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이라면 반드시 암송해야 할 10가지 성경구절'(10 Bible verses every Christian should know by heart)

영국 교계 유력지 크리스천투데이 마크 우즈(Mark Woods) 객원 에디터는 4일(현지시간) 게재한
'기독교인이라면 반드시 암송해야 할 10가지 성경구절'(10 Bible verses every Christian should know by heart)란 제목의 칼럼을 통해, 성경 구절을 암송해야 하는 이유와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10가지 필수 암송 구절을 소개했다.

우즈는 "어린 시절부터 성경의 구절들이 늘 떠오를 수 있도록 공부해야 한다"라며 암기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는 "암기는 정말 특별한 일"이며 "당연하게 그 과정을 받아들이지만 암기가 되는 과정을 생각해보면 정말 놀라운 일이다. 성 어거스틴은 그의 고백론에 암기의 놀라운 점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최근 신경과학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영국의 세 명의 연구가들은 암기를 통해 정보가 두뇌에 저장되는 그 비밀을 발견했다"고 설명했다.

우즈는 "암송에 관한 많은 논쟁이 있다"며 "구글(google)이 있는데 암송할 필요가 있겠는가? 우리가 찾아 볼 수 있는데 왜 굳이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가? 두뇌의 정보처리 능력을 다른 곳에 사용할 수 있는데 단순 사실을 저장하는 일에 낭비하는가?"라고 반문하면서 "그러나 컴퓨터가 많은 것을 해 줄 수 있지만 우리를 대신해서 생각해 줄 수 없으며 특히 우리가 하나님께 꼭 들어야 하는 말씀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지적했다.

그는 "나는 어린 시절 주일 학교를 다니면서 성경 구절을 암송했다. 그것이 주일학교 교육 과정의 핵심( key)중 하나였다. 반복해서 구절을 읽고 암송하면서 얼마나 많은 성경 구절이 내 마음에 심겨졌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끝으로 마크 우즈는 "이것이 어린 시절부터 성경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고 굳게 믿는 이유이다. 내가 가장 필요할 때마다 성경 구절들을 쉽게 떠오르고 찾을 수 있다"라면서 "성경 구절들이 내 마음에 심겨질 수 있도록 도와주신 주일 학교 선생님께 감사하다"며 성경 암송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 했다.

"우리가 어떤 성경 구절을 가르쳐야 하는가?"

다음은 마크 우즈가 제안한 '기독교인이라면 반드시 외워야 할 10가지 필수 성경구절'이다.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2.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행하실 것임이라 반드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 하고(신31:6)

3.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시119:103)

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5.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獨生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6.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7.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

8.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3:15)

9.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5-16)

10.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요일3:1)


학개


학개(Haggai)

1. 명칭

파사의 고레스왕이 주전 539년에 바벨론을 정복하여 파사 제국에 통합하고 정복한 모든 민족에게는 회유 정책을 썼다.
그리하여 그들의 고유의 종교를 믿는것과 고국에 돌아가는 것을 허락 하였다.
이 정책은 곧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큰 변화를 가져 왔다.
그리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던 자들이 큰 희망을 안고 돌아왔다.
그러나 어려 움이 많았다.
15년간이나 성전 재건을 힘썼으나 결과는 실망적이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즉 다리오왕 제2년(520년)에 두 위대한 예언자가 나타났다.
바로 학개스가랴이다.
에스라서에 의하면(스 5:1, 스 6:14)이 두 예언자의 활동의 결과로 유대인들은 성전을 재건하고 번영하였다.

에스라 5:1
선지자들 곧 선지자 학개잇도의 손자 스가랴가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름을 받들어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예언하였더니.

에스라 6:14-15

유다 사람의 장로들이 선지자 학개잇도의 손자 스가랴의 권면함으로 인하여 전 건축할 일이 형통한지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명령과 바사고레스다리오아닥사스다의 조서를 좇아 전을 건축하며 필역하되.
다리오
왕 육년 아달월 삼일에 전을 필역하니라

성전 재건 시작일 : 6월 1일
성전 재건 재개 : 6월 24일(학개 1:15) 다리오 왕 2년 6월 24일
성전 재건 완성 : 9월 24일

학개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길이 없다.
짐작컨대 포로시기에 바벨론에서 출생하여 살다가 팔레스틴으로 귀환한 사람인것 같다.
만일 이 가정이 옳다면 그는 바벨론에 있을 때 다니엘과 아는 사이였을 것이다.


7월 24일(토)
자기의 소위를 살펴보라(학개 1:5)


그러므로 이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 볼찌니라.

 ♦ 7월 24(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학개 1:1∼15
♦ 묵상을 위한 주제 : 자기의 소위를 살펴보라(5절)
♦ 성구 : 그러므로 이제 나 만군(萬軍)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自己)의 소위(所爲)를 살펴볼찌니라.  

선지자 “학개”라는 이름은 “축제” “절기”라고 합니다.
B.C. 586년에 유다 왕국과 예루살렘 성전은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망하고 말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끌려갔습니다. 시편 137편은 바벨론 포로생활을 노래한 것입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시편 137:1∼4)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을 때 비로써 예루살렘에서 자유롭게 제사를 드릴 수 있었던 것이 큰 즐거움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벨론 제국은 바사(페르시아)제국에게 패하고 고레스 왕은 즉위한 후 유다 백성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BC. 538년).

스룹바벨의 인도를 받아 약 50년 만에 5만 명이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감격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시편 126:1)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감격 속에 훼파된 성전을 다시 세우시기 시작했습니다(BC 536년). 성전이 다시 세워질 때 모두 기쁨의 함성을 질렀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찾아와서 자신들도 성전 건축에 동참하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스룹바벨과 지도자들은 그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사마리아는 아시리아 제국의 혼혈 정책으로 이미 이방인의 피가 섞였을 뿐만 아니라, 그리심 산에 그들의 성전을 만들어 놓고 제사를 드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사마리아 사람들은 관리들에게 뇌물을 건네기도 하고, 투서를 보내기도 하며, 성전 건축을 집요하게 방해했습니다. 그래서 성전 건축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유다 백성들도 건축하다가 만 성전이 방치된 것을 당연하게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16년이 흘러 BC 520년이 되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선지자가 학개입니다.

1:1∼6, 성전 재건하는 일을 태만히 하던 백성들에 대한 질책
1:7∼11, 성전 재건에 대한 격려
1:12∼15, 성전 재건을 다시 시작하는 유다 백성들에 대한 증거

처음 사랑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던 그 날의 감격과 기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죄로 인하여 완전히 무너진 나를 일으켜 세우시고 믿음의 길을 걷게 하신 주님을 찬양하며 그 은혜를 증거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므로 남은 생애가 복되고 보람된 날이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 찬양 /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7월 26일(월)
평강을 주리라(학개 2:9)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오늘 나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이 필요한 곳이 어디인가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 7월 26(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학개 2:1∼23
♦ 묵상을 위한 주제 : 평강을 주리라(9절)
♦ 성구 : 이 전(殿)의 나중 영광(榮光)이 이전(以前) 영광(榮光)보다 크리라 만군(萬軍)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平康)을 주리라 만군(萬軍)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의 감격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성전 재건을 멈추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학개는 성전 재건에 힘쓰라고 권면합니다(7월 21일). 성전을 짓기 시작한 날이 6월 24일이었으므로 27일이 지나는 마침 장막절의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제1의 성전(솔로몬 성전)을 직접 목격했던 사람들에게 제2의 성전(스룹바벨 성전)은 너무 초라하였기에 실망하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3절).

당시의 상황을 에스라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에스라 3:12∼13).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으나 여러 사람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르니. 백성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간하지 못하였더라.”  

믿음의 사람은 성전의 겉모양이 아니라 성전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일지라도 그곳에 모일 수 없는 현실은 성전이 아니라 초라한 건물입니다. 반면에 아무리 초라하고 작은 성전일지라도 그 안에서 날마다 찬송과 말씀과 기도가 끊임이 없다면 그곳은 거룩한 처소가 될 것입니다.

성전이란 주님이 늘 함께 하시는 곳입니다.
외부의 압력에 의해 모이지 않는 곳에 주님이 함께 하실까요?
그러나 외부의 압력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예배가 생명이라고 확신하며 순교자적 믿음으로 모여서 예배할 때 주님은 그곳에 함께 하실 것입니다.

비록 초라하게 보이는 제2의 성전일지라도 솔로몬의 성전보다 더 찬란하게 될 수 있으므로 멈추지 말고 성전 재건을 계속해야 한다고 격려합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내 안의 성전을 지금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지요?
나를 주의 자녀로 삼으신 하나님의 사랑과 언약에 따라 오늘도 먼저 안에서 무너지는 성전을 새롭게 세워가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하며 축복합니다.

♪ 찬양 / 나 어느 곳에 있든지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학개 2:9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아멘

솔로몬 성전을 목격했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생활을 마치고 다시 건축하는 스룹바벨 성전이 너무 초라하기 때문에 실망하였다.
이때 하나님은 선지자 학개에게 이르시기를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는 말씀을 전한다.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 엩텐 샬롬 / I give peace!

이곳 : 초라한 성전(솔로몬 성전과 비교 할 때)

평강(샬롬. shâlôwm) שָׁלוֹם
온전한, 충분한, 안전함, 건전함, 평화, 일치, 조화, 친교 

평강이 필요한 곳이 어디인가?


학개 2:4

그러나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찌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찌어다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찌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굳세게 하라!
하자크(châzaq) חָזַק

1. 단단히 매다   2. 굳게 유지하다

학개 2:7b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학개 2:12

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 국에나 포도주에나 기름에나 다른 식물에 닿았으면
그것이 성물이 되겠느냐 하라 학개가 물으매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아니니라. 

학개 2:13

학개가 가로되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여진 자가 만일 그것들 중에 하나를 만지면 그것이 부정하겠느냐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부정하겠느니라. 

근묵자흑 근주자적 거필택린 취필유덕
近墨者黑 近朱者赤 居必擇隣 就必有德

먹을 가까이 하는 이는 검어질 것이요, 인주를 가까이 하는 자는 붉어질 것이니
살 곳을 택할 때는 이웃을 살펴야 하며, 나아갈 때는 덕이 있는 이를 향하여야 한다.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잠언 13:20)

영어 속담으로는 "If you lie down with dogs, you get up with fleas"
개와 함께 뒹굴면 벼룩을 덮어쓸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학개 2:14

이에 학개가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에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 이 나라가 그러하고 그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고
그들이 거기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 


평강이란?
거룩을 회복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거룩을 회복할 수 있는 곳은
재건하는 성전이다!

학개 2:19b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디모데전서 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오늘의 기도

거룩한 백성의 삶에 참여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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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강 학개 1: 1- 6
너희 행위를 살피라

예루살렘에 성전을 최초로 지은 사람 이름이 누구이지요?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을 제1성전이라고 합니다.
이 성전은 바벨론에 의해서 무너졌습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백성들이 재건한 성전을 제2의 성전 또는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활동하셨을 때에 스룹바벨 성전을 헤롯 대왕이 수리를 하였으므로 헤롯 성전이라고 합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는 여건이 좋았어요 아버지 다윗이 막대한 부를 축적해 놓고 아들이 그 조건 아래서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러나스룹바벨 성전은 바벨론 포로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들이 지었기 때문에 어려움 속에서 재건되었습니다.
성전 건축이 계속 된 것이 아니었스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의 정치적 모략에 의해서 멈출 때도 있었습니다
 
외국에 있는 예배당들 보면 백년 이상 건축해온 예배당이 있었습니다.
수 백년을 건축해온 예배당도 있습니다.
스페인에 가면 바로셀로나에 사그라다 파밀리아라고 하는 성 가족 교회가 그 좋은 예라고 하겠습니다.
가우디라는 건축가가에 의해서 100년이 넘도록 지금도 짓고 있습니다.  

성전 건축을 하다가 어려움을 겪자 중단하기도 하거든요.
그 때 성전 건축을 해야 될 이유를 깨우친 선지자가 학개입니다.

학개 선지자와 더불어 성전 재건을 깨우친 선지자는 스가랴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일치하는 부분도 있고 다른 부분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가장 참담한 기억이 있다고 하면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경험일 것입니다.
 
바벨론이 여러차레 침략하면서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 갔는데 최종적으로 예루살렘이 망하게 된 것은 기원전 586년이었습니다.
그들이 바벨론에서부터 귀환하게 된 것은 바사 왕 고레스의 칙령에 의해서 주전 538년경에 돌아오게 됩니다.
 
포로로 잡혀간지 70여년만에 돌아옵니다.

돌아 온 시간이 그만큼의 세월은 길다고 하면 길고 짧다고 하면 짧습니다 그만큼의 포로로 잡혀가 있다  인생의 상당한 기간을 전반 이상을 포로 생활을 한다는 것은 씁씁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이 고레스 왕의 칙령에 의해서 돌아와서 예배를 회복해야 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성전을 지으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 제단을 만들고 에스라 3장 4절 최초로 초막절 절기를 지켰어요
 
 
  얼마나 감동적이었겠어요  상당히 큰 기쁨을 주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순조로와요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포로로 돌아온 사람들이 제단을 만들고 초막절 축제를 하고 그러자 그 땅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우리도 비용을 낼게 우리를 동참할게 하는 것이어요
 
  유다인은 물론이고 사마리아인들도 우리도 도울게 고맙지 않아요 돌아온 사람들은 그들을 받아 드릴 생각이 없었어요 왜냐 하면 우리는 저 당에 잡혀 갔어도 우리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했는데 여기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이방인의 습속을 신앙의 순수성이  무너졌을 것이다
 
  이들의 도움을 받는것은 성전을 짓는 일에 적절하지 않는 것이다 마치 문제는 우리가 일제에 해방이 되었을 때  신사 참배를 거부했던 분들이 신사 참배에 동참한 사람들을 저 사람들은 변절된 사람들이야 이렇게 이야기하고
 
  신사 참배한 사람들은 참해 하면서 속 상해하던 일이 있거든요  똑 같은 일이 역사속에서 반복이 되고 있는데 나도 동참 시켜줘 안 돼 너희는 너희는 더러워 거룩이라고 하는 게 더럽혀짐과 관련된 개념이거든요
 
  그러니까 너희들은 거룩하지 않아 하는 말이지요  그 때 여러분 나는 더럽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저 사람들이 싫어져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든지 저 사람들을 끌어내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방해하고 위에 편지를 보내는 것이어요 이 사람들이 성전 건축한다고 하는데 페르시아 임금에게 복종하기 보다는 다른 임금에서 복종하기 위해서 성전을 짓는 것이야 이것 막아야 돼 이런 식으로 합니다
 
  에스라 4장 이런 식으로 무기를 들고 위해를 가하려는 사람도 있지요 그러니까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 너무 어려워 졌어요 그래서 중단이 됩니다 얼마동안 중단이 되느냐 하면 근 20년 가까운 시간 중단이 됩니다
 
  시작을 해 내놓은 데 20년간 방치를 해요 정말 흉물 스럽습니다 기원전 516년에 준공됩니다 그런 상황 속에 있었습니다 그 때 등장한 것이 바로 학개 예언자입니다 그 무렵 20년이 지났을 때 돌아온 사람들도 삶에 지쳤어요 돌아올 때는 희망이 있지 않아요 내 고향에 돌아오면 우리가 자유인으로 멋지게 살 것이야 삶이 너무 힘들어 흉년이 들고 먹을 것 부족하고 인심이 흉흉하고 머물러 있던 사람하고 갈등 때문에 삶이 힘겨워요
 
  그 때는 공적인 어떤 일을 하기 보다는 나 자신을 지키는 일이 너무 힘든 것이야 거기에만 몰두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전 건축에 대한 열정도 싫고 성전을 건축할 만한 여럽이 없다고 스스로 느껴요
 
 
  바로 그 때 학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것이어요
  1절 다리오왕 제 이년 여섯째 달 곧 그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가 학개로 말미암아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 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우리가 예언서를 보다 보면 예언자가 부름을 받았던 때를 늘 적시를 하지 않아요 대게의 경우에 그 때 무슨 무슨 임금 시대에 이렇게 이야기 하지 않아요 그런데 지금 여기에 이야기 되고 있는 임금 이름이 누구지요 다리오 왕
 
  그런데 이미 다 아시겠지만 다리오는 유다의 임금이 아닙니다 유다의 임금이 아니어요 이 사람은 다리오는 누구냐 하면 페르시아의 임금입니다 성경에서 선지자가 부름을 받았을 때를 이야기 할 때 이렇게 유다 임금이 다른 나라 임금 이야기 하는 것이 드물지요
 
  학게는 다리옹 때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페르시아 임금이어요 페르시아라는 나라는 고레스라는 임금으로 유명합니다마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해방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 세속의 역사 속에서는 고레스라고 안 하고 씨루스 임금이라고 하는데 씨루스라는 사람이 대 제국으로 성장을 시켜요 페르시아는 영토를 확장 시킨 왕입니다
 
씨루스 고레스를 이어서 왕이 된 사람이 캄비세스라는 왕인데 이 캄비세스 왕은 애굽까지 정복해요 애굽까지 정복을 함으로서 제국의 영토를 넓혀가고 있는데  그 다음 그를 이은 임금이 다리오어요
 
  이 다리오 임금은 인더스 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 합니다  대 제국을 형성한 것이지요  어마 어마 어마한 제국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어요 페르시아가 다른 제국과 다른 것이 하나 있어요
 
  그것이 어떤 것일까요? 페르시아는 다른 제국들의 특색은 무엇이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제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언어 내가 가지고 있는 문화속에 들어와야 돼 그렇게 제국을 운영을 했어요
 
  우리가 바벨탑 이야기를 할 때 바벨탑의 재료를 무엇이라고 했느냐 하면 벽돌이라고 했거든요 이것을 그런 의미라고 할 수 없으나 이전에는 자연석을 썼어요 벽돌이라는 게 규격화 된 것이거든요
 
  이것은 무엇이냐 도량형의 통일과 관련이 되어요 길이를 젠다든지 부피를 젠다든지 마차 바퀴 사이의 간격을 만든자든지 이런 것들이 도로 건설하고 관계가 있기 때문에 제국들은 도량형의 통일을 하려고 합니다
 
  중국의 진시왕도 도량형을 통일하려고 합니다 바벨탑이라고 하는 것은 다름이 용납되지 않아요 규격화 된다고 하는 것은 다름이 들어설 여지가 없어 페르시아는 달랐다 그 이야기여요
 
 
  다양한 언어 문화 경제 시스템 종교 이런 것들을 그래 너희들이 누리고 있던 그것을 그대로 누려 이렇게 허용을 해 주는 것이어요  그 조직들을 잘 융합을 해  페르시야 문명은 무엇과 같은 가 하면 물이 이렇게 흘러가는 데 조그마한 지천이 와서 합류하지 않아요 다른 물이 와서 합류를 하지 않아요 큰 강이 되지 않아요
 
  이것처럼 페르시아 문명은 흘러가면서 융합하는 문명이었어요 다름을 이렇게 포함하는 문명이었어요 어어느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결혼한 사람에게 강을 가지고 이야기 했어요
 
  강을 가지고 이야기 했어요 북한강이 흐릅니다 충주 저 쪽에서부터 남한강이 흘러요 어디에서 만나느냐 하면 양수리라는 곳에서 만나요 양수리를 두물머리라고 하지 않아요한강과 북한강이 만나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남한강은 남을 버리고 북한강은 북을 버리고 한강이 되는 것이어요
 
  나를 버렸지만 나는 더 큰 나가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신비한 부부가 된 것이 그것인지 모르겠는데 그렇지요 나는 끝까지 갈 것이야 그러면 곤란하지요 페르시야 문명이라는 다양한 것을 받아 드림으로 자기를 크게 만들었어  문화적인 것이 컸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다양성을 인정하는 그런 나라가 되었어요
 
  다리오 왕이 중요한 왕인데 그 왕이 즉위한지 2년 여섯째달 초하루에 학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 이렇게 본문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누구를 향하고 있느냐 하면 누구에게 주어졌어요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 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임했다
 
  스알디엘은 첫 번째 총독인 것으로 보여요 스룹바벨이 그 아들이고요 그 다음에 여호수아는 바벨론에 태어난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들에게 말씀이 임했는데 이 다리오왕 2년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 하면 항상 이 권력이라고 하는 것은 권력 교체기에 위기를 맞이 할 때가 있습니다 아주 강력한 왕이 물려나고 아직 리더쉽이 확정되지 않은 후임 왕이 들어올 때 자기 세력을 키어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다리오 왕은 즉위하자마자 반란을 효과적으로 제압을 했습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이지요 그리고 그 반란에 가담한 벌주면서 행정구역을 개편하고 총독 제도를 두기 시작 합니다 이런 전환기에 학개가 하나님의 일군으로 부름을 받았다 이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학개가 예언한 시기는 어떤 예언자는 상당히 긴 시간 예언하지 않아요 그런데 학게가 예언한 것은  6월 1일부터 시작에서 9월 24일까지 날자가 딱 있어요 3개월 넘은 4개월 안 되는 그 정도의 시간동안 활동을 합니다 분명한 포커스가 있지요
 
 
  이제 어쩼던 4개월 정도인데 학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때가 며칠 날이었다고요 다리오왕 2년 6월 1일 그런데 성전 건축이 재개 된 날자는 언제이냐 하면 6월 24일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고 겨우 세주 지난 다음에 일이 시작이 된 것이어요
 
  상당히 빠른 진척을 보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학개라는 사람은 보통 예언자를 이야기 할 때 아버지의 이름과 함께 나오더근요 아니면 할아버지 이름이 나오고 증조 할아버지가 나오는데 학개는 부모가 누구인지 전혀 안 나타납니다
 
  이것을 보면 학개라고 하는 사람이 종교 귀족이 아니었구나 종교 귀적이 아니었고 명문 가문 출신도 아니었구나 할 수 있어요  어떻게 보면 흙수저 출신이어요 학개가 그렇다고 이야기 할 수 있겠어요
 
  학개라는 이름은  학가이라는 것이 히브리어 발음입니다마는 축제를 뜻하는 하그라는 말과 연결이 되지요 학개와 스가랴 성전 건축을 독려한 선지자들로 성전이라는 게 절기 축제를 바치는 고것이고 순례의 중심이었음을 생각할 때  성전 건축을 촉구했던 학개의 이름이 축제와 연결된다는 것이 상당히 적절한 것입니다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이 학개는 철저히 가문의 전통에 의지한 것이 아니고 우리 조상이 대단한 사람이어요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이 신빙성이 있어요 이렇게 안 하고 오로지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만 의지하는 그런 선지자였던 것이지요
 
  2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 같이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하나님이 짜증이 나신 것이어요 여기 하나님을 일컷는 말이 만군의 여호와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 전사로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셔요 적을 무찌리시는 분으로 여기에 등장하고 있지요
 
  그런데 여기에 만군의 하나님이라고 일컬은 의미는 있는 것이어요 백성들 사이에 만연한 패배주의 무기력 절망감  그것과 맞서 싸우시는 하나님 바로 그 분이 여기 만군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말 속에 담겨 있습니다
 
  때때로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객관적인 현실이 아니라 나의 내면이 무너질 때 사람이 무너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남들이 저 사람 살만한데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있어요 열악한 환경이 있는데 씩씩하게 살아가는 데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으면서 무기력에 빠진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이 무너져 있기 때문에 빅터 프랭클이라고 하는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가 있는데 이 분은 나치 수용소에 갇힌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빅터 프랭클이 수용소에서 가진 경험을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지금을 포인트라는 사람이 인간이 무엇 때문에 살아갈 쾌락에의 의지 인간은 쾌락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이야기 합니다  아플레라는 사람은 권력의 의지가 인간을 살게 만든다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수용소에 갇혀 보니까 쾌락의 의지도 아니야 권력의 의지도 아니야 무엇이 나를 살게 하느냐 하면 내 삶이 의미가 있다고 할 때 살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어요
 
  빅터 프랭클이 자기가 수용소에 내 가족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이 사람은 바로 용광로에 들어가지 않고 노동 사역에 쓰이게 되어요 살아 남았지요 그런데 비밀을 말하자먄 나중에 밝혀진 것이지만 빅터 프랭클의 가족들은 이미 죽었어요 같이 끌려 간 가족들이 바로 죽었어요
 
  프랭클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강제 노역은 너무 힘들어요 그가 노동하면서 힘겨울 때 만도 그가 생각한 것은 내 가족이 평안하기를 바래 그러니까 힘겨운 노동이 즐거운 노동이 되었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그 수용소에서 만난 사람들이 보니까 어떤 일이 의미있다고 느낄 때는 사람들이 살아 그가 한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면 인간은 윌 투 미닝 Will to meaning 의미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 의미의 의지를 가진 인간 미닝이지요
 
  그래서 나중에 그가 나치가 망한 다음에 돌아와서 의사로 활동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고치는 데 결국 무엇이냐 하면 삶의 의미를 구성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의미를 찾아 주므로 그들이 치료 되도록 해요
 
  그것을 로고 테라피라고 하는 데  로고스 말씀이거든요 내 속에 의미가 돌아올 때 살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하시는 매우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우리 속에 있는 무기력과 절망 그것과 맞서 싸우도록 하셔요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 가운데 하나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의미가 채워지는 순간 사람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어요
  그래서 이 땅에 있는 교회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이 누군가에게 의미를 주는 일 이게 중요해요
 
  만군의 하나님은 외부에 적과 싸우시기도 하지마는 우리 마음속에 떠 오르고 있는 무의미 고통 무기력 절망과 이런 것들과 싸워서 우리가 삶의 의미를 되 찾을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어요 그 하나님이 이야기 하는 것이어요
 
  그 하나님이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어요 백성이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우리가 그 백성들의 마음을 알 수 있어요 최초의 열정이 남는 것은 곤고한 삶의 무게일 수 밖에 없어요
 
 
  열정이 식고나면 남루한 이 현실만 남지 않아요 미국에 라스베가스에 가면 그렇다면서도 밤중에 화려하고 번쩍 번쩍하고 우아하고 그러는데 다음 날 아침 보면 조명이 꺼진 그 도시는 사막 가운데 있는 적막할 도시일 뿐이지 그런 것입니다
 
  열정이 식고 나면 남는 것은 곤고한 삶의 무게 밖에 없는 것이야
  그 다음에 성전 재건을 안해야 할 이유가운데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성전 건축이 자칫하면 페르시야 당국의 의혹을 살 수 있어 페르시아의 반역을 저지르기 어떤 중심을 만드는 것이 아니야 이런 의혹을 살 수 있다 백성들은 그런 핑계를 생각한 것이어요
 
  세 번재는 이런 것도 있으리라고 봅니다  우리의 삶이 죄를 하나님이 흔연히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이아닐까 우리의 삶이 곤고한 것은 주님이 아직 우리의 죄를 용서하지 않은 것이니 성전을 짓는 것은 그 분의 뜻에 반하는 일일 수도 있어 이렇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안할 핑계는 얼마든지 있어 그래서 제 테드 강연에서 어느 미국의 대학 교수님이 강의를 하는 것을 듣는데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선을 행할 것인가 하는데 그러니까 사람들의 눈에 잘 노출 되도록 해야 돼 그래야 사람들이 선을 행할 가능성이 있어 남들의 눈을 의식해서 이게 첫 번째이고 두 번째는 무엇이냐 하면 핑계를 댈 수 있는 여지를 없도록 만들어야돼
 
  그러니까\  12월이 되면 구세군 자선남비가 딸랑 딸랑하지 않아요 사람들이 거기 지나갈 때 약간 질리거든요 어떻게 하냐 하면 저기 있네하고 돌아가지요 돌아가면서 못 봤다고 하고 무엇이냐 하면 핑계를 댈 수록 여기도 있지만 그런 사람들이 있데요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는데 어떻게 보면 유치하게 어쩼던 그렇게라도 선을 행한 게 좋은 데 금방 이야기 한 것처럼 무엇인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어요 이게  백성들의 문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말 용기가 꺾이면 안 할 수 있는 이유를 밝히는 것이 인간의 재능입니다  
  그 때 여호와가 말씀하신 것이어요
  4절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제 판벽한 집에 거주한 것이 옳으냐
  성전이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내 버려지고 무너지고 파괴되었습니다
 
  그런데 판벽한 집이라는 게 백향목으로 지은 집이야 아름답고 튼튼하게 잘 꾸며진 집이 판벽한 집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이렇게 퇴락했는데 너희들 사는 집은 좋은 것으로 꾸미려고 그렇게 지내고 있느냐
 
  그게 옳으냐 어떤 사람이 옳습니다 이렇게 나오면 대책이 없겠지요 그것은 한 대 맞는 수 밖에 없어요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그들이 자기의 집을 꾸미는 일에는 열중하면서 하나님의 집을 꾸미는 일은 아직은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이냐 언약 공동체의 비젼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백성을 선택하셨을 때는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라고 하셨는데 그 꿈을 실현하도록 주는 중심이 성전인데 그 성전에 퇴락을 방치했다는 이야기는 무엇이냐 하면 그 꿈을 버린 것이어요
 
 
  내가 누구인지 잃어버린 것이어요 자기 망각이어요 결국은 이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공공의 문제보다 개인의 문제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세상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
 
  성 프란치스코가 어느 날 잠을 자다가 꿈을 꾸어요 성 다미아노 성인이 누더기를 걸린체 울면서 오는 것이어요 프란체스코가 놀합니다 성인님 천국에 어찌하여 울고 계셔요 이렇게 물어요
 
  천국에 계신 분이 울고 있다니  천국에도 눈물이 있단 말이어요 그러자 다미아노가 대답합니다 천국에도 눈물이 있다오 그것은 아직도 지상에서 헤메고 있는 사람의 눈물이다네 이렇게 말해요
 
  그리고 다미아 성인이 이야기 합니다 지금 교회가 위기에 처해 있다고 그런데 너는 이렇게 평안한 잠 자리에서 잠만 자고 있을 것이냐 가서 무너지는 교회를 세워 이렇게 이야기 해요
 
  프란체스코 성인은 하나님의 계시로 알아 듣고 수리하는 일에 나섭니다 그런데 사실은 성 다미아노가 프랑체스코를 그렇게 부른 것은 눈앞에 보이는  가시적인 건물을 고치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스스로의 부요함 속에서 도전 없이 왔던 카도릭 교회가 무너지고 있다고 하는 이야기였고 그것을 어깨를 떠 받혀 일으키라는 말이었어요
 
  그래서 프란 치스코 성인이 13세기에 교회에 가지고 들어온 것은 가난이라고 하는 본질을 잃어버리지 말하야 한다고 들어오거든요 이것이 공공의 문제보다 개인의 문제에만 관심을 갖는 이 세상을 하나님이 탄식하였다
 
  5절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너희 행실을 돌아보라는 것이어요 돌아봄을 자기를 돌아보는 것 반성이라고 하지요 어디에서 나온 말이어요
 
  논어에서 증자가 한 말입니다 五日오일 三省삼성五오 나는 하루에 세 번 나를 돌아 본다
  첫 번째는 무엇이냐 하면 남을 위하여 일을 꾀하면서 진심을 다하지 않았는가 불충하지 않았는가 하는 게 첫 번째이고
 
  벗과사귀면서 진실하지 배운것을 불신 믿음직하지 않은 것이어요
  그 다음에 배운 것을 익히지 않았는가 불 습입니다
 
  불신 불충 하지 않았는가 자기를 돌이켜 생각해 보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야 맑은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지금 그 백성들에게 너희 행위를 한번 돌이켜 생각해 보라고 하고 있습니다
 
 
  신앙 생활이란 결국은 무엇이어요 내가 고백하고 있는 그 내용을 삶으로 번역한 과정인데 입술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정 반대로 왜곡하고 있는 그 현실을 하나님은 돌아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거룩함은 일상적 삶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안 되어요
  6절에 너희가 많이 뿌릴 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 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군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결국 백성들이 선택한 삶은 풍요로움이었지만 본인의 행복이었지만 그들의 행복을 추수하지 못해요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흉년이 찾아오기도 하고 제국의 수탈 때문이라고 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이라는 삶의 중심성이 바로 서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삶이 구멍 뚫어진 전대에 서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이 바로 서지 않는 경우에는 말도 무너지게 되어 있다 우리의 삶이 본이 무엇인지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는 것은 말을 추구하기 위해 본을 버린 것이야
 
  오늘 우리의 삶을 어떻습니까? 인간을 가리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본 그 본을 내가 정말 굳게 붙들어야 하고 내 속에 가물 가물하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심지에 불을 붙여야 하는 데 우리는 무엇이냐 내 속을 성찰하기 보다는 바같에 있는 외부적 조건들을 바라 보느라고 본을 상실한 본말이 뒤집힌 삶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아픔을 우리들이 경험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 마음속에 크게 와 닿은 것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으로 스스로를 드러내신 것인데 우리 속에 있는 절망 우리 속에 일어나는 무의미 나는 할 수 없어 무기력 이런 것과 맞서 싸우면서 우리 속에 숨을 불어 넣으셔서 나만의 행복이 아니라 함께 사는 세상을 위해서 꿈을 불어 넣는 하나님의 사랑 그것이 제게는 크게 다가옵니다.


제2강 학개 1:1:7-15
마음을 움직이시는 하나님

아기는 어떤 존재인 줄 알아요 아기 어른의 스승이다 그런 시도 있지요 어린이는 어른의 스승이다고 어른의 아버지도 하는 시도 있습니다 어느 시인이 있는데요 그 시인이 아기 천사께서 우리 집에 오신 다음에 모든 것이 만사 오케이다고 이야기 합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대오 옹아리로 모든 것이 통해 그러니까 그 예쁜 아기 앞에서 모두가 용서가 되고 받아드리게 되고 집안에 있는 사람들도 화해하게 되고 그렇게 보면 연약함의 신비라는 것이 있어요
 
세상은 강한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고 하지만 연약한 사람들이 세상을 정화해 그러니까 아기가 어른의 스승이고 맞다 말이어요 성탄절로 비유해도 되겠네요 우리 주님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지요
 
그 아기를 우리의 마음속에 모시고 산다고 하는 것 연약하고 섬세한 존재를 우리들이 어떻게 품고 갈 것인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차가운 북풍 앞에 서 있는 것 처럼 위태로와요
 
현실은 우리에게 절망감을 안겨 줄 때가 많이 있지만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은 다시 시작할 용기 나는 넘어져도 다시 시작할 힘을 우리 속에 힘을 불어 넣어주는 분이 있기 때문에 어떤 분이 말이 인간은 제 아무리 크게 넘어져도 하나님의 은총 밖으로 넘어지는 방법은 없데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 사로 잡고 있기 때문에 나에게 실망할 수 있고 그러나 믿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다시 시작할 용기를 갖고 내 삶을 고쳐 세우는 것 그런 것이 아닐까, 싶어요
 
7절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 행위를 살필지니라
만군의 여호와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고요 자기 행위를 살필지니라 돌이켜 생각해 보는 것이 삻핌이지요 인간이 다른 존재와 다른 것이 자기를 성찰할 수 있는 존재라는데 있습니다
 
성찰 사유라는 것은 나 좋을 대로 처신한 것이 아니고 타자와 관계 속에서 나를 돌아보는 것이어요 내가 미란씨와 만났다면 돌이켜 생각해 보는 것이야 내가 친절하게 말해야 하는데 무뚝뚜하게 말한 것이 아닌가 내가 선한 표정을 가지고 타자라는 거울 앞에서 우리 시대에 가장 부족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반성 우리는 누구를 보고 판단은 잘해요
 
저 사람 옷 잘 입었네 저 사람이 화장이 잘 나왔네 이런 소리는 잘 하는데 저 사람은 저러면 안 돼지 이런 말을 잘 하는데 밖을 보는 일에 익숙해요 자기를 살피는 일에 너무 소홀해 이것이 우리의 습성처럼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 단편 소설이 기억나는데 친구들이 제주도 갔데냐 술을 많이 먹었어요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 이게 콘 텍즈 렌즈기 뒤로 돌아갔데요 큰 일 났지 않아요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인지 아닌지 나는 잘 몰라 어쩧던 소설이 그래요 친구들이 우수어 죽겠는지 친구들이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보고 무엇이라고 하더니 읽었던 기억이 나요
 
사람이 자기를 살피는 일을 잘 못하지요 성찰하지 않는 것이어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도 내 사정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이라고 하는 대 타자 앞에 내 삶을 돌이켜 생각함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지 이것을 생각하는 것이 기도여요 이게 매우 중요해요
 
그러나 성찰을 한하는 것이지요 여기 하나님은 거듭 너희 자신을 살필지니라
5절 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 행위를 살필지니라
 
8절 그리고는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나무를 비어오라는 것이어요 여기 산이라고 번역하는 단어 우리말로 번역할 때는 그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사실은 무엇이냐 하면 정관사가 있어요
 
그러니까 그 산이어요 그 산이 어떤 산인지 몰라요 그 이야기는 그 산이라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정관사를 가지고 그 산이라고 이야기 할 때 사람들은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다 알아 나무가 있는 어떤 산이겠지요
 
사람들 생각하기에 성전을 지으려면 백향목 싯딤나무 이런 것들 가지고 지으리라고 생각하니까 우리는 백향목에 접근할 수 없어요 솔로몬 시대에 성전을 지을 때도 백향목을 운송해 오거든요
 
그리고 스룹바벨이 성전 건축을 시작할 때 그 대도 에스라 책을 보면
3장 7절 레바론에서 백향목 가져오거든요 처음에 지금 그 길이 다 막혔어요 가져 올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지금 하시는 말씀이
8절 그 산에가서 그 산은 백향목이 나는 것이 아니라 야산 같은 것 평범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이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성전의 의미는 건축 자재에 있지 않다 자재가 얼마나 훌륭하지 않아 하나님에게는 이게 굉장히 중요한 대목이라고 보게됩니다
 
사실 성전의 핵심은 무엇이냐 하면 황폐해진 하나님에 선에 대한 송구스러움 죄송함 아픔 이런 것들이 있을 때 그게 성전의 핵심이지요
 
시편에서 우리들이 보았습니다마는 여호와께서 받으시는 제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제물은 양도 소도 아닙니다 상한 마음이다 그렇게 말합니다
 
시편 51편 7절 파커 팔머라는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왜 우리 랍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두라고 하지 않고 머리 위에 두라고 이야기 합니까? 그러자 랍비가 대답합 평생시에 사람들을 말씀을 들어도 그게 마음속에 안 들어간데 머리 위에 두라
 
살다 보면 고통스러운 일을 경험하고 나의 자아가 무너지는 경험을 할 때 무너질 때 들어가 비로서 들어가 우리 가슴속에 들어간다 무너져서 깨지는 것이 아니라 무너져서 열리는 마음 이게 은총의 도구여요 하나님이 말슴이 그 때 결실해져 오히려 그러니까 지금 하나님의 가장 기뻐하시는 제물은 상한 마음이다고 그것 가기조 가는 것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이다는 것이어요
 
성전 건축의 자재가 중요하지 않아
시편 51편 17절 상한 마음 성전 건축의 자재가 중요하지 않아 평범한 그 산에서 나를 무엇으로 보는 것이야 성전의 화려함 건축 자재의 화려함 이것은 하나님의 관심 사항이 아니어요 그 속에 담겨 있는 마음이 중요한 것이지요
 
그래서 시작하려는 마음 하나님의 집이 황폐해 졌는데 이 집을 수리하기 위해서 시작하는 이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겠스니다
 
제가 즐겨 인용하는 시가 있는데 함석헌 선생님의 님이 오신다는 시가 있습니다
님이 오신단다는 소리가 들여 옵니다 임을 맞이하는 설레임이 있습니다
님이 오신다 길 닦아 예비하자 내 집에 오시는 님으리 날 보러 오시는 님을 긎저 어찌 맞느냐? 집안 청소하고 이것을 해야되여
 
님이 오실 날이 가까워 왔으니까 아침에 일찍 일어나 가지고 청소를 깨끗이 하고 할 수 있으면 은 모래도 깔아 놓고 물도 뿌리고 오시는 이 맞아야지 참 좋은 마음이지요
 
님을 기다리면서 그저 잤고니 이것 저것을 온 방인 하투루 늘어놓아 그저 앉으실 곳도 없이 했구나
 
늦잠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정말 일어나서 허둥 지둥거리는 것이야 그런데 그런 날일 수록 왜 그리 어지런 진 것이 많은 지 몰라 방안에 허트린 것이 있고 앉으실 곳조차 없는 것이야 쓸자 닦자 고치자 마음이 허둥 허둥하고 있는데 하면 할수록 묶은 먼지가 왜 그렇게도 많은지 천장에는 거미줄도 나 있고 저 길은 이렇게 풀들이 우거지고 야단이 난 것이어요
 
마음만 분주했지 다 마치지 못했는데 님이 오셨다는 소식이 들리는 것이어요
아이구 님이 오시네 저기 벌써 오샤 이를 이를 어찌노 어딜 들어오시랄꼬 이 얼굴 이꼴 이 손은 아에
 
아 이를 어쩌노 어디 들어오라고 할 까 당황하고 있는데 오신 님이 이야기 하는 것이야
이 애 이 애 걱정 마라 나도 같이 쓸어주마 나 위에 슬 지 않은 그 방 내가 쓸어 너를 주고 닦다가 닳아질 네 맘 내 담아주마
 
그러니까 중요한 게 무엇이냐 하면 나를 위해 닦지 않은 그 마음을 받은 것이야 니미 그러니까 그 분이 오셔서 내 집을 쓸어주고 나를 주겠다는 그 방을 너에게 주겠다는 것이어요
 
이 시는 이렇게 끝납니다
밝히자면서 못 맑힌 맘 저절로 밝혀지고 나중에 맑아졌으니 내라곤 없소이다 님 곁에만 사오리
 
내가 나를 깨끗하게 하고 싶었는데 나는 못했어 그러나 깨끗하게 하려는 내 마음을 님이 보시고 오리려 나를 맑혀 주시고 깨끗하게 해 주셨어 그러니까 은총으로 사는 것이야 중요한 것은 얼만큼 깨끗해 시작하려는 것이 중요하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엣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게 아슬 아슬한 이야기이기도 한데 솔로몬의 최대 치적을 이야기 할 때 성전 건축을 이야기 하지요 최대의 치적인 것은 맞으나 문제가 있어요 성전 건축을 위해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고 물자를 동원하다 보니 백성들의 삶이 피해해졌어 그렇지요
 
그래서 솔로몬이 세상을 떠났을 때 백성들이 느흐보암에게 이야기 아지요 당신의 아버지 때문에 너무 힘들었어
 
왕상 12장 4절 당신 아버지 때문에 너무 힘들었어 강제 노역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느흐보암이 그 말 안 듣지요 분단이 되지요 성전 건축이라는 것이 아름다운 치적처럼 보였지만 결국 분단이라는 것을 낳았어
 
그런데 성전 이전에 광야 공동체가 만들었던 것은 무엇이냐 하면 성전이 아니라 회막이라는 것이어요 회막을 만들어요 회막 건축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에 언약이 맺어지고 그리고 그들이 이제 하나님에게 지시를 받은 것이 회막을 만들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출애굽기 26장 1절 그래서 탈출 공동체가 마음을 보아서 한 최초의 행위가 회막 만드는 것이어요 한 백성이 지어지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아름다운 것들을 만들어 내는 것인데 회막 건축은 바로 그런 것이었고 분단이 아니라 그들을 하나가 되게 했어 그들을 통합했단 말이지요
 
회막 건축할 때 어떻게 했느냐 하면 백성들 모두가 기여를 합니다 돈 있는 사람들은 금은 붙이도 내 놓고 어떤 사람들은 아껴 두었던 좋은 가죽 같은 것도 내 놓고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은 실 조금 내 놓고 그러니까 각자가 할 수 있을 만큼 기여를 해요
 
그런데 이 공동체가 아름다운 것은 무엇이냐 하면 기여의 경중을 가리지 않았다 그래서 저는 어디 가 보면 건물 짓는데 돈 내놓은 사람 누구는 1억 크게 이렇게 누구는 5천만원 누구는 100만원 기타 등등 성경의 원리에 어긋나요
 
경중을 가리지 않는다 1억원을 냈기 때문에 큰 자리 차지하고 이렇게 하는 것은 교회는 그렇게 하면 안 돼 믿음의 사람은 그렇게 하면 안 되어요 경중을 가리지 않았기에 기뻐 여기에는 기여라고 하는 것이 자발적으로 낸 것이어요 인색한 마음이 아니어요 자발적으로 냈고 경중을 가리지 않았어 이것이 사회를 통합했어요
 
성전 건출이라는 것은 잘 지었지만 백향목 가지고 돌 뜨는 사람도 있고 이렇게 잘 지었지만 결국은 분단으로 귀착되는 일이 벌어졌고 우리는 참 두렵게 생각을 해야 되어요 요즈음도 성전 건축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교회들이 많아요
 
정막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예배당 잘 짓는 일도 매우 중요하나 회막 건설이 예2배당 건축의 핵심 원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자발적으로 기여하고 경중을 가리지 말고 어떤 사람이 성전 건축하는데 3억원을 내 가지고 공로패 이런 것 하지 말고 돈 많이 낸 사람 왜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이야 이런 것 하지 말고
 
그러니까 하나님이 지금 하신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학개 1장 8절 그 산에 올라가라 그것을 가지고 성전을 건축하라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영광을 얻으리라
 
여기 내가 기뻐하고 라는 말은 어떤 의미이냐 하면 하나님 앞에 바친 예물이 열납되었을 때 사용하는 단어여요 하나님은 그것을 아주 기쁘게 받아 드린다 백향목이 아니네 그것 안 하신다 겨우 그것 가지고 왔어 그것 안 하신다
 
그 마음을 하나님은 기쁘게 받으시고 그것 때문에 영광을 받으신다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하므로 지금 하신 그 말씀을 확증하시는 것이지요 마치 도장을 찍는 것처럼 하나님은 어떤 사람의 기여의 겅중에 따라서 사람들 평가 안 한다 이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핵심이다고 할 수 있습니다
 
9절을 보면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 왔으나 내가 부어 버렸노리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내 집인 황혜하였을 때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
 
9절은 6절을 변형한 것입니다 많이 뿌릴 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수확의 말씀을 6절의 말씀을 변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9절이 우리에게 일깨어준 말씀은 욕망을 중심에 둔 삶의 허망함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어요
 
인간의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욕망한다고 하는 것은 결핍이 있기 때문이어요 내 속에 결핍이 있기 때문에 욕망이 벌어지는 것이어요 특별히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심리적 결핍입니다 마음 속에서 벌어진 결핍이어요 그냥 멀고 살만 한 대도 결핍을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결핍은 무엇이냐 하면 채움의 욕구여요 그런데 채움의 욕구라라고 하는 것은 내가 채워지기 남에게 줄 수 없어 그래서 배타적이야 배타적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고통 받는 타자에 대한 의지가 없는 것이야 이것은 자기중심적이지
 
내 삶 속에 타자가 들어올 여지를 주지 않은 것이야 욕망에 사로 잡힌 사람은
우리가 믿음 생활한다는 것은 본 회퍼가 욕망을 따라 살지 않는 사람 내 욕망을 내 삶의 핵심으로 삼지 않고 사는 게 믿음의 삶이라는 말이어요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어떻다고 말하느냐 하면 자기 배 채우는 일에 몰두했어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욕망이어요 그러나 적었어 그것을 집으로 가져 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다 어마 어마한 이야기가 여기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자기 중심적인 삶은 타자를 위한 여지를 주지 않기 때문에 요즈음 식으로 이야기 하면 이런 이들이 만들어진 세상은 각자 도생의 삶 내가 살아남아야 각자 도생이어요 각자가 생을 도모해야 되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살벌해 여러분 과거에 지금부터 50년 전에 우리는 참 가난한 나라였어요 50년 60년 전에 지금은 상당히 부요한 나라가 되었습니다마는 가난했지만 비참하지는 않았어요 우리 생각해 보면 왜 그랬을까요? 골고루 가난해서 그래요
 
남과의 비교의 대상이 별로 없기 때문에 골고루 가난해 그러니까 골고루 가난하니까 그 때 무엇이 있었느냐 하면 정이 있어 배고픈 사정 헤아리고 그러니까 공동체가 살아 있는 것이야 가난해도 그런데 돈이 우리의 사회를 지배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돈은 독점력이거든요
 
그러니까 돈이 들어간 곳에 공동체가 한결 같이 무너져 각자 도생의 사회는 공동체가 무너진 사회란 말이지요 이게 참 고통스러운데 그런 삶을 빈손이 되게 한다
 
1장 9절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내 집읁 황혜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
 
그런 삶은 빈손이 되게 한다 집에 데리고 가서 불어 버리겠다
하나님이 어떻게 불어 버리겠어요 이런 것 아닐까요? 질병 예기치 않은 사고 재난 낭비 이런 것들이 그 집에 찾아오면 풍요롭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그것들이 다 사라지지 않아요 이게 하나님이 불어 버리셨다는 말일 것이어요
 
이 욕망에 바탕을 두고 있는 삶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자기중심의 삶이고 타자에 대한 여지가 없도록 만들 때 그런 삶을 하나님이 후 불어 버린다 이게 무시 무시한 이야기여요 이 경고를 우리가 알아 들어야만 합니다
 
그들이 지금 문제는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해 빨랐다 하는 말입니다 공적인 일 자기들의 언약 백성으로서의 지향을 꼭 붙들지 않고 내가 살아남는 그 일에만 관심을 가짐으로 공동성은 무너지고 개인성만 강조된 사회 하나님은 그것을 타락한 사회로 보신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라고 하는 중심으로부터 이탈한 그 사회를 하나님은 아름답게 보시지 않는다
이게 본문이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10절 그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11절 내가 이 땅과 산과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돠 땅의 모든 소산과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한재를 들게 하였느니라
 
결국 땅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합니다 하나님이 땅을 명하셔서 풀이 돋아나게 하시고 땅은 그런 역할을 감당했어요 죄가 들어오기 전에 땅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도구였어요
 
그런데 죄가 들어오게 되지 땅이 어떻게 되었어요 창세기 3장 18절 엉겅퀴를 내고 가시 넝쿨을 내고 이것이 성서에서 중요한 이야기인데요 땅의 황폐라고 하는 것은 그저 지력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무엇과 연결시키는가 하면 인간의 죄로 연결시키는 것이어요
 
레위기 25장 4절 하나님은 땅도 쉬게하라 안식년 되면 땅도 쉬게 하라고 하지 않아요 안 지켰어 사람들이 성경은 무서운 이야기가 나와요 그들이 땅의 안식을 허락하라는 말을 안 하니까 하나님이 무엇이냐 하면 그 땅에 백성들을 이방 나라로 잡혀가게 했어
 
레위기 26장 34절 그러자 당이 안식을 누렸다 무시 무시한 이야기여요
성경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여요
그러니까 땅의 황폐함은 인간의 죄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어요
 
10절 너희로 말미암아 하늘은 이슬은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이슬 내려주고 비를 내려 주어야 농사를 짓는데 자기 중심성 욕망을 중심에 놓고 사는 너희의 삶의 결과 하늘이 닫혔다 땅은 산물을 그쳐요 그리고 그 땅에서 자라나던 모든 것들이 결국 잘 자라 보이지만 한재가 들었어 전부 결실하지 못하는 이런 상황이 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호세아서 2장에 보면 하나님이 땅을 회복하시는 이야기가 나와요 인간이 하나님앞에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께 돌아설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호세아 2장 22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내가 응답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에 응답하고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하리라
 
결국 이 문제가 풀리면 땅도 회복된다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세상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거든요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였다고 고백하는 신자들조차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숨결이 닿아 있는 것이라는 것을 잊어 버리고 나의 욕망을 위해ㅓ 함부로 홰손하고 해친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죄여요
 
그래서 하나님이 믿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아낌이야 이게 절제이지요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 가운데 절제가 들어가지 않아요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성령의 9가지 열매 9가지 열매 그 9가지 열매 가운데 우리 시대에 가장 회복되어야할 열매는 절제의 열매여요
 
나 좋을 대로 내 욕망대로 가면 땅이 황폐해 질 수 밖에 없어 우리가 정말 많은 것을 쌓아 올린다 하더라도 한재가 들어서 하나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다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일관적 세계여요
 
12절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 제사장 여호수아와 남은 모든 백성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와 선지자 학개의 말을 들었으니 이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보내셨음이라 백성이 다 여호와를 경외하매
 
그들 스룹바벨 제사장 여호수아와 백성들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들었고 선지가 학개 말을 들었어 왜 바깥 귀가지고 듣는 게 그게 아니고 이 때 들음은 순종입니다
 
들음이라는 말 속에는 순종이라는 뜻이 들어 있어요 듣는다고 라는 말은 그런 의미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학개가 집안 축신으로 보이는데 그 학개늘 총독도 그렇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 받아드린 것이지요
 
이게 중요한 것이지요 진리를 향해 그들의 마음잉 열리는 것이어요 두 번이나 반복되고 있는 던어가 있는데 12절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 두 번씩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말함으로 하나님의 친밀하심과 동시에 하나님의 무한하심이 여기에 표현되고 있어요
 
그러니까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란 말은 그 하나님을 뜻하는 말인데 두 번이나 이 말이 반복되고 있는 것은 무저질번 했던 언약4이 다시 서게 되었다 라고 한 말이 그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13절 그 때에 여호와의 사자 학개가 여호와의 위임을 받아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하니라
 
메시지의 내용이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니 누구와 함께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경외하는 이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이어요
 
그러면 그동안 하나님이 보재하였다는 것일까요? 아니지요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계셨지만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함께 하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14절 여호와께서 스루바벨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의 마음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 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과 남은 백성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들이 와서 만군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의 전 공사를 하였으니
 
15절 그 때는 다리오 왕 제 2년 여섯째 달 이십사일이었더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이냐 하면 마음을 감동 시키는 일이어요 하나님이 숨을 불어 넣었다고 할 때 그것이 르하흐이거든요 하나님이 그들 속에 숨을 불어 넣으신 것이어요 갱기를 불어 넣으신 것이어요
 
이 르하크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사람들의 마음에 무기력과 절망감과 무의미를 제거하고 그들 속에 무엇인가를 수행하고 싶은 마음의 열망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어요 이게 하나님의 영이하시는 일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들 속에 그 마음을 불러일으키자
14절 그들이 와서 하나님의 전 공사를 하였다라고 말합니다
무엇이 먼저인지를 보여 주고 있어요 하나님이 그들에게 숨을 불어 넣으신 것이 우선이고 그러자 그들이 와서 하나님의 전 공사를 시작했다라고 말합니다
 
여러해 전입니다마는 여수에 있는 어느 교회에 말씀을 전하러 간 적이 있습니다 교회당이 참 예뻐요 참 좋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이야기 합니다 이 교회를 우리 교인들이 지었습니다 교인들이 이 교회를 어떻게 지어요
 
회사 출근하는 교인들이 퇴근하고 돌아와서 밤에 와서 공사를 하고 여 신도들은 밥을 짓기도 하고 자재를 날라주기도 하고 그래서 그 교회를 완성한 것이야 너무나도 아름다운 예배당을 지은 것을 보고 마음이 감동인 되었는데 그들이 그 마음 속에 기쁨이 있기에 그래요 하나님이 숨을 불어 넣었기 때문에 그래요
 
서양의 속담 가운데 이런 게 있데요 성령 받지 못한 채 목회를 하거라 그런 말이 그것은 굉장히 불행한 일이어요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의 생기가 내 속에 없으면 모든 게 고역이어요
 
그런데 내 속에 하나님이 영을 불어 넣으시면 모든 것이 감사하고 기쁨이 돼 그러니까 내 궁리라고는 없소이다 이 말이 정말이어요 경험해 본 사람은 알 수 있어요 성 어거스틴이 내가 하는 일이 온통 악 뿐입니다 더러 내가 선한 일을 한 것은 내가 한 일이 아니라 내 속에서 당신이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속에 당신의 숨을 불어 넣으심으로 당신이 기뻐하는 일을 하도록 하십니다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내가 했어 그렇게 안 해요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냥 겸양 떠는 말이 아니라 아는 것이야 내가 한 일이 아니라 내 속에서 그분이 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어요
 
하나님의 생기가 여러부느이 마음을 가득 채우면 좋겠어요 여기 있는 분들이 하나님의 생기로 일을 하게 될 때 사람들은 알아 차려요 아 저 사람은 출발이 다른데 무엇인가 달라 이 느낌이 있어요 하나님의 생기를 가지고 호흡하기 땝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성전 건축이 재건이 시작된 그 날을 다리오왕 이년 제 6월 24일 학개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선포한지 석주 남짓 지났을 대 정말 빠르지요 이게 어떻게 가능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숨을 그들 속에 불어 넣었기 때문에 우리의 욕망을 바탕을 둔 삶이라는 것이 내 것으로 확보했더 하는데 하나님이 훅 하면 다 날라가 그런데 하나님이 훅 숨을 불어 넣으시면 우리를 신명나게 만들어요 하나님이 술을 불어 넣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제3강 학개 2:1,9
영광이 머무는 성전

일년 365일 가운데 특별한 날들이 있나요 특별한 날자 크리스마스 결혼기념일 나도 여러 가지 있는데 2월 15일 나에게 중요한 날인데 생전 처음 교회에 간 날이지요 나는 청년 시절에 교회에 갔기 때문에 고등학교 졸업하고 다른 일 하다가 청년 시절에 갔거든요
 
그날이 수요일날이었는데 나에게 잊을 수 없는 날이지요 그래서 2월 15일은 특별한 날이고 사람마다 특별히 기억는 그런 날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10월 27일이 중요합니다 2007년 10월 27일 성서학당이 시작한 날
 
이렇게 날자에 대한 이야기를 한 까닭이 무엇이냐 하면 예언서 가운데 특정한 날짜를 탁탁 꼽아 가면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학개서 밖에 없어요 우리가 학개 공부를 하고 있는데 학개가 소명을 받은 날자도 소상하게 나오고 성전 건축을 시작한 날도 나오고 다양한 날자들이 나오고 있는데 굉장히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귀환하게 된 것은 바벨론이 무너지고 페르시아라는 나라가 들어서면서 고레스 왕의 칙령에 의해서 돌아오지요
 
그래서 귀환한 공동체가 돌아온 것은 주전 538년경으로 봅니다 돌아오자 마자 그들이 했던 일은 제단을 먼저 쌓고 그 위에서 제사를 초막절 제사를 드렸어요 감사의 제사를 드린 것이지요
 
그리고 성전을 건축하려 했으나 내외의 많은 반대에 부딪치고 방해에 부딪쳐서 성전을 짖지 못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언제나 그래요 초창기의 열정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열정이 빠져 나가고 나면 환멸과 권태가 밀려오고 하는데 오랜 시간동안 성전을 짓고자 하는 그 마음의 열정이 사그라들자 사람들은 성전을 짓는 일 보다는 내가 먹고 사는 일이 중요해요 거기에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몰두하면 행복한 일이 많이 벌어지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고 가뭄이 들고 질병이 다가오고 온갖 어려움이 역경이 지속되었던 것이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깊은 환멸 속에 빠져 들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학개가 부름을 받은 것이어요 그 때가 주전 520년경 귀환 공동체가 돌아온지 18년 그 정도가 지난 다음에 학개가 부름을 받았고 그 때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있었기에 유다 왕을 가지고 말하지 않고
 
1절 다리오왕 제 이년 여섯째달 초 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학개에게 임했다
2장 일곱째달 그달 이십일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했다
일곱째 달입니다 7월 21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학개에 임했는데
 
7월이라는 달이 매우 의미 있는 달입니다
이 7얼이 왜 중요한지 이야기를 할께요
일곱째 달을 히브리에서는 티슈리월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데 그 날을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새 해로 시작을 해요
 
출애굽 사건과 관련이 되는 데 우리로 이야기 하면 1월 1일이 새해인데 이 사람들의 새해라고 하는 것은 티슈리월에 시작이 됩니다 그러니까 티슈리월이라는 시작되는 달의 첫날을 로쉬하사나라고 불러요
 
유대인의 새해 그 날을 새해라고도 하고 무엇이라고도 하면 나팔절이라고도 합니다 왜 나팔절일까요? 뿔 나팔을 부는 날이기 때문에 나팔절인 것이지요
 
여러분 뿔 나팔 본적이 있나요 뿔 나팔을 보면 사실 불기가 쉽지가 않다고 해요 그래서 이것을 장단에 리듬에 맞추어서 부는 것이지요 그 장단 고저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아야 하지요
 
뿔 나팔을 부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시간이 시작 되었다는 것을 나타내어요 뿔 나팔 소리는 어떤 소리이냐 하면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부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로쉬하샤라의 뿔 나팔 소리의 의미를 랍비들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잠자는 자들아 깨어나라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고 회개하라
 
로쉬하샤라의 뿔 나팔 소리의 의미여요 사람들은 일상 속에 빠져서 살다 보면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디에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망각하고 살지 않아요 우리도 그럽니다 일상에 일들 루틴한 일들을 하다 보면 내가 순례자라고 하는 사실을 잊어 버리고 내가 더 나은 존재로 초대받은 자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그저 일상 속에서 하루 하루를 덫 없이 살아가기 쉽지요
 
그리고 우리 일상을 깨고 들려오는 뿔 나팔 소리는 너 잠자는 자여 이제는 깨어나라 그래서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고 회개하라 뿔 나팔 소리의 의미는 그런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림자를 사냥하는 사람이 되지 말며 공허한 것을 찾느라 인생을 소비하는 자가 되지 말아라
 
뿔 나팔 소리가 담겨 있는 의미가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내 삶이 여러분 일상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일상 데일이 라이프이지요 일상은 참 귀한 것이어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상 속에만 파 묻혀 살다 보명 방향을 잃기가 쉬어요
 
수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이어요? 호흡이지요 호흡을 어떻게 합니까? 음파 음파 수영에서 중요한 게 호흡이지요 수영을 못하는 사람들은 숨을 쉬기위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물이 입에 들어오기 때문에 무서워하지요 수영 잘하는 사람은 아주 평안하게 수영을 하지요
 
그러니까 호흡이라고 하는 게 매우 중요한데 그 호습은 결국 무엇이냐 하면 일상에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어요 저는 조금 시간이 나 가지고 외국에 나가면 수도원에 들어가서 머물 때가 있습니다
 
수도원에 들어가 있으면 참 좋아요 왜냐하면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회하고 점심 전에 기도회하고 저녁 먹기 전에 기도회하고 잠들기 전에 기도회하고 네 번 정도 드리는 그 기도회 리듬이 얼마나 좋은 지 몰라요
 
중간 시간에는 일도 하고 독서도 하고 하는데 기도 시간이 되면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중단하고 기도에 동참해야 돼 그 리듬이 내 속에 베게 될 때 호흡이라고 하는 게 그런 것인데 우리는 살다 보면 일상의 코를 박고 사는 것이지요
 
무엇이냐 하면 호흡이 잘 안되기 때문에 수영할 때 호습이 안 되면 어떻게 되지요 숨만 차고 힘들고 가라 앉고 우리 삶이 그런 것이어요 호흡이 잘 안되기 때문에 자꾸만 우리 일상 속에서 이런 삶을 살게 되는 데 이 뿔 나팔 소리는 그것을 돌이키라는 말이지요
 
그 날은 너의 영혼을 들여다보라 자기 영혼을 들여다 보는 날이어요 그리고 너의 악한 받법과 생각에서 떠나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러면 하나님이 너를 용서하실 것이야
 
뿔 나팔 속에 담겨 있는 뜻이 그렇게 오묘합니다 인간은 기호를 다루고 상징을 다루는 동물이기 때문에 그 뿔 나팔 소리가 우리의 마음을 원점으로 돌아오도록 하고 있어요
 
이런 기도를 들어 보셨는지 모르겠는데 향심기도 (관상기도)라는 것이 있어요 우리의 마음을 무엇인가를 향하는 것이지요 무엇인가를 집중하는 그 분은 하나님 뿐입니다 그냥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어요
 
침묵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면 소리내서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곳에 현존해 계신 하나님을 그냥 느끼고 앉아 있는 것이어요 그러면 여러분 우리 마음이 집중이 되어요
 
여러분 경험은 어떻던가요 나는 목사이고 항심 기도를 훈련함에도 불구하고 10초도 지나지 않아서 다른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이것은 어쩔 수 없어요 그것을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 마음에 통합성이 깨져 가지고 그런데 분심이라고 그래요 늘 그게 찾아와
 
우리가 흔히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아요 예배 드릴 때 예배에 집중해야 하는 데 내가 자동차를 잠그고 왔던가 무엇인가 생각들이 떠오르지 않아요 예배를 방해하지 않아요 이것이 분심이야
 
그런데 이 분심이 우리 속에 떠 오를 때 마다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 하면 시크리트 워드라고 하는 것을 정하는 데 성스로운 언어를 하나를 택해요 어떤 의미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 평화 생명 그런 말을 자기가 정해요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다가 내 마음에 다른대로 떠 돌아 상대가 다리가 많이 아프겠다 하는 생각이 떠올라 그 때 평화라는 말을 내 마음을 세크리트 워드인 내게 평화라는 말을 평화 내 마음을 원점으로 갖다 놓는 것이야
 
마치 깃털이 내려 앉는 것 처럼 내 마음이 원점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필요한데 뿔 나팔 소리라는 것이 너희들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가져오라 그것이 뿔 나팔 소리의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7월 티수리월은 매우 중요한 까닭이 무엇이냐 하면 7올 1일 로쉬하나아라고 하고 열흘이 지난 다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 절기가 돌아옵니다
 
욥 키르로하고 하는 것인데 그것을 우리 말로 번역한게 대 속죄일 이게 7월 10일 날 그래서 그 날을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데이스 오브 워라고 하는 데 두려움의 날이어요 하나님 앞에 내 삶의 무게를 달아보고 하나님앞에서 지금까지 지었던 모든 죄를 속죄함 받아야 하는 날이어요
 
경건해야만 하는 그 날이 대 속죄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이 일곱째 달은 매우 중요하고 대 속죄일이 지나간 다음에 7월 15일부터 시작되는 게 초막절이어요 초막절은 그 때 시작이 되어요
 
그러니까 티쉬리월이 굉장히 중요하지요 그리고 티쉬리월의 초막절의 마지막 날이 7월 21일이 됩니다 초막절의 마지막 날이 그 날은 토라를 암송하거든요 오늘 학개에게 그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날이 언제이냐 하면 일곱째 달 그달 21일 7월 21일 초막절이 끈나는 날 절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절 너는 스알디알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남은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라
 
우리는 이 말씀을 1장 1절에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어야 할 대상들이 총독 스룹바벨 대제사장 여호수아 남은 백성들입니다
 
3절 너희 가운데 남아 있는 자 중에서 이 성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 것 없지 아니하냐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전 성전은 어떤 것이어요? 솔로몬 성전 솔로몬 성전이 바벨로니아에 의해서 무너졌거든요 이전 성전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나이가 제법 많은 사람들 나이가 많겠지요
 
숫자가 많지 않더라고 이전 성전의 영광을 본 사람들이 보기에는 여기 스룹바벨이 만들어가고 있는 이 성전은 규모면에서 보면 보잘 것 없는 것 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따지고 보면 레바논의 있는 백향목을 가지고 와서 지은 이전의 성전과 그들이 잘 알고 있었던 평범한 산에서 가지고 온 나무로 만든 성전은 달라요 그것은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이전 성전은 다윗 왕 때부터 모아놓은 재화로 마음껏 활용하면서 왕실에 적극적 도움을 받으면서 지은 것이 이전 성전이었지요 거기에 비하면 열악하기 이를 데 없는 조건 속에서 짓는 두 번째 성전은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에스라서를 보면 그 성전을 우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에스라 3장 12절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에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으나 여러 사람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르니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이전에 그 영화로웠던 성전을 생각하니까 마치 이게 초막처럼 너무 초라해 보인 것이어요 대성통곡을 했다 그런데 학개를 통하여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3절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는 보잘 것 없지 아니하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규모의 문제 그들을 사로 잡고 있는 것은 규모의 문제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어 이전에 성전이 이러다면 지금 성전이 이러니까 초라하다고 합니다
 
사람이기에 그런 생각을 갖습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굉장한 건물을 보면 굉장한데 규모가 주는 느낌들이 있는게 사실입니다 사실 인간이 주고 있는 숭고함이라고 하는 미락적 개념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것 보다 훨씬 압도적인 큰 것 앞에 섰을 때 숭고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지금은 백층 넘는 건물도 있고 하지만 고대 세계의 쿠푸 왕의 피라믿과 같은 것들을 압도적인 높이와 크기를 바라보면 우아 숭고함을 느낀단 말이어요 그런 것들이 그렇지요 예를 들어서 히말라야 있는 안나 푸르나 봉 앞에 흰 설상 앞에 서는 순간 오아 이게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이 어마 어마한 것을 짓고 싶어하는 크기에 대해 압도되는 느낌을 주고 싶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 학개를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성전이 중요한 것은 규모의 문제가 아닙니다
요한복음 2장 19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하고 말합니다
 
헤롯 대왕에 의하여 재건된 그런 성전을 바라 보면서 아 돌 하나가 이렇게 크다니 제자들이 놀랜 것이어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삼일 안에 짓겠다
 
제가 담임하고 있는 청파 교회가 교회 지어진지가 올해로 꼭 40년입니다 40년 되었는대요 그래서 예배당을 봉헌하는 예배에서 제 전임자인 목사님이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 때 설교 제목이 무엇이냐 하면 이 성전을 허물라야
 
교인들이 그렇게 열심히 해 가지고 예배당을 지었어요 그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이 성전을 허물라 이 본물을 가지고 이야기 하는 것이야 놀랍지 않아요 우리가 여기에 사로 잡히면 안 돼 교회는 건물이 아니야 그 이야기를 그 목사님이 하시고 싶었던 것이어요 대단한 목사님이셔요
 
그 목사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우리가 헌신했지 우리 예배당 이렇게 안 하고 더 중요한 본질이 무엇인지 생각을 해야만 했던 것이지요
 
마가복음 13장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나갈 때 제자중 하나가 주님께 말합니다 선생님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면 이 성전이 어떠 하나이까 네가 이 큰 성전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 지니라
 
주님에게 중요한 것은 규모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이 머물러 있으면 초막이라고 해도 거룩한 공간이고 아무리 대단한 건물을 지었다고 해도 하나님의 영이 떠나시면 그것은 죽은 건물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지금 학개를 통해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하는 것이어요
 
4절 그러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수룹바벨아 스스로 굳게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 제사장 여호수아가 스스로 굳게세 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당의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 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굳세게 라는 구절이 3번 반복되고 똑 같이 여호와의 말이 세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글쓰는 사람에게 가장 피해할 단어가 반복입니다.
제가 아내에게 지적을 받고 왔는데 이 단어가 반복되고 있지 않아요 고치고 왔어요
 
그런 엄중한 비평가가 옆에 있다는 것이 행복합니다 글쓰는 사람이 피하여 할 것이 반복인데 어떤 때는일부러 반복합니다 아내가 이것은 반복인대요 하면 일부러 반복하는 가닭이 있지요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 반복할 때가 있지요
 
굳게게 하라는 구절과 여호와께서 함께 하니라는 말씀이 세 번식 반복되어서 함으로 힘을 내서 일하라 규모의 의기 소침하지 말아라 다시 말하면 작은 시작을 부끄러워하지 말아라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하는 일이 작다고 생각해서 부끄러워서 일을 못할 때가 있습니다
 
머리 속에 포부만 키우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미얼 죤슨이라고 하는 사람이 했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어요 좇은 뜻 가지고 있어요 그러나 아직 그 뜻을 펼치기에 내 역량이 적었어 교회가 그렇습니다 교회가 커지면 좋은 일 할 것이야 여러분 교회 커져서 좋은 일 할 수 없습니다 뜻이 있어야 아주 작지만 어떤 일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벳세다 광야에서 벌어진 일을 우리는 압니다 굶주린 군중들을 바라 보면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느냐 마가복음 9장 13절 여짜오되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으니 먹을 것을 사지 아니호는 할 없사옵니이다 하니.
 
그것 가지고 오병 이야기의 결론 이야기가 먹고 남은 것이 열두 광주리였다 모두 만족했다 작은 시작을 부끄러워 하지 말라 교회가 작다고 우리는 규모가 작아서 못해요 그것이 아니고 어떤 일을 내가 할 수 있을만큼 시작하는 것이어요
 
테레사 수녀님을 우리가 알고 있는데 이제 성녀가 되었습니다 마는 어떤 사람이 와 가지고 테레사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수녀님 수녀님이 돌보고 있는 이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이기는 한데 세상에는 고통을 받은 사람은 많은 데 돌몸을 받는 사람은 이렇게 많은 고통이 있는데테레사 수녀가 이야기합니다.

