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오바댜



에돔의 심판과 이스라엘의 회복
  
내용개요
오바다서는 구약의 선지서 중에서 가장 짧은 책이다. 
하나님은 본서를 통해 에돔 족속에 대한 심판을 예고하고 있다. 
에돔은 이삭의 장자인 에서의 후손으로 이스라엘과는 사실상 형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으로 이스라엘과는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그들은 세일 산을 거점으로 하여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여 왔다. 
그런데 그들은 원래부터 하나님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숭배했으며 자신들의 강력한 군사적, 경제적인 힘만을 의지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서 심판을 선언하신 것이다(1-9절).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스라엘과는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다른 국가들보다 이스라엘을 더욱 핍박하고 심지어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에 의해 침략 당할 때는 그것을 기뻐하고 같이 노략질까지 일삼았다. 
하나님은 이로 인해 그들을 심판하시기 로 한 것이다(10-16절). 
그러나 에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단지 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선민인 이스라엘의 구원을 제시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선지자는 에돔의 심판과 함께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17-21절).


강해
오바다 선지자는 유다에 행한 에돔의 잔악한 행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에돔에게 징벌을 내리실 것임을 예언하였습니다. 
유다를 대적한 에돔의 심판 예언은 곧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유다가 대적 에돔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에돔의 죄악을 징벌하신다는 본서의 내응은 하나님의 주권과 공의로우심을 증거하여 주며 핍박받는 의인에게 승리의 소망이 됩니다.  

1 . 심판받을 에돔

1) 스스로의 교만으로 속은 에돔
여호와께서는 에돔을 미약하게 만드시어 크게 멸시를 받게 하실 것을 예언하셨는데, 이는 그들이 교만하여 중심의 교만으로 스스로 속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의 힘으로 높아질 수 있다고 생각하여 스스로를 속이는 교만한 죄에 빠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에돔의 교만을 꺾어 낮추심으로써 그들의 죄악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용납지 아니하시는데 이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교만한 죄가 모든 죄의 근본이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어 주권적인 뜻에 따라 높이시기도 하고 낮추시기도 하는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높아지려는 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인 것입니다. 
에돔이 교만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당하였듯이 이스라엘도 교만함으로 심판을 받아야 했고 모든 인간의 범죄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교만으로 비롯된 것입니다.  

a. 교만하여 악을 행함(대하 26:16)
b. 교만하면 낮아짐(잠 29:23)
c. 마음의 교만이 속임(렘 49:16)

2) 에돔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도구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다른 나라에게서 수탈한 보물을 다시 다른 나라 백성에게 수탐당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돔을 심판하심에 있어서 그들과 약조한 자들과 그들의 식물을 먹는 자들을 이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인간의 노력이 허망한 것임을 보여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도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앗수르와 애굽과 약조를 맺었지만 결국엔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a. 가까운 친우가 배반함(시 55:12-13)
b. 가까운 친구가 잊어버림(욥 19:13)
c. 형제마다 속임(렘 9:4)

2. 에돔의 죄악

1) 이스라엘에 행한 에돔의 포학
에돔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구체적인 이유는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의 멸망에 동참하였음을 인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수욕을 입게 하고 영원히 멸절시키신다고 예언하셨습니다. 
에돔은 이스라엘과 형제국으로서 이방국들이 예루살렘을 짓밟을 때 방관하거나 이스라엘의 패망을 기뻐하지 말아야 했으나 오히려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이러한 행악이 단순한 이스라엘에 대한 악행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도전적 행위였던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선택된 백성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고 범죄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심이 취소된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행한 에돔의 포학을 방관하지 아니하시고 보응하신 것입니다. 
에돔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보고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를 깨달아 하나님을 경외하며 겸비히 행하여야 했지만 어리석은 그들은 오히려 교만하여 이스라엘을 치는 일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게 되었습니다.  

a. 주를 대적하여 서로 언약함(시 83:5-6)
b. 예루살렘이 해 받던 날에 기뻐함(시 137:7)
c. 유다를 쳐서 원수를 갚음(겔 25:12)

2)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의 심판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열국을 심판하실 날이 가까웠음을 예언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열국을 심판하시되 그들이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시므로 모든 자에게 그 행위에 상당하는 보응을 내리십니다. 
악인에게는 그 죄 값을 치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성격인 것입니다. 
열국들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야 하는 죄목은 우상 숭배와 이스라엘에 대한 포학이었습니다. 
그들은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것들의 형상으로 바꾸어 숭배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만국을 심판하실 때에 에돔도 심판을 받게 되어 그 들이 이스라엘을 침과 같이 다른 민족에게 침을 당하게 하시어 에돔이 본래 없었던 것같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한 자들의 말로는 소멸당하여 그 존재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시적으로 악인의 흥왕함을 허용하시지만 결국에는 악인을 소멸시키심으로써 자신의 공의를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a. 행한 대로 갚으심(시 137:8)
b. 황무케 하심(겔 35:15)
c. 유다를 쳐서 원수를 갚으심(욜 3:7)

3. 이스라엘의 회복의 날

1) 이스라엘의 회복
하나님께서 열국을 심판하시는 날은 이스라엘이 이방의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어 승리하며 회복하는 날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법을 어겨 심판을 받아 이방인들로 말미암아 멸망당하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영원히 버리신 것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에게는 구원의 날이 예비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오바다 선지자의 예언은 역사 속에서 그대로 성취되어 이스라엘은 회복하여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a. 시온이 공평으로 구속됨(사 1:27)
b. 백성이 다 의롭게 됨(사 60:21)
c. 다윗의 무너진 천착이 회복됨(암 9:11)

2) 영적 이스라엘의 회복
이스라엘의 회복은 단지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구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승리와 완성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즉 신약 시대에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성도들이 승리하여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장에서의 이스라엘의 회복은 이중적인 예언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구원자들이 시온 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고 나라가 여호와께 속한다 는 증거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심판주로 오시어 모든 악의 세력을 멸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실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이방국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약속은 오늘날 성도들이 세상에서 악의 세력에게 핍박을 받으며 언제나 실패하는 것 같지만 결국엔 하나님 나라 백성이 승리하여 악한 세력을 멸하고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온전히 세워질 것이라는 소망의 말씀입니다.  

a. 유다가 영원히 서게 됨(욜 3:20)
b. 거룩하다 칭함을 얻음(사 4:3)
c.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의 구원(욜 2:32)

결론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영적인 승리와 회복을 체험한 존재이지만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그 모든 것의 완성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날의 승리를 고대하며 현재의 고난을 인내로써 극복하여야 합니다. 
말씀을 믿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자가 최후의 승리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단어해설]

3절. 중심의 교만. / 하나님을 경멸하고 자신의 힘을 믿은 에돔의 교만을 가리킨다.

6절. 수탐. / 사람의 행위를 면밀히 조사하는 것뿐 아니라 약탈하기 위해 집을 샅샅이 수색하는 것을 나타낸다.

10절. 수욕. / 기대와 어긋남으로 인해 겪게 되는 당황과 곤혹 뿐 아니라 전쟁에서 패배당한 결과로 얻어지는 불명예를 의미한다.


[신학주제] 에돔의 멸망 원인. 

에돔은 근원상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스라엘과 달리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하고 결국 멸망당하고 말았다. 
본장에서는 바로 에돔이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을 거역한 죄이다. 
선지자는 에돔의 죄를 지적하면서 먼저 그들의 교만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당시 에돔은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결과 그들은 자신들의 힘만을 믿고 하나님을 경멸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인간의 모든 힘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둘째는 형제인 이스라엘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환난을 기뻐하고 같이 핍박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이웃 사랑을 강조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며 공의에 벗어나는 불의한 행동이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본 장의 내용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져야 할 두 가지 측면의 삶의 기준을 보여 준다. 
즉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형성하는 수직적 관계와 공동체 구성원간에 실현해야 할 사랑과 공존의 수평적 관계이다. 
이 두 가지 관계는 상호 보완적이며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될 절대적인 성도들의 삶의 기준인 것이다.


[영적교훈]

바쁜 현대 사회 속에서 살다 보면 남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힘들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서로 무관심한 관계가 되어 버렸고 익명의 시대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결코 이런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 못지 않게 사람들끼리의 사랑과 공존을 중요하게 여기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비록 바쁘고 힘든 생활 속에서도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는지를 살피고 가난한 자들에게는 도움을, 소외된 자들에게는 위로를 주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10월 1일(수) 오바댜 1장
_________________________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1:21)

구원자들이 시온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
Deliverers will go up on Mount Zion to govern the mountains of Esau. And the kingdom will be the LORD's.

* 속하리라(1961) 하야(hâyâh) הָיָה

1.  있다.  2.  어떤 자에게 속하다.  3. 섬기다 
발음 [ hâyâh ]  
구약 성경 /  3549회 
관련 성경 / ☞(장막을) 치다(창 13:3), 임하다(창 15:1, 수 22:20), 계시다(창 31:5), (싸우고) 있다(삿 12:2), 섬기다(삼상 2:11), 만나다(삼상 6:9), 속하다(삼하 9:9), 따르다(왕상 16:21, 호 3:3), 같다(시 50:21), 두다(출 25:15), 더하다(출 9:3), 성취하다(잠 13:19), 이루다(겔21:7, 39:8), 지치다(단 8:27), 얻다(슥 8:10).


오바댜서 1장 21절에 나오는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는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이 에돔의 멸망과 함께 시온 산에서 구원을 얻어, 궁극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를 이루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이 구절은 에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이후, 구원받은 성도들이 시온 산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되는 미래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바댜서의 배경
  • 오바댜 선지자 :
    남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당했을 때 활동한 선지자로, 그가 받은 계시는 주 하나님이 에돔을 심판하신다는 내용입니다. 
말씀의 의미
이 말씀은 모든 나라와 민족이 여호와 하나님의 것이 될 것이며, 그분만이 궁극적인 통치자이심을 강조합니다. 
에돔의 멸망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드러나고, 이후 구원받은 자들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 것임을 보여줍니다. 
많은 성경 해석가들은 이 구절이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과 복음으로 세워질 교회를 통해 성취될 것이라고 봅니다

  • 에돔의 심판 :
  • 유다 멸망 당시 유다를 대적하고 조롱했던 에돔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며, 그 교만과 포학이 멸망의 이유입니다. 

  • 구원자들의 등장 :
    에돔이 멸망한 후, 시온 산에 구원받은 자들이 올라와 에돔을 심판하며, 그들이 궁극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될 것입니다.
  • 하나님의 주권 :

  • 이 말씀은 모든 나라와 민족이 여호와 하나님의 것이 될 것이며, 그분만이 궁극적인 통치자이심을 강조합니다. 
    에돔의 멸망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드러나고, 이후 구원받은 자들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 것임을 보여줍니다. 
    많은 성경 해석가들은 이 구절이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과 복음으로 세워질 교회를 통해 성취될 것이라고 봅니다.

  • 구원과 심판의 완성
     :  론적으로, 구원과 심판의 완성은 악을 심판하고 의를 회복하며, 모든 피조세계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한 사역의 최종적인 성취를 가리킵니다. 
    '구원과 심판의 완성'은 신학적으로 세상 끝날, 즉 종말에 하나님께서 모든 악을 심판하시고, 믿는 자들의 구원을 온전히 이루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악한 세력을 멸하고, 신자들의 영생과 부활을 완성하며, 새로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총체적인 과정을 포함합니다. 
    구원의 과정과 심판의 의미
    • 구원: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해방, 보호, 영생, 그리고 성화의 전 과정을 의미하며, 칭의(의롭게 여겨짐)와 현재적 삶을 거쳐 미래에 최종적인 구원의 완성을 얻는 전 과정입니다. 
    구원과 심판의 완성이라는 개념의 의미
    • 종말론적 완성:
      '구원과 심판의 완성'은 세계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궁극적인 결론을 나타냅니다. 













  •  


    앞 구절(19,20절)과 조화를 이루면서 그 내용을 요약한다. 
    즉, '에서와 산'이라는 단어로 밀접하게 연관시키고 있다.

    구원자들이 시온 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 '구원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모쉬임'(*)은 '예솨'(*)에서 온 말로 전쟁에서 얻은 승리와 비슷한 뜻을 가지고 있다(합 1:2;  3:13, 18). 
    여호수아라는 이름도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고, '예수'도 이와 같은 어원을 갖는다.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 
    - 본 구절의 '나라'는 직접적으로 '에돔'을 의미하지만, 세상 나라 전체를 가리킨다. 
    즉, 모든 세상적인 나라가 타파되고 하나님 나라가 구현되리라는 점을 말한다. 
    이는 예수께서 사탄의 세력을 파하시고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여 그들을 당신의 나라로 불러들이신 사역을 통해 확연하게 드러났다.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the Kingdom will be the LORD's)

    구원자들이 시온산에서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면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구원자들이란 전쟁에서 승리한 자를 말합니다.
    에서의 산이란 에서의 후손 즉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자들이 세웠던 나라를 말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말합니다.
    신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구약에서 예언된 구세주 즉 메시야를 믿고 구원을 받은 거룩한 백성들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마지막 때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 구원자가 되어 이 세상 모든 믿지 않는 사람들 위에 우뚝 일어설 것이라고 선포하십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여,
    성경은 마지막 시대의 영적인 특징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갈(영적 기갈)(아모스 8:11) 
    둘째는 불법이 성행(사랑의 고갈)(마태복음 24:12)
    셋째는 냉랭(冷冷)한 믿음(소극적 믿음)(누가복음 18:8)

    냉랭하다(冷冷)
     
    1. 태도가 정답지 않고 매우 차다.


    라오디게아교회
    요한계시록 3:15-16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열정(熱情)은 감정 중 하나로, 어떤 일에 대해 뜨거운 마음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 특정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강하고 다루기 힘들거나 간신히 통제할 수 있는 감정이나 성향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는 용어이다. 열정은 아이디어, 제안 또는 명분에 대한 간절한 관심이나 찬사에서 그 범위가 다양할 수 있다. 관심이나 활동을 열정적으로 즐기는 것, 사람에 대한 강한 매력, 흥분 또는 감정이다. 일반적으로 정욕이라는 용어가 암시하는 것보다 더 깊고 포괄적인 감정을 암시하며 종종 황홀경 및 고통의 개념을 포함하지만 로맨스 또는 성적 욕망의 맥락에서 사용된다. 


    유의어뜻이 서로 비슷한 말

    • 열의
      어떤 일에 대한 강한 의욕이나 관심
    • 정열
      강한 감정이나 열망
    • 열정적
      강한 열의나 감정을 가진 상태
    • 흥미
      어떤 일이나 사물에 대한 관심이나 매력
    • 몰입
      어떤 일에 깊이 빠져드는 상태
    • 열망
      강한 소망이나 바람

    반의어뜻이 서로 반대되는 말

    • 무관심
      어떤 일이나 사물에 대해 관심이 없는 상태
    • 냉담
      감정이 없거나 차가운 상태
    • 무기력
      활력이 없고 힘이 없는 상태
    • 소극적
      적극적이지 않고 소극적인 태도
    • 우울
      기분이 처지고 우울한 상태
    • 지루함
      흥미가 없어 따분한 상태



    열정이란 무엇인가 한자어의 유래와 의미


    열정(熱情)이란 단어는 한자로 '열(熱)'과 '정(情)'이 결합된 형태로, 각각의 한자가 지닌 의미를 통해 이 단어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다 '열(熱)'은 뜨겁거나 열렬한 상태를 나타내며, '정(情)'은 감정이나 정서를 의미한다

    즉, 열정은 뜨거운 감정, 강한 열의를 뜻하는 것으로, 어떤 일이나 목표를 향해 불타는 마음가짐을 표현한다 열정은 개인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이는 단순히 감정의 차원을 넘어, 목표 달성을 위한 동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열정이 있는 사람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도전하며,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 이러한 열정은 개인의 성장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열정이 넘치는 사람은 다른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함께하는 이들에게도 동기를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한편, 열정은 때때로 부정적인 측면도 지닌다 지나치게 열정적일 경우, 일에 몰두하여 건강을 해치거나, 인간관계에서 갈등을 초래할 수 있다


    열정이란 무엇인가 한자어의 유래와 의미

    따라서 열정은 적절한 균형이 필요하다 자아의 성장을 위한 동력으로써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휘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열정을 잘 조절하고 관리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열정은 또한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예술가나 운동선수는 자신의 분야에서 뛰어난 성과를 내기 위해 열정을 쏟는다 이들은 자신의 열정을 통해 창의성을 발휘하거나, 신체적 한계를 극복해 나간다 이러한 사례는 열정이 개인의 삶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열정은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목표를 향한 끈질긴 노력과 뜨거운 감정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데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의 열정을 발견하고, 이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으며, 그 열정을 적절히 조절하여 건강한 삶을 영위해야 한다

    열정은 우리에게 삶의 활력을 주는 요소이며, 이를 통해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는 기반이 된다


    Enthusiasm (열정) : 긍정적이고 활기찬 감정. 어떤 활동이나 아이디어에 대한 강한 흥미와 긍정적인 에너지 포함한다.

    Passion (열정) : 주로 개인적인 가치나 믿음에 근거한 높은 흥미. 감정적으로 깊게 연결된 강한 욕구나 애정을 의미.

    Fervor (열정) : 강렬하고 격렬한 감정. 일반적으로 열정적인 상태가 더 강조된 상황에서 사용되며, 감정이 뜨거움을 강조한다.

    Ardor (열정) : 고무적이고 뜨거운 감정을 나타내며, 종종 로맨틱한 느낌을 갖는다. 사랑, 열정, 혹은 애정에 대한 감정을 강조할 때 사용.

    이 단어들은 유사하지만 각각의 미묘한 차이로 다양한 문맥에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열정과 관련된 단어들은 감정의 강도나 성격에 따라 선택되며, 상황에 따라 적절한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절은 앞 구절(19,20절)과 조화를 이루면서 그 내용을 요약한다. 
    즉, '에서와 산'이라는 단어로 밀접하게 연관시키고 있다.

    구원자들이 시온 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 '구원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모쉬임'(*)은 '예솨'(*)에서 온 말로 전쟁에서 얻은 승리와 비슷한 뜻을 가지고 있다(합 1:2; 3:13,18). 
    여호수아라는 이름도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고, '예수'도 이와 같은 어원을 갖는다.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 
    - 본 구절의 '나라'는 직접적으로 '에돔'을 의미하지만, 세상 나라 전체를 가리킨다. 
    즉, 모든 세상적인 나라가 타파되고 하나님 나라가 구현되리라는 점을 말한다. 
    이는 예수께서 사탄의 세력을 파하시고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여 그들을 당신의 나라로 불러들이신 사역을 통해 확연하게 드러났다.



    소선지서 중에는 그 연대가 밝혀지지 않은 몇 권의 책이 있습니다

    오바댜는 자신을 "여호와의 종"이라고만 밝혔을 뿐 그가 언제 살았던 사람인지는 전혀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엘리사 시대에 오바댜라고 불린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그가 오바댜서를 기록한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확인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구약 성경에는 오바댜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13명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왕상 18:3, 대상 3:21, 27:19, 대하 17:7, 스  8:9,  느 10:5, 12:25 참조). 
    또한 오바댜의 메시지를 읽어보면 엘리사 시대에 나타난 오바야의 특성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많이 나타납니다.  

    2.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오바댜 서의 기록 연대는 주전 850년부터 주전 400년 사이로만 추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주전 850년은 님이 언급하신 여호람의 통치 기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400년은 말라기가 활동했던 구약의 마지막 시대입니다. 
    오바댜의 연대는 이 450년(주전 850-400년)기간 중에 활동했다고 알 수 있을 뿐, 그때가 언제인지는 단정할 수가 없습니다.

    3. 오바댜서에 대한 연대에 대해서 가장 설득력을 가진 견해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여호람의 통치시기(주전 848-841년)로 보는 견해
    둘째는 유다가 포로된 직후인 주전 578년경으로 보는 견해

    첫 번째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오바댜를 여호사밧의 아들인 여호람 시대에 살았던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람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사악한 여자 아달랴와 결혼했습니다(왕상 22:44, 대하 18:1, 21:6, 22:3, 4, 10). 
    * 여호람 + 아달랴

    여호람은 자기의 보좌를 보존하기 위해서 자기 형제들을 모두 죽였는데, 이런 일은 사악한 아달랴에게 영향력을 입어서 일어난 것으로 보입니다(대하 21:4). 
    그리고 후에 아달랴는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자기의 손자들을 죽였습니다(대하 22:10). 
    첫 번째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오바댜가 바로 이처럼 혼란한 시기에 예언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이때에 하나님께서 오바댜를 불러서 남쪽의 에돔 족속에 대해 예언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오바댜가 이스라엘에 대해 교만하게 행한 에돔의 멸망을 예고했다고 주장합니다(옵 11-14).

    3. 두 번째 견해는 에돔의 멸망을 선포하는 오바댜의 내용과 자연스럽게 일치하는 장점이 있습니다. 
    또한 이 시기에 쓰여진 다른 선지자들 역시 에돔이 바벨론과 공모를 한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렘 49:7-22, 겔 25:12-14, 35:5-6. 애가 4:21-22, 시 137:7). 
    예레미야와 에스겔은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한 시기에 쓰여졌는데, 오바댜의 내용은 이 선지자들의 글과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렘 49장을 보면 오바댜서와 내용이 매우 비슷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렘 49장과 오바댜서가 공통된 자료를 인용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 오바댜서에는 유다가 포로된 후에 등장하는 소망의 메시지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여러 가지 상황들을 참고해서 일부 학자들은 오바댜가 활동한 시기를 유다가 바벨론 포로가 된 직후인 주전 578년 경으로 보고 있습니다(이 시기는 예레미야와 에스겔이 활동했던 때입니다).

    4,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 견해를 받아들여야 할까요? 

    첫 번째 견해의 장점은 성경상의 위치에 있습니다. 
    학자들은 소선지서 중에서 앞에 나온 호-욜-암-옵-욘-미가가 유다가 바벨론의포로가 되기 전에 쓰여졌고, 
    뒤에 나오는 나-합-습-학-슥-말라기는 그 후에 쓰여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입장에서 앞에 나오는 오바댜서의 연대가 제 9세기인 여호람 시대로 제기되고 있습니다. 

    두 번째 견해의 장점은 내용에 있습니다. 
    오바댜서에서 묘사되고 있는 상황과 메시지는 유다가 바벨론 포로가 된 직후의 상황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예레미야나 에스겔의 내용 역시 오바댜서가 포로 직후에 쓰여졌다는 것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두 번째 견해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바댜의 연대 문제는 아직도 미확정적인 채로 남아 있습니다. 
    오바댜서가 구체적으로 자신이 활동했던 시대와 자신이 오바댜서를 기록한 연대를 밝히고 있지 않은 만큼, 이 문제는 누구도 해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대 문제는 이런 주장들이 있다는 것을 참고하고, 연구하는 것이 좋습니다. 
    분명한 증거가 나오기 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가능한 모든 요소들을 충분히 생각해보고 나서, 자기 자신이 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좋습니다.





    오바댜서(Obadiah)

     

    구약의 예언서 가운데 가장 짧은 책이다. 이 책의 메시지는 앞으로 당할 불행한 운명과 심판에 관한 것이며,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능력 있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오바댜서는 기록된 모든 예언서 메시지의 축소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바댜는 그의 짧은 메시지를 통해 이스라엘을 압제했던, 믿음 없는 이방 족속 위에 내려질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고 있다. 그는 또한 믿음을 지닌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기록하고 있다.

     

    이 작은 책은 큰 죄에 해당하는 자만과 오만함에 대한 위험, 즉 다른 사람들을 착취함으로 인해서 생겨나는 우월 감정에 대한 위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오바댜는 잠언의 진리를 도표로 그리듯이 입증하고 있다(욥 1:3-4).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

     

    저자 : 
    오바댜라는 이름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이외에 오바댜서의 저자에 대해 알려져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기록 연대 :
    오바댜서 자체가 저자의 출신 지역이나 시기, 또는 그의 아버지의 이름 등과 같은 배경에 대해서 아무런 사실도 제공해 주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 책의 기록 연대에 대해서 많은 논쟁이 있어왔다. 
    크게 보면 여호사밧 왕의 아들인 여호람의 통치기간 동안이라는 주장과, 아하스 왕의 통치기간이라는 주장, 그리고 BC 586년에 있었던 바벨론의 예루살렘 함락 사건 바로 직후인 BC 586년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오바댜 1:11의 내용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이 내용 자체가 선지자가 목격한 과거의 사건인지 아니면 순수한 예언인지에 따라 큰 시각차를 보이고 있다. 
    만약 이것이 선지자가 경험한 내용이라면 그것은 아마도 바벨론의 공격으로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던 사건(BC 586)을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반면에 이 내용이 순수한 예언이라면 이 책이 기록된 시기는 아마도 여호람 왕 시대에 블레셋과 구스와 아라비아 사람이 연합하여 유다를 침략함으로써 궁중의 모든 재물이 약탈되고 아내들과 아들들이 탈취되었을 때(대하 21:8-10; 왕하 8:20-22 참고)일 것이다.

    소수의 학자들 이외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오바댜서의 기록 연대를 BC 6세기로 보고 있다. 
    이 연대를 가장 뒷받침해 주는 것이 유다의 멸망 때 에돔이 유다를 침공한 것에 대한 언급이다(옵 11-16; 애 4:21-22).

    오바댜서의 특징 : 
    오바댜서는 전체 분량이 21절밖에 안되는, 예언서 가운데 분량이 가장 적은 책이다. 
    그러면서도 이 책에는 다른 예언서들과 함께 공유하고 있는 신학적 토대들이 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민족과 나라를 다스리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그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대적들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개입하셔서 공의로써 심판하신다. 
    특별히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창 12:3)의 아브라함 언약이 오바댜에서는 “너의 행한 대로 너도 받을 것인즉 너의 행한 것이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옵 15)는 말씀으로 나타났다.

    오바댜에서 보여 주는 야곱과 에서, 그리고 이스라엘과 에돔간의 계속적인 갈등은 신약에서 절정을 이룬다. 
    즉 이두매인이자 에돔의 후손인 헤롯 대왕이 이스라엘의 메시아인 아기 예수를 죽이려 한 것이다(마 2:16).

    전체 개관 : 
    오바댜서는 에돔의 죄악들을 들어 심판을 선언하는 한편 이스라엘의 회복을 전하고 있다. 
    에돔의 죄악에 대한 목록(옵 10-14)은 하나님의 심판이 정당함을 보여 준다. 
    에돔에 대한 심판은 나아가 하나님의 백성뿐 아니라 열방들도 포함된다. 
    이러한 넓은 범위는 오바댜 15-16에 나타나며(애 1:21 참고)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완성될 지를 보여 준다(옵 21).

    1. 에돔에 대한 멸망(1-9)

    2. 에돔의 죄악들(10-14)

    3. 이스라엘 적들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15-16)

    4. 이스라엘 백성들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축복(17-21)

    핵심 메시지 : 
    오바댜의 주된 내용은 에돔의 영원한 멸망과 이스라엘의 영원한 구원에 대한 선포이다. 
    이때 에돔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원수인 이방들을 대표하고 있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표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의 모든 나라들이 마침내 심판을 받게 되고 그 나라들이 어떻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게 될 것인지를 보여 준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 메시지이다.


    오바댜는 어떤 책인가?

    오바댜는 ‘여호와를 예배하는 자’ 또는 ‘여호와의 종’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남유다의 선지자로 활동 하였습니다.

    오바댜는 B.C. 586년경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예루살렘 성이 함락될 때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국가의 멸망이라는 엄청난 시련과 좌절에 직면해 있는 남유다 백성들에게 위로와 회복의 소망을 전했습니다. 
    특히 포로 생활 중에도 결코 여호와에 대한 신앙을 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오바댜는 남유다의 멸망을 직간접적으로 도운 에돔의 멸망에 대해, 선민 이스라엘에게는 회복의 메시지를 선포하였습니다.

    • 오바댜서의 배경

    주전 586년, 바벨론 군대에 의해 파괴되는 예루살렘을 향해 에돔사람들은 바벨론을 격려하며 “무너뜨리라... 무너뜨리라!“고 외칩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형제들이었습니다. 
    에돔은 야곱의 형인 에서의 후손들입니다(창 2:21-26).

    • 오바댜서의 내용

    1. 에서에 대한 하나님의 복수(1-16절)
    예레미야는 49장 7-22절에서 이미 에돔의 운명을 말하였습니다. 
    오바댜서에는 이 예언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에돔의 죄는 무엇입니까?

     *교만(3-4절)
    - 에돔은 작은 나라였으나 그 업적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에돔은 바위를 뚫고 성을 세웠는데, 그들은 “바위에 보금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3절). 에돔의 으뜸가는 도시 페트라는 산의 등성이를 파서 된 것이며, 그 요새는 난공불락으로 여겨졌습니다(사 14:12-15 비교). 그래서 누구도 자신들을 공격할 수 없다고 여기며 교만하였습니다.

     *동맹(7절)
    - 이스라엘에 사는 형제의 짐을 나누어 지기는 커녕 주위의 나라들과 동맹하여 예루살렘을 적대하였습니다.

     *폭력(10절)
    - 에돔 사람들은 예루살렘성이 무너지는 것을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즐거워함(12절)
    - 에돔은 그의 형제의 재난에 대하여 울어야 했으나 반대로 즐거워하며 조롱하고 있었습니다(잠 24:17-18).

     *약탈(13절)
    - 이들은 유대인들이 재앙을 당하는 것을 이용하여 그 성에서 재물을 약탈하였습니다.

     *피난하는 자들을 방해함(14절)
    - 유대인들 중의 어떤 이들은 피난하여 가족들을 보호하려고 하였는데, 에돔사람들은 그 길을 막았습니다. 이들은 피난하는 사람들을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돌려 보내는 일을 도왔습니다.

     *술의 축제(16절)
    - 에돔 사람들은 포도주를 공급받게 되어 큰 축제를 벌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유대인을 취급한 그대로 그들을 취급하실 것입니다(시 137:8-9 절). 이들은 연맹군에게 배반을 당하였습니다(11절). 이들은 약탈하였는데 후에는 자신의 나라를 빼앗기게 됩니다(5-6절). 에돔은 폭력을 휘둘렀는데, 결국은 완전히 끊겨지게 되며(9-10절), 에돔은 유대인들이 멸망되기를 원하였으므로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10, 18절). 에돔은 그들이 뿌린 것을 거둘 것입니다(사 34:5-15/겔 25:12-41/겔 35:1-15/암 1:11-12 참조)!

    2. 야곱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17-21절)

    17절의 “오직“이라는 작은 단어가 전환점이 됩니다.

    하나님은 시온의 구원과 죄씻음을 약속하십니다. 
    성전은 그들의 죄로 인해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의 집“을 정화하시고 회복시키실 것이고 왕국은 여호와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에서의 집(에돔)은 회복되지 못할 것입니다.

    • 오바댜의 개요

    오바댜서 개관도표

    • 오바댜가 전하는 메시지

    리브가는 쌍둥이를 가졌습니다. 
    하나님은 동생 야곱을 택하였습니다. 
    그가 형 에서를 제치고 장자가 되었습니다. 
    성경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은 “야곱의 하나님“으로 소개합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구성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과 언약을 맺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하신 맹세를 하십니다. 
    "나는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되리라." 하지만 육신적으로 장자였던 에서에게는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로마서 9:13 
    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받은 자녀를 대표하며, 
    그들이 비록 때때로 죄를 범하고 실망시키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의 유업을 얻을 은혜로 선택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선택의 교리는 아래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구원이란 공로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야곱은 육과 영 사이의 투쟁을 나타냅니다(갈 5:16-26). 
    에서는 성도의 육(죄성)을 상징합니다. 
    에서는 매력이 있고, 능력이 많지만, 교만하고, 탐욕적이고, 반역적입니다. 
    그는 언제나 이기는 편에 있는 것같이 보이지만 하나님은 육신에는 심판을 선언하셨으며 어느 날 심판이 번개처럼 임할 것입니다. 
    에돔은 교만하고 반역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이 망하자 조롱하고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5년 후에 에돔 역시 바벨론에게 망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영적으로 에돔은 어느 나라인가? 
    이 세상은 육신을 자랑하며 육신이 성취한 일과 육신이 얼마나 강한가를 자랑한다. 
    그러나 모든 육신은 그리스도의 승리 앞에 엎드러질 것이다(계 19:11-21 참조). 
    특히 육신이란 말이 반복하여 언급되는 17-18절을 눈여겨 보자.

    또 에서는 육(죄성, 옛사람)을 상징하는 존재입니다. 
    에서와 야곱, 즉 육과 영 사이의 투쟁을 상징합니다. 
    이는 성경 전체를 통해 일관되게 가리치는 교훈입니다.

    •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

    신약 성경에 나오는 헤롯은 에돔사람이었습니다. 
    헤롯 집안의 한 왕은 그리스도를 파멸시키려는 시도로 많은 유대 아기들을 죽였고(마 2:16-18), 또다른 왕은 세례(침례)요한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또다른 한 왕은 사도 요한의 형 야고보를 죽였습니다(행 12장). 
    오늘날 이스라엘과 아랍 사이의 투쟁은 창세기 25장 21-26절에서 시작된 똑같은 전쟁의 연속이라고 생각합니다. 
    육대 영, 교만대 복종, 인간의 길 대 하나님의 길 등, 투쟁은 그리스도가 돌아오셔서 그의 왕국을 세우실 때 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싸움에서 누구 편에 서야 하겠습니까?

    *참고 : 예정과 선택교리

    예정은 하나님의 무조건적, 절대적 은혜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미리 자질을 헤아리고 그 ‘예지’에 따라서 작정했다는 주장은 자체로 모순된다.

    삼위 하나님의 구원협약에 따라서 그리스도가 영원 전에 구속주로 작정되시고, 우리는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아 지체로 선택되었다.
    이는 우리의 자질을 불문하고 택하심이니 택자들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택하신 분의 ‘기뻐하심’에 따른 것이었다.
    우리를 택하심은 우리를 자신의 은혜를 찬양하는 자로 삼고자 하심이었다.
    그러므로 예정을 예지에 종속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택하신다고 함은(롬 11:2, 행 2:33) 무조건적인 은혜를 베푸실 언약의 자녀들을 미리 마음에 두셨다는 의미이다
    주님은 택한 자들을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신 자들 ‘아버지의 것’이라고 부르셨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음으로써 자녀가 되는 권세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에게만 있다

    선택은 ‘믿음의 어머니’이며, 믿음은 선택에 대한 ‘보증’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을 수 있도록 하실 뿐만 아니라 믿음 자체를 주신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중에서)


    에서와 야곱 – 두 국민은 어느 족속을 말하는가?


    창세기 25:23에서 리브가가 쌍둥이를 임신했을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창 25:23)

    이는 에서와 야곱이 각각 두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을 의미합니다.


    1. 에서 → 에돔 족속

    • 에서는 장자였지만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넘겼고, 결국 세일산 지역(오늘날 요르단 남부)에서 ‘에돔 족속’의 조상이 됨(창 36:1-9).

    • ‘에돔’은 히브리어로 ‘붉다’는 뜻인데, 이는 에서의 붉은 피부색과 붉은 죽 사건(창 25:30)과 관련됨.

    • 에돔 족속은 후에 이스라엘과 종종 대립하는 관계가 됨(민 20:14-21, 시 137:7).

    2. 야곱 → 이스라엘 족속

    •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후에 이름이 ‘이스라엘’로 변경됨(창 32:28).

    • 야곱의 12아들은 이스라엘의 12지파가 되었고, 이는 후에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함.

    • 하나님께서 야곱을 통해 언약을 이루셨고, 그의 후손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됨.

    3. 두 민족의 관계

    • 이스라엘과 에돔은 형제 민족이지만, 성경에서 계속 충돌하는 모습을 보임.

    • 출애굽 당시, 모세가 에돔 땅을 지나가려 했지만 에돔 왕이 거부(민 20:14-21).

    • 다윗 시대, 이스라엘이 에돔을 정복하고 통치함(삼하 8:13-14).

    • 바벨론 포로기, 에돔이 이스라엘을 조롱하며 멸망을 기뻐함(시 137:7, 오바댜 1:10-14).

    • 신약 시대, 에돔 후손 중 ‘헤롯 왕조’가 등장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림(마태복음 2:1).

    하나님의 언약은 야곱(이스라엘)을 통해 성취되었으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됨.




    창세기 25장,야곱과 에서, 하나님은 왜 에서를 버렸는가? 


    창세기25장

    아브라함이 별세한 후 이삭의 시대가 문을 엽니다. 이삭은 아내 리브가에게서 쌍둥이 아들을 낳습니다. 큰 아들의 이름은 에서, 작은아들의 이름은 야곱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쌍둥이면서도 외모와 성격 모두 완전 다른 이란성입니다.

    큰 아들 에서는 몸이 붉고 털이 많은 사람입니다. 기질이 호탕하고, 성격이 급하며, 사냥을 좋아하는 그야말로 사나이라 불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야곱은 집안에 있기를 좋아하고 성격이 세밀하며 말이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 만일 저보고 둘 중 누구와 친구가 되려는가 묻는다면 당연히 에서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단순하며 기분파이기 때문에 잘만 비위를 맞춰주면 덕볼 일이 많고, 또 의리파입니다. 자기가 손해볼지언정 배신하지는 않는 그런 성격이죠. 물론 단점도 있긴해도 친구가 손해볼 단점은 아닙니다. 하지만 야곱은 다릅니다. 이런 사람들은 계산적이기 때문에 쉽게 손해를 보질 않습니다. 친구를 잘 믿어주지도 않고, 뒤끝이 있습니다. 속을 알 수 없어서 잘못하다가는 뒤통수 얻어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그들의 성격이 그들의 이름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에서는 몸이 붉다는 뜻이고, 야곱은 남의 뒷다리를 잡은 자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하나님은 에서보다는 야곱을 더 좋아하십니다. 심지어 에서를 버렸다고까지 말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작은 에피소드에서 그 실마리를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야곱의 팥죽 사건이죠.

    사냥을 좋아하는 에서가 집에 돌아오니 야곱이 시간을 맞춰 붉은 죽을 쑤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팔레스타인지역에서는 적갈색의 콩에다 파와 각종 양념을 넣어 끓인 수프가 있다고 합니다. 붉은 색의 스프를 우리식으로 팥죽으로 번역한 것이지만 우리의 팥죽은 아닙니다. 원어에는 붉은을 두번 반복하고 있습니다. 에서가 이 죽을 보았을 때 얼마나 먹고 싶어했는가 그 마음이 죽 이름에 담겨 있는 것이죠. 이런 점을 보면 야곱은 의도적으로 에서가 돌아올 때를 맞춰 이렇게 하였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배가 고픈 에서는 야곱에게 죽 좀 달라했지만 야곱은 매정하게 거절하고는 형의 장자의 권리와 죽을 바꾸자고 합니다. 에서는 정말 아무 생각없이 덜렁 이것을 바꾸고 맙니다. 배고파 죽게 생겼는데 장자 권리가 뭐 소용 있냐는 것이죠. 그리고 장자의 권리는 나중에 아버지 돌아가실 때 재산을 나눌 때나 좀 덕을 보지만 그건 나중일이고 지금은 배고픔을 해결하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 성경은 이런 에서의 생각을 장자의 권리를 경홀히 여겼다고 합니다.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 장자의 권리 속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권리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권리와 집안의 대를 이어갈 권리가 있다는 것을 소홀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받는 축복의 권리를 팥죽 한 그릇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였기에 하나님은 그런 에서를 버렸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철학자 제임스는 사람에게는 세 가지 종류의 선택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년 1월 11일, 뉴욕주 뉴욕 ~ 1910년 8월 26일, 뉴햄프셔주 탬워스)는 미국철학자, 심리학자이다. 프래그머티즘 철학의 확립자로 알려졌다. 
    철학
    ·종교학·심리학 등에 뛰어난 연구를 많이 남겼다. 
    1855년에서 1860년까지 유럽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영국, 프랑스, 스위스, 독일에서 생활하면서 유럽 문물을 만났다. 1861년에는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하였고, 화학을 전공했다. 1864년에 학부 졸업 후 하버드 메디컬 스쿨로 진학했고, 1869년에 의학박사(M.D.) 학위를 얻었다. 1873년에 하버드 메디컬 스쿨의 해부학, 생리학 강사로 일했고, 1875년에는 하버드 대학교의 심리학 교수가 되었다. 제임스는 기능주의 심리학에 큰 업적을 세웠다. 한편 제임스는 하버드 대학교에 심리학연구소를 설립하기도 했다.

    첫째는 살아있는 선택과 죽은 선택
    둘째는 피할 수 있는 선택과 피할 수 없는 선택, 
    셋째는 중요한 선택과 사소한 선택입니다. 

    죽은 선택은 이미 정해진 것이어서 사람의 노력으로 바꿀 수 없지만 
    살아있는 선택은 사람의 선택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나머지는 설명 안해도 아시겠죠. 
    에서는 자신의 삶의 순간에 자기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살아있는 선택을 거부하였고, 중요한 것 대신에 사소한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에서의 가장 큰 불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야고보서 4장 8절에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엘리제사장을 꾸짖을 때 하신 말씀입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2:30)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자 하십니까? 그럼 지금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십시오. 하나님께 존중받고 싶다면 하나님을 존중하십시오. 하나님을 최고로 여길 때 하나님은 역시 당신을 최고로 여겨주신답니다.


    에서와 야곱이 태어났을 때 이삭의 나이가 육십 세였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사건은 아브라함이 160세에 있었던 일입니다. 다시 말해, 이 이야기는 아브라함이 살아있을 때의 일이고, 아브라함이 175세에 죽었으니 에서와 야곱이 태어난 후에도 15년을 더 살며 손자들의 재롱과 자라는 모습을 지켜봤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시간순서로 따지면, 에서와 야곱이 태어난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죽음 이전에 기록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기의 저자는 마치 이 일이 있기 전에 아브라함이 이미 죽은 것처럼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앞에서 마무리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이제부터 새로운 세대에 관심을 집중하고, 그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려는 의도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죽고 나서 본격적으로 이삭의 생애가 기록될 것 같았는데, 그런 예상과는 달리 막상 이야기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이삭보다는 야곱입니다. 실제로 창세기의 저자는 이삭과 그의 첫째 아들 에서 보다 둘째 아들 야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삭의 이야기는 26장에서 짧게 다루어지고, 그 후로 독립된 이삭의 이야기는 없습니다. 창세기에서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들 야곱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며, 상대적으로 작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이삭의 가정을 볼 수 있는데 사실, 이삭보다는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에서와 야곱에 대한 오늘 본문을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부분은 에서와 야곱이 태어난 사건이고, 둘째 부분은 에서가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파는 사건입니다.

    이삭은 40세에 리브가와 결혼했습니다(20). 특별히 저자는 리브가를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인 브두엘의 딸이며 아람 족속인 라반의 누이라고 소개합니다. 이것은 앞으로 야곱이 자신의 외삼촌인 라반을 찾아 갈 일을 염두에 두고 미리 그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준 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삭은 리브가와 결혼해서 어머니인 사라가 죽은 후에 위로를 얻었습니다. 그런 이삭에게 문제가 있다면, 오랜 시간 아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는 것은 창세기에서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그러했었고, 이삭의 아내 리브가도 그러합니다. 훗날 야곱의 아내들도 그러한 일로 괴로워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 집안의 여자들이 임신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실까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자녀에게 많은 후손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약속이 이루어지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면, 결혼해서 자녀를 낳는 일은 그냥 자연스러운 일로 생각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약속이 성취될 때마다 결정적인 역할을 하십니다. 창세기의 저자는 약속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또한 약속을 성취해 가시는 분도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언급합니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의 자손,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비록 이삭이 아브라함의 아들이며 약속의 상속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문제없이 다음 상속자를 낳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여전히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서 중요한 것이 이삭의 간구입니다. 그리고 이삭의 간구를 하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21)

    이삭의 기도가 응답되어 결혼하고 20년 만에 리브가가 임신합니다. 그런데 임신으로 기뻐했던 시간이 지나고 나서 리브가에게 근심이 생깁니다. 자신의 뱃속에서 일반적이지 않은 심한 요동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들들이 뱃속에서 서로 싸우고 있다는 말씀을 통해서 알고 있지만, 정작 리브가는 영문도 모른 채 걱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혼한 후 처음으로, 그것도 어렵게 경험하고 있는 임신입니다. 요즘처럼 초음파로 검사해서 태아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때가 아닙니다. 아마도 리브가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 전까지 자신의 뱃속에 두 아이가 있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입니다.

    22절에 뱃속에 있는 아이들의 움직임을 묘사하기 위해 ‘싸우다’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 말은 강한 의미를 가집니다. ‘짓누르다, 으깨다, 산산조각 내다, 학대하다’ 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만큼 뱃속에 있는 아이들의 움직임이 컸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태어난 후에 싸워도 충분히 싸울 날이 많은데, 그것도 부족했는지 뱃속에서부터 싸우는 아이들로 인해 그녀의 뱃속은 편안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두 아이가 이미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싸우고 있다는 것은 앞으로 둘 사이에 있을 갈등과 다툼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반복해서 볼 수 있는 것이 이와 같은 가족 간의 갈등입니다. 가인은 자신의 동생을 시기하여 살인을 저지릅니다. 아브라함과 롯은 재산 때문에 같이 살 수 없었고, 이스마엘은 이삭을 조롱하다가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야곱과 에서는 속고 속이는 갈등을 겪게 되고, 뿐만 아니라 야곱은 외삼촌 라반과도 다투게 됩니다.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은 동생 요셉을 노예로 팔아 버립니다.

    이런 일은 단순히 성경 속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우리도 그러합니다. 우리도 가까운 가족으로부터 오는 갈등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왜 우리는 가장 소중한 사람들과 오히려 더 많이 싸우는 걸까요? 가장 친밀한 부부사이에서 오히려 더 많은 갈등과 다툼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갈등이 만날 때 “어떻게” 와 “”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상대방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지? 어떻게 저렇게 행동할 수 있지?’ ‘어떻게 저러냐? 이해할 수 없어!‘ 하지만 우리가 그 사람의 입장에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말했는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럴 수도 있지!’ 하는 겁니다. “5-3=2” 어떤 오해도 세 번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러한 갈등은 가정에서만 있는 일은 아닙니다. 영적인 가족인 교회에서도 쉽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서로 협력하여서 한마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수고하려고 모인 사람들이 서로 싸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도 우리는 “어떻게”와 “”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면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는 것이 좋아, 이렇게 해야 돼’, 이런 면에서 우리의 관심이 모아집니다. 그리고 그 ‘어떻게’를 달성하기 위해 때로 부딪히기도 하고 다투기도 합니다. 의견 차이 때문에 마음이 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교회 안에서 뭔가를 할 때 어떻게 보다 ‘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왜 이것을 하는지 말입니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 여러 부서가 크리스마스 행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크리스마스 행사를 준비하고, ‘어떻게’ 더 좋은 행사를 만들까?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왜’ 우리가 이것을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왜’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만 생각한다면, 더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되고 하는 일에 대해서 의미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많은 종교인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어떻게’ 율법을 지켜야 하는지에만 몰두한 나머지 ‘왜’ 율법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놓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하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 가운데 어떻게를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를 함께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창세기는 물론, 성경에서 계속 강조되는 것은 정말 다양한 사람들의 갈등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하고 갈등 속에서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한 번 더 참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억울함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와서 자신의 뱃속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 길이 없었던 리브가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23)

    리브가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이 응답은 네 마디의 간략한 시적인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을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첫째는 그녀의 뱃속에 함께 할 수 없는 두 민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배가 요란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이 두 민족이 그 힘에 있어서 동일하지 않고, 한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강한 민족이 형이 아니라 동생입니다. 그래서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라는 말씀합니다.

    어찌되었든 때가 되어 리브가는 두 아이를 출산합니다. 첫째 아이는 붉고 온몸에 털이 많아서 에서라 이름 지었고, 둘째 아이는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기 때문에 야곱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이 당시 문화에서 이름 짓기는 중요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대개의 경우 이름을 지을 때 미래에 대한 소망을 담거나 출생에 관련된 사건을 기억할 수 있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약을 읽다보면 이름 짓는 장면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어떤 경우는 이름 짓는 게 장난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이런 이름을 지어도 되나 하는 생각이듭니다. 털이 많아서 에서이고, 발꿈치를 잡아서 야곱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좀 황당한 이름들이지만, 당시의 문화 안에서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이삭과 리브가는 특이한 아들 둘을 얻었습니다. 하나는 붉고 털 많은 자이고, 다른 하나는 남의 발꿈치를 잡는 자입니다. 그리고 두 아들은 성장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달랐던 두 아들은 자라면서 더 뚜렷한 차이를 보입니다. 에서는 능숙한 사냥꾼이 되어서 주로 들에서 생활하는 사람이 되었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으로 장막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 배에서 태어난 쌍둥이인데 정말 다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아들의 다른 점이 아니라 그 다른 점으로 인해서 부모의 사랑이 갈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해서 에서를 사랑하였고, 리브가는 이삭과는 달리 야곱을 사랑하였습니다. 아빠는 형을 사랑하고, 엄마는 동생을 사랑합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쉽게 예상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부모의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사랑은 가정의 문제를 일으킵니다. 이것은 단순히 부모가 자신과 더 잘 맞는 자녀를 사랑하고, 다른 자녀를 덜 사랑하는 정도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문제는 근본적으로 자녀에 대한 부모의 문제이기보다 부부의 문제입니다. 이삭과 리브가의 관계가 건강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부부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축복을 얻기 위해 속이고 속는 일이 전개되는 27장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자녀 양육의 최선은 건강한 부부관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부부사이가 좋지 못하면 그 안 좋은 영향이 그대로 자녀에게 전달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녀를 잘 양육하기 위해 고민하는 것만큼, 서로에 대해서 나의 남편에게 그리고 나의 아내에게 어떻게 더 잘 할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뭔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이삭의 가정에 드디어 사건이 벌어집니다. 27절에 에서를 가리켜 익숙한 사냥꾼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단어의 표현 그대로 말하면 사냥을 아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어느 날, 사냥을 잘 아는 능숙한 사냥꾼인 에서가 사냥에 실패했는지 심히 피곤한 상태로 돌아왔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이 사냥꾼이었던 에서는 사냥에 실패하고, 오히려 에서가 야곱의 사냥감이 되어서 야곱의 미끼를 덥석 무는 것입니다.

    마침 야곱은 죽을 쑤고 있었고 에서는 그 죽을 먹기 원했습니다. 에서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30) 에서는 팥죽을 가리켜 ‘그 붉은 것’이라고 말하는데, 지금 배가 너무 고파서 눈에 뵈는 것이 없는 상태 같습니다.

    상황을 파악한 야곱은 형에게 말이 안 되는 거래를 요구합니다. 죽을 주는 대신 장자의 명분을 달라는 것입니다. 이 요구에 대해서 에서는 맹세까지 하며 장자의 명분은 야곱에게 팝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야곱이 어떻게 장자의 명분을 얻게 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은 에서가 가지고 있는 장자의 권리, 그 가치를 알고 자신의 세속적인 형으로 하여금 그것을 포기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에서는 경솔하고 감정적인 인물로 묘사되는데 그는 피곤하여 지쳤고, 굶주려 있었고, 장자의 명문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기는 모습은 34절에 그의 행동을 말해주는 연속되는 동사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에서는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감으로써 자신이 장자의 명분에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에서는 들에 사는 야생 동물처럼 자기 배를 채우는 일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능숙한 사냥꾼이기보다 형편없는 미끼에 넘어가 붙잡힌 짐승 같습니다.

    에서가 정말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알 수 없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죽 한 그릇에 장자의 권리를 팔아버린 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선택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계획이 있습니다. 그분의 섭리 안에서 모든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형이 동생을 섬길 거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두 사람을 통해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에서는 쉽게 장자권을 내어주었고, 야곱은 필사적으로 장자권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야곱이 자기 형의 자리를 빼앗았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다고 말씀합니다. 에서가 장자가 될 만한 자격이나 의지가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본문의 사건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히12:16)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에서의 세속적인 성품과 행동을 통해 경고를 받을 수 있습니다. 육체적인 욕구를 위해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을 희생하는 것, 일시적인 만족을 위해 영원한 것을 포기하는 것에 대한 경고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우선순위와 가치관에 대한 교훈입니다.

    세속적인 사람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일시적인 만족을 얻기 위해서 영적이고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들을 기꺼이 포기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망령된 자가 되지 않도록, 정말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도록, 그러한 실수를 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당장 얻을 수 있는 잠깐의 만족을 위해, 더 가치 있고 더 소중한 것을 희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잠깐의 쾌락을 위해 정말 귀중한 것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잠깐의 달콤함을 얻기 위해 더 유익한 것을 내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것을 일시적인 것과 바꾸지 마십시오. 반대로 일시적인 것들을 영원한 것으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주는 것과 영원한 것 사이에서 어떤 것이 더 가치가 있는지 제대로 보고 제대로 구별하며 더 좋은 것을 선택하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잠깐의 즐거움을 위해, 순간의 편안함을 위해, 더 가치 있는 것을 포기합니다. 죄의 유혹에 넘어가기도 하고, 눈에 보이는 것에 마음이 빼앗겨서 눈에 보이지 않는 진짜 가치 있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잘못된 선택을 합니다. 그리고 뒤늦게 후회하게 됩니다.

    하지만 지나고 나서 후회하는 것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에서는 훗날 눈물을 흘리며 후회하지만 기회는 없었습니다. 히브리서는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히12:17)

    우리는 이 경고의 말씀을 기억하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리석은 선택을 했을 때 날아가 버린 기회는, 그 소중한 가치는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오바댜 전체 강해, 오바댜 내용과 주요사상, 내용분해, 교훈

    *이름의 뜻을 통한 주제 / 하나님의 종

    *오바댜 주제 / 이 세상의 왕국을 다 취하신 하나님(1:21)

    *오바댜 주제 절 / "구원받은 자들이 시온 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1:21).

    Ⅰ. 예언자 오바댜

       오바댜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의 종"입니다. 오바댜에 대해서 다른 참고자료를 얻을 수가 없다. 아모스를 제외한 다른 선지자들과 달리 그의 가문과 출신이 전혀 소개되지 않음으로 그들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오바댜라는 이름은 히브리인들 사이에 흔한 이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왕상18:3, 대상3:21, 7:3, 8:38, 9:16, 12:9, 대하17:7, 34:12, 스8:9, 느10:5 등 참조).

    오바댜의 연대에 관하여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많으나 예레미야 전후의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 대체적입니다. 렘49:14 - 16과 본서 1:1 - 3은 에돔이 받을 심판에 대하여 아주 비슷한 낱말들과 내용들을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Ⅱ. 내용과 주요 사상

       에돔은 야곱의 형제 에서의 별칭으로(창25:25~26, 36:1, 19. 43) 그 후손을 가리키기도 하고,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의 명칭이기도 합니다(민20:23, 21:4, 34:3). 그들은 이스라엘과 혈연관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줄곧 이스라엘과 적대관계에 있었습니다(암1:11). 이와 같은 에돔에 대한 심판은 다른 선지자들에 의해서도 선포되었습니다(사34:5~15, 렘49:7~22, 겔25:12~14, 35:1~15, 암1:11~12). 이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을 돕지 않고 괴롭힌 에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본서의 내용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본서는 다른 민족을 멸시하며 저주하고 오직 자기 민족만 높이 들릴 것을 희망하고 있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편협한 배타주의 민족주의라는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서가 가르치는 중심 내용은 이웃나라(이스라엘)가 당하는 고난을 보고도 도와주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기회로 자기의 이익을 얻는 좋은 기회로 삼는 잔인한 무관심과 부도덕을 하나님께서 미워하신다는 것과 그러한 나라는 이웃 나라와 꼭 같은 고난을 받게 된다는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리고 본서를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민족은 야곱의 후손이요. 에돔 민족은 바로 에서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야곱의 간교는 형제 사이에 다툼을 가져왔는데 그 후손들도 화목하지 못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정착하려고 에돔 땅을 지나갈 수 있게 허락해 줄 것을 요청했을 때, 에돔은 그것을 거절했으며(민20:14~21), 가나안 정착 후에도 두 나라는 서로 무역 경쟁자의 입장에 있게 되어 이해가 상반되는 대립 관계가 있었습니다. 도리어 에돔은 유다왕국의 멸망을 바라고 기뻐하는 처지였다(11 - 14절, 애4:21).

    Ⅲ. 내용 분해

     1. 에돔의 심판과 그 이유 1 : 1 - 14

       1) 에돔의 멸망에 대한 경고 1 : 1 - 4

       2) 에돔의 완전한 멸망 1 : 5 - 9

       3) 에돔의 심판 이유 1 : 10 - 14

     2. 여호와의 날 1 : 15 - 21

       1) 만국의 심판 1 : 15 - 16

       2) 이스라엘의 회복 1 : 17 - 21

    Ⅳ. 오바댜서의 교훈

    선지서는 기록을 남긴 선지자를 기록 선지자라고 합니다. 
    그 이전에는 기록으로 남기지는 않았지만 말씀과 사역을 통하여 선지자 노릇을 했던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이 선지자들을 기록 전 선지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을 예로 들자면 엘리야 엘리사 같은 사람들입니다. 
    엘리야 엘리사가 등장하기 이전에 사역했던 선지자들도 다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엘리야 엘리사 이후부터는 기록 선지자가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기록 선지자들은 장차 올 세계에 초점을 맞추고 사역했던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다윗 즉 다윗의 자손 메시야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오바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오바댜가 언제 이 예언을 기록했는지 본서에서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예루살렘이 침략을 받았을 때 에돔이 했던 악한 짓에 대하여 심판을 선언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외국의 침략이 언제 있었던가를 생각하는 것이 오바댜의 기록 연대를 아는 데 도움이 됩니다. 
    예루살렘이 침략을 받은 사건은 여러 번 있었습니다. 
    주전 926년 르호보암 때 애굽 왕 시삭이 침략해서 약탈한 적이 있습니다(왕상 14:25-26). 
    그리고는 주전 848-841에 여호람 치세 중에 블레셋과 아랍인들이 침략한 적이 있습니다(대하 21:16,17). 
    그래서 왕자들과 왕비들과 왕궁의 재물을 약탈하여 간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전 790년 아마샤 치세 중에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침략한 적이 있습니다(왕하14:13-14). 
    또 주전 605-586년 사이에 바벨론의 연속적인 침략이 있었습니다. 
    이 중에 오바댜서는 여호람 치세 중에 있었던 블레셋과 아랍인들의 침략을 취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오바댜서는 주전 840년경에 기록되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록 선지자로서는 가장 일찍이 기록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즈음도 믿는 자가 잘못되는 것을 보고 고소하다고 생각하면서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봅니다. 
    에돔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돔은 침략자가 예루살렘을 늑탈하며 좋은 물품을 얻기 위하여 제비 뽑았는데 그들과 한 패가 되어 뒤따라가며 똑같은 짓을 했던 것입니다(11). 
    에돔은 예루살렘이 재앙을 당하는 것을 보고 방관하며 기뻐하며(12) 
    아마도 크게 입을 벌리고 웃으면서 좋아라고 했던 것입니다. 

    같이 성에 들어가서 재물을 약탈하며 도망하는 자를 막고 또 잡아서 대적에게 넘겨주는 짓을 했던 것입니다(13-14). 이것이 에돔이 본성이요 세상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선택자에 대하여 가지는 이러한 적개심은 세상이 가진 본성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세상이 심판을 받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에돔을 위하여 하나님은 심판날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15절에 "여호와께서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웠나니 네가 행한 대로 너도 받을 것인즉 너희 행한 것이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향하여 심판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 속한 에돔도 마찬가지로 심판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에돔의 심판은 세상 심판의 한 예조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싫어하던 에돔의 멸망은 세상 심판의 한 징조에 불과합니다. 언젠가 세상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에돔의 심판은 이 세상이 심판의 일부분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러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살해하여 그 피와 제물의 피를 섞은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사람들이 당한 이 심판이 바로 회개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이 당할 심판을 예시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서 치어 죽은 18명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들보다 죄가 더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고 하셨습니다. 자기들의 죄 때문에 심판을 받아 죽지만 그것은 예루살렘의 회개하지 않는 모든 사람의 심판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눅13:1-5).

      여기서 우리는 세상의 종말이 언제 있느냐 하는 것 따위는 성경의 관심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싫어하고 나아가서 하나님을 싫어하는 세상은 언젠가는 반드시 심판을 당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하나님을 싫어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순간순간 사고를 당하고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세상의 심판을 내다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죽는 것을 보거든 세상이 망하는 것을 알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우리 신자에게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죽어가는 것을 보거든 죄악의 몸 즉 죽을 몸이 마침내 죽는 것이요 따라서 이것은 또한 죄악의 세상이 죽을 것을 보여 주는 징조인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 즉 계시를 받은 자가 하나 다른 것은 시온산이 망하지 않음을 앎니다. 17절에 "오직 시온산에서 피할 자가 있으리니 그 산이 거룩할 것이요 야곱 족속은 자기 기업을 누릴 것이며" 라고 합니다. 시온산은 하나님에 의해서 남겨지는 자들로 채워지며 이들이 불이 되어 에돔을 불사를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세상 심판의 원리입니다.

    오바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두 가지

    1. 은혜를 모르는 세상은 반드시 망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있지만 그것을 모르는 세상은 반드시 망한다는 것입니다. 
    이 시기에 대하여서 알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징조는 지금도 세상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심지어 신자의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고난 즉 교회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세상은 심판 될 것입니다. 
    교회의 고난에 대한 보복을 하나님이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구원자를 보내시므로 이 보복 심판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2. 시온은 망하지 않으며 구원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교회는 망하지 않으며 구원됩니다. 
    구원자가 시온에 올라오는 것이 구원의 징표입니다. 
    동시에 이것은 세상 심판의 징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시온의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망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이것은 세상은 망하게 되어 있고 죄악은 망하게 되어 있음을 선언하는 사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의 역사철학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세상이 아무리 세력이 승하고 이기는 것 같아도 결국은 패할 것이라는 점이요 또 하나님의 나라가 아무리 약한 것 같아도 하나님의 나라는 승리할 것이요 따라서 교회가 죄악 투성이라고 해도 교회는 결국 죽음을 통하여 부활할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패하지만 교회는 영원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을 구원자로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고 좌절하지 말고 살도록 하십시다. 
    또 세상의 우리 삶이 망해버린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있는 것으로 망하지 않음을 믿고 살도록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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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

    강원대학교 정외과 명예교수 최동희

    인류가 고안해낸 삶의 질서 중에서 가장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에 근접한 것이 자유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겠다. 과연 자유민주주의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 내용을 지닌 것이기에 사사무애법계에 근접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자유민주주의 의미를 일층 더 선명하게 하려면 그와 대칭되는 인민민주주의와 비교 분석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는 수 세기에 걸친 자유의 질적 확대과정과 자유를 누리는 주체의 확대과정을 통해 확립된 것이다. 인민민주주의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을 계기로 소련, 동유럽 등의 공산국가에 확립되었던 질서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는 다음 다섯 가지 수준에서 비교 분석이 가능할 것이다. 

    1. 결정방식
    2. 정치체제
    3. 경제체제
    4. 사회체제
    5. 문화 체제
     

    결정방식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는 결정방식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자유민주주의는 최대한의 많은 사람이 참여해서 그중에서 다수가 좋다고 해서 내린 결정이 좋은 결정이라고 본다. 이러한 결정은 인간의 평등을 전제로 한 것이다. 사람은 모두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능력은 큰 차이가 없다. 평등한 사람들 속에서 가장 좋은 것은 다수가 좋다는 것이 된다. 다수결 원칙은 이러한 인간 평등을 기초로 한 것이다.

    인민민주주의는 합리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소수에 의한 결정이 좋은 결정이라고 본다. 이것은 인간은 본래 불평등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무지한 다수보다는 소수의 능력 있는 사람의 합리적 판단에 의한 결정이 좋은 결정이 된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엘리트주의적 결정이 있을 수 있다. 고도의 기밀을 요 하는 외교, 안보문제는 다수의 의견보다 소수의 합리적 판단으로 결정될 수 있다. 전문성이 높은 문제는 소수의 전문적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주도하여 결정을 내린다.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경우는 다수의 참여로 결정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결정방식이다.

    인민민주주의 국가에서도 다수가 결정에 영향을 줄 경우가 있다. 이른바 대중노선과 같은 것이다. 중국의 문화혁명기에 홍위병의 대중노선이나 인민재판이 좋은 예이다. 대중노선은, 인간 평등을 기초로 한 것이 아니라, 소수가 다수 의견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행위이다.

    이상의 결정방식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영향을 준다.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에서는 국민 모두의 정치참여가 중시되지만, 인민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공산당 독재가 강조된다. 자유민주주의 경제 질서에는 개개인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이 중심이 되지만 인민민주주의에서는 중앙집권적 계획경제가 경제를 주도한다. 자유민주주의에서는 자유롭게 사회집단이 결성되어 집단을 통해 이익을 공동으로 추구할 수 있지만, 인민민주주의에서는 공산당 지배 구조 속에 사회집단이 존재한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표현의 자유, 언론 출판의 자유를 기초로 국민 모두의 다양한 문화 활동이 보장되지만, 인민민주주의에서는 문화는 공산당 또는 사회주의 혁명의 수단이 된다.

    정치체제

    정치적인 면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의 본질적인 차이는 정당제도에 있다.

    자유민주주의는 복수정당제를 택하고 있다. 복수정당제는 다수의 정당이 정치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경쟁을 하는 정당제이다. 정당은 정강 정책을 통해서 다수 국민의 지지를 얻으려 노력한다. 선거 때마다 각 정당은 훌륭한 후보를 내세워 다수 국민의 지지를 얻으려 한다. 다수 국민의 지지를 얻은 정당이 행정부의 정치 권력을 장악하여 집권하게 된다. 선거 결과 국민 지지가 여러 정당으로 분산되면 다수정당제가 되고 두 개의 큰 정당으로 국민 지지가 양분되면 양당제의 정당제가 되게 된다. 복수정당제에서 각 정당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얻기 위해 국민 각계각층이 원하고 바라는 바를 정당의 정책으로 제시하게 된다. 정권을 장악한 정당은 입법이나 정책의 실현으로 계속 국민 지지를 얻으려 노력한다.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선거를 통해 정권이 다른 정당으로 넘어가게 된다.

    인민민주주의는 프롤레타리아(노동자 계급) 독재이다. 프롤레타리아는 다수이기 때문에 다수의 독재는 민주주의가 된다는 논리이다. 그런데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공산당 독재이어야 한다. 노동자들은 무지해서 공산당의 지휘 감독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인민민주주의는 공산당(노동당) 일당 독재체제가 된다.

    공산당 이외에 우당(友黨)이 있을 수 있으나 우당은 공산당과 정권을 경쟁할 수 없다. 인민민주주의 국가에서의 선거는 공산당과 다른 정당이 정치 권력을 놓고 경쟁하는 행사가 아니라 공산당의 지배를 확인하는 의례적 행사에 불과하다. 공산당은 국민 지지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국민 여론이 공산당 집권에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국민이 당의 지시와 지도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복수정당제의 장점은, 국민 각계각층의 원하고 바라는 바가 여러 정당의 정강 정책으로 반영되기 때문에, 국민을 위한 정치가 실현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국민이 정치의 주체가 된다는 점이다.

    단점은 다양한 국민의 이해관계를 쉽게 정책화할 수 없고, 또 정당의 정책이 실현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게 된다는 점이다.

    일당 독재의 장점은 정책의 신속한 실현에 있다. 다양한 국민의 이해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지배자의 합리적 판단으로 정책이 정해지고 집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점은 국민 다수의 이익보다 소수 지배층 중심의 정치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또 국민은 정치의 객체로서 당의 지시와 지배에 순종해야 한다는 점이다.

    경제체제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경제는 자본주의 경제체제, 또는 시장경제체제이다. 시장경제에서는 개인의 사유재산이 보호되고 개개인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이 보장된다.

    수요와 공급이 시장기구에 의해 결정된다. 수요보다 공급이 적으면 가격이 오르든가 공급이 늘게 된다. 공급이 많으면 가격이 하락하고 공급이 줄게 된다. 수요와 공급이 시장의 가격기구에 의해 균형을 잡게 된다.

    시장경제의 장점은 경제의 활력과 창의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개인의 자유로운 경제활동과 이윤 추구가 보장되기 때문에 경제생활에 있어서 개인의 능력이 극대화될 수 있다. 이것은 경제의 활력과 창의력을 키운다.

    단점은 노력과 능력의 차이로 인해 불평등이 조성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평등 속에서 불평등이 만들어지는 현상이다.

    10시간 일한 사람의 보상이 5시간 일한 사람의 보상보다 배가 되는 것은 평등하고 공정한 것이다. 그러나 결과만을 보면 5를 받은 사람과 10을 받은 사람은 소득에서 불평등한 경우가 되는 것이다. 새로운 아이디어로 신품종을 개발한 사람은 재래식 방식대로 한 사람보다 더 많은 소득을 올리는 것은 평등한 것이다. 이 경우도 결과에서는 불평등이 되게 된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중요한 것은 특히 두 가지이다. 첫째는 모든 사람의 노력과 능력이 최대한으로 발휘될 수 있도록 보장해 주는 것이다. 권력의 불필요한 규제 통제는 최소화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 결과적으로 조성되는 불평등은 복지정책으로 완화해야 한다. 그러나 결과의 평등이 경제의 효율을 저해하지 말아야 한다. 10시간 일한 사람과 5시간 일한 사람에게 결과의 평등에 따라 같은 보수를 준다면, 이것은 인간의 자생력과 창의력을 말살하는 불공정이 될 것이다.

    인민민주주의 국가의 경제는 계획경제체제이다. 생산수단은 공공 소유 또는 국가 소유이고 개개인의 경제활동의 자유는 인정되지 않는다. 정부의 합리적 판단으로 국가 전체의 모든 수요를 예측한다. 예측된 수요를 각 생산업체에 배분하고 모든 생산 자제가 공급된다. 생산된 물자는 전국에 필요한 지역에 배분된다.

    계획경제체제에도 장점, 단점이 있을 수 있다.

    장점은 자원의 합리적 배분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소수의 능력 있는 사람이 전국의 수요를 정확히 예측하고 공급(생산)을 하면 수요와 공급이 정확하게 균형을 이루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자원의 낭비를 막을 수 있게 된다. 그렇지만 이것은 가정에 불과하고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단점은 다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수요에 대한 정확한 예측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전국에서 매년 필요한 물자는 지역마다 차이가 있고 또 그 종류도 대단히 많다. 그 모든 수요를 예측한다는 것은 신(神)의 작업이다. 잘못 예측된 수요에 따른 생산은 전국적으로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을 가져와 경제 운영이 어렵게 된다. 작년에 과잉 생산된 물자가 산적해 있는데, 전년도와 같은 생산 지침이 시행된다.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 현상이 장기화 되면서 인민민주주의 국가는 경제의 활력을 잃고 대부분 폐망하였다.

    둘째, 계획경제에서는 인간의 창의성이 온전히 발휘될 수 없고 또 경제의 활력도 기대할 수 없다. 소수 지배층을 제외하고 국민 다수는 경제의 객체에 불과하다. 인간의 창의성은 주체적 활동에서 나온다. 국민은 정부 지침에 수동적으로 따르기 때문에 국민의 창의성이나 경제의 활력을 기대할 수 없다.

    결과적 평등을 인위적으로 잘못 추구하면 사람들의 의존성을 키워 인간의 자생 능력을 떨어트린다. 경제생활에서의 인간의 객체화는 경제의 활력과 창의성을 크게 저하시킨다.

    사회체제

    자유민주주의에서는 결사의 자유가 보장된다. 모든 사람은 이해관계를 함께하는 사람들과 사회집단 또는 이익집단을 결성하여 집단의 힘으로 공동으로 이익 추구를 하게 된다. 기능별로 다양한 이익집단들이 정부나 정당에 압력 활동을 전개한다. 각 정당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얻기 위해 이익집단들의 요구를 수렴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국민 다수가 원하고 바라는 사안들이 정부 또는 정당의 정책으로 반영 되게 된다.

    이러한 사회체제의 장점은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치가 현실화된다는 점이다. 국민 대부분은 기능별, 지역별, 영역별의 다양한 사회집단이나 이익집단에 참여한다. 개인은 사회집단을 통해 이익 추구와 이익 보호를 받을 수 있다. 결과적으로 다양한 사회집단은 국민 다수를 정치참여의 길로 이끌어 준다.

    단점은 자본과 조직력이 강한 사회집단이 정책 결정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국민 전체가 사회집단에 참여하고 있다고 할 수 없다. 조직되지 않은 국민이 다수일 경우도 있다. 그러할 경우는 많은 사람의 권익이 정책으로 보호받지 못할 수도 있게 된다. 그러나 적극적인 정당 활동이 존재하면 조직되지 않은 국민의 권익도 보호될 수 있다.

    인민민주주의 국가에도 다양한 사회집단이 존재한다. 그러나 사회집단은 이익집단 또는 압력단체의 기능을 갖지 못하고, 공산당(노동당)의 지시를 구성원들에게 전달하고 구성원들을 규제 통제하는 기능만을 갖는다.

    장점은 당의 지시를 일사불란하게 신속하게 국민 전체에 전달할 수 있다, 는 점일 것이다.

    단점은 국민의 다양한 요구나 욕구가 표현되고 충족될 수 없다, 는 점이다. 위로부터의 대규모 군중 집회가 자주 개최되는 것은 군중의 욕구 불만을 집단적으로 발산케 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겠다.

    문화 체제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의 문화생활은 표현의 자유, 언론 출판의 자유 등으로 모든 사람이 자기의 소질에 따라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다.

    장점은 수만 가지 주의 주장이 꽃피울 수 있다는 점이다. 남의 자유에 제한을 가하지 않는 한 모든 생각이나 사상은 표현될 수 있고 또 존중된다.

    단점은 문화 예술의 세속화 현상일 것이다.

    인민민주주의 국가에서의 문화 예술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socialist realism)에 따른다.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는 문화 예술은 사회주의 혁명이나 공산당 이념에 충실하여야 한다, 는 지침이다.

    문화 예술이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의 지침을 따르면, 문화 예술의 획일화 현상이 나타난다. 인간의 다양한 문화 활동이 제약을 받게 되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는 인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서로 상반 된, 종합적인 삶의 질서이다. 서로 다른 총체적인 삶의 질서는 한 울타리에서 공존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남과 북의 연방제는 현실성이 없다. 남과 북의 공존은 서로 다른 국가에서만이 가능할 것이다.

    종합적인 삶의 질서로서의 자유민주주의는 인류의 가장 이상적인 삶의 질서인 사사무애법계에 근접해 있다. 사사무애법계는 구성원 하나하나가 자기의 빛을 발하면서도 전체로서는 서로 걸림 없고 대립 갈등이 없는 완벽한 공존의 질서이다. 자유민주주의 질서는 아직 완벽하지는 않지만, 국민 대다수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한다는 점에서 사사무애법계에 근접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강원대학교 정외과 명예교수 최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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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는 어떻게 다를까?

    오늘날 세계 정치 질서 속에서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보편적인 가치처럼 사용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 서로 다른 체제들이 공존한다. 특히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는 모두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공유하지만, 본질적인 성격은 극명하게 다르다. 자유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핵심 가치로 삼고 다원주의적 질서를 제도화한 체제이며, 인민민주주의는 특정 계급과 집단을 주권자로 내세우면서 실질적으로는 일당 독재를 합리화하는 체제이다. 두 체제의 차이를 명확히 이해하는 것은 단순한 정치학적 논쟁을 넘어, 현대 사회에서 자유와 권력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로 이어진다. 이 글은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를 헌법적 개념, 역사적 기원, 현대적 사례, 그리고 이념적 차이라는 네 가지 축으로 심층 분석하여 정리함으로써 독자들에게 학문적 통찰과 정책적 시사점을 제공하고자 한다.

    헌법적 개념의 대비: 자유와 권리 vs 집단과 당

      헌법은 정치 체제의 성격을 가장 명확히 드러내는 기본 문서이다. 자유민주주의 헌법은 개인의 권리를 국가 권력보다 우위에 두며,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아 제한적으로 행사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명시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조항은 자유민주주의의 정수를 담고 있다. 이때 ‘국민’은 집단적 추상 개념이 아니라, 권리를 가진 개별 시민들을 의미한다. 반면 인민민주주의 헌법은 ‘인민’ 또는 ‘노동자·농민’을 주권자로 규정하면서도 실제로는 특정 정당이 이들을 대리한다는 형식을 취한다. 북한 헌법 제11조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선로동당의 영도 밑에 모든 활동을 진행한다”는 조항은 인민의 이름으로 당의 권력을 절대화하는 전형적인 구조를 보여준다. 따라서 헌법적 차원에서 자유민주주의는 권력 분립과 기본권 보장을 제도화하지만, 인민민주주의는 당 중심 권력 집중을 정당화한다.

    역사적 기원: 시민혁명과 개인 권리 vs 사회주의 혁명과 집단 권리

      자유민주주의는 근대 유럽의 시민혁명을 거치면서 탄생했다. 영국의 명예혁명(1688)은 의회 주권과 법치주의를 확립했고, 미국 독립혁명(1776)은 개인의 생명·자유·재산권을 신성한 권리로 규정했다. 이어진 프랑스 대혁명(1789)은 자유·평등·박애라는 원칙을 전 세계로 확산시켰다. 이러한 역사적 흐름은 존 로크, 몽테스키외, 토크빌 같은 사상가들의 이론적 토대를 거쳐 오늘날의 자유민주주의로 이어졌다. 반대로 인민민주주의는 1917년 러시아 혁명에서 기원한다. 레닌은 기존의 자유민주주의를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비판하며,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를 제시했다. 이는 사실상 일당 독재와 계급 독재를 제도화한 것이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유럽과 아시아로 확산되었다. 즉, 자유민주주의는 개인 권리를 중심으로 발전한 반면, 인민민주주의는 집단 권리와 계급 중심 논리에서 출발했다.

    현대적 사례: 다당제와 정권 교체 vs 일당제와 권력 집중

      오늘날 자유민주주의 국가는 미국, 독일, 대한민국, 일본 등을 대표 사례로 들 수 있다. 미국은 권력 분립과 다당제 경쟁을 통해 자유민주주의의 전형을 보여주며, 독일은 기본법에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명시하여 헌법재판소가 이를 수호한다. 대한민국 역시 헌법 전문과 제4조에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국가의 근간으로 삼고 있다. 반면 인민민주주의 국가는 중국, 북한, 쿠바, 베트남 등이 있다. 이들 국가는 헌법상 인민의 권리를 보장한다고 규정하지만, 실제로는 공산당이 모든 정치 활동을 독점한다. 중국 헌법은 “중국공산당의 영도”를 명시하며, 북한 헌법은 조선로동당의 영도를 최고 원리로 선언한다. 따라서 자유민주주의 국가는 권력이 순환하며 견제와 균형이 작동하는 반면, 인민민주주의 국가는 권력이 특정 세력에 집중되어 권위주의적 성격을 띤다.

    이념적 초점: 자유+민주 vs 인민+민주

      이념적 차원에서도 두 체제는 뚜렷한 대비를 보인다. 자유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로 설정한다. 따라서 다수결 원리도 개인의 기본권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만 정당성을 가진다. 다시 말해, 자유민주주의에서 민주주의는 자유를 보장하는 수단이자 장치이다. 반면 인민민주주의는 집단적 주권을 강조한다. 그러나 인민이라는 개념은 모호하며, 실제로는 공산당이 인민의 대리인을 자처한다. 그 결과 인민의 자유와 권리는 국가와 당의 이익에 따라 제한되며, 민주주의는 집단적 권력 유지의 수단으로 전락한다. 이념적으로 자유민주주의는 자유를 전제로 한 민주주의이고, 인민민주주의는 집단을 전제로 한 권력 독점적 민주주의라 할 수 있다.

    민주주의의 이름을 둘러싼 본질적 차이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는 모두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내세우지만, 그 내용은 극명하게 다르다. 자유민주주의는 헌법적 차원에서 권력 분립과 기본권 보장을 제도화하고, 역사적으로 시민혁명과 개인 권리 사상에서 기원했으며, 현대적으로는 다당제와 정권 교체를 통해 권력 남용을 억제한다. 반면 인민민주주의는 헌법적으로 당의 권력 독점을 정당화하고, 역사적으로 사회주의 혁명과 계급 투쟁 논리에서 출발했으며, 현대적으로는 일당제와 권위주의적 통치를 통해 민주주의의 외형만을 유지한다. 이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표면적으로는 보편적 가치를 지닌 듯 보이지만, 그 실제 운영 원리를 살펴보면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길을 걷는다. 자유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제도화했지만, 인민민주주의는 집단의 이름으로 권력을 독점하며 민주주의의 본질을 훼손한다. 따라서 두 체제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정치학적 학문 탐구를 넘어, 오늘날 우리가 지켜야 할 자유와 권력의 균형에 대한 실천적 과제로 연결된다.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떼고 '인민'을 붙이면 어떻게 될까?

    자유민주주의는 국민이 투표 통해 정권을 만들고 교체하는 선거 민주주의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대한민국 중·고교 한국사 교과서에서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가 삭제되고 대신 “민주주의”가 삽입됐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알레르기적 반감이 작용한 듯한데, 이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개념 자체를 정확히 알지 못해 생겨난 무익하고 부조리한 논란일 뿐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민주주의”는 화자(話者)의 의도, 정치적 목적, 역사적 맥락에 따라 여러 의미로 혼용되어온 다의적 개념이다. 
    상식적으로 중·고생 교과서에 정확하고 구체적인 개념 대신 불명료하고 애매한 개념을 사용할 수는 없다. 
    한국사 교과서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삭제하자는 주장은 북한의 역사 교과서에서 “인민민주주의공화국”을 삭제하고 “민주주의공화국”만 쓰자는 주장만큼이나 어불성설이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결합된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는 개인의 기본권, 정부의 권력분립, 대의제 민주주의의 절차 등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정교한 이론 체계이다. 
    자유주의 헌법에 따라 운영되는 민주주의라는 점에서 “입헌 민주주의(constitutional democracy)”라고도 불리는데,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독일 등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국가들은 물론 국가 간섭을 최소화한 자유방임주의 국가까지도 기본적으로 자유민주주의에 들어간다. 
    무엇보다 자유민주주의는 참정권을 부여받은 국민 개개인이 투표를 통해 정권을 창출하고, 또 그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선거 민주주의(electoral democracy)를 채택한다.

    대한민국은 1948년 8월 15일 성립될 때부터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채택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라는 사실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인민민주독재”의 사회주의 체제라는 사실만큼이나 명확한 팩트(fact)다. 중국현대사를 기술할 때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삭제할 수 없듯, 대한민국 현대사의 기술에서 “자유민주주의”는 절대로 삭제될 수 없는 용어다. 중·고교 교과서라면 더더욱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적 질서가 확립되는 과정을 정확하게 드러내야 한다. 헌법 정신에 어긋나는 교과서는 위헌적 불량품이기 때문이다.

    인민민주주의는 ‘인민’이 ‘인민의 적’에게 독재하는 체제...자유민주주의와 양립 불가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는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상극(相克)의 체제다. 
    1940년 1월 마오쩌둥은 “신민주주의론”이라는 글에서 세 가지 민주주의를 논했다. 
    그는 구미 자본주의 국가의 민주주의는 자산계급의 독재를 합리화하는 “구(舊)민주주의”라고 혹평했다. 
    반면 구소련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이미 발달한 사회주의 공화국의 민주주의라고 극찬했지만, 당시 중국이 일본과 국민당이 분할 점령하고 있는 “반(半)식민지, 반(半)봉건” 상태의 나라이기 때문에 소련식 사회주의 공화국이 바로 성립될 순 없다고 보았다. 
    마오쩌둥은 제3의 길로서 노동자, 농민, 좌파 지식인, 및 소자산자의 계급적 연대에 기초한 “신(新)민주주의”를 제창했다. 
    1940년대 10년 동안 마오쩌둥의 “신민주주의론”은 중국식 사회주의 혁명의 이론적 청사진이 되었다.

    1940년 당시 마오쩌둥은 앞으로 건립할 사회주의 공화국의 이름을 “중화민주공화국”이라 했다. 9년 후 중화대륙을 군사적으로 점령한 후, 중국공산당은 새 나라의 국명을 “중화인민공화국”으로 개칭했다. 공화국 속에 이미 민주의 의미가 내포돼 있다는 학자들의 지적도 있었지만, 사실은 그 당시 마오쩌둥이 이미 “인민민주독재”의 이론을 정립했다.


    <1949년 7월 1일, 인민일보 제1면에 게재된 마오쩌둥의 “인민민주전정을 논함”>

    마오쩌둥에 따르면, “인민민주주의”는 중국공산당 영도 아래서 “인민” 계급이 “인민의 적”에 대해 독재를 행사하는 전제적 시스템이다. “인민민주독재” 아래선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지난 70여년 간 중화인민공화국은 중국공산당 일당독재를 요지부동의 기본 전제로 삼아왔다. 시진핑 역시 집권 초기부터 중국의 인민을 향해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의 유혹을 물리치라고 강력하게 요구해왔다. 가령 2019년 3월 시진핑은 중공중앙의 기관지 <구시(求是)>지에 실린 글에서 “서구식 헌정(憲政), 삼권분립, 사법독립”의 길을 갈 수는 없음을 강조했다. 중국식 “인민민주주의”가 구미식 “자유민주주의”와 절대로 양립할 수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29세 전기공 웨이징성, 선거 민주주의 담은 대자보 내걸고 15년형 받아

    1978년 12월 5일 베이징 동물원의 전기공 웨이징성(魏京生, 1950-)은 베이징 시단(西單) 민주장(民主墻, 민주의 벽)에 “제5의 현대화: 민주와 그 외”라는 제목의 대자보를 써서 붙였다. 웨이징성이 말한 “제5의 현대화”란 다름 아닌 “민주화”를 의미했다. 1960년대부터 중국공산당은 농업, 공업, 과학·기술, 국방 네 분야에서 이른바 “4대 현대화”를 내걸어왔다. 이에 맞서 웨이징성은 “민주화”야 말로 현대화의 급선무라 주장했다.

    지난 주 살펴 봤듯, 웨이징성은 18년의 세월 인권유린으로 악명 높은 친청(秦城) 감옥에서 정치범의 삶을 살아야만 했다. “베이징시 제1중급 인민법원”은 왜 왜 일개 전기공에 불과한 스물아홉 살 청년이 기껏 대자보를 붙였다는 이유로 “반혁명죄”를 걸어 15년 형을 언도해야 했을까? 바로 웨이징성이 선거를 통한 권력교체를 부르짖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명료하고 강력한 문장으로 인민이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를 통해 무능하고 부패한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구미식 선거 민주주의의 도입을 주장했다.

    중국공산당이 그러한 “과격한” 주장을 그대로 방치할 리 만무했다. 중국공산당은 국공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중국의 각 지역을 군사적으로 점령한 중국 통일의 주체였다. 중국공산당이 막강한 군사력을 견지하고 있는 한, 그 어떤 조직도 정권교체를 꿈꿀 수 없다. 1949년 중화대륙을 통일한 중국공산당은 “인민민주독재”의 이념을 통해 선거를 통한 권력교체의 길을 완벽하게 막아버렸기 때문이었다.

    1979
    <1979년 추정, 법정 진술하는 웨이징성의 모습. 사진/공공부문>

    시진핑이 말하는 민주란? 독재권력의 대민 지배를 전제...민주의 주체는 중국공산당

    놀랍게도 35년 지난 2013년 이래 중국공산당 총서기 시진핑은 “제5의 현대화”라는 과거 웨이징성이 외쳤던 구호를 그대로 차용해서 쓰고 있다. 웨이징성에게 “제5의 현대화”는 “민주화”였지만, 시진핑이 부르짖는 “제5의 현대화”는 “국가 치리(治理) 체계와 치리 능력의 현대화”를 의미한다. 영어로는 흔히 거버넌스(governance)라 번역되는 치리의 본뜻은 “다스리다,” “질서를 바로 잡다” 정도의 의미다. 최고권력자가 “정치범”의 표현을 표절하면서 “제5의 현대화”의 원의를 “민주”에서 “압제”로 바꿔치기 했다! 오늘날 중국의 현실을 보면, 그 함의가 어렵잖게 파악된다. 바로 QR코드, 바이오 메트릭스, 홍채인식, 인공지능, 빅데이터 등 최첨단의 디지털 감시체제를 이용한 대민(對民) 통제의 강화라 할 수 있다.

    물론 시진핑도 틈만 나면 “민주(民主)”를 강조한다. 시진핑 정권에서 강조해온 “사회주의 핵심가치관” 12가지 중에서 “민주”는 “부강(富强)”에 이어 제2의 가치이다. 과연 어떻게 공산당 일당독재의 나라 중국의 최고권력자가 “민주”를 외칠 수 있을까?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지만, 역사를 돌아보면 독재자치고 “민주” 팔이를 안 한 사례가 별로 없다. 레닌, 히틀러,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 등, 20세기 전체주의 정권의 좌우파 독재자는 모두 “민주”를 강력한 장기집권의 명분으로 삼았다.

    미국 하버드 대학의 정치학자 페리(Elizabeth J. Perry)의 분석에 따르면, 오늘날 중국에서 “민주”는 흔히 “인민주의적(populist)” 개념으로 사용된다. 시진핑 집권 초기 중국의 사회의식 조사를 보면, 85%의 중국인들은 “민주”가 “정부의 지도자들에 의한 인민을 위한 통치” 정도의 의미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때의 “민주”란 유권자가 직접, 비밀, 보통 선거를 통해 권력을 창출하고 교체하는 근대 구미 사회의 선거 민주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개념이다. 계몽주의 이후 입헌 민주주의는 경쟁적 선거, 다수결주의, 국가권력 제한을 명시한 자유주의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민민주주의(populist democracy)”는 21세기 현대 민주주주의 국가의 “선거 민주주의”와는 결이 다른 개념이다. 전자는 독재 권력의 하향적 대민(對民) 지배를 전제하지만, 후자는 국민 참여에 따른 상향적 민주 권력의 창출과 교체를 핵심으로 삼는다. 결국 중국공산당이 부르짖는 “민주”란 “백성을 어엿비 여기고 백성을 위하는” 전통시대 군주의 위민(爲民) 통치의 이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민주”의 주체는 중국 인민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이다.

    그렇다고 모든 중국인들이 “인민주의적 민주” 개념에 포박당해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위의 조사에 따르면 적어도 15%의 중국인들은 “정기적인 선거를 통한 국가 지도자의 선출”을 “민주”의 본뜻이라 생각하고 있다. 2013년 조사에 따르면, “중국이 선거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61%는 부정적 답변을 했다. 적어도 39%는 미국식 “선거 민주주의”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언제든 제2의 웨이징성이 다시 나와서 민주적 직선제를 통한 정권 교체를 주장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1978-1979
    <1978-1979, 베이징의 민주장(民主墻) 운동. 사진/공공부문>

    톈안먼 민주 운동과 구소련 붕괴로 이어진 웨이징성의 민주장 운동

    1979년 3월 덩샤오핑을 정조준해서 “민주”의 직격탄을 쏜 웨이징성과 <<탐색>>지 동인들의 결정은 기름통을 들고 불길로 뛰어드는 무모한 행동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40년이 지나 웨이징성은 그날 자신이 써붙였던 “민주냐, 새로운 독재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자평했다.

    “예상대로 우리들이 모두 체포되자 커다란 풍파가 일어났다. 덩샤오핑은 부득불 잠시 민주화 체포를 잠시 정지할 수밖에 없었고, 덕분에 민주장은 1년 간 더 지속됐다. 우리들의 체포가 변곡점이 되어 민주장에선 큰 변화가 일어났다. 민간 간행물 편집위원 류칭(劉靑, 1946?- )과 저명한 시인 베이다오(北島, 1949- )를 위시한 운동가들이 구명운동을 벌였다. 당내 각급의 개혁적 간부들이 덩샤오핑의 정치적 탄압을 비판했다. 그 결과 당내에는 덩샤오핑 독재를 비판하는 반대파가 결집되었다.

    웨이징성은 베이징 민주장운동의 세계사적 의의를 적극적으로 평가한다.

    “1979년 민주장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중국 밖 여러 나라에서도 민주화 운동이 새롭게 일어났다. 타이완, 파리, 프라하, 바르샤바, 모스크바 등지로 민주의 열풍이 번져갔다.”

    1979년 12월 10일 타이완 민주화운동의 도화선이 된 ‘메이리다오(美麗島)사건’이 발생했다. 웨이징성의 지적대로 “베이징의 봄”은 타이완 민주화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예컨대 타이완 민주진보당 전 주석 스밍더(施明德, 1941- )는 스스로 베이징 민주장운동에 자극을 받았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덩샤오핑의 강경 진압으로 민주장운동은 중단되었지만, 민주를 향한 중국 인민의 열망을 쉽게 사그러들지 않았다. 1986년 봄 다시 민주의 싹이 돋아나 그해 말 대학가에선 대규모 학생 시위가 일어났고, 3년 후엔 1989년 4-6월 톈안먼 민주운동으로 만개했다. 톈안먼 민주운동은 비록 탱크 부대에 짓밟혀 무지몽매한 대학살극이 벌어졌지만, 베이징의 봄은 결국 구소련과 동구 공산당 체제를 붕괴를 예고했다. 웨이징성은 말하듯, “베이징 민주운동은 전 지구적 민주화 운동을 촉발시킨 위대한 공헌을 했다.” <계속>






    자유민주주의와 민주주의의 차이: 근본적인 개념 이해 ⚖️🌐 완벽 분석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합니다. 언뜻 보면 비슷하거나 같은 개념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두 용어는 엄연히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각각의 가치와 지향하는 바에도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

    '국민이 주인이 되는 정치 체제'를 뜻하는 민주주의와, 여기에 '개인의 자유와 권리'라는 가치를 더한 것이 바로 자유민주주의입니다. 
    이 글에서는 두 개념의 핵심적인 차이점과 역사적 배경, 그리고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까지 깊이 있게 다룹니다. 민주주의의 다양한 얼굴을 이해하고, 더 나은 사회를 위한 논의에 참여해 보세요. 🧠✨

    🌟 1. 민주주의(Democracy)란 무엇인가?

    민주주의는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을 위하여 정치를 행하는 제도를 의미합니다. 그리스어 'demos (국민)'와 'kratos (지배)'에서 유래한 말로, '국민의 지배'를 뜻합니다. 🏛️

    1. 민주주의의 핵심 개념 🗣️

    • 국민 주권: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원칙입니다. 국민이 직접 또는 대표를 통해 국가의 중요한 의사 결정에 참여합니다. 🙋‍♀️🙋‍♂️
    • 다수결의 원칙: 의사를 결정할 때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것을 기본으로 합니다. 이는 가장 효율적인 의사 결정 방식 중 하나로 여겨집니다. ✅
    • 대의 민주주의: 현대 국가에서는 모든 국민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기 어렵기 때문에, 국민의 대표를 선출하여 그들로 하여금 국민의 의사를 대변하도록 하는 대의 민주주의(간접 민주주의) 형태가 일반적입니다. 🗳️

    2. 민주주의의 다양한 형태 🌐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정치 체제라기보다는, 다양한 이념과 결합하여 여러 형태로 나타납니다.

    • 직접 민주주의: 국민이 직접 정책 결정에 참여하는 방식 (고대 아테네, 현대의 국민투표 등).
    • 대의 민주주의: 국민이 선출한 대표를 통해 통치하는 방식 (대부분의 현대 국가).
    • 인민 민주주의: 사회주의 국가에서 사용했던 용어로, 프롤레타리아(노동자 계급)의 지배를 강조하며, 공산당 일당 독재 체제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예: 북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름에 '민주주의'가 있지만 우리가 흔히 아는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멉니다.) 🚩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국민이 다스리는' 시스템을 의미합니다. 그 방식과 결과는 어떤 이념과 결합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

    🛡️ 2.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란 무엇인가?

    자유민주주의는 민주주의와 자유주의가 결합된 형태입니다. 단순히 국민이 주인이 되는 것을 넘어, 국민 개개인의 자유와 권리(인권)를 최우선 가치로 삼고 이를 보장하는 민주주의를 의미합니다. 📜

    1. 자유민주주의의 핵심 개념 ✨

    • 개인의 자유와 권리 보장: 다수결의 원칙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의견이나 개인의 기본권(언론, 집회, 사상, 신체 등)은 다수의 결정으로도 침해될 수 없다는 원칙을 포함합니다. '다수의 횡포'를 견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 권력 분립: 국가 권력(입법, 행정, 사법)을 여러 기관으로 나누어 상호 견제와 균형을 이루게 함으로써 권력 남용을 방지하고 개인의 자유를 보호합니다. 🏛️⚖️
    • 법치주의: 모든 국민과 정부 기관이 법에 따라 행동하며, 자의적인 권력 행사를 제한하는 원칙입니다. 법 앞의 평등을 강조합니다. 📖
    • 복수 정당제 및 자유로운 선거: 여러 정당이 자유롭게 경쟁하고, 국민이 자유로운 선거를 통해 대표를 선출하는 다원주의 사회를 지향합니다. 🗳️
    • 사유 재산권 보장 및 시장 경제: 개인의 사유 재산권을 인정하고, 시장 경제 체제를 기반으로 경제 활동의 자유를 보장합니다. 📈

    2. 자유민주주의의 역사적 배경 📖

    자유민주주의는 17~18세기 계몽주의 사상과 시민 혁명(영국 명예혁명, 미국 독립혁명, 프랑스 혁명)을 통해 발전했습니다. 절대 군주제에 대항하여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옹호하고, 권력 제한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와 결합하게 되었습니다.

    • 초기 자유주의: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 현대 자유민주주의: 개인의 자유 보장과 함께 사회적 평등, 복지 등도 중요하게 고려하는 방향으로 발전했습니다.
    "자유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기본 위에 '자유'라는 안전장치를 더한 것입니다. 다수의 결정이라 할지라도 개인의 기본권을 침해할 수 없다는 원칙을 강조하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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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 자유민주주의와 민주주의의 핵심 차이점 비교

    두 개념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만, 분명한 강조점의 차이를 가집니다.

    1. 주요 차이점 요약 📊

    구분 민주주의 (일반적 개념) 자유민주주의 (Liberal Democracy)
    핵심 가치 국민 주권, 다수결의 원칙 개인의 자유와 기본권, 권력 분립, 법치주의
    초점 누가 통치하는가? (국민) 어떻게 통치하는가? (자유와 법에 근거)
    다수결의 원칙 다수의 결정이 중요 다수결이지만 소수 의견과 개인의 자유를 존중
    적용 범위 정치 체제 일반 (광범위) 특정 이념(자유주의)이 결합된 정치 체제 (더 구체적)
    위험성 다수의 횡포 가능성 지나친 개인주의로 인한 공동체 약화 가능성
    예시 고대 아테네 민주정,
    인민 민주주의 (북한)
    대한민국, 미국, 유럽 대부분의 민주 국가

    2. 민주주의의 '명사'와 '형용사' 🧐

    쉽게 비유하자면, 민주주의는 '명사'와 같습니다. "이것은 민주주의다"라고 말할 때,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반면 자유민주주의는 '자유로운'이라는 형용사가 붙어 '어떤 종류의 민주주의인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즉,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는 민주주의라는 의미입니다.

    💡 대한민국 헌법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대한민국 헌법 전문과 제4조 등에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민주주의를 넘어, 개인의 기본권이 존중되고 권력 분립과 법치주의가 실현되는 형태의 민주주의를 지향한다는 뜻을 명확히 합니다. 이는 북한의 '민주주의'와는 근본적인 차이를 둔다는 의미도 포함합니다.

    마무리하며: 현대 민주주의의 본질 🌐✨

    현대 국가에서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민주주의'는 대부분 개인의 자유와 권리, 법치주의를 핵심 가치로 삼는 자유민주주의를 의미합니다. 단순한 다수결 원칙이 아닌, 다수의 결정이라 할지라도 소수의 기본권을 침해할 수 없다는 중요한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는 국민 주권과 개인의 자유를 조화시키려는 노력의 산물이며, 이는 현대 사회의 안정과 발전을 위한 중요한 토대가 됩니다. 이 두 개념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정치적 논의를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하고 참여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남북한 체제 어떻게 다른가

    취재기자
    10~12분

    남북한 체제 어떻게 다른가
    - 자유와 평등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는 사회가 바람직

    이재봉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 교수 / 통일경제포럼 공동대표)
    pbpm@hanmail.net

    2017. 11. 28

    인류가 추구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보편적 가치 두 가지를 뽑는다면 자유와 평등일 것이다. 이 가운데 남한이 추구해온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자유를 더 중시하고, 북한이 지향해온 인민민주주의와 사회주의/공산주의는 평등을 더 중시한다. 그런데 자유와 평등은 서로 보완적이면서도 상충적이다. 개인의 자유가 확대되면 사회적 평등은 축소되고, 사회적 평등이 확장되면 개인의 자유는 위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유와 평등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는 사회가 바람직하다.

    남북의 이념이나 체제를 비교하면서 남한은 민주주의인데 북한은 공산주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는 부적절한 비교다. 민주주의는 정치 이념이나 체제를 가리키고, 사회주의/공산주의는 경제 이념이나 체제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남쪽의 정치적 자유를 내세우고 싶으면 남한은 민주주의인데 북한은 독재주의라고 말하든지, 남쪽의 경제적 풍요를 자랑하고 싶으면 남한은 자본주의인데 북한은 사회주의/공산주의라고 말하는 게 옳다.

    민주주의는 경제적으로 자본주의와 결합될 수도 있고 사회주의와 결합될 수도 있으며, 사회주의는 정치적으로 민주주의와 결합될 수도 있고 독재주의와 결합될 수도 있다. 대개 민주주의 정치는 자본주의 경제와 짝을 이루고, 사회주의 경제는 이른바 ‘프롤레타리아 독재’ 정치를 거치게 된다. 이 때문에 우리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그리고 사회주의와 독재주의를 같거나 비슷한 개념으로 쓰는 경향이 크다. 이것 역시 잘못이다.

    1. 남한의 자유민주주의와 북한의 인민민주주의
     민주주의는 정의하기 어려운 정치학 용어다. 개념이 애매모호하고 종류가 많기 때문이다. 2017년 현재 지구상의 약 200개 나라 가운데 스스로 민주주의가 아니라 규정하는 국가는 거의 없을 것이다. 남북한부터 그렇다.

    남한은 1948년 정부수립 때부터 지금까지 단 1년이라도 민주주의가 아닌 적이 없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는 헌법 제1조 때문이다. 이승만의 12년 독재정치에도 민주공화국이라 했고, 박정희의 18년 군사독재 때도 민주공화국이라 우겼다.

      북한은 남한보다 민주주의를 더 강조해왔다. 남한은 헌법 제1조에서 민주공화국을 내세웠지만, 북녘은 나라 이름에서부터 민주공화국을 앞세우기 때문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948년부터 2017년 현재까지 3대에 걸쳐 세습 통치를 해도 예나 지금이나 ‘민주주의’와 ‘공화국’은 변함없다.

      민주주의에는 종류가 많다. 직접민주주의와 간접민주주의, 대의민주주의와 심의민주주의, 절차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민주주의,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대통령이 1950년대에 주창했던 교도민주주의와 남한의 박정희 대통령이 1970년대에 독재정치를 강화하며 이름 붙였던 ‘한국적 민주주의’까지..... 이 가운데 이념적으로나 제도적으로 널리 자리잡아온 대표적 민주주의로는 크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미국과 남한 등이 지향해온 자유민주주의, 중국과 북한 등이 추구해온 인민민주주의, 스웨덴과 노르웨이 등이 실시해온 사회민주주의다.

      첫째,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결합된 것으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정치 이념이다. 17-18 세기 유럽에서 발전된 자유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개인의 자유와 법적 평등을 중시한다. 여기서의 자유는 각 개인이 권리를 누리기 위해 최소한의 제한을 받으며 자신이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는 상태요, 평등은 개인이 타고난 본질적 가치가 동등하며 세습적 특권이 거부되는 상태다. 자유민주주의는 개인주의와 사유재산권 등을 중시하므로 주로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결합하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라는 말 앞에 아무런 수식어를 붙이지 않으면 자유민주주의를 가리키기 마련이다. 세계 최강대국 미국과 남한이 지향해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자유 가운데서도 가장 기본적인 사상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 등이 반공을 바탕으로 한 국가보안법에 의해 심각하게 훼손당하고 있으니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둘째, 인민민주주의는 사회주의/공산주의를 지향하는 나라들에서 인민의 평등을 목표로 채택해온 정치이념이다. 자본주의에 의한 경제성장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노동자 계급이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인민의 대표기관인 의회 등을 도입해 민주주의를 실시해야 한다. 또한 사회주의/공산주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동’들을 제거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 독재’도 거쳐야 한다. 이에 따라 북한에도 인민의 대표들로 구성된 최고인민회의라는 의회가 존재하고 기능한다. 그러나 최고인민회의가 수령의 통치를 견제할 수 있는 권한과 능력이 없는데도 인민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셋째, 사회민주주의는 민주적 방법으로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이념이다. 노동자 계급에 의한 폭력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부정하고 의회민주주의를 통해 사회주의를 이룬다는 취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이 시작되면서 소련의 스탈린 독재주의가 공산주의와 같은 개념으로 쓰이게 되자, “사회주의는 민주주의에 의해서만 실현되며, 민주주의도 사회주의에 의해서만 달성된다”는 민주사회주의운동이 영국과 서독을 중심으로 전개되기도 했다. 사회복지정책이 가장 잘 발달된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덴마크 등 북유럽 국가들이 취하고 있는 민주주의다.

        2. 남한의 다당제와 북한의 1당제
    남한은 오랫동안 군사독재를 통해 양당제 같은 1.5당제를 유지했다. 거대한 여당과 왜소한 야당이 있었던 것이다. 1990년대 말부터 정당 간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며 양당제를 거쳐 다당제로 발전하고 있다. 북한은 2017년 현재까지 수령독재 또는 1당독재를 실시해오고 있다. 남한에서는 북한을 비난하기 위해 부정적인 의미로 1당독재라는 말을 쓰지만 북한에서는 이를 당연하게 여기고 정당화하며 미화한다.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사회는 여러 계급이나 계층의 사람들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사회의 다양성을 중시하고 다당제를 취하기 쉽다. 각 계층의 권익을 대변할 수 있는 정당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한 정당도 필요하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한 정당도 필요하다. 진보주의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정당도 만들어지고 보수주의자들을 대변하기 위한 정당도 만들어진다. 환경보호를 위한 정당도 나오고 종교의 확장을 위한 정당도 나온다.

      인민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사회는 (자본가) 계급이 없어지는 것을 목표로 삼기 때문에 사회의 획일성을 중시하고 일당제를 선택하는 게 당연하다. 계급계층이 다양하지 않기 때문에 정당이 많이 만들어질 필요가 없다. 궁극적으로 ‘노동자 천국’을 만들기 위해 노동자들을 대변하며 그들의 권리와 이익을 위한 정당인 공산당이나 노동당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자본가 계급을 위한 정당은 있을 필요도 없고 있을 수도 없다. 이른바 1당독재를 긍정적으로 선전하거나 정당화하는 배경이다.

      북한에는 정당이 3개가 있다. 남한에 잘 알려져 있는 <조선로동당> 말고 과거 남한의 <민주노동당>과 자매결연하고 교류했던 <조선사회민주당>도 있으며 천도교도들이 중심이 된 <천도교청우당>도 있다. <조선로동당>은 1945년 10월, <조선사회민주당>은 1945년 11월, <천도교청우당>은 1946년 2월 만들어졌다. 이렇듯 정당이 세 개나 있는데도 1당제라고 일컫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정당이란 사전적 의미로 정치적 이념이 같거나 비슷한 사람들이 정권을 잡고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조직한 단체다. 명실상부한 정당이 되기 위해서는 집권(執權) 경험이나 수권(受權) 능력이 있어야 한다. 정권을 잡아본 경험이 있거나 정권을 잡을 수 있는 능력을 지녀야 진정한 정당인 것이다. 북한엔 이러한 정당이 <조선로동당> 하나뿐이기 때문에 1당제라고 한다. 미국에서 대통령선거 때가 되면 전국적으로 100개 안팎의 정당이 출현하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정권을 잡아보고 앞으로 정권을 잡을 수 있는 정당은 민주당과 공화당 2개 밖에 없기 때문에, 미국의 정당제도를 다당제라 하지 않고 양당제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참고로, 자유민주주의에서는 정권을 잡지 못한 정당을 야당이라고 하지만 인민민주주의에서는 정권을 잡지 못한 정당을 우당(友黨)이라고 부른다. 경쟁하거나 반대하는 정당이 아니라 협력하거나 보조하는 정당이란 뜻이다. 북한에서 <조선사회민주당>이나 <천도교청우당>은 <조선로동당>의 정책을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게 아니라 보조하는 우당이다.

    공산주의를 추구하는 사회에서는 국가나 정부보다 당이 더 높은 위치에 있고 더 크고 많은 권력을 행사한다. 당이 국가를 이끌어가는 체제다. 공산주의 이론에 따라 정부와 국가는 궁극적으로 사라져야 할 조직이나 기구지만 공산당은 영원히 남게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북한 헌법 제1장 제11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선로동당의 령도 밑에 모든 활동을 진행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당이 국가를 영도한다는 것은 모든 국가권력이 당에서 나온다는 뜻이다.

        3. 남한의 자본주의와 북한의 사회주의/공산주의
    자본주의는 개인의 ‘자본(재산)’을 중시하는 경제 이념이다. 사유재산권이 핵심 가치다. 자본주의는 산업혁명 과정에서 시작되어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발전해왔다. 시장경제와 결합되는 순수자본주의, 즉 정부의 간섭과 통제를 배제하거나 최소화하고 경제의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는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오래 전에 사라졌다. 1930년대 세계대공황을 극복하는 과정에서부터 경제활동에 대한 정부의 개입과 역할이 커져 왔다. 이것이 수정자본주의다. 시장의 역할에 초점을 맞춘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정부의 개입이라는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요소를 섞었다고 해서 혼합경제체제 (mixed economic system)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제는 세계 어디에서나, 미국에서든 남한에서든, 순수한 자본주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자본주의는 수정되면서 발전해온 것이다.

    요즘은 자본주의라는 말조차 잘 쓰지 않는 경향이 있다. 자본주의라는 말을 생략한 채 시장경제라고 강조하거나 ‘시장민주주의(market democracy)’라고 부르기도 한다. 자본주의 하면 빈익빈부익부 또는 황금만능 등의 부정적 개념이 먼저 떠오르지만, 시장이란 말은 수요와 공급에 의한 자유로운 소통을 먼저 연상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공산주의를 알기 위해서는 사회주의부터 알아보는 것이 좋다. 대개 둘을 같은 것으로 쓰고 있지만, 공산주의가 목표나 결과라면 사회주의는 과정이나 수단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는 사회주의가 지향하는 마지막 단계 또는 종착점이요, 사회주의는 공산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시작 단계 또는 출발점이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 세상에 공산주의 국가는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북한을 포함해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국가들이 다소 있었을 뿐이다.

    북한은 헌법 서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의 사상과 령도를 구현한 주체의 사회주의 조국이다”고 선언하고, 제1장 제1조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체 조선인민의 리익을 대표하는 자주적인 사회주의 국가이다”고 규정하고 있다. 나라의 이념이나 사상 또는 체제를 사회주의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어서 그 개념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렵지만, 말 그대로 사회의 조화와 평등을 강조하는 이념이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단점이나 폐단이라고 할 수 있는 사유재산에 따른 부의 편중이나 사회적 불평등 또는 모순 등을 극복하거나 개선하기 위해 발전되어온 사상이기 때문에,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기본 원칙이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가장 근본적이고 큰 차이는 사유재산을 인정하느냐 금지하느냐는 점일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유재산의 대상이 생산수단에 한정된다는 사실이다. 개인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소비하는 재물, 또는 쉽게 말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물품들인 음식, 옷, 가구, TV와 냉장고 같은 가전제품 등은 물론 값비싼 자동차도 개인이 가질 수 있다. 북한에도 관용차 말고 자가용을 굴리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어떤 물건을 만들어낼 때 노동의 대상이나 도구가 되는 생산수단은 개인이 가질 수 없다. 식량을 만들어내는 데 필요한 토지나 지하자원 그리고 옷이나 가구를 만들어내는 데 필요한 원료나 기계 등은 가질 수 없다는 뜻이다. 간단히 말해 가장 대표적인 생산수단은 농장과 공장인데 이런 것들은 국가나 공공기관만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헌법 제2장 제20-22조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생산수단은 국가와 사회협동단체가 소유한다. 국가소유는 전체인민의 소유이다. 국가소유권의 대상에는 제한이 없다. 나라의 모든 자연부원, 철도, 항공, 운수, 체신기관과 중요 공장, 기업소, 항만, 은행은 국가만이 소유한다. 국가는 나라의 경제발전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는 국가소유를 우선적으로 보호하며 장성시킨다. 사회협동단체 소유는 해당 단체에 들어있는 근로자들의 집단적 소유이다. 토지, 농기계, 배, 중소 공장, 기업소 같은 것은 사회협동단체가 소유할 수 있다. 국가는 사회협동단체 소유를 보호한다.”

    거듭 강조하자면, 소비재는 자동차처럼 아무리 비싸고 큰 것이라도 개인이 가질 수 있되, 생산수단은 땅이 손바닥만 하고 공장이 아무리 조그만 해도 개인이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참고로 중국은 지속적인 개혁개방을 통해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크게 받아들여 오고 있는데, 생산수단 가운데 공장이나 기업은 개인이 가질 수 있게 되었지만, 아직 땅은 한 평도 가질 수 없다. 농지에 대한 경작권은 가질 수 있어도 소유권은 가질 수 없으며, 공장을 세워 그 건물은 사고 팔 수 있어도 공장이 들어선 땅은 사고 팔 수 없다는 뜻이다.

    사회주의에서 생산수단을 개인이 갖지 못하게 하는 배경이나 이유는 노동력 착취를 막기 위해서다. 예를 들어, 한 개인이 농장이나 공장을 가지고 있으면 그 자신은 직접 일을 하지 않고도 일꾼들의 노동을 통해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농장이나 공장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생산한 것을 자신이 직접 갖지 못하고 지주나 공장주로부터 노동의 대가 또는 임금을 받을 뿐이다. 이 과정에서 농장이나 공장 등 생산수단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노동력을 빼앗게 되는데, 사람이 사람을 착취하는 비인간적인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생산수단을 국유화 또는 공유화한다는 것이다. 농장과 공장 그리고 기업 등이 소수 개인의 이윤추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공공사회의 필요를 위해 운영되도록 하기 위해서다.

    마르크시즘(Marxism)이라 불리는 과학적 공산주의 또는 현대공산주의는 1848년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을 내놓으면서 이론적 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사상이다. 1818년 독일에서 태어난 마르크스가 대학을 졸업하고 신문기자로 일하다 프랑스를 거쳐 영국에서 생활할 때는 산업혁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기계와 공장의 등장으로 경제가 크고 빠르게 성장하는 가운데 농업사회가 공업사회로 바뀌어갔다. 이런 공업화 과정에서 그는 노동자들이 한낱 기계의 부품으로 전락하는 한편 공장주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을 보면서 공산주의사상을 발전시킨 것이다.

    공산주의는 궁극적으로 전 세계 모든 인류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이상적 사회를 목표로 한다. 공산주의가 이루어지려면 기본적으로 3가지가 없어져야 된다. 첫째, 부의 편중이나 사회적 불평등을 불러오는 사유재산이 사라져야 한다. 사회주의의 기본원칙으로 공산주의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사회적 갈등과 대립을 일으키는 계급이 사라져야 한다. 노동력을 착취하는 자본가계급이 제거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셋째, 인민의 자유로운 생활을 간섭하고 통제하는 정부가 사라져야 한다. 따라서 공산주의는 무소유(無所有), 무계급(無階級), 무정부(無政府)의 3무 사회를 이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공산주의의 배경과 목표는 참 훌륭하고 바람직하다.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민족이나 국가를 초월해 하나가 되어 아무런 간섭이나 통제 없이 능력껏 일하고 필요한 만큼 분배받는 사회가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이를 실현하는 데는 몇 가지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첫째, 개인이 생산수단을 갖지 못하게 되면 자본가들의 노동력 착취가 없어지고, 양극화나 빈익빈부익부 현상 같은 부의 편중이나 사회적 불평등이 일어나기 어렵겠지만, 생산성이 크게 떨어져 경제 성장도 이루기 어려울 것이다. 경영자나 관리자 처지에서는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소위 주인정신이 약해 소홀하기 쉽고, 노동자 입장에서는 근로의욕을 높이는 유인책(인센티브)이 적어 최선을 다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기업 또는 민영기업보다 공기업이나 국영기업의 생산성이 떨어지는 이유요, 자본주의국가보다 사회주의국가의 생산성이 뒤처지는 배경이다.

     

    둘째, 더욱 심각한 문제는 계급을 없애는 과정에서 폭력을 부추기거나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계급이란 군대나 경찰 등의 조직에서 신분이나 직위가 높고 낮음을 구분하는 단계가 아니라, 서로 이해관계가 달라 갈등하고 대립하며 투쟁하는 집단을 일컫는다. 예를 들면, 고대의 귀족과 노예, 중세의 영주와 농노, 근대의 자본가와 노동자가 각각 계급을 이루는 것이다. 이렇게 시대마다 상반되는 집단들 사이의 대립과 투쟁을 통해 인류가 발전해왔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인류의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했다.

    공산주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자본가 계급이 없어져야 한다고 했는데, 자본가들이 스스로 사유재산을 내놓고 노동자 계급으로 변신할 수 있을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노동자 계급이 자신들을 착취하는 자본가 계급을 물리쳐야 하는데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자본가들이 생산수단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축적된 부를 통해서 온갖 정보 및 통제나 회유 수단을 가지며, 권력과 결탁하거나 아예 권력을 잡기까지 하는 마당에, 노동자들이 무슨 수로 자본가들을 타도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이에 마르크스는 모든 노동계급이 단결하여 혁명을 통해 지배 계급을 바꿀 수 있다고 했다. 그게 바로 ‘프롤레타리아(노동자) 폭력혁명’이다. 계급을 없애는 것은 폭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말인데, 폭력적 수단에 의하지 않고 공산주의를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이 공산주의의 심각한 문제다.

      셋째, 노동자혁명을 통해 자본가 계급이 타도된다 할지라도 공산주의가 실현될 때까지는 독재정치를 실시해야 한다는 것도 비판받아야 할 점이다.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생산수단의 사유화를 금지하고 계급을 폐지하더라도 모든 인민이 한결같이 당과 국가의 방침이나 정책을 지지하거나 따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당이나 국가의 결정을 지지하고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인민민주주의를 실시하지만, 그 결정에 반대하거나 저항하는 개인이나 집단에 대해서는 불순분자 또는 반동세력으로 몰아붙이고 무자비하게 숙청하며 독재를 시행하게 된다. 이른바 프롤레타리아 독재다.

      요약하자면 공산주의가 태어난 배경이나 지향하는 목표는 훌륭하고 이상적이지만, 공산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과정이나 수단은 폭력적이고 독재적이라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4. 남북한 통일을 지향하며
    남한의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그리고 북한의 인민민주주의와 사회주의는 각각 장점과 단점을 지니고 있다. 남한은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이념을 발전시키되 ‘사회적 평등’을 중시하는 북한 체제의 장점을 조금씩 받아들이는 게 바람직하다. 바꿔 말해 복지정책을 지속적으로 확대하면 된다. 북한은 ‘사회적 평등’을 중시하는 이념을 발전시키되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남한 체제의 장점을 조금씩 받아들이는 게 좋다. 쉽게 말해 개혁개방을 지속적으로 확대하면 된다. 그러면 남북이 이제까진 70년 안팎 헤어져 서로 다른 이념과 체제 아래서 살아왔어도, 앞으로는 자유와 평등이 적절하게 어우러지는 복지 사회를 지향하며 통일을 추구할 수 있지 않겠는가.

      * 이 글은 2017년 11월 3일 경기평화교육센터에서 “남북한 체제 비교”를 주제로 실시한 강의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인민민주주의(人民民主主義, 러시아어: Народной демократии, 영어: people's democracy) 또는 민중민주주의(民衆民主主義)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이론상 개념 중 하나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소비에트 연방 과학 아카데미 사회과학원은 각 약소국의 혁명 모델을 연구하였고 그 결과 ‘인민민주주의’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이 인민민주주의 혁명 이론에 근거하여 동유럽과 아시아 각국 공산당에 산업프롤레타리아·농민·지식인·소부르주아의 연립 정권을 구성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악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종전 후 갑작스러운 공산화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수월하게 사회주의로 나아가기 위해 다양한 계급을 하나의 혁명집단으로 묶을 수 있는 역량을 확보할 정치적 여유를 벌기 위함이다. 두 번째는, 동유럽과 아시아 일대의 경제혁 생산력은 상당히 낮았기에 자본주의가 들어선 적이 없다는 평가에 기초하여, 해당 사회를 반봉건사회(半封建社會)라 규정하고, 민주주의 혁명을 선차적으로 도모하려는 의도이다.[1]

    본래 인민민주주의와 유사한 이론적 개념은 1928년 12월 10일 코민테른에서 발표한 ‘12월 테제’에서 등장하나[2], ‘인민민주주의’라는 용어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소비에트 연방 사회과학원에서 만들어졌다. 소비에트 연방 사회과학원은 식민지 국가, 약소국과 특히 중국의 혁명을 연구하였다. 연구 결과 기존 서구의 부르주아와 달리 약소국의 부르주아는 민족 독립을 중시하는 동시에 진보적인 성격을 강하게 갖춘 부르주아라는 것이 밝혀졌다. 특히 중국의 부르주아 지식인은 서구의 불충분한 부르주아 혁명을 비판적으로 흡수했기에 서구 부르주아 민주주의 초기에서 드러났던 일련의 비민주적인 양상도 또한 성찰할 수 있었다. 동시에 중국의 사회주의 운동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 활동가와 민족 부르주아 지식인이라는 두 축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게 되었다. 소비에트 연방 사회과학원은 이러한 현상이 모든 약소국에서 발생하는 현상이라고 분석한 후 이들의 혁명 흐름을 ‘인민민주주의 혁명’이라고 정의하였다.[3]

    중요한 것은 인민민주주의 혁명의 객관적 조건이 성립되는 사회구성체는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아닌 반봉건사회라는 것이다. 반봉건사회는 완전한 봉건사회도, 완전한 자본주의 사회도 아닌 중간 상태를 의미하며, 제국주의 침탈을 위한 자본주의적 생산 구조가 협소적으로 진행된 상태의 구(舊)식민지 또는 신(新)식민지 상태와 겹친다. 코민테른의 12월 테제에 따르면 제국주의 시대에서 약소국은 제국주의 국가의 세계 재분할 감행에 의해 온전하게 부르주아 혁명을 완수할 수 없으며, 자본가가 혁명을 주도할 수도 없다. 이 시기 혁명은 노동자·농민·소상공인·민족자본가·지식인의 연합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으며, 혁명은 반봉건적 사회구성체를 파괴하여 참된 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성격을 갖추게 된다.

    레닌의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당의 두 가지 전술』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할 수 있으며, 그 형태는 세계의 생산 관계의 일정 정도와 긴밀하게 연관되어있다.

    부르주아의 계급 독재(이것은 흔히 ‘자유민주주의’라고 불린다) 아래에서 시민에 의거하는 통치를 주창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그 정치의 정체성이 소수의 자본가와 다수의 군중(群衆, Массы)에 몰려져 있다. 여기서 군중이란 계급 의식이 없거나 희미한 개체를 뜻하는 말로, 인민(人民, Народ)과 차별적으로 쓰인다. 낡은 생산 관계를 유지하려는 부르주아 계급은 인간 개체가 유적 존재(독일어: Gattungswesen)로서 사람인, ‘인민’이 되는 것을 막고 오로지 군중으로서, ‘군중에 의거한 통치’를 형식적인 표어로 삼고 있다. 그러나 군중은 계급 의식이 없거나 희박하며, 역사 발전의 원동력인 생산 관계와 생산력 사이의 모순을 제대로 인식해내지 못 하기에, 그들 스스로가 유적 존재가 되지 않는 한 전근대와 차별화되는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를 통치 원리로서 구현할 수 없다. 한편, 부르주아는 자본주의적 소유 구조에서 스스로의 경제적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정치적, 법적 장치를 ‘법치’와 ‘인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하나씩 도입한다. 군중은 부르주아의 이러한 정치적 행동에 때때로는 찬동하며, 동시에 반대하기도 한다. 이들은 스스로의 진정한 권리를 찾는 거시적인 방법을 모르며, 특정 정치인, 특정 담론에 얽매여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한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이러한 총체적 난국 속에서 ‘부르주아적 자유’는 이러한 상태를 부추길 뿐, 그 어떤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기대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레닌은 부르주아적 자유가 인민과 프롤레타리아에게 전혀 필요없는 것이며, 인민의 이해와 대립하는 것이라고 하였다.[4][5]

    이러한 의미에서 군중은 인민과 다르다. 여기서 인민은 무산계급을 뜻하는 프롤레타리아와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적대적 모순 그 자체인 계급 모순을 체화하는 주체이다. ‘계급 투쟁이라는 본질을 가진 적대적 모순’ 그것 자체의 현상으로 주요 모순이 되었을 때, 프롤레타리아는 이러한 주요 모순에 참가하는 계급 투쟁의 최일선에 있는 계급이다. 반면 인민은 이러한 적대적 모순이 제국주의 단계에서 불균등 발전 법칙에 의해 여러 양태로 화(化)하였을 때, 그러한 변환된 모순을 인식하는 개체라고 해야 옳다. 따라서 인민은 프롤레타리아 계층이 아닌 지식인, 소부르주아 계층에서 충분히 등장할 수 있다.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은 『미국 노동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기만성에 관해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가장 민주주의적인 부르주아 공화국도 자본이 근로자를 탄압하기 위한 기관, 자본이 정치권력의 도구, 부르주아 독재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으며 또 될 수도 없었다. 민주주의적 부르주아 공화국은 다수자에게 권력을 약속하고 그것을 선언했으나 토지와 그 밖의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가 존재하는 한 결코 그것은 실현될 수 없다. 부르주아적 민주공화국에서는 ‘자유’란 실제로는 부자를 위한 자유였다.

    — 블라디미르 레닌, 『미국 노동자들에게 보내는 편지』(1918년 8월 20일)[6]

    소비에트 연방의 공산주의자인 로이 메드베데프(Рой Медве́дев)는 자신이 저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에 대하여』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해 이렇게 논하였다.

    우리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논할 때, 그것을 불안전한 환상적인, 기만적인, 책략적인 효과를 노린 것 등으로 멸시하는 것이, 습성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렇게 취급하는 것은 편파적이요, 잘못된 것이다. 물론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아주 제한된 민주주의며, 따라서 비판의 여지가 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는 노동자와 자본가, 빈자와 부자에 대하여 기회가 평등치 않다는 것을 입증하기는 쉬운 일이다.

    — 로이 메드베데프,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에 대하여』(1975년)[7]

    결과적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근대적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자연법 사상과 인간이 갖는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변증법적 함의’ 둘 사이를 연결할 수 없으며, 이에 따라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진보하는 민주주의’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갖는 외형적 형식을 갖추기 위하여 ‘실증성에 기초한 법치로서 법치주의’를 주창한다. 이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스스로가 민주주의에 대해 근본적인 수사(국민 주권, 사회계약에 기초한 헌법 원리 등)를 부여하면서도 놓지 않는 것이며, 모순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경험 단계의 지각적 지반을 통해서는 민주주의의 성격과 그 정당성을 정초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역사적 실례(實例)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1789년의 프랑스 혁명과 1848년의 프랑스 2월 혁명은 민주주의를 부르짖은 것이었으나, 실제로 이러한 대사건이 진정한 의미에서 민주주의의 달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 근거로 프랑스는 1789년 기준으로 약 150년이 지나서야 여성의 참정권이 인정되었다. 노동조합 활동의 보장은 140년이 지나서야 보장된 것이다. 1783년 미국 혁명 시점에서 여성에게 참정권이 보장된 시점은 1920년이다. 영국의 경우도 1912년이 되어서야 보장이 되었지만 그 조건은 완전히 동등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그것 자체로 진보하는 민주주의라고 할 수 없으며, 민주주의적 통치 원리 보장성을 완전히 충족하지 못 한다. 반면 러시아 10월 혁명은 곧바로 남성과 완전히 동등한 여성 참정권을 보장하였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성립된 수많은 인민민주주의 국가의 경우도 양성의 동등한 참정권 및 개인이 행사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 권리를 상당 부분 보장하였다.

    군중 집단은 계급의식이 없는 것과 무관하게,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내포한 모순을 직접적으로 느끼고 있다. 따라서, 비본질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군중 집단의 저항이 생겨날 수 있다. 이러한 저항은 소부르주아적 사회주의로 귀결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부르주아가 모든 생산 관계를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군중이 직접적인 행동에 기반한 정치 캠페인을 통해 닥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일종의 망상이다. 이러한 운동은 참여민주주의나 직접민주주의 운동으로 표현된다.[8] 하지만,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 나타나는 문제는 근본적으로 부르주아가 생산 수단을 독점하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여러 장치를 도입하며, 이러한 장치를 고수하기 위한 다층적 폭력을 실시하는 데에 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모든 모순, 사회적 문제, 빈곤의 문제는 이러한 것과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구조는 상당히 입체적이다. 그러나, 소외된 군중은 이러한 문제를 인식할 수 없으며, 계속하여 특정한 담론과 미시적인 정책, 더 나아가서는 정치적으로 선전이 잘 된 인물에 대한 광신적인 숭배를 통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문제점을 영영 해결할 수 없는 길로 가게 된다.[9]

    이탈리아의 공산주의자인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는 군중이 부르주아를 넘어서지 못 하였으며, 부르주아의 정치적 패턴을 분석하는 데 실패했지만, 부르주아는 군중의 정치적 패턴을 대부분 이해하였다고 분석했다. 그리하여 부르주아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사회에서 군중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반동성을 되려 유지하는 행동 방식을 문화적 차원에서 강화하는 방식을 선호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문화 패권’이라는 개념이 정립된 것이다. 그람시는 이어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특징을, ‘인간의 정치적 본성과 괴리된 법률에 대한 숭배’(부르주아 법치주의),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 한 상태에서 행동하는 군중의 정치적 권리’(부르주아 인권), ‘사물에 대한 수동적이고도 기계적인 반응과 그 과정을 자유로 착각할 자유’(부르주아 자유)라는 세 가지 특징으로 정리하였다.

    인민민주주의는 계급 의식에 기초한 사람에 기반하는 민주주의이다. 이는 정확하게 말하여, 생산 관계와 생산력 사이의 모순에서 시발(始發)하여 생성된 수많은 주요 모순을 파악할 수 있는, 유적 존재에 의거하는 민주주의적 통치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인민민주주의는 사회주의 단계라고 취급할 수 없으나, 이 정체(政體)에서 대부분의 공민은 사회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계급 투쟁 의식을 항상 갖는 것으로 간주된다.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당의 두 가지 전술』에서 레닌은 러시아 제국이 제국주의의 약한 고리이기 때문에 과거 서유럽의 전통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경로로 나아갈 수 없다고 하였다. 레닌은 러시아의 민주주의 혁명은 노동계급과 농촌 소부르주아 계급의 연합으로서 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레닌은 위 두 세력이 이중 권력 체계로 이끄는 민주주의를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라고 칭하였다. 이 개념은 인민민주주의와 유사하나, 본질적으로는 다르다.

    인민민주주의 국가의 정책은 사회주의 국가의 일반적인 정책과 분명히 차이가 있다. 이 단계는 사회주의 혁명의 객관적 조건을 달성하기 위한 기간이다. 따라서 경제 운영에 있어서 전면적인 국유화가 아닌 국유화와 집체소유(混合所有)의 혼합 방식을 채택한다. 또한 정당 정치에도 몇 가지 차이점이 존재한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국유화는 경제 운영 골격의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민민주주의 혁명이 목표로 되는 사회구성체는 봉건적 소생산 체계와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가 혼재된 상태이며, 인민민주주의 혁명은 이 반봉건 체제를 타파하는 데에 그 목적성이 있다. 특히 소생산 경제 주체의 수는 상당히 많기에 이들을 한꺼번에 국유 조직에 흡수하기 힘들다. 따라서 봉건적 소생산 구조는 소멸하고, 대신에 소생산자(중소 및 영세자영업자 등)는 생산자 협동조합으로 편입되어 자기 노동에 기초한 수익을 보장받는다. 이러한 집체소유법은 사회주의 단계에서도 유지된다.

    토지 개혁은 토지 소유권을 일체 소멸하는 전면적인 토지 국유화가 아닌, 토지 분배의 성격을 강화한다. 따라서 농민은 토지 소유의 주체로서 법적 효력을 가지며, 소작제 폐지, 몇 가지 징세 제도와 소유 가능 토지 면적 제한 등을 통하여 반(半)봉건적 토지 소유 구조의 부활을 막는다.

    불로소득자 및 임대업자는 공업화가 진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거에 소멸하기 힘들기에, 사회주의 공업화의 객관적 조건이 성립될 때까지 표준임대료제를 통하여 임대료의 폭증을 막는 동시에 임대료를 대폭 낮춘다. 중국과 베트남 인민혁명 과정에서 실제 적용된 감소폭은 최소 30%에서 최대 50% 수준이었다. 불로소득에 기생하는 지주는 소멸하게 되며, 임대업자는 추가적인 노동을 하지 않을 경우 제한된 소득만을 얻게 된다. 단, 이 과정은 각국마다 그 조건에 따라 상이하게 달랐으며, 동유럽의 인민민주주의 혁명에서 임대업자는 곧바로 소멸되었다. 사회주의 토대가 확립되었을 때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한 모든 임대-임차 관계가 청산된다. 이러한 혁명 과정이 진행되는 동시에,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의 장(場)이라고 할 수 있는 대량 생산 체계를 갖춘 공장업은 사회주의적 국유화를 통하여 사회주의 형성의 객관적 조건을 마련하게 한다. 인민민주주의 경제 구조에서 공장의 프롤레타리아는 인민민주주의의 강화와 더불어, 사회주의로의 진보를 추동하는 핵심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주의 혁명의 객관적 조건이 전(全) 사회적인 것으로 될 때, 인민정부는 토지 국유화를 점진적으로 수행하고, 소농 및 영세농이라는 소생산자의 성격을 갖고 있는 농민을 협동농장의 일원으로 전환한다. 이 과정에서 농민은 소생산자 성격이 사라지며 농업 프롤레타리아로서 기능할 수 있다.

    직접 투표에 기초한 보통선거제, 여성 참정권 완전 보장, 여성 인권 증진, 노예제도 폐지, 국내 외국인이 가질 수 있는 권리 등을 보장한다. 그러나 인민정부는 인민민주독재(人民民主獨裁) 권력이기에 불로소득 기생자·매판지주·매판자본가·기타 착취자 등에 대해서는 폭력을 수반하는 독재를 실시한다.

    행정 조치에서 ‘법률우위의 원칙’이 폐지되고, 개별 사안에서 기만적인 ‘법리’(法理)보다는 인민의 의사를 중점에 놓고 판단한다. 카를 마르크스와 블라디미르 레닌은 자유로운 공화국인 부르주아 공화국이 기존의 자연법사상을 망각하고, 스스로의 반인민적 지배를 위해 현상적 차원에서 규정된 개법(個法)을 헌법이라는 이름으로 권위를 부여한 후 법률을 부르주아 독재의 수단으로 여길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이것은 민주주의 발전에 합치하는 것이 아니며,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참된 민주주의가 될 수 없는 이유라고 하였다. 여기서 인민에 의한 정치는 법률적 토대 위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닌, 각 지역에 조직된 문화·생산 조합과 인민위원회의 의사를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것을 의미한다.[10]

    인민민주주의 국가에서 법률은 미시적 차원에서 인민민주독재가 작용되는 범위를 대략적으로 조율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또한, 인민민주독재가 개별적으로 해결할 수 없으며, 민주주의 발전과 관련이 없는 개인과 개인 사이의 문제, 민사상의 법률 문제는 관련 법률을 적용한다.[10]

    법률 성격, 법률이 적용되어야 하는 범위의 확립 및 제한점을 기준하는 인민민주주의 국가의 특성은 사회주의 성립 이후에도 유지·발전된다.

    복지라는 개념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반봉건국가나, 최소한 수준의 복지만 갖추고 있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달리, 인민정부는 교육·노동·식량·의료·주거 차원에서 전향적인 복지가 이루어진다. 인민정부가 실시하는 복지는 국가주도의 복지로, 민간사회복지업체·민간자선사업체에 의한 자본주의적 복지랑 상당히 다른 구조를 갖추고 있다. 그 첫 번째 시도는 복지 시설의 대대적인 국유화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후 대부분의 주거와 일정 식량 및 생필품은 무상으로 분배되며, 무상 교육, 무상 의료가 실시된다. 노동권은 직장배정제(職場配定制)를 통하여 보장된다. 특히 주거 지대와 작업장 지대 내 국립탁아소 건립 및 주요 직종 할당제 실시를 통한 여성 복지 강화는 인민정부 주도 민주주의 시책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이다. 이러한 복지 체계는 사회주의 단계에서도 유지·발전된다.

    소생산자 및 중소기업에 대한 재정 지원도 또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제도의 실질은 점진적인 국유화 및 집체소유화와 병행하며 이루어진다.

    인민민주주의 정당 정치는 형식적으로 다당제(多黨制)에 기초하고 있으나, 사회주의 혁명의 객관적 조건으로 향하기 위한 혁명을 지도하는 중심 세력은 프롤레타리아이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전위정당이 실질적으로 정치를 주도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도력은 정당 정치라는 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프롤레타리아 전위정당 주도의 사회 변혁 과정(형식적 정당 정치가 아닌 영역)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정당 정치는 형식적으로 다양한 계급·계층 조직의 이해를 대변한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전위정당이 갖는 실질적인 권력으로 인해 다양한 계급·계층의 이해가 제대로 반영되기 어려울 수 있다. 이에 따라 인민정부는 다양한 계급·계층 조직의 연립체인 통일전선체(統一戰線體)를 조직하여야 한다.

    경제 조직의 사회주의화는 프롤레타리아 계급 역량을 확보하게 할 것이고, 정당 정치에서 다양한 계급 이해와 프롤레타리아의 이해 사이의 괴리는 점점 좁혀질 것이다. 사회주의로의 단계가 완성될 때 정당 정치는 프롤레타리아 전위정당에 의해 독점적으로 운영될 것이다.

    인민민주주의 국가에서 삼권분립(三權分立) 또는 이권분립(二權分立)은 사라지거나, 형식적으로 존재하더라도 제기능을 하지 못 하는, 사실상의 폐지 상태로 된다.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 이론에서 권력 분립의 이데올로기와 법적 토대는 자유주의 성립 초기 부르주아들과 봉건영주 사이의 타협으로 성립된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카를 마르크스는 물론이고, 블라디미르 레닌, 체 게바라 등은 삼권분립 또는 이권분립이 자유주의자들이 혁명기 과정에 봉건영주 세력과 타협한 산물일 뿐이라고 주장하였으며, 봉건 세력과의 타협에 기초한 불완전한 민주주의가 그 자체의 모순으로 인해 참된 민주주의로서 기능하지 못 하는 하나의 증거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또한,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최고로 성숙하게 될 경우, 삼권분립과 이권분립이 인민의 직접적이고 실천적인 정치 권력 행사를 제한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하였다.[10]

    반봉건적 생산 관계를 일체 철폐함으로써 부당한 징세 제도는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그러나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징세 제도는 재정 운영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인민정부는 사회주의 구조로의 진입 조건이 생성될 때까지 소생산자(농민, 기타 자영업자 등), 중소기업에 대해선 징세를 펼친다. 따라서 토지세, 법인세, 일부 소득세, 공과금 제도는 당분간 유지된다. 경제 영역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객관적 조건이 마련될 때 소생산자의 수는 적어질 것이며, 대다수의 농민은 협동농장으로 나아가 농업 프롤레타리아로서 기능하고, 기업의 국유화는 상당한 수준으로 진행된 상태일 것이다. 이에 따라 인민정부를 징세 제도의 단계적인 폐지를 실시한다. 사회주의 국가가 된 상태에서 징세 제도는 극히 일부의 공과금 제도를 제외하고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인민민주주의 국가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종전 급증하였다. 1960년대 이후 몇몇 인민민주주의 국가는 헌법을 개정하여 자국이 사회주의 단계에 들어섰음을 선포하기도 하였다. 보통 인민민주주의 단계를 완수하고, 사회주의 단계에 들어서면 국호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변경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사회주의 단계에 들어섰음에도 ‘공화국’ 또는 ‘인민공화국’이라는 국호를 그대로 유지하는 경우도 일부 존재한다.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은 자국을 인민민주독재(신민주주의)에 기초한 국가로 규정하고 있다. 이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사회주의 단계로 들어섰다는 뜻이 아닌, 인민민주주의 단계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라오스를 제외한 나머지 베트남·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쿠바 등은 헌법에서 자국이 엄연히 사회주의 단계에 들어선 사회주의 국가임을 명시하고 있다. 그 자세한 정보는 다음과 같다.










































    2025 아모스


    정보화 / Informatization
    글로발화 / Globalization
    디지탈화 / Digitalization


    현대화, 그 변화의 물결 -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의미

    “현대화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묻고, 또 고민하는 질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은 과거와 분명히 다른 점이 많죠. 그런데 이 ‘다름’이 바로 ‘현대화’의 흔적입니다. 현대화는 단순히 기술이 발전하고, 도시가 커지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방식, 생각하는 방식, 그리고 관계 맺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변화의 과정입니다. 그렇다면, 이 변화는 어떻게 우리 삶에 영향을 미쳤을까요? 한번 되돌아보는 것도 좋겠죠.

    과거와의 단절, 그리고 그 시작

    현대화는 단순히 ‘산업화’라는 단어 하나로 설명될 수 없습니다. 이는 18세기 산업 혁명에서 시작되었고, 점차 전 세계를 뒤흔들며 오늘날의 모습을 만들었죠. 물론 그 시절 사람들은 기계가 사람의 일을 대신할 수 있다는 상상을 하며 ‘미래’를 그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미래가 실제로 눈앞에 펼쳐진 순간, 사람들은 무엇을 느꼈을까요? 바로 ‘변화’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흐릅니다.

    산업화라는 파도가 덮친 후, 농업 중심 사회에서 제조업과 서비스업이 경제의 중심으로 자리잡으면서, 사람들의 생활과 사고방식도 큰 전환을 맞이했어요. 다시 말해, 우리가 지금 ‘현대’라 부르는 이 시대는, 사실 아주 오랜 시간 전부터 차근차근 걸어온 길이라는 거죠.

    현대화의 다양한 얼굴들

    현대화는 너무나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어요. 그 변화의 중심에는 기술, 교육, 그리고 사람들의 이동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농촌에서 도시로 몰려드는 도시화 현상은, 현대화를 대표하는 중요한 특징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자주 떠올리는 고층 빌딩들, 복잡한 교차로들, 그리고 늘 분주한 사람들. 이 모든 것은 도시화의 산물입니다. 이 도시 속에서 사람들은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새로운 생활을 만들어갔습니다. 그럼, 이 변화들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 산업화 : 경제의 중심이 농업에서 산업으로 바뀌었어요. 이를 통해 생산성이 크게 향상되었고, 경제는 급격히 성장했죠.

    • 도시화 : 대도시로의 인구 집중은, 서울처럼 거대한 도시들이 경제 활동의 중심지가 되게 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새로운 사회적 문제도 불러왔죠.

    • 기술 발전 : 기술이 발전하면서 사람들의 일상은 근본적으로 달라졌어요. 스마트폰, 인터넷, 그리고 자동화 기술까지.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만들었죠.

    • 교육의 확산 : 교육이 중요해졌습니다. 단순히 지식 습득을 넘어서, 전 세계가 연결되는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수적인 능력이 되었죠.

    • 문화의 세속화 : 전통적인 가치관이 변화하고, 개인의 자유와 합리적인 사고가 더욱 강조되었어요. 이 변화는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한국 사회와 현대화의 흐름

    한국은 20세기 중반 이후 급격한 현대화를 경험했어요. 특히 1960년대 경제 개발 계획을 통해 산업화를 추진한 결과, 한국은 짧은 시간 안에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뤄냈습니다. 그런데, 그 이면에는 또 어떤 변화들이 있었을까요? 우린 이 과정을 어떻게 느꼈고, 또 무엇을 배웠을까요?

    • 경제 성장: 현대화가 가져온 빠른 경제 성장 덕분에, 한국은 이제 세계 경제 강국 중 하나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 도시화와 인구 집중: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로 인구가 몰리면서, 여러 사회적 문제가 등장했습니다. 주택 문제, 교통 체증, 그리고 환경 문제 등...

    • 문화적 변화: 한국 사회의 전통적인 가족 구조와 가치관에 큰 변화가 있었고, 이는 새로운 문화적 흐름을 만들어냈습니다.

    • 교육의 확대: 한국은 교육에 대한 투자와 중요성을 점차 확산시켰습니다. 덕분에 ‘고학력 사회’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교육의 질이 높아졌죠.

    디지털화와 미래 사회를 향해

    오늘날 현대화는 더 이상 단순한 산업화에 그치지 않고, 디지털화, 정보화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4차 산업 혁명’이라는 용어가 일상적으로 사용될 만큼, 기술 혁신은 이제 우리가 사는 방식을 더 빠르고, 더 스마트하게 바꿔놓고 있어요. 
    그런데 과연 이런 변화가 끝일까요? 
    아니죠, 현대화는 계속해서 진화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앞으로 어떤 세상에서 살아가게 될까요?
    물론, 그 과정에서의 사회적 불평등, 환경 문제 등은 여전히 큰 고민거리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진정한 ‘지속 가능성’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앞으로의 현대화는 더욱 포용적이고, 지속 가능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필요가 있겠죠.

    결론 :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

    현대화는 단지 ‘경제 성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사회의 구조를 바꾸는 근본적인 변화의 과정입니다.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는 이 현대화를 겪으며 많은 교훈을 얻었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길을 가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점은, 현대화가 계속될수록 ‘지속 가능성’과 ‘포용성’의 중요성이 더 커진다는 사실입니다. 
    이 두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미래 사회를 준비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일 것입니다.

    급변하는 시대, 현대사회의 특징과 과제

    현대사회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시기입니다. 기술의 발전, 경제 구조의 변화, 그리고 문화적 다양성이 공존하는 현대사회는 많은 가능성을 제공하는 동시에 새로운 도전 과제를 안겨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다양한 차원에서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이를 이해하고 적응하는 것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현대사회의 주요 특징과 그로 인한 영향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오늘날 현대사회의 큰 특징 중 하나는 기술의 혁신과 디지털 기술의 확산입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보급은 정보에 접근하고 소통하는 방식을 혁신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과거에는 정보를 얻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지만, 이제는 몇 초만의 필요한 정보를 손쉽게 검색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소셜 미디어와 같은 플랫폼은 개인이 전 세계의 사람들과 소통하고 자신의 의견을 공유할 수 있는 장을 제공합니다.

    이러한 기술적 변화는 업무의 효율성을 높이고 다양한 경제적 기회를 창출하는 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온라인 플랫폼을 통한 원격 근무와 전자 상거래의 발전은 경제 활동의 새로운 형태를 제시하며 개인과 기업 모두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습니다. 특히, 스타트업이나 소규모 기업은 전통적인 물리적 인프라 없이도 세계 시장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적 발전이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혜택을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디지털 접근성이 부족한 지역에서는 정보와 자원에 대한 불평등이 심화하고 있으며, 이는 기술 격차(digital divide)라는 사회적 문제를 야기합니다. 또한, 개인 정보 보호와 사이버 보안 문제는 현대사회에서 새로운 위협으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현대사회는 또한 글로벌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특징을 보입니다. 국경을 초월한 경제, 문화, 사회적 교류는 현대사회의 핵심적인 요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우리는 이제 전 세계의 상품과 문화를 손쉽게 접할 수 있는 환경에 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다양한 나라의 음식을 맛보거나 해외에서 생산된 상품을 구매하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글로벌화는 기술적 혁신과 더불어 국가 간 경제적 상호 의존성을 높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글로벌화는 긍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역 고유의 전통과 문화가 약화할 위험성이 있으며, 특히 소수 민족의 문화와 언어는 점차 사라져 가는 추세에 놓여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유네스코에 따르면 전 세계 언어의 약 40%가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각국 정부와 국제기구는 소수 언어와 문화를 보호하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글로벌화는 또한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킬 수 있습니다. 다국적 기업이 소수의 국가와 지역에 부를 집중시키면서 저개발 지역의 경제적 종속성을 강화할 위험이 있습니다.

    경제 구조의 변화는 현대사회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입니다. 과거의 제조업 중심 경제는 점차 서비스업과 지식 기반 경제로 전환되고 있습니다. 이는 새로운 일자리와 산업을 창출하는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지만, 자동화와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으로 기존 일자리가 줄어드는 부정적인 영향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공장 생산 라인의 자동화는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대체하며, 많은 사람이 기존의 직업을 잃고 새로운 직업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 놓이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재교육과 평생 학습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정부와 기업은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개인 또한 변화하는 노동 시장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경제 구조의 변화는 새로운 형태의 경제적 불평등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고숙련 노동자와 저숙련 노동자 간의 임금 격차가 확대되는 문제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기후 변화와 환경 문제는 현대사회의 가장 시급한 도전 과제 중 하나로 꼽힙니다. 지구의 평균 온도가 상승하고 기상이변이 빈번해지면서 환경 보호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습니다. 자원의 과도한 사용과 환경 오염은 생태계 파괴를 가속화하고 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적 협력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2015년 체결된 파리기후협정은 지구 온도 상승을 산업화 이전 대비 2도 이하로 억제하기 위한 국제 사회의 공동 노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많은 국가와 기업이 재생할 수 있는 에너지와 친환경 기술을 도입하며 지속 가능한 발전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태양광과 풍력 에너지는 화석 연료 의존도를 줄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전기차와 같은 친환경 기술은 대기 오염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개인 차원에서도 자원 절약, 재활용, 그리고 에너지 효율적인 생활 방식을 실천하는 노력이 장려되고 있습니다.

    현대사회에서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개인화와 디지털 사회적 관계의 변화입니다. 사람들은 점점 더 개인의 목표와 행복을 우선시하며, 이는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동시에 사회적 관계의 약화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소셜 미디어와 같은 디지털 플랫폼은 사람들 간의 연결을 강화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실제 인간관계는 점차 약화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이 온라인에서 활발히 활동하면서도 실제 생활에서는 외로움을 느끼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는 디지털 사회에서의 연결이 종종 표면적이며, 깊은 인간관계를 대신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균형을 맞추고 지역 사회와의 연대를 강화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지역 커뮤니티 활동에 참여하거나 자발적인 봉사 활동을 통해 사회적 관계를 강화하는 것이 한 가지 해결책이 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현대사회는 기술, 경제, 문화, 환경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급격한 변화를 경험하고 있으며, 이는 우리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새로운 기회와 가능성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해결해야 할 과제와 책임을 부여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도전에 대응하고 지속 가능한 미래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협력해야 합니다. 현대사회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변화에 적극적으로 적응하며,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서로 협력하는 자세를 갖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모두의 적은 노력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요즘 시대의 특징 6가지

    1) 요즘 시대 _ 리더십과 조직문화에 영향을 주는 시대적 특징 6가지

    2) 리더십 _ 리더의 역할 재정의와 리더의 시간 사용의 변화 5가지

    3) 조직문화 _ 구성원 모두가 함께 해야 할 행동과 일하는 방식의 변화 5가지

    그 중 이번주 뉴스레터에서는 요즘 시대의 특징 6가지를 공유해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정말 편하게 읽어보시며 우리 회사와 나에게 주는 메시지를 찾아보시면 좋겠습니다.

    ◆ ‘정답이 없고, 지도가 없는 시대’

    ① 퇴사하지 못하는 엘더

    ‘엘더(elder·연장자)’라는 명칭이 새롭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로 50대가 넘어선 선배들 중에 임원이나 팀장이라는 리더십 타이틀을 갖지 못한 직원을 일컫는 말이죠. 수년 전만 해도 은퇴 전 많은 선배들이 퇴사하고 자기 사업을 시작했었는데 요즘 회사 밖에서의 생존이 위험하다고 느끼며 조금 더 조직에서 머무르려는 직원들이 많아 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생긴 용어입니다.

    저 또한 많은 대기업들과 프로젝트를 함께하고 있기에 이 메시지의 무게와 어려움을 직간접적으로 느낄 수 밖에는 없더라고요.

    A팀장님은 팀원 7명 중에 3명이 과거 자신의 팀장이었던 분이고, 팀에서 가장 연봉이 높았던 25년차 부장님이 영수증 정리를 하고 있었고 대리/ 과장들이 중요한 기획서를 작성하고 있는 B팀장님의 고민도 참 해결하기 어려웠었습니다. 또 어떤 부서는 고참 임원과 고참 팀원들로만 구성된 팀을 만들어 어려운 과업보다 익숙하고 해결하기 쉬운 과업을 부여하기도 하죠.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엘더의 연봉이 팀장보다 더 많은 경우가 많이 있다는 것이죠. 이를 지켜보는 요즘 세대들은 ‘왜 연봉을 많이 받는 선배보다 연봉이 낮은 내가 더 어려운 일을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며 엘더와 팀장을 압박하기도 합니다.

    과거 엘더는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조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었습니다. 그들의 경험이 일하는 방식이 되었고, 그 방식으로 성과를 만들어 내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엘더의 지식과 경험이 더 이상 큰 성과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더라고요.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시대의 특징을 조금 이해해 볼 수 있다면 조직의 방향성과 구성원 개개인의 성과와 성장 방정식을 조금은 다르게 기록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② 요즘 시대의 특징 하나, ‘정보의 공유‘

    Knowledge Doubling Speed, 벅크민스터 풀러 박사가 공유해준 지식 배가 곡선의 메시지 입니다. 너무 빠르게 지식이 쌓이고, 새로워 지고 있다는 의미이죠. 이로 인해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과거에는 우리 팀에서 연장자가 가장 많은 지식과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는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모르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죠. 팀장도 비슷합니다.

    이로 인해 한 회사는 다양한 방법을 통해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찾고 공유하고 있죠.

    1) 모든 구성원들이 정기적으로 외부 커뮤니티에 참석하고, 매달 팀 모임에서 그 내용을 공유합니다. 우리가 몰랐던 지식과 경험을 외부로 부터 학습하고 동료에게 공유하는 것이죠.

    2) 이보다 더 강력한 지식 인풋의 방법으로 ‘외부 경력직을 지속해서 채용‘합니다. 이때 채용의 핵심은 ‘우리 회사가 가지지 못한 지식과 경험을 가졌는가?’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리고 외부 경력직이 입사를 함과 동시에 기존 구성원들은 외부 경력자와의 원온원을 통해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학습'하고 자신들의 일하는 방식을 바꾸더라고요.

    3) 주간회의 마다 한 명씩 돌아가며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공유하는 팀도 있습니다. ‘동료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제공한다‘ 라는 목적에 따라 모든 구성원들은 매주 1명씩 20분 동안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발표합니다. 전 직장에서의 프로젝트 경험, 자신이 했던 스터디에서 얻은 인사이트, 외부 멘토와 코치로 부터 얻은 지식 등 모든 것을 공유하는 것이죠.

    이 세가지 행동의 목적은 간단합니다. ‘우리가 모르는 지식을 우리의 업무에 적용하자.’는 것이죠.

