 곳이다.
성막문은
동쪽에 하나뿐이었다. 크기는 20규빗 곧 9미터이었고,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수놓아 짠 휘장을 쳤다. 문은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구원에 이르는 문은 오직 하나임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성막 밖의 인간이 하나님의 임재장소인 거룩한 성막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는 동쪽문
하나뿐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하고 새로운 생명의 길이 ‘문’이신 예수님뿐임을 강조하는 예표였던 것이다.
요한복음 10장 9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하셨다.
27장 20-21절은 등대의 연료 및 그
사용방법에 대한 규정이다. 이처럼 등대의 제작 규례와 사용 명령을 따로 구분하여 지시할 만큼 등대와 그것의 연료가 되는 기름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네 겹의 앙장으로 씌워진 성막 안은 밤이면 바깥으로부터
자연광을 흡수할 수 없기 때문에 칠흑 같이 어두웠다. 바로 이곳 성소에 놓인 황금등대 위의 일곱 개 등잔에 불을 밝힘으로써 그 내부를 밝게 하며
제사장의 활동을 용이하게 하였다. 이처럼 등댓불은 죽은 것 같은 실내를 생명이 넘치는 곳으로 만든다. 결국 이 등대는 죄로 어두워진 인간의
양심과 음란하고 악한 세상을 밝히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빛을 받아 이 땅에서 ‘빛’으로 살아가야 할 우리 성도들을 상징하는
예표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 12절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하셨고, 마태복음 5장 14절에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라고 하셨다.
성소를 밝히는 기름의 재료는 올리브유였다. 지방
함유량이 60퍼센트 이상으로 많은 양의 기름이 추출된다. 올리브유는 질이 좋고 향기가 좋아 고대로부터 향유와 식용유로도 사용되어져왔다. 따라서
올리브유는 성도의 순결한 믿음을 상징하는 것으로써 성소를 밝힐 유일한 기름으로 규정되어 있다. 신약시대에는 올리브유가 성령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인침’의 표시로 사용되었고, 치유를 목적으로도 사용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올리브유는 성령님의 특성을 상징하는데도 사용되었다. 등잔에 기름이
충분할 때 어둠을 오랫동안 밝힐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성도들도 성령의 기름으로 충만할 때 내 속의 어둠을 몰아내고, 세상의 어둠도 몰아낼 수
있다.
______________________레위기 6장
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2 “누구든지 전당잡은 물건과 맡은 물 건을 돌려 주지 않거나 강도질하거나 자기 이웃을 착취하거나
3 분실물을 주운 다음에도 그 사실을 부인하고 거짓 맹세하는 등,
4-5 이런 죄를 범한 자는 그 죄가 드러나는 날에 그 물건의 5분의 을 더하여 주인에게 돌려 주어야 하며 그는 자기 허물을 속할 속건제물을 나 여호와에게 가져와야 한다.
6 그는 네가 정한 값에 해당하는 흠 없는 숫양을 제사장에게 가져갈 것이며
7 제사장은 그를 위해 속죄해야 한다. 그러면 그가 용서받게 될 것이다.”
번제에 관한 규정
8-9 여호와께서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이런 명령을 전하라고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불로 태워 바치는 번제에 관한 규정이다. 번제물은 놋제단 위에 밤새도록 얹어 놓고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해야 하며,
10 다음날 아침 제사장은 고운 모시로 만든 속옷과 겉옷을 입고 번제물의 재를 가져다가 단 곁에 둔 다음
11 다른 옷으로 갈아 입고 그 재를 야영지 밖의 깨끗한 곳으로 가져가야 한다.
12 그리고 단 위의 불은 항상 피워 두어 꺼지지 않게 해야 한다. 너희 제사장은 아침마다 그 위에 나무와 번제물을 올려놓고 화목제물의 기름을 태우도록 하라.
13 단의 불은 꺼지지 않고 계속 타야 한다.”
소제에 관한 규정
14 “다음은 곡식을 제물로 드리는 소제에 관한 규정이다: 제사장은 제단 앞에서 나 여호와에게 제물을 바쳐야 한다.
15 그는 곱게 빻은 밀가루 중에서 한 움큼을 떠내어 감람기름과 향을 섞은 다음 전체를 나 여호와에게 바쳤다는 표로 그것을 단 위에서 불로 태워야 한다. 그것은 나 여호와를 기쁘게 하는 향기이다.
16-17 그 나머지 밀가루는 제사장들이 먹을 몫이다. 그러나 이것은 누룩을 넣지 말고 구워 성막 뜰에서 먹어야 한다. 내가 이것을 나에게 바친 화제물 중에서 제사장들에게 주었으므로 그것은 속죄제물이나 속건제물과 같이 아주 거룩한 것이다.
18 그러므로 이것은 대대로 제사장들만 먹어야 한다. [a]누구든지 이것을 만지는 자는 거룩해질 것이다.”
19-20 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아론의 자손들이 기름 부음을 받아 제사장으로 위임되는 날에 그들은 나 여호와께 소제물로 고운 밀가루 [b]2.2리터를 바치되 반은 아침에, 반은 저녁에 바쳐야 한다.
21 그들은 그것을 감람기름으로 반죽하여 철판에 구운 다음 썰어서 나 여호와를 기쁘게 하는 소제물로 바쳐야 한다.
22-23 아론의
자손이 자기 아버지의 대를 이어 기름 부음을 받고 제사장으로 위임되는 날에 이 소제물을 바치게 하라. 이것은 영구히 지켜야 할
규정이다. 이 제물은 나 여호와 앞에서 완전히 불로 태워야 하며 아무도 그것을 먹어서는 안 된다.”
속죄제에 관한 규정
24-25 여호와께서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 게 이런 명령을 전하라고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속죄제에 관한 규정이다. 속죄제의 제물은 대단히 거룩하므로 제단 북쪽의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잡아야 한다.
26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은 그 제물을 성막 뜰, 거룩한 곳에서 먹도록 하라.
27 그 고기에 접촉하는 자마다 거룩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 제물의 피가 묻은 옷은 거룩한 곳에서 빨아야 한다.
28 만일 그 고기를 토기에 삶았으면 그 그릇은 깨뜨려 버리고 놋그릇에 삶았으면 그 그릇을 깨끗이 닦고 물에 씻어야 한다.
29 이 제물은 매우 거룩한 것이므로 제사장들만 먹도록 하라.
30 그러나 피를 가지고 성막에 들어가 성소에서 죄를 속하기 위해 사용된 속죄제물의 고기는 제사장이라도 먹어서는 안 되며 그것은 완전히 불로 태워야 한다.”
무릇 그 거짓 맹세한 물건을 돌려 보내되 곧 그 본물에 오분 일을 더하여 돌려 보낼 것이니 그 죄가 드러나는 날에 그 임자에게 줄 것이요. or whatever it was he swore falsely about. He must
make restitution in full, add a fifth of the value to it and give it all
to the owner on the day he presents his guilt offering.
그 거짓 맹세한 물건
이웃의 물건을 횡령하거나 탈취하고서도 결코 그러한 일이 없다고 거짓 맹세함으로써, 그것을 자신의 소유물로 삼고 있는 부당한 물건을 가리킨다.
본물에 오분 일을 더하여
이웃의 물건을 거짓맹세로 부당하게 취한 자가 죄 용서함 받기 위해서는 먼저 그 물건을
주인에게 성실히 돌려주는 일부터 시작해야 했다. 이때 이웃의 물건을 횡령, 탈취 등으로 취한 자는 자신이 취한 물건, 즉
본물(本物) 뿐만 아니라 그동안 피해자가 겪었을 손실이나 어려움 등을 고려하여 본물의 가치에 덧붙여 손해 배상격으로
1/5(20%)을 더 가산하여 갚아야 했다. 이러한규정을 통하여 우리가 깨닫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1. 진정한 회개는 단지 말
뿐만 아니라 행동으로써 그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사실이다(마 3:8). 이런 의미에서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을 통해
누구든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려는 자는 먼저 형제와 화해한 후.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가르치셨다(마 5:23,24).
2. 본물에 오분 일을 덧붙여 갚는 행위는, 진정한 회개가 단지 죄 짓기 이전 상태로의 환원이
아니라 그 이상의 신실한 생활에로의 향상을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삭개오의 경우, 그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진정 회개한후에 그
회개의 표시로 만일 자신이 토색(討索) 한 물건이 있을때는 배로 갚겠다고 고백했음을 볼 수 있다(눅 19:8).
죄가 드러나는 날에
남의 물건을 횡령하거나 약탈한 자가 자신의 범죄를 사함받기 위해 하나님께 속건제를 드리는 날에.
여호와께 신실치 못하여 범죄하되(2절)
이 말은 속건제의 대상 중 하나인 이웃에 대한 모든 범죄가(1-7절) 궁극적으로 여호와께
신실치 못한 데서 기인하고 있음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왜냐하면 사람이 여호와께 대한 진실한 신뢰가 없을 때그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에게도 역시 신실치 못하여 쉽게 범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에 대한 범죄는 곧 하나님께 대한 범죄와 일맥
상통한다(Matthew Henry, The preacher's Complete Homiletic Commentary).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은 결코 별개의 계명이 아니라, 상호 밀접히 연관된 계명으로서 모든 율법의 핵심을 이루는
2대 정신이다(마 22:36-40).
남의 물건을 맡거나
은행이나 보험 제도를 갖추고 있지 못했던 고대사회에서는 장기간 출타시 귀중한 물품을 이웃에게
위탁하는 관습이 있었다. 이때 기탁된 남의 물건을 맡은 자는 성실히 그 책임을 감당해야했다. 그런데 만일 남의 물건을 맡은 자가
나중에 거짓말로 그러한 사실을 부인할 경우, 그것은 그에게 죄가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만일 맡은 물건이 도적을 당했을 경우,
위탁자는 그 정황 여하에 따라 자신의 책임유무를 재판장앞에서 엄격히 따져, 면제가 되기도 하고 혹은 배상의 책임을 지기도 했다(출
22:7-13).
전당 잡거나 -
이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테수멧야드'는 곧 '서약이나 맹세의 증거로 준 담보물'을 뜻한다.
따라서 이러한 남의 담보물을 마치 자기 소유인 양 타인에게 마음대로 처분하는 행위는 죄가 된다는 의미이다. 영어 성경(KJV)은
'친분이나 우정을 속여 물건을 횡령하는 것'이란 뜻으로 번역하고 있다.
늑봉하고도
'늑봉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솩'은 '압제하다','사기치다', '협박하다'란 뜻이다. 따라서
늑봉(勒捧)이란 폭력과 사기 등으로 이웃을 협박하여 소유물을 빼앗는 행위를 가리킨다(신 24:14; 호 12:7; 욥 24:2).
레위기 6장은1장에서부터 5장에 언급된 다섯 가지 제사의 결론이라고 하겠습니다.
6:1-7. 재산권을
침해한 자가 드려야 할 속건제 6:8-13. 번제와 화목제 6:14-23. 소제 6:24-30. 속건제를 드리는 절차와 방법
따라서 6장에서는 제사의 원인만이 아니라 절차와 방법에까지 상세한 규례를 언급하므로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삶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죄인들 뿐입니다.
첫째는 현장에서 간음중에 붙잡혀 온 죄인은 드러난 죄인입니다. 둘째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처럼 드러나지 않은 죄를 지니고서 드러난 죄인들을 정죄하는 죄인입니다. 죄가 드러나지 않았다고 하여 죄가 작은 것도 아닙니다.
성 프란시스는 “하나님은 얼마나 위대하시며 나는 그 앞에 얼마나
죄인인가를 좀 깨닫게 해주세요” 라고 날마다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존재의 빛 앞에 우리 자신이 벌거벗은 것 같이
모든 육체의 현저한 죄들이 밝히 드러나는 그 순간은 얼마나 두려운 시간일까?
죄는 먼저 우리의 생각에서부터 시작한다. 사람은 먼저 죄를 생각하고 그 다음에 행동으로 옮긴다. 결국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몸
뿐만이 아니라 몸을 사용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부패되는 데는 단 1분도 걸리지 않는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그 보혈의 공로로 인하여 주홍 같은 우리의 죄는 희어졌으며,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멀리 옮기셨으며, 우리의 죄를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죄를 깊은 바다에 던져주셨다. 마치 컴퓨터의 DELETE
삭제 버튼을 누른 것 같이 깨끗이 지워주셨다. 이 얼마나 놀랍고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이며 은혜인가?
그리하여 죄인을 의인으로 여겨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크게 다가오면 올수록 “이제는 죄를 마음껏 지어도 되겠지”가 아니라,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가가면 갈수록 우리의 죄에 대한 반응은 더욱 더 예민해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죄가 용서되어진 그 마음에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들어오시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예수님은 인간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기관을 마음이라고 하셨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하셨다 (마 5:8).
마음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마음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다.
잠언 4장 23절에는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말씀하신다. 고귀한
마음을 가진 사람도 때로는 헛된 생각에 사로잡힐 수 있다. 그러나 헛된 생각을 마음에 오래 품지 않고 떨쳐버려야 한다.
루터는 “새가 우리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새가 우리 머리 위에 앉는 것은 막을 수 있다. 더군다나 새가 우리 머리에 둥지를 트는 것은 더욱 막을 수 있다”고 하였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보배로운 피를 흘려 주신 이유는 우리가 어떤 죄를 짓더라도 회개만 하면 용서하기 위함만은 아니다. 그가
돌아가심은 모든 죄를 용서하심과 동시에 우리로 보혈의 능력을 힘입어 천국백성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 결코 우리에게 이중적인 삶을
살게 함이 아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셔야 할 정도로 무서운 죄에 대해 우리가 더 민감하게 반응하게 하심이다. 우리의 마음은 생명의 근원이 되는 중요한
처소이다. 그리고 인생과 신앙생활을 더 풍요롭게 하는 능력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오시기에 앞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마 3:2)고 선포했다. 진정한 회개는 나 중심의 삶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돌이키는 것이다.
이제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심으로 날마다 나의 자아가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연습하는 것이다. 보혈을 지나 하나님 아버지 품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골 3:10)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한걸음씩 나가네.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시네,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네” (보혈을 지나 찬양 가사)
어느 랍비가 제자들에게 1달러를 주며 이 강의실을 가득 채울 수 있는 물건을 구하여 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 제자들이 시장으로 달려가서 과연 강의시를 가득 채울 수 있는 물건이 무엇일까 하고 열심히 찾았습니다. 어떤 제자는 휴지, 어떤 제자는 강냉이, 어떤 제자는 솜뭉치..... 다양한 물건을 갖고 날이 어두워질 무렵 제자들이 모였습니다. 랍비는 제자들이 가져온 물건들을 보며 하나씩 확인하였으나 마음에 맞는 물건이 없었습니다. 그때 한 제자가 강의실의 불을 모두 끄라고 한 후에 손에 들고 있던 초에 불을 밝혔습니다. 그러자 어둡던 강의실이 밝아지며 모든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작은 촛불이 어둡던 강의실을 환하게 밝힌 것입니다. 죄는 내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그러나 죄를 드러내면 내 마음은 아주 환하게 밝아질 것입니다.
레위기의 목표는 "거룩한 나라" "거룩한 백성"입니다. 거룩한 나라는 거룩한 백성이 세워갈 수 있습니다. 자유대한민국은 자유를 사랑하고 지키려는 국민들에 의해서 유지될 것입니다. 공산주의와 김일성주의를 추종하는 주사파들에 의해서 자유대한민국은 유지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천국 시민권자들로서 무엇을 지켜야 할까요? 오직 복음으로만 나를 무장하고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 나를 지켜야 합니다. 나의 가족들을 지켜야 합니다. 나의 조국을 지켜야 합니다.
마르틴 루터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던 필리프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 은 늘 죄의식에 쉽게 사로잡혀 루터를 성가시게 했습니다. 보다 못한 루터는 어느날 맬란히톤에게 살인 같은, 도저히 용서 안 될 것 같은 죄라도 저지르고 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습니다.
루터의 이 말을 “구원 받았으니 이제 맘껏 죄지어도 된다”고 한 것이 아니냐는 식으로 곡해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사실 루터의 강조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진리가 우리 삶에 비추는 능력을 말하려했던 것입니다(로마서 8:1).
새로운 피조물이 된 믿는 자들은 이제 죄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살아난 자라는 것입니다(로마서 6:11, 3:21). 이제 죄가 드러나더라도 그 죄가 믿는 자들을 주장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로마서 6:14).
드러나는 죄를 미워하고 멀리하는 것은 예수님의 은혜에 시선을 고정할 때 성령님을 통해 이뤄지는 열매이지 결코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 지켜낼 수 없는 부분입니다. 성화를 강조하면 할수록 우리는 성화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칭의를 말하고 고백 할수록 영적성숙은 자연스럽게 이뤄집니다. 정죄감 없이 더욱 주님을 좇는 능력이 생수처럼 뿜어져 나오게 됩니다. 사단은 계속 죄의식을 갖도록 유혹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온갖 방법으로 그 죄의식을 줄이거나 없애도록 노력하게 만들지만 헛될 뿐입니다. 예수님이 성취하신 죄사함과 의롭게 하심의 은혜에 마음과 영혼을 고정시키면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바다 위를 걷게 될 것입니다. 죽일 듯이 몰아치는 폭풍과 삼킬 듯 넘실거리는 파도를 보느라 우리의 시선을 예수님의 얼굴에서 떼지 않기를 바랍니다.
세 가지 죄
첫째, 남의 물건을 위탁 받거나 전당 잡고도 이를 부인하는 것 둘째, 강도질하거나 늑봉하고도 그 사실을
부인하는 것 셋째, 남이 잃은 유실물을 습득하고도 그 사실을 부인하는 것 이러한 죄는 율법을 위배한 것이요, 그것은
곧 하나님께 대한 죄입니다.
원상 회복과 보상
하나님은 부당하게 가로챈 물건을 원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욕심 때문에 이웃에게 손해를 입힌 사람은 이웃이
당한 고통을 보상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탈취한 사람이 물건을 돌려줄 때에는 본물의 5분의 1을 더해 주도록 배상의
원칙을 정해 주셨습니다.
___________________ 레위기 5장
속죄제를 필요로 하는 경우
5 “만일 어떤 사람이 법정에 증인으로 소환되었으나 자기가 보거나 들은 것을 말하지 않으면 그는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2 “어떤 사람이 죽은 들짐승이나 가축이나 곤충과 같이 의식상 부정한 것을 만졌을 경우에는 그가 모르고 만졌을지라도 부정하게 되어 과실을 범하는 자가 된다.
3 “만일 그가 모르고 사람의 부정에 접촉하였다가 그것을 알게 되면 그는 과실을 범한 자가 될 것이다.
4 “어떤 사람이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아무 생각 없이 어떤 일을 하겠다고 맹세하였다가 후에 자기가 한 일을 깨달으면 그는 과실을 범한 자가 된다.
5 “누구든지 이런 과실을 범한 자는 자기가 과실을 범했다고 고백하고
6 자기가 범한 그 과실에 대하여 속죄제물로 어린 양의 암컷이나 암염소를 끌고 와서 나 여호와에게 바칠 것이며 제사장은 그 사람의 과실을 위해 속죄해야 한다.
7 “만일 그가 어린 양이나 염소를 바칠 형편이 못 되면 자기가 범한 과실에 대해서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두 마리를 나 여호와에게 가져와 한 마리는 속죄제물로, 다른 한 마리는 번제물로 바쳐야 한다.
8 그는 그 제물을 제사장에게 가져갈 것이며 제사장은 속죄제물을 먼저 드리되 그 목을 완전히 끊지 말고 비틀어
9 피를 단 곁에 뿌리고 그 나머지 피는 제단 밑에 흘려야 한다. 이것은 속죄제이다.
10 그리고 나머지 한 마리는 규정대로 불에 태워 번제로 드려야 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제사장이 그 사람의 과실을 위해 속죄하면 그가 용서받게 될 것이다.
11 “만일 그가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 비둘기 두 마리도 바칠 형편이 못 되면 그는 자기가 범한 과실에 대하여 고운 밀가루 [a]2.2리터를 가지고 와서 속죄제로 드려야 한다. 이것은 속죄제이므로 그 위에 기름을 붓거나 향을 놓아서는 안 된다.
12 그는 그것을 제사장에게 가져갈 것이며 제사장은 전체를 바쳤다는 표로 그 가루 한 움큼을 집어다가 단에서 나 여호와에게 불로 태워 바치는 화제물 위에 얹어 태워야 한다. 이것은 속죄제이다.
13 이와 같은 방법으로 제사장이 과실을 범한 그 사람을 위해 속죄하면 그가 용서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제물의 나머지는 곡식으로 드리는 소제물의 경우와 같이 제사장에게 주어야 한다.”
속건제
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15 “어떤 사람이 무의식 중에 나 여호와에게 드리는 거룩한 예물에 대하여 잘못을 범하면 그는 벌금으로 네가 정한 값에 해당하는 흠 없는 숫양을 나 여호와에게 바쳐야 한다. 이것은 허물을 씻는 속건제이다.
16 그는 거룩한 예물을 드리는 데 있어서 범한 잘못에 대하여 자기가 바치도록 되어 있는 예물의 5분의 을 더 추가하여 제사장에게 가져갈 것이며 제사장은 속건제의 숫양으로 그를 위해 속죄해야 한다. 그러면 그가 용서받게 될 것이다.
17 “어떤 사람이 나 여호와가 금한 명령 중 하나를 모르고 범했을지라도 그것은 죄가 되므로 그는 그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18 그는 모세 네가 정한 값에 해당하는 흠 없는 숫양을 속건제물로 제사장에게 가져갈 것이며 제사장은 그가 모르고 범한 잘못에 대하여 속죄해야 한다. 그러면 그가 용서받게 될 것이다.
레위기 4장에서 속죄제는 죄를 지었을 때 그 죄를 속하기 위해서 드리는 제사로 언급되었습니다. 제물은 빈부에 따라 형평에
맞게 드렸습니다. 제사장과 온 회중은 흠 없는 수송아지로, 족장은 흠 없는 숫염소로, 평민은 흠 없는 암염소나 어린 암양으로
드렸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는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두 마리로, 극빈자는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 곧 2.3리터를 바치도록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제물에 차별을 두신 것은 속죄제나 속건제가 의무제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죄를 범한 자가 경제적인 이유로 속죄를
받지 못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그 피해를 줄이기 위함이었습니다.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속죄제나 속건제의 규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속에 이르는 길에 결코 빈부귀천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복음의 보편성에 대한 모형이자 그림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복음에는 빈부귀천의 차별이나 남녀반상의 차별이 없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차별 없이 누구한테나
주어진다는 것이 로마서의 말씀입니다.
속죄제는 대속을 위한 제사였습니다. 하나님의 계명 중 하나라도 범했거나 어떤 사건에 직간접으로 연루된 증인이 정직하게
진술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과 자기 자신을 속이고 타인에게 해를 끼쳤을 때나(1절), 자신도 모르게 짐승이나 사람의 부정한 것에
접촉하여 부정을 입었을 때나(4절), 경솔하게 맹세한 후에 그 맹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을 때(4절) 반드시 바쳐야 하는
제사입니다. 이 경우 범죄자는 반드시 먼저 죄를 인식하고, 그것이 하나님께 죄가 된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고백해야 했습니다. 그런 후
비로소 속죄를 바라는 겸허한 심령으로 어린 암양이나 암염소를 취하여 속죄제 규례를 따라 하나님께 예물을 바쳐야 했습니다. 이것은
속죄제의 근본정신이 죄에 대해서 철저히 깨닫고, 겸손히 회개하는데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바쳐진 예물 가운데 남은
것은 제사장이 먹었습니다.
속죄제와 속건제의 차이점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속죄제는 특별한 죄에 대하여 바치는 제사이고, 속건제는 보상이 가능한 죄, 곧 성물이나 이웃에게 범한 죄에 대하여 바치는
제사로써 오분의 일이 플러스되는 벌금형이 함께 주어졌습니다. 단순한 벌금형으로도 처벌이 가능하지만 제사를 바치는 이유는 죄의
근원적인 용서가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속죄제와 속건제의 형식적 차이를 보면, 첫째, 제물이 다릅니다. 속죄제는 소, 염소, 양, 비둘기, 고운 가루를 드렸지만,
속건제는 오로지 흠 없는 숫양을 드렸습니다. 둘째, 속죄제는 남은 피를 번제단 밑에 쏟았으나 속건제는 쏟지 않았습니다. 셋째,
속건제는 언제나 개인적인 제사였지만, 속죄제는 집단적인 제사도 포함했습니다. 동물의 머리위에 손을 얹고 죄를 전가시키는 문제를
속건제에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는데,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생략된 것으로 봅니다. 끝으로 속건제는 속죄제와 달리 특별한 경우에도
드려졌습니다. 곧 문둥병자가 나은 후에(4:1-20), 또한 나실인이 부정한 허물을 용서받기 위해 속건제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속건제는 단순히 어떤 사람이 잘못을 범한 것에 대한 책임, 범과 등을 보상하는 제사입니다. 속죄제는 무의식중의 범죄를 속하고 속건제는 의식적으로 하나님과 타인의 명예를 손상시킨 것을 배상하는 제사입니다.
속건제를 바치는 경우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성물에 대해 범한 죄이고(14-19절),
둘째는 이웃에게 범한 죄입니다(6:1-7). 첫째 죄는 다시 고의로 하나님의 성물에 대하여 범과한 것과 부지중에 계명 중 하나를
범한 것으로 나눠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레위기 5장은 다른 사람의 재물을 가로채는 사기 행위를 했거나 그것을 부인하며 거짓 맹세하였을 때도 속건제를 바쳐야 한다고
규정하였습니다. 사람에게 잘못한 것은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되고, 하나님께 잘못한 것은 사람에게 잘못한 것이 되기 때문에
이웃에게 죄를 범하였을 때 하나님과 이웃 모두에게 죄를 범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속건제를 바쳐야 하고, 손해를 끼친
사람에게는 범죄물과 그 범죄물의 오분의 일을 더하여 본인에게 배상을 해야 합니다.
속건제는 속죄제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속죄 제물인 동시에 속건제물이 되셨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구약의 속죄제와 속건제가 예표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십자가 위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에 따르는
형벌을 받으심으로써 속죄제를 완성하셨고, 하나님의 모든 요구들을 순종하심으로써 속건제를 완성하셨습니다.
신약성서에서는 다양한 언어로 구원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의롭다 하심’(4:24; 5:1/justification)이란 말이 있는데, ‘의롭다 하심’은 법정용어입니다. 법정에서의 무죄 선언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둘째, ‘구속(救贖)’(3:24/redemption)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구속’은 노예시장의 통용어입니다. 근본개념은
몸값 지불, 즉 속전(贖錢)을 내고 노예의 속박에서 풀려나는 것을 말합니다. 속건제의 의미를 이 몸값 지불의 ‘구속’의 의미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셋째, ‘화목’(5:10-11/reconciliation)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화목’은 중재(仲裁)용어입니다. 분단의 벽을 헐고 적대감정을 풀어 화평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넷째, ‘그 피를 인하여’(3:25; 5:9/sacrifice)가 있습니다. ‘그 피를 인하여’는 피해보상의 개념이며,
희생제사 용어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속죄제물, 희생제물, 대속제물이 되셨습니다. 안수를 통해서 예배자의 죄가 제물에게
전가되듯이,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전가되었고, 그분은 우리의 죄를 친히 짊어지시고 우리를 위해서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끼친 피해를 보상하셨습니다.
두 번째의 구속개념과 네 번째의 피해보상 개념이 속죄제 및 속건제와 연관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죄인이며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를 위해서 친히 속죄제물이 되시고, 속건제물이 되셨습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하고
기쁘고 반갑고 복된 소식입니까? 이 복음의 깊이와 가치를 깨닫고, 그것을 잘 간직하고 잘 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전하라고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2 “누구든지 무의식 중에 나 여호와가 금한 명령 중 하나를 어겼을 경우에는 이렇게 하여라. 3 “만일 기름 부음을 받은 [a]제사장이 모르고 범죄하여 백성에게 그 죄의 재앙이 돌아가게 하였으면 그는 자기가 범한 죄에 대하여 흠 없는 수송아지 한 마리를 속죄제로 나 여호와에게 바쳐야 한다. 4 그는 그 수송아지를 성막 입구 나 여호와 앞에 끌어다가 그 수송아지 머리 위에 손을 얹은 다음 그것을 나 여호와 앞에서 잡아야 한다. 5 그리고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은 그 수송아지 피를 가지고 성막에 들어가서 6 손가락으로 피를 찍어 나 여호와 앞 곧 성소의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리고 7 또 그 피를 성막 안의 향단 뿔에 바를 것이며 그 송아지의 나머지 피는 성막 입구에 있는 번제단 밑에 모두 쏟아야 한다. 8 그런 다음 그는 그 속죄제물의 모든 기름, 곧 내장을 덮고 있거나 그것에 붙어 있는 기름과 9 두 콩팥과 그 위에 덮여 있는 허리 부분의 기름과 간에 덮여 있는 간 꺼풀을 떼어내어 10 화목제물의 기름을 떼어냈을 때처럼 그것을 번제단 위에서 불로 태워야 한다. 11 그러나 그 수송아지의 가죽과 그 모든 고기와 그 머리와 다리와 내장과 똥, 12 곧 기름 부분을 제외한 그 나머지는 모두 야영지 밖으로 가지고 가서 재 버리는 정결한 곳에서 나뭇불로 태워야 한다. 13 “만일 이스라엘 전체 백성이 잘못하여 나 여호와가 금한 명령 중 하나를 어겨 범죄하고도 깨닫지 못하다가 14 후에 그 죄를 깨달으면 그들은 수송아지 한 마리를 속죄제로 드려야 한다. 그들은 그것을 성막 앞으로 끌어다 놓고 15 백성의 장로들이 나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 머리에 손을 얹은 다음 그것을 내 앞에서 잡을 것이며 16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은 그 수송아지 피를 가지고 성막으로 들어가서 17 손가락으로 피를 찍어 나 여호와 앞 휘장 앞에서 일곱 번 뿌리고 18 또 성막 안 나 여호와 앞에 있는 향단 뿔에 그 피를 바를 것이며 나머지 피는 성막 입구에 있는 번제단 밑에 쏟아야 한다. 19 그리고 그는 그 송아지의 기름을 다 떼어내어 단에서 불로 태워 20 속죄제의 수송아지에게 한 것처럼 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제사장이 백성을 위해 속죄하면 그들이 용서받게 될 것이다. 21 그런 다음 그는 [b]기름을 제외한 그 수송아지의 나머지 부분을 야영지 밖으로 가지고 가서 제사장 자신의 죄 때문에 바친 그 송아지처럼 그것을 불에 태워야 한다. 이것은 전체 백성을 위한 속죄제이다. 22 “만일 백성의 지도자가 모르고 나 여호와의 명령 중 하나를 어겨 범죄하였다가 23 후에 자기 죄를 깨닫게 되면 그는 흠 없는 숫염소 한 마리를 제물로 가져와서 24 그 숫염소 머리에 손을 얹은 다음 나 여호와 앞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잡아야 한다. 이것은 속죄제이다. 25 제사장은 그 속죄제물의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번제단 뿔에 바르고 나머지 피는 모두 번제단 밑에 쏟을 것이며 26 그 모든 기름은 화목제 제물의 기름처럼 단 위에서 불로 태워야 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제사장이 죄를 범한 지도자를 위해 속죄하면 그가 용서받게 될 것이다. 27 “만일 일반 백성이 모르고 나 여호와가 금한 명령 중 하나를 어겨 범죄하였다가 28 후에 자기 죄를 깨닫게 되면 그는 흠 없는 암염소 한 마리를 끌고 와서 29 그 머리에 손을 얹은 다음 제단 북쪽의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잡을 것이며 30 제사장은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 번제단 뿔에 바르고 나머지 피는 모두 그 제단 밑에 쏟아야 한다. 31 그런
다음 그는 화목제 제물의 기름을 떼어낸 것처럼 그 암염소의 기름을 모두 떼어내어 단 위에서 불로 태워 나 여호와를 기쁘게 하는
향기가 되게 해야 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제사장이 그를 위해 속죄하면 그가 용서받게 될 것이다. 32 “만일 그가 어린 양을 속죄제물로 가져올 경우 그는 흠 없는 암컷을 끌고 와서 33 그 머리에 손을 얹은 다음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잡을 것이며 34 제사장은 그 속죄제물의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번제단 뿔에 바르고 그 나머지 피는 모두 번제단 밑에 쏟아야 한다. 35 그런 다음 그는 화목제의 어린 양에서 기름을 떼어낸 것처럼 그 제물의 모든 기름을 떼어내어 나 여호와에게 불로 태워 바치는 화제물 위에 얹어 태워야 한다. 제사장이 이런 식으로 그 사람을 위해 속죄하면 그가 용서받게 될 것이다.”
요아킴은 최근 태어나 가장 정신없는 한달을 보냈다.
딸의 결혼식을 성대히 치른 뒤 며칠 못가 지병을 않으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겨우 장례식을 마친 뒤 한숨 쉬려는가 했더니 최근
사업을 함께 시작한 동업자 녀석이 모든 물건을 빼돌려 도망을 가고 말았다. 요아킴은 쉴 겨를이 없었다. 그 녀석이 두로 항으로
도망간 뒤 배에 오르면 끝장이었다. 서둘러 추적을 떠난 요아킴은 이틀을 노숙한 뒤 삼일 째에도 이른 아침부터 발걸음을 재촉했다.
요아킴은 반나절이 지나 어느 마을에 도착한 뒤에 그 날이 안식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련의 큰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한 바람에
안식일 날짜를 망각하는 중대한 실수를 범한 것이다. 가슴이 덜컹거리며 두려움에 사로잡힌 요아킴은 그 자리에서 무릎 꾾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의 죄가 해결될 수는 없었고 속죄제를 바쳐야만 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요아킴은 그 범죄자가
배에 승선하기 직전 체포할 수 있었다. 재산을 되찾아 집으로 돌아온 요아킴은 안식일을 무심코 범했던 죄를 용서받기 위해 즉시
성전으로 올라가야 했다. 더불어 그에게는 추가로 드려야할 제물이 있었다. 바로 잃었던 재산을 되찾게 해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번제와 화목제였다. 하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제사는 속죄제였다. 죄를 용서받지 않고 드리는 번제와 화목제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리
없기 때문이다.
무심코 지은 죄를 위해 바친 속죄제
요아킴이 안식일을 무심코 범한 뒤 바친 제사는
‘속죄제’였다. 속죄제는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사였다. 첫째, ‘비고의적인 죄’를 해결하고(레 4~5장) 둘째,
‘부정결’의 문제를 해결했다(레 11~15장). 예컨대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산후 정결례를 거쳐 깨끗케 되는데, 일정 기간 날짜가
지난 뒤 목욕을 해야 하며, 가장 중요하게는 자녀 출산에 대한 감사의 번제와 더불어 ‘속죄제’를 바쳐야만 했다(더 자세한 것은
나중에 레 12장을 다룰 때 설명할 것이다). 덧붙여 유출병 걸린 여자가 피가 멈춘 뒤, 또는 악성 피부병(나병이라는 번역은
잘못이다) 환자가 치료된 뒤 반드시 바쳐야하는 것도 속죄제다. 사람이 부정을 탔을 때 그것은 죄 문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속죄제가
요구된 이유는 무엇인가? 분명 그것은 그런 다양한 부정결들은 창세기 3장에서 죄가 세상에 들어온 후 발생된 죄의 증상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부정결의 문제도 근원을 따지면 죄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속죄제가 요구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우선 속죄제는 속건제와 더불어 ‘죄’를 해결하는 제사였다. 속건제가 해결하는 죄는 재산상의 피해를 입힌 죄에 국한된다는 점에서
속죄제가 다루는 죄와 차이가 난다. 속건제에서는 상대방의 금전적/물질적 손해를 배상하고 하나님께 속건제 숫양을 바쳐 그 문제를
해결한다. 그러나 속죄제는 도덕적 계율을 어긴 죄인데, 다만 그 죄는 ‘비고의적인 죄’ 다시 말해 ‘그릇’ ‘무심코’ 여호와께서
금지하신 계명을 범한 죄다. 한글 성경에서는 단순히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라고 되어 있으나 히브리어 원문의 의미는 정확히
‘여호와께서 금지하신 계명 중 하나라도’이다. 고의적인 죄의 경우는 일부 고의성이 가벼운 경우를 제외하고(레 5:1~4) 매우
심각하여 속죄제는 허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반역죄로서 하나님께서 직접 징벌하셔서 처단하시거나(예, 레 10장의 잘못된 제사를 드린
나답과 아비후) 하나님의 지시로 백성들이 처형을 했다(예, 레 24장의 하나님을 저주한 이스라엘 평민). 다만 어떤 반역죄의
경우 심판이 유보되어 하나님께서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도 했다.
어쨌든 금지 명령은 매우 중대한 계명이다. 따라서
무심코 위반했다 하더라도 상당히 심각하다. 요아킴의 경우 안식일에 여행이 절대 금지되어 있으나 그는 무심코 이 금지 명령을
위반했다. 속죄제를 바쳐 죄가 속죄되어 하나님께 용서받아야만 했다. 요아킴은 평민이었기 때문에 바쳐야하는 속죄제 짐승은 암염소나
암양이었다.
속죄제는 짐승의 피로 성전과 그 기물들의 오염을 씻어내는 효과를 낸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인간의
죄와 부정결이 성전과 그 기물들을 더럽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속죄제는 죄와 부정결의 문제를 위해 바치는 것이 원칙이나, 그 외에도
제사장 임직이나 레위인의 임직, 또는 나실인의 서원과 같은 몇 가지 특별한 예식에 속죄제를 드렸으며, 국가적 절기마다 다양한
속죄제를 바치곤 했다. 그 기능에 대해서는 몇 가지로 의견이 나뉘는데 그중 가장 그럴듯한 설명은 아마도 절기별로 제단과 성전의
잠재적 부정결을 닦아내는 기능을 했을 것이란 견해다.
속죄제와 속건제, 특히 속죄제는 그 제사의 특징과 의미, 제사의
절차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대단히 많은 지면을 필요로 하는데, 여기서는 최대한 간략하게 설명해야하는 아쉬움이 있다. 상세한 설명과
목회적 적용과 여러 힌트, 특히 속죄제의 자세한 교회론적 의미에 대해서는 필자의 책 <레위기의 신학과 해석>(새물결
플러스)의 도움을 받기 바란다.
신분에 따라 등급화된 속죄제
속죄제는 죄인의 신분과 사회적 지위에 따라 달랐다. <표>는 높은 지위로부터 낮은 지위에 이르기까지 제물의 크기와 가치가 줄어든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선
4장에서 먼저 (대)제사장의 비고의적인 죄에 대해 수소를 바칠 것을 명령한다. 많은 학자들이 3절의 ‘기름부음받은 제사장’을
대제사장으로 해석하지만, 만일 그렇게 될 경우 제사장이 목록에서 누락되므로 이것은 분명 대제사장을 포함한 제사장들로 보아야 한다.
(대)제사장과 회중은 동급이었다. 따라서 둘 다 수소가 요구된다. 이때 회중은 제사장이 포함된 회중을 의미한다. 만일 제사장과
회중이 분리되어 취급되는 경우, 제사장이 제외된 회중의 제물은 흔하게 숫염소였다(레 9장; 16장). 족장은 평민의 지도자로서
숫염소를 속죄제로 바쳤고, 평민은 암염소나 암양을 바쳤다. 여기서 수컷이 암컷보다 제의적 가치 면에서 우위에 놓여 있음이 다시
확인된다(시장 가치로는 암컷이 월등히 비쌌다). 한편, 제사장과 평민 사이에는 레위인이 있어야 하는데 레위기 4~5장의 목록에서
빠져있다. 아마 레위인은 제사장과 평민 사이의 신분이었다는 점에서 족장과 동급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양과
염소를 조달하기 어려운 가난한 계층을 위해서는 비둘기 두 마리가 속죄제로 바쳐졌다. 이때 한 마리는 번제와 같이 모두 제단에
태웠고, 다른 한 마리는 피를 제단에 흘린 뒤 제사장이 섭취하는 방식으로 두 비둘기가 처리되었다. 그러나 가난한 계층 중에는
심지어 비둘기마저 힘에 겨운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극빈자들이 무심코 죄를 범했을 경우에도 죄 문제를 그대로 넘길
수는 없었기에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수단을 그들에게 허락하셨다. 바로 그들이 평소 음식으로 먹는 밀가루 1/10에바(약
2.2리터)를 소제의 속죄 제물로 가져오라 명하신 것이다(레 5:11~13).
경제적 형편과 무관하게 죄의 문제는
어떤 방법으로든 반드시 해결되어야 했다. 비록 밀가루는 피가 없는 속죄 제물이었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재량으로 극도로 가난한
자들을 위해 밀가루 제물에 피의 효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해주셨다. 마지막 한 사람을 위해서까지 속죄의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의 큰
은혜가 아닐 수 없다.
매우 특이한 속죄제의 피뿌리기
속죄제의 피 의례는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대)제사장과 회중을 위한 속죄제 수소는 안수 후 도살을 한 뒤 그 피를 양푼에 받아 내성소로 가지고 들어간다.
거기서 양푼의 피를 손가락으로 찍은 뒤 지성소 휘장 앞의 향단 주변에 ‘뿌리고’ 향단의 네 뿔에 ‘발랐다’(레 4:6~7,
17~18). 그러나 평민을 위한 속죄 제물인 염소와 양의 피는 마당에 놓인 번제단의 네 뿔에 ‘바른다’(레 4:25, 30).
비둘기의 경우에 피를 양푼에 받지 않고 죽인 뒤 몸채 들고 마당의 번제단 벽에 일부를 뿌리고 남은 피는 제단 아래 흘렸다(레
5:9).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제사장과 회중을 위한 속죄제 수소의 피는 내성소에 들어가 향단에 처리한 반면, 평민의 속죄제
짐승(염소와 양, 비둘기)의 피는 마당의 번제단에서 처리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신분에 따른 죄의 오염력과 영향력이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제사장과 회중의 죄의 ‘독기’는 내성소까지 침범해 향단을 더럽힌 반면, 평민의 죄는 마당의 번제단을 더럽히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한 이유로 피를 뿌리는 위치가 달랐다.
<표>에서 확인해 볼 수 있듯이 피를 어디에 뿌렸느냐에
따라 속죄제 고기 처분 방식도 달라졌다. 내성소에서 피를 뿌린 짐승의 경우 결코 그 고기를 제사장이 먹지 못하고 진영 밖의 재를
버리는 ‘정결한 곳’에서 소각을 해서 없앤다. 반면에 마당의 번제단에서 피가 처리된 속죄제 짐승의 고기는 제사장들에게 일종의
수고비로 건네져 그것을 먹어서 없앴다. 이것은 분명히 속죄제 고기의 오염도의 차이로 인한 것이다. 내성소에 피를 뿌린 속죄제
짐승의 경우 피를 통해 흡수된 오염이 강해 먹을 수 없어 밖에 반출해 태웠던 반면, 마당에 피를 뿌린 속죄제 짐승의 경우 그
오염이 경미해 제사장이 먹을만 했기에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집례한 제사장들이 먹도록 조치하시고 밖에 버려 태우진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속죄제는 ‘태우는 속죄제’와 ‘먹는 속죄제’로 나뉜다.
속죄제의 피 뿌리는 특유의 동작은 아래의
비교를 통해 분명해진다. 우선 속죄제 외의 다른 모든 제사들, 즉, 번제/속건제/화목제에서는 피를 뿌리는 방식이 공통적으로
‘끼얹다’(zaraq ‘dash, throw’)이다. 피를 양푼에 받은 뒤 제단 사면 벽에 뿌려서 처리한다. 그러나 속죄제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피를 양푼에 담은 뒤 다음 세 가지 동작을 통해 피를 처리한다.
a. ‘뿌리다’(히자-hizza ‘sprinkle’) : 손가락으로 제단 주변에 b. ‘바르다’(나탄-natan ‘daub, put’) : 손가락으로 제단의 네 뿔에 c. ‘쏟다’(샤파크/야차크-shapak/yatsak ‘pour’ ): 제단 밑에
속죄제에서는
피가 든 양푼을 들고 제단 벽에 끼얹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을 양푼에 담아 피를 찍은 뒤 소량의 피를 제단 주변에 뿌리거나 제단
뿔에 바르는 동작으로 피를 처분한다. 피가 대량으로 남는데, 이 남은 피는 제단 밑에 쏟는다. 여기서 손가락으로 피를 뿌리고
바르는 동작이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가져오는 효과는 제단의 정화이기 때문이다(레 8:16; 16:19). 즉, 속죄제의 피를
특이한 동작으로 뿌리고 바를 때 제단과 성전이 청소된다. 이것이 속죄제의 가장 큰 특징이다.
죄의 자백이 요구됨
레위기
5장 1~6절은 약간의 고의성이 있는 죄들을 위해 바치는 속죄제 규정이다. 네 가지 사례가 주어지는데 이것은 모두 고의성이
개입되어 있으므로 그 죄의 공개적인 인정과 자백이 요구된다. 이런 죄의 인정과 자백은 속죄제 절차에서 매우 중요했다. 그것 없이는
속죄제는 아무런 효력이 발생되지 않았을 것이다. 혹자는 이 경우는 고의성이 있기 때문에 더 죄질이 나빠 ‘자백’이 요구되었지만,
4장의 죄들은 ‘비고의적’인 죄들이 때문에 죄질이 가벼워 자백이 요구되진 않았다고 말한다. 실제로 4장에는 ‘자백’의 요구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4장은 ‘금지명령’이기 때문에 요아킴의 사례에서 보듯이 무심코 그 죄를 지었다하더라도 심각했다. 따라서
자백은 그런 심각한 상황에서 자동적으로 수반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이유로 4장에서는 자백을 명시적으로 요구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속죄제의 최종적 효과는 ‘속죄’와 그로 인한 ‘죄사함’이었다(레 4:20, 26, 35).
속죄제는 레위기 4:1-6:7에 걸쳐 소개된다.
‘하타트’라는 단어에서 왔다. ‘과녁에서 벗어나다’ ‘죄를 짓다’ 속죄하다‘라는 뜻을 가진다. 죄를 짓고 나서
속죄하기 위해 드려지는 제사이다. 죄와 상관없는 제사는 없지만, 속죄제의 경우 죄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있다.
1970년대 새로운
속죄제 이론과 더불어 정결제(purification offering)로 부르기로 제안했다. 트렘페 롱맨Ⅲ와 레이몬드 딜러드
역시 ‘정결제’로 부른다. 정결제로 부르는 이유는 제사방법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용어 때문이다.
속죄제에 대한 내용은 레 4:1-5:13까지 나와 있지만, 6:25-7:7에서 속건제와 함께 다루어진다. 고의적인
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부지주의 죄도 포함한다. 5:1-6에서는 부지중에 지은 죄에 대해 다룬다. 민수기 15:22-31에서
부지중의 죄와 고의로 지은 죄를 설명한다.
속죄제는 드리는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구분해 놓았다. 다른 제사와 다르게 물질의 부가 아닌 지휘체계 안에서 구분했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4:3-12. 제사장 4:13-21. 이스라엘 온 회중 4:22-26. 이스라엘의 지도자 4:27-35. 이스라엘의 평민
속죄제 제사 방법
신분에 따라 드리는 제물과 방법이 약간씩 다르다. 대제사장과 전체 회중의 경우 반드시 수소를 드려야 하고, 밖에서 소각된다. 또한 피뿌림도 마당이 아닌 내성소까지 들어간다. 그런데 숫양은 보이지 않는다.
(아래의 표는 김경열의 것에서 가져옴)
신분
제물
피의 취급
소각 대상
남은 고기
(대)제사장
수소
내성소/향단
기름
밖에서 소각
회중
족장
숫염소
마당/번제단
두 콩팥
제사장 섭취
평민
암염소
혹은 암양
마당/번제단
간엽
제사장 섭취
빈민
비둘기 두 마리
(속죄제와 번제)
마당/번제단
번제 비둘기
속죄제 비둘기
제사장 섭취
극빈
밀가루 1/10에바
없음
한 움큼
제사장 섭취
제사장이 드리는 속죄제(4:3-12)
제물을 회막문 앞에 가져온다.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잡는다.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은 피를 받아 회막에 가져가서
성소의 휘장 파에 일곱 번 뿌린다. 회막 안 향단 뿔들에 바르고, 피 전부를 회막문 앞 번제단 밑에 쏟는다.(4-7)
수송아지의 모든 기름을 떼어내고 더불어 다른 내장도 떼어낸다. 떼어낼 것들은 다음과 같다. 내장에 덮인
기름,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허리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 등이다. 이것들을 모두 번제단 위에
불사른다.
그러나 나머지 수송아지의 가죽과 모든 고기,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 똥 등은 진영 바깥 재 버리는 곳에서 불로 사른다. *죄를 사함 받는다는 말이 없다.
평민이 드리는 속죄제(4:13-21)
제물을 회막문 앞으로 가져온다. 회중의 장로들이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잡는다. 제사장은 수송아지의 피를 회막에
가지고 들어가서 손가락으로 피를 찍어 회막 안 제단의 뿔에 바르고, 나머지는 번제단 밑에 쏟는다. 기름만을 취하여 제단에
불사른다. 나머지는 진영 밖에 나가 재버리는 곳에 모두 불태운다. *제사장이 회중을 위하여 속죄하여 죄사함을 받는다.
속죄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사를 상징한다.
속죄 제사를 통해 죄인들이 구원을 얻게 된다.
속죄 제사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 어누 누구도 필할 수 없는 제사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죄가 있는 자들은 반드시 속죄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와야 합니다. 이 제사는 제사장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예외가 없는 제사입니다. 가난한 자들도 죄가 있으면 속죄 제사를 드려야만 속죄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 앞에 모든 자들이 죄인인데 이 모든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사를 통하지 않고는 절대 속죄받을 수 없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속죄제의 의미를 통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제사를 깨다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레위기 4: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였으되.
속죄제사는 누구든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라도 지키지 못하고 범죄 하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입니다.
‘범하였으되’ עשה(아사 6213) 준행하다, 범하다, 범죄 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졌지만 말씀대로 살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께 속죄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행동에 옮기지 못하고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죄를 지은 것이 자신이 아니라고 우겨도 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행동이 올바르고 윤리적으로 깨끗하게 살았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 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 죄는 계속해서 짓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를 지을 때마다 속죄 제물을 가지고 와서 속죄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도 이미 아담으로부터 원죄가 있기 때문에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를 통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윤리적으로 양심적으로 살아간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레위기 4:3 만일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 하여 백성의 허물이 되었으면 그가 범한 죄로 말미암아 흠 없는 수송아지로 속죄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릴지니.
만약에 제사장이 하나님께 범죄 하여 백성들 앞에 허물이 있으면 수송아지로 속죄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려야 합니다.
‘속죄제물을’ חטאה(핫타아 2403) 속죄
희생,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חטא(하타 2398) 정결하다, 제사드리다, 깨끗이 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제사장이 죄를 범하면 흠 없는 수송아지를 속죄 제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 수송아지는 제사장의 모든 죄를 전가받아 죽었습니다. 범죄 한 제사장 대신으로 제물이 죽었던 것입니다. 이 제물이 희생을 당하고 제사장은 정결하며 깨끗하게 되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나타내고 있는 제사입니다. 주님의 피 흘림이 지금의 구원받은 제사장들을 살린 것입니다.
레위기 4:12 똥 곧 그 송아지의 전체를 진영 바깥 재 버리는 곳인 정결한 곳으로 가져다가 불로 나무 위에서 사르되 곧 재 버리는 곳에서 불사를지니라.
제사장을 위해 희생된 송아지의 가죽과 고기와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과 똥을 진영 바깥 재 버리는 곳에 가져다가 불로 태워버리라고 하나님은 명령하고 있습니다.
‘가져다가’ יצא(야차 3318) 이끌어내다, 건져내다, 옮기다, 불러내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결한 곳으로 송아지의 제물을 모두 가져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송아지의 제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이 제물을 통하여 죄로 죽었던 자들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악에서 건져내 주시고 불러내어 의인의 자리로 이끌어 내시는 것입니다. 결국 이 송아지가 죽고 내가 구원받게 되는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송아지의 제물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에 진영 바깥 재 버리는 곳으로 가지고 갈 수 있습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제물을 챙겨가야 합니다. 이 제물은 이미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제사이며 예수 그리스도도 진영 바깥 재 버리는 곳에서 죽을 것을 예언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히 13:11-12)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 되었고 예수님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사를지니라’ שרף(사라프 8313) 불사르다,
불타다, 분향하다, 라는 뜻입니다. 속죄 제물은 재버리는 곳에서 불에 태워지게 됩니다. 이 제물이 불태워져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가 되어 하나님이 흠향하기에 좋은 냄새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십자가에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어 주시는 예수님의 제사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영원한 속죄 제사가 하나님께 분향이 되어 올라가게 되고 택함 받은 백성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자신이 원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택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릴 길이 없었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구약의 송아지 제물은 계속해서 드려야 하지만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면 끝입니다. 더 이상의 속죄 제물은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죄를 사함 받고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게 되었으며 죄인에서 의인의 자리에 있는 줄을 깨달아야 합니다.
(레 4:13-14) 만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그 범한 죄를 깨달으면 회중은 수송아지를 속죄제로 드릴지니 그것을 회막 앞으로 끌어다가
만일 이스라엘 회중이 하나님 앞에 계명을 어겨 허물이 있지만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범한 죄를 깨달으면 속죄제를 드려야 합니다.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שגה(샤가 7686)
범죄 하다, 길을 잃다, 미혹되다, 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정도를 걷지 못하고 길을 잃어 신앙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거나 세상의 미혹에 빠져 살아갈 때에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죄인 줄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있으면서도 죄인 줄도 모르는 상태가 계속 이어지다가 깨달을 때에 속죄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럴 수 있습니다. 나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하지만 자신이 열심히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열심이어야 합니다. 구원에 관해서 나의 열심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무시하고 부인하는 것은 자신의 열심에 빠져 하나님께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인정하는 것이 속죄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레 4:20) 그 송아지를 속죄제의 수송아지에게 한 것 같이 할지며 제사장이 그것으로 회중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들이 사함을 받으리라
회중들을 위해 송아지의 속죄 제사를 드림으로 회중들이 죄 사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함을 받으리라’ סלח(살라흐 5545) 용서하다, 사하여 주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린 속죄 제사를 통하여 회중들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완전하게 사하여 주시는 것을 말씀합니다.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통해 택한 자들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생명을 주시는 것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 사함을 받은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죄를 용서함 받을 수 없습니다. 완전하게 죄가 깨끗해진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을 상징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으로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가 아니면 나는 절대 구원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내 힘으로는 죄에서 빠져나올 어떠한 힘도 없기 때문입니다.
속죄제를 드리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첫째, 제물의 머리에 안수해야 합니다.
(레 4:15) 회중의 장로들이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속죄 제사를 드릴 때에는 흠 없는 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조금의 흠이라도 있으면 제물로서는 불합격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 흠도 없고 점도 없으신 분입니다.
(벧전 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된 것이니라
죄인들의 죄를 사해주기 위해서는 흠이 없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통해 죄인들의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그래서 흠 없는 제물에 안수를 하여 자신들의 죄를 전가시켰던 것같이 우리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전가시키고 예수님의 의가 나에게 올 때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안수의 행위는 이 시대에 적용해보면 주님의 십자가 공로를 내가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나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회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하나님께 나의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주님을 통해 죄를 사해주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반드시 죄의 고백과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둘째, 피를 뿌려야 합니다.
(레 4:17) 그 제사장이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 여호와 앞,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며
속죄 제물의 피를 성막의 휘장에 일곱 뿌려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피가 없이는 죄 사함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히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휘장은 예수그리스도의 육체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항상 나의 죄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 앞에 고백해야 합니다. 피를 일곱 번 휘장에 뿌린 것은 완전한 회개를 상징합니다. 우리의 죄를 날마다 주님 앞에 뿌려야 합니다. 그리고 죄 사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주님의 보혈 안에 늘 거주하고 있어야 합니다.
속죄제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회중 전체를 위한 속죄제 개인을 위한 속죄제
회중 전체를 위한 속죄제를 드릴 때에는 제물의 피를 성소 안으로 옮겨서 뿌린 다음 나머지는 번제단 밑에 쏟고 고기는 진
밖에서 불사르게 됩니다.
개인을 위한 속죄제를 드릴 때에는 제물의 피가 성소 안으로 옮겨지지 않습니다. 번제단 밑에 다
쏟게 됩니다. 대신 개인을 위한 속죄제물의 고기는 제사장이 먹습니다.
왜 이런 과정을 하나님께서 겪게 하셨을까요?
속죄제는 속죄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제사입니다. ‘속죄제’라는 말과 ‘속죄하다’라는 말이 우리말로는 비슷한데 히브리어로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속죄하다’는 히브리어로 ‘카파르(כָּפַר)’라고 하며 죄를 ‘덮다(cover)’와
‘지운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동사입니다. ‘카파르’라는 동사가 기본형으로 쓰인 예를 성경에서 찾아보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홍수 당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든 다음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창세기 6:14)고 한 말이 바로 카파르입니다. 역청으로 나무 전체를 덮어서 나무가 보이지 않도록 지운 것과 같습니다. 쉽게 설명해서 볼펜으로 쓴 글씨를 지우려면 화이트를 칠하여 글씨를 덮어서 지우게 됩니다. ‘카파르’는 그렇게 죄를 ‘덮어서 지운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에서 나온 파생어 중에 ‘코페르(כֹּפֶר)’라는 단어가 있는데, ‘속전(ransom)’ ‘보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다른 사람의 물건을 망가뜨리면 돈을 주어 보상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때 보상을 뜻하는 단어가 바로
코페르입니다. ‘속죄일’을 뜻하는 ‘욤 키푸르’ 역시 동사 카파르에서 나왔습니다.