맞아요 자매님 우리가 하는 일은 아주 작지요.
그러나 우리가 하는 일은 켄지스강에서 한컵의 물을 덜어내는 일 밖에 안 될 것이어요.
하지만 겐지스 강물은 한 컵 만큼 줄어져 있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어요
 
우리가 세상의 고통의 문제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착각이어요 우리가 하는 일이 한 줌의 물을 덜어내는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해야 되어요
 
성전이 초라하다고 울지 말아라.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내가 너희와 함께 함이라.
하나님이 함께 하면 적은 것이 문제가 안 된다 이 이야기가 핵심입니다.
그 메시지 속에 무엇이냐 하면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가 반복되고 있어요
 
5절에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언약한 말과 나의 영이 너희 가운데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 말지니라
 
두 가지가 함께 있어 하나님이 그 백성들과 맺은 언약의 말이 함께 있고 하나님의 영이 함께 있어 그것이면 되었지 그것이면 되었지
 
에스겔 선지자가 보았던 비젼이 에스겔이 깜짝 놀란것이
11장 23절 하나님의 영이 성전에서 빠져 나와서 동쪽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어요 형해만 남은 것이야 아무리 근사한 건물 지어 놓은다 할지라도 그것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니어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영이 그 속에 머물느냐 이 작은 시작을 격려하면서 하나님이 학개를 통해 하신 말씀은 두가지이지요 언약의 말씀이 너희와 함께 있다 나의 영이 함께 있다 그러니 두려워 하지 말라 작지만 생명력 있는 성전이 될 것이다 합니다 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들 가운데도 규모가 작은 큰 교회와 작은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고 살아 있는 교회와 죽은 교회가 있다.
그것 밖에는 없어 그러니까 큰 교회라고 해도 하나님의 영이 그 속에 있고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있다면 살아 있는 교회입니다.
큰 교회라고 해도 작은 교회라도 마찬 가지입니다
 
거꾸로 말을 할 수도 있어요 작은 교회인데도 언약의 말씀이 없고 그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거꾸로도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어요 그래서 우리는 늘 겸허하게 가야만 합니다
 
6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가까운 미래에 하나님이 역사 속에 개입하실 것임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키신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임재가 세상의 모든 것들을 뒤 바꾸어 놓을 그런 때가 온다
 
국제 정세가 요동치는 시대였지만 역사의 새로움은 인간의 계획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개입에서 일어난다 하는 것입니다
 
1989년이지 1990년인지 기억을 하는데 제가 학교 교목을 그만두고 잠시 쉬고 있을 때인데 어느 교회 예배당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목사님이 기도해요 이렇게 기도했어요 하나님 도저히 무너지지 같지 않던 저 동부권의 장벽들이 샤베레리아서 불어오는 하나님의 바람이 불어오자 무너져 내린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무엇이어요 베르린의 장벽이 무너지고 오랫동안 공산주의 실험이 실패로 막을 내리는데 그렇게 급격하고 공산주의가 몰락할 지는 아무도 모른 것이야 하나님의 바람이 한번 불어 오니까 와르르 무너진 것이어요
 
그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런 것이구나 하나님이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 시킨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인간의 계획 속에 역사가 있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 속에 인생의 역사가 개입되고 있구나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 절망 처럼 절망처럼 느끼는 대서도 절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은 낙심하지 않고 절망의 어둠 속에서도 희망의 불꽃 하나를 들 줄 아는 사람이어요
 
7절 또한 모든 나라를 진동시킬 것이며 모든 나라에 보배가 이르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모든 나라를 진동 시키고 그래서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를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 말은 의도적인 말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성전이 파괴 될 때 성전에 있는 모든 것들이 약탈 당했지요
 
성전에 있는 모든 것들이 약탈당했습니다 성전에 있는 모든 것들이 약탈당했다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로 이야기하자면 솔로몬의 황금시대가 막을 내렸다 하는 뜻이거든요
 
솔로몬의 황금 시대가 막을 내렸어요 그런데 지금 나라가 망했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내가 세상을 진동 시킬 것이고 나라들도 진동 시켜서 결국 어떻게 한다고 이야기 합니까?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를 것이다 이전에 흩어졌다고 한다면 나라들의 보배가 이곳을 모여 들게 될 터인데 새로운 영광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
 
작지만 초라하다고해서 낙심하지 말아라 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을 통하여서 온 민족이 하나님에 이를 날이 다사올 것이다 학개는 이렇게 가슴 벅찬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런 시대가 열리는 까닭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차기 때문에 그렇다고 합니다
 
7절 또한 모든 나라를 진동시킬 것이며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8절 은도 내것이요 금도 내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9절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러분 8절부터 9절까지도 무엇 무엇이니라 하고 선언한 다음에 후렴부처럼 선언한 말이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세 번씩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마치 성 삼위 송영을 부르는 것처럼 당신이 일으키실 사건이 틀림없는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라는 사실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 지금은 초라해 보이지만 금도 나의 것 은도 나의 것 하나님의 영광이 그렇게 드러날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결국은 그런 영광이 가져온 세상의 모습은 무엇이냐 하면 샬롬의 세상 평강의 세상 결국은 이 성전을 통하여 하나님의 샬롬이 세상을 가득채우게 될 것이다 작지만 생명력이 있을 때 그 속에 언약의 말씀이 함께 하고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면 결국은 그 성전을 통하여 하나님의 샬롬이 빛살처럼 번져가게 될 것이다 학개를 통해 주신 말씀입니다.


제4강 학개 2:10-23
거룩은 전염되지 않는다

성경 한 권 한 권을 끝날 때마다 마음속에 기쁨이 있어요. 
아 그래도 하나를 통과해서 내가 지나가고 있구나 하는 이야기 벌들이 일 벌 한 마리가 평생 모을 수 있는 꿀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요
 
반 스푼 정도 평생 몇 만 송이에 꽃을 찾아 다녀야 그만큼 만드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제 꿀벌들이 하고 있는 일은 꽃에게도 좋은 일이지요 왜 그래요 꽃이 가지고 있는 꿀을 가지고 가지마는 꽃의 수분을 돕는 역할을 하지 않아요
 
우리가 어떤 성경책을 읽어가고 통과해 나가면 벌의 다리에 꽃 가루가 묻어 있어서 우리가 무엇인가 잉태하도록 하는 일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런데 신앙 가운데 가장 슬픈 신앙이 불임의 신앙이어요 무엇인가 생산해 내고 탄생시켜야 하는데 오랫동안 다니기는 했는데 그냥 그런 것이지 슬픈 것이지요
 
성경책 한 권을 끝내고 나면 우리 내면에 무엇인가 잉태되기를 소망합니다
10절 다리오 왕 제 이년 아홉째 달 이십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게에게 임하니라
 
아홉째 달 이십 사일 특정한 날이 등장하고 있지요
2장 1절 일곱째달 곧 그달 이십일일에 초막절이 끝나는 날로 이야기 했는데 아홉째 달 이십사일 두달 남짓 지난 다음에 학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그 날로 학개에 하신 말씀이 그쳐요 그 이후에도 학개에게 어떤 말씀을 사신지 모르지만 기록에 의하면 이것이 마지막으로 등장합니다
 
나중에 스룹바벨에 대한 신탁이 있지만 같은 날이거든요 두달이 지난 다음에
11절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는 제사장에게 율법에 대하여 물어 이르기를
제사장들이 하는 일들이 어떤 일들이 있지요 하나님앞에 제사를 드리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법도에 따라서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제사뿐만 아니라 제사장에게 요구되고 있는 매우 중요한 일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분별하는 일이어요 어떤 것이 거룩한지 불결한 것인지 분별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카도릭 같은 대서는 분별이라는 말보다 식별이라는 단어를 쓰거드뇽 이것과 저것을 알아차리는 일이지요
 
고전 2장 10절 여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성령의 은사 가운데도 중요한 은사가 영를 분별하는 은사입니다
이런 것 아세요 제 후배 목사 책을 읽다가 매우 재미 있는 것을 보았는데 가짜 휘발유를 만드는 사람이 있어요 가짜 휘발유를 만들 때 가장 많이 들어가는 것이 무엇일까요? 진자 휘발유여요 그러니까 진자에다가 조금 다른 것을 섞어서 가짜 휘발유를 만들어요
 
왜냐하면 진짜 휘발유가 많이 안 들어가면 사람들이 즉각 알아 차리거든요 세상에 나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냐하면 사실에 입각한 정보를 가져다 쓰면서 자기들의 나쁜 견해를 집어넣어가지고 퍼트리는 사람들 이것이 가짜 뉴스이거든요
 
이게 가짜 휘발유를 만들어 가짜에 진자 많이 들어가 있는 것이 진짜여요
그런 것을 우리가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사이비 아닌데 그런 것처럼 보이는 사이비 비슷 사자야 비슷한데 아니야 가자가 너무 많아요 세상에 b가짜 뉴스도 많고요 그 뉴스에 사람들이 속아가는 까닭이 무엇이냐 하면 그 속에 진자가 많아요
 
그러니까 여러분 예를 들어서 90퍼센트 사실에 10%에 가짜가 섞여 있으면 그것이 진짜입니까? 가짜입니까? 가짜여요 영적 분별력이 중요한 것은 그 10%가 모든 것을 망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하신 이야기를 기억하는데 어떤 종교적 현상이 종교적 열정이 교회를 부흥 시키는 데 열 개의 공적이 있는데 그 중에 90프로의 공이 있다고 해도 그 종교적 열정이 10 퍼센트의 페해를 가져 온다면 사람들은 90을 취하지요
 
이것이 효과적이기까 그 목사님 이야기가 그 종교적 열정을 가지고 있는 그 10%가 그 종교적 부정적인 요소 이것을 삼키고도 남아 정말로 그래요 꽁 잡는데 메라고 사람들을 많이 모으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이 10%가 전체를 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그런 말을 우리가 들어 보았지 않아요 똑 같은 분별을 해 주어야 해요
 
분별을 해 주어야 해 이것이 옳은지 틀린지
그러니까 제사장의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가 분별하는 일인데 무엇을 분별하라고 이야기를 했느냐 하면
 
12절 율법에 대하여 물어 이르기를 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상상을 해 보세요 세마포 같은데다가 고기를 샀어요 하나님에게 바칠 거룩한 고기를 쌌습니다 그런데 그 옷자락이 만약 떡에나 국에는 포도주에나 기름에나 다른 음식물에 다았으면
 
옷자락에 싼 성물 거룩한 것 때문에 이 옷자락에 접촉했던 기름이나 포도주가 거룩하게 변하겠느냐
 
12절 답은 무엇입니까? 제자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니이다 하는지라
어떤 거룩한 곳에 접촉했다고 해서 내가 거룩한 것이 아니다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분별을 하게 되는데
13절 학개가 이르되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여진 자가 만일 그것들 가운데 하나를 만지면 그것이 부정하겠느냐
 
시체를 만지면 부정해 진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성서의 세계에서 제사장은 분별을 하는 사람인데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지요 속된 것을 구별을 해요 구별의 기준으로 매우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거룩한 것은 생명에 가까운 것이고요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지오 그래서 부정하다고 하는 것은 속되다기 보다는 부정한 것은 무엇과 관견이 되느냐 하면 생명이 아니라 죽음과 관련된 것이라고 볼 수 있어요
 
사멸할 수 밖에 없는 사멸의 운명을 타고난 것들 이런 것들이 부정한 것으로 취급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멸할 것이 아닌 생명이 거룩함에 속하기 때문에 그래서 제사장들이 하는 것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경계를 지켜 내는 일이었어요
 
우리가 입고 있는 의복도 중요해요 사람의 집 벽에도 무엇인가 부정한 것이 생겨나지 않았는지 그 경계를 지키기 위해서 제사장들이 노력을 합니다 피부라고 하는 것도 피부에 종양 같은 것들이 나서 투병하다가 나아지면 제사장에게 가 가지고 완치 되었는지 보여주고 판단을 해야 하는 것이어요
 
레위기 14장 2절 나병환자가 정결한 날의 규례는 이러하니 곧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거룩한 것과 접촉했다고 해서 나는 거룩해 지지 않아요 그런데 부정한 것과 접촉했을 때는 부정해 지지요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참 놀라운 분인 것은 무엇이냐 하면 부정해지는 것이 좋아요 꺼림직한 일이지요 부정해 진다고 하는 것은 그러니까 나환자라든지 이런 부정한 것으로 규정되어 있는 사람들을 보면 물러서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나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도 자기의 부정을 감염시킬 까봐 사람들에게 갈 때에 입을 가리고 말하는 것이지요 불결 불경 여러분 병의 고통도 고통인데 자기를 불견한 존재로 세상앞에 말한다고 하는 게 얼마나 슬프겠어요
 
불결 불결하고 갈 수 밖에 없는데 예수님은 나 환자를 바라보면서 아 안 되었다 3미터 떨어져 내가 기도할 터인데 3미터 떨어져 그렇게 안 하잖아요 어떻게 했어요 그의 몸에 손을 데고 내가 말하노니 깨끗해 져라합니다
 
눅 5장 13절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나병이 곧 나으니라.
 
그게 무엇이냐 하면 그가 가지고 있는 부정을 주님이 자신의 것으로 수용한 것이야 그리고 정화 시키는 것이야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이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어 했던 까닭이 무엇이냐 하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내가 사랑 받는 사람이라고 부정한 사람을 보면 피하게 되어요
 
주님은 무엇이냐 하면 그의 아픔 속으로 들어가셔요 그의 몸에 타치를 한단 말이어요 타치가 중요한 것이어요 타치한다고 하는게 그래서 오래 전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우리 후배 목사님이 있는데 아주 맑은 영혼을 가지고 있는분이셔요
 
그분은 불경스럽게도 예수님을 걸레가 되신 주님 그렇게 말해요 걸레의 용도은 깨끗한 대에만 쓸 수 있습니다 바닥을 더러운 것을 닦으려면 걸레는 자기 몸에다가 더러운 것을 묻혀서 깨끗하게 하지 않아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제사장들은 분별의 기준은 명확했어요
 
제사장들은 분별을 하는 자인데 그 분별의 기준은 명확하지요 내가 거룩한 것과 악수를 했다고 해서 내가 거룩해 지지는 않아 어떤 분들이 이야기 합니다 예수 믿으셔야지요 이야기합니다 나는 괜찮고 우리 아내가 잘 믿으니까 아내 천국 갈 때 메달려서 가면 된다고 그런데 그런데 거룩한 곳에 접촉한 다고 내가 거룩해 지지 않아 거꾸로 이야기 하면 부정한 것과 접촉하면 내가 부정해져
 
그래서 사람들이 꺼려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건은 무엇이냐 하면 꺼려지는 부정을 당신의 몸으로 받아 드림으로 정화시키는 것이어요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건이어요 부정하게 됩니다 하자
14절 이에 학개가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 이 나라가 그러하고 그들의 손에 모든 일도 그리하고 그들이 거기에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고 말합니다
 
어떤 이야기입니까? 이 백성들이 하는 모든 일들이 부정하다 그들의 형편은 그런 것이어요 부정을 씻기 전에 하는 행동은 종교적인 행동은 소용이 없다 내 손에 숯 검덩이가 많이 묻어 있으면 상훈씨 먼지가 물었어요 털어주면 먼지가 털어져요 더 묻지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이 이러하다 너희와 접하는 모든 것들이 더러워 지고 있다 하는 이야기 성전에 황혜함을 방치 한체 하나님 앞에 바쳤던 제물은 정결할 수가 없다 그 이야기입니다
 
예물의 문제가 아니고 이미 그들의 마음속에 묻어 있는 때 때문에 그것은 부정할 수 밖에 없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예배 행위가 매우 중요하지만 저는 예배가 매우 중요하다고 하는 사실을 십분 이해하고 정말 예배를 정성스럽게 드려야 한다는 사실을 늘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배 드리러 온 사람들 보고 어서 오세요 하고 마지하면 좋겠는데 부정적으로 이야기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혹시 기억이 나실는지 모르는데
 
이사야서 1장 11절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 불렀고 나는 수 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 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절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너는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여러분 교회를 다닌다고 다 신자인 것은 아니고 마당만 밟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어요 이것이 참 두려운 현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복음 성가에도 그런 것 있나요 우리 입술은 주님 닮은 듯 하나 내 마음은 주님을 닮지 못한 일 입술은 주님을 닮은듯한데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은 주님을 닮지 못한 것이 있는데
 
내 마당만 닮은 이들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이
13절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하나님이 화가 나신 까닭이 어디 있느냐 하면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하고 말합니다 예배를 드리는 데 동시에 악을 행해 그러면 예배를 망치는 것이지요 더럽히는 것이지요
 
내 손에 있는숯 검덩이를 가지고 사방 묻혀 놓는 것이지요 이게 그릇된 종교 행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 제사도 바치고 나는 꽤 괜찮은 신자라고 자부하는 신자들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니라
 
14절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에언자는 어떤 사람이냐 하면 하나님의 파토스에 사로잡힌 자라 파토스라고 하는 말을 정념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생각이어요 예언자는 무엇이냐 하면 세상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어떤 마음일까 세상을 바라보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 것일까 인데
 
예배드리러 성전을 찾아 오는 사람들을 예배드리기 위해서 나오지만 일상 생활 속에서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은 악을 행하고 있다면 이게 예배일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제가 여러해 전에 조지아라는 나라와 아르메니아라는 나라를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참 놀랬어요 조지아 사람들 정교회 신자들인데 아르메니아도 그렇고 정교회 신자들인데 가다가 십자가만 보이면 길을 건너가다도 여지 없이 이래요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이어요 예배당에 들어가 보면 이콘들 앞에 촛불 켜 놓고 기도하고 이콘에 입 맞추고 앉아서 말씀 듣고 하는 것 보면 참 거룩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운전사들은 관광객들 속여 먹고 시장에 가면 시장 사람들 바가지 씌우려고 하고 오늘 교회에 나오고 있는 사람들도 그런 평형이 무너진 것 이것이 대단히 종교적인 것 처럼 보이는데 일상생활에서는 자기의 이익에 의해 움직이는 그런 것들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은 그래도 나에게 예배하러 오니까 좋아 그렇게 이야기 하실까
 
이사야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어요
12절 내 마당만 밟는다 외적인 종교 행위가 아니라 진실되게 설 것인가
15절 복이 약속되고 있는데 이제 원하건대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 곧 여호와의 전에 돌이 돌위에 놓이지 아니한 때를 기억하라
 
오늘과 이전을 구별하여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오늘은 여호와의 전에 돌이 놓이던 날입니다 그러니까 이전과 이후를 한번 비교해 보라 기억하라라고 하는 것은 기억을 위해서는 인간은 늘 망각하는 동물이지요 인간은 망각하는 동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알레테이야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 모르겠는데 그리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이어요 세상을 떠날 때 강을 건너가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강을 건너는 것처럼 표상을 하고 있단 말이어요
 
건너는 그 강을 스틱스강이라고도 이야기 하는데 레테강이라고도 이야기해요 사람들은 그 강을 건너갈 때 강물을 마셔요 물을 마실 때 과거의 기억을 다 잊어요 레테는 망각의 강이어요
 
진리라고 하는게 알레테이야이어요 아라고 하는 것은 부정의 의미이거든요 그러니까 레스테이를 깨트리는 것이어요 알레테이라는 것은 진리를 비 은폐성 은폐되어 있던 것들이 드러나는 것이어요
 
은혜되었던 것이 드러나는 것이 진리이다 진리라고 하는 것은 은혜 되었던 것들이 드러나는 것이 진리이다 기억한다고 하는 것은 망각의 우리의 기억속에 그것이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도록 하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오늘과 이전의 삶을 너희들이 반드시 기억하라 그래야만 알 수 있어요 하나님을 진실히 예배를 드리는 자에게 어떤 복이 오는 지를
16절 그 때에는 이십 고르 곡식 더미에 이른즉 십 고르뿐이었고 포도주 틀에 오십 고르를 길으러 이른즉 이십고르 뿐이었느니라
 
성전에 기초가 놓이기 전에는 그렇게 수확이 빈약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수확이 빈약한 것이 있겠지만 가혹한 세금 정책 때문에 뜯기는 것도 많았겠지요 그런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많이 거두어 들인다 해도 빠져 나가는 것이 많으면 독은 비게 마련이어요 진실된 예배를 드리기 전에는 빠져 나가는 대가 많았다
 
학개 1장 6절에 보면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운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보람이 없어요
9절 너희가 많은 것을 받았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 집으로 가져갔으나 불어 버렸느니라 이것이 인상적인 이야기였습니다
 
결국 빠져 나가지 않아야 채워지는 데 빠져 나가는 것을 막지 않고 하면 안 된다 옛날에 오성과 한음이라고 하는 나라가 있었어요 제가 즐겁게 보었던 만화입니다 장난 꾸러기이거든요 오성과 한음이 오성인지 한음인지 모르겠는데 구멍이 뚫어진 독에 물을 다 채우면 무엇을 준다고 냇가에 가 가지고 물을 떠다가 막 집어넣었는데 되어요 안 되어요 안 되어요
 
오성이라는 자가 깨를 내어요 가만히 구멍 뚫어진 것을 메워 그리고 물 갇다 부으니까 차 오르게 되지 않아요 빠져 나가지 않게 해야지 하나님 없이 복을 누리려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독에 물을 넣은 것 처럼 허망하기 짝이 없어요
 
과거의 삶이 그랬다는 것이어요
16절 그 때에는 이십 고르 곡식 더미에 이른즉 십 고르 뿐이었고 포도주 틀에 오십고르를 길으러 이른즉 이십고르 뿐이었었느니라
 
17절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 손으로 지은 모든 일에 곡식을 마르게 하는 재앙과 깜부기 재앙과 우박으로 쳤으니 너희가 내게로 돌아카지 아니하였느니라
 
맡 뻐잔 독처럼 살림이 고달파졌으면 해야 할 일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의 살므이 이 곤고함의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했는데 사람들은 자기를 돌이켜 성찰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래서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18절 너희는 오늘 이 전을 기억하라 아홉째 달 이십사일 곧 여호와의 성전 지대를 쌓던 말부터 기억하여 보라 곡식 종자가 아직도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어떤 이야기입니까? 성전 지대를 쌓기 시작하는 그 날부터 복을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성전 건축에 가서 일하느라고 노동력이 부족할지 몰라도 오히려 수확은 늘어나게 될 것이다 빠져나가는 일이 적기 마련이어요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어요
 
풍요의 상징이었던 나무들 포도나무 무화과 나무 석류나무 그 나무들이 열매가 없었는데 오늘 이후에는 달라질 것이다 확신에 찬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전 지대를 샇던 날부터 하나님이 복을 내리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고 그 날을 기억해 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성전 지대를 쌓는 날은 어느날이어야할까요?
 
생각해 보세요 우리의 마음속에서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세요
우상이란 어떤 것들이 우상이었지요
출 20장 4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물속에 있는 것들을 본 따서 만든 것들이 우상이지요
 
진자 우상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우리의 마음속에 영향을 미쳐할 그 자리에 우리 영혼의 핵심의 자리에 다른 것들이 들어와 독차지 하고 앉아 있는 것 그것이 우상이거든요
 
그 우상은 현대 세계의 우상은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돈입니다 오똔 뷴운 아여가 했어요 현대 세계의 우상은 출세이다 출세를 위해 못할 일이 없어 부모 자식 간의 관계도 끊고 친구들도 이용가치로 바라보고 그러면 내가 아무리 교회를 내 마음에 지성소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돈이어요 출세여요
 
우상 숭2배하고 이 우상을 척결해야 합니다 다시금 하나님이 내 마음에 중심 속에 들어오셔서 좌정하시도록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하나님을 우리 마음 속에 모셔 드리기 위해 그림을 품고 다가설 때 학개 시대의 성전 지대가 놓이는 것과 같은 것이야
 
내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있는 그 우상과 결별하고 내 마음의 핵심속에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그분과 맺은 언약 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어떤 이웃의 사랑의 마음들이 내 마음속에 회복될 때 그 때는 포도나무 무화과 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 같은 풍요의 상징의 나무들에 꽃이 피고 열매가 맺을 것이다 말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내 삶이 왜 이렇게 곤고할 까 생각하면서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야 되어요 여러분의 마음속에도 성전의 지대가 놓이기 바랍니다
 
마지막에 스룹바벨에게 약속이 등장하는데

20절 그달 이십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학개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1절 너는 유다 총독 스룹바벨에게 말하여 이르라 내가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것이요
22절 여러 왕국들의 보좌를 엎을 것이요 여러 나라의 세력을 멸할 것이요 그 병거들과 그 탄자를 엎드려뜨리리니 말과 그 탄자가 각각 그의 동료의 칼에 엎드려 지리라
23절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스알디엘의 아들 내 종 스룹바벨아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너를 세우고 너를 인장으로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세상에 가장 힘 있어 보이는 나라들을 심판하시고 연약해 보이지만 하나님이 내 종이라 일컷는 스룹바벨을 내 세우실 때 하나님이 마치 그를 도장처럼 그를 통해서 일하실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다양합니다.
종교인들도 있지만 때때로 정치 지도자들도 하나님의 종으로 일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나의 일이 아니하 하나님이 생각하신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바로 그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나를 복되고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우리의 삶이 황폐해 진 것이 아닌지 채워도 채워도 만족이 없었던 것은 내 마음속에 그릇된 것이 아닌지 다시 한번 그릇된 주인을 내 쫓고 하나님을 내 마음속에 모셔 들여서 마치 학개 시대에 성전 지대가 놓이는 것 처럼 그런 믿음을 가지고 살 때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의 나무의 열매들이 맺혀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학개를 통해 그렇게 약속하십니다
 
우리의 삶이 그런 복된 역사에 나타나는 것을 바라보고 그것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더 찬미하고 우리의 삶이 이웃 사람들을 복되게 하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스바냐(여호와께서 감추신다) 여호와께서 보호하신다


7월 21일(수)
내가 진멸하리라(스비냐 1:2)

스바냐의 의미 :
1. 여호와께서 감추신다. 2. 여호와께서 보호하신다. 3. 여호와께서 숨기신다.

스바냐 1:2 /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지면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 아멘

진멸하리라(쑤프. çûwph) סוּף 
- 완전히 쓸어버리다(창세기 6:7, 7:4) 

창세기 6:7,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창세기 7:4, 지금부터 칠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를 내려 나의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 버리리라.

스바냐(Zephaniah)
(의미) 야웨께서 숨기신다.

2:3.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스바냐 1:3
내가 사람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와 바다의 고기거치게 하는 것(우상)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할 것이라 내가 사람을 지면에서 멸절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멸절하다(카라트. kârath) כָּרַת

참조 / 스바냐 1:4-6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 모든 거민 위에 손을 펴서 바알의 남아 있는 것을 그곳에서 멸절하며
그마림이란 이름과 및 그 제사장들을 아울러 멸절하며.
무릇 지붕에서 하늘의 일월성신에게 경배하는 자와 경배하며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와. 여호와를 배반하고 좇지 아니한 자와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를 멸절하리라.

스바냐 1:1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아의 시대에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더라.

히스기야(13대 왕?) - 아마랴 - 그다랴 - 구시 - 스바냐

히스기야 : 야웨께서 강하게 하셨다
아마랴 : 야웨께서 약속하셨다
그다랴 : 야웨께서 위대하시다
구스 : (이디오피아 사람)
스바냐 : 야웨께서 감추어 두셨다
              야웨께서 쌓아 두셨다
백성들의 죄를 쌓아놓으시고 훗날 벌하실 것이다(1:12)

신앙의 뿌리가 깊은 가문 

스바냐 1:3

내가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거치게 하는 것(우상)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할 것이라
내가 사람을 지면에서 멸절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진멸의 대상 : 짐승, 새, 고기 

멸절하다(카라트. kârath) כָּרַת 

스바냐 1:4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 모든 거민 위에 손을 펴서 바알의 남아 있는 것을 그곳에서 멸절하며 그마림이란 이름과
및 그 제사장들을 아울러 멸절하며.
 
손을 펴서(하나님의 권능을 펴신다) 모세의 지팡이 

그마림(바알의 제사장을 의미)


스바냐 1:5

무릇 지붕에서 하늘의 일월성신에게 경배하는 자와 경배하며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와. 

말감(암몬 족속의 신 밀감)

스바냐 1:6
여호와를 배반하고 좇지 아니한 자와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를 멸절하리라.

우상(바알, 말감) : 욕망, 이기적, 배타적
야웨 신앙 : 경외심, 포용, 협력  

남 유다의 왕들 

       13대 : 히스기야
  14대 : 므낫세
15대 : 아몬
    16대 : 요시야

혼합주의 시대 : 개인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정의와 공의를 행한 임금 요시야(예레미야 선지자의 평가)
가난한 자, 불쌍한 자를 위한 신앙의 통치
이 시대에 스바냐의 등장 

시편 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오늘의 기도

기복신앙을 창조신앙으로
개인구원을 사회구원으로


1. 바알의 남아 있는 것을 멸절

'바알'은 가나안 사람들의 신으로, '주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알은 농경신으로 다산을 주관하는 풍요의 신입니다.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우상 숭배를 금지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주민들이 섬기던 바알을 섬겼습니다.
여기서 '바알의 남아있는 것'은 개혁을 추구했던 요시아가 많은 바알 숭배 사상이 남아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은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는 바알 우상을 파괴하실 것임을 말씀합니다.

2. 그마림이란 이름과 및 그 제사장들을 멸절

'그마림'은 바알을 숭배하는 가나안의 제사장들을 가리키던 칭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알의 남은 것들만 파괴하시는 것이 아니라, 거민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었던 이방 제사장들조차 모조리 파멸시키실 것임을 말씀합니다.

3. 지붕에서 하늘의 뭇 별에게 경배하는 자


이들은 별과 달을 숭배하는 자들입니다.
별과 달을 숭배하는 의식은 가나안과 바벨론에서 흔히 행해졌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가나안과 바벨론의 영향을 받아 왕정 시대가 끝날 때까지 지속적으로 별과 달을 숭배하였으며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신 4:19; 왕하 21:3,5; 렘 8:2; 19:13; 44:8-10).
하나님은 선지자 스바냐를 통해서 별과 달을 숭배하는 자들도 예외 없이 심판하실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4. 야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

'말감'은 문자적으로 '그들의 왕'을 의미합니다.
'말감'은 솔로몬이 후궁들을 위해서 산당을 지은 것에서 시작되어(왕상 11:5-8,33; 왕하 23:13) 지속적으로 이스라엘을 악에 빠지게 했던 우상 중의 하나입니다.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은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맹세한 후에도 말감을 섬기는 종교적 혼합주의를 행하였습니다.
이러한 종교적 혼합주의는 예루살렘에서 흔히 자행되던 죄악이었기에 이들도 심판의 대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5.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과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

하나님께서 심판하기로 결정하신 대상은 배교자들과 불신앙자입니다.
여호와를 찾고 구하는 자는 내적으로, 도덕적으로 여호와만을 바라며 그 계명을 즐겨 행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과 유다 거민들 중에는 하나님을 바라기는 커녕 도리어 내면적, 도덕적으로 배교하거나 불신앙에 빠진 자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입니다.

왜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는 자들은 심판의 대상이 되어지는 것입니까?

여호와 하나님만이 절대자 이시기에 이 세상의 모든 삼라만상이나 사람들은 그 앞에서 복종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요, 그가 세우신 법이요,

창조의 질서이기에 하나님 한분만을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1:17절에서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고 심판의 원인을 밝히고 있습니다.

유다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 스스로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께 범죄하였기 때문입니다.
은과 금을 하나님 처럼 섬긴 이유 때문입니다.(18)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우상 섬기기를 즐겨한 때문입니다.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그들이 그렇게 추구했던 은과 금도 여호와께서 심판하시는 날에는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음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조차도 하나님이 안 계신 것 처럼 사는 그리스도인이 점점 늘어만 가는 것 같습니다.
왜, 다른 신상에게 경배하는 것을 거부하고 하나님께만 경배하는 일이, 과연 엄청난 고통과 생명의 위협을 당하면서까지도 대가를 지불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이것은 영원히 죽느냐 영원히 사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창조주 하나님과 죽임 당하신 어린양 예수님 외에 진정한 경배의 대상은 없습니다. 창조자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주님의 선하신 뜻대로 지음 받은 피조물이라는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속에서 우리는, 우상숭배와 죄의 결과는 반드시 '심판'이라고 하는 엄중한 경고를 마음속에 새기며 주의 뜻을 이루어나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기도 /

심판하실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를 기억하여 구별된 주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소서.





스바냐가 활동하던 시기는 유다 왕국의 영적 암흑기였다. 므낫세와 아몬의 영향으로 우상 숭배의 죄악에 물들었다. 요시야가 개혁을 이끌었지만 유다 백성의 진실한 회개가 일어나지 않았다. 예배 형식을 정비하고 우상을 몰아냈지만 백성들의 부패한 마음을 바꿀 수가 없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스바냐를 통해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신다. 유다 백성과 지도자의 죄악을 고발하고(4-5), 심판 날의 모습을 예언한다(7-13). 불의한 권력자들, 우상 숭배자들, 예루살렘에서 포악을 행한 자들, 돈을 의지한 자들은 심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심판의 날이 무척이나 가깝고 빠르게 올 것이라고 예언한다.

여호와의 큰 날에 멸절하고자 하는 대상은 누구인가?

지붕에서 하늘의 뭇 별들에게 경배하는 자들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들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

우상숭배하는 자들과 여호와를 따른다고 하면서도 우상을 따르는 자들, 그리고 여호와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멸절하신다고 하였다.

그 중에서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들'을 멸절하신다는 말씀이 귀에 더 쟁쟁하게 들려온다.

참된 경배의 대상이신 만군의 여호와를 경배하지 않고 잘못된 대상인 하늘의 일월성신을 경배하는 자들을 멸절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명목적으로는 여호와를 섬기지만 실제로는 이방신을 섬기는 패역한 선민들의 죄악을 질타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역사적으로 볼 때 전적으로 이방신을 섬기는 데에 전념한 적은 거의 없었다. 죄악에 빠진 경우 거의 대부분 이러한 범죄를 저질렀다. 즉 가식적 · 형식적으로 여호와를 섬기거나 종교 혼합주의적 · 종교 다원주의적 유혹에 미혹되어 여호와께 범죄하였던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여호와를 섬기면서도, 하나님을 믿노라고 하면서도 세상적인 것들을 쫓아다니는 삶들이 너무 너무 많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가증히 여기시는 것이다. 우리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찾아보고 뉘우치고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자.

예배의 형식은 엄청나게 발전하였다. 축제와 같은 예배를 드린다고 각본에 짜여진 대로 연출을 한다. 성도들에게 감동을 주는 예배의 형식은 뛰어나다. 현대 문화의 발전을 교회 예배 의식에 도입하여 엄청나게 화려하다.

그러나 예배를 준비하는 자들의 마음 속에 어떤 것들이 존재하고 있을까? 종교 혼합주의, 다원주의 뿐만 아니라 개인의 사욕을 채우기 위한, 연출자에게 기쁨과 만족을 주기 위한 예배가 대부분임을 볼 때 안타까울 뿐이다.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힘써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성경대조 및 주해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심판 날의 선포(1-6절) ;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이 심판 받는 이유가 선포된다. 이들은 우상숭배를 하였다.

1.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시대에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더라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아 때에, 주께서 스바냐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의 아버지는 구시이고, 할아버지는 그달리야이고, 그 윗대는 아마랴이고, 그 윗대는 히스기야이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땅 위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내가 말끔히 쓸어 없애겠다. 나 주의 말이다.

3. 내가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거치게 하는 것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할 것이라 내가 사람을 땅 위에서 멸절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람도 짐승도 쓸어 없애고, 공중의 새도 바다의 고기도 쓸어 없애겠다. 남을 넘어뜨리는 자들과 악한 자들을 거꾸러뜨리며, 땅에서 사람의 씨를 말리겠다. 나 주의 말이다.

4.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들 위에 손을 펴서 남아 있는 바알을 그 곳에서 멸절하며 그마림이란 이름과 및 그 제사장들을 아울러 멸절하며

내가 손을 들어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을 치겠다. 이 곳에 남아 있는 바알 신상을 없애고, 이방 제사장을 부르는 그마림이란 이름도 뿌리 뽑겠다.

​‘그마림’은 히브리어 ‘케마림’의 음역이다.
‘케마림’은 ‘우상을 섬기게 한 제사장들’(왕하 23:5), ‘(송아지 우상을 섬기는) 제사장들’(호 10:5)로 번역되고 있다.

/ 아람어, 시리아어, 그리고 우가릿어에서 ‘케마림’은 ‘제사장들’을 일컫는다.

/ 따라서 구약 성경에서 ‘케마림’이 ‘우상을 섬기는 제사장들’을 가리키는 말인 것은 틀림이 없다.

/ 문제는 본문에서 ‘케마림’과 ‘그 제사장들’을 뜻하는 ‘학코하님’의 관계가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이다.

​한글개역 성경 및 개역개정판 성경과 KJV가 ‘케마림’을 고유명사처럼 ‘그마림(Chemarims)’으로 번역한 반면 대부분의 다른 영역본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제사장들(NASB, the idolatrous priests)’, ‘우상의 제사장들(AB, the idol priest)’ 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 만일 후자의 번역을 따르면 ‘햄 학케마림’은 ‘우상을 숭배하는 제사장들의 이름’ 곧 ‘우상을 숭배 하는 제사장들 개개인의 이름’을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제사장들 개개인의 이름을 멸절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부자연스럽다. 더욱이 ‘이름’을 뜻하는 ‘햄’이 복수형이 아니라 단수라는 사실은 이러한 해석을 더욱 부적절하게 만든다.

/ 그러므로 ‘케마림’은 한글 개역 성경이나 KJV의 번역처럼 일종의 고유명사로서 우상을 숭배하는 제사장들을 부르는 호칭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 즉 본문은 ‘그마림이란 이름’, 즉 ‘그마림이란 호칭’ 자체를 멸절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 이러한 표현은 앞선 ‘바알의 남아 있는 것’까지 완전히 멸절할 것이라는 표현과 일맥상통한다.

/ 바알에 관계된 모든 것을 그 뿌리까지 완전히 제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상 숭배에 앞장섰던 그 제사장들과 그 제사장들을 지칭하는 호칭까지 완전히 말소시키겠다는 것은 모두 우상 숭배에 대한 철저한 심판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문의 해석에 있어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제사장들(학코하님)’에 대한 해석이다.

 다시 말해 여기서 말하는 ‘제사장들’이 어떤 제사장들을 가리키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 ‘제사장들’은 타락한 여호와의 제사장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를 문맥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이 문제의 해답은 의외로 간단히 찾을 수 있다.
앞에서 본문을 직역한 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 제사장들과 함께 그 그마림이란 이름을’이란 표현은 ‘우상 바알을 섬기는 그 제사장들과 함께 그들을 지칭하는 그마림이란 호칭을’이라는 의미로 이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학코하님’은 ‘우상을 숭배하는 제사장들(NIV, the idolatrous priests)’로 해석하여야 한다.

본절에서 여호와께서는 우상 바알을 멸절시키시되 그 남아 있는 뿌리까지 철저히 진멸할 것이며, 또한 그 우상을 섬기는 제사장들을 멸절시키시되 그들을 가리키는 이름까지 완전히 사라지게 할 것이라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5. 또 지붕에서 하늘의 뭇 별에게 경배하는 자들과 경배하며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들과

지붕에서 하늘의 뭇 별을 섬기는 자들, 주에게 맹세하고 주를 섬기면서도 말감을 두고 맹세하는 자들,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들과'는

/ 문자적으로 ‘그리고 경배하는 자들을,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그럼에도 말감으로 맹세하는(자들을)’이란 뜻이다.

/ 여호와의 심판의 대상이 되는 자들로 상징된 ‘경배하는 자들’의 두번째 부류를 지목하고 있다.

/ 본절 전반부에서는 참된 경배의 대상이신 만군의 여호와를 경배하지 않고 잘못된 대상인 하늘의 일월성신을 경배하는 자들을 멸절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본문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명목적으로는 여호와를 섬기지만 실제로는 이방신을 섬기는 패역한 선민들의 죄악을 질타하고 있다.

/ 이스라엘 백성들은 역사적으로 볼 때 전적으로 이방신을 섬기는 데에 전념한 적은 거의 없었다. 죄악에 빠진 경우 거의 대부분 본문에서 언급하는 범죄를 저질렀다고 할 수 있다. 즉 가식적 · 형식적으로 여호와를 섬기거나 종교 혼합주의적 · 종교 다원주의적 유혹에 미혹되어 여호와께 범죄하였던 것이다.

‘말감’은 ‘왕’을 뜻하는 ‘멜레크’에서 나온 말로

/ 문자적으로는 ‘그들의 왕’이란 의미를 지닌다.

/ 그래서 이 표현을 가나안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이며 왕으로 섬겼던 바알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 그러나 히브리어 성경의 헬라어 역본인 70인역 (LXX)과 수리아 역본과 라틴어로 번역된 벌게이트 역본에서는 이것이 암몬 족속의 국가신인 밀곰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 바알에 대해서는 이미 4절에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문맥상 밀곰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 이 ‘말감’ 곧 밀곰은 솔로몬이 후궁들을 위해 산당을 지은 것에서 시작되어(왕상 11:5-8 ; 왕하 23:13) 바알과 더불어 지속적으로 이스라엘 자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격노케 한 우상으로 소개된다.

겉으로는 ‘여호와께’ 경배를 드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말감으로’ 맹세를 하는 혼합주의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만연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러한 혼합주의를 극도로 싫어하신다.

/ 출애굽 당시 시내산 아래서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을 자신들을 구원한 신이라 말하면서 여호와의 절일을 선포하고 제단을 쌓고 제물을 드렸었다(출 32:1-6). 그러나 그것은 여호와 신앙이 아닌 여호와의 이름을 가장한 우상숭배일 뿐이었다. 때문에 그것은 여호와를 진노케 했으며 결국 이에 연루된 무수한 악인들이 심판을 당해야만 하였다(출 32:25-35).

/ 이와 같이 종교 혼합주의는 여호와의 이름을 이용한다 해도 그것은 우상 숭배의 다름 아니다. 아울러 이러한 혼합주의는 오히려 참된 여호와 신앙을 더욱 빠르고 무섭게 허물어뜨릴 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6.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과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을 멸절하리라

주를 등지고 돌아선 자들, 주를 찾지도 않고 아무것도 여쭙지 않는 자들을 내가 없애 버리겠다."

심판 날의 모습(7-13절) ; 심판 받는 날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습이 나온다. 이들에게 임할 심판의 내용이 무겁고 엄중하다.

7.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고 그가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음이니라

주께서 심판하시는 날이 다가왔으니, 주 하나님 앞에서 입을 다물어라. 주께서는 제물을 잡아 놓으시고서, 제물 먹을 사람들을 부르셔서 성결하게 하셨다.

8. 여호와의 희생의 날에 내가 방백들과 왕자들과 이방인의 옷을 입은 자들을 벌할 것이며

"나 주가 제물을 잡는 날이 온다. 내가 대신들과 왕자들과, 이방인의 옷을 입은 자들을 벌하겠다.

9. 그 날에 문턱을 뛰어넘어서 포악과 거짓을 자기 주인의 집에 채운 자들을 내가 벌하리라

그 날이 오면, 문지방을 건너뛰는 자들을 벌하겠다. 폭력과 속임수를 써서, 주인의 집을 가득 채운 자들을 내가 벌하겠다.

1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어문에서는 부르짖는 소리가, 제 이 구역에서는 울음 소리가, 작은 산들에서는 무너지는 소리가 일어나리라

그 날이 오면, 물고기 문에서는 곡성이, 둘째 구역에서는 울부짖는 소리가, 산 위의 마을에서는 무너지는 소리가 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11. 막데스 주민들아 너희는 슬피 울라 가나안 백성이 다 패망하고 은을 거래하는 자들이 끊어졌음이라

막데스에 사는 너희는 슬피 울어라. 장사하는 백성은 다 망하고, 돈을 거래하는 자들은 끊어졌다.

12. 그 때에 내가 예루살렘에서 찌꺼기 같이 가라앉아서 마음속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등불로 두루 찾아 벌하리니

그 때가 이르면, 내가 등불을 켜 들고 예루살렘을 뒤지겠다. 마음 속으로 주는 복도 내리지 않고, 화도 내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술찌꺼기 같은 인간들을 찾아서 벌하겠다.

13. 그들의 재물이 노략되며 그들의 집이 황폐할 것이라 그들이 집을 건축하나 거기에 살지 못하며 포도원을 가꾸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그들은 재산을 빼앗기고 집도 헐릴 것이다. 그들은 집을 지으나, 거기에서 살지 못할 것이며, 포도원을 가꾸나, 포도주를 마시지 못할 것이다."

심판 날의 성격(14-18절) ;
미리 선지자를 통해 이 날이 가깝고 빠르다고 경고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인자하심을 보여준다.

14.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우는도다

주께서 심판하실 그 무서운 날이 다가온다. 득달같이 다가온다. 들어라! 주의 날에 부르짖는 저 비탄의 소리, 용사가 기운을 잃고 부르짖는 저 절규.

15.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그 날은 주께서 분노하시는 날이다. 환난과 고통을 겪는 날, 무너지고 부서지는 날, 캄캄하고 어두운 날, 먹구름과 어둠이 뒤덮이는 날이다.

16.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들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

나팔이 울리는 날, 전쟁의 함성이 터지는 날, 견고한 성읍이 무너지는 날, 높이 솟은 망대가 무너지는 날이다.

17. 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맹인 같이 행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또 그들의 피는 쏟아져서 티끌 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 같이 될지라

"내가 사람들을 괴롭힐 것이니, 그들은 눈먼 사람처럼 더듬거릴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나 주에게 죄를 지은 탓이다. 그들의 피가 물처럼 흐르고, 시체가 오물처럼 널릴 것이다.

18.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지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주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은과 금이 그들을 건질 수 없다.
주께서 분노하시는 날, 주의 불 같은 질투가 온 땅을 활활 태울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을 눈 깜짝할 사이에 없애실 것이다.


유다에 임할 심판의 날

스바냐가 활동하던 시기는 유다 왕국의 영적 암흑기였다.
므낫세와 아몬의 영향으로 우상 숭배의 죄악에 물들었다.
요시야가 개혁을 이끌었지만 유다 백성의 진실한 회개가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스바냐를 통해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신다.
유다 백성과 지도자의 죄악을 고발하고(4-5),
심판 날의 모습을 예언한다(7-13).

불의한 권력자들, 우상 숭배자들, 예루살렘에서 포악을 행한 자들, 돈을 의지한 자들은 심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심판의 날이 무척이나 가깝고 빠르게 올 것이라고 예언한다.

​'유다에 임한 심판의 날'을 설교할 수 있다.
심판의 모습을 말하며 경고하는 메시지이다.
그러나 이 경고는 윽박지르는 위협이 아니라 회개하길 기대하는 사랑의 경고이다.
심판의 강도와 엄중함을 강조할 수 있다.
하나님 외 다른 것을 의지하는 모든 자들이 심판 받을 것이며,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다행히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고 자비로우신 분이니 아직 기회가 남았다.
그러니 외형만 그럴듯하게 바꾸는 회개가 아니라 전심으로 돌이켜야 한다.
하나님 대신 의지하는 모든 것을 버리고 돌이켜야 한다.

​주제 / 여호와의 날

​오늘의 말씀은, 유다에 임한 심판의 날입니다.
대부분의 선지서 말씀이 주는 교훈이 그렇듯이, 우리는 심판을 받는 유다 왕국을 반면교사로 삼아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본문에 대한 적용적 해석

​스바냐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기는 요시야 왕이 종교개혁을 시행하던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에 예배 형식을 정비하고 우상을 몰아냈지만 백성들의 부패한 마음을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스바냐를 통해 심판의 말씀이 선포됩니다.
그들의 죄를 낱낱이 고발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특히 하나님보다 돈과 권력을 추구했던 부패한 지도자들은 더욱 철저히 심판받을 것입니다.
그들이 의지했던 성벽과 높은 망대
는 무너질 것이고 돈과 은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심판의 날이 무서운 속도로 다가온다고 선지자는 선포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전 경고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고 인자하심을 보여줍니다. 이 말을 들은 유다 백성과 지도자들은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청중을 향한 해석적 적용

​오늘의 말씀은, 유다에 임한 심판의 날입니다.
외형에만 머무르는 변화와 회개는 하나님의 심판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유다 백성과 지도자들에게 요구하셨던 회개처럼 전심으로 돌이켜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심판이 무척이나 엄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외에 의지하는 우상이 있습니까?
눈에 보이는 권력자를 의지합니까?
은과 금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의지하는 모든 것들이 심판의 날에 무용지물이 될 것입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들이 있다면 지금 즉시 버리고 전심으로 돌이킵시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고 자비로우신 분이시니 돌이킬 때 우리를 받아주십니다.

​결론과 도전

​하나님께서는 심판만을 즐기는 무자비한 폭군이 아니십니다.
선지자를 통해 미리 심판을 예고하시는 이유는 자신의 백성들이 돌이키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심판 경고를 들으신 모든 분들이 하나님께로 즉시 돌이키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7월 22일(목)
구하라 찾으라 얻으리라(스바냐 2:3)

스바냐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숨기신다"는 뜻입니다.
스바냐가 활동하던 시기는 니느웨가 함락되고 바벨론이 유다를 침략하던 시기라고 합니다.

스바냐 2:3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아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남은 자에 대한 보상 심판
아모스 5:15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찌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스바냐 2:3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요셉의 남은 자(유다) :  세상(에레츠. erets) אֶרֶץ
                                     땅, 여러나라, 각국

첫째, 여호와를 찾으라
                          (바카쉬. bâqash) בָּקַשׁ                                          
                            - 믿음 생활의 근본                   

아모스 5:6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Seek the LORD, and ye shall live                   
삶이란 다양한 문제와 부딪치는 것
그때마다 누구를 먼저 찾는가?


둘째,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바카쉬. bâqash) בָּקַשׁ
  - 믿음 생활의 핵심(예수의 의와 마음)

시편 105:3
    그 성호를 자랑하라 무릇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찌로다.
    Glory ye in his holy name: let the heart of them rejoice that seek the LORD.

셋째,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싸타르. çâthar) סָתַר
- 믿음 생활의 결과(노아의 방주)

마태복음 24: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But he that shall endure unto the end,
the same shall be saved.

누가복음 21:19 /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마태복음 7:7-8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빌립보서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오늘의 기도 

예수님의 마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이루게 하소서!


스바냐는 유다 백성들을 "수치를 모르는 백성"이라고 합니다.
우상숭배에 몰입하므로 옳고 그른 것에 대한 사리 분별력이 없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상숭배로 인해 가정이 파괴되고, 사회와 나라 전체가 혼란에 휩싸여 있고, 이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가 극에 달해있는데 백성들은 전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만일 지금 내 몸의 일부분이 썩어가고 있는데 이를 전혀 모르고 있다면 생명이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패역한 무리를 향해 "모이라"고 외칩니다.
모이되 하나님의 격렬한 분노가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3절)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배신하고 온갖 이방신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는 "수치를 모르는 백성"인 유다 백성을 향해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라고 부르십니다.

첫째는 반어법의 의미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규례를 어기고 세상에서 가장 교만한 자들이라는 것을 반어적으로 강조함으로 그들의 잘못을 스스로 깨우치게 하기 위해 이처럼 반대되는 호칭으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유다 백성들이 아무리 패역했다 할지라도, 지금이라도 하나님을 찾고 공의와 겸손을 구한다면 유다 백성의 신분은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겸손한 자라는 선포성의 뜻을 지닐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우리를 의인이라 칭하셨습니다.
우리가 의인 이였기에 우리를 의롭다고 하셨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지금 과연 의인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주셨습니다.
우리를 왜 의롭다고 하셨을까요?

본문의 표현대로라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을까"해서입니다.

암에 걸려 죽어야 할 사람이 한 순간 암이 치료되어 정상인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럽겠습니까!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그가 과연 과거처럼 허랑방탕한 삶을 살까요?
아니면 매 순간 새로운 생명을 얻은 것에 감격해하면서 최선을 다해 살까요?

본문은 갑자기 주변 나라들이 심판받은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유다의 서쪽에 있는 블레셋인 가사와 아스글론(4-7), 동쪽에 있는 모압과 암몬(8-11), 남쪽의 구스와 에티오피아(12), 북쪽의 앗수르(13-15)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모든 나라들을 심판하는 주의 날이 임박했다고 경고하십니다.
이들을 심판하시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었습니다.

“그들이 내 백성을 비방하고 자기들의 경계에 대하여 교만하였느니라”(8)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백성에 대하여 교만하여졌음이라”(10)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15)

즉 이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 것은 주변 국가들이 교만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무시하고 모욕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아이러닉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모욕했다고 이들을 심판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소위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고 있었나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철저히 외면하고 이방신들을 우상으로 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니 당연히 이웃국가들로부터 지탄받아 마땅합니다. 오히려 잘못을 범하고 있는 유다를 비방하고 모욕하는 이들에게 상을 주어야 하지 않나요!

자녀들을 키우면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표현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되었습니다. 자녀가 아무리 나쁜 짓을 저질렀다고 해도 부모에게는 사랑스러운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보다 더하십니다. 자신을 아무리 배반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사랑스러운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유다가 저지르고 있는 죄에 비하면 이방국가의 죄는 죄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들 이방국가들을 심판하실 뿐만 아니라 열방의 땅을 이스라엘이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하십니다. 즉 본문에서 스바냐를 통해 하나님께서 의도하는 바는 단 한 가지,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여호와를 찾게 하기 위함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여호와를 찾고 올바르게 살려고 힘쓰고 겸손하게 살아간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열방을 차지하는 복을 누리게 되지만, 여전히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심판을 받게 될 주변국가와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애절하지 않습니까! 본문은 자신을 끊임없이 배반하는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지고하신 사랑의 고백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오늘 본문에서 나타난 이스라엘을 향하신 사랑보다 더 작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의 생명을 내려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로 내모실 만큼 우리가 잘나고 똑똑한 사람인가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괴수의 삶을 살아가던 우리였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인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공의와 겸손을 구하기를 인내하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생명을 얻은 우리는 여전히 나약한 존재입니다. 세상적 유혹에 너무나 쉽게 넘어가 세상의 가치를 우상으로 섬기며 수치를 모르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명령을 따르면서 살아가는 겸손한 내 아들, 딸아, 너희는 나 하나님을 찾고, 올바로 살도록 힘쓰며 겸손하게 살도록 애써라”


스바냐서 2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앞부분은 1-3절로 이스라엘 자손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선포와 그 심판이 오기 전에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주시는 말씀이며, 두 번째 부분은 이스라엘이 재난을 겪게 되는 일에 일조했거나 그 재난을 기뻐했던 몇몇 이웃 나라들까지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먼저 1절과 2절을 보겠습니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명령이 시행되어 날이 겨 같이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내리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이라는 말의 의미는 절대자의 존재를 거부하고 자기가 모든 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교만한 사람을 뜻합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무관심하며 하나님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이기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은 되었으나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따르지 않는 명목상의 신자, 이름뿐인 성도들도 수치를 모르는 백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하였으니, 모이라는 것입니다.
보통 심판이 임하면 모이지 말고 오히려 숨을만한 곳을 찾아 흩어져 도망쳐야할 것인데, 스바냐 선지자는 모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파멸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함께 찾아보라는 것이며, 민족적으로 한 자리에 모여 스스로를 낮추고 금식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생존과 멸망의 갈림길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원인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멈추고, 돌이킬 수 있는 길을 함께 찾으라는 것입니다. 스바냐 선지자는 그 방법으로 다음 세 가지를 권하고 있습니다.


3절,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첫째, 여호와를 찾으라

주님의 은총과 은혜를 구하며, 모든 일을 주님께 고하고, 필요한 것들을 요청하며, 부지런히 찾고 끊임없이 하나님을 찾는 것
이것이 믿음 생활의 근본입니다.
세상의 것, 인간을 찾아다니지 말고 여호와를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점에서 새벽마다 말씀으로 모이는 우리들을 주님은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라

하나님께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들을 이루어 주시도록 구하고,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할 본분을 제대로 행하는 것이 공의입니다.
우리가 바르게 살아서 의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값없이 죄의 대가를 치러주심으로 받은 그 구속의 의, 예수 공로로 구원 받게 된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도록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 때 성령의 은혜가 임하고,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셋째, 겸손을 구하라

겸손은 자랑, 교만, 자고(自高)의 반대로 성경에서 말하는 겸손은 사람이 홀로 있을 때의 자기 내면에서 생각하는 것뿐만 아니라, 반드시 외부 사람들을 향한 행동에서 나타나는 그 사람의 태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겸손이 온유와 비슷한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자각하여 낮은 데 처하는 마음가짐을 가질 때 하나님의 은총을 입게 됩니다.

역대하 7장 14절입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이와 같은 세 가지 자세와 마음을 가지고 실천하면, 하나님께서는 비록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도 우리가 숨김을 얻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숨김을 얻는다는 이 표현은 노아의 방주를 연상하게 합니다.
땅의 모든 것을 심판하실 때, 노아와의족들을 살리시려하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사야서 20장 26절에 보면 “내 백성아 갈지어다.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깐 숨을지어다.”라는 약속의 말씀을 생각하게 됩니다.

선한 사람이라고 해서 모든 환난과 심판을 면하는 것은 아닙니다.
환난과 재난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뢰하고, 공의를 구하며, 겸손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숨김을 받고, 특별한 보살핌을 받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습니다. 죄악이 만연하고, 재난이 횡행할 때에 믿는 사람들은 거룩한 두려움으로 깨어 있고, 하나님께 안전하고 평안한 피난처를 간구하는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숨김을 얻으리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2장의 두 번째 부분은 이스라엘 이웃 나라들에 대한 심판의 말씀입니다.
4절에서 7절까지는 블레셋 국가 안에 있는 도시와 지역들에 대한 심판 예언이며,
8절부터 11절에는 모압과 암몬에 대한 심판입니다.
12절부터 15절까지는 구스와 니느웨 국가에 대한 심판의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방 나라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침탈하고, 주님의 백성들을 조롱하며 비방했기 때문입니다.

8절, 내가 모압의 비방과 암몬 자손이 조롱하는 말을 들었나니 그들이 내 백성을 비방하고 자기들의 경계에 대하여 교만하였느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선하게 살고자 하는 이들을 모함하고, 조롱하며, 비방할 때 하나님이 갚으시며 심판하심을 믿으며, 굳건히 견디어야 할 것입니다. 

12절과 13절에는 구스와 니느웨에 대한 멸망과 심판이 나옵니다.
강력했던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의 멸망을 예언함으로써 하나님의 분노의 날, 닥칠 심판이 결코 작은 규모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심각한 것이며, 임박한 것임을 확인시켜 줍니다. 그럼에도 주님을 찾고 의뢰하는 이들에게는 피할 길을 열어주시는 소망의 하나님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심판의 날, 여호와의 분노의 날과 같은 커다란 고통과 시련의 시기가 다가올 때, 스바냐 선지자의 예언처럼, 우리는 모여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주신 말씀처럼 하나님을 찾고, 공의와 겸손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살아계신 하나님, 임박한 심판의 날이 다가왔는데도, 수치를 모르는 백성처럼 무디고 강퍅한 심령으로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 만연한 죄악과 불신앙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모이기에 힘쓰게 하시고, 민족적인 회개, 공동체의 돌이킴을 허락하옵소서.
그리하여 환난 날에 숨김을 얻게 하시고, 주님의 은총을 입게 하소서.
겸손하게 주님의 얼굴을 구하며, 하나님만을 나의 의지할 분으로 섬기는 믿음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7월 23일(금)
나를 기다리라(스바냐 3:8)



스바냐 선지자가 활동할 때는 남 유다 제16대 요시야 시대였습니다.
요시야는 영적 부흥을 이끈 대표적인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불과 8세에 왕이 되었으나 20세에 이방신과 우상을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제거해 버렸으며, 종교개혁의 범위를 북이스라엘까지 확장시켜 벧엘에 있는 제단까지 헐어 버리고, 사마리아 지역의 산당 제사장들을 모두 죽이기도 한, 참으로 대담한 믿음의 선각자였습니다.

그는 성전을 수리하는 도중에 대제사장 힐기야가 발견한 율법책을 보고서, 그 이후 그것을 엄격히 지켜 나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여전히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고, 이 사실을 아시는 하나님은 유다에 내리실 진노를 돌이키지 않으셨습니다.

2장에서 이방 나라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께서 3장에서는 예루살렘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선지자를 통해 전달하십니다.

1- 2절입니다.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그 성읍이 화 있을진저. 그가 명령을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의뢰하지 아니하며 자기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였도다.”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 당시 예언자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이미 1장에서 심판을 선포했는데도 또 다시 패역하고 더럽다느니, 포학하다느니 하는 거친 표현까지 써가며 말씀을 전해야 하는 선지자 스바냐의 심정은 매우 힘들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스바냐는 자신의 고조할아버지가 히스기야 왕이었던 왕족 출신의 선지자였습니다. 자신이 왕족이면서도 또한 최선을 다하는 왕 요시야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스바냐를 선지자로 보내어 3가지 싫은 소리를 직접적으로 전하게 하십니다. 자신의 백성을 압제하는 것이 포학이요, 하나님에게 반역하는 것이 패역이었고, 종교적으로 우상을 섬기며 순결을 더럽혔다는 것입니다.

그와 더불어 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백성의 지도자들과 재판장들을 향해서 탐욕에 가득 찬 굶주린 사자요, 저녁에 잡은 먹이를 아침이면 다 먹어치울 정도로 만족을 모르는 이리에 비유하였습니다. 4절에서는 심지어 선지자들과 제사장들 같은 종교 지도자들조차 경솔하고 간사하고 거만할 뿐 아니라, 우상숭배와 일월성신의 숭배로 말미암아 성소를 더럽히고 하나님의 말씀까지 불순종함으로 내면의 태도까지 더럽혔다고 선포합니다. 2장 말미에서 그렇게 타락했노라고 선언한 이방나라들을 향한 심판의 메시지가 똑같이 유다에서도 적용되는 것을 보면, 하나님 편에서는 ‘그 놈이 그 놈이다’라고 여겨질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오늘의 말씀은 우리들을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100주년기념교회는 우리가 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세간의 주목을 톡톡히 받고 있으며, 일거수일투족의 행동거지에 있어 매우 조심스럽게 처신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냥 그저 주님의 말씀에 순수하고 진실되게 반응하며 신앙생활 하려고만 했던 우리들로서는 이러한 주목이야말로 너무나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어찌 되었든 개혁의 기치를 외친 자답게 말씀대로 살아내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이기에, 거침없이 개혁하는 젊은 왕 요시야 시대였음에도 여전히 그 왕의 턱 밑에 있던 지도자들은 그의 고군분투하는 노력에 비해 한없이 타락해 있었던 것처럼, 오늘도 우리와는 전혀 먼 얘기인 듯한 ‘포학과 패역, 그리고 더러움’의 모습이 우리 가운데도 버젓이 남아있는 것은 아닌지 겸허히 주님의 말씀으로 허리를 동이는 이 시간이기를 원합니다. 우리 자신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여전히 탐욕스런 눈빛의 사자와 이리 같은 모습을 취하고 있는데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들의 가정에서, 직장에서, 이웃과의 관계에서 냉정히 되짚어보는 우리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들의 진정한 몸부림을 통해 신앙과 삶이 다른 이중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6절에서, 아침마다 빠짐없이 공의를 비추시는 하나님께서 자기 수치를 알지 못하는 자를 심판하시되, 사람조차 살 수 없을 정도로 모든 성읍을 초토화시켜버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 이방인들과 비교해서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더 나은 점이 별로 없는 자들을 향해 따로 말씀하십니다. 7절입니다.

“내가 이르기를 너는 오직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 그리하면 내가 형벌을 내리기로 정하기는 하였지만 너의 거처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그들이 부지런히 그들의 모든 행위를 더럽게 하였느니라.” 표준새번역으로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너에게 일렀다. 너만은 나를 두려워하고, 내가 가르치는 대로 하라고 하였다. 그러면 내가 벌하기로 작정하였다가도 네가 살 곳을 없애지는 않겠다고 하였는데도, 너는 새벽같이 일어나서 못된 일만 골라 가면서 하였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대하는 하나님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습니다. 요나서에서 어떻게 하여 하나님께서 니느웨 백성들을 향해 불 같은 진노를 내리기로 하셨음에도 그 심판을 거두시고 용서해주셨는지를 말입니다. 마치 엄마는 자식을 너무 심하게 혼내준 것은 아닌가 하면서 좀 살갑게 대하려 하면, 오늘 표현처럼 새벽 같이 일어나서 못된 짓만 골라가면서 하는 여전히 자라지 않는 아이 같은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하나님은 하나님을 찾으며 그 이름을 부를 때까지 참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2절, 13절에서는 남은 자,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남을 억울하게 속이지도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 하고 간사한 혀로 사기 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잘 먹고 편히 쉬도록 해줄 것이며, 아무도 그들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지켜줄 것이라고 약속해주십니다. 이 약속이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자 다짐하는 우리 자신들과 100주년기념교회에 그대로 임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14절부터 말씀의 어감, 즉 톤(tone)이 달라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14절입니다.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또한 17절입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이방나라들과 똑같이 죄악을 저지르는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으나 완전히 멸하지 아니하시는 주님. 이방나라들은 온 성읍이 황폐해지고 멸하여졌으나, 이스라엘을 통해서는 여전히 말씀에 순종하고 따르는 남은 자들로 새 역사를 준비하시고 계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진노의 대상이 되었던 자들이 이제는 사랑의 대상, 그것도 기쁨을 이기지 못할 정도의 격한 사랑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다루시는 태도는 눈물 쏙 빠지게 혼내시다가도 다시금 그 큰 가슴으로 한없이 안아주시는 우리들 부모로서의 태도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하나님을 인정하는 한, 비록 우리 인생이 혼탁한 일들로 뒤죽박죽 되고 뭐 하나 제대로 풀리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의 운전대를 결코 놓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찾는 한, 어디서부터 잘못이 되었는지 교훈해주실 것이고 그 가르침대로 순종하려고 부단히 애쓰기만 하여도 우리 가운데 계셔서 우리 등 뒤에서 우리를 꼭 붙잡아주실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은혜가 우리 각자에게 넘쳐나는 오늘 이 하루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주님. 오늘은 개혁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히스기야 가문의 두 개혁적인 젊은 왕과 선지자였던 요시야, 그리고 스바냐를 통해 얼마나 더 철저하게 우리 자신의 각자의 삶에서 개혁되어가야 하는지를 주님 말씀으로 겸허히 받아들입니다. ‘이만큼 하면 되겠거니’ 하고 자기만족에 빠질 때에 하나님 편에서는 ‘그 놈이 그 놈이다’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기에, 늘 허리를 동이며 자만하지 않는 우리 되게 하옵소서.
우리를 향해 진노하는 하나님이시지만 잘못을 인정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언제 어디서든 우리 인생을 능히 구원해내주시는 능력있는 하나님이시기에, 우리 자신들이 주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되는 기쁨들을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예수님을 믿으며 처음 가졌던 그 첫사랑의 격한 감격이,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그 주님의 사랑이, 평안히 길을 갈 땐 보이지 않아도 지치고 곤하여 넘어질 때면 다가와 손 내미시는 한없는 주님의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새록새록 다시금 새겨지는 이 기도의 시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남 유다 16대 왕 요시야 통치 18년에 여호와의 성전을 수리하다가 율법책을 발견했습니다. 요시야 왕은 그 율법책을 읽다가 자기 옷을 찢었습니다. 그 이유는 조상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고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준행하지 아니하였기에 하나님의 진노가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요시야 왕이 율법책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읽고 깨달음을 얻은 후 모든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책을 들려주고 백성에게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도록 명령하며 각종 우상 등 가증한 것들을 제거했습니다(대하34장). 이것을 요시야의 종교개혁이라고 말합니다. 중세 종교개혁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읽었을 때 시작된 것처럼 요시야의 종교개혁의 발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깨달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요시야의 종교개혁에 영향을 준 인물 중 한 사람은 요시야 왕의 친척인 스바냐 선지자로 보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히스기야 왕의 후손입니다. 하나님께서 스바냐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알리셨습니다. 우상숭배와 도덕적 타락이 만연한 시대에 스바냐 선지자는 ‘여호와의 날’을 예언하였습니다. 스바냐 1장에서 남 유다의 심판을, 2장에서 모든 민족에 대한 심판을 앞두고 회개할 것과 구원받을 자들의 구원을, 3장에서는 앞 두 장과 같이 예루살렘의 죄와 회복과 구원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오직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1-8절)

1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그 성읍이 화 있을진저 2 그가 명령을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의뢰하지 아니하며 자기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였도다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성’은 예루살렘 성을 가리킵니다. 이 성에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명령과 교훈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루살렘 백성이 말씀을 듣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의뢰하지도 가까이 하지도 않았기에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3 그 가운데 방백들은 부르짖는 사자요 그의 재판장들은 이튿날까지 남겨 두는 것이 없는 저녁 이리요 4 그의 선지자들은 경솔하고 간사한 사람들이요 그의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하였도다

3절은 정치 지도자들을 가리켜 부르짖는 사자와 저녁 늑대로 비유합니다. 지도자들의 잔인성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4절은 종교 지도자들의 경솔함과 간사함과 불경건함과 율법위반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5 그 가운데에 계시는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빠짐없이 자기의 공의를 비추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

정치 지도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의 타락에도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신 분이심을 매일 드러내신다고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정의의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정의의 빛을 세상 사람들에게 비추심에도 불의한 자는 자신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모른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침마다 정의의 빛을 비추실 때 그 빛으로 정의를 세워나가야 합니다.

6 내가 여러 나라를 끊어 버렸으므로 그들의 망대가 파괴되었고 내가 그들의 거리를 비게 하여 지나는 자가 없게 하였으므로 그들의 모든 성읍이 황폐하며 사람이 없으며 거주할 자가 없게 되었느니라 7 내가 이르기를 너는 오직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 그리하면 내가 형벌을 내리기로 정하기는 하였지만 너의 거처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그들이 부지런히 그들의 모든 행위를 더럽게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여러 나라를 심판하셨는데 예루살렘은 이를 보고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기를, ‘너는 오직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교훈을 받으면, 하나님께서 형벌을 내리시기로 작정하셨지만 그들이 살아갈 터전을 남겨두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모든 행위를 더럽게 하였습니다. 그것도 부지런히 더럽혔습니다. 악을 행하는데 부지런한 자가 되지 않고 선을 행하는데 부지런한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형벌을 작정하셨더라도 회복을 위하여 살 터전을 남겨두실 정도로 택한 백성들이 멸절되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악을 행하는데 부지런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일어나 벌할 날까지 너희는 나를 기다리라 내가 뜻을 정하고 나의 분노와 모든 진노를 쏟으려고 여러 나라를 소집하며 왕국들을 모으리라 온 땅이 나의 질투의 불에 소멸되리라

‘벌할 날’이 ‘여호와의 날’이며 ‘분노와 진노의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자주 하시는 말씀은 ‘그날에’ 모든 민족과 나라를 모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날에 악을 행했던 자들은 질투의 불로 소멸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런데 ‘그날’, ‘여호와의 날’에 질투의 불로 인한 심판만이 있지 않고 구원받을 자에게는 구원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 내용이 9-13절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9-13절)

9 그 때에 내가 여러 백성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여 그들이 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한 가지로 나를 섬기게 하리니 10 내게 구하는 백성들 곧 내가 흩은 자의 딸이 구스 강 건너편에서부터 예물을 가지고 와서 내게 바칠지라 11 그 날에 네가 내게 범죄한 모든 행위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것은 그 때에 내가 네 가운데서 교만하여 자랑하는 자들을 제거하여 네가 나의 성산에서 다시는 교만하지 않게 할 것임이라 12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네 가운데에 남겨 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 13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거짓된 혀가 없으며 먹고 누울지라도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시는 과정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구원을 베푸시지만 구원을 베푸실 때 구원받을 자를 먼저 변화시키십니다. 입술을 깨끗하게 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하여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십니다(9절). 예물을 바치도록 하십니다(10절). 교만을 제거해 주시고 다시는 교만하지 않도록 해 주십니다(11절). 곤고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호하도록 하십니다(12절).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구원받을 자가 악을 행하지 아니하고 거짓을 말하지 않도록 만드십니다. 주목할 점은 11절에 ‘범죄한 모든 행위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범죄 행위로 인해 정죄함과 심판을 받지 않도록 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범죄 행위로 인해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그래서 노래합니다.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14-20절)

14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구원받을 백성, 거룩한 곳에 거하는 사람이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으로 기뻐하고 노래하라고 합니다. 또 다른 이유를 알려줍니다.

15 여호와가 네 형벌을 제거하였고 네 원수를 쫓아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누가 받으셨습니까? 누가 우리의 원수를 쫓아내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없었다면 우리는 영벌에 처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더 큰 은혜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이를 믿는 자마다 화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16절에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17절에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16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하나님께서 나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고 하십니다. 나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나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신다고 하시니 절망 가운데 있을 때에 누구를 바라보아야 하겠습니까?

18 내가 절기로 말미암아 근심하는 자들을 모으리니 그들은 네게 속한 자라 그들에게 지워진 짐이 치욕이 되었느니라 19 그 때에 내가 너를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벌하고 저는 자를 구원하며 쫓겨난 자를 모으며 온 세상에서 수욕 받는 자에게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리라 20 내가 그 때에 너희를 이끌고 그 때에 너희를 모을지라 내가 너희 목전에서 너희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너희에게 천하 만민 가운데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18절부터 마지막 절까지는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를 부르시고 그들을 위로하실 것과 대적들을 벌하실 것을 다시 한 번 더 말씀하십니다. 각 절마다 ‘모으다’라는 동사가 반복해서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근심하는 자들을 모으시고(18절), 쫓겨난 자를 모으시고(19절), 너희를 모으신다(20절)고 합니다. 근심하는 자들이란 예배드릴 때 예배의 장소로 가지 못하여 근심하는 자들입니다. 예배를 갈망하지만 예배드릴 처지가 되지 못하는 사람의 근심입니다. 이러한 근심이 사라진다는 것은 예배가 회복된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괴롭힘을 당하였지만 칭찬과 명성을 주셔서 위로해 주시겠다고 합니다. 20절은 명성과 칭찬을 재차 약속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회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으실 때 회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복시키실 때에는 우리를 정결하게 하는 과정을 통해 회복시켜 주십니다. 요시야 왕 때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깨달은 후 회개를 통한 정결의 과정을 거쳐서 신앙 회복을 이루었습니다. 오늘 하루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깨닫고 실천함으로 신앙개혁을 이루어 나가시길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을 멀리하던 시대에 하나님께서 숨겨두신 자, 스바냐 선지자를 통해 미래에 있을 여호와의 날을 선포하게 해 주시고 구원의 은혜를 받을 자에게 경외함을 주시고 구원의 소망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정의의 광선을 보고도 정의를 외면하는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이 정의 회복에 중심이 되게 하시옵소서. 범죄한 모든 행위에도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법을 섬기는 마음으로 죄의 법을 따르려고 하는 육신을 이겨나가는 오늘 하루가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위한 질문
1. 하나님께서 아침마다 정의의 빛을 비추시는데 사회가 정의롭지 못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2. 하나님을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면 누리게 될 은혜가 무엇입니까?
3.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베푸시는 구원과 회복의 과정은 무엇입니까?
4. 하나님께서 ‘그 날에’ 우리를 모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5. 하나님께서 나로 인해 기쁨을 이기지 못하실 때가 언제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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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표제


다른 소선지서들과 마찬가지로 스바냐서도 단순히 그 저자의 이름을 따서 불리워진다.
히브리어로 스바냐(Sephanyah)는 “여호와께서 숨기셨다”, 혹은 “여호와께서 간수하셨다”라는 뜻이다.
구약에는 같은 이름을 가진 몇 사람이 있다(대상 6:36; 렘 21:1; 슥 6:10, 14).