    ③ 요즘 시대의 특징 둘, ‘지식의 역전‘

    과거에는 팀장이 가장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의사결정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팀장보다 더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팀원들이 많이 알게 되더라고요. 팀장은 임원과 팀원들 사이에서 너무 바빠 외부 활동이나 학습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팀원들 중 성장과 성공에 관심이 있는 직원들은 외부 커뮤니티, 대학원, 독서 클럽 및 사이드 프로젝트, 외부 멘토와 코치 등을 통해 회사가 가진 지식과 경험 이외에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익히게 되었죠.

    팀장과 엘더가 가지고 있는 과거 지식이 더 이상 지금 시대에 통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는 이들이 바로 ‘선배가 모르는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외부에서 수혈’ 받은 팀원들입니다.

    이들은 팀장과 선배의 조언과 티칭을 ‘꼰대와 라떼‘라며 옛날 지식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특히, GPT와 다양한 IT 도구들, 유투브와 다양한 디지털 도구들은 회사 내 선배가 꼭 필요한 존재인가? 라는 질문을 할 수 밖에 없게 되었죠.

    ④ 요즘 시대의 특징 셋, ‘지식 생산자‘

    임플로이언서 (Employee + Influencer’ 직원들 중에 SNS와 방송 등을 통해 영향력을 갖춘 사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요즘 개인 SNS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참 많죠. 저 또한 페이스북, 링크드인, 브런치, 블로그, 인스타그램에 매일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2018년 7월 1일 네이버 블로그에 글을 매일 쓰기 시작했으니 벌써 2200일이 넘었더라고요.

    유투브에서 ‘백종화‘ 라는 이름을 치면 외부 강연을 했었던 영상들을 찾을 수 있고 5,800여명이 구독해 주시는 뉴스레터와 책도 7권이 출간을 했네요. 직장을 다닐 때 어느 순간 ‘B사를 다니는 백종화‘가 아니라 ‘백종화가 다니는 B사‘ 라고 불러 주시는 분도 계셨습니다. 후배 중에 ‘제가 다니는 회사를 입사하고 싶다'며 이력서를 낸 친구들도 있었고요.

    저는 글이라는 매개로 매일 콘텐츠를 만들어 냅니다. 탁월한 지식은 아니지만, 내 경험과 생각이 필요한 누군가에게는 가장 적합한 지식이 될 수 있는 것이죠. 그리고 그렇게 콘텐츠를 생산하는 활동을 오래하다 보니 여기저기에 제 생각과 경험들이 많아 졌고요.

    지금 시대는 누구나 지식을 만들 수 있는 시대입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지식은 ‘연구기관, 성공한 기업과 경영자, 학자'들의 전유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죠. 초등학생도 자신의 지식을 만들고 공급할 수 있고, 그 누구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있게 된 시대가 된 것이죠. 반면 IT에 능숙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주저하는 선배들에게는 ‘알겠어. 알겠는데 못하겠어.’ 라는 좌절을 주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⑤ 요즘 시대의 특징 넷, ‘기업 내부 지식 생산 / 공유‘

    빠른 기업들은 구성원들이 자신의 성공과 실패 경험을 회사 내 인트라넷에 기록하고 공유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현대 제철의 ‘기술 지식 공유 플랫폼‘. SK 하이닉스의 노하우를 협력사에 공유하는 ‘DBL 스퀘어‘, 수험생의 질문에 교수 / 서포터즈가 1대 1로 답변을 하는 에듀윌의 ‘에지인‘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제 첫번째 직장도 비슷한 플랫폼이 있었습니다. 저음 신입사원으로 입사했던 2004년, 승진을 하기 위해서는 내 성공 사례와 실패 사례를 정리해서 LUTI 라는 플랫폼에 업로드 했어야 합니다. LUTI 점수가 일정 수준을 넘지 못하면 승진의 기회가 박탈 되었죠. 내 지식을 업로드 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다른 선후배가 업로드한 지식들을 읽고 적용하기도 해야 했습니다. LUTI 는 내 지식을 업로드한 숫자와 다른 누군가가 내 지식을 보고 어떻게 적용했었는지를 점수로 환산해서 티칭 점수를 나에게 주었고, 내가 다른 사람들의 지식을 학습하고 어떻게 적용했는지를 보며 학습 점수를 주었거든요. 두 점수가 합산되어서 내가 얼마나 지식과 경험을 공유하고, 학습했는지로 평가 받게 해주었습니다.

    이런 문화가 구성원 모두에게 적용되며 성공도, 실패도 기록하고 공유할 수 밖에 없는 회사가 되더라고요. 그런데 문제는 기업 내부보다 외부에서 지식을 더 많이 찾게 된다는 것이죠. 외부에서 얻는 지식의 양과 질이 내부에서 얻는 것보다 더 탁월하기 때문입니다.

    ⑥ 요즘 시대의 특징 다섯, ‘조용한 소속감‘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2가지 변화가 생겼습니다. 하나는 바로 희미해지는 소속감입니다. 10년 정도 전까지만 해도 ‘평생 직장‘ 이라는 목표가 있었고, 내 지식과 경험을 내 선배들로 부터 얻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회사가 나를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을 모든 직장인들이 알아가기 시작했죠.

    대퇴사의 시대, 대이직의 시대, 조용한 퇴사, 대해고의 시대라는 신조어가 생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는 한번 입사하면 끝까지 책임지는 회사가 아닌, 회사의 상황에 따라 수시로 구조조정과 정리해고가 이루어 질 수 밖에 없는 불확실한 비즈니스 환경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제 똘똘한 직장인들은 평생 직장이 아닌, ‘평생 직업’을 선택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자신의 성장과 성공에 관심 가져주는 사람과 조직을 선호하는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⑦ 요즘 시대의 특징 여섯, ‘공존의 시대‘

    또 다른 변화는 앞에서 이야기한 평생 직업을 선택하며 자신의 업에서 주도권을 가져간 직장인 외에 ‘편안하게 일을 하며 은퇴하겠다는 마음을 가진 배짱이들’도 많아지기 시작했다는 것이죠.

    승진도 관심이 없고, 연봉 인상에도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조금 더 편안하게 일하고, 저녁 시간과 주말 시간을 나와 가족을 위해서만 사용하겠다'는 마음을 가진 직장인들입니다. 극단적인 개미와 배짱이가 우리 조직에 함께 존재하는 시간이 바로 요즘 시대의 특징입니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어떤 삶을 선택하고, 어떤 회사와 동료를 선택해야 할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제 조직과 개개인이 내릴 수 밖에는 없게 되었습니다. 내가 편안함을 추구한다면 그런 조직을 선택해야 하고, 내가 빠른 성장과 성공을 원한다면 ‘지식과 경험을 확장하며 나의 성장과 성공에 관심 가져주는 조직과 리더'를 만나야 하는 것이죠.


    요즘 시대는 ‘정답이 없는 시대, 지도가 없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나에게 필요한 것은 ‘나만의 목표‘가 될 수 밖에는 없죠. 
    그 답을 스스로 찾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Q. 여러 패널께서 상황에 따른 다른 리더십이 필요함을 말씀해주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업에서 리더십 진단을 하거나 리더십에 대한 평가를 하려면 일관된 도구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공정성/타당성 등을 위해서라도요.) 
    실제로 컨설팅하시거나 현업을 경험하시면서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하는 리더십 진단 방법 혹은 도구가 있을까요?

    A (100coach) 생각 (정답이 아닌, 백코치의 관점입니다.)

    리더십 다면평가의 방법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면 평가에서 다면 피드백으로 말이죠. 이제 리더십은 정답을 이야기할 수 없는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도전을 좋아하는 리더, 편안함을 중요하게 여기는 리더, 학습과 피드백이 중요한 리더, 관계가 중요한 리더, 개척하고 새로운 문제를 찾아 해결하는 것을 잘하는 리더와 안정적인 운영을 잘하는 리더 등 다양한 리더십을 인정할 수 밖에는 없는 것이죠.

    리더십을 평가하게 된다면 회사가 정한 리더십의 모습에 맞게 리더십을 갈아 끼울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의 리더십으로 조직을 운영할 수 없는 시대거든요. N가지의 다양한 리더십이 서로 상호작용하며 조직의 문제를 풀고 목표를 달성해가야 하는 시대입니다.

    특히, 공존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모든 구성원들의 말을 다 들어주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는 없게 되었고요. 도전적인 리더와 피드백을 중요하게 여기는 리더를 싫어하고 나쁘게 평가하는 팀원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가 조직에 필요한 리더일까요? 기준은 이제 조직과 구성원의 상황에 맞춰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평가가 아닌, 피드백의 관점으로 리더십 다면 진단을 바라봐 주시면 어떨까요? 그렇다면 리더십 다면 진단의 결과를 가지고 리더와 리더의 상사 그리고 HR이 모여 토론하며 더 나은 리더가 될 수 있도록 피드백하고 코칭하는 도구로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죠.

    다면 평가가 아닌, 성장을 위한 다면 피드백의 도구로 사용된다면 지금 하고 계신 고민은 쉽게 해결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오늘의 시대를 정보 홍수의 시대라고 합니다.
    각종 정보가 유투브, 에스엔에스라는 매체로 세계적으로 유포되고 있습니다.

    교회마다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을 게시합니다.
    그런데 홍수가 넘쳐나도 마실 물이 없다는 말처럼 아모스 선지자는 말씀의 기갈이라고 탄식합니다.


    말씀의 기갈이 오는 이유

    1. 강팍함(스가랴 7:12)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신으로 이전 선지자를 빙자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노가 나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나왔도다.

    돌처럼 마음이 굳어지면 하나님 말씀이 어떤 감동적인 말씀이라 할지라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말씀을 받으려면 깨끗한 마음이 준비돼 있어야 합니다. 교만하고 오만한 마음은 은총의 말씀 앞에 자신을 맡길 수가 없습니다

    누가복음 8장 15절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은총의 말씀이 좋은 마음과 착한 마음에 심어져 결실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들은 말씀으로 생각하는 성숙한 삶의 태도를 가져야겠습니다.

    2. 교만(누가복음 10:21)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만한 자들에게는 숨기십니다. 
    그러나 어린아이같이 깨끗한 마음의 영혼들에게, 겸손한 영혼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은 양약으로 역사하게 될 것입니다.

    야고보서 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3. 하나님의 진노(사무엘상 3:1)

    아이 사무엘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섬기는 당시에 하나님은 진노하심으로 이상을 보이시지 않으셨습니다. 말씀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회개할 일이 있는지 찾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28장 27절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혹시라도 내가 변화될까 두려워서 귀를 막고 눈을 막았다는 것입니다 날마다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을 사모하지 않는다면 말씀은 결코 유익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4. 마귀의 역사(마태복음 13: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는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에 은혜를 담는다면 여러분은 마귀에게 그 마음의 땅을 빼앗기지 않은 것입니다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은 사탄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계시록 1장 3절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하나님 말씀의 인도가 절실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세상은 죄악으로 어두워져 가는데 무엇으로 이곳에서 나를 건질 수 있을까요?

    다니엘서 9장 13절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이 모든 재앙이 이미 우리에게 임하였사오나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떠나고 주의 진리를 깨닫도록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은총을 간구치 아니하였나이다 말씀에 흥미와 관심이 사라진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말씀의 기갈은 곧 하나님 백성의 실패입니다. 오직 우주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만이 우리를 붙드실 수 있습니다. 주의 발 앞에서 하나님 말씀을 기쁨으로 받길 간구하시고 사모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계 기아와 영양실조에 관한 7가지 사실

    풍요로 가득한 2024년에도 기아는 여전히 전 세계가 직면한 문제입니다. 
    전 세계 기아와 영양실조에 대해 알아보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확인해 보세요.

    1. 전 세계 인구 11명 중 1명이 굶주리고 있습니다

    2023년에는 7억 5,700만 명

    이 기아를 겪었습니다. 이는 전 세계 인구 11명 중 1명이 기본적인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음식이 한참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2. 수단은 세계 최악의 기아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수단은 재앙 수준의 기아를 겪고 있습니다. 계속되는 분쟁으로 광범위한 강제 이주민이 발생하여 2023년에는 2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위기 수준의 식량 부족에 직면했습니다. 2024년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아 현재 수단의 일부 지역은 기근에 직면해 있습니다.

    2024 세계 위기국가 1위 수단 위기 더 자세히 알아보기

    3. 기아와 영양실조는 똑같지 않습니다

    기아는 음식 부족으로 인한 신체 상태를 말하며, 영양실조는 단백질이나 에너지 부족과 같은 영양 결핍을 의미합니다. 닮은 듯 다른 이 두 가지는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전 세계적인 기아 위기는 영양실조 위기이기도 합니다.

    4. 어린이 사망의 거의 절반이 영양실조와 관련이 있습니다

    기아 관련 건강 문제는 사망의 가장 큰 원인이며, 어린이 사망의 거의 절반이 영양실조와 관련이 있습니다. 영양실조에서 살아남은 어린이의 경우에도 신체 및 인지 발달에 영향을 미치는 등 심각하고 장기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5. 영양실조는 치료가 가능하지만 치료를 받는 어린이는 5명 중 1명도 되지 않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약 4,500만 명의 5세 미만 어린이가 급성 영양실조를 경험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중 매년 200만 명의 어린이가 영양실조로 인해 사망하고 있습니다.

    급성 영양실조를 치료할 수 있는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 검증된 치료법이 있지만, 필요한 치료를 받는 어린이는 5명 중 1명도 되지 않습니다. 더 간단한 접근 방식을 통해 상황을 개선할 수 있습니다.

    6. 전 세계적으로 기아 퇴치를 향한 진전을 이루었습니다

    지난 50년 동안 전 세계 기아는 감소했습니다

    . 오늘날에는 11명 중 1명(9%)이 굶주리고 있지만, 1970년에는 4명 중 1명(또는 24%)으로 훨씬 더 높았습니다.  기아는 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기아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습니다. 심화되는 분쟁, 기후변화, 극심한 빈곤은 점점 더 소수의 국가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위기의 영향을 받는 지역과 국가의 사람들은 한꺼번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이는 새로운 기아 위기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7. 기후변화와 분쟁은 기아를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지구 기온이 상승함에 따라 자연재해가 증가하고 있으며, 가뭄과 홍수 등 기후 관련 재해로 인해 농지가 파괴되고 식량 불안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기후변화로 인해 전 세계 식량 가격은 2050년까지 20% 상승

    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기후변화는 농지의 50%

    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예측되고 있습니다.

    분쟁은 세계 기아의 또 다른 주요 요인입니다. 기아를 겪는 85% 이상의 사람들이 분쟁에 영향을 받는 지역

    에 살고 있습니다. 일례로 수단은 계속되는 폭력 분쟁으로 식량 가격이 급등하고 기존 문제가 악화되고 있습니다. 수단은 '인간이 만든 식량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기아 위기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요?

    영양실조 치료 격차 해소

    영양실조에 대한 해결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치료를 받는 어린이는 5명 중 1명도 되지 않습니다. 국제구조위원회는 영양실조에 대한 접근 방식을 간소화하여 이러한 치료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국제구조위원회의 간소화된 치료법은 92%의 회복률과 21%의 비용 절감 및 접근성 향상을 달성했습니다.

    혁신적인 간소화된 치료법 더 알아보기

    국제구조위원회와 함께해 주세요

    국제구조위원회는 분쟁과 재난으로 삶이 무너진 사람들의 생존과 복구, 재건을 돕습니다. 1933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도움으로 설립되어 현재 40개 이상의 위기 국가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국제구조위원회의 간소화된 영양실조 치료법으로 기아 종식을 위해 함께해 주세요.


    7억 3천만명 굶는데 하루 10억 끼니 버려…온실가스 10% 차지


    유엔 환경프로그램(UNEP)은 2022년 한 해 동안 전 세계적으로 먹을 것이 10억톤 넘게 쓰레기로 버려졌다고 27일(현지시각) 밝혔다. 
    음식물쓰레기지수 보고서 이미지 갈무리

    전 세계적으로 7억3천만명이 굶주리고 있지만, 사람들은 하루에 10억 끼니 이상의 먹을 것을 내다 버리는 것으로 조사됐다.

    유엔 환경프로그램(UNEP)은 27일(현지시각) ‘음식물쓰레기지수 보고서’에서 이렇게 밝혔다. 보고서를 보면, 2022년 한 해 동안 음식 및 식품, 식량 등 먹을 것이 10억톤 넘게 쓰레기로 버려졌으며, 이는 한 사람당 132㎏꼴로 전체 먹을 것의 5분의 1에 해당한다. 비용으로 따지면 1조달러(1340조원)에 이른다. 반면 전 세계적으로 굶주리는 사람도 7억3천만명에 달한다.

    먹을 것이 가장 많이 버려지는 건 가정이었다. 매년 버려지는 10억톤 분량의 음식물 쓰레기 중 60%가 가정에서 나왔으며, 28%는 음식점 등 요식업소, 12%는 소매 판매처에서 나왔다. 유엔환경계획 잉에르 안데르센 사무총장은 “먹을 것을 버리는 건 비극”이라며 “한쪽에서 수억명의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는데 다른 쪽에서는 음식물이 버려지고 있다”고 말했다.

    음식물쓰레기는 부자 나라의 문제가 아니었다. 소득 수준이 비슷한 나라라도 버려지는 음식물쓰레기는 한 사람당 7㎏까지 차이가 났다. 대체로 더운 나라들이 더 많이 버렸는데, 이는 더운 날씨에 신선한 식품이나 음식물을 오래 보관하기 어려운 사정이 작동한 것으로 보인다.

    음식물 투기 및 손실은 환경에도 영향을 미친다. 지구 전체 온실가스 배출의 8~10%가 먹을 것을 내다 버려서 나온 것으로 추산되며, 이는 항공분야의 온실가스 배출보다 거의 5배 많은 규모다. 영국의 환경단체 ‘쓰레기와 자원 행동프로그램’(WRAP)의 해리엇 람 최고경영자(CEO)는 “음식물쓰레기가 야기하는 엄청난 환경비용, 사회 및 경제 비용을 고려할 때 음식물쓰레기를 줄이기 위한 더 협력적인 행동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나라별로는 음식물쓰레기 줄이기에 성공한 주목할 만한 사례도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인도네시아, 멕시코,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몇몇 나라에서는 2007년부터 시작한 음식물 낭비와 온실가스 배출 모범 사례 등을 공유하고 행동하는 ‘공공-민간 파트너십(PPP)’을 통한 음식물쓰레기 줄이기 운동이 성과를 보였다. 특히 일본은 거의 3분의 1이 줄었고, 영국은 18%가 줄었다.


    세계 인구 8억명 굶주리는데…매일 음식물 10억만톤 버려져

    전 세계에서 8억명이 굶주림을 겪고 있지만, 매일 10억 5000만톤의 음식물 쓰레기가 발생하고 있다는 보고가 나왔다.

    27일(현지시간) 유엔 환경프로그램(UNEP)이 발표한 최신 음식물 쓰레기 지수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전 세계 인구 중 8억명이 굶주리는 상황에서 매일 10억끼 분량의 음식물이 버려진다. 이는 시중에 유통되는 모든 농산물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양이며, 금액으로 환산하면 1조 달러(약 1350조원) 규모로 추산된다.

    이는 81억명이 넘는 전 세계 모든 사람이 매일 한 끼 이상의 식사를 낭비하고 있는 셈이며, 전 세계에서 생산된 음식의 19%를 차지한다. 1인으로 환산할 경우 132㎏에 달한다고 UNEP는 설명했다.

    또한 "매일 10억끼씩 버려진다는 수치는 매우 보수적인 추정치이며 실제 폐기량은 더 많을 수 있다"는 지적도 덧붙였다.

    음식물이 가장 많이 버려지는 곳은 가정으로 전체의 60%의 비중을 차지했다. 이어 호텔·식당 등 서비스업소 28%, 정육점·식료품점 등 소매업소 12% 등 순이었다. 가정에서 식사량보다 더 많은 식자재를 구입해 낭비하는 경우가 생기고, 개발도상국 등에서는 냉장 시설 부족이나 운송 중 손상 등으로 음식물이 상하면서 폐기된다는 것.

    또한 이런 식량 낭비가 "도덕적으로도 문제지만, 환경적인 실패"라고 꼬집었다. 특히 음식물 쓰레기로 발생하는 온실가스는 전체 배출량의 8~10% 수준으로, 항공 산업에서 발생하는 배출량의 5배에 이른다. 국가 배출량으로 따지면 미국과 중국에 이어 3위를 차지할 정도의 양이다.

    보고서는 "농업용지 조성이 자연생태계 내 서식지 손실의 주요 원인이며 음식물 쓰레기는 전 세계 농경지 30%를 유지하는 규모와 맞먹는다"면서 "온실가스 배출량 가운데 최대 10%를 차지하는 것도 음식물 쓰레기"라고 지적했다.

    보고서를 공동 집필한 비영리단체 WRAP의 리처드 스와넬은 "현재 전 세계에서 굶주리는 8억 명에게 매년 버려지는 음식으로 하루 한 끼만 먹여도 (모두) 먹일 수 있다"며 "우리가 이미 구매하고 있는 음식을 더 잘 활용한다면 탄소 발자국과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고, 비용을 절약할 기회가 될 수 있음에도 사람들은 이에 대해 거의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전세계 기독교인들 25억 6천만,종교인들 중 가장 많아… 남반구 큰 증가폭

    전세계에서 기독교 인구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특히 남반구에서 기독교 인구 증가폭이 두드러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든콘웰신학대학교 글로벌기독교연구센터가 매년 발표하고 있는 세계 기독교 현황(Status of Global Christianity, 2022)에 따르면, 올해 중반 기준 기독교 인구는 전체 79억 5300만 명 가운데 3명에 1명꼴인 25억 6000만 명으로 전 세계 종교 가운데 가장 많았다. 
    2025년에는 약 26억 3700만 명, 2050년에는 33억3400만 명으로 앞으로도 기독교 인구가 가장 많을 것으로 전망됐다.

    기독교 인구 통계자료는 로마 가톨릭과 정교회도 포함되어 있는데, 가톨릭은 12억 명, 정교회는 약 3억 명을 차지했다.

    기독교 인구 중에는 오순절 계열과 복음주의 계열의 약진이 눈에 띈다. 오순절 계열은 1.88% 증가세를 보이는 가운데 약 6억7000만 명, 복음주의 계열은 1.8% 추세에 약 4억 명, 프로테스탄트 계열 역시 1.54%에 약 6억 명으로 강한 상승세를 나타냈다. 특히 오순절 계열은 2020년 4억4000만 명에서 약 20년만에 2억3000만 명이 증가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브라질 등 남미 국가에서 가톨릭 신자가 급감하고 있으며, 오순절 교회로 개종이 늘고 있다”면서 “대중을 끌어안고 빈곤층을 위해 사역하는 오순절 교회에 사람들이 관심을 더 갖고 있으며, 특별히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면서 복음주의 교회가 더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지친 사람들을 위로한 것도 영향을 주고 있다”고 분석했다.

    기독교인 다음으로 많은 종교 인구는 무슬림 19억 6000만 명, 힌두교인 10억 7000만 명, 불교도 5억 4000명 순이었다.

    또한 신의 존재를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자(Agnostics)는 0.59% 증가하며 약 7억 5000만 명, 신이 없다고 믿는 무신론자(Atheists)는 0.18% 1억 4700만 명에 그쳤다. 1970년 이후 불가지론자는 소폭 증가하고 있지만, 무신론자의 비율은 꾸준히 감소했다. 발표 자료에서는 2025년에는 1억 4300만 명, 2050년에는 1억 4200만 명으로 무신론자는 오히려 줄 것으로 내다봤다.

    이번 자료에서 주목해볼만한 것은, 선진국들이 몰려 있는 북반구에 비해 저개발국과 도발개상국이 많은 남반구의 기독교 인구가 가파르게 증가한 것이다.

    북반구에서는 기독교인이 0.13% 증가한 약 8억 4000만 명이었으며, 아프리카, 남미, 오세아니아, 아시아 일부 국가가 포함되어 있는 남반구는 1.79% 증가한 17억 2000만 명이었다.

    대륙별로 보면 유럽 기독교인이 0.06% 증가세 중 5억 7000만 명, 북미 0.27%에 2억 7000만 명이었다. 반면 아프리카는 무려 2.77% 증가한 6억 9000만 명이었고, 남미 1.09% 증가한 6억 1000만 명, 오세아니아 0.73% 증가한 약 3000만 명이었다.

    2000년 당시 통계와 비교해 보면 북반구는 8억 1000만 명에서 소폭 증가했지만, 같은 기간 남반구는 11억 7000만 명에서 17억 2000만 명으로 크게 증가했다. 2018년 발표된 조사자료와 비교해보면 아프리카 기독교 인구는 6억 명으로 불과 4년 사이에 9000만 명의 기독교 인구가 늘었다.

    한편, 타문화권에서 사역중인 선교사는 43만 5000명, 파송 선교단체는 5700개로 추정됐다. 또 지난 10년간 순교자수는 90만 명으로 20여년전인 2000년의 160만 명에 비해서 줄어들었다.

    현재 전 세계에서 복음을 모르는 인구는 22억 2300만명으로 이는 전 세계 인구의 28%에 해당한다.







    9월 30일(화) 아모스 7-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기갈(飢渴)(8: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The days are coming," declares the Sovereign LORD, "when I will send a famine through the land-- not a famine of food or a thirst for water, but a famine of hearing the words of the LORD.

    보라 날이 이를지라 

    - '이를지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임'(*)은 '들어오다'는 의미를 가진 '보'(*)의 분사형으로 역동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큰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사람들을 세우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도록 하셨다. 백성들은 말씀을 들을 때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상태이다. 왜냐하면, 말씀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떠나셨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시 74:9; 애 2:9; 겔 7:26; 호 5:6).


    기갈(飢渴) : 주릴 기, 목마를 갈
    a thirst for water

    기갈이란 한글사전의 정의는 '배고픔과 목마름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라고 합니다.
    영어성경에서는 "a thirst for water(NIV)" 

    갈함(6772) 차마( tsâmâʼ ) צָמָא

    1. 갈증.   2. 목마름.  3. 겔 19:13. 
    발음 [ tsâmâʼ ]
    어원 /   
    구약 성경 /  
    • 1. 명사, 남성  갈증, 목마름, 겔 19:13.
    • 관련 성경 / 목마름(출 17:3, 시 69:21, 사 50:2, 신 28:48, 대하 32:11, 애 4:4), (해)갈(시104:11), 메마른데(렘 48:18, 겔 19:13), 
      갈증(사 41:17).




    주림(7458) 라아브(  )  רָעָב

    1. 배고픔.  2. 굶주림.  3. 기근
    발음 [ râʽâb 
    어원 / 
    구약 성경 / 101회 사용
    • 1. 명사, 남성 배고픔, 굶주림, 기근, 창12:10, 14:30, 애5:10.
    • 관련 성경
      ☞기근(창12:10, 대하6:28, 사14:30), 흉년(창26:1, 왕하4:38, 느5:3). [형] 주린(출16:3, 왕하6:25, 느9:15).


    육신적으로 너무 풍성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적으로는 갈급한 시대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 많은 설교자들의 동영상에 의한 설교가 넘쳐나고 있지만 설교를 듣는 사람들의 마음 한 구석에는 텅빈 공간에서 메아리만 울려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적 기갈의 시대가 닥쳐왔기 때문입니다.

    아모스 8장 11절에서 언급된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은 이스라엘 백성이 겪게 될 영적 기근을 의미합니다.
    양식이나 물이 부족한 육체적 기갈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그분의 뜻에서 멀어진 상태를 지칭합니다.
    이 환상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끝이 이르렀음을 알리시며, 더 이상 용서하지 않으시고 심판하시겠다는 경고입니다.

    1884년 아펜셀러와 언더우드 선교사에 의해서 복음을 받은 조선 땅에 급성장한 교회가 이제는 무너지고 있다고 합니다.
    141년만의 기적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후 100년 만에 급성장하였으나 이제는 급하게 감소되는 현상은 교회안에 젊은층이 전멸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2025년 한국에서 각 교단의 총회를 마치면서 발표한 교세 통계 자료에 의하면 미래 세대라고 할 수 있는 년령층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 공통된 입장입니다.
    그 원인을 여러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겠지만 선지자 아모스는 "영적 기갈"이 그 원인이라고 외칩니다.

    핵심 내용

    • 환상의 의미 :
      아모스 선지자에게 보여주신 여름 과일 한 광주리 환상에 이어,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을 보내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 영적 기갈 :
    이는 단순히 먹을 것이나 마실 물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영적인 굶주림,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게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 하나님의 심판 :
    이 기갈은 이스라엘의 끝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징조이며, 하나님의 인내가 다하여 그들을 더 이상 용서하지 않으시고 심판하시겠다는 강력한 경고입니다. 

  • 이스라엘의 태도 :
    북이스라엘은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습니다. 

  • 미래 :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이스라엘의 기쁨은 애곡으로 변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를 잃어버린 채 심판을 맞이할 것입니다


  • 진정한 위기는 '말씀의 기갈'에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아모스 8:11)

    교회에서 몇 개월에 걸쳐 아모스를 강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처음에 가졌던 아모스에 대한 선입견도 깰 수 있었고, 그 말씀의 깊이와 넓이에 감격하며 깊은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아모스의 힘은 그 말씀이 오늘 날 우리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 사실이 매주 깊은 울림을 만듭니다.

    위에 언급한 아모스의 한 구절은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아모스 전체 중의 백미라고 여기는 부분입니다. 이는 5장 24절의 말씀과 극적인 호응을 이루며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잘 알려진 대로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 지로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물'과 '하수'는 생명의 근원, 생명수를 일컫는 표현입니다. '물'과 '강'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경에서는 주로 그렇게 쓰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하나님의 공법과 정의를 생명의 근원으로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공의에서 벗어난 이스라엘을 향한 최후통첩이자 살 길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지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갈”

    그러나 아모스 8장에서는 더 이상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용서를 베풀지 않으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들에게 '생명수를 이제는 마셔라'라고 말씀하셨지만, 더 이상 그들에게 그 생명수가 공급되지 않을 것을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그토록 심각하게 타락한 것은 그들 가운데 바른 진리의 말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그들의 타락의 원인이자 결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끊어짐으로 타락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가운데 끊어지는 저주를 받게 됐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는 가장 근본적인 뿌리는 그들이 하나님의 특별 계시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바벨탑 사건 이후 언어와 민족과 국가가 모두 분열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따로 말씀하셨습니다. 선택하신 것이지요. 그러므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말씀이 끊어진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는 특수성이 완전히 상실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이상의 큰 저주가 이스라엘에게는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지만, 결국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심각한 심판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과연 ‘신자 됨’이란 무엇인가

    이는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매우 심각한 문제를 던져 줍니다. 곧, ‘신자 됨’이 무엇이냐는 것이지요. 과연 무엇으로 ‘신자 됨’을  증명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어떤 행위적 측면들, 선행이나 도덕, 양심의 발현 등으로는 구분되지 않습니다. 어차피 이처럼 일반계시 영역 안에 존재하는 사항들로는 특이성 자체를 찾을 수 없고, 더욱이 선행의 문제에 있어서 결코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다른 종교의 사람들 보다 더 우월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독특한 종교적 경험으로 우리의 신자 됨을 증명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만의 특별한 종교적 경험이라고 하는 일들이 이단은 말할 것도 없고 온갖 종교들 속에서 우리보다 더 활발히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오늘날의 이스라엘인 교회와 신자 역시도, '신자 됨'과 '교회 됨'을 찾을 근거가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생명으로 공급받고 그것으로 존재를 유지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유일한 '신자 됨'의 증거이겠지요.

    그러므로 오늘 날 교회와 신자가 염려해야 하고 두려워해야 할 상황은 맑은 생명수가 사라지고 썩은 물이 흐르는 일일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이 생명수가 되어 우리 가운데 흐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애통해 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오늘 날 많은 '걱정'을 하시는 '분'들의 말씀 속에서는 이러한 '염려'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더욱이 그러한 '걱정'에 앞장 서는 분들일수록 '더 크고', '더 많은' '목회'와 '사역'을 하시는 분들이라 더 안타깝습니다.

    진리가 기갈 된 시대…우리의 눈물마저 말라버린 시대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에 목말라 합니다. 곧, 진리에 심각한 갈증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 진리를 전하고 붙드는 일이 우리의 일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썩은 물이 철철 넘쳐흐르고, 아이부터 노인까지 그 물이 마치 생수인양 벌컥벌컥 마셔대고 있는데도 뒷짐 지고 다른 일에만 열을 내고 있다면 그것 이상 심각한 직무유기가 어디에 있을까요.

    세상을 향해 애통해하며 흘릴 눈물은 세상 그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이야 어차피 세상의 방식을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단지 그 세상 속에 살아가는 자들이 양심에 따라, 하나님의 일반계시에 충실하게 살아가기를 바라고 돕는 것까지가 교회와 신자의 일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진정 흘릴 눈물은 우리 가운데에 이미 벌어지고 있는 말씀의 기갈을 향한 눈물이어야 하겠지요.

    시국을 걱정하시는 많은 분들을 보고 문득 씁쓸한 마음이 들어 몇 자 적어봤습니다.

    홍수가 닥치면 주위 사방에 물이 많지만 마실 물은 없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아이러니라고 합니다.

    아이러니(irony) 뜻, 종류, 유래, 어원

    아이러니(irony)는 예상 밖의 결과가 빚은 모순이나 부조화를 의미하는 문학에서 자주 사용되는 표현 방법이다. 
    일반적으로 말과 행동이 서로 모순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의도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고, 의도하지 않게 표현될 수도 있다.

    아이러니(irony) 뜻

    아이러니(irony)는 말과 행동이 서로 모순되는 것을 의미한다. 

    의도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고, 의도하지 않게 표현될 수도 있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문학에서 자주 사용되는 표현 방법이다. 아이러니를 사용하면 독자나 청중에게 흥미를 유발하고, 생각할 거리를 제공할 수 있다.

    아이러니(irony) 종류

    1. 언어적 아이러니

    말과 행동이 서로 모순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하면서 상대방을 미워하는 경우이다.

    2. 상황적 아이러니

    예상과는 다른 결과가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기대했는데, 시험에 떨어지는 경우이다.

    3. 구조적 아이러니

    작품의 구조 자체가 모순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행복한 결말을 기대했는데, 비극적인 결말이 나오는 경우이다.

    아이러니는 문학 작품에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작품의 주제를 더욱 강조하고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아이러니는 문학에서 다양한 효과를 낼 수 있으며 독자나 청중의 기대를 뒤집을 수 있고, 긴장감을 조성할 수 있다.

    아이러니(irony) 유래, 어원

    아이러니(irony)는 모순, 역설, 이율배반, 부조화 등을 뜻하는 말이다. 
    이 말은 '위장(僞裝)'이란 의미의 그리스어 에이로네이아(eironeia)에서 유래했다. 
    그런데 위장이라고 하면 무엇을 은폐하여 드러나지 않게 하는 실제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 아이러니는 좀 더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뜻을 내포한다.

    아이러니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사용되어 왔다. 
    일찍이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무지(無知)를 가장한 채 논쟁의 상대에게 접근하여 그에게 어리석은 질문을 던짐으로써, 자칭 지자(知者)라고 자부하는 상대방의 내적 모순을 폭로하고 스스로 무지함을 자각하게 하는 방법을 썼다. 
    이를 가리켜 '소크라테스적 아이러니'라 불렀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지적(知的)인 날카로움을 갖는다는 점에서 기지(wit)와 통하고, 간접적으로 깨닫게 한다는 점에서 풍자(satire)와 통하며, 은유의 방법을 쓴다는 점에서 유머(humor)와 통한다. 이는 상대방의 생각을 자극하고 진실을 깨닫도록 돕는 데 효과적인 방법으로 여겨졌다.

    아이러니는 다양한 문학 작품에서 활용되었다. 특히 희곡에서 아이러니는 등장인물의 행동과 운명의 역설성을 강조하는 데 효과적으로 사용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에서 햄릿은 삼촌에게 살해된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척 미쳤다고 행동하는데, 이는 상황적 아이러니의 대표적인 예시이다.

    아이러니는 문학 작품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뉴스 기사, 정치적 발언, 심지어 개인적인 대화에서도 아이러니를 찾아볼 수 있다. 아이러니는 사회 문제를 비판하고 풍자하는 데 사용되기도 하며, 상황의 유머러스함을 표현하는 데에도 활용한다.

    “홍수에 마실 물 없다”는 옛날 속담이 있습니다. 
    홍수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물을 마시지 못하는 것입니다. 
    홍수로 인해서 물은 넘쳐나지만, 정작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물은 없는 것입니다.

    그동안 사람들은 물질의 풍요로움이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물질의 풍요로움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물은 넘쳐나지만 정작 마실 물이 없는 것입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활동하던 때도 오늘날처럼 물질이 풍요로운 때였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역사상 최고의 번영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통치자들과 권세가들은 ‘모든 것이 잘되어 간다’고 기세등등했고, 하나님을 업신여기며 향락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 때 아모스는 이스라엘에게 경고했습니다. 본문 11절을 보겠습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들이 배고파하겠지만 그것은 밥이 없어서 겪는 배고픔이 아니고, 사람들이 목말라 하겠지만 그것은 물이 없어서 겪는 목마름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서 사람들이 굶주리고 목말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 11절의 말씀으로 오늘 우리 한국 사회를 조명해 보면 어떨까요? 성경이 널리 보급되어 있고, 너무 많다 싶을 정도로 동네마다, 골목마다 교회가 자리 잡고 있고, TV와 라디오, 인터넷에 하나님의 말씀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인 수가 더 늘어나야 할 터인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늘어나기보다는 오히려 교인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의 이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은 말씀을 들어도 마음에서 깨닫지 못하는, 영적 둔감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보라 날이 이를지라’는 말씀은 심판의 날을 말합니다. 
    심판 때는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마지막 때에 영적 기갈이 다가오는 것일까요?

    ​영적 기갈의 원인 / 무감각(無感覺), 무관심(無關心), 불만족(不滿足) 


    무감각
    없을 무
    느낄 감
    깨달을 각
    장단음
    무-감각 
    • 1.
      아무 감각(感覺)이 없음.
    • 2.
      주변(周邊) 상황(狀況)이나 사람에 대하여 관심(關心)이 없음.
    • 1.

      명사 insensibility, senselessness, numbness to emotion

    • 2.

      명사 insensibility, apathy


    감각의 종류

    일반적으로 알려진 오감 외에도 다양한 감각이 있습니다:

    • 시각: 빛과 색을 인식하는 감각입니다.
    • 청각: 소리를 감지하는 감각입니다.
    • 후각: 냄새를 감지하는 감각입니다.
    • 미각: 맛을 감지하는 감각입니다.
    • 촉각: 접촉, 압력, 온도를 감지하는 감각입니다.
    • 평형감각: 신체의 균형과 위치를 감지하는 감각입니다.
    • 고유감각: 신체 부위의 위치와 움직임을 감지하는 감각입니다.

    감각의 과정

    감각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칩니다:

    • 자극 수용: 감각 기관이 외부 자극을 받아들입니다.
    • 변환: 자극이 신경 신호로 변환됩니다.
    • 전달: 신경 신호가 뇌로 전달됩니다.
    • 해석: 뇌가 신호를 해석하여 의미 있는 정보로 만듭니다.

    감각의 특성

    감각은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가집니다:

    • 적응성: 지속적인 자극에 대해 감각의 강도가 감소합니다.
    • 역치: 감각을 일으키는 최소한의 자극 강도가 있습니다.
    • 선택성: 특정 자극에만 반응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 개인차: 같은 자극에 대해 개인마다 다르게 느낄 수 있습니다.

    감각의 중요성

    감각은 우리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 환경 인식: 주변 환경을 이해하고 상호작용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 안전: 위험을 감지하고 대응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 학습: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는 데 기초가 됩니다.
    • 즐거움: 다양한 감각적 경험을 통해 삶의 질을 높입니다.

    감각은 우리가 세상을 경험하고 이해하는 기본적인 방식입니다. 각 감각은 고유한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이들이 통합되어 우리의 풍부한 경험을 만들어냅니다. 감각의 정확성과 민감성은 개인마다 다를 수 있으며, 나이나 건강 상태에 따라 변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감각을 잘 관리하고 활용하는 것은 건강하고 풍요로운 삶을 위해 중요합니다.

    인식(認識)


    인식(認識)은 ‘사물을 분별하고 판단하여 아는 일’을 의미하는 한자어입니다. 한국어로는 ‘어떤 대상을 알아차리고 분별하여 이해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인식은 단순히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서, 대상에 대한 이해와 해석을 포함하는 복잡한 정신 과정을 의미합니다.

    이는 개인의 경험, 지식, 가치관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같은 대상이라도 개인마다 다르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길을 걷다가 큰 개를 보고 위협을 느끼는 반면, 다른 사람은 같은 개를 보고 친근함을 느끼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인식의 다양한 의미

    인식은 여러 맥락에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 철학적 인식: 인간이 세계와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을 탐구합니다.
    • 심리학적 인식: 정보를 처리하고 해석하는 정신 과정을 연구합니다.
    • 사회학적 인식: 사회 현상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식을 분석합니다.
    • 인지과학적 인식: 인간의 지각, 학습, 기억, 추론 과정을 연구합니다.

    인식의 과정

    인식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칩니다:

    • 감각: 외부 자극을 감각 기관을 통해 받아들입니다.
    • 지각: 감각 정보를 조직화하고 해석합니다.
    • 인지: 지각된 정보를 기존 지식과 연결하여 의미를 부여합니다.
    • 판단: 인지된 정보를 바탕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인식의 특성

    인식은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가집니다:

    • 주관성: 개인의 경험과 배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 선택성: 주의를 기울이는 대상에 따라 인식이 달라집니다.
    • 능동성: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해석합니다.
    • 가변성: 새로운 정보나 경험에 의해 변할 수 있습니다.

    인식의 중요성

    인식은 우리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 의사결정: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결정이 달라집니다.
    • 행동: 인식은 우리의 행동 방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 관계: 타인에 대한 인식은 대인 관계의 질을 결정합니다.
    • 학습: 새로운 정보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학습 효과가 달라집니다.

    인식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기본적인 방식입니다. 올바른 인식은 합리적인 판단과 행동의 기초가 되며, 개인과 사회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자신의 인식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필요한 경우 수정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직감(直感)


    직감(直感)은 ‘이성적 판단 과정을 거치지 않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작용’을 의미하는 한자어입니다. 한국어로는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느낌이나 판단’으로 해석됩니다. 직감은 의식적인 추론 없이도 무언가를 곧바로 이해하거나 판단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이는 과거의 경험과 지식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하여 빠르게 결론을 내리는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경험 많은 의사가 환자의 증상을 보고 즉시 진단을 내리는 경우나, 숙련된 운전자가 위험한 상황을 순간적으로 감지하고 대처하는 경우가 직감의 예시입니다.

    직감의 특성

    직감은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가집니다:

    • 즉시성: 의식적인 사고 과정 없이 즉각적으로 판단이 이루어집니다.
    • 직접성: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작용입니다.
    • 통합성: 다양한 정보를 순간적으로 종합하여 판단합니다.
    • 개인차: 경험과 지식에 따라 개인마다 다른 직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직감의 역할

    직감은 우리 삶의 여러 영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 의사결정: 복잡한 상황에서 빠른 판단을 내리는 데 도움을 줍니다.
    • 창의성: 새로운 아이디어나 해결책을 떠올리는 데 기여합니다.
    • 위험 감지: 잠재적 위험을 빠르게 인식하고 대응하게 합니다.
    • 대인관계: 타인의 감정이나 의도를 즉각적으로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직감의 과학적 근거

    최근 연구들은 직감의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 신체 표지자 가설: 안토니오 다마지오의 이론으로, 직감이 신체의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는 능력과 관련있다고 봅니다.
    • 패턴 인식: 뇌가 과거 경험을 바탕으로 패턴을 빠르게 인식하는 능력이 직감의 기초라고 봅니다.
    • 무의식적 처리: 많은 정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처리되어 직감으로 나타난다고 봅니다.

    직감은 우리의 일상생활과 전문적인 영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직감만을 맹신하기보다는 논리적 사고와 균형을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직감을 발달시키고 활용하는 능력은 경험과 학습을 통해 향상될 수 있으며, 이는 더 나은 판단과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오감(五感)


    오감(五感)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의 다섯 가지 감각’을 의미하는 한자어입니다. 한국어로는 ‘다섯 가지 감각’으로 해석됩니다. 오감은 인간이 외부 세계를 인식하고 상호작용하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합니다.

    이는 우리의 경험과 인지 과정의 기초가 되며, 생존과 적응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예를 들어,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우리는 시각으로 음식의 모양과 색을 보고, 후각으로 향기를 맡으며, 미각으로 맛을 느끼고, 촉각으로 질감을 느끼며, 청각으로 씹는 소리를 듣습니다.

    오감의 종류

    오감은 다음과 같이 구분됩니다:

    • 시각 : 빛과 색을 인식하는 감각으로, 눈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 청각 : 소리를 감지하는 감각으로, 귀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 후각 : 냄새를 감지하는 감각으로, 코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 미각 : 맛을 감지하는 감각으로, 혀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 촉각 : 접촉, 압력, 온도를 감지하는 감각으로, 피부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오감의 기능

    각 감각은 다음과 같은 고유한 기능을 수행합니다:

    • 시각 : 물체의 형태, 색상, 움직임, 거리 등을 파악합니다.
    • 청각 : 소리의 높낮이, 크기, 방향 등을 인식합니다.
    • 후각 : 다양한 냄새를 구별하고 인식합니다.
    • 미각 : 단맛, 쓴맛, 신맛, 짠맛, 감칠맛을 감지합니다.
    • 촉각 : 물체의 질감, 온도, 압력 등을 감지합니다.

    오감의 중요성

    오감은 우리 삶에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 환경 인식 : 주변 환경을 이해하고 상호작용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 안전 : 위험을 감지하고 대응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 학습 :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는 데 기초가 됩니다.
    • 즐거움 : 다양한 감각적 경험을 통해 삶의 질을 높입니다.

    오감은 우리가 세상을 경험하고 이해하는 기본적인 방식입니다. 
    각 감각은 고유한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이들이 통합되어 우리의 풍부한 경험을 만들어냅니다. 
    오감의 정확성과 민감성은 개인마다 다를 수 있으며, 나이나 건강 상태에 따라 변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감을 잘 관리하고 활용하는 것은 건강하고 풍요로운 삶을 위해 중요합니다.

    Q : 감각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인가요?

    A : 감각은 ‘눈, 코, 귀, 혀, 살갗을 통하여 바깥의 어떤 자극을 알아차림’을 의미합니다. 이는 우리가 주변 환경을 인식하고 상호작용하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합니다. 감각은 생존과 적응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며, 우리의 경험과 인지 과정의 기초가 됩니다.

    Q : 인식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나요?

    A: 인식은 ‘사물을 분별하고 판단하여 아는 일’을 의미합니다. 이는 단순히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서, 대상에 대한 이해와 해석을 포함하는 복잡한 정신 과정입니다. 인식은 개인의 경험, 지식, 가치관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Q: 직감의 기본적인 의미는 무엇인가요?

    A: 직감은 ‘이성적 판단 과정을 거치지 않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작용’을 의미합니다. 이는 의식적인 추론 없이도 무언가를 곧바로 이해하거나 판단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직감은 과거의 경험과 지식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하여 빠르게 결론을 내리는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Q: 오감이란 정확히 무엇을 말하나요?

    A: 오감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의 다섯 가지 감각’을 의미합니다. 이는 인간이 외부 세계를 인식하고 상호작용하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합니다. 오감은 우리의 경험과 인지 과정의 기초가 되며, 생존과 적응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무관심
    없을 무
    관계할 관
    마음 심
    장단음
    무-관심 
    • 1.

      관심(關心)이나 흥미(興味)가 없음.

    1.
    [명사] indifference, unconcern, apathy, [형용사] indifferent (to), unconcerned, uninterested (in), apathetic, careless (of)



    관점 - 관심의 의미

    사전적 - 주의와 마음이 향한 상태

    심리학적 - 동기와 주의를 유도하는 감정적 에너지

    철학적 - 존재에 대한 태도와 자각

    사회적 - 관계 형성과 배려의 핵심

    교육적 - 성장과 정서 안정을 위한 자극

    종교적 - 사랑과 자비의 시작

    문화적 - 표현 방식과 해석이 다양한 행위






    불만족
    아닐 불
    滿
    찰 만
    발 족
    장단음
    불-만족 
    • 1.
      마음에 흡족(洽足)하지 않음.
    dissatisfaction (↔만족)

    만족(滿足)의 어원과 한자 의미

    '만족(滿足)'이라는 단어는 한자로 '가득 찰 만(滿)'과 '발 족(足)'이 결합된 형태입니다. 직역하면 "그릇이 가득 차고 발이 충분하다"는 의미로, 무언가가 충분히 채워져 더 이상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 '만(滿)' : 가득 차다, 넘치다, 충만하다
    • '족(足)' : 발, 충분하다, 넉넉하다

    한자의 구성 자체가 매우 상징적입니다. '만(滿)'은 물(水)이 가득 찬 상태를 나타내고, '족(足)'은 기본적인 이동 수단인 발을 의미합니다. 이는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된 상태, 즉 생활의 필수 요소가 채워진 상태를 암시합니다.

    만족의 심리학적 의미

    심리학에서 만족은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 상태 중 하나로 간주됩니다. 매슬로우의 욕구 단계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생리적 욕구, 안전 욕구, 소속과 사랑의 욕구, 존경 욕구, 자아실현 욕구 등 다양한 단계의 욕구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욕구들이 충족될 때 만족감을 느낍니다.

    흥미로운 점은 만족이 단순히 '많이 가진 상태'가 아니라 '충분하다고 느끼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는 만족이 객관적인 조건보다는 주관적인 인식에 더 많이 의존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대 사회와 만족의 역설

    현대 사회는 역설적으로 '만족'을 어렵게 만드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소비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새로운 욕구를 창출하고, 소셜 미디어는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상대적 박탈감을 증폭시킵니다.

    뉴스와 광고는 우리에게 "아직 부족하다"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전달합니다. 더 나은 집, 더 좋은 차, 더 높은 연봉, 더 멋진 여행... 이러한 끊임없는 '더 많이'의 추구는 정작 현재의 '충분함'을 느끼지 못하게 만듭니다.

    옛말에 "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는다(知足不辱)"라는 말이 있습니다. '족함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욕심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의 상황과 조건 속에서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에 만족할 줄 아는 지혜를 뜻합니다.

    만족의 다양한 형태

    만족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몇 가지 주요 유형을 살펴보겠습니다:

    1. 물질적 만족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만족으로, 의식주와 같은 기본적인 필요가 충족될 때 느끼는 만족감입니다. 배고픔을 해소하는 식사, 추위로부터 보호해주는 따뜻한 집 등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2. 정서적 만족

    관계와 소속감에서 오는 만족으로, 사랑받고 존중받는 느낌, 의미 있는 관계에서 오는 충족감 등이 포함됩니다. 가족, 친구, 동료와의 깊은 유대감은 정서적 만족의 중요한 원천입니다.

    3. 성취적 만족

    목표를 달성하거나 자신의 능력을 발휘했을 때 느끼는 만족감입니다. 어려운 일을 해냈을 때의 성취감, 자신의 기술과 지식이 성장했음을 느낄 때의 만족감이 여기에 속합니다.

    4. 존재적 만족

    자신의 존재 자체, 삶의 의미와 목적에서 오는 만족감입니다. 자신이 세상에 기여하고 있다는 느낌, 자신의 삶이 의미 있게 흘러가고 있다는 인식은 깊은 존재적 만족을 가져옵니다.

    동양 철학에서의 만족

    동양 철학, 특히 도가와 불교에서는 만족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노자는 "족함을 아는 것이 부유함이다(知足之足, 常足矣)"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만족을 아는 사람은 항상 풍요롭다는 의미로, 참된 부(富)는 외부적 조건이 아닌 내면의 상태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불교에서는 '만족'을 중요한 덕목으로 강조합니다. 욕망(갈애)이 고통의 원인이라고 보는 불교에서, 현재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는 태도는 평화와 행복을 가져오는 중요한 실천입니다.

    서양 철학에서의 만족

    서양 철학에서도 만족은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에피쿠로스는 행복이란 단순한 쾌락의 극대화가 아니라 고통의 부재와 마음의 평정(아타락시아)이라고 보았으며, 이는 욕망을 제한하고 자연적이고 필수적인 것에 만족하는 태도를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외부 환경이 아닌 자신의 내면에서 만족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세네카는 "자연에 따라 사는 자는 결코 가난하지 않다"고 말하며, 자연의 질서와 조화를 이루는 삶에서 진정한 만족을 찾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현대인의 만족을 위한 실천적 제안

    현대 사회에서 진정한 만족을 경험하기 위한 몇 가지 실천적 방법을 제안합니다:

    1. 감사 습관 기르기

    매일 감사일기를 쓰거나 감사할 일들을 되새기는 시간을 갖는 것은 현재의 풍요로움에 주목하게 해줍니다. 이는 '아직 부족한 것'보다 '이미 가진 것'에 초점을 맞추는 사고방식의 전환을 가져옵니다.

    2. 비교 습관 줄이기

    소셜 미디어 사용 시간을 제한하고, 타인과의 비교보다는 자신의 내적 기준에 따라 만족감을 판단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비교는 만족의 도둑"이라는 말이 있듯이, 끊임없는 비교는 만족감을 앗아갑니다.

    3. 최소주의(미니멀리즘) 실천하기

    물질적 소유를 줄이고 정말 필요하고 가치 있는 것에 집중하는 생활 방식은 만족감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됩니다. 덜 소유할수록 오히려 더 많은 만족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4. 경험에 투자하기

    물질적 소유보다 의미 있는 경험에 투자하는 것이 더 지속적인 만족감을 가져옵니다. 여행, 배움, 관계에 투자하는 것은 장기적인 만족과 행복에 기여합니다.

    5. 자신의 '충분함'의 기준 정립하기

    스스로에게 "얼마나 있으면 충분한가?"라는 질문을 던져보세요. 자신만의 '충분함'의 기준을 명확히 하는 것은 끝없는 욕망의 순환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만족과 성장의 균형 찾기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 현실에 안주하거나 발전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진정한 만족은 현재 상태를 인정하면서도 건강한 성장과 발전을 추구하는 균형 있는 태도에서 비롯됩니다.

    "오늘의 나에게 만족하되, 내일의 나를 위해 노력한다"는 태도는 현재에 대한 감사와 미래를 향한 건강한 열망을 동시에 담고 있습니다.

    풍요로운 결핍의 시대, 만족이라는 혁명

    우리는 역사상 가장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만족감은 더 낮아진 듯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족'이라는 개념을 재발견하고 실천하는 것은 일종의 조용한 혁명이 될 수 있습니다.

    만족은 단순히 현실에 안주하는 수동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추구하도록 하는 사회적 압력에 저항하고,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결정하는 주체적인 선택입니다.

    '만족'의 한자 '만족(滿足)'이 말해주듯, 진정한 만족은 그릇이 가득 차고 발이 충분한 상태, 즉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는 외부의 기준이 아닌, 자신의 내면에서 찾아야 하는 상태입니다.

    오늘, 당신은 무엇에 만족하시나요?

    그리고 그 만족은 진정 당신의 기준에서 비롯된 것인가요? 함께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1. 죄에 대한 무감각

    2. 말씀에 대한 무관심

    3. 육신에 대한 만족 

     

    1. 영적 기갈이 다가오는 것은 죄에 대하여 무감각하기 때문

    호세아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외쳤다면 아모스 선지자는 하나님의 공의를 외쳤습니다. 
    아모스는 특별히 경제 정의를 외쳤는데, 그가 활동하던 때에 이스라엘이 범한 죄의 내용이 본문 4-6절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삼키며 땅의 힘없는 자를 망하게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곡식을 팔며 안식일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 하고 세겔을 크게 하여 거짓 저울로 속이며 은으로 힘없는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가난한 자를 사며 찌꺼기 밀을 팔자 하는도다.”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은 가난한 자와 힘없는 자를 괄시하는 것입니다. 
    당시의 사회적인 부정과 불의는 지배자들의 재판과정에서만 자행된 것이(5:7-13) 아니라 시장 등 사회 도처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월 첫날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날로 정했습니다. 그것을 월삭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안식일도 지켰습니다. 누가 보아도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마음은 없습니다. 인색한 마음으로 아까워하면서 지켰습니다.

    몸은 예배에 왔지만 마음은 ‘언제 예배 시간이 끝날까?’ 마음은 딴 곳에 가있습니다. 월삭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곡식을 팔며 안식일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밀을 내게 할꼬.” 이 말을 쉽게 표현하면 ‘아 빨리 곡식을 팔아야 하는데 이놈의 월삭은 왜 이렇게 자주 오는 거야, 빨리 밀을 팔아야 하는데 왜 안식일을 이렇게 자주 오는 거야 귀찮아 죽겠네. 안 지키자니 마음이 편하지 않고 지키자니 시간이 아깝고.’ 이런 말입니다.

    이런 예배를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마귀는 예배 시간을 제일 싫어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예배를 방해하려고 하고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려고 합니다. 마귀에게 속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참된 예배를 잃어버리자 그 자리에는 자연스럽게 거짓과 속임수가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에바를 작게 하고 세겔을 크게 하여 거짓 저울로 속이며.” ‘에바’는 곡식을 담아 파는 그릇이었는데 이것은 작게 만들고 돈을 받을 때 쓰는 단위인 ‘세겔’은 크게 한 것입니다. 이러한 상거래의 부정행위, 사기 치는 일로 인해 이스라엘에는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이 가중되었습니다.

    “은으로 힘없는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가난한 자를 사며.” 이것은 가난한 자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갚지 못하면 신발 한 켤레 값에 사람을 종으로 팔아먹어버리는 인신매매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찌꺼기 밀을 팔자.” 이것은 가진 자들이 자기들은 먹지 않으면서 가난한 자들에게 찌꺼기 밀을 판 것을 말합니다. 권력과 결탁한 힘 있는 자들의 부정부패는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고 학대하는데서 극심하게 드러났습니다.

    이처럼 아모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죄의 개념과 감각이 없었습니다. 아모스의 책망이 있었지만 저희들은 여전히 죄를 밥 먹듯 저질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말씀을 듣고도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치 전범으로, 수많은 유대인을 끝까지 잡아 학살하던 악명 높은 아이히만이라는 한 독일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악의 화신이라 불릴 정도로 수많은 생명을 집요하게 추적하여 파리 목숨처럼 앗아갔습니다.

    아이히만은 전쟁 후 오랜 세월 경찰의 추적을 피해서 도망 다니다가 결국에 붙잡히게 되었고, 1961년에 유대인에 대한, 인류에 대한, 전쟁에 대한 범죄로 기소되어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 때 사람들은 악마와 같은 모습, 눈에 핏발이 서고 증오와 살기로 가득한 한 사람의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그러나 법정에 선 아이히만의 모습은, 그저 평범한 50대 중반의 한 가장의 모습에 불과했습니다.

    사람들을 더욱 경악하게 한 것은 아이히만의 변론이었습니다. 그는 잘못했다든지 용서해 달라든지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저지른 악에 대해, 자기가 처한 상황 속에서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고 스스로를 변호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아이히만은 사람이 죄에 대해 무감각해지면 어떻게 되는 지 보여주었습니다.

    영적 기갈의 징조는 죄에 대한 무감각입니다. 양심이라는 것은 마음에 새긴 율법입니다. 율법이 없어도 사람이 죄를 알 수 있는 것은 양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인간다운 것은 양심이 있어서입니다. 양심이 작동하지 않는 인간, 죄에 대한 감각이 사라진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죄에 대해 무감각해지면 머지않아 영적인 기갈이 다가옵니다. 이때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않고 물질적 풍요 속에서 이기적으로, 내 멋대로 사는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께 깊이 회개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기 때문(아모스 8:12)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왜 하나님의 말씀을 얻지 못하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아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잔소리로 여겨질 만큼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성경의 예언서의 대부분이 이스라엘과 유다가 멸망하기 전에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책망과 경고의 말씀에 귀를 닫았습니다.

    인간관계에서 서로 싸우고 아옹다옹 할 때는 그래도 애정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애정이 식으면 말하기도 싫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심판을 경고하시고 회개를 촉구하실 때는 그래도 기대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자 하나님은 더 이상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예언자를 보내지도 않고 이상으로도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실제로 포로 귀환 후 말라기를 끝으로 400여 년 동안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아모스 시대와 지금 이 시대의 동일한 점이 있다면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교만하고 강퍅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포스트모던이즘의 영향으로 유일신과 절대 구원을 주장하는 기독교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죄악이 가득하면 성도들도 영향을 받아 영적 수준이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도 비현실적으로 보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바보스럽게 여겨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경을 외면하고, 성경에 먼지가 쌓이게 됩니다.


    마태복음 24: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누가복음 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마지막 시대에 다가오는 말씀의 기근은 성경이 없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교회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오늘날처럼 성경이 널리 보급되어 있고, 교회가 많은 때가 언제 있었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주리고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을 몰라도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하나님 이름만 나와도 귀를 닫고,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영적 기갈이 생깁니다.

    그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요한복음 6:35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7:37-38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예수님께 나아가는 자마다 생명의 떡으로 영혼의 배고픔을 해결하고 생수의 강으로 영혼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문제는 먹을 것이 없어서 주리고 마실 물이 없어서 목마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갈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들어도 되고 듣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살리는 양식이며 생수입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3. 영적 기갈이 다가오는 것은 육신의 것에만 몰두하기 때문

    13절을 보겠습니다.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 

    여기서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는 인간이 육신적으로 가장 아름답고 강할 때를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면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왜 다 쓰러지는 것일까요? 
    육신적으로 최고의 상태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끊어지고 영적인 기갈이 다가오면 아름답고 젊음이 충만하던 젊은 남녀도 맥없이 쓰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가지고 인간이 육신적으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렸습니다. 
    그 과정에서 솔로몬은 우상숭배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없습니다. 
    육신의 것에 몰두하면 자연적으로 영적인 것은 관심 밖이 됩니다.

    말년에 하나님께로 돌아온 솔로몬은 육신의 것에 몰두했던 지난 삶에 회고하며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 1:14) 

    옛날이나 지금이나 청춘 남녀들이 하나님 말씀 없이 세상을 방황하다 넘어지고 자빠지기가 부지기수입니다. 
    겉으로는 멀쩡한 것 같지만 젊은이들이 육신의 것에 몰두하면 술과 마약을 하며 온갖 음란의 진흙탕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됩니다.

    사람들이 육신의 것에 몰두하면 또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요? 
    본문 14절을 보겠습니다. 
    “사마리아의 죄 된 우상을 두고 맹세하여 이르기를 단아 네 신들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라 하거나 브엘세바가 위하는 것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라 하는 사람은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우상을 만들고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섬깁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우상을 만들어놓고 복을 달라고 빕니다.

    이사야 4:17
    그 나머지로 신상 곧 자기의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그것에 기도하여 이르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하는도다.

    우리가 볼 때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그러면 우상 숭배하는 자들은 왜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사야 44:18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함은 그들의 눈이 가려서 보지 못하며 그들의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함이니라.

    우상숭배는 영적으로 무지하여 깨닫지 못하고 오로지 육신의 것에 몰두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우상숭배는 육신의 탐욕이 드러난 것입니다. 

    골로새서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탐욕은 모든 우상숭배의 뿌리입니다.

    우상숭배의 한 형태는 자연숭배입니다. 
    자연을 신성시하고 숭배함으로써 육신적 안전과 복락을 기대합니다. 
    애굽 사람들에게 나일 강은 풍요를 가져다주는 신이요 우상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출애굽 때 가장 먼저 나일 강을 피로 만들며 그들의 신을 심판하셨습니다(출 7:20, 12:12).

    인도의 힌두교인들도 갠지스 강을 성스러운 강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일생에 꼭 한 번은 갠지스 강에 몸을 담그는 게 소원이고, 죽어서 갠지스 강가에서 화장되는 것이 최대의 소원입니다.그래서 인도의 갠지스 강물에는 강변의 화장터에서 뿌려진 유골과 시신을 태운 부산물이 둥둥 떠다닙니다. 
    그러나 힌두교인들은 그 갠지스 강변에 몸을 담그고 강물을 성수(聖水)라며 감동하며 마십니다.

    우상숭배의 폐해는 참으로 심각합니다. 
    세계적으로 많은 민족이 우상숭배로 인해 일상이 온통 더러움에 오염되어 있습니다. 
    환경이 오염되면 병원균에 감염되어 병이 나고 죽게 되듯 우상에 전염되면 그 결국은 멸망입니다. 
    엎드러지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모든 문제의 핵심은 결국 영혼의 문제입니다. 
    세상에, 육신의 일에 마음을 빼앗기면 우리 성도들에게도 영적 기갈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죄에 대해 무감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무관심하고, 그리고 육신의 것에만 몰두하면 그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기갈이 찾아와서 영혼의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적으로 풍요롭던 때가 아득한 옛 시절 같습니까? 
    그렇다면 인정하기 싫어도 영적 기갈이 다가온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영적 기갈이 다가오지 않도록 하나님 앞으로 가까이 나아가기를 더욱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귀가 먹는 것으로 유혹할 때 
    신명기 8:3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면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베드로전서 2:2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함이라.


    9월 29일(월) 아모스 4-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4:12)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Therefore this is what I will do to you, Israel, and because I will do this to you, prepare to meet your God, O Israel.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12-13)

    예비하라(3559) 쿤(kûwn)  כּוּן

    1. 똑바로서다. 2. 세우다.  3. 필렐형  כּוֹנֵן
    발음 [ kûwn ] 
    구약 성경 / 217회 사용

    예비하다는 히브리 단어는 '쿤(kûwn)' 이라고 합니다.
    '쿤'이란 "똑바로 서다" 또는 "세우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만나려면 똑바로 서야만 합니다.

    똑바로 선다는 것은 올바른 삶을 말합니다.
    나라가 어지럽고 뒤숭숭한 이유는 똑바로 서야 할 사람들이 바르게 서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희랍의 철학자 플라톤은 똑바로 서는 것을 '정의(正義)'라고 하였습니다.
    정의는 사람마다 자기의 본분을 바르게 감당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정치가의 본분은 정치를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농사군의 본분은 때에 따라 씨를 뿌리고 가꾸어 풍성한 수확을 얻는 것입니다.
    군인은 나라의 영토와 국민들을 잘 지키고 보호하는 것입니다.
    상인은 장사를 잘하여 이익을 증대시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리에 따라 그리스도인의 본분은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사역하던 시기는 B.C. 793~753년이었습니다.
    북이스라엘 여로보암 2세 때의 사마리아는 태평성대의 시대였으며 무려 41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여로보암 2세는 수리아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영토를 크게 확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벧엘과 길갈에 황금송아지와 바알의 우상 신상을 세웠습니다.
    레위인이 아닌 보통 사람으로 제사장을 세우고, 8월 15일을 절일로 정하고 임의로 하나님께 제사했습니다.

    종교가 타락하면 도덕이 타락합니다. 
    백성들은 우상을 섬기는데 몰두하고, 높은 산, 푸른 나무숲은 음란과 쾌락의 유희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저에게 준 것이요, 저희가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저에게 더하여 준 것이라”고 통탄하셨습니다(호 2:8).

    이스라엘 온 천지가 풍성한 물질이 썩는 것과 함께 윤리와 도덕과 신앙이 썩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모스 선지자를 통하여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고 외치게 하셨습니다.

    오늘의 시대를 향하여 여호와 하나님은 동일하게 외치라고 합니다.
    대한민국 사람들아 여호와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면 사회 질서가 확립 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면 법질서가 바르게 실행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야 미국과 한국의 관계가 정상화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공의와 질서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거룩함이 묻어나는 공의와 질서가 없이는 세상을 새롭게 세워갈 수 없습니다.
    더러운 입맛에 따라 세상을 주물럭거린다면 여호와 하나님은 반드시 징계를 통하여 나라를 바르게 세울 수 있도록 엄하게 다스릴 것입니다.
    피 흘림이 없는 자유를 누리려면 먼저 공의로운 하나님 만기를 예비해야 합니다.

    지혜 있는 인간들은 어떤 일이든 미리미리 준비해 놓습니다.  
    만약을 위하여 예비합니다.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미래를 예비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보험에 가입하는 것도 장래를 위한 준비입니다. 
    죽어서 들어갈 묘지를 미리 예비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렇듯 인간들은 많은 예비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것들 보다 가장 중요하게 예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우리들에게 오늘 말씀하십니다.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왜냐하면 우리는 언젠가 한번은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그때에 예수를 믿었던 자는 천국으로 갑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고 산들을 지으시고 바람도 창조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은 심판주입니다. 
    그 만남을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모습 그대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죄인으로서는 영광스런 하나님 앞에 이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첫째, 하나님께 예배할 때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계시지 않을 거라 생각하면 안됩니다. 아무리 큰 봉사를 해도, 아무리 큰 헌금을 드려도, 아무리 중요한 직분을 받아도 예배에 등한한 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둘째, 회개할 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더럽고 추한 자를 만나주지 않으십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속에 꽉 차 있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죄를 없앨 수 있습니까?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회개해야 죄를 없앨 수 있습니다. 회개는 수술과 같습니다. 죄는 회개해야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깨끗이 씻음 받습니다. 불의가 죄입니다. 의롭지 못한 것이 죄입니다. 불법이 죄입니다. 법을 어기는 것이 죄입니다. 선을 알고도 행치 않는 것도 죄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믿지 않음이 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모두 죄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행위를 심판하십니다. 그 심판을 피하는 길은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깨끗이 씻음 받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하나님 만날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는 하나님 만날 준비가 된 자들입니다. 내가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내 죄를 회개하는 자는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씻음 받아 깨끗하게 용서함 받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아모스는 12절에서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러나 이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 일이나 성과가 있을 때는 주인을 만나는 것이 즐겁고 기다려지지만 잘못된 행동을 한 후 주인이 보자고 하면 그것은 두렵고 가기 싫은 법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곧 최후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작은 사건들로 경고하셨는데 결국 말을 듣지 않자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시겠다고 합니다.

    그 하나님이 어떤 분입니까? 13절입니다. “대저 산들을 지으며 바람을 창조하며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며 아침을 어둡게 하며 땅의 높은 데를 밟는 자는 그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온 우주 만물을 만드신 분이요, 그 앞에서는 온 만물이 벌벌 떨며 어떤 것도 감출 수 없습니다. 옛날 중국에서는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서는 그가 누구든 세 번 무릎을 꿇고 그 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해야 합니다. 황제가 거하는 자금성에는 일곱 개의 문이 있는데 이 문을 통과할 때마다 이런 예식을 행하게 했다고 합니다. 인간 앞에서도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는 더하지 않겠습니까?

    이는 매우 심각한 사실입니다. 인간은 그냥 살다가 죽으면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인생은 길어야 백년도 되지 않을 정도로 짧지만, 그래서 영원이라는 바다에 비하면 한줌의 모래만도 못하것 같지만, 그러나 그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내가 이 짧은 인생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영원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는 정말 두려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계시면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홀로 하나님 앞에 서고 홀로 하나님을 상대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신앙인들도 조심해야 합니다. 11절에 무어라 말씀합니까? “내가 소돔과 고모라를 무너뜨림같이 하였으므로 너희가 불붙는 가운데서 빼낸 나무 조각같이 되었으나” 한참 불이 붙은 나무 조각을 꺼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온통 그을리고 탄 불쌍한 모습일 것입니다. 이처럼 부끄러운 구원을 받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하면 이런 부끄러운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를 향하여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예배가 하나님께서 열납하실 만한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생활 속에서 무엇보다 이 세대의 정신과 가치관과 풍습을 본받지 않아야 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좇아 살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열납하실 만한 예배를 드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아모스 4:12~13)

    인간은 만남과 헤어짐의 관계 속에서 삶을 영위해 가고 있습니다. 
    어떤 만남은 소망과 기쁨 가운데 만나는 복스러운 만남이 있는가 하면, 어떤 만남은 만나면 안 될 사람이 만나고, 만나면 안 될 환경을 만나는 악연의 만남도 있습니다. 
    또 어떤 만남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선택할 수 있는 만남도 있고, 또 어떤 만남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필연적으로 기다리는 만남이 있습니다. 
    죽음 후에 찾아오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그것입니다. 
    성경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히 9:27).

    인생은 누구나 예외 없이 하나님 앞에 서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선악간에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죽음과 심판은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사역하던 B.C. 793~753년, 북이스라엘 여로보암 2세 때의 사마리아는 태평성대의 시대였습니다. 
    북이스라엘에서는 드물게 여로보암 2세가 4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는 수리아와의 일전에서 승리함으로,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영토를 크게 확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벧엘과 길갈에 황금송아지와 바알의 우상 신상을 세우고, 레위인이 아닌 보통 사람으로 제사장을 세우고, 8월 15일을 절일로 정하고 임의로 하나님께 제사했습니다.

    종교가 타락하면 도덕이 타락합니다. 
    백성들은 우상을 섬기는데 몰두하고, 높은 산, 푸른 나무숲은 음란과 쾌락의 유희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저에게 준 것이요, 저희가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저에게 더하여 준 것이라”고 통탄하셨습니다(호 2:8).

    이스라엘 온 천지가 풍성한 물질이 썩는 것과 함께 윤리와 도덕과 신앙이 썩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모스 선지자를 통하여 “네 하나님 마나기를 예비하라”고 이스라엘의 심판을 예고하셨습니다.

    주의 길을 예비하라(마가복음 1: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누가복음 3:4 /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이사야 40:3 /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왜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해야 하는가?

    1. 종말(개인의 종말, 세상의 종말)(창세기 3:19, 로마서 5:12, 베드로후서 3:10) 

    과학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인류는 끊임없이 생명의 한계에 도전해왔고, 어떤 부분은 얼마만큼 성과를 거둔 것도 사실이지만, 아직까지 극복하지 못하고, 영원히 극복하지 못할 불가능의 벽이 곧 죽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범한 아담에게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고 했습니다(창 3:19). 


    바울은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했습니다(롬 5:12).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라고 했습니다(벧후 3:10).

    성경은 여러 곳에 개인의 종말과 세상의 종말을 명백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도서 12장 14절엔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자는 죽음 후에 하나님 만날 일을 준비해야합니다.

    2. 죄 때문(로마서 3:10)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했습니다(롬 3:10). 
    아담의 타락 이래 온 인류가 범죄 했으니 하나님 앞에 의로운 인생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의롭다 칭함을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라”고 했습니다(요 3:16).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요 3:17).

    성경은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라고 했습니다(엡 1:7).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요일 1:7). 
    베드로는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벧전 1:19).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그분을 만날 준비를 해야 합니다.

    3. 잃어버린 상태에 있기 때문(누가복음 19:10)  

    예수님께서 “인자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고 왔노라”고 하셨습니다(눅 19:10).

    “잃어 버렸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하고, 하나님과 분리된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건강을 잃어버렸다고 가장 큰 손실이 아닙니다. 
    사람이 물질을 잃어버렸다고 가장 큰 손실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있어 가장 큰 손실은 사람이 영혼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하셨습니다(요 14:2). 
    그러나 하나님을 잃어버린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를 예비하지 못한 사람은 그 곳에 갈수 없습니다.

    어떻게 예비할 것인가?

    1. 이웃을 사랑하는 것(마태복음 22:37-39)

    율법사가 시험하여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하셨습니다(마22:37~39).

    첫째는 하나님 사랑이요, 둘째는 이웃사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늘 관심을 가지시는 이웃은, 작은 자! 곧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였습니다.

    2. 참된 신앙을 회복하는 것()


    본문 4절에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를 드린다”고 했습니다.

    벧엘과 길갈은 어떤 곳인가? 이스라엘의 종교와 신앙의 중심지입니다. 그곳에 우상을 세우고, 여호와 하나님과 이방신을 겸하여 섬기는 종교혼합주의 죄악에서 돌이켜야합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보다 더 앞세우는 무엇이 있다면 그것이 곧 우상이라는 사실입니다. 유형무형의 우상을 제하여 버리고, 하나님 제일주의 순수 신앙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3. 회개하고 돌아서야 하기 때문() 

    본문에는 “그런데 너희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씀이 6절, 7절, 9절, 10절, 11절에 계속하여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범한 이스라엘을 가진 방법을 동원하여 부르셨지만 그들은 돌아올 줄 몰랐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벧전 4:7)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오늘, 지금 바로 이시간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잠시 후에 그 문은 닫힐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부패와 패역은 여호와 하나님의 큰 근심거리 입니다.  
    이사야서 1장에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도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을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사야서에서 한탄하신 것이나 아모스에서 한탄 하시는 내용이 다 같습니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잠자는 이스라엘을 깨워 돌아오게 하시려고 고난을 주시지만 이 백성들은 절대로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습니다.
    양식를 떨어지게 하여 보시기도 하시고, 비를 멈추게 하시기도 하시고, 메뚜기를 동원하여 곡식을 다 먹어치우게도 하시고, 전염병으로 치시고, 이방의 군대로 침략을 하여 청년들을 죽게하시기도 하였으나 이 목이 곧은 이스라엘은 전혀 돌아설 생각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입으로는 섬기지만 동시에 악을 행하기에 익숙한 청개구리 같은  믿음을 가진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이되는 말씀입니다.

     

    이사야서 29장에 백성들에대한 하나님의 평이 나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에서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 
    우리들의 신앙의 모습도 어느덧 우리들의 믿음의 선조들을 닮아갑니다. 입으로는 다 그럴듯하게 말하지만 실상은 겉모습만 따라가는 믿음입니다.

    세상이 기이하게 돌아갑니다. 
    틀린 것 같은 정책과 법들이 버젓이 통과되고 시행이 됩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는 때 입니다.
    이 혼란의 와중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말씀을 하십니다.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 
    하나님은 오늘도 자기의 뜻을 택한 사람들에게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성경 말씀속에 이미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바로 택함을 받은 사람들 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서는 날, 지혜자의 지혜가 살아나고 명철자의 총명이 회복될 것 입니다.


    9월 27일(토) 아모스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자기의 비밀(3:7)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Surely the Sovereign LORD does nothing without revealing his plan to his servants the prophets.

    자기의 비밀을 다른 말로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비밀(God's secret)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 본절이 앞절과 연관성이 있는지 여부는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앞 부분과 논리적인 연결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T. E. McComiskey). 
    그래서 어떤 학자는 본절의 첫머리에 나오는 히브리어 '키'를 '그러나'(but)로 번역하고(Harper), 
    어떤 역본들은 '확실히'(surely)로 번역하였다(KJV, JB). 
    그렇지만 8절에 나오는 '사자'와 '두려움'의 개념이 4절의 '사자'와 6절의 '두려움'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을 보면, 
    7절만을 따로 생각할 수도 없다. 

    한편 '비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소드' '은밀한 협의'(SECRET COUNSEL)란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밀접한 관계에 기초한 적극적인 의논(잠 15:22)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깊은 관계성을 통해 미리 알려주는 계획(plan)을 가리키기도 한다. 
    하나님과 이런 관계에 있으므로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렘 23:18, 22). 
    한편, 하나님의 심판에는 그에 앞서 항상 경고가 있다. 

    노아 시대에 홍수 심판도 그러했고(창 6:13-21),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에도 미리 경고되었다(창 18:17-21;19:12,13).

    아모스 3장 7절의 "자기의 비밀"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심판이나 섭리이며, 하나님은 반드시 선지자들을 통해 이 비밀을 미리 알리신 후에 행하신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어떤 재앙을 내리시거나 어떤 일을 행하시기 전에, 종종 그 뜻을 선지자들에게 계시해주시고 그들에게 전달하게 하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내용 :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 본문은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임을 강조합니다. 


    현재 이스라엘에 대한 설교(아모스 3:1-15)

    3~6장까지는 설교 형태로 예언을 합니다. 
    그 중 3장은 현재, 4장은 과거, 5-6장은 미래의 틀에서 예언을 합니다. 
    3장은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예언을 2장에 비해 좀 더 구체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본장의 내용구조는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필연성(1-8절), 
    이스라엘의 범죄 지적(9-10절),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양상(11-15절)으로 되어 있습니다.

    1.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필연성 (1-8절)

    1.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께서 너희에 대하여 이르시는 이 말씀을 들으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리신 모든 족속에 대하여 이르시기를.   
    2.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

    하나님께서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리신 모든 족속에게 일렀습니다(1절).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모두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낸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언약백성으로 삼았음을 증명하는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가나안 땅에서 거룩한 제사장나라로 세우기 위해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구원해낸 것입니다(출 19:6). 
    그래서 하나님이 모든 민족 가운데 그들만 알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그들만 알았으니 하나님이 모든 죄악을 그들에게 보응할 것이라고 했습니다(2절). 
    이는 이스라엘에게만 특별한 사랑을 쏟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알다’에 해당하는 ‘야다’(ידע)는 지적인 앎이 아니라 경험적인 앎으로서 관계성을 기초한 지식을 강조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그들만 알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만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고 애정을 쏟았다는 의미로 한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만 다른 민족에게 주지 않은 특별한 은혜를 주었습니다. 
    그들에게만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고 그들에게만 자신의 뜻을 나타냈습니다. 
    그들에게만 자신의 뜻을 알 수 있는 율법을 주었고 자신과 교제할 수 있는 성전과 제사제도를 주었습니다. 
    그들에게만 특별한 은혜를 베푼 것은 그들을 거룩한 제사장나라로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출애굽기19:6에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름을 두시고 그들에게 영광을 받으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특별히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출애굽기19:5에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이라고 했습니다. 
    그 언약은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어기고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을 그에 합당한 징벌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3.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
    4. 사자가 움킨 것이 없는데 어찌 수풀에서 부르짖겠으며 젊은 사자가 잡은 것이 없는데 어찌 굴에서 소리를 내겠느냐
    5. 덫을 땅에 놓지 않았는데 새가 어찌 거기 치이겠으며 잡힌 것이 없는데 덫이 어찌 땅에서 튀겠느냐

    아모스는 하나님의 심판의 필연성에 대해 수사학적 질문을 통해 제시했습니다.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느냐고 했습니다(3절).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고는 같은 방향으로 같이 걸아갈 수 없습니다. 
    쟁기를 가는 소도, 행진을 하는 군사도, 여행을 하는 친구도, 사업을 하는 동업자도, 가정생활을 하는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처럼 언약 관계에 있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뜻이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언약을 지킨데 반해 이스라엘은 언약을 어기고 불순종과 죄악으로 길로 갔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자가 움킨 것이 없는데 어찌 수풀에서 부르짖겠으며 젊은 사자가 잡은 것이 없는데 어찌 굴에서 소리를 내겠느냐고 했습니다 (4절). 사자는 먹이를 사냥하여 잡았을 때 포효하며 먹이를 굴에 가져가 새끼들에게 먹이기 위해 새끼들을 부를 때 소리를 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심각한 죄악을 보았기 때문에 심판을 선언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덫을 땅에 놓지 않았는데 새가 어찌 거기 치이겠으며 잡힌 것이 없는데 덫이 어찌 땅에서 튀겠느냐고 했습니다 (5절). 덫은 얇은 판이나 그물 등으로 장치한 기구 안에 새 모이를 넣어두고 새가 모이를 먹기 위해 들어왔다가 장치를 건드리면 판이나 그물이 덮쳐서 새를 잡는 형태의 기구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하려는 것은 이스라엘이 심판받을 만한 죄악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이 드러났는데 하나님이 심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6 성읍에서 나팔이 울리는데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행하심이 없는데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

      7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8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

      아모스는 연이어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대해 수사학적 질문을 통해 제시했습니다. 성읍에서 나팔이 울리는데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행하심이 없는데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고 했습니다 (6절). 성읍에서 파수꾼이 나팔이 부는 것은 적군이 쳐들어올 때 부는 것입니다. 그 경고의 나팔을 불 때 백성들은 두려워 피하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이 심판하시려 하기 때문에 그것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에게 보이지 아니하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7절). 하나님은 심판을 내리기 전에 먼저 선지자에게 알려서 그 심판에 대한 경고를 한 다음에 그래도 돌이키지 않을 때 심판을 내립니다. 노아 때 세상이 홍수로 멸망당할 때도 그러했고 아브라함 때 소돔 고모라가 유황불로 멸망할 때도 그러했습니다 (창6:13-21, 18:17-21, 19:12-13). 본절은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종말의 날짜를 예언하면서 그 근거로 자주 활용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본절의 내용은 날짜 개념이 아니라 사건 개념의 계시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하려할 때도 아모스에게 미리 그 계획을 알려 주었는데 그것은 아모스로 하여금 이스라엘에 심판을 경고하게 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에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심판 메시지를 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모스는 이어서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않겠으며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8절). 사자가 부르짖으면 누구나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이 심판을 경고하면 그 심판 메시지를 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선택하시고 구원하시고 영광받으려는 목적을 가지셨습니다. 베드로전서2:9에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남다른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예수님의 구속과 성령님의 강림으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령님의 인도와 성경말씀의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예배와 교제와 사역에 참여하게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전도와 선교의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하여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만 섬기며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을 가진 성도답게 사는 것입니다.
     
    2. 이스라엘의 범죄 지적 (9-10절)

    9. 아스돗의 궁궐들과 애굽 땅의 궁궐들에 선포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사마리아 산들에 모여 그 성 중에서 얼마나 큰 요란함과 학대함이 있나 보라 하라
    10. 자기 궁궐에서 포학과 겁탈을 쌓는 자들이 바른 일 행할 줄을 모르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아스돗 궁궐들과 애굽 땅 궁궐들에 선포하여 이르라고 했습니다. 사마리아 산들이 모여 그 성 중에서 얼마나 큰 요란함과 학대함이 있나 보라고 하라 했습니다 (9절). ‘아스돗’(Ashdod)은 블레셋의 5대 성읍중 하나로서 블레셋을 가리켜 한 말로서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자주 침입하여 괴롭힌 나라였습니다. ‘애굽’(Egypt)은 이스라엘이 그곳에 살 때 학대하여 괴롭힌 나라였습니다. 그처럼 이방국가로서 대적국가였던 나라에게 이스라엘의 죄를 보게 한 것입니다. ‘사마리아’(Samaria)는 북이스라엘의 수도로서 북이스라엘을 가리켜 한 말입니다. 이방국가에게 이스라엘에 얼마나 큰 요란함과 학대함이 있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요란함’에 해당하는 ‘메호마’(מהומה)는 혼란, 소동, 괴롭힘 등의 뜻이 있는 단어인데 여기에서는 괴롬힘의 의미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블레셋과 애굽은 그 나라의 왕궁과 성읍들에서 괴롭힘과 학대가 심하게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이스라엘 성읍들에 괴롭힘과 학대함을 있는지 보라는 것은 이스라엘 왕궁과 성읍에 괴롭힘과 학대함이 블레셋과 애굽에 못지않게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언약국가가 이방국가에 못지않은 죄를 지으므로 이방국가가 그들을 보고 놀랄 정도라는 것입니다.

      자기 궁궐에서 포학과 겁탈을 쌓는 자들이 바른 일 행할 줄 모른다고 하라 했습니다 (10절). 권세자들이 궁궐에 살면서 포학과 겁탈을 일삼는다는 것입니다. 권세를 가진 자들이 권세를 이용하여 힘없는 사회적 약자들을 심하게 억압하고 착취한 것입니다. 15절에 보면 “겨울 궁과 여름 궁을 치리니 상아 궁들이 파괴되며 큰 궁들이 무너지리라~”고 했습니다. 권세자들은 큰 궁궐을 짓고 살았습니다. 궁궐을 겨울 궁과 여름 궁이 따로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냉난방 시설이 없는 때였으므로 겨울에는 벽을 두껍게 하고 문과 문틀을 튼튼하게 단 따뜻한 집에서 지내고 여름에는 벽이나 창을 거의 없는 시원한 집에서 지냈습니다. 아내들의 거처로 별채를 따로 두기도 했는데 상아(코끼리 이)로 장식을 해서 상아궁이라 하기도 했습니다. 12절에 보면 “~사마리아에서 침상 모서리에나 걸상의 방석에 앉은 이스라엘 자손도 건져냄을 입으리라”고 했습니다. 침상과 의자의 방석이 언급되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침대와 쇼파를 말합니다. 지금으로부터 3천여 년 전인데 그런 것들을 갖추고 산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부요한 생활이 9절에서 언급한대로 학대로 인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압제하고 그들의 것을 탈취한 것들로 누리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권세를 가진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빚을 주고 빚을 못 갚으면 경작지와 집 등을 빼앗은 것입니다. 빼앗긴 자들은 자연히 사마리아에서 살지 못하고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율법은 가난한 자들을 도울 것을 요구합니다. 50년마다 돌아오는 희년 때에는 종도 풀어주고 땅도 되돌려주고 빚도 탕감해 주게 했습니다 (레25:13-55). 추수 때 곡식 한 뭇을 잊어버리고 왔으면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버려두라고 했습니다. 포도도 다 따지 말고 얼마를 남겨두고 감람나무도 한 번 떤 후에 다시 가서 살피지 말라고 했습니다 (레19:10, 신24:19-21). 그것은 가난한 자를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북이스라엘 사회는 그런 정신을 무시하고 오히려 자기 가난한 자들을 착취한 것입니다. 우리 사회도 국가는 제도적으로 사회적 약자들이 살 수 있도록 해야 정의로운 사회라 할 수 있습니다. 세금을 충분히 거두어 국방과 교육에 사용하는 동시에 복지에 많이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서 노인이나 극빈자들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어야 합니다. 또한 부자들은 자발적으로 기부를 많이 해야 합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라는 말이 있습니다. 로마시대에 사회 지도층이 사회에 대해 가져야 하는 도덕적 의무 혹은 책임을 강조하는 프랑스어입니다. 당시 귀족들이 노동자들에 대해 도덕적 의무를 다해야 자신들과 사회 전체가 잘된다는 생각을 가진 데서 나온 말입니다. 교회적으로는 교우들 가운데 극빈자들을 돕도록 해야 합니다.

    3.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양상 (11-15절)

    11.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 땅 사면에 대적이 있어 네 힘을 쇠하게 하며 네 궁궐을 약탈하리라
    12.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목자가 사자 입에서 양의 두 다리나 귀 조각을 건져냄과 같이 사마리아에서 침상 모서리에나 걸상의 방석에 앉은 이스라엘 자손도 건져냄을 입으리라
    13. 주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의 말씀이니라 너희는 듣고 야곱의 족속에게 증언하라
    14. 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보응하는 날에 벧엘의 제단들을 벌하여 그 제단의 뿔들을 꺾어 땅에 떨어뜨리고
    15. 겨울 궁과 여름 궁을 치리니 상아 궁들이 파괴되며 큰 궁들이 무너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땅 사면에 대적이 있어 이스라엘의 힘을 쇠하게 하며 이스라엘의 궁궐을 약탈하리라고 했습니다(11절). 
    사면에 대적이 있어 힘을 약화시키고 궁궐을 약탈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앗수르(Assyria) 제국의 디글랏 빌레셀 3세(Tiglath-pileser III)가 B.C. 733년에 북이스라엘에 속한 길르앗과 갈릴리를 침략하고, 살만에셀 5세(Shalmaneser Ⅴ)가 B.C. 722년에 북이스라엘을 완전히 멸망시킵니다. 
    그리고 목자가 사자 입에서 양의 두 다리나 귀 조각을 건져냄과 같이 사마리아에서 침상 모서리나 걸상의 방석에 앉은 이스라엘도 건져냄을 입으리라고 했습니다(12절). 
    당시 목자가 양을 치는 중에 맹수가 양을 잡아먹게 되었을 때 목자가 양의 다리나 귀 조각 등을 주인에게 가지고 가면 그것이 목자가 양을 지키려 했다는 증거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잃어버린 양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목자가 맹수에게서 양의 다리나 귀 조각을 건지는 것처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대적을 통해 멸망시킬 때에 그들을 멸망시키는 가운데서도 남은 자가 있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철저한 심판 가운데서도 회복의 여지를 남겨두겠다는 것입니다. 
    아모스서 전체의 의미를 볼 때는 두 번째 의미일 것 같으나 본문 자체만을 볼 때는 본문이 심판을 강조하는 부분이라는 점에서 첫 번째 의미일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블레셋(아스돗)과 애굽에게 하나님 말씀을 듣고 야곱 족속에게 증언하라고 했습니다(13절). 
    이방민족이 증언을 할 정도로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이 심각했음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보응하는 날에 벧엘의 제단을 벌하여 그 제단의 뿔을 꺾어 땅에 떨어뜨릴 것이라고 하라 했습니다(14절). 
    ‘벧엘’(Bethel)은 이스라엘의 종교적 배도에 대한 대표적인 장소입니다. 
    여로보암1세(JeroboamⅠ)는 북이스라엘의 벧엘과 단에 제단을 쌓고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숭배했습니다(왕상12:28-33). 
    ‘제단의 뿔’은 제단의 가장 중요한 핵심 부분입니다. 
    속죄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권위와 능력의 상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벧엘에서 금송아지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에 그 우상숭배의 장소를 완전히 파괴하되 가장 핵심적인 것까지 파괴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도덕적으로도 타락했지만 근본적으로는 종교적이 타락이 있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고 율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생활에서 범죄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긴 데서 발생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겨울 궁과 여름 궁을 쳐 상아 궁들이 파괴되며 큰 궁들이 무너질 것이라고 하라 했습니다(15절). 
    왕을 비롯한 권세자들은 겨울에 거할 곳과 여름에 거할 곳을 따로 두고 그 집을 상아로 장식했습니다. 
    힘없는 백성들을 압제하고 그들의 것을 착취한 것으로 풍요를 누렸기 때문에 그것들을 다 파괴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언약국가로서 이방국가의 모습으로 타락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미 심판을 경고했던 이방국가들에게 이스라엘의 심판을 증언하라고 한 것입니다. 
    13절에 “주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의 말씀이니라 너희는 듣고 야곱의 족속에게 증언하라”고 했습니다. 
    이방민족이 증언을 할 정도로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이 심각했음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속적인 단체와 다를 바 없고 성도들이 세속적인 자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인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와 성도가 바른 정체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4:17에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라고 하는 말씀을 깊이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비밀 예수 그리스도(골로새서 1:24-27)

  •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 내가 교회 일군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 성경은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비밀은 감추어진 것이지만 꼭 알아야 할 사람들에게는 공개된 것이지요. 
    이것이 비밀의 양면성입니다. 

    비밀의 헬라어는 ‘뮈스테리온’입니다. 
    ‘입을 다물다라’는 단어 ‘뮈오’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알리지 말아야 할 말이나 일을 의미하지요. 
    신약에서 그 의미는 신령한 계시 외에는 밝혀질 수 없는 진리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이 비밀이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영원 전부터 감추어져 왔으며 하나님의 종들에게 공개된 것입니다(단2:19,28,29). 물론 성경이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되어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성경의 내용을 알고 믿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믿음을 가져야 할 사람들에게는 성경의 비밀이 열려있고, 믿음을 갖지 못할 사람들에게는 성경은 여전히 비밀에 붙여진 책이지요. 그러므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비밀을 알 수 있다는 것이 최고의 행복입니다. 우리 모두 성경이 우리에게 오픈된 하나님의 편지임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만일 나에게 성경이 공개되지 않는 비밀의 책으로 남아 있다면 나는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음에 감사하십시다. 무엇보다 성경 말씀이 들려지고 믿어지는 것이 가장 큰 복 인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비밀 성경이 나에게 공개된 것이 최고의 축복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책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신비가 성경 안에 다 들어 있지요.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소개하시고 믿게 하십니다. 그런데 만일 아무에게나 공개해도 상관없는 일이라면 굳이 비밀이라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비밀은 꼭 알아야 할 사람만 알아야 합니다. 지켜줄 수 있는 사람에게는 비밀을 맡겨주십니다. 만일 비밀을 지켜주지 못할 사람이라면 비밀을 어떻게 공개할 수 있겠습니까? 때문에 나에게 비밀이 공개된 것은 그만큼 하나님이 나를 믿어주신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한마디로 나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겨주시는 것이지요.

    그것은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나에게 비밀을 공개하는 것은 그만큼 나를 믿어준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사람과의 관계도 신의가 있어야 비밀을 맡겨둡니다. 하물며 하나님은 오죽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비밀을 이해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시기에 맡겨주십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아줄 그릇이 된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에 비밀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이른바 하나님의 비밀을 이해하고 믿고 지키고 행하는 자에게 당신의 비밀을 맡겨두신다는 말이지요. 비록 나는 전혀 그럴만한 그릇이 아닐지라도 하나님이 나를 그만큼의 수준으로 인정해주신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얼마나 행복합니까?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지요. 하나님의 비밀을 아는 사람들이니까요. 하나님이 당신의 비밀을 맡겨두신 것이니까요. 내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비밀이 들려지고 보여지고 믿어지니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을 소개하기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4:1)라고 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겨달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바울 사도 안에 하나님의 풍성한 비밀이 가득하다는 말이지요. 과연 내 안에 하나님의 비밀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비밀이십니다. 
    하나님의 비밀의 본체이십니다. 하나님의 모든 비밀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비밀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두 맡겨놓으셨습니다. 세상 어떤 종교나 어떤 사람에게도 하나님은 당신의 비밀을 맡겨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세상 어떤 종교도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비밀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으면 아무도 하나님의 비밀을 알 수 없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비밀이라는 말이에요.

    하나님의 비밀을 알기 원하시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면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모든 비밀을 알려주십니다. 그러면 그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가 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일꾼이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비밀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자만 알 수 있고, 비밀을 맡을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는 것이 비밀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다는 것이 비밀입니다. 믿는 자는 누구든지 이 비밀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의 비밀을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공개하시면서 다른 자들에게는 숨기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천국의 비밀이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그 하나님의 비밀을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알려주십니다(마 13:11).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그러므로 나에게 당신의 비밀을 공개하신 하나님이 얼마나 고맙습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당신의 비밀을 알려주심에 감사하십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비밀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하나님은 성경에 계시된 모든 비밀을 우리가 다 알기 원하십니다. 우리의 믿음만큼 알려주십니다. 성령을 통해 알려주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믿고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토록 믿어주시는데 과연 나는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는 것일까요?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을 내 마음 판에 새기지 못하고 그 비밀을 지켜드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요? 대부분이 그럴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맡겨주신 믿음의 비밀을 잘 새기고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나를 믿고 비밀을 알려주신 하나님에 대한 예의입니다. 비록 어떤 위험이나 불이익이 있을지라도 말입니다. 비밀은 반드시 지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비밀의 생명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반드시 하나님의 비밀을 믿음으로 받아드리고 행함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비밀대로 살아야 한다는 말이지요.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비밀을 누설한다할지라도 예수님이 알려주시지 않으면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비밀을 풀 수 있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으니까요. 그런데 그 비밀의 열쇠를 가지신 예수님이 내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주시는 마음과 생각으로 살 때 하나님의 모든 비밀이 풀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거든요.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사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에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비밀을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비밀을 알고 싶으면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본다고 해서 하나님의 비밀을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 비밀을 깨닫는 지혜를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 하나님께서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당신의 비밀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사실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비밀이지만 그중에 최고의 비밀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최고의 비밀입니다(27, 2:2). 그런데 그 예수님이 어디 계실까요? 내 안에 계십니다(27절).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이보다 더 큰 비밀이 어디 있겠습니까?

    골로새서 2:2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골로새서 1: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비밀을 구하기만 하면 성령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 깨닫게 해주십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무엇일까요? 성령은 우리 안에서 내 영으로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비밀을 알려주시고 깨닫게 하시고 적용시켜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14장 26절을 보십시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삼위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은 질서가 분명하십니다. 삼위 하나님의 역할이 다르십니다. 모든 일을 작정하시고 설계하시는 분은 성부 하나님이시오, 하나님의 모든 일을 맡아서 성취하시는 분은 성자 예수님이십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우리 안에서 깨닫게 하시고 적용케 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아무도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습니다(고전12:3). 성령께서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십니다(롬 8:16). 하지만 구속사역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모든 비밀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비밀을 갖고 계시고 알고 계신다는 말이지요.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비밀을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비밀을 알려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알려면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비밀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비밀을 아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비밀을 가지시고 우리 가운데 친히 오신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것이지요. 그 예수님은 하나님의 비밀의 완전체로 오신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을 믿어야 하나님의 비밀이 풀리는 거예요. 믿지 않으면 하나님의 비밀을 몰라요. 하나님의 비밀을 알기로 작정된 자들만 알 수 있는 거예요. 사도행전13장에 보면, 전도여행을 떠난 사도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나 아무나 그들이 전한 복음을 영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작정된 자들만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13:48)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알기로 작정된 자들만 복음을 받아드린 것이지요.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것입니다. 이른바 하나님의 비밀을 받아드린 것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을 좇아 우리가 복음을 영접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일입니까? 하나님의 비밀은 세상의 지식이나 학문으로 설명되어질 것이 아니요, 세상의 철학이나 종교로 믿어질 것이 아니며,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이해되어질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최고의 비밀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최고의 비밀이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것을 알려면 먼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비밀의 본체이십니다. 예수님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비밀이에요. 예수님의 탄생과 사역 모든 것이 하나님의 비밀이지요.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비밀이지요.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성령잉태가 하나님의 비밀이요, 성육신이 비밀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이 비밀이요, 부활이 비밀입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승천하심이 비밀이고, 다시 오시는 주님이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그분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신비에 쌓여있는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무엇보다 그 예수님이 내안에서 나를 성전 삼고 계심이 비밀입니다. 이 비밀이 아무나 믿어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내 안에 의심없이 믿어지는 것이 신령한 은혜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이 비밀이 풀린 것입니다. 예수를 영접하지 않는 자는 여전히 베일에 쌓여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전혀 비밀을 알 수 없는 것이지요. 감히 누가 하나님의 비밀을 풀어줄 수 있겠습니까? 시대마다 하나님의 비밀을 풀어주겠다고 자청하는 사람들이 자주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입맛에 맞는 말만 토해냅니다. 자기들 멋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난도질합니다. 그들은 영혼을 미혹시키는 영적사기꾼들인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시대마다 있어 왔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극성을 부리고 있지요. 하지만 예수님을 통하지 않으면 아무도 하나님의 비밀을 풀 수 없습니다. 혹시라도 주변에서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자기들 멋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거나 선포하는 자들이 있다면 경계하십시오. 대부분 그런 자들은 음녀와 같이 달콤한 말로 성경을 해석하고 풀어갑니다. 성경을 자기들 마음대로 작위적으로 해석하여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도적질 할 것입니다. 말세에는 그런 자들이 더욱 많아질 것입니다.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비밀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으면 알 수 없도록 보안장치를 해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에게도 현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종교에도 속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알려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해야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품속에 있는 독생자로서 하나님의 비밀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물론 그분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말씀으로 계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분을 새 언약의 중보자로 우리 가운데 보내신 것이지요.

    그분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와 함께 살기 위해서입니다(살전 5:10).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런데 주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이 땅에 오셔서 내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친히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아무나 믿어지겠습니까? 주님이 주시는 믿음이 아니면 믿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의 비밀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하늘보좌 우편으로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모든 죄를 탕감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속량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11-12절은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그런데 이 비밀이 믿어지십니까?

    그런데 그 주님이 다시 왕권을 가지시고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과 함께 영으로, 그리스도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9장28절은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해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이것도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성전 삼고 내안에 주인으로, 왕으로, 전부로 들어오셔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여 예수님은 머리가 되고, 나는 몸이 되어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예수님이 주는 마음에서 그분의 음성을 듣고 살게 해주시겠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이른바 새 언약의 복음이지요. 요한복음 10장27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비밀이요, 천국의 비밀입니다. 이것이 이해되어지고 믿어지는 것이 복음의 비밀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 비밀을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서 깨닫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비밀이 깨달아지십니까? 믿어지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세상에서 최고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복음의 비밀은 반드시 율법을 통과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3:24-25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복음은 비밀 중에 비밀입니다. 
    그런데 이 비밀이 율법 안에 감추어져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구약 성도들은 율법을 통해서 복음을 보아야 했던 겁니다. 그러나 율법을 통해 복음의 비밀을 깨닫는 것이 어찌 그리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율법이라는 수건이 벗어져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옷을 벗어야 복음의 비밀을 아는 거예요. 그런데 아직도 율법의 수건을 쓰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복음이 비밀이 완전히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율법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율법을 붙들고 살아갑니다. 그 사람들은 절대로 복음의 비밀을 알 수 없는 것이지요.

    복음의 비밀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면 영원한 생명이 없습니다. 복음이 아니면 구원은 없습니다. 그 복음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비밀을 알지 못하면 복음을 믿지 못함이요, 복음을 믿지 못하면 구원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십니다. 율법을 주신 목적은 결국 복음을 만나게 하심입니다. 이른바 율법을 통과하여 복음을 만나게 하려하심이지요. 그런데 지금도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율법을 통과하지 못하고 율법에 갇혀 살고 있습니다. 정말 가슴 아픈 일이지요.

    누차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버스를 타고 어디로 이동할 때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릴 것입니다. 
    정류장은 버스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장소에 불과합니다. 
    정류장에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정류장은 지정된 목적지를 향해 가기 위해 잠시 머무는 장소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율법은 복음을 만나기 위한 하나님의 한시적인 법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만 유효한 법이지요. 
    우리를 예수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는 거지요. 
    아파트를 분양하는 시공사가 아파트 분양을 위해 모델하우스를 짓습니다. 
    그 모델하우스는 구입할 아파트의 그림자입니다. 
    아무도 그 모델하우스에서 살지 않습니다.

    그 모델하우스는 실물 아파트 분양이 끝나면 전부 철거가 됩니다. 
    아무도 모델하우스에서 살겠다고 고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에 그런 바보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율법도 그런 원리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복음으로 안내하는 몽학선생일 뿐입니다. 
    복음의 실체이신 주님이 오시면 그림자는 사라집니다. 
    그런데 복음의 실체이신 주님이 이 땅에 육체를 입고 오신 것입니다. 
    이른바 그분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오신 것이지요(골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He is the image of the invisible God, the firstborn over all creation.


    이것이 복음의 비밀입니다. 이 비밀을 아는 자가 복된 사람이지요.

    이 비밀을 알려면 반드시 율법의 수건이 벗겨져야 합니다. 율법의 옷을 벗어야 합니다. 율법의 때가 벗겨져야 합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지요.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난 것이지요. 그러면 율법 안에 감취어진 하나님의 비밀을 주님이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하나님의 비밀을 다 갖고 계시고 알고 계시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아직도 율법의 옷을 벗으면 죽을 것 같이 여기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허다합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는 것처럼 안달 부달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뭔가 자기 눈에 보이는 종교적인 열심이나 공력이 추가되지 않으면 불안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아직도 율법의 선입견이나 편견이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기도하십시오. ‘주님, 제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내 눈에서 율법의 비늘이 벗어지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반드시 율법의 옷을 벗어야 복음의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아무도 복음의 옷으로 단장하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부가 아니라면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 없는 자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씀이지요. 아무리 당신이 율법으로 흠이 없을 정도로 완벽하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당신이 사도 바울처럼 율법으로 흠이 없고 완전하십니까? 그런 사도 바울도 율법의 더러운 옷을 훌훌 벗어버리고 복음의 옷을 입었습니다. 구원은 다른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그 비밀이 주안에 나타났습니다. 당신의 종교적인 고집으로 당신의 영혼을 망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다른 복음은 율법으로 살려고 하는 일체의 모든 행위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율법으로는 구원이 없다는 말입니다. 저주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경고하는 것입니다(갈1:9). 그런데도 율법을 고집하시렵니까? 당신은 율법을 버렸다고 말할는지 모르지만 지금 당신의 생각을 붙들고 있는 종교적인 모든 것들이 당신 안에 있는 율법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복음은 오직 주님이 주시는 마음과 생각입니다. 당신을 압도하는 모든 마음과 생각을 내려놓으십시오. 그것을 포기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복음을 영접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율법으로 하지 않으면 우리가 복음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율법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알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이 죄의 값을 알게 하였습니다. 또한 율법은 나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비참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율법이 없으면 죄를 모르고, 죄를 모르면 사망을 모르며, 사망을 모르면 영생도 모릅니다. 그런 모든 사실을 우리에게 알게 하신 것이 바로 율법의 기능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7:12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율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복음을 만나지 못합니다. 복음을 만나지 못하면 비참한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복음의 비밀이 우리 안에 깨달아지기를 축원합니다. 그 복음의 비밀이 사도들을 통해서 공개되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복음의 비밀이 공개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복음의 비밀이 공개된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이보다 더 복된 것은 없습니다. 율법 안에서 감추어있던 복음의 비밀이 공개된 자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구약과 신약은 시대적으로만 구분할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여전히 구약시대에 사는 사람이 있고, 구약시대에도 신약시대처럼 살았던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지금도 구약시대처럼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른바 아직 율법의 탈을 벗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힘쓰고 애쓰는 사람들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나 구약시대를 살았던 사람일지라도 복음을 만나서 복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은 복음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시간적으로 신구약을 구분하는 것은 또 다른 율법의 잔재에 불과할 뿐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골자는 이것입니다. 영적인 것과 육신적인 것의 경계는 시간이 아니요, 장소가 아닙니다. 혹은 세대도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각 사람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느냐의 여부에 달린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젊은이가 늙은이처럼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비록 나이는 늙었지만 젊은 청춘처럼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마음의 자세로 살아가느냐가 중요합니다. 
    지금 우리가 은혜의 시대, 복음시대를 살아가지만 여전히 율법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율법의 옷을 입고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자들은 아직도 주안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비밀을 바르게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비밀을 아는 자라면 반드시 복음을 믿고 복음 안에서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즉, 예수를 구주삼고 주님이 주시는 마음과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의 비밀에 참예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비밀을 기쁨으로 누리고 자유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비밀(The mystery of God) 골로새서 1:25-27

    25. 내가 교회 일군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추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사도 바울은 골로새교회 성도에게 자신이 교회의 일군이 된것은 하나님의 경륜, 곧 그분의 명령을 따라 된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맡기신 ‘명령’ (mission) 은 바로 ‘하나님의 비밀’ 을 알게 하는 것이라고 바울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비밀은 영원전 부터 모든 세대 가운데 감추었던 것인데, 이제 ‘그의 성도들에게 드러나게 되었다’ 고 말합니다. 

    이 비밀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바로 구약에 약속된 다윗의 씨요, 메시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그러나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십자가에 목박아 죽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인것 입니다. 
    이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의 비밀이요, 우리 모든 성도의 ‘영광의 소망’ (the hope of glory) 라고 바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말씀을 통해, 단순히 머리로만, 성경지식으로만이 아니라, 내 인격적인 고백을 통해 예수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비밀되시며, 나의 영광의 소망되심을 고백하는 축복된 성도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기대 합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잘 알고 있는가?’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이 질문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 하시겠습니까? 

    사실,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 비록 오랫동안 신앙생활 했다는 그리스도인들 조차도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에 대해 물으면 주로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합니다; “예수님은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음을 믿음으로 우리가 죄사함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가게 됩니다!!” 모두 맞는 말 입니다. 이것은 모두 예수 믿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가게 된다는 구원의 확신을 언급한 것 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전부라면 많이 부족 합니다. 오늘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했다면, 영원전 부터 모든 세대에 감추어졌던 비밀이요, 이제 성도들에게 ‘드러난 비밀’ (the revealed mystery) 이 되신다면 <예수님 믿으면 죄 사함받고, 천국간다> 가 예수님에 대한 전부가 되어서는 문제가 많음을 우리는 깨닫아야만 하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2000여년전에 팔레스타인 나사렛동네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셔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신 그분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를 멸망시키지 않고 살리기 위해 이 땅에 죽게 하고자 보내신 그의 독생자 예수는 누구 입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성경에 나타난 것을 통해 차례대로 살펴 보겠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은 그의 미션을 이루셨나?’

    첫째그분의 ‘의로우신 피’로서 그 미션을 이루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은 죄없으신 선하신 분으로서 우리를 위해 그의 '값진 생명' (=의로우신 피) 를 대신 주실수 있는 자격이 있는 분 입니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인 것 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자격)

    둘째, 십자기 위에서 하나님의 화목제물되심으로 그 미션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미션을 이룰 자격이 있을뿐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철저하게 순종하심으로 그 사명을 이루셨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어린양' 이 되셔서 말 입니다. (하나님의 어린양: 순종)

     큰그림에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온 목적(mission)은?’ 

    1. 하나님과 화해’ (For reconciliation with God)시키기 위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 롬. 3:25) 이것을 줄여서 ‘칭의’ (justification)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나의 죄가 씻음바 되고, 의롭다고 불리어지는 것 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어지는 시작인 것 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과 더 깊은 사귐을 통해 화목해 가는 것 입니다.
    2.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백성’ (For being people who eager to do what is good) 되게 하시고자: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디도서 2:14) 이것을 줄여서 성화’ (sanctification) 라고 합니다. 특별히 여기서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수많은 크리스챤들이 예수믿고 구원받는 것에는 관심과 믿음이 집중되어 있지만, 거듭난 이후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하나님의 자녀' 가 되는 일에는 관심도 없고 열심도 없다는 사실 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자녀들에게 드러내시고자 하는 비밀은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성숙된 자녀가 되기 원하신다는 사실 입니다.
    3.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 (For reigning with Christ) 하게 하시고자: (“ ~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살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 할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디모데후서 2:11,12) 이것을 줄여서 ‘영화’ (glorification) 라고 합니다. 이 '영화'의 삶은 현재의 삶이 아니라, 언젠가 다시 주님을 만나게 될때 영화롭게 변화되어질 삶인 것 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우리 각자는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갈수 있을찌를 살펴 보겠습니다.
    • 나는 어떻게 <하나님의 비밀> 예수님을 알아갈까?’
    1. 그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묵상’함으로: 복있는 사람은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  하여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시편 1:1,2): 예수님을 알아나간다는 것은 그분과 점점 더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나간다는 뜻 입니다. 그분을 알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첫출발이 되어야 할까요? 이미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라면, 이제 다음 단계는  그분의 마음과 뜻을 이해해 나가는 것 입니다. 그분의 마음과 뜻을 어떻게 알아갈까요? 바로 성경말씀 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내신 그분의 뜻과 계획하심이 성경에 매우 구체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나는 잘 모르겠다’ 고 말하지 마십시요. 그것은 당신이 말씀을 읽고, 그분의 뜻을 찾기에 무관심하고 게으른 까닭 입니다. 하나님의 이 비밀은 감추어져 있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 깊은 속까지도 ‘드러내신 비밀’ (the revealed mystery) 인 것 입니다. 내가 여전히 말씀을 즐거워 하지 않고, 하루동안 그리스도의 생명의 말씀을 마음에 되새기기를 게을리 한다면, 여러분은 결코 하나님의 비밀인 주님을 알아갈수 없습니다.
    2. 그의 말씀을 ‘지켜나감’으로: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한복음 14:21)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사랑하고 묵상해 나가는 것이 그분을 알아 나가고 그분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가는 출발점이라면, 그분의 말씀 즉, 그의 계명 (=명령) 을 지켜나가는 것은 반드시 함께 이어져나가야 할 다음 단계일 것 입니다. 이말은 ‘주님은 말씀은 열심히 보는데, 그의 말씀데로 살지 않는다’ 라는 엉터리 신앙이 되어서는 않된다는 뜻 입니다. 주님의 생명의 말씀을 묵상하고 사랑한다면, 반드시 그 말씀의 뜻을 쫓아 지켜 나가야만 한다는 것 입니다. 주님은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 (. 14:21) (“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요. 15:10b) 고 분명하게 선언하셨읍니다. 그분의 계명 (the commandment) 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 13:34) 는 것 입니다. 왜 주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이토록 강조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다음 이렇게 그이유를 밝히고 계십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제자인줄 알리라” (. 13:35) 는 것 입니다. 말로가 아니다는 것 입니다. ‘서로사랑할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의 제자로 합당한 삶을 살게 되는 것 입니다. 당신은 지금 사랑을 연습하고 있습니까?
    3. 성령을 통해 그분 안에 거함’으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안에, 내가 안에 있으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수 없음이라” (. 15:5) 예수님을 우리가 알아나간다는 것은 결국 주님과 내가 하나가 되어지는 인격적인 연합을 뜻함을 주님은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 말씀 하십니다. 포도나무가지가 열매를 많이 맺는 방법은 오직 한가지 입니다. 바로 ‘포도나무 원둥치’ 에 잘 붙어 있어야 합니다. 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순간, 그 가지는 어떤 열매도 맺을수 없고, 말라죽게 됩니다. 그 나무로 부터 ‘수액과 영양분’ 을 공급받지 못하게 되기 때문 입니다. 예수님을 더 깊이 알아나간다는 것은 최종적으로 그분안에 거하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지막 질문은 “어떻게 하는것이 그분안에 거하는 것인가?” 일것 입니다. 주님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십니까?;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계명을 지키면 사랑 안에 거하리라” (. 15:10) 고. 이 말씀은 다시 두번째 조건으로 돌아 갑니다. 즉, 주님을 계명을 지킨다는 뜻은 그분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 그분의 계명을 지킬때 우리는 주님의 사랑안에 거하게 될뿐 아니라, 그분안에 또한 거하게 되는 것 입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바로 ‘성령’을 말씀 하셨습니다. 왜일까요? 성령이 아니고는 주님의 사랑의 명령을 누구도 지켜 나갈수 없기 때문 입니다. 여러분은 성령께 순종함으로 사랑의 명령을 지켜 나가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그의 독생하신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영원전 부터 감추어져 있는 그분의 놀라운 비밀을 그의 택하신 자녀들에게 밝히 드러내기를 심히 기뻐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우리를 천국백성 되게 하여 주실뿐 아니라, 그분을 모퉁이 돌이 되게 하여 우리 모두가 연결되어 하나님의 성전으로 지어지게 하심을 성령을 통해 그의 사도들에게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분 안에서 땅아래 있는 것이나, 하늘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게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놀라우신 비밀의 계획은 지금도 그를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끊임없이 발견되어지고, 누려지는 것 입니다. 마치 ‘영원히 솟아나는 생수’ 와 같이 말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알아가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비밀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남은 평생, 날마다 그의 말씀을 통하여, 그의 ‘사랑’ 의 계명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실천해 감을 통해 더욱 더 깨닫아 나가고, 깨닫은 만큼 하나님을 온 힘과 마음과 뜻을 다해 사랑하는 그분만을 경외하는 자녀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 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비밀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비밀

    하나님께서 시대마다 자기 백성과 체결하신 언약 속에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과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점진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언약의 최종 성취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빠진 언약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언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고, 언약을 통해 영광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골 1:26-27, 2:2-3).

    예수 그리스도는 “감추었던 만나”(계 2:17), “감추인 보배”(잠 2:4, 참고-고후 4:6-7, 벧전 2:4-8), “감추인 보화”(마 13:44, 골 2:2-3) 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언약에는 하나님의 비밀이 담겨 있고, 그 언약의 최종 성취는 하나님의 비밀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자세히 연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 가운데 언약이 체결되고 완전히 성취되는 과정을 더욱 선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본론

    1.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비밀

    성육신(Incarnation)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심’입니다(빌 2:6-8). 성육신은 성자 하나님께서 신인(神人) 즉 하나님-사람(God-Man)이 되신 것으로, 그의 신성(神性)에 인성(人性)이 부감 됨을 의미합니다(요 1:14).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방편은, 성령으로 동정녀의 몸에 잉태되어(마 1:18, 20)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은 하나님의 비밀입니다(골 1:26-27, 2:2). 그래서 디모데전서 3:16에서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딤전 3:16).

    2. 비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 백성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비밀을 알지 못하였으며,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못하고 배척하였습니다(요 1:11, 6:41-42, 고전 2:6-9). 그래서 예수님께서 공생에 최후 순간에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사 성을 내려다 보시고 소리 내어 우시면서,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라고 한탄하셨습니다(눅 19:41-42). 여기서 “숨기웠도다”는 헬라어로 ‘크륍토’(κρύπτω)인데, 이것은 ‘감추다, 숨기다, 비밀로 하다’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비밀인데 유대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히 목수 요셉의 아들로만 생각했던 것입니다(눅 4:22).

    요한복음 6:42에서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라고 수군거렸습니다. 여기 “아는데”는 헬라어 ‘에이도’(ϵίδϖ)의 1인칭 복수형으로, 그냥 얼핏 아는 것이 아니라 ‘사귐과 확신을 통하여 자세히 아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모님을 자세히 알았기 때문에 오히려 예수님 앞으로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하심보다도 자신들이 아는 경험과 지식에 착념하다가 영생에서 낙오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3. 감추었던 만나 예수 그리스도

    요한계시록 2:17에서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감추었던” 역시 ‘크륍토’(κρύπτω)의 완료수동분사형으로, ‘감추어져 있는’ 만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기는 자에게 이 만나를 주십니다. “이기는”의 헬라어는 ‘니카오’(νικἀω)의 현재분사형으로, ‘계속적으로 이기는’ 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날마다 죄악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자신을 이기는 가운데, 감추어져 있는 만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축복을 소유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계 2:7).



    하나님은 왜 ‘비밀’을 보이시는가? 
    아모스 3장 7절과 성경 속 하나님의 계시 원리

    서론: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 아모스 3장 7절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성품과 그분의 일하심을 보여줍니다. 특별히 아모스 3장 7절은 "그 비밀을 보이지 아니하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고 선포하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그의 종들에게 미리 알리신다는 놀라운 원칙을 밝힙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과 그분의 백성을 향한 친밀한 교제를 동시에 드러냅니다. 오늘은 이 구절의 깊은 의미를 파헤치고, 성경 전체에서 이와 유사한 하나님의 속성을 발견할 수 있는 다른 구절들을 함께 탐구해보고자 합니다.

    본문 분석: 아모스 3장 7절의 깊은 의미

    아모스 3장 7절은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이 구절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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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 비밀을 보이지 아니하고는"

    여기서 '비밀'(סוֹד, 소드)은 단순히 숨겨진 정보가 아니라, 하나님의 깊은 뜻과 계획, 섭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작정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과 인류를 향한 분명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그 계획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깊이와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시편 33편 11절은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독단적으로 행하시기보다, 먼저 그 뜻을 드러내기를 기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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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이 부분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확실성을 강조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행하시기 전에 반드시 그 계획을 당신의 종들에게 계시하신다는 원칙을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무작정 심판하시거나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경고하시고, 준비시키시며, 당신의 뜻을 알리시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사랑을 동시에 나타냅니다. 베드로후서 3장 9절은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말하며, 하나님께서 심판에 앞서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사랑의 마음을 드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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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그 종 선지자들에게는"

    아모스 3장 7절은 이어지는 구절에서 이 '비밀'을 누구에게 보이시는지를 명확히 밝힙니다: "자기의 종 선지자들에게는 그 비밀을 보이지 아니하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선지자'는 하나님의 대언자로서,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그분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분의 계획을 깨닫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특정 시대의 선지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통해 그분의 뜻을 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확장될 수 있는 원리입니다. 신명기 29장 29절은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목적이 우리가 그 말씀대로 살게 하기 위함임을 보여줍니다.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는 성경 구절들

    아모스 3장 7절의 원리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당신의 백성에게 드러내시는 신실한 성품을 보여주는 구절들을 살펴보겠습니다.

    • 창세기 18장 17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이 구절은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의 친구 아브라함에게 계획을 알리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당신의 친구로 여기셨고, 그에게 당신의 마음을 열어 보이셨습니다.

    • 시편 25편 14절: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이 구절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즉 하나님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계획과 약속)을 보이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그분의 뜻을 아는 열쇠임을 보여줍니다.

    • 예레미야 33장 3절: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그들이 알지 못했던 크고 놀라운 일, 곧 그분의 계획을 보이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는 기도가 하나님의 비밀을 알아가는 통로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 요한복음 15장 15절: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함은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더 이상 종이 아닌 친구라고 부르시며, 아버지로부터 들은 모든 것, 즉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뜻을 그들에게 다 알리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신약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계시되었음을 보여줍니다.

    • 이사야 46장 9-10절: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와 같은 이가 없느니라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노라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아시며, 당신의 계획을 미리 알리시고 반드시 성취하시는 분임을 강조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신실하심을 드러냅니다.

    결론: 계시하시는 하나님과 우리의 삶

    아모스 3장 7절과 그와 유사한 성경 구절들은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의 뜻을 적극적으로 계시하시기를 원하시는 분임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분은 당신의 백성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시며, 그들에게 당신의 계획을 알리시고, 세상의 흐름 속에서 당신의 뜻을 분별할 수 있도록 돕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고 그분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는 다음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아브라함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하나님을 친구로 여기고 그분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것이 중요합니다.

    • 말씀에 대한 경외: 하나님의 계시는 주로 성경 말씀을 통해 주어집니다.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 기도: 예레미야에게 약속하셨듯이, 간절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놀라운 일들을 보여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의 종들, 곧 당신을 사랑하고 경외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당신의 '비밀'을 보이시며, 그들과 함께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진리 속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을 발견하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복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전달되는 방식(아모스 3:7)

    1. 하나님의 계시와 선지자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인류에게 전하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비밀을 선지자들에게 보여줌으로써 그분의 백성이 준비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이 과정은 하나님이 임의로 행동하지 않으며, 그의 백성들에게 선지자를 통해 분명한 메시지를 주신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2.선지자들의 역할

    선지자의 역할 "그 종 선지자들"이라는 표현은 선지자들의 특별한 위치를 나타냅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이들은 단순한 예언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직접적으로 모든 이에게 알리지 않고, 선지자들을 통해 계시하십니다.

    선지자들은 중재자로서 역할을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자로서 백성들에게 경고하고,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역할을 합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행하시는 일들을 미리 알고 그 일들을 백성들에게 알림으로써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전달합니다.

    3. 뜻을 땅의 사람들과 함께 이루심

    이 구절은 또한 하나님이 혼자서 일하시지 않으며, 땅의 보낸 선지자와 함께 그의 뜻을 이루어 나가신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분의 종들에게 미리 그분의 계획을 알려 주시고,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이 더 명확하게 드러나며, 사람들은 그분의 계획에 따라 준비할 수 있게 됩니다.

    4. 선지자들의 사명

    이 구절은 또한 선지자들의 사명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선지자들은 단순한 전달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비밀을 알고, 그분의 계획을 사람들에게 전하며, 백성들이 그분의 뜻에 따라 행동하도록 촉구합니다. 
    선지자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때로는 환영받지 못하는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 어려운 사명을 감당합니다.

    ​아모스는 그러한 선지자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당대의 부패한 사회를 향해 하나님의 공의를 외쳤고,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이 임할 것이라는 경고를 주었습니다. 
    그의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명확하게 전달하고, 그들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습니다.

    골로새서 2:2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My purpose is that they may be encouraged in heart and united in love, so that they may have the full riches of complete understanding, in order that they may know the mystery of God, namely, Christ.

    하나님의 비밀 그리스도(the mystery of God, namely, Christ) 

    비밀의 정원(시크릿 가든) 아모스 3:7

    비밀은 ‘밝혀지지 않았거나 감추어진 속내’라는 뜻입니다. 

    개역개정판 성경에는 ‘비밀’이라는 단어가 37번 나오는데, 대부분이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고, 종합을 해보면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합니다(골 2:2).

    골로새서 2:2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My purpose is that they may be encouraged in heart and united in love, so that they may have the full riches of complete understanding, in order that they may know the mystery of God, namely, Christ.

    하나님의 비밀은 밝혀지지 않았거나 감추어져 있기에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선지자나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들에게는 그 비밀을 알려주십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3:2에 의하면 ‘비밀을 알아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님’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If I have the gift of prophecy and can fathom all mysteries and all knowledge, and if I have a faith that can move mountains, but have not love, I am nothing.

    ‘비밀’,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

    목회자로 살아가면서, 목회자 이전에 신앙인으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비밀을 분명하게 보고 싶을 때가 잦습니다. 
    확실하게 보여주면 흔들리지 않을 터인데 종종 “정말 하나님이 계시는 것일까?” 하는 ‘하나님의 부재’를 종종 경험하게 됩니다.

    2010년 아이티에서 쓰나미가 발생했을 때 그곳 현지인들이 “하나님, 정말 당신은 살아계신 건가요?” 
    절규하는 모습을 외신을 통해서 본 적이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이 국교이기에 국민의 80%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인데, 쓰나미로 폐허가 되자 그들은 ‘신의 부재’를 심각하게 경험하는 것입니다.

    얼마전 일본 대지진과 쓰나미를 보면서 저는 개인적으로 ‘신의 부재’를 느꼈습니다. 
    몰지각한 이들은 이런 재앙을 향해 하나님이 심판하신 것이라는 투로 말하기도 했지만, 그런 식의 해석은 성경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말씀을 전한다면, 하나님의 비밀을 알지 못하는 거짓 선지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것을 잘 봐야 합니다. 
    그런데 잘 보이지 않으니, 비밀입니다.

    본문에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암 3:7)”. 
    자 그러면 한번 생각해 봅니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암 3:7)”

    그런데 그럼에도 왜 이리되었습니까?

    욕심 때문입니다. 더 많이 갖고, 더 편리해지고자 하는 무한소비와 무한욕구를 부채질하는 인간의 욕심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욕심 때문에 무슨 문제가 생기면 늘 힘없고 약한 이들이 더 큰 아픔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 경고를 하나님은 수도 없이 보여주고 계시지만, 선지자를 자처하는 이들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들도 관심이 없습니다.

    참 선지자란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비밀을 보는 사람들, 그것을 보았기에 전하여야 한다는 사명감에 붙들려 사는 사람입니다.

    아모스, 그는 어떤 선지자였습니까?

    유다왕 웃시야 시대에 드고야에서 양을 치던 목자였습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비밀을 듣습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너희가 죄를 돌이키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죄악상뿐 아니라 이웃 나라들의 죄악상까지 고발합니다.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너무 직설적인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구체적으로 지적합니다.

    그 죄악상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이 지키는 절기를 미워하고 성회를 기뻐하지 않으시고, 제사를 드려도 돌아보지 않으십니다. 구역질 난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은 강 같이 흐르게 하라’(암 5:12-24)는 것입니다.

    신약성서로 넘어오면 하나님의 비밀은 특별한 이들에게만 보여집니다.

    마가복음 4장 11절에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하십니다. 이것도 하나의 비밀인데, 누가복음 8:10절에 의하면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신서로 넘어가면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 4:1)” 는 사도의 자기정체성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비밀, 그것을 보지 못하는 자들은 사도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서 이제는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고전 13:2)”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결론은 하나님의 비밀을 알아도 하나님과 사랑, 이웃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 빌은 더 이상은 비밀이 아니게 됩니다.

    골로새서 1:26절에 말씀에 의하면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비밀이 공개되었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들만 사도만 혹은 목사만 하나님의 비밀을 아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그 비밀을 알 수 있게 되었으며, 그 하나님의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개역개정판 성경에 나오는 ‘비밀’이라는 단어를 따라가며 저는 시크릿 가든(비밀의 정원)을 떠올린 것입니다. 교회 뒤에 작은 공간이 있습니다. 잘 활용하면 아주 좋은 공간이 될 것 같습니다만, 교회 땅이 아니므로 조심스럽습니다. 지금은 그곳에 어떤 식물이 잘 자랄 것인지 살피는 중입니다. 거기에 토지주가 거부감을 갖지 않을 정도로 휴식공간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한남교회는 언덕 위에 있어서 올라다니기 쉽지 않지만, 이만한 전망 좋은 곳에 자리한 교회도 드뭅니다. 언덕길을 위시해서 우리의 공간으로 만들어갈 수 있는 곳이 참으로 많습니다. 마치 ‘비밀의 정원’과도 같습니다. 이 비밀의 정원이 잘 가꿔지면, 많은 이들이 와서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육간의 휴식, 이것이 가능한 한남교회가 되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에 오시면, 교회에 작은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다양한 일들, 그것은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것들이 아닙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비밀, 하나님의 계시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에 민감한 사람, 그것을 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비밀을 본다고, 안다고 다 기쁜 것이 아닙니다. 때론 그로 말미암아 고통을 감당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의지와 뜻과 달라서 괴로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비밀을 드러내는 일, 그것이 우리 믿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남의 사생활을 폭로하는 이들을 파파라치라고 합니다.

    그들은 그것을 통해 돈을 벌려고 합니다. 그런 비밀을 폭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대의 징조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비밀을 제대로 보고 폭로하라는 것입니다. 이 일을 하려면 용기가 필요하고, 때로는 고난도 당합니다. 아니, 대체로 고난 겪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비밀을 내게 보여주셨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그 행복 때문에 아프기도 하지만, 나는 그 비밀을 선포하고 내 삶의 영역에서 삶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비밀을 간직한 분들이십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간직한 분들답게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동산,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비밀의 정원입니다.*


  • 선지자를 통한 계시 :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아무에게나 알리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종 선지자들에게 먼저 알리신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 심판의 선포 :
    이 비밀은 주로 이스라엘이 받을 심판과 재앙에 대한 경고와 관련됩니다. 사마리아에 임할 심판이 예고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재앙을 내리시기 전에 먼저 선지자들에게 그 계획을 알리시고, 선지자들은 그 뜻을 백성들에게 전하게 됩니다. 

  • 재앙의 필연성 :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니"라는 구절은 하나님의 행동에는 반드시 그 이유와 목적이 있으며, 이는 선지자를 통한 경고와 함께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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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blog.naver.com/jhunkim319/221474863393

    구약의 선지자들(선지자 연구)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민12:6)

     


    * 선지자(先知者)의 출현

      사무엘 이전에도, 성경에는 하나님으로부터 계시와 환상을 받은 자들이 여러 명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선지자로 불린 아브라함,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창20:7 중)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였던 모세,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신34:10) 사사 겸 선지자로 활동했던 드보라 등입니다. “그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삿4:4) 그러나 본격적인 선지자들의 등장은 사무엘에 이르러서였습니다.


    * 선견자와 선지자

    “(옛적 이스라엘에 사람이 하나님께 가서 물으려 하면 말하기를 선견자에게로 가자 하였으니 지금 선지자라 하는 자를 옛적에는 선견자로 일컬었더라)”(삼상9:9)

    구 분

    원어의 의미

    차이점

    공통점

    선지자

    히브리어 ‘나비’로

    ‘말하는 자’(spokesman),

    ‘예언자’(prophet)라는 뜻

    ① 선견자는 계시를 받고 선지자는 계시를 선포함

    ② 선견자는 선지자보다 훨씬 전부터 사용되던 용어(삼상9:9)

    ① ‘호제’와 ‘로에’는 선지자를 지칭하기도 함(사30:9~10)

    ② 양자는 결국 같은 부류의 사람을 가리키는 호칭임(삼하24:11)

    선견자

    히브리어 ‘호제’ 또는 ‘로에’

    모두 ‘보는 자’(seer)라는 뜻


    * 다윗 역시 선지자!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소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행2:29~30)

      다윗 역시도 사도 베드로에 의해 선지자로 증거를 받고 있는데(행2:30), 실제로도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왕의 선견자였던 헤만’(대상25:5)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계시와 환상을 받아서 75편 가량의 시편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 궁정 선지자

      구약의 선지자들 중 일부는 궁중에 기거하거나, 또는 통치자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예언 활동을 했습니다. 예컨대 사무엘, 나단, 갓은 다윗 왕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또한 정치적 영향력도 지니고 있었는데, 이와 같은 제도권의 선지자들을 일반적으로 ‘궁정 선지자’로 일컫습니다.

     

    * 문서 선지자

      선지자들 가운데는 그들의 예언 내용을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으로 남긴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타인에 의해 예언 내용이나 사상만이 전해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를 보통 ‘문서 선지자’라고 합니다. 이들은 주전 8~6세기에 활발한 예언 활동을 하였으며, 보통 붓과 두루마리를 들고 설교하고 그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구약의 대, 소선지서 기자들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대(大)선지서와 소(小)선지서

    이 구분은 해당 선지자의 활동기간이나 역량이 아닌, 그들이 남긴 선지서의 분량에 따른 구분입니다.

    구 분

    대선지서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 애가, 에스겔, 다니엘 (5권)

    소선지서

    호세야,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12권)


    *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신18:15)

      여기서 ‘나와 같은 선지자’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1차적으로는 모세 이후 여러 세대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일어날 모든 선지자들을 가리키나, 궁극적인 의미에서 이 말은 모세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사장이며(출24:6~8) 왕이며(신33:5) 선지자(신24:10)였던 것처럼, 온 인류의 유일한 대제사장이시며 영원한 왕이시고 참 선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의 모든 말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행3:22,23) /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행7:37)

     

    * 하나님의 비전: 만인(萬人)선지자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두고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민11:29)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당신의 모든 자녀들이 다 선지자 되길 원하셨으며, 이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으로 율법적 분리를 상징하던 휘장이 찢어진 이래, 성도라면 누구나 하나님과 직접 교제하게 됨으로써, 또한 보혜사 성령이 각자의 심령에 임하심으로써 온전히 성취되었습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줄 것이며.”(욜2:28,29) / “이는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구리라 그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행2:16~18)

     

     

    <구약의 선지자들 1>

    초기의

    선지자들

    • 아브라함(창20:7)

    • 모세(신34:10)

    • 미리암(모세의 누이 / 출15:20)

    • 드보라(사사 겸 여선지자 / 삿4:4)

     

    통일왕국

    시 대

    • 사무엘(마지막 사사, 제사장 겸직)

    • 다윗(시편 75편을 저작 / 행2:30)

    • 선견자 헤만(찬양대장 / 대상25:5)

    • 나단(삼하7:2~17, 12:1~25)

    • 갓(선견자 / 삼상22:5)

    • 아히야(실로 사람 /왕국 분열을 예언)

    분열왕국

    시 대

    • 스마야(왕상12:22~24)

    왕국 분열 직후의 남북 전쟁을 막음

    • 아사랴(대하15:1~7)

    오뎃의 아들, 아사의 개혁 촉구

    • 선견자 하나니(아사에 의해 투옥됨)

    • 선견자 예후(대하19:2,3)

    하나니의 아들 / 여호사밧을 규탄함

    • 야하시엘(레위인 / 대하20:14~17)

    • 마레사 사람 엘리에셀(대하20:37)

    아하시아와 교제하는 여호사밧 규탄

    • 디셉 사람 엘리야(대하21:12~15)

    여호람에게 글을 보내 책망함

    •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대하24:20~22)

    요아스를 규탄하다가 순교를 당함

    • 브두엘의 아들, 요엘(욜1장~3장)

    유다인들의 회개를 촉구함

    •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사1~66장)

    유다 백성들의 경성과 회개 촉구

    • 미가(미1~7장)

    이스라엘, 유다의 심판과 회복 예언

    • 엘고스 사람, 나훔(나1~3장)

    니느웨(앗수르)의 멸망을 선포함

    • 하박국(합1~3장)

    요시아 왕의 재위 말기 예언 활동

    • 여선지자 훌다(왕하22:14~20)

    요시아의 종교개혁을 촉발함

    • 스바냐(습1~3장)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 촉구

    •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렘1~52장)

    유다의 멸망과 회복을 예언함

    • 스마야의 아들 우리야(렘26:20~23)

    유다멸망 예언, 여호야김에 의해 순교

    • 아히야(왕상14:1~18)

    실로 사람 / 여로보암의 멸문 예언,

    • 무명의 선지자(왕상13:1~32)

    유다 출신 / 벧엘 제단 규탄

    • 예후(왕상16:7)

    하나니의 아들 / 바아사를 책망함

    • 디셉 사람 엘리야(왕상17장~왕하2장)

    우상(바알) 종교와 맞서 싸움

    • 미가야(왕상22:13~28)

    이믈라의 아들 / 아합의 죽음 예언함

    • 엘리사(왕상19:16~왕하13:21)

    엘리야의 뒤를 이어 우상종교에 대항함

    • 브에리의 아들, 호세야(호1~14장)

    고멜과 혼인, 북이스라엘의 회개 촉구함

    • 드고아의 목자, 아모스(암1~9장)

    북이스라엘의 임박한 멸망 예언, 회개촉구

    • 아밋대의 아들, 요나(욘1~4장, 왕하14:25)

    니느웨의 회개 촉구, 이스라엘 영토회복 에언

    • 오뎃(대하28:9~11)

    사마리아군인들에게 유다 포로의 석방 촉구

     

     

     

     

     

     

     

     

     

    바 벨 론

    포로시대

    • 제사장 출신, 에스겔(겔1~48장)

    바벨론 포로민들을 향한 예언 사역

    • 오바댜(옵1장)

    유다 침략에 앞장 선 에돔의 멸망 예언

    • 예레미야(렘40~44장)

    정복당한 유다와 애굽에서 예언활동

    • 다니엘(단1~12장)

    바벨론 포로지에서의 활발한 활동, 예언

    포로귀환

    이후시대

    • 학개(학1~2장, 스5:1,2)

    백성들의 각성, 성전의 재건 촉구

    • 스가랴(슥1~14장, 스5:1,2)

    잇도의 손자, 선지자 학개와 동역함

    • 말라기(말1~4장)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느헤미야와 동시대에 사역, 백성들의 각성 촉구

    (분열왕국시대의 남북 선지자의 분류는 출신지역이 아니라 활동 지역이 기준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 2> (편의상 사무엘부터 기술)

    선지자

    활동시기

    (주전)

    부친이름

    (고향)

    특징 및 주요활동

    주요 본문

    사무엘

    1075~1017

    엘가나의 아들

    (라마)

    ‘여호와께 구함’이라는 뜻

    최후의 사사, 최초의 선지자

    사사시대와 통일왕국 과도기에 활동

    미스바 신앙부흥운동을 주도함

    사울, 다윗 두 사람에게 기름 부음

    다윗의 행적을 기록함(사무엘의 글)

    삼상1:1~25:1

    대상29:29

    나단

    1010~930

     

    ‘선물’ 또는 ‘주는 자’라는 뜻

    다윗 왕조 때의 궁정선지자, 고문

    아사리아와 사붓의 아버지

    밧세바를 범한 다윗에게 회개 촉구

    다윗과 솔로몬 두 왕의 행적을 기록함 솔로몬에게 기름 부음

    삼하7:2~17; 12:1~25

    헤만

    1003~945

    요엘의 아들

    ‘충실, 신실’이라는 뜻

    다윗, 솔로몬 시대의 충실한 성가대장

    놋제금을 크게 치는 자로 명성 떨침

    왕의 선견자로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을 만들기도 함, 예배찬양의 규범 제작

    대상6:33

    15:16~19

    16:41~42

    1010~970

     

    ‘행운’이란 뜻

    다윗 왕 때의 선견자, 다윗이 도망 중일 때 이방 땅에 머물지 말고 유다로 들어가라고 함, 다윗의 통치 말기에 인구조사를 행함으로 범죄하자, 하나님의 징계의 말씀을 전했음. 다윗의 행적 기록

    삼상22:5; 24:11~19

    아히야

    10세기 초

    (실로)

    ‘여호와의 형제’라는 뜻

    왕국 분열 및 여로보암의 등극 예언

    여로보암 가문의 멸망을 선포함

    솔로몬의 행적을 기록함

    왕상11:29~40; 14:1~18

    스마야

    930~913

     

    ‘여호와께서 응답하심’이란 뜻

    왕국분열 직후의 남북전쟁을 막음

    르호보암 왕의 행적을 기록함

    대하11:2~4; 12:5~8

    잇도

    970~910

     

    ‘찬양하는’이란 뜻

    솔로몬, 르호보암, 아비야의 행적 기록함(묵시책과 주석책 등)

    대하9:29; 12:15: 13:22

    아사랴

    910~

    오뎃의 아들

    ‘여호와께서 도우셨다’라는 뜻

    구스의 백만 대군을 무찌르고 온 아사에게 종교개혁을 촉구함.

    대하15:1~7

    하나니

    874~

     

    ‘여호와는 은혜로우심’이라는 뜻

    이 단어는 ‘하나냐’의 단축형임

    선지자 예후의 아버지

    북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아람과 연합한 아사를 책망하다가 투옥됨

    대하16:7~10

    예후

    909~886

    하나니의 아들

    ‘그는 여호와’라는 뜻

    북왕국 이스라엘의 선지자

    바아사를 꾸짖고 그 멸망을 예언함

    여호사밧이 악인을 도운 행위를 질책

    대하19:2,3

    왕상16:7,12

    엘리야

    875~850

    (디셉)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뜻

    우상(바알) 종교와 맞서 싸움

    북이스라엘의 최고 선지자

    갈멜 산에서 바알선지자 850명 처단

    여호와야말로 참 하나님이심을 선포

    선지자 엘리사의 스승

    유다왕 여호람에게 글을 보내 책망함

    병거 타고 승천한 불의 선지자

    왕상17~왕하2장

    대하21:12~15

    미가야

    869~850

    이믈라의 아들

    ‘누가 여호와 같으랴’는 뜻

    북이스라엘의 선지자

    이스라엘 유다 연합군의 패배와 아합이 길르앗 라못에서 죽을 것을 예언

    왕상22:13~28

    야하시엘

     

    레위 사람

    스가랴의 아들

    모압, 암몬 연합군과의 전쟁을 앞둔 여호사밧과 유다 백성들을 독려함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선포함

    대하20:14~17

    엘리사

    9세기 후반경

    사밧의 아들

    (아벨므홀라)

    ‘하나님은 구원자’라는 뜻

    북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야의 제자

    엘리야의 뒤를 이어 우상종교에 대항

    선지학교를 세워 생도들을 육성함

    기적적인 능력으로 조국을 지킴

    왕상19:16 ~

    왕하13:21

    엘리에셀

    853년경

    도다아후의 아들

    (마레사)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다’라는 뜻

    유다 여호사밧 왕 때의 선지자

    여호사밧이 악한 아하시아와 교제함을 규탄, 그의 배가 파선될 것 예언

    대하20:37

    스가랴

    835~796

    여호야다의 아들

    ‘여호와께서 기억하심’이라는 뜻

    요아스 왕을 즉위시킨 제사장 여호야다와 공주 여호사브앗의 아들,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어 백성들의 배교행위를 질책하고 심판을 선포함. 요아스의 의해 여호와의 전 뜰에서 돌에 맞아 순교함

    대하24:20~22

    호세야

    793~710

    브에리의 아들

    ‘여호와여 구원하소서’라는 뜻

    고멜과 혼인하여 세 자녀를 둠

    북이스라엘의 출신으로 여로보암 2세 때 활동, 북이스라엘의 회개촉구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 끝없는 사랑을 선포함

    성경기록(호세야)

    호1~14장

    아모스

    793~753

    (드고아)

    ‘무거운 짐을 진 자’라는 뜻

    목자출신, 북이스라엘에서 주로 활동

    주변 7개국에 대해 차례로 예언

    배교와 방종으로 얼룩진 북이스라엘의 임박한 멸망과 회개를 촉구함

    백성들에게 공평과 정의를 촉구함

    ‘선지자의 아버지’로 일컬어짐

    성경기록(아모스)

    암1~9장

    요나

    798~752

    아밋대의 아들

    (가드헤벨)

    ‘비둘기’라는 뜻

    니느웨 성의 회개를 외친 선지자

    다시스로 도망하다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3일간 지내기도 함.

    하나님의 보편적 관심을 기록함

    이스라엘의 영토회복 예언하기도 함

    성경기록(요나)

    욘1~4장

    왕하14:25

    오뎃

    740~732

     

    ‘부흥자’라는 뜻

    북이스라엘의 선지자

    이스라엘 왕 베가가 유다와 싸워 20만 명을 포로로 잡아올 때 그들을 유다로 돌려보내게 함.

    대하28:9~11

    요엘

    835~796

    브두엘의 아들

    (예루살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뜻

    유다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함예루살렘과 유다에서 주로 활동

    메뚜기 재앙이 하나님의 심판임을 선포하면서 유다백성들의 회개 촉구

    여호와의 날을 선포한 선지자

    회개하고 성령을 경험할 것을 촉구함

    성경기록(요엘)

    욜1~3장

    이사야

    739~680

    아모스의 아들

    (예루살렘)

    ‘여호와는 구원’이라는 뜻

    여선지자인 아내와 두 아들 ‘스알야숩, 마헬살랄하스바스’를 둠

    유다귀족출신, 주로 예루살렘에서 사역

    유다 백성들의 경성과 회개 촉구

    므낫세 왕에게 순교를 당함

    희망과 복음의 선지자

    회개와 고난을 통한 소망을 강조함

    히스기야의 행적을 기록(사36~39장)

    성경기록(이사야)

    사1~66장

    대하32:32

    미가

    728~697

     

    ‘하나님과 같은 자가 누구냐’라는 뜻

    유다 출신의 선지자

    이스라엘, 유다의 심판과 회복 예언

    겸손, 자비, 정의에 대해 호소함

    메시야의 베들레헴 탄생 예언

    성경기록(미가)

    미1~7장

    나훔

    612년경

    (엘고스)

    ‘위로자’라는 뜻

    니느웨(앗수르)의 멸망을 선포함

    하나님의 열심히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한다는 사실을 선포함

    성경기록(나훔)

    나1~3장

    하박국

    612~605

     

    ‘껴안은 자’라는 뜻

    요시야 왕의 재위 말기에 예언 활동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을 강조

    성경기록(하박국)

    합1~3장

    훌다

    622

    살룸의 아내

    (예루살렘)

    여선지자, 예루살렘 둘째 구역 거주

    예복을 주관하는 살룸의 아내

    요시야가 발견한 율법책에 대해 예언 요시야의 종교개혁을 촉발함

    왕하22:14~20

    대하34:22~28

    스바냐

    630년경

    구시의 아들

    ‘여호와께서 숨겨 주신 자’이라는 뜻

    므낫세와 아몬의 영향을 받아 우상숭배에 젖어 있는 유다의 각성촉구

    임박한 ‘여호와의 날’에 대해 경고함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을 촉발함

    겸손한 자들의 소망을 강조함

    성경기록(스바냐)

    습1~3장

    우리야

     

    스마야의 아들

    유다멸망 예언

    여호야김에 의해 순교

    렘26:20~23

    예레미야

    627~586

    힐기야의 아들

    (아나돗)

    ‘여호와께서 세우시다’라는 뜻

    눈물로 회개를 선포한 선지자

    요시야를 위해 애가를 지음

    유다의 멸망과 회복 예언, 독신생활

    정복당한 유다와 애굽에서의 활동, 순교

    애굽에서 우상숭배하는 동족들을 꾸짖다가 순교당한 것으로 추정됨

    새 언약의 약속을 예언함.

    성경기록(예레미야, 예레미야 애가)

    렘1~52장

    대하35:25

    에스겔

    593~570

    부시의 아들

    ‘하나님께서 강하게 하신다’는 뜻

    바벨론 1차 침략 때 포로로 잡혀감

    포로시대의 제사장이며 선지자

    포로민들을 중심으로 한 예언 사역

    환상과 소망의 선지자

    새로운 예배 공동체를 향한 미래 소망

    성경기록(에스겔)

    겔1~48장

    오바댜

    586년경

     

    ‘주의 종, 주의 경배자’라는 뜻

    예루살렘이 바벨론의 침략 당한 직후에, 유다침략에 앞장 선 에돔의 멸망을 예언함.

    성경기록(오바댜)

    옵1장

    다니엘

    605~536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라는 뜻

    유다 지파의 왕족 출신

    바벨론 1차 침략 때 포로로 잡혀감

    신앙 절개를 지킨 포로 선지자

    바벨론포로지에서 활발한 활동, 예언

    구약의 계시록으로 평가되는 ‘다니엘서’를 기록함

    단1~12장

    학개

    520~515

     

    ‘축제, 즐거움’이라는 뜻

    포로생활 중 제사장 가문에서 출생

    1차 포로귀환 때 함께 돌아옴

    사마리아 사람들의 방해로 성전 재건공사가 16년이나 중단되자,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성전의 재건을 촉구함

    하나님의 집을 우선할 것을 강조함

    성경기록(학개)

    학1~2장

    스5:1,2

    스가랴

    520~470

    잇도의 손자

    베가랴의 아들

    ‘여호와를 기억함’이라는 뜻

    제사장 가문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선지자의 사명을 받았음.

    학개와 마찬가지로 성전 재건 독려

    8가지 상징적 환상을 보고 기록함.

    여호와의 우주적 통치를 강조

    성경기록(스가랴)

    슥1~14장

    스5:1,2

    말라기

    433~432

     

    ‘나의 천사, 나의 사자’라는 뜻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느헤미야가 가나안 땅을 떠나 있던 시기에 해이해진 백성들을 향해 각성을 촉구함

    하나님만을 높이고 그분의 의를 기다릴 것을 촉구함, 성경기록(말라기)

    말1~4장

     

    <4대 선지서 비교>

    구 분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사역연대 (주전)

    739~680

    (60년간)

    627~586

    (41년간)

    593~570

    (23년간)

    605~536

    (70년간)

    소 명 장

    사 6장

    렘 1장

    겔 1~3장

     

    출신지, 사역지

    예루살렘

    아나돗, 예루살렘

    바벨론 그발강변

    예루살렘, 바벨론

    예 언 대 상

    유다인

    포로된 유다인과

    남은 유다인

    포로된 유다인

    이방나라 왕들과 포로된 유다인

    중 심 내 용

    하나님께서 남은 자에게 영광스런 미래를 약속하심

    예루살렘의 죄, 운명, 미래의 영광

    예루살렘의 멸망과 회복

    영광스러운 미래

    4개 왕국과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

    역사적 배경

    왕하 15~20장

    대하 26~30장

    왕하 24~25장

    단 1~6장

    단 1~6장

    정치적 상황

    시리아, 이스라엘의 위협

    앗수르의 위협

    북이스라엘 멸망

    애굽과 앗수르

    2강의 각축전

    앗수르의 멸망 바벨론의 등장

    1차 바벨론포로

    애굽과 바벨론 2강의 각축전

    백성 중 일부가 포로됨(2차)

    예루살렘의 함락

    유대인들의 3차 바벨론 포로

    종교적 상황

    우상숭배 성행

    외식적 예배 만연

    히스기야의 개혁

    요시야의 개혁

    요시야 사후

    다시 과거로 회귀

    거짓선지자 만연

    전민족의 불순종

    불신, 반역

    하나님과의 교제 단절, 그러나 소수의 남은 자

    메시야에 대한

    비유적 표현

    싹, 나의 종

    의로운 가지

    여호와 우리의 의

    백향목의 연한 가지

    돌, 인자, 기름 부음 받은 자

    예언의 강조점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임을 가르침

    바벨론 포로의 당위성, 이를 회개의 기회로 삼아 더 큰 구원을 사모할 것 촉구

    범죄 결과에 대한 단체적, 개인적 책임, 언약 성취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 등을 가르침

    열국의 우상보다 뛰어난 하나님, 하나님의 구원 능력은 장소, 상황에 구애 받지 않음을 보여줌

    구 성

    66장

    52장

    48장

    12장

    표현상의 특징

    선포와 경고

    상징적 행위

    비유와 묵시

    역사와 묵시

    중심단어

    구원은

    여호와의 것

    유다의 멸망

    장차 있을 이스라엘의 회복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비 고

    복음의 선지자

    메시야의 선지자

    눈물의 선지자

    심판의 선지자

    희망의 선지자

    환상의 선지자

    포로기의 선지자

    이방 시대의 선지자

     

        













    선지서와 선지자


    선지자 엘리야 하늘로 올라가다 (왕하 2장)

    선지자는 하나님 말씀을 전달하는 대언자라 정의합니다.

    • (민 12:6)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성경(구약)은 선지자들의 사역을 이스라엘의 역사를 담고 있는 역사서들에서 뿐 아니라 선지서라 분류된 책들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문서는 그 자료들을 모아 요약합니다.