속죄의 과정으로는 용서와 정결이 있습니다. 이사야 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속죄제의 의미와 속죄제를 드리는 방법
속죄제(Sin Offering) 어의
속죄제를
뜻하는 히브리어 ‘하타트'는 ‘과녁에서 벗어나다’, ‘죄를 짓다’, ‘속죄물을 드리다’, ‘속죄하다’를 뜻하는 ‘하타'에서 파생된 것으로 ‘하나님의 법에서 벗어난 죄로부터 청결과 속죄함을 얻기 위하여 드리는 제사’를 뜻한다.
제물의 종류
속죄제의 제물은 범죄자의 사회적인 위치에 따라 달랐다.
제사장 — 흠 없는 수송아지를 드림(레 4:3) 온 회중 — 수송아지를 드림(레 4:13) 족장 — 흠 없는 수염소를 드림(레 4:23) 평민 — 흠 없는 암양이나 암염소를 드림(레 4:28)
이 외에도 가난한 자는 산비둘기나 집비둘기를 제물로 드릴 수 있었으며(레 5:7) 이보다 더 가난한 자는 고운 가루 에바 십분의 일을 제물로 드릴 수 있었다(레 5:11)
속죄제의 방법
헌제자가 제물이 될 짐승을 회막문 여호와 앞으로 가져온다. 헌제자의 손을 제물의 머리 위에 얹고 안수한다. 헌제자가 제물을 잡아 피를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그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성소 앞에 일곱 번 뿌리고 향단 뿔에 바른 후 회막 앞과 번제단 밑에 전부 쏟는다. 희생
제물의 모든 기름과 콩팥을 번제단 위에서 불사른 후 그 나머지 부분은 진 바깥 재 버리는 정결한 곳에서 나무 위에 놓고
불사른다. 그러나 아론과 그 아들들을 위한 속죄제는 진 밖에서 불사르지 않고 다리와 고기를 회막 뜰에서 구워 먹도록
하였다(레6:24-27)
속죄제와 속건제의 차이
속죄제의 목적은 ‘범죄에 대한 용서’를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목적은 속건제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 둘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첫째는, 범죄의 성격적 차이로서 속죄제가 하나님께 범죄한 자, 즉 ‘율법을 범한 죄’를 위한 제사였던 반면에, 속건제는 인간에게 범죄한 죄, 즉 ‘도덕적인 범죄의 대속을 위한’ 제사였다.
둘째는, 속죄제는 속건제와는 달리 ‘범죄한 일을 배상할 수 없는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제사였던 반면, 속건제는 ‘배상이 가능한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제사였다는 점이다.
속건제의 의미와 속죄제와의 차이
속건제(Guilt Offering)의 어의
속건제를
뜻하는 히브리어 ‘아솸'( )은 ‘죄'(Sin)가 아닌 ‘범죄'(Guilt),’범법'(Tresspass),
‘손해'(Damage)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회적인 죄’, 또는 ‘도덕적인 죄를 용서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를 뜻한다.
속건제의 제물
속건제의
제물은 범죄의 형태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어 이러한 제물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너무나도 복잡하고 광범위하다. 그러므로
각각의 범죄에 대한 속건 제물에 대해서는 레5:14, 6:7, 7:1-10, 14:1, 15:2을 참고하도록 하되 이러한 여러
가지 제물을 요약하면 ‘흠 없는 일년된 수양’, ‘범죄물과 그 범죄물의 오분의 일을 더하여 본인에게 주는 일’,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둘’이나, ‘고운 가루 에바 십분의 삼’과 ‘기름 한 록’ 등이다.
속건제와 속죄제의 차이
죄와 관계된 제사
가. 속죄제(하타아트-sin offering) * 제물이 대상과 재력에 따라 차이가 있다. - 제사장과 백성 전체(수송아지) - 족장(수염소) - 평민(어린 암양, 암염소) - 가난한 자(비둘기, 곡식 가루)
* 향기로운 냄새를 위한 제사가 아니라, 죄를 속하기 위해 드린 제사였다.
* 번제처럼 모든 제물을 제단에 불사르지 않고 기름을 제외한 모든 제물을 진 밖으로 가져가서 태워야 했다.
* 인간의 죄성과 연약함을 인해 부지중에 지은 죄를 속하기 위해 드려졌다.
나. 속건제(아샴-배상제사(trespass offering)) * 속건제는 생활 중에 범한 죄나, 자기 의무를 태만히 해서 남에게 해를 입혔을 경우에 드리는 사죄와 보상에 대한 제사였다.
* 속건제를 드리는는 경우는 다음과 같았고, 그 외에는 속죄제사를 드렸다. - 하나님의 성물을 범했을 때 - 하나님의 법에 따라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은 경우 - 이웃에게 악을 행하거나 물질에 손해를 입힌 경우 - 남의 물건을 강제로 빼앗거나/ 분실물을 습득하거나/ 저당물을 잡거나/ 거짓맹세로 남에게 피해를 입힌 경우 - 시체로 인해 몸이 부정케 된 경우
* 속건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속죄 원리가 나타난다. - 잘못이 있을 때는 자백하고 인정하라. -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라. - 번제는 계속해서 드리지만 속건제는 한 번에 해결할 문제이다.
다. 속죄제와 속건제의 같은 점과 다른 점
*. 같은 점 이
두 제사는 백성들이 "여호와의 명령을 어긴 경우에 드리는 제사"였다. 백성들은 "여호와께서 금한 일을 했거나, 또는 하라고 한
일을 하지 않았을 경우"에 이 제사를 드리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제사는 결코 고의로 지은 죄를 속하기 위한 제사는
아니었다. 하나님은 고의, 또는 계획적으로 지은 범죄(짐짓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처벌하게 하셨다.
속죄 제사를 통해서 용서받을 수 있는 죄는 실수나 연약함으로 지은 죄(그릇 범한 죄)였다. 속죄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죄는 다음과 같았다. 1) 실수나 부지 중에 지은 죄(4:13,22,27,5:18) 2) 부주의로 인해 지은 죄(5: 1,4,15) 3) 무의식적으로 짓는 죄(민 35:11,15, 22, 23).
* 다른 점
속죄제는 일반적으로 여호와의 명령을 어긴 보편적인 경우에 드렸다. 그러나 속건제(보상제사)는 1) 여호와의 성물을 드릴 것을 자기가 사용했거나(5:15-19) 2) 남의 물건을 빼앗거나 손에 넣고 부인하거나 거짓 맹세를 해서 피해를 입힌 경우에 이를 보상하기 위해 드려졌다(5:20-25).
*. 제사 절차상의 차이점 - 속죄제는 속죄제물만 드렸지만, 속건제는 속건제물 외에 불법으로 취한 것에 1/5(전체 6/5)을 더한 배상이 요구되었다. - 속죄제는 제물을 드리는 자가 그 제물을 죽이고 직접 불에 태웠다(4:15,24,29,33). - 그러나 속건제는 제사장이 대신해서 제물을 잡았으며, 그 제물도 제사장이 먹어야만 했다(14:12). - 속죄제물은 개인의 경우 암컷을 드렸다(4:28,32). 그러나 속건제사는 제물로 수양이 필요했으며(5;18, 6:6), 훔친 것 외에 1/5에 해당하는 배상을 첨가했다.
요아킴은 최근 태어나 가장 정신없는 한달을 보냈다.
딸의 결혼식을 성대히 치른 뒤 며칠 못가 지병을 않으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겨우 장례식을 마친 뒤 한숨 쉬려는가 했더니 최근
사업을 함께 시작한 동업자 녀석이 모든 물건을 빼돌려 도망을 가고 말았다. 요아킴은 쉴 겨를이 없었다. 그 녀석이 두로 항으로
도망간 뒤 배에 오르면 끝장이었다. 서둘러 추적을 떠난 요아킴은 이틀을 노숙한 뒤 삼일 째에도 이른 아침부터 발걸음을 재촉했다.
요아킴은 반나절이 지나 어느 마을에 도착한 뒤에 그 날이 안식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련의 큰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한 바람에
안식일 날짜를 망각하는 중대한 실수를 범한 것이다. 가슴이 덜컹거리며 두려움에 사로잡힌 요아킴은 그 자리에서 무릎 꾾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의 죄가 해결될 수는 없었고 속죄제를 바쳐야만 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요아킴은 그 범죄자가
배에 승선하기 직전 체포할 수 있었다. 재산을 되찾아 집으로 돌아온 요아킴은 안식일을 무심코 범했던 죄를 용서받기 위해 즉시
성전으로 올라가야 했다. 더불어 그에게는 추가로 드려야할 제물이 있었다. 바로 잃었던 재산을 되찾게 해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번제와 화목제였다. 하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제사는 속죄제였다. 죄를 용서받지 않고 드리는 번제와 화목제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리
없기 때문이다.
무심코 지은 죄를 위해 바친 속죄제
요아킴이 안식일을 무심코 범한 뒤 바친 제사는
‘속죄제’였다. 속죄제는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사였다.
첫째, ‘비고의적인 죄’를 해결(레 4~5장) 둘째,
‘부정결’의 문제를 해결(레 11~15장)
예컨대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산후 정결례를 거쳐 깨끗케 되는데, 일정 기간 날짜가
지난 뒤 목욕을 해야 하며, 가장 중요하게는 자녀 출산에 대한 감사의 번제와 더불어 ‘속죄제’를 바쳐야만 했다(더 자세한 것은
나중에 레 12장을 다룰 때 설명할 것이다).
덧붙여 유출병 걸린 여자가 피가 멈춘 뒤, 또는 악성 피부병(나병이라는 번역은
잘못이다) 환자가 치료된 뒤 반드시 바쳐야하는 것도 속죄제다.
사람이 부정을 탔을 때 그것은 죄 문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속죄제가
요구된 이유는 무엇인가? 분명 그것은 그런 다양한 부정결들은 창세기 3장에서 죄가 세상에 들어온 후 발생된 죄의 증상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부정결의 문제도 근원을 따지면 죄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속죄제가 요구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우선 속죄제는 속건제와 더불어 ‘죄’를 해결하는 제사였다. 속건제가 해결하는 죄는 재산상의 피해를 입힌 죄에 국한된다는 점에서
속죄제가 다루는 죄와 차이가 난다. 속건제에서는 상대방의 금전적/물질적 손해를 배상하고 하나님께 속건제 숫양을 바쳐 그 문제를
해결한다. 그러나 속죄제는 도덕적 계율을 어긴 죄인데, 다만 그 죄는 ‘비고의적인 죄’ 다시 말해 ‘그릇’ ‘무심코’ 여호와께서
금지하신 계명을 범한 죄다. 한글 성경에서는 단순히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라고 되어 있으나 히브리어 원문의 의미는 정확히
‘여호와께서 금지하신 계명 중 하나라도’이다. 고의적인 죄의 경우는 일부 고의성이 가벼운 경우를 제외하고(레 5:1~4) 매우
심각하여 속죄제는 허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반역죄로서 하나님께서 직접 징벌하셔서 처단하시거나(예, 레 10장의 잘못된 제사를 드린
나답과 아비후) 하나님의 지시로 백성들이 처형을 했다(예, 레 24장의 하나님을 저주한 이스라엘 평민). 다만 어떤 반역죄의
경우 심판이 유보되어 하나님께서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도 했다.
어쨌든 금지 명령은 매우 중대한 계명이다. 따라서
무심코 위반했다 하더라도 상당히 심각하다. 요아킴의 경우 안식일에 여행이 절대 금지되어 있으나 그는 무심코 이 금지 명령을
위반했다. 속죄제를 바쳐 죄가 속죄되어 하나님께 용서받아야만 했다. 요아킴은 평민이었기 때문에 바쳐야하는 속죄제 짐승은 암염소나
암양이었다.
속죄제는 짐승의 피로 성전과 그 기물들의 오염을 씻어내는 효과를 낸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인간의
죄와 부정결이 성전과 그 기물들을 더럽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속죄제는 죄와 부정결의 문제를 위해 바치는 것이 원칙이나, 그 외에도
제사장 임직이나 레위인의 임직, 또는 나실인의 서원과 같은 몇 가지 특별한 예식에 속죄제를 드렸으며, 국가적 절기마다 다양한
속죄제를 바치곤 했다. 그 기능에 대해서는 몇 가지로 의견이 나뉘는데 그중 가장 그럴듯한 설명은 아마도 절기별로 제단과 성전의
잠재적 부정결을 닦아내는 기능을 했을 것이란 견해다.
속죄제와 속건제, 특히 속죄제는 그 제사의 특징과 의미, 제사의
절차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대단히 많은 지면을 필요로 하는데, 여기서는 최대한 간략하게 설명해야하는 아쉬움이 있다. 상세한 설명과
목회적 적용과 여러 힌트, 특히 속죄제의 자세한 교회론적 의미에 대해서는 필자의 책 <레위기의 신학과 해석>(새물결
플러스)의 도움을 받기 바란다.
신분에 따라 등급화된 속죄제
속죄제는 죄인의 신분과 사회적 지위에 따라 달랐다. <표>는 높은 지위로부터 낮은 지위에 이르기까지 제물의 크기와 가치가 줄어든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선
4장에서 먼저 (대)제사장의 비고의적인 죄에 대해 수소를 바칠 것을 명령한다. 많은 학자들이 3절의 ‘기름부음받은 제사장’을
대제사장으로 해석하지만, 만일 그렇게 될 경우 제사장이 목록에서 누락되므로 이것은 분명 대제사장을 포함한 제사장들로 보아야 한다.
(대)제사장과 회중은 동급이었다. 따라서 둘 다 수소가 요구된다. 이때 회중은 제사장이 포함된 회중을 의미한다. 만일 제사장과
회중이 분리되어 취급되는 경우, 제사장이 제외된 회중의 제물은 흔하게 숫염소였다(레 9장; 16장). 족장은 평민의 지도자로서
숫염소를 속죄제로 바쳤고, 평민은 암염소나 암양을 바쳤다. 여기서 수컷이 암컷보다 제의적 가치 면에서 우위에 놓여 있음이 다시
확인된다(시장 가치로는 암컷이 월등히 비쌌다). 한편, 제사장과 평민 사이에는 레위인이 있어야 하는데 레위기 4~5장의 목록에서
빠져있다. 아마 레위인은 제사장과 평민 사이의 신분이었다는 점에서 족장과 동급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양과
염소를 조달하기 어려운 가난한 계층을 위해서는 비둘기 두 마리가 속죄제로 바쳐졌다. 이때 한 마리는 번제와 같이 모두 제단에
태웠고, 다른 한 마리는 피를 제단에 흘린 뒤 제사장이 섭취하는 방식으로 두 비둘기가 처리되었다. 그러나 가난한 계층 중에는
심지어 비둘기마저 힘에 겨운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극빈자들이 무심코 죄를 범했을 경우에도 죄 문제를 그대로 넘길
수는 없었기에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수단을 그들에게 허락하셨다. 바로 그들이 평소 음식으로 먹는 밀가루 1/10에바(약
2.2리터)를 소제의 속죄 제물로 가져오라 명하신 것이다(레 5:11~13).
경제적 형편과 무관하게 죄의 문제는
어떤 방법으로든 반드시 해결되어야 했다. 비록 밀가루는 피가 없는 속죄 제물이었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재량으로 극도로 가난한
자들을 위해 밀가루 제물에 피의 효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해주셨다. 마지막 한 사람을 위해서까지 속죄의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의 큰
은혜가 아닐 수 없다.
매우 특이한 속죄제의 피뿌리기
속죄제의 피 의례는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대)제사장과 회중을 위한 속죄제 수소는 안수 후 도살을 한 뒤 그 피를 양푼에 받아 내성소로 가지고 들어간다.
거기서 양푼의 피를 손가락으로 찍은 뒤 지성소 휘장 앞의 향단 주변에 ‘뿌리고’ 향단의 네 뿔에 ‘발랐다’(레 4:6~7,
17~18). 그러나 평민을 위한 속죄 제물인 염소와 양의 피는 마당에 놓인 번제단의 네 뿔에 ‘바른다’(레 4:25, 30).
비둘기의 경우에 피를 양푼에 받지 않고 죽인 뒤 몸채 들고 마당의 번제단 벽에 일부를 뿌리고 남은 피는 제단 아래 흘렸다(레
5:9).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제사장과 회중을 위한 속죄제 수소의 피는 내성소에 들어가 향단에 처리한 반면, 평민의 속죄제
짐승(염소와 양, 비둘기)의 피는 마당의 번제단에서 처리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신분에 따른 죄의 오염력과 영향력이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제사장과 회중의 죄의 ‘독기’는 내성소까지 침범해 향단을 더럽힌 반면, 평민의 죄는 마당의 번제단을 더럽히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한 이유로 피를 뿌리는 위치가 달랐다.
<표>에서 확인해 볼 수 있듯이 피를 어디에 뿌렸느냐에
따라 속죄제 고기 처분 방식도 달라졌다. 내성소에서 피를 뿌린 짐승의 경우 결코 그 고기를 제사장이 먹지 못하고 진영 밖의 재를
버리는 ‘정결한 곳’에서 소각을 해서 없앤다. 반면에 마당의 번제단에서 피가 처리된 속죄제 짐승의 고기는 제사장들에게 일종의
수고비로 건네져 그것을 먹어서 없앴다. 이것은 분명히 속죄제 고기의 오염도의 차이로 인한 것이다. 내성소에 피를 뿌린 속죄제
짐승의 경우 피를 통해 흡수된 오염이 강해 먹을 수 없어 밖에 반출해 태웠던 반면, 마당에 피를 뿌린 속죄제 짐승의 경우 그
오염이 경미해 제사장이 먹을만 했기에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집례한 제사장들이 먹도록 조치하시고 밖에 버려 태우진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속죄제는 ‘태우는 속죄제’와 ‘먹는 속죄제’로 나뉜다.
속죄제의 피 뿌리는 특유의 동작은 아래의
비교를 통해 분명해진다. 우선 속죄제 외의 다른 모든 제사들, 즉, 번제/속건제/화목제에서는 피를 뿌리는 방식이 공통적으로
‘끼얹다’(zaraq ‘dash, throw’)이다. 피를 양푼에 받은 뒤 제단 사면 벽에 뿌려서 처리한다. 그러나 속죄제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피를 양푼에 담은 뒤 다음 세 가지 동작을 통해 피를 처리한다.
a. ‘뿌리다’(히자-hizza ‘sprinkle’): 손가락으로 제단 주변에 b. ‘바르다’(나탄-natan ‘daub, put’): 손가락으로 제단의 네 뿔에 c. ‘쏟다’(샤파크/야차크-shapak/yatsak ‘pour’): 제단 밑에
속죄제에서는
피가 든 양푼을 들고 제단 벽에 끼얹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을 양푼에 담아 피를 찍은 뒤 소량의 피를 제단 주변에 뿌리거나 제단
뿔에 바르는 동작으로 피를 처분한다. 피가 대량으로 남는데, 이 남은 피는 제단 밑에 쏟는다. 여기서 손가락으로 피를 뿌리고
바르는 동작이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가져오는 효과는 제단의 정화이기 때문이다(레 8:16; 16:19). 즉, 속죄제의 피를
특이한 동작으로 뿌리고 바를 때 제단과 성전이 청소된다. 이것이 속죄제의 가장 큰 특징이다.
죄의 자백이 요구됨
레위기
5장 1~6절은 약간의 고의성이 있는 죄들을 위해 바치는 속죄제 규정이다. 네 가지 사례가 주어지는데 이것은 모두 고의성이
개입되어 있으므로 그 죄의 공개적인 인정과 자백이 요구된다. 이런 죄의 인정과 자백은 속죄제 절차에서 매우 중요했다. 그것 없이는
속죄제는 아무런 효력이 발생되지 않았을 것이다. 혹자는 이 경우는 고의성이 있기 때문에 더 죄질이 나빠 ‘자백’이 요구되었지만,
4장의 죄들은 ‘비고의적’인 죄들이 때문에 죄질이 가벼워 자백이 요구되진 않았다고 말한다. 실제로 4장에는 ‘자백’의 요구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4장은 ‘금지명령’이기 때문에 요아킴의 사례에서 보듯이 무심코 그 죄를 지었다하더라도 심각했다. 따라서
자백은 그런 심각한 상황에서 자동적으로 수반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이유로 4장에서는 자백을 명시적으로 요구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속죄제의 최종적 효과는 ‘속죄’와 그로 인한 ‘죄사함’이었다(레 4:20, 26, 35).
히브리서 7:5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가졌으나.
히브리서 7:10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공동번역)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맞았을 때에 레위가 조상 아브라함의 몸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의 성경) 이것은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났을 때 레위는 아직 태어나지 않고 자기 조상의 몸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히브리서 7:4-10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가졌으나.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 약속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레위가 조상의 허리에 있었다는 말씀은 히브리서 기자의 아주 특이한 표현 방법으로 "허리"는 생식 기관을 은유족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남편이 허리를 다쳐 고통을 받는다는 말은 육체적인 기관 허리가 아니라 생식 기관을 사용하기 어렵다는 표현입니다.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바칠 때 레위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던 때입니다. 그러나 그 허리에 있었다는 것은 장차 태어날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창세기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하나님 나라의 복입니다. 우리는 이 복에 대해서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복이라고 하면 이 세상에도 받고 하나님 나라에서도 받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은 하나님 나라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들의 이성적 지식으로 마치 율법을 잘 지켜야 복을 받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으려면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진 자라야 복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허리'라는 말이 나오는 이게 무슨 뜻입니까? 창세기 35:11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즉
이스라엘이라는 인물이 된 야곱의 허리에서 많은 국민과 많은 왕이 줄줄이 쏟아져 나온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많은 국민과 많은 왕은
어디 들어있는 겁니까? 이미 야곱 안에 담겨 있는 겁니다. 그것이 허리라는 배출구를 통해서 역사 안에서 터져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허리'라는 말은 결코 분화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따로 따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모두가 하나의
원질 안에 예속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동양식으로 말하지만 '허리'란 '배'를 뜻합니다. 아무리 후손들이 번식해도
모두 선조의 뱃속에 이미 담겨 있었던 존재였다는 겁니다.
그러면 레위 족속이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레위
지파가 하는 일은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내린 그 약속에 다 담겨 있는 일이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나온 자가 이삭이고
그 이삭의 허리에서 나온 자가 야곱이고 그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자 중의 하나가 레위입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레위 지파는
아브라함의 허리 안에 있는 자입니다.
신약에 와서 '허리'라는
말 보다 다른 확실한 말을 성경은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안'이라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 허리'가 아니라 그냥
"예수님 안에 있음"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로마서 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갈라디아서 3:26-27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겁니다. 더 이상 율법에 매여 살면 안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점을 우려해서
다음과 같이 당부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10-11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사도는 평소에 다음과 같이 당부한 점을 유의합시다.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는 당부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가 율법에 더 이상 매이지 않고 해방되었다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4: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는 의미는?
창세기 14:17-24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한 전투에서 승리합니다. 돌아오는 길에 살렘왕 멜기세덱을 만나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드립니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기도 했습니다. 왕이자 제사장의 신분을 동시에 가진 자는 멜기세덱 외에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멜기세덱을 오실 예수님의 모형으로 생각합니다. 구약시대의 제사장은 레위지파에서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레위라는 호칭은 제사장과 같은 의미로 쓰여집니다.
조상의 허리에 있었다는 표현은 태어나기 전 이라는 뜻 입니다.
그 의미는 레위지파 제사장보다 멜기세덱 제사장이 더 우월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레위지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멜기세덱 제사장에게 진리품의 십분의 일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제사장입니다. 그러나 레위지파 계열의 제사장보다 우월하십니다. 그 이유는 멜기세덱 계열의 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사람이 모두 칠십이요 요셉은 애굽에 있었더라”(출애굽기 1:5) “The descendants of Jacob numbered seventy in all; Joseph was already in Egypt.”(Exodus 1:5)
출애굽기는 야곱의 계보로부터 시작합니다. 이 계보 끝 출애굽기 1장 5절은 창세기 46장 27절을 그대로 인용하면서도 단 하나의
단어를 바꿔 말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집 사람’을 야곱의 ‘허리’로 바꿉니다. 여기서 간과해선 안 될 메시지가 있습니다.
‘야곱의 허리’란 히브리어로 ‘예렉 야코프’라고 하는데, ‘예렉’은 단지 허리가 아니라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말하며 ‘허벅다리 사이’, 사타구니 즉 ‘생산의 자리’를 의미합니다(창세기 32:32).
5절. / 야곱의 혈속(네페쉬 요츠에 예레크 야아콥) - 직역하면 '야곱의 허리로부터 나온 영혼들'이다. 이처럼 후손을 '허리에서
난 자'로 묘사하고 있는 것은 허리에 후손을 얻을 생명력이 보존되어 있다고 믿는 히브리인들의 관용적 표현이다(히 7:5).
* 예레크(3409) יָרֵךְ
1. 넓적다리
2. 무생물에 적용될 경우.
3. 성막에 있는 등대
발음
/ 예레크(yârêk)
어원 / 연계형 יֶרֶךְ, 어미활용 יְרֵכִי, 쌍수 יִרֵכַיִם, ‘부드럽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한편
여기서 사람을 '영혼'(네페쉬)으로 서술한 것은(창 12:5) 영혼을 인격의 대표격으로 여긴 히브리인의 사고(시 42:1,
2, 5)를 반영한다. 그리고 혈속(血屬)이란 가장을 중심으로 몇 대(代)가 함께 기거하는 이른바 대가족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는
1절의 '권속'과 비교되는 혈연 집단이다.
야곱은 얍복강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내겠다고 씨름해 기어이 이깁니다. 이때 생산의 자리가 골절되는 부상으로 절뚝거리는 중상을
입게 됩니다. 그 대가로 야곱과 그의 자손들의 번영을 약속받았기에 ‘허리’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쓴 것입니다. ‘야곱의 허리’는
야곱의 고난을 통해 세워진 이스라엘 가문을 뜻합니다. 이스라엘의 번성(출 1:7)엔 조상들의 고난의 대가가 있었습니다.
믿음의 가문은 그냥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값은 고난의 값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저절로 성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 과정이라는 고난을 지불해야 합니다. 그만한 값을 치를 때 비로소 값진 인생이 됩니다.
10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
허리에 있었다는 말은 자식을 낳는 생식에 대한 부분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드린 것은 레위 후손들이 드린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 논리를 완성함으로 인해서 레위인의 십일조를 받는 사람은 제사장이므로 멜기세덱이 제사장이라는 논리를 완성하는 것입니다. 또한 유대인들이 자랑하고 드높이는 제사장과 레위인보다 멜기세덱이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허탄한 족보와 신화 이야기를 더 이상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과 관계가 없고 영적 성장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레위 지파가 아닌 멜기세덱을 따라서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제사장들이 성경에 많이 나오지만 아론이 첫 번째 대제사장이었는데 그는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대제사장이므로 그를 제외하고는 멜기세덱보다 훌륭한 대제사장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제사의 영역에서는 아론을 제외하고 가장 탁월한 제사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홉니와 비느하스처럼 수준이 낮은 제사장들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멜기세덱은 성경에서 높다고 할 만큼 최고수준의 제사장이 확실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40년 동안 생활할 때 이드로의 집에서 생활했습니다. 이드로의 집에서 모세가 그렇게 오랫동안 살았는데 이드로가 만일 하나님의 제사장이 아닌 이방신의 제사장이라면 그가 그렇게 오래 함께 있었겠습니까. 이드로의 하나님과 모세의 하나님이 다르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면서 이드로의 말을 듣고 백성들을 다스렸는데 만약 이드로가 이방신의 제사장이라면 그런 사람의 말을 듣고 따라갔다는 것이 되므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이방신의 제사장의 말을 따른 것이 된다면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드로가 믿은 하나님과 모세가 믿은 하나님이 같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드로의 충고를 모세가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드로는 애굽에서 유대인과 같이 살지도 않았고 오히려 가나안 지역에서 미디안 족속으로 산 자입니다. 그러므로 꼭 유대인만 구원을 받았다고 보면 안 됩니다. 이드로는 미디안 사람이고 제사장입니다. 히브리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에게만 구원이 있는 것처럼 자부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아니라도 이방 땅에도 훌륭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욥도 훌륭하고 이드로도 훌륭하고 멜기세덱도 훌륭합니다. 결국 히브리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면서 한편으로는 유대인들의 편협 된 사고를 깨려는 의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신지를 보여줍니다.
히브리서 7:10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
중학교 생물교과서 진화론을 이야기할 때에 예문이 “옛날 히브리사람들은 (성경에) 자손의 씨(정자)가 허리에 있다고 믿었다“라는 예가 있었다.
교과서 저자는 성경시대의 옛 사람이 생물학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들이며 그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무식하다는 간접적인 비아냥이다.
(인간의 이론 진화론이 판치는 비이성적인 세태이기 때문에 그렇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진화론 창조론 모두 한편 합리성이 있고 다른 한편 증명할 수 없는 모순이 있다. 과학적인 태도라면 두 주장을 다 언급해야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대세, 유행을 따른다. 지금은 진화론이 대세 유행이어서 창조를 주장하면 무식해 보여 그런 것은 아닐런지? 진화론, 창조론 모두 논리성과 모순이 있는 데 어느 것을 선택하는 가는 믿음이다. 나는 창조를 믿는다.)
그런데 성경 전체를 문맥을 따라 읽어 보면 “허리”라는 표현은 종종 reproductive organ system (생식기관)을 포괄적으로 의미함을 알 수 있다.
성경 어디에 그런 내용이 있을까? 그러려면 성경을 문맥을 따라 조화롭게 읽어야 한다. 성경의 문맥을 떠나서 일부 구절, 내용만 가지고 해석 설파 하는 것을 경계하라.
예를 들어 우리말도 뒤를 본다, 뒷간, 볼일을 본다… 라 말하면 젊잔은 표현이지만 똥을 눈다(싼다), 똥깐 이라고 말하면 비속 표현인 것과 같다. 이런 경우, 문맥상 뒤를 본다는 말을 “자신의 뒤쪽을 본다”고 하면 오해다.
성경에서 Sex와 관련된 것을 직접적으로 기술하는 것이 불편하여 완곡한 표현했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억지 주장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 성경의 다음 구절을 읽어보자.
창세기에 있는 유다의 아들 오난의 이야기이다.
[창세기 38:8,9]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 된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의 형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오난의 이야기를 보면 구약에서도 생식기관을 통해 자손이 이어진다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남자의 정액이 여성의 몸에 들어가 자녀가 생긴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롯의 두 딸도 성행위를 통해 자손이 생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창세기 19:31-38 참조)
구약시대의 사람들도 다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우리가 말하는 성행위라는 표현만도 완곡한 표현이다. 자세하게 표현을 하면 음란 소설이 될 것이다. 그러니 완곡한 비유적 표현을 성경에 썼을 것이다.)
성경을 문맥을 따라 전체적으로 읽는 것이 중요하다. 히브리서 7:10 및 성경 많은 곳의 문맥에서 허리는 reproductive organ system (생식기관)을 의미한다. 그 냥 쉽게 말해서 그의 몸에서 라고 이해하면 된다. 그 이상의 해석은 불필요하다.
성경의 문맥을 무시하고 해석, 설명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한다. 또한,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경계해야한다. 믿는 사람이 성경 전체를 주의 깊게 열심히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허리가 reproductive organ system (생식기관) 혹은 몸을 표현하는 구절은 많이 있지만 무작위로 둘을 뽑았다.
[창세기 35:11]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출애굽기 1:5]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사람이 모두 칠십이요 요셉은 애굽에 있었더라
그런데 이것을 다음과 같이 이상하게 현학적으로 풀어 설명하는 것은 듣는 이를 혼란에 빠지게 한다. 뭔 히브리어가 어쩌구 저쩌구 … 하면서
물론 전문가라면 원어(히브리어, 헬라어)를 열심히 공부해야한다. 그러나 문맥을 무시한 원어를 들먹이는 현학적인 해석은 사람을 혼동시킨다. 자기도 잘 이해를 못했으니까 성경의 문맥을 떠나 복잡하게 설명을 하는 것이다. 문맥을 따라 명료하게 설명을 할 수 없으면 자기도 잘 모른다는 뜻이다. 요즈음 이런 사람들(설교자)이 매우 많은데 이런 설교자를 경계한다.
(문맥을 따라 이해한다는 것은 제나라 말, 국어를 잘 이해 한다는 말인데 제 나라 말도 문맥을 따라 잘 이해하지 못하면서 원어로 이해하려 하면 매우 이상한 뒤틀린 오해, 해석을 하게 된다. 이런 사람은 제대로 진지하게 성경을 읽었나 하는 의심을 하게 된다.
아마 요즈음 유식한 교인이 많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열등감에 뭔가 더 우월하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원어가 어쩌구저쩌구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비뚤어진 생각을 해본다. 그렇다고 꼭 원어로 해석을 하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인간에게 절대라는 말은 잘못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본다. 예를 들 것도 없이 Naver, Google에서 “허리에서”라고 찾아보면 많이도 나온다. (쓸데없는 일이지만 시간 나는 분은 찾아보세요)
(1) 히브리 원어에서 “허리”는 무엇이라고 하는 데 그 뜻은 원어에서는 어쩌구저쩌구 …. 이런 설명은 문제라고 생각한다.
성경을 진지하지 읽지 않는 수준 미달의 설교자가 많이 있다. 듣는 사람은 주의해야한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성경 진지하게 전체적으로 많이 읽어야 한다.
(2) 이스라엘의 허리는 “얍복강에서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뀐 야곱의 허리”라고 한 사람도 있다, (창세기 32_22-32 참조)
속죄제의 영적 의미(레위기 4:1-35)
레위기 4장은 속죄제에 관한 내용입니다. 4장에서는 제사장과 온 회중과 족장과 평민이 속죄제를 바쳐야할 경우와 방법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속죄제는 5장에서도 이어지는데, 5장에서는 가난한 자와 극빈자가 속죄제를 바쳐야할 경우와 방법 및
속건제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이 속죄제를 바치는 경우에는 죄 범한 제사장이 흠 없는 수송아지를 회막문 앞으로 끌어와서 그 제물의 머리에 안수한
후에 도살합니다. 다른 정결한 제사장이 그 제물의 피를 받아 회막에 가지고 들어가서 손가락에 그 피를 찍어 성소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리고 향단 뿔에 바릅니다. 그리고 나머지 피는 모두 번제단 밑에 쏟아 붓습니다.
도살된 제물 가운데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콩팥과 허리 근방에 붙은 기름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취하여 정결한
제사장이 번제단 위에 불사릅니다. 그리고 제물의 나머지 곧 가죽과 고기와 머리와 다리와 내장을 진 바깥 재 버리는 곳인 청결한
곳으로 가져다가 불로 나무 위에서 태웁니다.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 속죄제를 바치는 경우에도 제사장이 속죄제를 바치는 경우와 동일한
방법으로 바칩니다. 그렇게 하면 사함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족장이 속죄제를 바치는 경우에는 흠 없는 수염소를 예물로 가져다가 그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도살합니다. 제사장은 그 피를
받아 손가락으로 찍어 번제단 뿔에 바르고 나머지 피는 번제단 밑에 붓습니다. 그리고 모든 기름은 단 위에서 불사릅니다. 평민이
속죄제를 바칠 경우에도 동일한데, 다른 것이 있다면, 수염소가 아니라 암염소를 바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억할 것은 족장과
평민의 속죄제의 경우, 앞서 제사장과 온 회중의 속죄제에서와 같이 제물의 가죽과 살코기를 모두 진 바깥에서 태우라는 언급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제사장과 온 회중을 위한 속죄제에서는 그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리고 향단 뿔에 바르도록
했지만, 족장과 평민을 위한 속죄제에서는 성소에 들어가지 않고 그냥 번제단 뿔에 바르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하면 사함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의 제사는 자발적인 제사와 의무적인 제사로 나눠집니다. 자발적인 제사에는 번제, 소제, 화목제가 있고, 의무적인
제사에는 속죄제와 속건제가 있습니다. 속죄제는 부지중에 혹은 실수로 지은 죄를 사함받기 위한 제사이고, 속건제는 사람이나 성물에
대하여 범한 죄를 사함받기 위한 제사였습니다. 속죄제를 정화제사, 속건제를 배상제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번제가 과거의 죄를 사함받기 위한 것이고, 소제는 개인적 성별을 위한 것이며, 화목제는 하나님과 공동체의 교제유지를 위해 바쳐진 제사라면, 속죄제는 무지로 범한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속죄제를 드리는 목적은 뜻하지 않게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 가운데 하나를 범한 것에 대해 속죄를 구하는 것입니다. 속죄제를
드려야 하는 구체적인 상황은 5장에 나타나 있는데, 증인임에도 불구하고 증언을 하지 않았을 때, 부정한 들짐승이나 가축이나 곤충의
시체를 만졌을 때, 부정한 사람과 접촉했을 때, 경솔하게 맹세했을 때 등입니다. 이 모두는 고의가 아니라 부지중에 범한
죄들입니다.
속죄제에는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예배자 자기 죄를 깨닫고 사함받기 위해서 하나님께 제물을 가지고 나아간다는데 있습니다. 물론 이 경우에는 의무적인
것입니다. 죄를 깨닫고서도 그 죄를 사함받기 위해서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속죄제의 제물은 범죄자의 사회적
신분에 따라 달랐습니다. 제사장과 온 회중은 흠 없는 수송아지를, 족장은 흠 없는 숫염소를 드렸습니다. 평민은 흠 없는 암염소나
암양을 드렸고, 가난한 자는 산비둘기나 집비둘기를 제물로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극빈자는 고운 가루 에바 십분의 일을 제물로 드릴 수
있었습니다. 에바는 ‘바구니’란 뜻으로 양을 재는 단위입니다. 1에바는 약 23리터입니다. 따라서 그 십분의 일은 약
2.3리터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이들 가난한 자와 극빈자의 속죄제에 대해서는 5장에서 설명됩니다.
둘째는 속죄제가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신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상징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대속희생의 어린양이 되사 모든 사람의 대속물이 되셨으며 그가 죽으신 장소는 예루살렘 성 바깥 골고다 언덕이었습니다. 속죄제
희생제물이 불살라진 곳이 진 바깥 정결한 곳이듯이 예수님도 진 바깥 골고다 언덕에서 대속제물이 되셨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짐승의 피로써 하나님의 선민이 되었지만, 신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하나님의 선민이
됩니다. 짐승의 피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피가 믿는 자들의 죄를 대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의 입장은
구약시대의 짐승의 피는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모형과 그림자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피로써만이 진정으로
속죄를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위한 것이었습니다(고전 15:3). 예수님은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에게 포도주잔을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새 언약의 피니라”(마
26:28). 또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42절)고 하셨습니다. 또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는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고 하셨습니다.
이들 말씀들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속죄를 위한 제물처럼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푸시려고 제물이
되어 주셨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셋째는 이 은혜를 감사하고 기뻐해야 한다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죄에서 자유 하였고, 의로운 자라는 칭함을 믿음으로
받았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한 것이며, 우리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요 3:16).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의로움이 우리의 것이 아닌 것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짊어지신 죄의 대가가
그분의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고후 5:21).
화목제
3 “화목제를 드릴 때 누구든지 소로 드리고 싶은 사람은 수컷이든 암컷이든 흠 이 없는 것을 나 여호와에게 바쳐야 한다.
2 그 제물을 가져온 사람은 그 짐승의 머리에 손을 얹은 다음 그것을 성막 입구에서 잡아야 하며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제단 사면에 뿌려야 한다.
3 그는 화목제물 중에서 나 여호와에게 불로 태워 바칠 부분, 곧 내장을 덮고 있거나 그것에 붙어 있는 모든 기름과
4 두 콩팥과 그 위에 덮여 있는 허리 부분의 기름과 간에 덮여 있는 간 꺼풀을 떼어낼 것이며
5 아론의 자손들은 그것들을 단의 불붙는 나무 위, 번제물 위에 놓아 태워야 한다. 이것은 불로 태우는 화제이며 나 여호와를 기쁘게 하는 향기이다.
6 “만일 나 여호와에게 드릴 화목제의 제물이 양이라면 암컷이든 수컷이든 그것은 반드시 흠 없는 것이어야 한다.
7 만일 그 제물이 어린 양일 경우 그것을 드리는 사람은 그 양을 나 여호와 앞에 끌어다가
8 그 머리에 손을 얹은 다음 성막 앞에서 잡을 것이며 아론의 자손들은 그 피를 단 사면에 뿌려야 한다.
9 그리고 그는 화목제물 중에서 나 여호와에게 불로 태워 바칠 부분, 곧 등뼈 부근에서 잘라낸 기름진 꼬리와 내장을 덮고 있거나 그것에 붙어 있는 모든 기름과
10 두 콩팥과 그 위에 덮여 있는 허리 부분의 기름과 간에 덮여 있는 간 꺼풀을 떼어낼 것이며
11 제사장은 그것들을 단 위에서 불로 태워야 한다. 이것은 나 여호와에게 불로 태워 바치는 음식이다.
12 “만일 화목제의 제물이 염소라면 그는 그것을 나 여호와 앞에 끌어다가
13 그 머리에 손을 얹은 다음 성막 앞에서 잡을 것이며 아론의 자손들은 그 피를 단 사면에 뿌려야 한다.
14 그는 그 제물 중에서 나 여호와에게 불로 태워 바칠 부분, 곧 내장을 덮고 있거나 그것에 붙어 있는 모든 기름과
15 두 콩팥과 그 위에 덮여 있는 허리 부분의 기름과 간에 덮여 있는 간 꺼풀을 떼어낼 것이며
16 제사장은 그것들을 단 위에서 불로 태워야 한다. 이것은 불로 태워 바치는 음식이며 마음을 기쁘게 하는 향기이다. 모든 기름은 나 여호와의 것이다.
17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아라. 이것은 너희가 어느 곳에 살든지 대대로 지켜야 할 불변의 규정이다.”
레위기 3장 17절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왜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고 하셨나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목적에 따라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로 구분되며 제사 드리는 방법에 따라서는 화제, 요제, 거제, 전제로 나누어집니다. 화제 중에는 제물에서 떼어낸 기름을 불에 사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는 그 중에서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낼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로 드리는 음식이요 향기로운 냄새라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레위기 3:14-16)
이 말씀 중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기름을 먹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창세기 9:4)
고기를 먹되 그 생명되는 피째 먹지 말라는 말씀이십니다. 그 이유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스라엘 집 사람이나 그들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 중에 무슨 피든지 먹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 피를 먹는 그 사람에게는 내 얼굴을 대하여 그를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위기 17:10-11)
모든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인간이 함부로 생명을 다루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경시 풍조를 경계하시기 위하여 그런 명령을 주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55:6-9 복음의 7대 연합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복음의 7대 연합
1. 탄생의 연합 2. 고난의 연합 3. 죽음의 연합 4. 부활의 연합 5. 승천의 연합 6. 재림의 연합 7. 왕국의 연합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화목제의 제사는 관계를 회복하게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대신관계) 둘째는 사람과의 관계(대인관계) 셋째는 물질과의 관계(대물관계) 물질관계는 세상의 환경과 물질과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넷째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대아관계)
에베소서 2:13-18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6:38-40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
하나님으로부터 용서의 빚을 지었기 때문에 용서해야 할 마음을 갖습니다. 화목의 능력과 용서의 능력은 사람에게서 찾을 수 없지만 용서 받은 사람은 십자가안에서 내가 더 큰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사람과의 담을 무너트릴 수 있습니다. 사람은 용서를 하지 않으려고 하는 본능적인 속성을 갖는다.
십자가의 빚을 알고 깨닫고 체험한 사람만이 사람과의 담을 무너트릴 수 있습니다.
가장 큰 용서를 받은 사람은 나라는 것을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화목제물을 해석하는 열쇠는 오네시모(Oneimus, 이익)
골로새인 빌레몬의 종으로 일찌기 주인에게 죄를 짓고 로마에 도망하여 있는 중 바울에게서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신자가 되었다.
바울이 골로세서를 써서 두기고와 오네시모편에 보내었다(골 4:7-9). 바울이 그를 전 주인에게 권하여 보내며 빌레몬서를 붙여 그
신덕을 증거하고 또 그 죄를 사하여 형제같이 사랑하라 하였다(골 4:9, 몬10-12).
화목제의 영적의미(레위기 3:1-17)
레위기 3장은 화목제에 관한 말씀입니다. 화목제의 특징은 ‘제사자가 바친 고기를 먹는 제사’입니다. 화목제는 하나님과의 친교를 위해서 무교병과 함께 드립니다.
화목제는 제사자가 암컷과 수컷 중에서 소나 양이나 염소 가운데서 흠이 없는 것으로 회막문에 가져와서 그 동물의 머리에 안수를 함으로써 동물로 하여금 제사자를 대신하게 하고, 예배자의 죄를 그 동물에 전가시켜 시켜 희생시킵니다.
예배자가 동물을 죽여 피를 받아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그 피를 제단 사면에 뿌립니다.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지만,
번제와는 달리 고기를 태우지 않습니다. 오직 콩팥과 내장의 덮인 모든 기름과 기름진 꼬리를 제사장이 제단의 불에 놓아 태웁니다.
동물의 가슴은 요제로, 오른쪽 뒤 넓적다리는 거제로 흔든 다음 가죽과 함께 제사장에게 주어지고, 나머지는 예배자가 가져다가 가족 친지들과 함께 그날에 다 먹어야 합니다. 제사장도 마찬가집니다. 먹다 남은 것은 불에 태웁니다.
화목제의 종류에는 자원제사와 서원제사와 감사제사가 있습니다. 특히 항해나 광야여행에서 무사히 돌아왔을 때, 병이 나았을
때, 감옥에서 나왔을 때 드리는 제사입니다. 감사제로써 화목제는 유월절 양, 제사장 위임식, 나실인의 서원 등에 드리며, 반드시
고기는 제사 드린 바로 그 날에 모두 먹어야 합니다.
화목제의 의미에는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평화, 언약체결에 대한 확증, 인간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면, 하나님이 받으시고 그
제물을 다시 인간에게 선물로 주시는 의미, 곧 하나님의 선물로써의 의미를 갖습니다. 이 선물을 제사장과 예배자와 예배자의
가족친지들이 함께 하나님 앞에서 나눔으로써 화목을 공고히 한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이 내리신 선물을 하나님 앞에서 나누어
먹음으로써 하나님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람사이에 신비로운 연결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먹는 것이지 하나님과
함께 먹는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에서 행하는 성만찬의 의미를 가장 잘 표현해 주는 제사가 바로 이 화목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사람과 사람사이에 갈등과 반목을 샬롬, 곧 평화로 바꾸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선물, 곧 화목제물로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라"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삼으시고, 그의 피로 인한 구속을 믿는 인간들의 범한 죄를 용서하심으로서 당신의 공의로우심을 나타내시고,
또한 예수를 믿는 자들을 의롭다고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며, 죄를 벌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죄범한 인간들이 모두 멸망 받기를 원치 아니 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들의 죄로 인한 진노를 푸시고 원수된 죄인들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로 친히 하나님과 죄인 사이의 화목제물로 삼으셨습니다.
화목제물이란 말은 일반적으로 신의 진노를
풀기 위해서 인간이 마련한 희생제물을 뜻하지만, 성서가 말하는 화목제물은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화목제물이 되셨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은 피해자가 가해자를 벌하기보다는 오히려 먼저 화해의 길을 모색하는 자기부정과 희생의
정신을 말합니다. 이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의 평화, 가정의 평화, 지역사회의 평화, 더 나가서는
국제사회의 평화를 도모할 수가 있고,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겨 실현 할 수가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습니다(고후 5:17-20).
고대 근동지방에서는 공동식사를 통해서 평화 협정이나 협약 또는 계약체결을 인준하는 규정관습이 있었습니다. 이삭과
아비멜렉(창 26:30), 야곱과 라반(창 31:54) 다윗과 아브넬(삼후 3:20). 쌍방간에 의견이
교환되고, 그것이 수용되고, 계약이 체결되면, 그것이 백성들에게 공포되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습니다(출
24:1-11).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을 계약의 하나님으로, 그들을 계약의 백성으로 믿었습니다. 출애굽 사건이 있은 후에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을 종살이에서 해방하신 야훼 한 분만을 그들의 신으로 섬기며, 그들은 야훼의 백성이 되기로 하나님과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하나님께 화목제사를 드렸고, 언약의 피뿌림을 받았으며, 그 제물을 나누어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열국 중에서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고, 제사장 나라가 되었으며, 거룩한 백성”(출 19:5-6)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구약(舊約)이요 이스라엘의 선민계약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침례식 때에 우리 모두는 하나님과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사건으로 인해서 죄의 종살이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시고, 성령으로 사는 새로운 삶을 주신 하나님 한 분만을 구세주로 모시고 섬기며,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기로 새로운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로 된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新約)이요 그리스도인들의 선민계약입니다.
성만찬은 바로 이 새로운 선민계약체결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벧전 2:9-10)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시는 행위입니다. 성만찬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공고히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귀중한 시간인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제사상에 올린 음식을 신(神)의 선물(膳物, gift)이라고 여겼습니다. 비록 제사상의 음식이 인간이 차린
음식이고, 다분히 잘 보살펴주시라는 뇌물의 성격을 띤 것이지만, 신(神)은 인간들의 정성을 받으시고, 음식은 예배공동체를 내리시기
때문에 선물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제사 음식은 신이 내린 선물이고, 예배공동체에 대한 신(神)의 뜻이 담긴 음식이기
때문에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은 반드시 이 제사 음식을 먹어야 했습니다. 예전에 우리가 사용하던 ‘복덕방’이란 말이 바로 이 선물을
나누던 회관을 뜻했다고 합니다. 이 말이 토지나 가옥 중개업소란 뜻으로 한동안 사용되기는 했지만, 먼 옛날의 복덕방은 각종
부락제 때 제사상에 올린 음식과 살코기를 마을회관으로 옮겨와 나눠 먹던 장소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먹고 마심으로 복을
받고(飮福, 음복), 먹고 마심으로 덕담을 나누는(飮德, 음덕) 신성한 장소가 복덕방이었던 것입니다. 복덕방에서 선물을 나누는 행위는
신의 뜻(神意, 신의)을 나누는 행위였고, 한 공동체의 결속과 연대를 신의 명령(神命, 신명)으로 이해하고 받아드렸던 엄숙한
행위였습니다. 제물은 이와 같이 마을 공동체를 강하게 결속시키고 공동 운명체임을 자각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해냈습니다.
복 복(福), 덕 덕(德), 방 방(房)
제사가 끝나면 음식을 나누어 먹는 일을 '음복(飮福)'이라 하는데 이 때의 '복(福)'은 '제사에 쓴 고기와 술'이라는 의미이다.
'명복(冥福)을 빈다'라는 말을 가끔씩 듣는데 이 때의 '명(冥)'이 '저승 명'이기에 '저승에서의 복을 빈다'라고 해석해야
한다. '복생어미(福生於微)'라는 말이 있다. 복은 미세한 일에서 생긴다는 의미이다.
복덕방의 어원은 '생기복덕(生起福德), 즉 복과 덕을 생기게 하는 것이라는 말에서 유래 하며, 복덕방(福德房)은 말 그대로 복과 덕이 있는 방을 말합니다. 복덕방은
원래 일종의 뒷풀이 장소였습니다. 마을의 당제나 동제를 지내고 난 뒤에 제사음식을 나누어 먹던 당산나무 아래나 그 곁에 넓은
마당집을 일컫는 말로, 마을 유지들은 음식과 돈을 기부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제를 올리기 위해 노동력을 제공하고 제사음식은 모두
골고루 복덕방에서 나누어 먹었던 곳이 바로 복덕방입니다. 제사음식을 받으러 윗마을 아랫마을 사람들이 다들 마을입구 복덕방 자리에
모이게 되면 집안 대소사에 관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오가고 간단한 물건을 교환하거나 흥정도 자주 이루어져 나중에는 타지 사람들까지 그 마을에 빈집이 있는지 동네사람들이 어떤지 알아보곤
했던것이 자연스럽게 복덕방에서 집을 사고팔수 있도록 중개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복덕방은 마을전체의 사람들과 어울리며, 개방적으로
부동산을 알아보고 흥정한 것처럼, 기획부동산이나 일부 뜨내기 부동산처럼 자신의 이익을 위한 장소가 아닌 진정한 복덕방으로써의
책무를 다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성한 뜻을 받들어 주님의 살과 피를 나누는 곳이 복덕방이요, 성도들이 먹고 마시는 떡과 잔은 모두가 한
운명체임을 주님의 명령으로 받는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의 구원과 축복을 위해서 외아들 예수님을
화목제물(和睦祭物)로 삼으시고, 구원을 위한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희생당하심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마련하신 화목제물 곧 선물인 것입니다. 이 선물을 나누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리고 이 제물 곧 하나님의 선물을 상징하는 성찬의
나눔이 있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신령한 복을 나누는 복덕방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And when any will offer a meat offering unto the LORD, his offering shall be of fine flour; and he shall pour oil upon it, and put frankincense thereon:
소제의 의미
소제의 의미 / 겉사람을 죽여라 - 구원 받은 후에 새로운 삶을 회복해야 한다. 곡식이 고운가루가 되려면 철저하게 부서지고 깨져야만 한다.
고린도후서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번제의 의미
번제의 의미 / 영혼 구원
- 원죄의 문제를 해결한다.
야고보서 1: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히브리서 10: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시편 17:13 여호와여 일어나 저를 대항하여 넘어뜨리시고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
소제에 사용할 수 있는 예물
1. 고운가루(2:1) - 씨앗, 성장, 열매, 추수, 탈곡, 맷돌 -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과정
2. 기름(누가복음 4:17-19)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3. 유향(시편 141:2)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
May my prayer be set before you like incense; may the lifting up of my hands be like the evening sacrifice.
에베소서 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and live a life of love, just as Christ loved us and gave himself up for us as a fragrant offering and sacrifice to God.
요한복음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I tell you the truth, unless a kernel of wheat falls to the ground and dies, it remains only a single seed. But if it dies, it produces many seeds
에베소서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요한복음 6:32-3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소제는 고운가루가 되는 것처럼 세상에 나가 작은 예수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각기
다른 모양의 십자가를 지고 가지만, 목적지는 같다. 목적지가 같은 만큼 우리에게는 많은 길동무들이 있다. 같은 모습으로 닮아 가는
자매와 형제들이 있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며 예수님을 보고, 우리가 스칠 때 예수님의 향기를 맡는다. 우리는 작은
예수다. 예수님은 복 있는 자가 되려면 마음을 비우고, 슬퍼할 줄 알며, 온유하며, 남을 불쌍히 여기며, 마음이 깨끗하고, 화평케
하며, 의를 위해 굶주리고 목말라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마태복음 5:3~12). 예수님을 닮기를 사모하는 사람은 날마다 이 교훈의
거울에 자기를 비춰 보면서 순종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우리들의 이미지는 너무 참담하다.
그들의 눈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과 전혀 다를 게 없다. 성경을 들고 있다고 해서 우리를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쩌다 이 지경에 까지 이르렀을까. 예수님을 닮아 가야 하는 거룩한 목표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너무 비현실적인 목표야.
이대로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믿음만 있으면 구원받는데…’ 하는 등의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예수님을 닮는 우리의 목표를 마치
응접실에 걸어 놓은 액자처럼 쳐다만 보며 신앙생활을 하는 데 그 원인이 있다.
예수님의 복 있는 사람의 조건에 대한
메시지는 분명하다. 예수님의 제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같이 온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부름받은 제자는 땅에서부터
예수님을 닮는 것을 목표로 삼아 열심히 오르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세의 구원을 외치는 자는 많지만 예수님의 제자가
되자고 외치는 자는 많지 않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비친 우리의 모습이 이러한 현실을 잘 설명하고 있지 않은가. 흠이 없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오를 정상이 어디인지를 분명히 하자는 것이다. 그 정상은 ‘작은 예수’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고 흉내라도 내야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야고보서 2:26)
영국의
어느 술집 주인이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전도집회에서 복음을 듣고는 마음의 변화를 얻어 “나 예수 믿겠습니다.”하고 벌떡 일어나
앞에 나가서 무릎 꿇고 기도하고 돌아갔다. 그리고는 곧바로 자기 술집 앞에 간판을 하나 붙였는데, “나 엊저녁에 예수 믿었소
오늘부터 술집 영업 안 합니다.”라고 써 놓았다고 한다. 이것이 믿음이다. 어제와 오늘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는 것이 믿음이다.
이것은 기적처럼 저절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를 통해 행동으로 드러나는 믿음의 과정이다.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야고보서 2:18)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인정받게 된 데에는 그의 마음속 믿음뿐 아니라 행동으로 드러나는 믿음을 하나님이 보셨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아들을 주신 이가 죽은 아들을 능히 살리실 수도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늘그막에 얻은 아들을 바침으로 아들보다 하나님이
자신의 우선순위에 있음을 행동으로 증명했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신앙의 뿌리이며 믿음의 조상이자 하나님의 친구로 일컬음을
받았다.
제자로 사는 것은 제자처럼 생각하거나 제자처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예수님이 사신 모습을 따라 ‘사는’ 것 이다. 이것이 제자 훈련의 핵심이다.
그러나 현대 교회의 성도들은 예수님처럼 변하는 것은 점진성을 가지고 마지막 날에나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점만 강조하여, “우리는
모두 인간인데…”하며 눈감아 주는 현실주의에 곤두박질치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한국 교회에 냄새가 진동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작은 예수가 되라는 명령은 목회자뿐 아니라 모든 믿는 자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표준이다.