 2. 저자

우리는 스바냐가 자기 책에서 자기에 대해 말한 것 이외에는 이 선지자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른다.
습 1:1에 의하면 그는 유명한 가문의 출신인 것이 확실한 것같다.
그가 그의 조상을 히스기야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밝힌 사실은 그 이름을 가졌던 유다의 왕에 관하여 언급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것은 그가 왕족의 혈통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3. 역사적 배경

선지자는 자기가 예언한 시기(습 1:1)가 유다왕 요시야의 시대라고 알려준다(B.C. 640-609).
스바냐가 B.C. 612년에 있었던 니느웨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으므로(습 2:13) 아마도 그는 요시아 통치 초기에 예언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아마도 하박국과 동시대 사람인 것같다.

 4. 주제

스바냐서는 요엘서와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날”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이 표현에 대한 의미는 사 2:12에 나와 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올 임박한 심판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들에게 임할 징벌도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스바냐가 그의 가혹한 심판들을 말하며 경고하는 것은 단지 백성들이 회개하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습 2:3)여 심판을 면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5. 개요

Ⅰ. 유다의 죄 때문에 받게 될 심판 1:1-18
     1. 표제 1:1
     2. 심판의 엄격함과 범위 1:2-18

Ⅱ. 은혜의 시기 동안에 여호와를 찾으라는 호소 2:1-3

Ⅲ. 여러 민족들에 대한 심판들 2:4-15
     1. 블레셋 2:4-7
     2. 모압과 암몬 2:8-11
     3. 구스 2:12
     4. 앗수르 2:13-15

Ⅳ. 예루살렘이 죄 때문에 견책받음 3:1-7

Ⅴ. 모든 민족들이 받게 될 심판 3:8

Ⅵ. 회복의 약속들 3: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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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바냐 분석


1. 저자

스바냐 선지자는 다른 선지자들 보다는 자신의 배경에 대해 많이 말해 주고 있다.

① 스바냐의 이름은 “여호와께서 그를 감추셨다”는 뜻이다.

② 그는 히스기야 왕의 현손으로서 왕족 출신이다(1:1).

③ 구시의 아들이다(1:1).

④ 그는 요시야 왕(B.C. 640-609)때의 선지자이다.

⑤ 그는 포로시대 이전 선지자들 가운데 마지막 선지자로서 예레미야와 동시대 인물이다 (렘 1:2).

⑥ 그는 주로 유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전한 사람이다.

⑦ B.C. 640-622년경, 즉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 이전에 본서를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2. 역사적 배경

스바냐는 B.C. 630-625년경, 남유다 제 16대 왕인 요시야 통치(B.C. 640-609년)때에 주로 활동한 선지자이다.
당시 근동의 패권국인 앗수르는 신바벨론 제국(B.C. 625-539년)의 등장과 함께 그 세력이 급격히 쇠퇴해져 가던 때였다.
이 때에 요시야 왕은 대외적으로 선왕들이 친앗수르 정책을 폈던 것과는 달리 강력한 반앗수르 정책을 폈다.
그리고 대내적으로는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단행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자주성을 회복하는데 크게 주력하였다.
그러나 요시야가 종교개혁을 시작하기 전에 유대민족의 상태는 매우 타락한 상태에 있었다.
이러한 때에 스바냐는 요시야가 본격적으로 종교개혁을 개시하기에 앞서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에 대한 책망과 열방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을 예언함으로써 그의 종교개혁에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3. 중심 메시지

스바냐의 중심 메시지는 여호와의 날의 죄에 대한 심판의 필연성과 양면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스바냐의 예언은 유다와 그 주변의 열방들을 함께 다루고 있지만, 주된 내용은 유다에 대한 경고와 격려다.
스바냐가 묘사하고 있는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나라를 불러모아 심문하심으로써 자신의 의를 입증하실 분이다.
스바냐는 온 세상에 두루 임할 여호와의 날의 심판에 대해 2:4-15에서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3:9-20에서 주의 날은 또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즉 심판이 완수된 다음에 주의 심판의 날은 축복의 날이 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든지 이방인들이든지 마지막까지 남은자들은 구원받아 넘치는 기쁨을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① 죄에 대한 하나님 심판의 필연성

② 하나님의 심판의 양면성(악인에 대한 심판과 의인의 구원)

4. 스바냐서의 특징

① 다른 선지자와는 달리 선지자의 족보가 구체적으로 4대조까지 기록되고 있다(1:1).

② 여호와의 날이 가지는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의인의 구원의 양면성을 극명히 대조시키고 있다.

③ 이방 나라들 보다는 남유다에 대한 경고와 격려를 주로 다루고 있다.

④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이방인 가운데서도 ‘남은 자’가 있을 것을 예언하고 있다(2:3,11 ; 3:9-12).

⑤ ‘여호와의 날’에 대한 스바냐 선지자의 진술은 장엄한 장송곡과도 흡사한 생동감 있는 운율로서 매우 음악적인 성격을 지녀 오늘날 진흔곡에 사용되어 널리 연주되고 있다.

5. 구조 분석

(1) 유다의 죄에 대한 보응 (1장)

(2) 유다의 이웃나라에 대한 보응 (2장)

(3) 유다의 회복에 대한 약속 (3장)

 

6. 주요 장과 구절

(1) 장

(2) 구절

1:6 →“여호와를 배반하고 좇지 아니한 자와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 를 멸절하리라”

1:12 →“그 때에 내가 등불로 예루살렘에 두루 찾아 무릇 찌끼같이 가라앉아서 심중에 스스 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벌하리니”

1:18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 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키우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거민을 멸절하되 놀 랍게 멸절할 것임이니라”

2:3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 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3:20 →“내가 내 때에 너희를 이끌고 그 때에 너희를 모을지라 내가 너희 목전에서 너희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너희로 천하 만민 중에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기타 주요 구절〉

1:1-5, 1:10, 1:12, 1:14-15, 2:1-2, 2:9, 2:15, 3:3-5, 3:12, 3:14-15

 

7. 기본적인 내용 파악

 

(1) 스바냐가 예언 활동을 하던 시기는?(1) →유다왕 요시야의 시대

(2) 스바냐의 출신 배경은?(1:1)

→ 왕족 출신으로서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구시의 아들이다.

(3)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무엇이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라고 했는가?(1:18)

→ 그들의 은과 금

(4) “내가 지면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 내가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 의 고기와 . . . 멸절하리라”(1:2-3).

‘멸절’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 스바냐서의 내용은 어느 시대를 연상케 하는가? → 노아 홍수 심판 시대

(5) 심판의 날을 스바냐 선지자는 무엇이라 표현하는가?

→ ① 여호와의 날 ② 희생의 날

③ 여호와의 큰 날 ④ 분노의 날

⑤ 환난과 고통의 날 ⑥ 황무와 패괴의 날

⑦ 캄캄하고 어두운 날 ⑧ 구름과 흑암의 날

(6) 심판의 때에 장차 어느 민족이 소돔같고 고모라 같이 될 것이라고 했는가?(2:9)

→ 모압, 암몬

(7) 습 3장 17절 말씀이 무엇인가?

→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 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 . ”

(8) 스바냐 선지자는 장차 유다가 사로잡힘에서 돌이킬 때에 그들로 천하만민 중에서 무엇 과 무엇을 얻게 하리라고 예언했는가? → 명성과 칭찬



스바냐 분석 2

[제목]
본서의 히브리어 성경의 표제는 선지자 ‘스바냐’의 이름을 따라 붙여진 것으로 ‘세판냐’이며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에 의해 감추어 졌다’이다. 70인역(Lxx)에서는 ‘소포니아스’라 하였다.

[저자]
본서의 저자에 대해서는 1:1에 분명히 명시하고 있는데, 저자는 자신을 특별히 히스기야의 현손(손자의 손자)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로 보건대 스바냐는 신실한 왕 히스기야의 왕통을 이은 유일한 선지자이다. 그는 이러한 이유로 요시아 왕의 궁전에 자유롭게 출입했으며 국내사정은 물론 국제 사회에 대해서도 비교적 식견이 넓었을 것이다.

[기록연대]
본 서의 저자인 스바냐가 어느 시대에 예언을 하였는가를 밝히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언의 시기를 결정할 만한 내적 증거가 습1:4-6에만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단지 여기에서는 므낫세 왕때 유행했던 이방신에 대한 제사와 바알 숭배가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요시야 왕의 종교 개혁 운동은 주전 621년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문제는 예언의 시기가 요시야의 종교 개혁 시대 이전이냐 이후이냐가 초점이 된다. 우상 숭배에 대한 책망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요시야 왕의 종교 개혁 (B.C.622년) 이전에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본 서의 기록 연대는 요시야의 종교 개혁이 일어나기 전인 주전 640-622년경으로 추측할 수 있다.

[배경]
므낫세와 암몬의 사악한 통치가 끝나고 요시아 왕이 즉위했으나 근 50년 가량 만연해 있던 배교의 상황에는 어떤 도전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스바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그의 나라 백성들에게는 물론, 인근 나라 백성들을 향해서도 강력히 경고하기 시작했다. 그 한 예로 B.C. 722년의 앗수르의 멸망은 하나님의 전능과 공의를 상기시키는 엄숙한 사건이었다.

[특징]
본서는 유다와 그 주변 열국들에게 임박한 심판을 경고하고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무한히 사랑하시되 심지어 질투하기까지 사랑하신다. 하지만 그들이 죄를 지을 때 하나님은 참으실 수 없으시다. 따라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심판을 집행하시는데 이것 또한 그의 사랑의 발로이다.

[목적]
본 서의 기록 목적은 요엘이나 아모스와 같이 여호와의 날을 선포하기 위한 것이다. 본 서에 나오는 ‘여호와의 날'은 심판의 날을 상징한다. 일반 민중들은 여호와의 날을 선민으로서의 구원이라는 관념에서 생각하고 있으나 선지자들의 이날에 대한 관념은 두려운 심판의 날로 생각하고 있다. 또한 본 서는 여호와의 날에 구원받을 남은 자(습3:13)들의 영광을 노래하기 위하여 기록하였다. 여호와의 날은 심판의 날로 다가오나 그 처절한 심판 속에서 구원의 희망을 간직한 자들인 남은 자들의 모습도 등장한다.

[구조]
스바냐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주의 날에 있을 심판(1장-3:8)과 주의 날에 있을 구원(3:9-3:20)이다. 전자는 진노의 날이고 후자는 기쁨의 날이다. 여기서 말하는 여호와의 날이란 궁극적으로는 신약에서 가르쳐 주는 최후 심판의 날과 동일한다. 그러나 다른 점은 신약의 최후 심판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뒤이은 최종적 심판 그 자체만을 말하고 있는데 반해서 여호와의 날은 이스라엘 민족의 멸망이나 회복 등과 같은 역사적인 사건과 동시에 최종적인 심판을 한꺼번에 함축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로 여호와의 날은 심판과 구원의 양면성을 갖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공의와 사랑의 양면을 갖고 계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짧은 본서의 말씀을 읽고 들을 때마다 그 여호와의 날에 나의 모습은 과연 어떠할지 다시 한번 돌아보아야 하겠다.

[내용]
모든 세대에 있어서 오직 소수의 비교적 신실한 사람들만이 하나님을 따릅니다. 그렇지만 몇몇은 항상 믿음의 선에서 살아 있다. 유다가 바벨론 포로가 되기 직전에 스바냐는 남은 자들이 구속받을 것이라고 격려했다. 비록 하나님이 주시는 비와 햇빛이 선한 것과 악한 것에 똑같이 떨어지지만 하나님의 눈은 언제나 진실한 믿음의 사람들에게 향하여 있다. 비록 유다가 곧 심판받게 되었지만 그들 중 남은 자들은 언젠가 돌아올 것이었다. 스바냐의 말(습3:17)은 70년간의 포로 생활 기간 중 계속 외쳐졌을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인정했다. 하나님은 여전히 전능하셨다. 하나님은 때가 이르러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사랑을 확고히 하셨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을 기뻐하셨다.

[교훈]
* 역사적인 교훈 : 본서는 유다와 열방에게 그들의 죄 때문에 닥칠 임박한 환난에 관하여 경고하고, 그들에게 회개할 것을 촉구하기 위하여 기록되었다. * 교리적인 교훈 : 본서는 하나님은 자기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시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은 정당하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한편 심판의 목적은 정화적인 차원이며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에게 자비와 용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다. * 기독론적인 교훈 : 본서에서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안에 거하시는 의로우신 주님으로(3:5), 열국을 대항하는 증인으로(3:8) 이스라엘의 ‘왕과 주’(3:15)로 나타나 있다.

C. 스바냐 세부 내용

1. 제1과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 (습 1:1~18)

 

성경을 처음 읽으시는 성도님이면 먼저 제가 기록한 『기독교신앙백과』의 스바냐 개론(p592)을 읽으십시오. 스바냐서의 전체적 내용을 요약한다면 “죄악을 인한 유다와 온 세상과 이방족(블레셋, 모압, 암몬, 구스, 앗수르)에 대한 심판을 경고하신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장의 말씀에서도 선민의 많은 범죄 행위와 이로 인한 진노와 멸절을 거듭 강조하셨습니다. ① 1절은 “스바냐의 족보”요, ② 2~3절은 “종합적 심판 또는 모든 것을 멸절함”이며, ③ 4~6절은 “선민의 우상들을 멸함”이요, ④ 7~18절은 “벌 받을 자들과 벌 받는 형편”입니다.

 

1. 스바냐의 족보에 대하여(1절)

“스바냐”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숨기시다”라 하고, 그는 아몬 왕(유다 18대 왕, 2년 재위)의 아들 요시야(19대 왕, 31년 재위, 좋은 일을 많이 하였음) 시대(주전 598~568, 연대 계산은 다양함)에 사역하였은즉 요시야 왕의 선정과 정화사역(왕하 22:1~7)에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입니다. 요시야 왕은 선정을 하였을지라도 100% 개혁(정화)을 다하지는 못하였으며, 또 그의 선정이 조상들의 죄값을 다 만회하지도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요시야의 선행을 인하여 그 시대에 멸망을 주시지 않고 연기하셨습니다(왕하 22:20, 대하 35:20~25). “스바냐는 히스기야(16대 왕, 17대는 므낫세)의 현손(손자의 손자, 4대손)이요, 아마랴의 증손, 그다랴의 손자, 구시의 아들이라” 하시므로 족보의 명확성을 나타내셨는데, 이는 역사와 왕족임을 확실히 나타내는 뜻입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누가 증거하였느냐?” 하는 것은 사람 따라 다른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요즈음에 와서 일반 대학에도 가짜 학력, 가짜 학위 교수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같은 이름으로 혼돈하지 않게 하려면 족보를 댈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현재 주민등록번호처럼…

 

2. 종합적 심판을 경고하심입니다(2~3절). 이 말씀이 종합적 심판인 이유는 “지면의 모든 것 즉 사람, 짐승, 공중의 새, 바다의 고기와 거치게 하는 것(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모든 것)과 악인들을 아울러 전멸할 것”을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선민도 징계하시고, 이방인도 심판하시며, 때가 되면 세상의 모든 것을 진멸하실 것인즉(벧후 3:10) 누구의 어떤 악이라도 공의로운 심판에 제외되지 않음을 말씀하신 것이요, 특히 죄 없는 동물들까지 없애시는 것은 그것들이 사람들을 위하여 필요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땅이나 만물도 심판 받을 사람이 거한즉 하나님이 필요를 느끼시지 않는 것입니다.

 

3. 선민의 우상들을 멸함(4~6절)입니다. 4절에서 “하나님은 유다와 예루살렘 모든 거민 위에 손을 펴서 바알의 남은 것을 멸절하시고 ‘그마림’이란 이름(바알 종교의 제사장 또는 단체 이름)과 제사장들을 멸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유다와 예루살렘만 거론하신 것은 북왕국이 멸망된 후이기 때문이며, 남아있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무슨 우상이 그리 많겠나? 하시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적 종교가 기초를 이루었다 하여도 대부분 우상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솔로몬왕의 타락 시에도 이미 아스다롯과 밀곰 신이 들어왔고(왕상 11:3~8, 33), 여러보암왕 때에 이질적 종교로 갈라졌으며(왕상 12:27~33), 아합왕 때에도 바알이 성행하였고(왕상 18:19), 유다와 아하스 때에는 예루살렘 성전 구조까지 개조했으니(왕하 17:10~16)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정통적 종교는 거의 없어진 상태였습니다. 5절에서 우상주의자들은 “지붕 위에서 하늘의 일월성신을 경배하였고 하나님께 맹세하면서도 동시에 말감(바벨론 신, 왕이란 뜻이라 함)에게도 맹세하였으니” 역시 두 신을 겸하여 섬기는 자들이었습니다(마 6:24). 또 6절에서 이들은 “하나님을 배반한 자요 하나님을 찾지도 구하지도 않는 자로서 다 멸절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섬기거나 의지하면 그것은 곧 하나님을 배반한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는 무관심한 교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많이 반성하고 살피셔야 할 일일 줄 압니다. 하나님이 이것들을 어떻게 멸하실까요? 물론 일시적으로 망하게 될 때 훼파되기도 하겠지만 최종 심판을 받을 때에라야 아주 멸절 당하게 될 것입니다(계 19:20~21, 12~13).

 

4. 벌 받을 자들과 벌 받을 형편입니다(7~18절). 7~10절은 예루살렘의 벌 받는 형편인데, 이 말씀이 예루살렘을 지목한 근거는 8절의 “여호와의 희생의 날(벌 받을 자를 죽이는 날)에 방백들과 왕자들과 이방의 의복 입은 자들을 벌하신다”는 말씀과 10절의 “어문(예루살렘 북쪽문, 다메섹문, 느 3:3)과 제2구역(예루살렘의 행정구역)에 곡성과 부르짖음이 있을 것”을 말씀하였기 때문입니다. 7절의 “여호와의 날”은 그 당시(바벨론이 예루살렘을 정복하는 때)를 의미하고 “여호와가 희생을 준비하고 그 청할 자를 구별하심”은 죽을 자와 벌 받을 자를 하나님이 구별하여 처리하신다는 뜻이요,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은 합 2:20의 뜻처럼 하나님이 주권자요 공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 8절의 “이방의 의복 입은 자”는 신앙의 정통을 벗어나서 이질적 종교 또는 세속 문화를 답습하는 자들이니, 이런 것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의 고유적 입지를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9절의 “그날에(심판 날) 문턱을 뛰어넘어(불법행위) 강포와 궤휼로 자기 주인의 집(왕실)에 채운 자들을 벌하신다” 하셨으니, 이들은 무법한 방백들일 것입니다. 10절에서 “작은 산들에서 무너지는 소리가 일어남”은 전란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산들(예루살렘 주위의 산들)로 도피하였으나 그곳에서도 화를 피하지 못한즉 그 곡성이 대단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11절은 예루살렘에 근접하여 사는 백성들이 먼저 화를 당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막데스 거민”은 영어 성경에서 낮은 땅에 거하는 자들로 번역하였고, “가나안 백성”은 관주 표기에 “장사하는”으로 표기되었습니다. 그들은 은을 수운(수송, 운반)하는 낮은 계급의 사람들입니다. 12절에서는 “그때에 내가 등불로 예루살렘에 두루 찾아 찌끼같이 가라앉아서 심중에 이르기를 하나님은 복도 화도 내리지 않는다 하는 자를 벌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등불로 찾는다” 하심은 하나님이 악인이나 그의 악행을 빈틈없이 찾아 심판하시는 일을 주밀하게 표현한 뜻이고, “찌끼 같음”은 깊이 숨겨진 죄악 즉 잘 씻어지지 않고 남아있는 때처럼 끈질긴 죄악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성도들 마음이 어느 부분이라도 “하나님은 복도 화도 내리지 않는다”(공의를 무시한 뜻)는 생각을 갖는다면 그것은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다 캐내어 벌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당연히 물질과 현실주의로 살았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13절에서 “그들의 재물은 노략되고 집은 황무할 것이며 집을 건축하나 거하지 못하고 포도원을 심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에게 혹 찌끼처럼 가라앉아있는 고정적인 죄(자존심, 고집, 세속, 현세욕 같은 것들)가 없는 지를 반성하셔야 하겠습니다. 14~18절에서는 “여호와의 큰 날(여호와의 날, 7절)” 대하여 하나님의 징벌이 임하는 상태를 거듭 묘사하였으니 곧 “가깝고 빠르며(계 1:1 참조) 소리가 있고 용사의 애곡하는 소리요 분노의 날 환난과 고통의 날이고 황무와 파괴의 날이며 어두움과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절망의 표현) 나팔 경고가 있고 견고한 성읍(예루살렘)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라” 하셨고(14~16절), 17~18절에서는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범죄를 인하여 고난을 내리시되 소경같이 행하게 하시며(피할 길을 모르는 뜻) 피와 살이 분토가 되게 하시고 그들의 은금도 건지지 못하며 온 땅이 질투의 불(악인이 평안한 것을 못 보시는 하나님의 공의)에 삼키워 놀랍게 멸절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과 멸망을 깨닫도록 경고하신 것입니다.

 

2. 제2과 이방족 심판과 선민 격려 (습 2:1~15)

 

1~2절을 보시면 “수치를 모르는 백성들을 모이라” 하셨고, 3절에서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를 구하라” 하셨으니까 이 말씀은 “분노의 날이 이르기 전에(2절) 회개하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1~3절은 “선민의 회개를 촉구하심”이고, 다음의 대부분의 말씀이 이방족(가사, 아스글론, 아스돗, 에그론, 해변 거민, 4~5절; 또 모압, 암몬, 8~9절; 구스, 니느웨, 12~13절)의 멸망(아주 망하는 것)과 심판(벌을 받으나 아주 멸망하지는 않음, 12절의 구스)을 예고하신 것인데, 그 중에서 유다 족속을 위로하시는 말씀이 있고(7, 9절), 또 이방인 구원에 대한 말씀(11절)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방족이 망하는 큰 원인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교만 때문입니다. 따라서 총제목을 “이방족 심판과 선민 격려”로 정하였습니다. 이 제목 속에 빠진 것은 이방인의 죄와 이방인 구원을 예고하신 내용입니다. 우선 4대지로 나누어 ① 회개를 촉구하심(1~3절), ② 가사 지경의 멸망(4~7절), ③ 모압, 암몬의 멸망(8~11절), ④ 구스와 니느웨의 심판(12~15절)으로 정한 다음 7, 9절(유다의 남은 자 위로)과 11절(이방인 구원)은 따로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선민의 회개를 촉구하심입니다(1~3절). “수치를 모르는 백성”은 죄의 심각성과 죄로 인한 불행을 잘 모르는 자를 의미하고, 이들은 선민과 모든 멸망 대상을 뜻할 것입니다. 선민이 회개의 우선자이지만 하나님은 이방족 니느웨도 회개시키셨으니까 이방인도 제외될 수 없을 것입니다. “모이고 모여서(회개할 것을 촉구하심)” 하신 것은 욜 2:15~17과 욘 2:5~8을 상기하십시오. 2절은 “하나님의 심판 명령이 있기 전에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광음이 겨같이 날아감”이나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는 다 전쟁을 연상한 환난의 심각성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3절에서는 회개를 촉구하시되 건전한 자들이 앞장설 것을 권장하신 것입니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은 타락한 세대에서 끝까지 믿음과 양심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회개자는 먼저 하나님을 찾는 태도(죄를 깨닫고 돌이킴, 말씀 기도를 사모함, 하나님의 뜻대로 삶)를 알아야 하고 공의와 겸손도 깨달아 시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음”은 하나님이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여 진노를 거두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혹시”란 말을 쓴 것은 욘 1:6처럼 하나님의 주권을 앞세운 성도의 태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니까요(단 3:17~18). 거듭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을 찾아 가까이 모시며 공의와 겸손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깊이 유의하십시오.

 

2.가사 지경의 멸망입니다(4~7절). 지도를 보시면 사해바다 서쪽 4/5가 유대 땅이고, 지중해변 1/5쯤이 불레셋 땅인데, 그 남단이 ‘가사’이고, 중간이 ‘아스글론’이며, 북쪽이 ‘아스돗’입니다(모두 욥바 남쪽에 있음). “이들이 백주에 쫓겨나고 에그론(가사와 아스글론 중간 동쪽에 위치함)은 뽑히며 해변 거민 그렛 족속(영어 성경에는 해변 거민이라고만 하였음, cherethites, 삼하 8:18, 20:23)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곳은 대부분 블레셋족들입니다. 5절에서 “블레셋 사람의 땅 가나안(가나안 땅의 대표족)아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를 치나니 내(하나님)가 너희를 멸하여 거민이 없게 하리라” 하시므로 블레셋의 멸망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팔레스틴’이란 말이 블레셋에 근거를 둔 말이지만 실제 혈통은 이스마엘과 에돔 족에 해당하고, 블레셋 족은 없다고 보셔야 할 것입니다. 6절에서 그들의 근거지인 “해변(지중해)은 초장이 되어 목자의 움(초막)과 양떼의 우리가 있을 것이라” 하신 것은 그들의 도성이나 성읍이 없어지므로 짐승 서식지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7절에서 “그 지경(블레셋이 망한 곳) 유다 족속의 남은 자에게로 돌아감”은 전쟁의 환난 후에 남아있는 선민족이 그 땅을 차지할 것을 예언하신 것이요(바벨론 포로 후), “그들이 거기서 양을 먹이고 저녁에 아스글론(블레셋 성읍이지만 그곳을 차지한 뜻)에 누울 것인즉 이는 하나님이 그들(선민)을 권고하여 그 사로잡힘을 돌이키실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선민을 권고하여 바벨론 포로 해방 이후에 남아 있는 유대인들이 그 지역을 차지할 것을 예언하심인 줄 압니다. 하나님은 이런 방법으로도 선민을 위로하시고 진노중에라도 긍휼을 베푸신 것입니다(합 9:2).

 

3. 모압과 암몬의 멸망입니다(8~11절). 모압과 암몬에 대한 예언은 렘 48:26~31, 49:1~6, 겔 25:1~11을 참고하십시오. 8절 말씀에서 “모압이 선민을 훼방하고 또 암몬이 선민을 후욕(멸시하며 욕되게 함)한 사실과 그들이 스스로 커서(자만) 그 경계(선민의 영토)를 침범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두 족속과 선민과의 관계에 대하여는 『성경사전』의 모압과 암몬을 찾아 읽으시면 많은 참고가 됩니다. 다시 말하면 솔로몬이 그 지역의 여인을 취한 일도 있었으나(왕상 11:1, 대하 12:13) 적대 관계로 싸우고 정복한 사례도 있었습니다(삿 3:12~14, 10:7~11). 그러나 본문에 해당하는 교만, 후욕, 경계 침범이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많은 알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9절에서 “내(하나님)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장차 모압은 소돔같이 되고 암몬 자손은 고모라같이 될 것이라” 하시므로 아주 망하여 없어질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그 지역에) 찔레가 나고 소금 구덩이가 되며 영원히 황무할 것이라” 하셨는데 사실 그렇게 되었고, “나의 끼친 백성(은혜 받은 선민의 뜻)이 그들을 노략하며 나의 남은 국민(역사가 흐른 후에 남은 선민)이 그것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 하시므로 모압과 암몬은 없어지고 장차(바벨론 포로 이후) 선민이 그 지역을 차지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10절에서는 “그들이 스스로 커서(교만) 만군의 여호와의 백성을 훼방하였기 때문이라” 하시므로 멸망의 원인을 교만이라 하셨고, 11절에서는 “여호와가 그들에게 두렵게 되어서(하나님이 그들을 두렵게 하신 뜻) 세상의 모든 신을 쇠진케 하리니 이방의 모든 해변 사람들아 각각 자기 처소에서 여호와께 경배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이방인의 우상 종교가 기독교에 정복당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이방의 모든 해변 사람들”이란 서유럽지역을 의미하는 줄 압니다. 복음은 유대인의 것만은 아닙니다. 때가 될 때 이방인에게도 나누어주신 것입니다(롬 11:25).

 

4. 구스와 니느웨의 심판입니다(12~15절). 12절에서 “구스는 살육을 당하였을 뿐 아주 멸망되지는 않았으므로” 오늘까지 에디오피아가 존속되고 있지 않습니까? 13절의 니느웨 멸망 예언은 “나훔의 예언”과 같은 내용이요, 14절은 니느웨가 황무하여 고슴도치가 깃들일 곳도 없음을 예언하셨습니다. “고슴도치가 기둥 꼭대기에 깃들이고 창에서 운다”는 뜻은 폐허된 주택이 짐승의 소굴 됨을 나타내신 말씀이고, “백향목으로 지은 것이 벗겨졌음”은 주택의 황폐를 뜻합니다. 15절은 앗수르가 세력을 떨칠 때 니느웨 백성들은 자만에 빠져 살았지만 (바벨론에게 멸망 당한 후에는) “어찌 이같이 황무하여 들짐승의 엎드릴 곳이 되었는고 하며 지나가는 자마다 치소하고 손을 흔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치소와 손을 흔듦”은 과거에 멋모르고 교만하며 사치한 죄에 대하여 망한 후에 비난 받고 지적 받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3. 제3과 예루살렘의 범죄와 경고 (습 3:1~8)

 

본 장은 두 과목에 나누어 상고하기로 하였고, 본문 1~8절의 말씀을 “예루살렘의 범죄와 경고”로 총제목을 정하였습니다. ① 1~4절은 “예루살렘의 죄”이고, ② 5절은 “하나님의 공의와 백성들의 무지”요, ③ 6~8절은 “열국의 멸망 예언과 경고”입니다.

 

1. 예루살렘의 죄에 대하여(1~4절)

본문에 예루살렘이란 말은 없으나 “방백들, 재판장들, 선지자들, 제사장들의 죄를 거론”하셨은즉 그들이 거처하고 행사하는 도성의 죄를 대표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1절에서 “(그곳은) 패역하고 더러우며 포악한 성읍이므로 화 있을진저”라고 하였습니다. “패역”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죄악이고, 죄악이 많으면 다 더러운 곳이며, “포악”은 법을 떠난 무질서한 폭력 행사를 의미합니다.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자는 다 포악한 자로써 화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2절에서 “그가 명령(하나님의 계명)을 듣지 않으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의뢰하지도 않으며 또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가지 않는다” 하셨으니 이런 사람들이 주위에도 많이 있는 줄 압니다. 이런 자들이 선민 세계에 있다는 것은 참으로 화 받을 일입니다. 성도의 가정에도 믿음이 없는 식구는 하나님의 명령(말씀, 설교)을 듣지 않으려 하고, 교훈도 받지 않으며, 하나님을 의뢰하는 데도 관심이 없고, 기도나 예배를 피하는 자들이 있는 것은 큰 유감입니다. 이런 자들을 믿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지만 화를 내리시는 것도 하나님이 하실 일인즉 성도는 그런 가족들을 위하여 은총과 긍휼을 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3~4절에서 “방백들을 부르짖는 사자라” 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1~2절에서 말씀한 포학하고 무법한 행위요, “제사장들을 이튿날까지 남겨두는 것이 없는 저녁 이리로 비유하신 것”은 이기주의에만 급급한 것을 의미하고, “선지자들은 경솔하고 간사한 위인들이라” 하시므로 인격의 무게와 진실함이 없이 말만 많이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제사장들이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함”은 제사행위를 나타낼 때 율법대로 거룩과 부정을 구별하지 않고 편의주의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로 말하면 모두가 무질서한 인본주의를 의미합니다. 눈을 크게 뜨고 성도의 생활 주변을 살펴 불의를 시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공의와 백성들의 무지입니다(5절). “그 중에 거하시는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치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간단없이 자기의 공의를 나타내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뜻이 많은 줄 압니다. 하나님이 의로우신 것은 본질적 순결(거룩)을 의미하고, “불의를 행하시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죄(모순)를 짓지 않으시며(고후 5:21), “아침마다 간단없이 공의를 나타내심”은 수시로 또는 끊임없이 범죄에 대한 점검과 처리(심판, 징계, 권고 등으로)를 하신다는 뜻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그 중(범죄하는 백성들 세계)에 거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거역하며 죄를 범한다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또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한다”고 하셨는데, 이는 2:1에서도 “수치를 모르는 백성이라” 하셨지요. 범죄 의식이 없는 백성, 죄에 민감하지 않은 성도, 심지어는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삼는 백성들(빌 3:19)이 있음을 경계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열국의 멸망 예언과 경고입니다(6~8절). 열국의 멸망 예언은 6절에서 하셨고, 선민에 대한 경고는 7~8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열국을 끊어버렸다” 하심은 많은 나라들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선민에 대한 징계와 함께 열국도 심판을 하실 것이란 뜻입니다. 이 열국이 어느 나라들을 의미할까요? 바벨론 침략에 의하여 망할 나라들이고, 2장에서 말씀하신 대로 블레셋, 모압, 암몬, 구스, 앗수르 등이 다 열국에 속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때가 되면 “그 나라들의 망대가 황무하여질 것이고 그 거리가 비게 될 것이며 지나가는 자 없이 그 모든 성읍이 황폐되어 사람이 없이 될 것이라”(6절)고 하셨습니다. 꼭 될 일을 된 것처럼 나타내신 것입니다. 7절에서 “너(선민)는 오직 나(하나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 그리하면 내가 형벌을 내리기를 정하였을지라도 너희 거처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는 선민이 자신들의 죄악과 열국의 멸망을 듣고 회개할 때(하나님을 경외하고 교훈을 받을 때) 심하게 벌하시지 않을 것을 약속하신 뜻입니다(라 9:13). 그러나 “그들이 부지런히 그 모든 행위를 더럽게 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약속과 결과가 함께 기록된 것은 선지자의 예언적 의미가 복합적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회개하면 벌을 경하게 하신다” 하였는데도 듣지 않은 것입니다. 8절에서도 같은 뜻을 강조하셨습니다. 이 뜻은 완악한 자들에 대하여 정하신 뜻대로 진노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회개하지 않으므로) 내가 일어나 벌할 날까지 너희는 나를 기다리라 내가 뜻을 정하고 나의 분한과 모든 진노를 다 쏟으려고 나라들(열국, 6절)을 소집하여… 모으리라 온 땅이 나의 질투의 불(악인의 형통을 못 보시는 하나님의 공의)에 소멸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선민과 관련된 국제적 재난의 섭리를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4. 제4과 나중에 주실 은혜 (습 3:9~20)

 

본문 말씀은 “나중에 주실 은혜”를 예고하신 내용입니다. 먼저 선민을 징계하시고 아울러 선민을 괴롭힌 이방 나라들도 심판하신 후 작정하신 때에 선민과 이방인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이 선지자가 예언한 심판은 바벨론의 침략으로 성취된 일이고, 또 나중에 주실 은혜는 바벨론의 압제에서 벗어나는 시기에 일시적으로 은혜를 베푸신 일도 있지만 궁극적인 은혜는 신약시대에 베푸신 하나님 나라의 건설(교회의 부흥)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본문은 두 대지로 나누어 상고하실 수 있습니다. ① 9~13절은 “선민과 이방인에 대한 구원의 약속”이고, ② 14~20절은 “은혜로 회복되는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시대의 백성들로서 크게 위로되는 말씀입니다.

 

1. 선민과 이방인 구원에 대한 약속(9~13절)

9절에서 “그때에 내가 열방의 입술을 깨끗게 하여(이방인들이 우상을 찬양하던 입술을 청화 또는 변화시키시는 뜻) 그들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일심으로 섬기게 할 것이라” 하셨으니, 이 말씀이 곧 이방인 구원에 대한 약속입니다. 이는 욜 2:28의 “그 후에 성령을 만민에게 부어주신다”는 약속과 같은 뜻이고, 이사야 선지자도 예언하였습니다(사 11:10). 이 예언은 바벨론 포로 후 시대에 부분적으로 성취되었지만(10절) 완전한 성취는 오순절 이후 사도행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10절에서 “내게 구하는 백성들 곧 내가 흩은 자의 딸”이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이방인의 자손들을 의미하는데, 그들이 “구스 하수 건너편에서부터 예물을 가지고 와서 내게 드리리라”고 하셨는데, 이는 이방인 구원의 사례를 지적하신 것으로 구스(에디오피아)의 백성들이 하수(홍해)를 건너 예루살렘에 와서 진리를 배우고 하나님을 경외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11절의 “그날에 네가 내게 범죄한 모든 행위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것”은 그때에 하나님이 너희 중에서 교만하고 자랑하던 자(무법한 포악자들)를 제하여 다시는 교만하지 않게 하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강포한 자가 많으면 수치를 당할 일이 많지만, 그들이 회개하면 평안해지겠지요. 또 징계를 받은 백성이 구속의 은혜를 받아도 역시 수치를 면하게 될 것입니다. 12절은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너희 중에 남겨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구원을 받을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구원의 은총이 가난하고 약한 자들에게 우선적으로 임하게 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마 4:13~16과 11:4~5을 읽어보시면 확실히 아시게 될 것입니다. 13절에서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나중에 주시는 은혜를 받을 자, 롬 9:27~29)”가 은혜를 받았을 때 변화될 상태를 말씀하신 것으로 “그들이 악을 행치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않으며 입에 궤휼한 혀가 없고 먹으려고 누우나 놀라게 할 자가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악인이 변화되면 겸손하고 진실한 사람이 됩니다. 그런 사람은 대적하거나 놀라게 할 자가 없다는 뜻입니다.

 

2. 은혜로 회복되는 변화입니다(14~20절). 14~17절은 “시온의 땅” 곧 선민 백성들을 위로(회복과 변화로) 하신 말씀이고, 18~20절은 특별히 경건한 사명자들(대회로 인하여 근심하는 자)을 위로하신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4절에서 “시온의 딸,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딸”로 선민을 호칭하시고, “노래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15절에서 “여호와가 너의 형벌을 제하셨고 너의 원수를 쫓아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너의 중에 있으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 하시므로, 권고의 때가 임하여 하나님이 함께 계시고 평안 주실 것을 예언하셨으니, 이는 영적으로 받는 은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16~17절도 같은 취지의 말씀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셔서 구원을 베푸시니 두려워 말고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약해지지 말라)” 하셨고, 또 “하나님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넘치게 기뻐하시는 뜻) 잠잠히 사랑하시고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선민을 기뻐해주신다는 뜻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도 그 성도를 귀한 자식처럼 기뻐해주시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신약시대에 베푸실 영적 축복과 성령 충만의 은혜가 그러하다는 뜻입니다. 18절에서 “대회로 인하여 근심하는 자를 모으심”은 어렵게 믿음을 지킨 사명자를 모아 위로하시는 뜻입니다. “그들이 네게 속하였음”은 선민의 지도자란 뜻이고, “너희 치욕이 그들에게 무거운 짐이 된 것”은 경건한 지도자들이 선민의 징계 받는 일 때문에 근심하고 기도한 사실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19절은 “선민의 대적을 벌하시고 저는 자를 구원하며 수욕 당하는 자와 쫓겨난 자를 모아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심”은 권고하시는 때에 남아있는 경건하고 약한 자를 붙들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20절도 같은 취지의 말씀입니다. “너희를 이끌고 모음”은 구원의 대상을 모으시는 뜻이요, “너희 목전에서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란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될 때를 지적하신 듯하고(영적 해방을 연상함), “그때에 천하 만민 중에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심”은 성도의 궁극적 승리를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이런 은혜는 오직 성령 충만으로만 체험할 수 있는 영적 축복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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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강 스바냐 1: 1- 6 두려운 경고


오늘부터 우리가 공부하는 책은 스바냐를 공부하게 됩니다 지난주 까지 하박국 공부를 했고 스바냐를 공부하는데 스바냐는 익숙하지 않은 책인 것 같아요 스바냐를 본문으로 설교한 들은 기억들이 있는지요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만약에 들은 기억이 있다면 그 노래 때문에 스바냐서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 전능자이시라 스바냐 3장 17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구절로 스바냐를 기억하기 때문에 스바냐는 굉장히 따뜻한 사람인처럼 느껴 집니다 스바냐 전체 내용은 그렇지 안해요 어두운 터널을 지난 다음에 나오는 고백이기 때문에 그것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창세기의 첫 머리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다음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복을 베푸시지요 창세기 1장 28절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이것은 생명이 점점 번져가는 모습을 우리에게 떠 올리게 하여주지요
 
그런데 스바냐서는 2절부터 무엇이냐하면 멸절하라 이야기합니다
사실은 여호와의 날과 관련된 이야기는 이런 구절들이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스바냐가 살았던 시대의 이야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1장 1절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아의 시대에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더라
 
아몬의 아들 유다왕 요시아의 시대에고 하고 있습니다 아몬의 유다왕 요시아의 시대라고 말하는 데 요시아 시대는 앗시리아가 멸망하기 직전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서 앗수리아의 세력이 약화된 시점이라고 볼 수 있었고 아직은 바벨론이라는 나라가 큰 세력을 얻지 못한 세대입니다
 
특별히 요시아 하면 유다의 임금 가운데 기억되는 분 가운데 이분들은 괜찮은 분이었어 기억되는 분이 몇 명이 있어요 요시아도 그렇고 히스기야도 이런 분들이 종교 개혁을 단행한 사람들입니다
 
우상 숭배를 멀리하고 야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순수성을 심어 주기 위해서 애 쓰는 사람으로 기억이 날 것이어요 왜냐하면 요시아는 임금이 된지 18년이 되던 해에 개혁을 단행합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성전을 수리하도록 시켰는데 성전을 수리하던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발견해요 그 동안 잊혀지고 있었던 하나님의 율법책을 발견합니다 그것을 임금에게 가지고 오거든요
 
왕하 22장 8절 대제사장 힐기야가 서기관 사반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노라 하고 힐기야가 그 책을 사반에게 주니 사반이 읽으니라
 
훌다라는 예언자가 여기 모든 예언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언을 합니다
왕하 22장 16절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곳과 그 주민에게 재앙을 내리되 곧 유다왕이 읽은 모든 말대로 하리니
 
요시아는 정말 참회하면서 그동안 우리가 신실하지 못하였는가 하고 종교 개혁을 단행합니다 우상 숭배하던 사람들을 우상 숭배를 금할 것을 요구하고 여러 가지 조치들을 취합니다
 
왕하 24장 4절 바알과 아세라의 목상들을 찍어 버리고 불 살라 버리고 일월 성신을 섬기는 풍조가 이스라엘도 들어와 있었는데
왕하 23장 5절 옛적에 유다 왕들이 세워서 유다 모든 성읍과 예루살렘 주위의 산당에서 분향하며 우상을 섬기게 한 제사장들을 폐하며 또 바알과 해와 달과 별떼와 하늘의 모든 별에게 분향하는 자들을 폐하고
 
바알과 아세라를 찍어 버리고 일월성신을 섬기는 풍조가 들어와 있었는데 그러한 기구들을 분향단을 폐하고 산당들을 폐하고 아스다롯과 밀골과 제사하기 위해서 만들었던 산당들을 다 폐하여 버리고 사람들이 다른 종교를 갖지 못하도록 조치를 합니다
 
왕하 23장 13절 또 예루살렘 앞 멸망의 산 오른 쪽에 세운 산당들을 왕이 더럽게 하였으니 이는 옛적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시돈 사람의 가증한 아스다롯과 모압 사람의 가증한 그모스와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위하여 세웠던 것이며
 
사람들이 그 우상들에게만 자기 마음을 바친 것이 아니고 야훼 하나님에 대해서도 신앙을 유지하고 있었어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우상 숭배를 해요 이런 것을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혼합주의 섞는 것이야
 
사실은 이런 혼합주의적인 유산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교회에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데 신앙의 내용은 우상 숭배자들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은 모두가 연약하기 때문에 복을 구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우리가 아프면 하나님 낫게 해 주세요 내가 인생의 곤경을 만나면 이 어려움에서 해결해 주세요 당연해 하나님께 청하는 것은 그러나 그것만이 신앙의 목표인것 처럼 생각하면 일종의 우상 숭배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과정일 뿐이지 더 성숙해 져야 되지요 우리의 신앙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내 문제를 해결해 주기시를 바라는 것도 신앙이지만 그러나 더 깊은 신앙은 하나님이 나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 이것이 더 깊은 믿음이어요
 
그 자리까지 성장해 가야되지요 그러지 못하고 언제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느냐 하면 나 혼자 먹고 싶은데 나누어 먹어야 돼 그러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그런 삶을 요구를 하신단 말이어요
 
하나님이 요구하는 거룩한 삶이라고 하는 게 다른 게 없습니다 그런 삶이어요
하나님이 창조한 하나님의 형상이 하나님의 형상답게 살아가지 못할 때 우리가 그의 설 땅이 되어 주기를 하나님은 바라셔요
 
내가 누군가에게 책임적 존재가 되어야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우리가 사는 연습을 해야 하는데 이것을 다 버리고 나의 문제만 해결되기를 바랄 때 자칫하면 우리가 혼합 주의적인 신앙에 빠지기 쉽겠다하는 이야기여요
 
예레미야는 그런 노력을 요시아를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예레미야 22장 15절 정의와 공의를 하나님의 세계가 타원형의 두 가지의 초점 정의와 공의 이것이 무너진 예레미야의 평가에 의하면
 
이 예레미야의 평가에 의하면 요시아 임금은 정의와 공의를 행한 임금이다 정의와 공의 세웠다는 말을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했다 그 말입니다 힘 있는 사람들만 뒷 받침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 힘있는 짓눌리고 그들의 살 권리를 뒷 받침해 주었다 요시아의 통치입니다
 
그 시대에 스바냐가 등장했다고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몬의 아들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성경에 다른 곳에는 안 나옵니다 매우 어려운 분입니다 그를 소개하는 말이 무엇이냐 하면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요하고 말합니다
 
굉장히 길게 소개를 하고 있지요 보통 누구의 아들 아버지가 소개 되는 데 고조 할아버지까지 이렇게 4대까지 이야기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이 발견됩니다
4대를 불러 주시겠어요 히스기야 아마랴 그다랴 구시 이렇게 되어 있지요
여기에 보면 그 다음에 스바냐이지요
이게 다 야 랴 랴 냐 어떤 모음의 특색들이 보입니다 대게 저 글자는 하나님을 뜻하는 단어이지요 하나님과 관련된 단어라고 볼 수 있겠지요 야훼 이름이어요
 
그 이름들이 여기에 등장하고 있는데요 하나님께서 히스기야는 어떤 뜻이냐 하면 야웨께서 강하게 하셨다 아마랴는 야훼께서 약속하셨다 그다랴는 야훼께서 위대하시다 이게 전부 하나님과 관련된 그런 이름으로 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집안이 대단해요 구시가 문제야 야나 냐가 없어 그런데 이름에 있는 저런 특색들을 보니까 사실은 구시라고 하는 것은 구스 사람을 뜻하는 말인데 스바냐의 아버지는 어쩌면 구스 땅으로 이주하여 살았던 사람일 수도 있고 정확히 알 수는 없어요 어떤지 어쩼던 조상들의 길게 언급된 까닭이 무엇이야 하면 구시의 아들하면 왠지 이방적 배경을 가진 것 처럼 아들도 사람들에게 전통성을 인적 받기 어려워 예언자들을 이야기할 때 4대까지 거슬려 가면서 뿌리 깊은 집안이야 아닐까 보게 됩니다
 
이 구시라고 하는 분의 불필요한 오해 때문에 스바냐가 전하고 있는 메시지조차도 사람들이 별 것 아닌것 처럼 여길까봐 그래서 이렇게 의도적으로 4대까지 거슬려서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히스기야는 우리가 알고 임금 일 수도 있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스바냐는 설명 안해 그 임금님이 고조 할아버지다 안해 사람들로 하여금 상상하게 하는 것이어요 임금님 아닐까 가타 부타 이야기를 안해 무엇인가 의도적이라 볼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그의 이름이 조상들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아버지의 이름이 자아내는 불필요한 오해를 불식 시키기 위해서 4대까지 거슬려서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볼 수가 있습니다
 
스바냐라고 하는 뜻은 다른 이름들은 이야기 했지요 히스기야 야훼께서 강하게 하셨다 아마랴 야훼께서 약속하셨다 스바냐의 뜻은 야훼께서 위대하다 스바냐의 뜻은 야웨께서 감추셨다 이런 의미로 풀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예언자의 이름속에 메시지가 이미 담겨 있어요 어떤 의미이냐 하면
(1) 환난날에 야훼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위험으로부터 감추어 주셨다 그런 이름일 수 있는 것이지요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을 숨겨 놓으셨다
 
그 말은 긍정적으로 본 이야기 이고 달리도 볼 수 있습니다
(2) 여호와께서 쌓아 두셨다 보이지 곳에 쌓아 주셨어
무엇이냐 백성들의 죄를 그 때 그 때 처벌하지 않고 쌓아 주셔 때가 이르면 칠려고 두 가지 의미를 다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장 12절 끝 부분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등불로 두루 찾아 벌하리니
등불을 들고 죄 지은 사람들을 벌하기 위해 찾아가는 하나님의 이미지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등불을 들고 죄인들을 찾아가는 하나님의 이미지 이것도 한번 형상화 해 볼만 하겠지요 실지로 프랑스의 어느 성당에는 그렇게 이미지화 되어 있는 하나님의 상이 있다고 해요 죄를 찾아가시는 그 모습으로 보이는데 사실 이렇게 죄인들을 벌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모습은 사실은 그리스 비극에도 등장하거든요
 
아리스킬로스 자비로운 여신들이라는 작품을 보면 자기 아버지를 살해한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 어머니를 죽이는 오레스테스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아버지인 아가멥논을 죽였어요 아들이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 엄마를 죽입니다
 
그런데 윤리적으로 아들이 어머니를 죽일 수 없어 달아 납니다 정의이의 여신이 따라가요 오레스테스를 코러스로 말합니다 그 깨끗한 마음으로 깨끗한 마음으로 깨끗한 손을 매미는 자에게는 결코 우리의 노여움이 다가가지 않으리 그는 무사히 인생을 통과할 수 있다네 그러나 여기 이 자처럼 죄를 짓고는 피 묻은 손을 감추는 경우 우리는 정직한 증인으로서 피살자를 돕기 위해 나타나시는 결국 그 자에게 우리가 유혈의 복수자임을 보여주게 되리라
 
이게 정의의 여신들 이야기입니다 어떻던 어떤 문화 속에서도 죄 지은자는 벌을 받게 되어 있다고 하는 메시지가 강력하게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죄 지은 자에게는 등불을 켜 들고 찾아다니는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2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땅 위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
3절 내가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거치게 하는 것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할 것이라 내가 사람을 띵 위에서 멸절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진멸하고 멸절시키고 무서운 말입니다 진멸하고 멸절하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데요 그러니까 엄중한 심판이 이 땅에 올 것이다 예언자의 언어는 처음부터 따뜻하게 안 갑니다 우리가 짓고 있는 죄의 값이 얼마나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지에 대한 유보 없는 단호한 태도를 말합니다
 
이 세상 망할 수 밖에 없어 사람 뿐만 아니라 살아 숨 쉬는 것을 하나님은 어떤 시대를 상기 시키지요 노아의 홍수 시대를 우리에게 떠 올리게 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모든 생명들이 다 죽어가는 이 광경은 머리 속에 그려 보기만 해도 묵시 문학적 광경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사실 묵시 묵학적 광경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지요 가난에 내 몰린 사람들 전쟁과 테러 공포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세상이 종말이 온 것 같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3절 거치게 하는 것도 하나님이 진멸하신다 결국 우상입니다 하나님은 우상들에 대한 심판을 수행할 것이아
 
종교조차도 자칫 잘못하면 우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기가 다니는 교회를 자랑스러워 하고 기뻐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요 그런데 우리 교회만 진리가 있어 이렇게 말하면 맞아요 틀려요 안 되어요
 
다른 교회는 어떻게 되든지 우리 교회 그래서 남의 교회 교인에게 가 가지고 우리 교회 가자 가자 우리 목사님 설교가 최고야 이런데다든지 우리 교회 친교가 최고야 이러면서 자기 교회를 이렇게 우상화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때때로 종교나 교회가 우상이 되어서 사람들이 진리이신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길을 가로 막올 때도 믾이 있습니다 그릇된 신념 특정인데 대한 맹목적 지지 그 속에 있으면 안 보여 그분이 어떤 모습인지 그가 어떻게 우상이 되고 있는지 그래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특별히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를 사람들이 우상화 하려고 할 때 한사코 노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망해 그 영혼이 자기를 우상 처럼 떠 받드면 이것은 잘못된 것이야 이미 이게 중요하다고 볼 수 있어요 우리 목사님 좋아 그것 까지는 좋아 그분이 정말 애들 하는 속된 말로 하나님하고 동기동창인 것처럼 그렇게 그분 아니고는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 다 형편 없는 것 처럼 이야기 하는 것 이것이 철저한 우상화라고 볼수 있어요
 
정현종 선생님이 우상화는 죽음이니 시를 썼는데
우상화는 죽음이니 우상화 하지 말라 위대하신 누구이든 우상화 법석 속에서는 우상도 시체요 우상화하는 사람들도 시체이니 제발 우상화하지 말라 그저 좋아하고 그저 사랑하고 사뭇 찬탄은 할이로되 섬기지는 말아야지 우상은 암이요 우상화는 에이즈요 하여간 전면적인 죽음이니 사람이든 사상이든 그 무엇이든 하나밖에 없으면 말할 나위 없이 전면적인 죽음이니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든 사상이든 그것을 우상화 하는 순간 자유가 없어져요 자유롭게 사고할 수 없게 돼 교회 다니는 이는 특정인을 우상으로 만들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우상으로 사람으로 세우려고 하는 사람들은 한사코 그 자리를 떠나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망하는 것이야 영혼이 망할 수 밖에 없어요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 모든 생명들 그리고 거치게 하는 것 다 없에고 그 다음에 악인들 까지도 진멸할 것이라고 합니다
 
악인들은 간단해요 악이라고 하는 글자가 버금아 밑에 마음 심자가 있는데 타자에게 무덤을 안겨 주려는 마음이어요 누군가에게 무덤을 안겨 주려는 마음 무덤을 안겨 주는 것은 누군가를 생명을 가진 존엄한 주체로 바라보지 않고 그를 무생물 취급하는 것이야 인격이 없는 취급을 하는 것이어요
 
악인은 악한 행위를 가장 젊잖은 사람도 악인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젊잖아요 사람 취급을 안해요 겉으로 비추어진 모습은 아주 괜찮아요 그런데 그 마음속에 교만함이 가득차 있어요 아랫 사람들을 하대하고 그가 악인이어요
 
그 사람이 법적인 죄를 저지르지 않는다 해요 그런 사람이 악인어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들을 격멸한다고 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격멸하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정말 기독교인들이 하지 말아야 할 일 가운데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나하고 생가깅 다르고 지향하는 바가 다르다고 해 가지고 그 사람을 격멸하고 혐오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받은 사람을 격멸하는 일은 결국은 그를 지으신 하나님을 격멸하는 일이다 창조조 하나님의 격멸이어요
 
내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 있어 그 때 겸허하게 하나님은 이 일은 저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여쭙데 겸손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이게 기독교인들의 마땅한 삶의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다에 있는 것도 그렇고 땅에 있는 것 사람과 징승 바다의 고기 모든 것들을 멸절하는 데 결국은 그 모든 일들이 공중의 새가 잘못해서도 아니고 바다의 물고기가 도덕적인 문제를 일으켜서도 아니고 그렇지 않아요
 
이 모든 심판이 누구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어요 사람 때문에 일어납니다 이것이 슬픈일입니다 공중의 새가 무엇 잘못 저지르면 얼마나 잘못 저지르겠어 가다가 가끔 똥 싸지요 바다의 물고기가 무엇 잘못을 저지르겠어요 자기들에게 주어져 있는 본능대로 사는 것이니까
 
지금 결국은 하늘도 오염되어 있고 바다도 오염되어 있고 백화 현상이 일어나고 전부 물고기가 만든 일이 아닙니다 인간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공의와 정의를 버리고 하늘과 바다와 강의 오염으로 나타나고 그 생명들도 온전히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들고 있지요
 
그러므로 인간이 반성해야 될 부분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이야기 한 기억이 있는대요 어떤 생물학자가 하는 이야기여요
 
세상의 생명의 구조라는 것이 이렇게 되어 있데요 생산자가 있고 소비자가 있고 분해자가 있어요 이 지구상에 생산자는 무엇이냐 하면 식물 세계입니다 식물들은 땅에 뿌리를 내리고 영양분과 물기를 받아 드리고 광합성을 하면서 잎도 만들고 열매를 만들어서 먹게 해 주어요 이들이 없으면 살 수가 없어요
 
소비자는 동물입니다 동물들 가운데서 가장 큰 소비를 하는 것은 누구이냐 하면 인간입니다 동물이든 인간이든 식물이든 다 죽어요 그렇지요 죽지 않고 있다고 한다면 끔찍한 일이지요 죽음은 복입니다
 
죽었을 때 시신이 그대로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끔찍한 일입니다 우리가 땅에 묻히고 그러면 미생물들이 열심히 분해해 가지고 다 양분으로 돌려놓습니다 그것을 식물이 먹고 새로운 것을 생산해 내지요
 
그러니까 정말 내가 빚지고 살고 있구나 내가 이 우주 가운데 사랑의 빚을 지고 있는 존재이구나 하는 생각을 품어야 돼 그렇지요 내가 잘난체 해 보아도 이 친구들이 없으면 살 수 없어요
 
어떤 분이 이야기하지요 한 숯가락 흙속에 미생물이 수 억마리여 이 애들 덕분이 인간이 산다고 인간을 함부로 해야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그런 기본적인 것들을 알고 살았으면 좋겠다
 
세상에 모든 것들을 진멸하라고 하는 것은 인간 때문이야 공중의 새와 물고기 때문이 아닙니다 인간의 죄 때문에 피조 세계가 실판을 받고 있는 이것을 생태학적으로 이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인간에게 더욱 더 적실하게 느깨게 되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입니다
 
4절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들 위에 손을 펴서 남아 있는 바알을 그곳에서 멸절하며 그마림이란 이름과 및 그 제사장들을 아울러 멸절하며
 
5절 또 지붕에서 하늘의 뭇 별에게 경배하는 자들과 경배하며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들과
 
6절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과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을 멸절하리라
 
멸절하리라 누군가를 향하여 손을 펴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드러내고 있는데요 여러분 손을 펴신다고 하는 것은 모세가 출애굽기 당시에 손을 펴시므로 열가지의 재앙을 내리셨고 모세가 지팡이를 내 밀므로 바다가 갈라진 것 처럼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14장 16절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위로 내 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하나님의 권능을 멸정의 대상은 모든 피조물에서 사람으로 사람에서 특별히 유다와 예루살렘으로 축소해 갑니다 죄의 뿌리가 어디 있는지 점점 유추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리고 남아 있는 바알을 철저히 끊겠다고 이야기 하고 있는데요
 
여기에 바알을 끊겠다는 말은 바알만 끊겠다는 말이 아니라 바알로 상징되는 모든 우상을 끊겠다 바알이라는 것이 바알의 영향력 그렇게 말할 수 있는데 어떤 것이 바알의 영향력이냐 하면 다른 것이 없습니다
 
바알을 믿는 신앙과 야훼를 믿는 신앙의 기초가 달라요 바알은 욕망을 자기의 중심에 놓습니다 바알을 섬기는 까닭이 내게 다산과 복을 달라고 해요 욕망입니다 야훼를 믿는 사람들은 자기 욕망에 따라서 믿는 것이 아니어요 경외심입니다
 
욕망은 늘 이야기하지만 배타적이어요 내 배고픈 사정만 알고 저 사람 배고픈 사정은 잘 몰라요 욕망은 배타적이어요 배타적이기 때문에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경쟁적이어야 해요 경쟁한다고 하는 것은 타자 부정이야
 
그런데 경외심을 가지고 산다고 하는 말은 나라고 하는 존재도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저 사람도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 안에서 내 삶을 살펴보기 때문에 포용적입니다 경쟁적이 아니라 협력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 결과는 타자 부정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의 존재의 바탕이 되어 진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어느 것을 내 삶의 원리로 사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인생이 되는 데 사람들은 여기에 많은 영향을 받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것을 떨쳐 버리겠다
 
지금도 똑 같습니다 욕망을 바탕을 두고 사는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악마적인 것인지 보여 주깁니다 욕망을 바탕을 사는 삶입니다
 
골로세 3장 2절 위엣것을 생각하고 땅에 것을 생각하지 말라
욕망을 바탕을 추구하는 삶이 아닙니다 위엣 겻을 생각하고 그 지체를 죽여야 합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5절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의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치시겠다고 지금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마림을 치시고 뭇 별에게 경배하는 자들을 치시고 여호와께 맹세하면서도 말감에게도 맹세하는 자들 혼합주의 자들 그들을 하나님이 치신다고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않는자들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고 따르지 않는자를 하나님이 멸절할 것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되는 것은 자기의 삶을 하나님의 마음에 접속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내 마음을 자꾸만 접속해 그럴 때 어떻게 됩니까? 접속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길을 묻는 것이어요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 길을 묻는것이어요 하나님께 길을 묻는다는 이야기는 나 좋을 대로 안 한다는 것이어요 나 좋을대로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길을 묻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실 일에 대한 새로운 기대감을 품습니다
 
하나님이 오늘 어떤 일을 하실까 하는 설레는 기대를 가지고 사는 것이지요
믿음의 사람들은 결국 어떤 사람들입니까? 자기의 정체성의 뿌리를 과거에 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의 새로운 세상에 꿈 거기에 사로 잡혀 사는 사람들이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시내산 앞에서 하나님이 그 백성과 언약을 맺으실 때 하나님께서 꿈을 주시지요
출애굽기 19장 6절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꿈을 주시지요
 
제사장 나라야 그들이 언제는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감을 보여 주고 있어요 정체성의 근거가 과거에 있지 않고 실현의 가치에 있는 것이 믿음의 삶이다 그게 바로 종말론적인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꿈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야 됩니다
발터 베냐민이라고 하는 독일의 사상가는 이렇게 이야기 하는 EDY 구원이라는 것은 역사에 대한 초월성의 침입니다 이런 말을 해요
 
역사라고 하는게 내제적으로 발전을 해 가지고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는 것이 아니고 이 발터베냐민이 하는 이야기는 우리 믿는 사람들은 무엇하는 사람이냐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이 이 속에 들어올 때 하나님의 마음에 내 마음에 침입해 들어오기 시작할 때 하나님 나라의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제 2강 스바냐 1: 7-13 등불을 등고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
 

때때로 살다보면 캄캄한 어두움을 만날 때가 있는데 그 어둠 속에서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 더듬 더듬 하고 있는데 어딘가에서 누가 불 하나를 켜면 고맙지요 등불이 된 사람도 있지요 누군가의 마음속에 등불이라고 하면 아련한 기억들이 있어요
 
늘 호롱불 밝히고 심지가 타고 석유를 올라오면서 불을 피우는데 석유를 채워 놓지 않으며 올라오다가 꺼져요 제사나 있을 때 그 때는 많이 밝혀야 하기 때문에 아버지가 아껴 두렀던 램프 시골에서는 남포라고 하는 것에 불을 켜요
 
그러면 그게 끄름이 안고 그러면 닦아내고 그게 일이었던 그런 기억들이 있는데 우리가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등불을 밝혀 들고 있으면 안심이 되지요 오늘 보고자 하는 스바냐에서는 등불을 들고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
 
이것 무엇이냐 하면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이 있나 찾아보신다는 말이어요 결국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무리 찾아도 없다 그런 이야기이지요
 
지난주에는 1절부터 6절까지 공부를 했거든요
오늘은 7절부터 13절까지 공부를 하겠습니다
오늘 이야기도 따뜻한 위로와 격려와 말보다는 아주 엄중한 말씀이 있는데
먼저 7절을 보면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지어다 이는 주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고 그가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음이라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지어요 아도나이 야훼인데 7절을 유의있게 보세요 거기에 여호와란 이름이 몇 번 등장하지요? 3번 등장하지요 여호와란 이름이 3번 등장하고 여호와를 그라고 해서 대명사로 받는 구적이 나오지요
 
여호와란 이름이 세 번 나오고 대명사까지 등장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짤막한 구절인데 앞에 말씀과 대비하기 위해서 여호와란 이름이 세 번 등장하고 앞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반복합니다
 
6절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과 여홓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을 멸절하리라
 
그 말씀과 대비하게 위해서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글쓰는 사람이 피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반복이어요 글 써 놓고 글을 퇴고할 때 나도 모르게 똑 같은 말을 쓴게 나타나요
 
그 글을 쓴 사람들은 예민하게 그것을 알아차려서 똑 같은 의미이지만 다른 말로 바꾸어 놓고자 합니다 그래야 글이 꼴이 되거든요 어떤 때는 의도적으로 반복을 할 때가 있어요 그것은 리듬을 만들거나 내용을
 
세 번씩이나 반복함을 볼 때 여호와를 찾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는 사람과 대조되기 위해서 등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7절 여호와라는 주어를 잠잠하라고 할 때 세 번씩이나 반복 찾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는 첫 마디가 무엇이냐 하면 잠잠할지어다 말한 것이어요
 
어떤 게 잠잠한 것이지요? 하나님 앞에 선다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 들끟고 있는 생각들 그 모든 것들을 내어 놓는 것을 이야기하는데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실 때 어디에서 드러내시지요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등장하시지요
 
그 때 무엇이라고 했지요 네 신을 벗으라고 하지요
출애굽기장 5절 왜 하필이면 신을 벗으라고 하지요
신발이라고 하는 게 옛날 문헌들 같은데 보면 정체성과 관계가 됩니다
 
아버지가 먼 길을 떠나면서 내 아들이 자라거든 나를 찾아 오라고 하고 내 아들인 증표로 신발은 가져오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신발을 벗으라고 하는 행위는 네 생각 일체의 것 내려놓고 그 앞에 엎드리라는 이야기이지요
 
여호와 앞에 잠잠하라고 한 그 말은 내가 이렇게 봅니다 내 생각은 이렇습니다 그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순전한 마음으로 그 앞에 있어 보라는 것이어요 그 권능 앞에 엎드려야 돼 들뜬 생각과 행동을 잠시 그쳐라 달리 이야기 하면 네가 잃었던 경외심을 회복하라 내가 절대 앞에 서 있다는 사실
 
 
내 삶이 유한한 삶이기는 하지만 앞에 있는 삶이라고 하는 사실을 한번 돌이켜 봐라 이게 여호와 앞에서 잠잠하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천사들이 이 세상에 나타나게될 재앙을 나타내는 장면들이 나오는데 특별히 일곱 봉인 되었던 하나 하나 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일곱 번째 인을 뗄 때 어떻게 했느냐 하면 하늘이 반 시간쯤 고요해 졌다 그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의 변전앞에서 온 우주가 고요해 지는 것입니다
 
계시록 8장 1절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하늘이 반 시간쯤 고요하더니
태풍의 눈 태풍의 뭐 거대하게 휩쓸고 있는 데 그 한 복판은 고요하다는 이야기여요 원심력 때문이지요 밖에 나 있는 원심력이 있으니까 한 복판은 조용한 기상 현상이 나타나는데 온 우주가 들 끊고 있는데 잠잠하라고 하는 그 이야기는 무엇이냐 하면 이 우주의 중심이 하나님이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잠잠하다는 말 속에 담겨진 뜻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 조용하라고 하느냐 하면 여호와의 날이 가까이 왔다 하고 말합니다 성서에서는 여호와의 날은 어떤 사람에게는 심판날이고 어떤 이에게는 구원의 말입니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소식이 예수님을 죽이고 예수님을 모함하고 그런 이들에게는 두려운 소식이지요
 
그러나 주님만을 바락 살았던 사람들 그래서 낙심했던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기쁜 소식이 되지요 세상에는 그런 것 같아요 똑 같은 소식이 누군가에게는 기쁜 소식이 되고 누군가에는 슬픈 소식이 되는데 여호와의 날 그 날이 가까웠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 날은 여호와의 개입에 의해서 역사가 궁극적으로 변화하는 그 날이 다가온다
 
하나님의 백성과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수행되는 날이 여호와의 날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그 날은 심판의 의미가 더 강해 심판하는데 그 이미지가 무엇으로 되어 있느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n제사를 바치지 않아요
 
제사 바칠 때 꼭 있어야 되는 것이 무엇이지요 제물 번제 같은 제사를 하나님께 바치되 다 태워 드리지 않아요 속죄제도 태워 드리는데 특히 화목제 같은 것을 네가 자원해서 하나님께 바칠 때는 남은 고기들은 제사장도 먹고 바친 사람도 먹어요
 
먹을 때 무엇이라고 이야기 하느냐 하면 제사를 바친 당일 날은 먹어도 돼 그 다음날도 먹어도 돼 예를 들어서 내가 소를 잡았어 제사장도 드리고 태울것은 태우고 기름이나 이런 것은 태우지 않아요
 
제사장도 먹고 내 가족도 먹는데 소 한 마리를 이틀 동안 다 먹을 수 있어요 없어요
요즈음 식당에도 보니까 소 한 마리 써 놓고 팔기는 한데 그런데 먹을 수가 없지 않아요
 
레위기 7장 17절 성경에는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제 삼일까지 두면 안 돼 이것은 위생적인 이유도 있을 것이어요 사흘 째 되면 부패할 가능성이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친교의 식탁에 이웃들을 초청하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초대해 가지고 함께 기뻐하라고 한 그런 이야기이지요
나는 이게 굉장히 굉장히 중요한 것이라고 보는데 일종의 나눔이 벌어짐으로 분배 정의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먹을 기회를 주는 것이지요
 
우리나라에서도 보면 옛날 절기 가운데 어떤 절기를 보면 머슴들을 위한 날도 있거든요
농사 짓기에 앞서서 머슴들을 위한 날이 있어요 머슴들을 위한 잔치를 베풀어 주기도 합니다
 
불교적 제의이기도 합니다마는 특정한 날을 정해 가지고 제사를 드려요 그 음식은 마을에 있는 어려운 사람과 함께 너누는데 부유한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배려하는 그런 뜻에서 이런 제물을 나누어 먹기도 했는데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다가왔어요 하나님이 제물을 잡아요 그리고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1장 7절 그가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음이니라 이 때 청할 자들이 희생당할 사람들인지 아니면 심판의 결과를 누릴 사람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애매해요 정확히 알 수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그 심판 자리에 누군가를 청하고 있다 그 말은 심판이 틀림없이 시행 될 것이다 보여 줍니다
 
제가 퀴즈를 낼 터니까 8절을 읽고 맞추어보세요
8절 여호와의 희생의 날에 내가 방백들과 왕자들과 이방인들의 옷을 입은 자들을 벌할 것이며
 
9절 그 날에 문턱을 뛰어 넘어서 포악과 거짓을 자기 주인의 집에 채운 자들을 내가 벌하리라
 
여기에서 이 문장을 이끌고 있는 핵심 단어가 무엇이지요? 벌한다 맞았어요 8절의 말미 9절의 말미에 벌하다고 하는 단어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 희생의 날에 여호와의 심판의 날에 제물이 된 사람들을 여기에 이야기 하고 있는데 누구입니까? 방백들 왕 같은 사람들을 이야기 하지요 그 다음에 왕자들 왕의 자식들이기도 하지만 귀족 집단들 이야기 합니다
 
그 다음에 이방인의 옷을 입은 자들 그렇게 말하지요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 또 이방인들 이방인도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여기서 이방의 옷을 입은 자들이라는 것은 외국 복장을 입어 화려한 옷을 이방 사람들의 옷 그러니까 우리가 평범한 옷을 입고 있는데 내가 특별한 외국의 옷을 입어 명품을 입은 것이야 그 옷이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그들의 복색을 받아 드리는 순간 그들의 문화와 종교까지 받아 드릴 가능성이 있어요
 
이방의 옷을 입은 자들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방의 생활 방식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를 내면화하고 그들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삼은 사람들
 
방백들 왕자들 이방의 옷을 입은 사람들 그 다음에
9절 문턱을 뛰어 넘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문텩을 뛰어 넘는 다고 하는 것은 포악과 거짓을 자기 주인의 집에 채우는 자들 문턱을 뛰어 넘는다는 것은 남의 집을 약탈하기 뛰어 넘는 그런 요소가 있는 것 같아요
 
여기에는 무엇이 있는가 하면 다곤 신전을 들어갈 때 문지방을 밟지 않고 블레셋 사람들은 문지방을 뛰어 넘는다고 하는 것은 남의 집을 약탈하기 위해 들어가는 행위일 수도 있겠고 블레셋에 다곤 신전 앞에서 사람들이 행하는 행태를 모방하는 사람들
 
결국 블레셋에 관습을 따른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 관습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성경에서 십계명에서 출 20장 3절 나 외에 다른 신을 있게 하지 말라 하는 데 여기 블레셋의 신은 다른 신인데 다른 신과 하나님의 차이가 있어요
 
여기에서 이야기 되고 있는 다른 신들은 사람들에게 항상 무엇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 그 신에게 정성을 바치면 그 사람의 도덕적 삶이 어떠하든지 간에 그에게 복을 주고 정성을 기우리지 않으면 화를 내리고 그렇다고 믿어요
 
야훼 하나님은 당신에게 아무리 제물을 많이 바친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삶이 정의와 공의를 해칠 경우에 이사야 1장 13절 너희의 제물의 향기 역겹다 그러지 않아요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제물이 아니야 온 세상이 다 나의 것인데 그것 가지고 내가 기뻐할 것 같으냐 내가 정말 기뻐한 것은 무엇이냐 너희가 정의와 공의를 세우는 것이어요
 
정의와 공의라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결국 무엇일까요 이웃 사랑이지요 그러니까 나 외에 세상에 소중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 차려야 하고 나 좋을 대로 행하지 않고 남 좋은 대로 행하는 연습을 해야 되어요
 