    선지서 분류

    분열 왕국 시대 이스라엘과 주변 국가

    구약의 선지자들은 솔로몬 왕 이후 남 유다 북 이스라엘 분열 왕국 시대를 거치면서 크게 네명의 대선지자와 열두명의 소선지자로 구분할 수 있다. 대와 소의 구분은 그들의 사역이나 업적의 구분이 아닌 선지서 책의 분량으로 나눕니다.

    대선지서

    에스겔의 환상에서 본 마른 뼈들이 살아남 (겔 37장)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예레미야애가, 에스겔서, 다니엘서

    소선지서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Micah), 나훔, 하박국, 스바냐 (Zephaniah)학개, 스가랴 (Zechariah), 말라기

    시대별 분류

    선지자 사역 당시 시대 배경

    • (BC 930) 남유다 (르호보암 왕) 북이스라엘 (여로보암 왕) 분열과 부패 시작 --> 분열 왕국 시대
    • (734-732) 앗수르의 공격 --> 아람 (시리아), 블리셋, 이스라엘, 그리고 유다의 일부 앗수르에 조공 받침
    • (722-721) 앗수르 사마리아 점령, 북이스라엘 망함 (북이스라엘왕 호세아 왕) --> 남유다 잔존 왕국 시대
    • (701) 유다 앗수르에 반란했지만 실패 --> 예루살렘은 해를 입지 않음 (히스기야 왕)
    • (586) 바벨론 (느부갓네살 (Nebuchadnezzar)에 의해 남 유다 망함 (시드기야 왕) --> 포로 시대
    • 포로 생활 70년 후 귀환 시작

    분열 왕국 시대

    핀 숯을 가진 천사와 이사야 (사6:6)
    • 요엘 (835-796): 여호와의 날, 성령의 강림, 통치자: 요아스
    • 요나 (793-753, 니느웨):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 이스라엘의 부흥, 여로보암 2세
    • 엘리야 (북이스라엘): 아합가의 멸망
    • 미가야 (764-724, 북이스라엘): 아합의 죽음
    • 호세아 (764-723), 북이스라엘): 사마리아 함락,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에 의존하는 이스라엘 책망, 여로보암 2세
    • 엘리사 (760-785, 북이스라엘): 아합가의 멸망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린 엘리사 (왕하 4장)

    남유다 잔존 왕국

    고뇌하는 예레미야

    바벨론 포로 시대

    포로 귀환 이후

    관련 자료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되는 여호와의 날 (The Day of the Lord)

    관련 문서

    검색: 선지자
    

    나단 (Nathan), 나훔 (Nahum), 다니엘 (인물), 말라기 (Malachi), 미가 (Micah), 미가야 (Micaiah), 선지서와 선지자, 선지자 표, 스가랴 (Zechariah), 스바냐 (Zephaniah), 스바냐 (인물), 아모스 (Amos), 에스겔 (인물), 엘리사 (Elisha), 엘리야 (Elijah), 엘리에셀 (Eliezer), 예레미야 (인물), 오뎃 (Oded), 오바댜 (Obadiah), 요나 (Jonah), 요엘 (Joel), 이사야 (Isaiah) - 인물, 하나니 (Hanani), 하박국 (Habakkuk), 학개 (Haggai), 호세아 (Hosea)

    참고한 자료

    • 구약성경개론 (Survey of the Old Testament - 폴 N. 벤웨어)


    구약 선지자들의 연대기

    이사야부터 말라기까지 현재 기록이 전해지는 16명의 선지자들은 BC 800년경부터 400년까지 4세기 동안 활동했다. 그들 대부분은 봉사 기간을 최소한 대략적으로라도 확정지을 수 있도록 연대 자료를 남겼다. 그러나 두 사람(요엘과 오바댜)의 경우 사역 시기에 관한 결정적인 증거가 없어서 이 문제에 대한 견해는 학자마다 매우 다르다.

    첨부된 도표를 통해 독자는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여 이 선지자들을 연구할 수 있다. 많은 예언과 기별은 선지자들이 봉사했던 시기의 상황과 대비시키고 그들의 생애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비추어 볼 때에만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유다와 이스라엘 왕들, 특별히 후기 왕들의 시대를 비교적 매우 정확하게 추정할 수 있기 때문에, 이 16명의 선지자들이 봉사했던 시기에 다스렸던 여러 왕들의 통치 기간이 본 주석에서 채용한 잠정적인 연대기에 따라 이 도표에 편입됐다(참조 제3권, 107; 제4권, 54, 76, 99, 100, 322). 이 시기에 다스렸던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왕들의 비교적 잘 정립된 연대도 다른 난에 기록되어 있다. 그 왕들 대부분은 성경의 예언서나 역사서에 언급되어 있다. 또 한 난에는 이 기간에 있었던 특별한 사건들의 목록이 나와 있는데, 일부는 이스라엘과 유다 주변국들에서 일어난 국외 사건에 관한 것이고 일부는 국내 사건에 관한 것이다. 이 도표에는 성경에 언급되어 있으며 예언적 기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건들만 나와 있다.
    다음의 간략한 요약에는 여러 선지자들이 도표에서 각각 해당 연대에 표시된 것에 관한 증거가 포함되어 있다.

    이사야
    이사야는 성경 기자들의 위대한 선구자였다. 이 사실은 여러 신약 기자가 인정하는 바, 그들은 이사야서를 90회 이상 인용했다. 이사야는 남방 왕국의 선지자로, 국가적으로 중차대한 시기에 살았다. 그는 두 번의 결정적인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 아하스 치세 때 아람과 이스라엘이 전쟁을 벌였던 시기(사 7~11장),
    (2) 히스기야 치세 때 산헤립이 이스라엘을 포위했던 시기(36, 37장).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신뢰를 통해 히스기야와 백성을 독려한 그는 예루살렘을 구원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그의 초기 봉사는 웃시야 왕 통치 말기와 일치하는 것 같지만(참조 이사야 서론), 공식적인 선지자로서의 부르심은 웃시야 왕의 마지막 해인 BC 740/739년에 있었다(6:1). 이어지는 세 왕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치세 아래서 신실하게 봉사했던(1:1) 그는 히스기야의 악한 아들 므낫세에게 극도로 미움을 받았던 것 같다. 므낫세는 BC 686년경 그의 아버지의 사망 직후 단독 통치자로 보좌에 등극했을 때 지체하지 않고 그 신실한 선견자를 제거하였다(선지자와 왕, 382). 유대 전승에 의하면 이사야는 톱으로 켬을 당하여 죽었다고 한다. 히브리서 11장 37절이 이 사건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그러므로 웃시야부터 므낫세까지 이사야의 전 봉사 기간은 반세기 넘게 지속됐음에 틀림없다(선지자와 왕 310, 382,).

    예레미야
    예레미야의 일대기는 다른 선지자에 비해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아나돗이 고향이었던 제사장의 가문에 속했다. 예레미야는 출생 전부터 하나님에게 택함 받아 직무를 맡았고(렘 1:5) 어린 나이에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았다(1:6, 7). 선지자가 자신을 가리켜 말한 “청년” 혹은 “아이”(1:6)라는 뜻의 히브리어 나아르(na‘ar)는 예레미야가 정확히 몇 살에 부름을 받았는지 드러내 주지는 않지만, 이 단어가 들어있는 구절의 문맥이 적어도 20세 미만의 매우 젊은 나이였다는 해석을 지지하는 듯이 보인다. 이 부르심은 BC 627/626년 요시야 왕 제13년(1:2; 25:3)에 있었다. 그 당시 요시야는 불과 21세밖에 되지 않은 젊은 왕이었다.
    예레미야는 조국이 위기를 겪던 시기에 살면서 동포에게 책망의 기별과 앞으로 닥쳐올 파멸에 대한 엄중한 예언을 많이 선포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여호야김 치세 때는 담대한 기별로 인해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기에 숨어 지내기도 했다(36:26).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의 치세 때는 바벨론인들에게 항복하라고 권고했다는 이유로 배반자로 여겨져 투옥됐다(37:11~16). BC 586년 예루살렘 멸망 후 느부갓네살은 예레미야가 유다에 남게 된 동포와 지내도 좋다고 허락했다(40:1~6). 유다의 새 총독 그다랴의 피살 후 미스바의 유대인들은 느부갓네살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예레미야와 그의 서기 바룩을 데리고 애굽으로 도망갔다(43:6).
    애굽에서 예레미야는 유대인들이 그곳에서 행하던 우상숭배를 강하게 질타했다(43, 44장). 그는 나일강 지역에서 사망했을 것이다. 유대인의 전설 가운데는 그가 동포에게 돌에 맞아 죽었다는 주장이 있다. 역사적인 후기(後記)인 52장을 예레미야가 기록했다면 그는 바벨론 왕 에윌-므로닥(Evil-Merodach)이 여호야긴을 감옥에서 방면했던(참조 52:31) BC 561년까지 살았음에 틀림없다. 이럴 경우 그는 80대였을 것이다. 52장이 예레미야의 서기나 그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영감받아 기록한 후기로서 첨가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가 약 20년 앞선 BC 580년경에 죽었다고 믿는다. 도표에는 두 의견을 다 반영하여 실재했을지 모를 BC 560년 이전 20년의 봉사 기간을 점선으로 표시했다.

    에스겔
    선지자 겸 제사장인 에스겔은 여호야긴 왕이 바벨론으로 압송됐던 BC 597년에 느부갓네살 왕이 포로로 잡아갔던 유다인 10,000명 중의 한 사람이었다. 여호야긴이 포로 된 지 제5년인 BC 593/592에 에스겔은 바벨론 남부 닙푸르(Nippur)라는 유명한 도성 인근의 한 운하였던 “그발강”가에서 첫 번째 계시를 보았다(겔 1:1~3). 포로 된 지 제5년을 그가 “제삼십년”이라고 언급한 것은 수수께끼이다. 선지자가 자신의 나이를 그렇게 지칭했거나 아니면 그 해가 요시야 왕이 개혁을 일으킨 지 제30년이라고 말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에스겔의 여러 기별은 정확한 연대를 매길 수 있으며 연대가 매겨진 예언 기별 중 마지막은 에스겔이 사로잡힌 지 제27년(29:17)인 BC 571/570년에 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에스겔은 BC 593/592년부터 BC 571/570년까지 적어도 22년의 봉사를 한 셈이 된다. 그러나 연대가 매겨지지 않은 일부 예언이 그 이후에도 주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BC 571/570년을 굳이 그의 봉사의 마지막 해로 구분지어 생각해서는 안 된다.

    다니엘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의 즉위년인 BC 605년에 바벨론으로 끌려갔다(참조 단 1:1 주석). 하지만 젊은 다니엘이 선지자의 소명에 관한 최초의 증거를 보여 준 사건은 느부갓네살 제2년 곧 그가 포로 된 지 제3년이 되어서야 일어났다(1:5, 17; 2:1, 19). 따라서 BC 603년을 다니엘이 선지자로 봉사하기 시작한 해로 볼 수 있다.
    한동안 그는 느부갓네살 정부의 고위직에 있었고(2:48) 그 위대한 왕에게 신임받는 모사가 됐다. 느부갓네살의 후계자들의 치세 때는 다니엘의 조력이 요청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바벨론이 멸망하던 밤, 벽에 기록된 신비스런 글자의 해석자로서 다시 한 번 역할을 담당한다(5장). 이 사건 직후 그는 새롭게 형성된 페르시아 제국에서 또다시 명예롭고 책임이 막중한 고위관직에 오르게 되었다(6장).
    7~12장에 기록된 모든 계시는 다니엘이 말년에 받은 것인데, 첫 번째 계시(7장)는 벨사살 원년(BC 552년 혹은 그 후)에, 마지막 계시(10~12장)는 고레스 제3년인 BC 536/535년에 주어졌다. 그가 책을 마무리짓고 봉함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가 이 시기였을 것이며, 이때 다니엘은 거의 90세였을 것이다(12:4, 13). 이런 이유로 다니엘의 광범위한 선지자 봉사 기간은 대략 BC 603년에서 535년까지로 산정할 수 있다.

    호세아
    선지자 호세아는 북방 이스라엘의 시민이었는데, 당시는 그가 “우리 왕”(호 1:1; 7:5)이라고 부른 여로보암 II세가 통치하던 때였다. 호세아의 예언 일부와 아모스의 예언을 비교해 보면 호세아가 동시대의 아모스보다 젊었다는 점이 드러난다(참조 호 4:3과 암 8:8; 호 4:15과 암 5:5; 호 8:14과 암 2:5). 유다 왕 웃시야와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시대(호 1:1)에 봉사를 시작한 호세아는 유다 왕 히스기야 때까지 계속 활동했다(1:1). 그러나 그의 모든 기별은 북방 왕국에게 보낸 것이었다.
    호세아서에는 BC 723/722년에 일어난 사마리아의 함락에 관해 아무런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선지자의 마지막 기별은 사마리아의 멸망 전에 주어졌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의 봉사는 약 BC 755년(혹은 그전)부터 BC 725년경까지로 산정할 수 있다.

    요엘
    선지자 요엘에 관해서는 브두엘의 아들(욜 1:1)이라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바가 아무것도 없다. 그의 저작은 능란한 말솜씨와 균형 잡힌 구문과 생동감 있고 인상적인 시(詩)라는 특징을 지닌다. 하지만 이 책에는 선지자가 살았던 시기에 대한 명확한 언급이 없다. 선지자가 매우 생생하게 묘사하며 다가올 심판날의 두려움과 비교하는 파괴적인 황충 재앙의 시대를 산정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요엘이 봉사했던 시기에 관해 학자들마다 견해를 달리한다. 이전 세대의 학자들은 그를 BC 9세기 사람으로 보는 반면, 현재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그의 시기를 요시야 왕 시대나 바벨론 유수 이후로 정하는 경향이 있다. 다음의 세 가지 견해를 지지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에 모두를 여기에 제시한다.
    1. 9세기 견해
    대제국 앗수르와 바벨론은 이 선지자의 시계(視界) 안에 등장하지 않는다. 이로 보건대 그는 앗수르가 팔레스타인 정세에 어떤 역할을 하기 이전 시대에 일했던 것 같다. 이방 민족들이 유다에게 자행한 적대 행위들(3:4 이하)은 열왕기하 8장 20~22절과 역대하 21장 8~10절에 기록된 사건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며, 반면 왕하 12:17, 18과 대하 24:23, 24에 기록된 하사엘의 침공을 지적하는 내용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요엘이 이 두 사건 사이에 해당하는 시기에 기별을 전했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더욱이 그는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어린 왕 요아스를 위해 섭정하던 시절(왕하 11:17~12:2)에 봉사했다고 여겨지는데, 이 사실은 요엘서 어느 곳에도 왕에 대한 언급이 없는 이유를 설명해 줄 것이다. 한편 그 당시에는 성전봉사가 잘 이뤄지고 있었다.
    2. 7세기 견해
    이 견해는 요엘의 봉사가 요시야 초기, 곧 앗수르 세력이 거의 끝나고 바벨론이 아직 약한 왕국이었던 시기에 들어맞는 것 같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이 두 왕국에 관한 언급을 이 선지자가 전혀 안 했던 것이다. 요시야는 어린 나이에 보좌에 올랐기 때문에 섭정을 받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는 요엘이 왕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은 점에 대한 설명이 된다. 더욱이 두로와 시돈 백성이 유다 역사의 마지막 수십 년이 돼서야 적대국으로 등장하는 반면, 요엘이 그들을 유다의 원수로 언급한 사실은 이 선지자의 봉사가 늦은 연대에 있었음을 가리키는 것 같다. 여기에 헬라에 관한 언급(욜 3:6)을 덧 붙일 수 있는데, 헬라는 BC 7세기 이전에는 근동 역사에서 활약한 적이 없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정확하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을지라도 본 주석에서는 7세기를 요엘서의 연대로 채택했다.
    3. 바벨론 유수 후 견해
    유다 왕이나 앗수르 혹은 바벨론에 관한 언급이 없으나, 두로와 시돈의 적개심과 헬라에 관해서 언급한 사실을 일부 주석가들은 요엘서가 포로 후 시대에 기록되었다는 증거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페르시아에 대한 언급, 즉 그렇게 늦은 연대에 기록됐다면 나오리라고 기대할 수 있는 요소도 이 책에는 나오지 않는다. 이 사실로 인해 이런 늦은 연대를 지지하는 논거는 약해진다.

    아모스
    아모스는 독자들에게 자신을 “목자” 그리고 “뽕나무를 배양하는 자”(암 1:1; 7:14)로 제시한다. 책 서두에서 그는 유다 왕 웃시야와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II세의 치세 때 봉사했다고 밝힌다. 두 왕만 언급된 점으로 보아 아모스는 두 왕이 각자의 나라에서 단독 통치자로 있던 시대에 예언했던 것 같다. 웃시야는 유다에서 BC 767년부터 750년까지, 여로보암은 이스라엘에서 BC 782년부터 753년까지 단독으로 통치한 왕이었다. 첫 번째 기별이 “지진 전 이년”(1:1)에 임했다는 언급이 있는데도 더 정확한 연대 추정이 불가능한 이유는 지진의 연대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지진은 매우 강력했음에 틀림없는데, 이는 스가랴 14장 5절을 보면 그 지진에 대한 기억이 250년 후에도 사람들의 마음에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아모스 선지자는 유다의 국민이었으나 이스라엘 왕국에도 기별을 전했다. 그의 기별 중 일부는 여러 이방 민족들에 대한 경고였다. 그는 북방 이스라엘의 성소가 있는 벧엘에 가서 이스라엘에 닥칠 운명과 경고와 견책의 예언들을 전했다.

    오바댜
    21절로만 구성된 짧은 책 오바댜는 연대가 나와 있지 않으며 연대적 배경도 불확실하다. 에돔에 대한 경고인 오바댜의 예언은 예루살렘을 약탈하고 많은 유대인을 포로로 잡아간 사건이 최근에 일어났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 오바댜가 BC 9세기 여호람 왕 시대에 예루살렘이 정복당한 사실(왕하 8:20~22; 대하 21:8~10, 16, 17)을 언급한 것이라고 믿는 이들도 있지만, BC 586년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일을 말하고 있다고 믿는 이들도 있다. 그가 사용한 단어 일부가 예레미야(옵 1:1, 3, 4절; 참조 렘 49:14, 16)와 요엘(옵 1:15, 17절; 참조 욜 1:15; 2:1, 32)에도 나온다는 점이 늦은 연대인지 이른 연대인지 밝히는 증거로 사용되기 힘들다. 본 주석에서는 이른 연대에 대한 편견은 없지만 늦은 연대를 채택하고 있다.

    요나
    선지자 요나는 가드헤벨 출신의 갈릴리 사람이었다. 그의 책에는 니느웨로 가라는 사명을 부여받은 시기를 입증할 수 있는 직접적인 자료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열왕기하 14장 25절에는 요나가 여로보암 II세가 성취할 이스라엘의 영토 확장에 관한 예언을 선포했다고 나와 있다. 이 예언은 여로보암이 즉위하기 전(약 BC 793년)이나 그의 통치 초기에 선포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요나는 여기서 논의하는 선지자들 중 가장 초기의 사람이었을 것이다.
    요나의 봉사 시기를 BC 790년경으로 이른 연대로 잡는 것은 앗수르의 역사와 잘 부합한다. 니느웨에 대한 요나의 사명과 그 결과가 부합되는 것으로 보이는 유일한 기간은 아닷-니라리 III세(Adad-nirari III, BC 810~782) 치세이다. 그의 통치 중 짧은 시기 동안 앗수르는 다신교 신앙에서 단일신 나부(Nabu) 숭배 신앙으로 돌아섰다(참조 제3권, 82).

    미가
    미가는 아마도 유다 남서부 텔 엣-주데이데(Tell ej-Judeideh)로 보이는 가드모레셋(미 1:1, 14) 출신의 선지자였다. 미가를 아합 시대(BC 9세기)에 이스라엘의 선지자였던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와 혼돈해서는 안 된다. 초기 주석가들은 이 두 사람을 동일 인물로 보려고 했는데, 이는 그들이 유사한 표현을 사용했기 때문이다(미 1:2; 참조 왕상 22:28). 그러나 미가가 제시한 연대적 자료는 이렇게 보는 것과 부합하지 않으며, 두 사람 사이에 한 세기 이상의 시차가 있음을 보여 준다. 미가는 자기의 봉사가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미 1:1) 시대에 해당한다고 언급한다. 요담의 단독 통치가 그의 아버지 웃시야가 죽던 BC 740/739년 후에 시작됐기 때문에, 미가의 선지자 봉사의 시작 연대도 웃시야의 사후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사야보다 조금 어린 동시대 사람인데, 그의 예언은 어휘와 용어 면에서 이사야와 매우 흡사하게 나타난다(미 4:1; 참조 사 2:2~4). 예레미야(렘 26:18)도 미가서(미 3:12)를 인용하며 미가가 히스기야 시대에 봉사했음을 증언한다. 이 모든 사실에 비춰볼 때 미가는 약 BC 740년부터 700년경까지 예언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나훔
    나훔은 엘고스 사람이라 불린다(나 1:1). 엘고스라는 지명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주석가들은 이곳이 갈릴리 북부에 있는 엘케시(Elkesi), 모술(Mosul) 인근의 알쿠쉬(Alkush), 유다의 엘류쎄로폴리스(Eleutheropolis) 인근 마을임을 밝히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가 남방 왕국에서 살고 일했으며, 그의 주요 예언이 전반적으로는 앗수르를 그리고 구체적으로는 니느웨를 다루고 있음은 분명하다. 어떤 연대적 자료도 나오지 않지만 선지자는 노(No)의 멸망을 과거사로 말하고 있다(3:8). 헬라식 명칭인 테베(Thebes)로 더 잘 알려진 상(上)애굽의 이 수도는 BC 663년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에게 멸망당했는데, 이 해는 나훔이 예언했다고 볼 수 있는 시기의 상한선이 된다. 반면 니느웨의 멸망은 장래 사건으로 기술되어 있다(3:7).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는 BC 612년 메대와 바벨론 연합군의 수중에 들어가 멸망당했고, 따라서 이 해는 나훔이 예언한 시기의 하한선이 될 수 있다. 테베에 임한 파멸에 관한 선지자의 생생한 묘사는 그 사건이 백성의 기억에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는 인상을 주는 반면, 앗수르는 세력이 기울고는 있었지만 아직 파국에 가깝지는 않았다. 그래서 테베의 멸망과 니느웨의 멸망 연대의 중간쯤 되는 BC 640년이 나훔의 예언적 봉사에 합당한 추측 연대일 것 같다.

    하박국
    하박국에 관해서는 이름 외에는 알려진 바가 아무것도 없다. 하박국 3장이 “영장”에게 바치기 위해 “내 수금에 맞춘 것”(합 3:19)이라는 기록을 보면 그가 성전에서 노래하는 자였을 가능성이 있다. 어떤 연대적 자료도 하박국서에 나오지 않지만 하박국의 예언 시기를 비교적 정확히 추정할 수 있는 언급들이 일부 있다. 성전이 아직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2:20) 하박국서는 BC 586년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기 전에 기록됐음이 드러난다. 더군다나 갈대아 사람들이 일어나 서방을 침략할 것이라는 예언은 전혀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보였다(1:5~7). 이 상황은, BC 626/625년에 통치를 시작하여 메대와 함께 앗수르를 멸망시킨 장본인인 나보폴랏사르(Nabopolassar) 치하의 갈대아 제국이 일어나기 전 시기에 가장 잘 맞는다. 갈대아 사람들이 주요 세력이 되기 전인 BC 630년경이 하박국의 예언 활동 시기로 매우 적절한 것 같다.

    스바냐
    선지자 스바냐는 유다 왕 히스기야(Hezekiah)로 보이는 히즈키야(Hizkiah, 두 이름이 히브리어로는 같음)라는 중요 인물에 이르기 까지 자기 계보를 소급한다. 그는 BC 640년에서 609년까지 다스렸던 요시야 왕(습 1:1)의 치세 때 봉사했다고 진술한다. BC 612년에 일어난 니느웨의 멸망이 미래의 사건으로 언급된 점은 스바냐의 사역이 이 연대보다 앞서 진행됐음을 나타낸다. 더욱이 유다의 죄악이 당대에 엄청났다고 반복하여 언급한 것(참조 1:4~6, 8, 9, 12; 3:1~3, 7)은 BC 622/621년에 시작된 요시야의 개혁 이전 시대를 가리킨다. 이러한 관찰을 통해 스바냐는 아마도 BC 630년경 요시야의 통치 초기 곧 하박국과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학개
    한동안 중단됐던 성전 재건(스 4:24; 5:1)은 학개의 담대한 봉사를 통해 다리오 I세 때 재개되었다. 학개서에는 연설 네 개가 들어 있는데, 각각에는 다리오의 정확한 통치 연월일이 나와 있다. 학개서의 이어지는 순서를 통해, 기록된 그의 봉사 기간은 BC 520년 8월 29일에 시작하여(학 1:1) 마지막 두 편의 연설(2:10, 20)을 했던 BC 520년 12월 18일까지 전부 3개월 반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된다. 학개의 사역처럼 이렇게 명확하게 연대를 매길 수 있는 다른 선지자는 없다.

    스가랴
    스가랴는 제사장 가문에 속했던 것 같다(슥 1:1; 참조 느 12:12, 16). 소명은 BC 520년 10/11월 어느 날 그에게 이르러 왔는데, 같은 해에 학개도 처음 등장한다(슥 1:1). 여러 예언이 두세 달 후에 연이어 임했다(1:7~6:15). 그런 뒤 그의 활동은 거의 2년 동안 잠잠했다가, BC 518년 12월 6일(7:17장과 8장에 기록된 또 다른 거룩한 기별을 받았다. 9~14장에 나오는 나머지 기별과 예언에는 연대가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스가랴의 활동기간을 확정할 수 없다. 따라서 그가 BC 520년에 사역을 시작하여 BC 518년까지 계속했음은 알려져 있는 반면, 선지자 봉사의 끝은 정하지 않은 상태로 유보해야만 한다. 일부 학자들은 그의 봉사의 마지막을, 잠정적으로 BC 510년이라고 정한다. 9~14장 부분이 훨씬 후에 주어졌을 수 있기 때문에 그가 좀 더 오래 일했을 가능성도 있다.

    말라기
    말라기라는 말이 “나의 사자”라는 뜻이기 때문에 말라기가 저자의 이름인지 아니면 단순히 익명의 저자에 대한 호칭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만약 후자가 사실이라면 그의 책은 구약의 선지서 가운데 유일한 익명의 작품이 된다. 그러나 말라기를 왜 고유명사로 보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타당한 근거는 없다.
    말라기서는 선지서들의 배열에서 마지막 책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 이전 시대에 저술된 마지막 예언서이기도 하다. 그 책의 기별은 유다 왕국 시대가 끝나고 총독이 나라를 치리하던 시대(말 1:8)에 기록되었음을 보여 주는데, 그것은 그때가 페르시야 시대임을 가리킨다. 성전은 분명히 재건됐고 말라기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제사가 정규적으로 드려졌다(1:7~10). 말라기가 꾸짖었던 여러 악습은 느헤미야가 두 번째 총독 임기를 맞이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발견했던 것들과 거의 동일하다(말 3:8, 9; 참조 느 13:10~12; 말 2:11~16; 참조 느 13:23~27).
    불행하게도 느헤미야의 두 번째 총독 임기의 연대를 추정할 수 없기에 말라기의 연대를 정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다. 느헤미야의 첫 번째 총독 임기는 BC 444년부터 432년까지 이어졌다가, 이후에 페르시아로 소환됐다. 거기서 그는 얼마간인지 알 수 없는 여러 해를 보낸 뒤 유대로 돌아왔을 때 느헤미야 13장에 기록된 악습들을 보게 된다. 이런 악습들은 총독의 단호한 조치로 시정되었다. 이를 통해 말라기의 사역은 느헤미야의 첫 번째 총독 임기에 뒤이어 있었지만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의 수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시기 이전에 있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이 책은 BC 425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선지자들의 활동 장소와 시기를 시대순으로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한 선지지와 그 때의 왕은

    북이스라엘 왕국에서 활동한 선지자들과 그들이 활동하던 시기의 왕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엘리야 (Elijah):

    왕: 아합 왕 (Ahab)
    엘리야는 북이스라엘 왕국에서 가장 중요한 선지자 중 하나로,
    우상 숭배에 맞서 싸우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특히 아합 왕과 그의 아내 이세벨이 주도한 바알 숭배에 반대하여 유명한 갈멜산 대결을 벌였습니다.

    (2) 엘리사 (Elisha):

    왕들: 여로보암 2세, 여호아하스, 여호람 등
    엘리야의 후계자로서 북이스라엘 왕국에서 활동했습니다.
    여러 왕들의 통치 기간 동안 예언 활동을 하였으며, 많은 기적을 행했습니다.
    엘리사는 이스라엘을 외적의 침략에서 보호하는 예언을 하고, 사회적 정의를 외쳤습니다.

    (3) 호세아 (Hosea):

    왕: 여로보암 2세 등
    호세아는 북이스라엘 왕국의 멸망 직전에 활동한 선지자로,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앙과 배신을 고발하고, 그 결과로 다가올 심판을 예언했습니다.
    그의 예언은 북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에 대한 경고로 유명합니다.

    (4) 아모스 (Amos):

    왕: ** ** 여로보암 2세
    아모스는 원래 남유다 출신이었지만,
    북이스라엘 왕국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아모스는 주로 사회적 불의, 부패, 그리고 종교적 위선을 강하게 비판하며,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오고 있음을 경고했습니다.

    네 명의 선지자들은 북이스라엘 왕국에서 활동했으며,
    각기 다른 시기에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특히 엘리야와 엘리사는 북이스라엘의 초기와 중기에,
    호세아와 아모스는 북이스라엘의 후기, 즉 멸망 직전에 활동한 선지자들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남유다에서 활동한 선지지와 그 떄의 왕은

    남유다 왕국에서 활동한 주요 선지자들과 그들이 활동한 시기의 왕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이사야 (Isaiah):

    왕들: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이사야는 남유다 왕국의 여러 왕들 하에서 활동한 선지자로,
    주로 히스기야 왕 때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사야는 유다의 죄악을 경고하고, 회개와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며, 메시아의 도래를 예언했습니다.

    (2) 예레미야 (Jeremiah):

    왕들: 요시야,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시드기야
    예레미야는 유다 왕국의 멸망 직전에 활동했으며,
    바벨론에 의한 유다의 멸망을 예언했습니다.
    그는 유다 백성이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임을 경고했고,
    실제로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3) 에스겔 (Ezekiel):

    왕들: 여호야긴 (유다의 마지막 왕 중 한 명, 바벨론으로 끌려갔음)
    에스겔은 바벨론 포로기 동안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유다의 멸망을 설명하고, 포로된 백성들에게 소망의 메시지를 전하며,
    미래의 회복과 새 성전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4) 미가 (Micah):

    왕들: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미가는 이사야와 동시대에 활동하며,
    주로 사회적 불의와 부패를 비판했습니다.
    그는 또한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태어날 것을 예언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5) 스바냐 (Zephaniah):

    왕: 요시야
    스바냐는 요시야 왕의 종교 개혁 이전에 활동하며,
    유다의 죄악과 다가오는 심판에 대해 예언했습니다.
    그는 요시야 왕이 개혁을 단행하도록 영향을 미친 것으로 여겨집니다.

    (6) 하박국 (Habakkuk):

    왕: 여호야김
    하박국은 유다의 죄악과 바벨론의 압박 사이에서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의문을 품고,
    하나님께 질문하며 답을 받는 형태의 예언을 남겼습니다.
    그는 신실한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심판 속에서도 믿음을 유지할 것인가에 대해 강조했습니다.

    (7) 요엘 (Joel):

    왕들: 정확한 시기는 불명확하지만, 여호사밧 왕 또는 요아스 왕 시기로 추정
    요엘은 메뚜기 재앙을 하나님의 심판의 상징으로 해석하고,
    회개와 금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촉구했습니다.

    (8) 아모스 (Amos) (또한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했지만, 유다에 대한 예언도 포함):

    왕: 웃시야
    아모스는 주로 북이스라엘을 대상으로 활동했지만,
    유다에 대한 예언도 했습니다. 그는 부패와 불의를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이 선지자들은 각기 다른 시기에 활동하며,
    유다 왕국의 왕들과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이들은 유다의 종교적 타락과 사회적 부패를 비판하고, 회개와 구원을 촉구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참고용 : 다른 자료에서 발췌... 중복되기도 함

    선지자들의 활동 시기와 장소를 시대순으로 정리

    (1) 오바댜 (Obadiah)

    활동 시기: 주전 9세기 (정확한 시기는 불명)
    활동 장소: 유다 왕국
    특징: 오바댜는 에돔에 대한 심판을 예언했습니다.

    (2) 요엘 (Joel)

    활동 시기: 주전 9세기 (정확한 시기는 불명)
    활동 장소: 유다 왕국
    특징: 요엘은 메뚜기 재앙과 "여호와의 날"에 대한 예언으로 유명합니다.

    (3) 아모스 (Amos) *이스라엘

    활동 시기: 주전 8세기 (약 주전 760-750년)
    활동 장소: 북이스라엘 왕국
    특징: 아모스는 주로 사회 정의와 도덕적 타락에 대한 예언을 했습니다.

    (4) 호세아 (Hosea) *이스라엘

    활동 시기: 주전 8세기 (약 주전 750-722년)
    활동 장소: 북이스라엘 왕국
    특징: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의 타락과 멸망을 예언했습니다.

    (5) 이사야 (Isaiah) *

    활동 시기: 주전 8세기 (약 주전 740-700년)
    활동 장소: 유다 왕국, 예루살렘
    특징: 이사야는 유다 왕국의 여러 왕들의 통치 기간 동안 활동하였으며,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많이 남겼습니다.

    (6) 미가 (Micah) *

    활동 시기: 주전 8세기 (약 주전 740-700년)
    활동 장소: 유다 왕국
    특징: 미가는 주로 유다의 사회적 부패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했습니다.

    (7) 요나 (Jonah)

    활동 시기: 주전 8세기 (약 주전 780-750년)
    활동 장소: 아시리아 니느웨 (아시리아의 수도)
    특징: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아시리아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8) 나훔 (Nahum) *

    활동 시기: 주전 7세기 (약 주전 660-620년)
    활동 장소: 유다 왕국
    특징: 아시리아 니느웨의 멸망 예언.

    (9) 스바냐 (Zephaniah) *

    활동 시기: 주전 7세기 (약 주전 640-609년)
    활동 장소: 유다 왕국
    특징: 유다와 이방 나라들에 대한 심판 예언.

    (10) 예레미야 (Jeremiah) *

    활동 시기: 주전 7세기 말~6세기 초 (약 주전 626-586년)
    활동 장소: 유다 왕국, 예루살렘
    특징: 유바벨론 포로기 직전에 활동하였으며, 유다의 멸망과 포로됨을 예언했습니다.

    (11) 하박국 (Habakkuk) *

    활동 시기: 주전 7세기 말 (약 주전 612-589년)
    활동 장소: 유다 왕국
    특징: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질문과 바벨론의 침공 예언.

    (12) 에스겔 (Ezekiel)

    활동 시기: 주전 6세기 (약 주전 593-571년)
    활동 장소: 바벨론 유배지
    특징: 에스겔은 바벨론 포로 기간 동안 포로로 잡혀 간 유대인들에게 예언을 전했습니다.

    (13) 다니엘 (Daniel)

    활동 시기: 주전 6세기 (약 주전 605-536년)
    활동 장소: 바벨론 제국
    특징: 꿈다니엘은 바벨론과 페르시아 제국에서 활동하며, 꿈 해석과 관련된 예언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14) 학개 (Haggai) **

    활동 시기: 주전 6세기 (약 주전 520년)
    활동 장소: 예루살렘
    특징: 학개는 성전 재건을 촉구하는 예언을 했습니다.

    (15) 스가랴 (Zechariah) **

    활동 시기: 주전 6세기 (약 주전 520-518년)
    활동 장소: 예루살렘
    특징: 스가랴는 성전 재건과 메시아 도래를 예언했습니다.

    (16) 말라기 (Malachi) **

    활동 시기: 주전 5세기 (약 주전 430년)
    활동 장소: 예루살렘
    특징: 이스라엘의 영적 회복과 메시아의 오심 예언.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적 의미의 선지자



    구약의 선지자들

    선지자란?

    '선지자(Prophet)'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나비(נָבִיא)'에서 유래했으며,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와 명령을 받아 백성에게 전하고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들은 예언적 환상과 신탁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드러냈으며, 때로는 심판과 회복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하며, 신앙적·윤리적 기준을 제시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구약에서는 신탁을 전하는 전형적인 선지자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다양한 영적 지도자들이 존재했습니다. 이들 또한 선지자적 역할을 감당했으며, 시대적 상황에 따라 특정한 사명을 부여받아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특정 사건의 개입을 통해 하나님의 경고와 희망을 전하며 백성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알리고자 했습니다. 때로는 개인의 삶과 희생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선지자의 유형과 대표적 인물들

    1. 원시적 영적 지도자

    노아: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예고받고 방주를 준비하며 의를 전파했습니다(창 6-9장). 베드로후서 2장 5절에서는 그를 '의의 전파자'로 칭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방주를 건축하며, 당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노아의 경고를 무시했고,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홍수 이후 노아는 하나님과 새로운 언약을 맺어 인류의 새로운 시작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의 사역은 하나님의 심판과 동시에 구원의 은혜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건으로 남아 있습니다.

    아브라함: 하나님께 언약을 받아(창 12:1-3)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며,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을 전하는 중재자적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심판이 예정되었을 때 하나님께 중재하며 하나님의 정의와 긍휼을 나타냈습니다(창 18장). 또한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언약의 순종과 신실함의 본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는 믿음과 순종의 여정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본보기가 됩니다. 그는 또한 각기 다른 시험과 도전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확립하며, 후대에까지 이어지는 언약의 기초를 형성했습니다.

    모세: 신명기 18장에서는 모세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큰 선지자'로 제시됩니다. 그는 출애굽을 이끌고 시내산에서 율법을 수여받아 이스라엘 공동체의 신앙적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또한 가데스 바네아에서 불순종한 백성을 위해 중보하며, 광야에서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했습니다(민 14장). 모세는 여러 차례 백성의 불평과 반항에 직면했으나, 하나님께 끊임없이 중보하며 백성을 위해 희생하는 리더십을 발휘했습니다. 그의 사역은 단순한 지도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백성을 보호하고 교육하는 전인적 역할을 포함했습니다.

    2. 왕이면서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한 지도자

    다윗: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으로서(삼상 13:14) 메시아적 왕국의 모형을 이루었습니다. 그는 시편을 통해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적 메시지를 남겼으며, 하나님의 임재와 왕권에 대한 깊은 신앙적 통찰을 제공했습니다. 다윗은 범죄 후에도 진심으로 회개하며(시 51편)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와 용서의 본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또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한 영원한 언약을 확립하실 것을 예고받았으며, 그의 후손이 장차 영원한 왕국을 세우는 메시아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신앙과 리더십은 이스라엘 왕정 시대의 중심적 모델이 되었습니다.

    선지자의 시대적 구분

    1. 신 앗수르 시대의 선지자들 (주전 9~7세기)

    • 이 시대의 주요 선지자 목록: 요나, 아모스, 호세아, 미가, 이사야

    앗수르 제국이 점차 강성해지던 시기에 활동한 선지자들로, 그들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사회적·종교적 타락을 책망하고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그들의 사역은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을 강조하면서도, 회복과 구원의 소망을 함께 전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요나: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고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처음에는 이방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을 받아들이지 못해 도망쳤으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의해 닌웨에 도달해 사명을 완수했습니다. 요나의 사역은 하나님의 구원이 특정 민족에만 국한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닌웨 사람들은 요나의 메시지를 듣고 전적으로 회개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면했습니다. 요나는 이러한 하나님의 극률에 대해 분노했으나, 하나님은 그에게 자비의 범위가 얼마나 넓은지를 가르치셨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과 용서를 상징하는 강력한 교훈으로 남아 있습니다.

    아모스: 정의와 공의를 외치며, 이스라엘의 불의한 사회 구조와 위선적인 종교 행태를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부유층이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행태를 규탄하며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하라"(암 5:24)고 선포했습니다. 아모스는 단순히 윤리적 비판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예배와 사회정의를 강조했습니다. 그는 인간 관계에서의 공정성과 배려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설파했습니다.

    호세아: 그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메시지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는 영적 배신을 표현하기 위해 음란한 여인 고멜과 결혼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으며, 이스라엘의 배교와 하나님의 사랑을 결혼 관계로 비유했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이스라엘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회복의 약속을 강조했습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멀리할 때마다 그들이 겪을 심판과 고통을 경고했지만, 동시에 회개하고 돌아올 때 주어질 은혜를 역설했습니다.

    미가: 미가는 유다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을 향해 불법과 우상숭배를 경고하며 심판을 예고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미 4:3)라는 구절에서 나타나듯이, 장차 올 평화로운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희망적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미가는 또한 "너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미 6:8)라는 구절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적 삶의 본질을 강조했습니다.

    이사야: 이사야는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을 향한 심판과 구원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는 임마누엘 예언(사 7:14)을 통해 장차 올 메시아를 예고하며, 하나님의 거룩성과 의로움이 온 땅에 드러나리라고 강조했습니다. 이사야서 후반부에서는 포로에서 돌아올 백성들을 위로하며,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을 선포했습니다(사 65:17). 이사야는 또한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진 고난받는 종의 예언(사 53장)을 통해 구속적 희생의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2. 신 바벨론 시대의 선지자들 (주전 7~6세기)

    • 이 시대의 주요 선지자 목록: 예레미야, 하박국, 스바냐, 나훔, 에스겔, 다니엘

    이 시대의 선지자들은 바벨론 제국의 침략과 유다 멸망이라는 역사적 위기 속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들은 심판을 예고하며, 동시에 장차 회복될 하나님의 언약을 선포했습니다. 그들의 메시지는 포로기 동안 신앙을 지키며 새로운 희망을 품도록 백성들을 격려했습니다.

    예레미야: 예레미야는 유다의 죄악과 멸망을 예언하며 백성에게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그는 바벨론으로의 포로 생활을 피할 수 없음을 경고했으며, 하나님께서 새로운 언약을 통해 그들의 마음에 율법을 기록하실 것을 약속했습니다(렘 31:33). 백성의 반발과 핍박을 받았지만,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는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요"(렘 29:11)라는 말씀을 통해 회복과 희망을 전했습니다.

    하박국: 하박국은 하나님께 왜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지 질문하며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깊이 묻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통해 그는 "오직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는 신앙적 원칙을 깨닫고 하나님을 신뢰하게 됩니다. 하박국은 마지막에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라는 고백으로 믿음의 절정을 보여주며,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스바냐: 스바냐는 여호와의 날에 임할 심판과 구원을 예고했습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우상숭배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겸손하게 의를 구하라고 촉구했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심판 속에서도 남은 자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와 사랑을 강조했습니다.

    나훔: 나훔은 닌웨의 멸망을 예언하며 하나님의 정의와 심판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앗수르의 잔혹함에 대한 하나님의 응징을 보여줍니다. 나훔은 또한 "여호와는 질투하며 보복하시는 하나님"(나 1:2)이라는 선언을 통해 하나님의 의로움을 나타냈습니다.

    에스겔: 에스겔은 바벨론 포로 생활 중에 다양한 환상과 상징을 통해 이스라엘의 죄와 심판, 그리고 회복을 전했습니다. 마른 뼈의 환상(겔 37장)은 이스라엘의 영적 부흥과 하나님의 새 언약을 상징합니다. 그는 성전 회복과 미래의 새 예루살렘에 대한 소망을 선포했습니다. 에스겔은 또한 하나님의 임재가 성전을 떠나는 장면을 통해 죄의 결과를 경고했습니다.

    다니엘: 다니엘은 바벨론과 페르시아 왕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며, 꿈과 환상을 통해 장차 올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예언했습니다. 그의 사자굴 사건은 믿음을 지키는 성도의 승리를 상징합니다. 다니엘은 또한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심"(단 7:13)이라는 예언을 통해 메시아의 도래를 예고했습니다.

    3. 페르시아 시대의 선지자들 (주전 6~5세기)

    • 이 시대의 주요 선지자 목록: 학개, 스가랴, 말라기

    페르시아 제국의 고레스가 유다 백성의 귀환을 허용한 후, 선지자들은 성전 재건과 신앙 회복을 독려하며 언약의 성취를 강조했습니다. 그들의 사역은 귀환 공동체가 새로운 신앙적 기초 위에 서도록 인도했습니다.

    학개: 학개는 성전 재건의 중요성을 외치며, 백성들이 개인적 안녕에만 몰두하는 것을 책망했습니다. 그는 성전이 회복될 때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해질 것임을 약속했습니다(학 2:9). 학개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과 재정을 통해 영적 우선순위를 정하실 것을 촉구했습니다.

    스가랴: 스가랴는 여덟 가지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을 선포했습니다. 그는 메시아 왕의 도래와 새 시대의 회복을 강조하며, 예루살렘이 다시 하나님의 중심지가 될 것을 예언했습니다. 스가랴는 "그 날에 여호와께서 홀로 왕이 되실 것이라"(슥 14:9)고 선포하며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나타냈습니다.

    말라기: 말라기는 타락한 제사장들과 백성을 향해 경고하며, 참된 경건과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함을 촉구했습니다. 그는 메시아의 선구자로서 '엘리야 같은 자'가 올 것을 예고하며(말 4:5-6), 하나님의 최종적 심판과 회복을 선포했습니다. 말라기는 또한 십일조와 예배에 관한 문제를 다루며, 백성들이 하나님께 올바른 경배를 드릴 것을 강조했습니다.

    신약 시대의 선지자가 갖는 의미

    예수 그리스도의 선지자직과 삼중직 개념

    신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궁극적인 선지자로 묘사됩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로서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온전히 계시하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미래 사건을 예언하는 선지자와는 차원이 다른 존재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내고 그것을 직접 실현시키신 분입니다. 이는 히브리서 1장 1-2절에서 명확하게 나타납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예수님의 선지자직은 삼중직(선지자, 제사장, 왕) 중 하나로 이해되며, 각 직분은 예수님의 사역 전반을 설명합니다.

    1. 선지자직 (Prophet)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직접 전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성취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이 곧 하나님의 계시의 중심임을 밝히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산상수훈(마 5-7장)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윤리와 가르침을 선포하시며,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예언을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미래에 대한 예언도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마 24장)과 마지막 심판에 대해 경고하셨고,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에 대한 소망을 전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선지자직은 단순한 예언을 넘어, 하나님 나라의 임재와 회복을 몸소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2. 제사장직 (Priest)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구약에서 제사장은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자였으나, 예수님은 스스로가 제물이 되어 인류의 죄를 단번에 속량하셨습니다(히 9:12). 이로써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영원한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3. 왕직 (King)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으로서 영원한 왕국을 다스릴 왕으로 오셨습니다. 요한계시록 19장 16절은 그분을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 묘사합니다. 예수님의 왕직은 단순히 정치적 통치가 아닌, 영적 왕국의 통치와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과 승천을 통해 그 왕권을 확증하셨으며, 최종적으로 모든 피조물이 그분의 주권 아래에 들어갈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선지자적 역할

    신약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어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선지자적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강조됩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은 그리스도인들을 “왕 같은 제사장”이자 “거룩한 나라”로 부르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을 선포하는 사명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이는 모든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삶 속에서 그 말씀을 구현할 책임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1. 복음 전파

    예수님은 승천 직전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로써 제자들과 이후의 모든 그리스도인은 복음의 선포자로서 선지자적 사명을 이어받았습니다. 초기 교회에서 베드로와 바울 같은 사도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며, 많은 이들에게 회개와 구원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와 같이 각자 처한 환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마 5:13-16). 이 사명은 단지 말로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2. 공동체 내에서의 선지자적 역할

    초대 교회에서는 선지자적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공동체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3절은 선지자적 은사를 통해 성도를 "덕을 세우고 권면하며 위로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선지자적 역할이 공동체 내에서 영적 성장을 돕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하는 데 필수적임을 보여줍니다.

    현대 교회에서도 목회자, 성경 교사, 그리고 영적 지도자들은 이러한 선지자적 역할을 맡아 성도들을 가르치고 격려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여 전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역할은 특정 직분자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성도가 각자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3. 사회적 정의와 예언적 목소리

    그리스도인은 사회적 불의와 죄악에 대해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부패한 지도자들과 불의한 사회 구조를 책망하며 정의와 공의를 외쳤듯이, 신약의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정의를 대변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와 억눌린 자들을 위로하시고, 종교적 위선과 부패를 강하게 질책하셨습니다(마 23장).

    오늘날에도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사회 속에서 약자와 소외된 이들을 돌보고,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는 데 앞장서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세상에 드러내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성령과 선지자적 사명

    신약에서 성령은 선지자적 사명을 수행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역할을 합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행 2장)을 통해 제자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할 능력을 받았으며, 각종 은사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시작했습니다. 사도행전 곳곳에서 성령은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하는 이들을 인도하고 힘을 더해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을 언급하며, 그 중에서도 예언의 은사를 중요한 위치에 두었습니다. 그는 "예언하는 자는 사람들에게 덕을 세우며 권면하고 위로한다"(고전 14:3)고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은사는 공동체 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고 상황에 맞게 적용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또한 성령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하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요한복음 16장 13절에서 예수님은 성령을 "진리의 영"으로 소개하시며, 그분이 장차 일어날 일들을 가르치시고 인도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그리스도인은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신약 시대의 선지자는 단순히 예언적 메시지를 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복음을 삶 속에서 실천하며 드러내는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셨으며,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분의 모범을 따라 선지자적 사명을 수행해야 합니다. 이는 복음을 전파하고, 공동체를 세우며,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는 것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사명입니다. 이러한 사명은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이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확장될 것입니다.




    선지작들의 사역

    구약에 소개되는 중요한 선지자들의 사역들을 간략하게 정리했습니다. 선지잘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달하는 자들이며, 어떤 선지자는 왕적 권위를 가지고 백성들을 통치하기도 합니다. 

    1. 모세 (Moses)

    • 이름: 모세
    • 생애:
      • 배경: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 주요 사건: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인도해냄,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음, 40년 동안 광야에서 백성을 이끔
      • 성경 구절: 출애굽기 3:10 -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2. 사무엘 (Samuel)

    • 이름: 사무엘
    • 생애:
      • 배경: 사무엘상, 사무엘하
      • 주요 사건: 마지막 사사이자 첫 번째 선지자, 사울과 다윗을 기름부음
      • 성경 구절: 사무엘상 3:19 -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3. 엘리야 (Elijah)

    • 이름: 엘리야
    • 생애:
      • 배경: 열왕기상, 열왕기하
      • 주요 사건: 바알 선지자들과의 갈멜산 대결, 하늘로 올라감
      • 성경 구절: 열왕기상 18:21 -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4. 엘리사 (Elisha)

    • 이름: 엘리사
    • 생애:
      • 배경: 열왕기하
      • 주요 사건: 엘리야의 후계자로 많은 기적을 행함 (나아만의 문둥병 치유, 사르밧 과부의 기름병 등)
      • 성경 구절: 열왕기하 2:9 -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하여 줄꼬 엘리사가 이르되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하거늘"

    5. 이사야 (Isaiah)

    • 이름: 이사야
    • 생애:
      • 배경: 이사야서
      • 주요 사건: 남유다 왕국에서 활동, 메시아 예언
      • 성경 구절: 이사야 6:8 -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6. 예레미야 (Jeremiah)

    • 이름: 예레미야
    • 생애:
      • 배경: 예레미야서, 예레미야 애가
      • 주요 사건: 남유다의 멸망을 예언, '눈물의 선지자'
      • 성경 구절: 예레미야 1:5 -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7. 에스겔 (Ezekiel)

    • 이름: 에스겔
    • 생애:
      • 배경: 에스겔서
      • 주요 사건: 바벨론 포로 생활 중 활동, 이스라엘의 회복과 새 성전 환상
      • 성경 구절: 에스겔 2:3 -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에게 보내노라 그들은 내게 패역한 자라 그들과 그 열조가 내게 범죄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렀나니"

    8. 다니엘 (Daniel)

    • 이름: 다니엘
    • 생애:
      • 배경: 다니엘서
      • 주요 사건: 바벨론에서의 고위 관리, 여러 환상과 예언
      • 성경 구절: 다니엘 6:10 -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9. 호세아 (Hosea)

    • 이름: 호세아
    • 생애:
      • 배경: 호세아서
      • 주요 사건: 이스라엘의 배교와 회복을 예언, 상징적인 결혼 생활
      • 성경 구절: 호세아 1:2 -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 하시니"

    10. 요엘 (Joel)

    • 이름: 요엘
    • 생애:
      • 배경: 요엘서
      • 주요 사건: 메뚜기 재앙과 회복, 성령 강림 예언
      • 성경 구절: 요엘 2:28 -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11. 아모스 (Amos)

    • 이름: 아모스
    • 생애:
      • 배경: 아모스서
      • 주요 사건: 남유다 출신으로 북이스라엘에서 활동, 정의와 공의의 예언
      • 성경 구절: 아모스 5:24 -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12. 오바댜 (Obadiah)

    • 이름: 오바댜
    • 생애:
      • 배경: 오바댜서
      • 주요 사건: 에돔의 멸망 예언
      • 성경 구절: 오바댜 1:15 - "여호와의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웠나니 네가 행한 대로 너도 받을 것인즉 너의 행한 것이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13. 요나 (Jonah)

    • 이름: 요나
    • 생애:
      • 배경: 요나서
      • 주요 사건: 니느웨로 가는 것을 거부하고 도망,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 후 니느웨로 가서 회개의 메시지 전파
      • 성경 구절: 요나 1:17 -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14. 미가 (Micah)

    • 이름: 미가
    • 생애:
      • 배경: 미가서
      • 주요 사건: 예루살렘의 멸망과 회복 예언,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태어날 것 예언
      • 성경 구절: 미가 5:2 -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15. 나훔 (Nahum)

    • 이름: 나훔
    • 생애:
      • 배경: 나훔서
      • 주요 사건: 니느웨의 멸망 예언
      • 성경 구절: 나훔 1:7 -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16. 하박국 (Habakkuk)

    • 이름: 하박국
    • 생애:
      • 배경: 하박국서
      • 주요 사건: 하나님께 질문하고 답을 받음, 칼데아인을 통한 심판 예언
      • 성경 구절: 하박국 2:4 -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17. 스바냐 (Zephaniah)

    • 이름: 스바냐
    • 생애:
      • 배경: 스바냐서
      • 주요 사건: 유다와 열방의 심판과 회복 예언
      • 성경 구절: 스바냐 3:17 -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18. 학개 (Haggai)

    • 이름: 학개
    • 생애:
      • 배경: 학개서
      • 주요 사건: 성전 재건 독려
      • 성경 구절: 학개 1:8 -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19. 스가랴 (Zechariah)

    • 이름: 스가랴
    • 생애:
      • 배경: 스가랴서
      • 주요 사건: 성전 재건 독려, 메시아와 종말에 대한 환상
      • 성경 구절: 스가랴 9:9 - "시온에 따라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에 따라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20. 말라기 (Malachi)

    • 이름: 말라기
    • 생애:
      • 배경: 말라기서
      • 주요 사건: 백성의 죄와 회개 촉구, 메시아와 엘리야의 오심 예언
      • 성경 구절: 말라기 3:1 -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구약의 선지자들(선지자 연구)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민 12:6)

     


    * 선지자(先知者)의 출현

      사무엘 이전에도, 성경에는 하나님으로부터 계시와 환상을 받은 자들이 여러 명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선지자로 불린 아브라함,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창20:7 중)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였던 모세,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신34:10) 사사 겸 선지자로 활동했던 드보라 등입니다. “그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삿4:4) 그러나 본격적인 선지자들의 등장은 사무엘에 이르러서였습니다.


    * 선견자와 선지자

    “(옛적 이스라엘에 사람이 하나님께 가서 물으려 하면 말하기를 선견자에게로 가자 하였으니 지금 선지자라 하는 자를 옛적에는 선견자로 일컬었더라)”(삼상9:9)

    구 분

    원어의 의미

    차이점

    공통점

    선지자

    히브리어 ‘나비’로

    ‘말하는 자’(spokesman),

    ‘예언자’(prophet)라는 뜻

    ① 선견자는 계시를 받고 선지자는 계시를 선포함

    ② 선견자는 선지자보다 훨씬 전부터 사용되던 용어(삼상9:9)

    ① ‘호제’와 ‘로에’는 선지자를 지칭하기도 함(사30:9~10)

    ② 양자는 결국 같은 부류의 사람을 가리키는 호칭임(삼하24:11)

    선견자

    히브리어 ‘호제’ 또는 ‘로에’

    모두 ‘보는 자’(seer)라는 뜻


    * 다윗 역시 선지자!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소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행2:29~30)

      다윗 역시도 사도 베드로에 의해 선지자로 증거를 받고 있는데(행2:30), 실제로도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왕의 선견자였던 헤만’(대상25:5)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계시와 환상을 받아서 75편 가량의 시편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 궁정 선지자

      구약의 선지자들 중 일부는 궁중에 기거하거나, 또는 통치자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예언 활동을 했습니다. 예컨대 사무엘, 나단, 갓은 다윗 왕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또한 정치적 영향력도 지니고 있었는데, 이와 같은 제도권의 선지자들을 일반적으로 ‘궁정 선지자’로 일컫습니다.

     

    * 문서 선지자

      선지자들 가운데는 그들의 예언 내용을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으로 남긴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타인에 의해 예언 내용이나 사상만이 전해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를 보통 ‘문서 선지자’라고 합니다. 이들은 주전 8~6세기에 활발한 예언 활동을 하였으며, 보통 붓과 두루마리를 들고 설교하고 그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구약의 대, 소선지서 기자들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대(大)선지서와 소(小)선지서

    이 구분은 해당 선지자의 활동기간이나 역량이 아닌, 그들이 남긴 선지서의 분량에 따른 구분입니다.

    구 분

    대선지서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 애가, 에스겔, 다니엘 (5권)

    소선지서

    호세야,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12권)


    *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신18:15)

      여기서 ‘나와 같은 선지자’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1차적으로는 모세 이후 여러 세대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일어날 모든 선지자들을 가리키나, 궁극적인 의미에서 이 말은 모세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사장이며(출24:6~8) 왕이며(신33:5) 선지자(신24:10)였던 것처럼, 온 인류의 유일한 대제사장이시며 영원한 왕이시고 참 선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의 모든 말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행3:22,23) /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행7:37)

     

    * 하나님의 비전: 만인(萬人)선지자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두고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민11:29)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당신의 모든 자녀들이 다 선지자 되길 원하셨으며, 이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으로 율법적 분리를 상징하던 휘장이 찢어진 이래, 성도라면 누구나 하나님과 직접 교제하게 됨으로써, 또한 보혜사 성령이 각자의 심령에 임하심으로써 온전히 성취되었습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줄 것이며.”(욜2:28,29) / “이는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구리라 그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행2:16~18)

     

     

    <구약의 선지자들 1>

    초기의

    선지자들

    • 아브라함(창20:7)

    • 모세(신34:10)

    • 미리암(모세의 누이 / 출15:20)

    • 드보라(사사 겸 여선지자 / 삿4:4)

     

    통일왕국

    시 대

    • 사무엘(마지막 사사, 제사장 겸직)

    • 다윗(시편 75편을 저작 / 행2:30)

    • 선견자 헤만(찬양대장 / 대상25:5)

    • 나단(삼하7:2~17, 12:1~25)

    • 갓(선견자 / 삼상22:5)

    • 아히야(실로 사람 /왕국 분열을 예언)

    분열왕국

    시 대

    • 스마야(왕상12:22~24)

    왕국 분열 직후의 남북 전쟁을 막음

    • 아사랴(대하15:1~7)

    오뎃의 아들, 아사의 개혁 촉구

    • 선견자 하나니(아사에 의해 투옥됨)

    • 선견자 예후(대하19:2,3)

    하나니의 아들 / 여호사밧을 규탄함

    • 야하시엘(레위인 / 대하20:14~17)

    • 마레사 사람 엘리에셀(대하20:37)

    아하시아와 교제하는 여호사밧 규탄

    • 디셉 사람 엘리야(대하21:12~15)

    여호람에게 글을 보내 책망함

    •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대하24:20~22)

    요아스를 규탄하다가 순교를 당함

    • 브두엘의 아들, 요엘(욜1장~3장)

    유다인들의 회개를 촉구함

    •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사1~66장)

    유다 백성들의 경성과 회개 촉구

    • 미가(미1~7장)

    이스라엘, 유다의 심판과 회복 예언

    • 엘고스 사람, 나훔(나1~3장)

    니느웨(앗수르)의 멸망을 선포함

    • 하박국(합1~3장)

    요시아 왕의 재위 말기 예언 활동

    • 여선지자 훌다(왕하22:14~20)

    요시아의 종교개혁을 촉발함

    • 스바냐(습1~3장)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 촉구

    •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렘1~52장)

    유다의 멸망과 회복을 예언함

    • 스마야의 아들 우리야(렘26:20~23)

    유다멸망 예언, 여호야김에 의해 순교

    • 아히야(왕상14:1~18)

    실로 사람 / 여로보암의 멸문 예언,

    • 무명의 선지자(왕상13:1~32)

    유다 출신 / 벧엘 제단 규탄

    • 예후(왕상16:7)

    하나니의 아들 / 바아사를 책망함

    • 디셉 사람 엘리야(왕상17장~왕하2장)

    우상(바알) 종교와 맞서 싸움

    • 미가야(왕상22:13~28)

    이믈라의 아들 / 아합의 죽음 예언함

    • 엘리사(왕상19:16~왕하13:21)

    엘리야의 뒤를 이어 우상종교에 대항함

    • 브에리의 아들, 호세야(호1~14장)

    고멜과 혼인, 북이스라엘의 회개 촉구함

    • 드고아의 목자, 아모스(암1~9장)

    북이스라엘의 임박한 멸망 예언, 회개촉구

    • 아밋대의 아들, 요나(욘1~4장, 왕하14:25)

    니느웨의 회개 촉구, 이스라엘 영토회복 에언

    • 오뎃(대하28:9~11)

    사마리아군인들에게 유다 포로의 석방 촉구

     

     

     

     

     

     

     

     

     

    바 벨 론

    포로시대

    • 제사장 출신, 에스겔(겔1~48장)

    바벨론 포로민들을 향한 예언 사역

    • 오바댜(옵1장)

    유다 침략에 앞장 선 에돔의 멸망 예언

    • 예레미야(렘40~44장)

    정복당한 유다와 애굽에서 예언활동

    • 다니엘(단1~12장)

    바벨론 포로지에서의 활발한 활동, 예언

    포로귀환

    이후시대

    • 학개(학1~2장, 스5:1,2)

    백성들의 각성, 성전의 재건 촉구

    • 스가랴(슥1~14장, 스5:1,2)

    잇도의 손자, 선지자 학개와 동역함

    • 말라기(말1~4장)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느헤미야와 동시대에 사역, 백성들의 각성 촉구

    (분열왕국시대의 남북 선지자의 분류는 출신지역이 아니라 활동 지역이 기준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 2> (편의상 사무엘부터 기술)

    선지자

    활동시기

    (주전)

    부친이름

    (고향)

    특징 및 주요활동

    주요 본문

    사무엘

    1075~1017

    엘가나의 아들

    (라마)

    ‘여호와께 구함’이라는 뜻

    최후의 사사, 최초의 선지자

    사사시대와 통일왕국 과도기에 활동

    미스바 신앙부흥운동을 주도함

    사울, 다윗 두 사람에게 기름 부음

    다윗의 행적을 기록함(사무엘의 글)

    삼상1:1~25:1

    대상29:29

    나단

    1010~930

     

    ‘선물’ 또는 ‘주는 자’라는 뜻

    다윗 왕조 때의 궁정선지자, 고문

    아사리아와 사붓의 아버지

    밧세바를 범한 다윗에게 회개 촉구

    다윗과 솔로몬 두 왕의 행적을 기록함 솔로몬에게 기름 부음

    삼하7:2~17; 12:1~25

    헤만

    1003~945

    요엘의 아들

    ‘충실, 신실’이라는 뜻

    다윗, 솔로몬 시대의 충실한 성가대장

    놋제금을 크게 치는 자로 명성 떨침

    왕의 선견자로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을 만들기도 함, 예배찬양의 규범 제작

    대상6:33

    15:16~19

    16:41~42

    1010~970

     

    ‘행운’이란 뜻

    다윗 왕 때의 선견자, 다윗이 도망 중일 때 이방 땅에 머물지 말고 유다로 들어가라고 함, 다윗의 통치 말기에 인구조사를 행함으로 범죄하자, 하나님의 징계의 말씀을 전했음. 다윗의 행적 기록

    삼상22:5; 24:11~19

    아히야

    10세기 초

    (실로)

    ‘여호와의 형제’라는 뜻

    왕국 분열 및 여로보암의 등극 예언

    여로보암 가문의 멸망을 선포함

    솔로몬의 행적을 기록함

    왕상11:29~40; 14:1~18

    스마야

    930~913

     

    ‘여호와께서 응답하심’이란 뜻

    왕국분열 직후의 남북전쟁을 막음

    르호보암 왕의 행적을 기록함

    대하11:2~4; 12:5~8

    잇도

    970~910

     

    ‘찬양하는’이란 뜻

    솔로몬, 르호보암, 아비야의 행적 기록함(묵시책과 주석책 등)

    대하9:29; 12:15: 13:22

    아사랴

    910~

    오뎃의 아들

    ‘여호와께서 도우셨다’라는 뜻

    구스의 백만 대군을 무찌르고 온 아사에게 종교개혁을 촉구함.

    대하15:1~7

    하나니

    874~

     

    ‘여호와는 은혜로우심’이라는 뜻

    이 단어는 ‘하나냐’의 단축형임

    선지자 예후의 아버지

    북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아람과 연합한 아사를 책망하다가 투옥됨

    대하16:7~10

    예후

    909~886

    하나니의 아들

    ‘그는 여호와’라는 뜻

    북왕국 이스라엘의 선지자

    바아사를 꾸짖고 그 멸망을 예언함

    여호사밧이 악인을 도운 행위를 질책

    대하19:2,3

    왕상16:7,12

    엘리야

    875~850

    (디셉)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뜻

    우상(바알) 종교와 맞서 싸움

    북이스라엘의 최고 선지자

    갈멜 산에서 바알선지자 850명 처단

    여호와야말로 참 하나님이심을 선포

    선지자 엘리사의 스승

    유다왕 여호람에게 글을 보내 책망함

    병거 타고 승천한 불의 선지자

    왕상17~왕하2장

    대하21:12~15

    미가야

    869~850

    이믈라의 아들

    ‘누가 여호와 같으랴’는 뜻

    북이스라엘의 선지자

    이스라엘 유다 연합군의 패배와 아합이 길르앗 라못에서 죽을 것을 예언

    왕상22:13~28

    야하시엘

     

    레위 사람

    스가랴의 아들

    모압, 암몬 연합군과의 전쟁을 앞둔 여호사밧과 유다 백성들을 독려함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선포함

    대하20:14~17

    엘리사

    9세기 후반경

    사밧의 아들

    (아벨므홀라)

    ‘하나님은 구원자’라는 뜻

    북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야의 제자

    엘리야의 뒤를 이어 우상종교에 대항

    선지학교를 세워 생도들을 육성함

    기적적인 능력으로 조국을 지킴

    왕상19:16 ~

    왕하13:21

    엘리에셀

    853년경

    도다아후의 아들

    (마레사)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다’라는 뜻

    유다 여호사밧 왕 때의 선지자

    여호사밧이 악한 아하시아와 교제함을 규탄, 그의 배가 파선될 것 예언

    대하20:37

    스가랴

    835~796

    여호야다의 아들

    ‘여호와께서 기억하심’이라는 뜻

    요아스 왕을 즉위시킨 제사장 여호야다와 공주 여호사브앗의 아들,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어 백성들의 배교행위를 질책하고 심판을 선포함. 요아스의 의해 여호와의 전 뜰에서 돌에 맞아 순교함

    대하24:20~22

    호세야

    793~710

    브에리의 아들

    ‘여호와여 구원하소서’라는 뜻

    고멜과 혼인하여 세 자녀를 둠

    북이스라엘의 출신으로 여로보암 2세 때 활동, 북이스라엘의 회개촉구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 끝없는 사랑을 선포함

    성경기록(호세야)

    호1~14장

    아모스

    793~753

    (드고아)

    ‘무거운 짐을 진 자’라는 뜻

    목자출신, 북이스라엘에서 주로 활동

    주변 7개국에 대해 차례로 예언

    배교와 방종으로 얼룩진 북이스라엘의 임박한 멸망과 회개를 촉구함

    백성들에게 공평과 정의를 촉구함

    ‘선지자의 아버지’로 일컬어짐

    성경기록(아모스)

    암1~9장

    요나

    798~752

    아밋대의 아들

    (가드헤벨)

    ‘비둘기’라는 뜻

    니느웨 성의 회개를 외친 선지자

    다시스로 도망하다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3일간 지내기도 함.

    하나님의 보편적 관심을 기록함

    이스라엘의 영토회복 예언하기도 함

    성경기록(요나)

    욘1~4장

    왕하14:25

    오뎃

    740~732

     

    ‘부흥자’라는 뜻

    북이스라엘의 선지자

    이스라엘 왕 베가가 유다와 싸워 20만 명을 포로로 잡아올 때 그들을 유다로 돌려보내게 함.

    대하28:9~11

    요엘

    835~796

    브두엘의 아들

    (예루살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뜻

    유다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함예루살렘과 유다에서 주로 활동

    메뚜기 재앙이 하나님의 심판임을 선포하면서 유다백성들의 회개 촉구

    여호와의 날을 선포한 선지자

    회개하고 성령을 경험할 것을 촉구함

    성경기록(요엘)

    욜1~3장

    이사야

    739~680

    아모스의 아들

    (예루살렘)

    ‘여호와는 구원’이라는 뜻

    여선지자인 아내와 두 아들 ‘스알야숩, 마헬살랄하스바스’를 둠

    유다귀족출신, 주로 예루살렘에서 사역

    유다 백성들의 경성과 회개 촉구

    므낫세 왕에게 순교를 당함

    희망과 복음의 선지자

    회개와 고난을 통한 소망을 강조함

    히스기야의 행적을 기록(사36~39장)

    성경기록(이사야)

    사1~66장

    대하32:32

    미가

    728~697

     

    ‘하나님과 같은 자가 누구냐’라는 뜻

    유다 출신의 선지자

    이스라엘, 유다의 심판과 회복 예언

    겸손, 자비, 정의에 대해 호소함

    메시야의 베들레헴 탄생 예언

    성경기록(미가)

    미1~7장

    나훔

    612년경

    (엘고스)

    ‘위로자’라는 뜻

    니느웨(앗수르)의 멸망을 선포함

    하나님의 열심히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한다는 사실을 선포함

    성경기록(나훔)

    나1~3장

    하박국

    612~605

     

    ‘껴안은 자’라는 뜻

    요시야 왕의 재위 말기에 예언 활동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을 강조

    성경기록(하박국)

    합1~3장

    훌다

    622

    살룸의 아내

    (예루살렘)

    여선지자, 예루살렘 둘째 구역 거주

    예복을 주관하는 살룸의 아내

    요시야가 발견한 율법책에 대해 예언 요시야의 종교개혁을 촉발함

    왕하22:14~20

    대하34:22~28

    스바냐

    630년경

    구시의 아들

    ‘여호와께서 숨겨 주신 자’이라는 뜻

    므낫세와 아몬의 영향을 받아 우상숭배에 젖어 있는 유다의 각성촉구

    임박한 ‘여호와의 날’에 대해 경고함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을 촉발함

    겸손한 자들의 소망을 강조함

    성경기록(스바냐)

    습1~3장

    우리야

     

    스마야의 아들

    유다멸망 예언

    여호야김에 의해 순교

    렘26:20~23

    예레미야

    627~586

    힐기야의 아들

    (아나돗)

    ‘여호와께서 세우시다’라는 뜻

    눈물로 회개를 선포한 선지자

    요시야를 위해 애가를 지음

    유다의 멸망과 회복 예언, 독신생활

    정복당한 유다와 애굽에서의 활동, 순교

    애굽에서 우상숭배하는 동족들을 꾸짖다가 순교당한 것으로 추정됨

    새 언약의 약속을 예언함.

    성경기록(예레미야, 예레미야 애가)

    렘1~52장

    대하35:25

    에스겔

    593~570

    부시의 아들

    ‘하나님께서 강하게 하신다’는 뜻

    바벨론 1차 침략 때 포로로 잡혀감

    포로시대의 제사장이며 선지자

    포로민들을 중심으로 한 예언 사역

    환상과 소망의 선지자

    새로운 예배 공동체를 향한 미래 소망

    성경기록(에스겔)

    겔1~48장

    오바댜

    586년경

     

    ‘주의 종, 주의 경배자’라는 뜻

    예루살렘이 바벨론의 침략 당한 직후에, 유다침략에 앞장 선 에돔의 멸망을 예언함.

    성경기록(오바댜)

    옵1장

    다니엘

    605~536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라는 뜻

    유다 지파의 왕족 출신

    바벨론 1차 침략 때 포로로 잡혀감

    신앙 절개를 지킨 포로 선지자

    바벨론포로지에서 활발한 활동, 예언

    구약의 계시록으로 평가되는 ‘다니엘서’를 기록함

    단1~12장

    학개

    520~515

     

    ‘축제, 즐거움’이라는 뜻

    포로생활 중 제사장 가문에서 출생

    1차 포로귀환 때 함께 돌아옴

    사마리아 사람들의 방해로 성전 재건공사가 16년이나 중단되자,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성전의 재건을 촉구함

    하나님의 집을 우선할 것을 강조함

    성경기록(학개)

    학1~2장

    스5:1,2

    스가랴

    520~470

    잇도의 손자

    베가랴의 아들

    ‘여호와를 기억함’이라는 뜻

    제사장 가문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선지자의 사명을 받았음.

    학개와 마찬가지로 성전 재건 독려

    8가지 상징적 환상을 보고 기록함.

    여호와의 우주적 통치를 강조

    성경기록(스가랴)

    슥1~14장

    스5:1,2

    말라기

    433~432

     

    ‘나의 천사, 나의 사자’라는 뜻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느헤미야가 가나안 땅을 떠나 있던 시기에 해이해진 백성들을 향해 각성을 촉구함

    하나님만을 높이고 그분의 의를 기다릴 것을 촉구함, 성경기록(말라기)

    말1~4장

     

    <4대 선지서 비교>

    구 분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사역연대 (주전)

    739~680

    (60년간)

    627~586

    (41년간)

    593~570

    (23년간)

    605~536

    (70년간)

    소 명 장

    사 6장

    렘 1장

    겔 1~3장

     

    출신지, 사역지

    예루살렘

    아나돗, 예루살렘

    바벨론 그발강변

    예루살렘, 바벨론

    예 언 대 상

    유다인

    포로된 유다인과

    남은 유다인

    포로된 유다인

    이방나라 왕들과 포로된 유다인

    중 심 내 용

    하나님께서 남은 자에게 영광스런 미래를 약속하심

    예루살렘의 죄, 운명, 미래의 영광

    예루살렘의 멸망과 회복

    영광스러운 미래

    4개 왕국과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

    역사적 배경

    왕하 15~20장

    대하 26~30장

    왕하 24~25장

    단 1~6장

    단 1~6장

    정치적 상황

    시리아, 이스라엘의 위협

    앗수르의 위협

    북이스라엘 멸망

    애굽과 앗수르

    2강의 각축전

    앗수르의 멸망 바벨론의 등장

    1차 바벨론포로

    애굽과 바벨론 2강의 각축전

    백성 중 일부가 포로됨(2차)

    예루살렘의 함락

    유대인들의 3차 바벨론 포로

    종교적 상황

    우상숭배 성행

    외식적 예배 만연

    히스기야의 개혁

    요시야의 개혁

    요시야 사후

    다시 과거로 회귀

    거짓선지자 만연

    전민족의 불순종

    불신, 반역

    하나님과의 교제 단절, 그러나 소수의 남은 자

    메시야에 대한

    비유적 표현

    싹, 나의 종

    의로운 가지

    여호와 우리의 의

    백향목의 연한 가지

    돌, 인자, 기름 부음 받은 자

    예언의 강조점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임을 가르침

    바벨론 포로의 당위성, 이를 회개의 기회로 삼아 더 큰 구원을 사모할 것 촉구

    범죄 결과에 대한 단체적, 개인적 책임, 언약 성취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 등을 가르침

    열국의 우상보다 뛰어난 하나님, 하나님의 구원 능력은 장소, 상황에 구애 받지 않음을 보여줌

    구 성

    66장

    52장

    48장

    12장

    표현상의 특징

    선포와 경고

    상징적 행위

    비유와 묵시

    역사와 묵시

    중심단어

    구원은

    여호와의 것

    유다의 멸망

    장차 있을 이스라엘의 회복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비 고

    복음의 선지자

    메시야의 선지자

    눈물의 선지자

    심판의 선지자

    희망의 선지자

    환상의 선지자

    포로기의 선지자

    이방 시대의 선지자

     

        






    구약의 선지자들 이름과 활동시기


    구약에 등장하는 선지자들의 이름과 활동 시기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각 선지자의 이름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왕국시기 이전의 선지자들 / 모세, 미리암, 발람, 사무엘 
    통일왕국 시기의 선지자들 / 나단, 갓, 아히야 
    분열왕국 시기의 선지자들 /  오바댜(848-841),  요엘(835-796),  아모스(782-739),  호세아(755-715),  미가(740-690),  이사야(740-680)남왕국시대 /  나훔(661-612),  스바냐,  예레미야,  하박국
    바벨론 포로 시기 / 다니엘,  에스겔
    귀환 시기의 선지자들 / 학개,  스가랴,  말라기



    왕국시기 이전의 선지자들 / 모세, 미리암, 발람, 사무엘 

    모세

    모세 이전에도 선지자의 역할을 족장들이 감당하기는 했지만 정식적인 선지자는 모세입니다. 

    미리암

    모세의 누나로 선지자도 활동했지만 강조 되지는 않습니다.

    발람

    이방 선지자로 이스라엘의 선지 활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았다는 점에서 주목할 부분이 있습니다.

    사무엘

    사사이자 선지자도 활동한 사무엘은 사사시대에서 왕정시대를 연 인물이었습니다.

    통일왕국 시기의 선지자들

    나단

    다윗과 동시대 인물이며, 다윗이 죽은 후 밧세바의 아들인 솔로몬을 왕 위에 앉힌 주도적인 인물입니다.

    다윗과 동시대 인으로 다윗의 개인 선지자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할 때 하나님께 기도했던 선지자입니다.

    아히야

    솔로몬 말기에 솔로몬의 범지를 폭로하고 이스라엘의 분열을 예언한 선지자입니다.

    분열왕국 시기의 선지자들


    오바댜(848-841)
    요엘(835-796)
    아모스(782-739)
    호세아(755-715)
    미가(740-690)
    이사야(740-680)


    남왕국시대

    나훔(661-612)
    스바냐
    예레미야
    하박국


    바벨론 포로 시기


    다니엘
    에스겔


    귀환 시기의 선지자들

    학개

    스가랴

    말라기






    이스라엘의 선지자들

    족장 시대로부터 시작하여 이스라엘이 로마에 의해서 완전히 무너지기까지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에서 통일 이스라엘을 이루고 있었던 다윗 왕과 솔로몬 왕 시대는 가장 번성하였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솔로몬 왕이 죽고난후 통일 이스라엘 왕국은, 북쪽의 북 이스라엘과 남쪽의 유다 왕국으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두 나라로 갈라지게 된 이스라엘은 솔로몬이 말년에 행하였던 악행, 즉 이방 신들을 이스라엘로 들어오게 하여 결국에는 우상 숭배에 빠지게 하였던 영향으로 인하여 북이스라엘은 단(Dan)과 베델(Bethel)에 금송아지를 섬기는 산당을 지어 백성들로 하여금 금송아지를 숭배하도록 하였고, 남 유다에서는 예루살렘에 하나님을 위한 성전이 성전산 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과 백성들은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남 유다에서는 하나님 앞에 신실한 왕들이 나타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였으나, 북이스라엘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바알 신과 아세라 목상과 같은 우상을 숭배하는 왕들이 많이 나타나서 나라를 부패시켰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성전의 문을 폐쇄하여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하게 하는 왕들도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에서 하나님의 앞에 악행을 자행하므로,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예언하면서 다시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 회복되기를 바라시는 마음으로 하나님은 말씀을 전하면서 선포하는 선지자들을 세우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께서 세우신 선지자들은 각 시대마다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잘못된 모습을 경고하기도 하고, 어떤 선지자는 자신의 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선지자도 있었으며, 곧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회복의 예언들을 전하였던 선지자도 있었습니다.

    선지자들 중에는 북이스라엘을 위하여 활동하였던 선지자가 있었으며, 남 유다를 위한 선지자, 그리고 이방 사람들을 위한 선지자들도 있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을 위한 선지자 : 호세아, 아모스, 미가.

    남 유다를 위한 선지자 : 이사야, 다니엘, 예레미야, 학개, 요엘, 스가랴, 스바냐, 에스겔, 말라기.

    이방 민족을 위한 선지자 : 요나, 나훔, 하박국, 오바댜.

    그리고 그 선지자들의 활동하였던 시기적으로 분류해 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BC 9세기 : 요엘, 오바댜

    BC 8세기 : 호세아, 아모스,  이사야, 요나, 미가

    BC 7 세기 : 나훔, 하박국,  스바냐, 예레미야.

    포로 시대 : 다니엘 , 에스겔.

    귀환 시대 : 학개, 스가랴,   말라기.




    https://blog.naver.com/byunsdd/221522143360

    Hebrew bible 

    http://blog.naver.com/supax/220591274623

    포로 귀환 시대  / 유대민족, 앗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오바댜

    오바댜 선지자가 활동하였을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보면, 매우 혼란한 시기였습니다. 남 유다의 선한 왕 여호사밧의 아들로 왕이 된 여호람은 북이스라엘의 악명 높았던 왕 아합과 이세벨의 딸이었던  아달랴와 결혼함으로써 남 유다 왕국에 많은 해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여호람 왕은 자신의 왕위를 보존하기 위하여 그의 모든 형제를 죽였을 뿐만 아니라 유다 땅에서 그의 아내가 가지고 들어 왔던 바알숭배도 허락하게 되었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에돔은 남 유다의 속국이었는데 여호람 시대에 독립하게 되었고, 블레셋 사람들과 아랍 사람들이 왕궁을 침범하여 재물을 약탈하는 사건까지도 일어났었으며 이때 왕자까지도 납치하여 갔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선지자 오바댜는 하나님의 말씀을 유다 사람들에게 전하였으며, 이방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뜻을 전하였던 선지자입니다.

    요엘

    선지자 요엘이 활동하였던 시기의 역사적 배경은, 선지자 오바댜의 역사적 배경 직후인 것 같습니다.  여호람 왕이 죽자 그의 아내였던 아달랴는 왕자와 손자들을 죽기고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학살을 당하였던 그의 손자 가운데 요아스만이 여호시바에 의해 구출되어 살아남아 있다가 여호시바와 결혼한 대 제사장인 여호야다에 의해 유다의 왕으로 추대 되었습니다.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영향을 받아 요아스 왕은 우상 숭배를 금지시키고 모세의 율법에 따른 제사제도를 시행하였습니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시대에 선지자 요엘은 남 유다를 위하여 활동하였습니다.

    호세아

    선지자 호세아는 남 유다의 웃시야 왕, 요담 왕, 아하스 왕, 그리고 히스기야 왕 시대에 그리고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 때부터 시작하여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의해서 망할 때까지 약 40년간 사역을 하였던 선지자입니다. 이때에 남 유다에서는 선지자 이사야가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가 다스리고 있었을 때에는 물질적으로 나라를 부흥 시켰으나 나라에는 도적이 들끓었고 종교적으로도 부패하였으며 사회적으로는 음행이 창궐하였던 시기였습니다.  여로보암 2세가 죽은 뒤 왕위 쟁탈전과 정치적 음모가 끊임없이 나타났으며 백성들은 더욱 탐욕과 착취로 타락하게 되었다가 결국 BC 722년에 앗시리아(앗수르)에게 점령당하여 되었으며 호세아는 앗시리아로 포로가 되어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아모스

    선지자 아모스는 남 유다 사람이었지만 그의 사역은 북이스라엘에서 하였습니다. 그가 선지자로 사역하였던 시기는 호세아 선지자가 활동하였던 시기와 비슷한 시기였습니다. 다만 아모스는 호세야보다 먼저 선지자로 사역하였습니다.

    요나

    선지자 요나가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였던 니느웨는 당시 앗시리아의 수도는 아니었지만 앗시리아에서 가장 큰 도시였습니다. 그 당시 앗시리아에서는 정치적으로 후계자 선정 문제를 놓고서 매우 혼란스러웠던 시기였는데 아스루단 3세가 앗시리아의 왕으로 오르는 후에 사태는 점점 더 악화되어 있을 때였으며 사회적으로는 열병이 유행병으로 돌고 있었으며 때마침 일어난 일식으로 인하여 국민들의 민심이 흉흉하였을 때였습니다. 선지자 요나는 북이스라엘 사람이었는데 시기적으로는 허세아가 사역하였던 시기와 비슷한 시기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 이사야는 웃시야, 요담, 아하스, 그리고 히스기야 왕 때에 사역하였던 선지자입니다. 그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는 약 60년 동안 남 유다 왕국에서 선지자 사역을 하였으며 북이스라엘이 멸망당한 후 30년을 더 남 유다에서 사역하였던 선지자입니다.

    웃시야 왕 시대에 하나님의 복 주심으로 인하여 번창하게 되어 요담 왕 시대에는 암몬으로부터 3년간 조공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남 유다의 아하스가 왕이 되어 통치하게 된 후부터는 여호와의 길을 떠났으며, 친앗시리아 정책을 펴면서 우상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심지어 성전 문을 폐쇄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악행을 저질렀던 아하스 다음으로 왕이 된 히스기야 왕은 폐쇄되었던 성전의 문을 다시 열었으며  다시 모세의 율법대로 제사를 드리기 시작하였고 모든 우상들을 제거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남 유다 왕국은 하나님 앞에서 회복할 기세를 보이다가 히스키야가 죽은 후 다음으로 왕이 된 므낫세 왕 시대에는 또 다시 우상들이 들어오게 되었으며 이때에 수없이 많은 무죄한 피가 흐르게 되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이때에 선지자 이사야는 므낫세 세력에 반대하다가 톱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미가

    선지자 미가는 남 유다의 요담 왕, 아하스 왕, 그리고 히스기야 왕 시대의 사람입니다. 이 시대는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하였던 시기와 비슷한 시기이며 미가는 이사야 보다는 더 젊은 선지자였습니다.

    선지자 미가가 활동을 시작할 때에는 앗시리아가 세력을 얻고 자기의 군대를 몰아 세계정복을 시작할 때였습니다.  주위의 모든 나라들은 앗시리아의 위협 때문에 떨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수리아의 수도 다메섹이 이미 앗시리아의 손에 넘어갔으며, 그 후로부터 10년 뒤에는 북이스라엘이 마침내 앗시리아에 의해서 망하고 말았던 때입니다.

    이러한 위기의 시대를 바라보고 있었던 선지자 미가는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를 향하여 동시에 경고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였습니다. 미가는 선지자들 가운데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에게 동시에 하나님의 경고 메지지를 전파하였던 유일한 선지자였습니다.

    나훔

    선지자 나훔이 기록한 “나훔서”를 요나서의 속편으로 보는 신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요나서와 나훔서, 이 두 책들은 같은 윤리적 맥락에서 니느웨의 역사를 취급하고 있으며, 요나가 니느웨의 회개를 기록했다면, 나훔은 니느웨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바냐

    선지자 스바냐는 남 유다의 요시아 왕 때 사역하였던 선지자입니다. 스바냐 선지자가 기록한 스바냐서는 요시아 왕이 남 유다를 종교적으로 개혁하기 이전에 기록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요시아 왕에 의해 이미 폐지된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스바냐가 선지지로 부름을 받기 이전에 살던 시대는 나훔이 살던 시대와 같은 시대로 히스기야 왕 이후의 므낫세와 아몬이 통치하고 있었을 시대였습니다.  므낫세 왕의 통치는 경건한 부왕 히스기야를 따르지 않고 그의 조부인 아하스의 길을 따라 악을 자행하였습니다. 성전 안에 바알 제단을 세우기도 하였으며 힘놈 골짜기에서 그의 자녀들을 제물로 드리는 일을 자행하였습니다.  그의 아들로서 왕이 된 아몬 역시 아버지의 뒤를 이어받아 계속해서 악을 자행해 왔지만 2년 만에 그가 죽임을 당하게 되어 그의 아들 요시아가 왕위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 하박국이 선지자로 활동하였던 시기는 신학자들마다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선지자 하박국은 하나님의 간섭 없이 언제까지 부패한 정치가 계속되어 무죄한 백성들을 착취할 것인가에 대하여  고통스럽게 질문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여호야김 시대(BC 608~600년경)로 보고 있습니다.

    요시야왕은 유능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무리하여 자신의 죽음을 빨리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둘째아들 여호아하스가 남 유다의 왕위에 오르게 되었지만 이집트의 왕 느고에 의해서 폐위되고 이집트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곧 이집트의 왕에 의해서 여호야김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 엘리야긴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그는 여호아하스의 두 살 위의 형이었으며 25세에 왕위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야김은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였으며 통치에 있어서도 무능력하였습니다.  그는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의 예언서를 불태워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 예레미야는 남 유다 왕 요시야가 왕이 된 지 13년째가 되던 BC 627년경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으며  남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갈 때까지 사역하였습니다.

    여호야김 4년에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명령하시기를 요시아의 날로부터 그때까지 그에게 나타낸 모든 예언을 두루마리를 취하여 기록하라고 하신 명령에 의하여 예언서를 기록하였는데 그의 서기관이었던 바룩이 예레미야의 구술을 받아 적은 기록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박국과 비슷한 시대에 활동하였던 선지자로써 남 유다 왕국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활동하였던 선지자입니다.

    남 유다 왕국이 신흥제국인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을 당함으로써 유다의 왕들과 수많은 지식인들이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잡혀갔습니다. 이때에 바벨론으로 왕과 그리고 지식인들과 함께 끌려갔었던 예언자가 있었습니다.

    다니엘

    예언자 다니엘은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을 침공 했을 때 그 자신과 세 친구들이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다니엘은 이사야와 같은 선지자라기보다는 예언자로써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갈 때부터 페르시아 제국의 왕 고레스의 명령에 의해서 유대 땅으로 돌아 올 때까지 약 70년을 사역하였습니다.

    다니엘은 3개의 큰 제국의 시대를 지내면서 예언자로 사역 하였습니다. 다니엘서에 기록된 예언들은 메데 파사, 희랍(그리스), 로마의 흥망성쇠와 그 후의 세상열국, 그리고 그리스도의 왕국의 도래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예언자 에스겔은 예레미야와 마찬가지로 제사장 출신의 예언자였습니다.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앞두고 앞으로 일어나게 될 사건들과 관련해서 적극적으로 예언활동을 펼친 반면, 에스겔은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되어 가는 이런 사건들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이와 같은 일들을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백성들과 관련시켜서 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젊었을 때 유다 왕 여호야긴과 함께 바벨론으로 끌려갔었는데 이때가 남 유다 왕국이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하기 약 11년 전 쯤 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갔었던 유다의 백성들이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왔을 때 활동하였던  예언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언자 학개, 스가랴와 말라기입니다.

    학개

    유다 백성이 세 번에 걸쳐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잡혀갔던 것처럼 그들이 예루살렘과 유다로 귀환 할 때도 세 번에 걸쳐 귀환하였습니다.

    첫 번째 귀환은 페르시아가 바벨론을 점령한 직후에, 스룹바벨에 의해 인도 되어졌고, 두 번째 귀환은 이보다 80년이 흐른 뒤 아닥사스왕 7년인 BC 458년에 에스라에 의해 인도 되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귀환은 두 번째 귀환이 있은 후 13년이 지난 뒤인 아닥사스왕 20년, 즉 BC 445년에 느헤미야의 인도를 받으면서 귀환하였습니다.

    귀환한 사람들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일로 알았고, 곧 재건사업이 시작 되었습니다.  이것은 귀환 첫해 7월에 시작되었는데 기초공사는 빠르게 잘 진행되어 순조롭게 마쳤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도 성전 재건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표하였지만 유다 사람들은 반대하였는데 이와 같은 갈등에 의하여 성전재건은 더 이상 진해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기초 작업만을 마친 채 16년 동안 방치되어 있다가 다리오 왕 2년이 되던 해에 다시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학개에게 임하였던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 학개서입니다.

    스가랴

    예언자 학개와 스가랴는 같은 시대에 활동하였던 예언가입니다. 예언자 스가랴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네 번에 걸쳐서 받게 되었는데, 첫 번째 계시는 BC 520년 다리오 왕 2년 8월에 임했으며,  두 번째 계시는 첫 번째 계시가 있었던 때보다 3개월 후인 같은 해 11월이 임하였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계시는 2년이 지난 BC 518년 다리오 왕 4년, 9월에 임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의 계시는 BC 480년 이후에 임하였습니다.

    학개와 스가랴는 같은 시대에 활동하였던 예언자로, 하나님께서 중단된 성전 건축에 대한 촉구하심을 선포함으로써  마침내 BC 515년 3월에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었습니다.

    말라기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의 마지막에 기록된 예언자 말라기서는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부터 유다 땅으로 귀환한 후에 기록된 예언서입니다. 이때에는 이미 재건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그러므로 사회적인 형편은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와 비슷하였습니다.

    말라기서의 내용면으로 보게 되면 종교적, 사회적 타락과 퇴보, 무엇보다도 종교적인 생활에 대하여 회의적으로 반응하고 있는 면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면은 포로 생활을 하다가 유다 땅으로 돌아와 살기 시작한 직후에 볼 수 있었던 시대상에서 오는 이스라엘 백성의 상처와 기대를 양면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건한 유대인들은 바벨론이 망하고 본국으로 귀환하여 성전이 재건되면 메시야왕국이 실현 되리라 믿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게 되지 못하자 실망하여 냉소주의와 불신앙이 온 유대 땅에 팽배하였던 시기였습니다.

    이와 같은 절망에 처하게 된 이스라엘 백성을 각성 시키는데 하나님의 말씀과 교훈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말라기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모스 개론

    1. 표제

    소선지서를 구성하고 있는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이 책의 제목은 저자인 아모스의 이름을 따라 붙여진 것이다. 
    아모스라는 이름은(히, Amos) “짐을 지다”, “(짐을) 운반하다”의 뜻을 가진 동사, 아마스(히,‘amas)에서 파생된 것이다. 
    따라서 그 이름의 뜻은 “짐을 진 자”인데, 
    이것은 아모스가 부름을 받고 전달하였던 엄숙하고도 무게가 있는 기별들과 잘 어울린다. 
    이 이름은 구약의 다른 곳에서 나오지 않는다.

     2. 저자

    전통적으로 아모스를 인정하고 있다. 
    그는 유다의 광야 지역인 드고아 출신이었다. 
    그는 이사야처럼 왕궁에 속한 선지자도 아니었고 예레미야처럼 제사장도 아니었다. 
    그는 양떼를 치고 뽕나무를 재배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양떼를 돌보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아모스 7:14, 15에서 소개되는 아모스의 자서전으로부터 우리는 그가 목자요, 경시받던 뽕나무 배양자이었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그가 가난하였지만 독립심이 있는 사람이었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 사실은 그가 잠시 그의 양떼를 떠날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우리가 이해하는 대로 교육받은 사람도 아니었고, 선지자 학교에서 선교를 위하여 훈련받은 사람도 아니었다. 
    아모스의 경우에서처럼, 비교적 배우지 못하고 유리한 점들도 별반 없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큰 사업을 위한 부르심을 받았을 때,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고후 4:7)이 나타나게 된다. 
    하나님을 봉사하는 일에 사람을 적합하게 만드는 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소유하고 있느냐에만 달린 것이 아니라, 그의 사람됨이 어떠하냐에 달려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 아모스는 유다를 떠나 이스라엘로 가서 아마도 왕의 여름 궁전이 있고 제일의 송아지 신전이 위치해 있는 벧엘에서 그의 주된 일을 하였을 것이다. 

    그가 송아지 숭배에 대하여 고발을 하였던 곳이 바로 여기였다. 
    아모스는 우상을 숭배하는 대제사장 아마시야의 반대에 직면하였는데, 이 사람은 아모스를 위험한 음모자라고 왕앞에 고소하였다(암 7:10-13 참조). 우리는 아모스의 말년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

    아모스는 그의 단순하면서도 꾸밈없는 변론과 그의 사상의 생동감과 고귀함 때문에 가장 중요한 선지자들의 대열에 들어야 한다. 
    물질 세계와 도덕 세계의 바탕을 파악하기 위하여 더욱 깊이 꿰뚫어 보거나 하나님의 거룩성, 지혜, 능력에 대하여 더 큰 통찰력을 나타낸 선지자들이 많지 않다.

    3. 역사적 배경 

    아모스는 유다와 이스라엘 양국이 번영하던 때에 부르심을 받아 그의 사명을 성취하였다. 
    여로보암 Ⅱ세 아래의 이스라엘은 그 세력이 절정에 달해 있었다(호 2:8 참조). 
    여로보암은 시리아를 정복하여 통일 왕국 시대의 북방 변경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 영토는 북단의 하맛에서부터 사해까지 이르렀다(왕하 14:25, 28). 
    유다에서는 웃시야 왕이 에돔과 블레셋을 정복하고, 암몬을 굴복시키고 농업과 평화의 목적을 위한 가내(家內)기술을 장려하였고, 크고 힘있는 군대를 양성하여 예루살렘을 철통같이 방비하였다(대하 26:1-15 참조).

    외관상으로는 외적으로부터 안전하고 내면적으로 튼튼하였기에, 이스라엘은 위험이나 멸망을 조금도 예기치 않고 있었다. 
    사실, 앗시리아가 그 상승 세력으로 주의를 끌고 있었지만, 그 나라가 이스라엘을 공격한다는 것은 있을성 싶지 않았다. 번영으로 인한 공통된 열매들­자부심, 사치, 이기심, 압박­이 유다와 이스라엘 양국에 마음껏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설상가상으로 이스라엘은 초대 왕이던 여로보암 Ⅰ세가 도입한 송아지 숭배(왕상 12:25-33)때문에 사태가 더욱 악화되었다. 아모스와 호세아가 부름을 받고 그들의 예언들을 특별히 북방 왕국을 향하여 하게 된 이유가 바로 이 송아지 숭배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웃시야는 B.C. 767-750년까지의 유다의 유일한 왕이었고, 여로보암 Ⅱ세는 B.C. 782-753년까지의 이스라엘의 유일한 왕이었으므로, 아모스의 봉사는 B.C. 767-753년 사이의 어떤 때인 것같다. 아모스의 실제적 예언 봉사가 얼마동안 이루어졌는지에 대하여 책 속에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지진 전 이년”(암 1:1)이라는 진술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언제 이 지진이 일어났는지를 확증할 만한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분명히 아모스는 호세아 선지자와 동시대의 사람이면서 더 나이를 먹었던 것같다.

    기록연대


    <암 1:1>의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의 지진 전 2년"은 아모스서의 기록 연대를 가늠케 한다. 그는 남방의 이사야와 미가보다는 훨씬 빠른 시대의 인물이며, 호세아와는 동시대 인물이다. 여기 여로보암(Jeroboam)은 여로보암 2세를 말한다. 그리고 천문학자들에 의하면 이때의 지진이 주전 763년 6월 15일에 일어났다고 계산한다. 이렇게 보면 아모스의 활동 시기는 대략 주전 760년경으로 확정된다. 왕하14:25에 의하면,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여로보암 2세가 통치했다고 한다. 이는 통일 왕국의 전성 시대인 솔로몬 왕 당시와 같은 것이다(왕상8:65). 또한 이것은 일찍이 모세를 통하여 약속했던 이스라엘의 전영역이었다(<신 32:36>). 그러나 나라의 부강과 더불어 국민의 사치와 죄악은 더욱 심각했던 것이다. <암 6:4>은 그들의 사치를 비판하고 있으며, 이에 반하여 <암 2:6,7>은 빈부의 격차와 가난한 자에 대한 착취를 고발하고 있다. 또한 <암 4:1>은 여성의 타락을 말하고 있다. 이렇듯 이 시대는 부요함과 더불어 죄악이 관영한 시대임을 알 수 있다.

     4. 주제

    아모스의 주요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그들의 죄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고, 가능하다면 그들로 회개하게 하는 것이었다. 아덴의 도시가 우상 숭배에 완전히 빠져 있는 것을 보고 바울의 마음이 격동되었던 것처럼, 아모스도 그가 상세하고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죄들과 사치를 보고 격동되었을 것이다. 그는 물질적 번영으로부터 생겨난 죄악들, 부자들의 사치, 주연, 방탕등을 탄핵했는데, 그들은 가난한 자를 압박하고 뇌물과 강요를 통하여 재판을 굽게 함으로써 이러한 일들을 자행할 수 있었다. 아모스는 호세아보다 죄악들이 저질러진 환경과 그 죄상들에 대하여 더욱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그는 백성들의 일상사에서 일어나는 죄악들을 곳곳에 생생하게 파헤치고 있다. 죄된 어떤 행위도 그의 눈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이스라엘과 유다를 경고하고, 주변 국가들에게 만일 그들이 계속 죄짓는 일을 고집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에게 틀림없이 임할 것임을 경고하는 일이 그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의가 죄를 이기고 마침내 최후의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영광스러운 묘사로써 그의 책을 마무리 짓고 있다.

    5. 개요

    Ⅰ. 표제 1:1

    Ⅱ. 주변 국가들 유다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들 1:2-2:16
         1. 다메섹 1:2-5
         2. 가사 1:6-8
         3. 두로 1:9, 10
         4. 에돔 1:11, 12
         5. 암몬 1:13-15
         6. 모압 2:1-3
         7. 유다 2:4, 5
         8. 이스라엘 2:6-16

    Ⅲ. 이스라엘을 위한 예언적 기별 3:1-6:14
         1. 예언적 기별들의 확실성 3:1-8
         2. 이스라엘이 회개하지 않음으로 심판을 피할 수 없음 3:9-4:13
         3. 이스라엘의 운명에 대한 슬픔 5:1-27
         4. 여호와의 날을 뒤로 미루는 자들에게 임할 화 6:1-14

    Ⅳ.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것들에 대한 이상 7:1-9:10
         1. 황충에 대한 이상 7:1-3
         2. 불에 대한 이상 7:4-6
         3. 다림줄에 대한 이상 7:7-9
         4. 아모스에 대한 아마샤의 반대 7:10-17
         5.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과 익은 열매에 대한 이상 8:1-14
         6. 죄인들의 심판에 대한 이상 9:1-10

    Ⅴ. 회복과 축복에 대한 약속들 9:11-15


    내용 요약
     
    1장 아모스의 묵시(1-2); 다메섹에 대한 예언(3-5); 가사에 대한 예언(6-8); 두로에 대한 예언 (9-10); 에돔에 대한 예언(11-12); 암몬에 대한 예언(13-15)
    아모스가 받은 묵시로(1) 여호와가 음성을 발하신다(2). 다메섹의 서너 가지 죄악은 이스라엘에 행한 잔악성이니(3) 하사엘의 집과 벤하닷 궁궐에 불을 보내시며(4) 아웬골짜기에서 거민을 끊으며 벧에던의 홀잡은 자를 끊으신다(5). 가사의 서너 가지 죄악은 이스라엘을 포로로 잡아 에돔에 팔아넘김이니(6) 블레셋의 성읍들은-아스돗, 아스글론, 에그론,(가드)(7-8) 멸망당한다. 두로의 서너 가지 죄악은 형제의 계약을 기억지 않았으니(9) 두로 성에 불을 보낸다(10). 에돔의 서너 가지 죄악은 형제를 긍휼히 여기지 않은 것이니(11) 데만에 불을 보내고 보스라의 궁궐을 사른다(12). 암몬 자손의 서너 가지 죄악은 영토를 확장하려고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갈랐으니(13) 랍바 성과 궁궐을 사르고(14) 방백들은 포로로 잡혀가게 한다(15).
     
    2장 모압에 대한 예언(1-3); 유다에 대한 예언(4-5);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6-16)
    모압의 서너 가지 죄악은 에돔 왕의 뼈를 불사른 것이니(1) 그리욧 궁궐을 사르며(2) 재판장과 방백을 멸하신다(3). 유다의 서너 가지 죄악은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고 거짓 것에 미혹됨이니(4) 불을 보내어 멸하신다(5).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악은 가난한 자에 대해 불의를 행하고(6) 무시하였고, (바알의 성녀와) 행음하며(7) 갖은 악을 행한다(8). 하나님은 아모리 사람을 멸하게 하였고(9) 저희를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었으며(10), 영적으로 축복하여(11) 성결하게 하셨다(12).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리니) 수레가 누름같이(13) 아무도 피할 수 없고(14-15) 망하게 된다(16).
     
    3장 정해진 심판(1-6); 하나님의 예언(7-8); 임할 심판(9-15).
    이스라엘아(1) 내가 너희만 알았으니 내가 너희의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2). 두 사람이 마음을 합해야 동행하고(3), 사자는 잡은 것이 있어야 소리 지르고(4), 창애가 있어야 새가 잡히니(5), 여호와의 명령으로 성읍에 재앙이 돈다(6). 비밀을 종에게 보이시고(7) 여호와가 말씀하시니 예언을 하게 된다(8). 아스돗의 궁과 애굽 땅 궁들은(9) 포악과 겁탈을 인하여(10) 힘이 쇠하게 되고 궁궐은 약탈당한다(11). 그러나 사자 입에서 두 다리의 건져냄 같이 적은 수가 건져냄을 받는다(12). 야곱 족속에게 증거하여(13) 벧엘의 단과 뿔은 땅에 떨어지고(14) 겨울궁과 여름궁, 상아궁은 파멸된다(15).
     
    4장 포로(1-3); 우상 숭배(4-5); 돌아오지 않는 자들(6-11); 하나님의 심판(12-13).
    가난한 자를 학대, 압제한 바산의 암소들은(1) 낚시로 끌려가고(2) 성은 무너지고 하르몬에 던지운다(3). 벧엘과 길갈에서 범죄하고(4) 수은제와 낙헌제로 광포하였다(5). 양식이 떨어지나 돌아오지 않고, (6) 비가 없어 마르고(7) 두세 성읍이 비틀거리나 여호와께 돌아오지 않는다(8). 깜부기와 팟종이로(9), 염병과 노략과 악취가 코를 찔러도 돌아오지 않는다(10). 너희는 소돔과 고모라에서 불붙는 가운데 빼낸 나무 조각같이 되었으나 돌아오지 않는다(11). 그러므로 내가 (심판을) 행하리니 하나님을 예비하라(12). 대저 창조주 하나님이시라(13).
     
    5장 이스라엘의 운명(1-3); 회개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용서(4-15); 심판(16-27).
    이스라엘의 애가이다(1). 이스라엘은 엎드려졌고(2) 많은 사람이 거하던 성읍은 적은 사람이 남게 된다(3). “여호와를 찾으면 살게 되고”(4), (형식적으로 섬기지 말라) 벧엘과 길갈, 브엘세바는 허무하게 되며(5) 요셉의 집은 멸망한다(6). 공법과 정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은(7) 우주의 통치자 하나님(8) 여호와를 찾으라. 패망이 임함은(9) 정직한 자를 싫어함이요(10) 너희가 지은 곳에 거하지 못함은(11) 너희 죄악의 중함을 인함이다(12). 이 때 지혜자도 잠잠하다(13).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라(14) 그리고 공의를 세우면 여호와께서 요셉의 남은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15). 그러므로 광장에서 사람들이 애곡하며(16) 포도원에서 울 것은 여호와가 지나감(심판을 받음)을 인함이다(17). 여호와의 날은 어두움이요(18,19), 갑자기 만난 것 같다(19). 절기를 멸시하니(21) 번제나 소제를 받지 아니하고(22) 노래도 듣지 않는다(23). “오직 공법과 정의를 흘리고”(24) 광야에서 드린 제물과(25) 우상을 가짐으로 인해서(26) 너희는 포로로 잡혀 가게 된다(27).
     
    6장 포로의 예언(1-7). 완전한 파멸(8-11)과 사악한 자의 최후(12-14).
    화 있을진저 시온과 사마리아 산에 있는 자들아(1) 갈레와 대하맛같이 멸망당하고(2) 심판을 생각지 않고(3) 사치와(4) 타락과(5) 일락으로 태만한 자는(6) 사로잡혀 가게 하신다(7). 성읍의 모든 것을 대적에게 주어(8) 다 죽게 되고(9-10) 멸망한다(11). 공법과 정의를 변개하는 너희는(12) 허무한 것을 기뻐하고 자신의 힘을 의지하니(13) 한 나라를 일으켜 학대하리라(14).
     
    7장 1. 황충의 환상/ 심판 보류(1-3); 2. 불의 환상/심판 보류(4-6); 3. 다림줄의 환상/ 피할 수 없는 심판(7-9); 아마샤가 아모스를 핍박함(10-17) - 하나님의 심판은 정해짐.
    풀이 움돋을 때 황충을 지어(1) 다 먹게 하시니(2) 미약한 야곱을 위해 심판을 하지 않게 하시며(3), 불로 징벌하게 하시니(4) 야곱이 미약하여(5) 이 심판의 뜻도 돌이키신다(6). 담 곁에 다림줄을 잡고 서시니(7) 백성을 다시 용서치 않고(8) 성소를 훼파하신다(9). 때에 제사장 아마샤는 아모스가 왕을 모반한다고 하며(10) 아모스의 심판 (여로보암은 칼에 죽고 이스라엘은 포로로 간다)(11)을 듣고 아모스에게 “유다 땅으로 도망가라”(12)고 하고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13)고 한다. 아모스는 뽕나무 배양하는 목자로(14) 하나님의 명령대로 하여(15) 아마샤에게 이르기를(16) 심판은 정해진 것이며 정녕 포로로 잡혀간다고 한다(17).
     
    8장 4. 여름 실과 광주리 비유(1-3); 심판(4-10); 말씀의 기근(11-14).
    여름 광주리를 보이시며(8) 백성 이스라엘의 끝이 이르러(2) 애곡과 파괴가 있다고 하신다(3). 궁핍한 자와 가난한 자를 망케 하는 자들은(4) 거짓 저울로 속이고(5) 가난한 자를 착취하니(6), 여호와는 그들의 소위(所爲)를 잊지 아니하시니(7) 이로 인해 땅은 떨게 된다(8). 여호와의 심판 가운데 천지가 변하고(9) 애통으로 가득 찬다(10). 말씀의 기근을 가지고(11) 말씀을 구하나 얻지 못하고(12) 다 갈하여 피곤하며(13) 우상을 가리켜 맹세하니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14).
     
    9장 5. 성전 비유(1-4); 전지전능하신 하나님(5-6); 범죄한 나라의 심판과 긍휼(7-10): 회복(11-15)
    주께서 단 곁에 서서 문지방이 움직이게 하고 칼로 살륙하게 하시니(1) 한 사람도 도망하지 못하고(2-3) 원수 앞에 사로 잡혀 살륙하게 하신다(4). 땅을 녹게, 바다를 높게, 강을 낮게 하시고(5) 전을 하늘에 세우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6). 이스라엘도 (선민이지만) 구스와 같고(7) 범죄한 나라를 멸하고(8) 그 중에서도 긍휼을 베푸신다(9). 그러나 화가 없다고 하는 자는 칼에 모두 죽는다(10). 그 날에(마지막 날에)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세우고(11), 에돔의 남은 자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업을 얻고(12) 열매 맺게 하시며(13) 돌이키게 하셔서(14) 본토에 심으셔서 다시 뽑히지 않게 하신다(15).
     

    [배경]
    우리는 1:1과 7:10~13을 통해 아모스가 유다의 웃시야 왕과 이스라엘의 여로보암2세 때에 활동한 선지자임을 알 수 있다. 유다 왕 웃시야는 B.C. 791~740까지 50여년간을 다스렸다. 웃시야는 유다의 적을 물리치고 예루살렘의 성벽을 튼튼하게 증축했다. 그의 치세 동안 유다는 번성했고 한때 선지자 아모스의 영향으로 영적으로 견고하기까지 했다.

    [특징]
    이사야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강조했다면 호세아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모스는 하나님의 공의를 강조하고 있다. 아모스는 하나님의 속성을 공의 혹은 정의로 파악하고 또한 이것을 인간도덕의 본질적인 요소라고 가르쳤다. 개인적인 죄는 하나님의 불꽃같은 심판대 앞에서 심판받고 국가적인 죄는 국가적인 심판을 받는다. 새계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목적]
    아모스가 예언을 하고 본서를 기록한 목적은 이스라엘에서 나타난 생활의 방종과 배교와 부패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과 심판을 선포하며 그들에게 바른 길을 제시하기 위함이었다. 아모스는 북 이스라엘 사람은 아니었지만 북 왕국의 타락상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한 농부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죄악을 책망하시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그들에게 임할 것을 예언하신 것이다.

    [구조]
    아모스는 1~9:10에서 하나님의 공의에 따른 심판을 말하<고 9:11>~15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따른 소망을 말한다. 전자에는 열방과 이스라엘의 심판을 가리키는 다섯 가지 환상이 나오고 후자에는 메시야의 약속이 나옵니다. 아모스는 남쪽 유다 왕국의 드고아에서 양치는 목자에 불과하였다.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거나, 특별한 재주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순전한 마음으로 경건히 신앙 생활을 하던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사명이 주어졌다. 아모스는 이러한 사회 현상을 반영하여 부패한 권력자들이 일으키는 사회 문제를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여호와의 말씀에 입각한 사회정의를 부르짖었다.

    [내용]
    사람은 손으로 죄를 범하지 않았어도 이미 마음으로 율법을 범한다. 이것은 북쪽 왕국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다. 아모스는 하나님께 책망받은 백성의 태도에 대해서 공박했다. 모든 생활이 아모스의 설교 내용에 비춰보면 다 수준 이하였다. 여기에는 아모스가 암소로 비유(<암 4:1>)한 사회적으로 출세를 노리는 야심가들도 모두 포함되어 있다. 백성들의 마음이 굳어질수록 아모스의 설교 내용도 더욱 강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고집센 자들에 대한 희망도 남겨 놓았다.이는 우리를 위한 적극적인 축복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능으로 우리의 태도조차 바꾸어질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우리들의 협력도 요구하십니다.

    [교훈]
    * 역사적인 교훈: 여로보암 2세 치하에서 번영하므로 물질만능주의가 된 북방 지파들에게 그들의 죄를 회개하도록 촉구하기 위한 것으로 아모스는 배교와 방종으로 얼룩진 이스라엘의 선민의식을 새롭게하고 새로운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도록 하였다.
    * 교리적인 교훈: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그의 소유인 백성을 향한 질투와 율법의 거룩성을 가르쳐 준다. 한편 본서에는 모세 율법에 대한 내용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2:7,8,12; <신 23:17; ><출 22:26, ><민 6:1>~21).
    * 기독론적인 교훈: 본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장막을 재건하는 자(9:11)와 백성의 남편(9:13)으로 예표되어 있다.


    아모스 참고 사항
     
    l. 본문을 어떻게 나누어야 하는가?
     
    참조)
    l-2장  “코 아마르 야웨(주께서 이떻게 말씀하시기를)”의 구조로 각 나라에 대하여 심판을 강조하고 있다.
    3-5장  "샤무우"(들어라)라는 구조로 이스라엘의 죄악상을 폭로하고 있다.
    6장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시며 특히 5:l8과 6장에는 "호이'(화 있을진저)로 시작하여 심판을 나타내고 있다.
    7-9장  그리고 아모스는"히르아니'(내게 보이신 것) 즉 하나님의 환상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결론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으며 서론 1:1-2과 결론 9:11-16을 나눌 때 다섯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내용적으로 볼 때도 l-2장의 각 나라의 심판을 8개국에 대한 심판이나 7개국(유다와 이스라엘을 같이)의 심판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특히 설교에 있어서도 세 가지 설교 혹은 다섯 가지의 설교로 나누는데 구조적으로는 세 가지의 설교와 두 가지의 큰 하나님의 심판으로 나누어 진다.
     
    2. 본문의 내용은 어떠한가?
     
    1-2장  각 나라의 구체적인 죄악상
     
    l. 다메섹 (Syria)
    (1) l:3 에 나타난 다메섹의 죄악상은 무엇인가?(참 왕하 10:32,33)
       예후 시대 때 시리아의 하사엘이 길르앗과 바산까지 침공한 것을 가리킨다.
    (2) 1:4-5 다메섹의 심판의 예언은 무엇인가?(참고 왕하 l6:6-9)
       BC 732 앗수르(Assyria)의 디글랏 빌레셀에게 멸망하였다. 특히 이스라엘을 괴롭힌 왕 하사엘과 벤하닷을 대표적으로 심판하고(4절) 우상숭배지인 아웬골짜기와 벧에던을 심판 하신다.
     
    2. 가사(Gaza = Philistia) 블레셋
    (1) 1:6의 블레셋의 죄악 상은 무엇인가?(참 대하 2l:16,17)
        유다 사람을 포로로 에돔 백성에게 팔았던 사실을 말한다
    (2) 따라서 l:7-8에서 보여주던 그들이 살던 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에그론{삼상6:16-17) 도시들은 불살라진다(왕하 l8:8 이스라엘의 승리).
     
    3. 두로(Tyre = Phoenicia)
    (l) 1:9 솔로몬시대에 두로왕 히람이 맺었던 계약(왕상 5:12) 즉, 노예 판매 금지 조항에 관한 것으로 추정된다.
       2) 1:10절의 심판과 같이 알렉산더 대왕의 침략으로 성취되었다
     
    4. 에돔(Edom)
    (l) 1:11 에서의 후손인 에돔은 이스라엘과 형제의 관계이나 칼로 무자비하게 한 것에 대하여 심판을 받게 된다.
    (2) 결국 1:12말씀과 같이 기원전 732년에 틸그랏 빌레셋 3세 때 멸망당한다.
     
    5. 암몬(Ammon)
    (1) 1:13 암몬은 롯의 후손으로서(롯과 두 딸의 후손 중 작은 딸은 암몬이었다. 창 19:36-38) 아람과 동맹을 맺어 여인의 배를 갈랐다(왕하 8:l2)
    (2) 그 결과 l4, 15절의 말씀대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멸망당했다.
     
    6. 모압(Moab)
    (l) 2:l모압의 죄악은 성경에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왕하 3장 26, 27을 비추어 보아 더    럽게 한 행위였다(왕하 23:l6)
    (2) 2:2,5 그 결과 모압은 티글렛 블레셋 3세에게 기원 전 734에 정복당하고 결국 느부갓네    살에게 멸망당했다.
     
    7. 유다(Judah)
      l) 2:4 유다의 죄악은 율법을 무시하고 거짓 것에 미혹 당하였다
      2) 그 결과 바벨론에게 멸망당하였다.
     
    8. 이스라엘(IsraeI)
    (l) 이스라엘의 죄악은 ①불의(2:6)한 재판, ②불의한 치부(7절 전), ③음행(바알 숭배 7절후), ④전당을 돌려주지 않음(8절 전 참 출 2, ⑤신행 분리 (8절 후), ⑥하나님의 구원의 역사(9-10절), ⑦하나님이 귀를 기울이지 않음(1l-l2절)

    (2) 그 결과 이스라엘은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이며(2: 14-l5) 누름을 당하게 된다(13절)






































































    2025 요엘


    여호와의 날(욤 아도나이. yôwm  Yehôvâh)  יֹום יְהוָה

    욤(3117)

    יוֹם 스트롱번호3117
    1.

    2.

    יוֹם: 낮에

    3.

    날마다

    발음 [ yôwm ]
    어원
    어미활용 יוֹמְךָ ,יוֹמִי, 쌍수 יוֹמַיִם, 복수 יָמִים, 복수 연계형 יְמֵי, 덥다는 의미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구약 성경
    2291회 사용


    아도나이(3068)

    יְהֹוָה 스트롱번호3068
    1.

    자존자

    2.

    영원한 자:히브리인들이 최고의 하나님으로 여기는 신의 이름 ‘여호와’.

    발음 [ Yehôvâh ]
    어원
    1961에서 유래
    구약 성경
    7020회 사용
    •  1. 고유명사 자존자, 영원한 자:히브리인들이 최고의 하나님으로 여기는 신의 이름 ‘여호와’.
    • 관련 성경 / 여호와(출 20:7, 레 24:13).

    한글개역 성경에서 '여호와의 날'이란 용어가 13구절 소개됩니다.
    대한성서공회 검색 사이트 사용 결과(사 13:6, 13;9, 겔 13:5, 30:3, 욜 1;15, 2:1, 11, 3:14, 암 5:18, 20, 습 1:7, 14, 슥 14:1)

    1. [이사야 13:6]
    너희는 애곡할찌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

    2. [이사야 13:9]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임하여 땅을 황무케 하며 그 중에서 죄인을 멸하리니

    3. [에스겔 13:5]
    너희 선지자들이 성 무너진 곳에 올라 가지도 아니하였으며 이스라엘 족속을 위하여 여호와의 날에 전쟁을 방비하게 하려고 성벽을 수축하지도 아니하였느니라

    4. [에스겔 30:3]
    그 날이 가까왔도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도다 구름의 날일 것이요 열국의 때이리로다

    5. [요엘 1:15]
    오호라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서 이르리로다

    6. [요엘 2:1]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성산에서 호각을 불어 이 땅 거민으로 다 떨게 할찌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7. [요엘 2:11]
    여호와께서 그 군대 앞에서 소리를 발하시고 그 진은 심히 크고 그 명령을 행하는 자는 강하니 여호와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렵도다 당할 자가 누구이랴

    8. [요엘 3:14]
    사람이 많음이여, 판결 골짜기에 사람이 많음이여, 판결 골짜기에 여호와의 날이 가까움이로다

    9. [아모스 5:18]
    화 있을찐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 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

    10. [아모스 5:20]
    여호와의 날이 어찌 어두워서 빛이 없음이 아니며 캄캄하여 빛남이 없음이 아니냐

    11. [스바냐 1:7]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찌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으므로 여호와가 희생을 준비하고 그 청할 자를 구별하였음이니라

    12. [스바냐 1:14]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심히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애곡하는도다

    13. [스가랴 14:1]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그 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너의 중에서 나누이리라

    그렇다면 '여호와의 날'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성경에서“여호와의 날”은 대부분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이 있다.

    * 여호와의 날(사2:12,13:6, 9, 겔13:5, 30:3, 욜1:15, 2:1,11, 3:14, 슥14:1, 암5:18, 20, 습1:7,14).

    여호와의 날을 스바냐는“분노의날, 환난과 고통의 날, 황폐와 패망의 날, 캄캄하고 어두운 날, 구름과 흑암의 날”이라고 말했다(습1:15).

    *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말4:5, 욜2:31).

    * 여호와의 보복의 날, 시온의 송사를 신원하시는 날(사34:8)

    * 여호와께서 징벌하시는 날(사10:3)

    * 괴로움과 슬픔이 사로잡혀 해산이 임박한 여자 같이 고통하며 서로 보고 놀라며 얼굴이 불꽃 같이 되는 날(사13:8),

    *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행2:20).

    * 큰 날, 심판의 날(유6, 계6:17, 16:14).

    * 주의 날(살전5:2, 살후2:2, 벧후3:10).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을 대적하며 진노하게 하였던 자들에게는 심판과 보복의 날이지만 여호와를 믿고 신뢰함으로 박해받고 그동안 고통받았던 자들에게는 주의 크고 영화운 날이며, 그들의 원한을 갚아 주시는 날이 될 것이다(암5:18).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여호와의 날이 오면 하늘의 군대가 와서 이스라엘 민족을 보호하고 도와주며 옹호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대언자들은 도리어 이 날을 참혹한 심판의 날로 선포한다.



    여호와의 날, 심판과 숨김의 길 (스바냐 1:14–2:3)


    본문읽기

    14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우는도다
    15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16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들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
    17   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맹인 같이 행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또 그들의 피는 쏟아져서 티끌 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 같이 될지라
    18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지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주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라

    2 장
    1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2   명령이 시행되어 날이 겨 같이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내리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
    3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스바냐 1:14–2:3 묵상

    “여호와의 날, 심판과 숨김의 길”


    1. 서론 – 여호와의 날, 두려움과 소망

    스바냐는 예언자 중에서도 유난히 “여호와의 날”을 강조합니다.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라는 경고는 단순히 먼 미래의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임박한 현실적 사건으로 선포됩니다. 이 날은 분노와 심판의 날이지만 동시에 은혜와 구원의 길이 열려 있는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1. 여호와의 날의 무서운 심판 (1:14–18)
    2. 심판 앞에서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는 권면 (2:1–3)

    2. 본문 주해와 묵상

    2.1. 여호와의 큰 날의 임박성 (1:14)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기서 ‘가깝다’(קָרוֹב, qarov)는 단순한 시간적 거리만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확실성을 의미합니다. 스바냐는 반복적으로 ‘가깝다’고 강조하며, 심판의 날이 이미 문 앞에 서 있음을 선언합니다.

    또한 그 날은 “용사도 심히 슬피 우는 날”입니다. 즉, 가장 강한 자들도 여호와의 날 앞에서는 무력해집니다.

    오늘의 적용: 우리는 종종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며 안심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반복해서 하나님의 날을 ‘가까이 있다’고 말합니다. 신자는 늘 긴장된 준비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2.2. 여호와의 날의 성격 (1:15–16)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여섯 개의 병렬된 표현(환난, 고통, 황폐, 패망, 캄캄함, 어두움)은 이 날의 파괴적 성격을 강조합니다.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가 전면적으로 드러나는 날입니다.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들을 치는 날”(16절)이라는 표현은 군사적 심판을 나타냅니다. 이스라엘의 자랑이었던 성읍과 망대조차 무너지며, 인간이 의지하던 모든 안전장치가 무력화됩니다.

    오늘의 적용: 우리 시대의 ‘견고한 성읍’은 무엇입니까? 경제력, 군사력, 기술력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날 앞에서 인간이 만든 모든 안전은 무너집니다.


    2.3. 범죄의 결과와 인간의 무력함 (1:17)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여호와의 날의 이유는 단순한 재앙이 아니라, 죄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 범죄했고, 그 결과 “맹인 같이 행”하게 됩니다. 영적 시력을 잃은 채, 길을 몰라 헤매는 모습입니다.

    또한 “피는 티끌 같고, 살은 분토 같다”는 표현은 인간 생명의 덧없음과 무가치함을 강조합니다. 아무리 강력해 보여도, 하나님 앞에서는 흙에 불과합니다.

    오늘의 적용: 죄는 인간을 맹인처럼 만듭니다. 방향 감각을 잃고, 결국 파멸로 갑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같은 운명을 맞게 됩니다.


    2.4. 은과 금의 무능력 (1:18)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부와 재물은 고대에도, 오늘날에도 인간이 붙드는 최후의 안전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돈이 아무 능력이 없습니다.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지리니”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과 질투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빼앗는 모든 우상을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오늘의 적용: 돈과 성공이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라는 착각을 버려야 합니다. 여호와의 날에는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우리의 피난처입니다.


    2.5. 심판 앞에서의 권면 (2:1–2)

    스바냐는 놀랍게도 심판을 선포한 직후, 회개와 모임을 촉구합니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여기서 ‘모이다’(קָשַׁשׁ, qāšash)는 ‘모아 쌓다’라는 뜻으로, 공동체적으로 회개하라는 초청입니다.

    또한 긴급성을 강조합니다.

    • “날이 겨 같이 지나가기 전”
    • “여호와의 진노가 내리기 전”

    오늘의 적용: 회개는 나중이 아니라 지금입니다. 기회는 짧고, 하나님의 날은 갑자기 임합니다.


    2.6. 여호와를 찾고,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2:3)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스바냐는 단순히 “심판을 피하라”고 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겸손과 공의를 구하라고 합니다.

    • 겸손(עֲנָוָה, anawah):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태도.
    • 공의(מִשְׁפָּט, mishpat): 하나님의 정의로운 질서를 따라 사는 삶.

    이것은 단순한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삶 전체를 하나님 앞에 돌이키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자들은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여기서 ‘숨김’(סָתַר, sātar)은 피난처를 의미합니다. 즉,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로운 보호가 있다는 약속입니다.

    오늘의 적용: 신자는 심판을 피하려고 도망가는 사람이 아니라, 겸손과 공의를 구하며 하나님 안에서 피난처를 찾는 사람입니다.


    3. 복음적 연결 – 심판에서 구원으로

    스바냐는 심판의 날을 무섭게 선포하지만, 동시에 구원의 길을 열어 둡니다.

    • 여호와의 큰 날은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과 연결됩니다.
    • 은과 금이 구원하지 못한다는 선언은,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복음의 진리를 가리킵니다.
    • 겸손과 공의는 단순한 도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삶의 열매입니다.

    → 궁극적으로 여호와의 분노에서 우리를 숨기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십자가에서 그분이 하나님의 분노를 대신 받으셨기에, 우리는 그 안에서 안전하게 숨을 수 있습니다.


    4. 오늘 교회를 위한 교훈

    1. 심판의 날은 가깝다 – 영적 긴장감을 잃지 말라.
    2. 하나님을 범죄한 죄를 직면하라 – 변명하지 말고 인정하라.
    3. 돈과 권력은 구원하지 못한다 – 우리의 안전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
    4. 회개는 지금이다 – 지체하지 말고, 공동체적으로 돌이켜야 한다.
    5. 겸손과 공의의 삶을 추구하라 – 이것이 여호와의 날을 준비하는 길이다.

    5. 결론 – 숨김을 얻는 길

    스바냐 1장 14절–2장 3절은 우리에게 두 가지 그림을 보여줍니다.

    • 심판의 무서운 날: 인간의 모든 안전과 자랑이 무너지는 날.
    • 그러나 동시에 숨김의 길: 하나님을 찾고, 공의와 겸손을 구하는 자는 보호하심을 얻는 길.

    여호와의 날은 피할 수 없는 날입니다. 그러나 그날은 그리스도 안에서 심판에서 구원으로 바뀌는 날이기도 합니다.


    6. 마무리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날이 가깝다는 경고 앞에서 저희의 무관심과 교만을 회개합니다. 은과 금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님을 피난처로 삼게 하옵소서. 공의와 겸손을 구하며 살아가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숨김을 얻는 은혜를 누리게 하옵소서. 아멘.”







    선지자 요엘은 여호와의 날을 "오호라 그 날이여'(1:15) 또는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2:31)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여호와의 날'을 "심판의 날" 또는 "구원의 날"이라고 강조합니다.

     ‘여호와의 날’(The Day of the LORD)은 성경에서 중요한 종말론적 개념으로 하나님의 심판구원이 결정적으로 나타나는 날을 의미합니다. 
    여호와의 날은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며 세 가지 핵심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사야 13:9, 요엘 2:1-2) 
    둘째는 하나님의 구원의 날(요엘 2:32, 스바냐 3:17)
    셋째는 재림의 날(베드로후서 3:10, 데살로니가전서 5:2)

    선지자 요엘은 여호와의 날을 '오호라 그 날이여'(1:15),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2:31)이라고 강조합니다.
    여호와의 날에 '여호사밧의 골짜기' 또는 '판결골짜기'에 사람이 많이 모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개혁자 칼빈은 이 골짜기를 "타작 마당의 골짜기"라고 합니다.
    이 말은 마지막 심판의 날이 '추수의 날'이라는 것에서 유추합니다.
    이것과 비슷한 골짜기에는 "여호사밧 골짜기"(욜 3:2), "하은곡 골짜기"(겔 39:11), '아마겟돈 골짜기"(계 16:16)와 비교하여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스바냐가 전한 여호와의 날 

    구약시대 많은 예언자들은 임박한 ‘여호와의 날’(Day of Yahweh)의 도래를 경고했다. 
    예언자 스바냐가 전한 ‘여호와의 날’을 예로 들어보겠다.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심히 빠르도다.” (스바냐 1:14)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여호와의 날’은 어떤 날인가?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란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로다.” (스바냐 1:15)

    그날은 분노하신 하나님께서 오시는 날이다. 
    왜 하나님은 분노하시는가? 
    “이는 그들이(=유다 백성)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스바냐 1:17) 
    유다 백성이 하나님께 범죄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진노하시고, 그들을 징벌하기 위해 급히 오시는 것이다.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여호와가 이 땅 모든 주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니라.” (스바냐 1:18)

    여호와의 날은 진노하신 하나님이 유다 백성을 징벌하시는 ‘심판의 날’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징벌하셔서 울음소리가 예루살렘을 채우고, 모든 것이 황무하게 되는 날이다.

    그러면, 다가오는 심판의 날, 여호와의 날 앞에서 유다 백성들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그 대답이 스바냐서의 핵심이 된다. 유다 백성들에게 아직도 시간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내리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 (스바냐 2:2)

    시간이 바람에 날리는 겨처럼 빨리 다가오지만, 아직 시간이 있고 유다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이다. 스바냐는 유다 백성들을 향해 선포한다.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공의를 찾으라! 겸손을 찾으라!” (스바냐 2:3)

    스바냐는 ‘찾으라’는 동사를 세 번 강조하고 있다. 
    그는 여호와를 떠나, 찾지도 않고, 공의도 없고, 자만하고 자고(自高)하는 유다 백성들을 향해 무섭게 꾸짖고 있는 것이다. 
    첫째는 ‘여호와’를 찾으라고 했다. 
    스바냐는 여호와 하나님을 찾지도 아니하고, 구하지도 아니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멸절시키신다고 했다. (1:6) 유다 백성들이 살길은 하나님을 찾아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다. 
    둘째는 불의와 부정을 버리고 공의를 찾고, 정의로운 삶을 살라는 것이다. 
    셋째, 겸손을 찾으라고 했다. 인간의 오만과 자만(hubris)으로부터 돌이켜 겸손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말씀이다. (잠언 15:33; 22:4) 
    이들 세 가지를 ‘찾는 것’만이 여호와 하나님의 분노의 날에 이스라엘이 살길이라고 스바냐는 선언한다.


    그날, 여호와의 날(요엘 1:15-20)

    “오호라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서 이르리로다 식물이 우리 목전에 끊어지지 아니하였느냐 기쁨과 즐거움이 우리 하나님의 전에 끊어지지 아니하였느냐 씨가 흙덩이 아래서 썩어졌고 창고가 비었고 곳간이 무너졌으니 이는 곡식이 시들었음이로다 생축이 탄식하고 소떼가 민망해하니 이는 꼴이 없음이라 양떼도 피곤하도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불이 거친 들의 풀을 살랐고 불꽃이 밭의 모든 나무를 살랐음이니이다 들짐승도 주를 향하여 헐떡거리오니 시내가 다 말랐고 들의 풀이 불에 탔음이니이다”

    마지막 심판은 불로 심판된다 했습니다. 
    불로 심판된다는 말은 인간은 이미 불로써 포위되었다 이 말이죠. 우리 곁에 불이 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이것이 불 가운데서, 불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무서운 맹렬한 심판의 불, 우리를 태우고 우리의 모든 의지하는 것들을 다 태워버리는 불속에서 살아간다는 이 사실을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만 알게 돼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산다는 말은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그 안에 담긴 채 살아가는 겁니다. 우리를 운반하는 운반체가 우리 자신이 아니고 약속에 의해서 운반하게 됩니다. 그 약속에 의해서 운반하게 되면 우리는 약속이라는 비행물체 안에 우리가 하나의 탑승이 되어서 가게 되면 그 약속이라는 그 거울 앞에 나오는 앞 거울 앞에 비취는 모든 것은 불에 태워지는 광경들이 다 드러날 거예요. 저것도 불에 태워질 것이고, 저것도 불에 태워질 것이고, 아르헨티나의 그 넓은 팜파에서 나오는 그 목축도 나중에 불로 태워질 것이고, 호주라는 뉴질랜드에 있는 수많은 양떼와 소떼들도 하나님께서 불로 다 태워질 것이고, 뉴욕에 있는 듀바이에 있는 상하이에 있는 그 높은 빌딩들도 불에 다 태워질 것이고, 그것이 약속 안에서, 예수 안에서 창을 통해서 바깥을 볼 때에 본래 이 세상은 불로 싸지름을 당하는 그러한 형편에 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러면 그 운반체. 그 약속이라는 비행물체 안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그냥 구경만 하고 관람만 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비행물체 안에 있는 사람들은 소위 구원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은 이 불로 없어지는 세계, 그 세계에 합당한 새로운 피조물로 바뀌어져야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의 약속은 진리입니다. 진리 안에 놓여있는 우리는 비 진리가 되죠. 진리 안에 있는 비 진리를 그 진리에 합당하도록 결합시키는 작업이 비행접시 안에서 따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쉽게 하면 하나님께서 그 이상을 통해서 야곱과 에서를 쌍둥이로 낳았는데 같은 쌍둥이예요. 쌍둥이인데 야곱을 다루는 운명이 따로 있고 에서를 다루는 운명이 따로 있습니다. 에서는 운명이라는 게 없어요. 지가 지 인생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운명이라는 게 없는데 야곱은 운명을 느껴요.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시도하는 대로 거부를 당하고 자꾸 커트를 당한다는 것은 내가 나를 다루는 인생이 아니고 다른 쪽에서 나를 그쪽에 맞도록 다루어지고 있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야곱을 느끼게 되는 겁니다.

    이걸 간단하게 말해서 약속 안에서 언약 안에서 언약이란 비행물체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야곱은 자기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와 뭣과 관련을 짓느냐 하면 그 차창 밖, 앞 유리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로써 태워져야 될 그러한 아직도 다 태워지지 않고 남아있으면서 불 태워질 것을 알지 못하는 바깥 풍경과 연관 지어서 자기 자신을 생각하게 되는 그러한 입장에 놓이게 되는 거예요.

    바깥쪽에 있는 그 멸망, 최후의 날, 심판의 날과 안쪽에 있는 자기 자신의 운명과 연결을 시키면서 언약이라는 그 비행물체를 타고 천국으로 날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안쪽에 구원받은 사람의 운명은 바깥쪽과 어떻게 연관 되는가, 바깥쪽에서는 심판과 멸망인데 그럼 이 안쪽에서는 뭐라고 표현하는가, 그걸 죽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창세기 5장에 보게 되면 여기에 “아담은 셋을 낳은 후에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 삼십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돼 있어요. 이걸 중간 것을 다 생략하면 “아담은 죽었더라“ 아담은 결국 죽게 되더라. 아무리 자식을 낳고 요란한 업적과 성과를 이뤄도 결국은 죽더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실은 죽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될 텐데 세상의 위대한 영웅들은 소위 그 사람이 죽은 날, 기일을 맞이해서 죽게 하신 주님은 찬양하지 않고 그 사람이 사적으로 벌였던 일에 대해서는 극구 그렇게 찬양을 해요. 안중근 의사 기념인, 심지어 유명한 영화배우나 가수, 이런 사람들의 기일이 되면 아직도 팬들이 살아있어서 난리도 아닙니다. 그날이 되면, 김 현식 기념일, 내 사랑 내 곁에 다시 한 번 듣고 그리고 유명한 가수들 죽고 나면 또 하고, 어제 육상 경기 기념식 하는데 죽은 손기정 선수 기념상 앞에 방석하나 해놓고 꽃 하나 바치는 그런 의식을 행한다 이 말이죠.

    주께서 다 죽인 건데 ‘아유, 아깝다’는 거예요. 뭐가 아까운데. 아까우면 주님이 하시는 일은 전부 다 엉터리네. 그러면,ㅎ ‘차라리 죽이려면 주께서 잘 죽여주세요.’ 이런 식으로. 진작 죽을 사람을 진짜 죽였나? 이런 식으로 해야 하는데. 그런데 아깝다는 거예요. 그것은 바로 비행물체 바깥을 볼 수 있는 불로 심판한다는 이것은 집단적으로 다 죽는 날을 생각 안 하고 그걸 염두에 안 두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휴, 잘만 하면 오래 살 수 있었는데.’ 이래 생각하거든요.

    인간이란 존재는 언약과 결부 시켜서 자기 존재를 봐야 되는데 언약도 몰라 계시도 몰라 성령도 몰라 아무도 몰라요. 이름도 몰라 성도 몰라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자기 자신을 파악하니까 자기 죽는 것은 생각 안하고 남 죽는 걸 되게 아까워하는 거예요. ‘그 다음 니 차례야. 니. 니 언제 죽을지 몰라.’

    여러분, 교회 나오는 것 쉽지 않습니다. 오늘 아침에 우리 어머니는 오시다가 장소를 못 찾아서 집에 도로 가셨어요.ㅎ 사람이 연세 많고 하면 교회 나오는 것도 자기 집 찾아가는 것도 많이 봐주고 있는 겁니다. 자기가 못 오고 안 오고하는 것도 할 수 없어요. 그래서 오전에 인간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고. 왜 내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고. 안 하면 안 하는 이유를 알지 못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멸망, 쉽게 말해서 노아홍수, 전체적으로 다 죽이는 사건, 심판의 홍수 이전에 먼저 구원받을 백성에 대해서는 그 비행물체 안에서 죽음이란 의미를 다시 한 번 새롭게 하는 일을 안팎으로 약속이란 이름으로 안팎 양쪽으로 다 실시를 하게 됩니다. 죽음의 의미를!!

    요엘서 같은 경우에 그날이 온다 할 때 그날이 왔을 때 그것이 요엘만 아니고 전 세계의 심판을 의미하는데 그 여호와의 날이 닥치기 전에 먼저 유다나라라는 혹은 이스라엘 나라라는 그 나라에 죽음을 통해서 마지막 심판을 미리 앞당겨 맛보게 하는 혜택으로 오늘 본문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읽었던 본문 기억하시잖아요. “멸망의 날이 여호와의 날이다” 이 말은 여호와께서 내리시는 멸망이다 이 말이죠. ‘아! 세상 더럽다. 확 부셔라.’ 이렇게 지가 원해서 멸망 온 게 아닙니다. 세상에서 사기 당하고 난 뒤에 ‘에이고, 나만 죽나, 다 죽어라, 다 죽어.’ 이런다고 해서 갑자가 세상 당하는 게 아니에요. 그날은 자기 날이지 여호와의 날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날은 어떤 인간도 마지막 날은 내 소원 풀어주는 내 날이 아님을 깨닫게 하시면서 일방적으로 여호와께서 들이닥쳐서 일을 벌이시는 날이 여호와의 날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성도한테는 매일이 여호와의 날 이예요. 왜, 매일 자기 뜻대로 안 되는 날이기 때문에. 특히 장사하는 사람들 미칠 지경 이예요. 아침에 눈만 뜨면 하루 종일이 아니고 삼백육십오일 내 뜻대로 되는 날이 없어요. 하여튼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그 말씀은 왜 그렇게 아버지께서 잘 지키시는지.ㅎ 아주 차질이 없어요. 빈틈이 없어요.

    요엘을 보게 되면 유다 사람들이 평소에 살려고 뭘 의지 했는가가 나오죠. 여기 16절에 보면 “음식물(식물)이 우리 목전에서 끊어져버리고 기쁨과 즐거움도 성전에서 끊어지고”, 교회 나와야 재미 하나도 없는데요. 복 받을 일이 없으니까. 17절, “씨가 흙덩이에서 썩고 창고가 비었고 곳간이 무너졌고 곡식은 시들고”

    성주군에 참외해서 1년에 3천 6백억 번다는 거예요. 
    대구시에 대기업에 취직했다가 자기 아버지 말 듣고 때려 치고 성주에서 참외 키우는 기술 배웁니다. 
    우리나라 참외 70%가 성주군에서 나오기 때문에 나중에 연말 되면 목돈이 1억씩 된 답니다. 
    어떤 사람은 비닐하우스 25~30동을 지어서 하니 한 동에서 몇 천만 원 나오는데 25동이니 돈이 3억대, 5억대가 돼요.

    그런데 그 씨가 만약에 어느 날 정전된다든지 가뭄 들어서 참외밭이 망해버리면 그 사람들이 뭘 느끼겠습니까? 
    우주의 종말을 느끼고 그 다음에 자기의 종말을 느낄 거다 이 말이죠. 
    ‘야! 이러다가 정말 참외밭을 폭싹 쓸어버리면 정말 이 세상이 멸망의 날, 심판의 날이 아니가, 이러다가 우리 집안 뭐 먹고 사노.’라는 걱정을 하게 되죠. 
    결국은 이러한 걱정을 한다는 자체가 참외가 안 돼서 참외가 썩어서 수입이 없을 때 걱정한다는 자체가 사람들이 자기 날을 기다렸지, 절대로 여호와의 날을 기다린 적이 없다는 거예요.

    아, 궁금해요. 난 성주군에 있는 교회마다 찾아가 보고 싶어요. 
    그 성주군에 있는 교회마다 목사들 외치는 것이 여호와의 날을 외치는지 아니면 추수 잘되는 목동 챙기는 그날을 챙기는지, 무슨 소리하는지 구경하고 싶어요. 
    구경하나 안하나 뻔하지. 
    그래서 성주에서는 그렇게 돈이 많아서 공공 단체도 그렇게 대우를 잘해주는 겁니다.

    그 다음에 18절에 보면 “생축이 탄식하고” ‘우~~’ 하고 소가 운다는 거예요. 돼지가 울고, 소하고 돼지하고 도살장에 끌려가면서 매몰처리 하면서 얼마나 울었겠어요. 죽은 채로 하면 그것도 소의 인격을 높이는데 이건 산채로 죽이니까, 괜히 베트남에 가서 하나가 구제역 들어서 온 나라에 소, 돼지 다 잡고 또 지나면 닭도 다 잡고 또 바다의 전복도 태풍불면 다 죽을 판이고, 그러니까 평소에 사람들은 여호와의 날을 안 좋아했다는 거예요.

    그럼 여호와의 날을 안 좋아했다는 말은 뭐냐 하면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서 여호와가 싫다는 거예요. 괜히 시어머니 옆에 얼쩡거리는 게 딱 귀찮아, 여호와를 싫어하면서 뭐라고 입을 벌려서 하는 말이 ‘여호와여, 영광 받으소서.’ 영광 받으소서. 가관이라. 가관. 그렇게 여호와가 싫은데 평소에 자기 날만 좋아하면서 교회에 와서 여호와를 부르짖는 심보가 더럽잖아요.

    여기 “소떼가 민망해 하니 양떼도 피곤하고” 양 떼가 피곤해서 누워있고, 그게 누가 이렇게 하느냐, 그게 비행물체 바깥이 아니라 안쪽에서 이미 마지막의 모습을 비행물체 안에 있는 자기 택한 백성에게도 이 일을 일으키는 겁니다. 너희가 평소에 여호와의 날을 진정 좋아했던 적이 있었느냐,‘를 묻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살기 위해서 의지했던 모든 것을 전부 다~ 거두고 치워버리고 없애버리고 그야말로 이 세상을 광야로 만들어 버립니다.

    제가 광주서 강의할 때 이런 이야기 했거든요. 애굽에서 광야 나와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 구약의 절차라면 신약에서는 그 절차를 반대로 합니다. 애굽 먼저 있고 광야 만들고 그 다음에 천국 가는데, 구약에서는 약속의 땅이 엄연히 가나안 땅이라서 지명이 나와 있지만, 신약에서는 이 땅이 애굽이고 이 땅이 광야 되게 해놓고, 그것도 믿는 사람에게 해당되지만, 그 다음에 약속의 땅은 어디 있느냐, 없어요. 이 땅에는 없어요. 골로새서 3장 1~4절 “이미 이 땅에서는 죽었고 너희 생명은 하늘에 감춰졌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이 신약에서는 하늘을 쳐다봐야 되지 땅의 것에서는 어떤 승부 걸만한 게 없어요. 그래서 땅의 것이 날아가더라도 ‘아! 이건 여호와의 날이 가깝구나.’ 하고 반기고 즐거워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지상에서 애굽이고, 그 다음에 광야 되고, 그 다음에 약속의 땅은 이 땅에 없고 하늘나라입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이 땅을 거칠 때 태웠거든요. 예수님이 이미 그 경과를 거쳤기 때문에 예수님이 거쳤던 그 경과를 그대로 밟으면 그 코스가 구원코스입니다. 다른 구원코스 없어요. 예수님이 이 땅에 숨어 나오고 죽어서 천국 갔다면 그 코스대로 성령께서 그 코스대로 가라고 인도하는 겁니다.

    그럼 여기서 오늘 중요한 것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렇다면 특히 신약이나 구약이나 광야를 만든다는 말은 우리가 스스로 더 살아보려고 애썼던 것을 일부러 다 치워버려요. 소도 탄식하고 양도 피곤하다 하고 전부 다 나자빠지고 곡식도 다 썩어버리니까 뭐 답답하죠. 강제적으로 더 살고 싶어도 살 수 없는 그런 형편에 놓여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인도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 어떻게 살다보니까 죽을 수밖에 없구나. 살려고 애쓰다 보니까 ‘아이고, 이제는 할 수 없다. 죽어야지.’ 이런 게 아니고 그런 식이 아니라면 그건 믿음이 없는 거죠. 어쩔 수 없어 죽는 것은 그건 신앙이 있고 아니고 관계없이 다 주어지는 거니까, 특별한 게 없어요.

    그러나 아담에서 ‘~~죽었더라. ~~ 죽었더라.‘ 하는 것은 그런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낯선 죽음을 의미하는 거예요. ’아이쿠, 이거 먹을 거 다 죽고 닭 죽고 소 죽고 할 수 없다. 하나님, 빨리 죽이세요. 죽어서 좋은데서 편히 쉬렵니다.‘ 이런 자기 편한 걸 생각하는 죽음 말고 하나님과 동행하므로 그냥 올라갔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거 좀 생각해 볼게요. 창세기 5장 21절에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여기 죽음 이야기가 없어요. 지금 그걸 이야기하려는 겁니다. 여기 창세기 5장 22~25절에 보면 죽었다는 이야기는 없어요. 그냥 계속해서 처음부터 동행했고 끝까지 동행했고 그리고 그를 데려갔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1장 5절에 보면 이 대목을 해석하면서 여기에 뭘 집어넣느냐 하면 죽음을 집어넣어요.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결과적으로 여러분, 같은 이야기처럼 보이죠? 그런데 창세기에서는 동행했다고 돼 있고 히브리서에서는 죽음을 보지 않고 올라갔다고 돼 있어요. 두 개 합치면 무슨 이야깁니까? 예수님께서 예수님 믿는 자는 ‘죽음도 동행이지 죽음이 아니다’라고 보라는 거예요. 이 말은 더 어렵게 이야기하면 지금 매일같이 죽여줄 때 그걸 동행하는 방법으로 받아들여라 이 말입니다. 매일같이 주님께서 매일같이 우리 밥그릇을 치우고 젓가락을 치우더라도 그게 우리를 살리는 유일한 동행하는 방법이 그 방법 외는 없다는 거예요.

    ‘어떤 집사가 매일같이 밥그릇을 치우시고 밥그릇을 깨고 매일같이 밖에 나가서 얻어터지고 하다가 죽어버렸다.‘라고 할 때 우리는 그것을 뭐로 보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는 방법인데 무슨 방법이냐, 평소에도 죽음을 보지 않고 살았던 동행 방식으로 우리는 볼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되는데 그 안목을 두자로 믿음이라고 보는 거예요. 굉장히 어렵죠?

    지금 내가 알고 있는데서 주의 일을 해석하지 말고 우리가 아는데 불가능 했었었는데 성령이 와서 십자가를 깨닫게 하는 ‘십자가에서 이미 우리는 살았고‘라는 입장에서 다시 어떤 분이 어떤 집사가 어렵게 사는 모습을 다시 한 번 되짚어보란 말이죠. 그것이 오히려 그 아픔과 그들의 고통스런 가난을 부러워하란 말 이예요. 왜, 남들은 살려고 하는데 그 사람들은 살려고 하는 건더기가 없어요. 하나님이 살려고 하면 다 치워버리고, 살려고 하면 다 치워버려요.

    미장원 하면 미장원 망하고 펀드 하면 펀드가 내려가고 주식하면 주식이 폭락하고 사면 샀다고 다 망하고 팔면 팔아서 망하고 여기 거치면 여기 일이 안 되고 만사가 되는 일이 없어요. 
    만사형통이 아니고 반대, 모든 게 불통, 형통이 안 될 때 그것은 바로 니가 땅에서 이미 죽었고 니 생명은 하늘에 있으니 하늘만 쳐다보라는 하나님의 독특한 배려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가 되겠죠.

    동행이라 하는 것은 그냥 쉽게 이야기해서 죽어야 될 분이 나와 함께 곁에서 같이 산다 생각하시면 됩니다. 
    동행이라는 것은 바로 우리 집에 죽어야 될 분이 또는 우리를 이 땅에서 데려 가실 분이 함께 사신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거예요.

    여러분이 바퀴벌레와 동행하신 적 있습니까? 
    죽이고 싶죠. 왜, 바퀴벌레가 나를 힘들게 하니까. 

    예수님은 그 이상입니다. 그것을 우리 쪽에서 보면 예수 믿기 힘든 게 아니고 불가능하고 짜증나요. 그러나 이미 구원받은 입장에서, 에녹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 이미 구원받은 사도바울의 구원받은 자의 성령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 동행 안 했으면 참 큰일 날 뻔 했어요. 동행 안 했으면 돈 좀 벌었다고 과시할 것이고 자랑할 것이고 이 땅에서 조금 성공한 것도 부풀려서 큰 성공 한 것처럼 으스댈 것이고 사법고시 누구 아들 합격했다고 붙일 것이고 누구 하나 성공 했다고 할 것이고 27살 때 대학병원 병원장 했다고 알려질 것이고 누구는 의사도 증권도 잘 하고 의사도 잘하고 시골 의사인데 뭐 그리 똑똑한지, 그런 것들을 자랑할 때 그 사람이 죽을 맘이 나겠습니까? 더 살고 싶죠.

    그러니 하나님께서 동행한다는 것을 우리가 안일하게 너무 성급하게 생각했던 겁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나의 날, 내가 성공한 날, 내가 출세한 날, 내가 대우받는 날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여호와의 날은 이것은 우리가 싫든 좋든 엄연한 현실인 것을 우리에게만 현실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께서는 수시로 그것을 이해되도록 조치하시는 겁니다.




     


    여호와의 날의 특징

    1.  하나님의 심판의 날

    여호와의 날은 주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날로 묘사됩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 불순종한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들에게 심판이 임하는 날로 언급됩니다.

    • 이사야 13:9
      "보라 여호와의 날 곧 진노와 맹렬한 분노의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 중에서 죄인을 멸하리니"
    • 요엘 2:1-2
      "여호와의 날이 이르렀으니 이는 가까웠음이라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이처럼 여호와의 날은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과 관련이 있습니다.

    2. 하나님의 구원의 날

    그러나 심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구원의 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회복과 영광이 주어지는 날입니다.

    • 요엘 2: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 스바냐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이처럼 여호와의 날은 믿는 자들에게는 새로운 희망과 회복의 날이 됩니다.

    3. 종말론적 성취 :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

    신약에서는 여호와의 날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과 관련됩니다.

    • 데살로니가전서 5:2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 베드로후서 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 여호와의 날은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는 날을 의미합니다.