맥스 루케이도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당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 그러나 그대로 두지는 않으신다. 하나님은 당신이 예수님처럼 되기를 원하신다.”
헨리 나우엔은 더 강하게 이야기한다. “진정한 구원은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진정한 구원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지막 날에 얻게 될 변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자리가 우리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태복음 5:48)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수준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도 부담스러워하는 우리에게 주님은 온전하라고 명령하신다. 이 명령에 따르려고 몸부림치지 않는 한 우리가 배우고
외우는 말씀들은 결국 우리 입에서 맴도는 메마른 구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 유향 / 유향은 향기를 발하는 일종의 향수입니다. 유향이라는 말만 들어도 향기가 납니다. 냄새나는 마굿간에서 예수가 나셨기에 향수인 유향을 선물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것까지는 몰랐을 것입니다.
황금 - 왕권을 상징 유향 - 제사장을 상징 몰약 - 메시아
황금의 의미 -
왕
황금은 왕권을 의미합니다. 우리나라 박물관을 가보아도 왕은 황금으로 왕관을 만들어 썼습니다. 황금 띠를 띠고 황금 그릇을
사용하였습니다. 동방박사중에 한 명이 아기 예수에게 황금을 선물로 드린 것은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라고 하는 믿음의 고백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당시 역사가 세네카는 당시 중동에서는 이런 말이 있었다고 전하여 주고 있습니다. <황금을 가지지 않고는 왕을 만날
생각을 하지 말아라.> 왕을 만날 때에는 반드시 준비하여야 하는 선물이 황금이었습니다. 황금은 금속의 왕이고 예수님은 세상에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왕되신 사람>이며 <사람이 되신 왕>이셨습니다. 예수님은 힘으로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왕이
아니라 사랑으로 통치하시는 왕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총이나 법으로 이 세상을 다스리시지 않으시고 십자가로 온 세상을 다스리신
왕이십니다. 세상의 왕은 못 할 것이 너무 많은 왕이지만 예수 왕은 못 할 것이 없으신 전지전능하신 왕입니다. 세상의 왕은 모든
면에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 하기에 참모들이 같이 일해주어야만 하는 왕이지만 예수 왕은 모든 면에 탁월한 지식을 가지신 왕중의
왕이십니다. 정치, 경제, 교육, 건강 모든 면에 그를 따를 자가 없는 왕이십니다. 세상의 왕은 임기가 있는 일시적인 왕이지만 예수 왕은
영원한 왕이십니다. 세상의 왕은 이 땅의 왕이지만 예수 왕은 오는 세상에서도 왕이십니다.
어느 역사학자가 알렉산더 왕과
예수님을 비교한 글이 있습니다. BC 350년 경 알렉산더 대왕은 세계를 정복하고 거대한 제국을 세웠다. 그리스도와 알렉산더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두 사람은 젊은 날에 일을 시작하여 33세에 세상을 마쳤다. 알렉산더는 왕국에서 태어났고 예수는 마굿간에서
태어났다. 알렉산더는 왕자로 태어났고 예수는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알렉산더는 왕좌에서 고귀한 왕으로 죽었으며 예수는 십자가에서
조롱받으며 죽었다. 알렉산더는 일생에 위대한 성공을 보였고 예수의 일생은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알렉산더는 자신의 소유를 위하여 수
십만의 피를 흘렸고 예수는 전 인류를 위하여 피를 흘렸다. 알렉산더는 영광의 바벨론에서 죽었고 예수는 수치의 갈보리에서
죽었다. 알렉산더는 모든 왕국을 정복하였고 예수는 죽음을 정복하였다. 알렉산더는 모든 사람을 노예로 만들었고 예수는 모든 인간을
자유케 하였다. 알렉산더는 역사를 만들었고 예수는 역사를 변화시켰다.
아기 예수에게 황금을 바친 것은 예수님은 왕이라는
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유향의 의미 - 제사장
유향은 향기를 발하는 일종의 향수입니다. 유향이라는 말만 들어도 향기가
납니다. 냄새나는 마굿간에서 예수가 나셨기에 향수인 유향을 선물한 것은 아닙니다. 동방박사들은 별을 따라 오기는 하였지만 마굿간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신 것까지는 몰랐을 것입니다. 유향은 가정에서는 온 가정을 향기롭게 하는 데 사용하였고 성전에서는 제사드리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제사중에 가장 많은 제사가 소제입니다. 소제는 다른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이 그 제사를 받으셨음을 감사드리며 드시는 일종의
감사 제사였기에 모든 제사 후에 거의 소제가 드려졌습니다. 그런데 소제를 드릴 때에는 반드시 유향이 필요하였습니다.
레위기 2:1-2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 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로 가져 올
것이요 제사장은 그 고운 기름 가루 한 줌과 그 모든 유향을 취하여 기념물로 단 위에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그리고 분향단위에는 늘 향이 꺼지지 않고 타고 있었습니다. 향을 내는 향품은 소합향, 나감향 그리고
풍자향을 유향으로 섞어 버므려 태우게 되어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30:34-3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의 향품을
취하고 그 향품을 유향에 섞되 각기 동일한 중수로 하고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그 향 얼마를 곱게 찧어 내가 너와 만날 회막 안 증거궤 앞에 두라 이 향은 너희에게 지극히
거룩하니라.
청진기라고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의사입니다. 망치와 톱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목수입니다. 시멘트와 모래와 자갈하면 얼른 떠오르는 이는 건축가입니다. 유향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는 제사장입니다. 유향은 제사장이 사용하는 물건중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제사장은 라틴어로 폰티펙스(Pontifex)라고 하는 데 이는 다리를 놓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아기 예수에게
유향을 선물한 것은 아이를 기르는 방에 향기가 늘 진동하기를 바란다는 바램으로 유향을 선물하였겠지만 그 속에 들어 있는 영적 의미는
<예수님은 제사장>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길을 여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돌아 가실 때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를 향하여 난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담대히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크게 외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마태복음 27:50-51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히브리서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유향을 선물한 것은 예수님은 제사장이라는 고백입니다. 진실로 예수님은
제사장입니다.
몰약의 의미 - 메시야(선지자)
몰약은 시스터스(cistus)라고 하는 나무에서 나오는 진입니다. 아주 값진
기름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사장과 왕과 선지자들에게는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 때 붓는 기름을 관유라고 하는 데 관유를 만들
때에 몰약을 썼습니다.
출애굽기 30:23-29 너는 상등 향품을 취하되 액체 몰약 오백 세겔과 그 반수의 향기로운 육계 이백 오십 세 겔과 향기로운
창포 이백 오십세겔과 계피 오백 세겔을 성소의 세겔대로 하고 감람 기름 한 힌을 취하여 그것으로 거룩한 관유를 만들되 향을 제조하는 법대로
향기름을 만들지니 그것 이 거룩한 관유가 될지라.너는 그것으로 회막과 증거궤에 바르고 상과 그 모든 기구며 등대 와 그 기구며 분향단과 및
번제단과 그 모든 기구와 물두멍과 그 받침에 발라 그것들을 지 성물로 구별하라 무릇 이것에 접촉하는 것이
거룩하리라.
이같이 값비싼 향을 만들 때 넣은 재료가 바로 몰약입니다. 그래서 솔로몬 왕의 침상에는 몰약을
뿌렸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몰약으로 시작하여 몰약으로 끝났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탄생하셨을 때 몰약을 선물로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마지막으로 받은 선물도 바로 몰약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자 니고데모가 몰약과 침향을
100근쯤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시체에 발랐습니다.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요19:39)
아주 귀한 사람의 침상에 뿌리고 정말 귀한 분의 몸에 바르고 하나님이 택하신 존귀한
자 의 머리에 붓는 기름이 바로 몰약입니다. 아기 예수님에게 몰약을 드린 것은 너무나 그 분을 존귀하게 여기는 자세입니다. 그런데
메시야란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그리스도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동방박사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았기에 몰약을 드린 것일까요? 아주
존귀한 사람의 시체에 바르는 기름이기에 예수님의 죽으심을 예수님이 태어날 때부터 알았던 것일까요? 이런 것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메시야에게 붓는 기름이라는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태어나신 목적이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죄의 값은 사망이기에 대신 죽으러 오신 분이십니다. 아마 이 세상에 예수님에 관한 그림이 가장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그림이 있다고 바클레이는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목수일을 하다가 너무 피곤하고 기지개를 펴는 데 벽에 그림자가 비쳐졌습니다 예수님이
두 팔을 벌리고 있기에 그림자는 십자가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어머니 마리아가 근심스럽게 의미심장하게 바라보고 있는
그림입니다.
그렇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님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습니다. 이 세 가지 선물속에 예수님에 대한
모든 예언이 다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왕중에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제사장중에 제사장이십니다. 예수님은 오직 한 분이신
메시야이십니다.
하나님은 온전하신 분이시기에 우리에게 온전하기를 기대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예수님도 온전한 분이시기에 우리에게 온전하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 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온전하여 지면서 우리에게
온전하여 지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우리는 온전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온전케 될 수 있습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벧전5;10)
그러면 온전케
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나요?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 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마19;21)
예수님은 온전하고자 하면 네 구제하라고 하였습니다. 남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길 수 있는 이들이 온전한 이들입니다. 우리는 이제 1층에 까페를 개설하였습니다. 쌀을 샇아 두어야 합니다. 누가
가지고 가는 지 모르게 가지고 가게 하여야 합니다. 누가 쌀을 갖다 놓았는 지 모르게 갖다 놓아야 합니다. 옷도 그렇습니다. 까페를
통하여 지역을 섬기기로 하였습니다. 성탄절을 지내며 전도하고 도와주어야 진정으로 주님께 예물을 드리는 것이 됩니다.
소제에 사용할 수 없는 것
1. 누룩(Yeast)(2:5, 11)
- 죄와 부패의 상징(고린도전서 5:6-8)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
* 바리새인의 누룩(교훈) / 마태 8:15, 16:6, 11-12, 누가 12:1)
2. 꿀(Honey)(2:11)
- 정욕, 탐욕의 상징(잠언 25:27) 꿀을 많이 먹는 것이 좋지 못하고 자기의 영예를 구하는 것이 헛되니라.
소제의 의미
1. 삶을 영위하는 물질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 대한 경배 2. 땅을 소유하지 않은 제사장과 레위인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보호하는 것 3. 예수는 생명의 떡(요한복음 6:32-35) 4. 영원한 계약(소금)
소제의 제물
1. 고운 가루(1절) fine flour - 한 줌을 취하여 기념물 - 남은 것(아론과 그 자손에게) - 기름(성령), 유향(예수님의 거룩한 삶, 온유와 겸손)
2. 화덕에 구운 것(4절) baked in an oven - 고운가루, 기름, 무교병
3. 번철에 부친 것(5절) on a griddle - 고운가루, 누룩을 넣지 말라
4. 솥에 삶은 것(7절) cooked in a pan - 고운 가루, 기름
5. 첫 이삭(14절) first fruits - 볶아 찧은 것, 기름, 유향
1-3. 고운가루(맥분)로써 만드는 소제
4. 화덕에 구운 것을 드리는 때
5-6. 번철(남비)에 부친 것을 드리는 때
7. 솥에 삶은 것으로 드리는 때
8-10. 소제 드리는 법
11, 13. 누룩이나 꿀을 넣지 말고 소금을 쳐야 할 것
12, 14-16. 첫 이삭을 소제로 드리는 때(볶아 찧은 것)
번제, 소제, 화목제가 바르게 드려질 때는 향기로운 냄새가 드러납니다. 따라서 냄새 제사라고도 합니다.
2 “누구든지 곡식으로 나 여호와에게 소제를 드리려거든 고운 밀가루를 바쳐라. 제물을 바치는 자는 그 밀가루에 감람기름을 붓고 그 위에 향을 놓아. 2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가져가야 할 것이며 제사장은 감람기름이 섞인 그 고운 밀가루 한 줌과 모든 향을 집어 그 제물 전체를 나
여호와에게 바쳤다는 표로 그것을 제단 위에서 불로 태워야 한다. 이것은 불로 태우는 화제이며 나 여호와를 기쁘게 하는 향기이다. 3 그 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 자손들에게 주어라. 이것은 나 여호와에게 바친 화제 중에서 아주 거룩한 것이다. 4 “만일 너희가 화덕에 구운 것으로 소제를 드리려고 하면 그것은 고운 밀가루에 누룩을 넣지 않고 감람기름을 섞어 구운 빵이나 감람기름을 발라 구운 얇은 과자여야 한다. 5 만일 철판에 부친 것으로 소제를 드리려고 하면 그것은 고운 밀가루에 기름을 섞어 누룩을 넣지 말고 만든 것이어야 한다. 6 그리고 그것을 조각으로 나누어 그 위에 기름을 부어라. 이것은 곡식으로 드리는 소제이다. 7 만일 너희가 솥에 찐 빵으로 소제를 드리려고 하면 그것은 고운 밀가루에 감람기름을 섞어 만든 것이어야 한다. 8 너희는 나 여호와에게 바칠 이런 소제물들을 제사장에게 가져갈 것이며 제사장은 그것을 단으로 가지고 가서. 9 나에게 전체를 드렸다는 표로 그 일부를 단에서 불로 태워야 한다. 이것은 불로 태우는 화제이며 나 여호와를 기쁘게 하는 향기이다. 10 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 자손들에게 주어라. 이것은 나 여호와에게 바친 화제 중에서 아주 거룩한 것이다. 11 “너희는 나 여호와에게 곡식으로 드리는 소제물에 누룩을 넣지 말아라. 너희가 나에게 바치는 소제물에 누룩이나 꿀을 넣어서는 안 된다. 12 누룩과 꿀은 제일 처음 추수한 예물로서 나에게 바칠 수 있으나 그것을 단에 올려 태워서는 안 된다. 13 너희는 곡식으로 드리는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쳐라. 소금은 너희와 나 사이에 맺은 계약의 상징이므로 너희 모든 예물에 이 소금을 쳐야 한다. 14 너희가 첫 이삭을 나 여호와에게 소제로 드리려거든 그것을 볶아서 찧은 다음. 15 그 위에 감람기름을 붓고 향을 얹어 바쳐라. 이것은 곡식으로 드리는 소제이다. 16 그리고 제사장은 그 모든 것을 나 여호와에게 바쳤다는 표로 찧은 곡식 일부와 감람기름 일부와 모든 향을 불로 태워야 한다. 이것은 나 여호와에게 불로 태워 바치는 화제이다.”
3. 기름 - 1b. 제물을 바치는 자는 그 밀가루에 감람기름을 붓고 그 위에 향을 놓아.
내적 기름의 부음 : 반죽하기 위하여 외적 기름의 부음 : 반죽을 요리하기 위하여
가루가 된 제물에 유향이 첨가되어 향기로은 제물이 됩니다. 가루가 된 제물에 기름을 부어 가루가 덩어리로 만들어지는 것처럼 성령의 역사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4. 누룩을 넣지 말라 4 “만일 너희가 화덕에 구운 것으로 소제를 드리려고 하면 그것은 고운 밀가루에 누룩을 넣지 않고 감람기름을 섞어 구운 빵이나 감람기름을 발라 구운 얇은 과자여야 한다.
누룩은 잘못된 교훈을 의미합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예수에 대하여 잘못된 교리 즉 기독론이 잘못된 것. 이단 종파의 교주 - 정명석 하나님께서 1만명의 여자와 동침하라고 하셨다. 여학생들을 유혹하려고 영어를 가르치고 취업하기에 필수적인 과목들을 가르친 후에 인간 관계를 친밀하게 형성한 후에 드디어 교리를 드러낸다.
고린도전서 5:7-8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마태복음 16: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사람의 본성은 누룩을 좋아한다. 귀가 솔깃하여 귀담아 듣고 마음에 담은 후에 전달하려고 한다.
* 설교의 품위를 높이려면 누룩을 넣을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로만 전해야 한다.
자아의 죽음 - 뜻, 견해, 의지 하나님의 뜻, 견해, 의지는 살아나야 합니다. 나의 뜻, 견해, 의지는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뜻 : will
1.사람이나 신과 같은 존재가 어떤 일에 대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이나, 어떤 일을 하고자 하여 가지는 마음이나 바람. 2. 뜻이 굳다. 3. 말이나 글, 또는 단어 등이 나타내거나 가리키는 바. 의미(意味).
견해(見解) : view
1. 어떤 사물에 대한 자기의 의견이나 평가. 견해를 달리하다.
의지(意志) : meaning
1. 어떠한 일을 이루려고 하는 마음가짐. 지의(志意) 의지가 강한 사람. 2. 철학•윤리학 / 어떠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의식적인 행동을 하게 하는 내적(內的) 욕구. 도덕적 가치 평가의 원인도 됨. 3. 심리학 / 생활체(生活體)가 나타내는 목적적 행동을 발생시켜, 그것을 통제하는 심적(心的) 과정. 반사적(反射的)·본능적인 행동과는 구별됨.
1-3절은 고운 가루로 드리는 소제에 대해서,
4-10절은 굽고, 부치고, 찐 것으로 드리는 소제에 대해서, 11-13절은 누룩과 꿀을 삼갈 것과 모든 소제물에 언약의 소금을
칠 것에 대해서, 14-16절은 첫 이삭을 볶아 찧은 것으로 드리는 소제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들 말씀에 나타난
영적의미를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소제에는 다섯 가지 예물
고운 기름 가루, 고운 기름 가루를 화덕에 구운 것, 고운 기름 가루를 번철에
부친 것, 고운 기름 가루를 솥에 찐 것, 첫 이삭 곡식을 볶아 찧은 것이 그것들입니다.
고운 가루의 상징적 의미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모든 거칠고 조악한 모습을 없애고 하나님 앞과 그리스도 안에서 깨어지고 부서진 순수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봉사할 것을
말합니다.
둘째, 소제는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로 드리는 화제
기념이 될 만큼만 불에 태우고 나머지는 제사장이 자기 몫으로 취합니다.
번제는 동물로 드리는 제사이고, 소제는 곡물가루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번제는 가죽을 벗겨 제사장이 취하고, 새의 멱통과
더러운 것은 버리고, 나머지는 전부 불태워 향기로운 냄새로 하나님께 드려지지만, 소제는 가루 한 움큼과 유향을 불살라 향기로운
냄새로 하나님께 드리고 남은 것은 제사장이 취했습니다.
또 번제는 피를 단 사면에 뿌리는 제사였지만, 소제는 곡식의 가루로 드렸기
때문에 피없는 제사였습니다. 가톨릭 학자들은 이 소제에서 성만찬의 근거를 마련하기도 합니다.
번제가 그리스도의 고난과 대속적인 죽음을 예표 했다면, 소제는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신 그리스도의 거룩한 삶을 예표
합니다.
소제물은 찬양의 제물이며 하나님께서 자비를 보여주신 데 대한 언약백성의 감사를 상징합니다. 소제물로는 최상의 것을
드렸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진 최상의 것, 곧 우리의 몸과 마음, 우리의 재능과 학식 등의 최상의 것을 주님을 위해 바쳐야 함을
의미합니다.
셋째, 소제는 단독 제사이기보다는 다른 제사와 함께 드려지는 제사
출애굽기 29장과 민수기 15장에 설명된 내용으로
봐서 번제와 소제는 서로 연관된 제사로써 번제가 먼저 드려졌습니다. 따라서 소제는 번제를 완성시키는 제사로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공물’의 의미를 지닌 소제는 일반적으로 다른 제물들과 함께 드려졌습니다. 그리고 소제는 예배자가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번제를 통해서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을 확증해주시고, 예배자는 소제를 통해서 하나님께 선물을 드림으로써
응답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솔선해서 주신 한량없는 은총에 대해서 예배자가 감사의 응답으로 바치는 헌신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넷째, 소제물은 기름과 유향을 섞어 드려야 합니다
여기서 ‘기름’은 올리브유를 말합니다. 그리고 ‘유향’은 유향나무의
수지를 건조시켜 얻은 우윳빛 향료를 말합니다. 아라비아산 수입품으로써 거룩한 관유에 섞는 향료 중 하나였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께 바쳤던 예물들 가운데 한 가지가 바로 이 유향이었습니다. 유향과 기름부음은 성령의 충만함과 향기라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의미합니다.
고린도후서 2:14-17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다섯째, 소제물에는 누룩과 꿀을 넣지 말아야 합니다.
누룩이 부패를 상징하고, 꿀이 쾌락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누룩’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하메츠,’ 곧 ‘흥분시키는 것,’ ‘날카롭게 쏘는 것’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누룩은 그 속성상
성경에서 종종 죄와 거짓 교훈, 위선과 허영을 상징하는데 쓰입니다. ‘꿀’은 벌꿀로써 발효의 성질을 가지고 있으므로 종종 누룩과
동일하게 취급됩니다. 무엇보다도 꿀은 세상적인 쾌락을 상징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런 것들에서 벗어나 하나님 앞에 순전한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섯째, 소제물에는 언약의 소금을 넣어야 합니다.
13절에서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소금은 누룩과 반대로 부패를 방지합니다.
고대근동지방에서는 중요한 매매나 언약체결 시에 체결된 언약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공동식사를 했습니다. 이때 어떤 경우에도 변함없이
약속을 이행한다는 뜻으로써 상대방의 소금을 먹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소금은 언약체결을 상징하며, 그 언약을 신실하게 지킬 것과
불변성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우리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지표로 삼고 사회의 부패를 방지하며 유익을 끼치는 삶을 살아야할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서약을 신실하게 지켜야 할 것을 교훈하는 말씀입니다.
일곱째, 번제와 마찬가지로 소제도 생활형편이 고려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참작하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and I no longer live, but Christ lives in me. The life I live in the body, I live by faith in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빌립보서 1:20-21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I eagerly expect and hope that I will in no way be ashamed, but will have sufficient courage so that now as always Christ will be exalted in my body, whether by life or by death. For to me, to live is Christ and to die is gain.
고린도후서 4:10-11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We always carry around in our body the death of Jesus, so that the life of Jesus may also be revealed in our body. For we who are alive are always being given over to death for Jesus' sake, so that his life may be revealed in our mortal body.
선악과를 따서 먹을 때에 죽어야 할 것이 살아났기 때문에 산 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죽어야 한다. 따라서 주님 앞으로 나오려면 반드시 산 자가 죽은 자가 되어야 한다. 선악과에 감염된 사람은 산 자가 되었으므로(자아, 육, 고집) 죽어야 한다. 산 자의 핵심은 선악과이므로 죽음은 영, 혼, 육의 죽음으로 나타난다. 영은 선악과를 먹은 즉시 죽었다. 예수를 모르기 때문 혼은 죽지 않고 살아서 몸부림을 친다. 선악과의 독성은 인간의 혼은 하나님의 뜻, 견해, 의지를 따르지 못하게 한다. 자기의 뜻, 견해, 의지를 주장한다.
고린도전서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I die every day--I mean that, brothers--just as surely as I glory over you in Christ Jesus our Lord.
소제 드리는 방법은 세 가지인데 첫 번째는 화덕에 구운 것으로 소제를 드리는 경우입니다. 이 방법은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
만든 무교병이나 기름 바른 무교 전병을 드리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번철에 부친 것으로 소제를 드리는 경우입니다. 이 방법은 고운
가루에 누룩을 안 넣고 기름을 섞어 조각으로 나누어 드리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 솥에 삶은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 가지 방법 중에서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자유롭게 선택하여 드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a. 화덕의 기름(레 26:26)
b. 번철에 부친 것에 대한 규례(레 2:5)
소제 드리는 절차
모든 제사에는 절차가 매우 중요합니다. 소제물을 여호와께로 가져다가 제사장에게 줍니다. 제사장은 그것을 단으로 가져다가 기념할
것을 취하여 단 위에서 불에 태워 화제로 드립니다. 그리고 소제물의 남은 것은 제사장과 그 가족에게 주어 식물로 삼게 합니다.
a. 제사장은 하나님께서 세우심(히 5:5)
b. 여호와의 제단에서 드리는 제물(사 56:7)
소제 드릴 때의 주의 사항
소제물에 있어서 금지된 것과 반드시 넣어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즉 누룩과 꿀은 소제물에 넣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고, 반드시
넣어야 하는 것은 소금입니다. 누룩과 꿀은 부패의 속성과 전염의 성질이 있습니다. 그러나 소금은 부패와 불결로부터 벗어나서 정결한
상태가 계속 유지되는 것을 상징해 줍니다.
a. 소제를 드릴 때(레 2:7)
b. 누룩을 넣지 말라(레 6:17)
'민하'는 구약에서 광범위한 용도를 갖는다. 비제의적 본문들에서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예물(들)"을 의미할 수
있는데, 특히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의무적으로 바쳐야 하거나 다른 사람의 호의를 얻기 위해 드리는 선물이다(예를 들어, 삼상
10:27; 창 32:14; 43:11).
그것은 또한 "어떤 나라가 그들의 통치자에게 바치는 공물"(왕상 5:1[4:21])을
지시한다. 제의적 배경에서 민하는 드리는 품목이 구체적으로 지시되지 않은 제물에 대해 사용된다. 예를 들어, 창세기
4:3-5에서 그것은 땅의 소산 중에서 드리는 제물과 가축 떼 중에서 드리는 제물에 공히 사용된다. 그러나 제의적 본문들에서
민하의 의미는 보통 제한적 의미인 "곡식 제물"이다. 이 제물을 지칭하기 위해 민하가 선택된 것은 곡식 제물이 여호와의 주권과
예배자의 생명에 대한 그분의 전적인 요구를 인식하는 가운데 드리는 예물이라는 사실을 추가적으로 지시한다.
시편
20:4에서 민하는 올라("번제")와 병행을 이룬다. 민하는 여호와께 바치는 일종의 곡식 제물을 지시하고 올라는 제단에서 태워지는
제물을 지시할 것이다(참조. H. J. Kraus, Psalmen 1-59. BKAT 15/1 [
Neukirchen-Vluyn: Neukirchener. 1978] 311).
이 두 단어는 함께 성소에서 드려지는 다양한
제물들을 수반한다. 그러나 더욱 빈번하게 민하는 전반적인 제물을 포함하는 '제바흐'와 짝을 이룬다(삼상 2:29; 3:14; 사
19:21; 암 5:25; 시 40:7). 함께 나타나는 이 두 단어가 "곡식"과 "짐승"을 의미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더욱
그럴듯한 것은 민하가 올라(번제)를 대신하는 용어라는 것이다(참조. Rendtorff, Studien. 191-192). 그렇다면
민하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바치는 희생물을 지시하고, 제바흐는 절기 식사가 되는 제물들을 나타낸다. 후기 예언서인 말라기에서
민하는 일반적으로 희생물의 의미로 사용된다(1:10, 11, 13; 2:12, 13; 3:3, 4). 따라서 민하는 폭넓은
의미론적 범위를 갖는다. 그 결과 민하의 엄밀한 의미가 의심스러운 몇몇 구절들이 있다(예를 들어, 슥 3:10). 이것은 민하가 또
다른 용도로 사용된 사례다. 그것은 때로 매일 특정 시간에 바치는 제물에 대한 언급으로서 하루 중 어떤 시간을 지칭하는 문구에서
사용되기도 한다. 대체로 올라(번제)는 이러한 방식으로 사용되는데, 그러나 몇 군데에서는 저녁의 민하에 대한 언급이 있으며(왕상
18:29; 스 9:4, 5; 단 9:21), 한 군데는 아침의 민하다(왕하 3:20). 민하의 폭넓은 의미론적 범위를
고려하면, 이러한 매일 드리는 민하의 정확한 성격은 불확실하다. 그것은 동물 희생, 특히 제단에서 완전히 태우지 않는 제물을
지시하거나 혹은 가능하게는 소제(곡식제)를 지시할 수도 있다. 제의 법안에서는 민하가 일반적으로 소제물(곡식 제물)을
나타낸다. 적은 양이 제단 위에서 태워지며, 나머지는 제사장들의 몫이 된다. 그것은 거의 매번 올라(번제)를 수반하며(삿
13:15-16, 19; 왕하 16:13, 15; 렘 14:12; 대상 21:23). 또한 자주 '제바흐 쉘라밈'(화목제)도
수반한다(레 7:12-13; 민 6:17). 흔히 나싸크("전제 물" : 붓는 제물)가 소제물과 함께 드려진다(민 15:1-21;
28-29장). 일부 본문들은 독자적인 민하에 대해 말한다. 제사장의 소제(곡식제)가 6:12-16(19-23)에서
묘사된다. 이 단락은 제사장 위임식 날과 그 이후에 날마다 민하가 드려진 것을 지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민수기 5:11-15에는
질투의 소제(민하트 키느앗: 개역 성경: 의심의 소제)에 대한 언급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아내가 의심스럽다고 염려하는 어떤
남편이 아내의 정절을 시죄법(범죄 여부를 시험하는 의식)으로 시험해 볼 것을 요구할 때 제사장에게 가져오는 제물이다. 칠칠절에는
회중이 햇곡식의 제물을 드린다(민하 하다샤: 23:16-17; 민 28:26). 이때 또한 번제가 이에 수반되는 소제(곡식제) 및
전제와 더불어 드려진다(23:18). - WBC 레위기 주석에서 발췌
누구든지 ... 드리려거든 - 소제는 구약의 5대 제사 중 번제, 화목제 등과 더불어 제물드리는 자가 자신의 생활
형편에 따라 그 마음에 기쁜대로 자발적으로 드리는 자원제(自願祭)이다. 그러나 속죄제와 속건제는 죄사함 받기 위하여 반드시
드려야만 하는 의무제(義務祭)였다.
소제(민하) - '선물' 혹은 '공물'(貢物)이란 뜻의 '민하'는 기본적으로어떤 사람이 보다 높은 사람의
호의(favor)얻기 위하여 드리는 예물을 가리켰다(창32:21 ;43:15). 그러나 후에는 받은 호의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표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바치는 예물을 뜻하게 되었다(Kell). 한편 구약의 5대 제사 중 소제가 번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등 다른 네 가지 제사와 다른 독특한 특징은 다른 4가지 제사는 동물을 희생시켜 드리는 '피 있는 제사'이나
소제만은 피 없는 '곡물제사'라는 점이다. 그리고 소제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즉 번제, 화목제 등과 같은 피흘리는 제사들과
더불어 그 일부로서 함께 드려지는 소제의 경우가 있고(출 29:38,39;레23:12, 13;민 15:5-10), 또한 독자적으로
드려지는 경우가 있다. 소제는 주로 피 흘리는 제사의 부속적 제사로서 특히 번제와 더불어 드려졌으나, 본장에 나타난 소제의
경우에는 백성들이 하나님께 대해 감사와 충성을 표현할 이유를 발견했을 때, 언제든지 드릴 수 있었던 독자적인 소제에 관한
규례이다(Matthew Henry). 소제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서론, 구약 제사의 종류와 의미)를 참조하라.
고운 가루(쏠레트) - 기본 동사 '쌀라'는 '흔들다'란 뜻인데, 곧 이 말은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고운 가루를
골라내기 위하여 빻은 가루를 흔들었기 때문인 듯하다. 한편 소제의 예물이 되는 고운 가루는, 먼저 인간과 관련되어 겉모습이 완전히
깨어진 후 순결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상징하며(고후 4:10-12), 그리고 그리스도와 관련되어서는 조금도
조악(粗惡)한 데가 없는 그리스도의 순결하고 완전한 인성(人性)을 상징한다(히 4:15 ;요일 3:5).
기름을 붓고
소제 예물의 종류로는 크게 '날 것'과 '요리된 것'이 있다. 요리된 예물의 경우에는 기름을 고운
가루(밀가루)와 '섞어야' 했지만(4-7절), 요리된 제물이 아닌 경우에는 단지 기름을 '붓기만' 했다(1,15절). 한편 여기서
기름(쉐멘)은 감람나무 열매로부터 짜낸 올리브 기름을 가리키는데 영적으로 이 기름은 성령의 사역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The
Preacher's Complete Homiletic Commentary).
유향을 놓아
'유향을 첨가하여'. 여기서 유향(레보나)은 감람과에 속하는 유향나무로부터 짜넨 고급 향료를
가리키는데, 이것을 첨가하는 이유는 제물이 향기를 풍기도륵 하기 위함이었다. 영적 의미에서 유향으로부터 퍼져 나오는 이 향기는
성도의 아름다운 기도나 모범적인 생활(고후 2:15), 혹은 하나님 앞에 전적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향내나는 아름다운 생애를
상징한다(엡 5:2).
고운 기름 가루 한 줌
소제물에는 5가지 종류가 있다. 1. 고운 기름 가루 한 줌으로 드리는 소제
2. 화덕으로 구운 것을 드리는 소제(4절) 3. 번철에 부친것을 드리는 소제(5, 6절) 4. 솥에 삶은 것을 드리는
소제(7절) 5. 첫 이삭을 볶아 찧은 것으로 드리는 소제(14절)
'한 줌'은 손에 가득(handful)
퍼담은 양을 가리키며 (Keil, Lange), 유대 랍비들의 주장처럼 단지 손가락으로 움켜 집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기념물(*, 아즈카라).
'기억하다'란 뜻의 '자칼'(*)에서 유래한 말로, 곧 기념물이란 인간 편에서는 풍성한 소산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을 기억하여 드리는 제물이란 뜻이요, 하나님 편에서는 하나님께 상달되어 하나님의 기억에 남을 만한 제물이란
뜻이다(시 20:3; 행 10:4). 따라서 기념물은 순수한 '여호와의 몫'으로서 '기념의 몫' 혹은 '기억의 몫'이라고도
한다. 한편 소제물 중 '아스카라'(기념물)로 취해지지 않은 나머지 소제물은 '제사장의 몫'이 되어 아론과 그의 자손들에게
돌려졌다(서론, 구약제사의 종류와 의미).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1:9,13,17에서 이미 반복된 말로, 하나님께 불살라 바쳐지는 제물이 하나님 앞에 기쁘게 상달되어진다는 의미이다. 자세한 내용은 1:9 주석을 참조하라.
제사 드리는 자가 정해진 번제 규례를 따라 자발적인 순종과 헌신의 마음으로 제사를 드릴 때,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뜻이다(엡 5:2; 고후 2:15; 빌 4:18). 특별히 여기서 '향기로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니호아흐'는 '편안한'(Commfortable), '휴식의'(restful)란 뜻이다. 즉 이것은 희생 제물이 하나님께
열납됨으로 말미암아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가 멈추고, 이제 안정되고 평화로운 안식의 상태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언약의 소금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고 맛을 내게 할 뿐 아니라, 그 맛을 지속시키는데 절대 필요한 생활 필수품이다. 따라서
이소금은 고대로부터 계약을 체결하고 그 체결한 계약을 확증할 때 계약 당사자들이 그것을 먹음으로써 계약의 지속성과 변개치 않을
것임을 표시했던 우정과 친교, 그리고 불변성의 상징물이었다(MatthewHenry, Keil, Lange, The
Preacher's Complete Homiletic Commentary).
이러한 견지(見地)에서 살펴볼 때 하나님께서 당신께
바칠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고 명령한 이유는 명확하다. 즉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과 맺은 언약이 진실되고 불변할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감사와 기쁨 중에그 언약을 믿고 바라며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소금이 갖는 속성에 반영시켜 그 백성들에게 확증시켰던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영원히 변치 않는
확실한 언약을 가리켜 '소금 언약'(Covenant of Salt)이라고 불렀다(민 18:19; 대하 13:5). 아울러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자신의 소제물에 소금을 치는 인간의 행위는 그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의 언약에 대해 믿음과 감사를 나타내는 신앙
고백적 행위였다.
그러므로 후일 그리스도께서도 이 '소금의 원리'로서 그리스도인의 생활 규범을 삼으셨던 것이다(마 5:13; 막
9:50). 한편 후대에 이르러 이처럼 제물에 소용되는 소금은 제단에 불을 지필 장작나무와 더불어 공동 부담으로 마련되어(스
7:20-22), 성전 뜰 소금의방에 항상 비치해 두고 있었다(Matthew Henry's Commentary).
제단의 의미
놋 제단이다. 놋 제단은 사람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길이다. 사람은 오직 놋 제단의 제물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다.
놋 제단의 첫 번째 의미는 심판이다. 사람이 사탄에 의해서 손상되었고 죄의 독을 주입받았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죄가 처리되어야 한다. 심판을 통과하는 것 말고는 죄를 처리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없다. 놋 제단에는 모든
희생 제물을 태우기 위한 불이 있으며, 제단에 입혀진 놋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다.
하나님께 제단에 바쳐진 희생
제물을 심판하시고 그것을 불로 태우실 때마다 구속이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제단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한 이들은 하나님에
의해 구속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모든 사람은 결국에는 제단에 두어져야 하고 번제물로서 하나님께 바쳐져야만
한다.
주님은
성령께서 오시면 “세상을 책망하시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요 16:8)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이미 우리의 죄들을 심판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반드시 이 심판의 빛 안에서 우리 자신을 심판해야
한다. 우리의 생활이 반드시 심판받아야 하며, 우리의 의복도 반드시 심판받아야 한다. 우리의 가족도 반드시 심판받아야 하며
우리의 직장도 반드시 심판받아야 한다.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은 반드시 심판을 통과해야 한다.
이것은
인간 사회에 있는 칭찬이나 아첨과는 대조적이다. 복음을 듣기 위해 오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교회가 반드시 말해 주어야 하는 첫
번째 말은 바로 “사랑하는 친구여, 당신은 죄인입니다!”라는 것이다. 우리의 존재와 우리가 가진 것과 우리가 하는 일은 좋든지
나쁘든지 관계없이 모두 십자가에 두어져야 하고 불태움을 통과하고 죽음에 넣어져야 한다.
이러한
심판을 통과하지 않고 놋 제단에서 심판받지 않은 사람들은 구속받을 수 없다. 심판을 통과한 모든 이는 피로 깨끗하게 되었고
구속되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구속받은 모든 이가 헌신하여 전제단에서 그들 자신을 바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속의 제단은
번제단이 된다. 하나님은 그 제단에 두어진 모든 것은 완전히 얻으신다. 만일 여러분을 완전히 얻지 못하신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에
의해 건축될 수 없다. 하나님의 건축은 제단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예배 본다'와 '제단 쌓는다'
한국 교회가 예배 호칭에 대하여 반드시 고쳐야 할 말은 “예배 본다”라는 말과 예배 행위를“제단 쌓는다”라고 표현하는 말이다.
‘예배’라는 말의 근본적인 원리로 볼 때 ‘본다’라는 말과 결합할 수 없는 말이다. “예배 본다”라는 말은 신학적 근거가 없을 뿐
아니라 근본적인 뜻으로도 써서는 안될 말이다.
“예배 본다”라는 말을 교회사적으로 보면 한국 교회는 1777년 가톨릭에서부터 1865년 개신교 <토마스>의 선교로
이어져 <알렌>, <언더우드>, <아펜 젤러>, <스크랜 톤> 등의 선교사들에 의하여
의료와 교육, 예배 등이 시행되면서 한국인들에게는 “경이로운 일”로 보이게 되었다.
그리고 대원군시대와 그 직후까지 종교에 대한 박해와 인명이 희생되는 사건으로 인하여 백성들은 교회 출석이나 신앙을 선뜻 가지려
하지 않고 관망하고 있을 때 먼저 교인(입교)된 신자들이 전도의 방법으로 ‘주일’ 혹은 ‘특별집회’의 “예배하는 것”이 볼만하고
재미가 있고 서양인(선교사)이 왔으니 “구경하러 가자”라는 뜻으로 “예배 보러 가자”고 한 말이, 그 후에 그렇게 전도 받은
사람들이 예배는 “보는 것”으로 알고 “예배 본다”라는 고정어를 만들게 되어 그것이 오늘에까지 관용어가 되었다.
혹자는 요
1:46에 <빌립>이 <나다나엘>을 예수님께 소개하고 인도할 마음으로 “와 보라”한 말씀이 근거가 될 수
있지 않느냐고 하는 지론(持論)을 펴기도 하나, 이는 예배에 적용될 수가 없는 억지에 불과하다.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신앙인의 영성적 반응이며 인격적 응답행위인 것으로써 “보는 것”이 될 수는 없다. 만약 “예배 본다”라는 호칭 사용을 계속
방치한다면 예배자는 ‘예배 참관자’(예배 관람자) 또는 ‘예배 구경꾼’에 지나지 않게 된다.
‘제단 쌓는다’를 ‘예배한다’로.
‘제단’이나‘쌓는다’라는 말은 구약적인 용어로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상징성은 있으나 그리스도로부터 열려진 신약교회의 표현은
아니다.
이 “제단”이라는 말의 구약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만남의 장소”(창 25:22, 17:15)였고, 제물과 화해를 받으시던
곳이며 속죄의 장소였는데 이 말이 구약에 42회, 신약에 20여 회가 기술되고 있으나 신약에서 ‘제단’이라는 표현은 구약제단의
사상적 인용이고 실제적으로 하나님과 신약의 교인 사이에 제단이 존재하지 않았다.
원래 ‘제단’의 또 다른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고귀한 희생을 치루실 것을 예표(豫表)한 곳으로서 “피 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는 사실을 선포해 주던 곳”이
제단이었다(히 9:9, 22). 그래서 예수님이 속죄의 제물이 되어 주심으로 제물도, 피흘림도, 제단도 그리스도로 완성되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 속죄물이 되신 이후의 신약교회는 제단이 요구되지 않았으며, 초대 교회 교인들은 실제적으로 제단을 사용하지
않았다. 십자가상에서 완전한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께서 개개인의 제단이 되셨기 때문이다(히 10:14, 18).
그러므로 오늘날 상당수의 교회가 예배 행위의 별칭으로 “제단 쌓는다”라는 말을 쓰는 것은 그리스도의 중보사상으로나 신약 교회의
예배 원리에서 보아 잘못된 것이다. 많은 교회들이 ‘바쳐야 받을 수 있다’는 이교적 발상에서 “제단 쌓는다”라는 말의 사용 사례를
보면 “신흥교단”들, “사이비 종파”, “무속풍의 기복신앙인과 지도자들”, 미신적 불건전 신비파들 등인데 이들은 가정제단,
새벽제단, 구국제단, 민족제단, 피의 제단, 불의 제단, 능력제단 등과 교회당 내의 소예배실을 ○○제단, 그리고 ○○산 제단 등의
이름을 걸고 제단이 뜻하는 바와 같이 희생을 요구하여 그 희생에 상응하는 ‘헌금’을 유인하고 여기에 복을 강조할 뿐 아니라,
성경이나 교리보다는 체험이나 개인의 은사를 더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히 10:18 이후에는 제단은 요구되지 않고 제물이
없으므로 “쌓는다”라는 ‘제의(祭儀)적 구조’나 ‘제물의 조성’이 전혀 요구되지 않는다. 따라서 “제단 쌓는다”라는 말이 예배적
사상을 담은 표현이라면 “예배한다”로 갱신되어야 한다.
히브리서 10:18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제단(祭壇) altar(KJV, NASB, NIV)
요약
구약 때에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단을 말하며, 신약 때에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곳을 말한다.
초대교회 때 카타콤바라는 지하묘지의 순교자 무덤 위에서 미사를 지낸 것에서 유래한다. 성당 중심이 되는 제단은 바로 그리스도를 뜻하기 때문이다.
옛날 사람들은 자연에는 신비스러운 초자연적 존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적 존재가 나타날 것 같은 장소에 제단을 설치하여 신성시하였다. 따라서 제단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신에게 제사를 봉헌하고 희생을 바치는 시설이었다. 그러므로 제단은 보통 사람이 접근해서는 안 되는 신성한 장소로서 두려움과 매력을 동시에 주는 장소였다.
유다인들에게 제단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는 장소로서 중요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킨 모세는 하느님에게서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나이산에 오르기 전 제단을 쌓고 희생을 바쳐서 계약 표시로 삼았다.
성서에서 최초로 언급되는 제단은 노아가 대홍수가 끝난 후 야훼 앞에 쌓은 제단이다(창세 8,20 참조). 구약시대 제단은 하느님과 인간의 결합을 나타내는 표시였다.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에 도착했을 때 야훼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그 자손에게 이 축복된 땅을 주겠다고 하셨다. 이 말씀을 듣고 아브라함은 야훼를 위해 제단을 쌓았다(창세 12,7 참조).
이처럼 유다인들에게 제단은 희생을 바치는 장소뿐 아니라 신적 존재와 만남의 표시가 되었다. 모세도 아말렉 사람들과 전투에서 승리한 후 기념 제단을 쌓았다(출애 17,15 참조). 유다인들은 제단을 흙이나 돌로 쌓았는데, 특히 돌로 쌓을 경우에는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해야 했다(출애 20,25 참조). 거룩한 제단은 인간 손이 더해져 부정을 타서는 안 되고 자연 그대로 존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제단은 하느님과 관계를 가진다는 점에서 완전성의 상징이 되었다.
신약성서에서 제단은 실제적이라기보다 비유적 의미를 지닌다. 제단은 예수님께서 죄인들 손에 넘어가시기 전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신 식탁을 의미했다(마태 26,20-46 참조). 구약성서의 희생과는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닌 새로운 희생을 위한 제단이라 할 수 있다. 하느님 집인 교회 건물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도 바로 이 제단이었다. 제단의 상징적 의미는 무엇보다 최후 만찬 식탁의 모방이라는 것이다. 또 제단은 구원의 희생이 이루어진 거룩한 십자가의 상징이 되었다. 따라서 제단은 주님이신 그리스도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가톨릭 교회에서 제단이라고 하면 미사성제를 거행하는 단을 말한다. 이 제단은 성당의 중심이며 성당도 이를 중심으로 건축된다. 이 제단은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골고타산도 의미하며 신령한 바위이신 그리스도를 의미하기도 한다. 최후 만찬 식탁을 모방한 제단은 예수의 살과 피를 나타내는 성체와 성혈을 바치는 단이 되었다. 여기에서 교회에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이 반복된다.
보통 가톨릭 성당의 제단은 성당 전면에 설치되어 제대를 중심으로 사제와 신자가 마주보고 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견고하고도 품위있게 축성된 것이다. 개신교의 제단 양식은 일정하지 않지만 최근에는 정면에 설치해서 십자가, 촛대, 꽃으로 장식하는 교회가 많아지고 있다.
3절.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열납하시도록 드릴찌니라. If the offering is a burnt offering
from the herd, he is to offer a male without defect. He must present it
at the entrance to the Tent of Meeting so that it will be acceptable to
the LORD.
1-2. 생축(가축)으로 예물 드림에 관한 지시
3-9. 소의 번제에 대하여
10-13. 양 혹은 산양의 번제에 대하여
14-17. 산비둘기 또는 집비둘기 번제에 대하여
제사의 종류는 " 번제(燔祭), 소제(素祭), 화목제(和睦祭), 속죄제(贖罪祭), 속건제(贖愆祭)" 다섯 가지로 구분합니다. 그리고 제사를 드리는 방식에 따라 "화제(火祭), 요제(搖祭), 거제(擧祭), 전제(奠祭)"로 설명합니다. 전제를 다른 말로 "관제(灌祭)" 라고도 합니다.
번제(燔祭. 올라, burnt offering)의 의미는 "하나님 향한 기쁨의 봉헌" 및 "전적인 헌신의 제사"를 말합니다. 번제를
뜻하는 히브리어 ‘올라'는 ‘올라가다’, ‘실어 올리다’, ‘높이다’라는 뜻의 ‘아라'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위로
드려지는 제사’, ‘위로 올라가는 제사’를 말하며, 불에 태워진 희생 제물의 향기가 하나님께 상달된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번제의 방법
1. 헌제자가 제물이 될 짐승을 끌고 회막문 여호와 앞으로 나아온다. 2. 헌제자의 손을 제물의 머리 위에 얹고 안수한다. 3. 헌제자가 제물을 잡아 피를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그 피를 번제단 사면에 뿌린다. 4. 헌제자가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뜬다. 5. 제사장은 그 뜬 각과 머리와 기름, 그리고 물로 씻은 내장과 정강이를 단 위에서 불 사른다.
이러한 방법은 양과 염소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였으나 비둘기의 경우는 달라서 제사장 혼자서 머리를 비틀어 끊고 단 위에 불사르며 피는 단 곁에 흘리고 멱통과 창자 등은 재 버리는 곳에 버리고 몸은 쪼개어 단 위에서 불살랐습니다.
번제의 목적
첫번째는 ‘속죄를 위한 것'(레 1:4, 16:24)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속죄제와 속건제가 죄를 속하기 위해 드려지는 제사라는
점을 들어 이 목적을 등한시 여기거나 그냥 지나쳐 버리려 하지만 번제의 주된 목적은 성경이 밝히 말해 주고 있는 대로 ‘속죄를
위한 것’입니다.
두번째는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헌신에 대한 표현’ 창세기 22장에 소개된 아브라함의 순종에서 잘 나타납니다. 그는 자신의 순종과 믿음의 증명을 위해 자신의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려 하였고, 그러한 믿음과 순종을 인정하신 여호와께서는
그를 위해 미리 준비해 놓으신 양을 제물로 삼아 번제를 드리게 하심으로 아브라함의 헌신과 믿음을 인정하셨습니다(여호와 이레).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매일같이 번제를 드리는 믿음으로 삶의 현장에서 복음의 전령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레위기의 5대 제사와 번제에 대한 이해
레위기는
여호와께 드려야 할 5 대 제사의 규례로서 시작된다. 그런데 이러한 레위기의 시작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왜냐하면 건축된
성막의(출 40:17) 주된 목적이 제사였고, 따라서 성막이 완성된 지금 그곳에서 드려질 제사의 규례가 주어지는 것은 당연한 논리요
순서이기 때문이다.
번제(Burnt Offering)의 어의
번제를
뜻하는 히브리어 ‘올라'는 ‘올라가다’, ‘실어 올리다’, ‘높이다’라는 뜻의 ‘아라'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위로
드려지는 제사’, ‘위로 올라가는 제사’를 뜻한다. 이러한 단어의 의미는 불에 태워진 희생 제물의 향기가 하나님께 상달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번제로 드리는 제물의 종류
번제에 사용된 제물은 수송아지, 수양, 수염소, 혹은 비둘기인데, 이 모든 제물은 반드시 흠없고 일년 된 수컷임을 그 특징으로 하였으나 비둘기에 대해서만은 수컷이나 암컷 중 어느 것을 드리라는 특별한 지시가 없다.
번제의 방법
헌제자가 제물이 될 짐승을 끌고 회막문 여호와 앞으로 나아온다. 헌제자의 손을 제물의 머리 위에 얹고 안수한다. 헌제자가 제물을 잡아 피를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그 피를 번제단 사면에 뿌린다. 헌제자가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뜬다. 제사장은 그 뜬 각과 머리와 기름, 그리고 물로 씻은 내장과 정강이를 단 위에서 불 사른다.
이러한 방법은 양과 염소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였으나 비둘기의 경우는 달라서 제사장 혼자서 머리를 비틀어 끊고 단 위에 불사르며 피는 단 곁에 흘리고 멱통과 창자 등은 재 버리는 곳에 버리고 몸은 쪼개어 단 위에서 불살랐다.
번제의 목적
번제의 목적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첫번째는 ‘속죄를 위한 것'(레 1:4, 16:24)인데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속죄제와 속건제가 죄를 속하기 위해 드려지는 제사라는
점을 들어 이 목적을 등한시 여기거나 그냥 지나쳐 버리려 하지만 번제의 주된 목적은 성경이 밝히 말해 주고 있는 대로 ‘속죄를
위한 것’이다.
두번째는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헌신에 대한 표현’이다. 이러한 목적은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순종에서 잘 나타나는데
그는 자신의 순종과 믿음의 증명을 위해 자신의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려 하였고, 그러한 믿음과 순종을 인정하신 여호와께서는
그를 위해 미리 준비해 놓으신 양을 제물로 삼아 번제를 드리게 하심으로 아브라함의 헌신과 믿음을 인정하셨다.
1-5장은 교훈적인 목적을 위해 기록되었고, 6-7장은 집행상의 세부 사항을 묘사하기 위해 기록되었다고 볼 수 있다.
1-5장은 또다시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1-3장은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레아흐 니호아흐 라도나이)로 드려지는
희생들에 대한 내용이다 (번제 - 올라, 소제 - 민하, 화목제 - 제바흐 쉘라밈). 4-5장은 특정한 죄들을
대속하는(카파르) 제사들이다(속죄제 - 하타트, 속건제 - 아샴). 속죄제는 희생을 드리도록 요구된 사람의 신분에 따라, 속건제는
범죄의 성격에 따라 규정이 주어진다. 누구든지 죄를 지은 사람은 언약 공동체의 일원으로 남기 위해 반드시 제사를 드려야 했다.
6-7장은 희생제사에 대한 세부 사항들을 기록하고 있다. 희생제물의 거룩성과 남은 부분들의 처리에 대한 부분을 다루고 있다. 제사장들이 받는 부분에 대해서도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
이 신(神)명칭은 레위기 전반을 통해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레위기가 특별히 언약의 백성이자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의 거룩과 성결에 대해 취급하고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즉 '언약의 하나님', '구속주 하나님'이라는 뜻을 가진 '여호와'란
신명칭은 특별히 '언약의 백성'과 관련하여 사용되어지는 신명칭인 만큼 레위기의 주제 및 내용에 합당하게 적절히 사용되어지고 있는
것이다(Lange).
회막(오헬 모에드)
'만남의 천막'이란 뜻으로 특별히 회막(會幕)이란 용어는 하나님과 언약 백성 간의 만남의
장소로서의 기능을 강조한 말이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이 '회막'을 통하여 인간들 사이에 최초로 거주하셨고, 또한 인간들과
만나셨다. 특히 여기서 회막을 통하여 인간들 사이에 거주하신 하나님의 거주는 장차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요
1:14) 그리스도의 거주를 예표한다(The Preacher's Complite Homiletic Commentary). 한편 이
말이 성경 다른 곳에서는 성막(출 26:9), 증거막(출 38:21), 법막(대하 24:6), 여호와의 전(출 23:19),
여호와의 장막(왕상 2:28)등으로도 표기된다. 또한 모세가 바로 직전에 시내 산 아랫자락에 회막을 세웠기 때문에(출
40:34-37)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러 더 이상 시내 산을 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고, 회막에서 여호와와 직접적인 교통을
하여 이 규정들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부르시고(와이크라)
직역하면 '그리고 그가 부르시고'란 의미인데 히브리 성경에서는 이 말이 첫 단어로 나온다.
아울러 '와이크라'란 단어는 각 성경의 첫 단어를 대체적으로 그 책의 제목으로 삼던 히브리인들의 관례를 따라 본서의 히브리 성경의
제목으로도 사용된 말이다. 특별히 이 단어에서 '그리고'(and)란 뜻을 지닌 '와'(*)는 의미상 출 40:33절에 이어지는
접속사로서 본서가 출애굽기의 후편임을 강력히 시사한다. 또한 '부르시고'에 해당하는 '이크라'는 특별한 임무를 부여할 때나 중요한
사항을 전달하고자 할때(출 3:4; 19:3) 주로 사용되는 동사로서 부름받는 자의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반응을 구하는 동사이다.
일러 가라사대
자기 백성에 대한 왕의 자격으로서, 더 나아가 그들의 죄를 속(贖)해 주시는 구속주의 자격으로서 택함 받은 백성이 마땅히 지켜 행해야 할 생명의 법도를 지금 선포하시는 것이다.
레위기는 결코 쉬운 성경이 아니다. 제사 자체가 낯설고 특이하다. 또한
구약 전반을 연구하면 레위기에 나타난 제사들이 특징들이 섞여 있거나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많은 경우 한 번
제사 지낼 때 번제와 화목제, 화목제와 속죄제를 함께 드리는 경우가 흔하다. 그렇기 때문에 각 제사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 구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레위기의 제사법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번제는 하나님 향한 기쁨의 봉헌이자 전적인 헌신의 제사 공적 행사에서 기본 제사로 드려 차별없음이 번제의 정신이었다
하나님께서 힘을 주신다
요아킴은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으로 충만하여 자신의 가축 중에 양 한 마리를 하나님께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는 평소 상품의 물건으로 찜해 둔
녀석을 골라 몸 상태를 잘 살핀 후 아무런 흠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성소로 가져갔다. 성소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목적으로 크고 작은 짐승을 바치려고 올라와 있었고 제사장들은 제사를 집행하느라 분주했다. 제단은 피로 흥건히 얼룩져 있었고, 제단
주변에는 짐승의 흘린 피 자국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잠시 기다리다 자신의 순서가 되자 요아킴은 양을 끌고 자신의 번제를 담당할
제사장 앞에 섰다. 제사장은 양의 몸을 다시 면밀히 검사하여 흠이 있는지 살폈다. 합격 판정이 내려지자 요아킴의 번제 바치기가
시작되었다.
그는 제사장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손을 양의 머리에 얹고서 이 번제를 통해 비천한 자신을 받아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왜 이 번제를 바치는지 말씀드렸다. 그는 시편의 감사시를 낭송하여 부르면서 하나님께 찬송을 올린 뒤 도살용 칼로
그 짐승의 고통이 최대한 빨리 끝나도록 목의 급소를 찔러 짐승을 도살했다.
요아킴과 제사장은 번제의 절차를 따라 신중히 그
제물을 마지막 순서까지 무사히 잘 드렸고 정성을 다해 바친 제사는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신다는 약속을 기억했다. 요아킴은 기쁨으로
충만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하나님의 은혜가 집안에도 가득히 들어차 있음이 느껴졌다. 요아킴은 매일 자신이 받은 축복을 감사하며
지냈고 어려운 시기가 닥칠 때에는 번제를 드린 순간의 결심과 감격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며 인내했다.
명칭에서 살펴 본 번제의 의미
요아킴이
드린 제물은 번제였다. 이때 그 제물은 전체를 모두 제단 위에 올려서 태웠다.
