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사람들은 상점에서 물건을 살 때 “이 물건 얼마나 오래 쓰나요?” 일본 사람들은 “이거 신제품인가요?” 한국
사람들은 “이거 진짠가요?”
얼마나 ‘가짜’에 속고 살았으면, 이렇게
‘진짜’인지를 묻는 것이 생활화가 되었겠는가? 그러다보니 기름도 참, 진짜, 순, 100%, 원조 등의 말이 붙어야 조금 안심이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물건을 살 때만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묻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세상 사람들은 주일날 성경책을 옆에 끼고
교회를 향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도 마음속으로 이런 질문을 묻고 있는 것 같다. ‘당신 진짜요?’
▲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의 <만들어진 신>. ⓒ 김영사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의
<만들어진 신>(영어 원제 The God Delusion)이다.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 또는 <눈먼
시계공> 등으로 잘 알려진, 세계적인 진화생물학자다. 그런데 7,000권만 팔려도 대박이라는 작은 한국 인문학 출판
시장에서, 이 책은 2007년 7월 중순에 출간된 지 한 달 만에 4만 권 이상이 팔려나갔고, 그해 연말 40만 권을 훌쩍
넘어섰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이후 인문학 도서 분야에서 최대의 돌풍이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의 돈지갑을 흔쾌히 열게 한 이 두껍고 비싼 책의 맨 첫 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인용되어 있다.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이상이라고 한다.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 한다.”
저자는
가수 존 레넌(John Lennon)의 노랫말을 인용하면서 독자들에게 한번 ‘종교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라’고 권유한다. 그러면
자살 폭파범, 9·11도, 아프가니스탄전쟁과 이라크 전쟁도, 십자군도, 마녀사냥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갈등도, 또한
보스니아 인종청소도 없었을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우리에게 과감히 종교를 버리고 “행복하고 도덕적이며 지적인
무신론자가 되라”고 주문한다.
'기독교 전도자 퇴치법 10계명'이란 우스개가 유포되는 사회
왜 한국인들은
이 책에 열광하는가? 요즘 우리사회에 ‘안티 기독교’ 현상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안티 기독교 인터넷 사이트는 너무 많아
일일이 언급하기도 힘들 정도인데, 반기독교 정서의 조직화 및 운동화 수위가 심상치 않다. 아마 22세기의 한국 역사학자는 21세기
초 한국문화의 가장 대표적인 현상으로 안티 기독교를 꼽을지 모르겠다.
이화대학교에서는 비기독교인
학생들 사이에 '기독교 전도자 퇴치법 10계명'이라는 우스개가 널리 유포되고 있다.
제1계명은 ‘절대 혼자 식당에서 밥 먹지
않기’ 왜냐하면 학생들의 약 15분 동안의 평균 식사 시간 동안에 최소한 5명 정도의 전도자를 만나기 때문이다.
제2계명은
누가 다가와 ‘교회 나가시느냐’고 물으면 ‘네~’ 하고 말꼬리 내리지 말고 ‘넵’하고 단호하게 말하기
제3계명은 또 누군가
다가와 ‘나와 같이 성경공부 해보지 않겠냐’고 물으면 ‘아니오~’ 하고 말꼬리 내리지 말고 ‘아니욥’ 하고 확실하게 거절하기
등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사도행전 2장에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 초대 교회의 모습이 잘 소개되어
있다. 이때는 베드로가 입을 열어 설교하면 하루에 3,000명씩 세례를 받고 크리스천이 되던 때였다. 그 이유가 44절에서
47절에 소상히 설명되어 있다.
“믿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필요한대로
나누어 가지며,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또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으며,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느니라.”
성도들의 본이 되는 생활과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열정이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고” 그 결과 구원 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다”는 말을 표준새번역 성서는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 ‘호감’이라는 말에
주목해보자.
일반인들을 상대로 한 종교 호감도 조사가 있었다. 1970년대에 조사에서 종교 이미지 선호도는 개신교가
1위, 불교가 2위, 가톨릭이 3위였다. 그런데 2000년도에는 순위가 바뀌어 가톨릭이 1위, 불교는 그대로 2위, 개신교는
3위로 떨어졌다. 개신교에 대한 비호감도가 증가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호감도의 변화는 실제 신도 수의 변화로도 이어졌다. 2005년 통계청이 발표한 우리나라 인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그 전
10년간 우리나라 3대 종교 중에서 천주교 신자는 74.4%, 불교 신자는 3.9%가 증가한 반면, 개신교 신자만 1.6%
감소했다. 성장가도를 달리던 한국 개신교의 신도 수가 줄었다는 충격적인 발표였다.
그때 매우 신기했던 일은 그
-1.6% 성장률을 실제 사람 수로 환산하면 ‘14만 4,000’명이 된다는 통계였다. 우연치고는 너무도 상징적인 숫자가 아닌가? 잘
알다시피, 14만 4,000은 요한계시록 7장과 14장에 나오는 말세 때의 공중 휴거 숫자다. 그렇다면 이번 한국 개신교인
숫자의 감소는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에 보내신 가히 ‘종말론적’ 메시지라고도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나님의 교회인가 아무개 목사의 교회인가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설득당하는 데 말이나 논리가 차지하는 비율은 5%에 불과하다고 한다. 60% 이상은 첫인상의
호감도가 좌우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아무리 논리적으로 말을 잘해도 첫인상에 왠지 호감이 가지 않으면 사람들의 3분의 2는 이미
마음의 문을 닫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개신교의 이미지가 갈수록 비호감이 되다보니, 아무리 담대히 길거리에 서서 복음을 외쳐도
사람들은 좀처럼 마음의 문을 열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예수는 좋은데, 기독교는 싫소.”
왜
이렇게 한국 개신교회의 대사회적 이미지가 땅에 떨어졌는가? 무엇이 그 원인인가? 말하기 힘들고 또 듣기 힘든 고언(苦言)이지만
참회하는 심정으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돌아보고자 한다. 뼈를 깎는 자기 성찰이 없이 우리는 생명의 길로 나아갈 수 없고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의 도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여러 자료를 종합해보니 한국 개신교회의 이미지가 악화된 가장 큰
원인은 일부 교회의 세습 문제로 나타난다. 성공한 제1세대 목회자들의 일부가 자기 자식들에게 교회를 기업처럼 물려주었다. 사회적
질타를 맞자 맞바꿔 물려주었다. 자기 교회는 친구 목사 아들에게, 친구 목사 교회는 자기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사람들은 그런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로 보지 않는다. 아무개 목사의 교회로 생각한다.
* 여기서 한 가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세습(世習)이란 단어가 어떻게 한국교회에 나타나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습(世習)이란 한자의 훈은 "인간 세(世)" "엄습할 습(習)" 입니다. 그 의미는 "재산, 신분, 직업 등을 한집안에서 자손 대대로 물려받음" 이라고 사전에서 정의합니다. 그런데 '세습'이란 용어가 2005년 북한에서 한국교회를 무너트리기 위하여 선동 용어로 지시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현재 북한에서 간첩을 남파하기 위한 공작 책임자로 있던 '김국성"씨가 탈북 후 한국에 들어와서 밝혀낸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한국교회를 부흥 성장시켰던 1세 목회자들이 모두 은퇴하면 그 다음 세대 중에서 과거의 한국 역사와 고난의 시기를 알지 못하는 사람을 내세우면 교회가 반드시 무너질 것이라는 정치적 책략에 의해서 북한의 지령에 따른 것이라고 합니다.
교회의 전통은 "세습"이 아니라 "승계(承繼)" 라고 해야 합니다. 승계란 이을 승, 이을 계라는 훈으로 "선임자나 선대의 업적, 유산, 전통 따위를 뒤이어 물려받음." 또는 "다른 사람의 권리나 의무를 뒤이어 물려받음."을 의미합니다.
잘
알다시피, 가톨릭교회에서는 사제들의 결혼을 금하고 있다. 하지만 이상성 박사의 말대로 사제들의 결혼금지는 11세기까지만 해도
권장 사항에 불과했다. 그런데 교회가 세속을 능가하는 절대 권력을 갖게 되자, 가톨릭교회는 교권의 세습을 막기 위해 사제들의
독신을 의무화했다는 것이다. 이제 한국 개신교회의 세습을 막기 위한 마지막 방법은 신학생들도 독신을 서원해야 안수를 주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
교회의 물질적 세속화
교회가 대형화되었고 기업이 되었으며 부자가 되었다.
그러면서 세속화 되었다. 기독교인들은 교회에 나가면 부자도 되고 성공한다고 믿고 나가는지 몰라도, 사람들은 물질과 하나님을 동시에
잘 섬길 수 있다고 설교하는 교회로부터 아무런 영적 신비도 느끼지 못한다. 이 세상의 시류와 정확히 일치하는 교회의 메시지에서
아무런 희망과 위안을 얻지 못한다.
가짜 박사의 절반이 목사님들
도덕성의 위기
몇 년 전
신정아 사건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필자는 당시 신 씨가 조사를 받기 위해 불려 다니던 서부지방검찰청사 근처에
살고 있기 때문에 수많은 TV 방송차량이 포진한 그 건물 앞을 지나다니며 당시 국민적 관심사와 분노가 얼마나 높았는지를 잘
기억하고 있다.
그때 핵심적인 문제는 바로 신 씨의 예일대 박사학위 위조였다. 서부지검 앞을 지나다니면서 부끄러워
머리를 숙이고 다녔다. 한국에 가짜 미국박사 학위 소지자가 968명이 있는데(정말 믿기지 않지만) 이들의 45%가 신학박사라고
한다.
이 나라 가짜 박사의 절반이 목사님들인 것이다. 가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목사님들에게 왜 그랬냐고 물으면, ‘교인들의 학력이
높아져서 어쩔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하지만 599불에 석사학위증을, 799불에 박사학위증을 사 오신 목사님이 단상 위에서
‘정직하게 살라’고 설교하면 과연 어느 교인이 그 말씀대로 살려하겠는가?
잘못된 단기 선교
몇 년 전 여름 서울의 한 유명 교회가 전 세계 27개국 53개 도시로 무려 103개나 되는 단기 선교팀을 보내 ‘땅 밟기’
선교라는 것을 한 적이 있다. 얼마 전에는 봉은사 땅 밟기가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된 적도 있다. 땅만 밟고 와도 그 땅에 선교가
된다는 이야기인데, 예수님도 하지 못한 일을 하겠다는 이 기괴한 발상의 선교에 필자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만다.
기피1호 신부감이 ‘교회 다니는 여성’인 이유
한국 개신교의 오만함이 이제는 하늘을 찌르는 것에 경악하고 만다. 한국교회에 선교사를 파송했던 미국 교회의 여러 선교대회에 참석하면서 선교가 무엇인지에 관해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두 단어가 있다.
선교란?
첫째, Life-long commitment 둘째, Equal partnership
첫째로 ‘뼈를 묻는’ 평생 헌신이다.
지금도 지하철 2호선 합정역 근처의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지에 가보면, 거기에는 우리보다 이
땅을 더 사랑한, ‘조선 사람을 더 나은 조선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 헌신하다 이 땅에 뼈를 묻은 많은 분들이 누워있다.
둘째로 ‘평등한 동반자 관계’
선교란 문화적·경제적·복음적으로 우위인 자가 앞서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현지인과
함께 겸손히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땅 밟기 선교라니 이런 발상이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가.
이화대학
학생들을 면담해보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공격적으로 펼쳐지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의 전도 앞에 상처 입지 않은 학생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인가. 최근 발표된 한 결혼정보회사의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신랑 후보들의 기피1호 신부감이 ‘교회 다니는
여성’이라고 나왔다 하지 않는가. 그들이 뽑은 두 이유가 재미있다. ‘왠지 배타적일 것 같아서’ ‘왠지 생활비를 헌금으로
빼돌릴 것 같아서’ 라고 한다.
‘밥 퍼주는 시인’ 최일도 목사의 일화가 생각난다. 속칭 청량리 588 굴다리 밑에서 노숙자와 행려자들에게 밥 먹이기 운동을 시작한 그가 그 일을 시작하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힌 적이 있다.
하루는
경기도 부천에 있는 한 신학대학교에 강연 초대를 받아 전철 1호선 타고 가던 중이었다. 자리가 없어 서서 가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날 과로를 한 탓에 하염없이 졸음이 쏟아졌다고 한다. 그래서 전철이 흔들리는 대로 함께 흔들리며 한참을 졸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옆구리를 콱 찌르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깨보니 이마가 약간 벗겨지고 아주 깐깐하게 생긴 초로의 아저씨 한 사람이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한 무서운 눈초리로 자신을 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더니 느닷없이 ‘예수 믿어!’ 하고 소리치는
것이었다. 엉겁결에 최 목사는 ‘나 목사인데요’ 라고 말도 못하고 ‘저, 믿고 있는 데요’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그
아저씨는 또 한참을 노려보더니 이렇게 또 한마디를 콱 내뱉고 옆 칸으로 가더라는 것이다. ‘졸지 말고 바로 믿어!’ 그때 최
목사는 너무 창피해서 자신이 목사라는 사실도 잊고 달리는 전철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때 그는 거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결심을 했다고 한다. ‘나 다시는 저렇게 입으로 예수를 증거 하지 않으리라! 나 다시는 저렇게 자신의 확신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으리라!’
한국 개신교가 비호감이 된 가장 큰 원인의 하나는 ‘종교가 생활화되지 못하고 생활이 종교화 되지 못한 것’
한 다른 여론조사에 의하면, 일반국민들이 기독교에 대해 좋지 않는 느낌을 가지는 이유 중 1위는 “교인들이 진실성이
없어 보이기 때문”(34%)이고, 2위는 “교인들이 이기적이기 때문”(11.8%)이며, 3위는 “타종교에 배타적이기
때문”(10.7%)이다.
1920년대에 농촌계몽운동을 펼치던 김활란 박사는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혹자(或者)는
종교란 모든 실생활과의 관계를 떠나 자기 혼자 어떤 신비한 경험을 하고 일요일에 예배당 가는 것으로만 알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고리대금업이나 다른 방식으로 착취를 하다가도 주일에 양심에 아무 저촉도 없이 예배를 드린다. 그 원인은 종교생활이 실제화 되지
못하고 실생활이 종교화 되지 못한 까닭이다.”
종교가 생활이 되지 못하고 생활이 종교가 되지 못하니까 (달리 말하면 ‘예수 믿기’와 ‘예수 살기’가 하나가 되지 못하니까) 요즘 사람들은 기독교인을 이렇게 정의한다.
“기독교인이란 누군가. 그들은 토요일까지 한 일을 일요일에 회개하고 월요일부터 다시 하려는 사람들이다.”
일주일에
하루라도 회개하는 것이 일주일에 단 한 번도 회개하지 않는 것보다 더 나은 삶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의 회개가 진정한
회개라면 우리는 우리가 회개한 일을 다음날 또 반복하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크리스천들의 신앙의
‘진정성’(authenticity)이 의심을 받기에, 사람들은 교회에 등을 돌린다.
어느 도시에 목회를 잘 하는
목사님이 있었다. 맨 땅에 개척해서 열심히 목회를 하니 교회가 크게 부흥했다. 그런데 그만 과로로 병에 걸리고 말았다. 콩팥
두개를 다 떼어내고 다른 사람의 것을 이식받아야 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평소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사랑의
실천을 강조했으니 교인들 중 누가 콩팥 하나 떼어주지 않을까 싶어 주일 설교 시간에 상황을 설명하고 콩팥을 떼어줄 사람 손을
들어달라고 부탁했다. 처음에는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맨 앞줄에 앉아 있던 수석 장로님부터 조심조심 손을 들더니
급기야 예배당을 가득 메운 3,000명의 교인이 다 손을 들더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목회를 잘못하진 않았어!’
목사님은 마음이 흡족해졌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3,000개의 콩팥이 다 필요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목사님은 이렇게
제안했다. 자기가 머리카락 하나를 뽑아서 공중에 날릴 것이니 모두가 ‘주여 삼창’을 하고 통성으로 기도하는 동안 그 머리카락이
자기의 머리 위에 떨어지는 사람이 콩팥을 기증하자는 제안이었다. 그래서 모두가 눈을 감고 열심히 통성으로 목사님의 건강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몇 시간이 지나도 그 머리카락은 공중에 둥둥 떠다니기만 할 뿐 아무에게도 떨어지지 않는
것이 아닌가. 너무도 이상해서 자세히 보니 교인들 모두가 이렇게 기도하더란다. (머리카락이 가까이 오면 입으로 바람을 불며)
“주~여” “아~멘” “믿~습니다.”
은퇴하신 박종순 목사님의 설교에서 기억하고 있던 예화다. 요한계시록 3장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신구교를
포함해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된 지 200년이 넘었다. 기독교가 조선에 들어왔을 때, 기독교는 당시의 사회를 개혁하고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위계적이고 가부장적인 유교적 가치관에 의해 철저히 소외되어 살아가던 이들에게 (특히 여성들에게) 기독교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 받았고 또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있는 자격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가히 혁명적인 평등사상을
소개함으로써 급속히 전파되어 나갔다. 특히 가난하고, 힘없고, 천대받던 사람들에게 급속히 퍼져나갔다.
물론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사상은 양반과 남성을 세상의 중심으로 믿어온 조선의 유교 체제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도전이었다. 하지만 같은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던 미천한 사람들에게 그것은 글자그대로 ‘복음’(福音)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한국 기독교는 선교 초기의 이와 같은 변혁적이고 인습타파적인 특성들을 점차 잃기 시작했다. 한 종교가 소종파적 형태를
지니고 있을 때는 평등적이고 변혁적이며 예언자적 특성을 지니다가도, 그 소종파가 점차 조직화되고 제도화되어 한 사회에 무리 없는
안착을 시도할 때가 되면 초기의 특성들을 포기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점점 강한 현상유지적 성향을 가지게 되고, 변화를 위한
어떠한 시도도 위험시 하게 된다.
성차별의 보루가 된 한국 교회
한국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언제부턴가
한국 교회는 성차별의 보루가 되었다.(한 교회여성단체가 교회 안에서 여성들이 담당하고 있는 일에 대한 설문조사를 벌인 적이
있는데, 설문자 1,000명 중 51%가 청소 및 음식 만들기, 7.3%가 행사 준비라고 응답했다. 이것은 오늘날 한국 교회
여성의 약 60%가 집안일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을 교회에서 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이 여성들이
교회에서 ‘가장 하고 싶은 일’이라는 항목에서 청소 및 음식 만들기를 택한 사람은 겨우 0.3%에 불과했다.) 언제부턴가 한국
개신교회는 지극히 배타적 신앙 행태를 강화해 왔고, 일부 대형 교회 목회자들은 도덕적 타락과 권력 사유화의 길을 걸었으며, 개
교회들은 수평 이동을 통한 교회 성장을 추구하면서 교인들을 뺏고 빼앗기는 소모적인 경쟁에 몰두해 왔다. 그렇게 교회는 점점 자신의
원래의 모습에서 멀어져 갔고, 교회의 성장이 곧 복음 선포라는 환상 속에 살다가 급기야 성장 자체의 위기까지 맞이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는 더 이상 소수 종교가 아니다. 한국 기독교는 다수 종교이며 주류 종교다. 이제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더 이상 ‘위험한’(risky) 일이 아니다. 초대교인들과 달리 오늘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신변에 아무 위협도 느끼지 않고 서슴없이 ‘예수는 나의 주’라 말할 수 있다. 이제 교회 나가는 것은 하나도 부끄러운
일이 아닐 뿐더러, 오히려 사회생활에 보탬과 이득이 된다. 기독교는 더 이상 이 나라에서 ‘좁은 문’이 아니라 가장 넓고 평탄한
길이 되었다. 그러면서 신앙은 서서히 ‘일상적인’(routine) 일이 되어 갔다. 판에 박힌 일과가 되어 갔다. 그리고 마치
중년의 부부들에게 권태기라는 것이 찾아오듯이, 첫 신앙의 감동도 사라져갔다. 그러면서 우리 모두는 제도교회의 안락함과 기득권 속에
거하게 되었다.
예수는 따르지 않는 3가지 완벽한 신학적 알리바이
실로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의 삶은
예수의 삶을 닮지 않았다. 교회는 종종 ‘예수 닮지 않은 그리스도’를 예배한다. 신학 강단에서 가르쳐지는 기독론(基督論)은 종종
예수를 따르지 않기 위한 교묘한 신학적 알리바이로 둔갑한다. 한인철 교수는 한국 교회가 예수는 잘 믿어도 예수는 따르지 않는
3가지 완벽한 신학적 알리바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 적이 있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를 따를 수 없다’ 왜냐하면 감히 신이신 예수를 따르는 일은 인간에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를 따를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가 이미 우리를 위해 모든 죄를 다 짊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를 절대 따라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를 따라 무엇을 하려는 것은 ‘오직 은총’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교묘한 3불(三不) 원칙이다.
참으로 철저하게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라”(롬 15:1-6)는 사도 바울의 권면의 말씀도 부정되고
있다.
문제의 뿌리는 종교개혁 신학 안에 잉태해 있고 그에 대한 우리의 불철저한 사유(思惟)와 전유(專有)에 있다. 우리는
“sola fide”를 이유로 행함을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우리는 “sola gratia”를 이유로 이웃에 대한 책무로부터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발부한다. 그리고 우리는 “sola scriptura”를 이유로 자연을 하나님 계시의 통로에서 배제해버렸으며 그
결과 자연을 자기 맘대로 착취하게 되었다. 문제의 뿌리는 우리가 물려받은 신학적 유산 안에 있고, 그것을 근원적으로 성찰하지
못한 신학자들과 신학 교육 안에 자리 잡고 있다.
결코 싸고 편리한 이름이 아닌 ‘크리스천’
필자
자신부터 참회해야 한다. 그 결과 오늘 우리는 한국 교회 안에서 하나님나라라는 자신의 중심적 메시지로부터 ‘이혼’ 당한 슬픈
예수를 본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떨어져 나간 예수의 빈자리는 언제나 정치적 권력, 문화적 우월감, 종교적 완고함, 기존질서에의
순응, 그리고 도피적 구원관이 메워왔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의 위기를 운운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성경책을 옆에 끼고 교회를 향하는 우리들을 향해 길거리의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던졌던 바로 그 질문, 즉 ‘당신 진짜요?’를
우리 스스로에게 정직하게 물어보아야 한다. 우리는 진짜 크리스천인가? 우리의 믿음은 진정성이 있는가? 우리는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는 참된 크리스천인가?
미국 남북전쟁 때 ‘프레드릭스버그 대전투’라는 유명한 싸움이 있었다.
육탄전까지 치르고 수많은 부상자들을 중간에 남겨 놓을 채 쌍방은 후퇴하여 대치하고 있었다. 이 때 북군 병사 하나가 물통을 들고
달려 나갔다. 남군에서 사격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병사가 목숨을 걸고 남군과 북군 가리지 않고 부상자들에게 물을 마시게 하는
광경을 보고 사격은 중단되었다. 이를 계기로 쌍방은 한 시간 동안 휴전을 하기로 하고 서로 부상자 처리를 하게 되었다. 이때 남군
장교가 이 북군 병사에게 다가가 묻는다. “What is your name?” 그러자 그가 대답한다. “My name is
Christian.”
그때 그는 자기
부모가 지어준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그때 그는 총탄에 맞아 죽을 지도 모르는 사지 한복판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향해 뛰어나가게
만든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이렇게 그에게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은 결코 싸고 편리한 이름이 아니었다. 그에게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은 이렇게 목숨을 건 이름이었다. 전 존재를 건 이름이었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의 이미지가 땅에 떨어진 이유는 혹 이런
‘진짜’ 크리스천의 수가 적어서는 아니겠는가?
찐빵집 경영철학을 본받자
"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골로새서3:23) '안흥찐빵'집 주인 심순녀씨(55)는 강원도 횡성에서 30년간 전통적인 방식으로 찐빵을 만들어
오고 있다. 심씨는 우연히 길거리 호떡장수에게 호떡 만드는 방법을 배워 장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심씨의 찐빵집은 전국에서
단골손님의 발길이 끓이지 않는 지역의 명소가 되었다. 심씨가 찐빵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남다른 비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비법은
남들이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하면서도 차별화된 맛과 전통음식을 팔면서 지역 연고 판매에 만족하지 않고 최신 물류시스템과
택배서비스를 접목시켜 전국을 상대로 영업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비법은 찐빵 하나 하나에 들어있는 심씨의
'정성'이었다. 최근 매출 1조 7천억원이 넘는 대기업 LG의 부회장 권문구씨는 이러한 안흥찐빵론을 직원들에게 강의했다.
작은 장사에서도 대기업이 배울 수 있는 많은 경영 기법이 숨어있다는 얘기다. 권부회장은 안흥찐빵집이 처음 장사를 시작할 때
호떡장사로부터 호떡 만드는 법을 배워 찐빵에 원용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일종의 '벤치마킹'이었다는 것. 그러나 권부회장이 특별히
강조한 것은 역시 '정성'이었다. 세계적인 LG전선에서 아직 불량품이 나오는 것은 정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결국
안흥찐빵의 '정성'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09-08-2022(목)
신이라(사도행전 28:6)
유라굴로 광풍으로 알렉산드리아 호는 파선되었고 승선했던 276명은 모두 "멜리데" 라는 섬에 상륙할 수 있었습니다. 마침 멜리데 섬의 원주민들은 풍랑이 일어났던 바다에서 구사일생 살아남은 사람들을 정중하게 맞이하여 옷을 말리고 몸을 따뜻하게 할 수 있는 모닥불을 피워
주었습니다.
바울은 이때 불이 계속 타오르도록 땔감을 넣고 있었습니다. 그때 나뭇가지에 숨어 있던 독사가 바울을 물었습니다. 섬의 원주민들은 이 사람이 거센 풍랑에서는 살아남았으나 결국은 독사에 물려 죽는구나! 아마 말못할 중한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며 바울이 죽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독사를 모닥불에 떨어트리고 태연하게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바울을 지켜보던 원주민들은 " 이 사람은 신이구나!" 하고 감탄합니다.
바울이 뱀의 독성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던 것은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를 지켜주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일행들과 함께 그 섬에서 석 달을 머물면서 멜리데 사람들에게 큰 유익을 주었습니다.
비록 죄수의 몸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계속 역사하셔서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었을 때 안수하여 그를 낫게
했습니다. 또한 멜리데 섬의 많은 병자들을 치유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고 다음 항해에 필요한 것들을 대접받을 수
있었습니다.
로마에서 바울은 그를 지키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있도록 허락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비록 군사의 감시를 받았지만 개인적인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며 형제들이 자기를 위해 마련해 준 편안한 숙소에서 지낼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먼저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몇 가지 요청을 합니다. 그는 유대인이나 유대의 관습에 해를 입히지 않았습니다. 유대에 있는 로마
권력자들은 바울이 무죄임을 인정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자기를 공정하게 판단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마지못해 가이사에게
호소하였습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그는 자기 민족인 이스라엘을 송사하려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다만 무죄 방면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가 지도자들을 부른 우선적인 목적은 이스라엘의 소망에 관해 함께 이야기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바울의 말을 들고 유대 지도자들은 우리가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너에 대한 이야기도 들은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공연한 일에 끼어들어 황제의 분노를 사거나 백성의 원망을 듣게 될까봐 이렇게 대답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바울과
유대교 지도자들의 두번째 만남에서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증거했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를 믿게 하려고
했습니다. 어떤 유대인들은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지도자들이 복음에 순종치 않음을 보고 이사야의
말을 적용해서 최종적으로 두려운 선언을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택함받은 민족이고 누구보다도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지만 영의
눈이 어둡고 귀가 어두워 예수님을 배척하여 이 귀한 은혜가 이방인에게 넘겨지게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사도행전은 바울이 로마에 도착한 후 이 년 동안 아무런 방해 없이 복음을 전파했다는 기사로 끝맺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행전의 성령의 역사는 끝나지 않고 오늘날까지 계속되어짐을 의미합니다.
로마로 온 이유(16-20절)
보디올에서 일주일을 머물렀다가 출발한 바울 일행은 마침내 제국의 심장 로마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거기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전해주며 사도행전의 막이 내려옵니다.
16.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에게는 자기를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당시 로마 시민으로 황제에게 상소한 미결수는 로마에 도착하면 황제의 근위대장에게 인수인계되어 황제근위대 감옥에 감금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근위대장은 바울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고, 감옥 밖에, 가택연금의 형태로 따로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습니다.
황제의 근위대장은 황제의 명령을 철저하게 준수하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왜 바울에게 이렇게 관대하게 대해주었는지 그 이유는 알
길이 없지만, 하나님의 신비한 손길이 역사하셨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바울은 감옥 밖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복음도 전하고,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할 수 있었습니다. 30절에서 증거하듯이, 이때부터 바울은 2년 동안 자기
‘셋집’에 머물렀습니다. ‘셋집’은 돈을 주고 빌린 공간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이지, 실제로 공간적으로는 ‘싸구려 헛간’
같은 곳이었습니다.
17a.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로마에 도착한 바울은 가택연금 상태에서 가장 먼저 초대한 사람은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얼핏 표면적으로 생각하면,
‘높은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함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그리스도인들을 먼저 초대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당시 로마는 로마제국에서 가장 큰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로마에는 처음 왔기 때문에 로마에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이 가택연금을 당할 셋집을 얻었다는 것은 누군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그리스도인이 도와주었고, 그들이 곁에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흘이 지나서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초대했던 것이었습니다. 왜 자신이 로마까지 오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려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죄수의 신분인 바울이 일일이 높은 사람들을 찾아다닐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17b-19. 그들이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관습을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준 바 되었으니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석방하려 하였으나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 못하여 가이사에게 상소함이요 내 민족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사도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은 바울을 배교자로 여겨
어떻게 해서든지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2년에 걸쳐서 벨릭스 총독과 베스도 총독에게 거짓된 내용으로 바울을 고발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 중에서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동맹한 사람이 40여 명이나 있었습니다. 그만큼 유대인들은 바울에게 적대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 시민의 자격으로 황제에게 상소했습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이 황제에게 상소한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기 전에, 로마에 있는
유대교 공동체에 바울을 모함하는 편지를 보냈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의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왜
자신이 왜 황제에게 상소했는지 그 이유를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 상소는 바울이 자기 민족, 유대인을 고발하기 위함이 결코
아니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0. 이러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으니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바울이 싸구려 헛간 같은 셋집에 가택연금 상태로 구금되어 있었다고 해서, 그 안에서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본문에
‘쇠사슬’은 ‘쇠사슬에 매인 것과 같은 억압된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쇠사슬_chain’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황제의 근위대장이 바울에게 감옥 밖에서 살 수 있도록 배려해주면서도, 미결수인 바울이 도망칠 수는 없도록 쇠사슬로 묶어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감옥 밖에서 머무는 미결수에게는 그 미결수의 한쪽 팔과 그 미결수를 지키는 군인의 한쪽 팔을 쇠사슬로 연결해
두곤 했습니다. 도망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왜 쇠사슬에 매여 있는지에 대해 해명하는데, 그것은 자신이 로마법을 어겼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인함이라고 합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오랫동안 간절히 기다려온 그 소망, 메시아의 오심에 대한 소망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복음에 대한 반응(21-29절)
그에 대한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의 반응이 이러하였습니다.
21.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전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
바울의 변론을 들은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바울에 관한 편지를 받은 적도 없고, 누가 와서 바울에 대해 험담한
사람도 없었다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정말 바울을 전폭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에 한 말은 아니라 다소 사탕발림이었습니다.
22. 이에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니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알기 때문이라 하더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즉 그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는 지금과 같은 정보가 빨리 오가던 때가 아니니까? 누군가가 그들에게 바울에
대한 부정적인 정보를 전해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을 무작정 배척하지는 않았고,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들어 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만날 날짜를 정했습니다.
23.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약속한 날짜가 이르자, 바울을 처음 방문했던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만이 아니라,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관심이 있는 유대인들까지, 많은 사람이 바울이 가택 연금되어 있는 싸구려 헛간 같은 셋집에 모였습니다.
본문의 ‘강론하다’는 ‘자세히 설명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은 ‘구약성경’을 일컫는 표현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찾아온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면서,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가 바로 나사렛 예수님이심을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자신을 찾아온 유대인들에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즉 ‘하루 종일’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강론했습니다. 특히 ‘아침’이라는 말은 ‘새벽’ 또는 ‘동트는 시각’을 뜻하는 말입니다. 즉 유대인들은 바울과 약속한 날이
밝자마자 바울을 찾아왔던 것이었습니다. 그 이른 아침부터 해가 저물어 앞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바울은 지금 인생 말년에 접어들었고, 지병에도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팔에는 쇠사슬도 있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는 것은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을 위해서, 주님 안에서 그들을 살리기 위해, 바울이 자신의 생명을 던진 것과도 같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이러하였습니다.
24.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동일한 공간에서 동일한 사람으로부터 동일한 복음을 들었음에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성경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앙 경험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와 동일한 마을에 있는 교회에서 동일한 목회자로부터 동일한 복음을 들으며
신앙생활 했음에도, 우리는 지금 주님 앞에 있지만, 지금 주님과 등지고 있는 사람도 참 많지 않습니까? 오직 주님의 은혜라는 말
외에는 설명이 불가합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그 말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아니하는 사람으로 나뉘었습니다. 그때 바울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25-28.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이르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
이 말씀은 이사야 6:9-10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듣는 것뿐만 아니라 삶으로 들으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영원히 구원해 주시려 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선민을 자처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아예 귀로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이방인은 이스라엘 백성과는 달리,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들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거부함으로, 그 말씀이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게 되었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참 신비하고도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연금 생활 2년 요약(30-31절)
28장으로 구성된 사도행전은 이렇게 막이 내리고 있습니다.
30-31.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바울은 싸구려 헛간 같은 셋집에 2년 동안 연금되어 있었는데, 찾아오는 사람을 다 영접했다고 합니다. ‘영접하다’는 동사가
미완료형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사람들이 계속해서 찾아왔고, 바울을 계속해서 그들을 영접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찾아온 사람들에게 전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주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사도행전은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입니까?”라고 질문하면서 사도행전의 막이
올라갔습니다. 물론 이때 제자들이 꿈꾸었던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달랐습니다. 하지만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임하신 후에, 제자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의 막이 내리면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의 주인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다고 증거합니다. 즉 사도행전의 주제, 우리 그리스도인이 꿈꾸고 살아야 할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이 온전히 임하는 곳입니다. 즉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사도행전의 주역입니다.
사도행전은 사도인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님을 기다리며 기도했고, 마침내 성령님께서 임하신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사도들은 자신들이 한 번도 배우지 않았던 언어로 말하게 되었고, 또 복음을 전했을 때, 그 말씀을 듣고 믿게 된
사람들이 3,000명, 5,000명이나 되었다고 증거합니다. 그러면 마지막에는 대단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습니다. 로마제국이
복음화가 되었다든지, 사도들이 다 대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든지로 마침표를 찍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순교를 당했고,
바울도 가택 연금된 것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어가셨고, 지금까지 이어오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이 세상의 나라나 세속적인 가치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이며, 영원한 가치관을 추구해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영원한 가치관을 추구하는 사람이 하나님이 힘이 되심을 삶으로 증명하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은 변질의
인생이 아니라 변화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삶이 각자의 사도행전으로 엮어지기를 소망하고, 축복합니다.
게에게는 늘 옆으로만 걷는 자식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게의 부부가 그의 자식을 위하여 걱정하던 끝에 물고기 숭어네 집으로 아들을 보내서 바로 걷는 교육을 시키도록 결론을 얻고 보냈답니다. 아들 게는 숭어네 집에 가서 오랫동안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아들 게는 똑바로 걸을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교육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그러나 웬 일인지 아들 게는 집에 돌아오자
마자 다시 옛날처럼 다시 옆으로 걷는 거예요. 게의 부모는 다시 아들 게를 숭어네 집에 보내 교육을 다시 받게 했다. 아들 게는
숭어네 집에 가자마자 다시 정상으로 잘 걷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기 집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옆으로 걷는 것이었다. 이에 속이상한 게의 부모가 아들 게에게 야단을 쳤다. 야단을 맞은 아들게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숭어네 부모는 바로 걷는데 엄마 아빠는 옆으로 걸으시니까 나까지 모로 걷게 되쟎아요?"
여러분 ! 그렇습니다. 윗 사람들이 본을 보이는 것이 최상의 교육이됩니다.
09-07-2022(수)
그대로 되리라(사도행전 27:25)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Wherefore, sirs, be of good cheer: for I believe God, that it shall be even as it was told me.
그대로 되리라 (it will happen just as) NASB
바울의 3차 전도여행은 사도행전 21장에서 끝이 났습니다. 22장에서는 가이사랴 빌립보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이후 사도행전 22장에서 26장은 2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던 바울이 복음에 대해, 자신에 대해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유대를 다스리던 로마의 관리들을 대상으로 변론하고 변호한 내용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27장에서 바울은 로마를 향해 출발하게 됩니다. 로마로 가는 것은 바울의 소원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바울의 열심은 유대와 사마리아와 소아시아를 넘어 이제 로마까지 향하기를 원했습니다. 사도행전 19장 21절에 보면 그의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이 일이라는 것은 에베소에서의 복음 사역을 말합니다. 바울은 3년 동안 에베소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로마를 향한 복음의 비전을 품게 됩니다. 로마를 향한 복음은 사실 바울만 말한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이미 말씀하셨던 부분입니다.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의 증인이 될 것이라는 말씀은 바울의 가슴에 새겨져 있었고, 그는 에베소 사역 가운데 그 비젼을 구체화시켰던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2년의 기다림 끝에 그는 로마를 향해 출발하게 됩니다.
가이사랴를 출발한 배는 시돈, 구브로해안, 길리기아, 밤빌리아 바다, 무라시 등의 구체적인 위치와 항로를 가리키며 항해를 시작합니다. 누가가 바울과 함께 배를 타고 가지 않았다면 기록될 수 없는 꼼꼼함입니다. 중요한 것은 로마로 가는 길에 누가는 바울과 함께 있었다는 것입니다. 누가의 흔적은 28장 16절 “우리”라는 표현을 통해 마지막으로 등장하며, 그가 로마로 가는 길에 바울과 끝까지 함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7장 말씀을 묵상하면서, 복음을 향한 바울의 열심도 중요하지만, 누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함께 복음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위해 살아가기 위해서는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내 자존심도, 내 시간과 계획도, 내 물질도 포기해야 할 때가 분명히 찾아옵니다. 그러다가 14절의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 어려움에 처한 바울의 일행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을 위해 가지고 배에 올랐던 음식과 각종 도구들을 바다에 던지는 모습을 보면서, 마치 하나님께서도 동일하게 저에게 버려야 할 것이 있는지 물어보시는 것 같았습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함께 로마로 가도록 하시기 위해서 항해의 과정, 그리고 태풍을 만나 나 자신을 버리는 과정을 겪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로마의 가는 길은, 복음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과정은 쉽지 않습니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광풍이 우리를 덮쳐오기 때문이며, 수많은 삶의 짐들이 아직도 우리 내면의 배에는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 때마다 오늘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사도행전 27:24-25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로마로 가는 길에 누가만 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계셨음을 믿으십시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복음의 길을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에도 항상 함께 하십니다. 오늘 하루 로마로 향하는 복음의 여정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또한 가족과 이웃들과 함께 걸어가는 은혜가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항해의 첫 부분에서는 백부장, 선장, 선주가 행해를 지휘했다면, 풍랑 속으로 들어가면서부터 풍랑의 중반까지는 풍랑이 항해를 지휘했고, 항해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바울이 항해를 지휘했다. 항해의 주역이 마지막에는 죄수인 바울에게로 옮겨간 셈이다. 비록 바울은 그의 법적인 자유를 점차로 박탈당했지만, 그의 예언 속에서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의 주권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점차로 확대되어가고 있다. 바울의 구금(拘禁)은 복음의 운반 기구(carrier) 역할을 하고 있다.
결국 이 14일간의 풍랑은 선장과 선주 그리고 백부장이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도착지인 말타 섬으로 바울 일행을 인도했다. 바다를 통하는 이 항해 여행은 어떤 의미를 보여주고 있는가?
첫째, 1장 8절에서 주님이 알려주신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된다는 말씀의 성취 둘째, 하나님의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셋째, 복음은 풍랑 속을 통과하며, 전도자는 풍랑 속에서 절대 절명의 훈련을 거쳐 사명을 재다짐 하는 기회를 맞는다. 넷째, 하나님은 전도자의 여정 속에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셔서 구원을 이루어 가신다. 이 예기치 못한 여정에서 하나님은 전도자를 사용하여 전도자가 계획하지 않았던 동승한 이방인들과 그리고 말타 섬 주민들의 구원을 위해서 역사하신다.
마침내 바울은 이달리야로 향하게 됩니다. 바울이 가이사에게 호소하였기 때문에 바울은 군인들의 호송하에 로마로 보내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의사 누가와 아리스다고가 바울과 동행을 했습니다. 이들의 항해는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그
배는 폭풍 이는 겨울 항해철이 접어들기 전에 이 취항지를 향해서 항해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흥미롭게도 바울은, 가이사랴를 떠나
첫 기항지인 시론에 도착했을 때 그 곳에 친구들을 만났고 또한 백부장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바울 일행은 지중해 동부에서 서부로
항해하는 데 바람을 거슬리며 항해를 했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소아시아의 남부 해안에 위치한 항구 도시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났습니다. 이 배는 276명을 태울 만큼 큰 곡물 운반 선이었습니다. 바울이 탄 이 두번째 배의 항로는 무라에서 출발하여 니로에
이른 다음 그레데의 남서 해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를 향한 바울은 우기로
행선하기가 위태로운 때라 이번 행선이 화물과 배뿐 아니라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을 것이라고 충고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겨울을 지내고 나서 항해를 시작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었습니다.
스르디스는
그레데 섬 서쪽에 있는 얕은 바다로, 이 바다에는 유동하는 모래가 깔려 있어 줄로 선체를 둘러감고 연장을 내렸습니다. 풍랑을
만난 사흘째는 배의 기구를 내어버렸습니다. 이때 바울은 ‘안심하라 너희의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을 것이고 배만 상할 것이라’고
안심시켰습니다. 바울은 비록 죄수의 몸이긴 했지만 위로자가 되어 줄 수 있었습니다.
난파선에서의 바울은
용기를 내어 그들을 도왔습니다. 그 용기의 근원을 하나님께 두었던 바울은 먼저 열 나흘 동안 불안과 공포에 떨며 아무것도 먹지
못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먹도록 권했습니다. 바울은 구원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폭풍과 파도가 조금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또한 배가
깨어짐으로 인해 바울에게는 커다란 위기였지만 백부장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섭리하심으로 백부장은
바울 사도를 구하고 죄수들도 살해 당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27장 1절에 우리라고 표기된, 사도 바울과 누가는 이제 배편으로 로마로 향하게 되며, 백부장 율리오가 그들과
다른 죄수들의 호송 책임을 맡게 됩니다.
아마도 의사였던 누가가 노쇠하고 병약한 바울의 곁에 필요했기에 누가가 동행했을
것입니다만 이 길고 어려운 항해의 길에 두 사람 외에도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게 되었음을 2절이 기록해
줍니다. 감사하게도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고, 이후 몇 개의 항구를 거쳐 로마로 가기 위해 미항이라는 곳에
다다릅니다.
그런데 그 때가 당시 9월이나 10월에 있는 금식하는 절기라고 표기된, 유대인의 속죄일이 이미 지나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백부장 율리오에게 권합니다.
10절 말씀입니다.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
이미 여러 번의 파선 경험을 가진 바울은 당시 금식하는 절기가 지나 겨울이 다가오면 바람과 파도가 거세어 지고, 항해 가운데 큰
폭풍을 만날 수 있는 것을 알았기에 무리한 항해의 위태함을 알아 백부장에게 10절의 말씀으로 권한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백부장은 바울의 권고보다는 선장과 선주의 말에 더 귀를 기울입니다. 11절입니다.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바울이 머물렀다가 겨울이 지나면 가는 것이 좋겠다고 권고한 항구는 겨울을 지내기에 비교적 작은 항구라 불편했고, 뵈닉스라는
그레데의 항구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고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기 때문에 백부장은 바울의 말을 귀담아 듣기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따라 결정을 내립니다.
그리고 임박한 겨울에도 불구하고 남풍이 순하게 불어 순조로운 항해가 시작됩니다. 이 배는 곡식을 가득 실은 이집트에서 로마까지
곡물을 운반하는 배로 추정되기에 제법 컸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도 이후 37절 말씀에 보면 276명이나 탄, 커다란 규모의
배입니다. 커다란 배가 순조로운 항해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유라굴로라고 하는 광풍이 크게 일어납니다. 배의 크기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어마어마한 파도와 광풍으로
위기 가운데 처하고, 선원들은 배 곁이나 뒤에 매달던 거루라고 하는 작은 거룻배 형태의 구조선을 간신히 끌어 올립니다. 그리고
풍랑에 깨져 버릴 것 같은 배를 밧줄로 감고, 스르디스라고 하는 모래톱에 걸려 좌초되는 것을 막기 위해 연장을 내리고 바람에 밀려
다닙니다.
하지만 그 다음날이 되어도 풍랑은 잠잠해 지지 않아, 사공들은 이제 배의 짐을 바다에 던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까지 그들의 손으로 내버리기까지 합니다. 그래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습니다. 아니 더욱 악화되어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않고 큰 풍랑도 여전해, 구원의 남은 소망마저 없어져 기진맥진한 상황이 됩니다. 여러 날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할 뿐 아니라, 풍랑에 따라 이리 저리 구르며 탈진하였기에 이제 아마 배에 탄 어느 누구도 살아 돌아갈 것이라는
기대조차 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바울이 사람들 가운데에 일어납니다. 광풍 가운데, 한치 앞도 볼 수 없어 두려움과 불안 속에 사로잡혀 소망조차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바울은 안심과 소망의 말을 전합니다. 22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바울은 대체 무슨 근거로 자신이 반대했던 시기에 무리해서 항해를 진행한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얘기를 하며 위로와 소망을 전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바울이 낙관론자이거나 긍정적인 성품의 소유자이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 죽음의 풍랑 속에 바울은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며
독대하였습니다. 그 풍랑 속에서도 자신과 함께 계시며 자신의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통해 위로와 믿음과 평안을
회복한 것입니다.
23절부터 25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24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25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모두가 두려워하는 가운데 담대함을 소유한 삶은, 오직 예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과의 독대를 통해서만
우리는 오늘도 우리를 돌보시는 주님 앞에, 주님께서 허락하신 인생의 걸음을 주님과 함께 바르게 해석하며 걸을 수 있습니다.
허락하신 고난 속에 하나님을 깊이 만난 바울을 사용하셔서 하나님께서는, 고난 중의 사람들을 위로하시고 안심시키실 뿐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하셔서 죽을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운명까지도 변화시켜 주신 것입니다.
인생의 풍랑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깊이 만날 기회를 허락해 주십니다. 두려움 가운데 믿음 없음을 책망하시며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신 예수님,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오셔서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평안을 주신 예수님과의 깊은 교제와 독대 속에
우리는 비로소 풍랑 속에서도 내 곁에 계신 주님을 만나고, 내가 해야 할 일을 깨달을 뿐 아니라, 다른 이들을 주님께로 이끌어
주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과 깊이 교제하시는 또 하루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여러분들의 자녀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너희도 나처럼만 살아보라!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부모가 과연 얼마나 될까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Follow my example, as I follow the example of Christ.)
내가 먼저 예수님을 본 받는 삶에 성공해야 합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나를 본 받으라"고 깨우쳐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아그립바의 허락을 받은 바울은 손을 들어 예의를 표하고 자신이 회심하게 되는 과정을 설명했습니다. 다메섹에서 만난 예수님은
사울에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시채는 뾰족한
쇠나 동물의 뼈가 박힌 채찍으로, 밭가는 소가 말을 듣지 않을 때 사용하는데 이때 소가 반항하며 뒷발질을 하면 더욱 채찍을
가하게 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대적하면 할수록 바울 자신이 더욱 고통을 당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신
이유는 바울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삼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박해에서 바울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했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생명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유지되었고 그래서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베스도는
바울의 변명에 대해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에게서 뚜렷한 죄를 찾지도
못하고 오히려 궁지에 몰리게 되자 베스도는 바울이 미쳤다고 선언하고 일단은 심문을 마치고자 한 것입니다.
바울은 분명한 회심의 과정을 경험했기 때문에 나를 본 받으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회개는 좁은 의미라고 한다면 회심은 넓은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회개는 수시로 잘못을 깨닫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회심은 일생에서 단 한 번으로 돌이킨 후에 다시는 잘못된 길에 머물지 않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바울을 향한 권력자와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은 바울이 미친 사람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나는 오직 예수에게만 미친 사람이라고 당당하게 고백합니다. 이제부터 예수에게만 미쳐봅시다. 이제부터 예수님만 따라갑시다. 절대 진리와 가치는 오직 예수님입니다.
우리의 삶이 변화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9-12).
지금 바울은 자신이 예수를 믿기 전에 어떤 사람인가를 이야기합니다. 9-12절에 보면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10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 11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세와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
여기 사울은 예수 믿는 자,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 칙령을 받아들었습니다. 그는 너무나도 이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약 230km, 그 당시 상당히 먼 거리인 예루살렘부터 다메섹까지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본문과 같은 9장 1절에 보면 ‘그가 칙령을 받으러 들어갈 때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위협과 살기의 마음이 등등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마음에 살기가 있었습니다. 미움이 있었고 분노가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여야 되겠다라는 미움이 그의 마음속에 가득 차 있었어요.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살기등등한 마음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향할 그 때에 예수님이 그에게 나타나셨다고 얘기합니다. "사울아, 사울아!" 이름을 부릅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죄 지은 아담을 부르셨던 하나님, 살인한 가인을 부르셨던 하나님,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 살기등등해서 찾아가는 사울을 부르셨던 하나님이 오늘 여러분을 부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목놓아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을 녹취한 책입니다. 우리를 포기할 수 없어서, 우리를 끝까지 그의 품에 안으시려는 하나님의 추적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구약시대에 한 선지자를 택하십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목사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얘야, 너 오늘 가서 저 창녀와 결혼하라!" "아니, 하나님, 제가 목사인데 창녀와 어떻게 결혼합니까?" "결혼하라!" 명령하셨습니다. 할 수없이 그가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그 창녀가 옛 버릇을 못 버리고 도망을 갔어요. 그렇게 사랑해 주었는데, 목사가 창녀를 데려왔는데... 하나님이 또 명령을 하십니다. "가서 돈을 주고 찾아 오라!" 포주에게 속했던 그를 다시 돈을 주고 찾아와 아내를 삼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런데 평생을 감사하며 그를 남편으로 모시고 살아야 할 터인데, 그 창녀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또 도망을 갑니다. 이번에는 이름도 모르는 한 남자와 동침을 해서 아들까지 낳아버렸습니다. 하나님이 그 목회자에게 찾아와서 다시 그 여자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으라고 하십니다. 너무나 괴로웠지만 하나님의 명령이라 할 수 없이 순종했습니다. "여보, 이제는 도망가지 마라! 내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당신을 이렇게 사랑했잖아! 내가 가진 재산을 다 버리고 당신도 누군지 모르는 아들을 내가 키우지 않소! 여보, 이제 나를 사랑하고 나를 믿음으로 내 평생 내 가슴에 상처를 입히지 말고 살아주오!" 애원했지만 얼마 세월이 지나지 않아 이 여자는 또 도망을 가버립니다.
그리고 다른 남자의 아기를 또 갖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이 그 목회자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가서 그 창녀를 데려오라고 명령하십니다. 이것이 상상이나 가는 일입니까? 오늘날 한번만 외도를 해도 이혼의 사유가 되어 이혼을 하겠거든, 몇 번씩이나 외간 남자의 아이를 가진 그 여자를 데리고 와 같이 살라니요? 아내로 같이 데리고 살라니요? 하나님이 도대체 어떻게 이런 명령을 내릴 수 있단 말입니까? 소설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역사, 성경에 기록된 호세아 선지자의 얘기입니다. 호세아서를 읽어보십시오. 하나님은 왜 이 잔혹한 일을 선지자 호세아에게 시켰습니까?
여기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사랑을 경험해야 한다는 것
하나님의 사랑을 백성들에게 전달하기 전에 하나님의 심정을 호세아 선지자 스스로가 한번 겪어보라는 겁니다. 네가 내 사랑을 안다고 설교하느냐? 정말 네가 내 가슴을 알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이러한 여자와 한번 살아보아라! 수없이 하나님을 떠나 도망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되풀이하시며 쫓아다니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려 보라는 겁니다. 호세아가 이 메시지를 받고는 그의 삶이 달라졌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려는 것
호세아를 위한 메시지가 아니라 오늘 바로 당신을 향한 메시지가 여기에 들어있는 겁니다. "얘야, 내가 너를 향한 사랑이 어느 정도인 줄 아니? 네가 계속해서 내 곁을 도망가는구나! 데려다 놓으면 또 죄를 짓고, 세상에 빠지고, 쾌락에 빠지고, 물질에 빠지고... 그러나 나는 너를 한번도 포기한 적이 없단다!"
우리를 사랑한다 말씀하시는 하나님,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당신의 사랑을 친히 보여 주셨던 하나님은 그것으로도 되지 않아서 마침내 그 사랑을 확증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찾아오셨습니다.
여러분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여러분은 과연 듣고 계십니까? 오늘 왜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습니까? 왜 그토록 신앙생활을 오래하고도 우리 마음에 변화가 없습니까? 그 이유는 성경을 수없이 읽으면서도 이 애타는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을 우리가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음성을 듣는 자는 복이 있을 줄 믿습니다.
오늘 이 음성을 들으십시오. 사울을 찾으셨던 하나님이 오늘 당신을 찾으십니다. 여러분의 있는 자리가 어디입니까?
오늘 이 말씀을 듣는 가운데 내 머리 속의 하나님이 아닌, 성경 속에 기록된 제3의 하나님이 아닌, 나의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 모두가 듣기를 바랍니다. 자신을 올바로 바라보아야합니다. 예수 믿는데 가장 방해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왜 사람들이 예수를 못 믿는가? 또 예수를 믿고 나서도 왜 신앙생활을 잘하지 않는가? 신앙생활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입니다. 이 세상 살면서 신앙생활 하는데 가장 원수가 자신입니다.
모든 판단의 주인이 자신이었어요. 자신의 견해로 볼 때 예수님은 가짜였습니다. 그러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사람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스데반을 과감하게 죽였어요. 양심의 가책도 없이... 그리고 이것도 모자라서 예수 믿는 사람, 저 230km 밖에 있는 사람까지 전부 잡아다가 감옥에 넣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불교신자라도 이렇게 못하잖아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안 믿는 사람이 아니라 유대교 신자였습니다.
그는 구약성경,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이렇게 악하게 행동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유는, 그가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실제로 자신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자신을 믿는 사람이 오늘날 교회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주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판단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미워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에게 말의 상처를 입힙니다.
인류역사에서 가장 잔혹한 전쟁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십자군 전쟁입니다. 임신한 부인의 배를 갈랐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실상은 자신을 믿고 있었던 겁니다. 사울 역시 자신의 의를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는 것입니다.
때가 정오라고 얘기합니다. 낮이 얼마나 밝습니까? 태양이 얼마나 밝은가요? 그러나 놀랍게도 그날 이 태양보다도 몇 십 배, 몇 백 배 더 환한 빛이 사울에게 쏟아졌습니다. 홀연히 쏟아졌습니다. 그 빛을 받은 사울이 도저히 견딜 수없어 그 자리에서 시력을 잃어버리고 땅에 고꾸라집니다. 그리고 사울이 가장 먼저 한 말이 무엇인가 하면 "주여! 뉘시오니까?" 옛날에 예수가 나타났으면 이렇게 물었을 겁니다.
"너, 누구냐?" 그러나 오늘 사도 바울은 이렇게 부릅니다. "주여!" 사도 바울이 그를 구세주로는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만 하나의 존경의 표시였겠지요. 무한한 힘을 바라보고 자기를 부르는 그 위대한 분을 향해 "주여! 뉘시오니까?"라고 대답합니다. 훗날 이 사건을 돌이켜보며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에서 자신을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라고 일컬었습니다. 나는 율법적으로 흠이 없고, 도덕적으로 예수 믿는 너희보다 낫다. 이만하면 내가 너희를 정죄할 자격이 있다라고 생각했던 사울, 그래서 살기가 등등했던 사울, 그러나 그는 오늘 이 다메섹에서 비로소 자신을 바라보았습니다.
왜 사람들이 교만한 줄 아십니까? 자신을 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왜 함부로 남을 정죄하는지 아십니까? 자신을 못 봐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못 보는 이유는 하나인데,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나도 저 멀찌감치서 만났어요. 여기에 아무리 환한 빛이 있어도 100미터 정도 떨어져서 반짝거리는 불빛 아래 깜깜한 밤에 옷을 보십시오.
아무런 티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밝은 빛에 오면 올수록 깨끗해 보이던 옷과 얼굴이 더러워져 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를 보는 것입니다. 오늘 사울은 자신을 보았습니다.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이었던가, 내가 얼마나 교만해서 내 지식에 미쳐서 살았던가, 그래서 함부로 판단하여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정죄하며 살았던가를 그는 보았던 것입니다.
그 후, 날마다 날마다 간증하기를 "죄인 중에 내가 죄수니라." 남은 인생을 그는 이렇게 간증하며 살았습니다. 변화되기 원하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당신을 바라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성도 여러분! 나를 보십시다. 나를 보십시다. 정말 하나님 앞에서 나를 돌아보면 허물이 나에게만 있고 남에게 있지 않습니다. 남편에게 있지 않고, 아내에게 있지 않고, 자녀와 부모에게 있지 않습니다. 모든 허물이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부르신 그 부름 앞에 일관되게 복음의 간증자로 살아갑니다.
바울은 행 13장에서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 이방인 선교에 나선 후 순교할 때까지 약 20년 동안 선교여행에 헌신했습니다. 1차 전도 여행 때 약 2년 여 갈라디아 지역 2240키로나 되는 먼 거리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2차 전도 여행 때는 약 3년 여 기간 동안 약 5000키로의 먼 거리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3차 전도 여행 때는 약 6년여 기간 동안 5000키로나 되는 먼 거리를 여행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다 로마로 가서 긴 투옥생활을 보내고 잠시 풀려났습니다.
그 후 서바나와 기타 여러 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다 다시 로마에서 체포되어 순교하게 되었습니다.바울은 이 여행 도중 자기가 겪었던 그 고초를 고후 12:23절 이하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헐벗었노라” 그야말로 바울은 예수를 위해 철저하게 헌신했던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가장 큰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뜻은 원칙적으로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유일한 뜻이요,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한 순간도 잊지 말아야 됩니다. 나는 이번 터치 153 새 생명 축제에 바울과 같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세상이 미쳤다해도 결코 위축됨이 없이 복음을 증거하는 은혜의 사람이 넘쳐나기를 기도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에 계실 때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미쳤다고 모함을 받을 만큼 '해산의 수고'를 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수많은 성도들도 지난 2000년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십시오. 도대체 누가 미친 것입니까? 영원한 생명을 발견하여 그 영생을 위해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투자한 사람이 미친 것입니까? 아니면, 잠깐 후면 사라져 버릴 명성을 위해 죽을지 살지도 모르면서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 채 10년도 가지 못하는 권력의 바람에 자신의 목숨을 다 걸어 놓고 사는 사람들, 자신의 목숨을 깍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술과 담배를 끊지 못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미친 것입니까?
사람은 어차피 무엇엔가 미쳐야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어디엔가 빠져들게끔 되어 있습니다. 흔히들 10대는 사랑에 미치고, 20대는 야망에 미치고 30대는 소유에 미치고, 40대는 정욕에 미치고, 50대는 늙음과 고독에 미치고, 60대는 명예와 죽음에 미친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에 미쳐 살아가십니까? 우리 주님께서 필요로 하는 사람, 오늘 교회와 이 시대가 진정 필요로 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게 똑바로 미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미칠 줄 아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저들의 뜨거운 정열, 불타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눈물과 감격과 열정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울 줄도 모르고 웃을 줄도 모르고 감격도 열정도 없는 고드름 같은 믿음 가지고는 어떠한 역사도 변화도 기적도 가져올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미치도록 사랑하지 않았다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드릴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치도록 사랑하지 않았다면 독생자를 날 위해 보내 주실 수 있었겠습니까? 오늘 우리 시대는 무감각의 질병으로 역사가 시들어 가고 교회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죄에 대해서도 무감각합니다.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도 무감각합니다. 신앙의 열정도 감격도 잃어버리고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들 때문에 오늘 이 시대가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 역시 예수님께 미치고 싶습니다. 완전히 미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처럼 온전한 사랑으로 모든 죽어 가는 사람들을 위해 해산의 수고를 해서라도 그들을 세우고 싶습니다. 사랑하고 싶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예수님의 사랑에 미쳐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에 취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세상을 복음으로 역사하는 성령의 계절을 가져오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복음은 기쁨을 줍니다. 이제 우리 교회는 사람을 세우기 위해 총 진력을 할 것입니다. 바울과 같이 영혼 구원에 대한 열정과 비전을 가지고 우리 모두 또 하나의 열매를 맺기 위해 충성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 14:15b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함이라.
옳은 말을 기분 나쁘게 하는 사람 : 엄마, 선생님 바울의 위대함 : 복음 전하는 일에 나를 본 받으라
나와 같기를 원한다(29)
자신을
변론하라 주어진 시간에 예수를 전하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지켜본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이 “네가 미쳤다”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도다.” 라고 혹평을 합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이 말에 굴하지 않고 “내가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당신들도 나와 같기를 원한다.”
“나와
같기를 원한다”는 것은 “나를 본 받으라”는 권면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서도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그리스도인들은
어디를 가든지 “나와 같기를 원한다.”, “나를 본 받으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나를
본 받으라” 권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본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늘 은혜 충만, 감사 충만해야 하고, 또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문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본이 되는 삶을 살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본이 되는 삶을 살지 못하니 복음을 전해도 세상 사람들이 들으려 하지 않는 겁니다.
한국 교회도 세상에 본이
되어야 하는데, 현실은 오히려 안 좋은 일에 본이 되고 있어서 부끄럽다 하는 것입니다. 평상시 본이 되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만이 당당히 복음을 전하고 “나와 같기를 원한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대형 교회 50개를 선정한 후 1위부터 23위까지는 모두 한국에 있는 교회라고 합니다. 선교 역사 130년 만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교회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분명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세계 적으로 본받을 만한 교회가 있느냐 라고 질문할 때 큰 것은 자랑할 수 있지만 본 받을 만한 것은 큰 것만큼 내세울 수 없다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큰 것과 더불어 내세 울 수 있는 신앙으로 회복해야 합니다. 그와 같은 신앙을 "나를 본 받으라"는 외침이라고 하겠습니다.
자부심(自負心)
자부심(自負心) / 스스로 자, 질 부, 마음 심 - self-respect pride, self-esteem,
- 모든 것을 가진 자
고린도후서 6:9-10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골로새서 2:2-3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자존심(自尊心)
자존심(自尊心) / 스스로 자, 높을 존, 마음 심 - one's pride, self-respect, self-esteem
-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로마서 1:16-17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자긍심(自矜心)
자긍심(自矜心) / 스스로 자, 자랑할 긍, 마음 심 - self-pride 눅 16:19-31 - 불쌍히 여기는 심정
누가복음 16:25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헬라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집이라고 는 나무통 하나가 있었는데 다닐 때는 통을 굴리면서 다니다가 적당한 데 세우고서 그 나무통 안에 들어가 하루 밤을 자고 또 아침이 되면 굴리고 다녔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헬라에서 유명한 철학자로서 알렉산더 대왕이 그를 만나기를 원하여 어느 날 만났습니다. 대왕은 디오게네스에게 무슨 소원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디오게네스는 "특별한 소원은 없습니다만 굳이 말한다면 지금 내가 햇빛을 쪼이고 있는데 국왕이 앞을 가로막고 있어 방해가 되오니 조금만 옆으로 비켜주셨으면 합니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이 때 알렉산더 대왕이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만약 내가 알렉산더가 아니라면 디오게네스가 되었을 걸세." 만일 내가 왕이 아니라면 네가 되고 싶다라는 말입니다.
자기 존재, 자기 가치, 자기 처지를 깊이 알고 아무 것도 부러워하지 않는 마음이 행복입니다.
다윗 왕은 시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읊었습니다. 원문에는 아무 소원도 없다라는 뜻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예수를 믿었다고 하지만 기도하는 것을 보면 소원이 너무 많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에게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 나는 아무 소원도 없습니다. 이대로 좋습니다. 이대로 만족합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입니까? 다른 사람을 부러워한다는 것은 자기 불만의 발산입니다. 시기와 질투는 자기 노력을 포기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로 자기 된 바에 대한 감사와 만족이 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행복입니다. 이러한 행복의 절정을 살아가는 인생이 신앙인입니다.
본문에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억울하게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오직 복음만을 전하는 바울에게 왜 이런 어려움이 있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헌신하고 사는 자에게는 만사형통 해야 하는데 왜 이런 고난이 있는 것입니까? 사도행전을 자세히 읽어보면 바울은 이상하게도 얽혀서 법정에 서게 됩니다. 로마 총독 앞에서 생사 문제를 놓고 바울은 일장 연설을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한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이 말을 다 들은 베스도 총독은 "바울아, 네가 미쳤구나. 네 많은 지식이 너를 미치게 했구나." 이렇게까지 비난을 했습니다.
고난도 당하고, 환난도 당하고, 핍박당하고, 매맞고, 투옥되고, 억울함을 당하고, 마침내는 미친 사람으로 취급되는 이 순간에도 그는 행복했습니다. 그러므로 훌륭하고도 놀라운 신앙을 이 순간에 간증하고 있습니다. "나와 같게 되기를 원하노라." 즉 여기 모인 모든 사람이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만족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당한 고난의 뜻을 알고 있었으며 미래적 의미도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내가 매맞은 것은 하나님 앞에 가서 훈장으로 바뀔 것이고, 오늘 내가 능욕을 당한 것은 하나님 앞에 가서는 영광으로 바뀌어질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날에는 이 모든 것이 자랑스럽게 될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미래를 알고 있었기에 행복했고 만족한 수 있었던 것입니다. 특별히 그는 믿는 바에 대하여 확실하고 절대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에 보면 "내가 믿고 내가 전하는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있으면 천벌을 받으리라" 했습니다. 내가 믿는바 십자가의 도리가 너무나 확실했기에 한 치도 양보할 수 없었고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전혀 있을 수 없다고 자신만만하였습니다. 이런 믿음을 지녔기에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이 믿기를 원한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또한 그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소중히 여길 뿐만 아니라 최고의 지식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3장에 보면 지금까지 그가 좋아하던 지식과 명예와 족보를 다 분토와 같이 여겼다고 했습니다. 즉 그가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 지식이 너무나 고상하기에 그 동안에 얻은 많은 지식은 다 배설물과 같이 여겼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부러운 얘기입니까? 그는 복음에 대한 지식의 완전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생각할수록 잘했고 그 감격이 넘쳐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자기가 행하고 있는 이 일은 영원히 가치의 것이고, 언제 생각해도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우리 교우들 중에 어떤 분들은 녹음해 놓은 설교 테이프를 한꺼번에 10개씩 사가는 것을 봅니다. 내가 들은 말씀이 너무 좋아서 다른 사람에게 꼭 들려주고 싶고, 내가 받은 그 감동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 그 마음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내가 들은 것을 얼른 잊어버리고 싶은 마음과 한 번 비교해 보십시오. 내가 들은 귀한 복음의 말씀을 꼭 누군가에게 전해야 하겠다는 그 마음이 바로 행복입니다.
나의 나 됨, 은혜로 된 나, 현재 이대로의 나를 감사하고 감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앞에 있는 생명의 면류관을 바라보니 무한히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영광과 긍지와 자랑에 살았습니다.
미쳤다는 말을 들어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고린도후서 5:13에 보면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그렇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미쳐서 일생동안 많은 고난을 당했지만 기뻐하며 살아갔습니다. 새 술에 취하고 그리스도에 붙들린 포로가 되어 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것뿐 아니라 더욱더 적극적인 자세로서 "당신뿐만 아니라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이 다 나와 같기를 바랍니다." 즉 나처럼 믿고, 나처럼 알고, 나처럼 행하고, 내가 가는 길을 여러분도 가기를 간절히 소원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아무 것도 부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전도가 있고, 여기에 선교가 있습니다. 우리는 전도할 때 적극적인 면이 없습니다. 내가 나가는 교회에 자신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한 번만 같이 가보자고 권면할 수 없습니까? 다른 말이 필요 없습니다. 어떤 분은 전도하라고 하면 성경을 잘 몰라서 전하지를 못하니 우선 성경공부를 하고 전도하겠다고 합니다. 설교는 목사가 할 일이지 여러분의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교회까지 데리고만 오면 됩니다. 내가 받은 은혜에 감격해서 이 은혜를 다른 사람도 깨달았으면 하는 안타까운 마음, 그것으로 전도는 끝나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벅차고 넘쳐서 외국까지 좇아가는 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여러분, 내 자녀도 나 같기를 바라고 내 친구도 내 마음 같기를 바란다면 얼마나 행복합니까? "나는 참으로 행복했다"가 아니라 "지금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행복할 것이다"가 아니라 "지금 이대로 더 바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나를 본받으라", 즉 나를 닮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쇠사슬에 매인 것을 제외하고는 다 나와 같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참 지혜 있는 표현이었습니다. 나와 같기를 바란다는 자체는 만족이요, 행복이었습니다. 여기에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 고치지 못할 과거를 후회하고 뉘우치고 있습니까? 아니면 벅찬 감격과 내 생애 최고의 절정을 누리며 벅찬 은혜에 살아가고 있습니까? 좀더 나아가서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이 되기를 바라며 살고 있습니까? 은혜 안에서 나의 나 됨에 감사하고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전하고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는 누구인가?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는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와 벤자민 비. 워필드(benjamin b. warfield, 1851-1921)등과 더불어서 세계 3대 칼빈주의자로 불리우는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대표적인 신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가 작고한지 이미 80년이 지났지만 그의 신학적인 영향력은 자신의 모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적으로 아직도 강력하게 미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그의 신학적 대작인 『개혁 교의학(gereformede dogmatiek)』은 여전히 정통적인 개혁신학의 기념비적 작품으로서 그 신학적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국내에서도 바빙크의 저술들을 소개하려는 노력은 박윤선 박사와 차영배 교수 이래로 지금까지도 간헐적으로 지속되고 있다.
바빙크의 신학과 한국 장로교회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우리는 교의신학 수업 시간이나 교재들을 통하여서 그의 이름을 너무나 많이 들었고 보았기 때문에 전혀 그의 이름이 낯설지가 않다(박형룡박사는 빠빙크라고 발음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도 빈번하게도 참조되고 있다면 그의 신학적인 비중은 남다를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1955년 2월 25일(금) 오후 늦은 시간에 당시 암스테르담 시내를 흐르는 운하중 하나인 꺼이저스흐라흐트 가에 위치하고 있던 자유대학교를 방문한 박형룡 박사는 이사회실에 걸려 있는 아브라함 카이퍼와 헤르만 바빙크의 화상(portrait)을 가장 유심히 보았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헤르만 바빙크의 사상적인 배경
1. 헤르만의 아버지는 1834년 화란 국교회(nhk)에서 분리(afscheideing)하여 생겨난 기독교 개혁교단(cgk)의 목회자였다. 바빙크의 부모는 정통적인 신학과 화란적인 경건주의 혹은 청교도 운동인 나더러 레포르마치(nadere reformatie)의영향을 공히 받은 인물들이었다.
2. 바빙크는 kampen에 소재한 교단 신학교에 진학하여 1년만 공부하고, 보다 더 폭넓은 신학 공부를 하고 싶어서 당시 자유주의 신학의 아성이던 레이든 신학부로 옮겨간다. 네덜란드 근대주의의 아테네라고 할 수 있는 leidse school에서 스콜턴 교수의 지도하에 근대 신학의 진수를 배우게 된다.
존 칼빈과 종교개혁 이후 개혁신학(post-reformation reformed theology)을 발전적으로 계승하고자 하는 바빙크의 노력과 자기 시대의 문화나 학문과 끊임없이 대화의 고삐를 늦추지 아니하는 바빙크의 열정은 이미 젊은 시절에 노출되고 있다. 레이든 대학교 신학부에서 <츠빙글리의 윤리>라는 연구로 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다.
3. 학위를 취득한 바빙크는 당시 신설된 자유대학교 신학부 교수로 청빙을 받았지만 거절을 하고, 자신이 속한 개혁교단의 목회자로 안수받고, 화란 북쪽에 소재하고 개혁신학교가 한 때 소재했던유서 깊은 소도시 프라너꺼르(franeker)에서의 1년간의 짧은 목회를 하게 된다. 이 목회 동안에도 그는 독일 철학 연구등을 쉬지 않았다.
4. 개혁교단 총회는 바빙크를 깜뻔에 소재한 개혁파 신학교(theologische school te kampen)의교의학 교수로 임명한다. 그는1883년 1월에 <거룩한 신학의 학문>이라는 주제의 취임 연설을 함으로 교수직에 취임한다. 바빙크는 카이퍼의 거듭되는 초빙에도 응하지 아니하고,1902년까지 이 작은 교단 신학교에서 교의신학 교수로 머물게 된다. 약 20여년 동안의깜뻔 신학교 교수 재직 기간 동안에 바빙크는 열정적인 강의를 통해서 개혁교단 목회자들을 양성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 동안에 최고의 결실이라고 한다면 바로 그의 대작(magnus opus)인 [개혁 교의학(gereformeededogmatiek),4vols.(kampen: zalsman, 1896-1901)]의 집필과 출간이라고 할 것이다. 아마도깜뻔이라고 하는 전원적인 소도시에서 소규모의 신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직에 머물지 아니하였다면 이와 같은 대작은산출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바빙크는 1906-11사이에 2판 개정판을 출간하게 되는데, 이것이결정판이 되었다. 그와 신학을 달리하는 레이든의 신학교수 베르코프(1914-95)는 바빙크의 주저에 대하여서 이렇게 평가한다:" 4권으로 된 개혁 교의학은 지금까지도 네덜란드어를 읽을 수 있는 신학자들에게 지식들과 통찰들을 제공하는 보고(eine fundgrube von kenntnissen und einsichten)로 남아있다"(h.berkhof,200 jahre theologie,120).
5. 바빙크가 깜뻔에서 교수하고 있는 동안 카이퍼에 의해서 주도된 또 한 차례의 교회 분열과 분열된 교회들간의통합이 이루어졌다. 1834년에 일어난 분열(afscheiding,영어로는 secession)에 이어서 1886년에 카이퍼의 주도로 일어난 분열(doleantie)로 nederduitsgereformeerde kerken이 조직되었고, 1892년에 양 교단은 통합 교단을 만들고 [화란 개혁교회 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1892-2004)]라고 이름하였다.
1901년에 아브라함 카이퍼가 네덜란드의 수상이 되면서 부득불 자유대학교 신학부의 교수직이 공석이 되고, 바빙크는 네 번째의 카이퍼의 초청을 수락하여 카이퍼의후임자가 되게 된다. 바빙크는 1902년에 자유대학교에 부임하여 1921년에 갑작스러이 서거하게 되기까지 약 20년간을 교의신학 교수로 사역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에 바빙크는 신학적인 저술들 뿐 만 아니라 교육학이나 심리학에 대한 많은 저술들을 하게 되며,상원의원으로서 정치적인 활동도 하게 된다.
1. j. h. landwehr, in memoriam prof. dr h. bavinck(kampen:kok,1921)
2. v. hepp, dr herman bavinck(amsterdam:ten have,1921)
3. r. h. bremmer, herman bavinck en zijn tijdgenoten(kampen:kok,1966)
4. 유해무,<헤르만 바빙크>(서울:살림사,2004)
바빙크 "나를 돕는 것은 나의 학문도 아니요 교리학 책들도 아니다. 오직 신앙만이 나를 구원한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가 제 정신임을 분명히 밝힌 다음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라고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에 아그립바는 궁지에 몰리자 바울의 말을 농담조로 받아넘겼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그립바를 그리스도께
인도하기에는 시간이 걸릴지라도, 기꺼이 그 기회를 붙잡으려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아그립바와 자기의 말을 듣는 모든 사람이 자기의
결박된 것 외에는 자기와 같이 되기를 기도한다고 대답함으로 변호를 끝맺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자랑스럽게 여겨 신분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누구나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라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서로 말하기를, 바울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죄가 없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새롭게 부임한 총독 베스도와 분봉왕 아그립바, 그리고 그의 누이 버니게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25장에 이어 26장에서도
계속해 나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26장에서는 바울 자신이 과거 유대교 믿던 때의 이야기를 하면서 10절과 11절에서
10.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투표를 하였고 11.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
자신이 얼마나 기독교인들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심하게 기독교인들을 박해하였는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다메섹으로 가던 가운데 그가 그렇게 핍박하던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게 됨을 고백합니다.
바울의 인생에서 예수님과의 만남은 그의 일생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 이후 바울은 그가 남은 생애를 어떠한 일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분명히 알게 됩니다.
17절과 18절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바울을 선택하신 것은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보내서 그들의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시기 위해 그를 만나주셨고, 그가 회심하도록 하셨다는 것을 바울은 깨달았고 그는
남은 인생을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 목적을 따라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소명에 대해 거스르지 않고 심지어 죽음의 위기 앞에서도 회개를 외치며 자신이 해야 할 복음 전파 사명을 최선을
다해 감당하였습니다. 때로는 돌에 맞아 죽을 뻔 하기도 하였고, 자신을 잡으려고 하는 사람들로부터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죄인으로 잡혀 로마로 압송되기 위해 기다리는 고립된 상황 가운데 처하게 되었지만 그는 어떤 상황에
처해있더라도 예수님을 만난 이후 한결같이 최선을 다해 22절과 23절의 말씀을 실천에 옮기며 살았습니다.
22.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23.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선지자들과 모세가 장차 되어질 것이라고 이야기 한 것 바로 구약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예수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한 이것을 바울은 죽도록 충성하며 이루어 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열심에 대해 총독 베스도는 바울이 많은 학문을 공부하여서 미친 것 같다며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바울을 조롱하지만
바울은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담대히 예수그리스도가 고난당하신 것과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신 것에 대해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위축되기 보다는 아그립바 왕에게 그가 전한 복음의 메시지에 대한 믿음의 결단을 촉구하는 말을 담대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예수님을 만난이후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신 목적인 이스라엘 사람들과 이방인들을 향해 복음을 전하라는
소명에 따라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던 바울이었기에 그 자리에 있던 아그립바 왕, 베스도 총독과
버니게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자리를 떠나면서 바울은 사형이나 결박 당할만한 행위를 한 사람이 아니라고 이야기 하며 돌아갑니다.
그리고 아그립바 왕도 베스도 총독에게 만약 이 사람이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않았으면 석방도 가능했을 것이라 말하여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한때는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던 핍박자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예수그리스도를 친히 만난 이후 바울의 인생은 완전히 변하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자신의 열심과 유익을 위해 살던 바울이었지만 그가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만나게 되었을 때 그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는 예수그리스도를 확실히 만난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목숨까지도 내어 놓고 열심히 그 말씀을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복음 전파를 위해 그의 일생을 바친 모습은 비단 바울에게만 요구되는 모습은 아닙니다. 성경은 구약에서도 그리고 신약에서도
우리가 이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살아가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선교의 명령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누가복음 24장 44절~47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44.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모세의 율법, 선지자의 글, 그리고 시편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시고 3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며,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을 기록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내용을 요약하시면서 바로 그 내용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복음이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있는 사도행전 26장 22절과 23절은 바울이 그의 소명으로 여기며 일평생 동안 이스라엘 사람들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그의 삶을 잘 요약해 줌과 동시에 이 말씀은 신약 성경 역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는 선교에 관해 기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고백을 통해 복음 전파에 대한 바울의 열정은
총독과 분봉왕 앞에서도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비록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도, 생명의 위협을 당한다 하더라도
그는 복음을 끝까지 전했습니다.
이러한 복음에 대한 열정을 지닌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열정을 가지고 아프리카로,
남미로, 공산권 국가로, 이슬람권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떠나는 많은 선교사님들이 계십니다. 그리고 비록 선교지로 나가지는
않았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또한 바울처럼 그리고 많은 선교사님들처럼 날마다 우리의 삶을 통해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선교사적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흔히 “선교”는 말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통해 주로 이루어진다고 여겨 왔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선교”가 총체적으로
이루어지는 사역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로 전해지는 복음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서, 우리의 존재를 통해,
우리의 직장, 가정 학교 등의 장소에서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무언의 방법으로도 복음이 전해 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하루 살아가는 동안 내가 있는 삶의 현장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나의 말 한마디 나의 행동 하나로 그
사람이 예수그리스도를 알아가게 된다면 우리는 선교사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라면, 자기 앞에 도사리고 있는 결박과 환난도 자신의 생명을 걸고 감수할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지금 처하고 있는 상황이 자신을 사랑하시고, 자신에게 참 생명을 주신 성령님의 뜻이라고 해석하였기에
그가 감옥에 격리되어 있던 시간 가운데에도 그는 담대히 아그립바 왕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바울의 말
한마디와 그의 행동은 믿지 않는 영혼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바라기는 이 시간 우리 모든 주님의 자녀들이 우리가 처한 상황을 바르게 해석하며, 마셔야할 쓴잔을 주님 안에서 기꺼이
마시고, 져야할 십자가를 외면하지 않고 우리가 좋은 여건에 처해 있든지 아니면 격리된 상황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늘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의 말과 삶을 통해 전파할 수 있는 복음 전파자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노동절 휴일을 맞이하는 오늘 이방인을 위한 복음의 증인으로 부름 받았던 바울이 어떤 환경에서든지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려는 굳센 믿음 본받아 저희들도 복음의 증인으로 나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건강한 삶’의 본보기를 아십니까 의사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고대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는 생물학자이자 예방의학의시조로서 “돈을 잃으면 적게 잃은 것이요 명예를 잃으면 많이 잃은것이요 건강을 잃으면 전부 잃어버린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성도들이 주안에서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 건강의 비결입니다. 예방의학이란 병들기 전 예방한다는 것입니다. 전염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
예방주사를 맞듯이 병을 예방하고 건강을 지키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동물과 다른 영적
정신적 도덕적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인 정신의학자 폴 토르니에는 ‘건강을 해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첫째 남을 미워하는 마음과 증오심이 건강을 해치는 원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증오심으로 남을 미워하는 순간 오히려 자신이 큰
타격을 받아 질병에 걸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범죄하여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을 때라고 말했습니다.‘우리 몸속에는 기본적인
인간의 평화와 반대로 죄성 독성 악성이 존재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을 미워하는 순간 기본적인 즐거움과 기쁨을 악에게
도둑맞아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기본적인 평화와 기쁨을 도둑맞지 않고 보존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길 외에는 묘약이 없다는 것 입니다. 건강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자 노력하는
성도에게만 주어지는 최고의 선물인 것입니다. 둘째로 주안에서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인간은 치료에 있어서 하나님의 동역자로 선택될 뿐이기에 병을 낫기 위해 치료의 본질과 수단을 혼돈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든, 금식을 하든, 병원에 가든,약을 먹든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이 고쳐주신다는 사실과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기에 매사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살 때 하나님이 주시는 참 평안으로 건강한 삶을 살게 됩니다. 셋째, 주안에서
아름다운 꿈을 가질 때 건강해집니다. 퇴임을 앞둔 맥아더 장군에게 어느날 한 장교가 찾아와 건강의 비결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그는 “사람은 나이가 먹었다는 이유로 늙지 않는다. 사람은 꿈을 포기 했을 때 늙는다.세월은 피부에 주름살을 생기게 하지만 인생에
대한 꿈을 잃어버린 사람은 영혼에 주름살이 생기게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꿈을 갖는 사람은 얼굴에 기쁨이 넘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안에서 미소를 잃지 맙시다. 우리 한번 웃어봅시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주안에서 건강한 삶을 사시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09-05-2022(월)
황제의 판결(사도행전 25:15)
3절 / 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겨 보내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러라.
관련 성경 / 부르다(눅 22:3, 행 2:21, 롬 10:12), 일컫다(행 4:36, 약 2:7), 일컬음을 받다(히 11:16), 상소하다(행 25:11, 26:32, 28:19), [명] 이름(마 10:3), 별명(행 1:23).
신약 성경
30회 사용
벨릭스와 베스도 (Felix and Festus)
벨릭스는 대략 AD 52년부터 60년까지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으로써 유대지방을 다스렸다. 노예출신으로 자유민의 신분을 얻은 그가
유대의 총독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글라우디오 황제와의 친분으로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그의 형
팔라스(Pallas)의 지원 덕분이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벨릭스는 자신의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을 제거하기 위해
암살자까지 동원할 정도로 잔인한 인물이었으며, 또한 총독의 지위를 이용하여 뇌물과 여자를 탐하였던 탐욕스런 인물이었다.
벨릭스
이후 몇 년 뒤 유대를 다스렸던 알비누스(Albinus) 총독도 벨릭스가 뇌물을 받고 심지어 반란에 가담했던 죄수들까지
풀어주었다고 불평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남아있는 모든 역자자료들이 벨릭스의 부정부패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가 사도 바울에게도 뇌물을 기대하고 그를 계속 붙잡아 두었다는 누가의 기록은 매우 정확한 것이었다(행 24:26).
역사가
타키투스는 벨릭스가 '노예의 마음을 가지고 왕의 권세를 휘둘렀던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
벨릭스는 낮은 출신 성분에도 불구하고 3명의 왕실 출신 아내들을 차례로 두었는데, 헤롯 왕가의 자손으로 헤롯 대제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막내딸이자 헤롯 아그립바 2세의 누이동생이었던 드루실라가 그 중의 한 명이었다(행 24:24).
드루실라는 가문적
배경으로 인해 유대교인과 그리스도교인 사이의 분쟁에 대해 이미 자세히 알고 있었을 것이며, 아마도 남편 벨릭스에게도 이런 내용을
자세히 알려 줄 수 있었을 것이다(행 24:22). 당시의 상류사회에서 매혹적이고 발랄한 미모로 유명했던 드루실라는 수리아의 작은
왕국의 왕과 먼저 결혼했었지만, 16세가 되던 해 벨릭스의 유혹으로 남편과 이혼 한 후 벨릭스와 재혼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벨릭스와 드루실라에게 사도 바울은 의와 절제와 심판에 대해 강론하였다(행 24:25).
당시 벨릭스는 '피의 대학살'을 통해 유대인들의 폭동을 진압한 사건으로 악명이 높았다. 탐욕과 폭정을 일삼던 벨릭스는 결국 잔혹한
진압 사건에 대한 유대인 지도자들의 진정서가 로마 황제에게 전달되는 바람에 유대인들의 눈치를 보며 총독자리를 물러나 로마로 소환
당했다고 요세푸스는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정치적 배경은 왜 벨릭스가 임기를 끝내고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사도 바울을 석방하지 않았는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행 24:27).
벨릭스의 형 팔라스는 글라우디오 이후 네로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다음에도 계속 영향력을 유지했고, 이 때문에 벨릭스는 로마로 소환된 이후에도 큰 형벌을 면할 수 있었다.
벨릭스의 실정으로 혼란과 긴장이 감도는 유대지방에 새로 부임한 베스도는 전임 총독보다는 훨씬 지방민들에게 협조적인 인물로,
부임한지 3일만에 직접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유대 지도자들의 협조를 요청하였다(행 25:1). 원만한 통치를 위해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했던 베스도는(행 25:9) 비록 그 자신이 바울의 죄 없음을 확신하고 있었지만(행 25:25), 바울의 요청 때문이라는
명분으로 자신의 손에서 로마 황제의 법정으로 '뜨거운 감자'를 떠넘기고 자신의 사법적인 판결을 보류함으로써 유대인 사회와의 충돌을
조심스레 피해간다(행25:12).
여러 인물들의 복잡한 정치적 배경과 정략적 계산 속에서도 세상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 주님의 계획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져 간다.
What Equals 100%? What does it mean to give MORE than 100%? Ever wonder about
those people who say they are giving more than 100%? We have all been in
situations where someone wants you to give over 100%. How about achieving 101%?
What equals 100% in life?
Here's a little mathematical formula that might help you answer these
questions:
If: A B C D E F G H I J K L M N O P Q R S T U V W X Y Z
Then : H-A-R-D-W-O-R-K = 8+1+18+4+23+15+18+11 = 98%
and K-N-O-W-L-E-D-G-E = 11+14+15+23+12+5+4+7+5 = 96%
But, A-T-T-I-T-U-D-E = 1+20+20+9+20+21+4+5 = 100%
AND, look how far the love of God will take you
L-O-V-E-O-F-G-O-D = 12+15+22+5+15+6+7+15+4 = 101%
Therefore, one can conclude with mathematical certainty that:
While Hard work and Knowledge will get you close, and Attitude will get you
there, it's the Love of God that will put you over the top!
We
have a question for groups c, d, and e ! How did you feel Thursday when Coach
Linhares cancelled practice? A- So happy you were giving high fives. B- A smile broke out from ear to ear.
C-You were somewhat
disappointed.
How do you value practice? The correct
answer is C.
You
must realize the value of practice! When practice becomes your friend, then you
will have an opportunity for greatness. You will never know how good you can be
until you are willing to become the greatest worker on the team.
Your
attitude will determine your altitude!! When you expect to be great you will
push yourself towards that goal. You must never give in to a defeatist
attitude. You will never have a bad race if you have properly prepared
mentally, physically and spiritually. The only exceptions are injuries and
sickness. There is a reason for great races and that reason is proper
preparation.
Only
one runner will be #1 on the team. All runners can be great workers and have a
great attitude. That’s the real value of
cc, everyone can be # 1 in work ethic and attitude.
Extra stresses in you life will nullify all your hard work. You will need to
eliminate extra stresses from your life like working and extra socialization.
During Sept and Oct school and running provide more than enough stress. Good is
no longer good enough!! You must strive for perfection. Our seniors need a
sense of urgency, because this is your last chance for a great season.
When
you have a commitment to excellence you will do everything correctly. When we
must constantly remind you to do things correctly it communicates one of two
things. 1) You really don’t' believe us when we tell you something. 2) You are just hoping to be good, and
it's not really that critical to you! If you are just hoping to get a state
medal it's not going to happen
When
you are not doing one thing correctly it make us wonder how many other things
you are not doing, like not eating correctly, getting rest every night. When
you come to practice tired you will not improve!
관련 성경 / 상하다(마 12:20), 상하게 하다(눅 9:39), 깨뜨리다(막 14:3, 계 2:27), 꺾이다(요 19:36).
신약 성경 / 7회 사용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려면? 문안하라(782) ἀσπάζομαι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려면?(마태복음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뱀은 사탄을 뜻하는데 어떻게 뱀을 높이며 슬기롭다고 말씀하실까? 신앙생활을 하면서 오랫동안 궁금해 했던
구절이다. 그리고 ‘과연 사탄이 슬기로울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 말씀은 중동 지방에서 널리 민간에 전해 내려오는 속담 중 하나였다. 그래서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예화를 드신 거라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을 만나고 겪어 보았다. 뱀같이 지혜로운 사람도 많이 만나 보았다. 그러나 그 심중에는 비둘기의 순결함이 없는 악한 사람이 많았다. 순결하기보다는 지혜로우면서 간교한 사람을 많이 본 것 같다.
‘광명의 천사로 나타나는 사탄의 모습을 경계하라’는 말씀도 이제는 이해가 된다. 보기에는 정말 착한 하나님의 사람 같은데,
오히려 큰 피해를 주는 사람도 상대해 보았다. 사도 바울은 특히 교회 안 지도층에서 미혹하는 사탄의 모습을 발견하고 경계하라고
말씀하신다. 교회 내에서, 그리고 세상에서 영적 분별력이 없으면 미혹되기가 쉽다. 하나님께 영적 분별력을 주시기를 간구해야겠다.
순수한 마음만 가지고 열정적으로 전도하는 많은 성도들을 만나 보았다. 길거리에서나 직장에서나 그들은 마음만 앞서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하고 오히려 미움 받는 존재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비록 사람들은 비난해도 하나님은 기뻐하셨을 것’이라고 위로를 했다. 그러나 꼭 그럴까? 좀 더 지혜롭게 하는 방법은 없었을까? 우리가 전도를 할 때 열정과 믿음만 가지고 한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효과가 있을까?
지하철에서, 서울역에서 큰 소리로 전도하는 분들과 내가 무엇이 달랐을까 생각해 본다. 좀 더 뱀같이 슬기롭게 하는 방법을 왜 생각해 내지 못했을까? 순결한 마음만 가지고는 세상을 이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같이 해 본다.
사탄의 제자들은 거짓을 아주 자애롭고 평화롭게 포장하고는 박수를 받으면서 자신의 뜻을 성취하는데, 나는 진리를 가지고도 박수를 받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종교의 지도자는 예수님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성경 말씀도 달리하고, 예수 이외에도 모든 종교가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종교 다원주의를 가지고도 ‘세계 평화’니 ‘가난한 자’니 ‘약한 자’니 ‘소외받는 자’니 포장하면서 칭찬을 받으며 목적을
달성하는데, 진리를 가지고도 제대로 전파하지 못하는 나에게는 잘한 것만 있는 것인가? 많은 반성을 하게 되었다.
이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과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비둘기같이 순결한 마음을 갖되 그들을 이길 수 있는 뱀의 지혜도
갖추어야겠다는 반성을 한다.
뱀처럼 지혜로워라
세속적 수단에 의지하여 고달픈 현실을
영악하게 헤쳐나가도 된다고 여깁니다. 뱀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에 비추었으니 일부 불법과 부정이 용납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양심과 행동을 도덕적으로 최대한 깨끗하게 행하려고 노력합니다. "뱀, 지혜롭게, 비둘기,
순결하게" 네 단어의 뜻만을, 그것도 일반적인 의미만을 기준으로 자의적으로 해석한 결과입니다.
이 두가지 해석 내지 적용이 서로 조화가 안
된다는 점을 나중에 스스로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영악하게 행동하려다 보면 아무래도 거짓 불법 탐욕 시기 등과
타협하여 잘못을 범할 수 있고 그러면 윤리적으로 결코 순결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둘을 각각 따로 적용시키기로
작정합니다. 세상 일은 지혜롭게, 교회 일은 순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문자적 부분적으로 해석했으니까 그 적용 실천도 문자적 부분적으로
합니다. 그리고 어쨌든 말씀대로 살았으며 분명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간주합니다. 그러다 세상에서 영악하게 행한 것이 신앙
양심에 조금이라도 걸리면 교회에서 더욱 열심히 충성함으로써 일말의 위로와 안식을 얻고자합니다. 혹시라도 세상에서 지혜롭게 사는
것에 잘못이 있었다면 그렇게 헷갈리게(?) 가르치신 주님의 탓이 됩니다.
신구약성경에서 말하는 지혜는 항상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성령의 교통으로 신자에게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짓이나 불법과 타협하더라도 영악하게 현실의 고난을 이기고 안락을 취하라는 지혜를 주실 리가
없습니다.
뱀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고대 유대인들이 가장 지혜로운(하나님의
지혜를 받았다는 뜻은 아니고 단순히 그 자체로) 짐승으로 여겼습니다. 부정적인 의미로 연결해선 안됩니다. 비둘기는 물론 순결과
평화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성경이 말하는 순결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순결해야 하고 그러면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지혜와 순결이 세속적 처세술이나 교회에서의 충성도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물론 ‘지혜’를 신자도 현실 문제를 극복해 나감에 믿음과 기도에만 집중하지 말고 이성적 분별력도 사용해야
한다고 적용하는 것은 틀리지 않습니다. 단 그럼에도 반드시 순결해야만 합니다. 거짓과 불법과 타협 관용해도 된다는 의미는 한 치도
개입시키지 않은채 이성적 지혜를 사용해야만 합니다.
1. 힘 있는, 2.누가복음 1:49, 사도행전 25:5, 3. δυνατός =δύνα- μαι: 나는 할 수 있다. ㉠ 딛1:9
발음
/ 두나토스(dünatŏs)
어원/ 141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능한(막 9:23, 눅 24:19, 행 18:24), 강한(롬 15:1, 고후 12:10), 유력한(행 25:5). [명]
능력 (롬 9:22, 11:23, 고후 10:4), 권능(롬 14:4). [부] 능히(행 11:17, 롬 4:21).
신약 성경 / 32회 사용
연약한 자(호 아두나토스)
ἀδύνατος, ον 102
1. 힘 없는, 2. 불가능하
발음
/ 아두나토스(adünatŏs)
어원/ 1[부정불변사]과 141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약한(롬 15:1), 할 수 없는(마 19:26), 하지 못하는(히 10:4)
신약 성경 / 10회 사용
기쁘게(아레스코)
ἀρέσκω 700
1. 기쁘게 하려고 애쓰다, 2. 기쁘게 하다, 3. 기뻐하다
발음
/ 아레스코(arĕskō)
어원/ 미완료 ἤρεσκον, 미래 ἀρέσω, 제1부정과거 ἤρεσα, 아마도 14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기쁘게 하다(마 14:6, 막 6:22, 롬 8:8)
신약 성경 / 17회 사용
(도입 이야기)
소경의 이기심 어느 시각장애인의 간절한 소원은 두 눈을 떠서 세상을 보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간절하였던지 어느 날 부엉이가 찾아와서 시각장애인에게 이런 제안을 합니다. "나는 밤에만 활동하므로 낮에는 눈이 필요없지요. 낮에는 당신이 내 눈을 사용하고 밤에는 내가 사용하면 좋겠지요. 한 가지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밤에는 반드시 눈을 돌려주어야 합니다. 시각 장애인이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밝은 세상이 보였습니다. 얼마나 좋았을까요? 낮 동안에는 눈을 사용하고 밤에는 부엉이에게 눈을 돌려줍니다. 이렇게 여러 날 지내는 동안 시각장애인의 마음에 왜 바보 같을까? 멀리 도망을 가서 낮에도 밤에도 내 마음대로 보면 될텐데....."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눈이 점점 흐려집니다. 결국 집으로 돌아와서 부엉이를 만났지요. 밤에 활동을 하지 못한 부엉이는 그동안 먹이를 얻지 못해서 기력이 약해졌습니다. 부엉이는 시각장애인에게 "왜 이제 왔어요!" 그리고 부엉이가 죽었습니다. 시각장애인은 더 이상 낮에도 밤에도 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세상 모든 존재는 존재의 목적이 있습니다. 존재의 목적을 무시하거나 외면할 때는 반드시 생각지도 못한 비극이 찾아올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전도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다른 사람이 복음이 전한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것을 남의 터에 집을 짓지 않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It is written : As surely as I live, says the Lord, every knee will bow before me; every tongue will confess to God.
관련 성경 / 병들다(마 25:36, 요 11:3, 빌 2:27), 앓다(눅 9:2), 약하다(행 20:35, 롬 4:19, 고후 11:
21), 연약하다(롬 8:3), 거리끼다(롬14:21). [명] 병자(막 6:56, 요 5:3,7, 6:2), 병(눅 4:40), 약한
자(고전 8:9, 11, 12), 연약한 자(롬 14:1, 2).
신약 성경 / 33회 사용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So then each one of us will give an account of himself to God.
마태복음 12: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베드로전서 4:5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갈라디아서 6: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전도서 11:9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 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마태복음 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마태복음 18:23-35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누가복음 16:2 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포렌식(Forensics)’ 고대 로마의 포럼(Forum)과 공공(Public)이 합성하여 나온
라틴어 입니다. 포렌식이란 범죄수사와 관련된 모든 과학기술을 의미합니다.
특히 요즘은 '디지털 포렌식(Digital Forensics)'이란 말을 많이 씁니다. 이는 컴퓨터, 스마트 폰, 각종
전자기기 같은 디지털 증거물을 분석하여 범죄의 증거를 수집하는 과학수사 기술입니다. 마치 시신을 부검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죽었는데 이 사람이 자살을 했는지, 타살을 당했는지 혹은 자살을 위장한 타살을 당했는지 시체를 부검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디지털 포렌식 수사를 하면 삭제 된 정보까지 다 회복시켜 범죄행위를 낱낱이 알 수 있습니다. 범죄자는 자기의
범죄 사실을 숨기기 위해 무엇보다도 자기의 쓰던 컴퓨터나 스마트 폰을 없애거나 포렌식 수사를 하지 못하도록 기기를 불능화 하려고
합니다.
반대로 수사관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범죄자의 컴퓨터나 스마트 폰을 확보하려고 합니다. 왜 그럽니까? 거기에 기록이 다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범죄 증거를 찾기 위해 지문 채취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디지털 포렌식 수사가 더욱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펜실버니아 물리 통계학 박사이시고 명지대의 박영아 교수란 분은 사전투표와 본 투표간의 격차가 나오는 확률은 1000개의
동전을 던져서 모두 한 쪽만 나오는 확률과 같다고 했습니다.
또한 서울대 통계학 명예교수시고 한림원 원장인 한국 통계학의 거장
박성현 교수는 이번 선거의 사전투표와 본 투표율의 차이는 신이 작정을 하고 도와줘야만 나오는 수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월터 미베인이란 미국의 학자가 있습니다. 예일대와 하버드대를 나오신 분이고 현재 미시건 대학에서 정치학
교수를 하시고 있습니다. 이 분은 특히 부정선거 탐지 전문가입니다. 지난 미국 대선 때에도 패배한 힐러리 클린턴 측에서 부정선거를
의심하고 이 분에게 조사를 의뢰했습니다.
그러자 이 분이 “이번 선거는 부정선거가 아니다.”라고 연구의 결론을 내림으로 부정선거 논란을 잠재운 분입니다. 그리고 이
분은 과거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부정선거를 8건이나 발견했는데 모두 사실로 들어났습니다. 특히 이 분의 부정선고 폭로로
볼리비아에서는 대통령이 사임을 하기도 했고, 콩고를 비롯해 이라크도 폭동이 일어나 선거가 다시 치러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최근 한국의 총선이 ‘사기(Fraud)’라고 보고서를 내놨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 전(2020년 5월
10일)에는 한국 총선에 관한 2차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거기에 보면 한국의 총선은 “사기로 조작이
되었다(fraudulently manipulated)“라고 해서 큰 파장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총선에서 낙선한 분이 “이거 이상하다. 확인해 보자.” 하고 법원에 증거 보전 신청을 했습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개표기, 개표기 제어용 컴퓨터, 선거 관리용 서버를 보존해달라고 했는데 기각이 되었습니다. 안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컴퓨터 서버를 어디에서 임차했는데 5월 1일에 그 서버를 돌려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서버를 돌려주는데 포렌식 수사를 아예 할 수 없게 ‘디가우징(?)’이나 무식하게 드릴로 뚫어서 파기한다고 합니다.
하여간 범죄자는 완전 범죄를 하려고 어찌하든지 자기의 범죄 증거를 없애려고 하고 반대로 수사관은 범죄의 단서와 증거를 확보하려고
합니다. 그래야 법정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상황을 내 자신과 한 번 대입해 봅시다. 내가 죄를 저질렀습니다. 사실 우리는 누구나 다 죄를 저지르는
죄인들입니다. 그 죄가 발각되면 큰일 납니다. 죄가 탄로 나면 명예도 잃고, 돈도 잃고, 감옥도 가야되고, 어쩌면 사형도 당할 수
있습니다. 고로 나는 죄를 부인해야 합니다. “나 안 그랬어요. 모르겠는데요.” 오리발을 내밀어야 합니다. 거짓말을 해야
합니다.
이때 나를 수사하는 수사관이 증거 없이 “야, 너가 죄를 저질렀잖아.” 하고 범죄자와 범정에서 말싸움만 해가지고는 안
됩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증거를 가지고 와야 합니다. 만약 범죄자가 역적모의를 했다면 역적모의를 한 사람들의 통화 기록을
가지고 와서 법정에서 공개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증거도 없이 그냥 무턱대고 사람들을 심판하여 지옥을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이 미련한 놈아!” 하고 욕을 하고 무시하면 그 말 한 마디에 심판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반면 어떤 사람에게 목마를 때 물 한 컵을 준 것이 있으면 그에 대하여 상급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이때 벌을 받는 자나 상급을 받는 자가 너무 오래 된 이야기이기에 전혀 기억이 없습니다. 과거에 내가 남에게 “이 미련한
녀석아!”라고 했는지 기억이 안 납니다. 과거에 내가 남이 목마를 때에 냉수 한 컵을 대접했는지도 기억이 안 납니다. 그러나 이때
예수님은 포렌식 수사를 통해 이러한 기록들을 다시 백업하여 공개까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상벌에 대한 심판이
누구도 인정할 수 있는 정의로운 심판이 되는 겁니다.
우리 모두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게 됩니다. 로마서 14:10-12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베드로전서
4:5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하나님이 “네 죄를 네가 알렸다.”고 하실 때 우리는 “주여, 저는 저의 죄를 모릅니다. 기억이
전혀 안 납니다. 저는 치매 환자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아- 실지로 기억이 안 나니까요. 이때 하나님은 증거를
대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양심이란 것을 끄집어냅니다. 마치 디지털 포렌식 처럼 지워진 기억을 되살려냅니다.
그것을 우리가 보면 도저히 죄를 부인할 수 없습니다. 고로 “주여,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하고 스스로 자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어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자기의 죄를 하나님께 직고하는 것보다 이 땅에 살아 있을 때 하나님께 자기의
죄를 먼저 직고하는 겁니다. 즉 미리 회개하는 겁니다.
이것이 복음이요. 아주 원초적인 복음입니다. 세례 요한도 외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님도
외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여러분, 하나님께 자기의 죄를 통회하고 자백하면 불쌍히 여김을 받습니다. 용서를
받습니다. 천국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어차피 들통 나고 직고해야 하는 죄를 자꾸 숨기려고 하고 오리발을 내밀면 가중처벌을 받습니다. 회개를 미루면 미룰수록
재앙은 더 커지게 됩니다. 반면 회개가 빠르면 빠를수록 하나님과 더 가까워집니다. 가장 미련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나는 죄를
안 지었다.”고 하고 오리발을 내미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다 죄인이라고 말씀했는데 나는 죄를 안
지었다고 하면 도리어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괘씸죄가 추가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올 때 죄를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해주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는 것이지 정죄하려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고로 지혜로운 자는 하늘나라에
가기 전에 모든 죄를 청산하고 갑니다. 그런데 인간이 자기 죄를 청산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욕심쟁이는 여전히 욕심을 부리고,
교만한 자는 계속 교만하고, 불평하는 자는 계속 불평하고, 못된 자는 여전히 못되게 말하고 행동합니다.
이때 자기 죄를 청산하고 버릴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육체의 고난을 겪는 겁니다. 오늘 본문 1절입니다.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자기 죄를 그쳤음이라.” 사람이 모든 일이 잘되고 형통할 때에는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큰 고난을 당하거나 육체의
고난이 임할 때에는 자연스럽게 자기의 죄를 회개하게 됩니다.
보통 사람들이 죽을 때 병들어 죽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대부분 육체의 고통이 따릅니다. 이게 성경적으로 무슨 뜻이냐 하면
바로 그 동안 지은 죄를 철저히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지은 죄를 모두 용서받고 천국에서는
의인의 상급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성경에 보면 전염병이 돌아서 많은 사람들에게 육체의 고통이 오고 병들 때에 사람들이 회개했습니다. 죄를 그쳤습니다. 그러자
전염병이 사라지고 하나님이 땅을 고치셨습니다. 즉 자기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므로 하나님의 치료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에게 항상 좋은 것을 주시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왕이면 이 땅에서 하나님께 직고하는 것이 하늘나라에서 심판의
자리에서 직고하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가 변화가 됩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취조하는
수사관처럼 여겨졌으나 이제는 나의 죄를 변호해주는 변호사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변호를 들으시고 그 죄를 용서해주는 판사입니다.
그리고 그 판사 분은 다름 아닌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에게 늘 기도하며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일상생활을 직접 보고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오늘은 이랬어요. 이 사람을 만나서 이랬고요. 이 일은 이렇게 정리했어요. 아버지가 순간마다 지켜주시고 도와주시니 항상
고마워요. 이제 잠 좀 자려고 합니다. 꿈속에서도 가르쳐 주실 것 있으면 한 수 가르쳐 주세요... 고주알 메주알... 이러쿵
저러쿵...”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 직고해야만 합니다. 심판을 당할 때가 되어서야 직고하려면 너무 당황스럽고 위험합니다. 죄는 미리미리 이
땅에서 가장 빠르게 직고하므로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다정하신 하나님과 사랑의 대화를 날마다 직접 해야
합니다.
무엇을 직접 하나님께 고하기를 원합니까? 하나님은 솔직하고 정직하게 고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내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고하십시오. 너무 거창하게 말할 필요도
없고, 격식을 차리며 어색하게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이미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고, 그 아들과 함께 또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하나님께 직접 고하면 하나님은 또한 직접 들으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고함으로 이 어지러운 세상 중에서도 큰 위로와
잔잔한 행복을 얻기를 축원합니다.
갈라디아서 6: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신약 성경 / 86회 사용
사랑의 빚이란 예수를 영접한 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는 갚을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빚을 잊지 말자!
카네기가 어린 시절 엄마를 따라 식료품 가게에 가게
되었다. 엄마가 물건을 사는 동안 그는 가만히 서서 체리 파는 할아버지 앞에 놓인 체리상자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주인 할아버지가
"먹고 싶으면 한 줌 집어 먹으렴" 이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는 말없이 가만히 할아버지만 바라볼 뿐이었다. 카네기의 어머니도
"할아버지가 허락하셨으니 한 줌 집어도 돼." 라고 말했지만 그는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체리를 한 움큼 집어
그에게 내밀었다. 그는 그제서야 고맙다고 말하며 두 손으로 체리를 받았다.
집으로 돌아가며 어머니는 카네기에게 왜 할아버지가 집어주기 전까지 가만히 있었는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카네기가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기본적인 단계는 악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악을 행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9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이웃의 영역에 침범하지 말라 성의 성역, 생명의 영역, 물질의 영역, 마음의 영역에 대해서 인정하라고 합니다.
율법을 완성하라(8절)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마태복음18:23-35
하나님 나라는 자기 종들과 회계를 하려고 하는 어떤 왕에 비길 수 있습니다. 왕이 회계를 시작하니, 1만 달란트 빚진 종 하나가 왕 앞에 끌려왔습니다.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자, 주인은 그 몸과 아내와 자녀들과 그 밖에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종이 엎드려서 무릎을 꿇어 ‘참아 주십시오. 다 갚겠습니다.’ 며 애원했습니다. 주인은 그 종을 불쌍히 여겨, 그를 놓아 주고, 빚을 완전히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1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나, 붙들어서 멱살을 잡고 ‘내게 빚진 것을 당장 갚아라.’ 라고 말했습니다. 그 동료는 엎드려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라며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매몰차게 몰아붙여 그 동료를 감옥에 가두고, 빚진 돈을 갚을 때까지 갇혀 있게 했습니다. 다른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딱하게 여겨서, 가서 주인에게 그 사실을 다 일렀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그 종을 당장 불러다 놓고 말했습니다. ‘이 악한 종아, 네가 간청하기에, 내가 네게 그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겼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리고 주인이 노하여, 그를 형리에게 넘겨 주고,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가두어 두게 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제자들에게 “(마 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고 하셨습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와서 “주님, 형제가 내게 죄를 지었을 때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 “일곱 번만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여라.”고 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은 490번까지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무제한으로, 끝없이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용서의 기준은 이 지상에 현존하는 사회법에서 도저히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용서법은 ‘하나님 나라의 법’에 따른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왕은 ‘하나님’, 종들은 ‘예수 믿고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될 자들’을, 그리고 ‘회계’는 하나님 앞에서 일생동안 자신들게 맡기워졌던 일들에 대해 결산하는 ‘심판의 자리’를 의미합니다.(고후5:10) 세상의 법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기준에 따라 선악간에 행한대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왕이 회계를 시작할 때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가 끌려왔다고 했습니다.
1달란트는 당시 순금 34kg에 해당되는 금액으로 노동자 한 사람의 하루 품삯인 1데나리온의 약 6,000배에 상당합니다.
그러므로 1만 달란트는 오늘날 금액으로 환산하면 10억달러 이상일 것으로 평가됩니다. 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의 증언에 따르면 유대 전역에서 거둬들인 1년 세금이 고작 800달란트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1만 달란트는 하나님께 대해 인간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큰 죄악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에 보면, “(마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는 기도가 있습니다. 이 말씀이 헬라어로는 “우리에게 빚는 자를 탕감하여 준 같이 우리의 빚도 탕감하여 주시옵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죄’를 갚아야 하는 ‘빚’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죄는 용서받기 전에는 죄로 남아 있습니다. 빚은 갚고 나면 더 이상 부채가 아닙니다. 자신이 지은 죄는 누구에게 전가할 수 없지만 부채는 제 삼자가 대신 갚아 줄 수도 있습니다. 죄는 죄를 낳고 부채는 부채를 낳는 악화 현상이 계속됩니다. 죄나 부채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무거워지고 증가되어 가는 것이 일반적 현상입니다. 부채를 채권자로부터 탕감받을 수 있듯이 죄도 하나님에 의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시되 기억조차 하지 아니하십니다.(사 43:25)
하나님께서 정하신 죄에 대한 법은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하심으로 인간의 죄값을 치루시고 우리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은사”, 곧 값없이 주시는 선물로 영생,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엡1:7) 인간이 죄 사함을 받아 죄가 없다고 인정받는 것을 ‘의인(義認)이라고 합니다. 이 의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림이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인간의 죄는 스스로 해결할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써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2:22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네가 많은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내 앞에 그대로 있으리니.
일만 달란트 빚는 자가 숨어오다가 발각되어 끌려왔습니다. 그에게 왕은 그 종 자신과 아내, 그리고 자식들과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 빚을 갚으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일만 달란트는 앞서 말씀드린 엄청난 금액으로 그 종이 자신을 비롯해서 가족들과 가진 모든 것을 다 처분해도 도저히 결코 갚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왜냐면 당시 노예 값은 기껏 많아봐야 10분의 1달란트 수준 이하였기 때문입니다. 다 갚으라는 왕의 명령에 종은 끝내 왕에게 호소하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시간을 기다려 주시면 다 갚겠다고 호소했지만 이는 가능성 있는 약속이 아니라 다만 왕의 형벌을 일순간이나마 모면해보려는 임기응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왕은 이를 불쌍히 여겨 완전히 그 빚을 탕감해주었습니다. 종의 간절한 호소에 감동되기보다는 오로지 왕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그 빚을 탕감해주게 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실 때 죄인의 간청에 따르기 보다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 그야말로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단번에 죄를 완전히 탕감, 사해주신 것입니다.(롬8:33) 이같이 죄인의 죄를 완전히 사해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 죄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 죄 사함을 위해 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요일4:10)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왕에게 전혀 상환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주시면 다 갚겠노라며 간청했던 것처럼, 죄인은 자신의 죄에 대해 용서를 진실히 구하는 간청이 있어야 합니다. 그냥 간청함도 없이 탕감해준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죄를 용서하되 죄를 회개하며 용서를 빌지도 않았는데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해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누가복음 17: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1절.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 그러므로 / οὖν 3767
1. 그래서, 2. 말했던 바와 같이, 3. 거기에 응해서
발음
/ 운(ŏun) 어원 / 3756과 445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그런즉(마 1:17, 롬 3:31), 그러면, 이에(요 1:22, 2:18), 거기에 대해서(요 4:9, 6:53), 실로 그러나(마 3:8, 요 9:18), 그러므로(마 18:4).
신약 성경 / 501회 사용
* 사도 / ἀπόστολος 652 ἀπόστολος, ου, ὁ
1. 고전 헬라어나 후기 헬라어에서의 ὁ ἀ.는 해양탐험의 대장을 나타내는 말이었는데 ‘보냄을 받은 자’란 의미가 있었다.
2. 대의원 3. 하나님의 사자
발음
/ 아포스토로스(apŏstŏlŏs) 어원 / 64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사도(마 10:2, 눅 17:5, 롬 1:1), 사자(使者)(빌 2:25), 보내던 사람(행 15:33).
신약 성경 / 80회 사용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의 권위를 증거하기 위하여 다른 사도들과의 관계에서 있었던 일을 소개했습니다. 교회의 기둥이라 불리는
사도들과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며, 예수의 구제자인 베드로의 외식을 책망한 일 등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이 다른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로서 말미암았으며 베드로와 동등한 책임과 임무가 주어졌음을 강조함으로써 자신의 교훈의 권위를 세우고 이신득의의
교리를 강조했습니다.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
1. 복음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올라감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복음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그 복음을 소개하였음을 밝혔습니다. 바울의 받은 복음은 다른
사도들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로부터 직접 계시받은 것이기에 예루살렘에 있는 자들에게 증거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다른 사도들과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으므로 이방인들에 관해서는 다른
사도들보다 많은 계시를 받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후 삼 년 만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야고보와 게바를 만나고 십사 년 만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사도들을 만났음을 강조함으로써 자신이 전하는 교훈이 사람에게 배운 것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께로 말미암은 것임을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a. 이방인에게 나타난 표적을 고함(행 15:12) b. 사도들에게 바울을 소개했던 바나바(행 9:27) c. 바나바와 함께 예루살렘을 방문함(행 15:2)
2. 이방인을 위한 사도직을 받은 바울
바울은
베드로가 할례자의 복음 전도를 맡은 할례자의 사도라면 자신은 이방인의 전도를 맡은 이방인의 사도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사명이
베드로의 사명과 동등함을 밝혔습니다.
그렇기에 교회의 기둥같이 여기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도 자신과 교제의 악수를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은혜를 사도들도 인정하였으므로 갈라디아에 있는 성도들도 자신의 사도권을 인정하고 교훈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a.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베드로(행 2:14) b. 이방인의 사도직을 영광스럽게 여김(롬 11:13) c.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함(고전 15:10)
게바를 책망한 바울
1. 게바의 실수
바울은
게바가 실수하였을 때 자신이 그를 책망한 사건을 말함으로써 자신의 교훈의 권위를 증명해 보였습니다. 게바가 안디옥에서 이방인들과
함께 먹다가 유대인들이 오자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그 자리를 피하였고, 그로 인해 다른 유대인들과 바나바도 실족하여 외식에
유혹되었음을 밝혔던 것입니다. 게바의 이러한 행위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치 않은 행위였는데 이는 복음을 따르지 아니하고
유대인들의 율법을 따른 행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사도직을 대표하는 자로서 모범을 보 여야 했으나 오히려 할례자들을
두려워함으로 실수를 범하고 다른 사람들도 실족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a. 율법이 금한 이방인과의 교제(행 10:28) b. 유대인들의 비방을 두려워함(행 11:2-3) c. 유익하지 못한 규례(히 13:9)
2. 바울의 책망
게바의
실수를 목격한 바울은 그를 심하게 질책하였습니다. 이방인들로 유대인과 같이 행할 것을 요구하여 복음의 걸림돌이 되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비록 베드로가 예수의 수제자로서 큰 권위를 지니고 있었지만 복음 진리 앞에서는 그의 행위가 책망받아야 함을
증거함으로써 율법주의적 행위에 대한 경계를 주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a. 예수 안에서 할례가 무익함(갈 5:6) b. 범죄자를 꾸짖음(딤전 5:20) c. 복음에 합당한 생활(빌 1:27)
이신득의의 구원
1.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
바울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음을 교훈하면서 율법주의자들의
거짓 교훈을 반박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복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자가 다시 율법을 행하면 스스로 범법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는 것은 모든 사람이 죄의 영향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와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은 서로 공존할 수 없음을
바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a. 율법으로 죄 사함을 얻지 못함(행 13:38-39) b. 믿음의 법으로 의롭게 됨(롬 3:27-28) c.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빌 3:9)
2. 믿음 안에서 사는 성도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고 선언하면서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고 이제 그리스도께서 자신 안에 사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성도가 사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구원을 얻은 성도는 율법에 얽매이지 아니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않아야 하는데, 이는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의 죽음이 헛된 죽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신학 사상은 그의 글에서 자주 나오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용어사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a.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해 삶(롬 6:11) b.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함(롬 6:4) c.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김(롬 7:6)
결론
바울의
사도들에 대한 행동에서 진리의 확신을 갖는 자의 담대함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비록 교회의 기둥과 같은 자들 앞에서도
그리스도께 받은 진리에 대해서 만큼은 조금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진리를 확신하는 데서 나오는 담대함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굳게 잡아 이러한 담대한 믿음을 소유하여야 합니다. 세상의 어떠한 거짓 교훈이 공격해 올지라도 진리에 대한 확신으로
단호히 대처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를 왜곡시키려는 어떠한 시도 앞에서도 바울과 같이 담대하게 복음을
변증할 있는 용기와 능력을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관련 성경 / 부르다(눅 22:3, 행 2:21, 롬 10:12), 일컫다 (행 4:36, 약 2:7), 일컬음을 받다(히 11:16), 상소하다(행 25:11, 26:32, 28:19), [명] 이름(마 10:3), 별명(행 1:23).
신약 성경 / 30회 사용
이름(ὄνομα). 3686 ὄνομα, ατος, τό
1. 이름, 2. 마태복음 10:2, 3. 마태복음 1:21
발음
/ 오노마(ŏnŏma)
관련 성경 / 이름(마 1:21, 눅 1:5, 롬 1:5), 명칭(행 18:15)
신약 성경 / 231회 사용
죄를 범한 사람은 누구든지 심판을 받고 형벌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심판에서 그 형벌에서 구원을 받는 길이 있는데 그것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의 이름을 부르면 다 구원을 받는다고 해서 진짜로 주여, 주여 라고 부르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야 하고 그 의미를 알고 바르게 불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상수훈을 통하여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막다른 골목에 가서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주님의 심판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살려달라고 부르는 그런 부름이 아닙니다. 미리 주님을 알고 그 이름을 부르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고 불러야 합니다.
1.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임을 알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후 자기들 스스로 최초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것이 창세기 4장 25-2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라고 했습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임으로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하나님을 떠났을 때 하나님께서 다시 아담에게 아들을 주셨는데 그 이름이 셋입니다. 셋이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에노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노스라는 이름의 뜻은 “죽은 사람” 혹은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경건한 후손인 셋이 아들을 낳았는데 왜 하필이면 죽은 사람 혹은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에노스라고 지었을까요?
그들은 인생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100여년쯤 살면 죽으니까 당연히 인간이 죽는 줄 알지만 그 때는 1000여년씩이나 살던 시대이니까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잘 몰랐던 시대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셋은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알았고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 그런 이름을 지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죄를 범한 인생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알고 그 이름을 불러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인생은 죽는다는 것을 다 압니다. 어제도 죽고 오늘도 죽고 매일매일 사람들이 죽어가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 사실을 다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로 이상한 일입니다. 왜 죽는지도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고 그냥 죽어가는 사람들이 참 이상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함으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그 죄에서 나를 건져주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영원히 죽지 않고 산다는데 그 이름을 불러야하지 않겠습니까? 뭐가 그렇게 바빠서 뭐가 그렇게 급해서 죽음 앞에 서 있는 인생이 그 죽음의 절벽 앞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2.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오직 주님밖에 없음을 알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알고 그 죽음에서 그 멸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노력들을 많이 했습니다. 여러 가지 종교들도 만들어 보고 훌륭한 사람을 교주로 세워보기도 하면서 이 죽음에서 구원을 받는 길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에 예수님만이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요 영생에 이르는 길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구주가 되심을 고백하면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정말 간절하게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할 것입니다. 오로지 한 길인데 다른 길이 없는데 대강 적당히 부를 수 없을 것입니다.
3.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로마서 10장 14절에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믿음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전파하는 자가 있어야 들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전파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믿고 주님의 이름을 불러서 구원을 받는 사람들이 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할 때 중요한 것은 우리가 교회에 와서 무엇을 듣는가가 참 중요합니다. 바른 설교를 듣는 사람은 바른 믿음을 가지는 것이고 바르지 못한 엉터리 설교를 듣는 사람은 엉터리를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교회의 교인들의 믿음은 엉터리들이 많습니다. 많은 목사들이 엉터리 설교를 하니까 그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다 엉터리 믿음을 가지고 교회에 다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예수님을 믿으면 잘살게 되고 성공하고 부자가 된다고 믿습니다. 목사들이 그렇게 설교를 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기도를 하면 100% 다 응답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목사들이 그렇게 설교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면 착한 사람이 되고 선한 일을 많이 한다고 믿습니다. 목사들이 그렇게 설교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성경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자기들이 편리하게 만들어 낸 것이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교인들 모으려고 목사가 편한 대로 편집한 것이지 참 설교가 아닙니다. 말씀대로 살아도 착한 일 많이 하면서 살아도 성공하지 못하고 잘 살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의 교인들이 많아도 세상은 더욱 악해져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이렇게 실수도 하고 어쩔 수 없이 죄도 지으면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주님 우리가 노력을 해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나는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지만 내 속에 있는 악한 것들이 오히려 더 나쁜 짓만 하게 만들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이나 받고 살게 합니다.
이 죄악 된 세상에서 이 죄악 된 삶에서 구원을 받는 길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 대신 십자가에서 죽어주심을 믿는 믿음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나는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믿습니다. 그 피가 나를 깨끗하게 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 믿음으로 주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4.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시편에 보면 많은 시들이 주님의 이름 하면 그 이름을 찬양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시8:1)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시63:4)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오리니”(시86:12)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나의 평생에 주의 이름을 송축하고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주의이름에 영광을 돌리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내 손을 들리라고 했습니다.
이런 찬양이 없이 이런 감사 없이 이런 감격도 없이 환난 날에 구원만 받으려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염치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죽음이 있고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한 사람도 의로운 사람이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이 심판을 면할 수가 없고 형벌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 구원을 받고 크고 작은 심판에서 구원을 받고 영원한 형벌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임일 알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오직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주님 밖에 없음을 알고 부르시기 바랍니다. 날 대신 죽어주신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부르시기 바랍니다. 그 이름의 위대함 그 이름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며 부르시기 바랍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기독교 신앙이 다른 종교에서 가르치는 구원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우치는 말씀으로 구약 요엘서를 인용한 말씀입니다(2:32)
첫째,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 눈으로 볼 수 없지만 그 이름을 부를 때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둘째,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간구하는 것입니다.
“부르다”는 헬라어 단어는 “에피칼레오마이(ἐπικαλέομαι)” 라고 하며, “부르다, 일컫다, 호소하다, 간원하다.” 라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부르는 것은 그가 들을 수 있도록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기도는 속으로 할 수 있지만 부르는 것은 들리게 해야 합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주님을 불렀을 뿐 아니라 사람들이 그분의 이름을 부르리라는 것까지 예언했습니다(욜 2:32, 습 3:9, 슥 13:9).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또한 신약의 성도들에게 발견하는 일상적인 신앙의 모습입니다.(행 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오순절 날 성도들은 주의 이름을 함께 불렀으며 그 부름에 대한 응답으로 강한 바람과 같고 불과 같은 성령이 임했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을 때에도 주의 이름을 불렀습니다.(행 7: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신약의 모든 성도들도 주의 이름을 불렀습니다.(고전 1:2∼3)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주의 이름을 부르던 성도들을 핍박하던 사울은(행 9:14)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극적으로 만났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바울이 되어 그도 역시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성도들을 두 종류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침묵하는 그리스도인”이며, 다른 하나는 “부르짖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믿음의 사람은 부르짖음으로 응답 받고 그 응답에 따라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도록 허락하셨습니다.(행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남은 자’는 히브리어로 ‘쉐아르’(שאר)라고 하고, 헬라어로는 ‘레임마’(λειμμα) 혹은 ‘로이포스’(λοιπος)라고 하고, 영어로는 ‘렘넌트(remnant)라고 합니다.
‘남은 것’ ‘남은 자’라는 뜻입니다.
구약시대 노아 때에도 세상 모든 사람이 타락하여 물로 심판 받아 모두 죽게 된 가운데서도 의로운 노아와 그 식구들이 살아남아 있었습니다 (창 6:6-8, 눅 17:26-27, 벧전 3:20).
롯 때에도 소돔성이 사람들이 타락하여 불로 심판받아 모두 죽게 된 가운데서도 의로운 롯과 그 식구들은 살아남아 있었습니다 (창19:29, 눅 17:28-29).
아합왕 때에도 북이스라엘이 아합왕과 이세벨의 학정으로 모든 사람이 우상을 숭배하고 많은 신앙인들이 숙청당하는 가운데서도 우상숭배에 굴복하지 않고 살아남은 엘리야와 7,000명은 살아남아 있었습니다(왕상 19:18, 롬 11:2-5).
포로기에도 이스라엘 백성과 유다 백성들이 우상숭배로 앗수르와 바벨론에 멸망한 가운데 사로잡혀간 자들 중에 하나님에 대한 유일 신앙을 가진 자들이 살아남아 있었습니다(사 6:13, 10:20, 11:10-12, 렘 23:1-4, 31:7-8, 단 1:8-9).
하나님은 음란과 우상숭배로 타락했을 때 심판을 하면서도 언제나 신앙공동체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신실한 신앙을 가진 ‘남은 자’를 남겨두셨던 것입니다.
요엘 선지자는 신약시대에도 ‘남은 자’가 있을 것을 예언했습니다.
요엘 2:32에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욜 2:28-32, 행 2:1-21).
사도 바울은 신약시대에도 남은 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11:5에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롬 9:27, 29).
사도 요한은 종말에도 남은 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12:17에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계 6:6).
구약시대에 모두가 우상숭배에 빠지고 앗수르와 바벨론에 멸망하여 사로잡혀 간 가운데서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지 않은 자들이 남아 있었고 그들이 돌아와 이스라엘의 신앙을 회복시키고 부흥시켰습니다.
신약시대에 모두가 영적으로 침체되어 로마의 박해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진 예수님의 제자들이 남아 있었고 그들이 성령의 충만하여 초대교회를 세우고 확장시켰습니다.
그처럼 종말에도 사탄의 온갖 핍박과 유혹에도 신앙을 지키는 자들이 살아남아 하나님 나라를 이룰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탄이 그것을 알기 때문에 참 생명력을 가진 ‘여자의 남은 후손들’ 곧 ‘남은 자’와 더불어 마지막 일전을 벌이기 위해 바다 모래 위에 선 것입니다.
‘바다 모래 위’는 용이 여자의 남은 자손과 싸우는 장소라기보다는 용이 여자의 남은 자손과 싸우기 위해 여자의 남은 자손을 공격하게 할 짐승을 부르는 장소라 할 수 있습니다.
13장에 보면 두 짐승이 나옵니다. 1-10절에는 바다에서 일곱 머리와 열 뿔이 달린 짐승이 나오고 11-18절에는 땅에서 두 뿔을 가진 짐승이 올라옵니다. 용이 그 두 짐승을 이용하여 여자의 남은 자손들을 적극적으로 공격합니다. ‘용’은 사탄을 상징하고, ‘바다에서 나온 열 뿔 달린 짐승’은 적그리스도를 상징하고, ‘땅에서 올라온 두 뿔 가진 짐승은 거짓그리스도와 거짓선지자를 상징합니다. 적그리스도는 기독교를 박멸하려는 정치지도자들을 의미하고 거짓그리스도와 거짓선지자는 기독교를 타락시키는 종교지도자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모든 사람들이 타락한 가운데서도 하나님 나라를 세울 자들을 남겨 놓습니다. 사탄은 그들이 구원역사에 생명력을 가진 자들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그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적그리스도와 거짓선지자들을 앞세워 공격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른바 ’남은 자‘들은 결코 그들에게 굴복하거나 미혹당하지 않고 신앙을 지킵니다.
남은 자들은 증거를 가지고 계명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요한계시록12:17에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라고 했습니다. ‘여자의 남은 자손’ 곧 이른바 ‘남은 자손’은 어떤 성격을 가진 자들이냐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입니다.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며 하나님의 계명을 가진 자들’인 것입니다.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라는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로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승천하신 분인 것을 믿는 믿음을 굳게 지키는 자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구주인 것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양보하지 않는 자들을 말하며 예수님이 구주인 것을 증언하기를 두려워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자들을 말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이 주되심을 부인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 자’라는 말은 하나님의 계명을 철저히 지키는 자를 말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계명을 양보하지 않고 지키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사탄이 이용하는 적그리스도의 박해와 거짓 선지자들의 유혹 속에서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하나님 계명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종말에 그런 자들이 하나님께 쓰임받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11:3에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고 했습니다 (11:5-6).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하며 영광을 누립니다. 요한계시록20:4에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고 했습니다 (14:12).
신약 복음시대에도 남은 자가 있습니다. 로마서11:5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남은 자는 교회 회복과 부흥을 위해 준비된 자들입니다. 그 목적 때문에 하나님이 환난 가운데서도 보호하고 원하시는 때에 영적 권세를 주어 사역을 감당하게 합니다. 그들의 특징은 예수님의 증거를 가지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입니다. 어떤 상황과 형편과 처지에서도 예수 믿는 믿음을 양보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을 양보하지 않는 자입니다. 우리가 모두 힘든 가운데 있지만 남은 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 신실한 신앙을 나타내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을 목적 하에 있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그 목적 때문에 우리를 어떤 상황에서도 지키신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약속어음
아브라함의 예를 들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것은 현찰이 아니라 약속어음이었다고 말합니다. 약속의
아들, 이삭이 태어나기까지 장장 25년이 걸렸습니다. 이삭의 후손들이 가나안 땅의 주인이 되어 큰 민족을 이루기까지 수백 년이
걸렸습니다. 출애굽 후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데 40년이 걸렸습니다.
믿음이란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베풀어 주신 것 때문에 하나님을 지금도 신뢰하며, 미래에도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믿음이란 앞을 내다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소망은 인간의 바람이 아니라 믿음에 기초한 미래에 대한 확신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을 신뢰한다는 것이며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그분의 약속을 신뢰한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한다는 것은 약속의 성취를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닻을 내리며 미래에 대해 이같이 확신하는 것을 성경은 소망이라 일컫습니다.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의 삶을 통해 영광을 드러내시는 통로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과 신실하심을 드러내 믿음을 완성하시며, 당신의 약속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게 하심으로 소망을 완성합니다.
이제부터
그러한 믿음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존재해 왔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믿음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대다수에게서 일관된 믿음,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보기란 힘듭니다. 이스라엘을 통해 믿음이 어떻게
그리고 누구를 통해 유지되고 전달되었는가를 살펴볼 것입니다. 그러면 새 이스라엘인 이 시대의 교회 모습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전 538년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 생활을 청산하고 귀향길에 오릅니다. 감격스런 귀환이었습니다. 믿음이
주는 교훈을 배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소망을 품는 법을 배운 것입니다. 이 교훈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터득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을 기꺼이 그리고
전적으로 신뢰하는 백성을 창조하시기 위해 계속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역경 속에서 자신들의 창조주이시며
공급자이시며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지 못한 이스라엘 민족의 실패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믿음의 학교를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출애굽 직후 광야에서의 이스라엘뿐 아니라 약속의 땅에
도달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끝없이 흔들렸습니다. 유혹이 밀려올 때마다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다른 신들과 세상의 좋아
보이는 것들을 추종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드러난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 중 남은 자들만이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했다는
사실입니다(시 106:6-43, 렘 7:23-26, 겔 20:5-31).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경고하셨듯이 이스라엘은
언제나 “패역한 백성”이었습니다(겔 2:3). 출애굽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상황적으로는 노예 생활에서
구원하셨지만, 영적으로는 죄의 노예 상태에서 구원하지 않으셨습니다(신 29:4, 사 6:9-10, 롬 11:7-8, 고후
3:14). 급기야 하나님께서는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셨듯이, 불신에 대한 형벌로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에서
추방하셨습니다. 시내 산 언약 또한 깨진 것입니다(출 16:28, 32:1-20).