    2. 여호와의 날과 종말론적 교훈

    1. 회개와 준비
      • 여호와의 날은 반드시 임하며, 예기치 못한 순간에 올 것이므로 성도는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 마태복음 24:44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2.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
      • 하나님은 악을 심판하시지만, 동시에 그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십니다.
      • 심판과 구원의 균형을 이해하고, 하나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3.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
      • 여호와의 날 이후에는 하나님의 완전한 나라가 도래하며, 의로운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집니다.
      • 요한계시록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결론

    ‘여호와의 날’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과 구원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이는 성도들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소망의 날이며, 하나님 앞에서 늘 깨어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여호와의 날을 대비하여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9월 26일(금) 요엘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의 날(1:15)

    오호라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서 이르리로다.
    Alas for that day! For the day of the LORD is near; it will come like destruction from the Almighty.


    여호와의 날(13구절)

    이사야 13:6 

    너희는 애곡할찌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

    이사야 13:9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임하여 땅을 황무케 하며 그 중에서 죄인을 멸하리니.

    에스겔 13:5 
    너희 선지자들이 성 무너진 곳에 올라 가지도 아니하였으며 이스라엘 족속을 위하여 여호와의 날에 전쟁을 방비하게 하려고 성벽을 수축하지도 아니하였느니라. 

    에스겔 30:3
    그 날이 가까왔도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도다 구름의 날일 것이요 열국의 때이리로다.

    요엘 1:5  
    오호라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서 이르리로다.

    요엘 2:1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성산에서 호각을 불어 이 땅 거민으로 다 떨게 할찌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요엘 2:11 
    여호와께서 그 군대 앞에서 소리를 발하시고 그 진은 심히 크고 그 명령을 행하는 자는 강하니 여호와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렵도다 당할 자가 누구이랴.

    요엘 3:14 
    사람이 많음이여, 판결 골짜기에 사람이 많음이여, 판결 골짜기에 여호와의 날이 가까움이로다.

    아모스 5:18 
    화 있을찐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 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

    아모스 5:20 
    여호와의 날이 어찌 어두워서 빛이 없음이 아니며 캄캄하여 빛남이 없음이 아니냐.

    스바냐 1:7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찌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으므로 여호와가 희생을 준비하고 그 청할 자를 구별하였음이니라.

    스바냐 1:14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심히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애곡하는도다.

    스가랴 14:1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그 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너의 중에서 나누이리라. 

     


    여호와의 날의 의미

     ‘여호와의 날’(The Day of the LORD)은 성경에서 중요한 종말론적 개념 중 하나로, 하나님의 심판구원이 결정적으로 나타나는 날을 의미합니다. 

    이 개념은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며, 주로 세 가지 핵심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여호와의 날의 특징

    1.  하나님의 심판의 날

    여호와의 날은 주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날로 묘사됩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 불순종한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들에게 심판이 임하는 날로 언급됩니다.

    • 이사야 13:9
      "보라 여호와의 날 곧 진노와 맹렬한 분노의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 중에서 죄인을 멸하리니"
    • 요엘 2:1-2
      "여호와의 날이 이르렀으니 이는 가까웠음이라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이처럼 여호와의 날은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과 관련이 있습니다.

    2. 하나님의 구원의 날

    그러나 심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구원의 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회복과 영광이 주어지는 날입니다.

    • 요엘 2: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 스바냐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이처럼 여호와의 날은 믿는 자들에게는 새로운 희망과 회복의 날이 됩니다.

    3. 종말론적 성취 :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

    신약에서는 여호와의 날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과 관련됩니다.

    • 데살로니가전서 5:2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 베드로후서 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여호와의 날은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는 날을 의미합니다.


    2. 여호와의 날과 종말론적 교훈

    1. 회개와 준비
      • 여호와의 날은 반드시 임하며, 예기치 못한 순간에 올 것이므로 성도는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 마태복음 24:44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2.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
      • 하나님은 악을 심판하시지만, 동시에 그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십니다.
      • 심판과 구원의 균형을 이해하고, 하나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3.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
      • 여호와의 날 이후에는 하나님의 완전한 나라가 도래하며, 의로운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집니다.
      • 요한계시록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결론

    ‘여호와의 날’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과 구원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이는 성도들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소망의 날이며, 하나님 앞에서 늘 깨어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여호와의 날을 대비하여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날

    이사야 26:4
    너희는 여호와를 의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사도행전 2:20-21 
    여호와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또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로마서 10:13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셨음이니라. 

    로마서 10:11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주 예수를 시인하며 또 하나님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니..

    요한일서 5:5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는 자가 아니냐?

    보라,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니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요한계시록 1:7-8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실로 그러하리라. 아멘.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 곧 처음과 나중이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자라.

    여호와의 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
    심판의 날
    구원의 날

    선지자들은 그 날을 여호와의 날이라고 기록했고 사도들은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전했습니다.

    선지자들은 그 날이 오기전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고 했고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여호와도 구원자, 예수도 구원자이신 것이고 여호와는 뿌리, 예수는 자손이라는 뜻입니다.
    재림도 한 분 하나님이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그분이 처음과 나중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이 한 아들로 오시면서 예수라 부르게 될 것이라고 하셨고
    예수라는 이름의 뜻도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시고 영존하신 아버지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고 평강의 왕이십니다.
    그리고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 전능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누구시라는 것을 어떻게 더 자세히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이제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는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그분이 대주재시고 심판주시고
    만왕의 왕이시고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것을 계획만 하시고 아들에게 다 맡기신 분이 아니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홀로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친히 사람되어 오셔서 죽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곧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 날이 여호와의 날입니다. 할렐루야!



    여호와의 날(요엘 2:1-11)

    왜 여호와의 날에 대해 말씀하고 있을까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메뚜기 재앙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이런 재앙으로 일상생활이 중단되고 예배생활이 중단되는 엄청난 위기를 만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런 엄청난 위기를 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금 그들이 메뚜기 재앙을 몇 번 만났습니까? 
    네 번 만났습니다. 
    똑 같은 메뚜기 같지만 조금의 차이는 있었습니다. 
    이름도 다르고 피해도 달랐습니다. 
    그런데 왜 네 번이나 만났습니까? 
    한 번 재앙을 만났는데 그때 정신을 차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또 다른 재앙을 그들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래도 정신을 차리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또 다른 재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네 번이나 재앙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네 번 재앙이 일어났던 것은 네 번 하나님이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이제는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래도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여호와의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이 오면 그땐 더 이상 기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날이 오기 전에 말씀 듣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엘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 여호와의 날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여호와의 날에 대해 어떤 경고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지, 여호와의 날에 하나님은 어떤 도구로 심판을 하시는지, 그리고 여호와의 날이 임하면 우리의 삶이 어떤 비극적인 삶으로 변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걸 통해 여호와의 날은 결코 시시한 날이 아니며 엄청난 심판의 날이 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여호와의 날에 대한 경고 (1-3)

    ● 욜 2:1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질러 이 땅 주민들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오늘 본문은 시온에서 나팔을 불라고 말씀합니다. 또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지르라고 말씀합니다. 시온과 나의 거룩한 산은 같은 장소를 의미합니다. 시온이라는 말은 요새라는 뜻입니다. 예루살렘 남서쪽에 있는 낮은 산이 시온인데, 여기에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져 있어서 나의 거룩한 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시온에서 나팔을 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시온에서 나팔을 불라는 말씀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나팔을 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교회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아닌 하나님을 믿는 교회 사람들을 향해 먼저 나팔을 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경고의 말씀을 주변 세상을 향해 외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에게 먼저 선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심판은 항상 하나님의 백성에게 먼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부터 심판하시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백성을 심판하시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팔소리를 들어야 할 일차대상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먼저 깨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온에서 나팔을 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교회에서 회개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교회가 말씀을 듣고 정신을 차리고 다시 깨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온 나팔은 “쇼파르(양각나팔)”을 의미합니다. 당시 이 나팔은 종교적인 큰 모임이 있을 때, 새로운 왕이 세워질 때, 전쟁이 시작될 때 불었습니다. 지금은 왜 불라고 말씀하십니까? 지금 회개하지 않으면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될 것이기 때문에 백성들을 경고하기 위해 나팔을 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나팔은 누가 불어야 합니까? 히브리어 원문은 2인칭 복수형을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본문 앞에 나오는 제사장들을 의미합니다. 경고의 나팔을 불어야 할 사람은 선지자가 아니라 제사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선지자는 특별한 때에 하나님이 세우셔서 말씀으로 깨우는 사명을 감당했던 사람입니다.

    제사장은 평소에 백성들과 함께 있으면서 말씀으로 도전하고 양육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평소에도 늘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다른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평소에 전했던 그 말씀이 아니라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드는 강력한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 주민들로 다 떨게 만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원문의 뜻은 격렬하게 진동하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경고의 말씀을 듣고 말씀 앞에 떠는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도 조금도 꿈쩍하지 않는 완악한 사람이 아닌 말씀을 듣고 충격을 받고 도전을 받고 영적으로 다시 깨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임박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날”이라는 말씀은 요엘 선지자가 가장 먼저 했던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이 인류의 역사에 극적으로 개입하여 당신의 뜻을 온전히 이루시는 날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날은 항상 양면성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겐 구원의 날이 되며, 어떤 사람에겐 심판의 날이 된다는 것입니다. 똑 같은 날인데 믿음으로 사는 사람에겐 구원의 날, 소망의 날, 승리의 날이 될 것이며, 죄에 빠져 살아간 사람에겐 심판의 날, 절망의 날, 멸망의 날이 되는 날이 바로 여호와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노아의 홍수 같은 날이 여호와의 날입니다. 분명히 이 날은 하나님이 인류역사에 극적으로 개입했던 날입니다. 그런데 이 날에 구원을 받은 사람도 있었고 심판을 받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에겐 구원의 날이 되고 어떤 사람에겐 심판의 날이 되는 날이 바로 여호와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불과 유황으로 멸망을 받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불과 유황으로 심판을 받을 때, 롯의 가족들은 구원을 받습니다. 여호와의 날이 바로 이런 날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간 사람에겐 구원의 날이 될 것이지만, 죄에 빠져 살아간 사람에겐 심판의 날이 되는 것이 바로 여호와의 날입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사람 중에 여호와의 날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을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조건 구원을 받는 날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서, 죄에 빠져 살면서도, 세상 쾌락에 젖어 살면서도 나는 무조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걸 뭐라고 합니까?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말 구원에 대한 자신감은 있는데 아무 근거가 없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나팔을 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정신 좀 차려야 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벌벌 떨며 깨어나야 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말씀 앞에 벌벌 떠는 사람은 그 날에 떨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말씀 앞에 떨지 않는 사람은 그 날에 심판 앞에 벌벌 떨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나팔을 불고 경고의 말씀을 선포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 말씀을 듣고 벌벌 떨며 회개하면 그날이 심판의 날이 아닌 구원의 날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 욜 2:2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새벽 빛이 산 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와 같은 것이 옛날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대대에 없으리로다

    이제 본문은 여호와의 날이 어떤 날인지를 말씀합니다. 그 날은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둡고 캄캄한 날”이라는 표현은 출 10:22에 애굽에 내린 9번째 재앙인 흑암의 재앙에서 사용된 말씀입니다. 애굽 땅을 심판하신 그 하나님이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새벽 빛이 산 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새벽이 시작될 때 붉은 빛이 순식간에 산꼭대기에 덮여버리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면 순식간에 모든 땅에 확 덮여버리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면 세상은 이처럼 소망을 잃어버리고 절망 가운데 암담한 현실을 만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정말 빠르고 신속하게 모든 것을 덮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심판을 시작하시면 어디를 보아도 빛을 볼 수 없고, 아무리 보아도 소망이 보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왜 이런 날이 오게 될까요?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어떤 학자들은 메뚜기 떼를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4절 이하에 보시면 전쟁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엄청난 군대가 쳐들어와서 나라를 초토화시키는 상황을 말씀한 것입니다.

    ● 욜 2:3 “불이 그들의 앞을 사르며 불꽃이 그들의 뒤를 태우니 그들의 예전의 땅은 에덴 동산 같았으나 그들의 나중의 땅은 황폐한 들 같으니 그것을 피한 자가 없도다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시작되니 그 땅이 어떻게 변했습니까? 불이 그들의 앞을 사르며 불꽃이 그들의 뒤를 태운다고 말씀합니다. 불이 한 쪽에만 붙은 것이 아니라, 앞에도 붙었고 뒤에도 붙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빠져나갈 구멍이 없습니다. 도무지 피할 길이 없는 엄청난 심판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예전의 땅은 에덴동산 같았지만 그들의 나중의 땅은 황폐한 들 같이 되어버렸습니다. 에덴동산은 저주받지 않은 가장 복된 땅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땅이 에덴동산과 같았다는 말씀은 정말 완벽한 조건을 갖춘 땅이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 속에 행복하게 살아가던 땅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황폐한 들과 같이 되어버렸습니다. 들이라는 말은 “광야, 사막”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절대 살 수 없는 사막과 같은 죽음의 땅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니까 에덴동산처럼 아름답고 풍성했던 땅이, 황폐한 사막처럼 죽음의 땅으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창 13:10에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받기 전에 여호와의 동산 같았다고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동산이라는 말은 에덴동산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죽음의 바다가 되어버렸습니다. 중동지역에 있는 사해바다가 바로 소돔과 고모라가 있던 그 자리입니다. 에덴동산과도 같았던 땅이 이제는 황폐한 땅으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면 에덴동산 같던 곳도 황폐한 땅으로 변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에덴동산과 같은 땅에 살고 있다고 해서 안일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이게 죄 때문에 깨어져 있다면 여기도 얼마든지 황폐한 땅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은 그것을 피한 자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아무도 피할 수 없고, 아무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피한 자가 없을까요? 사실은 피한 자가 있습니다. 노아 홍수 때에도 피한 자가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심판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을 받을 때에도 롯의 가족들이 심판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참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피할 길을 열어주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중에 한 사람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해 살아남은 자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어떻게 하라고 말씀합니까? 시온에서 나팔을 불고, 성전에서 경고의 말씀을 선포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경고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십니까? 그것은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이 시작되기 전에 미리 경고하여, 모든 주민들이 미리 깨닫고, 정신 차리고, 회개하도록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일단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면 그 어떤 사람도 피할 수 없고, 그 어떤 곳도 안전한 곳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심판이 시작되기 전에 우리가 말씀을 듣고 정신 차리고,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간다면, 그 날은 절대 두려운 심판의 날이 아니라 회복의 날, 구원의 날, 소망의 날로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 경고의 말씀을 전하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이 기회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기회를 붙잡고 정신을 차리면 위기에서 벗어나 소망의 길로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금 영적 잠에서 깨어나면, 지금 은혜와 축복의 길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기를 만났다면 더욱 말씀 앞에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경 말씀을 통해 나에게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듣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리면 그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말씀을 듣고 벌벌 떨며 하나님 앞에 엎드리면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경고의 말씀이 귀에 들리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 때문에 벌벌 떨며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모든 영혼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영적 잠에서 깨어나고, 황폐하던 땅이 에덴동산과 같은 복된 땅으로 회복되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여호와의 날의 심판 도구 (4-9)

    ● 욜 2:4 “그의 모양은 말 같고 그 달리는 것은 기병 같으며

    ● 욜 2:5 “그들이 산 꼭대기에서 뛰는 소리는 병거 소리와도 같고 불꽃이 검불을 사르는 소리와도 같으며 강한 군사가 줄을 벌이고 싸우는 것 같으니

    이제 본문은 여호와의 날에 심판의 도구로 쓰임 받는 군대에 대해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메뚜기 심판을 비유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볼 수도 있고,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되어 이스라엘 나라를 침입할 이방나라 군대를 묘사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방나라 군대가 침입하는 상황으로 이해하는 게 좋겠습니다.

    본문에 계속 반복되는 것이 무엇과도 같다는 표현입니다. 말과 같고, 달리는 기병 같고, 병거 소리와도 같고, 불꽃이 검불을 사르는 소리와도 같고, 강한 군사가 줄을 벌이고 싸우는 것 같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모두 이스라엘을 공격할 군대가 얼마나 강하고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군대인가를 생생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먼저 그의 모양은 말과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말이라는 짐승이 나온 것은 메뚜기의 머리를 자세히 보면 말의 머리처럼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달리는 것은 기병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메뚜기 떼가 기병들이 돌진하는 것처럼 엄청난 속도로 힘 있게 달려드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뛰는 소리가 나옵니다. 이것은 껑충껑충 뛰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이 언약궤를 메고 올 때 기뻐서 춤을 출 때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리가 병거소리처럼 들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워낙 엄청난 군대가 한꺼번에 뛰니까 이 소리가 병거소리처럼 들렸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꽃이 검불을 사르는 소리와도 같다고 말씀합니다. 이 소리는 마른 장작 이 탈 때 탁탁 소리를 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메뚜기의 날개소리를 표현한 것입니다. 워낙 많은 메뚜기의 날개소리가 한꺼번에 들리다보니 이게 마치 마른 장작들이 불에 탈 때 나는 소리들이 한꺼번에 들리는 것처럼 들려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한 군사가 줄을 벌이고 싸우는 것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줄을 벌이고 싸운다는 것은 잘 훈련된 군대가 질서정연하게 진을 치고 한 줄로 서서 전진하는 모습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군대는 절대 오합지졸이 아니라 잘 훈련된 최정예 부대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 욜 2:6 “그 앞에서 백성들이 질리고, 무리의 낯빛이 하얘졌도다

    이런 군대를 보는 순간 백성들이 질리고 무리의 낯빛이 하얘졌다고 말씀합니다. 질린다는 말은 본래 몸을 비틀면서 비비꼰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너무 고통스러우면 이렇게 몸을 비틀면서 괴로워하게 됩니다. 낯빛이 하얘졌다는 말씀은 본래 잿빛으로 변했다는 뜻입니다. 완전히 낯빛이 어둡게 변해버렸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것이 심판이 시작되면 모든 인간에게 나타나는 일반적인 반응입니다. 지금까지 아무리 하나님을 무시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비웃던 인간이라도, 일단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면 이처럼 겁에 질려버리고, 공포심에 사로잡혀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다니엘 5장에 보시면 바벨론 벨사살 왕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그릇으로 하나님을 모독하며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손가락이 나타나서 벽에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여호와의 날이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왕의 얼굴빛이 변하고, 넓적다리가 녹는 듯 힘이 풀리고, 그의 무릎이 서로 부딪혔다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무시하며 대적하던 인간도 여호와의 날이 되면 얼굴빛이 변하고 다리에 힘을 잃고 질려버린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이 되면 아무도 하나님의 임재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없습니다.

    ● 욜 2:7 “그들이 용사 같이 달리며 무사 같이 성을 기어 오르며 각기 자기의 길로 나아가되 그 줄을 이탈하지 아니하며

    ● 욜 2:8 “피차에 부딪치지 아니하고 각기 자기의 길로 나아가며 무기를 돌파하고 나아가나 상하지 아니하며

    이제 그 군대가 어떻게 공격하는지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용사 같이 달리며” 힘들게 돌격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강력하게 돌진한다는 것입니다. “무사 같이 성을 기어오르며” 무사라는 말은 본래 깨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내 머리가 깨어진다 해도 전혀 물러서지 않고 목숨 걸고 싸우는 군인들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자신이 깨어져 죽는다고 해도 전혀 물러서지 않고 성벽을 기어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기를 각오하고 달려들면 막아낼 수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런 전투의 상황에도 전혀 흐트러지지도 않습니다. 한 명도 그 줄을 이탈하지 않고, 서로 부딪히는 일도 없고, 각기 자기의 길로 전진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무기를 돌파하고 나아가나 상하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온 무기는 던지는 무기나 화살을 의미합니다. 성을 기어오르면 방어하는 쪽에서도 절대 가만있지 않습니다. 고대전쟁 영화를 보면 화살을 쏘고, 돌을 던지고, 창을 던지고, 심지어 끓는 기름을 쏟아 부으면서 강력하게 저항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강력하게 저항해도 결국 그 성이 함락되는 경우는 어떤 경우입니까? 그것을 돌파하고 나아갈 때입니다. 여기에 돌파한다는 뜻은 원문의 뜻은 “나팔(떨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떨어져 죽는다는 뜻입니다. 성 안에서 날아오는 무기에 맞아 떨어져서 죽는 군인들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군인들이 떨어져서 죽는 모습을 보면서도 전혀 굴복하지 않고 계속 돌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살이 날아오고, 돌이 떨어지고, 뜨거운 기름이 쏟아져도 계속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동료들이 죽어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서도 전혀 물러서지 않고 집요하게 성을 향해 돌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은 아무리 막아도 끝없는 싸움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죽여도 죽여도 계속 올라오는 것입니다. 6.25 전쟁 때 중공군의 인해전술처럼 끊임없이 올라오는 적군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강한 무기를 들고 막아도 절대 막을 수 없는 전쟁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 욜 2:9 “성중에 뛰어 들어가며 성 위에 달리며 집에 기어 오르며 도둑 같이 창으로 들어가니

    이제 대적들은 예루살렘 성 안으로 침입해서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이제 성 안에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이곳저곳을 자유롭게 뛰어 들어가며, 달리며, 기어오르며, 창문으로 들어가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들은 성중에서 뛰어 들어가고 있고, 성 위에도 있고, 집에도 기어오르고, 창으로도 넘어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군대가 성안으로 들어오면 그때부턴 더 이상 숨을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창문은 그나마 가장 구석진 곳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넘어 들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장소가 다 열려버린 것입니다. 대적들이 들어오지 않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예루살렘 성은 난공불락의 요새로 알려진 성이었습니다. 앗수르 군대는 포위했다가 포기하고 돌아갔고, 바벨론 군대는 3년 동안 포위해야 겨우 점령할 수 있었던 성입니다. 그런데 이 성이 뚫려버린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은 정말 견고한 성이지만,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면 이처럼 처참하게 무너진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 모든 것은 무엇을 보여줍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절대 우습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정말 무시무시한 심판이며, 내 힘으로 절대 막을 수 없는 심판이며, 아무리 안전한 곳에 들어가 숨어 있어도 결국 모든 것이 다 뚫리고 무너져서 완전히 멸망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두 번째 단락에서는 여호와의 날에 하나님이 사용하실 심판의 도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메뚜기는 그렇게 강한 심판의 도구가 아닙니다. 메뚜기 한 마리가 달려들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강하게 하시니까 정말 강력한 심판의 도구로 변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약한 존재라도 하나님이 들어 사용하시면 엄청나게 강력한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군대를 바벨론 군대로 보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래 바벨론도 그렇게 강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심판의 도구로 선택하시니까 갑자기 전 세계를 지배하는 초강대국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 최고로 안전한 곳에 있다고 해도 하나님은 얼마든지 나를 심판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실 수 없는 곳은 없습니다. 아무리 안전한 난공불락의 요새 예루살렘 성에 숨어 있어도, 하나님이 심판을 시작하시면 대적들이 마음껏 들어와서 처참하게 무너지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항복해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울며, 금식하며, 부르짖고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경고의 나팔을 불며 경고의 말씀을 전파하고 있습니까?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 재앙 때문에 죽지 말고, 이 재앙을 피하고 살아나야 한다고 경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이런 위기를 만나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메뚜기 재앙이 몇 번 일어났습니까? 네 번 일어났습니다. 왜 네 번이나 일어났습니까? 한 번 재앙이 일어났는데 정신을 안 차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또 한 번 더 재앙을 내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래도 정신을 차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재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네 번이나 재앙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래도 안 듣는다면 어떻게 된다는 말입니까? 여호와의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이 오면 그땐 더 이상 기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날이 오기 전에 말씀 듣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메뚜기 재앙은 위기가 아니라 기회였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에게 위기는 몰락할 수밖에 없는 시련이 되겠지만, 하나님의 사람에게 위기는 다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사람답게 회복되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더욱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게 만드는 하나님이 주신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위기를 만났다면 다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사람답게 회복될 수 있는 기회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위기는 절대 위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위기 때문에 하나님을 더욱 생생하게 만나고 경험하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만난 이 코로나 시대도 분명히 위기입니다. 하지만 이 위기 때문에 우리가 다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면 이 위기는 우리에게 다시 하나님의 사람답게 세워지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 여호와의 날의 심판 결과 (10-11)

    ● 욜 2:10 “그 앞에서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떨며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두도다

    이렇게 엄청난 군대가 공격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 앞에서 땅이 진동하고, 하늘도 떨고, 해와 달도 캄캄하고, 별들이 빛을 거둔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그 군대 때문에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든 천한 신분을 가진 사람이든 세상 모든 사람들이 공포에 사로잡혀 벌벌 떨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비유적인 해석으로 끝내면 안 됩니다. 이것은 종말에 일어날 하나님의 심판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 이처럼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떨리고, 해와 달이 빛을 잃어버리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그런 급격한 천재지변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온 세상이 불지옥으로 변하면 아무리 능력 있는 사람이라도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마지막 최후의 심판 때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에도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에 우리의 삶은 이처럼 절망적인 상황이 되어 벌벌 떨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 욜 2:11 “여호와께서 그의 군대 앞에서 소리를 지르시고 그의 진영은 심히 크고 그의 명령을 행하는 자는 강하니 여호와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렵도다 당할 자가 누구이랴

    여기서 우리는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그의 군대 앞에서 소리를 지르시고 계신 것입니다. 군대 앞에서 소리를 지른다는 것은 공격 명령을 내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변 강대국이 자기 스스로 침략해 들어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명령하셔서 이렇게 침입해 들어온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허락이 없다면 어떤 대적들도 우리를 공격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 주변에서 나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일어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허락, 하나님의 명령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혼자 알아서 자기만의 생각으로 이렇게 나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에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 죄도 없다면 나를 연단시키기 위한 목적이 있고, 나에게 죄가 있다면 자를 징계하시기 위한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 이유 없이 시작된 시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두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하나님의 명령으로 우리에게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대적하는 그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람들은 절대 나의 원수도 아니고, 나의 대적도 아니고, 내가 싸울 대상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사랑하고, 용서하고, 품어줘야 합니다. 그들은 진짜 대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짜 대적은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이 나의 대적이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 “그의 군대”와 “그의 진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침입하는 이방나라 군대는 더 이상 세상의 군대가 아니라 그의 군대, 즉 하나님의 군대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군대가 아니라 대적들이 하나님의 군대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와 함께 하실까요? 그의 군대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대적들과 함께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과 싸우는 것은 누구와 싸우는 것입니까? 하나님과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원수는 진짜 원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런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도망갈 때 자기를 쫓아오며 저주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근거 없는 비난과 욕설을 퍼부으며 마음껏 저주하는 모습을 보며 주변 사람들이 분노합니다. 특히 아비새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자기가 가서 저 인간 목을 베어버리겠다고 일어나려고 했습니다.

    사실 시므이는 일반 평민이었고 아비새는 전쟁 용사였습니다. 그래서 한 주먹 거리도 안 되는 인간입니다. 보통 이렇게 한 주먹 거리도 안 되는 것들이 잘 까붑니다. 그런데 다윗은 뭐라고 말합니까?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저주하게 버려두라.”

    다윗은 지금 시므이가 자기를 저주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침착하게 견뎌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침착함이 회복되길 바랍니다. 잘 참지 못하고 이를 갈며 대적하면 안 됩니다. 원수를 사랑하며 축복하는 것이 이 싸움에서 승리하는 비결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 그의 명령을 행하는 자는 강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그 군대를 이길 수 있는 군대는 이 세상에 없다는 뜻입니다. 일단 하나님의 군대가 되었다면 아무리 약했던 존재라도 절대 막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군대와 정면충돌하는 사람이 가장 어리석은 사람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렵도다. 당할 자가 누구이랴?”고 말씀합니다. 1절에 나온 여호와의 날이 여기에 다시 한 번 언급되고 있습니다. 왜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을까요? 심각한 위기의식을 갖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관심도 없고, 생각도 없고, 신경도 안 쓰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이 어떻게 변했습니까? 더 정상적인 삶을 살았던 것이 아니라 더 죄에 빠진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사람은 반드시 죄의 길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절대 더 깨끗하고, 더 거룩하고, 더 헌신적인 삶을 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단락에는 여호와의 날의 심판결과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날이 시작되면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떨고, 해와 달도 캄캄하고, 별들이 빛을 거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우리 편이 되지 않고 대적들의 편에 서서 우리를 공격하는 그런 비극적인 상황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걸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십니까? 지금 우리가 만난 시련이 아무리 심각해도 이 시련만 바라보지 말고 종말에 임할 마지막 심판을 바라보며 준비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정말 무서운 심판은 마지막 날 심판의 날에 받는 최후 심판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지금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렇게 때리시고 징계하고 계십니까? 왜 한 번도 아니고 네 번이나 메뚜기 재앙을 만나게 하십니까? 이들이 마지막 심판을 받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에 완전한 파멸에 이르지 않도록 지금 그들을 때려서라도 그들을 바로잡고 회복시키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시련을 만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답이 다음 12절에 나옵니다.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무슨 뜻입니까? 아직 기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울며, 금식하며, 마음을 다해 부르짖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얼마든지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때리시는 분이시지만 어루만져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아무리 혹독한 시련 가운데 있어도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나아가면 그때 하나님의 회복이 시작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날이 시작되면 그때는 더 이상 기회는 없습니다. 기회는 오직 여호와의 날이 오기 전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날이 되기 전에 경고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회개하고, 변화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마음을 다해 부르짖고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여호와의 날이 임하기 전에 경고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회개하고 변화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비록 우리가 미련하여 죄악 된 삶을 고집하다 지금 엄청난 시련을 만난 중에 있더라도,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마음을 다해 부르짖고 나아가면 하나님이 어루만져 주시고 위로해주시고 회복시켜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눈물이 회복되길 바랍니다. 더욱 간절한 기도가 회복되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눈물이 회복되고, 기도가 회복되고, 말씀이 회복되어,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회복을 경험하고 우리 때문에 이 진해 땅이 에덴동산처럼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이 인류의 역사에 극적으로 개입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날입니다. 
    지금 우리가 말씀을 듣고 깨어나지 않으면 반드시 여호와의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 날이 오면 에덴동산 같던 땅이 황폐한 사막처럼 죽음의 땅이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경고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위기를 만났다면 더욱 말씀 앞에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벌벌 떨며 하나님 앞에 엎드리면 피할 길을 열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주신 것은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영적 잠에서 깨어나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여호와의 날에 심판의 도구로 쓰임 받는 군대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무리 약한 존재라도 하나님이 들어 사용하시면 얼마나 강한 존재로 변신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막아도 절대 막을 수 없고, 아무리 안전한 곳에 숨어 있어도 절대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여호와의 날의 심판 결과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면 모든 상황은 절망적인 상황이 될 것이며, 하나님은 우리의 대적이 될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날이 임하기 전에 경고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회개하고 변화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변화되지 않으면 더욱 강한 여호와의 날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달라지면 하나님은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경고의 말씀을 듣고 영적 잠에서 깨어나서 황폐하던 땅이 에덴동산처럼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나길 바랍니다. 
    다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사람답게 세워지는 기회를 만드시기 바랍니다.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부르짖고, 하나님께 나아가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회복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의 날이 시작되면 그땐 더 이상 기회는 없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 기회입니다. 
    우리 모두 여호와의 날이 오기 전에 경고의 말씀을 듣고, 영적 잠에서 깨어나서, 하나님의 사람답게 변화되어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 속에 에덴동산과 같은 복된 삶을 회복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C. S. 루이스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합리적 변증

     C. 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는 기독교 신앙을 합리적으로 변증하고 설명하는 책으로, 원래는 BBC에서 방송된 강연을 바탕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 책에서 루이스는 기독교를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변호하며, 신앙이 합리적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주요 변증의 핵심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도덕법을 통한 신 존재 증명

    루이스는 인간이 보편적으로 선과 악,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도덕법(Moral Law)**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 이 도덕법은 문화와 시대를 초월하여 존재하며, 개인적인 본능 이상의 힘을 갖고 있습니다.

    • 도덕법이 존재한다는 것은 단순한 사회적 합의가 아니라, 초월적인 존재(즉, 하나님)가 이를 부여했음을 의미합니다.

    • 따라서 우주에는 선과 악을 구별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있으며, 이는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고 주장합니다.


    2. 그리스도론 – 예수는 누구인가? (Liar, Lunatic, or Lord 논증)

    루이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해 세 가지 가능성을 제시하는 유명한 **"삼중 논법(Trilemma)"**을 제시합니다.

    •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다음 세 가지 중 하나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1. 거짓말쟁이(Liar): 예수가 의도적으로 사람들을 속였다.

      2. 미치광이(Lunatic): 예수가 자신을 신이라 착각한 정신병자였다.

      3. 주(Lord): 예수가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 예수가 거짓말쟁이나 정신병자가 아니라면, 그는 참으로 하나님이심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 이 논증은 예수를 단순한 도덕 교사로 보는 관점을 배격하고, 그의 신성을 받아들일 것을 촉구합니다.


    3. 기독교는 단순하면서도 깊은 진리를 담고 있다

    루이스는 기독교 신앙이 단순하지만 결코 피상적이지 않다고 강조합니다.

    • 기독교는 단순한 도덕 규범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체계적인 진리입니다.

    •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변화되는 존재입니다.

    • 따라서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본성과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진다고 설명합니다.


    4. 자유의지와 악의 문제

    루이스는 왜 하나님이 악을 허용하시는가에 대한 질문을 다룹니다.

    •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Free Will)**를 주셨으며, 이는 사랑과 도덕적 선택을 가능하게 합니다.

    • 그러나 자유의지는 잘못 사용될 수도 있으며, 인간이 이를 남용할 때 악이 발생합니다.

    • 결국 악은 자유의지가 존재하는 세계에서 불가피한 요소이지만, 하나님은 이를 통해 선을 이루신다고 주장합니다.


    5. 기독교 신앙과 성화 (Christian Life & Transformation)

    • 루이스는 기독교 신앙이 단순한 도덕적 개선이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는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 기독교인은 자신의 노력으로 선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변화되는 존재입니다.

    • 믿음은 단순한 감정이나 윤리적 가르침이 아니라, 실제적인 삶의 변화와 관계된 것입니다.


    결론: 기독교의 합리성과 초월성

    **"순전한 기독교"**는 단순한 교리 설명을 넘어, 기독교가 논리적이며 실질적인 삶에 영향을 주는 신앙임을 변증하는 책입니다.

    • 루이스는 감성적인 접근이 아니라, 이성적 논리와 실생활의 경험을 통해 기독교 신앙을 변호합니다.

    • 그는 기독교 신앙이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인간의 존재와 우주의 본질을 설명하는 참된 진리임을 강조합니다.

    이 책은 기독교를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 그리고 신앙에 대한 합리적 근거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강력한 변증이 됩니다.



    강력한 회심을 경험한 신앙의 인물 7인

    서론: 회심, 인생을 바꾸는 전환점

    기독교 역사 속에서 회심(回心)은 단순한 신념의 변화가 아니라, 인생의 방향 자체를 바꾸는 강력한 경험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죄와 방황의 길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어떤 이는 회심을 통해 삶의 목적을 새롭게 발견했고, 어떤 이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는 기적을 경험했다. 여기서는 근현대 인물들 중에서 강력한 회심을 경험한 7인을 살펴보며, 그들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조명하고자 한다.


    1. 찰스 콜슨 (Charles Colson, 1931-2012) – 권력의 탐욕에서 겸손한 섬김으로

    찰스 콜슨은 미국 닉슨 대통령의 특별보좌관으로서 워터게이트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가기 전까지 권력의 정점에 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감옥에 가기 직전, 친구를 통해 기독교의 메시지를 듣고 강한 회심을 경험했다. 그 이후로 교도소 사역에 헌신하여 '프리즌 펠로우십(Prison Fellowship)'을 설립하고, 전 세계 수많은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로 변모했다.


    2. 이반 모이스예예프 (Ivan Moiseyev, 1952-1972) – 무신론 교육을 받았던 군인이 순교자로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에서 교육받은 이반 모이스예예프는 강한 무신론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군 복무 중 강한 성령 체험을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심했다. 이후 그는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끔찍한 고문과 압박 속에서도 신앙을 지켰다. 결국 그는 순교했지만, 그의 신앙과 용기는 소련 내 기독교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3. 조니 에릭슨 타다 (Joni Eareckson Tada, 1949-) – 절망 속에서 소망을 찾다

    17세의 나이에 다이빙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조니는 처음에는 극심한 절망과 분노 속에 빠졌다. 하지만 깊은 회심을 경험하며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맡겼고, 이후 장애인들을 위한 사역자가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고통을 통해 더욱 강한 신앙을 갖게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전 세계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사역을 하고 있다.


    4. 리 스트로벨 (Lee Strobel, 1952-) – 무신론에서 신앙의 변증가로

    리 스트로벨은 무신론자로서 시카고 트리뷴(Chicago Tribune)의 기자였다. 그의 아내가 기독교인이 되자, 그는 이를 반박하기 위해 기독교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구를 거듭할수록 기독교의 진리를 발견하게 되었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다. 이후 『예수는 역사다(The Case for Christ)』 등의 책을 저술하며 기독교 변증가로 활동하고 있다.


    5. 로시어 스프롤 (R.C. Sproul, 1939-2017) – 냉담한 종교에서 살아 있는 신앙으로

    R.C. 스프롤은 젊은 시절 하나님에 대해 관심이 없었지만, 대학 시절 밤늦게 도서관에서 강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며 회심했다. 그는 개혁신학을 연구하며 기독교 신앙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이후 Ligonier Ministries를 설립하여 전 세계 수많은 신자들에게 신학적 교육을 제공하는 지도자가 되었다.


    6. 프랜시스 콜린스 (Francis Collins, 1950-) – 과학에서 신앙으로

    세계적인 유전학자인 프랜시스 콜린스는 원래 무신론자였다. 그러나 의학을 공부하며 인간 유전자의 경이로움을 경험하면서 신의 존재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C.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를 읽으며 회심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신앙과 과학이 조화될 수 있음을 주장하며, 신앙을 지닌 과학자로서 활동하고 있다.


    7. 안네 반 데르 비엘 (Anne van der Bijl, 1928-2022) – 무신앙에서 성경 밀반입자로

    네덜란드 출신인 안네 반 데르 비엘(브라더 앤드류, Brother Andrew)은 신앙에 대한 관심이 없던 젊은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군 복무 중 하나님의 강한 부르심을 경험한 후 완전히 변화되었다. 그는 이후 ‘하나님의 밀수꾼’으로 불리며, 공산권 국가들에 몰래 성경을 배달하는 사역을 감당했다.


    결론: 회심은 삶을 바꾸는 능력이다

    이들 모두는 다양한 삶의 환경에서 신앙을 만나고 강력한 회심을 경험한 인물들이다. 어떤 이는 권력과 부를 쫓다가, 어떤 이는 절망 속에서, 어떤 이는 학문을 탐구하다가 하나님을 만났다. 그리고 그 만남은 단순한 감정적 변화가 아니라, 실제로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 변화되고 있으며, 회심의 이야기는 단지 과거의 전설이 아니라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 각자도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인생의 방향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강력한 회심을 경험한 신앙의 인물 7인

    서론 : 회심, 인생을 바꾸는 전환점 기독교 역사 속에서 회심(回心)은 단순한 신념의 변화가 아니라, 인생의 방향 자체를 바꾸는 강력한 경험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죄와 방황의 길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어떤 이는 회심을 통해 삶의 목적을 새롭게 발견했고, 어떤 이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는 기적을 경험했다. 
    여기서는 근현대 인물들 중에서 강력한 회심을 경험한 7인을 살펴보며, 그들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조명하고자 한다. 


    1. 찰스 콜슨 (Charles Colson, 1931-2012) – 권력의 탐욕에서 겸손한 섬김으로 찰스 콜슨은 미국 닉슨 대통령의 특별보좌관으로서 워터게이트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가기 전까지 권력의 정점에 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감옥에 가기 직전, 친구를 통해 기독교의 메시지를 듣고 강한 회심을 경험했다. 그 이후로 교도소 사역에 헌신하여 '프리즌 펠로우십(Prison Fellowship)'을 설립하고, 전 세계 수많은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로 변모했다. 

    2. 이반 모이스예예프 (Ivan Moiseyev, 1952-1972) – 무신론 교육을 받았던 군인이 순교자로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에서 교육받은 이반 모이스예예프는 강한 무신론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군 복무 중 강한 성령 체험을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심했다. 이후 그는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끔찍한 고문과 압박 속에서도 신앙을 지켰다. 결국 그는 순교했지만, 그의 신앙과 용기는 소련 내 기독교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3. 조니 에릭슨 타다 (Joni Eareckson Tada, 1949-) – 절망 속에서 소망을 찾다 17세의 나이에 다이빙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조니는 처음에는 극심한 절망과 분노 속에 빠졌다. 하지만 깊은 회심을 경험하며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맡겼고, 이후 장애인들을 위한 사역자가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고통을 통해 더욱 강한 신앙을 갖...






    요엘

    저자: 요엘서는 그 책의 저자가 선지자 요엘(욜 1:1)이라고 언급합니다.

    저작 연대: 요엘서는 주전 835-800년 사이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기록 목적: 이 책의 배경인 유다는 어마어마한 메뚜기 떼에 의해 황폐화됩니다. 메뚜기 떼의 침략은 곡물, 포도밭, 정원 및 나무 등 모든 것을 파괴합니다. 요엘은 메뚜기를 통해 행군하는 인간 군대를 상징적으로 묘사하며 이 모든 파괴를 유다의 죄로 인해 그 나라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책은 크게 두 가지 주요 사건을 조명하여 줍니다. 하나는 메뚜기의 침입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의 부으심입니다. 이 책에 대한 초기의 성취는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가 인용한 것처럼 오순절날에 발생한 사건과 연관됩니다.

    핵심 구절: 요엘 1:4,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요엘 2:25,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과 팥중이가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

    요엘 2: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요약: 메뚜기의 끔찍한 재앙 뒤에는 그 땅 전체에 임하는 심각한 기근이 뒤따릅니다. 요엘은 이러한 일들을 촉매제로 사용하여 유다에게 경고의 말을 전합니다. 사람들이 신속하고 온전하게 회개하지 않는 한, 적군은 메뚜기처럼 땅을 황폐화시킬 것입니다. 요엘은 모든 백성과 그 땅의 제사장들에게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면서 금식하며 겸허해질 것을 호소합니다. 그들이 반응한다면, 그 나라에 물질적인 축복과 영적인 축복이 새롭게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때에는 모든 열방이 그분의 심판을 받게 되기 때문에 이와 비교할 때 끔찍한 메뚜기 떼들은 고작 하루살이처럼 보일 것입니다.

    요엘서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날인 주의 날입니다. 이 날은 하나님이 그분의 진노와 능력과 거룩의 속성을 계시하시는 날이며, 그분의 원수들에게는 무시무시한 날입니다. 첫 번째 장에서 주의 날은 역사적으로 그 땅에 임하는 메뚜기의 재앙으로 체험됩니다. 2장 1-17절은 요엘이 메뚜기 재앙과 가뭄에 대한 은유를 사용하여 회개에 대한 부름을 새롭게하는 과도기 장입니다. 2장 18절-3장 21절은 종말론적인 용어로 주의 날을 묘사하고, 회개에 대해서는 육체의 회복(2:21-27)과 영적인 회복(2:28-32), 그리고 국가적인 회복에 대한 예언으로 답변합니다(3:1-21).

    예표: 구약이 개인적인 죄이든 국가적인 죄이든 죄에 대한 심판을 말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이 예표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계속해서 이스라엘에 회개하라고 경고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회개를 했을지라도 그들의 회개는 율법을 지키는 것과 행함에 제한되었습니다. 그들의 성전 제물은 십자가에 달려 단번에 영원히 바쳐질 궁극적인 희생의 그림자였습니다(히 10:10). 요엘은 주의 날에 임할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은 "크고 심히 두렵도다 당할 자가 누구이랴”(욜 2:11)고 말합니다. 그 대답은 우리 스스로는 그런 순간을 결코 견딜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속죄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심판 날에 대해 두려워 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적용: 회개가 없다면 심판은 가혹하고 철저하며 확실할 것입니다. 우리의 신뢰는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 여호와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를 그분께 더 가까이 가도록 하기 위해 자연, 슬픔 또는 다른 일반적인 사건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자비와 은혜 안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확고한 계획을 마련하여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우리의 죄와 그분의 완전한 의를 교환해 주셨습니다(고후 5:21). 더 이상 시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밤의 도적같이 신속히 올 것입니다(살전 5:2). 우리는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이 구원의 날입니다(고후 6:2).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 55:6-7). 오직 하나님의 구원을 붙들어야 우리는 주의 날에 있을 그분의 진노를 피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날 (The Day of the Lord)

    요엘서는 구약 성경 39권 중 29번째 책으로 12권의 소선지서 중 하나입니다.

    [ 호세아 <-- 요엘 --> 아모스 ]

    요엘은 유다에 닥칠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합니다. 유다에 닥친 메뚜기 때와 가뭄의 재앙을 여호와의 날의 전조로 봅니다. 하나님은 요엘을 통해 유다의 회개를 촉구하며 마지막 때의 구원의 소망을 전합니다. 베드로오순절 설교(사도행전 2:17-21)에서 요엘서 2:28-32[1]을 인용합니다.

    • (욜 2: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개요와 구조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요 1:4)

    • 저자: 선지자 요엘 [2];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 저작 시기: BC 830년 (명확치 않음)
    • 목적: 남유다에 닥칠 심판 경고, 회개 촉구, 그리고 소망
    • 주제: 주의 날
    • 지리적 배경: 유다
    • 책 이름 약자: 욜[3] , Joel[4]

    구조와 특징

    요엘서는 모두 3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아래와 같이 나눌 수 있습니다.

    • 메뚜기떼의 공격 (1장)
    • 여호와의 날 (2장)
    • 유다의 영광스러운 미래 (3장)

    특징

    • 언제 쓰여졌는지 명확하지 않다
    • 저자 요엘에 대해 알려진 것이 없다

    메뚜기떼의 공격 (1장)

    요엘 당시에 메뚜기 떼로 땅이 황폐해져 농사를 망친 사람들은 애곡 하였습니다. 요엘은 여호와의 날이 가까이 왔으니 제사장들에게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로 소집하여 장로들과 모든 주민이 회개와 기도 할 것을 촉구합니다.

    • (1:13) 제사장들아 너희는 굵은 베로 동이고 슬피 울지어다 제단에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울지어다 내 하나님께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와서 굵은 베 옷을 입고 밤이 새도록 누울지어다 이는 소제와 전제를 너희 하나님의 성전에 드리지 못함이로다 제사장들은 자신들부터 시작하여 국가적 굴욕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라는 권고를 받습니다. 왜냐하면 이 심판은 그들에게 중요한 부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님께 바칠 희생 제물이 없기 때문입니다.[5]
    • (1:15) 슬프다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부터 이르리로다 선지자는 요엘 1:13-14의 권고에 대한 근거를 더욱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그는 현재의 재앙을 다가올 훨씬 더 심각한 재앙, 심지어 위대한 “여호와의 날” 자체의 전조로 여깁니다. 그리고 그는 그 재앙이 다가올 것이라는 전망이 일으키는 경각심을 표현합니다.[6]

    여호와의 날 (2장)

    여호와의 날이 임박했으며 그의 군대는 크고 강하여 심히 두렵고 당할 자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 (2:2)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새벽 빛이 산 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와 같은 것이 옛날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대대에 없으리로다 여기서 새벽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동사 Shachar에서 파생되었는데, 한 가지 의미는 “검게 되거나 검게 되다”이고, 두 번째 의미는 “빛으로 터져 나오다”입니다. 이 후자의 의미에서 아침을 의미하는 단어인 새벽이 파생되었고, 전자에서 “검은색”이라는 단어가 나왔는데, 이 단어는 나일 강의 이름을 시호르(이사야 23:3)로 합니다. 따라서 이 단어의 의미를 검은색과 관련하여 받아들이고, 흘러서 산 꼭대기에 쌓인 두껍고 어두운 구름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현재 맥락과 더 잘 맞는 듯합니다. 다음 설명은 자연적 메뚜기떼와 정치적 메뚜기떼를 모두 포괄합니다.[5]

    주께로 돌아올지어다 (2:12-17)

    • (2: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주께서 불쌍히 여기셨다 (2:18-27)

    그러면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당히 주셔서 땅을 회복시키시고 풍족케 하실 것이고 하나님과 그의 백성으로 관계를 회복할 것입니다.

    • (2:23)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예전과 같을 것이라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2:28-32)

    그 후에 만민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 줄 것이고 여호와의 날에 이르러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 (2: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이 약속은 성령이 부어진 오순절 날 성취되기 시작했으며,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부여된 회개의 은혜와 기적적인 은사에서 계속되었습니다. 죄 많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마지막 날의 심판보다 앞서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그분에 대한 지식, 그분에 대한 믿음, 그분을 향한 열망, 그분에 대한 의존,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진실성의 증거로서 그분께 대한 양심적인 순종을 전제로 합니다. 큰 날에 구원받을 자는 오직 죄에서 하나님께로, 자아에서 그리스도께로, 아래의 것에서 위의 것으로 효과적으로 부름받은 사람들뿐입니다.[7]

    유다의 영광스러운 미래 (3장)

    앞 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의 구원에 대한 은혜로운 약속을 보았습니다. 이제 3장 전체는 그 약속에 대한 설명으로, 그 구원이 무엇이며, 교회의 적들을 멸망시킴으로써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 그리고 교회의 영원한 안식과 기쁨 속에서 어떻게 완전해질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히스기야 시대에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공격했을 때 부분적으로 성취되었고, 그 후 유대인들이 바빌론에서 포로 생활에서 돌아왔을 때, 그리고 그 때부터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유대인 교회를 위해 행해진 구원으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를 위해 행해진 위대한 구원과 우리의 영적 적들과 그들의 모든 대리인들의 멸망에 대한 추가적인 언급을 가지고 있으며, 큰 날의 심판에서 그 완전한 성취를 이룰 것입니다.[7]

    여호와의 날에 모든 민족들을 심판하시고 징계하실 것이나 그의 백성에게는 피난처, 산성이 되셔서 심판과 구속을 완성하시고 시온에 영원히 거하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심판하시다 (3:1-13)

    • (3:12) 민족들은 일어나서 여호사밧 골짜기로 올라올지어다 내가 거기에 앉아서 사면의 민족들을 다 심판하리로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한 이들이 모이는 선지자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최종 결정이 내려질 장소를 예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했던 모든 나라들, 이스라엘과 유다 주변의 적대적인 나라들, 특히 더 가까운 이웃의 적대국들이 의심할 여지 없이 주된 대상입니다. 이 구절의 "일어나서(stir up: ESV)“라는 표현은 9절의 "격려하고(stir up)”에 상응합니다. “올라올지어다”에 대해 어떤 학자들은 (1) 여호사밧 골짜기에 도달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으로 올라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2) 전진 또는 행진의 일반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임재에 들어가는 것”을 "올라오는 것"이라고 해석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재판관으로서 심판의 보좌에 앉으셔서 심판의 결정을 하십니다.[8]

    여호와께서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다 (3:14-21)

    • (3:16)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부르짖고 예루살렘에서 목소리를 내시리니 하늘과 땅이 진동하리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의 피난처, 이스라엘 자손의 산성이 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강한 폭풍 속에서 다가오시니, 하늘과 땅이 그분 앞에서 진동합니다. 그분의 심판은 오직 그분의 적들에게만 내리시고, 그분의 백성에게 그분은 요새와 방패가 되십니다.[6]

    관련 자료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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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색: 성경인물:: 요엘
    

    바이블프로젝트 요엘 개요

    참고한 자료

    각주

    1. (욜 2:28-32)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2. (욜 1:1) 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3. https://www.bskorea.or.kr/bible/korbib_shortword01.php
    4. https://www.logos.com/bible-book-abbreviations
    5. 이동: 5.0 5.1 Ellicott's Commentary for English Readers
    6. 이동: 6.0 6.1 Cambridge Bible for Schools and Colleges
    7. 이동: 7.0 7.1 Matthew Henry’s Concise Commentary
    8. Pulpit Commentary







    요엘

    요엘서를 기록한 선지자는 브두엘의 아들 요엘입니다. '요엘'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선지자 요엘에 대한 정보는 그 이상 없어 요엘서의 기록 시기도 알기 어렵습니다. 다만 ①여호사밧왕(남 유다 4대 왕)이 에돔과 동맹군을 물리친 여호사밧 골짜기에 대한 내용이 나오므로 여호사밧 시대 이후이거나 ②블레셋, 애굽, 에돔이 심판받을 적대국으로 나오고, 바벨론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을 보아 요아스왕(남 유다 8대 왕) 때 기록되었다고 추정합니다. 이 학설에 따르면 요엘서에 제사장에 대한 언급만 있고 왕이 등장하지 않으므로 어린 요아스를 대신해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섭정했던 때 요엘서가 기록됐다고 봅니다.


    내용

    메뚜기가 곡식을 다 갉아 먹는 재앙이 이스라엘에 닥쳤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예물조차 없을 정도로 곡식이 없어 사람은 물론 가축까지 고통받았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범죄로 인한 결과였습니다.
    요엘 선지자는 이와 비교할 수 없는 크고 두려운 심판의 날이 닥칠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회개하면 하나님이 재앙을 거두시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주셔서 다시 풍요롭게 해주실 뿐 아니라 성령을 부어주신다는 구원의 약속도 전했습니다.





    여호와의 날 앞에서 회개와 회복의 부르심

    본문 요약

    요엘서는 메뚜기 떼로 인한 자연재해를 시작으로 여호와의 날이라는 더 큰 심판을 경고하며 회개를 촉구하는 선지서입니다. 그러나 그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돌아오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며 회복을 약속하십니다. 성령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주실 것을 예언하며, 장차 임할 구원의 시대를 내다봅니다. 요엘서는 짧지만 강력한 메시지로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 그리고 회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본문의 구조

    1. 재앙과 회개의 촉구 (1:1~2:17)
    2. 회복과 성령 강림의 약속 (2:18~2:32)
    3. 열방 심판과 최종 회복의 선언 (3:1~3:21)

    재앙과 회개의 촉구 (1:1~2:17)

    요엘서는 전대미문의 재앙으로 시작됩니다. 메뚜기 떼가 모든 농작물을 삼켜버리고, 곡식과 포도주가 끊기며, 사람뿐만 아니라 제사조차 드릴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이는 단순한 자연재해로 보이지만, 요엘은 이를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합니다. 백성은 자신들의 죄를 돌아봐야 하며, 장로들과 제사장은 이 사건을 후손에게 전하며 기억하게 하라고 명령받습니다. 경제와 종교, 일상과 예배 모든 것이 무너진 현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선지자는 금식과 슬픔을 명하고, 제사장들은 성전에서 울며 여호와께 돌아오도록 호소합니다. 이때 등장하는 여호와의 날은 단지 물리적인 재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날로 묘사됩니다.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피빛으로 변하며, 하늘과 땅이 흔들리는 무서운 날입니다. 그러나 그 심판의 목적은 멸망이 아니라 회개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하시며, 그의 본심은 인애와 긍휼,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뜻을 돌이키시는 분임을 강조하십니다. 하나님은 단호하지만 동시에 참으로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회개는 공동체 전체의 일입니다. 노인부터 아이까지, 신랑과 신부까지도 회개에 참여해야 하며, 제사장들은 하나님 앞에서 중보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는 회개가 단지 외적인 의식이 아니라 온 마음과 삶을 동반한 진실한 변화여야 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 분명히 심판하시지만, 회개하는 자에게는 은혜와 자비를 넘치도록 베푸시는 분입니다. 이 첫 번째 부분은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일깨워줍니다.

    회복과 성령 강림의 약속 (2:18~2:32)

    백성의 진심 어린 회개 앞에서 하나님의 반응은 긍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땅을 불쌍히 여기시고, 다시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주시며, 북쪽에서 온 군대를 쫓아내실 것이라 하십니다. 메뚜기 떼로 상징된 군대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징계였지만, 하나님은 다시 그들을 물리치시고 땅을 회복시키십니다. 들판에는 푸른 초장이 회복되고, 나무는 열매를 맺으며, 백성은 다시 기뻐하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회개한 백성을 어떻게 은혜로 다시 세우시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가운데서 크신 일을 행하셨고, 그들을 다시 자신의 백성으로 회복하십니다. 이는 단지 육적인 풍요의 회복을 넘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라는 근본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백성은 이제 다시 “여호와는 우리 하나님이시며 다른 이가 없도다”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회복은 단지 현실의 안정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회복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는 구원을 얻게 하시겠다고 하시며, 구원의 문을 활짝 여십니다.

    특히 이 부분에서 요엘은 이후 오순절 성령 강림을 예언하는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은 말세에 그의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실 것이라고 하시며, 이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시대가 도래할 것을 예고합니다. 아들들과 딸들은 예언하고, 늙은이는 꿈을 꾸며, 젊은이는 환상을 보게 되며, 남종과 여종에게까지 성령이 부어지는 이 약속은 하나님의 구원이 특정 계층이 아닌 모든 사람을 향해 열려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는 신약시대에 베드로가 사도행전 2장에서 직접 인용하며 성취된 말씀으로 언급됩니다. 성령의 부으심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도록 하시는 능력이며, 하나님의 백성된 증거이자 복음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입니다.

    열방 심판과 최종 회복의 선언 (3:1~3:21)

    요엘의 마지막 장은 하나님의 정의와 심판, 그리고 최종적인 회복에 대한 선언으로 구성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흩뜨리고 고통을 준 열방을 심판하시겠다고 하십니다. 특별히 여호사밧 골짜기에서 하나님은 열방을 불러 모으고,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악에 대해 심판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이는 단지 이스라엘의 복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가 반드시 실행된다는 신앙의 선언입니다.

    열방은 이스라엘의 자녀들을 팔아 이방 땅으로 넘기고, 하나님의 기업을 욕되게 했으며,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악을 기억하고 갚으시며, 자기 백성을 다시 돌아오게 하시고 높이시겠다고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이 단지 내부의 회복만이 아니라 외부의 악에 대해서도 반드시 판단하시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무력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모든 민족 위에 계신 재판장이십니다.

    하나님은 열방을 심판하시지만, 동시에 시온 산에는 피할 자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날은 어둡고 두려운 날이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구원의 날이 됩니다. 하나님은 다시 시온에 거하시며, 예루살렘은 거룩한 곳이 되고, 이방인은 다시는 그리로 지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땅은 다시 풍요로워지고, 산에는 단 포도주가 흐르며, 시내는 물이 가득하며, 하나님의 성소에서는 샘이 흘러나와 생명의 근원이 됩니다.

    이는 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모습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않고,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계시는 영원한 왕으로 높임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끝까지 지키시며, 회개한 자들에게는 풍성한 은혜로 응답하십니다.

    결론

    요엘서는 짧지만 심오한 메시지를 전하는 예언서입니다. 하나님은 자연재해와 민족적 위기를 통해 말씀하시고, 백성의 죄를 깨우쳐 회개로 이끄십니다. 심판은 두려운 것이지만, 회개하는 자에게는 생명의 기회가 됩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찢는 진실한 회개를 원하시며, 그 회개 위에 회복과 성령의 부으심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영은 모든 자에게 부어지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게 됩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도 메뚜기 떼 같은 위기와 흔들리는 현실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하나님은 여전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옷을 찢는 신앙이 아니라, 마음을 찢고 돌이키는 신앙을 요구하십니다. 요엘서를 통해 우리는 회개의 능력, 하나님의 긍휼, 성령의 약속, 그리고 최종적인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을 바라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다시 시온에 거하시며, 그분을 경외하는 자와 함께 영원히 살아가실 것입니다. 여호와께 돌아오는 자에게는 언제나 길이 있으며, 하나님의 긍휼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여호와의 날과 회개의 촉구

    요엘 1장

    메뚜기 재앙이 이스라엘을 덮쳐 땅이 황폐해졌으며, 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다. 하나님은 이 재앙을 통해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시며, 제사장과 모든 백성이 금식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요엘 2장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며, 이는 더욱 큰 심판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진심으로 회개하는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회복의 약속을 주신다. 또한, 성령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실 것이라는 놀라운 예언이 선포된다.

    요엘 3장

    하나님은 회개하는 이스라엘을 회복하시고, 그들을 괴롭혔던 열방을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다시 축복을 누리게 되며,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다. 이는 궁극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예고하는 말씀이다.

    결론

    요엘서는 하나님의 심판과 회개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참된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긍휼과 성령의 부어주심을 경험할 수 있음을 가르친다. 또한, 하나님은 불의한 세상을 반드시 심판하시며, 회개하는 자들에게 회복과 축복을 약속하신다.


    요엘 ― 여호와의 날을 선포한 선지자

    2~3분

    요    엘

    (여호와의 날을 선포한 선지자)

    1. 인적 사항

      (1) 요엘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뜻.

      (2) 예루살렘 출신으로 추정. 남유다 선지자.

      (3) 브두엘의 아들로서 12소선지자 중의 한 사람(욜1:1).

    2. 시대적 배경

      남왕국 유다의 선지자 요엘은 유다의 유약한 제9대 왕 요아스의 재위 기간인 B.C.835-796년까지 사역한 선지자이다. 이 때는 이스라엘의 남북 분열 왕국 시대의 중반기로서, 국제적으로는 강대국간의 패권 다툼이 별로 없던 다소 평온한 시기였다. 그러나 국내적으로는 커다란 변혁의 회오리가 스치고 지나갔던 때였다. 남유다의 제7대 왕이 된 아합의 딸 아달랴를 몰아내고 7세밖에 안된 어린 요아스를 왕위에 옹립하는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혁명이 있었다(왕하 11:4-12). 그리고 대제사장 여호야다는 섭정인으로서 아달랴의 바알 숭배로 인해 훼손된 성전을 수리하고 왕과 백성들로 하여금 여호와 신앙에 대한 언약을 맺게 하는 등 善政을 베풀었다. 그러나 여호야다가 죽은 후 유다 왕 요아스는 심한 동요와 죄악에 빠져 이교의 우상 숭배를 허용하는 등 부패하게 되었다(대하 24:18). 이것은 비단 요아스 개인만의 부패가 아니었다. 이에 편승한 유다 백성들 역시 패역의 길로 치닫게 되는데, 이 때에 대 메뚜기 재앙이 닥치게 되어 백성들은 기근과 가난으로 큰 고통을 겪어야만 하였다.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소명 받은 선지자 요엘은 홀연히 일어서서 유다 백성들을 향해 회개를 촉구함과 동시에 회복의 소망에 관한 메시지를 전파한 것이다.

    3. 주요 생애

      소  명    이  후

      메뚜기 재앙으로 인한 회개의 촉구

      B.C.835-796

      요엘1,2장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구원의 약속 선포

      요엘 2:18-3:21

      요엘서 기록

      B.C.830년경

      요엘 1:1-3;21

      죽음


    4. 성품

      (1) 광야에서 회개를 선포한 세례 요한과 비교되는 인물로, 시대의 불의와 야합하지 않는 강직하고 정의감에 불타는 성품의 소유자.

      (2)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면서도 애끓는 심정으로 민족의 회개를 외친 것으로 보아 사랑과 민족에 대한 애정이 많은 선지자(욜 2:12-14).

    5. 구속사적 지위

      (1) 메뚜기 재앙이 같은 역사적 사건을 통해 미래에 있을 여호와의 날 심판을 경고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와 각성을 촉구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소명 받은 선지자(욜2;31,32).

      (2) 여호와의 날 심판 경고와 회개 촉구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간의 화목을 도모한 중보자의 역할을 감당한 자(욜2:13). 이는 죄인과 하나님 사이의 유일 절대한 중보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된다.

    6. 평가 및 교훈

      (1) 유다 백성이 패역하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예언자인 요엘 선지자를 통하여 유다 백성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도록 책망하시고 경고하셨다. 이와 같은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당신의 종들을 따라서 하나님의 종들을 통한 메시지를 들을 때에 우리는 책망은 책망대로, 권면은 권면대로 순순히 받고 그것을 적극 실천으로 옮기는 실천적인 신앙을 소유해야할 것이다(욜2:12-17).

      (2) 요엘은 백성들을 향해 메뚜기의 재앙을 선포하면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욜2:32)이라고 전했다.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주의 이름은 죄인들을 구원하는 능력이 있다. 능력의 주님의 이름을 우리는 얼마나 힘써 진실 되게 부르고 있는가?



    요엘 ( Joel )


    요엘(Joel)은 구약 성경의 소선지서 중 하나인 요엘서의 저자이자 예언자로, 그의 예언은 주로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 그리고 성령의 강림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요엘은 예언서 중에서도 특별히 "여호와의 날"(Day of the Lord)에 대한 메시지로 잘 알려져 있으며, 기독교 신학에서 그의 예언은 종말론적 사건과 성령의 역사를 나타내는 중요한 예언으로 해석됩니다.


    요엘의 배경과 역사적 맥락

    요엘서의 배경에 대한 역사적 정보는 비교적 제한적입니다. 요엘서에서 특정한 왕이나 역사적 사건이 명시되지 않기 때문에, 그의 활동 시기는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있지만, 대체로 기원전 9세기에서 5세기 사이로 추정됩니다. 요엘은 주로 남유다 왕국에서 활동한 예언자로 여겨지며, 그의 예언은 유다와 예루살렘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요엘서의 주요 배경은 심각한 메뚜기 재앙입니다. 메뚜기의 대규모 침략은 이스라엘의 농업 사회에 큰 타격을 주었고, 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해석되었습니다. 요엘은 이 재앙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며, 동시에 회개와 구원의 기회를 제시합니다.

    요엘의 메시지: 심판과 회개, 그리고 회복

    1. 메뚜기 재앙과 하나님의 심판

    요엘서는 메뚜기 재앙을 중심으로 시작됩니다. 이 재앙은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의 상징으로 여겨집니다. 요엘은 이를 통해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해 경고하고, 그들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메뚜기 재앙은 "여호와의 날"의 전조로 간주되며, 다가올 더 큰 심판을 예고하는 사건으로 해석됩니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 메뚜기 재앙을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로 보고, 인간이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할 필요성을 상기시켜 줍니다. 요엘서 1:15에서 "슬프다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이 이르렀나니"라는 표현은 심판이 임박했음을 경고하며, 회개와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2. 여호와의 날 (Day of the Lord)

    "여호와의 날"은 요엘서의 핵심 주제입니다. 요엘은 여호와의 날이 심판의 날이자, 동시에 구원의 날이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고, 죄악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그러나 그 날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날이 될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여호와의 날이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종 심판을 상징한다고 해석됩니다. 신약에서는 이 날을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이해하며,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며, 의인과 악인에 대한 최종적인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데살로니가전서 5:2, 베드로후서 3:10).

    3. 회개와 하나님의 자비

    요엘은 심판의 경고와 더불어 회개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강조합니다. 요엘 2:12-13에서 하나님은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그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요엘은 단순한 형식적 회개가 아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참된 회개를 촉구하며,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우시고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신다고 강조합니다.

    기독교 신학에서 이 구절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상징합니다. 죄인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실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요엘의 메시지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과 연결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죄의 용서와 구원의 은혜를 예표합니다.

    4. 회복과 구원의 약속

    요엘은 심판과 회개에 이어 하나님의 회복의 약속을 전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심판하신 후, 그들을 다시 회복시키시고 풍성한 축복을 주실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요엘 2:25에서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팟종이와 느치와 황충이 먹은 해 수를 너희에게 갚아주리니"라는 구절은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게 하실 것이라는 희망을 전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이 회복의 메시지를 하나님의 구속사와 연결 지어 해석합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파멸을 맞이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은 회복을 약속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하시며 구원을 이루십니다. 이 회복은 단순히 물질적 풍요를 넘어서 영적 회복과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상징합니다.

    성령의 강림: 요엘서 2:28-29의 예언

    요엘서에서 가장 유명한 예언 중 하나는 성령의 강림에 대한 예언입니다. 요엘 2:28-29에서 하나님은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은 기독교 신학에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과 직접 연결됩니다.

    신약 성경에서 사도 베드로는 사도행전 2:16-21에서 이 요엘의 예언을 인용하며,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한 사건이 바로 요엘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성령의 부어짐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이후 모든 믿는 자들에게 성령이 임할 것을 의미하며, 이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은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해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기독교에서는 이 예언을 통해 성령의 역사와 보편적인 구원의 약속을 강조합니다. 요엘은 성령이 특정한 계층이나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임할 것이라고 예언하였으며, 이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가 성령을 통해 새로운 삶을 누리게 될 것임을 의미합니다.

    종말론적 의미

    요엘서의 또 다른 중요한 주제는 종말론적인 구원과 심판입니다. 요엘 3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만국을 심판하시고, 그의 백성을 회복시키실 것을 예언합니다. 이 종말론적인 심판은 하나님의 공의가 완성되는 날로 이해되며, 신약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종 심판으로 해석됩니다. 요엘은 그날이 심판의 날인 동시에 구원의 날임을 강조하며, 믿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축복이 임할 것을 약속합니다.

    요엘서의 기독교적 의의

    회개의 중요성: 요엘서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은 기독교 신앙에서 회개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요엘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인간의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이 구원의 길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으며, 이 메시지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깊이 연결됩니다.

    성령의 약속: 요엘의 성령 강림 예언은 신약에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요엘 2:28-29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사도행전 2:16-21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2025 호세아


    9월 23일(화) 호세아 1-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호세아 2: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I will betroth you in faithfulness, and you will acknowledge the LORD.

    호세아서의 주제는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1장에서는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고멜이라는 창녀와 결혼하라고 명령합니다.
    이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지만 하나님을 배신하고 다른 신들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심판하실 것이지만,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고자 합니다.

    2장에서는 고멜은 호세아를 떠나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집니다. 
    호세아는 고멜을 찾아가 다시 데려옵니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회복시키시고자 하시는 마음을 보여 줍니다.

    3장에서는 호세아는 고멜에게 이혼장을 주고, 그녀가 7년 동안 다른 남자와 함께 살도록 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고, 다른 신들을 섬겼던 기간을 상징합니다. 
    7년이 지난 후, 호세아는 고멜을 다시 데려옵니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징계하셨지만,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4장에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를 책망하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우상숭배하고, 거짓말과 살인과 간음과 도적질을 행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오늘 묵상 할 주제는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안다는 히브리 단어는 "야다"라고 합니다.
    '야다'라는 단어는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강조합니다.
    사람을 안다고 말할 대 겉 사람을 아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겉 사람이란 서로 이웃끼리 지내며 알고 지내는 관계라고 한다면 속 사람이란 결혼 후에 동거하며 함께 지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은 내가 네게 장가들어 하나님을 알게하실 것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에게 창녀와 같은 여인 고멜을 아내로 맞이하라고 명령합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마치 창녀와 같이 우상을 숭배하며 여호와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을 깨우칩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부부관계"로 비유하셨습니다(사 54:5-8).

    진실함(530. 에무나) 
    - 흔들리지 않는 신뢰와 불변하는 성실, 충성을 뜻하는 단어로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언약의 견고함을 나타내준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영속적인 성공을 보증하는 여호와의 신실성이다(J.Given).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3045. 야다) 
    - '알다'의 히브리어 '야다'(*)는 단순한 객관적인 인식 이상의 것으로 주관적이고 경험적인 이해, 또한 인격적인 관계에 있어서의 참다운 깨달음을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완전히 계시하리라는 약속인 동시에 하나님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신다는 뜻을 포함한다(M. Henry). 
    또한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특별한 언약 관계를 인정하고, 여호와께 충성과 복종의 태도를 보일 것을 시사한다(Chrisholm). 
    결국 이 새로운 지식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케 하고(벧후 1:3-7) 그와의 거룩한 사귐에 있게 할 것이다(요일 1:1-4).


    내가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호세아 2:14~3:5)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이시기에 죄에 대해서는 매우 엄중하게 다루시지만, 그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온다면 언제나 기꺼이 받아주시는 긍휼과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한 사랑을 음란한 아내를 맞이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선명하게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죄악으로 가득하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시고 징계하시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회복시키시길 원하셨습니다. 
    2장 14절부터 23절의 말씀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골 골짜기(Valley of Achor)로 소망의 문을 삼아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2:15). 
    아골은 히브리어로 “아카르”(עָכַר)라는 단어에서 나온 “아코르”(עָכוֹר)인데, 아카르는 괴롭히다(to trouble), 혼란하게 하다(to disturb) 등의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그래서 근심의 골짜기, 괴로움의 골짜기 등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아골 골짜기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여리고 성을 쳐서 승리한 후에 아간이 불순종하여 아이 성 침공에 처참하게 실패한 후에 아간의 죄를 드러나 아간이 돌에 맞아 죽은 장소입니다. 

    이러한 괴로움의 골짜기가 오히려 소망의 문이 되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하셨듯이, 포로로 끌려가게 된 상황에서 다시 구원하여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2:15).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겠다고 말씀하시는데(2:19, 20),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더 이상 바알을 비롯한 우상의 이름을 부르지 않게 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따르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2:16, 17). 
    이 땅에 있는 들짐승과 새와 곤충들과도 언약을 맺겠다고 하시는데(2:18), 더 이상 들짐승과 새와 곤충들로 인한 피해를 입지 않게 하시겠다는 약속이며, 전쟁에서도 자유롭게 되어 평안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2:18).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장가들겠다는 표현으로 이스라엘을 회복시켜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시는데,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이스라엘에게 장가드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2:19). 

    공의(公義, Righteousness)는 “옳다”, “바르다”는 의미의 “체데크”(צֶדֶק)라는 히브리어에서 나온 “베체데크”(בְּצֶ֣דֶק)라는 히브리어가 사용되었고, 정의(正義, Justice)는 히브리어로 “우베미쉬파트”(וּבְמִשְׁפָּ֔ט)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는 “미쉬파트”(מִשְׁפָט)에서 나온 단어로 미쉬파트는 “법률에 의해 판단되는 옳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은총(恩寵, Lovingkindness)은 “우베헤세드”(וּבְחֶ֖סֶד)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의 원형은 “헤세드”(חֶסֶד)로 은혜, 사랑, 긍휼, 자비 등 한국어 성경에서는 매우 다양하게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긍휼(矜恤, Mercy)은 히브리어로 “우베라하밈”(וּֽבְרַחֲמִֽים)인데, 이 단어는 어머니의 자궁이나 사람의 내장을 의미하는 “라함”(רַחַם)에서 나온 단어로 속마음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들을 살펴볼 때 하나님은 공의와 정의에서 벗어나지 않으시면서도 은총과 긍휼을 잊지 않고 균형을 잡으시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이 한곳에 모여 성취되는 곳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代贖)이 이 모든 것을 이루는 곳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2:20). 2장 20절의 “네가 알리라”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웨야다앗트”(וְיָדַ֖עַתְּ)인데, 이 단어의 원형은 “야다”(יָדַע)로서 “알다”, “이해하다” 등의 의미를 가진 단어로, 이 단어는 머리로만 아는 지식을 넘어서서 경험을 통해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에 관하여” 아는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의미합니다.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기심을 통해 우리를 다시 하나님의 신부(新婦)로 삼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비로소 하나님을 참으로 알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을 몸소 체험하여 알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경험하는 은혜가 주어졌음이 참 감사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2:21, 22),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 받지 못했던 자들[로루하마(לֹא רֻחָמָה)]이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는 자[루하마(רֻחָמָה)]들이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던 자[로암미(לֹא עַמִּי)]들이 하나님께서 “내 백성”[암미(עַמִּי)]이라고 불리게 되는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2:23).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을 향하여 “나의 하나님”[엘로하이(אֱלֹהָֽי)]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2:23).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호세아 3장에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호세아가 음란한 아내인 고멜을 값을 지불하고 다시 데려오는 퍼포먼스(Performance)를 통해서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우상을 섬기며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시면서, 호세아에게 자신을 떠나 다른 남자의 품으로 간 아내를 다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3:1). 

    건포도 과자는 우상에게 제물로 드리는 것에 관한 상징적 표현입니다. 
    남편을 떠나 다른 남자에게 간 그 음란한 아내를 데려오기 위해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값을 지불하고 다시 사 오라고 말씀합니다(3:2). 한 호멜(Homer)은 약 230ℓ이니 한 호멜 반이면 345ℓ이고, 무게로 환산하면 180kg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노예의 몸값이 은 30세겔(Shekel)이었는데, 은 15세겔과 보리 한 호멜 반은 대략 은 30세겔의 가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노예를 사고파는 값을 지불하고 아내를 다시 데려오라는 말씀입니다. 그 음란한 아내가 집을 나가서 불륜을 저질렀으니 오히려 돌에 맞아 죽게 하도록 해도 되는데, 값을 지불하고 다시 사 오라는 말씀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십자가에 달려서 죽임당하심으로 우리의 죗값을 모두 지불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미리 보여주시는 장면입니다. 이렇게 다시 데려온 아내에게 더 이상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다시 언약의 관계를 회복하겠고 말씀하십니다(3:3).

    이스라엘 백성은 포로로 끌려가 있는 동안 왕도 없고, 지도자도 없었습니다(3:4). 그리고 하나님께 제사도 드릴 수 없었고, 그들이 우상으로 섬기던 주상(柱像, Sacred pillar)도 없었습니다. 주상은 히브리어로 “맛세바”(מַצֵּבָ֑ה)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특정한 장소에 세워진 기둥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아마 우상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이 입는 예복(禮服)인 에봇(Ephod)도 없었다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명한 절기와 제사들을 주관할 제사장들도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드라빔(Teraphim)은 한 집을 수호하는 신으로 여기는 작은 크기의 우상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 번듯한 지도자도 없었고, 하나님을 향한 제대로 된 제사나 섬김도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포로 생활에서 다시 돌아온 후에는 하나님께서 다윗 왕의 계보(系譜)를 잇게 하실 것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은총으로 나아가는 은혜가 있을 것을 약속하십니다(3:5).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전히 성취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끝이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십니다.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고, 공의와 정의로 행하시되,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다시 구원하셔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마치 남편을 배신하고 불륜을 행하며 음란하게 살았던 고멜과 같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모든 죗값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셔서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이 사랑에 깊이 감사하며,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과 뜻을 다해 우리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삶이 되길 소망합니다.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과 음행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너희가 바알들을 섬긴 시일대로 벌을 주겠다고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자기 백성을 향한 사랑에 조금이라도 어떤 변화가 있어서가 아니라, 사랑에는 변함이 없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그의 신부라고 할 때 신랑에게 걸맞은 신부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벌을 주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즉 벌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지만 그 벌은 무엇을 위한 벌인가?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도록 하기 위한 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벌을 주겠다고 하셨지만 내가 그를 타이르겠다,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 하겠다,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겠다고 말씀하셨던 겁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어렸을 때 그리고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노래하도록 만들겠다고 까지 하셨는데, 과거 출애굽의 역사처럼 지금도 동일한 하나님께서 그들을 죄악 된 자리에서 이끌어 내시겠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이전에는 하나님이 남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남편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바알을 남편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이상 바알을 남편으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이끌어 내겠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과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파괴되었던 창조의 질서가 회복되게 됩니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을 섬기고 다른 모든 피조물에 대하여 다스려야 했지만, 죄는 이 관계를 파괴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이런 창조의 질서가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도 회복되는데, 율법의 정신처럼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이웃 또한 사랑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이 파괴되었을 때 이웃 사랑이 아니라 전쟁의 역사였다면 하나님 사랑의 회복은 그런 전쟁의 역사도 그치고 평안의 때가 된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계속해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어떻게 은혜를 베푸시는지에 대해 다시금 말하는데, 19절과 20절입니다.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본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아내가 다른 신으로 하여금 남편을 삼았습니다. 즉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한번 깨어져 버렸습니다. 이혼한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금 이스라엘에게 장가들겠다고 하십니다. 너를 내 아내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비록 네가 잘못한 일이 있지만 그 잘못을 잊어버리겠다는 말입니다. 그 잘못을 지워버리겠다는 말입니다. 음행한 사실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만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영원히 살되’라는 말을 덧붙이십니다. 방금도 말했지만 본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남편아 아내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아내 쪽에서 잘못함으로 인해 한번 그 관계가 깨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관계를 다시금 회복하게 하실 때는 또 다시 헤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하나님은 시작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시작과 함께 완성까지 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신다는 것입니다(빌1:6). 물론 그 과정 가운데 호세아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음행이 한번만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있습니다. 한번의 실수로 끝나면 좋겠지만 우리의 부패한 본성은 끊임없이 음행을 저지릅니다. 하나님 한분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여기에도 기웃거리고 저기에도 기웃거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번만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라, 두 번 세 번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일곱 번을 일흔 번이라도 하십니다. 490번이 한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히 살겠다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영원히 살게 될 때까지, 영원히 살 수 있는 수준이 될 때까지 하나님은 용서하고 또 용서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우리에게 끊임없는 은총을 베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용서하심에 대하여 악용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푸는 방식은 이어 설명하는 것처럼 세 가지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우선 19절에 보면 공의와 정의가 먼저 나옵니다. 그리고 이어 은총과 긍휼이 나옵니다. 그리고 20절에서 진실함이 나옵니다. 즉 하나님은 공의와 정의를 통하여, 그런 다음 은총과 긍휼을 통하여, 그리고 그것을 진실함 혹은 성실함으로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14절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타이르되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겠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거친 들로 데리고 가시는 것이 공의와 정의를 행사하시는 겁니다. 왜 거친 들로 데리고 가시는가? 호세아 2장 6절로 말하자면 왜 가시를 주시는가? 이스라엘 백성 쪽에서 잘못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잘못에 대하여 그냥 내버려두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시를 주십니다. 거친 들로 데리고 가십니다. 어려움을 주시는 것이고, 고난을 주시는 것이고, 잘못에 대한 징계를 행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지금 공의와 정의입니다. 쉽게 말해 죄에 대한 벌 혹은 징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징계와 벌을 주신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행한 만큼의 징계와 벌은 아닙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행한 만큼 징계와 벌을 받아야 한다면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자범죄를 계산하지 않고 원죄만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누구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겠다, 오늘 본문에서처럼 너희와 영원히 살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공의와 정의를 행하시되, 거기에 은총과 긍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행하시는 공의와 정의는 은총과 긍휼에 기초한 공의와 정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공의롭지 못하고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택자 편에서는 그들이 받아야 할 벌만큼 주시지 않는 것이 사실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그리스도에게 택자가 받아야 할 벌을 충분하게 내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반드시 죄에 대하여 공의와 정의를 행사하시는데, 그 공의와 정의를 택자에게게 내리신 것이 아니라 택자의 모든 죄 짐을 그리스도에게 전가시켜 그에게 내리셨던 겁니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이 있는 겁니다.

    다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문제를 해결 받았다고 할 때 죄책이 제거된 것이지, 부패가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닙니다. 남아 있는 부패성,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자범죄가 여전히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은총과 긍휼을 베푸시되 여전히 공의와 정의와 함께 자신의 은총과 긍휼을 베푸시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은총과 긍휼을 베푸신다고 해서 공의와 정의 없는 은총과 긍휼을 베푸시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은총과 긍휼만으로는 저들이 하나님께로 완전히 돌아서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이상 하나님은 죄의 길에서 돌아서도록 하기 위해 공의와 정의를 실행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벌을 내리시되 필요한 만큼의 벌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측면에서 진실함이 추가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진실함이란 신실함 혹은 성실함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런 공의와 정의, 은총과 긍휼을 베푸시는 일을 신실하게 성실하게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한번 행하고 그만 두는 것이 아니라 혹은 두 번, 세 번 정도만 행하시고 그만 두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계속해서 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을 통해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겠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겁니다.

    20절 마지막에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는 말씀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공의와 정의로 일하시며, 또한 은총과 긍휼로 일하시되, 진실함 성실함으로 일하실 때 너희는 여호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는 것이지,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의 역사란 단순히 일반계시의 차원이 아님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일반계시를 통해서도 자신을 알리셨지만 구원의 지식과 관련해서는 특별계시로만 알 수 있게 하셨습니다. 때문에 너희가 여호와를 알게 된다고 할 때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외적 증거로써의 말씀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실제로 우리 삶에 있어 공의와 정의를 행하시고, 은총과 긍휼을 베푸시되 신실하게 성실하게 행하시지만, 앞서 그의 말씀으로 이 사실을 알리신다는 것입니다. 그의 말씀으로 징계하시고 그의 말씀으로 위로하시는 일이 반복해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죄를 나타내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끊임없이 공의로 행하시되, 은총과 함께 신실함으로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말씀의 효력이 있다는 것은 그 말씀과 함께 일하시는 내적 증거로써의 성령의 일하심이 함께 있다는 것도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입니다. 여호와를 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역사하심으로 말미암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가? 그의 말씀과 그의 성령으로 나타납니다. 특별히 그의 말씀으로 나타난다고 할 때 거기에는 공의와 정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은총과 긍휼도 있습니다. 그리고 진실함, 성실함도 있습니다. 책망과 벌이 있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은총이 있는 것이고, 그 일을 성실하게 실행하시는 일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셨기 때문에 시작하신 그 일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이루시기 위하여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교회는 무조건 사랑만 외치는 곳이 아닙니다. 사랑도 있지만 책망도 있습니다. 왜 책망이 있는가? 근본적으로 사람은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이상 지상의 교회가 말씀으로 책망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말씀으로 권징을 하지 않는다? 그 교회는 참된 교회라 할 수 없습니다. 책망이 있고 권징이 있는 교회가 참된 교회로 분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교회의 표지라고 할 때 말씀과 성례와 더불어 권징이 들어가는 겁니다. 권징 없는 교회, 책망 없는 교회를 참된 교회라고 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계속해서 오늘 본문 21절과 22절을 보시면 여호와를 알게 된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부터 응답하셔서 그들의 필요를 채우시는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내가 응답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답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하리라” 그러나 여기에 있는 22절은 앞선 말씀 20절의 내용 없이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에 대하여 땅에서 나는 것들을 충분히 먹고 마실 때 주어지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행복의 시작은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성경을 통해 알리시는 바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기 백성으로 삼아 주실 때 시작된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을 위해 인간의 죄를 제거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아내로 삼을 때 참된 복이 시작된다고 알립니다. 이것으로부터 시작하지 않는 지상의 축복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행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용납되고 우리와 거룩한 혼인이 맺어지고 또한 그가 우리의 아버지로서 우리를 보존하시며 우리가 그의 보호와 방어 아래 안전하고 평안하게 된다는 약속을 받을 때 거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선지자는 하나님을 아는 자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지상의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본래부터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것들이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아닌 바알로부터 얻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 모든 것을 끊어버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게 될 때는 다시금 지상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겠다고 하시는데, 지난주 살핀 15절의 내용과 일치합니다.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그러나 여기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그 날에 내가 응답하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답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하리라고 하십니다.

    우선 응답한다는 것은 들어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아닌 바알로부터 공급된다고 하는 모든 것을 끊어버리심으로 실제로는 바알로부터 공급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십니다. 그럼 누가 공급하시느냐?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구에게 공급해 주시기를 기도하느냐?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누가 주체인지 알게 하셨고, 누가 주체인지 알게 되자 주체이신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이 얼마나 무지한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히 알리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식으로 그들에게 공급하시는지 순서를 따라 말씀하십니다. 그런 측면에서 뒤에서부터 생각해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곡식과 포도주, 기름을 얻는 것은 땅으로부터 얻습니다. 그럼 땅만 있으면 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땅에 필요한 것을 공급해야 합니다. 해가 있어야 하고, 비가 있어야 하고, 그 외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는 여러 요소들이 하늘로부터 제공되어야 합니다. 그럼 하늘은 그 자체로 땅에 필요한 것은 공급하는가?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을 주관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무지는 어떻게 나타나느냐? 주체를 빼 버리는 데 있습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땅으로부터 얻어야 한다는 것은 압니다. 또한 땅은 하늘로부터 공급 받아 제공한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입니다. 하나님에게까지 올라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방인들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에게 그 영광을 돌립니다. 이방인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했던 겁니다. 그래서 그들의 무지를 깨우치기 위해 하나님은 하늘로부터 응답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응답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특히 22절 마지막에 ‘이스르엘’이라는 단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왜 이스르엘입니까? 이미 호세아 1장에서 하나님은 너희의 이름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스르엘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로 불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거룩하고도 영광스러운 이름인데, 더 이상 그 이름으로 불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공급하신다는 겁니다. 즉 너희가 바알로부터 얻는다고 생각하고 있던 때도 사실 내가 너희에게 공급했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알리시고 있는 겁니다. 지금은 너희가 하나님을 아는 자로 있지만, 그래서 하나님께 공급해 주실 것을 기도하고 있지만, 너희가 알기 전부터,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스르엘로 불릴 때부터 사실은 하나님이 계속해서 공급해 주신 주체라는 사실을 더욱 강조하여 알리고 있는 겁니다. 때문에 결코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체인 것을 빼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사실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지상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땅으로부터 얻는다고 해서 땅이 주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땅은 하늘로부터 공급 받는다고 해서 하늘을 주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의 열심과 노력이 있습니다.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열심과 노력이 주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과정이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주체이십니다.

    하늘에 있는 해로부터 빛을 주시고, 또한 구름을 통해 비를 내리시고, 그래서 땅을 적십니다. 그 결과 땅으로부터 싹이 나고 잎이 나고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열매를 위해 인간의 노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모든 과정 속에서 결국 열매를 맺어 얻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을 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스르엘로 불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이름이 그들에게 돌려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먹고 마시는 문제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펠라기안주의에게도 적용되고, 반펠라기안주의에게도 적용됩니다. 당연히 알미니안주의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이 주체이신데, 하나님이 아닌 인간에게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모든 자들은 감히 말씀드리지만 이스라엘로 불릴 수 없습니다. 아무리 그들이 그들의 주장을 한다 하더라도, 그래서 그들이 이스르엘로 불릴 수밖에 없다 해도 변함없는 사실은 하나님이 주체시라는 겁니다. 항상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11:33-36)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은 하나님이 주체가 되셔서 우리에게 알리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숨기시는데 누가 하나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안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모든 부분에 있어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했다는 의미입니다. 출발만 하느냐? 과정도 하나님이 주체로 있는 것이고, 마지막도 결국 하나님의 주체임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아야 할 영광은 사실 하나도 없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우리가 받은 면류관을 다시금 돌려드리는 내용도 있는데, 바로 이 사실을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천국에 가면 상급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공로로 말미암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모든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올려드리고 있는 게 아닙니다. 물론 천국에 가면 상급이 있을 것입니다. 성경이 상급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상급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공로의 상급은 아닙니다. 결코 공로의 상급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하나님이 마지막까지 이르게 하시기 때문에 공로의 상급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상급일 뿐입니다. 때문에 상급을 받을만한 무엇을 내놓았다면 여러분으로부터 출발한 게 아님을 알아야 하고, 그런 측면에서 교만이 아니라 겸손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을 했다고 해서 교만하다는 것은 공로주의의 결과이지 결코 성도의 합당한 열매가 아닙니다.

    더불어 23절로 오시면 곡식과 포도주, 기름의 풍성함만이 아니라 그것을 먹을 수 있는 백성의 수 또한 많아질 것을 말씀합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시니라” 호세아 1장 10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 그러나 이 말씀의 뜻은 이사야 10장 22절의 의미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음이라” 때문에 혈통으로만 볼 때는 그 수가 많지 않습니다. 회복의 말씀이 적용되는 대상은 남은 자들이기 때문에 육적 이스라엘 자손으로만 보면 그 수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마치 씨처럼 땅에 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의 수를 많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처럼 이스라엘 자손의 수를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헤아릴 수 없도록, 셀 수 없도록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 때 이스라엘 자손의 수는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까지를 포함합니다. 남은 자가 씨가 되어 이방인에게까지 확장되는 것을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ㄱ 버니다.

    그리고 그들을 땅에 심는다고 할 때 그것은 이미 호세아 2장 1절에서 말씀하시던 방식과 같이 할 것이라고 하시는데, 간단히 말하면 루하마요 암미입니다. 본래는 로루하마요, 로암미입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고, 내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의 죄 때문입니다. 그들의 음행 때문입니다. 하나님 한분만을 섬기지 못하고 우상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주체이신 하나님 자리에 우상을 올려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이때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에게 어떤 가능성을 보고서 그렇게 하시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가능성은 없습니다. 찾아볼려고 해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랑하기도 하셨기 때문에, 그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긍휼을 베풀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고, 내 백성이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당연이 이때도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까지를 포함합니다.

    오늘 본문 23절 맨 처음에 나오는 ‘내가 나를 위하여’라는 말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위하는 것은 결코 이기적인 것이 아닙니다. 왜 우리더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까? 하나님이 이기적이기 때문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이기적일 것 같으면 굳이 우리를 구원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기 아들까지 세상에 보내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 아들로 하여금 십자가 형벌을 받게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을 위하여 그렇게 하셨습니다. 즉 내가 너를 선택했기 때문에, 내가 너를 사랑하기로 했기 때문에, 무선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하기로 했기 때문에 내가 나를 위하여 그 일을 이루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때문에 하나님은 한번 선택하신 백성을 버리시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버림을 받았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택한 자기 백성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다 아담 안에서 범죄한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지, 하나님 탓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택자 역시 동일한 죄 가운데 있지만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정하신 바를 결코 변경함 없이 실행하십니다. 그래서 죄로 말미암아 긍휼히 여기지 않겠다고 하셨지만 내 백성이 아니라고 하셨지만 그들을 돌이키게 만든 후에 다시금 긍휼을 베풀겠다, 내 백성이 되리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때서야 비로소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할 수 있도록 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주는 내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철저히 하나님 홀로 일하신 결과로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겁니다.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한다고 할 때 그것은 나의 나 됨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고 말한 바울의 말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내용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이 말씀처럼 남은 자를 통하여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을 증거 하게 하시고, 그 수를 많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을 이루셨고, 지금도 이루고 계신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한번 말씀하신 것에 대하여 얼마나 신실하게 역사하시는지를 다시금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그가 하신 말씀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말씀하시고서 이루지 못한 것이 없습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그만큼 신실하십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시는 것은 그것이 곧 하나님의 백성에게 유익으로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지 않고 어떻게 우리가 구원의 은혜를 누리겠습니까? 즉 하나님을 위한 것이 사실 하나님의 백성의 유익으로 있는 겁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살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겁니다. 너를 위해 살지 말고 나를 위해 살라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는 겁니다. 즉 그를 위하여 사는 것이 바로 우리가 가장 복된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길로 있는 겁니다.

    여러분, 성도의 견인이라는 교리가 있습니다. 견인이라는 말 자체는 ‘인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신학에서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즉 영원한 구원에 이르도록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보존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내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는 인내를 말할 때 내 쪽에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인내해야 한다고 권면할 때 여러분이 해야 한다는 측면에서도 분명 말합니다. 그러나 그때도 주체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떤 확신을 합니까?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만약 사람이 주체면 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너무나도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단 1%라도 이바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구원에 이르게 된다면 그것은 100% 하나님께서 견인의 은총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랑 되신 그리스도의 신부라면 철저히 그의 이름을 위하여 사는 것이 우리를 위한 것인 줄 알고 그런 방향으로만 나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연약함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이루어주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셨기 때문에 그분에게만 영광을 올려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긍휼을 입은,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리는 자들의 마땅한 삶인 것입니다.


    호세아 2:19~20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장가 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자기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지으셨습니다(창 1:27).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의 마음(성품)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 중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것은 인간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 곧 당신의 마음과 성품을 주어 인간을 지으신 것은 우리를 당신의 사랑의 대상자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천군과 천사들을 당신의 사랑의 대상자로 삼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오직 당신의 종(사역자)으로 삼으셨을 뿐이었습니다(히 1:14).

    ​오늘 말씀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실함으로 장가들어 영원한 우리의 남편이 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스스로 하나님을 떠나 버렸습니다. 
    그 때부터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죽음이 시작되었고, 인간에게 큰 불행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을 거절하고 떠나버린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독생자를 보내사 인간들의 죄를 위해독생자를 대신 화목제물로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그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우리에 대한 자기의 변함이 없으신 사랑을 십자가로 확증하셨습니다. (롬 5:8)

    이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자는 자기 아들의 피로 거듭난 사람들임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늘 하나님을 배반하고 사랑하지도 않는데,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짝사랑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그 사랑을 입고 사는 거룩한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이(고전 1:2) 실제로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주님과 관계가 실제가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바리새인들 처럼 형식적이고 율법적인 종교생활에 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어떤 지식이나, 사상이 아닙니다. 
    신앙은 실제입니다. 
    신앙의 실제는 너무 중요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실제입니다.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도우심과 지키심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 실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되심도 실제입니다.
    예수님도 실제입니다. 
    그분의 십자가도 실제입니다. 
    그의 피로 구원을 받은 것도 실제입니다.

    성령님도 실제입니다. 
    성령님이 지금 내 안에 내주해 계심도 실제입니다.
    주님의 피로 성도된 내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것도 실제입니다.
    천국도 실제입니다. 마귀도 실제요, 그의 종들인 귀신들도 실제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어떤 동화나 지어낸 설화나 우화가 아닙니다.

    오늘 내가 생을 마친다면, 내안에 영으로 내주해 계신 주님을, 내 눈으로 직접 뵈올 것도 실제인 것입니다.

    이 진리가 여러분의 삶에 중심이 되셨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삶이 달라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믿는 것도 아니고, 안믿는 것도 아닌 것에서)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 일이 우리가 돈을 버는 것처럼 내 삶에 실제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앙생활을 다른 종교인들이 하는 것처럼 나를 위한 종교생활이 되어서는 안되지 않겠습니까?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은 우리를 실제로 좋아하시고, 진실로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우리를 당신의 연인으로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믿는 신앙생활이 나의 삶의 전부가 되어야 하고 정말 실제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된 우리가 자기 아들 예수를 미칠 것만큼 사랑하는 그런 신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오직 예수만 생각하고, 예수만 사모하고, 예수만 갈망하고, 예수만 사랑하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당신은 예수만 사랑하는 예수님의 연인이 맞습니까?


    호세아 2:1-23

    호세아 2장은 1장 10절과 11절에 이어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형제에게는 암미라 하고 너희 자매에게는 루하마라 하라”

    사실 1장 6절에서 호세아와 고멜사이에서 태어난 딸의 이름은 로루하마, 즉 “불쌍히 여기지 않다” 였습니다. 또 1 장 9절에서는 호세아와 고멜의 둘째 아들의 이름은 로암미 즉, “나의 백성이 아니다” 였습니다.

    그러나 2장 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의 형제를 암미 즉 “나의 백성”이라 부르시고 그 자매들을 루하마 즉 “불쌍히 여기다”라고 부르신다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를 발견합니다. 분명 이스라엘 백성들은 현재 하나님을 떠나 바알숭배에 빠져 있는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회복의 약속을 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회복은 미래에 있지만 그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현재에 주어진다는 겁니다.

    사람은 현재 자기 자신의 상황과 형편이 좋지 않으면 앞날을 내다보며 소망을 가지기가 참 힘듭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가능성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위로는 결코 암미나 루하마가 될 수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암미와 루하마로 부르시고 대접해 주신다는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우리의 모습 역시 로암미와 로루하마 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이미 우리를 암미와 루하마로 불려주십니다. 그러기에 신약성경 로마서 5장 8절은 이렇게 증거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때, 즉 우리가 로암미와 로루하마 였을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으시고 우리를 암미와 루하마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2절부터 5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고발하고 계십니다. 그 죄목은 간음입니다. 호세아와 고멜과의 결혼관계는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부정한 아내와 같은 이스라엘은 어리석고 생각이 없으며 기억을 잘 못합니다. 그러기에 심지어 8절을 보면 하나님이 주신 물질들도 마치 바알이 준 것처럼 착각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일이 잘 풀릴 때 단지 운이 좋았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대신에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 역시 과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잘 기억하지 못하는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13절입니다. 부정한 여인이 남편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해 결국은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닙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복으로 이끄십니다. 14절과 15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때와 애굽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물질적인 회복뿐만 아니라 아내된 이스라엘이 처음과 같이 하나님을 섬길수 있도록 내적인 변화를 주신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사실 우리 자신의 내적인 변화도 우리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주하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속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16절과 17절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회복된 이스라엘은 예전의 나쁜 모습을 완전히 버리게 됩니다.

    16절을 보면 "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고 말씀합니다. 내 바알이라고 번역된 "바알리"라는 단어는 "내 남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우상 바알과 이름이 같기에 다시는 이렇게 부르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18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남편되시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언약을 맺으며 그들에게 다가오는 모든 위험에서 보호해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댈 곳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오직 하나님만이 채워 주실 수 있는 부분들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시편 139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 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이러한 다윗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시기에 20절에서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머리를 통해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몸으로 익힌 전인적인 깨달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결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자격도 없고 긍휼히 여김을 받을 자격도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참다운 회복이란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바르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암미와 루하마라 불러주실 때 우리 역시 23절의 마지막 구절처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는 응답을 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로암미와 로루하마 같은 우리를 먼저 암미와 루하마로 부르시고 그렇게 우리를 만들어 가시는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의 그 사랑을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온몸과 마음으로 경험하여 온전히 깨달아 알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도 암미와 루하마로 살아가는 한 날이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너를 부르시되 마치 버림을 입어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 곧 소시에 아내 되었다가 버림을 입은 자에게 함같이 하실 것임이니라 네 하나님의 말씀이니라.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의 말이니라."

    외간 남자와 놀아난 여자를 다시 아내로 맞이할 수 있는 그 마음은 크고 넓고 높고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주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 이스라엘의 영적 간음은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를 좋아하며 즐긴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나에게는 영적 간음을 즐기던 이스라엘과 같은 잘못은 없었는지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향한 온전하고 순수한 사랑의 헌신으로 사랑의 위대함을 알려야 하겠습니다.

  • 참 하나님을 안다는 것—무엇을 의미하는가?

    1, 2. 이사야 2:3에 따르면, 마지막 날에 무슨 초대가 있으며, 누가 초대됩니까?

    마지막 날에 관한 이사야의 감동적인 예언은 모든 민족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끄는 초대를 발합니다. 그 초대는 참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게 되라는 것입니다.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라.]”a이사야 2:3.

    2 이 예언을 보면, 마지막 날에 세계적으로 많은 민족의 사람들이 하나의 공통된 교훈의 근원으로 인도되어, 참 하나님을 알게 되도록 도움을 받을 것임을 알려 줍니다. 어떤 진리를 그들이 배움으로써 참다운 평화의 결속으로 연합하게 될 것입니까?

    3. 성서의 중요한 한 가지 특징이 어떻게 전통으로 인해서 거의 사라졌습니까?

    3 성서의 두드러진 특징 한 가지는, 전통으로 인해서 거의 사라지긴 했지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며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부를 때 그분의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그분과 가장 친밀한 사이로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벗이 있는데, 그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거나 심지어는 누가 물어도 알려 주지 않으려고 할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대개는, 원수지간이라야 너무 싫은 나머지 상대방의 이름을 언급하는 일조차 하지 않으므로 그의 존재를 인정해 주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고대 이스라엘과 그들의 하나님 사이에 있었던 특별한 관계—그로 인하여 그들은 이름으로 그분을 알았음—가 고대 시편 필자에 의해서 이처럼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시 91:14.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해야 하는가?

    4, 5. 하나님의 이름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4 성서의 관점에서 볼 때, 참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 의문이 있은 적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실 때, 그를 사용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속박으로부터 인도해 내시겠다고 설명하시자, 모세는 이처럼 논리적인 질문을 하였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히브리어, יהוה = YHWH = 야훼 또는 13세기 이후로,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출애굽 3:13, 15, 사체로는 본 책자에서.

    5 이 이름은 히브리어를 아는 사람이 보면 의미가 깊습니다. 그것은 “되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어근 הוה 즉 h·w·h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름은 히브리어 문법에 의하면 사역형 즉 히필입니다. 그러므로 그 기본 의미는 하나님이 영원히 존재하심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사물이 존재하게 또는 발생하게 하신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특히 그분의 목적과 관련해서 독특한 면으로 참됩니다. 택하신 백성을 애굽의 속박으로부터 자유케 하시기로 목적하셨을 때, 그분은 그 일이 그렇게 되게 하셨습니다. 어떤 세력도 그분이 천명하신 의사를 가로막을 수 없었습니다. 여호와는 자신의 목적이 성취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하여 그분은 자신이 약속의 성취자가 되게 하십니다. 이 점은 자신의 백성을 바벨론 포로 상태로부터 자유케 하시려는 목적에 있어서도 사실이었습니다. 이 땅에 낙원 상태를 가져오실 목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의 이름 자체가 이러한 약속들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 보증이 됩니다.—이사야 41:21-24; 43:10-13; 46:9, 10.

    6-9. (ㄱ)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의 사용을 금하시지 않음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ㄴ) 하나님의 이름의 사용 금지가 언제 어떻게 유대교의 일부가 되었습니까?

    6 그러나 십계명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발음하는 일을 금하지 않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세 번째 계명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유대 백과 사전」의 이러한 설명에 유의해 봅시다. “YHWH라는 이름의 발음을 기피하는 현상은 ·⁠·⁠· 셋째 계명(출애굽 20:7; 신명 5:11)의 의미를 ‘너는 너의 하나님 YHWH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로 오해함으로써 생겼다. 하지만 참 의미는 ‘너는 너의 하나님 YHWH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하지 말라’는 것이다.”5 유의할 점은 하나님의 이름을 ‘일컫는’ 것 즉 발음하는 것을 이 성구가 금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일을 의미한다 해도, 쾰러와 바움가르트너의 공저인 히브리어 고어 사전에서는 “헛되이”로 번역된 히브리어 용어(라슈샤우)를 “이유 없이 이름을 부르다 ·⁠·⁠· 이름을 오용하다”6로 설명한다는 점에 유의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이 금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의 사용이 아니라 그 오용입니다.

    7 그렇지만, 하나님의 이름이 “발음하기에는 너무 거룩하다”는 주장은 어떠합니까?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사람이 발음하기에는 너무 거룩한 것으로 보셨다면, 처음부터 아예 계시하시지도 않았어야 이치적이 아니겠습니까? 히브리어 성경 원본에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이 6800번도 넘게 나온다는 사실 자체가 알려 주는 바는,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을 알고 그 이름을 사용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경 행위를 막기 위해 자신의 이름의 사용을 제한하시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백성이 그 이름을 사용하고 또 알릴 것을 반복해서 격려하시고 심지어는 명령하기까지 하십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분에 대한 사랑은 물론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의 증거이기도 하였습니다. (시 91:14) 예언자 이사야는 이 문제에 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히는 이러한 말을 하였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 이름을 부르며 그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 이름이 높다 하라.”—이사야 12:4. 또한 참조 미가 4:5; 말라기 3:16; 시 79:6; 105:1; 잠언 18:10.

    8 여호와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발음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셨다면 미리 명백히 그것을 금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성서 어디에서도 그분의 이름의 합당한 사용이나 발음을 금하지 않습니다. 성서 시대의 충실한 사람들은 그분의 이름을 자유롭게 사용하였습니다. (창세 12:8; 룻 2:4; 4:11, 14) 사실상,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으로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자들을 반복적으로 정죄하셨습니다.—예레미야 23:26, 27; 시 44:20, 21.

    9 이러한 금지 사항은 성서의 일부가 아님이 매우 분명한데, 어떻게 유대인 사상의 일부가 되었습니까? 랍비이자 「만인의 탈무드」(Everyman’s Talmud)의 저자인 A. 코헨 박사의 설명을 보면 이 전통이 여러 세기에 걸쳐 점차적으로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코헨 박사의 기록은 이러합니다. “성서 시대에는 일상 대화에서 그 이름을 사용하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었던 것 같다. 개인들의 이름에 또는 야후를 붙이는 일이 유대인들 간에, 심지어 바벨론 유배 이후까지 지속된 것으로 보아, 이 네 글자 이름의 사용이 금지 사항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초기 랍비 시대에 와서는 이 이름을 발음하는 것이 성전 봉사로만 제한되었다.” 이 시대에 더 진전된 일에 대해 그는 이와 같이 말한다. “그 이름은 JHVH 대신 회당 예배에서 아도나이(내 주)라고 불리었다. 그러나 원래의 발음은 현인들에 의하여 그 제자들에게 주기적으로—7년마다 한두 번씩—전수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키두신 71) 그 관습조차도 잠시 후에는 사라져서, 그 이름의 발음법을 이제는 확실히 모른다.”7 바로 그것이 “사람의 계명”의 결과였습니다.—이사야 29:13; 신명 4:2; 참조 9면 15, 16항.

    이름을 지닌 자들에 대한 요구 조건

    10-14. (ㄱ)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지닐 사람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십니까? (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형태의 순결이 요구됩니까? (ㄷ) 어떤 외부의 이교 영향이 유대교에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까?

    10 분명히,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있거나 사용하기까지 한다 해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는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참 숭배자의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지니는 것은 독특한 특권입니다. 예언자 예레미야가 이처럼 선포한 바와 같습니다.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이오니] ·⁠·⁠·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니이다.]” (예레미야 15:16) 그러나 이 웅대한 특권에는 막중한 책임이 따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방 나라의 왕들에게 이처럼 단언하셨습니다. “내가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성에서부터 재앙 내리기를 시작하[리라.]” (예레미야 25:29)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70년 간의 바벨론 포로 상태로부터 석방시키시기 전에 이미 예언자 이사야를 통하여 그 백성에게 이와 같이 경고하셨습니다. “너희는 떠날찌어다 떠날찌어다 거기서 나오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찌어다 그 가운데서 나올찌어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여 스스로 정결케 할찌어다.” (이사야 52:11) 오늘날 참 숭배자들, 가장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지닌 자들로서 정결케 하는 데는 즉 순결을 유지하는 데는 무엇이 포함됩니까?

    11 확실히, 숭배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행실, 특히 하나님 자신이 세워 놓으신 도덕 표준에 관한 행실에 있어서 순결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오늘날 사회의 방임적 표준과는 대조적으로 성경은 거짓말, 도둑질, 음행, 간음, 동성애, 살인 및 온갖 형태의 속임수에 대한 하나님의 정죄를 표현함에 있어서 해석상 의문의 여지를 남기지 않습니다. (출애굽 20:12-16; 23:1, 2; 레위 5:1; 19:35, 36; 20:13) 성경은 나쁜 행동 자체만 아니라 나쁜 행위로 인도하는 나쁜 생각까지도 정죄합니다.—출애굽 20:17; 레위 19:17; 시 14:1-5; 욥 31:1, 9-11.

    12 도덕적 순결에 더하여 종교적 순결도 여호와의 이름을 지닌 자들에게는 분명히 요구될 것이었습니다. 반복적으로, 여호와께서는 고대 이스라엘 민족에게 다른 신들을 숭배하는 이웃 나라들의 종교적 사상과 행위 그리고 관습으로부터 영향받지 말도록 경고하셨습니다. 사실상, 바로 이 조건—그들이 열국의 거짓 숭배를 모방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만 그들은 약속의 땅에 머무를 수 있었습니다. (레위 18:24-30; 신명 12:29-31) 우상 숭배가 분명히 금지되었을 뿐 아니라 점성술, 영매술, 점, 마법 그리고 죽은 자에게 기도하거나 죽은 자에게 묻는 일과 같은 온갖 형태의 미신과 미신 행위도 금지되었습니다.—출애굽 20:3-5; 22:18; 레위 20:27; 신명 18:9-13; 이사야 8:19, 20; 47:13; 예레미야 10:2.

    13 종교적 순결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문제는 교리적 순결입니다. 주변 나라들의 도덕과 숭배를 모방하지 말라는 경고는, 단지 이스라엘 나라가 가나안 사람들에게서 그 땅을 차지할 당시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미 종교적 진리를 자신의 백성에게 계시하셨습니다. 그들만이 참 하나님 여호와를 숭배하였습니다. (출애굽 19:5, 6; 신명 4:32-37; 시 147:19, 20) 그들만이 이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았고, 그분의 증인들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분에 관해 가르칠 입장에 있었습니다. (이사야 43:9-12; 시 105:1) 이와는 반대로, 다른 나라들의 종교 관습과 행위에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기본적으로 없음이 드러났습니다.—이사야 60:2.

    14 그 좋은 시작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반복적으로 외부 종교 사상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사사 2:11-13; 열왕 상 18:21; 예레미야 2:11-13; 에스겔 8:14-18) 가나안 문화와 바벨론 문화가 지속적인 영향을 남긴 한편, 유대교가 직면한 전무후무한 큰 도전은 그리스 제국에 의한 헬레니즘 문화 시대에 닥쳐 왔습니다.b 기원전 4세기로부터 통용 기원 수세기까지에 이르는 그리스 문화의 장기간의 영향을 요약해서, 유대인 저술가 막스 디몬트는 이와 같이 평하였습니다. “플라톤의 사상,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 및 유클리드의 과학으로 견문을 넓힌 유대인 학자들은 새로운 도구를 가지고 토라 연구에 착수하였다. ·⁠·⁠· 그들은 결국 그리스의 이성을 유대인의 계시에 부가하였다.”

    인간에게 불멸의 영혼이 있는가?

    15-17. (ㄱ) 성서는 사망과 영혼에 대하여 무엇을 가르칩니까? (참조 22면 네모) (ㄴ) 성서는 죽어 간 사람들에게 무슨 희망을 제시합니까?

    15 유대교의 교리와 신앙도 이 시기에 영향을 받았습니까? 「유대 백과 사전」은 이처럼 솔직하게 시인합니다. “영혼불멸 교리가 유대교에 들어오게 된 것은 아마 그리스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8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원래 사람이 이 땅에서 완전한 건강 가운데 영원히 살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셨음을 간단 명료하게 가르칩니다. (참조 11-12면, 2항부터 4항) 창세기 2:7을 보면 이러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산 영혼”, 「신세」]이 된지라.” 이 성구에서는 사람이 영혼을 받았다고 하지 않고 영혼이 되었다고 명시하고 있음에 유의할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반역하였기 때문에 사망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 결과 아담은 한 인간 영혼으로서 죽었습니다. 그의 어떤 부분도 다른 세계에서 계속 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불멸의 영혼 개념은 성서의 가르침이 아닙니다.c 성서는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고 간명하게 말합니다.—에스겔 18:4.

    16 죽은 자의 상태에 관하여 성경에서 알려 주는 내용은 영혼이 죽는다는 성서의 가르침과 일치 조화합니다. 전도서 9장 5절과 10절을 보면 이러합니다.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며 ·⁠·⁠·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스올, 인류의 일반 무덤]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비교 시 146:3, 4) 사망은 하나님께서 형벌로 내리신 것이었습니다. (창세 2:17) 그것은 생명의 반대이지, 다른 형태의 생명이 아닙니다. 사실이 그러하기 때문에, 성경 어디에서도 지옥불(게 힌놈)에서 불에 타는 형벌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고 해서 놀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 역시 그리스 철학과 이교 교리에서 흡수된 개념입니다. 환생에 대한 유대인의 신화적 신앙에 관하여 「신 표준 유대 백과 사전」(The New Standard Jewish Encyclopedia)에서는 이와 같이 설명합니다. “그 관념은 인도에서 유래한 것 같다. ·⁠·⁠· 카발라[유대교의 신화 책들]에서는 「바히르」라는 책에 처음 나타나고, 다음 조하르부터는 신비주의자들에게 보편적으로 수용되어 하시드파의 신앙과 문헌에 중대한 기여를 하였다.”9

    17 사망은 생명의 반대이고 영혼은 다른 세계에서 계속 사는 것이 아닌데, 죽어 간 사람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메시야 왕의 개입에 의해서 지상 인류에게 낙원 상태가 회복된 다음에 죽은 자들 대부분이 생명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가르칩니다. 이러한 성서의 가르침을 가리켜 종종 ‘죽은 자의 부활’이라고 합니다. 부활될 사람들 가운데는 하나님을 충실히 섬겼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분에 관하여 배우고 진리로 섬길 기회가 충분히 없었던 수많은, 아니 수십억이나 되는 사람들도 포함될 것입니다.—다니엘 12:2, 13; 이사야 26:19; 욥 14:14, 15.

    18, 19. 우리는 왜 참 하나님을 알게 되어야 하며,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18 땅에서 완전한 생명으로 부활된다는 이러한 성서의 희망은 모든 나라의 사람들에게 참 하나님을 찾아 알려는 강력한 동기를 갖게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사야 2:2, 3에 언급된 바와 같이, 이 마지막 날에 여호와로부터 나오는 교훈의 참 근원은 어디입니까? 누가 사람들을 여호와의 길로 교훈하여 “그 길로 행”하게 할 수 있습니까? 지금까지 살펴본 성서 지식에 비추에 볼 때, 유대교나 그리스도교국이 그러한 교훈을 베풀 수 있습니까?

    19 예언에 따르면, 순결한 가운데 여호와의 이름을 지닌 한 집단의 사람들, 참으로 그분의 증인인 동시에 나라들에게 영적 빛의 근원 역할을 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었습니다.—이사야 60:2, 3.

    [각주]

    a 이 예언을 무심코 읽어 보면 마지막 날에 유대교로 대대적인 개종이 있을 것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문맥 자체로 보거나 현재 사건들로 볼 때 그것은 정확한 견해가 아니다. 이 부분과 다음 부분에 나오는 설명은 이렇게 결론 내리는 이유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b 알렉산더 대왕의 통치 시기(기원전 336-323년)로부터,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철학, 문화 및 언어를 그리스 제국의 영역 모든 나라에 확산시키고자 힘을 모았다. 그리스 문화와 사상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그리스화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리스 문화에 여타 문화를 예속시키려는 그러한 노력은 로마 제국 아래서도 끊이지 않았다. 그리스를 정복한 로마였지만 그리스의 문화와 철학에는 매료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 영향의 사조에 저항해 보려고 표면상 열심히 투쟁한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그리스 철학의 사상, 논법 및 주의(主義)를 받아들인 증거는 역력하다.

    c “영혼”으로 번역된 단어는 성서 히브리어로 네페슈다. 그런데 오늘날 유대교에서는 종종 히브리어 단어 네샤마를 사후에 계속 존재하는 사람의 일부분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성경을 면밀히 연구해 보면 네샤마라는 단어는 결코 그러한 의미를 전달한 적이 없음이 밝혀진다. 그 단어는 단지 호흡 과정 또는, 사람이든 동물이든, 호흡하는 피조물을 가리킬 뿐이다.—창세 7:22; 신명 20:16; 여호수아 10:39, 40; 11:11; 이사야 2:22.

    [20, 21면 네모]

    성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 여호와[히브리어, יהוה = YHWH]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출애굽 3:15, 사체로는 본 책자에서.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룻 2:4.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 이름을 부르며 그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 이름이 높다 하라.”d이사야 12:4, 사체로는 본 책자에서; 시 105:1.

    “그 때에 내가 열방의 입술을 깨끗케 하여 그들로 다 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일심으로 섬기게 하리[라.]”—스바냐 3:9, 사체로는 본 책자에서.

    “주를 알지 아니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열국에 주의 노를 쏟으소서.”—시 79:6, 사체로는 본 책자에서.

    탈무드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사람들이 말한 것

    “사람은 친구에게 인사할 때 그 이름을 언급해야 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베라코트 9:5.

    “이와 같이 그[속죄일의 대제사장]는 말하였다. ‘오 JHVH여.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 집이 당신 앞에 죄악을 범하고, 범과하고, 죄를 지었나이다. 당신께 JHVH의 이름으로 간청하나이다. ·⁠·⁠·’ 그러면 성전 뜰에 서 있던 제사장들과 백성들은, 대제사장의 입에서 낭랑하게 흘러나오는 그 거룩하고 존귀한 이름을 들을 때, 거룩함과 순결함 가운데 무릎을 굽히고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이렇게 외쳤다. ‘그분의 거룩하고 지존하신 이름을 영영히 송축하리로다.’”—요마 6:2.

    “성소에서는 그 이름을 기록된 대로 발음하였다. 그러나 그 경계 밖에서는 대치된 이름을 사용하였다.”—소타 7:6.

    “처음에는 대제사장이 그 이름을 큰소리로 포고하곤 하였다. 그러나 질이 나쁜 사람들이 많아지자 낮은 소리로 포고하였다.”—「예루살렘 탈무드」, 요마 40.

    “그 이름을 글자 그대로 발음하는 자[는 장차 올 세상에서 제외된 자들 가운데 속한다.]”—산헤드린 10:1.

    “그 이름을 입 밖에 내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사형 죄에 해당한다.”—페식타 148.

    [각주]

    d “그 이름을 부르[라]”(히브리어, קראו בשמו)는 구절은 “그분을 이름으로 부르라”로도 번역될 수 있다. (비교 「신 영어 성서」) 같은 히브리어 구문이 “[아브람]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라]”고 번역된 창세기 12:8에도 나온다.

    [22면 네모]

    사망과 영혼—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경이 말하는 것: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산 영혼, 네페슈]이 된지라.” (창세 2:7, 사체로는 본 책자에서) 사람이 영혼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영혼이 것임에 유의해야 한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창세 2:17) 첫 사람 아담에게 사망은 불순종에 대한 형벌로서만 언급되었음에 유의해야 한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세 3:19.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네샤마]를 하나도 살리지 말찌니[라.]”—신명 20:16.

    “그 성읍을 취하고 그것과 ·⁠·⁠· 그 중의 모든 사람[영혼, 네페슈]을 칼날로 쳐서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 그 성읍과 그 중의 모든 사람[영혼, 네페슈]을 진멸[하였더라.]”—여호수아 10:37.

    “그 가운데 모든 사람을 칼날로 쳐서 진멸하여 호흡이 있는 자[네샤마]는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더라.]”—여호수아 11:11.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네페슈]이 죽으리라.”—에스겔 18:4, 사체로는 본 책자에서.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며 ·⁠·⁠·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인류의 일반 무덤]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전도 9:5, 10.

    랍비들이 말한 것:

    “제7하늘 아라보트에는 창조를 기다리는 영들과 영혼들이 간직되어 있다.”—하기가 12ㄴ, 탈무드.

    “안식일 전야에는 영혼이 하나 더 사람에게 주어졌다가, 안식일 종료 시에 그에게서 나간다.”—타아니트 27, 탈무드.

    “[사후] 만 12개월 동안 몸은 계속 존재하며, 영혼은 오르내린다.”—샤바트 152, 탈무드.

    “죽은 자에게 벌레가 고통스럽기는 산 자의 육체에 바늘이 꽂힌 것과 같다.”—샤바트 13, 탈무드.

    “죽은 사람의 이름으로 현세에서 무엇을 말하면, 그 사람의 입술이 무덤에서 움직인다.”—산헤드린 90, 탈무드.

    “유대교는 ‘몸의 사망 후 영혼의 불멸을 보장하는 종교’이다.”—쿠자리 1:103, 유다 할레비, 12세기 랍비.

    [23면 삽화]

    이스라엘, 디베랴(티베리아스)에 있는 이 고대 회당 바닥은 그리스 사상과 문화가 유대교에 미친 영향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 주는 한 예에 불과하다. 황도 12궁이 보이고 그 이름들이 히브리어로 쓰여 있다. 가운데 있는 그림은 태양신 헬리오스다



  • 리더스다이제스트사가 펴낸 <세계상식백과>에 있는 기록에 따르면, 
    피지 군도의 작은 섬 '베카'라는 곳에서는 '음베테'라고 불리는 고승과 그 제자들에 의해 불 위를 걷는 의식이 행해진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직경 4.5 내지 6m 정도의 구덩이를 1 내지 1.5m 깊이로 파냅니다. 
    통나무를 그 안에 잔뜩 쌓고 그 속에 돌을 집어넣습니다. 
    통나무가 타들어 가면서 돌이 차곡차곡 쌓이게 됩니다. 
    준비가 완전히 끝나면 '음베테'는 돌 위에 마른 잎을 뿌려봅니다. 
    그러면 금방 불길이 일어납니다. 
    돌이 달구어진 것입니다. 
    이윽고 고승과 제자들은 돌 위를 천천히 걸어다니다가 나오는데 상처 하나 생기지 않습니다.

    이와 비슷한 의식이 스리랑카 콜롬보 북쪽의 작은 어촌에서도 매해 벌어진다고 합니다. 
    또한 남부 인도의 일부 촌락에서도 해마다 벌어지는데 특히 '우다이푸르' 마을이 유명하다고 합니다. 
    불구덩이- 보통 8㎡ 에 1m 깊이-에 불이 준비되면 어찌나 뜨거운지 구경꾼은 10m 안으로는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서양의 과학은 중화상을 입지 않고 어떻게 사람들이 불 위를 걸어다니는지에 대해 합리적으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의사들이 피지섬과 스리랑카에서 불 위를 걸은 사람들을 조사해 보았으나 발바닥에 화상은 전혀 없었으며 발바닥 피부의 감각도 정상이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이런 일이 세계 어느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면 그 옛날 다니엘 때에도 있을 수 있었겠지요. 
    다니엘이 불구덩이를 태연히 거닐다가 상처 하나 없이 나왔다는 기록에 대한 입장을 다시 정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람이 불구덩이 속을 손끝 하나 상하지 않고 걸어다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과 그럴 수는 없다고 믿는 사람으로 말입니다. 
    글 앞쪽에서는 '믿는다'라고 했던 것이 이제는 '안다'가 되어 버렸고, '안다'고 했던 것이 '믿는다'가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많은 기적을 베푸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눈으로 본 유대인들 중에도 믿지 않는 자가 많았습니다. 
    그들이 믿지 않은 것은 믿지 않으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믿지 않으려는 마음을 가진 자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알 수가 없습니다. 
    믿지 않는 자에게는 앎이 허락되지 않는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바로 믿는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믿을 수 있다. 
    You can see and trust as much as you know.

    신명기 7:9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Know therefore that the LORD your God is God; he is the faithful God [NIV] <Deuteronomy 7:9>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인간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 이상으로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을 것이라.”
    (Men will trust in God no further than they know Him) 

  • 똑같은 것을 보아도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알고, 더 아는 만큼 더 깊게 보게 되는 법이지요. 
    참된 신앙도 결국은 창조주 하나님을 알거나 알아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기적 같은 영혼의 변화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거듭남’이나 ‘새로운 피조물’ ‘새 것’ 등의 단어로 표현하고 있고, 
    예수님 육신의 동생인 유다는 이를 ‘단 번에 주신 믿음의 도’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어디서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 수많은 것 중에서도 가장 정확하고 직접적인 것이 ‘그의 말씀’ 곧 성경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경건한 사람들은 성경연구에 시간과 노력을 쏟고 있지요. 
    때로는 믿는다는 사람들도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바르게 그리고 많이 알고 있는지를 살펴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이들이 성경말씀을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더욱 많이 알고, 그분을 더욱 깊이 신뢰하며 살아가기를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 예수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르다

    마태복음 16:15-17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기독교 신앙의 기초에는 바른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가리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도 베드로와 같은 신앙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바른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로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아는 것이지 믿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는 것에서 믿는 것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지식적으로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신적지식인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것이 전부인줄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런 신앙고백을 한 것이 곧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 것이지,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성경을 통해서 믿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해 보면 드디어 아는 것의 한계가 무엇인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알게 하다아포칼립토 라고 하는데 덮개를 제거하다, 계시하다, 보여주다 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스스로 알리실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ἀποκαλύπτω 스트롱번호 601

    1. 드러내다.  2. 폭로하다.  3. ἀ
    발음 [ apŏkalüptō ]

    어원 / 미래 ἀποκαλύψω, 제1부정과거 ἀ- πεκάλυψα,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ἀπε- καλύφθην, 미래수동태 ἀποκαλυφ- θήσομαι, 575와 2572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드러나다(마 10:26, 눅 12:2), 나타내다(마11:25, 고전3:13, 갈1:16), 나타나다(눅17:30, 롬1:17, 살후2:6), 드러내다(눅2:35), 계시를 받다(눅10:22), 알게 하다(마16:17), 보이다 (고전2:10), 계시되다(갈3:23).

  • 흔히 계시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스스로 알 수 없도록 닫혀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열어서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말씀이 바로 계시입니다. 
    감추어진 것을 열어서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간접적인 지식이며 간접적인 경험입니다.

    우리가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것과 내가 삶의 현장에서 직접 체험하는 것은 다른 것과 같습니다. 
    영화를 보게 되면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의 경험들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얻는 지식은 내가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닙니다. 
    간접적인 경험과 지식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알게 해 주셔서 터득한 지식은 내가 직접 체험해서 믿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간접적인 경험이며 간접적인 지식입니다.

    그렇다면 믿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아는 것과 믿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먼저 믿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해 보면 자연적으로 아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아는 것과 믿는 것의 차이점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시고 나는 과연 믿는 사람인지 지식적으로 아는 사람인지 점검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을 내 마음에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믿는 것과 영접하는 것이 같은 내용이지만 사람들이 오해하지 못하도록 영접하다(인격적으로 받아들이다) 라는 단어를 믿는다는 단어보다 앞세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내 마음에 주인으로 영접하고 모셔 드리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셔서 하나님의 모든 것을 상속받게 하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마음에 주인으로 모시게 되면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그대로 받아서 예수님과 동일한 자녀의 권세를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셨던 일을 그대로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특권이며, 축복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내 마음에 주인으로 모셔 드리는 것입니다. 

    로마서 14:7-9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예수님을 내 마음에 주인으로 모셔 드린 사람은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생명은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이 생명의 주인이기 때문에 생명에 대한 애착이 강하여 죽음에 대하여 극도의 공포와 두려움을 느낍니다. 
    죽는 것을 너무나 싫어합니다. 
    그러나 부활의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게 되면 생명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주님이 알아서 할 일이지 내가 염려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또한 죽어도 다시 살기 때문에 죽음은 두렵지 않습니다.

    죽음이 두려워서 벌벌 떨거나 죽음을 피하려고 도망간다면 그 사람은 아직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셔 드리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때문에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죽음이 두려워서 다 도망갔다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결정적인 증거이며, 또한 생명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했다는 불신앙을 단적으로 보여 준 사건입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2. 참된 믿음은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믿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셔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믿을 만한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가 버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그 전에도 부활의 예수님을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었고 구원받았습니다. 
    우편 강도와 같은 사람입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부활을 경험했을 때 드디어 주님 앞에 엎드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면서 즉시 예수님을 자신들의 주인으로 모셔 드렸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누구든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드디어 믿을 만한 증거를 가지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전까지는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지식적으로 아는 것에 불과합니다. 

    요한복음 2: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제자들이 언제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고 했습니까?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야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전까지는 지적인 동의만 했습니다. 
    이렇게 지식적으로 아는 것의 한계는 삶에 변화를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식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드디어 삶이 달라지고 변화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후에 삶이 획기적으로 변화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곧 예수님의 제자들이며,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를 기록하면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빌3:4-9/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 만큼 예수 믿고 놀랍게 변화된 사람은 없습니다. 그가 예수 믿기 전에는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부활의 예수님을 전하다가 도리어 엄청난 핍박을 받았습니다. 또한 그 동안 자신이 보화처럼 여겼던 세상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삶이 변화되지 않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관해서 알고 있을 뿐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을 믿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아는 것도 하나님이 깨닫게 해 주셔야 가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아는 데서 예수님을 믿는 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3. 참된 믿음에는 반드시 삶과 행동이 따르게 됩니다.

    약2:14-17/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야고보 사도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진리가 무엇입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믿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죽은 믿음이며 가짜입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면 반드시 내적인 변화와 함께 외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환경이 바뀌게 됩니다. 내가 바뀌고, 환경이 바뀌고, 주위 사람들이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열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고, 열매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삶의 열매를 통해서 사람들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마7:16-20/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했습니다. 삶의 열매를 보면 그 사람이 예수를 아는 자인지 예수님을 믿는 자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면 예수님의 성품인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히게 됩니다.

      공간복음을 통해서 제자들의 삶을 보시면 제자들은 위기를 만날 때마다 항상 불안해 하였고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항상 평안했습니다. 어떤 위기 앞에서도 불안해 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평안을 유지했습니다. 믿는 자가 맺게 되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위기나 죽음 앞에서 가장 분명하게 들어납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믿으면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부활의 신앙으로 죽음을 초월합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믿음이 됩니다! 히11:35-40/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39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들이야말로 믿는 자들이었습니다. 죽음 앞에서 두려워 떠는 자는 믿는 자가 아닙니다! 지식적으로 아는 자입니다. 지식적으로 아는 자는 행동이 따르지 않습니다.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약해서 행동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은 뻔한데 몸이 따라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는 자는 몸과 마음이 함께 움직입니다. 믿는 자는 죽음조차도 못 말립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세상이 못 말리는 사람입니다.

    4. 믿는 것과 아는 것이 일치합니다.

    이런 사람이 곧 온전한 사람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른 사람입니다. 
    예수님과 내가 하나가 된 사람입니다. 

    에베소서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이 신앙생활의 최고의 목표입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처럼 되는 것보다 더 큰 기대와 소망은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되는 방법은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같이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내 마음에 주인으로 모셔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내가 영적으로 연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내가 나의 몸 안에서 함께 사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밥을 먹을 때 예수님과 함께 먹습니다. 
    잠을 잘 때 예수님과 함께 잡니다. 
    예배드릴 때 예수님과 함께 예배를 드립니다. 
    기도할 때 예수님과 함께 기도합니다. 
    공부할 때 예수님과 함께 공부를 합니다.
     설교준비를 할 때 예수님과 함께 설교준비를 합니다. 
    직장생활 할 때도 예수님과 함께 직장생활을 합니다. 
    모든 것을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 내가 예수님처럼 되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에베소서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 말씀처럼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 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진리의 지식과는 일치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는데 아직도 원수를 미워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믿는 것과 아는 것이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믿음과 성경말씀이 일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사람은 마음이 항상 평안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문제 앞에서도 항상 평안해야 합니다.

    때로는 마음이 평안하다가도 어떤 문제를 만나고 삶의 파도를 만나게 되면 평안이 사라져 저립니다.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이런 사람은 믿음과 지식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아직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마음에 주인으로 모시지 않았습니다. 

  • 이런 사람은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사람입니까? 믿는 사람입니까? 
    만약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예수님을 지식적으로 아는 사람이라면 빨리 예수 믿지 않는 것을 회개하고 부활의 주님을 마음에 주인으로 모시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  
  • 9월 24일(수) 호세아 5-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께로 돌아가자(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Come, let us return to the LORD. He has torn us to pieces but he will heal us; he has injured us but he will bind up our wounds.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호세아 13:7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사자같고 길가에서 기다리는 표범 같으니라




    회복(恢復) /  넓을 회, 회복할 복
    -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


    restoration
    미국∙영국[ˌrestəˈreɪʃn]
    • 1. (낡은 건물·그림 등의) 복원[복구] 
      2. (이전의 제도·법률 등의) 부활 
      3. (제자리·원 상태로의) 회복, (본래 주인에게로의) 반환
    1. 회심(悔心) 요엘 2:12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2. 관계(關係) 여호수아 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3. 예배(禮拜) 요한복음 4:24 

    하나님은
    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4. 순종(順從) 사무엘상 15:22

    사무엘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것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שׁוּב 스트롱번호 7725

    1. 방향을 돌리다.  2. 회복하다.  3. 돌이키다
    발음    [ shûwb ]  
    구약 성경  /  1059회 사용


    어느 형제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주님을 영접하기 전에는 좋지 않은 생활을 하였습니다.
    시간만 나면 친구들과 만나서 술을 마시고 다른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어 싸움을 하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싫은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에 소아마비로 인해 목발을 짚고 다니는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그는 저를 무척 좋아했지만 저는 그가 소아마비라는 이유로 멀리 했습니다.
    작년 4월, 좀더 벌어 보자는 욕심 때문에 육지에 나가게 되었는데 진주에서 김천으로 가던 중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사고가 어떻게 났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제가 100% 잘못한 것으로 판정이 났습니다.
    사고가 난 후 며칠 동안은 사경을 헤매다가 얼마 후 깨어난 저는 양쪽 다리의 심한 통증을 느꼈습니다.
    저는 그렇게만 믿고 며칠을 지냈는데 며칠 후 조금 고개를 들 수 있어서 제 다리를 보게 되었는데 왼쪽 다리는 절단된 상태이고 
    오른쪽 다리는 발목 부분이 뼈만 남아 덜렁거렸습니다.
    저는 자살을 하고 싶었지만 몸을 움직이지 못하니 자살도 못하고, 다른 사람들은 부모님을 생각해서라도 절대 나쁜 생각을 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런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병원 진단 결과는 간 파열, 신장 파열, 좌 대퇴부 절단, 우 경골 및 비골 개방성 골절, 좌 비구 골절, 우족 관절이개, 우 하퇴부 다발성 연부조직 손상 등으로 크게 다쳤는데, 병원에서는 간과 신장만 살리고 남은 다리와 골반은 우리나라에서는 수술할 줄 아는 사람이 없으니 포기하라고 했습니다.
    결국 그 병원에서는 희망이 보이지 않아서 서울 영동 세브란스 병원에서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수술이 잘되어 오른쪽 다리는 절단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 후 약 3개월간 병원 생활을 하다가 퇴원해 집에 내려와 있었지만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저는 밤에는 불타는 지옥의 악몽에 시달렸고 낮에는 그 악몽 때문에 밥맛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악몽에 시달리던 어느 날, 여동생으로부터 아는 동생이 있는데 그녀는 신앙심도 깊고 또 저의 병원비까지 빌려주었다고 해서 고마운 마음에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고 다음 날 제주 남문 교회의 두 형제님을 차례로 만나면서 주님을 더욱 알게 되었습니다.
    신기하게도 그 분들을 만난 후부터 악몽이 사라지고 성경 말씀을 듣고 난 후 즐거운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구원의 참뜻을 몰랐지만 한 구절 한 구절 놀라운 성경 말씀을 듣고서야 진정 구원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아직 저는 하나님을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다른 사람이 체험하지 못한 것을 체험하였고 지금의 저는 마음이 평안합니다. 

    많은 것을 잃었지만 온 천하보다 귀한 영생을 얻었습니다.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이제는 주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삶이 되도록 열심히 살겠습니다.
    저를 거듭나게 하여 주시고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호세아 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사랑의 선지자 호세아는 하나님의 변함 없는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선포하고 음란한 이스라엘의 무절제한 죄를 지적하며 사랑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간절히 호소했습니다. 

    호세아가 말한 “여호와께로 돌아가자”에는 3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첫째, 거리의 개념 

    예배는 신앙생활의 출발입니다.
    예배를 삶의 우선순위에 두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표현이자 인생이 행복해지는 지름길입니다.
    요즘같은 비대면 예배라도 그리스도 중심의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 아니면 나 중심, 내 편의 위주로 예배를 드리고 있지는 않은지를 돌아보며 교만의 높은 산에서 내려와 주님께 더 가까이 돌아가야 합니다.

    둘째, 시간의 개념

    [요엘 2:12]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더 늦기 전에 '이제라도' 여호와께 돌아가자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더 이상 안 들리십니까?

    설교 말씀이 더 이상 은혜가 안되십니까?

    감사보다는 불평으로.. 사랑과 용서보다는 미움과 비난으로 남을 정죄하십니까? 

    술과 도박, 쾌락에 빠져 세상을 주인삼고 하나님과 멀어지셨나요?
    지금이라도.. 이제라도.. 주님께로 돌아가십시요.

    우리 주님은 우리의 실수와 죄를 탓하지 않으시고 다시 안아주실것입니다

    셋째, 관계의 개념

    사랑하는 사람과 여행을 간다면 그 어떤 길도 지루하지 않고 즐겁고 시간이 아쉬울 정도로 빨리 갈것입니다.
    그렇듯 사랑하는 우리 주님과 함께라면 그 어떤 고난과 힘든 길도 즐겁게 잘 감당할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관계가 깨어지면 다른 관계들, 부부사이의 관계, 부모와 자식사이의 관계도 깨어집니다.
    물에서 멀어지면 마르듯이 생명의 주인인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면 아무것도 할수 없고 버려져 마르게 됩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힘써 여호와를 아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에 달려있습니다.
    우리 모두 여호와께로 돌아가 믿음이 회복되고 거룩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는 선봉장이 되길 기도합니다.

    오늘도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언제 어디서든 어느 상황과 환경에서도 주님께 돌아가 나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믿고 의지하게 하소서.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가장 큰 축복인 임마누엘의 복에 감사하며 마음의 걱정과 불안, 두려움이 사라지게 하시고, 
    하나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쉬지 말고 기도할 수 있는 신실한 일꾼이 되게 하소서.
    너무 늦기 전에 더 늦기 전에 교만의 높은 산에서 내려와 여호와께 돌아가게 하시고 하나님과의 뜨거운 사랑이 회복되어 
    무너진 가정과 사회 공동체를 온전히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호세아 6:1~3

    늘날의 시대를 바라보면서 참으로 풍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요로움 속에서 사람들은 더 많은 풍요를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자족하는 비결을 깨닫지 못한 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보다 차원높은 부와 권력을 얻으려고 합니다. 부(富)를 추구하는 것 자체를 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들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하심 가운데서 날로 더욱 풍성한 부와 권력을 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범사에 좋은 것을 취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와 이 시대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부와 권력은 이기적입니다. 심지어는 퇴폐적이기까지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안중에도 없고, 도덕적인 선을 추구함도 없습니다. 무작정 많이 소유하면 된다는 식입니다. 물질적인 풍요를 추구하지만 정신세계는 얼마나 공허한지 모릅니다. 도덕적 가치가 사라졌습니다. 인륜이 짓밟히고 있고, 추악한 모습으로 세상은 점점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런 기류에 예수를 믿는 신앙인들도, 교회도 편승하고 있는 지경입니다. 세상적으로는 풍요롭기를 추구하지만, 그리고 어느 정도 그것을 이루었지만, 오늘날의 현실은 영적으로는 심히 빈곤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식은 거의 전무한 지경입니다.

    교회와 성도들은 부와 권력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에 집착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에 매여 종노릇하는 가운데 있어서는 안됩니다. 성경이 성도를 향해서, 그리고 교회를 향해서 부요한 자가 되라고 말씀하실 때에 부와 권력은 단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풍요로울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권력을 탐닉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영광스러운 이름을 얻을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영육간에 풍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혹 세상의 것은 잃어도, 가난하고, 궁핍하며, 세상에서 아무런 권세는 없어도, 하나님께는 부요하며, 영적으로는 풍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로 이것이 축복입니다. 비록 이 시대의 사람들은 영적인 은혜를 구하지 않고, 영적 풍요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고 해도, 그들의 불신앙적인 모습을 따라 망하는 가운데 있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구하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영적인 풍요와 영광을 얻을 수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호세아가 선지자로 활동하고 있던 시대는 풍요로운 시대였습니다. 당시에 북조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가 다스렸습니다. 그는 정치적인 능력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국제정세를 밝히 볼 수 있었고, 나라의 힘을 키워,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곳곳에는 많은 물질로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시대를 보시면서 개탄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만족하며, 왕이 정치를 잘한다고 칭찬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은 여로보암 2세를 보시면서 탄식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으로 빈곤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으로는 풍요롭고, 잘 사는 나라가 되었지만, 하나님 앞에는 무일푼의 노숙자와 같이 영적인 빈곤함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영적으로 빈곤하다면 비극입니다.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시면서 “너희가 부요하다고 생각하느냐 그러나 너희의 실상은 가난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눈에 안약을 발라 보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적인 빈곤은 하나님의 버림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며, 결국 영원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1.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인 은혜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물질만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진노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됨의 신분을 박탈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방에 포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영적인 것이 풍요롭지 못한 사람의 결국은 이럴 수 밖에 없습니다. 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께로 다시 돌아오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1 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호세아 6:1)

    하나님의 진노 속에 망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여호와께로 돌아가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세상의 풍요로움에 영적인 눈이 멀어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영적인 축복을 외면하며 살던 자리에서 이제는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시대를 바라보면서, 한국교회의 영적현상을 바라보면서 지금이 바로 호세아 시대와 같이 세상적으로는 풍요로우나 영적으로는 심히 빈곤한 가운데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로 인하여 온 나라 구석구석에 붕괴와 파멸이 찾아왔음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호세아 선지자가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께 멀어졌던 우리의 마음을 돌이켤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을 바라보시면서 세상을 향해, 세상의 풍요만은 구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지 말고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돌이켜야 합니다. 본문에서 돌이키다는 말은 원문성경에서 슈브(bWv)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 말은 “되돌아 가다.” “회복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에 떠나왔던 자리로 되돌아 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입니다. 우상을 버리고, 세상의 온갖 핍박 가운데서도 하나님만 믿고 섬기기로 한 백성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영적인 축복의 의미를 상실하고 세상의 물질과 풍요에 눈이 멀고 마음이 빼앗기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죄악된 자리에서 돌이켜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자리로 돌아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귀하게 여기던 자리로 다시 돌아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냥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돌아오라는 말씀은 “회복하다.” “회개하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지난 날의 잘못을 회개하는 역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하고, 하나님을 멀리 했던 것,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지 못하던 것을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물로 회개하며 나아오게 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은혜를 받고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까? 영적인 축복을 누리며, 영적으로 부요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회개하는 심령이 되어야만 합니다. 성령충만을 받게 되는 것도 회개하는 자가 될 때에 가능합니다. 죄악을 가지고서는 절대로 하나님께 돌아갈 수도 없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마음껏 누릴 수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을 사랑하며 살았던 우리의 모습을 주님 앞에 철저하게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공급하시는 은혜의 가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우리의 불신앙을 회개해야 합니다. 영적인 것에 풍요롭기를 위해서 헌신하고 수고해야 하는데, 그것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세상에서 돈 많이 벌고, 출세하고, 성공하는 것에만 우리의 모든 마음을 빼앗겨 버린 것을 회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구주와 하나님께로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돌이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1.2.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께 돌아가자고 한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계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말씀에서 “여호와께서 찢으셨고, 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가치를 인식하고 못하고, 은혜를 구하기에 주저하는 사람들이 세상의 것만을 얻기 위해서 눈을 벌겋게 해서 살아가는 것을 보시면서 하나님은 그곳에 진노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치셨다는 것입니다. 이방 나라를 통하여 그들을 치셨고, 온갖 재난을 통해 그들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는 실존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으면 잠시는 큰 부요를 누리는 것같습니다.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고 있을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크게 부요했습니다. 부족함이 없는 것같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멸망의 전조일 뿐입니다. 영적으로 경각심을 갖지 못하게 되었을 때에 크게 망하게 됩니다. 앗수르의 공격 앞에 한 순간에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처참하게 일그러지게 되었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긍심마저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고 세상을 구하며 살아가게 되면 하나님을 그들을 치십니다. 그들을 갈갈이 찢어버리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영적인 부요함을 위해 헌신하지 못한 채, 세상의 것만을 간절히 추구하는 우리의 영적 자세를 바꾸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두려우신 심판을 피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에게 다시금 치료와 위로를 허락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는 “찢으셨으나 낫게하시고, 치셨으나 싸매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회개하는 자가 되어지면 그들이 어떤 죄악을 저질렀더라도 하나님은 다 용서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말씀하십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그렇습니다. 우리의 죄악이 아무리 더럽고 추한 것이라고 하나님께로 돌이키기만 하면 하나님은 복을 주십니다. 용서하십니다. 그 모든 죄악을 기억도 하지 않으십니다.

    탕자가 아버지께 큰 죄를 짓고,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세상에서 온갖 고초를 겪었습니다. 헐벗고 굶주린 신세가 되어서 다시금 아버지께로 돌아왔습니다. 그 때에 아버지는 탕자를 외면하거나 박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와 함께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이었지만, 그가 돌아오게 되었을 때에 그의 모든 허물을 아버지는 감싸주었습니다. 그의 그의 굶주림과 헐벗음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열어주었습니다. 새 옷으로 입히고, 금가락지를 끼워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사모함이 없이 세상에 미쳐 살았다 할지라도 지금이라도 주님께 돌이키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시금 놀라우신 은혜를 허락하십니다. 용서해주실 뿐만 아니라 넘치는 축복으로 채워 우리의 삶을 영적으로 부요케 하시는 것입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죄악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회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회개하면 능력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회개하면 질병에서 고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회개하면 문제가 사라지고, 슬픔 중에 위로를 받을 수 이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혀있는 담이 허물어지고, 하늘로부터 임하는 놀라운 영적인 축복이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난 날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지 못했거나, 은혜를 사모함에 게으르고 세상만을 추구하던 우리의 모습을 철저하게 회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하나님께로 우리의 전 생애와 삶의 방향을 되돌려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를 용납하시고, 영적으로 부요케 하시는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3.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만 하면 치료와 회복의 은혜를 허락해 주십니다. 왜 그런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까? 본문 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호세아 6:2)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이 돌아오게 될 때에 회복하시고, 싸매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니 이틀 후에 살리시고, 제 삼일에 일으키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멸망을 당한 이스라엘 백성이지만 기적같은 능력으로 불가능한 가운데서도 신속하게 구원을 얻게 한다는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2절에 있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암시하며,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시는 것, 우리가 어떤 죄를 범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영생의 축복으로 더하여 주시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희생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을 싸구려 구원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조건 예수 앞에 나오기만 하면 구원함을 얻는다고 하니, 구원이 너무 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 자체의 가치를 값싼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는 것,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어떤 댓가를 요구하지도 않고, 또 어떤 조건을 제시하지도 않고, 풍성한 영적 축복을 허락하시는 것은 바로 구원이 싸구려고, 천국이 무가치한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엄청난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생명을 지불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결코 싸구려가 아닙니다. 천하를 두고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의 핏값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 은혜가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언제든지 나아갈 수 있고, 그 은혜의 보좌 앞으로 가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힘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풍요를 마음껏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힘입어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부귀나 영화를 취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영적인 부요함을 추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입술이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오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실 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의 놀라운 축복을 더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주 예수를 힘입어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2.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 세상의 풍요로움만을 추구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권면하던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은혜에 풍성하게 되기 위해서 여호와를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호세아 6:3)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되면 우리는 모든 죄에서 용서함을 받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치료하심과 위로하심을 얻을 수 있게 되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만을 가지고서는 초보의 신앙, 유치한 은총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신앙은 성장해야 합니다. 보다 성숙한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은혜에 더욱 풍성한 가운데 있기를 위해서는 여호와를 알아야 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가운데 거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돌이키는 차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여호와를 알아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힘써 여호와를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여호와를 안다고 할 때에 “안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야다([d'y)라고 합니다. 이 말은 객관적인 사건이나 정보를 많이 아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야다는 부부가 서로 한 마음과 한 뜻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인격적 친밀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알기를 바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속성을 갖고 계시는지?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하는 것 등등을 알기를 바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이룰 수 있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이 서로를 사랑함과 신뢰함으로 두터운 인격적 친밀함을 유지할 수 있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욥기에 보면 하나님은 동방의 장부 욥을 칭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하나님의 회의에서 칭찬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욥을 신뢰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욥 사이에는 긴밀한 인격적 교제가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인격적 친밀관계에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아브라함에게 숨기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일컬어 하나님의 친구로 묘사하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하나님과 이런 관계에 있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이 믿을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이 사랑함으로 모든 것을 숨기지 않는 사람,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고, 하나님과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매우 친숙한 관계에 있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친밀하지 않았습니다.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돈을 사랑했습니다. 쾌락을 추구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었고, 하나님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신뢰하지 못하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증언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하는도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망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갖지 않으면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망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불이 나와서 우리를 삼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적으로 풍요롭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힘써 알아야 한다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누구든지 친밀하게 되기 위해서는 자주 만나야 합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눠야 합니다. 함께 시간을 보내고, 같은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친밀한 관계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자주 만나고, 하나님과 많은 대화를 나눠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배를 통하여 말씀을 통하여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만나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누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호세아 성경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은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으신다고 말씀하시면서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향한 헌신의 역사가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될 때에, 우리가 사랑으로 하나님의 일에 동역자가 되어질 때에 하나님은 우리와 친밀하게 되시고, 크신 복으로 함께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과 기도로, 예배로 하나님과 친밀하게 되기를 시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을 품고 주님의 일을 위해서 힘써 동역자가 되어 헌신함으로 주님과 친밀하게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새벽빛같이 일정하신 하나님, 땅을 적시는 비와 같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빛을 비추시고, 풍성한 은총으로 우리의 메마른 영혼을 윤택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은혜에 힘입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를 향해 우리의 믿음의 발걸음을 옮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욕심을 따라가던 우리의 옛 사람을 철저하게 포기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호세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께 돌이켜서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고, 이제는 세상과의 관계를 끊고 하나님과의 인격적 사랑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예배함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위해 기꺼이 동역자로 헌신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새벽빛 같이 일정하시고,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의 삶에 은혜로 충만케 하실 주님께서 빈곤한 영혼을 풍요롭고 건강하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 되는 축복이 저와 여러분, 온 교회 위에 충만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호와께로 돌아가자(return to GOD)

    연가시를 아는가? 

    수중에서 사는 기생충의 일종인데 이것이 1차 숙주인 모기나 하루살이, 또는 잠자리가 그 알을 먹으면 알이 속에서 숙주의 몸 속에서 부화하고 자란다. 
    그러다가 여치나 사마귀, 바퀴벌레가 그 1차 숙주를 잡아먹으면 이 연가시는 제 2숙주 속에서 양분을 다 가로채 먹으면서 대부분 10~15cm의 정도까지 자란다. 
    그리고 마침내 성충이 되고 숙주의 몸속에서 나와야 할 때가 되면 이 연가시 기생충은 생활하고 알은 낳는 곳이 물속이기 때문에 2차 숙주로 하여금 갈증을 유발시켜 물가로 가도록 해서 물에 빠져 죽게 한다. 
    그런 다음 연가시는 그 숙주의 몸 밖으로 나와 짝짓기를 하고 알을 낳는다. 
    그런데 이런 연가시의 특성을 변형시켜 만든 영화 <연가시>가 2012년 7월 상영되어 약 4백 5십만명의 관객을 동원했고 많은 화제를 낳았다고 한다. 
    그 내용 중 변종 연가시에 감염된 사람의 행태를 보면 연가시가 영양분과 수분을 다 먹고 흡수해 버리기 때문에 감염된 사람은 아무리 먹어도 포만감이 없어 계속 먹는데 큰 양푼에 가득한 밥을 먹기도 하고 밥통째로 먹고도 계속 먹으려고 한다. 
    그리고 물을 마셔도 마셔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고 큰 생수통의 물을 통째로 먹는가 하면 변기에 고여있는 물을 마시기도 하고 급기야는 바다나 강에 빠져 죽는다. 

    오늘 이 세대가, 이 사회가, 바로 내가 영적 변종연가시 기생충에 감염되어 있지나 않는가?

    만약 이런 영화 속의 일들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어떨까? 소름 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사실 이런 일들은 일어나고 있고 그것도 너무나 편만해져 있다. 오늘날 사람들이 얼마나 재물과 명예와 권력과 쾌락을 추구하고 있는가? 정부의 주요 직분을 맡을 후보자들을 청문회라는 과정을 통하여 자격과 능력을 검증한다. 그런데 청문회를 통해 많은 분들의 생활모습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비난 받을 일들이 많이 드러난다. 그래서 어떤 후보자는 그 도가 지나쳐 임명을 취소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일부 허물이 있어도 임명을 강행해 정쟁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버닝썬 사태에서 시작된 일부 연예인들과 그들 주변 사람들, 그리고 재벌가문에서 자행되는 마약복용 등 끝이 없는 쾌락을 추구하던 사람들의 모습이 일부 드러나고 있다. 이 사회는 그렇다고 치고 교회는 어떠한가? 교회 또한 이 사회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대형교회의 세습문제, 도덕성 문제, 사이비 종파들의 이단적 가르침에 의해 생기는 불미스러운 사건 들로 인해 기독교의 사회적 신뢰도는 형편이 없다. 2017년 기독교윤리실천운동 본부가 발표한 "2017년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일반시민의 기독교신뢰도는 20.2%에 불과했다. 그런데 비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에 대한 신뢰도는 10.7%에 불과했다. 비그리스도인 10명중 9명은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2016년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15,5%인 불교를 누르고 개신교 인구가 19.7%로 한국최대의 종교가 됐다. 그런데 사회는 어떤가? 성경의 가르침대로,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 섬기며 봉사를 가르치는 그리스도인 숫자가 전체 인구의 20%를 차지하는데 왜 사회는 더 황폐해지고, 더 이기적이 되고, 각종 각종 범죄는 더욱 기승을 부리는가? 전체 인구의 80%가 비기독교인들인데 왜 그들의 기독교 신뢰도는 10%밖에 되지 않는가?