문턱을 뛰어 넘는자라고 하는 것은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지요 넘어가지고 이방의 습관을 따르든 저 삶과 사욕의 무관한 삶인 것이지요 그 사람들을 하나님이 살육의 제물로 삼겠다 그렇에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자기 욕망에 충실한 사람들은 이웃들을 목적 자체로 보지 않고 이용 가치로 보게됩니다 그것을 말씀 드렸다 싶이 그를 지으신 하나님에 대한 모독행위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나보다 못돼 보이는 사람들도 정말 존중해야 하는 이유가 왜냐하면 저 사람도 하나님의 작품이어요 이것을 늘 명심해야 해요 기독교인들은 함부로 대해야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메스컴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마는 아파트 경비원들이 모욕 당하는 일들이 많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술 취해서 70대 노인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주인이 개를 보고 짓는 것을 보았느냐 당신은 개이고 이런 것이지요 이런것이 돈이 만들어 내고 있는 악마성입니다
 
이것을 절말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증한 일들 인 것이지요 너무나 많이 돈과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존엄한 존재로 대하지 못하는 것이어요 교회가 해야 될 일이 있다고 하면 무엇이냐 하면 존중하는 삶을 연습하여야 해요
 
정말 존중하고 아껴주고 귀히 여기고 이것을 연습해야 해요 교회에 모든 사람들 전부 그런 마음으로 산다고 하면 세상은 변할 것입니다 기독교인들 가운데도 사람들을 그런 방식으로 대하는 일이 있다고 하면 명확히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는 하나님 안 믿는 사람이어요
 
너무 과한 이야기인지도 모르지만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보면 그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미신과 우상 숭배라고 하는 것은 사회적 불의에 연결이 되고 사회적 불의에 항거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10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어문에서는 부르짖는 소리가 제 이 구역에서는 울음 소리가 작은 산들에서는 무너진 소리가 일어나리라
 
10절을 이끌고 있는 단어는 어떤 단어이지요? 소리 소리어요 이것이 반복되고 있지요 여기 어문 어문이 무엇이어요 말 그대로 피쉬 게이트입니다 어문 물고기 물고기의 문이라는 뜻이어요
 
이게 어떤 이야기냐 하면 옛날에 사대문이 있지 않아요 우리나라도 보면 유교 이념에 의해서 만들어 졌거든요 조선이 인의예지를 가지고 문들을 만든다 말이어요 동대문이 흥지문 의는 돈문 예는 숭문 지는 홍문 그 다음에 신은 무엇이냐 하면 보각 이게 유교 이념을 가지고 만든 도시이어요
 
이 도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말하느냐 하면 자기를 자부하는 말이 있어요 나는 문안 사람이야 사대문 밖에 사는 사람들은 문 밖 사람 그런데 문들로 사람들이 드나들지만 그 모든 문이 똑 같은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왕래가 빈번한 문도 있지만 도성 안에서 사람이 죽었어요 시신이 밖으로 나가야 돼 그러면 어떤 문으로 나갔어요 요즈음 광의문이 있는 데요 광의문 족에 옛날에 시구문이라고 있었어요 수구문이라고 했는데 물이 흘러가는 곳이라고 했는데 시체를 뜻하는 시구문이기도 하고 시신이 나가는 문이어요 이런 문들이 있었던 것이어요
 
미국에 가서 보니까 휴스턴에 있는 어떤 농장에 갔는데 그 농장d에 사람들이 어떻게 발전해 갖는 가를 보여주어요 1920넌대에 지어진 집이 있는데 안내문이 그렇게 이야기 해묘 여기 출입문이 가족들이 드나드는 문입니다 친구들이 드나드는 문입니다 저 문은 하인들이 드나드는 문입니다 문도 정해져 있어요
 
우리도 학교 다닐 때 생각해 보면 중앙 현관으로 못 다니게 했어 선생님들이 우리는 옆문으로 다녀야지 중앙 현관문으로 못 다니게 했어요 전부 계급이지 어문이라는 게 물고기 비린네 나는 것이지 않아요
 
양문이라는 게 양 떼들이 어문이라는 곳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이 어문이라는 것은 느헤미야서에
느헤미야 3장 3절 어문은 하스니아의 자손들이 건축하여 그 들보를 얹고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었고
 
느헤미야 13장 16절 또 두로 사람이 예루살렘에 살며 물고기와 각양 물건을 가져다가 안식일에 예루삼렒에서도 유다 자손에게 팔았다
 
그곳은 물고기이지만 상행위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어요
거기에서 부르짖는 소리가 나요
 
스바냐 11장 10절 제 이 구역에서는 하고 말하지요
제 이 구역은 신시가지입니다 그러니까 도시가 이렇게 있는데 팽창을 하다 보니까 더 수용이 안 돼 옆에 달아서 새로 만든 것이어요
 
제 2구역도 어떨까요? 굉장히 사람들이 많이 가고 그리고 요즈음으로 이야기하면 투기지역이지요 그러니까 어문도 그렇고 제 이구역도 그렇고 그런 의미가 있어요 그게 무너질 것이다 무너지는 소리가 날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온통 경제적 가치에 눈에 팔려 있던 그것들이 무엇인가 생기가 있는 그 곳에서 오히려 비명 소리가 들린 것이고 무너지는 소리가 들릴 것이고 작은 산들에서는 무너지는 소리가 날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수행 될 때 하나님을 잊고 살았을 번 한 그런 상황속에서 비극들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11절 막데스 주민들아 너희는 슬피 울라 가나안 백성이 다 패망하고 은을 거래하는 자들이 끊어졌음이라
 
막대스라고 하는 곳도 예루살렘의 한 구역이거든요 특별히 우리가 절구 같은 것들이 있지 않아요 절구하고 공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움푹 들어간 지역이어요 막데스라고 하는 곳은 움품 들어간 지역인데 그 곳에서 가나안 사람들이 패망하고 은을 거래하는 자들이 끊어졌다고 하는 사실이 상기하는 것은 이 지역이 상업 지구였구나 이렇게
 
어문도 그렇고 제이 구역도 그렇고 막데스라고 하는 곳도 그렇고 사람들이 빈번하게 왕래하면서 상행위를 하고 있었던 그런 장소 늘 이야기하지만 이익이라고 하는 동기가 내 삶을 사로잡는 순간 진리에 대한 관심은 멀어진다
 
모든 인간관계가 그럽니다 내가 누구와 만난 관계에서 이익이 우리의 관계를 규정할 때 우리는 서로를 존엄한 인격으로 대하기 어려워요 내가 이용해야 될 대상으로 보이기 쉬어요 이게 세상의 거의 모든 지역이 그런 이익이 인생에 중심인 지역인 것을 보여 주고 있어요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이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 때에 12절 그 때에 내가 예루살렘에서 찌꺼지같이 가라앉아서 마음속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등불로 두루 찾아 벌하리니
 
예루살렘에서 찌꺼기같이 가라 않았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요? 찌꺼기 같이 가라앉았어 이것 무엇이냐가 자기만의 세계관과 가치관에 사로 잡혀서 변화를 향해 자기를 개방할 생각할 생각이 없는 사람들 그들을 표현하여 찌꺼기 같이 가라앉았다
 
사람이 사람인 것은 무엇이냐 하면 자기를 개방하고 남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나를 변화 시킬 수 있을 때 사람은 성숙해 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심판하겠다고 하는 자들은 무엇이냐 하면 찌거기 같이 가라앉았어
 
이익이라고 하나의 동기에만 움직일 뿐 진리 앞에 마음을 개방하지 않은 그 마음을 찌꺼기 가라 앉았다 진리가 완고하게 찌꺼기 같이 가라 앉은 마음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요
 
그들을 하나님이 등불로 두루 찾아 벌하리니 왜냐하면 그들이 하는 말이 하나님은 복도 내리지 않고 화도 내리지 않아 그 말은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이야 하나님은 안 계시지 않아 그 말이어요
 
이 말이 누가 한 말인지 알아 맞추어 보세요 신은 죽었다 니체가 하는 말이지요
우리가 신학 다닐 때 퇴수회라는 곳을 가보면 신학생들의 낙서가 있어요
신은 죽었다 그리고 니체 그 밑에 니체는 죽었다 신 이렇게
신은 죽었고 하는 말이 니체가 무신론자이기 떼문에 한 말인 것처럼 생각이 되지만 사실은 즐거운 학문이라는 책에 등장하는데 광인 하나가 대 낯에 등불을 밝혀 들고 다닙니다
 
미치광이어요 그가 외칩니다 나는 신을 찾노라 나는 신을 찾노라 라고 말합니다 광인이 시장 거리에서 등불을 들고 나는 신을 찾노라 할 때 많은 무신론자들이 놀리기 시작합니다신이 집을 나갔나 신이 우리 집 막네 처럼 길을 길을 잃었나 보다 다른 사람도 이야기 합니다 아직도 숨박꼭질을 어쩌면 신은 배를 타고 떠났는가 아니면 그냥 걸어갔는가
 
미치광이를 외워 쌉니다 미치광이는 외칩니다 신이 어디로 갔나고 내가 알려주지 우리가 신을 죽인 것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알려 주지 우리가 신을 죽인 것이다 신이 존재하지 않은 것이 아니어요 결국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들이 하나님을 죽인 것이야
 
다시 이야기하면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이 되어야 하는데 나의 존재가 하나님의 있음을 드러내는 통로가 되어야 하는데 하나님 무시하고 복도 내리지 않고 화도 내리지 않고 제 멋대로 사는 그것이 신의 죽음이다는 것이어요
 
아 불경한 그렇게 이야기 할 것이 아니라 우리도 살면서 하나님 죽게 만들 수 있어요 하나님 죽을 수 없는데 은유적 표현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의무가 있다면 무엇이냐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시실을 드러내는 것을 보여 주는 삶을 살아야 돼 인간의 의무가운데 하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이 좋다는 사람들 조차도 부유해지면 마음이 평안해 져서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는 것처럼 생각이 든단 말이어요 하나님이 하신 일 성경이 우리에게 증언하지 않아요 해방하시고 억눌리고 있는 사람들을 해방하시고 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런지 율법을 부여해 주시고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놀라운 것은 인간과 연약을 맺으시지 않아요
 
언약을 맺는다고 하는 것은 나의 자유를 너와의 관계속에서 유보하겠다는 것이어요 절대적 존재이고 지존한 하나님이 우리와 이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겠어요 왜 매일까요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의 삶속에 하나님이 개입하고 있는데 모든 하나님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어요
 
하나님이 화도 내리지 않고 복도 내리지 않아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은 새로운 역사를 시작할 수 없어 이렇게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자들을 등불을 들고 찾겠다는 이야기는 샅샅이 찾아 내어서 벌할 것이다
 
13절 그들의 재물이 노략되며 그들의 집이 황폐할 것이라 그들이 집을 건축하나 거기에 살지 못하며 포도원을 가꾸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하나님이 주시는 복도 하나님이 주시는 벌도 믿지 않는 완고함 이것이 우리 문명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12졸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고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말은 어떤 말과 관련이 되느냐 하면 예언자들이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우상들은 말고 못하고 우리에게 화를 내지도 못하고 복도 주지 못하고 화도 내리지 못한다고 예언자들이 이야기 하거든요
 
우상에게 하는 말을 하나님에게 적용하고 있어요 하나님을 우상의 지위로 벌어지고 있었다 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보면 니체가 이야기 하는 신의 죽음이라는 말은 그런 삶을 방식을 행태를 가르키는 말이었을 것이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미국의 학자인 필 주커먼이라는 사람이 신 없는 사회 종교 없는 사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점점 사람들이 종교 없는 삶을 선호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흐름처럼 보여집니다 세상이 좋아졌나 그렇지 않거든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삶으로 입증하는 일이 많아질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우상처럼 지위 격하 시키려는 사람들은 그들의 재물은 노략되고 집을 건축하지만 거기 살지 못하고 포도밭을 가꾸지만 포도주를 마시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있었기에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였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거두어 가시면 남는 것이 없다 이것이 스바냐가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는 엄중한 삶의 현실입니다
 
프레드린 니체의 광인 시장에 등불을 들고 신이 어디 있는가 찾았던 그 광인은 광인이지만 사실은 무엇이냐 광인은 다른 세계를 보는 사람이거든요 시장 거리에서 이익에 밝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광이이다는 것이어요
 
그는 보고 있어요 그들의 삶이 신을 무존재처럼 만드는 사실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서 가시적 존재로 드러나도록 나를 주님의 통로로 삼는 그런 일이 필요하겠지요 바로 그런 삶이 복된 삶인 것이어요 오늘 스바냐는 그런 교훈을 우리에 주고 있습니다.

제 3강 스바냐 1: 14- 2: 3 여호와를 찾으라

지난주에 우리가 등불을 들고 악인들을 찾아 나선 하나님의 모습을 이야기 했어요
사실 성경이라는 책은 끝없이 인간을 찾아오시는 하나님 또 그런 하나님을 피하여 달아나는 인간의 숨바꼭질 그런 이야기를 보여 줍니다
절박할 때 하나님을 찾지만 절박함이 사라질 때 사람은 하나님에게 등 돌리기 일 수 이지요 그 때도 하나님이 찾아 오시지요 이것이 구원사의 이야기라고 봅니다
 
프랜시스 톰슨 시 하늘의 사냉개라는 시가 있습니다
난 그분을 피하여 달아났습니다 이런 말로 시작이 됩니다 시간 속에서 장소 속에서 끝 없이 하나님을 피하여 달아나 내 인생의 곤고함을 맛보게 되는데 유일한 희망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 그것이 하늘의 사냉개라는 시 속에 담겨 있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끈질기게 찾으셔요 오늘 하나님이 지난 주에 보았듯이 화가 많이 나셨는데 여전히 화가 가시지 않았지만 화로 끝나지 않아요 언제나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새로운 기대를 가지고 인간을 대해 주시는 그분의 말할 수 없는 인내 이것이 우리를 살게 하는 것 같은데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14절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하고 말합니다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다 하고 말합니다 큰 날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압도적인 그런 날을 이런 표현으로 쓰고 있지요
 
그 날이 가깝다 가까울 뿐 아니라 빠르게 다가오는 그래서 어떤 번역은 그 날이 득달 같이 득달같다는 말은 잠시도 쉬지 않는다 이것이 득달 같다는 말인데 하나님이 결정하신 것은 반드시 신속하게 이루어진다 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 날은 소리와 더불어 다가오는 여호와의 날이 소리로다 하고 말합니다 심판의 소리이겠지요 그 날이 다가오면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우는 도다 슬피 운다는 것은 비명을 지르는 것이지요 용사 용맹을 자랑하는 자입니다 용사조차도 압도적인 하나님의 도래 앞에서 비명을 지를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올 것이다 대조가 되고 있어요
 
가장 용감하게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지금 비명을 질러대는 그런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5절 그 날은 분노의 날이요 여기 보면 어떤 날 분노 환난 고통 황패 패망 캄캄하고 어두운 날 구름과 흑암의 날
 
16절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들을 치며 높은 망대를
날이 날이요 날이요 날이요라고 반복합니다 이런 문장이 무엇과 같은 가하면 폭포가 쏟아지는 것과 같은 날이며 날이며 이야기 한단 말이어요 우리가 폭포가 쏟아지는 것을 이것은 급박한 문장이기 때문에 날이요 날이요 쓰고 있단 말이어요 마치 이 말이 여호와의 날이 가까이 왔고 문장의 형태를 통해서 흥미로운 대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5절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라고 번역되어 있는 단어가 쇼와라고 하는 히브리어로 되어 있는데 쇼와라고 하는게 유대인을 전멸 시키는 것 홀로코스트 유대인을 대 말살 정책이 홀로코스트인데 그게 히브리어로 이야기 하면 쇼와 온전히 불 태워지는 것이어요 남지 않는 것이어요 그 날이 패망의 날이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한나 아렌트 철학자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을 쓰는데 악은 틀별한 사람 저지른 줄 알았어요 생긴 것이 우락 부락하고 유난히 나쁜 사람들이 저지르는 줄 알았는에 나치의 수용소에 갇힌 사람의 고민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자기를 박해하는 저 사람들을 증오하면 내가 견딜 수 있갰는데 독일 사람들이 만든 문학 그들이 만들었던 음악을 들으면서 교양을 키워 왔는데 나의 나됨이라고 하는 것이 그들로부터 받은 영향을 통해서 형성된 것인데 그들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어요
 
이것이 견디기 어려운 것이어요 나 스스로를 이런 참담함을 경험하는 데 한나 아렌트가 하고 있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면 특정한 사람이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은 군중 심리에 몰려가고 악한 사람들의 선동에 의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악의 도구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이어요
 
동화 되는 것이어요 평상시에 보면 선한 사람입니다 꽃도 사랑하고 짐승들을 보아도 사랑하고 또 크레시칼 뮤직 음악 듣는 것도 좋아하고 교양 있는 사람들이어요 그들을 사람을 죽이는 것에 가담하고 왜 그들이 악을 저지느냐 왜 악을 저지르냐 한나 아렌트가 했던 말은 생각 없음입니다
 
쇼트니스라고 하는데 사유하지 않는 것이어요 생각하지 않고 남이 시키는 대로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것 그러니까 생각이라는 것이 중요한데 그런데 오늘 대중문화의 시대의 살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생각의 주체가 되어 살기 보다는 다른 이들이 우리에게 외부에서 주고 있는 감각적인 자극에 반등하는 일 이게 우리의 삶인줄 알고 살지요
 
그래서 남들이 만들어 놓은 가치관 속에 자기를 투입하려고 하니까 늘 고단하고 힘겹고 그런 것인데 이게 정말 고통스러운 것이어요 홀로 코스트 사실 홀로 코스트에 피해를 받던 사람들을 인터뷰한 다큐멘터리가 있어요 그 작품 이름이 쇼아입니다
 
그 다뮤멘타리를 보기 위해서는 인내심이 필요해 상영시간이 무려 556분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한번 볼만 해요 그런데 왜냐하면 그 속에서 나의 모습도 있고 이웃들의 모습도 있고 그들이 어떻게 고통을 겪었고 상처를 극복하였는지 이런 이야기들이 등장한단 말이어요
 
여호와의 날이라고 하는 것은 압도적으로 다가와 신속하게 다가와 죄 지은 모든 사람들이 황폐하고 패망하게 하고 하나님의 분노가 나타난다 압도적인 날이기가 캄캄하고 어두움의 날이 구름과 흑암의 날이고
 
16절 이 날이 올 대에 나팔을 불어 경고하고
견고하다고 믿었던 성읍들이 무너진 날이 적들이 오는 지를 바라보는 망대들이 무너지고 압도적인 심판이 수행됨을 있음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런 현실이 다가올 때
17절 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맹인같이 행하려 하리니
맹인같이 행한다는 말이 무엇일까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것이지요 제가 종종 드는 비유가 그런 것인데 어떤 문제가 내 앞에 다가오면 눈 앞이 캄캄하지요
 
모든 판단이 정지가 돼 어떻게 해야 할런지 이 문제가 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 압도적은 불행을 겪고 나면 사람은 그런 것이어요 하나님의 분노 앞에 서는 순간 내가 무엇인가를 내다 보고 내가 어떻게 해야 되겠다는 판단이 서지 않아요 이것이 맹인 같이 되었다 더듬더듬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시편에서도 우상을 의지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시135장 18절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니 그들의 입에는 그것을 만든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라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은 눈이 가리어져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처럼 될 것이다 삶에 대한 전말을 가지 못할 것이다 도무지 바라볼 수 없는 어두움이 사로잡을 수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 볼 때 무엇으로 보지요 눈이 있어요 보지 않아요 눈만 있으면 보아요 빛이 있어야 보지요 빛이 없으면 못 보지 않아요 캄캄한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못 보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 캄캄한 심판의 날에 자기만 알고 살던 사람들에게 무엇이 사라졌는가 하면 빛이 사자진 것이어요 이것이 맹인이 되었다는 말이어요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 사람들에게 없는 것이 빛이 없는 것이어요 그 상황을 이야기 합니다
 
17절 그들의 피는 쏟아져서 티끌 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 같이 되니라
무서운 이야기인대요 공동 번역은 그들은 피를 땅에 뿌리고 배알을 거름덩이처럼 쏟게 될 것이다
 
여기 분토라고 하는 것 분토는 무엇인지 알지요 오물 썩은 흙 주로 똥 그러니까 범죄의 결과가 이렇게 될 것이다 정말 두려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18절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다
은도 금도 심판의 날 그들을 도울 수 없다 내가 가지고 있는 저금통장 적금통장 보험문서 땅 문서 이런 것들이 재앙의 날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인간의 한계 상황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한계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걸어갈 때 절벽 앞에 서면 여기가 한계이지요 벼랑 끝이야 인간에게 있는 한계 상황이라고 하는 게 서양 사람들에게는 무엇이 있느냐 하면 죄칙감 죄책감이라는 것도 있고 한계상황은 무엇이냐 하면 자기가 유한하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어요
 
내가 정말 유한하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구나 이런 게 주로 언제 오느냐 하면 질병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질병 같은 것이 찾아와요 실패도 있습니다 무엇 보다 심각한 것은 죽음입니다
 
이런 한계상황 속에 도달할 때 사람은 비로서 무엇하느냐 하면 자기가 지금까지 세우고 있었던 가치관이 순위가 의미가 없음을 알게 되어요 이전에는 이게 나에게 제일 중요했어요 저 앞에 서는 순간 그렇게 애지 중지 하던 것들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야
 
나에게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갑자기 세상이 달리 보이겠지요 내가 소홀히 했던 것들이 아름답게 보이고 일상적 풍경으로 보고 넘어간 것들이 내가 이제 다시는 이것과 접할 수 없다고 생각한 순간 애뜻한 의미로 다가오요 가치관의 우선순위가 달라져 버리는 그러나 이것을 경험하지 못했을 때 사람들이 은과 금 사회에서 내가 누릴 수 있는 명예 권세 이런 것들이 내 삶을 보장해 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는 아무 소용이 없어요 은과 금 이야기를 할 때 요한과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서 한 말 기억 나시지요
 
행 3장 6절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예수 그리스도ㅢ 이름으로 일어나라
삶의 방편을 주는 것이 아니라 살아 갈 수 있는 내적 힘을 주는 것이어요 선교란 이런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야고보서에 보면 금과 은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에게
아교보서 5장 2절 너희 재물은 썩었고 금과 은예 너희 재물은 썩었고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말세에 재물을 쌓았다는 말은 노동자에게 돌아가야 될 품 삯을 떼어 먹는 것 사치스러운 삶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헐 벗음을 돌보지 않은 것 그런 현상을 이야기 하는 것이어요
 
너희의 금과 은은 녹슬었다고 합니다 제가 터키의 이스탄불에 간 적이 있는데 거기 저는 어떤 여행지에 가면 그 지역과 관련된 사람들에 대한 공부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그 지방에 가더라도 그 지방에 어떤 분이 있으면 군청이나 이런 데 가서 자료를 구하기도 하고 서점에 가서 자료를 구해서 열심히 읽고 그리고 그 다음 날 가서 보곤 하는데
 
이스탄불에 갔을 때 제가 정말 열심히 읽은 것이 누구이냐 하면 4세기와 5세기 초에 살았던 콘스탄티 노플에 대 주교였던 요한네스 크리스소토무스분이 있어요 그 분의 별명이 황금의 입입니다 설교를 잘하는 분이셔요 골든 마우스라는 소리를 듣는데 설교를 잘하면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 만질 것처럼 생각이 되지요
 
이분이 그렇지 않아요 호랑이 사자 같이 터져 나옵니다 그런데 그분이 콘스타틴 대 주교로 와서 보니까 주교 주교관에서 정기적으로 연회가 열리는 것이어요 화려한 음식을 차리고 주교의 손님이 되는 것은 굉장히 영예스러운 일이어요 그 영예도 있지만 맛 있는 것 먹거기 가면 이 분이 보니까 가자 마자 연회를 폐합니다 밥을 혼자 먹었요
 
연회에 초대 받아서 자랑스러운 사람은 저 사람은 왜 이래 이런 표정이어요 옛날 방식으로 안 하니까 그러지요 어떤 사람들은 보석으로 장식된 금 성작이나 제단보 같은 것들을 기증해요 예배당에 가져 오지요
 
크리스소토무슨는 오셨어요 그렇게 안해 그 속에서 자기 기념비를 세우려는 교만한 마음을 보는 것이어요 이것을 갖다 바침으로 이 사람 괜찮을까요 그리고 자기 예배당에 있는 값 비싼 것들을 매각하고 비용들을 줄여서 가난한 사람들 돌봐 주라고 하고 상류층들의 호사스러운 삶을 비난합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심지어는 황제의 아내 황후에게 당신 그렇게 살면 안 돼
결국 결과적으로 미움 사서 귀양가서 죽어요 이 분이 상류층들의 호사스러운 삶을 비난하며 이렇게 설교합니다
 
여러분은 그런 짓을 부끄럽게 행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굶주림에 시달리고 계시는데 여러분은 그런 호사를 누 누리고 있습니다 아니 더 옳게 말하면 그런 미친 짓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당신의 동료인 인간이 추위에 얼어죽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그런 세간 살이 따위나 마련하고 있습니까? -크리소스 토무스의 설교중-
 
부유한 자들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설교시간에 이렇게 하면 어떻게 할까요? 쫓겨날 것 같은 대 어떻게 보면 이게 예언자의 모습이어요 금과 은이라고 하는 게 우리의 삶을 보장해 주지 못해 이게 스바냐가 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 날에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18절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질 것이라
하나님은 질투하는 분이라고 하는데 질투라는 감정은 부정적인 감정으로 볼수 있지만 사랑하지 않으면 질투가 발생하지 않아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질투라는 감정은 부정적인 것이 많아 시기심도 그렇고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절대적인 하나님의 사랑하기에 발생하지요 사랑하기에 내가 내 손자 손녀를 사랑한다고 해서 애가 원하는 것 다 해 주어야 합니까?
 
애가 사탕 주세요 그러는데 할아버지 사탕 그러는데 사탕을 주어야 하느냐 때때로 욕망을 꺾어 주어야 해요 안 주어야 해 자기 욕망대로 살면 하나님이 무엇해야 하느냐 금지 네가 어긋날 길로 가면 안돼하고 이야기해야 돼
 
때때로 사랑은 안 돼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돼 이것이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다는 말이어요 하나님은 이 질투에 그 불에 삼켜지는 날이 올 것이다 모든 주민에게 재앙이 와서 그들이 놀랍게 멸정 당하게 될 것이다 이야기 합니다
 
여기까지가 무시 무시한 심판의 이야기입니다
그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마음이 등장합니다
2장 1절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수치를 모른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자기가 벗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해 인간이 인간인 것을 무엇이냐 자기 욕망대로 살아가는 것은 인간이 아니어요
 
여러분 우리가 사람과 인간 약간 헷갈리기도 하지만 어느 학자가 이야기 한 것은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사람으로 산다 이것을 바꾸어서도 이야기 할 수 있는데 내가 생물학적으로 태어나서 인간입니다
 
사람과 인간입니다 생물학적으로 그러나 나는 나 좋을 대로 수 없이 많은 관계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나는 자유로운 존재이지만 나라고 하는 사람은 자유롭지만 나의 자유라는 것은 타자라는 한계 앞에서 잠시 멈추어야 돼 나 좋을 대로 해서는 안 돼 타자 때문에 나를 다 내려 놓는 것이 잘한 것이라고 볼 수 없지만 어떻든 타자의 존재를 생각하면 살아야 합니다
 
돌아가신 함석헌 선생님이 씨알의 소리 권두언에 당신 아내가 세상을 떠난 이야기를 써요
그 글을 쓸 무렵에 돌아가신 것 같아요 그 글의 제목이 나야 뭘 당신 아내는 늘 그 마음으로 살았다는 것이어요 좋은 것을 누릴 수가 있을 때 나야 뭘 그리고 남편을 위해서 자식들을 위해서 남편을 위해서 다 내려 놓는 삶을 사는 것이어요
 
이것이 헌신적인 어머니의 삶이지 않아요 너무나 숭고해요 하지만 너무 그렇게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 어머니들 다 그렇게 사셨는데 자기 것도 챙길줄 알고 그랬으면 좋겠는데 나의 자유라고 하는 게 타자 앞에서 약간 유보되기도 하고 저 사람을 위해서 내가 누릴 수 있는 것을 내려놓을 줄 알 때 나의 나됨이 발생하는 것인데
 
수치를 모르는 것은 염치없는 것 그러니까 인간의 도덕성이라고 하는 것이 자기 홀로 있는 것이 도덕이 아니어요 남들과의 관계속에 발생하는 것이어요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 도덕이 사라졌을 때 그게 무엇이냐 하면 수치를 모른 것이야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야 염치를 모른 것이어요
 
이것이 왜 수치를 모르느냐 하면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너와 나 사이에 타자와 나 사이에 언제나 하나님이라고 하는 심급을 모시면 나는 너를 함부로 대할 수가 없어 그러니까 나 좋을대로 행하는 사람들은 마음속에 무엇이 없느냐 하나님이 없는 것이어요
 
그 수치를 모르는 백성들아 모일지라 모일지라 너희들 자기 좋을 대로 살던 욕망의 노예가 된 삶에서 벗어나라 이제는 모이라 현재의 참상을 인정하면서 새로운 삶을 도모해라고 하는 것이어요
 
서양적 주체라고 하는 것은 어느 철학자가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서양적 주체는 외로워요 지금도 프랑스나 이런 곳에 있는 사람들이 외로움을 많이 느낍니다 개인주의가 심화되어 있어서 저마다의 모습으로 살아요
 
저 사람은 왜 옷을 저렇게 입지 안해요 사나보다 다 인정해요 그런데 외로워 이게 서양적 주체입니다 이 서양적 주체의 모습이 무엇이냐 하면 나르시시즘이라는 이야기 들어보았지요 나리키소스의 이야기인데 아주 잘 생겼어요
 
자기에게 빠져 있어 자기가 근사한 것이야 숲속에 사는 임프가 너무 매력을 느낀 것이어요 나를 좀 봐줘 나를 좀 봐줘 하는 데 자기에게 온전히 사로 잡혀 가지고 이 님프에 눈 길을 안 주어요 이 님프가 너무 속 상해서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소리만 남겨 놓고 그 님프의 이름에 에코야 에코 울림이지 않아요 그게 님프인데 사라졌어요 나르시소스가 하고 있는 몹시 마음에 안 들었어 신들이 보기에 그래서 신이 저주를 내립니다 그에게 자기에게 홀딱 빠지게 만들어요
 
그래서 나르시소스는 물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보고 매력적인 것이야 그래서 입을 맞추려고 다가 가가가면 없어져 흔들리고 맨날 거기 들여다 보가 있다 거기 빠져 죽지 않아요 그리고 그가 그가 떠난 자리에 무엇이 생겼다고요 수선화가 피어납니다
 
나르키소스 수선화가 피어났다 그 이야기인데 결국 인간이 인간인 것은 무엇인가 하면 누군가의 부름에 대해서 응답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데 응답의 능력을 잃어 버린 것이어요 그렇기 때문에 수치를 모르는 백성이 모일지어다
 
다시 한번 모여봐 타자 앞에서 나의 자유를 유보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인데 이것이 다 무너졌으니 다시 한번 모여 가지고 새로운 삶을 누려랴 이렇게 이야기 하고
 
2절 명령이 시행되어 날이 겨 같이 지나가기 전에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내리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 지니니
 
무엇 무엇하기 전에 그럴 지어다 하고 말합니다 날이 겨 같이 날아간다는 것이 무슨 소리여요 속절 없이 흘러가는 겨 시간의 은유 겨 겨가 무엇인지 알지요 왕겨 그런 것 그러니까 어떤 이야기냐 하면 재앙이 닥치기 전에 지금 하나님이 예언자를 통해 이렇게 예고하고 있는 까닭이 무엇이냐 하면 재앙이 닥치기 전에 돌이키라는 것이어요 지금은 어떤 시간이냐 하면 지금은 다른 시간이 아니어요 유보된 시간이어요 하나님의 심판이 유보된 시간이어요
 
지금은 돌이켜야 할 때이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아켜야 할 그 때다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버릇은 무엇이냐 하면 돌이키지 못해요 도박 중독에 걸린 사람 멈추지 못하는 것이어요 나중에 후회하지만 지금은 아닌 것처럼
 
아이데커라는 전제와 시간이라는 책에서 인간을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인간은 죽음에 이르는 존재다 이것이 평범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한계를 인식하며 사는 존재가 인간이다는 것이지요
 
죽음의 한계를 의식할 때 내 삶의 의미를 물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이게 인간이어요
인간은 죽음을 인식하고 살지 않아 죽음을 누구도 자신의 죽음을 죽어본 적이 없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든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죽은 내 죽음이 아니어요
 
우리의 의식 속에는 이런 생각이 있어요 나도 언젠간 죽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이것이 인간의 버릇이어요 나는 언젠가 죽을 것이야 아직 시간은 있어 돌이킬 시간이 있어 하나님이 아니야 시간이 없어 여기 금방 이야기한 대로 명령이 시행되어 날이 겨 같이 지나가기 전에 여호와의 진노가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
 
모여오라 하나님의 존전이라고 절대적인 현존 앞에 모여와 이렇게 해야 살 수 있어
여호와 앞에 모인다고 하는 말은
3절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모여 오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어야 합니가? 여호와의 규례에 미쉬파트를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겸손하다는 것이 제가 뭐 이게 겸손한 것이 아니어요
 
어떤 분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제가 평생 겸손하게 살았지 않아요 굉장히 겸손한 것을 자랑해 이게 겸손한 것이 아니어요 여기에서 겸손하다고 하는 것은 가난하고 약하고 짓밟힌 존재들이다는 것이어요
 
무시당하고 그런 사람들이어요 짓 밟히고 보니까 짓 밟힌 사람의 마음 아픔을 알 수 있어요 공감하게 되어요 이것이 성경이 이야기 하는 겸손함이어요 겸손한 사람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공감의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어요
 
정말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사람이야 말로 겸손한 사람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을 사는 게 생명의 길이다는 것을 겸허하게 인정하는 것 나의 욕망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 법을 이게 지자 겸손이어요
 
칭찬하면 제가 요 이게 겸손이 아니어요 진자 겸손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한계를 있는 존재이고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자각하고 그렇기 때문에 어려움 겪고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기고 그런 이들에게 하는 이야기가
 
3절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고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다시 이야기 하면 자기를 자꾸 낮추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작하신 새로운 미래를 기대하라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다니엘이 정신이 나간 느부갓네살에게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다니엘 4장 27절 그런즉 왕이여 내가 아뢰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하하소서
 
우리가 모여서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구원받았어 아니고 여기는 그것 아니어요 왜 우리를 불러 주시는 것이어요 공의와 겸손을 그 삶은 이웃에게 덕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이다 하는 이야기이지요 그렇게 우리가 살 때 우리 구원 받을 것이야 그 이야기가 아니고 혹시 숨김을 얻으리라
 
그 모든 것이 하나님 속에 있지요 하나님의 절대 은혜속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하나님의 행동을 통제하거나 그 분의 긍휼하심을 의지해서 내 삶을 바꾸면 하나님이 혹시 우리를 구해줄 수 있지 않겠나 이게 스바냐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정말 겸손한 사람이 누구인지 이야기 했는데 너무 늦기 전에 우리가 그런 삶으로 돌이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4강 습2:4-15 이스라엘 이웃 나라들의 운명

인접한 나라들 끼리 사이좋은 나라들이 어떤 나라들이 있을까요? 미국과 카나다 깨 괜찮은 전통적으로 보면 인접한 나라들이 친해지기가 어렵지요 이웃 사촌이 되는데 이권 때문에 이스라엘이 있었던 파레스타인 땅에도 그 곳에도 여러 민족들이 있었지요
 
그 민족들이 평롸롭게 지낸 시기가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정복하고 착취하고 보복하고 이런 일들이 반복이 됩니다 이스라엘이 있는 그 자리가 전쟁이 많을 수 밖에 없는 자리였지요 동쪽으로는 메소포타미아아 문명권이 있지요 티그리스강과 유브라데스 강가에서 이루어진 문명 스메르 문명 아카니아 문명 나중에는 신 바빌리아까지 강대한 제국들이 등장했거든요 \
 
제국이 자기를 확장해 가는 대 욕구이니까 서편지역으로 확장해 가는 것이 꼭 거쳐가는 그 지역이어요 그런데 어디까지 치고 싶은가 하면 애굽을 치고 싶은 것이어요 애곱도 또 마찬가지이지요 메소포타미아와 자궁를 겨룰 때 꼭 지나가야돼
 
그 사이에 끼어 가지고 강대국 뿐 아니라 그 속에서 살아 남아야 하는 민족끼리 우리 끼리 평화롭게 지내면 좋은 것인데 맞고 큰 사람이 누군가를 꼭 때리는 사람이 되는 것처럼 하두 그러다 보니까 서로 치고 받고 일이 잦아요
 
이게 이스라엘이 평화가 없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러한데요 지금 스바냐를 공부하는데 스바냐의 예언도 이스라엘만 한정되지 않슨비다 주변에 있는 나라들을 향하거든요
 
참 무서운 이야기들이 반복이 되고 있는대요 오늘 이스라엘 이웃 나라들이 받을 벌에 대해서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는데 여기 4절부터 7절까지는 대게 어떤 도시국가들이냐 하면 블레셋의 5국가들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블레셋이라고 하면 이스라엘이 터 잡고 있는 쪽에서 남서쪽 자리 잡고 있는 블레셋 5 부족의 연맹체이거든요 중앙 집권 연맹이 아니고 연맹을 만든 게 블레셋이라는 나라입니다
 
블레셋이라는 나라는 대게 문명이 상당히 달라요 이스라엘이나 중 근동의 문명과 다른 문명을 만들어 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애당초 터 잡고 사람들이 아니라 이주해 온 사람들이다
 
대게 어떤 사람들이 이주해 왔는가 하면 그리스를 보면 아테네라는 본 반도가 있고 고린도라고 하는 좁은 지역 밑으로 반도가 있는데 거기를 펠레포네스 반도라고 해요 그래서 아테네와 스파르타 펠레포네소스의 중심 도시인 전쟁이 벌어진 것이 그 유명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입니다
 
이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밑단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만든 문명이 미케네 문명이라고 하고 있는데 미케네 문명이라는 게 상당히 발달한 문명이었어요 전쟁이 잦고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이주를 해 가다가 저도 가 보고 싶은 섬인데 크레타라는 곳으로 사람들이 이주해 오고 그리고 크레타에서 배를 타고 넘어와서 지금의 파레스타인 블레셋이라는 지역에 정착했을 것이다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대게 그 때를 주전 13세기 말에서 12세기 초에 이주해 왔을 것이다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서 사람들이 밝혀내고 있습니다 그들의 문화는 메소포타미아 문명과는 다른 문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팔레스타인 블레셋 사람들이 살던 곳이 미케네 문명 사람들이 맞겠다고 생각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거기에서 발견되는 토기들이 있어요 문명마다 토기를 만들곤 했는데 거기에 사용되고 있는 문양들 기하학적 무늬같은 것들이 있는데 미케네 문명의 그 토기와 상당히 유사한 형태로 되어 있어요
 
이 사람들이 이주해 온 사람들이 맞겠다 생각을 갖게 듭니다 이주해 온 사람들이 주변 사람들하고 사이가 안 좋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요 사실 성경을 보면 블레셋과 이스라엘과 갈등 이야기가 자주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다윗과 싸웠던 골리앗 거인 장수가 블레셋이었어요
그러니까 골리앗으로 상징되는 것이 블레셋이었지요
사무엘상 5장에 보면 블레셋과 전쟁이 벌어져요 전쟁에서 패배하자 법궤를 모시고 전쟁에 나가여 그런데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패배하였습니다
 
사무엘 4장 3절 전쟁에 법괘를 모시고 가 가지고 전쟁에 패배했어요 법궤를 빼앗겼어요
그들이 신이 이겼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괘를 어디에 갖다 놓느냐 하면 그들의 신전에 갖다 놓습니다 다곤 신전입니다
 
5장 2절 자기들이 섬기는 신의 신전에 다곤 신전입니다 다곤 신이라고 하는 신은 사실은 바벨론이아와 앗시리아 사람들이 섬기는 신입니다
 
다곤 신은 풍요를 상징해요 물고기 모양으로 형상화하기도 했습니다 다곤신은 비늘이 해양 민족이니까 물고기 신과 관련된 어떤 신앙을 발전 시켜 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사무엘 상이 흥미로운 것이 그것이지요 전쟁에서 패배함으로 야훼가 패패한 것처럼 보였어요 야훼는 법궤이지만 사로 잡혀서 적들의 심장부인 굴복당한 것 처럼 보여요 어떻게 되었어요 결과는 다곤 신상이 넘어져요 마치 야훼 하나님께 절을 하는 것 처럼 이게 누가 그랬어 다시 세웠놓아는데 다음날도 보니까 도 넘어져 있어요
 
5장 4절 다음날도 이 야훼 법궤를 다른 도시로 옮겨요 네가 맡아 줄래\ b가는 곳마다 그 곳에 재앙이 내립니다 이 법궤는 블레셋의 다섯 나라를 다니면서 그들에게 벌을 내려요 이게 사무엘상은 굉장히 강력한 메시지를 보여 주고 있다고 볼 수 있지요
 
이 블레셋과 관련된 것을 이야기 하자면 사사기도 공부했는데 사사가운데 힘이 세고 술을 좋아했던 삼손 술을 잘 들었던 것 같어요 그래서 포도주를 마시고 잔치하고 사람 사귀기 위해서 내려 간대가 블레셋 땅이어요
 
거기에서 머리 각이고 눈도 뽑히고 이런 불행을 당하는데
사사기 16장 28절 마지막에 나의 힘을 회복케 하소서 하고 신전 기둥 사이에 기대어서 밀어서 무너뜨렸는데 그 신전이 다곤 신전이어요
 
블레셋이라는 문명과 이스라엘이 어떻게 엮었는지 대체로 알 수 있겠지요 그러니까 성서 기자들은 성경의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 주느냐 하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만의 이야기가 아니고 이스라엘의 운명을 결정하는 주변 세계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어떻게 심판 받고 어떻게 벌을 받는 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것은 그들에 대한 심판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이스라엘에 대한 희망의 이야기도 합니다 이것이 예언자들의 예언 속에 자주 등장하는 하나의 모티브임을 볼 수 있어요
 
그 다음에 보면 지금도 여러분 지금까지 이야기 할 때 팔레스타인 그랬지 않아요 b고대 세계는 그곳을 팔레스타인이라고 안 했어요 유대라고 했어요 유다인들이 사는 땅이어요 유대라는 것은 땅 이름입니다
 
유대인 그러면 유대 땅에 사는 사람들이어요 지금도 우리는 그 땅을 팔레스타인이라고 하지요 역사가 좀 있습니다 로마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멸망당하지 않아요 에이디 70년에 헤롯 성전이 파괴되고 3년동안 항전하던 사람들이 마사다라는 사해 근처에 있는 요세위에 올라가서 3년 동안 항전하다가 마지막 정복될 위기에 처하게 되지 그 마지막 날 밤에 사실은 로마 군인이 바로 가서 정복할 수 있었어요
 
로마 장군이 자기들의 승리를 기념하고 있었어 하루 종도 묶혀 두었다가 하루를 공격 안하고 딱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 밤에 마사다 성에 9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다 자결을 합니다 자살이 죄라고 여겨 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 자살한 것이 아니고 재비 뽑기 한 사람이 자살하고 해서 전부 죽여요
 
거기에서 두려워서 숨었던 여인들 아이들 두 세사람만 살아 납니다 그것이 마사다의 최후의 증언이 되었던 것이지요 마사다 항전을 통해서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거든요
 
유대인들은 국가가 소멸 되었지만 그러나 유대인들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후 135년에 바르코크바라는 사람이 일어나서 유대 독립 운동이 벌이게 됩니다
 
반란이 벌어지게 되지요 로마 황제가 하드리아누스라는 사람인데 군대를 보내 가지고 진압된 그 곳에 행저우 구역을 개편하면서 유대라고 땅 이름을 더 이상 쓰지 못하게 해요 왜냐 하면 반란의 씨앗이 될까봐 그것을 펠리스틴 사람이 머문 땅이라고 해서 팔레스타인으로 명명한 것이어요
 
어쩼던 이 나라들에 대한 심판의 이야기가 본문 속에 등장하는 데
4절 가사 그 다음에 아스글론 아스돈 이렇게 일단 이 세 도시 국가가 등장하고 있는데
가사는 버림을 당하며 아스글론은 폐허가 되며 아스돗은 대낮에 쫓겨나며 헤그론은 뽑히리라
 
사실 히브리어로 이 본문을 읽을 수 없기 때문에 라임을 맞추는 것이지요 이 속에 라임이 있거든요 우리는 라임을 따라갈 수 없는 것이어요 똑 같이 라임이 되는 것이 아니고 두 도시는 라임이 있고 한 도시는 라임에 가까운 뿌리들이 등장해요
 
예를 들면 가사라고 하는 표기는 사실은 아자라고 있는 것과 관련이 되는데 보이다는 뜻에 아자브라는 동사에서 나오건요 가사는 버림을 당하며 가사라고 하는 이름 속에 버리다는 라임이 들어있는 것이지요 절묘하게 말 놀이를 하고 있단 말이지요
 
아스글론이라는 말도 황폐를 뜻하는 테마마 라는 그 속에 들어 있어요
그 다음에 아스돗은 쫓아 낼 것이다고 하는데 쫓아내다는 뜻의 뿌리가 그 속에 들어가 있어요
 
그 도시의 이름이 원래 그렇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그런 단어들로 빗대어 이야기 하지요 아스돗은 그렇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고요 이제 뒤에 등장하는 대 버림받고 폐허가 되고 쫓겨나고 뽑힐 것이다 하고 있는데
 
4절 아스돗은 대낮에 쫓겨나며 대 낮이 상징하는 것은 안전함이어요 블레셋의 영화로움이 절정에 달해 있는 그 때 스스로의 자부심이 커질 때 하나님의 심판이 도래하게 된다 이것을 시간적 표현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5절 해변 주민 그렛 족속에게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를 치나니 내가 너를 멸하여 주민이 없게 하리라 말하는 데 그렛이 무엇인지 알기 어려우나 해변 족속 그러지 않아요
 
그렛이 무엇인지 알지 어려우나 해변 족속 크레타 일 것이다 그 주민들 블레셋 사람의 땅 가나안아 하고 말하는데 이 가나안이라는 땅은 우리가 가나안 하면 좋은 느낌이어요? 나쁜 이름이어요?
 
사실은 가나안이라는 이름은 성경에서 보면 긍정적으로 사용하지 안항요
노아의 아들이었던 함의 막네 아들이 가나안이고 그 함이 가나안과 더불어 저주를 받아 가나안은 약간 부정적이어요
 
창세기 9장 그들이 살고 있던 땅이 가나안인데 가나안이라는 이름 속에는 상인이라는 뜻도 장사하는 사람 뜻도 있습니다
 
그들이 살고 있는 땅이 가나안 땅인데 그래서 호세아 12장 7절에 보더라도 그는 상인이라 손에 거짓 저울을 가지고 속이기를 좋아하는 도다
 
이게 가나안에 대한 부정적 평가인 것을 알 수가 있지요 여기 그렛 주민들도 그렇고 가나안 사람들도 그렇고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을 칠 것이다고 이야기 하고 결국 너로 인하여 주민이 없어질 것이다고 말 합니다
 
풍요로운 땅 사실은 바다에 가까운 곳은 사람이 정착하기가 좋은 곳이거든요
6절 해변은 풀 밭이 되어 목자의 움막과 양떼의 우리가 거기에 있을 것이며
7절 그 지경은 유다 족속의 남은 자에게로 돌아갈지라 그들이 거기에서 양떼를 먹이고 저녁에는 아스글론 집들에 누우리니 이는 하나님 여호와가 그들을 보살피사 그들이 사로 잡힘을 돌이킬 것임이라
 
해변지역에 머물면서 아주 강고한 문명을 형성하고 있었던 블레셋의 도시국가들은 결국은 폐러가 되었기 때문에 목자의 움막 짐승들이 자라는 곳이 될 것이고 양떼의 우리가 거기에 있는 것이야 사람들이 들 끊던 그 도시들이 텅빈 곳이 되고 짐승들이 사는 지경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남은 지경은 유다 족속들이 차지할 것이다 이야기를 하고 있고 거기에서 양떼를 먹을 것이고 저녁에는 아스글론 집들이 누우리니 블레셋 사람들이 살고 있던 그 도시 거기에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들이 평안히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여호와가 그들을 보살펴 주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8절에서부터 보면 모압과 암몬 이야기를 하는데요 사실 모압과 암몬이라고 하는 이 나라는 아브라함 족속과 관련이 있어요 없어요
 
아브라함의 조카 롯 롯이 소돔성이 멸망할 때 소알로 달아나서 그리고 산에 머물다 그리고 소돔성이 멸망하고 나서 두려워 졌어요 그래서 이 딸들이 외로운 곳에 있으면서 이러다가 자식들도 못 낳겠다 하면서 우리가 아버지를 옆에 누움으로 자식들을 낳지 않아요
 
큰 딸과 아버지 사이에 태어난 아들 이름이 모압이고 작은 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벤암미인데 거기에서 낳은 아들이 암몬이어요
 
창세기 19장 37-38절 큰 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모압의 조상이요
작은 딸도 아들을 낳아 이름을 벤암미라 하였으니 오늘 날 암몬 자손의 조상이었더라
 
인접해 있는 국가인대도 불구하고 서로 싸워요 성경 이야기가 우리에게 들려준 것은 무엇이냐 하면 뿌리를 거슬려 올라가면 구지 싸울 이가 없어 우리가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이야 그 이야기를 상기시켜 주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8절 내가 모압의 비방과 암몬 자손이 조롱하는 말을 들었나니 그들이 내 백성을 비방하고 자기들의 경계에 대하여 교만하였느니라
 
모압이 비방합니다 암몬이 조롱한 것이어요 자기들의 경계에 대하여 교만하였느니라 자기를 크게 여겼다 그런 이야기여요
 
예레미야 48장 42절 모압이 자기를 높여서 하나님과 맞섰다
여호와를 거슬려 자만하였으므로 멸망하고 다시 나라를 이루지 못하리라
 
자기를 높에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맞섰다 스스로 어떤 자신을 가졌는가 하면 자기들이 용사요 능란한 자라고 자부 했다는 것이어요 그들은 약탈한 보물로 자부심을 삼는 그런 나라이다 이것이 예레미야고 보고 있던 그 나라의 문제입니다
 
예레미야 48장 14절 너희가 어찌하여 말하기를 우리는 용사요 능란한 용사라 하느냐
스스로 자부했어요 그들은 약탈한 보물로 자부심을 삼는 나라이다 결국은
 
예레미야가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예레미야 48장 37절 모든 사람이 대머리가 되었고 모든 사람이 수염을 밀었으며 손에 칼 자국이 있고 허리에 굵은 베가 들렸고 지붕과 거리 각처에서 큰 소리가 들릴 것이다
 
모든 사람이 대 머리가 되고 머리 깎이었다 그리고 수염을 밀고 수염이 밀렸다는 것은 위엄의 상징이어요 이것이 밀렸다는 이야기는 제국의 위엄을 박탈당했다는 이야기 이고
 
에레미야 48장 38절 모압의 지붕과 거리 각처에서 슬피 우는 소리가 들리니 내가 모압을 마음에 들지 않는 그릇같이 깨트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백성들의 운명을 모압과 암몬이 그대로 보여 주고 교만했던 벌에 대한 이야기가 여기 등장하고 있습니다
 
9절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장차 모압은 소돔 같으며 암몬 자손은 고모라 같은 것이라 찔레가 나며 소금 구덩이가 되어 영원히 황폐하리니 내 백성의 남은 자들이 그들을 노략하며 나의 남은 백성이 그것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
 
소돔과 고모라라고 하는 이 성은 사해 인근에 있어요 그래서 지형적으로 보자고 한다면 소돔과 고모라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기가 어려워요 고대에 있었던 문명이기 때문에 그러나 고고학자들이 발굴을 해 보니까 여기가 상당한 규모의 도시들이 있었는데 그 도시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어요
 
그리고 그 도시의 흔적이 있는 그 곳이 대게 무엇이냐 하면 소금 산으로 되어 있어요 이것은 불 심판이라고 이야기 하지 않아요 불 심판이 내렸는데 그게 어떻게 보면 옛 사람들이 지각 변동 같은 것들이 문명이 덮였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것이다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소돔이 멸망한 까닭이 어디 있었지요?
 
흔히 소돔의 멸망을 이야기할 때 남색하는 것 때문에 멸망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소돔의 멸망은 남색만이 아니고 어떤 이야기냐 하면 낯선 사람들을 환대하지 않은 무정함 때문이었습니다
 
낯선 사람들이 왔을 때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 드리고 환대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했
어요 환대라고 하는 것이 낯선 자들이 설 땅을 허락해 주는 것이 환대여요 그리고 나그네 되어 살고 있는 사람들이 두렵지 않아요
 
고아나 과부 같은 사람들이 설 땅을 잃어버린 사람들이지요 그러니까 고아나 과부 나그네를 우리의 삶속에 환대한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인간이 인간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해 주는 일이다
 
그 사람들이 이 속에 들어와서 편안하게 나도 여기에서 존중을 받고 있어 이 느낌을 받도록 해 주어야 하는데 고대 세계는 환대 보다는 적대가 일반화 되어 있었고 이 적대의 특색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사람을 목적을 가진 존귀한 존재로 여기지 않고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고 그러니까 수단으로 여긴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박탈하는 일이다는 말이어요
 
이것이 소돔성이 멸망할 수 있는 이유인데 모압과 암몬을 두고 소돔과 고모라 같은 그것이 모압과 암몬이라고 하는 그 나라에 이런 환대가 아니라 적대가 넘치는 곳 이웃으로 따뜻하게 이웃으로 대접하기 보다는 그들을 이용 가치로 바라보는 그들의 그릇된 문명이 있단 말이지요 이것을 우리가 볼 수 있어요
 
이 대목을 보면 정말 무지한 자들이었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안 돼 왜냐 하면 오늘 우리의 현실을 생각해 보는 것이어요 오늘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 가운데 와 있는 낯선 사람들이 우리의 삶속에 들어와 가지고 자기의 인간적 존엄을 유지해 가면서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우리가 공간과 마음을 베풀어 주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와 다를 수 없는 소돔과 고모라와 다를 바 없는 그런 상황 속으로 밀려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오늘 자민족 중심주의가 점전 전 세계에 번지고 있지 않아요 유럽 같은 대에서도 난민 같은 사람들에 대한 배척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데 이것은 세상이 점점 황폐해 지고 위험속에 있다는 징후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현실을 예쁘게 봐 줄 이가 없을 것이다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어요 어쩼던 거기가 영원히 황패하게 될 것인데 그래서 그들의 황폐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될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런 일을 당한 까닭이 무엇이라고 이야기 합니까?
8절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백성에 대하여 교만하여 졌음이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천대하고 힘으로 누루려고하고 이것이 그들의 멸망을 제촉했다 누군가를 억압했는데 자기가 당하는 그런 상황을 이야기 하고 있어요
 
11절 여호와가 그들에게 두렵게 되어서 세상의 모든 신을 쇠약하게 하리니 이방의 모든 해변 사람들이 각각 자기 처소에서 여호와께 경배하리라
 
결국은 교만함의 대가 조롱하고 비방하는 사람들의 그 조롱과 비방이 자기를 무너뜨리는 덫이 되었어요 이것은 언제나 그래요 우리 어렸을 때 시골에서 놀 때 심심하고 그러면 지나가는 사람들을 골탕 먹이려고 길에다가 이렇게 함정을 파고 풀로 이렇게 덮어 놓고 그러면 누가 함정에 빠지면 그가 빠지는 것인데 궁금해서 가다 보면 꼭 내가 빠져요
 
옛날에 작난할 때 풀로 이렇게 나 있는 도로에서 이쪽 풀과 저쪽 풀을 묶어 놓아요 가다가 보면 걸려 넘어지게 우리가 경험한 것은 꼭 내가 걸려 풀들이 그런 인생인데 결국은 남을 못 살게 할려고 하는 그들이 탁 걸려서 넘어지게 결초 보은에 고사도 있기는 합니다마는 꼭 자기가 걸려 넘어가는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법칙이어요
 
남을 못 살게 굴려는 그들이 어쩔 수 없는 남을 해하려고 하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를 군대에서 훈련을 받는 데 유격 훈련을 받게 되는 데 일주일 동안 가 가지고 훈련을 세게 받아요 빨간 모자 쓴 조교들이 얼마나 겁을 주고 그러는지 몰라요
 
내가 조교 몇 년에 너희 같은 놈들 처음 봤어 기압주고 그리고 마지막에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산 위에 올라가서 도르래를 타고 강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이야 내려가는 그것을 하는 데 옷이 흠벅 젖지 않아요
 
마지막에 훈련에 끝나고 나면 기분이 좋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 젖은 옷을 다 벗고 마름 옷으로 갈아 입으면 기분이 좋아요 끝났어요 이제 끝나는 기념으로 무엇을 하느냐 하면 교관과 조교들을 물속에 던지는 의식이 있습니다
 
우정이지 물속에 집어넣으려면 자기도 들어가야 돼 그것을 보면서 남을 빠트리려면 자기도 빠져야 돼 그런 생각이 들어요 누구를 미워하려면 내 마음을 가시 돋히게 만들어야 되거든요
 
남을 미워하는 사람들 보면 에너지가 많은 사람들이어요 정말로 그래요
이런 것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대요
그 다음에 같은 이야기 반복인데요
12절 그 다음에 구스가 등장해요 구스는 이디오피아 나라로 보여 집니다
그들도 내 칼에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고요 북쪽에 앗수르도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어요
 
13절 여호와가 북쪽을 향하여 손을 펴서 앗수르를 멸하며 니느웨를 황폐하게 하여 사막같이 메마르게 하리니
 
가만히 보니까 지금 이야기 할 때 블레셋은 이스라엘 입장에서 보면 서쪽 그리고 모압과 암몬은 동쪽 앗수르는 북쪽 구스는 남쪽 동서남북을 다 이야기 해요 이스라엘의 사방 동서남북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 이 나라들을 등장하고 있습니다
어쩼던 교만한 이에 대한 주어진 대가를 14절과 15절에 스스로의 황폐하고 메마름일 수 밖에 없다 이야기 하고 있는데요
 
13절 스스로에 대한 메마름일 수 밖에 없다 그들의 교만의 대가가 그 문명이 황폐하게 상황을
 
14절 각종 짐승이 그 가운데에 떼로 누울 것이며 당아와 고슴도치가 그 기둥 꼭데기에 깃들이고 그것들이 창에서 울 것이며 문턱이 적막하리니 백향목으로 지은 것이 벗겨졌음이라
 
15절 이는 기쁜 성이라 염려 없이 거주하며 마음 속에 이르기를 오직 나만 있고 나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 하리니 어찌 이와 같이 황폐하여 들 짐승이 엎드릴 곳이 되었는고 지나가는 자마다 비웃으려 손을 흔들리로다
 
당아는 갈 까마귀 까마귀 종류인 것으로 보여요 어쩼던 고슴도치가 기둥 곡대기에 깃들이고 그것들이 창에서 울 것이며 인간들이 살고 있던 곳이 짐승의 차지가 되는 심판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문턱이 적막하고 그 다음에 구상적 언어가 등장하는데 백향목으로 지은 것이 벗겨졌음이라 하고 말합니다 백향목은 최고의 건축재료 이거든요 그런데 그것이 벗겨지고 거기에 새가 깃들고 고슴도치가 깃들고 그런 적막한 상황을 이야기 하고 있어요
 
그리고 말합니다 이는 기쁜 성이라 염려 없이 거주하며 마음속에 이르기를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 하더니 나만 있고 다른 이가 없다하 라고 이야기 했어요 이게 무엇과 관련이 되느냐 하면 출애급기 3장 14절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나는 나다 그 이야기에 뒤집힌 이야기입니다
 
이 나라들이 오직 나만 있고 다른 다른 이가 없다 말하므로 야훼 하나님의 그 절대성을 거꾸로 뒤집고 있는 현실임을 보여 주어요 국가도 마치 신이 된 것처럼 여기고 있는 것이지요
 
나는 나다 나 외에 다른 것이 없다 이것이 얼마나 오만해요 그런데 그렇게 기쁜 성읍 모든 것 누리고 살고 있는 것 처럼 보였던 그곳이 황폐하여 들짐승이 옆드릴 곳이 되었다 그래서 지나는 사람마다 비웃을 것이다 하고 말합니다
 
결국은 다른 것 없습니다 예언서 우리들이 보고 있지만 사람들을 환대하지 않는 문명 나의 어떤 목적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수단으로 사람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를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오늘 예언서가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할 수 있다고 한다면 사람들을 지극한 마음으로 환대하고 내 곁에 누군가가 다가 올 수 있도록 공간을 열어줄 수 있는 삶이 하나님의 복 받는 삶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 5강 습3:1- 7 예루살렘의 죄악


어느 꽃을 제일 좋아하세요 제가 좋아는 꽃은 백합이어요 저는 안개꽃이어요 저는 이인자의 역할을 제대로 하거든요 옆에서 일인자를 보았을 때는 안개꽃 같은
 
봄에 피어나는 꽃 가운데 순백의 꽃 있지요 목련 목련 꽃이 봄에 아주 아름답데 피지요 잎조차 나지 않았는 대 목련 꽃이 피어 있으면 예쁘지 않아요 목련이 질 띠는 예쁘지 않아요 바닥에 떨어지면 변색되고 발로 밟히고 그러면 좋지 않아요
 
목련을 보면 그런 생각을 해요 처음에는 사람이 좋은데 끝이 좋아야 하는데 그 생각을 해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타락하면 가장 추해 보여요 이것이 인간의 삶 속에서 경험하는 진실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를들면 기독교는 얼마나 아름다운 종교여요 종교로 이야기하자면 그런데 이 기독교가 본래 가야할 방향으로 가지 못하고 엉뚱한 길로 간다고 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주 추하게 보이거든요
 
한 나라 한 종교가 타락하고 왜곡된 까닭은 그 나라의 백성들이 나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혹은 그 종교의 신자들이 잘못 되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선한 길로 인도해야 하는 지도자들이 그릇된 길로 가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게 볼 수 밖에 없겠지요
 
이것은 성서에서 보는 일관적인 이야기입니다 예언자들이 바로 하는 이야기가 지도자들의 죄 종교 지도자든 정치지도자든 그들의 죄가 백성들의 삶을 얼마나 어렵게 만드는지 보여 주거든요
 
참 가슴 아픈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데요 여기 보면 패역하고 더러운 곳 어디여요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이 받을 형벌과 보호 소제목이 있으니까 어쩼던 패역하고 더러운 곳 이 말이 참 슬픕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은 거룩한 도성이라고 일컬어 졌지 않아요 하나님의 성전이 있었고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향해 순례자로 여겼고 그것은 가장 아름다운 곳이어야 합ㄴ미다
 
그곳에 가면 내가 받아 드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면서 세상에 받은 상처들이 다 어루만져지고 내 마음에 상처들이 어름 같은 것들이 녹아져서 봄에 사람이 되도록 새로운 생명이 움터나오는 도시이어야 하지요 이게 예루살렘입니다
 
교회도 그런 공간이어야만 합니다 교회에 온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는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곳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현존 앞에 서는 경험을 하지 못한다면 교회는 문제가 있다고 보아야하겠지요
 
메네딛토 성인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데 이 베나딛트라는 성인이 로마의 귀족출신인데요 로마의 귀족들인 누리고 있는 향락과 사치스러운 삶이 맑게 순수하게 살아야 하겠다고 하고 로마에서 떨어져 있는 수비아코라는 조그마한 마을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문명과 단절하고 하나님앞에 정결한 삶을 살기 위해서 수비아골 동굴 속에 들어가 가지고 기도하고 묵상하고 지내요 이 동굴에 얽혀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여인이 정신이 온전치 못했어요
 
어느 곳에 가든지 이 여인이 옷도 찢어지고 상처나고 가족들이 참 슬폈겠지지요 고칠려고 백방으로 노력해 보았지만 잘 낫지 않았어요 어쩔 수 없다 어느 날 그 여인이 떠 돌다가 베네딕토 기도 동굴에 들어와서 하루를 묶었습니다
 
하루를 묶고 그 다음날부터 정신이 온전해 졌어요 나는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땅에 교회들이 이러면 참 좋겠다 세상에 사는동안 마음이 찢기고 상처가 많고 마음에 정처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가는 순간 마음이 차분해 지고 상처가 치유되고 마음에 통전성이 회복되고 그래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면 좋겠다 생각하는데 오늘의 교회 현실은 그렇지 못하고 이것이 가슴 아프게 느껴지는 데 이것이 교회에 이야기 했지만 예루살렘이라고 도성에 똑같이 적용이 되고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도성이 어떻게 패역하고 더러운 곳 이런 말을 들어요 참 슬픈 현실입니다 그리고 아름다워야 할 것이 가장 타락했기 때문에 그 성읍에 화가 있다고 하는 것은 당연하게 느껴집니다
 
왜 그곳이 패역하고 더러운 곳이 되었느냐 하면
2절에 4가지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2절 그가 명령을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의뢰하지 아니하며 자기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였도다
 
명령을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의뢰하지 아니하며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였도다 하지 않은 것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은 것 네가지가 열거되고 있지요 죄를 이야기할 때 죄는 두 가지가 있어요
 
어떤 것이냐 하면 저지른 죄가 있어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한 것이어요 그렇지요 도둑질 하지 마 도둑질 했어요 행동을 통해 내가 저지른 것이어요
 
그러나 죄라고 하는 것은 여기만 있지 않아요 법률적으로 보면 내가 구체적 죄를 저지르지 않았으면 내 마음속에 죄의 욕망이 있다고 해도 죄가 되지 않습니다 성서가 우리에게 가르친 것은 저지른 것만 죄가 아니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죄가 있는데 그 죄의 이름이 태만 죄여요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은 것이어요 누가 복음에 보면 부자의 문간에 있었던 나사로가 있습니다 나사로도 세상을 떠났고 부자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가지 못합니다
 
지옥의 구렁텅이에 빠집니다 부자의 죄가 무엇이지요? 부자가 왜 지옥에 가 있을까요 자기 집 문간에 있는 나사로를 돌보지 않는 죄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이어요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나는 깨긋해 나는 이런 죄를 저지르지 않았어 말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 있어요
 
가인이 아벨을 죽인 다음에
창세기 4장 9절 나는 동생 지키는 자 입니까? 나는 너를 동생 지키는 자로 만들었어요
하는 이야기이지요
 
하나님이 네 동생이 어디 있느냐 하니까 나는 동생 지키는 자 입니까 하거든요 하나님은 나는 너를 동생 지키는 자로 만들었어 합니다 태만죄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을 책임지지 않는 것이야 이것이 태만죄입니다 이 태만죄가 나태한 죄라고도 이야기 할 수 있는 데 이 태만죄가 발생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2절 명령을 듣지 아니하며
듣는다는 말 속에는 순종하다는 뜻이 담겨 있거든요 명령을 듣기를 거부했다는 것은 반역의 충동이 내 속에 있어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생각이 없어요 때때로 보면 사람들은 성장을 해야 하는데 나무로 이야기 하자면 나무를 하나 심었습니다
 
나무는 두가지 운동을 해요 하나는 등치를 키어가야 하고 하나는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나무는 두가지 방향성을 가지고 있지요 나무는 자라기만 하면 무너질 수 밖에 껍질이 이것을 형식 형식이 필요해요
 
그런데 형식만 있으면 안 되어요 형식주의가 되면 안 되어요 내적으로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다이나믹입니다 다이나믹한 것 역동성이어요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룰 때 건강해 지는 것이어요
 
역동성만 있고 형식만 있으면 엉망이 되는 것이어요 우리는 아이들을 키울 대도 애들이 신나게 놀게 해야 하지만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해요 애들 기 죽이지 마 하지만 때때로 꺽어줄 수 있어야 해요 그 의지라고 하는 것을 이것이 명령이야
 
하나님도 그 백성이 인간이 죄에 끌리는 속성이 있거든요 어떤 분은 원죄를 설명할 때 원죄를 이야기 할 때 우리와 무관하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떠먹어 가지고 우리도 제수 없게 원죄라고 하는 말을 그렇게 보면 안 되고 아담과 하와가 그랬던 것 처럼 우리 속에 있는 죄에 끌리는 속성이 우리 속에 있어요
 
모든 인간속에 죄에 이끌리고 있는 속성 같은 것이 있어요 왜냐 하면 인간이 욕망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그래요
 
창세기 2장 7절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하나님이 코에다 생기를 불어 넣으므로 생령이 되게 하였는데 사람이 욕망을 가진 존재여요 욕망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끌리고 있어 결핍에 채우려고 하니까 나쁜 것에 이끌리는 속성이 있어요
 
여기에 있는 상훈씨나 여기 나운씨나 참 착한 사람들이지만 이 분들 속에 악의 요소가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없어요 인간이 어쩔 수 없는 그렇기 때문에 은혜 앞에 우리 자신을 자꾸 세워야 할 까닭이 악에게 이끌리기 보다는 선에게 이끌려 하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는 때때로 명령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으냐 명령에 순종해야 사람 골이 돼 명령을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라고 말합니다 여기 교훈이라는 게 징계이고 교정이어요
 
내가 잘못된 것을 누군가가 깨우쳐 주어야 하지 않아요 그래서 그것을 그러거든요 질자인데 꾸짖어서 바로 잡아 주는 것이지요 우리가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선생님이 꾸짖어 주기 때문에 그런 것이어요
 
그러면 안 돼 말한다든지 이게 무엇이냐 하면 교훈을 받는 것이어요 못난 사람의 특징이 남을 꾸짖을 것만 있고 못난 사람의 특색입니다 교훈을 받지 않습니다
 
여호와를 의뢰하지 아니하며 자기 자기 욕망을 하나님처럼 섬기며 살고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니라 가까이 나아간다고 하는 것은 누군가와 가까이 있다고 하는 것은 친밀함이어요 그 침밀함의 다른 이름이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가까워져요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은 마주 봅니다 젊은이들이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서로 바라보는 것을 보면 참 좋다 그러거든요 진자 정말 사랑해서 눈빛을 이야기 하는 것 같아요
 
이상하에 죄라고 하는 게 우리속에 들어오면 마주보지 못해요 등 돌리게 되지요 그래서 어느 신학자는 이야기 합니다 사랑은 끌리는 힘이고 죄라고 하는 것은 힘이 밀어내는 힘이어요 밀어내는 힘이 청력인데 잡아당기는 힘이 인력이고 청력을 사회학적으로 이야기하면 소외 시키는 힘이어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포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맺지 않느냐 하면 하나님이 내 욕망을 이루는 일에 제동을 건다고 생각해요 하나님이 불편해 그러니까 가까이 안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고 하지 않고 이렇게 하다 보니까 태만죄 속에 빠지게 굳건히 되었고 그 결과 패역하고 더러운 것이 되어요 이것이 예루살렘에 내려진 하나의 아주 슬픈 진실입니다
 
3절 그 가운데 방백들은 부르짖는 사자요 그의 재판장들은 이튿날 까지 남겨둔 것이 없는 저녁 이리요 ㅣ
 
4절 그의 선지자들은 경솔하고 간사한 자들이요 그의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하였도다
 
한 나라의 지도층 인사들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방백은 정치 지도자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정치 지도자를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부르짖는 사자다고 합니다
 
이것이 무엇 때문엔 그럴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권한 혹은 권력 혹은 권위를 우리에게 위임해 주실 때 세상에 모든 권력 권한이라는 것은 위임된 권력입니다
 
옛날에는 사적으로 어떤 갈등이 생기면 사람들이 보복하는 것이어요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이어요 이 보복이라는 것은 항상 악순환을 내 부모를 죽인 원수 산에 올라가서 원수를 처단하고 악 순환이 벌어지지 않아요
 
이 순환의 고리를 귾어야 돼 이렇게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요 방법이 없네요 그게 무엇이냐 하면 법이어요 사적인 보복을 못하게 하고 법이 이 사람의 잘못에 대해서 징계를 하는 것이어요
객관적으로 법은 제대로 되어야 하지요 그러니까 여기 권력이라고 하는게 우리를 대신해서 정의를 세워 주세요 우리를 대신해서 세상을 공평하게 만들어 주세요 그래서 우리가 가져야할 권한을 그들에게 위임해 준 것이지요
 
모든 정치 지도자들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국회의원이 되었던 대통령이 되었던지 간에 우리 선거 때 되면 그분들이 겸손하지 않아요 그런데 그 겸손한 분들이 권력의 자리에 가면 참 달라지지요 참 묘한 이치입니다
 
이것은 위임 받은 권한이어요 그러니까 그들이 해야 한 일은 위임된 권력을 가지고 공의를 세워야합니다 이 방백들의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이 권한 권위를 가지고 자기 이속 차리는 일에 다 활용한 것이어요 그것을 부르짖는 사자 이것이 정치의 타락을 보여 주어요
 
그다음에 재판장들 재판장은 저녁이리다 이튿날 까지 남겨 둔 것이 없는 저녁 이리라고 하는 것은 뇌물 받고 재판을 굽게 만들고 그래서 이 재판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정의의 여신 법원 앞에 가면 정의의 여신 동상이 서 있는데 한쪽 눈을 가리고 한 쪽에는 저울을 들고 한 손에는 칼을 들지않아요
 
왜 눈을 가리었을까요? 이 사람이 돈 있는 사람 힘 있는 사람이라고 해 가지고 뭐 그럴 수 있지 넘어가면 안 된다고요 가난하다고 법률 어기면 안 되지 않아요 그것을 지켜야지 가난한 사람을 돌보기 위해서 하나님은 정의라는 것을 이야기 했지만 공의로움도 해야지요
 
재판장들은 정의를 세우는 일이어야 하는데 정의를 세우지 않고 자기 이익을 위하여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해 그렇게 되면 세상에 신뢰가 무너져 이렇게 마땅히 세상에 기초를 잡아주어야 할 사람들이 자기의 이익을 위해 남용하게 될 때 믿을 것 나 밖에 없어
 
세상에 믿을 인간이 없어 이렇게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지요 이게 서야 할 사람이 서지 못할 때 벌어지는 일이어요
 
가슴 아픈 것은 여기 있어요 선지자들은 경솔하고 간사하다 참 기가 막힙니다 선지자들은 눈이 불꼭 같아야 하지 않아요 세상에 이면을 꽤 뚫어 보고 때때로 잘못된 것에 냉엄하게 잘못을 지적하고 상처 입은 백성들은 따뜻하게 감싸 주는 것이 그래서 떠돌고 있는 중심을 잡아주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경박하고 간사해
 
이런 헛된 종교인들 여러분 종교인들이 바로서야 역사가 바로 가는데 오늘의 종교인으로 부름 받은 사람으로 생각해 보는 것이지요 내가 바로 섰나 그래서 경박은 면해야 할 것 같아요
 
그 다음에 간사하면 안 되어요 종교인들은 간사하면 안 됩니다 간사하다는 것은 안에 질실과 밖의 진실은 다르다 그러니까 남의 비위 맞추기 위해서 간사한 말을 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안 됩니다
 
에드워드 사이드라는 학자가 있는데요 그 분이 지식인에 대한 이야기에서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지식인이 자기의 말을 듣는 유력한 청중을 의식하여 말을 왜곡하는 순간 그는 지식인이 아니어요
 
이 지식인의 자리에 목사를 넣어 보자고요 목사가 자기 교회에 유력한 사람들 염두에 두고 마땅히 해야 할 말을 하지 않는다든지 왜곡한다든지 그러면 목사가 아니어요 지식인 론에 현실을 어떠합니까? 힘 있고 유력한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복음을 왜곡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종교조차 이 불의한 세상을 그 나라는 희망이 없다 여기 제사장은 무엇하는 사람입니까? 거룩을 지켜내는 사람이어요 사람들을 거룩한 삶으로 인도해 내야 하지요 그러니까 경계라고 하는 것이 있어
 
제사장이 지켜야 하는 것은 경계인데 경계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을 더럽게 만드는 것들로 사람들을 지켜 내는 경계여요 이것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해야 합니다 더럽힘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거룩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를 오염 시킬 수 있는 것으로부터 구별하는 것이어요 제사장운 성소를 더럽혔다 그리고 율법을 범하였도다 하나님의 말씀을 범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전심 전력을 기우려야 할 율법을 대수롭지 여기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네 부류의 사람이 등장 했습니다 방백 선지자 제사장 그들이 무엇이냐 하면 최고 지도자들이어요 그들을 한 묶음으로 묶어 놓은 것은 그들이 그렇게 불의를 연대를 맺었기에 가능한 것이어요
 
어느 한쪽이 노하고 이야기 하면 그렇게 못합니다 그들이 좋은 게 좋은 것이지 뭐 그러고 가는 것이야 여러분 제가 담임하고 있는 교회에서 제 전임자인 목사님이 우리 교인들에게 수 십년동안 귀가 닿도록 하신 말씀이 좋은 좋은 게 아니고 옳은 게 좋은 것이다 이 말씀을 하셨어요
 
좋은 게 좋은 게 아니어요 옳은 게 좋은 것이어요 이들은 무엇이냐 하면 불의의 연대를 통해 서로를 이렇게 북돋아 주어요 정치인들은 종교인들에게 잘하십니다 하고 그들은 종교인들에게 서로가 불의의 연대를 형성함으로 나라 전체를 참 슬픈 일입니다
 
가끔은 예언자들이 등장해야 하는데 제가 4세기 위대한 교부인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이 분은 황금 입으로 알려져 있어요 설교를 워낙 잘했어요 옛날에는 설교만 잘한 분으로 생각을 했어요
 
이 분의 글을 읽다가 가슴이 뜨거워 졌어요 왜냐하면 예언자이어요 콘스탄니 토풀의 대 주교였는데 콘스탄티 노플의 대 주교였는데 콘스탄티 노플에 황제가 있어요 동 로마시대 거기에 이 크리스토 토무스가 황제의 부인 이름이 에브독시아입니다 교회에 잘 나온 사람입니다 유력자입니다 그런데 사치스럽고 허영과 불의를 일 삼아요
 
그러자 에브독시아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당싱에게 황후의 권세를 주었다면 그것은 정의를 세우라고 주었을 것입니다 인간은 흙과 재 풀과 먼지에 불과하고 인생 또한 그림자와 연기 그리고 한바탕 꿈에 지나지 않듯이 황제도 그와 같습니다
 
이 지엄한 꾸중 앞에서 지금 종교 지도자가 하는 말이어요 황제의 지위 영원할 것 같아도 아니야 그것은 티끌과 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니 이제 절망에 빠져 있는 이들에게 더 이상 고통과 불행을 지우지 마십시오 당신은 포도밭과 무화과 밭 기름돠 돈 그리고 권력을 가지 무덤에 내려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미움을 받아요 귀양가서 죽어요 크리스 토무스가 그러니까 권력에 대항하는 사람은 이렇게 대가를 치룬다 말이어요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사람있기 때문에 해야 할 말 안하고 갈 수 없는 것이어요 이것이 참된 종교인이고 예언자이고 말할 수 있겠지요
 
이렇게 교훈을 받지 않을 때 일들이
5절 그 가운데에 계시는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빠집없이 자기의 공의를 비추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 도다
 
여기 중요한 것이 그렇게 패역하고 더러운 도성인데 하나님이 안 계신 것 처럼 보여요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곳에 계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의 삶의 자리는 하나님이 머무는 곳이다 예언자가 들려주는 것이 그런 것입니됴
 
민수기 35장에도 보면 제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구절인데
민수기 35장 34절 너희는 너희가 거주한 땅 돋 내가 거주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 여호와는 이스라엘 자손중에 있음이니라
 
오늘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이 하나님의 거주하는 땅이어요 그 이야기는 나는 지금 하나님의 현존 앞에 있는 것이어요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일상의 삶의 자리야 서 있는 사리인 것을 잊지 말고 내가 하나님 앞에 서 있다만 함부로 할 수 없지 않아요
 
이것인데 그 의로우신 하나님이 불의를 행치 않는 하나님이어요
그 하나님을 섬긴다는 자들이 불의를 일 삼는 것이지요
5절 그 가운데에 계시는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빠짐없이 자기의 공의를 비추시거늘 불의한 자가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
 
마치 해가 떠 오른 것처럼 하나님은 끝없이 그 땅에 공의의 태양이 떠오르기를 바라고 그렇게 역사하고 계신데 그 지도자라는 사람은 그 하나님의 뜻을 역행하고 있다 이것이 예언자가 보기에 정말 슬픈 일입니다
 
더 더욱이 슬픈 것은 불의한 자들은 수치를 알지 모른다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 시대의 문제가 염치를 모르는 데 있다 생각을 해 보는 데 사람은 염치가 있어야 사람인데 염치가 너무 없어요
 
그런데 수치를 모른다는 것도 참 문제입니다 인간에게 수치심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를 함부로 욕망의 강에 떠밀리지 않도록 하는 닻 구실을 해 주어요 수치심 내가 그렇게 하면 안 되지 남들의 눈을 의식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양심의 법에 따라서 문제는 자기의 더러움을 알지 못한다 불의한 자의 특색입니다 그들은 영혼이 무디어진 사람들이어어요
 
영혼이 무디어 진 것을
디모데 전서 4장 2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 하는 자들이라
양심에 화인을 맞아서 뜨거운 그 인두로 지져진 것이야 그 영혼이 무디어졌어요 그래서 수치심을 알지 못하는 것이야 그래서 공의와 정의를 알지 못한다 이게 이 시대의 슬픔 가운데 하나입니다
 
6절 내가 여러 나라를 끊어 버렸으므로 그들이 망대가 파괴 되었고 내가 그들의 거리를 비게하여 지나는 자가 없게 하였으므로 그들의 모든 성읍이 황폐하며 사람이 없으며 거주할 자가 없게 되었느니라
 
6절은 앞서 보았던 구절들과 관련이 있는데 그렇게 하나님을 등진 수치를 모르는 백성들을 하나님은 징계하고 심판했어요 그들이 높이 세운 망대가 무너지게 만들었고 그들이 융성하게 사람들이 융성하게 다니던 거리가 빈 곳이 되었고 짐승들의 거처가 되었고 그 이야기를 하면서 너희도 그 지경이 되고 싶니 그런 이야기여요
 
7절 내가 이르기를 너는 오직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리 그리하면 내가 형벌을 내기기로 정하기는 하였으나 너희 거처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그들이 부지런히 그들의 모든 행위를 더럽게 하였느니라
 
하나님의 마음 아픔이 느껴지지 않아요 이제는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 그리하면 내가 형벌을 내가 돌이킬 수 있어요 그런데 이런 경고를 사람들이 안 받아 그들의 모든 행위를 더럽게 하였느니라 앞의 말이 기가 막해 부지런히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고 하는 말 곳에 담겨있는데 의미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억압과 수치를 그치고 약자들의 살 권리를 인정하고 그들을 있는 그들을 그대로 존중하라는 말이어요
 
양심에 화인 맞은 그들은 하나님의 경고조차 경청하지 않고 자기들의 삶의 방식에 따라 부지런히 악을 행합니다
 
결국 그들의 마침은 멸망일 수 없습니다
빌립보서 3장 19절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의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지라
 
십자가의 원수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이게 슬픈 현실입니다 우리 나라가 방백 재판관 선지자 제사장들 그들이 불의의 연대를 형성하고 있다면 나라는 희망이 없어요
 
그래서 그들이 불의의 연대를 형성하지 못하도록 국민들이 감시하고 비판하고 요청하고 국민들이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 땅이 패역하고 하나님이 사시는 땅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의 몫을 살아내는 땅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져 있는 도전이고 책임입니다.