하지만 아담과 하와에게 옷을
입히시고 여자의 후손을 통해 구원을 약속하신 것처럼(창 3:15,20), 바벨론 포로 생활 또한 이스라엘 역사의 종지부를 찍는
사건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체험을 통해 우리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언약을 파기한 후에 처음으로 선언된 진리, 곧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다”(시 103:8)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 중에도 하나님은 심판이 아니라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은 이스라엘을 멸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패역하였기에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보존하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바벨론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귀환
그러한 와중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안에 신실한 소수를 남겨 두셨습니다. 그들을
통해 당신의 약속을 이어가셨습니다. 불신이라는 죄에서, 불신으로 야기된 자멸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렘
31:1-40, 겔 36:22-38).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는 이스라엘을 깨끗케 하시는 것이었습니다(사 48:9-11). 바벨론
포로 사건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진노는 “남은 자들”을 불러 깨끗케 하였고, 그들의 믿음을 튼튼하게 세워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들어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음이라 이미 작정된
파멸을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
하나님께서는 반역한 무리들이 회개하면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사1:19-27, 미 7:18-20).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회개와 관계없이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남겨두십니다.
그들이 바로 남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는 자들입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신실하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소망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남은 자들의 역사입니다.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음이라.” 참으로 무서운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이지만 그들이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남은 자만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남은 자들을 제외한 이스라엘은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습니다. 그들은 파멸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정의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예정인 것입니다.
예레미야도 똑같은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내가
내 양 떼의 남은 것을 그 몰려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이 생육하고 번성할 것이며, 내가
그들을 기르는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잃어버리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23:3-4).
하나님의 역사는 이렇게 인간의 잘잘못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섭리와 일하심을 통해 이어집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남은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새롭게 창조해나가십니다.
남은
자들이 바벨론 포로생활을 마치고 귀환했을 때 조국의 상황은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약속하신 것과 전혀 달랐습니다. 538년의
귀환은 하나님의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방의 왕인 고레스의 정치적 책략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슥 1:1-4, 사
44:28-45). 그들의 귀환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제1차 귀환이 너무 미미했기에 에스라는 그보다 더 많은 무리를 이끌고
2차 귀환에 오른 스룹바벨에게 자신의 권한을 넘겨 주어야 했습니다(슥 1:11-2:2).
하나님께서 찬란히 빛나는
독립국가로 세우셔서 이방 민족들을 다스리게 할 것이라는 기대는 보잘것없는 도시국가를 세우는 것으로 대체되었습니다. 그것도 주변
세력들과 투쟁을 벌인 끝에 폐허 위에 간신히 세워졌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바사 제국에 기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현실은 약속과
너무 달랐습니다. 해가 갈수록 상황은 더욱 절망적이었으며, 공동체의 사기는 완전히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며 이스라엘 예배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성전 재건 사업도 22년 동안의 온갖 고생 끝에 주전 516년에야
가까스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이고 초자연적인 개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바사 제국의 도움을 통해서였습니다(슥
6:1-12). 솔로몬 성전을 익히 알고 있던 사람들은 새 성전의 규모가 너무 보잘것없다는 생각에 눈물을 흘렸습니다(슥
3:1-6).
그런데 예루살렘은 어수선하고 새 성전은 보잘것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학개와 스가랴와 같은 예언자가 나타나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을 버리시지 않았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언자들은 아직도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고 선포했습니다(학
2:5). 학개 선지자는 조금 있으면 하나님께서 땅과 모든 나라를 진동시키시고 모든 나라의 보물을 성전에 들이실 것이며 그
성전을 솔로몬의 옛 성전보다 더욱더 영광스럽게 하실 것(학 2:6-9)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스가랴도 같은 예언을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무리들은 소수였지만 하나님의 백성이었고, 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학 1:12-14). 현재의 상황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케 하지만 하나님은 약속을 잊지 않으셨습니다(슥 8:2-8). 믿음은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바벨론
포로생활 이후의 하나님의 백성 이야기는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역경 중에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려는 처절한 투쟁을 기록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학 1:1-2:9, 슥 1:16, 4:6-10, 6:15). 한쪽에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고,
다른 쪽에는 이러한 약속을 의심케 하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약속을 지키기 시작하셨습니다. 백성들이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기 시작했으며, 성전이 건축되었고, 예루살렘은 차차 안정을 되찾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일하고 계시다는 증거였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을 부분적으로
성취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중에 신실한 남은 자들은 믿음을 이어갔습니다. 상황을 바라보고 믿음을 저버리기보다 기대의 방향을
미래로 바꾸었습니다. 소망을 가진 사람들로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지금 불완전하게 성취될지라도 훗날 완전하게 성취될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했습니다”(히
11:13).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소망은 그분의 신실하심을 믿는 것에 기초합니다. 따라서 믿는 자는 현재 성취되지
않은 약속들이 미래에는 틀림없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새롭게 가져야 합니다. 약속은 성취될 것입니다. 오늘이 아니라면 내일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경을 당할 때 소망은 “영혼의 닻”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한 확신이 서면
현재의 고난을 인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소망을 갖는 것은 순진해서가 아니라 “믿는 자를 알기” 때문입니다(딤후
1:12). 그런 까닭에 이스라엘의 역사는 여호와를 변함없이 믿으라고 촉구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바뀌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일하셔서 백성들에게 믿음과 소망을 가르치셨듯이, 지금도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자를
창조하는 일을 계속하십니다. 십자가 이후의 그리스도인들은 바벨론 포로 생활 이후의 남은 자들처럼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음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하신 모든 것이 성취될 미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 가운데 겪는 시련은 장차 다가올 하나님의 구속을 더욱 사모하게 만듭니다. 고난은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을 떨쳐 버리고 저
세상으로 우리의 시선을 향하게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며 우리 앞에 놓인 것을 굳게 확신할 때
고난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4)는 약속을
신뢰할 수 있는 발판이 됩니다.
이사야 10:20-23에서 기억해야 할 단어는 남은 자 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안전을 추구하며
자기의 욕망을 좇는 이들은 패역한 백성이 되어 파멸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오직 소수의 남은 자들만이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며 약속을 소망으로 바라보며 믿음의 길을 달려갈 것입니다.
남은 자 구원 (로마서 9:27-33) The Salvation of the Remnant
1. 희망의 소수 (The Minority of Hope) (Romans 9:27-29) - 포로의 ‘남은 자’ (The remnant from the captivity) - 고난당하는 소수 (The suffering minority) - '거룩한 씨’ 희망 (‘The holy seed' of hope)
“남은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으리니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이다” (이사야 37:31-32).
2. 믿음의 소수 (The Minority of Faith) (Romans 9:30-33) - 믿음은 인간의 책임 (Human responsibility) - 행위가 아니라 믿음 (Faith, not works) - 거침돌 혹은 디딤돌 (Stumbling block or stepping stone)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이사야 28:16).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의 희망이다. You are saved by believing in Jesus Christ, who is the only hope of humanity.
남은 자 구원 (로마서 9:27-33)
하나님이 유대인의 경우, 예언하신 대로 ‘남은 자’만 구원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남은 자’ 구원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남은 자’를 구원하신다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이것이 우리의 생활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본문 27절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사야 10장 22절에 예언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통해서 이스라엘에 대한 진노를 시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때문에 이스라엘 나라가 망할 때에 오직 ‘남은 자’만 그
진노를 피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돌아올 때도 이스라엘 대중(majority)이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남은 자(minority)만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의 아들 ‘스얄야숩’이라는 이름을 통해서도 ‘남은 자가 돌아올
것이다’는 진리를 전했습니다(사 7:3).
‘남은 자’는 소수입니다. ‘남은 자’는 고난당하는 소수입니다.
우리는
‘남은 자’란 말만 들으면 구원받을 사람들이 소수일까, 다수일까 하는 질문부터 던집니다. 우리가 ‘남은 자’만 생각하면 소수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좁은 문’과 ‘좁은 길’을 생각해도 구원받을 사람들이 소수라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계시록 7장 9절을 보면 구원받을 사람들이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 즉 다수입니다.
우리는 마침내 구원을 받을 사람들이 얼마나 될지 잘 모릅니다. 우리가 다만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모든 사람들을 한 사람도 빼지 않고 다 구원하실 것이라는 사실뿐입니다 (계 20:15; 21:27).
‘남은
자’ 구원 문제를 다룰 때에 구원받을 사람들이 소수인가, 다수인가 하는 문제는 이 정도로 정리하고 ‘남은 자’는 고통당하는
소수라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는 것이 고통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오는 것도
고통이었습니다. ‘남은 자’ 구원은 고통당하는 소수의 구원입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일제시대에 신사참배를 거부한 주기철 목사님 같은 분이 ‘남은 자’입니다. 6.25사변 때는 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 손동신 손동인이 공산당의 핍박에 굴하지 않은 ‘남은 자’입니다.
초등학교
때 약 60명 급우들 중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저 혼자뿐이었습니다. 등치 큰 제 친구 김모씨는 저를 늘 핍박했습니다. 제가
땅바닥에서 뭔가를 그리고 있을 때 그는 제 머리에 오줌을 싸기도 했습니다. 저는 군대생활 중에도 신앙을 지키느라 두들겨
맞았습니다. 내무반장은 자기 주머니에서 끄집어낸 작은 성경책으로 제 머리를 툭툭 치면서 저를 괴롭혔습니다. 저는 그 때 ‘나 혼자
남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는 가정에서 혼자 예수님을 믿으실 때에 ‘나 혼자네!’라는 생각이 드시지 않습니까? 남편과 시댁
어르신들이 박해하실 때에 ‘나 혼자네!’ 하는 생각이 드시지 않습니까? 직장에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따돌릴 때에 ‘나
혼자네!’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괴롭지만 낙심하지 마십시오. 외롭지만 낙담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왕 중 왕’ 하나님이 창세전에 선택하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의 VIP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총애를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자신의 눈동자같이 지키십니다(슥
2:8). 여러분은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총애하시는 하나님의 선민(選民)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남은 자’입니다.
하나님은 ‘남은 자’를 구원하신다는 예언을 28절 말씀대로 “이루시고 속히 시행”하실 것입니다.
29절에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사야 1장 9절에 예언된 말씀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씨”라는 단어입니다. “씨”는 얼른 보면 한
알이지만, 그 속에 수많은 열매가 들어 있습니다. ‘남은 자’는 소수이지만 그 속에 앞으로 구원받을 많은 사람들이 들어 있습니다.
‘남은 자’에게 벅찬 희망이 있습니다.
이사야는
‘그루터기’라는 말도 사용했습니다. 이사야 6장 1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둥치가 잘리고 그루터기만 남아 있어도 후에 그 그루터기가 움이 돋고 줄기가 뻗고 꽃이 피고 많은 열매가 맺힙니다.
‘남은 자’는 ‘거룩한 씨’와 ‘그루터기’입니다. 거기서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놀라운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여기에 감격과
희망이 있습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혼자 남아 있지만, 앞으로 나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거야. 내가 지금 우리 가정에서 혼자 예수님을
믿고 박해를 받지만, 앞으로 많은 우리 가족들이 예수님을 믿을 거야. 나의 많은 후손들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과 복을 받을
거야.”
제가
양지 캠퍼스에서 가르칠 때에 어떤 여학생이 자신은 ‘나무의 썩은 그루터기 같다.’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여학생은 썩은
그루터기에서 움이 돋는 것을 보고 희망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썩은 그루터기가 움이 돋고 줄기가 뻗고 꽃이 피고
많은 열매가 맺힙니다.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박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 집안의
‘거룩한 씨’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친구들 중에 ‘그루터기’입니다. 여러분들을 통해서 여러분의 가족들과 여러분의 친구들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유다 족속 중에 피하여 남은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으리니 이는 남은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 산에서 나올 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이다”(37:31-32).
하나님이 ‘남은 자’를 구원하시는 열정은 하루 밤에 앗수르 군대 18만 5천 명을 시체로 만드시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선민을 반드시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선택하신 사람을 자신의 눈동자 같이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선택하신 ‘남은 자’가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바울은
위에서 다수가 멸망하는 중에 남은 자를 구원하시고 그 남은 자를 추수의 ‘씨’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강조했습니다.
30절부터는 시각을 달리하여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 결코 인간의 책임과 무관한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결코
인간의 책임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공존합니다. 인간의 책임이 하나님의 뜻을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책임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본문의 앞부분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부각시켰는데 이제 여기서는
인간의 책임을 부각시켰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은 결코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잡한 기계의 바퀴들이 반대 방향으로 돌지만 공동의 목적을 이룹니다.
마찬가지로 얼른 보면 반대되는 진리도 서로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어 하나님의 구원 목적을 이룹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의 주권도
기쁘게 받아들이고, 회개하고 순종하는 인간의 책임도 기꺼이 감당해야 합니다.
본문
30-31절을 보면 스스로 의(義)를 이루겠다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의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공을 쌓지도 않고 도를
닦지도 않은 이방인들은 의를 얻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이루어 놓으신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32절을 보면 유대인들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들의 행위를 의지하다가 거침돌에 부딪혔습니다. 33절에는 이사야 28장 16절 말씀이 나옵니다.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멸망의 수치를 당하지 않고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려 죽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우리의 죄는 예수님에게 넘어가서 예수님이 처리하시고, 예수님의 의는 우리에게 넘어와
우리의 의가 됩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의(義)의 전가(imputation)가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 때문에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의를
추구하던 유대인들은 거침돌에 걸려버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거침돌(stumbling block)이면서 동시에
디딤돌(stepping stone)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의롭게 사는 행위를 통해서 구원을 받겠다는 사람에게는
거침돌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이 주신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디딤돌입니다.
지금도
스스로 노력해서 구원을 받겠다는 사람에게 그리스도는 여전히 거침돌입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습니까?’라고 하면서 ‘내가
뭔가 좋은 일을 해야 구원을 받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거저 받기만 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는
사람은 그리스도라는 거침돌에 걸려 넘어집니다. 스스로 구원을 받겠다는 사람은 다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길을 내시지 않으면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내신 길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요 14:6).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피난처(sanctuary)입니다(사 8:14).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선물을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은혜로
선택하신 사람입니다.
의를 추구하는 노력을 하지 않은 자들이 의에 이르고 의를 추구하는 노력을 한 자들은 의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는 하나님의 길은 인간들의 길과 너무도 다릅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충격을 받습니다.
‘의는
믿음으로 얻는 것이다’
이것은 이상해 보여도 하나님의 구원의 길입니다. 이것을 거절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거절하는 자는 하나님을 하나님의 왕좌에서 끌어내리는 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이 되지 못하게 하는
무서운 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길이 인간의 길과 아무리 다르다 하더라도 인간의 길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여기에 구원이 있습니다.
알렉산더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은 강제 노동 수용소에 감금되어 있는 동안 지칠 대로 지쳐서 간수들이 자신을
죽이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휴식 시간에 낯선 사람이 그의 옆에 앉았습니다. 솔제니친은 전에도 그를 본 적이
없었고 후에도 다시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
낯선 사람은 막대기로 땅에 십자가를 그렸습니다. 솔제니친은 그가 그린 십자가를 뚫어지게 내려다보면서 “나는 저기에 인간의 자유가
있음을 안다”고 말했습니다. 솔제니친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우리를 위해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만 인간의 구원과 평화와 행복이 있습니다. 20세기 문학계의 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대표적인 문인
솔제니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고난당하는 소수의 남은 자’를 구원하십니다. ‘남은 자’는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하는 ‘거룩한 씨’입니다. ‘남은 자’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남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의
희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남은 자’가 되었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갈보리 언덕에 세워진 예수님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사람을 두 종류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회개한 강도와 다른 하나는 회개하지 않은 강도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서는 강도라고 합니다만 헬라어 성경에서는 "레스테스(λῃστής) 폭도"라고 합니다. 강도가 아니라 일종의 정치범과 같은 죄인을 말합니다. 두 명의 강도 중에서 회개한 강도를 "디스마" 라고 하고 회개하지 않은 강도를 "게스다"라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성경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외경이란 책에서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λῃστής, οῦ, ὁ 3027
1. 강도, 2. 폭도
발음
/ 레스테스( lēstēs) 어원/ ληΐζομαι ‘노획하다’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강도(마 21:13, 막 11:17, 고후 11:26)
신약 성경 / 15회 사용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당시 사람들의 조롱을 살펴봅시다.
(지나가는 사람들)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태 27:39-40).
(대제사장, 서기관)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빠하시면 저를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두 강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회개한 강도) 우리는 죄값에 의해서 십자가 형을 받지만 이 사람은 죄가 없도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하여 주십시오. (누가복음 23:42)
종의 영(프뉴마 둘레이아스) πνεῦμα δουλείας
양자의 영(프뉴마 휘오데시아스) πνεῦμα υἱοθεσίας
1절 /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There is no condemnation! 우덴 카타크리마(οὐδέν κατάκριμα)
기독교 신앙은 자신이 죄인 됨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하신 로마서
3:10-12의 선언은 이신득의 곧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기독교 진리의 전제가 됩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인입니다. 세상 법정에서는 죄를 많이 지은 사람, 적게 지은 사람, 끔직한 죄를 지은
사람, 좀 가벼운 죄를 지은 사람 등으로 죄인들을 구별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하나님 앞에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마치 밤중에는 촛불과 전등불이 그 밝기에 있어서 큰 차이가 나는 것 같지만, 밝은 태양빛 아래서는 둘 다 아무런 존재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이 가진 의로움이란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정에서 모든 인간이 “죄의 삯은
사망이라”(롬 6:23) 하신 율법에 의해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골고다 언덕 위에 두 강도 사이에 높이 세워졌던 주님의
십자가는 사실인즉 저와 여러분이, 아니 전 인류가 달려야 할 십자가인 것입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서 두 강도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처음에는 두 강도도 예수님을 조롱하고 욕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한 강도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강도는
모든 사람이 입에 거품을 물고 비웃고 욕하고 대적하는 마당에도 묵묵히 그 모든 모욕을 참으실 뿐 아니라 오히려 저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말할 수 없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분은 보통 분이 아니구나, 이 분이야말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구나.”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조상 적부터 신앙생활을 해 왔고 성경을 들어왔기 때문에 메시야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있었습니다. 비록 강도가
되었을망정 태어날 때부터 강도였던 것은 아니니까요. 그런데 십자가에 달렸을 때 성령님께서 이 강도의 영안을 열어 주셨던 것이지요.
그러자 이 강도는 비로소 십자가에 달려 고난당하시는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 강도는 다른 강도가 예수님을
비방하며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하였을 때 그 동무를 꾸짖었습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그런 다음, 그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즉시로 그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두 강도가 똑같이 흉악한 죄를 저질렀고 그 죄 값으로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며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구원을
받았고, 다른 한 사람은 멸망을 당했습니다. 두 사람이 시작은 같았으나 그 결과는 천양지차가 나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이 같은
결과가 나오게 된 원인이 무엇일까요?
첫 번 째로, 회심한 강도는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이 강도는 예수님을 비방하는 동료를 향하여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고 나무랐습니다. “네가
일생에 지은 죄도 많은데 마지막 죽어가면서까지 이 거룩한 분을 비방하다니 너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어떻게 당하려고
그러느냐?”고 책망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마음이야말로 믿음의 기초가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함부로 죄를 짓지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물마시듯 죄를 짓는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존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존재하시며 불꽃같으신 눈으로 모든 인생을
살피십니다.
이 강도는 하나님의 심판을 예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날 아무 준비도 없이 종말을 맞이한다는 사실이 두려웠으며, 바로 이 두려움이 그를 회개의 단계에 이르게 하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세상 유혹을 받아 죄 짓는 자리에 서게 되었을 때 엄위하신 하나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여러분을 죄 짓는 자리에서 떠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두려워 할 때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다른 한 강도는 십자가에 달려서도 사람들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그 강도는 그곳에 모여든 사람들과 한편이 되어서
예수님을 조롱하고 욕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그를 구해 줄 것도 아닌데 말이지요.
그러나 회심한 강도는 사람들의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떳떳하게 예수님을 향하여 신앙을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인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 10:32-33)고 하셨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유익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생명의 샘이라.”(잠 14:27) 하신 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 째로, 회심한 강도는 자기가 받는 형벌을 정당하다고 인정했습니다.
이 강도는 처음 십자가에 달렸을 때만 해도 억울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기보다 더 나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데 곁에서
고난 받으시는 예수님을 대하면서 그의 마음에 변화가 일었습니다. 과연 자기는 죽을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제 죄를 깨닫지 못하고 분위기에 편승해서 덩달아 예수님을 조롱하는 다른 강도를 보고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다.”고 했습니다.
어느 임금이 감옥엘 시찰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죄수 한 사람 한 사람을 면담하면서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죄수들은 하나같이 죄가 없는데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왔노라고 하소연했습니다. 그런데 죄수 하나가
줄곧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는 정말 몹쓸 죄를 지었으므로 감옥살이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 그 임금은 그 회개하는
죄수의 등을 채찍으로 후려치면서 “너 같은 죄인은 결백한 사람만 있는 이곳에 있을 자격이 없다.”고 하면서 바깥으로 내쫓았다고
합니다. 지옥에 가면 이곳저곳에서 ‘억울하다’는 소리가 진동할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사람은 자기 죄를 인정하고 그 대가를 달게 받습니다.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재산을 달라고 하여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여 다 허비한 둘째 아들을 보십시오. 나중에 그가 빈털터리가 되어 들에서 돼지치기가 되어 쥐염 열매조차 배불리 먹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을 때, 드디어 회심하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가 아버지를 만나서 드린 첫 말씀은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이제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죄 지은 것을 원통히 여기고 눈물로 뉘우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세 번 째로, 회심한 강도는 예수님의 무죄하심을 믿었습니다.
이 강도는 예수님에 대하여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예수님의 행적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고 있었는지는 모릅니다. 어쩌면 이 강도는 예수님께서 그를 저주하고 욕하고 비웃는 자들을 향하여 비난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고 그의 무죄하심을 믿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성령님께서 이 사람의 마음에 이와 같은 사실을 깨닫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죄가 있다면 우리의 구세주가 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죄인이
죄인을 속량할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무죄성은 구세주의 기본적인 자격 요건인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여자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셔서 탄생하셨으므로
죄가 없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독생자로 믿고 고백하는 것은 곧 예수님의 무죄하심을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무죄하신 예수님에게 온 인류의 죄를 다 걸머지게 하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대속의 죽음을 당케 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고난당하실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4-6)
복음서를 읽어보시고, 거기 기록된 예수님의 모습을 마음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거룩하시되 우리와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고
죄인들의 친구가 되시는 주님. 인자하시고 사랑이 많으시되 속되지 않으시며 하나님의 아들의 위엄을 지니신 주님. 인격적이나 편협하지
않으신 주님의 모습을 대하면서 이 강도와 같이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네 번 째로, 회심한 강도는 예수님께 자신을 의탁했습니다.
이 강도는 예수님을 향하여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는 감히 자기를 낙원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지 않고 단지 자기를 생각해 달라고만 했습니다. 어떤 식으로 기억하시든지 그것은 예수님께 다 맡겼습니다.
로마 당국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고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배척당하시고 골고다 언덕 위에서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며 죽어 가는
예수님을 향하여 이 강도가 자기 영혼을 부탁하였다는 사실은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강도가 이처럼 예수님께
자신을 맡길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에게 더할 수 없는 행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직 생명이 남아 있을 때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사실처럼 이 강도에게 복스런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평생에 걸쳐서 예수님에 대하여 전해 들으면서도 마음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지내다가 멸망으로 떨어지는 마당에 이
강도는 십자가에 달렸던 짧은 시간에 구세주를 믿고 영생을 보장받았으니 복 받은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강도는 오랜 시간에 걸쳐서 사정하고 애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이
말을 하는 데는 아무리 천천히 말할지라도 십 초가 채 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이 강도는 영생을 얻었습니다. 친절하게도
예수님께서 그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영생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은 오랜 세월이 소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죽는 그 순간에 예수님을 영접하더라도 구원을 받게 됩니다. 기독교
교리에 관하여 많은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할지라도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잘 알지 못해도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0장 9절로 10절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하신 대로, 나사렛 예수를
주요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아직도 주님을 믿지 않으시는 부모님이 계시거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예수님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
하신 말씀과 같이, 우리는 일단 전하는 일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전할 때 처음에는 핍박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완고한
분들은 그러려면 부모 자식의 의리도 끊겠다고 협박하기도 합니다. 그렇더라도 계속 전하십시오. 그래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게 됩니다.
병상에 누워서, 임종을 기다리면서 여러분이 전해 주신 말씀을 기억하고 이 강도와 같이 예수님을 부르고 예수님의 손에 자신의
영혼을 의탁하게 될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이 강도가 지옥에 떨어지려던 순간에 회개하고 주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것은 비유컨대 불 가운데서 구원받은 것과 같습니다. 아니면
무너진 건물 무더기 속에서 건짐 받은 것과도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것과 받지 못한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보다 더 큰
것입니다. 하나는 영생이요 하나는 영벌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나도 좀 더 늙어서 예수님을 믿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는, 그것은 정말 위험하기 짝이 없는 생각입니다. 누구나 다 이 강도와 같은 행운을 만날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사람은 저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가 따로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6:2에 보니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이라는 시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강도에게는 십자가에 달려 죽어 가던 그 순간이 그에게 주어진 구원의 기회였으며, 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았던 것입니다. 반면에 다른 한편 강도는 그 마지막 기회를 놓쳐 버리고 멸망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한편,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는 기도 속에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 강도의 믿음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 나라는 지상의 나라가 아니요 영원한 천국을 말합니다. 다른 편 강도는 예수님을 비방하여 말하기를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죽어가는 마당에서도 이 세상에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단지 육신의 삶만을
바랐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잘되고 윤택한 생활을 영위해야 하겠지만, 그러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 나라여야 합니다. 로마서
14:17에 보니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 주 예수님께서 통치하시는 거룩한 나라요 영적인 나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께서는 이 땅의 축복보다 영적인 축복, 곧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더욱 큰 관심을 갖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 연후에 이 땅의 축복도 구하십시오. 이 순서가 올바로 되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진실된 성도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강도를 통해서 우리는 회개와 믿음의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둘 다 동일한 죄를 짓고
세상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 가는 순간에, 한 강도는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고, 또
한 강도는 끝까지 완악한 마음을 버리지 못하다가 멸망을 받고 말았습니다.
구원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무조건적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인데도 받아 누리지 못한다면 이처럼 아쉽고
후회막급한 일이 달리 어디에 있겠습니까? 구원받는데 우리의 공로나 노력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진심으로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이 진리는 매우 단순하지만, 이 진리를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의 결과는 영생과 영벌로,
천국과 지옥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구원이 무조건적으로 주어졌다고 가벼이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얻은 구원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대가로
지불하고서 얻은 것입니다. 온 우주보다도 더 크고 막대한 대가를 지불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2:3에는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라고 한 것입니다.
본문을 읽는 사람들은 누구나 십자가상에서 회심하고 구원받은 이 강도를 부러워할 것입니다. 이 강도는 정말 행운아입니다. 너무나
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성도님들이야말로 이 강도보다 수백배 수천배 더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강도는 불타는 건물잔재에서 겨우 건짐 받은 것에 불과하지만 성도님들께서는 이미 구원을 보장받고서 영원한 천국의 상급을 준비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니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성도님들 모두, 이 큰 구원의 은총을 받은 자답게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을까를 생각하시면서 봉사와 전도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종의 영에 붙잡혀 시달리던 저희들을 사랑하셔서 양자의 영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후로는 아버지 하나님의 은총을 힘입어 주의 거룩한 백성답게 살아가도록 지혜와 믿음을 더항 주시고 마지막까지 인내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한 책망 -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새번역) 너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실상 너는, 네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
신약 성경 / 2회 사용
* 로마서 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마태복음 22:37-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율법과 우리의 관계가 분명해진다.
마태복음 5:17-18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하나님의 율법은 의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제시한다.
갈라디아서 2:15-16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전도서 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율법과 죄의 관계는 무엇인가?
요한일서 3: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모든 율법을 다 지킬 필요가 있는가?
야고보서 2:10-11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계명을 지키지 않고도 하나님을 알 수가 있는가?
요한일서 2:4-6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율법의 목적은 무엇인가?
로마서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을 지킴으로써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는가?
로마서 3:27-31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613계명은 유대교에서 지키는 율법으로 유대민족의 출애굽과정에서 광야를 떠돌아다니던 시절 모세가 기록한 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을 세분화한 것이다.
두 가지 버전이 있는데, "하라"는 긍정적인 형태로 된 계명 248개와, "하지 말라"고 하는 부정적인 형태로 된 금지 계명 365개로 편집된 버전과 모세오경의 순서대로 편집된 버전이다.
성경순서대로 편집된 버전은 다음과 같다.
창세기 (1~3계명)
1. "생육하고 번성하라"(창 1:28).
2. 모든 유대인 남자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창 17:10).
3. 환도뼈의 큰 힘줄을 먹어서는 안 된다(창 32:32).
출애굽기 (4~114계명)
4. "이 달을 한 해의 첫째 달로 삼아서, 한 해를 시작하는 달로 하여라"(출 12:2).
5.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니산 월 14일 오후에 흠이 없는 1년된 수양이나 숫염소를 잡아야 한다 (출 12:5-6).
6. 유월절 양으로 바친 제물은 니산 월 15일 밤에 먹어야 한다(출 12:8).
7. 유월절에 먹는 양고기는 날로 먹거나 삶아 먹어서는 안된다(출 12:9).
8. 유월절 양고기는 다음 날까지 남겨서는 안된다(출 12:10).
9. 유월절에는 누룩을 제거해야 한다(출 12:15).
10. 누룩없는 떡(무교병)을 니산 월 15일에 먹어야 한다(출 12:18).
11. 유월절 기간동안에는 누룩으로 만든 떡을 먹어서는 안된다(출 12:19).
12. 유월절에는 조금이라도 누룩이 섞인 떡을 먹지 말라(출 12:20).
13. 변절한 유대인이나 이교도들은 유월절 양을 먹지 못한다(출 12:43).
14. 임시로 거주하는 타국인이나 고용된 타국인 품꾼도 유월절 양을 먹지 못한다(출 12:43).
1. 물고기, 2. δύο ὀψάρια, 3. 요 6:9. 공관복음서에서는 δύο ἰχθύας로 되어있음
발음
/ 옾사리온(ŏpsariŏn)
어원/ 3702의 어간의 파생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작은) 물고기(요 6:9), 생선(요 21:9, 10, 13)
신약 성경 / 5회 사용
* 3702. ὀπτός ὀπτός, ἡ, όν 3702
1. 구운, 2. 삶은, 3. 누가 24:42
발음
/ 옾토스(ŏptŏs)
어원 / ‘담그다’와 유사한 동사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구운(눅 24:42)
신약 성경 / 1회 사용
삯은 군사들이 복무하는 동안 받는 급료. 군인은 철저하게 명령에 복종하여야 하듯 죄의 삯은 철저하게 죄에 복종하므로 얻는 댓가로 그 결과는 죽음이라는 것.
은사. 5486. χάρισμα
χάρισμα, ατος, τό 5486
1. 선물, 2. 은사, 3. 부여된 은총
발음
/ 카리스마(charisma)
어원 / 548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은사(롬 1:11, 고전 7:7, 딤전 4:14), 선물(롬 5:16).
신약 성경 / 17회 사용
전쟁서 패망한 줄도 모르고 땅굴 속에서 '28년' 동안 숨어 지낸 일본 군인
한 일본군이 적에게 목숨을 빼앗길까 두려워 28년 동안 땅굴 속에 숨어 살다 발각돼 세상에 존재를 드러냈다.
1915년 일본 아이치현에서 태어난 요코이는 제2차 대전 발발로 1944년 괌에 일본군 병장으로 배치됐다. 같은 해 미군이 괌을 점령하면서 일본군 2만 명이 전사했다. 당시 살아남은 대부분의 일본군은 보급이 끊기면서 굶어 죽거나 항복했다. 하지만 요코이와 동료 2명은 항복을 하는 대신 산속으로 도망쳐 땅굴을 파 숨어 살았다. 이들은 낮에는 땅굴에 숨어있다가 밤이 되면 작은 물고기를 잡거나 열매를 따다 배를 채우곤 했다. 군복이 낡아 찢어지자 요코이는 나무껍질의 섬유질로 직접 옷을 만들어 입기도 했다. 열악한 환경 속에 같이 숨어 살던 동료 두 명은 8년 만에 목숨을 잃었다. 요코이는 끈질긴 생존능력으로 28년을 땅굴에서 생존했다. '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지 말라'는 일분군의 전진훈(戰陣訓)을 지키기 위함이었던 것.
요코이 쇼이치는 일본이 전쟁에서 패해 항복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1952년 종전했다는 미군의 전단을 발견했지만, 항복은 치욕이라며 계속 동굴 생활을 하기로 선택했다. 그러던 1972년, 섬에 살던 주민들이 요코이의 모습을 보고 경찰에 신고하면서 그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나게 됐다. 당시 요코이는 오랜 시간 사람과 대화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미 말하는 법을 잊은 지 오래였고, 동굴에서 숨어 살았던 탓에 똑바로 서서 걷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그는 3개월 동안 치료를 받은 후에야 언어능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후 일본으로 귀환한 요코이는 첫 인터뷰에서 "부끄럽게도 살아 돌아왔습니다"라고 말했다.
여전히 자신을 군인이라 여긴 요코이는 살아서 나라로 돌아오는 것을 치욕이라 생각한다며 눈물까지 보였다. 일부 현지 언론에서는 요코이의 탈영 의혹을 제기했으나 시민들은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그를 영웅이라 칭하며 환대했다.
이후 요코이는 일본 정부에서 지급한 보상금으로 평범한 생활을 시작하며, 결혼하며 가정을 꾸리다가 1997년 83세 나이에 심장병으로 삶을 마감했다.
아담은 930세를 향수하고 죽었다(창세기 5:4-5)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 삼십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셋째는 아담은 흙에 생기가 들어가므로 산 영이 되었다(고린도전서 15:45)
-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예수께서는 성령이 마리아라는 흙속에 들어가서 생명이 되셨다.
아담(흙 + 생기), 예수(마리아 + 성령)
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마태복음 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라는 말과 창세기 2장 7절의『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그 흙으로
만든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라는 그 말과 아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특별히 누가『당신은 죄를 지었소이다, 죄인이요』이런 말을
하지 않아도 기독교인이면 다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생각한다. 다윗이 시편에서『하나님 앞에서 모두 죄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교회다니는 사람들은 대개 자기가 죄인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다 자기가 죄인이라고 생각하지만 무슨 죄를 졌기에 죄인인가 라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땅에서 일어나는 일, 세상에서 행한 자기 행위 만을 가지고 죄를 논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께 돌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도 알지못하는 사이에 다 죄인이 되었다. 나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교회의 가르침에 의해서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죄인이라고 생각한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은『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기 때문에 아담의 모든 후손들이 다 죄인이 되었다』 라고 가르친다.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그 후손들이 다 죄인이 되었다 라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인 것이다. 로마서 5장 12절에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이렇게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말을 한다. 로마서 5장 19절에『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있는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라고 사도바울이 말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5장
22절에 보면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라고 했다. 아담 안에서『모두
죽었다』 라는 것이다. 아담 한 사람이 범죄하므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고,『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왕노릇하게 되었다』라고 교회가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아담은 모든 사람의
비난의 대상이 된 것이다. 모든 세상 사람들을 다 죄인으로 만드는 그런 사람이 된 것이다. 교회다니는 사람이나 교회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우리가 왜 죄인인가? 라고 말을 한다면 아담의 원죄를 말한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그 후손들이 다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아담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아담의 후손이 죄를 전가받아서 다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신명기에 죄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율법을 주시면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식들 때문에 아비가 죽거나 아비 때문에 자식이 죽는 일은 있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예레미야 31장
30절에 보면『신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 이가 신같이 각기 자기 죄악으로만 죽으리라』했다. 에스겔서 18장 2-4절에 보면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비가 신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찜이뇨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라고 했다. 이 말은『아담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므로 모든 후손이 다 죄인이다』라는 말은 성립이 안된다 라는 것이다. 예레미야 31장 30절은『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주실텐데 새 언약은 옛 언약과 같지 않고 새 언약은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에 기록하고, 그 생각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 즉 하나님의 언약 속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들은 다 죽게되고 하나님의 언약 속에 들어온 사람들은 다 사는
것이지 너희가 말하는 대로 아비가 잘못해서 자식이 죽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인간이 아담 때문에 죄인이 되었고, 아담 때문에 내가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아서 죽는다』라는 생각은 전혀 아무런 근거도
없고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로마서 5장 12-21절에는 그런 뉘앙스가 많이 풍긴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다. 로마서 5장
12절을 살펴보면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에서『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라는 표현에서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말씀하고 있다. 즉『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생긴 것이 아니고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라고 말하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세상에 들어왔다』라고 말하는 것은 세상 밖으로 부터 들어온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다른 세상 밖이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나라 만이 존재했는데, 세상 밖으로 부터 들어왔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로 부터 죄가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잘못 이해하면 원래는 세상에 죄가 없었는데 죄가 세상 밖에서 들어왔다고 오해할 수
있다. 인간이 사는 세상은 죄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죄가 없다. 하나님 나라에서 죄가 발생하면 바로 쫒겨난다. 바로
쫒겨난 곳이 이 세상이며 그 하나님 나라에서 발생한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온게 아담을 통로로 해서 들어온 것이다. 세상 밖에서
아담을 통하여 세상 안으로 들어온 것이라고 사도바울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은 본래 죄가 없는데 죄가 들어와서 악한 상태가 되고 멸망당할 수 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생각은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창조의 목적이 있다고 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죄가 없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죄가
발생하면 하나님의 나라도 이 세상처럼 죄가 만연해서 더러운 하나님의 나라로 될 것 같은가? 아니고 죄가 쫒겨나는 것이다. 죄가
들어온 이 세상은 죄가 만연될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이 없는 상태로 창조된 것이다. 하나님은 죄와 더불어 함께 유하실 수 없는
분이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인데 왜 하나님이 안계시고 간섭을 하지않는가 반문할 수 있다. 이 세상은 감옥과 같은 곳으로서
하나님이 안계신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나타내신 것은 다 그림자로서 보여주신 것이다. 물리적 빛도 하나님의 빛에 대한
그림자이고,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에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신 것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신데 인간에게 보여지는
하나님으로 오신 것이다. 그 분이 예수님이시다. 그래서 이 세상은 죄가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세상 밖으로 부터 아담을 통로로
해서 세상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에서 이와
같이 라는 말은『아담을 통로로 해서 죄가 세상 밖으로 부터 세상으로 들어온 것 같이』라는 말이다. 모든 사람이 같은 방법으로 죄가
들어오게 된 것이다. 아담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므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 밖으로부터 세상으로 들어온 것 같이 모든 인간이 다 그렇게 죄가 들어왔으므로 아담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므로 범한 죄가 후손에게 전하게 된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은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는 말의 모든 초점을 에덴동산에 맞추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는 말을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우리에게 설명을 해 주는데, 12절에 『이러므로』라고 이야기한 것을
주목해야 한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말한다. 로마서 5장 6절에서 11절까지 살펴보면『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않고 선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정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리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
하느니라』사도바울이 로마서 5장 12절에서『이러므로』라고 말했는데, 앞에 있는 내용을 받는다. 앞에 있는 내용은 로마서 5장
6-11절의 내용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 우리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대속죄물로 주셔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
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에 조차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확정하셨다 라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라는 것이다.『하나님의 사랑하는 방법』이
바로『이러므로』라는 것이다. 『이러므로』는 앞 문장의 원인에 대해서 그 결과를 말할 때『이러므로』를 사용할 때가 많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러한 방법으로 라고 생각해야 한다.『이러므로(이러한 방법으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에서 즉, 앞의 로마서 5장 6-11절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가 대속제물로 인간을 대신해서 죽는 그런
방법으로 아담이 세상에 죄를 가지고 들어왔다는 것이다. 로마서 5장 14절에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범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모든 사람이 아담과 같이 죄를 가지고 이 세상에
들어왔으며, 아담은 대속제물인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방법으로 세상에 죄를 가지고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로마서 5장 14절에
아담의 후손은 아담과 같은 범죄를 짓지 않았다고 한다. 교회사람들은 아담 때문에 죄인이 되었다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되었다고 하는데, 아담의 후손은 아담과 같은 범죄(법을 어긴 것)를 짓지 않았다는 것이다. 로마서 5장
14절에서 아담의 후손들도 사망이 왕노릇 했다고 한다. 아담의 후손들이 아담과 같은 그런 범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사망이 저희들
위에 왕노릇 했다는 것이다. 즉 아담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해졌다. 아담과 같은 죄를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이 저희들 위에서 왕노릇 했다는 것이다. 아담의 후손들이 죽는 것은 아담 때문이 아니라 지신들의 죄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세상에서도 연좌제 같은 것을 없애고 있는데, 하나님을 연좌제를 하시는 분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는 말은 판박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는 도장을 찍을 때 같이 나오는 그런
의미의 판박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아담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내용을 다 무시하고 아담을
죄인의 대명사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와 그리스도는 하나다. 아담과 하와도 본래 하나다. 에베소서 5장 30-32절에서
사도바울이 아담과 하와의 관계는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에게서 하와가 나온 것에 대해서 아담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요, 하와는 교회를 상징한다고 말한바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아담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사도바울은『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하여 말하는데 이 비밀이 크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스도와 교회가
하나였는데,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에덴동산을 통해서 볼 때, 아담이 왜 세상에 왔는가? 자기 지체 즉
교회를 구하기 위해서 온 것을 말해준다. 그 지체가 왜 세상에 왔는가? 그 지체인 교회를 상징하는 하와는 교회사람들이
에덴동산에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만일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라고 하면서
이것이 큰 비밀이라고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아담은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아담은 죄의 대명사인데 그리스도는 구원의 대명사이다.
구원의 대명사는 모든 죄를 다 짊어지고 가신 것이다. 아담은 인간에게 다 죄를 주고 갔는데, 예수님은 죄를 다 가져가셨다 라고
한다면 서로 짝이 안맞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모든 죄를 다 짊어졌는데, 아담도 뭔가 다 짊어져야 맞는 말이다. 아담은 하나님
나라에서 죄를 짊어지고 최초로 육체 속에 들어와 육체의 생명체로서 죄의 통로 역할을 한 것이다.
고린도전서 15: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기록된 바는 성경에 기록된 것같이 라는 것이고, 산영은 창세기 2장 7절에 생령이라는 말로, 생명체라는 의미이다. 아담이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모든 책임을 지고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올 때, 육체 안에 들어가는 것은 흙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흙
속에 들어간 아담은 그 영이 죽은 것이다. 영이 흙 속에 들어가면 영은 죽고 흙이 생명체가 된다. 영들이 하나님의 처소를 벗어나서
하나님을 떠나겠다고 하니까,『가라』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처소를 벗게 하고 세상의 처소인 흙을 덧입혀 주는 것이다. 하늘의 처소도
싫고 세상의 처소도 싫다고 입지 않은 영들은 말하자면 귀신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은 육체의 생명이 된 것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생령이라는 표현 때문에 혼란이 있는데, 생령은 살아있는
생명체를 말한다고 언급한 바가 있다. 다시 말해서 첫 아담은 육체적 생명체가 되었고, 마지막 아담은 살리시는 영이 되어, 영생을
얻게되었다 라는 말이다. 아담은 범죄한 자들의 육체적 생명체의 통로로,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는 영생의 통로로 된다는
말씀이다. 생명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같은 위치에서 바라보는 것이 맞는 말이다. 아담이 범죄한 영들의 책임을 지고 최초로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와서 자기를 따라 오는 모든 범죄한 영들이 종국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영생을 아담 안에서는 육체의 생명을 이어가게 하는 것이다. 육체의 생명을 얻지않으면
그리스도의 영생도 없는 것이다. 아담을 통한 육체의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약속하는 의미를 담고있다.
관련 성경 / 때리다(마 24:49, 눅 12:45, 행 18:17), 치다 (마 27:30, 눅 22:64, 행 23:3), 상하게 하다(고전 8:12)
신약 성경 / 13회 사용
오실. 3195 멜로(μέλλω)
1. ~에 일어날 것이다, 2. ~하려고 하다, 3. ~하게 되어 있다
발음
/ 멜로(mĕllō)
관련 성경 / 임박하다(마 3:7), 오다(마 12:32, 16:27), 하려 하다(마 2:13) 신약 성경 / 109회 사용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
창세기 2:7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그 흙으로
만든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아담은 흙 속에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가므로 살아있는 혼이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후손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은 역시 혼을 갖는다. 아담이 죄로 인하여 죽은 것처럼 모든 사람들도 역시 죽음을 경험해야 합니다. 죽음이란 죄의 결과라고 합니다.
창세기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기독교인은 누구나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죄인이라고 생각하지만 무슨 죄를 지었기에 죄인인가 라는
것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땅에서 일어나는 일, 세상에서 행한 자기 행위 만을 가지고 죄를 논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께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죄는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기 때문에 아담의 모든 후손들이 다 죄인이 되었다."고 가르칩니다.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그 후손들이 다 죄인이 되었다 라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로마서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로마서 5: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있는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고린도전서 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아담 안에서모두
죽었다는 것은 아담 한 사람이 범죄하므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고,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왕노릇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모든 사람의
비난의 대상이 된 것이다. 모든 세상 사람들을 다 죄인으로 만드는 그런 사람이 된 것이다. 교회다니는 사람이나 교회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우리가 왜 죄인인가? 라고 말을 한다면 아담의 원죄를 말한다.
아담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아담의 후손이 죄를 전가받아서 다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신명기에 죄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율법을 주시면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식들 때문에 아비가 죽거나 아비 때문에 자식이 죽는 일은 있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예레미야 31장
30절에 보면『신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 이가 신같이 각기 자기 죄악으로만 죽으리라』했다.
에스겔서 18장 2-4절에 보면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비가 신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찜이뇨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
이 말은『아담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므로 모든 후손이 다 죄인이다』라는 말은 성립이 안된다 라는 것이다.
예레미야 31장 30절은『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주실텐데 새 언약은 옛 언약과 같지 않고 새 언약은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에 기록하고, 그 생각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 즉 하나님의 언약 속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들은 다 죽게되고 하나님의 언약 속에 들어온 사람들은 다 사는
것이지 너희가 말하는 대로 아비가 잘못해서 자식이 죽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인간이 아담 때문에 죄인이 되었고, 아담 때문에 내가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아서 죽는다』라는 생각은 전혀 아무런 근거도
없고 잘못된 것이다.
로마서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는 표현에서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말합니다.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생긴 것이 아니고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말하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세상에 들어왔다고 말하는 것은 세상 밖으로 부터 들어온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다른 세상 밖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나라 만이 존재했는데, 세상 밖으로 부터 들어왔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로 부터 죄가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잘못 이해하면 원래는 세상에 죄가 없었는데 죄가 세상 밖에서 들어왔다고 오해할 수
있다. 인간이 사는 세상은 죄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죄가 없다. 하나님 나라에서 죄가 발생하면 바로 쫒겨난다. 바로
쫒겨난 곳이 이 세상이며 그 하나님 나라에서 발생한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온게 아담을 통로로 해서 들어온 것이다. 세상 밖에서
아담을 통하여 세상 안으로 들어온 것이라고 사도 바울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창조의 목적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죄가 없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죄가
발생하면 하나님의 나라도 이 세상처럼 죄가 만연해서 더러운 하나님의 나라로 될 것 같은가? 아니고 죄가 쫒겨나는 것이다. 죄가
들어온 이 세상은 죄가 만연될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이 없는 상태로 창조된 것이다. 하나님은 죄와 더불어 함께 유하실 수 없는
분이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인데 왜 하나님이 안계시고 간섭을 하지않는가 반문할 수 있다. 이 세상은 감옥과 같은 곳으로서
하나님이 안계신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나타내신 것은 다 그림자로서 보여주신 것이다. 물리적 빛도 하나님의 빛에 대한
그림자이고,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에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신 것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신데 인간에게 보여지는
하나님으로 오신 것이다. 그 분이 예수님이시다. 그래서 이 세상은 죄가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세상 밖으로 부터 아담을 통로로
해서 세상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아담을 통로로 해서 죄가 세상 밖으로 부터 세상으로 들어온 것 같이 모든 사람이 같은 방법으로 죄가
들어오게 된 것이다. 아담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므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 밖으로부터 세상으로 들어온 것 같이 모든 인간이 다 그렇게 죄가 들어왔으므로 아담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므로 범한 죄가 후손에게 전하게 된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12절)
로마서 5장 6절에서 11절까지 살펴보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않고 선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정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리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
하느니라.
사도 바울이 로마서 5장 12절에서『이러므로』라고 말했는데, 앞에 있는 내용을 말합니다. 앞에 있는 내용은 로마서 5장
6-11절의 내용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 우리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대속죄물로 주셔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
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에 조차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확정하셨다 라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라는 것이다.『하나님의 사랑하는 방법』이
바로『이러므로』라는 것이다. 『이러므로』는 앞 문장의 원인에 대해서 그 결과를 말할 때『이러므로』를 사용할 때가 많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러한 방법으로 라고 생각해야 한다.『이러므로(이러한 방법으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에서 즉, 앞의 로마서 5장 6-11절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가 대속제물로 인간을 대신해서 죽는 그런
방법으로 아담이 세상에 죄를 가지고 들어왔다는 것이다. 로마서 5장 14절에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범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모든 사람이 아담과 같이 죄를 가지고 이 세상에
들어왔으며, 아담은 대속제물인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방법으로 세상에 죄를 가지고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로마서 5장 14절에
아담의 후손은 아담과 같은 범죄를 짓지 않았다고 한다. 교회사람들은 아담 때문에 죄인이 되었다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되었다고 하는데, 아담의 후손은 아담과 같은 범죄(법을 어긴 것)를 짓지 않았다는 것이다. 로마서 5장
14절에서 아담의 후손들도 사망이 왕노릇 했다고 한다. 아담의 후손들이 아담과 같은 그런 범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사망이 저희들
위에 왕노릇 했다는 것이다. 즉 아담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해졌다. 아담과 같은 죄를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이 저희들 위에서 왕노릇 했다는 것이다. 아담의 후손들이 죽는 것은 아담 때문이 아니라 지신들의 죄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세상에서도 연좌제 같은 것을 없애고 있는데, 하나님을 연좌제를 하시는 분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는 말은 판박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는 도장을 찍을 때 같이 나오는 그런
의미의 판박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아담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내용을 다 무시하고 아담을
죄인의 대명사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와 그리스도는 하나다. 아담과 하와도 본래 하나다. 에베소서 5장 30-32절에서
사도바울이 아담과 하와의 관계는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에게서 하와가 나온 것에 대해서 아담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요, 하와는 교회를 상징한다고 말한바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아담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사도바울은『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하여 말하는데 이 비밀이 크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스도와 교회가
하나였는데,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에덴동산을 통해서 볼 때, 아담이 왜 세상에 왔는가? 자기 지체 즉
교회를 구하기 위해서 온 것을 말해준다. 그 지체가 왜 세상에 왔는가? 그 지체인 교회를 상징하는 하와는 교회사람들이
에덴동산에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만일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라고 하면서
이것이 큰 비밀이라고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아담은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아담은 죄의 대명사인데 그리스도는 구원의 대명사이다.
구원의 대명사는 모든 죄를 다 짊어지고 가신 것이다. 아담은 인간에게 다 죄를 주고 갔는데, 예수님은 죄를 다 가져가셨다 라고
한다면 서로 짝이 안맞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모든 죄를 다 짊어졌는데, 아담도 뭔가 다 짊어져야 맞는 말이다. 아담은 하나님
나라에서 죄를 짊어지고 최초로 육체 속에 들어와 육체의 생명체로서 죄의 통로 역할을 한 것이다.
고린도전서 15: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기록된 바는 성경에 기록된 것같이 라는 것이고, 산영은 창세기 2장 7절에 생령이라는 말로, 생명체라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아담이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모든 책임을 지고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올 때, 육체 안에 들어가는 것은 흙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흙
속에 들어간 아담은 그 영이 죽은 것이다. 영이 흙 속에 들어가면 영은 죽고 흙이 생명체가 된다. 영들이 하나님의 처소를 벗어나서
하나님을 떠나겠다고 하니까,『가라』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처소를 벗게 하고 세상의 처소인 흙을 덧입혀 주는 것이다. 하늘의 처소도
싫고 세상의 처소도 싫다고 입지 않은 영들은 말하자면 귀신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은 육체의 생명이 된 것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
생령이라는 표현 때문에 혼란이 있는데, 생령은 살아있는
생명체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첫 아담은 육체적 생명체가 되었고, 마지막 아담은 살리시는 영이 되어, 영생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담은 범죄한 자들의 육체적 생명체의 통로로,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는 영생의 통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생명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아담이 범죄한 영들의 책임을 지고 최초로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와서 자기를 따라 오는 모든 범죄한 영들이 종국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영생을 아담 안에서는 육체의 생명을 이어가게 하는 것이다. 육체의 생명을 얻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영생도 없습니다. 아담을 통한 육체의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약속하는 의미를 담고있습니다.
7월 23일(토) 복(福) 있는 사람(로마서 4: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Blessed is the man whose sin the Lord will never count against him.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 방법 / 도 사 등 기 덮어버리다
1. 도말하신다(시편 51:9)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Hide your face from my sins and blot out all my iniquity.
2. 기억하지 않는다(이사야 64:9)
여호와여 과히 분노하지 마옵시며 죄악을 영영히 기억하지 마옵소서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 .
Do not be angry beyond measure, O LORD; do not remember our sins forever. Oh, look upon us, we pray, for we are all your people.
3. 등 뒤로 던져 버린다(이사야 38:17)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내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내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Surely it was for my benefit that I suffered such anguish. In your love you kept me from the pit of destruction; you have put all my sins behind your back.
4. 덮어버린다(시편 85:2)
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저희 모든 죄를 덮으셨나이다. You forgave the iniquity of your people and covered all their sins. Selah
5. 사하신다(골로새서 2:13)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When you were dead in your sins and in the
uncircumcision of your sinful nature, God made you alive with Christ. He
forgave us all our sins.
7월 22일(금) 믿음의 법(로마서 3:27)
믿음의 법은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 것이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게 하므로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인간 존재의 부패함은 목구멍은 열린 입술이요 혀로는 끊임없이 속이고,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는 사람의 말의 악함과 부패함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그 마음에 담은 악, 죄의 경향성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마음에서 나온 말들이 실제 행위를 통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발은 피를 흘리는 데 빠른, 해서는 안 될 일들을 지금 하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되는 부패함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죄악이 바로 하나님을 두려함이 없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결론은 하나님 앞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인간의 부패하고 타락한 상황이라고 하겠습니다.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19절)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 앞에 온 세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23절)
성경은 인간에게 소망이 없음을, 인간의 행위에 의로움의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완전히 타락하고 부패한 상태에 있는 인간에 대해 가감 없이, 에누리 없이, 드러내고 나타냅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인간이 어떤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연약함만 깨달을 뿐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죄인됨을 깨달을 뿐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한 이후에 인간의 상태는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율법, 계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백성은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며 이렇게 살아갈 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계명이요 율법입니다.
그것은 그들을 괴롭게 하기 위해서, 혹은 고통스럽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원해서 주신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행복한 삶은 무엇일까요?
말씀대로 사는 것 아닙니까?
말씀대로 살 수만 있다면 우리는 그 안에서 가장 행복한 삶을 살 것입니다.
물론 말씀대로 사는 것이 힘들고 어렵다고 해도 말씀대로 사는 사람의 삶은 환경과 상황에 상관없이 하나님 안에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죄성 때문에 그렇게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완벽하게 지키며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런 연약한 존재임을 자각하고 주님을 의지할 뿐인 것이죠.
그러므로 율법을 통해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서 결코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것을 믿었고, 이것을 통해 자신들의 의로움을 자랑했습니다.
자신들의 행위로써 얼마든지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과연 죄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어떻게 행위로써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율법을 통해 의롭게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한계만 드러낼 뿐입니다.
그래서 20절 마지막 부분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을 통해, 계명을 통해, 말씀을 통해 나의 나 됨, 죄성을 깨달을 뿐입니다.
내 힘의 한계와 부족을 여실히 느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내 힘으로는 결코 이 말씀을 지킬 수 없음을….
아무리 내가 노력하고 애써도 내 힘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그 겸손함을 배울 뿐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조그만 남보다 낫다고 생각하면, 조금이라도 충만하게 되면, 조금이라도 무엇인가로 채워졌다고 느끼면…
금방 교만해집니다.
그리고 나를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정죄하기 시작합니다.
율법은, 말씀은 우리를 겸손케 합니다.
내 힘으로는 주 뜻대로, 주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손을 드는 것입니다.
주의 힘으로, 주의 능력으로 살 수 있기를…
그리고 그 힘으로 사는 사람들은 결코, 자신을 자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도 겸손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결코 행위로써 완전할 수 도, 완전해질 수도 없는, 결코 의롭다 인정함을 받을 수 없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2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1절에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으로는 결코 우리가 의롭게 될 수 없다,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없다, 행위로서는 한계에 이를 수 밖에 없다 했습니다.
다만 율법을 통해서 우리의 죄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요, 우리의 한계를 발견할 뿐입니다.
율법으로는 결코 우리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로운 존재가 될 수 없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행위를 통해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자 하지만 그 행위로써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게 회복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죄된 인간이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로의 회복은 행위로써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으로 우리가 의롭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 합니다.
다른 방법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의>입니다.
24절은 이것을 좀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 가운데 있고 결코 하나님의 의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는 상태인 것은 앞에서도 설명했습니다.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님께 이를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옳은 행위를 통해,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도 안됩니다.
아무리 수많은 선한 행위를 했을 지라도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심을 통해 그 죄로부터 우리를 구속> 하셨습니다.
<구속으로> 로 번역된 ‘아폴뤼트로세오스απολυτρωσεως’ 의 원형 ‘아폴뤼트로시스(απολυτρωσις)’ 는 ‘~로부터(from)’ 라는 분리의 개념을 나타내는 전치사 ‘아포 (åπo)’ 와 ‘풀어줌’ 이라는 의미를 지닌 ‘뤼트로시스(λύτροsis)’ 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인간을 얽어 매고 있던 죄와 죽음의 속박에서 완전하게 분리하여 해방시키는 것>을 뜻합니다.
이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의 몸을 대속 제물로 바친 것입니다.
즉 자기의 무죄한 몸을 ‘속전(購錢)’ 으로 십자가에 바치고 인간을 사온 것입니다(딤전 2:6).
예수님은 자기 몸을 십자가에 제물로 바치고 대신 우리를 그 값으로 사온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인간의 죄를 씻음 받기 위해서는 흠 없는 유월절 어린양의 대속의 피가 필요했죠(출 12: 1-13).
하지만 이는 완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이신 무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를 죄와 죽음의 세력에서 온전히 해방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성육신하신 무죄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피를 흘려 인간을 구속하셨던 것입니다(마 20:28 ; 고후 5: 15).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구속입니다.
24절<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우리의 구원이 우리 자신의 노력이나 행위와 무관하게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 번역된 ‘디카이우메노이δικαιουμενοι’는 ‘디카이오오(δικαιόω)’의 현재 수동태 분사이며, <의롭다고 취급되다>, <의롭다 함을 얻다>(NASB, being justified ; NIV, are justified)’ 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를 값 주고 사셔서 우리를 죄를 속해주셨다는 것을 믿는 자들,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는 자들을 <의롭다칭해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칭의>입니다.
로마서의 주제가 바로 <이신칭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죄에서 구속을 받고, 사함을 받고 의롭다고 칭해지는 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값없이십자가에죽으심으로죄를대신지셨고우리의죄를사하셨다는것을믿는믿음>으로 우리는 <의롭다칭함을받는다>는 것입니다.
즉, 오직 믿음으로써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신칭의입니다.
놀라운 것은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 곧 <칭의>를 통해 우리는 신분이 바뀝니다.
앞에서 죄의 한계,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완전한 부패와 타락으로, 아무리 스스로의 힘으로 그것에서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그 죄의 아들, 죄의 종의 신분에서 이제는 신분의 변화가 생기는 것입니다.
죄인의 신분, 죄의 종에서 이제는 <의의아들> <하나님의아들> <의인의신분>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죄로부터 완전한 사면을 받은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이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로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값없이 주어진 선물, 곧 은혜로 말미암아 된 것입니다.
그래서 24절에 <하나님의은혜로말미암아> 라고 말합니다.
그 은혜로 의롭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구약 성경을 통해 증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21절에 <율법과 선지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를 획득하게 된다는 사상이 구약에 이미 나타나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도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고(창 15 :6), 바울이 증거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롬 1: 17)>는 말씀도 구약에 이미 나타나 있습니다(합 2:4).
하나님께서는 구약 성경을 통해서 이미 의인이 되기 위한 길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뿐임을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믿었던 유대인들의 얼마나 율법을 오해하고 있는 것인지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결코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서 그것을 지키는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됨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무시하고 왜곡해서 스스로 율법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해 자신들의 한계를 인정하고 오직 믿음만이 하나님께 인정함을 받을 수 있음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통해 의롭게 된다고 여겼고 이것을 자랑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을 그렇게 자랑스럽게 여겼던 이들이 그 율법의 온전하게 지키지 못하고 외식과 형식에 치우쳤던 것입니다.
그래서 겉으로 드러난 행위로 자신들을 드러내려 했습니다.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멀고 겉으로 드러낸 행위로써 자신들의 의로움을 드러내려 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행위를 통해 우리의 의를 드러낼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마음 중심입니다.
동기입니다.
아무리 겉으로 의로운 척, 바른 척 해도 그 중심이 하나님에게서 멀면 그것은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연약함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내가 온전해졌고, 또 앞으로도 온전해질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주시고, 그 믿음을 통해 의인의 신분, 의로운 존재, 하나님께 인정받은 존재가 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위대함입니다.
믿음의 놀라움입니다.
3.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지 않고 오히려 굳게 세운다(31절)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화목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불화하게 된 우리를 친히 제물이 되셔서 죽으심으로 화목케 하셨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의 모든 죄를 씻으셨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자기 의로우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죄에 대해서 반드시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죄인된 인간을 위해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하심으로 심판의 의를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대신 그를 믿는 자마다 의롭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니 철저하게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의이며, 구속이며, 구원인 것입니다. 그러니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 어떤 법으로도, 행위로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믿음의 법, 오직 믿음으로만 얻은 의요,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을 받은 유대인에서 이제는 온 백성으로, 모든 열방으로 확대되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의 하나님에서, 이방인의 하나님으로 확대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을 부를 수 있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이루어진 의로 말미암아 되어진 일입니다.
중국 교회의 지도자 워치만 니의 책에 나오는 이야기
예수
믿은 지 얼마 안 되는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가 하루는 기차 여행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동석한 세 사람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카드놀이를 하기로 하고 그 형제에게 함께 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중하게 사양했습니다. 그러니까 세 명 가운데 한
사람이 "카드놀이 할 줄 모르십니까?" 라고 묻더랍니다. 형제가 조용히 웃으며 "할 줄은 알지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럼 손은
두었다가 무엇을 하시게요?" 즉시 돌아온 반문에 그 형제가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손은 제 손이 아니라서요. 달리 할 일이 있어서요." 세 사람은 의아해하며 물었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러자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자기가 최근 예수 믿게 된 동기와 신앙을 간증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자신의 몸이 주님의 몸이 되고
자신의 손도 주님의 손이 되었는데, 아무래도 주님의 손으로 카드놀이 하는 것을 그분이 기뻐하지 않으실 것 같아 사양한다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의 대답은 무엇보다 성경적인 거룩함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 줍니다. 거룩은 무엇을 안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물론 손으로든 입으로든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손으로 입으로 몸으로 하나님의 일을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시간과 존재를 하나님의 일에 드려 보십시오. 죄를 지을 여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가운데 삶의 진정한 기쁨을 느껴 보십시오.
행위로써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행위로써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연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죄의 영향을 받는 연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그 죄의 영향, 죄인의 신분에서 구속하셨습니다. 죄인의 신분인 우리를 피로 값 주고 사셨습니다.
7월 21일(목) 이면적(裏面的) 유대인 로마서 2:29
유대인 : 율법을 받았고 할례를 행하는 사람 / 선민(선민) - 12절, 13절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이방인 : 율법을 받지 못했으며 할례를 행하지 않는 사람 - 14절, 15절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 내 복음 - 16절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참 유대인 : 이면적 유대인
유대교의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승에 의하면 할례를 받은 사람은 비록 지옥문 옆에 앉았을지라도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아브라함이 책임져 준다는 교훈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모세를 통해 율법을 받은 백성들이요, 할례를 통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특수 민족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아무리 잘못을 저질러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보장되었다는 우월감을 가진 이유로 이런 사상이 전해 내려온 것 같습니다.
이러한 우월감과 특권을 누리려면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율법을 지켜야 하는데 실생활에서 율법을 받은 자답게, 또 할례를 받은 자답게 살지 못하면서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을 자랑하면서 이방인들을 향해서는 몹시 경멸하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이와 비슷한 신앙생활을 즐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나는 모태 신앙이다. 또는 나는 몇 대째 기독교 집안이라고 자랑하면서도 신앙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을 향해 세례 요한은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이 율법을 받은 백성이라는 자부심만 가졌지 자기들이 받은 율법을 지키지도 않은 유대인들의 죄악을 지적하며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와 구원을 받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세 부분으로 구분합니다(2:17-29)
1. 형식적 율법(17-24) 2. 형식적 할례(25-27) 3. 이면적 유대인, 마음에 받은 할례(28-29)
1. 형식적 율법(17-24)
유대인들은 여러 가지로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애급에서 종살이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은혜로 애급으로부터 구출해주셨으며 홍해 바다를 육지 같이 건너게 하셨으며 40년 동안 만나로 먹이시고 불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신 것을 체험했던 백성들입니다. 그리고 지도자 모세를 통해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과는 완전히 구별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으며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율법은 지키지 않고 자부심만 갖고 이방인들을 깔보는 유대인들을 향해 사도 바울이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17절부터 20절까지는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자부심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과 대조되는 유대인이라는 이름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유대인이란 율법과 하나님과 연계된 민족으로 그들이 가진 율법과 하나님은 바로 자기네들의 자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가르치는 율법사나 선지자들을 통해 율법의 교훈을 배우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선한 것을 좋게 여기는 자들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자들이라 믿었습니다. 또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를 알고 있으므로 영적으로 어두운데 있는 소경 된 자들에게 빛이 되어주어 길을 인도하는 자들이며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고 아이들과 같은 자들의 선생이라는 자부심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자부심을 가진 유대인들에게 공격을 퍼붓기를 남을 가르치는 자가 자신은 가르치지 못하느냐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남에게 가르치기를 도적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우상 숭배하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네가 도적질을 하며 간음하며 심지어 우상에게 드려진 물건들을 도적질하느냐고 질책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가진 백성이라고 율법을 자랑하고 또 하나님을 자랑하면서도 그 율법을 지키지 않고 오히려 율법을 범하니 이런 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을 무시하고 천대했지만 율법이 있다고 한 유대인이 율법을 지키지 않고 율법을 범했으니 이것을 보는 이방인들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꼴이 되었다고 질책하고 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남쪽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므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나라로 포로로 잡혀가 종의 생활을 하게 했는데 이런 일을 통해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결과가 되었던 것과 같은 그런 점들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한의 백성들은 정신적인 자유를 누리면서 분산된 정신과 사상으로 갈등 구조를 형성합니다. 북한의 주민들은 정신적인 자유를 누리지 못했기 때문에 정신적 장애를 갖고 자기 의지와 판단을 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2. 형식적 할례(25-27)
유대인들은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난지 8일만에 할례를 행했습니다. 물론 맨 처음 할례가 시행될 때에는 아브라함은 99세에 이스마엘은 13세에 할례를 행했던 것입니다. 할례는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지키고 순종하겠다는 결단의 징표로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할례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켜 행할 때에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이라고 자부심을 갖고 있는 그들이 앞부분에서 지적된 대로 율법을 지키지 않았으니 할례가 무익하다는 사실을 25절에서 27절까지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자신을 이방인과 차별화 하기 위해 할례를 받지 못한 자들을 두고 무할례당이라고 경멸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지만 만일 율법을 범하면 할례가 아무 의미가 없어서 할례를 받지 못한 무할례당이나 마찬가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할례란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겠다는 전제 아래 받은 징표이므로 만일 무할례자가 할례는 받지 않했지만 언약을 지킨다면 그는 무할례자가 아니라 바로 할례자나 다름없게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무할례자가 온전히 율법을 지키면 할례자나 다름없게 될 것이므로 율법을 지키지 않은 할례자 유대인들을 오히려 비판하지 않겠느냐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3. 이면적 유대인, 마음에 받은 할례(28-29)
누가 참 유대인이며 누가 참 할례자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1장 16절에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네들만 구원을 받고 이방인들은 구원받지 못하는 존재들인양 믿고 있었지만 그런 것은 하나남의 뜻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잘못된 자부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혈통상 유대인이 참 유대인이 아니라 마음으로 율법을 받아 그 율법을 지켜 행하는 자가 참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외과적으로 할례를 받은 자가 참 할례자가 아니라 참 할례자는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드려 죄 사함 받은 자가 참 할례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6 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했는데 사도 바울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혈통과 상관없이 복음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어질 한 구원의 역사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문이 이방인에게도 열린 것은 신약시대부터 되어진 것이 아니라 구약시대에도 이미 그 문이 열려 있었던 것입니다. 요나의 경고를 받고 회개했던 니느웨 사람들이 이방인이었으며 룻과 욥이 이방인이었습니다. 유대인으로 태어나서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구원이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마땅히 믿고 행해야 할 것을 행함으로 구원이 이뤄지는 것임을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참 그리스도인 즉 참 신자가 되라는 교훈입니다. 우리들은 오늘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유대인들이 갖는 대단한 자부심을 소개받았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기도 유대인이지만 자기 동족들이 자부심만 가졌지 내적으로 참 유대인이 되지 못한 그들의 죄악들을 폭로하며 그들이 그런 죄악에서 벗어나 참 유대인 그리고 참 할례자가 되기를 기원했던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을 향해 퍼붓는 그 공격을 우리들의 신앙생활과 연관시켜 우리들의 신앙을 점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죄 사함을 얻게 하는 세례를 받은 자들을 그리스도인 또는 성도라 부릅니다.
당신은 참 그리스도인이십니까? 예라는 대답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참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참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길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고 받은 그 말씀을 몸으로 실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남이 잘 못을 저질렀을 때에 남을 가르치고 충고했던 그대로 내가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남이 잘못했을 때에 비록 그를 두고 충고를 직접 못했다 하더라도 내 마음에 그가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참 성도답지 못하다고 마음에 걸렸다면 나는 그런 행동을 내가 삼가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교인인가?
나는 성도인가? 성도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사람으로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사도행전 19:21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사도 바울이 로마로 가려는 것은 서바나로 가려는 것이었다. 서바나로 가려면 로마교회가 바울을 전적으로 지원하며 후원이 필요하였다.
로마서 15:23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스페인)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24.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줌을 바람이라.
7월 20일(수)
복음(福音)의 능력(能力) 로마서 1:16-17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2098. 복음(복음) εὐαγγέλιον
εὐαγγέλιον, ου, τό
1. 좋은 소식에 대한 보상, 2. τὸ εὐαγ- γέλιον, 3. ὁ λόγος τοῦ εὐ.
발음
/ 유앙게리온(ĕuanggĕ- liŏn) 어원 / 2095와 3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복음(마 4:23, 막 16:15, 롬 1:1)
신약 성경 / 76회 사용
* 32. 앙겔로스, ἄγγελος ἄγγελος, ου, ὁ
1. 사자, 2. 사람이 보낸 사신, 3. 하나님이 보낸 사자 : 메시아의 예고자
발음
/ 앙겔로스(anggĕlŏs) 어원/ ‘소식을 가져 오다’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사자(使者)(마 1:20, 행 5:19, 약 2:25), 천사 (마 13:39, 히 1:4, 계 1:1)
신약 성경 / 176회 사용
* 2095. 유(εὖ)
1. 잘, 2. 좋게, 3. εὖ ποιεῖν: 좋게 행하다
발음
/ 유(ĕu)
관련 성경 / 잘, 좋게, 다행히(마 25:21, 눅 19:17, 행 15:29, 엡 6:3)
본서의 기록 연대는 A.D.57년 이른 봄으로 추정되고 있다. 바울은 이때 제3차 전도 여행중이었는데 그는 예루살렘의 가난한
신자들을 위해 이방인 교회들이 모금한 헌금을 예루살렘에 가지고 가려던 중이었다.
15:26에 의하면 바울이 본서를 쓸 때는 이미
마게도냐와 아가야 교회의 헌금을 받아 가지고 고린도에 도착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본서는 바울이 고린도에 3개월 체류해
있는 기간 동안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징
바울의 사상은 '이신득의(以信得義)'이다. 유대인은 물론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상을 의미한다. 바울은 이 교리를 본서에서 아주 명쾌하게 논리적으로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이신득의'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단편적인 것이 아니라 구원은 물론 죄책과 거듭남과 성화와 성도의 견인까지 포함하는
포괄적인 것으로 그 의미하는 바가 크다. 바울은 특별한 단어들을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말하면서 인간의 죄를 위해
희생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 의도적인 문체를 사용하였다. 바울이 다른 서신에서보다
본 서신에서 자기를 소개할 때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사도성에 대해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복음에 부여되는 하나님의 의를 말하고 있다. 즉 인간의 행위로는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으며,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복음에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본 서신이 조직 신학의 총체는
아니라 할지라도 기독교 교리의 핵심 교리를 말하고 있다. 본 서신은 서신서이면서도 신학적인 성격을 띤 논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위대한 로마서는 종교 개혁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던 것을 알 수 있다. 바울이 본 서신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성령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목적
바울은 본 서신을 로마 교회 방문을 위하여 기록하였다. 바울이 로마 교회를 방문하려 한 것은 자기가 받은 영적인 은사를 로마
교회의 성도들에게 알리기 위함이었으며, 이로 인해 그들의 믿음이 강하여지고 또 서로 힘을 얻기 위해서였다. 특히 본서에는
이신득의의 신앙원리를 가장 극명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이 원리는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이루어 놓으신 의를 믿음으로서만이 모든 인간은 죄에서 자유로울 수가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구조
바울 서신의 특징적인 구조는 교리편과 생활편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1~11장 : 교리 /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이 무엇인가?
12~16장 : 실천편 /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교리편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무엇이냐?"를 밝히고 있는 데 반해 실천편에서는 "하나님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를 밝히고 있다. 전자는 "믿음에 의한 삶"이라면, 후자는 "믿음에 의한 섬김"이다.
바울 서신들
중에서 처음에 위치한 로마서는 구원에 관한 바울의 신학을 짜임새 있게 기록하였고 아울러 구원 받은 성도로서의 마땅히 행할 바에
대한 실천적 권고를 담고 있다.
이러한 깊이 있는 내용과 체계적인 전개로 말미암아 본서는 "바울의 복음서"라고 불리워진다. 즉
복음서가 예수의 삶과 행적을 사실 그대로 기록한 것이라면, 본 로마서는 예수의 탄생과 사역들의 의의를 성도의 구원 과정과 연결하여
설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서는 질문과 응답의 형식으로 먼저 현재의 상황에 따른 구원의 필요성을 이야기하고 계속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 칭의(稱義), 성화(聖化) 등에 관하여 설명한다.
특히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이신득의(以信得義)의 신앙 진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본서는 크게 3부분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1:1~8:39 / 인사와 더불어 구원의 필요성과 이에
이르는 방법 9:1~11:36 / 이스라엘의 과거, 현재, 미래 상황을 이야기하며 하나님의 의가 역사 가운데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가 12:1~16:27 /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고 구원을 얻게 된 백성이 그 은혜에 대한 감사로써
마땅히 해야 할 의의 실천과 이에 따른 변화된 삶
1. 표제
바울이 이 편지서를
기록했을 때 원래는 아무런 표제가 붙지 않았던 것 같다. 바울이 로마에 있는 신자들에게 보내는 단순한 한 통의 편지였다. 그러나
이윽고 이 서신은 초기의 사본들에게 붙여진 “로마인들에게”(헬, Pros Rhomaious)라는 표제로 알려지게 되었다. 후기의
사본들은 좀 더 확대된 표제 곧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사도 바울의 서한”이라는 표제를 갖게 되었다. 이 표제는 오늘날에도 몇개의
영역(英譯) 성경에서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2. 저자
사도 바울이 이 편지서의
저자라는 사실이 심각하게 의심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로마로 보내진 원래의 편지에 로마서 제16장은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며 그것은 아마도 바울이 한동안 일한 적이 있는 에베소(행 19장)에 보내진 별개의 편지일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이러한 이론은 주로 16장에 열거된 사람들의 명단의 길이에 그 근거를 두고 있으며 또한 바울이 아직 한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
도시인 로마에 그토록 많은 친구들을 알고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리라는 추측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그 당시로 말하자면
제국의 각처에서 사람들이 로마로 자연스럽게 이주하던 때이므로 바울이 세계의 수도인 그 도시에 많은 친구들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더욱 이 모든 초기의 사본들이 제16장을 그 편지서의 온전한 부분으로서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현대의
보수적인 입장은 이 편지서 전체가 사도 바울의 로마의 신자들에게 쓴 것으로 믿고 있다.
바울은 다소(Tarsus)에서
출생한 유대인이었다. 그는 바리새인의 위대한 교사인 가말리엘의 수제자로서 전통적인 교육을 받았다. 다른 모든 유대인 소년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하나의 직업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피장”(천막 만드는 사람)이었다. 예루살렘에서 첫 순교자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할 때 그는 현장에 있었으며, 그 광경은 분명히 젊은 사울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이 젊은 바리새인은 예수 그리스도와 정면으로 대면하게 된다. 그의 기적적인 회심이 있은 다음에 그는
침례를 받고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받는다. 그후 그는 아라비아로 물러나서 연구와 준비에 몰두하고 3년이란 세월을 보내었다. 그는 그의 고향 다소에서 3년을, 안디옥에서 1년을 보낸 다음 성령의 지도를 받아 이방인들을 위한 위대한 선교사가 되었다. 3차에 걸친 선교 여행을 통하여 그는 많은 교회들을 세우고 또 편지서들을 썼다.
그는
로마의 시민권과 헬라의 교육과 히브리의 종교를 한 몸에 종합한 매우 갖춰진 선교사로서 그의 위대한 사업을 위한 최고의 자격을
구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모든 인간적인 자질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받은 은혜와 사도권만을
신뢰하며 복음 사업에 임하였다(롬 1:5).
희생과 고난으로 점철(點綴)된 여생을 다 보낸 다음에 그는 죽음으로써 자신이 전한 기별을 증거하였다. 네로 황제의 결정에 의하여 그는 참수형에 처해졌으며 지하 묘지(catacomb)에 장사되었다고 전해진다.
3. 역사적 배경
로마서는
제3차 선교 여행 동안에 바울이 석달 동안 체류한 고린도에서 기록된 것이 확실시된다(행 20:1-3 참조). 많은 학자들은 이
시기가 A.D. 57-58년의 겨울일 것으로 믿고 있으나 또 더러는 그보다 좀 이른 시기로 보는 이들도 있다. 이 편지서가
고린도에서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가이오(롬 16:23; 고전 1:14)와 에라스도(롬 16:23; 딤후 4:20)에 대한 언급과
고린도의 동쪽 항구인 겐그레아의 교회에서 특별한 봉사를 하고 있는 것으로 바울이 묘사하는 뵈뵈에 대한 추천(롬 16:1)등으로
말미암아 증명되고 있다.
이 편지서를 기록할 당시에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그리스도인 가운데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교회들로부터 거둔 의연금품을 가지고 팔레스타인으로 막 돌아가려는 참이었다(롬 15:25, 26; 행
19:21; 20:3; 24:17; 고전 16:1-5; 고후 8:1-4; 9:1, 2).
그 사명을 다한 후에 바울은 로마를
방문하여 그곳으로부터 계속해서 스페인으로 여행하고자 했다(행 19:21; 롬 15:24, 28). 바울은 로마 제국의 수도에 있는
그리스도 교회를 방문하고 싶은 마음을 여러 번 가졌으나 아직 한번도 방문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롬 1:13;
15:22).
그러나 이제는 아시아와 헬라에서의 그의 선교 사업을 마쳤다고 생각해서(롬 15:19, 23), 그는 이탈리아의
사업을 강화하고 스페인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하기 위해 서쪽으로 옮겨 가고자 애쓰고 있었다. 이러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바울은
로마에 있는 신자들의 축복과 협력을 받고자 희망하였다.
그리하여 불원간 그 도시를 방문할 것을 기대하면서 그들에게 이 서한을 써
보내게 되었다. 이 편지를 통하여 바울은 매우 강하고 분명한 어조로써 그의 복음의 위대한 원칙들을 개괄하고 있다(롬 1:15;
2:16).
4. 주제
이 편지서의 주제는 인간의 보편적인 죄악성과 죄인인
인간이 용서를 받을 뿐만 아니라 완전하고 성결하게 될 수 있는 하나의 길을 마련하시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은혜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
“길”이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시고 영원히 살아 계셔서 인간을 회복하시고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바울이 이 편지서를 기록할 때 그의 마음 속에는 유대화주의자들과의 논쟁 가운데서 야기된 여러가지 문제들이 꽉 차
있었다. 그는 그 문제들 중에서 기본적인 것들을 다루면서 죄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에 관하여 광범한
예증들로써 대답하고 있다.
먼저 바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간에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므로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스런
이상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롬 3:23).
이것에 대해서 어떠한 핑계도 댈 수 없는 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간에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상당한 계시를 받았기 때문이다(롬 1:20).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다 정죄아래 있는 것은
의당한 일이다. 게다가 죄된 인간은 이러한 곤경으로부터 자신을 건져낼 능력이 도무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의 타락한
형편하에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롬 8:7).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려는 율법주의적인 시도들은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의 연약성과 구주의 필요성을 인식하기를 거절하는 이른바 오만한
자기 의(義)에 빠지게 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구제책을 강구하실 수 있으시다. 그분은 이것을 당신의 아들의 희생을 통하여
마련하셨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믿음, 곧 그의 죗된 과거를 덮어주기 위해 이미 마련된 것을 받아들이는 믿음과
그로 하여금 의의 생애를 살도록 인도하시고자 제공된 능력을 받아들이는 믿음을 행사하는 것, 오직 그것 뿐이다. 이것이 이 편지서의 첫 부분에 전개된 바울의 복음이다. 그 나머지 부분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과 그리스도 교회 신자들을 취급하는 문제들에이 복음을 실제적으로 적용시키는 면을 다루고 있다.
5. 개요
Ⅰ. 서론 1:1-15
1. 인사 1:1-7 2. 개인적인 부언 1:8-15
Ⅱ. 교리적인 주석 1:16-11:36
1.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교리 1:16-5:21 (1) 믿음으로 얻어지는 의 1:16, 17 (2) 의에 대한 보편적인 필요 1:18-3:20 ① 이방인들의 실패 1:18-32 ② 유대인들의 실패 2:1-3:20 (3) 그리스도 안에서 마련된 의 3:21-31 (4) 구약의 교리인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4:1-25 (5) 칭의의 복스런 결과 5:1-11 (6) 칭의의 효과와 아담의 타락의 결과의 대조 5:12-21
2. 믿음으로 말미암는 성화의 교리 6:1-8:39 (1) 죄에 대해 죽고, 새 생애로 부활함 6:1-11 (2) 율법과 죄의 속박에서 벗어남 6:12-23 (3) 죄에 대한 율법의 관계 7:1-13 (4) 육과 영 사이의 갈등 7:14-25 (5) 성령 충만한 생애 8:1-39
3. 이스라엘의 선택 9:1-11:36 (1) 이스라엘의 거절에 대한 바울의 유감 9:1-5 (2) 거절의 정당성 9:6-13 (3) 하나님의 뜻은 의심할 수 없음 9:14-29 (4) 거절의 원인이 된 이스라엘의 불신 9:30-10:21 (5) 이스라엘의 궁극적 회복 11:1-36
Ⅲ.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교리의 실제적 적용 12:1-15:13
1. 그리스도인의 자아 희생 12:1, 2 2. 교회의 구성원으로서의 그리스도인 12:3-8 3. 다른 사람들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관계 12:9-21 4. 국가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관계 13:1-7 5.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빛-사랑 13:8-10 6. 재림이 가까움 13:11-14 7.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상호 관용이 필요 14:1-15:13
Ⅳ. 결론 15:14-16:27
1. 개인적인 부언 15:14-33 2. 여러 사람들에 대한 인사 16:1-16 3. 거짓 교사들에 대한 경고 16:17-20 4. 바울의 동료들과 대필자의 인사 16:21-23 5. 축도와 송영 16:24-27
데이비드 마틴 로이드 존스(David Martyn Lloyd-Jones) 1899. 12. 20. - 1981. 3. 1 영국의 의사 출신의 복음주의 설교자 존 스토트와 함께 한국교회에 가장 영향력이 많았던 목회자.
거룩함과의 만남
로이드 존스는 기독교에 대해 불붙는 논리(logic on fire)라고 불렀다. 이는 인간의 감정에 호소하는 감상적인 설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과 만나는 경험을 통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열정적인 집중을 하게 된다는 뜻이다.
“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들이 주장해야 하고, 또한 알아야 하며, 체험해야 하는 것은 어떤 일들을 하고 안 하는 것들에 대한 일반적인 아이디어나 행위들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아는 것만이 우리들의 목표이어야 합니다. 그 이외의 것은 모두 그리스도인의 목표 미달입니다.(복음의 핵심, 132쪽.).
”
"종교오락"에 대한 거부
마틴 로이드 존스는 사회에서 출세한 사람들이 간증하는 일부 개신교교회들의 모습들에 대해 "종교오락"이라는 말을 썼다. 즉, 교인이라는 소비자들의 니즈에 맞게 설교하고 목회하는 종교서비스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설교의 의미를 훼손시킬 수 있음을 꿰뚫어본 것이다.
“
간증자로 초대되는 사람들 중에는 해군 제독이나 육군 장성처럼 특별한 직함을 가진 이들도 있고, 야구선수나 연극배우, 영화배우, 가수처럼 대중에게 잘 알려진 이들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복음을 설명하고 설교하는 일보다 그런 이들의 간증 듣는 일을 훨씬 더 가치 있게 여깁니다. 제가 이 모든 것을 ‘오락’이라는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음을 눈치 채셨습니까?
저는 이런 일들이 당연히 오락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설교에 등을 돌리고 이런 오락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설교와 설교자 26).
”
신학에 대한 존중
로이드 존스는 설교는 신학적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즉 설교자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학문인 신학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설교를 잘하는 방법을 배우려고 하거나, 교인들에게 교회생활과 사회생활을 열심히 하라고 가르치는 현대교회의 문제점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특별히 조직신학과 교회사를 그의 설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부흥에 대한 견해
로이드
존스는 성령의 부으심이 말씀 선포로만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령의 불을 끄는 행위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부흥운동이 성령의
기름부으심이며, 칼빈주의가 만일 메소디즘과 함께 하지 않으면, 지성주의와 스콜라주의로 흐른다고 경고하였다. 그렇게 함으로
신앙고백이 성경을 대체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질 수 있다고 경고하였다. 그는 열광주의 즉 감정 조절이 한되는 상태를 옹호하며,
이것을 칼빈주의자들이 반박한다고 주장하였다.[1]
“나는 내 자신을 깊이 응시하여, 나의 가장 깊은 은닉된 장소에서 창피한 기억들을 모두 꺼냈다. 내 마음이 볼 수 있도록 진열하였다. 그 순간 거대한 폭풍이 바로 그 기억들을 강타하였다. 내 눈에서 눈물이 한없이 흘러나왔다. 나는 그 기억들을 구역질하듯 모두 토해냈다. 옆에 있었던, 알리피우스부터 급히 뛰쳐나왔지만, 나는 울기 위해서 혼자 있어야만 했다. 나는 더 깊은 곳으로 떨어져 이동하여, 그의 존재가 나를 방해하지 않았다.”
<고백론> 8권 28단락a
‘톨레 레게’tolle lege.
이 라틴어 표현은 ‘취하여 선택하여라!’란 의미다. 취사선택하라는 신의 목소리이자 동시에 눈물로 정화되고 변화된 어거스틴 자신의 목소리였다. ‘톨레’tolle는 고속도로의 톨게이트tollgate에서도 알 수 있듯이, ‘벌금을 부과하다; 사용료를 지불하다’란 의미다.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가기 위해, 특정한 고속도로를 상용했기 때문에, 그 사용료를 지불해야한다. 라틴어 ‘톨레레’tollere는 ‘선택하다; 집어 들다;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다’란 의미다. ‘레게’lege는 ‘읽다’란 라틴어 동사 ‘레게레’legere에서 파생한 단어로 더 근본적인 의미는 ‘선택하다; 추리다’란 의미다. ‘톨레 레게’tolle lege를 번역하자면, ‘(한 가지 원칙을 선택하여) 집어 들고 (그 선택한 것을 너의 삶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말로 알려라!’란 의미다.
어거스틴이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듣고 분연히 일어섰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들었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고, 기뻐 날 뛰었다. 그는 신적인 무엇이 그를 움직인다고 생각하여, 성서를 ‘들어올려’ 아무렇게나 펼쳐진 성서의 첫 문장을 ‘읽었다.’ 그는 사막의 수도자 안토니우스도 이런 식으로 소리를 들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였다. 안토니우스가 들은 소리를 이것이다. ‘너는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였다. 어거스틴이 성경책을 들고 펼쳐 읽었다.
“낮에 행동하듯이, 단정하게 행합시다.
호사한 연회와 술취함, 음행과 방탕, 싸움과 시기에 빠지지 맙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십시오.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꾀하지 마십시오.”
그가 읽은 내용은 <로마서> 13.13-14였다. 어거스틴이 이 구절을 읽자, 빛이 등장하여 그를 감쌌다.
어거스틴은 과거의 어거스틴이 아니라 미래의 어거스틴이 되었다. 그의 삶은 단정端正해졌고, 타인과 경쟁하여 제압하려는 삶이 아니라, 더 나은 자신이 되기 위해 투쟁하고 수련하기 시작하였다.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교수 본래 아우구스티노회 수사였던 루터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면죄부 판매가 회개가 없는 용서, 거짓 평안(예레미야예언자의 가르침을 인용함)이라고 비판했으며, 믿음을 통해 의롭다함을 얻는(der Rechtfertigung durch den Glauben) 이신칭의를 주장했다.
칭의를 통한 개인 구원의 새 시대를 열어주었다. 면죄부 판매를 비판한 루터는 1517년95개 논제를 게시함으로써 당시 면죄부를 대량 판매하던 도미니코회 수사이자 설교자 요한 테첼에 맞섰다.
1520년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모든 주장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받았지만, 오직 성경의 권위를 앞세우면서 성서에 어긋나는 가르침들을 거부하였다.
영국 개신교계에서 감리교 운동을 시작한 인물로, 영국과 미국의 감리교 창시자다. 영국국교회(Church of England)에서 안수를 받았으며 신학자이며 사회운동가이다. 또한 웨슬리의 사역과 저술은 감리교의 활동만이 아니라 19세기 성결 운동과 20세기 오순절 운동 및 기독교 사회복지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신학공부와 목회활동
차터하우스 학교와 옥스포드 대학교에서 공부한 존 웨슬리는 옥스퍼드 링컨 칼리지의 교수(fellow)가 되었으며, 1725년에는 부제가, 1728년에는 사제/장로목사가 되었다.
잉글랜드국교회인 잉글랜드 성공회 사제이었던 아버지 새뮤얼 웨슬리의 교구에서 사제로 사역한 후 1729년 옥스퍼드로 돌아와 신성회(Holy Club)를 지도하였다.
신성회는 신학 공부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경건을 연마하기 위한 모임이었으며, 동생 찰스 웨슬리가 처음 시작하여 조지 휫필드도 가입하였고, 존 웨슬리도 가입한 후 모임을 지도하게 되었다.
존 웨슬리는 동생 찰스 웨슬리와 함께 아미리카 식민지 조지아로 건너가 2년 동안 선교를 했지만 실패했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다. 영국으로 돌아온 후 웨슬리는 아메리카로 건너가는 동안 만났던 모라비아 교도들과 교류하였다. 이후 독일을 방문해 모라비안 교회와 독일 경건주의 교회들을 돌아보기도 했다. 1738년 5월 24일, 웨슬리는 복음적 회심을 경험하였다. 웨슬리는 이날의 일기에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라고 기록하였다. 이즈음 웨슬리는 모라비아 교도들과 결별하고 스스로의 사역을 시작하였다.
전도여행과 사회개혁
웨슬리의 사역은 조지 휫필드처럼 교회라는 울타리 밖으로 나가는 사역이었다. 하지만 휫필드가 예정론의 칼빈주의적 감리교를 지향했던 것과 달리 웨슬리는 자유의지론을 바탕으로 하여 아르미니우스주의와 가까운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브리튼섬 전역과 아일랜드를
다니면서 웨슬리는 자신이 가는 곳마다 소모임인 속회를 조직하여 소모임 안에서 신자들이 훈련 받고 양육 받을 수 있게끔 했다.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웨슬리가 평신도 설교자를 세워 자신처럼 나라 곳곳을 다니며 선교하게 했다는 사실이다. 웨슬리의 지도
아래, 감리교도들은 교도소 개혁과 노예해방 등 당시 사회적으로 중요한 이슈를 이끌고 개혁하였다.
신학사상
웨슬리는 비록 조직신학자는 아니었지만 신학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해 주장하였고, 칼빈주의의 이중 예정론에 맞섰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인 내면에 하나님의 사랑이 깊게 자리한다면, 이를 바깥으로 표출하여 사회적 성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웨슬리의 신학은 공교회주의를 바탕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가시적으로 표현되는 수단인 성례전과 예전을 존중하는 성공회 고교회주의(High church,Anglo-catholic)와 개인의 종교경험을 존중하는 복음주의가 균형 있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웨슬리는 은총의 수단(means of grace)을 통해 신자들이 변화할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경험할 수 있음을 역설하였다.
감리교와 잉글랜드 성공회 요한 웨슬리의 회심
전생애를 통틀어 웨슬리는 잉글랜드 성공회 성직을 유지하였고, 영국에서 감리교 운동은 단지 침체된 영국 성공회를 개혁하는 내부의 신앙 운동이라 하였으나, 미국 감리교회에서 목사를 안수할 감독을 웨슬리가 파송하며 미국에서는 분리적 태도를 취했다.
웨슬리 사후 영국 감리교는 미국 감리교회처럼 영국 성공회로부터 독립하여 자체적인 교단을 형성하였으며, 감리교로부터 사회운동을 강조하는 구세군, 성결교, 오순절 운동 등이 생겨났다.
웨슬리는 "영국에서 제일 사랑받는 사람"이라고 흔히 묘사되곤 한다.
요한 웨슬리의 회심
저녁기도, 루터의 로마서 주석
1738. 5. 24 이른 아침 존 웨슬리는 성서를 묵상하는 중에 성서 구절 하나를 우연히 읽게 되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베드로후서 1:4
이 날 오후 웨슬리는 세인트 폴 교회에서 있었던 저녁 기도회에 참석하였다. 이때 찬양대는 푸셀의 "오! 깊은 곳으로부터 주님께 나아갑니다(Out of the deep have I called unto thee, O
Lord)"를 불렀다. 이 곡은 마음의 고뇌와 거룩한 열망에 휩싸여 있던 웨슬리의 영적 상태를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었다.
저녁이
되자 웨슬리는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올더스게이트 거리(Aldersgate Street)의 네틀턴 코트(Nettleton
Court)에서 모이는 모라비아 교도의 기도회에 가기 위해 저녁 기도회에서 빠져 나와 성서를 펴니 "네게 하나님의 나라가 멀지
않도다"라는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기도회 장소에 도착한 웨슬리는 뒷자리에 앉아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는 것을 들었다.
"그러므로 믿음만이 우리를 의롭게 하며 성령으로 외적인 선한 사역을 기뻐한다면, 불신앙은 창세기 3장에 나오는 대로 낙원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그랬듯이 죄를 짓게 하고 육체를 낳으며, 외적인 악한 사역을 기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요한복음 16장 8-9절에 "그분이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점을 깨우쳐 주실 것이다. 죄에 대하여라고
한 것은 사람들이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불신앙은 모든 죄의 뿌리요, 수액이며, 최고의 기도이다. 그러나
믿음은 우리를 변화시켜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우리 안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8시 45분, 마지막 구절을 읽는 소리를 듣는 순간 웨슬리는 마음이 따듯해지는 경험을 하였다. 존 웨슬리가 중생의 은혜를 체험하고 회심한 것이다. 웨슬리는 이날 저녁에 일어난 일을 다음과 같이 일기에 썼다.
"저녁에 나는 별로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올더스게이트 거리에 있는 한 신도회에 참석하였는데 거기에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다. 8시 45분 경에 그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시는 일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내 마음이 이상하게 따듯해지는 것을 느꼈다(I felt my
heart strangly warmed).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있으며,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만을 믿고 있음과, 내 죄를
아니 내 죄까지를 다 거두어 가시고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얻었다."
웨슬리는 곧 마음에서 경험한 것을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간증하였고 밤 10시쯤 되어서는 신도회 회원들과 함께 동생 찰스에게로 가 이 기쁨을 나눴다.
유다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들이 신약 성경에 8명이 있는데 유다서는 예수님의 형제인 유다에
의해 쓰여진 책입니다. 1절부터 4절까지에는 이 편지를 쓰게 된 목적이 기록되어 있는데 거짓 교사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으므로 그들과
힘써 싸워 믿음을 지키라고 권면하기 위해 이 편지를 쓴다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유다가 이 편지를 쓸 당시에 거짓 교사들이 거짓 진리를 가지고 성도들의 믿음을 혼란스럽게 했던 것과 같이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도 여러 가지의 거짓 가르침으로 성도들의 믿음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거짓 교사들과 힘써
싸워 믿음을 지키라는 권면을 받는 우리들은 현 시대에 우리들의 교회 주변에서 우리들의 신앙을 위협하는 거짓 가르침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 성경과 대조해보고 성경에 어긋나는 것을 가르치는 거짓 가르침과 힘써 싸워 우리들의 믿음을 지켜나가시기를 원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편지를 보낸 자와 받는 자의 소개(1-2) 2. 편지를 쓰는 목적(3-4)
1. 편지를 보낸 자와 받는 자의 소개(1-2)
1절에 보면 편지를 보낸 자가
자기를 소개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의 형제라고 하면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이 그 야고보가 누구인지 다 알 정도라고 한다면 그 당시에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였던 야고보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의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다서를 기록한 유다도 예수님의 동생이 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6장 4절에 보면 예수님의 형제가 소개되는데 야고보, 요셉, 유다, 그리고 시몬 이라고 소개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께서 살아 계신 동안에는 그의 형제들인 야고보나 유다가 자기의 형인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메시야인 것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돌아가신 후에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야고보서를 기록한 자가 되었고 유다도 자기를
소개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하며 또한 이 유다서를 기록하는 큰 일꾼이 된 것입니다.
유다가 자기를 소개하기를 구세주 되신 예수님의 동생이라고 소개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의 종이란 주인의 소유물에 불과한 존재였는데 자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자기의 관계는 형과 동생의 관계가 아니라 죄인과 죄를 사해주는 메시야와의 관계요 주인과 종의 관계인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편지를 받는 자에 대해 소개하기를 부르심을 입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받아 읽을 자들이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세상에서 나와
하나님께로 온 자들이라 했습니다. 즉 죄 값으로 죽어 마땅한 죄인들이었으나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어 그리스도를 통해 죄 사함을
받고 그리스도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는 자들이며 또한 교회 안에 슬며시 들어온 현재의 이단자들에게 미혹되지 않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철저한 보호를 받는 성도라는 것입니다. 2절에서 유다는 이 편지를 받아 읽을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긍휼과 사랑 그리고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참 평화를 풍성하게 해 달라고 기원하고 있습니다.
2. 편지를 쓰는 목적(3-4)
3절에서 편지를 쓰게 된 경위를
밝히기를 본래는 성도들이 얻은 현세의 구원과 주님 재림시에 누리게 될 영원한 구원에 대해 더 자세히 써보내기를 간절히 원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본래 마음먹었던 계획을 바꾸어 성도들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내용으로 써보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4절에서 이렇게 주제를 바꾸어 써보내게 된 이유를 밝히고 있는데 그 이유란 교회 안에
몇몇 이단 사상을 가진 자들이 들어왔기 때문이라 한 것입니다. 모든 사단의 세력들이 다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런 자들은 심판을 받기로 정해진 자들인데 이들은 경건한 삶을 버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이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왔다고 하였습니다.
유다가 이 편지를 쓸 당시에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이단 사상이 바로 영지주의(Gnosticism)란 것이었는데 이들은
누구보다 영적으로 많이 알고 누구보다 신령하여 많이 깨달았다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은혜가 크신 분이시므로 인간이 어떤
죄악을 저질러도 다 용서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이 육체가 원하는 본능대로 살아도 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죄가 커야 은혜가 더 크다고 하여 오히려 비도덕적인 삶을 살도록 조장했으며 육체적 범죄행위를 그들의
이론으로 정당화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육신의 행위는 인간의 고귀한 영혼에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육체적인
쾌락을 즐기는 방종의 생활을 하였고 다른 사람들을 이러한 죄악의 구렁텅이에 끌어드렸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들은 성도들이 살아야
할 정결한 삶과 정 반대 되는 사상을 가지고 교회 안에 들어와 성도들을 미혹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이단 사상을 가진 자들은
주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자체를 부인했으므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도 믿지 않았고 죄를 사해주는 구세주로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즉 교회 안에서 성도들과 함께 신앙 생활을 하고는 있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불신자였으며 오히려 신자들이 불신자가
되도록 믿음에서 끌어내리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죄 값으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들을 주님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으로 죄 사함을 얻어 구원되었으니 이 귀한 은혜를
귀히 알고 자신을 모든 죄로부터 지켜 주님 재림시까지 흠 없고 티없는 정결한 삶을 살아나가야 하는 것이 성도들의 마땅한 삶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할 성도들을 향해 오히려 육신이 원하는 것을 자제하지 말고 본능대로 살아도 된다고 가르치는
자들이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 왔으니 유다는 이 일을 교회가 당하는 큰 위기로 알고 그런 이단자들의 정체를 폭로하고 성도들이 그런
이단 세력과 힘써 싸워 이미 받은 구원을 지켜나가도록 편지를 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우리에게 주신 본문 말씀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교훈은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온 이단 사상을 경계하고 단번에 받은 믿음을 지켜나가라는
교훈입니다. 유다는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온 이단 사상의 정체를 폭로하고 믿음을 지켜나가도록 이 편지를 써 보냈는데 우리들은 어떤
편지를 써서 보내야 할까요?
첫째는 교파주의 위기
하나님의 뜻은 다 같은 말을 하고 분쟁이 없이 다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장과 교리를 달리하는 교파는 날로 늘어만 가고 있으며 나눠지는 자체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리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파가 존재하는 사실을 마음 아파하는 것이 아니라 교파가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드리고 있는 현실이 바로 큰
위기인 것입니다. 성경에 어긋나는 구원관이나 예배관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교회 조직과 다른 이론을 가진 모든 교파주의는 단번에
받은 믿음에 큰 위기가 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 지에는 상관없이 각 교파에서 가르치고 있는
모든 가르침을 성경을 통해 걸러보지 않고 그대로 믿고 받아드리는 일은 정말 큰 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몸이 하나요 성령이
하나입니다. 그리고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한 소망 가운데 온전히 합해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에 의해 믿음이 하나를 이뤄나가야 한다고 우리들은 편지를 써보내야 합니다.
둘째는 세속 주의의 위기
세속 주의란 영적인 교회를 세상적으로 몰고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믿음의 목표는
죄 사함 받아 현세에도 구원받고 주님 재림시에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 영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생의 복보다는 이 세상의
세속적인 복을 강조하여 하늘나라의 소망보다는 세상에의 소망을 심어주는 사상이 바로 세속주의 신앙입니다. 그리고 세속주의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대로 따라가는 사상입니다. 예배도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사람 중심으로
바꾸어 가는 것입니다. 이런 세속주의는 결국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피아노를 드려오게 하였고 요사이는 오케스트라까지 동원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속주의는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는 주님의 명령인 주의 만찬을 예배에서 빼내고
헌금은 더 많이 강조되어 영적 공동체인 교회에서도 돈돈돈 하도록 영적 교회를 부패시킨 것입니다. 요사이는 여성 파우어가 강한 이
세상 추세에 밀려 여자들을 목사와 장로를 시키며 동성연애자를 교회에서 추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도 목사 안수를 해주어야
하는지를 토론하고 있는 실정에 이른 것입니다. 이런 세속주의는 예언 기도를 끌어들여 예언을 해주고 돈을 받기에 이르렀으며 병
낫도록 기도해주고 돈을 받기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 무슨 일보다도 최우선 순위에
두어야 하는데 이런 세속 주의는 불가피하다는 본인의 판정에 따라 예배를 등한히 할 수 있는 것으로 믿게 하고 예배의 내용 자체를
열린 예배라는 명목으로 사람 중심으로 점점 세속화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세속 주의는 다시 말씀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우리들은 편지를 써서 보내야 합니다.
셋째는 율법주의의 위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후에도 구약의 율법 사상을 끌어드리는 위기입니다. 만인 제사장이
선포된 이 때에 목사가 까운을 입고 제사장같이 계속 남아 있으면서 목사에게만 축복권이 있다고 주장해오고 있는 것은 기독교의 진리를
파괴하는 위험한 사상입니다. 또 예배당을 성전이라 부르며 신성시하는 것은 성도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는 복음의 기초를
무너뜨리는 위기인 것입니다. 헌금을 많이 내게 하기 위해 말라기서나 구약의 사상을 끌어드리는 것은 성도들이 복음으로 얻은 구원의
은혜를 율법의 속박으로 다시 돌아가게 하는 위기인 것입니다. 교회 안에 율법적인 사상들이 들어와 있음에도 전연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 바로 큰 위기인 것입니다. 복음이 아닌 율법적인 것은 교회에서 다 추방되어야 한다고 우리들은 편지를 써서 보내야 합니다.
교파주의의 신앙, 세속주의의 신앙, 그리고 율법주의와 힘써 싸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단번에 주신 귀한 믿음을 지켜나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거짓 교사들의 패망(유다서 1:5-16)
유다서 1절부터 4절까지에서는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와 성도들의 믿음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 거짓 교사들과 힘써 싸워 믿음을
지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본문은 성도들의 믿음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 그 거짓 교사들은 결국 망하고 말 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유다가 지적하고 있는 이 거짓 교사들은 비록 그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 있지만 몸만 교회 안에
들어와 있지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오히려 믿는 자들을 신앙에서 떨어져 나가도록 유혹하는 사단의 세력들이었던 것입니다. 그
누구도 이 사단의 세력에 말려든다면 결국 그도 사단의 세력 안에 들어가게 되므로 사단이 망할 때에 함께 패망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하나님 앞에 범죄 하므로 패망했던 실제적인 예를 들어가며 거짓 교사들은 과거의 모든 범죄자들이 패망했던
것과 같이 패망하고 말 것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오늘의 본문에서 지적하고 있는 거짓 교사들을 경계하여 본래 받은
순수한 믿음을 지켜나가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생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패망한 역사적인 세 사건의 예(5-10) 2. 패망한 역사적인 세 인물의
예(11)
3. 거짓 교사의 정체(12-16)
1. 패망한 역사적인 세 사건의 예(5-10)
유다는 구약 성경에 나타난 세
사건을 예로 들면서 범죄자들은 결국 망하고 말 것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의 사건은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다 죽었던 사건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시고 광야 40년 동안 만나로 먹이시며 바위에서 물을 내셨으며 홍해 바다를 건너되 육지 같이 건너게 하셨으며
불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수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면서도 조금만 불편한 일이 생기면
차라리 애굽에서 그대로 종살이 한 것이 나을 뻔했다고 모세에게 불평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하나님을
불신했던 200만 300만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다 죽게 하시고 오직 믿음이 있는 여호수아와 갈렙만을 살리셔서 가나안땅에
들어가도록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두 번째의 예는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의 예입니다. 베드로 후서 2장 4절에도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의본문 6절에서는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었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창조하시고 그들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셨으나 그중 어떤 천사들은 교만해져서 자기가 맡은 책임과 지위를 지키지 않고
자유롭게 떠난 천사들을 범죄한 천사들로 간주하고 그들을 심판 때까지 영원히 묶어두었다고 한 것입니다. 아무리 그 존재가
천사일지라도 범죄한 천사는 엄하게 벌하신다는 증언인 것입니다.
세 번째의 예는 소돔과 고모라 멸망의 예입니다. 세 번째의 예는 창세기 19장에 기록된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사건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은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았다고 했는데 요사이 일반화되고 있는 동성간의 성적인 범죄를
지적한 것입니다. 창 6장 4절에도 천사들이 사람인 여자들과 접촉하여 자식을 낳았다고 했는데 천사들과 사람들간에 접촉한 색도 다른
색이려니와 여자와 여자 그리고 남자와 남자간의 색도 다른 색인 것입니다.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다른 육체와 성적인 범죄를
저지르므로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의 질서를 무시한 소돔과 고모라가 형벌을 받은 예를 들면서 이 것은 우리의 거울이 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유다는 위의 세 사건을 소개하면서 거짓 교사들은 이 세 사건을 잘 알면서도 그들과 똑같이 하나님의 질서를 어지럽혀 육체를
더럽히며 하나님의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훼방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유다는 거짓 교사들이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훼방하는
일이 잘못된 일임을 9절과 10절에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9절에서 예로 든 천사장 미가엘과 모세의 시체에 대한 내용은
성경에 나와 있는 내용이 아니고 성경에 들어가지 못한 다른 문서인 위경(Apocrypha) 중 모세의 승천(The
Assumption of Moses)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그 내용은 사단은 모세가 살인자라는 이유로 모세의 시체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였고 천사장 미가엘은 분명히 사단을 비난하고 판결할 수 있는 위엄과 권세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사단에 대해 비방하거나
고소를 하지 않고 오직 모든 심판은 하나님께 맡긴다는 의미로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비방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진 천사장 미가엘도 비방하지 않았는데 거짓 교사들은 쉽게 남을 비방하고 무엇이든지 훼방하니 거짓 교사들은
무엇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이성이나 자제력이 없고 오직 자기의 육적인 본능으로만 살고 있으니 이로 인해 멸망 받게 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2. 패망한 역사적인 세 인물의
예(11)
유다는 11절에서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좇아 멸망하느니라 했습니다. 첫째의
인물은 가인입니다. 가인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대로 제사를 드리지 않고 자기 생각으로 제사를 드린 불순종한 자였으며 동생을 죽인 자
즉 남에게 해를 끼치는 자였습니다. 두 번째의 인물 발람은 자기의 물질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 숭배와
음행에 빠지도록 했던 자였습니다. 세 번째의 인물 고라는 모세와 아론의 권위에 도전하여 반역했던 자였습니다. 유다는 거짓 교사들은
가인이나 발람이나 고라와 같은 자들이므로 그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3. 거짓 교사의 정체(12-16)
유다는 거짓 교사들이 어떤
존재들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 성도들이 탄 사랑과 친교의 배를 파선시키는 암초와 같으며, 지도자라 하면서 양들을 먹여
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몸만 살지게 하는 목자라 했습니다. 또 거짓 교사들은 비를 뿌려주지 못하는 바람에 불려 가버리는
구름과 같이 기대했던 자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존재들이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이 당연히
맺어야할 열매를 전연 맺지 못하는 뿌리까지 뽑히고 뽑혀야할 존재들이라 했습니다. 또 거짓 교사들은 바닷물이 들어왔다 나가면 해변에
더러운 쓰레기들을 두고 나가듯이 거짓 교사들은 그들의 삶 속에 오직 수치스럽고 더러운 것들만 생산해 내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예비 된 캄캄한 흑암에 들어갈 유리 하는 별들이라 했는데 이 내용은 역시 성경이 아닌 다른 문서
에녹서(Enoch)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에녹서에서 에녹은 세상에 돌아다니다가 하늘의 일곱 별이 결박되어 불 속에 든 것을 보게
되어 천사 우리엘에게 무슨 죄로 저렇게 되었느냐고 물으니 천사가 대답하기를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별들로 그 죄가 다
타기까지 만 년을 매어 있어야 한다고 대답했다는 내용입니다. 유리하는 별들이란 자기의 위치를 지키지 못하고 빛을 환하게 비춰주지
못하는 떠돌아다니기만 하는 쓸모 없는 별들을 말하는 것으로 이 별들이 영원히 예비 된 캄캄한 흑암에 들어가야 하듯 거짓 교사들도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고 자기들의 욕심만 채우고 아무 쓸모 없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임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14절부터 16절까지의 내용도 성경이 아닌 다른 문서인 에녹서를 인용한 것인데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예언하기를 주님께서
수많은 천사들과 함께 재림하셔서 모든 불경건한 자들이 행한 경건치 못했던 일과 하나님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정죄하고
심판하시기 위해 임하셨다고 했습니다. 심판을 받을 그들은 원망하는 자들이며, 불만을 말하는 자들이며 정욕대로 행하는 자이며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며 또 아첨하는 자들이라 했습니다. 이들이 주님의 심판을 받듯이 거짓 교사들도 같은 죄를 짓고 있으므로 심판을 꼭
받게 될 것을 힘주어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교훈은 거짓 교사들이 지은 그런 죄를 경계하여 파멸을 면하라는 경고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오늘 본문
내용에서 어떤 자들이 심판을 받았는지 역사적으로 증거를 받았으며 그 누구든지 심판을 받은 자들과 똑같은 죄를 지은 다면 예외
없이 심판을 받게 될 것에 대한 경고를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다른 제사를 드린 가인이 심판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체험하고도 조금만 어려움이 생기면
하나님을 불신하고 과거로 돌아가려고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판을 받았던 것입니다. 자기의 자리를 지키지 못한 천사가 심판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별들이 심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어기고 다른 색으로 간음하다가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
받았으며 남에게는 어떤 해가 되든지 자기의 욕심만 채우는 발람이 패망했습니다. 또 지도자를 모함하고 배신한 고라가 심판을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누구든지 패망한 자들과 같은 죄를 지은 다면 패망하고 말 것을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범죄한 일로 패망한 자들이 지었던 같은 죄를 우리들도 지을 수 있는 것들이어서 유다가 범죄치 말라고 강력하게
경고하는 것으로 풀이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들의 생각과 달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하고 하나님을
불신한 자들이라면 그들이 아주 큰 숫자인 200만 300만이라도 버리시며 그 신분이 천사일지라도 버리신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깨달았습니다. 세상이 다 범죄하면 세상을 다 물로 아니면 불로 심판해버리시는 하나님이시지 너무 많은 숫자가 같은 범죄를
저질렀으므로 환경을 참작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심을 알았습니다.
심판 받아 마땅한 거짓 교사들이 저질렀던 범죄에서 우리들은 해방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딸들이라
할지라도 거짓 교사들이 지었던 같은 죄를 짓는다면 거짓 교사가 망할 때에 우리들도 그들과 함께 망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불순종, 불신,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 자기만 아는 이기심, 불평 불만, 육의 욕심대로 사는 것, 불 경건한 삶, 자기의 위치를
지키지 못한 삶, 자랑이나 아첨하는 삶, 강퍅한 말을 하는 입, 하나님의 은혜를 배신한 삶, 이런 모든 삶은 하나님께 범죄한
삶이 되므로 주님 재림시에 심판을 면치 못하는 삶인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도록 유혹하는 사단에 도전하여 이런 유혹을 이겨내는
승리의 삶을 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도들에게의 권면(유다서 1:17-25)
마지막 부분에서는 성도들이 믿음을 지켜나가는데 꼭 필요한 귀한 권면이 주어져 있습니다. 이 지구상에 거짓 선지자나 이단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지만 자기가 이단이라거나 자기가 거짓 선지자라고 양심 선언을 하는 경우는 한 건도 없는 것입니다. 거짓 선자자의
정체가 언제 다 들어 나게 될까요? 주님 오실 때까지는 이 세상에 존재한 수많은 교파나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모두 자기가
정통이요 자기가 하나님이 보내신 참 선지자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재림시에는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가 분명히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
스가랴 13:4-5절에 보니 주님 오시기 전까지는 거짓 선지자들이 선지자로 위장하기 위해 선지자들이 입었던 털옷을 입었으나 주님
재림시에는 털옷도 입지 않으며 자기 스스로 자기를 소개하기를 자기는 선지자가 아니라 농부라고 고백할 것이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속일 수 있지만 주님 재림시에는 속일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모든 거짓은 자취를 감추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직
거짓 선지자가 기승을 부릴 마지막 시기이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거짓 선지자의 유혹에 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소개받는 우리 모두는 거짓 선지자가 우리 주변에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들을 경계하여 주님 오실 때까지 우리들의 순수한
믿음을 지켜나가시기를 기원합니다.
본문을 네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기롱하는 자들이 있을 것임을 기억하라(17-19) 2. 자신을
건축하라(20-21) 3.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고 불에서 끌어내라(22-23) 4. 하나님의 찬양(24-25)
1. 기롱하는 자들이 있을 것임을 기억하라(17-19)
기롱한다는 말의
뜻은 조롱한다는 뜻인데 이는 하나님을 조롱하고 성도들을 조롱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말세에 거짓 선지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사도들이 전에 했던 말을 기억하라고 유다는 성도들에게 권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베드로 그리고 사도 요한은 그들의
편지에서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 경계하도록 미리 말한바가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가 나타날 것을 예고한 유다는 다시 거짓 선지자들의
특성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말세에 나타날 거짓 선지자들은 경건은 모르고 자기의 욕심대로 사는 자들이며, 교회와 교인을 갈라놓는
당을 짓는 자들이라 했습니다. 또 그들은 교회에 들어와 있으나 성령은 없는 자들이라 했습니다. 성령이 없다는 말의 뜻은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믿지 않은 다는 말입니다. 교회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구원도 심판도 믿지 않은 불신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말세에 교회에 나타나게 될 것을 몇몇의 사도들이 미리 말한 바가 있는데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2. 자신을
건축하라(20-21)
유다는 성도들이 믿음의 도를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거짓 선지자와 힘써 싸워 이겨야 하므로 거짓 선지자와 힘써 싸워 이길 수 있는 네 가지 길을 권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라고 했습니다. 거룩한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이 기초가 된 믿음을 말합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는 믿음도 많기 때문에 그런 믿음과 구별하기 위해 거룩한 믿음이라 한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가 나타났을 때에
모래 위에 세운 집이 무너지듯 무너지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로 단단하게 다져진 기초 위에 자신을 세워나가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늘 가까이하여 자기가 가진 믿음을 말씀과 대조하고 말씀에 따라 실행하라는 것입니다.
다음은 성령으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거짓 선지자와 싸워 이길 수 있는 두 번째의 길은 성령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기도한다는 말의 뜻은 자기 욕심만을 채우려는 기도 말고 성령을 충만하도록 채우려는 기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에
합하는 기도이며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의지하는 기도를 말합니다.
그 다음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킨다는 말의 뜻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자신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는 울타리가 되어주시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이
세상 아무 것도 지켜주는 울타리가 되어줄 수 없을 것이므로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지 말고 늘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만
머물러 있으라는 뜻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된 긍휼은
재림시에 성도들에게 베풀어주실 긍휼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재림시에 주님께서 베푸실 긍휼을 소망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소망을 가진 자는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어 승리의 자리에 들 수 있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고 불에서 끌어내라(22-23)
22절부터
23절에서는 거짓 선지자들로부터 유혹되었거나 유혹될 성도들에게 사랑을 베풀라는 권고인 것입니다. 바로 앞부분에서 거짓 선지자들을
대항하여 싸워 이기려면 자신을 단단히 무장하라고 권면했는데 이렇게 자신을 지키기 위해 단단히 무장했으면 이제는 자기 이웃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을 구출해내라는 것입니다. 첫째는 거짓 선지자의 유혹을 받아 비 진리를 진리라 믿고 오히려 진리를 의심하는
이웃들에게 냉대만 하지 말고 사랑과 긍휼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에게 유혹된 자는 거짓 선지자들이 불에 탈 때에 함께
불에 타고 말 것이기 때문에 불에서 그들을 구원해 내라는 권고인 것입니다. 불에서 그들을 구원하는 길이란 비 진리에 빠져 있는
자들을 조심스럽게 접촉하여 비 진리의 삶에서 빠져 나와 진리를 다시 믿게 하라는 권면인 것입니다. 물에 빠진 자를 건져 낼 때에
조심스럽게 건져내지 않으면 둘이 다 빠져 죽는다는 것을 생각하며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미 빠져 들어간 자를 접촉할 때에 조심스럽게
두려움을 가지고 접촉하면서 구출해 내라는 권고입니다.
4. 하나님의 찬양(24-25)
유다는 거짓 선지들로부터 성도들을
지켜주셨고 앞으로도 지켜주실 하나님께 찬양하는 말로 유다서를 끝맺고 있습니다. 유다는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거짓 선지자들의 위험
속에서도 성도들을 능히 보호하시어 아무런 거침이 없게 하실 하나님으로 찬양하고 있습니다. 또 주님 재림시에 성도들을 하나님의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능력이 있으신 하나님으로 찬양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가장 큰 소망은 주님 재림시에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는 것이요 그 자리에 서기 위해서는 그 자리에 설 때까지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셔야 하기 때문에 모든
악으로부터 성도들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성도들을 흠 없게 바로 서게 하실 하나님으로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다는 마지막 절인 25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히 함께 하시기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일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또 주님의 보혈의 공로로 많은 천국
백성들이 천국에 입성하므로 큰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를 영원히 누릴 분이심을
찬양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교훈은 주님 재림시에 하나님의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바로 설 수 있도록 믿음을 지켜나가라는
교훈입니다. 그리고 이런 믿음을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자신을 바른 믿음의 사람으로 건축해나가라는 교훈인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명에도 지식도 권세도 부귀도 다 중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세상에서 이름 있는 자들의 장례식은 오히려 더
허망한 생각이 들게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가졌던 아무 것도 그를 죽음 앞에서는 쓸모가 없다는 허무한 생각을 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장례식에 갈 때마다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장례식을 아무리 화려하게 거행하고 장례식에서 죽은 자의 약력을
아무리 아름답고 꾸며주어도 그런 것들은 죽은 자의 영혼을 구원하는데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또 장례식을 집례하는
자가 고인의 영혼이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고 선포한다고 하더라도 그 선포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 무엇이 죽은 자의 영혼이 주님 재림시에 천국에 입성하도록 해주는 것일까요? 그것은 살아 있는 동안에 가졌던
본인의 바른 믿음과 바른 실행만이 자신의 영혼이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살도록 보장해주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유다는 우리들에게
권하기를 바른 믿음으로 자신을 세워나가라고 한 것입니다. 바른 믿음으로 자신을 세워 나가는 자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 흠 없게 즐거움으로 설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떻게 자신을
세워나가라고 했나요?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워나가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어떤 교파나 어떤 유명한 신학자가 제시한 믿음 말고
하나님의 말씀이 인정한 믿음 위에 우리들 자신을 건축해 나가야 합니다. 말씀과 대조하여 세상이 준 믿음은 하나씩 버려나가므로
거룩한 믿음으로 바꿔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성령으로 기도한다는 말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은 주님의 기도를 생각하면
됩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실행하기 위함이었으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채우기
위함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한 기도 말고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성령께서 원하는 삶을 살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늘 충만하도록 성령의 기도로 우리들을
건축해나가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 유다는 우리들에게 늘 하나님 안에 거하여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을 늘 받을 수 있는 자들이 되고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늘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는 삶으로 우리 자신의 믿음을 건축해 나가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렇게 믿음을 세워나가야 하겠습니다.
또 이런 믿음으로 자신을 무장한 우리 모두는 비 진리에 빠져 있는 영혼들에 관심을 갖고 그들을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받게 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귀한 삶을 사시어 주님 재림시에 하나님의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바로 살 수 있으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1. 부르심을 입은 자(유다서 1:1-2)
유다서는 67년경에 유다에 의해 쓰여진 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유다는 자신을 야고보의 형제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야고보란 이름이 여러 곳에
있지만 여기서 야고보라고 지칭한 인물은 야고보서를 기록한 주님의 형제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유다는 야고보와 함께 주님의 육신적인 형제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본서를 기록한 유다는 사도 중에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주의 복음을 위해 많은 사역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 서신을 쓴 목적은 많은 이단자들과
복음을 대적하는 무리들이 복음을 방종 주의와 혼돈하여 진리를 흐리게 하고 있으므로 이것을 엄히 경계하고 성도들로 구원을
위해 끝까지 싸우게 하려는데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유다의 축복 기도
유다는 이 서신의 서두에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 대하여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더욱 풍성할 것을 축원해 주고 있습니다.
유다는 부르심은 입은 자들에 대하여 두 가지 특권을 말씀해 줍니다.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은 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자들을 복음으로 부르십니다. 이들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받은 그의 백성들입니다.
이들에 대하여 로마서 9:10 이하에서 사도 바울은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는데
하나님의 택하심에서 오는 부르심은 야곱의 경우처럼 에서는 미워하셨기 때문에 부르심에서 제외되고 야곱은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사람의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따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그 뜻을 알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를 부르심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 목적을 위해 그 무한하신 지혜와 권능으로 조금도 차질 없이 계획하셨고 또 조금의 실수도 없이 그 뜻을
이루신다는 사실입니다. 신명기 29:29에서 이르시기를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께 속한
일'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오묘함을 알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에게 주어진 환경과 지혜 안에서만 생각하기 때문에
이사야 55:8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그의 생각으로 모든 일을 섭리하시기 때문에 결코 후회함이 없으십니다. 바울은 로마서 1:30에서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내가 부르심을 받은 것은 이같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와
판단에 다라 결정되어 실행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확고한 믿음을 가져야 하며 늘
그 은혜 가운데서 감사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따질 수 있는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이런 완벽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찾아온 것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뢰하고 그의 뜻대로 이루어질
수 있기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 분의 뜻은 언제나 나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시는 일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분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
유다는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두 가지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을 얻기 위해 창세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에
의해 지켜져 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에도 하나님의 지키심에 의해 내가 세상에 태어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나나 여러분은 지난날 고려 시대나 이조 시대에 태어났어도 좋을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옆집 부자집
주인의 아들이나 앞집 권세 있는 집주인의 딸로 태어날 수도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 가문의 혈통을 통해서 내 부모님에 의해서 내가 세상에 태어날 것을
이미 예정하셨으며 그런 모든 일들을 이루시기 위해 나를 지켜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이 이 땅에 전파되기 이전의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것은 이같은 하나님의 지키심의 섭리에 의한 필연적인 일인 것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앞으로도
이같은 하나님의 지키심으로 나의 구원을 온전히 이루어 주실 것이란 사실입니다. 이런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지키심은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어 천국에
이르기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끝까지 지키심을 입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 깊이 새겨 늘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생애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07-18-2022(월)
네 영혼이 잘 됨같이(요한삼서 1:2)
영혼(5590). 푸쉬케(psüchē) ψυχή
ψυχή, ῆς, ἡ
1. 영혼, 2. 생명력, 3. 혼
발음
/ 푸쉬케(psüchē) 어원 / 559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목숨(마 2:20, 막 8:35, 롬 11:3), 영혼(마 10: 28, 눅 12:20, 고후 12:15),
마음(마 11:29, 막 14: 34, 행 14:22), 생명(막 3:4, 요12:25, 행 20:10), 힘(막 12:33),
뜻(행 4:32), 인(행 27:37), 영(고전 15:45), 혼(살전 5:23, 히 4:12), 명(벧전 3:20), 심령(벧후 2:8),
사람(행7:14, 롬 13:1) 신약 성경 / 103회 사용
* 5594. ψύχω
1. 차게하다, 2. 싸늘하게 하다. 수동: 차게 되다, 3. 싸늘해지다
발음 / 프슈코(psüchō) 관련 성경 / 식어지다(마 24:12) 신약 성경 / 1회 사용
겉(1854) 에코(ἔξω)
1. 밖에, 2. 마가 11:4, 3. οἱ ἔξω 밖에 있는 사람들
발음
/ 에코(ĕxō) 어원/ [장소의 부사] 1537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밖으로(마 21:17), 외인(막 4:11), 겉(고후 4:16), 밖(마 5:13, 막 3:31, 눅 1:10), 바깥(마 26:69, 막 1:45), 외국(행 26:11) 신약 성경 / 63회 사용
* 1537. 에크(ἐκ)
1. 모음 앞에서는 ἐξ, 2. 마태 2:15, 3. 요한 15:19
발음
/ 에크(ĕk) 관련 성경 / ~에서부터, ~에서부터 멀리, ~로 말미암아, ~에게서 온(마 1:18) 신약 성경 / 916회 사용
후패(1311). διαφθείρω
1. 파괴하다, 2. 파멸시키다
발음
/ 디아프데이로(diaphthĕirō) 어원 / 완료수동분사 διεφθαρμένος, 제2부정과거수동태 διεφθάρην, 1225와 535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좀먹다(눅 12:33), 낡아지다(고후 4:16), 부패하다(딤전 6:5), 깨지다(계 8:9), 망하다(계 11:18), 멸망시키다(계 11:18) 신약 성경 / 6회 사용
* 1225. διαβάλλω
1. 적의로 고소하다, 2. 비난하낟, 3. 참소하다
발음
/ 디아발로(diaballō) 어원/ 제1부정과거수동태 διεβλήθην, 1223과 90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밀고되다, 들리다(눅 16:1) 신약 성경 / 1회 사용
관련 성경 / 더럽히다(고전 3:17, 15:33), 멸하다(고전 3:17), 해롭게 하다(고후 7:2), 부패하다(고후 11:3), 썩어지다(엡 4:22), 멸망하다(유 1:10)
신약 성경 / 9회 사용
속(2081) ἔσωθεν
1. 안으로부터, 2. 안에
발음
/ 에소덴(ĕsōthĕn) 어원/ [장소부사] 208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속에는(마 7:15), 속에서(막 7:21, 23), 안에는(마 23:25, 27, 눅 11:7), 안으로는(마 23:28), 속은(고후 4:16), 속도(눅 11:40) 신약 성경 / 12회 사용
* 2080. ἔσω
1. 안으로, 2. 내부에
발음
/ 에소(ĕsō) 어원 / [장소부사] 151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안에(마 26:58, 막 14:54, 요 20:26), 속에(롬 7:22, 엡 3:16), ~안에(고전 5:12), 안으로 (막 15:16)
신약 성경 / 9회 사용
*1519. εἰς
1. ~안으로, 2. ~에게. 3. ‘가다’ 라는 동사나 어느 장소를 향한 동작을 포함하는 동사들의 뒤에서. ㉠ 성 안에 가서
발음
/ 에이스(ĕis) 관련 성경 / 결과가 ~이다(마 2:1) 신약 성경 / 1768회 사용
새롭도다(341). ἀνακαινόω
1. 《반》διαφθείρειν: 새롭게 하다, 2. 갱신하다, 3. 고린도후서 4:16
발음
/ 아나카이노오(anakainŏō) 어원 / 303과 2537의 파생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새롭다(고후 4:6), 새롭게 하심을 입다(골 3:10)
신약 성경 / 2회 사용
* 303. ἀνά
1. 위에, 2. ἀνὰ μέσον, 3. ~가운데
발음
/ 아나(ana) 관련 성경 / 층대(행 21:35) 신약 성경 / 13회 사용
* 2537. καινός καινός, ἡ, όν
1. 새로운, 2. 쓰지 않은, 3. 알려지지 않은
발음
/ 카이노스(kainŏs) 어원 /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새(마 9:17, 눅 5:36, 계 2:17, 마 13:52, 막 2:21, 고후 5:17), 새로운(고후 5:17, 계 21:5), 새로 되는(행 17:21)
신약 성경 / 42회 사용
* 새로운(네오스) νέος νέος, α, ον
1. 새로운, 2. 상징적으로 쓰일 경우. ㉠ 고전5:7. ㉡ οἶνος ν.: 새 술, 3. ἐνδύσασθαι τὸν ν.: 새사람을 입다
발음
/ 네오스(nĕŏs) 관련 성경 / 젊은(요 21:18, 행 5:6, 딤전 5:11). [명] 젊은이(딤전 5:1, 14), 젊은 자(눅 22:26) 신약 성경 / 24회 사용
영혼이 잘 된다는 것은 속 사람이 잘 된다는 것이라고 하겠다. 겉 사람은 주로 외적인 기준으로 평가한다. 예를 들면 그가 입고 있는 옷, 그가 살고 있는 집, 그가 사용하는 자동차와 같은 것들이다. 반면에 속 사람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준이 없기 때문에 가늠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속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유지되는 사람이므로 영적 생활을 어떻게 하느냐에 의해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이다. 왜냐하면 나는 외할아버지를 보지 못했다. 그렇다고 외할아버지가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나의 어머니의 아버지가 외할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이다.
영혼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겉 사람을 중요시하고 겉 사람을 외면하는 사람의 종말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에서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곧 영혼을 위한 말씀이며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영혼이 잘 된다는 것은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성경에서 영혼이 잘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인가?
첫째는 구약시대에는 선지자들입니다. 둘째는 신약시대에는 사도들입니다. 사도들의 대부분은 죽임을 당하고, 죽음의 위협과 굶주림과 매 맞음 속에서 예수를 증거했습니다. 셋째는 초대교회 시대에는 수 많은 순교자들입니다.
영혼이 잘된 사람이란 어떤 사람들인가?
첫째는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요한복음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둘째는 예수님의 제자(누가복음 14:33)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셋째는 이 세상 것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요한일서 2:15-17)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니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넷째는 세상에서 자랑을 받을 수 없는 사람(누가복음 16:15)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영혼이 잘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으로 이러한 사람들은 악한 것을 외면하고 선한 것을 본 받는 길을 따라갑니다.
영혼이 잘 되려면 바른 신앙을 유지해야 합니다. 바른 신앙이란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날마다 주님을 닮아가는 일에 하나가 되어 세상을 하나님의 것으로 회복하는 일에 보탬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종교는 없지만 영적 존재는 믿는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수요성서학당 #. 14(09-16-20)
겉 사람과 속 사람(고린도후서 4:16, 에베소서 4:22-24)
고린도후서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Therefore we do not lose heart. Though outwardly we are wasting away, yet inwardly we are being renewed day by day
공동번역 /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낡아지지만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 /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비록 우리의 겉 사람은 쇠약해 가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와지고 있습니다. 새번역 /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 겉 사람과 속 사람을 구별하는 기준은 "시간" 이라고 하겠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겉 사람은 누구나 약하여지고 쇠하여 갈 것입니다. 반면에 속 사람은 정신을 차리기도 하고 철이 들기도 하고 반성하며 후회하면서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려고 결단합니다.
- 옛 사람과 새 사람을 구별하는 기준은 "신앙" "거듭남" "중생" "구원" 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원을 받은 후에도 내 안에서 옛 사람의 삶의 습관이 나를 힘들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모습을 일컬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탄식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케 된 후에는 "나의 달려 갈 길을 다 가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렇게 고백합니다.
* 자연인의 반대는 "문화인" 또는 "문명인"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사람이다. 자연인의 겉 사람은 육체의 소욕을 따라가는 사람 자연인의 속 사람은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
* 자연인과 문화인 그리고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겉 사람은 동일한 모습이다. 모두 시간이 지날수록 육체는 쇠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속 사람은 목적과 추구하는 것이 다르다. 속사람은 새로워 집니다. 어떻게 새로워 집니까? 자연인의 속 사람은 "정신을 차린다" "철이 들었다" 그리스도인의 경우는 "회개" "깨닫는다"고 합니다. 에베소서 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You were taught, with regard to your former way
of life, to put off your old self, which is being corrupted by its
deceitful desires; to be made new in the attitude of your minds; and to put on the new self, created to be like God in true righteousness and holiness.