번제는 우리말로 ‘태우는 제사’를 뜻하며 대부분의
영어 성경들에서도 마찬가지로 ‘the burnt offering’이다. 그러나 번제의 히브리어 ‘올라’(ola)는 단순히
‘올리는 것’이다. 이것은 ‘올라가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 ‘알라’(ala)에서 기원한 명사다. 번제의 이름 ‘올라’는 우연하게도
우리 말 ‘올라가다’와 발음이 일치한다.
이런 이름이 의미하는 바는 번제의 짐승의 모든 부위가 제단 위에 ‘올려 바쳐져’ 불에
타면서 짐승 전체가 연기되어 향기로 하나님께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체를 태워 드린다는 의미를 반영하여 어떤 영어
성경들은 ‘전번제’(whole burnt offering)로 번역하기도 한다.
▲ 번제를 드리기 위해 양과 염소, 또는 소의 가죽은 벗겨지고 몸 안의 오물들이 제거됐다. 또 가죽을 제외하고는 모두 불태웠다. 번제는 이처럼 누구나 드릴 수 있었지만 드리는 자의 전적인 헌신을 필요로 했다.
번제의 특징
희생
짐승은 마당의 제단 근처에서 잡는데, 작은 가축인 양과 염소의 경우 “제단 북편”으로 도살 장소가 정확히 명시된다(레
1:11). 그러나 대형 가축인 소의 경우 위치가 정해지지 않는데, 아마 그 이유는 힘이 세고 덩치가 큰 소를 통제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번제는 가죽을 제외하고 다 태운다. 가죽은 제사장의 수고비로 돌아간다(레 7:8). 가죽을 벗기는 행위에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속사람의 온전한 헌신을 상징한다는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지만, 실은 가죽의 특성상 잘 타지 않고 다른 부위도
덩달아 잘 타지 않게 되며 또한 향기로운 냄새가 아닌 악취를 풍기기 때문에 가죽을 벗겼을 것이다.
가죽을 벗겨내고
짐승으로부터 더러운 똥와 오물들을 다 깨끗하게 제거한 뒤 모든 부위를 다 드렸다(레 1:9): 몸통, 머리, 정강이, 창자.
번제는 다른 제사들과 달리 인간의 몫이 없이 모두 하나님께 태워져 바쳐진 이유로 랍비들은 번제가 다른 희생 제사들보다 우월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적어도 감사의 목적으로 바친 목축하는 사람의 짐승의 번제와 농사꾼의 곡식의 소제 사이에 우열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번제가 가장 중요했던 이유는 가장 기본적인 감사와 헌신의 제사였기 때문일 것이다.
드리는 때
오대
제사중 처음 세 가지, 번제와 소제, 그리고 화목제는 자발적인 제사로 ‘감사’가 그 기본적 동기라 할 수 있다. 물론 각 제사의
용도는 그 외에도 다양했다. 예
를 들어 소제의 제물은 감사의 예물로만 바치지 않고 가장 가난한 사람을 위한 속죄제로 바쳐질 수
있었다. 번제 또한 자신의 비뚤어진 마음을 회개하는 마음으로 드릴 수 있었고 중대한 일을 앞두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자 바치기도
했으나 기본적으로 번제의 취지는 “감사와 봉헌”이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번제는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때에 성전에 올라가
번제를 드릴 수 있었다.
성경에는 노아가 홍수 후에 감사의 번제를 드릴 때 처음 등장한다(창 8:20). 여호와께서는
그 번제의 향기를 받으시고 다시는 사람의 악한 본성으로 인해 물로 땅을 심판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신다(창 8:21;
9:11). 이처럼 번제에는 하나님의 진노를 완화하고 태도를 바꾸시게 하는 기능이 있었다. 어린 양을 바친 아벨의 제사 역시
번제의 속성을 가졌다(창 4:2~4). 성경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아담이 타락한 이후 하나님께서 그에게 가르쳐주신 제사법이
후손에게 전수된 것이 번제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번제에 드린 짐승의 가죽이 제사장에게 돌아간 것은 에덴에서 아담과
이브에게 가죽옷을 입혔던 것을 연상시킨다(창 3:21). 이것은 분명 신학적 암시를 담은 구절이다. 에덴이 일종의 성전이었다고
가정하면 아담은 그 성전을 관리하는 제사장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아담이 최초로 번제 드리는 법을 전수받은 인물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성경에서 번제는 대부분 공적인 행사에서 기본 제사로 드려진다. 의외로 지극히 사적인 번제는 구약성경에서
드물다. 몇 가지 예를 살펴보자면 하나님께 감사와 기쁨을 표시하기 위해 아낌없이 모두 드릴 때(삼상 6:13~14), 완전한
헌신을 다짐할 때(창 22:2; 삿 11:31), 고난 중에 하나님께 탄원하며 의지하고자 할 때(삿 21:2~4; 미 6:6)
번제를 바쳤다. 때로는 서원을 이행하기 위해 화목제와 더불어(레 7) 번제를 함께 올리기도 했다(레 22:18).
그러나 번제를
의무적으로 바치는 경우도 있었다. 크게 다음 세 가지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a. 상번제 : 상번제란 항상 드리는
번제를 의미한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제사장이 일년 생 숫양을 드리곤 했는데(민 28:3~4)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도 아침에는
처소에서, 저녁에는 각자의 일터에서 마음으로나마 번제에 동참했을 것이다.
b. 안식일과 절기 : 상번제 외에 안식일에는 소제와 전제와 더불어 일년 생 숫양 두 마리를 함께 드렸다(민 28:9). 절기마다 번제에 요구되는 짐승과 그 숫자가 달랐다(민 28~29장 외).
c.
기타 : 경우에 따라 속죄제를 드릴 때 번제가 요구되기도 했다. 일례로 레위기 12장에서 산모가 아이를 낳으면 부정해졌는데 이때
그녀는 일정 기간의 자연 정화 과정을 거친 뒤 성전에서 속죄제와 더불어 번제를 바쳐야 했다. 그 외에도 다시 정결한 상태를
회복하기 위해 흔히 속죄제와 번제를 함께 드렸으며(레 14:13; 15:15), 나실인 서약을 할 때도 속죄제 및 화목제와 더불어
번제가 요구되었다(민 6장). 출산한 여인의 경우 속죄제는 부정결한 산혈로 인한 제단의 오염을 씻어내기 위해 바쳐지나 번제에는
자녀를 얻은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가 담겨있을 것이다. 부정한 자를 깨끗케 하는 속죄제에 번제가 동반되는 것도 다시 정결해진 것을
감사하기 위해서일 수 있다.
기능과 목적
번제의 일차적 목적은 감사로 드리는 헌신과 봉헌이다.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면 그분이 기쁘게 받으신다는 진술이 그 증거다(레 1:2~3). 즉 번제는 여호와께 전적인 기쁨이 되는
제사다.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 하신 하나님의 요구는 곧 아브라함의 완전한 섬김과 헌신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창
22:2). 자주 번제는 감사의 표시로 하나님께 바쳤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이때 화목제가 동반될 수
있는데 번제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로 드리고 화목제는 사람들을 초청해 그 고기를 먹으며 감사와 기쁨을 나누었다(출
18:9~10).
제물에는 제물을 바치는 사람의 마음이 담겨있어야 한다. 정성스러운 번제를 바치면 하나님께서 ‘그를
기쁘게 받으신다’고 말한다.
미드라쉬 레위기 주석에서 랍비들은 희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나님께 올리는 희생 제물은
부서진 마음이다; 오 하나님, 부서지고 회개한 마음을 멸시하지 마소서.”
번제에 의한 속죄는 전적인 헌신의 표시에 뒤따른 부수적
효과라 할 수 있다(레 1:4):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발생한다. 이미 죄를 위한 속죄제와
속건제라는 제사가 별도로 존재하는데 그렇다면 번제는 이런 제사들과 어떤 기능적 차이가 있는가?
속죄제·속건제는 쌍둥이 제사로서
구체적인 죄의 문제를 다룬다. 그렇다면 번제를 드린 목적은 인간의 기본적 죄성(sinfulness), 즉 원죄의 속죄를 위해서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단번에 모든 죄를 영원히 속죄하시기 전까지는 원죄 역시 거듭해서 속죄해야 할 대상 중 하나였다.
레위기에서 속죄제·속건제가 신설되기 전에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 번제를 드렸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욥 1:5). 즉 번제는 본래
구체적인 죄를 용서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이기도 했으나 속죄제·속건제가 생긴 이후로는 원죄를 속죄하는 제한적 기능만을 수행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참조. Milgrom 1991: 175~176).
물론 레위기에서 제사법이 제정된 이후에도
잘못을 저지른 뒤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번제를 드리는 경우가 있었다. 예컨대 다윗이 자신의 군사력을 과시하려는
야욕에서 인구조사를 벌이자 그 결과가 하나님의 재앙이 임하여 많은 백성들이 희생되었다. 다윗이 황급히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자
하나님의 진노가 가라앉고, 재앙이 멎었다(삼하 24:25; 대상 21:26). 자기 의를 드러내는 교만은 인간의 원죄의 근원적
뿌리다. 따라서 번제는 원래 하나님께 기쁨의 표시로 바쳐지곤 했지만 때로는 자신의 죄된 본성을 용서받고 욥처럼 부지불식간에 저지른
죄를 사함받기 위해 드리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번제는 하나님을 향한 기쁨의 봉헌물이자 감사의 표시로서 전적인
헌신과 아낌없는 드림을 보여주는 제사였다.
번제의 종류와 비둘기 번제가 주는 의미
번제의 짐승은 다음과
같이 등급이 나뉘었다. 본문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형편이 어려운 사람에게는 새나 곡식을 바치는 것을 허용했다는
사실에서(레 5:7, 11) 신분과 경제력에 따라 각기 다른 등급의 제물이 권장되었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여기서 반드시
명심해야 할 점은 제물의 크기나 종류와 상관없이 번제의 효력은 동일했다는 사실이다. 9절과 13절, 그리고 17절 끝에서 소와
염소/양, 그리고 비둘기의 번제 각각의 효과에 대한 최종적 진술이 나타난다: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소와
비둘기의 크기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게 차이가 나지만, 여호와는 모든 제물을 동등하게 평가하셨다. 겉모양과 크기를 보는 사람과
달리 하나님께서는 중심과 태도를 보시기 때문이다.
신약에는 두 렙돈 밖에 바치지 못하는 과부의 헌금에도 동일한 정신이 깃들어
있다는 대목이 있다(막 12장; 눅 21장). 번제의 정신은 차별 없는 제사에 있다. 누구에게나 여호와 앞에 나와 예배할 자격이
있다. 따라서 교회 안에 신분이나 빈부, 인종, 지역에 따른 차별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
레위기 1 Korean Living Bible
번제
1 여호와께서는 성막에서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전하라고 말씀하셨다. 2 “너희 중에 누구든지 나 여호와에게 제물을 드리고자 하거든 너희 가축 중에서 소나 양을 바쳐라. 3 “만일 그 제물이 소를 잡아 불로 태워 바치는 번제라면 흠 없는 수소로 하고 내가 기쁘게 받을 수 있도록 그것을 성막 입구 나 여호와 앞에서 바쳐라. 4 제물을 바치는 자가 번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으면 내가 그것을 그의 죄를 대신 속죄하는 희생의 제물로 받을 것이다. 5 그는 나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고 아론 자손의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성막 앞에 있는 제단 사면에 뿌려야 한다. 6 그리고 그는 그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것이며 7 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은 제단 위에 불을 놓고 그 불 위에 나무를 벌여놓은 다음 8 머리와 기름을 포함하여 그 각 뜬 제물을 단의 불붙는 나무 위에 벌여놓아야 한다. 9 그리고 그 사람은 내장과 다리를 물로 씻을 것이며 제사장은 그 모든 제물을 단 위에서 불로 태워야 한다. 이것은 불로 태우는 화제이며 [a]나 여호와를 기쁘게 하는 향기이다. 10 “만일 그 제물이 양이나 염소를 잡아 불로 태워 바치는 번제라면 그것은 흠 없는 수컷이어야 한다. 11 그 제물을 가지고 온 사람은 나 여호와 앞 제단 북쪽에서 그 짐승을 잡아야 하며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단 사면에 뿌려야 한다. 12 그리고 그는 그 짐승의 각을 뜨고 제사장들은 머리와 기름을 포함하여 각 뜬 그 제물을 단의 불붙는 나무 위에 벌여놓아야 한다. 13 또 그 사람은 내장과 다리를 물로 씻어야 하며 제사장은 그 모든 제물을 단 위에서 불로 태워야 한다. 이것은 불로 태우는 화제이며 나 여호와를 기쁘게 하는 향기이다. 14 “만일 나 여호와에게 드리는 제물이 새를 불로 태워 바치는 번제이면 그것은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여야 한다. 15 제사장은 그것을 단으로 가지고 가서 목을 비틀어 끊고 그 머리를 단 위에서 불태우고 그 피를 단 곁에 흘릴 것이며 16 멱통과 내장은 제거하여 제단 동쪽의 재 버리는 곳에 던져야 한다. 17 그리고 그는 그 새의 날개를 잡고 몸을 완전히 떼어내지 말고 찢어서 그것을 단의 불붙는 나무 위에서 태워야 한다. 이것은 불로 태우는 화제이며 나 여호와를 기쁘게 하는 향기이다.”
Q. 왜 하나님은 암컷이 아니라 수컷을 드리라고 하셨을까요? A. 수컷은 암컷을 대표하기 때문[QA성경]
학교에서 반장은 반학생을 대표한다. 마찬가지로 남성은 여성을 대표한다. 남성이 우월하거나 여성이 열등하다는 뜻은 아니다.
Q. 제물을 드리는 사람은 소를 어디에서 드리라고 하셨나요?(3) A. 회막 문에서
Q. 4절 “그는 머리에 안수할지니”에서 그는 제사장을 가리킬까요? 제물 드리는 사람을 가리킬까요? A. 제물 드리는 사람
Q. 제물을 드리는 사람은 회막 문에서 번제물인 소의 머리에 안수를 합니다. 안수는 무슨 뜻인가요? A. 손을 머리에 얹고 기도하는 것
Q. 제물을 드리는 사람은 안수할 때 무슨 기도를 했을까요? A. 자기의 죄와 허물을 고백하는 기도.
* 안수에는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죄가 번제물인 짐승에게 옮겨진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Q. 제사자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하면, 어떻게 된다고 말씀하시나요?(3) A. 그(제사자)를 위하여 기쁘게 받으심이 되어 그(제사자)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 속죄란 죄에 대해 값을 치르고 없애는 것이다. 제사자는 번제물인 짐승을 자기 죄의 값으로 지불하여 죄를 해결한다.
Q.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는(죽이는) 사람은 제사장과 제물 드리는 사람 중 누구일까요?(5) A. 제물 드리는 사람
** 수송아지를 잡는다는 것은 짐승의 목숨을 끊는 행위를 말한다. 제물 드리는 사람은 번제물의 목덜미를 칼로 그어 죽였다.
Q.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자기 죄를 위해 산 짐승을 죽일 때 어떤 기분이나 생각이 들었을까요? A. 다양한 대답이 가능하다.
** 자기 죄 때문에 짐승이 피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짐승을 불쌍하게 생각했을 것이고, 죄의 심각성을 깨달았을 것이다.
Q. 제사장들은 짐승의 목덜미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어떻게 했나요?(5) A.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 앞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 피를 그릇에 담아서 번제단 사면에 부었다.
Q.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는 것은 제사장과 제물 드리는 사람 중 누가 했을까요?(6) A. 제물 드리는 사람
** 각을 뜨는 것은 죽인 짐승을 머리, 몸통, 다리 등으로 잘라 나누는 것을 말한다.
Q. 번제단 위 나무를 준비하고 각 뜬 제물을 태우는 일은 누가 했나요?(7~9) A. 제사장
Q. 번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나타냅니다. 번제는 OO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말해보세요. 제물 드리는 사람, 번제물은 무엇을 가리킬까요?
A. 제물 드리는 사람은 죄인인 OO이고, 번제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번제물이 제사자의 죄를 속죄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셔서 OO의 죄를 없애셨다.
Q. 만약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셨다면, OO는 어떻게 될까요? A. OO의 죗값을 OO가 직접 치러야 한다. 즉 죽어서 영원한 지옥불에서 자기 죄에 대한 벌을 받는다.
구약의 5대 제사에는 번제 뿐 아니라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가 있다. 모든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번제물 때문에 제사자의 죄가 없어지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OO 대신 죽으셨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OOO을 위해 제물로 주셨다. 하나님께서 OO를 어마어마하게 사랑했기 때문이다. OO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해라.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사랑하는 아들을 제물로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OO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신 사실을 영원히 잊지 않게
하옵소서. OO가 일평생 예수님을 굳게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 번제(Burnt Offering)
번제(燔祭) : 불사를 번(燔), 구울 번(燔), 제사 제(祭)
구약(舊約) 시대(時代)에 하나님께 올리던 제사(祭祀)의 한 가지. 짐승을 통째로 태워 제물(祭物)로 바친 것으로, 매일(每日) 아침 저녁과 안식일(安息日) 또는 매달 초하루와 무교절ㆍ속죄제(贖罪祭)에 지냄.
번제(5930) (올라, ʽôlâh) עֹלָה
1. 제단 위에 드려진 것. 2. 상승
발음
/ 올라(ʽôlâh) 관련 성경 / 번제(창 8:20, 레 10:19), 번제물(출 10:25, 레 3:5, 민 6:11) [동] 올라가다(겔 40:26), 번제하다(창 22:7, 8). 구약 성경 / 9회 사용
1. 번제
번제는 레위기 1장에 기록되어 있다. 번제는 ‘전체를 태워 모두 바치는 수직적 헌신의 제사’1이다.
번제가 기록된 레위기 1장의 구조를 잠깐 살펴보자.
1-2절 서론 3-9절 소의 번제 10-13절 양과 염소의 번제 14-17절 새의 번제
1-2절에 해당하는 서론은 후에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고, 곧바로 번제로 넘어가자.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2절에 번역된 ‘예물’은 히브리어 고르반 막 7:11에서 언급된 것으로 ‘하나님께 드려짐’으로 받는다.
2. 용어해설
번제(Burnt Offering)는 ‘불태우는 제사’이다. 모든 제사는 불, 즉 화제를 기본으로 한다. 번제의 히브리어 단어 ‘올라’는 ‘올라가다’ ‘높이다’는 뜻인 ‘아라’에서 온 단어다. 희생제물을 불로 태워 하늘로 올려 보낸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 인듯하다.
3. 드리는 방법
1.2 드리는 방법
소를 드릴 경우, 먼저 ‘흠 없는 수컷’(3절)이어야 한다. 양과 염소인 경우에도 동일하게 흠 없고, 수컷이어야 한다. 새로 드릴 경우는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이어야 한다. 암수 구분은 없다. 회막 문에서 드려야 한다. 먼저 제사자(제사장이 아님)는 자신의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한다. 그(제사자)는 숫송아지를 잡는다. 그 때 흐르는 피를 아론의 제사장들은 피를 받아 회막 문 앞 제단 사방에 뿌린다. 그는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뜬다.(6절) 내장과 정강이는 물로 씻는다.
새로 드릴 경우 가축과 다르게 제단 위로 바로 가져간다. 제단에서 목을 비틀어 불사른다. 흐르는 피는 곧바로 제단 곁에 흘린다.(15절) 그러나 먼저 모이주머니와 더러운 것들은 제거하여 제단 동쪽 재 버리는 곳에 던진다. 몸을 찢지만 완전히 찢지 않는다는 점도 특이하다.
제물을 잡는 곳이 이곳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5절에서는 단지 ‘여호와 앞’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11절에서는 ‘제단 북쪽 여호와 앞’이라고 방향을 정해 두었다.
번제의 의미
우리는 가장 먼저 언급되는 번제를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 전부를 드리는 제사
첫 번째 교훈은 번제는 ‘모든 것’을 드려야 한다는 점이다. 제물이 준비되면 제사장들은 각을 뜬 제물의 머리와 기름을 제단 불 위에 놓여진 나무 위에 올려놓는다. 제사장을 불로 ‘전부’(9절) 태워 드려야 한다. 전부를 드린다는 의미에서 ‘전번제’로 부르기도 하는 이 제사는 제사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를 알려 준다.
제물은 제사자를 상징한다. 그는 안수함으로 자신을 제물과 대입된다. 죄를 지어 드리는 제사가 아니기 때문에 전가로 확정할 수 없으나, 제물과 제사자는 다른 존재가 아닌 것이다.
2 대가를 지불하는 제사
두 번째 교훈은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소’로 번역된 히브리어 ‘베헤마’는 들짐승인 ‘하야’와 반대되는 집에서 기르는 가축을 말한다. 대체로 소로 번역되지만 양과 염소와 같은 더 작은 가축도 포함한다. 구약 시대에 소는 최고의 가치를 지닌 가축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사장이나 족장들이 드릴 때는 소를 드린다. 가축이 귀했던 시대에 소를 제물로 드린다는 것은 큰 희생의 의미를 지닌다. 또한 사냥을 통해 공짜까지라고 할 수는 없으나 약간의 노력으로 드릴 수 있는 들짐승이 아니다. 소는 가축을 기르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재산이자 가족과 같은 의미로도 사용된다. 소는 자신이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가치를 하나님께 다린다는 의미다. 또한 흠이 없어야 한다는 조건은 일반 소가 아닌 최고의 소를 드려야 한다는 말이다.
제사(예배)는 실용적 측면에서 가장 무의미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종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는 사치스러운 것이다. 예배드림은 자신의 이득을 위한 것이 아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상징적 행위이다. 번제가 비록 사랑과 헌신을 목적으로 하지만 속죄가 전제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4절)
고든 웬함은 Milgrom의 말을 인용하여 ‘속죄제는 성막의 다양한 부분을 죄로 말미암아 일어난 부정에서 정결하게 하는 것과 관련 있지만 번제는 더 일반적인 의미에서 죄를 속죄하는 제사’라고 말한다. 즉 번제는 부지중에 지었을 죄에 대한 제사인 것이다.(민 15:24, 욥 1:5)
3 감사와 헌신
김경열은 번제가 가치 있는 이유를 ‘가장 기본적인 감사와 헌신의 제사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죄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자원하여 드리는 감사와 충성의 표시로서 드리는 제사인 것이다. 그렇기에 종종 죄와 상관없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 드리는 화목제와 동반되기도 한다. 번제가 모든 제물을 불살라 드리는 전적 헌식의 의미를 담고 있다면, 화목제의 경우는 사람들을 초대함 함께 음식(제물)을 먹으며 기쁨을 나눈다.(출 18:9-10)
4 흠 없는 수컷
가장 중요한 의미는 하나님에 드려지는 제물은 ‘흠 없는 제물’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수컷이 대표성을 상징한다면, 흠 없음은 제물의 가치를 의미하다. 아무리 크고 멋있어 보여도 흠이 있다면 열납 되지 않는다. 22장에서 자원제물이나 서원제물이 번제로 드려질 경우, 조금의 흠도 허락되지 않는다. 즉 최고의 제물을 드려야 한다. 제물에 흠이 없다는 말에는 몇 가지의 의미를 갖는다. 후대로 넘어가면 제물을 돈으로 구입해 드리지만, 당시는 집에서 기른 가축이어야 했다. 흠이 없기 위해서는 가축 중에서 아무거나 드리면 안 된다. 자신이 좋은 것과 하나님께서 바라는 것은 다르다. 흠 없는 제물을 드리기 위해서는 제물로 드릴 가축을 꼼꼼히 살펴야 한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겉으론 흠 없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러지 않을 수 있다. 준비되지 않는 제사는 위험할 수 있다.
번제를 드릴 때는 수컷을 드려야 한다. 이 또한 다른 제사와 차이를 보인다. 속죄제의 경우, 족장은 숫염소를 가지고 와야 하지만 일반 백성은 암염소를 드려도 된다.(레 4:22-31) 새를 드리는 경우는 특별히 예외가 적용된다. 새는 극빈자들을 위한 제물이며, ‘흠이 없어야 한다’는 조항이 붙지 않는다.
존 E. 하틀리는 ‘가난한 자가 번제물을 구하는 데 있어서 선택의 폭을 더 넓혀 주었을 것’이다.
매일 드려지는 제사
레위기 존 E. 하틀리는 번제가 매일 드려지고, 절기 때마다 드려졌음을 상기킨다. 대하 16:40에 의하면 다윗의 지시한 것이 율법에 나타난 대로인지 아니면 다윗이 정한 것인지 약간 모호하다. 하지만 아침과 저녁에 번제를 드리는 행위는 그 이후 계속되었을 것이다.
김경열은 번제를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a. 상번제
상번제란 항상 드리는 번제를 의미한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제사장이 일 년생 숫양을 드리곤 했는데(만 28:3-4)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도 아침에는 처소에서, 저녁에는 각자의 일터에서 마음으로나마 번제에 동참했을 것이다.
b. 안식일과 절기
상번제 외에 안식일에는 소제와 전제와 더불어 일년 생 숫양 두 마리를 함께 드렸다.(민 28:9) 절기마다 번제에 요구되는 짐승과 그 숫자가 달랐다.(민 28-29장 외)
c. 기타
경우에 따라 속죄제를 드릴 때 번제가 요구되기도 했다. 일례로 레위기 12장에서 산모가 아이를 낳으면 부정해졌는데 이때 그녀는 일정 기간의 자연 정화 과정을 거친 뒤 성전에서 속죄제와 더불어 번제를 마쳐야 했다.
영적인 교훈
번제의 의미를 정리하면 이렇다. 번제는 직접적인 죄로 인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부지중에 지었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대하 29:7-8)가 임하는 것을 막는 것이다. 고든 웬함은 ‘사람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불쾌감이 처벌로 이어지지 않도록 차단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악한 본성을 지닌 인간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죄를 지을 수 있다. 자신이 인지하든 하지 못하든 죄는 언제든지 타락한 인간의 심성 속에 존재한다. 속죄제가 계명을 위반한 경우에 드리고, 속건제가 물질적 보상에 대한 것이다. 그렇다면 번제는 무엇인가? 번제는 인간의 근본적 죄성에 대한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겸손의 마음이다. 번제는 속죄의 의미를 전제하지 직접적이지 않다. 즉 자신을 되돌아보며 혹시 모르고 지었을 부지중의 죄에 대해 하나님께 자신의 허물을 고백하는 것이다.
고든 웬함은 더 나아가 번제가 ‘구원에 대한 감사제로, 자원제로, 또는 서원이 이루어질 때 서원제로 드려지는 것이 매우 적절’하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는 감사로 드리는 제사이다.(시 50:23, 겔 46:2) 고든 웬함은 안수를 기도와 연관지어 하나님과의 친밀함과 정성어린 예배로 확장시킨다. 번제에서 제사자는 하나님에 대한 깊은 사랑과 헌신에 대한 결심을 갖는다. 자신의 죄인됨을 부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의 삶을 인도할 것을 간구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번제는 속죄의 의미는 전제하는 동시에 감사와 찬양의 제사이다.
신약으로 나아가기
신약에서 번제라는 단어는 오직 두 곳에서 사용된다.(막 12:33, 히 10:6-8) 나머지 부분은 구약의 본문을 인용하거나 의역한 것이다. 나머지는 함축적 의미에서 번제가 언급된다. 마가는 예수님의 죽음을 ‘자기 목숨을 위한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라고 강조한다(막 10:45).
바울 역시 번제를 암시하는 말을 한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에베소서 5:2)
번제의 핵심은 자신의 죄성에 대한 깊은 숙고이다. 번제가 죄에 대한 직접적인 연관이 아니지만 자신의 악한 본성으로 인해 지었을 수도 있는 죄를 겸손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주님은 세족식을 거행하면서 목욕을 한 자는 발만 씻으면 된다고 하셨다. 매일드리는 상번제는 매일의 회개와 같은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기를 노력하는 것이며, 매일 주어지는 시간들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다.
안수(按手)는 피차간 서로 언합하여 하나기 됨을 상징하는 행위로서 안수의 목적은 자신이 가진 그 무엇을 타인에게
전가(轉嫁)시키시 위한 것이다. 따라서 제물에 안수하는 행위는 제물을 드리는 자가 안수를 통하여 그 제물과 하나됨을 나타내는
동시에 자신의 죄를 그 동물에게 전가시킨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행위인 것이다. 따라서 제물 드리는 자는 자신이 직접 피를
흘리지 않고도 자신과 연합된, 안수받은 제물의 피흘림을 통해 자신의 죄를 속함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 제물 드리는
자는 자기 대신 처참히 죽어가는 제물의 모습을 통해 죄의 심각성과 속죄의 은총을 마음속 깊이 체험해야 했다.
'안수할지니'에
해당하는 원어 '사마크 야도'는 '그가 자신의 손을(위에) 얹힐지니'란 의미인데 원어상 그 말 속에는 두가지 뜻이 내포되어
있다.
첫째, 제물을 드리는 자가 '직접' 자신의 손을 제물 위에 놓아야 한다 둘째, 제물 위에 손을 얹되 '힘껏
단단히 누르면서' 얹어야 된다(카일, Keil) 특히 이 점에 대해 유대 랍비들의 말을 빌리면, 제물을 드리는 자는 그의
양손을 희생 제물의 양 뿔 사이에 얹고 있는 힘을 다해 힘껏 눌러야 한다(Matthew Henry).
안수(按手)
안수는 다양한 희생들에서 발견되는 의례다. 번제,
화목제(3:2, 8, 13), 속죄제(4:4,15, 24, 29, 33), 속건제에는 아무런 의식도 제시되어 있지 않을지라도, 이
안수 의례가 역시 그 희생 의식의 일부였던 것으로 추측될 수 있다.
사람이 짐승의 머리에 한 손을 올렸는지 아니면 두 손을
올렸는지는 논쟁이 되고 있다. 몇 군데에서 사람이 바치는 대상 위에 두 손을 모두 올린다고 명시적으로 진술된다(16:21; 참조.
민 27:23; 신 34:9). 일반적인 용어인 야도("그의 손")는 짐승에게 한 손을 대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탈굼역(Tg)은 레위기 1-4장에 있는 야도를 "그의 오른손"으로 번역한다. 그렇지만 미쉬나(Mishnah)는 두 손의 안수를
요구한다(m. Menah. 9.8).
이 의례의 의미를 밝혀 보려고 그 동안 많은 의견들이 제안되었다. 한 입장은 희생을 드리는 사람이 자신의 죄를 짐승에게
전가한다는 것이다(Noordtzij, 22-23). 이것은 속죄일의 아사셀 염소의 경우에 해당되지만(16-21), 그 의례의
의미를 다른 희생들에 적용하는 것에는 심각한 난관들이 있다. 아사셀의 경우에는 대제사장이 한 손이 아닌 두 손으로 그 염소 위에
안수하며, 그 염소는 회중의 죄를 짊어진 채 더렵혀진다. 로드리게즈(Rodriguez, Substitution, 217-19)와
키우치(Kiuchi, Purification Offerings, 115)는 이러한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10:17을 토대로
속죄제의 고기가 죄를 짊어지면서 동시에 가장 거룩한 것으로 분류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입장은 속죄제의 고기는 제단에서
태우지 않지만, 제사장들이 먹거나 아니면 진 밖의 정결한 장소에서 태웠다(4:12). 게다가 안수 의례는 죄의 대속에는 거의
관심이 없는 희생제인 화목제 의식의 일부다(3:2).
노트(Noth. 22)는 사람이 자신의 인격을 그 짐승에게 전가한다고 생각한다. 이 입장의 변형인 또 다른
견해는 이러한 몸짓으로 사람이 제물을 통해 얻는 영적인 힘이나 거룩을 스스로 요청하고 있다는 것이다(J. Pederson,
Israel, 3-4; 366). 그러나 여전히 이러한 두 가지 해석을 화목제에 적용하기는 어렵다.
다른 이론은 바치는 자와 희생물 사이에 동일화가 형성된다고 주장한다(W. R. Smith. Religion of
the Semites, 325: R. K. Yerkes. Sacrifices in Greek and Roman Religions
and Early Judaism, 134).
페터(R. Peter, VT 27[1972] 48-55)는 제물에 한 손을 얹는 것은
바치는 자가 그 짐승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몸짓인 반면, 두 손을 올리는 행위(예를 들어, 레 16:21; 24:14)는 한
편에서 다른 편으로의 어떤 것의 전이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 이를테면, 한 사람이 갖는 특별한 신적 능력을 다른 사람에게
부여하는 행위(신 34:9; H. H. Rowley, Worship in Ancient Israel, 133; 참조.
Hoffmann. 1:122).
동일화의 범위는 이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 다양하다. 로울리(Rowley)의 제안에
의하면, 바치는 자는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어떤 장벽이 있든지 짐승의 죽음이 그것을 제거하고, 또한 바치는 자가 이 의례로써
감사와 충성 속에 하나님께 자신을 양도하는 것을 상징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짐승과 동일시한다(133). 게세(H. Gese,
Essays on Biblical
Theology, tr. K. Crim[Minneapolis: Ausgburg. 1981]
104-8)가 믿는 바는, 희생을 가져오는 당사자가 안수로 자신을 그 짐승과 동일시함으로써 그것이 자신을 대신해서 역할하게끔
한다는 것이다. 거룩한 제단 위에 짐승의 생명을 앙도할 때, 역시 바치는 자의 생명이 그렇게 상정적으로 양도된다. 야노브스키(B.
Janowski. Siihne. 220-21)는 비슷한 해석을 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짐승의 대체가 상징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당사자의 생명의 양도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바치는 자는 안수를 통해 그 짐승의 죽음에 동참한다.
속죄일에 아사셀을 위한 염소에게
죄들을 전가하는 의례와 대조적으로, 이 의례는 주체적인(subjective) 전가를 표현한다(아사셀 염소는 불특정 다수의 죄와
관련되지만, 번제의 안수는 개인이 주체가 되어 직접적인 전가가 된다는 의미). 즉 짐승의 네페쉬("생명력")가 바치는 자의
네페쉬를 대신한다(참조. 레 17:11).
키우치(Purification Offering, 116-19)는 마찬가지로 그 의례가
대체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는 이 견해의 근거를 "열납"이라는 '라촌'의 의미에 두었지만(참조. 7:18), 본문은
대체의 성격에 대해 어떤 분명한 증거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 의례가 화목제에서 사용된다 할지라도(3:2), 이러한
입장들은 속죄제에 적합할 수 있다(4:1-5:13). 그러나 그 제물이 어떤 방식으로 대체하는 제물로 간주되었는지 아무것도
암시되어 있지 않다(de Vaux, AI. 416, 448-49: Bertholet. 2-3). 대체의 개념이 원래의 안수 행위
배후에 있었는지의 여부는 구약 본문들로부터 결정짓기가 불가능하다.
3장과 4장에 있는 규정들에서 안수 행위가 짐승의 도살
뒤에 따르는데, 렌토르프(Rendtorff, 35-40)는 번제 규정 단락(1:3-17)의 4절에서 뒤따르는 단어들이 "그리하면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주목한다. 그는 이 절이 안수 의례에 대한 설명이라고 해석한다. 즉 이 의례는
희생이 짐승을 바치는 개인에게 영적인 효과를 발휘하도록 하는 데 필수적이다. 바꾸어 말하면, 안수는 희생의 혜택이 바치는 자에게
발휘되는 것을 보증한다. 나아가 유대 전승이 강조하는 대로(참조. b. Menah. 93b), 이 의례는 대리자가 다른 사람을
위해 제물을 드리지 못하게 만든다.
바치는 자는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하면서 연약한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무가치함과 죄성을 고백하고 또한 기도를 읊거나 시편을 인용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진술한다.
그런 경우들을 위한 가능한
시편들로서 남아 있는 것들은 시편 40, 51 그리고 66편이다. 또한 제사장은 시편 30편이나 50편과 같은 어떤 시편을
사용하여 응답해 주었을지도 모른다(Wenham, 53). 죄의 대가가 죽음이기 때문에 바치는 자는 분명하게 짐승의 죽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한다. - WBC레위기 주석에서 발췌
번제에 대한 해설
번제는 중앙 성소에서 가장 정기적으로 바치는 제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규정은 개인적인 번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가장 큰 관심은 그 희생이 하나님께서 그것을 받으시는 방식으로 드려진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예배자는 성소 입구에서 흠 없는 수컷을
바쳐야 하고 이어서 지정된 의식을 신중하게 따라야 했다. 열납되는 희생은 여호와께서 바치는 자의 죄의 성향을 위한 대속으로 그
짐승을 받으신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사자는 자신의 제물을 통해 속죄되면서 확신을 가지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갔을 것이다.
그는 그 외의 다른 제물들을 자유롭게 드릴 수 있었다.
보통 번제를 드린 후에 사람들은 화목제를 바쳤는데(3장), 그것은 자신의
가족이나 혈족을 위한 축제 음식으로 쓰여졌다.
번제 드리기가 여호와의 개인적 예배의 중대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너무
가난해서 소나 앙/염소를 바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약관이 만들어졌다. 그런 사람은 비둘기나 산비둘기를 바칠 수 있었다. 이러한
새들은 매우 흔한 것이어서 쉽게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새의 작은 크기를 감안해 볼 때 의식 절차는 눈에 띄게 달랐으나 효력은
동일했다.
번제를 드리는 가운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의 완전한 죄성과 하나님의 전적인 생명에 대한 주권을 인정했다.
왜냐하면 번제는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제사장이나 바치는 자에게는 어떤 것도 돌아가지 않았다. 그것은 목자나
농부의 기본 재산에서 취한 값비싼 예물이었다. 이 제물을 가져와 바치는 자는 여호와께서 일용할 양식을 채워 주실 것을 신뢰하면서
믿음으로 행동했다.
이 제물을 통하여 하나님은 당사자에게 인간의 일반적인 죄성에 대하여 용서를 부여했다. 그런 용서는 주기적으로 필요했다.
타락한 인간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저주 아래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하면서 매일 죄를 짓는다. 온갖 인간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갈등들은 인간의 기본적 죄성에 대한 증거가 된다. 모든 사람이 이 죄성에 굴복하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유지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자신의 죄성을 대속해야 한다. 고대의 이스라엘 사람이 얼마나 자주 그런 제물을 바쳤을까? 아마 각
사람의 죄에 대한 자각과 여호와를 향한 열심의 정도에 따라 몹시 다양했을 것이다. 최소한의 기준은 아마도 절기에 바치는 연례적인
희생이었을 것이다.
번제에 대한 이해는 신약의 많은 구절들을 조명해 준다.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에 대한 신약의 언어 중
많은 것들이 일반적인 것이기에 구약의 제의 법안의 특정한 희생들과 관련짓기가 어렵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은 번제에 비견될 수
있다. 이 제사에 요구된 짐승과 마찬가지로 그분은 흠 없는 남성이었다(벧전 1:18-19). 그분은 하나님께 완전한 복종의 삶을
살면서 결점이 없으셨다. 이러한 이유로 그분의 희생은 옛 언약 하에서 바친 그 어떤 제물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었다(히
9:23-26). 십자가의 제단 위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을 성부 하나님께 완전히 드리셨다(롬 8:32). 번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였다(엡 5:2). 빈번하게 드린 번제와는 달리, 그리스도께서는 단번에 영원한 제사로
자신을 드리셨다(히 10:12). 그리스도의 최종적인 죽음은 하나님께 대한 신실한 예배의 일부인 짐승 제사를 종결시켰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해 믿는 자는 더 이상 매일 번제가 드려지는 손으로 만든 성소에서 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된다(히
7:27). 오히려 예수께서는 하늘의 지성소로 자신의 피를 가져가심으로써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위한 영원한 구원을 보증해
주셨다(히 9:11-14). 그렇지만 믿는 자는 구약의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매일의 속죄를 필요로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만으로 충분하다. 요한이 쓴 대로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계속적으로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한다"(요일 1:7).
신약의 신자가 더 이상 성소에 짐승을 가져오지 않을지라도,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여호와의 예배가 그러했던
것처럼 완전한 헌신을 요구한다.
구약의 신자는 자신의 가축 떼에서 가져온 희생을 드림으로써 자신의 헌신과 믿음을 표현했다. 자신이
제사장인 신약의 신자는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사랑과 신뢰를 자발적으로 표현했다. 짐승을 대신해서 그는 영적인 희생을
드렸다(벧전 2:5).
히브리서 13:15-16에 따르면, 믿는 자는 찬양의 희생제와 선행의 제사, 그리고 자신의 소유를 이웃에게
베푸는 나눔의 제사를 드린다. 사람이 이러한 전심으로 희생들을 드릴 때, 그의 제물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다. 하나님께서
제물을 받으실지에 대한 관심은 신구약 모두에서 공통적이다.
바울은 신자들을 위해 희생의 은유를 확대시킨다. 그는
신자들에게 자신의 몸을 살아 있는 희생(개역 성경: 산 제사)으로 드리라고 말한다(롬 12:1, 2).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제사는 번제다. 왜냐하면 번제물 전체가 제단에서 완전히 태워지는 것처럼, 신자는 자신을 전적으로 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짐승이 흠이 없어야 하는 것처럼 신자도 역시 거룩해야 한다. 이러한 개인적인 제물이 효력을 갖기 위해 번제와 마찬가지로 그 제물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만한 것이어야 한다. 신자의 삶은 살아 있는 번제로서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 WBC
레위기 주석에서 발췌
번제의 영적의미(레 1:1-17)
레위기 1장의 내용은 번제에 관한 것입니다. 번제의 핵심은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헌신과 감사에 있습니다. 번제는 제물을 모두 태워 향기로운 냄새가 하늘로 올라가게 하는 제사방식입니다.
제물은 예배자의 생활형편에 따라 수소, 숫염소, 숫양, 산비둘기 또는 집비둘기 가운데서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흠이 없어야 했고, 1년 된 수컷이어야 했습니다.
제사방법은 예배자가 제물이 될 짐승을 끌고 성막문 하나님 앞으로 끌고 갑니다. 속죄를 위해서 예배자가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를 합니다. 예배자의 죄를 제물에게 전가시키는 것입니다. 죄를 뒤집어 쓴 제물이 예배자를 대신해서 죽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는 교훈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자가 제물을 잡아 그 피를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그 피를 번제단 사면에
뿌립니다. 예배자는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뜹니다. 제사장은 그 뜬 각과 머리와 기름과 물로 씻은 내장과 정강이를 단 위에서
불로 태웁니다. 양과 염소도 동일한 방법으로 시행합니다. 단 비둘기의 경우에는 제사장이 직접 새의 머리를 비틀어 끊고 몸은 쪼개어
단 위에 불사르며 피는 단 곁에 흘리고 멱통과 창자 등은 재 버리는 곳에 버립니다.
번제는 가죽을 제외한 모든 것을 불로 태웁니다. 불로 태우기 때문에 번제를 화제라고 부릅니다. 번제는 가죽을 제외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몫이 되고, 제사장은 가죽을 취하지만, 예배자의 몫은 없습니다. 번제의 영적인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생명 전체를
바쳤다는 것이고, 성도들의 온전한 헌신을 의미합니다. 불로 태우는 화제의 경우, 번제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죄 모두에 해당이 됩니다.
이제 번제가 갖는 영적의미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번제에 쓰인 제물들은 제각각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먼저 어린 숫양은 순전함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마 10:16)고 하셨습니다. 또 온순한 양은
부드러운 마음씨를 상징하며, 형제사랑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은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굶주리고 헐벗은
자들, 병들고 옥에 갇힌 자들, 나그네 된 자들을 돌보고 구해준 선한 사람들을 양의 무리로 분류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했고, 계시록에서도 예수님을 어린양으로 묘사했습니다. 수소는 어질고 착한 마음씨를
상징합니다. 소는 밭을 갈거나 짐을 나르는 일에 쓰이지만, 불평이나 잔소리 없이 주인의 일을 묵묵히 수행합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이루기 위해서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묵묵히 골고다 언덕에 오르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염소는 험한 바위산이나 높은
곳을 좋아합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험한 곳도 마다않고 달려 나가는 참 신앙인을 상징합니다.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할 뿐
아니라, 오랫동안 메시지 전달자로 활동해 왔습니다. 평강의 왕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을 상징하는
새입니다.
둘째, 번제는 온전한 헌신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흠이 없는 산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어린 새끼들처럼
마음과 생각이 순전하고 깨끗하고 순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깨끗한 마음을 받으십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복을 주십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1절에서,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하기를,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하셨습니다.
셋째, 번제는 영적 예배의 그림자입니다. 번제의 핵심사상은 온전한 헌신입니다. 온전한 예배를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참 예배의 그림자가 번제인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온전한 헌신, 곧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영적 예배란 무엇을 말할까요? 출애굽기와 레위기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지시하시고 보여주신 그대로의 예배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순종의 예배를 기뻐하십니다. 사도들이
우리에게 보여준 예배는 예수님의 생애를 재현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사도들의 가르침을 정통신학으로 여겨왔습니다.
따라서 사도들의 가르침대로 하지 않는 예배는 온전한 예배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갈릴리에서의 말씀의 사역과
예루살렘에서의 다락방사역으로 나뉩니다. 기독교는 교회가 처음 세워진 때부터 제1부 말씀예배와 제2부 성만찬예배를 온전한 예배로
드려왔습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말씀과 기도와 찬양예배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로 생각하면서 예배에서 주의 만찬을
제외시켜왔습니다. 가톨릭 미사가 갖는 미신적인 요소들 때문이었습니다. 초기 개혁가들이었던 루터나 칼뱅 등은 가톨릭 미사의 미신적인
요소만을 제거한 채 매주일 예배 때마다 주의 만찬을 시행하고자 했으나 칼뱅의 선임자이자 군인이었던 츠빙글리가 주의 만찬을 일
년에 4차례로 제한시켜버린 것이 그만 굳어져서 바로 잡을 기회를 놓치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그 잘못된 전통이 그대로 시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만찬이 빠진 예배는 기도회이지 온전한 예배라 말할 수 없는 불완전한 예배인 것입니다. 1960년대부터
수많은 신학자들이 이 점을 지적하고 있고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너무 오랫동안 굳어져 있고 오해도 있는 터라 쉽게
고쳐지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온전한 예배는 하나님의 뜻대로 드리는 예배란 사실이고, 하나님의 뜻은 성서에 기록되어 있으며, 기독교
예배는 신약성서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신약성서교회예배가 바르게 회복되어야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그 점을 깊이 인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레위기는
히브리성서에서 첫 글자를 따서 바이크라[외치다] 라는 명칭으로 나타난다. 반면에 헬라어-라틴어성서에서는 제사장들을 위한 책으로
분류하여 헬라어 성서에서 류에이티콘[leueitikon]과 라틴어 성서에서 레비티콘[levitikon]으로 불리웠으며, 결국에
헬라어-라틴어성서에 따라서 ‘레위기’로서 불린다.
전체 구조
레위기는 처음부터 이
책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출애굽 율법의 연속선상에 있음을 제시한다. 레위기 1장 1절과 7장 38절 그리고 27장
3절을 보면, 계시의 장소로서 시내산이 등장한다. 즉, 레위기 1장 1절은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부여받은 장소와 시기를
출애굽의 연장선상으로 제시하며, 또한 하나님의 현현 → 율법 수여 → 제의에 필요한 제도와 기구 제작(이상 출애굽)과 더불어,
후속으로 제의의 이론과 실행을 제시하는 레위기의 시작을 알린다.
레위기 본론에 해당하는 레위기 1-25장은 간단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먼저 소위 욤 키푸르(Yom Kippur)라고 하는 속죄일이 나타나는 레위기 16장을 기준으로 정확하게 두
개의 주제가 나누어진다.
전반부(레 1-15장)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죄를 어떻게 제거하고 나아갈 수 있는가를 제시하는
제사법과 제사의 실행(레 1-7장)과 하나님과의 교제를 거룩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 설명하는 소위 정결법(레
11-15장)이 제시된다. 이 전반부(레 1-15 장)는 주제가 두 개인 것 같지만, 정확하게 보면 인간이 하나님에게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을 제거한다는 측면에서 하나의 주제로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속죄일(레 16장)을 지나 소위
‘성결법전’(Holiness Code)으로 불리우는 법전이 레위기(레 17-27장) 차지한다.
레위기의 주제를 힘있게
이끄는 것은 세 가지 큰 단락 속에 섞여서 있는 이야기체들이다. 3개로 이루어진 이야기 형식들은(레 8-10 장; 16장;
24:10-23) 주제와 주제를 힘있게 연결하고, 전개된 주제를 끝내면서 전환점으로서 새로운 주제를 이끈다.25) 첫 번째 이야기
형식은 제의의 이론과 실행(레 1-7장)을 마감하는 이야기 형식으로 제사장의 위임과 역할에 대한 레위기 8-10장이다. 제사를
드리기 원하는 자와 주재하는 자가 레위기 8-10장을 통해 연결된다. 또한 제사장은 그 뒤에 나타나는 정결법(레11-16장)에서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판별하는 주체가 된다. 이 이야기에서는 제사를 진행하게 하는 주체와 정결을 판단하게 하는 주체, 즉
제사장이 전반부를 이끌어 나간다.
두 번째 이야기 형식은 레위기 16장으로서 대속죄일(Day of Atonement)이라고 한다. 선택된 백성이 거룩한 길로 가기 위하여 지난 죄를 회개하고 정리하는 과정을 제시한다.
세
번째 이야기 형식은 세 가지 이야기체 중 가장 짧은 구절로서 레위기 24장 10-23절에 나타난다. 이 이야기는
신성모독(10-16절)과 사법적 결과들(17-23절)을 제시한다. 여기에서 신성모독이 인간이 행하는 범죄들 중에 가장 극단적인
제시하며, 마지막 결론을 유도하는(레 26장) 법전을 강조할 수 있게 한다.
레위기의 결론은 레위기 26장에서 볼 수
있다. 레위기 26장은 축복(레 26:3-13)과 저주(레 26:14-46)으로 나누어지며, 율법의 순종과 불순종에 따른 결과를
제시한다. 율법에 대한 순종은 추수를 위한 충분한 비(레 26:4), 점령한 땅에서의 평화(레 26:6),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하나님이 함께하심(레26:11-12)이다. 반면에 율법에 대한 불순종은 병과 슬픔(레 26:16), 전쟁과 기근, 역병(레
26:23-29)들이다. 레위기 전체뿐만 아니라, 율법서의 결론을 이끈다.
결론 부분의 마지막 레위기 27장은
종교적 서원으로 나타나는 부록이다. 처음 부분은 자발적인 서약을 다루는 인간(2-8절)과 짐승, 물질(9-13절)과 헌정된
물건(14-2절)에 대하여 다루며, 그 헌정된 것에 대한 제약 규정이 뒤따른다(26-33절). 마지막 서원의 종착역은 십일조 (레
27:30-34)에 해당한다.
2.3.1. 제사법(레 1-7장)
레위기
1-7장은 제사에 대한 율법을 다루고 있는 장들이다. 여기 나오는 제사들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만드는 행위이다.
특히 인간이 거룩한 존재(하나님)와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의 시도이다. 이스라엘은 제물과 제물을 드리는 자와 제사장이 중심이 되어
거룩한 존재와의 만남을 시도하였다. 다음에 제시되는 5개의 제 사법은 이스라엘 제의의 가장 기초적인 제사 방법이다.
번제(레
1장) :
히브리어 명칭은 올라(레 1장; 6:8-13)이며, ‘올라가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번제는 가죽과 부정한 부위(예,
새의 모이 주머니 등)를 제거하고 동물 전체 부위를 화제(불에 태우는 행위)로 드린다. 원역사의 이른 시기부터(창 4:4;
8:20; 15장: 아브라함) 드려진 제사이다. 이 제사가 속죄의 기능을 가졌다는 것은 아마도 희생제물 머리에 손을 얹는 행위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선물로서 작용한다. 레위기 6장 8-13절에 또 한 번 나오는 번제는 제사장의 책임이 적혀
있다. 제사장은 제물을 밤새도록 타게 해야 하며, 아침에 옷을 갈아입고 단 옆에 있는 재를 치우는 역할을 했다.
소제(레 2장) :
히브리어 명칭은 민하(레 2장; 6:14-18)이다. 이 단어의 원래 의미는 ‘선물’이다. 즉, 권력자에게 호의를 불러일으킬 목적으로 주는 예물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레위기
2장에서 사용하는 공식 명칭은 ‘소제’ 또는 ‘음식제’이다. 소제물은 곡식 가루로 드리는 제사이다. 번제가 가축을 드리는
제사라면, 소제는 밭에서 추수한 곡식을 드리는 제사이다. 동물보다는 저렴한 가격의 곡식으로 드려진다는 점에서 가난한 자들이 드리는
것이다. 레위기 6장 14-18절에서 제사장들은 한 움큼의 소제물을 단위에 향과 함께 태워야 했다. 나머지는 누룩을 넣지 않고
아론과 그의 자손들이 먹을 수 있었다.
화목제(레 3장) :
이 제사는 히브리어 단어 샬롬(평강)에서 나온 단어와 희생
제물을 뜻하는 제바흐를 합성해서 사용하는 용어이다. 두 단어에서 보듯이 이 제사의 특징은 내부적 평안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평안을 비는 용어로 사용된다.(창 29:6; 삼하 18:30 등)
이 제사는 짐승의 기름기 일부만 제단에서 태워
하나님께 드리며, 나머지는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과 주위에 있는 자들이 나눠 먹는다. 나눔의 교제는 화해와 화목을 전제로 한다.
후반부 제사장 규정(레 7:11-16)에서 화목제물은 감사의 표현으로 무교병과 무교전병으로 드리며(레 7:12), 서원이나
자원하는 맹세(레 7:16)로도 드려진다. 제사장의 몫으로는 가슴과 오른쪽 뒷다리이며,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속한 것이다.(레
7:28-34)
속죄제와 속건제(레 4:1-6:7) :
이 단락은 두개의 비슷한 제사 종류로서 속죄제(레
4:1-5:13)와 속건제(레 5:14-6:7)로 나눠진다. 속죄제와 속건제는 위에서 제기한 3개의 제사-번제, 소제와 화목제–
와는 다른 차이를 제시한다. 물론 5개의 모든 제사가 개인의 속죄에 관여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의 3개의 제사(번제,
소제 그리고 화목제)는 인간이 지은 직접적인 죄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스스로 드리는 감사와 찬양의 성격을 가진다.
반면에 속죄제와 속건제는 부지 중에 ‘야훼의 계명을 어긴 경우’(레 4:2)에 해당한다. 위의 세 가지 제사가 자발적인 행위라고
한다면, 속죄제와 속건제는 부지중에 죄를 범한 경우에 드리는 제사이다.
위의 개념설명에서 보듯이, 속죄제는 히브리어에서 죄에 대하여 말하는 하타[죄를 짓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명사로서 핫타아[일반적인 죄(창 31:36); 죄를 깨끗하게 하는 매개물(속죄물: 민 19:9);
속죄제(레 6:18, 23; 겔 40:39; 42:13; 45:19; 스 8:35; 6:17비교, 느 10:34)라고 한다.
단어가 지적하듯이 죄와 관련되어 있으며, 죄의 영향을 다루고 있다. 즉, 하나님과 인간에게 죄를 지은 후에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드리는 제사이다. 이것을 부지중에 지은 죄(레 5:1- 6)라고 한다. 속죄제는 죄를 지은 사람의 지위에 따라 제물이
달라지기도 한다.
속건제는 히브리어 단어 아샴[~va:죄, 범죄(민 5:7,8); 값, 대속물, 속건제물(삼상
6:3, 4, 8, 17; 사53:10); 속건제(레 5:15, 18, 19, 25; 6:10; 7:1, 2, 5 ,7
등등)]이라고 하며, 이 역시 ‘보상함으로 죄값을 치르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단어이다. 그래서 이 단어는 단순한 범죄의 속죄보다는
속죄와 배상의 의미를 같이 가지고 있다. 그 죄과를 치르기 위하여 제사장에게 1/5을 추가로 배상 지급해야 한다.(레 5:16)
둘째, 번제, 소제와 화목제는 제사를 드려야 하는 시기와 죄의 종류에 대하여 언급이 없다.
왜냐하면 ‘자발적’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속죄제와 속건제는 자발적이기 보다는 제사를 드려야만 하는 조건적인 경우이며 또한 속죄와
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셋째, 이 제사들은 전부 ‘피의 사용법’을 제시한다. 그러나 번제, 소제와 화목제는 피를
성막 바깥으로 가져가서 뿌려진다.(레 1:5, 11, 15; 4:25 등) 그러나 속죄제와 속건제는 피를 성막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서 성소와 지성소 앞 분향단의 뿔 등에 뿌린다.
전체적으로 보면 레위기 1-7장에서 이러한 제사의 종류를
제시하는 방법이 동일하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레 1:1-6:7. 레 6:8- 7:38)것 같지만, 명백하게 앞의 제사(레
1:1-6:7)는 제물을 바치는 사람을 중요시하며, 평신도를 염두에 둔다. 그리고 뒤에 제사(레 6:8-7:38)는 제사장의
책임을 강조한다. 이것은 야훼에게 드리는 제사가 평신도와 제사장이 함께 했을 때 진실한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3.2. 제사장 법(레 8-10장)
출애굽기에서
성막이 만들어지고(출 25-40장), 레위기에서 제사의 종류와 규정(레 1-7장)이 주어진다. 그리고 레위기에 속한 3개 이야기
형식 중에 하나인 레위기 8-10장은 하나님 예배를 집전할 제사장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것은 앞의 제의에 관계되는
여러가지 경우를 판별하게 하는 결정적인 주제와 예배를 인도할 힘을 가진다는 것을 통하여 레위기 1-7장을 마무리 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이 이야기의 목적은 이미 출애굽기 29장 43-46절에 기록되어 있다.