제 6강 회복의 꿈

(스바냐 3: 9-13)
 
사람이 야단만 맞으면 주눅들지 않아요 그런 것이 있지요 때때로 격려가 필요하지요 그래서 보면 우리가 야단치는 사람이 있어야 되고 사람이 될려면 그냥 야단 안치고 전폭적으로 받아 주는 사람도 하나쯤은 있어야 하고 이게 역할 분담인 것 같아요
 
그래서 엄마 아빠가 야단치면 할머니 할아버지는 받아주고 이런 역할 분담이 아이를 균형있게 키우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드는데 하나님도 예언자들을 통해서 계속 야단을 쳐요 매를 많이 맞으면 주눅들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야단침은 언제나 무엇으로 귀착되느냐 하면 사랑이지요 정의가 전제되지 않은 사랑이라는 것은 잘못될 가능성이 있지요 바르게 사랑을 해야 하지요 사랑은 정의를 내포한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동안 스바냐서를 공부하고 있는데 무서운 이야기들이 했어요 정의가 공의가 무너진 세상을 향한 하나님이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이스라엘 이웃 나라들을 향한 심판에 대한 이야기가 거듭 나왔어요 우리는 움츠려 들였어요
 
오늘부터 스바냐서의 마지막 부분을 향해 가고 있는데 위로와 희망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비교적 희망적인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9절 하나님이 민족들을 회복시키실 때 제일 먼저 어떤 일을 하시는 지가 9절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러 백성의 입술을 깨끗케 하며 입술이 깨끗한가요? 하나님의 계획은 입술을 먼저 깨끗하게 하는 데 사실은 입술가지고 하는 일이 무엇이 있느냐 말 입술이 더럽다고 하는 말은 말을 더럽게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입술을 가지고 정말 거짓말을 하고 악한 말을 하고 남을 해치는 말을 하고 하는 것들이 더러운 입술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지요 하나님이 맨 먼저 회복을 하시는 일은 말을 회복하신다 더러운 말이 사라지도록 만든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사야의 소명 이야기를 보면 이사야 6장 5절 이사야가 성전에서 환상을 봐요 하나님의 환상을 보거든요 그 때 이사야가 탄식합니다 화로다 나여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중에 거주하면서 만국의 왕을 뵈었음이라
 
거룩함에 섰을 때 사람이 느깨게 되는 것은 참 좋다가 아니라 두려움이어요 내가 너무 어둡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비유적으로 이야기를 하자면 이 위에 빛이 있어요 내가 저만치 떨어져 있으면 빛의 근원으로부터 멀어져 있으면 내 몸에 묻은 것 잘 안 보이지요
 
나는 스스로 어떻다고 느끼느냐 하면 나는 깨끗해 그렇게 느껴요 그러나 빛을 가까이 다가가면 내 옷에 묻어 있는 것도 보이고 어두운 것들도 보이지요 그래서 무엇이냐 하면 빛에 가까이 갈수록 자신이 흠이 많다는 것을 알아요
 
그래서 바울 사도가 나중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아름다운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면 스스로 무엇이라고 이야기 하면 디모데전서 1장 15절 죄인중에 내가 괴수니라 해요 그 말은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바울은 정말 나쁜 죄인이야 이렇게 말하면 그 말의 의미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것이지요
 
나는 죄인중에 괴수라는 말은 겸양을 떨기 위한 말이 아니어요 빛에 가장 가까이 다가선 자가 한 자기 하는 자기 인식이어요 그래서 빛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일 수록 나만큼 한 사람 누가 있어 나만큼 떳떳하게 사람 누가 있어 말한 사람은 잘 못된 것이어요
 
윤동주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란다 한점 부끄러움이 없다고 안 했지요 죄짓고 들어가는 사람은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고 이야기 하고 들어가지 않아요
 
이사야도 거룩 앞에 섰을 때 아 나는 이렇게 이 땅에서 살면서 입술이 부정한 자인데 저 영광된 하늘의 세계를 보았으니 나는 죽을 수 밖에 없겠다 그 때 스랍하나가 제단에 숲불을 가져다가 입술에 가져다 댑니다
 
그래서 정결하게 되지요 입술을 정화해 더 이상 이사야는 이전에 자기의 말을 하고 살던 사람이 아니라 이제는 정화된 입술로 하나님이 그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하지요 소명이 그렇게 발생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입술이 깨끗하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살리는 말 무엇인가 살리는 말 올바른 말 참된 말 친절한 말 이런 것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일전에 물은 적이 있는데 음 높이가 부드럽게 이어 부르려고 할 때 무엇이라고 이음줄 영어로는 스로우라고 하기도 하고 레가토라고도 하거든요
 
그런 표시가 있으면 어떻게 불러야 해요 이어서 부드럽게 이어서 불러야 하지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본래의 언어의 기능이라고 하는 게 그 레가토 이움을 줄을 닮았다 다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한 생명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식하고 살아야 하는데 오해도 말로부터 비롯되고 이해도 말로부터 비롯되어요
 
말이라는 게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어야 하는데 말이 띠때로 사람을 멀어지게도 합니다 단적인 예를 들어볼까요 아담이 잠에서 깨어나니까 자기 앞에 낯선 존재가 있었어요 그 때 아담이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창세기 2장 23절 새 번역 이제야 나타났구나 남자에게서 났으니 여자라 하리라 이 사람 그 때에 그 남자가 말하였다 인간이 누구인데 나를 보고 내 뼈 내 살 이렇게 안 하지 않아요 처음인데 누군가가 내게 사랑의 언어를 사용하게 되면 가까워 지지 않아요 그런데 죄가 들어왔을 때 아담의 언어가 바뀝니다
 
창세기 3장 12절 너 왜 다먹었어 당신이 내게 주어 함께 살라고 한 여자가 먹었나이다
그 언어는 갈라지는 언어이지요 죄가 우리를 지배할 때는 갈라지는 언어로 상처를 주는 언어를 하게 되지요 죄가 우리를 지배하기 전에는 이어주는 말 서로 아름답게 다가서게 하는 말을 하지 않아요
 
입술이 부정한 자는 갈라서는 말을 하는데 얼마나 많은 부정한 말을 하며 사는지 모릅니다 정말 제단 숯불로 우리 입을 이렇게 지저 주면 좋겠는데 우리가 뭐 욕은 하지 않더라도 우리 마음속에서 발화되고 있는 말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상처를 줄 때가 있고 이런 경우가 꽤 많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입술이 깨끗해 질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입술이 깨끗해 지니까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한 가지로 나를 깨끗해 졌다 입술이 깨끗해 지니까 하나님을 경외심이 생겨났다
 
마태복음 5장 8절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을 볼 것이요
마음이 청결해 내 영혼에 드리워져 있는 더러워진 것을 닦아 지니까 하나님이 보여요 입술이 부정한 자리에서 그 입술이 깨끗해 지자 하나님을 찬미하는 소리가 나온 것이야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말합니다 한 가지로 주님을 섬기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한 가지로 번역되어 있는 이 단어는 한 어깨로 그런 뜻이어요 우리가 어릴 때 친구들하고 놀 때 어떻게 하지요 어깨동무 내 동무 그러지요 이렇게 어깨 동무를 하지않아요
 
이것을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어깨를 겪는다 함께 어깨 동무를 하는 것이어요 다정하게 가기도 하고 레미제라블 같은 데 보면 서로 어깨를 겪고 어려움을 이겨 나가지 않아요 한 가지로 나를 섬길 것이다고 하는 이야기는 무엇이냐 하면 이 전에는 어깨를 겪지 않았어 친구가 그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섬긴다고 하는 말은 여기 섬긴다고 제사장과 레위인의 직무에 관련된 단어에 주로 쓴 단어이어요 하나님이 그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실 때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을 때 그들에게 주신 소명이 있었는데 그 소명이 무엇이냐 하면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었지요
 
출애굽기 19장 6절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이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소명이었어요 흩어져 있던 뭇 나라 사람들이 입술이 깨끗해 지자 그들이 어깨를 함께 하고 하나님을 섬겼다 그 섬겼다는 단어가 제사장의 직무와 관련된 사명을 보여 주어요
 
이 구절이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여호와의 통치를 받아들인다 하나님이라고 하는 절대적 중심 속에서 내 삶을 본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여호와의 통치가 받아 들여진 세상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미국이 굉장히 큰 상처를 받은 사건이 있지요 2001년 9 11 테러 사건 미국이 본토 공격을 받은 게 일본에 의해서 태평양 전쟁 벌어졌을 때 본토 받은 것 외에는 거의 처음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데
 
멘허턴에 있는 다리들이 폐쇠개 되고 어려움을 겪었는데 특히 어려움을 겪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는 미국에 있는 무슬림들은 피잡을 하고 다니다든지 이러면 테러리스트인 것처럼 인식이 될 수 있어요 그 당시에는 그러니까 밖에서 나가면 공격의 표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이분들은 공포를 느낍니다
 
그 때에 뉴욕에 있는 교회들이 모든 교회는 아니지만 뉴욕에 있는 교회들이 무엇을 했느냐 하면 주변에 있는 이웃 무슬림들을 찾아가 그래서 필요하신 물건이 있으면 이야기 해 주세요 사다 줄게요
 
그분들이 밖에 나오지 못할 때 그분들을 위해서 장을 보아다주고 이런 것들을 했어요
이것이 종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살기를 원하는 생명이고 사람은 누구나 미움의 표적이 되어 있을 때 그들을 품이 되어 감싸 주려고 한 것이어요 그것이 하나님의 통치가 이뤄지다 그 관계속에 이것이 여호와의 통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사건으로 저는 보아요 이렇게 되면 서로 바른 말을 하고 상처주는 말을 하고 해해치는 말을 하고 이런 이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어깨를 겪고 하나님을 섬기게 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정확하게 말하자면 바벨탑 사건의 역전이 일어난다
 
창세기 11장 8절 바벨탑 때는 언어를 혼잡해 가지고 흩어 졌어요
지금은 한 하나님을 찬양하는 언어적 통일이 일어나고 흩어졌던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와서 함께 섬기게 되는 바벨탑의 역전이 벌어졌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여주는 비젼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10절 내게 구하는 백성들 곧 내가 흩은 자의 딸이 구스 강 건너편으로부터 예물을 가지고 와서 내게 바칠 것이라
 
하나님께 구하는 백성들을 하나님은 품을 열고 맏아 드리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젠에 죄 때문에 흩어 버렸던 자들이 구스 강 저편은 아프리카 저 편이거든요 저 멀리까지 가 있던 사람들이 주님께 예물을 가지고 와서 바치게 될 것이다
 
구스 강 건너편은 우리 식으로 이야기 하면 그 당시에 땅 끝 가장 먼곳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중심을 가지고 나아와서 예물을 바치고 그런 때가 반드시 올 것이다
 
11절 내게 네게 범죄한 행위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것은 그 때 네 가운데서 교만하여 자랑하는 자들을 제거하여 내가 나의 성산에서 다시 교만하지 않게 할 것이니라
 
너는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날은 어떤 일이 벌어진다고 말합니까? 하나님께 거역했던 행위로 인하여 더 이상 부끄러워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고 말핮ㅂ니다 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까?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들이 벌을 받을 만큼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은 파멸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언제나 회복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잘못한 것을 징계하시는 까닭은 분풀이를 심판의 목적은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정화이고 하나는 연단 그렇지요 이 둘이 함께 가도록 되어 있어요
 
심판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심판을 통해서 자기의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 돌아보도록 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우리가 심판을 자초하는 까닭은 무엇이냐 하면 본말을 뒤집기 때문에 인간이 심판을 자초해요
 
한자로 본이라는 글자 나무 목자가 있지 않아요 밑에 하면 본이야 여기에다 나무를 그렸어요 줄을 그으면 말자여요 본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 땅이야 이것은 무엇이어요 뿌리 땅에서 올라오는 데 여기에 메달리는 것은 열매 본은 뿌리이고 말은 열매인데 말도 그러니까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어요 이것도 매우 중요해요
 
그러나 나무를 지탱해 주는 것은 열매가 아니라 뿌리인 것이지요 문제는 본은 사람 눈에 보이지 않아 밑에 있기 때문에 무엇이 보이지요 열매가 보이지요 사람들은 열매에 관심을 가져요 여기를 튼튼하게 하는 것인 말을 추구하는 말을 내 삶의 중심으로 추구하는 결국은 심판을 자초해요
 
이것은 욕망과 탐욕과 관련이 되기 때문에 탐욕적인 삶이라는 것이 심판을 자초하게 되고 심판을 통해 얻게 되는 것이 말이 아니라 이것을 얻는 것이어요 내 삶이 말이 아니라 본에 정화된 삶이라고 말하고 이런 일이 내 속에서 제대로 이루어지게 될 때 나는 연단된 존재가 되는 것이어요 이것이 중요한 대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시온은 하나님의 심판을 이미 겪어 내었기 때문에 더 이상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게 될 것이다는 것이어요 그래서 교만하여 자랑하는 자들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제거 되었고 자기 힘에 도취되어 들떠 있는 사람은 스스로의 죄의 무게 때문에 스러졌기 때문에 이렇게 정화되고 연단된 사람들이 그 도성을 채우기 때문에 이제는 과거의 잘못에 붙들려서 부끄러워하지 말아라
 
세상에 과거의 잘못 저지르지 않은 사람이 있어요 여러분이 이야기 한 것은 애교스럽게 볼 수 있는 잘못들인데 사실 따지고 보면 내가 의도하고 지은 잘못도 있지만 해야 할 일을 안 하는 것도 죄도 많이 있고 그렇게 보면 죄 없는 사람이 없지요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그 죄라는 과거가 어두운 인력이 되어서 나를 어둠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는 죄 의식속에 살 수 밖에 없어요 하나님의 은총이 무엇이냐 과거에 저지른 그 죄들을 네 아픔을 내가 알아 너를 용납했어 용서를 해 주셨다고 하는대도
 
용서를 해 주셨다고 하는데도 여전히 그 속에 묶여 사는 것은 바보짓이지요 그러나 너무 헤픈 용서 쉬운 용서 문제가 될 수 있어 그래서 하나님은 대가를 꼭 치루게 하셔요 그러면 용서해 주셔
 
더 이상 붙들리게 하지 않는 것이 인생의 지혜라고 이야기 할 수 있겠네요 이렇게 하나님이 심판을 통해 정화하고 연단하심으로 사람들이 정말 교만하지 않게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하시는 것이지요
 
12절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네 가운데에 남겨두리니 그들이 여호와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세상의 모습이 드러나지요 나는 그 거룩함에 가르쳐 주고 있는 레위기의 성결 법전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거룩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의 일이어요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어요
 
레위기에 성결 법전은 거룩이라고 하는 것은 종교 행위에 국한 시키지 않았다 요즈음으로 이야기 하면 예배당 교회에 참석하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금요 철야 기도회하고 그리고 금식 기도하고 또 성경 많이 읽고 은혜 받은 집회에 빠지지 않고 이러면 굉장히 거룩한 삶으로 사는 것 처럼 보여요
 
이 거룩한 삶이라고 하는 게 항상 성결 법전에서 무엇과 연결되느냐 하면 윤리야 윤리적 삶이어요 윤리라고 하는 것은 거룩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라고 한다면 윤리라고 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인데 기독교적 윤리 성서적 윤리라고 하는 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만ㅁ이 아니라 우리의 관계속에 하나님을 모셔 들임을 뜻해요
 
나 좋을 대로 저 사람과 관계 맺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들의 관계속에 중심이 되어 드리기 바라는 윤리라는 말이어요 그는 거룩하긴 하나 윤리적이지는 않아 이것은 안 돼 어떤 사람이 성경을 백번을 읽었어 거룩해 보여요 은혜 받은 집회에 빠지지 않아 그러나 자기 회사에 직원들을 함부로 대하는 갑질을 한다면 그는 거룩하지 않은 것이야 이것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윤리적이기는 하나 경외할 줄을 몰라 나쁜 짓은 안해 그런데 그의 내면속에는 사람들을 멸시하는 것이 있다든지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은 윤리적인 행위가 아니야 그 속에 무엇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경외해야 될 대상으로서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거룩함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사회 속에서 윤리적 삶으로 드러나야 하고 사회 속에 드러나는 윤리적 삶은 무엇으로 나타나야 하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관심으로 나타나요 고아 과부 나그네로 상징되고 있는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
 
그래서 레위기 23장 22절 추수할 때 밭의 한 모퉁이를 남겨 두라고 하는 것이어요 그들의 몫이라고 이야기 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바로 저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 거룩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만족이 되기 쉬어
 
나는 신양 생활 정말 열심히 해라고 말하는 데 여기에 대해서 격멸한다든지 그들의 고통에 대해서 모르는 체 한다든지 내가 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 처럼 가난하지 않는 것을 감사합니다 기도를 한다든지 그것은 경건이 아니어요 거룩이 아니어요
 
그러니까 거룩함은 반드시 이런 삶으로 나타날 때 진자 거룩함이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일관되게 가르쳐 주고 있는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보아야 합니다
 
12절 하나님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들 공동 번역은 그것을 기를 펴지 못하는 사람들 기를 펴지 못하는 사람들을 남겨 두었어 사회 경제적으로 곤궁한 사람들 법적인 보호를 받지 못한 사람들 또 착취와 억압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을 그들 가운데 남겨 두시고 이것이 하나님이 정화한 세상이어요
 
그들이 기를 펼 수 있어야 돼 그들이 누구를 의지해서 사느냐 하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 말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이 보호함을 입고 그들이 굴욕감을 느끼지 않고 자기의 삶을 할껏 살아 가도록 만들어 하나님을 풍성하게 만드는 일이어요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다는 것은 그들의 피난처가 되어 주신다하고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만들어 가시는 세상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3절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거짓된 혀가 없으며 먹고 누울 지라도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
 
악을 행하지 않는다 악이라는 것이 무엇이었어요 타자에게 무덤을 안겨 주고 싶어 하는 마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타자에게 무덤을 안겨 준다는 것은 해고지 하는 것이어요 그의 생명을 축소시키려고 하는 모든 행동은 악이야
 
우리가 누구에게 욕을 한다든지 멸시하는 태도를 보인다든지 무시한다든지 그려면 그런 일을 겪은 사람은 생명이 위축되지 않아요 그것은 살인이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정말 염두에 두어야 될 것이 무엇이냐 하면 누구를 대하든지 나는 저 사람에 생명을 키워 주는 일 풍성하게 만드는 일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 해 멸시하고 격멸하고 이런 일을 통해서 생명을 키울 수 없어요
 
여기 중요한 것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여러분 악을 행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하나님이 남겨둔 사람이어요 그 다음에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면 입에 거짓된 혀가 없는 것이어요 그 다음에 먹고 누울 지라도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고 말합니다
 
두려움이라고 하는 게 어떻게 방생하지요 왜 우리가 두려웁지요 우리 두려워요 인간이 유한하기 때문에 두려워요 시간속에 살고 있는 사람은 다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낄 수 밖에 없어요 특별히 성서적 의미로 이야기 하자면 우리가 에덴에 동쪽에 살고 있거든요 에덴에 동쪽에서 살면 불안이어요
 
창세기 4장 16절 가인이 에덴에 동쪽에 이주하여 놋 땅에 거주하더니 에 놋이야 이 말의 뜻은 유리하다 방황하다 이 뜻이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에 등 돌이고 이웃에게 등돌리고 사는 사람들의 삶은 다 놋이야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두려워 방활 할 수 밖에 없어요
 
우리도 때때로 두려워하고 불안해 빠져 삽니다 에덴에 동쪽에 살기 때문에 그렇거든요 하나님이 십판하시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정화가 일어난 다음에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이것은 외적 침입에 대해서 이야기 일 수 있지만 내면의 이야기 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고 불의를 행하는 사람들은 이익을 내면에 일고 있는 불안을 떨쳐 버릴 수 없어요
 
그러나 자기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삼지 않고 자기의 평안함을 위해 누군가를 어려움 속으로 몰아내지 않은 사람은 조금 가난할 수 있지만 마음에 평화를 누릴 수 있다 이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인데요
 
결국 인간들이 모두가 지향하고 있는 바는 불안이 없는 삶을 살고 싶다 불안 없는 삶 두려움이 없이 살고 싶지요 많은 예언자의 이야기입니다
 
주전 8세기에 굉장히 아름다운 비젼을 보여 주고 있지요 육식에 동물들과 초식에 사는 동물들이 꿈 꾸거든요 이사야 11장 6절 그 꿈 이야기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이라
 
그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자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 세상입니다 사자가 소처럼 풀을 뜯어 먹어 그 말은 무엇이냐 하면 사자로 상징되고 있는 것이 강자들이야 그들이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힘을 자기들의 욕망을 위해 사용하는 일을 내려 놓고 다시 이야기 하면 그 육식성의 폭력성을 버리게 될 때 평화가 오는 것이어요
 
세상에 평화가 없는 것은 힘 있는 저 사람들이 세상을 불 안전하게 만들기 대문이 아니어요 힘 없는 사람들을 수단으로 삼기 때문에 먼저 힘을 가진 사람들이 지배하려는 욕망을 내려 놓고 섬기기 시작할 때 평화가 와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삶은 한결같이 높아지려는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가리켜 주지요
 
마태복은 20장 27절 너희 중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높임을 받고 싶은 사람이 있느냐 그러면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지요 이것이 이사야 11장의 신약 성서의 버전이어요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힘 없는 사람들 너희가 문제야 너희 대문에 세상이 소란 스러워 그럴 게 아니고 힘 있는 사람들이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힘을 자기 욕망을 위해 사용하기 보다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그 힘을 사용할 대 세상은 평화롭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세상이어요 정말로 평화를 꿈꾸는 사람이 어떻게 해야 될까요 간단하게 이야기 할께요 첫째 기도안에 머무르라 다시 말하면 날마다 평화를 만드시는 그리스도의 삶을 묵상하면서 하나님 앞에 평화로운 세상을 이루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돼
 
세상 도처에 있는 아픔들 아프리카에 곤고한 사람들이라든지 이 사람들을 우리의 기도속에 모시고 와서 하나님께 그들이 평화롭고 안전하게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해야 돼 이것이 첫번째입니다
 
두 번째는 무엇이냐 하면 기도만 하면 안 되어요 죽음의 세력에 항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를 고통 스럽게 만드는 생명을 해치는 사람과 제도에 굴복하지 않아야 되어요 이게 우시 속에 있어야 돼
 
2018년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두분이 있는데요 데니스 무쉐거라는 콩고 공화국에 의사입니다 이 분은 어떤 일을 했느냐 하면 전쟁을 통해 성폭력 피해를 입은 치료하고 돌봐 주었어요 회복해 주는 일을 했어요
 
그러니까 세상은 끊임없이 여성들을 도구화 하지만 이렇게 끝끝내 그들을 지켜내는 사람들이 있어요기도만 하지 않았어어요
 
나다이 무라드 이라크 소수 민족의 여성입니다 아이에스에 납치 되어 가지고 집단 성 폭력을 당했어요 그리고 탈출한 다음에 전쟁을 반대하고 인신 매매를 막기 위해 매진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어요
 
그들은 기도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기도안에 머물러야 되지만 악에 대해서 아니요라고 해야 되어요
세 번째는 삶을 축복하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어야 돼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삶을 행복하게 살아내는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이 얼마나 든든하게 매력적으로 살아가는지 보여 주어서 세상의 아름다운 삶의 표지를 세워가기 시작해요
 
그래도 소용이 없어 사람들이 그렇게 말할지 몰라도 우리는 그래도 이렇게 살것이야 저 사람들을 보니까 아름다운 삶이 가능하구나 이렇게 느길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미국에 민권 운동이 벌어지고 있던 1965년 3월 7일 아리바마 주에 셀바라는 곳에서 몽고메리를 행진하던 사람 가운데 한 노인이 한 말이 있어요 자기들의 행동에 대해서 믿음을 가지고 모험에 뛰어 들어 희망을 가지고 결정을 내리고 결과는 사랑으로 감내하자
 
이것이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해야 할 마음속에 세겨야 할 요소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아름답게 세상에 만들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그렇게 만들기 워하시거든요 기도 안에 머물고 그 다음에 이 불의와 죽음의 세력에 대해서항거할 수 있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기뻐하며 경축하며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내적 능력이 내 속에서 생길 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삶을 증언으로 살아갈 수 있겠다 여러분의 삶이 그런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7강 스바냐 3:14-20 시온에서 울려 나오는 찬양


여러분 기쁠 때 무엇을 하십니까? 저는 사람들 만나요 저는 가족들하고 지냅니다 거꾸로 슬플 때 무엇을 해요? 저는 혼자 있는 편이어요 사람은 슬플 때도 노래하고 기쁠 때도 노래하고 그러지 않아요
 
그러니까 사람의 마음을 띠어 주는 것만이 음악의 역할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감싸 안아주는 역할 이런 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
 
돌아가셨지만 가야금을 타신 황병기 선생님이 계신데요 그 선생님은 자신의 음악을 사람들의 고양시키는 음악 보다는 사람의 마음을 감싸 안은 음악을 하고 싶다고 합니다 고양 시킨 음악을 하는 사람은 그런 음악을 하는 것이고 어떤 상태에든지 노래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정서를 드러내고 사람의 정서를 드러내는 것 같아요
 
시편이라는 책도 시편에는 두 가지 소리가 들려오지요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셔 바치는 기쁨의 노래가 있는가 하면 살다 보면 안 계신 것처럼 어려운 일을 만나기도 하고 어려운 일을 만나기도 하고 내 속에서 탄식이 터져 나올 때 하나님 어디 계셔요 탄식의 노래도 있거든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노래 가운데 초대하고 계신다는 사실이어요 노래를 부른다고 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어요 나는 노래 잘 못하지만 합창단에 끼어 보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어디 일것 같아요 요한 계시록에 보면 보좌에 앉으신 분이 계시고 네 생물이 있고 이십사 장로가 있고 네 생물이 보좌에 앉으신 분과 어린양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면 이십사 장로가 따라 부르고 천군 천사가 따라 부르고 온 우주가 참여하거든요 나는 그 노래에 동참하고 싶어요
 
그런데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죽어서만 하는 노래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이 그 분에 대한 찬미일 수 있어요
 
오늘 우리가 볼려고 하는 본문이 우리를 노래 가운데로 인도합니다
14절 시온의 딸아 노래할 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 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할지라
 
노래의 초대 시온의 딸아 노래할 지어다 이 명령이 참 좋으네요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 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노래할 지니라 전심으로 노래한다는 것 어떤 것일까 생각해 보는데요
 
우리 신학교 다닐 때 신학교에서 퇴수회라는 것을 간 적이 있어요 요즈음으로 이야기 하면 사람들이 엠티같은 것이라고 할까 퇴수회라는 것을 갔는데 공식적인 행사가 끝나면 통나무 집 같은데 학년 별로 들어가서 자기들끼리 이야기 나누고 그러는데 누가 한 사람이 키타치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따라서 노래를 부르지요
 
신학생들이 노래 잘 합니다 신학교에 들어가서 내가 열등감을 느낀게 노래를 너무 잘해 누가 한 사람이 켐퍼스 잔디밭에 앉아 가지고 키타치면서 노래 부르면 지나가던 사람이 앉아 네 사람이 앉으면 사부 중창이 되는 것이어요 노래들 정말 잘해요
 
그 날은 퇴수회의 기분이니니까 찬양을 안 하고 누구 하나가 무엇을 불렀느냐 하면
양희은씨가 불렀나
한 사람 여기 또 그 곁에 둘이 서로 바라보며 웃네
먼 훗날 위해 내미는 손 둘이 서로 마주 잡고 웃네
 
그 다음에 한 사람 곁에 또 그 곁에 둘이 좋아해 이런 곳이어요
후렴 부분을 반복하는데 갑자기 옆에 있는 사람이 너무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이야
그 무한 반복이야 한 사람 곁에 또 한 사람이 그냥 종교 체험이야 찬양이 아닌데 정말 그 때 느꼈던 하나됨의 기쁨 우리가 한 길을 가는 동료들이구나 이것을 가슴 절절하게 느꼈는데 노래라는 게 사람의 마음을 묶어 주는 게 있는데
 
노래하라고 하나님이 불러요 슬픔 속에 있는 사람이건 기쁨 속에 있는 사람이건 노래하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그냥 노래해 이런 명령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노래 부를 마음이 있어서 부르지 않아요 슬픔을 그러나 스바냐서에서 오늘 노래하라고 하는 것은 기쁨의 노래를 부르라
 
어떤 기쁨일까요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세상은 힘 있는 사람들 힘 있는 나라가 통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근원적 확신 이것이 내 속에 있을 때 여기서 울려 나오는 기쁨 시온의 하나님의 하나님의 아름다운 통치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확신할 때 노래하자는 기쁨을 노래하자 이것을 기쁨을 함께 노래하자
 
지금은 고통 가운데 있을지 모르지만 미구에 전개될 하나님의 백성들의 당연한 반응은 기뻐하는 것이어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다른 게 아니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하는 것 미리 취하는 것 하나님이 약속하는 바를 내 삶 속으로 끌어 당겨요 이것이 믿음의 삶이라고 할 수 있어요
 
여전히 현실은 어려워요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어디로 초대하셨느냐 하면 노래로 초대하셔요 함께 노래해 그 때 노래할 때 함께 솔로도 좋지만 부르는 노래들이 갖는 힘들이 있는데요 미구에 전개될 반응으로 노래를 부름으로 약속을 미리 앞당겨서 경험하자는 것이어요
 
여러분 타고르라는 인도의 시성 그분이 키단자리라고 하는 시를 섰는데 그 가운데 한 대목이 이렇습니다 당신은 나를 무한케 하셨으니 그것은 당신의 기쁨입니다 이 연약한 그릇을 당신은 비우고 또 비우시고 끊임없이 이 그릇을 싱싱한 생명으로 세우셨습니다
 
나를 비우고 또 비워내고 그리고 그 속에 싱싱한 생명으로 세우셨어 그리고 노래합니다
이 가냘픈 갈대 피리를 당신은 언덕과 골짜기 너머 지니고 다니셨고 이 피리로 영원히 새로운 노래를 부르십니다. - 기탄질리(니빈드리 타고르의 시)
 
갈대 피리 같아 나라고 하는 존재가 그런데 그 님으로 표상되고 있는 하나님이 나를 데리고 다니셨고 그리고 이 피리로 영원히 새로운 노래를 부르신다 나라고 하는 존재는 하나님이 부르시는 피리야 나라고 하는 존재는 하나님의 순결을 불어 넣으셔서 부르시는 피리이다 놀라운 표현이지요
 
그리고 말합니다 당신 손길의 끊없는 토닥거림에 내 가냘픈 가슴은 한없는 즐거움에 젖고 형언할 수 없는 소리를 발합니다 때때로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당신의 손길이 나를 토닥거려 주기에 무궁한 소리가 납니다
 
무궁한 선물은 이처럼 작은 내 손으로만 옵니다 세월은 흐르고 당신은 여전히 채우시고 그러나 여전히 채울 자리는 남아있습니다 내 삶 속에 지속될 때때로 하나님은 은총을 내다보는 노래이지요
 
여러분 잊지 마세요 내 속에 있는 것들을 비우고 또 비워내 왜 비우시느냐 하면 더 새로운 생명을 채우기 위해서 비우신다 이것이 타고르라는 시인이 들려주는 노래야요 그것을 생각하면 내 삶에 근심 걱정이 가득차 있지 어깨를 짓누르는 것이 있어요
 
하나님은 싱싱하게 채워 주실 것이야 하나님은 내 속에 하나님의 숨결을 불어 넣으셔서 하나님의 선율을 노래할 것이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노래해야 되어요 노래엔 동참하는 사람이 되어야 해요
 
15절 여호와가 네 형벌을 제거하였고 네 원수를 쫓아냈으니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기뻐하여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이스라엘이 받아야 될 심판에 따른 형벌을 이미 제거하셨 그 다음에 원수를 쫓아 내셨어 여호와께서 그들 가운데 계시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포악과 거짓을 행하는 자들이 살수 없는 삶을 살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두려움이 없는 삶을 약속하셨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시간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의 내용은 불안이어요 유한한 인간은 불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삶이 불 확실해요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그러니까 불안해요 모호해요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런지 알 수 없어요
 
그러나 불확실하고 모호하다고 해도 우리는 나부다 나를 더 잘 아시고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내 삶을 위탁하고 산다고 하면 자유가 내 속에 찾아와요 내가 무엇인가 내가 무엇인가 내가 무엇인가 결실을 얻어야 해 하면 부자유가 나를 지배해
 
최선을 다해 살지만 결과가 어떻게 하든지 간에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 겪어낸 삶이라고 보면 모호한 삶도 복이 될 수 있다 불확실한 삶도 복이 될 수 있어요 정답이 없는 삶 모호한 삶을 살아갈 용기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때때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강해요 그 삶이
 
고정희라는 시인이 들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신학을 공부하신 분이신데 아주 훌륭한 시인이었습니다 시인답게 라고 말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지리산 뱀사골에서 급류에 휩쓸려서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분의 시 가운데 제가 사랑하는 시가 있는데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시입니다 상한 갈대를 위하여라는 시인데 이렇게 노래합니다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에서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게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들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해가 문제fi
고통과 서름에 날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혼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거 있거니
 
우리의 삶이 여기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 처럼 때대로 밑둥이 잘린 것 처럼 내 삶이 외로울 대도 있어요 그리고 부평초처럼 어떤 상황 속에서도 물 고이면 곷을 피어내는 저 식물들 처럼 외롭리로 작정하면 어디든 못 가랴 말하고 있는 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라 열정 이런 것들
 
그래서 무엇이냐 하면 오늘 우리의 삶이 고통과 설음의 땅이라고 해도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고 그리고 희망이 있는 데 영원한 눈물 영원한 비탄은 없어 왜 캄캄한 밤하늘에 내가 서 있다고 하더라도 저편에서 마주 잡을 손 하나가 오고 있어
 
그게 어떤 사람일 수 있지만 영원한 마주 잡을 손은 주님이셔요 역사의 통치자이신 하나님 그 분이 서러움의 땅 외로움의 땅이라도 거기에 지지 않고 간다 믿음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든든함이어요 돈 많아야 든든하고 든든하지 않는 것이야
 
믿음의 사람들은 그런 든든함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서 마주 잡을 손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분 그 분은 때때로 나를 통해 상훈씨의 손을 잡아 주시를 원할 때가 있어요 이것이 삶의 보람입니다
 
하나님은 나와 더불어 구원을 베풀고 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어요
이런 기쁜의 순간들이 그들에게 올 것이다 두려움이 없이 살자는 이야기여요
16절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두려워 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손을 늘어 뜨린다는 것은 기력이 완전히 빠져 늘어진 상태 파 김치처럼 다가오는 압도적인 재앙으로 말미암이 맥이 빠진 상태가 손을 늘어뜨리다 라고 하는 말이지요
 
우리도 살다보면 문제의 크기에 압도 되어서 자기의 속에 있는 가능성을 보지 못할 때가 있어요 그렇지요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될 것이 있어요 정말 잊지 말아야 될 것 세상에서 내게 직면하는 문제보다 나의 존재가 더 크고 귀해 때때로 치욕적인 일이 내게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견디기 어려운 일이 나를 찾아 오기도 합니다
 
그 어려운 일이 살아갈 용기를 빼앗아 갈 수도 있어요 그러나 잊지 말아야 될 것은 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받은 존재이다 나의 문제보다 문제가 나보다 큰 것으로 생각하여 문제로부터 회피하기 위해 달아나지 말고 이 문제는 해결될 것이야 하나님이 그런 능력을 내게 주셨어요 내 속에 가능성에 눈 뜰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진자 믿음의 사람이어요
 
두려워 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 뜨리지 말라라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세상 살면서 낙심 될 때가 많아요 세상에 악이 너무 성행한 것처럼 보여요 선하게 사라려는 사람이 언제나 이용당하는 것 처럼 보여요 그리고 우리가 그러면 안 되지 않아요 하면 모난 돌이 정 맞는 다고 너 그래 가지고 사회생활 할 수 있겠어 좋은게 좋은 것이지 이렇게 하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가 듣는 소리가 무엇이냐 하면 가만히 있으라 네가 그런다고 세상이 안 달라져 그렇게 말하지 않아요 어차피 세상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야 우리속에 비관적 전망을 심어 주려고 하는 사람이 많이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네 손을 늘어E 우리 속에 힘을 우리에게 존재의 용기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어요
 
17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잊지 맙시다 우리 가운데 계셔요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은 일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게 계셔요 그 분은 어떤 분이셔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어요 전능자라는 말은 용사라는 것이어요 하나님은 용사여요 세상의 어두움과 패배하는 분이 아니어요 우리를 대신해서 싸우시는 분이시어요
 
시편 3편 7절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빰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라고 노래하지 않아요
 
하나님은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라고 말합니다 그 다음에 정말 감격적인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이게 정말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 너를 잠잠히 사랑하신다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실 것이다 어마 어마한 이야기여요 시련을 통과하면서 세상에 헛된 것들에 사로잡히지 않고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에 대한 주님의 긍정이 이러한 언어로 등장하고 있어요
 
따지고 보면 하나님 앞에 우리가 떳떳한 존재이겠습니까마는 하나님만 의지하여 살 수 없는 나의 곤고함을 주님의 은총이 없으면 살 수 없어요 주님 앞에 우리가 두손들고 나아갈 때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기뻐하신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즐거이 부르며 기뻐 기뻐하시리라
 
이 대목을 공동번역은 이렇게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너를 구원해 내신 용사 네 하느님 야훼께서 네 안에 계신다 너를 보고 기뻐 반색하시니 사랑도 새삼스러워라 명절이라도 된 듯 기쁘게 더덩실 춤을 추시리라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를 바라보면서 더덩실 춤을 추시는 이 상상력 시적 상상력 대단한 내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심판이 지나갔어요 정화되고 연단이 되었지요 그리고 하나님의 소망이 우리에게 들어와서 노래를 부르게 되었어요 새로운 삶이 시작이 됩니다
 
18절 내가 절기로 말미암아 근심하는 자들을 모으리니 그들은 내게 속한 자라 그들에게 지워진 짐이 치욕이 되었느니라
 
이 말은 무엇이냐 하면 여호와의 절기를 지킬 수 없는 형편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많았지 않아요 가난하든지 누군가에 눌려 있던지 먼곳에 흩어 있던지 하나님 앞에 절기를 지키며 정말 축제의 함성을 지르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하나님이 그들을 다시 모으신다
 
그들은 네게 속한 자라 그들에게 주어진 짐이 치욕이 되었느니라 지난 날 치욕스러운 일이 그들을 사로 잡고 있었으나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19절 그 때에 내가 너를 괴롭게 하는 다즐 다 벌하고 저는 자를 구원하며 쫓겨난 자를 모으며 온 세상에서 수욕 받는 자에게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리라
 
역사의 역전이 벌어집니다 하나님의 저는 자를 다 멸하실 것이다고 말합니다 저는 자를 구원한다 저는 자는 다리가 저는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을 뜻합니다 그들에게도 새로운 희망이 주어진다 남들하고 언제나 뒤 쳐지고 못나 보이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각별한 은총이 함께 한다
 
그리고 쫓겨난 자를 모으고 주변화 된 사람들을 마지널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마지너리티 주변성이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정말로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저는 자 그 다음에 이런 주변화 된 사람들 쫓겨난 사람들 중심에 설 가능성을 박탈을 당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각별하게 관심을 가지신다 하는 이야기 입니다
 
하나님은 주변화 된 사람들 마지날을 통해서 새로운 역사를 하세요 함석헌 선생님이 하신 말씀인데 공부 잘하는 사람들은 공부를 잘하면 원하는 대학 들어가고 취직도 잘하고 원급 많이 받고 그렇게 살아요
 
공부 못하는 사람들은 좋은 대학도 못가 취직도 잘 안 되어서 어려워 그래서 세상이 왜 이 모양이야 세상이 이러면 안 되지 않아 그래서 무엇이냐 하면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은 대게 잘 나간 사람들이 아니라 안 그런 사람들이어요
 
이것이 놀라운 점이어요 하나님의 역사는 이런데 있어요 이 방송을 통해 공부 못한 다고 탄식하는 사람들 하나님은 함께 일하기 원하세요 그렇다고 공부 잘하는 사람들이 낙심할 이유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품고 가면 되니까 세상에서 수모를 당하는 사람에게 칭찬과 명성을 얻게한다고 말하는 데 바울 사도가 십자가 본질을 경험하고 나니까 이 세계여요
 
고전 1장 27절 그러나 하나님께서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에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28절 하나님께서 세상에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하시나니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정말 놀라와요 여기에 바울 사도가 이야기 했던 미련한 것 또 약한 것 천한 것 멸시 받는 것 없는 것 이게 스바냐서의 언어로 이야기 하면 저는 자 쫓겨난 자 수욕 받은 자가 됩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이들과 더불어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고 싶어 하신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렇게 만드시려고 한다 이게 스바냐서라 우리에게 들려준 이야기 입니다
 
20절 내가 그 때에 너희를 이끌고 그 때에 너희를 모을지라 내가 너희 목전에서 너희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너희에게 천하 만민 가운데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것은 19절에 거의 반복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 이 구절과 아주 깊이 연관되어 있는 시편이 있지요 시편 126편인데 1절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 꾸는 것 같았도다
 
2절 그 때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찿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시 시작할 용기를 주시는 분 이것이 소망이라고 볼 수 있어요 스바냐서의 시작은 참 암담했습니다 스바냐를 소개하는 말이 끝난 다음에 시작하는 2절을 어떤 말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땅위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 라는 말로 시작이 되어요 하나님의 심판이 예고됩니다
 
결국 하나님이 이렇게 화가 난 까닭은 하나님이 세우신 세상의 기초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그 기초는 정의와 공의였습니다 정의와 공의가 무너진 세상 그 세상에 하나님은 화가 나셨어요 그래서 그 세상을 진멸하겠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스라엘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주변 나라들도 정의와 공의를 저 버리고 그 때 하나님께서 그 나라들도 다 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에 동서남북에 있는 나라들을 언급했어요 이 나라들이 망하게 될 것이야 말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 뿐만 아니라 가장 거룩해야 될 예수살렘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저주 받을 공간처럼 바뀌었어요 하나님이 그 모든 것들을 다 이제 쳐서 멸할 것이다 이야기 했어요
 
그 다음에 한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언제나 무엇과 이어져 있다고요 하나님의 심판은 그들에게 베풀려는 더 큰 복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까 심판을 통과한 백성들에게 정화의 복이 다가 왔고 단련의 복이 다가왔고 더 이상 오만하지 않게 되고 정의와 공의를 구부러지지 않게 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본 사람들이 되고 그래서 하나님 없이 우리가 살 수 없어요 하고 진실되게 고백할 때 주님은 우리를 어디로 초대했느냐 하면 노래할 지어다
 
하나님을 찬미하는 하나님에 대하는 새로운 역사에 대한 찬미로 우리를 불러 주셨고 지난날에는 화를 당하기는 내가 너희 가운데 함께 있어 주겠다고 약속하여 주심으로 그 노래사 근거 없는 희망의 노래가 아니라 근거 있는 노래가 되었고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신 전능자이신 하나님이 우리로 인하여 기뻐하신다
 
공동 번역으로 이야기 하면 더덩실 춤을 추시리라 하나님의 모습을 성경에 이런 이미지가 있을까 싶지요 하나님의 기쁨 그 타락한 백성들이 회복되었을 때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이것이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서 목자가 목에 메고 돌아와서 너무 기쁜 나머지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하는 것 같은 그런 분위를 보여 주고 있지요
 
오늘 우리 스바냐서의 결론은 이 이야기입니다 너무 늦은 때는 없다 새로운 시작이란 언제나 가능하다 우리의 죄가 주홍빛 보다 붉을 지라도 지난 날 우리들이 저질렀던 혹히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에 있언 상처가 어떠하든지 정말 그것을 아파하고 하나님 앞에 새로운 삶을 우리가 꿈꾼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그러한 시작을 기뻐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시고 우리와 더불어 이루어갈 새로운 미래를 예비해 주신다 그런 존재로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스바냐서는 이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어요 우리의 삶이 제 아무리 고통스럽다고 해도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하면 고통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고 약속하신 세계를 우리의 삶으로 선취하는 복된 삶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는 삶입니다.







































하박국(포옹)



7월 17일(토)
사납고 성급한 백성(하박국 1:6)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하박국 1:1∼17 
♦ 묵상을 위한 주제 : 사납고 성급한 백성(6절)
♦ 성구 :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性急)한 백성(百姓) 곧 땅의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所有) 아닌 거(居)할 곳들을 점령(占領)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하박국”이란 이름은 “포옹하는 자” 또는 “포옹 받는 자”라는 뜻입니다.
기원전 612년 앗수르 제국은 바벨론과 메대바사 연합군에 의해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대략 500년 동안 왕성하고 견고하던 앗수르 제국이 무너진 후 선지자 하박국은 유다 왕국을 침략하는 바벨론에 대해서 예언합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는 유다의 16대 왕 요시야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하나님

유다 왕국은 바벨론으로부터 여러 차례(1차, 2차, 3차) 침략을 받고 결국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하박국은 세 장으로 구성 되었으며 선지자의 질문과 하나님의 대답이 2번 반복되었으며 선지자가 찬양의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1장은 선지자의 첫 번째 질문과 하나님의 첫 번째 대답 그리고 선지자의 2번째 질문에 대해 증거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첫 번째 질문(1:1∼4)

하나님의 첫 번째 대답(1:5∼11)

하박국 선지자의 두 번째 질문(1:12∼17)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던 유다 나라는 극심한 혼란 속에 있었습니다.  

유다의 16번째 요시야 왕은 나라를 말씀으로 세우려고 애를 썼던 왕이었습니다. 

마침 앗수르 제국과 애급 사이에 갈그미스 전투가 있었는데 요시야는 앗수르 제국 편에 서서 애급 왕 바로느고의 진군을 막다가 므깃도에서 전사했습니다.
그 이후 유다는 애급의 세력에 휘말려 위기 속에 있었습니다. 애급 왕은 유다의 왕의 이름을 마음대로 바꾸었고 애급이 원하는 사람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이와 같은 혼란 속에서 유다 백성들은 힘이 최고라고 생각하여 많이 가진 사람이 적게 가진 사람을 착취하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을 짓눌렀습니다. 온 나라가 힘의 논리에 빠져 있었습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가진 자가 없는 자를 짓누르고 학대할 때 하나님은 사납고 성급한 갈대아 사람을 일으켜 유다 백성들을 깨우치려고 하셨습니다.

깨달아야 할 때에 깨닫지 못하면 재앙과 징계를 받아야만 바로 설 수 있는 기회를 찾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앙을 통과한 후에 깨닫는 어리석음 보다는 재앙이 임하기 전에 먼저 깨닫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는 생각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라고 합니다.

오늘 받아야 할 은혜를 내일로 미루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 오늘 받아야 할 은혜를 반드시 오늘 회복하는 지혜로운 사람으로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 찬양 / 여러 해 동안 주 떠나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묵상 주제 / 사납고 성급한 백성
하박국 1:6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의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 아닌 거할 곳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아멘 





하박국 선지자를 이스라엘의 철학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유다보다 더 악한 나라 바벨론을 사용하여 유다를 징계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문 때문에 선지자는 주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달합니다.
그러나 하박국 선지자는 오히려 하나님에게 질문을 합니다.

"왜 우상을 숭배하는 바벨론을 사용하여 유다를 공격하게 하십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지만 하나님은 하박국에게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선지자 하박국의 결론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라고 고백합니다.

당시 유다 나라는 16대 선한 왕 요시아에 의해서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율법책을 찾아내어 백성들에게 잊혀졌던 말씀을 읽어주며 모든 백성들이 그 말씀에 귀를 기우렸던 신앙의 전성기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요시야 왕은 갈그미스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백성들은 요시야 왕의 둘째 아들 "여호아하스"를 17대 왕을 추대했습니다.
그런데 애급 왕 느고가 여호아하스를 싫어하여 첫째 아들 "여호야김"을 18대 왕으로 임명했습니다.
유다 나라의 주권이 애급 왕에 의해서 결정되는 안타까운 시대이었습니다. 
18대 왕 "여호야 김"은 애급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백성들은 앗수를 무너트린 신흥강국 바벨론을 의지하는 것이 더 좋다고 합니다.
이때 선지자 예레미야는 바벨론을 의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예언합니다.
왕은 애급을 의지하려 하고, 백성들과 선지자 예레미야는 오히려 바벨론을 의지하는 것이 좋은 길이라고 합니다.
사치와 향락을 좋아하던 여호야 김 왕은 애급에게 조공을 바치려고 많은 세금을 거둬드립니다.
점점 민심이 흉흉한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때에 하박국 선지자는 왜 하나님은 바벨론을 막대기로 사용하여 유다를 징계하시느냐 하며 끈질기게 질문합니다.

하박국 1:1-2  
선지자 하박국의 묵시로 받은 경고라.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강포란 히브리어는 "하마스" 라고 합니다.
'하마스'는 "자기 동료를 해칠정도로 아주 도덕적으로 아주 타락한 상태를 말합니다(창세기 6:11).

때에 온 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에 충만한지라.

선지자 하박국은 여호와 하나님에게 끊임없이 간구하고 부르짖습니다.
언제까지 이 백성들을 이렇게 버려두시렵니까?

하박국 1:3-4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

유다의 18대 왕 여호야 김과 백성들은 여전히 자기들의 삶에 도취되어 버렸습니다.
선지자 하박국만 부르짖고 항변합니다.
이때 하나님은 갈대아 사람 사납고 성급한 사람들을 일으켜 유다를 징계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박국 1:6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의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 아닌 거할 곳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바벨론을 일으켜 유다를 징계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레미야도 이미 이와 같은 일을 예언했습니다. 

이제 우리 역사 현장으로 눈을 돌려봅시다.
한국 사회는 지금 어떻습니까?

실험실에서 개구리를 실험용으로 사용할 때 처음부터 찬물에 개구리를 넣고 천천히 물의 온도를 높이면 개구리는 그 안에서 죽어간다고 합니다. 서서히 잘못된 사상에 붙잡힌 전교조와 민주노총의 운동으로 거대한 조직이 형성되었습니다.

민주노총의 조합원이 100만명이라고 합니다.
조합원은 의무적으로 월급에서 매월 5만원을 조합원 회비로 선납한다고 합니다.
회사에서 조합원들의 봉급을 지불할 때 아예 조합비를 떼고 지출하면 조합비를 노조 사무실로 보낸다고 합니다.
여러분 민주노총 조합원 회비가 매월 500억이란 예산입니다. 
일년에 1년 6천억이란 조합비를 갖고 운영합니다.
예산을 확보했기 때문에 돈으로 할 수 있는 온갖 일을 계획합니다.

8월 15일 민주노총에서 한미동맹을 반대하는 집회를 준비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민주노총에서 사용하는 용어가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한미연합훈련을 한미전쟁연습이라고 하여 반대합니다.
그런데 북한에서 사용하는 용어가 한미전쟁연습을 즉각 중단하라!는 것입니다.
 



제 1강 하박국 1: 1-11 율법이 해이해진 세상


성경가운데 제일 좋아하는 성경이 무엇이어요 하박국입니다 왜요 하박국이 안아주다라는 표현을 가지고 있거든요 하박국에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구절이 좋습니다
 
우리가 추수 감사 주일에 본문으로 많이 택해지는 구절이지요
하박국 3장 17-18절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박국은 포옹하다 안아주다 꺼안는 자 그런 뜻도 있지만 시름하다 그런 뜻도 있지요
하박국 선지자가 대게 살았던 것은 지난주까지 공부했던 나훔서의 배경이 되었던 것은 앗시리아라는 나라인데 앗시리아라가 비시 612년에 멸망당하거든요
 
그리고 등장한 새로운 제국이 바벨론입니다 바벨론인데 그 무력에 활동한 선지자로 보여져요 어떻던 제국의 틈 바구니에 있었던 사람들 힘 겨운 상황에 있었던 것으로 봅니다 보면 위대한 문화적 유산이라는 게 아주 평안한 시절에 만들어 지지 않아요
 
그리스에도 그리스하면 떠 오르는 유적들이 어떤 것들이 있지요 파르테논 신전이든지 유명하지요 비시 479년 그것이 만들어진 때가 아주 평화로운 시기가 아닙니다 도시 국가들의 전쟁이 심할 띠이고 또 레르시아와의 전쟁이 벌어지고 그 때 아름다운 유산들이 만들어 지는데 그러니까 유형적인 유산도 만들어 지지만 그리스에서는 무형 유산들이 만들어 지거든요
 
그리스의 비극 작가들이 그 때 다 등장해요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이런 위대핝 비극 작가들이 등장하는 데 그게 다 어려운 시절입니다 곤고한 시절입니다 인간의 위대함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가장 난감할 때 가장 위대한 문화를 꽃 피어낸다는 대 있습니다 인간성의 위대라고 볼 수 있어요
 
앗시리아 나라에 괴롭힘을 당하던 나라들이 앗시리아가 망하니까 평안해지겠다고 생각하지만 또 다른 제국이 등장해 가지고 괴롭히는 것이어요 계속 그런 일들이 그러면 약소 민족들은 다 사그라져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제국들은 사라졌지만 약소민족들은 살아 남은 민족들이 있어요 특히 어떤 나라들이냐하면 정신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그래서 함석헌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 고난 받는 종의 노래가 있지요
 
이사야 52:13-53:12 고난 받는 종의 노래가 있는데 이런 노래를 만들 수 있는 민족 가장 위대한 정신의 높이를 보여 주는 것 성경은 그런 위대함을 보여 주어요 예언서가 그렇거든요 우리가 예언서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점점 그것을 배워가면 좋겠어요
 
하박국 1장 1절부터 11절까지 공부하겠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평화가 없지요 언제나 갈등이 있는 세상입니다
중국의 작가인 라오서라고 하는 분이 로토시앙스라는 책을 썼는데 그 책에 하나의 에피쇼드가 등장합니다 어떤 에피쇼드냐 이런 것이지요 하늘은 선인과 악인을 가르지 않고 해와 비를 골고루 내려 주지요 성경에도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작가적 상상력을 가지고 작가가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공정치 않기 때문에 해와 비는 사람들의 삶을 굴곡지게 만든다는 것이어요
 
어떤 이야기냐 하면 똑 같은 조건이라도 시인 묵객들은 이슬 빛 아름다움을 이야기 하지만 하루 벌어 먹는 사람은 하루 살아가는 사람을 보여 주지요 특별히 예언자라는 사람들은 보는 사람들입니다
이사야 52 : 13-53: 11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바라보다 보면 우울해지요
특별히 예언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보는 사람들입니다 무엇을 보느냐 하면 현실을 꽤 뚫어 보는 사람들이지요 현실을 쾌 뚫어 보면서 어떤 화가의 그림을 본 적이 있는데 백산 그림이었어요
 
오랫동안 다니면서 산을 그려요 굉장히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어요 무엇을 발견했느냐 초기에 산에 갔을 때 이 분은 춘하추동에 산 빛을 그려 냅니다 봄에는 연두입들이 솟아나오고 여름에는 무성하게 가을이 되면 물들고 겨울이 되면 쓸쓸하게 되는 춘하추동을 그려요
 
어떤 때 올라갔느냐에 따라 다르게 그려요 상당히 오랜 세월동안 그림을 그리다 보니까 후기로 갈수록 춘하추동을 안 그려요 그리고 산들에서 나무도 다 제거하고 산 속에 바위에 굴국 같은 것들을 들어내요
 
이전에도 무엇을 보았느냐 하면 눈에 보이는 것을 보았어요 그런데 이후로 가면서 자꾸 산을 보다 보니까 무엇이 보이기 시작했느냐 하면 산을 이루고 있는 골격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어요 이것이 발전이다고 볼 수 있겠지요 사람은 보는게 달라지는 것이지요
 
마그로스코라는 화가가 있습니다 마그로스코라는 그림을 보면 까만 판넬이어요 이게 무슨 그림이야 생각이 드는 것이어요 그런데 그 판넬 앞에 사람들이 앉아서 명상을 해요 왜 그럴까요 눈앞에 아름다운 형태가 있으면 우리가 형태에 집중을 해요
 
아무런 형태가 없으면 무엇을 보는 것이지 유심히 보고 있다 보면 내가 보여요 내 마음이 보여요 마크로스의 그림은 바로 그런 것을 우리에게 이야기 하지요 그렇게 유심히 보다 보면 검은 색으로만 칠해 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어요 붉은 색도 있고 푸른 색도 나타나고 그러면서 어둠 속에서 밝음이 어떻게 베어나온지를 보여 주어요
 
이 그림이 위대한 작품이 되는데 예언자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옳다 그르다 보기 보다는 그들을 그런 상황 속에 몰아간 구조적 문제가 무엇인지 보는 자여요 예언자는 어떤 자라고 하나님의 분노를 느끼는 자이어요
 
불의한 현실에 대해서 하나님의 불의한 분노를 느끼는 자들이어요 하박국은 분노가 많아요 이 세상이 왜 이 지경인 것이야 세상이 왜 이 모양이야 그런 질문입니다 하박국은 하나님 에게 막 질문을 해요
 
하나님 이러시면 안 되지 않아요 세상이 왜 이래요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그래서 하박국의 구성은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에 대한 하박국의 질문과 하박국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이게 굉장히 재미 있는 구성인데요 그 응답은 이 불의한 현실을 하나님은 지속되게 하지 않으실 것이다 불의는 끝장이 나기 마련이고 하나님이 그런 불의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 하는 이야기이지요
 
그리고 나니까 하박국이 하나님 안에서 자기 마음속에 질서가 생겨나게 되자 하박국은 기도를 하게 되지요 하나님 이런 세상을 이루어 주세요 하박국의 구성은 하나님을 향한 질문 질문에 대한 응답 하박국의 구원에 대한 간구와 기도 이렇게 구성되어 있는게 하박국의 구조라고 볼 수 있습니다
 
1절 선지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경고라 하고 말합니다
이 경고라는 것은 대게 이방 나라에 대한 경고에 사용되는 단어이요 앗사라고 하는 단어가 떼때로 이스라엘 백성들 자신을 향한 메시지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이 때는 내부적 문제로 본 것인데요
 
묵시로 받은 경고라 묵시라는 것은 무엇이어요 모든 사람에게 공표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 보여 주실 사람에게 보여 주신 것이지요 그렇게 경고를 들었다
 
어떤 경고인가
2절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이니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사뭇 시비조입니다 하나님 무엇하시는 것이어요 이런 내가 부르짖어도 주님께서 듣지 아니하십니다
 
사실 성서에서 소개되고 있는 하나님은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분이시거든요 히브리 사람들이 강제 노역에 시달려서 신음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들으셨거든요 또 하갈이 사라에게 쫓겨나서 광야에서 울고 있을 때 하갈을 찾아 오시거든요
 
그 눈물 울음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의 주특기는 듣는 것이어요 세상의 소리를 듣는 게 들음이 하나님의 특기인데 하박국은 현실을 바라보면서 너무 답답한데 하나님이 안 들은 것 처럼 보여요 부르짖어도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 하시니이가 고통과 재앙의 상황속에서 지금 외치는 것이어요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듣지 아니하시니이다 강포라고 번역된 단어 하마스는 이웃에게 행하는 이웃에게 폭력을 행하는 일이 일상이 괴고 있는 세상이지요 마치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처럼 아합과 이세벨이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것처럼 또 다윗도 우리야의 아내를 취하기 위해 우리아를 죽음으로 내 모든 이 모든 것들이 하마스 강포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이 당에서 자행되고 있는 하마스들이 제법 많이 있지요 그러니까 우리나라 말 가운데 외국에서 우리 말 발음으로 쓰는 단어들이 몇 개 있거든요 영어 단어 통성기도 이런 것 우리나라에만 있는 기도이기 때문에 사실은 한국인들이 영향을 미쳐서 미국에 있는 기독교인들도 어떤 모임에서는 통성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소리내서 통성기도 통성 프레야 그 다음에 어떤 것들이 있느냐 하면 그 다음에 부끄러운 단어들인데 재벌 그 다음에 갑질 그러니까 다른 나라 말로 어떻게 표현이 안 되는 한국적 현상이어요 이게 우리나라에만 있는 일은 아니겠지만 유난히 우리에게 심한 것 왜냐하면 우리가 약자들에 대한 존중이 너무 없어졌어 경제 발전하는 것을 지향하기에 인간성이 낮아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존중하는 법들을 잘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힘이 있고 돈이 있으면 함부로 대하는 일상이 된 백화점에서 누구 무픞을 꿇는다는둥 이런 소리 듣지 않아요 화가 나지 않아요 왜 거절하지 못하나 이렇게 함부로 이야기 할 수 없는 게 생존이 걸려 있기에 저항하지 못한 사람이 많아요
 
어떤 경우 보면 교장 선생님이 교사에세 손바닥 내 놓으라고 하고 때렸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학생들 가르치는 교사들에게 제일 중요한 게 존엄이지 않아요 손 될 때 떨치고 나서 이것이 아니다고 할 수 있어야 하는 데 내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 앞에 한 없이 약해지는 인간의 모습 고통 스러운데 하마스가 너무 많은데 이런 강포함이 우리가 이웃에게 강포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폭력이지만 어떤 폭력이냐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대한 노골적인 반역입니디
 
왜 하나님은 어떻게 인간을 지으셨느냐 하면 어떻게 하와를 만들었는가 하면 아담 잠들게 하고 갈비뼈로 하와를 만들었어요
 
창세기 2장 22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 이끌어 오시니
 
성서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인간론의 핵심이라는 것은 갈비뼈를 만들었다는 것은 우리는 서로에게 속한 존재라는 것이어요 너 없이는 내가 없다 이게 성서가 우리에게 보여준 인간론의 핵심이어요 그러니까 내가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너도 행복해 져야돼 이것이 창조 질서여요
 
누군가에게 폭력을 가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 질서를 위배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강포가 넘치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부르짖고 있는데 여기 하나님이 구원하지 않는 것 처럼 보인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하박국의 투덜거림이 계속됩니다
3절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죄악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거스리는 반역행위입니다 패역은 다른 사람들에게 끼치는 해악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게 짓는 죄와 우리 이웃들에게 짓는 죄가 넘쳐요 이게 하박국의 눈에 보여요
 
예언자이기 때문에 이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는 것 처럼 보여요 현실이 이러한 것은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은 것처럼 보여요 이것을 보지 않았다고 하면 무엇이냐 하면 이것을 보지 예언자는 구조적인 문제를 본자의 고독함이 있어요
 
겁탈과 강포가 넘친다고 이야기 하는데 겁탈이라는 것이 성적인 문제만 아이고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누군가를 무력화 시키는 것들이 겁탈이어요 강포라고 하는 것이 폭력으로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지요 힘이 정의로 여겨지고 있는 세상이다는 말이지요
 
프라톤의 국가 정체라는 책에서 소크라 테스하고 대화를 나누는 이야기 하는 것이어요 정의란 강자의 편익이다 그렇게 말합니다 이게 외곡된 세상의 모습이지요 그러니까 강자가 자기 좋을 대로 하는 게 정의처럼 인식되는 것이어요 그것은 하나민의 정의가 아니거든요
 
우리의 현실은 강자들이 하는 것이 옳은 것처럼 오히려 구조화 되어 있단 말이지요 이런 정의와 공의는 이것이 세상이다고 이야기 할 때 하나님이 이 세상을 두가지의 질서 위에 세우셨는데 타원형에는 초점이 두 개가 있지요
 
원은 하나이지만 중심을 두 개인데 하나는 정의이고 하나는 공의인데 겁탈과 강포라고 하는 것은 정확히 역상이어요 이것을 뒤집은 것이어요 정의와 공의를 뒤집은 게 그러니까 하나님이 원래 세운 일들이 이렇게 벌어지고 있어요
 
하박국이 보기에는 지금 하나님이 그런 세상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사회 분위가 변론과 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변론과 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대게 일상에서 이런 다툼들이 벌어지는데 법이라고 하는 게 법이라고 하는 게 이런 세상 속에서는 법이라고 하는 게 올바로 집행이 되어야 하지요
 
이 법이라는 글자를 어떤 짐승이 있었다는 데 그 짐승이 죄 지은 사람을 물로 몰아 넣을 때 뿔로 박아 가지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물이 흐르는 것 처럼 자연스러운 것이 법이다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는 데 어떻게 보면 그 짐승이 죄 지은 사람을 뿔로 받아서 물로 보낸것이 맞은 것 같은데 법이라고 하는 게 옳게 집행이 되어야 하는데 법도 늘 강자들이 법을 독점을 하고 이렇게 되었을 때 겁탈과 강포가 넘치는 세상에서 사회적인 약자들이 속절 없이 유린 당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 된다고요
 
그것이 4절이 요약을 했어요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외워 앃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 짐이니이다
 
율법이 해이해 졌다는 이야기는 무엇이지요 하나님이 당신의 삶의 원리로 주셨던 그 하나님의 법이 이제 작동되지 않게 된다 힘이 없어졌어 율법이 율법이라고 하는 게 율법의 핵심을 출애굽기에 등장하고 있는 율법의 핵심을 어떤 분이 한 마디로 요약을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가난한 이에 대한 우선적 관심 여기에서 가난하다는 말은 물질적인 가난함만 말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권리를 누리지 못한 사람들 또 이 때에 가난함이란 제도의 보호를 받지 못한 자든지 나그네가 되었기에 소외 계층을 이야기 하는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관심이어요
 
그래서 성경은 율법이라고 하는게 항상 힘 있는 사람들이 힘 없는 사람들을 배려해 주고 어떻게 가야하는 지를 일깨워 주고 있어요 이것을 지킬 때 생명이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겁탈과 강포가 넘치는 세상에서는 율법이 해이해 졌다 더 작동되지 않는다
 
그 결과 정의가 시행되지 않는다 이런 세상에서는 악인이 의인을 외워싸고 있고 의인들이 그래서 기를 펴지 못한다 이런 상황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것이 위헌 심사를 받았나 그렇게 알고 있는데 장발장 법이라는 것 들어보셨나요 장발장 법 장발장이 무엇인지는 아시지요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사람이 있어요 빵을 훔쳤다가 감옥 갔다 나온 사람이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사소한 문제 죄인데 내가 무엇인가 누군가의 것을 훔치었어 먹든지 그랬어요 동일한 범죄를 또 저질렀을 때는 가중처벌하는 것이 장발장 법입니다 어떻게 보면 가중 처벌하는 것이 맞을 수도 있겠다 늘 옳은 지는 의문의 소지가 있습니다
 
사실 2011년에 이탈리아에서 한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로만 오스트리아 호프라는 사람이 슈퍼 마켓에서 치즈하고 쇼세지를 훔치다가 체포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훔친 치즈와 소시지는 4.07 유로 정도 요즈음 돈으로 하면 7천원 정도 이 정도를 훔쳤어요
 
그래서 체포당해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재판이 무려 5년 동안이나 갔어요 대법원에서 결국 무죄 선고를 합니다 이 사람은 훔친 것은 분명한데 왜냐 하면 그의 행위 자체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 그가 그런 행위를 할 수 밖에 없던 배경에 초점을 맞추어서 판결을 했어요
 
대법원이 한 이야기가 이런 이야기 입니다 노숙자가 영양 섭취라는 필수요건을 충족하기 위해서 소량의 음식을 품친 것은 범죄 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데 먹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있었기에 피고의 행위에는 불가피성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이런 정신이 부합되는 것이어요
 
그런데 하박국의 시대는 이런 정신이 전혀 시행되지 않은 것 처럼 보였다 악인이 의인을 외워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보여지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로 인해 하박국은 분노합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시행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보면 세상이 살만한 것은 무엇이냐 이렇게 분노한 사람들이 있을 때입니다 이런 분노 세상이 이렇게 가면 안 되지 않아 대 부분의 우리는 어떻게 하고 살지요 세상이 뭐 그러러니 하고 그것을 제일 좋아하는 것이 누구일까요? 사탄이지요 그렇지요
 
그래서 중요한 게 불의한 현실에 눈을 감으면 안 돼 불의에 대해서 종교적 아르바이를 제공해서도 안 되어요 우리가 교회에서 잃어 버린 것이 무엇이냐 불의에 대해 분노할 줄 아는 것을 잃어 버렸다 우리끼리 이렇게 예수 잘 믿고 복 받고 이렇게 사는 데 성서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함께 살고 있는 세상에서 하나님이 함께 살라고 지어준 이웃들이 인권을 누리지 못하고 산다든지 불의의 희생자가 되고 있을 때 교회의 존재 이유는 분노하는 데 있어요
 
이헣게 하면 안 돼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 오늘의 교회가 잃어 버린 것이 있다면 그런 분노 그 분노에는 한 마디를 덧 붙일 수 있습니다 거룩한 분노 그러니까 누구를 미워하기 때문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신이 왜곡되고 있는 세상을 보고 분노하는 것이 거룩한 분노인데 이것을 잃어 버렸기에 개신교는 힘을 잃어 버리고 있다 세상 사람들에게 비웃음 거리가 되고 있다
 
왜냐하면 스스로를 정화하지 못하는 집단 처럼 보이고 있다는 말이어요 이게 속상한 것이지요
 
5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여러 나라를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놀랄지어다 너희의 생전에 내가 한가지 일을 행할 것이라 누가 너희에게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
 
하박국이 이렇게 질문을 했지 않아요 하나님은 언제까지 참으시겠습니까?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너희 생각에 내가 행할 것인데 너희가 믿을 수 없는 일일 것이야 6절부터 이야기 합니다
6절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이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가 아닌 거처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한 백성을 일으켜 세울 것이어요 성경에서 보라라고 하는 단어는 잘 보세요 그런 이야기가 아니어요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반드시 일어날 일을 이야기 할 때 그 급박함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 쓰는 단어이어요
 
보라 이 일이 급박하게 일어날 것이어요 그래서 결국 한 백성이 일어날 터인데 그들은 사납고 성급해 어떤 일입니까? 지체하지 않고 성급해 그들은 자기 소유가 아닌 갈대아 사람들 넓은 곳으로 다녀 무엇 정말 주저하지 않고 마치 쓰나미가 몰려오는 것 처럼 그들의 기세가 그렇게 무섭게 나타날 것이어요
 
7절 그들은 무서우며 당당함과 위엄이 자기에게서 나오며
어떤 이야기입니까? 남의 눈치를 보거나 조언을 듣거나 그것이 아니어요 스스로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야 그런데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일으킨다는 것이어요
 
왜냐하면 불의한 세상을 징계하기 위해서 그런 이를 일으키신다 하고 말합니다 이것은 압도적인 무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세상을 다 파괴할 것 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질서 아래 있는 것이어요
 
9절 그들은 다 강포를 행하러 오는 데 앞으로 나아가며 사람을 사로 잡으러 나아오기를 모래 같이 많이 할 것요
 
강포를 행하러 온다는 말은 강포한 세상을 징취하기 위해서 온다 말할 수 있어요 하박국이 보고 있는 그 사회는 겁탈과 강포가 넘치고 있는 세상이어요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한 민족을 일으켜 세웠고 그들이 와서 강포를 징취하기 위해 강포를 들고 온 것이야
 
무서운 현실이지요 그 기세가 당당합니다 그래서 왕들을 멸시합니다 방백을 조소합니다 모든 견고한 성들을 비웃고 흉벽을 샇아 그것을 점령할 것이다 아무리 강력한 성도 무너지게 된다
 
하나님의 심판이 바벨론의 등장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달라요 원하지 않았는데 바벨론이 와서 우리 당하게 되었어 이것과 우리가 자체내에 가지고 있는 불의함 이것을 해결하여야 하는데 하나님이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의 섭리 아래서 보고 있기 때문에
 
11절 그들은 자기들의 힘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는 자들이라 이에 바람 같이 급히 몰아 지나치게 행하여 범죄하리라
 
이것은 애매한 구절이기는 합니다 두 가지의 번역이 있는데요
먼저 가돌릭 성경은 그러나 제 힘을 하나님처럼 여겨 죄를 지은 자들 그들은 바람처럼 지나가 사라지리라 라고 이야기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선택박은 바벨로니아가 결국은 지나치게 자기를 믿었기 때문에 결국은 사라질 것이다
 
새번역은 그러나 제 힘이 하나님이라고 여기는 이 죄인들도 마침네 바람처럼 사라져서 없어질 것이다
 
여기 불의가 있어 불의한 세상이야 이것을 징계하기 위해서 바벨론을 세우셨어요 여기를 쳐 이제 심판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바벨론은 자기들의 한계가 무엇인지 몰랐어 스스로를 신으로 여겨요 힘을 신으로 숭상하는 자들이어요
 
그들의 결국이 어떻게 된다고요 바람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들이 가장 강력하다 할지라도 결국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이게 예언자들이 보여주고 있는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현실이 있고 압도적인 무력을 가진 자들이 있는데 어떻게 어떻게 하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도 때가 되면 스러질 수 밖에 없어요 해가 떠오르면 스러지는 이슬처럼 이것도 아무것도 아니야
 
하박국서가 지금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어떤 경우이든 힘을 정의로 여기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징계의 도구로 선택 받은 자들이 지나치게 자고할 경우에 그들 또한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하는 비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언자는 꽤 뚫어 보는 사람인데 하박국은 그렇게 깨 둟어 보면서 우리에게 어떻게 살 것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정 반대로 역상으로 우리가 생각해야 하겠지요 우리가 심판을 면하기 위해서는 정의와 공의를 이것을 추구하지 않는 신앙 생활이라는 게 공허한 생활이어요 나의 욕망 여러분 늘 하는 이야기이지만 인간은 욕망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인간 속에는 결핍이 있기에 욕망이 있는 것이어요 무엇인가 결핍이라고 하는 것은 채워 지기를 원합니다 인간의 욕망의 특생이라는 게 만족이 없어요 이 결핍 때문에 욕망이 발생하는 데 여기에는 만족이 없어요 찰 만자가 없어요
 
차지를 않아 그러니까 영원한 결핍 속에 살게 되는 것이어요 인간이 결핍 되어 있기 때문 채워야 하니까 욕망은 늘 배타적이야 다른 사람과 무엇인가 나눌 수 없어요 욕망은 배타적이라는 이야기는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는 저 사람이 없어져야 돼 그래서 폭력적이 되어요 갈등이 생겨나고 정의와 공의를 추구한다는 것은 나의 채워 지지 않은 결핍이 있으냐 이 결핍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의 결핍이 더 큰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나는 그만 해도 되어요 저 사람에게 주세요 정의와 공의여요
 
이 땅에 기독교인들이 존재하는 까닭은 무엇이냐 하면 욕망을 우리의 삶의 중심으로 살지 않고 오히려 욕망이 아니라 누군가를 돌보고 섬기고 나누는 삶이 언제나 유쾌하고 행복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어야
 
신앙의 보람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데 있다 새로운 삶의 분위기를 만들어 지고 있는 것이지요 한국 교회가 새로워 져야 되는 것이 그 지점을 향해 나갈 때 새로워 질것이다 봅니다.