용어 영어 성구 헬라어 의미
겉 사람
outward man, outwardly, outer man
고후 4:16
ἔξω
육에 끌리는 사람
속 사람
inwardly, inward man, inner man
고후 4:16
ἔσω
영에 끌리는 사람
옛 사람
the old man, the old self
엡 4:22
παλαιός
중생 이전의 사람
새 사람
the new self, the new man
엡 4:24
καινός
중생 이후의 사람
대부분의 설교자는 겉 사람은 옛 사람이며, 속 사람은 새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하게 읽어보면 옛 사람과 새 사람은 거듭난 후에 나타나는 삶의 양식으로 옛 사람의 삶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상태가 지속되므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겉
사람과 속 사람이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모습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나 구원 받지 못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삶의 양식으로 겉
사람은 육체 끌리는 삶의 양식이라면 속 사람은 영에 끌리는 삶의 양식 즉 선한 양심에 의하여 갈등하며 고민하는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NEET족 ; Not in Education, Employment, Training (한국어로 방콕족)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철저한 무가치함과 무능력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철저한 무가치함을 깨달은 자는 자신에게 선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오직 죄 지은 것만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전율한다.
자신의 철저한 무능력을 깨달은 자는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한 없이 슬퍼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구원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한없는 사랑과 은혜에만 의지한다.
무덤 속의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부패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부활한 것은 “나사로야 나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된 것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자는 자기도 그렇게 구원받았음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자이다. 죽은 시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사로는 무덤에서 걸어 나온 후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몸은 수의로 칭칭 감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예수께서는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난 자는 자기가 구원 받기 전에는 물론, 구원 받은 후에도 행한 것이라고는 죄짓는 것 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한다. 그리고 그는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베드로처럼 절규한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율법주의자와 행위주의자들
어떤 형태로든 자기의 의를 주장하는 자들은 아직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할 수 없는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 믿는다고 말하는 이교도들일 뿐이다. 그들이 참으로 예수를 믿고 거듭나는 때는 자신의 철저한 무가치함과 무능력을 깨닫고 겸손히 고백하는 때이다. 그 때가 어서 왔으면 참 좋겠다. 그러면 하늘나라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그들로 인해 큰 기쁨의 잔치가 열릴 것으로 믿는다.
인생을 살면서 많은 선생님을 만납니다. 선생님들의 역할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선생님이 내 인생에서 중요한 존재는 아닙니다.
‘박군의 마음’ 이라는 전도지
박군이라는 청년에게 전도를 하는 내용인데 박군의 마음속에 있는 일곱 가지 악한 성향, 죄를 짐승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일곱 짐승이 차지하고 있는 마음을 주님이 온전하게 들어오심으로 일곱 짐승이 다 나가고 아름답고 선한 마음이 되는 것을 설명한 전도지입니다.
영적 전쟁을 아주 쉽고 간단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아마 이 전도지를 처음 만든 사람은 영적으로 많이 열려진 사람일 것입니다.
그 일곱 가지 짐승의 마음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수다쟁이 영 / 개구리
말이 많은 사람은 그 사람의 안에서 개구리가 쉬지 않고 개굴개굴 하고 울어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개구리는 입에 관련된 것으로 설명됩니다(요한계시록 16:13).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말이 많은 사람은 절제하지 못하고 수없는 말들을 입에서 쏟아냅니다. 그리하여 영적 에너지를 잃게 하고 주변에 악한 기운으로 가득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이들은 침묵을 배우고 입술로 주님을 찬양하고 높여야 합니다.
주님께 받은 은혜를 나누는 대화가 있는가 하면, 세상을 사랑하고 세속에 깊이 물든 대화가 있습니다. 덕을 세우는 말이 있는가 하면, 남을 비방하고 또는 상처가 될 수 있는 날카로운 말도 있습니다. 다툼이 있는 곳에는 절제되지 못한 말들이 있습니다.
성경 곳곳에 말의 중요성이 나옵니다. 축복의 말은 반드시 축복으로 돌아오지만 저주의 말을 하면 나쁜 저주가 임합니다. 이것이 혀의 권세입니다(잠언 18:21). 말한 대로 열매를 맺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둘째, 교만의 영 / 공작새
공작새가 그 날개를 활짝 펴서 자랑을 하듯이 교만의 영을 가진 이들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자기가 선하고 지식이 많으며 영적이라고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이들은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뿐 아니라 교만은 스스로를 높이는 것입니다. 과거에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이 이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들의 왕국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또 다시 대홍수가 일어나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높은 탑을 쌓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그분의 말씀과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 없이도 잘 살수 있다고 믿으며 사는 사람이 교만한 사람입니다.
불신앙이 가장 큰 교만의 죄입니다.
하나님을 안 믿으면 지옥에 가지요. 이 사실이 부당한가요?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이 사람들 안에는 있습니다. 하나님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심지어 공산당들도 죽을 위기를 만나면 어떻게 하는 줄 아세요? "하나님, 잘못했어요. 하나님, 제발 한번만 살려주세요!" 이렇게 나옵니다. 무신론자라도, 부처를 섬기는 사람이라도 죽기 직전엔 하나님을 찾아요. 그러나 하나님을 거역하고자 하는 악독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순순히 그분을 따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거절하는 것입니다.
잠언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셋째, 간교한 영 / 뱀
뱀은 간교한 영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창세기 3:1).
간교한 영의 사람은 지혜가 많고 머리가 좋아서 말을 잘 하며 사람들을 잘 속입니다. 잘못을 해도 상대방이 그것을 추궁하면 교묘하게 변명하여 오히려 상대방이 잘못한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 영은 “배신의 영”과도 연결되어 있으며 “유혹의 영”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강자 앞에서 약하며 약자 앞에서 잔인합니다. 영안이 열린 이들에게 이들은 뱀의 형상으로 보이게 됩니다.
야곱은 속임수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겨우 한 끼 먹을 팥죽으로 형의 장자의 명분(권리)을 빼앗았습니다. 그의 지혜는 분명히 타고난 것입니다. 하지만 바르게 사용하지 않을 때, 그것은 악한 영의 도구가 됩니다. 간사하게 부리는 꾀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에 다듬어져야 합니다. 야곱은 그로 인해 험한 세월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골로새서 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넷째, 음란한 영 / 염소
염소는 성적으로 더러우며 정욕이 강하다고 합니다. 성적으로 문란한 이 시대에 음란을 피해가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과거에 비해 생활이 많이 편리해졌습니다. 과거에 없던 것들이 새로 생겨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따른 문제도 심각한 문제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편리한 도구들은 우리의 생활을 풍성하게 해줍니다. 정보를 빠르게 얻을 수 있어요. 하지만 이것이 문제입니다. 죄를 짓는 데에도 쉽고 빠릅니다. 음란과 세속에 빠지는 죄는 지금 매우 심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베드로전서 4: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다섯째, 혈기의 영 / 호랑이(사자)
사자 또는 호랑이는 분노의 영 또는 화의 영을 상징합니다. 속에서 폭발적으로 분노와 혈기가 일어나는 이들은 속에 호랑이나 사자가 으르렁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성질이 강하고 사나워서 가까이 하기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베드로전서 5:8)
성경에서 최초의 살인 사건은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돌로 쳐 죽인 것입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왜 죽였을까요? 미움과 혈기를 참지 못해서 죽였습니다.
따돌림과 괴롭힘이 학교에서 왜 일어날까요? 혈기 내는 영이 사람 안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에베소서 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디모데전서 2:8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여섯째, 탐욕의 영 / 돼지
돼지의 영을 “탐욕의 영”이라고 합니다. 돼지의 영이 내 안에 들어오면 끊임없이 욕심을 부리며 그 욕망으로 인하여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아무리 가진 것이 많이 있어도 남들에게 자기가 가진 것을 주려고 하지 않으며 더 많이 얻으려고 합니다.
나발이란 사람은 부자이었지만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데 인색했습니다. 굶주린 다윗과 그의 일행을 먹이기는커녕 조롱하는 말로 다윗을 노하게 했지요. 그리고 어떻게 되었나요? 그는 몸이 돌처럼 굳어져 며칠 후 죽었습니다.
누가복음 12: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골로새서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일곱째, 게으름의 영 / 거북이
거북이와 같은 게으름의 영의 지배를 받으면 항상 나태하고 게을러서
모든 것을 미루며 일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사명을 받았어도 제대로 감당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악하고
게으른 종아(You wicked, lazy servant!)” 라는 책망의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25:26∼30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 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46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죄의 종류와 마귀의 역사는 수도 없이 많지만 이 죄들은 사람의 마음 안에 자리잡고 있는 대표적인 일곱 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who wants all men to be saved and to come to a knowledge of the truth.
베드로후서 3:9 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The Lord is not slow in keeping his promise, as some
understand slowness. He is patient with you, not wanting anyone to
perish, but everyone to come to repentance.
디도서 3:4-6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새 사람은 도덕과 윤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으로 새롭게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람 즉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사모하고 기도하며 그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시편 104:30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에베소서 4: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시편 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골로새서 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요한계시록 21:5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수요성서학당 #. 14(09-16-20)
겉 사람과 속 사람(고린도후서 4:16, 에베소서 4:22-24)
고린도후서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Therefore we do not lose heart. Though outwardly we are wasting away, yet inwardly we are being renewed day by day
공동번역 /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낡아지지만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 /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비록 우리의 겉 사람은 쇠약해 가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와지고 있습니다. 새번역 /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 겉 사람과 속 사람을 구별하는 기준은 "시간" 이라고 하겠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겉 사람은 누구나 약하여지고 쇠하여 갈 것입니다. 반면에 속 사람은 정신을 차리기도 하고 철이 들기도 하고 반성하며 후회하면서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려고 결단합니다.
- 옛 사람과 새 사람을 구별하는 기준은 "신앙" "거듭남" "중생" "구원" 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원을 받은 후에도 내 안에서 옛 사람의 삶의 습관이 나를 힘들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모습을 일컬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탄식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케 된 후에는 "나의 달려 갈 길을 다 가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렇게 고백합니다.
* 자연인의 반대는 "문화인" 또는 "문명인"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사람이다. 자연인의 겉 사람은 육체의 소욕을 따라가는 사람 자연인의 속 사람은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
* 자연인과 문화인 그리고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겉 사람은 동일한 모습이다. 모두 시간이 지날수록 육체는 쇠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속 사람은 목적과 추구하는 것이 다르다. 속사람은 새로워 집니다. 어떻게 새로워 집니까? 자연인의 속 사람은 "정신을 차린다" "철이 들었다" 그리스도인의 경우는 "회개" "깨닫는다"고 합니다. 에베소서 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You were taught, with regard to your former way
of life, to put off your old self, which is being corrupted by its
deceitful desires; to be made new in the attitude of your minds; and to put on the new self, created to be like God in true righteousness and holiness.
용어 영어 성구 헬라어 의미
겉 사람
outward man, outwardly, outer man
고후 4:16
ἔξω
육에 끌리는 사람
속 사람
inwardly, inward man, inner man
고후 4:16
ἔσω
영에 끌리는 사람
옛 사람
the old man, the old self
엡 4:22
παλαιός
중생 이전의 사람
새 사람
the new self, the new man
엡 4:24
καινός
중생 이후의 사람
대부분의 설교자는 겉 사람은 옛 사람이며, 속 사람은 새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하게 읽어보면 옛 사람과 새 사람은 거듭난 후에 나타나는 삶의 양식으로 옛 사람의 삶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상태가 지속되므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겉
사람과 속 사람이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모습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나 구원 받지 못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삶의 양식으로 겉
사람은 육체 끌리는 삶의 양식이라면 속 사람은 영에 끌리는 삶의 양식 즉 선한 양심에 의하여 갈등하며 고민하는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NEET족 ; Not in Education, Employment, Training (한국어로 방콕족)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철저한 무가치함과 무능력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철저한 무가치함을 깨달은 자는 자신에게 선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오직 죄 지은 것만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전율한다.
자신의 철저한 무능력을 깨달은 자는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한 없이 슬퍼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구원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한없는 사랑과 은혜에만 의지한다.
무덤 속의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부패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부활한 것은 “나사로야 나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된 것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자는 자기도 그렇게 구원받았음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자이다. 죽은 시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사로는 무덤에서 걸어 나온 후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몸은 수의로 칭칭 감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예수께서는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난 자는 자기가 구원 받기 전에는 물론, 구원 받은 후에도 행한 것이라고는 죄짓는 것 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한다. 그리고 그는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베드로처럼 절규한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율법주의자와 행위주의자들
어떤 형태로든 자기의 의를 주장하는 자들은 아직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할 수 없는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 믿는다고 말하는 이교도들일 뿐이다. 그들이 참으로 예수를 믿고 거듭나는 때는 자신의 철저한 무가치함과 무능력을 깨닫고 겸손히 고백하는 때이다. 그 때가 어서 왔으면 참 좋겠다. 그러면 하늘나라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그들로 인해 큰 기쁨의 잔치가 열릴 것으로 믿는다.
인생을 살면서 많은 선생님을 만납니다. 선생님들의 역할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선생님이 내 인생에서 중요한 존재는 아닙니다.
‘박군의 마음’ 이라는 전도지
박군이라는 청년에게 전도를 하는 내용인데 박군의 마음속에 있는 일곱 가지 악한 성향, 죄를 짐승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일곱 짐승이 차지하고 있는 마음을 주님이 온전하게 들어오심으로 일곱 짐승이 다 나가고 아름답고 선한 마음이 되는 것을 설명한 전도지입니다.
영적 전쟁을 아주 쉽고 간단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아마 이 전도지를 처음 만든 사람은 영적으로 많이 열려진 사람일 것입니다.
그 일곱 가지 짐승의 마음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수다쟁이 영 / 개구리
말이 많은 사람은 그 사람의 안에서 개구리가 쉬지 않고 개굴개굴 하고 울어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개구리는 입에 관련된 것으로 설명됩니다(요한계시록 16:13).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말이 많은 사람은 절제하지 못하고 수없는 말들을 입에서 쏟아냅니다. 그리하여 영적 에너지를 잃게 하고 주변에 악한 기운으로 가득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이들은 침묵을 배우고 입술로 주님을 찬양하고 높여야 합니다.
주님께 받은 은혜를 나누는 대화가 있는가 하면, 세상을 사랑하고 세속에 깊이 물든 대화가 있습니다. 덕을 세우는 말이 있는가 하면, 남을 비방하고 또는 상처가 될 수 있는 날카로운 말도 있습니다. 다툼이 있는 곳에는 절제되지 못한 말들이 있습니다.
성경 곳곳에 말의 중요성이 나옵니다. 축복의 말은 반드시 축복으로 돌아오지만 저주의 말을 하면 나쁜 저주가 임합니다. 이것이 혀의 권세입니다(잠언 18:21). 말한 대로 열매를 맺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둘째, 교만의 영 / 공작새
공작새가 그 날개를 활짝 펴서 자랑을 하듯이 교만의 영을 가진 이들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자기가 선하고 지식이 많으며 영적이라고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이들은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뿐 아니라 교만은 스스로를 높이는 것입니다. 과거에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이 이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들의 왕국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또 다시 대홍수가 일어나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높은 탑을 쌓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그분의 말씀과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 없이도 잘 살수 있다고 믿으며 사는 사람이 교만한 사람입니다.
불신앙이 가장 큰 교만의 죄입니다.
하나님을 안 믿으면 지옥에 가지요. 이 사실이 부당한가요?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이 사람들 안에는 있습니다. 하나님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심지어 공산당들도 죽을 위기를 만나면 어떻게 하는 줄 아세요? "하나님, 잘못했어요. 하나님, 제발 한번만 살려주세요!" 이렇게 나옵니다. 무신론자라도, 부처를 섬기는 사람이라도 죽기 직전엔 하나님을 찾아요. 그러나 하나님을 거역하고자 하는 악독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순순히 그분을 따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거절하는 것입니다.
잠언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셋째, 간교한 영 / 뱀
뱀은 간교한 영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창세기 3:1).
간교한 영의 사람은 지혜가 많고 머리가 좋아서 말을 잘 하며 사람들을 잘 속입니다. 잘못을 해도 상대방이 그것을 추궁하면 교묘하게 변명하여 오히려 상대방이 잘못한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 영은 “배신의 영”과도 연결되어 있으며 “유혹의 영”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강자 앞에서 약하며 약자 앞에서 잔인합니다. 영안이 열린 이들에게 이들은 뱀의 형상으로 보이게 됩니다.
야곱은 속임수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겨우 한 끼 먹을 팥죽으로 형의 장자의 명분(권리)을 빼앗았습니다. 그의 지혜는 분명히 타고난 것입니다. 하지만 바르게 사용하지 않을 때, 그것은 악한 영의 도구가 됩니다. 간사하게 부리는 꾀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에 다듬어져야 합니다. 야곱은 그로 인해 험한 세월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골로새서 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넷째, 음란한 영 / 염소
염소는 성적으로 더러우며 정욕이 강하다고 합니다. 성적으로 문란한 이 시대에 음란을 피해가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과거에 비해 생활이 많이 편리해졌습니다. 과거에 없던 것들이 새로 생겨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따른 문제도 심각한 문제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편리한 도구들은 우리의 생활을 풍성하게 해줍니다. 정보를 빠르게 얻을 수 있어요. 하지만 이것이 문제입니다. 죄를 짓는 데에도 쉽고 빠릅니다. 음란과 세속에 빠지는 죄는 지금 매우 심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베드로전서 4: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다섯째, 혈기의 영 / 호랑이(사자)
사자 또는 호랑이는 분노의 영 또는 화의 영을 상징합니다. 속에서 폭발적으로 분노와 혈기가 일어나는 이들은 속에 호랑이나 사자가 으르렁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성질이 강하고 사나워서 가까이 하기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베드로전서 5:8)
성경에서 최초의 살인 사건은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돌로 쳐 죽인 것입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왜 죽였을까요? 미움과 혈기를 참지 못해서 죽였습니다.
따돌림과 괴롭힘이 학교에서 왜 일어날까요? 혈기 내는 영이 사람 안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에베소서 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디모데전서 2:8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여섯째, 탐욕의 영 / 돼지
돼지의 영을 “탐욕의 영”이라고 합니다. 돼지의 영이 내 안에 들어오면 끊임없이 욕심을 부리며 그 욕망으로 인하여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아무리 가진 것이 많이 있어도 남들에게 자기가 가진 것을 주려고 하지 않으며 더 많이 얻으려고 합니다.
나발이란 사람은 부자이었지만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데 인색했습니다. 굶주린 다윗과 그의 일행을 먹이기는커녕 조롱하는 말로 다윗을 노하게 했지요. 그리고 어떻게 되었나요? 그는 몸이 돌처럼 굳어져 며칠 후 죽었습니다.
누가복음 12: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골로새서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일곱째, 게으름의 영 / 거북이
거북이와 같은 게으름의 영의 지배를 받으면 항상 나태하고 게을러서
모든 것을 미루며 일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사명을 받았어도 제대로 감당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악하고
게으른 종아(You wicked, lazy servant!)” 라는 책망의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25:26∼30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 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46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죄의 종류와 마귀의 역사는 수도 없이 많지만 이 죄들은 사람의 마음 안에 자리잡고 있는 대표적인 일곱 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who wants all men to be saved and to come to a knowledge of the truth.
베드로후서 3:9 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The Lord is not slow in keeping his promise, as some
understand slowness. He is patient with you, not wanting anyone to
perish, but everyone to come to repentance.
디도서 3:4-6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새 사람은 도덕과 윤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으로 새롭게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람 즉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사모하고 기도하며 그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시편 104:30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에베소서 4: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시편 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골로새서 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요한계시록 21:5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미국의 '탈종교'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 그러나 제도권의 종교를 이탈한다고 해서 '신(神)' 또는 영적인 것에 대한 관심까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종교와 영적인 것의 구분이 선명해지고 있다. 퓨리서치센터가 최근 미국인의 신에 대한 믿음을 분석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사람들이 "신을 믿는다"고 말할때 오늘날 그것이 뜻하는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퓨리서치센터가 미국내 성인
4,729명에게 물었다. 신뢰도는 95%(오차범위 ±2.3%)다.
신을 믿는다는 게 곧 종교를 갖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최근 미국에서는 종교 기관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고 있지만 이러한 추세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미국인이 어떤 영적인 힘 또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인식하고 있다.
퓨리서치센터에 따르면 미국인 10명 중 9명(88%)은 신 또는 어떤 형태로든 강력한 영적 존재가 있다는 것을 믿는다.
이를 좀 더 자세하게 나눠보면 응답자의 56%가 "성경에 있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답했다. 반면 32%는 "어떤 형태로든 강력한 영적 존재 또는 힘을 믿는다"고 응답했다.
신이라는 존재도 어떤 형태의 강력한 힘도 믿지 않는다고 응답한 미국인은 10%에 불과했다.
이는 종교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을 어떤 종교 기관에도 속하지 않았다고 말한 응답자 10명 중 7명(72%)은 "하나님 또는 어떤 형태로든 강력한 영적 존재를 믿는다"고 답했다.
즉, 신이라는 존재는 믿지만 종교에 얽매이지 않는 미국인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신 또는 영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은 젊은층 보다는 노년층에게 더 강했다.
우선 '성경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응답은 18~29세(43%), 30~49세(49%), 50~64세(67%), 65세 이상(65%) 등 연령이 높을수록 비율이 높았다.
하지만, '어떤 형태의 강력한 힘 또는 존재를 믿는다'는 응답은 18~29세(39%), 30~49세(37%),
50~64세(28%), 65세 이상(26%) 등 젊을수록 반드시 종교적인 신이 아니어도 영적인 존재의 인식과 믿음은 더 강했다.
미국인의 일상은 영적인 것과 상당히 밀접한 것으로 조사됐다.
응답자의 절반(48%) 가량이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신 또는 영적인 존재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미국인들은 왜 신이나 영적인 존재를 믿을까?
10명 중 7명(77%)은 "신이나 영적인 존재가 나를 보호한다"고 응답했다. 또 '신이나 영적인 존재가 자신에게 보상을
해주기 때문(67%ㆍ중복응답 가능)', '신이나 영적인 존재는 사람들이 행한 대로 심판을 하기 때문(61%)' '징벌을 하기
때문(40%)'이라는 답변도 있었다.
그만큼 인간은 신 또는 거대한 영적인 존재보다 기본적으로 연약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셈이다.
이번 퓨리서치센터의 보고서를 분석해보면 분명한 것은 영적인 것에 대한 믿음과 관심은 분명 높지만 종교에 얽매이지 않는 미국인들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그만큼 종교사회학계서 일컫는 'SBNR(Spiritual But Not Religiousㆍ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는 않다)'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SBNR 부류의 특징은 삶에 있어 영적인 생활은 매우 중요하게 여기지만 종교적 형식이나 신념에 얽매이지 않는다.
하트포드신학교 스콧 섬마 교수는 "특히 SBNR을 추구하는 부류는 밀레니얼 세대로 구성돼 있으며 종교적 테두리 안에
갇히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며 "반면 명상이나 요가 등을 통해 매우 실제적으로 영적인 삶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전했다.
최근 이들은 정치적으로도 미국내 주요 유권층으로 부상하고 있다. 대부분 자유주의적 사고를 가진 부류로 동성결혼, 낙태 등의 이슈에 대해서도 진보적인 성향을 띤다는 게 특징이다.
퓨리서치센터는 미국이 기독교 국가라는 인식이 강한 만큼 기독교인만 따로 추려 질문을 던졌다.
우선 개신교인 10명 중 8명(80%)은 "성경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답했다. 반면 "어떤 형태로든 강력한 영적 존재를 믿는다"(18%), "아무 존재도 믿지 않는다(1%)"는 응답도 있었다.
반면 "성경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가톨릭교인은 69%에 그쳤다. "어떤 형태로든 강력한 영적 존재를 믿는다"(28%), "아무 존재도 믿지 않는다(2%)"는 답변은 개신교 보다 높았다.
미국내 유대교인은 "어떤 형태로든 강력한 영적 존재를 믿는다"(56%)는 응답자가 가장 많았고 성경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답변은 33%에 그쳤다.
미국인들이 성경의 하나님이 아닌 영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다는 것은 종교에 국한되지 않는 인식이 강해지고 있다는
것임을 엿볼 수 있다. 특이한 점은 이러한 현상이 개신교 내에서도 점차적으로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기독교 여론조사 기관인 바나리서치그룹은 신앙은 있지만 교회에는 출석하지 않는 사람을 조사한 결과 자신을
'개신교인'이라고 밝힌 응답자의 10%가 "예수를 사랑하지만 교회에는 가지 않는다"고 답했다. 일명 '가나안 교인(교회를 '안
나가'는 교인을 일컫는 신조어)'인 셈이다. 이는 2004년 당시 조사결과(7%)와 비교했을 때 3% 포인트 증가했다.
주목이 되는 부분은 이들이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보다 오히려 더 굳건한 신앙을 견지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다'라는 응답은 가나안 교인(93%)이 가장 높았다. 이어 교회 출석 교인(90%), 일반인(59%) 순이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존재'라는 대답도 가나안 교인(94%)이 교회 출석 교인(85%)보다 높았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한 존재'라는 대답
역시 가나안 교인(95%)이 교회 출석 교인(92%)보다 높게 나타났다. 이는 종교 기관에 속해 있는 것이 반드시 신앙, 믿음
또는 영적인 이해 증진을 보장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세계에서 가장 종교적인 나라는 어디일까?
갤럽인터내셔널(Gallup
International)과 WI시장조사네트워크(WI Network of Market Research)가 65개국 65,000여
명을 상대로 실시한 종교 관련 설문 조사 결과가 발표되었습니다. 가장 종교적이지 않은 나라는 중국이었습니다. 응답자의 90%가
자신이 무신론자이거나 비종교적인 사람이라고 답해 압도적인 차이로 1위에 올랐죠. 응답자의 4분의 3이 같은 대답을 한 스웨덴,
체코 등이 뒤를 이었습니다. 중국은 유서깊은 종교적 전통을 지닌 나라지만, 수십 년에 걸친 공산당 집권으로 인해 무신론적 유물론이
빠르게 확산된 것으로 보입니다. 스웨덴과 같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경우, 최근 들어 세속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나 부활절은 여전히 인기있는 명절이지만, 실제로 진지하게 종교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수는 줄어들고 있는 것이죠.
중국과 홍콩이 예외로 두드러지기는 하지만, 아시아는 종교적인 지역입니다. 응답자의 절반 정도가 무신론자, 또는 비종교인이라고
답한 지역은 서유럽과 오세아니아 정도입니다. 서유럽에서도 특히 영국과 네덜란드는 비종교인이 많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현대
무신론의 발원지라 할 수 있는 프랑스는 오히려 순위에서 밀렸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무신론자, 또는 비종교적인 사람의 비율이 65%로
나온 것은 상당히 의외입니다.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에서는 그 비율이 19%에 불과했지만요.
이번 조사는 국적 이외에 다른 요소들이 어떻게 종교에 대한 태도와 연결되어 있는지도 살펴보았습니다. 나이별로 살펴보니 34세
이하의 응답자들이 나이 든 응답자들보다 종교적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교육 수준을 잣대로 보니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가장
종교적인 것으로 나타나기는 했지만, 모든 교육 수준별 집단에서 종교를 가진 사람이 무신론자보다 많았습니다. 소득 수준 중상위
집단과 상위 집단에서는 종교적인 사람의 비율이 50% 이하였지만, 하, 중하에서는 70%였습니다. GDP가 높은 나라가 덜
종교적이라던 퓨리서치센터의 조사 결과와 비슷한 부분입니다. 이 조사에서 예외는 중국과 미국 정도였죠.
세계 전체를 보면 여전히 종교를 가진 사람의 수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6대 4 정도로 더 많습니다. 특히 신앙심이 깊은
지역은 아프리카와 중동이죠. 동유럽, 아메리카, 아시아가 그 뒤를 잇습니다. 특히 젊은 세대에서 종교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는
추세를 볼 때, 종교적인 사람들의 수는 앞으로도 증가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 갤럽 조사에서 가장 종교적인 나라는 태국으로 드러났습니다. 응답자의 94%가 종교를 갖고 있다고 답했죠. 2,3,4,5위는 아르메니아, 방글라데시, 그루지아, 모로코가 차지했습니다. (워싱턴포스트)
사람만이 영적 존재로 창조
이 땅의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서 오직 사람만이 영적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창세기 1:26).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형상을 따라 그분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닮도록 그분의 형상으로 지으셨고 그분처럼
기능하도록 그분의 모양대로 지으셨습니다. 우리는 개나 고양이, 원숭이, 개코원숭이 같은 동물들과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적
존재입니다.
창세기에 나와 있는 창조의 이야기를 보면, 어떻게 모든 동물과 식물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생겨났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창조한 데 있어서는 두 가지 용어를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첫째는 창세기 1:27에 있는
“창조하시되(created)”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창 1:27)
둘째는 창세기 2:7에 나오는 “지으시고(formed)”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창조하다”와 “짓다”라는 이 두 용어가 종종 호환되어 사용되기도 하지만, 둘은 다릅니다. 뜻만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한 그분의 본래의 목적 곧 그분의 계획과 비전을 묘사하시는 데 있어서도 다르게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형상을 따라 그분의 모양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하셨을 때, 누구도 창조된 사람을 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의 영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창조된 사람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하나님 안에 존재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육신의 몸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콧구멍에다 생명의 호흡을 불어 넣으셨다”고 말씀합니다(창 2:7, 한글킹제임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영인 인간(the spirit-man)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그의 육신의 몸으로 들어갔으며,
그러자 사람이 생령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사람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입니다. 당신은 영이지, 육신의 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영의 참된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4:4에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영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개발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말씀을 통해 세워지고 말씀을 통해
유지됩니다.
베드로전서 2:2(한글킹제임스)은 말씀합니다. “갓난 아기들로서 순수한 말씀의 젖을 사모하라. 이는 너희가 그것으로
인하여 자라게 하려 함이니라”
Karl Barth
하나님의 형상을 설명하면서 이는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적 존재임을 설명합니다.
좀더 설명하자면 영혼이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형성된 것으로서 만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이루어지면 그 영혼은 잘 되는 것이고 만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그 영혼은 죽거나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잘된다는 것은 속사람이 잘된다함인데
속사람이 잘된다 함은 하나님과 잘 지낼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될 때 영혼이 잘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께서는 내 이름을 불러 주시고 내가 하나님을 자주 찾아 만나 뵈옵고 하나님께서도 나를 찾고 만나실 때 나와 하나님 사이는
좋아지게 됩니다만 바로 이때 내 영혼이 잘 되고 있다함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총의 품안에 있고 하나님이 내 영혼 가운데 임마누엘
하시어 서로가 서로의 안에 있을 때 내 영혼은 잘되고 있습니다. 내가 영으로 주를 사랑하고 주님이 나를 사랑하실 때 내 영혼은
현재 잘 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 다른 것이 없어도 살아도 하나님 없이는 견딜 수 없을 때 내 영혼은 잘되고 있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됨이 있다면 영혼의 못됨도 있습니다. 영혼의 못됨이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을 아예 생각하거나 상정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도무지
의식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산다면 내 영혼은 황폐해지고 피폐해져서 내 영혼은 못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도무지 의식하지도 않고 하나님과 담을 쌓고 살아간다면 그 영혼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여 영혼 속에 거미줄이 쳐져 있고 문이
잠궈져 있어 하나님 없이 살아간다면 그저 세상살이에 아등바등하여 살아간다면 그 영혼은 못되어도 한참 잘못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주님 앞에 나아가 기도로 긴밀한 대화와 소통을 하고 어떤 일이 있을 때에도 주님께 물어보고 말씀과 음성을 듣고
순종하며 하나님께로부터 복과 은총을 많이 받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도 마음과 정성으로 봉헌하며 기뻐하며 늘 감사하며 찬송하면서 살 때
아울러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며 살 때 우리 영혼은 잘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오직 하나님을 소망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사랑으로 사랑하며 살 때 바로 그 영혼은 잘되고 있는 것입니다.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가 잘 되고 육체도 강건하기를 원하노라”
영혼이 잘되면 범사도 자동적으로 잘 되고 육체도 자동적으로 잘된다함일까요? 마치 앞바퀴
돌아가면 뒤바퀴가 굴러가듯이 그런 어떤 기계적인 상호작용을 말할까요?
아닙니다. 영혼이 잘 될 때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되는
것이니 하나님께서 자신과 친한 그 사람에게 영향을 미쳐서 하는 모든 일을 범사를 잘되게 하여 주시고 육체도 강건하게 해 주신다 그
말입니다.
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노라 바로 앞에는 “사랑하는 자여!”가 먼저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그래서 그 영혼이 잘되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모든 전반적인 것을 다 잘되게 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보통 사람들은 관계를 맺고 삽니다. 사면에 팔방의 관계를 맺고 삽니다. 물질과 관계도 있습니다. 시간과의 관계도
있습니다. 자신이 자신과의 관계도 있습니다. 자신의 몸과 관계도 있습니다. 사람과 관계도 있습니다. 부모와의 관계도 있고 자식과의
관계도 있고 아내와 남편의 관계도 있습니다. 사람의 행복이 어디서 오느냐 무슨 소유를 더 늘리는데서 오는 좁은 것이라기보다는
사람이 맺고 있는 관계들이 원활하게 잘 이루어질 때 거기서 인간은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이루어질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랑하시어 그가 맺고 있는 모든 관계를 잘 소통하게 해주십니다. 이를 보통 만사형통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은혜에 감사하고 살면 그 하나님께서 좋아하시고 감격하시어 “사랑하는 자여!” 부르시면서 그가 맺고 있는 모든
관계 즉 범사가 잘 되게 하시고 몸, 육체와의 관계도 잘 이루어지게 해 주신다 그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서 웰빙을 누리고 행복을 누리고 사는 길이 바로 오늘 말씀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수직적인 관계, 즉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하여 영혼이 잘됨을 추구하는 일입니다. 수직적인 관계가 잘 이루어질 때 이 땅에서 사면팔방으로 맺고 있는
모든 관계도 잘 되어지는 것입니다. 요한 장로가 교회에서 악한 자로 인하여 고통당하는 가이오를 위로하기 위하여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이 성경 구절을 좀 더 알기 쉽게 영문성경을 번역한다면
“나의 사랑하는 친구여, 나는 기도하노니 내가 네가 영적으로 잘 되어 있는 것을 아는 것과 같이 모든 일이 잘 되고 건강하기를 원한다”
사도들 : 대부분이 죽임을 당하고, 죽음의 위협과 굶주림과 매 맞음 속에서 예수를 증거함 순교당한 자들 : 로마시대 이후 수없이 순교 당함 개혁교회시대
1) 개혁자들 : 죽음을 하나님께서 초월시킨 사람들이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
2) 전도자들 : 예수를 믿는다는 것 때문에 죽임을 당할 수 있는 곳에서 전도하는 전도자들이야 말로 영혼이 잘된 사람들이 아닌가?
영혼이 잘된 사람이란 세상과 어떤 사람들인가?
(1)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2)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33).”
(3) 이 세상 것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니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
(4) 사람들에게 자랑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눅 16:15)”
창세기에 나타난 다섯 가지 하나님의 사랑
첫째, 하나님의 이름(여호와)을 알려주신 사랑(창세기 2:4)
창조시 하나님은 엘로힘 하나님이었다. 엘로힘은 누구나 부를 수 있는 신의 이름이다(=신의 이름 엘). 이스라'엘', 벧'엘', 임마누'엘'의 '엘'이 바로 '신'이다. 바'알', '알'라와 같은 이방신도 '알'('엘')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신을 자기 백성에게 알릴 때에는 여호와라고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성경에 여호와는 모두 6,823번
나타난다. 이때 여호와라는 이름은 모두 정확하게 자기 백성에게 자신을 계시할 때 쓰였다. '엘'은 평범한 이름이다. 세상에
아버지는 많으나 아무나 나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아무나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없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찾아오시고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셨다. 우리와 친히 관계를 맺으시는 여호와로 나타나신다.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말로 처음
나타나셨다. 여호와는 거룩한 이름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이름(발음)을 제대로 부르지 못하였다. 여호와라는 명칭을
제대로 부르지도 못하였다. 괜히 송구스러워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쓰고도 제대로 부르지 못하고 하나님을
'아도나이'라고 불렀다. 우리 성경에 '주님'으로 번역된 그 말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신을 먼저 들어내신 분이다. 부모도
아기에게 맨 먼저 아빠, 엄마부터 말을 가르친다.
사람들은 자신과 수준이 안 맞으면 속으로 '넌 알 필요도 없어'하며 무시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을 먼저 오픈하셨다.
자신을 드러내셨다. '하나님의 먼저 사랑'이 사람이 범죄 한 이후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이유가 되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바울은 로마서 10장 9절에서 네가 네 입으로 예수를 주라 시인하라 했다. 즉
창세기 2장 4절의 '여호와 하나님'(=아도나이 하나님) 즉 '주님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은
하나라고 분명히 못 박고 있다. '나의 주님이 바로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다!
둘째, 사람을 위해 동산을 배려하신 사랑(창세기 2:5-6)
하나님은 낙원을 주시는데 그것은 사람을 위한 준비였다. 사람이 없을 때에 동산은 아직 초목과 채소가 없었다. 사람이 있을
때에 이런 것들은 의미가 있다. 주인공이 있어야 케익이나 꽃이 의미가 있다. 주인공 없이 꽃다발을 들고 다니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나님은 먼저 사람을 만드시고 자신이 만드신 동산으로 사람을 데려가셨다. 들의 초목이나 밭의 채소는 1장에기록된 풀과 씨
맺는 채소나 열매 맺는 과목과는 다르다. 2장의 이 말은 땅을 일구고 수고해야 먹을 수 있는 곡물이나 떨기나무, 관목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이런 것들을 두지 않았다.
이 말씀은 에덴동산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인간 타락 이전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일하지 않고도 얻을 수 있는
열매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천국의 모습은 지금과 다를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천국은 상상할 수 없는 곳이다. 그저 다르다는
것만은 확인할 수 있다. 타락하여 무너진 세상에 살면서 천국을 가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저 상상으로 바라볼 뿐이다. 천국 간증은
상상이다. 즉 거짓이다. 상상은 자신 만이 간직해야 된다. 남에게 퍼뜨릴 때 문제가 발생한다. 천국을 조금이라도 상상해보고
싶다면 말씀 안에서 타락 이전의 이 에덴동산을 보고 상상해보라. 성경은 타락된 지금 세상과 조금 다른 에덴동산을 살짝 알려준다.
셋째, 창조주 하나님은 사람을 다른 피조물과 다르게 지으셨음을 알려주신 사랑(창세기 2:7)
사람은 본래 흙이었다. 흙이 가진 17가진 주요 성분이 사람 몸에도 그대로 있다. 사람도 다른 생명처럼 육체이다. 육체로는
다른 생물과 별 다를 것이 없다. 생령이 아닌 죽은 육체는 그래서 구루터기나 다름없다. 그저 썪어서 흙으로 되돌아간다. 하지만
다르다. 사람은 하나님이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셔서 생령이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빚어 지으셨다(히브리어 '야차르'). '야차르'는 토기장이가 흙으로 무엇을 만들 때 쓰는 단어이다.
토기장이는 의미 없이 아무렇게나 질그릇이나 토기를 만들지 않는다. 분명한 목적이 있다. 특별한 목적 즉 예술가가 아무렇게나 작품을
만들지 않는다.
그 목적이란 성경에 보면 첫째 인간의 찬양을 받기 위함이요(사 43:21) 둘째 하나님은 야곱을 '야차르'하였기에 잊지
않겠다(사 44:21) 심지어 복 중에 '야차르'하기 전에 예레미야를 알았다(사랑했다) 했다. 하나님이 알면 하나님이 사랑한
것이다(렘 1:5). 하나님은 '나는 아이라 말할 줄 모른다'고 변명하는 예레미야를 안다(사랑한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우리의
수명도 '야차르' 하였고(시 139:16), 악인도 '야차르' 하였다(왕하 19:25). 하나님이 성도를 '야차르'하였다. 가정을
'야차르'하였고, 교회를 '야차르'하였다. 선한 목적의 '야차르'였다. 하나님은 선한 것은 선한 뜻에 맞게, 악한 것은 악한 것에
맞게 '야차르' 한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데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한 목적이 있다. 여러분을 구원하시고 여러분 가정 교회를 주신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선한 '야차르'를 믿는 다면 두려움이 없어진다.
넷째, 사람의 주거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창세기 2:8-14)
에덴동산은 '기쁨의 장소'라는 뜻이다. 즉 참기쁜 곳이라는 뜻이다. 그 위치는 정확하지 않다. 위치가 중요하지 않다. 인류가
죄 지은 이후로 에덴은 사라졌다. 이제 에덴은 지역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만 회복된다. 참기쁨은 예수 안에 있다.
15 가지
지리적인 언급 가운데 14 가지가 현재시제이다(지금 거기 있다는 뜻). 과거에 있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지금거기 있는 것이다. 두
강은 지금도 있다. 따라서 에덴의 과거 위치를 일부 짐작하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무너진 실락원을 지금 굳이 찾아본 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다섯째, 하나님의 사랑은 언약 사랑임을 알리심(창세기 2:15-17)
하나님 사랑은 무절제한 사랑이 아니다. 관계된 사랑이다. 아무런 언약이 없는 하룻밤 사랑이 아니라 질서가 있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로 표현하고 있다. 15절서 8절을 반복하신 이유는 중요하다는 의미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선악의 구별을 아는 유일한 생명체다. 그래서 인간에게만 죄라는 개념이 있다. 에덴동산에 언약의
징표를 두신 이유는 하나님과의 사랑은 무분별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관계가 깨져버리면 생명도 깨진다. 단순 연애와 부부의
차이(무분별과 언약의 차이)를 구별하라. 쥐새끼가 고구마 훔쳐 먹고 죄책감을 가지는가? 강아지가 사람 물고 죄책감을 가지는가?
강아지는 또 문다.
행복은 믿음과 순종에서 온다!
우리를 빚으신('야차르'하신) 그분께 순종하는 것이 기쁨이요 복이요 완전한 행복, 완전한 평화, 완전한 사랑을 체험하는 길이다. 일방적 사랑이 열매를 맺으려면 그 사랑을 상대방이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짝사랑하신다!
그 사랑이 맺어지려면 간단하다.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간단한 것을 못해 방황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랑을 만드신 하나님의 사랑보다 더 귀하고 값지고 짜릿한 사랑이 어디 있겠는가. 세상의 짜릿한 사랑은 즐기면서
하나님과별거하려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가. 누구 때문인가?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바로 그 존재, 사단이다! 하지만 누가 그 사랑을
끊으리요. 하나님 본체가 사랑이다.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호 1장 23-2장 1절/14장 4절) 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사랑하겠다고 했다. 그런데도 이 사랑을 외면하는 그들은 누구인가. 그렇게 세상의 쾌락이 달콤한가!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면 동물만도 못하다. 아니 못한게 아니라 추악하고 패역하다. 고릴라는 하나님을 대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마귀의 유혹으로
타락한 사람은 마귀처럼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다. 고릴라보다 더 못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부모 빰을 치거나 방망이로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은 극형에 처한다. 패역한 자식이기 때문이다!
원숭이보다도 고릴라보다도 못나게 살아갈 것인가? 값진 사랑을 하며 살아갈 것인가! 하나님은 창세전에 우리를 부르셨다.
에베소서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로 사랑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사랑하시는 예수 안에서 거져 주셨다.
이 비밀한 사랑을 알아야 사랑은 완성 되는 것이다!
창조하다(바라) 창세기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So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he created him; male and female he created them.
창조하다(바라. bârâʼ) בָּרָא 새기다, 조각하다, 창조하다 순수한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의미
짓다(야차르) 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the LORD God formed the man from the dust of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fe, and the man became a living being.
짓다(야차르, yâtsar ) יָצַר 형성하다
어떤 물체의 형태, 모양을 강조하는 것을 의미
만들다(아사) 창세기 1:16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God made two great lights--the greater light to govern the day and the lesser light to govern the night. He also made the stars.
만들다(아사, âsâh) עָשָׂה
노동하다, 만들다, 생산하다
창조된 물질로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드시는 것을 의미
만드시다(바나) 창세기 2: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Then the LORD God made a woman from the rib he had taken out of the man, and he brought her to the man.
만들다(바나, bânâh) בָּנָה
짓다, 세우다, 쌓다
용어 영어 성구 헬라어 의미
겉 사람
outward man, outwardly, outer man
고후 4:16
ἔξω
육에 끌리는 사람
속 사람
inwardly, inward man, inner man
고후 4:16
ἔσω
영에 끌리는 사람
옛 사람
the old man, the old self
엡 4:22
παλαιός
중생 이전의 사람
새 사람
the new self, the new man
엡 4:24
καινός
중생 이후의 사람
대부분의 설교자는 겉 사람은 옛 사람이며, 속 사람은 새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하게 읽어보면 옛 사람과 새 사람은 거듭난 후에 나타나는 삶의 양식으로 옛 사람의 삶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상태가 지속되므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겉
사람과 속 사람이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모습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나 구원 받지 못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삶의 양식으로 겉
사람은 육체 끌리는 삶의 양식이라면 속 사람은 영에 끌리는 삶의 양식 즉 선한 양심에 의하여 갈등하며 고민하는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NEET족 ; Not in Education, Employment, Training (한국어로 방콕족)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철저한 무가치함과 무능력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철저한 무가치함을 깨달은 자는 자신에게 선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오직 죄 지은 것만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전율한다.
자신의 철저한 무능력을 깨달은 자는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한 없이 슬퍼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구원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한없는 사랑과 은혜에만 의지한다.
무덤 속의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부패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부활한 것은 “나사로야 나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된 것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자는 자기도 그렇게 구원받았음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자이다. 죽은 시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사로는 무덤에서 걸어 나온 후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몸은 수의로 칭칭 감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예수께서는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난 자는 자기가 구원 받기 전에는 물론, 구원 받은 후에도 행한 것이라고는 죄짓는 것 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한다. 그리고 그는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베드로처럼 절규한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율법주의자와 행위주의자들
어떤 형태로든 자기의 의를 주장하는 자들은 아직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할 수 없는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 믿는다고 말하는 이교도들일 뿐이다. 그들이 참으로 예수를 믿고 거듭나는 때는 자신의 철저한 무가치함과 무능력을 깨닫고 겸손히 고백하는 때이다. 그 때가 어서 왔으면 참 좋겠다. 그러면 하늘나라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그들로 인해 큰 기쁨의 잔치가 열릴 것으로 믿는다.
인생을 살면서 많은 선생님을 만납니다. 선생님들의 역할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선생님이 내 인생에서 중요한 존재는 아닙니다.
‘박군의 마음’ 이라는 전도지
박군이라는 청년에게 전도를 하는 내용인데 박군의 마음속에 있는 일곱 가지 악한 성향, 죄를 짐승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일곱 짐승이 차지하고 있는 마음을 주님이 온전하게 들어오심으로 일곱 짐승이 다 나가고 아름답고 선한 마음이 되는 것을 설명한 전도지입니다.
영적 전쟁을 아주 쉽고 간단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아마 이 전도지를 처음 만든 사람은 영적으로 많이 열려진 사람일 것입니다.
그 일곱 가지 짐승의 마음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수다쟁이 영 / 개구리
말이 많은 사람은 그 사람의 안에서 개구리가 쉬지 않고 개굴개굴 하고 울어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개구리는 입에 관련된 것으로 설명됩니다(요한계시록 16:13).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말이 많은 사람은 절제하지 못하고 수없는 말들을 입에서 쏟아냅니다. 그리하여 영적 에너지를 잃게 하고 주변에 악한 기운으로 가득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이들은 침묵을 배우고 입술로 주님을 찬양하고 높여야 합니다.
주님께 받은 은혜를 나누는 대화가 있는가 하면, 세상을 사랑하고 세속에 깊이 물든 대화가 있습니다. 덕을 세우는 말이 있는가 하면, 남을 비방하고 또는 상처가 될 수 있는 날카로운 말도 있습니다. 다툼이 있는 곳에는 절제되지 못한 말들이 있습니다.
성경 곳곳에 말의 중요성이 나옵니다. 축복의 말은 반드시 축복으로 돌아오지만 저주의 말을 하면 나쁜 저주가 임합니다. 이것이 혀의 권세입니다(잠언 18:21). 말한 대로 열매를 맺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둘째, 교만의 영 / 공작새
공작새가 그 날개를 활짝 펴서 자랑을 하듯이 교만의 영을 가진 이들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자기가 선하고 지식이 많으며 영적이라고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이들은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뿐 아니라 교만은 스스로를 높이는 것입니다. 과거에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이 이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들의 왕국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또 다시 대홍수가 일어나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높은 탑을 쌓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그분의 말씀과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 없이도 잘 살수 있다고 믿으며 사는 사람이 교만한 사람입니다.
불신앙이 가장 큰 교만의 죄입니다.
하나님을 안 믿으면 지옥에 가지요. 이 사실이 부당한가요?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이 사람들 안에는 있습니다. 하나님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심지어 공산당들도 죽을 위기를 만나면 어떻게 하는 줄 아세요? "하나님, 잘못했어요. 하나님, 제발 한번만 살려주세요!" 이렇게 나옵니다. 무신론자라도, 부처를 섬기는 사람이라도 죽기 직전엔 하나님을 찾아요. 그러나 하나님을 거역하고자 하는 악독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순순히 그분을 따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거절하는 것입니다.
잠언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셋째, 간교한 영 / 뱀
뱀은 간교한 영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창세기 3:1).
간교한 영의 사람은 지혜가 많고 머리가 좋아서 말을 잘 하며 사람들을 잘 속입니다. 잘못을 해도 상대방이 그것을 추궁하면 교묘하게 변명하여 오히려 상대방이 잘못한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 영은 “배신의 영”과도 연결되어 있으며 “유혹의 영”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강자 앞에서 약하며 약자 앞에서 잔인합니다. 영안이 열린 이들에게 이들은 뱀의 형상으로 보이게 됩니다.
야곱은 속임수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겨우 한 끼 먹을 팥죽으로 형의 장자의 명분(권리)을 빼앗았습니다. 그의 지혜는 분명히 타고난 것입니다. 하지만 바르게 사용하지 않을 때, 그것은 악한 영의 도구가 됩니다. 간사하게 부리는 꾀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에 다듬어져야 합니다. 야곱은 그로 인해 험한 세월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골로새서 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넷째, 음란한 영 / 염소
염소는 성적으로 더러우며 정욕이 강하다고 합니다. 성적으로 문란한 이 시대에 음란을 피해가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과거에 비해 생활이 많이 편리해졌습니다. 과거에 없던 것들이 새로 생겨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따른 문제도 심각한 문제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편리한 도구들은 우리의 생활을 풍성하게 해줍니다. 정보를 빠르게 얻을 수 있어요. 하지만 이것이 문제입니다. 죄를 짓는 데에도 쉽고 빠릅니다. 음란과 세속에 빠지는 죄는 지금 매우 심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베드로전서 4: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다섯째, 혈기의 영 / 호랑이(사자)
사자 또는 호랑이는 분노의 영 또는 화의 영을 상징합니다. 속에서 폭발적으로 분노와 혈기가 일어나는 이들은 속에 호랑이나 사자가 으르렁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성질이 강하고 사나워서 가까이 하기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베드로전서 5:8)
성경에서 최초의 살인 사건은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돌로 쳐 죽인 것입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왜 죽였을까요? 미움과 혈기를 참지 못해서 죽였습니다.
따돌림과 괴롭힘이 학교에서 왜 일어날까요? 혈기 내는 영이 사람 안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에베소서 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디모데전서 2:8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여섯째, 탐욕의 영 / 돼지
돼지의 영을 “탐욕의 영”이라고 합니다. 돼지의 영이 내 안에 들어오면 끊임없이 욕심을 부리며 그 욕망으로 인하여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아무리 가진 것이 많이 있어도 남들에게 자기가 가진 것을 주려고 하지 않으며 더 많이 얻으려고 합니다.
나발이란 사람은 부자이었지만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데 인색했습니다. 굶주린 다윗과 그의 일행을 먹이기는커녕 조롱하는 말로 다윗을 노하게 했지요. 그리고 어떻게 되었나요? 그는 몸이 돌처럼 굳어져 며칠 후 죽었습니다.
누가복음 12: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골로새서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일곱째, 게으름의 영 / 거북이
거북이와 같은 게으름의 영의 지배를 받으면 항상 나태하고 게을러서
모든 것을 미루며 일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사명을 받았어도 제대로 감당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악하고
게으른 종아(You wicked, lazy servant!)” 라는 책망의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25:26∼30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 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46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죄의 종류와 마귀의 역사는 수도 없이 많지만 이 죄들은 사람의 마음 안에 자리잡고 있는 대표적인 일곱 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who wants all men to be saved and to come to a knowledge of the truth.
베드로후서 3:9 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The Lord is not slow in keeping his promise, as some
understand slowness. He is patient with you, not wanting anyone to
perish, but everyone to come to repentance.
디도서 3:4-6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새 사람은 도덕과 윤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으로 새롭게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람 즉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사모하고 기도하며 그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시편 104:30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에베소서 4: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시편 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골로새서 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요한계시록 21:5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07-16-2022(토)
온전한 상(요한이서 1:8)
공명(共鳴; Resonance) / 물리학적, 공학적 용어 - 특정의 고유진동수를 지닌 물체가 그와 같은 진동수를 가진 힘을 주기적으로 받을 경우 진폭과 에너지가 크게 증가하는 현상을 가리키며, 공진(共振)이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공명을 일으키는 진동은 소리, 기계적 진동과 같은 역학적 진동도 있고, 전자기파 등의 전기적 진동 등 매우
다양한데, 공명현상이 일어나면 원래 세기가 약했던 파동도 큰 힘으로 증폭이 될 수 있다. 이 같은 공명현상은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불편하게 작용할 수도 있지만, 도리어 이를 이용하여 개발된 문명의 이기들도 적지 않다.
붕괴되기 직전 뒤틀리는 타코마 대교. ⓒ Free Photo
군대의 행진으로 무너진 다리들
우리 생활 주변에서도 공명현상은 자주 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세탁기의 탈수 과정이다. 세탁물을 고속으로 탈수시킬
경우에는 세탁기가 심하게 움직이는 경우는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탈수 과정이 끝나서 세탁통의 회전 속도가 줄어들게 되면
세탁기가 점점 움직이다가, 어느 순간 크게 흔들리면서 그 후 멈추게 된다.
세탁기의 세탁통이 돌아갈 경우 회전속도에 따라 세탁기에 규칙적인 충격을 가하게 되는데, 통이 빠르게 회전할 때에는 세탁기의
고유진동수와 달라서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하므로 흔들림이 별로 없다. 그러나 회전 속도가 줄어들면서 세탁기의 고유진동수와 일치하게
되는 순간, 공명이 일어나 크게 흔들리는 것이다.
탈수과정에서의 공명은 세탁기를 크게 흔드는 정도이지만, 공명현상이 심해지면 다리가 무너지거나 건물이 흔들릴 정도로 큰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 공명현상으로 멀쩡하던 다리가 붕괴되는 일은 역사적으로 여러 차례 있었다.
먼저 1850년에 프랑스에서 발생한 앙제다리(Angers Bridge) 사고를 예로 들 수 있다. 478명의 군인들이 일제히
발을 맞추며 앙제 다리를 걸어가다가 공명이 일어나 다리가 무너져 버렸는데, 이 사고로 226명의 군인들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하였다.
그 이전인 1831년 영국 맨체스터에서도 군인들의 행진에 의해 다리가 붕괴되는 비슷한 사고가 있었다. 만약 군인들이
일사분란하게 발을 맞추어 행진하지 않고, 그냥 무질서하게 걸어갔더라면 공명현상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다리가 무너지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여러 사람들의 발맞춤으로 인한 공명이 건물을 흔들리게 한 일은 몇 년 전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났는데, 서울의 한 고층건물이
갑자기 흔들리게 되어 많은 사람들이 황급히 대피하는 소동이 빚어졌던 것이다.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조사 결과 그 건물의
피트니스 센터에서 실시했던 태보운동의 공진이 원인이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즉 피트니스 센터의 수강생 23명이 강사의 구령에
맞추어 태보를 하면서 발을 구르는 동작을 반복하였는데, 여기서 발생한 진동수가 건물의 고유 수직진동수와 일치하면서 공명현상이
발생하여 건물이 흔들렸던 것으로 결론 내려진 것이다.
물분자의 공명을 이용하는 전자레인지. ⓒ Free Photo
바람에 의한 공명으로 무너진 타코마 대교
군대 등의 인위적인 발맞춤으로 공명이 발생한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현상 즉 바람에 의한 공명으로 튼튼한 다리가 갑자기 무너진 사건이 지난 1940년에 미국에서 발생하였다.
미국 워싱턴 주의 타코마 해협에 놓여있었던 타코마(Tacoma)대교는 미국의 현대적 토목기술을 동원하여 시속 190km의
태풍에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견고하게 설계하여 건설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완공 된지 석 달 만에, 시속 70km 정도의 바람에
힘없이 무너지고 말아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다리의 붕괴 과정을 목격한 워싱턴 대학 교수의 말에 따르면, 길이 840m인 타코마 대교가 가운데부터 좌우로 비틀리기
시작하더니, 한 시간쯤 후부터 다리가 엿가락처럼 휘어지고 파괴되면서 무너져 내렸다고 한다. 토목기술자들은 다리를 붕괴시킬 정도에는
턱없이 약한 바람에 다리가 무너진 사실에 경악했는데, 그 원인을 상세히 조사해본 결과, 바람에 의한 공명현상이 그 원인으로
밝혀졌다.
타코마 대교는 양쪽 교각에 연결한 케이블에 다리가 매달려 있는 현수교로서, 바람이 불 때마다 약간의 흔들림이 생겼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람에 의한 진동이 다리 자체의 고유진동수와 일치하면서 공명에 의하여 흔들림이 점점 커졌고, 결국은 다리가 버티지
못하고 붕괴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다리를 건설할 경우 설계 단계에서부터 이런 데에 대한 보완을 철저히 하게
되었다.
위의 예들을 보면 공명현상은 교량, 건물 등을 위험하게 만들거나 사람들에게 불편을 끼치는 것으로만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거나 일상생활에 편리하게 적용되는 경우도 매우 많다.
TV나 라디오의 채널 선택, 물 분자의 진동으로 음식을 데우는 전자레인지(Microwave oven), 사람 몸의 상태나
질병을 진단하는 MR(Imagnetic Resonance Imaging) 장비 등은 모두 공명현상을 이용하여 개발된 것이다.
음식을 데우거나 조리하는 데에 사용되는 주방의 필수 가전제품인 전자레인지 역시 공명현상을 이용한 대표적인 예이다.
영어로는 마이크로웨이브 오븐(Microwave Oven)이라 불리는 전자레인지는, 물 분자의 고유진동수에 해당하는 마이크로파를 가해줌으로써 음식 속의 물 분자가 공명운동을 할 때 생기는 마찰열로 조리하는 것이 그 원리이다.
전자레인지의 핵심 부품인 마그네트론은 마이크로파를 만들어내는 장치인데, 여기서 발생하는 마이크로파는 전자기파의 일종으로서, 그 파장이 적외선보다는 길고 텔레비전 방송의 전파보다는 짧다.
마이크로파는 공기, 유리, 종이 등은 투과하지만 금속에는 반사되고 물에서는 흡수된다.
따라서 전자레인지에는 금속으로 된 용기를 사용하면 안 되는 것이다.
산소원자 하나에 수소원자 두 개가 공유 결합한 물 분자는 104.5도의 각도를 이루는 형태이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중성이지만 부분적으로는 전기적인 극성을 띠게 된다.
따라서 외부에서 전자기장이 가해지면 각각의 물 분자는 그 영향을 받아서 운동을 하게 되는데, 마이크로파에 의해 공명된 물 분자들은 고속으로 회전하면서 인접의 물 분자와 마찰열을 발생시킨다.
빵이나 밥, 채소, 육류 등 음식물은 대부분 물을 포함하기 때문에, 그 마찰열로 손쉽게 음식물을 가열하고 조리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 몸의 상태나 질병 등을 진단하는 데에도 공명현상은 유용하게 활용된다.
큰 병원에서 볼 수 있는 MRI(Magnetic Resonance Imaging), 자기공명 영상장치 역시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공명현상을 이용한 것이다.
다만 다른 전자기기와는 달리 원자핵의 자기공명, 즉 강한 자기장에 놓인 수소 원자핵이 공명하면서 방출하는 전자기파로 영상을 만든다.
온전한(4134) πλήρης
πλήρης, ες
1. 가득찬, 2. 마가 6:43, 3. 누가 5:12
발음
/ 프래레스(plērēs) 어원 / 413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찬(마 14:20, 막 6:43), 충실한(막 4:28), 충만한(눅 4:1), 심히 많은(행 9:36), 가득한(행 13:10, 19:28), 온전한(요이 1:8) 신약 성경 / 16회 사용
발음
/ 미스도스(misthŏs) 관련 성경 / 상(마 5:12, 막 9:41, 계 22:12), 삯(마 20:8, 눅 10:7, 벧후 2:15), 값(벧후 2:13) 신약 성경 / 29회 사용
여호와께서 “온전한 상”을 주시다
하나님께서 충실한 ‘룻’에게 주신 “온전한 상”은 확실히 생각있는 사람들이 여호와의 존재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확인하며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그분에게 가까이 나아가도록 움직여야 함이 분명합니다.
룻기는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충성을 바치는 사람들을 위하여 행동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알려 줍니다. 더우기
그것은 하나님의 목적은 결코 실패하지 않음을 증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 ‘다윗’과 동일한 영을 가질 수
있고,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너의 승리로 인하여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 기를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 바 기름부음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 오른손에 구원하는
힘으로 그 거룩한 하늘에서 저에게 응락하시리로다.” 시편 20:5-6
미혹하는 자(πλάνος) 4108
πλάνος, ον
1. 그릇되게 인도하는, 2. 속이는 자, 3. 디모데전서 4:1
-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발음
/ 프라노스(planŏs) 어원 / 불확실한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속이는 (자)(마 27:63, 고후 6:8), 미혹하는 (자)(요이 1:7) 신약 성경 / 5회 사용
가스라이팅이란 상대방의 심리·상황 등을 조작해 스스로 의심하게 만들고, 타인의 정신을 지배·조종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가스라이팅 또는 가스등 효과는 심리적 조작을 통해 타인의 마음에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키고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만듦으로써 그 사람에게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패트릭 해밀턴의 연극을 원작으로 한 1944년 미국의 영화
〈가스등〉에서 유래한 말이다.
잭이라는 남성이 자기 아내 벨라를 억압하는 이야기다. 잭은 보석을 훔치기 위해 윗집의 부인을 살해했다. 하지만 보석을 찾기
위해서는 불을 켜야 했고, 그 건물은 가스등을 쓰기 때문에 불을 켜면 가스를 나눠 쓰는 다른 전등불이 어두워지거나 깜빡여서 들킬
위험이 있었다. 이 때문에 잭은 벨라가 의심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집안의 물건을 숨기고 그녀가 물건을 잃어버렸다고 몰아가며 타박한다. 잭이 위층에서 불을 켜고 집안을 뒤질
때마다 벨라가 있는 아래층은 불이 어두워지고 인기척이 났고, 그럴 때마다 잭은 그것도 벨라가 과민반응하는 것이라고 몰아간다.
처음엔 반신반의하던 벨라도 이게 지속되자 자기 자신에게 의구심을 갖게 되고, 점점 무기력과 공허에 빠지게 되어서 결국 남편 잭만을
의지하게 된다. 하지만 경찰인 브라이언의 등장으로 결국 잭의 범죄가 발각된다는 내용. 1944년에 '샤를르 보와이에'가 잭, 잉그리드 버그만이 벨라(영화에서는 폴라로 이름이 바뀜) 역을 맡아 영화화되었고, 한국에도 '가스등' 이라는 제목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여기서 잭이 벨라의 판단력이 비정상적이라고 몰아가고, 이에 벨라가 수긍하는 행태에서 본따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졌다.
상대방의 자주성(自主性)을 교묘히 무너뜨리는 언행을 말한다. 주로 '상대방에 대한 간섭', '상황적 연출과 조작', '귀인 오류' 등의 행위를 벌여 피행위자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든다. 가스라이팅이란 스스로의 판단력을 의심하도록 만들어서, 판단을 다른사람에게 의존하도록 만드는 행위를 의미하는 말로, 학술적인 용어는 아니며, 일종의 유행어 성격을 띈다.
밀레니얼 세대는 X세대와 Z세대 사이의 인구통계학적 집단이다. 일반적으로 1981년부터 1996년까지 출생한 사람으로
정의한다. 전기 밀레니얼(1981년~1988년)과 후기 밀레니얼(1989년~1996년)로 구분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밀레니얼
세대는 베이비붐 세대와 초기 세대의 자녀들이다.
밀레니얼 세대는 전 세계적으로 출산율이 감소하는 시기에 태어났으며, 이전 세대들보다 더 적은 수의 자녀를 두고 있다.
밀레니얼 세대는 최초의 글로벌 세대이자 인터넷 시대에 성장한 첫 세대로 묘사되어 왔다. 이 세대는 일반적으로 인터넷,
모바일 장치 및 소셜 미디어의 사용 증가와 친숙함을 특징으로 들 수 있으며, 이러한 이유로 디지털 원주민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전
세계의 밀레니얼 세대는 직장 생활을 시작한 이후 상당한 경제적 혼란을 겪었다. 많은 세대들은 대공황의 여파로 노동 시장에서
초기에 높은 수준의 청년 실업에 직면했고, 10년 후 COVID-19 대유행으로 인해 또 다른 불황을 겪었다.
Z세대는 밀레니얼 세대와 알파 세대의 사이에 있는 인구통계학적 집단이다. 연구원들과 대중 매체들은 1990년대 중/후반과 2010년대 초 사이 출생자를 Z세대로 본다. Z세대의 구성원들은 대부분 X세대의 자식들이다.
Z세대는 어릴 때부터 인터넷과 휴대용 디지털 기술에 접근하여 성장한 최초의 사회 세대로서 디지털에 정통하지 않더라도
"디지털 원주민"이라고 불렸다. 또한 스크린 타임이 어린 아이들에 비해 청소년들에게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가장 뚜렷하다.
각 세대 등장 배경
M세대
이
인구통계학적 코호트의 구성원들은 밀레니엄 세대로 알려져 있는데, 그 이유는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밀레니엄 세대로 바뀌기
때문이다. 작가 William Strauss와 Neil Howe가 슈트라우스를 창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우 세대론은 밀레니얼
세대를 명명하는데 널리 인정받고 있다.
1993년 8월, 광고 시대 사설은 당시 X세대와 다르게 정의된 13-19세(1974~1980년 출생) 청소년을 묘사하기 위해 Y세대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밀레니얼 세대는 베이비붐 세대의 자손이고 1980년대 초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출생률이 증가했으며, 세대의 큰
규모 때문에 에코붐 세대라고 불리기도 한다. 미국에서는 1990년 8월에 출산율이 정점을 찍었고 선진국의 소규모 가정으로의
20세기 추세가 계속되었다. 심리학자 진 트웬지는 2006년 저서 제너레이션 미(Generation Me)에서 밀레니얼 세대를
'미 세대'로 묘사했다. 제안된 이 그룹의 대체 이름에는 인터넷 세대, 9/11 세대 등이 있다.
미국의 사회학자 캐슬린 샤푸티스는 밀레니얼 세대를 부메랑 세대 또는 피터팬 세대로 분류했는데, 그 이유는 구성원들이
성인기로의 통과의례들을 그들 이전의 세대들보다 더 오랫동안 지연시키는 경향 때문이다. 또한, 이전 세대보다 더 오랜 기간 부모와
함께 사는 구성원들에 대한 경향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킴벌리 파머는 높은 주거 비용과 고등 교육, 그리고 노년층의 상대적
풍요를 이러한 추세를 이끄는 요인이라고 주장한다.
Z세대
Z세대라는 이름은 Y세대(밀레니얼 세대)부터 알파벳 순서를 이어받아 X세대에 이은 2세대라는 점에서 유래했다.
이 세대의 다른 이름으로는 i세대 국토안보부 세대, 인터넷 세대, 디지털 원주민, 네오디지털 세대, 인터넷 세대, 100년대, 포스트 밀레니얼 세대 등이 있다. 인터넷 세대라는 용어는 인터넷의 대량 채택 이후에 탄생한 첫 세대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심리학 교수이자 작가인 장 트웬지는 2006년 밀레니얼 세대에 관한 책의 제목으로 iGeneration(줄여서
iGen)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나 출판사에 의해 거부당했다. 그 당시에는 아이팟과 아이맥 컴퓨터는 있었지만 아이폰과 아이패드는
없었다. 트웬지는 나중에 그녀의 2017년 책 iGen에 이 용어를 사용했다. 이 이름은 2009년 인구학자 셰릴 러셀에 의해
만들어졌다.
퓨리서치센터가 2019년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구글 트렌드에 올라온 다양한 명칭을 조사한 결과 미국에서는 Z세대라는
용어가 압도적으로 인기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메리엄-웹스터 사전과 옥스퍼드 사전은 모두 Z세대에 대한 공식 엔트리를 가지고
있다.
일본에서 코호트는 디지털 네이티브로 기술된 이전 코호트에서 한 단계 벗어난 네오디지털 네이티브로 기술된다. 디지털
네이티브는 주로 텍스트 또는 음성으로 통신하는 반면, 네오디지털 네이티브는 비디오, 비디오 전화 및 영화를 사용한다. 네오디지털
네이티브는 PC에서 모바일로, 그리고 텍스트에서 비디오로 변화를 강조한다.
주머(Zoomer)는 아이러니하거나 유머러스하거나 조롱하는 어조로 Z세대를 지칭하는 비공식 용어이다.베이비붐 세대를 가리키는 부머라는 용어와 Z세대의 "Z"를 결합했다. 이에 앞서 2000년대에는 특히 활동적인 베이비붐 세대를 묘사하기 위해 주머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2018년, Zen Z 청소년을 조롱하는 4chan 인터넷 밈에서 "Zoomer"라고 불리는 ‘Wojak' 캐리커처를 통해 사용되면서 현재의 Zoomer의 인기는 급상승했다. Merriam-Webster의 기록에 따르면 Z세대라는 용어는 적어도 2016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Z세대라는 용어는 2021년 10월 메리엄 웹스터 사전에 추가되었다.
07-15-2022(금)
구원의 증거(요한일서 5:11)
구원 받은 증거가 있습니까? 구원 받은 확신이 있습니까?
증거와 확신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사전적 의미를 소개합니다.
증거(證據) : 증거 증(證), 의지할 거(據) / Evidence. Testimony - 어떤 사실(事實)을 증명(證明)할 수 있는 근거(根據).
확신(確信) : 굳을 확(確), 믿을 신(信) / Conviction. Confident - 굳게 믿음. 또는 그러한 믿음.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제 호주머니에 2만불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믿습니까? 2만 불이 있다는 것은 자기 확신입니다. 2만불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확신하려면 호주머니에서 2만불을 꺼내서 보여주면 됩니다. 2만불이 나의 것이라고 한다면 내 마음대로 그 돈을 사용해야 합니다. 만일 그 돈을 사용하지 못한다면 내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증거와 확신을 확인하려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첫째는 내적 증거(경험과 주장) 둘째는 외적 증거(성경과 인정)
예를 들면 나는 구원을 받았다고 증거할 때 그 증거는 자기 경험입니다. 그 경험을 확신시켜 줄 수 있는 것이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한일서는 당시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므로 이 편지를 그들에게 보내어 구원을 확신하도록 격려하고 위로하였던 말씀입니다.
예전에 교회 재정부에서 있었던 사례를 소개합니다. 어느 사업을 하는 집사님 부부가 당시 감사헌금을 드렸는데 봉투에 그 금액이 10만원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재정부에서 헌금 계수를 하던 중 봉투에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은 것을 알고 즉시 그 집사님에게 연락했습니다. 그러자 그 집사님은 내가 분명히 봉투안에 수표를 넣었다고 말합니다. 재정부원 중에 누군가 그 수표를 가져간 것처럼 생각되어 모두 난처한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오후 봉투에 수표를 넣었다는 집사님이 재정부장에게 전화를 하여 "제가 큰 실수를 했습니다. 수표가 식탁 위에 있습니다. "
그 전화로 인하여 재정부원들에 대한 의심도 해결되었고 그렇게 확신하던 집사님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도 확인되었습니다.
확신이란 주관적인 것입니다. 증거는 객관적인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이란 내가 모태 신앙으로 태어나서 지금까지 교회에 출석하며 교회에서 직분을 맡아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증거일까요? 아니면 확신일까요? 확신입니다. 그러나 내가 신앙생활하는 것을 내 가족들이 보고 내 주위 사람들이 보고 있습니다. 주위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신앙생활을 할 뿐만 아니라 주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신앙으로 섬긴다면 그것은 증거가 될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을 구원의 증거로 무장해야 합니다. 어떻게 구원의 증거로 무장할 수 있을까요?
1절을 읽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예수께서 그리스도 즉 구세주가 되심을 믿는 것입니다. 성경은 객관적인 증거입니다. 내가 믿는 것은 주관적인 확신입니다. 주관적인 확신이 객관적인 말씀과 일치할 때 그것이 증거가 될 것입니다.
1절을 다시 읽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구원의 증거는 예수님께서 구세주가 되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구원의 증거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 부모가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모든 자녀들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사랑으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렇게 고백한 것은 베드로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했습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떠나 갈릴리 바다에 나가 밤새도록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이상하게도 그 날 밤 물고기가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노련한 어부가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물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것이 기적입니다. 이런 기적은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기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편으로 던지라고 하셨을 때 누가 그물을 배 오른편으로 던지라고 하였는지 모르고 직업 정신에 따라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졌습니다. 그 순간 그물에 물고기가 가득하게 잡혔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습니다. 그 베드로에게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묻습니다. 구원의 증거는 믿음을 사랑으로 승화시키여만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이 현재 살고 있다는 것, 자신에게 생명력이 약동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일만큼 희열을 느끼는 일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몸은 건강하게 모든 역할을 다 하되 삶의 실제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야 말로 비극이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다시 태어났다는 사실, 영적으로 거듭났다고 하는 사실, 죄와 멸망의 현실로 부터 구조받았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필수적으로 가져야 할 통찰력이며, 기쁨의 원천인 것입니다.
1.구원의 확신에 대한 잘못된 오해
구원의 확신은 우리의 노력이나 만족감을 근거로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심령에 보내시는 일종의 표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혈통,가족의 신앙, 가문,(요1:13)
2) 성경 지식(요3:10)
3) 예배 참석(요4:20)
4) 여러 활동, 사역(마 7:22)
5) 감정적인 변화, 또는 체험(행 8장의 시몬)
2.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됩니다.
이것을 회심이라고 하며 회심은 회개와 믿음으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1) 회개는 죄로부터 돌이키는 것을 말하며 다음과 같은 것을 내포합니다.
1)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눅18:13)-지식
2) 죄에 대한 통회(시51:1-4)- 감정
3) 죄로부터 떠나고자 하는 마음(요6:37)-의지
(2) 믿음이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해서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셨으므로 이제 우리의 죄가 용서되었음을 믿는 것입鎨. (사53:4-6)
3. 구원을 확신하는 길
(1) 말씀의 증거(객관적 증거)
1) 하나님의 약속(행16:31-32)- 이 구원은 궁극적으로 누구의 약속입니까?
2)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히 9:28전반)
3) 성령의 인치심(엡1:13)- '인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 삼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삼중적 증거는 가장 확실한 확신의 길입니다.
(2) 생활의 증거 (주관적 증거)
1) 주 되심의 고백(고전12:3)- 생활의 전 영역에 걸쳐 그 분의 주인되심을 인정.
2) 우리의 관심사(롬8:5)- 세상적인 것에서부터 영적인 일로 관심이 바뀜.
3) 성품의 변화(갈 5:22-23) -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성숙함을 발견하게 됨.
4. 구원의 확신에 대한 올바른 순서
구원을 받았다면 왜 기쁨이 없나? 왜 감정적인 변화가 오지 않는가? 다른 사람들은 있는데 왜 내겐 없는가? 등의 걱정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구원을 받을때 이렇게 느꼈다. 눈물이 솟구쳤다. 뭔가 확 뜨거운 것을 받았다'등의 체험은 모든 사람에게 일률적으로 찾아오는 표준적인 증거는 아니며, 사람의 개성에 따라 당시의 환경에 따라 여러가지로 다를 수 있습니다. 또 감정의 변화는 구원받은 사실에 잇따라 생기는 법이지 '기쁨이 생긴 다음에 구원받은 것을 알게 되었다'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 요한복음 4:50절에서 신하가 아들의 회복을 확신한 근거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구원의 확신도 이와같이 사실(요 5:24,10:28)을 믿고 받아들였을 때(믿음) 기쁨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언제나 기쁘고 좋은 것만 지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심한 갈등과 괴로움을 더 많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또 다른 증거일 수가 있습니다.
07-14-2022(목)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요한일서 4:6)
미혹(4106). 플라내(πλάνη)
πλάνη, ης, ἡ
1. 배회 / 4108의 여성형, 2. 잘못, 3. 미혹
발음
/ 프라내(planē) 관련 성경 / 유혹(마 27:64, 엡 4:14), 간사(살전 2:3), 미혹(살후 2:11, 벧후 3:17, 요일 4:6), 어그러짐 (유 1:11), 그릇됨(롬 1:27) 신약 성경 / 10회 사용
* 미혹의 영 : 유혹의 영, 간사한 영
진리(225). 아래데이아(ἀλήθεια)
ἀλήθεια, ας, ἡ
1. 진실성, 2. 진실 (반) ψεῦδος, 3. 일반적 진리
발음
/ 알래데이아(alēthĕia) 어원/ 227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참(마 22:16), 사실(막 5:33), 진리(요 1:14, 4:24, 롬 2:2), 실상(요 16:7),
과연(행 4:27), 참 됨(행 26:25), 진실하심(롬 15:8), [동] 진실 하다(롬 15:8), 참되다(롬 3:7) 신약 성경 / 109회 사용
* 227. ἀληθής
ἀληθής, ἑς
1. 진실한, 2. 참된, 3. 요한복음 4:18(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발음 / 알래데이아(alēthēs) 어원 / 1[부정불변사]과 299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참된(요 8:13, 벧후 2:22), 참(요 5:32) 신약 성경 / 26회 사용
* 2990. λανθάνω
1. 숨어 있다, 2. 눈에 띄지 않다, 3. 마가 7:24
발음
/ 란다노(lanthanō) 관련 성경 / 숨기다(막 7:24, 눅 8:47), 알지 못하다(행 26:26), 잊다(벧후 3:5, 8). [부] 부지중에(히 13:2) 신약 성경 / 6회 사용
영들이라고 해서 아무 영이나 다 믿지 말고, 다만 그 영이 하나님게 속한 것인지 아니면 악령인 사탄에 속한 것이지, 즉 진리의
영인지 아니면 거짓 영 곧 미혹의 영인지를 잘 분별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일서 4:1-3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 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요한일서 4:6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사도
요한은 여기서 성도들에게 이 세상에 있는 영들을 다 믿지 말고 먼저 그 영이 어디에 속하였는지 즉 그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속하지 않은가 분별하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씀은 곧 우리가 지금 말하거나 경험하고 있는 영들이나 혹은 영적 은사들이
하나님께로부토 온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영들에게서 온 것인지를 잘 분별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요한의 말씀을 통해서 이 세상에는 하나의 영 곧 진리의 영인 성령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많은 다른 영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앞에 일어나고 있는 영적 은사나 영적 사실들을 볼 때 먼저 그 영(적 은사)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아닌 다를 실재들로부터 온 영인 가를 잘 분별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 말은 곧 그 영이
어디로부터 온 영인지 즉 그 영의 출처, 즉 그 영의 근원을 먼저 알아봐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성령의 근원적 출처 곧 성령이 어디로부터 오는 영인지를 잘 말씀해 주셨다. 즉 성령은 하나님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우선 우리는 이 세상에는 많은 영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영들을 그 특성에 따라서 크게 다음 셋으로 대별할 수 있다.
1. 악령(惡靈) : 미혹의 영,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영들(spirits) 곧 사탄(satan/devil). 2. 정령(精靈) : 선과 악의 구분이 없는 초자연적/정신적인 실재들로서, 무속(shaman) 적인 정령(精靈), 혹은 동양 철학에서 말하는 기(氣)와 같은 실재들. 3. 성령(聖靈) :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오는 신령하고 거룩한 영 곧 진리 의 영, 즉 진리와 사랑과 평화와 지혜의 영(9가지 선한 열매를 맺게 하는 영, 갈 5:2-23).
영을 분별하는 5가지 방법
1. 성령의 은사는 감정과는 상관없다
요한복음 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The wind
blows wherever it pleases. You hear its sound, but you cannot tell
where it comes from or where it is going. So it is with everyone born of
the Spirit.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는 우리의 감정이나 느낌과는 별개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 받은 증거로써 감정의 극치를 기대하지만, 성경은
오히려 성령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바람을 보지 못하지만 바람이 무엇을 하는지는 알 수 있다.
비록 우리가 바람을 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이 마음에 역사할 때에 그것을 볼 수 없지만, 그분의 능력은 조용한 가운데 새로운 생명을 가져다 준다. 비록 우리가
성령의 역사를 보거나 만지지는 못할지라도, 그분께서 해놓으신 결과를 볼 수는 있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변화된다면, 우리의 생애가 성령의 임재하심을 증거하게 될 것이다.
성령의
임재는 우리의 느낌이나 감정에 의존하여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임재하심은 오직 변화된 생애를 통해서만 분명하게
확증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온전히 자신을 비우고 마음 속의 우상과 죄를 버린다면, 그리스도의 영께서 우리의 마음 속을 충만하게
채우실 것이다. 오직 이러한 사람들만이 성령의 선물을 받을 수 있는데,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자랑치
아니할 것이며, 오직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것이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심이라."
고린도전서 2:10, 12
우리가
하나님의 영을 받았을 때에, 우리는 어떤 황홀하고 자극적인 느낌을 얻기 보다는, 오히려 침착함과 예리한 판단력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생애를 바치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서와 생애를 생각해 보자. 그분처럼 성령이 충만하였던
사람이 있는가? 그분의 생애는 감정적 환희와 흥분으로 차있는 생애가 아니었다. 오히려 희생과 봉사로 점철된 생애였다. 그분께서는
죄와 불의를 거절하셨으며, 병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고 치료해 주시는 생애를 사셨다. 그분께서는 성령이 충만하신 결과로
거룩한 삶을 사셨던 것이지, 자신에게 성령이 임하셨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구제와 치료를 베푸신 것이 아니었다. 그분께서는 단 한번도
자기 자신을 위하여 성령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셨으며, 오직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에만 성령의 능력을
구하셨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성령 충만함은 하늘 아버지의 뜻을 조용하면서도 진지하게 행하는 순종의 삶으로 표시되었다. 그분의
삶은 사랑과 희생과 극기와 자아부인으로 꼴지워졌다. 마찬가지로 진실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도, 이성적인 분별력과 하나님의 진리가
감정과 느낌을 지배해야 한다. 진리는 건전한 상식 위에 세워지며, 질서 있는 가정생활을 통하여 다른 영혼들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허락하시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복음의 효과적이고 신속한 전파이다. 성령의 은사가 개인의 신앙적
만족감을 얻는 수단으로 사용되서는 않되며,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도 안된다.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정해 주신다는 마음의 안정감을 얻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서도 안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성령의 은사를 교회에게 허락하신
이유는 구제와 봉사를 통해서 복음의 효과적인 전파를 위해서 주셨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잘못 사용되고 있는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교훈하면서, 다음과 같이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에게 충고하고 있다.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해서 하고 ...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고린도전서 14:26,33,40.
2. 은사를 받기 위해서 무엇을 얼마나 해야 됩니까?
고린도전서 12: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All these are the work of one and the same Spirit, and he gives them to each one, just as he determines.
성령의 은사는 우리의 선택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복음의 전파를 위한 당신의 뜻과 섭리에 따라서 어떤 사람을 도구로서 사용하고자 하실 때에
주어지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 당신의 필요와 목적에 따라서
준비된 인간에게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이다. 우리가 성령을 부리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우리를 부리신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성도들을 통하여 기적을 행하신다. 우리는 성령의 기적과 은사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다. 그러나 기적이나 은사의
필요성과 그것이 행하여 지는 장소와 시간과 환경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달려 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기적이
행사되어야 하는 최적의 시간과 장소와 환경을 알 수 없다. 언제, 어느 때, 어떠한 환경에서 하늘 아버지의 기적이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우리에게는 하늘이 주시는 능력을 시기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는 영적 지혜가 부족하며, 또한 성령의
은사와 기적을 간구하는 우리의 기도가 이기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과 성령의 기적적인 은사를 구할
때에 예수께서 하셨던 기도를 본받아야 한다.
주님,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성령의 은사를 간구하는 저의 소원을 들어 주시옵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3. 기적은 구원의 증거가 아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9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The coming of the lawless one will be in accordance
with the work of Satan displayed in all kinds of counterfeit miracles,
signs and wonders.
어떤
기적이나 은사도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구원을 평가하는 절대적인 증거나 기준으로 사용되어서는 않된다. 기적을 행하였고 경험하였던
사람들 중에서도 결국에는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과 반역적인 삶을 산 결과로 인하여 멸망받았던 예를 성경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어떤 은사가 누구에게 발견되느냐에 따라서 서로의 영적 상태를 판단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과 믿음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시험 기준을 살펴보자. 예수께서는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말씀하셨다(마태복음 7:20).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갈라디아 5:22,23). 성령의 열매는 증오가 아니라 사랑이며, 불만과 낙담이 아니라
희락이고, 분냄과 근심과 스스로 지어낸 불화가 아니라 화평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은 자들에게
하늘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따라서 성령의 은사를 풍성하게 내려주신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이다.
4. 영을 분별하는 5가지 방법
우리는
성령의 은사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령의 은사는 오늘날 이 시대에도 나누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은사를 분석하고 사용할 때에 한가지 잊어서는 안될 것이 있다. 성경은 마지막 시대에 사단이 진리에 굳게 닻을 내리지 못한
사람들을 혼동시키기 위해서 성령의 역사를 위조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마지막 시대에 나타나는 사단의 활동은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으로 특징지워질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데살로니가후서 2:9).
사단의 활동이 매우 기만적인 이유는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자칭하" 고 있으며,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기 때문이다.(고린도후서 11:13,14).
그 기만이 너무나 놀라운 것이기 때문에 성경은 "택하신 자들"까지도 미혹당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마태복음 24:24).
이러한
말씀들은 성령 은사를 추구하는 교회나 성직자들을 모두 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인가? 아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교회와 모든 종교적 체험, 그리고 모든 기적을 시험해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바울이 말했듯이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기 위해서 말이다(데살로니가전서 5:21).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에게 주는 사도 요한의 또 다른 충고를 들어보라.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요한일서
4:1
그렇다면, 성경은 영을 시험하는 판단 기준으로서 어떤 것을 제시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은 5가지 성경절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율법에 순종하는 삶(이사야 8:20)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이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 아침빛을 보지 못하고."
성령의 참 은사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는 삶을 살 것이며, 자신이 믿는 바가 성경의 진리에 일치해야
한다. 성경의 진리를 올바로 이해하고,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순종하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둘째, 예언은 성취되어야 한다(예레미야 29:9)
"선지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응한 후에야 그는 진실로 여호와의 보내신 선지자로 알게 되리라."
어떤 사람이 예언하는 은사를 받았으면, 그가 예언하는 바가 정확하게 성취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열매를 맺어야 한다(마태복음 7:20)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어떤 사람이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면, 그의 성품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대표자로 설 수 있을 만큼 풍성한 성령의 열매를 맺고 있어야 한다. 가정에서 부부 싸움을 하고, 자녀들에게 짜증을 내며, 모든
금전 문제에 있어서 엄격한 정직을 유지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이 방언을 하고 병 고치는 은사를 행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하늘에서
내려온 은사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러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 그를 잘 알고 있는 믿지 않는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감화를 끼칠까? 아마도 사람들은 그가 가지고 있는 두가지의 다른 양면을 보면서 하나님의 복음에 대하여 이상한
혼돈을 갖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람에게 성령의 은사를 내려 주심으로써 복음을 전파하고 증거하실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그러한 사람은 혹시 자신이 다른 영을 받았을 가능성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하늘은 위대한 성령의
능력을 받기에 적합하게 준비된 사람들에게만 하늘의 거룩한 선물을 준다. 거룩하게 변화된 성품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에게 하늘의
위대한 능력을 위탁하였을 때에 복음 전파사업에 어떠한 혼돈과 위험이 따르게 될지를 생각해 보라.
넷째, 성육신 사건을 믿는다(요한일서 4:2-3)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리 이것이 곧 적 그리스도의 영이니라."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우리와
같은 육체로 오셔서 시련과 고통 중에서 승리하셨던 것처럼, 진실한 그리스도인들도 그분의 모본을 따라서 죄와 시험을 승리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 영을 분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죄와 유혹에 대하여 승리하는
생애를 살아야 하며, 그러한 가르침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이어야 한다. 거룩한 생애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거룩한 하늘의 선물이
내려지게 된다.
다섯째, 예수 믿음을 지키는 것(요한계시록 14:11-12)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사도 요한 역시 앞에서 이사야가 말했던
영의 구별법에 동의하고 있다. 마지막 시대에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인내로서 고난을 통과하면서 나오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에 관한
계시를 보면서, 사도 요한은 그들의 신분을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것은 영을 분별하는 분명한 기준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기적과 은사를 무조건 하나님의 영의 은사라고 보아서는 않된다는 것이 이 질문에 대해서 성경이 말하는 대답이다. 성경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충고는 모든 기적과 은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험하고 판단하여 유익을 얻으라는 것이다.
5. 은사 경험자들이 가장 유의해야 할 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 자체는 영원불변하지만, 진리를 이해하는 우리의 지식과 경험은
잘못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된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진리를 검증하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를 기준점으로 해서 우리가 가진 지식과 경험을 판단해 보아야 한다. 즉, 우리의 지식과 경험으로 진리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서 우리의 지식과 경험을 시험해야 한다.
그러나
사단은 경험을 진리 위에 놓으려고 애쓴다. 우리의 경험은 그것이 올바른 진리의 테두리 안에서만 가치있는 것이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같은 사건을 관찰했을 때, 각기 다른 경험을 이야기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진리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경험은 우리가 어떤 교단에 속했으며, 어떤 사람에게 성경은 배웠느냐에 따라서 크게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진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항상 동일하다.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고 있다는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경험을 설명한다. A) 나는 어떤 놀라운 기적을 경험을
하였다. B) 그런데, 나는 나의 경험과 매우 흡사한 경험을 성경에서 발견하였다. C) 그러므로 나의 경험은 진리이다. 이와 같은
3단 논법에 의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성령의 은사로 받아 들인다. 이러한 논리의 전개는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리지만, 자신의
경험이 초대 교회의 경험과 비슷하다고 해서 자신들의 경험이 진리 안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단도 기적을 일으킬 수
있으며, 성령의 역사를 위조할 수 있고, 사람의 감정을 조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험이 최고의 증거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진리는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한 "영"에 의해서 진리를 척량하려고
한다. 바울은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아니하고." 데살로니가후서
2:10,11. 하나님의 진리인 성경 말씀을 깊이 연구하라. 그것만이 마지막 시대에 펼쳐지는 사단의 대기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성령)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니라." 요한복음 14:15~17. 사도 요한은 여기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의
계명(commendment, 명령)을 순종할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에 대한 순종이야말로 자신의 경험을 시험할 수 있는 최종적인 판단 기준이며, 동시에 성령을 받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자신의 경험과 느낌, 그리고 자신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지식이 어떠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바를 단순한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순종의 생애를 사는 것이야말로 그 사람을 지배하는 영을 분별하는 최고의 기준이다.
사도 요한이 말씀한 것 같이 영들을 어떻게 분별해야 하는가? 즉 어떤 것이 참된 영 곧 진리의 성령이며 어떤 것이 악령/미혹의 영이고, 또한 어떤 것이 무속적/샤먼적인 정령들인가를 분별할 수 있는가?
사도 요한은 우리게 중요한 영의 분별 법을 암시해 주고 있다. 그가 제시하는 영의 분별법은 먼저 영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속하지 않은가를 불별하는 일이다. 그리면 영들이 하나님께 속했나 속하지 아니한가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가?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라...>
사도
요한에 의하면 하나님께 속한 영 곧 참된 령인 성령과 미혹의 영의 구별은 그 영이 육체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구별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참 영과 거짓 영의 구별은 바로 이 세상에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시고 한
인간으로 사신 예수님, 곧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의 삶과 그리고 그의 말씀/교훈과 밀접하게 연결된다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사실 때, 언제나 성령 충만함 속에서 사셨으며, 즉 성령 충만의 삶을 사셨으며,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의 영의 사람 곧 성령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와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고로 성령을 받은 사람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마음을 가져야 하고 그의 인격을 본받아야 하고,
그분의 교훈 곧 그분의 사상을 지녀야 하고, 그분의 말씀대로 사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요컨대, 성령 충만자는 그의 삶과
인격에서 성령/진리의 영의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의 냄새/향기가 나야하고 그의 흔적이 보여야 한다는 말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빛/광채가 비쳐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결론에 도달 할 수 있다. 참 영과 거짓 영, 성령과 악령,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 거룩한 하나님의 영과 무속적인 정령들과의 구별은 바로 그 영이 예수 그리스도마음/영과 관련되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즉 그 영이 진리와 사랑과 평화와 지혜의 사람 예수 그리스시도의 마음을 갖게 하며, 또한 그분의 빛과 향기를
발하게 하느냐 못하느냐로 구별된다는 사실이다.
내가 참으로 성령을 받은 사람인가 받지 못한 사람인가, 그리고 내가
진정 성령 충만자인가 이닌가를 어떻게 부별할 수 있는가? 바로 우리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 마음이 있는가 없는 가로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가 나지 않는 가로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빛과 향기가 나지
않는 다면, 그것은 참 영인 진리의 성령을 받지 못하였거나 그러지 않으면 진리의 영이 아닌, 미혹의 영이나 무속적인 정령을 받지
않았나 잘 살펴보아야 한다. 동시에 우리가 성도들에게 성령을 받으라, 성령 충만을 입으라고 말할 때, 아무 영이나 받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진리의 성령, 곧 예수 그리스시의 마음 영과 동일한 참 성령을 받으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거짓
선지자나 적 그리스도는 아주 먼데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주변에, 우리 교회 안에, 아니 우리 속에도 숨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분명하게 알려주시고 친히 보여주신 성령 곧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을 올바로 전하지 않고,
성령을 이 세상에 흔이 있는 어떤 기이한 현상의 영이나 무속적 영, 아니면 우리를 미혹케하는 거짓 영 즉 자기 만족적이고 감각적인
흥분만 조장하는 미혹의 영들과 혼동케 하거나 혹은 그런 행위를 자행하는 일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거짓 선지자나 적 그리스도의
하나로 전락하게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마태복음 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 략질 하는 이리라..... (20절)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리라.
요한일서 2:18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 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느니라.
요한이서 1:7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예수님은 산상수훈 끝부분에서,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경고하셨다. 그리고 그 거짓
선지자들은 겉으로는 아주 선한 양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속심에는 사람들의 재산을 노략질하는 이리와 같은 자들이기 때문에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고 말씀하셨다(마 7:15).
또한 마태복음 24장에서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주면서 할 수 있는 대로(모든 수단을 다해서)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혹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마 24:24).
한편
사도 요한은 그가 쓴 첫 번째 편지에서, 말세에는 많은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을 예고했다.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이때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요일 2:18).
그리고 또한 그는 그들 즉 거짓 선지자나 적그리스도들이 말하고 보여주는 영들을 다 믿지 말고, 오직 그
영들이 하나님께 속한 참 영인가, 아니면 마귀에게 속한 거짓 영인가를 잘 분별해야 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요일 4:1).
위의
말씀들은 오늘날 우리의 마음을 매우 무겁게 압박하는 말씀들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 주변에 수많은 자칭 그리스도, 자칭
선지자/예언자, 자칭 예수, 자칭 메시야, 자칭 감람나무, 자칭 보혜사 등 수많은 위선자들과 사이비 종교 지도자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서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사도 요한이 지적한 위의 말씀들은 바로 오늘의 우리 한국 사회와 교계를 향해서
하신 말씀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가 참 선지자며 거짓 선지자 또는 적그리스도인지를 구별하는 기준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열매로써 알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마 7:20). 즉 누가 참 선지자며 누가 거짓
선지자인지를 구별하는 표식(기준)은 바로 그들의 열매, 곧 그들의 삶과 행동을 보아서 알 수 있다는 말씀이다. 그들의 삶과 행동이
예수님이 가르쳐주시고 모범으로 보여주신 참 영적 지도자의 삶과 행동과 일치하고 있으면, 그들이 이 시대의 참 하나님의 종들 혹은
참된 영적 지도자로 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거짓 선지자 혹은 거짓 그리스도 즉 적그리스도로 보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한편 예수님은 우리의 영적 전쟁에 있어서 우리의 적 곧 원수가 먼 곳에 있지 않고 바로 우리 가까이에 있음을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래서 “사람의 원수가 바로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6)고 말씀하셨다(마 10:36).
그러면 오늘의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 생각해 보자. 오늘의 우리 교계와 사회에서 참 선지자는 누구며 그리고 거짓 선지나 혹은 적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그리고 또한 우리는 오늘의 우리 교계와 사회에서 어떻게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 혹은 적그리스도를 구별해 낼 수 있을까?
일찍이
본회퍼 목사는 주님의 십자가의 대가로 얻어진 지극히 소중하고 값비싼 은혜를 값싼 은혜처럼 선전하고 남발하는 행위는 교회의
치명적인 적으로서, 모든 교회가 대향해서 싸워야 할 대상이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값싼 은혜란 오늘날 교회에서 철저한 회개
없이도 믿기만 하면 죄가 사해진다고 말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제자 됨이 없이도 의롭게 된다고 말하며, 또한 값싼 축복을
남발하는 행위들이다.
이러한 행위들은 기독교의 근본 진리/신앙을 왜곡시키고 교회를 병들게 하며 교회의 발전을 크게 저해하기 때문에
교회의 무서운 적으로서 적그리스도적 행위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러한 각도에서 오늘의 우리 교회와 사회에서 거짓 선지자와
적그리스도는 과연 어떤 사람들인가 살펴보자.
1. 거짓 선지자 혹은 적그리스도의 일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지 않고 자신이 그리스도 혹은 구세주 또는 보혜사라고 말하는 자들이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썼다.
“거짓말 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요일 2:22).
2. 하나님의 말씀/복음을 올바로 전하지 않고, 왜곡되게 전하는 자, 즉 예수님의 복음이 아니라 자기 멋대로 만든 복음 곧 자기복음을 전하는 자도 적그리스도 에 해당한다.
3. 교회의 분열과 파쟁을 일으키며 교권싸움으로 하나님의 교회(기독교)의 신성한 명예를 실추시키고 하나님의 교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자들도 적그리스도에 해 당한다.
4. 값싼 은혜를 남발하며, 물신숭배(Manmonism)와 기복신앙(Baalism을 조장하는 자들도 적그리스도에 해당한다.
5. 금전으로 교권을 잡으며, 금전으로 학위를 사며, 금전으로 교회를 사고파는 자들도 적그리스도에 해당한다.
6. 충실한 영성훈련과 수준높은 신학교육을 하지 않고 신학교를 마구 세워서 저질의 하나님의 종들을 양산하는 자들도 적그리스도에 해당한다.
7. 하나님의 종으로서 성결한 삶을 살지 않고 비윤리적인 행위나 삶으로 하나님의 교회/기독교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잃게 하는 자들도 적그리스도에 해당한다.
오늘날
우리 모두는 깊이 성찰해야 한다. 내가 과연 누구며 어디에 속한 사람인가를 숙고해보아야 한다. 내가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만한
참 주님의 종인가, 아니면 구약의 바알 선지자들 처럼 하나님의 뜻은 외면하고 사람들의 귀에만 좋게하는 값싼 은혜를 남발하는 거짓
선지자는 아닌가. 오늘날 나는 과연 주님의 복음이 지닌 깊은 영적 진리들을 바로 이해하고 올바로 전하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의
본래 의도와는 아주 다르게 내멋대로 전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또한 나는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류에 편승하여 잘못된
일인줄 뻔히 알면서도 용기있게 항거하거나 단호히 거부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병들게 하고 또한 그의 신성한 명예를 실추시키는
적그리스도적 행위들을 해오지는 않았는가 반성해 보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부지중에라도 그러한 적그리스도적 행위들에 연루되었다면
오늘 이시간부터 즉시 그 일을 중지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침체에 빠진 우리의 교회를 다시 일어서게 하며 새로운 도약과 생기를
불어넣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소아시아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신앙은 삼위 하나님과 구원에 관한 내용을 핵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넓게는 모든 사상이나
철학이나 역사나 예술이나 문학이나 경제나 정치나 문화가 다 신앙의 활동영역입니다. 그런 분야에 대해서는 믿음의 관점에서 연구하고
분석하여 나름대로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은 단순히 학문적 연구와 분석의 대상으로만 취급할 수 없습니다. 영은
눈으로 볼 수 없고 감각적으로 만질 수도 없습니다.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영에 대해 분별하는 것은 세심한 주의가 요구됩니다.
사도 요한이 영을 다 믿지 말고 분별하라고 한
것을 보면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영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가지고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영을 볼 수는
없습니다. 영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영이 아닙니다. 만약에 영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면 볼 수 있습니다.
천사나 하나님의 사자가 사람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는 경우에 눈으로 볼 수 있는데, 그런 때도 눈에 보이는 그 모습은 영의 본래의
모습이 아닙니다. 영은 모습이 없습니다. 그래서 영에 대한 문제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 영의 문제에 대해 바르고 건전한 지식과
깨달음이 없으면 아주 잘못될 위험이 있습니다.
성경은 영이 직접 나타나거나 활동하지 않고 사람이나 지식이나 사상이나 문화나 그 외의 여러 것들을 통해서 활동한다고
가르칩니다. 성령의 활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베소서 1장 21-22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 영역에 대해“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고 하였는데, 이는 곧 예수의 영인 성령의 활동 영역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활동
영역은 곧 악한 영의 활동 영역이기도 합니다. 성령은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일하시지만 악한 영은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허물기 위해 일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뿐 아니라 만물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분별해야 하고 또한 악한 영의 활동도 분별해야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 점을 매우 강조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활동 영역은 교회 안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모든 영역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특별히 교회 안에서 활동하는 악한 영을 경계해야 합니다. 악한 영의 활동은 언제나 성령의
사역을 빙자하기 때문입니다. 악한 영은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방법을 이용하고 성령께서 소중히 여기시는 것들을 모방하여 성도를 속이고
기만합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성령께서 사도들과 예언자들을 사용하여 일하셨기 때문에 악한 영은 거짓 사도와 거짓 예언자를 교회에
투입하는 전략을 사용하였습니다.
오늘날은 목사나 장로 같이 교회 안에 영향력 있는 지도자를 이용하여 교회를 허무는 도구로 이용하는 것이 악한 영의 방법일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가 외부의 공격 보다는 내부로부터의 공격에 더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는데 이는 다 악한 영의 전략에
의한 것입니다. 성령께서 교회를 세워 가시는데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증거와 가르치는 것인데 악한 영도 그 방법을 이용하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입니다. 구약에서는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왕들을 이용했고 초대교회에서는 선지자나 예언자나 사도나 교사를
이용했습니다. 요즘은 두 말 할 것 없이 목사나 선교사나 장로나 그 외에 영향력 있는 지도자나 능력이나 신비한 체험 같은 것을
이용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말씀을 통하여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분별해야 합니다. 악한 영은 초대교회 때만이 아니라
이미 구약에서도 활동하였습니다. 구약에는 하나님께서 주로 “예언자들”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전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언자들의
특징은 자신이 전하고 보여주는 것은 자신의 지혜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변하는 것으로 자처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참
선지자뿐 아니라 거짓 선지자도 같은 주장을 하기 때문에 누가 악한 영의 지배를 받는지 또는 진리의 영의 지배를 받는지 잘
분별해야만 했습니다.
엘리야 시대에는 하나님과 바알 중 참 신과 거짓 신을 가리기 위한 갈멜산에서의 대결이 있었고 그 대결에서 하나님이 참
신이심이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악한 영은 언제나 노골적으로 바알이 참 신이라고 주장하는 방법만을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이 참
신이라고 주장하면서 거짓 선지자 노릇을 하기도 합니다(cf. 왕상 18:6-12). 거짓 선지자의 특징은 언제나 왕이나 백성들에게
좋은 말만 하는 것이고 참 선지자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말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 아합이 유다 왕 여호사밧에게 미가야에
대하여, 그는 한 번도 내게 좋은 말은 하지 않고 악한 말만 하기 때문에 미워한다고 하였습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 되게 전하면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습니다. 진리만 전하면 사람들이 싫어하는 이유는
사람은 누구나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위로하고 칭찬하고 용기를 주는 말을 좋아합니다. 세상 살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이유로
죄를 책망하고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메시지를 싫어합니다. 경제적인 용어를 빌리자면 영적 “수요(需要)”가 그렇습니다. 진리를
간절히 듣기 원하는 수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 축복, 성공, 위로, 형통, 치유, 능력, 체험 같은 메시지는 수요가 많아서
그런 메시지를 전하는 교회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입니다. 진리만 전하는 교회는 문을 닫아야 할 지경입니다.
초대교회에 가현설 자들은 예수님의 인성을 믿지 않았고 육체의 부활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가현설 자들은 지식도 많고
수사학에도 능했기 때문에 많이 배우지 못한 성도들이 변론으로는 그들을 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성도들은 거짓 교사나
거짓 선지자들과의 논쟁에서 그들을 이길 만큼 학문과 설득력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이긴 것은
그리스도의 승리에 참여한 때문이고 또한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악한 영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복음을 이상한 사상과 그릇된 가르침과 일치시키려는 교묘한 악한 영이 전략적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악한
영은 복음을 적극적인 사고방식이나 긍정적인 생각 같은 것과 일치시키려고 합니다. 복음을 형통과 축복, 성공 지향적인 복음으로 재
설명하려고 합니다. 병 고치는 복음, 기적을 행하는 복음, 성공을 약속하는 복음, 사회개혁주의 복음, 그 외에 별의별 형태의
복음이 많습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 사도 요한은 ‘미혹의 영’이라고 하였습니다. 미혹의 영은 우리가 들으면 흥미가 있고 구미가
당기고 관심을 끌게 하는 것들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진리에는 그런 달콤한 것이 없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신데 사람들은 진리를
싫어하기 때문에 마치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참 신이신 하나님을 싫어하여 자기들의 마음에 맞는 하나님을 만들어 섬겼듯이 요즘
교인들 중에는 자기 마음에 맞는 성령을 만들어 이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이상한 기적이나 체험하게 하는
영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악한 영이 교회를 어지럽게 하고 성도들을 미혹하는데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성령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악한 영은 목사도 이용하고 선교사도 이용하지만 가장 효과적이고 강력한 방법은 성령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악한 영이
교회를 무너뜨리는데 이보다 강력하고 효과적인 방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이 진리의 영인지 미혹의 영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달콤하고 흥미롭고 내 입맛에 맞으면 악한 영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악한 영의 결정적 증거는 계시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악한 영은 전략적으로 복음을 왜곡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성경적”또는 “말씀 중심”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에 철저한 것 같은 방식으로 말씀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악한 영은 우리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교묘한 방법으로 자신을 감추기 때문에 세심하게 주의하지 않으면 속기 쉽습니다. 악한 영을
분별하는 데도 결정적 시금석은 사랑입니다. 서두르지 말고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보면 악한 영은 교묘한 엘리트 의식의 교만을
드러냅니다. 뿐만 아니라 악한 영은 이기적이기 때문에 절대로 진실한 사랑을 나타내지 못합니다. 악한 영도 사랑을 강조하지만 그
사랑이 진실하지 않다는 것은 사람보다 은사나 능력이나 깨달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진리의 영은
절대로 사람을 무시하지 않지만 악한 영은 은근히 또는 노골적으로 사람을 무시합니다. 진리의 영은 사람을 겸손하게 하지만 악한 영은
영적 교만으로 사람을 무시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런 특징이 바로 계시의 말씀을 듣지 않는 증거들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고
지혜의 영이시고 분별의 영이십니다. 모든 성도들이 이 진리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악한 영을 분별하고 은혜와 진리 가운데 진실
된 사랑을 실현하여 교회마다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요일 4:6-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
창세기에서 처음으로 예언된 메시아(창 3:15)는 최초의 복음이었습니다. 이것을 원시복음(Protevangelium, Proto - ‘원래의’, evanglium - ‘기독교복음’)이라고 합니다.
마리아의 몸에서 출생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메시아 예언은 실현되었습니다(마 1:18∼23, 2:11). 이제 남은 메시아 예언은 부활 후 하늘로 오르신 예수님께서 다시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란 예언입니다(마 24:30, 26:64, 막 13:26, 14:62, 눅 21:27, 행 1:11, 계 1:7).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아담과 하와가 따 먹음으로 죄와사망이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사망으로 망하게 된 것을 그대로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의 담을 허시고 다시 낙원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약속해 주신 것이 바로 원시 복음인 것입니다.
첫째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우리가 모두 죄인이 된 것입니다(원죄). 둘째 아담인 예수님이 우리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 모두는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롬 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표하여 죽으신 것은 결국 우리 모두가 각자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신 것이며 그로 인하여 우리는 영원한 형벌을 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구원받기 위해 해야 할 것이 꼭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믿음이 있을 때에 우리는 구원의 기쁨과 죄에서 해방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으며 우리의 신앙생활은 보다 활기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성경에 기록된 족보는 4복음서 중에 마태복음 1장에 아브라함부터 예수에 이르기까지 기록되었으며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족보가 없고 누가복음 3장에서 예수께로부터 하나님에 이르기까지 남자가 낳은 후손들의 대략이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족보는 남자가 낳은 후손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 15절에서 말하는 여자의 후손이라 기록한 말씀이 단 한곳 마태복음 1장 16절에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셨다는 것입니다. 이에 관하여 자세한 내용을 누가복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눅1:25-36).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유일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아브라함의 후손을 낳은 남자가 아닌 여자가 있었으니 다윗의 후손 (마1:16) 야곱이 낳은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로 그에게 (마 1:18) 성령이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그를 덮으시리니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여기 ‘덮으시다’라는 뜻은 감싸다라는 뜻으로 닭이 알을 품듯(창 1:2)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심과 같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동정녀의 몸에 잉태되시고 나신 것은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으로 죽은 자 가운데 계신 예수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것과 같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께서(고전 15:3) 성경대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고전 15:4) 성경대로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사단의 권세 아래 놓인 세상과 그리스도 안으로 불러냄을 받은 자들과의 전쟁이라 할 것이다
사단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이기신 세상을 다시금 회복하려고 안간힘을 다할 것이다. 또한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계 17:17) 하나님께로부터 권세를 받아 다스릴 환란까지이다. 얼마남지 않은 마지막 시간이 될 것을 아는 그들은 끝까지 하나님의 일을(계 2:9. 13:6. 16:9. 11. 21) 훼방할 것이며 회개치 않고(계 20:14) 불 못을 선택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최후의 날이 임하기까지 복음의 말씀을 변질시키고 왜곡하여 진리에서 비켜서도록 할 것이다.
그 하나는 동정녀에 관하여서이고 둘은 창조론에 대적하는 진화론이며 셋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부정하는 종교다원주의이며 넷은 홍해바다에 길을 내신 일이며 다섯은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축소하려는 미련한 자들의 대적이며 여섯은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형벌을 부인하는 일이며 일곱은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이다
그러므로 그들은(마 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으켜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고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그러므로 그 어떤 유혹에도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며
처음 듣고 믿은 복음의 말씀인 ‘십자가의 도’에서 떠나지 말고 오히려 굳게 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사랑의 대상자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창조하신 후, 마지막으로
사람을 지어 하나님 대신 세상을 통치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시도하는 순간 인간은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인간은 죽음에 이르게 되었고, 그로인해 영원히 살도록 창조된 자가 그만 구원이 필요한 자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사랑하시기에 사랑의 대상자인 사람들을 향해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않으실 수 없었습니다.
죄로 인하여 사람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에 하나님께서는 한가지 특이한 약속을 주십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 창세기 3:15.
인류를 죄악에 빠뜨린 뱀에게 한 말입니다. 뱀은 사실 뱀의 모습으로 나타난 마귀를 말합니다. 마귀는 여자의 후손의 발뒤꿈치를
상하게 하겠지만,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으깰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성경에서 모든 인류는 남자의 후손입니다. 창세기에도,
역대기에도, 마태복음에도, 누가복음에도 모든 인류는 남자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두 남자를 통해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여자의 후손이 딱 한명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마귀는 예수님 십자가에 매달아 죽게
하였지만, 예수님을 죽음에 가둬 두지를 못했습니다. 즉 머리를 상하게 하려 시도하였지만 예수님께서 죽었다 살아나시는 부화사건을
통해, 겨우 발뒤꿈치만 상하게 한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반면, 부활을 통해 마귀는 자신의 궁극의 무기인 죽음이라고 하는 무기가
깨지는 것 보아야 했습니다. 즉 머리가 으깨어져 버린 것이지요. 죽음으로도 어쩔 수없는 마귀는 이제 예수 이름 앞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의 형편없는 상태는 예수의 이름을 가진 모든 자들 앞에서 동일하게 적용되는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즉 예수를 품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구원이 임한 것이지요.
이것을 원시복음이라 부릅니다. 여자의 후손, 즉 남자의 몸을 빌지 않고 처녀의 몸에서 태어난 인간이 모든 인간을 구원할 것이라는 최초의 구원 예언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왜 하필 처녀의 몸에서 태어난 자라 할까요?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죄가 없어야 합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바로 죄가 유전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죄의 유전은 남자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즉 남자의 몸을 타고 태어난 모든 인간은 죄인인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을 위해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구원의 길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피의 대속 제사입니다. 다른 죄없는 생명체가 대신 죽음으로써 생명을 대신하면
된다는 것이지요.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레위기 17:11).
즉 죄를 없애는 방법은 바로 대속의 제사였습니다. 대속이란 죄를 ‘대신 속한다’는 뜻입니다. 제사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죄인을 위해 대신 죽어줄 제물이었습니다. 이때 사용되는 대속 제물의 조건은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어린
양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하나 생깁니다. ‘짐승이 인간을 대신해서 죽을 수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럴
수없다라고 말합니다. 상식적으로도 당연히 그럴 수 없지요. 그래서 제사에 사용되었던 희생양은 그저 상징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는 예표라고 부릅니다. 즉,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어린 양이란, 죄도 없고 허물도 없는 사람 제물을 뜻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죽을 수 있는 구원자는 다음과 같은 자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1. 인간을 대표해서 죽어야 하므로 사람이어야 한다.
2. 죄도 없고 허물도 없어야 하므로, 남자의 피를 받으면 안된다
3. 죽음을 이겨야 한다. 즉, 그저 대신 죽는 것으론 부족하고 죽었다가 살아나야 한다.
이러한 존재를 보내 주겠다는 약속이 바로 창세기 3:15절의 원시복음인 것입니다.
죄인이 아닌 인간이 될 수있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인간이기 위해서 인간의 육신을 받아야 한다
2. 죄가 없기 위해서 남자의 피를 받으면 안된다. 죄는 남자를 통해서 유전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기 위해 구원자는 우선 남자의 몸을 받지 않고 여자에게서만 태어났어야 했습니다. 인간의 몸에서
태어나야 인간이 되어 인간을 대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죄가 없는 순결한 영혼이어야 했고, 죄와 죽음을 이기는 능력을
가져야 했으므로 그 영은 하나님으로부터 와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자가 처녀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남자의 후손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이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구원자는 완벽하게 인간이면서, 또한 완벽하게 하나님이어야 했던 것입니다.
아무도 믿지 않을 사실, 믿음을 주기 보다는 오히려 조롱거리가 될 수 밖에 없는 사실, “처녀가 애를 낳은 것이 우리가
모시는 구원자라네”라고 하는 이야기가 당당하게 성경에 자리 잡을 수밖에 없었던 사연은 바로 대속제물의 조건을 만족시켜야 하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최초로 복음의 약속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타락한 이후, 즉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와 뱀에게 벌주시는 종말론적 심판의 광경을 보이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심판의 선언 속에 하나님은 긍휼을
잊지 않으셨다. 여인의 후손을 통한 구원 약속을 주셨기 때문이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마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3:15) 여기서 구원에
관한 중요한 진리를 발견한다.
첫째, 우리 구원을 인간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전적 능력으로 이루신다는
선언을 본다. 사람의 노력의 보태기로 이루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구원의 역사를 본다. 진정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단독역사로만 가능하다. 우리의 구원도 전적인 은혜로 되는 것이지 나의 어떤 장점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 원리는 역사속에 일관하게 나타난다. 신약의 구원 역시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여신 것처럼 우리 마음을 여실 때 믿게
되고 회개하고 구원을 받는다.
둘째, 그의 구원은 마귀와의 단절로 이루어진다. 마귀의 말에 귀가
솔깃하여 독을 마시듯이 자기 것이 되어버린 인생은 하나님이 마귀와 원수가 되게 하심으로서 구원이 성립되게 하신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마귀와 대적하는 입장에 서있는 전쟁터에 있는 것이다. 기회를 엿보고 있는 일곱 마귀의 역사를 대적해야한다.
평강의 하나님이 속히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리라는 약속을 받고 있는 자들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할 일은 주님이
마련하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여 입는 일만이 남았다.
마지막으로 구원이란 연합을 가리킨다. 하나님과의 연합이 구원이란 말이다.
마귀와 원수가 되고 하나님과 연합한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던 신분이 오직 주님을 따르는 신분으로 바꾸어진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 그리스도 안에서의 승리 자리로 올라가는 것이 구원이다.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죄에서 건짐
받는 초보적 부분에서 하나님과 떨어질 수 없는 연합의 자리로 나가는 것이다.
이 예언은 정말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바로 이 3가지 절대적 요소를 골자로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적 은혜로 구원받은 자이다. 우리는 마귀와의
대적하는 용사로서 부름 받았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영원한 연합을 함으로서 우리의 구원이 완성됨을 안다. 이 놀라운 원시복음의
골자가 내 속에 있는지를 살피자. 정말 내가 믿는 복음이 바로 이것 향해 나가고 있는가?
원시복음(元始福音, Protoevangelium)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박윤선 박사는 (1) 사람과 마귀(계 12:9, 20:2)가 서로 원수되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것, (2) 사람이 마귀와 원수 된 상태가 구원이라는 것, (3) 여자 후손과 뱀 후손이 상호적대행위를 계속한다는 것, (4)
택한 백성구원은 그 백성이 마귀머리 상하게 함으로 성립된다는 네가지 중요 요소를 지적했다.
여자 후손은 택한 백성 대표할 메시아가
나실 것을 가리킨다(사 7:14, 마 1:23, 갈 4:4). 원시복음을 포함 에덴동산의 일을 기록한 창 1-3장은 구속사의 네
과정을 암시하고 있다.
1.
창조적 은혜와 축복 :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만물 가운데, 생존환경에 적합한 지 구와 그 안에 동물·식물을 만드시고, 인간은
하나님 형상에 따라 하나님 모양대로 남녀로 디자인하여, 손수 빚어 만들어 자신의 생기를 불어넣어 생명이 되게 하시고, 가정을
이루게 하시고, 생육 번성 땅에 충만, 정복, 다스림, 이름을 짓는 명명권(命名權)을 주셔서 그것들을 누리며, 생명과 선악과로
아담과 하와의 언약, 교제, 소통하시고, 순종과 영광 받으시고, 그들을 영원히 살게하심은, 한마디로 창조적 축복의 은혜요, 감사
찬송 기쁨의 주제다(창 1:1-28, 2:15-17, 19, 23, 사 43:7, 21)
2.
창조질서를 어긴 인간 범죄 :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형상대로 모양대로 지음받은 정체성, 축복을 누림을 받은 사명, 하나님 축복의
약속을 잊고, 아담은 한 몸된 아내 보호 돌봄 간수하는 남편 역할을, 하와는 한 몸된 남편 돕는 내조 배필로서 협의하는 아내역할
등한하고, 하나님을 언약 어기고, 하나님과 대화보다는 다스려야 할 뱀을 대화 상대로 자기와 동격에 두어, 하나님 말씀보다 뱀말에 귀
기울임으로, 뱀에게 틈탈 기회를 주었다(시 1:1-2, 엡 4:27). 결국 하와는 하나님 금하신 선악과를 먼저 따먹고 아담으로
먹게 해서, 부창부수(婦唱夫隨)를 범죄했다. 그 죄 결과는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고, 그들이 대표하는 온 인류에게 비극을
가져다주었다(롬 5:12).
3. 하나님께서 미리 경고하신 심판(창 2:17) :
인간의 죄의식, 수치심, 핑계, 하나님 원망, 노고(勞苦), 죄성(罪性),
사망의 실존적 변화와 에덴동산에서 쫓겨남, 저주받은 땅 경작, 하나님 한탄하신 죄악관영(貫盈)한 생의 정황 변질로, 하나님 관계,
인간 관계, 자연 관계의 훼손, 실존과 상황이 사람과 악한 사탄마귀의 영적 전투상태 전시상황으로 바뀌었다(창 3:7-19,
22-24, 4:7, 6:5-6).
4.
무조건적 은혜 원시복음(창 3:15)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구원을 선포하셨다. 뱀 후손과 여자 후손 적대 관계는 궁극적으로 여자
후손이 승리하나, 피흘림을 통해서다. 피흘림은 수치(羞恥) 가림, 죄 씻음이다. 여자 후손 피흘림으로 그가 대표하는 백성들
죄씻음, 죄가려줌, 궁극적 승리를 가져오게 됨을 하나님 손수 실천해 보여 주셨다(창 3:21, 레 17:11, 힙 9:22).
그러나 뱀 후손은 하나님 허락 하에 제한받는 힘으로 최후 심판때까지 여자 후손 공격하기를 멈추지 않음으로, 하나님 자녀는 하나님
절대의존 신앙과 그 열매인 예배와, 삶의 자리에서 죄를 다스림 죄와 더불어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창 4:7, 욥
1:6-12, 마 4:1-11, 눅 22:31-32, 힙 12:4). 그래서 모이기를 힘씀, 믿음의 선한 싸움(딤전 6:12, 힙
10:25), 하나님의 전신갑주 영적무장을 취하라 한다. 악한 사탄마귀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 두루 찾아 헤매고 다니지만,
성령의 검 하나님말씀과 성령 안에서 함께 더불어 기도 교제로 마귀를 대적하면 물러가고, 마귀 물리친 다음 하나님을 의지 가까이함이
영전의 필승전법 이다(엡 6:10-20, 힙 4:12, 약 4:7-8, 벧전 5:7-8; 신 4:7, 시73:28,
145:18).
원시복음은
구약의 메시야 예언(사 7:14)과 그 메시야의 피흘림(창 3:21, 4:4, 15:6-18, 9-14, 출 12:13,
24:1-8, 레 17:11, 사 53:4-6) 두 방면으로 예언되어 오던 것이, 신약의 때가 되어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로 성취되었다(마 1:16, 23, 눅 1:34-35, 2:10-11, 요 4:25, 19:30, 갈 4:4,
31). 이 구원사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계획, 완성, 우리에게 적용된 것인데, 하나님
말씀을 듣고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믿음으로 영접할 때, 성령께서 우리 영혼에 인 치심으로 중생 구속(救贖) 영생을 얻고, 하나님
자녀의 영, 권세, 명분받아 하나님 아바아버지라 부르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후시가 되게 하신 것이다. 이 구속사는
에덴동산 실낙원에서 새하늘 새땅 복락원에 이르기까지 한결 같다. 구원받은 하나님 자녀는 ‘나 같은 죄인 구원하시기 위해서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선택하사 나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나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내게 그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며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기를 소원해야한다(요 1:12-13, 갈 4:4-7, 엡 1:4-14). 원시복음이 결국 내 구원 위함이라
믿어짐으로, 모세가 죽기전 이스라엘자손을 축복하고 불렀던 찬양을, 천국 갈 때까지 나도 부르지 않을 수 없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오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신 33:29).
단에게 내린 저주인 동시에, 타락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입니다. 다시 말해, 여자의 후손 중에서 메시아가 태어나 인류를 구원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원시복음’(Original Gospel)
원시복음이란 최초의 복음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최초로 메시아,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된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신약에 4복음서가 있듯이 구약에는 원시복음이 있습니다.
그러면 원시복음의 핵심은 무엇인가?
아주 중요한 3가지 핵심 메시지가 있습니다.
1. 그리스도가 여자의 후손으로 와서 마귀를 멸한다는 것입니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사단과
여자의 후손이 원수관계, 곧 적대관계가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마귀를 멸할 여자의 후손은 누구인가? 그는 분명
인간입니다. 하지만 보통 인간이 어떻게 영물인 사단을 이길 수 있는가? 사단을 이기려면 사단보다 더 강해야 합니다. 결국 사단을
이길, 여자의 후손은 성육신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결국 원시복음은 여인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를 예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 가운데서 메시야가 태어나 마귀를 멸하시고 인간을 구원할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요일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 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또한 여자의 후손 가운데서 그리스도가 태어난다는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더욱 구체적으로 예언되었습니다.
(사 7:14)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 예언대로 처녀에서서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난 분이 누구인가?
(마 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 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늘 고백하는 대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요, 구원자인 것입니다.
그러면
왜 메시아는 ‘여자의 후손’이어야 하는가? 다시 말해 왜 처녀가 낳아야 하는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할 자는 아담의 후손, 즉
남자의 씨로 태어나면 안됩니다. 왜요? 아담의 혈통을 타고 난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원죄 아래 있고 그 죄로 인해 저주와 심판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롬 5:12)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그래서 성경은 구원자로 오실 분은 여자의 후손, 즉 처녀에게 태어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이 예언대로 예수님께서는 동정녀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어 탄생하셨습니다. 인류를 대대로 묶고 있던 원죄와 상관없이 의롭고 순전하고 거룩한 사람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일하게 죄 없는 사람입니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이 예수님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메시아이심을 믿습니다.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또한 하나님은 사단에게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사단과 적대관계를 가지고 싸우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예언대로 예수님은 사단과 크게 세 번 싸우시는데 두 번은 이미 싸우셨고 한 번은 앞으로 싸우실 것입니다.
첫 번째 사단과의 싸움은 언제였는가?
세례를
받은 후 광야에서 40일 금식기도를 한 후 사단으로부터 받은 3가지 시험입니다. 예수님은 이 시험을 말씀으로 다 물리치시고
승리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단이 지배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마 4:17)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두 번째 싸움은 언제였는가?
십자가에 고난당하심입니다. 십자가의 수난 당하심은 사단과의 영적 싸움입니다. 이 싸움이 처음에는 예수님이 지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승리하셨습니다.
세 번째 싸움은 언제 있게 되는가?
예수님의 재림 때 치러질 싸움입니다. 이 싸움에서 사단은 완전히 패하게 되며, 영원히 유황불에 갇히게 될 것입니다.
(계 20:10)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여자의 후손으로 오셔서 마귀를 멸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2. 사단이 발꿈치를 상하게 함은 예수 십자가의 고난을 말합니다.
(창 3:15)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사단이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에게 발꿈치를 물리는 고통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단의 계략 가운데서 십자가에 고난당하심을 뜻합니다. 실제 사단은 예수님을 상하게 하기 위해 집요하게
역사했습니다. 무엇보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습니다.
(요 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수제자
베드로에게는 예수를 부인할 생각을 넣었습니다. 대제사장들에게는 예수를 죽이려는 생각을 넣었고 거짓 증인들에게는 고소할 생각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빌라도에게 예수를 정죄하여 십자가에 내어 줄 생각을 넣어 주었습니다. 사단은 메시아를 죽임으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무산시키려 했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때는 헤롯을 사주하여 2살 이하의 죄 없는 아기들을 학살하게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려는 예언의 성취입니다.
3. 예수님이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하심은 부활과 속죄를 말합니다.
(창 3:15)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여자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님이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사단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합니다. 하지만 발꿈치는 신체 기능면에서 크게 중요치 않은 부분입니다. 따라서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는 것은 비록 해를
당하지만 치명적이지는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여인의 후손이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것은 치명적인 상처를 준다는 것입니다. 머리는 아주 중요한 부위로써 한번 상하게
되면 거의 회복 불능의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됩니다. 이 말을 실감 있게 표현하면 예수님이 ‘사단의 머리통을 박살낸다.’는
것입니다.
이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하셨습니다. 사단과 그의 왕국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원수 사탄의 세력을 꺾고 승리하셨습니다.
(히 2: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지금 활동하고 있는 사단도 머리에 치명상을 입은 사단입니다. 우리의 사단과의 싸움은 이겨 논 싸움입니다예수
이름으로 나가면 사단은 꼼짝 못합니다. 사단은 ‘예수 십자가’에 대한 악몽,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 이름으로 사단을
대적하기를 바랍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 끝났다면 이것은 예수님의 패배요, 사단의 승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죄를 이기고
사망을 이기고 사단을 이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에게 치명상을 입히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고전 15: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 15: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살이 찢기시고 물과 피를 다 쏟으신 다음 선포하셨습니다.
(요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예수님은 속죄의 피 흘리심으로 죽었던 우리의 영혼을 살리셨고 가시와 엉겅퀴의 저주에서 해방시키셨으며, 온갖 질병에서 구원하시는 일을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속량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셨습니다.
(갈 4: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원시복음은 수천 년 전의 메시아 예언의 약속입니다. 수많은 선지자들이 메시아 예언을 했습니다. 이 약속이 과연 어떻게 성취되었는가? 드디어 때가 찼을 때 하나님이 그 아들을 구원자로 보내주셨습니다.
(갈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여기 ‘때가 찼다’는 것은 메시아를 보낼 적기가 됐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언은 더딜지라도 반드시 이루어짐을 믿으십시오. 성경의 나머지 모든 예언도 그대로 이루어 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틀림없습니다.
(마 5:18)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 24:35)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방금
전 말씀에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원시복음의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다는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께서 여인의 후손으로 성육신하여 오신 것입니다.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 성취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원시복음에서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을 보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죄악
세상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인가? 사랑하는 아들을 그 참혹한 십자가에 내어주신 이유가 무엇인가? 저 사망의 음부에 당신의 아들을
사흘씩이나 가두어두신 이유가 무엇인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과 저를 죄에서 건지시고 구원과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열심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나님의 이 열심이 아니라면 어찌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었으리요. 하나님의 열심은 지치지 않으십니다.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이루십니다. 이 사랑으로 나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여러분도 사랑하는 자식을 잃어버렸다면 이런 열심으로 찾을 것입니다. 결코 포기 하지 않을 것입니다. 끝까지 찾을 것입니다.
우리도 이 하나님의 열심을 본받기를 원합니다. 이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 마음에 불붙기를 원합니다.
이 하나님의 열심이 사도바울에게 불붙었습니다.
(고후 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과연
바울은 어떤 일에 열심이었는가? 영혼 구원을 위한 열심입니다. 각 사람을 정결한 처녀로써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중매하고자 하는
열심입니다.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의 신부로써 혼인 잔치에 들어가게 하려는 열심입니다. 바울에게 불붙은 하나님의 열심은 1세기에
소아시아와 유럽 전 대륙을 십자가로 물들게 했습니다.
우리도
이 하나님의 열심을 회복하기를 원합니다. 이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 마음에 불붙기를 원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피가 헛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은 세상의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열방의 모든 족속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 하나님의 사람들을 일으키시고 계십니다.
마귀의 일을 멸하려 오신 예수 그리스도
영생하는 문제에 있어서 제일 큰 시험은 미혹입니다. ‘미혹’이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프라나오’이고, 히브리어로는
‘타아’라는 단어입니다.
미혹이라는 단어에 대한 뜻은 ‘속이다’,‘꽤다’,‘유혹한다’,‘사기
치다’,그 다음에‘길을 잃게 하다’,‘방황하게 하다’,‘유리하게 하다’, 바른 길을 가지 못하도록‘옆 걸음치게 하다’, 더듬게 하다’.‘오락가락 하다’
신약 성경에 36번, 구약 성경에
19번 사용됩니다.(인터넷 다국어 성경 검색 결과) 그런데 이 미혹이라는 단어가 들어있는 곳마다 굉장히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들이었습니다.
창세기 3장 1절에서 5절 말씀에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창조하시고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만들고 그들에게 3대 축복을 줬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백성이 번성하도록
했고, 그 다음에 모든 만물을 정복하도록 했고, 그리고 통치하며 다스리도록 했는데 창세기 3장 1절에서 5절까지에 보면 마귀가
하와에게 말씀으로 미혹을 하므로 그 축복을 놓치게 되고 맙니다.
첫 번째로 이 미혹에 걸려들었는데 속이는 거였습니다. 즉, 사기
쳐서 길을 잃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물을 다스리며 영생해야 할 아담과 하와가 미혹이라고 하는 덫에 걸려 영생을 놓쳤습니다.
이것이 알파적인 역사입니다. 이제 마지막 때도 역시 말씀을 가지고 미혹하는데 그 미혹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입니다.
거기에
보면 옛 뱀이라는 마귀가 무엇으로 미혹을 했냐면 말씀을 가지고 미혹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미혹을 할 때에 이기지
못하고 그 미혹에 걸려 발목이 잡힐 때에 영생의 길이 막혀버리고 죽음이 왕 노릇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고 하셨는데 이는 말씀으로 시작하신 하나님이 말씀으로 마치겠다는 겁니다. 말씀으로
시작하실 때 뭐가 옆에 끼어드느냐? 마귀의 미혹이 끼어듭니다. 그와같이 마지막에도 똑같이 말씀 미혹이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지막에 말씀으로 이기는 자가 될 때 이 몸이 죽지 않고 영생한다고 하는 것이 알파와 오메가 역사입니다. 첫
아담이 영생을 놓쳤는데 무엇 때문에 놓쳤느냐면 미혹 때문에 놓쳤습니다. 그래서 여기 본문 7절에 보면 ‘자녀들아’라고 말을 하고
있는데 그 단어가 ‘테크나’인데 이는 ‘어린 자녀’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연세가 있고 나이가 들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테크나’입니다. 나이만 들었지 하나님이 볼 때는 철부지 어린아이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내가 철이 든 것 같은데 저분이 볼
때는 철부지요. 나도 저 사람의 말 들어보면 너무 철부지에요. 그래서 철부지끼리 모여 놓으니까 지지고 볶고 자기가 옳다고 머리를
숙이지 않고 굽히지도 않고 하는데 늙을수록 고집이 센 것은 다 오늘날 철부지들이 하는 짓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테크나’라고
하면서‘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미혹이라고 하는 것은 영생에 방해거리가 되고 옆 걸음치게 하여 영생의 바른길을 가지 못하게 하고 길을 잃게 하는데 이것이
미혹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마지막시대에도 우리가 예수 십자가 피로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지만 말씀으로 미혹을
이겨야 영생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기고 또 이기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마지막 천국에 관한 말씀을
하시면서‘이겨라, 지켜라, 기다리라, 싸워라,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의의 투구를 쓰라’는 말씀을 했습니다. 그런데 구원 받은 우편
강도가 전신 갑주를 입었거나 구원의 투구를 쓰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구원은 이런 것이 하나도 필요 없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오시는 주님 앞에서는 까다롭고 조건들이 많이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 영생한다고 하는 것이
그리 호락호락하게 그저 누워서 떡 먹기처럼 쉬운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
여기에 ‘미혹을 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을 보니까 반드시 미혹이 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시편 95편 10절 1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고향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의 지팡이로 홍해를 가르고 하늘의 만나와 반석의 생수를 마시게 하였지만 그 백성들을
향하여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마음이 요동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말씀을 히브리서 3장 10절에
인용하기를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노하셔서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라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들중 20세를 기준으로 하여 다 광야에서 쓰러뜨려 버리고 20세 이하 어린 것들이 장성해서
여호수아와 갈렙의 인도로 가나안땅으로 들어갔습니다. 광야에 다 눕혀진 그들이 하늘의 신령한 만나도 먹었고, 반석의 생수도 마셨으나
광야에 쓰러진 것은 미혹에 걸려 넘어졌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미혹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암보다 더
무섭고 고혈압보다도 더 무섭고 당뇨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미혹입니다.