43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 내 영광으로 말미암아 회막이 거룩하게 될지라. 44 내가 그 회막과 제단을 거룩하게 하며 아론과 그의 아들들도 거룩하게 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며, 45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46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9:43-46)
전체적으로
이 이야기를 끌고가는 것은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그대로 행했다”(레 8:4, 5, 9, 13, 17, 21, 29, 34
,36; 9:6, 7, 10, 21; 10:7, 13, 15)라 는 말이다. 이것은 야훼의 지침에 대한 절대적 순종을 의미하며, 그
순종은 제사장과 그의 가족들, 결국에는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레위기 8-10장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제사장의 위임식(레 8장)과 제사장의 직분을 올바르게 수행하는 방법(레 9장), 마지막으로 제사장 직무
수행에 있어서 금기사항(레 10장)을 제시한다. 제사장의 기원을 주제로 하는 레위기 8장은 아직 제사장으로 임명되지 않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주인공이 되며, 이 임명 절차로 그들은 전적으로 제사장 가문으로서 이스라엘의 모든 제 사를 집전하게 된다. 레위기
8장의 구조는 위임식 준비(1-4절), 위임식의 거행(5-32절) 그리고 추가규정(33-36절)으로 구성되어있다. 특히 위임식
준비에서 모세가 온 회중(에다)이라고 말하는 단어는 중요한 사건에 대한 집단 증인으로서 작용한다. 비록 능동적으로 제사를
집행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그 사건에 있다는 것 자체로 그 사건을 정당화한다. 즉, 온 회중을 모았다는 것은 모든 이스라엘 민족이
이 위임식의 증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다음 위임식 거행에서 아론의 착복식(5-9절), 제사장에게 기름 부음
(10-13절), 제사장이 드리는 제사(속죄제: 14-17절; 번제: 18-21절), 위임에 대한 화목제사(22-30절)의 순서로
이어진다. 레위기 8장은 출애굽기 29장과 닮은 꼴을 형성한다. 즉, 출애굽기 29장이 실행 규칙을 제정한 것이라면, 레위기
8장은 실제로 거행된 것을 보고하고 있다.
레위기 9장은 이레동안 위임식을 거행한 다음, 이제 정식적으로 완전하게
승인된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제사를 드린다. 그렇다고 해서 모세의 역할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 레위기 8장에서 이레동안 위임식을
행한 시기(레 8:33)와 칠 주야를 기다린 행위(레 8:35)를 통하여 모세가 이 제사의 주재자 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레위기
9장에서도 대 제사장 아론의 직무가 시작되기 전에 첫 번째 공식적인 제사 지침을 모세가 명령(레 9:1-7)한다. 그 명령 후에
아론이 공식적인 첫 제사를 시작한다. 아직까지는 증인으로서 ‘온 회중’을 모으지 않는다. 공식적으로 준비는 아론, 그의 아들들
그리고 이스라엘 장로들이다.(레 9:1) 그리고 난 후 모세는 ‘온 회중’을 모은다.(레 9:5) 그리고 야훼의 영광이 나타날
것을 기대하며, 모세는 아론에게 제사의 시작을 명령한다.(레 9:6-7)
아론의 제사는 자신을 위한 제사로 시작한다.
첫 번째, 아론 자신을 위한 속죄제(레 9:8-11)와 번제(레 9:12-14)를 드린다. 대 제사장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하여 자신부터 정결해야 한다. 그 다음 단락은 온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속죄제, 번제, 화목제 그리 고 소제를
드린다(레 9:15-21). 그리고 아론의 축도(레 9:22-23)와 야훼의 영광(레 9:24)이 나타나며 9장이 끝난다. 9장의
진정한 목적은 제사를 통한 “야훼의 영광”이 회막에 나타났으며(레 9:23), 그리고 그 영광을 이스라엘이 경험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경험한 것을 이스라 엘은 두 가지로 표현한다: 소리지르며[룬] 그리고 엎드렸다[나팔]. 여기에서 ‘룬’은 기쁨을
가지고 소리 지르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여기에서 ‘엎드리다’라는 표현은 문맥상 불이 내려와 번제물을 태우는 것을 보고, 두려움
속에서 엎드린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은 두려움만을 표현했다기보다는 존경을 포함한 경외를 의미한다. 백성들은 제사를 통하여
야훼의 임재를 경험하고 기쁨의 환 성 속에서 야훼 경외를 경험한다. 이것은 오늘날 성도들이 예배를 통한 야훼 임재를 경험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레위기 10장에서 야훼께서 명하지 않은 불을 분향함으로 올바른 예배가 손상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불을 통한 심판이 나타난다.(레 10:1-3) 미사엘과 엘사반과 아론이 모세의 명을 순종함으로 손상된 예배가
회복된다.(4-7절) 이어서 모세가 아닌 야훼께서 처음으로 아론의 대 제사장직을 확인하는 명령이 나타난다.(8-11절)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라는 명령은 자연스럽게 레위기 11-15장으로 연결하게 하는 작용을 한다. 마지막으로 모세 지시와 아론 사람들의
지시 불이행에 대한 논쟁과 모세의 수용으로 이어지는 레위기 10:12-20은 먼저 모세가 소제에 관하여 명령(12-15절),
엘르아살과 이다말의 지시 불이행(16절), 모세의 책망(17-18절) 그리고 아론의 중재(19 절) 마지막으로 모세의
수락(20절)으로 끝난다.
히브리어로는 '넘어가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니산월(아빕월,
1월) 14일 해질 무렵, 나흘 전에 준비한 수양을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함께 먹고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아침까지 남은
것은 불에 태워 버린다. 애굽이 하나님의 진노로 장자를 잃는 열 번째 재앙을 당할 때 구원받은 것과 해방을 기념하는 날이다.
2. 무교절(레 23:6-8: 고전 5:7,8)
히브리어로는
맛차로. 니산월(아빕월, 1월) 15일부터 7일 동안(21일 까지) 누룩이 없는 무교병을 먹는다. 절기의 이름도 이 누룩 없는
떡을 먹는다하여 무교절이라 불리웠다. 무교절이 시작되는 첫 날과 마지막 날은 '성회' 로 백성이 모이고 노동을 하지 못했으며 매일
하나님께 화제를 드렸다
3. 초실절(레 23:9-14: 고전 15:20)
초실절은
히브리어로 바쿠림이라 불리며 무교절 기간 중에 있는 절기로, 유월절 후 첫 안식일 다음 날이다. 추수 전에 곡식의 첫 이삭 한
단을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로써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이다. 초실절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기 전에는 떡이나 볶은 곡식, 생
이삭이라도 먹지 않았다.
히브리어로는
솨부아 '맹세하다' 라는 뜻으로 밀을 수확할 수 있도록 복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이다. 칠칠절은 초실절로부터 50일째에
해당하는 날로써 보통 시완월(3월) 6일경이 된다. 이 날은 하루만 절기로 지키는데 성회를 공포하고 노동이 금지되며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고 수염소 한 마리를 속죄제로 드렸다. 특이한 것은 모든 절기에는 누룩이 없는 무교병을 쓰지만 칠칠절만은 누룩을 넣은
유교병을 소제로 사용한다.
5. 나팔절(레 23:23-25)
나팔절은 티쉬리월(7 월) 1일로 유대 민간력으로는 1월에 해당하는 새해 첫날이다. 이 날은 나팔을 하루 종일 일정한 간격으로 불었으며 성회가 선포되고 노동을 금했다. 그리고 속죄제로 수염소 한 마리를 드렸다.
6. 속죄일(레 23:26-32; 히 9:25, 26)
이 날은 성회가 선포되고 노동을 금하며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로 티쉬리월( 7월) 10일이다. 특별히 연중 이 날만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갔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한 수염소와 아사셀을 위한 수염소를 드렸다.
7. 초막절(레 23:33-34)
수장절,
장막절이라고도 불린다. 티리쉬월(7월) 15일부터 8일 동안 행해진다.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나와 광야에 머물었던
것을 기념하는 동시에 풍성한 수확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이다. 첫날과 여덟째 날에는 성회로 모이고 노동이 금지되었으며 각
날마다 그에 상응 하는 제사를 드렸다.
메시아의 도래를 바라보는 예언적 절기
- 전도서, 시편 113-118편
시편 118:25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구원해 주소서! 아도나이 호쉬안나!
장막(수카)을 만드는 4가지 재료(아르바미님) 레위기 23:40
첫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 가지와 무성한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칠일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
아르바 미님(레위기 23:40)
4(아르바) 종류들(미님)
아름다운 나무 실과(에트로그. Etrog) 향이 있고 맛도 있다 토라를 배우고 실천하는 사람
종려 가지(룰라브. Lulav) 맛은 있으나 향이 없다 토라를 배우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
아르바미님(레위기 23:40)
무성한 가지(하다스. Hadas) 향은 있으나 맛이 없다 토라를 배우지 않았으나 실천하는 사람
시내 버들(아라바. Aravah) 맛도 없고 향도 없다 토라를 배우지도 않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
초막절을 지키는 규례
1. 안식하라(35절, 39절)
2. 성회로 모이라(35절, 37절) 3. 제물을 바치라(37절)
4. 초막을 짓고 거주하라(42절)
느헤미야 8:16-17
백성이 이에 나가서 나무 가지를 취하여 혹은 지붕 위에, 혹은 뜰 안에, 혹은 하나님의 전 뜰에, 혹은 수문 광장에, 혹은 에브라임 문 광장에 초막을 짓되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회 무리가 다 초막을 짓고 그 안에 거하니 눈의 아들 여호수아 때로부터 그 날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이같이 행함이 없었으므로 이에 크게 즐거워하며.
성전에서 지키는 의식 두 가지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길어온다.
제사장의 뜰 중앙에 초막절 마지막 날에 물을 붓는다.
이사야 12:2-3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요한복음 7:37-38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초막절 = 수장절=장막절(수카, 수콧)
1. 수확물을 창고에 저장하는 것
2. 광야 40년의 삶을 기념하는 절기(옷, 신발, 하나님의 돌보심) 3. 가나안 땅에 입주하여 한 해 풍성한 수확물을 창고에 저장한 후 광야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지낸 시간을 기억하는 절기 4. 이른 비를 간구하는 절기 5. 한 해 농사의 절기를 마치며 농사의 전환기를 준비하는 절기로 우기가 시작한다. 비가 오기를 간구한다. 한 해 농사의 사이클의 마감과 더불어 과실들을 수확한다(5대 과일 / 포도, 무화과, 올리브, 대추야자, )
6. 추수감사의 의미(대추수감사절)
수카(초막)를 만드는 4가지 식물 : 아르바 미님 레위기 23:40 / 실과 종려, 시내버들, 아브라(4) 미님(종류들)
1. 아름다운 나무 실과 - 에트로그(Etrog) 2. 종려가지 - 룰라브(Lulav) Palm frond 3. 무성한 가지 - 하다스(Myrtle) 4. 시내버들 - 아라바(Willow)
아름다운 실과(에트로그) 향이 있고, 맛도 있다. 4종류의 사람이 있다.
토라를 배우고 실천하는 사람
종려가지(룰라브)
맛은 있으나 향이 없다. 토라를 배우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
무성한 가지 - 하다스(Myrtle)
향은 있으나 맛이 없다. 토라를 배우지 않았으나 실천하는 사람
시내버들 - 아라바(Willow)
맛도 없고 향도 없다 토라를 배우지도 않고 실천하지 않는다.
광야의 백성들 1. 아름다운 나무 실과 - 에트로그(Etrog) 요단강 건너는 백성들 2. 종려가지 - 룰라브(Lulav) Palm frond
젖과 꿀이 흐르는 땅 3. 무성한 가지 - 하다스(Myrtle) 약속의 땅에 얻은 열매 상징 4. 시내버들 - 아라바(Willow)
실로암 못에서 물을 떠온다. 동틀 무렵 물을 떠와 제단에서 관제 의식을 행한다. 수문에서 레위인들이 나팔을 분다.
관제의 축제 여인의 뜰에서 불을 켠다(가지가 촛대 5개) 수전절(촛대 9개) 성전(촛대 7개)
7일 째 해가 지고 8일 째 해가 뜰 때까지 관제의 축제(요한복음 8장, 아침이 되니.....) 아침까지 밤을 새워 행사한다(All night)
여인뜰, 니카노 문, 15개 계간 중 10계단에서 나팔을 불며 동쪽으로 향한다. 순결과 공의의 문에 도착했을 때 한 바퀴를 돌고 지성소가 있는 서쪽을 향하여 "이 성전에 계신 아버지여 저 이방인들은 성소를 등지고 얼굴을 동쪽을 향하고 떠오르는 태양을 숭배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은 여호와를 향합니다."
가장 나이가 많은 랍비의 선창에 따라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주여!
우리 노인들에게 젊은이들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소서 젊을 때에 죄를 사함받는 자들은 복이 있을지어다.
간음한 여인이 붙잡혀 들어왔다.(요 8장)
초막절 제물 1. 종료나무 2. 모짜(예루살렘 남서쪽 시냇가)의 버드나무 가지 / 시내 버들, 잘랐을 때 물이 없으면 말라 죽는다. 물이 필요한 것(물 =은혜) 성전 제단 남서쪽에 세운다. 제단에 기울도록 한다. 제단 주위를 매일 한 바퀴씩 돈다(시계 반대 방향으로). 7일 째 일곱 바퀴를 돈다. 요한복음 7장 시편 118:25 - 기도문(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형통케 하소서!) 안나 아도나이 호시아 나, 안나 아도나이 하츨레하 나 제사장의 뜰이 개방된다(아이들, 심지어 여자들도 들어올 수 있다) 버드나무 가지를 "호시아나" 라고 한다. 3. 4.
누워서 하늘의 별이 3개가 보여야 한다. 아파트를 계단식 형으로 건축한다. 하늘 조망권을 화복한다. 예루살렘은 종교화, 텔아비브는 세속화 된다.
마태복음 17:4 초막 셋을 짓되....... 초막의 의미는 수카를 말한다. 변화산 사건이 초막절 즈음에 일어났던 사건이라고 추측한다.
7일 동안 황소 70마리를 번제로 드린다. 13, 12, 11, 10, 9, 8, 7마리 = 70마리 왜 창세기 10장에 열방의 70민족으로 소개된다. 열방을 축복하는 제사장 백성으로 삼으셨기 때문에 7일 동안 70마리 황소를 바친다. 제사장 백서으이 역할
7 : 완전수 70 : 숫양 : 14 어린 양 : 98(7의 14 배수) 364에바의 소제 : 7의 48배
초막절은 완성을 의미(수확의 완성) 첫 열매를 시작으로 밀과 여름 과실의 수확 구원의 최종적 완성 심판의 최종적 완성 초실절 - 칠칠절 - 초막절 / 교회가 완성되어가는 과정 교회 탄생 - 교회의 성장 - 재림(완성, 열방도 포함)
스가랴 14:16, 19, 솔로몬 성전의 봉헌
열왕기상 8:2 에다님 월(티스리월)
레위기 23:39, 여호와의 절기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운다 / 수장절(feast of ingathering), 장막절
너희가 토지 소산 거두기를 마치거든 칠월 십오일부터 칠일 동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되 첫날에도 안식하고 제 팔일에도 안식할 것이요.
광야 40년 생활을 위하여 천막(Tent)을 쳤다. 잠시 머물러 있는 동안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하여 먹게 하셨다.
3대절기 /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2대절기 / 유월절, 초막절
지키는 방법
1. 안식하며 제물을 드리는 절기 - 노동을 하지 말라(35절, 39절)
첫날에는 성회가 있을찌니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찌며.
39절, 너희가 토지 소산 거두기를 마치거든 칠월 십오일부터 칠일 동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되 첫날에도 안식하고 제 팔일에도 안식할 것이요.
첫날과 마지막 날에도 안식하라. 휴지구 즉 쉼표가 필요한 인생이다.
대략 9월말-10월 중순까지 한국의 경우 추석의 절기와 비슷하다.
2. 성회로 모이라(35절, 37절,
첫날에는 성회가 있을찌니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찌며.
쉬면서 하나님을 묵상하라.
3. 제물을 바치라(37절)
이것들은 여호와의 절기라 너희는 공포하여 성회를 삼고 번제와 소제와 희생과 전제를 각각 그 날에 여호와께 화제로 드릴찌니.
신명기 16:16 너희 중 모든 남자는 일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신앙의 전통을 위하여 남자들에게 의무적으로 하도록 가르쳤다.
38절, 이는 여호와의 안식일 외에, 너희의 헌물 외에, 너희의 모든 서원 예물 외에, 너희의 모든 낙헌 예물 외에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니라.
백성이 이에 나가서 나무 가지를 취하여 혹은 지붕 위에, 혹은 뜰 안에, 혹은 하나님의 전 뜰에, 혹은 수문광장에, 혹은 에브라임 문 광장에 초막을 짓되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회 무리가 다 초막을 짓고 그 안에 거하니 눈의 아들 여호수아 때로부터 그 날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이같이 행함이 없었으므로 이에 크게 즐거워하며.
4가지 식물을 갖고 초막을 짓기도 하고 아르바미님
40절, 첫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 가지와 무성한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칠일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
4가지 식물(아르바미님)
1. 아름다운 나무 실과(Etrog) 2. 종려가지(Lulav) 3. 무성한가지(Hadas) - 영생을 상징 4. 시내버들(Aravah) - 그늘과 쉼이 있는 곳
1. 쉼과 예물 2. 초막을 짓고 거한다 3. 메시아의 도래를 바라보는 예언적 절기 - 전도서(헛되다는 것을 강조하여 주의 명령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 시편 113-118편을 읽는다
시편 118:25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O LORD, save us; O LORD, grant us success.
구원해 주소서(아도나이 호쉬안나) - 호산나
초막절 마지막 날 / 호산나 라바(큰 구원을 베풀어 주소서) 심핫 베잇 하소에바(Simchat Beit Hashoeva) : 실로암에서 물을 길어 오는 의식
성전에서 지키는 의식 두 가지
제사장의 뜰 중앙에 초막절 마지막 날에 물을 붓는다(전제, 관제) 실로암 연못으로 간다. 히스기야 왕 시대에 지하수로를 만들었다(히스기야 턴널) 500m 물을 붓는 순간 나팔을 분다
이사야 12:2-3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요한복음 7:37-38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마지막 날은 밤새도록 춤을 추며 네 개의 기둥에 불이 켜진다.
요한복음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세상의 빛이시다 - 생명의 근원이시다!
여호와의 절기(레위기 23:39)
너희가 토지 소산 거두기를 마치거든 칠월 십오일부터 칠일 동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되 첫날에도 안식하고 제 팔일에도 안식할 것이요.
14. 너는 매년 삼차 내게 절기를 지킬찌니라 15.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한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칠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찌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 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찌니라 16.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17. 너의 모든 남자는 매년 세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찌니라
출애굽기 34:18-23
18. 너는 무교절을 지키되 내가 네게 명한대로 아빕월 그 기한에 칠일 동안 무교병을 먹으라 이는 네가 아빕월에 애굽에서 나왔음이니라
19. 무릇 초태생은 다 내 것이며 무릇 네 가축의 수컷 처음 난 우양도 다 그러하며
20. 나귀의 첫 새끼는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네 아들 중 장자는 다 대속할찌며 빈 손으로 내 얼굴을 보지 말찌니라 21. 너는 엿새 동안 일하고 제 칠일에는 쉴찌니 밭 갈 때에나 거둘 때에도 쉴찌며
22. 칠칠절 곧 맥추의 초실절을 지키고 가을에는 수장절을 지키라
23. 너희 모든 남자는 매년 세번씩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보일찌라.
5월 19일(수)
대속죄일(레위기 23:26-32)
2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7.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희에게 성회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28. 이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것은 너희를 위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속죄할 속죄일이 됨이니라
29. 이 날에 스스로 괴롭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라
30. 이 날에 누구든지 아무 일이나 하는 자는 내가 백성 중에서 멸절시키리니 31. 너희는 아무 일이든지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그 거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32. 이는 너희의 쉴 안식일이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이 달 구일 저녁 곧 그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까지 안식을 지킬찌니라.
새해(로쉬 하샤나) :로쉬(머리, head), 하샤나(해, year) - 한 해의 머리가 되는 날, 한 해의 으뜸이 되는 날
한국의 경우 보신각에서 종을 울린다. 이스라엘은 뿔 나팔을 분다.
레위기 23:24,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곧 그 달 일일로 안식일을 삼을찌니 이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이요 성회라.
유대력으로 7월 1일(새해, 로쉬 하샤나) 태양력으로 9월 -10월 경
설날 השנה ראש (로쉬 하샤나)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새 해를 맞이하여 첫날을 명절로 삼고 축하한다. 우리 민족도 새해 첫날을 맞이하여 기뻐하는 ‘설날’이 있다. 설은
“원단/세초/연시”라는 한자말로도 표현한다. 1월 1일을 양력으로 신정(新正)이라고 하고 음력으로 구정(舊正)이라고 한다. 해가
바뀌어 새로이 한 해를 맞이하는 첫 날 곧 ‘설’을 쇨 때마다 한 살을 더 먹는다. 설 명절은 설날부터 대보름인 15일까지
이어진다.
유대인들에게도
설날이 있는데 השנה ראש (로쉬 하샤나)라고 부른다. 유대인의 ‘로쉬 하샤나’도 하루로 끝나지 않는다. 열흘 후에 지키는
‘욤 키푸르’(대속죄일)에 이르기까지 회개의 시간을 가진다.
유대인들은 ‘로쉬 하샤나’를 티쉬리월 첫째 날과 둘째 날에 지킨다.
티쉬리월은 양력 9월 말이나 10월 초에 오는데 이 달이 음력으로 첫째 달이 되는 까닭이 탈무드에 나온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달을 티쉬리월이라고 간주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반으로는
니산월을 한 해의 시작으로 간주하지만 유대교 종교력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한 때를 기준으로 삼아 티쉬리월을 한 해가 시작되는
달로 지키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출애굽기는 아빕월을 한 해 첫달로 지키라고 규정한다. 여기에서 장구한 세월에 걸친 유대 달력의
변천사를 짐작할 수 있다.
창세기
1장 1절에 히브리어 ראש (로쉬)란 단어가 나온다. ‘태초에’란 어구에 있다. 이 명사는 본디 머리를 가리켰는데 그 의미가
확장되어서 “으뜸/시작/우두머리/지도자” 따위로 그 의미가 다양해졌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문장에서 בְּרֵאשִׁית (브레쉬트)는 “한 처음에/태초에”란 뜻이다. 이 어구에 나오는 “로쉬”는 모든 창조의 처음을 가리키기에 탈무드는 티쉬리월에 오는 새 해의 첫 날 “로쉬 하샤나”를 창조신학과 연결시켰다.
하샤나(השנה)는
‘해/년(年)’을 뜻하는 명사 <샤나>에 정관사 <하>가 접두한 형태이다. “로쉬 하샤나”는 ‘나팔절’(욤
테루아 יוֹם תְּרוּעָה)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정작 성경에는 ‘나팔절’ 이란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나팔절은 민수기
23장 ‘칠월 초하룻날 나팔을 불며 쉬라’는 말씀에서 유추한 용어이다. 레위기 23장 23절 이하에도 나온다. 나팔절 곧 설날은
오늘날까지 지키고 있는 유대인의 네 가지 큰 명절 중 하나이다.
로쉬
하샤나는 느헤미야 8장에도 나오는데 디아스포라 공동체는 토라를 읽으며 설 명절을 지켰다. 토라를 읽으며 명절을 지켰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출애굽기 12장 2절에 רֹאשׁ חֳדָשִׁים (로쉬 호다쉼)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는 첫째 달이란 듯이다.
첫째 달 첫날부터 열흘 동안 속죄한 후에 대속죄일을 맞이한다. 이 명절에는 안식일과 동일하게 노동을 하지 말고 쉬어야 한다.
느혜미야에 나타난 로쉬 하샤나에서는 서로 기쁨을 나누는 축제의 성격을 띠고 있다.
설날의
성경적 의미는 여러 가지로 찾아 볼 수 있다. 로쉬 하샤나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을 기념하는 뜻을 지닌다. 이 날은
정결하게 되고 새로워지는 시간이요, 용서받는 때이며, 새 출발을 의미한다. 또 심판의 날이란 뜻도 있다. 우리가 설날을 새 출발에
방점을 두지만, 성경의 설날은 지금까지 지은 죄를 뉘우치는 회개로부터 시작하는 날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공로로 죄씻음을
받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새롭게 한 해를 시작하는 축제를 벌인다. 그런 의미에서 설날은 희년을 선포하는 것처럼
양각나팔을 불어 토라공부와 토라실천의 결기를 다짐하는 뜻 깊은 성숙의 날이 되어야 한다.
대속죄일 레위기 23:27-28, 27.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희에게 성회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28. 이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것은 너희를 위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속죄할 속죄일이 됨이니라
레위기 16:29, 너희는 영원히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칠월 곧 그 달 십일에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되 본토인이든지 너희 중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리하라.
대속죄일(욤 키퍼) : 욤(날, the day). 키퍼(카파르) 덮는다, cover.
새 해는 속죄를 통해서 맞이할 수 있다.
레위기 16:31 이는 너희에게 큰 안식일인즉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할지니 영원히 지킬 규례라.
거룩한 세마포 속옷을 입으며 세마포고의를 살에 입고 세마포 띠를 띠며 세마포 관을 쓸찌니 이것들은 거룩한 옷이라 물로 몸을 씻고 입을 것이며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서 속죄 제물을 위하여 수염소 둘과 번제물을 위하여 수양 하나를 취할찌니라.
아론의 두 아들이 진지한 준비가 없었다. 아무 때나 나올 수 없었다. 그러나 현재는 아무 깨나 나올 수 있다.
12-13절, 향로를 취하여 여호와 앞 단 위에서 피운 불을 그것에 채우고 또 두 손에 곱게 간 향기로운 향을 채워 가지고 장 안에 들어가서 여호와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우게 할찌니 그리하면 그가 죽음을 면할 것이며
아론의 두 아들은 아무 때나 아무 불이나 사용하므로 죽임을 당하였다.
레위기 8:7-9,
제사장의 평상복을 벗고 속죄일에는 세마포 옷을 입는다.
둘째, 자신을 위한 속죄의 제물을 드린다.
레위기 16:6 아론은 자기를 위한 속죄제의 수송아지를 드리되 자기와 권속을 위하여 속죄하고.
13-14절, 여호와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우게 할찌니 그리하면 그가 죽음을 면할 것이며 그는 또 수송아지의 피를 취하여 손가락으로 속죄소 동편에 뿌리고 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속죄소 앞에 일곱번 뿌릴 것이며.
셋째, 백성을 위한 속죄 제물을 드린다.
레위기 16:15 또 백성을 위한 속죄제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장 안에 들어가서 그 수송아지 피로 행함 같이 그 피로 행하여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뿌릴찌니.
레위기 16:21 아론은 두 손으로 산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찌니.
예수께서 죄를 짊어지고 극적으로 처리한 모습
"아사셀 염소"(레위기 16:10, Azazel / 염소 + 사라진다(go away)
넷째, 번제를 드린다.
레위기 16:23-25, 25. 속죄제 희생의 기름을 단에 불사를 것이요 27. 속죄제 수송아지와 속죄제 염소의 피를 성소로 들여다가 속죄하였은즉 그 가죽과 고기와 똥을 밖으로 내어다가 불사를 것이요.
속죄함을 받은 후에 용서의 확신이 중요하다. 그 후에 반드시 해야 할 것은 "번제(태워버린다, 온전한 헌신)"
번제가 없으면 열매가 없다. 예배를 통헤서 나를 온전히 주 앞에 바치는 훈련이 중요하다.
대속죄일(יֹום כיפור 욤 키푸르, יֹום
הַכִּפֻּרִים 욤 하 키푸림)은 유대력으로 티쉬리(7) 월 10일이며 유대인들이 1년에 한 번 속죄하는 날로 큰
안식일이며 성회로 모였다. 이 날에는 육체적인 노동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일까지 금지되었으며, 만약 이 날에 일을 하면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를 모르는 자로 죽임을 당했다. 따라서 이 날은 오직 금식을 하면서 스스로 괴롭게 해야 한다.
크리스천은
오순절을 성령강림절로 지키지만, 유대인이 지키는 오순절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토라를 받은 날이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토라를 받고
내려왔을 때, 산 밑에서는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고 있었다. 그래서 모세는 그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다시 산으로 올라갔다.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의 죄를 속할까 하노라 하고"(출 32:30)
모세는
이스라엘이 지은 우상숭배의 죄를 "큰 죄"라고 하며 그 죄를 속죄하러 하나님께 다시 올라갔다. 처음과 마찬가지로 모세는 40일간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 반역한 그들을 위하여 자기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달라며 간절히 하나님께 속죄하고 내려왔다. 모세가
40일간 속죄하고 내려온 날이 속죄일인 티쉬리 월 10일이다.
출애굽기 34장 29절 이하를 보면,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께 속죄하고 두 돌판을 가지고 내려왔을 때, 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므로
사람들은 그에게 가까이 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 앞에 나타나셨을 때에 무척 두려워했다. 왜냐하면
주님의 임재는 나팔소리와 함께 구름과 연기와 불과 우뢰와 번개 가운데 임하셨기 때문이다(출 19:16-19, 20:18).
그
뒤에 주께서는 70명의 장로를 산 위로 부르셔서 만나주셨고,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오면 속죄소 앞에서
만나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주 앞에 엎드려 회개할 때이다. 회개를 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고 그분으로부터 사명을 받을 수 없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25:22)
언약궤 위에 있는 두 그룹은 날개를 펴서 언약궤와 속죄소를 덮고 있으며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했다. 그곳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1년에 한 번 모든 백성을 대표한 대제사장을 통하여 만나주시고 죄를 사하여 주셨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속죄양이 되시고 대제사장이 되셔서 보혈의 피를 흘리시므로 피뿌림을 받은 우리들은 그분의 보혈의 공로로 1년에 단 한 번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지성소에 매일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8-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19-22
▶ 대속죄일의 의미
대속죄일의 히브리어
'욤 키푸르'의 '욤'은 '날'을 의미하며 '속죄'를 뜻하는 '키푸르'(כִּפֻּרִ)는 동사 '카파르'(כָּפַר)에서
유래했다. '카파르'(כָּפַר)는 '속죄하다'(make an atonement) 이외에 '화해하다'(make
reconciliation), '용서하다'(forgive), '덮다'(to cover), '자비롭다'(be merciful),
'씻다'(cleanse) 등의 뜻을 갖고 있다.
따라서 '대속죄일'이라는 말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씻어주고 덮어주고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인하여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하나님 아버지와 화해하여 은혜의 자리에 나아가게
되는 매우 기쁜 날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피는 죄를 속하는 것"이므로
아무데나 뿌려지면 안된다. 그래서 어떠한 피도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이며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 마시라고 한 것이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
과거에는
대제사장 이외에 그 누구도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러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리고 대제사장도 1년에 한 번 하나님께서
지정해주신 대속죄일에만 들어가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왕같은
제사장이 된 우리는 아무 때나 어디에서든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갈 수 있다. 이는 아무 때나 어디에서나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죄를 자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언제든지 내가 원하는 것을 구하게 됐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회개할 수
있도록 만나주시는 주님 앞에 우리는 너무 교만하다. 1년에 단 한 번 만나주시던 주님을 매일 만날 수 있게 되니 회개를 해야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며, 주님 앞에 나아가는 시간도 습관적으로 늦게 나가서 예배 시간도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 또 다른 볼 일
때문에 예배가 끝나기도 전에 나가기도 한다. 심지어 빠지기도 한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에나 밤에 자기 전에도 주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는다.
그리고 예배하기 위하여 정결하고 거룩한 옷차림이나 마음가짐으로 나아가지 않고 자기 취향에 맞고 편한
옷차림과 편한 마음으로 나아간다. 예배를 구경하러 가는 구경꾼들이 얼마나 많은가? 정말로 주님을 두렵고 떨림의 대상이라고 믿는다면
어떻게 예배 시간에 늦을 수 있으며 중간에 나갈 수 있을까? 그리고 아무리 덥거나 춥거나 불편하다고 내가 원하는 옷차림과 자세로
예배의 자리에 나올 수 있을까?
레위기 16장에는 대제사장 아론의 두 아들이 여호와께 나아갔다가 죽은 뒤에 주께서 모세에게 죽고싶지 않으면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아무 때나(무시로) 들어오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아론의
두 아들이 여호와 앞에 나아가다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형 아론에게
이르라. 성소의 장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무시로 들어오지 말아서 사망을 면하라. 내가 구름 가운데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
아론이 성소에 들어오려면 수송아지로 속죄 제물을 삼고 수양으로 번제물을 삼고 거룩한 세마포 속옷을 입으며 세마포 고의를 살에 입고
세마포 띠를 띠며 세마포 관을 쓸찌니 이것들은 거룩한 옷이라. 물로 몸을 씻고 입을 것이며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서 속죄
제물을 위하여 수염소 둘과 번제물을 위하여 수양 하나를 취할찌니라"(레 16:1-5)
"향로를 취하여 여호와 앞 단
위에서 피운 불을 그것에 채우고 또 두 손에 곱게 간 향기로운 향을 채워 가지고 장 안에 들어가서 여호와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우게 할찌니 그리하면 그가 죽음을 면할 것이며"(레 16:12-13)
이 말씀을 통하여
아론의 두 아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았기에 죽은 것을 알 수 있다. 속죄소에서 주님을 만나는 날은 1년에 한 번
대속죄일 뿐이며, 또 그곳에 나아갈 때에는 반드시 대제사장의 화려한 옷을 입으면 안 되고 흰 세마포 옷을 입어야만 한다. 또
반드시 목욕을 한 뒤에 세마포 옷을 입고 그곳에 들어가야 하며 빈손으로 들어가도 안 되며 반드시 향과 피를 갖고 들어가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절기와 안식일
많은
이들이 '여호와의 절기'와 '안식일'에 대해 잘못 알고 잘못 가르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기 때문에 여호와의 절기나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여호와의 절기'와 '안식일'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따라서 절기들을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한다. 그분 안에 거할 때, 지켜지고 완성되는 것이다.
성경은
결혼을 통하여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신부인 교회가 하나라는 것을 말씀한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 안에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계속해서 말씀한다. 주님 없이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래서 율법을 친히 만드시고
완성하신 주님과 한 몸이 된 이들에게만 계명을 지켰다고 인정해주시고 의롭다고 인정해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절기나 안식일을 지켜야 하느냐에 대하여 쓸데없는 논쟁을 하느라 세월을 아끼라는 주님의 말씀을 헛되이 지키고 있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아 6:3)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
▶ 스스로 괴롭게 하는 날
본문
27절에 보면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 32절에서도 "이는 너희의 쉴
안식일이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이 달 구일 저녁 곧 그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까지 안식을 지킬찌니라"라고 말씀한다.
Mishnah의 Yoma 8:1에 의하면 스스로 괴롭게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금식'(물도 마시지 않음), '금욕'(부부관계), '목욕 및 샤워 금지', '향수나 크림 금지', '가죽으로 된 신발과 옷 착용 금지'
특히
이 날이 안식일과 겹칠 경우 안식일은 기쁜 날이므로 금식하지 않지만, 속죄일은 안식일 중의 안식일(שַׁבַּת
שַׁבָּתֹון)이며 반드시 금식을 하며 경건하게 보내야 했다. 그래서 안식일과 명절이 겹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힐렐 2세는
티쉬리 월 1일이 수요일이나 금요일이 되지 않도록 했다(359년).
"이는 너희에게 큰 안식일(שַׁבַּת שַׁבָּתֹון)인즉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할지니 영원히 지킬 규례라"(레 16:31)
속죄일을
맞으며 우리 자신을 괴롭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 괴롭게 하면서 안식을 지키라고 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국어에서 말하는 '안식'을 생각하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씀하는 '안식'의 개념을 모른다.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는 안식일에 무엇을 해야하는지 알 수 있다. 우리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것이 안식하는 것이라는데, 이것이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가 될까? 성령의 조명이 없으면 절대로 이해 불가능이다.
안식일의 개념은 우리가 하고싶은 모든 것을 중단하는
것이다. 오락이나 운동을 하며 놀고싶고, 사먹고 파티하고 싶고, 학교 공부나 숙제를 하고 싶고, 자고 싶고, 돈 벌고 싶고,
데이트하고 싶고, 커피숖에 앉아서 즐기고 싶고, 여행을 가고싶은 우리의 모든 육적이고 세상적인 것을 끊는 것이 안식이다.
오직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생각하며 그분만 예배하며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중단하는 것이 진정한 안식에 들어간 것이다.
안식일에 제사장들은 절대로 쉴 수 없었다. 가장 바빴다. 그래서 예수님도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하셨다. 세상이
돌아가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도 일하신다는 사실을 유대인들은 알기에 예수께서 하신 그 말을 반박할 수 없었다.
안식일은 쉬는 날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만 예배하기 위하여 우리의 모든 것을 버리고 부인하고 내려놓고 번제물이 완전히 재가 될 때까지 타듯이 우리를 온전히 그분께 드리는 희생의 날이 안식일이다.
한국의 추석과 여호와의 절기 중 마지막 추수때 즉 심판때인 추수감사절인 장막절이 자주
같은 날이다. 왜냐하면 추석과 장막절 모두 보름달이 뜨는 때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우리는 미국 청교도들의 전통에 의해 11월
마지막주 목요일에 추수감사절을 지켜왔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은 추수감사절을 사람이 만든 시기가 아닌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정해주신
날인 장막절에 지켜야 할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막 7:8-9)
▶대속죄일의 절차
이날에
대제사장은 모든 백성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지성소에 들어가서 정결한 동물의 피를 속죄소에 뿌리며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기원했다.
대제사장은 먼저 자신과 그의 가족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수송아지의 피로 속죄하고 이어서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염소의
피로 속죄했다.
1. 대제사장은 향로를 취하여 제단 위에서 피운 불을 채우고, 두 손에 곱게 간 향기로운 향을
채워서 지성소로 들어가 분향하여 향연으로 속죄소를 가려서 죽음을 면하게 한다(레 16:12-13).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지 않기
위해서이다.
2. 분향 후 수송아지의 피를 갖고 지성소에 들어가 대제사장과 그의 가족들을 속죄하기 위하여 손가락으로
속죄소 동편에 그 피를 뿌리고 속죄소 앞에 일곱 번 뿌린다(레 16:14). 7은 완전 수로 일곱 번 피를 뿌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완전하다는 것을 예표하는 것이다(히 7:27, 9:12, 10:10).
3.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두 마리의 염소가 준비되는데 대제사장은 성전 동쪽 문에서 두 염소를 제비 뽑은 뒤 여호와를 위한 것과 아사셀을
위한 것을 구별한다. 그리고 아사셀 염소의 뿔에 ‘아사셀을 위하여’ 라고 쓴 붉은 띠를 묶는다.
4. 대제사장은 속죄제 염소로 제비뽑힌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서 (2)와 같은 방식으로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뿌린다.
5. 성소에 있는 분향단을 위하여 속죄하기 위하여 수송아지와 염소의 피를 취하여 분향단 귀퉁이 네 뿔에 바르고 손가락으로 그 피를 그 위에 일곱 번 뿌려서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에서 분향단을 성결케 한다(레 16:18-19).
6. 대제사장은 동쪽 문으로 가서 두 손으로 산 염소(아사셀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모든 불의를 지고 무인지경에 이르렀을 때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낸다(레
16:20-21). 아사셀 염소가 광야로 가는 동안 대제사장은 소의 내장을 제거한 뒤 소와 염소를 묶고 아사셀 염소가 절벽에
이르렀을 때 불로 사른다. 이때 염소가 다시 돌아오는 불상사(죄가 돌아옴)를 막기 위하여 절벽으로 끌고가 밀어서 죽인다.
7. 대제사장은 여인의 뜰로 가서 대속죄일과 관련된 토라를 읽은 후 지성소에 들어갈 때 입었던 세마포 옷을 회막에 들어가 벗고 거룩한
곳(정결탕)에서 물로 몸을 씻고 자기 옷을 입고 나와서 두 마리의 양으로 자기의 번제와 백성의 번제를 드린다. 두 마리의 양을
북쪽에서 잡고 그 피를 담아 번제단 둘레에 바른다. 자기와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고 속죄제 희생의 기름을 단에 불사른다(레
16:23-25). 그리고 소제와 전제를 드린다.
"7월 10일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일 것이요 마음을 괴롭게 하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 너희는 수송아지 하나와 수양 하나와 일년 된 수양 일곱을 다 흠 없는 것으로 여호와께 향기로운 번제를
드릴 것이며 그 소제로는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서 쓰되 수송아지 하나에는 에바 십분지 삼이요 수양 하나에는 에바 십분지 이요
어린 양 일곱에는 매 어린 양에 에바 십분지 일을 드릴 것이며 또 수염소 하나를 속죄제로 드릴 것이니 이는 속죄제와 상번제와 그
소제와 그 전제 외에니라"(민 29:7-11)
8. 세 번에 걸쳐 지성소에 출입하며 번제를 마치면 대제사장은 흰 세마포 새옷으로 갈아입고 손과 발을 씻고 지성소에 들어가 향로와 불을 제거하고 향로와 부삽을 가지고 나온다.
9. 수송아지와 염소의 가죽과 고기와 똥을 밖으로 내어다가 불사르고 그것을 불사른 자는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은 후에 진에 들어올 수 있다(레 16:27-28).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19-22)
이날 모든 사람은 흰 옷을 입고 오는데, 계시록에서 흰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말씀한다. 또한 매50년째 되는 희년에 있는 속죄일에는 모든 빚을 탕감해 주어야 했으며 팔렸던 종들도 해방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긍휼이 한이 없으신 자비하신 분이다. 그래서 어떠한 죄도 하나님 앞에 고백될 때면 하나님께서는 용서해 주신다. 그러므로 속죄양이
되시고 대제사장이 되셔서 단번에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크신 은혜를 우리는 잊지말아야 한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8-19)
우리의
예배는 반드시 회개가 동반되어야만 한다. 회개가 없는 예배는 가증한 종교의 형식일 뿐이다. 구원받은 성도가 할 수 있는 특권이
바로 회개이다. 회개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며 마귀의 종노릇하던 곳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맛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사에 회개할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한다.
현대의 유대인들은 속죄일이 시작되기 전 오후에 만찬을
갖는다. 그리고 속죄일은 목욕이나 샤워를 할 수 없기에 속죄일 전에 먼저 정결 의식을 행한다. 대속죄일 저녁이 되면 남자들은
키텔(Kittel)이라는 흰 예복을 입고 기도회로 모인다. 저녁 기도회에서는 '콜 니드레(Kol Nidre) 기도'로 시작한다.
그래서 대속죄일 저녁에 드리는 예배를 '콜 니드레'라고 부른다.
막스 브루흐(Max Bruch)의 첼로 협주곡으로
유명한 '콜 니드라이'(Kol Nidrei, Op. 47: 신의 날: Day of Atonement)는 아람어인 '모든
서약들'(All Vows)이란 뜻의 '콜 니드레'(Kol Nidre)를 <히브리 선율에 의한 첼로, 관현악, 하프를 위한
아다지오>로 하프와 관현악이 함께 어우러지는 환상곡이다.
콜 니드레 기도는 "모든 서약들"이라는 말 그대로
유대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실행하지 못한 모든 서약들을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기억하지 않으시고 도말해주시기를 바라며 하는
기도이다. 이 예배를 드리는 동안 "우리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계명을 어긴 것을 용서하옵소서. 우리가 알고 지은 죄와
모르고 지은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라는 기도를 많이 한다. 특히 대부분 말로 지은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악한 혀'(라숀 하라아
Lashon ha-Raa)라는 뜻의 죄 즉 거짓 맹세하거나 악하게 말하거나 저주나 욕을 한 것들의 죄를 고백하는 기도이다.
그
동안 나의 입에서는 어떠한 말이 나왔는가? 주님과 사람들에게 무언가 하겠다고 말로 약속을 해놓고 지키지 않은 것들은 얼마나
많은가? 화가 나서 내뱉은 말은 어떤 것들인가? 그러면서도 우리의 혀가 '악한 혀'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7월 10일에는 오전 8-9시부터 회당에서 예배가 시작되며 오후에는 요나서를 낭독하는데,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므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것처럼 유대인들도 회개하며 용서를 구하므로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하심을 얻기 위함이다.
대속죄일의
마지막 예배를 '네일라'라고 한다. 이때 예배자들은 마지막으로 네일라 기도를 한다. 그들은 마지막 기도의 문이 닫히기 전까지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며 '테키야 그돌라'의 나팔 소리가 울려퍼지는 순간 모든 예배와
대속죄일이 끝난다.
테키야 그돌라의 긴 나팔 소리는 금식이 끝났음을 선포하는 것이며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죄의
용서함을 받은 기쁨을 갖고 5일 후에 있을 여호와의 절기의 가장 하이라이트인 장막절 축제를 준비하기 시작한다. 각자 집 앞에
초막(수콧)을 만들기 위해 종려나무 가지를 비롯한 초막에 필요한 것들을 나르며 마지막 심판날인 추수 때를 준비한다.
여호와의
절기 중 가장 마지막 절기인 장막절은 안식일을 의미한다. 장막절은 7번째 절기이며 안식일은 7번째 날이다. 7은 완전 수이다.
불완전한 인간(인간의 수는 6)이 하나님(하나님의 수 1)과 하나가 된 상태가 7이며 그것이 안식이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만이 무시로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할 수 있고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감사절인 장막절에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결혼 잔치를
하게 되는 데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으며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으며 신랑과 대화를 안 할 수 있단 말인가?
안식에
들어가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천국을 소유한 것이며 임마누엘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며 지성소에 들어간 것이다. 지성소에는
세상의 것은 아무 것도 갖고 들어갈 수 없고, 화려한 대제사장의 옷도 입을 수 없고 오직 '성도의 옳은 행실'을 의미하며
'그리스도의 의'를 상징하는 '흰 세마포 옷'만 입고 '성도들의 기도'인 '향'과 '속죄할 피'를 갖고 들어갈 수 있다. 즉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도와 선한 행실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외에는 없는 것이다.
지금 내가 하고싶은 일은
무엇인가? 그것을 모두 중단할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만으로 정말 만족하며 살아왔고 살고 있으며 살아갈 수 있는가? 나
스스로 얼마나 나를 괴롭게 할 수 있는가? 지금 내가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 정말 버리기 싫은 것이 있는가?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나의 우상이며 회개할 제목이다.
"주 여호와 내가 말하노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수다한 비누를 쓸찌라도 네 죄악이 오히려 내 앞에 그저 있으리니"(렘 2:22)
우리는
우리를 스스로 깨끗케 할 수도 구원할 수도 없는 연약한 존재이다. 우리가 무엇을 하려고 하면 할 수록 '자기의 의'라는 더러운
때가 계속해서 추가될 뿐이다. 우리는 지성소에 들어가서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받아야만 비로소 정결해질 수 있다. 그래서 우리에겐
속죄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이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벧전 1:2)
유대인들은
다른 절기보다 대속죄일을 가장 열심히 지킨다. 그 이유는 그들의 행위를 기록한 책이 마지막으로 봉해지는 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주께서 마지막으로 책을 봉하시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 금식하며 기도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속죄일이 되기 40일 전부터 잘못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잘못한 것을 회개하지 않으면
대속죄일에 하나님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할 자격이 상실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말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 5:23-24).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속죄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은 모른다는 것이다. 반면에 크리스천들 중에 대속죄일이 언제인지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고, 대부분 관심도 없다. 그래서 그 날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허다하다. 심지어 목사들 중에는
대속죄일이나 여호와의 절기 이야기를 하면 이단처럼 취급하는 이들도 있다. 이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가감하면서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이 너무 많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8-19).
여호와의
절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며 그분을 제대로 알기 위해 예행 연습을 하는 리허설(성회)이다. 우리 크리스천은 그러한
리허설(성회)을 통하여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그분이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았으나 유대인들은 그렇게 열심히 리허설을
하면서도 아직까지도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대속죄일을 맞을 때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여 금식하며 회개하는 가운데 주님의 긍휼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많은 이들이 구약에 있는
말씀들과 규례들을 구시대의 유물로 착각한다. 제사제도는 십자가 사건으로 폐하여졌다. 그러나 구약의 모든 것이 폐하여 진 것이
아니다.
대속죄일을 맞으며 요나서를 묵상하는 가운데 니느웨 사람들처럼 함께 회개의 자리에 나아가자. 그것이 지성소로
들어가는 것이다. 지성소로 들어가는 것은 목숨을 걸고 들어가는 것이다. 아론의 두 아들처럼 하나님의 지시하신 방법이 아닌 자기들
마음대로 들어갔다가는 죽는 곳이 지성소이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의
길을 가자.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 1:18).
대속죄일은 연중 성정 행사의 클라이막스이다. 대제사장이 혼자서 주관하는 제사 아브라함의 천사가 대제사장을 돕는다.
안식일 중의 안식일 / 거리에는 차량도 다니지 않는다(단, 앰블런스는 제외) TV.
히브리서 9:7, 11-12
7.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년 일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11.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대제사장의 대리 임명
나팔절(레위기 23:23-25)
2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4.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곧 그 달일일로 안식일을 삼을찌니 이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이요 성회라 25. 아무 노동도 하지 말고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찌니.
칠월 : 정확하게 번역하면 일곱번째 달 초하루 왜냐하면 1년 12달에 초하루는 모두 12번 있기 때문이다.
양각나팔 : 쇼파르(shofar) 나팔절에 양각 나팔을 부는 방법 : 최대한 길게 소리를 내어 분다 이러한 방법을 "테키야 하 그돌라" 라고 한다. 예전에 한국에 민방위 훈련시 사이렌을 길게 울려 불던 방식과 비슷하다.
유대인들은 "나팔절"을 "신년" "새해"라고 부릅니다. 히브리어로 "로슈 하샤나" "로슈(머리)" "하샤나(한 해)" 즉 "한 해의 머리" 즉 한 해의 시작을 말합니다.
2021 / Sep. 6-8 (Hebrew Year 5782)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에게 "나팔절" 즉 "신년"과 관계된 우스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구정 때 한 살, 신정 때 또 한 살, 그리고 나팔절 때 또 한 살을 먹으므로 일 년에 세 살을 먹는다고 합니다.
나팔절은 신약에서 "예수님의 재림"에 해당합니다. 레위기 23장은 이스라엘의 절기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에게는 여호와의 절기라고 하겠습니다.
유월절 - 무교절 - 초실절 - 오순절 - 나팔절 - 속죄일 - 장막절
나팔절에 사용하는 나팔은 수양의 뿔로 만든 나팔을 만든다. 그 유래를 창세기 22장에서부터 시작합니다.
2절에서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나팔절은 사랑의 대상에 대한 우선순위가 결정되어야 한다.
12, 13절에서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본즉 한 수 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결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수풀에 뿔이 걸려 있는 수양은 신약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아들을 대신하여 즉 나를 대신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나팔절은 어떠 날인가?
1. 천지창조가 완성된 날 아담이 창조 된 날,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는 날이다. 인류 역사의 시작
2. 인류가 심판을 받는 날
3.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바친 사건 이삭 대신 죽은 수풀에 뿔이 걸린 수양. 수양을 기념하기 위하여 수양의 뿔을 분다. 양각 나팔을 불기 때문.
일곱 번째달의 월삭이 나팔절이다. 칠(안식, 샤밧)
일 년은 12번의 월삭이 있다.
월삭이 중요한 이유
사무엘상 20:5 다윗이 요나단에게 이르되 내일은 월삭인즉 내가 마땅히 왕을 모시고 앉아 식사를 하여야 할것이나 나를 보내어 제 삼일 저녁까지 들에 숨게 하고
사무엘상 20:18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일은 월삭인즉 네 자리가 비므로 네가 없음을 자세히 물으실 것이라.
사무엘상 20:24 다윗이 들에 숨으니라 월삭이 되매 왕이 앉아 음식을 먹을 때에
이사야 1: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골로새서 2: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Therefore do not let anyone judge you by what you eat
or drink, or with regard to a religious festival, a New Moon
celebration or a Sabbath day.
나팔절과 생명책
탈무드에서 나팔절이 되면 저 하늘 보좌에서 3권의 책이 펼쳐진다. 1. 생명책 - 영원한 영생에 들어갈 사람
2. 멸망의 책 - 죽음의 책, 영원한 멸망
3. 중간 책 - 하는 것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 10일 후에 결정된다. 나팔절부터 10일 7월 10일이 속죄일이다. 중간책에 있는 사람들은 이 기간동안 회개해야 한다.
시편 69:28,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 May they be blotted out of the book of life and not be listed with the righteous.
출애굽기 32:32,
생명책에 있는 목록에서 내 이름을 지워달라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 But now, please forgive their sin--but if not, then blot me out of the book you have written.
나팔을 부는 세 가지 목적
1. 언약(계약) 시내산 언약 출 19장을 기억하기 위하여
2. 사탄을 혼비백산하게 하기 위하여
3. 죄의 잠에서 깨어 회개하도록
* 모든 숫놈의 뿔 나팔을 불 수 있다. 그러나 소의 뿔은 안 된다. 출애굽기 32장 금송아지 우상 사건 때문에....
양각나팔과 더불어 양 쪽에 은나팔(하초츠라)을 짧게 분다. 성소 계단에서 쇼파르(한글성경에서 호각)
시편 98:6
나팔과 호각으로 왕 여호와 앞에 즐거이 소리할찌어다. with trumpets and the blast of the ram's horn-- shout for joy before the LORD, the King.
나팔절 때 바치는 제물 - 일곱번째 월삭
월삭에 드리는 제물 : 소 2, 양 7, 수염소 1 속죄일 : 10개의 제물을 추가적으로 드린다 (황소 1. 수양 1. 양 7. 염소 1)
나팔을 동문에서 분다. 가운데 양각나팔(쇼파르) 길게 양쪽에 호각(하초츠라) 짧게
성전 꼭대기에 올라가서 다시 나팔을 분다.
월삭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 초승달을 본 2명의 증인들이 성전에 와서 보고한다 - 3명의 증인이 필요하다(나팔절)
감람산 꼭대기에서 봉화를 올린다. 주후 350년에 달력을 만들어서 절기를 지킨다. 사마리아 지역에 안렉산드리온(사마리아 지역에 위치)에서 봉화를 올려야 할 때 올리지 않으므로 유대력을 만들게 되었다.
느헤미야 8:2
칠월 일일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남자, 여자 무릇 알아 들을만한 회중 앞에 이르러. So on the first day of the seventh month Ezra the priest brought the Law before the assembly, which was made up of men and women and all who were able to understand.
칠월 일일 : 나팔절(일곱번째 달 초 하루)
느헤미야 8:9-10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느헤미야가 또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Then Nehemiah the governor, Ezra the priest and scribe, and the Levites who were instructing the people said to them all, "This day
is sacred to the LORD your God. Do not mourn or weep." For all the
people had been weeping as they listened to the words of the Law. Nehemiah said, "Go and enjoy choice food and sweet drinks, and send some to those who have nothing prepared. This day is sacred to our Lord. Do not grieve, for the joy of the LORD is your strength."
단 것을 마시되 : 사과를 꿀에 찍어 먹는다.
나팔절과 재림
마태복음 24:31
저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데살로니가전서 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나팔절과 예수님의 시험
요한일서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For everything in the world--the cravings of sinful man, the lust of his
eyes and the boasting of what he has and does--comes not from the
Father but from the world.
절기는 신앙과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위하여 특별행사를 갖는 것입니다. 모형과 상징이 비유 교훈인 것처럼 깨닫게 하는데 유익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형과 상징을
실상보다 중히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약시대의 성회와 절기도 실상을 알게 하실 목적으로 주신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① 1~8절은 “안식일, 유월절, 무교절에 대한 말씀”이고, ② 9~14절은 “첫 이삭을 드리는 행사”인데, 이것을
초실절(출 34:22)이라고도 합니다. ③ 15~21절은 “칠칠절 행사”이고, ④ 22절은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한 배려”이며, ⑤
23~25절은 “7월 1일 나팔 부는 성회”이고, ⑥ 26~32절은 “7월 10일 속죄일 성회”이며, ⑦ 33~44절은 “7월
15일 초막절 행사”입니다.
선민의 월력 개념을 살피면 출애굽한 달을 첫 달로 삼고(출 12:2), 그 달 10일에 유월절
제물을 준비했으며(출 12:3), 14일 해질 때에 잡아 유월절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랐으니(출 12:6), 그 14일 이 유월절
첫날이고(출 12:11), 그 다음 날부터 7일 동안 무교병을 먹는 날을 무교절이라고 합니다(출 12:18). 출애굽한 것은
유월절 밤이 지난 다음 날이었습니다(출 12:29~34, 37~41, 13:3). 1월 15일부터 출애굽 행군이 시작되었고,
안식일 용어는 출 16:25에서 만나를 받았을 때에 “오늘은 안식일이라” 하셨는데, 그때가 2월 15일(출
16:1)경이었습니다(마라, 엘림을 떠나고 만나를 먹을 무렵).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1월 14일부터 21일까지의 유월절
기간이 첫 안식일(15일)부터 다음 안식일까지로 계산하였을 것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1주간 계획의 행사가 시작되어
지금까지 온 줄 압니다. 출애굽 당시의 아빕월(출 13:4, 신 16:1)을 1월로 시작하였고(양력으로 3, 4월에 해당),
왕정시대에 시브월(2월, 왕상 6:1, 37)과 에다님월(왕상 6월, 느 6:15), 기스르월(9월, 느 1:1, 슥 7:1),
데벳월(10월, 에 2:16), 스밧월(11월, 슥 1:7), 아달월(12월, 스 6:15, 에 3:7, 8:12)이 나온즉,
1년의 달 수는 12월인데 달의 날 수는 잘 알수 없습니다. 다만 유대력 1월을 양력 3월 15일~4월 15일로 추정하는
것입니다.