    이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예수님을 믿노라고 하는 여러분과 제게 있는 것이 아닌가?

    본론

    성경은 오늘 여러분과 제가 사는 이 세상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 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 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 (호 4:1,2)

    사도 바울은 좀 더 직접적이고 자세하게 이 세상 끝의 사회적 현상을 설명한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딤후 3:1-5) (참조: 롬 1:28-31)

    오늘날의 사회상을 잘 설명하고 있나? 어떻게 2천년 전에 이 사회의 모습을 이렇게도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 왜 이렇게 되었나? 무엇이 이렇게 만들었나?

    하나님 없는 성공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이다

    호세아 선지자가 북방 이스라엘을 위해 봉사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의 왕은 여로보암 2세였다. 
    선지자 호세아가 봉사한 기간은 대략 기원전 755년 부터 725년 까지 약 30년이었고 여로보암 2세는 기원전 793년 부터 753년까지 약 41년동안 왕으로서 통지하였다. 

    여로보암 2세의 통치기간 동안 북방이스라엘은 외형상으로는 다윗과 솔로몬 시대이래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번성하였고 성공적인 나라였다. 

    북방이스라엘은 계속적으로 왕을 살해하여 왕위를 찬탈함으로 왕좌의 주인이 바뀌었고 무정부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런데 여로보암 2세는 41년간 통치를 하였으니 정치적으로 안정이 되었고 그로 인해 그 당시의 영토는 다윗과 솔로몬 때와 비슷해졌다. 경제상황도 많이 나아졌고 다른 나라가 침략도 하지 않아 번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번영이 오히려 여로보암 2세와 북방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되었다.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 대신에 피조물을 숭배했다. 
    하나님의 율법과 규례는 완전히 무시되었다. 부정직과 불신과 기만이 팽배했다. 
    온갖 사치가 조성되었다. 
    가난한 자를 압제하고 불의한 재판이 성행했다. 
    음행이 종교에 도입되었고 신성모독과 회의주의가 편만했다. 
    그야말로 나라 전체가 퇴폐하고 부패해졌다. 

    호세아 4:7에 
    "저희는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저희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침묵하시거나 숨어계시지도, 방임하시지도 아니하였다. 끊임없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규례와 율법을 상기시키고 순종하도록 호소했으며 계속해서 반역적인 삶을 살 때 그 결국은 멸망임을 경고하였다. 그러나 세속적 번영과 쾌락에 취해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기별과 호소를 외면했다. 호 8:12 "내가 저를 위하여 내 율법을 만 가지로 기록하였으나 저희가 관계없는 것으로 여기도다"라고 한탄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묘사한다.

    하나님 없는 번영,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 없이 오는 성공은 행복이 아니라 그 사람을 마침내 파멸로, 사망으로, 영원한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임을 잊지 말라!

    영적 연가시에 감염된 사람은 재물을 아무리 모아도 만족함이 없다. 재물에 대한 탐욕 때문에 끊임없이 재물을 모으는 일에만 몰두한다. 계속해서 성공에 대한 갈증에 목말라하는 사람들, 권력에 대한 탐욕, 쾌락을 추구하는 만족 없는 욕구들이 가득한 것이 오늘날 이 사회가 아닌가? 이것이 다 우리의 마음속 가득 찬 영적 연가시 때문이 아닌가?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게는 본성적으로 옆으로 걷는다. 아무리 바로 걸으려 해도 걸을 수 없다. 영적연가시 같은 탐욕과 교만이 마음속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그 규례를 지켜 행할 수 없다. 이것은 노력의 문제가 아니다. 렘 13:23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고 말한다.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우리의 죗된 본성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과 심지어 사랑과 겸손의 마음조차도 가질 수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이 영적 연가시를 몰아낼 방법은, 치료할 특효약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 호 6: 1,3절에 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영적 연가시에 감염되어 끊임없는 탐욕과 만족되지 못한 욕심에 빠져있는 죗된 영혼의 치료책은

    첫째,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다. 철저한 회개가 있어야 한다. 환자는 불편함을 느끼고 이상함을 느끼면 병원에 간다. 자신이 진단하고 처방하지 않는다. 병원에 가서 자신의 상태를 이야기 하면 의사가 진단하고 처방하거나 수술하여 낫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소홀해지고, 기도가 등한시 되어지고 세상에 대한 욕심이 생기거나, 이기심이나 교만함이 생겨나면 영적 이상 징후이다. 즉시 큰 의원이신 여호와께 나아가야 한다. 시51:17에 다윗은 고백한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사랑의 사도 요한도 말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요일 1:9)

    둘째는 힘써 여호와를 아는 것이다. 이 안다는 단어의 히브리어 원문(디아트 - 야다에서 유래)의 의미는 체험적으로 아는 것이다. 부닥쳐서 알고, 보아서 알고, 만져서 아는 경험적으로 아는 것이다. 지식적, 피상적, 관념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오직 여호와만이 우리의 치료자 임을 알아야 한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호 6:1)

    어렸을 때 양계장을 했다. 하루는 달걀 1개를 몰래 꺼내가지고 동네 만화방에 갔다. 만화방 주인에게 계란을 주면 만화책 몇 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께 들켰다. 종아리를 회초리로 맞았다. 무척 아팠고 멍이 들었다. 그 날 저녁에 어머님이 무슨 연고를 가지고 와서 많이 아팠지? 라는 한 말씀만 하신 채 다른 말씀 없이 상처 위에 발라주시고 마사지를 해 주셨다. 그 마사지 하시는 어머니의 손끝을 통해 전해지는 사랑이 나로 하여금 다시는 계란을 훔치는 일을 하지 않게 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치료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동정과 연민과 사랑만이 우리가 가진 영적 연가시를 제거할 수 있다. 재물과 명예와 권력과 쾌락을 추구하는 끊임없는 욕망을 일으키게 하는 우리 안에 있는 이 연가시 같은 죄를 없애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

    결론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멸망을 앞둔 북방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간절히 호소했던 이 호소가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과 저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가?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는 애절하고도 간절한 호소가 우리의 마음속에 메아리치고 있다. 일어나자!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동화작가 권정생님의 ‘우리들의 하느님’ 이란 책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권정생 선생님은 어느 날 시내에 나갔다 돌아오려는데 버스비가 모자라 완행열차를 타게 되었다. 
    그 열차 안에서 만난 한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아주머니는 의성에 있는 시골교회 집사인데 십년 전 어느 날 바쁘게 집안일을 하고 있는데 거지가 구걸을 하러 왔다고 한다. 
    정신 없이 일에 몰두하던 아주머니는 귀찮은 생각에 거지를 내쫓았다. 
    그런데 돌아서 나가는 거지의 뒷모습을 보니 놀랍게도 예수님이었다는 것이다. 
    깜짝 놀란 아주머니는 하던 일을 멈추고 허겁지겁 쌀을 한 대접 퍼서 달려 나가 보았으나 거지는 어디론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아주머니는 주저앉아 통곡을 했다. 
    그때부터 아주머니는 십 년을 하루같이 만나는 사람을 모두 예수님으로 알고 대접을 한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다하고 나서 아주머니는, “세상 사람이 다 예수님으로 보이니까 참 좋아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드리고 싶어 예”.

    권선생은 이야기 끝에 여태껏 들은 설교 중에 진짜 설교를 들었다고 덧붙였다. 
    예수 잘 믿어서 복 받고 잘살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님을 만나 삶이 변화된 이야기를 듣기 원한다. 
    여호와를 알고 힘써 여호와를 알아 여러분과 저의 삶이 변화되기를 기도한다.








    구체적인 방법 : 

    1. 진심으로 회개하고 마음을 다해 돌아가기(悔心) : 

    요엘서 2:12
     “이제라도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돌아와라, 나에게로! 너희 마음을 다해, 금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 금식하고 울며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 신속히 결단하는 것이 중요하며,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적절한 때입니다. 

    2. 하나님을 알아가고 친밀한 관계를 회복하기(關係 恢復)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깊이 함으로써,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온 마음을 드리는 예배와 기도를 통해 친밀함을 쌓아야 합니다. 

    3. 온 마음을 다해 예배하고 섬기기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진실된 마음으로 예배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며 은혜와 복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찬양해야 합니다. 

    4. 하나님께 감사하고 순종하기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께 되돌아가는 행위이며,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해야 합니다. 


  •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의로운 소망을 따라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본절에서 3절까지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 해석으로 나뉜다.

    1.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호세아 선지자의 권면으로 보는 견해(Keil). 
    2. 회개의 날에 백성들 서로가 뉘우치며 권면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Lange, Wood, Chrisholm). 

    이상의 두 가지 견해 모두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아마 이것은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와 태도를 독백과 대화체의 형태로 표현한 것으로서 미래에 있을 백성들의 회개에 더 잘 부합되는 것 같다(Harper, Ewald, Cheyne).

    우리를 찢으셨으나 
    - '찢다'의 히브리어 '타라프'(*)는 사자가 먹이를 찢는 것처럼 심판이 가혹함을 암시한다(5:14; 시 50:22).

    낫게 하실 것이요 
    - 5:14에서 예언된 멸망과 형벌은 이미 성취된 것으로 언급된다. 
    그러나 진정한 회개가 있을 경우 심판의 자리에서 고침을 받게 될 것임이 선언된다. 
    이는 백성들을 치료하고 회복시켜 주시는 여호와의 사랑과 주권적인 섭리를 보여주고 있다(신 32:39). 
    한편 이것은 여호와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백성들의 참된 회개를 전제하고 있다. 또한 이스라엘의 구원은 오직 여호와께 달려 있음을 상기시킨다.

    여호와께로 돌아가자(let us return to the LORD)


    7725. 돌아가다(슈브. shûwbשׁוּב

    1. 방향을 돌리다.  2. 회복하다.  3. 돌이키다 
    발음 [ shûwb ]
    구약 성경 / 1059회 사용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호세아 6장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찢고 상처 입히셨지만, 다시 살리시고 싸매어 주실 것이며, 그분께로 돌아와 자신을 알자고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불성실한 회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은혜와 사랑으로 기회를 주시며 회복과 치유를 약속하시지만, 백성은 진실한 회개 대신 형식적인 제물만 드리는 것을 지적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자비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강조합니다. 

    호세아 6장의 주요 내용
    •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촉구 (1-3절)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는 호소로 시작합니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찢으셨으나 다시 낫게 하시고, 치셨으나 싸매어 주시며, 이틀 후에 살리시고 셋째 날에 일으키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 돌아가면 구원과 회복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 진실하지 않은 백성들의 회개 (11절, 13절)
    • 백성들의 회개가 "진실하지 않은" 것이라 지적합니다. 

  • 형식적인 희생 제사만 드리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아는 지식과 자비로운 행동은 부족했음을 비판합니다. 

  •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중요성 (3절, 6절)
    • “우리가 주님을 알자”고 외치며, 진정한 예배는 희생 제사가 아니라 자비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 "내가 기뻐하는 것은 희생 제사가 아니라 자비요,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는 6절의 말씀은 신약에서도 예수님이 인용하신 구절입니다. 

  • 하나님의 회복의 약속 (1-3절, 6절)
    •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에도 불구하고 긍휼히 여기시며 그들을 회복시키고자 하십니다. 

  • 이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회복의 주권자 되심이 드러납니다. 

  • 12 <너희 마음을 바꾸어라> 여호와의 말씀이다. “지금이라도 너희의 온 마음을 다하여 내게 돌아오너라. 금식하고 울며 슬퍼하여라."
    13 옷을 찢지 말고 너희 마음을 찢어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너라. 그분은 은혜롭고 자비로우시다. 그분은 쉽게 노하지 않으시고 사랑이 많으시며 벌을 내리지 아니하신다.
    14 주께서 그 마음을 바꾸시며 너희에게 복을 주실지 누가 알겠느냐? 그래서 너희가 여호와께 곡식 제물과 부어 드리는 전제물을 바칠 수 있게 될지 누가 알겠느냐?" (쉬운성경)

    요엘 (Joel)은 남왕국 유다의 8대 왕 요아스 (Joash)가 왕으로 즉위하던 초기에 활약했던 예언자입니다. 그 때가 대략 B.C. 830년경쯤 됩니다. 요아스는 7살의 어린 나이에 왕이 된 사람입니다. 하지만, 제사장이었던 여호야다 (Jehoiada)가 옆에서 도와 주었기 때문에 별 문제 없이 나라를 통치했습니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던 성전을 대대적으로 보수하는 등 나라를 잘 다스렸습니다. 그러다가 여호야다가 죽습니다. 정신적으로 의지할 곳이 없어진 요아스는 그 때부터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지게 됩니다. 보다 못한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 (Zechariah)가 충고를 했지만 그 때문에 스가랴는 죽임을 당합니다. 그 때 요아스가 저질렀던 일이 얼마나 악했던지 예수님께서 요아스 때의 일을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살해당한 바라갸 (Barachiah)의 아들 스가랴의 피에 이르기까지, 너희는 세상에서 피를 흘린 의인에 대한 죄값을 치를 것이다.” (마태복음 23:35)

    하나님은 위기의 때에 거의 예외 없이 예언자들을 등장 시킵니다. 예언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십니다. 이 방법은 오늘날에도 똑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올바른 길을 가지 않을 때 경고를 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하나님은 그 계획을 아브라함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내가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어떻게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Should I hide my plan from Abraham., 창세기 18:17)?” 생각해 보면, 참 엄청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과 소통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소통의 채널 가운데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이 소통의 채널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소통하시는 또 다른 채널이 있는게 그것이 성경입니다. 하나님은 시대를 초월해서 여전히 그 말씀을 읽는 사람들과 소통을 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지금도 살아 있는 하나님의 강력한 말씀입니다 (The word of God is alive and powerful., 히브리서 4:12). 성경을 읽지 않는 사람은 또 다시 하나님께서 소통하시는 채널을 막는 사람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요즘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하나님께 생각을 집중하고, 나 자신을 돌아보고, 조용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내적 음성 (God’s inner voice)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성경을 읽는 것도 그렇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습니다. 서점에서도 소설이나 교양서적들이 잘 팔리지 않습니다. 베스트셀러라는 말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아주 가벼운 읽을 거리 외에는 읽지 않습니다. 청년들은 그나마 종이 책들은 읽지 않습니다. 스마트 폰이나 online을 통해서, 혹은 SNS (Social Networking Service)를 통해서 몇 줄 안 되는 짧은 글들을 읽습니다. 그러니까 생각이 깊어지지 않습니다. 이런 시대적인 흐름이 성경을 읽는 데도 방해가 됩니다. 생각을 하지 않으니까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일이 시대 흐름과 맞지 않은 ‘out-of-date’ 된 일들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무리 시대 흐름이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일과 성경 읽는 일을 게을리 하면 안 됩니다. 이 일을 게을리 하면 그 때부터 우리의 영적인 호흡이 정지됩니다. 하나님과 소통의 채널이 막히기 때문입니다. 힘들어도 기도하고 성경 읽어야 합니다. 단 몇 줄이라도 성경 읽고 그 말씀을 생각하는 일을 중단하면 안 됩니다. 

    다시 기원전 9세기 유다 왕국의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요? 
    요아스 왕 한 사람이 우상숭배에 빠진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 그 한 사람 때문에 그가 통치하던 한 시대가 우상숭배에 빠지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시대를 쉽게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예언자를 통해 그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사람이 요엘입니다. “지금이라도 너희의 온 마음을 다하여 내게 돌아오너라. 금식하고 울며 슬퍼하여라 (Turn to me now, while there is time. Give me your hearts. Come with fast-ing, weeping, and mourning).” (12절) “내게로 돌아오라”는 말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말입니다. 회개를 희랍어로 ‘메타노이아 (μετάνοια)’라고 합니다. 이 말을 성경에서는 ‘turning away from sin and turning to God’ 이런 뜻으로 사용합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숭배에 빠진 그 시대에게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주신 것은 아직도 기회가 있다는 뜻입니다. 아직도 회개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아무리 잘못해도 쉽게 포기하지 않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이 말씀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라도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그 길이 항상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데, 우리도 하나님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 (The Parable of the Prodigal Son)’는 우리에게 영원한 소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자기 비지니스를 해 보겠다고 아버지 유산을 받아서 아버지를 떠났던 작은 아들을 다시 받아 주시는 아버지는, 회개하고 돌아오는 죄인을 받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넓고, 높은 것인지를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세계 각국에 조금씩 다른 버전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제가 읽은 이야기는 태국에 있는 이야기인데, 집을 나간 아들을 어머니는 오늘도 기다립니다. 집으로 돌아 온 아들이 멀리서 어머니 집을 훔쳐 봅니다. 그런데, 어머니 방 방문이 열려 있습니다. 방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본 아들은 용기를 내서 어머니에게 돌아갑니다 아들이 어머니에게 말합니다. "어머니, 이렇게 어머니 방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돌아올 용기를 냈습니다." 그랬더니, 어머니가 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아, 난 네가 떠난 후에 한번도 이 방문을 닫은 적이 없다!"

    오늘 말씀 14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은혜롭고 자비로우시며, 쉽게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많으시며, 벌을 내리지 아니하신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He is merciful and compassionate, slow to get angry and filled with unfailing love. He is eager to relent and not punish.” 이 말씀 중에 ‘compassionate’라는 말이 눈에 들어옵니다. 상대방의 처지에 deep sympathy를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sympathy를 가지신 분입니다. 우리의 고통 (pas-sion)과 우리의 아픔, 우리의 약함을 잘 아십니다. 히브리서 말씀 읽을 때도 이런 말씀이 나왔습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한 부분을 잘 알고 계십니다 (For we have a high priest who is able to sympathize with our weaknesses).” (히브리서 4:15)

    바로 이 말씀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언제나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 앞에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문이 항상 열려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작은 아들은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작은 아들처럼, 우리에게는 항상 하나님을 떠나 살고 싶은 유혹이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도 얼마든지 살 수 있을 것 같은 유혹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간섭 없이 살고 싶은 유혹이 있습니다. 이런 유혹에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 때 여러분이 오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나에게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문이 열려 있다!” 성경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Your God is gracious and compassionate. He will not turn his face from you if you return to him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우리의 처지를 잘 이해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그는 우리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않으십니다)." (역대하 30:9)

    그러나, 하나님께 돌아갈 때는 조건이 있습니다. 완전히 하나님께 마음을 드려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너희의 온 마음을 다하여 내게 돌아오너라 (12절)”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New Living Translation에서는 “Turn to me now, while there is time. Give me your hearts” 라고 번역했습니다. 같은 말씀이 NIV 성경에는 “Return to me with all your heart”라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사람은 그의 온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입니다. 온 마음으로 예배하고, 온 마음으로 찬양하고, 온 마음으로 순종하고, 온 마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우리의 온 마음이 드리지 않는 형식적인 것을 싫어하십니다. 이사야 42:8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여호와다. 이것이 내 이름이다. 나는 내 영광을 다른 것에게 주지 않겠고, 내가 받을 찬양을 우상들이 받게 하지 않겠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오해합니다. “아, 하나님은 우상을 찬양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구나!” 이 말씀을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온전한 찬양을 기쁘게 받으신다는 뜻입니다. 마음의 절반은 우상에게 빼앗기고 있으면서, 그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런 찬양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또 열왕기상 18:21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바알과 여호와 둘 사이에서 머뭇거릴 것입니까? 여호와와 바알을 함께 섬기려고 하십니까?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시면 여호와를 따르고 바알이 참 하나님이면 바알을 따르시오.”

    하나님을 믿으려면 온전한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 절반은 마음을 빼앗기고, 절반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에 빠졌다고 하니까 하나님을 완전히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것 같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요아스 왕이 처음에는 하나님을 잘 섬기다가 제사장 여호야다가 죽자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버린 것 같지요? 아닙니다. 하나님을 버린 것이 아니라, 우상에게 절반은 빼앗긴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성 크리소스톰 (St. John Chrysostom, 347-407, Archbishop of Constantinople)의 이야기 입니다. 

    그가 자기 교구를 순방하던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교구는 넓은데, 가는 곳마다 사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한 시골에 있는 교회를 순방하게 되었습니다. 
    이곳에도 역시 사제가 없었습니다. 
    이 교회를 떠나면서 그는 한 농부에게 교회에 대한 책임을 맡기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자꾸 마음에 쓰였습니다. 
    “내가 괜한 일을 했구나! 
    그 자격 없는 농부가 어떻게 교회를 책임질 수 있겠어?” 
    불안 마음을 가지고 크리소스톰은 그 교회를 다시 가 보았습니다. 
    간다는 말도 하지 않고 몰래 그 교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가 보고 싶었습니다. 
    크리소스톰은 기둥 뒤에서 몰래 예배 광경을 지켜 보았습니다. 
    지켜 보는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예배가 끝난 뒤에 크리소스톰은 그 농부 사제 앞에 무릎을 꿇고 자기를 위해서 기도를 해 달라고 했습니다. 
    농부 사제는 그 사람이 크리소스톰인 것을 알고 깜짝 놀라면서 무슨 소리냐고, 제가 기도를 받아야 할 터인데, 왜 이러시느냐고 만류를 했습니다. 
    그 때, 크리스스톰이 “나를 용서해 주시오. 나는 지금까지 당신처럼 가슴에 불을 안고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소.” 
    이 말을 들은 그 농부 사제가 당황하면서 “아니, 그러면, 그렇게 하지 않고 달리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법이 있습니까?”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회개해야 할 것들이 참 많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우리가 온전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음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일인데,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 그런 식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차라리 하나님을 떠난 것보다 더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절반은 우상에게 마음을 빼앗긴 채 절반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했고, 절반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송했고, 절반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온 마음 (a whole heart)’ 드려야 합니다. 
    ‘whole food’에서 파는 식품이 organic 식품이라고 해서 값이 비싼 것처럼, 우리의 ‘whole heart’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요엘은 자기 시대 사람들에게 “옷을 찢지 말고 너희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13절)”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 우리의 진심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형식적이고,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마음을 찢어서 그 속을 다 하나님께 보여 드리라는 것입니다.

    “욥기를 어떻게 설교할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세미나를 마치고 모두들 유익한 시간이었다고 좋아했습니다. 
    지금 목사들의 생각이 “어떻게 하면 설교를 잘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생각이 좀 달랐습니다. 
    지금 설교를 잘 하는 목사들은 많습니다.
    얼마든지 설교 잘하는 목사들의 설교를 들을 수 있고, 설교집을 사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좋은 목사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별로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설교는 잘 하는데, 인격은 갖추지 못한 목사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입을 열면 그렇게 좋은 설교를 쏟아내는데, 왜 돈과, 명예와, 권력에 대한 욕심을 내려 놓지 못한 목사들이 그렇게 많습니까? 
    지금은 목사들이 설교를 잘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온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훈련을 해야 하는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목사가 없어서 교회가 시끄럽고, 이런 평신도가 없어서 교회가 세상에서 존재감을 상실해 가고 있는 것 아닙니까? 
     


    여호와께로 돌아가자(호세아 6:1-3)

    호세아가 활동할 당시 북 이스라엘의 상황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열왕기하 14:25-27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하여 매인 자도 없고 놓인 자도 없고 이스라엘을 도울 자도 없음을 보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이 하겠다고도 아니하셨으므로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

    호세아가 북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활동할 당시에 북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왕은 여로보암 2세였는데(호 1:1) 그가 북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 그 영토가 가장 넓게 뻗어 나갔습니다. 
    그 말은 여로보암 2세가 북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 북 이스라엘이 그 어느 왕이 다스릴 때보다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주어진 말씀입니다. 
    1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주실 것임이라.”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로 돌아가자고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지금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전에 말씀 드렸듯이 북 이스라엘은 그 어느 왕이 북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보다 더 번성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하여 영적인 상태와 세상의 축복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북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북 이스라엘은 그 어느 때보다 번성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호세아서 4장에서는 그런 북 이스라엘의 모습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호세아 4:1-2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

    비록 겉으로는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모든 면에서 번성하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곪아 터진 이 모습이 바로 여로보암 2세가 북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의 이스라엘의 실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망하기 일보직전의 모습이며, 실제로 여로보암 2세가 죽은 지(B.C. 753) 31년 후(B.C. 722) 호세아 왕이 북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완전히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이와 같이 겉으로는 최전성기를 달리고 있던 북 이스라엘의 실제 모습이 망하기 일보직전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호세아 선지자는 절박한 심정으로 자기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제 그만 하나님께로 돌아가자고 호소하였던 것입니다.

    이 북 이스라엘의 모습이 지금 우리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나라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모든 면에 번성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아는 나라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웬만한 나라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어떤 나라라는 것을 거의 다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위상이 커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지금 우리나라는 여로보암 2세가 다스렸던 북 이스라엘처럼 그 어느 때보다 번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지금 우리의 겉모습이 아무 문제가 없이 모든 면에 부족함이 없이 풍족합니까? 
    그렇다고 해서 결코 안심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최전성기를 달리고 있던 북 이스라엘이 고작 31년 후에 앗수르에게 완전히 망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겉으로는 그렇게 초고속으로 번성하고 있었지만 반대로 속으로는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초고속으로 썩어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겉으로 아무 문제없이 모든 면에 부족함이 없이 풍족하더라도 속으로 북 이스라엘처럼 썩어 들어가고 있다면 우리는 조만간에 북 이스라엘처럼 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혹시라도 북 이스라엘처럼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속으로는 조금씩 썩어 들어가고 있을지도 모르는 우리에게 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이 말씀을,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음성으로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어떤 일보다 이 일에 많은 비중을 두고 이 일의 중요성을 온 몸으로 느끼고 그 어떤 일보다 이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즉 우리가 이 말씀대로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우리의 속사람은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모든 면에 강건하게, 튼튼하게 자라가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겉과 속이 함께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되며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이 가면 갈수록 모든 면에 더욱 더 풍성해질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거기에 대하여 오늘 본문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3절.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3절에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과 관련하여 호세아서 4:6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여기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식이 없기 때문에 맺혀진 결과를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호세아 4:11-13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 내 백성이 나무에게 묻고 그 막대기는 그들에게 고하나니 이는 그들이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버리고 음행하였음이니라. 그들이 산꼭대기에서 제사를 드리며 작은 산 위에서 분향하되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너희 딸들은 음행하며 너희 며느리들은 간음을 행하는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식이 없기 때문에 맺혀진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마땅히 섬겨야 할 하나님을 버리고 절대로 섬겨서는 안 되는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결국 그 죄가 그들을 멸망으로 인도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지식은 어떤 지식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 지식은 당연히 하나님에 대한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은 이와 같이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할 만큼 큰 차이가 나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녔어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의지하거나 그것을 섬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어서 하나님을 바로 아는 사람은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의지하거나 섬길 수 없습니다.

    이 우상숭배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은 우리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얼마만큼 있느냐?” 하는 것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지식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 지식을 원어로 “다트”라고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다트”라는 단어는 “야다”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야다”라는 단어는 설교에 자주 인용이 되는 단어입니다. “야다”라는 단어는 “안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머리로만, 지식적으로만 아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야다”라는 단어는 그 사람을, 그 존재를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즉 이 “야다”라는 단어는 아버지가 자녀를 알고 자녀가 아버지를 알듯이 아는 것을 의미하며,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알듯이 아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누군가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계속해서 그와 함께 지내면서 알아가는 것을 가리켜서 “야다”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호세아 4:6의 “지식”이라는 단어 “다트”“야다”에서 유래하였는데, 그러므로 백성들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다는 말은 그들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그 결과가 멸망이라고 단정을 짓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멸망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을 아는 길 외에는 없기 때문에 오늘 본문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3절 上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여기에 보면 “여호와를 알자.”라는 말을 두 번 반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애가 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기만 하면 멸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하나님을 몰라서 멸망으로 달려가고 있는 동족들의 모습이 너무 애가 타서 호세아는 “여호와를 알자.”고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말할 때는 “힘써”라는 말을 추가하였습니다. 이 말의 원래 뜻은 “추적하다.”라고 합니다. 우리가 영화 같은 데서 경찰이 범인을 추적하는 장면을 볼 때 쉬엄쉬엄 추적하는 경찰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 경찰은 없습니다. 범인을 추적하는 경찰은 젖 먹던 힘까지 다 쏟아 부어서 범인을 추적해서 결국 범인을 체포하고야 맙니다.

    호세아는 그렇게 하나님을 알아가자고 자기 동족들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그렇게 하나님을 알아가라고 우리에게 호소하시고 계십니다.

    부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끼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어떤 일보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에 우리의 모든 힘과 노력과 시간과 땀과 수고를 다 쏟아 부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실제적으로 인격적으로 알아가기 위하여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까워질 수 있도록 노력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떤 사람과 가까워지기 위한 노력을 하나님께 그대로 하면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과 가까워지기 위하여 어떻게 합니까?

    그 방법은 어떻게 하든지, 무슨 수를 써서든지 그 사람과 함께 있는 시간을 많이 가지는 것입니다. 전화를 사용하든지, 메일을 사용하든지, 문자를 사용하든지, SNS를 사용하든지, 직접 만나서 밥을 사주든지, 그 사람을 찾아가서 그가 하는 일을 도와주든지, 취미생활을 같이 하든지 무슨 수를 써서든지 함께 있는 시간을 많이 가지면 그 사람과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서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해줍니다. 거기에 내 시간과 내 물질과 내 땀이 투자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왜 그렇게 손해 보는 일을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에게는 그 사람과 가까워지는 것이 그 어떤 일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일이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일입니다. 하나님과 가까워져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적으로, 실제적으로 알고 나면 우리는 절대로 우상숭배 죄를 범하는 길로 갈 수 없습니다. 그 길로 가지 않는 우리를 그 어떤 것도 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비록 겉으로는 번성하고 있지만 속으로 곪아터져서 언제 멸망할지 모르는 자기 동족들에게 정말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자.”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를 통하여 우리에게도 똑같은 호소를 하시고 계십니다.

    비록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겉으로는 잘 되고 있는 것 같지만 속으로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썩어 들어가고 있다면 우리는 조만간에 멸망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돌아가자.”고 하는 호세아의 호소를 우리에게 하는 호소로 받아들이고 지금 즉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기도를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읽든지, 예배에 참석하든지, 신앙서적을 읽든지, 설교를 듣든지, 전도를 하든지, 교회 봉사를 하든지 무슨 수를 써서든지 하나님과 친밀해지기 위하여 노력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를 도우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계속해서 친밀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점점 더 하나님을 알아가게 되며 그럴수록 우리는 우리를 멸망으로 이끌어가는 우상숭배 죄와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를 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2절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육적으로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반드시 우리를 회복시켜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돌아가는 일에 온 힘을 쏟아 부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무슨 수를 써서든지 하나님과 가까워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관계적으로 계속해서 더 많이 알아 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들이 멸망이 아니라 살아나고 일으켜지는 회복의 역사가 계속해서 일어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마지막 시대의 특징

    마태복음 24: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Because of the increase of wickedness, the love of most will grow cold.

    누가복음 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원한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
    I tell you, he will see that they get justice, and quickly. However, when the Son of Man comes, will he find faith on the earth?





    9월 25일(목) 호세아 10-1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10:12)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Sow for yourselves righteousness, reap the fruit of unfailing love, and break up your unplowed ground; for it is time to seek the LORD, until he comes and showers righteousness on you.

    잠언 4:23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묵은 땅(5215) 니이르(nîyr) /   נִיר

    1. 개간된 땅.  2. 새로 일군밭.  3. 잠 13:23
    발음 [ nîyr ] 
    어원 / 5214  
    구약 성경 /  3회 사용
    • 1. 명사 개간된 땅, 새로 일군밭, 잠13:23, 렘4:3, 호10:12.
    • 관련 성경 /  경작지, 밭을 경작함(잠 13:23), 묵은 땅(렘 4:3).

    5214. נִיר

    1. 땅을 갈아 엎다.  2. מָנוֹר
    발음 [ nîyr ] 
    어원 /  5216과 동일 어원에서 유래한 듯
    구약 성경 / 2회 사용 
    •  1. 동사 땅을[쟁기로] 갈아 엎다, 렘4:3, 호10:12.
      •  a. 동사 [주]מָנוֹר, 멍에, 농기구[쟁기].
    • 관련 성경  / 갈다(렘 4:3), 기경(起耕)하다(호 10:12).


    호세아 10장 12-15절

    묵은 땅을 기경하라

     

    가. 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따른다.

    14절, “그러므로 너희 백성 중에 요란함이 일어나며 네 산성들이 다 무너지되 살만이 전쟁의 날에 벧아벨을 무너뜨린 것 같이 될 것이며 그 때에 어머니와 자식이 함께 부서졌도다.”

    * 본문의 말씀은 이스라엘 여로보암 2세가 왕으로 있을 때에 선지가 호세아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죄에서 돌이켜 돌아오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결국은 무서운 심판이 임하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 성도는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의 말씀을 가벼이 보면 안 된다. 여기서 “살만이 벧아벨을 무너뜨린 것 같이”(초토화)와 “어머니가 자식이 함께 부셔졌도다”라는 말은 심판의 심각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요나 시대의 니느웨는 모범적인 사례다.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는 아쉽게도 그렇지 못했다.

    * 15절에서 “너희의 큰 악으로 말미암아 벧엘이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이스라엘 왕이 새벽에 정녕 망하리로다”는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여기서 ‘벧아벨’과 ‘벧엘’ 그리고 ‘새벽’은 단순히 교인이 아니라 참 신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나. 문제는 교만이다.

    13절, “너희는 악을 밭 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었나니 이는 네가 네 길과 네 용사의 많음을 의뢰하였음이라.”

    * 이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직접적 또는 간접적 이유를 말하고 있다. 물론 심판의 직접적 이유는 “악을 밭 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의 열매를 먹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를 가져오는 간접적인 이유는 교만인데 이것이 더 심각한 문제다. 여기서 하나님은 “네가 네 길과 네 용사의 많음을 의뢰하였음이라”는 말씀을 통해 교만이 죄의 원인임을 밝히신다.

    * 사람이 자신의 길을 의뢰하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 자신의 길(데레크, 삶의 방식)을 의뢰하는(바타흐, 확신하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에 몰두하여 하나님보다 앞서 가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법궤를 앞세우고 그것의 뒤를 따르라고 하셨다(수3:3참조). 그러나 사사시대에는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고, 그때는 결국 암흑시대가 되었다(삿17:6참조). 사탄의 타락은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한 것에 있었음을 참조하라(사14:12-14참조).

     

    다. 묵은 땅을 기경하라.

    12절,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 교만은 죄를 가져오고, 죄는 심판을 불러온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공의를 심어 인애를 거두라고 말씀하신다.

    * 여기서“묵은 땅을 기경하라”는 말씀이 강조하는 것은 “땅을 갈아엎으라”라는 것이다. ‘기경하다’(니르)는 ‘땅을 쟁기로 갈아엎다’라는 뜻이다. 땅을 쟁기로 갈아엎어야 잡초의 뿌리가 죽는다.

    * 묵은 땅(니루)은 단순히 ‘오래 묵은 땅’이나 ‘길가와 같이 딱딱한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마13:19 참조). 

    묵은 땅은 ‘기경한 땅’이지만 지금까지 계속하여 악을 심고 죄를 거두어들이던 땅을 의미한다. 
    따라서 묵은 땅은 악을 심고 죄를 거두는 일에 만성이 된 사람의 마음을 비유하는 것이다.

    * 죄를 짓는 일에 만성이 되면 결국은 감각을 잃는다. 
    바로가 강퍅하게 되는 단계는 첫째 ‘고집하다’(하자크 칼형)이고, 
    둘째는 ‘둔감해지다’(카베드 히필형)이며, 
    셋째는 ‘강퍅하게 하다’(하자크 피엘형)이다. 
    즉 고집부리다 보면 둔감해지고 결국 강퍅하게 되므로 계속 갈아엎어야 한다.






    אֶרֶץ 776 [’erets]

  • 1. 명사
  • 2. 명사 나라, , 출3:8, 13:5, 창21:32, 룻 1:7.
  • 3. 명사 [주] 복수 אֲרָצוֹת의 뜻은 ‘토지’[창26:3,4]로서 보통 정관사와 함께 쓰인다. 특히 후기 히브리어에서는

  • אֲדָמָה 127 [’ădâmâh]
    • 1. 여성형 명사
    • 2. 여성형 명사 흙[통곡하는 사람이 자기 머리에 먼지를 뿌릴 때 사용됨], 삼상4:12.
    • 3. 여성형 명사 들판[경작되는 곳], 창47:19, 시105:35, 사28:24.




    너희가 自己(자기)를 爲(위)하여 義(의)를 심고 矜恤(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起耕(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臨(임)하사 義(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호세아 8:7 

    갈라디아서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성경에서 땅 또는 밭은 사람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성서와 땅 / 땅의 기본적 의미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하늘과 땅)를 창조하시니라”(창 1:1)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시니라”(창 2:8)

    땅은 구약 이해에서 빠뜨릴 수 없는 중심 주제이다. 인간 자체가 땅의 흙으로 지어졌을 뿐 아니라, 삶과 역사가 땅이라는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그 땅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나시는 거룩한 장소이기에, 하나님 계시의 중심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구원 역사를 위하여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도, 자손 번성과 함께 땅의 소유를 약속하셨다. 그에 따라 출애굽 구원의 최종 목적지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가나안이었다.

    땅이 구약의 중심 주제인 것은 통계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구약에서 땅은 2504번이나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언약이 사용된 경우보다 더 많은 것으로서 땅이 중요한 주제임을 보여준다. 
    구약에서 땅은 상징성을 지니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현실적이다. 즉 전쟁, 갈등, 횡포와 같은 무질서가 난무하는 삶의 현장이 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오셔서 구원 역사를 이루시는 역사의 무대 역시 땅이다. 구약은 땅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과 그 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거룩한 사람들의 자서전적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은 하늘을 담고 있는 땅의 이야기이다.

    성서 주제로서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최근까지 땅에 관한 연구가 소홀히 취급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땅을 이원론적으로 다루었던 기독교 신학의 입장이 크게 작용한 것과 관련이 있다. 땅을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 구분하면서, 그 신학적 가치를 외면한 것이다. 광야를 세상으로 보고 가나안 땅을 천국으로 보는 것이나 가나안 정복과 입국을 은유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그런 경향의 좋은 예이다. 그런 점은 교회가 즐겨 사용하는 찬송가 가사 내용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요단강 건너가 만나자’에서 강조되는 것은 요단강 건너편은 실제의 땅이 아니라 죽음 너머의 천국을 지칭한다. 땅을 역사적 현실이 아닌 미래 천국에서 받게 될 영원한 유업으로 해석한 것이다. 땅에 대한 해석의 방향은 내세 지향적인 것으로 치우쳐, 구약의 본래적 의미를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신학적 주제로서 땅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1948년 이스라엘 독립과 무관하지 않다. 이스라엘의 독립이 있기 전까지 땅의 주제는, 이스라엘-아랍 영토권 문제와 복잡하게 얽혀 있었던 민감한 정치적 이슈였다. 구약에서 땅의 문제는 불가피하게 이스라엘의 영토 소유권을 지지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독립하여 정치적 실체로 등장하면서 그런 부담감이 사라져 버렸다. 그에 따라 땅에 대한 연구 분위기도 자연스럽게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1960년대 이후 땅의 신학적 논의가 성서학계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배경이다.

    구약성경에서 땅을 의미하는 대표적인 용어는 ‘아다마’와 ‘에레츠’ 두 가지가 있다.

    ‘아다마’는 ‘붉다’(red)는 뜻의 히브리어 ‘아돔’에서 파생된 것으로, 붉은색을 띈 비옥한 토양을 의미한다. 
    특히 이스라엘에서는 산지에서 흘러내려와 아래쪽 골짜기에 쌓인 충적토가 유명하다. 
    지중해 연안지역에서는 이를 ‘테라로사’(terra rosa), 즉 ‘붉은 색의 흙’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아다마’는 경작이 가능한 땅, 경제적으로 높은 가치가 있는 땅, 곧 인간의 거주와 생존에 적합한 땅을 의미한다. 
    ‘아다마’의 반대 개념은 인간이나 생물의 생존이 어렵고 힘든 사막 혹은 광야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위하여 창조하신 에덴동산은 ‘아다마’의 땅이다. 토양 자체도 비옥하였지만, 네 개의 강으로 나뉘어 흘러 내려갈 정도로 많은 물이 솟아나는 샘 근원이 에덴동산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비옥한 토양과 풍부한 물 근원, 그리고 그런 좋은 여건 속에서 잘 자라는 각종 과일나무들, 이 모든 것들이 에덴동산을 최고의 ‘아다마’로 만들었다.

    비옥한 땅 ‘아다마’와는 달리, ‘에레츠’는 조건과 관계 없이 창조와 우주적 관점에서 본 땅이다. ‘에레츠’는 하늘 혹은 바다와 반대되는 보다 큰 개념의 땅이다. 히브리적 사고에 의하면, 우주는 하늘과 땅으로 이등분되거나, 하늘과 바다와 땅으로 삼등분된다. 곧 ‘에레츠’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거대한 우주의 한 부분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이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함께 창조하신 땅이 곧 ‘에레츠’이다(창 1:1).

    ‘에레츠’의 또 다른 이해는 정치적 개념으로서의 땅이다. 한 나라의 통치력이 미치는 영역이 곧 ‘에레츠’이다. ‘아다마’가 인간 생존에 적합한 좋은 환경으로서의 땅이라면, ‘에레츠’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드러내는 신앙적 개념의 땅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이루어진 계시의 현장으로서의 땅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성경에서 강조하는 땅은 ‘아다마’보다는 ‘에레츠’가 더 우선적이다. ‘에레츠’가 하나님과의 본질적 관계를 전제한다면, ‘아다마’는 주어진 ‘에레츠’ 안에서 누리는 복과 관련된다.

    ‘에레츠’와 ‘아다마’와 의미상으로 유사한 것이 ‘공간’(space)으로서의 땅과 ‘장소’(place)로서의 땅 구분이다. 
    ‘공간’으로서의 땅은 외부의 어떠한 압력도 받지 않고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이다. 
    그런 ‘공간’은 어떤 책임도 존재하지 않는 공백 상태의 땅이다. 
    모든 부담을 벗어버리고 마음껏 휴식을 취하는 바캉스의 휴양지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장소’로서의 땅은 역사적 의미가 있는 땅, 무엇인가 사건이 일어났고, 그 사건이 기억을 통하여 여러 세대에 걸쳐 역사의식으로 정착된 땅, 그곳에 살고 있는 자들에게 분명한 자기 정체성을 확립시켜주는 땅, 그것이 ‘장소’로서의 땅이다. 
    따라서 ‘공간’의 추구는 역사로부터의 도피이지만, ‘장소’의 소유는 역사 안으로 들어가려는 결단이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이 추구하였던 땅은 풍요를 보장받는 ‘아다마’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와 통치가 기다리고 있는 ‘에레츠’이다. 
    역사의 부름을 외면한 채 속 빈 ‘공간’ 속에 안주하려는 것은 영적 나태이다. 
    반면에 하나님과의 만남 그리고 그 부름의 의미로 가득 찬 거룩한 ‘장소’를 지향하는 뜨거운 열정, 그것이 성경이 강조하는 땅의 바탕색이다.

    흙은 뭔가를 바라지도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저 뭔가를 심으면 그것을 열심히 키워주고 성장시킨다. 
    물이 오면 그 물길을 만들어주고 땅속으로 스며들게 해준다. 
    태양이 비치면 따뜻하게 품어주고 눈이 오면 땅을 덮도록 놔둔다. 
    욕심이 없다. 
    자연의 흙은 그렇다.

    사람의 흙을 관할하는 토기운은 어떨까. 적당하면 무난하게 중도를 지키지만, 과다하면 <천하태평, 과유불급, 욕구불만, 자기위안>의 특징들이 드러난다. 
    토기운은 사람의 마음이다.

    사람의 마음이 너무 넓으면 어떨까. 땅이 너무 넓으면 무엇을 심을지 좀 막막하다. 
    그 넓은 땅을 경작하자니 왠지 힘들 것 같고, 경작을 안하자니 땅이 아깝고......그러다가 결국엔 <에라 모르겠다. 어떻게 되겠지>하는 천하태평이 마음속에 자리잡는다. 
    땅을 너무 많이 소유한 사람은 그 자체로도 마음이 든든할 것이다. 
    굳이 뭔가를 심거나 힘들게 경작하지 않아도 <내 땅인데 어디 가겠어?>라며 배만 두드리고 세월을 보낸다. 
    너무 많아도 탈이다. 
    자신이 능력껏 일굴 수 있을 정도의 적당한 크기의 땅을 가지면 열을 다해서 농사를 지을텐데, 너무 넓으면 오히려 손놓고 땅만 바라보고 살겠다고 한다. 
    그게 내 땅인데 하는 마음으로 에헴~ 하고 수염만 쓰다듬는다.

    땅은 속이지 않는다.  
    심는대로 키우고 나는 것이다. 
    그래서 토기운(土氣運)은 믿음이다. 
    자신을 믿는 것이다. 
    토기운이 적당하면 자신감도 좋고 남들에게도 너그러이 잘 퍼주는 장점으로 작용하는데.....토기운이 너무 과다하면 자만심으로 변질된다. 남에게도 잘 퍼주지만, 퍼주는 것 이상으로 더 받으려고 한다. 사람 마음이란 그런 것이다. 그래서 토기운이 과다하면 모든 것에서 욕심도 많아진다. 
    만족을 모른다. 
    욕구불만이 항상 따라다닌다. 
    만족할 정도로 뭔가 들어와도 욕심이 또 커진다. 
    이 정도로 만족할 수 없다. 
    그 불만족으로 불행하게 살아간다. 
    아주 크고 넓은 땅을 타고났는데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면, 오히려 그 넓은 땅을 짊어지고 살아가게되는.......무거운 삶을 자처하는 것이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일이 잘 풀릴때도 잘 안풀릴때도 있다. 
    잘 안풀릴때는 어떤 점에서 잘못되었는지 반성하고 돌아볼 필요가 있다. 
    같은 실수와 실패를 겪지 않기 위해서는 당연히 자기 탓이 아닌가 생각해봐야 한다. 
    그런데 토기운이 과다하면 자만심으로 그렇게 돌아볼 반성을 묻어버린다. 
    <뭘 그 정도갖고 내가 나를 탓해! 다음에 다시 하면 되잖아! 쫀쫀하게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 
    태평한 마음으로 자기를 너무 믿는 자기위안과 자가당착에 빠진다. 
    다음에 또다시 같은 실수와 시행착오를 겪어도 또 마찬가지로 속편하게 마음먹어 버린다. 
    마음을 먹어버린다. 
    넓은 땅에 묻어버린다.

    마음이란 이렇게 여러가지로 변할 수 있고 여러가지로 얼굴을 바꾼다. 
    토기운이 과다하면 그렇게 마음이 뻔뻔해지고 자기방식대로 속편한대로 생각하고 마음먹는다. 
    자신에게 솔직해지기는 커녕, 자기방식대로 자기마음대로 생각하기에 <나는 그게 솔직한거야>라는 착각에 빠질수도 있다. 
    문제가 있어도 문제가 있는 것조차 생각하지 못하고 사는게 더 큰 문제일수도 있다. 
    사람의 마음이란게 다 같은 마음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이란게 그리 정직한게 아니다. 
    마음을 믿을수도 없고, 안 믿을수도 없다. 
    자기 마음의 크기와 넓이를 아는게 먼저다. 
    땅은 너무 좁아도 너무 넓어도 문제다.
    욕심이 많은게 꼭 나쁜건 아니다.
     그 욕심 때문에 큰 일, 좋은 일, 남들이 하지 못한 일을 해낼수 있다.
    욕심을 버려라? 
    사람이 욕심없이 살수 있을까?
    다만,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욕심인가를 봐야 할 것이다.
    욕심이 많다면 그 욕심만큼 남보다 더 열심히 살면 된다.
    그 욕심만큼 살지 못하니 그것이 불만이 되고, 하다가 팽개치는게 아닌가.


    좋은 땅과 같은 마음 밭(누가복음 8:15)

    좋은 땅은 길 가나 바위나 가시떨기가 없는 땅을 말합니다. 좋은 땅은 길 가와 같이 굳은 마음, 얇게 깔린 흙 밑에 깔린 바위와 같은 마음, 염려, 재물, 향락과 같은 말씀의 영양분을 빼앗아가는 가시떨기의 마음이 없는 마음 밭을 의미합니다. 이 마음을 가진 사람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고 인내로 결실하는 자입니다. 그들은 복음에 대해 수용성이 있고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탄력성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8:15

    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착하고 좋은 마음

    예수님은 씨앗이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를 말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은 in an honest and good heart( KJV, ESV, NASB95, RSV)로 ‘정직하고 착한 마음’을 말합니다.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이 되려면 우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정직해야 합니다. 
    투명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외식하거나 자기를 포장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삶이 열매를 맺으려면 사람 앞에서는 경건하게 보이는 척하지만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는 온갖 악행을 행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을 가진 자는 말씀을 듣고 지킵니다. 
    “듣는다”는 것은 복음의 수용성을 말합니다. 
    좋은 흙은 깊고 부드러우며 기름지고 깨끗합니다. 
    씨앗은 땅 속으로 잘 들어가야 하며, 거기서 씨앗은 영양분을 얻어, 자라서 풍성한 수확을 거두게 됩니다. 
    “지킨다”는 말은 hold it fast(ESV; NASB95; NRSV; RSV)로 ‘굳건히 붙잡다’는 뜻입니다. 
    헬라어 원어로는 katechō로 ‘소유하다, 붙잡다’는 뜻으로 자신의 소유물을 유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듣고 지키어

    “듣고 지키어”라는 구절은 사도행전에서 베뢰아 사람을 떠올리게 합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습니다(행 17:11).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들은 감정적으로 은혜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에 정말로 주의를 기울이고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을 실제 삶에 적용하려면 그것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맹목적인 믿음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성과 이성을 주셨고 논리적으로 추론하고 체계화시키면서 그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견고히 하기를 원하십니다. 

    “좋은 마음”은 제자들처럼 비유의 뜻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고 질문함으로 알고자 하는 소원이 간절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씨앗 비유 뿐만 아니라 다른 비유에 대해서도 질문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일방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문답식 교육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의문을 갖고 질문을 던지는 것은 결코 불경건한 일이 아닙니다. 괜히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려고 딴지를 거는 방식이 아니라면 우리는 마음껏 의문을 던지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권위적인 사람은 질문을 하면 교만하다고 책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음이 너그럽고 온유하시며 누구에게나 열린 마음을 갖고 계십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과 무리들과 묻고 답하는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교훈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해하기를 원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10). 질문을 던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자 간절한 마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나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영적 소원이 없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해함으로 말씀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견고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 수 있습니다. “지킨다”는 말은 ‘굳게 붙잡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누구이신 줄 잘 알기 때문에 그의 말씀을 굳게 붙잡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이해했기 때문에 그것을 소중히 여깁니다. 

    좋은 마음 밭을 가진 사람들은 성경공부를 할 때나 설교 말씀을 들을 때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말씀의 종으로 세우심을 받은 교회의 지도자들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좋은 마음 밭을 가진 자는 이 말씀을 사람이 하는 말이 아닌, 하나님이 그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으로 영접합니다. 이렇게 유연하고 열린 마음을 가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놀랍게 역사합니다(살전 2:13). 하나님께서 주신 이 말씀은 좋은 마음 밭을 가진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역사를 일으킵니다. 

    우리가 전하는 말씀은 아주 평범한 인간의 입술에서 나오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접하면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좋은 마음 밭을 가진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그들 마음에 비추십니다(고후 4:6).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의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의 말씀이 “영생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떡을 기대하고 따르던 무리들은 예수님이 더이상 떡을 만드는 기적을 베풀지 않자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다른 사람이 다 떠나도 그들은 “영생의 말씀”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요 6:68). 그들은 예수님을 이 땅에 오신 “영생의 말씀”으로 영접했습니다(요 1:14). 

    인내로 결실하는 자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은 인내로 결실하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두 번째 종류의 땅인 돌밭에서 말씀을 기쁨으로 받지만 뿌리를 깊게 내리지 않음으로 자라지 못하고 마르게 된 예를 드셨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시련이 닥칠 때 인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반면 좋은 마음 밭을 가진 사람은 말씀을 주의 깊게 듣고 그러한가 상고하고 제자들처럼 질문을 던짐으로 말씀의 뜻을 이해하고 그 결과 그 가치를 깨닫고 굳게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시련이 닥쳐도 굳건히 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가혹한 시련 속에서도 계속해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인내”는 원어로 ‘아래 머무르다’는 뜻으로 어떤 원칙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흔들리지 않고 씩씩하게 견디는 모습을 묘사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또한 상황에 영향을 받지 않고 시련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성품을 묘사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미래를 바라보는 능력, 압박하는 세력 너머에 있는 것에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을 언급합니다. 

    예수님은 인내의 본을 잘 보여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고 기록했습니다(히 12:2). 

    사도행전에 나오는 교회는 인내로 결실하는 예를 보여줍니다. 유대인들이 교회를 박해할수록 교회는 더욱 성장했습니다. 박해가 심해질수록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였습니다(행 6:7).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은 예외 없이 엄청난 양의 열매를 맺습니다. 좋은 땅에서는 어떤 씨앗은 열매를 맺고 어떤 씨앗은 열매를 맺지 못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씨 중에서 실패하는 경우가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유되는 씨앗은 그 생명력에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 씨앗은 예외 없이 좋은 땅에 뿌려졌을 때 100% 열매를 맺습니다. 뿌려진 씨앗은 씨앗 하나에 하나의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습니다(마 13:10-23; 막 4:13-20). 

    나중에 예수님께서 겨자씨 비유를 말씀하실 때, 말씀의 씨앗이 좋은 마음 밭에 심기어질 때 어떻게 자라는가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말씀의 생명력을 잘 이해하도록 하셨습니다. 겨자씨는 작지만 자라서 큰 나무가 됩니다. 새들의 쉼터가 될 만큼 규모가 커지게 됩니다. 우리는 가장 작은 씨앗 중 하나에서 그렇게 큰 나무가 나올 것이라고는 결코 기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이 작은 씨앗이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큰 식물을 자라는 것을 볼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땅은 주님의 마음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시편37편의 말씀 중 “온유한 사람들이 오히려 땅을 차지 할 것이다”라는 말씀을 인용하신 것 같습니다.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 한다는 말씀을 처음 접할 때는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들이 이 땅에서 많은 부동산을 소유한다는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많이 달랐습니다. 이 세상에서 부동산을 많이 차지하는 사람은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재테크에 강하고 탐욕스럽고 투기꾼적인 기질이 있는 사람들이 부동산을 많이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틀릴 때도 있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 예수님의 말씀은 절대로 틀린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시편37편을 암송하고 있습니다. 

    시편37편은 40절까지로 되어 있는 긴 성경입니다. 암송한다는 것이 보통 힘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몇 번을 포기할까 하다가 그래도 도전하였습니다. 반복해서 읽고 가슴에 새기고, 또 다시 읽고 새기고 하는 중에 지금까지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은 시편37편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 하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땅”이라는 단어였습니다. 대충 세어보니 9번인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땅을 차지한다”, “땅을 물려받는다”, “땅에서 길이길이 산다”, “언제나 땅에서 산다”, “땅에서 끊어진다” 등 땅, 땅, 땅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땅은 아무나 차지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 주님이 베푸신 복을 받은 사람, 악한 일 피하고 선한 일 힘쓰는 사람, 의인, 주님께서 높여주시는 사람들이 그 땅을 차지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편37장에서 말하는 땅을 차지하는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은 후에 그들의 마음 가운데 남아 있는 악한 생각들을 정복하고 마음의 청결함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봅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질투심이 없고, 분노가 없고, 자랑이 없고, 허영심이 없고, 교만이 없고, 탐욕이 없고, 정욕이 없고, 탐식이 없고, 게으름이 없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받아 그런 악한 생각들을 정복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악한 생각들, 악덕들이 시편37장에는 다 들어 있습니다. 시편37장에서 말하는 ”악인들, 악한 자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간단히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나를 제외한 다른 악한 사람들이라고 간단히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 악인들, 악한 자들은 내 마음 속에 있는 악한 생각들일 수 있습니다. 옛 성인들은 우리 안에 악과 선이 동시에 존재하는데 악이 득세할 때는 나도 악인이 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내 안에 있는 악한 생각들이 힘을 얻을 때 나도 악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악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37장에 말하는 악인들, 악한 자들이 바로 저였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우리 안에는 얼마나 허영심이 많이 있는지요. 믿는 자라고 하면서 얼마나 교만한 마음이 많이 있는지요. 영적 지도자라고 하면서 얼마나 탐욕이 많이 있는지요. 자기가 행한 선을 자랑하고, 교인 숫자 자랑하고, 한국에서 제일 큰 교회, 세계에서 몇 번째 큰 교회라고 자랑하고, 자기가 이룬 업적 자랑하고, 어느 목사를 지칭하면서 차세대 한국 교회 대표주자, 세계적인 하나님의 종, 남다른 설교의 대가, 능력의 종, 권능의 종, 이 시대 최고로 쓰임 받는 종 등으로 표현한다면 그 모든 것이 허영심의 발로입니다. 어느 목사는 자기가 비행기를 탔는데 승객들을 향하여 ‘나 때문에 여러분은 다 안전합니다! ‘라고 선포하였다고 스스럼없이 말합니다. 교만의 극치입니다. 조심하여야 합니다. 허영심은 교만으로 직행하는 지름길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나 교계에서 허영심과 교만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지적하지 않습니다. 허영심과 교만은 무서운 죄입니다. 땅, 즉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지 못하게 하는 무서운 죄악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인 온유와 겸손을 본받지 못하게 하는 죄 말고 더 큰 죄가 있을까요? 허영과 교만 말고도 다른 모든 악덕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지 못하게 방해하는 악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악덕들을 주님의 은혜로 극복할 때 우리는 비로소 땅을 물려받게 됩니다. 그 땅은 바로 주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바로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우리 속에 있는 악덕을 극복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물려받게 됩니다. 이때 우리의 마음에 평강과 기쁨이 임하고 어떠한 외풍에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어떠한 시련도 이기는 영적 힘이 하늘로부터 임하게 됩니다. 한국 개신교회 교인들이 예수님을 믿은 후에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여러 가지 악덕을 극복하는 영적전쟁을 배우고 훈련하였어야 하는데, 불행하게도 바로 3박자 축복부터 배우기 시작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한국 개신교회는 깊이 없는 교인들을 양산하게 된 것입니다.

    찬송가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그 맘에 평강이 찾아옴은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를 작시 하신 분은 땅을 차지하는 경험을 하신 분이 틀림없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물려받은 분임에 틀림없습니다.


    농부의 마음

    가을이 찾아오면 농부의 마음을 생각한다. 가장 아름다운 마음은 농부의 마음이다. 농심은 천심이다. 예수님은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요 15:1)고 말씀하셨다. 농부의 마음을 읽으면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농부는 하늘을 보고 산다. 농부는 위를 보고 살며, 하나님을 바라보며 산다. 농부는 혼자의 힘만으로 농작을 할 수 없음을 안다. 위에서 비를 주시고, 태양 빛이 있어야만 곡식이 자란다는 사실을 농부는 잘 안다.

    농부의 마음은 무릎을 꿇는 겸손한 마음이다. 농부는 무릎을 꿇고 산다. 땅을 경작하기 위해 무릎을 꿇고, 땅에 심은 곡식을 돌보기 위해 무릎을 꿇는다. 농부의 무릎을 꿇는 모습 속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본다. 무릎을 꿇는 모습 속에서 겸손을 배운다. 농부를 보면 무릎으로 사셨던 예수님이 생각난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것들은 모두 무릎을 꿇는 헌신을 통해서 나오는 것이 분명한 것 같다.

    농부의 마음은 정직하다. 농부는 심은 것을 거두고 심는 대로 거둔다는 사실을 안다. 농부의 마음은 기대하는 마음이다. 농부의 마음속에는 빛나는 설렘이 있다. 씨앗을 심는 농부의 가슴속에는 출렁거리는 가을이 담겨있다. 농부는 봄에 씨앗을 심으면서 오곡백과가 넘치는 논밭을 본다. 그러므로 농부는 비전의 사람이다.

    농부의 마음은 풍부한 마음이다. 농부는 비록 소박하고 검소한 삶을 살지만 풍부의식속에 산다. 자연의 풍부함을 안다. 생명의 풍부함을 안다. 농부는 씨앗 속에 담긴 가능성을 알고, 무한한 잠재력을 안다. 작은 벼를 한 알 심으면서, 그 한 알의 씨앗을 통해 수많은 곡식을 추수할 것을 안다. 농부는 땅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곡식을 사랑한다.
    농부는 생명의 신비를 안다. 생명은 탄생하고 성장하고 성숙하고 열매를 맺는다. 또한 농부는 생명의 역설적인 능력을 안다. 생명이란 비바람을 맞으며 오히려 강해지며, 역경 속에서 더욱 순수하고 크게 자란다. 뜨거운 여름 태양빛 아래서 곡식은 알차게 여무는 것이다.

    농부의 마음은 가꾸는 마음이다. 가꾸는 마음은 아름답다. 가꾼다는 것은 돌본다는 것이다. 돌봄은 관심에서 시작하고 관심은 사랑에 있다. 결국 농부의 마음은 사랑하는 마음이다. 땅을 가꾸고, 곡식을 가꾸는 농부에게서 우리는 정성을 배운다. 성실을 배운다. 성실처럼 고귀한 성품은 없다. 살아가면서 배우는 것은 성실에는 황혼기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 보배로운 성품을 우리는 농부에게서 배운다.

    농부의 마음은 인내하는 마음이다. 기다리는 마음이다. 농부는 준비하며 기다리고, 가꾸며 기다리고, 추수 때를 기다린다. 모든 것은 인내를 통해 성취되고 열매를 맺는다. 거듭 기억하라. 농심은 천심이다. 그래서 농심을 갖고 사는 사람은 지혜롭다.


    천장지구(天長地久)

    하늘과 땅이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물이 오래오래 계속됨을 이르는 말이다.

    天 : 하늘 천(大/1)
    長 : 긴 장(長/0)
    地 : 땅 지(土/3)
    久 : 오랠 구(丿/2)

    (유의어)
    천양무궁(天壤無窮)

    출전 :
    ○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제7장
    ○ 백거이(白居易)의 장한가(長恨歌)

    하늘만큼 길고 땅만큼 오래되다. 

    하늘과 땅이 존재했던 시간만큼 길고 오래되다. (애정이)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天長地久. 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 故能長生.
    하늘과 땅은 영원무궁하다. 하늘과 땅이 장구할 수 있는 까닭은 스스로를 위해 살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장생할 수 있는 것이다.

    是以聖人後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이런 까닭에 성인은 자신을 남보다 뒤로 돌림으로써 남보다 앞에 나설 수 있게 되고, 자신을 잊고 남을 위함으로써 자신이 존재하게 된다.

    非以其無私耶. 故能成其私.
    이는 무사(無私)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자신이 영원하고 완전한 존재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 말은 '노자(老子)' 제7장에 나오는데, 여기에 나오는 '천장지구'는 성인을 비유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 말이 하늘과 땅만큼 오래가고 영원히 변치 않는 애정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된 것은 백거이(白居易)의 장한가(長恨歌)에서 유래한다.

    臨別殷勤重寄詞
    헤어질 무렵 은근히 거듭 전하는 말이 있었으니

    詞中有誓兩心知
    그 말에는 둘이서만 아는 맹서가 들어 있었지

    七月七日長生殿
    칠월 칠석 장생전(長生殿)에서

    夜半無人和語時
    깊은 밤 남몰래 속삭인 말

    在天願作比翼鳥
    하늘에서는 비익조(比翼鳥)가 되고

    在地願爲連理枝
    땅에서는 연리지(連理枝)가 되자

    天長地久有時盡
    장구한 천지도 다할 때가 있지만

    此恨綿綿無絶期
    이 한(恨)은 면면히 끊일 날 없으리라

    '장한가'는 120구, 840자로 이루어진 당현종(唐玄宗)과 양귀비(楊貴妃)의 슬프도록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이다.

    전단은 총 74구로, 현종이 양귀비를 만나 지극한 사랑을 나누다가 안녹산(安祿山)의 난으로 양귀비가 죽은 후 밤낮으로 그녀를 그리워하며 창자가 끊기듯 마음 아파하는 모습을 그렸다.

    후단 46구는 현종이 양귀비를 못 잊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한 도사가 선계로 가 선녀가 되어 있는 양귀비를 만나 그녀에게 들은, 현종을 그리워하는 양귀비의 마음과 두 사람이 나눈 사랑의 맹약으로 되어 있다.

    위에 예를 든 부분은 선녀가 된 양귀비가 도사에게 이야기해 준, 천보(天寶) 10년(751) 칠월칠석에 현종과 양귀비가 화청궁(華淸宮)에 거동하여 노닐며 장생전에서 나눈 사랑의 맹약으로, '장구한 천지도 다할 때가 있지만 이 한은 면면히 끊일 날 없으리라'는 구절에서 영원히 변치 않는 애정을 비유하는 말인 '천장지구'가 유래했다.

    '장한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애창되었으며, 시가와 소설과 희곡으로 윤색되는 등, 중국 문학에 많은 제재를 제공했다.


    ◼ 천장지구(天長地久)

    하늘과 땅이 끝이 있을까. 하늘만큼 길고(天長) 땅만큼 오래(地久)라는 하늘과 땅이 처음 존재했던 때로부터의 시간만큼 길고 오래되었다는 무한의 뜻이다. 이 말이 귀에 익은 사람들은 홍콩의 느와르 명작영화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1990년 유덕화(劉德華), 오천련(吳倩蓮)의 애틋한 사랑은 속편까지 나왔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영화의 원제 천약유정(天若有情)도 당(唐)나라 시인 이하(李賀)의 시구에서 따왔다지만 우리나라서의 번역명은 더 잘 알려진 데서 나왔다.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에 실려 있고, 역시 장한가(長恨歌)로 유명한 백거이(白居易)의 사랑 표현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도덕경의 제7장 도광(韜光)장을 먼저 보자.

    天長地久. 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 故能長生.
    하늘과 땅은 영원무궁하다. 하늘과 땅이 능히 이런 것은 스스로를 위해서 살지 않기 때문에 장생할 수 있는 것이다.

    노자가 태고 때부터 영원한 존재인 하늘과 땅이 서로 경쟁하지 않았다는 당연한 사실을 말한 것은 이어지는 성인을 비유하기 위해서였다.

    성인은 자신을 위한 것을 뒤로 돌림으로써 남보다 앞에 나설 수 있고, 자신보다 남을 위함으로써 자신이 존재하게 된다. 성인뿐 아니라 천도의 무위자연을 본받아 사심 없이 대하면 누구나 훌륭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런 당연한 이치를 돌려 말한 노자에 비해 낙천(樂天)이란 자로 더 잘 알려진 백거이는 글자대로 하늘과 땅만큼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을 노래했다.

    그의 장한가는 전체 4장에 120구, 840자나 되는 장편으로 당(唐)나라 6대 황제 현종(玄宗)과 미인의 대명사 양귀비(楊貴妃)의 비련을 그렸다.

    마지막 장에 성어가 나오는데 화목한 부부나 남녀관계를 말하는 비익연리(比翼連理) 구절부터 보자.

    在天願作比翼鳥
    在地願爲連理枝
    하늘에선 날개 붙은 비익조가 되고, 땅에선 가지 붙은 연리지 되길 원하네.

    天長地久有時盡
    此恨綿綿無絶期
    장구한 천지도 다할 때가 있건만, 이 한은 면면히 끊일 날 없으리라.

    하늘과 땅처럼 영원하도록 자기를 뒤로 하고 남을 앞세우는 훌륭한 사람이 본받을 일이다. 남을 위해 일을 하겠다는 지도층이 명심할 말이고 일반 사람들은 영원한 남녀의 사랑에 더 솔깃하다. 사랑하는 짝이 나타나면 누구나 자신의 사랑은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라며 상대에 진심을 알아 달라고 애탄다.

    사랑이 성공한 뒤에는 초기에 열렬한 만큼 쉬 식는 사람도 많다. 더 문제인 것은 적령기의 청춘들이 여건이 되지 않는다고 아예 사랑을 포기한다는 사실이다. 비익연리가 되고 하늘처럼 땅처럼 영원한 사랑이 많아져야겠다.


    ◼ 천장지구(天長地久)

    하늘은 길고 땅은 오래간다

    통행본 장 7장

    天長地久.
    하늘은 길고 땅은 오래간다

    天地之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也, 故能長生.
    하늘과 땅이 길고 오래갈 수 있는 것은
    스스로 삶을 도모하지 않기 때문이니
    그 때문에 장생할 수 있다

    是以聖人退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不以其无私與.
    이 때문에 성인은 자신을 뒤로 물리면서도 자신이 앞에 있게 되고, 자신을 밖으로 내몰면서도 자신을 보존하게 되니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故能成其私.
    그러므로 결국 그 사사로움을 이룰 수 있다.

    ○ 天長地久.
    '노자'는 여기에서 하늘과 땅의 장구함을 말함으로써 사람을 깨우치려고 하였다. 남다른 통찰력으로 자연을 독해하여 교훈을 얻는 것은 '노자'의 주요한 어법이다.

    왜 하늘은 '길고' 땅은 '오래간다'고 하였는가? 길다는 것은 모양이고, 오래간다는 것은 시간이다. 원래 하늘은 시간을 기준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모양에서 부족하다는 혐의가 있고, 땅은 모양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시간에서 부족하다는 혐의가 있다. 그 혐의를 벗기 위해서 거꾸로 이야기한 것이다. 재미있는 설명이다.

    소철은 하늘과 땅도 형체를 가졌으므로 장구함에는 한계가 있고, 진정으로 장구한 것은 천지의 시작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곧 천지의 시작 같은 형이상의 세계만 영원하다고 본 것이다. 이것이 송대의 분위기다. 상식적 정서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곳에서 문제를 잡아내는 것을 보면 그 시대의 분위기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주겸지는 이것이 원래 옛말인데, '노자'가 인용하여 풀이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 글 전체가 "하늘은 길고 땅은 오래간다"는 금언을 풀이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 天地之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也, 故能長生.
    하늘과 땅이 길고 오래갈 수 있는 것은 스스로 삶을 도모하지 않기 때문이니 그 때문에 장생할 수 있다.

    여기에서 '자생(自生)'이라는 말은 '자사(自私)'라는 말과 같다. 곧 "스스로 삶을 도모하지 않는다"는 것은 "허겁지겁 자기만 배부르기를 도모하고 사사로이 다른 사람 것을 빼앗아 자기에게 주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장생할 수 있는 이유는 "스스로 삶을 도모하면 사물(남)과 다투게 되고, 스스로 삶을 도모하지 않으면 사물과 함께 편안한 곳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노자'는 스스로 삶을 도모하는 일의 폐해를 이야기한 바 있다. "백성들은 살고 또 살려고만 하니 몸을 움직여 사지로 가는 것이 또 십 분의 삼이다." "목숨을 더하려는 것을 요망하다고 한다." "무릇 살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지 않는 것이 생명을 귀하게 잘 여기는 것이다." 지금 문장과 서로 참고하면서 보면 더 좋겠다.

    여기에서 '생(生)'자를 '태어난다' 또는 '태어나게 한다'는 뜻으로 푸는 경우도 있다. "죽지 않으면 태어남도 없다. 태어나지 않는 것이라야 능히 태어나고, 또 태어나게(生生) 할 수 있다. 하늘과 땅이 길고 오래갈 수 있는 이유는 스스로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니 스스로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장생할 수 있다. 마치 골짜기의 신(곡신)과 같다."

    이런 해설은 '열자' 천서의 다음 문장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태어나지 않는 것만이 태어나고 또 태어나게 할 수 있고, 변화하지 않는 것만이 변화하고 또 변화하게 할 수 있다. (…) 사물을 태어나게 하는 것은 태어나지 않고, 사물을 변화하게 하는 것은 변화하지 않는다."

    이것은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는다"는 말에 대한 '열자'의 해석이다. 이런 해석이 멋들어지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을 택한다면 이 문장이 어떻게 뒤의 문장과 연결되는지 복잡하게 설명해야 할 것이다.

    ○ 是以聖人退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이 때문에 성인은 자신을 뒤로 물리면서도 자신이 앞에 있게 되고, 자신을 밖으로 내몰면서도 자신을 보존하게 되니,

    앞의 문장을 부연한 글이다. 여기에서는 스스로 삶을 도모하지 않는 것이 무엇이며, 그를 통해 어떤 좋은 결과가 있는가를 설명한다.

    하상공에 따르면 "남을 먼저하고 나를 뒤로하면 천하가 그를 존경해서 먼저 어른으로 모신다. 자기를 박하게 하고 남을 후하게 하면 백성이 그를 부모처럼 사랑하고 신명은 그를 어린아이처럼 보우해서 몸을 항상 보존하게 된다."

    각기 다른 해설이 있지만 그 뜻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때문에 성인은 백성 위에 서려고 할 때는 반드시 그 말을 낮추고, 백성 앞에 서려고 할 때는 반드시 그 몸을 뒤로 한다"는 말과도 서로 통한다.

    '도응훈'은 이 말을 공자 시대의 인물인 공의휴(公儀休)의 고사에 빗대어 설명한다. 공의휴는 생선을 대단히 좋아했는데, 그가 노나라의 재상이 되었을 때 사람들이 좋은 생선을 갖다 바쳤으나 전부 거절했다는 것이다.

    그 제자가 까닭을 물었을 때 공의휴는 이렇게 대답했다. "오직 생선을 좋아하기 때문에 받지 않은 것이다. 생선을 받아서 재상직에서 쫓겨나게 되면 비록 생선을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생선을 자급해서 먹을 수 없을 것이고, 생선을 받지 않고 재상직에서 쫓겨나지 않으면 오랫동안 생선을 자급해서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공의휴는 생선을 좋아하면서도 그 욕심을 내세우지 않고 선물로 들어오는 생선을 물리쳤으므로 자신을 뒤로 물린 것이고, 그렇게 해서 계속해서 생선을 먹을 수 있었으므로 결국 자신이 앞에 있게 되었다

    이 고사는 '한시외전' 권3에도 인용되어 있으며, 그곳에서도 역시 '노자'의 지금 문장을 소개한다. 단지 '한시외전'은 '노자'를 소개한 후 "생각함에 사특함이 없다(思無邪)"는 '시'의 정신도 이 고사와 관련되어 있다고 첨언했을 뿐이다.

    그런데 정말 공의휴의 고사는 "생각함에 사특함이 없다"는 '시'의 정신과 연결될 만한가? 철저한 도덕주의자가 본다면 공의휴는 도덕적인 인물이 아니다. 그는 이미 이익을 계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중국의 공리주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익에 대한 계산쯤은 누구나 다 하는 것 아닌가. 복을 바라고, 이익을 추구하는 게 잘못된 일은 아니지 않는가.

    어쨌거나 지금 '노자'의 문장은 궁극적으로 사사로움이 없는 삶의 태도(無私)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생각함에 사특함이 없다"는 말과 연결된 것이다.

    여담이지만 공의휴의 고사는 원래 '한비자 외저설우하'에 나온다. '도응훈'은 한비자를 보고 그 고사를 가져온 것이 분명하다. '도응훈'의 '제자(弟子)'라는 말은 '외저설우하'에서는 '동생(弟)'으로 되어 있는데, '도응훈'이 고사를 가져올 때 약간 바뀐 것이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고사는 '안자춘추'에서 제나라의 현신 현장(弦章)의 일로 언급된다. 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선물로 들어온 고기를 사양했다는 것이 이야기의 뼈대이다. 현장은 안자를 이어 경공(景公)을 도운 인물이므로 역시 공의휴처럼 공자와 동시대 인물이다. 여기에서도 같은 이야기가 주인공만 바뀌어 다른 곳에서 나타나는 중국 고사 전설의 패턴을 확인할 수 있다.

    ○ 不以其无私與. 故能成其私.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결국 그 사사로움을 이룰 수 있다.

    이 문장은 예로부터 약간의 혐의가 있었다. "사사로움을 이룬다"는 말 때문이다. '사'는 '설문'에 '사(厶)'로 되어 있는데, 이 글자는 원래 간통하는 것을 나타낸다.

    중국은 위진남북조 시대에 개인을 가장 강조했지만 그래도 지금의 개인주의 하고는 거리가 멀고, 전시대를 통틀어 보면 멸사봉공의 막강한 공사 관념이 있었다. "사사로움을 이룬다"는 말에 혐의가 잔뜩 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가령 "사사로운 이익을 계산하고 이익을 도모한 것이 아니라 일의 추세가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것이니 마치 겸손히 있는데도 빛이 나고, 몸을 잊었는데도 장수를 누리는 것과 같다"는 식의 발명이 필요했다.

    이런 해설도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보다는 이 문장도 역시 앞에서 말한 '무위이무불위'의 말의 구조를 통해서 이해하면 쉽다.

    곧 앞의 사사로움과 뒤의 사사로움은 함의가 다르다. 뒤의 사사로움이라는 말은 "몸(身)을 두고 말한 것이지 공·사의 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사로움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은 "자신이 앞에 있게 되고" "자신을 보존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노자'의 말의 구조는 좀더 복잡하다. "무위하면 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말에서 "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것은 '노자'의 본의에서 볼 때 무소불위한 능력을 가지게 된다는 말이 아닌데도 결국은 그런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그 사사로움을 이룰 수 있다"는 말 역시 이기적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다는 뜻은 아니지만 역시 그런 암시를 준다.

    경공이 안자에게 물었다. 
    "반듯한 정치를 해서 장구할 수 있다면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 
    안자가 대답하였다. 
    "그 행함은 물과 같은 것입니다." (안자춘추 내편 문하)

    ◼ 천장지구(天長地久)

    중국 영화 중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영화 제목 중에 '天長地久'란 영화가 있습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하늘은 길고 땅은 오래다'는 뜻인데요, 유덕화와 오천련이 주연으로 나온 이 영화는 '하늘과 땅처럼 사랑이 영원하리라'는 주제를 우리에게 잘 알려진 중국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제목 '천장지구'는 원래 노자의 도덕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노자 도덕경 7장에 나오는 천장지구의 원래 뜻은 이 영화에서 말하는 변치 않는 사랑의 의미와는 좀 다릅니다.

    하늘과 땅은 장구합니다(天長地久). 천지가 저토록 장구 할 수 있는 이유는(天地所以能長且久者는) 억지로 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以其不自生이라). 그래서 천지는 장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故로 能長生이라).

    이 구절에서 노자는 하늘과 땅이 수많은 세월동안 장구(長久)한 이유를 '부자생(不自生)'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자생(自生)은 스스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부(不)'라는 부정어가 붙어 억지로 만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늘과 땅은 의지와 목적을 가지고 간섭하는 주체가 아니라는 겁니다. 자신들의 품안에서 자라는 세상의 모든 만물이 스스로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주체일 뿐 강요하는 존재는 아니라는 뜻인데요.

    천지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풀 한포기 나무가 한그루마저도 스스로 자랄 수 있도록 돌봐주는 어머님의 마음을 가진 존재일 뿐입니다.

    노자는 이런 자연의 불간섭 원리를 그의 철학에 적용하였습니다. 리더는 천지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위적인 강요를 하지 않는 무위(無爲)의 리더십을 통해 사람들을 스스로 그렇게 되도록 만드는 자연(自然)의 결과를 내라는 것입니다. 일명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는 역설적인 리더십입니다.

    노자철학에 의하면 리더는 간섭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스스로 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드는 천지(天地)를 닮은 리더가 진정한 리더의 모습입니다. 
    관심이라는 명목으로 직원들에게 강요하지 말고, 자신의 생각과 신념을 직원들이 스스로 따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라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강요하는 리더보다 오히려 장구(長久)하게 리더로 남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노자는 뒤이어 이렇게 말합니다.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세요. 
    그러면 오히려 당신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後其身而身先). 
    한 발짝 밖으로 비켜서세요. 
    그러면 오히려 당신은 안에 있게 될 겁니다(外其身而身存)."

    내가 리더로서 남보다 낫고 그들을 다스린다는 생각을 가지고 억지로 지도하려 할 때 오히려 그 자리를 보존하지 못하게 된다는 역설적인 리더십 철학입니다.

    억지로 간섭하지 않기에 오히려 장구할 수 있고, 군림하려 하지 않기에 결국은 위에 있을 수 있을 것이라는 노자의 이 기막힌 '역설의 리더십'을 저는 일명 '조용한 리더십'이라 정의하고 싶습니다.

    행복한 동행이란 글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어느 때는 그냥 두세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세요. 우리가 힘들어 하는 것의 많은 부분은, '관심'이라는 간섭 때문입니다. (...) 사랑이란 일으켜 세워주고 붙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일어나 자랄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세상은 반드시 강요한다고 원하는 데로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말없는 가르침 '불언지교(不言之敎)'를 행해 보십시오. 섬기는 리더가 오히려 섬김을 받을 수 있다는 노자의 아름다운 철학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늘과 땅은 만물에게 간섭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장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천장지구', 우리 가슴 속에 늘 채우고 살아야 할 삶의 화두입니다.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문호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그로 인한 파멸을 강렬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이 작품은 물질적 욕망이 인간을 어떻게 파멸로 이끄는지 보여주는 동시에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 줄거리

    이야기는 도시에 사는 언니와 시골에서 농부와 사는 동생의 대화에서 시작된다.

    언니는 상인과 결혼해 자신의 호화로운 도시 생활을 자랑한다. 
    이에 동생은 도시 생활은 악마의 유혹으로 가득 차 있으며, 농촌 생활이 훨씬 안정적이라고 주장한다. 
    언니와 동생의 이야기를 듣던 동생의 남편 ‘파홈’은 아내의 말에 동의하며 말한다.

    “우리 농부들은 어릴 때부터 땅을 벗 삼아 살아왔기 때문에 어리석은 생각에 빠질 틈이 없습니다. 
    다만 넓은 땅이 없다는 게 아쉽습니다. 원하는 만큼의 땅만 가질 수 있다면 악마도 무섭지 않을 텐데.”

    난로 뒤에서 이들의 대화를 모두 엿듣고 있었던 악마는 파홈의 말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악마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 한번 붙어보자. 내가 너에게 땅을 넉넉히 주겠다. 그리고 그 땅으로 널 홀리겠다.”

    첫 번째 땅을 소유한 파홈

    파홈이 사는 마을 근처에는 한 여성 지주가 많은 땅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평소 소작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새로운 관리인이 들어오면서 관리인이 소작인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이에 소작인들은 여지주에게 땅을 자신에게 팔아달라 요청했고, 이때 파홈도 15정보(약 5만 평)의 땅을 사게 된다.

    그는 자신의 땅에서 농사를 짓고, 수확을 얻으며 점점 안정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이웃 농부들의 가축이 그의 땅을 침범하는 일이 발생했고, 파홈은 이웃들과 다투게 되었다. 땅으로 인해 소송을 걸고, 벌금을 매기고, 사람들의 원성을 들었지만 그는 오히려 더 많은 땅을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을 느꼈다.

    더 넓은 땅을 찾아 떠난 파홈

    그러던 어느 날 파홈은 먼 지방에서 온 한 농부로부터 볼가강 너머의 기름진 땅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곳의 농부들은 조합을 통해 땅을 배분받아 풍족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파홈은 자신이 가진 땅을 모두 정리한 후 가족들과 함께 그곳으로 이주했다.

    새로운 땅에서 그는 50정보(15만 평)의 땅을 분배 받았다. 땅이 넓어 만족스러운듯 했지만, 넓은 땅에 대한 욕망은 시간이 지나면서 또 다시 커져갔다. 그는 파산한 농부가 헐값에 내놓은 땅을 사기로 했다.

    땅값의 잔금을 준비하던 때, 파홈은 바시키르라는 마을에서 온 상인에게 솔깃한 정보를 듣게 된다. 바시키르족이 사는 마을에 가면 매우 싼 값에 땅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파홈은 더 많은 땅을 얻을 기회라 생각하고, 일꾼 한 명을 데리고 바스키르족이 있는 마을로 향한다.

    바스키르족과의 거래

    바스키르족은 친절했다. 바스키르의 촌장은 파홈에게 원하는만큼 땅을 줄 수 있다고 했다. 그들이 땅을 파는 방식은 매우 특이했다. 땅값으로 1000루블을 지불한 뒤, 갖고 싶은 만큼의 땅을 하루 안에 걸어 표시하면 그 땅을 모두 주겠다는 것이다. 단, 해가 지기 전까지 출발 지점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 조건이었다.

    그날 밤, 파홈은 엄청난 땅을 얻을 생각에 설레서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새벽녘에야 겨우 잠들었다.

    파홈은 잠결에 텐트 밖에서 나는 촌장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밖을 내다보니 촌장이 배를 움켜잡고 기괴하게 웃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는 촌장이 아니라 자신에게 바스키르를 소개해준 상인이었다. 상인에게 말을 걸려고 쳐다보자, 상인이 갑자기 악마로 변했다. 악마는 바닥에 쓰러진 한 남자를 보고 깔깔 웃었다. 바닥에 쓰러진 남자는 파홈 자신이었다.


    파홈의 눈이 번쩍 뜨였다.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파홈은 불길한 꿈을 꾸어 기분이 좋지 않았으나 서둘러 일꾼과 함께 촌장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촌장은 여우털 모자를 어느 땅에 내려놓고 파홈에게 이곳에서부터 출발해 돌아오라고 말했다.

    파홈은 삽을 메고 걷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는 모든 땅이 비옥했다. 1km쯤 갔을 때, 그는 구덩이를 파서 잔디 조각을 놓아 자신의 땅이라고 표시했다.

    가면 갈수록 눈앞에 펼쳐진 탐스러운 땅으로 인해 파홈의 걸음은 빨라졌다. 중간에 몇 번씩 돌아갈까 고민했지만 아직 돌아가기는 이르고, 조금만 더 가면 더 넓은 땅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에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정오가 되어 그는 잠시 빵과 물로 끼니를 해결한 뒤 다시 한참을 들판을 걸어다녔다.

    정신차려보니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파홈은 출발점으로 돌아가기 위해 다급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멀리 와버린 탓에 지칠대로 지친 상태였다. 파홈의 숨이 가빠졌다. 온몸에 힘이 빠졌지만 여기서 포기하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기에 그는 목숨을 걸고 출발 지점을 향해 뛰었다.

    출발 지점에 가까워졌을 때, 파홈은 언덕 위에서 자신을 보며 환호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언덕 위에는 아직 해가 빛나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 남은 힘으로 언덕을 올랐다. 촌장은 옆구리를 움켜 잡고 웃고 있었다. 마침내 출발 지점에 도착했다. 파홈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고꾸라졌다. 그의 손이 여우털 모자에 닿았다.

    촌장이 소리쳤다.

    “아, 참으로 훌륭합니다. 진짜 좋은 땅을 차지했습니다.”

    일꾼이 달려가 쓰러진 파홈을 일으키려 했으나, 파홈은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일꾼은 파홈을 누일 수 있을만큼의 구덩이를 파, 파홈을 그곳에 묻었다.

    파홈이 묻힌 땅은 약 2m 정도가 전부였다.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가 주는 교훈

    톨스토이는 마지막 문장을 통해 인간에게 필요한 땅은 결국 죽어서 누울 작은 무덤의 크기뿐이라는 교훈을 전한다. 파홈은 처음에 작은 땅으로도 만족했지만, 욕심이 커질수록 더 많은 땅을 원했다. 결국 자신의 욕망이 스스로를 파멸로 몰고가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다.

    파홈의 수고는 모두 헛된 것이 되었다. 그가 죽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으면 소유하던 물질과 재산은 그와 전혀 상관이 없게 된다. 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파홈과 성경 속 어리석은 부자

    그리고 그들에게 비유를 하나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밭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 소출을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하고 궁리하였다. 그는 혼자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겠다. 내 곳간을 헐고서 더 크게 짓고, 내 곡식과 물건들을 다 거기에다가 쌓아두겠다. 그리고 내 영혼에게 말하겠다.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두었으니, 너는 마음놓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

    (새번역 누가복음 12:16~18)

    예수님의 비유에는 한 부자가 등장한다. 부자는 수확이 많아지자 창고를 더 크게 짓고, 앞으로 평안히 먹고 마시며 즐거이 살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네게서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새번역 누가복음 12:19)

    파홈은 더 많은 땅을 소유하면 행복할 것이라 믿었다. 부자 역시 부를 축적해두고 앞으로 행복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죽으면 아무 의미가 없게 되는 것이 인생이다.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누가복음 12:22~24)

    아무리 돈이 많은 부자라도 당장 오늘 밤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찾으시면 소용이 없으며, 더군다나 재산과 물질은 우리의 생명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누가복음 12:15)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 이야기 속 파홈 그리고 비유 속 부자처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물질적인 풍요가 가장 큰 행복이라고 믿는다. 더 넓은 집, 더 좋은 차, 더 많은 재산이 목표가 되어 버린 시대다. 그러나 성경은 물질적인 풍요만을 삶의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교훈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솔로몬의 깨달음: 부와 권력을 가진 뒤에 깨달은 진정한 삶의 가치

    고대 이스라엘 왕국의 황금기를 이끈 솔로몬 왕은 명예와 권력은 물론이고 상상을 초월하는 부를 누린 왕이다. 솔로몬 시기, 주변국들은 솔로몬에게 엄청난 조공을 바쳤고, 해마다 약 23톤의 금이 솔로몬 왕의 궁으로 들어왔다. 그의 궁전에서 사용하는 모든 잔과 그릇은 순금으로 만들어졌으며, 예루살렘에서 은은 돌처럼 흔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 모든 부귀영화를 누렸던 솔로몬은 인생의 말년에 허무함을 이야기하며 전도서를 기록했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1~2)

    이 삶에서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나 명예 같은 세속적인 물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솔로몬은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많은 땅, 돈 같은 부나 명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육체가 원래 왔던 흙으로 돌아가고, 숨이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네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새번역 전도서 12:7)

    할 말은 다 하였다. 결론은 이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여라. 그분이 주신 계명을 지켜라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해야 할 의무다.

    (전도서 12:13)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바로 영의 세계를 바라보라는 것이다. 우리가 영원히 살아야 할 세계는 바로 이 땅이 아니라 천국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름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 영적인 부요를 누릴 수 있다. 앞서 살핀 말씀처럼 재산이나 물질은 우리의 생명을 지켜줄 수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한다.

    기록된 바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한 것들을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고린도전서 2:9)

    그래서 솔로몬은 이 땅에서 누리는 잠깐의 부요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라고 교훈한 것이다. 영적인 준비 없이 세상의 물질에만 집착하는 삶은 결국 허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땅을 얻기 위해 내달렸던 파홈처럼 말이다.

    사람에게는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 육적인 삶만 바라보고 사는 이들이 차지할 땅은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영의 세계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 차지할 땅은 다르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천국은 무한한 영광과 풍요로 가득하다.

    유한한 세상에서 잠깐의 만족을 위해 살 것인가?

    무한한 천국을 얻기 위해 영의 세계를 바라보고 준비할 것인가?

    이제 스스로의 선택에 달렸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오늘 밤 내가 네 영혼을 찾겠다” 말씀하신다면 당신은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가.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 하지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마태복음 6:19~21)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러시아어: Много ли человеку земли нужно? 므노고 리 첼로베쿠 제믈리 누즈노[*])는 1886년 출판된 레프 톨스토이단편 소설로, 톨스토이는 본 작품을 통해 인간의 욕심과 그로 인한 파멸을 경고하였다.

    필요한 만큼만 원하는 검소함을 자랑으로 여기던 러시아인 농부 파홈(Пахом, Pahom)[1]은 아내를 찾아온 처형에게 '농부의 삶은 땅만 충분하다면 악마도 두렵지 않다'고 호언장담한다. 그런데 악마 한 마리가 난로 뒤에 숨어 이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고, 속으로 선언한다.

    이후 파홈은 근면하게 일하는 동시에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모아 원하는 만큼의 땅을 손에 넣는 데 성공하지만 악마의 계략과 이간질 그리고 소유한 땅이 넓어지면서 이웃들과 지속적인 트러블이 일어나 골머리를 앓는다.[2] 그러는 와중에도 소유한 땅을 불려가던 파홈이지만, 날이 갈수록 자신의 처지와 소유한 땅의 크기에 대해 불만을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굉장히 넓은 땅을 거저나 다름없는 금액에 판다는 바시키르인 유목민의 소문을 듣고 파홈은 그들을 찾아간다.

    유목민들의 거래 조건은 지극히 간단한데, 해가 뜨고 나서부터 해가 지기까지 걸어서 이동한 뒤 시작 지점으로 되돌아오면 단돈 1000루블[3]걸었던 구간의 내부 면적만큼 땅을 받을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시작 지점에 조금이라도 늦게 도착하면 선지불한 1000루블은 돌려받지 못하고 계약은 파기된다는 조건이다.

    조건을 승낙한 파홈은 바시키르인 마을에서 하룻밤을 자고 내일 아침에 출발하기로 하는데, 그날 밤에 자신이 무리를 한 나머지 쓰러져 죽게 되고 악마가 그런 자신을 보며 비웃는 꿈을 꾼다.

    이튿날 아침, 파홈은 악몽을 꾼 것을 찜찜해하면서도 땅을 차지하기 위해 출발한다. 하지만 걸으면 걸을수록 점점 더 기름진 토지들을 보게 되고, 이것들을 모두 차지하기 위해 욕심을 부리다가 결국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하지 못할 위기에 처한다. 마지막 순간에 파홈은 거추장스러운 신발과 옷도 전부 벗어던지고 젖먹던 힘까지 내어 달려 시작 지점에 도착하는 데 성공하지만, 지나치게 몸을 혹사시킨 나머지 그대로 넘어져 피를 토하며 즉사한다. 그리고 이를 본 악마는 통쾌하게 웃는다.

    죽기 직전의 파홈에게 엄청난 땅을 얻었다고 축하를 해 주던 바시키르인 촌장을 옆에 둔 채, 파홈의 하인은 죽은 주인을 묻을 땅을 파기 시작한다. 그리고 소설은 다음의 해설과 함께 끝이 난다.

    누가복음 8:15
    개역개정,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누가복음 8:15
    그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정직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그(3588) 좋은 땅(테 칼레 게) 호 칼로스(2570) 게(109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그 말씀을 듣고(191),
          지키어(2722), 인내로(5281) 결실하는 자(2592) 

    듣고(191) 아쿠오(akŏuōἀκούω

    1. 듣다.  2. 마 10:14
    발음 [ akŏuō ]  
    관련 성경  /  듣다(마2:3, 눅4:28). 들리다(계12:10).

    지키다(2722) 카테코(katĕchō)  κατέχω
    1. 제지하다.  2. 굳게 붙들다.  3. 차지하다
    발음 [ katĕchō ]

    어원  /  미완료 κατεῖχον, 제2부정과거 κα- τέσχον, 2596과 2192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만류하다(눅4:42), 지키다(눅8:15, 고전11:2, 15:2), 가다(눅14:9), 걸리다(요5:4), 들어가다(행27:40), 막다(롬1:18, 살후2:6), 얽매이다(롬7:6), 가지다(고후6:10), 취하다(살전5:21), 머물다(몬1:13), 잡다(히3:6,14, 10:23), 차지하다(마21:38).

  • 인내(5281) 후포모네(hüpŏmŏnē)  ὑπομονή, ῆς, ἡ     

    1. 인내.  2. 대망
    발음 [ hüpŏmŏnē ]

    어원  /  5278에서 유래
    • 1.  인내, 참음, 견딤, 견인불발, 눅21:19, 롬5:3.
    • 2.  대망, 기대, 계1:9.
    • 관련 성경  / 참음(롬2:7, 고후12:12), 견디는 것(고후6:4, 골1:11), 인내함(딛2:2), 인내(눅8:15, 살후3:5, 벧후1:6).


    결실하는 자(2592)  카르포포레오(karpŏphŏrĕō)  kαρποφορέω 스트롱번호 2592

    1. 열매를 맺다.  2. 막 4:28. 3. 마 13:23
    발음 [ karpŏphŏrĕō ]

    어원 / 미래 καρποφορήσω, 제1부정과거 ἐκαρποφόρησα, 2593에서 유래
    • 1. 열매를 맺다, 수확을 내다.
      • a.  [문자적] 막4:28.
      • b.  [비유적: 내적 생활의 결실로서의 실천적 행동] 마13:23, 막4:20, 눅8:15. 
    • 관련 성경  /  결실하다(마13:23, 눅8:15), 열매맺다(막4:28, 롬7:5, 골1:10).



    󰃨 착하고 좋은 마음 - '마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르디아'(*)는 인간의 영적, 지적, 의지적인 요소가 집중되어 있는 전인적(全人的)인 좌소를 가리킨다. 한편 '착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칼레'(*)는 '칼로스'(*)의 변형으로 '카코스'(*)의 반대어이다. '카코스'는 '올바로 쓰이지 못하는 펜'이나비겁한 병사처럼 그 목적에 부합되지 못하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카코스'의 반대말인 '칼로스'는 목적에 적합한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돈벌이나 사리사욕과 같은 낮은 차원의 성취에 몰두하지 않고 지혜나 의로움 등의 숭고한 일을 획득하는 일에 열심인 태도를 묘사하는 말이다. 복음의 씨가 뿌려져서 좋은 열매를 맺기에 적합한 마음은 그 다음의 형용사 '좋은'이라는 단어에 의해 더욱 분명해진다. '좋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가데'(*)는 숭고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필요시에는 작은 것들을 과감하게 포기할 줄도 아는 내면 상태를 가리킨다. 이 단어도 반대어인 '포네로스'(*)와 비교할 때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포네로스'는 '적극적으로 악한 것'이란 뜻이며 '가장 큰 피해를 끼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포네로스'의 반대어인 '아가데'는 선하고 유익한 것이라는 의미가 분명해진다.

    󰃨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
     '착하고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달리 말해서 말씀을 듣되 그 말씀을 듣는데 그치지 않고 지키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염려, 재물에 대한 욕심, 그리고 쾌락과 같은 마귀의 시험을 '인내'로 견디어내 마침내 백배의 결실을 맺는다. 
    '인내'는 모든 영적 열매가 발아(發芽)하고 지속적으로 생산되는 데 있어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 요소이다.


    󰃨 가시떨기에...일락에 기운이 막혀 - 가시떨기와 같은 상태의 사람들은 어느정도 영적인 성장을 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서 상당한 정도의 신앙을 갖게되지만 궁극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의 가치를 혼동함으로써 결국에는 실패하는 부류들이다. 마치 세례요한의 메시지에 대해 그것이 옳은 것임을 알지만 세상적인 지위와 부귀에 대한 미련 때문에 결국은 인정하지 않고 죄를 범했던 헤롯 안디바와 갈은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다음의 세 가지가 문제가 된다. 첫째는, 이생의 염려이다. 마가는 '이생의' 대신에 '세상의'라고 표현했는데(막4:19), 지극히 세속적인 것에 대한 염려 때문에 신앙이 온전히 성장하지 못하게 됨을 말함에 있어서는 같은 뜻이다.이 염려는 신앙 생활에 매우 해로운 것으로 영혼의 저항력을 조금씩 약화시켜 마침내는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는 죽은 영혼이 되게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런 것을 경계하여 염려하지 말 것에 대한 교훈을 주신 바 있다(12:22-34;마 6:25-34). 둘째는 재리(財利) 이다. 재물에 대한 지나친 열망 때문에 진리를 따르지 못한 예는 '어리석은 부자'(12:16-21), '부자 관원'(18:18-23)과 같은 이야기에 아주 잘 나타나고 있다. 셋째는 일락(逸樂) 즉 생의 향락이다. 일시적이고 표면적이며 충동적인 육체의 쾌락을 위해 영혼의 존귀한 가치를 망각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숭고한 영혼을 조금씩 침식하여 마침내는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요 4:36) 맺지 못하게 하는 생의 향락은 크게 둘로 나누인다. 첫째는 그 자체가 죄악이 되는 술취함, 음란한 행위, 폭력 등이며둘째는, 그 자체는 죄악이 아니나 심하게 빠져들 경우 죄가 될 수 있는 유흥(amusement), 스포츠 등이다.

    󰃨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 성경에는 온전한 신앙을 갖지 못한 자들을 열매 없는 나무에 비유하는 경우가 있는데, 호 10:1,2는 그 대표적인 예로서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잎사귀만 무성한 포도나무로 비유한다.


    성서학자에 의하면 구약의 중심 주제가 "땅"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땅은 구약에서 빠뜨릴 수 없는 중심 주제라고 하겠습니다.
    인간은 땅의 흙으로 지어졌을 뿐 아니라, 삶과 역사가 땅이라는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그 땅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나시는 거룩한 장소이기에, 하나님 계시의 중심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구원 역사를 위하여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도, 자손 번성과 함께 땅의 소유를 약속하셨습니다. 
    그에 따라 출애굽 구원의 최종 목적지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땅이 구약의 중심 주제인 것은 통계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땅은 2504번이나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언약이 사용된 경우보다 더 많은 것으로서 땅이 중요한 주제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구약에서 땅은 상징성을 지니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현실적입니다.  
    즉 전쟁, 갈등, 횡포와 같은 무질서가 난무하는 삶의 현장이 땅에서 일어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오셔서 구원 역사를 이루시는 역사의 무대 역시 땅입니다.
    구약은 땅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과 그 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거룩한 사람들의 자서전적 기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늘을 담고 있는 땅의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성서 주제로서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최근까지 땅에 관한 연구가 소홀히 취급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땅을 이원론적으로 다루었던 기독교 신학의 입장이 크게 작용한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땅을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 구분하면서, 그 신학적 가치를 외면한 것입니다.
    광야를 세상으로 보고 가나안 땅을 천국으로 보는 것이나 가나안 정복과 입국을 은유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그런 경향의 좋은 예라고 하겠습니다.
    그런 점은 교회가 즐겨 사용하는 찬송가 가사 내용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요단강 건너가 만나자’에서 강조되는 것은 요단강 건너편은 실제의 땅이 아니라 죽음 너머의 천국을 말합니다.
    땅을 역사적 현실이 아닌 미래 천국에서 받게 될 영원한 유업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땅에 대한 해석의 방향은 내세 지향적인 것으로 치우쳐, 구약의 본래적 의미를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신학적 주제로서 땅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1948년 이스라엘 독립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독립이 있기 전까지 땅의 주제는, 이스라엘-아랍 영토권 문제와 복잡하게 얽혀 있었던 민감한 정치적 이슈였습니다. 
    구약에서 땅의 문제는 불가피하게 이스라엘의 영토 소유권을 지지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독립하여 정치적 실체로 등장하면서 그런 부담감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에 따라 땅에 대한 연구 분위기도 자연스럽게 부각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1960년대 이후 땅의 신학적 논의가 성서학계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배경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땅을 의미하는 대표적인 단어는 ‘아다마’와 ‘에레츠’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본문에서 사용된 단어 "묵은 땅"은 "니이르(nîyr)"라고 합니다.

    아다마와 에레츠는  

     두 단어를  가지가 있다.

    ‘아다마’는 ‘붉다’(red)는 뜻의 히브리어 ‘아돔’에서 파생된 것으로, 붉은색을 띈 비옥한 토양을 의미한다. 
    특히 이스라엘에서는 산지에서 흘러내려와 아래쪽 골짜기에 쌓인 충적토가 유명하다. 
    지중해 연안지역에서는 이를 ‘테라로사’(terra rosa), 즉 ‘붉은 색의 흙’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아다마’는 경작이 가능한 땅, 경제적으로 높은 가치가 있는 땅, 곧 인간의 거주와 생존에 적합한 땅을 의미한다. 
    ‘아다마’의 반대 개념은 인간이나 생물의 생존이 어렵고 힘든 사막 혹은 광야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위하여 창조하신 에덴동산은 ‘아다마’의 땅이다. 토양 자체도 비옥하였지만, 네 개의 강으로 나뉘어 흘러 내려갈 정도로 많은 물이 솟아나는 샘 근원이 에덴동산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비옥한 토양과 풍부한 물 근원, 그리고 그런 좋은 여건 속에서 잘 자라는 각종 과일나무들, 이 모든 것들이 에덴동산을 최고의 ‘아다마’로 만들었다.

    비옥한 땅 ‘아다마’와는 달리, ‘에레츠’는 조건과 관계 없이 창조와 우주적 관점에서 본 땅이다. ‘에레츠’는 하늘 혹은 바다와 반대되는 보다 큰 개념의 땅이다. 히브리적 사고에 의하면, 우주는 하늘과 땅으로 이등분되거나, 하늘과 바다와 땅으로 삼등분된다. 곧 ‘에레츠’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거대한 우주의 한 부분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이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함께 창조하신 땅이 곧 ‘에레츠’이다(창 1:1).

    ‘에레츠’의 또 다른 이해는 정치적 개념으로서의 땅이다. 한 나라의 통치력이 미치는 영역이 곧 ‘에레츠’이다. 
    ‘아다마’가 인간 생존에 적합한 좋은 환경으로서의 땅이라면, ‘에레츠’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드러내는 신앙적 개념의 땅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이루어진 계시의 현장으로서의 땅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성경에서 강조하는 땅은 ‘아다마’보다는 ‘에레츠’가 더 우선적이다. 
    ‘에레츠’가 하나님과의 본질적 관계를 전제한다면, ‘아다마’는 주어진 ‘에레츠’ 안에서 누리는 복과 관련된다.

    ‘에레츠’와 ‘아다마’와 의미상으로 유사한 것이 ‘공간’(space)으로서의 땅과 ‘장소’(place)로서의 땅 구분이다. 

    ‘공간’으로서의 땅은 외부의 어떠한 압력도 받지 않고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이다. 
    그런 ‘공간’은 어떤 책임도 존재하지 않는 공백 상태의 땅이다. 
    모든 부담을 벗어버리고 마음껏 휴식을 취하는 바캉스의 휴양지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장소’로서의 땅은 역사적 의미가 있는 땅, 무엇인가 사건이 일어났고, 그 사건이 기억을 통하여 여러 세대에 걸쳐 역사의식으로 정착된 땅, 그곳에 살고 있는 자들에게 분명한 자기 정체성을 확립시켜주는 땅, 그것이 ‘장소’로서의 땅이다. 

    따라서 ‘공간’의 추구는 역사로부터의 도피이지만, ‘장소’의 소유는 역사 안으로 들어가려는 결단이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이 추구하였던 땅은 풍요를 보장받는 ‘아다마’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와 통치가 기다리고 있는 ‘에레츠’이다. 
    역사의 부름을 외면한 채 속 빈 ‘공간’ 속에 안주하려는 것은 영적 나태이다. 
    반면에 하나님과의 만남 그리고 그 부름의 의미로 가득 찬 거룩한 ‘장소’를 지향하는 뜨거운 열정, 그것이 성경이 강조하는 땅의 바탕색이다.






    마음 밭을 기경(起耕)하라(호세아 10:12)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 에게 내리시리라"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제 막 감옥에 들어온 무기수였습니다. 언제 나가게 될지 어떻게 이 좁고 쾌쾌한 공간에서 지내야 할지 막막했던 그는 교도소장을 향해 간절한 청원을 한 가지 했습니다.
    "절대, 문제를 안 일으킬테니 교도소 마당 한 귀퉁이에 정원을 가꾸게 해주십시오."
    새로 부임한 교도소장은 그렇게 하도록 허락했습니다. 그리곤 그는 처음엔 손길이 많이 가지 않아도 잘 자라는 고추나 양파를 심었습니다. 씨를 심고 그것이 자라감에 따라 그는 작은 만족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해에는 여러 종의 장미도 심어보고 작은 묘목의 씨앗도 뿌렸습니다. 그렇게 한 해 그는 정성스레 정원을 가꿨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작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래 비록 내가 지금은 자유의 몸이 아니지만 이 정원을 돌보듯 나 자신을 돌봐야겠구나. 또 이렇게 씨를 뿌린 다음 지켜보고 경작하고 결과를 추수하는 정원사의 일이 소박한 것이지만 얼마나 큰 보람과 기쁨을 주는가."
    교도소 마당의 작은 땅뙈기에 무언가를 심고 가꾸던 그는 이십칠 년 후,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199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바로 남아프리카 최초의 흑인 대통령, 넬슨 만델라였습니다.


    당신의 마음 밭에는 어떤 새싹들이 자라고 있는지요? 악한 열매를 거둘 악한 새싹들이 자라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만, 거짓, 음란, 탐욕, 미움, 다툼, 시기, 우상숭배, 이기심, 험담, 판단 등이 당신의 마음 밭에서 무성하게 자라고 있지는 않은 지요? 그렇다면 당신의 마음 밭을 기경(起耕)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밭에 선한 씨를 파종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집 정원에 흙만 있는 화분 두 개가 있었습니다. 꽃씨를 사다 심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미처 틈을 내지 못했는데 여름이 지날 무렵 두 개의 화분에서 모두 푸른 잎이 자라나고 있는 게 아닙니까? 한 화분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고, 다른 화분에는 어떻게 심겼는지 참외 줄기가 자라나 납작 납작한 잎이 나서 화분의 흙을 덮어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얼마 후 줄기에 동그란 열매가 달리더니 아기 주먹만한 참외 세 개가 노랗게 익어갔습니다. 향긋한 내를 풍기기 시작하여 보는 이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지요. 똑같은 화분에 무엇이 심겨졌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대접받는 것을 보면서 인간의 마음 밭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 마음에는 무엇을 심어야 할까요?
    "악인의 삯은 허무하되 의를 뿌린 자의 상은 확실하니라"(잠11:18)
    영국의 성직자 칼렙 c. 콜턴은 말했습니다. "악을 뿌리뽑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는 그 자리에 덕을 심도록 하라. 그렇지 않으면 또 다시 수고를 해야 할 것이다. 잡초가 자랐던 억센 토양에 아무 것도 나지 않게 하는 데 드는 수고보다 훨씬 적은 수고로 밀이 나게 할 수 있을 것이다.(욥4:8, 9)
    마태복음 13:18-23에 보면 씨뿌리는 비유가 나옵니다.
    농부가 밭에 씨앗을 뿌리기 전에 알아야 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토양의 질을 알아내는 작업입니다. 또한 땅이 씨앗을 뿌리기에 적합한가를 알아내고 개간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로 씨앗인 하나님의 말씀을 뿌리기 위해서 이를 심는 밭인 마음이 적합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자신을 알아야 신앙생활을 온전히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어떤 밭인가를 바로 알아 개간하여 100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1. 길가 밭

    길가와 같은 굳은 땅입니다. 아마 두 가지 경우에 이런 땅에 씨가 뿌려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대 땅에 가보면 밭이랑이 좁고, 길고, 밭과 밭 사이에는 작은 길이 있습니다. 길에 서서 씨를 뿌리기도 하는데 씨가 길에 떨어져 자라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씨뿌리는 법이 있는데 나귀 뒤에다 씨 자루를 싣고, 자루 모퉁이를 잘라 구멍을 내고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며 뿌립니다. 그러니까 자연 길가에도 뿌려지게 됩니다. 그런데 길가에 뿌려지면 이어 새들이 와서 씨를 주워 먹어버리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의 마음은 기독교의 진리가 들어갈 수 있는 입구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의 진리가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오히려 적대시되는 경우가 있고, 어떤 사람은 그 진리에 아주 무관심합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기독교의 진리는 우리 인간 생활에 적응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기독교가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오히려 귀찮은 존재로 생각 합니다. 물론 사람의 사는 것이 항상 쉽고 어떤 긴장이나 눈물이 없다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동안에 내 자신의 힘만으로는 어떻게 못할 경우, 다른 힘이 필요할 때가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가장 큰 비극은 많은 사람이 이 사실을 너무 늦게야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본래 인간에게는 악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 생명의 숨,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브는 뱀을 친구로 사귀게 되었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죄의 정도는 점점 더 사악해 지게 되고 시대가 지날수록 악한 정도가 점점 더 심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 일어나고 있는 사악한 범죄들은 과거에 저질러져 왔던 것보다도 심한 것을 부인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묵은 땅이기 때문에 부패될 수밖에 없습니다. 강팍하여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이며,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에 익숙합니다. 이 일이 6천년 동안을 거듭해 온 까닭에 딱딱해져서 아무리 씨앗을 뿌리려 해도 심기워 지지 않습니다. 개간되지 않은 땅에는 아무리 좋은 씨를 부려도 결실을 맺을 수 없습니다. 묵은 땅을 개간해야만 합니다.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삼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끝없이 마음을 개간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 말씀 듣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예배드리는 일에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믿음을 통해서 행함이 나타나고, 행함 속에서 온유와 겸손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교만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묵은 교만을 좀 더 적극적이고 행함 있는 믿음을 통하여 개간해 가야 합니다.

    2. 돌 밭

    흙이 얇은 돌밭 같은 땅입니다. 물론 이 땅은 모두가 돌은 아닙니다. 흙이 얇은 밭에 돌 이 깔려 있는 땅입니다. 갈릴리 지방의 땅이 대개 그렇습니다. 여기 저기 바위가 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땅이 씨를 발아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땅이 얇기 때문에 뿌리가 내리지 못해서 양분을 땅에서 흡수하지 못하므로 결국 해가 날 때 말라 버리고 죽고 맙니다. 무슨 일이고 시작하기가 끝내는 것보다는 쉽습니다. 어떤 유명한 전도자가 '1백 명 가운데 5명은 그리스도에게로 완전히 이끌고, 나머지 95명은 교회 안에서 성숙할 때까지 돌보아주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천의 생활을 시작하기는 합니다. 그런데 대개가 도중에 넘어집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도중에 실패할 때 그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고, 그 값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못했을 때 당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하여 많은 매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 배후의 환경, 즉 기독교인의 생활 내용이 무엇인지를 몰라서 너무 쉽게만 생각하다가 당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과거의 일들에 관하여는 묻지 않습니다. 지금 하나님 안에 속하여 얼마나 충성을 하고 있는 가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어떤 이들은 과거에 자신이 행한 일들에 대하여 자랑을 하면서도 현재는 행치 않는 것을 봅니다. 돌밭은 주로 이러한 자들이 많습니다. 말씀을 기쁨으로 받습니다. 앞으로 주의 일에 충성하고, 행하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개조되지 않았고, 행함이 따르지 않습니다. 말씀을 받되 영적인 믿음으로 와 닿지 않습니다. 이는 마음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육신의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옳다고 인정하면서도 영과 육이 서로 맞지 않기 때문에 결실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육신의 돌을 우리의 몸 안에서 빼내야 합니다. 주 안에서는 '내가'라는 말은 결실을 맺을 수 없는 가장 큰 장애물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옛날 우리 동양 사람의 글귀에 선한 사람과 같이 있게 되는 것은 마치 지란지실(芝蘭之室)에 들어간 것과 같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지란은 난초를 의미합니다. 좋은 향기가 나는 난초가 있는 방안에 들어가면 온 방안이 향기로 가득해서 자연히 향기에 도취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을 때에는 우리의 심령이 향기를 피우게 되고, 우리의 생활이 향기를 풍기게 되며 무언의 감화를 줄 수 있는 높은 자리에까지 우리의 신앙이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다 은혜를 내려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길바닥 같거나 바윗돌처럼 굳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내릴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비유에 돌밭에 떨어진 씨는 열매는 못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부드러워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내립니다. 죄를 회개해야 은혜가 우리 마음속에 미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돌처럼 굳은 그대로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내리지를 못합니다. 강퍅한 마음이나 나만 옳다고 하는 독선적인 마음에는 하나님의 은총이 내릴 수 없습니다. 내 잘못을 깨닫고 돌이켜서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그 심령 위에만 하나님의 은혜가 내립니다. 여러분, 이슬이 어떤 곳에 많이 내리는지 아십니까? 산골짜기에 많이 내립니다. 깊은 골짜기에 가보면 거기는 산꼭대기보다 이슬이 더 많이 내립니다. 아마 신령한 은혜도 이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3. 가시 밭

    가시로 가득 찬 땅입니다. 팔레스틴의 농부들은 퍽 게을러서 가시덩쿨을 윗 부분만 잘라서 불살라 버리기 때문에 얼핏 볼 때는 퍽 깨끗하게 보이지만 땅 밑에는 아직도 가시덩쿨의 뿌리가 남아 있기 때문에 때가 되면 가시덩쿨이 다시 성해집니다. 그런데 가시덩쿨은 곡식의 씨보다 더 빨리 자라기 때문에 씨의 생명을 막아 버립니다. 세상의 염려와 근심, 걱정의 넝쿨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로 성장하지 못하고 열매맺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축복을 받으며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봅니다. 그들은 육신에 의한 결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있는 듯 보이지만 믿음이 없음을 보게 됩니다. 자기가 앞서가는 신앙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내 경험, 내 지식으로 살아가서도 안됩니다. 유대인들은 완벽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잘못된 싹을 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남을 판단하고, 마음대로 무시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었습니다. 영적인 척 하면서 인간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명령을 들은 요나는 한참을 생각한 후 니느웨로 가지 않고 욥바로 향해 갔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바다에 던져 물고기 배에 넣으시고 그가 회개하자 그를 꺼내어 니느웨로 가게 하셨습니다. 왜 불순종했을까요?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려면 자기 생각을 버리고 가야 하는데 자기 의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이처럼 불순종을 낳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집에 방문했을 때 마리아는 말씀을 듣고 마르다는 음식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칭찬했습니다. 목사가 심방할 때 무엇을 주실 것인가를 기대해야 합니다. 대접하는 것보다 말씀 듣는 것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 물질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자들을 보게 됩니다. 교회는 물질이 없어 운영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자가 없어 운영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을 사모하여 성령으로 마음을 개간하시기 바랍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편견은 금물입니다. 모세가 구스 여자를 아내로 삼았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주의 종이 바람을 피웠습니다. 이를 본 아론과 미리암이 책망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모세가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론과 미리암을 문둥병이 들게 하셨습니다. 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편견을 버리고 밭을 개간하십시요.

    4. 좋은 땅

    열매 맺을 수 있는 좋고, 깊고, 깨끗한 땅입니다. 이 말씀은 기독교인이 가져야 할 세 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 하나는 이 말씀을 들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즉 마음에 말씀을 들을 준비가 없는 한 들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경험, 지식, 의견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마음의 준비가 없기 쉽습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는 그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 마음으로 진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가만히 보면, 우리의 몸은 현명하게 창조되었습니다. 가령 우리 눈앞에 무엇이 스치고 지나갈 때 눈은 자동적으로 감깁니다. 그것을 반사작용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에 원치 않는 무엇인가가 들려질 때에는 자동적으로 우리의 마음 문은 닫혀지고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진리가 우리의 마음을 괴롭힌다면, 이것은 어떤 때 맛없는 약이나 괴롭히는 치료법이라도 우리의 건강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문을 꽉 닫아버려 진리가 길가에 떨어지면 이것은 인간에게 비극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말씀을 행동에 옮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 보면 결실 하여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갈릴리와 같이 아주 메마른 땅에 서 이런 결실을 얻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감동 받기를 원합니다. 
    감동 횟수가 잦을수록 삶의 질은 좋아집니다. 감동을 주는 것은 많습니다. 아름다운 자연과 음악, 좋은 글, 고전으로 자리잡은 모든 것 등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처럼 감동을 주는 존재는 없습니다. 사람의 아름다운 마음은 한 사람의 일생을 감동으로 붙잡기에 넉넉한 극상의 예술입니다. 만물 중에 가장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인간의 심성에서 흘러나오는 마음씨는 비길 데 없이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저는 살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았는데 가시처럼 쿡쿡 찌르는 모진 마음도 만났지만‘사람의 마음이 저렇게 선하고 비단결처럼 고울 수 있을까’하고 목사인 저까지도 부끄럽게 만드는 온유하고 품위 있는 마음도 많이 만났습니다. 아름다운 마음, 아름다운 사람을 생각하자면 향수처럼 떠오르는 분이 있습니다 어릴 적 우리 동네에 집 한 채가 있었습니다. 그 집에는 서울 할머니라는 분이 홀로 사셨습니다. 그 옛날 서울서 공부하신 분이니 시골에서는 왕비처럼 귀해 보였습니다. 그 할머니의 동생 되시는 분이 그 당시 전북도지사 부인이면서 이화여대 교수였습니다. 여름과 겨울방학이면 도지사 부인께서는 아들과 함께 그 집에 내려와 열흘씩 쉬어 가셨습니다. 그러던 여름 어느 날, 우리 동네에서 잘 산다는 집에서 도지사 부인을 청하여 점심을 대접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정성을 다해서 차린 밥상이겠습니까. 구경꾼이 마당 안에 가득 찼습니다. 마침내 도지사 부인께서 첫술을 뜨셨습니다. 그런데 이 무슨 짓궂은 변인지, 수저 위에 얹혀진 하얀 쌀밥 틈에 통통하게 삶아진 파리 한 마리가 툭 불거져 나왔습니다. 순간 그를 지켜본 사람들은 오싹했습니다. 그런데 그 부인은 얼른 밥술을 입에 넣고 물을 마셔 꿀꺽 삼켜버렸습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밥 한 그릇을 맛있게 비웠습니다. 그 부인의 이야기는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 발등에 부었던 나드향유 처럼 번져 갔습니다. 예수님이 수가성 우물가에서 부끄러운 여인과 대화합니다. “네 남편을 불러오라”“저는 남편이 없습니다”“네가 남편이 없다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가 남편이 없다는 말이 옳도다” 여자는 남편이 있는데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당연히 여자를 꾸짖어야 했습니다. “네가 감히 나를 속이느냐? 다 속여도 나는 못 속인다.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치우고도 누구 앞에서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하느냐?”고 으름장을 놓을 법도 한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부끄러운 여인의 입장이 되셔서 그녀의 수치스러운 마음을 미리 삼켜주신 것입니다 남의 허물에서부터 나를 상하게 하는 역겨운 일에 이르기까지, 나의 거슬림을 이날까지 삼켜주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나도 삼켜야 합니다. 삼키는 일은 척박한 땅에 두엄을 묻어주는 일과 같습니다. 삼키는 일을 잘 해야 내 심령의 산성화를 막고 옥토가 되어, 남에게 감동을 주며 살아가는 마음 밭이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내 마음의 밭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 살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묵은 땅에는 열매가 없습니다. 쓸데없는 땅입니다. 해도, 비도, 이슬도 다 받으면서 아무런 보답이 없습니다. 묵은 땅은 옆 밭에 장애를 줍니다. 묵은 땅과 같은 마음의 밭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오랫동안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게을리 하는 동안 그 마음이 굳어집니다. 좋지 못한 습관이 하나뿐 아니고 점점 더 생깁니다. 그 습관의 뿌리가 점점 더 깊어집니다. 여러 가지 잡초가 그 마음 밭에 나기 시작합니다. 세상 생각,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 교만한 마음, 비열한 마음 등의 모든 잡초가 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묵은 밭 같은 마음에는 하나님의 빛도, 비도, 이슬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소용없습니다. 설교를 들어도 도덕적인 교훈을 들어도 그 마음이나 생활에 어떤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 묵은 땅은 어떻게 하라고요? 묵은 땅을 갈라고 하였습니다. 무슨 씨를 심기 전에 먼저 예리한 보습을 넣어서 갈아서 굳은 흙을 파고 뒤집어 잡초를 뽑아 버려야 한다고 하십니다. 얕게 갈지 말고, 깊이 갈아 뿌리까지 뒤엎어야 합니다. 물론 묵은 밭을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너무 굳어서 처음에는 힘듭니다. 그러나 힘들어도 갈아야 합니다. 아픕니다. 그러나 아파도 갈아야 합니다. 묵은 땅을 갈기 전에 무슨 씨를 뿌릴 수 없습니다. 묵은 땅은 갈아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회개라고 합니다. 이 시간 우리 마음 밭을 보시고 우리 가운데 다만 몇 사람이라도 이런 마음을 가지고 계신 분이 있으면 성령의 보습으로 갈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세례 요한이 복음 전파할 때 제일 먼저 외친 말이 무엇입니까? 회개하라! 왜 우리가 교회에는 출석하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까? 왜 전에는 좋은 열매를 맺었던 분이 요사이는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까? 묵은 땅이 되어 버려 그렇습니다. 묵은 밭에 씨뿌려야 소용없습니다. 아무리 애써 씨를 뿌려도 소용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먼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세요! 마음의 묵은 땅을 갈아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맺으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악한 생각이나 부정적인 생각, 교만, 음란, 거짓, 탐욕, 시기, 미움, 분노의 생각이 우리 마음을 주장하지 못하게 하시고 묵은 땅을 기경하여 좋은 열매 맺는 마음 밭으로 변화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채울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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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장

    농촌에서 검소한 삶을 꾸려나가는 농부 파홈과 그의 아내는 도시에서 상인으로 활동하는 아내의 자매와 대화를 나눈다. 아내의 자매는 도시에서의 삶이 얼마나 좋은 지를 자랑하지만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파홈의 아내는 농민의 삶을 찬양하고 상인의 삶을 비하하여 두 사람 간에 작은 말다툼이 일어난다. 대화를 듣던 파홈은 넓은 땅만 있다면 악마조차도 두렵지 않다고 주장했고 난로 뒤에서 이를 엿듣던 악마는 땅과 목숨을 건 내기를 준비한다.

    2장

    마을 근처에 위치한 농민들이 공동으로 이용하는 농지의 관리인은 작은 실수에도 벌금을 부여했는데, 이로 인해 파홈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던 중 농지의 지주가 농지를 매각한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농민들은 농지를 나누어 구매하기로 한다. 파홈도 이에 따라 농지를 구입했고, 완전히 자신의 것이 된 농지에서 농작물을 수확하며 행복을 느낀다.


    85세의 갈렙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여호수아 14:6-15 
    6. 때에 유다 자손이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나아오고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와 당신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이르신 일을 당신이 아시는 바라 7 내 나이 사십 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케 하므로 내 마음에 성실한 대로 그에게 보고하였고 8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으므로 9 그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가로되 네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영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10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 행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케 하셨나이다 오늘날 내가 팔십오 세로되 11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 12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13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매 14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며 15 헤브론의 옛 이름은 기럇 아르바라 아르바는 아낙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사람이었더라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1. 에서의 자손이었던 갈렙

    가나안 땅을 분배한 장소는 길갈이었고 가장 먼저 나아온 지파는 유다였다. 그들은 전쟁에서 항상 먼저 나아간 용감하고 담대한 지파였다. 그들 가운데서도 갈렙이 먼저 와서 헤브론 땅을 요청했다. 갈렙은 그니스(Kenizzite) 사람인데, 그니스(겐) 사람이란 창세기 36장에 기록된 바 에서의 자손 중 그나스 족장의 자손이다(11, 15절). 그들은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다 출애굽 때 함께 떠난 잡종이었다(출 12:48).

    이러한 족속 사람인 갈렙은 이스라엘에 귀화할 때 유다 지파에 속하였고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열두 정탐꾼을 보낼 때 유다 지파의 대표로 선발됐다. 출신이 이방이요 잡종인 사람이 유다 지파의 대표가 될 수 있었던 것이나, 유일하게 두 사람―여호수아와 갈렙―만 가나안에 들어갈 특권을 갖게 된 것이 놀라울 뿐이다. 그리고 그가 제비를 뽑을 것도 없이 그 기업은 결정돼 있었다.

    2. 동년배였던 여호수아와 갈렙

    현재 그는 85세이고 가데스 바네아에서 정탐으로 파견됐을 때에는 40세 청년이었다. 여호수아와는 동년배이다. 출애굽 당시 그의 나이는 39세였던 것이다. 그는 45년 전에 약속된 기업의 분깃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잊지 않을 뿐 아니라 담대히 요청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 이 두 위대한 인물만 들어가게 하고 나머지는 광야에서 쓰러져 죽게 하신 것에서 경고와 배움을 얻는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약속을 유업으로 받는 자들이 과연 누구이며 어떠한 자들인가를 분명히 알려주시는 것이다. 오직 갈렙과 여호수아 같은 믿음과 순종의 사람들만이 성공한다. 역대로 하나님은 동년배의 사람들을 들어 사용하시는 예가 많이 있다. 루터와 칼빈은 12년 정도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웨슬레와 휫트필드도 동년배들이요, 같은 학교 출신들이다. 다비와 함께 했던 한 무리의 사람들도 그러하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같은 년배로서 온전히 주님을 따른 좋은 본보기이다.

    우리도 갈렙처럼 온전히 주 하나님을 따르면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갈렙은 우리에게 인생의 좋은 비전을 주고 있다. 그는 85세가 됐어도 젊었을 때의 좋았던 신앙을 회상하며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이 젊었을 때 위대한 업적을 쌓고서 노년에 가서는, 아니 중년부터도 그가 젊었을 때 이룬 큰 일을 회상하며 그 꿈을 되새기는 맛으로 사는 것을 본다. 그러한 모습은 전형적인 이기는 자의 모습이 아니다. 갈렙은 젊었을 때에나 늙었을 때에나 여전히 같은 영과 믿음을 소유했고 여전히 싸우며 전진하고자 했다. 그는 소위 은퇴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사람을 더 보기로 하자! 가데스 바네아에서 백성들이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아우성치며 반역할 때 그는 여호수아와 함께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 편에 섰다. 하나님께서는 갈렙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민 14:24). 그는 그 후로도 결코 반역적인 무리 속에 낀 적이 없었다. 주님을 온전히 따르기 위해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전진한 사람이다.

    3. 내 마음에 성실한 대로, 온전히

    7절에서 그는 ‘내 마음에 성실한 대로’ 모세에게 보고했다고 했다. 70인 역에서는 ‘그의 마음에’로 번역했는데, ‘그의’란 ‘모세의’ 또는 ‘하나님의’로 읽을 수 있다. 따라서 그의 마음은 하나님과 모세의 마음과 일치됐다고 볼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참된 마음과 양심대로 보고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의 양심에 하나님이 없었다. 그들은 가나안 땅을 하나님의 마음이나 모세의 영으로 보지 않고 그들의 위축되고 소심한 마음으로 보았다. 그러나 갈렙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마음으로 보았기에 그의 본 것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본 것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열 정탐 중 혹 어떤 사람은 그들의 양심대로 보았다 하더라도 아우성치는 민중을 바라보면서 참되게 양심에 따라 보고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고 참다운 사람의 양심도 아니다. 그것은 대세에 기울어진 약하고 간사한 마음이다. 그러나 갈렙은 ‘내 마음의 성실한 대로’ 보고했다. 갈렙이 승리자의 특징을 지닌 것은 바로 이런 마음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14장 14절에서 갈렙이 헤브론을 기업으로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온전히(wholeheartedly) 좇았기 때문이라 했다. 14절 뿐만 아니라 이 ‘온전히’라는 말은 갈렙의 인생을 대표하는 말이 됐다(7, 8, 9, 14절). ‘온전히’란 마음을 다한다는 말이다. 이는 주 예수님의 첫째 되는 계명이기도 하다. 이기는 자 곧 하나님의 유업을 받는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온 마음으로(with all heart) 섬기기를 배워야 한다. 온 마음으로 섬기는 자가 아니면 이기는 자가 아니다. 목숨을 다하여 섬기는 것이 아니면 이기는 자의 영이 아니다. 힘을 다하지 않는 것도 이기는 자의 태도가 아니다. 우리는 갈렙에게서 이러한 이기는 자의 전형을 볼 수 있음을 인해 감사한다.

    4. 갈렙의 단순한 성품

    여호수아서를 훌륭하게 강해한 레드파스나 몽고메리는 갈렙의 성품이 단순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그들은 위대한 영적 인물들이 동일하게 이러한 성품의 소유자들임을 지적했다. 몽고메리가 한 몇 마디 말을 인용해보겠다. “위대한 사람들은 결코 복잡하지 않다. 복잡한 사람들은 심약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수많은 갈등과 동기들에 에워싸여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모두 함께 해결할지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문제의 한 면만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면까지 보았다. 그들은 하나의 행동에서 이 점을 보지만 그것을 달리 취하면 더 나아지리라는 것을 인정만 할 따름이다. 위대한 사람들은 이러한 사람들이 아니며 그들은 교활하지 않다. 그들은 여러 가지 문제가 복잡하더라도 취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들은 중요한 요인과 최선의 길을 보고 그것을 일관성 있게 따라가는 사람들이다.”

    그러면서 몽고메리는 교부 시대의 위대한 인물인 아타나시우스와 루터, 링컨 등을 예로 들었다. 그들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끝까지 그들의 소명을 지키고 나아가 결국은 승리를 거둔 인물들이다. 교회 역사는 그들에 의해 엄청난 도움을 얻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결국 진리는 승리하고 역사는 그들의 정당성을 입증하였다.

    5. “나의 힘이 그제나 이제나 일반이라”

    그는 85세지만 여전히 싸울 것을 제의한다. 이 역시 이기는 자의 특징이다. “나의 힘이 그제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11절). 실상 가나안 전쟁은 이미 종료됐다(11:23). 그러니 갈렙이 꼭 현재 싸워야 할 긴급한 필요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헤브론을 갈렙에게 줄 때 반드시 마지막 전투가 있게 될 것임을 알 수 있다(15:13-19). 그는 약속된 그 땅을 얻자, 거기 있던 아낙의 소생,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좇아내었고 드빌 거민을 쳤다. 드빌 곧 기럇세벨은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이 취하자 갈렙이 약속대로 그의 딸 악사를 아내로 주었다.

    이러한 위대한 믿음의 사람의 주위에는 같은 믿음의 영을 가진 사람들이 생기게 마련이고 그들은 같이 동역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승리로 이끄는 주역들이 된다. 이는 교회사의 많은 사실들이 증명한다. 교회사에 위대한 영적인 인물들이 나올 때마다 주위에 한두 명, 또 그 이상 매우 위대하고 귀한 조력자들이 있어왔던 것이다. 이는 매우 신기한 일이다.

    6. 85세에도 전쟁을 치뤄야 하는 땅을 원하다

    그는 85세지만 쉬려 하거나 피동적이 아니었다. 그가 얻으려는 땅은 전쟁을 치르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땅이었다. 그런 땅을 갈렙은 원했던 것이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하다 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12절). 15절에 의하면 갈렙에게 할당된 땅은 헤브론이며 “기럇 아르바라 하였는데 아르바는 아낙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사람이었더라”고 한다.

    갈렙은 적극적인 보고를 하는 사람만이 아니었다. 그는 여호수아와 함께 “저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보고했을 뿐 아니라, 그가 믿은 대로 행한 사람이었다. 그는 노년에 가장 큰 아낙 사람들을 쫓아내는 위대한 일을 했다. 이기는 자의 한 가지 두드러진 특징은 그들이 믿고 말하는 바를 행하며 그러한 길을 일생토록 곧게 걸어간다는 것이다.

    7. 그가 원했던 땅, 헤브론의 뜻

    그가 구한 곳은 헤브론이었는데, 헤브론은 ‘교통(fellowship)’이라는 뜻이다. 그는 최상의 상태를 원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교통 안에 머무는 것이다. 이곳은 아브라함이 영적 체험으로 말하자면 세겜(능력)과 벧엘(하나님의 집)을 거쳐 가장 최고봉에 이르렀던 장소이다. 믿음의 사람, 승리의 사람에게 주어진 최상의 기업은 하나님과의 간격 없는 교통이다. 이러 최상의 기업을 얻는 사람을 본보기로 보는 것은 매우 가치가 있는 일이다. 갈렙과 같이 단일하고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추구한 자만이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통 안에 들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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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을 안다는 것 

    성경적으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개인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맺고 그분을 삶으로 인정하며 닮아가는 인격적인 경험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한 교제,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신뢰, 그리고 하나님을 닮아가는 변화를 포함합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의 의미

    1. 개인적인 관계와 교제 


    어떤 사람을 아는 것이 개인적인 관계를 통해 깊어지듯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분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아는 방법

    a. 말씀의 묵상과 기도 /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각이 생겨 하나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동의하고 그분의 뜻대로 행하며,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삶의 생각, 말, 행동의 변화로 이어질 때,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 b. 인격적이고 체험적인 앎 /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뇌로 인지하는 지식 차원을 넘어, 하나님과 직접적인 사귐을 통해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 c. 삶의 주인으로 인정 
    지식적인 앎을 넘어,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그분을 신뢰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 d. 하나님을 닮아가는 변화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분을 닮아가는 과정으로, 생각, 말, 행동이 점차 하나님과 같아지는 변화를 수반합니다. 


  • e. 영생의 시작
    요한복음 17장 3절 말씀에 따라,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곧 영생이라고 합니다. 


  • 아는 것? 
    1. 신뢰와 순종
    2. 삶의 변화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통해 그분을 알고, 그분이 말씀하신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시편 119:11 
    내가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어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나이다."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어떤 양날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예레미야 9:23-24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재물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내가 인애와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디모데후서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그리고 그를 아는 자는 사도들의 말을 듣고, 그를 아는 자는 그가 명령하신 것을 행하며, 그를 아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요한1서 4:6-7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시편 119:10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요한복음 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배려심 없고 이기적인 아이, 공감능력을 불어넣으려면?

    아이가 간식을 독점하려 하거나, 다른 아이의 부탁이나 도움을 들어주지 않는 행동은 보호자에게 걱정과 안타까움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사실 아이의 이기적인 행동은 자연스런 일이다. 
    이기적인 행동은 사회적 상호작용을 탐색하고 나눔의 개념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많은 어린이에게 흔히 나타나는 발달 단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이 지속되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따라서 보호자가 아이들이 공감 능력을 키우고 타인을 배려하는 사람이 되도록 돕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고민이 된다면?

    시카고대 신경과학자이자 아동 심리학자인 장 데세티 박사는 평생동안 공감, 도덕성, 친사회적 행동과 이기적인 행동의 근원을 찾아 연구해왔다. 
    그의 연구는 이기심, 공감, 이타적 행동의 신경 메커니즘을 탐구하여 어린이의 이러한 특성의 발달과 사회적 상호 작용 및 관계에 대한 잠재적 영향을 밝히는 데 도움을 준다.

    다음은 데세티 박사가 제안하는 이기적인 성격의 아이들에게 이타심을 알게 하고, 공감을 배우도록 하는 방법들이다.

         시카고대 아동 심리학자 장 데세티 박사

    공감과 관대함

    아이들은 주변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하면서 배운다. 이타심을 가르치기 위해 부모와 보호자는 공감하고 관대한 행동을 일관되게 모델링해야 한다. 타인에 대한 친절과 배려를 보여주고, 자원을 나누고, 자선 활동에 참여한다. 긍정적인 모범을 보이면 아이들도 이러한 가치를 스스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다.

    관점 잡기

    아이들이 다른 사람의 감정과 관점을 이해하도록 돕는 것은 공감 능력 발달에 매우 중요하다.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다른 관점을 고려하도록 돕기 때문이다. 실제 상황이나 이야기를 통해 다른 사람의 감정을 생각하는 것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경계와 결과 설정

    이기적인 행동에 대한 명확한 경계와 결과를 설정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책임감을 가르치는 데 중요하다. 아이가 이기적인 행동을 보이면 차분하게 그 행동이 미칠 영향에 대해 설명하고 적절한 행동을 일깨워준다. 일관성이 핵심이므로 경계와 결과가 공정하고 균일하게 적용되도록 한다.

    나눔의 기술

    아이들이 이 기술을 연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나눔을 장려한다. 아이들이 과제를 완수하기 위해 장난감이나 자원을 공유해야 하는 놀이 시간이나 그룹 활동을 준비한다. 칭찬과 인정을 통해 긍정적인 공유 행동을 강화하고 협력의 이점을 상기시켜 준다.

    감사의 중요성

    아이들에게 자신이 가진 것에 감사하고 다른 사람의 친절에 감사를 표현하도록 가르치면 관대한 태도를 키울 수 있다. 아이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거나 감사 노트를 쓰거나 봉사 활동에 참여하여 주변 사람들과 사물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도록 격려한다.

    긍정적 강화

    이타적인 행동을 했을 때 이를 인정하고 칭찬한다. 긍정적 강화는 아이들이 공감과 관대함을 계속 발휘하도록 장려한다. 칭찬할 만한 특정 행동과 그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 강조하여 구체적으로 칭찬한다.

    친절한 행동 배우기

    자원 봉사, 이웃 돕기, 자선 단체 기부와 같은 친절한 행동에 자녀를 참여시키도록 한다. 이러한 경험은 아이들이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의 가치를 이해하고 지역사회에 대한 책임감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타심이 기회 필요해

    이기적인 행동을 일관되게 다루고, 공감을 모델링하고, 이타심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아이가 타인에 대한 공감과 배려심을 키울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물론 변화에는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인내와 끈기야말로 아이들이 더 자비로운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이끄는 중요한 열쇠라는 것을 기억하도록 하자.


    장 데세티(Jean Decety) 박사 연구팀은 14개국 1,170명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해서 종교가 그들의 가치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연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비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자란 아이들이 타인에 대해 더 관대했고 이타적인 생각을 갖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 조사가 얼마나 신빙성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연구결과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오늘의 종교가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이 우리를 더 관대하고 따뜻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지 못한다면, 남을 더욱 배려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지 못한다면 그 믿음은 작동하지 않는 믿음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이런 일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외적인 종교 행위에는 열심을 내면서도 정작 하나님이 관심하시는 바는 외면하는 이들의 위선을 신랄하게 꾸짖었습니다. 
    예수님도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신앙적 위선을 통렬하게 꾸짖으셨습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그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했지만, 이것들도 마땅히 행해야 했다."(마23:23)

    본과 말을 뒤집은 신앙생활은 일쑤 사람들을 위선으로 이끕니다. 다시 한번 말합니다. 하나님 안에 머무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고통받는 이들에게 다가서셨고,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당신의 몸으로 짊어지셨고, 그들 속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으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했다." 병자들을 치유하면서 하신 이 말씀이 참 신비합니다. '내가 고쳐줬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너의 절실함이, 너의 큰 신뢰가, 너의 사랑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작동하는 믿음과 작동하지 않는 믿음

    선진국에서 제작한 최신의 기계를 도입하여 생산을 시작하려고 할 때 한국에서는 고사를 지냅니다.
    만일 고사를 지내지 않으면 기계가 원활하게 작동하지 않거나 인명 사고가 발생한다고 믿는 민간 신앙 때문에 반드시 그 기계를
    설치한 후에 고사를 지냅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자동차를 구입하고 자동차 앞에 돼지머리를 놓고 고사를 지내기도 합니다.


    야고보서 2:18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야고보서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야고보서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야고보서 2: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


    디도서 1:16
    저희가 하나님을 是認(시인)하나 行爲(행위)로는 否認(부인)하니 可憎(가증)한 者(자)요 服從(복종)치 아니하는 者(자)요 모든 善(선)한 일을 버리는 者(자)니라.




    요일 2:4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딤전 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부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딤후3:8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








    호세아 장별 요약

    호세아 1장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고멜이라는 창녀와 결혼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지만, 하나님을 배신하고 다른 신들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심판하실 것이지만,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고자 합니다.

    호세아 2장

    고멜은 호세아를 떠나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집니다. 
    호세아는 고멜을 찾아가 다시 데려옵니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회복시키시고자 하시는 마음을 보여 줍니다.

    호세아 3장

    호세아는 고멜에게 이혼장을 주고, 그녀가 7년 동안 다른 남자와 함께 살도록 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고, 다른 신들을 섬겼던 기간을 상징합니다. 
    7년이 지난 후, 호세아는 고멜을 다시 데려옵니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징계하셨지만,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호세아 4장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를 책망하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우상숭배하고, 거짓말과 살인과 간음과 도적질을 행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호세아 5장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그들의 왕들이 멸망하고, 그들의 땅이 황폐해질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며, 그들을 회복시키시고자 하십니다.

    호세아 6장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촉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의롭게 만드시고, 그들과 함께 영원한 언약을 맺으실 것입니다.

    호세아 7장

    이스라엘은 다시 하나님을 배신하고, 다른 신들을 섬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호세아 8장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우상들을 섬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호세아 9장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멸망하고, 그들의 땅은 황폐해질 것입니다.

    호세아 10장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다른 신들을 섬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무성한 포도나무 같아 열마가 많은 많은 우상을 섬깁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악으로 바꾸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호세아 11장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징계하셨지만, 여전히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하십니다. 
    아무 힘이 없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 내신 하나님은 그들을 붙드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하여 돌아오라 외치십니다.

    호세아 12장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다른 신들을 섬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바람과 동품을 먹듯 무의미한 애굽과 앗수르에 도움을 구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간사하고 불쌍한 야곱을 구한 것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애굽과 앗수르를 의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호세아 13장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다른 신들을 섬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에브라임은 북지파의 가장 강력한 지파였지만 바알을 섬기는데 앞장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아침 구름 같이 이슬같이 사라질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호세아 14장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촉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용서하시고, 그들을 회복시키시고자 하십니다.
    호세아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상징하는 고멜과 호세아의 결혼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그리고 이스라엘의 죄와 심판을 보여 줍니다.



    1차원, 2차원, 3차원, 4차원 개념에 대해 알아보자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3차원 공간에서 살아가며, 길을 걷고, 집을 지으며, 물건을 만듭니다. 
    하지만 우리의 세계는 시간이라는 차원도 함께 포함하고 있습니다. 
    4차원이란 개념을 알아보고, 시간을 넘어 공간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 쉽게 설명하겠습니다.

    1. 차원이란 무엇인가?

    "차원"이라는 용어를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합시다. 
    차원은 공간의 특성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는 개념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1차원, 2차원, 3차원, 그리고 4차원은 차원의 다른 수준을 나타냅니다.
     
    1차원 : 선

    1차원은 가장 기본적인 차원으로, 선 하나만으로 표현됩니다. 
    이것은 길이만을 나타내며, 방향은 없습니다.

     2차원 : 면

    2차원은 선이 두 번 겹치면 면이 됩니다. 
    이것은 길이와 너비를 가지며, 예를 들어 종이나 화면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3차원 : 공간

    3차원은 면이 깊이를 가지면서 공간을 형성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공간이며, 길이, 너비, 높이를 포함합니다.

    4차원 : 시간

    4차원은 시간을 추가한 개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난, 현재, 미래를 경험하는 데 필요한 차원입니다. 
    시간이 추가되면 사건들은 일어나는 순서대로 나열됩니다.

    시간을 공간으로 표현하기

    우리가 4차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한 가지 방법은 "시공간"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을 하나로 통합하여 사건들을 공간 내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예를 들어, 우주와 시간을 하나의 공간으로 생각하면 우주와 시간이 공간 내에서 곡선을 그리며 이동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상대성 이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4차원 시공간을 개념화한 중요한 이론 중 하나입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은 상대적이며, 물체의 질량과 속도에 따라 공간과 시간이 왜곡됩니다.

    결론 :

    4차원은 시간을 포함한 공간을 설명하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함께 고려함으로써 우리는 우주와 우리의 존재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으며, 이는 물리학, 천문학, 철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 개념은 우리의 세상을 이해하는 데 새로운 시각을 제공합니다.


    차원이란 무엇인가? 1차원부터 4차원까지

    어떤 공간의 차원은 그 공간의 성분들 중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고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성분들을 최대한 모아 놓았을 때, 그런 성분의 개수가 몇 개인지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3차원 공간은 앞뒤, 좌우, 위아래의 3가지 방향으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그래서 3차원이다. 2차원 공간은 평면 위의 공간이다. 평면 위의 점을 생각해보면 점은 앞뒤, 좌우의 2가지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 따라서 평면은 2차원이다. 1차원 공간은 수직선 하나로 이루어진 공간이다. 수직선 위에 있는 점이 움직인다고 생각할 때, 이 점은 수직선을 따라 좌우로만 움직일 수 있다. 그래서 1차원인 것이다. 1차원 공간은 간단하게 수직선 하나로만 표시할 수 있지만, 2차원 이상의 공간을 표시하려면 위치를 정하는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데카르트 좌표계 혹은 직교좌표계라는 것이다. 2차원 공간은 2개의 서로 직각으로 교차하는 직선으로, 3차원 공간은 3개의 서로 직각으로 교차하는 직선으로 표시한다.

    1.일차원(One dimension)

    1차원은 기하학적으로 직선이나 곡선을 말한다.

    직선 위의 점의 위치는 그 위에 원점을 지정한 다음, 방향을 주고 단위의 길이를 지정하면, 직선 위의 점의 좌표인 하나의 실수로서 나타낼 수 있다. 또, 곡선 위의 점의 위치도 마찬가지로, 하나의 실수로 나타낼 수 있다. 따라서 직선과 곡선은 1차원 공간이다.

    2.이차원(Two dimension)

    2차원은 차원이 두 개인 것을 의미한다. 흔히 평면을 의미한다.

    2차원 평면에서 한 점의 위치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두 개의 값(변수)이 필요하다. 2차원 좌표계로는 직교 좌표계(Cartesian coordinate)와 극 좌표계(polar coordinate)가 널리 사용되고 있다.

    3. 삼차원(Three dimension)

    삼차원은 세 개의 차원을 의미하며, 일반적으로 물리적 공간을 지칭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삼차원 공간을 인지할 수 있으며 물리적 공간은 좌우(가로), 전후(세로), 상하(높이)의 세 방향으로 표현된다. 이는 공간의 한 점이 세 개의 좌표로 나타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공간의 한 점의 좌표는 P = (x, y, z)로 표현할 수 있다. 좌표값을 표시한 방식으로 직교 좌표계, 원통 좌표계, 구면 좌표계가 있다.

    4. 사차원

    인간은 3차원 공간에 사는 생물이라서 4차원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직접 느낄 수는 없다. 
    다만 2차원과 3차원 사이의 관계로부터 더 높은 차원을 유추해 볼 수는 있다.

    4차원 세계는 우리가 실제로 가 보질 않았기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우리의 경험이 3차원 공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리 고차원이라고 해도 수학의 확실성과 엄밀성, 자연스러운 확장을 통해 우리는 고차원의 일부를 보고 느낄 수 있다.

    4차원은 수직선 4개가 서로 직교하는 공간이며, 5차원은 수직선 5개가 서로 직교하는 공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공간들은 우리가 평면 위에 그릴 수 없고 단지 머릿속으로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실존적 세계의 4가지 차원


    1. 물리적 차원의 자연세계
    2. 사회적 차원의 인간세계
    3. 심리적 차원의 자기세계
    4. 영적 차원의 초월세계

    인간이 살아간는 세상을 3차원의 세계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계신 곳을 4차원의 세계라고 합니다.
    3차원과 4차원은 마치 숫자 하나의 차이라고 생각되지만 사실은 3차원의 세계에서는 4차원의 세계를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곳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4차원에 거하시는 하나님께서 3차원에서 버둥거리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을 알려주지 않으면 인간은 도저히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불가항력적인 세계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선지자 호세아는 4차원에 거하시는 하나님께서 3차원에 머물고 있는 인간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인간에게 장가들어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하시겠다고 합니다.

    결혼이란 세속적인 의미는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는 부부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때 남자가 결혼한 후에 여자를 안다는 것과 남자가 결혼하기 전에 여자를 안다는 것은 질적으로 엄청난 차이를 말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3차원에 머물고 있지만 하나님은 4차원의 세계에서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사람에게 장가들지 않으면 인간은 동물과 흡사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장가들다'는 표현은 인간의 신부인 교회 공동체와 하나님이 맺는 사랑과 헌신의 관계를 비유하는 것으로, 특히 구약의 호세아서에 나타나는 주요 주제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의 언약 관계를 잃어버린 상태를 '음란한 아내'에 비유하며, 자신은 이스라엘에게 '장가들겠다'고 말씀하시며 그들을 사랑하고 회복시키겠다는 의지를 표현하십니다. 

    호세아를 통한 비유 

    •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한 깊은 사랑과 구원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며, 언약 관계 안으로 되돌려 그들을 회복시키겠다는 약속입니다.
    요약
    '하나님이 인간에게 장가든다'는 표현은 인간(교회)을 향한 하나님의 헌신적인 사랑, 그리고 언약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신학적인 비유입니다. 

  • 호세아서는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저버리고 다른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을 '음란한 아내'에 비유합니다.


  • 하나님은 마치 신랑이 신부를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듯,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다시 당신의 신부 삼아 사랑하시겠다는 의지를 '장가들겠다'는 표현으로 나타내십니다.




  • 본문 호세아서에 보면 BC 760년에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장가를 든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70년 후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한 뒤인 BC 690년에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과 유다백성들의 남편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이사야54:5절) 

    얼마나 이스라엘백성들을 사랑하셨으면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장가든다. 또는 남편이라고 표현을 하셨을까요? 청춘남녀가 사랑하면 결혼을 하지요. 결혼하면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배려하고 아끼고 끝까지 책임을 지고 서로 돌봐주어야지요. 하나님과 성도들의 관계는 성경 말씀에 의하면 상징적으로 아버지와 자녀 남편과 아내의 관계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1.하나님께서 장가드신다.

     

    BC 760년경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장가들어 영원히 산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호세아2:19-20절)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장가든다는 표현을 하셨겠습니까?

     

      

     

    2.하나님께서 남편이 되셨다.

     

    BC 760년에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장가드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70년 후인 BC 690년경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나는 너희의 남편이라고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말씀을 하셨고 또 BC 620년에는 영적으로 간음한 유다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창*녀(렘3:3)라는 표현까지 하시며 이혼증서(렘3:8)를 써주었다고 말씀하시며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나는 너희의 남편이라고 하셨습니다(예례미야3:14절) 

     

      

     

    또 다시 BC 596년경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북편 땅 앗수르에서 인도하시며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며 나의 인도를 받을 것이며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요 너희는 대적의 땅에서 돌아 올 것이며 하나님께서 남편이라고 표현을 하셨습니다(예례미야31:32절)

     

      

     

    3.예수님께서 신랑이시다.

     

    신약성경 마태복음9장15절, 마가복음2장20절, 누가복음 5장33-3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성도들의 신랑이심을 비유로 암시를 하셨습니다. 찬송가 175장(통162)가사를 보면 마태복음 25장 6절 말씀을 근거로 해서 신랑 되신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밝은 등불 들고 나갈 준비됐느냐? 우리 신랑 예수 오실 때 밝은 등불 손에 들고 기쁨으로 주를 맞겠네. 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도들의 영적인 신랑이시며 장가들며 남편이라고 표현하신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성육신 하신 분입니다. incarnation[ˌɪnkɑːˈneɪʃn](예수님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현현(顯現), 성육신(成肉身)

     

      

     

    하나님께서 인류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려고 성령으로 잉태되어 성육신 하신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과 성도들 사이는 영적으로 상징적으로 신랑과 신부사이와 같습니다. 보아스와 룻과 같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보아스는 베들레헴의 유력자요 총각인데 흠 있는 과부 여인 룻을 아내로 맞이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흠 있는 죄인인 우리들을 영적으로 신부로 맞이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신랑 되신 예수님은 우리를 영원히 사랑하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무덤(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으며 언젠가는 하나님만 아시는 때에 신부들인 성도들을 데리러 오실 텐데 우리 모두 하나님의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다 참예 하시기를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말씀에 하나님께서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장가를 들며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또한 이사야 54장5-8절 말씀을 들어보시기를 바랍니다. 
    너를 지으신 이가(하나님) 네 남편이며 구속자며 온 세상의 하나님이며 다시 모으며 영원한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다.

    호세아 서론


    역사적 맥락 : 

    호세아는 북이스라엘 왕국 역사의 격동기인 기원전 8세기경에 예언했습니다. 
    그는 아모스, 이사야, 미가와 같은 선지자들과 동시대의 선지자였습니다. 
    왕국은 정치적 불안정, 우상 숭배, 도덕적 부패에 직면해 있었고, 호세아의 사역은 다가오는 아시리아의 위협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저자 : 

    호세아 라는 이름의 뜻은 "구원"이라고 합니다.
    호세아는 심판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의 개인적인 삶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대한 불충실함을 생생한 은유로 보여주었습니다.