오늘날
육체의 생명을 끊는 무서운 질병이 있다면, 오늘날 내 영혼의 영원한 안식의 축복을 못 받게 하고 망치게 하고, 죽이는 역사가
미혹입니다. 그런데 그 미혹을 우리가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가 중요한데 그 이기는 것에 대하여서는 오늘날 교인들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오늘날 내 자식이 공부를 좀 못하면 좋은 학교에 못 갈까 걱정을 하고 있고, 내 사업이 잘 못되어 수입이 적으면 생활에
어려움이 올까봐 걱정을 하고 있지 내 영혼이 망가뜨려져서 영생에 방해되는 일이 있을까 염려하며 노심초사하는 분이 얼마나
있습니까? 여러분, 내가 사업에 미혹이 돼서 돈이 날아 가서 오는 생활의 미혹도 있습니다. 사기꾼을 만나서 돈을 날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은 물질의 미혹입니다. 여러분, 꽃뱀을 만나가지고 많은 젊은이들이 쓰러져서 젊음을 탕진하고 넘어지게 하는
사랑의 미혹이 있습니다. 그것이 더 나가면 영적인 문제까지 다치지만 육체를 망가뜨리는 미혹도 많이 있는데 제일 귀하고, 제일
무서운 것은 내 영혼을 망가뜨려서 영생에 방해되는 미혹인데 여러분 주위에도 얼마든지 그 미혹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세를 만난 우리 성도들에게 미혹에 걸려들지 않도록 하라고 본문 7절 상반 절에 말씀 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5절에
예수님께서도 제자들 데리고 감람산에 올라가 앉아셨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나는 그리스도라고 하며 많은 사람을
미혹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난리와 난리 소문, 전쟁에 대한 소문이 있지만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면서
오히려 “미혹을 주의하라”고 했습니다. 이 미혹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지 몰라요. 여러분, 제가 늘 이런 얘기합니다.
보살이 목탁을 치고 와서 미혹을 하면 우리가 안 넘어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내가 주의 사자라고 하고, 권사요
장로요 목사라고 하면서 성경 가지고 미혹하면, 말씀에 굳게 서지 않을 때 백발백중 흔들리지 아니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무엇보다“미혹을 주의하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24절에 보면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가지고 와서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라고 보여주면서 택한 자들이라도 미혹을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봐 보십시오. 미혹은 얼마나 많은 이적기사를 가지고 광명한 천사 모양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무방비 상태인지 모릅니다. 신천지가 덤벼들어도 막아내지 못하고 그냥 피하라고만 합니다.
여러분, 신천지 단체들은 전에는 감춰놓고 활동했는데 이제는 드러내놓고 합니다. 우리는 그냥 덤벼들 때에 쉬쉬 하고 못 가게하고
막습니다. 목사님들을 막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자녀가 거기에 빠질 때는 어떻게 막겠습니까? 성도들에겐‘가면 안
된다’고 하면 될지 모르지만 여러분의 자녀가 거기 빠져 들어갔을 때엔 어떻게 막아내겠습니까? 순천의 어떤 목사 아들이 갔다가
아버지가 하도 ‘야 이놈아 목사 아들이 신천지에 빠져가지고 되겠냐?’고 해서 다시 돌아왔는데 와서 딱 아버지의 설교를 들어보니
죽은 설교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내가 영생하려면 신천지에 가야 되겠다고 가버렸답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난번에 호남 쌀이 와서
팔아줬지요? 그 목사 사모가 신천지에 빠져서 교인을 데리고 가버렸습니다. 목사가 죽을려고 그랬어요. 우리 교단입니다. 어떻게
막아내겠냐 말이에요. 그것이 미혹입니다. 넘어갈 때는 내가 확신을 가졌으니까 넘어가고 진리인 줄 아니깐 넘어가는 겁니다. 그러나
바른 말씀의 잣대를 가지고 가서 붙어보고 대화해보면 진리가 아닌 것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오늘
여러분,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고 했는데 이렇게 미혹은 영생하는 길의 방해가 미혹입니다. 우리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의 미혹도
물질에 손해가 있고 인격에 손해가 있지만 영생의 미혹은 말씀을 가지고 들어옵니다. 오늘 여러분, 꼭 여러분은 미혹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갖기를 바랍니다. 그럼 미혹을 이길 수 있도록 한다면 뭡니까? 말씀 밖에는 없다 이 말입니다. 말씀을 정확하게 아는 길
밖에 없습니다. 영생의 길을 미혹하는데에 뭘 가지고 오냐면 말씀을 가져오기 때문에 말씀을 가지고 물리쳐야 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말씀 자체가 그리스도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말씀이에요. 그런데 말씀자체이신 예수그리스도에게도 마귀가 말씀을
가지고 시험하러 왔다니까요. 마태복음4장에 나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뭐라고 마귀를 물리쳤습니까? “성경에 기록하였으되”라고
하면서 말씀으로 물리쳤습니다. 그 마귀가 하나님의 아들인 줄 알면서 말씀이신 그리스도에게 말씀을 가지고 와서 예수를 미혹을 하니까
예수님께서도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말씀을 정확하게 붙드는 방법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정확한 말씀을 붙들려고 하면 정확하게
가르치는 스승을 만나야 되고 그래야 말씀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 이 말입니다. 우리는 씨름 선수나 레슬링 선수나 양궁 선수가
아니라 우리는 말씀의 선수가 되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깜짝 놀랄 일입니까? 아니 그 놈의 마귀가 예수님이 말씀자체이신
하나님의 아들인 줄도 알면서 성경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성경 가지고 치고 들어오면 오락가락 안 하겠습니까?
오락가락하게 하는 것이 미혹이거든요. 그래서 여러분들은 중요한 이 미혹에서 벗어나는 준비가 말씀 속에서 완벽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미혹을 이기면 어떻게 되느냐? 7절 하반절에 보면 ‘의롭게 되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의로움’이라는 말은
헬라어로‘디카이오스’ 라는 말인데 공의로움, 옳음, 진실함이라는 말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참으로 의로운 분입니다. 의로우신
주님께서 영생할 우리에게도 의로워지라고 요구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동인교회 성도들이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은 귀가 나팔같이
열려야 되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예수님이 성경을 풀어줄 때에 마음이 뜨겁지 않더냐 라고 했는데 말씀을 들으면서 졸릴
시간이 어디 있으며, 다른 데 마음을 둘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왜냐면 말씀자체가 불이기 때문에 말씀이 들어올 때 내 마음이 막
뜨거워져야 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여러분들에게 의로우신 주님께서 당신과 같이 우리도 의로워지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3장 3절에
보면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케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제가 늘 이런
말씀하지요? 세탁기에 보면 액체 세제가 있고 또 분말 세제가 있는데 아무리 액체가 좋고 분말이 좋아도 그 세제는 우리 죄를 씻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경죄, 중죄, 어떤 큰 죄라도 죄를 씻는 것은 예수의 피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피와 말씀으로 내가 단장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 의로운 자가 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여기에 보니까 주의 깨끗하심과 같이 우리도 깨끗하게 되어야 된다고
했는데 무엇으로 깨끗하게 되냐면 피와 말씀으로 깨끗하게 되어야 합니다. 요한1서 2장 28절에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가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도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설교가 주의 강림하실 때 내가 서야 될 자인 줄로 믿고 이 말씀을 들어야 됩니다. 기독교가 얼마나 말씀을 붙들고 있지
못하기에 주의 강림은 그저 몇몇 기독교인들의 소리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절대적으로 여러분은 그의 강림하실 때에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 부끄럽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지금 주님 오실 징조들이 세계에서 자꾸 자꾸 일어나고 있습니다.
나는 우리 교단 목사님들이나 장로님들을 보면 아주 벽창호 같은 분들이 많이 있어 보이더라고요. 우리는 진리가 원하는 대로만
달려가야 되지요? 진리가 원하는 대로 내가 가야됩니다. 주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도 담대함을 얻어야 되고 그 앞에 부끄럽지 않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기 때문에 미혹을 주의하도록 성도들에게 가르치고, 그의 성결하심과 같이 우리도 성결하도록 준비를
시켜야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게 뭐냐면 주의 강림을 중요시해야 됩니다. 그때에 여러분은 담대하게 서기를 바랍니다. 사람도 사람 앞에 설
때에 뭔가 문제가 있으면 주저주저하는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정당당히 설 수 있도록 요한일서 2장 18절을 마음에 되새기기를
바랍니다.
본문
8절에 보면 죄를 짓는 자마다 마귀에게 속한 자라고 하면서 “이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고 했는데 이 ‘처음’이란 단어가
‘아르케’로 ‘태초’입니다.
루시퍼는 성경 어디에도 없고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 맞네요!’라고 하는 그룹이 있고, ‘성경을
배운대로 가르쳐야 된다’고 하는 그룹도 있어요. 여러분, 잘못 배운 것을 고쳐주면 감사하게 생각해야죠. 아주 저에게 돌질하는
목사도 있었고, 쌍수를 들어서 환영하는 목사도 있는데 언제나 둘이에요. 예수님의 열두제자 중에도 뭐라 했습니까?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열두 제사들에게 ‘이 중에 하나는 마귀니라’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쓰임을 받느냐가 제일
중요합니다. 그래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이 있는데 그것이 무슨 말씀인지 압니까? 무엇 때문에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합니까?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이 마귀라는 단어 자체가 ‘디아볼로스’인데 그 뜻이 뭐냐면 ‘헐뜯는다,
거짓말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의 아들 된 자들에게 미혹을 가져옵니다. 여러분, 마귀의 일을 없이하려고 주님이 오셨다고 그랬는데
마귀의 일이 뭡니까? 마귀의 일이 미혹입니다. 그래서 영생을 뺏는 거예요. 영생을 뺏는데는 뭘 가져와야 돼요? 미혹을 가져와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마귀의 하는 일을 멸하기 위하여 주님이 이 땅에 오셨다고 했습니다. 주의 백성들에게 자꾸 미혹이 오니까
먼저 예수 십자가 피로 죄 씻음을 받게 하고 이제 마지막에는 이 죄악 세상을 심판합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보면
주님이“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그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9장 28절의 말씀을 보면“그리스도께서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들리신 봐가 되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고 했죠. 첫 번째는 어디에요? 갈보리 산 언덕에서 죄인을
위하여 죽으실 때가 첫 번째고, 이제 죄인을 심판하러 오실 때가 두 번째입니다. 그래서 초림의 주님은 죄인을 위하여 오셨고,
재림의 주님은 죄인을 죽이러 오신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죄인이 영생하게 되는 일은 마귀의 하는 일을 없이 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하는 일인 미혹이 없어지면 뭐가 없어집니까?
죽음이 없어집니다. 인간이 아무리 배우고 아무리 도를 닦고 아무리 일을 많이 해도 이 영생 문제만은 인간이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마지막 세상 끝 날에 영광의 주님이 구름타고 이 땅에 오시는 날, 전 세계 인류를 미혹하던 마귀를
없이 하실 때에 그 미혹을 이긴 자들에게 안식의 복과 참 영생을 누리게 하는 것이 기독교 마지막 최후 최대의 역사인데 그것이
주의 재림과 함께 이루어지게 됩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나타나신 것은 그 마귀의 일을 없이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귀의 하는 일이 미혹인데 여기 ‘일’이라는 단어가 ‘엘곤’으로 마귀의 ‘사업’ 입니다. 그럼 마귀가 무슨 사업을
잘해요? 어느 시장에 찾아다니면서? 성도들이 모인 시장에 와 가지고 마귀의 사업을 하는데 그 마귀의 사업인 미혹하는 그 일을
멸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면 주님이 오셔야 되는 것입니다.
07-12-2022(화)
나의 자녀들아(요한일서 2:1)
하나님의 아들/ 벤 후퍼(Ben Hooper) 1870. 10. 13. Newport, Cocke County
생부는 르무엘 후퍼 박사였고, 생모는 Sarah Wade였다. 하지만 후퍼는 혼외 결혼으로 태어난 벤은 출생신고를 할 수 없었다. 그의 엄마는 세 도시를 전전하며 아기를 데리고 이사를 다니다, 마지막 세 번째 도시 녹빌에서 엄마는 아들 벤을 감독교회가 운영하는 성 요한 고아원에 맡기게 된다. 그 후 9살이 되자, 벤은 자기 친부 후퍼 박사에게 합법적으로 양자로 입적되었다. 그 때부터 벤은 후퍼 라는 성을 가지게 되었고, 그 후부터 친부에게서 양육되었다. 후에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법대에 진학해서 변호사가 되었고, 나중에는 테네시주 주지사가 되어서 2번 더 재선에 성공했으며, 상원의원으로도 2번이나 임기를 마쳤다.
미국 테네시주 어느 작은 마을에 벤 후퍼(Ben Hooper)라는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체구가 작고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사생아였습니다. 친구들은 놀리며 멸시하였습니다. 12살이 되었을 때 젊은 목사가 교회에 부임해 왔습니다. 설교에 많은 사람들이 격려 받는다는 소문을 듣고 후퍼는 교회에 몰래 몰래 가곤 했습니다. 예배당에 늦게 들어가 뒷자리에 있다가 끝나면 빨리 빠져 나오곤 했습니다.
몇 주가 지난 어느 주일입니다. 후퍼가 설교의 감동에 젖어 있는 사이에 예배가 끝난 것입니다. 할 수 없이 교인들 틈에 끼어 나오면서 목사님과 인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후퍼를 보고 말합니다. "누구 아들이더라?"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졌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환한 얼굴로 말합니다. "네가 누구 아들인지 알겠다. 아버지를 닮았기 때문에 금방 알 수 있어.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네 모습을 보면 알 수 있거든!"
당황하며 빠져나가는 후퍼의 등을 향해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답게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세월이 흘러 벤 후퍼는 테네시주의 주지사가 되었습니다. 후퍼는 주지사가 된 후에 "목사님을 만나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던 그 날이 바로 제가 테네시 주의 주지사가 태어난 날입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주지사에 두 번씩이나 당선되는 좋은 날을 보게 된 것입니다.
누구나 그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고, 삶의 스타일을 알 수가 있고 교양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성 프랜시스가 처음에 은혜를 받아서 그저 주님의 일 만 하고, 옷도 해주면 가난한 사람에게 갖다주고 이렇게 되니까 자기 아버지는
크게 낙심하였습니다.
아버지는 큰 부자요 포목상 주인이었는데 이 애가 커서 자기의 사업을 계대(繼代)할까 생각했는데 사업을
할 생각은 안하고 돌아다니면서 기도하고 주의 일만하고 도무지 자기가 하라고 하는 일은 안 한단 말입니다.
책망해도 쓸 데 없고 때려도 쓸 데 없어요, 마지막에는 성이 나서 "이놈, 내 아들 된 것을 아주 파면해 버리겠다!"고
호적에서 빼버리고 그 때 법관에게 가서 그 말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법관도 할 수 없이 "이제는 아무개의 아들이 아니라"고
호적에서 빼도록 선언을 했습니다.
그 때에 성 프랜시스가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자기 입었던 옷을 다 벗어서는 자기 옆에 계신 아버지에게 다 놓으면서 "아버지 이것 받으세요, 이 앞으로는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입니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탈무드에 보면 남자의 인생은 일곱 개의 단계로 나누어 변화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 한 살은 임금님, 모두 모여 왕을 섬기듯 비위를 맞추어 주고 성질을 부려도 받아준다.
2. 두살은 돼지, 진흙 속을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한다.
3. 열살은 어린 염소, 깔깔거리거나 떠들어대거나,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4. 열여덟 살은 말, 성장하여 자기 힘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어 한다.
5. 결혼하면 당나귀, 가정이라고 하는 무거운 짐을 지고 뚜벅뚜벅 걸어가지 않으면 안된다. 6. 중년은 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하여 사람들의 호감을 얻지 않으면 안된다.
7. 노인은 원숭이, 아이들과 같이 되는데, 아무도 관심을 가져 주지 않는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를 맛보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두가지의 큰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첫째, 삶의 변화
둘쨰, 신분의 변화
그런데 먼저 변화되는 것은 신분의 변화입니다.
신분의 변화는 순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삶의 변화는 점짐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치 아이가 태어나는 것은 순간적이지만 성장하는 것은 오래걸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변화된 신분은 놀라운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으로 바뀌어 졌습니다.
이 신분의 변화는 우리에게 축복의 삶을 약속합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녀만의 특권을 누리는 것입니다.
07-11-2022(월)
하나님은 빛이시라(요한일서 1:5)
하나님은 빛(φῶς)이시라는 말씀을 다양하게 해석합니다. 대표적인 해석은 "광명, 계시, 분리"(Calvin) "진실, 정의"(Hutter) "지혜, 사랑, 영광"(Bengel) 등으로 살펴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빛'이라고 할 때 그 빛은 마치 태양의 일곱가지 색이 합하여 "빛"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모든 속성이 일치하여 보다 넓은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는 다양한 빛을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달빛" "별빛" "등불" "횃불" 등과 같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착함(19) ἀγαθωσύνη
ἀγαθωσύνη, ης, ἡ 19
1. 착함, 2. 올바름, 3. 너그러움
발음
/ 아가도수네(agathōsünē) 어원 / 1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선함(롬 15:14), 양선(良善)(갈 5:22) 신약 성경 / 4회 사용
* 18. ἀγαθός
ἀγαθός, ἡ, όν
1. 선한, 2. 적합한, 3. 완전한
발음
/ 아가도스(agathŏs) 관련 성경 / 선(마 5:45, 롬 2:7), 물건(눅 12:18,19), 선행(행 9:36), 양심(행 23:1). [형]
선한(마 12:34, 19:16, 눅 6:45, 골 1:10), 좋은(마 7:11, 눅 1:53, 요 7:12), 착한(마 25:21,
고후 9:8) 신약 성경 / 102회 사용
의로움(1343) δικαιοσύνη
δικαιοσύνη, ης, ἡ
1. 의, 2. 정의,
발음
/ 디카이오수네(dikaiŏsünē) 어원 / 134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의(마 3:15, 눅 1:75, 고후 3:9), 의로움(고전 1:30, 엡 5:9). [동] 의롭다(롬 3:25, 26) 신약 성경 / 92회 사용
* 1342. δίκαιος
δίκαιος, αία, ον
1. 올바른, 2. 법대로 사는, 3. 누가 1:6
발음
/ 디카이오스(dikaiŏs) 어원/ 134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의로운(마 1:19), 옳은(마 23:28, 27:19), 무죄한(마 27:24), 마땅한(빌 1:7),
공의로운(살후 1:5), [명] 의로운 자(마 5:45), 의인(마 9:13, 10:41, 벧전 3:12), 공의(요 7:24),
의( 골4:1) 신약 성경 / 79회 사용
* 1349. δίκη
δίκη, ης, ἡ
1. 형벌, 2. 정의의 신
발음
/ 디케(dikē) 어원 / 1166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임 관련 성경 / 정죄하기(행 25:15), 공의(행 28:4), 형벌 (살후 1:9, 유 1:7) 신약 성경 / 3회 사용
* 1166. δεικνύω 1. 보이다, 2. 마태 4:8
발음
/ 데이크누오(dĕiknüō) 관련 성경 / 보이다(마 8:4, 막 1:44, 딤전 6:15), 가르치다(마 16:21), 지시하다(행 10:28) 신약 성경 / 33회 사용
진실함(225) ἀλήθεια
ἀλήθεια, ας, ἡ
1. 진실성, 2. 진실 《반》ψεῦδος, 3. 일반적 진리
발음
/ 아레데이아(alēthĕia) 어원/ 227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참(마 22:16), 사실(막 5:33), 진리(요 1:14, 4:24, 롬 2:2), 실상(요 16:7),
과연(행 4:27), 참 됨(행 26:25), 진실하심(롬 15:8), [동] 진실하다(롬 15:8), 참되다(롬 3:7) 신약 성경 / 109회 사용
* 227. ἀληθής ἀληθής, ἑς
1. 진실한, 2. 참된, 3. 요한 4:18
발음 / 아레데스(alēthēs) 어원/ [부정불변사]과 299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참된(요 8:13, 벧후 2:22), 참(요 5:32) 신약 성경 / 26회 사용
* 2990. λανθάνω
1. 숨어 있다, 2. 눈에 띄지 않다, 3. 마가 7:24
발음
/ 란다노(lanthanō) 관련 성경 / 숨기다(막 7:24, 눅 8:47), 알지 못하다(행 26:26), 잊다(벧후 3:5, 8). [부] 부지중에(히 13:2) 신약 성경 / 6회 사용
빛(포스) 5457. φῶς
φῶς, φωτός, τό
1. 빛, 2. 마태 17:2, 3. 빛을 내는 물건
발음
/ 포스(phōs) 어원 / φάω ‘반짝이다’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빛(마 4:16, 눅 8:16, 딤전 6:16), 불(막 14: 54), 불빛(눅 22:56), 등불(요 5:35, 행 16:29), 광채 (행 12:7), 광명(고후 11:14) 신약 성경 / 73회 사용
등불빛(루크노스) 3088. λύχνος
λύχνος, ου, ὁ
1. 등, 2. 누가 11:36, 3. 마태 6:22
발음
/ 루크노스(lüchnŏs) 어원/ 3022의 어간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등불(마 5:15, 눅 11:33, 벧후 1:19, 계 21:23) 신약 성경 / 14회 사용
* 3022. λευκός, ἡ, όν
1. 빛나는, 2. 흰, 3. 마태 5:36
발음
/ 류코스(lĕukŏs) 어원 / λύκη ‘빛나다’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흰(마 5:36, 요 20:12, 계 1:14), 백마(계 19:11) 신약 성경 / 25회 사용
횃불(람파스). 2985 λαμπάς
λαμπάς, άδος, ἡ
1. 횃불, 2. 등
발음
/ 람파스(lampas) 어원 / 298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등(마 25:1,4, 요 18:3), 등불(행 20:8, 계 4:5), 횃불(계 8:10) 신약 성경 / 9회 사용
* 2989. λάμπω
1. 바치다, 2. 빛을 발하다, 3. 마태 5:16
발음
/ 람포(lampō) 관련 성경 / 비치다(마 5:15, 고후 4:6), 비치게 하다(마 5:16), 빛나다(마 17:2, 행 12:7) 신약 성경 / 7회 사용
1. 잘, 2. 좋게, 3. εὖ ποιεῖν: 좋게 행하다 발음/ 유(ĕu) 관련 성경 / 잘, 좋게, 다행히(마 25:21, 눅 19:17, 행 15:29, 엡 6:3) 신약 성경 / 6회 사용
* 4576. 경의를 표하다, σέβομαι
1. 경의를 표하다, 2. 예배한다, 3. 숭배한다
발음
/ 세보마이(sĕbŏmai) 관련 성경 / 경배하다(마 15:9, 막 7:7), 경건하다(행 13: 43, 17:4, 17), 경외하다(행 18:7, 13), 위하다(행 19:27) 신약 성경 / 10회 사용
94. 올바르지 못한, ἄδικος
1. 올바르지 못한, 2. 불공평한, 3. 부정직한
발음
/ 아디코스(adikōs) 어원/ 1[부정불변사]과 134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불의한(마 5:45, 벧후 2:9). [명] 악인(행 24:15) 신약 성경 / 12회 사용
*1349. 형벌, 정의의 신. δίκη
1. 형벌, 2. 정의의 신,
발음
/ 디케(dikē) 어원/ 1166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임 관련 성경 / 정죄하기(행 25:15), 공의(행 28:4), 형벌 (살후 1:9, 유 1:7) 신약 성경 / 3회 사용
* 1166. 보이다. δεικνύω
1. 보이다, 2. 보이다, 3. 마태 4:8
발음
/ 다이크누오(dĕiknüō) 관련 성경 / 보이다(마 8:4, 막 1:44, 딤전 6:15), 가르치다(마 16:21), 지시하다(행 10:28) 신약 성경 / 33회 사용
미국 플로리다주에 사는 한 보물사냥꾼 가족이 대서양 해저에 가라앉은 스페인 배에서 100만 달러(약 11억 6700만원)어치 보물을 인양했다고 영국 가디언이 27일(현지 시각)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보물사냥꾼인 슈미트 일가는 대서양에서 1715년에 침몰한 스페인 배에서 최근 금화 51개와 12m 길이 금줄을
건져냈다. 발견된 금화는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를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은 소수뿐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인양을 지휘한 브렌트 브리즈번은 보물을 찾은 장소가 300년 전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 스페인으로 향하던 배 11척이 플로리다
해안에서 허리케인을 만나 침몰한 곳으로, 마이애미에서 북쪽으로 약 210km 떨어진 해안 앞바다라고 밝혔다.
침몰한
함대는 400만 달러(약 46억 6600만원) 상당의 화물을 싣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브리즈번은 말했다. 그는 또 2010년
유명한 보물사냥꾼 멜 피셔로부터 이 지점에 대한 수색권을 구매했고, 이후 슈미트 일가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과 하청 계약을
체결했다고 설명했다.
미국 연방법과 플로리다주 법률에 따라 플로리다주는 주 박물관에 전시하기 위해 보물의 20%를 가져간다. 나머지는 계약에 따라 브리즈번의 회사와 슈미트 일가가 나눠 갖게 된다.
“경건한 자에게 주시는 복”
경건이란 성결, 기도, 예배, 봉사, 금식, 구제 등 우리
신앙생활의 전반적인 행함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믿음에는 반드시 행함이 따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죽은 믿음입니다.
경건이란 말이 성경에서 구약에서 9, 신약에서 48 구절로 나타납니다. (한글개역 성경 인터넷 검색 '경건')
경건은 우리에게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얼마나 말씀대로 순종하느냐? 얼마나 회개하여 세속에 물들지
않느냐? 얼마나 이웃을 사랑하며 돌보았느냐? 얼마나 하나님 앞에 기도하느냐? 얼마나 주를 위해 충성했느냐? 이런 내면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참된 신앙이 경건입니다. 성경은 이 경건한 자에게 주시는 복이 큽니다.
경건한 자에게 어떤 복을 주실까요?
1. 보호해 주십니다.
벧후 2:9에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그랬습니다. 이 세상에 시험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경건한 자는 주님이
지켜주십니다. 시편 34:7을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가 지키는데 누가 해할 수 있겠습니까?
다니엘이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니까 하나님께서 악한 원수들과 사자굴에서도 지켜 주셨습니다.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게 해주십니다. 어느 시골길을 가던 버스가 핸들고장으로 고개에서 굴렀습니다. 차는 이리 받고 저리 받고 박살이 나고 많은
사람들이 다쳤습니다. 그런데 어느 성도는 그렇게 평안하기만 하더랍니다. 그리고 아무 다친 곳이 없이 나오게 되엇습니다. 누가
지켜주신 것일까요? 하나님을 잘 경외하면 하나님이 지켜 주십니다.
2. 높여주십니다.
잠 8:17에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높이니
하나님께서 왜 높이지 않으시겠습니까? 요셉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높이니 하나님께서도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높여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낮고 낮게 오셨지만 그토록 높이 되심도 하나님을 높였기 때문입니다. 경건의 본을
보여주셨어요. 그래서 딤전3:16에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했습니다.
이것이 경건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이고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써서 경건에 이르기를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3. 성령을 주십니다.
예수 믿는 자에게 성령이 계십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하심은 경건한 자에게 있습니다. 눅 2:25에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했습니다. 날마다 주님을
기다리며 성전에서 기도하던 시므온에게 성령이 충만하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성령 충만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초대교회 성도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날마다 기도하고 찬송하며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이 성령의 불이 천하각국에서 온 경건한 사람들에게 붙었습니다. 경건이 그 충만한 은혜의 기초였습니다.
4. 지도해 주십니다.
경건한 요셉에게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경건한 마리아에게도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알려 주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백부장 고넬료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다가 천사가
나타나 욥바에 있는 시몬을 청하라고 해서 청하여 예수 믿게 되고 예배하니 성령이 임했습니다. 이처럼 경건한 자에게 성령의 지도와
인도가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보혜사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곁에 오셔서 지도해주십니다. 우리 입은 하나님께 묻고 우리 귀는 하나님을 향해 쫑긋해 있어야 합니다. 이 복은 경건하게 기도하는 자가 받는
복입니다.
5. 다스려 주십니다.
백부장 고넬료를 보면 많은 것을 깨닫게 됩니다. 행 10:7에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종졸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그랬는데 한편 '종졸'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트라티오테스'는 '군사'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많은 것을 깨닫습니다.
고넬료가 자신도 가족도 하인들도 군사들도 다 이방인인데 어떻게 온 가족을 그렇게 복음화시키고 하인들과 군인들까지 그렇게 하나님
경외하는 사람들을 만들었는가 하는 것은 참으로 감동적인 사실입니다. 신앙이란 강제로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바로 경건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입니다. 기도하고 사랑함에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 다스려 주십니다. 기도해
보세요. 가족이 따라옵니다. 부하들이 순종합니다. 하인들이 섬깁니다. 우리에게 기도와 사랑이라는 경건이 있을 때 다스려지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사랑만 가지고도 가능합니다. 기도만 가지고도 가능합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를 가지면 다스려지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6. 범사에 유익합니다.
오늘 읽은 딤전4:8에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 잘 경외하면 이 땅에서도 천대에 이르기까지 복을 주십니다. 창세기 5장을 보면 경건한 아담의 후예 셋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900세 이상을 건강하게 살았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장수한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서 경건함도 그
중요한 방법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약속하신 여인의 후손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날마다 메시아를 갈망했고 여인의 후손으로 오는 자손
낳는 일에 힘썼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완전한 메시아사상입니다. 메시아가 오면 우리의 죄와 고난을 대신 담당하신다는 것은 그들의
상식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메시아의 고난을 묵상하고 그 고난에 동참함을 기뻐할 것입니다.
이 주님의 고난의 복음이 놀라운 치료와 강건의 복이 됩니다. 주님이 고통당하심으로 나는 나음을 입었다는 믿음을 가지면 치료가
임합니다. 치료의 광선은 이 치료의 복음을 믿을 때 주어집니다. 진정 경건한 사람은 일반 고통이라도 주님이 주신 고통이라면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 고통을 주님을 생각하며 조용히 느낍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놀라운 치료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7. 영원히 기억하십니다.
딤전 6:18-19에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했습니다. 경건이 내세에까지 유익하다는 말씀입니다. 막10:30에 예수님께서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딤후 3:12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했어요. 세상 사람들과 같이 살면 그들에게
환영을 받겠지만 그렇게 살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세속화된 종교에 매력 갖지 마세요. 우리는 그렇게 살지 않기
위해 출애굽한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7)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를 위해 세상에 오셔서 우리 믿음의 본이 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경건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우리 모두 본을 보여주신 주님처럼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참으로 경건한 성도가 되어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받고
하늘과 땅의 온갖 아름다운 복으로 가득하시기 바랍니다.
자기 존중, 자기 사랑(Self-esteem) - 자존심(自尊心) Paide
Self-esteem을 한국말로 번역하면 자기존중,
혹은 자기 사랑 그렇게 될 겁니다. 사람들은 어려서 부터 이 셀프 이스팀이 높아야 한다.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이유는
self-esteem이 낮아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 반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자기 사랑과 자기 존중이 너무도 커서 모든 죄악의 원인이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현상은 종말이 가까와 올수록 더욱 강하게 나타날 것이라고 합니다. 요즘 사회 현상들을 보십시요.
자기 사랑, 자기 존중이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극단적 이기주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오늘 2절 말씀에
보시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이런 내용들을 읽어보면 오늘날 사회현상들을 잘 묘사해서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요즘
사람들 가만 보세요! 다른 사람들은 다 상관없다! 자기만 좋으면 된다!는 식으로 살아가지 않습니까?
이것은 이웃을 사랑하라! 섬김의 종으로 살아라! 주님의 말씀과는 전혀 상반되는 가치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도 그렇게 자기사랑에 도취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여러분 기억하십시요. 자기사랑은 결국은 자기파멸입니다. 자기 사랑에 도취되어
멸망한 존재가 무엇입니까? 바로 사탄입니다. 참된 자기사랑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안에 충만하게 고일때 참된 자기사랑과 이웃사랑이 함께 실철될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은 없고 자기 사랑에 빠져서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는 겁니다. 교회를 다닌다
하는 사람들 중에도 간혹 그런 사람들을 보게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하나님
면전에서도 싸우고 다투고 그러는 사람들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맘대로 되지 않으면 주님의 몸되신 교회를 훼방하는 불량배들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안에 있으면 교회는 절대로 성장할수 없구요. 하나님을 뜻을 이루어 드릴수도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알수있다 그럽니까? 오늘 5절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서서 네가 돌아서라”
경건의 모양은 있어요. 겉으로는 예배도 드리구요. 찬송도 하구요.
기도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경건의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 자들은 결국 어떻게 된다 그럽니까? 6절에 보시면,
욕심에 이끌린다 그러구요. 7절에 보시면,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한다 그랬구요. 8절에도 보시면,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이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받은 자들이다 그럽니다.
경건의 능력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성품이 삶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성령의 열매들이 관계 가운데 드러나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삶 속에서 날마다 경건의 능력이 뭍어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진리안에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것이 참된 하나님 사랑이요. 참된 믿음의 삶입니다.
07-07-2022(목)
신의 성품(베드로후서 1:4)
(도입 이야기)
매우 추운날 새벽 3시에 한 선교사 지망생이 면접시험을 치르러 선교국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8시가 되어서야 시험관이 도착했고, 그
시험관은 아주 쉬운 문제를 내었습니다. 영어 문제로 “제빵업자(Baker)라는 단어를 써보시오.”, 수학 문제로는 “2의 두배는
얼마요?” 그는 초등학생 수준의 문제같은 것을 내어 주는 것이 이해가 안갔지만 Baker라고 쓰고, 또 2의 두배는 4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시험관은“참 잘하셨습니다. 합격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이 시험관은
선교위원회에서 그 선교사 지망생을 극진히 칭찬하면서 그가 선교사의 자격을 너무 잘 갖추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첫째, 극기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추운날 새벽 3시에 오라고 했는데 아무런 불평이 없었습니다.
둘째, 시간을 엄수했습니다.
셋째, 다섯시간을
기다리는 인내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넷째, 어린이 시험문제로 시험을 보는데도 기분 나쁜 표정 한 번 짓지 않고 겸손하게 시험을
치르고 합격했습니다.
우리가 요구하는 선교사로서의 자격요건을 다 갖추었으므로 기꺼이 선교사로 파송할 것을 추천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기뻐 사용하시는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오늘 사회와 교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바보스러워 보일지 몰라도 돌아서서는 모두가 마음속 깊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존경하게 되는 사람이 바로 이런
이타적인 사람, 인내의 사람, 진실된 사람, 겸손한 사람입니다.
밀레의 ‘만종’은 현재 프랑스 파리에 있는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되어있다. ‘만종’은 미국인 토마스
애플턴 (Thomas G. Appleton)이 밀레에게 의뢰하여 1857년부터 1859년까지 2년간 제작된 작품이다. 그 당시
밀레 나이가 45세였다. 하지만 작품을 부탁했던 토마스는 그것을 찾아가지 않았다. 당시 너무나 궁핍했던 밀레는 이
작품을 단돈 600프랑, 지금으로 약 90유로, 한화로 약 12만원이라는 헐값에 팔고 말았다. 밀레의 ‘만종’은 그 후에
미국미술협회에 팔렸다가 프랑스의 백화점 재벌 알프레드 쇼사르(Alfred Chauchard)가 프랑스의 자존심을 걸고 80만
프랑이라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다시 사들여 1891년 1월 드디어 프랑스로 돌아왔다. 처음엔 누구도 쳐다보지 않던 이 작품은
보면 볼수록 묘한 아우라가 느껴지는 그림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받는 명화가 되었다.
그런데 밀레의 만종은
그림에서 보여주는 평온함과는 달리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은 매우 격동의 세월이었다. 18세기 후반에 시작된 산업혁명은 유럽 전역을
산업화로 변화시키고 있었고 자본가는 더욱 더 부를 축적하게 되었고 노동자는 점점 더 피폐한 삶을 살게 되어 사회주의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또한 7월 혁명과 2월 혁명을 겪은 요동치는 시대였다. 그런 시대적인 상황에서 완성된 이 작품에는
작가 밀레가 바라보는 현실에 대한 자신의 복잡한 마음이 담겨져 있는듯하다.
일반적으로 ‘밀레’라고 알려진 그의
정식이름은 장-프랑수아 밀레(Jean-Francois Millet)이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자란 밀레는 어릴 적 목사님으로
부터 신앙과 문학, 라틴어를 배웠다. 그는 19살에 그림을 배우기 시작하여 후에 ‘바르비종파’(The Barbizon
School)를 만들어 활동했다. 이 화파는 프랑스 파리의 근교 ‘바르비종’에 모여 전통적인 화풍의 형식을 따르지 않고 시골의
농부들을 그리는 화가들의 모임이다.
작품, ‘만종’(晩鍾)의 원제는 ‘랑젤뤼스(L’Angelus’)인데 카톨릭의
‘삼종기도’ 즉 아침, 점심, 저녁 하루 세 번 드리는 기도를 의미한다. 만종은 저녁에 드리는 기도로 하루 일과를 마친 부부가
멀리 교회에서 들려오는 종소리를 들으며 기도하는 모습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작품은 가로가 55.5cm이고, 세로가 66cm 그리
크지 작품인지만 그 울림은 어떤 작품보다 크게 울려 많은 사람들에게 평온함과 위로를 전해준다.
첫째, 믿음(信)
믿음은 '신뢰, 확신, 확실성' 어떤 대상이나 사실이나 진리에 대해서 가지는 확신이요, 나아가 다른 사람이 그 사람에 대해서 '신뢰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둘째, 덕(德)
업적이나 타고난 재능, 또는 '탁월, 뛰어남' 한자로 덕은 생각이 크고 넓은 사람, 다른 사람이나 일이나 사물에 대해서 크고 넓은 생각을 가져 품어주는 것을 뜻합니다.
셋째, 지식(智識)
지식의 기본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넷째, 절제(節制)
‘강한, 지배하는, 억누르는, 자제하는’에서 유래했으며, 자기 자신이나 어떤 것에 대한 '지배권'을 의미합니다. 즉 절제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상대를 고려하고, 그리고 다음을 생각하여 스스로를 억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죄인들에 대하여 그때그때 하고픈 대로, 즉 하나님의 대쪽 같은 성품과 기준대로 했더라면 죄인들과 이 세상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다섯째, 인내(忍耐)
절제가 외적인 일이라면 인내는 내적인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참고 또 참으시는 분입니다.
여섯째, 경건(敬虔)
하나님의 본질적인 신성, 거룩, 구별, 신비함 등을 뜻하는 말입니다.
일곱째, 형제우애(兄弟友愛)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입니다.
여덟째, 사랑(愛)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이지요.
‘스티븐 코비` 박사가 지은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왜 이 책이 나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서론 부분에 나옵니다.
미국 독립 기념 200주년을 앞두고 스티븐 코비 박사를 비롯한 일단의 컨설턴트 그룹이 미국의 장래를 위해 이색적인 연구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지난 200년 동안 성공을 다룬 연설, 논문, 책자, 신문보도 등을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성공이 무엇인지를 연구했습니다. 수년에 걸친 조사와 연구 끝에 그들은 주목할 만한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그것은 미국의 건국 이후 초기 150년 동안에는 성공과 관련해 성품윤리(Character Ethics)가 강조 되었으나, 이후 50년 동안에는 성격윤리(Personality Ethics)가 강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성품윤리>는 성공을 위해서는 기본 원칙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그 원칙은 언행일치, 겸손, 충성, 절제, 용기, 정의, 인내, 근면, 소박, 수수함, 황금률과 같은 덕목들입니다.
이러한 성품윤리의 원칙에 근거해서 성공을 거둔 대표적인 인물이자 그의 자서전을 통하여 이것을 확실하게 남겨놓은 사람은 미국 건국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인 ’벤자민 프랭클린‘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성공을 가져오는 기본 조건이 외적 성격 중심의 사고(Personality Ethics)로 바뀌었습니다. 즉 내적인 성품보다는 대인관계, 대중적인 이미지, 태도와 행동, 기법과 기술, 연설법, 차림새 등이 성공에 더 크게 작용한다고 본 것입니다.
이 연구 끝에 코비 박사 등은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라는 프로그램 개발에 나섰고, 후에 같은 제목으로 책을 출판했습니다.
코비 박사가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는 건강한 미국을 위해서는 본래의 성품윤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이 아버지가 아끼던 나무를 잘라놓고 그것을 하인에게 떠넘길 수도 있었으나 정직하게 잘못을 고백했다든지, 미국의 16대 대통령인 링컨이 소년 시절 빌려온 책에 문제가 생겼을 때 수십 리 길을 걸어가 용서를 빌었다든지 하는 얘기가 성품윤리를 대변하는 일화들인데, 코비 박사 등은 이러한 성품윤리가 회복되면 건강한 미국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면서 윤리라기보다는 일종의 처세술에 가까운 성격윤리가 활개 치는 시대에도 성품윤리 원칙에 따라 살면 성공한다는 한 사례를 소개했습니다.
그는 바로 J. P. 모건(John Pierpont Morgan : 1837,4,17~1913,3,31)입니다. 그는 미국과 세계 금융의 중심지인 뉴욕 맨해튼의 월스트리트(Wall Street)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자 독보적인 성공을 거둔 사람입니다. 그가 활동할 당시 월스트리트는 시장이 불완전한데다가 투기꾼들의 농간으로 크고 작은 금융사고가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모건은 그 나름의 사업 윤리를 통하여 마침내 성공했을 뿐 아니라, 월스트리트의 문화를 바꾸었습니다.
그의 성공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성공의 요인이 무엇이냐는 것이죠. 이에 대한 그의 대답은 “경제적 신용이 아니라 성품의 신용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모건은 “신용이 없는 사람과는 그가 비록 예수님 나라에서 발행한 채권을 내놓아도 거래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즉 성품, 사람의 내면적인 가치가 성공의 열쇠였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좀 더 구체화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표현했습니다. 무뚝뚝하고 융통성이 없어 보이는 ‘철물점 주인’같은 사람들이나 그런 지도자들보다, 멋진 옷을 빼입고 세련된 말투에 친절한 웃음을 짓는 ‘보석상’ 같은 사람들이 점점 더 활개치고 있지만, 진정한 성공을 거두는 것은 겉으로는 무뚝뚝하게 보이나 진실하고 정직하고 신실한 사람이라는 것이고, 또 이런 사람들이 성공하는 사회라야 건강한 사회라는 것입니다. “신의 성품에 참예한다”하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참예한다”는 말은 오늘 본문에 코이노노스(κοινωνος)라고 되어 있는데요. 이 말은 ‘코이노스(κοινος)와 코이노니아’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코이노스’는 형용사로서 '공통의(common)'를 의미하며, 명사로서는 '동료, 동역자, 파트너', 그리고 어떤 것의 '공유자'를 의미합니다. 이 말이 상업용어로 쓰일 때는 ‘동업자, 사업 파트너’라는 뜻입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 베드로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에 대해 언급할 때 이 말이 쓰였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신앙적인 문제와 연관이 되어서 ‘그 신과의 연합’, 나아가 ‘같은 신에게 예배하고 제사하는 사람들끼리의 연합’을 뜻하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마태복음 23:30, 고린도전서 10:18에 나타납니다.
특히 고전 10:20에서는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즉 우상 제사와 연관되는 것은 우상과 귀신들과의 친교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용어가 되어 ‘피로 맺은 혈맹’을 뜻하는 말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신의 성품에 참예한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과 연합한 자가 되었다는 것과 성도들끼리도 하나로 연합되었다는 의미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과의 연합이라는 것이 단순히 법적인 것이나 의미상의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연합된 자에게는 그 증거가 나타나는데, 그것이 곧 하나님의 성품을 나누어 가지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죄와 죄에 대한 심판에서 구원받은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은혜로 이 땅의 것 몇 가지 얻고 만족하는데서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장차 갈 천국을 보장받은 것만도 아닙니다. 정말 감당할 수 없는 크고 놀라운 복은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속성을 주님으로부터 받아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며 살아갈 수 있는 너무나 특별한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이죠.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읽지는 않았습니다만, 3절에 보면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4절에 우리가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은 하나님의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0절에서는 “그러므로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하지만, 기껏해야 육신의 부모를 닮는 것이 전부일 수 있는 우리가 주님을 닮은 사람,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아버지도 그렇게 닮는다면, 그리스도의 보혈로 나의 아버지가 되신 하나님, 아니 애초부터, 원래부터 나의 진정한 아버지이신 하나님, 바로 그 아버지를 내가 닮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여러분도 놀랍고 또 감사하지 않으십니까? 우리가 육신의 아버지를 닮는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를 닮을 수 있게 되었다니까요!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 하나님의 성품을 닮을 수 있는 자, 하나님의 성품을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하나님을 닮은 성도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하나님을 닮을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가 비평을 잘하면 자녀들은 부정적인 성격을 닮게 된다. 악의와 오기에 찬 부모의 모습을 자주 보며 자란 자녀는 난폭한 성품을 배운다. 그러나 자주 격려를 받으며 성장하는 자녀들은 자신감이 넘친다. 칭찬을 받으며 자란 자녀는 감사할 줄 아는 성품을 배운다. 자녀는 부모가 하는 대로 닮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는 아이들에게 좋은 본을 보여주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어느 분의 글입니다. 이 글처럼 자녀가 그 부모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부모를 닮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똑 같은 원리가 하나님 아버지와 여러분 사이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와 더욱 가까워져서 하나님을 더 많이 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대로 하나님의 믿음을 닮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에 대한 전부를 믿으십시오. 그리하여 믿음의 비밀과 믿음의 능력을 다지시기 바랍니다. 나아가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신뢰는 받는 사람, 보증수표와 같은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덕을 닮으시기 바랍니다. 용기 있는 사람, 칭찬받으며 존경받는 사람, 생각과 마음이 넓은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지식 있는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을 아는 지식, 구원 등 하나님의 계획과 하시는 일에 대한 지식, 이 세상과 인간에 대한 지식과 그리고 그 지식에서 나오는 이해와 사랑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절제하십시오. 성경이 기록될 당시 이 말은 성적 문제에 관련된 참을성, 감각적인 충동에 대한 통제력, 그리고 음식과 음주의 향락을 삼가는 것에 관한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거룩한 성령님과 주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조절하시기 바랍니다.
인내하십시오. 어떤 경우에도, 지독한 괴로움과 고통의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확고하고 변치 마시기 바랍니다.
경건하십시오. 하나님을 경외하고 매 순간, 모든 장소에서 하나님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형제 자매를 사랑하십시오.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시오. 성도들과 나아가 다른 사람들을 한 배에서 난 친형제자매처럼, 한 핏줄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랑하십시오. 십자가로 대변하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받고 체험한 자로서, 희생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저는 설교를 시작하면서 <성격윤리>와 <성품윤리>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 시대는 그의 내적인 자질, 인격, 성품이 어떠하냐 하는 것보다, 대인관계와 처세술이 뛰어난 사람이 성공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본 대로 미국의 장래를 위하여 성품, 인격, 그 사람의 내적인 조건이 성공의 열쇠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처럼, 오늘 성경이 말하는 것도 그와 같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얼마나 닮았는가?” 즉, 그의 내적인 자질과 성품과 인격이 하나님 아버지를 닮은 정도가 곧 성공의 척도라는 것입니다.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 하나님의 속성을 그대로 자신의 내적인 모양새가 됨으로서, 하나님과 세상에서 진정한 성공자가 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에게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라고 권고하시며 이 일에 더욱 힘쓸 것을 요구하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빛이시며 우리도 빛이라고 말합니다(마 5:14, 엡 5:8). 하나님이 거룩이시므로 우리도 거룩하라고
명합니다. 다른 곳에서는 평강의 하나님이 지금 친히 우리를 거룩케 하고 계신다고 말합니다(히 12:9-10, 살전 5:23,
히 2:11). 또한 하나님만 의이신데, 성경은 우리도 위치적으로나 성분적으로 하나님의 의가 될 수 있음을 계시합니다(롬 4:25,
고후 5:21, 마 5:20, 계 19:7-8).
성품의 변화는 모든 성도에게 숙제처럼 여겨집니다. 경험과 능력이 많아도 성품이 따라주지 못하면 온전치 못합니다. 신의 성품을 닮아 가는데 유익한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일까요?
1.신의 성품(Divine Nature)
성도를 신의 성품에 참여토록 부르십니다(벧후1:4). 이는 하나님처럼
전지전능한 존재가 되게 하신다거나, 내 기질과 내 성격보다 조금 더 나은 성품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죄로 인해
무너진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것을 말하고, 인간이 아닌 하나님께 기원을 둔 구별되고 거룩한 성품(Divine Nature)으로
변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2.신기한 능력(Divine Power)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Divine Power) 때문이라고 가르칩니다(벧후 1:3). 이는 하나님을 삶에서 인격적으로 깊이 알아갈 때
주어지며(벧후 1:3,요 15:7),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주어집니다(엡 5:18b). 곧,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고, 그
다스리심에 온전히 따를 때 신기한 능력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3.신령한 삶(Divine Life)
성도는 경건에 속한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고(벧후 1:3), 신령한 집이요,
거룩한 제사장으로 살게 됩니다(벧전 2:5). 여기서 신령함이란 하나님의 영이 동행하시는 삶입니다. 신령한 삶을 사는 성도는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Fruit of Holy Spirit)를
맺으며(갈 5:22-23;사랑,희락,화평,오래참음,자비,양선,충성,온유,절제), 늘 하나님과 동행해야만 잘 맺을 수
있습니다(요 15:5).
말씀 적용
1.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라 변화의 원동력은 나 자신의 경건과 훈련이 아닌 성령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3. 심령이 가난한 자 - 천국이 저희 것 4. 애통하는 자 - 위로를 받을 것 5. 온유한 자 -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 배부를 것 7. 긍휼히 여기는 자 -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 8. 마음이 청결한 자 - 하나님을 볼 것 9. 화평케 하는 자 -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 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 - 천국이 저희 것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 현재형(3절, 10절) 다른 여섯 가지 복은 모두 미래형(4절, 5절, 6절, 7절, 8절, 9절)
육의 생각을 영의 생각으로 돌리기
“성령님은
육신의 연약함을 입고 있는 우리를 잘 아십니다. 죄된 본성에 기반을 둔 자아로부터 파생되는 부정적 생각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아에서 나오는 영의 생각으로 교체해 달라고 성령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롬 8:5~6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5.
For those who are according to the flesh set their minds on the things
of the flesh, but those who are according to the Spirit, the things of
the Spirit. 6. For the mind set on the flesh is death, but the mind set on the Spirit is life and peace, (NASB)
죄책감,
우울감, 소외감 등의 느낌은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느낌에 영향을 가장 크게 미치는 것은 그 사람의 세계관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슬플 일이 아닌데 어떤 사람에게는 슬픈 일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각 사람의 세계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관은
생각의 경향을 갖고 오는 생각의 집합(mind set)입니다.
거듭난
이후에도 죄된 본성에 기반을 둔 자아와 그리스도 예수에 기반한 새로운 자아 사이에 계속된 전쟁이 있습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생각하는 방식을 바꿔야만 합니다. 생각하는 방식이 느낌을 결정하고, 그 느낌이 태도와 행동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울하다고 느끼면, 우울하다고 느끼게 하는 생각이 그 느낌 뒤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우울감을 쫓아내고 싶다면, 이 외에도 내
생각과 태도와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감정을 몰아내고 싶다면 감정과 싸울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 그에 합당한 영의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을 언급한 것은 우리가 더 나은 생각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이성 영역에 생각을 던집니다. 그 생각은 보통 육신의 갈망을 채우는 유혹(temptation)입니다. 하나님도 영을 통해
생각을 던집니다. 그 생각은 영의 갈망을 채우는 영감(inspiration)입니다. 우리가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믿음으로
올바른 생각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결국 올바른 생각을 선택하기 위해 말씀이 필요한 것입니다)
엡 6:11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Put on the full armor of God so that you can take your stand against the [devil]’s [schemes].
바울은
에베소서를 통해 마귀의 간계에 대해 얘기합니다. 간계의 헬라어 원어는 “메쏘데이아”입니다. 영어 단어 method의 근원입니다.
이 메쏘데이아의 어근은 “호도스”로 “길(way, road)”을 뜻합니다. 간계의 영어 번역은 생각/계획/책략을 뜻하는
scheme인데, 이 단어는 생각의 덩어리와 관련이 있습니다.
마귀
또한 사람의 잠재의식 영역 가운데 육신의 생각을 불러일으킬 생각의 덩어리를 확보하고자 애를 쓰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생각의 덩어리는 방향성을 지니기 때문에 그 어근에서 보는 것처럼 “길(way)”과도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마귀의 헬라어 원어는 “디아볼로스”입니다. “디아”는 “~를 통해서”란 의미이고, “볼로”는 “던지다(to throw)”란 의미입니다. 원어적으로 보면 마귀는 어떤 목표물을 향해 벌어진 틈을 통해 참소를 던지는 자입니다.
이런
원어적 의미를 갖고 “마귀의 간계”를 보면, 약한 틈을 통해 육신의 생각을 던져 고착화시켜 길을 냄으로 원활하게 사람을
조정하려는 것이 곧 마귀의 간계인 것입니다. 두려움, 슬픔, 염려, 걱정의 느낌은 모두 생각에서 옵니다. 이 감정을 이기려면 이런
감정을 생산하도록 부추기는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굴복시켜야 합니다.
만일
TV를 볼 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만한 프로그램이 나왔다면 그 프로그램에 분개하며 부정적 영향과 싸우려 하지 말고 좋은 채널로
돌리면 됩니다. 이와 동일하게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키는 생각이 들어왔다면 그 부정적 생각과 대항하여 싸우려 하지 말고 진리에
근거한 좋은 생각으로 돌려야 합니다.
바울은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을 언급합니다. 이는 육신의 생각(mind set)으로 인해 부정적 영향을 받을 때 이 생각과 싸울 것이
아니라 영의 생각(mind set)으로 돌릴 수 있음을 내포합니다. 하나님은 내주하시는 영을 통해 이것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선택하고 성령님은 도우십니다. 할렐루야!
육신의
생각은 사망입니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어느 누가 사망을 선택하고 싶겠습니까? 모든 사람은 생명과 평안을 선택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현실은 크리스챤마저도 자기 파괴적인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은혜를 받고서도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키는 생각을 붙들며 삽니다.
성령님은
육신의 연약함을 입고 있는 우리를 잘 아십니다. 죄된 본성에 기반을 둔 자아로부터 파생되는 부정적 생각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아에서 나오는 영의 생각으로 교체해 달라고 성령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진리에 기반한 영의 생각으로 채널 돌리듯 돌리면 나쁘고 낡은 옛 자아의 생각은 더이상 호소하지도, 유혹하지도,
영향도 못미치는 것을 봅니다.
고후 10:3~5 3.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4.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5.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우리는
날마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육신의 생각을 교체 가능한 영의 생각으로 바꿔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특별히 HAGAH의 시간을
갖기 전에 아래와 같은 기도를 하고 기도한 내용대로 마음을 모아 HAGAH를 하면 성령님께서 틀림없이 말씀을 통해 도와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주님. 제 생각 가운데 자유롭게 오셔서 영의 생각을 던지실 수 있도록 마음 중심으로 성령님을 초대합니다. 제 모든 생각 기관의
주인으로 성령님을 모십니다. 성령님께서 제가 갖고 있는 모든 재료와 하나님의 말씀을 재료 삼아 생각 영역에 빛을 비춰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제 온 마음을 성령님께 엽니다. 로마서 8장의 말씀을 암송이 아닌 HAGAH할 때 영의 생각을 던져주옵소서. 잠재의식 영역 안에 있는 모든 육신의 생각을 영의 생각으로 교체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롬 8:5~6>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1.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으로 말미암지 않은 모든 것은 육신의 일이라고 했는데 롬 8:6에서 그로 말미암은 “육신의 생각”은 사망임을 알려줍니다.
비오스,
프쉬케 모두 유한한 생명을 갖고 있고, 조에 만이 무한한 생명을 갖고 있습니다. 즉 영으로 말미암지 않은 모든 것은 유한한
생명을 갖고 있습니다. 무한한 생명, 즉 영원한 생명을 갖고 있지 않은 모든 것은 결국 유한한 생명, 즉 사망입니다.
아무리 좋은 생각, 결과라 할지라도 무한할 것 같지만 그것이 영으로 말미암지 않은 것이라면 결국 유한합니다. 이는 언젠가는 사라집니다.
<벧전 1:23~25> 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을 다시 언급한 베드로는 모든 육체(사르크스, 로마서 8장의 육신)가 풀과 같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영원한 것은 생명이요, 영인 하나님의 말씀(요 6:63)이라고 알려줍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란 구절을 읽을 때, 악하고 나쁜 생각만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HAGAH-R8 Day3
(1)에서 나눴던 것처럼 그 어떤 좋은 것이라도, 탁월한 것이라도 생명의 영으로 말미암지 않은 모든 것은 육신의 생각입니다.
이
육신으로 기인한, 다른 말로 생명의 영으로 말미암지 않은 모든 것은 결국 언젠가는 사라집니다. 하나님 나라에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영으로 말미암은 것만 영원하며 하나님 나라에 보존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서 8장을 볼 때 아래의 대결 구조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생명의 “영” vs. 사망의 “육신”
로마서의 “생명”은 창세기의 “생명 나무”, 로마서의 “육신”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벗어난 자들은 선한 일 vs. 악한 일, 선한 생각 vs. 악한 생각…의 패러다임으로 살아갑니다. 유치원 들어가기 전부터 배우는 것은 이거 하면 안돼요, 이건 잘했어요…의 선악과 패러다임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나라의 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차원이 다른 세계의 법입니다. 그것이 로마서 8장에 나오는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가져 오는 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서 8장에서 “악한 생각 vs. 선한 생각”…의 패러다임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생각 vs. 영의 생각”…의 패러다임으로 끌고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인간의 도덕적 기준에 맞는 선하고 악한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인 영으로 기인했느냐 아니냐와 영으로 말미암지 않은 모든 것은 사망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이 세상 모든 것은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모두 사라지지만… 주의 말씀은, 주의 영은, 주의 생명은…
주의 영으로 말미암은 모든 것은 사람의 기준으로 볼 때 아무 것도 아니고 약해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영원히
남습니다.
2. 생각은 세계관과 관련있습니다
롬 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For the mind set on the flesh is death, but the mind set on the Spirit is life and peace, (NASB)
어떤
생각이 문득 들어옵니다. 그리고 사라질 수 있습니다. 휘발성처럼 사라진 생각은 내게 영향을 못미칩니다. 그런데 동일한 생각이
들어오고 또 들어와 사라지지 않고 쌓이면 그 생각은 내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합니다. 생각이 쌓여 내 안에 집합을 이룬 것을
mind set이라고 합니다. 휘발성 처럼 사라지는 생각이 아닌 덩어리를 이룬 생각은 특정 관점을 생성합니다. 방향성을 갖고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 부분이 발전하면 한 사람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이룹니다.
롬 8:6에 나오는 “생각”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는 “프로네마”입니다. “프렌”에서 온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생각” 중에서도 반복되는 생각, 그래서 어떤 방향과 경향을 띤 생각을 강조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 원어를 가장 잘 반영한 NASB는 생각을 “mind set”으로 번역했습니다.
물리학을
처음 공부할 때 배우는 F = ma (힘을 = 질량 X 가속도)를 떠올리면 모든 질량은 힘을 갖는다는 가장 기본적인 물리 법칙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휘발성처럼 사라지는 생각은 내게 힘을 미치지 못하지만 쌓여져 덩어리가 된 질량이 있는 생각은 내게 힘을
미칩니다. 그런데 그 쌓인 생각이 육신으로 말미암은 것이면 결국 사망이지만, 그 생각의 덩어리가 말씀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그것은
영원한 생명(조에)이자 평안입니다.
육신의
생각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영이요, 생명인 하나님의 말씀 뿐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선하고 악한 생각이란 패러다임이
아닌 육신과 영의 생각이란 기준으로 보면 결국 영으로 말미암지 않은 모든 것이 육신의 것이요 사망이기 때문에 영으로 말미암은
것의 기준을 알아야 합니다. 이를 알려면 결국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생명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육신의 생각은, 육신의 mind set은 견고한 진과 관련이 있습니다.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영역으로 뭉쳐있기 때문에 아무리
큰 은혜를 경험한다 하더라도 잠재의식 영역에 형성된 mind set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바뀌질 않으면 특정 은혜로 변화를
받은 것 같지만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가장 치열한 영적인 전쟁은 바로 이 mind set이란 잠재의식의 땅에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HAGAH란 방법을 통해 잠재의식마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시려고 한 것입니다.
발음
/ 수네이데시스(sünĕidēsis) 어원 / 4894의 연장형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양심(요 8:9, 고전 8:7, 히 9:9), 깨닫는 일(히 10:2), 생각함(벧전 2:19) 신약 성경 / 30회 사용
* 4894. συνείδω
1. 완전하게 보다, 2. 깨닫다, 3. 이해하다
발음
/ 수네이도(sünĕidō) 어원/ 4862와 149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알다(행 5:2, 14:6), 깨닫다(행 12:12, 고전 4:4)
- 4862. σύν
1. 함께, 2. ~와 같이, 3. 함께 남다
발음
/ 순(sun) 관련 성경 / 함께, ~와, 더불어(마 25:27) 신약 성경 / 128회 사용
- 1492. εἴδω
1. 보다, 2. 별을 보다, 3. 누가 7:22
발음
/ 에이도(ĕidō) 관련 성경 / 보다(마 2:2, 막 1:10, 요 1:39), 알다(마 2:16, 막 10:42, 요 9:25), 뵙다(마 28:17),
보이다(막 12:15), 당하다(행 2:31, 13:36), 시인하다(딛 1:16), 알리다(눅 2:15), 의논하다(행 15:6)
신약성경에서 언급되는 “양심”은 “도덕적
깨달음”이나 “도덕적 의식”을 의미하는 헬라어 "쉬네이데시스"를 번역한 것입니다. 양심은 한 사람의 행동과 생각, 말이 옳고 그름의
기준을 따르거나, 혹은 거스를 때 반응합니다.
구약성경에는 신약성경의 쉬네이데시스와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 히브리어 단어가 없습니다. “양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없다는
것은 개인적이기 보다 공동체적이었던 유대인의 세계관 때문일 것입니다. 히브리인은 자신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 개인으로서가
아닌 조직적으로 관련된 언약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여겼습니다. 다시 말해서, 히브리인 민족 전체가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한, 히브리인은 자신의 입장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떳떳했다는 뜻입니다.
신약성경의 개념은 본질적으로 좀 더 개인적이며, 세 가지의 중요한 사실을 수반합니다.
첫째, 양심은 인간이 자기평가를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양심이 “선했거나” “깨끗했던” 여러 경우들에 대해 언급합니다
(사도행전 23:1, 24:16, 고린도전서 4:4). 바울은 자기 자신의 말과 행동을 점검하며 그것이 자신의 도덕과 가치 체계에
합당한 것인지 살폈습니다. 물론 그 도덕과 가치 체계는 하나님의 기준에 바탕을 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양심은 그의 마음의
온전함을 입증했습니다.
둘째, 양심이 어떤 것을 증언한다.
바울은 이방인들이 비록 모세의 율법을 가지지는 못했지만, 그들 마음
속에 하나님의 율법이 새겨졌음을 증언해주는 양심을 가졌다고 말합니다(로마서 2:14-15). 바울은 또한 자신이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 (로마서 9:1)과 사람들을 다룰 때 거룩함과 신실함으로 행했다는 것(고린도후서 1:12)을 증언하며 양심에
호소합니다. 바울은 또 양심을 통해 자기 행동이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의 양심에 모두 분명히 드러남을 알게 된다고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5:11).
셋째, 양심은 개인의 가치 체계의 종입니다.
미숙하거나 나약한 가치 체계는 나약한 양심을 낳는 반면, 제대로 알고 있는 가치
체계는 옳고 그름에 대한 확고한 인식을 낳습니다. 크리스천 삶에서 성경적 진리에 대한 적절치 못한 이해로 인해 개인의 양심이
조종당하고, 직면한 문제에 대해 불균형한 죄책감 및 수치심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 성숙하게 되면 양심이 강건해집니다.
이러한 양심의 마지막 기능은 바울이 우상들에게 제물로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과 관련하여 가르칠 때 언급됩니다. 바울은 우상이 진짜
신은 아니므로 음식이 제물로 바쳐졌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고린도 교회의 일부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했고 그러한 신들이 실제로 존재했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미숙한 신자들은 양심에 잘못된 편견과 미신적 관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신들에게 제물로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을 꺼림칙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약 양심이 나약한 형제들이 제물로
바쳐진 음식 먹는 행위를 정죄한다면, 좀 더 잘 아는 자들이 자기들의 음식 먹을 자유를 포기해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여기서의
교훈은, 우리의 양심이 성숙한 믿음과 이해로 말미암아 거리낌이 없다고 해서, 더 강한 양심에서 비롯되는 자유를 행사하여 나약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을 실족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볼 수 있는 양심에 대한 또 다른 언급은 마치 뜨거운 철로 지져진 것과 같이 “화인을 맞거나” 무감각하게 된 양심에
대한 것입니다(디모데전서 4:1-2). 그러한 양심은 단단해지고 굳어져서 더 이상 아무것도 느끼지 못합니다. 화인 맞은 양심을
가진 자는 더 이상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모든 것이 괜찮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속이고 스스로를 죄에 방치하며, 다른
사람들을 아무 감정 없이 무감각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과 늘 좋은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마음을 늘 새롭고 부드럽게 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양심이 약한 자들을 크리스천의 사랑과 긍휼로
대하며 배려해야 합니다.
07-02-2022(토)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베드로전서 2:2)
순전하고 신령한 순전한 / ἄδολος
아도로스(adŏlŏs) - 순수한, 성실한, 속일 수 없는
신령한 / λογικός
로기코스(lŏgikŏs) - 영적인, 합리적인
로마서 12:1(영적)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사모하라(ἐπιποθέω) : desire
에피포데오(ĕpipŏthĕō) - 간절히 사모하다
고린도후서 5:2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07-01-2022(금)
믿음의 결국(베드로전서 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NIV. for you are receiving the goal of your faith, the salvation of your souls.
결국(結局) : 일의 끝장 / 맺을 결, 판 국
5056. 테로스(tĕlŏs) τέλος : 끝, 결말, 마지막 τέλος, ους, τό
1. 끝, 2. 마지막, 3. 결말
발음
/ 테로스(tĕlŏs) 어원 / 기본형 τέλλω ‘제한하다’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끝(마 10:22, 24:6, 막 13:13, 눅 21:9), 마지막(롬 6:21,22, 고전 15:24),
결말(마 26:58, 약 5:11), 결국(고후 3:13), 관세(마 17:25, 롬 13:7), 마침(롬 10:4), 목적(딤전 1:5),
말세(고전 10:11) 신약 성경 / 40회 사용
NIV : the goal of your faith(믿음의 목표) KJV : the end of your faith(믿음의 마지막) NASB : the outcome of your faith(믿음의 결과)
06-30-2022(목)
믿음의 기도(야고보서 5:15)
신약 성경에 믿음(faith)이란 단어가 무려 231번이나 나옵니다. 예수를 믿고 나서 가장 갈망하는은사 중 하나는 단연 믿음의 은사일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믿음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고, 믿음만 있으면 못할 것이 없을 것 같은 그런 강한 인상을 받습니다. 염원(念願) : 생각염(念), 원할 원(願)
늘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간절히 바람. 또는 그런 소원
기도(祈禱) : 빌 기(祈), 빌 도(禱)
신명에게 빎. 또는 그 의식
로마서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 말씀(레마) - 4487 ῥῆμα
1.말하여 진 것, 2. 예언, 3. 명령
발음
/ 레마(rhēma) 어원 / 448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말씀(마 4:4, 눅 1:37, 행 5:20), 말(마 5:11, 행 2:14, 고후 12:4), 일(눅 2:15, 행 5:32) 신약 성경 / 68회 사용
* 4483. 헤오(ῥέω)
1. 말하다, 2. 지시하다
발음
/ 헤오(rhĕō) 관련 성경 / 말하다(마 2:15, 5:21, 12:17, 24:15), 이르다(롬 9:12)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는 1934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출생했다. 독실한 부모 밑에서 성장한
그는 20세 때부터는 아르헨티나 전역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온 세계에 영향을 주었던 아르헨티나의 영적갱신
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 특히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의 ‘믿음 교회’(Faith Tabernacle)의 목회
성공은 그를 일약 세계적으로 유명한 목회자로 만들어 주었다. 그 후 그는 1974년 스위스의 로잔 대회에 주강사로 초청을
받아 설교를 했으며, 이를 계기로 그의 영향력은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제3세계의 지역을 넘어 동구권을 포함한 다른 지역에까지 퍼져
나가게 됐다. 오르티즈 목사는 처음에는 오순절 계통의 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했으나 후에는 장로 교회에서 시무하였으며 많은 교회를
개척했다. 그는 장로 교파를 비롯, 여러 복음주의 교파뿐만 아니라 나아가 일반 사회에서까지 폭넓은 명성을 얻고 있는 종교 지도자로
알려져 있다. 지금도 그의 메시지는 라디오나 텔레비전을 통해 라틴 아메리카 등지에 전해져 여러 저자들에 의해 인용되고 있다.
06-29-2022(수)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야고보서 4:8)
가까이 하라(1448) 엥기조(ἐγγίζω) 믿음의 기도(야고보서 5:15)
1. 접근하다, 2. 누가복음 7:12, 3. 마태복음 21:1 발음
/ 엥기조(ĕnggizō) 어원 / 미래 ἐγγιῶ , 제1부정과거 ἤγγισα, 완료 ἤγγικα, 145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가깝다(마 3:2, 막 1:15, 행 7:17), 가까이 오다(마 21:1, 막 11:1, 눅 18:35), 가까이 하다(눅
12:33, 약 4:8), 가까이 가다(눅 24:28, 행 9:3, 히 7:19), 이르다(빌 2:30). [부] 가까이(눅 15:1) 신약 성경 / 42회 사용
누가복음 7:12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마태복음 21:1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 1451. 가까운(엥구스) ἐγγύς
1. 가까운, 2. Σαλίμ: 살림에 가까운, 3. 사도행전 9:38
발음
/ 엥구스(ĕnggüs) 어원/ 비교급 ἐγγύτερον, 최상급 ἔγγισ- τα, 기본동사 ἐ. τοῦ ‘조르다’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가까이(마 24:32, 눅 21:30, 요 11:18, 엡 2:13) 신약 성경 / 31회 사용
한국의 경우
1. 이슬람화 / 한국인 이슬람 신자 약 4만명 사원 17개, 기도처(무살라) 123개 유학생 지원 : 본국에서 한국인 여성과 결혼 할 때 총각 증명서 발급 외국인 이슬람 신자 11만명
2. 중국화 / 차이나 타운 30개 유학생 수 : 7만 1천 67명 외국인 유학생의 비율 44.4% 3년 거주 후 지방 선거권 부여
3. 정치적 / 우파와 좌파의 대결 현재 50:50
무분별한 차이나타운 전국에 30개 "과도한 특혜 사회문제 유발"
춘천 대규모 차이나타운 건설이 논란이 되고 있는 가운데, 우리나라에 이미 30곳이 넘는 차이나타운이 존재하거나 추진중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
현재
정부의 무분별한 인허가로 인해 차이나타운이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수년간 중국계 조선족, 한족 등을 포함하여 중국에서
건너온 외국인들이 급증하여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데, 국내 곳곳에 이들의 집단 거주지가 속속 정부의 인허가 또는 묵인 속에 건설되고
있어 향후 큰 문제로 비화될 전망이다.
수원 팔달구 차이나타운, 안산시 원곡동 차이나타운, 시흥시 정황동 차이나타운, 강원도 정동진 차이나타운 개발중, 대구 중구 차이나타운, 대구 달서구 차이나타운, 부산시 차이나타운
전남 진도 차이나타운 (천만평 땅에 17조원 투자해 건설중) 전남 여수 차이나타운 (전략적으로 확보) 전남 광양 차이나타운 (전략적으로 확보) 제주도 차이나타운 (신제주 차이나타운)
서귀포 차이나타운, 한라산 자락 차이나타운, 제주도 애월읍 상가리 (34만평 건설중), 춘천에 대규모 차이나타운 공사 예정(최근 문제됨) ,경기도 포천 차이나타운 (추진중) 등이다.
중국계들은 다른 나라로 이주해 가서도 현지 문화와 동화되지 못하고 자신들만의 폐쇄적인 문화를 유지하려는 습성을 갖고 있어, 현지 국가의 각종 이권을 장악하고 수익금은 사회에 환원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차이나타운
다문화 가정에게 대한 과도한 특혜도 논란이 되고 있다.
대형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는, 조선족을 포함한 다문화 가정과 국내 체류 외국인 (영주권자 포함)에 대해 우리나라 정부가 너무나 과도한 특혜를 줬기 때문에, 대한민국 국민이 역차별 당하고 있다는 비판이 수도 없이 나오고 있다.
이미
많은 곳에서 우리나라 정부와 지자체가 이들 조선족과 다문화 가정에게 주는 혜택이 믿어지지 않는다며 조목조목 리스트를 정리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제 국내 거주 외국인에 대한 말도 않되는 특혜 때문에 오히려 대한민국 사회 구조가 왜곡되고
비뚤어진다는 평가가 나오기에 이르렀다.
어떤 특혜가 있는가?
외국인이 국내 3년 거주시 지방선거권
부여하는 점은 치명적이라는 평가다. 단지 3년을 거주한다고 투표권을 주는 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렵다는 것. 이는
우리나라의 정체성에 위협을 가져올 수 있는 심각한 문제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공무원시험 다문화전형 특혜, 운전면허및
자격증 국비지원 등은 우리나라 청년들의 취업 전선에 역차별을 주고 있다. 특히 공무원과 자치 경찰 등은 국가관과 애국심이
투철해야 하는 데, 자신들이 중국인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중국계 조선족이 대거 공무원과 경찰로 편입될 경우, 결국 향후 치명적인
문제가 야기 될 수 있다.
부동산도 문제다. 외국인에 대한 공공분양및 공공임대 우선순위, 부동산 담보 대출
무제한은 서울 경기 일대 집값 상승의 주범으로 분석되고 있다. 최근 수년간 서울 경기 부동산이 폭등하는 이유 중 하나로 중국계
자금이 해당 지역 부동산을 싹쓸이 했던 것이 그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그 배경에는 정부의 과도한 금융 혜택이 있다는 것이다.
부동산을
취득할 때 무제한 담보대출을 한다는 것은, 중국계 자본은 자신들의 돈이 없어도 은행 대출만으로 서울 시내 부동산을 매입한다는
것인데, 이는 고스란히 서울 수도권 부동산을 중국인들에게 내주고 가격을 폭등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외국인에 대한 불공정한 특혜는 한 두가지가 아니다.
취득세
양도세 재산세 지원, 투기 관리지역 취득가능, 대출이자 특별할인, 은행 예금이자 6%이상 지급, 외화송금수수료 할인, 통신비
외료비지원, ATM 수수료 면제, 국공립 어린이집 및 병설 유치원 0순위, 보육로, 육아 도우미 비용 지원, 학습지 비용 및
학원비 지원, 고등학교 및 대학교 등록금 할인 및 장학금 지원, 기숙사 우선배정, 중국인들은 무료로 대학 다닐 수 있는 혜택 등
이루말할 수 없는 특혜들을 주고 있다.
이러한 법률 및 조례 등으로 현재 오히려 내국인의 역차별이 이뤄지고 있다는 분노가 치솟고 있는 가운데, 이러한 법안들을 대거 통과시킨 정부와 국회의원에 대한 책임론이 불거지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 나와 있는 조선족의 숫자는 공식적으로 70만, 비공식 (불법체류자 포함) 300만에 육박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쉽게 말하면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 중에서 노동력을 갖고 있고,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대한민국에 들어와
있다는 얘기다.
이들이 한국 사회에 동화되지 않고, 무수히 건설되는 차이나타운에서 자체적인 이익집단으로 성장할 경우, 결국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혼란을 가져올 수 밖에 없다는 우려가 나오는 대목이다.
고향을
떠나 먼 곳에 와서 현지에 동화되고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자긍심을 심어주는 일도 분명 필요하다. 그러나 정부는
이들의 표를 의식한 나머지 과도하게 느슨한 다문화 정책으로 사회혼란을 가중시킬 것이아니라, 앞으로 더 이상의 불법적인 이주를
금지하고, 불법 체류자에 대해서는 엄하게 다스리는 등 질서를 잡는 일이 서로를 위해 합리적인 정책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한편 복수의 정치,외교 전문가들은 "국내 거주 중국계의 표를 의식했던 여권 후보가 각종 선거에서 참패하는
현상은 이미 돌아선 대한민국의 민심을 나타낸다." 라며 "정부가 감성적인 광고 등으로 국민의 눈물샘을 자극해서 비뚤어지고 무분별한
다문화 정책을 쏟아내는 방식은 앞으로 거센 국민적 저항과 직면할 것" 이라고 입을 모았다
중국 자본이 제주도 접수중 _제주도 차이나타운 (신제주 차이나타운) _서귀포 차이나타운 _한라산 자락 차이나타운 _제주도 애월읍 상가리 (34만평 건설중)
ㅡ법무장관후보 조국. 사모펀드에 중국자본 6천억 유입 의혹 조국의 임명강행은 중국의 자유진영에 대한 침략행위! ㅡ스마트 가로등사업(몰래카메라내장)수주관여. 모니터링중... (177건 관급공사 수주) ㅡ한국지하철 무료 Wi-Fi. 중공 화웨이 5G 설치. 도청중... ㅡ카톡도 중국꺼.. 사용자제 요망(톡방 멤버 아니라도 엿듣기 가능)
ㅡ한국대학에서 중국유학생 성적 2.5이상 장학금 다 주고 ㅡ외국인 특혜로 마구잡이 입학허가 (우리 애들은 어릴때부터 입시를 준비해도 명문대 들어가지 못하는데...) ㅡ4년 졸업하면 영주권 주고 ㅡ비싼 암치료 해주고 ㅡ촛불집회 동원하고 ㅡ한국국적 주고 투표권 주고....ㅠㅠ 이제 지자체 뿐만 아니라 대통령도 출마할 수 있는 법도 만들것임
ㅡ지난 70년간 뼈빠지게 일해서 세계 10대 무역강국 만들어 중국 시진핑에게 갖다 바치는 중.....
ㅡ반중친미 ㅡ반중친미 반중집회에 참여합시다 ㅡAnti-China (중공) - Anti Communist (중국공산당)
7년간 무슬림 유학생들과 함께 살아온 주민들은 왜 '돌변'했을까
06-28-2022(화)
위로부터 난 지혜(야고보서 3:17)
지혜(4678) 소피아
4678 συγκακουχέω
1. 지혜, 2. 마태복음 12:42
발음
/ sŏphia 어원 / 468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지혜(마 11:19, 롬 11:33, 고후 1:12, 마 12:42, 눅 11:31, 골 2:23) 신약 성경 / 51회 사용
* 4680. 소포스(σοφός) σοφός, ἡ, όν
1. 현명한, 2. 지혜있는 , 3, 고린도전서 3:18
발음
/ 소포스(sŏphŏs) 어원 / σαφής ‘깨끗한’과 유사 관련 성경 / 지혜로운(마 11:25, 눅 10:21, 딤전 1:17), 지혜 있는(마 23:34, 롬 1:22, 고전 3:18, 약 3:13) 신약 성경 / 20회 사용
탈무드에 나오는 "갈비뼈 도둑"이라는 예화를 보면 인류 최초의 여성은 아담의 갈비뼈를 1개 훔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로마 황제가 어떤 랍비의 집을 방문하여 그에게 물었다. "신은 도둑이다. 어째서 남자가 잠들고 있는 사이에 남자의 허락도 받지
않고 갈비뼈를 훔쳐 갔는가?" 랍비가 대답을 못하고 있는데 그의 딸이 곁에서 대화에 끼어 들었다. "황제의 부하를 한 사람만 빌려
주십시오. 조금 곤란한 문제가 생겨, 그것을 조사 시키는데 쓰려고 합니다." 황제가 물었다. "그건 별로 어려운일이 아니지만
도대체 그 문제란 무엇인가?" "어젯밤 도둑이 집에 들어와서 금고 하나 훔쳐 갔습니다. 그 대신에 도둑은 금 그릇을 두고
갔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했는지 조사해 보고 싶어서 입니다." "그것 참 부럽구나. 그런 도둑이라면, 내게도 들어 왔으면
좋게는데!" 그러자 랍비의 딸은 이렇게 말했다. "그럴 겁니다. 그것은 결국 아담의 몸에서 일어난 일과 똑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갈비뼈를 하나 훔쳐 갔지만, 이 세상에 한개의 갈비뼈 보다 값진 여자를 남겼습니다."
하나님이
최초의 여자를 남자의 머리로 만들지 않았던 이유는 남자를 지배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발로 만들지 않았던 것도 남자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지혜는 참과 진리가 무엇인가를 알게 하는 것이며 인간의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깨우쳐 주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지혜를 명확하게 구별하여 이해를 도운 성경의 인물을 본다면 그는 야고보 사도이다.
그는 야고보서 3장에서 '세상의 지혜와 위로부터 임하는 지혜'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기록했다. 세상적인 지혜는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擾亂)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야고보서3:16-17) 위에 제시된 두가지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에게서 주어진 지혜는
쉽게 구분한다면 어두움과 빛, 멸망과 영원한 생명에 관한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느 돈 많은 유대인이 병들어 죽게 되었다. 그 사람이 유서를 작성했다. 아들은 타지에 나가있었기 때문에 아들에게 주는 유서를 그의 종에게 남겼다. 유서에는 두 가지 조건이 적혀있었다.
“첫째, 나는 내 아들에게 이 유서를 전하는 충실한 노예에게 전 재산을 남긴다. 둘째, 내 아들에게는 내 모든 것 가운데 한 가지만을 고르게 하라.”
노예는 너무나 기뻤다. 아들이 올 때까지 주인의 재산을 잘 관리하였다. 그리고 그 유서를 랍비에게 보이고 증인으로 삼았다. 아들이 돌아왔고 노예는 랍비와 함께 주인 아들에게 갔다. 랍비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아버지가 죽을 때 유서를 남겼는데 당신에게는 단 한 가지밖에 남기지 않았고 나머지는 모두 이 노예에게 준다고 했습니다. 당신은 아버지의 소유 중에서 무엇을 고르겠습니까?”
젊은 아들은 한참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이 노예를 갖겠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모든 재산을 다시 이어받게 되었다. 아들은 유서 속에 담긴 아버지의 뜻을 알았던 것이다.
건강한 삶의 지혜
전국시대의 명의였던 편작에게 의사 지망생이 찾아왔다. “저도 선생님처럼 유명한 의사가 되고 싶습니다.” 젊은이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 본 편작이 말을 이었다. “온 천하를 다녀서 약이 될 수 없는 풀들을 뜯어 오너라”
젊은이는 산야를 헤매고 다녔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선생님 온 천하를 다녀봐도 약이 되지 않는 풀이 없군요. 그냥 돌아가겠습니다” 명의가 되겠다는 꿈을 포기하고 돌아서는 젊은이를 편작이 불러 세웠다.
“그래 됐어, 하찮은 풀도 약으로 볼 줄 아는 것을 보니 유능한 의사가 될 수 있겠어” 편작은 젊은이를 제자로 받아 들여 의술을 가르쳤고 훗날 젊은이는 편작의 뒤를 잇는 당대 명의로 이름을 날렸다는 일화가 있다.
약(藥)이라는
한자어도 풀이라는 뜻의 ‘초두 머리’ 밑에 즐거움이라는 뜻의 ‘락’을 쓴다. 치료의 기쁨을 안겨주는 풀이 바로 약이라는 뜻이다.
들풀 하나도 유심히 살펴 쓰임새를 찾던 옛 사람들의 지혜가 아쉽다. 건강에 대한 정보와 지식이 홍수를 이루고 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지혜가 부족한 시대임에 틀림없다. 건강에 대한 지식도 중요하지만 건강한 삶의 지혜를 터득해야 할 때다.
藥 : 약 약, 뜨거울 삭, 간 맞출 략(약)
艹(초두머리 초)
+
樂(노래 악)
현명한 왕
아라곤 스페인 왕이 어느 날 10여 명의 신하들을 이끌고 민정 시찰을 나갔을 때의 일이다. 어느 보석상 앞을 지나다가 진열장안을
들여다보니 좋은 보석이 많아서 왕은 신하들과 함께 보석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왕은 주인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보석
하나를 사가지고 신하들과 함께 그 가게에서 나왔다. 그런데 얼마쯤 갔을까, 보석상 주인이 헐레벌떡 뛰어 와서는 " 폐하 말씀
드리기 대단히 죄송하오나 폐하께서 다녀가시고 저희 가게에서 가장 값비싼 다이아몬드 하나가 없어졌습니다." 고 조아리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크게 당황을 하며 신하들을 모두 데리고 보석상으로 되돌아갔다. 왕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주인에게 부탁했습니다.
"큼직한 항아리에 소금을 절반 정도 넣어 가지고 오시오." 가게 주인은 잠시 후에 소금 항아리를 왕 앞에 갖다 놓았습니다. 그러자
왕은 신하들에게 명령했습니다.
"지금부터
한 사람씩 차례대로 자기 주먹을 이 항아리 안에 넣고 속에 있는 소금을 잠시 휘젓다가 꺼내시오!" 신하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왕의 명령대로 실행하였습니다. 왕은 주인에게 탁자 위에 그 소금 항아리를 쏟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다이아몬드가 그 소금 속에
섞여 있는 것이 아닙니까? 현명한 왕의 기지로 보석을 찾았을 뿐 아니라 그것을 훔쳤던 신하에게는 아무도 모르게 자기 잘못을
뉘우치도록 해주었던 것입니다.
지혜(智慧), 명철(明哲), 지식(知識)의 차이
- 지식은 아는 능력 - 지혜는 행하는 능력 - 명철은 분별하는 능력
지식(비나)이란? 아는 능력
비나 / בִּינָה
스트롱번호 998 1. 이해, 2. 총명 발음
: 비나(bîynâh) 어원 : 99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지식(신 4:6), 총명(대상 22:12, 욥 34:16, 사 29:14), 명철(대하 2:12, 잠 2:3, 23:23), 지혜(욥 39:26, 잠 7:4, 23:4), 지각(사 27:11), 뜻(단 8:15) 구약 성경 : 37회 사용
잠언 2:3 /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and if you call out for insight and cry aloud for understandin.
세상에서는 학문을 비롯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지혜(호크마)란? 행하는 능력
호크마 / חָכְמָה 스트롱번호 2451
1. 숙련, 2. 지혜, 3. 다양한 학식 발음
: 호크마(chokmâh) 어원 : 244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지혜(출 28:3, 삼하 20:22), 슬기(출 35:26), 유능한 기술자(대상 28:21) 구약 성경 : 153회 사용
출애굽기 28:3 / 너는 무릇 마음에 지혜 있는 자 곧 내가 지혜로운 영으로 채운 자들에게 말하여 아론의 옷을 지어 그를 거룩하게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Tell all the skilled men to whom I have given wisdom
in such matters that they are to make garments for Aaron, for his
consecration, so he may serve me as priest.
인생의 경험이 많은 노인들은 어떤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자기의 경험에 비추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방법을 찾아내는 것을 말합니다.
지혜는 영적, 도덕적 능력을 모두 포함합니다.
명철(테부나)이란? 분별하는 능력
테부나 / תְּבוּנָה
스트롱번호 8394
1. 지식, 2. 욥기 32:11 발음 :테부나(tebûwnâh) 어원 : 99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총명(출 31:3, 왕상 4:29, 겔 28:4), 분별력(신 32:28), 명철(욥 12:12, 시 49:3,
잠 2:2), 지혜(욥 26:12, 시 136:5), 통달(사 40:14), 지각(옵 1:7). 능숙함(시 78:72, 호 13:2). [형]
명철한(잠 10:23, 20:5) 구약 성경 : 42회 사용
잠언 2:2 /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turning your ear to wisdom and applying your heart to understanding.
모양이 같은 쇠뭉치를 보고 어떤 사람은 그것이 납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것을 고철이라고 합니다. 정확한 구별을 위하여 자석을 사용하듯이 명철이란 사물을 보고 그 본질을 정확하게 분별하는 것을 말합니다.
“호크마”를 ‘지혜’, “비나”를 ‘지식’, “테부나”를 ‘명철’ 이 단어들은 동사형 명사(동사에서 만들어진 명사)라고 보시고 동사의 뜻을 알면 명사의 의미가 풍성해질 것입니다.
“호크마”의 동사형은 “하캄”으로 지혜롭다, 지혜롭게 행동하다는 뜻
“비나”와 “테부나”는 “빈”이라는 동사에서 온 것으로 모양은 판이하나 히브리어에서 어미나 접두어를 붙여서 명사로 만든다고 보시면 이해가 쉬울 듯
동사 “빈”이란 의미는 ~사이를 식별(구별)하다는 의미로서 즉 구별하고 식별할 수 있으니 지식이나 이해 혹은 깨달음 등으로 될 수 있을 것이고 통찰력이 있어야 되는 문제이니 명철로 더 나아가 지혜로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하캄”과 “빈”은 내용을 들여다보면 동의어에 가깝습니다. 우리말에선 식별과 지혜는 별개처럼 정의 되지만...
통상적으로 어떤 단어를 얘기할 때 ‘이것이다’라고 번역하지만 여러 뜻이 있고 심지어 우리말의 하나의 단어에서 여러 의미가 있듯이... 그래서 문맥 안에서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아들아! [1~4절]까지 만약~ 한다면, [5절]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5절을 사역하면 “여호와의 경외를 구별할(빈) 것이고 // 하나님의 지식을 찾을 것이다”
결국 역으로 말하면 1장의 내용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머리,시작)이어늘 (1:7)
이는 먼저 여호와 경외 곧 하나님 지식을 찾음으로 파생되는 모든 것 즉 지혜, 지식, 명철 등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실 때 특히 시편이나 잠언 등에서 자세히 보시면 단어나 문장 두 개를 나란히 놓습니다. 반복 구절처럼 놓는데
그들의 특성입니다. 이렇게 하므로 뜻을 풍성히 하거나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는 두 개의 내용을 함축하는 것으로써 각자의 뜻으로
보는 게 아니라 서로 잡아주어 하나의 내용으로 보셔야 합니다.
[2절]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3절] 지식을 불러 구하며 //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5절] 여호와의 경외와 하나님의 지식도 나란히 놓였음을 볼 수 있고...
그러므로 여기서 지혜와 지식과 명철은 위에 언급된 것처럼 개별적이나 서로 합하여 풍성과 강조를 더한 하나의 뜻으로 보아야 할 듯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지혜는 사건의 해결 능력
우리가 이 세상의 유혹이나 삶의 문제들 앞에서 넘어지지 않고 승리해 나갈 수 있는
지혜는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옵니다.
명철(insight or understanding)은 사물에 대한 통찰력과 이해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묵상할 때” 명철함이 스승보다 그리고 노인보다 더 뛰어나다고 말합니다(시 119:
99-100).
스승은 세속적 지식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세상 지식은 영적
지식과는 다릅니다. 아무리 세상의 박사 학위를 가진 자도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십자가의 구속과 복음에 대한 영적인 일을 이해할 수
없지만, 초등학교 밖에 안 나온 크리스천이라도 성령님께서 깨우치시면 복음의 깊은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노인은 이
세상의 갖가지 경험을 다 한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세에 밝고 인생사는 법을 잘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고 묵상하는 사람은 공부를 많이 한 스승보다, 지혜와 명철이 뛰어났던 것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창
41:39). 다니엘과 세 친구는 바벨론의 모든 자보다 모든 학문과 재주 뿐 아니라 지혜와 총명이 훨씬 뛰어났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외과 의사이며 "Think Big"(크게 생각하라)의
저자인 벤 카슨은 학창 시절부터 매일 잠언을 하루에 1장씩 읽었다고 합니다. 잠언을 읽으면 삶의 참된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는 “140억개의 뇌세포는 우리가 마주치는 모든 것을 수용한다”고 말하면서 어떤 것을 뇌에 입력하느냐가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저속적인 책들이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는 세상적인 대중매체를 입력하느냐,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뇌 속에 입력하느냐
하는 것은 어떤 인생을 사느냐를 좌우하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많은 지식보다 또 어떤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지혜와
명철입니다. 이러한 지혜와 명철을 갖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마음속에 내면화해야 합니다.
지혜는 상황에 맞게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잠언 9:10) -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wisdom, and knowledge of the Holy One is understanding. 지식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잠언 1:7) -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knowledge, but fools despise wisdom and discipline.
명철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예레미야 9:24) -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찌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but let him who boasts boast about this: that he understands and knows me, that I am the LORD, who exercises kindness, justice and righteousness on earth, for in these I delight," declares the LORD.
관찰,
경험, 반성에 의해 얻어지는, 적절한 생활에 대한 지식과 감정을 말한다.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며(고전 2:6,7), 머릿속
지식이 아니라 행동으로 이어져야 하는 총체적 삶의 양식으로, 하나님에의 신앙과 복종을 지혜의 중심으로 생각했다(시 111:10;
잠 1:7,9:10).
①. 습득한 지식을 이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②. 미래형(未來形)이다. ③.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을 통하여 얻는다(잠 8:12)
발음
/ 후포(hüpŏ) 관련 성경 / «속격» 의하여, 말미암아(마 1:22, 눅 2:18) «대격» 아래, 밑에(마 8:9, 행 4:12) 신약 성경 / 220회 사용
* 히스테미(서게하다) 2476
ἵστημι
1. 놓다, 2. 세우다, 3. 내세우다
발음
/ 히스테미(histēmi) 관련 성경 / 서다(마 2:9, 막 9:1, 요 1:35), 세우다(마 4:5, 행 6:6, 롬 3:31), 데리고 가다(마 18:16), 서
있다(마 20:6), 두다(마 25:33), 멈추다(행 8:38), 작정하다(행 17:31), 그대로 두다(고전 7:37),
확정하다(고후 13:1), 대적하다(엡 6:13), 앉다(약 2:3), 일어서다(계 11:11)신약 성경 / 154회 사용
* 후포스타시스 - 아래에 서게하다 즉 받침대를 의미한다. 꽃을 위한 받침대, 책을 위한 받침대, 이렇게 발전하여 믿음을 위한 받침대가 곧 후포스타시스로 실상(실체)이라고 하겠다.
후포스타시스 /
“삼위일체”에서 ‘위(位)’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후포스타시스’라는 용어의 주가를 높여놓은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보통 ‘실체(實體)’로 번역됩니다. 그래서 삼위일체에서 ‘체(體)’에 상응하는 용어일 것 같은데요, 아닙니다. ‘체’에 상응하는 용어는 ‘우시아’입니다. 이때 우시아는 “본질”을 의미하지요. 삼위일체에 상응하는 그리스어 용어를 그대로 풀어내자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은 각각 다른 분이나 본질적으로는 같은 분이시다”
‘본질’은 무엇이고 ‘같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후속 논의가 여전히 남아있지만 신학자가 아닌 우리들은 사변적인 영역에 들어가지 말고“일체”를 간단히 “통일체”로 이해하고 신앙생활하는 것이 유익하다.
‘실상’이 바로 ‘휘포스타시스’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이다”
우리나라 말이지만 여전히 미궁 속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성경 번역은 기본 의미가 아닌, 파생적 의미에서 해법을 찾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휘포스타시스에는 동적인 개념이 들어있는데 이 점을 드러낼 때는 “실체”가 아닌 “기체”(基體)로 번역합니다. 어떤 것을 형성하고 완성하는 출발점 내지 토대라고 할까요? 이러한 방향으로 해석하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는 이런 뜻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을 실현해가는 토대와 같은 것이다”
믿음의 행위의 하나인 기도를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다 아시는데 왜 기도로 아뢰어야 합니까?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역사(役事)의 재료(토대)가 된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전자는 “확신” 비슷한 의미로, 후자는 “증거” 비슷한 의미로 번역합니다. 객관성과 관련 있는 “증거”(엘렝코스)로 번역했을 때 이 구절이 말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상반절이 형이상학 개념과 관련되어 있다면 하반절은 인식론 개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애초 믿음에는 주관성이 강해서 객관성이 강한 ‘증거’과 연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생물학에서 세포핵을 관찰할 때 염색을 하지요. 그렇게 보이게 된 세포핵은 엄격히 말해 원래 세포핵은 아닙니다. “염색약에 물든 세포핵”이지요. 하지만 이것은 세포핵에 대한 증거가 되지요.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는 것도 비슷합니다. 믿음이라는 염색약이 들어갔지만 염색약 같은 믿음도 증거의 요소가 되지요.
삼위일체에 관하여 성경은 무엇을 가르치는가? 삼위일체는 성경적인 교리인가? 기독교의
삼위일체 개념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그것을 완벽하고 충분하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는 설명은
고사하고 그것을 완벽하게 이해하기가 불가능한 개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존재 방식은 우리와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보다 한없이 위대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기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아버지,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 모두 하나님이시라고 가르칩니다. 성경은 또한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라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삼위일체 내의 서로 다른 위격(인격)들의 관계에 대해 몇 가지 사실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그것은 인간의 생각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삼위일체가 사실이 아니거나 성경의
가르침을 근거로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삼위일체는
한 하나님께서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세 하나님을 제안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기 바랍니다. 이
주제를 공부할 때, “삼위일체”라는 단어가 성서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단어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이 용어는 세 위격의 하나님을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된 것입니다. 세 위격은 같이 공존하시고, 함께 영원하신 위격들로서 한 하나님을 구성하십니다. 진짜 중요한
점은 “삼위일체”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개념은 성경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삼위일체에 대해 언급하는
내용들입니다.
1.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신 6:4; 고전 8:4; 갈 3:20; 딤전 2:5).
2. 삼위일체는 세 위격들로 구성됩니다(창 1:1, 26; 3:22; 11:7; 사 6:8, 48:16, 61; 마 3:16-17, 28:19; 고후 13:14).
창세기
1장 1절에서, 복수형의 히브리어 “엘로힘”(Elohim)이 사용되었습니다. 창세기 1장 26절, 3장 22절, 11장 7절,
그리고 이사야 6장 8절에서, 복수 인칭 대명사인 “우리”가 사용되었습니다. ‘엘로힘’(하나님들)이라는 단어나 인칭 대명사
“우리들”은 복수 형태인데, 두 개 이상의 것들을 분명하게 지칭하는 히브리어입니다. 이것이 삼위일체에 대한 명쾌한 주장은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복수적 측면을 나타내줍니다. 하나님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 ‘엘로힘’은 명확하게 삼위일체 개념을 허용합니다.
이사야
48장 16절과 61장 1절에서, 아들은 아버지와 성령에 대해 언급합니다. 이사야 61장1절을 누가복음 4장 14-19절과
비교해 보십시오.
마태복음 3장 16-17절은 예수님의 세례 사건을 묘사합니다. 이 구절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성부 하나님께서
아들을 기뻐하신다고 선포하시는 동안 성령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 위에 강림하십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과 고린도후서 13장
14절은 삼위일체 내에서 서로 구별되는 세 위격을 보여주는 예가 됩니다.
신약에서 예수께서는 보혜사(돕는 분)이신 성령님을
보내시는 것에 대하여 아버님께 말씀드리십니다(요 14:16-17). 이는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아버지나 성령으로 여기지
않으셨음을 보여줍니다. 이 외에,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아버지께 말씀하시는 모든 다른 경우들을 살펴보기 바랍니다. 그분(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삼위일체의 다른 분이신(다른 위격이신) 아버지께 말씀하셨습니다.
4. 삼위일체의 세 위는 하나님입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이십니다(요 6:27; 롬 1:7; 벧전 1:2). 아들은 하나님이십니다(요 1:1, 14; 골 2:9; 히 1:8; 요일 5:20). 성령은 하나님이십니다(행 5:3-4; 고전 3:16).
5. 삼위일체의 세 위는 긴밀한 관계입니다.
성부는
다른 위에서 발생하지 않았으며, 성자는 성부로 부터 영원히 발생하셨으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 부터 영원히
방출하셨습니다.이것은 내부의 관계로서 삼위일체 그 어느 분의 신성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유한한 우리의 마음으로
무한하신 하나님에 관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아들에 관한 참조로는 누가복음 22:42, 요한복음 5:36, 그리고 요한일서
4:14을 보십시오. 성령에 관한 참조로는 요한복음 14:16, 14:26, 15:26, 16:7, 그리고 특히 요한복음
16:13-14)을 보십시오.
6. 삼위일체의 세 위는 서로 다른 과업들을 갖습니다.
성부는
우주 생성의 궁극적 원천 또는 원인(고전 8:6; 계 4:11)이시며, 하나님의 계시(계 1:1), 구원(요 3:16-17),
그리고 예수님의 인간으로서의 사역들(요 5:17. 14:10)의 궁극적인 원인이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일들을 일으키십니다.
성자는
성부께서 다음과 같은 일들을 하실 때의 대리자이십니다. 우주의 창조와 보전(고전 8:6; 요 1:3; 골 1:16-17);
하나님의 계시(요 1:1, 16:12-15; 마 11:27; 계 1:1), 그리고 구원(고후 5:19; 마 1:21; 요
4:42). 아버지는 그의 대리자 역할을 하는 아들을 통하여 이 모든 일들을 수행하십니다.
성령은
성부께서 다음과 같은 일들을 수행하시는 수단입니다. 우주의 창조와 보전(창 1:2; 욥 26:13; 시 104:30); 하나님의
계시(요 16:12-15; 엡 3:5; 벧후 1:21); 구원(요 3:6; 디도서 3:5; 벧전 1:2);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들(사 61:1; 행 10:38). 따라서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일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수행하십니다.
삼위일체를
실례를 들어 설명하려는 많은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중적인 설명은 그 어떤 것도 완전히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계란(또는 사과)의 예에서, 껍질, 과육, 그리고 씨앗이 사과의 부분이며 사과 자체가 아닌 것처럼, 또는 달걀의 예에서 껍질,
흰자, 그리고 노른자는 달걀의 부분이며 계란 그 자체는 아니라는 점에서 삼위일체를 설명하지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하나님의
부분들이 아니며 또한 그들 각각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러한 설명은 삼위일체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없습니다.
물의 실례는 다소
나아 보이지만, 여전히 삼위일체를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액체, 기체, 그리고 얼음은 물의 형태들입니다.
아버님, 아들,
그리고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형태들이 아닌, 각자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이러한 실례들이 삼위일체의 그림을 제공할지는 몰라도, 그
그림은 완전히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은 한정적인 실례에 의해 온전히 묘사될 수 없으십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 교회의 역사를 통틀어 분열을 초래하는 쟁점이었습니다. 삼위일체의 핵심적 측면이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에 제시되어 있지만, 몇 가지 부차적인 쟁점들은 명쾌하게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이시고, 아들도 하나님이시고, 성령도 하나님이시지만, 오직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만 존재하십니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성경적 교리입니다.
이
사실 외에서의 쟁점들은 어느 정도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본질 부분은 아닙니다. 우리의 한정된 생각으로 삼위일체를 완전히
정의하려고 하는 것 보다는,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무한하게 높으신 그분의 본성에 초점을 맞추며 섬기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로마서 11:33-34).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삼위엘체라는 개념과 기능은 분명히 성경적인 근거를 갖는다.
삼위일체(三位一體)
1. 삼위일체의 용어와 형성
이단들은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성경에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성경에 없다. 그러나 삼위일체라는 개념과 그 용어는 분명히 성경적인 근거를 갖는다.
성경은 하나님이 유일하신 한분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에 대해서 분명히 하나님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삼위하나님은 상호교류와 상호구별된다는 성경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이것을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성경 기록을 그대로 요약하고 정리하는 가운데 삼위일체라는 이론이 정립되어진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공동번역] 그 아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란한 빛이시요, 하느님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하신 분이시며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인간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셨고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표준새번역] 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요, 하나님의 본바탕의 본보기이시요, 자기의 능력 있는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죄를 깨끗하게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현대인의성경] 그 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며 하나님의 본성을 그대로 나타내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능력 있는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며 죄를 깨끗게 하시고 하늘에 계시는 위대하신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개역]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휘포스타시스)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KJV] Who being the brightness of [his] glory, and the express image of his person, and
upholding all things by the word of his power, when he had by himself
purged our sins, sat down on the right hand of the Majesty on high;
[NIV] The Son is the radiance of God's glory and the exact representation of his being, sustaining
all things by his powerful word. After he had provided purification for
sins, he sat down at the right hand of the Majesty in heaven.
[RSV] He reflects the glory of God and bears the very stamp of his nature, upholding
the universe by his word of power. When he had made purification for
sins, he sat down at the right hand of the Majesty on high,
히브리서 1:3에서 “휘포스타시스”(confidence essence, nature, person)라는 단어가 나타나는데 이 단어의 뜻은 “본질, 본체, 실체, 실상”이라는 뜻을 갖는다. 다시 말하여 예수님은 성부하나님의 “휘포스타시스”인 것이다.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본질은 동일하다는 이 단어가 삼위일체라는 단어를 탄생하게 한다.
이 단어는 단순한 유사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본질이라는 뜻이다. 또한 히브리서 외에도 빌립보서 2:6에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체, 본질임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몰프헤)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몰프헤”라는 단어는 “휘포스타시스”와 동일한 뜻을 가진다. 즉 “본체, 본질, 형상”이라는 뜻이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이시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아니하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본질에서 동등하다는 결론을 갖음으로서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AD 318년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장로 아리우스는 예수그리스도가 "비존재로부터 피조되었으며, 존재하지 않았을 때도 있었다"고 주장하며 유사본질이라고 주장함으로서 알렉산더 감독과 대립하여 초대교회를 분열시켰다.
아리우스 장로는 알렉산드리아교회의 중요한 인물이었는데, 쉽게 말하자면,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고, 예수를 피조물로 보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선조라고 보면 맞다.
알렉산드리아 지방의 주교인 알렉산더감독은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하였으며, 알렉산더 감독이 죽은 후에 그 서기였고 집사였던 아타나시우스가 아리우스를 상대로 힘겨운 토론을 하여 결국 승리를 갖게 된다.
결국 아타나시우스가 예수가 하나님의 동일본질이며, 피조물이 아니라는 것을 토론을 통하여 입증하고 승리함으로서 삼위일체의 초석이 니케야회의를 통하여 정립되었던 것이다.
삼위일체, 바로 알고 계신가요?
1. 요 1:1; 마 3:16-17
삼위일체, 교인이라면 얼마나 귀에 익숙한 어휘입니까? 그런데 솔직히 얼마나
난감한 어휘인지요? 기독교의 핵심적 진리에 속한다는 것은 알지만 막상 설명하라면 말이 막히는 진리, 그것이 ‘삼위일체’란
진리입니다. 그리고 문제는, 설명한다고 하는 많은 기독교인이 삼위일체를 양태론이나 삼신론 식으로 설명한다는 점입니다. 양태론과
삼신론은 모두 삼위일체에 대한 잘못된 이론으로서 실제로 ‘이단’인 이론들입니다.
그렇다면
삼위일체니, 양태론이니 골치 앓을 것 없이 그저 열심히 믿으면 된다고 해야 할까요? 그러나 믿음만 있으면 된다는 태도는 기독교의
건강한 신앙이 항상 ‘믿음의 열정(fervor of faith)’과 ‘진리에 대한 바른 이해(right understanding
of truth)’의 균형에 의해 유지되는 사실과 역행합니다.
이 균형은 정확히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과 ‘진리’의
균형입니다(요 4:24). ‘열심’이라면 이단 추종자들도, 공산주의자도 다 갖는 것인데 그들의 문제는 ‘진리에 대한 이해’가
없다는 점입니다.
‘삼위일체’는 어떤 진리입니까?
삼위일체는 하나님께서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내 보여주신 ‘하나님의 본질적 구조’에
대한 진리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존재구조’ 안에 분명한 ‘세 분’이 계시며, 그 세 분은 깊은 관계성 안에서 ‘한 분’이시라는
것, 그것이 삼위일체입니다. 이러한 삼위일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내어 주신 하나님의 ‘본질적 구조’에 대한 진리이기에 매우
중대한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누구신가를 알려면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하나님 자신에
대한 진리를 우리에게 알려주실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는 (1)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를 위하여
필수이기 때문이며, (2) 기독교인으로서의 ‘바른 삶’을 위하여 필수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는 ‘기독교인으로서의 바른 삶’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합니다.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나타내시고 계시하신 진리 중 필요 없다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정확한 일조량의 햇빛이 지구에 닿게 하셨겠습니까? 지구 위의 생명체들이 그것을 통해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사실을 계시하셨을까요? 믿는 자들이 그 진리를 통해 생명 있는 자들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진리의 내용을 바르게 알려는 ‘진지함’ 없이 그저 자기 생각대로 믿어도 된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고 무지한 고집일 뿐입니다.
성경은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마 5:5). 성경이 말하는 ‘온유’는 배워야 할 것을
배우려는 자세를 포함합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하나님의 삼위일체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라고 물으면
다수의 교인이 ‘유일신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유일신’이라고 하는 순간 그들의 머릿속을 장악하고 있는 생각은
“단독적 주체의 신,” 그저 영원부터 영원까지 ‘싱글’인 신, ‘영원한 솔로’인 신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러한
‘영원한 솔로’로서의 유일신은 정확히 이슬람의 알라신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제 알아볼 것이지만, 성경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러한 ‘영원한 솔로’의 신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그저 ‘단독적 주체’로, 즉 ‘영원한 솔로’로 생각하는 교인은 삼위일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요? 가장 흔한
이해가 삼위일체를 하나님의 ‘세 면(面)’이나 하나님의 ‘세 역할(function)’로 보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아버지,
아들, 성령이란 ‘한 분 하나님’의 ‘세 면,’ 혹은 ‘세 역할’일 뿐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한 남자’가 집에서는 아버지, 직장에서는 과장님, 교회에서는 집사님인 것과 같다는 식의 설명을 들은 적이 있는지요?
마치 한 남자의 ‘원맨쇼’처럼 말입니다. 혹시 주일학교에서 그런 식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본 적이 있는지요? 유감스럽게도 그
‘원맨쇼의 하나님’ 설명은 정확히 ‘이단’에 속하는 이론입니다.
교회사를 보면, 2세기에 사벨리우스(Sabellius)라는
사람이 그런 식으로 삼위일체를 가르쳤습니다. 그는 ‘한 분 하나님’이 구약에는 ‘아버지’로, 신약에는 ‘아들’로, 교회시대에는
‘성령’으로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단독적 주체의 하나님’이 역사 안에서 ‘세 역할’을 했다는 것이지요. 아버지, 아들, 성령을
단순히 한 하나님의 세 면(세 양상, 세 역할)으로 본다고 해서 그의 이론을 ‘양태론(Modalism)’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성경의 삼위일체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교회의 지도자들(교부들)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교회 교부들은
사벨리우스의 양태론을 반(反) 성경적 이단으로 단죄하였습니다(AD 262).
우리는 진정한 삼위일체는 양태론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한 단독적 주체의 신이 ‘세 역할’을 하는 그런 신관이 아닙니다.
성경이 증언하고 교회가 ‘정통’으로 유지해온 삼위일체론에 의하면, 하나님의 존재구조 안에는 참으로 ‘세 분’이 계십니다. ‘세
분’ 아버지, 아들, 성령은 ‘단독적 신’의 세 면이 아니고, 각자가 자신의 주체성(selfhood)을 가지신 분명한 ‘세
주체들(three Persons)’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 대화, 일 등을 나누시는 ‘인격적 관계(personal
relationship)’ 안에 있는 분들이신 것입니다.
아버지, 아들, 성령 각자가 자신의 ‘개별적 정체성’을 가진 ‘주체’시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 마태복음 3장 16-17의
예수님 세례 장면입니다.
이 세례 장면에서 삼위일체 안의 ‘아들(Son)’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위한 세례를
받으십니다. 그런데 거기에 누가 나타나십니까?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또 다른 분이 나타나시는데 하늘의
음성으로 나타나시는 ‘아버지(Father)’이십니다. 주목할 것은, 예수님의 세례 장면에 아버지, 아들, 성령 세 분이
‘동시에(simultaneously)’ 나타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각 분께서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현현(顯現)하여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증거가 사벨리우스의 양태론 이단과 어떻게 다른지 보시는지요? 사벨리우스 말대로 ‘솔로’인 단독신이 어떤
때는 아버지로, 어떤 때는 아들로, 어떤 때는 성령으로 혼자 ‘원맨쇼’를 했다면, 마태 3장에서와 같이 아버지, 아들, 성령이
‘동시에’ 각자의 신분으로 현현(顯現)하실 수는 없겠지요.
이 마태 3장의 예수님 세례 장면은 그래서 양태론이 거짓인 것을
증명하는 중요한 성경 말씀입니다.
이러한 성경적 증거 때문에 2세기의 현명한 교부들이 양태론을 이단으로 단죄했던 것입니다.
양태론에 반(反)하는 다른 성경의 증거들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예수님은 자신과 아버지를 존재적으로 분명하게
구별하십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향해 기도도 하시며(요 17:5), 자신의 뜻과 아버지의 뜻을 구별하시기도 합니다(눅 22:42).
또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셨다는 구절은 성령과 아들(예수님)을 구별하는 말씀입니다(막 1:12).
‘삼위일체’란 언어는 성경에는 없는 언어지만 위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삼위일체의 ‘내용’은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습니다.
‘원죄’라는 말이 성경에 없지만 원죄의 진리가 성경 전체에 흐르듯이 말입니다. ‘성육신’이라는 말이 성경에 없지만 성육신에 대한
진리가 성경 전체에 있듯이 말입니다. ‘삼위일체’란 용어는 3세기의 터툴리안(Tertullian)이 양태론을 반박하기 위하여 처음
사용하였습니다.
주목할 것은, 삼위일체의 진리는 이미 구약에서 힌트와 암시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구약에서 자신의 복수성과
단수성을, 즉 삼위일체적 특징을 나타내셨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주 ‘우리(we, our)’라는 표현을 쓰십니다(창
1:26; 사 6:8). 또한 놀랍게도 ‘하나님’을 뜻하는 히브리어 ‘엘로힘’은 정확히 ‘하나님들’입니다. 즉 단수가 아닌
복수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 1절도 정확히 하면 “태초에 하나님들(엘로힘, Gods)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입니다. 그리고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전 12:1)”는 말씀의 ‘창조주’는 히브리 원어에서 ‘에쓰보레카’로서
‘창조주들(Creators)’입니다. 즉 “창조주들을 기억하라”입니다. 그런데 구약은 하나님이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라는 것도
아울러 강조해 가르칩니다(신 6:4).
자유주의 신학자 중에는 하나님의 복수적 표현인 ‘엘로힘’을 삼위일체와 무관한 것으로
해석하지만, 구약과 신약 전체의 전후관계와 문맥 안에서 볼 때, ‘엘로힘(하나님들)’은 삼위일체적 계시의 용어로 충분히 볼 수
있다는 것이 복음주의 신학의 해석입니다.
요즘 이단들에 대한 경계를 많이 하는데 막상 ‘정통교회’에 속해 있다는 교인은 이슬람의 알라(Allah)신과 성경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적 차이를 모르고 있습니다.
당혹스런 사실이지요. 알고 보면 삼위일체는 기독교 진리의 근본이며 근간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성육신의 진리,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셨다”는 속죄의 진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이시다”라는 기독론적 진리는 모두 삼위일체의 진리에 서 있는 것들입니다.
과연 삼위일체는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위해
가장 근본적이며 중대한 진리인 것입니다. 본 장에서 저는 특히 양태론(Madalism)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아버지, 아들, 성령 각
분이 참으로 서로 구별되는 분들임을 말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 ‘세분들’이 어떻게 ‘한 분’이신지 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2. 신명기 6:4, 요한복음 17:5
하나님의 존재구조 안에 참으로 ‘세 분’이 계시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그 다음의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결국 ‘세 하나님들(three Gods)’을 가르치느냐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단호히 ‘아니오’입니다.
기독교 신학은 ‘세 하나님들’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습니다. 그 표현은 삼신론(tritheism)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삼신론이란
쉽게 말해서 서로 분리된 ‘세 신들’을 말합니다. 즉 각자가 자신의 주체성을 가진 세 신들이 ‘서로 따로 노는’ 식으로 존재한다는
이해의 신론입니다. 따라서 삼신론에서는 만일 한 신이 없어져도 다른 ‘두 신들’의 존재에는 이상이 없습니다. 이러한 삼신론은
정확히 힌두교에서 발견되며(부라마, 비쉬누, 시바), 몰몬교에서도 볼 수 있는 신관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삼위일체는
삼신론과는 전혀 다른 신론임을 이제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독교의 신학은 아버지, 아들, 성령은 분명한 ‘세 분’이시지만 그분들은 ‘함께’ 분명한 ‘한 분’이시기도 하다고 가르칩니다. 즉
3 = 1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역으로 1 = 3임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아버지, 아들, 성령이 ‘분명한 세 분의
주체들’이시면서 동시에 ‘한 분(one)’이시란 말입니까?
‘한 분’이신 분이 어떻게 동시에 ‘세 분’이시라는 것입니까?
삼위일체의 진리는 알고 보면 다양성(diversity)과 일체성(unity)의 관계를 말하는 문제입니다. 주목할 것은 ‘3의
요소(threeness)’가 모여 ‘일체 됨(oneness)’을 이루는 것은, 즉 다양성(diversity)이 일하여
일체성(unity)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 속에 충만히 들어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 만물이
하나님의 능력(power)과 신성(divinity)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합니다(롬 1:20). 바울의 말대로 자연은
하나님의 여러 면 - 하나님의 능력, 지혜, 아름다우심 등 - 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자연이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도 많이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연을 주시해 볼 때 자연 안에는 ‘3의 요소’가 모여 ‘일체성’을 이루는 것으로 차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환경인 ‘3차원
세계’는 물질, 시간, 공간이라는 ‘3 요소’로 되어 있습니다. 우주의 물리적 세계를 지배하는 힘은 강력, 전자기약력,
만유인력으로 되어 있습니다.
요즘 과학자들은 전자기력과 약력을 본질적으로 하나의 힘으로 봅니다.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되어 있으며, 공간은 가로, 세로, 높이로 구성돼 있습니다. 음악에서 장조의 으뜸화음은 도, 미, 솔 ‘세 음’의
화음입니다. 미술에서 물감의 삼원색은 빨강, 노랑, 파랑입니다. 우리의 생태계는 육지, 바다, 대기 3 요소입니다. 이렇게 자연이
‘이상하게’ 3의 요소를 드러내며 그 ‘3의 요소’가 함께 일하여 의미 있는 ‘일체성’을 이루는 것은 단지 우연일까요? 아니면
바울의 말대로 자연이 하나님의 신성(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면일까요?
신학에서 자연이 드러내는 3과 1의 면들을 ‘삼위일체의 유비’라고 합니다. 자연에서 발견되는 삼위일체의 유비들은 결코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정확하게 대변하지는 않습니다. 때로 자연 안의 유비(analogy)를 잘못 사용하여 삼위일체에 대한 곡해를 낳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삼위일체를 물의 기체, 액체, 고체로 설명하거나, 달걀의 노른자, 흰자, 껍질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런
유비로 삼위일체를 설명하면 흔히 양태론적으로 빠져 혼란이 발생합니다. 이러한 유비의 위험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자연 안의 ‘3의
요소’와 그것이 이루는 ‘일체성’의 신비는 삼위일체에 대한 무시할 수 없는 ‘흔적’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다양성’이 모여 ‘일체성’을 이루는 실체를 유기체(organism)라고 합니다. 그라이더(J.
Kenneth Grider) 교수께서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을 ‘유기적 일체성(organic unity)’으로 강조합니다. ‘유기적 일체’의 특징은 한 부분이라도 없으면 ‘전체’가 마비되고 없다는 것입니다. 물질, 시간, 공간 중 하나라도
제거하면 ‘삼차원세계’ 전체가 없어져 버립니다. 육지, 바다, 대기 중 하나라도 없애면 ‘생태계’ 자체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주목할 것은, 하나님의 존재구조에서 아버지(Father), 아들(Son), 성령(Holy Spirit) 각 분은 유기적으로 다른
분들과 관계되고 연결되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재적으로(ontologically) 한 분이 안 계시면 다른 두 분도 계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능적으로(functionally) 한 분의 일은 다른 두 분과의 관계 안에서만 있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세 분’이 ‘한 분’이시라고 할 때 그 ‘한 분’은 유기적 차원에서 ‘한 분’이신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아버지’의 일은 결코 ‘아버지 홀로’의 일이 아니며, ‘아들’의 일도 결코 ‘아들 홀로’의 일이 아닙니다. ‘한 분’의 일은
항상 ‘다른 분들’과 ‘함께’ 이루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창조도 ‘세 분’의 합동적 일이며(창 1:1-28; 요 1:3),
구원의 일도 ‘세 분’이 ‘함께’ 이루신 것입니다(요 3:16).
삼위일체에서 중요한 신학적 용어가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라는 말입니다.
‘페리코레시스’는 ‘돈다(go
round)’는 뜻의 희랍어로서 ‘상호투과,’ 혹은 ‘상호교통’을 의미합니다. 아버지, 아들, 성령 세 분은 존재적으로,
기능적으로 ‘상호 교통’과 ‘상호투과’의 관계에 있다는 진리입니다.
한 예로 육지, 바다, 대기는 서로 ‘상호투과’적 관계에
있습니다. ‘육지’는 대기에서 물을 내려주어 생명을 유지하며, 대기의 물은 바다가 줍니다. 바다는 또 끊임없이 육지로부터 공급을
받습니다. 남자가 여자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룬다는 진리도(창 2:24) 육체적, 정신적으로 서로 주고받으며 하나 되는
‘상호투과’적 진리입니다. 나무의 뿌리, 줄기, 잎에서 각 부분은 다른 부분과 연결되어서만 자신의 정체성을 갖습니다. (‘나무’의
예는 양태론적으로 이해되기 쉬워 조심해야 합니다) 삼위일체에서 아버지, 아들, 성령 ‘각 분’은 ‘따로 분리된’ 분이 아니고 항상
유기적으로 다른 ‘두 분’의 본질을 나누어 받아 자신의 정체성을 갖는 분입니다. 중세의 현명한 신학자들은 그래서 삼위일체를
나타내는 도형을 그렸습니다.
위의 도형에서 외곽선은 두 분 사이의 ‘구별’의 선입니다. 즉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영어 “IS NOT"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것은 “아버지는 아들이 아니시다,” 혹은 “아들은 아버지가 아니시다”를 뜻합니다. 그러나 내부의 선은 ‘동일화’의 선입니다.
본질에서 ‘하나님’이시라는 점에서 모든 분들이 “IS," 즉 “하나님이시다”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도형은 한 편으로는 양태론을
피하며 다른 편으로는 삼신론을 피하는 좋은 도형입니다. ‘셰마(들으라)’라고 하는 신명기 6장 4절은 놀랍게도 하나님의 복수성과
단수성을 모두 천명하는 구절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엘로힘’으로서 ‘하나님들’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우리 ‘하나님들(복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단수)”라는
선언입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존재구조는 이처럼 ‘분명한 3분’께서 유기적으로, 페리코레스적으로 연결되시어 ‘분명한 한 분’을 이루고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한 분 되심’은 ‘도’라는 단순한 단수의 하나가 아니고 ‘도’와 ‘미’와 ‘솔’이라는 다양성이
만들고 있는 ‘풍요한 하나 됨’의 한 분 되심입니다.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피아노 건반에서 도, 미, 솔 ‘세 음’을
함께 쳐 화음을 들려줍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 소리는 하나입니까, 여럿입니까?”하고 묻습니다. 눈치가 빠른 분은 “둘
다입니다”하고 대답을 하지요. (완전한 유비는 아니지만 도움이 됩니다) 아버지, 아들, 성령 세 분이 함께 ‘풍요한 한 분’을
이루고 계신 진리는 놀랍기만 합니다. ‘아들’ 예수께서는 그래서 영원부터 영원까지의 삼위적 영광을 함축하는 기도를 아버지께
하십니다: “아버지, 세상이 있기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누렸던 그 영광으로 지금 아버지 앞에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소서(요
17:5).”
삼위일체가 얼마나 중대한 성경의 하나님에 대한 진리인지 ‘감’을 좀 잡으셨는지요? 삼위일체의 진리는 기독교의 신관을 이슬람의
단독주체적 신관과 구별되게 하며, 모든 이단들의 잘못된 신관과 구별되게 하는 중대한 성경의 진리입니다. 이단들의 공통적 특징은
‘모두’ 성경적 삼위일체론에 서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증인은 단독유일신을 주장하며, ‘지방교회’라는 이단은 양태론을
가르칩니다. 몰몬교는 삼신론적 신관을 갖고 있습니다. 이제 다음 글로 삼위일체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3. 요한복음 3:16, 요한일서 4:16
교회의
삼위일체론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요? 머리 좋은 신학자들이 원탁에 둘러앉아 짜낸 이론인가요?
신학자 몰트만(Jurgen
Moltmann)은 삼위일체에 대한 결정적 계시자는 다른 분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지적했습니다. 구약에서 이미 암시적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복수성과 단수성(삼위일체의 본질), 그것의 의미를 예수께서 오셔서 밝히 드러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누구십니까?
예수는 삼위일체의 한 멤버이십니다. 삼위일체에서 ‘아들(Son)’이신 분입니다. 삼위일체는 말하자면 삼위일체의 멤버이신 분이
세상에 오시어 드러내 주신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아버지(Father)’의 존재를 분명하게 해 주셨고, 예수님 자신이 ‘아들(Son)’이심을 밝히셨고, 보혜사 성령(Holy Spirit)을 소개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이 삼위일체이심을 명백하게 알게 된 것입니다.
몰트만(Moltmann)은 그래서 삼위일체에 대한 바른 이해는 예수 그리스도에서 출발하여야만 옳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한
분’보다는 ‘세 분’에서 시작하는 이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는 누구십니까?
그는 태초부터 하나님의 삼위일체 존재구조에서 ‘아들 하나님(God the Son)’으로 계신
분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님을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창조의 일을 누가 하셨느냐고 하면 어떤 사람은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아들’이신 예수님도 창조의 일을 하셨음을 분명히 합니다(요 1:3). 성령께서도 자신의
몫을 하셨습니다(창 1:2). 창조는 아버지, 아들, 성령 삼위의 ‘합작’입니다.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살리는 ‘구원의 일’도
역시 삼위(三位)의 합동적 일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구절인데 놀랍게도 삼위일체적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 보내시는 아버지(Sender) 독생자를 주셨으니 ------------------- 보내심을 받은 아들(The Sent)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 믿도록 돕는 성령(Helper)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라 -----> 삼위일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축복)
기독교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진술의 의미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여기서 ‘인간이 되신 하나님’은 ‘아버지,
아들, 성령’ 세 분 전부가 아닙니다. 여기서 ‘인간이 되신 하나님’은 ‘아들 하나님(God the Son)’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고 할 때, 그 ‘인간이 되신’ 주인공은 ‘아들 하나님’이십니다. 그 ‘아들’도 분명한 하나님이시기에(요
1:2)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진술은 참인 것입니다. 그 아들이 인간이 되신 것은 ‘아버지’가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구원의 일을 완성하실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도우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일”은 역시 아버지, 아들, 성령 세 분의 합동적 일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16)”고 선포합니다. 이 선포가 삼위일체와 직결된 중대한 진리임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몰트만(Moltmann)은 하나님이 오직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시기에 이러한 선언이 가능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사랑이시라”는 말의
시제는 현재형인데 이 현재형은 영원성을 함축합니다. 즉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도 하나님은 본질에서 사랑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아버지, 아들, 성령 사이의 사랑입니다. 몰트만(Moltmann)은 절대유일적 신은 본질에서 사랑일 수 없음을 지적합니다.
왜냐하면 이슬람의 알라(Allah)같은 절대유일신은 창조 전에 ‘홀로’이기에 사랑할 대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한다면 자기
자신을 해야 하는데 그것은 나르시시즘(narcissism), 즉 ‘자기애’ 이상이 되지 못합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참 창조주
삼위일체 하나님은 본질에서 사랑이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절대 단독자가 아니고 삼위일체시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가 창조하신 세상을 움직이는 중요한 원칙이기도 합니다. 동물들의 본능 속에 심어져 있는 ‘사랑의 원리’는 매우 놀랍습니다.
단단한 호두껍질은 마치 ‘사랑’처럼 속 알갱이를 보호해 줍니다. 태양열은 ‘사랑’처럼 적당한 온기로 우리에게 내리쬐어 줍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인간 피조물 안에는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긍휼의 힘’이 있습니다!
알고 보면 삼위일체의 사실은 기독교의 모든 중대한 진리들의 근거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성육신(incarnation)’은 삼위일체 없이 설명이 안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대속(代贖)의
힘’을 가진 십자가라는 것도 삼위일체를 통해서만 사실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의 십자가도
대속(代贖)의 십자가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고찰했듯이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것도 삼위일체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진리입니다. 기독교가 선포하는 복음, 그것은 오직 구원이 삼위일체의 합작이기에 있을 수 있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신 분이 ‘하나님 자신’이시라는 사실이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낮춤의
하나님’이시며, ‘희생의 하나님’이시며, ‘긍휼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삼위일체가 사실이 아니면 십자가를 중심으로 한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이해들이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삼위일체를 가르치다 보면 받게 되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 아들, 성령 세 분이 모두 하나님의 신분을 가진 분이라면
어느 분에게 우리가 기도를 해야 하느냐는 질문입니다. 제가 언급했던 그라이더(J. K. Grider)교수께서 정확히 이 문제를
수업시간에 다루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분의 강의와 또 제가 그 후 공부한 내용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엄밀히 아버지, 아들, 성령
모두 하나님이시기에 어떤 분에게 기도해도 신학적 오류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공중기도를 할 때는 흔히 아버지, 하나님, 주님
등의 좀 더 대표적이며 포괄적인 명칭이 적절하다고 보겠습니다. 개인적 기도에서는 이러한 명칭들 외에 ‘예수님’께 직접 기도를
하는 것도 좋습니다. 인간이 되어 오신 중보자가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때 ‘성령’을 부르며 기도하는 일은 드문데 실제로
성령님께 기도하는 것이 잘못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역할은 ‘아버지’와 ‘아들’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일이기에
성령님은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을 부르는 것으로 만족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할 때는 실상 삼위일체 전체를
대상화하는 것이기에 성령님도 포함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특정한 분에게 기도하던지 간에 궁극적으로는 항상 ‘삼위(三位)’
전체께 기도를 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를 부르며 기도할 때 우리는 이미 ‘아들’을 통하여, ‘성령’ 안에서
아버지를 부르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 기도를 할 때, 우리는 이미 ‘아들을 보내주신 아버지’에 대한 감사 안에서 그 기도를
하는 것이며, 또 성령의 도움으로 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분을 부르며 기도할 때 다른 분들이 섭섭하실까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요. 어떤 분에게 기도를 드리던지 기독교의 기도는 항상 ‘삼위일체 하나님’ 전체께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에 관한 다른 질문은 아버지, 아들, 성령 사이에 어떤 위계질서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현재 복음주의의
어떤 신학자들은 삼위(三位)의 존재적 동등설을 주장합니다. 즉 아버지, 아들, 성령 사이에 지위적으로 높낮이가 전혀 없다는
관입니다. 그러나 어떤 신학자들은 ‘지위의 차이’를 주장합니다. 그들은 아버지, 아들, 성령 세 분은 ‘하나님의 신분’이라는
점에서는 동등하지만, 위계질서에서 ‘아버지’의 우선됨(the primacy of the Father)이 있다고 합니다. 즉
‘아버지’가 삼위일체 안에서 으뜸이시며 지도자급의 존재시라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의 증거가 ‘위계질서의 실재’ 쪽으로 더 강하게
말하고 있다고 보는 신학자입니다. ‘아들’ 예수께서 항상 아버지의 지도력과 권위를 인정하신 것이 한 증거입니다. ‘아들’께서 역사
안에 오시어 분명하게 하신 것이 인간의 ‘불순종의 역사’를 깨고 ‘순종의 역사’를 시작하신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정확히 ‘불순종의 아들들’의 자리에서 떠나 ‘순종의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은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을 천명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우선성에 대한 성경의 증거라고 봅니다.
삼위일체의 진리는 하나님 자신께서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 자신에 대한 ‘놀라운 사실’입니다.
삼위일체는 그저 이론적 유희나 즐기라고 주신 지식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삼위일체의 진리를 알게 될 때, 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참으로 우리의 기쁨과 힘과 생명이 되도록 하나님은 이 진리를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이해를 통해 우리는
나 같은 죄인을 위해 하나님께서 참으로 인간이 되신 것을 압니다. 그 하나님께서 참으로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을 압니다.
이런 깨달음과 반응이 우리의 마음 중심에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삼위일체의 영광을 우리에게 드러내 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다소 길게 3차례에 걸쳐 삼위일체의 진리를 설명하였습니다. 이러한 저의 ‘노력’은 삼위일체 진리의 중요성에 대한 저의
인식 때문입니다. 모쪼록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의 생각 속에 성경의 삼위일체 진리가 새로운 이해로 뿌리내리기를 바라며, 또한 그
이해와 함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감사가 더욱 마음속에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목회적 시각으로 본 삼위일체론 교육 - 기독교강요 1권 13장을 중심으로-
0. 들어가면서
A. 고대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의 용어 해석(I,13,1-6)
1.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해석
2. 삼위에 대한 해석
3. 새로운 신학적 용어들의 필요성과 한계
B. 성자와 성령의 인격과 신성
1. 성자의 인격과 신성
a. 성자의 인격
b. 성자의 신성
2. 성령의 인격과 신성
3. 삼위의 구별성과 일체성(16-20)
a. 한 분 하나님
b. 삼위이신 하나님
C. 칼빈의 삼위일체론 대적들(21-29)
1. 세르베투스
a. 세르베투스는 위격(位格)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b. 세르베투스는 범신론적인 오류에 빠졌다
2. Valentinum Gentilem
a. 성부만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
b. 이들은 성자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c. 이들은 성부와 성자의 차이점을 신성의 양으로 구별한다
d. 칼빈의 반격
D. 나가면서
0. 들어가면서
기독교인들이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왜 중요할까? 첫째는 성경의 하나님을 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믿는다는 것은 우상숭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인간은 자기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 이해에 따라 그들의 삶의 양식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는 일과 하나님의 백성답게 하는 일은 같이 가기 때문이다. 특별히 고도의 사고(思考)를 요구하는 삼위일체론은 그 지역 기독교인들의 삶의 양태를 결정하는 것이다.
한국교회 성도들이 거의 대부분 양태론에 빠져 있다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이다. 그 원인은 교회 지도자들이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피조물 속에서 설명근거를 가져와서 설명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즉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피조물에서 예를 가져와 설명을 시도하다가 결국 양태론에 빠졌다는 말이다. 후론하겠거니와 칼빈은 이런 시도의 위험을 간파하고 자신은 그렇게 설명하지 않는다고 했다. 말하자면 한국 기독교인들은 상당한 부분 삼위일체 하나님을 왜곡되게 이해하고 있거나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데서는 기독교인으로서 바른 정체성을 기대하기가 힘들다. 인간 이성으로 하나님을 정확하게 이해한다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다. 작은 인간 이성으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크신 하나님을 모두 파악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런 무리한 시도는 결국 인간이 하나님을 정의하고 심판하는 오류에 빠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 최소한 성경이 계시하는 내용을 바로 이해해 보려는 자세는 요구되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마술신앙에 빠진 한국교인들은 이런 일에 태만히 한 것이다.