1. 안식일, 유월절, 무교절(1~8절)
이 절기는 출애굽할 때 시행하였지만(출 12:1~31) 여기에서 주신 계명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지키라는 것(10절, 출 13:5)”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에 의하여 하는 행사는 다 성회이고, 본 장에서는 6대 절기(유월절,
초실절, 칠칠절, 나팔절, 속죄절, 초막절)를 말씀하셨는데, 월삭(민 10:10)과 안식일은 절기에 들지 않습니다(3, 4절).
그리고 초실절이 곧 맥추절이며(출 23:16), 출 23:16의 수장절이 본문 22~25절에 해당하는 나팔절과 같은 것으로
사료됩니다. 수장절은 추수를 끝내고 연종에 하는 행사이기 때문입니다(절기상 연종은 추수를 끝낸 때임). 안식일에 대하여는 3절에서
“육일 동안 일하고 일곱 째 날은 무슨 일이든지(무노동을 강조한 뜻) 하지 말고 쉬라”고 하셨습니다(출 20:8~11).
4~8절에서 유월절(7일 중 첫날), 무교절(7일 중 6일간)의 말씀이 나옵니다. 유월절은 출애굽 전날 밤(문설주의 피, 애굽의
장자와 초태생 죽음)을 기념하는 뜻이고, 무교절은 누룩없는 떡을 먹으며 애굽을 탈출한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15절). “첫날도
성회로, 7일도 성회로 모이라” 하셨는데, 이 날은 안식일과 겸하게 된 줄 압니다. 그리고 이 유월절을 기한에 미쳐(전)
공포하라(준비의 뜻)고 하셨습니다. 8절에 기록된 화제에 대하여는 민 28:16~25에 자세히 기록되었습니다.
2. 초실절 행사(9~14절)
이 시기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첫 농사를 짓고 곡물을 거두었을 때 할 일입니다(10절). 안식일
이튿날에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갖고 가서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열납되도록 흔드는 것입니다. 그때에 1년 된 수양을 번제로
드리고, 다른 소제와 전제(힌 1/4의 포도주)도 함께 드립니다(11~13절). 14절은 “첫 소출을 하나님께 드리기 전에는
먹지 말라”는 뜻이고, “대대로 영원한 규례라” 하심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영원히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초실절이 다음
칠칠절을 계산하는 기점이 되는데, 이 날짜는 첫 곡식을 거두어 들일 수 있는 안식일 다음 날입니다. 영적 해석가들은 이 날을
예수님의 부활의 예표로, 그리고 칠칠절, 즉 오순절 요제를 성령 강림의 예표라고도 합니다.
3. 칠칠절 행사(15~21절)
15절에서 안식일 이튿날(초실절 행사일)부터 7안식을 지나는 날은 곧 50일 째 되는 날이기 때문에
오순절이라고도 하지만, 구약에서는 칠칠절로 말씀하셨고, 오순절이란 용어는 행 2:1에서 기록되었습니다. 16~17절에서 (그날에
고운 가루) 에바 2/10로 누룩을 넣고 만든 떡 두 개를 하나님께 첫 요제로 드리고(두 개의 의미는 알 수 없음), 18절에서는
“이 떡과 함께 1년 된…어린 양 일곱과 젊은 수소 하나와(늙은 소는 값이적음) 수양 둘을 그 소제, 전제와 함께 번제를
드리라(번제 규례 1장)”고 하셨습니다. “화제”는 불태운 것을 뜻하고, “향기로운 냄새”란 번제로 굽는 냄새를 뜻하는 것입니다.
또 19~20절에서 “수염소 하나로 속죄제를 드리고 1년 된 어린 수양 둘로 화목제를 드릴 것”은 레 3:1~17에, 20,
21절에서 드린 속죄제는 레 4:13~21에 준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17절에서 “누룩 넣은 떡을 만들어 드린다”는 것은 무교병과
대조되는 말씀인데, 새 소제(첫 이삭으로 만든 떡)를 드리는 제물로서 무교병(고난의 상징)의 입장에 머물지 않음을 상징하는
뜻으로 여겨집니다. 따라서 율법과 고난 상징의 시대가 복음(부활)과 성령의 시대로 전환될 것을 예고하신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을 예고하시는 일이 아니고서야 구테여 칠칠절 다음 날 50일 째 되는 날을 성회로 열어 새 소제를 드리게 하실
이유가 있으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21절은 “그날도 안식일처럼 지키고 성회로 여기며…영원한 규례라(14절)”고 하셨습니다.
4.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한 배려(22절)
이삭을 줍는 자와 배 고프게 지나가는 나그네는 항상 있는 것인즉 곡물을 벨 때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고
떨어진 것을 줍지 않게 하신 것은 가장 쉬운 방법으로서의 구제 행위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선방식은 “자신이 필요 이상 갖지
않으시면서(고후 8:9) 구제할 때 은밀하게 하라(마 6:2~4)”는 것이었습니다.
5. 7월 1일 나팔 부는 성회(23~25절)
이 절기를 나팔절이라고 합니다. “7월 1일을 안식일, 또는 성회로 삼고 하나님께 화제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화제는 불태운다는 뜻인즉 규례대로(출 29:18, 레 1:9, 2:2, 신 18:1) 드리면 됩니다. 왜 나팔을 불고
성회를 삼았을까요? “추수가 끝났은즉 가난한 사람들이 이삭을 주으러 가도 된다, 또 앞으로 10일 후면 속죄제 성회가 있은즉
준비하라”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민 29:1~6을 참고하십시오. 백성을 다스리는 일정이 주밀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6. 7월 10일 속죄일(26~32절)
속죄일 행사인즉 마땅히 속죄제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회중을 위한 속죄제 규례는 레 4:13~21에
기록되었습니다. 본문에서 주신 말씀은 “7월 10일에 시행하라. 9일 저녁부터 준비하여 이튿날까지 안식하고 성회로 지켜라(26,
32절). 스스로 괴롭게 하고(죄를 생각하는 뜻) 하나님께 화제를 드려라. 속죄일인즉 일하지 말라(28절, 속죄가 먹고 사는
일보다 중요하다는 뜻). 스스로 괴롭게 하지 않는 자는(중심에 통회하지 않는 자, 시 51:17 참고)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라(29절). 이 날에 일하는 자는 멸절시키리라(30절).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너희 거하는 각 처에서 대대로 영원히 지킬
규례라”고 하셨습니다. 회개하고 속죄 받는 행사에 참여하지 않는 자는 완악한 자로서 살아남을 수 없음을 알리는 엄격한 행사라고 할
것입니다. 이 행사는 레 16:5~22에서 “아사셀 양”이란 말씀으로 더 자세히 기록되었습니다.
7. 초막절(33~44절)
“7월 15일은 초막절이니 7일 동안 지키라(34절)”고 하셨습니다. “첫 날도 성회요, 아무 노동도
하지 말며(고용인들을 해방하는 뜻도 있음, 안식일처럼 지키는 뜻), 7일 동안 (매일) 화제를 드릴 것이요, 8일도 성회이며,
하나님께 드릴 거룩한 대회라(35~36절)”고 하셨습니다. 37~38절은 “초막절 뿐 아니라 다른 절기들을 지킬 때 미리 공포하여
준비하게 하고, 번제, 소제, 희생과 전제를 각각 그날에 화제로 드리고, 안식일 외에, 헌물 외에, 서원예물 외에, 낙헌예물
외에 드릴 것이라” 하시므로 이 초막절 행사를 다른 제사나 예물과 겸하지 않게 할 것을 명하신 것입니다. 39절은 “소산 거두기를
마친 때의 행사”이므로 감사절 의미가 있지만 더 큰 이유를 40~44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곧 “40년 동안 광야에서의 초막
생활을 기념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신 16:13, 출 23:16을 참고하십시오). 출 23:16에서는
수장절이라고 하셨습니다. 수장절은 소출을 다 거둔 의미이고, 초막절은 광야의 초막생활을 기념, 전수, 감사하는 의미입니다. “첫
날에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가지, 무성한 가지, 시내 버들을 취하여(초막을 만들고) 출생자가 다 그 안에 거하며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즐거워할 것이라(40절)” 하셨으니, 감사에는 예물에 앞서 즐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41절에서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라” 하셨으니, 초막에 거한 것도 감사할
일이요, 기념할 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획적으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주신 때는 마라와 엘림을 거쳐(출
15:2~27) 신광야에 왔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을 때, 즉 출애굽 2개월 15일 즈음입니다(출 16:1). 마라는
쓴물이고, 엘림은 단물입니다. 유교병은 굳은 떡이나 무교병은 부드러운 떡입니다. 칠칠절에는 “누룩을 넣어 먹으라(17절)”고
하셨습니다. 초막생활도 있었지만 가나안에 정착하는 생활도 있은즉 성도는 항상 소망 중에 살면서 고난도 취미와 낙으로 즐겨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성령님 및 교리설교 9과 “성령 강림절을 지키는 정신” 참고).
"일곱주를 셀지니 곡식에 낫을 대는 첫날부터 일곱주를 세어 네 하나님 여호와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신 16:9~10)
곡식에 처음 낫을 대는 날이 바로 초실절입니다. 이날은 예슈아께서 부활의 첫 열매로 부활하신 날이기도 합니다. 이 초실절부터 계수하여 7주를 지나면 49일이고 그 다음날이 50일 이 날이 오순절입니다. 이 오순절의 구속사적인 의미는 성화를 의미합니다. 즉 구원받은 자가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성화의 과정을 말합니다. 유월절에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구원이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것은 시작이고 성화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거룩한 삶을 살고 더 이상 죄짓지 않도록 살아야합니다.
그렇게 살기 위하여 그 당시에 토라말씀을 주셨고 예슈아시대에는 성령을 주셨습니다. 놀랍게도 이 오순절에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오순절에 주신 토라(율법과 계명) 와 성령의 역활은 무엇일까요? 여기서 토라를 다 율법이라고 신약번역자들이 번역해놓았습니다.
토라의 역활
첫째, 죄를 깨닫게 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7:7)
토라(율법)의 중요한 역할은 죄가 무엇인지 가르쳐주는 역할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사람과 똑같이 살면 죄를 짓고도
죄인지 알지를 못합니다. 세상 따라 살때는 탐내는 것이 죄인줄 알지 못하다가 토라를 보니까 탐내는 것이 죄라고 가르쳐주니까 죄인줄
압니다. 또한 동성애가 죄가 아니라고 세상은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동성애는 죄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러한 죄를 짓지 않으려고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토라는 죄를
알려주고 죄를 짓지 않도록 경고도 합니다.
둘째, 선하고 의로운 삶으로 도와줍니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슈아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함이라."(딤후3:15~17)
이 당시의 성경은 구약성경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 때는 신약이 나오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약 말씀
전체인 토라와 선지서 시가서입니다. 여기서 토라, 모세오경이 중심입니다. 디모데는 이 성경이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고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함으로 의의 열매를 맺게 하며 또한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에 있기에 선한 열매를 맺게 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순절은 이스라엘에서 생산되는 7가지의 식물(보리, 밀, 석류, 포도, 무화과, 대추야자열매, 올리브)을 거두어 하나님께
드리는날이듯이 우리는 이 날에 성화의 열매 선하고 의로운 열매들을 이 오순절에 드리도록 하기 위해 토라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토라의 가르침으로 선한 열매 의의 열매를 맺도록 해야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토라의 가르침대로 살지 못하고 불순종하고 죄를 짓고 토라말씀보다 유전과 전통을 가르치고 토라가
되시는 예슈아를 거부하였습니다. 예슈아는 토라 말대로 사셨고 토라를 완성하셨습니다. 친히 유월절 어린양이 되사 십자가에서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또 최고의 법인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을 실천하심으로 모든 울법을 이루셨던 것입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13:10) 이와같이 예슈아는 선하고 의로운 삶을 살도록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 시내산에서 이 토라를 주셨습니다.
성령의 역할
첫째 말씀을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십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14:26) 토라받은 오순절에 성령님이 오셔서 백성들이 성화의
과정을 걸어가도록 즉, 토라의 가르침에 따라 성공적으로 걸어가도록 모든 것을 가르치고 모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보혜사는 변호하고 보호하심을 말합니다.
토라말씀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성령께서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십니다. 그러므로 잘 모르면 성령님께
물어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으로 응답하실 것입니다. 매년 오순절을 지내면서 자신의 성화 과정을
점검합시다. 또한 성령의 도움을 받아 구원의 완성을 향하여 죄를 짓지 않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들째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33~23) 하나님의 오순절에 7가지의 소산물을 예물로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님을 보내주신 후에는 우리에게 9가지의 성령의 열매를 맺어 드립니다. 어떻게 열매를
맺는가요?
성령을 따라 살고 성령 충만함으로 토라의 가르침 따라 살 때에 맺는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성화의 과정을 성령님과 동행할 때
이러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백성이 성령의 열매를 맺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토라와 성령을 이 오순절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길 축복합니다.
"너희 타작마당과 포도주틀의 소출을 거두어들인 후에 이레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이레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소출과 네 손으로 행한 모든 일에
복을 주실 것이니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신 16:13)
이 초막절은 초막을 지어놓고 그 속에서 하나님이 광야를 잘 인도해 주심을 감사하고 축하하고 기뻐하며 파티를 하는 절기입니다.
7일간 이 기간 내내 맛있는 음식과 노래와 춤을 초막 안에서 즐깁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합니다. 즉, 완전한 구원을
이루는 천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초막절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할 다른 절기가 있습니다.
그것이 대속죄일입니다. 이 날은 금식하며 회개하는 날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날입니다. 물론 이전부터 회개를 하지만
이날은 특별히 하나님과의 관계와 다른 것에 흠이 있는지 살펴보면서 최종 회개하는데 그동안 성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살아왔다 해도
완전한 의를 이루지 못함과 온전한 거룩함을 이루지 못하는 한계가 있기에 놀랍게도 이 대속죄일을 마련하여 이날에 십자가의 보혈로
모든 죄를 깨끗이 씻고 초막절로 들어가도록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중요한 것은 죄를 없애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절기의 사이클에서 구원의 완성인 초막절로 들어가기 전에
대속죄일에 온전히 회개하여 십자가의 보혈로 그동안의 죄를 씻고 초막절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속사적 관점으로 보면 초막절은
구원의 완성입니다. 성경은 신랑 되신 어린양 예슈아와 혼인잔치의 예표가 초막절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절기의 사이클에 따라 유월절은 어린양 예슈아를 통하여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오순절은 말씀과 성령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는즉, 거룩해지는 성화의 과정을 거친 후에 가을 절기인 초막절에 들어가서 완전한 구원을 이루게 하는 계획이 들어있는
이 3대 명절은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사의 예표라는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이러한 3대 절기를 매년 지나면서 우리는 구원을 지키고 이루어가며 거룩한 삶을 살고 천국까지 이르는 것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절기의 사이클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축복합니다.
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10.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11.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12. 너희가 그 단을 흔드는 날에 일년 되고 흠 없는 수양을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13. 그 소제로는 기름 섞은 고운 가루 에바 십분 이를 여호와께 드려 화제를 삼아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고 전제로는 포도주 힌 사분 일을 쓸 것이며
14. 너희는 너희 하나님께 예물을 가져오는 그날까지 떡이든지 볶은 곡식이든지 생 이삭이든지 먹지 말찌니 이는 너희가 그 거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히브리 백성들이 지키는 명절은 교훈적이며 예언적입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에 이어서 초실절이라고 합니다. 초실절은 첫 열매를 하나님께 바치는 절기라고 하겠습니다. 첫 이삭은 보리 추수를 말합니다. 밀 추수는 맥추절이란 절기를 지킵니다.
히브리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가 될 때부터 흩어진 백성 즉 디아스포라가 되면서 절기를 지키는 것이 어려워졌습니다. 이때까지는 초실절을 지키는 것에 어려움이 없었을 것입니다.
절기를 지키는 날 / 안식일 다음 날 즉 부활의 날
11.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 주일
영적 의미는 첫 열매는 인간의 부활의 생명이 되는 부활의 주님을 상징합니다. 안식일 다음 날 부활하셨다. 이 날은 곧 초실절이 갖는 영적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 바람직한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안식후 첫날 마리아와 몇 명의 여인들이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그곳에서 무덤이 비었다는 것을 알고 부활의 소식을 전합니다.
고린도전서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첫 열매 : 첫 그 열매(the first fruit)
한 단을 가져갈 것이요
10.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고린도전서 15: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는 자들이 함께 부활한다. 부활은 예수님 한 분에게만 성립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속한 자들 모두가 부활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출생 후에 세상을 떠나는 시간은 각 사람마다 달리 떠납니다. 어린 생명, 갓난 아기, 소년, 소녀, 청년, 장년, 노년..............등 그러나 모두 부활의 날에는 모두 함께 일어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3-14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찐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
흠 없는 양, 고운 가루, 포도주
12. 너희가 그 단을 흔드는 날에 일년 되고 흠 없는 수양을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13. 그 소제로는 기름 섞은 고운 가루 에바 십분 이를 여호와께 드려 화제를 삼아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고 전제로는 포도주 힌 사분 일을 쓸 것이며
현대인들의 적용
- 첫째 것을 바치는 신앙( 첫째 것은 소중하고 의미가 있다)
(예) 가인과 아벨의 제사 / 첫 열매와 첫 새끼 첫 새끼를 드린 양
가인은 땅의 소산(창세기 4:3)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창세기 4:4)
잠언 3:9-10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
1. 첫 월급을 예물로 바치는 신앙 2. 사업장에서는 첫 수입을 예물로 바치는 신앙 3. 첫 시간을 무릎을 꿇고 시작하는 신앙 4. 첫 시간에 성경을 펴서 말씀을 읽고 시작하는 신앙 5. 음식을 만들었을 때 목회자에게 먼저 가져다 드렸던 신앙 6. 이웃의 영혼을 바칠 수 있는 신앙(직장, 이웃, 학교....)
로마서 15:16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정월 십사일 저녁은 여호와의 유월절이요 이 달 십오일은 여호와의 무교절이니 칠일 동안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 그 첫날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찌며 너희는 칠일 동안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 것이요 제 칠일에도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찌니라.
출애굽 당시 상황과 무교절의 유래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을 지키고 급히 애급에서 나오느라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을 가지고 나오면서 칠일간 무교병을 먹게 되었다(출애굽기 12:17~20).
유월절
밤에 애급 앙 바로가 장자를 멸하는 재앙을 당하고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떠나라고 하였다(출애굽기
12:30~31).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으로 출발한 후에 애급 왕 바로의 군대에게 쫓기기 시작하여 홍해 바다를 건너는 7일
동안의 고생한 날들을 기억하기 위한 절기이다(신명기 16:3).
유교병을 그것과 아울러 먹지 말고 칠일 동안은 무교병 곧 고난의 떡을 그것과 아울러 먹으라 이는 네가 애굽 땅에서 급속히 나왔음이니 이같이 행하여 너의 평생에 항상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을 기억할 것이니라.
그래서 무교병을 '고난의 떡'이라고도 불렀다.
구약 시대의 무교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율법을 알려 주시면서 15일부터 7일동안
무교절임을 선포하셨다(레위기 23:6~8). 애급에서 나온 것을 평생 기념하기 위해서 무교병을 먹으라는 율법(신명기
16:3~8)에 따라서, 오늘 날에도 유대인들은 무교병을 먹는다.
3. 유교병을 그것과 아울러 먹지 말고 칠일 동안은 무교병 곧 고난의 떡을 그것과 아울러 먹으라 이는 네가 애굽 땅에서 급속히 나왔음이니 이같이 행하여 너의 평생에 항상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을 기억할 것이니라> 4. 그 칠일 동안에는 네 사경 내에 누룩이 보이지 않게 할 것이요 또 네가 첫날 해 질 때에 제사드린 고기를 밤을 지내어 아침까지 두지 말것이며 5. 유월절 제사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각 성에서 드리지 말고 6.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가 애굽에서 나오던 시각 곧 초저녁 해 질 때에 드리고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그 고기를 구워먹고 아침에 네 장막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8. 너는 육일 동안은 무교병을 먹고 제 칠일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찌니라
구약에서 무교절을 지키는 장면
1. 출애굽 당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킨 무교절(출애굽기 12:17)
2. 솔로몬 시대 무교절 지키는 무겨절(역대하 8:13)
3. 히스기야 시대 남유다에서 지킨 무교절(역대하 30:13)
4. 요시아 시대 남유다에서 지킨 무교절(역대하 35:17)
5. 바벨론 포로 시절에 지킨 무교절(에스라 6:22)
구약 무교절 예법
1. 무교절 첫날과 끝날 성회를 열고 아무 노동도 하지 않음(레위기 23:7) 2. 무교절 절기 7일간 무교병을 먹음(레위기 23:6) 3. 무교절 절기 7일간 집에서 누룩을 제거(출애굽기 12:19)
신약 시대의 무교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을 지키고 고난을 받은 것처럼, 예수님도 최후의 만찬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 유월절을 지키시고 무교절(니산월 15일)에 십자가에 달리는 고난을 받으셨다.
무교절은 7일 간의 휴일이며, 첫날과 마지막 날은 법정 공휴일로, 휴일 식사, 특별기도 서비스가 진행되며 그날에는 일을 하지 않음으로써 하나의 성일로 기념된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아닌 외국에 거주하는 유대인들도 유월절을 포함하여 8일 동안 축제를 기념한다.
카라이테 유대교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다른 종류의 유대력을 사용하는데,이 달력은 종종 현대의 유대력과 하루나 이틀씩 차이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2009년에 일반 유대교에서 사용한 유대력의 니산월 15일은 4월 9일에 해당하는 반면, 카라이테 유대교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이 사용한 달력에서 아빕월(=니산월) 15일은 2009년 4 월 11일에 해당한다. 카라이테 유대교인과 사마리아인의 유월절은 하루 동안 진행되며 연이어 6일 간의 무교절 축제가 이어진다.
유월절과 무교절 날짜 논란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10일부터 유월절과 무교절 준비를 같이 시작하고 날짜도 하루 차이이고(유월절은 14일, 무교절은 15일로 부터 7일간), 봄철 대표 절기가 무교절이다 보니, 유월절과 무교절을 흔히 혼동한다.
유월절 다음날인 15일부터 7일간 무교절로 지내며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으며 15일과 7일째에 성회를 가진다.(레위기
23:6~8) 원래 이 두 축제는 별개의 축제로 취급되었으나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이 노예 생활에 대한 기억이며 죄악으로부터
정결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다, 실질적으로 무교절에 쓸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만들기 위해서는 유월절 전부터 준비해야 했으므로
점차 하나의 절기로 여겨졌다.
참고) 무교절과 유월절이 같은 절기이다는 주장과 사실 확인
출애굽기 12장 내용과 레위기 23장 내용이 일부 차이가 있어 결국 무교절과 유월절은 같은 절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너희는
무교절을 지키라 이 날에 내가 너희 군대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음이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영원한 규례를 삼아 이 날을 대대로
지킬지라 정월에 그 달 십사일 저녁부터 이십일일 저녁까지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 칠 일 동안은 누룩을 너희 집에 있지 않게
하라 무릇 유교물을 먹는 타국인이든지 본국에서 난 자든지 무론하고 이스라엘 회중에서 끊쳐지리니 너희는 아무 유교물이든지 먹지
말고 너희 모든 유하는 곳에서 무교병을 먹을지니라
출애굽기 17절 초반에 보면, "무교절을 지키라"는 내용이 있고, "십사일 저녁부터 이십일일 저녁까지
무교병을 먹으라"는 내용이 존재한다. 무교절은 명칭에서 비롯된 것처럼, 무교병을 먹는 날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절에 보면, "칠 일 동안은 누룩을 너희 집에 있게 않게 하라"고 적혀 있다. 그러므로 14일부터 무교절이 시작하므로,
유월절은 무교절에 포함된 비 독립 절기라는 주장이다.
십사일부터 이십일일은 팔일에 해당한다. 8일간 무교병을 먹게 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4일 저녁 유월절에는 양고기와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으라고 하셨다. (참고: 영문 위키 Passover Seder)
이달 십사 일까지 간직하였다가 해질 때에 ...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즉, 유월절날 무교병을 먹게 되어 있는 절기 내용 때문에 유월절과 무교절이 같다고 여기는 것이지, 유월절은 무교절과 같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무교절 The feast of Unleavened Bread
출애굽기 12:15 너희는 칠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칠일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쳐지리라.
1. 무교절(無酵節)의 의미
무교병(無酵餠)은
히브리어 ‘맛차’, 헬라어 ‘아쥐모스’로, 누룩이 없는 떡을 말합니다. 한자로는 ‘없을 무(無), 술괼 교(酵), 떡 병(餠)’(창
19:3)이며, 반죽을 부풀게 하는 누룩을 넣지 않고 만든 넓적하고 얇은 빵입니다. 무교병은(출 12:15) 주로 긴급한 상황
속에서 만들어 먹었으며(출 12:33-34, 39, 삼상 28:24-25), “고난의 떡”으로도 불렸습니다(신 16:3).
2. 무교절을 지키는 방법
무교절은
유월절이 끝난 직후인 1월 15일부터 21일까지 7일간 지키는 절기입니다(출 12:18, 레 23:5-8). 7일 동안 집안에
누룩을 없애고 누룩을 넣지 않는 떡(무교병)을 먹으며 지내는데, 이는 성도의 성별된 생활을 상징합니다. 특별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12:15).
유대인들은
니산월(태양력 3-4월)이 되면 유월절 전에 온 집안의 누룩을 제거하는데, 이 행사는 깊은 구속사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유월절이 오기 며칠 혹은 몇 주 전부터 대청소를 합니다. 카펫트도 청소하고 옷이나 침구, 커튼 등도 세탁하고, 집안에 있는
먼지를 샅샅이 제거합니다. 주머니까지도 일일이 뒤집어서 털어 냅니다. 너무 낡고 더러운 것들은 새 것으로 교체합니다. 가정은
물론이고 각 건물마다 곰팡이와 먼지를 완전히 닦아 내는 대청소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마을마다 불을 피워 남아 있는
누룩들을 태우고, 식기들과 조리 도구들도 끓는 물로 소독하여 누룩의 흔적조차 모두 없앱니다. 특히 유월절 전날 저녁에는 누룩을
제거하는 일이 그 절정에 이릅니다.
마태복음 16:11-12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마태복음 16:6, 11을 볼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8:15). 이 누룩은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마 16:12).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율법을 문자적인 의미로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이와
같은 노력에 대해서 예를 들어 말씀하시기를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을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잘못된 교훈은 행동으로 나타난 것만 죄라고 가르쳤으나 예수님께서는 행동하기 이전의 마음과 생각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안식일에 가축이 웅덩이에 빠져 있을 때 만일 가축이 죽을 것같으면 끄집어내야 합니다. 그러나 가축이 죽지 않을 것같으면 안식일이 지난 후에 웅덩이에서 꺼내야 합니다.
길을 가던 제자들이 안식일이 밀 이삭을 잘라 먹었을 때 바리새인들은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한다고 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다윗이 시장하여 진설병을 먹었다.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다는 것을 율법에서 읽지 않았느냐?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
2. 외식(hypocrisy) /
누가복음 12:1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외식(外飾)은 겉만 번지르르하게 꾸미는 것으로, 속과 겉이 다른 것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15장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는 것을 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장로의 유전을 지키지 않느냐?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였으나 하나님께 드렸다고 하면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며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한다고 하셨습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은 내게서 멀다고 하셨습니다.
3. 음행(sexual immorality) /
고린도전서 5:1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고린도
교회에 음행이 있었는데, 이것은 누룩과 같아서 온 교회에 금방 퍼져 나가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책망하면서, ‘묵은 누룩,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을 내어버리라 즉 누룩이란 죄악을 의미합니다.
고린도전서
5:6-8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누룩의 결과 / 죽음(death) 로마서 5:1, 6:23
죽음은 모든 것을 썩이고, 냄새를 풍기고 이용이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 같이 누룩도 같은 작용을 한다. 그리고 죽음은 죄의 댓가요, 악의 열매이다(로마서 5:21, 6:23).
로마서 5: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누룩 / 쥐메 zuvmh, 2219
zuvmh, 2219(zyme: 쥐메). 효모, 누룩 leaven.
zumovw, 2220(zymoo: 쥐모오). 발효시키다 ferment.
azumo", 106(azymos 아쥐모스). 누룩 없는 unleavened.
1. 고전 헬라어 문헌.
쥐메(zyme:)는
아리스토텔레스(주전 4세기)로부터 텝투니스 파피루스(Tebtunis Papyri; 주후 2세기)에 이르기까지 세속 헬라어에
나타난다. 쥐모오(zymoo:)는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주전 5세기)의 글에서 처음 사용된다. 누룩은 곡식을
발효시킬 때 쓰이는 것으로 이스트가 아니라 오래 되고 시큼해진 가루반죽이다. 이것을 저장해 두었다가 즙을 첨가하여 발효소가 되게
만든 후, 새 가루 반죽에 “넣어”(마 13:33; 눅 13:21) 그 속으로
스며들고 가루반죽이 부풀도록 하는 것이다. 로마 국가 제의(祭儀)에서 플라멘 디알리스(Flamen Dialis)는 누룩과
접촉해서는 안 되었다. 그 이유는 플루타르크(Quaestiones Romanae 109)의 주장에 따르면, 누룩이 약하게 하고
시큼하게 하고 부패시키기 때문이다.
구약성경
1. 쥐메(zyme:)는 70인 역본과 요세푸스의 글 가운데 절기(축제) 및 제사 규정과 관련된 제의 문맥(cultic contexts)에서 문자적으로 사용된다(예: 출 12:15; 출 12:19; 신 16:3; 요세푸스, Ant. 3, 252이하). 그것은 유대 의식에 있어서 반드시 금기는 아니었다. 누룩은 화목제의 감사희생에서는 사용되었으나(레 7:13), 불로 태워드리는 소제에서는 사용이 금지되었다(레 2:11; 레 6:17). 매년 유월절과 무교절 예식 때에는, 모든 누룩은 니산월 14일 하루 동안에 전 유대 가정에서 하나도 남김없이 제거되었고, 유대인들은 그날 저녁부터 7일 동안 오직 무교병만을 먹으며(출 20:14; 출 20:20) 애굽에서 급히 도망쳐 나온 것을 기념하였다(출 12:34; 출 12:39).
이러한 춘계 대청소는 제의 의식이었지만, 한편 그것은 신 누룩을 계속 사용함으로써 야기되는 연속적인 전염병 발생을 막고자 하는
위생상의 목적을 갖고 있다(C. L. Mitton, “Leaven”, ExpT 84, 1972-73, 339이하).
2.
비유적으로 누룩은 랍비 전승에서 서로 다른 여러 가지 의미들을 갖는다. 랍비 알렉산더는 그것을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에 대한
인간적인 억제를 나타내는 은유로서 사용하였다(I. Abrahams, Studies in Pharisaism and the
Gospels, I, 1917, 52이하). 반면에 랍비 히야 바 압바(Rabbi Chiyya bar Abba)는 토라(율법)를
지키는 이스라엘 백성을 그 능력으로 다시 하나님에게로 인도할 '토라'를 누룩으로 묘사하였다(SBI 728). 필로(Philo)
역시 그것에 전이된 여러 가지 다른 의미들을 부여하였다. 한편으로, 그것은 과장된 오만함, 탐닉 및 허식을 상징하며(Quaest.
in Exod, 1, 15; 2, 14),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완벽한(영적) 음식물과 행복한 기쁨을 나타낸다(Spec.
Leg. 2, 185).
신약 성경
1. 쥐메(zyme:)와 쥐모오(zymoo:)
공관복음서와 바울 서신에 나타난다. 각각의 경우는 문학적 표현 즉 비유, 은유, 격언(잠언) 및 상징에 속한다. 비록
학자들 가운데에는 신약성경에서 “누룩은 전염병처럼 퍼지는 악 영향을 표상하기 위하여 상징적으로 사용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종종
있기는 하지만, 다양한 용례들의 요점은 문맥에 따라 다르다(C. L. Mitton, Op. cit., 342).
(a) 비유, 마 13:33과 눅 13:21에서는, 예수의 말씀과 사역에서 보여지는 하나님의 → 왕국 Kingdom이 눈에 띄이지 않지만 영속적으로 팽창한다는 사실이 반죽 전체에 스며들기까지는 그 속에 감추어져 있는 누룩에 비유되고 있다.
오데버그(H. Odeberg)는 이 비유를 악에 대한 경고로 해석하며(Herren Kommer, 1962, 199-201), 미톤(C. L. Mitton)은 영향력 있는악의 힘과 비교하는 것이라고 말한다(Op. cit., 341). 그렇지만 이 비유 앞에 있는 겨자씨 비유의 요점은 적은 것에 의한 팽창 또는 성장이다(참조: 고전 5:6의 경구). 도마 복음서는 누룩을 비유적으로 사용하면서 그것의 팽창하는 성질을 강조한다(p.1-525*) (B. Gartner, The Theology of the Gospeis of Thomas, 1961, 230이하).
마태와
누가의 요점은 은밀하고 신비한 침투에 의한 팽창이며, 악의 영향력은 아닌 것으로 보여진다(B. Gerhardsson, “The
Seven Parables in Matthew 13”, NTS 19, 1972-73, 22이하). 반죽이 의미하는 것이 사회의
문화인지 아니면 지역적 세상(orbis terrarium)인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시사된 바가 없다.
(b) 은유, 막 8:15에서 누룩은 제사들이 조심해야 하는 바리새인과 헤롯('헤롯당'의 다른 표현임)의 속성을 가리킨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경계하라는 내용의 마 16:11이하에서는 이 은유가 교훈으로 해석되며, 바리새인들만이 언급되고 있는 눅 12:1에서는
'외식' hypocrisy으로 설명된다. 몇몇 학자들(예: V. Taylor, The Gospel According to St.
Mark, 1953, 365)의 견해에 따르면, 그 훈계가 암시하는 바는 누룩이 악한 어떤 것을 지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니다(H. Windisch, TDNT Ⅱ 906). 만일 바리새인들이 후에 랍비 히야 바 압바(위의
'구약성경' 2를 보라)가 주장한 것과 유사한 주장을 율법(토라)에 대해서 한다면, 마가복음에 설명되지 않은 경고는 설명 없이도
이해되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경우에 있어서 마태는 기독교인 대중에게 편지를 하면서 누가와 마찬가지로 그 은유를 올바로
해석하였다. 왜냐하면 바리새인의 율법 준수가 예수님 보시기에는 더 이상 활력에 찬 믿음이 아니라 가면이었기 때문이다(참조: 마 6:2이하; 마 23:13).
(c) 격언(잠언). 고전 5:6과 갈 5:9에서 바울은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진다”는 말을 한다. 형식에
있어서는 잠언(격언)이지만, 바울 외에는 다른 곳에서 잠언으로 사용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이 말들은 기독교 교회에서 누룩의
비유와 관련되어 있었을 것이다. 빈디쉬(Windisch)는 예수께서 격언의 요점을 비유의 형태로 승화시키셨다고 생각한다(Op.
cit., 905). 그러나 그 비유가 바울을 제외하고 복음의 전승형성 이전에 존재했었다는 증거가 없으므로, 비유로 인하여 격언이
교회 내에 생겼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다른 경우에 있어서도 공관복음 전승이 신약서신들의 소재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참조: H. Riesenfeld, The Gospel Tradition and its Beginnings, 1957,
15). 고린도전서에서의 그 격언은 공동체 안에 범법자가 계속 존재함으로써 공동체가 범법의 죄를 짓게 된다(고전 5:1)는 내용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며, 갈라디아에서의 비유적 표현은 회중의 이해(판단)에 미치는 거짓 교사의 영향력을 가리킨다.
(d) 상징. 고전 5:7에서 바울은 공동체에게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고 권면했다.
이것은 범죄자를 축출하라(고전 5:13)는 명령이거나 죄와의 연합에 대한 “자랑”을 버리라는 훈계일 것이다. 명령의 근거는 유월절 → 어린 양 Lamb 그리스도께서 희생당하셨다는 것과, 기독교인들은 “누룩 없는” 자들이라는 사실, 그리고
명절은 누룩(곧 악과 악의)를 내어버리고 누룩 없는 떡(곧 순전함과 진실함)을 함께 나눔으로써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우화가
아닌, A. T. Hanson, Studies in Paul's Techique and Theology, 1974, 112이하).
이 상징은 유월절 의식을 상기시키며 기독교가 그리스도를 유월절 → 어린 양 Lamb(요 19:14; 요 19:31; 벧전 1:19)과
동일시한 것을 기억케 한다. 유대인들은 유월절 음식을 먹기 전에 누룩을 내버렸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도 누룩을 내버려야
하는데, 그 이유는 유월절 희생이 이미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기독교인은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지게 되고 하나님에 의해
새롭게 된다(고전 6:11). 이것이 바울의 윤리적 교훈의 전형적인 예이다. 이 윤리적 교훈에 따르면
기독교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직설법으로 표현되었다)은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라는 권면의
근거(명령법으로 표현되었다)이니 하나님이 신자 안에서 역사할 때 악을 버리고 선을 좇는 것이다. 이 밖의 다른 예들을 찾아볼 수
있는 구절은 롬 6:1; 고전 6:19이하; 그리고 골 2:20-4:1 등이다.
2. 아쥐모스(azymos)는 '누록 없는' unleavened을 뜻하며, 고전 5:7이하(위의 1. (4)를 보라)의 경우를 제외한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복수 형태의 '타 아쥐마'(ta azyma)로 나오는데, 이는 '무교(병)절'을 의미한다.이것은 본래 아빕월에 지켜지던 일종의 추수감사절이었는데(출 23:14-17), 유월절 의식의 일부가 되었다. 후자는 니산월 15일부터 21일까지 행해졌지만, 막 14:12에서 볼 수 있는대로, 니산월 14일에 시작되는 것으로 정해져 있었다(Josephus, Ant. 2, 15, 1; 14, 2, 1). 유대인들은, 눅 22:1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언제나 유월절을 무교절과 동일시하였다(겔 45:21; Josephus, War, 2, 10). (p.1-526*) - G. T. D. Angel.
O.
T. Allis, “The Parable of the Leaven”, EQ 19, 1947, 254이하; Arndt, 340;
J. P. Lewis, “Leaven”, ZPEB Ⅲ 901이하; Liddell-Scott, 757; C. L. Mitton,
“Leaven”, ExpT 84, 1972-73, 339-42; H. Windisch, zym? etc., TDNT Ⅲ 902-6
"떡"은 주님이시다. 요한복음 6:22-29 나는 생명의 떡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누룩없는 떡은 예수 그리스도는 죄와 악이 없을 뿐 아니라 죽음이 그를 주장하지를 못하고
다스릴 수 없음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생명과 부활의 능력만이 작용한다. 그러기 때문에 죽음에서 부활하셨다. 즉, 주님은
의롭고 거룩하실 뿐만 아니라 생명의 근본이심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 떡을 먹는 이스라엘 자신들에게 의롭고 거록함만이 아니라
생명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 거룩한 떡에 접촉된자는 거룩하여 진다"는 레위기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신약시대에 제2이스라엘 되는 성도가 생명의 떡이 되시는 주님과 영적인 관계를 가질 때,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힘입을 때,
의롭고 거ㄹ함만이 아니라 영생을 얻게 됨을 의미한다.그러므로 천하 다른 이름으로 구원이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 그
구원에는 칭의,거룩함, 생명이 있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 그 구원에는 칭의,거룩함,생명이 있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 안에 주어지는 것이다 (요6:39-54,롬8:10-23,고전15:12-57).그러므로 요한복음 6장 22-29절에
주님은 자신이 생명의 떡이 되심을 말씀했다. 우리가 주의할 것은 이 무교절은 1주간 계속됨이다. 그 첫날과 마지막 날에 성회로
모이고, 다음 둘째 날에서 여섯째 날까지 5일간은 일을 했다. 이 날에 무슨 일을 했을까? 이 날에 한 일은 레위기 23장 9-14에
의하면 초실절을 지켰다. 즉 이스라엘이 처음 익은 보리단을 거두어 하나님께 바친 것이다. 그러므로 이날은 하나님을 위한 일을
하는 날이다. 위 성경에서 하나님께 드림이 된 처음 익은 곡식단은 무엇인가?이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고 했다.103)
이런 첫 열매 되시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도 그 부활의 생명과 소망이 주어진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15장 23절 이하에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가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자"이라고 했다. "이것은 일반 신자들의 부활을 보장하는 것이기도 하다.104)
그 부활은 전체 성도에게와 이스라엘과 이방인에게도 다 미친다(행 26;23). 물론 부활 때에 제1차 부활과 제 2차 부활이 있다. 그러나 부활의 역사는 하나이다.
우리들이 이 유월절과 무교절을 살펴보면 시간적으로 전주간과 차주간의 관계를 알 수 있다. 그와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관계도 역시 시간적인 차이가 있다. 즉 주님께서 전주간에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는가 하면 차주간인 안식일 후 첫날에 부활하셨다.
또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들도 주안에서 죽으나 사나 주안에서 사는 부활의 영광이 있다. 우리는 이 소망중에 살고 있다(고전 15:12-57,딤전 4:14-16).
그러므로 우리는 그 무교절에서 배운 진리가 크다. 주님의 행하신 일들은 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섭리에 따라서 기록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초림만 아니라 그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도 다 그렇다. 앞으로 생각할 성령의 강림과 주님의 재림과 심판도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따라 되어진 것이다. 그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의 확증이요, 의롭게 함과 거룩함과 생명의 유대를 증거하는
증서이다.
신약시대의 무교절
구약시대에 지킨 무교절이 출애굽 당시의 고난을 기억하기 위한 절기라면 신약시대의 무교절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기억하고 잊지 않기 위한 절기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하셨다(마태복음 9:15, 마가복음 2:20, 누가복음 5:35).
성경에서 신랑은 예수님을 가리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시며 운명하신 날, 즉 신랑을 빼앗긴 날은 유월절 다음 날인 무교절이었다. 바로 성력 1월 15일이다. 그래서 새 언약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해마다 이날이 되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무한한 사랑으로 고난을 참으신 그리스도의 참사랑을 기억하기 위해 금식하며 예배를 드린다.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사도행전 20:6)
바울과 누가 일행은 마케도니아 지역인 빌립보에 있을 때 무교절을 맞이했다. ‘무교절 후에 떠났다’는 말은 빌립보에서 무교절을 지키고 떠났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시길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라”고 하셨다. 이는 아브라함처럼 행사하지 않는 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그리스도인’이란 칭호를 받게 된 것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었기 때문이며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따르는 순수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의 행사를 해야 한다. 신랑을 빼앗긴 날에는 금식으로 동참하는 사람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유월절에 마지막 만찬을 드시고 무교절에 십자가에서 운명하셨다. 절기를 따라 절기의 제물이 되신 것이다. 무교절은 초대교회 사도들과 성도들이 지키던, 아주 소중한 그리스도의 율법이다.
유월절 Passover
출애굽기 12:27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날로, 유대 민족에게 있어서 최대의 축제일입니다.
1) 유월절의 의미
‘유월절’은 히브리어 ‘페사흐’로 ‘건너뛰다, 뛰어넘다’라는 뜻을 가진 ‘파사흐’에서 유래하였습니다(출 12:13, 2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시면서 애굽에 내리신 마지막 재앙은 사람부터 짐승까지 처음 난 것을 치신 장자 재앙이었습니다(출
12:29-30, 13:15). 이 때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게 하심으로, 죽음의
사자가 이스라엘 백성의 집을 그냥 넘어 가게 하셨습니다. 유월절은 바로 그날, 이스라엘 백성이 죽음에서 구원 받은 것을 기념하여
지키는 절기로(출 12:13-14, 21-23, 27), 매년 반드시 지켜야 할 이스라엘의 3대 절기인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
중의 하나였습니다(출 23:14-17, 34:18-23, 신 16:1-16).
2) 유월절 어린양의 준비
하나님께서
어린 양은 1월 10일에 준비하였다가(출 12:3), 특히 1월 14일 해 질 때에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12:6).
유월절 제물로 사용되는 어린 양은 1년 된 수컷으로(출 12:5), 1월 14일까지 보관하면서 제물로서 합당한지 시험합니다. 만일
이때에 준비한 양이 흠이 있거나, 제물로서 합당하지 못한 기타 다른 요소들이 발견되면, 유월절 어린양으로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
유월절 양을 1월 14일 해 질 때에 잡으라고 하셨는데(출 12:6), 해 질 때는 오후 3시부터 오후 6시 사이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 양으로(요 1:29, 고전 5:7) 인간의 대속을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때가, 바로 유월절 양을 잡기
시작하는 오후 3시였습니다(마 27:46-50).
3) 유월절을 지키는 방법 (제도)
유월절은 니산월(태양력 3-4월) 14일에 지켜졌으며, 특별히 성경에서는 마지막 10번째 재앙을 통해 애굽의 모든 장자들을 멸하신 유월절인 니산월(1월) 14일 밤(유대 달력으로 15일이 시작되는 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월
14일 저녁에 양을 잡아서 피와 고기를 분리시켰는데, 고기는 고기대로, 피는 피대로 사용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또 양의 죽는
모습을 통하여 죽음의 고통과 대가를 크게 느끼고 생각케 하는 것인데 그 양의 죽음은 대속의 죽음을 뜻합니다. 피는 양을 먹는 집
문설주와 인방에 바릅니다(출 12:7, 22). 이 피를 바름으로 양을 잡은 집을 표시하고, 양의 피냄새를 풍기어 양의 희생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어린 양의 고기는 그날 밤에 불에 구어 먹되 무교병과 쓴 나물과 같이 먹습니다(출 12:8-9).
여기서 몇 가지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출 12:9-11, 46).
① 날로 먹어서는 안됩니다.
② 물에 삶아 먹어도 안됩니다.
③ 아침까지 남겨 두어서는 안되며, 남은 것은 불에 태웁니다.
④ 뼈를 꺾어서는 안됩니다.
⑤ 머리 뿐 아니라 정강이와 내장도 남김없이 다 구워 먹게 되어 있습니다.
⑥ 먹을 때 자세는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습니다.
또한, 주의해야 할 것은 그 밤에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애굽에 재앙을 내리심으로 애굽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시기 때문입니다(출 12:22-23).
요한복음 2:23,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요한복음 3:1,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공생애 첫번째 유월절 : 니고데모와의 대화
예수님의 일방적인 선포하시는 말씀이다. 이것을 유월절 배경에서 이해해야 한다. 유월절에 고대 이스라엘 국가가 탄생한 것처럼 유월절의 화두는 거듭남에 의한 하나님 나라를 깨우치셨다.
거듭남(아노덴) 위로부터 above 다시 / 니고데모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학문적으로 깊은 사람이었으므로 아노덴을 다시라고 이해한 것이 합당하다. born again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영적으로 설명하신다. 위로부터 from above
요한복음 6:4-5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유월절에는 모든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벳세다에 계신다. 이것은 굉장히 놀라운 사건이다. 이 해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왜 그러셨을까? 세례 요한의 처형이 있었다.
가버나움은 헤롯 안티파스의 영역(세례 요한을 처형한 헤롯) 벳세다는 헤롯 빌립의 영역(헤롯 안티파스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 지역으로 이동하셨다)
요한복음 기자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유월절을 조명한다.
1. 보리떡 2. 물고기
요한복음 6:9 여기 한 아이가 있어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보리떡은 가난한 자들의 식량 유월절에는 밀떡을 먹는다.
빈들 - 벳세다는 유다 지방에서 가장 푸르른 지역. 년 강우량이 1000-1200mm 광야, 빈들(에레모스)이 아니다(지리적으로) 그런데 왜 광야, 빈들이라고 표현하였을까?
마태복음 14:15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먹게 하소서.
애급에서 나온 백성들이 제일 먼저 들어간 곳이 광야 에레모스 빈들이었다.
요한복음 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표현하셨다.
요한복음 13장부터 18장까지의 기록이 마지막 유월절 6시간에 일어났던 일을 기록한다. 해가 질 때부터 자정까지 6시간 동안 진행된 유월절 만찬 자리에서 있었던 사건이다.
요한복음 13장 최후의 만찬 자리 / 큰 다락방 1. 크다 2. 2층 3. 가구가 준비된 방 4. 사랑방(손님을 위한 방으로 '카탈루마' 라고 한다)
유월절 만찬을 "세데르(Seder)" 라고 한다. 이 때 4잔의 포도주를 마신다. 취하지 않도록 1잔의 포도주에 3잔의 물을 넣어 희석시켜서 마신다. 왜 4잔의 포도주를 마시는가?
출애굽기 6:6-8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줄 너희가 알찌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하셨다 하라.
4개의 동사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4잔의 포도주를 마신다. 유월절 행사의 핵심 코드는 "해방" 그러므로 "기쁨"이다.
기쁨의 상징은 포도 / 예수님은 포도나무, 너희는 가지
유월절 만찬 음식 무교병 - 급하게 나왔다. 구원의 즉각성(무교병을 먹는 것)과 점진성 어린 양 - 삶은 어린 양 고기 쓴나물 - 마로르 하로셋 - 무화과 대추야자 건포도 등을 혼합하여 만든 소스로 애급의 고역 구은 계란 - 고통 상징 포도주 4잔 - 소금 -
성경은 이적과 기적과 기사 그리고 표적으로 가득하다.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초인간적인 놀라운 행적으로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등의 사건 그리고 자연계에서 벌어지는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물 위로 걷는다든가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사건 등을 이적, 기적, 기사라고 하고 이것들은 메시아적 증거로서 표적이라고
한다.
영어 성경은 이적과 기사를 Wonder로, 기적을 Miracle로 번역했고 표적은 sign이라고 번역했다. 한글 성경은 헬라어 세메이온(σημειόν)을 이적 또는 표적이라고 번역했고, 테라스(τέρας)를 기적이라고 번역해서 혼선 양상을 보인다. 이적, 기적, 가사는 테라스(τέρας)로 번역해야 하고 세메이온(σημειόν)은 표적으로 번역해야 구분이 될 것이다.
“표적”이란 히브리어로 ‘오트’(תוא)이고, 헬라어는 쎄메이온(σημεῖον)이며 영어로는 ‘사인’ (sign)으로 ‘표시’, ‘징조’, ‘증표’ 등의 뜻을 가진다.
표적을 둘로 나누어 본다면 초인간적 행사를 이적 기적이라 하고 초자연적 행사를 이적 기사라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적이나 기적이나 기사는 표적(sign, σημεῖον)의 다른 명사들이다. 그래서 히브리어에서는 이적, 기적, 기사, 표적이 ‘오트’(תוא)로 통일된다.
요한복음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라는 일곱 개의 대표적 표적이 나타난다.
1.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표적(요 2:1~11)
2. 가버나움에서 죽어가는 고관의 아들을 고치신 표적(요 4:46~54))
3. 베데스다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표적(요 5:1~9)
4. 디베랴 바다 건너편에서 오병이어로 5,000명의 무리를 먹이신 표적(요 6:1~15))
5. 디베랴 바다에서 물 위를 걸으신 표적,(요 6:16~21)
6. 실로암에서 날 때부터 장님이었던 사람의 눈을 뜨게 해주신 표적(요 9:1~12)
7. 베다니에서 죽은 지 사흘 된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요 11:1~44)
표적의 의미가 무엇인가?
성경에 나타난 구속사적 표적들을 살펴보자.
첫째, 이스라엘 구원의 언약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표적
지팡이로 뱀을 만들어 보이시는 일, 모세의 손에 문둥병을 발하게 하셨다가 다시 치유하시는 일 등이 약속을 이행하시겠다는 하나님의 표적인 것이다. 임마누엘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사인이다.
둘째, 무흠하신 속죄의 어린 양이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표적
메시야가 성령으로 잉태되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게 하시고 성령세례를 받게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속죄 양으로 오신 메시아이심을 나타내는 표적이다(사 7:14).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하심과 속죄주의 자격을 나타내는 사인이다.
셋째, 기적을 통해 천국을 보이시는 성령님의 능력의 표적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의 권능을 따라 나타나는 치유사역과 초자연적 기적 등은 바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는 표적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님을 통해 만물을 회복하고 우리를 천국으로 초대하시는 메시아인 증거의 사인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주님에 의한(by Jesus), 주님에 대한(of Jesus), 주님을 위한(for Jesus) 표적을 탐욕에 의하여 인간의 욕망을 채우는 표적으로 오인하게 되었다.
오병이어의 표적이 있은 뒤에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질문했다. 모세는 만나를 통해 먹을 것을 제공하는 표적을 보였는데 예수는
무슨 표적을 보이겠는가? 라고 질문하게 된다. 유대인들이 주님을 따른 것은 경제적 해결이나 정치적 이슈로 표적을 구했음을 스스로
자인하는 장면이다
그 증거로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을 때 주님을 따르는 무리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때 주님께서 그들을 보면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나를 증거하는)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이 땅의)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라고 하셨다.
주님은 정치적이고 탐욕적인 표적을 추구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진정한 표적이 무엇인가를 선포하셨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 12:39~40))
주님은 이미 자신에 대한 표적으로 많은 이적 기사를 통해 주님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이심을 나타내 보이셨다. 그러나 깨닫지
못하고 육신의 욕망을 채우고자 하며 이 땅의 표적만을 구하는 저들에게 요나의 표적을 통해 종말론적 구속자로 오시는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증거하신 것이다. 요나의 표적이 주님 자신을 증거하는 모형으로서의 진정한 표적이라는 것을 알려주신 것이다. 그러나
깨달을 수 있는 귀 있는 자만이 알 수 있었다.
바울사도께서는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선포했다.
“유대인은 (땅의)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땅의)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표적과 지혜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전 1:22~23).
성경에
나타나는 이적 기사의 표적의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에 예언한 메시아요 구세주라고 표식인데 이것을 모르는 군중들에게 바울
사도께서는 하나님이 보내신 진정한 표적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인을 구원하시는 구세주이심을 선포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의 7대 절기
출애굽기 34:22절 말씀이 많은 혼동을 불러 일으키는 것 같은데… 일단은 레위기 23장을 중심으로 7절기를 정리하시는 것이 좋을 듯…
1 . 유월절(레 23:4-5; 고전 5:7)
히브리어로 "페사흐" '넘어가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니산월(아빕월,
1월) 14일 해질 무렵, 나흘 전에 준비한 수양을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함께 먹고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아침까지 남은
것은 불에 태워 버린다. 애굽이 하나님의 진노로 장자를 잃는 열 번째 재앙을 당할 때 구원받은 것과 해방을 기념하는 날이다.
2. 무교절(레 23:6-8: 고전 5:7,8)
히브리어로는
맛차로. 니산월(아빕월, 1월) 15일부터 7일 동안(21일 까지) 누룩이 없는 무교병을 먹는다. 절기의 이름도 이 누룩 없는
떡을 먹는다하여 무교절이라 불리웠다. 무교절이 시작되는 첫 날과 마지막 날은 '성회' 로 백성이 모이고 노동을 하지 못했으며 매일
하나님께 화제를 드렸다 3. 초실절(레 23:9-14: 고전 15:20)
초실절은
히브리어로 바쿠림이라 불리며 무교절 기간 중에 있는 절기로, 유월절 후 첫 안식일 다음 날이다. 추수 전에 곡식의 첫 이삭 한
단을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로써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이다. 초실절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기 전에는 떡이나 볶은 곡식, 생
이삭이라도 먹지 않았다. 4. 오순절(=칠칠절=맥추절) (레 23:15-21 : 행 2:1-47: 고전 12:13: 엡 2:11-22)
히브리어로는
솨부아 '맹세하다' 라는 뜻으로 밀을 수확할 수 있도록 복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이다. 칠칠절은 초실절로부터 50일째에
해당하는 날로써 보통 시완월(3월) 6일경이 된다. 이 날은 하루만 절기로 지키는데 성회를 공포하고 노동이 금지되며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고 수염소 한 마리를 속죄제로 드렸다. 특이한 것은 모든 절기에는 누룩이 없는 무교병을 쓰지만 칠칠절만은 누룩을 넣은
유교병을 소제로 사용한다. 5. 나팔절(레 23:23-25)
나팔절은 티쉬리월(7 월) 1일로 유대 민간력으로는 1월에 해당하는 새해 첫날이다. 이 날은 나팔을 하루 종일 일정한 간격으로 불었으며 성회가 선포되고 노동을 금했다. 그리고 속죄제로 수염소 한 마리를 드렸다.
6. 속죄일(레 23:26-32; 히 9:25, 26)
이 날은 성회가 선포되고 노동을 금하며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로 티쉬리월( 7월) 10일이다. 특별히 연중 이 날만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갔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한 수염소와 아사셀을 위한 수염소를 드렸다. 7. 초막절(레 23:33-34)
수장절,
장막절이라고도 불린다. 티리쉬월(7월) 15일부터 8일 동안 행해진다.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나와 광야에 머물었던
것을 기념하는 동시에 풍성한 수확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이다. 첫날과 여덟째 날에는 성회로 모이고 노동이 금지되었으며 각
날마다 그에 상응 하는 제사를 드렸다.
출애굽기 12:14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킬찌니라. * 그림자 : 참 형상이 아니다.
히브리서 10: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2. 예수 그리스도 : 구속의 은혜
베드로전서 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없고(自犯罪) 점(原罪)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3. 그리스도인 : 복음의 시작
마가복음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사도 바울은 복음의 핵심을 가장 정확하게 깨달았다.