제 2강 하박국 1:12-2: 3 악인이 득세한 세상

성경을 공부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할는 이런 것을 배우기도 하지요 사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데 성경은 상당히 오래전에 만들어 졌어요 과거의 것이지만 오늘의 우리에게 의미가 있기 때문에에 우리가 보지요
 
스웨덴의 언어학자인 헬레나 호지라는 분이 있는데 오래된 미래라는 책이 있습니다 미래라는 것이 가까운 미래도 아니고 오래된 미래라고 말합니다 사실 앞으로 미래의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되는지의 지혜를 과거로부터 배워야한다 그 제목속에 담겨있는 뜻인가 싶어요
 
언어를 연구하기 위해서 라다크라는 인도의 북부에 있는 마을을 찾아 갑니다 그 곳에서 돈에 오염되지 않은 사람의 아름다운 삶을 발견을 해요 평화로운 곳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분쟁이 많지 안항요 안식 없는 세상에 살고 있는데 라다크 마을은 너무 평화로운 것이어요
 
평화로운 것이 무엇일까 보니까 돈이 지배를 안 해서 그래서 그 마을 사람들에게 가장 큰 욕이 무엇인지 아니요 우리 어릴 때 친구들하고 싸우다가 욕 배트를 하거든요 그러다가 최종적인 싸움 결론이 무엇인가 하면 부모님 들먹이면 그 다음에는 욱박지르지요 그렇다가 거기 건드리면 안 되는 기억이 나는데
 
라라크 사람들에게 가장 큰 욕은 무엇이냐 하면 저 사람은 화를 잘 내는 사람이다 와 잘 내는 사람이다 욕이어요 그것처럼 모욕적인 말이 없어요 그 말은 무엇이어요 그 마을 사람들이 화를 잘 안 내는 것이어요
 
화 내지 않는다는 것은 화 낼 일이 없기도 하겠지만 문화의 풍토가 그렇기도 하지요
우리는 화 낼 준비를 다하고 삽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 화 낼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어요 건드리기만 해봐 가만 안 잇을 것이야 이런 태도로 우리가 살아요
 
우리 사회가 그만큼 경직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의 세상은 그런 세상은 아닙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세계가 있는 것이지요 잃어버린 세계로 우리가 돌아가는 연습을 해야 하는데 그렇기 위해서 하나님의 눈으로 이웃들을 바라볼 수 잇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항상 내 누군가를 판단을 합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판단이 되는 순간 불쾌해요 대게의 경우가 우리는 습관적으로 누구를 판단하고 발설하기도 합니다 그것 때문에 평화가 깨지기도 하지요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그렇게 그렇게 판단하는 사람들이 자기보다 약자라고 생각하기에 판단하는 데 그런 이들이 사회적 불의에 대해서 굳게 입을 다물고 왜냐하면 그것은 나에게 손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지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타자의 약점은 감싸주되 세상을 어지럽게 만드는 불의에 대해서는 아니요라고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한단 말이어요 이것이 예언자들이 보여주는 세계이고 우리가 지난주부터 하박국을 시작했습니다마는 하박국의 뜻이 안아주다 포옹하다 씨름하다 이런 뜻인데 그 이름 뜻과는 달리 어떻게 보면 하박국은 무엇인가 불만을 제기합니다
 
하나님 세상은 이러지 안 되지 안되지 않아요 내 질문하겠습니다 대답해 주세요 그래요
하박국이 첫 번째 호소햇던 내용은 인간이 부르짖는데도 듣지 않은 현실이었습니다 패역한 세상 때문에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은것입니다
 
하박국에 첫 번째 호소했던 내용은 하나님이 인간이 부르짖는 대도 듣지 않은 것입니다
패역한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악행을 심판하기 위하여 오실 것이고 그들을 심판의 도구로 역할을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1장 6절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이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가 아닌 거처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들을 일으켰나니
 
심판의 도구로 세움 받은 그 민족이 과도한 폭력에 치우심으로 그도 또한 바람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고 이야기 했는데 하박국이 두 번째로 질문을 한 것이지요
 
하박국이 질문을 제기 할 때 하나님에 대한 그의 인식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12절 선지자가 이르되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하신이요 주께서 만세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가 사망이 이르지 아니하더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그들을 두셨나이다 반석이시여 주께서 경계하기 위하여 그들을 세우셨나이다
 
하나님을 표현할 때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하신이요 하고 말합니다
거룩함은 구별되었다 그런 뜻이기도 하지요 구별되었어요 세상에 속된 것들과 구별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그 다음에 만세전부터 계신 분
여기 계시다고 이야기하는데 이분이 있다하고 이야기하지요 재미나는 게 영어에 비 동사가 있는데 비 동사는 번역을 한번 해 보세요 아이 엠 나는 있습니다 보어가 없으니까 있다는 뜻이지요 처음에는
 
아이 엠 어 보이 보어가 있다 나는 소년입니다 이다이지요 나는 존재합니다 하는 이야기이고 나는 이다이지요 존재 그 자체와 무엇 무엇이다라고 하는 서술어가 비 동사 속에 함께 들어있어요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말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은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존재하는 동시에 다른 것들을 있게 하는 존재이십니다 하나님은 만세 전부터 계시는 분이다는 말은 하나남은 오래된 분이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말도 있지만 그 말은 만세전부터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존재하도록 만드신 분이셔요
 
존재 그 자체이면서 동시에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나오도록 하신 창조주라고 하기도 합니다 창조주 이 표현 속에 담겨 있는 의미가 이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으로 유래 되었다고 한다면 그 세계는 선한 세계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지요 거룩하고 만세전부터 계셔서 세상에 모든 것들을 선하게 창조하시고 또 유지하시는 분 아니십니까? 이 말쏙에 담겨져 있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런데 세상은 왜 이래요
 
하나님은 이런 분이지지 않아요 그런데 세상이 이 모양이지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2절 우리가 사망이 이르지 아니하리라 이런 하나님을 의지하고 산다고 할 때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않다고 하는 데 나의 있음이 유지될 것이아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라 이런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데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데 그리고 말합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그들을 두셨나이다 여기에서 그들은 1장에서 이야기 한 갈대아 인들입니다 심판의 도구로 선택받은 나라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하기 위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심판하기 위해서
둘째는 경계하기 위해서 경계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을 세웠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박국은 그것을 인정 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자로 세웠다는 사실을 그런데 심판자가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이냐 하면 없에 버리는 것이 아니고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도록 경계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 일을 위해 세워졌는데 여기가 심판자로 세웟다고 세웠다고 이야기 함으로 세움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스스로가 존재한 것이 아니라 갈대아 사람들의 일어남은 누구를 통해서입니까? 하나님이 세우셨기 때문에 그들이 선 것이어요
 
그들이 압도적인 무력을 가지고 세상을 심판한 것 처럼 보여도 사실은 그들은 하나님의 손에 들려 있는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둘을 열결 짓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반석이시다 반석이시오 그렇게 말하지요
 
반석이시오 반석이신 주님 반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수렁 속에 빠져 들 때 반석위에 세워주시는 어떤 은총의 존재를 심판이라고 어두운 심연 고통이라고 하는 어두운 심연 그 때도 그 백성을 반석위에 심판과 경계에 고통과 불확실성 속에서도 하나님은 반석이 되어서 그 백성들을 버리지 아니하시는 이 말속에 담겨져 있는 의미가 이렇게 복합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13절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심으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를 방관하시면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 대도 잠잠하시나이까
 
여러분 하나님에 대한 불만이기도 하지만 검사가 마치 재판관 앞에서 하나님을 피고로 삼아서 논고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눈이 정결하신 분이십니다 다시 말하면 눈이 맑은 분이셔서 오염되고 더러운 것을 볼 수 없는데 오늘 현실을 보십시오
 
그 다음에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는 분이신데 어찌하여 저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나이까 하나님이 지금 고발되고 있는
첫 번째 이유가 방관죄이어요
두 번째는 무엇이지요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 대도 침묵하십니까?
 
방관과 침묵의 죄로 하나님이 기소되고 있습니다
이것 참 무서운 그런데 하나님이 정말 사랑하는 존재가 누구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이어요 우리가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 영광 받으소서 우리가 이럴 때 내가 영광스럽네 하고 기뻐하실 것 같습니까?
 
하나님은 누구를 좋아하느냐 하면 대드는사람들을 좋아해요 세상이 이러지 않아요 그게 하나님의 합당합니다 주여 이 죄악된 우리는 주님만 바라봅니다 이것 주님만 기뻐하실 것 같아요 아니어요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이기에 그런 것이어요
 
예언자들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대들 때 하나님은 고연 놈 그러지 않는다 그 말이어요
그렇지요 하나님 이러면 안 되지 않아요 이러면 안 되지 않아요 이러는 것은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정말로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인데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정말로 침묵으로 방조한 죄를 묻고 있습니다
 
갈대아 사람들이 등장해 가지고 사람들을 이렇게 무자비하게 그들에게 폭력을 가하고 있는 이 현실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세상이 아니지 않아요 하고 대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엘리비젤이라고 하는 작가를 들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엘리비젤이라고 하는 사람이 유대 사람이어요 나치 치하의 수용소에 갇힌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용소 체험을 우리에게 수용소 체험을 우리게 전해준 책이 있는데 그 가운데 나이트 밤이라고 하는 책이 있어요
 
그 가운데 나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강제 노역장에 갔다가 수용소로 돌아오고 있는 데 저녁 무렵인데 사람들이 그 연병장에 그 수용소의 운동장에 다 서 있는 것입니다 그 때는 다 숙소로 들어가야 할 때인데 왠일인가 하고 가 보니까 그 운동장 한 복판에 교수대가 세 개가 세워져 있고 그리고 거기에 사람들이 교수형에 처해져 있는 것이어요
 
왜냐하면 탈출하다 잡혀온 사람들을 본보기로 삼기 위해서 교수형에 처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모자를 벗어서 그 죽음 앞에 경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너무 가슴 아픈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교수대에 메달린 사람 가운데 하나가 아이야 어린 아이 체중이 많이 나가지 않으니까 어른들은 목이 부러져 가지고 빨리 숨이 끊어지는데이 애는 죽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소리가 들려와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신가 또 내면의 소리가 들립니다 하나님은 저 교수대에서 소년과 함께 계신다는 들려와 밤이라고 하는 책에 등장하고 잇는 일화인데 실화이지요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인 볼트만이라고 하는 분은 바로 그 이야기를 가지고 어떤 책을 썼느냐하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러니까 엘리비젤은 증인으로서 나치의 만행에 증인으로서 굉장히 큰 역할을 했습니다
 
많은 책을 썼습니다 내가 감동하는 부분들이 많이 있는데 그분은 놀랍게도 노벨 문학상을 받지 않고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인류의 양심을 일깨우는 일을 했기 때문에 86년가 그래요
 
엘리비젤이 쓴 희곡 가운데 상골우드의 재판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사실 더 파이어 갓 하나님의 소송이 원 제목으로 우리말에 번역이 될 때는 상골우두의 재판이라고 제목으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유대인 학살의 생존자들고 카돌릭 신부와 떠돌이와 유랑객들이 상고르라고 하는 한 지방의 여관에 모입니다 상처 입은 그들은 연극을 해요 어떤 연극을 하느냐 하면 창조주 하나님을 피고로 삼는 재판을 연극으로 하게 됩니다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기소된 것이어요 학대와 방관의 책임을 물어 하나님을 피고로 세우는 재판극을 벌입니다 어떤 이는 검사가 되어서 하나님을 몰아 세우고 어떤 이는 하나님을 변호하고 어떤 이는 참상에 대한 증인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묻는 질문이 이런 것이지요 하나님이 정말 선하시고 정의롭다고 한다면 모든 비극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유죄이다 이것이 검사의 논고입니다 그런데 증인들도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한 사람이 하나님을 맹렬하게 변호합니다 하나님 이럴 수 밖에 없었다
 
희곡의 마지막 장면세 반전을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변호한 것이 사탄입니다 사탄이 하나님을 변호해요 놀라운 변전인 것이지요 엘리비젤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하나님은 당신을 변호할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어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세상이 이렇게 되면 안 되지 않아요 이런 사람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변호하기 위해서 하나님 그럴 수 밖에 없었어 말하는 것이 아니어요 욥의 세 친구들이 하나님 편에 서서 욥을 심판하지 않아요
 
그런데 결국 그들이 결국 칭찬 받지 못하지요 욥이 나도 너희를 용서해 주어야 나도 너희를 받을 것이야 하지 않아요 상고르드의 재판이라는 것이 그렇게 여기에서 하나님을 방관죄로 침묵하는 죄로 하나님 문제가 있습니다 지적을 하고 있는 하박국은 하나님은 불경하다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야 어떻게 보면 왜냐하면 세상이 그렇게 가면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고 있기에 분노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이 하박국서가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박국의 말이 계속됩니다
14절 주께서 어찌하여 사람을 바다의 고기 같게 하시며 다스린자 없는 벌레 같게 하시나이까
 
너무 가슴 아픈 것이야 여러분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인데 지금 강력한 무력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 의해서 바다의 물고기 같이 떼로 잡혀 가고 또 다스린자 얺는 벌레처럼 이리 저리 도망 다닐 수 밖에 없는 이런 상황 속에 왜 몰아 넣으신 그가 낚시로 모두 낚으며 그물로 잡으며 투망으로 모으고 그리고는 기뻐하고 즐거워 합니다
 
사람들을 존엄한 인격으로 대하지 않고 여러분 제일 나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의 어법 가운데도 조심해야 될 것이 있는데요 동 일본 지진이 일어나고 쓰나미가 일어나 가지고 여러해 전에 수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3만명 가까운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습니다
 
우리는 3만명이 죽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일본의 한 작가가 이야기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3만명이 죽은 3만개의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 어떤 숫자속에 개인들을 가두어 놓게 되면 그냥 우리는 숫자로 환원된 그 숫자만 바라보지 그 희생당한 사람 하나 하나의 상황은 사라져요 사람은 저마다 존엄한 존재입니다
 
여기에 있는 한분 한분의 이야기가 있는데 그들을 숫자로 환원 시켜서는 안된다 이 말이어요 악마가 하늘 일 가운데 집단화 해 가지고 하나 하나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사람들을 그물에 다 집어넣고 이 속에서는 개별적 인격의 존엄 같은 것은 없는 것이어요
 
군사력을 가지고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고 있는 일이 하박국에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제국의 군대 앞에서 존엄을 박탈당한 인간들의 쓰라림이 여기에 있는 데 이게 가슴 아픈 것이어요
 
주님이 허락하시는 세상이 이런 세상입니까? 이러면 안 되지 않아요
15절 낚시로 낚으며 그물로 잡으며 이런 표현을 하박국의 의도적으로 쓴 것은 바벨론의 창조 신화가 있거든요 거기에서 마르둑이라고 티아맛이라는 괴물을 잡을 때 그물을 사용하거든요
 
그러니까 바벨론의 창세 신화를 잘 알고 있어 그래서 일부러 그물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이야기하고 넘어가야 될 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몽뚱 거려서 집단화 할 때가 아주 많이 있습니다
 
우리 어렸을 때 시골에서 라디오를 경청할 때 어떤 것을 들었느냐 하면 베트남 전쟁에 가서 군인들이 청용 부대인가 적을 어디에서 몇 명을 죽였습니다 이 소리를 들었어요 라디오에 계속 그 이야기 나왔거든요
 
그러니까 날마다 몇 명 죽였습니다 오아 우리가 그러니까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개별적인 존재 하나 하나를 숫자로 환원시키는 일에 익숙해 졌어요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무엇이냐 한 개인에게 비인간적인 행위는 내 안에 있는 인간성도 파괴한다
 
내가 어떤 사람을 비인간적으로 대하지 않아요 그 때에 비인간 취급을 받는 사람도 아프지만 그를 비인간으로 취급하는 내 안에 인간성도 파괴되는 것이야 이것은 내 말이 아니라 임마누엘 칸트라는 철학자의 말입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이어요 다른 한 명에게 가해지는 비 인간적인 행위는 내 안에 있는 인간성을 파괴한다 하고 이야기 합니다 하박국은 그런 현실에 예민한 것이어요 사람들을 비 인간적으로 취급하고 있는 폭력 때문에 비록 유다가 지은 죄 때문에 심판의 도구로 그들을 세웠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대한 반역 행위가 일어나고 있어요
 
과도한 폭력이라는 것이 이 하박국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다 옳습니다 순응하는 자가 아니어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 파괴되는 것 때문에 아파하는 것이어요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이러면 안 될 것 같습니다 하고 제기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정말로 이렇게 악인들에 의해서 세상이 속절 없이 파괴되고 있는 모습을 보는데 그 악인들은 어떻게 한다고 기뻐하고 즐거워 합니다 사람들을 포로로 잡고 그러면서도 기뻐합니다 그물에 제사하며 투망 앞에 분향하오니 이것이 무슨 이야기일까요 그물과 투망 결국 이것을 통해서 사람들을 사로 잡았어요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한 마디로 이야기 하면 군사력이기도 하고 폭력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막대한 군사력 혹은 폭력이어요 그런데 그들이 이것에 제사를 바쳐 그 말은 군사력과 폭력을 우상으로 삼고 이게 지금 제국을 바라보고 있는 하박국의 대변입니다
 
그러니까 폭력을 우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어요 내가 가지고 있는 힘이라고 하는 것을 마치 신처럼 숭상합니다 오늘로 이야기 하자면 돈이 많으면 내가 존귀한 것처럼 이야기 합니다 그들이 돈이라고 하는 것을 수단으로 이야기 하지만 사실은 보면 마치 신처럼 여기지요 이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도 하나님과 맘몬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누가복음 6장 13절 하나님과 만몬을 돈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수단이지만 돈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전까지는 만족하는 법이 없어요
 
그래서 우상이기 쉬운 것이어요 그러니까 그것들을 제사를 그 앞에 바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신적 존재가 되는 것이어요 이것이 신이어요 그 세태에 대하여 얼마나 정확한 분석을 하고 있는 지 모르지요 이게 하박국이지요
 
17절 그가 그물을 떨고는 계속하여 여러 나라를 무자비하게 멸망시키는 것이 옳으니이까
이 말 속에 옳지 않습니다 라고 하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안 된다
 
하나님이 대답하십니다
2장 1절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른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2장 1절은 상황이 이러합니다 제시하고 하박국이 하나님에게 하시는 말이어요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슴하실런지 기다리고 바라보면 어떻게 대답하였는지 보리라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보면 이 녀석 보게 하지 않고 흐뭇하실 것 같아요
나는 무엇이라고 대답하실런지 내가 들어봐야 되겠어요 어떻게 보면 불경스러워 보일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불경을 행하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과 깊은 일치를 이루었기에 아픔이 있네요 세상이 이 모양 이어서는 안 됩니다 해 보세요 여러분 예언자는 파숫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다싶이 에스겔서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파숫군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냐 눈을 뜨고 지켜보아야 합니다 적이 오는 지 안 오는 지 적이 오는 것을 보면 파숫군이 해아 할 일은 나팔을 불어서 사람들을 깨워야 해요 파숫군이 잠이 들었어 적이 오는 것을 보지 못했어 적이 오는 것을 보고 혼비 백산 도망갔어요 잠들어 있던 사람들을 깨우지 못했어 그러면 그 죄를 파숫군에게 묻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파숫군이 적이 오는 것을 나팔을 부었어요 깨어야 된다 일어나야 돼 하고 이야기 했는데 그래서 이 잠이 너무나 달콤한데 지금 꾸고 있던 꿈마저 깨어나지 않는다든지 그러면 그 책임은 깨어나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지요
 
파숫군은 외쳐야 하는 사람입니다 이게 파숫군으로 부름 받은 예언자들의 소명이었는데 이렇게 기다리고 잇는 파수 망대에 서서 기다리고 있는 그 예언자에게 하나님이 대답하십니다
 
2절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세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을 너는 사람들에게 가서 선포하라가 아니어요 무엇이라고 이야기 하지요 기록하라 커다란 판넬 같은 것에다가 세기라는 것이어요 세긴다고 하는 것은 지워 지지 않은 것이지요 세겨라 그리고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약간 어려워요 이 말은 달려가면서 읽게 하라는 말은 크게 쓰라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는데 어떤 이야기냐 하면 그 소식 사람들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보고 너무 좋아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달려간다 두 가지의 가능성이 있다
 
우선 판에 세겨라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하고 말합니다
3절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이 이루겠고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 되지 않고 하나님의 시간은 차곡 차곡 다가온다
 
우리가 아무리 막으려고 애써도 가을이 오는 것처럼 그리고 겨울이 오고 봄이 오는 것처럼 그 때는 아무도 막을 수가 없다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하는 것은 어김 없이 성취 되도록 되어 있다 그러니 네 생각에는 더디게 보일런지 몰라도 하나님의 때를 꾸준히 기다리라 그 이야기입니다 그렇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을 앞 당기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가쟌 자키스라고 하는 자기의 영혼의 자서전이라는 책과 어느 날 산에 올라가서 나비가 부화하는 모습을 봅니다
 
나비가 고치를 뚫고 나오는 모습을 보는 것이어요 그 과정이 빨라요 느려요 대게 느리지요 지켜 보고 있다가 나비를 응원하기 위해서 무엇을 했느냐 하면 입김을 불어 넣어 주었어요 호호 그래서 나비가 나왔어요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이 애가 태어나지 못했기에 날개가 접혀서 펼수 없는 불구가 되어 버리고 말았어요 이것이 카잔 스키스탄이 직접 경험 했을 가능성이 었어요
 
우리는 살다 보면 누군가를 돕기 위해서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을 앞당기려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시간을 우리가 앞당기는 것이 아니어요 우리는 해야 할 일을 해 가면서 기다리는 것이어요 더딜 지라도 기다리는 것이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시간이 다가오도록 촉매 구실을 해 가는 것이 세상이 안 되지 않아요 예언자의 뜨거운 열정을 봅니다 이 마음이 우리에게 있는지 바라봅니다.

제 3강 하박국 2:4-8 악은 장구하지 못하다

인간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질문을 통해서 얻어져요 내가 물어 보지 않는 것은 옳게 안다고 이야기 할 수 없어요 정말 그렇지요 분명해 보이는 것도 질문을 거듭함을 통해서 더 깊은 자리로 나아갈 수 있게[ 되지요
 
믿음이 깊어지기 위해서는 질문이 많아져야 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자꾸 질문해야 합니다 왜냐 하면 의문이라야 말로 우리를 깊은 세계로 안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믿음의 반대말은 회의가 아니라 믿음의 반대말은 그릇된 확신이어요
 
그러니까 의문 회의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깊어지기 위한 도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떤 그냥 당연질문이 없거든요 당연한 세상 어른들은 오랫동안 살다 보니까 하늘에 구름이 떠 있는 것도 당연한 것이고 봄이 되어 가지고 나무 잎 나오는 것도 당연하고 그런데 애들은 왜 그래요 묻지요
 
우리가 하박국 공부하고 있는데 하박국이 질문이 많지 않아요 하나님 이러면 안 되지 않아요 이렇게 자꾸 대들어요 그러니까 하박국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깊어진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종교 개혁자인 마틴 루터에게 굉장히 중요한 성경 구절 하나가 있는데 기억이 안 나겠지요 로마서 1장 17절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 말이 굉장히 중요하지 않아요 그 말이 원래 나온 성경이 어디여요 하박국입니다
 
그 단어가 굉장히 중요한 구절인데 오늘 이제 그 구절을 공부하겠습니다
4절에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여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지난 시간에 보라라고 하는 말이 그냥 보라는 말이 아니라 어떤 뜻이었지요 그 일이 반드시 일어난다 하고 하는 일종의 확언이라고 이야기를 했었지요
 
2장 4절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마음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는 갈대아 사람입니다 그의 마음은 교만하고 하고 말하는데 마음은 단순하게 마인드 우리 마음을 뜻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어로 네페쉬라는 말인데 이것은 전인을 뜻해요
 
목구멍을 뜻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숨 호흡 다양한 의미로 쓰여지고 있는데 존재 전체를 이야기 하는 것인데 그의 존재 전체가 교만하다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교만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 교만이지요 부풀어 오른 마음이어요 자기를 과대평가하는 것이 교만이지요 악인의 특생이 존재 전체로 자기를 과대포장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요
 
우리가 현대인들이 앓고 있는 병이 두 가지가 있거든요 어떤 병인지 아세요
첫째는 남들과 같아지지 않으면 못 견디는 병 남이 가지는 것은 나도 다 가져야 돼 남이 누리는 것은 나도 다 누려야 돼 이것을 병 욕망의 평준화 나한테 좋은 것 누리고 살면 좋은데 비교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제가 입은 저 옷은 무슨 옷이네 나도 있어야지 남과 같아지고 싶어하는 마음입니다
 
또 모순된 이야기이기도 한데 우리는 남이 나와 같아지는 것을 용납하고 싶지 않아 똑 같응 옷을 입고 있는 사람 보면 불쾌해 구별되기를 원해 그러니까 모순적 감정입니다 남과 같아지기를 원하면서 남과 구별되기를 원하는 이 모습 속에서 우리는 고통 받고 있어요
 
이것이 현대인들을 괴롭히고 있는 병인데 이 교만함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면서 내가 더 크다고 느끼고 싶어하는 마음이어요 그 마음이 교만함입니다 그 태도는 남이 나보다 못하기 때문에 함부로 대해도 돼 나는 그럴 권리가 있어 그렇게 느낍니다
 
이것이 극단화 되었을 대 하박국의 언어로 이야기 하면 겁탈과 강포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어요 하박국이 바라보고 있는 세상의 문제는 그런 것이었거든요 다른 것이 없어요 내 마음이 남보다 큰 존재인 것 처럼 스스로 인식하고 그렇게 보여 주고 싶어해요
 
그러다 보니까 다른 사람을 아래로 보려고 하고 아래로 보기 때문에 함부로 여기고 전혀 맥락에 관계입니다마는 한국 남자들이 모이면 무엇을 하는지 아시지요 족보 따지기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그 다음에 하는 이야기는 무엇이지요
 
그 다음에 학벌이 어떻게 되세요 그것도 인연이 없으면 군번이 이런 것 그래서 무엇하냐 하면 서열을 정해 이것을 소위 패킹 오더라고 하는 데 그러니까 조류들이 무엇인가를 먹을 때 그 쪼아 먹는 순서가 페킹 오더야
 
이렇게 따져 가지고 다른 사람하고 처음 만나서 악수하고 혹시 나이가 어떻게 나보다 많이 어리시군요 말 놔도 되지요 이렇게 그것이 무슨 태도인지 모르겠어요 왜들 그러는지 그러니까 우리가 존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해서 그래요
 
그 마음에 뿌리속에 있는 것이 교만함이단 말이지요 일곱 가지 죄의 뿌리라는 것이 있어요 기독교 전통에 오랫동안 가르켜 온 것이비다 교만으로 시작 되어 가지고 시기 분노 나태 탐욕 정욕 탐식 너무 많이 먹는 것
 
일곱가지 죄의 뿌리 중에서 내 마음속에 명심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인색 인색한 것
어떤 것이 인색한 것이지요 똔 쓰지 않는 것 그게 인색이지요 그러나 그게 죄의 뿌리라고 말할 수 없어요 그 때 인색은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마음의 병이어요
 
누가 예뻐요 이야기하면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 하지요 예쁘죠 하지만 성격은 사람들에게 있어요 누가 굉장히 똑똑해요 똑똑해 똑똑하지 그런데 인간성은 그 사람 참 착한 것 같아요 착하지만 똑똑하지는 않아 이것이 전부 인색이야
 
그 이야기는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 같아요 내가 보기에는 나의 정신이 커지기 위해서는 인색을 떨치고 누군가가 좋은 것을 보면 아낌없이 좋아해 주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러면 그 사람도 기분 좋고 나 또한 사람 대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그러거든요
어떻던 7가지 죄의 뿌리 가운데 제일 앞에 나오는 게 교만이어요 다른 사람 앞에 나를 크게 부풀게 보이려고 하는 마음인데
 
2장 4절 그 교만한 사람들은 자기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다 말합니다 겉과 속이 다른 것이지요
 
그리고 나서 이제 교만한 사람에 대비되고 있는 사람이 무엇이냐 의인입니다 교만한 사람하고 대비해서 의인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의인이라고 하는 말이 오해하기 쉬운 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사람은 참 의로와 그러면 늘 불의에 대해서 투쟁하고 이런 사람처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 의인이라고 하는 말은 쩨다카를 따르는 사람 짜딕인데 쩨다카라는 것은 무엇이어요 누군가를 긍휼히 여길 때 긍휼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이 쩨다카여요
 
그 마음의 뿌리속에서 다른 사람들은 긍휼히 여기는 까닭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 안에서 그를 바라보기 때문이어요 의인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에 신실한 사람들이 의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쓰고 하나님의 눈으로 사람들을 의인이라고 합니다
 
이런 의인들은 어떻느냐 하면 자기 좋을 대로 처신하지 않습니다
때때로 하나님이 나에게 요구하는 바가 나의 이웃들이 내게 요구하는 바가 내게 불리할 수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불리하다고 해서 입장을 바꾸지 않습니다 이게 의인입니다 선택한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길이 의인이라고 할 수 있어요 벗어나지 않는 그 삶을 진실한 삶이라고 말합니다
 
그 진실한 삶에 대비되는 삶이 무엇이었어요 정직하지 못한 삶 아까 교만한 사람은 정직하지 않다고 이야기 했지요 진실하지 않으면 정직하지 않는 것이어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주로 하나님의 미쁘심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단어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미쁘심 뿐만 아니라 내가 이웃과 맺는 관계에서 얼마나 성실하나 하는 것도 믿음으로 표현될 수 있음을 우리가 봐야 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을 가지고 산다고 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충실할 뿐만 아니라 내게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있는 인간의 인간됨이라고 하는 것은 요구받음에 대한 응답을 통해 구성된다
 
우리에게 무엇인가가 요구되어요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 가다가 강도를 만나 가지고 다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비명조차 못 질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내가 그 옆을 지나가게 되었어요 강도 만난 존재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요구합니다 요구 받음에 대한 응답이 요구되는 데 응답하지 않을 때가 많이 있다 응답이다는 단어가 응답하다는 동사는 리스판스(response)입니다
 
이것의 명사형이 무엇이냐 하면 리스판스비리티(responsbility) 책임이어요 책임이라고 하는 것은 누군가의 응답하는 것이어요 인간이 인간이 된다는 것은 무엇이냐 누군가의 요구에 대해서 책임을 질줄 아는 사람이다는 것이어요
 
교만한 사람들은 책임을 안 집니다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대합니다 자기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습니다 의로운 사람들은 믿음으로 사는 자이니까 하나님과의 언약에 따라서 내가 사람들을 함부로 안 보고 그 사람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그가 요구하는 바에 응답하며 사는 것이지요
 
이 응답이 매우 중요해요 반응할 줄 아는 게 그래서 저는 종종 이런 이야기를 종종합니다
노아 홍수 시절에 하나님은 모든 세상을 물로 심판을 하셨습니다 노아와 그 가족들만 남겨 두었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새로운 세상을 구원의 세상을 노아를 통해 시작하지 않았어요
 
누구를 통해 하십니까?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복의 매개가 요구하셨어요
그래서 어떤 분이 묻습니다
창세기 12장 2 노아도 의롭고 아브라함도 의로와요 그런데 왜 하나님은 노아가 아닌 아브라함을 통해서 세상의 구원을 베풀었을까?
 
그 차이가 무엇일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노아는 순종의 쳄피언이어요 아브라함도 순종의 쳄피언이고 떠나라고 하면 떠납니다 아들을 바치라고 하면 바칩니다 둘다 순종의 쳄피온입니다 노아와 아브라함의 차이는 하나입니다
 
창세기 14장 14- 16절 자기 조카 롯이 잡혀 갔다는 말을 들었을 때 사병들을 이끌고 그 먼곳에 가서 조카 롯을 구해 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소돔과 고모라 성을 그 성에 살고 있는 의로운 사람이 멸망하면 안 되니까 의인이 악인과 함께 멸망하며 되느냐고 가로막고 구합니다
창세기 18장 23절 그 의인들을 위해 이웃에 대한 책임이 곧 믿음입니다
의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하는 것은 주여 믿습니다 이것이 아니어요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책임적이고 이웃들에게 책임적으로 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악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교만합니다 의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말은 정말로 소중한 것이어요 세상이 아무리 악하다고 해도 의인들은 하나님과 이웃관계에서 마땅히 행할 바를 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때때로 그러다 보면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너만 의롭느냐 이런 소리 듣습니다
 
우리 이런 소리 많이 듣습니다 너만 교회 다닌 것이야 너만 착한 것이야 이런 것을 무엇이냐 하면 죄의 사회성이야 자기들의 잘못된 행위 속에 누구를 끌어 넣고 안심하고 싶어요 저 사람 하나만 우리의 양심을 비춰주는 묻혀야돼 그래서 너도 우리 속에 들어오라
 
그러나 우리가 세상에서 악과 싸워야 되지만 악의 선택하는 도구를 사용하면 안 되어요 제가 좋아하는 성인이 계신데 요한네스 크리스소스토무스 라는 분이 계신데 4세기에 콘스탄티 노플의 대 주교입니다
 
그 분이 말하기를 우리가 양으로 남아 있는 한 우리가 승히할 수 있다 비록 우리가 늑대 천마리에 외워 쌓인다 할 지라도 우리는 정복하고 승리한다 그러나 우리가 늑대가 되는 즉시 패배한다 늑대는 기르지 않고 양을 기르는 목자의 기지를 잃기 때문이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하는 의인은 손해를 감수하면서라도 하나님의 방법을 택해야 되어요 사랑이라는 방법 누군가를 살려주기 위해 나를 선물로 주려는 방법을 선택해야지 악인들이 선택한 방식을 취함으로 악을 제거하려고 하면 안 된다
 
의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이야기할 때 그것을 개인이 아주 사사로운 신앙을 뒷 받침하는 본문으로 받아 드리면 안 됩니다 의인이 내가 강조하는 바는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서야 한다 코람데오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것도 중요하지만 의인은 어떤 사람이냐 타자의 운명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다 이게 의인이야
 
오늘 한국 교회가 잃어 버린 것이 복음의 공공성 우리가 함께 사는 세상을 이것이 약화 되어 있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헬라어 단어에서 이디오테스라고 하는 단어가 있는데요 이 단어의 뜻은 무엇이냐 하면 공공의 문제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기의 문제에만 관심을 가지고 사는 자자 이디어테스라고 이야갛니다
 
이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가 영어 단어 바보를 뜻하는 이디엇트입니다
바보는 머리가 나쁜 사람이 아니어요 오직 자기에게 몰두하고 있는 사람 이것이 바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제 강의중에 한 이야기인데 투키디데스라고 하는 그리스 역사가가 쓴 헬로폰네스 전쟁사 라는 책이 있습니다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전쟁을 해요 도시 국가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고 그게 기원전 431년 경이거든요
 
첫 번째 전투에서 아테네의 많은 젊은이들이 죽습니다 스파르타와의 싸움에서 죽은 병사들을 시신들을 수습해 와 가지고 장례를 치루게 됩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국장의 예를 갖추어서 장례를 치루게 됩니다
 
매장하기 전에 그 시대에 가장 존경 받은 사람을 사람들이 택합니다 추도사를 하도록 그 해 추도사를 하도록 뽑힌 인물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이 페리클레스입니다
 
페리클레스의 연설이 책에 등장하니다 거기에서 전몰자들에게 아주 아름다운 찬사를 바칩니다 그러면서 그의 연설은 거기에만 그치지 않고 아테네라고 하는 자기 속해 있는 아테네의 긍지를 드 높이는 연설을 합니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도 사치에 흐르지 않고 지식을 사랑하면서도 유약함에 빠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자기 나라에 대한 강력한 자부심이 등장합니다 그 다음에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전사라도 정치에 소홀핮 않으며 이에 참여하지 않는 자를 공명심이 없다고 보기 보다는 쓸모없는 자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뿐입니다
 
이 이야기는 자기들이 살아야 하는 세상이 어떤 세상이어야 하는 지에 대해서 책임져야 하는 나만 행복하면 된다 이런 사람들을 쓸 모 없는 그리스 민주주의에 매우 중요한 형태라고 이야기 할 수 있어요
 
믿는 것도 똑 같습니다 우리는 나의 행복만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이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야 할 세상이 어떤 세상이 되어야할런지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의인이어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우리가 그런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기 바랍니다
5절 그는 술을 즐기며 거짓되고 교만하여 가만 있지 아니하고 스올처럼 자기의 욕심을 넓히며 또 그는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르고 자기에게로 여러 나라를 모으며 여러 백성을 모으나니
 
그는 누구인지 갈대아 사람을 이야기 하는 것이고요
그래서 그는 술을 즐긴다 술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빠지게 만들지요 탐닉하도록 만들지요 탐닉하게 되면 결국은 자기를 잃어버려 몰각하는 것이어요 술에 취하면 그것을 그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그는 술을 즐기며 거짓되고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가만히 있지 않는 것도 분제여요 무엇이든지 분주하게 하는 것인데
 
새 번역은 술이라는 단어를 재산으로 쓰기도 하거든요 새 번역 성경은 부유한 사재산은 사람을 속일 뿐이다 탐욕스러운 사람은 거만하고 탐욕을 채우려고 쉴날이 없다
 
카도릭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참으로 재물은 믿을 수 없다 거만한 사람은 견디어 낼 수 없다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여하튼 악인들의 특색이 무엇이냐 몰각 지각이 없어요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해요 그리고 거만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떠 벌리기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사나와 집니다 술취하면 사람들이 사나와 지기도 하는데 그리고
 
헛것을 봅니다 술취하면 헛것을 보고 곤고한 사람들의 처지를 잊게 된 것이지요 바로 그것을 술취함으로 이야기했어요 여기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술이라는 것이 나는 무엇으로 보느냐 하면 폭력이야 폭력에 취해 내 힘만 믿고 내 주먹이 얼마나 큰지 알아 그러면서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것들이 자기에 대한 과신 이런 것들 가만히 있지 않는 것이어요
 
2장 5절 그는 술을 즐기고 거짓되고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스올처럼 자기의 욕심을 넓히며 또 그는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르고 자기 에게로 여러나라를 모으며 여러 백성을 모으나니
 
스올은 죽은 자들이 머무는 세상이지요 죽은자들이 머무는 세상이 점점 넗어 가는 것이어요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른다 이게 악인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의 운명이 어떻게 되느냐하면
6절 그 무리가 다 속담으로 그를 평론하여 조롱하는 시로 그를 풍자하지 않겠느냐 곧 이르기를 화 있을진저 자기 소유 아닌 것을 모으는 자여 언제까지 이르겠느냐 볼모 잡은 것으로 무겁게 짐진자여
 
술에 취한 것처럼 자기에 도취되어 지내고 있는 그들 제 힘만 믿고 못할 일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 그들이 커보여요 지금은 그런데 신앙은 무엇이라고 이야기했어요 깨 뚫어 보는 것이지요 눈에 보이는 너머의 세계를 꽤 뚫어 보는 것이지요
 
그겋데 보니까 그들의 몰락이 멀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어요 부드러운 것은 생명에 가갑고 점점 자기를 강해 가지고 닥딱하게 변했어 그러자 예언자의 눈이 탁 보는 게 무엇이냐 하면 애들은 이제 망한다 이것을 꽤 뚫어 보는 것이어요 권력의 정점에 있는 그들이 망한 것이지요
 
그래서 그 무리가 다 속담으로 그를 평론하며 조롱하는 시로 그를 풍자하지 않겠느냐
속담이라는 것은 속담으로 그들을 조롱하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풍자라고 하는 게 어떤 것이지요 풍자라고 하는 것은 자라고 하는 게 특별히 풍은 바람 풍 자를 쓰는데 자라고 하는 것이 찌를 자자입니다
 
우리가 칼에 찔렸다 자상을 입었다 하고 찌를 자자인데 풍자의 특색이 무엇이냐 하면 사람을 푹 찔러 어떤 풍자의 대상이 된 것은 그런 것이어요 해악은 어떤 것이냐 하면 어떤 인물에 대한 동정심과 그리고 연민을 불러 일으키기도 합니다
 
흥부 농부전에서 보면 흥부가 형 대신 매 맞으려 가는 장면도 나오고 우리 연민을 자아내거든요 이게 해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게 해학이라고 한다면 풍자는 마치 무엇하고 같은 가 하면 마당 놀이에서 말둑이가 양반을 조롱하는 것이어요
 
양반의 허례의식을 막 조롱하고 막 찌르고 이렇게 하지 않아요 이런 것도 풍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풍자라고 하는 말은 중국의 시경에 처음 등장하는 데 윗사람들이 아랫사람들을 풍화하고 풍화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가르쳐서 잘 교화하는 일을 풍화한다고 합니다
 
풍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이어요 잘 가르켜서 교화하는 것이어요
그리고 그 다음에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아랫 사람들은 윗 사람들을 풍자하는 데 아랫 사람들이 윗 사람들의 결점을 공격하는 것이어요
 
그렇게 하는데 이를 말하는 자 죄 없으며 이를 듣는 자 훈계로 삼을 가치가 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풍자의 대상이 된 사람들은 자기를 찌르고 있는 그 말을 통해서 이놈이 나를 공격해 그 사람을 공격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나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으면 좋을 터인데 지금 이제 사람들이 무엇을 이야기 하느냐 하면 그 권력의 정점에 속담으로 그들을 조롱하고 풍자를 통해서 그들을 찌르게 될 것이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깨달으면 좋은데 깨닫지 못하지요
 
그들의 특생이 무엇이어요 자기 소유 아닌 것을 모으는 자 볼모 아닌 것으로 무겁게 짐진자 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게 인간이지요 어떤 분이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이 세상은 지구라고 하는 이 혹성은 지구라고 하는 별은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의 필요를 감당하기에 넉넉합니다
 
지구는 그러나 지구는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욕망을 채워 주기에는 턱 없이 부족합니다 그렇지요 이 지구라고 하는 별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공급해 주어요 생명이 있는 존재들에게 그런데 욕망을 충족시키기에는 지구 하나 가지고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오늘 내가 너무 풍요롭게 지낸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이야기하느냐 하면 다른 누군가가 누려야 할 것을 빼앗아서 누리고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우리나라도 물 부족 국가로 바뀌어 가는 현상인데 늘 샤워하고 욕하고 하는 것은 깨끗해서 좋기는 좋으나 그러나 다른 나라들이 더 가뭄속에 들어가도록 만드는 경우가 많이 있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우들하고 함께 몽골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몽골에 나무를 심기 때문에 그 숲을 보기 위해 갖다 왔기 때문에 우리의 습성이 무엇이냐 하면 씻어야 해요 아침에도 싯어야 하고 저녁에도 씻어야 하고 그런데 보면 몽골도 물이 상당히 부족한 나라이거든요
 
그런데 관광객들을 위한 시설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샤워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어요 우리 교우들이 반성들을 했습니다 거기 사람들을 보면 손톱 사이에 떼도 끼어 있고 하는 데 위생 관념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분들이 관광객처럼 살면 그 나라는 지탱될 수 없어요
 
우리는 깨끗한 척하고 여기에 대한 반성들을 했거든요 자기 소유 아닌 것을 모으는 것 볼모 잡은 것을 짐진 것 이런 것들이 결국은 하나의 풍요로운 문명을 지탱해 지는 것들이지만 그 풍요로움 때문에 오히려 더욱 더 가난해 지고 여려워 지는 사람들이 있어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 세상은 괜찮은 세상이 아니거든요
지금 예언자는 바로 그런 세상을 네가 언제까지 이러겠느냐 말하고 있고요
7절 너를 억누를 자들이 갑자기 일어나지 않겠느냐 너를 괴롭힐 자들이 깨어나지 않겠느냐 네가 그들에게 노략을 당하지 않겠느냐
 
지금은 숨 죽이고 있는 것 처럼 보여요 여러분 모순이 극대화 되면 변화가 일어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출애굽 사건을 보면 출애굽에서 애굽을 탈출해 열 개의 재앙이 내리지 않아요 개구리도 튀어 나오고 온갖 게 나온다고요
 
흥미로운 것은 무엇이냐 하면 없던 개구리가 생긴게 아니고 그 땅에 어디엔가 있던 모든 것들이 일제히 몸을 드러낸 것이지요 불편하고 견딜 수가 숨 죽이고 있어 그들이 없는 것으로 여기면 안 돼 그런데 힘 있는 사람들은 없는 존재 견디다 못해 이러면 안 되지 않아 일어나는 것이어요
 
바로 그게 7절 너를 억누를 자들이 갑자기 일어나지 않겠느냐 너를 괴롭힐 자들이 깨어나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이 갈대아 사람으로 상징되고 있는 힘 있는 사람들이 누군가를 억누르고 고통을 가했는데 역전된 날이 오지 않겠느냐 이것이 하나님의 질서라는 것이어요
 
8절 네가 여러 나라를 노략하였으므로 그 모든 민족의 남은 자가 너를 노략하리니 이는 네가 사람의 피를 흘렸으이요 또 땅과 성읍과 그 안의 모든 주민에게 강포를 행하였음이라
 
노략하는 자가 노략 당합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이게 하나님이 정한 이치이다 이전에는 시시한 말처럼 들렸는데 크게 다가오는 우리 속담이 있습니다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 데 팥난다
 
우리는 불의를 심는자는 불의로부터 심판을 수확하게 될 것입니다 아름답고 의로운 삶을 심는 자는 결실이 없다고 해서 그 결실을 내가 보거나 내 후손이 볼 것입니다 힘 있다고 해서 억누르는 삶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사람입니다
 
의로운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항상 타자를 배려하고 자기를 선물로 줄 수 있는 사람이 여러분 그런 의로운 삶의 길로 뚜벅 뚜벅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제 4강 하박국 2: 9-20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하라
나는 살면서 남에게 싫은 소리 하는 것이 참 어려워요 싫은 소리 잘 하는 사람이 있어요 하기 어려워요 사람들 대 놓고 꾸짖거나 잘 하지 못합니다 저 사람 왜 그래 알아서 해 주면 좋겠는데 그 때 나 혼자 속으로 속 상해하고 기도하고 그런 때가 많이 있습니다.
 
갈등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지요 갈등이라고 하는게 이제 부정적인 의미를 갖기도 하지만 사실도 갈등도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정수봉이라는 사회학자는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을 이야기 하면서 조어인데 우리가 말할 때 문법에 맞게 말하지 않아요 무의식 속에 문법이 들어있는 것이지 한국인들이 사고하고 말한다고 할 때 그 유형을 그 사회학자가 분석을 했어요 그 가운데 하나가 갈등 회피주의가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갈등이 생기는 상황이 불편하기 때문에 그냥 없는 것으로 이렇게 회피해요 이것이 문제 해결이 안된 것이어요 때때로 갈등을 이야기 하는 사회학적 개념에서는 갈등이 긍정적 기능을 한다고 하기도 합니다
 
정말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한다면 노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이 이야기한 까닭은 무엇이냐 하면 예언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대게 긍정적인 말들 보다는 부정적인 말들을 많이 하거든요
 
그래서 예언자들은 인기가 없어요 예언자들의 운명이라고 하는 것은 대게 순교 죽음 고독 이런 것들입니다 버림 받음 이것이 예언자들의 운명이지요 그러나 인류의 정신에 큰 영향을 미친 예언자들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보면 세상을 깨어 있게 만드니까 이렇게 이렇게 사는 사람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하는 대목이 등장합니다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우려야 하겠습니다
 
하박국은 불의한 세상을 바라보면서 하박국이 세상이 이러면 안 되지 않아요 하나님 세상이 왜 이 지경이지오 질문을 던지고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대답하실는지 지켜 보겠다 시작을 합니다
 
1절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대답하실런지 내가 지켜 보겠다
하나님이 대답을 하시는 것이지요 이러 이러한 일을 행하는 자는 화가 임한다 하고 말하는데 몇 가지 화가 나오는 데
2장 6절 화 있을진저 자기 소유 아닌 것을 모으는 자여 언제까지 이르겠느냐 볼모 잡은 것으로 무겁게 짐진 자여
 
화의 선언이 나오게 있지요 자기 소유 아닌 것을 모으는 자 볼모 잡은 것으로 모으는 자 첫 번째 화였습니다
9절부터는 두 번째 화가 등장하고 있는데 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높은 데 깃이려하며 자기 집을 위하여 부당한 이익을 취하려 하는 자에게 화가 있다 합니다
 
높은 데 깃들이려한다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권세 같은 것 이것은 공간적으로도 맞는 것 같아요 요즈음도 유럽에 가다 보면 도로를 달리다 보면 산 곡대기 위에 집들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불편할 터인데 정말 이상해요 왜 산 꼭데기에 집을 지었지 그 원인은 두가지 중에 있는 것 같아요 하나는 무엇이냐 도시 국가들 사이에 전쟁이 잦았을 때 계곡에 있으면 언제나 침투가 되지 않아요 적들이 오는 지를 볼 수 있는 높은 곳으로 가야겠지요
 
또 하나는 고원 다습한 지역에서는 병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통기가 잘 되는 높은 곳으로 올라 갔을 것입니다 힘 있고 부유한 사람들은 그런 곳으로 삶의 터전을 이루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밑바닥에 형성을 하는 것이지요
 
질병에 취약하고 전쟁이 일어나도 피해를 당하고 그렇게 공간적으로도 볼 수 있는 지역입니다 여기 높은 데 깃들인다는 것은 자기를 강화하고 자기를 크게 만들고 이것도 높은데 깃들인다는 교만한 마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공간적으로도 이야기 될 수 있고 은유적으로도 이야기 될 수 있습니다
9절 자기 집을 위하여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자 자기 집을 위하여 부당한 이익을 취한댜 어떤 이야기일까요 사람들은 저마다 관심의 방향이 자기에게 향해 있습니다
 
그래서 죄라고 하는 것을 무엇이라고 이야기 하느냐 하면 죄라고 하는 것을 저 나름대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자기 속으로 구부러진 마음 그러니까 언제나 나야 어떤 일을 하더라도 나 나와 내 가족 우리 신앙 생활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나를 위해 기도하고 내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거드든요 나와 내 가족이 별일 없으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남들이 불행을 당했는데 내게 불행이 안 올 때 내게 하나님이 말 없이 보호하고 그것은 말 없이 하나님께 하면 되지만 공적으로 드러내 놓고 불행을 당한 사람들이 있는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지켜 주셨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은 폭력적이야
 
그 어려운 일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아서라고 인식될 수 있단 말이어요 정말 우리는 이런 말들 조심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부당한 일을 행하면서 가족주의 국가주의로 포장하면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 부끄러운 축약어 가운데 하나가 내로 남불 그러니까 내가 하면 괜찮고 남들이 하면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준말 내로 남불 그렇게 말하지 않아요
 
공직에 나가는 사람들을 청문회 같은 것을 하다 보면 몇 가지씩은 걸려요 위장 전입이라든지 위장 전입은 정말 많아요 위장취업도 있고요 특혜를 얻은 것도 있고요 다운 계약서를 작성한 것도 있고 온갖 것들이 있습니다
 
서민들은 보면 그들이 사는 방법이 저렇구나 속 상하지요 법을 위반합니다 다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자식 키우니가 알지 않아요 가족 주의입니다 이것을 확장하면 국가주의가 됩니다 우리나라인데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국가주의를 넘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신앙인에게는 국가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적 가치는 그것보다 더 높은 그런데 늘 나와 내 집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것 처럼 생각합니다
 
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높은 데 깃든 것도 죄입니다 자기 집을 위하여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것 이야기하고 있는데 부당한 이익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이익일까요? 다른 사람이 누려야 할 몫을 내가 빼앗는 것이 부당한 이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이런 것이 많이 있습니다 가을철이 되면 다람쥐들이 이제 겨울을 위해서 도토리 같은 것을 모아 드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람쥐가 볼에다가 도토리 잔득 집어넣고 게가 가져 가야 얼마나 가져 가겠어요
 
우리 어떻게 합니까? 요즈음도 공원 같은 데 보면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아침부터 열심히 엎드려서 일들을 하고 계셔요 도토리 줍느라고 그냥 다람쥐 먹이면 좋을 것 같은데 그래도 내 가족들에게 도토리 묵 해 먹이고 싶어서 이것은 귀여운 위반이고 정말 우리는 많은 위반을 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나와 내 가족을 위해서 마음을 빼앗기고 살다 보면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지 못하는 일들이 너무 많이 벌어지게 됩니다 자기의 이익을 모든 가치 판단의 척도로 삼는 사람들에게 이웃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나 좋을 대로 처신하는 그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웃을 비존재로 만든다 하나님이 함께 살라고 만든 이웃들을 비 존재로 만드는 것 이런것들이 죄라고 볼 수 있겠지요
 
내 옆에 있는 사람도 똑 같이 사는 것을 인식이 안 되는 것이어요 인간의 도덕성이라고 하는 것은 내 옆에 있는 사람들도 여러분 인간의 내가 상훈씨와 내가 함께 살 때 도덕성이 내가 많은 것을 누릴 수 있지만 이웃을 위해 나의 몫을 내려 놓을 줄 아는 것이 도덕성이야
인간의 도덕성을 그렇게 발생한단 말이어요
 
그렇지 않고 나만 챙기는 것은 이 자본주의 법 앞에서는 능력자라고 이야기 할지 몰라도 그들에게 화가 있다 평화롭게 살고 있는 명분으로 위해 내 세우는 것이 나라를 위하여 라고 말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악하게 보신다
 
그런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숨겨질 수 없다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렇게 사는 사람에게 어떤 결과가 오느냐 하면
11절 담에서 풀이 부르짖고 집에 들보가 응답하리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내가 모아가지고는 아주 철옹성 같은 집을 지었는데 내가 안전한 공간을 만들었어 그런데 여기 밤에 돌들이 부르짖고 집의 들보가 응답하고 이것은 어떤 무생물조차 그의 죄를 고발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일전에도 이몽룡이 어사 출두하기 전에 변사또 금잔 미주는 천인 혈이요 금잔의 아름다운 술은 많은 사람의 피다 옥반 가효 천인고요 옥반에 담겨 있는 기름진 안주감은 만인의 고혈이다고 노래하지요
 
여기에는 집에 들보조차도 그의 죄를 지적한다 하나님은 들으시는 분이셔요 세상의 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이시다 이렇게 무생물조차 그의 죄를 지적하는 것은 그의 생이 끝났음을 의미입니다
 
그 다음에 보면
12절 피로 성읍을 건설하며 불의로 성을 건축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피로 성읍을 건설한다 이것은 어떤 이야기일까요? 성읍을 부요하게 만들기 위해 전쟁이라는 수단을 전쟁을 통해서 누군가의 것을 약탈하고 누군가를 죽이고 그래서 쌓아진 부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피로 세워지는 성읍이다
 
불의로 성을 건축하는 자에게 화가 있을진저 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런 것 저는 늘 제국이라고 하는 게 무한한 확장을 지향하는 데 무한히 확장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것을 내 것으로 삼아야 하는데 이것은 폭력적인 것입니다
 
언제나 제국은 폭력적입니다 우리가 일제의 만행을 겪었지 않아요 인제가 동 아시아에서 저지른 죄가 크지요 일본이 동 아시아인들에게 저지를 폭력들 수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수 많은 여성들을 도구화 했던 이 일을 위해서 이것이 큰 죄입니다 하고 통해 자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안 하지요 제국이 가지고 있는 폭력성 성 같은 것이 있는데 제국의 논리라고 하는 것은 나를 강화하기 위해서 제거해 버리거든요 이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정면으로 어기고 있는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무엇 무엇을 위하여 약자들을 수탈하는 체제는 악마적이다고 말해야 합니다
이 제국이 늘 좋아하는 말이 있는데 일사 분란 총화 단결 그런 것 다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아요 19 세기에 국민 국가가 등장하게 되는데 유럽에서 여러 나라들이 국민 국가가 생겨납니다 국가의 정체성을 동질성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 민족은 무엇이야 백의민족 순수 혈통 반만년 동안 이 이야기를 끊임없이 해 왔단 말이어요 이게 국민 국가를 만들기 위한 것들입니다
 
문제는 이런데 있습니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소위 우리라고 하는 틀이 있어요 이 우리라고 하는 틀 속에는 무엇이 있느냐 하면 피부색은 이렇고 몸은 이렇고 언어는 이렇고 틀들이 있어
 
이질적 존재들도 있단 말이어요 언어가 다르고 피부색이 다르고 또 종교가 다르고 뭐 다양한 다름들이 있지 않아요 문화가 다르고 이럴 때 이 국민국가는 우리들로부터 그들을 배제한단 말이어요
 
배제하거나 또 하나는 무엇이냐 받아 드릴게 너희들의 특생 버리고 우리 식으로 이야기 해 미국의 못된 사람들이 여기 우리나라니까 너희 나라말 하지 마 영어 써 이런다든지 피부색은 바꿀 수 없으니 우리 말해 이러든지 종교 너 그 종교 가지면 안 돼 이 종교가져 동화 시키는 것이야 동화되지 않은 것은 추방하든지 죽이든지 해요 이게 국민 국가들이 국가가 형성되면서
 
결국 그렇게 하는 나라들은 어떻게 될 것이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까?
13절 민족들이 불탈 것으로 수고하고는 것과 나라들이 헛된 일로 피곤하게 되는 것이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미암음이 아니냐
 
결국 이런 방식으로 사람들의 살 권리를 빼앗아 가는 그 민족들은 결국은 허망함을 추수하게 될 것이다 이 성경의 메시지가 얼마나 강력한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 지를 보여 주어요
 
우리나라에서도 우리의 틀 속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틀 그러나 우리나라는 다문화 국가로 가고 있어요 굉장히 이 문화 사람들이 들어와서 이주 노동자들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인구 절벽이 다가온다고 이야기 하는데 노동력이 우리가 우리 이주해 오는 사람들의 노동력은 필요합니다 그들 신세를 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이등 국민으로 삼는다든지 그들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화를 부르는 일이다고 하박국은 하고 있어요
 
우리가 세겨 들어야 될 대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4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
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그 대가 온다 왜냐하면 무한한 자기 확장을 꾀하고 있었던 제국들이 무너져 가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아 역사를 주관하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이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심판은 반드시 시행이 된다 이것이 하박국이 들려주는 대목입니다
 
이 대목으로 찬양이 있지요
물이 바다 덮은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 가득하리라 물이 바다 덮은 같이 물이 바다 덮음 같이 물이 바다 덮음 같이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아는 것이 온 땅에 가득할 것이다
이것이 예언자들의 전망입니다
이사야 11장 9절 폭력이 없는 세상을 이야기 하면서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온 땅에 가득하는 것을 이사야가 내다 보지 않아요
 
9절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황도 없을 거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라
 
이것이 하박국이 정말 예언자들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앞에 경외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게 볼 수 있어요
 
15절 이웃에게 술을 마시게 하되 자기의 분노를 더하여 그에게 취하게 하고 그 하체를 드러내려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이웃에게 술을 마시게 하는 사람 안 된다 이것은 단순히 알콜 마시게 하는 말이 아니지요 이웃에게 술을 마시게 한다는 말은 술이라고 하는 것은 때때로 어떻게 쓰여졌느냐 하면 진노의 잔으로 표현되는 진노의 잔으로 표현해요
 
예수님도 나를 좌의정 영의정 마가복음 10장 38절 세베데의 두 아들에게 주님이 무엇이라고 하지요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겠느냐 하지요
 
마가복음 10장 38절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그 잔은 영광의 잔입니까? 고난의 잔입니까? 고난의 잔입니다 누군가에게 술을 마시게 한다는 것은 누구를 취하게 만듬으로 누군가에게 고난을 안겨주는 그런 삶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들에게 화가 있다
 
누군가를 취하게 하는 것도 문제인데 거기에다가 자기의 분노까지 더하여 취하게 한다 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냐 하면 바벨론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그분의 분노의 잔입니다
 
그 잔을 가지고 이 바벨론이 죄 지은 나라를 징계하도록 하나님이 쓰셨어요
그러면 도구는 도구로서 역할만 하면 됩니다 거기에 무엇을 했다는 것이야 자기 분노를 더했다 이게 문제입니다
 
분노를 더한 까닭이 무엇이냐 하면 그 하체를 드러내게 하려는 것이었다 하고 말합니다 하체를 드러낸다는 것 그것은 그들을 수치 스럽게 만들지요
 
그러니까 수치스럽게 만든다는 말은 존엄의 박탈이지요
여러분 십자가 처형의 악마성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십자가로 사람들을 처형할 때 고통도 고통이지만 못을 박히는 고통도 고통이지요 옷을 벗기거든요
 
무엇이냐하면 옷을 벗긴다고 하는 것은 그의 존엄의 박탈입니다 더 이상 인간으로 처신하지 못하는 것이어요 이것이 상징적 행위라고 볼 수 있겠지요 여기에도 누군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그 술에 자기의 분노를 더하고 왜 분노를 더하느냐 하면 바로 그의 하체를 벗김으로 수치스럽게 만드는 것이어요
 
그리고 하체를 벗긴다는 말이 말 속에 담겨 있는 뜻은 전쟁 상황 속에서 자행되는 여성들에 대한 성 폭행 같은 것들도 암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쟁에서는 이런 일들이 자주 벌어졌거든요
 
이런 일들을 시행하게 하는 데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남을 취하게 하는 사람은 스스로 취하게 될 것이다
16절 네게 영광이 아니요 수치가 가득한즉 너도 마시고 너의 할례 받지 아니한 것을 드러내라 여호와의 오른 손의 잔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라 더러운 욕이 네 영광을 가리리라
 
하나님의 진노의 잔이 너희 손에 돌아가게 될 것이 더러운 욕이 네 영광을 가리리라 여러분 죄를 지으면 그것이 반드시 자에게로 돌아온다 예언자가 거듭 거듭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세상인데도 저는 심은 대로 거두는 세상이 정상적 세상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대박 이런 말들을 잘 믿지를 않습니다 제 외손녀가 있는데 세살인데 아름다운 바다를 보더니 와 할아버지 대박이어요 그래요
 
깜짝 놀랬어요 아니 애가 이런 용어를 써 나는 대박이라는 말을 참 싫어해요
아무튼 나는 심는대로 거두는 세상이 참 좋은 세상이다 하는 생각을 하는데요 강포를 행한 자에게는 강포의 운명이 다가올 것입니다
 
17절 이는 네가 레바논에 강포를 행한 것과 짐승의 피를 흘리며 땅과 성읍과 그 모든 주민에게 강포를 행한 것이 네게로 돌아오리라
 
레바논에 강포를 행하고 짐승을 죽이고 하는 자에게 어떤 생명도 반드시 그들에게 되 갚아질 것이다 이것이 예언자가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다섯 번째 화의 선언이 등장합니다
18절 세긴 우상은 그 세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새긴 우상과 부어 만든 우상 이것을 이야기 하고 있네요 어떤 것일까요 세긴 우상을 나무나 부어 만든 우상이고 부어 만든 우상은 동으로 만든 우상이지요 그 우상들을 사람들이 만들고 이렇게 이야기 한다는 것이지요
 
19절 나무에게 깨라하고 말하지 못하는 돌에게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 진저 그것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보라 이는 금과 은으로 입힌 것인즉 그 속에는 생기가 도무지 없느니라.
 