칼빈이 삼위일체를 설명한 내용으로 보면 그가 성도들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한 것을 볼 수 있다. 크게는 칼빈의 기독교강요 자체는 삼위일체를 가르치는 교과서로 볼 수 있다. 그는 사도신경의 구조를 본받아 기독교강요를 삼위일체론적으로 형성했다. 제 1권은 창조주 하나님을, 제 2권은 구속주(救贖主) 하나님을, 제 3장은 구속을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성령 하나님을 다룬다.
우리의 관심은 칼빈이 좁은 의미에서 삼위일체론을 어떻게 이해했고 또 어떻게 설명했는가 하는 것이다. 칼빈의 신관은 기독교강요 제 1권 10장에서 13장까지 인데, 10-12장까지의 내용은 13장에 나오는 삼위일체론의 양의 절반을 조금 넘는다.이것은 칼빈이 신론을 설명하면서 삼위일체론에 관심을 집중시켰음을 의미한다. 그는 여기서 먼저 고대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을 정리하면서 자기 나름대로 삼위일체론을 설명하고(I,13,1-6) 그 다음 그는 성경의 증거에 근거하여 성자와 성령의 신격과 신성을 설명한다(I,13,7-13).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삼위일체론의 대적들을 비판하면서 다시 바른 삼위일체론을 설명한다(I,13,14-29). 그가 이 교리를 설명하는 내용을 보면 성도들이 이해하기에 쉽도록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는 목회적인 시각으로 삼위일체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또
칼빈이 기독교강요에서 삼위일체론을 열거한 과정은 그의 교육방법을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A. 고대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의 용어 해석(I,13,1-6)
칼빈은 먼저 고대 교부들의 삼위체론을 간단히 점검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고대교부들이 삼위일체론을 설명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언급한 용어는 ‘하나님의 본질’, ‘삼위’, ‘위격’ 등이다. 칼빈은 이런 용어들을 차례로 설명하면서 한편으로는 고대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을 점거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성경 구절에 근거하여 그 내용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1.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해석
그러면 칼빈은 ‘하나님의 본질’(essentia Dei)을 어떻게 설명할까? 우리는 그가 두 가지로 설명함을 볼 수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이 하나님은 인격(人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건전한 상태로 지키시기 위하여 그의 본질에 대해서는 별로 말씀하시지 않으시지만,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속성들로써 인간의 어리석은 상상을 모두 제거하시고 또한 인간의 마음의 대담무쌍함을 억제하시는 것이다”(I,13,1). 물론 칼빈은 여기서 ‘하나님이 인격이시다’라는 말을 직접 표현하지는 않는다. 칼빈이 여기서 하나님의 동작과 행위를 표현한 것을 보면 그가 인격임이 드러나는 것이다. 즉 칼빈은 하나님이 인격이심을 전제하고 하나님의 본질을 설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런 인격성은 ‘하나님의 적응성’을 설명하면서도 드러난다. “유모가 어린 아기들을 대할 때에 흔히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렇게 우리에게 맞추어서 말씀하신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만큼 그렇게 지능이 모자라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주목할 만한 것은 칼빈이 여기서 세속 철학의 비인격적인 범신론을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옛날 어떤 사람은 ‘우리가 보든 것이든, 보지 못하는 것이든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다’라고 매우 그럴듯해 보이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는 신성이 세계의 모든 개체에 주입되어 있다는 식으로 상상했다”
그 다음 칼빈은 하나님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의 속성을 두 가지 언급한다. 그것은 ‘무한하심’(immesitas)과 ‘영적임’(spiritualis natura)이다. “하나님의 무한하심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잣대로 그를 재지 못하도록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며, 또한 그가 영이시라는 사실은 그에 관한 어떤 세속적이며 육신적인 상상에 빠지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칼빈은 이런 하나님은 인간이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분이심을 말하는 동시에 그의 편재성을 말하여 인간 이성의 한계를 벗어난 분임을 지적한다. 이 설명 속에서도 하나님은 인격이심을 암시한다.
요컨대 칼빈은 하나님의 본질을 설명하면서 그가 인격이라는 것과 그는 인간의 이성의 능력을 벗어난 무한하신 분임을 지적한 것이다. 즉 그는 하나님이 인간 이성을 초월하는 크신 분임을 독자들에게 인식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술신앙에 빠져 하나님을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용하는 미성숙한 교인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것이다.
2. 삼위에 대한 해석
칼빈은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 설명한 다음 하나님은 한 분이지만 이 하나님은 구별된 삼위로 존재하심을 설명한다. “그는 자신을 유일하신 한 분으로 선언하시는 한편, 동시에 세 분의 위격으로(삼위로) 구별되게 바라보도록 그렇게 자신을 계시하신다” 칼빈은 이 같은 사실을 ‘하나님 안에 세 본체가 계신다’라고도 표현한다.
그 다음 칼빈은 세 분이 구별된 분임을 설명한다. 우선 그는 성부와 성자는 구별됨을 설명한다. 그는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은 “그 본체의 형상”이라고 말씀하는 히브리서 1:3을 인용한다. 그는 이런 표현 속에는 성자와는 다른 어떤 특질이 성부에게 있음을 의미한다고 말하여 이 두 분은 구별됨을 지적한다. 그러면 성부와 성자는 어떤 관계에 놓여 있을까? 칼빈은 성자 안에서 성부가 자신을 온전히 표현한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이 두 사이의 관계를 설명한다. “그러나 성부께서는 비록 그가 그의 고유한 특성을 통해 아들과 구별되지만 성자 안에서 전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셨기 때문에, 그가 성자 안에서 자신의 본체를 나타내셨다고 주장하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된다.” 위의 내용을 도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칼빈은 성령 역시 성부와 구별되는 분임을 지적한다. “그가 성부와 다른 분이신 것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는 여기서 성령과 성부의 구별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성령은 하나님인 동시에 이 하나님 안에 있는 세 본체 가운데 하나임을 말한다.
이와 연관하여 칼빈은 고대 교부들의 ‘위격’ 내지 ‘본체’ 이해를 설명하면서 동방 교부들과 서방 교부들은 이 점에서 일치함을 지적한다. 칼빈에 의하면 라틴 교부들은 ‘위격’이라는 말에 persona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그것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subsistentia(실재)이고 희랍 교부들은 ‘하나님 안에 세 얼굴이 계시다’(προσωπα in Deo esse)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그 의미는 동일하다고 한다(I,13,2).
지금까지 내용을 도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신약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성령이 성자를 드러낸다면, 결국 성자 뿐 아니라 성자가 반영하는 성부의 본체도 성령 안에서 반영된다고 볼 수 있다. 칼빈은 여기서는 이 문제를 언급하지는 않았다.
3. 새로운 신학적 용어들의 필요성과 한계
칼빈은 ‘삼위일체’, ‘위격’과 같은 용어들을 만들어 성경의 진리를 설명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본다. 특히 대적들에게 대답하려고 할 때 이런 용어들이 매우 유용함을 지적한다. “즉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의 확실한 규범을 성경에서 찾고, 마음의 생각과 입으로부터 나오는 일체의 말을 여기에 순응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고 난해한 성경의 내용들을 보다 명백한 말로 설명하는 것을 누가 못하게 하는가?”(I,13,4). 즉 칼빈은 거짓 교사들을 폭로하기 위해 ‘삼위일체’, ‘위격’과 같은 표현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겼다. 이를테면, 칼빈은 아리우스에 대항하여 ‘호모우시오스’(동일본질)라는 용어가 효과적으로 작용했고 사벨리우스에 대항하여 ‘위격’ 곧 ‘한 분 하나님 안에 삼위가 일체로 계심’이라는 용어가 효과적이었음을 지적한다.
그럼에도 칼빈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한다면 ‘삼위일체’ 또는 ‘위격’이라는 용어는 잊혀져도 좋다고 생각한다(I,13,5). 말하자면 이런 용어들은 진리를 인식하는데 도구 역할을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용어 문제를 두고 고대의 수많은 교부들은 일치하지 않았음과 이들이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매우 주저하며 신중했음을 지적한다.(Inst I,13,5). 칼빈은 어거스틴도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주저했음을 지적한다. “즉 그는 이와 같은 중대한 문제를 논하기에는 인간의 말이 빈곤하기 때문에 ‘휘포스타시스’라는 용어를 부득불 사용하게 되었으나 이러한 용어로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이시라는 것을 설명할 수 없고, 다만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실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묵과하지 않기 위해 사용한 것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칼빈은 이들이 새로운 용어들을 사용하는 것이 필요함을 인식하도록 설득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고대 교부들이 당시에 등장한 여러 대적자들과 싸울 때 이런 용어들이 있었더라면 더욱 효과적으로 물리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이를테면 아리우스에 대항하여 성부와 성자의 본질이 같음을 말하면 아리우스의 정체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그 본질이 동일하시다고 주장해 보라. 그러면 이 변절자의 가면을 벗길 수 있을 것이다” 또 사벨리우스 곧 성부와 성자, 성령의 명칭은 신격의 구별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벨리우스에게 ‘하나님의 본질 안에 삼위가 있다’라고 주장하면 그의 공허한 다변을 억제케 함을 지적했다.
그 다음 그는 삼위일체론을 정리한다. “본체들의 하나됨” 그리고 “한 본질 안의 셋이 있다는 것은 삼위일체의 세 위격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가 위에서 언급한 자기의 삼위일체론에 기초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분 하나님이시나 성자는 성부가 아니며 성령 또한 성자가 아니며 그들 각자는 서로가 어떤 특성에 의하여 구별된다”
칼빈은 지금까지의 내용을 마지막 절에서 자기의 삼위일체론을 요약 정리한다.
1) “위격”은 하나님의 본질에 속하며 세 “위격”들은 상호 관계하며 각기 비공유적 특성으로 서로 구별된다.
2) 실재인 “위격”은 본질과 분리될 수 없으며 특별한 표지가 있어서 본질과 구별된다. 칼빈은 이 말을 다시 설명한다. “그래서 나는 세 실재는 상호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각자의 특성에 의하여 서로 구별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3) 각 위에게 고유한 것은 어떤 것이라도 전달될 수 없다.
b. 성자의 신성
칼빈은 요한복음 1장 첫 부분에 기록된 내용이 성자가 하나님이심을 매우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성자의 신성을 강조한다. “요한은 이 말씀에 견고하고 영원하신 본질을 부여하고 그에게 고유한 것이 있음을 인정하며, 또한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심으로 우주의 창조자가 되셨는가를 명백히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모든 계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로 불리는 것이 마땅하듯이, 이 하나님의 실체를 지니신 이 말씀은 최고의 자리 곧 모든 예언의 원천의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그 이유는 이 말씀이 불변하시며 하나님과 영원히 동일하시고 바로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성자의 신성과 위격을 동시에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리고 칼빈은 ‘성자의 신성’을 논하면서(I,13,7) 성자가 성부에게서 나왔음을 두 번이나 강조하며 그의 신성과 동시에 위격성을 보여준다.
칼빈은 또 “말씀의 영원성”(I,13,8)을 논하면서 성자가 시간을 초월해서 영원 속에 계신 분임을 말함으로써 그의 신성을 증거한다. 그는 창조 기사를 설명하면서(창 1:3)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기 이전에 이미 그 말씀이 존재하고 계셨음을 지적한다. 칼빈은 성자에게는 시작이 없다는 것을 요한복음 17장을 인용하여 증거하고 요한복음 1장 1-3절을 언급하면서 그의 영원성을 증거하여 그의 신성을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부와 성자 사이의 관계와 그의 신성에 대해 요약 정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한 번 굳건히 정리할 수 있다: 시간의 처음 이전에 하나님에 의해 나셨고, 영원히 그와 함께 거하셨다. 이로써 이 말씀의 영원성, 그의 참된 본질 그리고 그의 신성이 증명되는 것이다.”
그 다음 칼빈은 구약성경이 성자가 하나님임을 증거하는 구절로 고개를 돌린다.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 하신 말씀이라는 구절이 그의 신성을 입증한다는 사실을 언급한 다음이사야 선지자의 말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과 하나님의 고유한 속성 가운데 하나인 최고의 권능을 지니신 분으로 제시한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신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칼빈은 또 예레미야의 발언 곧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 23:5-6)는 구절과 “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받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살 것이며 이 성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는 이름을 얻으리라”(렘 33:16)는 구절이 성자께서 영원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제시한다고 말한다.(I,13,9). 칼빈은 또 에스겔이 말하는 ‘여호와 삼마’(겔 48:35)라는 표현과 모세가 말하는 ‘여호와 닛시’라는 표현 등은 여호와가 그리스도임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I,13,9.).
흥미로운 것은 칼빈이 구약에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천사)’를 그리스도와 연결시킨다는 것이다(I,13,10). 그는 기드온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가 그로부터 희생제물을 받는다는 사실에서(삿 6:11,12,20,21,22; 7:5,9), 그리고 삼손의 부모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천사’가 하나님이라는 사실 속에서(삿 13:16,18,20,22,23), 호세아서를 인용하여 야곱이 씨름한 그 천사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호 12:5)이라는 사실 속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창조함을 받은 천사가 아니라, 충만한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이심을 말한다(I,13,10). 칼빈은 또 스가랴서 2장에 나오는 ‘다른 천사를 보내시는 천사’(슥 2:3)가 만군의 여호와임을 말하며 이사야의 발언 곧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사 25:9)고 했는데 이 여호와의 천사가 바로 그리스도임을 말한다.
그 다음 칼빈은 신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문제로 눈을 돌린다(I,13,11). 그는 사도들이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내용 곧 성육신 사건을 증거하는 모든 구절들이 그의 영원한 신성을 증거함을 말한다(I,13,11). 이를테면, 바울이 로마서 9:32-33에서 이사야서 8:14를 인용하며 예언이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고 말함을 주목하고 그리스도가 만군의 여호와임을 천명한다. 칼빈은 이사야서 45:23을 인용하는 로마서 14:10-11 내용 속에서도 그런 내용을 본다. 또 시편 68:18을 인용하는 에베소서 4:8에서, 이사야 6:1을 인용하는 요한복음 12:41에서, 시편 102:25을 인용한 히브리서 1:10에서, 시편 97:7을 인용하는 히브리서 1:6에서 그런 내용을 본다. 칼빈은 사도들이 구약의 이런 내용들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하는 것은 성경을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칼빈은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시오(시 102:13), ‘온 땅과 모든 섬들을 다스리시는 것으로 말씀하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로 본다(시 97:1).
그 외에 칼빈은 요한이 말씀을 하나님이라고 선포한 내용(요 1:1,14), 바울이 그리스도를 가리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롬 9:5)이라고 말한 내용,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심판대에 앉는다는 내용(고후 5:10), 또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었다(딤전 3:16)는 내용, 그만이 모든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딤전 1:17)는 내용,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빌 2:6-7)라는 내용, 요한이 예수를 가리켜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이라”(요일 5:20)는 내용,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행 20:28라는 내용, 도마의 고백(요 20:28) 내용 속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본다.(I,13,11).
그뿐 아니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사역 속에서 그의 신성을 본다(I,13,12). 그는 그리스도의 창조와 섭리 사역은 그의 신성을 보여준다고 한다. “섭리와 권능으로 온 우주를 다스리시며 그의 능력의 명령으로 만물을 붙드신다는 것은 - 이는 사도가 그리스도의 사역을 말씀하는 것인데(히 1:3)- 오직 창조주만이 행하는 일인 것이다”나아가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죄하심 속에서(사 43:25; 마 9:6), 사람의 마음의 은밀한 생각을 꿰뚫어 보는 일 속에서(마 9:4; 요 2:25) 그의 신성을 본다. 또 칼빈은 예수께서 스스로 베푸신 이적 속에서 그의 신성이 드러나지만, 그가 제자들에게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병자를 낫게하며, 귀신을 내어 쫓는 권능을 주셨다는 사실 속에서(마 10:8; 막 3:15; 6:7) 그의 신성이 드러난다고 말한다(I,13,13).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 교회의 서고 무너짐인 것처럼 그것을 규명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사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삼위의 신성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다음과 같은 벤델의 말은 주목할 만하다. “누구든지 삼위의 신성을 부인하면 그리스도의 신성을 마멸시키며 이와 더불어 기독교 신학의 모퉁이 돌을 내칠 뿐 아니라 복된 믿음을 저버리게 된다”
우리는 칼빈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거하는 내용이 동시에 그의 인격을 보여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성자의 신성과 그의 인격은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위의 내용을 요약하면 칼빈은 성자가 성부에게서 나오셨다는 것과, 성자가 인격인 동시에 하나님임을 성경 구절을 통해 쉽게 설명했다는 것이다. 즉 칼빈은 이성에 의해 철학적인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설명하지 않고 성경 계시 중심으로 설명을 시도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오직 성경’이라는 종교개혁 원리에 충실했다고 본다.
2. 성령의 인격과 신성
칼빈은 성자에 대한 내용에 비해 성령의 신성에 대해서는 그렇게 많이 논하지 않는다(I,13,14-15). 그런데 그는 성령의 인격성과 신성을 정확하게 가르친다. 칼빈은 성령의 인격성과 신성을 동시에 설명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논하기로 한다.
칼빈은 성령이 창조 사역에 관여하셨음 속에서 그의 신성이 드러난다고 하는 동시에 문장 표현을 통해 그의 인격성을 암시한다. “그는(모세)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혹은 형체가 없는 물질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고 보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보도는 우리가 지금 지각하고 있는 우주의 아름다움이 성령의 능력 덕분에 힘있게 보존되고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우주가 그런 아름다움으로 장식되기 전부터 성령께서 그 혼돈 덩어리에 관여하셨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칼빈의 발언도 성령의 인격성과 신성을 잘 반영한다. “성경이 성령께 속한 임무로 가르치고 또 경건한 자들이 실제로 성령께서 행하시는 것으로 느끼는 일들 - 세상에 가득하여 만물을 지탱시키고, 자라게 하고, 하늘과 땅에서 만물을 살리는 등의 일들 - 은 피조물이 행하는 일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것이다. 또한 성령께는 한계로 정해진 것이 없기 때문에 그는 피조물들의 범주에 속하지 않으시며, 만물에게 생기를 주입시키시고 본질과 생명과 움직임을 불어넣어 주시는 데에서 그의 신적인 위엄이 드러나는 것이다”
칼빈은 성령의 중생시키시는 사역 속에서도 그의 신성과 인격성을 보여준다. 그는 성령의 중생시키는 사역을 설명하면서 성령의 독자성을 지적할 뿐 아니라 이 사역이 하나님께만 속한 기능임을 지적한다. “그런데 성경은 곳곳에서 성령께서 중생을 일으키시는 분으로, 그것도 빌려온 능력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중생을 이루시는 분으로 말하고 있고, 또한 중생뿐만 아니라 미래의 영생을 베푸시는 주체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 칼빈은 성도들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일, 칭의와 성화 그리고 은사를 분배하는 성령의 사역을 설명하면서 성령의 독자적인 위치와 그의 신성을 설명한다. 끝으로 칼빈은 성령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으로서 그 분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만일 성령께서 하나님 안에 계신 실체가 아니시라면, 선택과 의지가 그에게 있다는 식으로는 결코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성령께 신적 권능이 있음을 매우 분명하게 가르치며, 또한 그가 본체로 하나님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칼빈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성령이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성경 구절을 언급함으로써 그의 신성을 증명한다(I,13,15). 먼저 칼빈은 ‘하나님의 성전’을 ‘성령의 전’과 동일시 한다는 데서(고전 3:16-17; 6:19; 고후 6:16) 그의 신성을 본다. 동시에 칼빈은 베드로가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책망할 때 사용한 성령의 명칭에서도(행 5:3-4) 그와 같은 것을 본다. 또 칼빈은 사도들이 하나님을 지칭하는 구약성경 구절을 신약에서 인용할 때 그 분을 성령으로 표현하는 것 속에서도 그의 신성을 본다(사 6:9; 행 29:25-26; 벧후 1:21; 사 63:10). 그 외에 칼빈은 성령에 대한 범죄를 설명하면서 그 분이 하나님임을 증거한다(I,13,15).
위의 내용은 칼빈이 성령을 증거할 때 사변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오직 성경을 주목하여 그의 신성을 증명해 낸다. 여기서도 그는 ‘오직 성경’이라는 종교개혁의 원리에 충실함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런데 칼빈은 여기서는 성자를 설명할 때와는 달리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온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의 관심은 오직 성령의 신성에 집중한다.
3. 삼위의 구별성과 일체성(16-20)
칼빈은 삼위일체에서 성자와 성령이 어떤 분인지를 각각 성경의 증거로서 규명한 다음 세 분 사이의 관계를 설명한다.
a. 한 분 하나님
칼빈은 하나님이 한 분임을 증명하기 위해 세례와 믿음을 설명한다. 세례는 한 분 하나님 이름으로 베풀어진다는 것이다. “세례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안에서 자기 자신을 완전히 명확하게 보여주신 한 분 하나님의 이름으로 베풀어질 것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본질 안에 삼위 - 한 분 하나님이 오직 이 분들 안에서 알려지신다 - 가 거하신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게 인식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칼빈은 믿음이 오직 한분 하나님과 관계함을 지적하는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는
명령은 우리가 한 믿음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믿는 것과 연결되어 성자와 성령이 하나님의 본질임을 추론해 낸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오직 한 분이시라는 것이 이미 확실하게 세워진 원리이므로, 우리는 말씀과 성령이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이시라고 결론짓게 되는 것이다”
b. 삼위이신 하나님
한 마디로 칼빈은 여기서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은 구별되는 분들임을 설명한다. 칼빈은 이 구별을 설명하기 위해 먼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의 말을 인용한다. “한 분 하나님을 생각하자마자 즉시 삼위의 광채에 싸이게 되고, 삼위를 구별하여 보자마자 곧바로 다시 한 분 하나님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이 구별을 설명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단어들 자체가 진정한 구별을 시사하여,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의 사역들에 따라서 이 이름들로 다양하게 불리는 그 명칭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우리는 여기서 칼빈이 양태론과 삼신론을 동시에 경계함을 볼 수 있다.
성경에는 한 꺼 번에 세 분 곧 성부, 성자, 성령이 구별된다고 말하는 구절이 없기 때문에, 칼빈은 우선 성경에서 성부와 성자가 구별되는 것을 말하는 내용을 언급하여 그 구별을 규명해 낸다(슥 13:7; 요 5:32; 8:16; 1:3; 히 11:3). 특별히 성부가 성자를 이 세상에 보내신 사실을 언급하여 이 두 분이 구별됨을 규명한다(요 1:18; 17:5). 그 다음 칼빈은 성령이 아버지에게서 나온다는 사실과(요 15:26; 14:26) 예수께서 다른 보혜사(요 14:16)를 보내신다는 구절을 언급하며 세 분이 구별됨을 보여준다.
칼빈은 다시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 세 분의 순서를 중심으로 세 분이 각기 다른 위격임을 보여주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주제를 논하면서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사람들의 일에서 나온 비유를 사용하는 것이 위험함을 지적한다는 사실이다. 먼저 칼빈은 하나님의 사역을 중심으로 그 순서에 대해 말한다. “모든 활동의 시작과 모든 일의 근원과 원천은 성부께 있고, 또한 지혜와 경륜과 모든 일의 질서 있는 시행은 성자께 있으며, 또한 그 활동의 능력과 효력은 성령께 있다는 사실이다”칼빈은 사람들이 먼저 성부를, 그 다음은 그에게서 나온 지혜인 성자를, 마지막으로 두 분에게서 나온 성령 곧 하나님의 계획과 작정들을 시행하는 능력을 생각한다고 말함과 동시에 고대 교회가 가르친 삼위 간의 관계를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자께서는 오직 성부께로부터 오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께로부터 동시에 나오신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칼빈의 목회적인 교육 자세를 볼 수 있다. 그는 성도들이 이것을 잘 이해하기 위해 연거푸 비슷한 내용으로 설명하고 있다.
칼빈은 성부, 성자, 성령이 구별될 뿐만 아니라 이 셋은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설명한다. “성자는 성부와 함께 한 하나님이시다. 그 이유는 그는 동시에 성부와 한 성령을 가지기 때문이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영이므로 성부나 성자와 전혀 상관 없는 다른 존재가 아니다”라고 한다. 칼빈은 삼위일체 세 분의 관계와 각각의 고유성에 대한 내용을 명확하게 가르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각기 세 분에게는 고유한 특성이 있다는 것과 더불어 각 본체(위격) 안에 온전한 신적 본성이 거하시는 것이다”
칼빈은 마지막에서(I,13,20) 지금까지 삼위일체 교육 내용을 요약 정리한다. 먼저 알아야 될 것은 하나님이라는 단일하고 유일하신 본질이며 그 다음 그 안에 삼위 혹은 세 본체가 계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 분 사이의 관계를 설명한다. 이 말은 칼빈은 각 부속품의 특성을 잘 설명한 뒤에 그 부속들이 저절로 서로 맞추어져 몸통 전체를 이루게 하듯이 성도들이 하나님의 본질, 세분의 위격의 특성 그리고 그 각각의 관계를 잘 설명하여 성도들의 머리속에서 저절로 삼위일체가 종합될 수 있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아래 도식과 같은 그림이 그려지도록 만든다는 말이다. 그리고 칼빈은 여기서 매우 목회적인 발언을 한다. “그러므로 알아서 유익이 되는 내용을 간단히 제시할 것이니, 진지함을 정말로 사랑하며 또한 주어진 믿음의 분량대로 만족하는 이들은 이를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칼빈은 지금까지 내용을 도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C. 칼빈의 삼위일체론 대적들(21-29)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칼빈이 자신의 삼위일체론을 열거한 다음, 항목을 정해 놓고 대적들을 비판한다는 점이다. 아마 그 당시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세력들이 교인들을 미혹했기 때문에 목회적인 차원에서 교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 같다. 칼빈은 이 부분에서 앞에서 언급한 자기의 삼위일체론을 매개로 하여 이단들을 비판하면서 교인들에게 삼위일체론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칼빈은 모든 이단의 근원이 사탄임과 이단들의 핵심 공격 내용이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부인하는 동시에 각 위격의 구별을 부정하는데 있음을 먼저 집고 넘어간다.그리고 칼빈은 처음부터 삼위일체론의 대적을 간헐적으로 언급한다. 이를테면 그는 범신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그런 사상을 비판한다. “고대의 어떤이는 ‘우리가 보는 것과 또 보지 못하는 것 모두가 하나님이시다’라고 그럴 듯한 말을 했다. 이 말에 의하면 그는 세계의 모든 부분에 신성이 침투해 있다고 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칼빈은 마니교의 이원론적 오류를 지적하고 지나간다. “저들은 두 원리를 가정함으로써 악마를 하나님과 거의 동등한 지위에 놀려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칼빈은 양태론을 비판한다. 또 그는 성자의 신성과 관계해서는 그것을 부인하는 유대주의를 대적으로 삼고 그들의 문제점을 논한다. 우리는 여기서 칼빈이 정식으로 비판한 그의 대적들만 분석하고 평가하려고 한다.
1. 세르베투스
칼빈은 세베르투스의 반(反)삼위일체론을 비판하면서 먼저 자신의 삼위일체론을 일목요연하게 열거하고 하고 넘어간다. 마치 칼빈은 비판의 표준을 제시라도 하는 듯이 그렇게 한다. “한 분 하나님의 본질은 단일하며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 그 본질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연장된다는 것, 그러나 반면에 성부의 고유한 속성이 성자와 다르며, 성자의 고유한 속성이 성령과 다르다는 것을” 칼빈에 의하면 이런 삼위일체론만 구비되면 아리우스와 사벨리우스는 물론 고대의 잘못된 이단들의 입을 막을 수 있다고 한다.(I,13,22).
a. 세르베투스는 위격(位格)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면 칼빈은 세르베투스의 문제점은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칼빈은 세르베투스가 위(位)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연고로 반삼위일체자가 된 것으로 판단한다. 칼빈은 지적하기를 세르베투스는 “하나님의 본질 안에 삼위가 존재하신다고 이야기하면 결국 하나님이 셋으로 분리되신다는 것이 되는데, 이 세 가지 연합은 하나의 상상인데 이는 하나님의 단일성과 모순되기 때문이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세르베투스가 삼위일체를 믿는 자들을 “Trinitarios”라고 부르며 이들이 무신론자들이라고 비난한 것을 주목한다.이것은 세르베투스가 고대 교부들이 창안한 위격(位格)이라는 이 단어를 바로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칼빈은 또 세베르투스의 주장을 묘사하되 “그는 위(位)들은 하나님의 본질 속에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요 우리에게 이런저런 형식으로 하나님을 나타내 주는 특정한 외형적인 관념들이라고 주장하였다. 태초에는 말씀과 성령이 본래 동일했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 구별이 없었는데,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으로서 나오시고 성령이 하나님으로부터 또 다른 하나님으로 나오신 후부터 구별이 생겨났다는 것이다”라고 했는가 하면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었고, 그의 관념의 반영이었으며, 또한 성령은 그의 신성의 그림자였다는 식으로 설명하기도 했으나”라고 열거했는데, 이것은 양태론과 같은 것이다.
b. 세르베투스는 범신론적인 오류에 빠졌다
칼빈은 세르베투스가 위격을 무시한 것은 결국 범신론에 빠진 연고로 그렇게 되었음을 주목한다. 즉 세베르투스가 범신론적인 오류에 빠진 나머지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비판한다. “결국 그는 마치 우리 속에도 실체로 있고, 또한 나무와 돌 속에도 있는 그 동일한 영이 하나님의 일부분인 것처럼, 분배의 양식에 따라서 보면, 하나님의 일부분이 성자에게나 성령에게 있는 것이라고 선언하여, 그리스도와 성령의 신성을 무(無)로 돌려버리는 것이다”(Inst I,13,22).
칼빈은 세르베투스가 위(位)란 단순히 “하나님의 영광의 가시적인 현현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을 주목하고 요한복음 1:1과 요한복음 17:5에 근거하여 성부와 성자 위격이 실재함을 규명해 낸다. 그리고 칼빈은 성령의 위격을 부인하는 세르베투스의 발언에 대항하여 그가 범신론적 오류에 빠진 결과 그렇게 주장함을 주목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저주스러운 것은 성자와 성령을 다른 피조물들과 구별하지 않고 완전히 뒤섞어 놓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본질 속에는 여러 부분들의 구분이 있는데, 그 각 부분이 하나님이시라고 공공연히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특히 신자들의 영들이 하나님과 똑같이 영원하며 본질이 동일하다고 진술하며, 다른 곳에서는 사람의 영혼뿐만 아니라 다른 피조물들에게까지도 본질적인 신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칼빈이 본 세르베투스의 문제점이 그가 성자와 성령을 피조물과 혼합시켰다고 지적한 니이젤의 말은 매우 적절한 것이다.
한 마디로 칼빈에 의하면, 세르베투스가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이유는 그가 위격의 의미를 몰랐고 동시에 범신론적인 오류에 빠져 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2. Valentinum Gentilem
a. 성부만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
칼빈은 여기서 괴물이라고 표현한 이 인물의 이름을 거론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칼빈 선집(OS)의 편집자를 통해 그의 이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 반(反) 삼위일체론자인 발렌티눔은 무엇을 주장했을까? 칼빈이 묘사한 내용을 언뜻 보아도 이 괴물은 종속론자가 아니면 아리우스의 추종자임을 알 수 있다. 칼빈이 묘사한 그의 정체는 다음과 같다. “어떤 악당들이 세르베투스의 불경스러움의 혐오와 수치를 피하기 위하여 삼위가 계시다는 것을 고백하지만, 거기에 단서를 붙이기를, 홀로 참되고 정당한 하나님이신 성부께서 성자와 성령을 만드시고 그들에게 자기 자신의 신성을 전입시켰다” 칼빈은 이 괴물의 종속론적인 발언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성부가 유일하게 본질 수여자(essentiator)라는 점에서 성자 및 성령과는 구별된다” 다음과 같은 발언도 여기에 속한다. “우선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흔히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신다는 사실을 논지로 삼고, 이를 근거로 하여 오직 성부만이 정당한 의미에서 하나님이시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칼빈은 여기서 이들을 비판하면서 성부와 성자가 동등한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다.
b. 이들은 성자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위에서 본 대로, 칼빈에 의하면, 이들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고 단지 성부의 신성을 전입(轉入) 받은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칼빈은 이들이 어리석게도 그리스도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를 한 위격(位格)의 아들로 생각한다고 오해함을 비판한다. 그리고 이들은 위격(位格, persona)의 의미를 모름을 통해 이런 오류에 빠짐을 간접적으로 지적한다. 이에 대해 칼빈은 이들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는 하나 성부만이 참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나누어지지 않는 본질의 단일성’(simplex essentiae unitas)을 보지 못한 연고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칼빈은 성부만이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결국 성자는 하나님의 지위에서 내던져지고 만다고 본다.
칼빈은 이들에게 대항하여 성경의 증거를 통해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명확하게 설명한다. 칼빈은 구약을 인용하는 신약의 기자들이 이해한 내용을 매개로 하여 구약의 하나님이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임을 증거함을 지적한다. 이를테면 요한이 이사야서 6:1에 나오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단정하는 것이라든가(요 12:41),바울이 이사야가 말씀하신 하나님이 바로 그리스도라고 증거한 내용(롬 9:33), 그리고 바울이 이사야서 49:18과 45:23에 나오는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해석한 것을 주목하며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규명한다. 그리고 칼빈은 히브리서가 시편을 인용하여 그가 창조자이심(히 1:10; 시 102:25-26)과 천사의 경배를 받으실 분()히 1:6; 시 97:7)임을 지적함을 통해 그가 하나님임을 보여준다.
또 칼빈은 구약 성경의 ‘여호와’라는 이름이 그리스도에게 적용될 수 있으며 성부로부터 신성이 전이(轉移)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존하신 분이며 이사야가 말하는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 44:6)는 구절은 그 하나님이 바로 그리스도임을 지적한다. 칼빈이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창조자이신 성자는 자존하시며 성부로부터 신성의 본질을 전입 받은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이런 설명은 성경의 통일성과 사도들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을 전제한다. 우리는 칼빈의 설명에서 사변적인 논리 장난이 전혀 보이지 않고 오직 성경에 근거하여 자기가 주장하는 펼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들이 그런 잘못된 주장을 하는 것은 그들의 사고방식이 범신론적인 데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c. 이들은 성부와 성자의 차이점을 신성의 양으로 구별한다
칼빈은 발렌티눔이 성부와 성자 사이의 차이점을 본질의 양의 차이로 봄을 주목한다. 칼빈은 이들이 성자가 본질(essentia)을 부분적으로 공유한다고 여기며 신성을 부분적으로만 소유하는 성자를 반신(反神)으로 만든다고 비판한다. 또 이럴 경우 하나님의 본질을 찢어놓는 오류를 범한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칼빈은 만일 이들이 “성부가 본질을 성자에게 주시면서도 여전히 유일한 하나님으로 남아 계시고 그에게 신적 본질이 그대로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결국 “그리스도는 상징적인 하나님, 곧 겉모양과 이름은 하나님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아닌 존재가 되어 버릴 것이다”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고 지적한다. 즉 성부가 성자에게 자기의 신성을 부어주면 그만큼 성부에게는 신성이 부족할 텐데 그럼에도 성부가 온전한 하나님으로 남는다면, 성자에게로 신성이 흘러들어가지 않게 된다는 말이다. 칼빈은 여기서 이들의 자가당착을 포착한 것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이들이 존재론적인 사고방식에 빠진 나머지 위격의 구별과 각 위격의 특성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칼빈은 이들의 경우 성자가 신적인 본질을 부여받은 것이라면 그것을 빼앗길 경우에는 하나님이 아님을 주목한다. 그 결과 칼빈은 이들이 명목상으로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를 하나님으로 보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이에 대항하여 칼빈은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을 소개하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이들의 오류에 빠지지 않게 한다. “성부와 성자는 모두 신적 본질을 전체로서 완전하게 공유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본질에 관해서는 성부와 성자 사이에 구별이 없는 것이다”
d. 칼빈의 반격
칼빈은 이런 이단에 대항하여 삼위 세 분 모두 하나님임을 성경을 통해 규명한다(I,23,24). 먼저 칼빈은 성부만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이 이단에 대항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임을 성경 구절로 규명해 낸다. 그 다음 삼위 세 분이 하나님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창조의 능력과 명령할 수 있는 권세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공통되는 것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I,23,24). 또 칼빈은 요한복음 4:24에 나오는 “하나님은 영이시니”라는 구절이 성부, 성자, 성령께 동등하게 적용된다고 말함으로써, 세 분 모두 하나님임을 말한다.
칼빈은 이들이 위격과 본질 사이의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여, 즉 각 위(位)가 신적 본질 가운데 자기 자신의 분리된 몫을 지니고 있다면 삼신론(三神論)에 빠질 것으로 비판한다(I,13,25). 이들을 비판하기 위해 칼빈은 먼저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을 언급하고 그들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하나님의 본질이 하나이며, 따라서 성자와 성령의 본질이 낳은 바 된 것이 아니지만, 성부께서 순서상 첫째가 되시고 또한 바로 앞에서 논의한 바대로 그가 친히 그의 지혜를 낳으셨으므로, 성부를 가리켜 신성 전체의 시초요 근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단서가 없는 그냥 하나님은 나신 바 되지 않으신 분이요, 또한 성부 역시 그의 위격에 관한 한 나신 바 되지 않으신 것이다”(I,13,25). 그리고 칼빈은 이들이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을 오해하여 그것을 ‘사위일체’로 비웃음을 지적한다. 이들은 세 위격과 본질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이에 대항하여 칼빈은 “우리는 위격을 본질과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고, 각 위들이 그 본질 내에 머물러 있는 상태에서 서로 구별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I,13,25)라고 말한 다음, 만일 이들의 주장대로 위격이 본질과 분리되었자면 삼신을 하나로 결합하는 것과 같은 결과가 생길 것이라고 말한다. 칼빈에 의하면, 이들의 삼위일체론은 결국 한 하나님과 두 피조물의 결합인 것이다.
그 다음 칼빈은 이들이 생트집을 잡는 문제들에 대항하여 대답한다. 이를테면 이들은 성경에서 그리스도가 성부보다는 위상이 낮은 것으로 표현한 구절을 대며 종속론적인 발언을 하나 칼빈은 성경 내용에 근거하여 그들의 발언에 쐐기를 박는다(I,13,26).
그리고 칼빈은 마지막으로 이들이 교부들을 잘못 인용하는 것을 점검하고 비판한다. 먼저 이들은 이레니우스를 잘못 이해하고 이용했다는 것이다. 이레니우스의 경우 이들과는 달리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칼빈이 요약한 이레니우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레니우스의 진술의 요점은 바로 이것이다. 그리스도의 아버지 이외에는 성경에서 다른 하나님을 선포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하며, 따라서 다른 신을 상상하는 것은 그릇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높이시는 그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외에는 다른 하나님이 없다는 사실을 그렇게도 자주 강조하는 것이 전혀 놀랄 일이 아닌 것이다 …… 곧 그 옛날 족장들에게 나타나셨던 그 하나님은 다른 분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이셨다고 말이다”
또 칼빈은 이레니우스의 저서(Adv. haer.) 3권 6장을 인용하여 “성경에서 절대적인 의미로 아무런 단서 없이 하나님으로 불려지시는 분은 진실로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으로 불려지신다”라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을 명확하게 말한다. 칼빈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임을 주장하는 이레니우스의 글을 계속 인용하면서 그의 신성을 주장한다.
또 칼빈은 이 대적들이 터툴리안의 글을 잘못 이해했음을 지적하고 터툴리안의 글을 소개하며 삼위일체 속의 성자가 하나님임을 증명하고 있다. “한 분 하나님이 존재하시며 경륜에 따라 그의 말씀이 존재하신다. 하나님은 본질의 단일성을 통해 유일하신 하나님이며 그럼에도 그 단일성은 그들의 신비로운 사역을 통해 삼위일체로 질서를 이루신다. 세 분은 상태에 따라서가 아니고 단계에 따라, 본질에 따라서가 아니라 형식에 따라, 능력에 따라서가 아니라 위격들의 수에 따라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여러 교부들을 언급하면서 그들이 한결같이 삼위일체를 확증함을 지적하는 동시에(이레니우스, 유스티누스, 힐라리우스, 이그나티우스, 어거스틴) 아리우스가 고대의 인정을 받는 저술가를 인용하지 못함을 지적하여 그의 가르침은 정통성을 유지하지 못함을 암시한다.(I,13,29).
칼빈은 자기의 삼위일체론을 마무리하면서 목회자로서 성도들을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의도를 내비친다. “자 이제 경건한 독자들은, 지금까지 교리에 대한 순전한 믿음을 왜곡시키고 어둡게 만들기 위하여 사탄이 사용해 온 온갖 비난들이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서 반박된 것을 인식하리라 믿는다”(I,13,29).
D. 나가면서
1. 칼빈의 기독교강요 1권 13장에 나오는 삼위일체론은 단순히 하나의 삼위일체론을 설명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나름대로 삼위일체 교육 방법이 반영되어서 여기에는 칼빈의 목회 정신을 볼 수 있다. 그는 먼저 고대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을 소개한 다음, 그것을 성경 구절을 동원하여 성도들이 손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2. 칼빈의 삼위일체론은 근본적으로는 서방교회를 따르나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를 잇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는 크리소스툼의 저서를 읽으면서 동방교회 신학과 만난 것으로 판단된다.
3. 칼빈의 삼위일체론은 매우 성경적이다. 매우 사변적인 내용을 성경 구절을 통해 성도들이 쉽게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다.
4. 칼빈은 당시의 대적들의 문제점을 자세하게 열거하고 비판함을 통해 성도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했다. 이것은 매우 목회적인 것으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칼빈의 이런 자세는 막연하게 복음만 전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식으로 사역하는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 무언의 암시를 하고 있다. 담임목사들은 자기 주위에 등장하는 이단들을 정확하게 분석해서 성도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해야 된다는 말이다.
5. 우리는 칼빈을 통해 삼위일체론을 효과적으로 가르치는 요령을 습득하게 된다. 1) 즉 먼저 우리는 세 분이 위격 내지 인격이심을 성경구절을 통해 규명해 낸다. 2) 그 다음 세 분이 하나님임을 성경 구절을 통해 설명한다. 3) 마지막으로 성부와 성자의 관계, 성부와 성령의 관계 그리고 성자와 성령 사이의 관계를 구체적인 성경 구절을 통해 규명한다. 그리고 성도들이 자연스럽게 그 마음속에서 이 세 분의 관계를 조립토록 해야 한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본질’, ‘위격’, 그리고 ‘세 분의 관계’가 삼위일체를 바르게 이해하는 관건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이 세분의 사역 곧 창조, 섭리, 보존 등이 어떻게 이루어지며 그런 사역이 우리의 삶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 가르쳐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삼위일체 하나님은 성도들의 개인의 삶과 연결되어 이원론에 빠지지 않고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신앙생활의 성공 여부는 이 삼위일체 하나님과 성도 간의 인격적인 관계에 달려 있는 것이다. 칼빈은 이런 면에서 매우 모범적으로 삼위일체론을 가르친 것으로 평가된다.
참고서적
1) 1차자료
-Joannis Calvini, OS III. Chr. Kaiser: Monachii in Aedibus, 1967.
-Johannes Calvin, Unterricht in der christlichen Religion. übersetzt von O.Weber, Neukirchener Verlag, 1984. 3. Aufl.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ed. bz John T. McNeil. tr. bz Ford Lewis Battles in LCC vol. XX(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67. 4th. printing.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tr. by Henry Beveridge. Grand Rapids: Eerdmans, 1989.
-Jean Calvin, Institution de la religion chrétienne. Aix-en-France: Edition Kerygma/ Charols: Editions Exelsis, 2009.
-Ford Lewis Battles, Interpreting John Calvin. Grand Rapids: Baker Books, 1996.
B. 성자와 성령의 인격과 신성
칼빈은 삼위일체를 설명함에 있어서 위의 내용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는 성경의 역사 속에 계시된 삼위 하나님의 활동을 점검하고 위의 내용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로 보건대 칼빈의 삼위일체론에서 특이한 것은 삼위일체 내부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역사속에 계시된 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관찰하여 그 내용을 설명한다는 것이다. 즉 칼빈의 경우 먼저 교부들이 전수해준 ‘내재적 삼위일체’를 설명한 다음, ‘경륜적 삼위일체’를 설명하면서 전자를 확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결국 성자와 성령의 신격과 신성에 대한 내용을 점검하는 문제와 연관된다.
칼빈이 여기서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은 성자와 성령 두 분 다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둘은 서로 다른 분임을 드러내려고 한 것이다. 그는 이것을 철학적인 사색을 통해 드러내려고 하지 않고 성경의 증거를 통해 이것을 드러내려고 한다. 이런 시도 속에서 그가 기독교인들에게 구체적인 해당 성경 구절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을 쉽고 효과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고대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을 능가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삼위의 하나님이 인격이심을 강조해야 되는 이유는 성경의 하나님이 이방신들과 다른 점이 인격성에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하나님의 인격성이 무시되면 범신론에 빠져 무신론으로 둔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칼빈이 열거한 내용 속에서 성자와 성령이 각기 다른 인격임과 동시에 두 분이 하나님임을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1. 성자의 인격과 신성
a. 성자의 인격
칼빈은 여기서(I,13,7-13) ‘성자가 인격이다’라는 말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그의 사역 내지 행동을 묘사함으로써 그가 인격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칼빈은 사도들과 솔로몬의 말을 참고하면서 성자가 만물을 창조하시고 유지하시며 섭리하신다는 말에 근거하여 성자가 인격임을 드러낸다. “사도들은, 세상이 성자로 말미암아 지음을 받았으며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셨다고 가르친다(히 1:2-3)” 칼빈은 전도서 8장에 나오는 ‘지혜’와 연관하여 성자가 인격이심을 암시한다. “지혜가 만세 전에 성부로부터 나와서 만물을 창조하고 하나님의 모든 사역을 통할하였다고 소개한 것이다(잠 8:22)” 잠언서의 이 발언은 성자가 하나님인 동시에 인격임을 암시하고 있다. 칼빈은 요한복음의 한 구절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5:17)라는 구절도 잠언서의 ‘지혜’에 대한 내용과 연관됨을 지적하면서 성자가 인격이심을 분명하게 말한다.
그
외에 아래에서 논하겠지만 칼빈이 구약이 증거하는 여호와 또는 여호와의 사자가 구약속의 그리스도로서 인격임을 말하는가 하면 구약의
많은 구절들이 여호와가 그리스도임을 증거한다는 것을 주목하는 내용은 성자가 한 분의 인격임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2. 본질과 인격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삼위일체에서 “삼위”는 휘포스타시스라는 단어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세 휘포스타시스가 존재한다는 개념으로 발전되어짐에 따라 세 인격(위격, person)이라는 의미가 되어진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본질은 하나이다. 그러나 성자도 한 휘포스타시스이고 성령도 한 휘포스타시스로써, 세 휘포스타시스가 존재한다. 이러한 용어에서 처음에는 본질과 인격이라는 단어가 혼동되어 사용되었다. 다시 말하면 세 인격(위격)이 존재하며, 이 세 인격(위격)은 동일한 한 본질(본체)을 공유한다.
실제로 고전적 삼위일체가 정립되는 과정에서 본체와 본질이라는 단어가 상당히 혼동을 일으켰다. 이 "휘포스타시스"가 셋 존재한다는 의미로서, “인격”이라는 개념으로 바뀌어가게 되는데, 헬라어가 라틴어로 바뀌는 과정에서 서방의 교부들, 특별히 어거스틴은 이 “휘포스타시스”라는 헬라어를 번역함에 있어 라틴어 “페르소나”(persona)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된다. 이 용어적인 차이에서 양태론이 나타나는 계기가 되어지는데, “페르소나”라는 단어는 배우가 여러 가지 가면을 쓰고 연극(일인다역)을 한다는 뜻에서 일인다역의 양태론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동방교회의 신학자들은 서방교회가 즐겨 사용한 '페르소나'를 피하고 그 대신 '휘포스타시스'라는 말을 사용했다. '페르소나'의 본래의 뜻이 가면(mask)이므로 그 말을 삼위에 적용시킬 때, 사벨리우스주의라는 오해를 받을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체를 의미하는 말로서 '우시아'를 사용했다. 한 '우시아'에 세 '휘포스타시스'가 있다고 했다.” (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59쪽)
서방교회에서 휘포스타시스라는 용어가 페르소나로 번역되고 인격이라는 의미가 되자, 동방교회에서는 본질을 뜻하는 용어로 “우시아”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되고, 동방교회에서는 "한 우시아(본질)에 세 휘포스타시스(위격)가 있다"라고 정의되었고, (미아 우시아 트레이스 휘포스타시스) 서방교회에서는 우시아라는 용어 대신에 “한 숩스탄시아에 세 페르소나가 있다”고 정의가 된다.(우나 숩스탄티아 트레스 페르소나)
페르소나는 영어로 person이 되고, 우시아는 essence로 번역되어지며, 숩스탄시아는 substance가 되어진다. 서방교회에서는 ‘휘포스타시스’를 ‘페르소나’(헬라어 프로소폰)라고 라틴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동방교회는 헬라어를 사용했고, 서방교회는 라틴어를 사용하였는데, 로마사람들에게는 ‘우시아’는 잘 이해되지 않는 언어였고, 헬라인들에게는 ‘페르소나’라는 단어가 잘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말은(프로소폰: 라틴어 페르소나의 헬라어) 불행하게도 사벨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하여 오용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을 형식적으로만 믿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란 자체 안에 있는 관계명칭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 외부세계와 가질 때 가지는 명칭뿐이라고 했다. 이름은 셋이나 실제는 한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는 당시 로마 교회 안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페르소나' 대신에 '프로소폰'이라는 말을 썼다. 이 말을 쓰면서 그는 삼위가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한 실체를 가진분이 아니라, 기능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때로는 아버지로, 때로는 아들로, 때로는 성령으로 나타나서 특유의 기능을 발휘하나, 하나님과 별개의 휘포타시스를 가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렇게 말하면서 하나님은 한때는 창조자로, 한때는 구속자로, 한때는 생명의 부여자로 나타났다는 것이다.”(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98페이지)
1650. 증거 - 엘렝코스(ἔλεγχος)
ἔλεγχος, ου, ὁ
1. 증거, 2. 유죄증명, 3. 견책
발음
/ 엘렝코스(ĕlĕngchŏs) 어원 / 165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책망(딤후 3:16), 증거(히 11:1) 신약 성경 / 1회 사용
전환금지치료법 : 성전환을 한다고 주장해도 부모가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것 - 전환 치료(Conversion therapy)
세계 3대 악처 / 소크라테스(크산티페), 모차르트(콘스탄체), 톨스토이(소피아)
악처는 태생부터 악인인가, 아니면 누가 악처를 만드는가? 세계 3대 악처라고 하면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부인
<소피아> 고전 음악의 대가인 모차르트의 부인 <콘스탄체>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부인인
<크산티페>
우리에게 이렇게 전설적이고 훌륭한 위인들의 부인들이 왜 이래? 톨스토이의 걸작
‘안나카레리나’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행복한 가정은 서로가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각자의 이유로
불행하다.” 아마도 이 구절은 톨스토이 본인의 경험담일지도 모른다.
<소피아>는 톨스토이를 따르는 제자들에
대한 질투와 유산문제로 자살하겠다고 협박하며 톨스토이의 애를 태웠다. 끝내 참다못한 톨스토이는 가출하여
<아스타포보>역에서 죽게 되었고, 그녀는 남편을 내 쫒아 죽게 만든 악처가 되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녀의 질투심과
톨스토이에 대한 협박이 나쁜 결과를 가지고 오게 한 악처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그러나 소피아는 남편을 도와 ‘전쟁과 평화’를 6번
씩 옮겨 적는 등, 톨스토이의 작품은 그녀의 손을 통해 태어났다. 톨스토이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대단한 악필이었지만 그녀만은
그의 글을 알아 볼 수 있었다. 톨스토이는 방탕한 바람둥이였지만 출산과 육아는 소피아만의 문제로 억척스레 가정을 지켜온
장본인이었다.
<콘스탄체>. 모차르트의 아내도 악처로 회자되는 인물 중에서 빠지지 않는다. 그녀의 악행은
매우 심한 낭비벽이었다. 남편 사후 6명의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라지만, 모차르트의 자필 악보나 서책을 팔아서 생활했다. 남편이
죽고 새로운 남자 ‘닛센’과 재혼을 한 이유로 악처로 불려졌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말로는 “콘스탄체는 교양이 높고 가사에도
열심인 밝은 성격의 여성”이라고 한다. 무엇보다도 모차르트 자신이 아내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편지를 많이 남기고 있었다. 사실
당대 음악가의 아내 모두 악처라는 평을 들었고, 다만 우리에게 바하의 아내 <빌케>, 슈만의 아내
<클라라>만이 현모양처로 남아있으니 후대의 콘스탄체의 평가는 박한 것이 아닌가.
소크라테스의 부인 <크산티페> 친구 좋아하는 소크라테스에게 친구들 앞에서 바가지로 머리에 물을
쏟아 부은 사건은 유명해서 많은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고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전혀 화를 내지 않고 “벼락 뒤에는 비가
내리기 마련이지.” 라는 명언이 유명하게 전해져 온다. 그리고 아내에 대한 몇 개의 명언이 또한 유명하다. “새미는 행복하다.
왜냐하면 말을 하지 않는 아내가 있기 때문에.” “꼭 결혼하세요. 좋은 아내를 가지면 행복해 질 수 있고, 나쁜 아내를
가지면 나처럼 철학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과 잘 해내면 누구와도 잘 할 수 있습니다.” 시련 / 시험 試, 불릴 練, 익힐 練, 단련할 練
1. 겪기 어려운 시험(試驗)과 단련(鍛鍊)
2. 신앙(信仰)이나 결심(決心)을 시험(試驗)해 보는 일. 3. 의지나 사람 됨을 시험하여 봄
작은 시련은 작은 믿음을 형성한다.
예를 들면 작은 시련이란 원인과 결과를 알 수 있는 것이다. 탕자의 비유에서 작은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을 것을 미리 받은 후에 아버지의 집을 떠났다. 그 결과 작은 아들의 생활은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 굶주린 배룰 채우며 아버지의 집을 생각했다. 차라리 이제부터는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서 아들이 아닌 품군으로 살기로 작정한다. 그러나 아들을 기다리던 아버지는 너는 잃었다가 다시 찾은 내 아들이라고 하며 반갑게 맞아주셨다. 이와 같이 인과관계가 분명한 시련을 작은 시련이라고 한다.
큰 시련은 큰 믿음을 형성한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은 100세에 귀한 아들을 얻었다. 그 아들 이삭을 하나님은 번제의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다. 아브라함은 왜 상속자가 될 아들을 번제의 제물로 바치라고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와 같이 원인과 결과를 알 수 없는 시련을 큰 시련이라고 하며 튼 시련을 거친 후에 비로서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다.
믿음이 시련이란? 믿음이 진실한가 아니면 거짓인가를 검증해야만 드러나게 된다.
믿음의 시련(야고보서 1:3) 1383. 시련 - δοκίμιον, ου, τό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줄 너희가 앎이라. because you know that the testing of your faith develops perseverance.
1383. 시련 - δοκίμιον, ου, τό
δοκίμιον, ου, τό
1. 추정, 2. 시련, 3. 순수한
발음
/ 도키미온(dŏkimiŏn) 어원 / 1382의 파생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시련(약 1:3, 벧전 1:7) 신약 성경 / 2회 사용
* 1382. 시련 - 도키매(δοκιμή) δοκιμή, ῆς, ἡ
1. 인정받는 성질 즉 품성, 2. 시련
발음
/ 도키매(dŏkimē) 어원 / 1384와 동일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연단(롬 5:4, 빌 2:22), 증거(고후 2:9, 9:13, 13:3), 시련(고후 8:2) 신약 성경 / 7회 사용
* 1384. 인정된 - 도키모스(δόκιμος) δόκιμος, ον
1. 인정된, 2. 존경 받는
발음
/ 도키모스(dŏkimŏs) 어원 / 138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칭찬을 받은(롬 14:18), 인정함을 받은(롬 16:10, 고전 11:19, 고후 10:18), 인정된(딤후 2:15) 신약 성경 / 7회 사용
* 1380. 생각하다 - 도케오(δοκέω) δοκέω
1. 생각하다, 2. ἐδό κουν πνεῦμα θεω- ρεῖν: 그들은 귀 신을 보는 것으로 믿었다 3. εἴ τις δοκεῖ σοφὸς εἶναι: 만일 누가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한다면 발음
/ 도케오(dŏkĕō) 관련 성경 / 생각하다(마 3:9, 눅 17:9, 요 11:13), 주관하다(막 10:42), 알다(눅 1:3, 요 20:15,
행 15:28), 가결하다(행 15:22), 유력하다(갈 2:6), 보이다(고전 12:22), 여기다(고후 11:16) [명] 생각 (마 17:25, 21:28, 요 11:56), 의견(눅 10:36) 신약 성경 / 63회 사용
지금 ‘광야’를 걷고 있나요? 광야는 고통의 장소가 아니라 연단과 훈련의 장소입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상황은 다르지만 누구든 ‘광야의 시간’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절망의 광야, 슬픔의 광야, 실패의 광야, 불안과 염려의 광야, 고통의 광야 등 이유와 목적을 알 수 없는 곳에 갇힐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광야는 결코 고통과 형벌의 장소가 아니라 훈련의 장소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무능을 철저히 깨달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광야에서 나오게 하시고 사용하십니다.
다윗에게도 광야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사울 왕과 그의 추종 세력을 피해 13년간 광야로 숨어다녔던 그에게 광야의 시간은 ‘연단과 훈련의 시간’이었습니다.
시편
57편은 이런 과정에서 나온 다윗의 대표적인 기도 시입니다.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을 때 쓴 시입니다. 당시 사울 왕이 보낸
수색대가 곳곳에 깔려 있어 다윗은 눈에 띄기만 하면 즉결처분을 당할 수밖에 없던 때였습니다. 공포와 불안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하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윗은 이런 절체절명의 순간에 하나님의 날개 그늘에 피해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겠다는
시를 썼습니다. 시편 57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어둡고 좁은 동굴에서 주님의 날개 그늘에
피하겠노라고 기도하는 다윗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돌보심은 독수리의 날개와 같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 날개‘는
영원한 안식을, ‘날개 아래 거하는 삶’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다윗에게 매일의 삶은
위협이었습니다. 다윗이 그를 따르던 몇 사람과 사해 절벽에 있는 아둘람 굴에 숨어 있을 때, 갑자기 동굴 입구에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습니다. 사울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그들을 알아보지 못한 채 등을 보이고 앉습니다. 다윗의 측근은 사울을 죽일 절호의
기회를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원하는 대로 하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이 세우신 사울에게 손을 대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다만 사울의 옷의 한 부분을 잘랐습니다. 다윗은 밖으로 나간 사울에게 “당신이 굴에 있을 때 당신을 죽이라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당신을 해할 마음이 없습니다. "이 옷자락이 그 증거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시편 57편에서 가장 강력하고 아름다운 표현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7, 8절)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는 ‘두 발로 흔들림 없이 서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대적자들을 물리쳐주시고 자신을 안전하게 지키실 것을
확신한 마음입니다. 고난과 죽음의 공포 가운데서도 흔들림이 없이 오직 주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새벽을 깨우리로다’는 절망 중에
탄식하고 있는 백성들에게 희망의 새벽을 알리겠다는 다윗의 선언입니다.
신비롭게도 다윗의 탄식은 찬양으로 바뀝니다.
다윗은 찬양하면서 영적인 눈이 열려 무한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을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적인 찬양으로 기도를
마무리합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11절)
일곱 개 서신서는 개별 교회가 아닌 전체 교회를 향해
말한다. 때문에 일반서신서(General Epistles)로 칭한다. 이 서신서들은 또한 실질적인 문제들, 예를 들면 조직 내
지도력, 근면함, 공평함, 좋은 관계, 그리고 효과적인 소통 등에 일관된 관점을 가지고 있다.
일반서신서는 당시 로마제국에서 크리스천들이 당면한 과제, 즉 어떻게 험한 세상에서
올바르게 예수를 믿고 따를 것인지를 반영한다. 초기 교회는 노예 생활, 차별, 부자와 권력자들의 학대 같은 문제를 겪었다. 이
서신서들은 거친 말과 대인 갈등도 다룬다. 인간적인 욕망과 하나님을 의지하려는 마음 사이에 일어나는 긴장, 하나님께 순종할 때
발생하는 세상 권력과의 마찰에 대한 두려움도 다루었다.
대체로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삶과는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세상에서의 삶과
노동에 단절감과 소외감을 느끼고 있었다. 현대 크리스천들도 일터에서 비슷한 갈등을 겪는다. 이를 달리 해석하면,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그 어떤 삶의 영역보다 자기 일터에서 더욱 주님을 섬길 기회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얘기다.
오늘날 사회는 기업, 정부, 교육 사업, 비영리 사업, 재택근무를 통해서 큰 결과를
달성해 간다. 그렇더라도 대부분의 직장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목적, 예를 들자면 공익을 위한 섬김, 타인의 유익을 위한
봉사, 헌신적인 인간관계, 정의 확산, 인격 개발 등의 일에 부합되지 못한다. 크리스천들은 자신이 추구하는 주님을 따르는 일과
일반 직장에서 추구하는 이윤의 극대화 같은 서로 다른 역할 때문에 큰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다. 로마제국의 많은 분야들이
신자들에게 매우 적대적이지는 않았듯이, 비록 의도적으로 악을 추구하는 직장이야 별로 없지만, 직장에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여전히 도전이 될 수 있다. 일반서신서는 당시 세상에서 힘겹게 살아가던 신자들을 위해 쓰였기 때문에, 현대 크리스천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일반서신서는 이와 같은 실질적인 관심사들을 우선적으로 다룬다. 이 서신서들은 크게 다음 두 가지 원칙 위에서 다양한 사안들을 취급한다.
1. 우리는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 2. 우리는 궁핍한 자들을 돕기 위해 일해야 한다.
일반서신서는 이 두 가지 원칙에서 21세기 일터에도 적용 가능한 놀랍게도 실질적인
활용 지침을 도출해 낸다. 어쩌면 그리 놀랄일은 아닌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실 곳으로
로마제국을 선택하셨듯이, 현대 일터를 그분의 임재 장소로 선택하고 계시니까 말이다.
야고보서
야고보서는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과 궁핍한 자들을 돕기 위해 일해야 한다는 ‘행동(실천) 중심의 관점’을 보여
준다. 진정한 믿음이 있고 진실로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우리 믿음은 궁핍한 자들을 돕는 다양한 행동으로 나타날 것이다. 바로 이
관점 덕분에 야고보서가 탁월한 실용적 지침으로 돋보인다.
야고보는 하루하루의 삶과 영적 성장 사이의 깊은 관계를 강조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하나님은 일상생활에서 겪는 고난과 역경들을 우리의 신앙 성장에 특별히 활용하신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2-4). 일터에서의 문제와같은 “여러 가지 시험”은 성장의
밑거름이 될 수 있지만, 야고보는 특별히 앞서 말한 극심한 고난과 역경들이 “믿음의 시련”으로 이어진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렇다면 우리 일터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시련으로 이어지는도전에는 어떤 종류가 있을까?
그중 하나는 종교에 대한 반감이다. 각자처한 상황에 따라,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믿음은 일터에서 편견, 구직 제한, 해고,
신체적 상해, 죽음에까지 노출될 수 있다. 설사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압박을 가하지 않더라도, 신자로서의 정체성이 앞길을
가로막는다는 생각에 신앙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도 있다.
또 다른 종류의 시련은 윤리적인 것이다. 우리는 도둑질, 사기, 정직하지 못함, 불공정
거래, 내 배를 채우기 위해 또는 내 앞길을 위해 남을 이용하는 행위 등을 통해 믿음을 저버릴 수 있다. 직장생활에서의 실패가 또
다른 시련이 될 수 있는데, 이는 너무 충격이 커 자칫 신앙이 흔들릴 수도 있다. 예컨대 정리해고나 일반적인 해고를 당하고 나면
너무도 황당하여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비롯해서 지금까지 믿고 의지한 모든 것들을 회의적으로 보게 된다. 아니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터로 부르셔서 큰 성공을 약속하시지 않았는가’ 혹은 ‘우리가 그분께 충실했으니 성공시켜 주시는 것은 마땅하지 않은가’
하고 물을 수 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결국 믿을 수 없고 심지어 존재하시지 않는다는 생각까지 할 수 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하나님이 과연 우리의 필요를 계속 채워주실지 의심할 수도 있다. 일과 관련된 이 모든 도전들이 믿음의 시련이될 수 있다.
일터에서 우리의 믿음이 시련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될까? 인내하라!(약 1:3-4) 야고보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라고
말한다(약 1:5). 위기를 넘기면 넘길수록 우리는 단단해지며,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기보다 하나님의 도우심에 기쁨을 느낀다.
야고보서는 지혜를 논하면서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는 원칙에서
시작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우리가 업무상의 결정, 기회에 대한 평가, 동료나 고객에 대한 신뢰, 자원 투자 등에서도 하나님께 지혜를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운가? 심지어 야고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를 주실 것을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치
말라’고까지 일러 준다(약 1:6). 즉, 우리의 문제는 일터에서 하나님께 너무 많은 도움을 기대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너무
적게 기대한다는 데 있다(약 1:8).
바로 이 점을 반드시 포착해야 한다.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시는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의심한다면, 당신은 야고보가 말하는 “두 마음”을 품은 자다. 어쩌면 아직 그리스도를 믿고 따를 것인지 아닌지를 결단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것은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약 1:8) 것이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기여할 수도, 심지어 자기
자신도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약 1:7).
야고보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갖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광대한 로마제국 전역에 흩어져 사는 수신자들이 이미 겪는 시련을 너무나 잘 알았다(약 1:1-2). 그러나 그는
신자의 삶이란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시작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야고보서 1장 9-11절에서 야고보는 이를 경제 영역에 즉각 적용한다. 당신이 부유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노력으로 그것을 얻었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자기 능력에 의지한다면, 비록 한창 사업을
진행하는 도중일지라도 당신은 이내 쇠진해질 것이다. 반대로 혹 당신이 가난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냉대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도리어 하나님께서 ‘일으켜 세우실 것’을 기대하라.
실패나 성공의 원인은 당신이 어쩔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이다. 불경기, 기업 매각,
재배치, 흉작, 차별대우, 태풍 피해, 혹은 다른 온갖 요인으로 생계를 위협받게 된 사람들이 그 증인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직장에서 경제적으로 성공하리라고 약속하지도 않으셨지만, 그렇다고 실패하도록 만드시지도 않는다. 오히려 실패와 성공을 모두 다
사용하셔서 악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인내력을 기르길 바라신다. 야고보서 2장 1-8절이 역경의 시기에 하나님을 찾도록 우리에게
당부하는 구절이라면, 9-11절은 성공의 때에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고 되새겨 준다.
비록 야고보가 하나님의 선과 세상의 악을 대비시키기는 해도, 우리는 천사 편에 있고 세상
사람들은 마귀 편에 있다는 식의 상상을 하게 하지는 않는다. 이 점을 주목해야 한다. 대신 선과 악을 나누는 것은 크리스천의 마음
중심에서 비롯된다고 밝힌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약 1:14).
그는 지금 교우들을 향해 말한다. 이에 따라서 우리는 교회는 선하고 세상 일터는
악하다는 정의를 섣불리 해서는 안 된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사기 행각 따위가 벌어지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교회에도 추문이 생기곤
한다. 이처럼 악은 양쪽 영역에 모두 존재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두 영역에서 모두 선을 나타낼 수 있다.
크리스천 공동체는 가난한 자들을 돕는 하나님의 도구 가운데 하나다. 가난한 자들을 돕는
하나님의 약속은 그분의 후하고 너그러우심을 직접 경험한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해서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모든 후하고 너그러운
베풂과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약 1:17, NRSV). 이것은 하나님이 곧 우리를 채워
주시는 궁극적 근원이시며, 또한 신자들은 하나님을 대신해 궁핍한 자들을 채워줄 책임이 있다는 두 가지 진리를 확인시켜 준다.
야고보는 ‘경청’할 수 있는 실천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크리스천들은
사람들(약 1:19)과 하나님의(약 1:22-25) 말을 모두 경청해야 한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 무슨 기술이라도 습득하려는 양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는’(약 1:21) 하나의 길로써 경청해야 옳다.
흥미롭게도 야고보는 성경 말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것까지도 자신의 악을
제거하는 한 수단임을 시사한다. 그는 남들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경우에 잘 듣는 걸 말하는 게 아니라, 그냥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지 못하게 막는 오만과 분노를 없애 준다고 말한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0-21).
달갑지 않은 말들, 곧 거슬리는 말, 비판의 말, 묵살의 말을 남들이 건네면 안 그래도
스트레스가 넘치는 일터에서 분노로 응수하기가 십상이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입지가 더 나빠지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증거를 믿지 못할 것이다. 화를 내거나 직설적인 말로 자신을 방어하기보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우리의 입지를 지켜야
한다.
이런 조언은 모든 유형의 일과 일터에 적용된다. 경청은 비즈니스 서적에서도 중요한 리더십 기술 가운데 하나다.[1]
사업체들은 고객, 직원, 투자자, 공동체, 주주들의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사람들의 진정한 필요를 채워 주려면, 조직체는
자신들이 채워 주길 바라는 그 필요 대상자들에게 귀를 기울여야 옳다. 이 사실은 마치 로마제국이 그랬듯, 곤경과 박해 속에서도
우리의 일터가 하나님의 일을 위한 옥토가 될 수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위의 진리는 충성된 일의 두 번째 원칙, 곧 궁핍한 이웃의 유익을 위해
일하는 것을 다루게 해 준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
이것은 첫 번째 원칙, 곧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때 따라오는 자연스러운 결과다.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남들의 유익을 위해서도 자유롭게 일하게 된다. 반대로 하나님을 신뢰한다면서 궁핍한 이웃을 돕지 않는다면,
이는 하나님을 진정 신뢰하지 않는 것이라고 야고보는 지적한다. 야고보가 말했듯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다(약 1:27). 신앙은 신뢰를
뜻하며, 신뢰는 행동의 밑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야고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께서 여러 소외계층에게 직접 실천해 보이신
모습을 잘 알기 때문이다. 또 야고보는 하나님나라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특별한 자리에 관한 주님의 가르침(약 2:5;
눅6:20)을, 보물을 “땅에 쌓아” 썩혀 버림에 대한 경고(약 5:1-5; 마 6:19)와 결부시킨다.
이 진리는 우리의 일터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왜냐하면 남의 필요를 채우는 것은 성공적인
일터의 으뜸가는 표상이기 때문이다. 그 일터가 기업이든, 교육의 장이든, 건강 관리든, 행정 공무든, 전문직이든, 비영리직 또는
다른 무엇이든 간에 말이다. 성공적인 조직체는 그 소비자, 직원, 투자자, 시민, 학생, 고객 또는 다른 주주들의 필요를 채우기
마련이다. 물론 이것이 야고보의 중점 사안은 아니다. 그는 빈민과 약자들의 필요에 각별히 관심을 기울이기는 하되, 그럼에도 여전히
실용적이다.한 조직이 사람들의 진정한 필요를 채울 때,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것이다.
야고보는 두려움을 계속 직시하고 믿음의 시련을 직접 맞닥뜨리라고 요청한다. 당신이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시련에 직면한다면, 하나님은 그 시련을 통해서 궁핍한 자들을 돌보는 당신의 역량을 배가시켜 주신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되지 말라”(약 1:22). 만약 당신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궁핍한 자들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당신은 자신을 속이는 거라고 야고보는 풀이한다. 그건 진정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왜?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일하지 않고 있다면, 아마 당신 자신의 유익을 위해 일하느라 너무 바쁘기 때문일 테니 말이다. 그리고
만약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서 일한다면, 아마도 하나님이 당신을 돌볼 것이라는 믿음이 없어서이리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일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아서다. 혹은 야고보가
말하듯,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7). 야고보는 예수님의 가르침을(특별히 다양한 소외계층과 가난한 자들을
실제로 돌보신 것을) 경험했기에 이런 통찰력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것은 특별히 예수님이 가난한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그들의 것이라고 가르친 사실(약 2:5; 눅 6:20)이며, 아울러 “이 땅”의 썩어질 재물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약 5:1-5; 마 6:19)를 언급하는 부분에서도 야고보의 암시를 발견할 수있다.
이것은 성공적인 조직의 첫째 조건을 충족시키기 때문에 우리 일에도 직접 적용할 수 있다.
성공적인 조직은 손님, 고용인, 주주, 주민, 학생, 고객과 다른 주주들의 요구를 충족시킨다. 야고보는 사실 처음부터 이런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지는 않았고,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주요대상으로 삼았다. 그래도 이 원칙은 적용할 만하다. 어떤 조직이
사람들의 진정한 필요를 채워 줄 때가 바로 하나님이 함께 역사할 때이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기업의 고객 서비스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크리스천들이 ‘기업에게 고객 대접을
받을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줄 때 오히려 더 큰 창조력이 필요하며, 하나님의 베푸시는 손길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어, 어떤 크리스천 그룹이 베트남에서 사회 · 경제적으로 가장 취약한 계층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
그곳에 가구 공장을 설립했다. 그 공장을 통해 하나님은 가구가 필요한 해외 고객들과 전에 실직자였던 지역 노동자들의 필요를 동시에
채워 주셨다.[2]
이와 비슷한 사례로, 글로리아 닐런드(Gloria Nelund)가 이끄는 트릴링크 글로벌(TriLinc Global)도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개발도상국 내 창업을 돕는 투자회사다.[3]
크리스천들의 의무는 각자의 직업을 통해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사회
구조와 정치 · 경제적 시스템은 빈민들의 필요를 채워 주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크리스천들도 이런 구조와 시스템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기까지, 우리에게는 빈궁한 사람들의 필요뿐만 아니라 부유층과 권력자들의 필요도 채워 줄 책임이 있다.
야고보는 또 앞서 말한 두 가지 기본 원칙을 부자 및 권력자 선호주의에
대한 경고로 사용한다. 그는 둘째 원칙, 곧 ‘가난한 이들의 유익을 위해 일하기’를 갖고 2장을 시작한다.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약 2:8-9).
말하자면, 우리가 부자와 권력자들을 선호한다면, 그건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 자신을
섬긴다는 점에서 죄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부자와 권력자들은 그들의 부와 권력의 일부를 우리에게 뿌려 줄 잠재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와 달리, 빈민들은 우리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고, 필요한 것들만 잔뜩 내보인다. 야고보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부유하고 옷 잘 입은 사람이 교회에 오면 특별 대우를 받는 반면, 가난하고 허름한 차림의 사람은 멸시받기 십상이라는 실례를
든다. 그러니까 교회 출석이라는 간단한 것에서부터, 가난한 사람들은 환영의 인사말에 굶주려 있다는 말이다. 반면 가는 곳마다
환영받는 부자들은 아쉬울 게 없다.
야고보는 또 레위기 19장 18절, 곧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성구를 들어, 부자들은 반기고 챙겨 주면서 빈민은 깔보고 얕보는 행위는 살인이나 간음보다 더 나을 것이 없는 반율법적 행동이라고
지적한다(약 2:8-12). 그렇게 함으로써 이웃을 섬기지 않거나 심지어 가난한 사람을 이웃으로조차 여기지 않는다는 의미다.
야고보는 교회 모임을 언급한 것이었지만, 여기에도 직장에 적용할 부분이 있다. 일터에서
우리는 우리를 도울 사람들, 또는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분별할 수 있다. 건강한 일터라면 이것은 단순히 강조점의 문제다.
그러나 사람들이 권력 다툼을 하느라 서로 치고받는 역기능적인 직장에서는 약한 사람 편에 서 주는 용기가 필요하다. 특정
계층선호주의를 배격하다 보면, 특히 사회에 깊이 뿌리박힌 편파주의, 곧 인종차별, 성에 대한 고정관념, 또는 종교적 편견 등에
부딪칠 경우 더군다나 위험하다.
야고보가 시사하는 ‘타인의 유익을 위해 일하기’ 원칙 적용에는 은연중 하나님 신뢰의 원리가
결부된다. 우리가 정말로 우리의 공급 능력을 확대하려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부자와 권력자들에게 빌붙고 싶은 유혹을
그다지 받지 않을 터이다. 또 일터나 학교에서 비주류 사람들과 어울려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야고보는 그리스도를, 그리고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까지 선행을 하라고 권하지는 않는다. 야고보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선행이 어떻게 가능한지
가시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빈민들 자신이 날마다 이 진리를 살아 낸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약 2:5). 이것은 산상수훈이나 평지 설교 (마 5:3; 눅 6:20)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에 빗댄 것일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어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가능하다.
자신을 의지할 이유가 없어서 그들은 하나님 의존하기를 더 잘 배워 왔다고 할 수 있다.
야고보는 2장에서 일이라는 주제를 좀 더 세부적으로 다룬다. 그는 예외
없이 “일”(헬라어로 ergon; ‘행함’이라는 뜻도 있음 - 옮긴이 주)이라는 단수형보다는 “일들”(erga)이라는 복수형을
사용한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야고보가 단수형이 아니라 복수형을 쓰는 데는 다른 의미가 있을 거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ergon[에르곤]’과 ‘erga[에르가]’는 단지 같은 단어의 단수형과 복수형일 뿐이다.[4]
[5] 야고보는 이 단어를 써서 누군가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온정의 일들부터, 벼논의 수확을 꾸준히 늘리는 등의 일선 업무까지 그려 낸다. 그가 복수형을
사용한 것은 크리스천의 일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기대를 보여 준다. 일(행위)에 중점을 둔 야고보 서신의 논조는 큰 논란을 불러오곤
했다. 루터는 야고보서 2장 24절(“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말씀을 읽고서,
이것이 갈라디아서 2장 16절(‘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과 배치되는 것이라 생각해, 야고보를 싫어하게 된것으로 유명하다. 다른 개혁가들은 루터의 견해를 공유하지는 않았으나,
이후 루터의 이의 제기는 개신교가 야고보서를 보는 지배적인 관점이 되었다.[6]
[7] 여기서 루터의 야고보서 논쟁을 길게 논할 수는 없지만, 야고보가 주장하는 일(행함)이 개신교에서 반대하는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약 2:21, 24-25)과 조화를 이룰 수 없는지 질문해 볼 수는 있다.
야고보 자신이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야고보서 2장 14절은 틀림없이 논쟁 중심부에
있으므로, 본서의 2장 1-13절에 앞서 이 부분을 먼저 생각해 볼 것이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야고보는 자신의 이 질문에 직설적으로 자답한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 그리고 ‘죽은 믿음’에 관해 신중하게 고른 에피소드에서, 누군가 이웃이 헐벗고 일용할 양식도 없는데
평안히 잘 가라는 빈말을 해 주는 경우를 언급한다(약 2:15-16). 야고보는 당연히 그리스도를 믿는 자(하나님을 신뢰하는자)는
궁핍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도와주리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날마다 일을 하다 보면 주변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줄 기회가 생긴다. 원하는 물건을
찾지 못하는 고객을 간단히 도와줄 수도 있고, 도움이 필요한데도 도움 요청하기를 겁내는 신참 동료를 찾아내는 경우처럼 단순한 것일
수도 있다. 야고보는 이런 연약한 자들, 혹은 소외된 자들에게 각별히 관심을 가지라고 권고하고 있으니, 일터에서 그런 대상이
누군지를 가려내는 연습이 우리에게는 꼭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야고보서의 핵심이다. 야고보는 일(행함)과 믿음이 상충된다고 상상하지 않는다.
믿음(신뢰)이 없다면 선한 행위도 없기 때문에 ‘행함으로 의롭게’ 될 수는 없다. 야고보의 말은, 일들(행함) 없이도 믿음이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온전한 구원에 이르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의미다. 야고보는 행함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한다. 바꿔 말하면, 그건 전혀 믿음이 아니라는 뜻이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크리스천들을 향한 야고보의 명령은, 주님께 대한 신앙 대신 다른 궁핍한 이들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라는 게 아니다. 심지어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에 덧붙여 그러라고 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한
결과로써 궁핍한 자들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는 것을 기대한다.[8]
크리스천의 믿음은 언제나 실천으로 이어진다는 통찰은, 일터 현장에서 큰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영적인 것이 곧 실천적인 것이므로, 우리는 세상을 영적인 것과 실천적인 것으로 나눌 수 없다. 야고보는 2장 22절에서 말한다.
“네가 보거니와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그렇기에 우리는 결코 “나는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다닌다. 그렇지만 나는 내 행함(일)과
믿음은 별개의 문제”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런 믿음은 죽은 것이다. 야고보가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약 2:24)라고 말한 것은, 매일 활동에서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헌신을 행동으로 이루어 내야 할
과제를 던진것이다.
야고보서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과 궁핍한 자들에게 유익을 주는 일이라는
기본적인 두 원칙을 실제로 적용한 예를 보여 준다. 야고보서 2장 14-26절에 대한 이 같은 우리의 평가를 전제로, 이런 적용이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완성이라는 관점, 야고보 시대에 유효했고 우리 시대에도 큰 교훈을 주는 이 관점을 유지하고 계속 진행해
나갈 것이다.
야고보는 ‘듣기’에 대한 실천 지침을(약 1:19-21) ‘말하기’에도
적용한다. 야고보서 3장 1-12절에서 그는 자못 맹렬한 단어를 사용한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약 3:6, 8). 또 구약 잠언 말씀에서 혀가 생명을 주관하는 권세를 가졌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으며(그 예로 잠 12:18 -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는 자가있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 같으니라”). 혀가
죽음까지 불러올 수 있다는 점도 잘 알았다.
교회에서 가혹한 말로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점을 제대로 주의하지 않는 크리스천들도 많다.
일터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는 부주의를 범하지는 않는가?(약 3:9; 창 1:26-27) 직장 내
정수기 옆에 모여서 나누는 수다, 뒷담화, 희롱, 경쟁자에 대한 경멸과 같은 일로 상처받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으며, 또 상처를
안 입혀 본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야고보서 3장 14절 - 4장 12절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의존의 원칙과
궁핍한 자들을 섬기는 원칙을 기술한다. 늘 그렇듯이 야고보는 순서를 바꾸어서 섬김을 먼저 논하고, 신뢰는 나중에 다루었다. 여기서
야고보는 먼저 이기적 욕망(selfish ambition)을 꾸짖는 것으로 시작해, 뒤이어 하나님께 대한 복종을 권고한다.
이기적 욕망은 화평하게 하는 일을 가로막는다(약3:16-4:11). 이기적
욕망은 다른 사람을 돕는 일과 반대 개념이다. 야고보서 3장 16절 말씀에 그것을 적절하게 요약했다. “시기와 이기적인 욕망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한 일이 있을 뿐입니다”(현대인의 성경). 야고보는 이런 이기적 욕망을 극복하는 실질적 방안으로
화평하게 하는 일(peacemaking)을 강조한다.[9]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3:18). 그 전형적인 방법으로 곡식을 수확하는 경우를 들어 강조하면서 일터를 암시하고, 몇 가지 화평하게 하는
일들을 나열한다. 피해를 입은 자들을 위해 슬퍼하는 것(약 4:9), 스스로 낮아지는 것(약 4:10), 비방과 기소와 판단을
자제하는 것(약 4:11), 그리고 자비와 진실(약 3:17)이다. 직장에서 일하는 크리스천들은 일터에서 이 모든 것을 실천할 수
있다.
하나님께 복종함으로 이기적 욕망을 극복할 수 있다(약4:2-5). 이기적
욕망은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도 다툼과 싸움을 일으킨다. 야고보는 그것이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규명한다.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4:2-3).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할 수
없다. 흥미롭게도 우리가 하나님께 의존하지 않는 이유는 다른 사람을 섬기기보다 자신의 기쁨을 원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두 가지
원칙을 완전한 하나로 묶는다. 야고보는 하나님 없이 부와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 믿는 유혹을 ‘세상과의 간음’이라는 말로
비유한다(약 4:4-5).[10]
간음의 비유를 쓰기는 했지만, 야고보는 전반적으로 이기적 욕망에 관해
말한다. 일터에서 우리는 자신의 성공을 위해 다른 사람을 디딤돌로 쓰려는 유혹을 받는다. 우리가 동료나 부하 직원의 실적을 가로챌
때, 승진을 위해 경쟁 직원에게 정보를 숨길 때, 자리에 없어서 자신을 미처 방어할 수 없는 사람한테 자신의 잘못을 전가시킬
때, 누군가의 어려운 상황을 자신의 기회로 이용할 때, 우리에게는 이기적 욕망의 죄책이 있다. 야고보는 이것이 다툼의 한
근원이라고 지적한다.
역설적이게도 이기적 욕망은 성공을 촉진시키기보다 오히려 지연시킨다. 조직에서 높은 지위에
오를수록 성공을 위해 남들을 더 많이 의지하게 된다. 일이란 게 부하 직원들한테 떠맡길 만큼 간단할 수도 있고, 국제팀에서
조정해야 할 만큼 복잡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만약 당신이 앞서려고 남들을 밟고 간다는 평판이라도 나돈다면, 누가 당신의 리더십을
믿고 따르겠는가?
자기 형상대로 모든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창 1:27), 모든 사람을 위해 죽도록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고후 5:14)께 복종하는 것이 해결책이다. 우리 자신에 앞서 남들을 섬기는 데까지 야망을 낮출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이다. 당신의 권위와 전문성이 더 높아지길 원하는가? 좋다. 다른 동료들의 권위와 장점을 추켜올리며
돕기 시작해 보라. 성공하고 싶은가? 좋다. 주변 사람들이 성공하도록 투자하라. 역설적이지만 다른 사람의 성공을 위한 투자는
자신을 위한 최고의 투자가 될 수 있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교(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의
엘리자베스 던 교수와 하버드경영대학원(Harvard Business School)의 마이클 놀턴, 이 두 경제학자는, 우리 자신을
위해 돈을 쓰는 것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 투자하는 것이 훨씬 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고 말한다.[11]
이제 야고보는 두 원칙들의 새로운 적용의 하나로 옮겨 가면서 사업상의 예측에 대한 경고를 다룬다.[12]
지금까지와는 달리 이제는 먼저 하나님을 신뢰하는 원칙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정신이 번쩍 드는 말로 시작한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3-14).
마치 단기 사업계획에 선고를 내리는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의 사전계획이 그가 우려하는
관심사는 아니다. 앞날에 무엇이 일어날지를 우리가 통제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점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다음 절에서 야고보가
말하려는 진짜 포인트를 엿볼 수 있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약 4:15).
문제는 계획 자체가 아니라, 미래가 우리 손안에 있는 양 계획하는 태도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자원, 능력, 관계, 시간 등을 지혜롭게 활용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우리가 돈으로 할 수 있는 최상의 계획을 세워 실행하더라도, 그 결과는 얼마나 예측 불가능한지 대다수의 사업가들이 잘
안다. 어떤 주식회사의 연간보고서든 10-20쪽에 달하는 지면 가득 회사에 닥칠 위험요소로 가득하다. “우리 주식 가격은 회사가
통제할 수 없는 어떤 불특정 요인 때문에 크게 변동할 수도 있다.”
오늘날의 일반 회사들과 마찬가지로 예측할 수 없는 일에는 적절히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을
야고보는 명확히 밝힌다. 그럼 어째서 야고보는 세상의 일반 사업체들이 그토록 잘 아는 것을 신자들에게 상기시키는 것일까? 아마도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노라면 예측할 수 없는 삶과 일에 대해서도 면역력을 얻을 거라고 때때로 착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이다. 야고보는 크리스천들이야말로 더욱 지속적으로 재평가하고, 적응하고, 조정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계획은 조정 가능해야 하고 상황 변화에 맞추어 실행해야 한다. 언뜻 보면, 이것은 단순히 사업 실행의 좋은 예다. 그렇지만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면, 이것은 영적인 문제이고 단순히 시장 조건에 대응하는 필요를 떠나 하나님의 인도함을 따르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야고보의 훈계를 다시금 주의 깊게 받아들여야 한다. 크리스천 리더십은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계획과 조치에 강제로 따르도록
하기보다, 먼저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과 인도하심을 우리 삶에 적용하는 것이다.
여기서 야고보는 다른 사람의 필요를 위해 섬겨야 한다는 원칙으로 다시 돌아간다.
야고보서 5장을 시작하는 그의 말은 준엄하다. 그는 ‘부유한 자들에게’ 경고한다.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약 5:1). 금고 안에 빛나는 금은보화와 옷장 안의 화려한 옷들은 언제나 빛날 것처럼 보이지만, 야고보는 그들의
재물이 이미 썩기 시작했다고 단언할 만큼 심판이 임박했음을 확신한다.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약 5:2-3). 그들의
사치하고 허랑방탕한 삶은 오직 도살의 날을 위해 ‘살찌는’ 데까지만 이어질 뿐이다(약 5:5).
이들 부자들은 어떻게 그들의 부를 획득했는지, 그리고 부를 획득하고 나서 무엇을 했는지 안
했는지에 따라 파멸당할 운명이다. 야고보가 불의한 사업 관행을 강하게 꾸짖는 것을 보노라니 구약 성경의 교훈이 떠오른다.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약 5:4;
레19:13).[13] 일꾼의 손에 있어야 할 돈이 사업주의 금고 안에 쌓여 있는 것이다. 그들은 부를 비축했고 주변의 필요한 자들을 외면했다(약 5:3).
사업주는 특별히 일꾼들에게 임금을 지불하는 데 바지런해야 한다. 공평한 임금 지불에 대한
분석 연구는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의 범위를 벗어나지만, 야고보가 ‘사기 쳐서 남기는 임금’(약 5:4, NRSV)이라고
한것은 이 특정 지주들의 권력 남용을 꾸짖는 것이다(개역개정에는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으로 번역했다 - 옮긴이 주).
일꾼들이 마땅히 삯을 받아야 하는데도 권세 있는 부자는 법적 처벌을 용케 피해 가면서 지불하지 않을 길을 발견한 것이다. 그런
부자는 흔히 사법체계를 무력화시킬 수단을 갖고 있어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부당한 권력을 남용하기가 너무나 쉽다.
부자들의 권력 남용에는 직원들을 독립 계약자(independent
contractors)로 잘못 분류하거나 미숙련자로 분류해 낮은 임금을 지급하게 만드는 부정확한 업무 배치, 같은 일이지만 여자
혹은 소수민족을 고용해서 다른 사람보다 낮은 임금 지급하기, 어른들도 꺼리는 위험한 일을 어린이들에게 시키는 아동 노동학대
등등이다. 권력 남용은 소위 표준관행이라는 이유로도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된다.
야고보는 이와 같이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한 자들을 단죄한다(약5:5).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한 삶이 과연 무엇인지를 말하기는 좀 복잡하지만, 수많은 크리스천들에게도 도전이 된다. 이 대목에서 야고보의 주된 관심은
빈민들이 잘 사는 것이므로, 우리 자신에게 물어볼 가장 적절한 물음은 이런 것일 터이다. “내가 사는 방식이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가? 아니면 더 가난하게 하는가? 나의 돈 씀씀이가 사람들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돕는가, 아니면 사람들을 빈곤 속에
머물게 하는가?”
야고보는 인내, 정직, 기도, 죄 고백, 병 고침에 대한 다양한 권면으로써 서신을
끝맺는다. 늘 그랬듯이 이런 것들은 진실한 행함(일들)으로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해야 하는 원칙 또는 하나님께 의존한다는 원칙
가운데 하나 또는 둘 모두에 호소한다. 그리고 여태 해 왔듯이 야고보는 이를 일터에 직접 적용한다.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인내하라
야고보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증거를 일터로 비유하면서 5장을 시작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약 5:7-8). 그러고는 위의 말에 메아리치는
경구로 마무리한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약 5:17-18).
일터에서의 인내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한 형태인데, 매우 힘든 일이다. 일은 어떤 결과를
얻으려는 것인데, 그렇지 않다면 일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 만큼 일을 하지 않고서도 결과를 움켜쥐려는 유혹은 항상있다. 만약
내가 돈을 투자한다면, 빨리 부자가 되고 싶어 하지 천천히되고 싶어 하겠는가? 내부자 거래, 폰지 사기(Ponzi scheme),
슬롯머신에 생활비를 날리는 도박 등은 그런 조급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만약 승진하고자 한다면 상사의 눈에 들도록 별의별
수단을 동원하지 않겠는가? 그것은 중상모략, 신용 위조, 험담, 팀 와해로 이어진다. ‘만약 내가 할당량을 채워야 한다면,
엉성하게 빨리 해치워서 생산라인의 다음 사람한테 문제를 전가시키면 되지 않을까?’ 이런 것들은 개인의 도덕적 문제로 끝나는 정도가
아니라, 직원이 자신의 이익을 도모할뿐더러 제품의 질도 나빠지는 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진실만을 말하라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 받음을 면하라”(약5:12).
항상 진실만을 말하는 사람들이 근무하는 직장을 상상해 보라. 단순히 거짓말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사실 그대로 가장 정확히 이해한 것을 듣고 말한다면? 맹세와 서약도 필요 없고, 소급 해명이 없어도 되고, 허위
진술과 사기에 대한 별도의 계약 조항도 따로 필요 없을 것이다. 판매자가 제품에 대한 모든 정보를 항상 제공한다고 상상해 보라. 또
계약서 내용은 모든 당사자들에게 늘 명료하게 전달되고, 사장과 상사들은 수하 직원들에게 돌릴 공을 명확하게 돌린다고 상상해
보라. 업무 관련 정보를 교묘히 감추기보다 언제나 명확한 대답을 하여 그림처럼 정확하게 전달한다고 상상해 보라. 현재의 직장에서
성공하겠는가? 만일 모두가 최대한 정직해진다면 성공할 수 있겠는가? 성공의 정의가 바뀌어야하는 것 아닌가? 이 주제에 대해서는 TOW 웹사이트 핵심 주제 코너에서 ‘진실과 거짓’ 부분을 보라.
구하라, 하나님께
야고보는 기도 얘기를 하면서 하나님 의존 원칙으로 되돌아간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약 5:13),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 하나님께 구하라”(약 1:5).
야고보는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아뢰라고 우리에게 요청한다. “하나님, 저는 생산에 차질을 빚게 된 이 실패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릅니다. 상사에게 이 문제를 이야기하기 전에 주님께 먼저 도움을 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마다 우리가 기대한 그대로 응답하겠노라
보장하시지는 않지만, 우리의 필요를 능히 채워 주실 수 있다. 많은 크리스천들은 이상하게도 매일 직장에서 부대끼는 특정 이슈들,
상황, 사람들, 필요, 두려움과 의문에 관해 마지못해 기도한다. 하나님의 구체적인 인도하심을 (심지어 특정 결과를 위해 간구하라는
야고보의 권면도) 자꾸만 잊어버린다. 그는 우리에게 믿음을 가지라고,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삶에서 실제로 응답하시리라고 말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서로 죄를 고백하라
야고보는 서로 죄를 고백함으로써 치유를 받도록 하라고 권고한다(약5:16). 일터에서
가장 흥미로운 말은 ‘서로’다. 여기서의 전제는 사람들이 단순히 하나님께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 죄를 짓는다는 것이며,
일터에서의 경우는 분명히 그렇다. 우리는 매일 생산과 업무 수행의 압박, 시간의 제약을 받고, 종종 귀 기울이지 않은 채
행동하고, 반대 의견을 무시하고, 불공정하게 경쟁하며, 자원을 독차지하고, 귀찮은 정리를 옆 사람에게 떠넘기고, 내 욕구불만을
동료들 탓으로 돌리곤 한다. 우리는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다.
유일한 치유의 길은 서로 죄를 고백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동료의 성과를 부정확하게
비판함으로써 그가 승진에서 제외되었다면, 단지 하나님께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뿐 아니라 직장에서도 그 죄를 피해자에게 고백해야
한다. 그 손상을 정말 바로잡기 원한다면, 해당 부서의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죄를 고백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동기로 죄 고백과 병
고침을 원하는가?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의 필요를 섬길 수 있다. “너희가 알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 것임이라”(약 5:20). 사망에서 누군가를 구원하는 것은 아주 깊고 절실한 필요를 채워 주는
섬김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죄인이기 때문에) 아마 우리 역시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사망에서 구원받도록 다른 누군가도 지금
우리를 돕고 있을 것이다.
베드로전서는 예수님께 충성했기 때문에 비방을 받고, 거짓 고소를 당하고, 신체적으로 학대받는 사람에게 쓴 서신으로(벧전
2:12, 18-20; 3:13-17;4:4, 14, 19), 여기서 베드로는 어떻게 크리스천이 자신의 고난을 세상을 위한
섬김으로 바꾸어 살도록 부름받았는지 설명한다.
그리스도는 그분을 알지 못하는 세상에서 그분을 따르도록 우리를 부르셨다. 우리는 낯선
이곳에 머무는 나그네이며, 여기는 우리의 진정한 집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가지 시험”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벧전
1:6). 그러나 베드로는 우리가 이 세상의 희생양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을 세상에 가져오는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부른다(벧전
2:5). 크리스천의 일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면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그분의 왕국을 회복할 때까지 세상을 축복하는
일이다.
서신 서두에서 베드로가 수신자들에게 쓰는 “나그네들인, 택하심을 입은 이들”(벧전
1:1, 새번역)이라는 본 구절은 베드로 서신 전체를 관통하는주된 메시지의 전조로 보인다. 이 구절은 ‘나그네들’과
‘선택받은’이라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 왕국의 시민이라면, 당신은 나그네다. 당신을 둘러싼 현재 이 세상은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은 외세 지배 아래 있는 것이다. 당신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동안, 당신의
진정한 왕국 시민권은 ‘하늘에 간직돼’ 있다(벧전 1:4). 어떤 나라에 잠시 거하는 나그네들처럼, 당신도 당신이 사는 땅의
통치자들의 총애를 반드시 누리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 스스로 오셨지만 “사람에게는 버린 바”(벧전 2:4) 되셨다.
마찬가지로 그분 왕국의 모든 시민들도 같은 대우, 곧 사람들에게 버린 바 되는 상황을 예상해야 한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동안 이 낯선 땅에 머물도록 우리를 부르셨다(벧전 1:15-17).
정치적 은유로 말하고는 있으나, 베드로는 일터의 용어를 들고 있다. “행위”(벧전
1:17), “은이나 금”(벧전 1:18), “불로 연단”(벧전 1:7), “깨끗하게 하여”(벧전 1:22), “집으로
세워지고”(벧전 2:5) 등등. 베드로가 일터 용어를 사용한 까닭은 우리가 일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주변 노동세계
가운데서 우리가 주님을 따를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해서다.
‘나그네’라는 말의 의미를 설명한 뒤, 베드로는 또 다른 용어 ‘선택받은’(벧전 1:1)을
사용한다. 만일 당신이 크리스천이라면, 당신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다. 당신이 임시로 거주하는 이 나라의 제사장이 되기 위해서다.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 베드로전서 2장 9절에서도 제사장의 타이틀 또는 ‘왕 같은 제사장직’은 거듭 나온다.
고대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은 희생제사를 드렸고 이스라엘을 축복했다
더 나아가기 전에 고대 이스라엘에서 제사장이 된다는 게 무엇을 뜻했는지 알아야 한다. 제사장에게는 주로 두 가지 역할이 있었으니, 예루살렘 성전에서 희생제사를 드리는 것, 그리고 제사장적 축복 선언이었다.[14]
[15]제사장들은 희생제사 의무를
감당하기 위해 성소나 성전의 내실로 들어가야 했고, 대제사장의 경우 매년 한 번씩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 있어야
했다. 대리적 축복 선언을 하기 위해 그들은 하나님 당신을 대신하여 말해야 했다. 이 두 가지 직무를 수행하려면 모두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가야 했다.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 앞에는 불순하거나 부정한 것은 아무것도 용납될 수 없기에 결국 각별한 정결 또는
성결은 필수적이었다.[16]
그러면서도 제사장들은 순번제로 돌아가며 자기 차례에 섬겼고(눅1:8) 주된 생계 수단으로 일반 직업에 종사했다. 그들은 일상생활에서 격리될 수도 없었지만, 세상의 더러움과 부패에도 불구하고 정결을 유지해야만 했다.
우리는 이 시대 제사장이다.
베드로가 크리스천들이 “거룩한 제사장”(벧전 2:5)과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으로 부름받았다고 한 것은 모든 신자가 자신을 전임 목회자로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전도자나 선교사가 되는 것이
선택받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성취하는 최선의 길이라는 의미도 아니다. 무슨 일로 생계를 유지하든, 크리스천들은 그 가운데서
순결하고 거룩한 삶을 산다는 뜻이다.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주변 사람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릴 수 있고,
하나님의 복을 전달할 수있다. 베드로는 직설적으로 말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하려 함이라”(벧전 2:11-12).
물론 크리스천들이 유대인 제사장들과 똑같은 희생제사를 드리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동물을
죽여 바치지 않는다. 대신 우리 주님이 앞서하신 것과 같은 희생제사를 드린다. 즉 궁핍한 자들의 유익을 위한 자기 희생이다.
베드로는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라고 말한다. 이것은 ‘영적 희생’(벧전 2:5) 즉, 궁핍한 자들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선한
청지기로 드리는 것을 뜻한다(벧전4:10).
우리는 날마다 일터에서 크든 작든 이런 자기희생의 기회를 만난다. 이는 베드로전서 1장
3절-2장 10절을 요약한 것으로, 사도 베드로가 수신자들을 왜 ‘선택받은 나그네들’(NRSV)이라고 불렀는지 내력을 알 수
있다. ‘나그네들’이라는 용어에는, 우리가 본향이 아닌 낯선 땅, 부정부패가 만연한 곳에서 외국인으로서 우리의 소명을 살아 낸다는
뜻이 담겨 있다. ‘선택받은’이라는 말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 ‘왕 같은 제사장들’은 특별히 자기희생을 통해서 세상에 복이
되는 제사장의 소명을 지녔음을 확인시켜 준다.
크리스천의 노동 환경에서 나그네와 제사장으로서의 부르심을 수행한다는 것은 어떤
일일까? 베드로는 이것을 외국인과 종인 수신자들에게 주는 직접적인 지침으로 말한다. 비록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은 우리에게
‘자유인’(벧전 2:16)으로 살아갈 권리를 부여해 주지만, 땅의 외국인들로서의 우리는 우리가 사는 나라가 어디든 그곳의 모든
시민법과 제도를 존중하고 순종해야 한다(벧전 2:13-14). 비록 베드로가 어떤 부류의 일꾼들이라고 밝히지는 않지만, 분명히
수신자들의 다수를 이루는 ‘종들’에게 자신이 받는 대우가 정당하든 부당하든 어떤 주인에게도 순종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은 예견된 일(벧전 4:12)이며, 오히려 보복하지 않고 그리스도 고난의 자취를 따라 고난을 감당할 기회를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벧전 2:21).
주의할 것은 여기서 베드로는 부당한 수난을 말하는 것이지, 우리 자신의 무능, 오만,
무지로 인해서 겪는 어려움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정당한 형벌이라면 순복하는 맘으로 받아야 한다. 사실 당신은 위의
권위에 불복할 자유가 없다. 비록 당신이 생각하기에 올바르다고해도 그렇다. 당신이 승진, 임금 인상, 창이 있는 사무실, 수준급의
의료보험 제도 혜택을 받을 만한 충분 조건을 갖추었는데도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어쩌면 고용주가 당신을
의도적으로 기만하고, 시간 외 근무를 강요하고, 상사의 잘못을 당신에게 뒤집어씌워 징계를 가할 수도 있다.
반면 당신 또한 아프지도 않으면서 병가를 내고, 개인 물품을 사면서 회사에 전가시키고,
회사 사무용품을 슬쩍 챙기거나 업무 시간에 빈둥거리는 것 같은 일로 고용주가 당신을 속인 것만큼 그렇게 윤리적으로 회사를 속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나으니라”(벧전 3:17).
하나님은 뺏기는 만큼 도로 취하라고 가르치지 않으신다. 당신이 속은 만큼 남을 속인다고
해서 당신의 행위가 덜 악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적대적인 업무 환경일지라도 오직 선을 행하도록 당신을 부르셨다(벧전2:20).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라’(벧전 3:9). 오히려 크리스천들은 심지어 불의하고 부당한 권위도 존중해야만 한다.
왜 그런가?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옹호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듯이(벧전 2:21-25), 우리는 제사장으로 사람들을 축복하도록 부름받았지, 우리 자신을 옹호하도록 부름받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는 권위에 도전하시고 권세를 사용하는 데 주저함이 없으셨지만, 베드로는 여기서 복음의
전체 개요를 다시 말하지는 않았다. 특별히 예언서와 같은 다른 성경의 경우, 억압적이고 불법적 권위에 대해서는 저항하라고 하나님이
강조하셨다.
항복이 항상 순종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도 공공연하게
불순종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임으로써 권위에 복종할 수도 있다. 이 대목과 그의 서신서 전체를 통해 베드로는 오로지 그리스도의
자기희생 모범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베드로는 이제 ‘장로들’(elders;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는 헬라어 어원에서 온
영어식 표현 ‘presbyters’나 ‘bishops’가 익숙하다)이라고 칭한 교회 리더들에게 지침을 준다. 이것은 또한 다른
사람을 섬기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어 일터에 있는 지도자들에게도 훌륭한 조언이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
자원함으로 하며”(벧전 5:2). 돈에 대한 탐심을 품지 말라(벧전5:2).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본을
보이라(벧전 5:3).
베드로는 잠언 3장 34절을 인용하면서 젊은이들에게 (아니, 사실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하고 겸손을 권유한다. 이것이 유독
베드로전서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 확대 설명을 하지는 않겠다. 단지 오늘날 일터에서 널리 활용하는 종의 리더십 개념을
베드로가 잘 알고 있었음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예수님의 탁월한 종의 리더십이 전수될 수
있었겠는가?(벧전 4:1-2, 6)
베드로후서는 거룩한 삶과 고난을 견디는 인내의 필요성에 관해 야고보서와 베드로전서에서 이미 보았던 여러 주제들을 강화한다.
여기서는 이 부분을 반복해서 다루지 않고, 일의 신학에 대한 강한 도전을 주는 베드로후서 3장에서만 그렇게 할 것이다. 만일
“현재의 하늘과 땅은 심판 날에 모든 경건치 않은 사람들을 불로 멸망시키기 위해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존되고 있는 것”(벧후
3:7, 현대인의성경)이라면, 오늘날 우리의 일은 그 가치가 무엇인가? 대럴 코스덴(Darrell Cosden)의 중요한 책에서
제목을 빌려 살펴본다면, 이 땅에서의 노동은 하늘에 무슨 유익이 있는가?[17]
우리가 이 땅에서 하는 일은 하나님과 관련이 있을까?[18] 대럴 코스덴은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다. 그의 논쟁의 핵심인 예수님의 몸의 부활은 (1) 물질 세상의 선함을 확인시켜 주고, (2) 지금 세상과 새 창조 세계 사이의 연속성을 보여 주며,[19](3)
아직 완전히 구현되지 않았지만 이미 시작된 새 창조의 표징이다. 우리의 노동은 궁극적인 가치가 있다. 구속받고 성화된 우리의
수고의 열매는 하늘을 그 본향으로 삼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3장은, 코스던의 일의 신학에서 두 가지 필수불가결한 면모들 즉
(1) 창조물의 타고난 선, 그리고 (2) 지금의 세상과 다가올 창조 세계의 연속성에 대한 질문을 떠올려 주는 것 같다.
베드로는 여기서 악을 심판하는 역사에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조롱하는
불법자들에게 맞선다(벧후 3:3-4). 그러면서 현재 세계와 미래 세계의 연속이 결여된 듯한 모습을 보이는데, 그것은 우주의 종말
또는 소멸을 뜻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 3:7).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 3:10).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벧후 3:11).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벧후3:12).
그러나 우주의 종말이 눈에 보이듯 너무나 가깝다고 속단하지는 말라.[20]
베드로가 사용하는 종말의 이미지는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독자들에게 확증해 주는 구약 성경의 예언적 계시에서 흔히 찾아볼수
있다. 구약 성경의 예언서들과 제2성전 시대 유대 문학은 모든 의인의 정화와 악인의 멸망을 언급할 때 불의 이미지를 은유적으로
사용했다.[21]
[22]
베드로후서 2장 7절, 10절과 3장 12절을 종말묵시문학의 관행적 흐름안에서 읽어 보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녹아 버리는 이미지를 하나님이 선과 악을 구별하시는 과정의 은유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23]
이것은 베드로가 첫 번째 서신에서 불의 이미지를 어떻게 사용했는지 보여 준다. 즉
수신자인 성도들도 역시 금을 제련하는 것과 같은 시련을 거칠 터인데, 이 불 시련을 통과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칭찬과 영예를
얻으리라는 진리를 상기시켜 주었다(벧전 1:5-7). 이 구절들은 문자 그대로 하늘과 땅이 소멸될 것을 강조한다기보다 모든 악이
궁극적으로 단절될 것임을 말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베드로는 ‘녹아 버리다’, ‘불에 풀어지다’, ‘심판’, ‘예비된 불’ 같은
용어로 세상을 변화와 시험의 면에서 조심스럽게 표현한다. 더글러스 무(Douglas Moo)는 베드로후서 3장 10-12절에서
사용된 ‘불에 녹아 버리다’는 헬라어 ‘lu?[루오]’가 멸절의 의미가 아니라, 급격한 변화를 뜻한다고 해석하면서 그 대안으로
‘undone’(풀린 상태의 또는 미완의 - 옮긴이 주)이라는 번역을 제안한다.[24]
베드로는 노아 시대를
언급하면서(벧후 3:5-6) ‘물의 넘침’을 완전한 멸절로 풀이하는 해석을 경계한다. 그것은 세계의 존재 자체의 끝이 아니라
인간의 악을 정화하는 의미였다. 노아와 가족, 소유와 방주 속 동물에 국한된 인간의 선은 보존되었고, 생명도 물리적 지구에서 다시
시작되었다.
끝으로, 궁극적 미래에 대한 베드로의 긍정적인 비전을 물질계 질서의 쇄신으로 묘사한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3). 이것은 보잘것없고 육체를 벗어난 저세상이
아니라 ‘하늘’과 ‘땅’을 포함한 새로운 우주다. 베드로후서 3장 10절에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라는
말씀이 있다. 드러난다고 했지 파괴된다고 하지 않았다. 불타고 난 후에도 여전히 ‘일들’이 남아있으리라는 뜻이다. 이상은 본
베드로후서가 현재 일의 영원한 가치에 관한 신학의 주된 근간이라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본 서신이 그런 신학으로 일관되어 있다는
얘기다.
우리가 원하는 만큼 충분히 상세하지는 않지만, 베드로후서는 현재 땅에서 하는 일과 미래에
경험할 일 사이에 모종의 연속성이 분명히 있다고 말한. 모든 악은 결국 소멸되지만, 모든 의로운 것들은 영원한 본향에서 새
창조를 맞이할 것이다. 불은 소멸하면서 더불어 정화시킨다. 풀어짐(용해됨)은 일의 끝을 가리키지 않는다. 하나님을 위해 행한 일은
오히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참된 결말을 이끌어 낸다.
비록 야고보서와는 무척 다른 상황에서 기록되기는 했지만, 요한일서도 역시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행위인 ‘행함’이 없는, 그런 믿음이 가능한지 도전한다.[25] 요한일서 2장에서 요한은 하나님을 진실하게 안다는 것은 성화된 인격과 행동, 하나님께 대한 순종으로 명백히 나타난다고 말한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3-6).
요한일서는 재차 야고보서와 보조를 같이하면서 궁핍한 자를 돌보는것을 하나님을 바로 아는
지식에서 나온 행동으로 간주한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요일 3:17) 한 걸음 더 나아가 요한일서는 믿음과 행함 사이의 관계를(요한의 용어로는 ‘하나님을
아는 것’과 ‘순종하는 것’ 사이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요한은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지는 것(요일 2:8-11),
하나님께 사랑받게 되는 것(요일 3:16; 4:7-10, 16, 19-20),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의 자녀가되는 것(요일
2:29; 3:1-2, 8-9),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가는 것(요일 3:14) 등의 다양한 이미지를 사용하면서, 하나님께
순종하기 전의 우리 실상을 보여주는 동시에 순종이 가져오는 결과까지 설명해 준다. 요한에 의하면, 올바른 삶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요 그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일
4:7-10).
요한은 이런 과정의 결과로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할 수
있다’(요일 1:7)고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의 대속적인 희생제사를 통해 우리를 질적으로 다른 존재가 되게 하여, 우리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대로 행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우리는 단지 이따금 한 번씩 빛을 켜 놓는 사람들이 아니다.
새로운 삶의 양식으로써 계속 빛 가운데 걷는 사람들이다. 이로써 직장 윤리에서도 직접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프로테스탄트(개신교) 사상 및 생활에서 오랫동안 경시해 오다가 최근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 하나가 ‘덕 윤리학’(virtue
ethics)이다.[26]
덕 윤리학은 규율을 정하고 즉각적인 결정의 결과를 계산하기보다 장기적인 도덕성 함양에
중점을 둔다. 규율과 명령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요일 5:3). 즉, 좀 오래 걸린다 해도 도덕성을 먼저 형성해 두어야 그런 규율들을 준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 긴
논의는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겠지만, 요한의 ‘빛 가운데 걸어가기’라는 개념은 덕성으로 접근하는 라이프스타일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우리가 하는 것(일)은 필연적으로 우리의 됨됨이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TOW 웹사이트 핵심 주제 코너에서 ‘윤리’ 부분을 보라.
빛의 은유에서 우리가 특별히 적용할 한 가지는, 우리의 직장생활이 열려 있어야 하고
투명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행동을 빛으로부터 감추려 하기보다 면밀하게 검토하고 행하자는 얘기다. 빛 가운데 행하면서
투자자를 속이지 않고, 품질 기록을 허위로 조작하지 않으며, 동료를 험담하지 않고, 뇌물을 갈취하지 않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요한일서 1장 7절은 요한복음 3장 20-21절 말씀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의
되풀이다. 보다 자세한 논의는 이 시리즈 3권 《일하는 크리스천을 위한 사복음서 · 사도행전》 4장 부분을 보라.
롭 스미스(Rob Smith)는 아프리카 빅토리아 호수에서 사용할 배를 만드는 비즈니스
선교사역체를 이끌고 있다. 그는 지역 관리들로부터 자주 뇌물을 요구받는다고 한다. 그런 요청은 언제나 비밀리에 이루어진다. 그런
지불에는 영수증도 없고 거래 기록은 어디에도 남지 않는다. 스미스는 이런 요청들을 빛 가운데로 가져가기 위해서 요한복음 3장
20-21절을 사용해 왔다. 그는 뇌물을 요구하는 관리들에 이런 식으로 말하곤 한다. “저는 이런 식의 지불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이에 대한 문서 작성을 위해 대사님이나 경영책임자를 불러들이고 싶습니다.” 그는 이런 전략이 뇌물에 맞서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뇌물이 비윤리적이기는 해도 시장 및 이익 확장의 도구가 된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지만,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조지 세라핌(George Serafeim)의 연구에 따르면, 뇌물 증여는 사실 장기적으로 회사 수익을 감소시킨다.[27]
이와 관련하여 요한일서에서는 하나님 나라에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 반드시 전임 사역자가
될 필요는 없다고 역설한다.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소위 ‘영적’ 사역이라고 불리는 설교와 전도를 하면서 월급을 받지는 않지만,
모든 크리스천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행위로써 빛 가운데 행할 수 있다(요일 3:18-19, 24). 그런 모든 행위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하며, 따라서 매우 영적이고 의미가 깊다. 이와 같이 교회에서하는 일이 아닌데도 가치가 있는 것은, 그것이
전도의 기회를 잡을 수도 있는 곳인 데다 선교기금으로 쓸 수 있는 임금을 받는 곳일뿐더러 주변 사람들을 섬김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친교를 구현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일터가 이웃 사랑의 가장 실천적인 수단인 까닭은 멀고 가까운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주는 물자와 봉사를 창출해 내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동은 하나의 영적 소명이다.
이런 의미로, 요한일서는 우리를 다시금 야고보서로 이끌어 간다. 두 책 모두 크리스천의
삶에서 순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하며, 이것이 어떻게 일의 신학에서 하나의 요인으로 포함되는지 보여 준다. 일터에서든,
어디에서든,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할 수가 있다. 궁핍한 자들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목숨도 주셨던 그리스도를 본받기 때문이다.
요한의 각 서신서는 “진리”(truth; 진실)와 “사랑”의 개념을 하나로 묶어서
다루는 게 특징이다(요일 3:18; 요이 1, 3절; 요삼 3절). 이 개념이 가장 확장되고 발전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요한이서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너의 자녀들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 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요이 3-5절).
요한에 의하면, 사랑에 진리를 더하면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우리와 함께할 수 있는
환경이라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종종 진실이 빠진 사랑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추구한다. 일터에서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을
하면서, 진실을 말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잘못된 믿음으로 불편한 진실은 가리거나 숨긴다. 혹은 진실을 말하면 평강이나 은혜보다
악감정이나 충돌이 일어날 것이라고 걱정한다. 딴에는 긍휼을 베푼다고 생각하면서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언제나 진리와 함께 출발해야 한다. 사랑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로 오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진리의 완전한 구현이시다. 말하자면, 사물 본연의 모습을 잘 아시는 하나님은 그분의 지식을 사랑으로 감싸
그분의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 주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만약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한다면, 허위와 회피 혹은 거짓말이아닌
진실에서 시작해야만 한다. 진실을 말하노라면 충돌을 일으키거나 자신 혹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어지럽힐 수 있다. 그렇지만 진정한
은혜와 긍휼과 평강은 현실과 맞닥뜨리고 어려움의 수고를 거쳐 진정한 해결점에 다다를 때에 절실하게 다가온다.
제너럴 일렉트릭사 CEO 잭 웰치는 직원들의 업무 성과에 대해 진실하면서도 노골적인 평가를
내리는 그의 관행 때문에 논쟁의 중심에 섰던 사람이다. 그는 매월 회사가 기대하는 바를 직원들이 얼마나 충족시켰는지 본인에게 알려
주었다. 그리고 일 년에 한 번씩은 그들이 최고의 성과를 올렸는지, 아니면 이런저런 부문에서 개선이 필요한 중간 정도의 성과를
보였는지, 혹은 해고의 위험에 처한 최하위 성과를 보였는지도 말해 주었다.[28]이런 관행을 가혹하다고 간주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웰치는 그것을 사랑의 표현이라고 봤다.
거짓 친절을 베푸는 관리자야말로 가장 나쁜 관리자다. 나는 (나긋나긋하게 잘해 주기만 하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당신이 친절한 관리자이니 훌륭한 관리자라고 생각해요? 그럼, 내 말을 들어 봐요. 당신이
영원히 그 자리에 있지는 않겠죠. 안 그래요? 승진을 하든지 은퇴하겠죠. 그리고 당신 후임으로 새 관리자가 와서 당신 부하였던
직원을 보고는 이렇게 말할 거요. “이런, 경력에 비해 실력이 너무 부족하군요.” 그런데 이제 그 직원이 쉰 살도 넘고, 삶의
다른 선택지도 별로 없다고 합시다. 그럼, 당신은 그 직원한테 뭐라고 할 건가요? 이젠 집에 가서 쉬라고 할 건가요? 그게 어떻게
친절인가요? 그렇게 되면 당신은 가장 잔혹한 관리자가 되는 겁니다.”[29]
진실함에는 대가가 따른다 (요이7-11)
요한은 우리에게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다’(요이 7절)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진실을 말하다가는 속임수로 이득을 챙기는 자들과 충돌할 것이다. 이런 난관에서도 진실을 말할 것인가, 아니면 속이는 일에 참여할
것인가? 만일 속이는 편을 택한다면,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정직한 사람들이 아님을 인정하는 셈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이 시리즈 1권 《일하는 크리스천을 위한 모세오경 · 역사서》 3장의 “출 20:16” 부분과 6장의 “신 5:20” 부분을 보라.
미국의 전 조폐국장 에드 모이(Ed Moy)에게는 이런 일화가 있다.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 회사 차량을 개인적으로 사용한 경우와 공적으로 사용한 경우의 유지비 보고서를 늘 구별해서 기록했다.
그때까지 회사에서는 집에서 직장으로 갈 때만 개인 용도로 처리하고, 나머지는 (심지어 개인적 여행일지라도) 회사 공용으로 처리하는
관행이 있었다. 그런데 에드가 이렇게 사적 용도를 정직하게 구분하자 그의 상사는 마치 그를 해고할 듯이 나무랐다. “우린 보수도
시원찮고, 이렇게 하는 편이 더 수입을 올리는 길일세. 자네 보고서는 동료들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있어.” 그러자 에드는
이렇게 답했다. “원하신다면 저를 해고하실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런 작은 일로 거짓말하는 사람이 부하로 있길
원하십니까? 그 부하의 영향력이 올라간다면 어떻게 그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우여곡절 끝에 에드는 그 직장을 계속 다녔다.[30]
속이는 자들이나 거짓 교사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할 것인가? 에드의 예에서 우리는 그런
계약을 파기시키는 것만이 최선은 아니라는 것을 알수 있다. 우리는 단순히 그 자리를 피하기보다 계약을 유지하며 진실을 말함으로써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게다가 만일 우리가 거짓을 일삼는 모든 사람들과 계약을 파기한다면, 누가 남게 될 것인가? 심지어 우리
자신조차 말이다.
요한은 대면하여 계속 대화하고 싶다는 말로 본 서신을 마무리한다.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대면하여 말하려 하니 이는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하려
함이라”(요이 12절).
아마도 전달하려는 의사를 편지로 써서 간접적으로 전하는 경우에는 오해가 생길 수 있다고
깨달은 듯하다. 이것은 비록 거리 때문에 서로 대면하는 것이 어렵다 할지라도 대면하여 직접 말하는 편이 더 효과적이라는, 세심한
의사소통에 관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해 준다. 21세기 일터는 개인 의사소통에서 훨씬 더 복잡한 도전이 기다린다. 오늘날 원거리
소통에는 화상회의, 전화, 문자 메시지, 편지, 이메일, 소셜 미디어 등등의 다양한 옵션이 있다.
그러나 효과적인 소통은 여전히 메시지의 성격에 적합한 미디어를 요구한다. 예를 들어서
이메일은 주문하는 데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지만 업무평가 내용을 전달하는 데는 아마 그렇지 못할 것이다. 더 복잡하고 더 감성적인
메시지일수록, 더 직접적이고 사적인 수단이 필요하다. 인텔 상무였던 팻 겔싱어(Pat Gelsinger)의 말을 들어 보자.
내게는 나만의 규칙이 있다. 만일 한 가지 주제로 네다섯 번쯤 이메일을 주고받았다면, 나는 더
이상 이메일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 후에는 전화를 사용하거나 직접 만난다. 어떤 문제를 빨리 해결하지 못한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한쪽은 냉정함을 잃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당신이 가장 직설적으로 말한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대방을 무능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는 의사전달 수단 때문일 수 있다. 이것은이 문제를 설명하는 데 중요한 요소다.[31]
잘못된 소통 수단은 쉽게 오해를 살 수 있고, 진실 전달에 실패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뿐인가, 잘못된 수단은 사랑을 전하는 데도 실패할 수있다. 그래서 바른 소통 수단을 선택하는 일은 우리 동료들에게 진실을 전하고
사랑을 보여 주는 데 필수적이다. 힘든 대화라도 존경과 온정으로 소통해야 하며, 달갑지 않은 사람과 소통할 때는 특히 그렇다.
마음이 불편하거나 불쾌할 때라도 얼굴을 맞대야 한다.
요한은 가이오라는 이름의 ‘동역자’(요이 8절)에게 이 서신을 보냈다. 요한은 서신을 통해서 개별적으로 접근한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2절).
그는 동역자의 육체(강건)와 영혼에 관심을 나타낸다. 동료를 단지 일꾼으로서만이 아니라
전인적으로 본다는 그 자체로, 이것은 일터에서 중요한 교훈이다. 그런 다음 요한은 일한 것에 맞게 대우받지 못하는 예로 자기
자신을 든다. 회중의 일원 가운데 디오드레베를 거론하면서 교회의 권위를 약화시키려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한다’고 요한은
말한다(요삼10절). 세 서신서 모두에서 요한은 주로 진리와 사랑에 함께 관심을 둔다 (요삼 1절). 그런데 디오드레베는 이와는
정반대로 증오 가운데 거짓 언행을 일삼았다. 다음 번역에서 요한의 고통이 더욱 생생하게 느껴진다. “내가 가면, 그가 하는 일들을
들추어내겠습니다. 그는 악한 말로 우리를 헐뜯고 있습니다”(요삼 10절, 새번역).
디오드레베가 신자라는 사실은 고통을 가중시킨다. 여기서 크리스천이 되었다는 자체만으로는
우리가 완전해질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디오드레베는 자신이 옳다고 여겼을 것이 틀림없다. 우리가 거짓 비방이라고 인식하는
그것을,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경고로 알려 주어 그들 자신을 방어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법하다.
일터에서 의견을 내놓으면서 자신이나 남들에게 좋지 못한 인상을 끼친 적이 있는가?
다음과 같은 간단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면, 남들의 시각으로 자신을 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누군가에 대해서 말할때
그가 한 방에 같이 있더라도 똑같이 말할 자신이 있는가?’ 만일 여기에 부정적인 대답이 나왔다면, 우리는 당사자에 대한 거짓
인상을 심어 줄수 있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나쁜 인상을 줄 수 있다. 요한이 디오드레베에 대해 말하는 것은 비방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편지가 교회에서 회람될 것을 잘 알았고, 디오드레베가 자신의 불평을 듣고 반응할 것에 대해 마음을 열어 놓고 있었다.
반대자에게 기회를 주어서 자신의 불평에 대응하도록 한 것은 요한이 진실과 사랑을 하나로
묶은 본질적 요소다. 디오드레베에 대한 요한의 불만을 전한 것은 반대자에게 설명이나 자기변호의 기회를 마련해 준것이다. 오늘날
같은 강도로 반응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대중 매체에 의해서 퍼져 가고, 수많은 공인들이 자행하는 ‘언론재판’과는 어떻게 다르다고
볼 수 있을까?
이 원칙은 개인뿐만 아니라 단체에도 적용할 수 있다. 여러 사람을 폄하하는 것은 한 개인을
비방하는 것보다 행여 더 나쁘지는 않더라도 마찬가지로 나쁘다. 사실 일터에서 생기는 온갖 종류의 불공정한 대우는 그들을 열등한
혹은 위험한 그룹으로 낙인찍으면서 시작된다.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곧 특정 상황의 진실을 발견하려는 쪽에
서서 편견과 연대 죄에 대한 거부 발언을 할 기회가 왔다는 신호다.
요한이 칭찬하는 데메드리오는 이 편지를 전달하는 형제로, 그 또한 흥미롭다. 요한은
데메드리오를 가이오와 그의 교회 앞에 높임으로써 자신의 지도자로서의 영향력을 행사한다. 요한은 데메드리오의 진실한 삶과 교회의
신자들에게 존경받는 삶을 칭찬한다. 일터에서 리더들은 (설사 표면상으로 복음이 승인받지 못할 때도) 그들의 권력과 영향력을 진실,
정의, 사랑, 그리고 긍휼이라는 목표를 향해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본 서신도 요한이서와 동일한 생각으로 끝을 맺는다. 요한에게는 지금 펜과
먹으로보다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을 법한 소통 내용이 있다(요삼 13-14절). 그러나 요한삼서는 우리 일상을
약간 색다른 시각으로 바라본다. 바로 마지막에 요한이 이렇게 덧붙인다. “너는 친구들의 이름을 들어 문안하라.” 사람의 이름을
거들며 말하는 것이 소통상 필요하다는 점과 그런 소통이 개인적인 터치를 증대시킨다는 점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대다수는 일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대면한다. 복도를 지나며 가볍게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과도 어느 정도는 소통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름을 불러 가며 인사할 정도로 잘 아는 대상은 몇 명일까? 당신은
상사의 바로 위 상사, 그 위 상사, 또 그 위 상사의 이름을 아는가? 아마도 알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 일터의 쓰레기통을 비우는
사람의 이름은? 당신과 의견 충돌이 있는 사람의 이름도 부르며 인사하는가? 어떤 시점에 필시 당신의 도움이 필요할지 모를 회사
신참 직원들의 이름은 익혔는가? 이름을 모르는 데다 익히는 것도 귀찮아 하면 사람들에 대한 당신의 존경과 온정의 수위가 여실히
드러날 터이다. 요한은 각 사람의 이름으로 그에게 인사를 할 정도로 충분한 배려심이 있다.
유다의 이 짤막한 서신서는 바로 역기능적인 한 일터, 즉, 경건치 못한 지도자들 탓에 엉망이 된 교회를 그린 놀라운 그림으로
시작한다. 교회마다 고유의 문제들이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유 4절)과 이단(‘고라의 반란’ - 유 8절) 등과
같은 이슈들이다. 다른 문제들은 권위 부정, 중상모략(유 8절), 폭력(‘가인의 길’), 탐욕(발람의 실수, 유 8절) 등등,
세속적인 일터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다.[32]
최악의 권력 남용은 자기 양 떼를 희생시켜 가며 자기 배를 채우는 지도자들에 의해
저질러진다. “그들은 겁 없이 너희와 함께 먹는다. 그들은 자기 자신만 기르는 목자다”(유 12절, NRSV). 유다는 탐욕스런
교회 지도자가 자신을 위해서 교회 재정을 유용하는 경우를 언급하는데, 이는 탐욕스런 경영진이 보고이익과 자신들의 상여금을
유지하려고 회사 연금 기금을 횡령하는 것, 혹은 사무실 직원이 업무 시간에 웹 서핑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모든 악한 일에 관해 유다는 교회와 마찬가지로 일터에도 놀라운 명령을 하고 있으니,
바로 긍휼히 여기라는 것이다.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유 22-23절).
유다는 악한 일에 강하게 대응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불이나 두려움이나 더럽혀진 육체
같은 이미지 표현을 볼 때, 유다의 긍휼은 유약함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긍휼은 엄격하다. 그 긍휼의 소망은 단순히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는 것이다.
이 엄격한 긍휼은 직장 상황에 따라 필요해진다. 누군가 사기를 치거나, 동료를 괴롭히거나,
고객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가볍게 넘어갈 수없는 문제다. 더 큰 악으로 발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단순히 설욕하여
대갚음하는 징계를 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어느 누구도 소망이 없는 사람은 없다. 경건한 지도자는 각 개인을
존중하고, 어떤 징계로써 그를 다시 일원으로 맞아들일지 현명하게 판단해야 한다.
일반서신은 두 가지 원칙에서 시작했다. 1.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함 2.
궁핍한 자들의 유익을 위해서 일할 수 있도록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함
이 두 가지 원칙은 믿음의 삶에서 일터를 이해하는
신학적 통찰과 일터를 위한 여러 가지 실천적 지침의 기저를 이룬다(특히 야고보서에서).
여기 두 가지 질문이 있다. 1. 우리는 이 두 원칙을 믿고 있는가? 2. 우리는 실제로 이 원칙들을 직장생활 속에 적용하고 있는가?
우리는 두 가지 원칙을 믿고 있는가?
우리는 일터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상황을 겪는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과연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분으로 믿을 수 있을지 의심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확신하거나 장담한다. 하나님을 신뢰해 온 듯한
사람들의 필요가 채워지지 않는 예가 있다는 것도 잘 안다. 직업, 집, 은퇴 자금, 심지어 삶 자체를 상실하는 사람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결코 기대하지 못했던, 혹은 전혀 가져 보지 못했던 좋은 것을 얻기도 한다. 새로운 기회가 생기고, 작은
노력이 큰 성공을 거두기도 하고, 투자한 일이 잘되기도하고, 낯선 사람이 내 필요를 채워 주기도 한다. 우리의 진정한 필요를
하나님께서 채워 주리라고 믿는 게 옳은가? 일반서신은 이 심오한 질문에 확고한 답을 얻기까지 씨름하게 만든다. 이 씨름은 아마
일생 동안 계속될지 모른다. 하지만 부정하는 것보다 씨름하는게 더 낫다.
궁핍한 자들의 유익을 위해서 일을 해야 한다는 원칙 또한 미심쩍기는 마찬가지다. “모든
사람들은 주로 자신의 부를 증대시키기 위해서 일한다”라는 경제의 기본 원리와 충돌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사회 전반에 팽배한 ‘자기
자신만을 생각해라’라는 태도와도 충돌한다. 우리는 (만약 우리에게 그럴 능력이 있다면) 우리가 제대로 보수를 받고 있는지 증명해
달라고 요구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우리의 노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제대로 유익을 끼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증명하려 하는가?
우리는 두 가지 원칙을 일터에 적용하고 있는가?
우리는 자신의 필요를 채우는 일을 스스로 점검하면서,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능력을
신뢰하는 정도를 가늠해 볼 수 있다. 혹시 우리 자신을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존재로 만드는 지식을 비축하고 있는가? 미래에
대한 안전감을 주는 고액의 퇴직금 혹은 고용계약서를 요구하는가? 날 마다 해고의 두려움을 안고 출근하는가? 가족과 공동체를 소홀히
여긴다는 강박관념을 느끼며 일하는가? 다른 여지가 없다는 불안 탓에 굴욕, 분노, 업무 미숙과 건강에 문제가 있는데도 맞지 않는
일을 계속하고 있는가? 엄격한 원칙은 없으며, 이런 행동 중 (강박 상태를 제외하고) 일부 혹은 전부는 특정한 상황에서 현명하고
적절할 수 있다.
일터에서의 행동을 보고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는지 알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는지가 하나님을 얼마나 깊이 신뢰하는지를 읽어 내는 가장 탁월한 지표다. 나는 주변 사람들이 일을 잘할 수
있게 돕는가? 혹 그가 나보다 앞서갈 가능성이 있더라도 그리하는가? 내 자리를 잃을 위험을 무릅쓰고도 동료들, 고객들,
납품업자들, 그리고 힘없고 어려운 자들을 지원하러 나서는가? 선택 가능한 범위 안에서 나 자신의 유익보다 궁핍한 자들의 유익을
위해 일하는 편인가?
유다서가 상기시켜 주듯이 우리는 매일 일터에서 이런 원칙을 적용할 무거운 책임이 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영적 민감성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와 우리 일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의 육신적 결과의 문제다. 그렇지만
그 책임은 판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긍휼한 마음을 갖기 위함이다.
일반서신은 일의 개념을 재정립할 과제를 제시할 뿐만 아니라 누구를 위해 일해야 하는지를
재정립하는 과제도 준다. 만일 우리 필요를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우리 자신이 아닌 그분을 위해서 일할 수 있다.
하나님을 위해서 일할 때, 남을 섬기게 된다. 남을 섬길 때 우리는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그러면서도 하나님나라의 시민으로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복을 가져오게 된다. 우리의 일을 통해 세상에 들인 하나님의 복은, 세계가 우리의 참된 집이 되도록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다음 발걸음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일한다(벧후 3:13) .
서신서(書信書) The Epistles
1. 명칭
‘서신서’(書信書,
the Epistles)란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이 로마제국 전역에 흩어져 있던 여러 지역의 초대교회 공동체 또는 특정 개인에게
신앙의 도움을 주기 위해 써 보낸 편지들 중, 성령께서 초대교회 성도뿐만 아니라 이후 세대의 모든 성도들의 신앙의 근거가 되게
하시고자 특별히 영감하신 편지들로서, 훗날 신약 정경(正經, Canon)으로 채택된 로마서에서 유다서까지의 21권의 책을 가리키는
명칭입니다.