로마서 1:16-17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유월절(踰月節)
성전(聖殿) : 공간적 배경 / 제사법, 성막 구조 절기(節氣) : 시간적 배경
유월절 : 니산월 14일, 무교절 전야(Eve) 무교절 : 니산월 15일-21일
주일안에 세 절기가 지켜진다 :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유월절 양 안에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교제한다.
고린도전서 5:7-8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언제 지키느냐?
유대 달력으로 첫째 달(정월)이면서, 동시에 아빕월(보리 추수기, 보리가 익는 계절)에 지켜야 한다.
마치 한국에서 농사를 지을 때 양력보다는 음력을 기준으로(24절기) 파종하고 수확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문제는 유대인의 달력은 "태음력" 태음력은 한 달이 29.5일 29.5일은 1년이면 354일 / 태양력보다 11일이 부족하다. 3년이 되면 33일 즉 한 달이 부족한다. 3년마다 윤달을(아달월) 추가한다. 그러므로 유월절을 지킬 때 반드시 정월이면서 아빕월에 유월절을 지킨다.
역사적 사건과 농사적 추수기를 의도적으로 연결시키신 하나님
출애굽의 기적으로 약속의 땅에 인도하신 과거의 하나님은 작물의 수확을 주시는 천지의 하나님이심을 강조하는 것이다.
(적용) 누구나 출애굽의 사건이 있었다(구원) 그런데 출애굽의 사건만 갖고 있다면 현재의 삶에서 구원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유월절이란 과거의 사건(니싼월, Nissan)에서 출발하여 약속의 땅(현재의 삶)에서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유월절을 지키는 유대인들의 풍경
1. 순례자를 위한 도로 보수 니싼월 전 달인 아달월 15일에 성전에서 사람들을 파견하여 도로 및 우물물을 보수한다. 평토장한 평민들의 무덤을 관리(뼈가 나뒹굴어 순례자들이 부정하게 되기 때문) unmark grave 마태복음 23:27, 회칠한 무덤 / 무덤에 회칠을 하여 순례자들의 성결을 보호한다.
2. 누룩제거
고린도전서 5:7
스바냐 1:12
3. 붉은 암송아지를 잡아서 정결케 하는 재를 만든다
감람산 번제단 위에서 붉은 암송아지를 태운다. 백향목과 우슬초를 함께 묶에서 태운다. 실로암 연못에서 떠온 물에 재를 풀어서 정결케 하는 의식을 행한다. 먼 지역에서 성전을 찾은 순례객이 부정하게 되었을 때 일주일울 기다릴 수 없으므로 특별하게 정결케 하였다. 7회 반복하여 정하다! 라고 선포한다.
* 정결케 하는 피 / 송아지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와 그리스도의 피
히브리서 9:13-14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시편 51:7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성전에 봉헌된 소년 제사장이 유월절 준비를 위하여 실로암 물에 가서 생수를 길어온다. 이때 처음으로 성전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4. 그릇을 정결탕에 넣어 정결케 한다.
돌그릇 놋그릇 질그릇 : 부정하여 질 때는 깨트려 버린다.
사람 : 질그릇과 같다. 사람은 날마다 깨트려서 버려야 하는 부정한 존재이다. 5. 성전세 : 반세겔
마태복음 17:24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가로되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유월절과 성경의 사건들
역대하 30:1 히스기야가 온 이스라엘과 유다에 보내고 또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편지를 보내어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에 와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니라.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편지를 보내어 : 남 유다 히스기야 왕이 통치 할 때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합니다(BC 722).
사마리아 산지(에브라임과 므낫세 지역) - 남북이 나뉘었지만 거국적인 유월절을 지키려고 하였다. 많은 난민을 받아드리므로 예루살렘의 인구가 10배 증가 예루살렘 영토는 4배로 증가한다. 메시아의 모델로 묘사된다.
요시야의 유월절
역대하 35:1 요시야가 예루살렘 여호와 앞에서 유월절을 지켜 정월 십 사일에 유월절 어린 양을 잡으니라
주전 612년 앗수르가 연합군에 의해서 멸망한다(메데, 바사 연합군) 요시아 왕 때 일시적으로 남북이 통일이 된다. 통일된 이스라엘을 기념하여 전국적인 유월절을 지키게 된다.
느헤미야의 유월절
느헤미야 2:1 아닥사스다왕 이십년 니산월에 왕의 앞에 술이 있기로 내가 들어 왕에게 드렸는데 이전에는 내가 왕의 앞에서 수색이 없었더니.
에스라 6:19-22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정월 십사일에 유월절을 지키되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이스라엘 자손과 무릇 스스로 구별하여 자기 땅 이방 사람의 더러운 것을 버리고 이스라엘 무리에게 속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다 먹고 즐거우므로 칠일 동안 무교절을 지켰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저희로 즐겁게 하시고 또 앗수르 왕의 마음을 저희에게로 돌이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전 역사하는 손을 힘있게 하도록 하셨음이었느니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일제히 몸을 정결케 하여 다 정결하매 사로잡혔던 자의 모든 자손과 자기 형제 제사장들과 자기를 위하여 유월절 양을 잡으니.
사도행전 12:3-4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쌔 때는 무교절일이라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사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하더라.
애급에서 노예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풀려난 때가 유월절 베드로가 감옥에서 풀려난 때가 유월절
요한복음과 유월절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은 3년입니다. 3년 동안 유월절 절기를 몇번 지냈을까요? 분명하게 세 번 유월절을 지키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 차례 유월절을 지키셨던 것 중에서 마지막 유월절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한복음 13:23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예수님은 유다의 품에 안겨 있다. - 제자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이미 유다가 예수를 팔아 넘길 것을 아시면서도 그 품에 안겨 있었다는 것은 유다로 하여금 회개의 기회를 주시려고 하신 것이다.
베드로가 만찬석의 말석에 앉았을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는 다섯 가지 근거
1. 성격 : 다혈질 / 가룟 유다를 싫어했다. 다른 제자들은 갈릴리 사람, 유다는 가룟 사람이었다.
2. 낮은 자가 되라 / 베드로는 큰 자가 되기 위해 먼저 말석을 차지한다.
3. 나를 팔 것이다 / 요한에게 머리짓을 하여 물어보자!
4. 식사 이후에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 /
5.
나는 참포도나무 - 포도는 기쁨을 상징한다. 중용, 절제 /
유월절 절기는 기쁨의 절기이지만 현재는 로마의 압제에 있었다. 유대인들은 5차례 봉기를 일으켰다.
15:2, 1. 열매를 잘 맺는 가지 2. 열매를 잘 맺지 못하는 가지
제거해 버린다(야이로) - 1. 잘라버린다 take out 2. 살짝 들어주는 것 lift up
흠 없는 양 다리를 꺾는다 / 예수님의 다리는 꺾이지 않았다. 흑암이 임하다 / 흑암 재앙(3일) 3시간 동안 태양 빛이 어둠 6시부터 9시까지 흑암 신포도주 / 우슬포로 찍어서 (우슬초 양의 피 좌우 문지장)
가나 혼인 잔치 , 물을 포도주, 가버나움에 들러
요한복음 2: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공생애 첫번째 유월절 : 니고데모와의 대화 예수님의 일방적인 선포하시는 말씀이다. 이것을 유월절 배경에서 이해해야 한다. 유월절에 고대 이스라엘 국가가 탄생한 것처럼 유월절의 화두는 거듭남에 의한 하나님 나라를 깨우치셨다.
거듭남(아노덴) 위로부터 above 다시 / 니고데모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학문적으로 깊은 사람이었으므로 아노덴을 다시라고 이해한 것이 합당하다. born again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영적으로 설명하신다. 위로부터 from above
요한복음 6:4-5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유월절에는 모든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벳세다에 계신다. 이것은 굉장히 놀라운 사건이다. 이 해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왜 그러셨을까? 세례 요한의 처형이 있었다.
가버나움은 헤롯 안티파스의 영역(세례 요한을 처형한 헤롯) 벳세다는 헤롯 빌립의 영역(헤롯 안티파스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 지역으로 이동하셨다)
요한복음 기자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유월절을 조명한다.
1. 보리떡 2. 물고기
요한복음 6: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보리떡은 가난한 자들의 식량 유월절에는 밀떡을 먹는다.
빈들 - 벳세다는 유다 지방에서 가장 푸르른 지역. 년 강우량이 1000-1200mm 광야, 빈들(에레모스)이 아니다(지리적으로) 그런데 왜 광야, 빈들이라고 표현하였을까?
마태복음 14:15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먹게 하소서.
애급에서 나온 백성들이 제일 먼저 들어간 곳이 광야 에레모스 빈들이었다.
요한복음 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표현하셨다.
요한복음 13장부터 18장까지의 기록이 마지막 유월절 6시간에 일어났던 일을 기록한다. 해가 질 때부터 자정까지 6시간 동안 진행된 유월절 만찬 자리에서 있었던 사건이다.
요한복음 13장 최후의 만찬 자리 / 큰 다락방 1. 크다 2. 2층 3. 가구가 준비된 방 4. 사랑방(손님을 위한 방으로 '카탈루마' 라고 한다)
유월절 만찬을 "세데르(Seder)" 라고 한다. 이 때 4잔의 포도주를 마신다. 취하지 않도록 1잔의 포도주에 3잔의 물을 넣어 희석시켜서 마신다. 왜 4잔의 포도주를 마시는가?
출애굽기 6:6-8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줄 너희가 알찌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하셨다 하라.
4개의 동사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4잔의 포도주를 마신다. 유월절 행사의 핵심 코드는 "해방" 그러므로 "기쁨"이다.
기쁨의 상징은 포도 / 예수님은 포도나무, 너희는 가지
유월절 만찬 음식 무교병 - 급하게 나왔다. 구원의 즉각성(무교병을 먹는 것)과 점진성 어린 양 - 삶은 어린 양 고기 쓴나물 - 마로르 하로셋 - 무화과 대추야자 건포도 등을 혼합하여 만든 소스로 애급의 고역 구은 계란 - 고통 상징 포도주 4잔 - 소금 -
2. 예수 그리스도 : 구속의 절기(베드로전서 1:18-19) - 실체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자범죄) (원죄)
히브리서 10: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로마서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Love does no harm to its neighbor. Therefore love is the fulfillment of the law.
야고보서 2:8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If you really keep the royal law found in Scripture,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you are doing right.
7대 절기 /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절, 장막절
1. 유대인 : 여호와의 절기(출애굽기 12:14) - 그림자
2. 예수 그리스도 : 구속의 절기(베드로전서 1:18-19) - 실체
3. 그리스도인 : 복음의 시작(마가복음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The beginning of the gospel
영원한 복음(요한계시록 14:6)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the eternal gospel
사도 바울은 복음의 핵심을 가장 정확하게 깨달았다.
로마서 1:16-17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cf. 성막(聖幕) the tabernacle.(출애굽기 26:27)
성막 저편 널판을 위하여 다섯이요 성막 뒤 곧 서편 널판을 위하여 다섯이며.
cf. 장막(帳幕) tents (출애굽기 13:20) 그들이 숙곳에서 발행하여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2. 여호와께 드릴 예물은?(2-3절)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생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찌니라.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열납하시도록 드릴찌니라.
예물(禮物)이란 히브리 단어는 "고르반"과 "테루마"라고 합니다.
고르반(7133) : 제물, 희생물, 제단 가까이 가져온 것(레위기 1: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생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찌니라.
테루마(8641) : 선물(올려서 바치는 것) 요제, 봉헌물, 바친(출애굽기 25: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무릇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에게서 내게 드리는 것을 너희는 받을찌니라.
예물(禮物)과 제물(祭物) הַצָעָה 예(禮)는 정성을 다하여 드린 예물 제(祭)는 제사를 위해 바쳐진 예물
예물은 바치는 사람의 자세를 강조 제물은 제사에 드려진 물건을 강조
제물(4503, 민하) / 선물, 공물, 제물
민하(명여)는 사용되지 않은 어근 마나흐(빌려주다, 선물을 주다)에서 유래했으며, '선물(gift), 공물(tribute), 제물(offering)'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히브리어 어근 마나흐에서 유래하였다고 단정한다. 아랍어
마나하는 일정한 기간 동안 '어떤 사람에게 어떤 것(암낙타, 염소, 양, 혹은 한 구획의 땅)을 빌려주다'라는 전문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차용자가 빌린 것에서 나온 소산물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고(예: 소산, 우유, 수확 곡물 등), 그후
본래의 소유물을 되돌려 주는 것이다. 이때 수확물은 무료로 주는 선물이 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10회 나온다.
1. 민하는 사람이 사람에게 주는 '선물'을 의미한다.
민하는 야곱이 에서에게(창 32:14-22, 창 33:21),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에게(창 43:11, 창 43:15, 창 43:26) 드린 예물(선물)에 대해 사용되었다.
민하는 우월한 사람, 특히 왕에게 바치는 선물이라는 세속적 배경에서 사용되는데, 이는 그 사람에 대한 존경 혹은 복종의 태도를 나타낸다. 삼상 10:27에서 사울을 경멸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에게 "예물을 드리지 아니하니라", 즉 그를 새로운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민하는 이런 의미로 삿 6:18, 삼상 10:27, 대하 9:24, 왕하 8:8-9, 왕하 20:12, 사 39:1, 시 45:13, 대하 32:23에서 사용되었다.
2. 민하는 '공물'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삿 3:15, 삿 3:17-18, 삼하 8:2, 삼하 8:6, 대상 18:2, 대상 18:6, 왕상 5:1, 왕하 17:3-4, 대하 17:5, 대하 17:11, 대하 26:8, 호 10:6, 시 72:10.
3. 민하는 가장 자주 제물이나 예물이라는 제의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민하는
특히 곡식 예물을 뜻하나, 민하가 원래예물 혹은 공물을 의미하였기 때문에 이 단어가 특별한 제의적 의미를 나타낼 때 이 단어가
막연하게나마 그러한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고 스나이드(Snaith)가 말하는 것은 정확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관계에서 특별히
흥미로운 것은 삼상 2:29, 삼상 3:14, 사 19:21에서 제바흐와 민하 간의 구별, 렘 14:12과 시 20:3에서 올라와 민하의 구별, 암 5:22에서 셸렘과 민하 간의 구별이다. 또한 창 4:3-4을 참조하라.
아벨과 가인은 하나님께 민하를 드렸다(창 4:4-5).
그러나 아벨에 있어서 그가 하나님께 동물 중에서 가장 좋은 부분을 바쳤으며 이는 하나님께 진정한 헌신을 반영하는 행위라고
언급되며 반면에 가인에 있어서는 단순히 그가 땅의 수확물 중에서 민하를 드렸다고 언급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형식적인 것을
거절하셨다. 가인의 진실한 복종의 결여(피흘림이 없는 희생제물을 주목하라)는 마침내 죄의 행위를 유발하였다(창 4:7 이하). 민하의 이러한 용법은 그 용어가 특별한 의미로 동물의 희생 제물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소제는 레 2:1-16과 레 6:14-23,
H7-16에서 정의되고 있다. 이것은 곡식단 형태일 수 있으며, 대강 찧어서 건조하게 볶은 곡식, 가루로 빻거나(오직 밀만이
그러함, 보리가루는 "의심의 소제"를 위해 보존되었던 것 같다) 혹은 빵을 만들거나 혹은 과자로 만들어 솥에 넣고 굽거나 혹은
기름으로 튀겼다. 향과 소금은 예비된 민하의 한 부분이었으나 누룩과 꿀은 첨가되지 않았다.
민하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제물로 드렸으며 신성한 제물이어서 예배하는 자와 함께 먹을 수 없었고 제사장들만이 그것을 먹었다. 속죄의 개념이 특별히 민하에
존재하지는 않으나 화목의 개념이 확실히 들어 있다. 일상적으로 누룩으로 발효된 떡과 더불어 그 땅의 새 소산의 제물(레 23:16)은 하나님 백성들의 전체적인 삶을 위대하신 주님께 위탁한다는 것을 가리킨다.(G. L. C.)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호 8:13에 한번 나오며 '제물'을 의미한다: "내게 드리는 제물로 말할찌라도 저희가 고기로 제사를 드리고 먹거니와 여호와는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이제 저희의 죄악을 기억하여 그 죄를 벌하리니 저희가 애굽으로 다시 가리라".
(참조: Gesenius; HELOT).
[참고 - 합하브(bh:b]h' , 1890). 선물 gift.
호 8:13은,
그들이 "내게 드리는 제물"의 고기로 제사를 드리고 그것을 먹는다(they sacrifice flesh for the
sacrifies of "mine offerings" and eat it, KJV), "그들은" 희생 제물을 "사랑하며, 그들은
고기를 제물로 바치고 그것을 먹는다"("they love" sacrifice, they sacrifice flesh andeat
it, RSV), "내게 드리는 제물"에 관해서는(as for the sacrifiecs of "mine offerings",
ASV), 그들은 제물을 "가져온다"(they "bring" sacrifices, Modern Language Bibie), "내
희생 선물"에 관하여는(as for "my sacrificial gifts, NASB와 NIV). KB는 이것이 전와되었다고
생각하고 이 구절과 호 4:18에 나오는 이 단어를 아하브(bh'a' , 158, 사랑 love)의 한
어형으로 수정한다. 개역 표준 성서는 이 두 구절이 불분명하다고 생각하며, 게다가 KB의 견해에 따른다. 그러나
합하브(bh:b]h' , 1890) 어형이이레적인 중복은 아니다. - P. R. Gilchrist.] (p. 640).
[동의어] (관련성구)
자바흐(2076) / 희생제물로 도살하다
자바흐(동사)는 기본어근이며, '희생제물로 도살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30회 이상 나온다.
1. 자바흐는 희생제물로 바칠 짐승을 잡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산당에서 우상에게 바치는 제사와 관련하여 피엘형으로 19회 나오지만 대부분이 칼형으로 나온다. 피엘형 중에서 3회는 솔로몬(왕상 8:5, 대하 5:6), 히스기야(대하 30:22)의 풍부하고도 올바른 제물들을 언급한다.
2. 자바흐는 '먹기 위해 도살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삼상 28:24, 겔 34:3, 대하 18:2, 신 12:15, 신 12:21, 왕상 19:21).
3. 자바흐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살해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겔 39:17-19, 왕상 13:2, 왕하 23:20).
(참조: BDB; TWOT).
[동의어] (관련성구)
제바흐(2077) / 희생, 희생제물 sacrifice
제바흐(명남)는 자바흐(jb'z: , 2076)에서 유래했으며, '희생, 희생제물 sacrifice'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60회 나온다.
제바흐는 종종 예물(시 40:6)이나 번제물(삼상 6:15, 출 10:25)과 연결되어 나온다. 이 명사는 자주 화목제(셸라밈, 레 3:1, 레 17:5)와 밀접히 연접하여 사용되지만 가끔은 화목제와 구별되기도 한다(민 15:8, 수 22:27).
종종 제바흐는 자바흐(jb'z: , 2076)의 동족 대격이기도 하나, 희생은 '만들어' 지기도 하고('made' 민 6:17, 왕상 12:27), '가져오기도 하며'('brought' 암 4:4, 신 12:6), '가까이 가져오기도 한다'('brought near, 레 7:11).
[동의어] (관련성구)
코르반(7133) / 제물, 헌물, 예물
1.
코르반(명남)은 카라브(br'q; , 7126: 가까이 오다, 접근하다)에서 유래했으며, 가까이 가져오는 것, 즉 드려진 것,
특별히 하나님께 드려진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희생으로 드려질" 것이라는 의미에서나(이 경우 이 단어는 모든 제의적 희생제사와
제물에 사용된다) 또는 단순히 성소에서 사용될 것이라는 의미에서 신에게 '바치는 제물, 헌물, 예물'을 의미한다(민 7:13이하, 참조: KD, Pentateuch, Ⅱ, p. 271; Vos, BT, p. 175).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82회 나온다.
명사
코르반은 여기에서 주어질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더 깊이 주목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제사 예물의 주 요소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포함된다. 첫째 헌물자가 행해야 할 점이 있다. 그의 예물 선택은 자아 희생을 반영해야 하며 자기의 생계 수단과 소산물로
이루어져야 한다(Vos BT, p. 175). 그 헌물은 흠이 없어야 한다. 왜냐하면 가장 좋은 것이 하나님께 속하기 때문이다.
헌물자의 사랑과 헌신은 응당 그로하여금 가장 좋은 것을 드리게 해야 하며(창 4:4) 오직 이것만이, 필수적이고 완벽한 희생제사의 도덕적 순수성을 반영할 수 있었다(벧전 1:19).
예물은
하나님에 의해 지정되며(레 1-7장) 하나님이 지정한 장소로 가져왔다(KD, Pentateuch, Ⅱ, p. 279). 예배의
열납은 하나님의 표준에 부합하는가에 달려 있다. 희생 제사용으로 구별해 놓은 산 제물에 안수하여(KD, ibid) 헌물자의 의향
뿐만 아니라 죄까지 그 제물에 전가시킨다(Vos, BT, p. 180).
그 다음 자아 고백적 죽음의 형벌이 대속적으로 그 짐승에게 가해졌다(Vos, ibid). 이와 같이하여 피는(q, v.) 덮는 것으로 사용되며(히 13:15) 고기는 불사르고(KD, op. Cit., p. 280) 인간의 생명은 상징적으로 하나님께 바쳐지게 되었다.
제사장은 피와 살(혹은 "곡물")을 받아 예정된 의식의 세부 사항에 따라 그것을 바친다. 하나님의 열납의 지시에 의해 이 모든 것은 불살라졌다.
여기서 한가지 크게 주의해야 할 것은 이교도의 희생제사 관념과는 달리 성경의 가르침에는 하나님께로의 하등의 가치 전달 개념이 없다는 점이다(Vos, BT, p. 176). 이스라엘 제사의 핵심적 의미는 영적인 것이었다(출 19:4-8, 렘 7:21 이하, 호 14:3).
(참조: L. J. COPPES).
우리는
후기 유대교에서 동일한 일반적인 용법을 발견하지만, 이 때이 용어는 어떤 것이 하나님께 드려질 때 - 희생제물로 드리거나 용도를
바꿈,즉 세속적인 사용과 관리를 중지함으로써 - 하는 맹세 용어이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들에는 물건들, 음식들 따위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개인이나 집단, 또는 전 국민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사람이나 물건이 성전에 넘겨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것들의 관리의 주체가 바뀐다는 것을 의미한다. 코르반은 개인의 포기의 형태를 취할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이 어떤 사람의 종이나 소유를 사용하는 것을(압력을 가하는 것, 복수하는 것, 상해를 입히는 것) 거부하는 한 방법이다.
따라서 그것은 결혼이나 가족 관계 내에서조차 관계를 깨뜨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랍비는 순수한 관점에서, 그러나
그 과정의 철저한 결과를 고려하고 그 맹세를 변경하려 하거나 그 결과를 경감시킬 방법을 찾고자 하였다.
신약 시대에 코르반은 하나의 맹세를 가리키게 되었는데, 이 맹세로써 자기의 소유물이 관념상 성전에 바쳐지게 되며(실제로는 자신이 가지고 있음), 따라서 타인에게 주어질 수 없었다.
코르반은 신약성경에서 막 7:11에 한번 나온다: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코르반은 막 7:10이하의 서기관 및 바리새인과의 논쟁에서만 나타난다. 마 15:3이하에서는 '재물'(한글개역, "드림")이라는 의미로 도론을 사용한다(참조: 마 5:23 - 마 5:24; 마 8:4등; 또한 히 5:1; 히 8:3 - 히 8:4; 히 9:9; 히 11:4). 예수님의 논지는 비록 그 아들이 서원으로 인하여 부모에 대한 모든 의무로부터 자기를 자유롭게 하더라도 서기관들이 그 서원(코르반)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기관의 논지(민 30:2 - 민 30:3에 기초함)는, 하나님께 한 서원이 언제나 우선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응답으로 예수님은 사 29:13을
인용하신다.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는 일치하고, 하나님은 인간의 안녕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기
때문에, 율법의 성취에 대한 그들의 관심을 올바르게 나타낼 수 없었다. 예수님은 성경의 유효성을 약화시키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성경의 유효성을 성경의 온전한 문맥(취지)에 두자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 목적은 성화일 것이지만, 성화 그 자체는 자비로 이끈다.
제 4계명은 이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코르반에 대한 방어적인 실행은 회피의 수단이 된다.
초대교회의 석의는 눅 21:4(여기에는 타 도라가 쓰임)의 노선을 따라서만 이 말씀을 해석한다. 라틴어 코르반(corban)은 자선 상자이며, 자선은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로 간주된다. 후대에 이 용법은 사라졌다.
테루마(명여)는 룸(!Wr , 7311)에서 유래했으며, '기증물 contribution, 제물 offering'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76회 나온다.
테루마의
용법은 대략 테누파(hp;WnT] , 8573)의 용법과 유사하다. 테누파는 여러가지 제물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제사 용어로
사용되며 또한 특히 직무를 이행하는 제사장을 위해 지정해 둔 제물들의 부분(몫)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된다.
테루마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나타낸다: 성막 건축을 위해 바친 물질들(출 25:2-3), 성전 건축을 위해 바사왕과 그 밖의 사람들이 드린 헌물(스 8:25), 반세겔의 속량금(출 30:13), 제사장들에게 주도록 정해 놓은 십일조의 십일조(민 18:25-32), 그리고 에스겔의 성전 이상에 나오는 거룩한 구역(겔 45:1, KJV '봉납(물) oblation', NASB '배당, 몫 allotment'), 우상에게 바친 제물(사 40:20)과 전리품 중에서 바친 제물(민 31:29)도 이 단어로 지칭된다. 그 땅의 처음 익은 곡식으로 만든 떡 재물을 가리키는 이 용어의 용법(민 15:20)은 첫 열매의 단을 언급하는 테누파(요제)의 용례를 상기시킨다.
테루마는 직무를 이행하는 제사장을 위해 정해 놓은 희생 제물의 몫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거제물"의 넓적다리를 가리켜 반복 사용된다(레 10:14-15, 민 6:20, KJV는 '넓적다리 thigh' 대신 '어깨 shoulder'라고 번역함, 한글개역은 본문에 "넓적 다리"라고 기록하고 난외주에 "어깨"라고 기록한다).
화목 제사에서 제사를 집행하는 제사장의 몫으로 할당된 수반되는 곡식 제물의 몫도 이 단어로 지칭된다(레 7:14, 대조적으로 테누파[요제]는 결코 고기가 아닌, 제사장의 몫을 지칭하지 않는다는 점을 주목하라). 테루마는 친족들에게 제사장의 몫을 먹지 말라고 금하는 구절에서도 나온다(레 22:12).
"거제물"이라는
말은 본래 이 제물이 드려질 때의 이 제물을 물리적으로 교묘히 다루는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교묘히 다루는 것을
분명히 언급하는 성경의 예는 없다. 이 용어는 의미가 약화되어서 예물을 어떤 방식으로 드리는지에 대한 암시 없이 단순히 '예물
gift'이나 '제물 offering'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 단어는 한 번 비제의적 용법으로 사용되어 뇌물로 매수하는 자들이나 이기적으로 선물을 강요하는 사람을 언급한다(잠 29:4, "선물의 사람들" men of gifts, 한글개역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는 자").(A. Bowling)
수컷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목축을 할 경우 암컷은 새끼를 낳기 때문에 수컷 보다 더 가치가 높았다고 합니다. 반면에 수컷은 주로 식용으로 사용한다고 합니다. 제사를 위해 바치는 것도 부담을 적게 하도록 배려한 것이라고 합니다.
4.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는?
성경에서 향기(香氣), 냄새라는 단어가 제일 많이 나오는 곳은 레위기입니다. 레위기에는 제사를 설명할 때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여호와께 드려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라’는 표현(表現)이 반복(反復)됩니다. 제사(祭祀)에는 늘 냄새가 있었습니다. 제물(祭物)을 태울 때 나는
냄새입니다. 그 냄새가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라고 성경(聖經)은 말합니다.
마무리를 위한 질문과 적용
1.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서 나는 향기, 하나님께 드려질 향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살아서 제물이 될 때 나는 냄새입니다.
우리가 산 제물 될 때, 자아의 죽음이 만들어내는 냄새입니다. 그 냄새가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편지(고린도후서 3:2-3)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사람이 알고 읽는바라.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You yourselves are our letter, written on our hearts, known and read by everybody. You show that you are a letter from Christ, the result of our ministry,
written not with ink but with the Spirit of the living God, not on
tablets of stone but on tablets of human hearts.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고린도후서 2:15)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For we are to God the aroma of Christ among those who are being saved and those who are perishing.
하나님께 드려지는 가장 아름다운 향기는 예수의 향기입니다. 예수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희생 제물로 자신을
드렸습니다. 예수 십자가 향기는 개선 행진의 냄새가 그렇듯 누군가에게는 생명의 냄새이고, 누군가에게는 사망의 냄새입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는 십자가를 바라만 보아도 눈물이 나고, 누군가는 십자가만 보면 화내고 짜증을 냅니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내가 죽을 때 비로소 우리에게서 예수의 향기가 납니다. 상처 안 받으려고 피해 다니고, 죽지 않으려고 도망
다니면 우리는 향기 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내가 상처받고 죽을 때 비로소 내 안의 예수 향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아가 타버릴까 봐 방화복을, 자아가 죽을까 봐 방탄복을 입고 삽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를 올려 드릴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는 옛 자아가 죽으면서 나는 냄새가 진동해야 합니다. 내 맘이 상해서 나는 냄새, 내 자아가 타들어 가는 냄새, 그
냄새가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입니다. 십자가는 내가 죽는 곳입니다. 십자가는 꽃길이 아닙니다. 가시밭길입니다. 그러나 그
가시밭길만이 생명의 길입니다. 내가 스스로 산 제물이 될 때 나는 그 냄새가 바로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하나님, 저희들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편지로 읽혀지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로 흘러넘치기를 원합니다. 저희들 안에 주 예수의 부활 생명의 싹이 솟아나야 하겠습니다. 부활 생명은 십자가 고난을 거쳐야 하오니 세상에서 겪는 모든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참고 인내하며 오직 주님만 닮아가며 향기로운 냄새로 퍼지며 그리스도의 편지로 읽혀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소제의 규례 / 레위기 6:14-18, 6:19-23 제사장 위임식(고운가루 에바 1/10, 아침에 절반 그리고 저녁에 절반, 기름으로 반죽하여 번철에 굽고 기름에 적시어 썰어서 소제로 드려야 한다.)
레위기 1장부터 7장까지는 다섯 가지 제사에 대해서 소개합니다.
1장에서는 번제의 제사를 말씀합니다.
번제의 예물에는 흠없는 수컷 소, 흠없는 수컷 양과 염소 그리고 새들 중에서 집둘기와 산비둘기 새끼를 제물로 바칠 수 있습니다. 개역 한글 성경에서는 비둘기를 집비둘기와 산비둘기라고 구분했지만 번제의 제사의 규정을 살펴보면 비둘기라고 하는 것이 훨씬 더 당시 번제의 제사에 가깝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번제의 제물은 가축 즉 내가 집에서 키우던 것을 제물로 가져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1장에서는 제물이 왜 달라지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4장과 5장에서 속죄제의 규정에서 이스라엘의 평민들에게 어린 암양을 제물로 가져오라고 합니다. 그러나 형편이 어려울 때는 비들기를 가져오라고도 합니다.
따라서 번제의 제물이 달라지는 것은 가정 경제적인 형편에 따라 이렇게 가르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1:2, 자원하는 제사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생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찌니라.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 억지로 제물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자원하는 믿음으로 제물을 가져와야 합니다.
1:4, 제물을 가져온 사람이 제물에 안수하라 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찌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안수한다는 동사가 손을 얹는 것만이 아니라 "누르다. 기대다. 의지하다"는 뜻으로 사용하는 단어라고 합니다. 따라서 번제의 제물에 안수하는 것은 제물에 나의 몸을 그대로 실어서 바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제물이 되는 짐승(가축)에게 안수하는 것은 내 손만 얹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것 즉 나의 몸까지 온전하게 전부를 드리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번제의 제물을 집에서 내가 직접 키우던 가축 즉 나와 가장 가깝게 지내던 것으로 나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번제물을 내 손으로 내가 직접 죽여야 합니다.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제사는 나를 죽여서 완전하게 바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수천번 수만번의 예배를 드렸는데 아직도 내가 너무 팔팔하게 살아있어서 이것이 온전한 제사가 아니며 거룩하고 신령한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는 삶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소개했습니다. 또는 그리스도의 편지로 읽혀져야 합니다.
번제가 상징하는 의미는 "헌신(獻身)"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부터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2021년
사순절 기간동안 내가 하나님께 헌신하기 위하여 번제의 제물처럼 완전히 불태워져 연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 한 가지씩 실천할 수 있는 은혜를 회복하여 부활주일 예배 때는 번제의 제물이 되는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하며
기도합시다.
제사 제도를 어디에서 말씀하셨을까요? 레위기 7:37-38 이는 번제와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와 위임제와 화목제의 규례라.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그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라 명하신 날에 시내산에서 이같이 모세에게 명하셨더라
레위기 2장 / 소제에 관한 질문
1. 소제로 바쳐지는 예물은?
2. 소제의 제물에 첨가하는 것들은?
3. 소제물의 남은 것은 어떻게 합니까?
4. 소제물에 넣지 말아야 하는 것들은?
5. 모든 소제물에 넣어야 할 것은?
(질문과 대답)
1. 소제로 바쳐지는 예물은?
(1절) 고운가루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가루로 가져온 소제물에는 반드시 유향(乳香) 놓아야 합니다. 당시 유향은 매우 비싼 가격에 거래되었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유향을 넣지 않는 소제물을 드렸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가난한 사람들은 어떤 소제물을 바쳤을까요? 고운가루를 음식으로 만들어 드릴 때는 유향을 넣지 않았습니다.
(4절) 화덕에 구운 것
네가 화덕에 구운 것으로 소제의 예물을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 만든 무교병이나 기름을 바른 무교전병을 드릴 것이요.
꿀과 누룩 : 물질을 변질시킨다 꿀은 더 달게 만들고, 누룩은 더 크게 만든다. 하나님 앞으로 나올 때는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와야 한다.
5. 모든 소제물에 넣어야 할 것은?(13절)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찌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찌니라.
첫째, 변치 않는 언약(민수기 18:19, 역대하 13:5)
민수기 18:19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영한 응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변하지 않는 소금언약이니라.
역대하 13:5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것이 아니냐.
하나님을 향한 그 마음을 변치 말아야 한다는 약속
둘째, 성결케하는 것(출애굽기 30:35, 에스겔 16:4, 열왕기하 2:21)
출애굽기 30:35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에스겔 16:4 너의 난 것을 말하건대 네가 날 때에 네 배꼽줄을 자르지 아니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정결케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로 싸지도 아니하였나니.
열왕기하 2:21 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 던지며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 좇아 다시는 죽음이나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짐이 없을찌니라 하셨느니라.
소금은 반드시 넣어야 한다. 누룩과 꿀을 넣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규정으로 인하여 아무리 작은 제사일지라도 소홀하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소제가 번제 다음으로 소개된 것은 역시 헌신의 의미와 감사의 의미를 내포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다른 제사에서는 무엇을 넣어라 넣지 말라는 규정이 없습니다. 오직 소제의 제사에만 이러한 규정에 따라 제사를 드리라고 한 것은 작은 제사일지라도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이 담겨져 있다고 하겠습니다.
번제(올라) : 올라간다 소제(민하) : 선물(膳物)
번제와 소제의 상징적 의미는 "헌신(獻身)" 이라고 하겠습니다.
헌신(獻身) : 출애굽기 32:39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헌신이란 히브리 단어는 "마래" 라고 합니다. 마래의 뜻은 "가득 채운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가득 채워진 물 항아리에는 다른 것을 넣을 수 없듯이 마음에 가득채워진 성령은(성령 충만)은 주님을 위하여 헌신하는 삶을 감당하게 합니다.
꿀은 세속적인 쾌락과 재리를 상징합니다(잠언 5:3) 대저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이와 같이 누룩과 꿀은
우리의 삶을 부패시키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독소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소제물로서 화제를 드릴 때에는
누룩과 꿀을 드리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누룩과 꿀은 발효성이 강한 식품으로써, 높은 온도에서는 쉽게 발효하여 그
원래의 성질이 변질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룩과 꿀은 쉽게 변질되는 신앙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을 변질시키는 누룩과 꿀을 우리의 삶 속에서 단호하게 제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본문 13절에는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대에는 소금이 매우 비싸고 귀한 식품이었습니다. 또 소금은 맛을 내고 오래
두어도 변질되지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언약의 상징물로 지정되었으며, 모든 예물에 첨가되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소금을
가리켜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소금은 바로 우리의 신앙의 순수성과 불변성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순수하고 변치 않는 신앙을 유지하라는 말입니다.
소제물에 대한 주의 사항은, 우리가 부패와 세속적인 유혹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향한 변함 없는 순수한 믿음을 갖고 신앙
생활을 하여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레위기 제3강 02-24-2021(수)
제사(祭祀)와 예배(禮拜) 제사의 여섯 가지 원칙(레위기 1:1-9)과 예배의 두 가지 원칙(요한복음 4:24) 제사라는 단어 / 831구절 예배라는 단어 / 10구절
구약의 제사는 구원 즉 애급에서 인도하신 은혜에 대한 감사 신약의 예배는 재림하실 주님을 기다리는 믿음 회당 예배 : 말씀 중심 다락방 예배 : 성만찬 중심
16세기 종교개혁을 거쳐 17세기 이성주의와 합리주의 시대를 맞이하면서 예배가 설교 중심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 이후 예배의 중심은 말씀과 성찬이 아니라 설교가 되었기 때문에 개신교회는 설교자에 따라 대형화 되는 추세를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는 대형화되지 않습니다. 최근에는 교회 예배가 마치 문화적인 양상으로 변화되고 있는 추세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때에 앞으로 예배가 어떻게 변화할지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제사와 예배에 대한 이해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도축(屠畜), 도살(屠殺)과 제사(祭祀)의 차이점?
기르는 가축을 죽게 하고(殺)+피를 빼고(放血)+가죽을 벗겨내고(剝皮)+뼈를 바르고(拔骨)+모양을 갖추는(整形) 과정 모두가 도축, 도살에 들어간다.
제사에는 짐승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반드시 안수(安受)를 한다.
몽골 지방의 유목민들이 짐승을 잡을 때는 몸 밖으로 피가 나오지 않는 방법으로 짐승을 죽인다고 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제사에서 짐승을 죽일 때는 반드시 몸 밖으로 피가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그 피를 제사장이 들고 성소로 들어가서 뿌릴 수 있습니다.
첫째, 흠 없는 제물(祭物)(1:3, 10)
제물은 생축(生畜)(베헤마) : 반드시 집에 기르던 짐승이어야 한다.
둘째, 안수(按手)(1:4)(누를 按, 손 手)
안수(按手)는 손을 머리 위에 얹는 기도를 말한다. 히브리어 - “싸마크”(기대다. 눕히다) 야드”(손) / 싸마크 야드(안수하다) : 누르다, 기대다, 의지하다 헬라어로 - “에피티데미”(눕히다. 얹다) 케일“(손) / 에피키데미 케일(안수하다) 영어 - Laying of Hands, Ordination
신약에서 “안수”가 “에피데시스”라는 동사로서 씌어져 있는 것은 4곳이다(행 8:18, 딤전 4:14, 딤후 1:6, 히 6:2).
셋째, 잡으라(1:5)
제물의 경우 소와 양과 염소라고 하면 그 제물을 어떻게 죽여야 할까? 살아있는 소를 제물로 바친다면 단번에 소를 죽일 수 있을까요? 살아있는 염소를 제무롤 바친다면 단번에 염소를 죽일 수 있을까요? 아마
어느 누구도 도살장에서 전문 직업을 갖고 있는 도살꾼이 아니라면 양과 염소 그리고 소를 단번에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 직접 그 제물을 죽여야 합니다. 제물을 죽이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간단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제물을 반드시 죽여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염소를 죽이려고 하면 여러 차례 칼로 찌르고 또 찔러야 합니다. 그러면 염소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닭 모가지를 비틀어 죽이는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닭보다 훤씬 더 크고 강한 염소를 쉽게 죽일 수 있을까요? 염소가 칼에 찔리면 비명을 지르고 몸부림을 치며 온몸을 흔들기 때문에 피가 제물을 바치는 사람에게 튀어 온 몸에 피 범벅이 될 것입니다. 소와 염소는 칼에 찔리면 엄청난 난장판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양이 칼에 찔리면 양은 찌른 사람의 눈을 쳐다보며 아무런 비명고 지르지 않고 하늘만 쳐다본다고 합니다.
이사야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넷째, 가죽을 벗기라(1:6)
소와 염소와 양의 가죽을 벗기는 일이 간단할까요? 가죽을 벗기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벗겨야 할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 직접 그 가죽을 모두 벗겨내야 합니다.
주방에서 닭 요리를 할 때 닭껍질 벗기는 것조차 힘들다고 하여 마트에서 닭을 구입할 때 껍질을 벗겨놓은 것을 구입하는 것이 주부들의 마음입니다.
다섯째, 각(脚)을 뜨라(1:6)(다리 脚)
각을 뜬다는 것은 아무렇게나 마구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마디를 분리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손을 분리시키려면 여덟 마디로 분리시켜야 한다고 합니다. 뼈 마디 마디를 분리시키는 것을 각을 뜬다고 합니다.
여섯째, 단(壇)위에 두고 불사르라(1:9)(제터 壇)
내장과 정갱이를 물로 씻어야 합니다. 제물과 내장과 정갱이는 모두 불로 태워야 합니다. 이것을 향기로운 냄새라고 하셨습니다.
왜 제물이 타는 연기를 향기로운 냄새라고 하셨을까?
제물의 조건 흠 없는 제물의 머리 위에 안수하는 것 : 나의 죄를 짐승에게 넘겨주는 것(轉嫁)( 구를 轉, 시집 갈 嫁) 짐승의 흠 없는 것이 나에게로 전가된다.
예수님의 경우 1. 나의 죄가 예수님에게 전가 2. 죄와 더불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도 전가된다. (하나님의 진노는 제물을 잡는 과정에서 철저하게 드러난다) 왜냐하면 제물을 잡는 과정이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럽다면 누가 죄를 지으려고 하겠는가? 3. 예수님의 의(義)가 나에게 전가된다.
제물이 타는 냄새와 연기가 향기로운 것이 아니라 죄가 완전히 소멸(燒滅)되는 것이 향기로운 냄새가 된다.
성도란? 제사로 언약을 맺은 사람들
시편 50:5 나의 성도를 내 앞에 모으라 곧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
요한복음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God is spirit, and his worshipers must worship in spirit and in truth.
신령이란? 성령(in Spirit)
진정이란? 진리(in Truth)
예배는 성령의 도움을 받아 진실한 삶의 열매를 드리는 것
시편 50:23,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제사란?
바치는 것을 통하여
잠언 21:3 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
시편 5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1. 유월절(逾越節) pass over 2. 무교절(無酵節) unleavened bread 3. 초실절(初實節) first fruits 4. 오순절(五旬節) pentecost (칠칠절) feast of ewwk 5. 나팔절(喇叭節) trumphet 6. 속죄절(贖罪節) atonement 7. 장막절(帳幕節) feast of tebernacles
레위기에서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어떻게 예배해야 하였는지 살펴봅니다. 오늘은 화목제라는 제사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화목제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질문을 하겠습니다. 질문은 단순합니다. 예와 아니오라고 대답하면 됩니다. (질문) 화목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에게 제사하는 것이 맞습니까?
(질문) 하나님의 백성들이 화목해야 할 대상은 누구일까요?
첫째는 하나님과 화목해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백성들끼리 서로 화목해야 합니다.
화목제를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적용해 봅니다.
(질문) 나는 하나님과 화목한 신앙입니까?
(질문) 교회 공동체 안에서 모든 성도들과 화목하고 있습니까?
(질문) 가족들끼리 화목하고 있습니까?
어느 교회에서 코로나 바이라스로 인하여 예배당을 리모델링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리모델링 하기 위한 헌금도 넘치도록 참여하여 재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강대상을 중심으로 성가대석이 있고 반대편에 그랜드 피아노가 있습니다. 예배당을 리모델링 하면서 가급적이면 더 많은 교인들이 참여하도록 준비 위원회를 조직했습니다. 그리고 위원회로 모였습니다. 마침 성가대 대장과 지휘자와 반주가가 참여하여 그랜드 피아노를 성가대석과 가까이 배치하는 것이 좋다고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이렇게 회의를 마쳤습니다. 그런데 어느 장로님께서 그랜드 피아노를 전에 놓여 있던 곳으로 옮겼습니다. 그 다음에는 다시 성가대석 가까이 또 옮겼습니다. 이렇게 주일 마다 그랜드 피아노가 오른편으로 왼편으로 옮겨지면서 예배당 바닥에 흠집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바닥만 흠집이 생긴 것이 아니라 서로 자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도 흠집이 생겼습니다.
이렇게 반복하던 중 결국에는 교회의 분쟁은 점점 더 심각해졌고 결국에는 분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현상이 오늘 우리에게는 없다고 단정할 수 있습니까?
아직도 누구는 무엇 때문에 거리낌이 내 안에 도사리고 있다면 오늘 화목제 제사를 살펴보며 내 안에 거리끼는 것들도 모두 정리해야 하겠습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
죄 :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구속 :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예수의 피 : 화목제물
출애굽기 25:21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Place the cover on top of the ark and put in the ark the Testimony, which I will give you.
화목제물(和睦祭物)의 종류(種類) / 소, 염소, 양
소,
염소 : 흠 없는 암컷,수컷 / 소(3:1), 양(3:6), 염소(3:12)
3:1(소) 사람이 만일 화목제의 희생을 예물로 드리되 소로 드리려거든 수컷이나 암컷이나 흠 없는 것으로 여호와 앞에 드릴찌니.
3:6(양) 만일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는 화목제의 희생이 양이면 수컷이나 암컷이나 흠 없는 것으로 드릴찌며.
* 화목제에서 "새"는 제물로 바칠 수 없다. 왜냐하면 제사장과 제사자가 나누려면 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화목제(和睦祭)의 종류(種類) 레위기 7:11-18
감사제(感謝祭)(7:11-15) 감사제는 서원제와 자원제보다 더욱 엄숙한 제사였습니다. 감사제는
소제(12절)뿐 아니라 유교병(13절)과 함께 드려야 했습니다. 감사제를 드릴 때 무교병과 유교병 어느 하나만 드린 것이 아니라
이들 모두를 함께 드렸다(14절).
서원제(誓願祭)(7:16-18) 서원제와 자원제의 제물은 그 이튿날까지 먹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16-17).
반면 감사제의 제물은 제사 드린 당일에 다 먹어야 했습니다(15절).
자원제(自願祭)(樂獻祭)(7:16-18)
서원제와 자원제의 제물은 그 이튿날까지 먹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16-17).
반면 감사제의 제물은 제사 드린 당일에 다 먹어야 했습니다(15절). 제물을 제사 드린 당일에 다 먹지 못한 경우에는 태워야
했습니다.
제물의 고기를 당일에 먹어야 한다는 규례는 다른 제사의 제물과 관련해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마 고기를 신속히 먹어야
한다는 명령은 예배자에게 다른 사람들,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고기를 나누어 먹도록 장려하기 위한 방편으로 인 것입니다. 즉
당일에 고기를 다 소비하라는 것은 다 나누어 함께 먹으라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를 어기고 남은 고기를 먹으면 그가 드린
제사는 가증하게 될 뿐 아니라 그 고기를 먹은 자는 죄를 지은 자로 간주되었습니다(18절). 이 경우에는 부정한 자가 제물을
먹었을 경우 위의 경우보다 더욱 심각한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의 백성 중에서 끊어지는 형벌을 받았습니다(20-21절).
“백성 중에서 끊어지다”라는 구절은 죽음과 같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심판을 지칭합니다. 백성 중에서 끊어지는 벌은 다양한 죄와
결부되어 나타나는데 주로 사람들이 판단하기에 대단히 힘든 종교적인 죄, 성적인 범죄와 관련되어 나타납니다(7:20-21, 25,
27; 17:4, 9; 18:29; 19:8; 20:17-18; 22:3절 등). 그만큼 부정한 가운데 제물을 먹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신약(新約)의 화목제(和睦祭)
신약에서 화목제와 가장 가까운 제도는 성만찬(聖晩餐)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 제자들에게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고전 11:25). 새 언약의 피는 옛 언약의 피에 대한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옛 언약의 피는 무엇이었을까요?
출애굽기 24:8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출애굽기 24장에서 백성들이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준행하겠다고 약속하자 모세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기둥을 세우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립니다.
언약서를 백성들에게 낭독하자 백성들은 다시 한 번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준행하겠다고 약속합니다(7절). 그러자 모세는 화목제의 피를 양푼에 담아 반은 하나님을 상징하는 단에 뿌리고(6절), 나머지 반은 백성들에게 뿌리며,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8절)라고 선언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신 최후의 만찬은 이와 같은 면에서 화목제와 유사합니다. 성만찬과 화목제의 유사점은 참여하는 자가 정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제물을 바친 자들이 제물을 먹기 위해 정결해야 했던 것처럼 신약에서도 자기 몸을 살피지 않고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했습니다.
“만일 몸이 부정한 자가 여호와께 속한 화목제의 희생의 고기를 먹으면 그 사람은 자기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요”(레 7:20)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고전 11:27)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은 번제라고 합니다. 제자들과 함께 그의 살과 피를 나눈 최후의 만찬은 화목제와 흡사합니다.
구별 없이 어느 것이든 가능하다. 그러나 전부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 그리고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허리 근방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드리도록 되어
있었다.
양
: 소와 마찬가지로 흠 없는 것으로 하되 암,수 어느 것이든 가능하였고, 어린 양을 드릴 수도 있었다. 양의 경우 역시 양의
기름만을 드리되 미려골(등심뼈 또는 척추)에서 베어 낸 기름진 꼬리와 내장에 덮인 것과 모든 기름진 두 콩팥과 간에 덮인 기름과
꺼풀만을 콩팥과 함께 드릴 수 있었다.
화목제는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를 드리는 세 번째 제사입니다. 그러나 번제와 소제는 의무적으로 드려야 하는 제사인
반면 화목제는 제사 자가 그것을 드리기를 원할 때 드리는 선택적 제사라는 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드린
번제와 소제와는 달리 이 제사는 성소에서 매일 정규적으로 드리는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화목제는 감사함으로 자원함으로 또는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드렸습니다(레7:15-16절). 화목제의 제물은 암수에 관계없이 가축인 소, 양 또는 염소로 드릴 수 있었습니다.
화목제에 대해서는 3장에는 제물과 방법에 대해서 그리고 7장에는 화목제의 종류와 거제와 요제, 그리고 제사장에게 돌려진 제물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래서 화목제는 오히려 7장에 훨씬 중요한 내용들이 많이 들었습니다.
화목제와 번제와 소제의 차이점은 예배 자에게 제물로 드린 동물의 고기를 먹는 것이 허용되었다는 것입니다. 번제의 경우 제물
전체를 태워 하나님께 드렸으면 소제의 경우 한줌의 제물만을 기념물로 태우고 나머지는 제사장들에게 주었습니다. 화목제의 경우 동물의
일부는 태웠으며, 일부는 제사장들이 먹었습니다. 또 그 가운데 일부는 예배 자에게 돌려져 예배 자와 그 친지들이 함께
먹었습니다. 따라서 화목제는 성소와 성소 근처에서 먹는 즐거운 축제였습니다.
각 문단은 “사람이 만일 화목제의 희생을 드리되 소/양/염소로 드리려거든 수컷이나 암컷이나 흠 없는 것으로 여호와 앞에 드릴지니”라고 시작합니다(1, 6, 12).
그리고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또는 이와 유사한 구절로 결론을 맺습니다(5, 11, 16).
마지막 문단은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는 구체적 명령이 추가 되었습니다. “대대로 영원한 규례”라는 표현은 레위기에서 중요한 원칙을 강조하기 위해 자주 나타납니다.
2. 화목제 의식
화목제를 드리고자 하는 자는 암수에 관계없이 흠 없는 가축(소나 양이나 염소)을 여호와 앞으로, 즉 회막 문 앞으로 가지고 왔습니다(1,6-7,12절).
예배 자는 제물의 머리에 안수했습니다. 안수가 자신을 제물과 동일시하는 상징적 행위라는 점은 중요합니다. 아마 예배 자는
동물의 머리에 안수하며 예배 드리는 이유를 고백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예를 들면 기도 응답이나 서원이 성취되었다는 고백들입니다.
화목제 의식은 안수 한 후에 동물을 잡습니다.
제사장은 그 피를 단 사면에 뿌립니다.
그리고 동물의 가죽을 벗기고 토막 냅니다. 이것은 레위기 3장에서 나타나지 않지만 번제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번제와 동일하게 화목제 의식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화목제가 번제와 다른 점은 번제가 동물 전체를 제단 위에서 태운 것과는 달리, 화목제에는 내장을 덮고 있는 기름과
콩팥을 덥고 있는 기름, 그리고 간 주위에 있는 기름만을(양으로 드릴 경우 꼬리의 기름까지)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로
태웠습니다(3-5, 9-11, 14-16절)
화목제 의식은 예배 자와 함께 예배하는 사람들 또는 가족들이 그 나머지 고기를 먹는 성스러운 식사에 참여하는 것으로 끝맺습니다. 그래서 신약의 성만찬과 가장 유사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목제 의식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7장에 소개되는 제사장들에게 주는 화목제 규례를 참조해야 합니다. 레위기 3장은 공동식사
자체에 대해서는 거의 설명하지 않습니다. 단지 7:20-21절에서 이 식사에 참여하는 모든 자는 의식적으로 정결해야 한다고
규정할 뿐입니다. 만일 부정한 자가 이를 먹으면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뒤에 다시 살피겠습니까만 제사장들이 제물을 먹지 못하게 하는 부정은 레위기 22장에 상세히 소개됩니다. 일반 백성 가운데
사람의 시체나 부정한 동물의 사체를 접촉한 자(11:24-40) 또는 몸에 유출병이 있는 자는 부정한 자로 간주되었으며, 이런
자는 적절한 정결의식을 행하기 전까지 어떤 제물도 먹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는 콩팥과 기름 부위를 태워 드린 반면, 제사장들은 가슴과 뒷다리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7:31-34절). 한 편
예배 자와 동참자들은 그 나머지를 먹었습니다. 그러나 피와 기름은 결코 먹어서는 안 되었습니다(3:17; 7:22-27절). 피는
생명을 속하기에 먹으면 안 되었으며(17:11절), 기름은 아마도 가장 좋은 부분이었기에 하나님께 드린 것으로 보입니다.
구약에서 기름은 최고의 것과 동의어로 사용됩니다(창4:4; 45:18; 시81:16절). 제물은 상징적으로 예배자 자신을
나타내기에 하나님께 제물의 최상의 부위를 드린다는 것은 예배자 자신의 최고의 부분을 하나님께 드림을 의미합니다. 콩팥도 특별히
단에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콩팥과 내장은 구약에서 감정의 좌소로 간주되었습니다(욥19:27; 시16:7; 렘4:14;
12:2). 따라서 콩팥을 한님께 드림은 오늘날 우리 마음을 드림과 같은 의미였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피를 먹는 것은 전적으로
금지되었습니다. 그것을 먹는 자는 자기 백성 중에서 끊쳐 지리라고 선언되었습니다(25-26절).
화목제 중에는 제사장의 분깃(7:28-36절)이 있습니다. 제사를 집행하는 제사장은 백성이 드리는 모든 제물에서 분깃을
받았다(6:26; 7:6-10). 이것은 제사장으로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에 주어지는 몫이었다(35). 화목제의 경우는 제사장은
가슴(30절)과 오른쪽 뒷다리(33절)을 받았습니다. 가슴은 요제라 불리며 뒷다리는 거제라 불립니다. 정통적인 해석은 거제의 경우
제물을 취하여 수직으로 흔드는 의식을 행한 것으로, 요제의 경우 제물을 취하여 수평으로 흔드는 의식을 행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렇게 드린 제물은 제사장의 몫이 되었습니다.
3. 화목제의 목적
화목제의 히브리어 명칭인 쉘라밈은 화평한 관계(샬롬),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아카드어의 “슐마누”) 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는 일련의 제사를 “완성하는”(샬렘)절차를 나타낸다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레위기 7장은 감사제, 서원제, 자원제라는 세 가지 종류의 화목제를 소개합니다(7:11-18절). 이 세 형태의 제사에서 구원 또는 평화가 공통적으로 발견됩니다.
화목제는 원수나 병의 공격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거나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며 드렸고(삿 20:26; 21:4; 삼하 24:25) 혹은 환난에서 구원 받은 후에 하나님의 자비에 초점을 맞추어 감사제를 드렸습니다(예. 시 56:12-13).
또 어려운 상황을 만났을 때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서원제의 약속을 합니다. 따라서 서원이 이루어졌을 경우 서원자는 화목제를 드려야 했습니다. 에서를
피해 집에서 도망 다니던 야곱이 만일 하나님이 자신을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여호와가 자신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벧엘에서 서원하고(창 28:20-22), 돌기둥 위에 기름을 부음으로 자신의 서원을 확실하게 보증합니다.