    주제 :

    호세아서의 주요 주제에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 불성실의 결과, 회개, 회복이 포함됩니다. 
    호세아의 메시지는 호세아와 그의 아내 고멜의 관계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이는 반복되는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반영합니다. 

    호세아의 구조

    1~3장 :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상징인 호세아의 결혼

     1장 :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불성실한 여인 고멜과 결혼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고멜은 우상 숭배를 통한 이스라엘의 영적 간음을 상징합니다.
     2장 : 호세아와 고멜의 관계는 이스라엘의 배신과 그들이 돌아오길 바라는 하나님의 간청을 반영합니다. 
             이는 심판과 미래의 희망을 대조합니다.
     3장 : 호세아는 고멜의 불충실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다시 되찾으시려는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줌으로써 고멜을 구속합니다.

    4~14장: 이스라엘의 죄, 심판, 회개에 대한 촉구

     4~7장 : 이스라엘에 대한 비난 
     호세아는 지식의 부족, 불신앙, 우상 숭배 등 이스라엘의 죄를 비난합니다. 
     이 부분은 배신에 대한 강한 이미지를 통해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는지를 강조합니다.
     
     8~10장: 반란의 결과
     이스라엘은 심판의 확실성에 초점을 맞춰 자신의 행동의 결과에 대해 경고를 받습니다. 
     앗수르는 하나님의 형벌의 도구로 예언되었다.
     
    11~14장 : 하나님의 긍휼과 회복 약속

     11장 : 어조의 변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부모의 사랑을 강조함

     12~13장 : 이스라엘의 반역 역사에 대한 더 많은 성찰.

     14장 : 주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을 위한 회개와 회복의 약속을 촉구하는 마지막 요청입니다.

     주요 키워드 및 주제

    • 불성실함 : 
      호세아서의 중심 주제는 영적 간음입니다. 이스라엘은 우상 숭배와 외국 동맹을 통해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는 불충실한 배우자로 묘사됩니다.

      언약 : 
      호세아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 관계를 강조합니다. 이스라엘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분의 언약을 지키셨습니다.

      심판 : 
      불순종의 결과가 생생하게 묘사됩니다. 심판은 최종적인 거부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한 회개의 요청으로 묘사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 
      하나님의 사랑의 부드러움은 특히 11장에서 하나님을 사랑이 많은 아버지로 묘사하는 부분에서 두드러집니다. 이스라엘의 지속적인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비는 가능합니다.

      회개 : 
      회개에 대한 촉구는 호세아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간청하며, 그들이 그 부르심에 귀를 기울인다면 회복이 약속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 : 
      호세아는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에는 그분에 대한 ** 친밀한 지식**이 필요함을 강조합니다("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 호세아 6:6 ).


    • 호세아서의 상징
      결혼에 대한 비유: 
      호세아와 고멜의 관계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고멜의 불충실함은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를 상징하는 반면, 호세아의 끈질긴 사랑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헌신을 반영합니다.

      아이들의 이름:
       호세아의 아이들의 이름은 예언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스르엘: 
      예후의 집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합니다.
      Lo-Ruhamah ("사랑받지 못함"): 하나님의 자비를 거두심을 상징합니다.
      로암미("내 백성이 아님"):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깨어진 관계를 상징합니다.

    • 핵심 구절
      호세아 2:19-20: "내가 영원히 네게 장가들어 정의와 공의와 사랑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리라."

      호세아 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호세아 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고치시리라."

      호세아 11:8: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 마음이 속에서 변하고 내 모든 긍휼이 불타오르나니."

    • 호세아의 메시지 요약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만성적인 불신실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지속되는 하나님을 묘사합니다. 
      이 책은 판단과 희망, 분노와 연민 사이를 오갑니다. 
      궁극적으로 호세아는 임박한 심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궁극적인 소망은 자신의 백성이 그분께 돌아오기만 한다면 
      그들을 위한 회복과 치유임을 강조합니다.

    • 빠른 참조를 위한 키워드
      불성실(우상 숭배, 영적 간음)
      심판(결과, 아시리아)
      언약(결혼, 서약 파기)
      회복 (희망, 구원)
      하나님의 사랑 (부모의 긍휼)
      회개 (회개, 치유)
      하나님에 대한 지식(친밀함, 참 숭배)

      이러한 요소들이 호세아서를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의 관계를 생생하게 묘사하는 심오하고 설득력 있는 책으로 
      만들어 줍니다. 
      이 책은 복잡성과 깊은 사랑, 끊임없는 은혜로 가득 차 있습니다.


























































































    2025 다니엘


    동거(同居) 한가지 동, 살 거
    - 한 집에 같이 거주(居住)함.

    동식(同食) 한가지 동, 밥 식
    (밥이나 음식(飮食) 따위를)함께 먹음.

    동침(同寢) 한가지 동, 잘 침
    - 남녀(男女)가 잠자리를 같이함.

    동행(同行) 한가지 동, 다닐 행
    - 같이 길을 감.

    동일(同一)  한가지 동, 한 일
    - 둘이나 그 이상(以上)의 것이 서로 꼭 같음. 한결같음.


    다니엘서 전체 구조 요약

    • 1-6장 : 역사적 사건
      다니엘과 친구들이 바벨론과 메디아-페르시아 제국에서 신앙을 지키며 기적적인 구원을 받는 이야기. 7-12장: 예언적 환상
      세계 제국들의 흥망과 최후의 심판,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예언.
    1. 역사적 이야기 : 다니엘과 친구들의 신앙과 시험 (1-6장)
    
    
    • 1장 : 다니엘과 세 친구의 바벨론 궁중 생활
    
    
    • 2장 : 느부갓네살의 꿈과 신상의 환상
    
    
    • 3장 : 금 신상과 풀무 불 속의 세 친구
    
    
    • 4장 : 느부갓네살의 꿈과 교만에 대한 심판
    
    
    • 5장 : 벨사살 왕의 연회와 하나님의 심판
    
    2. 예언적 환상 이야기 
    • 6장 : 다니엘과 사자굴 사건 

    • 7장 : 네 짐승의 환상과 인자 같은 이의 왕국

    • 8장 : 숫양과 숫염소의 환상

    • 9장 : 다니엘의 기도와 70이레의 예언

    • 10장 : 다니엘의 환상과 영적 전쟁

    • 11장 : 남방 왕과 북방 왕의 예언 

    • 12장 : 종말과 부활에 대한 약속


    다니엘 1장

    다니엘과 세 친구(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옵니다. 
    그들은 왕궁에서 학문을 배워 왕을 섬길 자로 선택됩니다. 
    왕은 그들에게 왕의 음식과 포도주를 제공하지만, 이방 신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지 않기로 결심합니다(단 1:8). 
    그들은 채소와 물만 먹겠다고 제안하며, 시험을 받은 후 다른 사람들보다 더 건강해 보입니다(단 1:15). 
    하나님은 다니엘과 친구들에게 특별한 지혜와 능력을 주셔서, 왕의 어떤 신하들보다도 더 지혜롭게 만드셨습니다. 
    다니엘은 또 특별한 꿈 해석의 능력을 받습니다(단 1:17). 
    그들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인정받고, 그들의 신실함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다니엘 2장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꾸고 이를 해석할 자를 찾지만, 아무도 꿈을 말하고 해석하지 못합니다. 
    왕은 이로 인해 모든 지혜자들을 죽이려고 하지만, 다니엘이 기도하여 하나님께 꿈의 의미를 알려달라고 간구합니다(단 2:18).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꿈을 계시하시고, 다니엘은 왕 앞에서 큰 신상에 관한 꿈을 해석합니다. 
    이 신상은 네 개의 제국을 상징하는데, 금은 바벨론, 은은 메디아-페르시아, 동은 그리스, 철은 로마를 나타냅니다(단 2:38-40). 
    다니엘은 마지막에 하나님의 왕국이 모든 왕국을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것을 예언합니다(단 2:44). 
    이로 인해 느부갓네살 왕은 다니엘을 높이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다니엘 3장

    느부갓네살 왕은 금 신상을 세우고, 모든 백성에게 절하라고 명령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하나님을 섬기며 이 명령을 거부합니다(단 3:12). 
    분노한 왕은 그들을 불타는 풀무에 던져 넣으라고 명령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 가운데서 보호하셔서 머리카락 하나 타지 않게 하십니다(단 3:27). 
    왕은 그들이 죽지 않은 것을 보고 놀라며,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고 그들을 높입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이 신실한 자를 보호하신다는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단 3:29).

     

    다니엘 4장

    느부갓네살 왕은 꿈을 꾸고, 다니엘을 불러 해석을 요청합니다. 
    왕은 큰 나무가 자라 모든 생물이 그 그늘에 살았으나, 하늘의 명령에 의해 나무가 잘려 나간다는 꿈을 꿉니다(단 4:14). 
    다니엘은 이 꿈이 왕에게 해당하며, 왕이 교만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짐승처럼 들에서 살게 될 것임을 경고합니다(단 4:25). 
    예언대로 느부갓네살은 7년간 광야에서 짐승처럼 살게 되지만, 그 후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겸손히 돌아와 왕국을 회복하게 됩니다(단 4:34). 
    이 사건을 통해 느부갓네살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인정합니다(단 4:37).

     

    다니엘 5장

    벨사살 왕은 큰 연회를 열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금, 은 그릇을 사용하여 술을 마십니다. 
    갑자기 벽에 손가락이 나타나 글을 씁니다. 
    다니엘이 불려와 글을 해석하는데, 이 글은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으로 하나님께서 벨사살의 왕국을 저울에 달아 부족하다고 판결하셨으며, 그 왕국이 메디아와 페르시아에 넘겨질 것임을 의미합니다(단 5:25-28). 
    그 밤에 벨사살은 죽임을 당하고, 메디아의 다리우스가 바벨론을 점령합니다(단 5:30-31). 이는 하나님의 심판이 속히 이루어진다는 교훈을 줍니다.
    BC 539년 10월 

     

    다니엘 6장

    다니엘은 메디아와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밑에서 높은 지위를 얻게 됩니다. 
    다른 고관들은 다니엘을 질투하여 그를 모함할 계획을 세우고, 왕에게 다니엘이 기도하면 사자굴에 던져지도록 법령을 제정하도록 유도합니다(단 6:7-9). 
    다니엘은 이 법령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결국 사자굴에 던져집니다(단 6:16). 
    그러나 하나님은 사자들의 입을 막아 다니엘을 보호하십니다. 
    이로 인해 왕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고, 다니엘을 구출하며 그를 모함한 자들을 사자굴에 던집니다(단 6:24). 
    다리우스 왕은 하나님을 높이고, 다니엘은 더욱 높임을 받습니다(단 6:26-28).

     

    다니엘 7장

    다니엘은 밤에 네 짐승에 대한 환상을 봅니다. 
    첫 번째 짐승은 사자 같고, 두 번째는 곰, 세 번째는 표범 같으며, 네 번째 짐승은 매우 무섭고 강력한 철 이빨을 가지고 있습니다(단 7:4-7). 
    이 짐승들은 바벨론, 메디아-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제국을 상징합니다. 
    마지막 짐승은 열 뿔을 가지고 있으며, 이 중 한 뿔이 나머지 뿔들을 꺾으며 권세를 장악합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인자 같은 이’가 나타나 영원한 왕국을 세우는 장면을 봅니다(단 7:13-14). 
    이는 메시아의 왕국을 예언하며, 세상의 제국들은 멸망하겠지만 하나님의 왕국은 영원할 것임을 상징합니다.

     

    다니엘 8장


    다니엘은 숫양과 숫염소의 환상을 봅니다. 
    숫양은 두 뿔을 가진데, 하나는 다른 하나보다 큽니다. 
    숫염소는 큰 뿔을 가지고 숫양을 쳐서 이깁니다. 
    다니엘은 이 환상의 의미를 묻고,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 해석해 줍니다. 
    숫양은 메디아와 페르시아 왕국을, 숫염소는 그리스 왕국을 상징합니다(단 8:20-21). 
    숫염소의 큰 뿔은 알렉산더 대왕을 나타내며, 그의 죽음 후 네 개의 작은 뿔이 나오는 것은 제국이 네 부분으로 나뉘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 예언은 장차 올 제국들의 흥망과 메시아 시대의 도래를 암시합니다(단 8:22-25).

     

    다니엘 9장

    다니엘은 예레미야서에서 예루살렘의 포로 생활이 70년간 지속될 것이라는 예언을 묵상하고, 이스라엘의 죄악을 회개하는 기도를 드립니다(단 9:2-19). 
    하나님은 가브리엘 천사를 보내 다니엘에게 70이레에 대한 예언을 해석해 줍니다. 
    이 예언은 예루살렘의 재건과 메시아의 도래, 그리고 메시아가 제거되는 사건을 포함합니다(단 9:24-26). 
    마지막 70번째 이레는 이스라엘의 남은 기간과 종말에 대한 예언으로, 성전이 파괴되고 대환난이 있을 것임을 나타냅니다. 
    이 장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메시아의 희생을 중심으로 한 구속 계획을 보여줍니다.

     

    다니엘 10장

    다니엘은 3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던 중, 큰 환상을 봅니다. 
    그 환상에서 천사가 다니엘에게 나타나, 앞으로 있을 일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천사는 다니엘에게 바사 왕국과 헬라 왕국 간의 싸움을 설명하며, 그가 하늘에서 벌어지는 영적 전쟁에 대해 알립니다(단 10:13-14). 
    이 환상은 세상의 권세들이 겉으로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적 싸움의 결과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니엘은 매우 두려워했지만, 천사의 위로로 힘을 얻고 계속해서 비전을 받습니다(단 10:19).

     

    다니엘 11장

    이 장은 남방 왕(이집트)과 북방 왕(시리아)의 세력 다툼과 정복에 관한 매우 상세한 예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예언은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 후 그리스 제국이 네 부분으로 나뉜 후, 셀레우코스 왕조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간의 갈등을 예언합니다(단 11:4-20). 
    후반부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를 지칭하며, 그가 성전을 더럽히고 이스라엘 백성을 박해할 것을 예언합니다(단 11:31). 
    이 장은 최종적으로 북방 왕과 남방 왕의 최후 대결, 그리고 장차 다가올 영적인 충돌을 상징합니다.

     

    다니엘 12장

    다니엘서의 마지막 장은 종말에 대한 환상으로, 대환난의 시기가 다가올 것이며, 그때 하나님께 충성된 자들이 구원을 받을 것임을 예언합니다(단 12:1). 
    죽은 자들이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것인지, 아니면 영원한 수치에 들어갈 것인지 결정될 것입니다(단 12:2). 
    다니엘은 이 예언이 먼 훗날 성취될 것이라는 지시를 받으며, 환상을 봉인하고 마지막 때를 기다리라고 명령받습니다(단 12:4, 9). 
    다니엘서는 결국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약속과 희망으로 마무리되며, 최후의 구속과 부활을 기대하게 합니다(단 12:13).


    마지막을 기다리라
    마지막 때에 두 가지 모습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단 12:2).

    "땅속에서 잠자던 사람들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깨어날 것이오. 
    한쪽 사람들은 영원한 삶을 누릴 것이고, 다른 쪽 사람들은 치욕을 겪고 영원히 기피 대상이 될 것이오."(새한글성경)

    한편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두 가지 모습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마 25: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Then they will go away to eternal punishment, but the righteous to eternal life.)

    다니엘서의 말씀과 예수님의 말씀을 종합하면 마지막 때에 나타날 두 가지 모습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영원한 삶 즉 영생(永生. eternal life)
    둘째는 치욕의 삶 즉 영벌(永罰. eternal punishment)

    그렇다면 누가 영생을 누리고 또 누가 영벌에 들어가게 될까요?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5장에서 아주 쉽게 가르쳐주셨습니다(25:31-33).

    "인자가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과 염소를 분별하는것 같이 하여
  • 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 오른편 즉 양의 무리에 속한 사람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25:34-40). 

  •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 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반면에 왼편 즉 염소의 무리에 속한 사람들을 향하여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25:41-43).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양의 특징은 나도 모르게 선한 일을 행하지만 염소의 특징은 나를 강조하고 나를 드러내려고 합니다.
    선한 일을 의식적으로행하는 것과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행하는 것의 차이라고 하겠습니다.

    양심이 마비된 사람들은 선한 일에 관심이 없지만 착한 양심의 사람들은 선한 일에 관심을 갖고 집중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이라면 선한 일에 마음을 쏟고 악한 일에는 마음을 닫을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9월 22일(월) 다니엘 10-12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지막을 기다리라(12:13)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날에는 네 업을 누릴 것임이니라.
    As for you, go your way till the end. You will rest, and then at the end of the days you will rise to receive your allotted inheritance.

    마지막(케츠. qêts)  קֵץ

    1. 극단
    2. 끝없이 אֵין קִץ
    3. 파멸
    발음 [ qêts ]

    어원 / 112에서 유래한 압축형
    구약 성경 / 67회 사용

  • 관련 성경 /  지남, 끝(창8:6, 전12:12), 끝남(출12:41, 민13:25, 대하8:1, 겔7:2, 단11:27), 끝(창6:13, 신31:10, 왕하19:23), 마지막(욥6:11, 애4:18, 단11:40), 종말(시39:4, 합2:3), 끝날(단12:13).


  •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다니엘 10-12장은 다니엘의 마지막 환상을 기록한 책입니다. 
    10장에서 부터 시작된 큰 전쟁에 대한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다니엘은 3주동안 슬퍼하고 금식하고 있을때에 주신 계시입니다. 
    11장 마지막에서 세상 권세자가 분노하여 많은 무리를 다 죽이며 멸망시키고자 할 것이요, 그가 장막 궁전을 바다와 영화롭고 거룩한 산 사이에 세울 것이나 그의 종말이 이르리니 도와 줄 자가 없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반대로 1절에서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말씀하십니다.

    큰 환란 가운데서 하나님은 천사장 미가엘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을 보호하십니다. 
    미가엘은 "여호와와 같은 이가 누구인가"라는 뜻으로 사단과 싸우고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는 천사장입니다.

    "그때에 네 백성중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말씀하시며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 예수님을 위해 핍박받고, 멸시와 천대 받으면서도 인내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킨 자들을 구원해 주십니다.

    2절에서 두 종류의 부활이 있음을 말씀해 주십니다.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말씀하십니다.

    죽는다고 죽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에 때에 부활하게 되고, 각각 그 행위를 따라서 영생을 받는자, 영원한 수치를 받는 자들로 나뉜다 말씀하십니다. 
    이때 영생을 얻는 자 중에서도 하나님께 인정받고 높임 받는 자들이 있습니다.

    3절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많은 사람을 옳은데, 즉 예수님께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날 것을 약속해 주십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몰라 방황하는 자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나름대로 알고 믿는 자들에게 지혜의 말씀을 전함으로 예수님께 그 마음과 중심을 돌이키도록 돕는자, 섬긴자들은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말씀해 주십니다.

    4절에서 다니엘에게 마지막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하십니다.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을 말씀을 지식적으로 알고자 합니다. 
    여기 저기서 좋은 말씀, 좋은 설교를 듣기 좋아하며, 이를 위해 빨리 왕래하고, 요즘에는 인터넷으로 실시간으로 유명한 말씀을 들으며 지식을 쌓습니다. 
    그러나 이는 자신을 교만하게 하는 지식지수만 높여 줄 뿐, 회개함도, 돌이킴도, 깨달음도 없는 그저 자랑하고, 거룩한척 하게 하는 말만 유창하게 하는 지식에 불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봉함하고, 구하는자, 경외심으로 듣는자, 절대적으로 영접하는 자들에게 깨닫는 영을 허락하사 말씀에 감추인 보배를 얻게 하십니다.

    5-7절에서 "이 놀라운 일의 끝이 어느때까지냐" 묻습니다. 
    다른 이가 "반드시 한때 두때 반을 지나서 성도의 권세가 다깨지기 까지이니 그렇게 되면 이 모든 일이 다 끝나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때"에 관심이 많습니다. 
    언제, 어떻게.. 에 많이 궁금해 하고 알고자 합니다. 
    한때 두때 반은 3년 반으로서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다니엘도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해서 8절에 보면 "내가 듣고도 깨닫지 못한지라 내가 이르되 주여 이 모든 일의 결국이 어떠하겠나이까" 묻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아 갈지어다 이 말은 마지막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하시며 다니엘의 질문에 분명하게 대답해 주지 않으시고 가라고 하십니다.

    10절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하게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있는 자는 깨달으리라"

    마지막까지 하나님께서 봉한 말씀을 많은 사람들은 연단받고, 스스로 정결하게 하며, 회개하고, 경외함으로 받는 자, 순종과 믿음로 말씀을 존귀히 여기는 자들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은 지식은 많을 지라도 악을 그치지도, 회개하지도, 돌이키지도 않으므로 지식만 많을 뿐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지혜있는자, 말씀을 경외하고, 순종하는자, 믿음으로 사는자만이 그 말씀의 뜻과 깊은 의미를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13절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날에는 네 몫을 누릴 것임이라" 

    다니엘서 12장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10대에 포로로 끌려와 80세가 넘을 때까지 이방땅에서 믿음을 지키고, 부와 명예와 권세를 떨칠지라도 한치의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기를, 세상으로부터 더렵혀 지지 않기를 결단하고 지킨 다니엘에게 주시는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가 지금까지 해 왔던 것 처럼 그가 변함없이, 깨달은 말씀 그대로 더렵혀지지 않고,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그 앞에서 흠없는 자가 되기를 기도하는 그 모습으로 기다리라 하십니다. 
    마지막 날에 그의 믿음대로 몫을, 상급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이 "때"와 "어떻게 될것"인가에 관심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서를 통해서 세계가 언제, 어떻게 움직일지, 어떤 일이 일어날지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고, 이루셨습니다.

    다니엘서를 통해서 이미 이루어진 일들을 하나씩 하나씩 확인해 가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이 말씀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졌고, 누구를 통해 이루어져 갔는지.. 하나씩 하나씩 체크하며 신기하고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마지막 말씀을 묵상하며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에 대한 관심보다, 내가 이 예수님을 어떻게 만날 것인가, 그때에 내가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앞에 서게 될 것인가에 더 집중하게 하셨습니다. 
    언제든, 어떤 모양으로 오시든, 내가 단독자로 서야할 예수님 앞에서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 이것을 준비하고, 이것을 바라보며 매일 오늘을 살아야 함을 배웁니다.

    하나님은 어떤 자를 기뻐하는지 분명히 말씀해 주셔서 지혜로운 처녀들 처럼 준비할 시간, 회개하고 정결해질 시간, 깨달을 시간과 기회를 주십니다.

    10절 말씀처럼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케 하며 희게 하라고 지혜있는 자들, 깨달을 수 있는 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다니엘 말씀을 묵상하며 깊이 배운 것은 "절대성"입니다. 
    다니엘이 뜻을 정해 자신을 더럽히지 않고자 타협하지 않았고, 풀무불 앞에서의 세 친구도, 사자굴 앞에서의 다니엘도 한치의 타협도, 합리화도, 변명도 없이 하나님만을 섬겨야 함을, 하나님과의 약속이 더 존귀함을 생명을 걸고 지켰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들을 풀무불속으로, 사자굴 속으로 함께 들어오셔서 그들의 절대적인 믿음과 결단을 축복해 주시고 머리털 하나 상하지않게 보호해 주셨습니다. 

    한달쯤 기도를 쉬는것, 한번쯤 무릎을 꿇는 것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생명과 맞바꿀 만큼 소중하다고 여기고 지켰을 때 하나님은 다니엘을 세상이 바뀌고 왕이 바뀌어도 별처럼 빛나는자, 지혜로운자로 높여 주셨습니다. 
    높아져서도 그가 변하지 않을때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 그 은밀한 계획을 모두 풀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다니엘의 절대성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현실의 상황과 조건, 사람들의 말과 보여지는 것들에 대한 판단으로 인해 하나님을 향한 그 사랑과 부르심의 은혜, 허락하신 사명을 내팽기치지 아니하고, 끝까지 견디는자, 마지막까지 예수님이 허락하신 그 자리, 그 은혜를 지키는 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나를, 우리 모임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작은 죄라도, 조그만 허물이라도 깨닫게 하시고, 애통하게 하시고, 회개케 하시며, 연단하여 주시는 하나님을 인해 감사 찬양합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이 질투하지 않으시게 늘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생각, 사명생각,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경외심으로 순종하며 따르는 주의 종이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 때가 언제라도, 내일이라도. 두려움이 아닌 기쁨과 감사로 두팔벌려 예수님을 맞이 하는 주의 지혜로운 종이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마지막을 기다리라

    다니엘이 힛데겔에서 보았던 환상(단 10:4)이 마지막 12장에도 이어진다. 
    안티오코스 4세로 표상되는 하나님의 대적자(적그리스도)가 멸망한 후,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임한다.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 (1절) 

    마지막 날에 가장 극심한 환난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그때가 이르면 성도들을 보호하는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성도들은 모두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 구절은 마지막 날에 구원자의 임재를 예언하는 구절로 유대인들 역시 메시아 시대에 대한 예언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성도의 부활 

    구약 성경에서 성도의 부활을 말씀하는 구절을 찾는다면, 본문이 대표적이다.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2절) 

    위의 구절은 부활 이후의 삶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곧, 영생을 얻는 부활이 있고 영원한 수치를 당하는 부활이 있다. 
    신약 성경에서도 마지막 심판 때에 영생의 부활과 영벌의 부활이 있다고 가르친다. 
    본문은 계속해서 영생을 얻는 부활에 대해 더 자세히 묘사한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3절) 

    위의 구절은 예수님께서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하며 인용하신다.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마 13:43) 

    이 세상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요, 부활 이후의 삶이 있다는 성경의 가르침은 이 세상에서 비록 고난을 당할지라도 영생을 바라보며 인내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마지막을 기다리라 

    하나님의 대적자 즉 적그리스도에 대한 실체와 그의 종말, 나아가 성도의 구원까지 다니엘이 보았던 힛데겔 환상에는 모두 담겨 있었다. 
    이 정도면 하늘의 비밀이 다니엘에게 모두 펼쳐진듯하다. 
    그러나 모든 묵시가 끝나는 본문에서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그 중에 하나가 세마포 옷을 입은 자 
    곧 강물 위쪽에 있는 자에게 이르되 
    이 놀라운 일의 끝이 어느 때까지냐 하더라 (6절) 

    본문에는 이에 대한 대답이 여러 가지로 등장한다. 
    곧, "한 때 두 때 반 때를 지나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지기까지"(7절), 
    "천이백구십 일"(11절), 
    그리고 "천삼백삼십오 일"(12절) 등이다. 

    다니엘서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이 기한은 과연 언제를 의미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그 의미를 파헤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가운데 만족스러운 대답은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그 의미를 완전히 깨닫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다니엘서의 결론은 마지막 날에 대한 현상과 시기를 정확히 예언하는 것이 아니다. 
    다니엘서의 결론은 사람이 하나님의 섭리를 모두 깨달을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분명한 선언이다. 
    그러니 성도들은 구원의 때까지 기다릴 뿐이다.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날에는 네 몫을 누릴 것임이라 (13절) 


    마지막을 기다리라(다니엘 12:1-13)

    북 이스라엘이 멸망 후 130년 쯤 지나서 남 유다는 바벨론 제국의 공격을 받습니다. 
    3차례에 걸친 침공에 의해 결국 멸망 당했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의 1차 침공 때 포로로 끌려갔는데 아마도 10세 전후의 어린이였다고 추정합니다.

    다니엘은 자기를 끌고간 바벨론 제국이 멸망당하고 바사(페르시아) 제국이 새롭게 세워지는 격동기를 지났지만 끝까지 살아 남았고, 오히려 다리오 왕(메대사람, 고레스왕의 외삼촌이자 장인, 고레스가 메대를 바사에 합병 후 상징적으로 장인을 왕위에 앉힘, 다리오가 2년 통치 후 고레스가 왕위에 올라 포로 귀환 명령함)때는 총리의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다니엘서에는 7장부터 네 가지 환상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7장에는 “네 짐승(사자, 곰, 표범, 열뿔 짐승) 환상”, 
    8장에는 “숫 양과 숫 염소 환상”, 
    9장에는 “일흔 이레 환상”, 
    그리고 10~12절에는 다니엘이 바사왕 고레스 3년에 “힛데겔 강가에서 본 환상”이 있습니다.

    이 네가지 환상에 대해서는 참 많은 억측과 오해가 있고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 만큼 환상은 쉽게 해석하고 단정할 수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수 많은 이단들이 이 환상이 이렇다, 저렇다 하면서 자신들의 말만 정답이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다니엘이 본 네 번째 환상(힛데겔 강가에서 본 환상, 10~12장) 의 마지막 부분이며 종말의 때에 관한 내용입니다. 
    다니엘이 환상으로 본 마지막 때의 모습이 담긴 1~4절을 읽어 드립니다.

    “1.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 
    2.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4.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그 때에” 라고 한 시점은 2절에서 보듯이 죽은 자가 깨어나 영생을 받기도 하고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하기도 한 다는 것을 볼 때 최후의 심판 날이 분명합니다. 
    그 때에 민족을 호위하는 미가엘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유다서에는 미가엘을 천사장으로 기록했습니다.

    천사장 미가엘이 민족을 호위한다고 했는데, 여기서 민족은 이스라엘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온 세계 열방(All Nation)을 말합니다. 
    미가엘 천사장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사탄의 무리를 대적하는데 선봉에 설 것이고 모든 민족을 보살피는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는 개국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큰 환란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언하신 내용(마 24:21,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과 일치합니다.

    1절에, 듣도 보도 못하던 환난이 일어나게 될 것이고 “그 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이것 역시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계 20:15)라는 요한계시록의 말씀과 일치 합니다.

    이렇듯 다니엘의 환상은 성경의 다른 예언, 특히 요한계시록의 말씀들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이단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 때가 몇 년 몇 월 몇 일에 일어날 것이라고 말도 안되는 시한부 종말론을 내세우거나, 미가엘은 이 시대를 예언하는 자기(이단들의 우두머리) 자신을 가리킨다고 주장하거나, 환란은 무슨 상징을 가진다는 등 이런 미혹의 말에 휩쓸리지 않으셔야 합니다.

    말세에 이를수록 거짓 선지자와 자칭 그리스도라고 일컫는 자들이 무수히 등장할 겁니다. 예수님이 직접 그런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우리가 걱정하고 점검해 가야 할 것은 내가 정말 생명책에 기록된 구원 받을 자0인가를 생각하며, 내가 믿음 안에 있는가를 날마다 확증하며 살아가데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지난 번 요한 복음 15장 말씀을 기억해 보시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생명책에 기록되어 구원에 이를 수 있는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겁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 날마다 서고, 오직 예수 이름을 앞세워 하루를 살고, 오직 성령이 말하시는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려고 애쓰고 수고하면 구원은 틀림 없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어질 것입니다. 서고, 살고, 순종하면 구원에 이릅니다.

    2절에서 그 때에 자는 자(죽은자)들이 일어나(부활) 영생에 들어가고, 또한 수치와 부끄러움(영벌)에 당할 자가 있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영생과 영벌의 대조는 언제 들어도 무섭고 두려운 말씀입니다.

    3절에서 지혜 있는자(지혜되신 예수님과 온전히 하나가 된 자)와 많은 사람들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죽도록 헌신하고 충성을 다한 자)는 영원토록 빛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역시 어떤 자가 생명책에 기록될 자이며 누가 하늘의 상급을 받을 자인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4절에서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라고 했는데, 이 말씀 역시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계 22:10)라고 일치 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니엘은 “봉함하라”고 했고, 사도 요한은 “인봉하지 말라”는 대조적인 기록을 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무려 600여년의 시차를 두고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이 완전히 공개되기 전과 후, 너무나도 다른 상황에서 말씀을 기록하였기 때문입니다.

    1~4절까지 다니엘이 본 환상은 “그 때에” 일어날 일들입니다. 이미 예수님의 오심, 죽으심, 부활, 그리고 요한계시록까지 알고 있는 우리에게는 이 내용이 어려울 것은 없습니다. 종말과 심판의 날이 무섭고 두렵기는 하지만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을 굳게 믿고 오히려 소망 중에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도다”(계 7:10)라는 찬양처럼 하나님만 경외하고, 예수님만 굳게 믿고, 성령님과 항상 동행을 요청하며 고단한 하루 하루를 묵묵히 지내다 보면 어느 새 그 때, 그 날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모든 성도는 그 날과 그 때를 기다리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 되고, 기다리는 것이 살아가는 이유가 되고, 기다리는 것이 내게 주신 가장 큰 선물임을 깨닫고, 오직 그 때를 향하여,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믿음의 길로 담대히 나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계속해서 다니엘이 본 환상이 나오는 본문 5~9절을 읽어 드립니다. “5. 나 다니엘이 본즉 다른 두 사람이 있어 하나는 강 이쪽 언덕에 섰고 하나는 강 저쪽 언덕에 섰더니 6. 그 중에 하나가 세마포 옷을 입은 자 곧 강물 위쪽에 있는 자에게 이르되 이 놀라운 일의 끝이 어느 때까지냐 하더라 7. 내가 들은즉 그 세마포 옷을 입고 강물 위쪽에 있는 자가 자기의 좌우 손을 들어 하늘을 향하여 영원히 살아 계시는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되 반드시 한 때 두 때 반 때를 지나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지기까지이니 그렇게 되면 이 모든 일이 다 끝나리라 하더라 8. 내가 듣고도 깨닫지 못한지라 내가 이르되 내 주여 이 모든 일의 결국이 어떠하겠나이까 하니 9. 그가 이르되 다니엘아 갈지어다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

    다니엘은 두 사람과 세마포 옷을 입은 자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환상으로 보았습니다. 세 마포 옷을 입은 자는 10장에서도 나오는데 이는 성육신 하기 전의 성자라고 추측이 되며, 두 사람으로 나온 존재는 천상에 존재하는 천사일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다니엘이 본 두 사람중 하나가 세마포 옷을 입은 자에게 “이 놀라운 일의 끝이 너느 때까지냐 하더라” 물었습니다. “어느 때 까지냐” 이런 어감은 반말로 들리고, 우리 나라 사람의 감정으로는 아니 천사가 성자에게 반말을 할 수 있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건 단순히 번역상 그렇게 된 것이고, 우리말인 한글 문화에서나 존칭이 엄격하지 외국어는 그렇지 않습니다. 특히 이 주고 받는 언어가 천상의 언어 였을테니 “반말 아닌가?”라는 것은 대한민국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해프닝이죠.

    “이 놀라운 일일 어느 때 까지냐”라는 물음에서 “이 놀라운 일”은 무엇일까요? 이 일은 짧게 신구약 중간기 시대에 마카비 혁명을 일으키게 만든 장본인인 셀류커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 군주의 핍박을 지칭한다고 해석합니다. 왜냐하면 뒤에 나오는 대답이 명시된 기간을 암시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물음에 세마포 옷을 입은 자가 영원히 살아계시는 자를 향하여 좌우 손을 들어 맹세하며 “반드시 한 때 두 때 반 때를 지나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지기까지이니 그렇게 되면 이 모든 일이 다 끝나리라”대답하였습니다.

    반드시 한 때, 두 때 반때 라고 기한을 명시했습니다. 한 때는 1년, 두 때는 1년, 반 때는 6개월이기 때문에, 총 3년 6개월, 마흔 두달이 됩니다. 이 기간 동안 고통 받으면 성도의 권세가 다 깨진다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극심한 핍박이 가해 질 것인지 상상조차 안 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기간이 꼭 어떤 시점의 역사적 순간을 뜻하지만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에서는 “그들(이방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계 11:2) 라는 예언이 있고, 또한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 마흔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계 13:5)는 예언도 있습니다. 한 때 두 때 반 때, 즉 3년 6개월, 마흔 두달 이라는 기간이 종말의 심판 때에도 어김 없이 이런 식의 숫자로 등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때 두 때 반 때는 이미 지나간(신약 중간기 시대) 핍박의 사건이기도 하지만 앞으로 종말에 임할 핍박의 예언기도 합니다. 얼마나 핍박이 극심한지는 “성도의 권세가 다 깨어지기까지” 라는 말씀을 보면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극한의 고통과 공포가 임할 것임을 경고하는 예언입니다.

    이런 대화가 오고가는 장면을 환상속에서 보고 들었지만 다니엘 조차도 도대체 이 기한이 무슨 의미인지, 언제부터 언제 까지를 이야기 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길이 없어서 직접 질문합니다. “내 주여 이 모든 일의 결국이 어떠하겠나이까”, 라고 묻자 “다니엘아 갈지어다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 라는 대답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다니엘은 기한에 대한 속 시원한 해석을 듣지 못했습니다. 대신에 “네가 듣고 본 말(말씀)을 마지막 때까지 봉함(지켜라)하라”는 말씀만 들었습니다. 다니엘에게 환상을 보여 주신 것은 기한에 대해서 실체적으로 알려 주고, 그 기한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 해 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아직 예수님이 오시기도 수백년 전이기에 다니엘이 종말의 일까지 그 실체를 다 알 수도 없었고 하늘에서는 그러한 내용까지 다니엘에게 세세하게 설명해 주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의 임무는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원형 그대로 명확하게 기록하고 훼손되지 않도록 잘 보관하여 후대에 물려주는 것이었습니다.

    후대의 사람들은 다니엘이 기록하고 보관하던 그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을 목격하면서, “맞아, 그렇구나, 먼 옛날 다니엘이 환상을 보고 기록했다고 한 그 말씀대로 진짜 다 이루어졌어, 하나님은 진실로 살아계신 분이셔,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셔,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말씀하신 모든 것들을 반드시 이루어 주시는 신실한 분이셔,”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 돌리게 될 것입니다.

    다니넬은 속 시원한 대답을 듣지는 못했지만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충싱하게 이행 했습니다. 오직 자신의 자리에서 맡겨진 역할을 충실히 완수하며 하나의 디딤돌 역할을 한 사람들이 성경에 기록된 지도자요, 왕이요, 선지자요, 신약의 제자들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작은 역할이지만 역사의 시간 안에서 디딤돌 하나를 놓게 하시려고 우리 각자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이 시대의 다니엘입니다. 우리에게는 다니엘에게 말씀 하신 것처럼, 기록되어 보관된 말씀들을 끝까지 지켜내고(봉함) 전달해 주어야 하는 특별한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이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려면, 우리에게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기록된 말씀이 그대로, 반드시, 속히 이루어 진다는 굳건한 믿음이 있어야 하고, 그리고 하나는 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그 날까지 끝까지 기다리며, 또 기다린다는 확고한 소망을 품는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00교회 모든 성도는 성령안에서 살아가시면서, 환상도 보시고, 음성도 들으시고, 영광도 목격하시는 많은 체험들 속에서 살아가시기를 바라며, 내가 만난 구원자, 내가 경험한 하나님의 나라, 내게 깨달음을 주신 진리의 말씀을 보존하고 전파하는데 최선을 다하는 이 시대의 다니엘로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다니엘이 본 환상 마지막 이야기 10~12절을 읽어 드립니다.

    “10.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하게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 11.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하게 할 가증한 것을 세울 때부터 천이백구십 일을 지낼 것이요 12. 기다려서 천삼백삼십오 일까지 이르는 그 사람은 복이 있으리라 13.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날에는 네 몫을 누릴 것임이라” 아멘.

    10절에는 “악한 자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오직 지혜(예수, 말씀, 진리, 믿음)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 라고 했는데, 깨닫는 자와 깨닫지 못하는 자는 그 날(종말, 심판)의 때가 이를수록 뚜렷하게 구분되어 나타날 것입니다.

    11, 12절에는 또 알 수 없는 숫자가 나옵니다. 11절의 천이백구십일은 3년 7개월이고, 이는 앞섯 나온 한 때 두 때 반 때(3년 6개월) 보다 한 달이 많은 숫자입니다. 대부분 이 기간은 주님 오시기 전에 겪게 될 마지막 대 환난의 시간으로 이해 합니다.

    대 환란이 일어나는 시기에는 적 그리스도가 출현하여 11절에서처럼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하게 할 가증한 것을 세울 때”가 올 것입니다. 실제로 B.C 167~164년에 적 그리스도의 예표라고 말하는 셀류커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 시절에 예루살렘 성전이 훼손되어 파손 되엇고, 희생 제사를 못 드리도록 없애 버렸고, 제사장들은 죽임 당하고, 성전에 돼지 피를 뿌리는 등으로 거룩한 성전이 더럽혀지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서 볼 숫자는 12절에 나오는 천삼백삼십오일입니다. 이 숫자는 11절의 천이백구십일 보다 45일이 많습니다. 3년 반도 견디기 힘든데 45일이나 더해져서 “천삼백삼십오일까지 이르러야 복이 있으리라” 했습니다.

    이 복은 단순한 복이 아니라 구원에 이르는, 영생에 이르는 복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환난의 시간, 더해지는 시간에는 극도의 환난과 핍박, 미혹과 시험이 들이 닥츨 것인데, 믿는 자들이라면 단단히 각오하고 무조건 끝까지 이기고 승리해야만 천국문에 이를 수 있다는 겁니다.

    이런 환난의 시간을 알려 준 다니엘은 자신이 기록한 12장의 책을 이렇게 마무리 합니다.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날에는 네 몫을 누릴 것임이라” 아멘.

    마지막 환난이 어떠할지 우리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기 때문에, “너는 마지막을 기다리라” 라고 시작하는 이 문장이 어느 정도로 단단히 각오하라고 하는 것인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해상 전투 영화를 보면 구축함에서 잠수함을 탐색하면 폭뢰를 바다에 투하 하거가 어뢰를 발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면 잠수함에서는 폭뢰가 터지거나 혹은 어뢰에 맞기 전에 충격에 대비하라고 하면서 몸을 낮추고 잠수함 내에 있는 쇠붙이는 무엇이든지 꽉 붙잡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뢰에 제대로 한 대만 맞아도 잠수함은 산산조각이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영화 장면에서 이런 엄청난 충격파를 대비하라는 것과 “너는 마지막을 기다리라”는 말씀이 교차되면서 생각을 해 봤습니다. 물론 비교가 안 되는 상상이겠지만, 아마도 죽을 만큼 견디기 힘들고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할 만큼 고통스러운 시간이 대 환난 일겁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가루와 같이 파괴되는 극심한 고통의 시간일 것이라고 저도 상상만 할 뿐입니다.

    는 말씀이 누가 누구에게 하시는 말씀인가요? 하늘에서 세마포 옷을 입은 자, 곧 입니다.

    인자 같은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다니엘에게 여러 가지 환상을 보여 주시고, 직접 음성을 들려 주시면서, 너는 죽는 날까지 이 말씀을 기록하고, 보관하고, 전달하는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라고 하셨고, 최종적으로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마지막 임무를 주셨습니다.

    이 임무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신 임무입니다. 이 임무를 죽도록 충성하며 끝까지 완수한다면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날에는 네 몫을 누릴 것임이라”는 약속의 말씀이 반드시 역사하게 될 것입니다.

    “다니엘아, 네가 마지막을 기다리는 동안 너는 평안히 쉬게 될거야, 환난을 끝까지 이기고 기다리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네 몫(영생 복랑을 누리는 생명의 면류관과 해 같이 빛나는 상급)을 누리게 될 거야” 라는 이 마지막 말씀으로 다니엘은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자처럼 큰 기쁨가운데 하나님께 영광돌려 찬송을 했을 겁니다.

    너무나 아름답고 감격적인 결말입니다. 나도 제발 직접 말씀으로 듣고 싶고, 얻고 싶은 부러운 결말입니다. 다니엘에게 말씀 하신 마지막 12절은 온 인류에게 주시는 기다림의 소망을 주시는 강력한 은혜의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한 달 동안 이 말씀을 암송하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한 마디 한 마디가 우리 몸 안의 세포에 녹아 내리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이 아무리 고단하다고 힘들 지라도, 단 하루도 견디기 힘든 고통을 무려 1290일 씩이나 받고 견뎌야 하는 대 환난이 온다고 할 지라도, 추가로 45일이 더해져 충격적인 고통이 추가 된다고 할 지라도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는 명령에 순종하는 것을 결코 잊지 않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다리라 그리하면 네가 너를 평안으로 쉬게하고 네 몫을 누리게 할 것임이라”는 이 절대적인 약속의 말씀이 나에게 주신 일평생 소망의 말씀으로 역사하여 내가 있는 자리에서, 내가 믿는 믿음으로, 내게 주신 사명 감당하며, 비가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파도가 치나, 한결 같은 마음으로 마지막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전진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고, 축복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저희들의 연약한 마음 속에, 기다리라, 평안으로 쉬게 하리라, 네 몫을 누리리라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희들의 인생의 시간을 붙들어 주셔서, 오직 약속의 말씀과 믿음을 앞세워 기다림을 온전히 이루어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마지막을 기다리라

    다니엘 12장
    (1) 마지막 때에 있을 여러 현상들을 묘사하는 전반부(1-4절), 
    (2) 마지막 날에 있을 현상들의 구체적인 시기에 대한 물음과 답변을 소개하고 있는 중반부(5-7절), 
    (3) 다니엘의 재차 이어지는 질문과 답변을 묘사하고 있는 후반부(8-13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통하여 12장은 하나님께서 종말에 사탄의 세력을 완전히 파괴시키고, 세상과 사탄을 넘볼 수 없는 완전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신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한편 12장은 종말론적인 분위기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10장부터 전개되는 싸움의 흐름이 종교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11:8, 36), 전쟁에 대한 묘사 자체가 구체적이기보다는 암시적이며 예언적이라는 점 등을 통해서 이미 알려졌습니다. 더구나 12장에서 묘사되는 일련의 사건들은 신약에서 제시하는 마지막 때의 모습과 매우 유사합니다(12:1-3, 막 13:19, 20). 그러므로 11장부터 전개되는 전쟁과 그 결과는 종말론적인 사건에 대한 예표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올리브(감람)산 강화에서 이 사건을 인용하신 것(마 24:21)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현 교회 시대를 마감하도록 결정지을 마지막 때의 대환난과 관련하여 12장의 예언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12장은 인간의 참된 소망은 오직 하나님 나라에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1. 마지막 날에 있을 일들(12:1-4)
    전 단락(11:20-45)에서 언급되었던 마지막 때의 일들은 주로 전쟁의 비참한 상황에 관한 환상이었습니다. 그러나 12장에서 나타나는 마지막 때의 상황은 이전의 모습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내용입니다. 즉 전 단락의 내용이 마지막 때에 일어날 부정적인 양상을 묘사하고 있다면, 본 단락은 종국에 있을 긍정적인 양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니엘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종결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계시의 방법과 구원 역사의 방식을 보여줍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을 중개로 하여 자신의 뜻을 온 세상에 전하는 방법을 주로 사용하시며,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소유한 자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본서는 다니엘의 신앙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자신에게 닥친 여러 가지 어려운 역사적 형편과 개인적으로 견디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본연의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였습니다. 이는 다니엘이 오늘을 사는 성도들에게도 귀한 신앙적 모범이 되는 인물인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마지막 이 계시의 말씀을 다니엘에게 위임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4절). 이처럼 종말론적 분위기를 강하게 풍기고 있는 본 단락은 ① 마지막 날에 있을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을 묘사하는 전반부(1-3절), ② 다니엘에게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맡기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후반부(4절)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편, 본 단락의 내용 가운데서 나타나는 두드러진 신학적인 특징은 '부활 사상'(2절)입니다. 이러한 구약의 부활 사상에 대해 자유주의 학자들은 부정적인 견해를 취하여 왔는데, 주로 고대 이방 종교나 문화에서 비롯된 신화적인 이야기라고 격하합니다. 그러나 구약의 부활 사상은 본 단락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다른 시대적 배경을 갖고 있는 성경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을 더욱더 분명히 하기 위해 아래의 구절들을 비교해 봅시다.

    단 12:2 –종말론적 상황, 장차 있을 하나 종말론적인 축,
    사 26:19 –종말론적 상황, 성령[성신]님의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복을 보여줌.
    왕하 13:21 –역사적인 사건,  새로운 소망을 계시함.
    겔 37:9-10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예언, 영생 증거함.

    이러한 여러

    성경적인 근거와 사례들을 보았을 때 구약에서 부활 사상이 나타납니다. 특히 구약의 부활 사상은 예수님 스스로 부활하심으로써 온전히 성취됩니다(막 8: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이제 본 단락의 내용을 몇 단계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미가엘의 등장(1a절) : 마지막 때에 있을 대대적인 전쟁이 거의 끝나갈 무렵 미가엘이 나타납니다. 미가엘의 등장은 환난을 당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함입니다. 결국 이는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원 운동의 전조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② 하나님 백성들의 구원(1b절) : 미가엘 천사의 개입과 함께 환난이 오고, 하나님의 구원이 뒤이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에게만 이루어진다(출 32:33, 계 20:12). 이러한 사실은 인간의 역사를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심을 보여주는 동시에 인간의 구원이 인간의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있음을 강하게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③ 영생과 영벌(2절) : 마지막 날에 있을 하나님의 역사는 두 가지 극단적인 양상이 일어나게 되는데, 영생과 영벌로 나타납니다. 이 두 가지 대조적인 양상이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의 본성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공의는 심판의 양상으로, 하나님의 긍휼은 구원의 양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롬 9:19-23).

    ④ 참 성도들에 대한 보상(3절) : 이 부분에서는 하나님이 진실된 백성들에게 있을 보상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지혜 있는 자 be wise'와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 they that turn many to righteousness'는 동일한 사람의 두 가지 다른 표현입니다(동의어 반복법). 즉 지혜 있는 자가 많은 사람을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보상을 받는 자는 단지 자신만의 성결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웃에게 영향을 끼쳤던 자들입니다.


    2. 다니엘과 환상 속의 두 사람(12:5-13)
    사실 본장의 결론은 이미 전 단락(1-4절)에서 끝났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최종적인 계시도 밝혀졌고 다니엘에 대한 마지막 부탁도 언급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뒤이어서 내용이 전개되는 이유는 10장부터 전개되었던 일련의 환상들을 최종적으로 정리하기 위한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전 단락에서 밝혔던 마지막 날에 있을 여러 사건들의 시점을 밝히려는 의도도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다니엘은 종말론적인 시점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했던 것입니다. 즉 단락이 마지막 날에 있을 사건들에 관심하고 있다면, 본 단락에서는 마지막 날이 과연 언제인가라는 역사적 시점에 대해 집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본 단락은 ① 환상 중에 두 사람의 대화를 묘사하고 있는 전반부(5-7절), ② 다니엘의 반복적 질문과 구체적인 답변을 묘사하는 후반부(8-13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편, 본 단락은 종말론적인 기간에 대하여 집중하고 있는데, 그 기간이 '한 때 두 때 반 때'가 지나야 한다고 밝힙니다(7절). 사실 이 표현은 이전에도 언급되었던 표현이기도 합니다(7:25). 이러한 동일한 표현이 있게 된 배경을 비교하여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7:25 - 벨사살 원년, 다니엘 자신의 환상, 종말론적 시기(한 때 두 때 반 때)
    12:5 - 페르샤왕 고레스 삼 년(10:1), 환상 속의 두 사람간의 대화, 종말론적 시기(한 때 두 때 반 때)

    또한 본 단락에서 언급되고 있는 '일천 이백 구십 일'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즉 ① 문자적인 1290일, 43개월로 보아 다니엘의 70 이레의 후반기로 보는 견해, ② 예루살렘이 함락되어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한 로마인이 등장한 때까지의 기간으로 보는 견해, ③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통치 기간으로 보는 견해, ④ 일천 이백 구십 일을 상징적인 날짜, 즉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최종적인 상황이 도래하여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와 그가 예표하는 적그리스도의 활동 기간으로 보는 종말론적인 견해 등입니다. 이 중에서도 환상 속에 나타난 내용이 상징적인 묘사라는 점을 감안할 때, 마지막 ④에 해당하는 종말론적인 기간으로 보는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날'에 대한 언급 자체가 종말론적인 일들과 관련되어 있으며 환상의 내용이 상징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데 유독 이 부분에서만 문자적인 해석을 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본 단락의 주도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환상 속에 나타난 두 초자연적인 인물들간의 대화(5-7절) : 이 둘의 대화의 중심은 마지막 시기에 관한 문제입니다(행 1:6). 한 사람의 이 질문에 대하여 처음 계시를 받을 때 있었던 세마포 입은 한 사람(10:5)은 '한 때 두 때 반 때'라고 대답합니다(7:25). 이 한 때 두 때 반 때가 구체적으로 어떤 날인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해석의 단서를 제공해 주는 언급이 나타나는데, 바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지기까지'(7b절)라는 구절입니다. 즉 이 세상에서 성도의 힘이 소멸되는 그날에 세상의 종말이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기간은 예수님의 초림으로부터 시작해서 재림으로 끝나는 전(全)종말론적인 시기입니다.

    ② 다니엘의 반복적인 질문과 대답(8-13절) : 다니엘의 질문은 두 가지 의문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구체적인 시기에 관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마지막 날의 최종적 상황을 묻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마포 입은 사람이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밝히고 있습니다. 우선 두 가지 극단적인 양상이 이 세상 속에서 극명하게 부각된다고 말합니다(10절). 즉 의인은 시험을 받을 때 회개함으로 스스로를 정결케 하는 반면, 악인은 자신의 악한 행동이 악인지조차 깨닫지 못하고 더욱 비뚤어진 길로 나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단을 위한 시험은 의인에게는 장차 누릴 승리와 영광의 증거가 되지만, 악인에게는 멸망과 심판의 증거가 됩니다. 

    또한 시기에 관한 언급을 이전보다 더욱 구체적으로 언급하는데, '일천 이백 구십 일'이고 밝히고 있습니다(11절). 이 기간이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그 시점이 '멸망케 할 미운 물건을 세울 때부터'(11절)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올리브산에서 가르치시기를 당신의 종말론적 상황들에 대한 밝히는 가운데 이 표현을 인용하고 있습니다(마 24:15). 결국 때와 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마 24:36) 주님이 오실 때 세상이 종말이 이루어짐은 확실합니다.

    이상과 같은 12장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성도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며 인내해야 합니다. 물론 세상의 불합리한 사건들과 모순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면서 산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지만, 기도하며 승리해야 하는 것입니다(합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성도는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롬 14:7-8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님을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해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이로다”). 자기의 욕심과 자아를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쯧대로 살아갈 때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3. 종말의 때 The Time of the End (단 12:1-4)
    (1) 그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 (2)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4)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북방왕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의 악의적인 행적(11장)에 이어지는 12장은 이미 그를 통해 상징된 바 있는 종말 때의 적그리스도의 출현과 그로 인한 대환난의 정황,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성취될 궁극적인 승리의 예언 기사가 역사적 성취의 실례를 통해 나타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12장은 본서에서 언급된 예언적 환상을 총괄하는 부분으로 다른 환상에 비해 종말에 일어날 일에 대한 확실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1절. “그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 ‘그때에 בָעֵת הַהִיא at that time’ 는 11:40의 '마지막 때'와 동일한 말로 11장과 연관해서 이를 역사적 측면에서 해석할 경우, 이는 유대 민족에 대해 잔혹한 박해를 행했던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의 최후의 시기를 말합니다. 그러나 상징적으로는 다니엘의 70이레 예언 중 마지막 대환난 때인 7년 대환난의 후반 3년 반의 기간, 곧 적그리스도의 출현으로 성도들에게 극단적인 박해가 가해질 무서운 환난의 때를 말합니다(9:26-27 참조, 렘 30:5-7, 계 13장 이하). ‘네 민족을 호위하는 군주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이는 순차적으로 대환난의 시기('환난이...것이며') 뒤에 언급될 문장으로 곧 적그리스도가 어두운 활동이 최고에 달했을 때 하나님께서 천사 미가엘(מִיכָאֵל)을 보내셔서, 그 택한 백성을 보호하고 위로하며 성도들에 대한 최후의 구원을 준비하시리라는 의미입니다(10:13 참조)

     “그런데 페르샤 왕국의 군주가 이십일 일동안 나를 막았으므로 내가 거기 페르샤 왕국의 왕들과 함께 머물러 있더니 가장 높은 군주 중 하나인 미가엘이 와서 나를 도와주므로”). ‘환난이 있으리니...환난일 것이며’ 일차적으로는 이미 11장에서 언급된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의 가공할 이스라엘 핍박을 지시하는 것이나 상징적으로는 종말에 있을 7년 대환난에 성도들이 적그리스도에게 당할 엄청난 박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올리브(감람)산에서 종말 교훈을 통해 종말에 있을 대환난의 정황을 바로 본 구절 1절에서 인용하신 사실로도 입증됩니다(마 24:21, 22). 한편 본 구절의 '개국이래'란 말은 일차적으로는 신정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의 태동 이후라는 의미와 함께 이차적으로 종말론적 관점에서 세상 역사의 전영역을 포괄하는 말입니다. 

    ‘네 백성 중...구원을 받을 것이라’ 앞서 언급된 미가엘의 도움에 직접 연결되는 기사로 역사적으로는 11:35[또 그들 중 지혜로운 자 몇 사람이 몰락하여 무리 중에서 연단을 받아 정결하게 되며 희게 되어 마지막 때까지 이르게 하리니 이는 아직 정한 기한이 남았음이라]의 성취를 가리키나, 궁극적으로는 천사의 군주 미가엘의 보호를 통해 보존된 신실한 성도('책에 기록된 모든 자')들이 메시야의 도래로 영원한 구원을 획득하게 되라란 사실을 말합니다. 한편 '책에 기록된 모든 자'에서 '책'(סֵּפֶר, 세페르)은 하나님의 세세한 섭리의 기록인 10;21의 '진리의 글'과는 달리 신앙적 고난을 이겨내고 끝까지 여호와 신앙을 수호한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된 '생명록'을 말합니다(시 69:28;말 3:16;빌 4:3;계 13:8).

    2절.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땅의 티끌 가운데서...있을 것이며 And many of them that sleep in the dust of the earth shall awake’ 성경의 용례상 '잠'이 '죽음'의 상징으로 자주 나타난다는 점(욥 3:13, 시 13:3, 고전 15:6)과 '티끌'(-עָפָר, 아파르)이 인간의 육체가 다시 귀속되는 '무덤'의 의미로 쓰여졌다는 점(창 3:19, 욥 7:21, 시 22:30, 30:10)에서 본 구절은 성도들의 무궁한 구원이 성취되는 그때에 이미 죽은 자들 가운데서도 많은 자들(일부 학자들은 '모든 자'로 해석한다)이 영혼뿐 아니라 육체적('땅의 티끙에서')으로도 부활하게 될 것임을 말합니다. 한편 이렇게 부활한 자들은 백보좌 심판(계 20:11-15) 앞에서 이전의 신앙적 삶과 불신앙적 삶의 여부에 따라 영생[무궁]의 구원을 얻기도 하며('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영원한 형벌을 받기도 합니다(계 21:8 둘째 사망). 곧 본절은 구약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의인과 악인이 함께 부활한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언급된 곳입니다.

    3절.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And they that be wise shall shine as the brightness of the firmament; and they that turn many to righteousness as the stars for ever and ever.” 기독교의 부활의 교리를 확증해주는 2절에 이어 3절은 의인에 대한 보상으로서의 영생의 교리를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지혜 있는 자'는 단 11:33, 35에 언급된 바 있는 신실하고 경건한 삶을 산 신앙의 사람들을 말합니다. 또한 '많은 사람을...돌아오게 한 자'는 곧 '지혜로운 자'와 동일한 말로, 그의 삶의 열매는 바로 그들을 통해 구원을 받게 된 새로운 신앙인들입니다('옳은 데로 돌아 온 많은 사람'). 따라서 본 구절은 일차적으로는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여호와 신앙을 수호한 유대인들(하시딤 חסידים)이 누리게 될 참된 승리와 영광을 예언하는 것(11: 35 비교)인 한편, 상징적으로 종말에 있는 대환난때에 끝까지 그들의 신앙을 수호한 성도들이 최후 심판 때 상급으로 받을 영원한 생명과 영광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곧 이 경건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상징인 빛('궁창의 빛과 별')과 함께 영원한 천국의 삶을 보장받게 됩니다(출 24:10, 마 13:43, 계 2:28).

    4절.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But thou, O Daniel, shut up the words, and seal the book, even to the time of the end: many shall run to and fro, and knowledge shall be increased.”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간수하고 shut up'는 8:26[너는 그 환상을 간직하라.]을 에도 나옵니다. 한편 '간수하라'는 말에 덧붙여 '봉함하라'(חֲתֹם, 하톰 seal)란 말이 사용된 것은 고대 근동에 있어서 이러한 '봉인'은 비밀의 유지라는 뜻보다는 그 내용이 공식적으로 인정되고 결코 바뀔 수 없다는 사실을 부각합니다. 

    본서에 나타난 이러한 예언들이 일점 일획도 변경되지 않고 그 필연적인 성취를 이루게 되리란 뜻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더하리라’ 여기서 '빨리 왕래하고'(שֹׁטְטוּ, 슈트 run fo and fro)는 원어상 '여행하다', '이리저리 뛰다', '열렬하다'(암 8:12), '주시하다'(대하 16:9, 슥 4:10)란 뜻을 함축하고 있는데, 현대 교통수단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한다'는 것은 곧 종말에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예언의 성취를 주시하며 그 예언의 참된 의미를 깨닫기 위해 열렬하게 노력할 것임을 말합니다. 또한 '지식이 더하리라'는 말은 그 노력의 대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예언의 진실을 깨닫게 되리란 의미입니다(Expositors Commentary). 한편 본절을 끝으로 10장 이하에서 계속 전개된 하나님의 계시가 종결됩니다.


    4. 이 모든 일의 결국은 어떠하겠나이까? What Shall be the End of These Things?: 종말에 대한 질문과 답변 First Q & A about the End  (12:5-7)
    (5) 나 다니엘이 본즉 다른 두 사람이 있어 하나는 강 이쪽 언덕에 섰고 하나는 강 저쪽 언덕에 섰더니 (6) 그 중에 하나가 세마포 옷을 입은 자 곧 강물 위쪽에 있는 자에게 이르되 ‘이 놀라운 일의 끝이 어느 때까지냐?’ 하더라. (7) 내가 들은즉 그 세마포 옷을 입고 강물 위쪽에 있는 자가 자기의 좌우 손을 들어 하늘을 향하여 영원히 살아 계시는 분을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되 ‘반드시  한 때 두 때 반 때를 지나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지기까지이니 그렇게 되면 이 모든 일이 다 끝나리라’ 하더라. 

    5절. “나 다니엘이 본즉 다른 두 사람이 있어 하나는 강 이쪽 언덕에 섰고 하나는 강 저쪽 언덕에 섰더니” 10장부터 12장 4절까지 이어진 계시의 종결에 이어 예언 성취의 시기(5-9절)가 천사들의 대화 속에서 재확인되고 있습니다(7:25). 곧 다니엘은 티그리스[힛데겔] 강가(10:4)에서 10:11 이후로 자신에게 계시를 말해주었던 '세마포 입은 자'(6절) 외에 다른 두 천사(5절)를 보게 됩니다.

    6절. “그 중에 하나가 세마포 옷을 입은 자 곧 강물 위쪽에 있는 자에게 이르되 ‘이 놀라운 일의 끝이 어느 때까지냐?’ 하더라.” 세마포 옷을 입은 자에 대해서는 10:5-6[그 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한 사람이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순금 띠를 띠었더라. 또 그의 몸은 황옥 같고 그의 얼굴은 번개빛 같고, 그의 눈은 횃불 같고, 그의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의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을 참조하면 됩니다. ‘놀라운 일의 끝the end of these wonders?’이란 일차적으로는 안티오쿠스4세 에피파네스의 박해(BC 171-164)가 끝나는 때를 가리키나 상징적으로는 종말에 있을 7년 대환난의 후 3년 반('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이 지나고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질 때를 말합니다.

    7절. “내가 들은즉 그 세마포 옷을 입고 강물 위쪽에 있는 자가 자기의 좌우 손을 들어 하늘을 향하여 영원히 살아 계시는 분을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되 ‘반드시  한 때 두 때 반 때를 지나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지기까지이니 그렇게 되면 이 모든 일이 다 끝나리라’ 하더라.” 세마포 입은 자의 대답은 7년 대환난의 후반 3년 반이 지난 후에 그 예언이 성취될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세상 종말의 정확한 때는 천사도 모르고 오직 성부 하나님께서만 아신다는 사실을 암시해줍니다(마 24:36 But of that day and hour knoweth no man, no, not the angels of heaven, but my Father only.개역이나 현대판 번역에는 ‘아들도 모르고’를 삽입하고 있으나 개혁자들의 성경에는 아들이 없음).

    ‘좌우 손을 들어 하늘을 향하여’ 히브리 개념상 극히 엄숙한 맹세의 외적 표현으로 이는 성경에서 '하나님'(신 32:40), '아브라함'(창 14:22). '천사'(계 10:5) 등이 행한 맹세시 하는 제스처입니다. ‘성도의 권세가 다 깨어지기까지니’ 일차적으로는 안티오쿠스4세의 박해로 수많은 변절자와 순교자가 나오게 됨으로써 외형상 언약 백성들이 완전히 패배한 것처럼 보일 때까지란 의미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수많은 성도들이 적그리스도의 가공할 핍박 앞에서 마치 패배하고 소멸되어가는 듯이 보일 때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절망적인 상황에서 극적으로 개입하셔서 적그리스도를 심판하시고 성도를 구원하십니다. 한 때 두 때 반 때는 1+2+0.5=3.5를 말하는데 7년의 절반이며, 42달이고, 1260일입니다.


    5. 다니엘의 재차 이어지는 질문과 답변 Second Q & A of Daniel(12:8-13절) 
    (8) 내가 듣고도 깨닫지 못한지라. 내가 이르되 ‘내 주님, 이 모든 일의 결국이 어떠하겠나이까?’ 하니 (9) 그가 이르되 ‘다니엘아 갈지어다.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 (10)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하게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 (11) 매일 드리는 제사(the daily sacrifice)를 폐하며 멸망하게 할 가증한 것을 세울 때부터 천이백구십(1290) 일을 지낼 것이요 (12) 기다려서 천삼백삼십오(1335) 일까지 이르는 그 사람은 복이 있으리라. (13)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날에는 네 몫을 누릴 것임이라.

    8절. “내가 듣고도 깨닫지 못한지라. 내가 이르되 ‘내 주님, 이 모든 일의 결국이 어떠하겠나이까?’ 하니” 8~13절까지는 이 모든 예언의 성취 때에 있을 궁극적인 승리를 위한 신앙적 인내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이 모든 일의...어떠하겠나이까?’ 다니엘이 계시의 최종적인 성취 곧 택한 백성의 영생[무궁한 생명]의 구원과 적그리스도의 패배와 영원한 멸망을 깨닫지 못한 까닭에 던진 질문으로 그의 궁극적인 관심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최종적인 운명입니다.

    9절. “그가 이르되 ‘다니엘아 갈지어다.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 And he said, Go thy way, Daniel: for the words are closed up and sealed till the time of the end.”‘다니엘아 갈지어다’ 여기서 '갈지어다 לֵךְ'란 말은 곧 다니엘에 대한 모든 계시의 완전한 종결을 의미하는 것으로 한편으로 이는 8절에 언급된 다니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완곡하게 거절하는 의도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 말속에는 10절에서도 보여지듯 그 종말적 정황이 아무나 알 수 있듯이 분명하게 제시되지는 않을 것이란 사실도 암시되어 있습니다.

    10절.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하게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 연단을 받고 정결케 되는 하시딤(경건한 사람들)은 일차적으로는 11:35[또 그들 중 지혜로운 자 몇 사람이 몰락하여 무리 중에서 연단을 받아 정결하게 되며, 희게 되어 마지막 때까지 이르게 하리니 이는 아직 정한 기한이 남았음이라]에서와 같이 신실한 유대인들이 에피파네스4세의 박해와 그로 인한 고난 속에서도 신앙적으로 더욱 정결케 되리란 의미입니다. 상징적으로는 마지막 대환난 때에 참된 신앙인과 거짓 신앙인이 가려지게 되며, 참된 신앙의 사람들은 그러한 적그리스도의 박해 속에서 궁극적인 승리와 구원을 대망하며 더욱더 신앙적으로 정결케 되리란 의미입니다.

    11절. “매일 드리는 제사(the daily sacrifice)를 폐하며 멸망하게 할 가증한 것을 세울 때부터 천이백구십(1290) 일을 지낼 것이요” ‘일천 이백 구십 일’은 7년 대환난의 후반 3년 반과는 30일의 차이를 나타내나, 여기서는 일차적으로 안티오쿠스 4세의 유대 민족 대박해 사건이 시작된 시점부터 그가 마카비 혁명(BC 167-164, 3년 반)으로 쫓겨나고 성전이 다시 정결케 될 때까지의 기간을 가리키는 것이며, 상징적으로는 적그리스도에 의한 7년 대환난에서 큰 박해가 시작된 시점(3년 반)부터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8:14 “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 삼백 주야까지니 그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 한편 이러한 구체적인 일수의 언급은 8:14의 경우에서와 같이 다양한 해석들을 야기시키나 그 근본적인 목적은 고난의 때에 대한 한정된 시한을 구체적으로 계시해줌으로써 대환난의 시기에 성도들에게 큰 소망과 위로를 주기 위함입니다(마 24:22 “그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날들을 감하시리라”).

    12절. “기다려서 천삼백삼십오(1335) 일까지 이르는 그 사람은 복이 있으리라.” 1335일에 대하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상당한 의문점을 지니는 난제에 속하는 일수로 이는 위에 언급된 1290일과 45일간의 차이를 가진다는 점에서 이 45일을 적그리스도에 의한 핍박이 끝나고 하나님의 나라, 곧 새 하늘과 새 땅이 건설되며 하나님의 축복 시대가 임하기까지의 짧은 기간으로 추측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그때까지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있다는 예언은 곧 그들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전한 통치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치리를 받는 천국 시민이 된다는 의미입니다(마 24:13;계 21:1).

    13절.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날에는 네 몫을 누릴 것임이라. 
    But go thou thy way till the end be: for thou shalt rest, and stand in thy lot at the end of the days. 

    이 구절은 하나님의 충성된 종이었던 노령의 다니엘에 대한 위로와 축복의 말씀입니다.

    '평안히 쉬다가'(נוּחַ, 누아흐 shall rest)는 원어상 '머물러 쉬다', '정착하여 쉬다'란 뜻으로 ‘노아 Noah’의 뜻과 같습니다. 
    여기서는 일상적인 휴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육신이 다시 부활하기까지 무덤 속에서 평안히 쉬게 될 것임을 의미합니다. 
    또한 '몫'(גֹרָלְ, 고랄)은 원어상 '분깃', '업'(시 16:5)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다니엘이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있을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그에게 영생[무궁한 생명]의 구원과 함께 큰 하나님의 상급이 주어지게 된다는 점을 시사해줍니다(계 22:12).

    전장(11장)에서 기술된 남방 왕 간의 갈등은 단순한 국지전이 아니라, 세상의 역사가 어떠한 흐름을 갖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점을 강조하기 위해 왕의 구체적인 이름이나 역사적 사실들을 밝히기보다 암시적인 표현을 사용한 바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의 전쟁 이면에 있는 영적인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는 전장(11장)에 이어서 12장은 전쟁의 결국에 대하여 묘사합니다. 
    이제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묘사하고 있는 이전의 장들(1-11장)에 대한 결론으로서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 역사를 집중적으로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은 본서 전체의 주체이신 하나님의 주권을 잘 나타내줍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상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해 가장 심각한 회의를 불러일으켰던 어두운 시대적 상황 속에서 본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선명하게 부각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적그리스도에 의하여 환난과 핍박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시련을 이기고 승리하는 자에게는 영생[무궁한 생명]과 축복이 허락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의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하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특별히 인간의 연약함과 부패함을 헤아리시고 미가엘을 통하여 보호해 주십니다(유 1:9 ; 계 12:7). 
    그러므로 우리는 썩어질 이 세상에 미련을 갖지 말고 영광스러운 미래를 바라보며 믿음으로 살아나가야 합나다. 
    그리스도와 함께 종말 전쟁에 참여하면 반드시 진정한 승리가 보장될 것이며 최후의 승자가 될 줄 확신합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하나님 아버지, 가정을 창조해 주시고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형제, 자매, 손자, 손녀들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말씀의 전수가 잘 이뤄지도록 우리 가정을 말씀과 기도와 찬양의 도구로 삼아주시고 사철에 봄바람이 부는 가정이 되게 하옵소서. 
    다니엘서 마지막 장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인간이 다스리며 운영하는 세계는 마침내 망하고 하나님 나라가 임하실 것을 예언하신 말씀을 깊이 명심하여 “오 주님, 다스려 주옵소서” 천년왕국, 새하늘 새땅, 새예루살렘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마지막까지 반드시 기다리게 하옵소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성경공부를 위한 질문들

    1. 종말에 이뤄지는 영적 전쟁에 누가 마지막으로 개입하는가? (12:1)
    2. 누가 최종 구원을 받는가? (12:1)
    3. 종말에 모든 사람들이 부활되어 심판대에 설 때 두 가지 부류로 나눠지는 것을 간단히 설명해 보자(12:2)
    4. 천국에서 전도 상을 받는 사람의 상급은? (12:4)
    5. 강물위에 세마포 옷을 입은 분께서 종말에 대해 하신 말씀은? (12:7)
    6. 모든 일의 결과를 설명한 내용을 요약해 보자(12:9-11)
    7. 다니엘에게 주신 마지막 종말 메시지는? (12:13)

    금주기도제목: ​
    1.예배를 회복하여 가정과 나라와 교회를 살게 하소서!
    2. 주님처럼 가르치며, 복음을 전파하며, 환우들을 치유하게 하소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5절, 주석과 해설

    다른 두 사람

    다른 두 사람이란 지금까지 계시를 말해 준 가브리엘 외의 두 존재를 뜻한다. 이 두 사람이 어떤 존재들인지 분명하게 알 수 없지만 다니엘에게 계시를 이해하도록 도와줄 천사들일 가능성이 많다.

    그 두 사람의 하나는 강 이쪽 언덕에, 다른 하나는 강 저쪽 언덕에 서있는 것을 다니엘은 보았다. 이 강은 힛데겔 강(티그리스, 단 10:4 참고)이다.

    6절, 주석과 해설

    세마포 옷을 입은 자

    여기의 세마포 옷을 입은 자는 10:4-6에 나오는 존재이다. 그분은 그리스도이셨다. 그리스도가 강물 위쪽에 있는 자로 묘사되었는데, “강물 위쪽에 있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강물 위에 있다”는 뜻이다.

    강 양쪽 가에 서 있던 사람 중의 하나가 세마포 옷을 입은 자 즉 그리스도께 이 일이 어느 때까지 있을 것인지 물어본다. 이 질문은 단 8:13의 질문과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다(단 8:13).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7절에서 듣게 된다.

    7절, 주석과 해설

    영원히 살아 계시는 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의미한다(단 6:26, 7:9).

    한 때와 두 때 반 때

    이 기간은 1260년의 기간으로써 538부터 1798년까지의 기간인 것은 이미 확인하였다(7:25 주석 참고). 그러므로 1798년은 마지막 때의 시작이 된다.

    8절, 주석과 해설

    내가 듣고도 깨닫지 못한지라

    다니엘은 10:1에서 그 환상을 깨달았다고 하였고, 10:14에서는 가브리엘이 온 것은 다니엘이 깨달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다니엘은 10장과 11장의 예언적 사건들에 대해서는 거의 깨달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12장에 나오는 마지막 때의 계시에 대하여 충분히 깨닫지 못하였던 같다. 그는 8장의 계시에서도 깨닫지 못하였다(단 8:27). 사람은 하나님께서 공개해 주신 것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신 29:29).

    9절, 주석과 해설

    갈지어다

    이 말은 “걱정하지 말라” 또는 “계속 하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

    다니엘서의 마지막 때에 관한 예언은 마지막 때에 가서야 열릴 것이라는 말이다. 실제로 마지막 때가 되어서 다니엘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0절, 주석과 해설

    연단을 받아

    시험과 고난은 사람을 정결하게 하는 도구이다(욥 23:10, 벧전 1:7, 계 7:13-14).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여기에서 “악한 사람”은 도덕적인 악한 사람도 포함되겠지만, 보다 근원적인 것은 종교적으로 악한 사람 즉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도덕적으로 악한 사람보다 종교적으로 잘못된 확신 속에 사는 사람들이 구원 받기가 더 어렵다. 그들은 잘못된 확신 속에서 자만하기 때문이다(마 21:31-32).

    악한 사람은 한 순간에 악한 사람으로 고착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삶의 여정을 통하여 서서히 형성되었기 때문에 역시 어느 날 갑자기 고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

    12:3의 지혜 있는 자와 같은 말이다. 즉 “신중한 자들”, “분별력 있는 자들”, “통찰력 있는 자들”로 번역할 수 있다. 옳게 분별하는 일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필수적으로 소유해야 할 특성이다. 왜냐하면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골 2:3, 딤후 2:15, 벧전 5:8).

    11절-12절, 주석과 해설

    1290일과 1335일

    • 11절과 12절에 나오는 1290 일과 1335 일에 대한 해석은 다음과 같은 견해로 나눌 수 있다.
    • 이 예언적인 기간에 대하여 해석할 수 있는 분명한 지침이 없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견해이다.
    • 이 예언적 기간은 미국에서 일요일 휴업령을 내리는 기간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들은 여러 차례 일요일 휴업령이 내릴 날짜를 정했지만 모두 아무 일 없이 지나갔고, 현재도 일요일 휴업령이 내릴 날짜를 정하고, 예수님 재림 날짜도 정하는 사람들이 있다(신 18:22).
    • 1290 일과 1335 일은 모두 1290 년과 1335 년을 뜻하며, 이 두 기간의 기산점은 서기 508년이라는 견해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1290 년의 끝은 1798년이며, 1335 년의 끝은 1843년이다. 

    13절, 주석과 해설

    마지막을 기다리라

    다니엘은 이제 마지막 때를 기다리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러나 다니엘이 죽을 때까지 세상의 마지막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평안히 쉬게 될 것이다. 
    마지막이 나의 시대에 오지 않을지라도 마지막을 기다리며,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특권이자 의무이다.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날에는 네 몫을 누릴 것임이라

    다니엘은 무덤에서 평안히 쉬다가 끝날 즉 예수님께서 오실 때에 부활하여 하나님께서 그를 위하여 준비하신 그의 몫을 누리게 될 것이다. 
    ‘몫’은 히브리어로 ‘고랄’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된 땅을 나눌 때에 배당한 소유와 상속 재산 등으로부터 유래되었다. 
    즉 분배 받은 토지와 재산과 사업 등을 가리킨다. 
    구원 받은 무리들은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몫을 받고 영원히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먼저 이 땅에서 그들에게 맡겨진 일(몫)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다니엘은 그에게 맡겨진 몫을 충성스럽게 감당하였기에 그에 합당한 상급(賞給)을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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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생의 물(요한복음 4:3~14)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일이 있습니다. 
    하나는 살리는 일이고, 또 하나는 죽이는 일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 있는가 하면, 사람을 죽이는 일도 있습니다.

    1. 사람을 살리는 일

    안델센의 동화 가운데 ‘성냥팔이 소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동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신 한 가난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 소녀는 하루하루 성냥을 팔아 살아가고 있었는데 여기저기로 성냥을 팔러 다니다보니 너무 추워 손발이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추위를 견디지 못한 소녀는 팔던 성냥을 그어 불을 붙이고 바람에 불이 꺼질까봐 두 손으로 모읍니다. 불꽃 속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내 성냥불은 꺼지고 맙니다. 소녀는 다시 성냥불을 켭니다. 그렇게 소녀는 부잣집 담에 기대어 밤새도록 반복하다가 그만 얼어 죽고 맙니다. 이 이야기를 읽고 기상학자는 때가 겨울이기 때문에 얼어 죽었지, 만일 여름이었다면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지리학자는 그곳이 유럽의 추운 곳이기에 얼어 죽었지 만일 아프리카나, 하와이 같은 지역이었다면 얼어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경제학자는 부의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부가 골고루 분배되었다면 가난한 자들도 함께 따뜻한 겨울을 지냈을 것이고 소녀는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교육학자는 지나가던 어른이 이 소녀를 만났을 때 추운 날씨에 잠은 집에서 자야한다고 가르쳤더라면 아이는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모두 틀린 해석은 아닙니다. 문제는 어느 누구도 이 소녀를 살리지 못했으므로 소녀가 죽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낚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낚시는 살아있는 고기를 낚아서 죽이기 때문에 좋지 않은 취미라고 생각합니다. 또 ‘마누라 죽이기’라는 영화가 있는데 저는 제목만 듣고 영화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내용은 잘 모르지만 마누라를 살려 두어야 양복도 다려주고, 와이셔츠도 빨아주고, 반찬도 만들어 주고, 살림도 해 주는데 왜 죽입니까? 근처의 식당에서 식사하다보면 주인이 저에게 “요즘 재미있습니까?”하고 물어봅니다. 저는 “예! 재미있습니다.”하고 대답합니다. 무엇을 하시는 분인데 사는 것이 재미있냐고 물으면 “저는 교회의 목사인데 사람을 살리는 일이 너무너무 재미있습니다”하고 대답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 얼마나 재미있고, 신바람 나는 일입니까? 성경에서 사람 살리는 재미로 살아가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일평생을 사람을 살리다가 가신 분입니다. 성령도 마찬가지로 사람을 살리는 영이십니다.

    2. 사람을 살리려면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지역에 있는 수가성의 우물가를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이 그곳을 찾아가신 이유는 남편 다섯이 있던 한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18절에 “네가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라고 했는데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꾸어 가면서 살았지만 행복하지 못하고 불행했던 한 여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곳을 일부러 찾아가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에는 시간을 내야합니다. 4절에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고 했습니다.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는 길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남쪽에 위치해 있고 갈릴리는 북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나가 지중해 해안을 따라 올라가는 길이 있고,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여리고로 내려가서 다시 북쪽 요단강을 따라 올라가는 길이 있고, 또 한 지름길이 있습니다. 그 길이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지나 갈릴리로 가는 길입니다. 문제는 유대인이 사마리아 사람들과 상종치 않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잠깐 중앙일보 7월 28일자 신문을 보면 19면에「개미도 위험을 알릴 때 소리를 지른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재목이 너무 재미있어서 읽어보니 개미의 허리 부분에 빨래판 같은 줄이 있어서 그 부분을 긁어서 위험을 알린다는 것입니다. 드르륵 소리를 내지만 사람들은 관심을 가지지 않기에 알아듣지 못할 뿐입니다. 자살하는 사람들도 자살하기 전에 누구에겐가 자신의 죽음에 관한 신호를 보낸다고 합니다. 가까운 친구에게나 가족들에게 “나 죽고 싶어”라든가 혹은 “살맛이 안나!”라든가 혹은 “모든 것을 정리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주위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 모를 뿐입니다. 문제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겠기에 그의 죽음을 알지 못하고, 죽고 난 후에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남편이 다섯이 있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관심을 가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가 <비전 +1 전도축제>를 선포하고 영혼 구원하는 일을 힘쓰자고 외쳤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관심을 얼마나 기울이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관심을 가지고 시간을 투자해야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3. 사람을 살리려면 대화가 통해야 합니다

    ① 관심을 가지고 대화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7절에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고 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관심과 대화입니다. 대화가 통해야 사람의 영혼을 구원시킬 수 있습니다. 시간을 내고, 형편과 사정을 알아보고, 이해를 가지고 대화해야 합니다.

    전도하는 일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가 지금 무엇을 하는지, 어떤 고민을 가지고 있는지 관심을 가지고 대화해야 합니다. 우리교회에서는 매주 토요일 ‘사랑의 동산 부부행복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많은 가정들이 대화가 없이 살고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간에 대화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가정의 하루 평균 TV시청시간은 2시간이면서도, 부부의 대화는 42초, 자녀와 대화는 37초밖에 되지 않습니다. 전문가들의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부부들 대화 중에 남편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 56%가 “병신 육갑하고 있네.”이고, 아내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 48%가 “웃기고 있네!”입니다. 행복한 가정은 대화가 있는 가정입니다. 대화는 가정행복의 심장과도 같습니다. 심장이 멎으면 죽습니다. 대화가 끊어지면 그 가정이 위험합니다. 예수님은 물을 달라고 하시면서 이 여인과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한 영혼을 살리는 일은 대화에서부터 시작됩니다.

    ② 긍휼히 여겨야합니다

    예수님이 물을 달라고 했더니 이 여인은 유대인 남자인 당신이 왜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며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인을 불쌍히 여겨 대화를 계속해 나갔습니다. 예수님은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했습니다. 17~18절에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남편을 다섯이나 바꾸어 가면서 사는 행실이 못 된 여자라고 비방하고 욕을 했지만 예수님은 이 여인을 불쌍히 여기며 긍휼히 여겼습니다.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은 영혼을 불쌍히 여겨야 가능합니다. 보통 여인들이 물을 길러가는 시간은 아침 일찍 아니면 저녁 해질 무렵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제6시쯤(6절) 물을 길러왔습니다. 지금의 시간으로 오후3시쯤 되는 한낮의 뜨거운 시간입니다. 이 시간에 물 길러오는 여인은 이무도 없습니다. 우물가는 동네 아낙네들이 모여 물을 길으면서 앞뒷집 이야기를 나누고 동네 모든 소문들이 우물가를 통해 전달이 되는데 사마리아 여인은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듣기 싫어 뜨거운 한낮에 물 길러 온 것입니다. 모두가 비방하는 여인을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며 불쌍히 여겨 구원하기 위해 대화를 하신 것입니다.

    ③ 인내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했더니 여자가 대답하길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9절)”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물 달라는 요구에 여인은 빈정거리면서 퉁명스럽게 거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내심을 가지고 물을 달라고 하셨습니다. 11절에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하고 또 거절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에도 사람들은 온갖 이유를 찾아서 거절합니다. 이때에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 영혼 구원을 위해 최선을 다합시다.


    믿음에 관한 성경 구절 모음

    믿음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 요소입니다. 
    성경에는 믿음에 관한 수많은 구절이 있으며, 이 구절들은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지침이 됩니다. 
    아래 표에는 성경의 주요 믿음 구절들을 정리했습니다.

    성경 구절 내용
    로마서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고린도전서 16:13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에베소서 3: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빌립보서 1: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골로새서 2: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딤후 4: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누가복음 17:19 “그에게 으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권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로마서 1:8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믿음에 관한 이러한 구절들은 신앙인에게 중요한 지침을 제공하며, 삶의 방향을 제시합니다. 특히, 어려운 상황에서 믿음을 굳게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상기시켜줍니다.

    기독교 신앙 예화 이야기

    기독교 신앙 예화는 신앙을 강화하고 믿음을 새롭게 다지게 합니다. 다양한 신앙 예화 중에서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주님을 섬기는 마음

    주님을 섬기는 마음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으면 모든 근심과 걱정이 사라지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많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주 예수의 모습을 바라보며 힘을 얻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일그러진 마음을 돌이킬 수 있습니다.

    기적을 체험한 어머니의 믿음

    어느 성가대원의 어머니는 아이의 맹장염 수술 후 창자에 생긴 혹을 발견했습니다. 의사는 재수술을 제안했지만, 어머니는 예수님께서 그 혹을 떼어주실 것을 믿고 기도했습니다. 설교 후 병자를 위한 기도 시간에 “내일 병원에 가서 수술하려는 사람 중에 뱃속에 혹이 난 사람은 오늘밤에 고침을 받았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어머니는 이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다음 날 병원에서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혹이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체험한 것입니다.

    믿음의 눈

    어느 교회 건축현장에서 세 벽돌공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한 명은 신실한 크리스천이었고, 기도 후 도시락을 먹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개가 도시락을 훔쳐갔고, 동료들은 그를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웃음소리에 담장이 무너져 동료들이 다치게 되었습니다. 
    노아처럼 끝까지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 필요합니다.

    링컨의 믿음

    아브라함 링컨은 대통령 취임식에서 “우리의 난관을 극복하려면 지혜, 애국심, 기독교 정신이 필요하며,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링컨의 믿음은 오늘날에도 큰 교훈을 줍니다.

    예화 제목 요약
    주님을 섬기는 마음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힘을 얻고 근심을 떨쳐냄.
    기적을 체험한 어머니의 믿음 맹장염 수술 후 기도로 혹이 사라짐.
    믿음의 눈 신실한 크리스천이 동료들의 비웃음에도 끝까지 하나님을 섬김.
    링컨의 믿음 대통령 취임식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중요성 강조.

    이러한 신앙 예화들은 믿음을 새롭게 하고, 신앙 생활에서 힘을 얻을 수 있는 좋은 예시가 됩니다.

    성경 말씀과 함께하는 일상 생활의 적용

    성경 말씀은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큰 지혜와 지침이 됩니다. 믿음에 관한 구절들과 신앙 예화를 통해, 우리는 더욱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번 섹션에서는 성경 말씀을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성경 말씀을 통한 하루의 시작

    하루를 성경 말씀과 함께 시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성경 구절을 읽고 묵상하면 하루를 긍정적으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 10:17을 통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나온다는 것을 상기하며 하루를 시작하면 좋습니다.

    기도와 묵상

    일상 생활에서 기도와 묵상은 신앙을 깊게 하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잠시 시간을 내어 기도하는 습관을 가지면, 마음의 평안을 찾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필립보서 4:6-7 구절을 묵상하며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라”는 말씀을 실천해보세요.

    성경 말씀을 통한 대화

    가족이나 친구들과의 대화에서도 성경 말씀을 나누는 것이 필요합니다. 서로의 신앙을 격려하고 지지하는 것은 신앙 생활에 큰 도움이 됩니다. 에베소서 4:29에 나오는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게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대화를 나누면 좋습니다.

    성경 구절을 삶에 적용하기

    성경 구절을 일상 생활에 직접 적용하는 것은 신앙의 성숙에 큰 도움이 됩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는 구절을 실천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휩쓸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신앙인의 목표입니다.

    일상생활 적용

    하루의 시작
    로마서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Consequently, faith comes from hearing the message, and the message is heard through the word of Christ.

    기도와 묵상
    빌립보서 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Do not be anxious about anything, but in everything, by prayer and petition, with thanksgiving, present your requests to God.
    And the peace of God, which transcends all understanding, will guard your hearts and your minds in Christ Jesus.

    대화
    에베소서 4:29 /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Do not let any unwholesome talk come out of your mouths, but only what is helpful for building others up according to their needs, that it may benefit those who listen

    삶의 적용
    로마서 12:2 /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Do not conform any longer to the pattern of this world, but be transformed by the renewing of your mind. Then you will be able to test and approve what God's will is--his good, pleasing and perfect will.
















    성경 말씀을 일상 생활에 적용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꾸준한 노력과 기도를 통해 가능합니다. 믿음의 구절들과 신앙 예화를 통해 우리는 더욱 깊은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마치며

    기독교 믿음은 성경 말씀과 신앙 예화를 통해 깊어지고 강화됩니다. 우리는 성경 구절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신앙 예화를 통해 그 말씀을 실제 생활에 적용하는 방법을 배웁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나오기 때문에, 성경 말씀을 일상 생활에서 꾸준히 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글에서는 믿음에 관한 성경 구절과 감동적인 신앙 예화를 소개했습니다. 또한, 성경 말씀을 일상 생활에 적용하는 방법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하루를 성경 말씀과 함께 시작하고, 기도와 묵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며, 가족과 친구들과 성경 말씀을 나누는 것이 신앙 생활에 큰 도움이 됩니다. 이러한 실천을 통해 우리는 더욱 깊은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과 신앙 예화는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고, 신앙 생활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일상 생활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여러분도 이 글을 통해 신앙 생활에 새로운 영감을 얻고, 더욱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부부의 믿음

    한 농부가 부인의 동의를 얻어 더 좋은 말과 바꾸려고 키우던 말을 끌고 시장으로 나갔다.
    가는 도중에 살진 암소에게 마음을 빼앗겨 말과 바꾸었다.
    또 길을 가다가 그 암소를 양과 바꾸었고, 조금 더 가다가 양을 거위와 바꾸었으며 또 그 거위를 붉은 벼슬을 가진 수탉과 바꾸었고 마지막으로 수탉을 썩은 사과 한 자루와 바꾸었다. 

    날이 저물어 여관방에서 만난 귀족 두 사람이 농부의 사연을 듣고는 “집에 돌아가면 부인이 화가 나서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농부는 “참 잘했다고 할 것이오”라고 반박했다.
    그러자 귀족은 만약 그렇다면 자기가 가진 금화를 몽땅 주겠다고 했다.
    이튿날 집에서 그간의 사연을 들은 농부의 아내는“그러잖아도 식초를 만들기 위해 썩은 사과가 필요했는데 참 잘되었군요” 라고 말했다.결국 농부는 내기에 이겨 부자가 되었다. 

    부부관계에 있어서 가장 큰 축복은 배우자의 능력보다 하나님께서 주신 배우자를 존중하는 것이다.

    임을 일깨워주는 안데르센
    의 동화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다니엘 3:13-18)

    자신의 생명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귀한 믿음을 가진 다니엘과 세 명의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라는 청년들이 등장합니다. 다니엘과 세 명의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느브갓네살 왕의 사랑을 받고 있었으나, 왕이 만든 금신상 앞에 절하지 않아서 용광로 앞에서 “이제라도 엎드리어 절하면 살려주겠노라”고 타일렀습니다. 그러나 히브리 청년 세 명은 하나님 외에 다를 신에게 절하거나 우상 앞에서 절하는 행위는 그 무엇보다도 무서운 죄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 무불에 던진다 할지라도 하나님께는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는 왕의 신에게 절하지 아니하겠고, 왕이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겠습니다.”(16절)하였습니다.

    다니엘과 그 세 명의 친구는 극렬히 타는 용광로에 버림을 받는다할찌라도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구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또한 그렇게 해 주시지 않더라도 왕이 섬기는 신과 왕이 세운 금신상에 절하지 않겠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고백한 뒷부분의 고백적인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는 왕의 신에게 절하지 아니하겠고, 왕이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겠습니다” 실로 대단한 믿음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가지고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찬미예수(168장)을 같이 부르시겠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입니다.

    1.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해야 합니다.

    믿음 생활하는 우리들에게도 실패와 아픔으로 인해 좌절되는 상황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의 생각대로 되질 않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행복의 문을 통과하고 성장해가는 과정에서 어려움으로 시험의 때가 올 수 있습니다. 시험들 수밖에 없고, 불평할 수밖에 없고, 눈물을 지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의심치 마십시오.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으십시오, 실패와 아픔과 눈물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가 극한 어려움 속에서 성공자가 되었다는 것보다는 어려움 앞에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의심치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낮의 해와 밤의 달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손길 앞에서는 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십니다. 어려움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자비하신 손길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환난을 면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분명히 우리를 지키십니다. 눈을 들어 천지지은신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세요.

    복음성가 찬미예수 90장을 같이 부르시겠습니다.

    2.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확신에 찬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들의 신앙은 확신에 가득 찬 신앙이었습니다. 그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었으며 그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것이라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이 같은 태도는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과 가까이 교통하는 삶을 살았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태도 중 가장 절정의 것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는 표현에서 적나라하게 나타납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 무불에서 건져내시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금신상에 대해 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의심이 아닌 그들의 신앙이 확고함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무엇을 베푸신다거나 그들을 보호하신다는 것에 근거한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모든 섭리에 대한 주권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돌리고 조건 없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신앙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믿어야 합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사도바울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환난과 아픔 속에서도 하나님의 율례를 배웠다고 고백한 다윗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실패와 낙망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보았노라도 고백한 욥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죽음 앞에서도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던 다니엘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세 청년이 왕의 특혜와 사랑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벼슬도 물질도 다 얻을 수 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의 보화나 큰 재물과 명예를 먼저 생각하기 보다는 후대에 상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사실 하나님보다도 먼저 세상의 것(명예, 물질, 유혹, 인기)을 먼저 생각하고 그것들을 사랑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9장29절에 보면 가정의 식구들보다도 먼저 주님의 것을 먼저 생각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영생을 상속하리라”는 말씀에 근거해서 우리들은 먼저 하나님의 것을 먼저 생각하여야 합니다.

    3.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먼저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또한 세상의 사람을 먼저 두려워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먼저 두려워하여야 합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을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젊은이들이 이렇게 당당하게 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로 한 것입니다. 네젊은이들의 우정 속에 나타난 모습 속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기초로 이루어 진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이 모든 삶의 기초가 될 때 행복이 더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 전서 4장 8절에 보면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사랑의 근원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요일4:8,16) 이 사랑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났으며(9-10), 이 사랑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 세 명이 같은 마음으로 죽음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네 명 모두가 믿음의 절개를 지킨 것같이 우리 모든 성도들도 한 사람도 제외 없이 주님오시는 그날까지 낙오되는 자 없이 신앙의 절개를 지킬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우리가 사랑을 할 때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그리 쉽질 않습니다. 이유 없는 죽음 앞에서 아니 억울한 죽음 앞에서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면 여러분들은 어떠한 마음이 들겠습니까? 그러함에도 주님을 사랑하실 수 있으십니까?

    사랑하셔야 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께서 세 번을 물으셨던 것은 아가페적인 조건 없는 사랑을 물으셨던 것입니다. 특별히 아가페적인 주님의 뜨거운 사랑을 가슴속 깊이 새기셔서 이 땅에 살면서 주변에 소외된 사람들을 사랑하셔야 합니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희망과 꿈을 같이 나눈다면 분명히 일어설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딤전6:17-19)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18)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19)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

    (사58:10-11)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동하며 괴로와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여 네 어두움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사랑이 하나님의 가르침 속에서 가장 큰 명령입니다. 어느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나아와 물었습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성경에서 나타난 모든 명령과 주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을 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분명하고 확실하였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사랑하라”(마22:37-39)
    이 예수님의 가장 큰 계명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의 명령을 가리켜서 가장 위대한 주님의 명령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사명은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이지만(마28:19-20) 우리에게 가장 위대한 명령은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입니다.
    사랑하고 살지 못할 때 인생은 존재의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전서 13장에서는 인간이 사랑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는 존재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실로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났으며 사랑이 없이는 실존의 모든 의미와 가치를 상실할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입니다.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불확실한 시대에서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믿음 위에 사랑이라는 탑을 쌓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도 일반적인 믿음이 아니라 구속사적인 믿음을 소유하여서 천국에 대한 확신과 그로 인하여 불확실한 이 시대에서 믿음으로 산다 할찌라고 사랑하지 아니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요”(고전13:2b)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과 같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사랑하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믿음을 갖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할 수 있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고신복 목사)

    오늘 본문에 보면 자신의 생명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귀한 믿음을 가진 다니엘과 세 명의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라는 청년들이 등장합니다. 다니엘과 세 명의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느브갓네살 왕의 사랑을 받고 있었으나, 왕이 만든 금신상 앞에 절하지 않아서 용광로 앞에서 “이제라도 엎드리어 절하면 살려주겠노라”고 타일렀습니다. 그러나 히브리 청년 세 명은 하나님 외에 다를 신에게 절하거나 우상 앞에서 절하는 행위는 그 무엇보다도 무서운 죄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 무불에 던진다 할지라도 하나님께는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는 왕의 신에게 절하지 아니하겠고, 왕이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겠습니다.”(16절)하였습니다.

    다니엘과 그 세 명의 친구는 극렬히 타는 용광로에 버림을 받는다할찌라도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구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또한 그렇게 해 주시지 않더라도 왕이 섬기는 신과 왕이 세운 금신상에 절하지 않겠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고백한 뒷부분의 고백적인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는 왕의 신에게 절하지 아니하겠고, 왕이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겠습니다” 실로 대단한 믿음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가지고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찬미예수(168장)을 같이 부르시겠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입니다.

    1.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해야 합니다.

    믿음 생활하는 우리들에게도 실패와 아픔으로 인해 좌절되는 상황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의 생각대로 되질 않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행복의 문을 통과하고 성장해가는 과정에서 어려움으로 시험의 때가 올 수 있습니다. 시험들 수밖에 없고, 불평할 수밖에 없고, 눈물을 지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의심치 마십시오.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으십시오, 실패와 아픔과 눈물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가 극한 어려움 속에서 성공자가 되었다는 것보다는 어려움 앞에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의심치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낮의 해와 밤의 달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손길 앞에서는 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십니다. 어려움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자비하신 손길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환난을 면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분명히 우리를 지키십니다. 눈을 들어 천지지은신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세요.

    복음성가 찬미예수 90장을 같이 부르시겠습니다.

    2.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확신에 찬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들의 신앙은 확신에 가득 찬 신앙이었습니다. 그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었으며 그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것이라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이 같은 태도는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과 가까이 교통하는 삶을 살았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태도 중 가장 절정의 것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는 표현에서 적나라하게 나타납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 무불에서 건져내시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금신상에 대해 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의심이 아닌 그들의 신앙이 확고함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무엇을 베푸신다거나 그들을 보호하신다는 것에 근거한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모든 섭리에 대한 주권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돌리고 조건 없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신앙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믿어야 합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사도바울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환난과 아픔 속에서도 하나님의 율례를 배웠다고 고백한 다윗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실패와 낙망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보았노라도 고백한 욥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죽음 앞에서도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던 다니엘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세 청년이 왕의 특혜와 사랑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벼슬도 물질도 다 얻을 수 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의 보화나 큰 재물과 명예를 먼저 생각하기 보다는 후대에 상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사실 하나님보다도 먼저 세상의 것(명예, 물질, 유혹, 인기)을 먼저 생각하고 그것들을 사랑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9장29절에 보면 가정의 식구들보다도 먼저 주님의 것을 먼저 생각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영생을 상속하리라”는 말씀에 근거해서 우리들은 먼저 하나님의 것을 먼저 생각하여야 합니다.

    3.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먼저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또한 세상의 사람을 먼저 두려워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먼저 두려워하여야 합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을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젊은이들이 이렇게 당당하게 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로 한 것입니다. 네젊은이들의 우정 속에 나타난 모습 속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기초로 이루어 진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이 모든 삶의 기초가 될 때 행복이 더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 전서 4장 8절에 보면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사랑의 근원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요일4:8,16) 이 사랑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났으며(9-10), 이 사랑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 세 명이 같은 마음으로 죽음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네 명 모두가 믿음의 절개를 지킨 것같이 우리 모든 성도들도 한 사람도 제외 없이 주님오시는 그날까지 낙오되는 자 없이 신앙의 절개를 지킬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우리가 사랑을 할 때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그리 쉽질 않습니다. 이유 없는 죽음 앞에서 아니 억울한 죽음 앞에서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면 여러분들은 어떠한 마음이 들겠습니까? 그러함에도 주님을 사랑하실 수 있으십니까?

    사랑하셔야 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께서 세 번을 물으셨던 것은 아가페적인 조건 없는 사랑을 물으셨던 것입니다. 특별히 아가페적인 주님의 뜨거운 사랑을 가슴속 깊이 새기셔서 이 땅에 살면서 주변에 소외된 사람들을 사랑하셔야 합니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희망과 꿈을 같이 나눈다면 분명히 일어설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딤전6:17-19)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18)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19)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

    (사58:10-11)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동하며 괴로와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여 네 어두움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사랑이 하나님의 가르침 속에서 가장 큰 명령입니다. 어느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나아와 물었습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성경에서 나타난 모든 명령과 주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을 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분명하고 확실하였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사랑하라”(마22:37-39)
    이 예수님의 가장 큰 계명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의 명령을 가리켜서 가장 위대한 주님의 명령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사명은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이지만(마28:19-20) 우리에게 가장 위대한 명령은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입니다.
    사랑하고 살지 못할 때 인생은 존재의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전서 13장에서는 인간이 사랑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는 존재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실로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났으며 사랑이 없이는 실존의 모든 의미와 가치를 상실할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입니다.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불확실한 시대에서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믿음 위에 사랑이라는 탑을 쌓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도 일반적인 믿음이 아니라 구속사적인 믿음을 소유하여서 천국에 대한 확신과 그로 인하여 불확실한 이 시대에서 믿음으로 산다 할찌라고 사랑하지 아니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요”(고전13:2b)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과 같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사랑하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믿음을 갖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할 수 있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러할지라도


    '그러할지라도'는 어떤 상황이나 조건을 전제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그렇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와 같이 반대되거나 의외의 결과가 이어질 것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주로 성경 구절에서 자주 사용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예시
    • "나를 죽게 하실지라도 위로와 기쁨을 말씀에서 찾는 것을 놓치지 않고 있다" (성경 구절), 여기서 '그러할지라도'는 죽음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위로와 기쁨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를 나타냅니다. 

    '그러할지라도'의 의미 분석
    • 그러할(그러하다):
      '그러하다'는 '그렇다', '그렇게 되다'라는 의미로, 앞선 어떤 상황이나 사실을 나타냅니다. 


  •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는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라는 뜻이며, '그러할지라도'의 변형된 형태로 볼 수 있습니다. 

  • -ㄹ지라도:
    '-ㄹ지라도'는 어떤 사실이 실제로 일어나든, 또는 가능하든 간에 그러한 상황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뒤에 오는 내용이 그와 무관하게 성립됨을 나타내는 연결 어미입니다. 

  • 그러할지라도 나와 함께 계신 하나님

    그날에 그가 숫염소 중 얼룩무늬 있는 것과 점 있는 것을 가리고 암염소 중 흰 바탕에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을 가리고 양 중의 검은 것들을 가려 자기 아들들의 손에 맡기고(30:35) 
    자기와 야곱 사이를 사흘 길이 뜨게 하였고 야곱은 라반의 남은 양 떼를 치니라(36).....

    그러할지라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31:5).... 점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가 낳은 것이 점 있는 것이요 또 얼룩무늬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가 낳은 것이 얼룩무늬 있는 것이니(8)....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12)....

    이기적이고 욕심 많은 라반은 야곱의 품삯이 되는 가축이 많이 생기지 않도록 특단의 계획을 세우지만 수포로 돌아갑니다. 단색 가축 떼를 얼룩덜룩하고 점이 있는 다른 떼와 멀찌감치 띄어놓기 위해 서로 사흘 길이 뜨게 하였지만, 그러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야곱은 매우 번창하게 된 것을 봅니다. 라반은 최초에 했던 약속을 일방적으로 변경할 것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라반의 변덕과 질투 속에서도 하나님은 놀라운 방법으로 야곱을 축복하는 것을 봅니다.

    기도: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믿음의 백성 삼으신 하나님! 야곱의 날을 기억하셨듯이 우리 인생이 하나님 앞에 있음을 고백합니다. 야곱에게 말씀하시고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의 체험이 되게 하옵소서. 오늘날 우리의 라반은 무엇인지요? 예기치 못한 어려움, 불편한 환경, 속이는 삶, 오늘날 라반이 우리를 어려운 지경으로 몰아갈지라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방식으로 우리를 축복하실 것이라는 믿음의 확신을 갖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러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창세기 31:1-16)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그대들의 아버지의 안색을 본즉 내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러할지라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창31:5)’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 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창31:13)’

    라반은 자신의 아들들에게서 야곱이 라반의 소유를 다 빼앗고 자신의 소유로 삼았다는 모함 가득한 소식을 듣습니다. 이후에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안색이 변했다는 사실을 감지합니다. 이 상황을 두고 하나님은 야곱에게 나타나 고향 땅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하십니다(창31:3). 야곱은 자신의 억울한 마음을 숨기지 않습니다. 안색이 변한 라반을 보고 불편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는 곧 라반의 반응에 개의치 않습니다. 이미 여러 번 자신을 속인 라반에 대해 그 어떤 기대감도 없었기 때문이니다. 신뢰는 오래 전부터 무너졌습니다. 하지만 그가 라반의 거듭되는 배신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의 고백처럼 ‘그러할지라도’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셨다는 사실을 알았고, 믿었으며,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련 없이 라반의 곁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곧바로 가족들에게 이 사실을 전달합니다. 비록 갈등 가운데 좋지 않은 모습으로 떠나게 되었지만 그는 지난 날 함께 하시는 하나님, 벧엘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앞길로 인도해주실 거란 사실, 그 약속을 확신했기에 아내들에게 이 약속을 붙들고 함께 떠나자고 강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족들도 그의 믿음의 고백에 동의하며 떠날 채비를 합니다. 앞으로의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 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오직 믿음 밖에 붙잡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임을 선언하며 믿음의 여정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라반이 그를 잡으려 추격해 오는 순간이 올지라도 약속의 땅을 향한 그는 믿음의 여정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 또한 그렇습니다. 붙잡을 수 있는 건 오직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가 내미시는 손을 믿음으로 붙잡는 것 외에는 답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유일한 버팀목이 가장 큰 능력이 됩니다. 지난 날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그가 흘린 십자가의 보혈로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영원한 삶을 이끄시겠다는 약속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이 벧엘의 약속, 벧엘의 하나님을 붙잡는다면 ‘그러할지라도’ 우리 인생은 숱한 고난과 역경 중에도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요, 수많은 배반과 모욕으로 얼룩진 삶이라 할지라도 결코 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지금껏 우리와 동행하셨고, 지금도 동행하고 계시며, 앞으로도 동행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제도 계셨고, 오늘도 계시며, 영원토록 함께 하실 하나님.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삶은 구원의 시작, 벧엘의 하나님을 기억하며 그 은혜를 붙잡는 인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인도하셨던 하나님, 그 하나님이 다름 아닌 우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할지라도"

    "아무리 그러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뜻으로, 어떤 조건이나 상황이 그러하더라도 그 상황에 굴하지 않고 다른 행동을 하거나 다른 마음을 품겠다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주로 성경에서 인용될 때 사용되며, 긍정적이고 의지적인 태도를 표현하는 데 자주 쓰입니다. 

    의미와 용법
    • 그러할지라도의 뜻:
      어떤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거나, 혹은 이미 그러한 상황일지라도. 

    예시
    • 욥기 6장 10절의 예시:
      "내가 죽게 하실지라도 위로와 기쁨을 말씀에서 찾는 것을 놓치지 않고 있다는 욥의 고백"에서 "그러할지라도"가 사용됩니다. 이는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위로를 찾는 굳건한 믿음을 나타냅니다. 


  • 문맥:
    '그럴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하더라도' 등의 의미로 쓰이며, 앞선 내용과 반대되는 혹은 상반되는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자신의 입장이나 믿음을 굳건히 지키겠다는 의지를 표현합니다. 

  • 학개서 2장 3-4절의 예시:
    "오 스룹바벨아, 그러할지라도 이제 마음을 강하게 할지어다"는 표현은 현재 상황이 어렵더라도 의지를 다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 그럼에 불구하고 

    ~에도 불구하고`는 영어 `in spite of`를 번역하면서 많이 
    쓰이는 영어 표현입니다. 
    따라서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그런데도`, `그렇지만`이나 
    `그럼에도`로 바꿔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번역 투의 문장을 비문으로 본다는 것은 다소 어렵다는 관점임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시비 대상입니다. 영어 ‘in spite of, despite, nevertheless…’ 등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나온 번역어이기 때문이지요. 이런 번역어의 사용은 내용전달이 중시되는 객관적인 문장에서 사용하기엔 군더더기가 많은 어구라는 지적을 받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반면에선 시와 노래의 제목으로까지 등장하게 된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경쟁력 있는 표현이 돼가고 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용해도 괜찮은 걸까요?


    이중적 구조를 통해 의미를 강조해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경쟁력

    관용구는 관용적으로 두 개 이상의 단어가 결합한 구로, 특정한 뜻을 나타내는 형태를 말합니다. 국어사전에서는 이런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하나의 관용구로 처리해 놓았습니다. “그럼에도‘와 ’불구하고‘라는 두 표현을 합해 놓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비록 사실은 그러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라는 이중적 구조의 뜻을 지녔습니다.

    ‘그는 아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하러 나갔다.’
    ‘웃자고만 쓴 책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를 향한 거듭되는 도전과 실패, 이를 극복하는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기대와 다르거나 상반되는 내용이 뒤에 올 때 앞뒤 문장을 이어 주는 구실을 합니다. 그러면서 ‘강하고 단정적인 의도’를 추가하여 문장의 의미적 맥락을 경쟁력 있게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요. 따라서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다른 말로 대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물론 시비를 거는 쪽의 말대로 ‘불구하다’를 빼도 뜻은 통하지만, 그렇게 되면 ‘강하고 단정적인 의도’는 담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해서 사용해야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분명 의미를 강조해주는 경쟁력 있는 관용구이기는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기사와 같은 객관적 글쓰기에서는 필요 없을 때가 많습니다. 특히 간결하고 객관적이어야 하는 스트레이트 기사에서 ‘불구하다’는 쓰지 않는 게 나아 보인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입니다. 왜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관용구 자체가 ‘불구하고’라는 군더더기 어휘가 붙은 표현일 뿐만 아니라 이런 연결구의 군더더기는 문장의 간결성을 떨어트리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방통위가 영업정지 처분을 내린 건 2004년 이후 처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조치로….’ 이 기사 문장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그럼에도’라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간결한 표현을 바란다면 ‘그럼에도’만 쓰는 것이 더욱 문장의 간결성을 갖출 수 있지요. 

    ‘불구(不拘)하다’는 ‘-ㅁ(음)에도’ 외에 ‘-ㄴ데도’, ‘-에도’와 어울려 쓰입니다. ‘얽매여 거리끼지 아니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같은 뜻으로 ‘물구(勿拘)하다’라는 단어가 있는데요, 물구(勿拘)하다 역시 ‘-ㅁ(음)에도/-ㄴ데도/-에도’의 구성으로 사용됩니다. 한데 이때 문장 안에서 ‘에도’와 ‘불구하다’라는 같은 의미가 충돌하게 되어 문장의 간결성을 떨어트리게 합니다. 조사 ‘에도’는 ‘무엇에 얽매이지 않음’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불구하다’를 덧붙일 이유가 없을 때가 대부분인 것입니다. ‘정치권의 해묵은 과제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보수 여당의 완강한 반대로 늘 제자리걸음이었다.’ 여기서 ‘과제임에도 불구하고’는 ‘과제였는데도’, ‘과제였지만’이라고 해도 충분한 것입니다. ‘한겨울인데도 불구하고 포근한 날씨가 계속 되는 가운데’, ‘불황에도 불구하고 자전거 매출이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이 문장들에서 깔끔하지 않은 느낌을 받았다면 ‘불구하고’ 때문이다. 객관적이고 간결한 문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적절치 못한 관용구인 것 이지요.

    그렇지만 역시 앞서 설명했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이중적 의미 구조로 내용을 강조하기 위한 관용구로서는 경쟁력 있는 표현입니다. 다만 글의 목적과 사용을 고려해서 적절한 기준을 가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운 글쓰기에 유용하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다. 
    우리말에는 곱고 어여쁜 단어들이 많음에도 묘하게 번역투 같은 말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뜻 때문이다. 
    사랑하지 않을 이유를 수십 가지라도 댈 수 있지만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정말이지 말 그대로 '사랑'으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관계를 떠올리게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한다는 말과 달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는 말이 주는 낭만이 있다. 
    물론 인간관계에서 이러한 낭만을 기대하는 것은 자기중심적이며 다소 유아적일 수 있음을 안다. 
    하지만 역시 차가운 인과를 담고 있는 접속사 '그래서' 보다는 뜨거운 숙명을 담고 있는 듯한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끌리는 건 어쩔 수 없다.

    인간관계 혹은 일 등 내 인생의 어떤 영역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외칠만한 일은 별로 없다. 
    그나마 여름과 운동 정도. 싫은 건 싫은 거고, 좋은 건 좋은 게 인지상정이니 말이다. 





    9월 20일(토) 다니엘 7-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의 은총(9:13)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이 모든 재앙이 이미 우리에게 임하였사오나 우리는 우리의 악을 떠나고 주의 진리를 깨닫도록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은총을 간구치 아니하였나이다.
    Just as it is written in the Law of Moses, all this disaster has come upon us, yet we have not sought the favor of the LORD our God by turning from our sins and giving attention to your truth.


    여호와의 은총(the favor of the LORD)

    다니엘서 9장에서 여호와의 은총에 대한 이해를 소개합니다.

    첫째는 여호와의 은총이란 죄악에서 떠나게 하는 것
    둘째는 여호와의 은총이란 주의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

    '여호와의 은총' 

    성경에서 하나님(여호와)께서 베푸시는 긍휼, 호의, 은혜를 의미하며, 특히 히브리어 단어 '하난'에서 유래하여 불쌍히 여기고, 베풀어주며, 받는 것을 뜻하는 '은혜'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여호와의 은총으로 나아가라'는 호세아서에 나오는 구절로, 여호와께서 베푸시는 호의와 자비 아래 나아가 살아가는 신앙적 태도를 나타냅니다. 

    '여호와의 은총'의 의미
    • 성경적 의미 :
      '여호와의 은총'은 단순히 '하나님의 긍휼'이나 '은혜'를 의미하는 것을 넘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베푸시는 친절하고 자비로운 태도와 도움을 뜻합니다. 

    성경에서의 활용 예시
    "여호와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는 호세아 3장에 나오는 구절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긍휼과 사랑 아래에 머무르며 살아가는 삶을 강조합니다.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는 하나님께 긍휼과 호의를 받는 사람을 의미하며,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복을 받는 것을 나타냅니다. 


  • 어원 :
    '은총'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하난'으로, '가까이하다', '호의를 베풀다', '불쌍히 여기다', '동정을 받다', '은혜를 받다' 등의 여러 의미를 지닙니다. 

  • 여호와라는 이름:
    '여호와'는 하나님(엘로힘)의 친밀하고 인격적인 이름으로, 능력을 나타내는 창조주이시면서 동시에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분을 의미합니다. 

  • 여호와의 은총( 페네이 아도나이) פְּנֵי יְהוָה

    은총(6440) 파님(pânîymפָּנִים     스트롱번호 6440

    1. 얼굴.  2. 대면 ㉠ פָּנִים אֶל פָּנִים
    발음 [ pânîym ]
    어원 / 6437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038회 사용

    6437. 파나(pânâh)  פָּנָה

    1. 돌다.  2. 창 18:22.  3. 향하게 하다
    발음 [ pânâh ]
    구약 성경  /  135회 사용 

    여호와(3068) 예호바( Yehôvâhיְהֹוָה 스트롱번호 3068

    1. 자존자.  2. 영원한 자 : 히브리인들이 최고의 하나님으로 여기는 신의 이름 ‘여호와’.
    발음 [ Yehôvâh ]
    어원 / 1961에서 유래
    구약 성경 / 7020회 사용
    • 1. 고유명사 자존자, 영원한 자:히브리인들이 최고의 하나님으로 여기는 신의 이름 ‘여호와’.

    • 관련 성경 /  여호와(출 20:7, 레 24:13)
    하난(chănan )   חֲנַן 스트롱번호 2604

    1. 긍휼히 여기다.  2.  힛파엘형: 탄원하다
    발음 [ chănan ]
    어원 /  아람어
    구약 성경 / 2회 사용
    • 1. 동사  긍휼히 여기다, 간구하다, 단 4:27.  
      동사 힛파엘형 : 탄원하다, 애원하다, 간구하다, 단6:11.

    • 관련 성경 /  긍휼히 여기다(단 4:27), 간구하다(단 6:11).

    다니엘 9장 요약

    다니엘 9장은 다니엘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을 다루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통해 이스라엘의 70년 포로 생활이 곧 끝날 것을 깨닫고, 백성의 죄를 자백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이후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다니엘에게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중요한 예언, 즉 "70 이레"에 대한 계시를 전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더불어 메시아와 종말에 대한 예언합니다.

    다니엘 9장의 구조

    다니엘의 기도 (1-19절)

    • 1-3절 : 다니엘이 예레미야의 예언을 읽고 기도하기 시작함.
    • 4-14절 : 다니엘의 죄와 백성의 죄에 대한 회개 기도.
    • 15-19절 : 하나님의 자비와 성소의 회복을 간구하는 기도.

    하나님의 응답 : 가브리엘의 계시 (20-27절)

    • 20-23절 : 가브리엘이 다니엘에게 나타나 계시를 전함.
    • 24절 : "70 이레"에 대한 예언의 시작.
    • 25-27절 : 메시아의 오심, 예루살렘의 회복, 종말의 사건들에 대한 구체적인 예언.

    1. 다니엘의 기도: 회개의 모범 (1-19절)

    다니엘의 기도는 이스라엘을 대신해 드리는 중보적 회개 기도로, 겸손과 철저한 자기 부정에서 비롯됩니다. 그는 자신과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못한 것을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와 이스라엘의 죄를 솔직하게 드러냅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동시에 강조하며, 회개와 구속의 필요성을 일깨워 줍니다. 다니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렸음을 고백하면서도,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그분의 용서와 회복을 간구합니다.

    다니엘은 매우 젊은 시기에 포로로 끌려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유다의 종말을 보면서 죄를 범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음에도 민족의 죄를 끌어안고 회개의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다니엘의 기도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문서 하단에 따로 정리했으니 필요하신 분들은 참조하시면 됩니다.

    2. 가브리엘의 계시: 하나님의 구속 계획 (20-27절)

    다니엘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천사 가브리엘은 이스라엘의 구속과 미래에 대한 "70 이레"의 예언을 전합니다. 여기서 "70 이레"는 하나님의 시간표로, 이스라엘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궁극적으로 메시아를 통해 구속이 이루어질 것을 예언합니다.

    24절에서 가브리엘은 70 이레가 "죄악을 끝내고, 죄를 속하며, 영원한 의를 드러내며, 예언과 환상을 봉인하고, 지극히 거룩한 자에게 기름을 붓는" 기간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메시아의 오심과 그의 속죄 사역을 예표하는 중요한 예언입니다.

    25-26절에서 언급된 "기름부음 받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그는 예루살렘의 회복과 더불어 인류의 구원을 위한 메시아적 사명을 완성할 자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메시아는 "끊어질 것"이라는 예언대로, 그는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되며, 이는 구속사의 핵심 사건입니다.

    27절에서는 "일 주의 절반"에 대한 언급과 함께, 메시아의 사역과 그 이후의 사건들, 즉 마지막 심판과 종말론적 사건들이 포함됩니다. 이는 메시아의 사역이 단순히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궁극적으로 종말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3. 구속사의 중심: 메시아와 하나님의 계획

    다니엘 9장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더불어 메시아적 예언이 핵심입니다. 다니엘은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해 기도했지만, 하나님의 응답은 그 이상을 넘어 인류의 구원을 위한 메시아의 사역을 예언합니다. 이는 다니엘의 기도가 단지 국가적 회복에만 머물지 않고, 영적 구속과 종말의 완성을 내다보는 중요한 계시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이 예언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시간과 역사를 초월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 죄를 끝내고, 영원한 의를 세우기 위한 구속의 계획입니다. 이 계획은 이미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으며, 우리는 이 구속사의 일부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결론

    다니엘 9장은 회개와 구속, 그리고 메시아의 사역을 강조하는 중요한 장입니다. 다니엘은 철저한 회개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고, 하나님은 그에게 메시아를 통한 구원의 계획을 보여 주십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속의 은혜를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속 계획은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우리는 그분 안에서 회복과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크게 입은 자

    성경의 인물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을 붙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잘 될 때나 어려울 때나 쉬지 않고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지독한 고난 속에서도 욥은 하나님의 섭리를 찾으며 기도했습니다. 
    쫓겨 다니던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께 기도하며 물었습니다. 
    사무엘은 기도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했으며, 사도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했습니다. 
    특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밤새도록 기도하셨고 붙잡히시기 바로 직전까지 기도하셨으며 십자가 위에서도 기도하셨습니다. 
    성경의 인물들은 모두 기도에 최선을 다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기도하는 사람이 됩시다.

    크게 은총을 입은 자, 다니엘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다니엘도 민족의 회복을 위해 하나님의 크신 긍휼하심을 의지하며 기도했던 기도의 사람입니다. 
    다니엘은 사자 굴 속에 던져질 것을 알면서도 믿음으로 기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다니엘이 어떻게 기도했던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1. 생명을 걸고 기도한 사람

    다리오가 왕이 된 해에 다니엘이 환상을 본 사건입니다. 
    이 때에 일어난 또 다른 일은, 다니엘을 시기하던 신하들이 다리오 왕 외에 다른 어떤 존재에게도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금령을 제안한 때입니다. 
    다리오 외에 다른 어떤 존재에게 기도하면, 사자 굴에 던지겠다는 법령이 선포된 때입니다. 
    이러한 상황들을 모두 알고 있었던 다니엘이지만, 생명을 걸고 하루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했음을 우리는 다니엘 6장을 통하여 이미 살펴본 바가 있습니다. 
    다니엘 6장 10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이때 다니엘의 기도 내용이 바로 다니엘 9장의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민족인 유다의 죄를 사해 달라고 다니엘은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에게 약속하신 대로 유다 민족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70년 뒤에 반드시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다니엘은 민족을 위하여 생명을 걸고 기도했던 사람입니다.

    2.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자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생명을 걸고 민족을 위해 기도한 다니엘을 향하여 가브리엘 천사는 무엇이라고 불렀습니까? 

    다니엘 9:23 
    곧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명령이 내렸으므로 이제 네게 알리러 왔느니라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 그런즉 너는 이 일을 생각하고 그 환상을 깨달을지니라.

    천사가 다니엘에게 말한 "은총을 입은"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원어 성경에 "חֶמְדָּה"(헤므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매우 귀하여 탐이 나고 꼭 가지고 다니고 싶은"이라는 뜻입니다. 
    생명을 걸고 믿음으로 민족을 위해 기도한 다니엘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은총을 입은 자이며 너무나도 귀하여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그리스도인

    성도 여러분! 
    우리도 다니엘처럼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고 항상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그리스도인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더욱 힘을 내어 나라와 민족, 교회와 가정, 세계 복음화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다니엘처럼 목숨을 걸고 기도하며 다윗처럼 항상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처럼 이 땅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기도를 놓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우리 모두가 이 새벽에 쉬지 말고 기도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함께 하는 기도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며 쉬지 않고 기도하신 예수님!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동이 트기 전의 새벽 시간에 주께 나와 기도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응답해 주옵소서. 
    이 시간 우리가 나라와 민족과 교회와 가정을 위해 기도할 때, 응답하여 주시고 참 평안과 만족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함께 할 기도 

    예수님처럼 다니엘처럼 기도하는 성도가 되게 하소서.
    우리 나라와 민족을 붙들어 주시고 문제들이 해결되게 하소서.
    우리 교회와 가정에 은혜를 주시고 믿음 위에 서 있게 하소서. 
    복음 전해야 할 한 사람이 생각나게 하소서.









    다니엘의 중보 기도 /  우리의 죄악을...간구치 아니하였나이다 
    - 여기에 기록된 '주의 진리'에 대해 혹자는 축복의 언약이든 저주의 맹세든 간에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함으로 해석한다. 
    이에 따르면 본 구절은 백성들이 당하는 현재의 고난이 이미 제시된 언약 파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적 결과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얻기 위해 회개했어야함 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Hitzig, Thomson). 

    그러나 델리취(Delitzsch)는 좀더 희망적인 측면에서 '주의 진리'를 말씀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계획으로 해석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징벌이 궁극적으로 온전한 구원을 성취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 섭리임을 깨닫고, 구원의 조속한 성취를 위해 미리 회개했어야 한다는 주장이라고 본다.





    9월 19일(금) 다니엘 4-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럴찌라도(5:17)

    다니엘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의 예물은 왕이 스스로 취하시며 왕의 상급은 다른 사람에게 주옵소서 그럴찌라도 내가 왕을 위하여 이 글을 읽으며 그 해석을 아시게 하리이다.
    Then Daniel answered the king, "You may keep your gifts for yourself and give your rewards to someone else. Nevertheless, I will read the writing for the king and tell him what it means. 

    그럴찌라도(Nevertheless) even so

    그리아니하실찌라도(even if he does not) even if you don't

    다니엘 3:18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But even if he does not, we want you to know, O king, that we will not serve your gods or worship the image of gold you have set up.

     
    다니엘서를 일다보면 두 가지 접속사 즉 "그리아니하실지라도"(3:18)와 "그럴찌라도"(5:17)가 눈에 아른 거립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대다수의 성도들은 내가 예수를 믿고 살아가는 동안 나에게는 절망적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절망적인 사건 앞에서도 당당한 신앙의 자세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럴찌라도(nevertheless. even so)'라는 접속사는 다니엘에게 많은 상급이 내려질지라도 나는 그와 같은 상급에 좌우되는 신앙이 아니므로 나를 위하여 예비된 상급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주고 오직 나는 벨사살 왕이 원하는 것을 알려주겠다고 하는 것을 강조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아니하실찌라도(even if he does not)'라는 접속사는 절망적인 사건이 닥쳐왔을 때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그 사건 가운데서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시며 보호해 주실 것을 믿지만 만일 내가 원하는 것대로 이루어주시지 않을지라도 내 믿음은 결코 흔들림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만일 내가 다니엘과 같은 입장에 처했다면 나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고백했을까?
    솔직하고 냉정하게 나의 신앙을 살펴볼 수 있는 믿음의 안목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것과 연관짓던 지난 날의 믿음을 성경적으로 확립해야 할 대가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좌파 정부가 요구하는 것에 동의하면 범죄자일지라도 그에게 높은 지위가 보장됩니다.
    그러나 좌파 정부가 계획하는 것이 부정한 것이며 잘못된 것이라고 쓴소리를 뱉으면 그 사람에게는 불이익 처분이 따라올 것이기 때문ㄴ입니다.

    22대 국회의원 300명 중에 87명이 기독교인이라고 합니다.
    87명은 대략 29%가 비율입니다.
    29%의 국회의원이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그들이 맡은 자리에서 소금과 빛이 된다면 자유대한민국은 절대로 죄편향으로 기울 수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유대한민국은 지금 거의 좌편향 정부가 되고 말았습니다.
    삼권분립이라는 정치 구조가 이미 무너졌습니다.
    범법자가 권력을 장악하고 권력을 갖도록 손뼉치며 동조한 세력들 중에도 기독교인들의 분포가 25%라고 합니다.
    전체 인구 중에 1/4 즉 25%가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좌편향 정부로 낮아지는 것에 대해서 찬성하거나 지지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편향 정부에서는 종교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와 불교와 가톨릭 등을 결코 용인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참된 종교인은 법과 질서를 존중할 뿐만 아니라 절대적 가치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유능한 남 유다 왕국의 20, 30세대이었습니다.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지만 여전히 왕국에서 제공하는 각종 산해진미과 고급 포도주를 제공받고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얼마든지 자기를 위하여 편한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지위를 보장받고 있었지만 이런 지위보다는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신앙이 더 중요하다고 자신의 입장을 떳떳하게 밝힌 것입니다.

    다니엘의 신앙은 두 가지 접속사에 의해서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그리아니하실찌라도"
    평소보다 더 뜨거워진 풀무불 속에 더녀 넣을 때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를 구해주실 것을 믿지만 만일 그렇게 하지 않을지라도 나는 하나님만 믿고 따르겠습니다.

    "그럴지라도"
    왕의 정책을 위한 하나님의 특별 계시를 다른 어떤 사람들도 알려주지 않을 때 다니엘을 통하여 그 비밀을 알려주시므로 그에 따른 보상과 상급과 지위와 명예는 그것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나눠주시고 나는 오직 왕과 나라를 위하여 그 비밀을 알려 줄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일꾼이 필요합니다.
    대한민국 땅에도 이러한 일군이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또한 이와 같은 일꾼들이 일어날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할 것입니다.

    멸망의 큰 잔치(종말론)

    우리의 삶의 중심은 내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시다.

    1.고고학으로 밝혀진 성경의 권위
    2.위기에서 하나님을 의지 않고 우상을 섬기는 벨사살
    3.인간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권은 하나님 이시다.
    4.성경 연구는 삶의 변화에 목적을 두어야 한다.
    5.우리 삶의  중심에는 하나님을 모셔야 한다.

    벨사살 왕은 그 정체가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벨사살 왕> 이 그 귀인 일천 명을 위하여 큰 잔치를  배설(排設)하고 그 일천 명 앞에서 술을 마시니라”
    이 벨사살 왕의 정체에 관해서 신학계에서는 오랫동안 논쟁을 거듭해 왔습니다. 
    논쟁의 발단은 일반(세속) 역사 책을 뒤져 보면 바벨론 역사 가운데 벨사살이라는 이름을 가진 왕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벨사살 왕은 누구인가?”

    다시 확증된 성경의 권위

    성경의 권위를 신뢰하지 못하고 그 권위를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바로 이 벨사살 왕이 역사 속에 실존하지 않았던 인물이라는 사실에 근거해서 다니엘서 전체를 역사적 정확성이 결여된 책이라는 진단을 내렸던 적이 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성경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혹은 성경의 명백한 교리를 뒤집는 불경건한 신학자들의 노름이 역사 속에는 항상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죽었다는 선언이 신학자들의 입술을 통해서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권위는 흔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1854년 영국의 J.G. 테일러라는 사람이 고고학자 팀을 이끌고 이라크 남부 지방에서 고고학 탐사를 하는 가운데 고대 바벨론어로 새겨진 글귀 하나를 발견했습다. 

    그런데 그것은 나보니도스 왕과 그의 아들 벨사살을 위한 기도문이었습니다. 
    바벨론의 역사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느부갓네살 왕이 죽은 후 세 명의 왕이 들어섰다고 합니다. 

    첫번째 왕은 메로다크 왕으로서 느부갓네살의 아들이었습니다. 
    메로다크는 2년 정도 바벨론을 통치하다가 느부갓네살 왕의 사위에 의해서 암살당합니다. 
    가족끼리 빚어진 비극이었습니다. 

    두번째 통치자는 네글리사 왕입니다. 
    이 사람은 4년쯤 통치를 하다가 물러났으며 네리글리사의 아들인 라바쉬말드크가 이어서 왕위에 등극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9개월밖에는 왕위에 머무르지 못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죽은 후 네번째  통치자, 그러니까 곧 바벨론의  마지막 통치자가 바로 나보니도스였습니다. 
    이 사람은 느부갓네살의 딸과 결혼한 것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족끼리 복잡하게 얽힌 것이지요. 
    나보니도스가 느부갓네살의 딸과 결혼한 것은, 자기도 왕의 자리에 앉을 수 있는 합법적인 왕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정략적 이유에서였을 것이라고 역사학자들은 추정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벨사살이 바로 나보니도스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1854년에 고고학자들의 발굴에 의해서 비로소 증명되었습니다. 
    비록, 왕위에 오른 일이 없는 벨사살에게 어떻게 왕이라는 칭호를 붙일 수가 있느냐는 문제가 남았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사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닌데, 복잡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것을 문제 삼고 있는 것입니다.

    나보니도스의 통치 시기는 주전 556년부터 539년까지입니다. 
    주전 539년은 바로 바벨론 제국이 멸망한 해입니다. 
    나보니도스는 전쟁을 많이 한 왕이라고 합니다. 
    특별히 그의 마지막 10년 동안은 거의 매일같이 전쟁을 했습니다. 
    전쟁을 많이 하게 되니까 자연히 해외 원정을 많이 나갔습니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이렇게 해외에 나가서 전쟁을 하고 있는 동안에 왕은 도대체 누구에게 통치권을 위임했겠습니까? 
    아들밖에 더 있었겠습니까? 
    즉, 나보니도스 왕이 해외에 출정 가 있는 동안 실제적으로 바벨론을 통치했던 사람은 그의 아들 벨사살이었으므로 당연히 그를 왕이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요즘 북한에, 위대하신 아바이 수령과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 이 두 사람이 통치자로 있는 것처럼 그 당시에도 통치자가 둘이었던 것입니다.

    다니엘서 5장에 기록된 바벨론 제국의 멸망 직전에도 나보니도스 왕은 새롭게 일어나던 메대 바사 제국과 북아랍 지역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결국 패전하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보리시파라는 곳으로 도망갔습니다. 
    이것은 그리이스의 역사가인 헤로도투스의 증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메대 바사의 마지막 도전이 드디어 바벨론 제국에 임하여 왕궁에까지 적들이 쳐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본문의 배경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다니엘서의 정확성에 대한 의심을 뒤집고 나아가 성경이 얼마나 권위 있는 책인가에 대한 놀라운 증거가 본문 7절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욕하고 우상을 찬양하는 잔치가 한창이던 순간을 기록한 5, 6절을 먼저 보십시오.
    “그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이에 왕의 즐기던 빛이 변하고 그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힌지라”기이한 일을 보고 놀라 벌벌 떨던 왕은 이것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 그 해석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
    “왕이 크게 소리하여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장이를 불러오게 하고 바벨론 박사들에게 일러 가로되 무론 누구든지 이 글자를 읽고 그 해석을 내게 보이면 자주옷을 입히고 금 사슬로 그 목에 드리우고 그로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리라 하니라”(7절). 
    이 <셋째 치리자>라는 단어가 아주 흥미롭습니다.
    “이것을 해석하는 사람은 세번째 통치자를 삼겠다”
    왜 하필이면 세번째 치리자일까요? 
    그것은 나보니도스와 그의 아들인 벨사살 자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셋째 치리자란 왕의 바로 아래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본문 16절을 보십시오.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너는 해석을 잘하고 의문을 파한다 하도다 그런즉 이제 네가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면 네게 자주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네 목에 드리우고 너로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리라”<셋째 치리자를 삼겠다>는 말이 또 한번 나옵니다. 
    결국 세속 역사가가 벨사살의 정체를 밝히기 전에 이미 성경이 정확하게 이 왕의 정체에 관해서 증언해 놓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발견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세속 역사에 벨사살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성경의 권위를 의심하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게 되고 성경의 위대한 권위와 정확성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주전 539년 10월, 바벨론 최후의 날에 흥겨운 잔치가 벌어집니다. 
    그리고 이미 메대  바사의 다리오의 군대는 바벨론 궁중을 포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5장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벨사살 왕이 그 귀인 일천 명을 위하여 큰 잔치를 배설하고 그 일천 명 앞에서 술을 마시니라”(1절). 
    적군이 쳐들어오면 전쟁 준비를 해야지 왜 잔치를 벌입니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나의 왕국은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는 벨사살의 자존심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벨사살은 자기 나라를 수호하는 신들의 능력을 굳게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 고고학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 당시 바벨론 궁중의 성벽은 굉장히 견고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벨사살에게는 <설마 누가 성벽을 넘어뜨릴  수 있겠는가>라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셋째, 민심을 무마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제 아무리 적군이 쳐들어와도 우리는 까딱없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 벨사살은 그날밤 굉장한 잔치를 배설하고 일천 명 앞에서 술을 마셨을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벨사살이 술을 마실  때에 명하여 그 부친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전(殿)에서 취하여 온 금, 은 기명(器皿)을 가져오게 하였으니 이는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마시려 함이었더라” 하필이면 유다가 망할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지고 온 기구들을 잔칫상에 대령하게 했습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
    “이에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 성소 중에서 취하여 온 금 기명을 가져오매 왕이 그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로 더불어 그것으로 마시고 무리가 술을 마시고는 그 금, 은, 동, 철, 목, 석으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니라”(3,4절). 

    벨사살은 바벨론의 우상 신들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5절). 
    자기 나라의 최후를 목전에 둔 급박한 상황에서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찾을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그분을 모독하며 우상 신들의 축제에 참여하고 있던 벨사살 왕과 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왕궁의 분벽에 홀연히 한 손가락이 나타나서 글씨를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심판의 메시지였습니다.

    벨사살 왕의 범죄

    물론 1-4절에서 벨사살 왕의 범죄가 드러났긴 하지만 다시 다니엘은 벨사살 왕의 죄를 조목조목 정리하여 그에게 선포하였습니다. 
    본문 22절 이하를 보십시오.“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오히려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도리어 스스로 높여서 하늘의 주재를 거역하고 그 전 기명을 왕의 앞으로 가져다가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왕이 또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은, 동, 철과 목, 석으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고 도리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22, 23절). 
    이것이 다니엘이 벨사살 왕에게 지적해 준 범죄의 내용입니다. 

    이  내용은 다시 세 가지로 분류됩니다.

    첫째. 의도적 범죄

    “왕이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에게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고 그에게 큰 권세를 주셨으므로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이 그의 앞에서 떨고 두려워하였으며 그는 임의로  죽이며 임의로 살리며 임의로 높이며 임의로 낮추었더니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강퍅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그 왕위가 폐한 바 되며 그 영광을 빼앗기고 인생 중에서 쫓겨나서 그 마음이 들짐승의 마음과 같았고 또 들나귀와 함께 거하며 또 소처럼 풀을  먹으며 그 몸이 하늘 이슬에  젖었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게 되었었나이다”(18-21절). 

    다니엘은 이렇게 말한 후에 즉시 “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알고도... ”(22절)라고 덧붙였습니다. 
    <그의  아들>에서 <그>는 느부갓네살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히브리 사람들은 몇 대 위의 선조라도 전부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벨사살은 조상 느부갓네살이 하나님 앞에서 교만했다가 징계를 받아 왕에서 쫓겨난 후 짐승처럼 울부짖는 정신병자가 되어 7년 동안 고생했던 일을 알고도 똑같은 범죄를 되풀이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지나간 역사를 통해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조상의 실수가, 선배의 실수가 계속하여 답습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다니엘서를 지배하는 가장 중심되는 사상임을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역사의 진정한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신다> 

    다니엘서 2:21  
    “그는(하나님은) 때와 기한을 변하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지식자에게 총명을 주시는도다” 

    왕을 세우기도 하고 폐하기도 하며 한 민족을 흥하게 하기도 하고 쇠하게도 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눈에 보이는 통치자가 실세를 쥐고 있기 때문에 그에게 아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5장 21절에서도 다니엘은 벨사살 왕에게 똑같은 사실을 다시 선포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 

    이것이 다니엘서의 위대한 역사 철학입니다. 
    이 사실을 느부갓네살 왕은 얼마나 무서운 대가를 지불하면서 뼈아프게 배웠습니까? 

    7년간 미치광이처럼 들판을 기어다니는, 하나님의 참담한 심판과 징계를 맛보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린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벨사살 왕은 느부갓네살의 전철을 밟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알고도 범한 죄이기 때문에 심판이 더욱 중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다 알고도 오히려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22절).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더 커다란 범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배울 때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즉, 성경공부의 목적을 하나님께 순종하여 내 삶을 바꾸는 데 두어야 하며 단순한 지식을 위한 성경 연구를 경계해야 합니다. 
    지식만 늘려 가는 성경공부 만큼 위험한 것은 또 없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은 알고도 행치 않는 자들에게 더 큰 심판이 있으리라는 경고를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때에 책망하시되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20, 21절). 
    실제 팔레스타인에 가보면 고라신이라는 마을이 문자 그대로 폐허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주님은 갈릴리 근처의 고라신과 벳새다 등지에서 많은 기사와 이적을 행하시며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주의 기적을 보고도,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고도, 주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치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들에 대한 경고를 통해 의도적인 범죄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책망의 대상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둘째. 교만

    교만은 모든 사람의 기본적인 범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천사장이 사단이 된 것도 자신을 하나님보다 높이려는 유혹에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21절에서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님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고 묘사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 많은 표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서에는 이 표현이 제일 많이 등장합니다.“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다니엘은 하나님 홀로 진실로 높으신 분이시며 그 누구도 그분의 자리에 설 수 없다는 사실을 천명한 것입니다. 본문 22절 이하를 다시 한번 보십시오.“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오히려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도리어 스스로 높여서 하늘의 주재를 거역하고...”(22,23절). 자기 신격화, 이것은 무서운 교만입니다. 여기에서 다니엘은 자기 조상이었던 느부갓네살과 똑같은 교만을 답습한 벨사살의 범죄상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셋째. 우상 숭배

     23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그 전 기명을 왕의 앞으로 가져다가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왕이 또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은, 동, 철과 목, 석으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고 도리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 벨사살이 예루살렘 성전의 거룩한 그릇을 가지고 야훼 하나님을 모독했던 행위의 배후에는 자기 조상을 비웃으려는 의도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우리 조상 느부갓네살은 이렇게 해서 야훼에게 굴복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나만은, 아무도 나의 능력과 나의 영광을 초월할 수 없다” 자기 나라가 망하기 일보 직전에까지도 자기를 높이려는 이 뿌리 깊은 유혹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벨사살의 모습을 보십시오.

    벨사살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야훼 하나님을 모독하고 우상을 찬양하던 바로 “그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보았습니다”(5절).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막고 그분의 자리에 자신을 세우고 있던 벨사살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하나님 자신의 극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손가락이 나타나서 무엇을 썼습니까? 그 내용이 24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이러므로 그의 앞에서 이 손가락이 나와서 이 글을 기록하였나이다 기록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24,25절).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전조(前兆)인 것 같은데 글자의 뜻을 통 알 수 없어서 답답하여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다시 다니엘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것을 해석할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때의 다니엘은 세월이 상당히 흘러서 80세는 족히 되었을  나이입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이 5장을 연구하면서 나이 80세가 되어서도 조금도 변함이 없는 순수함으로 하나님 앞에 섰던 다니엘의 모습에서 커다란 감명을 받았습니다.

    왕은 그 글자를 해석하여 달라고 하면서 별 소리를 다합니다. 우선  세번째 통치자로 삼겠다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굉장히 많은 뇌물을 주겠다고까지 했습니다. 16절 이하를 보십시오.“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너는 해석을 잘하고 의문을 파한다 하도다 그런즉 이제 네가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면 네게 자주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네 목에 드리우고 너로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리라”이에 대해 다니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다니엘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의 예물은 왕이 스스로 취하시며 왕의 상급은 다른 사람에게 주옵소서 그럴지라도 내가 왕을 위하여 이 글을 읽으며 그 해석을 아시게 하리이다”(17절). 다니엘은 황금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권세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바벨론의 권력 구조의 상층부에 속해 있으면서도 여전히 다니엘은 오직 하나님의 사람이었을 따름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분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에 쓰임 받기를 원하는 일념으로 80년을 살아온 이 순수한 청년. 그는 나이만 들었지 여전히 젊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다니엘이 해석을 합니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메네』는 “숫자를 세다”를, 
    『데겔』은 “저울로 달아 본다”  
    『우바르신』은 “나누다”를 뜻합니다.

    26절 이하를 보십시오.
    “그 뜻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26절).
    “당신이 얼마 동안 통치할 것이며 얼마 동안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렸소”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한 나라와 문명의 연한(年限)을 정하신다는 것을 선포한 것입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
    “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 함이요”(27절).
    “저울에 달아보니 당신은 안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표준으로 보았을 때 당신은 도저히 더 이상 왕의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이것은 심판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
    <베레스>의 복수형이 “우바르신”입니다. 
    즉, 이것은 바벨론이 두 조각으로 나뉘어 메대 바사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손가락이 나타나서 심판의 메시지를 기록하는 동안에 벨사살 왕은 이미 초죽음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 그의 최후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 날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그때에 다리오는 육십이 세였더라”(30, 31절). 
    이것이 메대 바사가 일어나고 바벨론이 넘어지던 순간입니다. 
    벨사살이 열었던 잔치는 문자 그대로 멸망의 잔치였던 것입니다. 
    이 교만한 왕에게 멸망은 갑작스럽게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서서히 오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한순간에 다가옵니다. 
    잠언서 기자의 증언처럼 “악인에게는 그 재앙이 갑자기 임한즉 도움을 얻지 못하고 당장에 패망합니다”(잠 6:15). 
    인간이 쌓아 올린 모든 영광은 눈깜짝할 새에 무(無)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때 이래로 바벨론 제국의 최후는 성경에서, 인류 역사의 최후의 모델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묘사된 인류 역사의 마지막 모습은 마치 바벨론 제국의 패망 모습과도 같습니다. 
    그렇기에 다니엘서를 이해하지 않고는 요한계시록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8:1-2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이 세상의 모습은 진정 바벨론에 비유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商)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3절)

    .“그와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들이 그 불 붙는 연기를 보고 위하여 울고 가슴을 치며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일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9, 10절). 
    한순간에 무너지는 인류의 바벨탑의 운명을 묘사한 극적인 장면입니다.

    교훈 두가지

    첫째, 우리 각자의 삶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다스리십니다. 이 이야기를 추상적으로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나를 다스리십니다. 나를 세우고 나를 폐하시는 분이십니다. 본문 23절에서 다니엘 선지자가 벨사살에게 선포한 심판의 메시지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었습니까?“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누가 당신의 호흡을 주장합니까? 이 순간 호흡이 끊어지면 모든 것이 끝장납니다. 심장의 고동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보십시오. 우리는 내 호흡을 주장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이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인생은 자꾸만 하나님을 망각합니다.

    둘째, 우리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본문 23절에서 다니엘은 벨사살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 것을 죄라고 지적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진정한 목적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로 호흡하게 하시고 살아 움직이게 하시며 나로 인생의 작정된 길을 걷게 하시는 궁극적인 이유는 바로 그분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인생이란, 삶의 중심에 나를 놓느냐 아니면 하나님을 놓느냐 하는 끊임없는 싸움입니다. 
    우리의 본능적인 부패성은 자꾸만 자기 자신을 삶의 중심에 두고 싶어합니다. 
    내가 영광을 받고 내가 내 삶의 초점이 되고 나를 드러내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우리가 끊임없이 싸워야 할 전쟁터는 바로 내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나로 호흡하게 하시는 그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드리기 위하여 그분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고자 애써야 합니다.

    벨사살은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서,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먹고 마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먹고 마시고 해야 할 진정한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이었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무시했을 때 그들의 잔치는 멸망을 부를 잔치가 되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바울은 같은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성찬식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멸망의 큰 잔치 이렇게 종말을 대비하라”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29절)를 하나님께서 징계하신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여기에서 먹고 마신다는 이야기를 왜 했겠습니까?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적인 삶의 모습이 바로, 먹고 마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서 먹고 마셔야 합니까?  
    다시 말해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을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나 자신만을 위해서입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먹고 마시고, 하나님을 위해서 정치도 하고 장사도 해야 할 우리가, 그 하나님을 망각하고 그 하나님을 무시하고 나를 위하여 먹고 마시고 욕심을 낼 때 하나님은 심판을 내리신다는 것이 “마지막 잔치”의 진정한 메시지인 것입니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25절).
    제게 주어진 인생의 남은 날을  당신만을 위해서 살 수 있도록 하나님, 언제나 당신이 제 삶의 중심이 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구하다'를 써서 '그럼에도 불구하고'로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쓰이는 '불구하다'가 사전에 아래와 같이 실려 있으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불구하다 「동사」 【…에】 【-음에】 ((‘-에도/음에도 불구하고’ 구성으로 쓰여))((‘-음에도’ 대신에 ‘-ㄴ데도’가 쓰이기도 한다))얽매여 거리끼지 아니하다.

    몸살에도 불구하고 출근하다.

    우리 삶의 이상도 끝내는 도달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무지를 이용해 거짓말을 하고 또 속는 것이나 아닐까?≪이문열, 시대와의 불화≫

    일정 기간 동안 간기를 빼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질펀하게 펼쳐진 땅을 보는 것만으로도 배불러하고 넉넉해했다.≪조정래, 태백산맥≫

    영어식 표현 in spite of에서 유래한 것으로 ....에도 불구하고
    그런데도, 그렇지만, 그럼에도 

    친구임에도 불구하고, 친구이지만, 친구임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데’는 앞과 상반되는 말을 할 때도 종종 쓰인다. 

    “그가 웃었다. 그런데 나는 슬펐다”처럼. ‘-는데’도 ‘그런데’와 비슷한 구실을 한다. 
    그리고 다음처럼 두 문장을 이어 준다. “그가 웃었는데 나는 슬펐다.”

    이렇게 상반되는 상황의 ‘그런데’와 ‘-는데’에는 ‘도’를 붙이는 일이 흔하다. 
    그러면 이 말들이 강조된다. 
    마치 목소리를 높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가 웃었다. 그런데도 나는 슬펐다.” 
    “그가 웃었는데도 나는 슬펐다.” 이처럼 ‘도’가 들어가면 느낌이 달라진다.

    ‘그럼에도’도 비슷하다. 
    ‘그런데도’나 ‘-는데도’처럼 ‘그럼에도’도 뜻을 강하게 드러낸다. 
    ‘그런데도’와 ‘-는데도’가 일상의 대화에서나 글에서도 자유롭게 쓰인다면 ‘그럼에도’는 주로 글에서 쓰인다. 
    이 말들은 ‘불구하다’와 때때로 어울리는데, 이때는 거의 글에서 나타난다. “그가 웃었다. 그런데도(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슬펐다” “그가 웃었는데도(웃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슬펐다”는 주로 글에서나 볼 수 있는 문장이다. 말로 할 때는 굳이 ‘불구하다’를 넣어 문장을 늘리지 않는다. 글에서도 ‘불구하다’를 넣으면 조금 더 강조하는 느낌을 줄 수 있다. 그렇지만 문장의 간결성은 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간결성을 넘어 하나의 관용구가 됐다. ‘불구하고’를 지우면 뭔가 빠진 듯한 느낌을 줄 때도 있다. 그렇더라도 ‘불구하고’를 빼면 문장은 더 간결해진다. “그가 웃었다. 그럼에도 나는 슬펐다”를 보면 알 수 있다. ‘얽매여 거리끼지 않는다’는 말 ‘불구하다’를 어찌 해야 할지 쉽지 않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하박국 3:16-19)


    다니엘 3:18]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수탉이 물을 먹을 때에 물그릇 속에 주둥이를 넣어서 물을 주둥이에 머금은 다음 고개를 들어 뒤로 젖힌 뒤 삼킵니다. 이렇게 물을 먹고 있는 닭을 보고 있던 한 인 도주의자가 저렇게 고개를 내렸다 올렸다 하려면 굉장히 힘들거야하면서 혀를 찼 습니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현실주의자가 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다 먹 고 살자면 할 수 없죠. 목을 안들면 그나마 한 방울이라도 목구멍으로 넘어 가겠습 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이럴때에 같이 있던 한 그리스도인이 두 분의 말씀이 맞군 요. 하지만 저 수탉은 한 모금의 물을 마실 때마다 하늘을 쳐다보며 하나님께 감사 하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감사하는 마음은 똑같은 사물을 볼찌라도 그 생각을 밝게 해주며, 그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해 줍니다. 사람이 좋은 일을 당할 때에는 감사하기 쉽습니다. 그러 나 고난과 시련이 겹칠 때에 감사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독특한 심성 가운데 한(한)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별의 한 그리움의 한 원한 한 맺힌 삶 등등, 한에 대한 용어들이 우리들 사이에서 친 숙하게 사용됩니다.

    그런데 이 한을 깊이 연구한 학자들에 의하면 이것이 생기는 원인이 억울함이 라고 합니다. 원하는 대로 정상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일이 억울하게 풀려 나갈 때에 생긴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한이 많다는 것은 억울한 일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민족이 반도에 위치한 연고로 수없이 많은 외세의 침략이 많았습니다. 그 결 과 온갖 원한과 억울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세월이 흐르다보니 이것이 하나의 문화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고유 문화 속에는 온갖 한이 서려 있 는 흔적을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억압과 수난을 많이 당하여 한이 많은 민족일수록 전해 내려오는 민속 음악들이 거의 단조 곡의 암울한 분위기에 가사 또한 구구절절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이 베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국악의 곡조와 가사가 대개 그런 경향이 있습니 다. 흑인 노예들의 애환이 깃든 흑인영가나 이스라엘 민속 음악에서 그러한 분위기 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억울한 일, 불행한 일을 당할 때, 모든 자연인들은 한을 품게 됩니다. 그 러나, 구원받아 자연인의 구습에서 해방된 성도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명령하십 니다. (살전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 님의 뜻이니라 그렇습니다. 우리 한민족의 핏속에 흘러 내려오던 이 억울함의 어두운 쓴 뿌리와 항상 피해 의식의 사고방식에 묶여 있던 구습에서 벗어나 축복의 사람이 되는 비결 은 바로 범사에 감사!!하는데 있습니다.