27권의
신약성경이 기록된 시기는 A.D.50-100년 어간이나 이것들이 교회의 공식적인 정경으로 인정된 것은 대략 300년이 지난
A.D.397년의 칼타고 공회(Councils of Cartago)에서였습니다. 또한 이 27권의 신약정경 중 21권의 책이
서신서로 불리게 된 것은 알렉산드리아의 교부 제롬(A.D.346-420)에 의해서입니다.
제롬은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였을 뿐 아니라 헬라어를 모르는 자들을 위하여 신약성경도 라틴어로 번역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벌게이트역’(Vulgate譯)입니다. 이 ‘벌게이트역’ 성경에서 제롬은 로마서에서 유다서까지를 한 부류로 묶어 이름을 붙였는데,
그것이 곧 서신서였습니다. 그리하여 A.D.150년경의 순교자 저스틴이 명명한 ‘복음서’(the Gospel)란 명칭과
마찬가지로 ‘서신서’란 명칭은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의 모든 교회에서 통용되는 명칭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서신서는 성도들이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교회의 일원이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삶의 원리와 지침들을 제공해 주는
책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근간이 되는 교리 전반을 다른 성경의 어떤 부분들보다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큽니다. 한편 복음서와 사도행전이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와 복음의 확장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증거한 것이라면, 서신서는 그러한
역사적 사건들을 성도의 삶과 연결하여 구체적으로 적용시킨 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 분류
서신서를
분류하는 가장 일반적이고 전통적인 방법은 저자별로 분류하는 것인데, 서신서 중 바울이 기록한 13편의 서신을 ‘바울서신’이라고
부르며 그 이외의 저자들이 기록한 8편의 서신들은 통칭하여 ‘공동서신’, 혹은 ‘일반서신’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서신은 수신자 또는
수신지역의 이름을 따서 그 책의 제목이 지어진 반면, 공동서신은 수신자를 반영한 이름인 히브리서를 제외하고는 모두 그 책의
기록자의 이름을 따라 그 제목이 붙여졌습니다.
그밖에 각 서신이 지니는 내용과 용도 및 기록 배경상의 특징에 따라 구분하면 아래의 도표와 같습니다.
* 서신서의 분류(저자별) *
구분
책명
저자
수신자
바울 서신
로마서
바울
로마교회
고린도전서
〃
고린도교회
고린도후서
〃
〃
갈라디아서
〃
갈라디아교회
에베소서
〃
에베소교회
빌립보서
〃
빌립보교회
골로새서
〃
골로새교회
데살로니가전서
〃
데살로니가교회
데살로니가후서
〃
〃
디모데전서
〃
디모데
디모데후서
〃
〃
디도서
〃
디도
빌레몬서
〃
빌레몬
구분
책명
저자
수신자
공동
서신
(일반 서신)
히브리서
미상
유대인성도들
야고보서
야고보
유대인성도들
베드로전서
베드로
유대인성도들
베드로후서
〃
유대인성도들
요한일서
요한
전체교회성도들
요한이서
〃
전체교회성도들
요한삼서
〃
가이오
유다서
유다
유대인성도들
* 서신서의 분류(특징별) *
구분
서신 종류
기준
교리서신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기독교의 구원론,기독론,교회론 등의 주요교리들을 집중적으로 다룸
재림서신
데살로니가전.후서
종말론, 재림 집중적으로 다룸
옥중서신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바울이 로마 옥중에서 기록함
교회서신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일곱교회에 보낸 서신
목회서신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에베소와 그레데교회 목회자에게 보낸 서신
회람서신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여러 사람이 돌려가며 읽을 것을 염두에 두고 쓴 서신
추천서신
빌레몬서, 요한삼서
편지를 전한 사람을 소개하거나 보증하기 위해 작성한 서신
답변서신
고린도전.후서, 빌립보서
어떤 문제에 대해 답변하는 형식
3. 기록의 요소들
* 발신인
히브리서의
발신인이 누구인지 분명치 않은 것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서신들은 본문 서두에 발신인이 분명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 서신
중에는 바울과 함께 한두 명의 발신인이 더 언급되어 있는 것이 있는데, 이들은 바울과 함께 동역한 자들로서 바울의 편지를 통해
안부를 전했거나 아니면 바울의 편지를 대필했거나 협조했던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 수신인과 전달경로
고대의
서신에서는 대개 수신인에 대해서 간략히 언급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당시 서신들이 오늘날처럼 공공 우편기관을 통해 전달된 것이
아니라 신뢰할 만한 전달자를 통하여 수신인에게 직접 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몰론 당시 로마제국은 공식적인 우편업무를 보았지만
사적 교신은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부유한 이들은 이 일을 위한 노예를 거느렸으며, 사도들은 자신의 동역자나 여행하는
성도의 편에 편지를 부쳤던 것입니다. 로마서는 여집사 뵈뵈에 의해 전달되었으며, 빌립보서는 에바드로디도에 의해 전달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대필자
오늘날과
같이 종이나 인쇄술이 발달하지 못한 고대 사회에서는 대필자라는 전문직업인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종이 대용으로 사용되었던
양피지나 파피루스 위에 글을 쓴다는 것은 전문적인 숙련이 요구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글을 모르는 문맹인들이나 좀더
세련된 글을 쓰기 위해서도 전문적으로 편지를 받아쓰는 자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서신서 중에도 대필자에 의해 기록된 서신들이
있는데, 이 경우는 단순한 전문 직업인이라기보다는 교회의 일원으로서 특별히 선택된 일꾼들이 대필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는 실루아노(실라)에 의해 대필되었으며(벧전 5:12), 바울 역시 대필자를 시켜 기록하게 했습니다(롬 16:22).
신약 27권 중
21권이 서신으로 분류된다. 즉 신약의 3/4이 서신이다. 가장 이른 서신 (아마도 갈라디아서- 49년)은 가장 이른 복음서
(아마 마가복음- 59년) 보다 10년은 더 빠른 것으로 보인다. 서신서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떻게 각 지역 교회에
전파되었으며, 그 후 개체 교회는 어떻게 특별하면서도 다양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가이다. 따라서 서신서는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복음을 그 핵심 주제로 한다.
1. 서신서의 장르
서신서는 바울이나
베드로, 요한 혹은 무명의 성도의 신학을 집대성한 논문(theological treatise-compendum)으로 우선적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먼저 1세기 특정한 수신자에게 특정한 상황과 문제에 대한 설득, 경고, 책망, 권면, 영적인 목회적 가르침을
위한 글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따라서 역사적 정황을 연구하는 것은 서신서 이해의 기초요 중요한 열쇠가 된다.
구체적인 상황에서
쓰여진 상황문서들(occasional documents)이다. 여기서 우리는 제한된 자료와 정보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닌다. 하지만 특정한 교회의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하려는 신약 서신 저자들의 신학적인 사상을 우리는 충분히 찾고 체계화 할 수
있고 해야만 하기에 바울 신학, 요한 신학, 베드로 신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별로 주저할 필요가 없다. 이것에 대한 반대
견해는 오래 전에 아브라함 카이퍼에게서 볼 수 있는데 그는 성경 저자들을 결코 신학자라고 부를 수 없다고 한다. 이유는 신학은
신학보다 앞서 형성된 교리(dogmas)와 분리해서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며, 교리는(제도적인) 교회 생활이 낳은 산물이기
때문이다.
성경 자체는 신학이
아니며 신학에 기초를 제공한다. 하지만 계시의 도구로서 바울의 신학적 사고의 틀이 사용된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이 말은
성경의 인간적인 요소가 강조되는 것으로 오해하면 곤란하다. 반대로 인간이 계시 전달의 도구화되었음을 강조하기에 하나님의 활동은
더욱 주도적이고 특별해 진다(참고. 게핀, 1992:29, 31).
서신은 상황적이되
신학적이다. 서신서 연구는 과제신학적(task theology)이다. 즉 어떤 과제의 해결을 위해 저자의 신학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체계화하는 것이다. 바울이 현대의 신학박사보다 못한 영성과 지적인 능력을 가졌겠는가? 바울은 다른 성경 저자보다 더 조직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확증하는데 더 많은 관심을 쏟은 것이라기보다는 구속 사역을 해석하는데 더
관심을 쏟은 것이다.
환언하면 바울의
관심은 구속역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그 절정을 이룬 것을 믿고 그 구속 역사를 설명하는데 있었다. 하나님은 계시 전달에
있어서 바울의 교육적 배경과 성격을 유기적으로 사용하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바울은 기독교 자료를 조직적으로 다룬 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참고. 박형용, 1992:6. In 리차드 게핀. '부활과 구속' 추천문. 엠마오). 편지는 시간을 두고 문제를
파악한 후 세밀하고 주도면밀하게 논리를 전개해 갈 수 있는 좋은 매체였다. 따라서 저자의 논리와 신학을 우리는 체계화 할 수
있다.
1.1. 용어 : 서신인가 아니면 편지인가?
"Light from
the Ancient East"(1927, 1965)에서 Gustav Adolf Deissmann은 많은 파피루스를 연구한
후에 서신(epistle)과 편지(letter)를 철저히 구분하여 그 중 하나를 선호하나(물론 이 구분에 타당한 지적이 있다)
우리는 교차적으로 사용하기로 한다. Deissmann에 의하면(참, 사적인) 편지(real letter)는 비문학적인 것으로
일반 회중이나 후대 사람들을 상대로 쓴 것이 아니라, 그 편지를 직접 받을 특정 개인이나 집단만을 위해 쓴 것이다.
반면에(공적)
서신(epistle)은 일반 회중을 대상으로 한 예술적인 문학형태, 또는 문학의 한 종류이다. Deissmann은 모든 바울
서신을 letter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다. 바울 서신과 비교하면 벧후, 요일은 훨씬 더(회람용, encyclical) 서신에
가깝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epistle이란 용어 안에는 편지로서 갖추어야 할 정확한 형태나 요소가 없다는 뜻이 암시되어
있다.
1.2. 주후 1세기의 서신:
1세기에 학생들은
초등교육을(혹은 12-15살) 받을 때부터 편지를 쓰는 교육을 받았다. 전문 편지 작성자를 위한 지침서도 있었다. 1세기에는
상업, 법률, 군사, 행정 등 여러 가지 목적으로 서신이 이용되었다. 따라서 시대의 아들인 바울-베드로-요한 역시 그 당시의
서신의 형태(특히 personal-private letter)와 특징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서신서 역시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차원을 배제한 서신서 분석은 무의미하다.
신약 서신서와
그레코-로마(Greco-Roman)의 서신들 간의 유사점을 연구하며 설득의 기술을 분석하는 것은 매우 유용하다. 물론 신약
기자들이 그 형식에 메이지 않고 자유롭게 변화를 주며 서신의 주요 내용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삼아 초대 교회에 전한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형식과 틀을 빌려 사용했지만 그 내용은 기독론적인 요소가 강하다는 것이다.
2. 서신의 형식
일반적인 헬라의
서신은 인사말, 감사말, 본론, 마지막 인사말로 구성된다. 신약 서신에는 그 당시의 다양한 문학적인 전통들을 수용했는데, 예를
들면, 당시의 수사학 양식들, 설득 양식 등을 사용했다. 바울-베드로-요한 서신의 형식은 일반적으로 아래와 같다: 서신이면서도
서신의 형태를 벗어나는 책도 있다. 히브리서, 특히 히 1-10장은 그리스도의 우월성과 그리스도 신앙을 지킬 것을 강조하는 설교
양식이다(히 13:22, '권면의 말'). 그리고 요한일서와 계시록도 다르다.
서론(Preamble)- 송신자, 수신자, 인사말(빌레몬서 1-3) Formula valetudinis(수신자의 행복과 관련된 말): 건강을 기원하고 감사의 말을 함 (4-7) 주요 논의를 소개함(Body-opening) (8-11) 본론적 논의(Main argument or body) (12-20) 논의의 결론(Body-closing) (21-22) 결론: 인사, 때로는 특정한 말의 첨가, 결론적인 고별 인사(23-25)
신약 서신은 고전 수사학적 형식을 일부 따른다(참고. 정태현, 1996:124-127):
(1) 서론(exordium 혹은 prooemium): 청중의 주의를 끌어 그들이 좋은 뜻으로 연설의 내용을 받아들이도록 준비시키는 짧은 말. (2) 연설 가운데 부분은 목적 제안(propositio)과 이성적 추론(rationes)으로 이루어진다. 1. 목적 제안(propositio): 연설이 얻고자 하는 목적을 제시하는 기능. 목적 제안은 두 가지 요소로 세분화 될 수 있다: 1.1. 세부설명(partitio): 강조하고 싶은 부분들을 자세히 설명함. 1.2. 사건 개진(narratio): 목적 제안에 맞춰 사건의 흐름을 진행함. 2. 논증(argumentatio): 여러 가지 증명을 끌어내는 기능. 반증(refutatio)은 반 대자의 견해를 반박하기 위한 논증. (3)
귀결(peroratio): 결론(conclusio)에 해당하는 부분인데 논증에서 제시된 증명들이 이제 분명히 옳다는 것을
천명하는 짧은 끝맺음이다. 연설자는 여기서 청중이 자신의 견해에 동조하는 판단을 내려 주기를 요청한다. 귀결은 두 가지 기능을
한다: (가) 목적 제안과 결론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나) 논증의 요지를 간추려 반복(recapitulatio)한다.
갈라디아서의 경우
서론(1:6-10), 사건 개진(1:10-2:14), 목적 제안(2:15-21), 논증 혹은 증명(3:1-4:31), 그리고
마지막 부분(5:1-6:10)은 권고문(paraenesis)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인사말(1:1-5)과 추신(6:11-18)이
앞뒤를 장식한다. 물론 모든 서신에 이런 형태가 정확히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야고보서는 실로 서신의 형식이 거의 없고
히브리서도 진짜 편지 형식에 분류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공공 설교인지 논란이 된다.
3. 서신이 읽혀진 방식
빌레몬서 그리고 요
2-3서와 같은 몇몇 개인적인 서신을 제외하고는 서신들은 주로 예배 중에 크게 읽혀지도록 의도되었다. 그 이유는 사도의 부재 중
서신이 그 사도를 대신하여 말씀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며, 그 당시는 기록된 문서의 시대라기보다는 구전의 시대였기에 하나의
편지(책값은 비싸고 인쇄술이 발전되지 못함)로 여러 사람이 듣고 말로 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초기 기독교의 선교활동의 수단이
편지이다. 따라서 서신이 낭독될 때 청중이 잘 그리고 오래 기억할 수 있도록 수사학적인 기교를 사용했는지 연구할 필요가
있다(예. 헬라어 표현의 중복 등).
4. 서신서의 수사학적인 기교
수사학이란 무엇인가? 고전적인 의미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진리가 거짓에 의해 가리지 않도록 말을 잘해야 한다는 동기에서 정의하기를 "화자가 청자를 위해 설득을 위한 가능한 모든 수단을 연구하는 학문"을 지칭한다.
고전수사학자들은
따라서 말하는 사람이 청중에게 보여주는 신뢰도(ethos), 그리고 청중의 감정에 대한 호소 (pathos), 또한 논리 정연한
주장 (logos)을 잘 조화시켜서 전하려는 진리를 잘 배열하고, 완전히 외운 다음에, 적절한 언어를 구사해서, 잘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사용한 고전 수사학이 1세기에 유행했는데 주로 4가지 요소들을 포함한다: 서론(exordium)→ 사실 진술(narratio)→
논증(probatio)→결론(peroratio) (참고. H.D. 베츠의 '갈라디아서 주석'. 한국신학연구소의 국제성서주석
시리즈 중).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고전 수사학의 3가지 종류:(Kennedy, G.A. 1984. New Testament interpretation
through rhetorical criticism.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1972.
The art of rhetoric. Princeton University Press; Vernon K. Robbins.
1996. Exploring the texture of texts. Trinity Press International;
Burton Mack. 수사학과 신약성서- 나단출판사 한국 저자의 책으로는 수사학적 성경해석의 이론과 실제- 현경식/이성호
공저- 성서연구사를 참고하라).
a. 법률적이고 변증적인 수사학- judicial-forensic: 법정에서 과거의 사건에 대한 변론과 판단을 청중에게 설득하는 것. b. 정치적이고 심의적-의도적인 수사학-deliberative: 공공집회나 정치적인 변론이 이루어지는 장소에서 청중들로 하여금 어떤 행동들을 미래에 취하도록 설득함. c. 의식적-제의적 수사학-ceremonial-epideictic: 공공예배나 의식에서 어떤 인물 (덕)이나 사건을 칭송하거나 책망하여 청중들에게 현재의 어떤 견해와 전망을 갖도록 설득하는 것.
서신을 해석함에
있어서 이것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함이 균형잡힌 해석을 위해 중요하나 먼저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서신, 하나님의 설득으로서의
서신(NT epistles as God's divine persuasion)으로 보아야 한다.
참고로 현대
수사학(modern rhetoric)은 이런 법정적, 정치적, 의식적인 범주를 너머 모든 인간의 언어적 및 비언어적 행동을 그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 따라서 소설, 시, 연극, 영화, 광고, 신문 기사, 음악, 사회 현상 까지도 그 대상으로 삼는다. 모든
인간의 이야기 속에는 그 주장하는 바의 이념적인 동기가 포함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따라서 이야기에는
가치 중립적인 것이 있을 수 없다고 본다. 화자의 세계관이 전제되어 있기에. 또한 화자가 청자를 설득하는 기술로 보지 않고 더
나아가 화자와 청자가 불확실한 그 무엇에서 확실한 것으로 해결해 나가는 과정으로, 해결해 나가도록 돕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청중은
설득의 대상이 아니라 결정의 참여자이다.
따라서 수사학은
인간의 의사소통에 사용된 모든 수단들을 묘사하고, 분석하고, 해석하고, 평가하는 작업을 말한다. 화자의 의도, 내용의 분석,
본문의 구조와 문학적 기교를 분석, 화자와 청자의 사회-역사적 배경, 그리고 설득을 통한 화자의 결정과 실행 등을 종합적으로
연구하는 사회수사학은 개혁주의 서신 해석에 유용한 기여를 한다.
수사학적 해석을
문학적인 해석 혹은 자유주의적 해석 방법으로 여기고 일방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바른 태도가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말씀을 하나님의 종들이 인간의 언어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 한 것이기에 인간의 언어를 분석하는 수사학적 비평은 적절하고
유용하다. 이를 통해서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1세기 서신서의 수신자들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와 그 영향력을 더 잘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사회-수사학을
길게 소개하는 이유는 최근의 서신서의 해석 경향 중 가장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이것이기 때문이다. 즉 역사 비평 방법만으로
연구하던 전성기는 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역사비평의 주요 관심은, 예를 들어, 이것이 바울의 것인가? 이 편지는 이전에 어떤
자료들을(기독교의 찬송, 케리그마, 교리문답 등) 모집한 것인가? 구전자료 혹은 주변의 다른 나라의 서신과의 종교사학파적 비교
등.
5. 로마제국 안에서 서신을 통한 복음의 전파의 용이성
통일된 로마제국은
발달된 교통망(예. 리챠드 보컴 등: holy internet)을 갖추어서 비교적 빠른 시일 안에 서신이 전달되었다. 그리고
언어적으로는 코이네 헬라어가(비교: 고전 헬라어는 좀 더 학적이고 고급) 보편적으로 사용되어서 언어적인 문제는 거의 없었다. 그
어느 시대보다 1세기 로마 제국은 복음이 효율적으로 증거되는 기반이 조성된 시기였다. 여기서 1세기의 여행에 대해 살펴보자.
로마 제국 시대에 하루 도보 여행길은 보통 32km 정도였고 급사(急使)들은 80km까지 여행 할 수 있었다.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은
현대인과 똑같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여행했다. 사업과 정부의 공무, 제의적인 순례, 순전히 관광적인 차원 등 여러 이유가
있었다. 육상여행은 고대에서 가장 자연스럽지만 안락하지 못한 여행의 형태였다. 하지만 1세기의 육로 여행은 어느 시대보다 안전하고
편안한 여행으로 평가된다. 네로 시대에 런던에서 로마까지 육로로 가는데 28일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로마의 군대가
효과적으로 이동하기 위해서 도로가 건설되었다. 로마의 도로망은 2차 세계대전 후 주간(州間) 간선도로가 발전되기 전까지는
견줄만한 것이 없었던 독보적인 것이었다. 빗물이 잘 빠져나가도록 가운데 부분이 약간 더 높았으며, 도로 양끝에는 도랑과 연석을
놓았다. 로마의 도로는 폭이 최소 8피트였고 평지에는 대개 10-12피트의 폭이 일반적이었고, 대도시로 진입하는 도로의 폭은
30-40피트였다.
여행을 위해 통행증이
발급되었는데, 특히 공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제한되었다. 여행을 위한 숙박시설로 여관이 잘 발달되었지만, 대개 친구 혹은
친구의 친구 집을 숙박 장소로 이용했다. 여행 날씨는 5-10월 사이가 선호되었다. 그리스인과는 달리 로마인과 유대인은 해상여행을
그리 선호하지 않았다. 나폴리에서 알렉산드리아까지 배로 여행하는데 9-27일이 소요되었는데, 바람과 일기에 따라
결정되었다(참고. 앨버트 벨, 2001:469-481). 참고로 holy internet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복음서를 특정
공동체로 한정하는 것을 반대한다. 헬라어가 사용되는 모든 지역에로 전달되는 그 범위가 수신자의 범위로 본다. 하지만 특정
수신자의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이 주장이 설득력 없이 보인다.
6. 서신의 특성
a. 성격상
인격적(personal)이나 사적(private)인 것이 아니다. 물론 예외적으로 아주 사적인 것도 있기는 하다. 공적인
헬라시대의 사업서신(business letters)은 아니지만 교회에 주어 보내어진 것이기에 공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바울의
경우 그의 동역자들을 공동 송신자로 언급함으로 공적인 특성을 더욱 강조한다(고전 1:2; 고후 1:1; 갈 1:1; 참고.
크리스챤 베커, 1998:43).
b. 대화와 현존
(먼저 편지로 만나고 조속한 시기에 실제적 방문-현존- 롬 15:22; 빌레몬서 21절): 마치 송신자가 독자 가운데 있는
것처럼 말하는 방식을 택한다. Koskenniemi가 주후 400년까지의 헬라 편지를 연구하여 이 두 요소를 강조했다. 대화적
특성이 있지만 더 나아가 문학적인 기교와 세련됨으로 정제된 대화이기에 일상 대화 보다 더 문학적이다.
c. 설교체: 강한 감정과 애정, 목회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 d.
계획적이지만 형식주의적이지 않다: 보통 헬라편지의 중요한 한 가지 특성은 전형적이고 비인격체적인 특성이다. 심지어 가장 친근한
가족과 친구간의 서신에서도 의식적이고 상투적인 틀을 유지했다. 반대로, 신약 서신에서는 건조하고 의미 없는 형식을 제거해 버린
것을 새로운(기독론적인) 내용으로 본다.
7. 서신서 해석의 원칙
(1)
사회-문화-정치-종교-역사적 상황을 본문과 보조 자료를 사용하여 재구축하라. 주로 저자와 수신자(유대인인지 헬라인인지)와의
친분관계, 그리고 수신자가 처한 사회문화적-교회적 형편에 주목하라. 이때 성경 사전이나 주석, 그리고 신약 서론 책을 참조할 수
있다(특히 유용한 것은 Martin, R.P. 1997. Dictionary of Paul and his Letters.
IVP와 Hawthorne, G.F. 1993. Dictionary of the later New Testament and
its developments. IVP).
(2) 기초적인
역사적 배경을 숙지한 후 편지를 전체로 읽는 것 즉 쉬지 말고 두 번 정도 완독하여 전체의 감과 맥을 잡아야 한다.
indicative(예. 롬 1-11장 상황 진술, 권면, 책망 등)→ imperative(예. 롬 12장)→ promise(롬
16:25-26)를 고려하라. (3) 논리의 흐름을 따라 사고의 시작과 마감이 분명한 좀 더 세부적인 단락으로 나누어 살펴보라.
(4) 문학적 이해가 필요하다. 즉 핵심단어와 반복되는 용어, 그리고 수사학적 표현을 중심으로 연구하라. (5) 신학적 이해가 필요하다. 특히 구약의 인용을 통한 계시사의 전진, 그리고 기독론적인 은유 혹은 그레코-로마의 문화에 반하는 기독교적 강조 등에 주의를 기울여 보라.
(6) 유비를 통한 적용을 해석(hermeneutics가 아니라 interpretation)의 마지막 단계로 해야 한다. 서신 역시 성령의 감동으로 된 영감된 말씀이기에 모든 시대의 교회에 그 적합성을 가지고 있다.
(6) 단계와
연관하여 서신서 메시지의 현대로의 적용의 원칙을 살펴보자- what it meant에서 what it means로 넘어오는
다리: 실제로 학자들이 1세기의 의미를 연구하는데서 그치고 그 현대적 적용에 대해서 소홀히 했기에 교회 안에서 서신서를 통해서
제기되는 실제적인 문제들에 대한 모호함이 여전히 많이 남아있다. 적용은 더 어렵고 기도를 요하는 작업일 수 있다.
이 작업을
윤리학자들의 몫으로만 남겨 둘 수 있는가? 오히려 적용이 성경적 원리에 대한 정확한 통찰에서 나오지 않고, 교회-교단의(신학적)
색깔-전통 혹은 한국적인 유교적 관습 등에 지배받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시대에 진리와 규범이지만 문화적
상대성(cultural relativity)으로 인해서 1세기 서신의 내용을 문자적으로 21세기에 적용할 때 무리가 따를 수
있다.
아래의 두 예를 보아도 적용이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안다:
(1) 딤전 5:23: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이것을 음주를 허용하는 본문으로 볼 수 있는가?
(2) 고전 14:34-35/ 딤전 2:9-15: 지금도 여성이 교회에서 설교하는 것 혹은 여성 안수를 금지하는 것인가?
이런 질문을 염두에 두고 적용을 위한 몇 원칙들을 살펴보자:
(1) 1세기의
상황과 유사한 상황 속에 우리가 산다면 그 본문의 신학적 내용과 윤리적인 명령들은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말씀이다(예.
고난 중에서도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한다). 서신서에서 일관되게 죄로 규정하는 것(음란, 동성애, 방탕…)은 여전히 늘 죄이다.
하지만 지나친 확대 적용은 금물이다. 고전 6:1-11에 세상 법정에 송사하지 말라는 것을 두 크리스천의 사업상 문제가 발생했을
때도 적용하지 말아야 하는가?
(2) 유사성이 아주
약하거나 없는 경우에는 어떠한가? 갈 5:2-6에서처럼 성도에게 할례를 강요하는 일이 한국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이 경우에 이
말씀은 21세기 한국 교회에 어떻게 적용되는가? 이때는 what it meant에 근거하여 적용의 구체적인 유비가 아니라 성도의
삶에 주는 원리를 도출해야 한다.
이 원리는 지역,
시간, 상황을 초월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 할 것은 무차별적으로 이 원리를 아무 상황에 적용할 수 없고, 그래도 유사한
상황에서만 적용 가능하다. 예를 들면, 바울이 이방 신전의 축제에 참여하거나 거기에 바쳐진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라고 할 때,
이것은 귀신과 사귀는 것이기에, 21세기에는 한국 교인들의 삶 중에서 점성술, 사술, 사주팔자, 심령술 등에 적용할 수 있다.
사실은 여기서도
유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시대와 장소에 규범적인 문화를 주시지 않아서 이런 적용은 아주 애매할 때가
많다. 성경에 언급되지 않은 낙태나 인터넷 범죄를 위해 우리가 어떤 성경 구절을 인용할 수 있나? 이때 우리는
창조-타락-구속-재창조의 완성이라는 성경적인 세계관 혹은 교리의 도움을 받아서 전체적인 성경에서 먼저 보고 우리의 구체적인
상황을 보는 지혜도 필요하다.
참고할 책
Du Toit, A.B. 1985. Guide to the New Testament V. Pretoria : NGKB.
Malherbe, A.J. 1988 Ancient epistolary theorists. The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Malina, B.J. & Pilch, J.J. 2006. Social-science commentary on the letters of Paul. Minneapolis : Fortress Press.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342. 새롭게함, 갱신, 갱생 - 아나카이노시스(ἀνακαίνωσις)
ἀνακαίνωσις, εως, ἡ
1. 갱신, 2. 갱생, 3. 새롭게 함
발음
/ 아나카이노시스(anakainō- sis) 어원 / 303과 2537의 파생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새롭게 함(롬 12:2, 딛 3:5) 신약 성경 / 2회 사용
3067. 씻음 - 루트론(λουτρόν)
λουτρόν, οῦ, τό
1. 목욕, 2. 씻음, 3. 세례
발음
/ 루트론(lŏutrŏn) 어원 / 306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씻음(엡 5:26, 딛 3:5) 신약 성경 / 2회 사용
중생의 씻음 : 거듭남의 세례 성령의 새롭게 하심 :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과정
바른 교훈(디도서 2:1)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여. You must teach what is in accord with sound doctrine.
5198. 바른 - 후기아이노(ὑγιαίνω)
ὑγιαίνω
1. 건강하다, 2. 누가 5:31, 3. 건전하다
발음
/ 후기아이노(hügiainō) 어원 / 519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건강하다(눅 5:31, 15:27), 강건하다(요삼 1:2), 바르다(딤전 1:10, 딤후 4:3, 딛 2:1), 온전하게 하다(딛 1:13, 2:2)
신약 성경 / 12회 사용
* 5199 ὑγιής, ές
1. 건강한, 2. 마태 15:31, 3. 건전한
발음
/ 후기에스(hügiēs) 어원 / 대격 ὑγιῆ, 837의 어간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성한(마 12:13), 온전한(마 15:31), 건강한 (막 5:34), 나은(요 5:6, 9,14), 고친(요 5:15), 바른(딛 2:8) 신약 성경 / 12회 사용
1319 교훈 - 디다스카리아(διδασκαλία)
1. 가르침, 2. 가르쳐진 교훈,
발음
/ 디다스카리아(didaskalia) 어원 / 132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교훈(마 15:9, 롬 15:4, 엡 4:14), 가르침(골 2:22, 딤전 4:1, 5:17), 가르치는 일(롬 12:7), 가르치는 것(딤전 4:13) 신약 성경 / 21회 사용
* 1320 디다스카로스(διδάσκαλος)
1. 교사, 2. 마태 10:24, 3. 마태 8:19
발음
/ 디다스카로스(didaskalŏs) 어원 / 132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선생님(마 8:19, 12:38, 요 11:28), 선생(마 9:11, 막 5:35, 약 3:1), 교사(행 13:1, 고전 12:28, 엡 4:11), 스승(딤전 2:7, 딤후 4:3)신약 성경 / 97회 사용
* 1321 디다스코(διδάσκω)
1. 마태 4:23, 2. ~을 가르치다, 3. 마태 15:9
발음
/ 디다스코(didaskō) 관련 성경 / 가르치다(마 4:23, 막 1:21, 눅 4:15), 배우다(갈 1:12), 교훈을 받다(골 2:7). [명] 가르침 (엡 4:21, 골 1:28) 신약 성경 / 97회 사용
바른 교훈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 벗어나지 않은 가르침을 말합니다. 바른 교훈과 다른 교훈을 구분하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느냐 따르지 않느냐에 따라 바른 교훈과 다른 교훈으로 구분됩니다. 잘 살펴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서 건강하게 동의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병이 들었다고 보면 됩니다. 그러나 다 이해 할 수는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에 대해서 거부 반응이 없이
건강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입니다.
둘째, 경건에 부합하는 가르침에게 건강한 관계를 맺느냐
아니냐
경건에 부합하는 가르침이란 예수님을 닮은 삶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본받는
가르침이란 뜻입니다. 윤리적 삶입니다. 바른 교훈이란 바른 교리와 바른 삶을 포함합니다. 바른 교리를 주장하면서 바른 윤리, 바른
삶은 무시한다면 바른 교훈이 아닙니다. 바른 삶은 있지만 바른 교리가 없으면 그것도 바른 교훈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중 어느 하나를 부인하는 것도 병든 교훈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 중에 하나를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도 다른
교훈, 병든 교훈입니다. 예컨대 예수님의 병 고침, 죽은 자 살림, 예수님이 행하신 각종 이적들, 이 모든 것은 예수님만이
구원자라는 것을 표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병고침, 이적들, 부유케하심 등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도 지나치게 나아간
병든 교훈입니다.
예수님은 천지만물의 창조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영과 육을 구별하는 가르침도 지나친 병든
교훈입니다. 이 세상의 삶만을 강조하는 것,반대로 내세의 삶만을 강조하는 것도 다 지나친 병든 교훈입니다. 사회성을
부인하고, 교회당만을 강조하는 것도 지나친 교훈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구원자와 계시록에 나오는 구원자를 균형 있게 다루어야 바른
교훈입니다. 예수님은 천지만물의 주인이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영의 세계의 왕이십니다. 종교적 색채만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윤리적인 면을 경시하는 것도 지나친 병든 교훈입니다. 지나치게 윤리적인 면을 강조하면서 복음을 경시하면 그것도 지나친 교훈입니다. 바른 교훈을 환영하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다 이해 할 수는 없어도 예수님의 말씀과 경건에 부합한 교훈을 건강하게 받고 소화시킵니다.
신약성경은 모두 27권인데 내용과 저자에 따라 크게
보면 4가지로 분류합니다.
예수님의 삶을 직접적으로 다룬 책은 '복음서(4권)' 초대교회 역사를 다룬 사도행전은
'역사서(1권)' 사도들이 쓴 편지글로 된 성경은 '서신서(21권)' 종말의 계시를 다룬
요한계시록을 '예언서(1권)' 라고 합니다.
'서신서'는 바울이 쓴 '바울서신(13권)'과 다른 사도나
제자들이 쓴 '공동서신(8권)'으로 구분합니다. 놀랍게도 바울이 쓴 13개의 편지글이 성경이 되었습니다. 바울서신은 다시 바울이
로마에 가택 연금 된 상황에서 쓴 '옥중서신(4권)', 목회를 위해 쓴 '목회서신(3권)', 그리고 각 지역 교회들에 편지한
'일반 서신(6권)'으로 분류합니다.
목회서신
디모데전서, 디도서,
디모데후서와 함께 '목회서신'으로 구분되는 책입니다. 목회서신은 바울이 에베소와 그레데에서 목회하고 있는 그의 제자 디모데와 디도에게 목회를 함에 있어 주의하고 살피며 전력을 다해야 하는 것에 대해 당부하는 내용들입니다.
특별히
디모데전서는 초대교회를 어렵게 했던 이단이나 거짓 교사들에 대해 경계하고 교회 행정과 관련해 공적 예배에서의 태도나 직분자들에
대한 자격을 설명하고 교회 내에 여러 계층들이 서로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등의 내용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교회 내 여성에 대한
지침은 문화적, 상황적 재해석이 필요하지만 전체적으로 현대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 가능한 내용들입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에베소에 보낸 첫 번째 목적이 교회 내에서 '다른 교훈'을 가르치고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고 있는 것을 금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1:3~4). 왜냐하면 이런 것들이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훼방하고 끝없는 변론을 만들어
내어(1:4)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거스르기 때문입니다(1:11).
오늘 본문 내용은 단순합니다. 바울은 '다른
교훈'에 대해 경계하면서(1:3~10), '바른 교훈'을 지킬 것을 요청합니다(1:10~11). 그리고 이 '바른 교훈'을 지키기
위해 주께서 '직분'을 주셨음을 분명히 합니다(1:12). 주께서 죄악 가운데 있는 자들을 부르사 하나님의 바른 교훈을 지키는
직분을 주심이 바로 참복음임을 설명하고 우리가 바른 교훈을 지키기 위해 이 참복음 안에 거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함을
설명합니다(1:13~17).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그토록
경계한 '다른 교훈'은 무엇일까요? 먼저 바울이 경계한 다른 교훈이 외부적으로 교회를 핍박하는 공격이 아니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세상의 평가, 세상의 핍박이 교회를 어렵게 하고 무너뜨릴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억울한 평가나 핍박이 있으면 우리 안에 어린 신앙인, 교회의 거룩성, 하나님의 영광을 지킨다는 명목을 내세워 거부하고 대적하려고
합니다.
바울이 활동했던 시대는 예수 믿는다는 것 자체로 핍박을
받아 가정과 직장에서 쫓겨나고 감옥에 갇히고 원형경기장에서 사자 밥으로 던져졌던 때입니다. 그리스·로마 지역은 온갖 신화와 신들로
가득했고 헬라 철학을 바탕으로 한 이성주의가 가장 발달했던 시기입니다. 외부적 핍박, 다른 종교와 철학의 확장 등 지금과 비교도
되지 않을 상황에서 바울이 이야기하는 '다른 교훈'은 이런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른 교훈'은 무엇인가
그것은
오히려 세속적 가치, 세상적 철학, 이데올로기를 교회 내에 가지고 들어와 마치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인 양, 하나님의 뜻인 양
포장하고 합리화해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바울이 당시에 경계하는 것은 '영지주의'와 '율법주의'입니다.
영지주의
'영지(gnosis)'는 지식, 깨달음 등의 의미로 지중해 연안의 토속 종교들의 신학적 이론과 사상의 영향을 받은 사상입니다.
영적 지식, 영적 깨달음 이런 것을 강조하며 육체는 악하고 천하다는 이원론이 핵심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인성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부활을 인정하지 않았으며(딤후 2:18) 결혼도 금지시켰습니다(딤전 4:3). 이들의 이원론적 사상은 결국 교회 내에
혼합 주의를 양산한 것입니다.
영적이라는 사상에서 각종 천상적 존재들을 유추하고 '신화'를 만들고
신들의 '족보'를 만들어 그것에 몰두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런 신화와 족보에 착념하며 하나님의 뜻을 밝히고 성경의 의미를 밝힌다며
끊임없이 논쟁하고 토론하는 것이 결국 하나님의 경륜(섭리, 역사)을 이루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경륜(섭리, 역사)은
토론과 논쟁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주의
유대인들로 어려서부터 구약성경을 배우고 예루살렘 성전과 지역 회당을 중심으로 코란과 선지서들을 공부했던
이들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율법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서도 어떤 행위를 통해 자신들의 믿음을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구약 율법을 다시 끄집어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 조문을 강조하면서 정작 그 율법이
가지고 있는 원래적 의미인 사랑과 은혜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1:7)."
한국교회를 어지럽히는 다른 교훈도
위에서 언급한 영지주의와 율법주의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극단적 '성령 운동'은 마치 영지주의처럼 영적인 것만이 모든
것인 양 사람들을 미혹하고 속입니다. 육적인 질병, 미래에 대한 불안 등을 이용해 사람들을 특종 종교 집단이나 종교 지도자들의
노예로 만듭니다. 또 다른 것은 '율법주의'의 부활입니다. 주일 성수, 십일조, 새벽 기도회, QT 등 다양한 종교적 행위를
절대화하고 신앙 성숙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바울의 말처럼 율법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잘못된 삶의 태도를 돌아보게 하고 기독교인으로서 책임 있는 삶을 살도록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그러나 그런 율법이
궁극적으로 믿는 자를 자유케 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1:11).
심각한 문제는
영지주의(성령 운동), 율법주의 등을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얻는 것입니다. 돈을 구하는 것입니다(딛 1:11, 딤전 6:5).
하나님의 이름, 은혜를 빙자해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용납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직분은 '바른 교훈'을 지키기 위해 주신 것
'바른
교훈'이라는 용어는 바울의 다른 서신에는 나오지 않는 말입니다. 오직 '목회서신'에만 5번 등장합니다(딛 1:9, 13, 딤전 1:10, 6:3, 딤후 1:13, 4:3) 그것은 바른 교훈을 지키는 것이 목회의 핵심이고 목적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를 지키게 하기 위해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1:12)"고 고백합니다.
직분은
바른 교훈을 지키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직분은 군림하고 명령하고 누리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일의 효율을 위해 직분도
필요하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죄인 된 우리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나라의 일꾼을 삼으시고 그의 일을 맡기심은 바른 교훈을 지키고
이를 전하라는 데 목적이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직분을 맡겨 주시고 이 거룩한 사명을
주신 것은 우리가 의로운 자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원래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 것입니다(1:13). 목사도 장로도 집사도 또 교회와 관련해 기독교와 관련해 어떤 직분을 맡은 자들은 바로 이 정신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라는 것입니다. 무슨 선한 것이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이는
예수님을 믿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할 때 이는 과거에 그랬다는 것이 아닙니다(딤전 1:15b).
현재진행형입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 주께서 우리를 긍휼이 여기셔서 믿음과 사랑으로 풍성하게
주신 것처럼 지금도 그의 긍휼하심이 필요하며 날마다 그의 긍휼하심 앞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긍휼은 먼저 믿은 자로서 본을 삼기 위함이다
이
긍휼은 내가 어떠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으로 찾아와서 일방적으로 주신 것입니다(1:16). 거저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통해 주를 믿어 영생을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1:16). 우리에게 중요한 사명이 주어진 것입니다. 먼저 믿은 자로서, 직분을 맡은 자로서 이제 다른 사람의 본이
되고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는 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사명을 통해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1:17).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을 위해 날마다 기도해야 합니다(1:5). 우리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도록 날마다 나아가야겠습니다.
사후, 아무 준비도 없이 칠십, 팔십 지나도 일만 하다가 그대로 딱 아는 그 만큼만 알고, 좋아하는 여행구경도 못하고. 저 세상으로 이 세상을 떠납니다.
우리는 지는 해를 바라보며 따르기 보다는 뜨는 해를 바라보며 남은 인생, 즐겁게 살아야겠습니다.
지는 노을이 좋을지 모르지만, 그 노을은 허무할뿐 뜨는 해는 내일을, 내년을 위하여 준비를 다하고 사는 나의 삶과 가족의 삶을 준비한 자에겐 항상 활력이 넘치고 자신감이 넘칩니다.
1680. 소망 - 엘피스(ἐλπίς)
ἐλπίς, ίδος, ἡ
1. 기대, 2. 신뢰, 3. 행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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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피스(ĕlpis) 어원 / ἔλπω 관련 성경 / 희망(행 2:26), 소망(행 16:19, 롬 5:5, 고전 9:10), 여망(행 27:20), 바람(행 26:6, 롬 5:2, 8:24) 신약 성경 / 53회 사용
생명(生命)
1. 부모로부터 받은 육체적 생명 : 비오스(βίος)
979. βίος, ου, ὁ
1. 생명, 2. 지상의 생활, 3. 삶의 유지 수단
발음
/ 비오스(biŏs) 관련 성경 / 생활비(막 12:44, 눅 21:4), 이생(눅 8:14, 요일 2:16), 생활(눅 8:43, 딤전 2:2, 벧전 4:3), 살림(눅 15:12, 30), 재물(요일 3:17) 신약 성경 / 10회 사용
2.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영원한 생명 : 조에(ζωή)
2222. ζωή, ῆς, ἡ
1. 생명, 2. 죽음(θάνατος), 3. ἐν τῇ ζωῇ σου: 네가 살아있는 동안
발음
/ 조에(zōē) 어원 / 219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생명(마 7:14), 이 세상의 삶(고전 15:19), 생기(계 11:11) 신약 성경 / 135회 사용
166. 영원한 - 아이오니오스(αἰώνιος)
αἰώνιος, ον
1. 영원한, 2. 시작이 없는, 3. 시작이나 끝이 없는
발음
/ 아이오니오스(aiōniŏs) 어원/ 16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영원한(마 18:8, 계 14:6), 영생의(눅 18:30, 요 17:2) 신약 성경 / 71회 사용
황해도 봉산군에 계동교회가 있는데 6·25를 전후하여 장로 7명 중 4명이 순교를 당했다. 그 중의 강석기 장로는
공산주의자들이 나무에 묶어 놓고 눈알을 다 뽑았다. 두 눈이 다 빠져 피가 흐르는데 강 장로님은 "내가 두 눈을 가지고 있을 때는
하늘나라를 볼 수 없더니 두 눈이 빠지니 하늘나라를 볼 수 있구나"하며 외쳤다.
죽은 후 천국과 지옥을 보고 살아난 박상옥
그는 충북 괴산군 어느 농촌에서 태어났다. 본래 기독교 가정이 아니었고 누이가 예수 믿고 목사님에게 결혼하였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매형과 누이가 전도하여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였다. 그 후 그는 집사가 되었다. 1965년 11월 22일 사업상 볼 일 때문에 경북지방으로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떠났다. 그런데 조령새재를 넘는 순간
와장창하는 요란한 광음과 함께 버스는 벼랑으로 굴러 떨어졌고 그는 얼굴과 머리가 깨어졌다. 피는 눈, 코, 입으로 흘러내려 일어설
힘이 없었고 정신이 몽롱해졌다. 그는 쓰러져 있는 그대로 찬송가 562장을 불렀다. <이 몸에 소망 구름 같고 부귀와 영화도 한 꿈일세……> 이렇게 4절까지 부른 후에 영영 의식을 잃고 말았다. 완전히 죽은 것이다. 그는 죽어서 끝이 보이지 않는 평탄한 길 위에 서서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앞에 가던 사람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그 사람은 충북 괴산 화양동에 사는 최인만(37세)이라는 분이었다. 그들은 둘이서 목적지도 없이 길벗 되어서 함께 걸었다. 얼마나 갔을까 그들 앞에 커다란 안내판이 나타났다. 알아보기 힘든 각
나라말로 적혀 있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우리나라 글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우측으로, 믿지 않는 자는 좌측으로>라고
쓰여 있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오른쪽으로 가고 최인만씨는 왼쪽으로 서로 헤어져 가게되었다. 그가 가는 우측 길은 계단이 있는데 서너 계단 올라서서 뒤로 돌아 최인만씨를 바라보니 그는 까맣게 변하여 있었다. 그래서 자기 옷을 보았더니 어느새 흰옷으로 바꾸어졌다. 계단을 올라서 보니 앞에는 잔잔한 큰 강이 있고 강가에는 흰 옷 입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배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낚시질하는 노인에게 가까이 가서 배가 언제쯤 오는가를 여쭈어 보았다.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니 그 분은 다른 분이 아니라 바로 그의 아버지였다. "아직 때가 안되었는데……" 하시면서 그의 인사를 받으시는 것이었다. 이때 머리와 수염이 희고 긴 노인이 나타났다. 머리에 뿔관을 쓰고 도포를 걸치고 긴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세상 모든
인간이 가는 길을 보라> 위엄 있는 음성에 고개를 들어보니 직사각형의 12문이 있고 문 앞에는 흰옷을 입은 문지기가 있었다. 문에는 사람들이 두 줄로 들어가고 문에서는 세상에서 행한 사실을 말하고 문에서 이간질, 거짓말하는 등, 입으로 죄를 지은 자는 혀를 뽑고, 눈에는 눈을, 손에는 손을 등 각가지 병신이 되고 있었다. 그는 좌측으로 90도 고개를 돌려보니 까만 옷을 입은 사람들이 두 줄로 서서 가는데 머리에는 뿔이 나고 눈이 셋이며 사람도
짐승도 아닌 빨간 옷을 입고 있는 괴물이 곡괭이를 들고 서서 이들을 찍어 던지는 것이었다. 용광로와는 비교가 안 되는 불꽃이
타오르고 붉은 물이 이글거리는 영원한 불못 지옥이었다(계 19 : 20). 다시 오른쪽을 바라보니 문은 보이지 않고 흰 옷
입은 사람들이 많아 흰 구름같이 보였다. 그 왼쪽으로 붉은 말들이 있고 말을 탄 사람들은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 밑에 감옥이
있었는데 까만 옷을 입은 사람들이 들어가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음부였다(벧전 3 : 19). 다시 우측을 보니 백말이
있고 백로의 머리와 어린 아이의 머리를 맞춘 것 같은 것이 평화스럽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낙원이었다. 정신 없이 낙원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는 갑자기 쓰러지고 말았다. 이때 "소라야"하는 음성이 들려오기에 대답을 하였더니 "나를 믿느냐"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는 "주여 믿습니다"고 대답을 하니 구원의 증표를 준다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 후 잠시 후의 일이었다.
가느다란 사람의 음성이 들려와 눈을 떠보니 자기가 살던 집이었다. 그가 일어났을 때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귀신이 나타났다고 놀라
야단들이었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자세히 살펴보니 산중에 무덤을 파놓고 그 시체를 하관 하려는 순간이었다. 그는 3일 3시간 동안 죽은 가운데 있었다. 그는 어안이 벙벙했다. 교통사고로 즉사해야 할 그가 관 속에서 살아나다니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능치 못하신 일이 없는 하나님께서 이 일쯤이야 못하시랴. 정신을 가다듬어 남은 여생 덤으로 사는 그는 주님을 위해 몸 바치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죽음 속에서 인사를 나누었는데 괴산의 최인만씨를 찾아보았다. 그런데 최인만씨는 그와 한 날 죽어 장사 지냈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 교우와 불신자들에게 그가 보고들은 천국과 지옥을 떨리는 마음으로 전하고 있다 자료출처 / 복음신보에서
영원한 집으로 가야지
존 애덤즈 목사에게 한 사람이 문안했다. "목사님 요즈음 기력이 어떻습니까?".
"예, 존 애덤즈는 든든한데 그가 사는 주택이 형편 없어요. (머리를 가리키며) 지붕이 이렇게 낡은 데다가, (가슴을 가리키며)
벽도 흙이 다 떨어지고 기둥만이 앙상하게 드러났답니다. 그 뿐만이 아니지요. (지팡이를 보이면서)바람이 불면 집이 넘어 질까봐
이렇게 받침대까지 있답니다. 어디 살겠오. 이제 튼튼하고 영원한 아버지 집으로 이사를 해야지요"하고 존 애덤즈 목사님은 대답했다.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
이단 못 떠나는 심리엔 ‘로미오와 줄리엣 효과’가…
이단·사이비에 빠진 신도의 마음을 돌이키는 일은 쉽지 않다. 객관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교리의 모순을 정면으로 반박해도 꿈적도 하지 않는다. 가출과 폭력, 심하면 가정 파탄까지 치닫게 만드는 이단·사이비는 왜
빠져나오기 힘든 걸까? 월간 현대종교(6월호)가 분석한 ‘이단을 떠나지 못하는 5대 심리’를 들여다봤다.
첫째, 로미오와 줄리엣 효과
연애를 하는 남녀가 부모의 반대 등 어려움이 있으면 유대관계가 더 끈끈해지는 것과 같은 심리다.
주변의 만류가 심해질수록 “예수님도 이단 취급을 받으셨다”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단체에 대한 마음이 두터워진다.
둘째, 선민사상
남들이 알지 못하는 교리를 알고 있다는 것에 우월감을 느끼는 것이다. 또 많은 사람에게 배척당하는 것 역시 ‘하나님께 택함받은 의인이 당하는 고난’이라 여기며 오히려 자부심을 갖는다.
셋째, 군중심리
수많은 신도가 불평 없이 교주를 따르는 모습에 휘둘리는 심리를 말한다.
넷째, 밀 그램 효과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의 이름을 딴 ‘밀그램
효과’도 있다. 권위자의 지시에 따라야 할 것만 같은 심리다.
다섯째, 탈퇴하면 지옥에 간다
교주들이 “탈퇴하면 지옥에 간다”는 식의 협박을 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신도들에게 구체적인 목표를 제시하고 무의식 중에 목표에 맞게 행동하게끔 하는 ‘자기실현적 예언’도 이단이 자주 사용하는 신도 관리 방식이다.
그렇다면
이단에 빠진 이들을 구출해내는 첫걸음은 뭘까?
“이단에 빠진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가족이나
친구 등 관계의 결핍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지나칠 정도로 친절한 이단 단체를 통해 관계의 욕구를 채우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단에서 빠져나오게 만드는 해법도 관계에서 찾아야 할 것”이라며 “가장 가깝게는 가족의 끊임없는 관심과 노력, 나아가
이들을 사랑으로 포용하려는 교회의 노력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왜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강해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습니까? 디모데는 성품이 온화하고 진실되고 충성된 자였습니다. 또한 눈물이 많은 자로서 목사의 심정이 충만했습니다. 반면 내면이 연약하고 속 두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는 현재 에베소 교회의 책임 목사로 있었지만 연소하고(딤전 4:12), 몸이 허약하며(딤전 5:23), 성격은 소심하여 많은 고전을 겪고 있었습니다. 밖으로는 에베소의 타락한 문화와 싸워야 했고 안으로는 유대 율법주의, 영지주의와 같은 각종 이단 사상과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그가 의지하고 존경하던 사도 바울은 네로의 박해로 인해 재 투옥되어 어두운 지하 감옥에 갇혀 언제 순교 당할지 모르는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또한 이로 인해 아시아에 있는 모든 신자들이 박해에 대한 두려움으로 복음을 저버리고 바울을 떠나갔습니다(딤후1:15). 이 소식은 디모데를 더욱 연약하게 하고 위축되게 만들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디모데에게 “강하라”(be strong)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의 일꾼은 강건해야 합니다. 생존경쟁이 치열한 세상에서 강해야 살아 남듯이 영적으로도 강해야 합니다. 강해야 복음의 외적 내적 원수와 싸울 수 있고 제자 훈련을 시킬 수 있습니다. 강해야 죄의 소욕을 이길 수 있고 세상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강해야 자기부인,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강해야 세상에 영향을 받지 않고 오히려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몸이 강하면 병균이 몸에 침입해도 물리칠 수 있기 때문에 병에 걸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몸이 약하여 저항력을 상실하게 되면 병에 걸립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불신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고 영적으로 건강한 인생을 살려면 내면이 강해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강해질 수 있습니까? 열심히 운동을 하고 먹는 것을 조절하여야 합니까? 물론 운동을 하고 먹는 것을 조절할 때 육신이 강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육신이 강하다 할지라고 영적으로 약하면 사단을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연약함을 이기고 내면이 강해지려면 예수님과 깊은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고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거해야 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란 죄 사함의 은혜요 부르심의 은혜 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도 바울은 엡 6:10-11에서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강건하려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참으로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엡 6:12-18에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13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절)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15절)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절)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17절)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18절)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려면 충성스러워야 합니다(2절)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려면 충성스러워야 합니다.
디모데는 딤후 1:13,14절에서 복음 진리를 지키라는 사명을 부탁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복음 진리를 수호할 뿐 아니라 전달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4단계로 설명하였습니다. 맨 먼저 복음은 그리스도에 의해 바울에게 맡겨졌습니다(딤전1:12). 다음으로 바울에게 맡겨졌던 복음은 디모데에게 맡겨졌습니다. 바울에게서 디모데에게 전달된 복음은 사적으로 전해진 것이 아니라 많은 증인 앞에서 공적으로 전해진 것입니다. 이제 디모데는 이 복음을 충성된 사람들에게 맡겨야 합니다. 그러면 그 충성된 사람들은 또 다른 충성된 사람들에게 그 복음을 맡기게 됩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복음이 충성된 사람들을 통해서 계승되고 세계적으로 확산되어 나가는 것을 복음의 사도적 계승이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모든 성도에게는 사도적 사명이 있습니다. 이는 마치 올림픽 성화의 횃불이 성화 주자의 손과 손을 통해 전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복음의 횃불을 들고 달리는 성화 주자들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복음의 횃불을 꺼뜨리지 아니하고 온전하게 보존하였다가 충성된 사람들을 통해서 다른 세대에 전달해야 할 책임과 사명이 있습니다. 이 전달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충성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충성된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까? 충성이란 말은 “변함이 없는 신실성”을 의미하기도 하고, “신뢰한 만한, 믿을만한 이란” 뜻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충성에는 책임성과 신뢰성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충성된 자는 상황이나 환경에 따라 변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습니다. 충성된 자는 좋으나 싫으나 꾸준히 맡은 바 사명을 감당합니다. 충성된 자는 책임성이 강하고 성실합니다. 일을 맡으면 상황을 핑계하거나 변명하지 않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책임성 있게 해냅니다. 이런 자는 신뢰할 만합니다. 하나님은 충성된 자를 귀히 쓰십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어떤 시련 가운데서도 배교치 않은 충성된 자들을 통해서 복음이 계승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의 좋은 군사로서의 일꾼이 되려면 주님께서 나를 충성할 자로 여겨서 내게 직분을 맡겨 주셨다는 확신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딤전 1:12-13에서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의 모습으로 충성할 때에 요셉과 같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놀라운 축복을 체험하게 됩니다.(창 39:1-6)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려면 고난을 견디어야 합니다(3절)
본문 3절에서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려면 고난을 견디이어야 합니다. 고난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믿음의 아들 딤후 4:5에서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군사가 된다는 것은 그 군사가 세속적이든 영적이든 고난을 견디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한 자연인이 늠름한 군인으로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우선 피나는 훈련이 요구됩니다. 혹 이 훈련기간 동안 심한 부상을 입을 수도 있고, 인간이하의 모욕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두려워 훈련을 거부한다면 그는 결코 훌륭한 군인이 될 수 없습니다. 국토방위와 국민의 생명을 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세속적 군사도 국가로부터 모집되어 훈련소에 들어가면 그 고난이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훈련이 끝난 후에도 주어진 임무를 수행해 가는 과정상에 숱한 고초와 시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심한 육체적 훈련과 정신적 고통, 잠이 모자라고 배가 고픈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때로는 멀리 도망하고 싶고, 탈출하고 싶고, 죽은 싶은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을 끝까지 견뎌야 훌륭한 군인이 되어 임무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현역 근무의 군사들은 안전하거나 편안한 시간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실제에 있어서 곤경, 위험과 고난을 감수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도 편안한 때를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고난과 핍박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가정으로 불화(不和)가 일어날 수있고, 재산(財産)상으로 피해가 닥칠 수도 있으며, 혹은 인격적인 수모나 심하게는 생명의 위협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마19:29, 행14:1-7) 그러기에 신자로서 충성된 주의 일꾼 되기를 열망(熱望)하는 분이 계시다면우선 그는 자신의 소유와 소망과 자유를 하나님과 교회를 위하여 위해 모두 희생(犧牲)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만 합니다(마26: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탄과 영적 싸움을 하는 그리스도의 군사가 고난을 두려워 한다면 되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고난을 견디고 참으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라면 ① 타협주의 ② 회피주의 ③ 대세주의를 거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난이 공로는 아니지만 ① 인간은 고난을 받아야 겸손해 집니다. 사람은 우선 겸손해야 진리를 깨닫습니다. 그래서 무디는 말하기를 "천국은 높지만 내려가면서 배운다"라고 했습니다. ② 고난을 받아야 그의 신앙 인격이 연단을 받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약 1:2에서 모든 시험을 기쁘게 여기라고 말씀하고 있고, 약 1:3에서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앎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연단 없는 자는 믿을 수도 없고 소망도 없습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갖게 합니다(롬 5:3,4) 인내하는 자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 8:15) 특히 우리는 선을 행할 때도 인내해야 합니다(갈 6:9) "우리가 선(善)을 행하되 낙심하지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이르매 거두리라"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라면 마땅히 인내해야 합니다. 아브라함도(히 6:15), 이삭도(창 2618,20-22), 모세(출 16:7,8),다윗(시40:1), 욥도(약5:11), 바울도(고후 6:4-6) 인내하면 좋은 군사의 모습을 지켰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려면 영적 훈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통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파악(把握)하고, 그 말씀을 열심히 읽고 이해하여 어떻게 하면 좋은 군사가 될 수 있을 것인지를 연구(硏究)해야 합니다. 어떠한 환난과 역경도 참도 견디어 내야 합니다.
욥은 자식과 재산과 건강을 하루아침에 잃었어도 신앙의 연단 과정에서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고통스런 연단 과정은 우리를 영적 사람으로 성장시킵니다. 사도 바울이 엡 6:12에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공중 권세를 잡고 있는 사탄과의 영적 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에게 어떤 어려움이 닥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자기 자신을 성숙한 군사, 훌륭한 군사, 좋은 군사로 훈련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배후에 숨겨져 있는 줄로 믿고 결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끝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고난을 극복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고난을 견디는 자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될 수 있습니다.
요즈음은 세상이 너무 편리한 세상이라 컴퓨터에 한번 접속으로 앉아서 모든 정보를 수고하지 않고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너무 편리하다 보니 안일해지고 연약합니다. 머리는 잘 돌아가지만 적용이 안되고 절제력, 투쟁심, 끈기 면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훈련을 통해 보완이 될 때 비로소 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될 수 있습니다. 훈련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사단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려면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4a)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려면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군사 훈련의 인간의 이기심을 없애는 것이라고 합니다. 즉, 갯벌훈련을 통해 수치심, 자존심, 이기심 등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감정을 버리고 국가를 위해 새로 태어나게 하는 훈련과정이라고 합니다. 군사가 국가의 부르심을 받기 전까지는 시민으로서 일생생활을 합니다. 시민에게는 개인의 인격과 자유와 권리가 보장됩니다. 그러나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군대에 들어가면 개인의 자유와 권리, 인격은 보장되지 않습니다. 군인은 국가의 안위와 전쟁에서의 승리를 최우선시해야 해야 합니다. 군인은 입대와 함께 이와 같은 군인의 존재의미와 목적에 바쳐진 자라고 할 수 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려면 자기 생활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자기 생각, 자기 감정, 자기 꿈과 이상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일단 민간인이 군(軍)에 복무하게 되면 민간인으로서의 생활을 모두 포기(泡起)하고 오직 군(軍) 생활에만 전념(專念)해야 합니다. 군인은 고난을 받아야 될 뿐만 아니라 기꺼이 군인(軍人) 생활에 전력투구해야 됩니다. 훈련 잘 받고 의무에 충실한 군인은 절대로 군의 규율을 어기면서 함부로 외출, 휴가 등을 하지 않습니다. 탈영하지 않습니다. 또한 군인이 되면 가정을 떠나서 국가에 헌신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현역 복무 중일 때 군인은 개인 사업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집안의 문제를 걱정한다거나 개인의 사생활에 연연할 수가 없습니다. 그 대신 국가는 군인의 먹고, 입고 살아가는 모든 비용을 책임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좋은 군사로서의 일꾼이 되려면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일단 성도의 길에 들어선 자는 무엇보다 경건(敬虔) 생활에 전념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라면 마땅히 영적 전투에서 강력한 싸움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련을 잘 받은 성도라면 함부로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가면서 자기 뜻대로 편한 대로하고, 자기 기분대로 하고, 자기의 생각대로 예수 믿지 않습니다. 성경을 자기 이치(理致)대로 사사로이 풀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자기의 일을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했던 많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에녹이 자기의 일에 얽매였다면 하나님과 300년동안 동행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좋은 군사로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려면 자기의 일에 얽매여서는 결코 안됩니다.
좋은 군사로 부르심을 받는 성도라면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고난 핍박 시험 환난(患難)이 걷잡을 수 없도록 몰아쳐도 참고 견디며 자기 뜻 에 얽매이지 않고 주님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신본주의 곧 믿음 본위로 살아가는 것입니다(히 11:6)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 영적 싸움에서 강력한 능력을 나타내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예수의 군사로서 온전히 성령께 사로잡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온전히 성령께 사로잡힌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일에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목회자에게만 해당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이것은 일반 성도들에게 적용됩니다. 일반 성도라고 해서 생활에 얽매여 주님의 일을 게을리 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직장 생활을 하든지, 농사를 하든지, 장사와 사업을 하든지, 공부를 하든지, 가정생활을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들이든지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 좋은 군사가 되려면 결코 우리의 생활에 얽매여서 안됩니다. 우리 자신의 생활에 얽매이면서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려고 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불가능한 일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하여서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개인 생활이 필요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현세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결코 피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가정, 직장 및 사회 등에서의 통상적인 의무 들고 피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신분으로서 우리 자신에게 주어지는 의무들을 실행하고 양심적으로 지켜야 합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딤전 4:4에서 "하나님의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라고 말하면서 딤전 6:17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셨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에게 금지된 것은 모든 세속적인 활동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과 관련하여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일생에 주어지는 사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서의 삶을 사는데 완전히 무해(無害)한 것들이라 할지라도 영적 싸움에서 사탄에게 강력하게 대적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면 그것은 결과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의 삶을 살게 하는데 얽매이게 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본문 4절 상반절에서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말라"는 권면은 우리가 어떤 일을 행함에 있어서 무엇을 우선 순위에 정할 것인지에 대한 말씀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자신이 무엇을 하든지, 어떤 일을 하든지 삶의 우선 순위가 주님을 위한 것에 집중되지 않는 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자기의 생활에 얽매이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서의 삶을 살지 못하도록 얽매이게 하고 미혹하는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든지 간에 피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서의 얽매이지 않고 만족할 만한 선한 싸움을 싸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4b)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군사는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해야 합니다. 군인은 자신을 군사로 세운 지휘관에게 순종과 충성을 다함으로써 그들을 기쁘게 해야 합니다. 군사를 모집한 자는 군사에게 모든 생활비를 지원(志願)해야 하고, 또한 군사는 그 모집한 자를 위해 헌신하고 충성해야 합니다.
고대의 좋은 군사들은 국왕이나 지휘관에게 충성을 다하여 생명까지 바쳤습니다. 군인의 생명(生命)은 바로 지휘 체계에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순종함으로서 그 주어진 임무를 충성스럽게 완수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시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국가는 군인(軍人)들에게 국가에 충성할 것을 요구합니다. 또한 개인의 이익이 국가의 이익에 충동할 때는 서슴없이 국가의 이익에 복종하도록 요구합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생명을 바치더라도 국가를 위해 충성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신자들도 그리스도의 군병으로 삼아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 절대적으로 순종하며 그분께서 분부하신 명령이 비록 힘들지라도 기쁨으로 복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죽기까지 충성해야 합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계 2:10). 충성은 군사된 자의 최고의 덕목(德目)이요, 최상의 영예(榮譽)인 것입니다.
우리를 좋은 군사로 모집한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도를 가리켜서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를 부름을 받은 성도들은 우리를 좋은 군사로 불러 주신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순교자적 자세로 충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갈 1:10).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믿음으로 후사를 기다렸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독자 이삭을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좋은 군사로서 모집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있으되 정말 우리 자신을 모집하신 하나님께 기쁘게 하는 생활을 하는 자들이 얼마나 됩니까? 다른 사람을 언급하기 전에 지금 우리의 자신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저와 여러분은 우리를 만세 전에 선택하여 주시고, 시궁창 같은 죄악의 자리에서 우리를 불러 주시고, 우리에게 귀한 직분과 사명을 주신 주님께 얼마만큼 기쁨을 드리고 있습니까? 이것은 반드시 사명을 받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소요리 문답 제 1문답에 보면 "사람의 제일 목적이 무엇이뇨?라고 질문에 대한 답변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기본적인 일들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라는 명령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즐거워하라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라]는 절대적인 명령이요, 우리의 최대의 과제임을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전 10:31)
좋은 논문을 쓰려면 좋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좋은 질문을 던져야 본질을 생각하게 되고 초점이 맞추어진 연구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좋은 질문을 던지는 것은 비단 학교에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Washington Cathedral에서 시무하는
Wedel 목사가 쓴 인명구조소(Lifesaving Station)라는 글입니다. 배가 자주 파선이 되는 어느 위험한 해안에
작고 보잘것없는 인명구조소가 있었습니다. 건물은 그저 움막 같았고 배는 한 척밖에 없었으며 몇 사람의 헌신된 사람들이 쉬지 않고
바다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열악한 환경에 대하여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파선이 되어 표류하는 자들을 열심히 찾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작은 구조소를 통하여 구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은
유명해지게 되었습니다. 구조 받은 사람들 중의 일부와 인근 지역에 살며 그곳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그 구조소를 위하여 무엇인가 해
보려고 자기들의 시간과 돈을 들였습니다. 새로운 구조선들이 구입되고 새로운 구조원들이 훈련되었습니다. 그 작던 인명구조소는
규모가 점점 커지게 되었습니다.
인명구조소에 새로운 멤버가 된 사람들은 건물이 너무 작고 초라한 것과 그들이 가진 장비가 너무 빈약한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바다에서 건져진 사람들을 위하여 좀 더 안락한 시설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간이침대 대신에 보다
좋은 침대와 가구를 들여놓았습니다. 이제 인명구조소는 멤버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을 더욱 아름답고도
고급스럽게 장식하였습니다. 그러나 멤버들은 점점 바다에 나가 구조하는 일에 관심이 없어지게 되었고 대신 사람들을 고용하여 그들로
하여금 구조 업무를 수행하게 하였습니다. 인명구조소의 설립 취지가 새겨진 현판과 모형 구조선은 여전히 상징적으로 건물 안에
있었으나 그 방에서는 각종 클럽 활동들이 벌어졌습니다. 바로 이때에 어떤 커다란 배가 해안에 난파하여 고용된 구조원들은 추위에
떨고 옷은 물에 젖고 익사 직전에 있던 사람들을 잔뜩 구조선으로 실어 왔습니다. 그들은 더러웠고 병이 들었고, 어떤 사람들은
인명구조소에 있는 사람들과는 전연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흑인도 있었고 아시아인도 있었습니다. 아름답던 클럽이 갑자기
그들로 인하여 더러워지게 되자 관리자는 재빨리 클럽 바깥에 샤워하는 곳을 두고 거기에서 구조된 사람들이 클럽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씻도록 하였습니다.
다음 번 회의에서 멤버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었습니다. 대부분의 멤버들은 해난 구조가 별로 유쾌하지 못한 일이요 클럽의
정상적인 활동을 하는데 장애가 된다 하여 이제 구조 활동을 중지하기 원하였습니다. 어떤 멤버들은 클럽의 주된 목적이 인명을
구조하는 것이라 주장하였고 아직도 이 장소가 인명구조소라고 불리는 것을 지적하였습니다. 그 회의에서 소수의 주장이 묵살되었고 만일
난파된 사람들을 구하고자 한다면 그들만의 독자적인 인명구조소를 시작해야 한다고 결정하였습니다. 그들은 따로 나갔습니다. 몇 년이
흘러 새로운 구조소도 전에 있었던 것과 같은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곳도 클럽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러자 또 다른
인명구조소가 생겨났습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여러분이 오늘날 그 해안을 방문한다면 그곳에 호화로운 클럽들이 해변을 따라 많이
세워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바다에서 배들은 여전히 난파를 당하고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물에 빠져 죽어 가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됩니까? 인명구조소가 원래 생긴 목적은 파선되어 물에 빠진 사람들을 건지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이 많아지고 구조소가 커지고 활동이 많아지게 되니 본래의 사명감, 인명구조소의 존재 목적을
분명히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시간을 보내며 즐기는 사교 클럽이
되고 말았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 구하는 것이 귀찮아지게 되고 물에서 건져진 사람들의 지저분한 모습이 자기들의 깨끗하고 우아한
분위기에 맞지 않게 느껴졌습니다.
이것은 교회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개척 교회 시절에는 모이기를 힘쓰고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도 하려고 합니다. 교회가
성장하면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교회에 생기다 보니 자연히 자기들과 취미가 같거나 배경이 비슷하거나 사회적인 지위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그룹을 만듭니다. 건축 헌금도 생겨서 크고 좋은 건물을 짓습니다. 새로 지어진 건물 안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각종
행사들이 자주 벌어집니다. 자칫하면 기도하고 말씀을 배우는 일에는 관심이 없어지고 교인 상호간의 친목의 비중이 더 커질 수
있습니다. 예배는 간단하게 빨리 보고 남은 시간을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각종 여가를 즐기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언제나 지켜주시고 인도하시는데 대부분의 교인들의 경우 주일 한 번 교회에 나오면서 예배 시간이 좀 길어진다고 안절부절 한다면
본질에 충실한 교인이라 할 수 없겠습니다. 자신들이 물에 뛰어들지 않고 대신 고용된 구조원들에게 물에 빠진 사람들을 건지게 하듯이
교우들이 잘 훈련받고 사역에 참여하려고 하기보다는 사역자를 교회에서 고용해서 월급이나 주는 사람들로 생각하고 사역은 사역자에게
맡기고 자기들은 관객이 되어 어떻게 하는가 관망하다가 잘하면 손뼉 치고 그렇지 못하면 비난하려 한다면 본질에서 크게 어긋난
것입니다.
인간은 죄인이다.
에덴동산에서부터 오늘의 디지털 바벨론 시대까지 세상은 많이 변했다. 그러나 사람은 죄인 그대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죄인된 인간의 특징 중의 하나는 ‘참지 못함’이다.
첫째, 정욕을 참지 못한다
하와는 동산 중앙에 있는 열매를 보고 참지 못했다. 보암직도, 먹음 직도,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에덴동산의 나무의 열매를 따 먹었다. 아담에게도 주었다. 죄가 코로나보다 더 빠른 속도로 전염된다. 모든 인류에게
오늘도 흐르는 죄성이다.
다윗도 한밤중에 목욕하는 밧세바를 보고 정욕을 참지 못하였다. 간음하였다. 죄를 덮으려고 우리야를 죽였다. 디지털 바벨론
시대의 Z 세대의 참을성은 8초다. 신상품을 보면 8초 안에 우선 저지르고 본다. 저들은 이런 일을 ‘지른다’라고 한다. 죄는
지르는 것, 선을 넘는 것, trespass다.
둘째, 분노를 참지 못한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전 푸틴의 전쟁 선포하는 얼굴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옥에 가두고 죽이고 스데반이 돌 맞아 죽을 때 사울의 얼굴 에는 분노가 충만하였으리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지르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엡 4:26-27).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 오래 참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 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 푸틴이 쏘아대는 탄도 미사일보다, 핵폭탄보다 더 강 력한 것은 ‘오래 참는 것’이다.
인내의 한자어 忍耐의 참을 인(忍)은 나의 마음에 무자비하게 칼을 대어 죽이는 것이다. 올림 픽 금메달리스트나 골프여제
박세리, 피겨여왕 김연아, 배구 여제 식빵 언니 김연경, 축구의 신 박지성이나 손흥민 같은 선수들은 무명시절에 자기 마음에
일어나는 육신적인 식탐과 분노에 칼 을 대고 오래 참았기에 오늘 유명인의 금메달을 목에 걸고 산다.
성경의 인내는 자기 마음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꾸어(빌 2:5-11) 심령의 정욕과 분노에 칼을 대어 자기를 죽여 다른
사람들을 살리려고 오래 참는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오래 참으셨(히 12:1-2). 그리고 영적인 금메달을 목에
걸고 보좌에 앉아계신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 3:8). 예수님은 마귀를 미사일로, 폭력으로 멸하지
않으셨다. ‘오래 참으심’의 신의 성품으로 십자가에서 6시간 동안 참으셨다. 그리고 자신을 죽여 화목제물로 드려 마귀의 일을
멸하셨다. 십자가를 지고 오래 참으라! 그래서 정욕과 분노로 틈타서 나의 삶을 망치는 마귀의 일을 멸하고 살라!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디모데후서 1:14)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Guard the good deposit that was entrusted to you--guard it with the help of the Holy Spirit who lives in us.
뉴욕의 그랜드 센트럴역 42번 포터 랠스턴 영 이라는 사나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남의
짐을 운반해 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더 중요한 일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기차역에서 일하는 포터로서 기독교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는 한사람 한사람의 짐을 나를 때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그들에게 나누려고 애를 썼습니다. 어느 날 그는 몸집이
작은 할머니를 기차의 지정석에까지 모셔다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 할머니는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할머니의 휠체어를 밀고
승강기로 들어 갈 때 그는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승강기가 내려가는 동안 랠스턴 영은 눈을 감고 하나님께 구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이 할머니를 도울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그에게 한가지 생각이 떠오르게 하셨다. 그는 휠체어를 밀고 승강기에서
내리면서 "할머니, 괜찮으시면 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쓰고 계신 모자가 참 잘 어울리십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랠스턴 영을 쳐다보며 고맙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다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드릴 말씀이 더 있는데요 입고 계시는 옷도 참 잘 어울립니다." 할머니도 여성이기에 그 말에
호감이 갔습니다. 그녀는 그리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지만 밝게 그에게 웃었습니다. "왜 나에게 친절하시지요? 참 자상하십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 눈에 할머니가 너무 슬퍼 보였습니다. 저는 할머니가 울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 어떻게 하면 할머니를 도울 수 있을까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모자에 관해 말하라는 지혜를 주셨지요"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습니다. "할머니 어디 편찮으십니까?" "그래요, 저는 늘 아프답니다. 너무나도 고통이 심해 견딜 수가 없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아프다는 것이 무엇인지 당신은 모르실 것입니다." 조용히 할머니의 말씀을 듣고있던 랠스턴 영이 대답했습니다. "예. 할머니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한쪽 눈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저의 한쪽 눈은 밤이나 낮이나 마치 뜨거운 쇠를 대고 있는 것처럼 고통이
심했습니다." "그래요? 그렇지만 지금은 아주 행복해 보이시는데요 어떻게 극복했나요?" 그는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기도
덕분이지요 할머니" "기도? 정말 기도가 당신의 고통을 없애 주었단 말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기도가 언제나 고통을
없애주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면 고통을 극복하는데 큰 힘이 되지요. 할머니도 기도해 보세요." 어느새 할머니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고 그의 손을 잡은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 후 1년이 지나 할머니는
이 세상을 떠났고 그녀의 딸이 랠스턴 영을 찾아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어머니가 당신에게 전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제게 당신을 찾아가서 지난해 휠체어에 탄 어머니를 기차에 태워준 일에 대해 감사의 말씀을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당신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아니 영원히 기억하실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분명 긍정적인 자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요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기도는 나를 보게 하실 뿐 아니라 연약한 이웃을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잃어버린 이 시대에 그리스도의 사람이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할 것입니다. 한 장님이 안구를 기증 받아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수술이 끝나 눈에 두르고 있던 붕대를 푸는 날이
되었습니다. 붕대가 조금씩 풀리면서 차츰 밝은 물체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눈앞에 펼쳐 친 세상도 너무도 아름다웠습니다. 그는 너무
기뻐서 곁에 있는 어머니에게 외쳤습니다. "어머니! 왜 이렇게 아름다운 세계 나에게 이야기해 주지 않으셨어요?" 어머니가 대답했습니다. "얘야!
나는 너에게 이 아름다운 세계를 매일 이야기 해주었단다. 단지 네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야." 심판의 날이 되면 사람들은 그들
앞에 너무나도 화려한 천국과 영원한 불구덩이의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몇 사람은 왜 이런 곳이 있는지 알려 주지
않았느냐고 통곡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많은 선지자를 통해 그의 백성들에게 이 모든 것이며 말씀하셨고, 심지어 확장된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유일한 길인 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내 주셨습니다. 단지 우리가 그 증거들을 사실로 믿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이
많이 있습니다. 만남도 그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성경에 그와 같은 아름다운 만남이 있는데 바울과 디모데의 만남입니다. 처음엔 스승과 제자로
만났지만 나중에는 믿음의 아버지와 아들의 만남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한 내용이 본문 14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바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아름다움이란 무엇입니까?
첫째, 거짓이 없는 믿음(5절)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볼 때 거짓이 없는 믿음이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거짓 없는 믿음’이란 사람에게 거짓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 거짓된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디모데가 가진 이 믿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던 믿음을 디모데가 그대로 이어받은 것입니다.
둘째, 복음
전함(8절)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말씀은 복음을 전하라는 뜻입니다. 전하지 않는 복음에는 고난도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16절은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복음은 선택해서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 52장 7절이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라고 말씀하고 있듯 복음 전함은
아름답습니다. 우리 인간의 제일가는 존재 목적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이 전도하는 일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누가복음 15장의 잃은 양을 찾는 비유, 잃었던 은전을 찾은 비유, 탕자의 비유가 그것입니다. 찾았을 때 기뻐하는 주인, 목자,
아버지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한 생명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그렇게 기뻐하신다는 것은 우리가 죽어가는 생명에게 복음을
전할 때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전도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전도하는 일에
모두 동참하여 아름다운 족적을 이 땅에 남기십시다. 그럴 때 의의 면류관과 상급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경을 살펴볼 때 발을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아름답지 않은 발, 즉 복되지 못한 발입니다.
이러한 발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탐욕적인 발입니다. 둘째로, 불의한 재물을 구하려고 달려가는 발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도망가는 발입니다.
다른 하나는 아름다운 발, 즉 복된 발을 말합니다. 복된 발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봉사하는 발입니다. 둘째로,
믿음으로 전진하는 발입니다. 셋째로, 교회를 가까이 하는 발입니다. 넷째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산을 넘는 발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발은 어떤 발입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발, 복된 발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 말씀의 가르침(13절)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라고 했습니다. 내가 가르친 것을 그대로 지키라고 하는 것은 스승이 제자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말입니다. 11절에 보면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고 했습니다. 교사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직분입니다. 고전 14장 19절에 보면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합니다. 나를 변화시킨 그 말씀을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가르칠 때 그 모습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거짓 없는 믿음이 아름답고, 복음 전함이 아름답고, 말씀을 잘 가르침이 아름답습니다. 이것들을 잘 지키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듣게 하시고 구속의 은혜를 받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 많은 신앙의 조상들이 복음을 위해
헌신하여 우리에게 그 복음을 증거하였듯이 우리도 복음의 증인된 삶을 살게 하옵소서. 험한 세상 속에서 인내하며,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는
백향목처럼 살아가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지족하는 마음
자족(自足) : 스스로 자, 발 족
1. 스스로 넉넉함을 느낌.
2. 다른 곳으로부터 구(求)함이 없이 자기(自己)가 가진 것으로써 충분(充分)함.
자만자족(自慢自足) 스스로 뽐내며 흡족(洽足)하게 여김.
지족(知足) : 알 지, 발 족
1. 제 분수(分數)를 알아 마음에 불만(不滿)함이 없음. 2. 곧 무엇이 넉넉하고 족(足)한 줄을 앎.
지족안분(知足安分) 족한 줄을 알아 자기(自己)의 분수(分數)에 만족(滿足)함.
자족하는 마음
“하나님은
해와 공기와 물과 같은 것들을 공유케 하셨다. 만일 누군가가 어떤 것을 자신만 소유하려 한다면, 마치 자연이 분노하듯이 서로
투쟁하게 될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나의 것’과 ‘너의 것’ 이라는 차디찬 용어로 나누고 분리하기를 갈망한다.”
황금의
입이라 불리는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347~407)이 자신의 저서에서 한 말이다.
많은
사람이 물질을 두고 분쟁하며, 이로 인해 불안과 염려 그리고 시기심이 촉발돼 인간이 물질을 통해 누려야 할 행복을 빼앗기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물질의 포로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복음이 물질의 억압과 시험 속에서도 우리를 자유케 할 능력을
충분히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외부 조건에서 만족을 얻을 수 없다. 설령 외적 상황이 화려하더라도 영혼이 곤핍하다면
그것은 정신적 장식품에 불과하다. 그러나 외적 상황이 곤핍하더라도 그리스도로 인한 은혜는 그런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믿음의
에너지를 공급한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안티스테네스(Antisthenes)는 “현명한 사람은 자족한다”라는 유명한 격언을 남긴 바
있다. 자족한다는 것은 일상을 행복하게 만드는 지혜의 한 방편이다. 자족할 줄 아는 마음만이 물질에 얽매이지 않는다.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고 자족할 때 탐욕의 사슬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자족하는 삶
피얼
목사는 자바에 있는 발리(Bali)섬을 방문하였습니다. 이 섬 사람들이 세계에서 제일 행복하게 산다는 소문을 듣고 일부러 보러 간
것입니다. 큰 산업 시설이나 재미있는 오락시설도 없는 섬이었습니다. 어째서 발리 사람들은 그토록 행복할까? 피얼 박사는 섬
사람들을 일주일 동안 인터뷰한 뒤에 다음과 같은 다섯 개의 해답을 종합할 수가 있었습니다.
1. 우리는 가진 것이 없습니다(We have nothing) 2. 우리는 단순하게 삽니다(Our life is simple) 3. 우리는 서로 좋아합니다(We like each other) 4. 우리는 먹을 것이 충분합니다(We have enough to eat) 5. 우리는 아름다운 섬에서 살고 있습니다(We live ona beautiful island)
자족하는 삶은 행복한 것입니다. 오늘도 자족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솝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눈병이 난 나이 많은 한 여자가 눈병을 고쳐주면 크게 사례하겠다고 약속하고 의사를 불렀습니다. 의사는
매일같이 그 여자의 집에 가서 그녀의 눈에 약을 넣기 위해 눈을 감게 하고서 그 사이에 그 집에 있는 값비싼 물건들을 하나씩 둘씩
몰래 집어갔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녀의 눈병이 거의 나을 무렵, 그녀의 집에는 변변한 가구라곤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의사는
자기가 탐이 나는 물건을 모두 훔쳐갈 수 있을 때까지 눈병 치료를 질질 끌어온 것입니다. 마침내 여자의 눈이 다 나았으므로 의사는
약속한 대로 사례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약속한 사례를 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녀는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재판장에 불려나온 그녀는 "어찌하여 약속한 사례를 치르지 않느냐?"는 재판장의 심문에 태연스럽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확실히 내 눈이 잘 보이도록 고쳐주면 상당한 사례를 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나 저 의사의 치료를 받고
나서는 내 눈이 전보다 더 나쁜 형편이 되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의사는 물론 재판장도 크게 놀라 그 곡절을 다시 물었습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습니다. "제가 저 의사의
치료를 받기 전에는 내 집에 있는 값비싼 물건들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내 눈은 좋아진 것이
아니라 전보다 더욱 나빠진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사례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결국 이 악덕 의사의 절도 사실이 법정에서 밝혀진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소유욕의 노예가 되어 마침내 자신의 파멸을 초래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은 것 같습니다.
독일의
신비주의자 타울러에 관해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습니다.
타울러가 하루는 거지를 만나서 “친구여, 오늘도 안녕하십시오” 하고
말하니 “나는 하루도 안녕하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행복하기를…” 하자 거지는 “난 불행해 본 적이
없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타울러가
놀라서 “그것이 무슨 뜻이오?” 하고 묻자 거지는 “날이 좋으면 감사하고, 비가 와도 감사하고, 먹을 것이 넉넉하면 감사하고,
배고파도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나의 뜻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 나를 기쁘게 합니다. 그러니
제게 무슨 불행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타울러는 더 놀라서 “대체 당신은 누구시오?” 하고 물었습니다. “나는 왕이오”
하고 그 거지가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당신의 나라는 어디에 있소?” 하고 타울러가 물으니 거지는 “내 마음속에 있소”라고
대답했습니다. 랍비 시므온은 “평생 동안 나는 한 번도 사슴이 무화과를 말리는 것을 보지 못했고, 사자가 물건을 운반하고 여우가
장사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염려 없이 먹고 산다. 만일 나를 섬기기 위해 창조된 그들이 걱정 없이 먹고 산다면
창조주를 섬기기 위해 창조된 나는 얼마나 더 걱정 없이 먹이시겠는가? 그러나 나는 염려함으로 내게 있는 것까지 부패시켰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선한 행실의 증거 - 선한 행실의 스모킹 건
스모킹 건(smoking gun) - 연기 나는 총
범죄 또는 사건 등을 해결하는 데 사용되는 결정적이고 확실한 증거를 일컫는 말
톨스토이의 '구두 수선공이 민난 하나님'은 마틴이라는 구두 수선공이 명일에 예수님을 만날 것이라는 꿈을 꾸고 하루 종일 예수님을 기다리는 내용입니다. 그
기다림의 시간 가운데 그가 가난하고 곤란을 당한 이들을 도와주고 선행을 베풀자, 예수님께서는 그날 밤에 나타나셔서 네가 도와준
그들이 바로 자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이야기는 참으로 유명하면서도 우리 모든 신앙인에게 큰 도전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레프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Tolstoy, 1828-1910) 소개
레프 톨스토이는 백작 가문의 4남으로 러시아 뚤라 지방에 있는 야스나야 뽈랴나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부모와
사별한 후, 고모의 양육을 받았다. 1844년에 까잔 대학교에 입학했으나 1847년에 중퇴하고 영지 야스나야 뽈랴나에 정착하여
농노들의 생활 개선을 위해 노력한다. 잠시 환락에 빠져 타락한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공허하고 무용한 생활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1851년에 까프까즈 의용병에 들어가 포병장교가 된다. 그가 형을 따라 까프까즈로 가서 쓴 작품 『유년시절』(1852)이 시인
네끄라스프에게 인정받아 잡지 《현대인》에 게재되면서 작가로 데뷔한다. 제대 이후 톨스토이는 문학의 새로운 방향을 추구하기
위해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독일 등 외국을 여행하고, 1859년에는 영지로 돌아와 농민 학교를 세우고 농민과 아동 교육에
애쓴다. 1862년에는 폭넓은 지적 관심을 지닌 중산층 출신의 소피야 안드레예브나 베르스와 결혼한다. 15년간은 행복했지만, 그
후에는 지독히 불행한 결혼생활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불행했던 시기에 그의 문학 활동은 가장 왕성했다. 1910년에
자신에게 명성과 풍요, 번영, 수많은 자식을 안겨주었던 영지와 아내를 버리고 순례자가 되어 빈손으로 민중 속으로 들어가 그들에게
실천적 사랑을 실천하고자 노구를 이끌고 집을 나섰다가 허름한 기차역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이 책에 번역된 10편의 단편은
자살 직전까지 갔던 정신적인 위기를 맞으며 사상적인 전환을 겪는 과정에서 나온 치열한 고민의 결과물이다. 신약성경 복음서에서
건져낸 삶의 원리와 깨달음을 평범한 민중도 이해하는 언어로 표현하기 위해 그는 이전까지 사용했던 작품의 색깔을 완전히 바꾸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톨스토이가 주창한 기독교적인 윤리관과 무저항주의가 오롯이 담긴 ‘인생 단편’이 탄생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신다
- 톨스토이의 단편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신다.”
구두수선공 마틴 아브디치(Martin Avdeich)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을 위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마틴의 이야기는 눈물겨운 시련과 함께 시작됩니다. 그는 구두수선공이었지만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젊은 시절에 그의 사랑하는 아내가 세 살 된 아들 하나를 두고 세상을 떠납니다. 얼마 후, 그 아들마저도 그를 막 도울 수 있는 나이에 죽어 그의 곁을 떠납니다. 마틴은 절망했습니다. 상실의 슬픔에 젖어 삶의 의욕을 잃었습니다. 착하게 살아가는 그에게 찾아온 역경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상실의 아픔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했고, 결국 교회를 떠났습니다.
마틴이 회의와 낙담 중에 있을 때 그 앞에 한 노인이 등장했습니다. 8년 동안의 순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노인이었습니다. 노인은 마틴에게 그의 슬픔의 이유가 자신의 행복에 집착하는 데 있으니, 이제 하나님을 위해 살아보는 것이 어떠냐고 권면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 어떻게 사는 것인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노인은 하나님을 위해 사신 예수님을 그에게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삶에 대해 알고 싶으면 성경을 읽어 보라고 권면했습니다. 마틴은 노인의 권면대로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 무렵, 그를 찾아오시겠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마틴은 그를 찾아오시겠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기다립니다.
그런데 기다리는 그에게 하나님이 오시지 아니했습니다. 그를 찾아온 것은 나이 들어 쇠약한 채로 눈을 치우는 노병 스데반 청소부 이었습니다. 그는 추위에 떨고 있는 그를 방으로 모셔 들이고, 그에게 따뜻한 차를 대접했습니다.
노병이 떠난 후에 그를 찾아 온 사람은 추운 날 벌벌 떨면서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가난했습니다. 이 여인은 며칠 동안 먹지 못해 젖이 나오지 않아, 아이도 굶은 상태였습니다. 마틴은 따뜻한 차와 빵과 스프를 제공하고, 그 여인과 아이를 위해 자신의 외투를 선물했습니다. 은밀히 보관해 두었던 비상금을 꺼내어 그 여인의 손에 들려주었습니다.
또한 마틴을 찾아 온 사람은 사과를 파는 늙은 여인과 그 여인에게서 사과를 훔친 소년이었습니다. 늙은 여인은 사과를 훔친 소년을 경찰에 데려가겠다고 위협했습니다. 마틴은 늙은 여인에게 소년을 위해 사과 값을 대신 지불하겠다고 약속하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늙은 여인은 소년을 용서했고, 소년은 늙은 여인의 무거운 자루를 등에 지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 날 밤, 하나님은 마틴에게 찾아오셔서, 그가 만났던 작은 소자들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다는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그 소자들을 섬긴 것이 바로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임을 깨우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때 마틴의 영혼이 기쁨에 휘감겼습니다. 환경이 바뀐 것은 없었지만 그는 참으로 부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를 부요케 한 것은 소외된 이웃을 돕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심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본을 보여라
아프리카의 성자 슈바이처 박사에게 자녀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 세 가지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인즉 첫째도 본보기,둘째도 본보기,셋째도 본보기라고 했다. 자녀가
공부에 흥미를 나타내기를 원하면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부모가 시간을 내서 책을 읽는 것이다. 자녀가 몸이 튼튼하기를 원하면
부모가 시간을 내서 운동을 하는 것이다.
첫째, 말에 대하여 본이 되라.
말은 곧 칼입니다. 칼은 수술도로 사용되면 사람을 살리지만 흉기로 사용되면 사람을
해치기도 합니다. 이처럼 말 한마디는 칼이 되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좌우할 수 있는 것은 이
막중한 몸이 아니라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말을 꼭 필요할 때에, 친절하게 말해야 합니다.
둘째, 행실의 본이 되라
성경은 믿음 못지않게 행실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바르고
온유한 행실로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 본을 보여야 합니다. 성경은 겸손과 온유로,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고
옷을 입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긍휼을 경험한 우리는 말뿐만이 아니라 행함에도 온유함으로 본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
사랑의 본이 되라
사랑의 결과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게 합니다.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합니다. 이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오늘도 부지런히 나가서 사랑의 씨를 뿌린다면 언젠가
사랑의 열매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반드시 열릴 것입니다.
넷째, 믿음의 본이 되라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우리가 소망하는 것들이 이루어지게 하는 능력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을 확신할 수 있는 마음의 증거입니다.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는 것이 믿음의 결과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믿음의 결과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입는 것이 믿음의 결과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도 믿음의 결과입니다.
위험한 일, 손해 보는 일, 너무 어려워서 누구도 하기 싫어하는 그 일들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여 여러분과 제가 감당할 때, 우리 안에 있는 그 위대한 믿음의 실체를 세상 사람들은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다섯째, 정절의 본이 되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 1:16) 하나님이 깨끗하니 우리도 그분만큼 정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정절이라고 하는 것은 ‘깨끗하다, 청결하다’는 뜻과 동시에 ‘굳은
마음, 변하지 않는 절개’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깨끗함을 상실하면 그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만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찾으시고 사용하시는 사람은 깨끗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
말과 행동, 그리고 사랑의 본이 되고 믿음과 정절의 모습을 보인다면 진정한 세상의 소금이요 등불이 되어 그리스도의 구원을
전파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 받을 것입니다. 그리하면 이 세상 끝까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라는 위대한 사명이 바로 여러분의 삶을
통해 이루어지는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누구를 모델로 삼을까?
오늘날
미국의 상징이 된 자유의 여신상은 프랑스의 조각가 바르톨디의 작품입니다. 본래 미국에 줄 이 동상을 만드는 데에 프랑스 정부가
400만 달러를 지원하기로 약속했으나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바르톨디는 자신의 전 재산을 투자하며 20년이나 걸려 이
작품을 조각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걱정이 생겼습니다. 이 여신상의 얼굴을 누구를 모델로 삼아 조각할지가 문제였습니다. 여러
유명한 사람들이 물망에 올랐지만, 결국 그는 많은 고심 끝에 자신을 낳아 기르고 사랑해주신 어머니를 모델로 삼기로 결정했습니다.
뉴욕을 방문하는 모든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이 자유의 여신상은 바로 바르톨디의 어머니의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자녀들은 누구를 모델로 하여 인생을 바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자녀들의 인생모델로서 부끄럽지 않은 부모가 될 수 있어야겠습니다.
평안북도 정주 오산학교 서쪽 야산에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거기에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일생을 남을 위해 살았고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사람.’ 이 비석의 주인공은 바로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선생입니다. 남강은 모진 고생을 하며 오산학교를 세웠는데 학교를 건축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건축하던 일꾼이 찾아와 기와가 모자란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집의 기와를 떼어다가 학교를 지어라.” 그는 오산학교를 위하여 재산을 다 팔았으며 나중에는 부엌세간까지 팔았다고 합니다. 남강은 1907년 평양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을 만난 후 희생을 앞장서는 생활을 철저히 하였습니다.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5년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성경을 세 번 통독하고 기도생활을 하였습니다. 특히 마태복음에 나오는 산상수훈을 암송하였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철저한 희생과 사랑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였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 날, 오산 학교 변소에 얼어붙은 오물을 교장인 자신이 먼저 도끼로 깨고 청소하는 솔선수범을 보였습니다. 학생들과 교직원에게 청결 관념을 철저히 가르쳤습니다. 남강 이승훈은 늘 이렇게 말했습니다. “겨레를 위하여 걸레질하는 마음을 잃지 말자” 남강은 청빈하게 살았습니다. 어느 날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가 사람들에게 질문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아이들을 가장 잘 가르칠 수가 있지요?” 슈바이처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아이들을 잘 가르치는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즉 첫째는 본을 보이는 것이고, 둘째가 본을 보이는 것이며, 셋째도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녀의 교육을 중요시하였으며, 아울러 교육을 담당하는 스승을 매우 존경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부일체(師父一體)라고 스승과 부모를 동등하게 여겼습니다. 교회에서도 성경을 가르치는 훌륭한 교사들이 필요합니다. 훌륭한 교사란 먼저 자신이 성경을 잘 배우고, 다음에 그 배운 것을 잘 가르쳐야 합니다. 또한 가르치되 사명감으로 열심히 가르쳐야 합니다.
바울은 영적 지도자로서 주의 일을 하는 디모데에게 ‘믿는 자에게 본(本)이 되라’고 교훈합니다. 신앙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를 본받는 삶을 살았기에 자신을 본받으라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녀들을 포함하여 믿는 자들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 12절에서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여기의 ‘본(本)’은 본보기의 준말입니다. 옷을 만들 때, 만들려고 하는 옷을 생각하면서 먼저 종이 위에 그려보고 잘라 내어 본을 뜹니다. 그리고 옷감을 본위에 올려놓고 그대로 재단하여 옷을 만듭니다. 무엇이든지 본이 있어야 잘 만들 수 있습니다.
‘본’ 의 원어는 ‘튀포프’ 인데 ‘어떤 것을 만드는 데 필요한 양식이나 모델’이란 뜻입니다. 교사를 비롯한 가르치는 자들은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말로만 가르칠 것이 아니라 본을 보이며 가르쳐야 합니다. 먼저 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디모데를 향하여 어떤 면에서 본이 될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첫째, 오직 행실에 있어서
북유럽에 사는 흰 담비(ermine)는 흰 털이 아름답기로 유명합니다. 흰 담비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털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습니다. 사냥꾼들은 이 속성을 이용해서 흰 담비를 잡는다고 합니다. 흰 담비가 사는 굴 입구에 새까만 숯검정을 칠해 놓고 숲속에서 놀고 있는 흰 담비를 굴속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러면 굴 입구에 다다른 흰 담비는 자신의 흰털을 더럽히지 않기 위하여 새까만 숯검정이 묻어 있는 굴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차라리 사냥꾼에게 잡히는 죽음을 택한다고 합니다. 오늘날 교회와 교인들이 세상으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습니다. 교회를 떠나는 가나안(안나가) 교인도 많이 생긴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교인들의 행실이 본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거룩성을 잃어버렸고 그 행실이 거룩하지 않습니다. 성도가 되었으면 마땅히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하는데 거룩한 행실을 갖는 일에 실패하고 있습니다.
본문 12절입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바울은 디모데가 가지고 있는 상대적인 연소함을 행동의 진지함으로 보충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연소함으로 업신여김을 받지 않도록 행동으로 본을 보여서 권위를 지니라는 뜻입니다. 사역자의 권위는 외부적인 치장이나 장식, 그리고 연령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진정한 가르침과 거룩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여기의 ‘행실’ 은 ‘아나스토로’ 인데 다른 사람과 관계되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먼저 언행을 일치시켜야 합니다. 말과 행실은 실과 바늘 같이 불가분리의 관계로서 양자가 일치되어야 참된 인격이 나타납니다. 말과 행실이 다르면 위선자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행이 일치되는 행실은 교사의 필수적인 요건입니다. 말이 거룩하지 못하고 행실이 깨끗하지 못하면 복음이 제대로 전파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실되게 말하고 행실에 있어서는 십자가의 의로써 행하여 말과 행실이 모순이 없는 생활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둘째, 오직 사랑에 있어서
아프리카 선교의 선구자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은 25년 동안 원주민들을 섬기며 헌신적으로 선교하였습니다. 은퇴 후에도 종종 아프리카 밀림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던 중 공교롭게도 자신의 생일날, 선교지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 죽었습니다. 리빙스턴이 죽은 지 삼년 후에, 당대의 설교가 헨리 드루먼드(H. Drummond)가 선교지를 찾아가서 원주민들, 특히 리빙스턴과 가까이 지냈던 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리빙스턴이 당신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주었습니까? 어떤 설교를 들었습니까? 그에게서 배운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에게 남긴 인상 깊은 교훈은 어떤 것입니까?” 그의 질문에 원주민들은 전혀 뜻밖의 대답을 했습니다. “우리는 그가 가르쳐준 성경의 내용은 다 잊어버렸습니다. 설교 도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게 기억합니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였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베푼 사랑은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지식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감동적으로 읽은 책의 내용도 얼마 후 기억에서 사라집니다. 예배시간 마다 듣는 설교의 내용도 며칠이 못가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사랑은 결코 잊지 못합니다. 사랑은 영원합니다. 사랑만이 오래오래 남습니다.
본문 12절입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내면적인 성품으로 타인과 관계된 생활과 연결됩니다. 이 사랑은 말과 행위로 표현됩니다. 사랑은 주님께서 주신 새 계명이요 바울이 강조한 제일의 덕목입니다. 가르치는 자들은 자신을 비워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의 사랑을 본받아 영혼을 몸처럼 사랑함으로 본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헌신적인 구제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강조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희생적인 구제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부터 구제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혹여 자기 공로를 앞세우는 마음으로 행하는 구제와 희생이라면 사랑이 없는 헛수고가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섬기는 일든지, 봉사하는 일이든지, 충성하는 일이든지 사랑으로 행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시기 바랍니다. 모든 일에 사랑으로 감당하므로 모두에게 유익이 되는 신앙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 오직 믿음에 있어서
존 와나메이커(Johon Wanamaker)가 51세가 되었을 때 벤자민 해리슨(B. Harrison) 대통령으로부터 체신부 장관직을 맡아 달라는 제의가 왔습니다. 그러나 와나메이커는 정중하게 사양을 했습니다. 이유를 묻는 대통령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지금까지 수십년동안 주일이 되면 교회에서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쳐 왔습니다. 저는 기력이 다하는 날까지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장관직을 맡게 되면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일에 지장을 받을까 걱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해리슨 대통령은 와나메이커에게 주일이 되면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그 조건으로 와너메이커는 장관직을 수락했습니다. 그 후 4년 동안 장관직을 수행하면서 주일이 되면 반드시 섬기는 교회로 가서 아이들에게 변함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에게 입버릇처럼 늘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본업은 교회학교 교사입니다. 장관직은 부업일 뿐입니다. 교회학교 교사는 종신직입니다. 장관직은 임시직일 뿐입니다." 참으로 귀한 믿음입니다. 그는 세상일보다도 하나님의 일을 더 소중히 여겼습니다. 대통령이 맡긴 일보다도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더 소중히 여기는 믿음은 누구에게나 본이 되었습니다.
본문 12절입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믿음은 사랑에 근거를 두어야 합니다. 말과 행실이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듯이 믿음과 사랑도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굳건한 믿음 없이는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고, 사랑 없이는 믿음의 확신이 생겨날 수 없습니다. 진실로 믿음이 충만하다면 좋은 지도자로서 성도들 앞에 부끄럼이 없을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다메섹에서 회심한 후 사도 바울은 철저하게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살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그리고 믿음에 도움이 되지 않은 것은 모두 다 버렸습니다. 그토록 연마해 왔던 학문도 도움이 되지 않기에 다 버렸습니다. 출세와 성공을 위해 공들여 쌓아왔던 업적도 다 버렸습니다. 배설물처럼 다 버리고 철저하게 믿음만 앞세웠습니다. 바울처럼 그리스도만 바라보는 믿음으로 본이 되시기 바랍니다.
히말라야 산맥에서 등반대의 길을 안내하는 티베트 사람들을 ‘셰르파(sherpa)’라고 부릅니다. 셰르파는 길에 익숙합니다. 일기변화와 산세에 정통한 사람들입니다. 수없이 산을 오르내린 사람들입니다. 세계의 최고봉 에베레스트봉 등반에 따른 자신들의 기여가 인정되지 않지만 누구보다도 생명을 무릅쓰고 히말라야 등반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등반대는 셰르파의 안내하는 대로 따라가야 등반에 성공합니다.
모름지기 가르치는 교사들은 영적 셰르파가 되어야 합니다.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 해도 다른 이들을 잘 인도하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오직 거룩한 행실로 본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냄으로 본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만 향하는 믿음으로 본이 되어 모든 이를 살리는 복된 교사들과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엘리트보다는 사람이 되어라’란 책을 쓴 전혜성씨는 말한다. “남편과 나는 집안에서는
영어를 쓰지 않았다. 한국에 계시는 부모님께 부탁해서 한글로 된 우리책을 아이들이 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또 ‘작은
천사들’이라는 노래 테이프를 사다가 틀어주기도 했다. 아이들은 그 노래를 모두 외우고 곧잘 따라 불렀다. 아이들은 한국어를 잘하는
것은 물론 읽고 쓰는 데도 별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적어도 초등학교 수준의 말과 글은 익힐 수 있었다”
칸트는
“어느 누구에게도 나와 똑같이 행하라고 말할 수 있게 행동하라”고 말했다.
생각은 쉽고 행동은 어려운데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부모가 말로 하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주는데 어떻게 자녀가 부모를 존경하고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간디와 사탕
어느
날 한 어머니가 아들을 데리고 간디를 찾아왔다. “선생님,제 아이가 사탕을 너무 많이 먹어 이빨이 다 썩었어요. 사탕을 먹지
말라고 아무리 타일러도 말을 안 듣습니다. 제 아들은 선생님 말씀이라면 무엇이든지 잘 들어요. 그러니 선생님께서 말씀 좀
해주세요”
그런데 뜻밖에도 간디는 “한달 후에 데리고
오십시오. 그때 말해주지요”라고 말했다. 아이 어머니는 놀랍고도 이상했으나 한달을 기다렸다가 다시 간디에게 갔다. “한달만 더
있다가 오십시오” “또 한달이나 기다려야 하나요?” “글쎄 한달만 더 있다가 오십시오” 아이 어머니는 정말 이해할 수 없었으나
참고 있다가 한달후에 또 갔다. “애야,지금부터는 사탕을 먹지 말아라” “예! 절대로 사탕을 안 먹을래요” 소년의 어머니가
간디에게 물었다. “선생님, 말씀 한 마디 하시는데 왜 두달씩이나 걸려야 했나요?” “실은 나도 사탕을 너무 좋아해서 사탕을 먹고
있었어요. 그런 내가 어떻게 아이에게 사탕을 먹지 말라고 할 수가 있나요. 내가 사탕을 끊는데 두달이 걸렸답니다”
희생의 모범이 가장 좋은 교육이다. 교육이란 끝없이 지속되는 희생의 과정이다.
재판장과 나뭇가지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담장 밑에 채소를 심었습니다. 그런데 옆집 나뭇가지가 담장을 넘어와서 그늘을 만들어 채소가 잘
자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담장을 넘어온 가지를 잘라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옆집 주인은 나뭇가지를 자르면 볼품이 없기
때문에 자를 수 없다고 버텼습니다. 두 사람은 결국 재판장 앞에 섰습니다. 재판장은 두 사람 말을 듣더니 재판을 하루 늦추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재판정에서 나뭇가지를 자르라고 판결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재판장에게 왜 판결을 하루 늦췄느냐고 물었습니다. 재판장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나뭇가지를 자르도록 판결하려고 했는데 우리집
나뭇가지가 옆집에 넘어가 있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어제 집에 가서 가지를 자르고 와서 오늘 판결을 한 것입니다.”
남에게 무슨 일을 시키려면 나부터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지도자입니다.
솔선수범
어떤 아버지가 중학생인 아들이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걱정스런 눈길만 보낼 뿐 아들에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아버지는 아들을 불러 담배를 끊으라고 타일렀다. 아들은 왜 아버지가 그때 바로 얘기하지 않고 한 달이 지난 다음 얘기했는지 궁금해 그 이유를 물었다.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했다. "네가
알다시피 나도 담배를 즐겨 피웠단다. 그런데 어떻게 너만 담배를 끊으라고 할 수 있겠니? 내가 먼저 담배를 끊는 것을 네게
보여주고 싶었다.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한 달이 지난 지금은 완전히 담배를 끊었단다. 그래서 이제 너에게 이렇게 떳떳이 이야기하는
것이란다.
어른들은 요즘 아이들이 말을 너무 안듣는다고 말을 합니다. 물론 그럴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아이들의 잘못을 지적하기에 앞서 어른들이 먼저 모범을 보이는 것은 어떨까요. 아이들이 누굴 보고 배우겠습니까?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말이다. 초기 로마 시대에 왕과 귀족들이 보여 준 투철한 도덕 의식과 솔선수범하는 공공정신에서 비롯되었다. 실례로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영국의 고위층 자제가 다니는 이튼 칼리지 출신이 2,000여 명이 전사했고, 6.
25전쟁 때에도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의 아 들도 육군 소령으로 참전하였고, 미군 장성 이들이 142명 이나 참전해 35명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었다. 중국의 마오쩌뚱 아들도 6.25 때 전사했다고 한다.
믿음은 내면의 변화로부터
곤충을 매우 사랑하는 곤충학자가 있었다. 어느 날 고치를 찢으려고 몸부림치는 나비의 애벌레를 보게 되었다. 몸부림에 비해 고치가 너무 견고한 듯 보였다. 곤충학자는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 가위로 그 고치를 찢고 나비를 꺼내주었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그 나비는 공중을 몇 번 선회하더니 땅에 주저앉아 죽고 말았다. 고치에서 나오기 위해 스스로 애를 쓰며 싸우지 않았기 때문에 날개가 충분히 강해지지 못했고 물기가 마르지 않아 날개가 약해 날 수 없었다. 외부의 도움이 오히려 죽음을 재촉하는 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 만물은 변화와 성장을 갈망한다. 그래서 외모를 변화시키기나 외부의 힘에 의지하려 한다. 그러나 진정한 변화는 자기 내면에서 와야 한다. 변화시켜줄 무엇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변화해야 한다. 내면의 변화를 반영하는 외면의 변화가 진실한 것이다.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믿음의 비밀
에베소서 6: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믿음이란 내가 받은 사랑을 아는 것이다!
우리가 받은 사랑이란 사실상 내가 모를 때 받은 것입니다. 가장 큰 사랑은 4살까지 받는다고 합니다. 갓 태어난 핏덩이를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누이고 그 많은 고생을 하면서 애지 중지 키우지 않습니까? 그런데 교육학에서 보면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4살 전의 일은 까맣게 기억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갓난아이 때에 우유를 먹었습니까? 엄마의 모유를 먹었습니까? 아마 그걸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4살 이후에도 모유나 우유를 먹었던 사람일 겁니다. 그 소중한 사랑은 다 몰라요. 모르게 되어 있어요. 이것이야말로 믿음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나를 먹였다더라. 저 분이 나를 도왔다더라…… 그것은 믿음으로 알게 된 것이지 결코 피부로 기억으로 알게 되어 있지 않아요. 내가 모르는 사이에 받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엄청난 사랑입니다. 이 엄청난 사랑을 내가 지금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라도 그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오를 때, 알지 못할 때에 사랑을 받았다고 성경은 말씀하는 것입니다.
디모데(Timothy) /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
부 : 헬라인 모 : 유대인 유니게
사도바울의 복음 사역은 사도 바울 혼자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같은 부부를 비롯, 수많은 동역자들이 사도 바울 곁에서 도왔기 때문에, 위대한 복음사역이 가능했다. 디모데 역시 사도 바울의 동역자로서, 바울은 디모데를 자신의 영적인 아들로 생각할 정도로, 바울에게 있어 디모데는 가장 친밀하고 가까운 관계였다.
실례로,
바울 서신 가운데 여섯 곳의 서두에서 디모데의 이름이 바울의 이름과 나란히 등장하고 있다(고린도후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후서, 빌레몬서) 그리고 그중 네 곳에는 다른 동역자의 이름 없이 디모데의 이름만 나온다. 그런데 바울이
서신을 기록할 때, 바울 곁에는 여러 다른 동역자들도 있었음을 우리는 그의 서신 말미에 나오는 인사말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유독 디모데의 이름만이 서신에서 다른 동역자와 달리 자주 바울 자신의 이름과 나란히 등장하는 것은, 디모데가 변함없이
바울의 사역의 짐을 나누어지는 평생의 동역자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디모데라는 이름은 ‘하나님을 경외함’,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 ‘하나님의 영예’라는 다양한 뜻을 갖고 있다. 디모데의
조상에 대해서는 사도행전과 오늘 읽은 본문에 잘 나타나 있다. 디모데는 갈라디아성의 루스드라 출신이었다. 디모데의 어머니는
유대인이었고, 아버지는 헬라인이었다. 그러니까 디모데는 혼혈아였다. 디모데의 유대인 어머니 유니게는 디모데를 믿음으로
양육하였으며, 특히 유니게의 친정 어머니 로이스(즉, 디모데의 외할머니)의 격려가 한몫 거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구약성경을 잘 알고 있었다.
디모데가
성경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바울이 1차 전도여행 후 예루살렘 공회를 마치고 2차 전도여행을 떠나, 1차 전도여행지였던
루스드라를 두 번째로 방문했을 때였다. 그때 이미 디모데는 제자라고 불리고 있었다.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모친은 믿는
유대 여자요(행 16:1).” 그러니까 약 2, 3년 전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루스드라를 처음 방문했던 그 시기에 모자가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던 것 같다(행 14:6-20).
디모데가
바울을 통하여 회심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오늘 본문에 잘 나타나 있는데, 바울은 디모데를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라고 표현하고 있다(딤전 1:2). 헬라, 로마인들 사이에서는 스승과 제자 관계를 부자 관계로 표현하는 관습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래서 바울도 자신이 전도한 제자를 흔히 자녀에 비유했는데, 디모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회심 후에 디모데의 영적 성장은 아주 빠른 편이었다. 그는 자기가 사는 성읍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칭찬을 들었을 뿐 아니라
거기서 상당히(약 30km) 떨어져 있던 이고니온의 성도들에게도 칭찬을 들었다. 그래서 바울은 청년 디모데를 잘 살펴본 후, 그의
평생의 동역자로 삼는다.
이때부터
디모데는 사도 바울의 동역자로서, 바울의 복음사역에 결정적인 조력자가 되는데, 바울은 그의 선교활동에서 생긴 개척 교회들을
방문하도록 자주 디모데를 파송했다.
예를 들면 데살로니가 파송(살전 3:2-3), 고린도 파송(고전 4:1), 빌립보
파송(빌 2:19-24)
그런데
사도행전을 통해 우리가 잘 알 수 있듯이, 초대교회 당시 복음사역은 순간순간 생명의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개척한 교회들은 너무나 어리고 취약하였다. 하지만, 젊은 디모데는 담대하게 그곳으로 달려갔으며, 책임감있게 사명을 잘 감당했다.
바울도 그런 디모데를 믿었기에, 주저함없이 여러곳으로 디모데를 파송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보낸 1년 6개월의 기간 대부분과 후에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하게 되는 3년이라는 기간에, 디모데는 줄곧 그의
곁에 같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개척한 교회에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바울은 디모데를 파송하여, 자신을 대신해 그
문제를 해결하도록 했다.
디모데는 바울의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 때도 그를 수행했으며, 예루살렘에서 바울이 체포된 후에는 잠시 보이지 않다가, 다시 로마에서 합류하게 된다. 로마의 옥중에서 바울이 빌립보서를 써서 디모데를 보내 그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또 그들의 소식을 가져오게 하는데, 빌립보 교회에 써 보낸 편지에 보면, 바울이 얼마나 디모데를 신뢰하고 있는지가 잘 드러난다.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빌 2:20-22).”
바울의 이 말은, 바울이 디모데 외 다른 동역자들을 크게 신뢰하지 못하는 듯한 인상을 줄 정도이다. 그만큼 바울은 디모데를 철저히 믿고 있었다.
그런데,
바울이 디모데에게 맡기려고 했던 일이 어떤 일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같은 상황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로마에서
빌립보까지는 걸어서 꼬박 40일이 걸린다. 그리고 또 돌아오는데도 40일이 걸린다. 다시 말해, 약 3개월 동안을, 온갖 어려움과
위험을 무릅쓰고 쉼 없이 걷고 또 걸어야만 하는 일이었다. 아무리 복음의 사역자들이라고 해도, 이같은 일을 선뜻 맡아 줄만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디모데만큼은 흔쾌히 맡아 주리라는 것을 바울은 알고 있었다.
디모데는 육신이 강건한 사람이 아니었다.
디모데전서 5:23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디모데는 위가 약하여 고생하였고 또한 몸이 약하여 자주
병을 앓았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은 디모데가 더욱 믿음직스러웠고 자랑스럽고 고마웠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기회 있을 때마다 디모데를 ‘내 사랑하는 신실한 아들’, ‘믿음 안에서 참 아들’이라고 자랑스럽게 불렀던 것이다.
빌립보서에 보면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곧 자기 부인의 마음을 품을 것을 간절히 권면하였다(빌 2:5). 디모데야 말로 그런 마음을 실제로 보여 준 살아 있는 실례였다. 디모데전후서에
보면, 바울은 아직 젊은 디모데를 든든한 사역자로 키우기 위해 얼마나 혼신의 힘을 기울여 가르치고 권면하고 있는지 잘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단순한 후계자가 아닌 자신의 분신처럼 여기며 정성을 쏟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즉 바울은 디모데를 향하여
아버지가 자기와 같은 마음을 품은 아들을 향해서 느낄 수 있는 모든 애정을 느꼈고, 그래서인지 디모데 또한 아들이 아버지에게 드릴
수 있는 모든 섬김과 헌신을 바울에게 다했다.
말년에 바울은 디모데에게 중요한 임무를 부과해 에베소 교회에 보낸 적이 있었다. 순교를 얼마 앞두고 로마감옥에서
디모데에게 급히 전갈을 보낸다. 최대한 빨리 자기에게로 올 것과 오는 길에 마가를 데리고 올 것이며, 또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두고
온 겉옷과 양가죽에 쓴 책을 가져오라는 전갈이었다(딤후 4:6-12). 죽음을 예고하는 듯한 예사롭지 않는 서신을 받은 디모데는
아마 겨울을 앞두고 두 달 이상 걸리는 여행을 서둘러 떠났을 것이다. 디모데가 바울이 순교당하기 전 늦지 않게 로마에 도착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바울은 순교를 앞두고 아들과 같은 디모데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디모데후서 4:16-18. 변명-재판에서 자신이 기소당한 것에 대해 변호하는 것) 본문에서 우리는 바울의 외로움을 짐작할 수가 있다. 바울은 독신이었다.
디모데는 이처럼 사도바울의 최후를 지켜줄 피붙이와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히브리서의 끝부분에 보면, 디모데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저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히 13:23).”
이로 볼 때, 디모데가 언젠가 감옥에 갇혔으며, 또 풀려났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디모데가 어떤 상황에서 언제 어디에서 갇혔고, 또 그의 최후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없다.
디모데의
경견한 신앙은 어려서부터 외조모와 모친의 철저한 신앙교육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어린 시절의 신앙교육이 자녀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잘 보여 주며, 세속 학문을 익히기 위한 학교 교육에 치중하여 신앙 교육을 소홀히 하는 오늘날의 기독교인 가정에 훌륭한
귀감이 된다.
바울은
디모데를 ‘내 사랑하는 신실한 아들’, ‘믿음 안에서 참 아들’이라고 칭할 정도로 그를 믿음으로 양육하였으며, 또 자신의
후임으로 에베소 교회를 돌보도록 하고 격려 편지를 보내는 등 디모데의 목회를 위해 힘써 협력하였다. 이는 복음을 전파하는 데 있어
자신만을 돌아보며 급급해 할 것이 아니라, 바울이 디모데를 양육한 것처럼 후세대를 힘써 양육하고 애정으로 협력해 주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고 효과적인 것인지를 잘 보여 준다.
디모데가
자신의 내성적 성격과 병약한 육체에도 불구하고 복음 사역을 충실히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도우심과 동역자들의 끊임없는
관심과 애정, 그리고 기도 때문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면 인간의 연약함을 들어 오히려 자신의 능력과 영광을
나타내신다는 사실과, 복음 사역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서로 기도해주며 관심과 애정을 쏟을 수 있는 동역자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디모데에게 보낸 두개의 편지와 디도에게 보낸 한개의 편지를 가리켜 "목회서신"(the Pastoral Letters) 또는 "목자 서신"(the Shepherd Letters)이라고 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1227-1274)가 "이 세 서신은 하나같이 목회규칙을 취급하고 있다"고 말한데서 기인하며, 1849년 영국 성경 학자 헨리 알포드가 "목회서신"이라는 명칭으로 공식 사용할 것을 주창함으로 일반화되었다. 이 세 서신만이 지역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개인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디모데는 에베소 지역을, 디도는 그레데섬을 책임 맡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서신은 지역 교회를 잘 지도하도록 훈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유대적 영지주의 형태의 이단적 교훈들로부터 신앙을 방어할 것을 교훈한다.
1. 수신자
디모데(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는 소아시아의 루스드라 태생이다(행 16:1이하).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He came to Derbe and then to Lystra, where a disciple named Timothy lived, whose mother was a Jewess and a believer, but whose father was a Greek.
바울이 두번째 전도여행 때 루스드라에 들렸고 이때 디모데가 바울의 일행이 되어 전도 여행에 나섰으며 그 이후로 디모데는 바울의 가장 충실한 동역자가 되었다(빌 2:19-22).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디도(공경하다)는 바울에 의해 개종되었다(딛 1:4).
같은 믿음을 따라 나의 참 아들 된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갈 2:1이하에서 예루살렘 사도회의에서 바울과 바나바의 동역자로 나타나고 있으며,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바울은 3차 전도여행 때 디도를 고린도로 보냈고, 마게도니아에서 만나 다시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모금을 위해 고린도로 돌려보냈다(고후 7:5이하, 8:23이하).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료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
신실한 주의 종(참 아들 딛 1:4, 동무 고후 8:23) 개인적으로 보내진 것이지만 이 편지들은 교회의 모든 성도들을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딤전 6:21, 딤후 4:22, 딛 3:15).
2. 기록 시기
바울이 1차 로마 감옥 생활을 마친 후부터 순교하기까지의 기간동안에 목회서신이 기록되었다고 본다. 로마에서 석방된 시기가 62-63년으로 추정되기에 석방된 이후 계속 전도여행을 하면서 마게도냐 지방에서 디모데전서를(딤전 1:3), 아가야의 니고볼리에서 디도서를(딛 3:12), 그 이후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때에 디모데 후서(딤후 4:6-11)를 기록했다.
3. 기록 목적
사도들의 시대는 임박한 종말 기대로 특징지어져 있었고, 이로 인해 세상에 대한 무관심을 가져오기도 했다. 그러나 재림의 지연과 더불어 사도이후 시대에 세상에 대한무관심적 혹은 부정적 태도도 조정되어야 했다. 어떻게, 언제 종말을 맞아야 될까에서 종말이 오기까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적응해 가며 생활해야 할까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가 세상에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의 기구와 조직이 필요했다. 그것은 내적으로는 "이단"의 위협이, 외적으로는 "박해"라는 위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적 안정을 위해 교회의 제도화를 추구했으며, 외적인 안정을 위해서 세상에 대한 올바른 적응을 꾀해 나갔다. 그리고 정통 신조와 교회 성직자에 대한 순종만이 외적인 반대나 내적인 분열로부터 교회를 지키는 최선의 방편임을 가르쳤다. 이것이 목회서신의 목적이다.
2). 영적 나태를 막고 경건의 훈련과 도덕적 품성을 고양하도록(딤전 5:1-25/ 딤후 3: 14-17 /딛 2:1-10)
3). 교직제도와 그에 따른 교역자들의 자질을 규정함(딤전 3:1 / 딛 1:5)
4. 내용구분
디모데 전서
1) 인사 / 1:1-2
2) 거짓 교사들의 교리에 대한 공격 / 1:3-20 거짓 교훈은 유대적 요소를 가진 영지주의 형태이며, "꾸며낸 이야기와 지리한 족보 이야기"(4절)는 영지주의적 경향을, 그리고 "율법"(8-9절)에 대한 언급은 유대적 요소를 가리킨다.
3)교회질서 / 2:1-3:16 교회의 기구적 조직에 대한 관심이 나타난다. 가. 교회예배 / 2:1-15 : 세상과의 관계 개선을 꾀하는 후대의 시도이다. 나 성직제도 / 3:1-16 : 감독의 자격과 집사의 자격이 규정되고 있으며 기독론적 찬양시(16절)도 함께 기록되어 있다.
4) 거짓교사들의 윤리에 대한 공격 /4:1-10 거짓교사들의 윤리가 참 교사들에게 기대되는 행위와 대조되고 있다.
5) 교회질서 / 4:11-6:19 기독교 성직자의 이상을 제시하고 있으며(4;11-5:2) 과부들에 관한 규정도 밝히고 있다.
6) 결론 / 6:20-21
디모데 후서
1) 인사/1:1-2
2) 바울을 본받아 증거한 것에 대한 권면(1:3-2:13) 바울로부터 들은 "건전한 말씀"을 본받고 따르며 지킬 것을 권면하고 있다.
3) 모든 면에서 선한 행동을 보이라는 권면(2:14-4:8) 피해야 할 거짓교사들의 본보기와 따라야 할 사도 바울의
본보기가 제시되고 있다. 속되고 헛된 것(2:16)-부활이 이미 지나갔다는 말(2:18)-허탕한 이야기(4:4)는 거짓 교훈을
말하며, 이에 반해 성경은 "영감된"것, 유익된 것으로 성경을 말하고 있다(3:16).
디도서
그레데 교회가 상당히 혼란스럽고 믿음의 선한 행위가 없었기에 교회 내의 질서 확립과 바른 신앙관의 정립이 시급한 상태였다(1:10-13 / 2:1-10). 이 그레데 교회에서 목회하는 디도에게 올바른 권면과 격려가 필요하였다.
1)인사 /1:1-4
2) 성직제도 / 1:5-9 감독과 장로의 자격 및 그들에 대한 지시
* 두 직분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점을 살펴볼 수 있다.
3) 거짓 교훈에 대한 공격 / 1:10-16
4) 올바른 기독교적 행동에 대한 권면 / 2:1-3:7 표준적인 도덕 교훈이 나온다.
5) 거짓 교훈에 대한 또다른 공격 / 3:8-11
6) 개인적 언급 / 3:12-14
7) 마지막 인사 / 3:15
목회서신의 5 가지 주제들
목회서신은
바울의 말년에 자신의 선교팀의 일원이었다가 도움이 필요한 교회들로 파송되었던 디모데와 디도를 위해 바울이 쓴 서신들이다. 바울
자신이 먼저 많은 교회를 세우고 돌보았던 목회자로서 경험을 후배 목회자들에게 나누고 교회의 당면한 현실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알려주기 위해 쓴 것이다.
디모데 전후서와 디도서가 그 서신들인데 목회에 관한 바울의 신학을 가장 잘 엿볼 수 있기
때문에 목회서신이라 불리운다. 시기와 저작 동기가 비슷해서 서로 다른 세 권의 편지에 쓰여져 있지만 공통된 내용들이 많이
나타난다. 이 공통된 내용들을 크게 다섯 가지, 교회 직분자의 조건, 이단에 대한 대처, 공적인 예배에 대한 지침, 목회자의
사역과 영성, 참된 신자의 경건으로 묶어서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교회의 직분자의 조건
목회 서신의
중요 주제 중 하는 교회의 직분을 맡을 자의 조건이다. 왜 사도 바울은 목회 서신에서 직분자의 조건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일까?
이는 목회 서신을 쓰게 된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바울이 목회서신을 쓰게 된 배경 가운데 하나는 에베소 교회와 그레데
교회 가운데 이단의 거짓 가르침이 큰 위협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단의 거짓 교리를 물리치려면 탁월한 신학자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물론 교리에 대한 무장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본래 이단은
바이러스처럼 늘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애를 쓰고 있다. 하지만 건강한 교회는 이단 바이러스를 능히 물리칠 수 있다. 반면 건강하지
못한 교회는 이단 바이러스에 맥을 못 추고 넘어질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건강한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건강한 교회는 무엇보다도
직분을 맡은 자들이 건강한 교회이다. 직분을 맡은 사람들이 먼저 경건의 바른 모범을 보여줄 때 그들의 영향력이 교회 구석
구석에까지 미쳐서 교회의 건강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직분을 맡을 사람을 신중하게 세워야 한다. 문제는
그 기준이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직분자를 세울 때 세속적인 기준을 그대로 교회 안에 적용할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된다.
세속적인 기준이란 나이, 재산 정도, 학벌, 현재 직위, 인맥 관계, 능력 등이다. 안타깝게도 많은 교회들이 이런 세속적인 기준에
의해 직분자를 실제로 세우곤 한다. 그 결과 교회의 건강성을 잃게 되고 교회 답지 못한 교회로 전락하는 모습을 많이 목격한다.
우리는 직분자를 세울 때 바른 기준에 대해서 목회 서신을 통해 가이드를 얻을 수 있다.
디모데전서 3:1-13은
감독과 집사의 자격에 대해서, 디도서 1:5-9은 장로와 감독의 자격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이 중에서 장로와 감독은 사실상
같은 직분을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장로는 유대 전통에서 온 이름이고 감독은 헬라 전통에서 온 이름으로 보이나 역할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본문들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직분을 맡을 사람에 대한 성경적 기준은 무엇인가?
첫째로 가정을 잘
다스린 사람이어야 한다.
모든 직분에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사항이 한 아내의 남편이라는 조건이다. 이 말은 일부일처제 원칙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직분자는 한 명의 아내에 대한 신실함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단, 이 말이 재혼을 한 사람을 배제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또한 직분자는 자녀를 바르게 양육한 사람이어야 한다. 바울은 왜 직분자에게 가정 생활의 열매를 요구하는 것일까?
이는 가정과 교회 간의 연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의 집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형제 자매라는 호칭을
통해 성도 간의 관계가 가족 관계임을 나타내었다.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 열매를 맺은 사람만이 교회 공동체에서도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가정 생활이 엉망인데 교회 직분자로 잘 섬길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둘째로 절제할 수 있는
품성을 갖춘 사람이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사회에서도 리더에게 도덕성을 요구한다. 그러나 바울이 교회의 직분자의 자격 조건으로
세우는 도덕성의 조건은 매우 엄격하고 수준이 높다. 여러 도덕적 자질 중에서도 특별히 바울은 절제하는 능력을 지도자의 조건으로
꼽고 있는 듯하다. 방탕하여 술을 즐기거나 쉽게 화를 내어 다투는 사람은 곤란하다. 왜 하필 바울은 절제하는 능력에 중요성을
부여할까? 이는 지도자가 충동적이어서 한 번 사고를 내면 그 일이 자기 개인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게 큰
피해를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신중하고 절제하는 능력을 우선으로 여긴다. 한 마디로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
지도자의 허물은 공동체의 분열과 상호 비난의 꼬투리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셋째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목회서신의 본문은 지도자는 일단 결혼하고 어느 정도 성장한 자녀를 둔 사람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이를 보면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사람이 지도자가 될 수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또한 새로 입교한 사람도 적합하지 않다고 않다. 이 두 가지 조건이
말해주는 바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여러 모로 검증이 된 사람, 누가 보더라도 성숙을 이룬 사람이 직분자로 적합하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또한 깨끗한 양심을 갖고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조건도 있다. 나이가 들수록 이런 재리의 유혹에
취약하게 되기 쉽다. 그러나 직분자는 나이가 들었더라도 물질의 유혹과 시험으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속한 공동체 전체를 부패로 이끌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조건을 만족시키는 사람은 한 마디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한 가지 더 고려해야 할 사항이 있다. 모든 직분에 대한 요구 사항은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이 중에서 감독의 직분에는 가르치는 일을 잘 할 것을 요구한 반면에 집사에는 이 부분이 빠져 있음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감독이나 장로의 직분은 말씀을 가르치는 직무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말씀을 잘 가르치는 일은 장로나 감독 직분에 합당한
사람에게 부여된 은사이다. 앞에서 능력보다는 도덕성을 위주로 기준을 제시했지만 또한 능력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임을 알 수
있다. 직분을 맡게 되면 그 직분에 합당한 역할을 수행해 내야 하기 때문이다. 무능한 사람은 아무리 도덕적으로 흠이 없다 할지라도
공동체 전체에 해악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2. 이단에 대한 대처
위에서 언급했던 대로 바울이 목회
서신을 보낸 교회들의 당면한 위협은 이단 세력이었다. 바울의 선교팀은 일단 교회를 세운 후에는 그 교회를 지역 지도자에게 맡기고
다른 지역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이동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 설립되었던 교회에 심각한 문제가 있을 때 다시 선교팀의 동역자를
파송하기도 했다. 바울이 디모데와 디도를 각각 에베소와 그레데에 파견한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이단에 잘 대처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당시에 교회를 위협하던 이단은 어떤 종류의 이단이었을까?
첫째로 유대교의 율법주의와 신화이다.
디모데전서 1:3-11, 디도서 1:10-16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당시 교회의 이단은 유대교에 뿌리를 두었거나 그
영향을 깊숙하게 받은 이단이었다. 유대교의 영향을 크게 두 가지 방면에서 받은 것으로 보인다. 먼저는 율법주의이다. 구원의
조건으로 믿음 외에 특정 율법 준수 행위를 부각시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은 물론 할례였다. 이단의 교사들은 자신들의 율법
선생으로 자처했다. 그러면서 마치 바울이 성경과 복음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것처럼 왜곡하면서 바울이 가르치지 않은 율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성도들을 미혹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율법에 대해 피상적으로 알고 있을 뿐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바리새인으로서 교육을 받은 바울이 가진 율법에 대한 이해와 지식의 깊이는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이런 바울이 보기에 율법 선생을 자처하는 거짓 교사들이 얼마나 가소롭게 보였을까 싶기도 하다. 유대주의에 의한 두번째
영향은 신화에 지나친 관심으로 나타났다. 유대교 특별히 신구약 중간기에 유대교는 구약 성경에 기반을 하되 자신들의 상상력이 가미된
수많은 이야기들이 범람하던 종교였다. 그 이야기들은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하고 호기심을 이끌어낼 수 있는 잡다한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작 구원의 핵심과 하나님의 경륜에 관한 내용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한 마디로 겉으로 보기에만 화려할 뿐
알맹이는 없는 허탄한 이야기들이었다. 거짓 교사들은 이런 허탄한 이야기들로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허탄한
이야기들을 단순한 흥미거리로 취급한다면 별 문제가 되지 않겠으나 이 신화들을 지속적으로 탐닉하게 되면 결국에는 정작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일들을 간과하게 되고 열매를 맺을 수 없게 된다는 점에 있다.
둘째로 금욕주의이다.