그 후 야곱은 벧엘로 다시 돌아오자 제사를 드립니다(창 35장). 삼상 1장에서 한나는 만일 하나님이 아들을 낳게 해 주시면 그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서원합니다(삼상 1:11절). 사무엘이 태어나고 젖을 뗀 후 한나는 세 마리의 수소와 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 부대로 서원제를 드렸습니다(삼상 1:24)
세 번째로 소개되는 화목제는 자원제입니다. 이것은 때로 낙헌제라고 번역되기도 했습니다(출 35:29; 스 1:4; 8:28; 시 54:6). 자원제 또는 낙헌제는 하나님의 호의와 선하심에 대해 예배자가 자발적으로 드리는 제사로 신명기는 추수를 한 후 드리는 자원제를 언급합니다(신 16:10) 자원하여 화목제를 드릴 경우에는 흠이 있는 제물이 허용되었습니다(레 22:23절). 하지만 감사제나 서원제에는 반드시 흠이 없는 동물로 제사 드렸습니다.
이 외에도 화목제는 흔히 언약 의식과 함께 나타납니다(출 24:5; 신 27:7; 왕상 8:63) 아마도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심에 대한 감사의 의미와 언약을 지키겠다는 서원의 의미로 화목제를 드린 듯합니다.
가끔 죄에 대한 고백과 구원에 대한 탄원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화목제는 대부분 즐거운 경우에 드렸습니다. 따라서 제사 후 뒤따르는 성스러운 식사는 여호와 앞에서 즐거움을 나누는 기회였습니다(신 12:12, 18; 27:7; 왕상 8:66)
마찬가지로 화목제에도 피를 뿌리는 의식이 거행되기는 하지만 속죄는 화목제의 주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속죄는 화목제를 드리기에 앞서 드려진 번제의 주요 목적이었습니다. 화목제에서 피 뿌리는 의식이 나타나는 것은 이와 같이 즐거운 경우에조차 인간은 항상 죄를 용서 받아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화목제를 드리는 예배자는 하나님의 언약의 법을 준수할 것을 서원하거나, 하나님이 예배자의 기도를 응답하여 주시면 하나님을 위해 특정한 일을 하겠다고 구체적으로 서원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이들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것을 화목제 식사를 통하여 가시적으로 보증하십니다. 고기를 먹으며 즐기는 것은 언약을 지키는 자에게 모든 다른 축복들(레 26:3-13; 신 28:1-14)도 주실 것임을 물리적으로 상기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이 언약을 지키는 자들은 집에서든 집 밖에서든 평화를 누리며 풍성한 수확과 많은 자녀들과 번역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화목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확인하는 화평한 관계를 표현하는 제사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난 이후 하나님이 주신 예물을 먹고 나누면서 평안과 기쁨을 확인하는 예배가 바로 화목제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이루어지는 샬롬입니다. 화목제가 드려지는 때가 감사할 때, 서원을 드릴 때, 그밖에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사랑을 임의적으로 표현할 때 드리게 되기에 화목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과의 화목을 강조하는 예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화목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누리는 거룩한 교제를 드러내는 제사입니다. 화목제는 잔치입니다. 예배하는 자가 하나님의 식탁, 즉
제단에서 하나님을 주빈으로, 예배드린 자를 객(客)으로 삼아 먹고 나누는 기쁨의 잔치입니다. 화목제는 서로 나눠주는
예물입니다(히 13:16). 하나님의 은혜를 서로 나누고 확인하는 제사가 바로 화목제입니다. 신앙은 이론이 아닙니다. 신앙은
지식이 아닙니다. 신앙은 삶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여 누리는 기쁨과 감사의 삶입니다. 우리의 삶이 잔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화목을 드러내는 잔치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예수의 피 덕분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 10:19)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화목제(Fellowship Offering) 제바흐 쉐라밈
화목제를
뜻하는 히브리어 ‘제바흐 쉐라밈' "자바흐"는 ‘동물을 살육하다’, ‘죽이다’, ‘제사 드리다’에서 파생된 "도륙" ‘희생물’을 뜻하는 ‘제바흐에서 파생하였다. ‘완전한’, ‘정다운’, ‘공평한’, ‘평화로운’을 뜻하는 ‘솨렘’에서 파생된
‘쉐라밈' "제바흐"와 "쉐라밈"의 합성어로 그 의미는 ‘사람이 하나님과의 완전한 관계’, 또는 ‘평화로운 관계를 얻고자 하는 희생 제물’ 이라는
의미이다.
제물(祭物)의 종류(種類) / 소, 염소, 양
소와
염소 : 흠 없는 것으로서 암컷,수컷 구별 없이 어느 것이든 가능하다. 그러나 전부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 그리고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허리 근방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드리도록 되어
있었다.
양
: 소와 마찬가지로 흠 없는 것으로 하되 암,수 어느 것이든 가능하였고, 어린 양을 드릴 수도 있었다. 양의 경우 역시 양의
기름만을 드리되 미려골(등심뼈 또는 척추)에서 베어 낸 기름진 꼬리와 내장에 덮인 것과 모든 기름진 두 콩팥과 간에 덮인 기름과
꺼풀만을 콩팥과 함께 드릴 수 있었다.
화목제를 드리는 방법
1. 제물을 갖고 여호와 앞으로 나온다. 2. 손을 제물의 머리 위에 얹고 안수한다. 3. 피를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그 피를 번제단 사면에 뿌린다. 4.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그 속의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콩팥과 그 위의 기름과 허리 근방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것을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그것들을 받아 제단에서 불사른다. 5. 제물의 가슴은 ‘요제’로 제물의 우편 뒷다리는’거제’로 흔들어 제사장의 음식으로주어지는데 제사장과 가족들은 그것을 그날에 다 먹어야 하며 남은 것은 불에 태워야 했다.
화목 제물의 고기를 제물을 바치는 사람도 먹을 수 있는 일종의 축제 형식의 제사(레 7:15-21)
요아킴은 먼 여행길을 떠났다. 사해에서 캔 소금
덩어리를 다메섹에 가서 팔면 가족들 일년 생계는 걱정할 필요가 없는 돈을 만질 수 있었다. 영세했던 요아킴 일행의 여행 장비는
빈약했으며 낙타와 노새는 노쇠했다. 300km가 넘는 여행길은 어려웠다. 큰 강을 만나 떠내려갈 뻔 했고, 뜨거운 광야 길을 건널
때는 길을 잘못든 바람에 물이 고갈되어 쓰러질 뻔했다. 우여곡절 끝에 목적지를 불과 하룻 길 앞둔 어느 날, 일행은 산적떼를
만났다. 모든 것을 빼앗길 찰나였다. 그 때 어디선가 갑자기 십수명의 군인들이 나타나 극적으로 그들을 물리쳐주었다. 그들은 임무를
마치고 마침 다메섹으로 복귀하고 있던 참이라 했다. 참으로 하나님이 보내신 하늘의 천군천사들이었다. 힘든 여행길을 마치고
요아킴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소금도 좋은 값으로 팔아 당분간 넉넉히 살 수 있게 되었다.
요아킴은 하나님께 바칠
번제의 양과 화목제 소를 각각 한 마리 씩 고른 후 당장에 성전으로 달려갔다. 자신의 여행길에서 함께 해주신 하나님, 여러 차례
위기의 순간에 구원의 손길을 베풀어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바치고 친족과 마을 사람들을 위해 기쁨의 잔치를 베풀고
싶었기 때문이다. 번제를 감사의 제물로 먼저 바친 후, 요아킴은 화목제를 또한 하나님께 올려 드렸다. 제사 규례를 따라 번제의
양은 남김없이 모두 태워져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로 올라갔다. 이어서 화목제의 수소는 내장의 기름 덩어리와 두 콩팥, 그리고 간엽을
도려내 바친 후 가슴과 오른쪽 넓적다리는 수고하신 제사장님 몫으로 드리고 나머지 대부분의 몸통을 집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요아킴은 마을 사람 모두를 불러 그 화목제 짐승으로 불고기 파티를 열었다. 그 동안 껄끄러운 관계였던 친구 시므온도 초대를 받고선
기꺼이 기쁨으로 달려와 주었다. 즐겁게 고기를 삶고 구워 먹으며 요아킴은 여행길에 어떻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호하셨는지 간증을
들려주었다. 감사가 풍성히 넘쳤다. 간증을 들은 다른 사람들도 또한 최근에 있었던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를 더하여 나누었다. 잔치의
자리에서 아름다운 찬양의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모두가 시편의 찬양을 노래했다. 그 순간 요아킴과 시므온을 비롯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화목하고 하나가 되었다.
화목제의 특징
위험한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요아킴이 바친 제사는
번제와 화목제였다. 번제는 여러 목적으로 바쳤지만, 가장 대표적인 자원의 제사로서 감사의 제물로 바치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
흔하게 화목제가 수반되었다. 번제가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제물이었다면, 화목제는 하나님께 일부 바치고 나머지 대부분은 사람이
함께 나누기 위한 제물이었다. 따라서 번제가 수직적인 제사였다면 또 하나의 감사의 제물이었던 화목제는 주로 사람들과 기쁨을 나누기
위한 수평적인 제사였다고 볼 수 있다.
레위기 3장에서 규정된 화목제의 히브리어는 쉘라밈(shelamim)이다. 이
단어는 분명 ‘샬롬’에서 기원한 것이다. 샬롬은 평화와 친교, 다시 말해 관계가 좋은 상태를 말한다.
화목제는 영어
성경에서 ‘평화의 제사’(peace offering)나 ‘친교의 제사’(fellowship offering)로 번역한다. 흔히
알고 있는 대로 화목제는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미 ‘화목한 관계’를 감사하며 기뻐하기 위해
바친다. 하나님과 관계가 틀어졌을 경우 관계를 복원하여 ‘화목’하고 화해하기 위한 제사는 속죄제와 속건제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죄가 하나님과 백성 사이를 가로막기 때문이다. 감사의 번제나 화목제는 하나님과 이미 화목한 관계 속에서 교제를 지속하고
기쁨과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 바치는 제사다. 화목제는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잔치를 베풀어 사람들과 고기를 나누는 것에 목적이
있었기에 소, 양, 염소를 암수 구분 없이 화목제로 바칠 수 있었다. 비둘기는 제외되었는데 고기를 나누기에 너무 빈약했기
때문이다. 양과 염소는 아마 가족과 친족들만 초대해서 나누었던 반면, 소를 잡을 때는 마을 잔치가 벌어졌을 것이다. 어느 것을
바칠 지는 자신의 형편과 감사의 정도에 따라 제사자 본인이 결정할 수 있었다. 화목제의 가장 큰 특징은 짐승의 일부만 하나님께
바치고 나머지는 전부 사람들이 나누어 먹었다는 점이다. 이때 하나님께 바치는 부위는 내장 부위의 기름 덩어리(suet), 두
콩팥, 그리고 간엽(liver lobe)이었다. 흔히 히브리어 요테레트 카베드(yoteret kabed)를 간꺼플로 번역하는데
그런 얇은 막이 제물에 적합했을리 없다. 랍비들은 그것을 ‘간의 손가락’, 다시 말해 간의 어느 한 토막으로 번역한다. 그것은 간
중에서 ‘미상엽’이라는 부위로 알려진다. 콩팥과 간엽을 바치는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으나 그 기관들이 인간의 감정이
집약되는 기관, 즉 감정의 좌소이기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특히 간은 당시 널리 퍼져 있던 간점술을 금지하기 위해 제단에
바치라고 했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콩팥은 단순히 기름 덩어리에 묻혀 있기 때문에 기름과 한 덩어리로 취급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화목제에서 태워지는 이 부위들을 단순히 ‘기름’이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레 6:12; 왕상 8:64; 대하 7:7; 사
1:11). 그리고 짙은 빨간 색의 간에 대해서는 고대인들에게는 그 기관이 피를 만드는 기관으로 간주되어 ‘피는 곧 생명’이며
하나님께 돌려야하기 때문에 간이 요구되었다는 설명이 가장 그럴 듯 하다. ▲ 고대 팔레스타인 양의 거대한 꼬리와 꼬리를 위한 수레
양의
경우는 특별히 미골에서 벤 기름진 꼬리를 잘라 바치라는 규정이 더해졌다(레 3:9). 꼬리가 두툼하고 묵직한 것이 팔레스타인
양의 특징이다. 최근에는 그런 양을 보기 힘들지만, 헤로도투스의 기록에 의하면 고대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어떤 양은 꼬리가 너무
거대한 나머지 바퀴가 달린 수레를 다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기름진 꼬리는 미골을 절단하여 제단에 바쳤다(레 3:9).
그러나 염소 꼬리나 소 꼬리는 기름이 아닌 고기 덩어리이므로 제단에 바치지 않았다(레 3:3-4, 14-15).
이렇게
기름과 일부 내장을 제하고 남은 고기(아마 남은 내장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는 제사장 몫으로 일부를 떼어낸 뒤 제사자가
가져가 이웃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 제사장의 몫은 가슴과 오른쪽 뒷다리, 나머지는 모두 제사자의 몫이었다.
그렇다면 왜
짐승의 기름을 여호와께 바쳤을까? 이에 대해서는 기름이 가장 맛있는 부위였다거나 콜레스테롤 덩어리라 인체에 해로워 제물로
바쳤다는 설이 있다. 기름에 잘 타는 부위인 만큼 제물의 소각을 도왔을 것이라는 실용적 이유를 내세우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밀그롬이 말한 대로 내장에 엉긴 지방 덩어리는 고기 위에 붙은 비계와 달리 먹을 수 없는 부위다. 또한 콜레스테롤이 인체에
유해하다는 관점은 현대 의학의 발달과 함께 등장했으며, 과하게 섭취하지 않는 이상 콜레스테롤은 반드시 필요한 영양소다. 또한
해로운 것을 바치라했다는 견해는 ‘기름은 내 것이라’는 하나님의 선언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기름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신 데는 다른 의미가 있다. 그것은 제물이 향기로운 냄새를 내는 데 있어서 기름이 핵심적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기름이 부와 풍요의 상징이자 힘의 근원으로 간주되었기에 풍요와 힘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하나님께
되돌려드리는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화목제를 드리는 때
번제와 마찬가지로 화목제 역시 자발적인 제사였기에
개인은 원하면 언제든 화목제 짐승을 바칠 수 있었다. 화목제는 월삭이나(민 10:10) 오순절 같은 일부의 절기에 공적 제의로
바쳐지는 경우를 제외하면(레 23:19) 매우 사적인 성격이 강한 제사였다. 민수기 29장 39절에 따르면 절기마다 바친 화목제는
절기법으로 규정되어 있기보다는 잔치를 위한 자발적 제사였음을 알 수 있다(참조. 대하 7:7). 또한 특별한 행사나 국가적
행사에서도 화목제를 풍성하게 드렸다(민 7장; 삿 20:26; 삼상 11:15; 대하 7:7; 30:22; 31:2). 화목제는
레위기 이전에도 이미 하나님께서 전수해주셔서 바쳐지던 제사였다(예, 출 18:12). <표>
a.
감사제/찬양제: 요아킴의 사례에서 보듯이, 여행을 무사히 마치거나 전쟁터에서 무사히 돌아왔을 때, 질병에서 회복되었을 때처럼
특별한 축복으로 인해 드리는 화목제였다. 감사의 화목제를 드릴 때 당일에 고기를 먹었다는 점으로(레 7:15) 미루어보면 감사의
기쁨이 충만했을 때 모든 고기를 즉시 먹는 것이 바람직했다.
b. 서원제: 하나님께 서원한 내용을 이행할 때 드리는
제사다. 한나가 아들 사무엘이 젖을 뗀 뒤 성전에 데리고 올라가 서원을 실행하며 수소 세 마리(혹은 삼년생 수소 한 마리)를
서원제로 바친 것(삼상 1:24)이 그 예다. 서원의 화목제 때는 이튿날까지 고기를 먹고, 종종 서원을 이행하기 위해 화목제와
더불어 번제를 함께 바쳤던 것으로 보인다(레 22:18).
c. 자원제/낙헌제: 특별한 일이 있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닌 단순히 기쁨으로 자원해서 드리는 화목제였다. 이때도 이튿날까지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이 경우 순전히 자발성에 의해 바치는
제사였던 이유로 짐승의 발이 더하거나 덜한(아마도 짧거나 긴) 약간의 흠이 있는 짐승도 바칠 수 있었다.
화목제의
고기는 지정된 기한 이후로는 거룩성을 상실하여 더러운 고기(히. 피굴)로 간주되었다. 이렇게 일정 기간 후에 제의적으로 부패한
고기나 부정한 것과 접촉한 고기를 먹는 것은 스스로를 부정케 하는 심각한 죄였기에 그런 고기는 진 밖에서 불살라 없애야 마땅했다.
또한 부정한 사람들이 속죄제의 고기를 먹으면 끊어지는(cutting off) 형벌을 받았다(레 7:18~20). 이는 아마
공동체에서 제명된다는 의미일 텐데, 고대 사회에서 공동체로부터 배제되는 것은 죽음과도 같았다.
화목제의 의의
화목제는
죄를 위해 드리는 제사가 아니었다. 화목제는 번제와 같이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고 이를 기뻐하는 감사의
제사라 할 수 있다. 화목제는 기쁨을 이웃과의 교제 속에서 나누는 일종의 잔치의 제사다(레 7:11~21). 요아킴의 사례에서
보듯이 큰 일을 겪은 사람은 마음에 여유가 생기는 법이다. 이때 다른 사람과 반목 관계에 놓인 것이 매우 사소해 보일 수 있다.
이때 화목제를 바치면서 공동체의 친목이 강화되고 불편한 관계에 놓인 사람들도 특별한 축제로 인해 화해의 관계로 복원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화목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목을 만드는 부수적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그동안은 예배에서
번제적 요소, 즉 하나님을 향한 수직적 경배만이 강조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수직적 교제(번제) 못지않게 사람 간의
수평적 교제(화목제)도 중요하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제사의 정신은 예배를 통해 실현되어야 마땅하다. 예배 시간은
짧지만 최대한 성도 간의 축하, 감사, 위로 및 합심의 기도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예배가 풍성한 교제와 나눔의
자리가 되는 것을 기뻐하실 것이다. 부족한 화목제의 요소는 예배 후 식사와 교제, 구역 예배나 여러 프로그램을 통해 채울 수
있다. 더불어 신자들은 자신의 물질을 화목제의 정신을 따라 이웃과 넉넉히 나눌 수 있어야할 것이다. 비단 물질만이 아니라 어려운
이웃을 섬기는 데 우리의 시간과 힘, 또한 지식을 사용할 수도 있다.
예수님께서는 예배에 앞서 성도들끼리의 나눔과
화해를 크게 강조하셨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이에 따르면 성찬식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함과 동시에 성도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현하는 중요한 예식이 된다.
(1) 제사장(3절) (2) 이스라엘 온 회중(13절) (3) 족장(22절) (4) 평민(27절)
2. 속죄제의 제물은 무엇인가?
(1) 흠 없는 수송아지(3절) / 제사장(3절) (2) 수송아지(14절) / 이스라엘 온 회중(13절) (3) 수염소(23절) / 족장(22절) (4) 암염소(28절), 어린 양(32절) / 평민(27절)
1. 속죄제의 언어적 의미
속죄제는 히브리어로 “하타트” 라고 합니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속죄제가 부정하게 된
성소를 정결하게 하는 기능을 중요하게 여겨서 히브리어 “하타트”를 "속죄제"(sin offering)로 번역하기보다는
“정결제”(purification offering)로 번역하는 것이 낫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어 “하타트”는 본래 “죄”를 나타내는 명사형입니다. 구약에서 이 단어가 보통 155회 정도 이런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동시에 이 말은 “죄의 용서”를 나타내는 “속죄제”라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히브리어 “하타트”가 속죄제란 의미로 사용된 것은 구약에서 대략 135회 정도입니다. 속죄제(하타트)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살면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목표를 어긋난 삶을 살게 되었을 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속죄제를 드림으로써 “범한 죄에 대해서 속죄함을 받고 사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4:20, 26, 31, 35: 5:6, 10, 13, 16). 일반적으로 속죄제는 속죄 제물을 드리는 자에게 “속죄함을 받게 하고, 용서함을 얻게 합니다.”
속죄제를 드려야 되는 상황은 크게 둘로 구분됩니다.
첫째는 부지중에 하나님의 금령을 어긴 것을 깨달았을 때 드리는 제사입니다(4:3-35).
특히 2절에서 ‘누구든지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그릇 범죄하였으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속죄제는 명시적인 계명을 부지 중에 어겼을 때 드리는 예배였던 것입니다.
둘째는 법정의 증언을 기피하거나 부정한 물체 등에 접촉하였거나 맹세한 것에 대한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것 등을 깨달았을 때 드리는 제사입니다(5:1-13).
그 어느 것이든 고의성이 없는 잘못과 허물에 해당합니다. 부주의하여 저지르거나, 무심코 저지르거나, 태만하여 저지른 범법행위가 여기에 속합니다. 만약 고의적으로, 의도적으로 저지른 범죄행위가 있다면 거기에 따른 형벌은 공동체로부터 “추방되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속죄제의 특징은 성소에 피가 뿌려진다는 것입니다. 성소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만나주시는 하나님 자신을 눈에 보이게 표현한 곳입니다. 바로 그 성소에 속죄제의 피가 뿌려졌습니다. 왜 이렇게 하는 것일까요?
이스라엘 신앙에서 죄의 삯은 부정(不淨)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파괴시키는 부정을 남깁니다. 죄는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파괴하는 부담스러운 실체입니다. 이 같은 관계의 파괴는 단순히 죄인에게 주는 죄책(罪責)으로만 그치지 않습니다. 관계의 파괴는 거룩한 신앙공동체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위기를 초래합니다. 하나님의 성소가 죄로 인한 부정에 오염되게 되는 결과를 맞게 되는 것입니다.
2. 4:1-5:13절의 구조
레위기에 네 번째 나타나는 속죄제의 구조는 앞의 1-3장과 명백하게 구분됩니다. 레위기 1-3장이 제물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 반면, 속죄제에서는 제사를 드리는 자의 사회적 지위가 문단을 배열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서론(4:1-2절)에 이어 각각의 단락은 “만일(임)"로 시작합니다(4:3,13, 22, 27, 32; 5:7,11). “제사장이 그이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또는 이와 유사한 구절로 각 문단이 끝납니다(4:20, 26, 31, 35; 5:10,13). 이 표현은 대제사장이 범죄하여 속죄제를 드리는 첫 번째 단락(4:3-12)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죄 때문에 제사를 드리는 대제사장 스스로 자신의 용서를 선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4:22절과 5:1절은 종속적인 경우를 소개하는 만일로 시작하지 않고 각각 아쉐르(만일)와 네페쉬키(만일 누구든지)로 문장을 시작하여 새로운 주제가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런 구분에 의해 다음과 같이 단락을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5:1-13, 속죄제의 규례 5:1-6. 속죄제를 드리는 네 경우 5:7-10. 가난한 자의 속죄제 5:11-13. 극빈자의 속죄제
3. 속죄제 의식
속죄제는 레위기에 소개되는 제사 중에서 가장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먼저 제사자는 신분에 따라 자신이 드려야 하는 흠 없는 동물을 선택했습니다. 제사자는 선택된 제물을 회막의 입구로 가져와서, 그의 손으로 제물의 머리에 안수한 다음 잡았습니다. 여기까지는 다른 동물의 제사의식과 동일하지만 이 후의 의식은 독특하게 속죄제에만 나타납니다.
번제와 화목제의 경우 제사장이 동물의 피를 단 주위에 뿌렸습니다. 그러나 속죄제에서는 피의 일부를 대야에 담아 특별한 용도로 사용했으며, 나머지 피는 단 밑에 부었습니다. 대야에 담은 피는 제사자의 신분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되었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 또는 이스라엘 온 회중이 속죄제를 드릴 경우, 대제사장은 이 피를 가지고 회막 안으로 들어가서 피를 성소의 휘장, 즉 회막의 가장 내부에 위치한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에 일곱 번 뿌렸습니다. 그리고 약간의 피를 성소에 위치한 향단의 뿔에 발랐습니다. 이 의식은 성막에서 둘째로 거룩한 장소, 즉 제사장들만 들어가도록 허용된 성소에서 거행되었습니다.
족장이나 평민이 속죄제를 드릴경우 회막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지 않고 단지 회막 뜰에 위치한 번제단의 뿔에 발랐습니다(레
4:22-35). 레위기 16장에 소개되는 속죄일에는 대제사장이 피를 가지고 지성소까지 들어가서 언약궤를 덮고 있는 속죄소 앞에
피를 뿌렸습니다(16:14-15).
대속죄일에는 일 년에 한번 시은좌에 피를 뿌림으로 죄를 덮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의 경중과 상황에 따라 피가 뿌려지는 곳이 달라졌다는 말입니다.
피 뿌리는 의식에 이어 동물의 고기를 처리하는 의식이 진행되었습니다. 휘장에 뿌리거나 단에 바르고 남은 피는 번제단 밑에 쏟았으며, 기름 부위는 화목제와 마찬가지로 번제단에서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로 태웠습니다(4:31).
기름과 콩팥을 제외한 나머지 고기는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 또는 온 회중이 죄를 지었을 때(4:3-21) 백성이 죄를 지었을 때 각각 다르게 처리되었습니다(4:22-35).
제사장 또는 온 회중이 부지중에 죄를 지었을 때에는 동물의 나머지 부분, 즉 가죽, 고기, 머리, 다리, 내장과 똥은 진 밖으로 가지고 나가서 재를 버리는 곳에서 불에 태웠습니다(4:11-12, 21). 그러나 만일 일반 백성 중 하나가 속죄제를 드릴 때에는 단지 기름 부위와 콩팥만 태웠고 그 나머지 고기는 제사장의 몫으로 주었습니다(6:26-30).
가난한 사람은 가축 대신에 비둘기 두 마리로 제사를 드릴 수 있었는데 그중 한 마리는 번제로 나머지 한 마리는 속죄제로
드렸습니다(5:7-10). 만일 새도 드리지 못할 정도로 가난할 경우, 그는 유향과 기름을 넣지 않은 고운 가루 에바 십분의 일로
속죄제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때에는 한 줌의 기념물만이 제단에서 태웠으며, 그 나머지는 제사장에게
주었습니다(5:11-13).
속죄제는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 드리는 제물과 의식이 자세히 설명되고 있습니다. 이런 부분을 사회적 신분에 따라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1) 대제사장의 속죄제(4:3-12)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이라는 표현은 레위기 4장과 6장에만 나타납니다(4:3,5,16; 6:22). 이 표현은 오직 대제사장을 가리키는 전문적 용어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3절의 “백성의 허물이 되었으면”이라는 표현은 대제사장의 죄는 자신뿐만 아니라 백성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구약의 제사장은 백성에게 주의 법도와 규례를 가르치는 교사의 역할을 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의 공적인 삶에서는 물론 사적인 삶에서도 모범을 보여야 했습니다. 대제사장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이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대제사장은 제사장들의 우두머리로서 그의 삶은 모든 사람들이 지향해야 할 거룩한 삶의 전형적인 모범이 되어야 했습니다.
대제사장이 지은 죄가 일반 백성이 지은 죄보다 심각했다는 것은 대제사장이 가장 값비싼 수송아지로 제사를 드렸다는 사실과 제물의 피를 가지고 성소까지 들어가서 피 뿌리는 의식을 행했다는 것에서 잘 나타납니다. 수송아지는 대제사장과 온 회중이 죄를 지었을 경우에만 제물로 드렸습니다(4:4,14)
(2) 온 회중의 속죄제(4:13-21)
온 회중이 죄를 지었을 때 드리는 속죄제의 의식은 한 가지만 제외하고 대제사장의 경우와 같습니다. 온 회중이 죄를 지었을 경우 회중 전체가 제물의 머리에 안수할 수 없었기에 회중을 대표하는 장로들이 수송아지의 머리에 안수했습니다(15절).
(3) 족장의 속죄제(4:22-26)
족장은 존경받는 특권을 지닌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족장 또는 지도자의 죄는 일반 백성보다 심각하게 간주되었습니다. 족장의 죄는 대제사장이나 온 회중의 죄만큼 심각하게 간주되지는 않았지만 죄를 지은 족장은 일반 백성의 제물보다 더 비싼 숫염소로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족장이 죄를 지었을 경우 제사장은 피를 가지고 성소로 들어가지 않고 다만 회막 뜰에 위치한 번제단의 뿔에 피를 바르는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앞의 두 경우 콩팥과 기름을 제외한 모든 고기들을 진 바깥에서 소각한 반면, 족장을 포함하여 일반 백성이 속죄제를 드렸을 경우에는 제사장들이 기름과 콩팥을 제외한 나머지 고기들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즉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서 피 뿌리는 의식을 행한 기는 제사장들이 먹을 수 없었으며 진 밖에서 불살라야 했던 반면(4:12, 21), 회막 뜰에서 의식을 행한 제물들은 제사장들이 먹을 수 있었습니다(6:24-30)
(4) 평민의 속죄제(4:27-35; 5:7-13)
평민은 대제사장이나 족장과 같이 비싼 제물로 속죄제를 드리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평민은 암염소(4:28) 또는 암컷의 어린양(4:32)을 제물로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평민의 속죄제 의식은 족장의 경우와 동일했습니다.
가난한 자는 비둘기 두 마리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 허용되었으며(5:7-10), 극빈자는 밀가루로도 드릴 수 있었습니다(5:11-13).
선택적으로 드리는 화목제는 반드시 생축(소, 양, 염소)으로 제사를 드린 반면, 의무적으로 반드시 드려야 했던 번제와 속죄제에서 양이나 염소를 드릴 수 없는 가난한 자에게는 생축이 아닌 비둘기 또는 밀가루(소제)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가난한 자가 비둘기 두 마리로 각각 번제와 속죄제를 드린 것을 보면(5:7), 본문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도 부유한 사람들도 속죄제와 함께 번제를 드렸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4. 속죄제를 드리는 경우(5:1-6)
레위기는 속죄제를 드려야 하는 다양한 경우를 소개합니다. 출산으로 부정해진 여인이 정결해지기 위하여(레 12:6), 심각한 피부병으로 부정해진 사람이 나았을 경우 정결해지기 위하여(레 14:19), 유출병에서 나은 자가 정결해지기 위하여(레 15:15,30)
그 외 번번하지는 않지만 제사장 위임식(레 8:14), 제단의 봉헌식(민 7:16), 레위인 위임식(민 8:8) 나실인이 서원이 성취되었을 때(민 6:14)
레위기 4장은 단순히 여호와의 금령을 부주의로 그릇 행했을 경우 속죄제를 드려야 한다고 언급하지만(4:2,13, 22, 27) 5:1-6절은 좀 더 구체적으로 이 제사를 드려야 하는 네 가지 경우를 소개합니다.
①. 법정에서 증인의 의무를 행하지 않았을 경우(5:1; 참조, 잠 29:24)
②. 부지중에 부정한 동물의 사체에 접촉했을 경우(5:2; 참조. 11:24-28)
③. 모르고 부정한 사람과 접촉했다가 후에 그 사람이 부정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경우(3, 참조.15:13-15, 25-30)
④. 무심결에 맹세를 했다가 후에 자신이 이를 지키지 않았음을 깨달았을 경우
이런 네 가지 경우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속죄제를 드려야 했습니다. 5:6절은 자신의 허물을 고백한 사람에게 “그 허물을 인하여 여호와께 속죄제를 드리되 양 떼의 암컷 어린양이나 염소를 끌어다가 속죄제를 드릴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여기 사용된 속죄제라는 말은 하타트가 아니라 야샴이라는 말로 벌금의 성격이었습니다.
5. 속죄제의 목적
동물로 드리는 모든 제사(번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는 제물의 머리에 안수한 다음 동물을 죽이며, 그 피를 제단에 뿌린 다음 그 고기 전체, 또는 콩팥과 기름을 단에서 태웁니다. 따라서 동물로 드리는 모든 제사가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는 속죄의 기능이 있음은 자명합니다. 하지만 각 제사의식의 독특한 점들은 각 제사의 강조점과 목적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번제는 죄의 사악함과 그 영향의 심각성을 보여주며, 제물 전체를 불사름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었음을 보여줍니다.
화목제는 번제를 드린 다음에 드리는 제사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의 결과로 주어지는 평화와 구원을 감사하며 즐기는 제사입니다.
속죄제의 독특한 점은 피 뿌리는 의식에서 발견됩니다. 구약에서 속죄제는 정결 또는 정화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속죄제는 특히 출산한 여인(레 12:6), 악질 전염성 피부병(14:19), 또는 유출병(15:15, 30)의 경우에서 보듯이 몸의 정결과 관련하여 드렸습니다.
속죄제의 피 뿌리는 의식은 이스라엘의 부정을 깨끗이 씻어내는 효력이 있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너희는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그 부정에서 떠나게 하여 그들로 그 가운데 있는 재 장막을 더럽히고 그 부정한 중에서 죽음을 면케할 지니라”(레 15:31).
속죄일에는 대제사장이 피를 번제 단에 뿌렸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에서 단을 성결케하기 위함이었습니다(16:19).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죄가 사람을 더럽힐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성소까지 오염시키며, 이 오염된 것을 정결케 하는 합당한 수단이 바로 동물의 피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번제가 죄인과 하나님 사이의 화해를 위한 제사 속죄제는 죄로 생긴 오염과 더럽힘을 처리하는 제사 속죄제는 성소 또는 성전을 정결케 함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지속적으로 거하실수 있게 합니다.
속죄제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그의 백성 가운데 하나님이 계속 머무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기에 적합하도록 예배에 사용되는 여러 도구들에 피가 칠해졌습니다. 향단과 번제단, 그리고 휘장 뿐 아니라 속죄소에까지 피가 뿌려졌으며(레 16) 더 나아가서는 제사장들의 귀와 손가락과 발가락 그리고 그들의 옷에도 피가 뿌려졌습니다(출 29:19-21; 레 8:22-24, 30).
히브리서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람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9-10장은 이런 속죄제사와 그리스도의 피가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를 자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속죄제의 피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라고 증거합니다. 죄로 인한 부정과 타락에서 하나님의 사람을 정결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예수의 피라는 것입니다(벧전 1:2; 요일 1:7). 이런 사상을 가장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신약의 말씀은 히브리서입니다(히 9:12-14).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들의 양심을 깨끗케 하고 죽을 행실을 떠나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속죄제(Sin Offering) 어의
속죄제를
뜻하는 히브리어 ‘하타트'는 ‘과녁에서 벗어나다’, ‘죄를 짓다’, ‘속죄물을 드리다’, ‘속죄하다’를 뜻하는 ‘하타'에서 파생된 것으로 ‘하나님의 법에서 벗어난 죄로부터 청결과 속죄함을 얻기 위하여 드리는 제사’를 뜻한다.
제물의 종류
속죄제의 제물은 범죄자의 사회적인 위치에 따라 달랐다.
제사장 : 흠 없는 수송아지(레 4:3) 온 회중 : 수송아지(레 4:13) 족장 : 흠 없는 수염소(레 4:23) 평민 : 흠 없는 암양, 암염소(레 4:28) 가난한 사람 : 산비둘기, 집비둘기(레 5:7) 극빈자 : 고운가루 에바 십분의 일(레 5:11)
* 에바(Ephah)
성경의 부피 단위 중 에바(אֵיפָה, Ephah)는 ‘바구니’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한 바구니에 넣을 정도의 양이며, 스아와 마찬가지로 가루나 볶은 곡식 등을 재는 단위다. 약 22ℓ에 해당한다. 12되와 같은 양이다.(1되 1.8 리터)
네가 단 위에 드릴 것은 이러하니라 매일 일 년 된
어린양 두 마리니 한 어린양은 아침에 드리고 한 어린양은 저녁 때에 드릴지며 한 어린양에 고운 밀가루 에바 십분 일과 찧은 기름
힌의 사분 일을 더하고 또 전제로 포도주 힌의 사분 일을 더할지며 한 어린양은 저녁 때에 드리되 아침과 일반으로 소제와 전제를
그것과 함께 드려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여 여호와께 화제를 삼을지니 (출애굽기 29:38~41)
하나님께 매일 드리는 제사를 이름하여 ‘상번제’라고 한다. * 날마다 바치는 번제물(민수기 28:1-8) / 상번제(常燔祭)
아침과 저녁에 드리는 이 제사에는 일년 된 어린양과 고운 밀가루
에바 10분의 1과 기름, 포도주를 드린다. 에바의 10분의 1은 2.2ℓ로 1되 가량의 양이다. 무게로는 2.2kg 정도인
셈이다.
속죄제의 방법
헌제자가 제물이 될 짐승을 회막문 여호와 앞으로 가져온다. 헌제자의 손을 제물의 머리 위에 얹고 안수한다. 헌제자가 제물을 잡아 피를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그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성소 앞에 일곱 번 뿌리고 향단 뿔에 바른 후 회막 앞과 번제단 밑에 전부 쏟는다. 희생
제물의 모든 기름과 콩팥을 번제단 위에서 불사른 후 그 나머지 부분은 진 바깥 재 버리는 정결한 곳에서 나무 위에 놓고
불사른다. 그러나 아론과 그 아들들을 위한 속죄제는 진 밖에서 불사르지 않고 다리와 고기를 회막 뜰에서 구워 먹도록
하였다(레6:24-27)
속죄제와 속건제의 차이
속죄제의 목적은 ‘범죄에 대한 용서’를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목적은 속건제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 둘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첫째는, 범죄의 성격적 차이로서 속죄제가 하나님께 범죄한 자, 즉 ‘율법을 범한 죄’를 위한 제사였던 반면에, 속건제는 인간에게 범죄한 죄, 즉 ‘도덕적인 범죄의 대속을 위한’ 제사였다.
둘째는, 속죄제는 속건제와는 달리 ‘범죄한 일을 배상할 수 없는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제사였던 반면, 속건제는 ‘배상이 가능한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제사였다는 점이다.
속건제를 히브리어로 ‘아샴(asam)'이라고 합니다. '아샴'이란 ‘범죄'(Guilt),’범법'(Trespass),
‘손해'(Damage) 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못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죄’, ‘도덕적인 죄를 용서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를 말합니다.
다섯 제사(Five Offering)
1. 번제(Burnt Offering) : 올라 / 희생 2. 소제(Grain Offering) : 민하 / 헌신 3. 화목제(Peace Offering) : 제바흐 쉐라밈 / 화평 4. 속죄제(Sin Offering) : 하타트 / 바른 관계 5. 속건제(Guilt Offering) : 아샴 / 바른 생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려고 속죄제의 제물이 되셨을까요? 아님면 속건제의 제물이 되셨을까요?
이사야 53: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 속건제물(his life a guilt offering)
속죄제의 제물 : 1. 제사장, 회중 / 흠 없는 수송아지 2. 족장 / 수염소 3. 평민 / 암염소, 어린 양 4. 가난한 자 / 비둘기 두 마리(속죄, 번제) 5. 극빈자 / 고운가루 에바 1/10
속건제의 제물 : 1. 흠없는 수양 2. 배상
속죄제와 속건제
레위기 7:7 속건제나 속죄제는 일례니 그 제육은 속하는 제사장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 (현대인) 속죄제와 속건제에 다 같이 적용되는 규정은 이렇다. 그 제물의 고기는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의 몫이다.
속죄제는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 안수한다. 그러나 속건제물은 제사장이 제물의 머리에 안수한다
3. 속건제 : 개인적인 제사 속죄제 : 집단적인 제사도 포함 동물의 머리에 손을 얹고 죄를 전가시키는 것을
속건제에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4. 속건제 : 특별한 경우 나병환자가 나은 후에(레 4:1-20) 나실인이 부정한 허물을 용서받기 위해(민 6:1-12)
시편 19:12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 동북아에서 중국을 겨냥한 쿼타(quarter) : 호주, 인도, 일본, 미국 - 일본 주일 미군 사령관(three star),한국 주한 미군 사령관(four star) 한국 정부가 극좌파 편향적 정치색으로 동북아 펜타(penta) : 호주, 인도, 일본, 한국, 미국 미국의 국방부장관. 국무장관이 한국을 방문한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여전히 중국과 북한의 지시를 따르려고 한다. 일본에서 기자들의 질문 / 중국과 북한의 선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러자 미국은 중국과 북한의 선언에 관심이 없다. 오직 미국이 관심을 갖는 것은 한국의 입장이 무엇인가? 한국의 입장에 따라 대응할 것이다.
레위기 제사의 의미 제사(예배)의 형식은 시대에 따라 바뀔 수 있다. 그러나 제사의 본질은 바뀔 수 없다.
시편 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The sacrifices of God are a broken spirit; a broken and contrite heart, O God, you will not despise.
상한 심령(Broken Spirit) 통회하는 마음(Contrite Heart)
속건제를 드려야 할 경우
1. 성물에 대한 것(레 5:15a) 누구든지 여호와의 성물에 대하여 그릇 범과하였거든 여호와께
속건제를 드리되.
2. 계명(율법)에 어긋난 것(레 5:17)
만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금령중 하나를 부지중에 범하여도
허물이라 벌을 당할 것이니.
3. 이웃에게 악을 행하거나 물질에 손해를 입힌 경우(레 6:1-7)
남의 물건을 강제로 빼앗거나 분실물을 습득하거나 저당물을 잡거나 거짓맹세로 남에게 피해를 입힌 경우
4 시체로 인해 몸이 부정케 된 경우
속건제 제사의 세 가지 속죄 원리
1. 잘못을 자백하고 인정하라
2.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라
3. 한 번에 해결
속건제의
제물은 범죄의 형태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어 이러한 제물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너무나도 복잡하고 광범위하다. 그러므로
각각의 범죄에 대한 속건 제물에 대해서는 레 5:14, 6:7, 7:1-10, 14:1, 15:2을 참고하도록 하되 이러한 여러
가지 제물을 요약하면 ‘흠 없는 일년된 수양’, ‘범죄물과 그 범죄물의 오분의 일을 더하여 본인에게 주는 일’,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둘’이나, ‘고운 가루 에바 십분의 삼’과 ‘기름 한 록’ 등이다.
속건제와 속죄제의 차이
죄와 관계된 제사
가. 속죄제(하타아트-sin offering)
* 제물이 대상과 재력에 따라 차이가 있다. - 제사장과 백성 전체(수송아지) - 족장(수염소) - 평민(어린 암양, 암염소) - 가난한 자(비둘기, 곡식 가루)
* 향기로운 냄새를 위한 제사가 아니라, 죄를 속하기 위해 드린 제사였다.
* 번제처럼 모든 제물을 제단에 불사르지 않고 기름을 제외한 모든 제물을 진 밖으로 가져가서 태워야 했다.
* 인간의 죄성과 연약함을 인해 부지중에 지은 죄를 속하기 위해 드려졌다.
나. 속건제(아샴-배상제사(trespass offering))
* 속건제는 생활 중에 범한 죄나, 자기 의무를 태만히 해서 남에게 해를 입혔을 경우에 드리는 사죄와 보상에 대한 제사였다.
* 속건제를 드리는는 경우는 다음과 같았고, 그 외에는 속죄제사를 드렸다. 1. 하나님의 성물을 범했을 때 2. 하나님의 법에 따라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은 경우 3. 이웃에게 악을 행하거나 물질에 손해를 입힌 경우 4. 남의 물건을 강제로 빼앗거나/ 분실물을 습득하거나/ 저당물을 잡거나/ 거짓맹세로 남에게 피해를 입힌 경우 5. 시체로 인해 몸이 부정케 된 경우
* 속건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속죄 원리가 나타난다. 1. 잘못이 있을 때는 자백하고 인정하라. 2.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라. 3. 번제는 계속해서 드리지만 속건제는 한 번에 해결할 문제이다.
다. 속죄제와 속건제의 같은 점과 다른 점
* 같은 점 이
두 제사는 백성들이 "여호와의 명령을 어긴 경우에 드리는 제사"였다. 백성들은 "여호와께서 금한 일을 했거나, 또는 하라고 한
일을 하지 않았을 경우"에 이 제사를 드리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제사는 결코 고의로 지은 죄를 속하기 위한 제사는
아니었다. 하나님은 고의, 또는 계획적으로 지은 범죄(짐짓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처벌하게 하셨다.
속죄 제사를 통해서 용서받을 수 있는 죄는 실수나 연약함으로 지은 죄(그릇 범한 죄)였다. 속죄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죄는 다음과 같았다.
1. 실수나 부지 중에 지은 죄(4:13, 22, 27, 5:18) 2. 부주의로 인해 지은 죄(5:1, 4, 15) 3. 무의식적으로 짓는 죄(민 35:11,15, 22, 23).
* 다른 점
속죄제는 일반적으로 여호와의 명령을 어긴 보편적인 경우에 드렸다. 속건제(보상제사)는
1. 여호와의 성물을 드릴 것을 자기가 사용했거나(5:15-19)
2. 남의 물건을 빼앗거나 손에 넣고 부인하거나 거짓 맹세를 해서 피해를 입힌 경우에 이를 보상하기 위해 드려졌다(5:20-25).
* 제사 절차상의 차이점
1. 속죄제는 속죄제물만 드렸지만, 속건제는 속건제물 외에 불법으로 취한 것에 1/5(전체 6/5)을 더한 배상이 요구되었다.
2. 속죄제는 제물을 드리는 자가 그 제물을 죽이고 직접 불에 태웠다(4:15, 24, 29, 33). 속건제는 제사장이 대신해서 제물을 잡았으며, 그 제물도 제사장이 먹어야만 했다(14:12).
3. 속죄제물은 개인의 경우 암컷을 드렸다(4:28, 32). 속건제사는 제물로 수양이 필요했으며(5;18, 6:6), 훔친 것 외에 1/5에 해당하는 배상을 첨가했다.
구약성경의 부피 단위
갑(Cab) / 빈 그릇
갑(קַב, Cab)은 히브리어로 ‘빈 그릇’이라는 뜻으로서 오목한 그릇을 가리킨다. 갑은 구약시대 이스라엘에서 고체를
측량할 때 사용하던 단위이며 1.2ℓ에 해당한다. 반 되 정도의 양이다. 성경의 부피 단위 중 가장 작다. 성경에는 열왕기하
6장에 한 번 언급되어 있다.
아람 사람이 사마리아를 에워싸므로 성중이 크게 주려서 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 세겔이요 합분태 사분 일 갑에 은 다섯 세겔이라 (열왕기하 6:25)
사마리아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악을 행했다. 그런 사마리아는 아람의 군대에 의해 포위당하고 말았다. 성이 포위되자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굶주림으로 ‘나귀 머리’, 비둘기의 배설물인 ‘합분태’를 먹으며 생명을 유지했다. 합분태가 실제 비둘기 똥이
아니라 이와 비슷하게 생긴 식물이라는 주장도 있다.
여하튼 당시 합분태 사분 일 갑은 0.3ℓ의 적은 양이었는데 이것이 5개월치 급여만큼이나 비싸졌다. 그마저도 없어서 못 먹는
사람이 생겼고 결국 사마리아 성안에서는 인육을 먹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낳는지 알려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오멜(Omer) / 보리 한 묶음
오멜(עֹמֶר, Omer)은 ‘보리 한 묶음’이라는 뜻으로 구약시대 하루분의 양식이다. 1오멜은 2.2ℓ에 해당하며 에바의 10분의 1, 그리고 1되와 같은 양이다. 무게로는 2.2kg가량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의
식량대로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인수대로 매명에 한 오멜씩 취하되 각 사람이 그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취할지니라 하셨느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 (출애굽기 16:16~18)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 당시 양식이 없어 굶주림에 허덕일 때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주셨다. 일곱째 날 안식일을
제외한 6일 동안 백성들은 매일 아침 만나를 거둘 수 있었다. 만나를 거둘 때 주의할 것은 각 사람이 먹을 만큼만 거두는
것이었다. 즉 1인당 1오멜만 거둬야 했다.
스아(Seah)
스아(סְאָה, Seah)는 ‘세아’로도 번역되어 있다. 주로 가루나 곡식을 측량할 때 사용하는 단위다. 1스아는 7.3ℓ로 4되에 해당한다.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쾌활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에
들어가 사라에게 이르러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아브라함이 또 짐승 떼에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취하여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창세기 18:5~7)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을 때 온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대접했다. 이때 사용한 고운 가루 3스아는 약
22ℓ의 양이다. 오늘날 팬케이크 하나를 만들려면 밀가루가 0.3ℓ(300㎖) 정도 소용된다는 것을 가정했을 때, 3스아는 70개
이상의 팬케이크를 만들 수 있는 양이다.
에바(Ephah) / 바구니
에바(אֵיפָה, Ephah)는 ‘바구니’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한 바구니에 넣을 정도의 양이며 스아와 마찬가지로 가루나 볶은 곡식 등을 재는 단위다. 약 22ℓ에 해당한다. 12되와 같은 양이다.
네가 단 위에 드릴 것은 이러하니라 매일 일 년 된
어린양 두 마리니 한 어린양은 아침에 드리고 한 어린양은 저녁 때에 드릴지며 한 어린양에 고운 밀가루 에바 십분 일과 찧은 기름
힌의 사분 일을 더하고 또 전제로 포도주 힌의 사분 일을 더할지며 한 어린양은 저녁 때에 드리되 아침과 일반으로 소제와 전제를
그것과 함께 드려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여 여호와께 화제를 삼을지니 (출애굽기 29:38~41)
하나님께 매일 드리는 제사를 이름하여 ‘상번제’라고 한다. 아침과 저녁에 드리는 이 제사에는 일년 된 어린양과 고운 밀가루
에바 10분의 1과 기름, 포도주를 드린다. 에바의 10분의 1은 2.2ℓ로 1되가량의 양이다. 무게로는 2.2kg 정도인
셈이다.
호멜(Homer) / 당나귀
호멜(חֹמֶר, Homer)은 성경의 부피 단위 중 최대 단위로 약 230ℓ에 해당한다. 히브리어 호멜은 ‘당나귀’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1호멜은 당나귀가 한번에 질 수 있는 양을 말한다. 주로 밀과 보리의 양을 잴 때나 메추라기의 양을 잴 때도
사용했다. 오늘날 쌀 한 가마의 무게가 80kg인데 이는 리터로 환산하면 약 180ℓ다. 호멜이 230ℓ이므로, 1호멜은 쌀 한
가마 반 정도에 해당하는 양이다.
백성이 일어나 종일 종야와 그 이튿날 종일토록 메추라기를 모으니 적게 모은 자도 십 호멜이라 그들이 자기를 위하여 진 사면에 펴 두었더라 (민수기 11:3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기 위해 내려주신 것은 만나만이 아니었다. 그들을 위해 메추라기도 보내주셨는데, 적게 모은 자도 10호멜이었다고 하니 그 양이 얼마나 방대했는지 알 수 있다.
신약성경의 부피 단위
되, 코이닉스(χοινιξ)
한글개역성경의 부피 단위 중 하나인 ‘되’는 헬라어 ‘코이닉스(χοινιξ)’를 옮겨놓은 말이다. 헬라의 부피 단위로 약 1.2ℓ다. 현재의 1되(1.8ℓ)보다 조금 작다.
내가 네 생물 사이로서 나는 듯하는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 말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6:6)
말, 모디오스(μοδιος)
예수님께서 빛의 역할에 대해 하신 말씀 가운데 ‘말’이 등장한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마태복음 5:15)
여기에서 ‘말’은 동물 말(Horse)이 아니다. 헬라어로 모디오스(μοδιος)인데, 고체의 부피를 잴 때 사용했던
바구니(Basket)를 가리킨다. 이 말씀을 공동번역에서 살펴보면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두는 사람은 없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오늘날의 됫박 역할을 했던 ‘말’이라는 부피를 측량하는 도구를 가리킨 것이다. 말의 부피는 약 8.7ℓ로 오늘날의
1말(약 18ℓ)보다는 10ℓ 정도의 차이가 있다.
말, 사톤(σατον)
예수님의 천국에 대한 가르침 속에도 부피 단위인 ‘말’이 등장한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마태복음 13:33)
비유 속에 나타난 ‘말’은 헬라어 부피 단위인 ‘사톤(σατον)’을 번역한 말이다. 약 12ℓ로 가루 3말은 36ℓ의 많은
양이다. 적은 누룩으로 많은 양의 가루를 부풀게 한 것처럼 천국 소망은 우리의 믿음을 부풀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강조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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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다섯 가지 제사의 종류
1.번제(燔祭) 2. 소제(素祭) 3. 화목제(和睦祭) 4. 속죄제(贖罪祭) 5. 속건제(贖愆祭) 둘째, 제사를 드리는 네 가지 방법
1. 유월절(逾越節) pass over /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2. 무교절(無酵節) unleavened bread / 무덤에 안장되신 예수 3. 초실절(初實節) first fruits /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 4. 오순절(五旬節) pentecost (칠칠절) feast of ewwk / 성령 강림으로 임재하신 예수 5. 나팔절(喇叭節) trumphet / 다시 오실 예수 6. 속죄절(贖罪節) atonement / 심판주가 되신 예수 7. 장막절(帳幕節) feast of tebernacles / 새 하늘과 새 땅과 더불어 나타나실 예수
*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요한복음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히브리어로는 '넘어가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니산월(아빕월,
1월) 14일 해질 무렵, 나흘 전에 준비한 수양을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함께 먹고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아침까지 남은
것은 불에 태워 버린다. 애급이 하나님의 진노로 장자를 잃는 열 번째 재앙을 당할 때 구원받은 것과 해방을 기념하는 날이다.
2. 무교절(레위기 23:6-8, 고린도전서 5:7-8) / 무덤에 안장되신 예수
* 이 달 십오일은 여호와의 무교절이니 칠일 동안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 그 첫날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찌며 너희는 칠일 동안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 것이요 제 칠일에도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찌니라 .
*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히브리어로는
맛차. 니산월(아빕월, 1월) 15일부터 7일 동안(21일 까지) 누룩이 없는 무교병을 먹는다. 절기의 이름도 이 누룩 없는
떡을 먹는다하여 무교절이라 불리웠다. 무교절이 시작되는 첫 날과 마지막 날은 '성회' 로 백성이 모이고 노동을 하지 못했으며 매일
하나님께 화제를 드렸다
3. 초실절(레위기 23:9-14, 고린도전서 15:20) /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너희가 그 단을 흔드는 날에 일년 되고 흠 없는 수양을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그 소제로는 기름 섞은 고운 가루 에바 십분 이를 여호와께 드려 화제를 삼아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고 전제로는 포도주 힌 사분 일을 쓸 것이며 너희는 너희 하나님께 예물을 가져오는 그날까지 떡이든지 볶은 곡식이든지 생 이삭이든지 먹지 말찌니 이는 너희가 그 거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
*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초실절은
히브리어로 바쿠림이라 불리며 무교절 기간 중에 있는 절기로, 유월절 후 첫 안식일 다음 날이다. 추수 전에 곡식의 첫 이삭 한
단을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로써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이다. 초실절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기 전에는 떡이나 볶은 곡식, 생
이삭이라도 먹지 않았다.
4. 오순절(칠칠절, 맥추절) (레위기 23:15-21, 사도행전 2:1-47, 고린도전서 12:13, 에베소서 2:11-22) /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
* 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칠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제 칠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 오십일을 계수하여 새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되 너희 처소에서 에바 십분 이로 만든 떡 두개를 가져다가 흔들찌니 이는 고운 가루에 누룩을 넣어서 구운 것이요 이는 첫 요제로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며 너희는 또 이 떡과 함께 일년 되고 흠 없는 어린 양 일곱과 젊은 수소 하나와 수양 둘을 드리되 이들을 그 소제와 그 전제와 함께 여호와께 드려서 번제를 삼을찌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며 또 수염소 하나로 속죄제를 드리며 일년 된 어린 수양 둘을 화목제 희생으로 드릴 것이요 제사장은 그 첫이삭의 떡과 함께 그 두 어린 양을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을 것이요 이것들은 여호와께 드리는 성물인즉 제사장에게 돌릴 것이며 이 날에 너희는 너희 중에 성회를 공포하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찌니 이는 너희가 그 거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히브리어로는
솨부아 '맹세하다' 라는 뜻. 밀을 수확할 수 있도록 복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이다. 칠칠절은 초실절로부터 50일째에
해당하는 날로써 보통 시완월(3월) 6일경이 된다. 이 날은 하루만 절기로 지키는데 성회를 공포하고 노동이 금지되며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고 수염소 한 마리를 속죄제로 드렸다. 특이한 것은 모든 절기에는 누룩이 없는 무교병을 쓰지만 칠칠절만은 누룩을 넣은
유교병을 소제로 사용한다.
5. 나팔절(레위기 23:23-25) / 재림하시는 예수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곧 그 달 일일로 안식일을 삼을찌니 이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이요 성회라 아무 노동도 하지 말고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찌니라.
나팔절은 티쉬리월(7 월) 1일로 유대 민간력으로는 1월에 해당하는 새해 첫날이다. 이 날은 나팔을 하루 종일 일정한 간격으로 불었으며 성회가 선포되고 노동을 금했다. 그리고 속죄제로 수염소 한 마리를 드렸다.
6. 속죄일(레위기 23:26-32, 히브리서 9:25, 26) / 심판주로 오실 예수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희에게 성회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이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것은 너희를 위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속죄할 속죄일이 됨이니라 이 날에 스스로 괴롭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라 이 날에 누구든지 아무 일이나 하는 자는 내가 백성 중에서 멸절시키리니 너희는 아무 일이든지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그 거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이는 너희의 쉴 안식일이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이 달 구일 저녁 곧 그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까지 안식을 지킬찌니라.
이 날은 성회가 선포되고 노동을 금하며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로 티쉬리월( 7월) 10일이다. 특별히 연중 이 날만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갔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한 수염소와 아사셀을 위한 수염소를 드렸다.
7. 초막절(레위기 23:33-34) /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오실 예수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십오일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칠일 동안 지킬 것이라
수장절,
장막절이라고도 불린다. 티리쉬월(7월) 15일부터 8일 동안 행해진다.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급을 나와 광야에 머물었던
것을 기념하는 동시에 풍성한 수확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이다. 첫날과 여덟째 날에는 성회로 모이고 노동이 금지되었으며 각
날마다 그에 상응 하는 제사를 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