    이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좋은 일이나, 기쁜 일 뿐 아니라 슬픈 일, 궂은 일, 억 울한 일 앞에서도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 감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련이 겹치고 전혀 소망의 여지가 없어 보이고 절망적일 때에 감사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 맥추감사절을 맞이하여 어려울 때에도 감 사할 수 있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난 하박국 선지자가 바로 그러한 사람입니다.

     1.하박국 선지는 고난과 어려움도 하나님의 뜻임을 깨달았기에 감사하였습니다.

     하박국 선지가 유다 요시야 왕 말기에 유다 나라에 만연한 불의를 보고, 백성들의 이같은 불신앙을 어찌하여야 될찌, 탄식하며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계시와 응답이 왔습니다.

    이제 곧 하나님께서는 이웃 나라 갈대아인들을 징계의 채찍으로 들어서 불신앙과 불의를 심판할 것임을 응답하십니다.

    그런데 그 심판이 얼마나 두려운 것이었던지, 하박국의 창자가 떨리고, 입술이 떨 렸습니다. 앞으로 이 백성들이 당할 심판을 생각할 때에 그 뼈가 썩어 내려 앉는 것 같았습니다.

    ( 잠 15:30)눈의 밝은 것은 마음을 기쁘게 하고 좋은 기별은 뼈를 윤택하게 하느 니라고 했습니다. 과연 사람의 심령 상태가 편안하고 즐거우면 뼈가 윤태하게 되지 만, 근심과 걱정에 빠지면 뼈가 마르게 됩니다. ( 잠 17:22)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 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성도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와 간섭을 받는 사랑의 대상입니다. 마치 부모가 훌 륭한 자녀로 키워 내기 위하여 때로는 잘했다고 칭찬과 선물을 주는가 하면 때로는 잘못된 길로 나가는 자녀를 위하여 더 깊이 나쁘게 빠지기 전에 경고와 사랑의 매로 다스리듯이 우리들을 다스리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아무런 잘못한 것도 없는데도 욥과 같이 고난을 겪게도 하십니다. 다시말해, 더 견고한 신앙과 단련되고 연단된 믿음의 사람으로 빚어 내시기 위하여 억울함을 당하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 아닌 것이 없습니 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범사에 감사하라시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도 처음에는 다가올 민족이 당할 시련과 고난을 생각 할 때에 염려와 근심에 떨리며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곧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달았습니 다.

    불신앙과 불의로 치닫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징계의 채찍을 가하심으로 회개하 여 모든 불신앙과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 바라는 거룩한 신앙의 사람으로 바꾸어 놓기 위한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와 뜻임을 깨닫고 믿었을 때에 오히려 감사할 수 있 었던 것입니다.

     범사에 하나님의 뜻임을 믿는 신앙은 곧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만나도 절대 하나님을 의심치 않고 의지하는 믿음이 하나님의 뜻을 믿는 신앙입니다 무슨 일을 만나도 절대 하나님만 신뢰하였던 믿음의 선배들의 기록이 단3:8-20절 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때는 바벨론이 세계를 제패한 시대였고, 이스라엘은 바벨론에게 억울하게 포로로 잡혀간 때였습니다. 당시 바벨론 왕이었던 느부갓네살 왕은 그 권세가 하늘 높은줄 모르고 치솟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의 교만은 극에 달해 금신상을 세워 예배하게끔 하는데 까지 이르렀습니다. 서릿발 같은 명령을 누가 감히 어길 수 있겠습니까 그 러나 여기에 항거한 세 사람의 믿음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다니엘의 친 구로서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였습니다. 이들은 살아계신 하나님만 의지하는 진실 한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우상숭배를 거절하였습니다. 이 사실이 느 부갓네살 왕에게 알려지자 왕은 사형에 처하도록 명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으려고 하는 자에게 사형이라니, 참으로 억울하고도 한 맺힐 일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조금 도 불평해 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믿음은 절대적이었 습니다. 어떤 일을 만나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이들은 굳게 믿었습니다. 마침 내 형장의 풀무불은 7배나 더 뜨겁도록 만들어졌고, 이들 세 사람은 불 속으로 던져 지기 위하여 밧줄에 꽁꽁 묶였습니다. 이제 다시 느부갓네살 왕은 우상의 신상 앞에 무릎을 꿇고 살아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허락합니다.

     (단 3:13-18) 느부갓네살 왕이 노하고 분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끌어 오라 명하매 드디어 그 사람들을 왕의 앞으로 끌어온지라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가로되 사드락,메삭,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그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니 짐짓 그리하였느냐 이제라도 너희가 예비하였다가 언제든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 든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 져 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 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 을 아옵소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뢰하다가 죽는 일을 당할지라도 그것마저 하나님의 뜻임을 믿는 신앙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믿음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아니하실지라 도의 믿음이요 감사입니다. 바로 이러한 신앙을 가질 때만이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 니다.

    이러한 담대함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치 않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롬 8:38-39)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리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도저히 감사 못할 억울한 일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의뢰하 기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 그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나의 영생을 위하여 내어주신 그 큰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범사에 감사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리고 그 감사는 마침내 우리의 선 자리를 축복의 자리로 바꾸어 놓을 것 입니다.

     2.하박국 선지의 감사는 환경을 초월한 감사였습니다(17-19)

    본문 (합 3:17-18)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 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무화과 나무, 포도나무, 감람나무들은 하박국 선지가 살고 있던 그 팔레스틴 지역 에 있어서 가장 유용한 과목들이었습니다(신6:11 욜1:7 미6:15). 그리고 양은 식용( 삼상25:18)과 희생제물로(창4:4출29:19-22레5:14-16) 사용되었고, 소는 농사를 지을 때에 없어서는 안될 짐승이었습니다. 만일 이러한 것들이 없다면 당장 생계가 어려 워지게 될 것입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하여 감사하는 것이 성도의 하박국 선지의 감사요, 그리아니하실지라도의 감사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감사입니다.

    오늘 이 본문을 현대적인 의미로 바꾸어 보면, `사업이 부도로 망하고, 재산을 다 날리고, 직장도 잃고, 마땅한 일자리도 구하지 못하여 처자식이 배고파 할찌라도 감 사하는 것이 그리아니하실지라도의 감사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아니하실지라도'의 감사는 세상도 감당키 어려운 `환경을 초월한 감사'인 것입니다. 그러면 왜 성도들이 최악의 환경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전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 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 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 다.

    그렇습니다! 도무지 감당키 어려운 시험과 고통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과 손길 은 결국, 능히 당하게 하시고 감당하게 하셔서 훨씬 더 나은 축복으로 인도하실 것 이기 때문에 환경을 초월한 믿음으로 그리아니하실지라도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3.하박국 선지의 감사는 결코 절망하지 않는 감사입니다.

     어려운 일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우리는 쉽게 절망합니다. 그러나 항상 절망은 문 제 해결에 있어서 어려운 일 그 자체 보다도 더 큰 방해가 됩니다. 중국 속담에 `배 가 뒤집히지도 않았는데 물 속으로 투신하려고 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난관에 부딪쳤을 때에 가장 큰 문제란 난관 그 자체라기 보다, 쉽게 절망해 버리는 것임을 꼬집는 속담입니다.

    하박국 선지는 민족의 앞날에 어두운 먹구름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절망하지 않고 먹구름이 비가 되고 뇌성 벽락이 되어 내리고 나면 밝고 맑은 화창해질 그 날을 바 라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절망적인 상황에서 오히려 절망 저 건너편의 소망을 바 라보고 감사드렸던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할 때에 절망 중에서도 희망이 보이는 법입니다. 낙담만 하고 체념만 하고 있으면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 앞에서 그리하니 하실지라도의 감사를 하게 될 때에 그 어려움을 극복할 가능성은 열리게 되는 것입 니다.

    성도 여러분! 견디기 어려운 일을 당했습니까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까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가능성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4.하박국 선지는 찬송과 기도로 감사드렸습니다.

     감사는 감사를 드리고자 하는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말해 감사하는 자는 하나님을 인정할 수 밖에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자는 항상 하나님의 존 재와 그분의 은혜 베푸심에 대하여 인정하는 언행을 계속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범 사에 감사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계시다는 것 을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자에게는 항상 하나님의 베푸시는 은혜에 대한 찬송이 있고, 앞 으로 더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을 간구하는 기도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믿음으로 드리는 감사 찬송과 기도는 하나님의 축복을 담는 그릇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풍성한 생명의 축복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 축복은 감사로 드리는 찬송과 기도의 그릇에만 담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에게 맺힌 한이 있습니까 억울함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있음을 믿고 이제부터는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운명은 바뀔 것입니 다. 창조적인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 합 3:17-18)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 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 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 다 이와같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감사를 드리는 축복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그럴지라도 

    1. [이사야 9:17]
    이 백성이 각기 설만하며 악을 행하며 입으로 망령되이 말하니 그러므로 주께서 그 장정을 기뻐 아니하시며 그 고아와 과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

    2. [이사야 9:21]
    므낫세는 에브라임을, 에브라임은 므낫세를 먹을 것이요 또 그들이 합하여 유다를 치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

    3. [이사야 10:4]
    포로 된 자의 아래에 구푸리며 죽임을 당한 자의 아래에 엎드러질 따름이니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

    4. [이사야 29:5]
    그럴지라도 네 대적의 무리는 세미한 티끌 같겠고 강포한 자의 무리는 불려 가는 겨 같으리니 그 일이 경각간에 갑자기 이룰 것이라

    5. [예레미야 3:3]
    그러므로 단 비가 그쳐졌고 늦은 비가 없어졌느니라 그럴지라도 네가 창녀의 낯을 가졌으므로 수치를 알지 못하느니라






    9월 18일(목) 다니엘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뜻을 정하여(1: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
    But Daniel resolved not to defile himself with the royal food and wine, and he asked the chief official for permission not to defile himself this way.

    다니엘은 왕족들과 귀족들과 더불어 바벨론 1차 포로가 될 때 바벨론 땅으로 끌려갔습니다.
    포로가 된 사람은 그 나라의 법과 제도에 무조건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뜻을 정했습니다.

    다니엘의 뜻은 왕실에서 제공하는 각종 음식과 포도주를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입니다. 
    포로의 몸으로 좋은 음식과 좋은 음료를 제공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특별 대우를 받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포로가 특별 대우를 받을지라도 특별 대우를 따르지 않으려는 것은 몸을 더럽힐 수 없다는 생각과 믿음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다니엘은 이러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뜻을 정한 사람을 도우시는 하나님(다니엘 1:8-16)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의 하나님이십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원리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기도하는 손처럼 긴 손은 없습니다. 
    기도는 일평생 동안 배워야 합니다. 
    다니엘이 기도의 손을 들었을 때 그 손은 하나님의 보좌에 이르렀습니다. 
    그가 기도의 손을 들면 하늘의 보좌가 움직였고, 하나님이 명하신 천사들이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그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동원해 주셨습니다. 
    그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천사가 사자 굴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가 기도할 때 천사 가브리엘이 기도 응답을 가지고 그에게 찾아왔습니다. 
    그의 기도 응답을 돕기 위해 하나님은 천사 미가엘을 보내셔서 사탄의 세력을 물리쳐 주셨습니다. 
    다니엘은 기도를 생명처럼 여겼습니다. 
    아니, 기도를 생명보다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기도하면서 사자 굴에 던져져 죽임을 당하는 것을 알고도, 전에 행하던 대로 기도했습니다.

    단 6:10절,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다니엘의 기도는 거룩한 습관이었습니다. 그는 하루에 세 번씩 일평생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의 자세는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겸손한 자세였습니다. 그의 기도하는 자세가 그의 성품과 인격을 보여 줍니다. 그는 감사며 기도했습니다. 죽을 것을 알고도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의 기도는 감사의 기도였고, 그의 감사 기도는 기적을 창조했습니다.

    다니엘에게 위기와 유혹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사람은 위기에서 뜻을 정하는 사람입니다. 성령 충만한 기도는 위기를 초월하는 인물로 만듭니다.

    저는 어려운 상황을 이겨낸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어려운 상황을 초월해서 비상하는 삶을 살았던 인물은 우리에게 영감을 줍니다. 위인이란 위기를 수없이 극복하고 승리했던 사람을 가리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다니엘은 위기를 수없이 통과한 사람입니다. 그가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간 자체가 그가 직면했던 큰 위기였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포로의 신분에서 바벨론의 재상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는 독수리처럼 비상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독수리는 태풍이 오면 그 바람을 이용하여 더 높이 날아오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할 분은 다니엘의 하나님이십니다. 포로로 끌려갔던 다니엘을 비상하게 만드셨던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다니엘의 인물 연구는 다니엘에게만 집중해서는 안 됩니다. 다니엘의 하나님, 우리 하나님에게 집중해야 합니다. 다니엘을 다니엘이 되도록 도와주셨던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동시에 우리는 왜 하나님이 다니엘을 그토록 사랑하셨고, 큰 은총을 베푸셨는지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니엘을 통해 그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승리하는 삶을 살았던 비밀을 발견할 수 있어야합니다.

    다니엘의 삶의 비밀을 압축한 단어로 묘사한다면 말씀 충만, 성령 충만, 그리고 기도 충만입니다. 그 핵심에 성령 충만이 있습니다. 다니엘의 세친구도 훌륭했습니다. 그들도 말씀을 따라서 살았습니다. 기도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 안에는 성령님이 충만하게 거하신 기록이 없습니다. 이렇듯 다니엘과 세 친구의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은 성령 충만이었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는 모든 어려운 상황을 초월한 인물입니다.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어 비상하는 삶을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는 죽음의 고비를 여러 번 넘깁니다. 고난의 능선을 넘어 넘습니다. 수많은 위기에 직면했지만, 그 모든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 비밀이 성령 충만에 있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성령 충만을 받았다는 사실을 자신도 알았지만 그가 섬겼던 왕들도 알아보았다는 것입니다.

    우선 다니엘이 성령 충만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다음의 말씀들 속에서 강조되는 것은 다니엘 안에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느부갓네살 왕이 다니엘 안에 성령님이 거하고 계심을 알았습니다.

    단4:18절, “나 느부갓네살 왕이 이 꿈을 꾸었나니 너 벨드사살아 그 해석을 밝히 말하라 내 나라 모든 지혜자가 능히 내게 그 해석을 알게 하지 못하였으나 오직 너는 능히 하리니 이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네 안에 있음이라.”

    둘째, 벨사살 왕의 왕비가 다니엘 안에 성령님이 거하고 계심을 알았습니다. 단5:11-12절, “왕의 나라에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사람이 있으니 곧 왕의 부친 때에 있던 자로서 명철과 총명과 지혜가 신들의 지혜와 같은 자니이다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 왕이 그를 세워 박수와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쟁이의 어른을 삼으셨으니 /왕이 벨드사살이라 이름하는 이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고 지식과 총명이 있어 능히 꿈을 해석하며 은밀한 말을 밝히며 의문을 풀 수 있었나이다 이제 다니엘을 부르소서 그리하시면 그가 그 해석을 알려 드리리이다 하니라.”

    셋째, 벨사살 왕이 다니엘 안에 성령님이 계심을 알았습니다. 단5:14절,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네 안에는 신들의 영이 있으므로 네가 명철과 총명과 비상한 지혜가 있다 하도다.”

    이처럼 다니엘이 소유했던 명철과 총명과 비상한 지혜가 바로 신들의 영이신 성령님께로부터 왔던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았던 다니엘을 공부하면서 그 삶의 비밀을 배워야 합니다. 그는 어떻게 포로에서 바벨론 나라의 제 2인자가 되었으며, 정권이 여러 번 바뀌었지만, 어떻게 형통한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다니엘이 어떻게 우상숭배를 하는 바벨론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을 지킬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이 수많은 포로 가운데 다니엘에게 큰 은총을 베푸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 비밀을 다니엘서를 보면서 함께 살펴볼 것입니다.

    기도의 사람 다니엘에게도 위기와 유혹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사람은 위기에서 뜻을 정하는 사람입니다. 성령 충만한 기도는 위기를 초월하는 인물로 만듭니다. 다니엘의 삶의 비밀을 압축한 단어로 묘사한다면 말씀 충만, 성령 충만, 그리고 기도 충만입니다. 그 핵심에 성령 충만이 있습니다. 다니엘의 세친구도 훌륭했습니다. 그들도 말씀을 따라서 살았습니다. 기도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 안에는 성령님이 충만하게 거하신 기록이 없습니다. 이렇듯 다니엘과 세 친구의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은 성령 충만이었습니다.

    다니엘의 성령충만은 느브갓네살 왕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벨사살 왕의 왕비가 알고 있었으며, 벨사살 왕도 다니엘의 성령충만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았던 다니엘을 공부하면서 그 삶의 비밀을 배워야 합니다. 그는 어떻게 포로에서 바벨론 나라의 제 2인자가 되었으며, 정권이 여러 번 바뀌었지만 어떻게 형통한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다니엘이 어떻게 우상숭배를 하는 바벨론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을 지킬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이 수많은 포로 가운데 다니엘에게 큰 은총을 베푸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 비밀을 다니엘서를 보면서 함께 살펴볼 것입니다.

    하나님은 뜻을 정한 사람을 도우십니다.

    다니엘 1장에서 가장 강력하게 눈에 띄는 다니엘의 삶의 비밀은 뜻을 정한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왕이 제공해 주는 음식과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오늘 본문 8절을 보십시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다니엘은 뜻을 정했습니다. 

    입지(立志) 즉 뜻을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뜻을 이루어 갔습니다. 
    그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면 그가 뜻을 정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를 알게 됩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청년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유다의 멸망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단1:1-2절을 볼까요? 
    “유다 왕 여호야김이 다스린 지 삼 년이 되는 해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을 에워쌌더니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들의 신전에 가져다가 그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두었더라.” 다니엘이 청년을 성장할 당시 바벨론이라는 나라는 세계를 재패하고 강하게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유다를 침략하여 멸망을 시킵니다. 또한 성전에 있는 그릇을 가져다가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둡니다. 바벨론은 어느 나라를 정복하면 그 나라의 우상 신을 가져다가 신들의 보물창고에 두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나라인 바벨론은 침략한 나라의 우상을 보물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상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성전에 있는 그릇을 가져다가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둔 것입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유다를 정복한 다음에 청년들 가운데 인재들을 포로로 데려 갑니다. 
    그는 인재의 소중함을 알았던 왕입니다. 
    왕족이나 귀족 가운데 인재가 될 만한 인물을 포로로 데려다가 교육을 시켜서 그들을 등용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3-5절을 읽어볼까요? 
    “왕이 환관장 아스부나스에게 말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왕족과 귀족 몇 사람 /곧 흠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모든 지혜를 통찰하며 지식에 통달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설 만한 소년을 데려오게 하였고 그들에게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언어를 가르치게 하였고 /또 왕이 지정하여 그들에게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에서 날마다 쓸 것을 주어 삼 년을 기르게 하였으니 그 후에 그들은 왕 앞에 서게 될 것이더라.”

    느부갓네살 왕은 이방 왕이지만 인재를 귀히 여겼던 사람입니다. 
    또한 교육의 중요성을 알았던 인물입니다. 
    그는 인재를 키우는데 자원을 투자하고, 시간을 투자했습니다. 3년 동안 교육을 시킨 다음 그들 가운데서 인재를 골라 사용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조금 더 엄밀히 말하면 바벨론 은 앗수르와 다른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런데 앗수르 제국은 민족 혈통 혼혈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런데 앗수르 제국이 망하자 새로운 제국 바벨론은 패망한 앗수르가 실행했던 정책과는 다른 정책을 선택합니다.

    바벨론의 정책은 정복한 각 나라에서 뛰어난 청년들을 데려다가 먼저 바벨론식 교육을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바벨론 사람으로 교화시킨 것입니다. 그 후에 그들은 정복지로 돌려보내 바벨론 제국의 2등 민족화를 이끌 지도자로 세우려했던 것입니다. 결국 바벨론의 모든 속국들을 영원히 바벨론 제국 아래 두겠다는 정책이었습니다. 성경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청년들 가운데 네 명의 청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6-7절을 보십시오. “그들 가운데는 유다 자손 곧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있었더니 /환관장이 그들의 이름을 고쳐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 하고 하나냐는 사드락이라 하고 미사엘은 메삭이라 하고 아사랴는 아벳느고라 하였더라.”

    느부갓네살 왕이 포로들에게 가장 먼저 한 일은 그들의 이름을 바벨론 식으로 바꾼 것입니다. 사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의 이름 속에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하나님 중심적인 이름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은 나의 심판관이시다.” 하나냐는 “야훼는 은혜로우시다.” 미사엘은 “하나님은 누구신가?” 아사랴는 “야훼는 돕는 자시다.” 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신앙적인 의미를 가진 이름을 바벨론 말로 개명한 것입니다. 개명한 이름 속에는 바벨론의우상 신들의 이름이 담겨 있습니다. 다니엘의 이름을 벨드사살로 고쳤는데, 그 뜻은 ‘벨이여! 왕을 보호하소서.’입니다. 벨은 바벨론 신의 봉사자와 예배자를 뜻하는 이름입니다. 하나냐는 사드락, 즉 ‘바벨론의 신 아쿠의 명령’이라는 뜻의 이름으로 개명되었습니다. 미사엘은 메삭으로 바뀌었는데, ‘바벨론의 땅의 여신 아쿠와 같다.’는 의미입니다. 아사랴는 아벳느고로 바뀌었고, ‘바벨론의 신 느고의 종이다.’ 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왕의 환관장이 그들의 이름을 개명했지만 그들의 신앙은 바꿀 수가 없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뜻을 정하여 거룩한 삶을 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렇다면 다니엘이 뜻을 정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첫째, 다니엘은 말씀을 따라 살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다니엘이 뜻을 정해서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기로 결단했습니다. 왜 왕의 음식과 포도주를 마시지 않으려고 했을까요? 그 이유는 왕이 제공해 주는음식은 우상에게 바친 고기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삼갔습니다. 특별히 돼지고기는 먹지 않았습니다. 신약에서도 고리도 전서를 보면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문제가 심각한 이슈가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이부정하다고 말씀하신 고기나 음식을 먹으면 부정하게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성별된 것을 먹는 것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도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생명나무 대신에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우리가 먹는 것이 우리를 만들어 간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가 먹는 것이 우리가 누구인가를 말해 줍니다. 우리가 먹는 것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기도 하고 더럽히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먹고 생명의 말씀을 먹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우리가 읽는 것을 먹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읽는 것이 우리를 만들어 갑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어떤 책을 가까이하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이 우리의 몸을 만들어 간다면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의 정신을 만듭니다. 우리가 영혼에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비록 바벨론 땅에 포로로 끌려 왔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왜 다니엘과 세 친구가 포도주를 삼갔을 까요? 포도주가 그들을 무디게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포도주에 탐닉하게 되면 판단력이 흐려지고, 훨씬 더 쉽게 유혹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호4:11절은 말씀합니다.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 잠언20:1절에서는 “포도주는 거만하게 하는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이에 미혹되는 자마다 지혜가 없느니라.”

    다니엘은 지혜와 총명이 탁월했습니다. 그는 숱한 지혜를 흐리게 만들고, 총기를 무디게 만드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고 포도주를 마시 않는 대신에 생명의 떡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었습니다. 성령님의 생수를 포도주 대신 마심으로써 성별된 삶을 산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전적으로 섬기고 의지하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왕이 내려 주는 진미와 포도주를 거부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섬기고 의지하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에 살면서 바벨론 왕을 섬겨야 했습니다. 물론 그들은 바벨론에 살면서 바벨론 왕을 섬겨야 했습니다. 물론 그들은 최선을 다해 왕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땅의 왕보다 더 위대하신 왕을 섬기고 의지하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그 왕은 역사를 주관하시고 열방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섬긴다는 것은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벨론 왕이 숭배하는 우상을 숭배하지 않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예배하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사는 삶은 모험입니다. 또한 자신들뿐만 아니라 환관장까지도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환관장이 다니엘에게 이르되 내가 내 주 왕을 두려워하노라 그가 너희 먹을 것과 너희 마실 것을 지정하셨거늘 너희의 얼굴이 초췌하여 같은 또래의 소년들만 못한 것을 그가 보게 할 것이 무엇이냐 그렇게 되면 너희 때문에 내 머리가 왕 앞에서 위태롭게 되리라 하니라.”

    다니엘은 이 모든 상황을 알고도 말씀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우리는 다니엘서 전체를 읽으면서 그들이 뜻을 정한 후 그 뜻을 끝까지 지켰음을 보게 됩니다. 특별히 다니엘3장을 보면 느부갓네살이 금신상을 세우고, 그 신상에 절하지 않으면 풀무 불에 던져 넣기로 작정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사드락 메삭과 아벳느고는 금신상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왕의 명령보다 하늘의 왕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다. 우상에게 절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배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의 명령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그들을 풀무 불 가운데서 건져 주십니다. 그 놀라운 광경을 지켜보았던 느부갓네살이 그들의 신앙을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3:28절을 보십시오.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이르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의 천사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들의 몸을 바쳐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다니엘 6장에서 다리오 왕은 그를 사자 굴에 던져 넣습니다. 그러면서 아주 놀라운 말을 합니다. 그 놀라운 말은 다니엘의 신앙을 대변해 주는 말입니다.

    단6:16절을 보십시오. “이에 왕이 명령하매 다니엘을 끌어다가 사자 굴에 던져 넣는지라 왕이 다니엘에게 이르되 네가 항상 섬기는 너의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 하니라.” 하룻밤이 지난 후에 다리오 왕이 사자 굴에 던져진 다니엘을 찾아와서 소리 질러 그에게 묻습니다. 6:20절을 보십시오. “다니엘이 든 굴에 가까이 이르러서 슬피 소리 질러 다니엘에게 묻되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네가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들에게서 능히 너를 구원하셨느냐 하니라.”

    다니엘의 신앙은 초지일관의 신앙입니다. 초지일관이란 처음에 먹은 마음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을 항상 섬기고 의지했습니다.

    셋째, 기도하며 살기로 정했습니다.

    다니엘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도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 2장에서 다니엘이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세 친구에게 기도를 부탁합니다. 단2:17-18절을 보십시오. “이에 다니엘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그 친구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에게 그 일을 알리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은밀한 일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사 다니엘과 친구들이 바벨론의 다른 지혜자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시기를 그들로 하여금 구하게 하니라.” 다니엘은 중보기도의 능력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우리가 다니엘과 세 친구를 통해 반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일고나성입니다. 아주 중요한 것에 뜻을 정한 다음에 그 뜻을 끝까지 지켜 나가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다니엘에게서 거룩한 습관을 배웁니다. 그것은 기도하는 습관입니다.

    다시 단6:10절을 보십시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그는 하루 세 번 씩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의 인생에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것도 기도하면 죽임을 당하는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때에도 다니엘은 전에 행하던 대로 세 번씩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의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뜻을 정한 사람을 도우십니다. 하나님은 뜻을 정한 사람과 더불어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뜻을 정한 사람을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렇습니다. “뜻을 정하는 것은 뜻을 세우고 성취한다는 것입니다.” “뜻을 정한다는 것은 한 방향을 선택하고 다른 방향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뜻을 정한다는 것은 집중하고 지속하는 목표를 정했다는 것입니다. “뜻을 정한난 것은 상황에 따라 살지 않고 말씀을 따라 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뜻을 정하지 않은 채 살고 있습니다. 뜻을 정하지 않고 삶은 표류하는 삶입니다. 방황하는 삶입니다. 방황하는 삶입니다. 반면에 뜻을 정한 인생은 방향이 분명하고 목표가 분명하고, 목표가 분명하기 때문에 놀라운 열매를 맺게 됩니다. “풍성한 열매는 집중과 지속의 결과입니다.” 뜻을 정하십시오. 우리가 뜻을 정하지 않으면 뜻을 정한 사람들에 의해 끌려 다니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 삶의 주인이 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우리의 주인이 되어 우리를 끌고 다닐 것입니다. 존 애킨슨은 “당신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주인이 된다.” 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뜻을 정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정해 준 뜻을 따라 살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 인생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뜻을 정할 때 우리 마음대로 정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뜻을 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보여 주시지만 우리를 대신해서 뜻을 정한 다는 것은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결단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뜻을 정해 주시거나 결단해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원해서 주도적으로 뜻을 정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뜻을 정한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 삶의 주인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존 애킨슨의 말은 한편으로 일리가 있지만 위험한 말입니다.

    다니엘은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을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삼았습니다.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주인으로 모시지 않으면 마귀가 주인 행세를 하려 들 것입니다. 가장 안전하고, 가장 풍성한 삶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 삶입니다.

    사람을 하나님처럼 의지하거나 상황에 따라 살면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반면에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말씀을 따라 살면 결코 수치를 당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결코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뜻을 정한 사람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다니엘이 뜻을 정했을 때 하나님께서 환관장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십니다. 9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다니엘과 세 친구가 뜻을 정하고 왕이 주는 진미와 포도주 대신에 채식을 먹기로 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얼굴을 다른 소년들보다 윤택하게 해 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1-16절을 다시 볼까요? “환관장이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를 감독하게 한 자에게 다니엘이 말하되 /청하오니 당신의 종들을 열흘 동안 시험하여 채식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한 후에 /당신 앞에서 우리의 얼굴과 왕의 음식을 먹는 소년들의 얼굴을 비교하여 보아서 당신이 보는 대로 종들에게 행하소서 하매 /그가 그들의 말을 따라 열흘 동안 시험하더니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음식을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더 좋아 보인지라 /그리하여 감독하는 자가 그들에게 지정된 음식과 마실 포도주를 제하고 채식을 주니라.”

    우리는 위기에 처하면 앞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길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믿음을 선택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기로 선택할 때 그 결과를 당장 예측할 수 있으면 좋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풀무불에 던져지고, 사자 굴에 던져지는 순간에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뜻을 정한대로 산다는 것은 굉장한 모험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환경 속에서도 정한 뜻을 굽히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면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시37:5-6절을 볼까요?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상황이 힘들어 보인다고 자포자기하지 마십시오. 어떤 상황에서도 올바로 선택하고 결단하고 무엇인가 시도하면 길이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만히 있는 자에게는 길을 열어 주시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홍해 바다를 향해 거어 들어 갈 때 길이열립니다. 요단강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도하지 않으면 성공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결정하거나 선택하지 않으면 시간만 지나갑니다.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뜻을 정하지 않고 미루는 것도 어떤 면에서 뜻을 정하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선택하지 않는 것도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시지만, 길을 선택하고 뜻을 정하고 결정하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자신들에게 열흘 동안 채식을 주어 시험해 보라고 부탁했습니다. 모험하고 시도할 때, 이전에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경험들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길을 열어 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새롭게 뜻을 정하십시오. 새로운 일을 시도하십시오. 성경을 읽으십시오. 기도를 하십시오. 전도하십시오. 책을 읽으십시오. 아이디어를 실험해 보십시오. 사람들을 찾아가서 구하십시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실패입니다.


    다니엘의 뜻을 정한 신앙(단 1:8-21)

    르호봇
    8~11분

    다니엘과 세 친구는 바벨론에 끌려 와서 이름을 바꾸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이름에서 우상을 섬기는 이름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나라를 잃은 슬픔이며 서러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유다 백성이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은 유다 백성을 바벨론에 끌려오게 하셔서 신앙을 새롭게 하려고 합니다. 단단한 신앙으로 바꾸어가고 있습니다. 환난과 핍박을 통해서 여호와의 신앙으로 바뀌게 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고기를 먹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우상에게 드렸던 음식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신앙의 정조를 지키려고 자신들을 시험에 보라고 했습니다.

    바벨론으로 끌려와 노예의 삶을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섬기는데 제약을 받게 됩니다. 사탄은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고 억압을 합니다. 그러나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하나님께 뜻을 정하여 신앙을 지켜나갑니다. 쉽지 않은 행동이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육신의 고통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니엘과 세친구의 신앙의 절개를 통해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8절 바야셈 다니엘 알 리보 아쎄르 로 이트가알 비파트바그 하멜렉크 우베예인 미쉐타이브 바예바케쉬 미사르 하사리심 아쎄르 로 이트가알

    (단 1: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먹는 음식을 먹지 못하게 하고 부정한 음식을 먹을 것을 권했습니다. 이것이 정한 백성들을 타락시키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부정한 음식을 먹으면 하나님께 부정한 자가 되어 하나님과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먹는 음식을 거부했습니다. 바벨론 왕이 먹는 음식과 포도주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이것으로 자신을 더럽힐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니엘이 정한 신앙의 절개입니다.

    ‘뜻을’이라는 단어는 (레브 3820) 마음, 심중, 정신, 의지, 라는 뜻입니다. 다니엘이 뜻을 정한 것은 마음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은혜를 알았고 부정한 음식을 먹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것을 깨달았으며 이미 다니엘의 정신 속에 주를 섬기는 마음이 있고 사랑하는 마음과 주님께 영광 돌리는 마음이 다니엘은 있었던 것입니다.

    ‘정하여’라는 단어는 (숨 7760 CW.VQIMZS 와우접속사 동사 칼(능동태)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정하다, 임명하다, 확립하다, 라는 뜻입니다. 다니엘은 왕의 명령이 떨어지고 나서 즉시로 자신의 마음을 정한 것입니다. 확실히 정립하여 바벨론 왕이 먹는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먹는다 하더라도 자신만큼은 절대 먹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나의 믿음과 신앙이 이렇게 마음에 확실한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를 더럽히지’라는 단어는 (가알 1351 VTIMZS 동사 히트파엘(강조재귀)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더럽다, 더럽히다, 부정하게 여기다, 라는 뜻입니다. 다니엘은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더럽히지 않으려고 산해진미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의 음식을 좋아하여 먹음으로 부정해지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음식을 먹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기 때문에 포도주도 먹지 않고 기름진 고기도 먹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이미 우상에게 드려진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은 많은 신전이 있고 우상의 제단이 많았던 곳입니다. 우상에게 드려지는 음식들을 자신은 먹을 수 없고 하나님이 정해주신 음식만 먹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절개입니다.

    ‘환관장에게 구하니’에서 ‘구하니’라는 단어는 (바카쉬 1245 CW.VPIMZS 와우접속사 동사 피엘(강조능동)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찾다, 요구하다, 원하다, 라는 뜻입니다. 다니엘은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 환관장에게 간절히 요청하고 있습니다. 절대 이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왕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즉시로 다니엘은 행동에 옮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음식을 먹어도 자신은 절대 먹지 않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나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술과 담배 같은 이런 것을 먹고 피우므로 거룩하지 못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육신적으로는 건강에 좋은 것을 골라먹으면서 내 영혼이 살찌우는 이런 복음의 말씀은 먹지 않습니다. 부정한 비 복음을 먹음으로 죽게 됩니다. 이제 나는 결단하여 거룩한 하나님의 음식을 영육으로 먹어야 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9절 바이텐 하엘로힘 에트 다니엘 레헤세드 우레다하밈 리페네 사르 하사리심

     

    10절 바요메르 사르 하사리심 레다니엘 야레 아니 에트 아도니 하멜렉크 아쎄르 미나 에트 마아칼르켐 베에트 미쉐테켐 아쎄르 라마 이르에 에트 페네켐 조아핌 민 하옐라딤 아쎄르 케길르켐 베히야브템 에트 로쉬 라멜렉크

    (단 1:9-10)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환관장이 다니엘에게 이르되 내가 내 주 왕을 두려워하노라 그가 너희 먹을 것과 너희 마실 것을 지정하셨거늘 너희의 얼굴이 초췌하여 같은 또래의 소년들만 못한 것을 그가 보게 할 것이 무엇이냐 그렇게 되면 너희 때문에 내 머리가 왕 앞에서 위태롭게 되리라 하니라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부정해지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마음을 아시고 환관장으로부터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즉시로 다니엘에게 은혜를 주셨는데 환관장의 마음을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다니엘의 신앙의 절개를 보시고 환관장에게 감동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먼저 다니엘이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켰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도 먼저 주님을 감동시켜야 합니다. 믿음의 정절을 지키면서 세상의 부정한 것들을 먹지 않고, 보지 않고, 듣지 않는, 신앙을 가지려고 하면 주님은 나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환관장은 느부갓네살의 왕의 명령을 어겨야 하는 상황입니다. 잘못하면 환관장이 죽을 수도 있는 이런 상황에서 다니엘의 말을 허락한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왕의 명령을 어긴다는 것은 죽음과 똑같은 것입니다.

    ‘지정하셨거늘’이라는 단어는 (마나 4487 VPAMZS 동사 피엘(강조능동) 완료 남성 3인칭 단수) 계산하다, 지정하다, 준비하다, 라는 뜻입니다. 느부갓네살은 명령을 내렸는데 이 명령을 어기는 자는 처형에 처할 정도로 엄중하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명령을 어기는 환관장과 사람들은 죽게 됩니다. 환관장은 왕의 명령을 어기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환관장의 마음을 돌려놓으시고 다니엘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이것이 신앙을 지키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는 은혜입니다.


    11절 바요메르 다니엘 엘 하멜르차르 아쎄르 미나 사르 하사리심 알 다니엘 하나느야 미솨엘 바아자르야

     

    12절 나스 나 에트 아바데이카 야밈 아사라 베이트누 라누 민 하제로임 베노켈라 우마임

    13절 베예라우 레파네이카 마르에누 우마르에 하옐라딤 하오켈림 에트 파트바그 하멜렉크 베카아쎄르 티르에 아세 임 아바데이카

    (단 1:11-13) 환관장이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를 감독하게 한 자에게 다니엘이 말하되 청하오니 당신의 종들을 열흘 동안 시험하여 채식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한 후에 당신 앞에서 우리의 얼굴과 왕의 음식을 먹는 소년들의 얼굴을 비교하여 보아서 당신이 보는 대로 종들에게 행하소서 하매

    다니엘은 간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왕의 음식을 먹지 않아도 절대 왕 앞에 가서도 초췌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시켜주고 있습니다. 다니엘의 확신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절대 얼굴이 초췌해지지 않고 더 좋아진다는 것을 다니엘은 믿었습니다. 이것이 믿음 있는 사람들의 행동입니다. 그러면서 당당하게 열흘 동안 자신들을 시험해 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험하여’라는 단어는 (나사 5254 VPMMYS 동사 피엘(강조능동) 명령법 남성 2인칭 단수) 시험하다, 유혹하다, 시도하다, 라는 뜻입니다. 다니엘은 당당하게 환관장에게 명령하여 말합니다. 우리를 시험하여 보라고 그것도 확실히 채식만 먹을 수 있도록 하라고 명령합니다. 이런 당당함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바로 주님이 나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을 어떠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주님을 의지하고 나가면 세상의 사람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이미 자신이 뜻을 정하여 주님의 뜻대로 나가기 때문입니다. 나에게도 이런 믿음과 정절의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먹게 하고’라는 단어는 (아칼 398 VQICXP.Ch 동사 칼(능동태) 미완료 공성 1인칭 복수. 연장형) 먹다, 삼키다, 라는 뜻입니다. 다니엘은 당당하게 우리에게 채소만 먹게 하여 열흘을 지켜보라는 것입니다. 왜 열흘을 지켜보라고 했을까요? 10의 의미는 질서의 완전, 책임, 증거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니엘은 열흘 동안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하게 이루어질 것을 믿었고 책임져 주실 것을 생각했으며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우신 기적을 증거 하기 위한 뜻이 있습니다. 이렇게 다니엘은 하나님의 격려하는 것을 믿었고 친구들을 격려했으며 자신 스스로 권면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열흘이 지난 다음에 왕의 음식을 먹은 자들과 채소만 먹은 우리들을 비교하여 보시고 그다음에 환관장 마음대로 처분해도 좋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당당함 속에 환관장도 허락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만 믿으면 세상 사람들 앞에서도 당당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신념이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14절 바이쉐마 라헴 라다바르 하제 바예나셈 야밈 아사라


    15절 우미케차트 야밈 아사라 니르아 마르에헴 토브 우베리에 바사르 민 콜 하옐라딤 하오켈림 에트 파트바그 하멜렉크


    16절 바예히 하멜르차르 노세 에트 파트바감 베예인 미쉐테헴 베노텐 라헴 제르오님

    (단 1:14-16) 그가 그들의 말을 따라 열흘 동안 시험하더니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음식을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더 좋아 보인지라 그리하여 감독하는 자가 그들에게 지정된 음식과 마실 포도주를 제하고 채식을 주니라

    ‘시험하더니’라는 단어는 (나사 5254 CW.VPIMZS.MZP 와우접속사. 동사 피엘(강조능동)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남성 3인칭 복수) 시험하다, 유혹하다, 시도하다, 라는 뜻입니다. 다니엘을 감독하는 자가 즉시로 열흘 동안 채소만 먹게 하기 위해 시험에 들어갑니다. 이 시험은 다른 음식은 절대 들어가지 않고 오직 채소만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부정한 음식은 먹지 않고 정결한 음식만 먹어도 정말 산해진미를 먹은 자들보다 더 좋아지는지를 알아보는 시험입니다. 만약에 채소만 먹어서 영양실조에 걸렸다면 하나님이 수치를 당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절대 뜻을 정한 믿음의 사람을 놔두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당당했습니다. 절대 부정한 왕의 음식을 주시지 말고 오직 채소만 달라고 했습니다. 이 시험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험이며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시험이었기 때문입니다.

    ‘좋아 보인지라’라는 단어는 (라아 7200 VNAMZS 동사 니팔(수동태) 완료 남성 3인칭 단수) 보다, 바라보다, 조사하다, 라는 뜻입니다. 열흘 동안 시험하고 나서 다니엘과 친구들을 보니 왕의 음식을 먹었던 자들보다 더 아름답고 얼굴이 윤택해진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은 더 나아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과 친구들의 모든 근본적인 모습들을 바꾸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한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100% 만지신 것입니다. 수동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은 믿음을 가지고 채소만 먹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얼굴과 몸은 더 좋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증거였습니다. 이 시험이 끝나고 나서 절대 왕의 음식을 먹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이 승리하신 것입니다. 먹는 것으로 사탄은 부정하게 만들려고 했지만 뜻을 정한 믿음을 통해 주님이 승리하셨습니다. 이것은 사탄이 예수님을 죽이면 끝이 난 것처럼 생각했지만 골고다 언덕에서 주님이 죽고 부활하셔서 완전한 승리를 이루신 것입니다. 죽기를 각오한 믿음 안에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17절 베하옐라딤 하엘레 아르바에탐 나탄 라헴 하엘로힘 마다 베하세켈 베콜 세페르 베호크마 베다니엘 헤빈 베콜 하존 바할로모트

    (단 1:17)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셨으니 다니엘은 또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더라

    다니엘과 친구들이 믿음으로 승리하고 나니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지혜와 학문을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받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의 시험을 통과한 자들에게 주시는 상급입니다.

    ‘지혜를 주셨으니’라는 단어는 (사칼 7919 VHNA 동사 히필(사역능동) 부정사절대형) 지혜롭다, 총명하다, 지혜롭게 행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지혜를 주셨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지혜를 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혜를 하나님께서 직접 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다니엘의 삶에 개입하셔서 계속 함께 하시겠다는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이 믿음을 지키기로 뜻을 정하여 사니까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깨달아 알더라’라는 단어는 (빈 995 VHAMZS 동사 히필(사역능동) 완료 남성 3인칭 단수) 식별하다, 분별하다, 지각하다, 이해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다니엘은 환상과 꿈을 깨닫고 분별하며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 왕이 꾸었던 꿈도 듣지 않고 알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제 완전하게 함께하셔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다니엘을 높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고 있다는 증거들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18절 우레미케차트 하야밈 아쎄르 아마르 하멜렉크 라하비암 바예비엠 사르 하시리심 리페네 네부카드네차르


    19절 바예다베르 이탐 하멜렉크 베로 니므차 미쿨람 케다니엘 하나느야 미솨엘 바아자르야 바야아메두 리페네 하멜렉크 

     

    20절 베콜 데바르 호크마트 빈나 아쎄르 비케쉬 메헴 하멜렉크 바이므차엠 에세르 야도트 알 콜 하하르투밈 하아솨핌 아쎄르 베콜 말쿠토

    21절 바예히 다니엘 아드 쉐나트 아하트 레코레쉬 하멜렉크

    (단 1:18-21) 왕이 말한 대로 그들을 불러들일 기한이 찼으므로 환관장이 그들을 느부갓네살 앞으로 데리고 가니 왕이 그들과 말하여 보매 무리 중에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와 같은 자가 없으므로 그들을 왕 앞에 서게 하고 왕이 그들에게 모든 일을 묻는 중에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 배나 나은 줄을 아니라 다니엘은 고레스 왕 원년까지 있으니라

    이제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 앞에 나가게 됩니다. 이제 다니엘과 친구들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가 되었습니다. 영적으로 육적으로 완전하게 준비된 상태에서 세상의 왕 앞에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이미 준비가 되어 세상에서 쓰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을 지키고 나가니 세상의 많은 박수와 술객보다 십 배나 더 능력이 나타났으며 인정받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다니엘은 바벨론에서부터 페르시아 왕 고레스까지 쓰임 받게 되는 아주 긴 수명을 살면서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리는 직분을 맡아 세상 나라에서 주님을 나타내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까지 어떠한 믿음을 가지고 살았습니까? 다니엘은 세상나라에 포로로 끌려갔지만 신앙과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뜻을 정하여 우상에게 드려졌던 음식을 거부하고 거룩한 하나님 백성으로서 정한 음식만 먹겠다고 다짐했으며 독주를 마시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신앙을 지키며 나가려고 할 때에 많은 육체적 고통과 조롱이 따라오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을 향한 열정으로 죽기를 각오하고 믿음을 지켰더니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지혜와 명철을 주시는데 열 배나 주셨습니다. 세상나라에서 크게 쓰임 받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오늘 나는 어떠한 뜻을 정했습니까? 주님의 나라를 위해 살기로 작정했습니까? 더 이상 세상의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정했습니까? 이제 나는 주님을 위해 뜻을 정해야 합니다. 오직 주님만을 섬기기로 작정해야 합니다. 세상과 주님 안에서 한 발씩 들여놓고 좋은 것만 취하려고 하는 이런 것들을 버리고 이제 주님께 쓰임 받기 위해 나의 뜻을 정하여 나가야 할 때입니다. 사탄은 나의 믿음과 신앙을 나태하게 하여 열정을 무너트리고 영성을 죽이고 있습니다. 환경 속에서 신앙을 잘하지 못하도록 달콤한 것들을 선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육체적인 달콤함 속에 빠져 죽어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꿀 속에 빠진 벌레를 상상해 보십시오. 꿀의 달콤함에 정신없이 먹다가 결국은 꿀 속에서 죽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의 육신적 쾌락에 빠져 살다가 내 영혼이 죽는지도 모르고 있다면 얼마나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까? 주님의 백성들은 이제 거룩한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이 음식을 먹기로 뜻을 정할 때에 주님도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다시 한번 주님께 뜻을 정하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니엘 1장 1 하나님을 향하여 뜻을 정하다 / 단 1:1-9

    다니엘서는 포로시대의 신앙 영웅인 다니엘의 생애의 주요 사건과 그가 받은 주요 묵시에 관해 기록한 책입니다. 좀 더 부연하면, 하나님의 징계로 야기된 포로시대(B.C. 586-538)를 전후하여 포로 출신이라는 정치적 한계와 다신교 사상의 이방 제국의 황실이라는 종교 문화적 한계를 극복하고, 바벨론, 메대-바사, 바사 등 이방 재제국의 몰락과 발흥을 거듭하는 가운데서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일관한 다니엘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역동적 사건들이 제시됩니다. 그리고 이 와중에 다니엘이 직간접적으로 받은 대제국의 흥망사를 배경으로 하는 종말론적인 묵시들이 소개됩니다.

    다니엘서 강해는 한홍 목사님의 책을 인용해서 작성했습니다.

    유다의 멸망

    “유다 왕 여호야김이 다스린 지 삼 년이 되는 해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을 에워쌌더니”(1절)

    여호야김은 요시야 왕의 아들로 주전 609년에 남왕궁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미 그때는 유다 왕국의 운명이 기울어진 때였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중동의 패권을 장악해온 애굽과 신흥 강국 바벨론이 차례로 유린한 탓에 당시 유다 왕국은 말할 수 없는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여호야김의 형제인 여호아하스가 왕위에 오른 지 3개월 만에 애굽 왕에 의해 폐위되고, 대신 여호야김이 새로운 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서 여호야김에게 바벨론과 유화정책을 펴라는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무시했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세워준 애굽에 충성을 맹세했고, 애굽에 조공을 바치기 위해 백성의 고혈(膏血)을 짜내는 정책을 폈습니다. 그 결과로 그가 왕이 된 지 3년 만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포위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세계 최대의 제국이었던 앗수르와 드로아, 그리고 아프리카의 애굽까지 정복하여 메소포타미아를 포함한 고대 근동 지역 전체를 장악한 대제국 바벨론을 만든 인물이었습니다. 군사적 영웅이었을 뿐 아니라 정치·문화적으로도 엄청난 업적을 남긴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잇는 전략적 요충지인 유다 왕국을 점령함으로써 애굽을 정복하고, 유다 왕국을 세계 제국을 향한 자신의 야망의 디딤돌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유다 왕 여호야김은 어리석게도 이 급변하는 세계정세의 판도를 읽지 못하고 나라의 패망을 자초했습니다.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들의 신전에 가져다가 그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두었더라”(2절)

    유다는 성전(聖殿)이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지만, 바벨론 군대는 그 성전을 약탈하고 성전의 기물들을 자신들의 신전에 가져다가 그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둠으로써 유다 백성과 하나님을 모독했습니다. 고대에는 전쟁의 승패가 도시 국가가 섬기던 신들의 승패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은 자신들이 믿는 신이 유다의 하나님을 굴복시켰다고 과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수치까지 감내하시면서 패역한 유다 백성들을 징계하셨습니다.

    바벨론으로 가다

    느부갓네살 왕은 점령한 각 속국을 보다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그 지역의 왕족과 귀족의 자제들 중 몇 명을 선출해 바벨론으로 데려와서 교육을 받게 했습니다.

    “왕이 환관장 아스부나스에게 말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왕족과 귀족 몇 사람 곧 흠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모든 지혜를 통찰하며 지식에 통달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설 만한 소년을 데려오게 하였고 그들에게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언어를 가르치게 하였고”(3, 4절)

    그들은 왕족과 귀족의 자제들 중에서도 까다로운 선발 기준으로 뽑은 인재들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다니엘과 친구들은 어떤 학문을 가르쳐주면 금방 깨우칠 정도로 지혜롭고 총명했습니다. 또한 모든 지혜를 통찰하며 학문에 익숙해 모든 지식을 체계적으로 소화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이런 인재들을 바벨론으로 데려와서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언어”를 배우게 했습니다.

    바벨론제국이 제3세계의 인재들을 데려와서 교육시킨 데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첫째, 제3세계의 차세대 지도자들의 실력을 최대한 뽑아내서 바벨론제국을 만들어갈 핵심 두뇌로 사용하려고 했습니다. 둘째, 바벨론 사상으로 무장한 이들을 훗날 자기 나라로 돌려보내 다스리게 함으로써, 점령지마다 친(親)바벨론 정치 세력을 심어놓으려는 생각이었습니다.

    “또 왕이 지정하여 그들에게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에서 날마다 쓸 것을 주어 삼 년을 기르게 하였으니 그 후에 그들은 왕 앞에 서게 될 것이더라”(5절)

    또한 왕은 왕궁에서 선별된 음식과 포도주를 각국의 영재들에게 날마다 공급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3년 동안 여러 분야에서 강도 높은 훈련을 받은 후에 바벨론 왕 앞에 세워져 나랏일을 했습니다. 인재 확보와 육성은 강대국을 만드는 핵심 전략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이 정도의 정성으로 사람을 세워야 합니다. 요즘 한국 교회들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명목으로 지도자들을 쉽게 세우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 가슴이 아픕니다.

    남은 자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

    드디어 다니엘과 세 친구인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등장합니다.

    “그들 가운데는 유다 자손 곧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있었더니”(6절)

    유다왕국은 망했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망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대로 살기로 결단한 다니엘 같은 ‘남은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역사를 이어가십니다. 바벨론은 힘으로 유다를 무너뜨렸지만 다니엘을 통해 흘러나가는 하나님의 영적 권위에는 바벨론의 최고 권력자인 느부갓네살 왕도 무릎을 꿇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역사만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해선 안 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의 섭리를 봐야 합니다.

    포로로 끌려간 각국의 인재들에게는 바벨론 식의 새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환관장이 그들의 이름을 고쳐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 하고 하나냐는 사드락이라 하고 미사엘은 메삭이라 하고 아사랴는 아벳느고라 하였더라”(7절)

    다니엘이란 이름은 ‘하나님은 나의 재판장이시다, 나를 판단할 자이시다’란 뜻입니다. 그의 친구 하나냐는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 미사엘은 ‘누가 하나님과 같은가’, 아사랴는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다’란 뜻입니다. 이렇게 좋은 뜻의 이름들을 바벨론 왕실에서는 순식간에 다른 이름으로 부르게 했습니다.

    유다의 이름들이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듯이 바벨론의 이름들 또한 그들의 신들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다니엘에게 준 ‘벨드사살’이란 이름은 바벨론이 섬기는 신(神)인 벨을 찬양하는 이름으로서 ‘벨이여, 내 생명을 보존하소서’란 뜻입니다. 나머지 세 친구들에게 주어진 이름들도 비슷합니다.

    신앙의 마지노선

    그러나 세상 속의 크리스천에게는 물러설 수 없는 신앙의 마지노선을 분명히 그어야 할 시점이 반드시 옵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8절)

    다니엘은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말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율법에 피가 섞인 고기를 먹는 것을 금하고 있었습니다. 바벨론 왕이 먹던 음식과 포도주는 단지 좋은 음식이 아니고, 모두 바벨론의 신에게 바친 뒤에 내려지는 우상의 제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음식을 먹으면 자신도 그 우상을 섬기는 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바벨론의 왕은 우상들에게 바쳐졌던 음식을 자기와 바벨론의 지도층들이 먹음으로써 자신들의 건강과 전쟁의 승리와 축복을 보장받는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다니엘이 그 음식을 먹게 되면 자신의 인생을 바벨론 왕과 그 우상 신들이 결정한다고 고백하는 것이 됩니다.

    배가 항해 중일 때, 물이 배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배는 침몰하고 맙니다. 바벨론 학문을 배우고 바벨론 식의 이름을 받는 것까지는 배가 물 위에 있는 것이지만, 우상의 음식을 먹는 것은 물이 배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 음식을 먹으면 어두운 권세와 그 하수인인 우상들의 영향력이 내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정결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십니다.

    다니엘은 단호하게 그 유혹을 떨쳐버렸습니다. 비록 십대의 어린 나이였지만 그 끝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가야 할 길이 아님을 안 순간 그는 벌떡 일어섰습니다. 노예로 끌려와 몸은 어떻게 할 수 없었지만 영혼까지 팔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은 바벨론이 휘두르는 대로 끌려가선 안 되겠다고 판단했습니다.

    뜻을 정한 자를 도우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위해 살기로 뜻을 정한 인생에 그 뜻을 이룰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십니다. 다니엘에게 하나님이 열어주신 길의 디딤돌은 왕궁 살림을 총괄하던 환관장이었습니다. 다니엘은 용감했지만 무모하지는 않았습니다. 먼저 자신의 결심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기도하며 모색한 다음, 마침내 환관장의 도움을 받기로 합니다.

    사실 환관장에게 있어서 다니엘의 요청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당장이라도 일이 잘못되면 자신의 안위가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 포로로 끌려온 소년의 신앙 양심을 지켜주자고 예외를 줄 수는 없었습니다. 다니엘이 뇌물을 준 것도 바벨론의 명문가 자제도 아니기 때문에 환관장에게는 이익이 될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다니엘의 말에 그의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9절)

    환관장이 다니엘에게 “은혜와 긍휼”이 생겼습니다. 쉽게 말해 괜히 좋은 마음, 불쌍해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우러난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환관장에게 그런 마음이 우러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밝힙니다.

    하나님은 믿지 않는 사람을 통해서도 그분의 뜻을 이루십니다. 환관장은 온갖 추악한 권력의 암투가 가득한 바벨론 왕궁의 살림을 책임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셈이 빠르고 정치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을 살리기 위해 그를 사용하셨습니다.

    죽음을 각오한 선택

    다니엘의 결심은 포로로 끌려간 노예로서 절대 권력자인 왕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죽음을 각오한 선택이었습니다.

    바벨론으로 끌려간 다니엘이 하나님을 위해 살기로 결심한 나이는 겨우 15세였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중학교 3학년에 불과한 나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앙에 기초한 분명한 인생관을 가졌습니다. 당시 조국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겼고, 결국 나라가 망했는데도 말입니다. 더욱이 포로로 잡혀간 땅에서는 그를 영적으로 인도해줄 사람들이나 교회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어린 소년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위한 뜻을 정할 때, 하나님께서 엄청난 축복과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우리의 인생은 어떤가요?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는 인생인가, 아니면 결코 타협할 수 없는 믿음의 길을 가기로 뜻을 정한 인생인가요? 지금 우리의 아이들에게 마땅히 가르쳐야 할 것은 하나님을 위해 살기로 뜻을 정하게 하는 일입니다. 다니엘처럼 확실한 영적 마지노선을 긋고 살아야 합니다. 결코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부터 우리가 서 있는 지점에서 각자 하나님이 주시는 방법대로 하기로 결심합시다.

    <묵상과 나눔>

    1. 내 인생의 바벨론은 어디입니까?

    2. 나의 신앙의 마지노선은 무엇입니까?

    3. 나는 무엇에 뜻을 정했나요?



    뜻을 정하여 (다니엘 1:8-21)

    다니엘은 지혜가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매우 잘생기고 인물이 출중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서 1 장 3~4 절을 읽어보면, 다니엘이 왕족 또는 귀족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머리도 똑똑하고, 인물도 잘 생기고, 게다가 부잣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에게는 약속된 미래, 보장된 성공, 그리고 행복한 인생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니엘의 인생 전체를 바꾼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과 바벨론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전 세계의 패권을 가진 바벨론은 이스라엘 전역을 폐허와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전쟁의 결과, 다니엘은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그의 집과 고향은 불타 없어졌습니다. 그는 더 이상 부모, 형제와 함께 살 수 없었습니다. 다니엘은 고아처럼 지내야 했고, 그의 조국 이스라엘은 지도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가장 두려운 사실은 다니엘이 전쟁포로이며, 노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벨론 사람들이 다니엘을 자신들의 나라로 끌고 갔습니다. 가족의 생사도 모르는 판에 인물이 좋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조국이 망하고 평생 노예로 살게 되었는데 남들보다 머리가 조금 더 똑똑한 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이 모든 불행이 그에게 일어났을 때 다니엘의 나이는 십대 청소년 즈음 되었을 것입니다.
    비록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으나 다니엘은 변함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것과 이방 사람들이 섬기는 우상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을 것이라 굳게 결심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8 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 (단 1:8) 왕이 말한 대로 그들을 불러들일 기한이 찼으므로 환관장이 그들을 느부갓네살 앞으로 데리고 가니” 왜 다니엘은 산해진미로 가득한 왕의 음식을 먹기를 거절했습니까? 다니엘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 바벨론 사람들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다니엘을 자기 나라로 끌고 간 후에, 그의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본래 다니엘이란 이름은 “하나님은 나의 재판관이시라”는 뜻입니다. 다니엘이란 이름은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그에게 “벨드사살”이란 새로운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벨티스가 왕을 지키다”는 뜻입니다. ‘벨티스’는 바빌론 사람들이 섬기는 신의 이름이었습니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다니엘에게 이처럼 새로운 이름을 부여함으로 그가 가진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태도와 사고 방식을 버리고, 바벨론 신과 왕을 섬기도록 종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자신의 참 신이 누구인지를 잊지 않았습니다. 비록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바꾸려고 시도하고 그들의 거짓 신에게 봉사하도록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했지만, 다니엘은 끝까지 이스라엘의 하나님만 섬길 것을 결심했습니다.
    바벨론 제국의 왕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에게 최상의 음식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왕이 먹는 최고 수준의 와인과 등급 좋은 고기들을 그에게 준 것이죠. 노예가 되어 바벨론에 끌려온 다니엘은 고기도 먹고 싶을 터이고, 배가 무척 고팠을 것입니다. 그도 왕의 진미를 먹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 말씀에서 본 것처럼, 다니엘은 이 모든 왕의 진미를 먹고 마시기를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당시 바벨론에서 왕들에게 바쳐진 음식은 그들이 섬기는 신들에게 희생 제물로 사용되었던 것들입니다. 즉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다니엘에게 준 것이죠. 따라서 다니엘이 볼 때 왕의 음식을 먹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부정한 동물을 먹는 것과 동일 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다니엘은 그 질 좋고 맛있는 왕의 음식들을 모조리 다 거부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부정한 음식을 먹음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혼을 더럽히지 않을 것을 다짐 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음식일 뿐이잖아? 고기 하나 먹는다고 해서 무슨 큰 일은 일어나겠습니까?” 그러나 다니엘에게 이것은 더 이상 음식을 먹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이 사안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자신을 더럽히지 않을 것이라고 뜻을 정했습니다. 왕의 진미를 먹는 것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임으로 그는 왕이 하사한 산해진미를 모두 거절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것을 선택했습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써 하나님 보시기에 중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기로 뜻을 정한 다니엘에게 하나님은 풍성하게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지 않고, 죄악으로 자신의 영혼을 더럽히지 않을 것을 결단하기를 바랍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삶을 눈 여겨 보시고,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 사람을 보호해 주십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따른다면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인도하여 푸른 초원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다니엘이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은 비밀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다니엘에게 큰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17 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단 1:17)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셨으니 다니엘은 또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더라”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에게 모든 학문에 대한 지식과 기술을 주셨습니다. 다니엘은 지혜를 얻었고 모든 환상과 꿈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전국에 다니엘보다 현명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니엘은 대학도 가지 않았고, 박사학위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20 절을 보면 다니엘은 바빌론의 모든 박사들보다 열 배 더 지혜로웠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지 않기 위해 힘썼기 때문에 하나님은 풍성하게 다니엘을 축복하셨습니다. 졸업생 여러분, 다니엘의 발자취를 따르십시오. 그렇게 한다면 여러분이 바로 차세대 다니엘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지혜와 명철을 더해 주실 것입니다.
    다니엘은 노예의 신분으로 바벨론에 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훗날 바벨론 제국을 다스리는 자 중 왕 다음 가는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에서 끌려 온 한 노예 소년이 온 제국을 다스리는 대신이 되었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 했을까요? 다니엘이 머리가 좋고 영리했기 때문입니까? 그가 단순히 운이 좋았기 때문에 바빌론의 두 번째 통치자의 자리까지 올라 갔을까요? 아니면 그에게 특별한 재능이 있었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이 가능 했을까요? 아닙니다. 다니엘이 놀랍게 하나님의 복을 받은 이유는 그가 어디 있었는지 또는 그가 누구와 함께 있든지, 언제나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날 ‘세상’이라고도 불리는 ‘또 다른 바벨론’은 여러분의 그리스도인이란 신앙의 정체성을 빼앗아 가려고 끊임없이 시도할 것입니다. 세상은 할 수 있는 대로 여러분을 유혹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세상이 주는 쾌락을 누리며 살도록 만들 것입니다. 그 교묘한 함정에 빠지지 마십시오. 세상이 여러분의 삶에 왕이 되도록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따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참된 왕이 되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은 선한 분이시고 여러분은 놀랍도록 복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다니엘처럼 뜻을 정합시다(다니엘 1:8-16)

    다니엘은 어린 시절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침공하였을 당시에 포로로 끌려온 왕족 중에 한 사람입니다. 그 다니엘은 심지가 굳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당시 바벨론의 임금이었던 느부갓네살은 세계 각국에서 똑똑한 소년들을 모두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궁중학교에 입학시켜 3년 동안 집중적으로 훈련을 시켰습니다. 거기다 자기가 먹는 진미와 포도주를 제공했습니다. 온갖 특혜를 다 부여한 것입니다. 그의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을 훈련시켜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서 자기에게 충성케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마도 세상 적으로 보면 그들은 출셋길이 열렸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낯설고 물 설은 타국 땅에 와서 이런 대접을 받는다는 것은 정말 큰 축복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에게는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왕이 주는 그 기름진 음식들이 바로 우상의 제물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우상숭배 하는 것을 금하셨으며,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조차도 싫어하셨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든 말든 출세하고 돈만 벌면 된다고 하면서 그것을 먹겠습니까? 아니면 출세도 좋고 돈을 버는 것도 좋지만 하나님을 슬프게 해 드리고 내 신앙을 더럽힐 수는 없다고 하면서 그것을 거절하시겠습니까?

    여기서 다니엘은 뜻을 정했습니다. 왕의 진미와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도록 결단했습니다. 말하자면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 세상의 부귀와 안일함과 모든 명예를 분토와 같이 여겨버린 것입니다. 세상의 권력보다도 물질보다도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였다는 말씀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위해서,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 뜻을 정했던 다니엘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더 놀라운 은혜를 주심으로 그의 삶을 책임져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라가 바뀌고, 왕이 바뀌어도 다니엘은 변함없이 귀하게 쓰임 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저와 여러분들도 어떤 환경과 여건을 만나든지 그 상황과 환경에 굴복하지 말고 다니엘과 같이 뜻을 정하여 신앙을 지키고 믿음을 지키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일사각오를 가지고 신앙을 지키고 믿음을 지킨다면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의 삶을 책임져 주시고 더 큰 은혜를 경험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1. 첫째로 생각해 볼 것은 다니엘이 뜻을 정했다는 사실입니다.

    8절 말씀을 다 같이 보시겠습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 다니엘이 위대한 삶은 바로 여기서 시작했습니다. 만일 다니엘에게 단1:8이 없었다면, 그 이후 그의 삶도 없었을 것입니다. 다니엘이 일생 동안에 받았던 수많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은 당연한 결과라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뜻이 없다면 길도 없습니다.

    오늘도 예배시간에 늦게 오신 분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내가 예배시간은 꼭 지키리라. 지각하지 아니하리라." 이런 뜻을 정하고서 노력을 해야지 예배시간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시간에 늦어도 상관없는 것처럼 생각해 버리면 늘 지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에녹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창5:21,21) 그의 나이 65세에 아들 므두셀라를 낳았습니다. 므두셀라는 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제일 오래 산 사람입니다. 에녹은 자기 아들을 낳기 전까지는 아무렇게나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들을 낳고서 키워보니까 아버지의 심정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깨달았습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구나! 이제부터라도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지!" 그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 이후로 에녹은 삼백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죽음을 맛보지 않고 승천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신 것입니다. 이러한 결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늘 아버지의 집에서 고생을 모르고 살았는데 아버지가 잔소리 하는 것이 싫다고 아버지 없는 세상에 나가서 한 번 마음껏 살아 보겠다고! 아버지 없는 세상에 나가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아버지의 집을 떠난 사람이 탕자가 아닙니까? 그러나 아버지의 집을 떠나고 나니 자유가 아니라 슬픔이 오고 부요가 아니라 빈곤이 오고 허랑방탕히 오고 말았습니다. 그 삶이 너무나 비참하였습니다. 돼지나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여도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탕자는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내가 아버지에게 너무나도 잘못했구나. 아버지에게 불효막심한 죄를 지었구나!" 그는 잘못을 뉘우쳤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결심을 했습니다. "내가 이제라도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야지. 그리고 아버지에게 내 잘못을 고하면서 용서를 구해야지!" 그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버지는 그를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더러운 옷을 다 벗기고 깨끗한 옷을 입혀주었습니다. 손에는 가락지를 끼워주었고, 발에는 신발을 신겨주었습니다. 살찐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아들의 모든 지위를 다시금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결단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 번 살아보리라! 지금까지는 그렇게 살지는 못하였을지만 이제부터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믿음의 순결을 지키리라! 먹고 마시는 문제 때문에 내 몸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사람들의 눈치 때문에 하나님을 섭섭하게 하지는 않으리라! 버릴 것은 버리고, 끊을 것은 끊고, 포기할 것은 깨끗하게 포기하리라!"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결단을 실행에 옮기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뜻을 정하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면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책임지시고 그를 도와 주셨던 것처럼 여러분들을 책임지시고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2. 둘째로 생각할 것은 다니엘은 뜻을 굽히지 아니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뜻을 정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뜻을 굽히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가 확고하고도 바르게 뜻을 정했다 할지라도, 작심삼일이 되어버리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어떠한 형편에서도 그 뜻을 굽히지 않고 지켜나가는 것이 더 중요한 줄 압니다.

    다니엘은 우상의 제물은 먹지 아니하리라 하고 뜻을 정한 후에 자기의 뜻을 환관장에게 말했습니다. 만일에 환관장이 자기의 말을 들어 주지 아니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너 때문에 내 목이 달아나게 생겼는데 너 책임지겠느냐?”하며 안 된다고 하는데 다니엘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어쩔 수 없지 뭐. 해도 안 되는걸 어떻게 해!”그랬습니까? 그가 이렇게 쉽게 포기했습니까? 아닙니다. 다니엘은 뜻을 굽히지 아니했습니다. 감독자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설득했습니다. 사정을 했습니다. 열흘만이라도 시험적으로 한 번 해보자고 졸랐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뜻을 세우면 길이 열립니다. 하나님께서 감독자의 마음을 감동시켜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다니엘은 우상제물인 왕의 진미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여도 되었습니다.

    또한 외국인인 다니엘이 왕의 사랑을 받고 총리로 발탁이 되고 재주가 탁월하니 시기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다니엘을 숙청하려고 온갖 궤계를 다 꾸밉니다. 다니엘이 하루에 세 차례씩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어 놓고 기도하는 것을 빌미로 다니엘을 해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메대 사람 다리오가 왕이 되었을 때에 시기하는 사람들은 왕을 부추겨서 이상한 법령을 만들었습니다. 앞으로 30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이외에 어떤 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집어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니엘을 해치기 위해서 만든 악법이었습니다. 왕도 이 사실을 모르고 도장을 찍은 것입니다.

    다니엘이 어떻게 했습니까? 이런 악법이 있음을 알면서도 다니엘은 전에 하던 대로 하루에 세 번씩 창문을 열어 놓고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아니하였습니다. 사자굴 속에 던져진다 해도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을 멈추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의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 믿음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다니엘은 사자 굴에 떨어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다니엘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굶주린 사자의 입을 봉하여 주심으로 다니엘의 몸이 상하지 아니하도록 보호하여 주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단3:1-1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은 잠깐입니다. 그러나 영광은 무한합니다. 잠시잠깐의 고난을 이기지 못하고 믿음의 순결을 꺾어버리고 포기하면 두고두고 후회하게 됩니다. 우리 대선의 성도들은 다니엘처럼 말씀대로 살려고 뜻을 정하신 후에 어떤 일이 있어도 뜻을 굽히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3. 끝으로 생각할 것은 다니엘이 받은 은혜입니다.

    9절 말씀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하나님이 다니엘로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기의 몸을 우상의 제물로 더럽히지 않으려고 뜻을 정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고 긍휼을 얻게 하여 주신 줄 믿습니다.

    다니엘은 뜻을 굽히지 않고 자신들을 시험해 보라고 요청했을 때에 하나님은 감독자의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열흘 동안 시험을 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기름진 우상의 제물을 먹은 사람들 보다 다니엘과 그 친구들이 더 건강하고 더 아름다워졌습니다. 15절을 함께 읽도록 하시겠습니다.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진미를 먹는 모든 소년보다 나아 보인지라”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합니까? 진미와 포도주보다도 채식과 물이 건강식품이어서 그렇습니까? 콜레스테롤 수치가 낮아서 그렇습니까? 다이어트 식품이라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교회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뜻을 정하면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지, 또는 어떤 사람을 통해서라도 은혜를 베푸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줄 믿습니다.

    또 17절 말씀을 함께 읽으시겠습니다.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더라.” 3년의 교육기간이 모두 끝났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의 학문은 다른 소년들보다도 뛰어났습니다. 그 일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이렇게 뜻을 정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겠다는 이들을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고 축복하셨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 뜻을 정하고 그 뜻을 굽히지 않았던 다니엘을 하나님은 축복해 주신 것입니다. 뜻을 정하고 그 뜻을 굽히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그 걸음을 인도하여 주신다는 것을 오늘 확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쪼록 말씀을 맺으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우상이 들끓는 바벨론 시대의 문화와 같은 시대입니다. 죄악의 물결이 홍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일수록 하나님의 말씀 안에 굳게 서서 온갖 죄악의 유혹을 이겨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이번 주간은 한가위 중추절을 맞이하게 됩니다. 먹고 마시는 문제 때문에 우리의 몸과 마음을 더럽히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혹 부득이하게 제사 문제 때문에 핍박을 당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기를 바랍니다. 다니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고난은 잠깐이지만 받을 영광은 무한합니다. 부디 다니엘의 결단이 우리의 결단이 되기를 바랍니다. 부디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베풀어 주셨던 은혜와 긍휼을 우리에게도 베풀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뜻을 정한 다니엘(다니엘 1:8~16)

    미국의 풍자 문학가인 마크 트레인이 쓴 소설 중에 왕자와 거지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17세기 영국런던의 어느 가정에 두 아이가 태아 납니다. 한 아이는 아주 허름한 빈민의 집에 태어납니다. 톰 캔디라는 아이인데 이 아이는 자라서 소매치기가 되고 거지가 됩니다. 한 아이는 그 당시 영국왕의 아들로 태어난 에드워드라는 아이입니다. 이 아이들이 우연한 기회에 만나게 됩니다. 이 거지인 톰이 소매치기를 하고 도망간다는 것이 왕국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깜짝 놀라서 숨을 곳을 찾다가 왕자 에드워드의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걸인 소년과 왕자는 서로 마음이 맞았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 걸인 소년은 “나는 아이스크림을 한번 실 컷 먹어봤으면 좋겠어! 좀 좋은 침대에서 자봤으면 좋겠어.”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왕자는 거지가 부럽다고 했습니다. “너는 가고 싶은 곳을 마음껏 다닐 수 있잖아. 나는 왕궁에 갇혀서 가고 싶은데도 갈수도 없다. 답답해서 못살겠다.”고 했습니다. 장난기가 발동해서 서로 옷을 바꾸어 입기로 했습니다. 왕자는 거지행세를 하고 거지는 왕자 행세를 했습니다. 거지가 된 왕자는 거지 옷을 입고 궁 밖으로 나갔습니다. 왕자 옷을 입은 거지는 궁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여러분 신나는 일입니다. 여러분이 보시기에는 누가 더 힘들겠습니까? 우리의 생각에는 “ 거지가 된 왕자가 더 힘들겠지?”라고 생각을 합니다. 다른 사람은 “왕자가 된 거지가 힘들거야.”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문제는 왕자가 된 거지입니다. 밖에서는 아무렇게나 생활을 했는데 손을 씻어야 됩니다. 예의를 지켜야 됩니다. 공부를 해야 됩니다. 시간대로 규칙적으로 생활을 해야 됩니다. 보통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생각할 때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똑 같다고 생각 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죄의 종으로 살았습니다. 세상 적으로 이야기를 하면 신분적으로 거지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왕자가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전서 2장을 보면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분이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왕자가 되었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지만 과거의 습관이 우리에게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집사가 되었지만 아직도 술집 앞을 지날 때면 목이 칼칼한 것입니다. 옛날 먹던 습관이 남아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과거의 언어, 과거의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건 왕자가 된 거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의 과거를 빨리 잊어버리고 새로운 생활의 적응해야 되는데 적응이 힘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날마다 말씀과 기도의 훈련을 해야 될 필요성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 왕자의 삶이나 그리스도인의 삶이나 아무렇게나 살 수 없습니다. 과거의 본능이나 하고 싶은 데로 살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을 무엇으로 결정할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행을 따라 삽니다. 누가 치마를 미니 스커트를 입으면 미니스커트를 입고, 롱 커트를 하면 롱 커트를 하는 것입니다. 누가 부동산 투기를 통해서 돈을 벌었다고 하면 나도 해야지 하며, 유행과 세속주의를 따라 갑니다. 또 한 부류는 집단의식에 끌려갑니다. 사람을 나눌 때 내편을 나눕니다. 네 가 아군이냐 적이냐를 나누는 것이죠. 그래서 그 사람이 내 그룹에 속하면 아무리 틀려도 옳은 것입니다. 상대가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내편이 아니면 틀린 것입니다. 꼭 정치인들의 모습 같습니다. 그룹의식, 갱 의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만나면 어디 출신이냐? 어느 학교 출신이냐? 를 묻습니다. 이것도 저속한 문화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자기의 행동을 자신의 이익에 둡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나에게 이익이 돌아와야 합니다. 교회 봉사도 이익을 따집니다. 손해 볼 것 같으면 하지 않습니다. “나는 못합니다. 그런 것” 딱 잡아뗍니다. 가려서 합니다. 나에게 조금이라도 이익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분들은 물질에 대해서 아주 사리가 밝습니다. 때로는 물질의 노예가 되어서 따라 갈 때가 많습니다. 이익이냐 손해냐 그것이 판단의 기준입니다.

    좀 더 성숙한 사람들은 이것이 선이냐 악이냐에 따라 행동합니다. 남들이 다 틀렸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선이고 정의이면 따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링컨 같은 사람입니다. 흑인들을 노예로 불이는 것 이것은 악이라고 생각하고 그 악과 싸웁니다. 동족 간에 남북이 전쟁을 하더라도 선을 지키기 위해서, 정의를 위해서 행동합니다. 좀 더 발전된  분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행동의 기준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기준은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에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기준할 때 거기에 따라야 합니다. 때로는 손해가 되도 하나님의 뜻이면 따라야 합니다. 내 모든 가족이 반대해도 하나님의 뜻이면 나 혼자라도 그 길을 가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1절에 보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물어야 합니다. 누가 의견을 이야기 하느냐? 누가 주장하느냐? 이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 로 결정을 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을 쫒아 살았던 사람이 성경에 나옵니다.

    누구입니까? 바로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였다고 오늘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주전 7C 에 남 왕국 유다 출신입니다. 그 당시 남 왕국 유다는 18대 여호야김이라는 왕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친 애굽 정책을 펴고 있었습니다. 그당시 바벨론과 애굽이 전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유명한 갈그미스 전투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전쟁에 바벨론이 승리했습니다. 애굽을 후원하던 유다가 미움을 샀습니다. 바벨론은 많은 군사들을 데리고 와서 예루살렘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바벨론은 예루살렘 성에 살고 있던 왕족들과 귀족들, 성경에 보니 흠 없고 잘생기고 똑똑한 소년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해 똑똑한 사람들을 다 데려가서 자기 사람들을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또 하나는 바벨론에 인재들이 많이 필요하니까 똑똑한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자신의 신하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똑똑한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유대인들을 바벨론화하기 위해서 이었습니다.

    여기에 다니엘과 세 친구들도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원하던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불행이 그의 앞에 다가 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결코 불행하다고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포로로 끌려 왔지만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그들을 왕궁으로 불러 들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을 바꾸고, 왕이 먹는 음식을 먹이고, 왕이 입는 옷을 입혔습니다.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그들의 정체성을 변질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니엘의 엘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벨드사살에 벨드는 바벨론의 우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특혜를 베풀고 맛있는 음식과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젊은이들을 회유시키는 하나의 전략입니다.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견디기 어려웠던 것이 무엇일까요? 고난과 핍박일까요? 그런데 그럴 때면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으로 무장해서 더 잘 이겨내고 순교도 불사했습니다. 그런데 잘 해주고 회유하고 친절하게 해주고 늘어지게 잠자게 해주면 하나같이 신앙이 병들어 버린 것입니다. 다 세속주의에 물든 것입니다. 어찌 보면 지금 그것을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먹게 했습니다. 그런데 왕의 진미와 포도주는 다니엘이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진미는 우상에게 드린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의 율법은 우상에게 드린 음식을 먹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엷은 포도주는 마셔도 독주는 마실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다니엘의 갈등이 주어집니다. 바벨론은 포로 생활 중에서도 바벨론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왕과 나라가 계속 바뀌었지만 그는 계속 총리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만큼 훌륭하고 총명하고 인격이 뛰어났던 것입니다.

    포로 생활 중에 다니엘이 총리가 되는 놀라운 승리를 경험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어떻게 인생의 변화가 가능했을까요?

    첫째는 그가 뜻을 정하였다는 것입니다.

    본문 8절을 한번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 다니엘은 뜻을 정했습니다. 어떤 뜻을 정했습니까? 더러운 우상 제물로 자신의 몸을 더럽히지 않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기로 다짐을 했습니다. 고린도 전서 10장 31절에서처럼 먹든지 마시던지 무엇을 하던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인생의 위대한 일을 한 사람은 분명한 뜻을 정해야 합니다. 뜻을 정한다는 것은 내 인생의 가치관을 정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가치관을 정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목적을 정하는 것입니다. 뜻을 정하면 뜻을 정한 곳에 길이 있습니다. 포로 소년에게 이런 특혜와 환대가 주어지면 얼마나 고마웠겠습니까? 그러나 다니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 우상 제물에 손을 대지 않겠다는 뜻을 정하는 것입니다.

    뜻을 정한다는 것은 우리의 인생의 목적을 정한다는 것과 똑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선배들은 독립운동을 하려고 뜻을 정하는 분이 있고, 나라를 위해서 뜻을 정하는 분이 있습니다. 뜻을 정한다는 것은 인생의 목적을 정하는 것입니다. 뜻이 있는 사람들은 당황하지 않습니다. 운전을 하다보면 갈림길에서 이리 갈까? 저리 갈까? 고민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에 분명한 비전과 목적이 없다면 그는 방황하게 됩니다.

    이사야 49장에 보면 “내가 헛되어 수고 하였으며 무익히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목적이 분명하지 않으면 힘만 낭비하게 됩니다. 가야 할 방향이 분명한 사람은 옆눈길을 돌리지 않습니다. 오직 목표만 향해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그의 일에 집중하게 됩니다.

    사도바울도 빌립보 3장에 “형제들아 아직 나는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쫒아가노라.” 라고 했습니다. 초점이 맞추어진 삶입니다. 초점을 맞춘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어떤 목적을 두고 그곳에 온 마음과 정신과 시간과 물질을 맞추면 강력한 힘이 들어 납니다. 우리가 안경을 쓸 때 초점이 맞지 않으면 사물이 흐릿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초점이 맞으면 잘 보이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습니다. 뜻을 정한 사람 목표가 분명한 사람은 위대한 일에 쓰임을 받습니다. 

    여러분 다윗을 보십시오. 사도행전 13장 36절을 보면 “다윗은 당시 하나님의 뜻을 쫒아 섬기다가 잠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쫒아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에베소서 5장 7절에 보니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합니다.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가를 분별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 말은 아버지의 뜻대로 하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갔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가 목적이 이끄는 40일 캠페인을 했습니다. 그 첫 번째 주제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준비되었다 입니다.” 정말 내 인생이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영광을 드리는 삶을 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곳에 우리 인생의 목적이 있습니다. 특별히 다니엘 당시의 음식 문화속에서는 어떤 사람이 주는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그 상을 차려주는 주인에게 내가 복종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의 바로가 주는 빵과 고기 덩어리를 떠날 때 그들이 독립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가 주는 그 고기와 떡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은 여전히 애굽의 노예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것을 떠나고 돌아설 때 그리고 광야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메추라기와 만나를 먹을 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니엘은 그것을 거부한 것입니다. 다니엘은 그래서 바벨론이 주는 음식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땅에서 나는 채소를 먹겠다는 것입니다.

    단지 밥 한끼를 먹고 먹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는 깊은 신앙적인 고백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내 주인으로 내 삶의 구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일날 예배드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의 주인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다른 일에 분주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세상의 노예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약속된 시간에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주인이라는 신앙의 고백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물질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열의 하나를 드리는 십일조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물질의 주인이라는 의미입니다. 열의 하나를 돌려드린다는 것은 이 물질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이 물질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다시생각하면 내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고백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새해를 시작하면서 뜻을 정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먹는 문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시간을 지키는 문제, 물질의 노예가 되지 말고 하나님을 위해서 이 물질을 드릴 수 있는 신앙의 고백이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름다운 뜻을 정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다니엘이 이렇게 변화된 삶을 위해서는 직접 행동했다는 사실입니다.

    뜻만 정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은 많이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누워서 머릿속에서 고래 등 같은 집을 열채를 지었다 부수었다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한 채도 짓지를 못합니다. 행동하는 신앙이 진정 변화를 경험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려고 할 때 요단강은 그때가 추수철이었기에 물이 많이 흘렀습니다. 그들이 요단강 물에 발을 담그는 순간 물이 줄어들고 마른 땅같이 되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물이 줄어들기를 기다렸다면 그들은 결코 그 강을 건널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것을 믿고 행동했을 때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행동하는 신앙,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내일부터는 이렇게 해야지, 내년부터는 이렇게 해야지 생각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못합니다. 당장 오늘부터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얼마나 많은 좋은 생각들이 실천되지 못하고 머릿속에만 머무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행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신앙의 능력입니다. 오늘 다니엘은 자기가 믿는 대로 뜻을 새운 데로 행동했습니다. 그는 환관장에게 가서 “나는 이것을 먹을 수 없습니다.” 라고 행동했습니다. 신앙은 믿는 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어떤 유수한 은행에서 아주 요직에 부장 한명을 특채했습니다. 부장을 특채해서 환영회를 하는 시간에 전무가 술을 한잔 따라서 부장에게 권하는 것입니다. 그때 부장이 “나는 그리스도인이기에 술을 먹지 않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전무가 화를 내면서 “옆에 있는 이 상무는 장로야. 장로는 술을 얼마나 잘 먹는데. 당신은 집사도 아닌 것이 술을 안 먹어.”라고 했습니다. “누가 그렇다고 하는 것과 나와는 상관없고 나는 그리스도인이기에 술을 먹지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분위기가 썰렁해졌습니다. 옆에 있던 총재가 “내가 주는 술은 거절하지 않겠지?” 다시 술을 따라 주었습니다. 부장이 “주시는 것은 자유이지만 저는 양심상 이것만은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저 부장 오래 일하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총재의 안색이 변하더니 한마디를 하는 것입니다. “자내가 진짜네. 나는 자네를 신뢰하겠어. 내가 예수 믿는 많은 사람들을 받는데 당신이 진짜네.” 라고 했습니다.  그 후부터 이 총재는 중요한 일이 있으면 이 부장을 불러서 상의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신앙 양심을 가지고 정직하게 행동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은행에 중직에 오르고 총재의 신임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거꾸로 생각합니다. 예수 믿는 것이 사회생활을 하는데 방해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정말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십시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선언하시고 공개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잘 되는 일입니다. 그것이 승리하는 길입니다. 숨기고 다니는 것은 참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는 행동에 옮겼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하나님을 신뢰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니엘은 자기들을 관리하는 감독관에게 가서 요구합니다. “내가 환관장에게 요구를 했더니 왕이 보고 우리 얼굴이 초췌해 지면 자기가 위험할까봐 허락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내가 감독관에게 다시 말씀드립니다. 열흘 동안만 저희가 채식을 하게 해주세요. 열흘 후에 우리 얼굴이 초췌하면 왕의 진미를 먹겠습니다. 그러나 저희 얼굴에 윤기가 흐르면 저희를 그냥 채식을 먹게 해주세요.” 그렇게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실험을 했는데 어떤 결과가 있었나요.

    성경 14절-16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그들의 말을 좇아 열흘을 시험하더니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진미를 먹는 모든 소년보다 나아 보인지라 이러므로 감독하는 자가 그들에게 분정된 진미와 마실 포도주를 제하고 채식을 주니라.”여러분 보세요. 열흘 동안 채식만 했는데 오히려 그들의 얼굴이 건강하고 윤기가 나고 아름다워 보였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실험을 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을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축복의 하나님이시고 믿는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분임을 알았기 때문에 이런 도전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니엘 3장을 보면 왕이 금 신상을 만들어 놓고 절하게 합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세친구들은 이것을 거절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칠배나 뜨거운 풀무불에 던저지게 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던저질지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고 비록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우리는 우상에게 절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셔서 그들을 풀무불에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게 하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정말 하나님을 믿는다면 믿는 대로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그곳에 신앙의 진가가 있습니다. 그 후로 다니엘 총리를 시기하는 자들이 그를 모함해서 왕 외에 다른 누구에게 기도하는 사람은 사자굴에 던져 넣기로 조서를 썼습니다. 다리오왕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도장을 찍었습니다. 다니엘은 사자굴에 던져지지만은 하나님은 사자들의 입을 막으셨습니다. 그 다음날 다니엘을 모함하던 무리들이 다 사자굴에 던져졌습니다.

    여러분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주일날 문 닫으면 장사 안 되는데?” 가게의 문을 닫고 주일날 봉사하는 사람들 보면 금요일 토요일 하나님이 다 채워 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유 목사님 지금도 부족한데 십일조하면 우리 다 굶어 죽어요.”라고 말합니다. 그럼 한번 해보세요. 진짜 굶어 죽는지. 그래도 망하게 되면 오세요. 돌려 드릴게요. 신앙은 시험해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말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시험해보라. 너희가 온전한 십일조를 내게 들여서 내 창고에 양식이 있게 하라. 그것 때문에 내가 너를 쌓을 곳이 없도록 붙지 아니하나 나를 시험해 보라.”고 말라기 3장 8절 이하에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신앙을 가지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은 오늘 말씀하시는 진정한 다니엘의 충성스러운 신앙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교회 고등학생이 주일이면 열심히 교회에서 봉사를 합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봉사를 하니까 늘 집에 돌아가면 늦게 됩니다. 그런데 이아이가 고3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교회를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아들을 이해를 못합니다. 가끔 술을 먹으면 술에 취해서 목사님께 전화를 해서 “우리 아이 잡아먹으려고 하십니까? 고3이 교회만 가서 살면 대학은 누가 붙여줍니까?”하고 말을 했습니다. 아이가 이 사실을 알고 왜 목사님께 전화 하냐고 반문을 합니다. 아버지가 “야 이놈아! 네가 우리 집 장남인데 대학도 못 들어가면 어떻게 하냐?”라고 말을 합니다. 이 아이가 기도를 하다가 이런 결정을 내렸습니다. “아버지 저하고 약속을 하십시다. 제가 주일날은 마음대로 교회에 봉사하고 예배하게 해주세요. 대신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두 달 동안만 시험해 보셔서 제가 성적이 떨어지면 제가 교회를 끊겠습니다. 만약 성적이 올라가면 저의 예배를 방해하지 마세요.” 이 아이가 주일날은 열심히 봉사를 합니다. 그리고 그 학교는 매일 시험을 보는데 월요일은 주일날 공부를 못했기 때문에 15등으로 떨어집니다. 그런데 화요일은 12등, 수요일은 10등, 목요일은 7등, 나중에 토요일은 1등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나중에 두 달 후에는 전교에서 1등을 하는 것입니다. 집중력을 가지고 기도하고 열심히 공부할 때 하나님은 그에게 곱절의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 1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더라.”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학문과 재주에 명철을 주셨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20절 말씀 “왕이 그들에게 모든 일을 묻는 중에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보다 십배나 나으니라.” 하나님이 지혜와 총명을 주는데 다른 박사들보다 10배나 총명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다니엘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해를 시작하면서 뜻을 새워보시기 바랍니다.
    “올해는 내가 정결한 삶을 살겠다.” “믿는 자의 합당한 삶을 살겠다.” “내가 하나님과 약속한 예배시간을 지키겠다.” “내가 주일 성수를 하겠다.” “내가 온전히 십일조 생활을 하겠다.” 한번 뜻을 새워보시기 바랍니다. 뜻을 새우면 길을 열어주시고 하나님의 축복이 그곳에 임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거지로 사시겠습니까? 왕자로 사시겠습니까? 여러분 거지의 신분을 벋어 버리세요. 하나님의 자녀의 왕자의 생각을 하세요. 왕자처럼 생각하시고, 왕자처럼 말하시고, 왕자처럼 걸어가시고, 왕자처럼 품위 있게 사세요.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축복이 그곳에 임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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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유다의 멸망과 바벨론의 1차 2차 3차 4차 포로의 역사  

    이스라엘은 북방 강대국 앗수르와 바벨론, 남방 강대국 애굽 사이에 낀 약소 국가였습니다. 
    남 유다의 제 16대 왕 요시야 당시는 세계 최강국이던 앗수르가 쇠퇴기에 접어들었고, 
    바벨론이 신흥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1. 므깃도 전투와 갈그미스 전투

    애굽은 앗수르를 도와 바벨론의 남하를 막기 위하여 갈그미스에서 바벨론과 싸우려고 하였습니다. 
    애굽 왕 느고는 갈그미스로 가기 위해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과해야 했는데, 
    이때 반 앗수르 입장이었던 요시야 왕은 북진하는 애굽과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애굽 왕 느고는 사자를 보내어 화친을 요청하며, 
    이 일은 하나님의 명령이고 자신이 싸우려는 대상은 요시야 왕이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대하 35:21). 
    그러나 요시야 왕은 듣지 않고 변장까지 하면서 전쟁터에 남기를 고집하였습니다(대하 35:21-22). 
    전쟁터에서 애굽의 궁수가 쏜 화살에 중상을 입은 요시야는 예루살렘에 돌아와 죽고 말았습니다(대하 35:23).

    요시야는 종교 개혁을 통해 영적 내리막길로 곤두박질하던 남 유다에 일시적으로나마 제동을 걸었지만, 
    요시야가 죽은 이후 남 유다의 국운이 갑자기 쇠약해지고 순식간에 멸망의 길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이후 애굽과 바벨론이 맞서는데, 이것이 갈그미스 전투(주전 605년)입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바벨론은 당시 근동 지방을 장악하였고, 
    애굽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왕하 24:7).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갈그미스 전투에서 승리한 후, 
    아프리카 대륙과 근동 아시아 지역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인 남 유다 왕국마저 정복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공격하였고, 
    3차에 걸쳐 유다 왕과 백성들을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3차에 걸친 바벨론 포로의 과정은 성전 파괴의 과정과 다름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들어서 가장 아끼는 성전을 파괴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을 철저하게 징계하셨습니다(왕상 9:7-9).

    바벨론 제1차 포로

    1. 포로 시기 – 주전 605년 / 여호야김 제 3(혹은 4)년, 느부갓네살 원년

    이때는 여호야김 왕 제 3년(단 1:1)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46:2은 이때를 여호야김 4년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기록에 1년 차이가 나는 이유는 열왕기하 23:34을 통해 해명할 수 있습니다. 

    열왕기 기자는 여호야김이 그의 동생 여호아하스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지 않고, 
    여호야김이 그의 아버지 요시야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는 요시야(주전 640-609b년), 여호아하스(주전 609b-608년), 여호야김(주전 608-597년) 순으로 왕이 되었지만(왕하 23:3-0, 34, 대하 36:1-4), 요시야 다음에 바로 여호야김이 왕이 된 것처럼 기술한 것은, 
    3개월의 짧은 통치 기간 동안 악을 일삼았던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왕하 23:31-32).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제 1차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주전 605년여호야김 제 4년이 되는 것입니다.

    2. 포로 대상과 당시 상황

    제 1차 바벨론 포로 때에는 다니엘을 포함한 왕족과 귀족들이 끌려갔습니다(단 1:3). 
    여호야김은 처음 3년은 바벨론을 섬기다가 다시 애굽과 동맹하여 반(反)바벨론 정책을 펼쳤고(왕하 24:1), 
    주전 602년 쇠사슬로 결박당하여 바벨론으로 끌려갔으며 성전 기구들을 약탈당하였습니다(왕하 24:2, 단 1:1-2, 5:2).

    바벨론 제2차 포로

    1. 포로 시기 – 주전 597년 / 여호야긴 즉위년, 느부갓네살 8년

    여호야긴주전 597년에 즉위하여 3개월 10일을 통치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왕하 24:8-12, 대하 36:9-10). 
    바벨론 역대기에 따르면, 티쉬리월(7월)로 시작되는 달력을 기준할 때 여호야긴이 왕이 딘 것은 주전 597년 불월(8월)이며, 3개월 10일이 지나 왕위에서 쫓겨난 것은 주전 597년 아달월(12월) 2일입니다.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포위한 후 얼마 동안의 시간이 경과한 다음에(왕하 24:10-11)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 성에 이르러 주전 597년 아달월(12월) 2일에 마침내 예루살렘 성을 점령한 것입니다. 

    이때 왕위에서 쫓겨난 여호야긴은 주전 597년* 니산월(1월) 10일에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됩니다(대하 36:10). 
    * 남유다 통치 연도는 티쉬리월 기준이므로 해가 바뀌지 않음.

    2. 포로 대상과 당시 상황

    바벨론은 여호와 전의 모든 보물과 왕궁 보물을 집어내었으며 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만든 것 곧 여호와의 전의 금기명을 다 훼파하였습니다(왕하 24:10-13, 대하 36:10).

    그리고 여호야긴 왕과 왕의 모친과 왕의 아내들과 내시와 나라의 권세 있는 자들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왕하 24:12, 15). 
    이때 용사 7천 명을 포함하여 방백과 백성 총 1만명, 그리고 공장과 대장장이 1천 명이 끌려갔는데, 그들은 모두 강장하여 싸움에 능한 자였습니다(왕하 24:14-16). 
    반란의 구심점이 될 소지가 있는 최고 지도자들과 탁월한 인물들을 모두 뽑아서 끌고 감으로 ‘빈천한 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도록하여 남 유다를 철저히 무력화 시킨 것입니다. 

    여기에는 에스겔 선지자와 에스더의 사촌 모르드개의 조상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겔 1:1-3, 에 2:5-6).

    바벨론 제3차 포로

    1. 포로 시기 – 주전 586년 / 시드기야 11년, 느부갓네살 19년

    시드기야는 바벨론에게 항복하라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권면(렘 27:12)을 듣지 않고 반(反)바벨론 정책을 고집하였고(왕하 24:20, 렘 27:12-13, 37:2), 
    바벨론은 시드기야 제 9년 10월 10일부터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습니다(왕하 25:1, 렘 39:1, 52:4). 
    시드기야가 애굽에 원군을 요청하여 바벨론 군대가 떠났다가 애굽 군대가 즉각 퇴각하자 다시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침공하여(렘 37:5, 11, 겔 17:15) 시드기야 11년까지 약 30개월 동안(티쉬리 기준 달력) 예루살렘 성을 에워쌌습니다(왕하 25:1-2, 대하 36:11-20, 렘 37:7-10, 겔 17:12-21). 
    마침내 주전 586년 시드기야 제 11년 4월 9일에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고 말았습니다(왕하 25:1-3, 렘 39:1-2, 52:4-6).

    2. 포로 대상과 당시 상황

    예루살렘이 포위되어 있는 동안 기근이 극심하여 자녀를 잡아먹을 정도로 비극적 참상이 빚어졌는데(애 2:20, 4:10, 사 9:20, 겔 5:10), 
    이는 모세의 예언대로(레 26:28-29, 신 28:53-57)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였습니다. 
    결국 BC 586년, 남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였고, 예루살렘 성이 함락된 4월 9일은 유다인들에게 바벨론 유수 기간 내내 금식과 애통의 날로 지켜졌습니다(슥 7:5, 8:19).

    성이 함락되던 때 시드기야는 밤에 도망하다가 갈대아 군대에게 잡혀 하맛 땅 립나로 끌려가 바벨론 왕에게 신문을 당하였습니다. 
    바벨론 왕은 시드기야의 목전에서 그 아들들을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어다가 죽는 날까지 옥에 가두었습니다(왕하 25:4-7, 렘 39:4-7, 52:7-11).

    ​예루살렘이 함락된 지 한 달 만인 5월 10일에 바벨론 시위대장관 느부사라단이 와서 여호와의 전과 왕궁과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사르고 사면 성벽을 헐었습니다(왕하 25:8-12, 대하 36:18-19, 렘 39:8-10, 52:12-16). 
    그리고 성전의 두 놋기둥(야긴과 보아스)과 받침들과 놋바다를 깨뜨려 그 놋을 바벨론으로 가져갔고, 또 가마들, 부삽들, 불집게들, 숟가락들과 섬길 때에 쓰는 모든 놋그릇을 다 가져갔으며, 또 금물의 금과 은물의 은을 가져갔고,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을 위하여 만든 두 기둥과 한 바다와 그 받침들을 취하였습니다(왕하 25:13-17, 대하 36:18-19, 렘 52:17-23).

    그리고 대제사장 스라야와 부제사장 스바냐와 전 문지기 세 사람을 잡고, 군사를 거느린 장관(내시) 하나와 왕의 시종 칠 인(혹은 다섯 사람)과 군대장관의 서기관 하나와 국민 육십 명을 잡아갔으며, 립나에서 그들을 쳐 죽였습니다(왕하 25:18-21, 렘 52:24-27).

    한편, 예레미야 52:28-30에는 바벨론에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항거하다 소규모로 잡혀간 자들이 총 4,600명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민족은 포로로 끌려간 자와 고국 땅에 남겨진 자, 그리고 재난을 피하여 주변국으로 도망친 자 등으로 나뉘어, 민족 전체가 갈기갈기 찢기고 그 존재가 점점 사라지는 최악의 비극적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선민 유다 백성이 하나님 없는 이방 나라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끌려간 것은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은 최대의 비극이요 수치였습니다. 이는 우상을 숭배하고 안식일과 안식년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그 거룩하신 뜻을 멸시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와 진노의 표현이었습니다(대하 36:21, 참고-렘 34:8-16).

    그러나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만 같던 바벨론이 하나님의 주권 역사로 메대와 바사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게 하시고(참고-렘 50:3, 9, 41-46장, 51장) 이스라엘 백성이 귀환하도록 하셨습니다(대하 36:22-23, 스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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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벨론 포로의 원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토 이스라엘에서 멀리 1,500km나 떨어진 바벨론 땅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간 것은, 율법적 관점에서 ‘언약의 땅에서 쫓겨나게 된 것’을 말합니다. 
    레위기에서는 이를 “땅이 그 거민을 토해내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레 18:24-25).

    레위기 18:27-28 
    너희의 전에 있던 그 땅 거민이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고
    그 땅도 더러워졌느니라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 있기 전 거민을 토함 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

    이것은 땅을 더럽히는 자가 받는 공통적인 심판의 원리로써, 출애굽 때 가나안 거민의 죄를 심판하고 그들을 토해내는 도구로 이스라엘을 사용하셨던 하나님이 이제 이스라엘의 죄를 심판하고 그들을 토해내는 도구로 바벨론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예레미야 2:13에서 예레미야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이 행한 근본적인 두 가지 악을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된 원인이었습니다. 
    첫 번째 악은 “생수의 근원 되는 하나님을 버린 것”
    두 번째 악은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 곧 다른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죄를 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권면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경멸하며 ‘욕으로’ 여길 정도로 타락하고 말았습니다(렘 6:10). 
    그렇게 하나님을 버린 결과, 우상숭배하는 죄와 안식일‧안식년을 범하는 죄에서 돌이키지 못하고 바벨론에게 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1. 우상숭배의 죄

    남 유다가 망하기 직전 활동했던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들의 죄를 지적하면서, 우상숭배에 대하여 여러 차례 경고하였습니다(렘 1:16-17, 5:19, 13:10, 25:6-7, 44:5-6 등). 
    당시 유다 백성들은 우상숭배에 골몰하여, 그 섬긴 우상의 수가 그들이 거한 성읍의 수와 같을 정도였습니다(렘 2:28, 11:13).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서 오지병을 깨뜨리게 하심으로써, 우상숭배한 범죄의 대가로 이스라엘이 반드시 패망할 것을 경고하셨다(렘 19:1-15, 참고-렘 7:30-34)

    예레미야 16:11-13 
    너는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 열조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서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고 나를 버려 내 법을 지키지 아니하였음이라.
    너희가 너희 열조보다 더욱 악을 행하였도다
    보라 너희가 각기 악한 마음의 강퍅함을 따라 행하고 나를 청종치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너희를 이 땅에서 쫓아내어.
    너희와 너희 열조의 알지 못하던 땅에 이르게 할 것이라
    너희가 거기서 주야로 다른 신들을 섬기리니 이는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지 아니함이라 하셨다 하라.
     

    유다의 심각한 우상숭배의 죄악을 깨우쳐 회개케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종 선지자들을 ‘부지런히’ 보내어 말씀을 전하셨지만 그들은 듣지 않고 무시했으며(대하 36:14-16, 렘 7:25, 25:4, 26:5, 29:19, 35:15, 44:4),  
    하나님의 실존을 불신하면서 선지자들을 거짓 선지자로 매도하고 죽이는 데 앞장섰습니다(렘 5:12-13). 
    그리고 회개할 기회를 주어도 회개치 않았습니다(렘 19:1, 10-13). 
    심지어 하나님의 성전 안에까지 우상을 갖다놓고 섬김으로써, 바벨론에 의해 성전이 파괴되기 전 이미 그들 스스로가 성전을 더럽혔던 것입니다(렘 32:34, 겔 8:1-18, 22:4).

    2. 안식일과 안식년을 이행하지 않은 죄

    1) 안식일의 불순종
    안식일 준수여부는 율법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을 나누는 기준이며 축복과 저주를 가름하는 분기점입니다(렘 17:19-27). 
    이는 안식일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는 영원한 표징이기 때문입니다(출 31:13, 겔 20:12, 20).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성문에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전을 삼키게 하겠다고 예레미야를 통해 엄중하게 경고하셨는데(렘 17:2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키지 않음으로, 바벨론 포로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에스겔 22:8 
    “너는 나의 성물들을 업신여겼으며 나의 안식일을 더럽혔으며”

    에스겔 22:26 
    “그 제사장들은 내 율법을 범하였으며 나의 성물을 더럽혔으며 거룩함과 속된 것을 분변치 아니하였으며 부정함과 정한 것을 사람으로 분변하게 하지 아니하였으며 그 눈을 가리워 나의 안식일을 보지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그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았느니라”
      


    2) 안식년의 불순종
    안식년의 규례는 ‘제 7년에 땅을 쉬게 하라’는 것과 ‘동족 히브리 사람 종을 7년째 자유케 하라’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레 25:2-7, 신 15:12-18).

    ① 6년 동안 땅에 파종하고, 제 7년에는 그 땅을 쉬게 하라(출 23:10-11, 레 25:1-7, 26:34-35)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이후로는 7년째 되는 그 해에는 그 땅에 파종해서는 안되었으며(레 25:2-4), 
    스스로 난 곡물이나 열매라 할지라도 거두지 말고 땅이 안식하도록 해야 했습니다(레 25:5). 
    그리고 안식년을 지키면 제 6년에 3년 소출을 주심으로 제 7년 안식년 뿐만 아니라 제 8년과 제 9년 까지도 부족함이 없게 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레 25:21, 렘 25:22). 
    이로써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알도록 하셨습니다(레 25:23).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욕심으로 인하여 제 7년에도 파종함으로 안식년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하심으로 땅이 안식하게 하셨던 것입니다(레 26:43).

    역대하 36:21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② 종이 동족 히브리 사람이면 6년 동안 부리다가 7년째는 자유케 하라(출 21:2-6, 신 15:12-18)
    율법에는 히브리 종인 경우 종이 된 지 7년째 되는 해에 반드시 놓아 자유하게 하도록 규정했습니다(출 21:2, 신 15:12). 
    그리고 자유의 몸이 된 종을 빈손으로 보내서는 안되며(신 15:13-14), 
    노예의 몸값을 받지 않고 조건 없이 해방시켜 주도록 규정하였습니다(출 21:2, 신 15:18).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안식년의 규례를 어기고 종들의 자유를 빼앗았습니다(렘 34:8-14).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바벨론에 끌려가게 하시어 그들도 자유를 빼앗기게 하셨던 것입니다. 

     예레미야 34:17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나를 듣지 아니하고 각기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언한 것을 실행치 아니하였은즉 내가 너희에게 자유를 선언하여
    너희를 칼과 염병과 기근에 붙이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너희를 세계 열방 중에 흩어지게 할 것이며”

    유다 백성은 무수한 죄 때문에 피 흘린 성읍이 되었고, 두껍게 녹슬어 버린 가마같이 되고 말았습니다(겔 24:6).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바벨론 포로 생활 70년’이라는 풀무 속에 집어넣고, 하나님의 노와 분을 쏟아서 유다의 죄악을 정결케 하셔야만 했습니다(렘 29:10-11, 겔 22:21-22, 24:12-14).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바벨론에 포로로 보내셨으나, 7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영적 암흑 상태로 방치해두지 않으시고 말씀을 보내어 철저하게 회개케 하시어 새로운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그들이 포로로 흩어진 상태에서도 하나님에 의해 구원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게 하셨습니다(렘 29:11-14). 
    정복자 바벨론에게 복종하고 그 땅에서 적응하며 그 역경 속에서 회개하여 정결케 됨으로써, 마침내 하나님의 정의와 구속 경륜을 확실히 깨닫고 믿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차귀환

    이스라엘 백성은 주전 605년, 597년, 586년 세 차례에 걸쳐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으나, 하나님께서는 무조건적인 은총을 베푸사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도록 허락하셨습니다(렘 29:14). 이스라엘 백성의 귀환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사44:28, 45:1-3)과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렘 25:11-12, 29:10, 14)대로, 바사(페르시아)왕 고레스가 귀환을 허락하는 칙령을 발표함으로 시작되었습니다(대하 36:22-23, 스 1:1-4). 이때부터 바사(페르시아) 제국 각처에 흩어져 있던 유다 포로들은 포로생활을 청산하고 3차에 걸쳐 돌아오게 됩니다. 제 1차 귀환은 주전 537년에 이루어졌습니다.

    1. 귀환 목적과 시기

    (1) 목적

    바사왕 고레스는 주전 538년에 귀환 조서를 내려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라고 공포했습니다(스 1:2-3, 참고-대하 36:22-23). 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을 비롯하여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들이 다 일어났습니다(스 1:5).

    하나님께서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어 성전 건축을 명하게 하신 것은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스 1:1). 바벨론 포로 귀환에 대하여 예레미야는 성전 회복과 그것을 통한 예배의 회복을 자세히 예언하였습니다. 이방인에게 성전이 짓밟히는 수치를 당한 것(렘 51:51)을 하나님께서 보수하시고(렘 50:28, 51:11), 다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렘 33:10-11, 18). 바벨론에서 돌아온 귀환민들의 최우선 과제는, 성전을 재건하고 성전을 중심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림으로써 선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2) 시기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바벨론 포로 생활이 70년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렘 25:11-12, 29:10), 이에 대해 역대하 36:21에서는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안식하지 못했던 토지가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게 된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 기간 ‘70년’은 실제 포로로 잡혀 간 때와 귀환하여 성전 건축을 시작한 때를 중심으로 볼 때 말씀대로 정확히 성취되었습니다. 제 1차 포로는 여호야김 3(혹은 4)년(느부갓네살 원년), 곧 주전 605년입니다(왕하 24:1, 렘 25:1, 참고-단 1:1-2). 제 1차 포로 귀환령이 내려진 것은 고레스 원년인 주전 538년으로, 귀환조서를 내린 다음(스 1:2-3), 이 명령을 따라 얼마 동안 귀환준비를 한 유대 민족은 1년 뒤인 주전 537년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스 1:5, 11, 3:1). 그리고 성전 건축을 시작한 것은 주전 536년 2월(시브월)입니다(스 3:1, 8). 그러므로 제 1차로 바벨론에 끄렬간 주전 605년에서 성전을 짓기 시작한 주전 536년까지 햇수로 70년이 정확히 성취된 것입니다.

    2. 귀환자와 귀환 당시 상황

    (1) 귀환자

    제 1차로 귀환할 때의 지도자는 스룹바벨과 예수아(여호수아)였으며, 총 49,897명이 귀환했습니다(스2:64-66).

    귀환자

    총인원

    49,897명

    회중 42,360명 (스 2:1-64, 느 7:5-66)

    지도자 11명, 평민 15,604명(가계별), 평민 8,540명(지역별), 제사장 4,289명,

    느디님 사람과 솔로몬 신복의 자손 392명, 레위인 341명,

    종족과 계보가 불명확한 자 652명,

    계수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 12,531명

    노비 7,337명 (스 2:65, 느 7:67)

    노래하는 남녀 200명 (스 2:65, 느 7:67. 245명으로 기록)

    또한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제 1차 귀환자 명단을 기록하면서, 귀환할 때 가지고 온 짐승들의 숫자까지 자세히 기록하였는데, 말 736마리, 노새 245마리, 약대 435마리, 나귀 6,720마리로 모두 8,136마리였습니다(스 2:66-67, 느 7:68-69). 이 짐승들의 수치를 귀환자 중 ‘온 회중’의 숫자(42,360명. 스 2:64, 느 7:66)와 비교해 보면, 대략 다섯 사람에 짐승이 한 마리 정도입니다(5인 기준 한 가족 당 1마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에도 “양과 소와 심히 많은 생축”이 함께하였습니다(출 12:38).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때도 짐승들과 같이 오게 하심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어려움이 없도록 지극한 사랑으로 돌보아 주셨습니다. 이렇게 귀환민들 뿐 아니라 각 생축들의 숫자까지도 정확하게 기록된 것은 귀환의 모든 과정에 하나님의 손길이 구석구석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며, 하나님께서 만물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주관하시고 섭리하셨음을 나타냅니다(롬 11:36).

    (2) 귀환 때 가지고 나온 재물

    유다인들이 귀환할 때, 그들이 거하는 주변의 이웃들이 은 그릇, 황금, 기타 물건, 짐승, 보물로 도와주었으며, 그 외에도 그곳 주민들이 하나님께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기까지 하였습니다(스 1:4, 6).

    또 고레스 왕은 옛적에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에서 옮겨다가 자기 신들의 당에 두었던 여호와의 전 기명을 돌려보냈는데, 유다 목백(牧伯) 세스바살이 그 기명들을 가지고 돌아올 때 금반 30, 은반 1,000, 칼 29, 금대접 30, 그보다 차(次)한 은대접 410, 기타 기명 1,000으로 도합 5,400이었습니다(스 1:7-11). 이는 제 1차 귀환자들이 신분에 관계없이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선전 건축 역사를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해 헌신하였음을 말해 줍니다.

    (3) 귀환 계기

    다니엘 선지자는 당시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던 강대국 바사의 총리로 있으면서 메대 왕 다리오 시대뿐만 아니라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까지 형통하였습니다(단 6:28). 이 말씀을 볼 때, 다니엘이 정치적으로 바사 제국의 기틀 확립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니엘은 메대의 다리오 통치 원년에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년 만에 마치리라”라고 했던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을 깨달았으므로(단 9:2), 귀환 1년 전(주전538년) 고레스가 유다인의 해방을 공포한 일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됩니다(대하 36:22, 스 1:1, 5:13).

    한편 다니엘 선지자는 고레스 왕 3년에도 바사 제국에 남아 활동하고 있었습니다(단 10:1). 그런데 다니엘 1:21에서는 다니엘의 최종활동 시기를 고레스 3년이라고 하지 않고 “다니엘은 고레스 왕 원년까지 있으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 또한, 고레스가 귀환 조서를 발표(스 1:1-4)하는데 다니엘이 어떤 영향력을 행사한 것임을 능히 추정케 합니다.

    (4) 성전 건축의 과정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선적으로 성막을 완성한 것처럼, 바벨론에서 귀환한 백성도 오직 성전 건축을 열망하였습니다.

    주전 537년 귀환한 백성들은 옛 성전이 있던 터 위에 단을 세우고(스 2:68, 3:3) 아침 저녁으로 번제를 드리고 초막절을 지키고 성전 지을 준비를 하였습니다(스 3:1-7).

    주전 536년 2월에 마침내 성전의 지대를 놓고 성전 건축 역사를 시작하였습니다(스 3:8-13).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이 집요하게 성전 재건을 방해했기 때문에 성전 건축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왕에게 조언을 하던 자들(모사)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뇌물을 받고 유다인들을 참소했던 것입니다(스 4:5).

    그 후 성전 건축은 약 16년 동안 중단되었다가(주전 536-520년), 주전 520년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와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비롯한 백성들의 마음을 감화하여 흥분시키므로, 다리오 왕 제 2년 6월 24일에 재개되었습니다(스 5:1-2, 학 1:14-15, 참고-슥 4:6-10). 이 시기에 스가랴 선지자는 성전 건축의 진정한 의미가 ‘메시아의 도래와 그의 왕국을 맞이하는 데 있음’을 밝히면서(슥 9-14장) 유다 백성의 바른 신앙 회복을 촉구하였습니다.

    성전은 주전 516년(다리오 왕 제 6년) 아달월(12월) 3일, 약 4년 5개월 만에 마침내 완성되었습니다(스 6:15). 이것은 주전 586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 무려 70년만의 일로, ‘70년’만에 귀환한다는 예언이 어김없이 성취된 것입니다(렘 25:11-12, 29:10).

    바벨론 포로 1차 귀환

    이스라엘 백성은 주전 605년, 597년, 586년 세 차례에 걸쳐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으나, 하나님께서는 무조건적인 은총을 베푸사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도록 허락하셨습니다(렘 29:14). 이스라엘 백성의 귀환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사44:28, 45:1-3)과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렘 25:11-12, 29:10, 14)대로, 바사(페르시아)왕 고레스가 귀환을 허락하는 칙령을 발표함으로 시작되었습니다(대하 36:22-23, 스 1:1-4). 이때부터 바사(페르시아) 제국 각처에 흩어져 있던 유다 포로들은 포로생활을 청산하고 3차에 걸쳐 돌아오게 됩니다. 제 1차 귀환은 주전 537년에 이루어졌습니다.

    1. 귀환 목적과 시기
    (1) 목적
    바사 왕 고레스는 주전 538년에 귀환 조서를 내려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라고 공포했습니다(스 1:2-3, 참고-대하 36:22-23). 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을 비롯하여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들이 다 일어났습니다(스 1:5).


    하나님께서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어 성전 건축을 명하게 하신 것은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스 1:1). 바벨론 포로 귀환에 대하여 예레미야는 성전 회복과 그것을 통한 예배의 회복을 자세히 예언하였습니다. 이방인에게 성전이 짓밟히는 수치를 당한 것(렘 51:51)을 하나님께서 보수하시고(렘 50:28, 51:11), 다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렘 33:10-11, 18). 바벨론에서 돌아온 귀환민들의 최우선 과제는, 성전을 재건하고 성전을 중심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림으로써 선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2) 시기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바벨론 포로 생활이 70년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렘 25:11-12, 29:10), 이에 대해 역대하 36:21에서는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안식하지 못했던 토지가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게 된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 기간 ‘70년’은 실제 포로로 잡혀 간 때와 귀환하여 성전 건축을 시작한 때를 중심으로 볼 때 말씀대로 정확히 성취되었습니다. 제 1차 포로는 여호야김 3(혹은 4)년(느부갓네살 원년), 곧 주전 605년입니다(왕하 24:1, 렘 25:1, 참고-단 1:1-2). 제 1차 포로 귀환령이 내려진 것은 고레스 원년인 주전 538년으로,  귀환조서를 내린 다음(스 1:2-3), 이 명령을 따라 얼마 동안 귀환준비를 한 유대 민족은 1년 뒤인 주전 537년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스 1:5, 11, 3:1). 그리고 성전 건축을 시작한 것은 주전 536년 2월(시브월)입니다(스 3:1, 8). 그러므로 제 1차로 바벨론에 끄렬간 주전 605년에서 성전을 짓기 시작한 주전 536년까지 햇수로 70년이 정확히 성취된 것입니다.

    2. 귀환자와 귀환 당시 상황
    (1) 귀환자
    제 1차로 귀환할 때의 지도자는 스룹바벨과 예수아(여호수아)였으며, 총 49,897명이 귀환했습니다(스2:64-66).

    귀환자
    총인원
      49,897명  

     회중 42,360명 (스 2:1-64, 느 7:5-66)
     지도자 11명, 평민 15,604명(가계별), 평민 8,540명(지역별), 제사장 4,289명,
     느디님 사람과 솔로몬 신복의 자손 392명, 레위인 341명,

     종족과 계보가 불명확한 자 652명,  
     계수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 12,531명 

     노비 7,337명 (스 2:65, 느 7:67)

     노래하는 남녀 200명 (스 2:65, 느 7:67. 245명으로 기록)

    또한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제 1차 귀환자 명단을 기록하면서, 귀환할 때 가지고 온 짐승들의 숫자까지 자세히 기록하였는데, 말 736마리, 노새 245마리, 약대 435마리, 나귀 6,720마리로 모두 8,136마리였습니다(스 2:66-67, 느 7:68-69). 이 짐승들의 수치를 귀환자 중 ‘온 회중’의 숫자(42,360명. 스 2:64, 느 7:66)와 비교해 보면, 대략 다섯 사람에 짐승이 한 마리 정도입니다(5인 기준 한 가족 당 1마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에도 “양과 소와 심히 많은 생축”이 함께하였습니다(출 12:38).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때도 짐승들과 같이 오게 하심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어려움이 없도록 지극한 사랑으로 돌보아 주셨습니다. 이렇게 귀환민들 뿐 아니라 각 생축들의 숫자까지도 정확하게 기록된 것은 귀환의 모든 과정에 하나님의 손길이 구석구석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며, 하나님께서 만물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주관하시고 섭리하셨음을 나타냅니다(롬 11:36).

    (2) 귀환 때 가지고 나온 재물
    유다인들이 귀환할 때, 그들이 거하는 주변의 이웃들이 은 그릇, 황금, 기타 물건, 짐승, 보물로 도와주었으며, 그 외에도 그곳 주민들이 하나님께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기까지 하였습니다(스 1:4, 6).


    또 고레스 왕은 옛적에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에서 옮겨다가 자기 신들의 당에 두었던 여호와의 전 기명을 돌려보냈는데, 유다 목백(牧伯) 세스바살이 그 기명들을 가지고 돌아올 때 금반 30, 은반 1,000, 칼 29, 금대접 30, 그보다 차(次)한 은대접 410, 기타 기명 1,000으로 도합 5,400이었습니다(스 1:7-11). 이는 제 1차 귀환자들이 신분에 관계없이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선전 건축 역사를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해 헌신하였음을 말해 줍니다.

    (3) 귀환 계기
    다니엘 선지자는 당시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던 강대국 바사의 총리로 있으면서 메대 왕 다리오 시대뿐만 아니라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까지 형통하였습니다(단 6:28). 이 말씀을 볼 때, 다니엘이 정치적으로 바사 제국의 기틀 확립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니엘은 메대의 다리오 통치 원년에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년 만에 마치리라”라고 했던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을 깨달았으므로(단 9:2), 귀환 1년 전(주전538년) 고레스가 유다인의 해방을 공포한 일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됩니다(대하 36:22, 스 1:1, 5:13).


    한편 다니엘 선지자는 고레스 왕 3년에도 바사 제국에 남아 활동하고 있었습니다(단 10:1). 그런데 다니엘 1:21에서는 다니엘의 최종활동 시기를 고레스 3년이라고 하지 않고 “다니엘은 고레스 왕 원년까지 있으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 또한, 고레스가 귀환 조서를 발표(스 1:1-4)하는데 다니엘이 어떤 영향력을 행사한 것임을 능히 추정케 합니다.

    (4) 성전 건축의 과정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선적으로 성막을 완성한 것처럼, 바벨론에서 귀환한 백성도 오직 성전 건축을 열망하였습니다.


    주전 537년 귀환한 백성들은 옛 성전이 있던 터 위에 단을 세우고(스 2:68, 3:3) 아침 저녁으로 번제를 드리고 초막절을 지키고 성전 지을 준비를 하였습니다(스 3:1-7).


    주전 536년 2월에 마침내 성전의 지대를 놓고 성전 건축 역사를 시작하였습니다(스 3:8-13).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이 집요하게 성전 재건을 방해했기 때문에 성전 건축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왕에게 조언을 하던 자들(모사)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뇌물을 받고 유다인들을 참소했던 것입니다(스 4:5).


    그 후 성전 건축은 약 16년 동안 중단되었다가(주전 536-520년), 주전 520년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와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비롯한 백성들의 마음을 감화하여 흥분시키므로, 다리오 왕 제 2년 6월 24일에 재개되었습니다(스 5:1-2, 학 1:14-15, 참고-슥 4:6-10). 이 시기에 스가랴 선지자는 성전 건축의 진정한 의미가 ‘메시아의 도래와 그의 왕국을 맞이하는 데 있음’을 밝히면서(슥 9-14장) 유다 백성의 바른 신앙 회복을 촉구하였습니다.


    성전은 주전 516년(다리오 왕 제 6년) 아달월(12월) 3일, 약 4년 5개월 만에 마침내 완성되었습니다(스 6:15). 이것은 주전 586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 무려 70년만의 일로, ‘70년’만에 귀환한다는 예언이 어김없이 성취된 것입니다(렘 25:11-12, 29:10).



    바벨론 포로시대의 연대

    B.C

    722. 북이스라엘 멸망(앗시리아)

    605. 바벨론 1차 포로(다니엘, 귀족들)

    597. 바벨론 2차 포로(여호야긴, 에스겔, 기술자)

    586. 바벨론 3차 포로/ 예루살렘의 완전한 멸망

    539. 10월 고레스의 바벨론 점령

    538/7 1차 포로 귀환(세스바살, 스룹바벨): 에스라 1-6장

    520 학개, 스가랴 선지자의 활동

    515 제2성전 완공

    492. 1차 페르시아 전쟁(다리오1세, 헬로도토스에 따르면 아토스 곶에서 폭풍을 만나 300척의 전함과 2만명의 군사를 잃음)

    490. 2차 페르시아 전쟁(다리오 1세, 마라톤 평야에서 아테네의 중장병 밀집대전술에 패함)

    480. 3차 페르시아 전쟁(크세르크세스, 살라미스 해전에서 패배)

    465. 궁정 쿠데타로 크세르크세스 사망

    465. 크세르크세스의 아들 아닥사스다 1세 집권(느헤미야가 술맡은 관원)

    461. 이집트가 페르시아 제국에 반기

    458 2차 포로 귀환(에스라): 에스라 7-10장/ 1차 신앙운동

    444/5 3차 포로 귀환(느혜미야): 느헤미야서/ 성벽재건 공사와 2차 신앙운동

    바벨론의 유다 왕국 1차, 2차, 3차 침공 정리하기
     

    각각의 침공은 유다 왕국의 상황과 바벨론 제국의 정책에 따라 다른 결과를 초래했으며,
    궁극적으로 유다 왕국의 멸망으로 이어졌습니다.

    (1) 1차 침공 (기원전 605년)

    배경: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 2세가 갈그미스 전투에서 이집트를 물리친 직후,
    유다 왕국을 포함한 팔레스타인 지역을 장악하려는 전략의 일환으로 예루살렘을 침공했습니다.

    결과:

    이때 바벨론은 예루살렘을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유다 왕국을 바벨론 제국의 속국으로 삼고 조공을 요구했습니다.
    다니엘과 같은 귀족 청년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2) 2차 침공 (기원전 597년)

    배경:

    기원전 597년, 유다 왕국의 왕 여호야김이 바벨론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왕위를 이어받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야긴도 바벨론의 공격에 직면하여 항복하게 되었고,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 2세는 여호야긴과 함께 많은 유다의 귀족들, 군사 지도자들, 기술자들을 포함해 약 10,000명을 포로로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이때 에스겔도 함께 끌려갔습니다.

    결과: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여호야긴과 함께 많은 유다의 귀족들과 기술자들을 포로로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이는 첫 번째 주요 바벨론 유수로 이어졌으며, 여호야긴 대신 시드기야가 바벨론에 의해 유다 왕국의 왕으로 임명되었습니다.

    * 참고(시작)
    에스겔의 활동 에스겔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후, 바벨론에서 예언자로서의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예언 활동은 주로 바벨론에 있는 포로들 사이에서 이루어졌으며,
    그들은 바벨론 강가에 거주하면서 에스겔의 예언을 들었습니다.

    에스겔은 바벨론에서 이스라엘의 죄악을 꾸짖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며, 나중에 회복될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해 예언했습니다. 그의 예언들은 후에 "에스겔서"로 집대성되었으며, 구약 성경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 참고(끝)

    (3) 3차 침공 (기원전 586년)

    배경:

    시드기야 왕이 바벨론에 반란을 일으키자, 느부갓네살 2세는 다시 예루살렘을 침공했습니다.

    결과: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철저히 포위하고 결국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솔로몬의 성전)이 파괴되었고,
    시드기야 왕은 체포되어 그의 자식들이 처형된 후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이 침공으로 유다 왕국은 완전히 멸망했고,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으며, 이는 바벨론 유수의 절정이 되었습니다.

    요약

    1차 침공: 기원전 605년
    2차 침공: 기원전 597년
    3차 침공: 기원전 586년

    이 세 차례의 침공을 통해 유다 왕국은 점차 바벨론 제국에 완전히 흡수되었고, 유다 왕국의 독립적인 정치체는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다른 자료 참고함

    (2) 2차 바벨론 유다 침공 (기원전 597년)

    2차 바벨론 유다 왕국 침공기원전 597년에 발생한 사건으로,
    이 침공은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왕 느부갓네살 2세(Nebuchadnezzar II)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수행되었습니다.

    배경

    유다 왕국은 이집트와 바벨론 사이에서 외교적 줄타기를 하며 자주 이들 강대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유다의 왕이었던 여호야김(Jehoiakim)은 바벨론에 조공을 바치고 있었지만,
    이집트의 지원을 받아 바벨론에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반란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2세의 분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기원전 597년, 느부갓네살 2세는 유다 왕국을 응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침공했습니다.
    바벨론 군대는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을 포위했으며, 이 과정에서 여호야김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여호야긴(Jehoiachin)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여호야긴은 바벨론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맞서 싸울 수 없음을 깨닫고 결국 항복하게 되었습니다.

    결과

    느부갓네살 2세는 여호야긴을 폐위시키고 그와 함께 유다의 귀족들, 기술자들, 그리고 엘리트 계층 약 10,000명을 포로로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이는 유다 왕국에서 일어난 첫 번째 주요 포로 이주 사건으로, 나중에 "바벨론 유수"라고 불리는 유대인들의 대규모 이주와 유배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이와 함께 바벨론은 여호야긴의 삼촌 시드기야(Zedekiah)를 유다 왕으로 세웠지만, 이는 바벨론의 꼭두각시 왕에 불과했습니다.
    유다는 바벨론의 속국이 되었고, 시드기야는 바벨론에 조공을 바쳐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1차 바벨론 유다 왕국 침공은 유다의 독립성을 크게 훼손시켰으며,
    이로 인해 유다 왕국은 점점 더 바벨론의 통제 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침공은 이후 2차, 3차 바벨론 침공으로 이어져, 기원전 586년에는 예루살렘이 완전히 파괴되고 유다 왕국이 멸망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3) 3차 바벨론 유다 왕국 침공 (기원전 586년)

    3차 바벨론 유다 왕국 침공은 기원전 586년에 발생한 사건으로, 이 침공은 유다 왕국의 완전한 멸망과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로 이어진 중요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이 침공은 바벨론 제국의 왕 느부갓네살 2세(Nebuchadnezzar II)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유다 왕국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Zedekiah)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배경

    2차 바벨론 침공(기원전 597년) 이후, 바벨론은 유다 왕국의 통제권을 장악하고 여호야긴(Jehoiachin)을 폐위한 뒤 그의 삼촌 시드기야(Zedekiah)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시드기야는 바벨론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의 왕으로서 즉위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바벨론의 지배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집트의 지원을 믿고 바벨론에 대항했지만, 이는 유다 왕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치명적인 실수로 이어졌습니다.

    시드기야의 반란에 대응하여 느부갓네살 2세는 유다 왕국에 대규모 군대를 보내 예루살렘을 포위했습니다.
    포위전은 기원전 586년에 시작되어 18개월간 지속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이 기간 동안 극심한 기근과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결국,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시드기야를 체포했습니다.
    시드기야는 포로로 잡혀 바벨론으로 끌려갔으며, 그의 아들들은 그의 눈앞에서 처형당하고 시드기야 자신은 눈이 멀게 되는 끔찍한 운명을 맞았습니다.

    결과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철저히 파괴했습니다.
    성벽은 허물어졌고, 특히 솔로몬이 지은 제1성전(솔로몬 성전)이 불타 파괴되었습니다.
    이로써 유다 왕국의 독립적인 존재는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으며, 유다 지역은 바벨론의 한 지방으로 전락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갔고, 이는 유대인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인 바벨론 유수(Babylonian Exile)로 이어졌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기간 동안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이는 그들의 신앙과 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3차 바벨론 침공은 유다 왕국의 종말을 의미하며, 이후 약 50년간 유대인들은 바벨론에서 유배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유대교의 역사뿐만 아니라 중동 지역의 정치적 지형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참고자료:
    https://blog.naver.com/samhoung/222069461208



    ​바벨론 포로 귀환 

    ​B..C 722년에 북이스라엘이 멸망합니다.
    136년 후 B.C. 588년에 남유다가 멸망합니다.
    남유다가 망한 연도는 B.C. 586년이 아니고, B.C. 588년임이 밝혀졌습니다.

    ​바벨론 포로는 B.C. 605년부터 B.C. 588년까지 3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첫번째 포로는 유다왕 여호야김 왕 때 였습니다.

    이때 다니엘과 그의 3친구들이 끌여갔습니다.

    바벨론은 여호야김 왕을 폐위하고 그의 아들 여호야긴을 세웠습니다.

    여호야긴 왕은 요시야 왕의 손자이자 여호야김 왕의 아들로,

    B.C. 598년에 아버지가 죽은 후 18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당시 유다는 바벨론 제국과 이집트 사이에서 힘겹게 버티고 있었고,

    여호야김 왕​​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조공을 바치며 신하의 입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야김 왕이 바벨론에 반기를 들고 이집트와 동맹을 맺으려 하면서,

    유다는 다시 바벨론의 침략을 맞게 됩니다.

    여호야긴 왕의 통치는 단 3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바벨론 제국의 강력한 압박을 받았고,

    결국 느부갓네살 왕이 직접 예루살렘을 공격해 왔습니다.

    여호야긴 왕은 당시 바벨론의 군사적 압력에 대항할 수 없었으며, 결국 항복하게 됩니다.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여호야긴 왕과 그의 가족,

    그리고 유다의 지도층 인사들을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이 사건이 바로 유다 왕국의 첫 번째 바벨론 포로 사건으로 기록됩니다.

    바벨론으로 끌려간 여호야긴 왕은 유다 왕으로서의 지위를 잃었고,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야긴 왕과 함께 끌려간 사람들은 유다의 귀족, 장인, 군사 지도자들이었으며,

    이는 유다 왕국이 사실상 바벨론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유다에는 여호야긴 왕의 삼촌인 시드기야가 바벨론의 괴뢰 왕으로 세워지게 되지만,

    그는 또한 바벨론에 반기를 들고 결국 예루살렘의 완전한 파괴와 두 번째 포로 사건을 초래하게 됩니다.

    여호야긴 왕은 바벨론에서 약 37년 동안 포로로 지냈습니다.

    바벨론의 왕이 바뀌면서 그의 처지가 조금 나아졌습니다.

    에윌므로닥이 바벨론의 왕이 되었을 때,

    그는 여호야긴을 감옥에서 풀어주고 그에게 왕처럼 대접했습니다.

    성경은 여호야긴이 바벨론 왕의 식탁에서 음식을 먹었고,

    일정한 생활비를 받으며 비교적 좋은 대우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열왕기하 25:27-30, 예레미야 52:31-34).

    이는 당시 여호야긴이 비록 포로였지만,

    유다의 왕족으로서 명예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 사건은 여호야긴 왕의 왕권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상징하며,

    결국 하나님의 백성에게 회복의 희망을 암시하는 요소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그의 포로 생활 이후 운명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지만,

    그는 바벨론에서 여생을 보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B.C. 597년에 2번째 포로가 이루어집니다.

    이때 유다의 귀족, 관리, 군인, 기술자 등 1만명이 끌여갔습니다.

    B.C. 588년에 3번째 포로가 이루어집니다.

    유다왕 시드기야 때 였습니다.

    바벨론은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성전을 불태우고, 시드기야의 눈을 뽑고, 쇠사슬에 묶어 끌고 갔습니다.

    바벨론 포로와 귀환로

    바벨론 포로는 7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B.C. 538년에 바벨론을 정복한 고레스는 B.C. 537년에 포로를 1차로 석방합니다.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석방된 이스라엘 백성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과 성벽을 재건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대적 사마리아인들의 방해로 성전공사가 중단됩니다.(B.C. 534-B.C. 520 -- 16년간)

    B.C. 458년 2차 석방이 이루어집니다.

    페르시아 아닥사스다 왕 때였습니다.

    에스라를 중심으로 석방됩니다.

    에스라는 학사로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성전 재건에 앞장섭니다.

    B.C. 455년에 3차 석방이 이루어집니다.

    느혜미아를 중심으로 석방됩니다.

    페르시아 아닥사스다왕의 허락으로 귀환한 느혜미나와 백성들은 성벽 재건을 이루어냅니다.


    ‘유대인들의 70년 포로귀환과 성전 중건’

    부제> ‘유대민족 엑서더스· 다니엘의 70이레’

    다니엘 선지자 ‘예레미야’의 70년 예언 깨닫아

    BC 606년 포로 ‘고레스 칙령’ BC 536년 귀환

    ‘이사야’ 태어나지도 않은 이방 왕, 고레스예언

    중건은 여러번 ‘고레스 다리오 아닥사스다’시기

    ‘니산월’ 바벨론 포로 이후 히브리 월력의 첫달

    유월절은 니산월에 ‘출애굽 기념하는’ 최대명절

    다니엘 9장

    1.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받던 첫 해

    2.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책을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 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 년만에 그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21. 내가 기도할 때에 이전에 환상 중에 본 그 사람 가브리엘이

    22. 다니엘아 내가 이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려고 왔느니라

    23. 그런즉 너는 이 일을 생각하고 그 환상을 깨달을지니라

    24.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죄악이 용서되며,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25.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광장과 거리가 세워질 것이며

    26. 예순두 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무너뜨리려니와 그의 마지막은 홍수에 휩쓸림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27. 그가 장차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맺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하게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하니라.(다니엘서 9장)

    ▲ 남유다 70년의 포로 기간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예루살렘 침입으로 인해 제1차로 포로가 되어 끌려간 BC 606년부터 스룹바벨의 인도로 제1차로 귀환한 BC 536년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    

    ● ‘70년 포로생활’ 구약성경 다니엘 9장

    구약성경의 다니엘 9장은 세계사의 관점에서 폭넓게 볼 때 역사서라 칭하기 보다는 미래 진행형의 대분수령을 이루는 핵심 축이라 할만하다. 단지 유대인을 향한 일획일점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은 현미경적 예언뿐만 아니라 이들 민족을 둘러싼 고대제국의 흥망성쇠, 그리고 현시점의 지구촌 인류에게도 섬뜩한 적색 경고음을 연신 정조준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의 다니엘 9장의 예언을 함축하면 다음과 같다. 예언서의 핵심은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의 귀환과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축, 이어 메시아의 탄생과 죽음, 성전파괴와 이스라엘 국가의 멸망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적그리스도의 등장과 세계정부의 수립에 이어, 최종적으로는 메시아(그리스도)의 제국의 종결점으로 일대 파노라마를 형성한다.

    다니엘서 9장의 서두는 선지자 ‘예레미야’의 70년 예언을 깨닫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1-2절) 다니엘은 다리오(Darius) 왕 원년인 BC 538년에 70년 포로의 기간이 마무리되고 있음을 인지하였다.


    ▲ 유대 포로귀환과 연이은 예루살렘성 중건은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니었다. “바사 왕 고레스와 다리오와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따라 성전을 건축하며 일을 끝내되”(에스라 6장 14절)   

    이어 다니엘이 기도할 때에 천사가 와서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언한다. 이 역사적 대사건인 다니엘의 70이레의 꿈은 BC 538년 메대족속 아하수에로(Ahasuerus)의 아들 다리오가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첫해에 본 환상이다.(21-27절)

    여기에서 한 이레는 7년이다. 구약성경의 중요 사건들에는 1일은 1년으로 계산한 사례가 다수 발견된다. 단적인 실례를 찾아본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40일 정탐하고 나서 돌아와 불평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생활을 내리시는데 1일을 1년으로 계산하여 40일을 40년으로 계산하여 40년간의 광야생활을 내리셨다.(민수기 14:34)

    다니엘이 먼저 깨달은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종식될 것에 대한 예레미야의 예언을 살펴본다.

    다니엘은 “이 민족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의 왕을 섬기리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예레미아 25:11-12, 29:10)는 말씀을 회상하기 시작한다.

    예레미아의 말씀은 ‘에스라’에서도 동시 확증된다. “여호와의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려 하나이까 이를 노하신 지 칠십 년이 되었나이다.”(에스라 1:12)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에서 본토로 귀환하게 된 대사역은 언제 극적으로 성취되었을까? 2년 뒤 장인이요 외숙부인 ‘다리오’가 죽고 ‘고레스(Cyrus)’가 BC 537년 집권하게 된다. 이 역사적 사건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파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에스라 1:1-3)

    예레미야의 예언 가운데서 백미는 바벨론 멸망(예레미야 25장, 29장)이었다. 그렇다면 이 고레스는 누구인가? BC 539년 고레스는 바벨론 왕 벨사살이 연회를 베풀던 밤에 바벨론 제국을 멸망시키고(다니엘 5:30) 바사 제국을 창건했다.

    “고레스는 해방자로 자처하며, 바벨론에 남겨 두었던 신상들을 원래 있던 성읍에 되돌려 보냈고, 포로 된 사람들을 귀향시키는 선정을 베풀었다. 그 결과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유다 백성들은 본토로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할 수 있었다.”(역대하 36:22-23)


    ▲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에서 본토로 귀환하게 된 대사역은 언제 극적으로 성취되었을까? 2년 뒤 장인이요 외숙부인 ‘다리오’가 죽고 ‘고레스(Cyrus)’가 BC 537년 집권하게 된다. 유물은 고레스 칙령.    

    ● BC 586년 바벨론에 의해 최종 멸망

    이미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왕(Nebuchadnezzar)의 꿈을 통하여 바벨론 이후에 일어날 약 1천년 제국에 대해서 예언한 바 있다. 생생한 실례는 바벨론과 페르시아, 헬라, 로마시대를 거쳐 열국시대까지 정확하게 이미 역사에서 실현되었다.

    ▲ 이미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왕(Nebuchadnezzar)의 꿈을 통하여 바벨론 이후에 일어날 약 1천년 제국에 대해서 예언한 바 있다. 생생한 실례는 바벨론과 페르시아, 헬라, 로마시대를 거쳐 열국시대까지 정확하게 이미 역사에서 실현되었다.

    이들 백성들이 바벨론에 끌려가게 된 역사적 사건을 살펴본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분열된다. 북이스라엘은 BC 721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남유다도 BC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 최종 멸망하게 된다. 남유다는 바벨론의 단번의 침공에 의해 망한 것이 아니라 총 세 차례의 침공으로 멸망했다. 첫 번째 침공은 BC 606년이다.

    이에 남유다 70년의 포로 기간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예루살렘 침입으로 인해 제1차로 포로가 되어 끌려간 BC 606년부터 스룹바벨의 인도로 제1차로 귀환한 BC 536년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 최종 3차까지 귀환한다.

    이에 이스라엘은 BC 536년에 1차 포로귀환을 하게 된다. 남유다가 포로로 잡혀간 때는 BC 606년이니 70년 만에 귀환하게 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바벨론의 1차 침입이 시작된 BC 606부터 고레스의 칙령으로 인한 1차 귀환 시점인 536년으로 계산한다.

    ▽ BC 536년 제1차 포로 귀환,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스룹바벨 등이 일차로 귀환(에스라 1-6장) ▽ BC 458년, 에스라의 제2차 귀환(에스라 7-10장) ▽ BC 445년, 제3차 귀환, 느헤미야의 주도(느헤미아 1-2장)


    ▲ 다니엘이 포로로 잡혀간 연대가 BC 606년이라고 할 때, 다니엘이 예언서를 읽을 때는 70년이 거의 끝날 시기였을 것이다.    

    다니엘이 포로로 잡혀간 연대가 BC 606년이라고 할 때, 다니엘이 예언서를 읽을 때는 70년이 거의 끝날 시기였을 것이다.아마도 포로생활 69년이 지나간 때인 듯하다. 그러므로 다니엘은 민족의 귀환에 대한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되기까지 불과 1년이 남은 시점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기도한 것이다.

    다니엘의 예언서로부터 약 200년 전을 소급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서 태어나지도 않은 이방 왕, 고레스에 대해 이렇게 예언하셨다.

    분명 “다니엘이 고레스 왕 원년까지 있으니라”(다니엘서 1장 21절)는 말씀처럼, 다니엘은 이사야서 44장을 고레스왕에게 보여주었을 것이고 자기 이름이 분명 예언된 내용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을 것이 틀림없다.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 하는 자니라.(이사야 44:28)

    고레스 왕이 포로 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귀환하도록 허락한 중대한 사건이요, 유대 민족 역사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

    ● 유대인 포로 3차례에 걸쳐 귀환

    유대인들이 본토로 귀환하게 되었고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는 명은 ‘70이레의 시간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에 성전중건의 예언의 시점을 다시 세밀히 규명하여 본다.

    성전 중건에 대한 예언은 ‘에스라 느헤미아 예레미아 다니엘’서를 심층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대두된다.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는 영이 난 것이 언제인지는 크게 2가지이다. 그리고 유대 포로귀환과 연이은 예루살렘성 중건은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니었다.


    ▲ 이스라엘은 BC 536년에 1차 포로귀환을 하게 된다. 남유다가 포로로 잡혀간 때는 BC 606년이니 70년 만에 귀환하게 된다.     

    “유다 사람의 장로들이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의 권면을 따랐으므로 성전 건축하는 일이 형통한지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명령과 바사 왕 고레스와 다리오와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따라 성전을 건축하며 일을 끝내되”(에스라 6장 14절)

    이제부터는 유대인의 70년 포로 생활 종식에 이어, 예언의 중핵인 70이레에 대해 본격 규명해 보기로 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고레스 칙령이 일대 분기점이 된 것이 너무 확실하다. 또 하나는 ‘아닥사스다왕’(Artaxerxes)때이다. 이 시점은 후에 상술하겠지만 다니엘 70이레의 대예언 중 예수님의 탄생과 사역, 십자가 처형과 가장 일치한다.

    ▲ 성전 중건에 대한 예언은 ‘에스라 느헤미아 예레미아 다니엘’서를 심층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대두된다.     

    아닥사스다는 두 번째, 세 번째 유다인 귀환을 허락했고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잠시 중단시키기도 했었다.(에스라 4:7-24) 두 번째 귀환은 아닥사스다왕 칠년에 일어났다. “아닥사스다왕 칠년에…예루살렘으로 올아올 때에”(에스라 7:7)

    세 번째는 아닥사스다왕 20년 재위 때이다. 유대인의 세 번째 귀환 느헤미아의 기록이 집중조명 받는다. 유대인의 포로 귀환공동체를 인솔하여 난관에 봉착한 에스라의 개혁을 돕기위해 왕의 재가를 얻어 예루살렘을 찾아와 고락을 같이했다.

    포로 잡혀갈 때 세 번에 나누어서 잡혀 갔는데 돌아올 때도 세 번에 나누어서 돌아오게 된다. 느헤미야는 에스라와 동시대에 활동했고 바벨론에서 출생했다. 느헤미야는 총독이었고 세 번째 포로귀환의 인솔자였다.


    ▲ 느헤미야는 선지자 에스라와 동시대에 활동했고 바벨론에서 출생했다. 느헤미야는 총독이었고 세 번째 포로귀환의 인솔자였다.  

    유대인의 세 번째 귀환인 BC 445년 아닥사스다왕 20년의 조서를 살펴본다. 아닥사스다왕은 이십년 ‘니산월’에 왕의 술을 맡은 관원은 느헤미야이다. 예루살렘 성문이 불에 탄 채로 남아 있고 성읍이 여전히 황폐되어 있다는 소식으로 근심에 빠져있는 느헤미야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을 중건하도록 허락하는 조서를 내린다.(느헤미아 2:1-9)


    ▲ 언제 공격해 올지 모르는 주변 국가의 위협을 받고 한쪽 손에는 공사에 필요한 쟁기를, 또 한쪽 손에는 이방 민족의 침략을 저지할 무기를 들고 공사를 진행해야 했다. (느헤미아 4:16-18)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명령이 내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귀환한다. 그러나 이 공사는 경제적인 여건이나, 인원동원 등의 문제뿐 아니라 이웃 민족의 방해 공작 때문에 아주 어렵게 공사를 진행하였다. 언제 공격해 올지 모르는 주변 국가의 위협을 받고 한쪽 손에는 공사에 필요한 쟁기를, 또 한쪽 손에는 이방 민족의 침략을 저지할 무기를 들고 공사를 진행해야 했다.

    이 때의 형편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내 수하 사람들의 절반은 일하고 절반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을 가졌고… 성을 건축하는 자와 짐을 나르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건축하는 자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건축하며”(느헤미아 4:16-18)


    ▲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명령이 내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귀환한다. 그러나 이 공사는 경제적인 여건이나, 인원동원 등의 문제뿐 아니라 이웃 민족의 방해 공작 때문에 아주 어렵게 공사를 진행하였다.    

    니산 월이 매우 주목을 받는다. 여기에서 유월절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유월절의 절기와 다니엘서의 예언은 볼트와 너트처럼 뗄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니산 월’(the month of Nisan)은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가 이후, 사용된 히브리 월력의 첫 번째 달이다. 니산 월 14일은 유월절로 지켜졌다. 유월절은 유대의 최대 명절이다. 출애굽기가 기원이다.

    야훼는 이집트가 히브리 노예들을 풀어주도록 하기 위해 이집트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린다. 마지막 재앙은 이집트에서 태어난 모든 첫 아이(가축도 포함된다)들의 죽음이다.

    모세는 히브리인들에게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발라두면 밤에 야훼가 보낸 죽음의 사자가 그 집을 그냥 지나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유월절의 시작이다. 이 첫 유월절은 무교병(발효시키지 않은 빵)의 축제라고도 부르는데, 출애굽기 12장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히브리인들은 서둘러 이집트를 떠나야 했으므로 신은 준비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발효된 빵이 아니라 발효시키지 않은 빵을 만들라고 명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충실히 지켰다. 유월절 축제 기간은 7~8일 정도다. 이때 무교병을 먹는 게 전통이다


    성경의 남북 분단 시대

    북이스라엘이 BC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할 때까지 약 208년간이나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역사(history)와 하나님의 역사(working)는 하나님의 주권이며 사람과의 협력의 역사이다. 베데스다 못가의 서른여덟 해 된 병자를 고쳐 주신 일을(요 5:1-9) 생각하며, 38선에 의해 분단된 이 나라를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들도 있다. 분단된 지 70년, 이를 성경의 바벨론 포로 생활과 일치시키는 것이 적절한지 의문이다. 그러나 유의미한 시도임에는 분명하다. 그리고 현 시점을 영적으로 바벨론 포로 종결로 보아야 할지, 시작으로 보아야 하는가에 따라 관점의 차이는 크다

    한국의 분단과 통일의 기간이 바벨론 포로기와 같이 70년과 동일한지, 애굽 430년 기간이 될지, 광야 생활 40년의 기간이 될지, 아직 바벨론 포로의 전 단계인지, 성경의 기준과 무관한 역사적 통일의 해가 전개될지 인간의 지혜로 판단할 수가 없다. 다만 한국의 역사나 분단과 유사한 이스라엘을 통해서 영적인 교훈과 의미를 찾자는 것이고,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인간의 응답과 순종, 이를 대비한 준비는 이 땅의 크리스천들의 몫이라 생각한다.

    이스라엘의 통합과 분열

    사울 왕 이후에 다윗 시대(BC 1010~970)에도 통일 왕국을 유지해 왔으나, 40년 뒤인 솔로몬 사후에 이스라엘이 분열하게 된다. 이스라엘의 통일 왕국(120년)은 사울(40년), 다윗(40년), 솔로몬(40년)을 말한다. 이스라엘은 사울-다윗-솔로몬 시기의 통일 왕국에 이어,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왕, BC 931년에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갈라졌다. 솔로몬의 우상숭배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로 나라가 분열되어 분열 왕국 시대라 한다.

    분열의 근원적인 원인은 솔로몬에게서 찾을 수 있다. 솔로몬은 율법을 거역하고 이방 여인들을 취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유혹으로 인하여 우상숭배에 빠졌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죄를 범한 솔로몬에게 나라를 빼앗아 그의 신복에게 주실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아비 다윗을 생각하여 그 나라를 모두 빼앗지는 않고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남겨 두고 그것을 그의 후손들에게 주실 것을 말씀하셨다(왕상 11:11, 12). 하나님은 솔로몬이 하나님의 법도를 떠나 이방 신전을 짓고 이방신을 섬기자 에돔 사람 하닷을 일으켰으며 마지막에는 솔로몬의 심복 중 한 사람인 여로보암을 대적하게 하셨고 12지파 중 10지파와 많은 땅을 차지하게 하셨다.

    주전 930년 남북으로 갈라진 분단 국가가 되었다. 722년 북쪽 이스라엘이 앗수르의 군대에 의해 먼저 망할 때까지 208년 동안 북쪽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통치자가 한 명도 없었다. 남유다에도 겨우 6명뿐이었다. 남북의 적대 관계는 계속되었다.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를 당시 이스라엘은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번영과 부를 누리는 시대였지만, 내적으로는 각 지파들 간의 갈등의 심화와 솔로몬 때부터 쌓였던 세금과 부역 등으로 인한 수많은 불평들이 백성들 안에 잠재해 있었으며, 우상숭배와 하나님에 대한 반역과 진리를 떠난 죄악, 정치, 사회적, 종교적 타락으로 인한 결과로 민족 분열을 겪게 된다.

    결국에는 남쪽에는 예루살렘을 수도로 한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다스리는 유다왕국이 섰고, 북쪽에는 세겜을 중심으로 하여 솔로몬의 신하였던 여로보암이 왕이 된, 북이스라엘이 들어섰다(왕상 11, 12장). 여로보암은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자였고, 솔로몬의 심복이었다. 그는 다윗 성의 무너진 곳을 보수할 때 그의 성실함이 솔로몬에게 인정되어 그의 심복이 된 것이다(왕상 11:26, 28).

    하나님은 솔로몬의 부패가 극에 달하였을 때 선지자 아히야를 보내어 여로보암에게 다윗 집에서 열 지파를 떼어 주실 것을 말씀하셨다. 이리하여 이스라엘의 통일 왕국은 120년 만인 BC 931년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때부터 이스라엘 역사는 남북 왕조로 나뉘어 진행된다. 남쪽은 유다 지파와 베냐민 두 개 지파로 구성되었고, 북쪽은 나머지 열 지파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후에 레위 지파는 우상숭배에 반발하여 남쪽으로 이주하게 된다.

    남유다는 르호보암의 즉위로부터 바벨론에 패망할 때까지(BC 931~586) 약 345년간 존속하고,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으로부터 앗수르에 의한 패망까지(BC931~722) 남북 분단 시대는 북이스라엘이 BC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할 때까지 존속한다.

    유다는 북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나서 약 135년 후, 바벨론 포로로 간다. 그리고 70년 동안 그곳에서 포로 생활(BC 586~444)을 하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토 이스라엘에서 멀리 1,500km나 떨어진 바벨론 땅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간 것은, 율법적 관점에서 '언약의 땅에서 추방되게 된 것'을 의미한다.