디모데전서 4:1-5을
보면 거짓 교사들은 특정 종류의 음식물을 먹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고 또한 결혼을 하지 말 것을 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바로 식욕과 성욕인데 이단 교사들은 일종의 금욕주의를 가르쳤던 것이다. 이 같은 금욕주의는 본래 헤브라이즘
전통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영과 육의 극단적인 이원론을 가졌던 헬레니즘 전통 속에서는 익숙한 것이다. 바울 당시보다 후기에
나타나기는 했지만 영지주의가 바로 이 같은 헬레니즘 전통에 기반한 것이었다. 따라서 교회를 위협하던 이단 세력은 유대교의 강한
영향력 아래 있었지만 동시에 헬레니즘의 이원론 전통도 일정 부분 흡수한 혼합주의였음을 알 수 있다. 근원이 어찌되었던 금욕주의는
의외로 사람들에게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금욕적인 룰에 따르는 사람들은 무언가 특별한 사람, 남들보다 더
경건한 사람으로 쉽게 간주되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금욕주의 추종자들은 남다른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고 실제로 주변에서도 대단한
사람들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금욕주의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를 전면으로 부인하는 매우 잘못된 가르침이었다. 하나님은
영혼 뿐만 아니라 육체와 물질 세계도 선하게 창조하신 분이시다. 욕망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복종치 않는 욕망의 무한
추구가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이단의 거짓 교사들은 금욕주의를 통해 오히려 그들의 은밀한 욕구를 만족시키려 하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었다.
셋째로 탐욕과 쾌락의 추구이다.
디모데전서 6:3-10, 디모데후서 3:1-9을 통해서 보면 이단의
교사들은 경건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속으로는 매우 탐욕적이며 쾌락을 추구하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현재의 이단
사이비 교주들의 모습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단 교사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순한 양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마음 속에는 양들을 잡아
먹고자 하는 늑대 같은 본심을 감추고 있다. 이들이 바라는 것은 실은 재물이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접근하지만 확실하게
자기 편 사람이 되었다고 여기는 순간에 본색을 드러내서 재물을 갈취한다. 그야말로 벗겨 먹을대로 벗겨 먹어서 더 이상 남은 것이
없을 때까지 이들은 결코 한 번 물은 먹이를 놓으려 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쾌락을 추구하기도 한다. 특히 음란한 쾌락을
남몰래 추구한다. 이단 교사들은 자신들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하거나 혹은 종교적 명분으로 포장된 종교 의식을 통해서 이를 은밀하게
추구한다. 그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전혀 없는 얼마나 세속적인 인물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단에 미혹된 사람들의
눈에는 그 실체가 보이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이단에 대한 대응책으로 디모데전서 1:18-20에서
디모데에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권면한다.
목회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자기 양떼를 먹이고 돌보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외부의 위협으로 양떼를 지키는 것이다. 전자의 영역에서는 목회자가 자애로운 어머니 같은 모습이어야 하겠지만 후자에서는
주먹을 불끈 쥔 용기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어야 한다. 이단은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교묘히 사람들을 속여서 잡아 먹는
원수들이기 때문이다. 이단의 정체를 드러내고 그들을 교회 공동체로부터 추방해야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모함과 오해와
핍박을 각오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목회자는 이런 힘든 과정을 감수하면서라도 이단으로부터 자기에게 맡겨 주신 양떼들을 지켜내야
한다.
3. 공적인 예배에 대한 지침
바울 당시의 교회에는 두 종류의 예배 모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각 가정 교회별로 모이는 모임 속에서의 예배이다. 이 예배는 좀 더 친밀하고 일상적인 예배였을 것이다.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자유롭게 예배가 드려졌을 것이다.
둘째는 온 교회가 모이는 예배이다. 특정 지역 내에서 모든 가정 교회들이 한
자리에서 모이는 예배이다. 이와 같은 예배는 다수의 인원이 참석하기 때문에 좀 더 다양한 은사들이 나타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대신에 가정 교회의 예배에 비해 좀 더 공적인 성격이 있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온
교회가 드리는 공예배에 있어서 질서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관심은 고린도전서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뿐만 아니라 목회 서신에서도 이 같은 공적인 예배에서의 지침에 대해서 일부 언급하고 있다. 그 내용은
디모데전서 2:1-15에 잘 나타나 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면한 공예배의 지침은 무엇인가?
첫째는 공예배에서
기도, 특히 중보기도의 필요성이다. 바울은 공예배의 기도에 있어서 권력자들에 대한 중보기도를 요청한다. 이 말은 여러 모로
오해하기 쉬운 말씀이다. 마치 교회가 친정부 혹은 친권력자 편에 서야한다는 말씀처럼 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대 교회
당시 권력자들로부터 교회가 얼마나 큰 핍박을 받았는가를 생각해 보면 이런 해석은 전혀 맞지 않는다. 교회가 권력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바울의 당부는 정치와 사회가 안정되어야 선교와 신앙 생활에 있어서 방해를 받지 않기 때문에 기도하라는 뜻이다. 결코 현
권력자들의 통치를 옹호하거나 지지하기 위해 기도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정치와 사회가 안정이 되려면 하나님의 통치 원리인 공평과
정의, 인애와 자비에 따른 통치를 권력자들이 행해야 한다. 권력자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할 때 바로 이와 같은 기도 제목을 가지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남자들은 분쟁하지 말고 기도에 힘써야 한다. 남성들은 여성들에 비해 천성이 공격적인
성향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다 보니 공예배 모임에서 작은 일에 분노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다툼을 일으키기 쉽다. 당시의
예배는 지금의 예배보다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였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남자들은 성내고
다투기보다는 기도하기에 힘써야 한다. 특별히 손을 들어 기도하라고 권한다. 손을 들어 기도하는 모습이 당시 전형적인 기도의
자세이었던 것 같다. 다툴 때도 역시 손을 들 때가 많다. 똑같이 손을 든다 하더라도 기도하기 위해서 손을 드는 것과 다투기 위해
손을 드는 것은 천양지차이다. 기도하는 남자는 아름답다. 남자다운 남자는 싸우는 남자가 아니라 손을 들어 기도하는 남자이다.
셋째로
여자들은 정숙해야 한다. 복음이 전파된 곳마다 뚜렷한 변화의 표지가 남녀 차별의 철폐이다. 우리 나라만 해도 조선 시대 남존여비
사상을 깨트리고 새 시대 연 장본인들이 바로 선교사들이었다는 점을 봐도 그렇다. 그런데 이렇게 남녀 차별이 철폐되었다고 해서
여자들이 지나치게 공예배 가운데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다 보면 실족하는 남성 성도들이 나올 수 있었다. 혹은 보수적인 여성
성도들에게도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다.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 가운데 여성이 교회에서 가르치거나 의사 결정을 주도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아 아예 마음의 문을 닫아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에 사도 바울은 공예배에서 여성들은 잠잠히 있도록 지침을 주었다. 차별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유하지만 서로에게 종노릇하라는 바울의 일관된 입장의 피력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바울은 여자들이
소박하게 차려 입고 공예배에 나오도록 권면한다. 공예배에 참석하는 성도들은 그들의 경제적 수준이 각기 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부유하겠지만 상당수는 가난하다. 만약 부유한 성도가 화려하고 값비싼 옷을 차려 입고 공예배에 나온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가난한
성도들은 위화감과 위축감이 들어서 가까이 가기 힘들 것이다. 결국 하나됨과 가족 공동체성은 상실되고 말것이다. 그래서
공예배에서는 최대한 검소하고 소박한 옷차림을 할 필요가 있다. 남녀 공히 해당되는 사항이겠지만 특히 여자에게 더욱 적용되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여자에게는 옷차림으로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본능적인 욕구가 남자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다. 겉으로 드러난 외적인
아름다움보다 더욱 아름다운 것은 내적인 아름다움이다. 선한 행실과 인격과 거짓 없는 믿음만큼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
4. 목회자의 사역과 영성
목회
서신은 사도 바울이 선배 목회자로서 후배 목회자들에게 남긴 충고이자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목회 서신을 통해서
목회자의 사역과 영성에 대한 풍성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목회 서신에서 바울은 목회자를 그리스도의 일꾼, 그리스도의 군사,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로 정체성을 부여하고 있다.
첫째,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
디모데전서
4:12-16, 디모데후서 1:3-18, 디모데후서 2:14-26 등이 말씀을 보면 바울은 영적인 아들인 디모데에게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라고 권면하고 있다. 여기서 일꾼이라는 말은 청지기 혹은 사명자와 비슷한 개념이다. 즉 목회자는 그리스도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사명을 부여 받은 존재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목회자에게 갖추어야 할 영성은 무엇인가? 맡은 일에 대한 충성과 신실함일
것이다. 가장 나쁜 일꾼은 게으른 일꾼이다. 그보다 더 나쁜 일꾼은 부패한 일꾼이다.
목회도 마찬가지이다. 목회자는 부지런해야
한다. 전심전력해야 한다. 다른 일에 한눈 팔지 말고 목회에 전념해야 한다. 목회자는 자기가 맡은 일에 대해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 목회서신에서는 지키라는 말로 이를 표현하고 있다. 또 일꾼에게 있어서 최고의 보상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기에게 일을 맡긴
주인에게서 인정과 칭찬을 받는 일이다. 목회자 역시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인정을 받는 일꾼이 되어야 한다. 인정받는 일꾼이 되기
위해 사도 바울은 특히 깨끗한 그릇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큰 그릇이든 작은 그릇이든지 더러운 그릇은 쓸 수 없다. 목회자는
도덕성에 있어서 치명적인 결함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아무리 능력이 많고 가능성이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도덕적 결함과 하자가
있는 사람은 목회자로 합당하지 않다. 부도덕한 목회자는 주께서 쓰실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바울은 디모데전서 6:11-16, 디모데후서 2:1-13에서 사역자를 군인에 비유한다. 군인의 특징은 자기 생활이 없다는
점이다. 지금도 군인들은 몇 년에 한 번 씩 수시로 근무지를 이동한다. 이 때문에 군인 자신에게 고통이 있고 무엇보다도 군인
가족에게 고난이 많다. 그러나 이는 군인으로서 감수할 수 밖에 없는 고난이다. 목회자에게 있어서도 고난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고난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감수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영성 중에 중요한 것은 인내이다. 인내가 없으면 끝까지
사역자의 길을 갈 수 없고 사역의 영광을 맛보지도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군사는 또한 싸우는 사람이다. 항상 적을 상대하는
직업이 군인이다. 마찬가지로 목회자 역시 수많은 대적들 가운데서 믿음이 선한 싸움을 하는 사람이다. 앞에서 말한 이단의 세력이 그
대적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단만이 싸움의 상대는 아닐 것이다. 목회자는 사람들을 권면하여 복음을 따르도록 책임과 역할을
부여받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사람들 속에 있는 부패하고 타락한 본성과 싸워야 한다. 그래야만 성도들의 경건과 믿음의
성숙을 이끌어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적은 바로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부패한 본성이다. 자기와 싸우지 않고서는
누구와도 싸울 수 없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영성은 자기와의 싸움에서 어떻게 승리하느냐에 달려 있다.
셋째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
디모데후서 3:10-4:8, 디도서 2장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의 역할의 중요성에 대해서
디모데와 디도에게 강조한다. 목회자는 무엇보다 말씀을 수종드는 사람이다. 이 일을 위해 은사를 부여 받았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다른 무엇보다 말씀에 탁월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교회를 위협하는 이단의 세력도 말씀의 검으로 물리칠
수 있다. 성도들이 경건에 이르도록 양육하는 수단 역시 말씀이다. 그러므로 말씀이 바르게 전하여지지 않은 성도들이 결코 성숙에
이를 수 없다. 건강한 교회는 목회자에 의해 안전하고 풍성한 말씀이 공급되는 교회이다. 목회자는 그러므로 그 누구보다 말씀 연구에
전심전력하여야 한다. 말씀 속으로 깊숙이 침잠해 들어가야 한다. 목회자의 영성의 핵심은 말씀의 영성이다.
5. 참된 신자의 경건
목회
서신에서 공통된 주제 가운데 하나는 신자의 참된 경건이다. 목회자의 역할은 성도들이 참된 경건에 이르도록 하는 역할이기
때문이다. ‘참된’이라는 말이 붙은 것은 거짓된 경건이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를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이 없는 경건이라고
불렀다. 거짓 교사들과 또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경건이 바로 거짓된 경건이다. 거짓된 경건은 겉모습만 경건해 보일 뿐 사실 상
속이 비어있는 깡통 같은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1장에서 참된 경건의 표지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다른 바울
서신에서도 일관하게 말해 왔던 대로 바로 사랑이다. 또한 이는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강조하셨던 내용이기도 하다. 경건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경건의 능력이다. 그러나 이 사랑이 구체적인 삶의 정황 속으로 들어가면 여러
가지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될 수 있다. 한 가지만 예를 들어 보자면 디모데전서 6장에서 말씀하듯이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물질에
대한 탐욕을 버리고 자족하는 삶을 살 수 있다. 그 외에도 직분자에 대한 조건, 혹은 목회자가 힘써야 할 직무에 대해 언급하는
내용 등등 목회 서신 전반에 걸쳐 참된 경건에 대해 선한 행실, 도덕성, 절제, 깨끗한 양심 등등 다양한 언어들로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같은 참된 경건은 어디서부터 올 수 있는 것일까?
첫째, 참된 경건은 바른 교훈에 의해 지도를 받은
삶이다
경건은 바른 교훈에서부터 온다. 이단들의 거짓된 가르침은 참된 경건을 낳지 못한다. 그저 경건을 흉내낼 수 있을 뿐이다.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면 성도들은 그 말씀에 의해 양육을 받게 된다. 바른 말씀에 의해 양육된 성도들은 내면에 변화를 받아 점점
성숙에 이르게 되고 그 열매를 외적으로도 나타내게 된다. 그것이 경건이다. 바른 교훈의 선포는 말씀 사역자의 의무라면 바른 말씀을
분별하게 듣는 것은 모든 성도들의 의무이다. 이단들이 교회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려면 목회자 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깨어 있어야
한다. 바른 말씀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또한 그 말씀을 자주 듣는 것도 중요하다. 아무리 영양가가 좋은 음식이라 할지라도
띄엄띄엄 먹는다면 아이가 자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 성도는 자랄 수 없다. 또한 듣기만 하고
끝난다면 역시 자랄 수 없다. 먹은 것을 완전히 소화시켜야 영양분이 온 몸에 퍼질 수 있듯이 성도가 참된 경건에 이르기 위해서는
받은 바 말씀에 순종하고 자신의 삶에 이 말씀을 적용시키려는 노고가 필요하다.
둘째, 참된 경건은 은혜에 합당한
삶이다
디도서 2장에 잘 나타나 있다. 경건에 이르게 하는 원동력과 에너지는 어디로부터 오는가? 그것은 은혜로부터 온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은혜를 아는 만큼 경건해진다. 은혜를 모르면 참된 경건은 없다. 유대교의 영향을 받은 율법주의자들의 한계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말씀을 가르친다고 하지만 그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를 충분히 드러내주지 못하는 말씀이었다. 인간의 공로와 의를
내세우는 말씀은 힘이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변화시킨다. 경건은 내 편에서 하나님을 향해 무엇인가 하는 일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먼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하신 일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은혜를 받은 자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강력한 동기를 얻는다. 그 동기가 성도를 참된 경건으로 이끌어 간다. 이 은혜의 크기를 아는 것이 경건의 시작이요 끝이다.
셋째,
참된 경건은 성령에 의해 새롭게 된 삶이다
디도서 3장에 언급되어 있다. 새 언약 시대의 특징은 성령의 내주이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중생하게 하시고 중생하게 하신 후에도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며 우리 속에서 내주하시면 우리를 위해 탄식하며
기도하시고 우리에게 말씀이 깨달아 알아지도록 역사하시며 우리의 생각과 삶을 지도하시고 인도하신다. 성령님에 의해 이끌어지는 삶이
경건한 삶이다. 성령의 열매가 경건이다. 성령 충만함을 입을 때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된 삶을 살 수 있다. 거짓된 경건은
여전히 성령에 속하지 않고 육에 속해 있다는 점에서 사실상 불경건이다. 자신의 힘으로 경건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령께서
추동하시는 그 힘에 의해 경건에 이를 수 있다. 또한 성령에 의한 경건은 자기 혼자 이루어가는 일이 아니다. 성령께서는 공동체에
각기 다양한 은사를 주신다. 이 은사들을 통해 성도들은 경건에 이르는 길에서 크고 작은 도움을 받는다. 그러므로 신자는 성령의
임재와 은사가 나타나는 예배를 통해서 참된 경건을 갖춘 성도로 빚어지게 된다.
목회 서신에 나타난 공통 주제
다섯 가지를 살펴 보았다. 비록 지금으로부터 이 천년 전에 한국 땅도 아닌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들을 목회하던 디모데와 디도에게
쓰여졌던 편지이지만 놀랍게도 지금 여기의 현실에도 정확하게 부합하고 필요한 말씀임을 새삼 발견할 수 있었다. 한국 교회 역시 각종
이단들, 거짓된 가르침, 잘못된 신학에 의해 오염되고 공격받고 있다. 그러나 누구를 비난하고 탓하고 있을 수 만은 없다.
부지런히 내 자신을 연단하여 주님께 인정 받을 수 있는 일꾼이요 그리스도의 군사로 준비되어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서신서의 명칭과 분류
1. 서신서의 명칭
‘서신서’(the
Epistles) 는 초대 교회의 지도자들이 로미 제국 전역에 흩어져 있던 여러 지역의 초대 교회 공동체 또는 특정한 일개인에게
신앙의 도움을 주기 위해 써 보낸 편지 들 중에서 초대 교회 성도들 뿐아니라 오고오는 세대의 모든 성도들의 신앙의 근거가 되게
하시고자 특별하게 영감(靈感)하신 편지들로서 훗날에 신약의 정경(正經)으로써 채택된 로마서에서 유다서까지의 21권의 책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27권의
성경이 기록된 시기는 A.D.50년 -100년 여간이나 이것들이 공교회(公敎會) 의 공식적정경으로 인정된 것은 대략 300년이
지난 A.D. 397년의 칼카타 공회(Councile of Cartageo)에서였다. 또한 이 27권의 책이 ‘서신서’로 불리우게
된 것은 알렉산드리아의 교부 제롬(Jerome , A.D.346-420년 ) 에 의해서였다. 즉 제롬은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벌게이트 역’(Vulgate)이다. 이 ‘빌게이트 역’ 성경에서 제롬은
로마서에서유다서까지를 한 부류로 묶어 이름을 붙였는데 그것이 바로 ‘서신서’였다. 그리하여 A.D.150년경의 순교자
져스틴(Justin Martyr) 이 4 복음서를 가리켜 명명한 ‘복음서’(the Gospels) 란 명칭과 마찬가지로
‘서신서’란 명칭은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의 모든 교회에서 통용되는 명칭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서신서는 성도들이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교회의
일원이며 여호와의 자녀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삶의 원리와 지침들을 제공해 주는 책일 뿐 아니라 기독교의 근간이 되는 교리인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 교회론, 종말론 전반을 다른 어떤 성경의 어떤 부분들보다도 직접적으로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
중요상이 크다. 한편 복음서와 사도행전이 주로 예수의 공생애와 복음의 확장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증거한 것이라면 서신서는 그러한
역사적 사건들을 성도의 삶과 연결하여 구체적으로 적용시킨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서신서를 분류하는 일반적이고도 전통적인 방법은
저자별(著者別)로 분류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서신서는 바울의 저작 로마서에서 빌레몬서까지의 13권과 익명(匿名)의 저작인
히브리서 1권, 야고보의 저자 야고보서의 1권, 베드로의 저작 베드로 전서와 후서 2편, 그리고 사도 요한의 저작 요한일서,
이서, 삼서, 3권과 유다의 저작 유다서 1권으로 분류된다.
한편 바울이 저술한 서신들은 바울 서신서라 부르며, 그리고
그 이외의 저자들이 저술한 서신들은 통칭하여 공동 서신서라 부른다. 그러므로 서신서는 그 저자를 기준으로 하면 일단 크게 둘로
분류할 수 있다. 그것은 곧 로마서에서 빌레몬서까지 13권의 '바울 서신'과 바울 외의 사도들이 기록한 히브리서에서 유다까지
8권의 '공동 서신'이다. 이제 이와 같은 분류를 한 눈에 알아 볼수 있께끔 간략히 도표화 하면 다음과 같다.
참고로 바울 서신은 수신자 또는 수신 지역의 이름을 따서 그 책의 제목이 니어진 반면, 공동 서신은 수신자를 반영한 이름인 히브리서를 제외하고는 모두 그 책의 저자의 이름을 따라 그 제목이 붙여진 것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책 이 름
저자 이름
기록 연대
바울
서신
로 마 서
바 울
A.D.57년
고린도전서
〃
A.D.55년55년
고린도후서
〃
A.D.56년
갈라디아서
〃
A.D.61-62년
에 베 소 서
〃
A.D.62-63년
빌 립 보 서
〃
A.D.62-63년
골 로 새 서
〃
A.D.62-63년
데살로니가전서
〃
A.D.51년
데살로니가후서
〃
A.D.51년
디 모 데 전 서
〃
A.D.63-65년
디 모 데 후 서
〃
A.D.66-67년
디 도 서
〃
A.D.66년
빌 레 몬 서
〃
A.D.62년
공동
서신
히 브 리 서
미 상
A.D.60년대 후반
야 고 보 서
야 고 보
A.D.46-49년
베 드 로 전 서
베 드 로
A.D.64년 전후
베드로후서
베 드 로
A.D.64년 전후
요 한 일 서
요 한
A.D.90년
요 한 이 서
요 한
A.D.90년
요 한 삼 서
요 한
A.D.90년
유 다 서
유 다
A.D.70-80년
나. 특징별 분류
서신서를 분류하는 또 다른 기준은 각 서신이 지니는 내용이
용도 및 기록 배경상의 특징이 있다. 그런데 이런 특징별 분류는 전통적이기는 하나 서신서 전체를 일관되게 한 기준으로 분류하는
것이 아니라 공통된 특징을 함께 가진 몇몇 서신을 함께 묶어 통칭하는 성격의 분류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에 서신서를 각
특징에 따라 구분하는 대표적 실레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1) 교리 서신(敎理書信)
다른 서신들도 교리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나 특별하게
기독교의 구원론, 기독론, 교회론 등의 주요 교리들을 집중으로 다루면서 그 교리들의 실생활에서의 적용 문제까지 다루고 있는
서신들을 가리킨다. 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이 4권이 이에 포함된다. 한편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는
기독교의 종말론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는 교리 서신적 성격을 지니고 있으나 동시에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된 사항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따로 '재림 서신' 이라 부르기도 한다.
2) 옥중 서신(獄中 書信)
바울이 기록한 서신서 중에서 특별하게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생활함으로써 기록한 서신서를 말한다.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이 4권이 해당된다.
3) 교회 서신(敎會 書信)
바울이 로마, 고린도, 갈라디아, 에베소, 빌립보, 골로새
, 데살로니가 이 7개 교회에 보낸 서신을 가리킨다. (로마서에서 데살로니가후서까지). 이 서신들은 이미 계시된 구속의 원리를
자세히 풀어 설파(說破)하는 가운 데 각 교회 성도들을 때로는 기독교의 기본 교리로 교훈하며, 또 때로는 임박한 예수님의 재림에
대비하여 성도들의 안이한 또는 잘못된 신앙생활을 시정 하도록 책망하며 바르게 이끌기 위해 교육하는 서신서들이다. (딤후
3:16).
4) 목회 서신(牧會 書信)
바울 당시 에베소 교회와 그레데 교회의 목회를 담당하고
있던 디모데와 디도에게 보낸 3편의 서신서를 가리킨다. (딤전,후, 딛). 이 서신들은 분명하게 일 개인에게 보낸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 내용은 교회 전체와 괸련된 문제 곧 교회 직분자의 자격 및 거짓 교사에 대한 경계, 공중(公衆) 예배와 교회의 질서
유지 등과 같은 귀중한 목회 지침 등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이는 디모데나 디도는 물론 모든 신약 교회의 모든 시대의 목회자와 더
나아가 모든 성도들이 읽어야 할 서신서이다.
5) 회람 서신(回覽 書信)
처음부터 여러 사람들이 돌아가며 읽을 것을 염두에 두고 쓴
서신서를 말한다. 골로새서와 갈라디아서가 대표적인 경우인데, 특별하게 골로새서에는 편지를 받은 자가 이 편지를 라오디게아
교회에도 전하여 그들이 함께 볼 수 있게 하라는 지시가 명기(銘記) 되어 있다.(골 4:16). 그리고 갈라디아서는 초대 교회
전체에서 가장 큰 논란이 되었던 문제 곧 율법과 복음과의 관계에 대하여 다루고 있으니 여러 사람들이 돌려 가며 읽었으리라는 것은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밖에도 비록 서로 돌려가며 일을 것을 지시한 특별한 언급은 나와 있지 않으나 로마서와 에베소서 역시
회람 서신으로 간주하고 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은혜로 말미암은 성도의 구원을 성찰(省察)한 다음 예수님의 지체(肢體)된 성도가
마땅히 행해야 할 덕목들을 역설하고 있는 이 서신서들은 많은 성도들이 널리 돌려 볼 필요가 있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6) 추천 서신(推薦 書信)
로마인들이 '에피스틀라 콤멘다티아(epistula
commendaticia), 즉 '천거(薦擧)의 편지'라고 일컸던 것이다. 이는 편지를 전하는 사람을 소개하거나 그 신분을
보증하기 위해 작성한 서신을 가리킨다. 서신서 중에 해당하는 것으로는 빌레몬서와 요한 삼서가 있다. 이 중 빌레몬서는 주인
빌레몬의 재산을 훔쳐 달아났다가 바울을 만나 회심(回心)한 오네시모를 위하여 바울 이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로 오네시모를 용서해
줄 것을 요청하는 글이다. 그리고 요한 삼서는 요한이 가이오에게 보낸 편지로서 가이오의 선하고 신실한 행위를 칭찬하는 가운데 그
서신을 전하는 데메드리오를 천거하는 글이다.
7) 답변 서신(答辯 書信)
이것은 어떤 문제에 대하여 대화 형식을 빌어 스스로
질의응답(質疑應答) 하거나 수신자로부터 받은 물음의 편지에 대하여 담하는 내용을 적어 보낸 서신을 가리킨다. 고린도전서와 후서와
빌립보서가 이에 해당하는데 전자, 즉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두 편지는 교회 내에서의 파당(派黨) 문제, 죽은 자의 부활
문제, 구제 헌금 등에 관하여 질의 응담한 답신서이다. 그리고 빌리보서는 빌립보 교인들이 옥중에 있던 바울을 위하여 보내준 헌금에
대하여 감사하며, 자신의 근황을 알린 글이라는 측면에서 답신서이다.
신약성경에서
바울서신과 계시록을 제외한 서신서들을 공동서신(The Catholic Epistles)이 라고 부른다. 그 외에 일반
서신(The General Epistles)이라고 명하기도 한다. 이 서신서들을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서신서의 수신 대상이 어느
특정한 개 교회가 아니라 일반적이며 보편적인 독자를 상대로 기록된 것이기에 공동서신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그 외에 바울서신과
구분키 위해 그렇게 부른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공통된 것은 아니다.
히브리서(만일 바울서신에서 제외할 경우), 야고보, 베드로, 요한, 유다에 의해 기록된 서신서들은 그 주제와 내용이 각각 다르다. 그리고 각각 40여년 간의 기간 사이에
기록됐다. 초대교회는 제4세기경 베드로전서와 요한1서를 정경으로 공인했다. 기타의 서신들은 6세기경에 이르러서야 모든 교회에서 정경으로 인정했다. 개인적으로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가 히브리서를 제외한 현재의 7권의 서신을 공동서신으로 인정했으며, 그 후 1545년 트렌트 회의에서 정경으로 확인한 것이다.
1. 공동서신 저자에 관한 견해 차이들
개혁교회의 보수주의에서는 공동서신이 그 편지의 발신자들이 기록한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진보적인 사람들은 비평적인 관점에서 볼 때 훨씬 후대 교회 사람들이
유명했던
사도들의 이름을 이용하여 쓴 것이라고 주장한다. 요한서신도 베드로전서, 유다서도 또 야고보서도 실제 그 사도들의 기록물이 아니라
익명의 성도들이 기록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공동서신의 집필 시기도 주후 64-200년까지 보고 있다. 이와 같은 진보와
보수측의 견해 차이는 공동서신 각론에서 구체적으로 다룰 것이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는 대체로 정통 보수측의 견해를 따르고자 한다. 각 서신서에 기록된 당시의 사도들과 전도인들이 기록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2. 공동서신의 가치
바울서신이
기독교와 그 복음 진리를 해석하고 적용하고 확립시킨 '골격'의 가치를 지녔다면, 공동서신은 '힘줄과 살'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공동서신은 심오한 신학론이나 신비스러운 경험보다는 대중적이요, 윤리적이요, 교훈적인 내용이 주된 주제다. 실제적인 신앙 훈계와
권면으로 당시 핍박과 이단의 유혹과 신앙적 시험에 둘러 쌓였던 모든 교회에게 힘과 지혜를 주고자 기록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동서신을 통해 당시 초대교회가 당면했던 보편적인 문제와 다양한 삶의 구조를 알 수 있다. 도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 바울
이외에 예수그리스도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사도들의 신앙 사상과 생각과 인품들을 엿볼 수도 있는 것이다. 비록 공동서신이 깊고
높은 신학적인 내용은 바울서신과 비교해 볼 때 가볍다고 생각할 수는 있으나, 바울이 말한 신학과 진리가 공동서신 속에서는
'육화'되어 나타난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바울만이 신야성경의 기자로 세우시지 않고 다양한 공동서신의 기자들을 따로 세우신 뜻은 이 세상의 성도들과 그 삶들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바울의 논리와 공동서신의 풍성한 교훈은 서로 상호 보완하여 성도의 신앙을 깊고, 넓고, 높은 자리로 인도해 줄 것이다.
이처럼 공동서신의 가치는 신약의 감동된 정경으로서, 또 그 시대의 역사적 기록물로서 그리고 문학적인 가치로서 바울서신 못지 않은
영원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3. 공동서신의 특징
앞에서
말한 공동서신의 가치는 그 구성과 내용의 특성에서 기인된다. 우선 특정 지역이나 교회가 아닌 모든 교회를 염두에 두고 기록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시 교회의 보편적인 정황을 알 수 있다. 그 다음 실제적이며 대중적인 내용을 갖고 있다. 바울서신처럼
이론적이며 예방적인 성질보다 당시 모든 교회의 성도들의 삶의 애로에 대한 구체적인 권면이나 교훈을 제시해 주고 있으며, 그
내용도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대중적인 가르침으로 되어 있다. 그 다음 다양한 주제를 지니고 있다. 히브리서는 율법과
예언의 완성이신 그리스도를, 베드로후서는 참희망과 참지식을, 요한서신은 사랑의 가치를, 유다서는 이단자들에 대한 경계를 주제로
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내용들을 통해 기독교 진리의 다양하고 보편적인 가치를 터득할 수 있다.
4. 공동서신의 각 개관
본 연구에서는 바울서신에서 다루지 않았던 히브리서도 공동서신의 범주에서 다뤄보고자 한다.
1) 히브리서
작자
미상이다. 바울, 아볼로, 바나바 등으로 추론하나 확실한 증거는 없다. 그러나 목회자, 신학자, 철학자의 자질과 능력을 겸비한
사람만이 기록할 수 있는 심오한 내용과 구체적인 신앙 권면으로 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율법과 제사와 예언의 완성이시며
본체이심을 강조하며, 그분만이 영원하고 유일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대제사장'이심을 증거한다.
2) 야고보서
헤이스(Hayes)라는
신학자는 '야고보서는 신약 속의 구약성경이다'라고 말했다. 그 안에 기록된 그리스도께 대한 두 세 구절의 언급을 제외시킨다면
마치 구약의 잠언서를 보는 듯하다. 야고보서는 바울서신의 대주제인 '신앙으로 인한 구원'과 반하는 듯한 내용이 있어 몇몇
개혁자들로부터 외면당한 예도 있었다. 그러나 야고보는 신앙을 성도의 전인격을 통해 관조하고 강조한 것뿐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얻는다는 사도 바울의 사상과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 신앙이란 그리스도에 대한 어떤 '생각'이 분명 아니다. 인격과 삶의 열매로
나타난다. 이는 바울서신서에도 강조되는 내용이다.
3) 베드로전·후서
베드로전서는
대사도 베드로의 아름답고 거룩한 신앙 인품이 여실하게 드러나는 신앙고백서요, 위로서이다. 당시 로마 제국 판도 안에서 이질적인
존재들로 업신여김받고 오해받고 핍박받는 모든 성도들을 위로하고자 쓴 베드로의 첫째 서신이다. 그 주제는 '고난을 상쇠하는
참희망'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성도들의 삶의 본분 중 한가지이며 그와 같은 삶에는 영원한 축복이 따름을 역설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처럼 핍박하는 원수를 위해 기도하고 축복해 주는 생활을 할 것을 권고한다. 그리고 삶의 종말적인 위기가
올지라도 말은 사회적, 신앙적 의무에 최선을 다할 것을 전하는 내용이다. 후서는 베드로 사도의 유언장과 같다. 순교하기 전 자신의
마지막장을 감지하고 보낸 공동회람 문서이다. 당시 교회에 일어나기 시작한 신비철학 종교인 지혜 종교(영지주의)의 폐단을 지적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참된 지시임을 강조하고 있다.
4) 요한서신들
요한서신중
요한1서를 제외하고 2,3서는 특정한 사람에게 보낸 서신이다. 그래서 공동서신의 범주에 제외시키는 이들도 있다. 요한 1서의
주제는 참사랑이다. 이는 요한복음 14,15장의 확대다. 신앙과 지혜와 덕의 권능은 사람에 있음을 강조한다. 당시 성행하던
영지주의에 물든 자들을 깨우치고 교화하며 예방키 위해 쓴 것으로 본다. 참된 성도, 참된 하나님의 자녀와 그 증표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의 증거를 지닌 자임을 말한다. 요한2서는 1서의 내용과 관계된다. 즉 거짓 진리를 전하는 거짓 교사에 대한
경고다. 요한3서는 교회의 질서에 대한 교훈이다. 교만하고 그릇된 어느 신자의 예를 들어 그것을 정죄하며 진리 안에서 행할 것을
강조한다.
5) 유다서
유다서는
주 예수의 육신의 동생인 야고보 사도의 동생 유다가 쓴 서신이다. 베드로후서와 그 내용이 흡사하여 논란이 많은 서신이기도 하다.
그러나 유다가 베드로 사도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서신서를 기록한 것으로 본다. 그 내용은 역시 이단자들의 침투와 오염을 경계하는
것이며 그들의 운명에 대해 통렬하게 경고하고 있다.
이처럼
공동서신의 주제와 내용은 다양하고 풍성하다. 그만큼 그 안에 깃든 하나님의 메시지가 풍요함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동서신의 내용은 오늘 현재 경건한 삶을 갈망하는 모든 성도들의 삶에 있어 각 분야의 교사가 될 것이다.
제 1 강 히브리서
1. 명칭
본
서신의 명칭은 한마디로 애매하다. 초기 전승은 본 서신의 명칭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거나 언급하는 경우 '히브리인들에게'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주후 2세기경 활동한 판테누스와 터툴리안 역시 본 서의 저자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지만 본 서의
표제만은 '히브리인들에게'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런 명칭이 어떻게 해서 생겼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2세기에 이 문서가 바울 서간집에 포함되었을 때 편집자가 '로마인들에게'와 같은 말에서 유추하여 이 명칭을 붙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명칭은 단순히 수신자가 유대인들 또는 좀더 정확하게 말해서 유대 그리스도인들이라는 편집자의 막연한 느낌을 반영했을 수도
있다. 이러한 명칭에 관한 불확실성은 본 서신의 역사적 배경을 고찰하는 데 있어서 불리한 점이 되어 왔다. 물론 서신의 내용에서
역사적인 언급들을 찾아내어 추론할 수도 있지만 본 서신에서 역사적인 언급들은 매우 애매하고 단편적이다. 따라서 본 서신의 명칭에
관한한 누구도 확정적인 주장을 하기는 어렵다.
2. 수신자
만일
'히브리인에게'란 명칭이 원래의 명칭이 아니라 편의상 편집자가 본 서신에 갖다 붙인 이름이라면 수신자를 밝히는데 있어서 명칭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 이 문제는 가능한한 성경 본문의 내증에 근거하여 밝혀져야만 한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보아 본 서의 수신자들은 예수님을 직접 보거나 그의 말씀을 듣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어떤 사람들의 가르침을
받아 예수님을 알고 있었던 유대인 그리스도인의 집단이었던 것 같다. 그들은 개종한 이래 계속 박해를 받았는데 특히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그들의 생활이 시작된 직후 심한 박해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저자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에서 아주 떠날 위험에 대해 경고함으로써 계속 신앙의 전진을 하도록 격려하고 있다. 또한 이들은
헬레니스트였음을 본 서신에서 추론할 수 있다. 그들은 헬라어로 된 구약성경을 알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옛 제사의식에 대한 그들의
지식은 구약성경을 읽은 데서 얻은 것이지 예루살렘의 성전 예배를 직접 접한 데서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암시되어 있다. 본
서신의 수신자들은 계속되는 박해의 위협 속에서 유대교로 회귀하려는 강한 유혹에 처한 헬라어에 익숙해 있던 유대인 기독교인들로
보여진다.
3. 저자
1) 바울 저자설
본
서신이 누구에게 보내졌는지 확실히 알지 못하여 또한 누가 이 서신을 보냈는지도 알 수 없다. 바울이 저자라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유세비우스 등의 신념은 동방 기독교의 판단에 영향을 주었고 궁극적으로는 4세기 말엽에 서방 교회의 판단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에서도 본 서신에 대한 바울의 저작설은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의 경우처럼 단정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본 서신에 나타난 문체와 사상의 양식은 바울의 것과 같지 않다. 즉 본 서신은 구약성경의 헬라어 역인 70인역에서만
구약성경을 인용했으며 바울의 문체보다 훨씬 유창한 헬라어를 구사하고 있다. 특히 바울 서신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독특한 대제사장
기독론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은 바울의 저자설을 부인하기에 충분하다.
2) 바나바 저자설
주후 220년에 글을 쓴 터툴리안은 히브리서의 저자로 바울의 동료이며 사도인 바나바를 지적한다. 이 견해는 아프리카 지역의 교회들의 일반적인 견해로 보여진다. 바나바는 초대교회의 유력한 인물로서 '권위자'(행4:36)라고 불렀으며 헬라 사상에 젖어 있던 구브로 출신의 레위인이었다. 이런 점에서 제사 제도를 구속사에 정확하게 적용하여 기술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바울과 함께 전도 여행을 했으므로 히2:3의 내용과 부합된다. 그러나 이것은 터툴리안이 지나치게 반유대주의저인 편에 있는 가짜 바나바의 편지와 성경의 사용법이 유사한 것을 보았을 뿐 초대교회 당시의 외적 증거를 확보하고 있지 못한 취약점을 가지고 있다.
3) 기타 저자설
419년
칼타고 회의 때 가서야 비로소 본 서에 대한 바울의 저작설이 동방에서처럼 사방에서도 전통적인 것이 되었다. 그러나 비평적 판단을
하는 주석가들은 여전히 본 서의 저자가 로마의 클레멘트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누가를 본 서의 번역자 또는 편집자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종교개혁 시대에 칼빈은 누가나 로마의 클레멘트를, 루터는 아볼로 저작설을 주장하였다. 한편 하르낙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함께 본 서를 썼다고 주장했다. 분명한 것은 저자는 제2세대 그리스도인으로서 70인역에 정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풍부한
어휘력을 가졌으며 바울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수사학적인 문체의 대가였다. 그는 성경에 능한 자로서 스데반과 빌립의 동료들이며 이방
선교의 선구자들이었던 헬라파 유대인들의 사고 방식을 이어받은 한 헬레니스트였다. 그러나 실제로 누가 본서를 썼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만이 그 진상을 아실 뿐이다.
4. 기록연대
본
서의 기록 연대에 관하여 성전이 아직 기능을 하고 있었던 시대로 보는 견해가 전통적 입장이었다. 그러나 많은 현대 신학자들이
성전 파괴 이후로 연대를 계산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크게 본 서신의 기록연대는 조기 기록설(A.D.58-60년)과 예루살렘
멸망 직전설(A.D.70년이전)과 그 이후의 설(A.D.80-90년)로 각각 나누어진다. 이와 같은 본 서신의 기록 연대는 로마의
클레멘트 히브리서 인용, 성전 제사의 진행여부, 박해 시기, 신학적 발전 여부에 따른 내, 외증에 의해 결정한다.
5. 목적
그
당시 독자들은 예전에 복음을 받아들였지만 현재 계속되는 기독교안에 대한 박해와 죄의 문제로 딜레마에 빠져 유대교로 회귀함을 통해
제사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들은 세례 이후 죄의 문제로 시달리면서 예수를 믿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는가에 대한
신학적 의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히브리서 독자들의 특별한 상황에 비추어서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 그들에게 예수를 믿는
것이 계속 우리에게 도움이 됨을 논증하기 위해 히브리서의 대제사장 기독론을 전개한다. 여기서 저자는 예수께서 현재 대제사장
되심과 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계속적으로 주고 계심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종말론적으로 한 번
영원히 효과 있는 제사로써 과거의 죄뿐 아니라 현재의 죄도 해결해 줄 수 있는 제사라는 것을 보여 주어야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자는 좀 새로운 논제로 이 문제의 해결을 전개한다.
제 2 강 야고보서
1. 서론
우리는
이제 신약성경 중 공동서신(General Epistles)이라고 부르는 부분의 초입에 들어서고 있다. 바울서신처럼 어떤 특정한
교회에 보내진 서신서가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진 것이요. 그리고 여러 사도들의 서신서를 묶은 것이기에 공동서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 첫머리를 장식한 서신이 바로 야고보서라고 불리우는 본 서이다. 야고보서는 흔히 '신약의 잠언서'라는 별명을
지니고 있다. 신앙의 실천, 신앙인의 삶의 지혜가 가득 담겨 있다. 이제 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1. 저자와 기록 연대
1) 본 서의 저자 문제
많은
사람들이 본 서의 저자가 주 예수의 육신의 동생인 사도 야고보가 아니라고 주장해 왔다. 그 이유로는 갈릴리 어부 출신이 본 서와
같은 고상한 희랍어를 사용할 수가 없다는 것이요, 그 다음 문제로는 성모마리아를 신봉하는 구교에서 제기한 내용으로 예수님에게는
사촌만 있고 형제들은 없다는 견해 때문에 비롯되었다. 즉 마리아의 '무흠수태'(Immaculat conception) 교리를
지킴으로써 마리아의 순결성과 거룩성을 보호하고자 지어낸 이론으로 이것을 '히에로니무스 설'(Hieronymian)이라 부른다.
마리아는
성령으로 그리스도를 잉태하고 출산한 후 순결을 지켰으므로 야고보와 같은 예수의 씨다른 형제는 있을 수 없고 오직 사촌들만이
있는데 성경에서 그들을 예수의 형제나 가족으로 부르는 것은 유대인들이 사촌들도 그렇게 칭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그래서
히에로니무스 설을 신봉하는 자들은 '작은 야고보'로 불리는 '알패오의 아들 사도 야고보'이며, 예수의 사촌으로서 글로바의 아내, 즉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자매인 마리아의 아들로 보는 것이다.
2) 본 서의 저자가 주의 동생이라는 증거
그렇다면 우리는 본 서의 저자가 어떤 이유로 예수그리스도의 동생인 초대교회 사도 야고보로 볼 수밖에 없는가? 먼저 우리는 성경이 분명히 예수의 동생들이 있음을 증거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는 점이다(마13:55).
그 중에는 분명히 야고보도 언급되어 있다.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한 약속대로 예수를 출산한 후 결혼하여 많은 자녀를 낳았으며
예수와 육신적으로 이복 관계인 동생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을 정통 개혁교회들은 믿는데 이 이론을 '헬비디우스 설'
(Helvidian)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본 서의 저자가 주의 동생 야고보가 될 수 없다는 이론은 받아들일 수 없다. 그 다음
희랍어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모국어와 함께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이들이 많았다. 사도 요한도 많은 서신서를 고급스러운 희랍어로 사용치
않았는가? 그 다음 약1:1에서
'주 예수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라고 밝힌 점이다. 이 사실이 저자의 권위에 대한 확실한 증표다. 이와 같은 표현은 당시 예루살렘
교회 감독이자 사도였던 주의 동생 야고보 외에는 사용할 수 없다. 만일 그가 아니라면 다른 표현으로 자신을 밝혔을 것이다. 그
다음 본 서 전체에 나타나는 명령적인 용법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와 가장 친근하게 생활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그리스도 예수와
유사한 표현법과 내용 등이 본 서가 주의 동생 야고보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산 증표이다. 그는 주후 62년경 순교했으니 그 시기
직전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한다.
3. 수신자와 기록 목적
본 서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약1:1)라고
시작한 것으로 보아 각처에 흩어진 유대인 성도를 주대상으로 삼은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로페스(Ropes)라는 신학자는 "모든
성도들은 저 하늘나라 본향을 떠나 이 땅에 흩어진 순례자(Diaspora)이며 새로운 이스라엘이다"라고 했다. 비록 야고보 사도가
유대 출신 기독교인들을 염두에 두었을지라고 그 내용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공통적으로 작용된다. 기록 목적은 '시험과 갈등의
해결'을 위한 것으로 본다. 외적인 박해로 인한 시험, 교회 내 다른 이웃과의 갈등을 그리스도 예수의 교훈을 순종하고 실천함으로써
해결하라는 것이 야고보서의 중심 요지인 것이다.
4. 타성경과의 연관성 문제
루터와
같은 개혁가는 본 서를 '지푸라기'라 불렀다. 바울에게서 확인 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의 진리와
배치되는 듯한 인상을 본 서에서 받았으리라. 그러나 본 서의 내용 중 행위가 강조되는 것은 바울서신서와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충적이다. 바울서신에서 강조된 믿음 역시 실천적인 삶을 요구한다. 야고보는 다만 그것을 강조했을 뿐이다.
5. 본 서의 특징
1) 유대교적인 논증
내용이 일관된 논리적인 진전이나 사상의 체계는 없다. 다만 당시 유대 랍비와 희랍의 지혜자들의 교수법과 설교 양식이 발견된다. 즉 설교자가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그 답을 하는 식이다.
2) 교리 중심이 아닌 생활 중심
본 서에는 그리스도의 성육신, 속죄, 고난, 부활이 없다. 다만 일상생활에서의 신앙적인 인내, 정절, 선행 등이 강조되어 있다. 그래서 본 서를 신약의 잠언서라고 칭하는 것이다.
3) 예수그리스도와 흡사한 교수법
본 서에는 자연을 사용한 비유법이 자주 등장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교수법이다. 주 예수와한 지붕에서 오랫동안 지낸 주의 동생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교수법이다.
6. 본 서의 내용 개관
1. 시험과 시련에 관한 교훈(1:1-16)
2. 참예배와 그릇된 예배에 대한 교훈(1:17-2:13)
3. 무가치한 신앙 생활에 대한 교훈(2:14-3:12)
4. 참지혜에 관한 교훈(3:13-18)
5. 교회의 분쟁과 세속화에 대한 질타(4:1-12)
6. 불의한 유력가에 대한 경고(4:13-5:6)
7. 인내에 대한 격려(5:7-11)
8. 맹세, 고난, 질병, 기도, 전도에 대한 금언(5:12-20)
제 3 강 베드로전서
1. 서론
우리는
이제 공동서신의 두 번째 서신을 접하게 된다. 베드로의 첫 보통 서신(The First General Epistle of
Peter, KJV)으로 명명된 본 서신은 공공 서신 중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내용으로 다가온다. 그리스도의 가장 밀접한 사도였던
신앙과 위로와 교훈으로 가득한 이 서신의 가치를 온전하게 아는 이들은 별로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그 나라를 위해 경건한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에게는 귀중한 격려와 소망을 주는데 있어서 본 서만큼 가치가 있는 책은 없다고 할 것이다.
2. 저자 문제
본
서는 1세기 말엽부터 교회들이 베드로 사도의 첫 편지로 인정해 왔다. 로마 교회의 교부 클레멘트, 또 유명한 폴리갑,
이레나이우스, 터툴리안 그리고 3세기의 오리겐에게 이르기까지 베드로전서가 베드로 사도의 것임을 의심치 않고 그 내용을 공공연하게
인용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몇몇 비평가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의혹을 제기한다.
첫째, 본 서에서 사용된 헬라어가 어부 출신의 베드로가 썼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고상하다는 것이요, 그 다음 본 서의 내용이 너무나
바울 사도의 사상과 흡사하다는 것이며 그리고 본 서에서 다루는 고난과 박해는 베드로 사도가 순교하기 전에는 본격적으로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러나 헬라어 문제는 본 서 5:12에서 밝혔듯이 용역자 실루아노가 대필했음이 분명하며, 그는 바울의 중요한 동반자로서(행15:40 ; 행16:19)
바울에게 깊은 신학적인 영향을 받았기에 베드로 사도의 말도 바울처럼 표현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언약과 교훈을 직접 체험한 사도로서 그분의 죽음, 고난, 부활, 승천, 재림의 언약도 직접 목도한 사도이기에 바울서신의 교리들을
산 경험으로 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도인 것이다. 또 박해와 고난 문제는 네로 황제가 다스리던 주후 62년경부터
시작되었으며, 예수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상도들은 개인적으로 위기를 느낄만큼 성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는
임박하는 말세적인 대박해를 통해 모든 성도들에게 박해와 고난에 대비한 신앙 무장을 강조했던 것이다.
3. 저작 시기와 장소
1) 저작시기
대개의 학자들은 본 서가 로마 제국의 대박해 시기 중 어느 한 시기의 직전이나 초기에 쓰여진 것으로 본다. 본 서의 분위기나 표현에서 우리는 그것을 느낄 수 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벧전4:7) 또는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벧전4:17)라고
베드로는 종말적인 대환란을 예고한다. 그렇다면 그 시기는 언제인가? 베드로 사도는 주후 68년경 대박해 기간 중 네로 황제에
의해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네로 황제에 희한 기독교에 대한 로마 제국의 첫 박해는 주후 64년경부터이다. 그 당시
네로는 기독교를 불법 단체로 간주하고 온 로마 판도 각처에서 개인적으로 사회로부터 냉대와 불이익을 당했었으며 누구나 곧 대대적인
박해가 닥칠 것을 예견했고 교회의 위기가 도래하게 될 것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본 서는 베드로 사도가 로마에 온 주후
63-64년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본다.
2) 저작 장소
본 서에는 그 저작 장소가 언급되어 있는데, 즉 바벨론에 있는 교회(벧전5:13)에서 기록하여 보낸다는 구절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바벨론(벧전5:13)에서
기록하여 보낸다는 구절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바벨론은 어디인가? 중세의 에라스무스, 칼빈 등은 유브라데 강 유역의 유대인
정착지인 바벨론이라고 추정했다. 또 이집트 카이로 근처인 앗시리아인 정착지가 바벨론으로 불리워졌으므로 그 곳에 관심을 두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바벨론은 당시 로마를 상징하는 기독교의 보편적인 은어라는 사실을 지적한다(계14:8 ; 계17:5). 구전에 의하면 베드로는 말년에 20여년간 로마에서 활동하다가 주후 64년 늦여름 네로의 분노의 희생물로 십자가 처형을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본 서가 로마에서 기록된 것임에 유력하다.
4. 저작 목적과 대상
본
서는 임박한 대박해로 인한 삶의 시련에 대한 신앙 무장을 위해 쓰여졌다. 물론 그 대상은 로마 판도 안에 흩어져 살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러나 베드로전서의 위대한 점은 다가올 박해를 소극적으로 맞을 것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박해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영광스러운 것이요, 그 상급으로 영생 복락을 맞이하게 되는 축복임을 강조하므로써 성도들에게 한없는 힘과 위안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본 서는 격려의 서신 또는 소망의 서신으로 부르는 것이다.
5. 본 서의 특징
1)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총
벧전1:2은 본 서의 주제다. 곧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한다. 영원한 나라를 예비하신 성부, 고난과 영광에 참예케 해주신 성자 그리고 위로의 성령에 관한 내용이 본 서 전체에 흐른다.
2) 그리스도인의 고난에 관한 자세
고난은 곧 닥칠 것이나 한시적인 것이요, 그 고난으로 교회와 성도들은 더욱 견고케 될 것(벧전5:11)이며
극 고난으로 성도들은 더욱 성화될 것임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위대한 고난의 증인인 베드로 사도의 빛나는 교훈은 고난에 대한
성도의 자세다. 즉 고난으로 삶의 종말이 올지라도 성도의 본분과 사명을 더 열심히 감당하라는 것이다. 열심히 선을 행하며, 열심히
봉사하며, 더 뜨겁게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벧전4:7-11). 이와 같은 자세는 오직 고난의 주 그리스도의 그 자세를 본받음으로 이룰 수 있음을 강조한다(벧전2:18-25). 그러므로 본 서는 종말때에 행할 성도의 신앙 윤리의 지침서의 가치도 지닌다.
6. 내용 개관
1. 하나님의 베푸신 은혜(1:1-12)
2. 은혜에 대한 성도의 자세(1:13-2:12)
3. 고난중에 지녀야 할 자세들(2:13-3:12)
4. 고난중에 행해야 할 일들(3:13-5:9)
5. 축복과 인사(5:10-14)
제 4 강 베드로후서
1. 서론
교회의
위기는 성도의 신앙적 삶의 위기에서 기인된다. 교회 구성원인 성도 각 개인의 삶의 정황이 곧 교회의 형편을 좌우한다. 그렇다면
교회 위기의 배경은 무엇인가? 베드로전서는 외적인 박해로 인한 위기에 대한 지침서인 반면 베드로후서는 이단 사설로 인한 교회의
내적 위기에 대한 경계서이다. 성도 각 개인이 거짓 교사와 거짓 교설에 물들어 반성서적인 신앙을 지닌다면 교회는 영원히 멸망하게 될
것이다.
2. 저자 문제
1) 가장 의심받는 본 서의 저자
신약성경
중 본 서처럼 저자의 진위 문제에 논란이 많은 정경은 별로 없을 것이다. 본 서는 2,3세기경부터 논란의 대상이었다.
유세비우스(Eusebius)는 베드로전서를 사도 베드로가 쓴 것으로 인정했으나 베드로후서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오리겐(Origen)도 마찬가지로 제2서신서는 다소 의심스럽다고 했다. 종교 개혁 시대에 와서도 루터(Luther)만이 베드로의
저술을 인정했고 칼빈(Calvin)이나 에라스무스(Erasmus)는 부인했다.
20세기의
학자들(진보적)은 거의가 베드로후서를 위작으로 보며, 신약성경 중 가장 후대에 기록되어 삽입한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는 대략 다음과 같다. 전서와 후서의 전혀 다른 주제의 차이. 또 문제의 차이와 표현이 전서는 매우 고상한 반면
후서는 상대적으로 수준이 낮은 것으로 보이는 점이다. 그 다음 유다서와 내용이 많이 중복되었다는 점과 교회 안에서 많은 성도들이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기대를 포기했다고 언급한 점(벧후3:4) 그리고 신앙의 조상들(사도)이 이미 잠들었다고 언급한 점과 교회가 늦게 베드로후서를 정경으로 받아들였다는 점 등의 이유를 들어 본 서가 2세기경 어느 무명인에 의해 위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2) 베드로 사도가 저자인 증거들
그러나 그와 같은 문제들이 오히려 사도 베드로만이 본 서의 저자임을 대변해 주는 증거가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베드로는 분명히 '시몬 베드로'(벧후1:1)라고 자신을 밝혔다. 만일 위작이라면 그냥 베드로 사도라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생생한 신앙의 경험담, 즉 변화산에서 주님이 변모하신 사건을 말하고 있다(벧후1:16-18). 이는 베드로 자신이 아니면 증거할 수 없는 내용이다.
그
다음 문체나 어휘가 틀린 것에 대해서는 전편이 실루아노의 대필로 작성된 것이라면 후편은 베드로 스스로 쓴 것이기에 헬라어의
수준이 다르고 문체가 다른 것으로 본다. 또 유다서를 인용했다고 했는데 사실은 베드로후서는 '거짓 교사'들을 앞으로 나타날
존재들로 말하며 미래 시제로 표현했고, 유다서는 현재 시제로 말했음을 볼 수 있다. 오히려 유다서가 베드로후서를 인용한 것이다.
그리고 어휘나 내용이 전서와 1/6이 일치한다. 이는 전서나 후서가 같은 사람이 쓴 것임을 반증한다. 그리고 권위 있고 단호하게
바울 사도가 쓴 서신서의 영감적 권위(정경성)를 인정하는 내용도 있는데(벧후3:16), 이는 사도 베드로 외에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 이와 같은 몇몇 사례만 볼지라도 본 서의 저자는 사도 베드로임이 분명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은 것이다.
3. 저작 시기와 장소
만일 본 서가 베드로가 쓴 것이라면 전서의 집필 시기인 주후 63-64년에서 순교한 주후 68년경 사이일 것이다. 벧후1:13에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옴을 암시한 듯한 내용으로 볼 때 본 서는 순교 직전인 67-68년사이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 장소도 마지막 활동 무대였던 로마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4. 대상과 목적
이 공동서신 역시 베드로의 첫째 서신과 마찬가지로 특정한 교회나 성도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로마 제국 판도에 있었던 모든 교회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벧후1:1에서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한 것이다. 본 서의 수신자들은 이미 기독교의 모든 진리 체계를 이해하고 믿는 자들이다(벧후1:12).
그들은 베드로 사도의 권위를 이미 알고 있고 그의 가르침에 진지한 열의와 사모심을 지니고 있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어떤 목적으로
본 서를 기록했을까? 그 목적은 크게 베드로 사도의 개인적인 문제와 당시 세계 교회의 보편적인 당면 문제 때문일 것이다. 즉
사도 베드로는 유언적으로 온 교회에 당부하고 싶은 말을 하고자 했을 것이다. "내가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벧후1:15)는 말대로이다. 그 다음 세계 각처에서 성행하는 이단적 종교 사조인 '영지주의 풍조'를 경계하고자 본 서를 쓴 것으로 추정된다(벧후2:1-3). 영혼만 귀한 것이요, 육체는 하찮은 것이니 육체로 어떤 죄를 지어도 구원과는 관계없다는 교설로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이 일어나기 시작하자 사도 베드로는 종말적인 심판을 염두에 두고 거룩한 생활을 할 것을 강조한다.
5. 주제
'신앙적인 참지식'이 본 서의 큰 주제이다. '앎, 지식'(Know, Knowledge)이라는 말이 16회나 반복된다. 끝 말도 "오직 우리 주 곧 구주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벧후3:18)고 했다. 이는 당시 특별한 영적 지시과 지혜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미혹하는 영지주의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는 예수그리스도를 닮는 생활을 강조했다(벧후1:5-7).
영지주의에 미혹된 자들이 극단적으로 무도덕한 생활을 했기에 그리스도를 닮아 거룩한 생활을 하는 것이 참지식과 지혜임을 교훈한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생활은 종말에 필히 시행될 하나님의 대심판을 염두에 두고 행해야 함을 강조한다. 신앙의 참 지식,
참지혜가 본 서의 강조점이다.
6. 내용 구성
1) 참된 지식의 의미(1장)
2) 거짓 지식을 전하는 자에 대한 경계(2장)
3) 참지식과 거짓 지식을 따르는 자들의 미래(3장)
제 5 강 요한서신
1. 요한서신의 서론
요한
1,2,3서를 요한서신이라고 한다. 이 서신들은 공동서신으로 분류되어 있으며, 사도 요한이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에 대해 이견들이 있지만, 사상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요한이 기록한 것으로 알려진 다른 문서들-요한복음, 요한
계시록-과 같은 위치를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요한서신은 세 개로 나눌 수 있는데, 논문 형식을 취한 요한 1서와 일반적인 서신
형식을 취한 요한 2,3서가 있다. 각 요한 서신들간에 보여지는 상이점도 있지만 이 서신들을 일괄적으로 연구하는 데는 별무리가
없다. 따라서 세 서신을 일괄적으로 연구함으로 요한서신이 지니고 있는 진정한 가치를 알아 보아야 할 것이다.
2. 요한서신의 저자와 저작 연대
1) 요한 서신의 저자
본
서신들이 요한의 저작이라는 데에는 학자들간에 많은 이견들이 있다. 요한의 다른 문서들과 요한1,2,3서의 저자가 다르다고 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들은 사랑의 사도로 불려지는 요한이 이단에 대한 과격한 표현을 사용하였다는 점을 들어서 반대하고 있다. 그리고
무식한 어부 출신인 요한이 본 서에 나타나 보이는 것처럼 깊고도 오묘한 글을 썼을 리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아닌
본 서에 등장하는 '장로'요한이 기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후대의 대다수 학자들(Alford, Calvin, Meyer)은
요한이 저자라는 데 일치를 보이고 있다. 그것은 무라토리 단편(Muratorian Fragment)에서도 입증하고 있다. 그리고
초대교회의 교부들과 주교들(Tertullian, Origen, Cyprian)도 요한의 저작이라는 것에 동의를 하고 있다. 그리고
장로라고 표현한 것은 직분을 가리키기보다는 헬라어의 원뜻인 '연장자'라는 의미에서 사도 요한자신을 가리키고 있다고 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본 서신의 기독론에 대해 특히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으며, 이것은 요한복음의 사상과 비슷함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요한의 저작인 다른 문서들과 문체나 신학 사상 그리고 어휘들을 살펴볼 때 요한이 본 서신서들의 저자라는 것이 입증되고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비평학자들도 이 사실에 대해 동의를 한다고 한다.
2) 요한서신의 저작 연대
본 서신의 저작 연대는 저작 장소와 깊은 연관이 있다. 저작 장소에 대해 알아보면, 요한이 팔레스틴 지역에서 기록하였다고 한다. 그 이유는 요일5:21을
근거로 하고 있으나 많은 역사가들(Eusebius, Irenaeus)은 에베소에서 본 서신을 기록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본
서신은 에베소에서 요한이 기록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 연대에 대해서는 학자들간에 의견이 분분하며,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첫째는 본 서신이 요한복음보다 먼저 기록되었다는 견해이다. 둘째로는 본 서신과 요한복음이 같은 시대에
기록되었다는 것이고, 마지막으로는 요한복음보다 본 서신이 후대에 기록되었다고 하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는 없지만, 본 서신이 요한의 말년에 기록되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그 연대를 말한다면 주후 90-95년경으로 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요한이 본 서신을 기록할 당시의 상황은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이단의 공격이 있었으며,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A.D.81-96)라는 로마 황제의 박해가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본 서신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3. 요한서신의 주제와 목적
1) 요한 서신의 주제
먼저
요한1서에서 보여지는 전체저인 주제는 '교제'라고 할 수 있다. 요한은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사랑을 표현하는 사람은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요한1서가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물든 초대교회에
대해서는 폭탄적인 선언을 하였다'라고 평하기도 한다. 요한2서에서는 성도들의 실천적인 삶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즉 성도들의 삶은
참된 사랑을 실천하여야 하며, 한편 요한3서에서는 성도의 실천적인 삶의 모습을 그리면서 특히 주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
성도가 해야 할 의무와 책임에 대해 말을 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주제를 종합하여 본다면, 요한서신의 주제는 '사랑의 윤리에 대한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이 말하는 사랑의 윤리는 이미 예수님께서 복음서에서 보여 주신 사랑이 전통적으로 유래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사랑의 실천을 성도들은 마땅히 행해야 하는 것이다. 단지 이론으로 끝나 버리는 사랑이
아니라 몸소 실천하여 열매 맺는 사랑이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 사랑의 대상은 우리의 형제요, 이웃임을 요한은 밝히고
있다.
2) 요한서신의 목적
요한의 서신에는 크게 다섯 가지의 주제가 있다고 한다.
그는
먼저 서로간에 사귐이 있도록 하기 위하여, 기쁨을 주기 위하여, 죄악에 물들지 않기 위하여, 잘못된 교리들에 대해 승리하도록
하기 위하여, 구원의 확신을 지닐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기록되었다고 한다. 당시의 상황은 새로운 거짓 가르침으로 인해 야기된
상황이었다. 이 가르침으로 인해 교회 안에서는 복음으로부터 이탈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이들의 주장과 진리의 복음을 구분할 수
있는 표준을 알지 못해 우왕 좌왕하는 상황 속에서 본 서신이 쓰여졌다.
따라서 예수그리스도란 분이
어떠한 분이신지 그리고 이탈자들이 아니라 독자들 자신이 그 표준임을 알리기 위하여 본 서신이 쓰여진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그리스도는 성육신하셨으며, 참하나님이시며, 우리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구세주이심을 요한은 밝히고 있는 것이다. 결국 본 서신은
예수그리스도의 선재설을 밝힘으로써 두 가지의 성품-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면서 거짓 가르침에 대해 논박하고 있으며,
예수그리스도가 보여 주셨던 사랑을 성도들이 실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쓰여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4. 요한서신의 특징
1) 요한서신의 특징
요한1서는
2,3서와 같이 편지글 형식을 취하지 않고 있으며, 교훈하기 위해 쓰여진 글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이 서신은 일반적인
독자들이 아니라 교회에서 영적으로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여 쓰여진 것이다. 왜냐하면 본 서신에서 나타나고
있는 사랑이 평범한 사람들이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심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사상을 표현하는 단어는 극히 단순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심오한 요한의 사상은 '사도적 권위의식'을 잘 표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사상을 파악할 수 있기
위해서는 사도와 같이 영적인 지도자의 위치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본 서신의 문체는 히브리서의 문체와 비슷한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요한2,3서는 신약의 서신 중 가장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요한이 나타내고자 하는 사상이 함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제 6 강 유다서
1. 저자와 저작 연대
1) 저자
본
서신은 1절에서 밝히고 있듯이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에 의해 기록되어졌다. 본 서신은 예수님의 동생인 유다가 기록하였다는 것이
전통적인 견해였다. 그러나 이러한 것에 반박을 하고 나선 일부 학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본 서신에 나타나는 영지주의 이단은
2세기에 있었던 것이며, 본 서신은 인용한 인용구는 외경인 에녹서와 모세승천기에서 인용된 것으로 이것은 2세기경에 기록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주장은 많은 외적인 증거에 의해 묵살되어 버리고 만다. 즉 초대 교부들은 본 서신이
예수님의 동생인 유다가 기록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무라토리 정경(Muratorian Canon)에서도 유다의 저작으로 보고
있다. 내적인 증거로는 유1:1에 잘 나타나고 있다. 신약성경에서는 유다란 이름이 많이 나온다(막3:19 ; 막6:3 ; 눅3:30 ; 눅6:16 ; 행5:37 ; 행9:11 ; 행15:22). 그러나 이들 중 여러 가지 여건상으로 보아 본 서신이 예수님의 동생인 유다(막6:3)가 기록하였다고 인정하게 된 것은 4세기 이후에 와서였다. 오늘날도 본 서신의 저자가 유다라고 알고 있는 것에 는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2) 저작 연대
본
서신의 저작 연대는 학자들마다 이견이 있기 때문에 정확한 연대를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예수님의 동생인 유다가 기록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근사치에 가까운 연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즉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본 서신의 저작 연대를 2세기
중엽에서 말엽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본 서신이 예루살렘의 멸망 이전과 이후 중 어느 한 때에 쓰여졌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는데,
본 서신의 내용 중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소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멸망 이전에 기록된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주후 70년 이전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1세기 후반에 발흥되었던 영지주의에 대한 성도들이 경계를 그 주된 내용으로 삼고
있으며, 예루살렘 함락에 대한 예연적인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함락 이후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유다가 주후 70-80년에
순교하였을 것으로 추정됨으로 본 서신의 기록 연대는 주후 80-90년으로 보든지 훨씬 이후인 1세기 말엽으로 보는 것이 모든
상황에 적절할 것이다.
2. 특징과 목적
1) 특징
유다서가 공식적으로 정경으로 받아들여진 때는 아다나시우스(Athanasius)가 주후 367년에 그의 정경에 본 서신을 포함시킴으로써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공식적인 인정은 주후 397년에 카르타고 회의(Council of Carthago)에서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있었던
니케아 공의회(Nicaen Council)에서는 본 서신을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본 서신이 외경인 '에녹서'와
'모세승천기'를 인용하였기 때문이었다. 본 서신은 비록 짧은 문장으로 기록되어져 있지만 그 구조 면에서 서신으로 갖추어야 할
것들을 모두 갖추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본 서신의 마지막 축도 부분이 바울이 기록한 로마서(롬16:25-27)에
기록되어 있는 부분과 상통한다는 사실을 들어 유다가 바울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을 하기도 한다. 유다서의 내용이 난해하기
때문에 본 서신 자체만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다. 그러나 짧은 내용 속에 구약의 많은 인물들이 열거되어 있으며,
이단자들에 대한 태도가 아주 논리저이고 단호한 것도 본 서신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외경을 인용한 것에 대해서는 크게
문제삼을 필요는 없을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바울도 이방 시인의 말을 인용하기도 하였으며(행17:28), 랍비의 문헌인 미드라쉬르 인용하기도 하였던 것을 볼 수 있다(고전10:4).
2) 목적
유다서는
교회 내에서 일고 있는 이단들의 정체와 그들에 대한 성도들의 올바른 태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즉 유다는 교회 내에 침투하여
성도들의 신앙을 혼란하게 하며, 공동체를 위협하는 이단자들을 경계하고, 믿음의 반석 위에 굳게 서야 함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본
서신은 영지주의자들로부터 교회를 보호하며 성도들의 신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그 주된 목적이라고 한다.
본
서신은 베드로후서와 마찬가지로 영지주의자들의 침입에 대해 기록하고 있으며, 수신자들에게 믿음의 도를 위하여 싸울 것을 말하고
있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은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였다. 그래서 기존적으로 받아들인 성도의 구원에 대해 의심을 가지게
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의 값없이 주신 은혜를 하나의 색욕거리로 만들고 말았다. 이러한 가르침에 현혹되는 성도들이 있음을 알고
유다는, 이들의 종말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성도들이 이들의 위협으로부터 헤어나오기를 바랐던 것이다.
본 서신의 목적은 유1:3과 유1:4에 잘 나타나고 있다.
3. 유다서에 나타난 예수그리스도와 내용 그리고 주제
1) 유다서에 나타난 예수그리스도
유다는 당시 만연해 있는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 반박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이원론적이다. 즉 물질은 악하고 영은 선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은 육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하면서 도덕적으로 방탕한 모습을 보였다(유1:4). 그래서 유다는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말한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은 종말에 심판하실 심판자로서의 예수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다(유1:15). 그리고 이단자들로부터 성도들을 영원까지 보호하여 주시며(유1:24). 언제나 긍휼을 베푸시는 예수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다(유1:21).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하나의 색욕 거리로 만드는 이단자들과는 대조적인 모습인 것이다. 유다가 말하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생활할 때 이 세상으로부터 오는 어떠한 유혹이라도 굳건히 이기며 신앙을 지킬 수가 있는 것이다.
2) 유다서의 내용과 주제
본 서는 크게 세 가지의 교리를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먼저
하나님께서 가지신 권위와 예수그리스도의 우월성 그리고 믿음의 실천이 믿음을 지키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적인 사고를 통하여 이단자들의 주장에 반박하고 있다. 본 서신의 내용은 이단자들의 특징적인 면과 그들이 종말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반드시 받을 것이라는 확신적인 면 그리고 이들에 대한 성도들의 바른 자세를 말하고 있다.
따라서
본 서선의 주제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이단자들의 가르침에 미혹되지 말고 사도들의 가르침으로 인한 믿음의 도를 위하여 싸울 것을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성경 66권 전체가 그러하듯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속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여기서 말하는 믿음의 도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2) 사도후시대 (속사도시대 AD 100~313년, 교회 핍박기) - 콘스탄틴 대제의 기독교 공인까지
특징 - 박해와 순례가 지속되었고 가톨릭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교부들이 등장했고 사상이 발달되었다.
정경이 집성 되었고 10대 박해가 일어났다.
사상적인 공격과 이단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3) 니케아회의시대 (AD 313~590년, 신학 조성기) - 초대 교황 그리고리우스 1세 즉위까지
특징 -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공인되었다 (395년) 신학 논쟁이 열기를 더해 갔고 교황제도로 국왕권의 약화가 초래되었다.
교회의 속화로 수도원 운동이 일어났다.
밀라노 칙령(313년) 이 반포 되었고 사도 신경이 인준(381년)되었다.
삼위일체의 존쟁과 펠라기우스의 논쟁이 일어났다
초대교회사
1. 초대교회사 범위와 시대구분
2. 초대교회사 문제
제1부 초대교회 배경
제1장 초대교회의 역사적 배경
1. Greco-Roaman 배경
(1) 로마제국: 지리적 및 정치적 환경
(2) 헬라적 배경
1) 초기 헬라철학(Pre-Socratic Philosophy)
2) 소크라테스(Socratic Philosophy: B.C.469-399 )
3)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Post -Socratic Philosophy)
4) 중기 플라톤주의(Middle Platonism)
(3) 스토아주의
1) 스토이즘의 역사 개관
2) 스토아 철학의 가르침
3) 스토아주의와 기독교
(4) 필로(Philo)
2. 유대주의 배경
(1) 다윗에서 알렉산더까지
(2) 마카비(the Maccabees)
(3) 회당과 산헤드린
(4)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5) 분산된 유대인(the Dispersion)
3. 제국의 종교
4. 요약
제2부 2세기와 초대교회 사상의 정초
제1장 초대 기독교 박해
1. 제 1 차 박해기간(A. D. 64-96)
(1) 네로황제 이전
(2) 네로 황제 박해
(3) 도미티안 황제 박해
2. 2차 박해기간(A. D. 98-249)
(1) 트라얀 황제 치하의 박해
(2) 히드리안 통치하의 박해
(3)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치하의 박해
3. 제 3차 박해 기간(A.D. 249-313)
(1) 데시우스 칙령과 전국적인 박해
(2) 디오클레티안 황제 박해
(3) 갈레리우스 황제
4. 콘스탄틴 황제와 기독교 공인
5. 요약 : 교회 생활의 변화
제2장 속사도
1. 로마의 클레멘트
2. 안디옥 감독 이그나티우스
3. 서머나 감독 폴리갑
4. 기타 속사도 문헌들
5. 요약
제3장 기독교 변증가
1. 아테네의 콰드라투스
2. 아리스티데스
3. 신앙의 변호자 저스틴 마터(100-165)
4. 타티안
5. 기타 헬라 변증가들
6. 요약
제4장 이단의 발흥과 발전
1. 이단의 역사적 배경
2. 영지주의
(1) 영지주의의 성격과 특징
(2) 영지주의 자료
(3) 영지주의의 기원
(4) 영지주의의 종류
1) 이집트계
2) 시리안계
3) 폰틱계
4) 유대주의계
(5) 영지주의 평가
3. 영지주의의 대표적 실례
(1) 발렌티누스
(2) 마르시온 주의
1) 신약과 구약의 대립
2) 마르시온의 기독론과 구원론
3) 마르시온의 영향
4. 몬타니즘
(1) 배경
(2) 가르침
(3) 몬타니즘과 교회
(4) 영향 및 쇠퇴
5. 요약
제5장 교회의 응전
1. 신경의 발달
2. 정경의 형성
3. 감독제도의 발달
제3부 3세기와 기독교 사상의 확립
제1장 이레니우스와 소아시아 신학
1. 이레니우스이 생애
2. 이레니우스의 작품
3. 이레니우스의 총괄 갱신(복구)
4. 이레니우와 전통
5. 요약 및 평가
제2장 라틴 신학
1. 터툴리안과 서방신학
(1) 터툴리안과 몬타니즘
(2) 터툴리안의 작품
(3) 터툴리안, 이성, 신앙, 철학
(4) 터툴리안의 세계관
(5) 터툴리안과 성서이해
2. 키프리안과 북아프리카 교회
(1) 키프리안과 데시우스 박해
(2) 키프리안과 교회의 일치
(3) 키프리안 대(對) 노바투스
(4) 북아프리카 교회와 로마교회의 대립
3. 요 약
제3장 알렉산드리아 신학
1.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1) 클레멘트의 작품
(2) 클레멘트, 철학, 이성
(3) 클레멘트의 성경해석과 신이해
(4) 클레멘트와 역사이해
(5) 클레멘스 사상 요약
2. 오리겐
(1) 오리겐의 성장 배경
(2) 명성을 더해가는 오리겐
(3) 팔레스틴에서의 작품 활동
(4) 제일원리와 콘트라 셀수스
(5) 오리겐의 신관
3. 오리겐 이후 알렉산드리아 신학
제4부 4-5세기와 정통의 확립
제1장 삼위일체 논쟁
1. 삼위일체 논쟁의 역사적 배경
2. 단일신론
3. 아다나시우스 대 아리우스 논쟁
(1) 아리안 주의
1) 급진적인 아리안 주의(Anominism)
2) 반(semi)아리안주의 - 성자의 본질은 성부의 것과 유사
4. 니케아 회의 신조
5. 니케아회의 이후의 아리우스 논쟁
6. 콘스탄티노플 회의
제2장 기독론 논쟁
1. 아폴리나리우스 주의(Apollinarianism)
2. 네스토리우스주의(Nestorianism)
(1) 논쟁의 핵심
(2) 에베소 회의와 평화안
3. 유티키스주의(Eutychianism)와 단성론(Monophysite)논쟁
4. 칼케돈 이후 기독론 논쟁
5. 기독론 논쟁 요약
제 5 부 초대교회 위대한 인물들
제1장 위대한 지도자들
1. 탁월한 행정가 앰브로스
2. 성경번역의 선구자 제롬
3. 황금의 입 요한 크리소스톰
제2장 어거스틴의 생애와 사상
1. 어거스틴의 성장 배경
2. 어거스틴의 사상적 배경
(1) 마니교
(2) 신플라톤주의
(3) 어거스틴의 회심
3. 어거스틴 사상
(1) 어거스틴의 인식론
(2) 어거스틴의 교회관
(3) 어거스틴의 인간이해
4. 어거스틴의 역사이해
5. 요약 및 평가
제 6 부 중세로의 준비
제 1 장 수도원 제도의 발달
1. 최초의 수도승들
2. 파코미우스 수도원
3. 대 바실과 동방수도원
4. 서방 수도원 발흥
5. 요 약
제2장 교황제도의 발달
1. 로마교회의 부상
2. 세르디카 서방교회
3. 교황제도의 확립
제 3 장 초대교회 세계선교 초석들
1. 아일랜드 선교사 패트릭
2. 스코틀랜드 선교사 콜럼바
제4장 결 론
서 론
1. 초대교회사 범위와 시대구분
외형적인 기간을 중심으로 할 때 초대 교회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던 주전 4년부터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Romulus augustus)황제가 폐위되어 로마제국이 멸망하던 476년까지로 잡는다. 내면적인 교회의 역사를 중심으로 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할 때부터 그레고리 1세가 즉위하기 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제 1세기를 사도시대라고 할 수 있다면, 제 2세기 전반은 속 사도시대, 제 2세기 중엽은 변증가들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제 3세기는 기독교 사상의 확립기라고할 수 있다. 3세기에 들어서면서 정통신학이 교회에서 서서히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제 4-5세기는 기독교 역사의 분깃점이다. 신학적으로는 기독교 정통사상의 형성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외형적으로는 교회가 세속화로 달려가는 전환점이기도 한다. 일련의 종교회의가 열려 교회에 분열의 요인이 되어왔던 신학적인 논쟁들을 종결지으려는 시도가 있었다. 325년의 니케아 종교회의를 시작으로 콘스탄티노플 회의(381), 에베소 회의(431), 그리고 칼케돈 회의(451)가 열려 정통신학의 초석을 놓았다.
초대교회사는 사도-속사도-변증가-소아시아 신학-라틴신학-알렉산드리아 신학-삼위일체 논쟁-기독론 논쟁-어거스틴으로 이어지는 사상적인 맥을
이해하면서 역사적인 흐름과 초대교회 역사를 이어온 사상가들을 함께 연구할 필요가 있다. 때문에 박해와 이단들의 연구, 수도원
운동의 발흥, 감독제도의 발달, 그리고 초대교회 선교운동은 초대교회사에서 필수적으로 다루어져야 할 주제들이다.
2. 초대교회사 문제
초대교회사를 총체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해 역사구성의 thesis로 삼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두 말할 것 없이 초대교회 최대의 주제였던 로고스다.
다시 말해 로고스는 초대교회를 이해하는 중심 열쇠이다. 1세기부터 진행된 기독교 박해, 2세기의 속사도, 변증가, 이단,
3세기의 소아시아, 알렉산드리아, 서방신학을 형성한 교부들, 4세기부터 진행된 삼위일체 논쟁, 기독론 논쟁, 이 문제들을 니케아회의(325)부터 콘스탄티노플 회의(680)에 이르기까지 로고스는 역사의 중심에 있었다.
당시 로마의 최대 종교 스토아주의는 점점 더 인격적인 종교로 탈바꿈했고 그 핵심에는 로고스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스토아 철학과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달랐고, 로고스에 대한 사상도 서로 차이가 있었지만, 스토아 철학과 기독교는 모두 로고스 사상을 공유하고 있었다.
스토아
철학에서 로고스 사상이 차지하는 그 이상으로 당대 헬라철학 특별히 플로톤주의에는 로고스 사상이 더욱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런 로고스 사상은 기독교가 잉태되었던 그 시대에 영향력을 떨치고 있던 중기 플라톤사상과 그 후에 나타난 신플라톤주의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때문에 플라톤주의는 기독교로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했다.
로고스의 성육신의 준비는 비단 그레코-로만 배경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다. 유대주의도 예외는 아니다. 수많은 구약의 선지자들의 예언들은 로고스의 오심을 예표하고 있는 것으로 믿었고, 그 때문에 당시 메시아 고대사상은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이런 성숙한 시대 속에서 로고스가 오셨던 것이다. 이처럼 초대기독교 핵심주제는 로고스이다.
이
로고스 사상은 예수님 당시는 물론 기독교가 태동되었던 제 1세기의 최대 주제였다. 제자들은 물론 성경의 모든 저자들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안에 거하신 그분이 인간의 구주이시며 인류의 구원자라고 믿었다. 또한 로고스는 변증가들에게도 최대의 주제였다.
로마의 클레켄의 서신에서, 이그나티우스의 일곱 서신에서, 폴리갑의 작품에서, 그리고 그 외 수많은 속 사도들의 작품과 사상에서도
로고스가 핵심에 있었다. 속 사도들의 로고스 사상이 점점 더 발전되어 하나의 틀을 갖기 시작한 것은 변증가들에 와서이다.
변증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주제는 로고스였다. 이 로고스 사상을 통해 그들은 기독교와 헬라철학을 연계시켰고 모세와 플라톤을 꿰뚫었으며 예루살렘과 아테네를 연결하였던 것이다.
로고스
사상은 2세기 이단들을 이해하는 열쇠이다. 2세기 역사무대에 등장한 일련의 이단들, 즉 영지주의, 발렌티누스, 마르시온이 갖고
있던 중심주제 역시 로고스였다. 기독교를 헬리철학의 틀 속에 뜯어 고친 나머지 기독교를 아예 헬라화시켜버린 영지주의자들의 한결같은
특징, 곧 영육의 이원론 사상은 플라톤 사상에 뿌리내려져 있다. 이들은 일부 플라톤 사상을 기독교화 시켰던 변증가들이나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달리 아예 전 헬라철학을 기독교화 하려고 하였다.
이런
일련의 도전을 맞은 교회는 전통적인 사도들의 신앙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고 그것들을 통해 잘못된 신앙을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고난과 부활과 재림을 담은 로마신경이 태동되었고, 이것이 오늘날의 사도신경 형태로 발전되었다. 정경형성이 촉진되고 감독제도가 발달하고 신경이 발달되면서 2세기 말엽에 들어서 초대교회는 하나의 틀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감독의 발달로 교구가 구체적으로 형성되었고 지역의 특성을 반영하는 신학자들이 등장하였다. 후대인들은 이들을 교부라 불렀다. 최초의 교부는 이레니우스였다. 이레니우스의 사상을 한마디로 집약한다면, 구속사와 성서적인 전통 및 언약사상에 근거한 로고스 총괄갱신 사상이다. 인류의
구속사는 창조와 더불어 시작되었고 종말까지 계속된다는 것이며, 로고스의 총괄갱신이 그 역사의 정점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레니우스의 역사관은 어거스틴의 역사관, 종교개혁 특히 칼빈의 역사해석의 원형이 되었으며, 종교개혁 이후의 콕세이우스를 비롯 많은
계약 신약자들의 계약신학도 이레니우스에게 상당한 빚을 지고 있다. 이레니우스의 로고스 사상은 요한복음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헬라철학의 로고스 사상과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또한 로고스는 알렉산드리아 학파를 이해하는 핵심열쇠이다.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원형은 저스틴에게서 찾을 수 있지만 필로에게까지 올라간다. 필로의 사상이 저스틴에게 와서 좀 더 성경적인 개념으로 발전되었고 이 저스틴의 로고스 사상이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원형이 되었다. 저스틴이 갖고 있던 진리라는 측면에서의 기독교와 헬라철학의 연속성이 클레멘트와 오리겐의 사상속에서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터툴리안이 헬라철학이야 말로 이단의 원천이라고 개탄한 것에 반해 알렉산드리아 신학자들은 헬라철학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확신했다.
터툴리안 역시 당대의 흐름을 주도했던 로고스 사상을 피할 수 없었고, 라티의 법률 용어를 동원하여 로고스론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터툴리안은 로고스의 성육신을 약화시키는 수많은 이단들 특별히 양태론자들에 맞서 참으로 인간이시고 참으로 하나님이신 로고스를 변화시키는데 온 정열을 다했다.
이것은 또한 4세기부터 6세기까지 초대교회사의 핵심 주제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과연 하나님이신가? 라는 주제와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참으로 인간이시고 참으로 하나님이시라면 인성과 신성이 예수의 한 인격 안에 어떻게 연합되었는가?
아다나시우스가
수없는 추방을 받으면서도 일편단심 아리우스에 대항하여 니케아 신앙을 변호하려고 했던 것도, 교회가 이 둘의 세력 다툼 속에서
양편가운데 어느 한편에 위치시키기 위해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정황도, 역시 로고스 때문이었다. 어쩌면 논쟁의 와중에서
고투해야 했던 4, 5, 6세기 교회회들에게 로고스는 생사문제였는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는
오류 많은 인간들의 이기적인 결정들을 거룩한 방향으로 진행시켜 주셨던 것이다.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출발했던 니케아
회의가 기독교 정통의 영원한 토대를 닦는 기회가, 시릴과 그 일행의 야심적이고 이기적인 결정이 에베소 정통으로 정착되는 계기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교회의 머리이신 살아계신 로고스께서 그 살아계심을 교회의 역사 속에서 선포하신 것이다. 역사에 초월하여 계시면서도 역사에 개입하신 그 로고스는 이 시간도 여전히 인류 역사와 나 자신의 역사에도 개입하고 계신다. 그리고 그 역사하심은 지금 이 시간에도 계속되는 것이다.
제1부 초대교회 배경
제1장 초대교회의 역사적 배경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여 하심이라.”(갈 4:4).
바울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설명하면서 “때가 차매”라는 말로 당시의 역사적 성숙을 표현하고 있다. 초대 교회사가 에버릿 퍼거슨(Everett Ferguson)도 갈라디아서의
“때가 차매”라는 말을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 속에서 이해해야 된다고 보았으나 외형적인 환경에서만 그 요인을 찾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는 두 가지를 지적한다. 첫째, 당시의 로마를 통한 정치적인 평화를 말한다. 둘째, 언어적인 준비를 지적하고 있었다.
당시 정치적으로는 로마가 세계를 통일하고 있었지만 헬라어가 세계를 통일하고 있었다. 헬라어는 의사소통, 사상, 사고방식,
교육수준, 이해 방식의 통일을 촉진시켰으며 또한 헬라 철학, 문학 그리고 종교의 확산을 가져다주었다.
따라서
“때가 차매”라는 바울의 말은 현대의 폴 틸리히가 지적하듯 내적인 시간과 외적인 시간 모두를 포함하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히스토리에(Historie)와 게쉬히테(Geschichte), 사건(event)과 행위(action), 그리고 외면적인
차원(the outer dimension)과 내면적인 차원(the inner dimension)이 바로 그것이다. 바울이 말한 바
‘때가 찼다’는 말은 우리가 흔히 물리적, 양적 시간 개념에서 말하는 크로노스(chronos)라는 외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정시(the right time)를 의미하는 질적인 시간 카이로스(kairos)라는 내적인 면에서도 그리스도의 오심은 완벽하게
준비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두 가지 측면이 완벽하게 준비되었을 때 오셨다는 사실이다.
1. Greco-Roaman 배경
초대
기독교의 헬라-로마배경에 대한 연구는 주전 330년부터 주후 330년간을 대상으로 한다. 이 기간은 헬라시대(the
Hellenistic Age)로 알려졌으며 이 헬라 시대는 다시 2기로 나눌 수 있다. 제 1기는 알렉산더부터 주전 약
200년까지로 헬라문화가 형성되고 팽창하여 지중해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쳤던 시대이다. 제 2기인 주전 200년 후부터는 이집트,
팔레스틴, 시리아 그리고 아시아에 토착문화가 발흥하면서 헬라적인 요소들이 움츠려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 황제부터 콘스탄틴 대제까지는 로마가 지중해를 완전 지배하면서 영향을 미쳤던 시대로 이 시대를 로마시대(the
Roman Age)라고 부른다. 이시기의 제1기는 주후 2세기까지를 말하며 2세기부터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할 때까지를
제2기라고 할 수 있다. 로마의 영향을 2세기에 최고 정점에 달하다 2세기 이후 바바리안 족이 침입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1) 로마제국: 지리적 및 정치적 환경
로마제국은
긴 역사를 자랑하였으니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났을 때 이미 로마는 약 75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처음 서부 이탈리아 출발한
로마는 읍, 도시 그리고 작은 국가로 점차 성장했다. 주전 256년 로마가 설립된 지 50년 후에, 이탈리아 반도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 후 바다를 건너 서쪽으로 뻗어나가 10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시실리(Sicily), 코르시카(corsica),
사르디니아(Sardinia), 카르타고(Carthage)와 스페인의 대부분을 정복했다.
주전
27년까지 모든 로마 영토는 공화국이라 알려진 통치형태에 의해 다스려졌으며 매우 강력했던 로마시 의회는 어떤 한 개인이 통치권을
장악하지 않았다. 주전 27년에, 즉 약 100년 동안 지속된 비참한 내란(civil war) 후에 로마의 전권은 쥴리어스
시이저(Julius Caesar)의 조카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Gaius Octavianus)의 수중에 들어갔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제국의 역대 황제들 중에서 첫 번째이며 가장 위대한 아우구스투스 시저(Caesar Augustus)로 알려졌다. 이
아우그스투스 시저가 바로 누가복음 2장 1절에 기록된 시이저 이다. 그와 함께 공화국도 끝이 나고 제국이 시작되었다.
아우구스투스 시저에 의해 정착된 로마의 평화가 200년 이상 지속되었다. 이러한 평화(Pax Romana)는 모든 방면에서
문화의 발전을 촉진시켜 문학, 건축 그리고 조각 등에 위대한 업적을 낳았고, 법률연구가 대단히 발달했으며 경제가 번영했다. 모든
곳에서 로마군대는 로마제국의 그리고 법과 평화의 상징이었다.
(2) 헬라적 배경
로마라는 하나의 거대한 세계 속에는 헬라 사상이 깊숙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지중해를 지배했지만 문화적으로는 헬라가 지중해를 지배하고 있었다.
기독교와
헬레니즘과의 관계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 기독교가 발흥했던 당대의 역사적, 문화적 상황을 연구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상당히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헬라사상은 전기와 후기로 구분되는데, 전기는 다시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 탈레스부터 파르메니데스
(2) 소크라테스(399 B. C) (3) 플라톤(d. 347B. C) 과 아리스토텔레스, 제 1기의 관심은 세계의 본질이었고 제
2기의 관심은 인간, 그리고 제 3기의 관심은 우주의 본질과 인간의 본질을 한 문제로 다루는 것이었다. 그리고 후기는
스토아주의(Stoics), 에피큐리안주의(Epicurians), 신피타고리안주의(Neo-Pythagoreans),
회의주의(Skeptics)그리고 중기 플라톤주의(Middle-Platonists)를 포함한다. 기독교 사상에 영향을 미친것은 바로
후기 이다.
1) 초기 헬라철학(Pre-Socratic Philosophy)
탈레스부터 파르메니데스까지의 헬라 철학자들은 세계의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로 고민했다. 세계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일련의 고대 헬라철학을 회의주의(Skepticism)과 구별하기도 한다.
탈레스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물에서 발생했다고 믿었다. 탈레스의 제자 아낙시맨더(Anaximander)는 물이 아니라 무한 대기(the
boundless atmosphere)가 만물의 근원이라고 가르쳤다. 주전 500년경 소아시아의 에베소에 살았던
헤라클리투스(Heraclitus)에 의하면 우주의 근본 요소는 불이며 불에서 만물이 발생했다. 불에서 공기가, 공기에서 물이,
물에서 땅이 나왔다. 그후 땅은 물로, 물은 공기로, 공기는 불로, 그래서 끝없는 변화의 회전(the endless cycle
of change)이 계속된다. 이들의 변화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결합이 이 세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다양한 변화를 야기시킨다.
그러나 이들 중에 어느 것도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헤라클리이투스와
동시대에 살았던 파르메니데스(Parmenides)는 헤라클리투스와는 정 반대로 이 세상에는 전혀 변화가 없다고 말했다. 그에게
존재하는 것 한 가지는 존재 그 자체(Being itself)이며, 우리가 경험하고 관찰하는 모든 변화는 단지 그렇게 나타나는
것뿐이다.
2) 소크라테스(Socratic Philosophy: B.C.469-399 )
주전 450년 전 아테네(Athens)에 살았던 소크라테스로 말미암아 헬라 사고에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주로 자연과 세상의 본질에 관심이 있었으나 소크라테스에 와서는 세상의 본질보다도 인간의 자질(quality)에 더 많은 과심을 기울였다.
헬라-로마시대,
특별히 소크라테스 시대에 와서 교육받은 많은 사람들에게 철학은 하나의 종교였다. 오늘날과 같이 이론적 연구나 형이상학적 연구가
아니라 삶의 방식(a way of life)으로 그 목적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는데 있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에게
철학은 단순한 이론체계가 아니라 하나의 삶의 태도이며 삶의 방식이었다.
3)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Post -Socratic Philosophy)
고대
그리스에 모든 시대를 초월하여 가장 탁월한 두 철학자가 나타났으니 그들이 바로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Plato,
B.C.429-347)과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B.C.384-322)이다. 소크라테스의 인간사고
혁명이 영향력 있는 일련의 다듬어진 철학체계로 열매를 맺은 것은 이들에 와서이다.
이들은 세계를 전체로 이해하려는 이전 철학자들의 관심과 소크라테스의 인간 이해를 하나로 연합시켰다.
플라톤은 두 개의 세계, 즉 이데아의 세계와 현상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데아의 세계(the world of the
ideas)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말한다. 플라톤에게 이데아는 본질적인 실제(ousia)로서 사물의 참된 본질이다. 이데아의
개념은 초월적인 개념으로 형이상적적인 의미를 지니며 인간 경험의 영역을 넘어서 존재하는 것이다. 피라밋의 정상에는 성서적 신개념과
근접한 선의 이데아가 있다.
인간의
이성에 상당한 의를 부여하였던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인간의 이성적 능력에 의해 다른 생명체와 구별되므로 인간의 지고의 선은
이성적인 삶이다. 사람은 순수 이성과 실천 이성 모두를 지니고 있다. 순수 이성이란 생각하고 이해하며 명상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며, 실천 이성이란 행동에 적용된 이성을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행복이란 지적 미덕과 도덕적 미덕을 포함한다.
관념적이었던
플라톤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세상과 개벽적인 것에 관심을 가졌다. 플라톤이 모형에서 출발하여 개체로 진행해 나간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체에서 출발하여 보편으로 진행하여 나갔다. 개체와 보편의 불가분의 관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과 육체의 관계에
대한 이해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지대한 공헌 가군데 하나는 플라톤의 이원론적 인간 존재를 종합하여 하나로 연합시켰다는 사실이다. 중세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집대성하여 신학적으로 체계화시켰는데 개체와 보편, 자연과 은총, 이성과 계시의 통합이 바로 그것이다. 플라톤의 인식론에 따르면 지식은 감각적 경험(sense experience)에 의존하지 않으나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사람은 감각에 의해 개체를 이해한다. 지성에 의해 인간은 보편을 배우며, 이 지식은 감각을 통해 얻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안간 사고에 미친 영향은 너무도 컸으며 그 영향은 고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철학 학파를 통해 후대에 계승되어 왔으나 그의 제자 알렉산더 대왕이 철학자들의 관심을 실천적 도덕으로 돌리면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적 세계관은 뒷전으로 물러서게 되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중세에 복고되어 기독교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은 플라톤 사상과 함께 수천년 동안 기독교 사상을 지배하여 왔다.
4) 중기 플라톤주의(Middle Platonism)
주전
1세기에 플라톤의 연구가 복고되어 육체와 영혼의 구분과 같은 이원론적 사상이 다시 등장하면서 교부신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며 이것은 중세 신학의 기초가 되었다. 중기 플라톤 사상가들은 플루다크, 아풀레이우스, 막시무스(Maximus of
Tyre) 그리고 알비누스(Albinus)이며, 이 중기 플라톤주의는 기독교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신 플라톤주의에로의 교량적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중기 플라톤주의는 2세기 기독교 변증가들 즉 저스틴 마터, 타티안, 아테나고라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의 저술활동에 지적 배경을 제공하였다. 퍼거슨은 히비스서에서 조차 플라톤주의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다름과 같은 몇 가지 이유 때문에 기독교 철학과 기독교 인식론을 정립하는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어 왔다.
첫째는
영적인 영역과 물질적인 영역의 구분이다. 하나님은 영적인 영역에 속하고 세상은 물질적인 영역에 속하며 인간은 양 영역을
연결한다. 둘째는 섭리론으로 인간과 절대자와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도움을 준다. 셋째는 영혼 불사개념으로 기독교와 가르침과
유사하다. 마지막으로 신개념의 정립을 들 수 있다. 이것은 특별히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두드러지는데 신은 물질이 없는 하나의 형상으로
그 자체와 완전한 존재이다. 비물질적인 실체(non-material reality)에 대한 플라톤주의의 강조는 성서적 신개념을
설명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플라톤의 영향을 반영하는 후대 일부 기독교 철학자들은 플라톤이 말한바 이데아의 개념과 성경의 로고스
개념을 연결하여 플라톤주의가 제시하는 우주적 종교사상(the idea of a cosmic religion)을 통해 인간의
종교성을 설명하려고 한다.
이런 기독교와 철학과의 유사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호간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플라톤이 말하는 궁극적인 존재는 비인격적인 존재인 것에 비하여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인격적 존재라는 점이다. 두 개의 중요한 이단인 영지주의와 아리안주의(Arianism)는 3세기 전후에 복음의 자리를 심각하게 위협했는데, 이 두 개의 이단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사상을 따라 인간과 세계를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되었다.
(3) 스토아주의
스토아
철학은 플라톤주의와 함께 그리스도와 초대교회 시대에 로마에 가장 성행하던 철학체계로, 폴 틸리이에 의하면 플라톤 사상보다도
기독교에 더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의 근본적인 사상과 스토아 철학의 가르침과는 비슷한 점이 많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로고스 교리이다. 이것은 초대 기독교의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의 역사를 연구하면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스토아철학에서 로고스는 모든 곳에 존재하는 신적 능력(the divine power)을 말한다. 스토아주의에서는 이 말이 세 가지 면은 내포한다. 첫째 로고스는 자연법(the law of nature)으로 모든 자연이 운행하는 원리이다. 따라서 로고스는 신적 존재이며, 창조적인 신적 능력이다. 둘째 로고스는 도덕법(the moral law)을 의미하며, 이것은 칸트가 “실천이성”이라 부르는 것으로 인간에게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셋째 로고스는 실체를 인식하는 인간의 능력을 말하며 폴 틸리히는 이것을 “순수이성”(theoretical reason)이라 불렀다.
1) 스토이즘의 역사 개관
스토이즘의 역사는 대체로 초기 스토아(the Early Stoa), 중기 스토아(the Middle Stoa) 그리고 후기 스토아(the Later Stoa)등 셋으로 대별할 수 있다.
초기는 대체로 주전 300-200년 까지의 기간으로 대표적인 인물은 스토아 학파의 창시자인 제노(Zeno of Citium ; 335-263 B. C), 크린테스, 크리시푸스,등이다.
중기는 150 B. C.부터 기독교가 시작되던 시기까지를 말하며 대표적인 인물로는 파나에티우스(Panaetius of Rhodes; 185-109 B. C)와 포시도니우스를 들 수 있다.
그리고
후기는 잘 알려진 네로 시대에 활동하던 관용론의 저자 루시우스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A. D.
1-65), 로마의 에펙터투스(Epictetus; A. D 50-135)그리고 명상록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 D. 121-180)를 들 수 있다.
2) 스토아 철학의 가르침
초기
스토아는 첫째로 유물론이다. 스토아주의에 따르면 비물질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하나님, 세계 그리고 심지어 언어도
물질적이다. 둘째로 스토아주의는 범신론이다. 스토아 철학은 만물에서 신적 실체를 발견하는 범신론에 기초한다. 셋째로 그들은 또한
모든 실체가 하나의 궁극적인 존재 형태로 구성되었다고 보는 일원론자(monist)이다. 일원론적 사고는 만물의 근원은 불이라고
보았던 헤라클리투스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스토아주의는 하나의 종교이며 철학이다. 스토아주의가 특성상 철학이기 때문에 단지 교육받은 지식층에만 수용되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스토아주의가 요구하는 것은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제국에서 우수한 지식층이 주로 스토아 철학을 따랐다.
3) 스토아주의와 기독교
용어상 많은 유사성이 있지만 스토아 철학과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관에서 출발하고 있다. 스토아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신관이다. 스토아주의는 완전히 인격적인 하나님을 갖지 않았으며 그들이 말하는 신은 단지 내재적인 신일뿐이다.
성경의 하나님은 세상의 창조자이시기 때문에 스토아철학의 범신론이 말하는 신과 결코 동일시 될 수 없다. 더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로고스의 성육신의 개념은 찾아보기 힘들며 단지 그들이 말하는 성육신이란 우리 각자가 자기 안에 로고스의 일부를 가졌다는 개념일
뿐이다.
또한
스토아 철학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격적인 죄의식이나 죄사함이 없으며 개인적인 불멸 개념도 없다. 사람이 죽으면 그의 선적 부분은
전체로 돌아간다. 스토아철학에서 말하는 이웃을 향한 도덕적 의무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기 희생과 능동적 사랑”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존중”을 도덕적 원천의 본질로 보는데서 출발하기에 스토아주의는 성경이 말하는 자비로운 하나님의 대속의 사랑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4) 필로(Philo)
디아스포라
유대인 알렉산드리의 필로는 스토아철학과 중기 플라톤주의를 이상적으로 융합시킨 초기 기독교 배경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주전 20년에 태어나 주후 50년에 세상을 떠났다. “언어학적 지식이 풍부하고 사상이 광범위하여 성경에 대해 탁월하고 고결한
견해를 지니고 있었던 필로는 거룩한 책들에 대한 주석을 저술하였다."
헬라인들이
구약에서 그들의 중심사상을 얻었다고 확신한 필로는 구약과 헬라철학을 연합된 가르침으로 결합시키려고 노력했다. 둘을 조화시키는
과정에서 그가 직면한 문제점이 바로 성경의 창조교리와 헬라의 창조관의 부조화였다. 헬라철학자들과 같이 하나님께서 모든 악의 근원이
되는 물질과 접할 수 없다고 믿었던 필로는 하나님과 세계와의 사이에 중재자(mediator)를 생각해 냈다. 이 중재자가 로고스였다.
요약하면 첫째, 필로는 고대 헬라사상과 유대주의 사상이 동일한 원천에서 나왔다고 보고 이 둘을 종합하였다. 둘째, 필로는 헬라사상과 유대주의 사상의 연속성을 확신하였기 때문에 구약의 상당부분은 우화적으로 해석하였다. 셋째, 필로는 헬라의 신관, 특별히 플라톤의 선의 이데아와 구약의 하나님을 동일선상에서 이해하였다. 마지막으로 필로의 기독교 이해는 초대교회사가들에게 오랫동안 관심의 대상이다.
2. 유대주의 배경
(1) 다윗에서 알렉산더까지
이스라엘 왕국은 주전 약 1,000년 전에 이새의 아들 다윗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는 주전 960년까지 이스라엘을 통치했다. 그의 아들 솔로몬은 주전 930년경 죽은 후에 다윗은 메시아 희망의 상징이 될 만큼
이스라엘에 위대한 공헌을 했다. 솔로몬 왕국 후 다윗의 왕국은 두 개로 분열되었다.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북부는 주전 721년
앗수르에 의해 포로가 된 후 결코 회복되지 못했다. 다윗의 왕가에 충실히 남아있던 남쪽왕국 유다는 586년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다. 539년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Cyrus)가 바벨론을 정복한 후 조국 이스라엘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포로들을 돌려보냈다. 첫
귀환 후 또 다른 그룹이 팔레스틴으로 돌아왔다. 그들의 지도자 중의 하나가 에스라였다.
주전
334년과 323년 사이에 젊은 마케도니아왕 알렉산더가 그리스에서 잊도에 이르는 모든 동부땅 그리고 남쪽으로는 이집트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정복했다. 주전 323년 알렉산더가 죽자 그의 부하 장군이 광활한 영토를 분할해 가졌다. 프톨레미(Ptolemy)는
이집트의 통치자가 되었다. 팔레스틴은 주전 198년까지 프톨레미의 통치권에 있었으나, 198년부터 다른 왕가인
셀류시드(Seleucids) 가문이 팔레스틴을 통치하게 되었다. 팔레스틴에서의 통치 변화는 유대 백성들에게 엄청난 결과를
초해하였다.
(2) 마카비(the Maccabees)
프톨레미
왕들은 유대인들이 자유로이 그들의 신을 섬길 수 있도록 허락했다. 하지만 새 통치자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종교를 포기하고 헬라
방식을 따르도록 강요했다. 이 정책을 대표한 지도자는 시리아의 셀류시드왕 (the Seleucid King of Syria) 안디옥 4세였다. 이러한 셀류시드 통치에 반대하는 폭동이 나이 많은 제사장 미타티아스(Mattathias)와 그의 네 아들들의 주도하에 일어났다. 이들 중에서 유다(Judas)가 지도자였다. 그들 모두는 마키비 즉 맹렬히 싸운 사람들로 알려졌다. 주전 141년에 유대인은 셀류시드를 몰아내고 완전한 승리를 쟁취해 주전 586년 이후 처음으로 이스라엘은 다시 독립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단지 80년 동안만 그들의 자유를 존속시킬 수 있었다.
주전 63년 팔레스틴에 일어난 내란은 로마 정부가 팔레스틴에 확고한 권력을 장악하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했다. 다음 60년 동안 이스라엘은 반(半) 독립국가로 어느 정도 자유가 주어졌으며 아스라엘의 통치자는 로마정부에 의해 임명되었다. 주전 37년 헤롯이 로마 정부에 의해 분봉왕이 되었다. 그
후 그의 세 아들에 의해 다스려 졌다. 주후 6년에 아켈라우스가 실수하자 그는 해직되고 추방되었다. 그가 다스리던 지역이 로마의
영이 되었고 로마의 총독이 지배했다. 주후 26년부터 36년까지의 총독은 5대 총독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라
이름하는 로마인이었다.
(3) 회당과 산헤드린
주전
586년 유대인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기 전 그들의 예배의 중심지는 예루살렘 성전이었다. 그러나 포로 후에는 회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들은 성전을 빼앗긴 후 기도, 성경낭독, 가르침의 목적으로 회당을 강조했다. 유대공동체의 지도자는 관할장을 회당의
통치자라 불렀다.
팔레스틴에서 유대인의 통치기구는 산헤드린이었다. 산헤드린은 대제사장 지도아래 주로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으로 구성되었다. 비록 로마 통치아래 있었지만 순전히 종교적인 문제에 있어서 팔레스틴 밖의 유대인들도 산헤드린의 권위를 인정했다.
(4)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마카비 시대 이후부터 유대지도자가 되었다. 사두개인들은 제사장 가운데서 나왔고 율법사였다. 그들은 구습을 선호했고,
변화를 싫어했다. 그럼에도 헬라 사상을 유대 생활에 도입하려고 할 때는 지지하기도 했다. 종교적으로 이들은 부활과 영생, 천사와
영혼의 불멸을 부정하고 영혼과 육체는 함께 사멸된다고 믿었다. 따라서 이들은 내세가 없다.
바리새인들은
거의 모든 면에서 사두개인들과 정 반대였다. 부활 내세의 삶과 상벌사상도 믿었다. 그들이 주로 집착한 것은 주로 율법의 외적
준수였으며 따라서 율법준수 이면의 영적 태도는 둔감했다. 이런 그들의 사상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대립되었다.
사두개인은 잘못된 교리를 가졌고, 바리새인들은 올바른 교리를 가졌지만 그들의 삶은 그들의 가르침과 모순되었다.
사두개인들은 그들의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주후 70년 예루살렘 몰락 후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바리새인들은 다소 오래 존속했지만 그들은 또한 유대정부의 몰락과 함께 역사에서 사라졌다.
(5) 분산된 유대인(the Dispersion)
전쟁포로의 분산 그리고 특별히 상업적으로 유대인은 팔레스틴에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분산된 유대인과 회당은 불과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그들 모두는 선교사들의 복음전파를 위한 자연적 요새를 팔레스틴 밖에 건설한 셈이다.
분산된 유대인들의 가장 중요한 중심지는 알렉산드리아와 이집트였다.
거기서 유대인들은 도시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주전 250년에 거기서 구약이 헬라어로 번역되어 헬라어 사용 세계에 구약성경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70연역(the Septuagint)으로 알려졌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유대인의 최대의 철학자 필로가
배출되었다.
3. 제국의 종교
로마제국의 종교는 크게 자연종고, 신비종교, 국가종교 등 세 종류로 나뉜다.
자연종교는 초자연적 능력을 산, 호수, 강, 나무, 태양, 그리고 달에서 또는 어떤 동물과 사람에게서 찾는다.
신비종교의
가장 큰 매력은 신과 직접적으로 교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데 있다고 본다. 이 신비종교는 기독교가 확산될 때 제국에서
강했던 종교이다. 잠시 동안 밀교의 한 형태인 미트라이즘(Mithraism)이 기독교의 강력한 경쟁자였다. 이것은 특별히
로마군대에 인기가 있었다.
국가종교는 강력한 정치적인 특징을 지녔다. 주된 요소는 황제를 위해 희생제물을 드리는 것이다. 국가종교는 신과의 교제, 연합 특별히 구원이 없는 종교이다.
요약
당시의 시대적 배경은 갈라디아서 4장 4절에
말한바 “때가 찼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이처럼 그리스도의 오심은 완벽하게 준비되었던
것이다. (정치적, 교통, 언어, 종교적, 사회 및 도덕적 요소, 정치적으로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통치기간동안 평화가 형성되어
새로운 종교가 발흥하기에 적합한 환경이 조성되었다.)
제2부 2세기와 초대교회 사상의 정초
제 1 장 초대 기독교 박해
“나는 86년 동안 그분을 섬겨왔는데 그동안 그분은 한 번도 나를 부당하게 대우하신 적이 없다. 그런데 내가 어지 이제까지 섬겨온 나의 왕 그리스도를 모독 할 수 있겠는가?”
폴리갑
고대
아태나고라스(Athenagoras)에 따르면 기독교인이 박해를 받은 원인은 “무신론과 식인풍습, 근친상간”이었다. 당시
로마제국은 공인된 종교 외에는 종교로 인정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상을 멀리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숭배하는 기독교인들을
무신론자로 낙인찍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받은 가장 큰 이유는 황제숭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주후 64년 네로 황제부터 시작된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는 313년 콘스탄틴과 리키니우스 두 황제에 의하여 기독교가 공인되기까지 계속되었다. 초대교회 박해는 크게 황제의 고의에 의하여 시작된 1차 박해기간(약 A. D. 64-96), 지엽적, 국부적으로 진행된 2차 박해기간(약 A. D. 98-249)그리고 전국적으로 박해가 진행된 3차 박해기간(A. D. 250-313)으로 대별할 수 있다.
1. 제 1 차 박해기간(A. D. 64-96)
(1) 네로황제 이전
네로황제 이전에는 기독교 박해가 진행되지 않았다. 알렉산더 대왕과 마찬가지고 역사의 전환점을 기록한 아우구스투스황제 이후 박해에 대한 진행은 간헐적이고 부분적이었다.
빌라도가 총독으로 있던 시기에 유대인들은 로마에서 추방되었고 심지어 4000명 유대 청년들이 도적과 싸우기 위해 사르디아로 보내졌다.
(2) 네로 황제 박해
글라우리오
황제가의 문란한 결혼생활로 인한 정치적 암투의 결과로 아그리파나의 아들 네로가 황제가 되었다. 네로는 16살의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황위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그러나 네로가 62년 자신의 고문 부루스를, 65년에 세네카를 각각
권좌에서 제거하면서 국가는 쇠퇴의 가도를 달리기 시작하였다. 특별히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과의 관계가 접점 악화되어가기 시작하였다.
유세비우스는 “극단적인 광기”라는 함축적인 표현을 통해 네로 황제의 성격을 단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네로
황제가 재임하던 주후 64년에 발생하나 로마의 대화재 사건은 기독교 역사에 잊을 수 없는 분기점이 되었다. 이 화재의 사건의
원인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린 후 기독교를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공식적인 대박해였으며 역사에 1차 박해기간의 시작으로
알려졌다. 고대 교회사가 유세비우스에 따르면 주후 64년 7월 “자신의 통치권을 확고히 다진 네로 황제는 사악한 계획을 세우고
유일하고 높으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신앙을 대적하여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
네로는 로마의 대화재 사건이 자신이 저지른 것이라는 소문을 무마시키기 위해 기독교인들에 화재의 원인을 돌려버렸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네로 황제하에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받은 것이 기독교인들이 로마 대화재의 장본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네로 황제의
개인적인 횡포로 말미암아 발생한 것임을 말해준다. 타키투스가 기독교를 가리켜 “매우 위험한 미신” 혹은 “사악하고 부끄러운
것”이라고 표현한 사실로 비추어 볼 때 당시 사람들은 기독교를 옳케 이해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일반인들이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네로는 자연스럽게 로마의 대화재 사건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려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네로 시대에
바울과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했다.
하나님께서
네로의 박해를 그냥 방관만 하실 수 없었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기독교를 극심하게 박해했던 박해자들이 거의 다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는 사실도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 계속되는 네로 황제의 폭정으로 서부의 군단들과 로마의 친위대가 반란을 일으키자 로마에서
도주하던 네로는 명을 다하지 못하고 30세의 나이에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끊고 말았다. 결국 그의 죽음으로 줄리어스 시저에게서
시작된 줄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68년에 막을 내리고 1년 동안 과도기의 내란이 제국을 휩쓸었다.
(3) 도미티안 황제 박해
초대교회
기록에 의하면 도미티안에 의한 대 박해가 그의 통치 15년에 있었다. 도미티안은 네로의 전철을 밟았다. 터툴리안은 도미티안이
네로와 “동일한 일”을 행하려 했으며 “잔인성에 있어서 실질적인 네로의 후계자였다”라고 말한다.
도미티안은
많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취급하였다. 그는 로마에서 상당히 많은 귀족들과 저명인사들을 부당하게 살해했고 아무 이유도 없이 많은
귀족들의 제산을 압수하고 그들을 추방하였다. 마침내 그는 하나님을 미워하고 적대하는 일에 있어 네로의 후계자가 되었다. 그의 부친
베스파시안은 전혀 신자들에게 불리한 시도를 하지 않았으나 도미티안은 박해를 시도한 두 번째 황제가 되었다.
전승에 의하면 도미티안 박해 때에 사도 요한이 말씀을 증거 하였다는 이유로 밧모 섬에 유배되었다. 도미티안이 사망하자 사도 요한은 유배지에서 귀환한 뒤 아시아의 교회들을 돌보았다.
도미티안
황제 역시 15년 동안 잔악하게 통치한 뒤 네로 황제처럼 비참하게 살해 되었다. 적어도 네로 황제와 도미티안 황제 치하에서 황제
치하에서 황제의 임의에 의한 박해가 진행된 뒤, 250년 데시우스 황제가 칙령을 발표할 때까지는 전국 전역에 그와 같은 박해가
다시 발생하지 않았다. 이기간 동안 박해는 지엽적, 국부적으로 진행되었다.
2. 2차 박해기간(A. D. 98-249)
(1) 트라얀 황제 치하의 박해
트라얀(Trajan;
A.D. 98-117) 황제부터 안토니우스 피우스(Antoninus Pius; A.D. 138-161)황제의 통치 말엽까지
기독교는 위협 아래 있었지만 폴리니 2세(Pliny the Younger, A.D. 61-113)와 트라얀 황제 사이에 오갔던
서신에서 나타나듯이 기독교인들에 대한 의도적 색출은 금지되었다. 소위 2차 박해기간이라 알려진 이 기간동안은 박해가 지역에 따라
국부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드러나더라도 그에게는 신앙을 부인할 기회가 주어졌다.
플리니
2세는 기독교인들을 세 부류로 분류하여 처벌의 기준을 정했다. 첫째는 그리스도인이라 고백하고 그 고백을 계속하는 자들, 둘째는,
그리스도인이라는 혐의를 받았지만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자들, 셋째는, 과거에는 기독교인들이었으나 지금은 배교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다.
트라얀
황제는 플리니 2세에게 보낸 회답에서 적어도 분명한 세 가지 사실을 말하고 있다. 첫째는 의도적인 색출은 금한다는 것과, 둘째는
익명의 고소는 정부가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 셋째는 과거에는 기독교인이었지만 현재 아니라면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칙령으로 인해 혹독한 박해는 어느 정도 완화되었으며,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들이기 위한 수색은 금지 되었다.”
(2) 히드리안 통치하의 박해
임으로적으로 박해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박해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대표적인 속사도 중의 한 사람인 안디옥 감독 이그나티우스가 트라얀 황제 치하에 순교했다.
국경선과
본토의 안정을 추구했던 하드리안(Hadrian; A. D. 117-138) 황제는 헬라의 유산을 보존하는데 남다른 관심과 정열을
기울였다. 그는 125년 아시아의 총독 미누시우스 푼다누스(Caius Minnucius Fundanus)에게 보낸 서신에서
정당한 재판을 거치지 않고서는 기도교인을 처형하지 말라고 명했다.
(3)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치하의 박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D. 160-180) 황제는 매우 특이한 인물이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처음에는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인 경향을” 나타내 보였으나 점차 “다른 생각을 품게 되었고 아첨자들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박해는 참혹했다. 기독교인들이 채찍에 맞아 온몸이 찢어져 유혈이 낭자했으며 속살이 드러나고 창자까지 밖으로 터져
나왔다. 그 후 그들은 바다 조개 껍질이나 땅 위에 놓인 창 끝에 눕혀졌으며, 온갖 종류의 고문을 받은 뒤에 짐승의 밥으로 던져
졌다.
박해는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강화되었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치하에 폴리갑이 서머나에서 순교하였다.
사랑하는
복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당신에 관한 지식을 주신 아버지여! 당신 앞에 살고 있는 모든 천사들과 천군들과
피조물, 그리고 모든 의인들의 하나님이시여! 당신께서 오늘 이 시간 나로 하여금 순교자의 반열, 그리고 그리스도의 잔에 참여하게
하시어 내 몸과 영혼이 성령의 썩지 않는 축복 속에서 영생의 부활을 얻기에 함당하다고 여기어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나는 신실하고 참되신 하나님이신 당신께서 예비하시고 계시하시고 이루신 풍성하고 가납될 만한 제물로서 당신이 보시는 앞에서
받아들여지기를 바랍니다. 나는 이 모든 일을 인하여 당신의 사랑하는 독생자 영원한 대제사장을 통하여 당신을 찬양하고 감사드리며
영광을 돌리나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이제부터 영원히 영광이 있을 지어다. 아멘.
폴리갑에
이어 165년 대표적인 변증가 저스틴도 순교의 대열에 합류했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통치기간은 177년 심한 박해가 고울
지방에서 일어났으며, 이후 250년 까지 박해가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특히 202년과 203년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황제 아래 심한 박해가 주로 이집트와 카르타고(Carthage)에서 발생했다. 세베루스
황제가 교회를 박해했을 때 도처에 잇는 모든 교회 내에서 믿음의 용장들이 자신의 신앙을 끝가지 지켰다. 특히 알렉산드리아에서 많은
순교자들이 나타났다.
세베루스 이후 기독교를 심하게 박해한 황제는 알렉산더 황제를 승계한 막시미누스 황제이다. 그는 “교회의 지도자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바로 이 시기에 오리겐은 순교에 관한 책을 저술하여 박해를 받으면서도 자신의 신앙을 굽히지 않은 멜브로즈와 가이사랴 교회의 장로 프로톡테투스(Protoctetus)에게 헌정했던 것이다.
다행이도 막시미누스의 통치는 3년을 넘기지 못했다. 간헐적으로 진행된 박해 이후의 평화는 복음전파의 호기가 되었다. 3세기 첫 50년 동안 수천명의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었다.
박해가 진행되는 기단은 신앙의 순수성을 훈련하는 기간으로, 박해가 중단된 그 기간들은 복음전파를 위한 절호의기회로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것이다.
1차
박해와 달리 2차 박해는 고발되는 경우에만 행해졌으며, 지엽적이고 간헐적이며 산발적으로 진행되었음을 말해준다. 박해의 위협은
항상 존재하였지만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항상 박해를 받은 것은 아니다. 그러다가 250년에 데시우스 황제가 들어서서 “제국의 모든
거주민들은 신들에게 제물을 바쳐야 한다”는 내용이 담긴 칙령을 발표하면서 박해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소위 3차 박해가
시작된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그 칙령에 근거하여 황제를 숭배해야 했고 숭배한 사람들에게는 증명서가 주어졌다. 법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투옥을 당하거나 고문을 당했고 심지어 목숨을 잃었다.
3. 제 3차 박해 기간(A.D. 249-313)
전국적인
박해가 발생한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주요한 원인 5가지를 든다면 (1) 기독교의 급속한 성장 (2) 제국의 경제 및 도덕의
쇠퇴 (3) 로마제국 창립 1000주년의 임박 (4) 교회는 국가 내에 국가(a state within the state)이며,
따라서 로마제국의 위협적인 존재라는 로마 지도자들의 견해 (5) 로마의 쇠퇴가 기독교의 성장을 싫어했기 때문에 내린 벌이라는
견해를 들 수 있다.
(1) 데시우스 칙령과 전국적인 박해
250년부터 251년 사이 데시우스(Decius)황제 아래 기독교가 그 때까지 직면했던 박해 가운데 가장 혹독한 박해가 일어났다.
데시우스
명령 앞에 교인들은 순응, 타협, 거부, 도피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어떤 이들은 탐관오리들에게 돈을 주고 증명서를 사기도
했다. 다행히 조직적이고 극심했던 데시우스의 박해는 오래가지 못했다. 데시우스는 제국을 통치한지 2년이 못되어 아들들과 함께
살해되었고 갈루스가 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박해는 계속되었다. 박해자들의 최후가 그렇듯이 갈루스도 비참하게 최후를
맞았다. 그 후 발레리안이 아들 갈리에누스와 함께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처음에 기독교인들에 우호적이었던 발레리안
황제(253-260)가 태도를 바꾸어 그의 통치 말엽인 257년부터 기독교인들을 박해하지 시작하였다. 발레리안의 박해 때에
필레스틴의 가이사랴에서는 신실한 그리스도인 프리스쿠스, 말쿠스 그리고 알렉산더 세 사람이 사나운 짐승들의 먹이가 되어 순교의
영광을 차지했다. 발레리우스 황제 통치 때 키프리안(Cyprian)도
카르타고에서 순교했다. 발레리안이 페르시안과의 전쟁에서 사로잡혀 노예가 되면서 그렇게 극심했던 박해는 일단 중단되고
기독교인들에게 관용이 베풀어 졌다. 그 후 갈리에누스(Gallienus)가 황위를 계승하였고 그가 내린 칙령에 의하여 43년간
합법적인 종교(a religio licita)로 인정받았다.
(2) 디오클레티안 황제 박해
303년
디오클리테안(Diocletian)이 황제가 되면서 박해가 또 다시 시작되었다. 이 역시 처음에는 우호적이어서 기독교가 매우
급속히 성장하였으나 추측이지만 그의 사위 갈레리우스가 황제를 선동하여 그의 태도가 바뀌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원인은
시벨레(Cyele)를 섬기는 이교도이자 기독교를 미워한 그의 모친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결과 303년 2월 23일
아무런 경고 없이 갑자기 시작되어 디어클리티안의 수도 니코메디아(Nicomedia)에 들어가 성경을 불태워버리고 건물을 완전히
파괴하였다.
디오클리티안의
박해는 제3차 박해 기간 동안 가장 길고 무시무시한 박해였다. 303년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를 선포하면서 디오클레티안은 자신의
아내와 딸들까지도 기독교인들이라는 이유로 무참하게 살해하고 핍박를 더 강화시켰다. 디오클레티안이 305년 황제직을 사임한 후
박해가 잠시 중단되었다가 곧 재개되어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할 때 까지인 313년 까지 계속되었다.
(3) 갈레리우스 황제
그
즈음에 디오클레티안 사위 갈레리우스가 통치하는 지역에서도 박해가 발생하였다. 박해를 시작한지 8년이 되던 해부터 박해를 완화해
10년 되는 해에는 완전히 박해를 종식했다. 이유는 그의 중병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을 돌이켜 반성하면서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죄를 자백했다. 그리고 그는 박해를 중지하라는 칙령을 발효했다. 갈레리우스 황제는 책령을 발표하고 5일 후 고통에서
해당되어 일생을 마쳤다.
4. 콘스탄틴 황제와 기독교 공인
콘스탄틴(Constantine)은 A. D. 288년에 태어났다. 그리고 그는 막센티우스와 전쟁에서 승리하여 약관 24세에 명실상부한 최고의 통치자가 되었다.
정치적 변화는 서방에서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동방에서도 유사한 변화가 있었다.
313년
콘스탄틴과 리키니우스는 밀란의 칙령(the Eidct of Milan)이라 알려진 것을 공포했다. 이 밀란의 칙령은 공식적으로
교회의 종교의 자유를 선포한 최초의 선언이었다. 물론 “관용의 칙령”으로 특정되는 밀란의 칙령이 종교의 자유를 기독교에만 국한
시킨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기독교인들에게 합법적인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공식 선언이었다.
콘스탄틴은 기독교의 공인에서 멈추지 않고 기독교인들에게 재산권에 대한 구체적 자유를 보장하였다. 그리고 교회를 위한 경비까지도 주었다. 그리고 콘스탄틴의 기독교에 대한 관심은 재정을 넘어 교리적 문제 까지도 확대되었다.
313년 밀란의 칙령이후 한 차례의 고비를 만나기는 했지만 기독교이 박해는 공식적으로 종식된 셈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콘스탄틴은 점점 더 뚜렷이 기독교에 유리한 방향으로 정책을 결정하고 추진하기 시작했다. 비록 그는 세례를 받지 않았지만
일련의 기독교에 대한 정책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분명 기독교인 이었다. 콘스탄틴 대제 이후 기독교는 로마에서 가장 우대를
받으며 군림하는 종교가 되었다.
5. 요약 : 교회 생활의 변화
터툴리안이 말한 것처럼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가 되어 박해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꾸준하게 성장하였다. 핍박이라는 기독교 장애물이 오히려 기독교를 성장시키는 수단이 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그러나 313년 콘스탄틴 황제에 의하여 기독교가 공인 된 후 기독교는 새로운 시대를 맞았다. 그것은 세 가지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기독교는 공인된 종교로 바뀌었고, 그 결과 외형적으로 상당히 확산되었다. 자연이 정교의 밀착이 이루어졌고 교회가 영적인 생명력을 상실하면서 교회는 세속화 현상이 예배는 형식 위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콘스탄틴의 등장은 교회사를 완전히 바꾸어 놓은 만큼 교회의 역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그의
등장으로 일련의 회의, 특별히 니케아 회의를 통하여 정통신학이 집대성되었다. 그러나 일련의 종교회의가 동서방교회의 분리를
촉진시킨 또 하나의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누구보다도 교회의 통일을 원하였던 콘스탄틴 황제가, 오히려 수도를 이전함으로 말미암아
본의 아니게 동서방교회의 분리는 촉진시켰다는 것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제2장 속사도
“나는
순교가 얼마나 큰 유익을 주는지 알고 있노라, 이제야 나는 제자로서의 첫 걸음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스도를 얻을 수 만 있다면
눈에 보이는 것이나 보인지 않는 것이나 그 어느 것도 나의 야망을 자극하지 못한다. 내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얻게만 된다면
화형이나 십자가나 사나운 짐승의 공격이나 또는 내 뼈를 찢고 사지를 부러뜨리며 온 몸에 멍이 들도록 맞는 등 그 어떤 마귀의
괴롭힘도 참고 견디겠노라”
이그나티우스
속사도들은
열두 제지 이후로는 초기 기독교 저자들로서 속사도 시대 라고 불리는 1세기 말부터 2세기 까지 활동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사도와 2세기 후반 저작활동을 했던 변증가들 사이에 교량역할을 함으로 사도들의 사상을 후대에 계승하는 일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1. 로마의 클레멘트
클레멘트가
고린도 교회에 쓴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서신>(The Letterof the Church of Rome to the
Church of Corinth)은 제1세기 말엽 로마의 3대 감독이었던 클레멘트가 기록한 것이다.
클레멘트의
서신의 특징은 첫째 장로와 감독을 구별하지 않고 상호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 특징은 헬라적 요소와 스토아적
요소이다. 하지만 클레멘트를 무분별하게 헬라사상과 기독교를 융합시키려 한 인물로 매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비록 클레멘트의
사상에 헬라주의적 요소가 나타나지만 그의 신관은 삼위일체적이라 할 수 있다. 현대 복음주의신학자들은 클레멘트가 성경의 권위를
존중하는 고등 성경관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클레멘트에 있어서 칭의론은
또 하나의 중요한 사상이다. 32장 4절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길임을
강조하고 있다. 클레멘트에게 믿음은 순종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심지어 때때로 순종을 믿음보다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클레멘트는 교회를 유기체적인 관계로 이해했다. 강자와 약한 자, 부자와 가난한 자가 교회 안에 존재할 수밖에 없지만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공유해야할 사랑의 윤리적 차원이 있다.
2. 안디옥 감독 이그나티우스
클레멘트와
동 시대인인 이그나티우스는 시리아 안디옥의 제3대 감독이라고 전해진다. 안디옥은 베드로와 바울 그리고 여러 성도들이 이곳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던 곳이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를 메시야로 믿는 신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이라 불리운
것은 이 안디옥에서였다. 또 “기독교”라는 말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 역시 안디옥 출신 이그나티우스였다.
이그나티우스는
트라얀 황제(A.D. 98-117)의 재위 기간에 체포당하였다. 이 때는 기독교가 모든 사회 계급으로 급속하게 확산되던
시기였다. 그는 로마로 호송되었고 이송되어 가는 도중 일곱 개의 서신을 기록하였다. 그는 로마에 도착하여 그리스도를 위해 맹수의
이빨에 “밀”처럼 갈아지기 원하였던 이그나티우스의 열렬한 소원은 마침내 로마에서 실현된다.
이그나티우스는 신약성경과 부흥도상에 있던 “보편교회”(Catholic Church)를 연결하는 중요한 고리였다. 그는 가현설자들의 그리스도관에 맞서 싸웠고 교회를 하나 되게 하는데 있어서 감독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며 그 하나 됨의 구체적인 실현을 위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감독에게 절대 순종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그나티우스의 편지들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순교에 대한 예찬이다. 이그나티우스는 순교를 통해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이르기를 열렬히 갈망하였다.
이그나티우스가 제창한 감독의 중추적 역할은 베드로를 잇는다는 “사도적 계승”의 토대위에 세운 것이 아니라 감독이 하나님의 위치에서 모든 것을 관장한다고 생각하는 신비적 신학에 입각한 이론이었다. 그는 하늘나라의 지상 모형이라는 사실에서 교회직분의 기원을 찾으려고 하였다.
교회의 하나됨에 대한 그의 관심은 성만찬 해석에도 나탄다. 이그나티우스는 교회의 하나됨이 진실 된 성만찬에 있다고 보았다.
이그나티우스의
작품에 두드러진 또 하나의 관심은 분열을 약시키는 이단적인 운동을 폭로하는데 있다. 그는 이단에 대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아그나티우스는 이단의 가르침을 전하는 거짓선생에 대해 심지어 야수(wild beasts)또는 미친개(mad dog),
혹은 허울 좋은 이리들이라고 혹평하였다.
이그나티우스가 볼 때 이단적인 요소는 첫째 기독교의 유대주의화이고 둘째는 가현설이다. 그가 이 두 이단을 강하게 반대한 것은 이들이 성육신을 비롯한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무로 돌리려고 하기 때문이었다.
3. 서머나 감독 폴리갑
젊었을 때 사도 요한의 가르침을 직접 받았던 직설적이고 정열적인 사람, 서머나 감독 폴리갑은 아우렐리우스 황제 때에 순교하였다.
폴리갑은
80년에 태어나 165년경에 순교할 때까지 86년 동안 충성스럽게 주님을 섬겨온 인물이다. 그는 사도들과 속사도시대를 연결하는
교량역할을 하였다. 폴리갑은 사도요한의 가르침을 후대에 전달했을 뿐 만 아니라 이그나티우스의 서신들을 모아 보존하였다.
이그나티우스의 순교는 폴리갑에게 상당한 도전과 용기를 주었다.
폴리갑은 아우렐루우스 때인 165년 경에 아시아에 큰 박해가 발생했을 때 순교했다.
폴리갑은
교회사적으로 몇 가지 면에서 중요하다. 첫째, 폴리갑은 로마에서 마르시온과 영지주의자들인 발렌티누스 추종자들을 정통주의로
회심시키는 도구로 쓰임을 받았다. 둘째는 클레멘트나 이그나티우스 보다 폴리갑은 공관복음과 사도행전을 잘 알고 있었다. 셋째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성서적 칭의론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보다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사실은 무엇보다도
폴리갑이 실천적인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4. 기타 속사도 문헌들
앞에서 언급한 속사도 외에 무게 있는 문헌들로는 바나바 서신과 디다케를 들 수 있다.
바나바 서신은 교리적 부분(1-17)과 실천적인 부분(18-21) 두 부분으로 구성되며 교리적 부분은 우화적 해석이 특징이고 실천적인 부분은 두길문서가 핵심부분이다.
속사도 문헌 가운데 빼 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중요한 문헌은 헐마스의 목자이다. 헐마스의 목자는 당시 그리스도인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5개의 환상과 12개의 명령과 10개의 비유를 수집했다.
1873년
필로데오스 바이레니오스(Philotheos Byrennios)가 발견한 디다케(The Didache)는 3가지 중요한 주제를
다룬다. 첫째는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차이이다. 둘째는 세례 예식에 과한 당대의 동향을 제시하여 주고 있다. 마지막 셋째 부분은
훈련지침이다.
5. 요약
속사도들은 몇 가지 중요한 의의가 있다. 그것은 소아시아 신학이 역사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폴리갑, 요한, 이그나티우스, 파피아스 등이 소아시아 출신이라는 사실이다.