나무에게 개라하고 말하지 못하는 돌에게 일어나라 한다
사실은 우상은 사람들이 왜 우상에 의지하느냐 하면 불안하기 때문에 그럽니다
여러분 어두운 밤길을 걸어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홀로 걸어갑니다 두렵지요 그런데 다섯 각이 어린애 하나 손 잡고 가면 무서워요 안 무서워요 안 무섭지요
 
애가 무슨 힘이 있다고 인간의 불안함이 무엇이냐 하면
내 내면에서 일어나는 불안함이어요
출 32장 1절 암 송아지 우상 없이 기다리다 우상 없이 기다려라 하나님에 대한 신뢰이지요 우상을 만들고 가시적인 것 앞에서 안심을 하는 것입니다
 
아론에게 금송아지를 만들자고 하는 것은 불안 했기 때문이어요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우상 없이 기다리는 것이어요 어느 시인의 시 제목입니다 우상 없이 기다려요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신뢰이어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을 때 사람들은 가시적인 것에 안심하는 것입니다
 
지혜를 예언자들이 말합니다 보기에는 헛된 것 우상의 본래 의미는 빈 것 공허한 것 헛된 것이어요 이것을 거짓 스승으로 삼고 있다는 말이지요 거짓 스승 거짓 스승이기 때문에 이 우상이 하는 일은 나의 욕망을 추인해 주어요 내가 원하는 바가 이 우상이 원하는 바인 것 처럼 해 준다 그 말이어요
 
하나님은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은 어떻게 나의 욕망을 추인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욕망이 잘못되었다고 하고 참된 스승의 특색은 꾸짖는다 너 그렇게 살면 안 돼 꾸짖지 않아요 그래서 질정해요 꾸짖어서 바로 잡아 주는 게 스승이어요
 
우상은 말을 못하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바를 해봐 잘 한다 그게 자기 욕망을 투사하는 것이야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정말로 어떤 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 절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을 우상화하는 경우도 있어요
 
내가 원하는 바를 하나님이 다 들어주실 것이라고 우상화 하는 경우가 있단 말이지요 이것이 복음으로 포장되기도 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긍정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야 된다 그래요 긍정적 사고방식 좋아요 적극적 사고방식 좋아요
 
그런데 믿는 사람에게 더 필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분별력입니다 내가 이렇게 누려도 괜찮한가 내가 이렇게 누렸을 때 다른 사람이 피해를 갖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분별력입니다 거짓 스승은 나의 욕망을 추인해 주면서 다 될 것이야 다 이루어질 것이다 말합니다 그러나 참 스승은 그렇게 살면 안 돼 옆에 굶주린 사람이 있지 않니 옆에 너처럼 누리지 못한 사람이 있지 않아 조심해야지 그래서 사람들은 참 하나님보다 우상을 더 좋아합니다
 
본능적이로 이게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신앙생활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원하는 바가 다 이루어지는 것이 복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바가 있지만 그 욕망을 내려 놓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을 복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마음을 이렇게 살아야 된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나무에게 깨라 말하지 못하는 돌에게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가 있습니다 그것은 교훈을 베풀 수가 없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어요
 
생기가 없다 생기는 공기할 때 기자로 쓸 수도 있지만 여기에서 생기는 한자는 그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마는 일어날 기자도 있거든요 일어나는 힘이 없어요 우상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 하지요
 
창세기 2장 그 속에 생기 생령이 되었아 하나님의 영이 들어가면 일어선 존재가 되는 것이야 일어났어 하나님의 영이 들어가면 일어선 존재가 되는 것이야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특색이 무엇이냐 절망의 골짜기에 누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이 절망이라고 말할 그 때 슬그머니 일어나는 생기를 간직하고 사는 것이어요
 
모든 인간은 죽음의 운명성이 있습니다 사멸성이라고 하지요 모든 인간은 사멸하는 운명이어요 안 죽을 사람 아무도 없어요 장담하는 데 백년 안에 여기 있는 사람 다 죽어요 여러분 사멸하는 운명이어요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어머니의 태에서 태어났을 때 인간의 탄생이 완료된 것이 아니라 인간은 끊임 없이 정신적으로 다시 태어나야 돼
 
이것을 한나 아렌트라는 정신 철학자가 어떤 말을 쓰느냐 하면 탄생성 그런 말을 써요 어떤 말이냐 절망의 어두움 속에 내가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 속에 불어 넣으시는 생기를 통하여서 다시 한번 일어나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용기 이게 탄생성이다는 말이어요
 
탄생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엇인가 종속되어 있으면 탄생할 수 없습니다 나 스스로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돈에 종속되어 있어도 안 되고 특정인에 종속되어 있어도 안 되고 내 삶에 주인이 되어야 해요 하나님만이 내 삶에 주인임을 인정할 때 새로운 시작이 가능합니다
 
20절 오직 여호와는 그의 성전에 온 땅은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다
참되신 그 분이 내 속에 생기를 불어 넌다는 생각으로 그 크신 영광 앞에서 내 속에 잠잠할 때 하나님의 생기가 우리 속에 들어와서 절망과 어두움을 이기고 일어서게 하신다 이것이 하박국이 제국의 폭력속에 있는 자들에게 들려주는 말씀입니다
 

제5강 합3:1-7 광채속에 감추어진 권능


야고보서에 보면 5장13절에 너희중에 고난당한 자가 있느냐 기도하라 너희중에 즐거운 자가 있느냐 무엇하라 찬양하라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기쁜 일이 있을 때 찬양을 하는데 그 기쁨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라 하는 이야기이지요
 
고난당한 자가 있느냐 기도라라 내가 곤고한 상황에서 벗어나기를 소망하지요 그러나 기도한다고 하는 것이 주는 아름다운 효과가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기도할 때 나는 넓은 전망 속에서 나의 고난을 바라보게 되어요
 
이전에는 그 고난과 내가 마주 서 있어요 너무 힘들어 나에게 왜 이러니 하나님앞에 이 문제를 가지고 갔을 때 그 고난이 내가 못 견딜 고난도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하는 고난이기 때문에 하나님 아시지요 제 마음 이러고 나니까 마음속에 위로가 오고 이것이 기도의 효력이어요
 
우리가 기도를 함으로 얻는 또 하나는 남들이 보기에는 고난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계기로 삼을 수 있어요 이것이 기도하는 보람이지요
 
하박국의 시작은 탄식이었습니다 하나님 세상은 왜 이 모양이어요 악한자가 득세하는 세상 막 탄식을 했습니
 
저 악인들이 지배하는 세상 저 악인들이 제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악인들이 심판이 될 것이다 그러면서 화해 선언이 여러번 반복이 되었습니다 어떤 이야기냐 하면 이전에는 눈앞이 캄캄했어 세상이 왜 이래 희망이 없어 어두어 그랬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나니까 오늘을 견딜 수 있는 힘이 내게 생겨 그래 지금 현실이 이러한지 몰라도 이 현실이 궁극적인 현실이 아니야 이것은 바뀔것이야 하나님 안에서 시행될 일이기에 겨 하나님 안에서 악인들이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야
 
하나님 이 모든 일들이 반드시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그 다음에 무엇이냐 하면 기도여요
오늘부터 보는 대목은 무엇이냐 하면 하박국의 기도입니다
 
1절 시기오놋에 맞춘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
시기 오놋에 맞춘 선지가 하박국의 기도라 하는데요 시기 오놋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것이지요 어떤 음절을 가지고 불러야 할지 모르는데 어떤 음률에 맞추어서 부른 것 같아요
 
지금도 우리가 교회들마다 주기도문 송 부르지요
나는 우리 교회이야기입니다마는 우리 교회에서는 예배를 인도하는 목회자들이 마이크에 가까이 대고 찬양을 안 합니다 마이크에 가까이 대고 찬양을하면 솔로야 압도 되어요 일부러 떨어지라고 이야기 합니다 많이 떨어져요 그러면교우들의 생생한 목소리가 같이 들려오는 것이어요 굉장히 감동스러워요
 
마지막으로 우리가 주기도문 송 부르는 데 수 백명이 함께 하나님에 계신 아버지 이름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것을 부를 때 마음속에 말할 수 없는 감동이 찾아옵니다 정말 울렁 울렁 힘이 느껴져요 이것은 나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 교우들이 하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 찬양이 다른 교우들의 소리와 섰어서 우리에게 올 때 내 뒤를 밀어 주고 있는 것같이 느껴지지요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들은 노래를 잘해도 안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어쩧던 이렇게 기도도 음률에 맞출 수가 있는 것이지요 때때로 주기도문만이 아니라 좋은 기도문에 곡조를 붙여서 부르는 기도들이 있거든요 그런 기도들을 부를 때 마음속에 감동이 오는 데 반복할 수 있는 것이니까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 이야기함으로 하나님의 행하심 그러니까 하나님의 역사 계획에 하박국이 무엇하고 있느냐 하면 기도로 응답하고 있지요
 
여러분 하나님은 인간과 더불의 세상을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어느 교부가 이야기한 것 처럼 하나님은 사람 없이 세상을 창조했지만 사람과 더불어 세상을 구원하기 원하신다 그러니까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데 나는 너의 도움이 필요해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신단 말이어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까닭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꿈이 있어서 그래요 하나님의 꿈을 위해 나를 통하지 않고는 하실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이야기해요 그렇지요 이게 중요한 것인데 어떤 분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박자가 잘 맞아야 하는데 쿵하면 짝이 들어가야지
 
그러니까 신앙생활이란 무엇이냐 하나님의 쿵에 대한 인간의 짝 이것이 같이 맞아 들어가는 것이어요 이것이 신인 협력설이 아니고 조화로움을 이야기한다 하나님이 쿵 했는데 무슨 소리가 낫나 그러면 안 되어요
 
인간쪽에서 먼저 쿵 할 수 있어요 하나님이 짝하고 응답해요 기도의 응답이지요 이것이 조화롭게 움직일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이 땅에서 나타나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다스릴지에 대한 꿈을 2장에서 말씀하셨어요
 
예언자에게 그러자 하박국이 그것을 받아서 기도로 응답을 하고 있지요
이 시기오놋에 맞추었다는 이야기를 통해서 이 부분이 예배 공동체가 하나님앞에 바친 공동체의 기도이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어요
 
하박국의 기도로 되어 있지만 이것이 지속적으로 공동체의 기도로 바치어 졌다 알 수 있습니다
 
2절이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랍나이다
주께 대한 소문을 들으신 바가 있나요 우리가 우물가로 가냐 되나 주님에 대한 소문 그 소문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주님이 행하신 일들 주께서 행하신 일들 그 백성에게 베푸신 은혜 그런 것들 여러분 생각해 보면 내 인생이 지금 암담한 처지에 있어요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아요 그 때에 아까도 우리 이야기 할 때 어떤 일이 우리에게 다가가오면 그 일이 내 눈앞에 성큼 다가오기 때문에 아무것도 안 보여 이것만 보여 이 문제만 그렇지요 이것을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눈앞에 캄캄하다고 합니다
 
이게 이게 문제 없는 것이 아니고 문제여요 그런데 내가 어느 순간 이 문제가 다가 왔을 때 물러났어 이렇게 이렇게 보니까 이것도 보이지만 무엇이 보여요 그러자 이 문제가 죽교사는 문제가 아니야 여백이 내 속에 생긴 거에요
 
그러니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는 까닭이 무엇이냐 하면 내 앞에 다가와 있는 이 문제를 떨어져서 바라보는 것이어요 그러자 무엇이 보이느냐 하면 이 문제가 내 인생의 어려운 문제인 것이 분명하나 지난날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도와 주셨는지 나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공동체에 어려움의 시간속에 하나님이 어떻게 도와 주셨는지에 대한 기억이 상기되는 것이야 기억의 상기여요
 
그래서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기억해 내는 것이어요
이것이 여기에 2절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놀랐나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하나님의 베푸신 역사 섭리 이런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어 그 이야기를 들음 정서적 반응이 놀랐나이다 아 깜짝이야 이게 아니지요 놀랐나이다 경외심 경외심에 사로잡힌 것이어요
 
여러분 베드로가 그물을 던지고 고기를 잡으려는 데 안 잡혀요 그런데 어떤 분이 와 가지고 그물을 깊은 곳에 던져라 깊은 곳에 던지니 고기가 많이 잡히거든요
 
누가복음 5장 4절 깊은 곳에 손을 붙잡고 주님 동업합시다 이렇게
누가복음 5장 8절 거룩한 존재에 눈이 띠어진 것이어요 그렇게 되지 자기의 나약함 더러움 나를 떠나소서 내가 감히 그 거룩에 다가갈 수 없어요 이것이 경외심이다는 말이어요
 
그러자 베드로가 나와 가지고 손을 붙잡고 동업합시다 이렇게 안 하지요 어떻게 했어요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요 주께서 베푸신 기사와 이적과 은혜를 들었어 그리고 놀랍나이다 하는 것은 주님의 솜씨가 놀랍다는 말이 아니라 그 앞에 경외심을 느끼는 것이지요
 
그리고 나서 유명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2절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것 많이 보지 않았어요 많은 교회가 이것을 표어로 씁니다
 
수년내에 부흥케 하소서 특히 교회에 건축하는 교회들이 써 붙여 놓고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주의 일은 건축하는 일이고 그렇게 정한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여기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주의 일이라고 하는 것은 앞에 2장에서 이야기 한 하나님의 화해 선언이야 이렇게 이렇게 못된 일을 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징계하고 역사를 바로 잡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꿈이 주인이 되어요
 
그리고 수년내라고 하는 것은 1-2년 사이에 이런 이야기가 아니고 영어로 이야기 하면 In the midst of the years 이렇게 되어 있는데 흘러가는 해에 중간에 그 이야기는 무엇이냐 하면 어떻든 시간 속에 수년내에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 흘러가는 시간 속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이루어 주는 데 우리 마음속에 무엇이 있느냐 하면 바라기는 빨리 그런 마음이 있겠지요 이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여기서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내에 나타내시옵소서 라고 하는 이 말은 그것이 현실이 되게 하여 달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이게 교회 건축할 때 이것 내 거는 것은 전형적 자의적 해석에 속한다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마치 무엇하고 같으냐 하면
욥기 8장 7절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욥의 구절을 사람들이 매우 좋아하는 데 그래서 음식점을 차리는 교우가 있으면 그것 사 가지고 갈 때가 있지요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가 기도해 주면 좋아하기도 하고
욥을 향한 빌닷의 책망중에 나오는 말이어요 성경 구절을 뽑아 가지고 내 마음에 맞게
얼마전에 미국에 갔는데 미국 사람들은 나무 판에다가 무엇을 써서 기록하고 장식하는 것을 좋아하나봐
 
물론 영어지만 이렇게 써 있습니다 손자 손녀들은 언제나 환영 부모님은 꼭 약속하고 오실 것 그렇게 그것 보고 제가 웃었는데요 부모들이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구나 언제나 자식들에게 손자 손녀들은 언제나 오케이 그런 현실인데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좋은 말이기는 하지요 띠어 놓자면 맥락속에서 보면 그 이야기가 아니거드뇽
 
주의 일을 수년에 부흥케 하소서 이 말은 폭력이 만연해 있는 세상 힘 있는 사람들이 힘 없는 사람들을 착취하고 억압하고 무시하고 이런 세상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제도와 시스템이 국가의 시스템이 폭력적 제국이어요 가난한 나라 힘 없는 나라들을 억압하고 있는 이 세상을 하나님이 바로 잡겠다고 하셨으니 그 주님의 일을 속히 이루어 주십시오
 
그 이야기여요 이 구절이 그런 의미로 받아 들여야 한다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게 지금 비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진노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진노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어요 바벨론을 통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이것이 진노입니다 죄 지은 백성에게 바벨론이라고 하는 몽둥이를 들어가지고 치게 하셨어요 그러나 하박국이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 그 속에서라도 긍휼을 잊지 마소서 라고 말합니다
 
사실은 잊지 마소서라는 단어는 기옵하소소라고 번역하는게 옳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신명기 4장 31절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 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잊지 않으신 분이 하나님이지요 이것이 참 중요합니다 자비라고 번역되어 있는 단어는 많이 공부를 하셨을 터인데 하나님의 성품을 이야기 할 때 오래 참으심 긍휼하심 자비하심 이런 단어들이 등장합니다
 
자비 혹은 긍휼이라는 단어는 영어로는 컴팻션 compasssion 이라고 옮겨지는데 컴은 함께라고 하는 뜻이고 팻션이라는 것은 열정이라는 뜻도 있지만 고난이라는 뜻도 있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함께 아파하는 것이어요 이게 하나님의 사랑이야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본체 만체 이렇게 안해 그 문제 속에 내가 들어가는 것이어요 그리고 그 문제를 내가 아파하는 것이지요 그 문제를 풀어내기 위해 애 쓰는 것이지요
 
이것이 사랑이지요 사랑의 근본적인 모습이 성육신이다는 말이지요 함께 고난당하는 그런 하나님의 모습이 성육신으로 등장하는 데 이 컴펫션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그 단어는 무엇과 관련이 되어 있느냐 하면 어머니의 자궁과 관련된 단어이어요
 
 
자신의 모태 속에 여성의 몸은 받아 안습니다 이 생명이 잘 자랄 수 있도록 희생적으로 돌봅니다 희생적으로 돌보아요 언젠가도 이야기 했습니다마는 인간의 몸에는 면역 체제가 있어요 외부에서 무엇인가 들어오면 음식물이 아닌 다른 생명이 들어오면 면역 체제가 발동되어 가지고 비상들이 울리고 가 가지고 싸워 그런데 여성의 몸 가운데 유일하게 공격 안하고 잘 보듬어 나는 게 새로운 생명이어요
 
이게 신기한 것이지요 하나님이 만드신 신비야 그러니까 어머니들은 그렇게 자기의 모태에서 새 생명을 품고 키우고 그 생명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지요 입덧하고 먹지 못하고 고생하고 그리고 이제 출산이라고 하는 고통을 겪습니다 출산해요
 
그리고 나면 탯줄이 잘리기는 하지만 그 어머니와 자식 사이에는 탯줄이 잘리지만 끊을 수 없는 정서적 끈이 있지요 그래서 아이가 아프면 어떤 심정입니까? 아기야 너 대신 내가 아프면 좋으련만 대신 아파하는 것이지요 그렇지 못한 것이 아쉬운 것이지요 이것이 어머니의 사랑이지요
 
인간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할 길이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이 그 때 인간이 경험한 사랑의 최대치가 어머니의 사랑이다 그래서 자궁에서 유래된 단어를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한 것이어요
 
이게 중요한 것이어요 솔로몬의 재판이야기를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마는
왕상 3장 25절 왕이 이르되 산 아이를 둘로 나누어 반은 이 여자에게 주고 반은 저 여자에게 주라
 
3장 26절 그 산 아들의 어머니되는 여자가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성경에는 그 여인의 자궁이 꿀틀하여 말하되 굉장히 강렬한 이야기이지요
 
가자 엄마 진자 엄마에게 아이를 잘라가지고 반식 주라고 하자 가자 엄마는 예 좋은 판단입니다 진자 엄마는 그 여인의 심정이 불 붙는 것 같아 성경은 그의 자궁이 꿈틀하여 이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사람들을 사랑할 때 그런 사랑으로 사랑하신단 말이어요 무엇 때문에 이게 하나님의 사랑이어요
 
그래서 하박국이 구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왜냐 하면 그 사랑이 그치는 순간 인간은 무너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요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하지만 인간이 해야할 일 가운데 해야할 일이 우리에게 베푸신 그 사랑을 그 이야기를 자꾸 이제 함으로서 내가 하나님께 속해 있는 존재임을 더욱더 확인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박국이 지금 진노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말아 달라고 기도하고 있단 말이지
3절 하나님이 데만에서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 산에서부터 오시는 도다
기도를 통해 얻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나님께서 지금 현현하고 계신 것입니다
 
데만은 에돔의 중심도시이고 바란은 아마 이스라엘 남쪽 지역이 아닐까 싶은데 하나님의 추상적 개념이 아니단 사실을 하나님의 사랑이 장소와 더불어 하나님의 현현을 이야기 하는 것이어요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 속에 오신다고 이야기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이 장소라는 것이 참 재미있는데 인간은 장소성 속에 있는 존재인데요 예를 들어서 저는 여러해 전만 해도 함양이라는 곳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곳이 어떤 곳인지 전혀 나와 관련이 없기 때문에 몰랐어요
 
그런데 함양에 있는 어떤 분과 아주 좋은 관계를 맺기 시작하자 함양은 그의 얼굴과 더불어 내게 떠올라요 경남 거창이라는 곳도 제게는 무관한 장소였지만 거창에서 인연을 맺은 아무게와 더불어서 떠 올라요
 
우리는 어떤 장소에 대표이기도 해요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내가 어떤 교회에 갔는데 그 교인 한 사람에 대한 인상이 그 사람이 교회에 정착할까 말까에 대한 결정을 좌지우지한 경우도 있단 말이어요
 
모든 장소에 대한 기억은 사람에 대한 기억과 연결된다 아름다운 곳에 가면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아무게와 함께 왔다 그 생각이 들지요 그 장소를 함께 누리고 싶은 것이어요 인간은 그런 존재라고 할 수 있어요
 
하나님이 이 세상에 현현하신다고 할 때 이것이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데만에서부터 오시며 바란 광야에서부터 오시고 구체적으로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이 현현하실 그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그의 찬송이 세계에 가득하도다
그분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이불처럼 그의 찬송이 세계에 가득하다 그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이불처럼
 
4절 그의 광명이 햇빛 같고 광선이 그의 손에서 나오니 그의 권능이 그 속에 감추어졌도다
 
영광의 빛이 온 누리를 비추는 것 처럼 보여 집니다 그의 관명이 그 속에 감추어졌도다
이사야에 보면 그런 말이 나오지요
이사야 30장 26절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메시고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굉장한 이야기이지요 이것보다 더한 것이 무엇이냐
요한 계시록에 21장 23절 하나님의 나라는 해와 달도 소용이 없어 왜 그 분의 영광의 광채가 세상을 가득차 있기 때문에
 
지금 하박국은 자기 시대를 바라보면서 암담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계획을 알게 되자 무엇이냐 하면 빛이 자기를 채워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창세기 1장 2절 땅이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1장 3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빛이 생겨났지요 상황은 바뀐 것이 없어요 다만 하나님이 자기 속에 내주하여 계시면서 빛을 비추어 주시자 하나님의 꿈이 무엇인지 드러났고 이 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임을 빛이 아 오르고 어두운 세상이 환해 진 것이어요
 
믿음의 사람들이 산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인간은 사멸하는 존재다고 이야기했지요 그런데 인간에게는 사멸성도 있지만 무엇도 있다고 이야기 했지요 탄생성 그런 말 기억나세요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이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이 불어 넣어주신 생기덕분이어요
 
지금 하박군은 암담하지 않아 이제는 현실은 여전히 그대로 이지만 암담하지 않아요 그가 바라 본 것이 찬송이 가득찬 세상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제가 성경에서 가장 아름답게 여기는 것이 요한 계시록 보좌에 앉으신 분이 있고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 있고 네 천사가 있고 24장로가 있는 데 그분들이 찬양을 시작해요
 
계시록 5장 13절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온 피조물들이 보좌에 앉으신 어린양과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찬양을 해요 이것이 중심에서부터 점점 번영하는 것이야 잔잔한 호수에 우리가 돌을 던지지 않아요 그러면 어떻게 되지 수 없이 많은 물결이 동심원을 이루며 퍼져 가지고 그것 보좌에서부터 찬양이 퍼져가
 
우리는 늘 무엇만 보느냐 하면 여기에서부터 호수쪽으로 오는 동심원만 생각하는 데 이 파도가 부딪치면 또 돌아갑니다 이것이 우주적 찬양이야 감동이야 하늘에서 시작된 찬양이 땅에서도 다시 하늘로 번져 가는 것이어요
 
이것이 그것 아닐까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리다 그 말의 의믈 그림으로 그리자면 그런 모습이 아닐까
 
온갖 피조물들의 찬양이 온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4절 그의 광명이 햇빛같고 광선이 그의 손에서 나오니 그의 권능이 그 속에 감추어 졌도다
 
그 광채는 부드럽고 온유하지만 하나님의 강한 권능이 그 속에 감추어져 있다
온유하지만 강력합니다 제가 노자에 나온 이야기를 종종 좋아하기는 합니다마는 거기 어떤 말이 나오느냐 하면
 
예는 날가룸이야 날카로움을 완화 시켜서 부드럽게 하고 해기분이라는 것을 어지럽게된 것을 풀어내고 화기광 그 빛을 조화롭게 만들고 너무 환하게 하지 않게 하고 동기진 마치 먼지와 하나가 된 것 처럼 한다 이게 진리 안에 있는 사람의 모습이어요
 
예수 그리스도가 그랬단 말이어요 예수 그리스도는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을 쪼겔수 있는 강한 말씀이지만 주님은 그것을 부드럽게 말씀으로 어지러운 세태를 단순하게 풀어나시고 광채 그 자체이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여기지 않고 종의 몸을 입고 와서 하나가 되었어요
 
빌립보서 2장 6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절 오히려 자기를 지어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몸을 입고 와서
 
하나님의 권능이 그 속에 감추어져 있어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너그럽고 놀라운 분이지만 5절 역병이 그 앞에서 행하며 불덩이가 그의 발 밑에서 나오는도다
 
결국 무엇이냐 역병과 전염병까지도 거느리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그런 분이셔요 때때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세상에 벌어져요 우리가 욥기에 공부할 때도 베헤못과 리워야단 혼돈의 괴물처럼 보여 지거든요 혼돈의 괴물조차도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나의 이성으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이 파악되지 않을 것이 일어나요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실 것이야 이것을 우기가 확고하게 믿어야해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이해를 추구해야 돼 알아야 돼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알아야 해 신앙은 이해를 추구해야 되지만 알아야 될 것이 무엇이냐 하면 신앙은 역설속에 더 한다 그 말이어요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이해할 수 일들이 너무 많다
 
키엘코겔이라는 분은 신앙의 깊이를 역설 속에서 찾아요 높아 지고자 하는 사람은 낮아야 해 살고자 하는 사람은 죽어야 돼 이것은 말로만 해 가지고는 알 수 없어요 그 삶을 선택한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는 십자가가 그래요 십자가는 궁극적 생명인 십자가
 
이 역설속에 있다 제가 감동하는 것 하나는 십자가 위해서 예수님의 7마디 말씀 가운데
마가복음 15장 34절 아버지 아버지 왜 나를 버리십니이까 시편 29편 구절을 주님이 낭송한 것이지만 그래도 그 심정을 하나님께 아뢴 것이지요
 
버림 받음의 고통 그러면 하나님 나는 이렇게 이렇게 해서 그래 이렇게 안 하지 않아요 너무 하십니다 이렇게 무엇이라고 했어요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깨 맡깁니다 이해할 수 없지만 나를 하나님께 맡겨 신뢰하는 것이지요
 
세상이 왜 이 모양이다고 합니다 그러나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이 세상에 있어요 역병도 전염병도 불덩이도 하나님께 속했어 이게 하나님 앞에 가고 있어요 내가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은 많다 그렇게 말합니다
 
6절 그가 서신즉 땅이 진동하며 그가 보신즉 여러 나라가 전율하며 영원한 산이 무너지며 무궁한 작은 산이 엎드려 지나니 그의 행하심이 예로부터 그러하시도다
 
하나님이 탁 서실 때 땅이 진동하고 하나님이 불꽃같은 눈으로 괘 뚫어 보실 때 여러나라가 전율하고 영원할 것처럼 보였던 산들이 무너지고 작은 산들이 엎드려져 그 위용 앞에 설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금 바벨론이라는 제국이 압도적인 영원할 것 같은 제국이어요 그러나 무엇이라고 이야기합니까? 그가 서신즉 땅이 진동하고 하나님이 한번 서시면 마치 쓰나미 같아 여러분 쓰나미가 몰려올 때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지 모릅니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정말 고통 받는 사람을 보았는데 쓰나미에 비유해서는 안 되겠습니다마는 오만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은 때때로 쓰나미처럼 다가온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인간이 모든 제국들의 무너짐을 볼 수 있습니다
 
굳건해 보이는 모든 나라들도 하나님의 현존 앞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어요 애굽 앗스르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진나라 나치의 제 3제국 소련 일본 모든 제국은 다 무너졌습니다
 
폭력과 겁탈에 기반한 사회는 자기 속에 파괴의 씨를 내장하고 있고 그 파괴의 씨는 반드시 자라서 그를 무너뜨릴 수 밖에 없다하는 이야기입니다 어린 왕자가 생떼쥐 베리의 어린 왕자가 날마다 자기 별에서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그 화산 분화구를 청소하는 일이 날마다 하는 일이었고 그리고 자기 별에서 싹이 터오는 것을 보면서 이것이 장미싹인지 바우밤 나무싹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장미 자라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그 큰 바우밤 나무가 자라면 별이 깨질 수밖에 없거든요
 
바우밤 나무 뽑는 것이어요 자기 속에 바우밤 씨가 생겨지만 견딜 수 없는 것 처럼 나무의 시가 자기 힘에 대한 과신을 하고 있는 사람은 자기 속에 파괴의 씨를 심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그냥 넘어가는 법은 없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7절 내가 본즉 구산의 장막이 환난을 당하고 미디안 땅의 휘장이 흔들리는도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현현이 서술되고 있습니다 그래요 살다 보면 떼때로 눈앞에 캄캄하고 암담할 수 있습니다
 
그런 순간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어둠보다 하나님의 광채가 더 빛난다 우리 내면속에 그 빛이 하나님이 지배하시는 굳건한 심령이 있다고 한다면 혼돈 고통 억압 이런 것이 우리를 규정하는 궁극적 말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멸할 사람만이 아니라 날마다 탄생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생기가 우리 속에 넘치기를 바랍니다.

제 6강 합 3:8-19 하나님의 철저하신 보호

재능이란 무엇일까요? 어떤 게 재능이지요? 재능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마다 재능이 다 다르지만 지속에의 열정 어떤 일을 지속하는 것 이것이 진자 재능이다
 
살면서 보니까는 아름다운 성취를 이룬 사람들은 재주가 뛰어난 사람들이기 보다는 꾸준한 사람이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런 의미에서 재능이라고 하는 것은 지속의 열정이다 하는 생각이 드는데 성경 공부도 그래요
 
성경 공부도 다 아는 것 같고 이 정도면 이만 하면 되었지 중단하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알듯한 이야기이지만 반복해서 듣고 그러다 보면 마음속에 세기어 지고 이것이 연륜이 쌓여지다 보면 성품이 되고 성품이 우리 인생을 만들기도 하고 꾸준함 이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우리가 하박국 공부하고 있는데 하박국의 뜻을 알고 있었지요 어떤 뜻이었지요? 안아주다 포옹하다 그런 뜻이다고 굉장히 따뜻한 의미로 그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 뜻이 있어요 보니까 안아주다 포옹하다 그런 의미도 있지만 씨름하다 붙잡으니까 가만히 보니까 하박국은 자기 시대와 문제하고 치열하게 씨름을 했어요
 
어떤 사람이 교양이 있다고 이야기 할 때 그 교양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겠어요 다른 게 없습니다 타자의 고통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 사람은 자기의 아픔은 작은 아픔에도 절박하게 반응합니다
 
다른 사람이 아픔을 겪고 있다는 사실은 잘 인식 안해 이것이 인간이지요 우리자 정말 사랑의 사람이라고 한다면 타인의 고통을 공감할 때 그게 깊어진 사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은 나의 문제에 대해서 해결해야 하지만 자기 시대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해야지요
 
하박국은 그랬어요 강포와 패역에 가득차 있는 세상 괴로워하고 이러면서 씨름해 왔지 않아요 오늘 하박국의 마지막 시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탄식이 있었고 하나님 세상이 왜 이 모양이어요 탄식이 있었고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 나의 심판은 늦추지 않는다 그 다음에 하박국의 기도 하나님이 뜻하는 바가 이루어지기 바랍니다 기도가 있었지요
 
8절 여호와여 주께서 말을 타시며 구원의 병거를 모시오니 강들을 분히 여기심이니까 강들을 노여워하심이니이까 바다를 향하여 성내심이니이까
 
8절에 보니까 하나님이 말타는 분이시네요 주께 말을 타시며 구원의 병거를 모시오니 전사로서의 이미지로 전사 하나님 악과 싸우는 하나님의 이미지인데 어떤 특정과 대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무엇과 더불어 강들을 분히 여기심이니이까 강들을 노여워하심이니니까 바다를 향하여 성내심이니이까
 
주님이 말을 타고 병거를 몰고 있는데 묻는 것이어요 바다 때문에 화를 내십니까? 강들 때문에 화를 내십니까? 바다와 강하고 싸워 봐야 여기 강들과 바다를 이야기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이냐 하면 고대 세계의 사람들은 강이 지배하는 신이 있다고 바다를 지배하는 신이 있다고 믿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신격이어요 그 신격이라고 하는 것을 특별히 믿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고 강과 바다와 싸운다고 그런 신격들을 하나님의 모습을 형상화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강이나 바다 같은 것들을 신격으로 할 수 없는 까닭은 사실 문이 있어야 농사를 지을 것 아니어요 물이 있어야 바다나 강을 통해서 운송할 수 있고 모든 것들이 경제 문제가 강과 바다를 통해 이루어 졌단 말이어요
 
밤은 무섭기도 합니다 범람하면 홍수로 범람하면 우리의 삶의 터전을 돌아가게 하고 고대인들에게 중요한 일은 강을 다스리는 일이 매우 중요했어요 중국에서도 홍수 피해나고 하면 황하를 다스리는 일이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왕들에게 가장 중요한 사명이 있다면 치산치수입니다
 
그래서 중국의 우임금을 물을 잘 다스리는 임금으로 여져져 있습니다 이 물이라고 하는 것이 인간의 삶하고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때로는 복된 삶을 제공해 주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몰아가기도 하기 때문에 그 신격들을 달레는게 고대인들에게 중요한 문제였겠지요
 
그래서 그 신들을 강이나 바다를 신격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 이방인들이지요 그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분노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보면 하나님은 우리가 성서를 통해 알고 있는 하나님은 바다를 가르신 하나님 어떤 바다이지요 홍해 갈대 바라들 또 요단강을 가르셨지요 명령하자 요단강의 물이 흐름을 중단하고 이런 것들이 물과의 싸움이다기 보다는 물을 신격으로 숭배하고 있는 자들의 그릇된 생각과의 싸움을 드러내 보인 것이지요
 
그런 사건들이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말을 타고 전차를 모시는 하나님이 사람들을 두려움에 빠트렸다 강과 바다와 더불어 싸우는 것으로 볼 수 있어요
 
9절 주께서 활을 꺼내시고 화살을 바로 쏘셨나이다 주께서 강들로 땅을 쪼게셨나이다
그 하나님은 말을 타시는 뿐 아니라 활을 꺼내시고 화살을 꺼내시고 당시시고 하나님이 여기서 궁수로 되고 있습니다 궁수로 표현된 하나님 이 생각을 할 때마다 내게 떠오른 사람은 그리스의 문학가인 니코스 카잔자키스입니다
 
니코스 카잔 자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라는 책을 통해서 많이 알고 분입니다 젊은 날부터 내 마음을 뜨겁게 만든 사람이 니코스 카잔자키스인데 오래 전에 그리스에 갔을 때 아테네 숙소에 머물고 있는데 이 땅은 니코스 카잔스키의 땅이야 그래서 숙소에서 나와 가지고 뒤졌어요 굴목을 서점을
 
저는 성서 그리스어는 하지만 현대 그리스어는 못 합니다 현대 그리스어는 할 수 없는 데 스리스말로 쓰여진 니코스 카잔 자키스의 책을 샀어요 읽지 못하는 책을 사 가지고 와서 호텔에서 만나는 그리스 사람에게 부탁을 했어요
 
내가 영어로 이야기 해 줄테니까 그리스어로 기록해 주어 자유를 새의 목적으로 상을 사람을 기억하며 그리스 말로 책에 쓴 적이 있습니다 니코스 카잔자키스 자서전을 보면 하나님을 궁수로 표현한 대목디 등장합니다
 
나는 당신이 손에 쥔 활이올시다 주님 내가 썩지 않도록 나를 당기소서
하나님께 그렇게 인생이란 게 전부 하나님의 손에 쥐어진 팔이야 나를 당겨지지 않으면 썩가든요 나를 당기소서
 
두 번째 나를 너무 세게 당기지 마소서 주님 나는 부러질지도 모릅니다
그렇지요 운명의 타격이 내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세게 당겨지면 내가 부러질 수 있어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있어요
 
세 번째 나를 힘껏 당겨 주소서 주님 내가 부러진들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섭리 앞에 자기를 맡기는 것이지요 우리가 살다 보면 상처 많이 받지 않아요 상처를 상처로만 간직하고 살면 인생이 우울해 집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인생은 부러진 갈대 하나님이 그 속에 술겸을 불어 넣으시면 피리가 되어 가지고 아름다운 선율을 노래 합니다 상처 없기를 바라지 말고 그 상처 속에 하나님이 그 속에 아름다운 선율을 상처가 없기를 바라기보다 그 상처 속에 하나님의 숨결이 나를 당겨 주소서 만약에 그런 당겨진 것이 없다면 내가 썩어 버릴지 몰라 그러나 너무 세게 당기지 마소서 내가 부라질 지 모릅니다 인간적 생각
 
세 번째는 그 기도 내용이 바뀌지요 내가 부러진들 어떻습니까? 내가 당신 안에 있는한 이것이 니코스 카잔 스키의 생각입니다 운명을 대하는 자세가 이러다고 볼 수 있는데 하나님도 화살을 메겨 쏘시는 분 전투하시는 분으로 나오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 어떤 말이 나오느냐 하면
9절 주께서 강들로 땅을 쪼개셨나이다 시적 표현이지요 물이 땅위를 흘러가지요 보통 땅에 고랑을 만들면서 흘러가지요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표현을 했어요 주께서 강들로 땅을 쪼게셨나이다 이것 어마 어마한 표현이 이 속에 담겨 있습니다
 
가끔 자연 하천들을 보면 일직선일 때가 없지요 구비 구비 이렇게 가지 않아요 특별히 몽골의 초원 같은데 물이 흐르는 곳을 가보면 초원이니까 나무들이 별로 없어요 높은 산 위에 올라가서 보면 물이 흘러가고 있는데 거기만 반짝 반짝 빛나는 것이어요
 
무엇처럼 보이느냐 하면 뱀이 기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런 천을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사행천이라고 해요 뱀 사자 해 가지고 뱀이 지나가는 처럼 보여요 비행기를 타고 이집트 상공을 날아가다 보면 밑을 내다보면 모래사막으로 된 그 곳에 초록색 뱀 한 마리가 기어가는 것을 보여요
 
나일강이어요 그 나일강을 중심으로 해서 사람들이 산림을 일구어 가지요 그런데 강이 흘러간다 표현할 수 있는데 하나님이 강으로 땅을 쪼게셨나이다 역동적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예언자들은 어떤 자들이냐 하면 우리가 바라보고 편견적 시선 상투적인 시선을 뒤집어 냄으로 새로움을 만들어 내는 존재들입니다
 
정현정 선생님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다 그래요 무엇인가 기대지 않고 사는 것이 있네요 하면서 저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를 좀 보세요 그렇게 말한단 말이어요 나무가 우뚝 서 있는데 그 나무는 그냥 있는 것이 아니야 공기를 기대고 서 있는 것이야
 
공기가 무슨 힘이 있어 그럴런지 모르지만 공기가 없으면 나무도 서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시적 표현이지요 무엇인가 뒤집어서 우리의 생각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하는데 예언자가 그렇게 보고 있어요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속에 하나님의 숨결이 베어 있음을 절묘하게 보여줍니다
이 하박국의 이야기가 점점 커집니다
10절 산들이 주를 보고 흔들이며 창수가 넘치고 바다가 소리를 지르며 손을 높이 들었나이다
 
우리는 산이나 이런 것들이 무정물이야 그냥 그 자리에 서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 데 하박국이 하는 이야기는 산들이 주를 보고 흔들립니다 또 창수 창이라고 하는 것은 점점 넓어져 가는 것을 이야기 하니까 큰 물이야 큰 물이 넘치고 바다가 소리를 지르고 손을 높이 들었나이다 이것 굉장한 표현들이 여기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언자는 시인입니다 월터 블그만이라는 신학자가 있는데 최근에 우리나라에 번역된 책이 있어요 그 분의 책 제목이 무엇이냐 하면 Finaly Comes The Poet 그래서 번역을 무엇이라고 했느냐 하면 마침내 시인이 온다
 
그 이야기는 성서의 언어는 시적인 언어라는 것이어요 산문적인 언어가 아니라 무엇인가 새로운 세계를 우리에게 열어 보여 주기 때문에 이것을 성서적 표현으로 이야기 하면 바울은 그렇게 이야기했지요 하나님의 구원이 십자가라는 어리석은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거든요
 
고린도 전서 1장 18절 이 세상에 멸망 받는 자에게 십자가는 어르석은 것이어요 그러나 구원 받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시인 어느 잡지에서 세상을 그렇게 인식하는 사람들 새롭게 상투적인 눈으로 바라보지 않고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시인이어요 그래서 정오승 선생님은 시에도 나오고 카리지브라의 시에도 나오는 데 예수님은 그들이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그 분은 모든 사람을 시인이게 하는 시인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접촉하고 살면 세상을 이전처럼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새롭게 바라보는 것이어요 이것이 시적 존재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 보면 굉장히 역동적인 표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10절 소리를 지릅니다 소리를 높이 듭니다 소리를 높이 들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시인들은 예언자들은 자연 현상이야 바람이 불고 물결이 이는 것을 이렇게 보지 않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편 107편 25절 여호와께서 명령하신즉 광풍이 일어나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 도다
 
26절 그들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깊은 곳으로 내려 가나니 그 위험 때문에 그들의 영혼이 녹는도다
 
27절 그들이 이리 저리 구르며 피한자 같이 비틀거리니 그들의 모든 지각이 혼돈속에 빠지는 도다
 
28절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뱃사람들의 지각을 혼돈하게 하시기도 합니다 동시에 그들을 바다를 고요하게 하시고 항구로 인도하게 하시도 합니다
29절 광풍을 고요하게 하시고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는도다
30절 그들이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시는 도다
 
바닷물 때문에 고통을 겪는 것 처럼 어려운 일들이 벌어져요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겪어낼 때 하나님은 바닷물을 잔잔하게 하시고 소원의 항구로 인도해 준다고 해서 하나님을 신뢰하게 사라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든든함을 그렇게 노래하고 있거든요
 
하나님은 그렇게 바다가 소리를 지르며 손을 높이 들게 만드신 분입니다
이 시인들의 역동적 표현은 대단합니다
시편 77편 16절 하나님이여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 물들이 주를 보고 두려워하며 깊음도 진동하였고
 
17절 구름이 물을 쏟고 궁창이 소리를 내며 주의 화살도 날아갔나이다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 이게 표현이 너무 아름답니다 물들이 주를 보고 두려워 하며 깊음도 진동하였고 구름이 물을 쏟고 궁창이 소리를 내며 주의 화살도 날아갔나이다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 아름다운 표현이지요 이것을 읽을 때 떠 오르는 옥스퍼드 대학생이었던 17세기 18세기 시인입니다 이 바이런이 시험을 보는 데 수험관이 보니까 답을 안 쓰고 창 밖을 내다 보고 있어요
 
옥스퍼드 대학에서 시행된 종교학 수업이었는데 그 시험 문제가 가나안 혼인 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된 영적의미가 무엇인지 논하세요 이런 문제였단 말이어요 바이런이 두 시간 동안이나 창 밖을 내다보고 있어요
 
남들이 적고 있는데 수험관이 한 글자라도 적으라고 바이런이 썼던 유명한 문장이 있습니다 무엇이라고 했을까요? 물이 그 주인을 알아보고 얼굴을 붉혔다 그게 하나면 다 된 것 아니어요 물이 포도주로 변화된 사건이야
 
그러나 짧막한 한 문장이지만 무엇인가 설명은 아무것도 안 했지만 공감된 것이 있는데 이것이 시적 세계인데 성경에도 보면 물들이 주를 바라 보았나이다 대단히 역동적인 장면입니다
 
말 타시는 하나님 활 쏘시는 하나님 그분의 현존 그 자체가 바다가 손을 들게 만드는 하나님의 위엄을 말한 다음에 11절 날아가는 주의 화살이 빛과 번쩍이는 주의 창의 광채로 말미암아 해와 달이 그 처소에 멈추었나이다 하고 말합니다
 
전사 하나님이어요 이제 화살을 쏘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화살을 쏘고 주님의 창을 휘두르는 전사로서 이야기 하는데 그것이 얼마나 압도적인지 해와 달이 그 처소에서 멈추었다 더 이상 빛을 낼 수 없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광채가 얼마나 놀라운지 해와 달도 무색해 졌다 이렇게 이야기 할까요 해와 달도 낯 빛이 창백해 졌다 그런데 화살이 막 날아가는 그 모습들을 우리가 영화를 통해 종종 보기도 합니다마는
 
이 화살 날아가는 이야기가 등장하는 대가 있습니다 그게 어디이냐 하면 헤로토스가 쓴 역사라는 책인데 주전 480년 페르시아의 왕이었던 크세르크스라는 왕이 백만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를 침공합니다
 
그리스는 인구도 많지 않고 속절 없이 당할 수 밖에 없는데 병사들이 서로를 얼마나 많이 오는지 정말 그들이 쏘는 화살이 해를 가릴 정도이다 하는 이야기를 하자 그들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페르시아의 병사들이 쏘는 화살이 해를 가릴 것이라고 하니 정말로 반가운 소식 우리는 그늘 속에서 싸울수 있지 않겠소
 
이것이 무엇을 이야기 하느냐 하면 페르시아는 그들이 생각하는 서양 사람들이 만났던 최초의 압도적인 타자입니다 그리고 페르시아 군인은 무엇이냐 하면 자발적으로 온 사람들이 아니라 전제 군주에 의해서 강요되어서 온 사람들이어요
 
그런데 아테네 사람들은 노예들은 전투에 안 나갑니다 시민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나가지요 압도적 타자를 경험하고 있지만 강요된 사람들이 아니기에 자유스러운 주체야 저들이 쏜 화살이 태양을 가린다고 한다면 그들 속에 싸울수 이게 무엇이냐 굉장한 자부심입니다
 
아테네에 민주정에 대한 자부심이 그 속에 담겨져 있는 것이어요 아시아적 존재인 페르시아를 폄하나는 듯 보여도 기분이 나쁘기는 하나 헤로도토스는 아테네의 자유 여기에 대한 자부심이 있기 때문에 이런 문장을 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지를 보여 주는 데
12절 주께서 노를 발하사 땅을 두르셨으며 분을 내사 여러 나라를 밟으셨나이다
주님의 노로 땅을 두르시고 여러 나라를 밟으십니다
 
13절 주께서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려고 나오사 악인의 집의 머리를 치시며 그 기초를 바닥까지 드러내셨나이다
하나님은 선택한 백성 그 기름부은자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직접 개입하시고 그들이 무너질 수 이것이 강력한 이야기입니다
 
악인의 집과 싸움으로 점점 하나님의 싸움이 구체화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죽임을 당하는 그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14절 그들이 회오리 바람처럼 이르러 나를 흩으려 하며 가만히 가난한 자를 삼키기를 즐거워하나 오직 주께서 그들의 전사의 머리를 그들의 창으로 찌르셨나이다.
 
가만히 가난한 자를 삼키기를 즐거워 하나 하나가 중요합니다 전사의 머리를 그들의 창으로 찌르셨나이다 결국 폭력을 행하고 다른 사람들은 타자화하고 다른 사람들을 수단으로 취급하는 그들은 자기들의 무기에 의해서 스스로 해칠 수 밖에 없다 이것이 하나님이십니다
 
15절 주께서 말을 타시고 바다 곧 큰 물의 파도를 밟으셨나이다
말을 타시고 하나님의 모습이 여기에 아름답게 우리가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오시는 장면이 있지요
 
옛날에 영화가운데 몬트리올 예수라고 하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어떤 공연을 하는 사람이어요 예수님이 물 위를 걸은 것을 시연하기 위해서 문 밑에 받힘을 쭉 만들어 놓고 그 위는 걷는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합니다
 
사실은 많은 성도들의 관심은 무엇이냐하면 예수님이 정말로 물 위를 걸으실 수 있을까 그 고민들을 하지요 이것이 사실이야 꾸민 이야기야 그런 관심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 위를 걷는 방법을 상훈씨는 알고 있습니다
 
몇 년 전인지 모르나 동일한 이야기를 했을 때 상훈씨가 했던 이야기가 있어요 한쪽 발이 빠질 것 같으면 다른 발음 옳기고 발을 빨리 움직이면 된다고 했어요
 
어떤 분이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마태복음 14장 26절 제자들이 그가 바다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면 무서워하며 소리 지르거늘
 
베드로가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고 두려워하는 데
27절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29절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서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주님이시면 나도 걷게 해 달라고 오라 그러자 베드로가 배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걸었어요 몇 걸음 걸었어요 몇 걸음 걸었는지 알 수 없지요 그런데 결국 베드로는 빠졌지요 왜 빠졌을까요?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어요 마음에도 무게가 있다 그의 마음을 예수님에게 맡겼을 때 그는 걸었는데 그 마음을 되 찾아 왔어 네가 걷는 것이야 천사가 가볍기 때문이거든요 무게가 안 나간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늘 하늘을 향해 바라보지 때문에
 
이 이야기를 하려는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이 바다를 걸으신 그 사건이 신약 성서에서 매우 중요하게 이야기 되고 있는 까닭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은 어떤 분으로 형상되고 있는가 하면
하박국 3장 15절 주께서 말을 타시고 바다 큰 물의 파도를 밟으셨나이다
흉흉한 물결위를 밟고 가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이야기 합니다
 
욥기 9장 8절 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
바다 물결을 밟는다고 하는 것은 그분이 누구임을 나타내신가 하면 하나님이심을 예수 그리스도가 물위를 걸었다고 하는 것은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동시에 그것만이 아니라 중요한 게 하나 있는데 예수님이 태어나실 무렵에 로마 황제는 아우구스투스라는 사람이었어요 로마는 아우수스투스를 신화화하기 위해서 동전을 만들어요 거기에 상징물을 집어 넣고 있는데 말을 타고 수레를 타고 그러니까 전투 수레를 타고 물결 위를 달려가는 아우구투스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어요
 
그것은 결국 무엇이냐 하면 물위를 달린다고 하는 마차를 타고 달린다고 하는 것은 신적 존재라는 것이어요 그 때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한 사람들이 예수님이 물 위를 밟고 걸으셨다는 것으로 누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냐 고백이다고 볼 수 있어요
 
이 본문하고도 매우 중요한 대목이라고 볼 수 있어요
말을 타시고 압도적인 하나님의 권능 여기 15절까지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16절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싹이 나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를 떨리는 도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게 중요한데 왜 이게 중요한가 하면 이전에 하박국이 무엇이라고 이야기를 햐였느냐 하면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하실지 내가 들어 보아야 하겠습니다
 
2장 1절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른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이라 하였나니
 
하나님 대답좀 해 보세요 이 세상에 대해서 그가 말합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내 입술이 떨렸음이라
 
그런데 그가 이제 말합니다
16절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 떨리는 도다
 
창자가 흔들린다고 하는 말은 옛날 사람들은 인간의 감정이 인간의 신체 장기 속에 머물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가장 깊은 정서가 머무는 자리가 창자라고 생각을 했어요
 
내 창자가 흔들렸다고 하는 것은 내가 서 있던 하나님의 압도하심 앞에서 내가 들었음으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 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느니라
 
적들의 패망이 예고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견디어야 할 현실은 무겁기만 합니다
이것이 하박국의 마음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의 마음속에 희망이 들어왔어요 왜 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강포와 폭력이 아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하박국에서 제일 잘 알려진 본문이 등장한 것이어요
 
17절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여기 보면 없고 없고 없고 그러지요 내 삶의 조건으로 이러 이러한 것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 것이 하나도 없어 그러면 무엇입니까? 불행한 것이지요 우리는 그렇게 치부합니다 평화로운 조건이 하나도 구성되지 않은 것 같은 그런 상황입니다
 
그런데 18절에 하박국이 이야기 합니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탄식이 변하여 기쁨의 찬양이 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를 그렇게 괴롭게 했던 그 현실이 해결 되었습니까? 현실은 그대로 남아 있어요 그러나 하박국에 생긴 것은 이 현실이 지속될 수 없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악인들이 심판을 받는 것은 이미 예정되어 있어요 실편될 수밖에 앞을 내다 보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 마음속에 생긴 것은 기쁨입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저 악인들인 줄 알았더니 아니야 그래서 그가 하는 이야기가
18절 여호와와로 말미암이 즐거워하고 기뻐할 것이다 합니다 이런 것을 급진적 낙관주의라고 이야기 합니다 래디컬 이야기 하고 있는데 래디칼이라는 말은 근본에서부터 그 뜻이어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급진적 낙관주의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레미야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거기에서 헛된 생각하지 말고
 
예레미야 29장 3절 유다의 왕 시드기야가 바벨론으로 보내어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에게로 가게 한 사반의 아들 엘라사와 힐기야의 아들 그마랴 편으로 말하되
 
4절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 잡혀 가게한 모든 포로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5절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6절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딸들 시집 장가 보내고 그들에게 평안을 구하라
7절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
 
그들이 평안해야 그럴 이 때는 하나님의 정한 때가 지나가면 그 때까지는 경거 망동하지 말고 그 속에서 생명을 유지하며 살아라 미래가 없다고 한다면 힘들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 분명했기 때문에 급진적인 낙관론을 가지고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기 하박국도 똑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절망의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보아내는 것입니다 그 희망의 근거는 나가 아입니다 이 절망 속에 빛을 비추어 하나님의 역사 섭리 나는 패배할런지 몰라도 나는 패배할 수 없다는 신념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무너지지 않게 해 주는 것이지요
 
19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여호와는 우리로 하여금 일어서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높이를 가지며 싸움을 살 수 있도록 해 주시는 분이 여호와이시다 여러분 하박국이 씨름 끝에 얻은 결론이 주어집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제아무리 열악하다 해도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내가 그와 더불어 있다고 할 지라도 나는 패배할 지라도 패배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하박국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입니다.













나훔(위로자, 위안자)


7월 14일(수) 범람한 물(나훔 1:7-8)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의뢰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그가 범람한 물로 그곳을 진멸하시고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시리라.

나훔이란 이름의 뜻은 "위로자" 또는 "위로" 라고 합니다.
그런데 나훔서를 읽어보면 전혀 위로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니느웨에 대한 멸망의 예언이 주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나훔과 같은 동시대에 활동한 선지자는 "예레미야" "스바냐"입니다.
나훔 선지자가 "니느웨의 멸망"에 대해서 외치기 130년 전에 선지자 요나가 40일 후에는 니느웨가 무너질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요나 선지자의 외침에 니느웨 성은 왕을 비롯하여 모든 백성들과 심지어 짐승들까지도 금식하며 회개하므로 니느웨 성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혀왔던 원수 앗수르의 몰락과 멸망에 대한 예언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마치 우리나라를 오랫동안 괴롭히던 일제 치하 시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 사건으로 인한 일본 천황의 항복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독립에 대한 기대로 인한 위로와 기쁨의 메시지로 받아들여진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1장은 하나님의 심판
2장은 니느웨의 멸망
3장은 앗수르의 멸망


나훔 1:7-8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의뢰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그가 범람한 물로 그곳을 진멸하시고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시리라. 아멘



경고하시는 하나님(맛사. massâʼ) מַשָּׂא 

나훔 1:1

니느웨에 대한 중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

중한 경고(맛사. massâʼ) מַשָּׂא

목소리를 높이다(사 3:7, 42:11)
  - 하나님의 의뢰를 받아 경고하는 하나님의 말씀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

미가 1:2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 법과 도덕을 범하면서도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신다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 

미가 1:3a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죄인을 결코 사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출애굽기 34:6b,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선하신 하나님(토브 아도나이)

나훔 1:7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그는 자기에게 의뢰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진멸하시는 하나님

나훔 1:8


그가 범람한 물로 그곳을 진멸하시고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시리라.


나훔 1:15a

볼찌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보하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오늘의 기도

아름다운 소식과 화평을 전하게 하소서! 

미즈노의 하나님  / 미즈노 겐조(1937-1984)

일본에 미즈노라는 시인이 있습니다(1937-1984).
그런데 미즈노씨는 세상에서 참 혹한 불구자인 것입니다. 전신이 해삼처럼 퍼져서 수족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며,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며 물론 글도 쓸 수 없습니다. 그가 의사를 발표할 수 있는 유일의 길은 눈을 반짝이는 것뿐입니다. 그가 작품으로 발표한 시는 그의 형수의 헌신적인 협조에서 이뤄 진 것입니다.

그가 시를 쓸 때에는 그의 형수가 일본어 50자표를 걸어 두고 막대기로 한 자씩 짚어 내려가다가 미즈노씨가 원하는 글자가 짚히면 그의 눈이 유난히 반짝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형수는 그 글 자를 백지에 써두고, 또 짚어 내려가다가 다음 글자를 쓰는 식으로 미즈노 씨의 마음에 있는 시가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 한 수를 쓰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과 두 사람의 인내가 필요한 것이며, 그 시가 바로 일본 문단의 걸작이 되고 베스트셀러가 되며, NHK가 특집으로 보도한 것입니다.

미즈노씨의 시집에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 12:9)라는 것이 있습니다.
도대체 미즈노 같은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가 족하다고 하겠습니까?
하나님을 원망하고 또 원망해도 부족할 터인데 말입니다.

파스칼
“사람은 같은 사건에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같은 조건에 살면서도 어떤 사람은 그 조건에서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또 어떤 사람은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미즈노씨가 체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우리들이 세상의 어떤 환경 속에서든 오직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네 은혜가 족하도다 (고후 12:7-10)


시인 미즈노 겐죠(水野源三)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뇌성 소아마비를 앓아 온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중증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본인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곳은 오직 눈뿐이었습니다. 울어도 자신의 눈물을 닦을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죽기를 원했지만 죽을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미야오 목사를 통해 복음을 듣고 예수를 영접했습니다. 그는 매일 거르지 않고 성경을 읽어가는 동안 자신이 살아야 하는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고 모습이 밝아져갔습니다. 

몸이 부자유스럽고 말조차 못하던 그가 시를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겐조를 진찰하던 의사가 예라고 대답할 때 눈을 감으라고 주문한 데서 비롯됐습니다. 어머니가 손가락으로 일본 문자판을 하나씩 짚어 가면, 원하는 자음과 모음에서 눈을 깜빡이는 방식으로 한자 한자의 글을 찾으며 문장을 만들어갔습니다. 이런 엄청난 작업을 통하여 말로 할 수 없었던 겐조의 내면세계가 표현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눈 깜빡임을 통해 수백 편에 이르는 시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겐죠는 ‘괴롭지 않았더라면’ 이라는 시를 통해 이렇게 고백합니다.

“만일 내가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였을 것을, 만일 모든 형제자매들이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이 전해지지 않았을 것을, 만일 우리 주님이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을”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늘 부족한 것처럼 불평을 일삼으며 살아온 것이 아닙니까?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없는 것이나 잃어버린 약한 점만 찾지 말고 장점을 헤아리며 감사하여야 합니다. 

바울은 최고의 석학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교육받은 엘리트였으며 태어날 때부터 로마시민권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가시로 인해 약함을 안고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육신의 가시를 ‘사단의 사자’ 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얼마나 그에게 큰 고통이었던 가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시를 제거해 주지 않고 대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는 응답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족하다”는 말은 ‘충분하다, 넉넉하다’ 의 수동태입니다. 

바울은 가시 때문에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당했지만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며 그로 인하여 족한 은혜를 얻게 되었습니다. 비록 자신이 기도한 대로 되지는 않았으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기에 오히려 만족스러운 일이 되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결국 약함은 바울에게 가시가 아니라 보배처럼 소중한 것이 되었습니다. 괴롭혔던 가시가 도리어 축복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약함은 바울의 시선을 자신에게서 하나님에게로 향하게 하였습니다. 이같은 깨달음으로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었으며 그 은혜에 감사하며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에게 주셨던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라는 응답은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 약함이 온전해지리니

거듭남 (Born again)의 저자 찰스 콜슨 (Charles Colson)의 말입니다.

 “나는 40년 동안 세상을 얻기 위해 전 생애를 투자했습니다. 그러나 힘들게 얻은 성공과 세상 것을 다 잃어버리고 차가운 감옥 바닥에 앉았을 때 비로소 나는 감옥이 하나님 사랑의 울타리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콜슨이 누구입니까? 닉슨 전 미국 대통령 보좌관으로 영화와 공명을 누렸으나 정치적 스캔들에 걸려 지위를 모두 박탈당하고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감옥에 갇히게 된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 회개하고 변화되어 감옥에서 나온 그는 교도소 선교회를 조직하여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지금도 감당하고 있습니다. 감옥에 들어가는 일련의 고통들이 가시가 되었으나 그 약함을 통해 교만과 자기 우상화가 깨어져 하나님 앞에 온전해지는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노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눈앞에 가시만 보고 원망하며 불평해 합니다. 그러나 그 가시가 약함을 깨닫게 해주는 은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찾게 하는 은혜이며 온전한 자아로 나아가게 만드는 은혜입니다. 

본문 9절입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하여지는 것입니다. 나는 심히 약하나 하나님의 은혜는 나를 크게 하십니다. 여기의 ‘온전하여진다’ 는 말은 성숙해진다는 뜻입니다. 성숙한 신앙은 가시를 아픔이라 하지 않고 온전케 하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스스로 약함을 고백하는 사람에게 임합니다. 만약 바울이 약하지 않았더라면 계시를 받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가시를 하나님의은혜로라 고백하십시오. 그때 비로소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혹 부끄러운 약한 점이 있습니까? 약함을 고백할 때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계시를 주사 온전함에 이르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약함이야말로 온전하게 만드는 은혜의 통로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약함을 자랑케 되리니

용혜원 목사의 ‘약함의 향기’ 라는 시입니다. “자동차의 사이드 미러엔 뒤차가 보이지 않은 사각지대가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고개를 돌려 확인합니다. 우리도 살아가다 보면, 스스로 보지 못한 부분이 얼마나 많은지 자꾸 깨닫습니다. 아무리 잘 살고 똑똑하고 빈틈없는 사람인 것 같아도 가까이 가보면 다 결점이 있고 편견이 있으며 약한 부분도 있습니다. 누구나 처음에는 내가 완벽한 줄 압니다. 그래서 주장이 강하고 용서가 힘들며 실수를 못 참습니다. 그러다가 차츰 우리는 내게도 약점이 있음을 깨닫고 남의 약점을 이해하게 되고 남의 실수도 용서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실수와 약점과 결점이 우리 삶의 소중한 부분이고 향기인 것까지 눈치 채게 됩니다.”

본문 9절입니다.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가시를 가졌음에도 기뻐하였습니다. 도리어 약한 것들을 자랑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의 ‘머문다’ 는 말은 ‘에피스게노세’ 로서 ‘장막을 펴고 함께 산다” 는 의미입니다. 즉 가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머무는 은혜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약함을 인정하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약함을 드러내면 치명적인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약함을 아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약함은 숨겨야 될 것이 아니라 인정해야 됩니다. 그것이 바로 약함을 극복하는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있는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결코 약함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약함 때문에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합니다. 그리할 때 약함이 자랑거리가 되도록 역사하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탄 배가 암초에 가로막혀 앞으로 나갈 수 없을 때 암초를 치우시는 것이 아니라 강물을 불어나게 하시사 암초를 넘어가도록 역사하십니다. 그때 불어나는 강물이 바로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약함은 우리로 자랑하게 만드는 은혜가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약함이 강하여지리니

나이가 든 소금장수와 젊은 소금장수가 소금을 팔기 위해 산을 넘고 있었습니다. 산을 오르다 너무 힘들어 젊은 소금장수가 불평하며 말합니다. “이 산이 조금만 더 낮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자 나이 든 소금장수가 말합니다. “나는 이 산이 지금보다 갑절만 더 높았으면 좋겠는걸” 그러자 젊은 소금장수가 의아히 여기며 묻습니다. “어르신도 힘들어 쩔쩔매면서 산이 더 높았으면 좋겠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때 나이가 든 소금장수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산이 더 높아야 산 너머 사람들이 소금 구하기가 더 어려워져 우리가 가져가는 소금 값을 더 쳐 줄 것이 아니겠는가?” 약함이 오히려 강함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이야기입니다. 

본문 10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약한 것들, 능욕, 궁핍, 박해, 곤고가 기쁨이 됨은 약할 때가 강할 때이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약함을 가진 바울이 어떻게 강해질 수 있었습니까? 자기 힘으로 할 수 없기에 하나님께 맡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강함의 비결은 약함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약해지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강해질 수 있는 조건을 갖춘 것으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능력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약하고 무능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강한 사람에게는 그의 무능함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살아가며 어려운 일과 약점이 생겨도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약함을 강함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도리어 약함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정채봉 동화작가의 글입니다.

“콩 형제가 있었습니다. 콩 형이 ‘나는 들에 가서 살래’ 그러니까 동생 콩이 ‘아니야. 나는 방안에서 살래’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콩 형은 들에 나가 햇빛을 받고 비바람을 맞으며 콩 나무로 자랐습니다.
그런데 햇빛도 받지 않고 비도 맞지 않는 방안에서 자란 동생 콩은 콩나물이 되어 상에 올라 반찬이 되고 말았습니다.
같은 콩이지만 햇빛을 받고 비바람을 맞으며 자라는 것은 나무가 되지만 온실에서 자라는 것은 콩나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약함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약함이 있습니까?
어려움이 있습니까?
경제적인 약함, 환경적인 약함, 인간관계의 약함이 있습니까?
약함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도리어 그 약함을 하나님께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약함으로 인해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약할 때 바로 그 때가 하나님께 맡길 기회인 줄로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약함은 우리에게 은혜입니다.
온전하게 하는 은혜입니다.
자랑이 되는 은혜입니다.
강함이 되는 은혜이기에 약함 속에서도 내게 주신 은혜의 족함을 깨닫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7월 15일(목) 그 존귀한 자(나훔 2:5)

나훔 2:5

그가 그 존귀한 자를 생각해 내니 그들이 엎드러질듯이 달려서 급히 성에 이르러 막을 것을 예비하도다.

(현대인의 성경)
왕이 정예병을 소집시키자 그들이 쓰러질 듯이 급히 성으로 달려가서 방어 태세를 취한다.

야곱의 영광(가온. gâʼôwn) גָּאוֹן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망한 후 

질투하시는 하나님(1:2)
보복하시는 하나님(1:2)
죄인을 멸하시는 하나님(1:3)
진멸하시는 하나님(1:8)

이사야 10:5
화 있을진저 앗수르 사람이여 그는 나의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나의 분한이라. 

나훔 2:1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나니 너는 산성을 지키며 길을 파수하며 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찌어다.

나훔 2:6-7
강들의 수문이 열리고 왕궁이 소멸되며.
정명대로 왕후가 벌거벗은 몸으로 끌려가며 그 모든 시녀가 가슴을 치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우는도다.

나훔 2:13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어 너의 병거들을 살라 연기가 되게 하고 너의 젊은 사자들을 칼로 멸할 것이며
내가 또 너의 노략한 것을 땅에서 끊으리니 너의 파견자의 목소리가 다시는 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오늘의 기도

시편 144:15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나라를 세워주소서!

(이야기) 속 안에 있는 것
 
독일이 아직 통일이 되기 전의 이야기입니다.

공산주의였던 동독 사람들은 한 밤 중에 베를린 장벽을 통과해 쓰레기나 선전물을 종종 서독으로 던졌습니다.
서독의 정부는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심하여 여러 차례 해결 방안을 의논했다고 합니다.
첫째, 쓰레기를 모아서 다시 돌려주자
둘째, 적법한 절차를 걸쳐 항의하자
셋째, 받은 것 이상으로 돌려주자
넷째, 식료품과 생필품을 가득 쌓아 동독의 장벽 앞에 놓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물건들 앞에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것밖에 주지 못한다.’ 라는 푯말을 세워놓았다고 합니다.

작가 펄벅이 한국을 잠깐 들렀을 때, 한국의 농부들이 소 를 끌고 가면서도 지게를 지고 가는 것을 보고 이유를 물었습니다.
농부가 하루 종일 일한 소를 위한 배려라는 말을 하자 펄벅은 깊은 감명을 받고 이에 대한 글을 남긴 적이 있습니다.

주님도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안에 주님의 말씀과 사랑이 있는지 확인해 보고, 선한 것을 담고, 선한 것을 주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반드시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합니다.

주님!
온전히 주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이 마음에 자리하게 하소서!
최근 내 안에서 나온 말들이 어떤 것이었는지 살펴보고 반성하십시오.



7월 16일(금) 그 음행과 그 마술(나훔 3:4)


 

나훔 3:4
이는 마술의 주인된 아리따운 기생이 음행을 많이 함을 인함이라
그가 그 음행으로 열국을 미혹하고 그 마술로 여러 족속을 미혹하느니라.


나훔 3:1
화 있을찐저 피 성이여 그 속에서는 궤휼과 강포가 가득하며 늑탈이 떠나지 아니하는도다. 

새번역 성경

너는 망한다! 피의 도성! 거짓말과 강포가 가득하며 노략질을 그치지 않는 도성!

* 거짓으로 다스리는 문명

나훔 3:2-3

휙휙하는 채찍 소리, 굉굉하는 병거바퀴 소리, 뛰는 말, 달리는 병거,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살륙 당한 떼, 큰 무더기 주검,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 전쟁으로 다스리는 문명

나훔 3:4

이는 마술의 주인된 아리따운 기생이 음행을 많이 함을 인함이라 그가 그 음행으로 열국을 미혹하고
그 마술로 여러 족속을 미혹하느니라.

* 화려함과 마술(속임수)로 다스리는 문명 


나훔 3:6-7

내가 또 가증하고 더러운 것을 네 위에 던져 능욕하여 너로 구경거리가 되게 하리니.
그 때에 너를 보는 자가 다 네게서 도망하며 이르기를 니느웨가 황무하였도다
누가 위하여 애곡하며 내가 어디서 너를 위로할 자를 구하리요 하리라.

* 개인의 존엄을 파괴하는 문명

오늘의 기도

세상을 변화시키는 믿음으로 살아가자!




문화의 의미

문화는 라틴어로 쿨투라(Cultura)다.
그것은 종교의식과 경작하고 파종한다라는 ‘쿨투스’에서 기원했다.
종교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신앙 차원에서 문화가 발생했다.
그런 차원에서 한국의 기독교문화도 이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중요한 원동력이 됐다.
그러나 바벨탑을 쌓은 일은 하나님의 뜻을 어긴 인간이 모여 하늘로 올라가려는 의지를 표현한 문화적 활동이었다.
하나님의 진리를 적대시하고, 명령을 거스르는 ‘바벨탑의 문화’는 지금도 곳곳에서 영역을 확장시키고 있다.

문화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장 좋은 선교 도구가 될 수 있지만 신앙을 파괴시키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소금인 그리스도인들이 소금의 사명을 그 시대 속에서 잘 감당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정직과 희생의 모습을 갖춘 신앙인의 삶이 모일 때 아름다운 새 문화를 이룰 수 있다.

제사 문화를 예배문화로

유교 제사가 우리나라에 들어 온 것은 이조 시대 때부터입니다.
유교에서는 효자로서 어버이를 섬기는데 있어서 3도를 말합니다.

첫째, 살아계실 때에는 봉양
둘째, 돌아가시면 그 상복을 입고
셋째, 상이 끝나면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맹자는 "뒤를 이을 아들이 없이 조상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되는 것은 가장 큰 불효라."했습니다.

왜 죽은 후 제사를 강조합니까?
제사가 끊어지면 영원히 죽기 때문입니다.
제사를 중시 여기는 사람들의 혼령관은 입귀, 귀신, 명신(신명)으로 나누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입귀는 짐승의 혼과 구별되는 것으로 영혼이라 지칭하는 '귀'입니다.
귀신은 전생에 풍부한 영양을 섭취하고 충분한 학식을 소유한 자로서 죽기 전 생존시에 획득한 특수 지위로 말미암아 사후에 일반 귀보다 나은 영혼입니다.

명신 또는 신명은 귀신들 중 천상에 살고 있는 귀신입니다.
후손들의 제사로서 궤양을 풍족히 받는 영혼은 오래 동안 사나 제사가 끊어지면 주림에 못이겨 제 2차 죽음으로 결정적으로 적멸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조상 제사에 최선을 다할 수 밖에 없습니다.

조상제사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문화는 아닙니다. 이집트. 중국. 페르시아. 로마. 그리이스.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는 일반적 현상입니다. 그들은 믿기를 죽은 조상이 신으로 화해 그의 가족과 종족을 적으로부터 지켜주며 상선 벌악을 하는 존재로서 죽어서도 변함없이 돌봐주는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문화는 죽은 자보다는 산자 중심의 문화로 바뀌어야 합니다. 부모 효는 살아계실 때 해야 합니다. 돌아가신 후 고기밥 해드리는 것 보다 살아 계실 때 전화 한 통화가 더 중요합니다. 명절 문화는 죽은 자를 위한 문화가 아니라 산자를 위한 문화가 되어야 합니다. 추석에 조상 제사보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문화를 정착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기뻐하시고 예배하는 자를 찾고 있습니다


리타드 니버(H. Richard Niebuhr, 1894-1963) / 그리스도와 문화(Christ and Culture)

미국의 신학자 리차드 니버의 1951년 작품이다.
그는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문화와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하여 5가지 유형(모델)을 제시하였다.

  •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

    문화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배타적인 태도를 가리킨다.
    이런 태도를 가진 이들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사회 관습이 무엇이든 지간에 그리스도와 적대 관계에 있다고 본다.
    그는 2세기의 교부 터툴리안톨스토이에서 그 전형을 본다.

    터툴리안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문화의 타락한 오락, 학문, 정치에서 탈출하도록 권면하였다.
    한편 톨스토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산상보훈의 말씀대로 단순하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니버에 의하면 이러한 반문화적인 유형의 삶은 그 자체 내에 문제점을 갖고 있다.
    인간은 언제나 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 '문화의 그리스도'

    첫 번째 유형과 정반대되는 것이다.
    이 유형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문화 사이에 근본적인 일치와 연속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는 위대한 교육자요 문화의 영웅이시다.
    토마스 제퍼슨은 그리스도를 완전한 도덕 교육가로 보았고,
    술라이에르마허는 그리스도를 모든 종교와 문화의 완성자로 보았다.