    바벨론 포로기와 이스라엘의 회복

    이스라엘이 망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많은 선지자들(엘리야, 미기야, 엘리사, 요나, 호세아, 아모스, 이사야, 미가)을 통해 회개하도록 선포한 것으로 알 수 있으며, 유다가 망하기 전에는 나훔(BC 686~612), 스바냐(BC 640~621), 예레미야(BC 626~584), 훌다(BC 621), 하박국(BC 608~598), 에스겔(BC 593~571) 등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외쳤으나 반역을 행하고 불순종한다.

    그 결과 강대국인 앗수르와 바벨론의 포로 생활을 거치게 된다. 이방 강대국가의 강점기를 거친다. 본토의 백성들, 외국에 포로 생활로 '남은 자'들로 백성들은 고통과 신음으로 힘든 세월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70년, 하나님의 때가 차자 조국 이스라엘로 귀환하게 된다. 성전이 재건되며 예배가 회복되고, 말씀이 회복된다. 새롭게 영적 이스라엘, 선민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며 하나님이 통치하고 다스리는 민족국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선민 유다 백성이 하나님 없는 이방 나라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끌려간 것은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은 최대의 비극이요 수치였다. 이는 우상을 숭배하고 안식일과 안식년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그 거룩하신 뜻을 멸시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와 진노의 표현이었다(대하 36:21, 렘 34:8-16).

    포로 후 바벨론에서까지도 선지자들, 다니엘(BC 586), 오바댜(BC 580), 요엘(BC 539~531), 학개(BC 520), 스가랴(BC 520~514), 에스라, 느헤미야, 말라기(BC 500~450)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키겠다는 것을 예언하게 하신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다니엘과 에스겔서는 하나님나라가 재건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인간의 눈으로는 영원할 것 같았던 강대국인 바벨론이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로 멸망하게 하시고(50:3,9, 41-46, 51), 이스라엘 백성이 본토로 귀환하도록 하셨다. 바벨론 왕국은 느부갓네살의 손자인 벨사살 때에 메대와 바사의 연합군에게 멸망하고 만다. 앗수르는 주전 612년에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한다. 남북 왕국 모두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한 것이다. 하나님의 예언에 따라 바벨론은 메대, 바사 연합국(페르시아)에 의해 멸망당한다. BC 538년에 고레스 칙령에 의해서 바벨론 포로로부터 귀환한 공동체는 BC 515년에 성전을 건축하고, BC 445년에는 예루살렘 성벽을 건설한다.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이 잡아 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려보내지 않았고 그의 왕가는 7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만 통치하게 된다. 메대 사람 다리우스는 바벨론을 정복하고 나이가 많음으로 바사의 고레스에게 왕권을 넘겨주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하여 예언하신 것처럼 70년이 되어서, 이스라엘을 자신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하여 고레스를 택하시고 그에게 오늘 이스라엘을 돌려보내도록 하신 것이다.

    70년 바벨론 포로기와 한국의 현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국내에서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의 대립이 첨예해 갈 때에 미소 양군이 각기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삼아 남북으로 갈라서 1945년 9월 한반도에 진출했다. 2015년은 광복-분단 70주년, 건국 67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해다. 70년은 완전수이며, 성수(聖數)인 7의 10배수인 70은 하나님의 특별한 일을 기대할 의미 있는 숫자이다. 하나님의 카이로스, 포커스와 타이밍은 중요하다.

    한민족은 676년 신라가 외세(당나라)를 한반도에서 축출한 이후, 1945년 광복까지, 후삼국 35년을 제외한 1,000여 년 동안 단일민족을 형성해 왔다. 세계 역사상 드문 통일국가의 역사이며 통일은 한민족의 정체성이다.

    세계사를 보면 이 70년은 의미가 있는 사건이 있다. 바로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시작된 공산주의가 70년 후인, 1987년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 정책으로 사실상 막을 내린 사건이다. 소련의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세계 질서와 구도가 변했듯이,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듯 한반도에도 휴전선이 사라지길 소원하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한국을 돌이켜 보시고 긍휼히 여기셔서 분단과 외세라는 바벨론 포로의 해방과 통일의 기쁨을 주시기를 간구한다. 평화적 민족 통일이 완성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죄악으로 왜곡된 분단의 중심 가치의 전복과 새로운 복음화 통일의 가치 창조가 올바른 통일 운동이다.

    바벨론 포로기는 오늘을 사는 크리스천들에게 많은 교훈과 지혜를 제공해 준다. 조지 바나는 사회와 국가를 이끌어 갈 영적 리더십이란, 첫째, 사람을 이끌도록 하나님께 부름받은 자(소명),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이끄는 자(성품), 셋째, 리더십을 위해 기능적 능력과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능력)라고 한다. 통일 시대를 대비하고 이를 실천하고 하나님나라 건설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소명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복음으로의 무장과 성령의 역사, 탁월한 실력과 안목도 겸비해야 이상적인 크리스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성경의 텍스트와 현존하는 이스라엘의 역사 통해서 국가를 치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 국제정치와 민족국가와 열강 간의 역학 관계, 경제·사회·역사적 문제까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다양한 지혜와 신앙의 원칙과 경험을 통해서 과거를 아는 지혜, 현재를 통찰하고 미래를 여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사람이 해야 할 사명과 그 방향을 깨달을 수 있다. 그리할 때 자기 시대를 개혁하고, 자기 시대의 부흥을 체험할 수 있는 은혜를 누리게 될 것이다.

    애굽의 430년간 노예 생활, 바벨론 70년간 포로 생활, 로마의 티토 장군에게 AD 70년에 멸망하고 약 2,000년에 이르는 유랑 생활,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나치에 의해 600만 명이 학살당한 사건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고난의 역사였다. 그러나 이들은 이런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알고 믿음으로 행했기에 오늘날 이스라엘을 유지하고 발전시키게 되었다.

    바벨론 포로는 이사야가 예언한 '남은 자'(the remnant) 사상이 구현되었다. 이사야의 '남은 자' 사상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의 파기와 불순종으로 인한 민족의 파국 상황에도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하심을 베풀고, 소수의 '남은 자'를 구해 주시고, 이를 통해서 존속하게 하신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최종 목적이 파멸이 아닌 자기 백성의 구원이며, 정화와 회복을 통하여 미래를 준비하는 백성들로 선택한 것을 말한다. 사도바울은 환난과 역경 중에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구원을 대망하는 자를 가리켜 '남은 자'로 정의했다(롬 9:27).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와 귀환 이후에도 이방 국가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고 로마의 지배 아래 있을 때 잠시 독립하였으나(마카비 시대), 다시 로마의 통치하에 있게 된다. 이때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한다. 이스라엘의 완전한 독립이 안 이루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의문이 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은 영적 이스라엘과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에 있다.

    지상 국가의 한계이다. 이스라엘의 성전이 무너진 것도 마찬가지이다. 건물인 교회도 영원하지 않다. 복음만이 영원하다. '이미'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와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나라의 긴장 관계에 있는 것이 영적인 현실이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통한 구속사적 진행, 어거스틴이 말한 '하나님의 도성'과 그 완성이 온전한 하나님나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나라는 영토적 개념에 국한되기보다는 이보다 더 포괄적인 영적 개념임을 알 수가 있다. 재림 예수님의 지상 출현이 온전한 하나님나라의 완성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영적 바벨론과 한국교회

    요한계시록 17장과 18장에서는 바벨론 패망과 하나님나라 완성의 자세한 과정을 언급하고 있다. 음녀 바벨론, 오늘날 타락한 도시 문명은 영혼들의 사냥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계시록에서는 바벨론을 큰 음녀, 어미, 귀신의 처소, 가증한 것,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 음녀와 연합한 땅의 임금들, '음행'과 '사치' 등으로 묘사하였다. 이것은 정신적, 도덕적, 문화적, 사회적, 영적 타락상을 의미한 것이다. 계시록에서 말한 바벨론은 구약성경의 지상 국가인 바벨론과는 다른 차원의 영적 비밀이 있다. 계시록은 '문자+상징'을 융합해서 조명해야 한다.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인간이 전부 알기에는 한계가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먼저 어떤 영적 바벨론 포로에 잡혀 있는지에 대한 자기 성찰과 회개도 요구되어 진다. 교회의 맘몬이즘, 성경 말씀 훼손과 소멸, 헌금 강요와 빚으로 얼룩진 매머드 교회 건물, 교회의 영적 권위 상실과 교회 내 폭력과 하나님 경시 풍조, 교권주의와 분열, 교회의 정치권력화, 목회자들의 타락, 세속화의 포로, 그리고 통일을 가로막는 남북 갈등에 못지않은 동서 갈등, 정치적 패권주의와 죄악과 부패, 소수의 부의 집중과 경제적 불평등, 사회적 죄악인 사치와 방종이나 타락 등이 한국교회와 국가와 시대를 사로잡고 있는 영적인 바벨론 포로기일 수도 있다.

    바벨론 포로 70년은 개인과 민족적 회개의 시기였다. 한국교회도 과거 일제시대 신사참배와 우상숭배, 교권 다툼과 자기 역할 상실 이후에 전쟁과 분단을 겪었다. 이러한 시대를 보고 성경적 교훈을 삼아야 한다. 개인과 집단, 한국교회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실천하는 거룩한 백성들로 현시대에도, 한반도의 통일 시대에도 귀하게 쓰임받길 소원한다.

    다니엘은 조상들의 죄악을 회개했다. 동일시 회개인 것이다. 다니엘은 BC 605년 당시 강대국이었던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유다나라를 제1차 침공했을 당시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 중 한사람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 15세였다. 나중에 바벨론의 국무총리가 된다. 다니엘서 9장에서 다니엘은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던 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온 지 70년 만에 해방이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포로로 끌려오던 때에 하나님의 사람 예레미야가 한 말이 기억났다. 예레미야는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여 70년간 포로 생활을 하는 것과(렘 25:11,12), 하나님의 은혜로 유다 땅으로 다시 돌아올 것(렘 29:10)을 예언했다. 예레미야의 말씀을 응하게 하신 것이다. 예레미야의 시간(Jeremiah's Time)이다.

    "다리오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책을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 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 년 만에 그치리라 하신 것이니라"(단 9:2).

    이렇게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알 수 있다. 다니엘은 바벨론 포로를 예언하였고, 동시에 바벨론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귀환도 예언하여(단 25:12) 포로 된 백성들에게 그의 예언은 유일의 소망이 되었던 것이다(단 9:2).

    다니엘에게 임한 기도 응답이 지금 한반도에서 드리는 우리의 기도에도 응하기를 소망한다. 해방 70년, 분단 70년이 되는 올 해에 통일 한국으로 가는 길이 열리게 되기를 기도한다.

    세계는 소통(communication)과 융합(convergence)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발전해 가고 있다. 사유 없는 지식, 통찰 없는 이성, 메마른 지성이나 향방 없는 신학적 지식과 교회는 통일 시대를 감당할 수 없다. 전략적 민첩성도 요구되어진다. 급변하는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의 세속화와 종교다원주의나 혼합주의는 경계해야 한다. 통일 운동은 영적 전투이다. 그래서 한국의 크리스천들은 교회 내에서 통일을 위한 기도나 준비도 중요하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성령의 권능으로 충만해서 교회, 국가와 시대를 이끌어 나가야 한다.

    미국 풀러신학대학원 교수인 클링턴은 "리더십이란,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목적으로 나아가도록 영향을 끼치는 역동적인 과정이다"라고 한다. 하나님의 선명한 목적은 선교의 명령이다. 2015년, 한국교회에 평화적 통일과 북한복음화 사명을 감당하는 결단의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되길 기대한다.

    황준배 / 신학박사, <카리스마적 리더십> 저술

    (간증:70년 포로생활 끝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약속(성경다니엘서에약속),북한 동포에게 신년을 주셨다. 주님께서 그림 한장으로 주님의 개입(은혜)하셨다는 것을 보여주셨다.예레미야 70년>은 예레미야의 사역을 통해 이스라엘 포로 생활 70년의 의미를 재조명하고, 다시 귀환한 뒤 다니엘, 에스겔, 에스더, 느헤미야와 같은 열매를 맺는 기쁨까지 한 권에 연결한 책이다.

    2018.4.29김에스겔 목사)

    바벨론 포로생활 70년은 위대한 섭리의 멍에였다”<와우! 예레미야 70년> 펴낸 조병호 목사

    박용미 기자승인 2016.04.01

    “하나님 예비하신 징계·교육·안식의 시간” 재조명

    ▲ <와우! 예레미야 70년>을 출간한 조병호 목사.

    <성경과 5대제국> <성경과 고대전쟁> <성경과 고대정치> 등으로 교계는 물론 일선 문화계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조병호 목사(성경통독원 원장)가 또 다시 성경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이번엔 예레미야다. <와우! 예레미야 70년>(통독원)은 이스라엘 백성의 바벨론 포로 생활 70년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징계, 교육, 안식의 시간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3월 31일, 서울 장충동 그랜드앰배서더에서 열린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조병호 목사는 기자들에게 대뜸 성경에서 가장 어려운 챕터가 무엇인지부터 물었다. 가장 먼저 나온 대답은 역시 레위기. 조 목사는 그 이유를 “스토리가 생략되어 있어서”라고 대답했다. 두 번째 대답은 센스 있게(?) 예레미야였다. 그는 “담고 있는 메시지가 애매해서”라고 설명했다.

    “예레미야서의 메시지는 ‘지는 게 이기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여호수아, 기드온, 사무엘, 다윗, 이사야까지 성경에는 승자 이야기가 많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승리한다는 명확한 교훈을 주지만 예레미야는 그렇지 않다.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는 게 이기는 거라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하고 있다.”

    적대적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라면 할 수 없는 이야기다.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예레미야였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질문하셨을 때 세례요한, 엘리야와 함께 거론됐을 정도로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크게 각인된 존재였다. 대대적인 구국성회 중에 줄과 멍에를 들고 와 “70년 동안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던 ‘퍼포먼스’가 당대 사람들에게 매우 강렬하게 남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멍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남유다에 대한 심판을 뜻하는 ‘징계’의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멍에가 쉽고 가볍다는 것을 깨닫는 ‘교육’을 뜻하기도 한다. 조 목사는 “포로 생활 70년은 백성들이 예레미야의 편지를 통해 받는 ‘제사장 나라 거룩한 시민 재교육’을 거쳐, ‘하나님께서 주시는 징계를 달게 받는 것은 쉽고 가벼운 나무 멍에를 메는 것이지만 저항하는 것은 세상이 주는 무겁고 힘든 쇠 멍에를 메는 것’이라는 진리를 배우는 시간”이라고 해석했다.

    또 이 70년은 그동안 죄악으로 마치 녹슨 가마와 같이 되어 버렸던 예루살렘 땅을 ‘안식’하게 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바벨론 군인들이 부수고 불태웠던 그 상태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사람이 살 수 없는 황폐한 곳이 되어 땅은 완벽하게 휴식을 누린 것이다.

    이쯤에서 조병호 목사는 예레미야에 대한 오해 한 가지를 꺼내들었다. 예레미야가 바벨론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고 했다는 점에서 그가 친바벨론주의자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조 목사는 “바벨론이 전쟁에 휩싸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총알받이가 된다. 그것을 막은 사람이 예레미야”라며 “그는 제국이 세계를 경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제국을 도구로 사용하시며 온 세계를 경영하신다는 사실을 전하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우리나라도 미국이나 중국 등 강대국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데, 하나님께서 제사장 나라를 세우기 위해 주변 제국들을 어떻게 사용하시는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렇게 <와우! 예레미야 70년>은 예레미야의 사역을 통해 이스라엘 포로 생활 70년의 의미를 재조명하고, 다시 귀환한 뒤 다니엘, 에스겔, 에스더, 느헤미야와 같은 열매를 맺는 기쁨까지 한 권에 연결한 책이다.

    “예레미야가 이렇게 가슴 뛰는 이야기였는지 성도들에게 알리고 싶고, 우리 자녀들이 어렵게 생각하는 성경을 쉽게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을 썼다. 독자들이 바벨론 포로 생활에 숨겨진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간증:70년 포로생활 끝나게하신것이하나님의약속(성경다니엘서에약속),북한 동포에게 회년을 주셨다. 주님께서 그림한장으로 주님의개입하셨다는것을보여주셨다.예레미야 70년>은 예레미야의 사역을 통해 이스라엘 포로 생활 70년의 의미를 재조명하고, 다시 귀환한 뒤 다니엘, 에스겔, 에스더, 느헤미야와 같은 열매를 맺는 기쁨까지 한 권에 연결한 책이다.2018.4.29.김에스겔목사.)

    이스라엘의 포로생활 70년과 역사이해

    김성욱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역사신학)

    1. 들어가면서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들을 언급하자면, 천지창조, 아브라함의 소명, 출애굽, 다윗왕조의 흥왕(興旺)과 몰락 그리고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생활과 그 귀환 등이 될 것이다. 그 동안의 논의를 볼 때 많은 설교와 논의는 주로 앞부분에 관한 것에 집중되고 있으며,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와 그 귀환의 역사적 의미는 그 중요성에 비하여 사뭇 간과되지 않았는가 하는 느낌을 받는다.

    본 논고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기와 그 의미에 관하여 잘 분석하고 이해한다면, 그것은 구약이해와 성경이해 더 나아가 역사이해를 위해서 귀중한 실마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역사적 사건에 관한 이해나 평가가 단순치 않다. 왜냐하면 이 부분에 관한 자료들이 서로 혼합되어 있으며 제대로 분류되지 않은 것도 한 이유이지만, 더 큰 이유는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기간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정확하게 70년으로 맞아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에 수차례 언급된 이스라엘의 포로생활 70년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혹은 그것의 역사성을 인정하면서도 객관적인 70년으로 수용하지 않고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해야만 하는가 라는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이러한 문제에 관하여 심도있게 다루면서 더 나아가 한국교회와 관련하여 우리가 풀어야할 문제에 관하여 함께 생각해보고자 한다.

    2. 이스라엘의 포로기

    이스라엘의 포로시기를 살펴보려면, 그 역사의 전후를 조사하여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북왕조 이스라엘의 멸망 후(B.C.722년)로부터 남왕조 유다가 멸망당할 즈음의 역사가 간단치 않으며 또한 열왕기와 역대기 외에도 여러 선지서자들의 글들이 중첩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당시의 국제정세와 함께 그 정황을 분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앗수르의 바니팔(오스납발, B.C.668-632, 대하 33:11-13; 스 4:10) 왕이 죽은 이후, 앗수르에서는 온 나라를 내란으로 몰고가는 큰 혁명이 일어났다(B.C.627-624). 그리고 이 혁명은 결정적으로 앗수르의 파멸을 초래하였으며 당시의 바벨론은 이러한 혼란 상태를 이용하여 독립을 되찾았다. 북왕조 이스라엘이 무너진 지 110년이 지난 후 유브라데스 강변의 신흥국가인 바벨론이 결국 메데제국을 몰락시키고 세계 정세에 있어서 패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 후 바벨론은 B.C. 612년에는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를 함락시키면서 결국 구약성경의 중심 배경이 되는 가나안 즉 팔레스타인 지역은 애굽과 바벨론의 세력 각축장이 되고 말았다. 즉 고대로부터 계속이어져 오던 근동지역의 패자인 애굽의 세력과 신흥 바벨론의 힘 간의 정치적 역학관계는 당시 국제정세를 흔드는 두 축이 되었다.

    비록 예전의 최고 강국이었던 앗수르가 신흥 바벨론과 메데 연합군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였으나(B.C.612), 아직도 앗수르 지역에는 앗수르의 잔류군이 남아 있었으며 또한 바벨론도 아직 본격적으로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지는 않았다. 이 틈을 타서 고대 근동의 전통적인 강국인 애굽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자신의 지배권을 회복하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로 알아 앗수르의 나머지 세력을 치려하였다. 그러자 앗수르의 남은 백성들은 하란으로 모여서 전력을 재정비하였고 애굽과 대항하기에 앞서 자신들의 거점을 확복하기 위하여 두 차례에 걸쳐 바벨론에 항거하며 하란을 탈환하려 하였다. 이 때 바벨론의 바포폴리살 왕은 이를 감지하고 군대를 이끌고 앗수르의 나머지 세력들을 쳤을 뿐만 아니라, 애굽의 바로 느고의 군대마저 격퇴하였다. 이 전쟁을 통하여 세계 패권(覇權)의 윤곽이 완연하게 드러나게 된다. 바로 이 사건에서 남왕조 유다의 요시야 왕은 애굽 군대가 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나갔다가 전사하고 만다(B.C.609). 이러한 상황은 B.C. 605년까지 계속이어 오고 있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갈그미스(Carchemisch) 전쟁에서 애굽의 주력 부대를 완전히 격파하였고, 또 이스라엘 백성 중 일부를 포로로 잡아가고 애굽의 하수까지 남하하였다(왕하 24:7). 따라서 이 전쟁을 계기로 바벨론은 명실공히 고대 근동의 세계 최강국으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을 이스라엘 역사와 연결하여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 갈그미스 전쟁 중에 바벨론에 의하여 이스라엘의 1차 포로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B.C.605년). 성경에서는 분명히 유다가 완전한 멸망에 이르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여러 징조들을 보이셨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B.C.605년의 제1차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이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하여 예레미야를 통해 바벨론에 항복하라고 말씀하셨고 70년 동안 포로가 될 것이라 하셨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계속적으로 자신의 길을 걸어 결국 멸망을 당하게 되었다.

    바벨론의 활동으로 인하여 팔레스타인의 세력 판도가 달라짐에 따라 애굽왕 바로느고의 봉신이었던 여호야김은 다시 메소포타미아의 세력권 안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B.C. 601년 여호야김은 바벨론에 항거하는 반란을 일으켰으나(왕하 24;1), 이로 인하여 B.C. 598년 12월에 다시금 바벨론 군대가 팔레스타인으로 진격해 왔다. 그 결과 유다의 여호야김 왕은 죽고, 이어서 18세인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왕위에 계승한다. 그러나 여호야긴왕의 통치도 오래가지 못한다. 그가 왕이 된지 3개월 만에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 느브갓네살은 여호야긴 왕을 비롯한 유다 백성을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아갔으며(B.C. 597년), 시드기야(B.C. 597-587년)를 왕으로 세운다. 시드기야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으로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계속하여 바벨론에 항거하였는데, 결국 B.C. 586년에 느브갓네살의 친위 대장 느부사라단에 의해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되었다. 결국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온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각 곳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이 역사를 정리해보자면 B.C. 605년의 갈그미스 전쟁에서 바벨론은 유다를 치고 많은 유대인들을 포로를 잡아갔는데, 이때 우리가 잘 아는 다니엘과 세 친구를 포함한 상류층의 인사들이 함께 끌려간 것으로 보는데(단 1:1-6) 이것이 이스라엘의 제1차 바벨론포로가 된다. 제2차 바벨론포로는 B.C. 597년에 일어났는데, 이 당시에 끌려간 유대인 중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에스겔 선지자를 언급할 수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종말과 관계되는 제3차 바벨론 포로는 B.C. 586년에 이루어졌다.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이스라엘은 바벨론에게 짓밟히게 되고 또한 예루살렘성전은 시드기야 9년에 포위되어 결국 시드기야 11년(B.C. 586년 7월)에 완전히 함락되고 만다. 이 때 시드기야 왕은 몰래 도망을 치다가 잡혀 느부갓네살에게 끌려갔으며, 자신의 아들들은 그의 목전에서 죽임을 당하고, 시드기야왕은 두 눈을 뽑히고 또한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붙잡혀 갔다. 이런 일련의 사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400여년 전통을 이어온 솔로몬성전이 완전히 파괴된 것이었다.

    결국 이스라엘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지고 포로생활을 하면서 이 때부터 디아스포라 개념이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약속한 기한이 차게 되어, 그들이 포로 잡혀간 지 약70년만에 이스라엘로 돌아오도록 허가를 받았다. 마치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는 것이 세 차례(B.C.605, 597, 586)에 걸쳐 진행되었듯이 이스라엘이 포로에서의 귀환하는 것도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은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구체적으로 성취되었는가를 확인시켜 준다. 제1차 귀환은 B.C.538년에 왕통의 후손인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그의 인도 하에 이루어졌으며, 49,897명이 귀환하였다(1:5-2:70). 일반적으로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은 바로 이 사건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제2차 포로귀환은 그로부터 약 80년 후인 B.C. 457년(아닥사스다왕 7년)에 일어났는데, 에스라의 인도 하에 1,754명이 귀환하였다(스 8:1-14). 그리고 제3차 귀환은 그로부터 13년 후인 B.C. 444년에 느헤미야의 인도 하에 귀환하였다.

    3. 포로생활 70년에 대한 해석의 가능성

    이스라엘의 포로생활과 그 귀환에 관하여서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다. 다니엘서 9:1-2에서는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입던 원년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서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고하신 그 년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년 만에 마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라고 하여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생활을 70년으로 언급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포로 귀환에 관한 역사를 기록하는 에스라서에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스1:1-2)

    여기에 등장하는 고레스는 B.C.559-530년까지 페르시아 제국의 기초를 닦은 왕으로 B.C.538년에 조서를 내려 유대인들의 귀환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포로는 아무리 많이 잡아도 B.C.605-538년이므로 67년이다. 그리고 당연한 귀결로 제2차 혹은 제3차 바벨론 포로로부터 바벨론포로 기한을 규정한다면, 그 기간은 훨씬 더 많이 줄어들게 된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수차례 강조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생활 70년이란 것은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생활에 관한 많은 글들을 살펴보면, 이 부분에 관하여서는 간과하고 넘어간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은 세가지 경향으로 설명하거나 이해하고 지나간다. 첫째, 실제로 67년이지만 마치 70년으로 생각하며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67년이나 70년 별 차이가 없고 그것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이 구태의연한 작업인 듯이 보일지 몰라도, 이 부분을 한번 고려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구약연구에 있어서 자료의 빈곤과 풀리지 않는 다른 많은 문제들 속에 파묻혀 슬쩍 넘어가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바벨론 포로의 70년이란 것은 상징적인 수로 인식하며 그 해석을 첨부한다. 이것은 나름대로 다음과 같은 성경적 근거를 제시한다.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칠십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대하 36:21).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자면 이스라엘의 달력에 따르자면, 매 7년이면 안식년이고 또 이런 안식년의 10번(완전수)을 곱하는 것(7X10=70)으로 설명한다. 즉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를 통하여 충분한 안식을 취한 후에 바벨론에서 귀환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세 번째의 설명으로는 그 동안 이스라엘이 안식년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만큼 안식을 취하게 하였다는 주장이 있기는 하지만, 그 근거와 타당성이 미흡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견해를 종합하고 발전시켜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입장으로 이스라엘의 포로기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를 정리할 수 있다. 먼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한 심판 중에 가장 혹독한 심판으로 철저한 징벌의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땅에서 뽑혀 이방의 땅으로 그리고 각처로 뿔뿔이 흩어지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생존권과 관련된 것으로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심판사상과 관계된다. 두 번째 입장은 이것에 더 나아가 대하 36:21에서처럼 ‘안식의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분명히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포로생활 70년은 심판의 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사건을 위한 준비기간으로 본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저들을 심판의 자리에 영원히 버려두시지 않고 회복시키는 분명한 소망을 보이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황무한 토지가 70년 동안 안식을 누리며 새로운 경작을 준비하듯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역사 심판을 통하여 정화되고 정결케되어 새로운 시대 메시아의 도래를 대망하며 소망을 가지는 기간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 동의를 표한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가능성에 대한 연구와 분석이 여전히 남는다. 왜냐하면 분명하게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생활 67년을 70년으로 주장하기에는 그 마음이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 다른 가능성을 다음 단락에서 다루고자 한다.

    4. 성전 재건과 이스라엘의 사명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생활 70년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학개서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사실 ‘학개’라고 하면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나 혹 그곳에서부터의 포로귀환과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학개서를 염두에 둔다면, 그것은 다만 제2성전건축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 성경을 앞에서 언급한 역사적 사실과 연관하여 생각해 볼 것이 있다.

    먼저 학개서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자. 포로이후의 역사에 관하여 여러 자료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B.C.539년에 고레스는 페르시아를 완전히 정복하였고, 그 이듬해에 모든 유대인들은 고국에 돌아가도록 선포하였다. 당시에 약 5만 가량의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귀환하여 열정과 의욕을 가지고 황폐한 땅에 돌아와 정착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일을 열심히 감당하면서 성읍들도 다 재건하여 사람들이 사는 곳처럼 만들고 또한 무너진 성전을 다시 수축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먼저 제단을 쌓아 번제를 드렸고(에스라 3장) B.C.536년에 이르러서는 성전재건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사마리아에서 온 사람들의 방해로 성전의 기초만 공사하고(B.C.534년) 더 이상의 진척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간이 흘러 B.C.520년이 되었다. 다리오가 왕으로 등극한 그 다음 해인 당시까지도 제2성전 공사에는 아무런 진척이 없었다. 이스라엘의 부호들은 안락한 대궐을 짓는데 많은 투자를 하지만 성전은 돌보지 않았고(학 1:4), 일반 백성들은 또한 여러 재해와 어려운 일 때문에 마찬가지로 이 공사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학 1: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러 재난과 농사일에 대한 실패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경고하며(학 1:10-11) 이것이이 주의 성전 건축을 게을리 한 그들의 죄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사실을 수용하기 보다는 자신의 삶에 너무나 바빴다(학 1:9). 이 때 하나님께서 학개에게 나타나셔서 이스라엘로 성전 건축을 하라고 명령하신다.

    결국 학개와 스가랴의 권고와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스룹바벨의 영도 하에 성전재건 공사는 다시 재개되었으며 결국 B.C.516년에 제2예루살렘 성전이 완공하게 된다. 새롭게 완성된 성전이 비록 예전의 솔로몬 성전과 같은 위용이나 웅장함이 없으나 더 영광스러울 것을 말씀하시며 이 부분에 관하여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위로와 은혜와 감격의 말씀으로 부어주신다.

    물론 학개나 스가랴 선지자의 등장이 B.C. 520년 이전이나 혹은 그 이후에 나타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리오왕 이년 유월 곧 그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로 말미암아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학 1:1-2) 그러나 여기에 나타나는 학개나 스가랴 선지자의 등장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듯이, 하나님께서 이 시기에 나타나셔서 이스라엘을 권면하는 것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역사개입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에 관하여 우리의 사고를 더 확대해보자.

    이스라엘의 포로생활 70년이라고 하였으나, 그 년수가 실제적으로는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 아님을 보았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무너지고 성전이 재건되기까지의 기간을 따져보면 공교롭게도 70년이 된다(B.C.586-516). 만일 이 문제를 우연에 의한 70년으로 보지 않고, 그 역사적인 의미를 생각한다면 어떻게 이해하며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성전이 훼파되고 성전이 재건되는 이 기간이 70년이 되는 것이다. 이 주제에 관하여 들어가기 전에 먼저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할 것이다. 물론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강조되는 개념 중의 하나가 “남은 자 사상”이기에 이 부분을 언급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이전 혹은 이후의 역사에서도 여전히 강조되는 것은 혈연적 이스라엘이 혹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선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이라고 할 때, 그것은 지역적으로 혹은 혈연적으로 한정되는 그룹에 대한 규정은 아니다. 오히려 구약의 많은 본문을 볼 때, 이스라엘이라고 하면 그것은 이스라엘의 본질과 관계된 것으로, 특별히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 공동체로서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성전에 들어가는 자들에 대한 범위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선포 등이 언급되고 있으며, 특히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더 나아가 진정한 이스라엘로 등장하는 것을 많이 발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정체성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께 예배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공동체인 것이다. 곧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고 진행된 나라의 백성으로 예배 공동체는 이스라엘 백성의 본질을 규정하는 중요한 기준 중의 하나이다.

    이 문제를 생각할 때, 또 다른 하나의 중요한 관점이 필요하다. 우리가 이스라엘이라고 할 때, 그 이스라엘은 혈연이나 지연에 의한 이스라엘은 아니다. 물론 혈연과 지연을 외면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이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후손 즉 피를 물려받은 후손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대상으로서의 이스라엘인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성전이 된다.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 범죄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는 없지만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만나 주시는 장소인 것이다.

    그렇다면 70년이 가지는 의미로,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포로되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이 문제가 이스라엘의 본질과도 밀접한 관련되는 것으로 본다면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성전과 관계된 것으로 인식하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즉 역사의 주인되시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살아야 하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이요 그분의 간섭과 인도와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이스라엘인데, 이들에게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성전이 없었다는 것은 너무나 큰 절망의 시기인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는 이 기간은 성전이 없어서 떠돌아다니던 영적인 방황의 시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기간이 바로 70년이다.

    이러한 성전의 문제는 구약으로 끝나지 않고 신약에서도 중요한 논쟁으로 나타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예수님께서 자신이 성전되심을 말씀하는 것과 사도행전 7장에 나타나는 스데반 집사의 설교가 그것이다. 물론 신약시대에 와서는 보이는 건물이 성전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지만, 구약시대의 사고에서 생각해 보면, 하나님을 만나며 또 그분으로 인하여 살아가는 이스라엘의 삶의 중심에는 항상 성전이 있었던 것이다. 성전 개념에 있어서 기초가 되는 회막을 보아도 그것은 언제나 이스라엘 진중에 있었다.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회막은 평상시에는 이스라엘의 중앙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하시며(임마누엘사상) 또 그들을 다스리는 상징이기에, 결국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있어 가장 본질적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또한 회막은 이스라엘의 이동시에는 온 백성보다 앞장서서 나가기에 이스라엘을 이끌고 나아가는, 즉 이스라엘의 인도자 되신 하나님의 임재를 분명하게 드러내 보였다.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성전이란 결국 이스라엘의 정체성과도 분명히 연관이 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포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은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지 못하고 바쁘다는 핑계를 통하여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역사 개입이 전개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전을 지으라는 말씀과 함께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하여 자신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 볼지니라 .......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 볼지니라”(학 1:5-7)

    5. 하나님의 영광으로서의 교회

    이사야의 예언이 있은 지 약 100여년 후에 바벨론의 침입이 있었고 또 그로부터 약 20년 후에는 견고하던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고 예루살렘 성전도 훼파된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가장 큰 자랑이며 거룩하고 장엄하고 찬란하게 여기던 성전, 하나님께서 이곳에 계시기 때문에 온 천하가 다 무너져도 살아계신 이 하나님이 계신 이 성전은 결코 무너지거나 패함이 없을 것이고 세상에서 제일 안전할 것이라고 하며, 수많은 선지자들이 외치며 확신하며 보증하며 보장했던 그 성전(렘 7:1-10)이 이방인의 손에 의해 무참히 무너져 버렸다. 그곳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사용되던 그릇과 모든 것들은 이제 이방신들을 섬기는데 이용되게 되었고, 하나님을 대표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리던 왕은 눈이 뽑히고 목배임을 당하였다. 그 동안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던 그 이스라엘과 왕족들은 또 노예처럼 이방 땅으로 끌려가게 되는데, 사실 이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자부하며 이방 사람들을 개나 돼지처럼 인식하며 대하였는데, 이제는 다 그들의 포로가 되어 세계 각 곳으로 흩어지게 되는 상황이었다.

    그 힘든 포로 생활을 끝내고, 페르시아왕 고레스에 의하여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에게는 그 기간 역시 여전히 힘든 기간이며 시련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언제나 이스라엘 중심에 있어 그 백성들을 하나로 묶으며 이끌던 성전이 없어진 지 오래며 또 그 성전을 재건하자니 방해도 있고 또한 각자의 일들이 많아 그 일은 더욱 외면당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런 시기에 학개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전의 참된 의미를 깨우쳐 주었으며 또 그와 함께 활동하였던 스가랴와 함께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것의 회복 곧 성전의 재건을 무엇보다 먼저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를 분명히 하는 의미에서 학개의 등장을 살펴본다면, 그것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역사개입으로 설명 가능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일 때문에 혹은 하나님께서 수차례 경고로 주신 어려움 가운데서 그 어려움의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고 더더욱 성전 건축에 대하여서는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았으며 그 진척 또한 시키지 못하고 있는 시기에, 하나님께서는 학개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을 권고하시는 것이다. 더 분명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70년 즉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곧 그들이 성전이 없이 지내야만 하는 70년의 기한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그 성전재건의 일을 담당해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을 자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학개 선지자를 통하여 이것을 일깨우시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 제2성전은 구속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 결국 이것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잘 보여주기 때문에 학개 2:9에서의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라는 예언과 축복의 말씀을 성취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일은 옛 조상 다윗이 많은 돈으로 준비해서 웅장하고 화려하게 국가적인 정책으로 대대적으로 해야 할 일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 백성 개개인이 스스로를 자각하며 또 아무리 바쁜 중에라도 감당해야 할 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요구된 것은 솔로몬의 성전과 같이 백향목이나 은금과 같은 호사스러운 재료가 아니라 주위에 있는 산에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는 것이었다(학 1:8a). 즉 그들이 순종할 마음만 있으면 언제든지 그리고 즉시 시행할 수 있는 것을 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그 외형에 있어서 솔로몬의 성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 너무나도 분명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위로의 말씀으로 은혜를 더하신다: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학 1:8b),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학 2:9).

    이 성전의 재건이란 단순하게 무너졌던 솔로몬 성전의 재건의 의미가 아니다. 그리고 무너진 옛 다윗 왕권의 회복이나 그 영화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간다. 만약 그런 의미라면 솔로몬 성전과 같거나 비슷한 재료로 짓도록 명령하였을 것이다.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스가랴서나 신약성경과 연관하여 볼 때, 장차 도래할 메시아 시대에 대한 전초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다시 세워진 성전 곧 회복된 시온과 예루살렘에 그 나라를 다스릴 왕이 찾아오시는 것을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6. 적용: 한국교회사에서의 바벨론 포로생활 70년

    교회사를 정리하다 보면 여러 사건에 대하여 “바벨론 포로”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기간이 이스라엘 역사에 있었던 것과 같은 그런 포로는 아니지만, 이런 용어가 실제로 사용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13세기 말부터 세속권력에 의하여 교황이 로마에 있지 못하고 프랑스에 체류한 ‘교황의 바벨론 유수’를 들 수 있겠다. 또 다른 유명한 예가 바로 루터에게서 발견된다. 루터는 1520년에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고함”, “교회의 바벨론 포로”와 “크리스천의 자유에 관하여”라는 세편의 작품을 저술하였는데, 그 중에 등장하는 제목이 바로 “교회의 바벨론 포로”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하여 카톨릭의 성만찬론에 대하여 비판하면서 세 가지 교회의 잘못된 모습을 ‘바벨론 포로’ 상태로 묘사하고 있다.

    이와 문맥을 같이하여 한걸음 더 나아가도록 하자. 현시국에서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는 주제 중의 하나가 바로 “북한” 혹은 “북한교회”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이 부분은 첨예한 주제여서 논자가 감히 화두를 던지기가 쉽지 않으나, 역사를 전공하는 자로서 역사이해에 관한 조심스러운 시도를 펼쳐 보이고자 한다. 우리는 북한의 실정을 여러 통로를 통하여 듣고 또 북한교회가 당하는 핍박과 고통을 안다. 이런 상황도 “교회의 바벨론 포로의 시기”라고 규정할 수는 없겠는가?

    만약 이렇게 ‘한국교회의 바벨론 포로의 시기’라고 규정할 수 있다면, 그렇게 명명함에 있어서 여러 가지 사건들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그 원인 분석에 관한 것인데, 우리는 쉽게 북한의 공산당을 큰 원인의 하나로 설정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이 타당성을 가지며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우리의 주된 관심이 ‘교회(敎會)’라는 것을 고려하면서 한국교회사를 다시금 짚어보고자 한다.

    오늘의 논지와 관련하여 논자는 1938년 9월9일 평양의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제27회 총회를 언급하고자 한다. 물론 당시의 상황을 말하자면, 삼엄한 경비 곧 193명의 총대들 틈에서 약 100명의 경찰들이 그 총대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 가운데 각본대로 진행된 총회였다. 그러나 어찌되었던 한국교회는 교회 스스로가 신사참배를 국민의식으로 가결하고 말았다. 물론 일제시대에 일본의 핍박 가운데 벌어진 일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 문제에 관하여 아직도 시원하게 해결하지 않고 있다. 주기철 추모사업 등 여러 행사들이 있었음에도, 그 동안 한국교회는 아직까지도 총회의 신사참배 가결에 대하여 총체적이며 근본적인 회개를 하지 않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러던 중에 벌써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물론 나중에 남북이 분단되고 공산당의 억압과 핍박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교회’라는 영적인 단체를 고려한다면, 교회가 교회의 정체성을 곧 교회의 교회됨을 스스로 무너뜨린 이 사건은 한국교회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서문밖교회에서의 신사참배 가결이 있은 지 벌써 66년이 지나고 있다. 얼마 후면 70년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교회는 교회의 정체성에 관한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우리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다. 물론 남북한의 문제 통일문제 등에 관하여 고려해야할 시기이며 또 여전히 북한을 위하여 여러 가지 물질로 혹은 다른 무엇으로 돕고 선교를 위하여 준비하며 실천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사를 생각하면서 현재 한국교회가 제일 먼저 풀어야 할 과제는 과연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의 문제를 넘어서 마치 학개서에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주신 말씀처럼 교회의 정체성을 바로 회복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곧 “자신의 소위를 돌아보라”라는 말과 같이 우리의 모습과 과거사를 추억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여야 할 것이다.

    교회가 교회답게 서기 위하여 우리의 과거를 청산하고, 먼저 한국교회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며, 하나 된 교회를 이루어가고자 노력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예전에 평양에 대하여 “동방에 예루살렘”이라고 불렸던 그 명성과 영화보다 더 큰 영광과 위로와 은혜로 한국교회 위에 부어주실 것을 확신하며 소망 중에 기다린다.

    (간증:70년 포로생활 끝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약속(성경다니엘서 약속),북한 동포에게 회년을 주셨다. 주님께서 그림 한장으로 주님의개입(은혜)하셨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예레미야 70년>은 예레미야의 사역을 통해 이스라엘 포로 생활 70년의 의미를 재조명하고 다시 귀환한 뒤 다니엘, 에스겔, 에스더, 느헤미야와 같은 열매를 맺는 기쁨까지 한 권에 연결한 책이다.2018.4.29)










    다니엘 전체 해석 요약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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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주권 앞에 선 믿음의 사람

    본문 요약

    다니엘서는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유다 청년 다니엘과 세 친구가 이방 제국 한복판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지켜나간 이야기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세상의 나라들이 흥망하는 역사를 예언한 책입니다. 절대 권력을 가진 왕들 앞에서도 진리를 저버리지 않은 신앙인의 삶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종말적 비전이 교차되며, 시대를 초월한 믿음과 소망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본문의 구조

    1. 바벨론에서의 신앙과 기적 (1~6장)
    2. 이상과 계시를 통한 하나님의 주권 (7~12장)
    3. 종말과 구원의 확신 (전장 통합)

    바벨론에서의 신앙과 기적 (1~6장)

    다니엘과 세 친구는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침략당한 후 포로로 끌려온 유다의 귀족 출신 청년들이었습니다. 바벨론은 그들에게 왕의 음식과 이름, 문화와 교육을 주입하며 정체성을 바꾸려 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로 결단하고 채식만 먹으며 하나님께 신실하게 서기로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결단에 지혜와 명철을 더하시고, 다니엘에게는 환상과 꿈을 해석하는 특별한 능력을 주십니다. 이는 타협하지 않는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를 부르는 통로가 됨을 보여줍니다.

    2장에서는 느부갓네살 왕이 꾼 꿈을 해석함으로 다니엘의 지혜가 온 제국에 드러납니다. 아무도 꿈의 내용조차 알 수 없었지만, 다니엘은 친구들과 함께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것을 바탕으로 해석합니다. 금, 은, 동, 철, 그리고 흙과 철이 섞인 다섯 부분의 신상은 각각 제국들의 흥망을 나타내며, 마지막에는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않은 돌이 그 모든 나라를 쳐서 무너뜨리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세워짐을 보여줍니다. 이는 세상 권세가 아무리 강해 보여도 하나님의 나라는 그 위에 있으며 반드시 완성된다는 분명한 선언입니다.

    3장에서는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음으로 풀무불에 던져지지만 하나님께서 직접 그들과 함께하심으로 머리카락 하나 그을리지 않고 살아납니다.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충성과 세상의 위협 사이에서 그들은 선택했고, 하나님은 그 믿음을 존귀하게 여기셨습니다. 4장에서는 느부갓네살 왕 자신이 교만하여 짐승같은 형벌을 받게 되지만, 회개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는 세상 통치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5장에서는 벨사살 왕이 하나님의 성전 기구로 잔치를 벌이다가 손가락의 글씨로 하나님의 심판을 선고받습니다. 다니엘은 그 글을 해석하며 왕의 나라가 끝났음을 선포하고, 그 밤에 벨사살은 죽고 바벨론은 메대와 바사 연합군에 의해 멸망합니다. 6장에서는 다리오 왕 아래에서도 다니엘이 모함을 받아 사자굴에 던져지지만, 하나님이 사자의 입을 막으시고 구원하십니다. 그는 기도하는 자였고, 권력을 두려워하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상과 계시를 통한 하나님의 주권 (7~12장)

    7장부터는 다니엘이 본 환상과 그에 대한 해석이 중심이 됩니다. 첫 번째 환상은 네 짐승의 환상입니다. 각각의 짐승은 바벨론부터 시작해 페르시아, 헬라, 로마로 이어지는 제국들을 상징하며,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이때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오셔서 영원한 권세를 받는 모습이 등장하는데 이는 메시아의 예표로 이해되며,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연결되어 해석됩니다.

    8장에서는 숫양과 숫염소의 환상이 나옵니다. 이것은 메대와 바사, 헬라의 충돌과 그 과정 속에서 성전을 더럽히는 한 작은 뿔의 등장을 예고합니다. 이는 역사적으로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로 이해되며, 신약적으로는 종말에 나타날 적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받아들여집니다. 다니엘은 이러한 계시 앞에서 심히 기진하며 두려워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그에게 세상 끝에 있을 구원의 약속을 주십니다.

    9장에서는 다니엘이 예레미야의 글을 읽고, 포로 기간이 70년이 될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그는 자신의 죄와 백성의 죄를 자백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합니다. 그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 70이레의 계시를 전합니다. 이는 예루살렘의 회복과 함께 메시아의 오심과 죽으심, 그리고 종말에 있을 사건들을 함께 내다보는 복합적인 예언으로서, 구속사의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10장부터 12장까지는 마지막 환상이 이어집니다. 다니엘은 또다시 금식과 기도 가운데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미래의 많은 전쟁과 핍박, 그리고 종말의 날에 있을 일들을 듣게 됩니다. 북방왕과 남방왕의 싸움, 성도의 고난, 궁극적인 부활과 상급에 대한 말씀이 선포됩니다. 의인은 영생으로, 악인은 수치를 당할 것이라는 선언은 구약 속에서 부활의 개념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중요한 본문입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날까지 다니엘에게 네 길로 가라 하시며 그 끝에 상급이 있을 것을 약속하십니다.

    종말과 구원의 확신 (전장 통합)

    다니엘서 전체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절대적 선언입니다. 눈에 보이는 제국들이 번성하고 권세를 자랑하는 시대였지만, 그 모든 역사의 흐름은 하나님의 손 아래 있었고, 하나님의 때에 따라 흥하고 망했습니다. 다니엘은 이러한 현실 속에서 결코 타협하지 않았고, 언제나 기도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그는 권력자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고, 세상의 위협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믿음을 통해 민족에게 희망을 주셨고, 모든 시대를 향해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다니엘의 환상은 단지 시대의 사건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마지막에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게 합니다. 이 나라는 결코 흔들리지 않으며, 거룩한 자들이 영원히 누릴 나라입니다. 지금은 고난과 핍박이 있어도, 그 끝에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회복하시고 심판하시며 완전한 통치를 이루실 것이라는 약속이 다니엘서의 중심에 있습니다.

    결론

    다니엘서는 포로 시대라는 절망의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께 붙든 자가 어떻게 시대를 넘어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권력 앞에서도 믿음을 지켰고,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살아계심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환상을 통해 역사 속에서 일어날 모든 일을 예고하시고, 그 모든 과정이 결국 하나님 나라로 향하고 있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도 어쩌면 다니엘이 처했던 바벨론과 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일하시며, 그분의 나라는 여전히 세워져 가고 있습니다.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에게는 결국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하며, 그 끝에는 영원한 상급이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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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니엘 장별 요약 정리 

    하나님께 신실한 사람, 다니엘

    1장 – 뜻을 정한 다니엘

    다니엘과 세 친구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왕궁 교육을 받지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기 위해 왕의 음식을 거부한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지혜를 주셨고, 그들은 바벨론 박수들보다 열 배나 뛰어난 자로 인정받는다.

    2장 – 느부갓네살의 꿈 해석

    느부갓네살 왕이 신상에 대한 꿈을 꾸지만 아무도 해석하지 못한다. 다니엘은 하나님께 기도한 후 꿈을 밝히고, 바벨론 제국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것을 예언한다. 왕은 다니엘을 높여 총리로 세운다.

    3장 – 풀무불 속의 세 친구

    느부갓네살은 금 신상을 세우고 절을 강요하지만,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거부한다. 그들은 풀무불에 던져지지만 하나님의 보호로 살아남고, 왕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들을 높인다.

    4장 – 느부갓네살의 교만과 낮아짐

    느부갓네살은 자신의 권세를 자랑하다가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 짐승처럼 살게 된다. 시간이 지난 후 회개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왕위로 회복된다.

    5장 – 벨사살 왕의 최후

    벨사살 왕이 성전 기물로 잔치를 벌이다가 벽에 나타난 손가락 글씨를 본다. 다니엘이 글을 해석하며 왕의 몰락을 예언하고, 그날 밤 바벨론이 멸망한다.

    6장 – 사자 굴 속의 다니엘

    다리오 왕이 다니엘을 신임하자 관리들이 음모를 꾸며 기도 금지령을 만든다. 다니엘은 여전히 하나님께 기도하다가 사자 굴에 던져지지만, 하나님의 보호로 살아난다. 왕은 하나님을 경외하게 된다.

    7장 – 네 짐승의 환상

    다니엘이 네 짐승의 환상을 보며 세계 제국의 흥망과 마지막에 세워질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깨닫는다. 인자 같은 이가 권세를 받는 장면이 등장한다.

    8장 – 숫양과 숫염소의 환상

    다니엘이 바사(페르시아)와 헬라(그리스)의 흥망성쇠를 예언하는 환상을 본다. 작은 뿔이 나와 성소를 더럽히지만, 결국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되어 회복된다.

    9장 – 예레미야의 예언과 70이레

    다니엘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읽고 회개 기도를 드린다.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 70이레에 대한 계시를 주며, 장차 메시아가 오고 속죄가 이루어질 것을 예언한다.

    10장 – 하늘에서 온 사람의 환상

    다니엘이 기도하던 중, 하나님께로부터 온 천사가 나타나 앞으로 일어날 영적 전쟁과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준다.

    11장 – 남방 왕과 북방 왕의 예언

    다니엘은 장차 일어날 강대국들의 대립과 이스라엘의 고난을 예언하는 말씀을 듣는다. 세상 권세자들은 흥망성쇠하지만, 끝에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

    12장 – 마지막 때와 부활의 약속

    최후의 심판과 의인의 부활이 예언된다. 환난이 있겠지만,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끝까지 믿음을 지키라고 말씀하신다.

    결론

    다니엘서는 하나님의 주권과 신실한 자들에게 베푸시는 보호와 지혜를 강조한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신앙을 지키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았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지혜와 능력을 주셨다. 또한, 세상의 권세는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흘러가며,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영원히 세워질 것임을 선포한다. 이를 통해 성도들은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끝까지 믿음을 지킬 것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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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니엘 개론

    제목 / 

    본서의 명칭은 저자이며, 주인공인 '다니엘'의 이름을 따라 붙여진 것으로,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 '하나님은 나의 심판'이다. 
    한편 본서는 헌신과 충성이 담긴 빛의 책으로 어두운 세력에서 밝은 빛을 발하는 빛된 자의 행실과 그 빛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담긴 책이다.

    중심 인물의 이름을 따라 책명을 붙이는 구약의 관습은 여호수아, 사무엘, 에스더, 욥기등의 책들에 의해서도 나타난다. 
    그러한 책명이 반드시 그 책의 저자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물론 다니엘서의 경우처럼 저자가 그 책명 속에 포함될 수도 있다.

    저자 /
    본서의 저자에 대해서는 본서 자체가 다니엘이라고 증거하고 있다(9:2; 10:2). 
    예수께서도 이 책의 저자를 다니엘이라고 인정하셨다. 
    이 책은 B.C. 539년 고레스에 의해 바벨론이 함락된 직후인 B.C. 530년경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유대인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의 전통적 견해는 다니엘서가 B.C. 6세기에 기록되었고, 이 책의 저자는 다니엘이라는 것이다. 이 전통적 견해가 옳다는 것을 지지하는 증거들은 다음과 같다.
     (1) 다니엘서의 주장.
     선지자 다니엘은 여러 구절들(단 8:1-7, 13-19, 27; 9:2-22; 10:2-5)에서 제 1인칭을 사용하고 있다. 그는 이 책을 간수하라는 거룩한 명령을 개인적으로 받았다고 진술한다(단 12:4). 저자가 자신을 제 3인칭으로 언급하고 있는 부분들이 있다는 사실(단 1:6-11, 17, 19, 21; 2:14-20)로 인하여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고대의 저술들 가운데서 그러한 어법을 자주 볼 수 있기 때문이다(스 7:28 참조).
     (2) 다니엘서의 저자는 역사를 잘 알고 있다.
     B.C. 6세기의 사람으로서 바벨론의 사건들에 정통한 사람만이 이 책속에 나타나는 역사적 사실들을 제시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들에 대한 지식이 B.C. 6세기 이후에는 잃어버린바 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러한 사실들이 그 시대 이후 고대의 다른 문헌 속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비교적 최근의 고고학적 발견들로 인하여 이 사실들이 한번 더 밝혀지게 되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다니엘서로부터 한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다니엘을 이 책의 저자로 언급하신다(마 24:15). 모든 그리스도인 신자에게 있어서 이 증언은 결정적 증거가 될 것이다.
     이 책은 아주 명백하게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 첫 부분(단 1-6장)은 주로 역사이며 둘째 부분(단 7-12장)은 주로 예언이다. 그러나 이 책은 문학적 구성 단위(literary unit)로 되어있다. 다음의 논리들은 그러한 통일성(unity)을 지지하는 것으로서 열거될 수 있다.
     (1) 이 책의 여러 부분들은 상호 연관되어 있다. 성전 기명들이 벨사살의 잔치에 사용된 일은 그 기명들이 어떻게 바벨론에 옮겨져 왔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에 비춰 이해할 수 있다(단 1:1, 2; 5:3). 단 3장12절은 단 2장 49절에 처음으로 묘사된 느브갓네살의 정치적 조치를 언급하고 있다. 단 9장21절에는 앞서 받은 묵시가 언급되고 있다(단 8:15, 16).
     (2) 역사적 부분에는 이 책의 후반부(7-12장)에 나오는 예언들의 주제와 매우 밀접한 예언(2장)이 내포되어 있다. 제 7장에는 제 2장에서 제시된 주제가 더 발전된 형태로 나온다. 또한 역사적 요소와 예언적 요소 사이의 관계가 역력하다. 역사적 부분(1-6장)은 한 나라, 곧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취급 방법과 그 나라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취할 역할에 대한 이야기가 다루어져 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모든 나라를 어떻게 다루시는가에 대한 하나의 예증으로서 나타날 것이다.
     바벨론과 같이 이 책의 예언 부분에 그림같이 묘사된 바벨론 이후 연이어 일어날 제국들도 하나님의 뜻을 알고, 또 거기에 협력할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되었다. 각 제국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 데서 보인 충성으로 평가될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언 부분에 묘사된 나라들의 흥망성쇠는 바벨론의 사례에서와 같이 역사 부분에서 제시된 원칙들에 의거하여 이해하여야 한다. 이러한 사실이 이 책의 두 부분을 하나의 단위로 묶어 놓으며 바벨론 이후에 일어날 세계의 각 제국들로 말미암아 연출될 역할을 이해하기 위한 기초를 놓아 준다.
     (3) 이 책의 문학적 구성 단위가 매우 잘 증명될 수 있기 때문에 대다수의 학파의 대표자들이 그 사실을 인정한다. 구성, 곧 사고의 전반적인 방향과 두 가지 언어로써 사용된 표현법은 이 책 전반에 공통됨으로 이 책의 어떤 부분은 한 저술가가 쓰고 다른 부분은 다른 저술가가 썼다고 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무색해진다.
    제 1 쿰란(Qumran)굴에서 발견된 수백 사본 조각 가운데 세개는 다니엘서 사본 조각이다. 이것들은 바르텔레미(D. Barthelemy)와 밀리크(J.T. Milik)에 의하여 “유대 제1 사막 쿰란 제 1 동굴에서 발견물”(Oxford, 1955, 150-152)이라는 책에 발표되었다. 그 사본 조각들은 두 서기관들에 의하여 쓰여졌는데 그것은 따로따로 된 두 두루마리에 속하든지 아니면 제 1장과 제 2장은 한 서기관이 쓰고, 제 3장은 다른 서기관이 쓴 같은 두루마리에 속하든지 할 것이다. 그 사본 조각들은 다음에 나오는 22절들의 부분들이 포함되어 있다. 단 1:10-17; 2:2-6; 3:22-30. 이 절들과 마소라 사본과를 비교해 볼 때, 거기엔 16가지의 차이점들이 있다. 그러나 그 중 어느 하나도 구절의 의미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16가지 중 9가지는 철자상의 차이이고, 그 철자가 미치는 영향도 고작 한 문제에 불과하다. 아홉 중에서 둘은 철자의 오기인 것같고, 나머지 일곱은 마소라 사본에서까지도 여러가지로 철자되어 있다. 네 가지의 첨가된 것이 있는데, 하나는 접사 “그리고”이며, 하나는 “만약”이라는 말 앞에 있는 “경우”라는 불변화사요, 나머지 두 단어에는 모음이 첨가되었다. 마소라 사본에 있는 모음 글자가 조각에는 없는 경우가 한번 있다. 두개의 동사 어미는 기록상의 잘못인 것같다. 마소라 사본과 사해 사본 조각들과의 차이점을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극히 미미하기 때문에 번역상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같다. 이것은 다니엘서의 히브리어 사본은 실질적으로 적어도 그리스도 당시에 있었던 것과 동일한 형태의 것이라는 강력한 증거이다.
     다니엘 2장의 사본 조각에 히브리어에서 아람어로 바뀌어지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다(단 2:4). 바로 그곳에는 히브리어의 마지막 단어와 아람어의 처음 단어 사이에 공백이 남겨져 있어 두 언어 사이의 구별을 뚜렷이 해 놓았다. 이 사본 조각들은 위경서에 나오는 “세 아이들의 노래”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마소라 사본과 일치한다(단 3:23).

    기록연대 / 
    본서는 부분적으로 1인칭으로 기록된 것을 보아 기술된 당시의 사건과 동시대에 구성된 것이거나, 적어도 그 다음 세대를 넘지 않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 책은 B.C.2세기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는 천사가 다니엘에게 비밀을 간수하고 봉함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었다(단 12:9). 
    본서가 B.C.2세기에 집필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본서에 기록되어진 예언 등은 이 책이 그 이전에 기록되었음을 증거하여 준다. 
    쿰란 교단에서 다니엘서는 정경으로 받아들여졌고, 신약 기자들에게도 본서가 예언서로 받아들여졌으며, 얌니아의 랍비들에 의해서도 6세기의 저술로 받아들여졌다.

    배경 /
    B.C. 626년 앗수르 제국에 반기를 든 바벨론은 612년에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함락시켰다. 
    또한 B.C. 605년에는 애굽마저 정복함으로써 명실공히 강대국으로 부상하였다. 
    바벨론 포로로 끌러간 다니엘은 줄곧 선지자와 정부의 관리로서 활동하였으며 그의 이런 활약은 바벨론이 메대와 바사에 의해 정복될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역사적 배경
     다니엘서는 바벨론 시대의 유대인 포로였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의 생애에서 일어난 어떤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기록, 느부갓네살 왕이 꾸었고 다니엘이 해석했던 예언적 꿈에 대한 기록과 다니엘 자신이 받았던 이상에 대한 기록을 함께 싣고 있다. 비록 다니엘서가 포로 기간 동안과 그 직후에 바벨론에서 기록되었다 할지라도, 그 목적은 유대 민족의 포로 역사나 다니엘의 전기를 기록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은 정치가이자 예언자인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의 경험 중 가장 중요한 점들을 말하고 있고, 특별한 목적을 염두에 두고 편찬되었다.
     먼저 다니엘은 그가 왜 바벨론 왕의 공무에 임하게 되었는지의 사유를 간략히 서술하고 있다(단 1장). 느부갓네살왕의 제1차 시리아 원정 때, 즉 B.C. 605년 제1차 포로로서 바벨론으로 잡혀갔을 때, 왕족의 피를 받은 다니엘과 다른 귀공자들이 정부의 직무를 위하여 훈련받도록 선택되었다. 다니엘이 바벨론에 체류한 첫 19년은 바벨론의 속국으로 있었을찌라도, 유다가 한 나라로서 존속할 수 있었던 마지막 해들이었다. 유다의 말년에 있었던 왕들의 빈번한 반바벨론 정책의 결과로써 재난들이 유다 국민에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덮쳤다.
     다니엘이 포로로 붙잡혀 갈 당시 유다를 통치했던 여호야김왕은 몇년 간은 바벨론에 충성하였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그는 친이집트파의 정책에 동의하여 반역하였다. 그 결과로서 유다는 군대의 침략을 받았고, 그 백성들은 그들의 자유를 빼앗기고 포로로 붙잡혀 갔고, 왕은 그 생명을 잃어 버렸다. 그의 왕위를 계승한 그의 아들 여호야긴은 겨우 석달의 짧은 통치 후, 그의 불충성으로 인하여 응징하러 온 바벨론 군대를 맞게 되었다. 그와 함께 수천명의 유다 상류 계급 사람들이 B.C. 597년에 포로로 붙잡혀 갔다. 여호야긴의 뒤를 이은 시드기야왕은 분명히 바벨론에 충성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의 연약성과 우유부단함 때문에 그는 애굽의 제안과 그의 주요 보좌관들의 반바벨론 감정을 오래 지탱할 수 없었다. 그 결과 팔레스틴에서 계속적인 반역에 지친 느부갓네살 왕은 유다 왕국을 멸망시키기로 결심하였다. 2년 반 동안 바벨론의 군대는 유다를 약탈하고, 그 성전과 그 왕궁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포함한 도시들을 점령하고 파괴하고, B.C. 586년에 유다 주민들의 대부분을 포로로 잡아갔다.
     다니엘은 이 다사다난한 때에 바벨론에 있었다. 그는 바벨론 군대가 그의 고국 땅을 치려고 몇번 출발하는 것을 보았을 것이며, 바벨론 군대의 승리의 개선과 포로된 유대인들의 도착을 목격하였을 것이다. 그 포로들 중에는 그의 가족을 동반한 젊은 여호야긴왕과(왕하 24:10-16), 나중에는 눈 먼 시드기야왕이(왕하 25:7) 있었다. 이러한 때에 다니엘은 포로된 유대인들 중에서 꾸며지고 있던 정치적 소동도 알았을 것이다. 이 소동의 결과로 느부갓네살은 그 주모자들 중 몇을 태워 죽였다. 바로 이 소동 때문에 예레미야는 포로된 그의 동포들에게 바벨론에서 조용히 평화롭게 지내라고 촉구하는 편지를 보내게 되었다(렘 29장).
     이 모든 시기 동안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관리로서, 그 나라의 신민으로서 잠잠히 그리고 충성스럽게 그들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그들은 학문적 수련을 쌓은 후, 박사라고 불리는 상류 그룹의 일원이 되었는데, 그들은 왕의 고문으로 봉사하였다. 다니엘이 미래의 제국들에 대한 꿈을 느부갓네살왕에게 해석할 특별한 기회를 얻었던 때는 바로 이때였다(단 2장). 그 결과 다니엘은 수년간 재직하였을 것으로 보이는 아주 높은 지위에 임명되었다. 이 지위는 다니엘에게 그와 그의 친구들이 섬기는 하늘과 땅의 하나님의 권세를 왕에게 알릴 기회를 제공하였다. 다니엘이 얼마동안 이 지위에 있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도 B.C. 570년 전에 그 지위를 상실한 것같다. 왜냐하면 그의 이름이 당시의 느부갓네살 정부의 관직을 맡은 고관들의 이름을 기록한 설형문자(쐐기문자)로 기록된 현존하는 “왕궁 정부 연감”의 목록에 없기 때문이다. 느부갓네살의 통치에 대한 이외의 왕궁 정부 연감은 현존하지 않는다.
     사실상, 다니엘의 이름이 현재로서는 성서 밖의 자료에서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 문서에 다니엘의 이름이 없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니엘이 얼마 동안 공직에 있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느부갓네살의 통치 기간 중에 있은 사건들 중 네가지 중요한 사건들만이 다니엘서에 기록되어 있고, 그 중 세 사건에서 다니엘이 활약하고 있다. 그 네 사건들은, 느부갓네살의 즉위년을 포함한 그의 통치 첫 3년 동안의 유대 왕족들의 교육(1장), 왕의 치세 제2년에 있은 느부갓네살의 꿈 해석(2장), 연대가 확실치 않은 어느 해에 두라 평지에 신상을 세운 일과 그 결과로 다니엘의 친구들이 당한 경험들(3장), 아마도 왕의 말년에 일어났을 것으로 짐작되는 것으로서, 왕이 7년간 미쳐서 쫓겨나 고생할 것을 선고하는 그의 꿈을 다니엘이 해석함(4장)등이다.
     느부갓네살이 실각되어 있는 시기 동안의 다니엘의 활동에 대하여는 알려져 있지 않다. 또한 느부갓네살이 권세와 왕위를 복권한 후에 다니엘이 무엇을 하였는지, 느부갓네살을 계승한 왕들­아멜마르둑(Amel-Marduk: 성경상의 에윌므로닥), 네르갈샤르우수르(Nergal-shar-usur), 라바쉬마르둑(Labashi-Marduk), 나보니더스(Nabonidus)­의 통치 기간 동안에도 그의 봉직이 요청되었는지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의 강대한 제국이 이전 왕들을 시살(弑殺)한 왕들의 통치하에서 도덕적으로 약하여지고 부패하는 것을 관찰하는 일이 허락되었다. 또한 그는 동방의 페르시아에서 고레스 왕이 혜성같이 나타나는 것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보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해방자로서 고레스라는 이름이 예언 중에 언급되어 있었기 때문이다(사 44:28; 45:1). B.C. 553년(고레스가 메대 제국의 정복자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해), 나보니더스는 아라비아의 테마(Tema)를 정복하기 위하여 출발하면서, 바벨론을 그의 아들 벨사살이 다스리도록 임명하는 것을 다니엘은 보았을 가능성이 있다. 다니엘에게 큰 이상들이 주어지고(단 7, 8장), 지금까지는 단순히 꿈과 이상의 해석자로만 알려졌던 그가 모든 시대의 위대한 예언자들 중의 한 사람이 되었던 것은 바로 벨사살의 통치 첫 3년 동안에 있었던 것이다.
     B.C. 539년 바벨론이 망하던 그 밤에 벨사살의 잔치가 베풀어지고 있던 홀의 벽에 손으로 쓰인 운명의 글을 읽고 해석하라고, 바벨론 사람들은 다니엘의 봉사를 한번 더 요청하였다. 페르시아 사람들이 바벨론과 그 제국을 정복한 다음, 새 통치자들은 전대(前代)의 노 정치가의 재능들과 경험을 이용하였다. 다니엘은 또 다시 왕궁의 고문관장이 되었다. 이사야의 예언들을 왕으로 알게 한 사람은 다니엘이었을 것이다. 그 예언들은 페르시아 왕이 유대인들의 포로 생활을 끝나게 하고 그들의 성전과 그 땅을 회복하게 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다니엘의 이 후기의 공직 기간 동안, 그를 시기하는 동료들에 의해 생명의 위협을 받았으나, 주께서 놀라운 방법으로 개입하셔서 그의 종을 구원하셨다(6장). 다니엘의 생애의 말년에 중요한 이상들을 추가로 받았는데, 그 처음 것은 메대왕 다리우스 때에 받았고, 그 다음은 고레스 왕 때에 받았다(10-12장).
     (1) 다니엘서의 역사성
     다니엘서의 역사성에 대한 첫 주요 공격이 신플라톤 철학자 폴피리(Porphyry:A.D. 233-304?)에 의해 있었던 이후로, 이 책은 처음에는 간혹 있었으나 지난 2세기 동안에는 계속적으로 비평의 불길에 휩싸여 왔다. 그 결과로 오늘날의 대다수의 그리스도인 학자들은 다니엘서가 B.C.2세기의 마카비 반란 시대에 살았던 무명의 저자에 의해 생긴 것으로 보고 있다.
     이 학자들이 다니엘서의 연대를 그렇게 늦게 잡는 데는 두가지 주요 이유들을 들고 있다. 첫째, 그들의 주장대로 어떤 예언은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Antiochus Ⅳ Epiphanes:175-163 B.C.?)를 가리키고 있다. 그들의 개념에 따르면, 대부분의 예언들­적어도 정확히 성취되었다고 증명되어 온 예언들­은 묘사된 사건들이 일어난 후에 기록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다니엘서의 연대는 안티오쿠스 4세의 통치 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저들의 논리에 의하면, 다니엘의 역사 부분은 입수할 수 있는 자료들에서 알려진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어떤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 불일치점에 대하여는 그 저자가 실제적인 사건과 시간상, 공간상 너무 떨어져 있었으므로 B.C. 7세기와 6세기, 곧 400년 전에 실제로 일어난 것에 대하여 한정된 지식밖에 가질 수 없었다고 가정함으로써 최선의 설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두가지 논쟁들 중 첫번째의 것은 고대의 영감받은 선지자들이 역사의 진로에 대하여 실제로 정확한 예언을 하였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타당성이 없다. 두번째의 것은 보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만한 가치가 있는데, 그것은 다니엘서에는 역사적 부정확성, 시대 착오와 오인이 포함되어 있다는 주장의 심각성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다니엘서의 역사적 신빙성에 대한 간략한 논의를 다음에 제시한다.
    다니엘서가 오늘날이라 할찌라도 입수할 수 있는 고대의 문헌적 자료들에 의하여 증명될 수 없는 몇몇 사건들을 기술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한 사건 중의 하나가 느부갓네살 왕이 미친 이야기인데, 현존하는 고대의 어떠한 기록들 가운데서도 찾아볼 수 없다. 신바벨론 제국의 가장 위대한 왕의 일시적 실각에 대한 입증할만한 자료가 없는 것은 왕실의 실록에는 오로지 칭송할 만한 것만 기록한 그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단 4:36). 또한 메대 왕 다리우스도 수수께끼 같은 인물인데, 역사상 그의 참 위치가 성경 외의 믿을만한 자료들에 의하여 입증되지 못하고 있다. 그의 신분에 관한 암시가 헬라 저술가들의 저서 속에서, 그리고 설형 문자로 된 자료로부터 단편적 정보는 찾을 수 있다.
     다니엘서의 보수적 주석가들을 당혹하게 만든 그 외의 역사적 난점들은 근대에 고고학에 의한 역사적 지식의 증가로 말미암아 해결되었다. 지금은 해결된 문제들 중 중요한 몇가지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① 다니엘 1:1; 예레미야 25:1 사이의 상상적 연대 차이-학자들이 일반적으로 동의하는 바와 같이, 믿을만한 역사적 출처가 되는 예레미야는 유다 왕 여호야김 4년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의 원년과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의 첫 예루살렘 정복의 해가 여호야김 제3년이라고 말함으로써 느부갓네살의 원년과 여호야김의 제3년과 같은 해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같다. 고대 왕들의 통치년을 산출하는 여러가지 제도에 대한 그 당시의 기록들을 발견하기 전에는 언듯 보기에 서로 모순되는 것같은 이 문제를 주석가들은 설명하는 일에 어려움을 느꼈다. 그들은 느부갓네살과 그의 아버지 나보폴라사르와의 동시 집권으로 추측함으로써, 그리고 예레미야는 유다 제도를 따르고 다니엘은 바벨론의 제도를 따르는 서로 다른 계산법에 따라 사건들의 연대를 매겼다고 추정함으로써, 이 난제를 풀려고 애썼다. 두가지 설명은 다 오늘날 낡은 것이 되었다.
     모든 어려움들은 그 당시의 유대 왕들과 같이 바벨론의 왕들도 그들의 통치 연대를 “즉위년” 방식에 계산하였다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풀리게 되었다. 바벨론 왕이 왕위에 오른 그 해는 왕의 공식적 첫 해로 계산하지 않고, 다만 그의 즉위년으로 계산했다. 그의 원년은 그가 처음 맞는 만 일년을 의미하며, 종교적 의식으로서 그가 바벨론의 신 벨(Bel)의 손을 잡는 때인 정월 초하루 이후에야 이 원년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요세푸스가 인용한 대로(아피온에 반대하여 1권 19), 베로수스(Berosus)에게서 느부갓네살이 그의 군사 원정 중 애굽 국경에 있을 때, 그의 아버지가 죽고 그가 왕에 올랐다는 것을 알게 된다(2권 95, 96, 161; 3권 91). 그러므로 다니엘과 예레미야는 서로가 완전히 일치한다. 예레미야는 느부갓네살의 첫 통치년을 여호야김 제4년과 같은 해로 보고 있고, 반면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즉위년에 포로로 잡혀 갔는데, 그 해를 여호야김 제 3년이라 하였다.
     ② 바벨론의 위대한 건축가 느부갓네살-헬라 역사가들에 의하면, 느부갓네살은 고대 역사의 사건에서 별로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는 결코 위대한 건축가로 또는 더 큰 바벨론의 건설가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영광이 바벨론의 역사상 탁월한 위치에 있었던 세미라미스(Semiramis) 여왕에게 돌려진다는 사실을 헬라의 고전 역사를 읽는 사람들이라면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지난 수 백년에 걸쳐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발굴된 그 당시의 설형 문자의 기록들은 고대 저술가들에 의한 양상을 크게 변화시켰다. 그 설형 문자의 기록들은 “이 큰 바벨론”(단 4:30)의 건설을 느부갓네살에게 돌리는 다니엘서의 기사를 확증하였다. 이 일은 이제서야 발견된 사실인데, 설형 문자 비문에 삼무-라마트(Sammu-ramat)라 불리는 세미라미스는 앗시리아의 모후(queen mother)였고 그는 그의 어린 아들 아다드니라리 3세의 섭정이었고 고전 문헌이 주장하는 것같이 바벨론을 통치한 여왕이 아니었다. 바벨론에서 아무런 건축 활동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반면 느부갓네살의 무수한 건물 비문은 그가 궁전들과 신전들과 도시의 신전탑을 재건하고, 새로운 건물들과 방어 성벽들을 다시 세움으로써, 어떤 의미에서 신바벨론의 창시자가 되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신바벨론 시대의 기자 외의 그 어느 누구도 이러한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헬라 시대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이 다니엘서에 있음으로 해서 다니엘이 6세기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2세기에 기록되었다고 믿는 비평 학자들이 당황하게 되었다. 그들의 난처한 입장을 말해 주는 전형적 실례가 다음에 나오는 하바드 대학의 파이퍼(R.H.Pfeiffer)의 말 중에 나온다: “예측컨대 우리는 우리 저자가 발굴이 증거한 대로, 신바벨론은 느부갓네살이 건설한 줄 어떻게 알았는지 결코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구약 입문, 뉴욕, 1941, 758, 759 페이지).
     ③ 바벨론 왕 벨사살-나보니더스(Nabonidus)가 페르시야가 정복하기 전의 바벨론 마지막 왕으로 언제나 등장하는 것에 반해, 벨사살의 이름이 성경 외의 어떠한 고대의 저술들 중에도 없다는 사실은 다니엘서의 역사성을 반박하는 가장 강력한 논쟁들 중의 하나로 정규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지난 수 백년에 걸쳐 나온 발견물들은 이 점에 있어서의 다니엘에 대한 모든 비평들을 반박하였고, 그 예언자의 벨사살에 관한 역사적 진술에 신빙성이 있음을 아주 인상깊게 변호하였다.
     (2) 다니엘서의 언어들
     에스라서와 같이 다니엘서는 일부는 히브리어로, 일부는 아람어로 기록되었다. 에스라서의 경우 두 가지의 언어가 사용된 것은 저자가 역사적 기술이 포함되어 있는 아람어 문서를 택하여, 그 부분을 그의 책 속에 써 넣고, 그렇지 않은 때는 그의 백성의 모국어인 히브리어로 기록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함으로써 설명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아람어 부분이 2장 4절에서 시작되어 7장 마지막 절에서 끝나는 다니엘서의 경우엔 이러한 해석이 맞지 않다.
     다음에 나오는 것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여러 학자들이 제시한 여러 설명들 가운데 일부인데, 괄호 안에 있는 것은 이러한 설명들의 타당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말들이다.
     ① 저자가 역사 이야기는 아람어로 말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썼고, 예언은 히브리어를 말하는 학자들을 위하여 썼다(그러나 아람어로 된 2장, 7장은 모두 대 예언들이므로 이 견해가 틀렸음을 말해준다).
     ② 두 가지의 언어는 두 가지의 자료를 가리킨다(이 견해가 옳지 못한 것은 여러 과격한 비평가들까지도 시인한 사실로서 이 책은 강력한 통일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③ 이 책이 원래는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기록되었지만, 그 부분들이 후에 번역되었다(이 견해는 왜 한 부분만 다른 언어로 번역되고 전체가 번역되지 않았느냐에 대한 의문을 답하지 못하고 있다).
     ④ 저자는 모든 계급의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나는 히브리어로 하나는 아람어의 두 판으로 출판하였다. 마카비안의 박해 기간에 이 책의 부분들이 상실되어, 두 판에서 남은 부분들을 아무런 변경도 없이 연결했다(이 견해는 정확하다고 증명할 수 없으며, 너무나 많은 불확실한 점들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로 불리한 입장에 있다).
     ⑤ 저자는 갈대아 사람들이 “갈대아 방언(Syriack: 정확히 말하면 아람어)으로 왕에게”(단 2:4)라는 이 부분에서 아람어로 기록하기 시작하여 그 당시 그가 기록하고 있는 동안은 이 언어로 계속하다가 다시 쓰기 시작했을 때는 히브리어(단 8:1)로 기록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마지막 견해가 바른 방향으로 인도하는 것같다. 왜냐하면 이 책의 여러 부분이 같지 아니한 때에 기록된 것같기 때문이다. 훈련받은 정부의 관리로서 다니엘은 여러 언어로 말하고 기록했다. 그가 어떤 역사적 사건들과 이상들은 히브리어로, 어떤 것은 아람어로 쓴 것같다. 이러한 가정에 기초하여 제 1장은 히브리어로 아마도 고레스 원년에 기록된 것같고, 제 3-6장의 이야기들은 아람어로 같지 않은 때에 기록된 것같다. 제 7장이 아람어로 기록된 것 외에는 대부분의 예언적 이상들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미래의 왕국들에 대한 느부갓네살왕의 꿈 이야기는(2장) 갈대아인들의 말이 인용되는 데까지(2:4)는 히브리어로 기록되었고, 여기서부터 이 이야기가 끝나는 데까지 아람어로 되어 있다.
     다니엘이 그의 말년에 그의 모든 저술들을 한 책으로 모았을 때, 그는 자기 독자들의 대부분이 두 나라 말에 통하는 것을 알고 - 다른 문헌들로 보아 명백한 사실이다- 이 책을 언어상 통일을 기하기 위하여 어떤 부분도 번역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다니엘서에 두 언어가 사용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이 책의 기원을 늦게 잡는 논쟁거리가 될 수 없다. 다니엘의 기원을 B.C. 2세기로 잡는 사람들은 왜 마카비 시대의 히브리 저자가 그 책의 일부는 히브리어로, 일부는 아람어로 기록했는지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철자법상 다니엘서 아람어의 특이점들은 3-4세기에 서부 아시아에서 쓰이던 아람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히브리 성경에서 볼 수 있는 특징으로서 언어의 현대화 때문인 것같다. 철자법이 기록 연대를 나타낼 수 없는 것은 마치 가장 최근의 영어 성경 개정판이 성경은 원래 20세기에 기록되었거나 번역되었다는 증거로 채택될 수 없다는 것과 같다. 철자법상의 특징은 기껏해야 언제 철자의 최근 교정이 있었는지를 암시할 뿐이다.
     사해 사본 가운데는 B.C. 2세기의 다니엘서 사본 조각들이 여러개 있다. 그 가운데 적어도 두 개가 히브리에서 아람어로 바꾸어진 그 부분을 보존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 당시 그 책에 두 가지 언어로 된 특징들이 있었음을 매우 명백히 보이고 있다.

    주제
     다니엘서는 역사와 예언의 안내서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 장래를 말하는 예언은 역사를 미리 보는 것이 되며, 역사는 장래를 예고한 예언이 눈에 보이게 지나가는 것이다. 예언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시간의 일들을 영원한 빛에 비추어 볼 수 있게 하고, 적절한 때에 효과적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깨우치게 하고, 최후의 위기를 위하여 개인으로 준비하게 하고, 성취된 예언 위에 믿음의 굳건한 기초를 놓게 하는 요소가 있다.
     다니엘서의 예언의 네 중요 부문에는 세계 역사의 배후에 대하여, 다니엘 시대로부터 세상 끝날에 이르기까지의 하나님의 백성들의 경험들이 간략히 제시되어 있다. “장막이 걷히고 모든 인간의 흥미와 능력과 감정의 활동과 반동을 위와 뒤와 속으로 전능하신 분의 힘이 그분 자신의 계획들을 묵묵히 참을성 있게 실현시키시는 것을 우리는 본다.” 네 분야의 예언은, “하늘의 하나님이”, “영원히 망하지…아니할” 한 나라를 세우실 때(단 2:44), “인자”가 “영원한 권세”(단 7:13, 14)를 받을 때, “만왕의 왕”에 대한 반역이 “사람의 손으로 말미암지 않고 깨어”질 때(단 8:25),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저들의 압제자들에게서 영원히 해방될(단 12:1)때에 각기 그 절정에 달한다. 이렇게 하여 다니엘의 예언들은, 위태로운 때와 영원히 끝없는 바닷가를 연결하는 다리, 곧 다니엘과 같이 마음 속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에게 봉사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믿음으로 현실 생활의 불확실과 곤혹에서 영원한 생활의 평화와 안정으로 건너가는 하나님께서 놓으신 한 다리를 준비한다.
     다니엘의 역사 부분은 가장 현저한 방법으로 참된 역사 철학을 드러낸다. 이 부분은 예언 부분의 서론에 위치한다. 한 나라, 곧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취급 방법을 자세히 이야기 함으로써 이 책은 우리로 하여금 이 책의 예언 부분에 요약되어 있는 기타 나라들의 흥망성쇠의 의미들을 깨달을 수 있게 해 준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 내포되어 있는 바벨론의 역할이 보여주는 역사 철학을 분명히 깨닫지 못하고서는 예언적 이상의 영사막 위에 나타난 바벨론을 뒤이어 일어난 다른 나라들의 역할도 충분히 깨닫거나 인식하지 못한다.
     이 책의 역사 부문에서 우리는 당대의 하나님의 사람인 다니엘이 이방 세계의 천재 느부갓네살과 대면하여 왕에게 다니엘의 하나님, 곧 역사의 중재자를 알리고 협력할 기회를 얻게 한 것을 본다. 느부갓네살은 당대의 가장 위대한 나라의 군주이었을 뿐만 아니라 탁월한 지혜를 가진 사람이었고, 또한 정의와 공의에 대한 천부적인 판단력이 있었다. 사실상 그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특별한 역할을 위하여 권좌에 오른 “열국의 능한 자”(겔 31:11)요, 이방 세계의 지도적 인물이었다. 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제 내가 이 모든 땅을 내 종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주고”(렘 27:6)라 하셨다.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붙잡혀 갔을 때, 그들이 엄하나 잔인하지 않은 손아래 붙들리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었다. 느부갓네살의 왕국에서의 다니엘의 사명은 왕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역사의 극적인 이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두 인물을 등장시키셨다.
     다니엘의 첫 네 장들은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의 충성을 획득하시게 된 방편들을 진술하고 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왕궁에서 하늘의 원칙들과 정책들을 대표할 만한 한 적절한 인물을 필요로 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개인적 대사로서 다니엘을 선택하여서 느부갓네살에게로 보내셨다. 포로인 다니엘로 하여금 느부갓네살의 호의를 사게 한 하나님의 방법, 느부갓네살로 먼저는 다니엘 그 다음에 다니엘의 하나님께 확신을 갖게 한 방법은 오늘날 세상에서 당신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사람들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예증한다.하나님께서 다니엘을 사용하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원칙의 사람이요 믿을 수 있는 성품의 사람이요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것을 생애의 첫째 가는 일로 삼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계시된 모든 뜻과 일치된 삶을 살기 위하여 “뜻을 정하”(단 1:8)였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바벨론 관리들의 “은혜와 긍휼을 얻게”(9절)하셨다. 이것은 제 2단계, 곧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의 신체적 탁월성을 증거하는 일을 위한 길을 준비하였다(12-15절). 그 다음에는 지적 우월성을 증거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저들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17절) 결과로서 저들은 저들의 경쟁자들보다 “십배나 나은 줄”(20절)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다니엘은 인격에 있어서나, 육체와 지능에 있어서 그의 동료들보다 월등하다는 것이 증명되었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느부갓네살의 신임과 존경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느부갓네살로 하여금 다니엘의 하나님을 대면하도록 준비시켰다. 일련의 극적인 경험들-2장의 꿈, 3장의 풀무불로부터의 인상적인 구출, 4장의 꿈-은 다니엘의 하나님의 권위와 권세와 지식을 왕이 만족하도록 증명하였다. 2장의 경험 가운데 나타난 인간의 지식의 열등성은 느부갓네살로 다니엘에게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의 신이요 모든 왕의 주재시요 모든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자시로다”고 시인하게 하였다(단 2:47). 그는 솔직하게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지혜보다 나을 뿐 아니라 자신의 신들의 추측된 지혜보다 월등하다는 것을 시인하였다. 금 우상과 불타는 풀무불의 사건들은 하늘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을 구원”(단 3:28)하셨다는 사실을 느부갓네살로 시인하게 만들었다.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수 있는 다른 신이 없다는 사실로 보아, 그의 온 나라 안에서 아무나 히브리인의 “하나님께 설만히 말하”(29절)지 않아야 한다고 그는 결론을 내렸다. 이제 느부갓네살은 하늘의 하나님은 지혜로우실 뿐만 아니라 권세가 많으신 분이라는 것과 전지하실 뿐만 아니라 전능하신 분임을 시인하였다. 세번째의 경험-그의 자만했던 지혜와 권세가 일시적으로 제거되었던 7년간-은 “지극히 높으신 자”(단 4:32)는 지혜와 권세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인간 나라를 다스리기 위하여 쓰신다는 사실을 왕에게 가르쳤다. 그분은 지혜와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느부갓네살의 이성이 되돌아 온 다음 그가 행한 최초의 행동은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존경”하고 그가 오랫동안 했던 것같이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하나님이 “능히 낮추심”을 시인하게 된 사실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수년에 걸쳐 느부갓네살이 개인적으로 배운 교훈들은 그를 이어 바벨론의 왕위에 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였다. 바벨론의 마지막 왕인 벨사살은 그가 느부갓네살의 경험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22절), 하늘의 하나님을 공공연히 모독하였다(단 5:23). 하나님의 계획과 조화되게 일하는 대신, “바벨론은 … 교만하고 잔인한 압제자가 되었”고, 하늘의 원칙들을 거절함으로써 파멸을 자초하게 되었다. 그 나라는 저울에 달아보니 부족하게 되었고(단 5:25-28),세상 통치권이 페르시아로 넘어가 버렸다.
     사자굴에서 다니엘을 구출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이전에 바벨론의 통치자들 앞에서 그리하셨던 것처럼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자들 앞에서 그의 권위와 권세를 증명하셨다(단 6:20-23). 메대 왕 다리우스의 조서는 “사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였고, “영원히 변치 않으실”것을 시인하였다(26절). “메대와 바사의 변개치 않는 규례”(8절)조차,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는”, “지극히 높으신 자”(단 4:32)의 명령 앞에 굴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고레스는 사자굴로부터 다니엘을 구출함에 있어서 나타난 하나님의 기적적 능력의 증거로 말미암아 좋은 인상을 받았다. 예루살렘과 성전을 재건하는 일에 그가 행할 역할을 말한 예언들 역시 그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의 마음은 깊이 감동되어 그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그의 사명을 완수하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하여 다니엘서는 하나님의 목적을 마지막으로 성취할 나라들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권위가 행사될 원칙들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시려고 바벨론을 높이셨다. 바벨론은 시험기를 거쳤으나, 결국 실패하고 그 영광은 쇠하고 그 권력은 떠나고 그 지위는 다른 나라로 말미암아 점령되었다.
     다니엘서의 네 이상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를 세우기까지 다니엘 때로부터 지상에 있을 선악의 세력들 사이의 투쟁과 관련이 있다. 사단은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지상의 세력들을 사용하려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이상들은 그 세력들을 알려주고 있는데, 사단은 이 세력들을 통하여 맹활약하고 있다.
     첫째 이상(2장)은 주로 정치적 변화를 다루고 있고, 이 이상의 주요 목적은 느부갓네살에게 바벨론 통치자로서의 그의 역할을 나타내 주며, 그에게 “이 일후에 일어날 일”(29절)을 그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마치 첫째 이상을 보충하려는 듯, 둘째 이상(7장)은 첫 이상 중에 언급된 세력들의 통치 기간 동안의 하나님의 백성이 당할 경험들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성도들이 마침내 승리하게 될 것과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의 원수들 위에 임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14, 18, 26, 27절).
     셋째 이상(8-9장)은 둘째 이상을 보충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백성과 종교를 없이하려는 사단의 시도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넷째 이상(10-12장)은 앞의 이상들을 요약하면서, 그 앞의 어떤 이상들보다 더 세부적으로 망라하고 있다. 이것은 둘째와 셋째 이상의 주제를 확대시키고 있다. 이것의 강조의 촛점은 “말일에 네 백성의 당할 일”과 “이 이상은 오랜 후의 일”(단 10:14)이라는 것, 그리고 “큰 전쟁에 관한 것”이다(1절). 11장 2-39절에 망라된 역사 이야기는 “말일”(단 10:14)과 “마지막 때”(단 11:40)에 일어날 사건들에까지 미친다.
     다니엘의 예언들은 계시록의 예언들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대체로 계시록은 다니엘과 동일한 범위를 다루고 있으나,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로서의 그리스도 교회의 역할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다니엘서의 애매한 부분들은 종종 계시록과 비교해 봄으로써 분명해진다. 마지막 때와 관련된 예언, 곧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하라는 명령을 다니엘이 받은 이 예언의 부분은, 부지런한 연구를 통하여 말세에 그 의미에 대한 “지식”이 “증가”할 것이다(단 12:4). “말세와 관련된 다니엘의 예언의 이 부분”이 인봉되었다 할찌라도(단 12:4), 요한은 “때가 가까우므로” 그의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계 22:10)는 특별한 지시를 받았다. 그러므로 모호한 경향이 있는 다니엘서의 어떤 부분들을 보다 명확히 해석하기 위하여 우리는 어둠을 몰아내는 빛을 위하여 계시록을 주의깊이 연구하여야 한다.

    특징 / 
    본서는 역사적 진술(1~6장)과 묵시문학적 자료(7~12장)로 구성되어 있다. 
    후자는 신학적 내용에 있어서 주로 종말론적이며 상징적이고 환상적이고 예언적인 문학 작품을 가리킨다. 
    묵시문학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다. 
    당시의 선지자들의 사역의 급선무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상기시킴으로써 낙심치 않게하는 것이다.

    목적 / 
    다니엘은 바벨론 궁정에서 거하면서 체험한 경험들과 그가 받은 환상과 계시들을 기록하였다. 
    이 기록의 목적은 이방 신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우월성과 유일성을 증거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징벌을 받아 이방의 포로가 되었지만 결국 이스라엘은 회복되고 이스라엘을 압제하던 세상 권세들은 사라질 것임을 예언하기 위함이었다. 
    특히 다니엘이 목격한 환상에 대한 기록은 장차 메시야가 임하여 자기 백성을 구원하며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이 밝히 드러나게 될 것임을 예고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증거하려 했던 것이다.

    구조 / 
    다니엘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지는데, 
    첫째 부분(1~6장) - 역사적 사실
    둘째 부분(7~12장) - 환상과 그 해석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래서 전반부는 주로 역사적인 것, 즉 여섯 가지 역사적 이야기들이 나오고 후반부에서는 주로 예언들, 즉 네 가지 환상들이 나옵니다. 이것을 서로 대조하면 전반부는 암흑의 역사이고 후반부는 광명의 역사이다. 
    내용으로 볼 때 전반부는 다니엘이 다른 꿈들을 해석하고, 후반부는 천사가 다니엘의 꿈을 해석한다. 
    여기서 전반부에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고, 후반부에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다.


    개요
    Ⅰ. 역사 부분 1:1-6:28
         1.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의 교육 1:1-21
           (1) 유다에서 바벨론까지의 제1차 포로 이송 1:1, 2
           (2) 왕의 봉사를 위하여 훈련 받도록 선택된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 1:3-7
           (3) 다니엘이 자기 법에 따라 살도록 허락을 얻음 1:8-16
           (4) 성공적 교육과 왕에게 봉사하도록 용납됨 1:17-21

         2. 큰 신상에 관한 느부갓네살의 꿈 2:1-49
           (1) 느부갓네살이 꿈으로 인하여 번민함 2:1-11
           (2) 박사에 대한 사형 집행 명령과 취소 명령 2:12-16
           (3) 다니엘이 지식을 받고 감사함 2:17-23
           (4) 다니엘이 왕에게 꿈을 전함 2:24-35
           (5) 다니엘이 꿈을 해석함 2:36-45
           (6)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시인함 2:46-49

         3. 다니엘의 친구들이 무서운 풀무불에서 구출됨 3:1-30
           (1) 느부갓네살이 신상을 세우고 그것에 경배하기를 요구함 3:1-7
           (2) 신실한 히브리 사람들이 경배를 거절함 3:8-18
           (3) 하나님의 개입으로 풀무불에서 건짐을 받음 3:19-25
           (4) 느부갓네살의 고백과 조서, 히브리사람들의 승진 3:26-30

         4. 느부갓네살의 두번째 꿈, 그의 겸비와 회복 4:1-37
           (1) 하나님의 지식과 능력에 대한 느부갓네살의 고백 4:1-9
           (2) 꿈에 대한 묘사 4:10-18
           (3) 다니엘의 꿈 해석 4:19-27
           (4) 느부갓네살의 쇠잔과 회복 4:28-36
           (5) 느부갓네살이 하늘의 하나님을 칭송함 4:37

         5. 벨사살의 잔치와 나라의 상실 5:1-31
           (1) 벨사살이 성전 기명을 모독함 5:1-4
           (2) 분벽 위에 손으로 쓴 신비한 글씨 5:5-12
           (3) 다니엘의 해석 5:13-28
           (4) 다니엘이 영예를 얻음 바벨론의 멸망 5:29-31

         6. 사자굴에서 다니엘이 구출됨 16:1-28
           (1) 다니엘의 승진과 그의 동료들의 시기 6:1-5
           (2) 기도를 금지한 다리우스의 조서 6:6-9
           (3) 다니엘의 조서 위반과 그 정죄 6:10-17
           (4) 다니엘의 놓임과 고소자들의 처벌 6:18-24
           (5) 다니엘의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공인 6:25-28

    Ⅱ. 예언 부분 7:1-12:13
         1. 다니엘의 두번째 예언적 기별 7:1-28
           (1) 네 짐승과 작은 뿔 7:1-8
           (2) 인자의 심판과 영원한 통치 7:9-14
           (3) 한 천사의 이상 해석 7:15-27
           (4) 다니엘이 받은 이상 7:28

         2. 다니엘의 세번째 예언적 기별 8:1-9:27
           (1) 수양과 뿔들 8:1-8
           (2) 작은 뿔과 그의 간교성 8:9-12
           (3) 성소 정결에 관한 시간적 예언 8:13, 14
           (4) 가브리엘이 이상의 첫부분을 해석함 8:15-26
           (5) 이상을 본 결과로 다니엘이 앓음 8:27
           (6) 다니엘이 회복을 위하여 기도하며 그의 백성의 죄를 자복함 9:1-19
           (7) 가브리엘이 이상의 남은 부분을 해석함 9:20-27

         3. 다니엘의 네번째 예언적 기별 10:1-12:13
           (1) 다니엘의 금식 10:1-3
           (2) “한 사람”의 나타남과 다니엘에게 생긴 결과 10:4-10
           (3) 그 사람과 다니엘과의 예비적 대화 10:11-11:1
           (4) 장래의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이상 11:2-12:3
           (5) 기사가 계속되는 동안 다니엘에게 개인적인 약속을 함 12:4-13


    내용 / 
    에스겔이 포로가 된 백성들을 성전에 대한 기대로써 격려하고 있었을 때, 다니엘은 바벨론의 왕가의 권세가들에게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나타내고 있었다. 
    불신자들은 다니엘서의 네 개의 세계 제국 [바벨론, 바사, 헬라 및 로마]에 대한 예언에 대해서 많은 비평을 해 왔다. 
    비록 이방인들이 팔레스타인을 한때 지배했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을 실제로 지배하셨었으며 지금도 지배하고 계십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권세는 우리들의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도 이루어 나갈 것이다.

    교훈 /

    역사적인 교훈 : 
    본서의 예언은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의 나라가 회복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함으로서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즉 유다 백성들로 하여금 환경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하나님앞에 진실하게 설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교리적인 교훈 : 
    본서의 가르침에는 두 가지가 있다. 
    즉 세상에 현존하는 권세자들을 정죄하고 동시에 이 세상에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을 전달하는 것이다.

    기독론적인 교훈 : 
    본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 왕국을 부수는 거대한 돌로(2:34, 45), 인자로(7:13), 옛적부터 계시는 자로(7:22), 기름부음 받은 자(9:26) 등으로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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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니엘 장별 요약

    다니엘 역사와 개론

    다니엘은 이스라엘 왕국 시대의 마지막과 포로 시대의 인물이다. 
    죄를 범하여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세 차례에 걸쳐 포로로 잡혀갑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남유다 왕국이 완전히 멸망하고 성전이 파괴되어 성전의 모든 기물이 바벨론에 옮겨 가게 됩니다.



    다니엘 1장 요약

    1-3절 여호야김 삼 년에 성전 기물을 가져와 시날 신전에 둠

    포로는 3차에 의해 일어난다. 다니엘은 1차 포로 때이다. 이 때는 남유다가 완전히 멸망하지 않을 때이다.

    4-7절 포로 중에서 지혜로운 자를 가르치게 함

    8-21절 다니엘과 세 친구가 환관장에게 구함

    [이스라엘의 3차 포로 시간과 사람들]

    • 1차 포로 / 기원전 605년, 다니엘을 비롯한 여러 귀족들
    • 2차 포로 / 기원전 597년 에스겔과 여호야긴의 온 집안 1만 여명이 포로 잡혀감
    • 3차 포로 / 기원전 588-486년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3년 동안 포위하여 멸망 시킨다. 왕과 귀족, 부자들이 포로가 되어 끌려 가고 가난한 사람들이 남게 된다.

    다니엘 2장 요약

    1-23절 느부갓네살 왕의 꿈과 위기

    24-49절 다니엘이 꿈을 해석함

    다니엘 3장 요약

    1-7절 느부갓네살이 두라 평지에 금신상을 세우고 절하게 함

    8-18절 다니엘의 세 친구를 참소하여 절하게 하나 거절함

    19-30절 그들을 풀무불에 던지나 죽지 않고 살아 나옴

    다니엘 4장 요약

    1-18절 느부갓네살 왕의 꿈

    19-27절 다니엘이 꿈을 해석함

    28-37절 꿈처럼 느부갓네살이 쫓겨나 떠돌게 됨

    다니엘 5장 요약

    1-9절 벨사살 왕이 성전 기물로 술을 마시자 손가락이 나타나 벽에 글씨를 씀

    10-16절 벨사상 왕 앞에 다니엘이 불려 나옴

    17-29절 다니엘이 꿈을 해석하고 그대로 됨

    30-31절 메대 사람 다리오가 바벨론을 정복함(바벨론이 망하고 메대-페르시아 왕국이 시작됨)

    다니엘 6장 요약

    1-9절 총리가 된 다니엘을 시기하여 함정을 만듦

    10-15절 절하지 않는 다니엘을 고소함

    16-28절 살아나온 다니엘과 고소한 자들의 죽음

    다니엘 7장 요약

    1-14절 다니엘이 네 짐승의 꿈을 꿈

    15-28절 꿈의 해석

    다니엘 8장 요약

    1-14절 벨사살 왕 삼 년의 숫양과 숫염소에 대한 환상

    15-27절 환상의 해석

    다니엘 9장 요약

    1-2절 예레미야의 예언 70년을 알게 됨

    예레미야는 남유다가 멸망하여 칠십 년 동안 바벨론을 섬길 것이라 예언한다.(렘 25:12, 29:10) 다니엘은 예레미야의 책을 읽고 칠십 년 포로 생활이 끝날 것은 알게 된다.

    3-19절 다니엘의 기도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는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다. 다니엘은 하나님께 과거를 회상하며 민족들의 죄를 자복한다.

    20-27절 천사 가브리엘이 예언함

    다니엘이 기도하자 환상 중에 가브리엘이 와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언한다.

    다니엘 10장 요약

    1-9절 거대한 신상 대한 이상

    고레스 제삼년에 전쟁에 관한 환상을 보게 된다. 거대한 신상에 대한 환상을 보고 다니엘은 죽은 것처럼 깊이 잠이 든다.

    10-21절 미가엘이 찾아옴

    전쟁의 천사인 미가엘이 다니엘에 오려했으나 이십일 동안 막혀 지체하나 와서 환상을 해석한다.

    다니엘 11장 요약

    1-45절 신상에 대한 해석

    바사에서 세 왕이 일어난다. 그가 헬라 왕국을 칠 것이다. 한 왕이 큰 권세로 행할 것이다. 남방 왕은 강할 것이다. 얼마 후에 남방 왕의 딸이 북방 왕과 화친한다. 그러나 버림을 당할 것이다. 하지만 공주에게서 난 한 사람이 북방을 쳐서 이긴다. 금과 보물들을 가지고 애굽으로 돌아간다. 북방 왕과 남방 왕이 다시 싸우게 된다.

    다니엘 12장 요약

    1-13절 마지막 때에 대한 예언

    마지막 때에 미가엘이 일어나고 환난이 있다. 책에 기록된 자만 구원을 얻는다.  많은 사람은 연단을 받고 성결하게 되나 악한 자는 더욱 악해질 것이다. 너는 마지막을 기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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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다니엘서의 특징

    *히브리 성경에서는 성문서로 분류

    *구약의 묵시문학 (신약에는 요한계시록)

    2. 다니엘서의 구조

    3. 묵시문학의 특징

    *이원론적인 시간이해: 현재의 때와 오는 때의 구분

    *윤리적인 이원론: 악인과 의인의 구분

    *다양한 상징과 비유: 숫자, 기호, 암호, 비유 등

    *운명론적 역사의식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강한 믿음

    4. 다니엘서의 상징 이해

    *형상 - 큰 신상, 뜨인 돌, 키가 하늘에 닿은 거대한 나무,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등

    *숫자 - 이천 삼백 일, 칠십 이레,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1290일, 1335일 등

    *구체적(x) - 암시적, 직설적(x) - 비유적, 추상적

    5. 메시아와 인자

    *뜨인 돌(2) - 하나님의 최종승리, 예수님을 돌에 비유한 신약성경 (눅 20:9-18, 벧전 2:4-10)

    *신들의 아들(3-6) - 세 친구와 함께 불속에 있던 존재, 사자굴에 함께 있던 천사

    *인자(7-8) -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서 나옴, 왕적인 존재, 예수님의 자기계시

    *세마포를 입은 사람(10-12) - 대제사장의 옷으로 메시아를 상징

    6. 다니엘서를 읽을 때 주의할 점

    *상징적인 표현과 숫자에 지나치게 풀이하면 안 된다.

    *화이부동 낭중지추의 관점으로 읽는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으며 오늘을 살아가는 힘으로 삼는다.

    *기도의 자세를 배운다.








    다니엘서 개론, 저자와 저작 연대

    책의 명칭 

    다니엘은 이 책에 기록된 사건들 가운데 등장하는 주요 인물이다. 예수께서는 이 책의 예언들을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마 24:15; 막 13:14)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증거는 이 책의 명칭이 단순히 다니엘의 이름을 따라 지어졌다는 것 뿐만 아니라 그 예언들이 다니엘에 의해 선포되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복음주의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 책의 저자를 에스겔서에(14:14, 20; 28:3) 노아와 욥과 함께 의인의 표본으로 등장하는 다니엘과 동일한 인물로 본다.

    이에 반하여 다니엘의 이러한 역사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에스겔서에 나오는 다니엘이 "홍수 이야기에 나오는 노아와 같이 고대 세계에 보편적인 전설상의 한 인물이다"(Montgo-mery, Ice, p. 2)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에스겔서에 나오는 노아와 욥은 고대 세계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 아니라 성서 상의 인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에스겔서에 나오는 다니엘을 다니엘서의 저자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저자와 저작연대 

    몇몇 학자들이 다니엘서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묵시적 예언의 가능성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J. E. H. Thomson저, Danie1 in Pulpit Commentary, p.93을 보라). 이러한 견해는 일반적으로 인정되지 않은 것이지만 때때로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진다(E. G., Ro-bert H. Pfeiffer, Introduction to the old T-estaIIlent,p.775).

    이러한 부정적인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된 주장들은 다음과 같다. 

    1)저자는 역사상의 문제에 있어서 과오를 범하고 있다.
    2)다니엘서에 나타난 히브리어와 아람어는 6세기 훨씬 이후의 형태들이다.
    3)여기에 사용된 몇몇 용어들은 6세기의 유대인 저자로서는 알 수 없었던 바사어와 헬라어들이다.
    4)이 책은 구약성경의 세번째 부분(성문서, W-ritings or Hagiographa)에 속해 있으므로 예언서가 끝난 후 기록되었음을 알 수 있다.
    5)다니엘서가 주후 2세기 이전에 존재했다는 외적 증거는 없다.
    6)이 책의 신학사상이 6세기의 것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진보적이다.
    7)서술된 내용이 환상적이고 비역사적이며 비현실적이다.
    8)다니엘서는 계시문학의 한 실례인데, 계시문학은 헬레니즘 시대가 거의 다 지나서야 나타났다(Montgomery,Icc,p.80).

    다니엘서의 역사성을 옹호하는 현대 변증가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1)다니엘서의 증언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있다.
    2)다니엘서를 정경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기독교시대 이전의 유대인들이 그 역사성을 믿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3)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을 포함하여 신약성서가 한결같이 증거하고 있다.
    4)고대의 직접적인 외적 증거가 있다(겔 14:14, 20; 28:3; 마카비일서 2:59,60. 그리고 요세푸스의 몇몇 귀절들).
    5) B.C.165년 이전에 다니엘서의 영향력에 대한 증거가 있다.
    6)다니엘서의 사상과 역사에 관한 부정적인 견해를 반박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


    이러한 근거를 뒷받침하는 강력한 증거는 특히 고고학에서 발견되었다.

    이 책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대부분의 반대들은 Charles Boutflower의 In and Around the book of Daniel과 R.H. Dougherty의 Nabonidus and Eel Shaz-zer에 의해 잠잠해졌다. 특히 올바른 이해를 방해하는 Montgomery의 견해를 받아들이는 문제도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Ice, p. 72, 2 nd full parsgraph).

    역사적 배경 

    에스겔서와 다니엘서는 포로기에 쓰여졌는데, 이때는 느부갓네살에 의해 유대인의 성전과 도성이 파괴되고 재산을 빼앗긴 후 유대인들이 잡혀가던 시기였다. 이러한 파괴는 세 번에 걸쳐 진행되었다.


    첫번째 B.C. 605년,

    느부갓네살 왕이 여호야김을 굴복시키고 포로로 잡아갔는데, 그들 중에는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도 있었다(단 1:1-6).

    두번째 B.C. 597년,

    느부갓네살의 팔레스틴 원정 중에 유다왕 여호야김과 여호야긴이 모종의 반역을 도모하여 처벌을 받게 되고, 느부갓네살이 다시 예루살렘을 점령하게 되었다. 느부갓네살은 만명의 포로들을 끌고갔는데, 그들 중에 여호야긴왕과 젊은 예언자 에스겔도 끼여있었다(겔 1:1-3: 참조, 대하 36:10; 왕하 24:8-20).

    세번째 B.C. 587년,

    오랜 포위 공격 후에 느부갓네살은 도성과 성전을 파괴하고 전 유대사회를 파괴하였다(왕하 25:1-7; 렘 34:1-7; 39:1-7; 52:2-11).


    B.C.583년 바벨론의 정복자이며 메대 -

     바사제국의 새 왕인 고레스가 유대인들이 귀환해도 좋다는 포고령을 내렸을 때 유대의 재건은 시작되었다(대하 36:22, 23; 스1:1-4).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것이 금지되었던 포로생활의 기간은 불과 48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B.C. 587년에 파괴된 성전은 70년이 지난 B.C. 515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재건되었다(스 6:15).

    그러나 "70년"이라는 예레미야의 예언은 바벨론 포로기간을 가리키는 것이며(렘 25:11), 이것은 유다 뿐만 아니라 그 인접 국가도 포함하는 말이다(B.C.605년에서 538년까지의 "70년"은 대략적인 수: 참조단 9:1,2절에는 B.C.539/538년으로 되어 있음).

    포로생활로 인해 유대인들에게 일어 난 문화적, 종교적 변화는 다음과 같다.

    즉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는 대신에 회당에서 드리게 되었으며, 제 2의 언어인 아람어(또한 시리아어나 갈대아어라고도 불렸다)를 채택하여 쓰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증거들은 아브라함이 사용한 언어가 원래 아람어였음을 밝혀준다.

    성서의 난외주를 읽어 보면(신26:5; 창31:47)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조상들이 아람어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고고학적 증거들은(참조, 모암 비석, 라스 샴라 호판) 가나안 사람들이 히브리어와 거의 동일한 언어를 사용했음을 보여 준다.
    바벨론에 있을 때 유대인들은 아람어를 상업어로 사용했으며, 때로는 그것이 외교어가 되기도 했다(참조, 사 36:11, 12).

    히브리어와 동일하지는 않지만 유대인들은 히브리어와 유사한 아람어를 사용했다(왕하 18:26).

    그리고 얼마 동안은 두 개의 언어를 병행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다니엘서의 전반에 해당하는 처음 6장이 히브리어로 쓰여졌다는 사실 뒤에는 분명히 이러한 상황이 깔려 있다.

    4. 계시의 해석 

    계시를 해석하는 데에는 해석자가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겸손히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계시 문학을 다루기 위한 어떤 특별한 성서해석학적 규칙들이 아직 정립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비성서적 계시문학의 해석에 적용되는 규칙들이 성서적 계시문학을 해석하는데 무비판적으로 도입 적용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에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다니엘서(내용분해)

    1장 /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
    2장 /
    느부갓네살의 신상에 대한 꿈과 그 해석
    3장 / 풀무불에 던져진 다니엘의 세 친구
    4장 / 느부갓네살의 큰 나무에 대한 꿈
    5장 / 벨사살의 연회
    6장 / 사자굴에 던져진 다니엘
    7장 / 네 짐승의 우상
    8장 / 수소와 수염소의 이상
    9장 / 70이레에 대한 이상
    10장 / 다니엘의 마지막 이상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장 /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

    1. 사로잡혀 감(1:)
    사로잡혀 온 때 (1:1).


    2. 선택됨(1:3-6)


    3. 이름의 변경(1:7)


    4. 다니엘의 결심과 시험(1:8-16)
    1)다니엘의 뜻을 정함(1:8-11).
    2)시험 기간(10일)(1:12-14).
    3)시험의 결과(1:15,16)


    5. 하나님의 축복과 저들의 지혜(1:17-21)

    2장 / 느부갓네살의 신상에 대한 꿈과 그 해석(2:1-49).

    6. 느부갓네살의 꿈(2:1-13)
    1)느부갓네살이 꿈을 꾸었으나 잊어 버림 (2:1).
    2)갈대마 술사들이 왕궁으로 불려 들어감(2:2).
    3)느부갓네 살의 요구(2:4-9).
    4)박사들의 무력 (2:10,11)
    5)느부갓네살의 진노와 박사들의 운명 (2:12, 13).


    7.다니엘의 해몽(2:14-45)
    1)다니엘의 현명한 간원(2:14-18).
    2)다니엘에게 그 잊혀진 꿈이 계시됨(2:19).
    3)다니엘이 하나님을 찬양함(2:20-23).
    4)다니엘이 왕께로 인도됨(2:24, 25).
    5)다니엘이 왕에게 꿈을 주신 목적을 말함(2:26-30).
    6)다니엘이 왕의 꿈(큰 신상의 꿈)을 말함(2:31-35).
    7)다니엘의 해몽(2:36-45).


    8.왕이 다니엘을 존귀케 함(2:46-49)
    1)왕이 다니엘에 절하고 하나님을 찬미함(2:46,47)
    2)왕이 다니엘을 높여 바벨론 온 도를 다스리게 함(2:48, 49).

    3장 / 풀무불에 던져진 다니엘의 세 친구(3:1-4:3)

    9. 느부갓네살의 교만과 금신상(3:1-6)
    1)금신상을 만들어 세움(3:1)
    2)금신상에게 경배하게 함(3:2-5).
    3)금신상을 경배하지 않은 자에 대한 형벌(3:6).
    4)모든 백성이 금신상에게 경배함(3:7).


    10.다니엘의 세 친구가 금신상에 절하지 않음
    1)다니엘의 세 친구를 고발함(3:8-12).
    2)느부갓네살왕의 신문과 명령 (3:13-15).
    3)다니엘의 세 친구의 거절(3:16-18)


    11.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불에 던져짐(3:19-27)
    1)풀무불에 던져짐 (3:19-23).
    2)천사의 보호(3:24, 25)
    3)구출(3:26, 27).


    12.느부갓네살의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조서(3:28-4:3)
    1)하나님께 찬양(3:28).
    2)느부갓네살이 조서를 내림 (3:29, 30).
    3)느부갓네살이 천하에 조서를 내림 (4:1-3)

    4장 / 느부갓네살의 큰 나무에 대한 꿈(4:4-4:37)

    13.느부갓네살이 꿈을 꾸고 그 해몽을 요구함(4:4-9)
    1)느부갓네살이 큰 나무에 대한 꿈을 꾸다(4:4, 5).
    2)느부갓네살이 해몽을 요구함(4:6-9).


    14.꿈과 그해석(4:10-27)
    1)왕과 꿈 이야기를 함(4:10-17).
    2)다니엘에게 해몽을 부탁함(4:18)
    3)다니엘이 해몽함(4:19-27).


    15. 꿈의 성취와 왕의 회복(4:28-37)
    1)왕의 정신이상(4:28-33).
    2)왕이 하나님을 찬양함(4:34, 35).
    3)왕의 회복과 고백(4:36, 37).

    5장 / 벨사살의 연회(5:1-31)

    16. 연회의 개최(5:1-4)
    1)벨사살왕이 일천명의 귀인을 위한 연회를 개설함(5:1)
    2)예루살렘 성전의 기명으로 술을 마심(5:2, 3).
    3)우상(신들)을 찬양함(5:4).


    17. 벽에 쓰여진 글(5:5-29)
    1)손가락이 나타나서 분벽에 글을 씀(5:5).
    2)왕이 큰 충격을 받음(5:6).
    3)박사들이 해석을 못함(5:7-9).
    4)여왕의 충고(5:10-12).
    5)다니엘이 부름을 받음(5:13-16).
    6)다니엘이 왕을 책망함(5:17-25).
    7)다니엘이 그 글을 해석함(5:26-28).
    8)왕이 다니엘에게 보상함(5:29)


    18.글의 성취(5:30, 31)

    6장 / 사자굴에 던져진 다니엘(6:1-28)

    19. 매대 - 바사에서의 다니엘의 형통(6:1-3)


    20.다니엘의 시련(6:4-24)
    1)총리와 방백들의 음모와 왕의 조서 (6:4-9).
    2)다니엘의 확고부동함(6:10)
    3)다니엘을 범법자로 고발함(6:11-13)
    4)왕이 다니엘을 구하려고 노력함(6:14, 15).
    5)다니엘을 사자굴에 던짐 (6:16, 17).
    6)하나님이 다니엘을 구원하심 (6:18-22).
    7)음모자들을 벌함(6:24).


    21.다리오왕의 조서와 다니엘의 형통(6:25-28)
    1)다리오가 하나님을 인정함(6:25-27).
    2)다니엘의 형통(6:28).

    7장 / 네 짐승의 우상(7:1-28)

    22. 다니엘의 꿈(7:1-3)


    23.다니엘이 본 이상(7:4-27)
    1)다니엘이 본 네 짐승(7:4-8).
    2)다니엘이 본 하늘의 모습(7:9-14).
    3)다니엘의 번민(7:15, 16).
    4)이상의 해석(7:17-28).

    8장 / 수소와 수염소의 이상(8:1-27)

    24.이상(8:1-14)
    1)때(8:1,2)
    2)수양(8:3, 4).
    3)수염소(8:5).
    4)수양과 수염소의 싸움(8:5-7).
    5) 네 뿔(8:8).
    6)작은 뿔(8:9-14).


    25. 이상의 해석(8:15-27)
    1)하늘의 해석자(8:15, 16).
    2)성취의 때(8:17-19).
    3)수양(8:20).
    4)수염소(8:21)
    5) 네 뿔(8:22).
    6)작은 뿔, 한 왕(8:23).
    7)이 왕의 권세와 성도들에 대한 도전(8:24).
    8)이 왕의 높아짐과 메시야와 싸움(8:25).
    9)이상의 때(8:26, 27).

    9장 / 70이레에 대한 이상(9:1-27)

    26. 이상을 볼 때까지
    1)때(9:1,2)
    2)다니엘의 기도(9:3-19).


    27.이상(9:20-27)
    1)가브리엘의 출현(9:20-23).
    2)70주에 대한 설명(9:24-27).

    10장 / 다니엘의 마지막 이상(10:1-12:13)

    28.이상(10:1-21)
    1)역사적 배경(10:1).
    2)계시를 위한 준비(10:2-9)
    3)천사와의 대화(10:10-21)


    29. 이상의 해석(11:1-12:4)
    1)바사와 희랍(11:1-4)
    2)수리아와 애굽(11:5-20).
    3)이스라엘을 박해한 수리아왕(11:20-35).
    4)자기 뜻대로 행하는 왕에 대한 예언(11:36-45).


    30. 대환란(12:1-4)


    31.종말의 예언(12:5-13)

    다니엘서(설교자료)

    [1] 왕궁에서 일하는 자의 자격
    [2] 다니엘과 요셉의 비슷한 경우
    [3] 다니엘의 인격
    [4] 크게 은총을 입은 다니엘
    [5] 하나님을 찬송한 이유
    [6] 하나님의 응답이 주어질 이유
    [7] 다니엘의 하나님
    [8] 느부갓네살의 꿈
    [9] 신상의 해석
    [10]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세우신 왕국
    [11] 사람의 손으로 되지 아니 하는 것
    [12] 계시의 결과
    [13] 낙성식에 모인 8가지 계층의 사람들
    [14] 느부갓네살의 고백
    [15] 다니엘의 4번째 예언
    [16] 느부갓네살왕이 배운 것
    [17] 권세와 권능
    [18] 느부갓네살의 회복과 축복
    [19] 다니엘에 대한 증거
    [20] 벨사살왕의 죄
    [21] 다리오왕의 명령
    [22] 하나님에 대한 사실
    [23] 적그리스도에 대한 4가지 사실
    [24] 다니엘이 본 네 짐승의 이상
    [25]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한 3가지 보증
    [26] 하나님에 대한 진리
    [27] 다니엘의 간구
    [28] 이스라엘의 죄
    [29] 전쟁의 이상
    [30] 메시야에 대한 8가지 묘사
    [31] 다니엘에게 미칠 영향
    [32] 다니엘 10-12장에 나타난 10가지 목적
    [33] 적그리스도와 신들

    [1] 왕궁에서 일하는 자의 자격

    1.왕이 명한 8가지 자격(1:3, 4)
    1)왕족이나 귀족이어야 함(3절).
    2)소년이어야 함(4절).
    3)육체적으로 흠이 없어야 함(4절).
    4)용모가 아름다와야 함(4절).
    5)모든 재주를 통달해야 함(4절).
    6)지식을 구비해야 함(4절).
    7)학문에 익숙해야 함(4절).
    8)왕궁에서 일할 수 있도록 갈대아 사람들의 학문과 방언을 교육받아야 함(4절).

    [2] 다니엘과 요셉의 비슷한 경우

    2.자기 민족으로 인해 포로가 됨
    창 37장.


    3. 체포자로부터 은혜와 긍휼을 받음
    창 39:21; 단 1:9.


    4.꿈의 해석
    창 37:5-11; 41:1-45; 단 1:17.


    5.왕에 의해 높임을 받음
    단 2:46-49, 5:29; 6:26; 창 41장.


    6. 거룩한 생활
    창 39:12; 단 1:8.

    [3] 다니엘의 인격

    7. 왕이 요구한 세가지 자격 요건
    1)출생 - 왕족(단 1:3).
    2)용모- 흠없고 아름다운 자(단1:4)
    3)두뇌(지력)- 지혜와 지식을 겸비하고 학문에 익숙한 자(단 1:4).


    8. 세가지 목적
    1)하나님의 목적, 왕의 앞에 모셔 서게 하려함이다(단 1:5)
    2)악마의 목적, 그들의 마음과 입과 그리고 그들의 행위를 통하여 스스로 더럽게 하기 위함이다(단 1:1-10)
    3)다니엘의 목적, 자기 스스로를 더럽히지 않기 위함(단1:8)


    9.다니엘 성격의 세가지 특성
    1)자기 자신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그의 신념(단 1:8).
    2)환관장에게 구하는 용기 (단1:8)
    3)"당신의 종들을 시험하여 왕의 진미를 먹는 자들과 비교하소서"하고 말하는 그의 정중함(단 1:12, 13).

    [4] 크게 은총을 입은 다니엘(단 1:1-8)


    다니엘이란 말의 의미는 "하나님은 나의 심판주이시다" 라는 뜻이다.

    10. 다니엘의 세가지 이름
    1)히브리 이름- 다니엘,
    2)갈대아 이름- 벨드사살(단 1:6, 7).
    3)하늘의 이름- 크게 은총을 입은 자(단 9:23; 10:11-19).


    11.다니엘의 세 영역의 생활
    1)개인생활- 목적이 확고부동한 생활(단 1:8)
    2)공적생활- 공무수행에 있어서 과실이 없는 생활(단 6:4).
    3)기도생활- 열렬한 기도생활(단 9:3).


    12. 다니엘의 세가지 탁월한 특성
    1)성자와 같은 신실함(단 1장).
    2)현자로서 두려움이 없는 대담무쌍함(단 2,4,5장).
    3)정치 인으로서 흠잡을데가 없음(단 6장)

    [5] 하나님을 찬송한 이유

    13. 하나님을 찬송한 15가지 이유(단 2:20-23).
    1)지혜가 그에게 있음(20절).
    2)권능이 그에게 있음(20절).
    3)때를 변하게 함(21절).
    4)기한을 변하게 함(21절).
    5)왕들을 폐함(21절).
    6)왕들을 세움(21절).
    7)지혜자에게 지혜를 줌(21절).
    8)지식자에게 총명을 줌(21절).
    9)깊은 일을 나타내심 (22절)
    10)은밀한 일을 나타내심 (22절)
    11)어두운데 있는 것을 앎(22절)
    12)빛이 그와 함께 있음(22절, 딤전 6:16).
    13)그는 나에게 지혜를 줌(23절).
    14)그는 나에게 능력을 줌(23절).
    15)우리가 주께 구한 바 일, 곧 왕의 일을 보이심(23절).

    [6] 하나님의 응답이 주어진 이유

    14. 다니엘에게 하나님의 응답이 주어진 12가지 이유(2:18-45)
    1)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18,30절)
    2)바벨론의 모든 박사나 술객들보다 하나님이 더욱 위대하심을 보이기 위해서 (27, 28절).
    3)하나님이 그를 의지하는 사람의 기도에 응답하심을 보이기 위해서(18-23절).
    4)하나님이 모든 나라의 통치자임을 보이기 위해서(19-23, 39-45절).
    5)하나님은 지금도 인생사를 인도한다는 사실을 보이기 위해서(19-23절)
    6)하나님은 지혜와 지식이 무한하심을 증명하기 위해서(21-23절; 롬 11:33).
    7)하나님이 예언의 주관자임을 보이기 위해서 (23-45절)
    8)하나님만이 유일한 참된 신이심을 보이기 위해서(20-30절).
    9)참된 신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보이기 위해서 (23절)
    10)계시를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참된 자녀인지 아닌지를 증명하기 위해서(29, 30, 45절)
    11)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던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30절)
    12)다니엘 시대부터 영원한 시대까지의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 주기 위해서(29-45절)

    [7] 다니엘의 하나님(단 2:28).


    "하늘에 하나님이 계시다"

    15. 다니엘의 하나님은
    1)자기의 뜻을 은밀히 나타내시는 하나님 (단 2:28)
    2)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 (단 2:28).
    3)보응하시는 하나님 (단 5:23-26).
    4)자신의 경륜을 통하여 보호해주시는 하나님 (단 6:22)
    5)다니엘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단 6:23).

    [8] 느부갓네살의 꿈

    16. 느부갓네살이 신상에 관한 꿈을 꿈(2:31-35)
    1)큰 신상.
    2)광채가 특심함.
    3)신상은 왕의 앞에 서있음.
    4)그 모양이 심히 두려움(31절).
    5)그 우상의 머리는 정금임.
    6)가슴과 팔들은 은임.
    7)배와 넓적다리는 놋임 (32절).
    8)종아리는 철임.
    9)발은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임 (33절).
    10)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림(34절)
    11)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음(34절).
    12)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함(35절)

    [9] 신상의 해석(2:38)


    왕이 꿈에서 본 5가지 물질로 만들어진 큰 신싱은 다섯 제국을 나타낸다. 이들은 바벨론, 메대-바사, 헬라, 로마, 그리고 10개의 나라로 구성된 로마이다(2:44, 45; 7:23, 24; 계 17:12-17).


    17. 금으로 된 머리 (32, 35, 39절)
    큰 신상의 금머리는 다섯 나라 중 첫번째 나라를 나타낸다- 바벨론 곧 느부갓네살의 나라(37, 38절; 렘 15:4, 24:9; 25:1-12; 29:18).
    다섯 나라는 이스라엘을 벌하는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한 후에는 곧 다른 나라에 그 임무를 넘겨주었다. 이 다섯 나라는 모두 이방인의 시대에 이스라엘을 벌하기 위하여 사용될 때까지만 존재하였고, 이스라엘에 대한 그들의 임무를 수행한 후에는 각각 다음 나라에 멸망되었다. 바벨론은 느부갓네살 원년, 곧 기원전 616년 경에 이스라엘을 정복하여 70년 동안 계속 지배했다(9:2; 렘 25). 느부갓네살이 43년을 통치하고 그 후 에윌므로닥이 계승했다(왕하 25:27; 렘 52:31). 그리고 바빌론이 멸망될 때까지 함께 통치했던 나보니두스와 벨사살이 그 뒤를 이었다(단 5장). 바벨론 제국은 70년 동안(기원전 616-546) 이스라엘을 지배했다(렘 25장).


    18.은으로 된 가슴과 팔(32, 35, 39절)
    신상의 이 부분은 메대 - 바사 제국을 상징하는데 이 나라는 70년 동안 유대인을 지배했던 바벨론을 계승했다. 이것은 이방인의 시대에 이스라엘을 압박하기 위한 두번째 나라이다(2:39; 5:1-31, 8:20; 9:1; 10:1; 11:1; 대하36:22; 스1:1-3).
    두 개의 팔은 두 개의 나라 곧 메데와 바사 이중 제국을 상징한다. 이 나라는 은으로 되었으므로 금으로 만들어진 바벨론 제국보다는 못하다. 이 나라가 바벨론을 정복했으므로 힘에 있어서는 열등하지 않으나, 정부의 형태, 부, 사치품, 그리고 영광의 면에서는 바벨론 보다 못하다(사 13:19). 바벨론에서 왕은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나(단 5:19) 메데-바사의 법은 왕보다도 높아서 왕이라 하더라도 자기 백성의 이익을 위해서 법을 변경시킬 수는 없었다(단 5:19). 마찬가지로 3번째와 4번째 나라도 정부의 형태, 부, 영광은 바벨론 보다 못하다. 바벨론은 이스라엘을 포로로 잡아갔고 메데 - 바사는 그들을 해방시켰다(사 44:28; 45:1-5; 스 1:1-4; 6:1-14).
    메데-바사는 고대 헬라제국을 세운 알렉산더 대왕 때까지 존속했다(기원전 334년).


    19. 놋으로 된 배와 넓적다리 (32, 35, 39절)
    신상의 이 부분은 이방인의 시대에 이스라엘을 지배했던 세번째 나라인 알렉산더 대왕 치하의 헬라제국을 상징한다(2:39; 8:20, 21; 11:1-34). 이 세번째 제국은 처음 세 나라 중에서 가장 영토가 넓다. 알렉산더는 헬라와 마케돈(Macedon)으로부터 시작해서 앞의 두 나라의 영토 뿐만 아니라 인도의 일부까지도 정복했다. 헬라 제국은 알렉산더의 죽음과 더불어 쇠퇴하기 시작해서 그의 방대한 영토는 우리가 다니엘 8장을 연구할 때 본 것처럼 네 나라로 나뉘었다.


    20. 철로 든 다리 (33-35, 40절)
    신상의 이 부분은 헬라 제국에 이어서 이스라엘을 지배했던 고대 로마제국을 상징한다. 이 나라는 이방인의 시대에 이스라엘을 지배했던 네번째 나라이다(2:40; 7:23, 24; 9:26; 눅2:1; 20:20-24; 요11:48; 마24:1, 2; 행 16:21; 22:25-29). 이 나라는 철이 금, 은, 놋 보다 강하듯이 앞의 모든 나라보다도 더 강력했다. 비록 네번째 나라라 할지라도 이것이 이방인의 시대에 이스라엘을 박해하기 위한 이방 세계의 마지막 나라는 아니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원하고 이 땅에 영원히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하걱 그들의 메시야가 오기 전에 이스라엘을 지배할 두개의 나라가 있을 것이다. 철로 만들어진 두 개의 다리는 고대 로마제국이 동서로 나누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21. 철과 진흙으로 된 발과 발가락 (33-35, 44절)
    신상의 이 부분은 미래의 새 로마제국(revised R-oman Empire), 곧 이방인의 시대에 이스라엘을 억압하게 될 다섯번째 나라를 의미한다 (2:31-43; 7:23-25; 계 17:12-17). 신상의 마지막 부분인 이 부분은 하늘에서 뜨인 돌에 의해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새 로마제국은 발과 발가락이 철과 진흙의 두 물질로 만들어졌음을 볼때 일부분은 강하고, 일부분은 약한 제국으로 분리될 것이다. 진흙은 일반 백성에 의한 지배를 뜻하며, 철은 왕들에 의한 지배를 뜻한다. 이러한 정부의 두 형태는 철과 진흙이 혼합되지 않듯이 공존할수는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철이 우세하여 승리할 것이다. 왕들이 다시 로마 제국의 영토를 통치할 것이다. 10개의 나라가 거기에 세워질 것이며, 10명의 왕들이 그것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44, 45; 7:7, 8, 23, 24). 10개의 발가락으로 나타내는 10개의 나라는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의 마지막 때까지 존재하나 그가 오실 때는 멸망될 것이다(계 17:8-17; 19:11-21). 이스라엘 사람들은 70번째 이레의 처음 삼년 반동안 10명의 왕들에 의해 통치받고 그 후 마지막 삼년 반 동안은 적그리스도에 의해 통치받을 것이다(2:44, 45; 7:7-14; 7:17-25; 계 13:1-18; 17:8-17; 살후 2:1-12). 성서학자들에 의하면 이 10개의 나라가 다니엘 7장과 요한계시록 17:12-17에 언급된 새 로마제국을 형성할 것이라고 한다.


    22.신상을 부숴뜨린 돌
    이것은 재림하여 이 세상 나라들을 멸망시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하늘나라를 상징한다(35, 44, 45; 7:13-27; 마 24:29-31; 25:31-46; 슥14:1-21; 살후1:7-11; 2:4-8; 유 14; 계 11:15; 19:11-20:7).
    그리스도 자신은 "돌"(stone)이라고 불리운다(시 118:22; 마21:44; 엡 2:19-22; 벧전2:6-8). "손으로 하지 아니 하고"(without hen-ds)라는 구절은 인간의 힘에 의하지 않고 전력으로 하나님의 행위에 의한 것임을 강조한다(2:45, 8:25; 욥34:20; 애4:6). 바벨론이 세계제국의 세번째 나라이고, 메데-바사는 4번째, 헬라는 다섯번째, 로마는 여섯번째, 그리고 새 로마제국은 일곱번째 나라라는 것을 성서 본문의 윤곽에서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방인의 시대에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여덟 나라 중 세번째에서 일곱번째 나라까지라는 것이다. 두 제국, 즉 첫번째 나라인 애굽과 두번째 나라인 앗수르는 바벨론 이전에 이스라엘을 지배했다.
    여덟번째 나라는 적그리스도의 나라이다(계 17:9-11). 이러한 다섯 나라가 다니엘서에서는 첫번째, 두번째, 세번째, 네번째, 다섯번째 나라로 나타나고, 요한계시록 17:8-11에서는 세 번째, 네번째, 다섯번째, 여섯번째, 일곱번째 나라로 나타난다.

    [10]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세운 왕국(단 2:44).

    23.하나님이 세우신 왕국
    1)불멸성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2)궁극적인 확정성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3)우주적 우위성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4)영원성-"영원이 설것이요"

    [11] 사람의 손으로 되지 아니한 것

    24. 사람의 손으로 되지 아니하는 것
    1)우리의 할례는 유대의 할례처럼 사람의 손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았다(골 2:11).
    2)우리의 신성한 하늘의 성소는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참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단 9:24).
    3)우리에게는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진다고 할지라도 사람의 손으로 되지 아니한 영원한 하늘의 집이 있다(고후 5:1).
    4)그리스도는 사람의 손으로 되지 아니한 산에서 뜨인 돌이다(단 2:45).
    5)적그리스도는 사람의 손을 말미암지 않고 깨어지리라(단 8:25).
    ("주님은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시리라") (살후 2:8).

    [12] 계시의 결과

    25.계시의 7가지 결과(2:46)
    1)왕이 엎드려-다니엘에게 절하고 명하여 예물과 향품을 그에게 줌(46절).
    2)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림 (47절).
    3)다니엘을 높임 (48절).
    4)다니엘에게 많은 선물을 줌(48절)
    5)다니엘을 세워 바벨론 온 도를 다스리게 함(48절).
    6)다니엘을 바벨론 모든 박사의 어른이 되게 함(48절).
    7)다니엘의 친구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높임 (49절).

    [13] 낙성식에 모인 8가지 계층의 사람들

    26.방백
    항상 왕에게 가까이 있었던 총독이나 개인 고문(3:2, 3, 27; 6:1-7).


    27.수령
    여러 도의 부총독, 총독대리, 귀족(2:48; 3:2-3,27; 6:7).


    28. 도백, 파샤(문무고관의 존칭)
    1)변경지역의 부총독(3:2, 3, 27; 6:7).
    2)군대의 지도자(왕상 20:24; 렘 51 23, 28, 57; 겔23:6, 12, 23).


    29. 재판관
    왕을 보좌하여 법률을 제정하는 사람(3:2).


    30. 재무관
    국고를 담당하는 사람(3:2, 3).


    31.모사
    법률관, 재판관(3:2, 3).


    32.법률사
    행정 장관(3:2, 3).


    33. 각 도의 관원
    문관과 여러 현인들(3:2, 3).

    [14] 느부갓네살의 고백

    34.느부갓네살왕이 고백한 5가지 사실(3:28)
    1)하나님이 그의 사자를 보내신다.
    2)하나님은 그를 의지한 사람들을 구원하신다.
    3)하나님께서 왕의 명을 거역하게 하신다.
    4)유대인들이(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몸을 버린다.
    5)하나님 외에는 이와 같이 구원할 수 있는 다른 신이 없다.

    [15] 다니엘의 4번째 예언(4:10-16; 성취됨).

    35. 예언 나무의 이상
    1)땅의 중앙에 한 나무가 있다.
    2)높이가 매우 높다(10절)
    3)그 나무는 자란다.
    4)그 나무는 견고하여진다.
    5)나무의 높이는 하늘에 닿았다.
    6)땅끝에서도 그 나무를 볼 수 있다(11절).
    7)잎사귀는 아름답다.
    8)열매가 매우 많다.
    9)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식물이 된다.
    10)들짐승이 나무의 그늘로 찾아든다.
    11)공중의 새들이 나뭇가지에 깃든다(12절)
    12)한 순찰자, 곧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왔다(13절).
    13)그는 소리질러 다음과 같이 외쳤다.
    -나무를 베라,
    -가지를 찍어라.
    -잎사귀를 떨어라.
    -열매를 헤쳐라(열매를 따라).
    -짐승들로 나무아래서 떠나게 하고 새들은 그 가지에서 쫓아내라(14절).
    -그 뿌리의 그루터기를 땅에 남겨두라,
    -하늘 이슬에 그 나무를 젖게하라.
    -들짐승과 더불어 풀이나 뜯게 버려두어라(15절).
    -그 마음은 변하여 인생의 마음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게하라.
    -일곱 때를 지나리라(16절).
    -이것은 순찰자들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명령이다.
    -이것은 거룩한 자들의 명령으로 내려진 판결이다.
    -인생으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나라를 다스리신다.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신다
    -지극히 천한 자로 그 위에 세우신다(17절).

    [16] 느부갓네살왕이 배운 것

    36. 느부갓네살왕이 배운 20가지 사실
    1)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4:37)
    2)하나님은 하늘의 왕이시다(4:37).
    3)하나님의 일은 진실하다(4:37).
    4)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다(4:37).
    5)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신다(4:37)
    6)하나님은 모든 왕의 주재이시다(2:47).
    7)하나님은 일한 것을 나타내신다(2:47).
    8)하나님은 그를 의뢰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의 사자들을 보내신다(3:28).
    9)하나님은 왕의 명을 거역하게 할 수 있다(3:28).
    10)참된 하나님의 종들은 어떤 다른 신도 섬기지 않는다(3:16-18,28).
    11)하나님 외에는 사람을 구원해 줄 수 있는 다른 신이 없다(3:29).
    12)어떤 신도 하나님처럼 기적을 행할 수는 없다(3:25-29; 4:3).
    13)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하다(4:3, 34).
    14)하나님의 권병은 대대에 이른다(4:3).
    15)하나님의 영은 인간 안에 거할 수 있다(4:8, 9, 18).
    16)하나님은 땅위에서 지극히 높으시다(4:17, 34).
    17)하나님은 자기의 뜻대로 나라를 누구에게든지 주신다(4:17, 32).
    18)땅 위의 지혜자들(박수와 술객 등)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2:2-13; 4:4-8).
    19)죄에는 댓가가 있다(4:27-33).
    20)자만심은 몰락의 원인이다(4:28-37).

    [17] 권세와 권능(단 4:25)


    우주를 지배하는 네가지 큰 법칙.

    37. 하나님의 주권
    "왕중의 왕"
    1)단 2:37.
    2)단 4:25.


    38. 사탄의 대항(대적)
    1)공중의 권세잡은 자(엡 2:2; 6:11)
    2)세상의 임금(요 14:30).
    3)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참소하는 자로서 모든 땅의 재판관 앞에 나타난다(욥 1:6, 2:1; 슥 3:1).


    39. 천사의 활약
    1)구원얻을 후사를 위하여 섬김 (히 1:14).
    2)인간의 도덕적 상태를 분별함(단 4:16).
    3)하늘의 합법적인 재판소를 형성함(단 4:17).


    40. 하늘에 있는 사악한 영들의 반항(엡 6:12)
    1)하늘의 사자를 -해하는 자들(단 10:12, 13).
    2)하나님의 천사들을 대적하기 위해 모인 자들(단10:20)
    3)땅위의 사건에 관여하는 자들(단 4:8).

    [18] 느브갓네살의 회복의 축복

    41. 느부갓네살의 7가지 회복의 축복(4:36)
    1)그의 총명이 다시 돌아옴(34절).
    2)그의 이성이 다시 돌아옴(36절):개역성서에는'총명'으로 번역됨.
    3)그의 나라의 영광이 회복됨.
    4)그의 위엄과 광명이 다시 돌아옴.
    5)그의 모사들과 관원들이 다시 그를 모심 (36절).
    6)그가 그의 나라에서 다시 세움을 받음.
    7)지극한 위세가 그에게 더해짐.

    [19] 다니엘에 대한 증거

    42. 다니엘에 대한 7가지 증거(5:11,12)
    1)그는 거룩한 신들의 영을 가지고 있음(11절)
    2)그는 비범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12절).
    3)그는 지식이 많음(12절).
    4)그는 매우 총명함(12절).
    5)그는 꿈을 해석하는 재주가 있음(12절).
    6)그는 은밀한 말을 밝힘(12절)
    7)그는 모든 의문을 파할 수 있음(12절).

    [20] 벨사살왕의 죄

    43. 벨사살 왕의 죄(5:22, 23)
    1)스스로 마음을 낮추지 아니함.
    2)하나님께서 그의 아버지(느부갓네살)에게 행한 일을 알고도 받아들이지 않음(22절).
    3)스스로 높여서 하늘의 주재를 거역함(23절).
    4)하나님의 집에서 쓰던 성전 기구들을 더럽힘(23절).
    5)신상들을 찬양함(23절).
    6)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준 참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음(23절)

    [21] 다리오왕의 명령

    44. 다리오 왕의 7가지 명령(6:24)
    1)모든 사람들은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해야 한다(26절)
    2)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26절).
    3)그는 영원히 변치 않으실 분이다(26절).
    4)그의 나라는 영원하다(26절; 2:44, 45; 7:13-14,18,27; 계11:15; 22:4, 5).
    5)그는 위험에서 건져 내신다(27절).
    6)그는 이적과 기사를 행하신다(27절)
    7)그는 다니엘을 구원하여 사자의 입에서 벗어나게 하셨다(27절, 히 11:33).

    [22] 하나님에 대한 사실

    45. 하나님에 대한 15가지 사실:심판(7:9)
    1)심판 보좌가 놓임 (9절)
    2)하나님은 인간의 눈에 보임.
    3)하나님은 왕좌 위에 앉아 계시는데, 이것은 하나님은 사람이 앉아 있는 것과 같이 몸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함(9절)
    4)하나님은 사람들과 같이 옷을 입고 있음(9절).
    5)그의 옷은 눈과 같이 희다(9절).
    6)그는 사람과 같은 머리를 가지고 있음(9절)
    7)그는 머리털을 가지고 있음(9절)
    8)그의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같이 희다(9절).
    만약 그가 머리와 머리털을 가지고 있고 옷을 입었다면, 그는 몸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요 4:24를 참조하라).
    9)그의 보좌는 불꽃 같음.
    10)보좌의 바퀴는 붙는 불 같음(9절; 겔1:15-20, 25-28; 10:9-13).
    11)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옴(10절).
    12)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수종듬(10절).
    13)수많은 사람들이 그 앞에 서 있음(10절).
    14)심판을 베품(10절).
    15)책들이 펴놓여 있음(10절).

    [23] 적그리스도에 대한 4가지 사실(7:11)

    46. 그는 큰 말을 할 것이다
    1)8, 11, 20, 25절.
    2)8:23-25.
    3)11:36.
    4)계 13:5.


    47.그는 학살당할 것이다
    단 1:11; 8:25; 11:45; 사11:4; 살후2:8; 계19:20.


    48. 그의 몸이 상할 것이다
    단7:11; 비교, 마10:28; 눅12:5.


    49. 그의 몸이 유황불에 던져질 것이다
    단11절:계 19:20; 20:10.

    [24] 다니엘이 본 네 짐승의 이상

    50. 다니엘의 35가지 이상-네 짐승(7:2-14)
    1)하늘의 네 바람이 큰 바다로 몰려 불어옴(2절)
    2)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 모양이 각각 다름(3절).
    3)첫째 짐승은 사자와 같음(4절)
    4)두번째 짐승은 곰과 같음(5절).
    5)세번째 짐승은 네 개의 날개와 네 개의 머리를 가진 표범과 같음(6절).
    6)네째 짐승은 모습은 나타나지 않으나 무섭고 놀라우며 극히 강함(7절).
    7)네째 짐승은 철 이가 있어서 먹고 부숴뜨리고 그 나머지를 발로 밟음(7절).
    8)네째 짐승은 이전의 모든 짐승과 다름(7절).
    9)네째 짐승은 10개의 뿔이 있음(7절).
    10)또 다른 작은 불이 10개의 뿔 사이에서 자람(8절).
    11)작은 뿔이 자람에 따라 10개의 뿔 가운데 3개가 뿌리채 뽑힘(8절).
    12)작은 뿔에는 사람의 눈같은 눈이 있고 또 입이 있어 큰 말을 함(8절).
    13)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해 있음(9절).
    14)그의 옷은 희기가 눈같음(9절).
    15)그의 머리털은 깨끗한 양털 같음(9절).
    16)그의 보좌는 불꽃 같음(9절).
    17)그 바퀴는 타는 불 같음(9절).
    18)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옴(10절)
    19)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시중들고 또한 수많은 다른 사람들이 심판받기 위하여 그 앞에 서 있음(10절).
    20)심판을 베품(10절)
    21)책들이 펴 놓여 있음(10절)
    22)작은 뿔이 큰 소리로 말함(11절).
    23)짐승이 마침내 죽임을 당함(11절).
    24)짐승의 시체가 상한바 되어 타는 불에 던져짐(11절).
    25)남은 모든 짐승들은 그 권세를 빼앗김 (12절).
    26)이 짐승들이 죽임을 당하기 전에 목숨만은 얼마동안 부지함(12절).
    27)인자가 하늘 구름을 타고 옴(13절).
    28)인자가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옴(13절).
    29)인자가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 앞에 인도됨(13절).
    30)인자에게 권세를 줌
    31)인자에게 영광을 줌
    32)인자에게 나라를 줌.
    33)모든 백성과 나라들이 그를 섬김
    34)그의 권세는 영원함
    35)그의 나라는 결코 멸망하지 않음(14절).

    [25]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한 3가지 보증

    51. 기도와 죄의 고백
    단 9:3, 4-6, 17, 20.


    52. 죄악을 떠남
    단 9:13; 사55:7.


    53. 진리에 대한 이해와 복종
    단 9:4-10, 13. 요8:32-36; 롬1:16.

    [26] 하나님에 대한 진리

    54. 하나님에 대한 7가지 진리(9:4-9)
    1)그는 크신 하나님이시다(4절).
    2)그는 두려워할 하나님이시다.
    3)그는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인자를 베푸신다(4절).
    4)그는 그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을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인자를 베푸신다(4절).
    5)그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다(7, 14, 16절).
    6)그는 심판의 하나님이시다(7, 13, 14, 16절).
    7)그는 자비의 하나님이시다(9절).

    [27] 다니엘의 간구

    55. 다니엘의 10가지 간구(9:16-19)
    1)주의 분노를 예루살렘과 시온 산에서 떠나게 하옵소서 (16절).
    2)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17, 18, 19절).
    3)나의 간구를 들으소서 (17절)
    4)주의 얼굴 빛을 주의 성소에 비추소서 (17절).
    5)귀를 기울여 들으소서(18절).
    6)당신의 눈을 뜨소서 (18절).
    7)우리의 황폐된 상황을 보소서 (18절)
    8)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 (19절).
    9)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19절).
    10)지체하지 마옵소서 (19절).

    [28] 이스라엘의 죄

    56. 이스라엘의 12가지 죄(9:5-14)
    1)범죄함(5,11,15,16절).
    2)패역함(5절).
    3)행악함(5절)
    4)주의 법도를 떠남(5절).
    5)주의 규례를 떠남(5절).
    6)주의 종,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음(6절)
    7)주께 죄를 범함(7절).
    8)주께 패역함(9절).
    9)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함(10절).
    10)주의 율법을 행치 아니함(10절).
    11)주의 율법을 범함(11절)
    12)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함(11, 14절).

    [29] 전쟁의 이상(10장)

    57. 가브리엘과, 그를 사로 잡아 그로 하여금 다니엘에게 이 전쟁의 이상을 보여주지 못하게 한 사탄과 같은 바사 군주 사이의 전쟁
    단 10:12, 13, 20.


    58. 바사군(君)과 헬라군(君) 사이의 전쟁
    단 1O:20, 21; 11:2,3; 8:20, 21.


    59. 바벨론군과 메대-바사군 사이의 전쟁
    단 11:1; 5:25-31.


    60.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을 차지하려다가 그것을 4나라로 나눈 그의 부하 장군들 사이의 전쟁
    단 1:4; 8:8, 22.


    61.알렐산더제국의 4부분중 2부분인 수리아와 애굽 사이의 전쟁
    단11:5.


    62. 수리아와 애굽 사이의 두번째 전쟁
    단 11:7-9.


    63.수리아와 애굽 사이의 3번째 전쟁
    단 11:10-12.


    64. 수리아와 애굽 사이의 4번째 전쟁
    단 11:13-16.


    65.수리아와 애굽 사이의 5번째 전쟁
    단 11:17.


    66. 수리아와 헬라 그리고 로마 사이의 전쟁
    단 11:18, 19.


    67. 수리아와 이스라엘 사이의 첫번째 전쟁
    단 11:20.


    68. 수리아와 이스라엘 사이의 두번째 전쟁
    단 11:21-24.


    69. 수리아와 애굽 사이의 6번째 전쟁
    단11:25-27


    70. 수리아와 이스라엘 사이의 3번째 전쟁
    단 11:28.


    71. 수리아와 애굽 사이의 7번째 전쟁
    단11:29-31


    72. 수리아와 이스라엘 사이의 4번째 전쟁
    단 11:32-34.


    73.수리아와 하나님 사이의 전쟁
    단 11:36-39.


    74. 수리아와 애굽 사이의 8번째, 곧 마지막 전쟁
    단 11:40-42.


    75. 수리아와 이스라엘 사이의 5번째 전쟁
    단 11:41.


    76. 수리아와 다른 나라들 사이의 전쟁
    단 11:41.


    77. 수리아와 리비아, 구스 사이의 전쟁
    단 11:43.


    78.수리아와 그에게 예속된 10나라, 러시아, 고대 로마 제국의 동쪽과 북쪽 나라들 사이의 전쟁
    단 11:44.


    79. 수리아와 이스라엘 사이의 6번째, 곧 마지막 전쟁
    단 11:45; 슥14:1-5, 14.


    80. 수리아와 재림하신 그리스도 사이의 전쟁
    단11:45; 7:21, 22, 25-27; 8:23-25; 9:27


    81. 미가엘로 그의 사자들과 사탄 및 그의 사자들 사이의 하늘의 전쟁
    단 12:1; 계 12:7-12.

    [30] 메시야에 대한 8가지 묘사(10:5)

    82. 그의 옷은 빛나는 세마포임
    단 1O:5; 12:6, 7; 비교; 계 1:13; 19:8; 출28:4-12.


    83. 그의 허리에는 정금 띠를 두름
    단 10:5; 비교 계 1:13.


    84.그의 몸은 황옥 같음
    단 10:6; 비교 계 4:3.


    85. 그의 얼굴은 번갯빛 같음
    단 10:6; 비교 1:16; 10:1.


    86. 그의 눈은 횃불 같음
    단 10:6; 비교 계 1:14; 19:12.


    87. 그의 팔은 빛난 놋과 같음
    단 10:6; 비교 계 1:14, 19;12.


    88. 그의 발은 빛난 놋과 같음
    단 10:6; 비교 계 1:14, 10:1.


    89. 그의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음
    단 1O:6; 비교, 계 1:14, 8:5; 10:2-4; 11:15; 14:2; 16:17, 18; 19:6; 시 29편.

    [31] 다니엘에게 미친 영향(10:8)

    90. 10가지 영향
    1)몸에 힘이 빠짐(8절).
    2)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듯 함(8절)
    3)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음(9절).
    4)한 손이 나를 어루만져서 손으로 땅을 짚고 무릎을 꿇고 일어남(10절).
    5)나는 그 후 떨며 일어섬(11절).
    6)나는 크게 두려워함(12절).
    7)나는 다시 땅굴을 땅에 대고 엎드림 (15절)
    8)나는 벙어리가 됨 (15절).
    9)천사가 나의 입술을 만지니 나는 다시 힘이 없어졌고 호흡이 남지 아니하였음을 호소함(16, 17절).
    10)나는 다시 강건하게 되어 계시를 받을 수 있게 됨(18절-12:13).

    [32] 다니엘 10-12장에 나타난 10가지 목적

    91. 마지막 날에 이스라엘에 일어날 일을 알려 주기 위함
    단10:14.


    92. 적그리스도가 어디서 나올 것인지에 대한 계시를 완성하기 위함
    단 11:2-45.


    93.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이스라엘을 억압할 세계적인 이방 제국들 가운데서 다니엘서의 계시를 완성하기 위함
    단 2:37-45; 7:17-27; 8:20-25.


    94. 작은 뿔 혹은 적그리스도에 대하여 알려 주기 위함
    단11:36-12:7.


    95. 적그리스도를 북방 왕과 동일시하기 위함
    단11:36-45.


    96. 새 로마 제국과 새 헬라 제국에 대한 계시를 완성하기 위함
    단 2:40-43; 7:23, 24.


    97.지리적으로 다니엘 2장과 7장의 10나라와 다니엘의 8장의 4나라로부터 이 나라들 중 하나인 수리아로 적그리스도의 도래지를 제한하기 위함
    단 7:23, 24, 8:9-14, 20-25; 11:36-45.


    98.적그리스도가 언제, 왜, 어떻게 올 것인지를 더욱 잘 설명하기 위함
    단 7:23, 24; 8:9-14, 20-25; 9:27; 11:36-45.


    99. 마지막 날의 전쟁에 대한 계시를 완성하기 위함
    단 2:40-45; 7:23,24; 8:9-14, 20-25; 11:40-45.


    100. 이 세상 나라들을 지배하는 사탄의 능력을 보이기 위함
    단 10:12-21; 11:1; 12:1.

    [33] 적그리스도와 신들

    101.적그리스도와 그의 신들에 대한 7가지 사실(단11:37)
    단 10:12-21; 11:1; 12:1
    1)그는 열조의 하나님, 곧 참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음(37절; 요5:43).
    2)여자들이 사모하는 신들을 돌아보지 아니함(37절).
    3)아무 신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함(37절)
    4)스스로 높여 모든 신보다 크다하며 심지어 참 하나님 보다도 높다고 함(36, 37절, 살후 2:4)
    5)그의 열조가 알지 못하던 신을 공경함(38절).
    6)세력의 신을 공경함(38절).
    7)이방 신을 공경함(38, 39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