속사도의
작품의 또 하나의 중요한 의의는 인물과 기록장소, 그리고 문장스타일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작품에서 몇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첫째, 순교자에 대한 지나친 열정이다. 둘째, 신앙의 표준으로 성경이 사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셋째,
정통의 형성이다. 속사도에 오면서 정통주의는 조금씩 형성되기 시작했다. 정통성의 표준은 사도들로부터 내려온 전통과 성경이다.
그러나 몇 가지 면에서 속 사도들의 작품들은 비평을 요한다. 아무래도 가장 두드러진 비판은 속사도들의 작품 속에 성격에서 떠난 전통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또 하나의 비판적 요소는 세례 후에 짓는 용서문제이다.
제 3 장 기독교 변증가
“로고스를
따라 산 사람들은 비록 저들이 하나님 없는 자들이라고 불리었을 지라도 그들을 그리스도인들이다. 헬라인들 중에 소크라테스,
헤라클리투스 등이 그러하였고, 야만인들 사이에 아브라함이나 아나니아, 아지리아나 미사엘, 엘리야 및 이제 그 이름을 다 열거할
자리가 없을 정도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였다.”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
2세기 들어서 당대의 이단들과 정부 지도자들 및 지식인들에게 기독교는 이 세상의 어떤 종교보다도 윤리적이며 어떤 철학체계보다도 가장 훌륭하고 진정할 철학임을 변호하면서 기독교를 수호하려는 저술가들이 나타났다. 이들을 가리켜 변증가들이라고 한다. 이들의 활동 시기는 대체로 130년부터라고 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변증가들은 속사도들과 당대의 정통주의 조류를 대표하는 이들로서 어떤 의미에서 최초의 신학자들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유대인과 이교도들을 동시에 공격하였다.
변증가들이 유대인을 공격한 것은 이들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않기 때문이며, 이교도들은 공격한 것은 이들이 기독교의 복음을 이질화 시켰기 때문이다. 변증가들이 기독교를 변호하는 방법은 소위 “공개적인 편지”들을 통해서였다.
1. 아테네의 콰드라투스
변증가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최초의 변증가로서 약 125년경 로마의 하드리안 황제에게 공개적인 변증서를 썼던 인물이다. 그는 예수께
병고침을 받은 자들 중 지금까지 살아있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들어 기독교를 힘있게 변증하였다.
2. 아리스티데스
변증가 아리스티데스는 로마의 황제 피우스(138-161)에게 변증서를 썼던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유세비우스 증언에 의하면, 신앙에 신실하게 헌신한 아리스티데스는 하드리안에게도 신앙의 변론을 써서 후손에게 남겼다.
변증서에서
그는 참된 신의 속성을 설명하고 이교도들의 신화를 공격하고 기독교 신자의 성품을 들어 기독교를 변증하고 있다. 아리스테스가
결론적으로 지적하려고 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우월성과 건전성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 윤리적 삶, 그리고 신행의 일치에 의하여
입증된다는 사실이다.
3. 신앙의 변호자 저스틴 마터(100-165)
2, 3세기의 기독교 대변자들로서 변증서를 내어 놓은 변증가들 가운데 최초의 한 사람으로 아마 가장 중요한 인물일 것이다.
저스틴은
기독교를 변증하는 일에 심지어 황제 앞에서 자신의 학식을 기독교를 변증하는데 사용한 학식 있는 최초의 이방인이었다. 무수한
저스틴의 저술 가운데 현존하는 저술로는 <제1 변증서>, <트리포(Trypho)와의 대화> 등이 있다.
장문의
<제1변증서(Tirst Apology>)에서 저스틴은 최초로 이교도의 여러 가지 비난과 몰이해에 대해 기독교를
변증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기독교가 어떤 새로운 창작품이 아니라 헬라 철학들보다 시대적으로 앞서가는 구약성경의 구체적 실현이라고
주장한다.
160년경에 기록된 <트리포와의 대화>는 바르쿠스 폼페이우스라는 어떤 인물에게 헌사된 책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 글이 기독교의 우월성을 보여줄 목적으로 유대교에 동정적인 이방인들을 위해 기록되었다고 생각한다.
저스틴은
자신의 변증을 순교로 확증했다. 유세비우스는 다음과 같이 저스티의 순교를 언급하고 있다. “이 무렵 저스틴은 앞서 언급된
통치자들에게 우리 신앙을 두 번째로 변론한 뒤 견유학파 철학자인 크레센스의 교활한 선동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순교의 면류관을
얻었다.”
저스틴은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변증가였다. 그러나 저스틴에 대한 현대인의 평가가 항상 통일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저스틴을 보는
시각은 두 가지가 있다. 프렌드는 부정적으로 보는데, 저스틴은 연속성이 없는 인물로 플라톤주의와 기독교와의 본질적인 조화가
가능하다고 보았고 그리스도의 양성과 삼위일체와의 관계를 분명히 인식하지 못한 가운데 로고스 신학을 발전시킨 인물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는 단적으로 저스틴이 어떤 신약의 저자들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바나드에 따르면
저스틴은 “기독교 안의 보편주의적 요소를 파악하고 전 문명사를 그리스도 안에서 종합, 완성한, 사도 바울 이후의 최초의
사상가였다.” 성경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는 어느 변증가보다 우수하다.
저스틴은
기독교가 무식한 종교라는 당대의 기독교 비판에 맞서 기독교야 말로 진정으로 지성적이라는 종교라 변호하고 있다. 저스틴의
헬라사상과 기독교 사상과의 연속성 추구는 영지주의자들이 갖고 있는 기독교 사상의 헬라화와 본질적으로 달랐다. 이것은 저스틴이
영지주의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데서도 어느 정도 입증된다.
4. 타티안
저스틴의 제자 타티안은 앗시리아 출신으로 저스틴이 순교한 후 165년경에 로마에 자신의 교육관을 설립하였다.
타티안의
<헬라인들에게 고함>은 타티안의 사상을 가장 잘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이다. 냉소적인 타티안은 희랍인들의 종교적인
자긍에 일침을 가하면서 희랍인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가 기원을 거슬러 올라간다면 결국 야만족들에게서 유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때문에 희랍의 종교가 야만인들의 종교보다 우월할 것이 결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타티안이 저스티의 뒤를 이어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그의 영향력은 그리 크지 않았다. 더구나 초대교회 교부들의 눈에 비친 타티안은
상당히 부정적이다. 특히 로마를 떠나 이단 엔크라티테스를 세워서 그의 사상은 본질적으로 기독교에서 이탈하고 말았다.
5. 기타 헬라 변증가들
아테나고라스는
삼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변호한 훌륭한 변증가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저스틴과 마찬가지로 태초에 하나님의 마음 안에
로고스가 존재했으며 이 로고스가 하나님에게서 나와 그들 통해서 만물이 창조되었음을 강조했다. 이 로고스가 성부와 일체인데 그것은
아들이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아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아테나고라스의 삼위일체 이해는 속사도들과 비교할 때 상당히
체계화 되고 발전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심지어 성령을 하나님에게서 흘러나오는 신적 존재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테나고라스는
삼위일체 발전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아테나고라스 보다도 더 구체저인 삼위칠체 개념을 제시한 변증가는 안디옥 감독 데오필루스이다. 그는 자신의 친구 아우툴리쿠스에게 헌정한 3권의 책에서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처럼 사용했으며 상당히 발전된 신관을 제시하고 있다.
변증가들의
작품 가운데 가장 까다로운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소위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서신은 저자와 연대로 미상이다. 문장의 스타일이
다른 변증가들과 맥을 같이 하지만 그 내용은 다른 변증가들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유대적 예언과 헬라 철학을 모두
경시하는 점이다. 이 서한의 대부분은 사회내의 기독교인이 감당한 특이한 역할에 기초하여 기독교를 변명하는 내용으로 구성된다.
디오그네투스에 나타난 사상은 신적인 출발이 역사에 결정적이라는 “역사신학”이라는 관점에서 기술되어 있다. 디오그네투스의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유대인이나 희랍인들과 본질적으로 구분되며 구분되는 분명한 증거는 그들의 삶이라고 단정한다.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서신의 저자는 유대인을 기독교인과 본질적인 다른 미신숭배자들이라고 보면서 그들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반면
사르디스의 멜리토는 유대주의와 기독교의 연속성을 대단히 강조하며 이 둘을 기독론적인 관점에서 연결시키고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나타난 상당히 많은 사건들은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사건들이라고 본다.
6. 요약
속사도들의
글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신학의 통일성이 헬라 변증가들의 작품에서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변증가들의 신학에서 분명히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은 헬라의 사상과 기독교의 사상 사이에는 모종의 연속성이 있다고 본 저스틴적 사고가 대부분의 변증가들의 사고와 맥을
같이 하고 있으며 이런 헬라사상과 기독교의 연계성은 로고스를 통하여 연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로고스 이론은 플라톤의 창조사상과 맥을 같이하지는 않지만 상당히 유사한 점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 로고스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냐
하는 문제는 아리우스와 아다나시우스 논쟁의 논제가 되었다. 그러나 변증가들은 성육신과 부활신앙으로 기독교의 본질을 조직적으로
제시하여 이를 후대 교부들이 기독교의 핵심진리로 체계화시킬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는 점에서 최초의 기독교 조직신학자로 평가
받는다.
제4장 이단의 발흥과 발전
나 이후에는 예언이 없을 것이요 다만 종말이 있을 뿐이다.
막시밀리아Maximila
1. 이단의 역사적 배경
우리는
이단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수많은 이단들이 역사에 등장했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현재까지 하나의 집단을 형성하여 계속
번성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단을 판단하는 기준도 시대마다 달리하여 왔다. 사도요한은 당시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염두에
두면서 누구든지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마다 적그리스도라고 정죄하였다. 이레니우스는 이단을 표준 교리에서 벗어나는
자, 어거스틴은 신앙 자체를 해치는 하나님에 과한 잘못된 신앙, 그리고 저스틴은 “사탄의 교리”라고 정의 하였다. 철학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터툴리안은 “이단들이 철학에 의하여 고취되고 있다(Heresies are instigated by
philosophy)고 봄으로써 철학과 이단을 상호 연계시켰다.
이단의
역사는 사도시대부터 시작된다. 2세기 정통신학의 대변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평가 받는 헤게시푸스에 따르면 당시 유대백성들
가운데 여러 이단들이 존재했다. 이들은 시므온에게서 시작된 시몬파, 클레오비우스에게서 시작된 클레오비우스파, 도시테우스가 창시한
도시테우스파, 다시 여기서 파생되어 고르테우스가 세운 고르테우스파, 마세보테우스가 세운 마스보테우스파, 그리고 역시 시므온에서
생겨난 메난드리안파, 바시리디안파, 마르시온파, 카로포크라티아파, 발렌티아파, 사투르실리아파 등이 있다.
이처럼 교회가 태동되기 시작한 초기부터 벌써 이단은 역사에 등장하여 정통신앙을 침해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이단세력은 궁극적으로 사탄의 조종을 받는 집단이라고 이해하였다.
2. 영지주의
2세기 중엽은 영지주의의 시대이다. 135년 예루살렘의 2차 함락과 193년 세베르 왕조의 즉위로 구별되는 두 세대 동안에 교회는 점진적인 헬라화의 과정을 겪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나타났던 중요한 이단 가운데 하나가 영지운동이다.
영지주의가
2세기 동안 만만찮은 세력을 형성하였던 기독교가 그 영향력을 증대시켜 나가면서 영지주의에 대한 헬라 지식인들의 관심이 점증했기
때문이다. 구원에 관한 문제, 그리스도-구세주에 관한 문제, 우주의 기원과 발달에 관한 문제 등은 그들이 해명하고자 했던 중요한
주제였다. 신약성경에는 영지주의적 특징을 반영하는 성경 귀절들이 여러 곳 나타나는데 예를 들면, 골로새서 2장 22-23절,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는냐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를 좇는 것을 금하는 데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가 바로 그것이다.
(1) 영지주의의 성격과 특징
켈리(J.N.D. Kelly)가 지산의 「초대기독교교리」("Early Christian Doctrine")에서 지적한 것처럼 영지주의는 유대교, 헬라철학 및 동양철학의 혼합이다. 영지주의는 기독교, 헬라의 철학 그리고 동양의 특별히 바벨론의 우주적인 신화론 페르시아의 이원론을 결합한 혼합 종교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영지 주의 사상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헬라의 이원론적 사상과 기독교와의 혼합이다.
하나님은
누구인가, 악은 무엇인가,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악에서부터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는
영지주의자들이 갖고 있던 중요한 관심사였다. 하나님, 인간, 죄인, 그리고 구속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영지주의자들은 한
가지 사실을 그들의 신념으로 수용한다. 그것이 영지(gnosis; knowledge)인데 이 영지는 영계로부터 온 계시이다.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여러 단계의 지식과 믿음을 창조하셨으며, 성경 외에 예수의 제자들에게 주신 비밀 구전(a secret oral tradition)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비밀 구전은 전승되어 내려왔고, 이 비밀의 구전을 소유한 이들이 곧 자신들이라는 것이다. 영지주의의 또 하나 공통적인 특징은 영육의 분리에 근거한 철저한 이원론적인 사고 때문에 영지주의자들의 삶은 금욕주의 아니면 자유방임주의라는 두 가지 극단으로 흘렀다. 만일 구원이 물질로 부터의 영혼 해방이라면 윤리적 이상은 금욕주의를 통해 달성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2) 영지주의 자료
영지주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이레니우스, 히폴리투스, 오리겐, 터툴리안 그리고 에피파니우스 같은 초대교부들의
저작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왔다. 이집트 상부에서 농부에 의해 1946년에 발견된 나그 하마디 본문(Nag Hamma야
texts)은 주후 400년경에 매장된 것으로 보이며 이 사본들은 약 50개의 작품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영지주의를 새롭게
재조명해 준다.
(3) 영지주의의 기원
저스틴과 이레니우스를 비롯한 초대교회 지도자들 대부분이 마술사 시몬(Simon Magus)을
모든 이단의 원천으로 보았다. 이레니우스는 ‘모든 종류의 이단들이 그로부터 생겨났다.’고 주장했다. 시몬의 사상은 그의 제자
메난더에게 계승되었다. 1세기 말경 시리아의 안디옥에서 영지주의를 가르쳤던 메난더는 시몬의 추종자로서 시몬과 같이 사마리아
출신이다. 메난더는 자신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주장하였지만 그가 죽음으로 ‘시몬 못지않게 사악한 도구임’이 드러났다.
이들 외에도 2세기 초에 영지주의자 새투르니누스(Saturninus)가 안디옥에서 그리스도는 구속자이지만 육체를 입으신 분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사도요한 당시 영지주의자 케린투스(Cerinthus)가 소아시아에서 영지주의 사상을 가르쳤다.
(4) 영지주의의 종류
일반적으로 영지주의는 크게 이집트계, 시리아계, 폰틱계 그리고 유대주의계로 대별할 수 있다.
1) 이집트계
이집트계의
대표적인 사람은 120년에서 130년 경에 로마에서 활약을 하였던 바실리데스(Basilides)이다. 유세비우스의 표현을
빌린다면 두 가지 상이한 이단지도자들, 즉 안디옥 사람 새투르니누스와 알렉산드리아이 바실리데스는 “시몬의 후계자 메산더에게서 나온
모리가 둘이고 혀가 둘인 뱀같은 세력”이다. 세투르니누스는 시리아에, 그리고 바실리데스는 이집트에 불경한 이단학파를 세웠다.
이집트계에 속하는 영지주의자들로는 바실리데스 외에 카르포크라테스(Carpocrates)같은 “영지주의라고 불리우는 또 다른 이단의 창시자”가 있기는 했지만 이집트계를 대표하는 영지주의자는 135-160년까지 활동을 하였던 발렌티누스(Valentinus)이다.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기록에 의하면 “히기누스가 감독으로 있을 때 로마에 온 발렌티누스는 피우스 황제 시대에 장년기에 들어서
있었고 아니세투스(Anicetus)시대까지 살았다. 바실리데스와 동시대인물인 발렌티누스(104-165)는 그의 적대자들에 의해
보다 더 심하게 오해되어진 영지주의자이다. 그는 로마에서 143년에 주교로 선출되어 교황 안티세투스(Pope Anticetus;
154-68)아래서 일했다. 그의 제자들인 플톨레미, 헤라클레온, 마르무스는 1세기 말에 각각 이탈리아, 알렉산드리아와 고을에서
영지주의를 퍼뜨리고 그 가르침을 그곳에 확산시키는데 공헌을 하였다. 발렌티누스는 바실리데스처럼 하나님을 단일한 초월자로 그리고 전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존재로 무에서 기원한 존재가 아니라 일자에서 기원한 존재로 보았다.
2) 시리안계
120년경에
활동하던 안디옥 출신 새투르니누스(Saturninus)가 시리안 형태를 대표하는 영지주의 자들이다. 시리안 형태의 영지주의는
다음 세 가지 두드러진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 자유방임주의 삶을 대표하며, 둘째, 구세주와 유대인의 하나님을 예리하게 구분해
주는 성육신하지 않았으며 육체와 형태를 갖고 있지 않으며, 셋째, 유대인의 하나님이 천사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3) 폰틱계
대표적인
인물은 마르시온이다. 세르돈의 지위를 계승한 폰투스의 마르시온이 세르돈의 가르침을 확대하여 율법과 예언자들이 선포한 하나님에
대하여 신성모독까지 행하였다. 마르시온은 구약의 하나님을 심지어 전쟁을 즐기는 악마의 협잡이(a worker of evils)며,
일관성 없이 심판을 일삼는 자기 모순적 존재라고 힐난하였다. 반면에 세상을 만든 하나님 보다 우월한 아버지로부터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찬하였다. 이레니우스가 남긴 말시온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마르시온은 그리스도의 탄생이 생략된 누가복음과
바울서신만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둘째, 반유대주의, 신구약의 구분, 신구약의 불연속성을 특징으로 한다. 셋째, 이 땅에서 취한
육체는 구원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을 영적인 영혼의 구원만으로 한정시켰다.
4) 유대주의계
1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유대주의 형태의 영지주의 가운데 대표적인 분파로는 에비온파(Ebionites)와 키린투스파(Cerinthus)가
있다. 에비온주의는 구약성경의 “가난한 자”라는 뜻의 evionim에서 유래했으며 본래 예루살렘의 신자들에 대한 경칭이었다.
이들의 큰 특징은 “유대주의와 기독교 요소들을 자신의 사상속에 혼합”시킨 점이다. 그리고 마태복음만 사용했다.
이들이 갖고 있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양자설이다. 예수는 동정녀에게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요셉과 마리아와의 사이에 탄생한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간이지만 공의, 신중성 그리고 지혜 등 다른 모든 면에 있어서 보통 인간들보다 탁월하다. 그들은 예수를 참 선지자로 이해하고 예수와 모세를 동일선상에서 취급한다. 또한 세례시에 그리스도가 비둘기 형태로 예수에게 임하여 알려지지 않은 아버지를 계시하다가 예수 생애의 말년, 십자가상에서 예수에게서 떠나갔다고 하였다.
유대주의계
영지주의 이단 가운데 더 위험했던 것은 케린투스였다. 에비온파와 비교한다면 키린투스(Cerinthus)는 좀 더 원색적인 이단
지도자였다. 카이우스는 자신의 논쟁(The Disputation)에서 케린투스는 “사도가 기록한 것처럼 꾸민 계시록을 사용”하고
“거짓으로 이적을 행하는 체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가 가르친 교리 중에는 그리스도께서 세상 나라를 소유할 것이라는 교리도
있다. 그는 축제와 희생제사 그리고 희생물을 살해함으로서 식욕과 정욕을 만족시켰다.
지금까지
영지주의의 유형을 요약한다면, 현대 이단과 마찬가지로 초대교회 이단들도 역사에 현존하지 않는 새로운 교리를 도출하거나 역사적인
가르침을 일대 수정하여 자신들의 교리를 산출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새로운 교리의 창출은 기성교회의 특징은 아니다. 역사적 기독교와 정통주의 신학은 신학 자체가 완성된 것이 아니라 완성되어 가는 것임을 확신하기 때문에 기성의 교리를 발전 개혁하기는 하지만 성경의 교리를 새롭게 창조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와는 달리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이단들은 항상 새로운 교리를 고안한다. 이런 교리적 혁신 때문에 이단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라는 낙인이 찍힌 것이다.
(5) 영지주의 평가
이들이
기독교인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던 이유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무엇보다도 영지주의자들은 그들만이 그리스도와 구원에 관한 특별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하였다는 점이고 이것이 일부 불안정한 기독교인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다. 게다가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만이
악의 기원 문제를 해결하여 주는 것처럼 강조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영지주의에 매력을 느낀 근본 이유는
영지주의자들이 사용하는 교리나 가르침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교리와 유사한 점이 많았다는 점이다. 영지주의는 기독교로부터 특정의
요소를 빌어가지고 이를 자신들의 일반적인 구원론으로 변형시켰다.
영지주의와 기독교와의 본질적인 차이는 계시관, 신론과 구원론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성경 외에 특별한 계시가 있다고 믿으며 성육신도 부인한다. 기독교의 구원이 죄에서의 구원, 영육의 구원인데 반하여
이들은 영혼만의 구원을 말하며 구원의 개념도 영혼의 복귀 또는 영혼의 육체에서의 해방을 말한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 역시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3. 영지주의의 대표적 실례
(1) 발렌티누스
알렉산드리아 출신 발렌티누스는 로마에서 가르치다가 주후 160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교회의 일원이었고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생각했으며 기독교 가르침을 헬라사상 및 동양사상과 결합시켰다. 발렌티누스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영지주의는
원래 존재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출발한다. 그는 홀로 있기를 원치 않아 마음(mind)과 진리(truth)라는 두
애온(Aeons, divine beings)을 낳았다. 그들은 네 개의 애온인 세계-생명(world-life)과
인간-교회(man-church)를 낳았다. 그들로부터 생산의 과정은 계속되어 애온들은 총 30이 되었다. 인간-교회 사이에서
태어난 마지막 애온은 지혜라는 여자 애온이다. 그녀는 아버지를 알기 원했지만 알 길이 없자 그녀의 슬픔은 결국 남자 없이
“불확실함”을 의미하는 아카모스(Achamoth)라는 자녀를 낳았고 이 때문에 플레로마에서 떨어져 나갔다. 지혜는 더욱 슬퍼했고
애온 마음과 진리에게 그녀를 도와 줄 것을 청했다. 마음과 진리는 지혜를 슬픔에서 건져내기 위해 그리스도와 성령이라 이름 하는 두
개의 다른 애온들을 낳았다. 그들의 행위가 플레로마 사이에 조화를 회복시켰고 그 사실에 감사해서 30개의 애온들 모두는 또 다른
애온을 낳아(put forth)예수라 이름 했다.
발렌티누스의
체계는 어떻게 세상과 사람이 존재하게 되었는가? 왜 선이 악과 함께 공존하는가? 어디서 선과 악이 나왔는가? 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영적이며 어떻게 구원이 완성되는가를 설명해주는데 초점을 맞춘다. 발렌티누스는 기독교의 중요한 가르침과 헬라의
세계관을 연합시켰다.
역사적으로 기독교 교회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 때문에 영지주의를 거부했다.
a.
지고의 하나님(the Supreme God)에 대한 지식과 그와의 교제가 불가능하다. b. 세상의 창조가 절대자 하나님의 작품이
아니라 열등한 신(무 inferior deity)의 작품이다. c. 물질계는 악하다. d. 구주는 하나님도 사람도 아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죽지도 죽음에서 부활하지도 않았고 사람처럼 보일 뿐이지 실제로 인간이 아니다(이점은 Docetism의 가르침과
비슷). e. 단지 몇 사람, 즉 태어날 때부터 영적인 사람들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 f. 부활이 없다.
(2) 마르시온 주의
영지주의가 기독교와 헬라철학을 혼합시킨 종교적 잡록집(Potpourri)인 데 반해 마르시온은 사도바울에게서 나온 특정의 사상들에 기초하여 기독교의 급진적 재편과, 아울러 모든 유대주의 요소들의 제거를 시도했다.
마르시온이란 소아시아 북부 해안 도시 시노페에서 감도의 아들로 태어나 주후 140년경에 로마로 이주해왔다. 로마에서 그는 세르돈(Cerdon)이라는 영지주의자의 영향을 받았다.
세르돈의
영향을 받아 마르시온도 율법과 선지자들이 선포한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전자는
알려진 분이고 후자는 알려지지 않은 분이기 때문이다. 전자는 의로운 분이고 후자는 은혜를 주시는 분이다. 마르시온은 이런 가르침에
비추어 구약과 신약을 이해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마르시온이 영지주의와 연계되었다는 사실을 쉽게 발견 할 수 있다. 마르시온은
반유대적인 기독교 사상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1) 신약과 구약의 대립
마르시온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예리하게 구분했다.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들에 기록된 하나님은 세르돈이 말하는 열등한
하나님(the inferior God)이다. 반면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는 알려지지 않은 선한 아버지(the good unknown
father)를 계시하신 분이다. 때문에 마르시온은 구약보다 신약을 선호했지만 신약 모두가 그리스도에 관한 순수한 가르침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두
하나님의 구별이 말시온의 가르침의 핵심이다. 자연히 그에게 구약과 신약, 율법과 복음은 절대적으로 구분되며 상호간에는 연속성이
없다. 구약과 율법과 이스라엘은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나왔다. 반면 신약과 복음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인 하나님에게서
나왔다.
2) 마르시온의 기독론과 구원론
마르시온의
기독론은 전형적인 영지주의를 반영한다. 그리스도의 몸은 물질이 아니라 그렇게 보일 뿐이다. 결과적으로 마르시온은 육체 부활의
사상을 거부하였다. 철저한 금욕주의 사상 때문에 그는 성찬식에서 포도주를 사용하는 것을 금하였으며 영지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결혼을
악한 것이라고 인식했다.
3) 마르시온의 영향
마르시온의
사상은 기독교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한편으로는 기독교를 헬라철학 사상과 혼합시켰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 내에 영육의
분리사상 즉 이원론을 뿌리 내려 타세적인 신앙을 더욱 촉진시켰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르시온 이단을 그의 섭리 역사를 위하여
선한 도구로 사용하였다. 그 첫째가 정경의 형성이다.
둘째 사도신경의 발달이다. 또한 말시온은 창조주 하나님과 구세주와의 관계를 연구할 필요성을 남겼다. 그리고 이것은 기독론뿐만
아니라 삼위일체론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구약과 신약의 연결을 하나님의 속성에서 찾았다. 이 하나님은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는 또한 창조주-구속주 하나님(the Creator-Redeemer God)이시다.
마르시온의 영향력은 2세기경에 절정에 달했다. 이레니우스와 터툴리안이 마르시온을 영지주의자들을 공격했던 똑같은 방법으로 공격했다. 천지창조부인, 창조주와 그리스도의 아버지 구분, 가현설적 기독론, 성육신과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부인, 영혼만의 구원, 물질계와 영계의 구분 등 이원론적 사고를 혹독하게 비판했다. 또한 서방에서 마르시온의 영향은 그들이 마니교와 연계되면서 급격히 세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레니우스와 터툴리안의 글이 영지주의를 격퇴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이 집단은 그 후 세력이 줄어들었지만 7세기까지 역사 속에 존재하였다.
4. 몬타니즘
몬타니즘은
본질적인 성격상 기독교라 말할 수 있다. 그들은 교회의 신앙을 따라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 이점에서
몬타니즘은 마르시온과 차이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몬타니즘은 초대교회에서 거부당했던 종교운동이었다.
(1) 배경
몬타니즘은
몬타누스에게서 출발한 운동이며 서부 소아시아 지역인 브리기아(Phtrigia)에서 172년부터 일어났다. 몬타니즘의 발흥에
관하여 유세비우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모든 선을 대적하는 큰 적수이며, 악을 조장하는 자이며, 또 인간들을 대적하여
온갖 음모를 아끼지 않는 하나님의 교회의 원수는 다시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교회를 대적하는 새로운 이단들을 출현케 했다. 이들 중
어떤 이단들은 독사처럼 아시아와 브리기아 지방에 기어들어왔다.
원래
이교 제사장(a pagan Phrgian priest)이었던 몬타누스는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한 후 이교주의를 포기했지만 여전히 새
종교를 구 종교 관습 속에서 이해하고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교회는 그들의 자만한 것이 기성교회의 문제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악령 때문이라고 보았다.
(2) 가르침
몬타누스는
그를 통해 성령(Paraclete)시대가 왔다고 가르쳤다. 유세바우스의 증언에 의하면 몬타니스트들은 “자신들이 성령과 예언의
은사”를 소유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이들의 일관된 주관은 성령께서(Paraclete)께서 예언자 몬타누스와 그를 돕는 두 여인을
통해 새 예언을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몬타니즘의
세력이 커지면서 다른 관습들이 추가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독신과 순교에 대한 강조다. 단지 한번만 결혼해야 하며, 영적인
이유로 결혼을 포기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순교가 권장되었고 순교를 피하는 것은 죄이다. 또한 여인이 교회에서 공직을 가질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
(3) 몬타니즘과 교회
예언과 은사에 대한 강조는
이런 것들을 소유하지 않은 이들이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인가 하는 문제로 고민하게 만들었다. 세 예언자와 뚜렷하게 성령을 받은 다른
사람들이 죄를 용서할 수 있다는 가르침은 감독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몬타누스주의자들은 세상과 완전한 분리를 강조하고 가르쳤다.
공식적인 박해에도 불구하고 몬타니즘은 종말에 대한 강조 때문에 핍박받은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4) 영향 및 쇠퇴
영지주의, 마르시온주의와 같이 몬타니즘은 교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성령께서 사도시대와 같이 교회 안에서도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또한 성령의 역사에 교회가 민감해야 한다는 교훈을 남겨 주었다. 또한 몬타니즘의 등장으로 교회의 권위의 형태에 변화가 오기 시작하였다. 부차적으로는 교회에 평신도 운동을 촉진하는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몬타니즘의 극단적인 성령운동은 교회에 무질서를 가져다주었다. 몬타니즘의 출현으로 교회는 새로운 운동이 일어날 때, 그것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몬타니즘은 교리적인 기준이 없는 신앙이 교회에 얼마나 유해한 것인가를 보여준 역사적 건이다.
5. 요약
영지주의는 정통주의 형성에 간접적인 촉진제가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단들의 도전을 통하여 기독교 신앙은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게 되었고 이단 사상이 등장하면서 정통 기독교 교리가 체계화되기 시작하였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이단이 무엇인지를 판별할 수 있는 이단의 판단기준들이 기독론과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정립되기 시작한 것은 니케아 회의 이후이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 이전에는 신약성경 이외에 정통 신앙의 보편적 표준은 존재하지 않았다.” 니케아 회의 이후 니케아 신조가 이단 판단의 기준이 되었으나 니케아 회의 이전에는 성경과 신앙율, 사도들의 가르침들이 이단 판단의 기준이 되었다.
영지주의가 많은 기독교적인 용어들을 차용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성육신, 구원, 삼위일체, 성령과 같은 성경적인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다.
제 5 장 교회의 응전
“그러므로
저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므로 그리스도인의 성경을 소유할 권한이 없다. 진실로 마르시온이여, 무슨 권한으로 너는 나의 나무를
찍는가? 발렌티누스여, 너는 누구의 허락을 받아서 나의 시냇물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가? 아렐레스여, 너는 무슨 권세로 나이
경계표를 옮기는가? 이 남은 자들, 너희들은 도대체 누구냐? 너희 마음대로 갈고 뿌리고 있느냐? 이것은 나의 소유다. 나는 이것을
오랫동안 소유하고 있었다. 나는 너희보다 먼저 그것을 소유하였다. 나는 이 재산의 본래의 소유자들로부터 받은바 틀림없는 양도증을
가지고 있다. 나는 사도들의 상속자다.”
터툴리안Tertullian
1. 신경의 발달
신경(creed)은
“나는 믿습니다”를 뜻하는 란틴어 크레도(credo)에서 유래했다. 신경의 역사는 교회의 역사만큼이나 오래 되었다. 사도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을 남겨주었고 이 신앙 고백은 하나의 틀을 이루어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성경에 나타난 신앙고백 외에 클레멘트와 이그나티우스 같은 속사도들의 신앙고백에서는 당대의 신앙고백의 일반적인 형식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이 시대의 신앙고백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였다. 당대의 영향력 있는 가현설(Docetism)을 염두에 둔 듯 속사도들의 신앙고백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이고 역사적인 삶이 실제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그나티우스의 신앙고백이후 좀더 모양을 갖춘 신앙고배이 변증가의 대변자라고 알려진 저스틴 마터의 작품에 나타난다. 165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이 신앙고백은 개인적인 형태의 훌륭한 신앙고백을 담고 있다.
“우리는
태초부터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모든 만물의 창조자이며 조물주이신 한 분 그리스도인의 하나님을 예배한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예언자들에 의해 성육신하셔서 구원을 알리시고 선한 스승이라고 앞서 선포되신 하나님의 종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한다.” 그러나
저스틴의 신앙고백에는 성령에 대한 고백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보다
좀 더 발전된 고백형태가 서머나의 장로들의 것이라 알려진 신앙고백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약 200년 혹은 이후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1907년에 발견된 발리제트 파피루스(Der Balyzeth Papyrus)라는 한 파피루스에는 매우 흥미있는
신앙고백이 담겨져 있었다. “나는 전능하신 성부하나님을 믿사오며, 그의 아들 독생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며, 그리고
성령을 믿사오며, 육체의 부활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the Holy Catholic Church)를 믿사옵나이다.” 속사도들과
변증가들의 신앙고백은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바울의 신앙고백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후 속사도들과 변증가들의 신앙고백이 교부들에 와서 더욱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지금가지의
단순하고 단편적인 신앙고백과 내용이 같지만 좀 더 체계적이고 해석적인 신앙율(Rules of Faith)이 약 150년부터
200년 사이에 널리 사용되었다. 이 신앙율은 세 가지 중요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신앙율은 먼저 교리적인 표준(a Standard
of Faith)으로 사용되었고, 세례입문 교육의 기초를 제공했으며 성경해석의 안내서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단에 대항하여
정통신앙을 변호하는 신학적 내용을 제공해 주었다. 신앙율의 원형을 찾을 수 있는 대표적인 두 인물은 이레니우스(190)와
터툴리안(Tertullian, 200)이다.
이레니우스의 신앙율은 빌립보서 2장 5절 이하에 나타난 바울의 기독론과 상당히 유사하다. 이레니우스의 신앙고백은 사도신경과 전체적으로 내용, 윤곽, 체계를 같이하고 있는 훌륭한 신앙 고백서로 성부하나님이 천지의 창조주이심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런
신앙고백의 내용은 터툴리안이 제시한 신앙율 속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터툴리안의 신앙율은 이레니우스의 것과 비교할 때 한층
간결하고 함축적이며 후대에 발전된 사도신경과 흡사하다. 이레니우스의 신앙율이 빌립보서 2장의 내용과 유사한 반면 터툴리안의
신앙율의처음 부분은 요한복음 1장과 유사하다.
초대교외의 가장 집약된 신앙고백은 역시 사도신경이다. 사도신경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체계화 되었다.
기원은
확실하지 않지만 로마신경의 초기형식이 히폴리투스 신경(the Interrogatory Creed of Hippolytus's
Apostololic Tradition. 215), 마르셀루스(Marcellus)가 쥴리우스 1세(340)에게 제출한 신조,
그리고 사도신경에 대한 루피누스(Rufinus)의 주석에서도 마찬가지로 보존되어 있다. 전형적인 로마 신경은 로마교회가 주후
200년경 세례 문답시 행한 신경이다.
히폴리투스의신경도 성부, 성자, 성령, 공회, 그리고 죽은 자의 부활 등의 신앙고백을 따라 문답의 틀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것은 사도신경의 순서와 상당히 맥을 같이 한다.
이런
신앙고백의 형태가 3세기 초엽에 일반적으로 교회의 신앙고백과 세례문답으로 널리 통용되다가 4세기 중엽에 문답식의 형식을 떠나
오늘날과 같은 사도신경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사도신경과 매우 근접한 가장 대표적인 것이 340년에
마르셀루스(Marcellus)가 줄리우스 1세에게 보낸 신경이다. 이 신조가 이전의 신조와 두드러지게 다른 점은 마지막에 죄의
용서와 영생이 추가되었고 좀 더 함축적으로 다듬어졌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 같은 사도신경은 약 5세기경에 등장했다. 사도신경의 텍스트 리셉투스(the Textus Receptus) 즉
원형은 프리미니우스(Priminius)의 De singulis libeis canonicis scarapsus 에서 최초로
발견된다.
약 710년과 724년 사이에 등장한 사도신경은 로마교회 신조에 상당한 빚을 지고 있으며 드디어 로마교회에 의해 처음으로 채택되어 서방교회의 신조가 되었다.
이단의 발흥에 대한 교회의 응전으로 생성된 신조는 이단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정착되었다.
2. 정경의 형성
신경
외에 이단의 발흥으로 촉진된 것이 정경의 형성이다. 우리에게 알려진 최초의 신약성경이 목차는 무라토이안 단편(the
Muratorian fragment)으로 알려진 고대 문헌 가운데서 찾아 볼 수 있다. 주후 200년 까지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약의 대부분은 초대교회에 의해 정경으로 인정을 받았다.
정경을 형성하는 중요한 기준은 각권이 사도들 또는 사도들과 가까운 자들에 의해 기록되었는가하는 것이었다.
현재 존재하는 신약대로 완전한 정경이 설정된 것은 AD 367년 아다나시우스에
의해서이다. 두 번의 힙포 공의회(Councils of Hippo)가 힙포 레기우스(Hippo regius:393)에서 그리고
카르타고 공의회가 어거스틴(Augustine)의 지도 아래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carthage : 397)에서 열려 현재와 같은
정경을 공식적으로 확정지었다. 동방과 서방교회는 그들의 선례를 따라다.
정경이
완성되기 까지는 거의 300년이 필요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정경의 출현이 아다나시우스(Athanasius)나
종교회의(Synods)의 공식적 선언의 결과는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 공식선언은 이미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랫동안 받아들인
것을 단지 확인했을 뿐이다. 신약 성경의 기록과 그것들이 교회에 의해 정경으로 받아들여진 것 모두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단의 발흥으로 촉진된 정경의 형성은 이단과 이설을 평가할 수 있는 구체적인 평가기준을 교회에 제공해준 셈이다.
3. 감독제도의 발달
교회가 내외적으로 도전을 받으면서 교회는 그들의 결집된 힘을 통해 이런 외부의 도전들을 효과적으로 대처해야만 했다.
로마의
클레멘트(A. D. 96)는 96년에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감독(episkopos)과 장로(presbuteros)를
구분하지 않고 동의어로 사용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클레멘트가 감독들의 권위를 언급하면서 그 기원을 하나님에게서 찾았다는
사실이다. 이그나티우스에 의하면 감독은 기독교 공동체의 상징인 동시에 사도적 전통(apostolic tradition)의
전달자였다.
이레니우스는 로마교회의 권위를 강조한 또 하나의 중요한 인물이다. 두 가지 사상 즉 이그나티우스의 단일 감독제와 클레멘트의 사도직의 계승이 70년 후에 이레니우스에
의해 하나로 연합되어 감독의 권위를 한층 체계화 시켰다. 이레니우스는 모든 감독들이 똑같은 권한을 지니고 있다고 이해하지
않았다. 특별히 로마교구의 감독은 우월한 권위를 가지는데 그것은 그 교회가 베드로와 바울에 의해 설립된 교회이며 그들의 권위를
계승한 교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레니우스의
경우 로마교회는 사도의 권위를 계승한 교회이며 그 중에서도 베드로와 바울의 사도직을 승계한 정통성 있는 교구이기 때문에 로마교회
감독은 다른 교구보다 더 권위를 지닌다는 논리를 가지고 있었다. 자연히 여러 감독들 중에서 베드로와 바울을 계승했다고 알려진
로마이 감독이 첫 번째 서열에 있었다.
감독의
권위가 2세기 동안에 대단히 성장했지만 권위에 대한 이해에는 견해차가 있었다. 이레니우스가 로마교회의 우월성을 인정한 반면
터툴리안은 사도적 권위를 어떠한 교회에서 찾지 않고 정통교리를 고수하는 사도적 기원을 가진 교회들, 예를 들면 고린도, 빌립보,
에베로, 로마교회에서 찾았다.
제3부 3세기와 기독교 사상의 확립
제1장 이레니우스와 소아시아 신학
“그가
성육신 하셔서 사람이 되셨을 때 그는 스스로 인간의 오랜 족보 안에 총괄갱신(recapitulate) 하신 것이며, 따라서
우리에게 구원을 제공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담 안에서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 안에 존재하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얻은 것이다.”
Irenaeus
터툴리안이 서방신학의 초석을 형성하였고, 오리겐이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기초를 제공하였다면 이레니우스는 소아시아 신학의 초석이 되었다.
1. 이레니우스이 생애
가톨릭
교의학의 아버지 또는 “교회의 최초의 위대한 조직신학자”라 불리우는 이레니우스는 교회의 전통, 구속사, 신구약의 권위 등 여러
분야에서 업적을 찾을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2세기 영지주의자들과 논쟁에서 중요성 때문에 기독교회사에서의 의미심장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레니우스는 일생동안 영지주의를 논박하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계획을 역사신학 내에서 진지하게 설정하였으며, 신약을 구약과 같은 권위로 보면서 성경을 총체적으로 사용한 최초의 그리스도인이었다. 이레니우스는
기독교를 진정한 철학으로 보려는 변증가들의 견해에 반대하였으며, 헬라적 사색의 도움을 동원하지 않았고, 계시의 내용이 단순히
새로우면서도 보다 나은 철학에 불과하다는 자들과도 견해를 달리했다. 그에게는 성경적 전통만이 신앙의 유일한 근원이었다.
목회적 소질을 타고난 이레니우스는 고울에서 복음을 전파하며 이단으로부터 양들을 변호하는데 상당한 관심을 쏟았다.
다른 한편으로 이레니우스는 변방에 있는 켈트족의 복음화와 리용의 교회 평화를 위해 노력했다. 후기 자료에 의하면 이레니우스는 리용에 있는 기독교인들이 죽임을 당하던 202년에 순교하였다.
2. 이레니우스의 작품
이레니우스는
수많은 저술을 기록한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는 것은 <소위 영지주의의 고발과 논박>과 <사도적
설교의 논증>이다. 전자는 영지주의자들에 대항하여 기술된 작품으로 <이단 논박>(Adversus
haereses)으로 알려졌다. 다섯 권으로 되어있는 이단 논박은 주제에 따라 다름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영지주의의
해설; 2-이성에 의하여 논박함; 3-5 - 선지서, 주의 말씀과 사도들에 기초한 성경으로부터의 논박, 이 책에서 이레니우스는
영지주의의 대표적인 유형인 발렌티누스의 제자인 플톨레매우스(ptolemaeus)의 제자들의 가르침을 집중적으로 파헤치고 있다.
역사적
성육신에 기초한 이런 통시적인 구속사와 신구약의 연속성의 개념은 에피데이키스(Epideixis)라고 불리우는 단편작품
<사도설교의 논증>에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이 작품에서 이레니우스는 창조에서 최후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구원의
역사를 제시한다.
3. 이레니우스의 총괄 갱신(복구)
이레니우스는
하나님의 형상을 독특하게 해석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셨다. 이 형상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바로 그 형상을
따라서 인간이 지음을 받았다.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은 아들 속에서 찾을 수 있으며 또 이 아들이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은 불완전한
인간이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에 이르기까지 성장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에덴에서의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인간을 사랑하시며, 그 사랑은 하나님의 본연의 계획을 수행하심으로 실현된다. 이런 사랑은 섭리라고 하는 하나님의 원대하신 계획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이 섭리는 4단계의 언약으로 구분된다. 첫
번째 언약은 아담언약으로 아담에서 노아홍수까지이고, 두 번째 언약은 노아의 언약으로 홍수 이후부터 출애굽까지 이며, 세 번째
언약은 모세의 언약으로 모세부터 그리스도의 초림까지 이고 마지막언약은 그리스도의 언약으로 그리스도의 초림 때부터 종말까지 이다.
창조와 구속 그리고 구약과 신약을 연결할 수 있는 구심점은 바로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과 원형이신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어 인간들 가운데 거하게 되셨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새로운 인간상을 회복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원대하신 계획의 일환이며 바로 이것이 이레니우스가 말하는 총괄갱신(recapitulatio)이다.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자신 안에 총괄하신다는 것은 곧 인류를 회복하는 것이며 인류를 갱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모든 인류의 대표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새로운 인간상의 총화이며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이자 구속의 정점이다.
총괄갱신의 또 하나의 근본적인 측면은 사탄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이다. 이런 사탄에 대한 투쟁은 3단계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는데,
첫 단계로 성육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현현되어 총괄갱신이 시작되었고 그리스도의 시험을 통하여 사탄에 대한 결정적
승리를 가져왔으며, 그리그도의 부활의 통해 사탄의 비장의 무기였던 사망을 정복하셨다. 그리고 마지막에 사탄에 대한 최종적인 승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도래하며 그 때가 오면 만물은 그에게 귀속될 것이다.
이레니우스의
총광갱신에서 교회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담이 인간의 머리이므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듯이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교회는 사탄을 정복한다. 그리스도께서 마귀를 정복하셨고,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충만케 이루기까지 성장시켜 줄 가능성을 회복시켜 주셨어도, 이 가능성은 몸이고,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는 세례와 성찬을 통해서
총괄갱신 사역을 진행시키시고, 세례와 성찬은 인간을 그리스도 자시에게 연합시켜 준다.
교회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서 매우 중요하다. 성만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의 실체는 물질적인 요소를 평가 절하시키는 영지주의에
대항하여 이레니우스가 확신하던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이 자신들의 비밀 전통과도 사도성을 주장하지만 그것은 왜곡된 것이며 그들은
총괄갱신의 구속사역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다. 이단들은 교회의 위협이며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장애물인데 무엇보다도 영지주의는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4. 이레니우와 전통
이레니우스는 사도적인 전통(가르침)은 성경에서 발견되며 교회에 보존되어 왔으며, 따라서 “진리를 보기 원하는 사람은 온 세계에 분명하게 된 사도들의 전통을 어느 교회에서나 분명하게 볼 수 있다”고 보았다.
교회의 전통에 대한 이레니우스의 호소는 정경형성과 깊은 관련을 갖는다. 이레니우스는 4복음서를 의심없이 수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4복음서가 이레니우스 시대에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레니우스의 역사관을 언급해보면, 이레니우스가 구속사관을 제시한 최초의 역사 신학자로 평가 받는 이유는 그가 창조와 구속을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구속사라는 관점에서 구약과 신약을 통일시 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그의 통시적인 역사 이해는 창조주와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하나이며 같은 하나님임을 확신하는데서 출발한다.
5. 요약 및 평가
이레니우스는 최초의 교부로서 사도시대와 속사도시대 그리고 변증가들의 시대를 요약하고 3세기와 4세기 교부들로 잇는 교차로에 서있다는 점에서 역사 신학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한 시대를 마무리하고 한 시대를 여는 역사적 교차로에 있었던 이레니우스가 이전 사상들과 연속성과 불연속성 둘 모두를 지니고 있는
인물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이레니우스가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매력을 주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제 2 장 라틴 신학
“아테네와
예루살렘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가? 플라톤의 아카데미와 교회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단들과 기독교인들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가? ‘스토아적’ 기독교 ‘플라톤주의적’ 혹은 ‘변증론적’ 기독교에 대한 모든 계획들을 치워버려라”
Tertullian
라틴신학은
로마에서 보다는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태동되기 시작했다. 카르타고와 북아프리카에 언제 어떻게 교회가 생겨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주후 180년에 그곳에 교회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알려졌다. 교회는 주로 로마인들이나 그들과 상업적인 거래를 했던 퓨닉계인들
가운데 존재했다. 따라서 기독교는 두드러지게 도회적이고, 도덕적이고 라틴적이었다. 북아프리카는 터툴리안(212), 키프리안(258년) 그리고 어거스틴(430) 등 3명의 위대한 교회 지도자를 배출했다.
1. 터툴리안과 서방신학
현대인들은
주저하지 않고 터툴리안 (150-212.)을 서방신학의 대변자 혹은 “라틴신학의 아버지”로 평가한다. 그가 서방신학에 미친
영향은 한마디로 지대하다. 그의 작품은 교회 생활뿐만 아니라 교리 및 신학논쟁에 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비록 그가
분리하여 공교회에서 이탈하기는 했지만 그의 저술들은 위대한 서방교부들에 의하여 전수되고 연구되었으며 라틴 교회에서 무게있게
취급되어왔다.
(1) 터툴리안과 몬타니즘
약
200년경 카르타고 교회의 장로로 안수 받은 터툴리안은 점차 몬타니즘으로 기울다가 207년 경에는 몬타니즘에 합류했고, 얼마
후에는 아예 공교회에서 완전히 분리해 나갔다. 그가 몬타니즘에 합류 하게 된 일반적인 견해는 첫째는 제랄드 브레이(Gerald
L. Bray)같은 이들이 주장하는 것으로 터툴리안이 몬타니즘에 합류한 것은 이 집단이 터툴리안 자신의 가르침을 옹호하는
집단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몬타니즘의 금욕주의적인 신앙이 터툴리안의 생활태도와 일치했다고 보는 견해이다. 세
번째 견해는 “부분적으로는 당시의 교회가 회개의 문제와 관련하여 느슨한 관습을 가지고 있는 데에 대한 반발의 표시로 해석된다.
(2) 터툴리안의 작품
첫
번째 중요한 작품의 범주는 변증론(Apology)이다. 기독교로 개종한 후 자신의 신앙을 변호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터툴리안은
신앙을 변호하는 작품을 저술하였다. 일련의 변증서를 저술한 터툴리안은 변증적인 차원을 넘어 이설과 이단들을 반박하는 작품들을
쓰기 시작한다. 알렉산드리아 교부들이 직접 이단들의 문제를 거론하면서 그들을 반박하는 것에 비해 터툴리안은 법적인 용어를 동원하여
현재 교회가 갖고 있는 전통에 호소함으로써 영지주의를 비판하였다. 터툴리안에 따르면 진정한 기독교만이 전통을 소유할 권한이
있으며 그런 면에서 이단들은 취득시효를 상실했으며 전통적 교회가 그 권한을 가진다.
변증서나
반박 외에 터툴리안의 작품 가운데 또 하나의 작품 부류는 도덕적, 예전, 권징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작품의 성격상
목회적 작품들, 교회에서 여성의 위치와 역할에 관한 작품들, 그리고 이교철학을 논한 작품으로 나눌 수 있다.
(3) 터툴리안, 이성, 신앙, 철학
터툴리안이
철학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이러한 철학 거부 태도는 신앙과 이성에 관한 그의 태도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인간이 믿는 것인 그의 이성으로 이해될 수 없다는 식의 논리가 그것이다. 터툴리안에 따르면 믿음에 과한 지식은 이성에
관한 지식과는 다르다. 전자의 것은 그 나름대로의 지위를 가지는 것으로서 이성적 증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당대의 철학이 이단들과 연계성이 있음을 발견한 터툴리안은 철학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졌고, 그 때문에 터툴리안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세계에 살던 당대인들과는 달리 자신의 신학을 표현하는데 특별히 철학적 용어에 빠져들지 않았다.
(4) 터툴리안의 세계관
터툴리안의
철학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 그의 종말론적이고 금욕주의적인 태도는 그의 세계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듯하다. 터툴리안에
따르면 사회가 기뻐할 때 기독교인은 슬퍼하며, 이방인이 행복할 때 기독교인은 슬퍼하고, 저들이 슬퍼하기 시작할 때 그리스도인이
기뻐하는 역설이 가능하다. 세상의 쾌락을 멸시하며 세상의 활동을 비웃는 일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 없는 쾌락이라는 논리다. 이와
같은 터툴리안의 부정적인 세계관은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강하게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어느 정도는 터툴리안이 몬타니즘에 가담한 이후
몬타니즘의 부정적이며, 종말론적아고, 금욕주의적인 세계관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5) 터툴리안과 성서이해
터툴리안은
고등성경관을 갖고 있는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두 권을 제외한 신약의 거의 모든 성경으로부터 직접 인용하며 신양성경들을
구약과 같은 권위로 두고 있다. 그는 또한 신앙의 규범(“regula fidei")또는 신앙율이라 부르는 것을 많이 언급한 것으로
유명하다.
2. 키프리안과 북아프리카 교회
키프리안(Caecilius
Cyprian)은 주후 248년에서 258년까지 카르타고의 감독으로 봉직했다. 키프리안 자신은 처음에 감독의 직위수락을 주저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일단 선출된 후에는, 직무에 열성적으로 헌신하여 오랫동안의 평화로 다소 침체의 기미를 보였던 이 교회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
(1) 키프리안과 데시우스 박해
키프리안은
3차 박해로 역사에 알려진 데시우스의 전국적인 박해기간에 8년 안 카르타고 감독을 지냈다. 그가 감독이 된지 불과 2년 만에
데시우의 황제의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것은 전국적으로 진행된 최초의 박해였다. 로마 제국 내에 모든 국민들은 신에게 제사를 드려야
했다.
키프리안 자신은 환난 기간 중에 지하로 숨어 편지로 목회하는 방식을 택했다.
(2) 키프리안과 교회의 일치
데시우스
황제가 고트족 전투에서 살해되고 251년 박해가 종결되자 박해 기간에 숨어 있던 키프리안이 카르타고의 교회를 재건하기 위해
나타났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문제가 발생하였는데, 박해기간 중에 그리스도를 부인했던 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나타나 교회에 재
입교 시켜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키프리안은 질서를 회복하는데 굉장한 진통이 따랐다. 키프리안은 순교자들과 핍박 중에도 절개를 지킨 고백주의자들을 크게 존경하였다.
키프리안은 교회의 통일성을 영적이고 내적인 통일성에서만 찾지 않고 오히려 가견적인 교회의 일치 속에서 그 의미를 찾으려고 하였다. 가견적인 단일체로서의 교회 밖에는 영적 생명이나 구원이 없다는 것이다.
교회의 통일성에 대한 키프리안의 변함없는 확신은 감독직의 통일성 이론을 확대되기 시작했다. 때문에 키프리안은 교회의 일치를 감독의 일치와 직결시키고 교화가 하나이듯이 감독직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키프리안은 교회의 일치를 강조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의 하나됨 그리고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됨에 호소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치를 파괴하는 것은 곧 교회의 순결을 파괴하는 반 기독교적인 행위로 간주했다.
(3) 키프리안 대(對) 노바투스
교회일치를
강조하며 분열을 막으려는 키프리안의 정책이 북아프리카 감독들과 로마 감독의 지지를 받았다. 노바투스가 “허황된 사상에 빠져
스스로를 카타리(Cathari)파라고 부르는 특이한 이단자들의 지도자가 되자 이 문제로 대단히 큰 규모의 종교회의가 열렸다.
종교회의에서는 키프리안의 입장을 따라 이방신들에게 실제로 제사를 지낸 자들은 죽을 때에 공교회에 재 입교 시킨다는 데로 의견이
모아졌다.
우리는
노바투스, 노바투스와 연합한 오만한 사람들, 그리고 그의 무자비하고 지극히 비인간적인 견해를 채택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교회로부터 멀어진 사람들로 간주한다. 우리는 과거 재난을 초래했던 회개라는 치료책으로 그들을 치유하여 주어야 한다.
교회
일치와 정치적인 일치를 추구했던 콘스탄틴이 즉위하여 326년에 칙령이 발표되면서 노바티안들에게도 신앙의 자유와 교회의 재산권이
인정되기 시작하였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는 노바티안의 감독 아케시우스(Acesius)가 참석하였다.
(4) 북아프리카 교회와 로마교회의 대립
로마에서는
감독이 그러한 사람(노바티안 교회에서 세례 받은 많은 사람들이 공교회에 들어오기 원했다.)에게 안수하는 절차를 밟은 후 그들을
교회로 입교시켰다. 반면 북 아프리카의 꽤 많은 교회들 중에는, 그러한 사람들이 반드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카르타고의 감독 키프리안과 로마의 감독 스데반의 주장은 서로 달랐다. 키프리안은 칼타고 교회의 입장을 그대로 반영하여
그러자는 제2의 세례를 받아야 할 것을 주장했지만 스데반은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로마의 감독 스데반은 교회 밖에서 일지라도 물로 세례를 베풀고, 그리스도의 명을 따라 성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시행했다면 유효한 세례로 인정하고 세례를 되풀이 할 필요는 없고 다만 안수하는 것으로 대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단자들의
세례문제를 두고 아프리카와 로마 사이에만 의견 대립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것은 초대교회 범 교회적 논쟁점으로 일찍이
몬타누스주의자들과 말시온주의자들의 세례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각 지역마다 의견이 대립되었다. 로마나 팔레스틴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그 유효성을 인정한 것에 반해 라틴 아프리카, 안디옥, 갑바도기아, 길리기아에서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다시
세례를 주어 왔다.
3. 요 약
비록 키프리안이 교회의 영적 측면의 일치를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제도적인 교회 속에서 교회의 일치와 통일을 찾으려고 했던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키프리안의 교회관을 집약한다면, 교회는 일차적으로 외적 조직체 속에서 통일성을 찾아야 하며, 이 가견적이고 보편적인 교회는 하나의 근원을 가지기 때문에 통일성이 존재하며 이 통일성은 감독을 중심으로 유지되고 보존되며, 그리고 이 교회를 떠나서는 결코 구원이 없다는 것이다.
키프리안은
순교로 일생을 마감했다. 또 다시 발레리우스 황제시에 박해가 발생했을 때 키프리안은 박해를 피하기 위해 숨지 않았다. 그는 곧
체포되어 집에 감금되었다. 얼마 후에 키프리안은 교수형에 처해져 순교자의 대열에 올랐다. 키프리안의 견대들은 순교자 감독으로서의
그의 위광에 힘입어 후 세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힘포의 어거스틴과 그의 도나투스파(Donatist) 대적들이 서로 키프리안을
자신들의 영적 아버지로 간주했을 정도이다.
제 3 장 알렉산드리아 신학
“율법이 히브리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듯이 철학은 헬라인들을 그리스도에게도 인도하는 ‘몽학선생’(schoolmaster)이다. 따라서 철학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함을 향한 길을 열어주는 하나의 준비이다.”
알렉산더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카르타고가 제국의 서부에서 로마 다음의 제2의도시가 된 것처럼 알렉산드리아는 동방에서 로마 다음의 도시가 되었다. 알렉산드리아는 정치적 경제적인 면에서 카르타고와 쌍벽을 이루었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서로 달랐다. 일반적으로 평가해서 카르타고는 로마 적인 특성을 지녔고, 알렉산드리아는 헬라적인 특성을 지녔다.
주전 200년부터 주후 300년까지 알렉산드리아는 헬라세계의 지적, 문화적 중심지였다. 약 50만의 인구를 가진 상업의 중심지 알렉산드리아에는 많은 유대인이 살고 있었으며 이집트 전체를 합친다면 유대인의 총수는 약 100만에 육박했다.
알렉산드리아는
헬라적인 특성이 강했지만 유대인의 중요한 중심지이기도 했으며, 이곳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헬라파 유대인들로 종교와 삶의 방식에서
헬라사상과 관습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이 때문에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전형적인 헬라파 유대인으로 역사에 알려졌으며
이들에 의해 이곳에서 주전 250년경에 70인경(the Septuagint)이 번역되었다.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플라톤주의적 경향을 반영하는 유명한 기독교 지도자들을 배출했는데 그중에 클레멘트와 오리겐은 대표적 인물이다.
1.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150-215)로 역사에 널이 알려진 티투스 플라비우스 클레멘트(Titus Flavius Clement)는 2세기 말엽부터 3세기 초엽까지 활동하면서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정초를 놓았다.
스토아
철학에서 회심한 판태누스(Pantaenus)는 저스틴이 로마에서 운영하고 있던 것과 유사한 최초의 기독교 학교를 알렉산드리아에
설립했다. 교회사가 유세비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클레멘트는 팬태누스를 만나 제자가 되어 그와 함께 성경연구에 전념하였다. 그 시기는
대략 180년경으로 추측된다. 클레멘트는 자신의 강요(Institutions)에서 판태투스를 스승이라고 칭할 만큼 높이 평가하고
있다. 판태누스가 죽자 클레멘트가 그를 계승했고 그의 지도력 아래 그 학교는 유명한 학교가 되었다. 이 학교는 교육받은 헬라
지식층에 복음을 전파하여 그들을 기독교인으로 개종시키는 창구역할을 했다.
(1) 클레멘트의 작품
그의
대표적인 저서는 <스트로 마타(Stromateis, The Miscellanies)>라고 불리우는 8권으로 된
책이다. 또 하나의 대표적인 클레멘트의 저서는 <교사(Paedagogus)>라는 제목이 붙은 8권의 저서가 있다. 그
외에 <헬라인에의 권고(Protrepticus: The Exhortation th the Greek)>,
<회심에의 권고(An Exhortation to Conversion)>, <부자가 구원받는다면?> 그리고
<교회법(Ecclesiastical Canon)> 등이 있다.
이들
클레멘트의 작품 가운데 두드러진 것은 특별히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초점을 맞춘 3개의 작품으로 클레멘트의 진리
인식론을 그대로 반영한다. 이것들은 <회심에의 권고(Exhortation to Conversion)>,
<교사(Tutor)>, 그리고 미완성 작품 <잡문집>(Miscellanies)등이 있다. 그의 첫 작품인 회심에의 권고는 기독교 변증학의 전통을 잇는 것으로 어떻게 로고스가 처음 우리를 회심시켰는가를 성명한다.
<교사>는 기독교 교리의 체계적인 강해를 담고 있으며 어떻게 로고스가 우리를 교회시키는가를 다룬다.
세 번째 작품 <잡문집>은 로고스가 어떻게 우리의 지식을 완전케 하여 참 지식(true gnosis)에 이르게 하는 가를 설명한다.
(2) 클레멘트, 철학, 이성
클레멘트의 신학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출발점은 그가 기독교 진리와 희랍 철학의 진리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이다.
이점에서 클레멘트가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적 기풍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으며, 저스틴과 아테나고라스의 전통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담대하게 기독교와 헬라 철학의 연합을 추구했다. 그것은 로고스가 진리의 원천으로 헬라인들의 철학과 기독교인들의 진리, 둘
모두의 저자라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 클레멘트는 “철학도 진리 참구의 존재로서 진리를 이해하는데 기여한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이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하였듯이 헬라인들에게는 철학이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Paidagogos)인 것이다.
클레멘트는
헬라인들이 철학을 통해 습득한 시작은 기독교인의 신앙을 심오하게 만드는데 사용될 수 있으며, 그러한 지식을 소유한 이들이야 말로
진정한 지식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완전히 알 수 있다고 믿었다. 결국 클레멘트가 강조하려고 하는 바는 신앙이란 지식의 토대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지식과
신앙의 관계는 이성과 신앙과의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클레멘트는 신앙과 이성이 떨어져 기능을 발휘 할 수 없다고 보았다.
믿음의 시발자로서 이성은 믿음보다 우선된다는 것이다. 신앙으로만 만족하고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자는 젖으로만 만족하는 어린 아이와
같다고 말한다. 이런 로고스 중심의 사상은 클레멘트의 성경해석, 신관 그리고 역사관에 깊이 반영되어 있다.
(3) 클레멘트의 성경해석과 신이해
클레멘트의 성경 해석은 문자적 해석과 우화적 해석으로 대별된다. 문자적 해석을 첫 번째 의미로 보고, 우화적 해석을 두 번째 즉, 진보된 의미로 이해했다.
클레멘트의
신관 역시 알렉산드리아의 전통을 반영한다. 그는 플라톤의 영향을 따라 신을 부정적인 개념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은 속성이 없으시고
분질의 범주를 넘어서 계시며, 하나님은 정의내릴 수 없는 분이므로 무엇이라고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클레멘트는 단순히 플라톤의 신관을 답습하기 보다는 성경의 삼위일체 신관과 조화시키려고 한다.
(4) 클레멘트와 역사이해
클레멘트는 현대적 의미의 역사관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의 구심점을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찾았다는 점에서 그의 역사해석은 의의가 있다. 역사의 주체이며 모든 지식과 피조물의 근원인 로고스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육신하셨다는 것이다. 이 성육신은 하나의 역사의 정점이며 헬라와 유대 역사를 한 점에 모으는 전환점이다.
(5) 클레멘스 사상 요약
클레멘트의 성경해석, 신론, 역사관의 구심점은 로고스이다. 결론적으로, 클레멘트의 신학의 핵심은 현대적인 용어를 빌린다면 기독론이라고 할 수 있고, 초대교회적인 의미로 표현한다면 로고스론이다.
이
로고스론은 헬라철학과 성경을 연결하는 교량이며 역사는 전체적으로 통일시켜주는 원리이고 또한 신구약을 총체적으로 연결시켜주는
근본원리이다. 헬라적인 특징과 성경적인 특징이 분명한 구분없이 한데 어울려 마치 현대판 종교 다원주의를 제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레멘트의 사고 속에서는 헬라철학의 중요성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기독교의 유일성을 제창하려는 내면적인 노력이
엿보인다. 정확히 표현한다면 클레멘트는 기독교 진리를 축으로 하여 헬라 철학을 끌어들여 조화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이런 클레멘트의
기독교 사상의 방법론은 오리겐의 신학의 원형이 되었다.
2. 오리겐
3세기
초반 기독교계에서 혜성 같이 떠올라 정통과 이단 양측으로부터 끊임없는 비판과 찬사를 동시에 받았던 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주후 185년경에 탄생하여 254년에 세상을 떠난 오리게네스 아다만티우스(Origenes Adamantius)였다.
터툴리안이 서방신학의 선구자였다면 오리겐은 명실공히 동방신학의 전통을 세워놓은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60평생 이단들과 로마
당국에 맞서 신앙을 변호하였으며 기독교 교육가로 활약하였고 유대인 사회에 대해 기독교를 증언하였으며 교회 내에서는 영적 지도자로
일하였다. 존경을 받았으나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의 저술과 사상은 역사 속에서 수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어왔다. 클레멘트의 사상이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초속이 되었다면 오리겐의 신학과 사상은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골격이 되었던 것이다.
(1) 오리겐의 성장 배경
오리겐은
기독교 가정에서 신앙으로 교육받으며 성장하였다. 세베루스 황제가 교회를 심하게 박해할 때 오리겐의 아버지
레오니데스(Leonides)가 순교했다. 당시 아직 어린 소년에 불과했던 오리겐의 영혼은 순교에 대한 열망에 강력하게 사로잡혀
있었다.
놀라운
지성적 역량과 비범한 경건에 힘입어 오리겐은 18세에 데메트리우스 감독의 지명을 받아 알렉산드리아의 세례
지원자(catechumens)학교를 관장하게 되었다. 곧 오리겐은 “모든 신자들에게서 훌륭한 명성을 얻었다.” 오리겐은 엄격하고
금욕적이며 극도의 빈고한 생활을 하였는데 이는 친구들마저 놀라게 했다.
이처럼 오리겐의 금욕주의적 성품은 그의 생활 전반을 재배했다. 열성적인 금욕생활과 더불어 신비주의는 오리겐의 신앙생활의 한 근본 요소였다. 이 오리겐의 신비주의는 무분별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성경에 뿌리를 둔 것이다.
오리겐의 금욕주의적인 금욕주의와 신비주의적인 삶은 그의 교육활동, 설교, 논박, 특히 저술 작업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오리겐의 명성을 더해 주었다.
(2) 명성을 더해가는 오리겐
오리겐의 명성이 알렉산드리아를 넘어 외부 세계에 널리 알려지면서 개인적으로 오리겐의 가르침을 받으려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오리겐이 긍정적인 평가만 받은 것은 아니었다. 유세비우스의 동시대 인물이며 오리겐의 비평가였던 포르피리(Porphyry)는 오리겐이 헬라철학과 야만인(유대인)들의 말을 혼합시켜 놓았다고 불만을 털어 놓았다.
불만의 요지는 헬라인인 오리겐이 헬라문학을 공부했으면서도 이 야만인들의 건방진 말에 현혹되어 자신의 학문의 업적을 야만인들에게
양도했다는 것이다. 이런 오리겐에 대한 비평은 객관성을 상실한 듯하다. 유세비우스도 인정하듯 오리겐이 헬라사상과 기독교를
조화시키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헬라사상과 기독교를 무질서하게 혼합시킨 것은 아니었다.
(3) 팔레스틴에서의 작품 활동
오리겐의 연구열은 대단했던 것 같다. 유세비우스의 증언에 의하면 오리겐은 그의 생애에 무려 6000여권이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다량의 책을 저술했다.
(4) 제일원리와 콘트라 셀수스
<제
1원리에 관하여>(De Principus)는 오리겐의 작품 중에서 가장 뛰어난 신학서이다. 이것은 오리겐의 잘 훈련된
신학적 머리와 헬라풍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 속에는 신론, 창조, 타락, 인간론, 윤리학, 성경의 역할과
성경의 해석 원리, 자유의지, 부활 등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들을 다룬 제반 단락이 들어있다. 제1권에서는 삼위 하나님과
영적 존재들, 제2권에서는 물질적 세계, 인간과 인간의 영혼을, 제 3권에는 자유의지, 악마와의 투쟁, 선의 궁극적 승리를,
그리고 제 4권에서는 성경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오리겐은
“하나의 연관성 있는 교리 체계를 구성하기를 원하는 자”가 기초적 원리로 삼을 원리들을 제1원리에서 이렇게 집약한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만물을 창조하시고 질서를 주시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때 우주를 존재케 하셨다.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하사 참으로 인간이 되셨다.
그리고 참으로 고난당하셨고, 참으로 죽으셨다. 그는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함께 하시다 하늘로 올리우셨다. 성령께서는 그 존영과
권세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과 연합되어 있으시다. 그리고 이 세상을 떠난 후에 반드시 심판이 있으며 성도들은 영광스러운 몸으로
다시 부활할 것이다. 모든 인간의 영혼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이들 악한 세력들은 죄악으로 영혼을 무겁게 하여 떨어뜨리려고
힘쓰기 때문에 믿는 영혼들은 그와 같은 세력으로부터 자유로워 지기위해 노력해야 한다.
영혼의 기원에 관하여는 오리겐이 분명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선재설을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리겐에게
그리스도는 역사의 중심이자 구약 성경 이해의 열쇠이며, 구약의 율법과 의식을 대신하는 존재였다. 때문에 구약에 대한 문자적
접근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오리겐이 볼 때 구약성경의 사건들, 인물들, 규범들은 사실상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것이다.
오리겐의
사상을 찾아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작품은 <콘트라 셀수스(Contra Celsus)>이다. 이것은 오리겐의 동시대에
살았던 이교도 비평가인 셀수스에 대항하여 기독교를 변호하는 글이다. 셀수스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교회를 비평하였다. 1)
기독교인들은 교리를 헬라철학에서 얻지 않고 야만인인 유대인들에게서 얻었다. 2) 이적은 참으로 기적이 아니라 단지 마술일 뿐이다.
3) 기독교 교리는 비합리적이다. 4) 마리아는 간음한 여인이며, 로마병사와 불륜의 관계를 갖고 태어난 아이가 바로 예수이다.
이에 대하여 오리겐은 만일 예수께서 그런 가정환경 출신이라면 간음을 반대하는 가르침을 설파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5) 오리겐의 신관
오리겐의 신론, 특히 삼위일체에 대한 가장 두드러진 공헌주의 하나는 성자와 성부의 관계에 대한 가르침이다. 오리겐은 성자를 성부와 같이 영원한 분으로 보았다. 오리겐의 영원 전 나심은 후에 삼위일체 정립에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된다.
그러나 오리겐은 아들이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영원하시다고 보았지만, 주저하지 않고 아들을 제2의 하나님(second God)이라고 부름으로써 성자와 성부가 다르면 성자가 아버지에게 종속된다고 보았다.
3. 오리겐 이후 알렉산드리아 신학
알렉산드리아신학은 그 성격상 아다나시우스를 중심으로 그 이전과 이후로 대별할 수 있다. 둘 사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은 지난 1세기 동안 역사신학계에 큰 논란이 되어 왔다.
둘
사이에는 어느 정도 구분이 된다. 예를 들면 초기 알렉산드리아 신학자들은 형이상학적 ‘그리스도의 의미’에 대한 탐구에 관심이
있었지만 후기 알렉산드리아 신학자들은 삼위신과 성육신에 관심이 있었지만 후기 알렉산드리아 신학자들은 삼위신과 성육신에 그 관심이
집중하였고 그 의미에 대하여는 저들의 선배들이 이미 탐구한 것 이상 나가지 못했다.
이런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에는 연속성이 존재하는데 바로 그것이 신화교리이다. 플라톤 사상의 영향을 받은 클레멘트는 인간의
신화를 믿었으며 이런 신화교리는 후기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대변자인 아다나시우스 사상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인성이 신성인 로고스와 연합함으로써 불사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이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핵심이다. 이런 면에서 알렉산드리아 신학은 전기 후기를 막론하고 로고스 사상을 축으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로고스가 성육신하심으로 불사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은 로고스에 참여하는 모든 인간도 역시 그로 말미암아 불사적인 존재로 새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아다나시우스가 강조한 로고스의 성육신에 근거한 인간의 신화교리를 시릴에게서도 그대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알렉산드리아 신학 속에서 흐르고 있는 기독론 사상의 맥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알렉산드리아 신학은 그
중심이 로고스 사상이며, 로고스 사상은 또 구원론 핵심을 구성한다.
따라서
아다나시우스를 중심으로 그 이전과 이후를 구분하는 것은 어느 정도 긍정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본질적우로 오리겐 이전의
알렉산드리아 신학과 그이후의 알렉산드리아 신학은 연속성이 더 강하다. 로고스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에게서 죽음을 제거하시기
위해 불가시적인 존재가 가시적인 존재로 나타나신 생명이요, 빛이요, 아버지의 로고스요, 우주의 통치자요, 그리고 왕이시다. 아다나시우스에게 이 로고스는 성부와 동질이시다.
제4부 4-5세기와 정통의 확립
제 1장 삼위일체 논쟁
만일
성부가 한분이고 성자는 또 다른 분이라면 그리고 성부도 하나님이고 성자도 하나님이라면 한 하나님이 아니라 두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면 결과적으로 그리스도는 사람이어야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성부께서 참으로 한 하나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Novatian
초대
기독교가 갖고 있는 초대의 주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였다. 과연 그리스도는 어떤 존재인가? 그는 정말 하나님이신가? 만일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이라면 창조주 하나님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성부와 성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성자가 하나님이고 성부도
하나님이라면 둘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라는 그리스도의 신성 문제와 관련된 문제는 초대교회 수 세기 동안 쟁점이 되어왔다. 이것을
삼위일체 논쟁(새 Trinitarian Controversy)이라 부른다.
1. 삼위일체 논쟁의 역사적 배경
주후 약 90년부터 140년 사이에 활동했던 속사도들은 비록 소위 신학적 의미의 삼위일체에 관한 분명한 교리는 제시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었다. 삼위일체 개념은 그리스도의 선재성이나 그리스도의 신성을 학문적으로 좀 더 체계화시킨 변증가들에게 오면서 더욱 분명해진다.
저스틴에게 성육신 이전에 선재하신 로고스는 “하나님의 첫아들”이며 “하나님에게서 나오신 하나님 다음 되시는 분”이다. 로고스는 하나님 다음 존재이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즉 지혜와 권능과 영과 능력에서 아버지에 종속된다고 보았다. 그의 삼위일체는 종속설(subordinationism)과 비슷했다. 이것은 대부분의 변증가들의 견해이다.
변증가들에
의하여 상당히 발전된 삼위일체 개념은 교부들에 와서 좀 더 체계화되기 시작하였다. 특별히 이레니우스는 변증가들 보다 상당히
진보된 신관을 갖고 있었다. 이레니우스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 이전에 존재하셨으며,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음을 받았다.
아들은 아버지와 같이 영원하시다. 아버지를 계시하시는 이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오직 한 하나님 창조주가 계시는데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하는 분이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다.
이레니우스는 아들이 아버지와 같이 영원하시다고 가르쳤다. 인류에 관련된 하나님의 모든 일이 그리스도 안에서 “요약”된다는 것이다. 이레니우스는 성자를 성부와 영원히 공존하시는 분으로 이해했다. 이 로고스는 “참 하나님이며 참 하나님”이시다.
터툴리안은 서방교회에서 가장 훌륭한 삼위일체론을 제시한 인물이다. 그는 삼위일체의 한 본성(one substance), 본질(nature) 그리고 삼위(three persons)의
개념을 도입한 최초의 신학자이다. 사실 그의 가르침이 325년 니케아 회의 그리고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 때에 신조의 기초가
되었다. 비록 터툴리안이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아니지만 삼위일체 교리의 윤곽을 제공한 최초의 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
2. 단일신론
우리는 삼위일체 논쟁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관련된 오류들과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과 관련된 오류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관련된 오류들의 전체적인 윤곽을 제시하면 다름과 같다.
* 단일신론(Monarchianism)
하나님이 한 분임을 강조하는 이론
(1) 양태론적 단일신론(Modalistic Monarchianism)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한다. 한 하나님이 성부․성자․성령으로 모습을 바꾸어서 나타났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삼위를 나타나심의 세 양태(양식)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성부 수난설을 주장하였다.
▶ 성부 수난설 : 십자가에 못 박힌 분은 성부이며, 승천하신 분은 성령님이다고 한다. 이 양태적 군주신론은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을 주장하려는데 있다. 대표자는 프락시어스(Praxaeus)와 사벨리우스(Sabellius)였다. 이 사상을 동방교회에서는 일명 사벨리안설(Sabellianism)이라고 한다.
프락시어스는 하나님의 위적 구별을 반대하였고, 성부가 고난 받으셨다는 주장을 피하고 있다. 사벨리우스는 성부 성자 성령이란 명칭은 단순히 신적 본체가 자신을 나타내는 세 형상을 가리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하나님은 창조와 율법수여에서 성부로, 육신의 몸을 입으신 것에서는 성자로, 중생과 성화에서는 성령으로 각각 나타난다고 하였다. 양 군주신론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음을 알 수 있다.
(2) 역동적 단일신론(Dynamic Monarchianism or Adoptionism, Patripassianism)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했다. 그리스도는
선인이라, 그리스도가 너무너무 착해서 하나님이 그 안에 신적 능력을 부여하시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신적 능력이 Dynamic하게 그
안에서 역사를 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고 착한 사람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착한 사람인데 그 안에 능력이
컷을 뿐이라고 한다.
▶ 이것을 양자 기독론(Adoptionism)이라고도 한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탄생시나 세례시 양자로 입적하셨다는 것이다. 사모사타의 바울(Paul of Samosotg)이 이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로고스는 성부와 동질이었으나 신격에 있어서 구별된 인격은 아니었다, 로고스는 모든 인간 속에 계시지만 특히 인간
예수 안에서 특별하게 만들었던 한 인격적 힘일 뿐이다. 이 신적 힘은 진보적으로 예수의 인성을 신화하였다.
인간
예수가 신화되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예수를 하나님으로 볼 수는 없으나 신적 존경과 영광을 받기에는 마땅하다고 하였다.
사모사타의 바울이 하나님의 단일성을 주장하여 후에 소시니안파와 일위신론(一位神論)자들의 선구자가 되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대부분 동태적 군주신론에 빠지고 있는 것을 본다.
3. 아다나시우스 대 아리우스 논쟁
동방에서 진행된 삼위일체 논쟁은 약 318년경 알렉산드리아 교회 알렉산더 감독과 그 교회 장로 아리우스 사이에서 발생한 논쟁에서 발단되었다.
서방의 양자론자들과 같이 아리우스는 하나님의 단일성에 관심을 기울인 나머지 성부 혼자만 시작이 없으신 분이며 성부만이 참으로 하나님이시라고 보았다. 성자는 본질적으로 성부와 구별된다. 아들은 시작이 있으시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위해 로고스를 창조하셨다. 이면에서 아리우스 사상은 헬라의 중기 플라톤주의를 반영한다. 결국 이 로고스는 는 무에서(ex nihilo) 창조된 첫 피조물(first born of creature)이며, 이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이지만 성부와 같은 동질(homoousios)이 아니고 유사 본질(homoiousios)이라는 것이다.
(1) 아리안 주의
1) 급진적인 아리안 주의(Anominism)
* 아들은 피조물이다.
* 아들은 시작이 있다(아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다).
* 아들은 아버지와 교통이 없고 아버지 지식을 공유하지 않는다.
* 아들은 변형할 수 있고 죄 지을 수 있다.
2) 반(semi)아리안주의 - 성자의 본질은 성부의 것과 유사
아리우스 논쟁이 중반에 접어들었을 때 하나님이 보내신 한 교회지도자가 출현했으니 그가 바로 328년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직을 계승한 아다나시우스(athanasius)이다. 300년경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373년에 세상을 떠난 아다나시우스는 니케아 신조의 기초를 세우는데 공헌했으며 그것을 보호하는데 일생을 바쳤다. 그의 이름은 니케아 정통 신앙의 동의어가 되었다. 아다나시우스는 아리우스가 오리겐을 오해했다며 아리우스주의를 전투적으로 공박하였다. 사실 아리우스는 오리겐의 로고스 사상을 잘못 이해했다. 아다나시우스가 볼 때 오리겐의 영원성은 곧 성부와의 동등성을 의미하였다. 이는 아들이 아버지와 동질이라고 선언한 니케아 회의 신조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알렉산드리아
감독 알렉산더는 321년 알렉산드리아 회의를 소집하여 아리우스 및 그 동료들을 정죄하고 출교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우스를
따르는 세력이 적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리우스의 견해가 다신론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유일성을 보호해 주는 것처럼 보였고
아리우스가 하나님이 물질계의 창조자가 될 수 없다는 헬라 사상을 주저함 없이 수용했으며,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또는 로고스를 신적 존재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니코메니아
감독 유세비우스는 전적으로 아리우스를 지지하고 나섰고 수리아에서는 가이사랴 감독 유세비우스도 아리우스 편으로 기울어졌다.
아리우스는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의 도움을 받아 은신처에서 있으면서 편지를 통해 자신의 입당을 계속 확산시켜 나갔다.
4. 니케아 회의 신조
콘스탄틴 황제는 아리우스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325년 5월 니케아에 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회의에는 약 300명의 감독들이 참석했다. 니케아 회의는 의견을 달리하는 세 부류의 집단이 주도하고 있다.
첫째가 니코메디아(Nicomedia) 감독 유세비우스가 이끄는 작은 그룹으로 아리우스를 전적으로 지지하고 있었고, 두 번째는
당대에 가장 학식있는 사람으로 알려졌던 교회사가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가 이끄는 작은 그룹으로 내심으로는 아리우스의 견해를
동정하면서 중도적 입장을 취했으며, 세 번째 그룹은 알렉산더를 중심으로 한 대부분의 대표자들로 반아리우스 입장을 갖고 있었다.
니케아회의에서
처음 작성된 니케아 신조는 아리우스의 견해를 닮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콘스탄틴 황제의 황실감독 호시우스의 개입으로 니케아
신조에 동일이 삽입되었다. 이것은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아리우스를 지지하는 자들이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 때문에 많은 교회사가들은 하나님께서 인간 역사에 섭리하시고 개입하신다는 고백을 하는 것이다.
니케아회의에서 아리우스파는 정죄를 받았지만 그의 영향력은 시들지 않고 확산되었다. 심지어 아리우스 세력은 황실을 등에 업고 영향력을 확대 하였다.
5. 니케아회의 이후의 아리우스 논쟁
니케아
종교회의 이후 전개된 아리우스 대 아다나시우스 논쟁은 3단계로 대별할 수 있다. 제 1기는 콘스탄틴 대제의 사망시기는 337년
5월 22일 까지이며, 제 2기는 콘스탄틴의 아들들이 황제의 직위에 오른 후부터 콘스탄티우스 1세가 죽던 361년 까지, 그리고
제3기는 줄리안이 즉위할 때부터 데오도우스 1세의 통치하에 아리우스가 완전히 제압될 때까지로 대별할 수 있다.
아다나시우스와
니케아 정통주의가 발전되고 더욱 체계화 된 것은 3인의 갑바도기아인(Cappadocans) 때문이다. 이들은 대 바실(Basil
the Great; 330-379) - 가이사랴 감독, 니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 335-394) - 대
바실의 동생,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 330-390)등이다. 바실은 삼위일체를 위한 인정된
문구 즉 한 본질(substance, ousia)과 삼위(three persons, hypostasis)를 확정시킨 최초의 인물이었다. 373년에 아다나시우스가 세상을 떠나자 바실은 동방에서 정통 신앙의 수호자로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바실과 두 그레고리는 삼위일체를 설명하기위한 용어 사용 방법에 일치를 보았다. 그것은 곧 “한 본체 안에서 세 위격”이라는 용어이다.
6. 콘스탄티노플 회의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379년 황제에
오른 다음에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공식적인 국교로 만들었다. 콘스탄틴 대제 이래 동로마에선 최초의 열렬한 서방신학 지지자였던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를 소집하여 니케아 신조를 재확인하였다. 이 회의를 통하여 아리우스파는 완전히 정죄를
받은 셈이며 아리우스파의 종말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제2장 기독론 논쟁
“한
분 동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성과 인성에서 완전하시며, 참으로 하나님이시며 참으로 사람이시며 이성적인 영혼과
육신으로 이루어지시되, 신성에 있어서는 성부와 동질이시고 동시에 육신으로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동일이시되 죄는 없으시며,
신성으로는 만세전에 성부에게서 나셨으나, 인성으로는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성모(데오토코스)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었으니, 한
그리스도, 성자, 주, 독생자는 신성과 인성(한 인격 안에) 혼동되지 않고, 변하지 않으며, 분할과 분리됨이 없이 연합되었다.”
칼케돈 신조
니케아
회의와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는 그리스도가 완전한 하나님이시면 완전한 인간이라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문제를
해결할 셈이다. 그러나 두 성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분명하게 규정하지 않았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문제가 정립되자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이 어떤 관계가 있는가하는 기독론의 문제로 발전하였다. 이것이 콘스탄티노플 회의부터 칼케톤 회의까지 다루어진 주제였다. 기독론의 논쟁은 362년 아폴리나리우스주의(Apollinarianism)로 시작하여 381년 콘스탄티노플회의에서 아폴로나리우스의 견해가, 431년 에베소 회의에서는 네스토리우스의 견해가 그리고 451년 칼케톤 회의에서는 유티키안의 견해가, 553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는 단성론이, 그리고 680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는 일의론(Monothelitism)이 정죄됨으로써 일단락 되었다.
1. 아폴리나리우스 주의(Apollinarianism)
아폴리나리우스는 신성을 강조한 나머지 인성을 약화시켜 신성이 인성을 흡수했다는 인상을 남겨주었다. 로고스가 인간 예수의 영(human soul)을 대신하였다고 이해함으로 신인(divine-human)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하기 보다는 인간의 육체를 입고 오신 하나님으로 이해했다.
인간 예수가 로고스를 가졌다는 점에서는 완전한 하나님이시지만, 안간의 지성과 이성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로고스가 인간 예수의 마음을 대신했다고 봄으로써 예수가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 신적 지성을
가지고 활동하신 예수에 불고하다고 이해했다.
갑바도기아인들이 지적한 것처럼, 만일 예수가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면 구원자체를 무효화시키는 것이다.
370년 갑바도기아 바실이 아폴리나리우스를 논박하기 시작하였고, 377년에는 로마 감독 다마수스 지도 하에 한 회의가 열려 그를
정죄하였으며, 그 후 382년에 다시 확인하였다. 또한 379년에는 안디옥에서 한 회의가 열려 아폴리나리우스 주의를 정죄하였고,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다시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아폴리나리우스는 388년 데오도시우스 법전(Codex
Theodosians) 이단 목록에도 포함되어다. 그 후 아폴리나리우스주의는 가현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같이 완전한 인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거부하는 이단으로 간주되어왔다.
2. 네스토리우스주의(Nestorianism)
네스토리우스는
아폴리나스리우스의 주장에 반대하여 성자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참으로 사람이라는 두 가지 사실을 강조하였다. 그에게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성과 신성을 가진 분이다. 신성과 인성이 뚜렷이 구별되며, 양성이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함께 존재한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아폴리나리우스의 약점을 넘어섰다. 그러나 이 신성과 인성이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어떻게 연합 되었는가하는
문제에서 네스토리우스는 오류를 낳고 말았다.
(1) 논쟁의 핵심
시릴과
네스토리우스 논쟁의 원초적인 출발점은 과연 마리아를 데오토코스(Theotokos)로 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알렉산드리아
신학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육체적 연합이 있었다면,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 그리고 마리아는
‘하나님을 나신 분’(데오토코스)로 불러야한 다고 보았다. 마리아를 데오토코스라고 불어야 한다는 알렉산드리아의 전통을 따라 시릴은
마리라를 데오토코스라고 주장한 반면 네스토리우스는 그녀는 데오토코스라고 부를 수 없고 크리스토토코스(christotokos: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불러야 된다고 보았다.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두성의 실재성을 인정하면서도 신성은 십자가에 고난에 참여할 수 없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신성과 인성을 구분하려는 네스토리우스의 가르침은 예수를 인성으로서의 예수와 신성으로서의 예수 즉 두 인격으로 말한다는 인상을 남겼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신적 그리스도와 인간적 그리스도 두 그리스도(two Christs)를 주장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해서 그에게는 이단이라는 표지가 붙게 되었고 아울러 신적 요소와 인간적 요소사이의
그릇된 대조를 주장하는 견해의 원형으로 간주되어왔다. 네스토리우스의 기계적 연합은 유기적인 연합과는 달리 속성의 교류(communicatio idiomatum)를 약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을 나신 분(God-bearer)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데오토코스(theotokos)는 어머니의 특권을 강조하기 보다는 아들의 신성(the Deity of the Son)을 강조하는데
포인트가 있다. 성령으로 잉태하여 마리아가 뱃속에 갖고 있는 예수는 단순한 인간 예수가 아니라 완전한 인성과 신성을 가지신 삼위
하나님의 제 2위이신 성자 하나님이신 것이다. 때문에 마리아는 육신과 연합된 하나님의 말씀(the Divine Word)을
잉태한 것이며 이런 면에서 마리아는 데오토코스(“theotokos" ; God bearer)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은
마리아가 인격적으로 신성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수 안에서 인성과 신성이 연합되었기 때문에 양성의 구분은 가능하지만 양성의 분리는 불가능한 것이다.
(2) 에베소 회의와 평화안
네스토리우스를 지지하는 데오도시우스 2세는 네스토리우스의 요청에 따라 431년에 에베소 회의를 개최하였다. 431년 6월 22일 성 마리아 교회당에서 개최된 에베소 회의는 지리적이나 여러 가지 여건으로 미루어 시릴에게 유리했다.
네스토리우스보다 먼저 도착한 시릴은 그들이 15일 가량 늦게 도착할 예정이니 기다려 달라는 감독들의 항의에도 그들의 도착하기 4일전 6월 22일 단독으로 에베소회의를 개최하고 네스토리스를 정죄하고 파문시켰다.
안디옥
감독 요한의 인솔 하에 나중에 도착한 네스토리우스 지지자들은 에베소의 주교 멤논의 직위를 박탈하고 시릴을 정죄하였다.
네스토리우스를 지지하던 황제는 어쩔 수 없이 상황이 이렇게 되자 시릴, 네스토리우스, 멤논 세 사람 모두를 해임하고 이들을
연금시켰으나, 시릴이 가지고온 거액의 뇌물을 황실의 영향력있는 사람들에게 보냄으로 시릴이 급부상하게 되었다.
에베소회의 이후 반 시릴 세력들이 등장하면서 시릴도 교리적인 면에서 상당부분을 양보해야만 했다.
아폴리나리우스의
가르침과 유사한 시릴의 단성론적 기독론 이해는 그에 대한 반대세력이 등장할 것을 예견하기에 충분했다. 특별히 시릴의 12개
파문조항은 반발을 샀고 극단적인 시릴을 달갑지 않게 생각한 이들은 12개 조항을 완전히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데오도시우스
황제도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의 화해를 위해서는 안디옥의 요한이 네스토리우스를 포기해야 한다고 설득하는 한편, 시릴에게는 안디옥이
네스토리우스를 포기하는 대가로 알렉산드리아 전통과 안디옥 전통을 융합시킨 통합신조 곧 평화안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결국
시릴은 사이러스의 데오도렛 감독이 작성한 평화안에 서명해야만 했다.
이
평화안은 안디옥 측이 에베소에서 작성한 것으로 안디옥의 신학을 상당히 반영하는 것이지만, 시릴과 네스토리우스 사이에 긴
논쟁점이던 마리아 호칭을 데오토코스로 결정함으로써 시릴에게 상당한 명분을 가져다주었다. 결국 이 평화안은 한편으로는 시릴의
연합교리를 양성의 인정 하에 수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네스토리우스의 양성론을 한 인격 안에서의 연합 하에 받아들어 한 인격(one person)의 두성(two natures)연합으로 결론을 내린 셈이다.
3. 유티키스주의(Eutychianism)와 단성론(Monophysite)논쟁
콘스탄티노플의
수도원장 유티키스도 평화안을 달갑지 않게 생각했다. 네스토리우스가 양성의 구분을 강조하여 예수를 두 인격으로 구별하는 오류를
낳았음을 잘 알고 있었던 유티키스는 에베소 회의이후 네스토리우스주의자들을 적발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그는 네스토리우스의
이원론을 극복하기 위해 신성과 인성의 두 본성이 연합 후에 하나가 되었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448년 11월 유티키스는
콘스탄티노플 한 지방 회의에 소환을 받고 이단성에 대해 심문을 받았다.
레오의 기독론은 네스토리우스와 유티키스의 극단의 단성론(Monophysitism)을 피하면서 완전한 인간이며 완전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연합되어 있다고 가르쳤다. 레오는 연합 후에도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성과 완전한 신성을 갖고 있다는 점을 강하게 진술하여 그의 사상이 후에 칼케돈회의에서 작성한 신조의 중심 교리로 정착될 수 있었다.
네스토리우스의
양성론을 배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티키스의 단성론을 배격하는 방향에서 진행된 칼케돈 신조는 433년의 조문으로서, 시릴의
네스토리우스에게 보낸 두 번째 서신, 레오의 틈에서 핵심적인 부분을 따와 종합적으로 재합성한 것이다. 그 중에서 양성이 한 인격
안에서 혼합, 변함, 나뉨, 분리됨이 없이 연합되었다는 레오의 가르침은 칼케돈 신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칼케돈 신조는
다음 몇 가지 면에서 교리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칼케돈신조는 지금까지 논란이 되어왔던 아폴리나리우스주의,
네스토리우스주의, 그리고 유티키스주의와 단성론 문제를 해결했고, 둘째 예수 그리스도가 신성에 있어서는 성부와 동질이며 인성에
있어서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니케아 전통을 재확인했으며, 셋째 시릴과 네스토리우스 이후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디옥 학파
사이에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 온 동정녀 마리아를 “데오토코스”(God-bearer)로 확정함과 동시 양성의 연합 관계를
피함으로써 그 동안의 기독론의 문제를 정착시켰다는 데 있다. 이외에도 칼케돈 회의에서는 콘스탄티노플이 “각 지방회의로부터 항소를
취급할 수 있는 상급법원으로 결정”됨으로써 명실상부한 로마교회 다름의 서열을 굳힌 셈이다.
4. 칼케돈 이후 기독론 논쟁
칼케돈에서 정죄를 당한 네스토리우스주의자들과 유티키스를 따르는 단성론자들은 칼케돈 신조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들은 각각의 지방에서 지지기반을 넓혀 나갔다.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칼케돈 이후 칼케돈 정통주의자가 물러나고 단성론자가 감독으로 앉았고, 알렉산드리아에서도 감독이 살해되고 단성론자가
임명되었다. 심지어 안디옥에서도 461년 단성론자가 감독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황제 제노는 단성론자들과 모종의 타협을 시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단성론자들에 2년간이나 추방당한 후 돌아온 제노황제는 단성론자들과 칼케돈 주의자들과 분열을 피하기 위해
단성론자들과 칼케돈 신조를 통합시키려는 통합성(Edict of Reunion), 헤노티콘(Henotikon)을 482년에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제노황제 이후 동방황제들은 단성론을 옹호하는 선왕의 정책을 그대로 답습했다. 그러다 저스틴(Justine : 527-565) 황제가 들어서면서 반 칼케돈 쪽으로 방향이 선회되었다.
단성론
논쟁은 단의론(monothelitism)등장으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극단적인 단성론자들은 그리스도가 한 의지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콘스탄틴 포고나투스 황제는 단의론 논쟁으로 인한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사이의 적대 관계를 해결할
목적으로 681년 콘스탄티노플에 제 6차 에큐메니칼 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5차 에큐메니칼 회의를 재확인한 후 일의론
지도자인 셀기우스와 호노리우스를 정죄하였다.
5. 기독론 논쟁 요약
기독론과
관련된 모든 회의 핵심논제는 신성과 인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과연 어떤 관계로 존재하는가 하는 것이었고 각 회의는 이
문제에 대한 신조를 결정하였던 것이다. 니케아 회의에서는 그를 완전한 하나님이며 완전한 인간으로 규정하였는데 이 말은 그리스도가
인간의 조건을 모두 갖고 계신 것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기독론논쟁과 교회 회의 관계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1)
아폴로나리우스 주의는 “완전한 인성문제”와 관련하여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2) 네스토리우스는 431년 에베소 회의에서
그의 그리스도의 두 인격 교리(“the doctrine of Christ as two persons”)가 그리고 (3) 유티키스
단성교리(“the doctrine of one nature")가 451년 칼케톤 회의에서 거부되었다. (4) 단성론 논쟁이
553년 제 5차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칼케톤 신조를 재확인함으로써 해결되었고, (5) 그리스도의 일의론(monothelite)이
제 6차 콘스탄티노플 회의(680)에서 거부되었다.
제 5 부 초대교회 위대한 인물들
제 1 장 위대한 지도자들
“… 거듭 되풀이 하거니와 신앙의 일에 있어서 감독들이 기독교 황제들을 판단하는 것이 관례였고, 황제들이 감독들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암브로시우스Ambrosius
1. 탁월한 행정가 앰브로스
엠브로스(Ambrose
: 340-397)는 고울의 수도 트레베에서 약 340년에 출생했다. 그는 34살의 나이에 감독의 직을 맡아 충실하게 그 직을
감당하였다. 그는 감독으로 상상할 수 없는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 후 세상을 떠나던 397년까지 앰브로스는 서구 사회에 교권을
강화시켜 놓는데 탁월한 행정적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감독직에
오른 후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부유했던 자기의 전 재산을 교회와 사회를 위해 바친 일이다. 탁월한 행정가였던 앰브로스는
자신의 경험을 살려 감독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켜 나갔다. 그러면서도 성경과 신학연구 그리고 설교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의
금욕적인 삶과 개방된 삶과 사역 그리고 꾸준한 연구는 세속정치에서 차지한 그의 명성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를 위대한 인물로
만들어 주었다.
전투적인
가톨릭 입장에서 확고히 서 있었던 앰브로스는 아리우스주의자에 대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또한 앰브로스는 국가와 교회의
분리가 아니라 교회의 권위위에 국가를 올려놓았다. 즉 평신도인 황제는 한 사람의 기독교인으로서 감독 아래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엠브로스
감독과 황제가 직면한 또 하나의 사건은 데살로니가 학살 사건이었다. 이 일일 있은 이후 앰브로스와 황제와의 대결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앰브로스는 회개할 것을 촉구했으나 황제는 감독의 회개 요청을 묵살해 버렸다. 하지만 앰브로스는 주일날 예배를 드리러
오는 황제의 출입을 막고 회개를 촉구하였다. 몇 달 동안 황제가 예배에 참석할 수 없었다. 공중 앞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바닥에 엎드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황제의 참회가 있을 후에야 예배에 참석 시켰다.
2. 성경번역의 선구자 제롬
제롬(331-420)은
성경번역과 함께 서방 수도원제도를 도입함으로 서방교회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제롬의 넓은 식견과 빼어난 언어적 은사는 그로
하여금 동서고금을 통해 가장 빼어난 성경 번역가 중 하나가 되기에 충분한 자질을 갖추도록 하였다.
오리겐과
제롬과의 관계는 제롬의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중요한 제이다. 오리겐을 상당히 존경했던 제롬은 오리겐의 방법론을
상당히 차용했다. 이것은 특별히 오리겐에 대한 존경이 개단했던 초기에 더욱 두드러진다. 그러나 후기로 가면서 제롬은 오리겐에 대한
존경이 변함없었고 “오리겐의 정통주의적 생애를 언제나 선망하였으나 오리겐의 신학 사변에 대해서 학자적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오리겐의 주석에 대한 존경은 여전했지만 그의 신학적 사명에 회의를 느낀 제롬은 오리겐에 대한 정죄에 재빨리 가담하였다.
제롬의
재치 있는 풍자와 격렬한 논박은 결국 인격적인 약점들을 남겨 놓았다. 편파성, 편협한 마음, 불공정, 허영심 그리고 그의
박학다식에 흠을 낸 부주의성 등이 그것이다. 제롬의 학적 감식력이 종경 받다 보니 결국 그의 통렬했던 개성은 간과되어 왔다.
그러나 상당한 인격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성경 번역, 주석, 기타 학적 저술을 통해 서방 기독교계에 헤아릴 수 없는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이다.
3. 황금의 입 요한 크리소스톰
기독교사에에서
가장 위대한 설교자 요한 크리소스톰은 350년 경 안디옥에서 태어났다. 그는 초대교회가 낳은 가장 명설교가 이자 성경
강해자였다. 그의 설교는 매우 직설적이고 강렬하며 단순한 것이 그의 특징이며, 교리적이기 보다는 도덕적이고 영적이었다. 진정한
설교자의모습이 무엇인가를 말과 행동으로 균형있게 보여주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곧은 성품을 가진 크리소스톰의 설교는 당대의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비록 자신의 곧은 성품과 직설적인 외침 때문에 황실의 미움을 사 오늘날 터키의 북동쪽에서
고독한 유배생활을 하다 외로이 세상을 떠났지만 요한의 메시지는 그의 삶과 함께 역사 속에서 길이 기억되어 왔다.
제 2 장 어거스틴의 생애와 사상
“두 나라가 서로 섞여 있는 동안은 우리는 또한 바벨론의 평화를 위하여서도 봉사하여야 한다. 진실로 하나님의 백성은 믿음으로 바벨론에서의 자유해방을 이미 받는다. 그러나 아직도 잠시 바베론과 함께 순례하여야 한다.”
어거스틴Augustine
역사, 신학, 철학, 문화 등에서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어거스틴은 “고대철학과 기독교의 종합”을 만들어 낸 인물이었다.
1. 어거스틴의 성장 배경
어거스틴은
354년 11월 13일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지방 타가스테에서 아버지 패트릭(Patrick)과 어머니 모니카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거스틴은 17살 나던 해에 카르타고에서 유학생활을 하다 “당시의 일반적인 관습에 따라” 한 여인과 깊은 육체적 사랑에 빠지고
만다. 이때부터 그의 방탕한 생활을 시작되었고, 얼마 후 아들 아데오다투스(하나님의 선물)를 않았다. 그러나 방탕한 생활 이면에
진리에 대한 열망이 끊이지 않았다. 그의 철학적 사유를 일깨운 것은 버질과 키케로의 작품이었다.
373년
19살 나던 해 있었던 진리에 대한 이 체험은 어거스틴에게 두 번째 도약이었다. “오 진리여, 진리여 그 시간 이후로 내가
얼마나 불타는 마음으로 그대를 사모했던가?”라고 어거스틴 자신이 고백하듯이 부와 명성에 대한 욕구가 이 책으로 말미암아 진리에
대한 열정으로 바뀌었다.
2. 어거스틴의 사상적 배경
(1) 마니교
<고백록>에 어거스틴은 마니교, 플라톤주의, 그리고 기독교로 세단계의 개인 확신을 회고하고 있는데 이것들은 어거스틴의 성숙한 사고에 두드러진 요소들로 부각되었다. 373년 19세의 어거스틴은 동방에서 기원된 마니교에 심취하게 된다.
오랫동안 기독교의 중요한 라이벌 중교 중의 하나로서 당대의 진실 된 과학적 신학체계를 대표하였던 이 철학체계는 특별히 이념적인 면에서 젊은 지성인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다. 어거스틴이 마니교에 몰입한 원인은 악의 기원 문제 때문이었다. 어거스틴은 마니교가 악의 기원 문제를 시원하게 해결하여 주는 것처럼 느꼈다. 만일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왜 이 세상에는 악이 존재하는가? 이것은 어거스틴이 가지고 있던 악에 대한 질문이었다.
마니교도들은 하나님과 세상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악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한다.
악은 하나님과의 병존하는 본래적인 원리로서 하나님의 지배를 제한하는 독립적인 권능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에 맞서서 싸우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선한 하나님과 악한 하나님의 끊임없는 대립과 투쟁이라는 관점에서 악의 문제를 해결한다.
그들의 구원관 역시 영지주의 이원론과 비슷한데, 구원이란 인간 안에 있는 빛이라 부르는 영적인 것과 암흑이라 부르는 물질의 두 가지 요소를 다시 분리시켜 영혼이 순후한 빛, 혹은 광명의 영역으로 다시 귀환하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19살부터
29살까지 10년 동안 어거스틴이 마니교에 몰입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마니교가 갖고 있는 진리 체계가
이론적이고 논리적일 뿐만 아니라 실천적이면서도 실존적이었고, 둘째, 악한 원리에 의하여 사로잡힌 선의 요소들을 악한 원리에서
구하는 것이라는 마니교의 구원체계야 말로 참된 구속의 진리이며, 셋째, 진리란 선과 악 사이에 벌어지는 투쟁 속에 존재한다는
마리교의 가르침이야 말로 가장 설득력 있는 세계관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이 마니교를 떠나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천문학과 플라톤 사상이다.
(2) 신플라톤주의
어거스틴이 마니교를 청산한 것은 그의 나이 29살
때이다. 마니교를 떠나온 후 어거스틴은 아카데미의 회의주의에 잠시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잠시 회의주의에 빠진 어거스틴은 당시
널리 읽히던 신플라톤주의의 원조 플로티누스의 작품을 닥치는 대로 섭렵하기 시작했다. 신플라톤주의는 어거스틴이 마니교의 이원론과
아카데미의 회의주의를 동시에 극복하고 영적실재를 발겨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신플라톤주의
신관은 마니교의 신관과 본질적으로 달랐다. 신플라톤주의는 하나님을 절대적이시고 불변의 선으로 모든 변화를 초월하며, 존재하는
모든 것으로 근원으로 인식하였다. 악은 결코 독자적인 원리는 아니며 악이 선과 더불어 싸우는 것이 아니다. 악이란 근본적으로 다른
근원으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라 단지 궁극적 존재로부터 멀리 벗어남으로써 성립하는 것이다. 신플라톤주의에서 악은 하나의 부정적인 성질이며 실제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선의 결핍을 의미한다. 마침내 어거스틴이 진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은 신플라톤주의를 통해서이다.
(3) 어거스틴의 회심
그를 완전히 기독교로 전향하도록 한 것은 밀라노의 한 정원에서 읽었던 로마서 13장 13절에서 14절이다. 현대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가 어거스틴의 신학이 계시 신학이며 그 계시신학은 기독교 회심을 통해서 발현되었다고 지적하듯이 어거스틴의 회심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노리가르(Noregaard)와 홀(Holl)같은 전통주의자들 역시 여기에 동의한다.
비록
어거스틴의 사상에는 플라톤적 구조가 나타나는 것을 부인할 수 없지만, 어거스틴의 회심은 진정한 의미에서 인생, 사상, 신앙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거스틴이 회심이전에 신플라톤주의를 일차적 원리로 삼은 것이 사실이나 회심 후에는 기독교
신앙을 일차적 원리로, 신플라톤주의를 이차적 원리로 삼았다. 후에 어거스틴은 진정한 진리 탐구와 종교적 삶은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
앞에 헌신한 후에 생겨났다고 고백하고 있다.
386년에 기독교로 귀하하고 387년 부활절에 세례를 받았다. 수년 후 어거스틴은 히포 교회의 장로로 선출되었고 그 뒤에 395년 같은 도시의 감독으로 선출되었다. 430년 말 발급소리를 들으며 임종하였다.
3. 어거스틴 사상
(1) 어거스틴의 인식론
“나는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Credo ut intelligam)는 어거스틴의 사상은 “나는 모순되기 때문에 믿는다”(Credo quia bsurdum)는 터툴리안의 견해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성과 신앙을 조화시키려는 어거스틴의 노력은 세례 직후에 저술한 <독백>(Soliloquia), 394년 의
<참종교에 관하여>(De Vera Religione), 395년 6월에 완성한 <자유 의지론>(De
Libero Aritrio), 그리고 416년에 완성한 거작 <삼위일체론>(De Trinttate)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성이
영원한 것을 직관하는데 필수적일 만큼 중요하지만 영원한 것과는 본질적으로 비교될 수 없다. 그렇다면 이성보다 탁월하고 영원한
존재가 무엇인가? 그것이 궁극적인 인식 대상인 진리 자체이며 그 진리란 다름 아닌 하나님이다. 어거스틴은 이 진리가 바로 자신이
믿는 하나님 곧 자신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인식하였다.
신앙과 이성을 조화시키려는 노력은 삼위일체론에서도 나타난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믿어야 하며 그 후 그 믿음을 밝히는데 우리의 이성이 중요한 도구로 쓰임 받는다.
삼위일체의 영원성, 동등성, 통일성을 깨닫기 위해 우리는 먼저 믿어야 한다. 진리에 대한 탐구라는 것이 깨달았을 때에야 계속 탐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진리를 이해케하는 이성은 필수이다. “신앙은 찾고, 지성은 발견한다”는 어거스틴의 원리가 여기서 나온 것이다. 그가 삼위일체론을 끝맺음 하면서 “나는 내가 믿은 것을 나의 지성으로 보기 위하여 많이 희구하여 왔다”고 고백한 것도 그의 인식론 원리를 반영한 것이다.
우리가
간과해서 안 될 것은 어거스틴이 인식론적이고 철학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어거스틴의 일차적인
관심을 실천적인데 있었다. 따지고 보면 인식론적이고 철학적인 관심은 실천적인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2) 어거스틴의 교회관
어거스틴의
교회관은 도나티스트와의 논쟁을 통하여 정립되었다. 404년 어거스틴이 주도하여 열린 카르타고 회의에서는 호노리우스 황제가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줄 것을 공식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국가는 이 요청을 받아들여 도나투스파의 난폭한 행위에 대해 벌금을
부과하는 한편 이들의 교회당을 접수하기 시작했다.
411년
카르타고회의 이후 어거스틴과 도나투스파와의 대립을 더욱 심화되기 시작했다. 진실로 거룩한 자들만이 정당하고 효력있는 세례를 베풀
수 있으며 따라서 그들에 의한 세례가 무효하다는 도나투스파에 반대하여 어거스틴은 심지어 이단자들에 위해 베풀어진 세례도 교회가
인정해주어야 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베푸는 자의 거룩성에 상관없이 세례를 효력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세례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성례의 최고 집례자이며 따라서 만일 합당치 않는 사람이 집례하는 경우라도 그것은 여전히 참된 성례라고 주장함으로써 도나투스파의 재세례를 철저히 반박하였다. 교회관은 키프리안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성례관은 로마의 전통을 따르고 있었던 어거스틴으로서는 이 둘의 전통이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교회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 교회의 통일성을, 교회의 통일성을 보존하기 위해 교회의 순수성을 내세웠던 키프리안의 전통을 선별적으로 수용하였다. 한편으로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키프리안의 전통을 받아들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의 순수성이 보편적인 교회에만 속했다는 키프리안의 전통을 부분적으로 거부했던 것이다. 어거스틴이 볼 때 교회의 순수성은 보편적인 사도적 교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노바티안 그리고 어거스틴 당대의 도나투스파에도 있었다.
교회의 하나님도 사랑을 전제로 한다. 어거스틴에게 사랑은 교회 통일성의 기초이며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다. 신앙의 일치를 외치면서 사랑이 결여되었다면 그것은 곧 복음의 본질을 떠난 것이며 따라서 그런 교회는 교회의 생명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3) 어거스틴의 인간이해
동방이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관계로 논쟁을 벌이고 있던 시기에 서방에서는 인간의 의지와 하나님의 은총 문제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전형적인 서방의 인간이해가 좀 더 체계적으로 발전되기 시작한 것은 어거스틴에 와서이다. 어거스틴은 적수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을
통해 그의 은총론을 체계화하기 시작했다. 영국 아일랜드 수도승 출신이었던 펠라기우스는 400년에 로마로 와서 7, 8년간 머물면서
활동하였다.
그
즈음 펠라기우스는 두 가지 사건을 만난다. 첫 번째 사건은 펠라기우스가 인간의 책임을 약화시키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역설한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읽고 충격을 받은 사건이고, 두 번째 사건은 자신과 입당을 같이 하는 코엘레스티우스를 만난
사건이다. 이때부터 펠라기우스는 공개적으로 어거스틴 사상과 대립되는 교리를 만들어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펠라기우스 사상의 출발점은 하나님이 공의로우신 분이라는 사실과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이다. 펠리기우스는 그리스도인들이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모든 죄를 인간의 본성에 돌리는데 분개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하는 것은 은총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행조건이다. 그리고 인간이 행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요구하시지 않으며 모든 계명은 인간이 행할 수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에 따라 보응하시며 인간의 공로에 따라 심판하신다.
계명은 인간의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다. 인간에게 맡겨진 책임은 의지를 가지고 그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다. 인간이 그 계명을 실천한다고 해도 결국 그것을 행할 수 있는 그 가능성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영광을 받을 인간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펠라기우스는 이것을 가능성(posse), 의지(velle), 실천(esse)이라는 세 가지로 구별하여 순서를 나누고 있다.
펠라기우스는 원죄를 부인하고, 선과 악이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이라고 보았으며, 우리의 행위에 따라 선악이 결정된다고 믿었다. 아담의 죄는 아담에게만 국한되며 전 인류에게 전가 될 수 없다. 적어도 구원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만큼 하나님과 협력한다.
따라서 인류의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과 하나님의 행위가 인간 인간의 작품이다. 그리고 인간은 완전히 성숙한 상태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선악을 행할 능력을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난다. 유아는 죄 없이 무죄한 상태서 태어나기 때문에 타락이전의 아담의 상태와
같다. 인간은 태어날 때 원죄를 타고나는 것이 아니며 다만 선행과 악행 가능성 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므로 인간의 선행과 악행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인간자신이 져야 한다.
410년
고트족에 의하여 로마가 멸망당한 후에 펠라기우스는 411년에 북아프리카 카르타고로 가서 자신의 가르침을 전파하면서 그곳에서
어거스틴과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다음해인 412년 카르타고에서 회의가 열려 펠라기우스의 제자 콜엘레스티우스를 정죄했다. 그
이유는 1) 아담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2) 아담의 죄는 자신에게만 영향을 미치지 인간 전체에 미치지는 않는다.
3) 복음과 마찬가지로 율법도 하늘나라로 인도한다. 4) 그리스도가 오시기 이전에 죄 없는 인간이 있었다. 5) 새로 태어난
유아는 타락 이전의 아담과 같은 상태에 있다. 6) 아담의 타락으로 모든 인간이 죽는 것도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맘아 모든 인간이
다시 살아나는 것도 아니다. 세례를 받지 않은 유아들도 영생을 소유한다. 세례를 받은 부자라도 자기의 전 재산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어떤 선행에 의해서도 공로를 얻지 못하며 따라서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다.
이와 같은 선행을 통한 공로 사상은 어거스틴의 믿음을 통한 은총론과 대립된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모든 자비가 신앙에서 비롯되었다고 확신했다.
펠라기우스 인간론이 자유의지론에서 출발했다면 어거스틴의 인간론은 인간의 전적부패와 불가항력적 은총론에서 출발하였다. 어거스틴의 자유이해 역시 그의 은총론에 기초한다. 인간의 자유는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주어진다.
아담의 원죄를 전가 받은 인간이 그리스도의 은총 없이 율법으로 구원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의 완악함으로 주어진 율법은 하나님의 은총을 전제할 때만이 가치 있다. 어거스틴에게 은총 없는 율법은 의미가 없으며, 은총 없는 율법은 성취될 수도 없다. 이런 어거스틴의 가르침은 한마디로 종교개혁자들이 외쳤던 sola gratia로 집약할 수 있다.
우리는
성령의 은사를 받고 사랑으로 선행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받기 위하여 먼저 믿도록 명령을 받는다. 이 하나님의 부르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며 따라서 펠라기우스가 주장하듯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통해 스스로가 거부하거나 수용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불가항력적 은혜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는 어거스틴의 은총론은 자연히 예정론을 따른다. 어거스틴은 예정받은 자들이 아직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미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말한다. 예정 자체가 신적인 기원을 같은 다면 그것은 불변적이다. 하나님의 은총이 거역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 선물이듯이 예정 역시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주권적 영역이다. 따라서 어거스틴은 이중예정론과 성도의 견인을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종교개혁자들에 와서 어거스틴의 은총론이 재확인 되었다. 또한 어거스틴의 역사관 역시 중세와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정통적인 기독교 사관으로 정착되었다.
4. 어거스틴의 역사이해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생명을 상실할 때 교회가 속해 있는 공동체를 흩으시고 개혁하셨다. 한편으로 로마의 멸망은 문화적인 책임을 다하지 못한
기독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따라서 인간 편에서 볼 때 로마 멸망의 일차적인 책임은 문화적 책임을 다하지 못한 로마인들에게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역사 속에서 계시면서 역사를 초월해 계신 하나님 편에서 이해할 때, 그것은 또한 로마 제국의 주변의
수많은 이방 민족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
하나님의 도성과 인간의 도성이라는 모티프를 통해 결국 어거스틴이 제시하고자 하는 역사이해는 창조이후 인간의 역사가 하나이 종말을 향해 달려간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이 제시한 역사이해 즉, 목적론적이 직선적인 역사관은 당대까지 지배해온 헬라의 순환논적 역사이해를 넘어 성서적 견해를 따라 역사에는 처음과 절정이 있으며 시작과 끝이 있고 시간 속에서 한 목적을 향해 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역사란 한 편의로 개인의 실존 속에 존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개인의 실존을 넘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어거스틴은,
개인의 실존 속에서 또 그 실존을 넘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임을 인식하면서도 각 개인이 역사를 구성하고 역사를
형성하여 가는 역사의 주체자들이라는 인식을 동시에 제공함으로써, 하나님 문화변혁의 동참자인 인간이 문화 명령을 수동적으로 수행하는
무기력한 존재가 아니라 사회와 역사 속에서 적극적인 문화적 사명을 부여받은 존재임을 일깨워주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인간의 자율성을 동시에 긍정하는 어거스틴의 독특한 역사해석은 마치 이성과 신앙의 조화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논리처럼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함께 어울리는 새로운 역사지평을 열어주었다.
이런 이유에서 역사가들은 어거스틴이야 말로 최초의 역사철학자 혹은 역사신학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이 성장함에 따라 인간의 도성이 쇠잔해 간다는 개념을 제시함으로써 기독교 신앙과 독립적인 역사철학의 한계를 설정하여 기독교 역사철학이란 결국 역사신학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인상을 남겨 주었다.
5. 요약 및 평가
이레니우스 소아시아 신학, 알렉산드리아 신학, 라틴 신학이라는
거대한 사상의 물줄기가 어거스틴에 와서 하나로 종합되어 서양의 중세와 근대의 사상적 맥을 형성하였다. 중세 사상, 종교개혁도
어거스틴이 없었다면 역사에 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실존주의, 역사신학, 역사철학, 개인주의, 역사관, 문화관, 그리고 그 외
수많은 현대사조도 사상적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어거스틴에 귀착된다.
그렇게 그의 사상이 설득력 있고 영향력 있었던 것은, 알렉산드리아 전통과 라틴의 전통을 대립적인 구조 속에서 이해하지 않고 하나로 종합시켜 두 개의 상이한 전통을 하나의 전통으로 조화시켰기 때문이다.
제 6 부 중세로의 준비
제 1 장 수도원 제도의 발달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마태복음 19:21
콘스탄틴
대제가 313년 밀란의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한 후 교회의 영적 생명력은 급격히 저하되기 시작하였다. 기독교는 박해 받는
종교에서 군림하는 종교로 탈바꿈했으며, 자연히 종교의 중심도 변천하기 시작하였다. 영적인 측면이 간과되고 예전적이고 외형적인
측면이 종교의 중심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광의적인 의미에서 수도원 운동은 콘스탄틴 대제 이후 나타난 영적 쇠퇴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한 일종의 갱신운동이었다.
1. 최초의 수도승들
초기 수도사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애굽 출신의 곱트인 성 안토니(256-356)였다. 안토니는 마태복음 19장 21절을 실천하고 그 후 안토니는 인간사회로부터 점점 멀리 떨어져 사회와 완전히 동떨어진 사막에서 마귀와 투쟁하며 금욕주의 삶을 시작했다.
초기 수도승은 후기에 찾아 볼 수 있는 공동체적 성격보다는 은자적인 성격이 강해 독립적으로 혹은 소수의 사람들이 모여 집단을 형성하며 수도했다.
2. 파코미우스 수도원
파코미우스
수도원은 지극히 개인주의적 수도생활에 대한 반동으로 태동된 것이다. 이 수도원은 나일강변의 타벤니시(Tabennisi)에
안토니와 동시대 사람 파코미우스(285-346)에 의해 설립되었다. 파코미우스와 이 공동체의 특징은 극단적인 금욕주의에
반대하였다. 파코미우스는 중앙 수도원에서 여러 수도원을 다스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수도원 공동체는 일종의 운영규칙들이
발전되었고, 4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파코미우스 제도가 체계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수도원
운동이 2, 3세대로 내려가는 동안, 금욕주의적 생활은 자체 내에 특수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 점차 명백해졌다. 4,
5세기에 접어들면서 수도원 제도는 보편화 되었고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팔레스틴 및 시리아에 두드러지게 많았다. 아마도 그것은
수도원 제도 이전에 금욕주의 성격이 강했던 지역이었기 때문인 듯하다.
3. 대 바실과 동방수도원
바실은
고립적인 고행생활보다는 공동체적 수도생활을 강력히 선호하였다. 수도사들이 단순히 개인의 구원만을 추구하고 사회적인 목적을
등한시한다면 기독교의 삶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독립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반문화주의적인 당대의 수도원 운동을 보면서 바실은 금욕주의
운동이 개인주의적이고 분리주의적인 경향을 벗어나 사회적 목적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실은
지나친 개인적인 경건을 반대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명령들 가운데 다수가 남과 함께 살 때 비로소 실현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고립된 금욕 생활보다는 공동체 생활을 강력히 지지하였다. 그는 또한 수도승들이 “거룩함”을 경쟁하기보다 서로를 도와야
한다고 가르쳤다. 바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나눔의 실천을 통해서 구현되고 구체화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바실의 수도원 이상은 그의 가정배경, 교육 배경 그리고 훌륭한 동료들과 교제를 통하여 성숙되었다.
바실은 이 세상을 전적으로 타부시 하지 않았다. 심지어 후에 어거스틴과 칼빈처럼 당대의 이교문학의 유용성을 인정하고 그것이 표현상의 기교와 아름다움을 제공해 준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약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바실의 수도원 성격이 파코미우스 수도원 공동체와 달라 교회와 수도원 공동체의 이상을
연결하려고 하기는 하였지만 그에게도 이원론적인 측면이 있었다. 바실은 영혼에 비해 육체를 낮은 차원으로 이해했고 당대의 조류에
따라 “육체를 영혼의 감옥”으로 생각하는 경향도 있었다. 게다가 바실은 인간의 노력을 통해 그리스도의 법을 완전히 따르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한 시대를 살았던 바실 역시 그 시대의 산물이며 우리는 일차적으로 그를 그 시대의 역사적 정황 속에서 평가해야
할 것이다.
4. 서방 수도원 발흥
서방에서
수도원 운동이 발흥한 것은 투어스 마르틴(Martin of Torus). 제롬 그리고 요한 카씨안(John Cassian)에
의해서 이다. 이들에 의해 시작된 서방 수도원 운동이 베네딕트 수도원과 켈트 수도원에 와서 더욱 체계화 되었다.
서방
수도원 운동의 개척자 중에 또 한 사람은 유세비우스 히에로니무스 소프로니우스(Eusebius Hieronimus
Sophronius)이다. 그는 제롬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다. 제롬에 와서 서방의 수도원 제도는 결코 낯선
제도가 아니었으며 하나의 기독교 이상으로 정착되기 시작했다.
밀란의 엠브로즈는 수도원 제도를 더욱 확대시켰고, 이탈리아 베르셀리의 감독 유세비우스는 자신의 사원에 속한 성직자들이 규칙에 따라 살도록 요구했고 어거스틴은 성직자 가족단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 수도원 이상을 실현했다.
서방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수도원 공동체는 역시 540년경에 출현한 베네딕트 수도원 이었다. 또 하나의 수도원은 5세기 말엽에 시작된 켈트의 수도원 운동이다 .
5. 요 약
영적 갱생의 필요성에 따라 발흥한 수도원 운동은 각 시대에 따라 모습이 약간씩 달랐음을 보여준다.
수도원 운동이 영적 쇠퇴에 대한 반동이었고 교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 수도원 운동은 교회에 적지 않은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수도원 운동으로 교회 안에 율법주의가 침투해
들어왔으며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간과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수도사들은 세상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피하는 결과를 가져왔는데 그것은 수도사의 첫째 목적이 그 자신의 구원에 있었지 다른 사람들의 구원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수도원 공동체는 자신을 철저하게 헌신하려는 무리들과 안주하려는 무리 두 종류로 처음부터 대별되었다.
제2장 교황제도의 발달
“로마의 감독은 모든 감독들 가운데 최고이다.”
Leo the Great
교회로서 베드로의 사도직을 계승한 정통성 있는 교회라는 로마교회가 자신들의 권위를 주장하기 위해 근거로 삼는 것은 마태복음 16장 17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이다.
1. 로마교회의 부상
로마교회에는 신경이 발달하였고 이단들과 투쟁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다. 사도들이 남긴 전통의 수호자라는 자신들의 자각은 대단했으니 약 160년경에 베드로와 바울을 기념하여 기념비를 그곳에 세운 것도 그 때문이다.
로마교회의 권위의 우월성에 대한 주장은 로마의 감독 줄리우스(Julius)가 341년에 있었던 안디옥 회의에서 아다나시우스와 마르셀루스(Marcellus)의 복권을 추구하는 서신에도 나타난다.
마태복음 16장에 근거한 로마교회의 우월성이 신학적 성경적으로 정립된 것은 그 후 382년 다마수스 때부터이다. 이때부터 로마교회는 상당히 권위적인 교구임을 주장하게 되었고 이것이 어느 정도 인정받기 시작하였다.
2. 세르디카 서방교회
세르디카(Serdica)
서방회의에서는 로마교구를 다른 교구의 상급 법원으로 지정하여 로마교구의 우월성을 합법화시켜 주었다. 세르디카 회의 법령에서는
밝히지 않고 자신들의 법령의 출처를 니케아회의에서 제정된 법령들과 합치시킴으로 말미암아 5세기에 이르러서는 세르디카 법령들이
니케아 회의의 결과인양 인용하는 경우도 생기게 되었다. 세르디카 법령들을 니케아 회의 법령들과 동등하게 다루게 된 이면에는
로마교회의 위치가 니케아 회의의 위치와 버금간다는 입장이 내포되어 있었다.
다마수스
외에 로마의 우월권을 확립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은 밀란의 감독 앰브로스이다. “다마수스 당시 로마 관습과 보조를
맞추고자 하는 정책은 일정 한도까지 밀란의 앰브로스에 의해 촉진되었다.” 엠브로스나 어거스틴과 같은 당대의 감독들을 아프리카에서
로마의 예식이 그대로 행해지고 관습화되고 있는 것에 대해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하나의 관례처럼 일반화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영향력이 우주적으로 모든 지역에까지 균형 있게 미친 것은 아니었다.
3. 교황제도의 확립
로마의 영향력은 레오 1세(Leo I : 440-461)가 로마교회 감독으로 재임하는 동안에 더욱 강화되었다. 레오가 로마 감독의 지위를 강화시킨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는 칼케돈회의이다. 여기서 레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450년에 칼케돈에서 열린 이 회의에서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혼합, 변한, 나뉨, 그리고 분리됨이 없이 연합되었다는 내용의 레오의 서신이 낭독되자 그곳에 모인 회원들은 갈채를 보내며 탄성을 보냈다. 그러나 칼케돈회의 에서는 제 28조항에 “새 로마” 콘스탄티노플이 교회 문제에 있어서 로마와 동등한 권한을 가져야하며 로마 다음가는 두 번째 지위를 가져야 된다고 명문화하였다.
칼케돈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레오는 로마교회의 우월성을 양보하지 않았다. 레오는 선대 감독들로부터 물려받은 자료들을 이용하여 로마 교회의 베드로적 권위를 구체화하고, 일관성 있고 권위 있는 로마교회의 최고성 교리를 만들었다.
레오
이후 영향력 있는 교황은 겔라시우스 1세(492-496)였다. 겔라시우스 1세는 세속의 최고의 권한자는 황제이고 교회의 최고
권한자는 교황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세속적인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황제가 해결의 열쇠가 당연히 로마의 교황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 시기까지 로마교회는 거룩한 교구(the Holy See)로서 자리를 완전히 굳히게 되었고 다른 교구들도 자의든 타의든 이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것을 교황제도는 역사에 정착되었다.
제 3 장 초대교회 세계선교 초석들
지금까지 주저해 왔다. 나의 글이 다른 사람의 글만 못하기 때문에 인간들의 혀의 판단 아래 떨어질까 나는 두려웠다.
패트릭Patrick
4세기에 접어들면서 복음은 로마주변의 야만족에게까지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1. 아일랜드 선교사 패트릭
패트릭은
서부 영국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패트릭은 아일랜드의 감독과 사도로 임명되었다. 패트릭은 아일랜드의 삶의 정황을 고려하여
지방 분권적 교회를 세웠다. 이 교회의 핵심은 대 수도원장들의 권력을 쥔, 반 은둔적 수도원제도였다. 패트릭은 아일랜드에
광범위하게 여행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지방의 왕들과 속 왕들(sub-kings)에게 의탁하여 보호를 받았다. 아일랜드 귀족의
자제들의 그를 수행한 경우도 빈번하였다. 그는 사회의 모든 계급으로부터 많은 개종자를 얻었던 것이다.
2. 스코틀랜드 선교사 콜럼바
일찍이 패트릭과 콜럼바가 없었다면 유럽 선교는 방향이 달라졌을 것이다. 아일랜드를 넘어 스코틀랜드에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 콜러바(521-597)는 “분쟁과 싸움이 얼룩진 사회”속에서 자랐다.
스코틀랜드 서부 해역에 있는 아이오나(Iona)라는 작은 섬에 정착한 콜럼바는 동료들과 함께 이교도적 스코트인들과 픽트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전진 기지를 세웠다.
콜럼바의
영향력 아래 563년부터 597년 까지 35년 동안 아이오나는 스코틀랜드와 북부 잉글랜드에 대한 복음 전파의 핵심지가 되었다.
콜럼바의 선교는 단순한 기독교인에로의 회심에만 초점이 맞추어 지지 않았다. 당시 종족문제가 선교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을 간파한
콜럼바는 575년에 아일랜드를 방문하여 데리 근처의 드럼시애트에서 열린 아일랜드 종족들의 국민 의회에 참석하여 고질적인 문제였던
고왕과 음영시인 들과의 분쟁을 중재하고 나섰다. 이러한 요인들에 힘입어 콜럼바와 그의 수도승은 스코틀랜드에 복음을 심고 그와 함께
보다 큰 질서와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절도 있는 수도원적 삶, 문제해결에 대한 탁월함 그리고 경건하고 실천적인 삶은 콜럼바의
영향력을 더욱 확산시켜 주었다.
직설적이고 단순한 성경적인 메시지를 전하며 선교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헌신적 삶을 통해 실천했던 콜럼바는 사랑하는 동료 수도승들에게 작별의 축복을 한 후 597년 6월 9일, 주일날 이른 시각에 평화로이 잠들었다.
제4장 결 론
지금까지 초대교회사 연구를 통해 발견한 몇 가지 두드러진 특징을 지적하고 초대교회사 우리에게 주는 역사적인 의미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모든 시대의 역사가 그렇듯이 초대교회 역사 역시 이전 시대와의 단절 속에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연속성에서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둘째, 초대교회의 역사에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또 하나가 도전과 응전의 대결구도 속에서 신학이 발전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셋째, 초대 교회사를 총체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사상적 주제는 그리스도 또는 다른 신학적 용어를 빌린다면 로고스라 할 수 있다.
넷째,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정통신앙을 정립시켜 교회의 틀을 형성할 수 있는 기초를 만드셨다는 사실이다.
다섯째, 알렉산드리아 전통, 라틴 전통, 그리고 소아시아 전통이 어거스틴에게 와서 종합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여섯째, 종말론의 변천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그들이 믿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사실은 절대 절망을 초극할 수 있게 만드는 절대 희망이 있다.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 교회의 역사에 주권적으로 개입하여 오셨다는 사실이다.
성경의 역사 속에서, 초대교회의 역사 속에서 개입하신 그 주권적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의 역사 속에서도 개입하실 것을 믿는다.
2. 중세사
1) 과도기 (AD 590~800년, 선교 발달기) - 신성로마제국 탄생까지
특징 - 교황권의 강화와 교회의 갱신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영국, 프랑스, 동일 등지에 선교사가 파송되었다.
모하메드의 출현으로 기독교가 이슬람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니케아 신조가 작성되었다.
2) 로마교회 성장기 (AD 800~1073년, 동서 교회 분리기) - 그렉고리우스 7세(힐데브란트)의 즉위까지
특징 - 신성로마제국이 건설되었다. 교황권이 강화 되었으며 이에 따라 교황권이 부패하게 되었다.
교황의 축첩 정치가 이루어졌다.
동서교회가 분리되었다.
3) 로마교회 전성기 (AD 1073~1303년, 기독교 실생활기) - 보니페이스 8세 사망까지
특징 - 8차에 걸친 십자군 운동이 일어났다. 종교재판과 고해성사 제도가 실시되었다.
탁발교단이 생겨났고 스콜라 철학이 발달되었으며 신비주의가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카놋사의 굴욕사건이 발생하였다.
4) 로마교회 쇠퇴기 (AD 1303~1517년, 개혁전초기) 루터의 종교개혁까지
특징 - 교회의 아비뇽유수로 교황권이 실추되었다 문예부흥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면죄부가 발행되었고 국가주의가 발생하였으며 스콜라신학이 붕괴하였다.
종교 개혁직전에 개혁자들의 활발한 활동이 있어났고 종교개혁의 토양과 분위가 조성되었다.
동로마제국이 멸망했다.
3. 근세사
1) 종교개혁시대 (1517~1648년, 신교 발생기) - 웨스트팔리아 조약까지
특징 - 루터에 의해 제창된 개혁운동이 지속되어 성공하게 되었다. 종교 개혁에 대항한 가톨릭의 반동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다
개혁신앙의 확산으로 곳곳에서 신교와 구교의 갈등과 대립이 일어났다.
칼빈의 종교개혁의 신학적 뒷바침이 이루어졌고 신앙고백이 활발해졌으며 문서화 되었다.
성경이 번역이 활성화 되었다. 예수회가 조직되었고 트렌트 종교회의가 소집 되었으며 프랑스에는 위그노 사건이 발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