    이 관점은 신학의 본질과 그 문화적 표현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 '문화 위의 그리스도'

    그리스도와 문화를 다 긍정한다.
    그러나 둘 사이에 간격이 있다고 본다.
    이 관점에서는 그리스도가 로고스와 주님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높은 층에 두고 문화를 낮은 층에 둔다.
    이러한 생각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에서 나타났고 후에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 나타났다.
  • '역설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와 문화'

    그리스도와 문화의 관계를 화해할 수 없는 양자간의 끊임없는 싸움으로 이해한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요 문화는 문화다.

    니버는 이런 유형의 대표자가 사도 바울루터 그리고 키에르케고르 등이라고 말한다.
  • '문화의 변혁자인 그리스도'. 

    이 유형의 대표자는 어거스틴, 칼빈, 존 웨슬리 등이다.
    이 입장에 의하면 세계는 구속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인간 문화의 문제는 변혁의 문제이다.
    세계는 배격되어서도 안되고 소홀히 여겨져도 안된다.
    따라서 이 유형에서 주장된 그리스도는 죽음과 죄에 예속되어 있는 인간을 구속하시는 것뿐 아니라 문화 속에서 사는 인간 생활을 계속적으로 성화시키고 변혁시키시는 분으로 이해된다.

독일 신학자 에른스트 트뢸취의 사상적 연관관계가 매우 깊다.
트뢸취의 신학은 니버의 지난한 노력으로 독일보다는 오히려 미국에서 활짝 꽃폈고, 이질적이고 새로운 토양에서 놀랄 정도로 잘 소개되었을 뿐 아니라 창조적으로 적용되었다.

니버는 트뢸취의 신학을 미국의 특별한 역사적- 사회적 상황에다 심었고, 창조적으로 발전시킨 탁월한 신학자요 기독교윤리학자라고 평가받을 수 있다. 니버의 신학방법론은‘역사적 방법’이다. 기존에 니버의 방법론으로알려졌던‘반성의 방법론’이라든지‘변증법적 방법론’은 니버의 방법론과는 거리가 멀다. 니버는 자신의 신학 방법론을‘역사적 방법’이라고 직접적으로 명명하지는 않았지만, 트뢸취와 동일한 방법론적 길을걸어갔다. 니버는 트뢸취처럼 자신의 신학 전반을 역사 위에다 정초했다. 니버는 신학연구를 위한 대상을 개별성과 발전 개념에서 잡았다. 그는 방법론의 대상 빛 아래서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대상적 객체나 주체의 개체성과 독특성, 다양성 측면을 명백하게 주목했다. 이것은 니버가 신학연구 작업의 주요 방법인‘역사적 방법’을 채택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고 또 거기로부터 파생되고 있는 지난한 신학 과제인 역사상대성의 문제를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신학의 중요 주제인 계시나 신앙의 의미를 종교적 상대주의로서 실증적이거나 합리적 차원이 아닌 신중심적인 상대주의로부터 해결코자 했다. 니버는 역사적 방법의하위 개념이라 할 수 있는 역사비평적 방법의 3원칙인 비평, 유비, 상관관계를 유효적절하게 역사에다 적용하기도 했다. 니버는 역사적 방법에서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갔다. 그것은 사회학적방법이다. 역사적 방법의 보충적 측면을 의미한다. 니버는 트뢸취처럼신학에서 사회학으로 시선을 돌리게 되었는데, 사회적인 것도 신학적인것처럼 역사적인 사실임을 밝혀냈다. 그는 역사적 방법의 연구 대상이사회적인 것까지 확대되고 있고, 역사화되고 있음을 통찰했다. 신학 형태의 다양성과 교리의 차이점이 생긴 것은 순수 신학적인 이유가 아닌사회적 상황 내지 사회학적 배경구조에서 배태되었기 때문이다. 니버는사회적 상황에서 계속 다양하고 이질적 모습을 보게 되는 이유가 새로운 모멘트인‘사회학적 관점’이 있었기 때문임을 확신했다. 사회학적방법에서 M. 베버나 E. 트뢸취 식으로 시행된 사회학적 유형론 연구는니버의 저서『그리스도와 문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나훔의 일곱 가지 특징을 소개하고 이 선지서를 설교해야 하는 이유


1. 나훔은 요나가 미처 들려주지 못한 하나님의 성품을 전달하는 책이다

성경에는 두려운 앗수르 제국의 수도, 곧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전하라고 하신 하나님과 이에 불순종한 요나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는 비록 후에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게 되지만, 처음에는 이를 거부했다.
요나가 단번에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던 이유는, 그분이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다는 사실을 그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요 4:1-2).
다시 말해, 하나님이 그 마음을 돌이켜서 자신의 민족을 괴롭히던 앗수르를 심판하지 않으실까봐 그 명령에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요나는 하나님이 그런 자들에게도 '자비'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훔은 그로부터 약 100년 후에 등장하여, 요나와 마찬가지로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예언을 선포한다.
이때는 요나 당시의 앗수르인들은 이미 다 사라지고, 요나를 통해 그 세대가 일으켰던 진실한 회개 운동도 더 이상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니느웨 사람들은 회개의 마음을 상실한 채, 잔인한 정복 전쟁과 주변국들에 대한 약탈 및 압제를 다시 이어가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니느웨인들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고, 곧이어 남유다에 대한 습격을 전개했으며, 마침내는 예루살렘에까지 포위 공격을 퍼부었다.
이 끔찍한 고통의 시대에 나훔이라고 하는 선지자가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다.

이처럼 성경은 요나를 통해 은혜와 자비가 넘치는 하나님의 모습을 묘사한다면, 나훔을 통해서느 죄악을 관용치 않으시는 그분의 성품을 보여 준다(출 34:6-7). 

2. 나훔은 하나님에 대한 고정관념을 교정해 주는 책이다

나훔이 1장 9절에서 던지는 질문은 문자적으로 이렇게 번역될 수 있다.
“너희는 여호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문장이 대부분의 성경에서는,
“너희는 여호와에 대하여 무엇을 꾀하느냐?” 라는 표현으로 옮겨져 있다.
그 이유는, 거기서 언급되는 ‘너희’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을 가리킨다고 흔히 생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구절은 하나님의 '대적'뿐 아니라 그 '백성'도 함께 다루는 문맥에서 언급된다.
그리고 여기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해 품으신 생각과 대적에 대해 품으신 생각은 마치 1장 10절에 묘사된 표현처럼 “가시덤불 같이 엉크러”져 있다.
이런 방식으로 나훔은 하나님에 대해 크리스천들이 가지는 통념 내지 일반적인 전제에 도전하며 우리의 이해를 교정해 준다.

3. 나훔은 하나님의 진노를 묵상하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흔히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부드럽고 사랑이 넘치는 존재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나훔은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이로서 그분을 소개한다(나 1:2).
이는 결코 우리가 가볍게 대할 수 있는 모습이 아니다.
그분은 창조주로서 자신에게 속한 영광을 위해 마땅히 품어야 할 질투를 드러내신다.

아마도 막강한 파괴력을 지닌 앗수르 군대가 거침없이 남유다로 진격해 오는 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은 두려워 떨며 과연 하나님이 그 순간에 무엇을 하실 수 있을지 의문을 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질투는 언제나 자신의 이름과 그분의 백성을 보호하려는 행위로 나타난다.
심지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이라도 그분의 행위를 거스를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 하나님이 노하기를 더디하실지라도, 그 모습은 무력함과는 완전히 거리가 멀다.
그러나 니느웨 사람들은 하나님의 그 인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했다.
그리하여 심판의 그림자를 앗수르에 드리우듯, 인내하시던 하나님은 마침내 그 제국을 무참히 멸망시키신다.
나훔은 이와 같이 하나님이 심판을 늦추지 않고 질투하며 보복하실 때, 어떻게 그 의로운 분노가 표출되는지를 생생한 야생의 모습과 전장의 이미지를 사용해서 전달한다(나 2-3장).

4. 나훔은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알려 주는 책이다

세상 사람들은 911테러나 유대인 대학살이 일어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느냐고 묻곤 한다.
또 많은 크리스천들도 왜 세계 곳곳에 있는 형제자매들이 그 끔찍한 고통을 당하는지 의아해한다.
하지만 나훔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알려 준다.
그는 하나님의 정의로운 분노가 매우 강렬해서, 바다를 뒤엎고, 비옥한 땅을 메마르게 하며, 산과 언덕을 떨게 만드는 광풍과 같다고 묘사한다(나 1:3-5).

또한 여기서 그는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진다.
“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나 1:6).
이에 대한 답변은 너무나 명백하다.
누구도 그 앞에 설 수 없다.
아무도 맞서 상대할 수 없는 대상은 그 어떤 제국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니느웨는 인간적인 힘으로 이루고자 했던 제국의 꿈이 결코 성취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나 3:8-10).
하나님이 죄악을 심판하시기로 한 이상, 아무리 겉모습이 그럴듯하더라도 그분의 심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나 3:12-19).

5. 나훔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평안의 메신저가 전하는 책이다

나훔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의 경고만이 아니라, 그분의 백성을 향한 평안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히브리어로 ‘나훔’은 평안을 의미한다.
이는 저자의 이름만을 의미하기 보다는, 그 책의 특징을 문학적으로 보여주려는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
비록 전개되는 이야기와 메시지는 평안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그 안에서 참된 평안을 찾게 하는 성경의 장치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1장 1절에서 언급되는) “엘고스”라는 지명조차 격분하신 하나님을 일컫는 히브리 식의 언어 유희로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나훔은 그처럼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평안의 메신저가 전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혹 오늘날 크리스천들이 중동과 같은 지역에서 겪는 박해라든가, 좀 더 일상적으로는 다양성을 강요하는 직장에서의 스트레스, 또는 복음을 전하면서 마주하는 적대 등,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을 하나님이 알지 못하신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나훔은 그분이 자기 백성이 당하는 고통에 민감하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분은 자기 백성을 괴롭히는 대적의 능력에 조금도 당황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심판하고자 하신다(나 1:7-2:9).

더 나아가 나훔은 그 모든 장면을 생생히 묘사하여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를 통해 그는 오직 하나님만이 자기 백성이 처한 현실을 알고, 그들을 돌보시며, 고난 속의 유일한 요새가 되어 주신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즉 앗수르 대군과 같이 거대하게 밀려드는 고난 앞에서, 오직 그분만이 우리의 안전한 피난처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6. 나훔은 구원에 대해 더욱 감사하게 하는 책이다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법적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는 이가 오직 한 사람밖에 없음을 가르친다. 그 한분은 바로 아버지의 뜻에 온전하게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분이 하나님께 대적하던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 달려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예수님 안에만 구원의 소망이 있음을 본다.

이처럼 나와 당신을 위해 그리스도 안에 피난처를 마련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생각할 때,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참된 정의가 회복되리라는 사실을 믿게 된다. 또한 우리와 끝 날까지 함께하겠다고 말씀하신 그분의 약속을 즐거움으로 붙들 수 있으며(마 28:20),
더 나아가 그분이 우리의 적군, 곧 사탄과 죄악 및 죽음을 물리치셨다는 소식을 들으며 기뻐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승리가 모든 이에게 알려질 그날을 대망한다.

나훔의 이야기를 통해 만군의 여호와를 자신의 대적으로 삼은 니느웨의 무모함과 그 심판을 떠올리며(나 2:13; 3:5),
우리는 예수님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하며 겪은 고통과 수치를 깊이 묵상할 수 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 15:34)라고 절규하실 때,
그분은 대체 어느 만큼의 고통을 견디고 계셨을까?
이렇듯 나훔은 하나님의 대적이 느끼게 될 괴로움과 수치를 계속 상기시킴으로써 내게 허락된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사건인지를 깨닫게 만든다.
그 결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구원의 길을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의 최종 심판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게 된다.

7. 나훔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날을 향해 전진하게 만드는 책

주전 612년, 나훔의 예언이 기록된 지 이십 년도 채 지나지 않아, 바벨론 제국의 침략으로 앗수르는 완전히 멸망한다.
그리하여 겉으로 보기에는 난공불락의 수도였던 니느웨도 역사의 저변에 묻혀 모든 이의 기억에서 사라지게 된다.​
그 흔적은 1842년, 고고학자들이 이라크 모술에서 잔해를 발견함으로써 다시금 우리에게 회자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니느웨의 소멸에 대해 우리는 경탄하며 찬양해야 할 것이다.
마치 요한계시록 19장에서 바벨론의 무너짐을 보며 하나님의 백성이 그 정의로운 심판에 기뻐 찬양하듯이 말이다.
나훔은 이러한 종말이 모든 이에게 분명히 임하리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곧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최종 승리를 확정하실 그날을 바라보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날까지, 지금의 걸음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믿음으로 사는 천국 시민이 된 우리는 “나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인가? 나는 아직 육에 속한 젖먹이 신자인가, 은혜를 받은 장성한 신자인가? 사명을 깨닫고 충성하는 일꾼 신자인가, 사명이 무엇인지 모르는 신자인가?”를 항상 점검하며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성령으로 거듭났습니까?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분명히 알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에게는 회개가 있습니다. 자신의 죄와 허물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지만 죄를 회개하는 죄인을 기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회개하는 사람은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함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해서 모두 다 장성한 신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누구나 젖먹이 신자입니다. 젖먹이 신자는 아직도 옛 사람이 살아있고 옛 습관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 시기와 분쟁이 있는 교회는 바로 이런 젖먹이 신자들이 많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고린도전서 3:1~3을 보면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라고 했습니다. 이런 육에 속한 사람들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고 교회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방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에 속한 젖먹이 신자들은 하루속히 은혜를 받아 장성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은혜를 받은 장성한 신자를 가리켜 ‘신령한 사람’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철저한 회개를 하게 되며, 거룩한 자가 되고 겸손한 자가 됩니다. 늘 감사가 넘치고, 예수 믿는 기쁨이 있으며, 행복한 모습이 얼굴에 나타납니다. 더 나아가 사명을 깨닫고 사명에 충성하는 일꾼이 됩니다.

여러분은 육에 속한 어린 성도입니까? 아니면 신령한 성도입니까? 사명을 알고 충성하며 사는 성도입니까? 아니면 사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자신만 구원받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까? 아무쪼록 장성한 성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 지내는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하시니 그가 자리를 들고 걷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이를 본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한다고 예수님을 핍박했습니다. 이에 대해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일은 선한 일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한마디로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하시는 사역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12:11~12을 보면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죽으면 지옥으로 떨어지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들이 죽기 전에 속히 살려내야 합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는 안식일이 따로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그 사명을 완수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0:21을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고 하시면서 우리에게도 사명을 주셨습니다. 지금도 일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도 하나님과 함께 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사명을 가지고 충성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명을 깨닫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의 사명이 중요한 이유는?

1. 우리의 사명은 이 땅에서 예수님의 사명을 계속 이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8:18~20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지상명령입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사항이 아닙니다. 반드시 성도라면 영혼구원을 위해 힘써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2. 우리의 사명은 위대한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영혼구원은 마치 무거운 짐을 지는 것과 같지만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쓰임 받는 영광이기도 합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쓰임 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3:9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라고 했습니다. 또 고린도후서 6:1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라고 했습니다. 또 고린도후서 5:20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라고 했습니다. 이는 천국의 대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사도행전 13:22~23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초대왕인 사울을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은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는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3. 다른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먹을 것을 나눠주고, 병든 사람을 고쳐주며, 옷가지를 나누고 안식처를 제공하며 여러 가지로 구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과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12을 보면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을 전해주는 일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일입니다.

4. 영원한 중요성을 갖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영원히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느냐, 아니면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느냐가 결정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는 한 순간의 복락이나 고통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복락이냐 영원한 고통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일생일대의 가장 중대한 결단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의 사명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5. 우리의 사명은 우리의 삶을 가장 의미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윌리엄 제임스는 “우리의 삶을 가장 잘 사용하는 방법은 우리의 삶을 보다 오래 남을 수 있는 일에 사용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가장 오래 남는 것은 이 세상이 아니라 영원히 계속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세상은 머지 않은 장래에 모든 것이 사라질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예수 믿어 구원받은 모든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그 외의 예수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은 지옥의 심판을 받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자신의 사명을 알고 충성하고 헌신한 사람은 천국에서 상급과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잠시라도 이 사명을 망각하고 산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삶을 낭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24절에서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라고 자신의 결단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6. 우리의 사명을 완수하는 날이 곧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이 되고 이 세상의 종말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4:14을 보면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몇월 몇일에 이 세상에 오시는지 조금도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이 말씀에서 분명한 사실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입니다. 믿고 안 믿고는 그 다음의 문제입니다. 일단은 복음이 전파되고 나서 이 세상의 끝이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만 전심전력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앞으로 이 세상은 더욱 더 죄악이 관영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환난과 재난이 더욱 더 심해질 것입니다. 놀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작년보다 금년이, 해가 갈수록 더 험한 일이 많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마음을 굳게 먹고 사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예수 믿고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기가 참으로 힘들어질 것입니다. 더욱이 죄 많은 세상에서 우리의 어린 자녀들이 어떻게 믿음을 지키며 살아갈지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주일학교 학생들이 몇 천명씩 모입니다만, 전국적으로 아이들이 모이지 않아서 주일학교를 하지 못하는 교회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저의 어린 손주가 컴퓨터로 게임을 하며 또 인터넷을 사용하여 자신의 사진을 찾아내 “할아버지 보세요”하는 것을 보니, 우리의 아이들이 신앙을 지키며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튼 이 세상이 더 악해지기 전에 하루 빨리 예수님이 오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속히 재림하게 하는 방법은 우리가 하루 빨리 사명을 완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영혼구원에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가 늘 이기적이 아니었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걱정 없이 먹고 살게 해주세요. 건강하게 해주세요. 사업 잘되게 해주세요. 성공하게 해주세요.” 이처럼 밤낮 잘 살게 해달라는 이기적인 기도에서 벗어나 이제부터는 사명을 완수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아시는 우리 하나님이 다 이루어주시고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1840년 리빙스턴은 런던 선교회 소속 의료선교사로서 남아프리카에 파송되었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 27세로 한창 젊은 나이였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의 발길조차 드문 곳까지 들어가 전도사역에 전력했습니다. 그러다가 전도와 의료를 겸하면서 아프리카 각지를 탐험하기 시작했고, 세계의 사람들에게 오지의 땅인 아프리카의 실상을 밝혔습니다. 그는 탐험을 계속하는 동안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1871년에는 열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스탠리의 수색 탐험대를 만나 구출되었습니다. 이외에도 죽음의 고비를 여러 번 만날 때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리빙스턴은 이러한 자신의 경험으로 ‘사람은 자기 사명이 끝나기 전에는 결코 죽지 않는다.’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죽는 날은 사명이 끝나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명을 완수하는 일에 있어서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이 신념을 가지고 계속 탐험과 선교를 강행했습니다.

새들벡교회의 릭 위렌 목사는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50년 이상 목사로 사역하셨고, 대부분 시골 중소 도시의 교회를 섬기셨습니다. 아버지는 평범한 설교자로 사명감을  가진 분이셨습니다. 그 중에 아버지께서 가장 애착을 보이신 일은, 자원 봉사자들과 함께 해외에 작은 교회 건물을 지어주는 일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평생 동안 전세계에 150개 이상의 교회를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버지께서는 2년 전 암 선고를 받으셨습니다. 이 땅에서의 마지막 한 주일 동안은 거의 24시간을 의식이 반밖에 없는 상태로 깨어 계셨습니다.

아버지는 꿈을 꾸시면서 그 꿈에 대해 크게 말씀하시곤 했는데, 숨을 거두실 무렵 갑자기 생기가 돌더니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애를 쓰셨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몸 상태가 너무 약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아버지를 다시 눕혀드렸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계속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하시면서 “예수님을 위해 한 명을 더 구해야 해! 예수님을 위해 한 명을 더 구해야 해! 예수님을 위해 한 명을 더 구해야해!”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 한 시간 동안 아버지는 그 말을 백 번 정도 더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한 명을 더 구해야 해!” 나는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의 믿음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아버지는 마치 명령을 하시듯, 약한 손을 뻗어 내 머리에 얹고 “예수님을 위해 한 명을 더 구해라! 예수님을 위해 한 명을 더 구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귀한 일에 쓰임 받기 원한다면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고 계신 일에 우리도 관심을 가져야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이보다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사명입니다. 장차 우리 모두 주님 앞에 서게 될 때에 자신의 사명을 완수했음을 보고 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1장에서는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심판에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열방에 맞서서 그들의 악함을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란 내용입니다.

1장 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투기’라는 단어는 ‘질투’라는 뜻입니다.
질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원래 주님께서 받으셔야 했던 사랑과 영광을 이방 나라들이 우상을 섬김으로써 빼앗아간 일이 대하여 반드시 보복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참 창조주이신 주님을 버리고 거짓 우상들과 거짓 신들을 섬긴 자들에게 진노를 내리십니다.



















나훔서 3장 7절을 봅시다. “(나 3:7) 그 때에 너를 보는 자가 다 네게서 도망하며 이르기를 니느웨가 황무하였도다 누가 위하여 애곡하며 내가 어디서 너를 위로할 자를 구하리요 하리라 하시도다” 멸망하는 앗수르를 보며 애곡하며 “니느웨가 폐허가 되었다. 이를 어찌할꼬?”하고 슬프게 눈물 흘릴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란 말씀입니다. 그 누구도 앗수르가 멸망하는 모습을 보며 슬퍼하거나 그를 위로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 앞서 선지자 나훔의 이름의 뜻이 ‘위로자’라고 했지요? 7절을 다시 보십시오. 말씀 중반에 ‘위로할 자’란 단어가 나옵니다. 즉 앗수르를 향하여 “너에게는 멸망 가운데 너를 위로할 자, 즉 나훔이 없구나?”하고 선지자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뒤집어서 말하면 “우리에게는 나훔, 즉 위로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하고 계셔!”하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러한 관점으로 보면 ‘위로’란 뜻의 이름을 가진 선지자 ‘나훔’과 이스라엘의 압제자 앗수르의 멸망이 하나의 메시지로 이어집니다. 오랜 원수 앗수르의 심판은 곧 이스라엘에게는 큰 기쁨이고 위로인 것입니다.

● 기록연대:
이 책은 주전 7세기, 정확하게는 주전 620년경 즈음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따가 다시 보겠습니다만 나훔서 3장 8절을 보면 애굽의 도시 중 하나인 ‘노아몬’이란 곳이 멸망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는 역사적으로 주전 663년경에 일어났습니다. 따라서 나훔서는 주전 663년 이후에 기록된 책입니다. 또한 나훔서가 예언하고 있는 니느웨의 몰락은 주전 612년에 일어납니다. 따라서 이 책은 주전 663년과 주전 612년 사이에 기록되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시대에 그와 함께 사역했던 선지자가 바로 예레미야와 스바냐 입니다.

● 시대상황:
선지자 나훔이 활동하기 약 130여 년 전, 선지자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니느웨에 가서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40일 뒤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 때 니느웨에서는 도시 전체가 철저하게 죄를 회개하는 일이 벌어졌고, 그 결과로 하나님은 니느웨를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신 계획을 철회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시간이 흘러 약 한 세기가 지났습니다. 나훔이 활동할 당시 니느웨는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렸고, 또 다시 죄악이 가득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또 다시 선지자 나훔을 통해 니느웨를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나서와 나훔서의 공통점은 둘 다 니느웨를 향한 예언이란 점입니다. 그러나 두 선지서의 가장 큰 차이점은 요나서에서는 니느웨를 향한 심판과 회개의 메시지가 함께 주어진 반면에, 나훔서는 오직 심판의 메시지만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선지자 나훔은 니느웨가 저지른 잔인하고 극악무도한 죄악들로 인해 그들의 멸망이 불가피함을 선포했습니다.
● 핵심메시지:
거대 제국이었던 앗수르는 막강한 군사력과 막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무려 10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주변 국가들을 괴롭혀 왔습니다. 앗수르 사람들은 매우 잔인했습니다. 기록을 살펴보면, 이들은 정복지에 반역의 의지를 원천부터 꺾어 버리고, 다른 민족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고자 전쟁 시 적의 피부를 벗겨 성벽에 붙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의 머리를 잘라 피라미드처럼 높게 쌓았습니다. 말뚝을 가지고 사람 위에 올려놓고 망치로 찍어서 사람을 죽였습니다. 죽은 병사들의 시체로 높은 더미를 쌓아 놓고 자랑했습니다. 얼굴과 신체의 일부를 잘라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게 했고, 때로는 남편의 머리를 잘라 아내가 들고 행진하게 했으며, 또한 아버지의 머리를 잘라 자녀들이 들고 거리를 돌게 함으로써 지배국가와 민족에게 반역을 저지를 수 없도록 엄청난 공포심을 심어주고자 했습니다. 이 앗수르 사람들이 얼마나 잔인했는지 그들의 수도 니느웨의 별명이 ‘the blood castle’(피의 도성)입니다.
이 사람들이 얼마나 악명높으면, 선지자 요나도 니느웨 사람들에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기 싫어서 반대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자신의 사명을 버리고 도망을 쳤겠습니까?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모든 주변 국가들이 앗수르 앞에 벌벌 떨면서도, 속으로는 누가 제발 앗수르를 무너뜨려 주기를, 자신들이 당한 끔찍한 일들을 보복해 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앗수르는 너무나도 막강했기에 그 누구도 이 나라를 건들지 못했습니다. 이 당시 앗수르 제국의 땅이 얼마나 컷는가 하면, 오늘날로 말하면 이집트, 이란,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요르단 그 밖에도 수많은 나라가 앗수르의 통치 아래 있었습니다. 바로 그 막강해 보이는 원수 앗수르를 하나님께서 친히 심판하시고 멸망시키시겠다는 것이 바로 나훔서의 주제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사람들 입장에서는 얼마나 통쾌한 메시지고 큰 기쁨과 위로의 말씀입니까? 그래서 우스개소리로 “선지자 요나가 가장 좋아할 구약성경이 ‘나훔’이다”라고까지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사람들을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분명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지만 영원히 참으시는 분은 아닙니다. 정의로우신 하나님은 절대로 죄를 간과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지만, 동시에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나훔은 바로 이 정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죄악이 범람하는 앗수르와 그 수도 니느웨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 선포했습니다.
오래된 원수요 민족의 압제자인 니느웨의 멸망 메시지는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아름다운 소식이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즉 복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나훔서의 핵심구절인 1장 15절을 보면 니느웨의 멸망 소식에 대하여 아름다운 소식, 화평 즉 평화를 전하는 자라고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함께 1장 15절을 읽겠습니다. “(나1:15)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보하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지어다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로다.” 원수의 멸망은 우리의 기쁨입니다. 훗날 사도 바울이 그 유명한 로마서를 쓰며 바로 이 말씀을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로마서 10장 1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롬 10: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모든 인류를 괴롭혀왔던 오래된 원수 사단의 나라가 멸망하는 것, 죄의 통치가 무너지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좋은 소식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 일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셨음을 선포하는데 이 말씀을 사용함으로써 예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로써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것이 우리에게 가장 아름답고 좋은 소식 즉 복음임을 가르쳐줍니다. 나훔서를 읽을 때마다 우리는 사단과 그의 졸개들로 이루어진 모든 원수들을 물리치시고, 이 세상의 모든 악의 세력을 꺾으시고 마침내 정의를 완성하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 나훔서의 특징:
나훔서는 언뜻 읽으면 이스라엘의 가장 큰 압제였던 앗수르 제국과 그 수도인 니느웨의 몰락을 선포하는 내용으로만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나훔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1장 그 어디에서도 니느웨와 앗수르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니느웨와 앗수르 이야기는 2장에 가서야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이 책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원수인 앗수르에 대한 심판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무대 위에 등장하는 모든 오만하고 폭력적인 세력들을 영원히 용인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또한 모든 시대의 폭력적이고 오만한 세력들과 사람들을 꺾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시켜 줍니다. 나훔서는 악한 원수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이 신실하게 살아가는 하나님의 남은 자들에게는 기쁜 소식임을 보여줍니다.

● 나훔서의 구조
1장 여호와의 위대하심을 선포
1) 열방 중의 악을 심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출현
이제 본격적으로 나훔서의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순서적으로 1장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만, 그전에 한 번 전체적인 구조를 봅시다. 구조를 보면, 2장에서는 니느웨의 멸망을, 3장에서는 앗수르의 멸망을 다루고 있습니다. 1장에서는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심판에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해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열방에 맞서서 그들의 악함을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란 내용입니다. 1장 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나 1:2)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투기’라는 단어는 ‘질투’라는 뜻입니다. 질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원래 주님께서 받으셔야 했던 사랑과 영광을 이방 나라들이 우상을 섬김으로써 빼앗아간 일이 대하여 반드시 보복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참 창조주이신 주님을 버리고 거짓 우상들과 거짓 신들을 섬긴 자들에게 진노를 내리십니다.

분명 우리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오래 참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영원히 참기만 하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그 크신 권능으로 모든 악인들의 죄를 심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열방을 심판하시기 위해 임하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모스서의 경우, 하나님께서 음성을 발하시매 풀밭이 시들고 가장 높은 산의 꼭대기가 메말라 버리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미가서의 경우,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 위해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시자 산들이 녹아버리고 골짜기가 갈라져버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나훔서도 이와 같이 악한 세력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오시는 하나님의 출현으로 인한 자연적 변화를 보여줍니다. 3-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나 1:3)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죄인을 결코 사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여호와의 길은 회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 발의 티끌이로다 (나 1:4) 그는 바다를 꾸짖어 그것을 말리우시며 모든 강을 말리우시나니 바산과 갈멜이 쇠하며 레바논의 꽃이 이우는도다 (나 1:5) 그로 인하여 산들이 진동하며 작은 산들이 녹고 그의 앞에서는 땅 곧 세계와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이 솟아오르는도다 (나 1:6) 누가 능히 그 분노하신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 진노를 감당하랴 그 진노를 불처럼 쏟으시니 그를 인하여 바위들이 깨어지는도다” 하나님께서 회오리 바람과 광풍으로 임하십니다. 4절을 보니 하나님께서 꾸짖으시니 바다가 마르고, 모든 강이 마릅니다. 홍해가 마르고, 요단강이 바른 것처럼 하나님께서 임하시면 바다도 힘을 못 씁니다. 4절에 바산과 갈멜, 레바논 세 도시가 등장하는데요, 이는 당시 가장 비옥하기로 소문난 땅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 위해 오시면 그 비옥한 땅들이 메마르고 꽃봉오리가 시들어버립니다. 5절에 보니 여호와께서 오시니 산들이 진동합니다. 작은 산들이 아예 녹아버립니다. 6절을 보니 하나님의 불 같은 진노로 인하여 바위들이 깨져버립니다. 이 얼마나 두려운 장면입니까? 나훔은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통해 하나님께서 죄악을 싫어하실 뿐만 아니라, 그 죄악을 심판하시고 정의를 회복하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악인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임하시지만, 주님의 심판은 무차별적인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악인을 심판하시지만, 주님을 의지하는 자들에게는 이 험난한 세상에서 피난처가 되어 주십니다. 7절 말씀입니다. “(나 1:7)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의뢰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선지자 나훔은 6절까지 천지를 진동시키고 산을 녹일만큼 두려운 하나님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자신을 의지하고 따르는 백성들에게는 그들이 어려움을 다할 때에 친히 피난처가 되어 주시는 선하신 하나님을 그려줌으로써 이스라엘에게 다시 한번 그의 이름 뜻대로 ‘나훔’ 즉 ‘위로’를 주고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은 자신을 대적하는 악인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심판하십니까? 8절입니다. “(나 1:8) 그가 범람한 물로 그곳을 진멸하시고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시리라” 쓰나미나 홍수가 나면 물이 도시 전체를 쓸어가 버리죠? 하나님께서 악인들의 거처를 마치 홍수와 쓰나미가 지나간 것처럼 완전히 멸명시키고, 그들을 어둠으로 쫓아내버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모든 심판이 앗수르에게 적용되고, 앗수르와 같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세력들에게도 적용됩니다.

2) ‘오만하고 폭력적인 민족들의 운명’과 ‘하나님께 충성된 신실한 자들의 운명’ 대조
이어서 9절부터는 오만하고 폭력적인 민족들의 운명을 보여줍니다. “(나 1:9) 너희가 여호와를 대하여 무엇을 꾀하느냐 그가 온전히 멸하시리니 재난이 다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나 1:10) 가시덤불 같이 엉크러졌고 술을 마신 것 같이 취한 그들이 마른 지푸라기 같이 다 탈 것이어늘” 나훔이 묻습니다. “너희가 여호와를 대항해 음모를 꾸민다 하여도 그것이 통할리가 있겠느냐? 하나님께서 완전히 멸하실 것이다. 그분의 대적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원수들은 마치 담장에 친 가시덤불처럼 엉크러진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수들은 술 취한 자들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마른 지푸라기처럼 완전히 불에 타 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심판을 받을 자가 니느웨로부터 나왔다고 말씀하십니다. 11절입니다. “(나 1:11) 여호와께 악을 꾀하는 한 사람이 너희 중에서 나와서 사특한 것을 권하는도다” 니느웨는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계획을 꾀하고 사악한 조언자들의 말을 듣고 있습니다. 12절을 봅시다. “(나 1:1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비록 강장하고 중다할지라도 반드시 멸절을 당하리니 그가 없어지리라…” 하나님께서는 앗수르가 아무리 강하고 병사들의 숫자가 많다하더라도 반드시 멸망시키실 것이라 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은 남 유다의 남아있는 자들에게 약속하십니다. “(나 1:12)…내가 전에는 너를 괴롭게 하였으나 다시는 너를 괴롭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12절 후반부에서는 하나님께서 남 유다 백성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유다야, 내가 너를 심판했지만 다시는 너를 심판하지 않겠다. 그들이 네게 지운 멍에를 내가 꺾어 버리겠다. 너를 묶어 놓은 사슬을 내가 끊어 버리겠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짓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앗수르를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백성을 향해 영원토록 노를 품고 계신 것은 아닙니다. 이제 앗수르가 지운 멍에를 주님께서 꺾어 버리시고, 사슬을 끊어버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원수 니느웨를 어떻게 멸하시는지 봅시다. 14절입니다. “(나 1:14) 나 여호와가 네게 대하여 명하였나니 네 이름이 다시는 전파되지 않을 것이라 내가 네 신들의 집에서 새긴 우상과 부은 우상을 멸절하며 네 무덤을 예비하리니 이는 네가 비루함이니라” 선지자 나훔이 선포합니다. “여호와께서 너에 대해 명령을 내리셨다. ‘네 이름을 이어 갈 후손이 더 이상 없을 것이다. 네 신전에 있는 새겨 만든 우상들과 녹여 만든 우상들을 내가 없애 버리겠다. 너는 아무런 쓸모가 없고 악하기에 내가 네 무덤을 만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악인을 심판하실 무덤까지 다 준비해 두셨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사단의 세력을 무찌르시고 승리하셨다는 것을 알리는 복음과 같습니다. 원수 사단은 멸망했습니다. 우리는 승리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15절을 보겠습니다. “(나 1:15)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보하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지어다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로다” 15절은 이미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원수 니느웨의 멸망 소식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아름답고 좋은 소식이 됩니다. 평안을 선포하는 소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원수를 이기셨음은 너무 기쁘고 좋은 소식이라, 이 승전보를 알리기 위해 산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마라톤이 전쟁의 승리를 알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뛰어간 이유와 같다.)
이제 유다는 앗수르의 침략이나 압제로 인해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축제의 절기를 지키고, 앗수르 사람들 눈치 않보고, 그들에게 조롱당할 염려없이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마음껏 지키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15절 후반부에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원수들과 악인들을 완전히 멸하셨음으로 이제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히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1장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출현과 오만하고 폭력적인 민족들의 파멸과,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구원자요 피난처 되심을 보여줍니다.







나훔서는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예언자 나훔이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 니느웨(니네베로)에 대한 예언을 한 예언서이다.
나훔
은 히브리어 성경에서 3장(구약 929장), 47절(구약 23,191절), 558단어(구약 304,901단어), 약2,100자(구약 약 116만자)로 이루어진다.

저자 :

나훔서는 그 책의 저자가 엘고스 사람 나훔(히브리어의 의미는 위로자 또는 위안자이다) (나 1:1)이라고 알려줍니다.
결정적인 증거는 없지만 엘고스 성의 위치에 관한 많은 이론이 있습니다.
그러한 이론 중 하나는 훗날의 갈릴리 바다의 가버나움(문자적으로 "나훔의 마을"을 의미함) 도시가 엘고스라고 설명합니다.

저작 연대 :

나훔에 관한 정보가 많지 않은 것을 감안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나훔서가 주전 663-612년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 좁히는 것입니다.

나훔서 안에 저작 연대를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되는 두 가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 나훔은 과거 시제로 애굽의 테베(노아몬, 나 3:8)가 앗수르 사람들에게 함락된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데(주전 663년), 그렇다면 이미 그 함락 사건은 나훔서가 기록되기 이전에 발생한 것이 됩니다.

둘째, 나훔의 나머지 예언은 주전 612년에 이루어졌습니다.

기록 목적 :

나훔은 이 책을 니느웨 백성들에게 경고하거나 "회개하도록 부르기 위해" 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150 년 전에 선지자 요나를 그들에게 보내어 그들이 계속 악행을 일삼을 경우에 발생하게 될 일을 경고하셨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회개했지만 지금은 그 때의 회개 이전만큼이나 악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앗수르 사람들은 정복 과정에서 지나치게 잔인해졌습니다.
(수 많은 잔악 행위들 중에는 희생자들의 몸을 기둥에 매달고 또한 그들의 가죽을 장벽에 걸어두는 것 등이 있습니다).

이제 나훔은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심판을 선포하셨고 앗수르 사람들은 이제 곧 마땅히 받을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절망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핵심 구절 :

나훔 1:7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나훔 1:14
나 여호와가 네게 대하여 명령하였나니 네 이름이 다시는 전파되지 않을 것이라.

나훔 1:15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참조, 사 52:7; 롬 10:15)

나훔 2:13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어.

나훔 3:19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 부상은 중하도다 네 소식을 듣는 자가 다 너를 보고 손뼉을 치나니 이는 그들이 항상 네게 행패를 당하였음이 아니더냐 하시니라.

요약 :

니느웨는 과거에 요나의 설교를 듣고는 악한 길에서 돌아서서 주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150 년 후 니느웨는 우상 숭배와 폭력과 교만으로 다시 물들었습니다(나 3:1-4).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선지자 중 한 사람을 니느웨로 보내어 그들의 도성이 멸망할 것을 알려주고 회개를 권고하게 하셨습니다.
슬프게도 니느웨 사람들은 나훔의 경고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그 성은 바벨론의 통치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예표 :

바울은 로마서 10장 15절에서 나훔 1장 15절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활동뿐만 아니라 메시아와 그분의 사역에 관하여 언급합니다. 복음 사역자는 자신들의 일이 “화평의 복음을 전하는 일”로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피로 죄인들과 화평을 이루셨고, 자기 백성에게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을 주셨습니다(빌 4:7). 전도자의 사역은 또한 화해, 의, 죄사함, 삶,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로 인한 영원한 구원과 같은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복음을 전파하고 그러한 소식을 전하는 것은 전도자의 발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여기에서 묘사되는 그림은 기쁜 소식을 선포하기 위해 간절함과 즐거움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달려가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적용 :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십니다.
그분은 모든 나라에게 주님을 그들의 주로 선포할 기회를 주십니다.
그분은 조롱 받지 않으십니다.
어느 나라든 그 나라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설 때에 하나님은 심판의 발걸음을 떼십니다. 거의 220년 전에 미국은 성경에 나오는 원리를 따르는 국가로 설립되었습니다. 지난 50년 동안 그러한 모습은 변질되었고 우리는 매일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 나라의 유일한 소망은 진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경의 원칙과 진리를 고수해야 합니다.





제 1강 나훔 1:1- 8 엄중히 심판하시는 주

나훔서는 소 예언서 12권 가운데 7번째 책이지요 궁금한게 있어요 왜냐하면 나훔서를 본문으로 설교를 들어본 적이 있는지요 사실은 나훔서 같은 성경은 설교자들이 설교를 위한 본문으로 선택하기가 쉽지가 않은 그런 본문입니다
 
실지로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때에도 자기 마음에 찡하고 울리는 것 밑줄을 긋지요 그것을 중심으로 성경을 이해하고 그러나 성경이라고 하는 것은 내 마음에 드는 편식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유대인 아이들이 13살이 되면 성인 의식을 성경을 해석하도록 요구하는 데 뽑아요 성경구절을 그 성경구절은 아주 편한 이야기 예를 들면 창세기에 나오는 선조들의 이야기 성경의 스토리가 있는 것들이면 해석하기가 쉽지 않아요
 
레위기에 난해한 것들을 뽑게 돼 이 아이는 그것을 가지고 연구를 해야 돼 연구를 해 가지고 이게 나에게 있는 성경인데 나는 이 말씀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하면 질문을 하는 것이야 자네 생각은 어떤가 물으면 저는 그 생각에 동의합니다 반대합니다 하면서 자기 설명을 해 나가야 돼 여하튼 창의적인 성경 공부인데요 그렇다고 보면 되어요
 
그러니까 성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토라를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정 받는 자리여요 성년 의식을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발달했어 이런 것도 의미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사람으로 존중해 주어야 된다는 것이어요
 
재미 있어요 내가 원하는 것 해 가지고 이것 할 것이야 이것 아니거든요 뽑아 난감한 부분도 걸리게 됩니다 성경은 그렇게 읽어야 되는 것이지요 아마 성경 말씀을 소 예언서를 선택하여 설교하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이렇게 보여 지는데
 
오늘 공부하게 될 나훔서는 낯선 책일 것이어요 그러나 패스하고 넘어가면 안 됩니다
건너 뛰면 안 되어요 이것은 반드시 우리들이 차근 차근 꼭 씹어 봐야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 보면 진노 분노 보복 그러니까 불편해 이게 나훔서가 설교하기 어려운 이유의 하나입니다 나훔 위로하시다 나훔 전체의 메시지는 이스라엘을 아주 괴롭히고 있던 나라인 앗시리아라는 나라가 곧 망할 것이다
 
그들이 쏳았던 폭력 그들이 민족들을 겁탈해 왔던 폭력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질 것이다 실지로 나훔서가 쓰여진 후에 니느웨 앗시리아의 수도인 니느웨가 멸망한 것이 비시 612년 경으로 보거든요
 
그러니까 정말로 망합니다 이 나라가 역사의 정점에서 앗시리아가 제일 잘 나갈 때 갑작스럽게 망해 버리고 마는데 그러니까 앗시리아는 망할 것이다 이스라엘이 구원받을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섭리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이것이 나훔서의 핵심적인 메시지라고 볼 수 있다
 
앗시리아가 망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민족주의적 감정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여요 일단의 학자들은 성경으로서 문제가 있지 않나 특수한 상황이 있지 않나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 말에 우리가 반박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앞으로 살펴 보아야 합니다 니느웨는 앗시리아의 수도인 동시에 죄로 가득차고 교만하고 억압적인 정치 체제를 보였던 그런 도시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니느웨의 심판을 예언한 다른 예언자를 압니다 요나가 니느웨가서 전하지요
 
그런데 요나는 어떻게 이야기합니까? 나중에는 니느웨가 망한다가 아니라 하나님은 이 백성 까지도 사랑하신다 말하지요 나훔은 아니어요 망할 것이다 이것이 차이어요 요나서와 나훔서는 그런데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니느웨는 앗수르아라는 수도라는 역사적 사실이 있지만 니느웨가 상징하는 것은 사람들을 억압하는 제 힘을 함부로 대하는 모든 세력을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힘 있는 나라가 망해 버렸기 때문에 아까도 이야기한 대로 역사의 정점에서 확 망해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수행되는지를 알려주는 책으로 아주 좋은 메시지를 안고 있다 이렇게 볼 수 있겠습니다
 
앗시리아라는 나라는 주전 20세기 이전부터 존재한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메소포타미아 강가에 있었던 나라인데 앗시리아라고 하는 나라에 주 도시가 앗수르라는 도시가 핵심 도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앗시리아를 때때로 앗수르 앗수르 하는 까닭도 그런데 이유가 있다고
 
앗시리아라고 변방에 조그마한 나라였지만 가장 강성한 것은 주전 10세기부터 주전 7세기 사이에 아주 강성한 국가를 형성이 됩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 두 개의 강이 있지요 유브레스강 티그리스 강이 있는데 강 유역이 있었기 때문에 강을 통한 원거리 무역에 능했고 소통 시키면서 막대한 부를 쌓아 올립니다
 
잉여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그것 가지고 무엇을 했느냐 하면 군비를 강화하게 됩니다
그리고 정교한 관료 조직들을 만들어 내고 또 기병과 말을 탄 군인들 육성하고 전차 부대 만들어 내고 이런 일들을 통해서 이 나라는 아주 강성한 나라가 됩니다
 
전쟁을 치루기 위한 전쟁 국가로 발전하였기 때문에 말이 중요하기 때문에 역참 제도 같은 것도 발전시킵니다 타고 가다가 말을 바꾸어 타는 그런데 군사력이 강력해 지고 주위와 싸움에서 거의 승리를 거두게 되자 앗시리아는 점점 교만해 지기 시작합니다
 
우리를 당할 자가 누구냐 그렇게 가는 것이어요 지금도 남아 있는 유적들을 보면 돌에 세긴 부조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 부조는 앗시리아가 적들에 대해서 얼마나 잔인했는가 부조들이 등장합니다
 
어떤 잔인한 일들을 하냐 하면 전쟁에 승리하고 포로들을 끌고 가지 않아요 그냥 묶어 가면 좋은데 코를 둟어 가지고 쇠 사슬로 묶고 데리고 가기도 했어요
 
그리고 사람들을 강제 이주 시킵니다 그런데 강제 이주 시킬 때 빨리 빨리 걸어가야 하는 데 잘 못 걷는 사람들이 있지요 어떤 사람들일까요? 병든 사람들 특히 애기들 이 애기들을 돌에 메쳐 죽이고 성경에도 등장한 이야기인데 진자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을 인간으로 대접하지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너무 잔혹하니까 그리고 이 앗시리아가 중앙 집권적인 국가였기 때문에 권력을 나누어 주는 일을 안 하기 때문에 권력의 사각지역에서 반란이 자꾸 일어나는 것이어요
 
너무 잔혹하게 하니까 틈만 나며 벗어 버리고 싶어서 반난이 일어난 것이어요 메데와 바벨론 연합군에 의해서 망합니다 권력의 정점에서 망해 버리고 맙니다
 
나중에 보면 페르시야라는 나라가 우리가 고레스 임금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지 않아요 페르시야가 어떤 식민지 정책을 쓰느냐 하면 권력을 다 나누어 주어요 너희 민족끼리 자치 생활을 해봐
 
두 가지 요구를 합니다 세금은 내야 돼 그 다음에 너희들 종교를 가지고 살아 해 우리 왕실을 위해 꼭 기도해주어야 해 이렇게 해요 그것이 앗시리아라는 나라가 반면 교사 역할을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너무 억압적으로 했기에 페르시야는 정 반대의 길로 갔던 것이지요 반면 교사입니다
이 메시지의 핵심은 나훔서의 1장 2절에서 11절에 등장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는 무엇이냐 여호와가 보복하시는 분이시다 진노하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계속 심판하시는 분이시다는 이야기가 등장하지요
 
1장 2절 여호와가 보복하는 분이시다 계속 심판하는 분이시다
진노 보복 똑 같은 단어가 반복 되기 때문에 똑 같은 것을 읽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똑 같은 말이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엄중하게 시행될 것임을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진노와 보복은 누구에게 주어지지요 자기를 거스리는 자 야훼 하나님을 거스리는 자들에게 진노와 보복이 주어진 것임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거스리는 자들은 상당히 다양하지만 나훔서는 어디이아요 앗시리아이지요 앗시리아라 앗시리라고 하지만 앗시리아라고 대게 쓰는데 그러니까 앗시리아이지만 그 수도인 니느웨 이지만 하나님은 보복하는 분이시다 하고 이야기를 하고
 
마지막에 3장에 가면 앗시리아가 망하는 것이어요
나훔 3장 14-19 절 그래서 앗시리아의 망가가 등장합니다
너 망하고 말았구나 장난체 하더니 중간을 채우는 중간 부분은 하나님을 거스리는 자에 대한 심판의 이야기가 네가지가 등장을 해요
 
나훔 1: 2-11 진노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묘사
괄호 쳐 놓고 끝판에 가서 망하는 나라에 대한 망가를 불러요
중간에 네 번에 심판 예고로 등장한다 이게 전체 구조이어요
 
나훔 1:2-11 진노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묘사
나훔 3:14-19 앗시리아의 멸망을 노래함
나훔 1: 2-11 진노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묘사
나훔 1:12-3:13 네 개의 심판
나훔 3;14-19 앗시리아의 멸망을 노래함
 
1장 1절 니느웨에 대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
니느웨에 대한 경고 이 책은 경고라는 말로 압축적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곧 엘고스 사람 나품의 묵시의 글이라
엘고스라는 말은 하나님은 맹렬하시다는 뜻인데 이 지명이 가지고 있는 나훔서의 메시지가 맹렬하거든요
 
엘고스 사람 나훔의 대게는 어떻게 되어 있지요 비젼이라든지 환상이라든지 하는데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 하고 이야기 합니다 선포가 아니라 글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나훔의 선포는 처음 부터 두루마리 형태로 기록해서 선포된 것이다 왜 처음부터 기록하였을까요 확실하다 그런 뜻이어요 확실한 것이어요 틀림없이 망한다 기록한다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는 앗시리아의 수도인 니느웨 향하여 심판의 메시지가 주어지고 있지만 이 메시지를 듣는 사람들은 니느웨 사람들이 아닙니다 누구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위로하시는 것이지요
 
결국 너희를 억압하고 있는 저 나라는 망하고 말 것이다 이야기함으로 그들에게 위로하시는 것이어요위로인 동시에 앗시리아처럼 살면 안돼 경고이기고 합나다 그런 식으로 살면 망할 것이야 위로한 동시에 경고하는 언어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까도 이야기한 대로 요나서가 하나님의 헷세드 언약에 바탕을 둔 사랑 이것을 강조한다면 나훔서는 하나님의 정의와 분노를 보여주는 그런 책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세상에 정의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것을 나훔서는 강조해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나훔서를 우리가 읽어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두 얼굴 가운데 어떤 얼굴을 좋아하느냐 하면 용서하시고 인내하시고 위로하시고 내 편이 되어 주시고 어떤 경우에도 다 받아 들여 주시고 따뜻한 아버지의 이미지 따뜻한 어머니의 이미지로 하나님을 소개할 때가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동시에 그런 요소도 있지만 벌하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인간의 죄에 대해서 심판하시고 정의를 세워 가시는 분이시기도 하시거든요 그러니까 오늘 우리들이 나훔서를 통해 배우는 것이지요
 
2절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보복하고 진노하신다 질투하는 하나님 그러니까 진노하고 보복하는 하나님 질투하는 하나님 어떻게 보면 우리가 하나님에게 덧씌우고 싶지 않은 이미지들입니다
 
하나님은 계속 용서해 주어야 하고 나훔서에 등장하고 하나님은 우리가 알던 하나님의 얼굴이 아닌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질투한다는 말이 질투라는 말이 부정적 감정일 때가 많기 때문에 아니 하나님에게 질투라는 용어도 써도 되는 것이야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지요
 
질투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어요 사랑이 있지요 사랑이 없이는 질투도 없지요 그러니까 사랑의 언약 관계를 맺었어 그런데 파트너가 다른 사람을 사랑해 그러면 질투나지요 하나님도 그런 것이어요 사랑하기 때문에 질투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의 통치권에 도전하는 일체의 세력에 대해서 용납하지 않으신다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경배하는 것을 하나님은 참아내지 못하신다 그렇게 말합니다 결국 하나님을 거스린다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소 예언서를 통해 계속 배웠습니다마는 하나님의 세계 질서를 두 가지 토대가 있다면 정의와 공의라고 이야기 했어요
 
하나님을 거스린다는 것은 이 땅에 마땅히 시행 되어야할 정의와 공의를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세상을 지탱하는 기둥 이야기가 나왔는데요 아브라함 죠스 헤셀라는 분이 세상은 세계의 기둥위에 세워있다고 합니다
 
그게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예배이고요 또 하나는 자애 사랑이어요 그리고 공부이다
이상하지 않아요 왜 공부위에 서 있나 이상하지 않아요
 
그런데 예배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예배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에게 마땅히 돌려야 될 영광을 돌리는 것이 예배이어요 그러니까 나의 삶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품고 사는 것이 예배이어요 이것 무너지면 세상은 무너진다
 
자애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존재인 이웃과 피조 세계를 사랑과 애정으로 바라보는 것이 자애입니다
 
공부라고 하는 것은 끊임 없이 나의 삶을 이런 삶에 연결 시키기 위해서 나의 삶을 돌파하는 것이 공부여요 책만 들여다 보는 것이 공부가 아니라 이 세가지 기능 위에 서 있어야 해 이런 기둥들이 공의와 정의로 나타날 터인데 이것들을 무너뜨리는 행위에 대해서 하나님은 진노하신다 그리고 그것을 무너뜨리는 사람들에 대해서 반드시 보복하신다 이렇게 말합니다
 
3절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니라 여호와의 길은 회오리 바람과 광풍에 있고 그의 발은 티글이니라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의 성품을 알려 주는 대목이기도 하지요 노하시고 진노하시고 갑자기 노하기를 더디하신데 이것 어떤 의미이냐 하면 하나님이 정말 진노하고 보복하는 분이시면 왜 저들 그냥 놔두세요 하고 이야기 할 때 그 때 지금 하는 이야기여요
 
그것은 내가 무능해서 심판 안하는 것이 아니야 지금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앗수르가 저지른 만행을 바라보면 그들을 바로 심판해야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이 지연된 이유가 무엇인지 그 이유를 지금 밟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때가 무르 익은 것이어요 카이로스라는 말 들어 보셨지요 하나님의 시간 (때) 마치 하나님의 때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가을이 되면 밤나무에 밤이 달리지 않아요
 
그리고 여러분 밤이 신기한게 많이 익으면 벌어지지 않아요 그래서 벌어진 것을 그게 밤송이 떨어지기도 하는데 어떤 때는 안에 든 밤이 후두둑 떨어지지요 알밤이 떨어져요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가을이 되어서 때가 되니까 떨어져요
 
하나님의 시간은 그렇게 도래하고 있는 것이어요 내가 앞 당길 수도 없고 미룰수도 없어요 그 시간이 다가와 하나님의 인내를 하나님의 무능으로 보면 안 되어요 하나님이 지금 노하기를 더디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심판의 시간은 차곡차곡 쌓여 가고 있다
 
3절 벌 받을 자를 내 버려 두지 않으신다
새 번역은 이 부분을 더 실감나게 번역합니다 주님은 절대로 죄를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는 않으신다
 
인간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은 그 죄를 모른체하고 넘어가는 법이 없다
3절 회오리 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의 발에 티끌이로다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하나님이 임하실 때 누구도 그 앞에 설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벌하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힌두교 이야기 혹시 아실지 모르겠는데 힌두교가 주로 어느 나라에서 인도 사실 힌두교라고 하는 것은 산스크리트어인 신두(Sindhu : )에서 유래된 말
 
큰 물을 뜻하는 신두라는 물에서 말하기도 합니다 인더스 강 흘러가는 겐지스강이나 그런 강들 때문에 그런 말이 나옵니다 힌두교에서는 최고의 신 힌두교는 수 억의 신이 있다고 말하는 데 다신이야 남미에서는 마라도나도 신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힌두교에서는 3대 신이 있어요
 
최고 신이 누구이냐 하면 브라흐마 (Brahma)라는 신과 비슈누 (Vishnu)라는 신과 쉬바 (Shiva) 신이 있습니다 각각 무엇을 강조하느냐 하면 브라흐마는 창조의신 비슈누는 유지의 신이고 쉬바는 파괴의 신이야 신은 파괴하면 안 될 것 처럼 보이는데 파괴해 낡은 것을 파괴해야 새로운 것이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쉬바신의 모습은 무섭게 파괴합니다
 
이 이야기는 사람들의 신 체험이 따뜻하고 부드럽고 온유한 모습으로만 않는다는 것이어요 때때로 하나님은 매몰 차기도 하고 그런데 우리는 야훼 하나님 속에 진노하는 모습과 긍휼히 여기는 모습이 다 있지요
 
하나님 안에 이 힌두교의 경우는 그것을 나누어서 각각의 신들의 역할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지요 어쩼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 하면 악을 제거하는 분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압도적인 위엄을 이야기 하기 위하여
4절과 5절 그는 바다를 꾸짖어 그것을 말리시며 모든 강을 말리시나니 바살과 갈멜이 쇠하며 레바논의 꽃이 시드는 도다.
그로 말미암아 산들이 진동하며 작은 산들이 녹고 그 앞에서는 땅 곧 세계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들이 솟아 오르는 도다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당신의 위엄으로 지배하시는 분이셔요 그것을 바다를 꾸짖어 바다를 말리는 것으로 말합니다
 
바다와 강물은 고대인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어요 바다가 일렁이면서 배를 삼키고 바다 속에 혼돈의 세력이 있다고 느꼈던 것이지요 그러나 히브리인들은 하나님께서는 그 바다를 관장하고 계신다 강물을 관장하고 계신다
 
여기에는 깊은 종교적인 의미가 있지만 어쩼던 바다와 강물로 상징되고 있는 혼돈의 세력까지도 다 잠잠케 하시는 분 이런 위대한 분이십니다
 
4절 바산과 갈멜이 쇠하여 레바논의 꽃이 시드는도다 다 시들게 창조하는 분이기도 하지만 황무하게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비옥한 목초지인 바산과 갈멜을 황무하게 만드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5절 그로 말미암아 산들이 진동하며 작은 세상에 모든 것들 솟아 났다가 무너지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창조하는 분이시기도 하지만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드라마틱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6절 누가 능히 그의 본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 가의 진노가 불처럼 쏟아지니 그로 말미암아 바위들이 깨지는 도다
누가 누가 이런 말을 반복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 누가를 이 나훔이 쓰고 있을 때 누가가 누구인지를 대충 알아 그것이 앗시리아이지요 앗시리아 뿐만 아니라 앗시리아로 상징되고 있는 강대국 거들먹거리고 힘 있는 세력들 누가 감당하fi 감당할 수 없다 하나님의 심판의 위엄 앞에서 스스로 견데낼 수 있는 존재는 세상에 없어 그 이야기를 하고 있지요
 
그의 진노가 불처럼 쏳아지니 바위들이 깨지는 도다
세상에 어떤 세력도 하나님의 심판을 견딜 수가 없는 것이어요
찬송가 70장 가사 떠오릅니다
어떤 가사이냐 하면
이방이 떠들고 나라들 모여서 진동하나
우리 주 목소리 한번만 발하면 천하에 모든 것 망하겠네
그 다음에 뒤에 가사는 이렇게 됩니다
만유주 하나님 우리를 도우니 피난처요
세상에 난리를 그치게 하시니 세상의 창검이 쓸대 없네
 
이 가사 속에는 두가지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거스리는 모여서 진동하시만 하나님이 한번만 목소리를 발하시면 천하에 모든 것 망한다
반대로 만유주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 주시면 우리의 피난처가 되어 주시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것이 망한다
 
그리고 여호와의 선하심에 대한 이야기가 7절과 8절에 나옵니다
7절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세상에 모든 선한 것이 그분으로부터 이렇게 엄위하게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8절 그가 범람하는 물로 그 곳을 진멸하시고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좇아 내시리라
하나님은 선하시며 하나님의 선하심은 무엇을 뜻하지요
여호와의 심판 앞에 세상에 어떤 세력도 견딜 수 없다고 한 다음에 하나님은 선하시며 말함으로 그렇게 엄위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자기에게 피하는 자를 아시느니라 그래서 범람하는 물로 그곳을 진멸 시키고 자기 대적들을 쫓아내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며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무엇을 뜻하지요? 약간 철학적인 이야기를 해 봅시다 좋아하는 것 이지요 좋다 참 좋다 맛있는 음식을 보면 와 참 좋다 이러지요
 
이제 예를 들어서 상훈씨가 맛 있는 음식을 보았는데 참 좋다고 그랬어요 상훈씨에게 졸아야 옆에 앉아 있는 나운 씨는 싫어 할 수 있지요 이것이 좋은 것의 한계입니다
 
선함은 상훈씨가 좋은 것이 나운 씨도 좋을 때 선함이어요 보편성이 기준이 좋은 것은 선함이 되어요
 
막 10장 17절 선하신 선생님 이야기 하거든요
막 10장 18절 왜 나보다 선하다고 하느냐 선하신 분은 한분 밖에 없어 이렇게 이야기 하지요
 
선함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공평적으로 좋아할 때 선함이어요 성경이 이야기 합니다 세상의 모든 선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그 선함은 악인들의 심판까지 포함된 선함입니다
 
7절 그 하나님은 환난 날에 누군가에 산성이 되어 주신다
그래서 유럽에 있는 예배당들 성당 건물이나 오래된 예배당들을 보면 예배당에 현관에서부터 이런 물결무늬 모양으로 계단들이 형상화 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예배당 정문인데 나오면 물결 무늬로 되어 있는 것 보실 수 있지요 이것이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와 이르는 곳마다 생명을 살려주는 것으로 보여 주는데
 
에스겔 47장 1절 그가 나를 데리고 선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 내리리라
 
이르는 곳마다 생명을 살리는 모습을 보여 주는데 바닥에 팍스 에트 보눔 Pax et Bonum 팍스는 평화이고 보눔은 선함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하나님의 중심으로부터 세상의 평화와 선함이 흘러가는 것이어요
 
이것을 형상화 해 놓은 것이어요
여호와는 선하시고 산성이시라 그에게 피하는 자들을 주님이 아신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사야 49장 15절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이사야 49장 16절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세겼고 너희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하나님은 당신을 거스리는 사람들에게 진노하고 보복하지만 오로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산성이 되어 주시고 환난날에 만나고 그 하나님께서 모든 선한 것을 지켜 내시고 하나님으로부터 선한 것이 흘러나오도록 한다
 
이것이 아름답게 형성된 찬송가가 70장 피난처 있으니
2절과 3절
2절 이방이 떠들고 나라들 모여서 진동하나
우리 주 목소리 한 번만 발하면 천하에 모든 것 망하겠네
3절 만유 주 하나님 우리를 도우니 피난처요
세상의 난리를 그치게 하시니 세상의 창검이 쓸데없네
 
오늘 공부했던 나훔 1장의 전반부는 이 찬송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 확신 가지고 우리 힘차게 살아갑시다
 
제 2강 나훔 1:9-19 결박을 끊으시는 하나님

인생이 지향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인생은 자유를 향한 먼 여정 같아요 정말로 자유를 얻게 되는 것 예수님은
 
요 8장 32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할 것이다 말씀하셨는데 그 말 한 마디만 이해해도 성경의 태반을 이해한 것 같은데 사실 진리라는 말도 이해하기 쉽지 않고 자유라는 말도 쉽지 않지요
 
인간이 부자유하게 된 것은 죄 때문이었습니다 예덴 동산에 있을 때는 인간이 자유로왔지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죄가 들어와서 동산에서 쫓겨난 다음부터 불안 했습니다 시간이라는 게 시간이 곧 불안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어는 철학자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신화적인 이야기 그리스 신화의 이야기인데 결국은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주인은 누구이냐 하면 불안이다는 것이어요 운명인 것이지요 왜냐하면 삶이 불 확실하고 불안하기 때문에 불안의 대용물들을 무엇인가 찾지요 불안한 마음을 달레기 위해서 요즈음 사람들에 불안의 대용물로서 제일 좋은 것이 돈이고 대게 다 그렇지요
 
돈이 우리에게 자유를 준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지요 돈은 구매력이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것 구매할 수 있고 돈이 있으면 어떤 사람을 움직이게 할 수도 있고 그렇기 때문에 돈이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돈은 우리를 확고하게 세상적으로 하지요
 
돈이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불안이 우리에게 깃들고 그렇게되면 돈은 자유가 아니라 부자유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된다고 하는 것은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데 있다고 보아요
 
교역자들 이야기 나누다가 젊은 시절 이야기가 나왔어요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법정에 서게된 선배들의 재판정에 가면 엄숙한 재판정에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We shall overcome We shall overcome 우리 승리하리라 우리 승리하리라 이런 곡들을 불렀어요 그리고 쫓겨 났지요
 
그리고 우리가 힘차게 불렀던 노래 가운데 무릎을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듣기를 죽기를 원하노라 우리들은 정의파다 정의파다 우리들은 비장했어요 70년대 그런 시간을 살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제가 부 교역자들에게 물었어요 무릎을 꿇고 사느니 보다 서서 죽기를 원하노라 이것 누가 한 이야기이지 아무도 몰라 그러자 요즈음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지요 왜냐하면 네이버에게 물어 보았어요
검색을 해 보보디 알베르 까뮈가 방항적 인간에서 한 이야기라는데 그겋지 제가 서가로 가 가지고 반항적 인간을 펼쳤는데 탁 나와요 35페이지에서 나와요 그렇지 자유 자유 그런데 성경에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바는 우리에게 궁극적 자유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 이십니다
 
하나님은 끝없이 우리를 얽어메고 있는 부자유의 사슬들을 끌어내고 그래서 우리가 자유롭게 우리에게 주어진 생을 경축하고 즐겁게 살고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살기를 원하시지요
 
그런데 그 자유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고 우리를 끝 없이 무엇인가 얽어 메려는 사람들ㅇ디 있는 것이지요 그들이 하나님 거스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무력화 하시는지 오늘 본문을 통해 배우고자 합니다
 
나훔 9장 9절에서 15절까지 공부하겠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나훔을 통해 주신 경고의 말씀을 들었었고 그리고 여러분 기억나시지요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분 진노하시는 분 보복하시는 분 무서운 이미지입니다 하나님이 또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도 했어요
 
그 오래 참음은 하나님의 성품을 말하지만 심판이 왜 지연되는 지에 대한 사람들의 우려 이런 것을 해소하기 위해서 이것이 심판을 이르르기 위한 하나님의 때가 무르익는 시절이다하는 이야기를 했었고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엄중한지 바다를 말리는 것처럼 강물을 말리는 것 처럼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훔 1장 4절 그는 바다를 꾸짖어 그것을 말리시며 모든 강을 말리시나니 바산과 갈멜이 쇠하며 레바논의 꿏이 시드는도다
 
나훔 1장 7절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날의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당신에게 피하는 사람들을 아시는 분으로 형상화 되었습니다 이것이 지난주에 보았던 마지막 대목이었지요
 
9절 오늘은 이렇게 경고하는 말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1장 9절 너희는 여호와께 대하여 무엇을 꾀하느냐 그는 온전히 멸하시리니 재난이 다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너희는 여호와께 대하여 무엇을 꾀하느냐라고 하는 말은 애매하기는 합니다 여호와 뜻을 거스리고 있는 앗시리아를 뜻하는 것인지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지도 불구하고 두려워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유다를 향한 것인지
 
유다에 대한 책망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섭리하에 확고하게 거하여야 하는데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고 눈에 보이는 세력들은 명확해 보이고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나를 실질적으로 도울 수 있다고 하는 나라들을 의지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지요
 
애굽이 우리를 도와 줄 수 있지 않을까 한드든지 아니야 지금의 대세는 앗시리아이기 때문에 굴욕스럽더라고 앗시리아에게 우리가 굴복해야돼 이것이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는 마땅치 않는 것이지요 이것이 유다 사람들에 대한 책망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은 것 처럼 조금 더 많은 것 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9절 그가 온전히 멸하시리니 재난이 다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그들이 의지하려고 하려는 세력들 세상을 호령하고 있는 세력들을 온전히 멸하시리다
 
온전히라는 것은 적당히 멸하시는 것이아니어요 두 번 수고하지 않을 정도로 철저히 무너뜨린다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일컷는 말이 여러 가지가 나옵니다
10절 가시덤불 같이 엉쿠러졌고 술을 마신 것 같이 취한 그들은 마른 지푸라기 같이 모두 탈 것이어늘
 
지금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를 바라보면서 예언자가 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가시덜불 같이 엉크러진 것처럼 보여요 그 엉클러진 가시덩굴 무엇이지요 다가가면 찌르지 않아요 그렇게 엉크러진 가시 덩굴 같은데 서로를 찌르는 형국이기도 하고요 술에 취한 것 같아 이성적인 능력이 마비가 되었어요 인간 이하의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른 지푸라기와 같다 불꽃만 다면 훨훨 타 버리고 마는 그런 상황 여러분 예언자는 기본적으로 무엇이냐 보는 사람이다 본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어요 보통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이어요
 
누구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눈으로 역사를 보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눈으로 보아요 보는 사람과 보지 않는 사람은 차이가 있습니다 보는 사람이 무엇인가 보고 있을 때 이게 현실이야 말할 때 보지 못하는 사람은 그게 무엇이야 그래서 이 보는 사람인 예언자는 본다고 말하지만 남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때문에 몽상가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몽상가처럼 보여요 꿈꾸는 자이고 엉뚱한 생각하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느 신학자는 이 예언자 같은 사람들 남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아내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일깨어 주는 사람들을 시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시 쓰는 사람만이 아니라 시인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남들이 보지 못하는 세계를 보여 주는 것이어요 여러분 시적인 것을 보여주는 것은 대단히 일상적인 삶 속에서 보통 사람의 눈에는 일상적으로 흔러가는 일인데 그 순간 속에서 잊지 못할 순간들을 발견해 내는 시인들이 이게 시인이단 말이어요
 
설교하는 사람도 그렇고 예언자라든지 이런 분들이 시인이다는 것이야 제가 좋아하는 구구절 가운데 하나가 정오승 시인이 예수를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그는 모든 사람을 시인이게 하는 시인
 
그런 말을 비슷하게 했던 사람이 칼리 지브란입니다 칼리 지브란이 했던 말을 정오승 선생도 기억했을 것이어요 모든 사람을 시인이기에 해 모든 사람을 시인이기에 한다는 말은 예수를 만나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와 접촉하는 순간 내가 이전에 볼 수 없는 세계를 보기 시작하고 그런 존재가 된다는 것이어요
 
우리가 정말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시인이 되어야 합니다 되지도 않는 시 쓰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져야 한다는 이야기이지요
 
너무 비현실적으로 들리는 예언 이것이 실지로 일어났어 이런 일이 시인들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지나가는 이야기이지만 얼마전에 제가 가지고 있는 책을 좀 정리를 했어요 한 사 오천권 정도 정리해서 다 없엤어요
 
기준은 무엇이냐 하면 내가 앞으로 이제 살아가면서 다시는 볼 것 같지 않은 책들 싫어서가 아니라 싫어서가 아니라 볼 기회가 없을 것 같은 책을 다 빼냈습니다 그런데 한 권도 안 버린 책이 있습니다 시집 시집은 한 권도 안 버렸어요
 
여하튼 이렇게 시적인 아이디어를 가지고 이렇게 지내고 있는데
11절 여호와께 악을 꾀하는 한 사람이 너희 중에서 나와서 사악한 것을 권하는도다
악을 꾀하는 이 한 사람이 나올 것이다 히고 말합니다
 
나훔의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은 앗수르의 왕인 산헤립일 가능성일 것 같이 보입니다 산헤립이 히스기야 시대에 쳐 들어와서 유다를 쳐 들어와 가지고 굉장히 굴욕을 안겨 주거든요
 
이게 산헤립인데 혹은 산헤립일 수도 있고 앗시리아라고 하는 그 압도족인 세력에 압도 되어서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못하고 하나님을 부인하는 어떤 사람일 수도 있어요 이것은 특정하기는 좀 어려워요
 
여하튼 이 앗시리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혼돈 속에 끌여 들인 것은 분명합니다
유다의 46개 성읍을 징벌하고요 예루살렘이 함락 직전입니다 어찌 할 수 없어가지고 우리가 항복합니다
 
왕하 18장 14절 유다왕 히스기아가 라기스로 사람을 보내어 앗수르 왕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나를 떠나 돌아가소서 왕이 내게 지우시는 것은 내가 당하리라 하였더니 왓수르 왕이 곧 은 삼백달란트와 금 삼십 달란트를 정하여 유다왕 히스기아에게 내게 한지라
 
당신의 봉신 국가가 되겠습니다 항복의 조건으로 유다에 부과하는 징벌금이 있습니다 그게 은 삼백 달란트와 금 삼십 달란트를 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만큼인지 감이 안 오지요 달란트라는 것을 구약과 신약과 무게 단위인데 구약 시대와 헬라 시대가 달라요 구약시대의 한 달란트가 34키로 그램쯤입니다 헬라시대는 한 2키로 정도로 보고 있는데 한 달란트가 금 34키로 정도여요
 
계산을 해 보아야 하는 데 한 달란트의 값이 금 34키로가 6천 드라크마로 보는데 드라크마는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노동자가 6천일의 품삯입니다 지금으로 보면 그것보다 더 많은 돈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이것만큼이 얼만큼 되느냐 하면 한돈이 몇 그램이지요 3.75그램이래요 돈으로 따지면 30달란트라고 하는 것은 금 27만 2천돈입니다 돌 반지 27만 2천개 은 반지로 이야기하면 그것에 지금 열배 정도니까 어마 어마하지요
 
그러니까 전쟁 배상금 우리가 너희를 완전히 멸망 시키지 않을 조건으로 이렇게 내놔
왕하 18장 15절 성전 안에 금을 다 내주었고 성전 문 기둥에 입힌 금까지 벗겨서 다 산헤립에게 주었습니다
 
성전 왕궁 곳간에 금을 다 내 주었고 내 주어도 부족하기에 성전 문 기둥에 입힌 금가지 벗겨서 다 주었습니다 너무 비참하지요 어쩼던 두려운 것이어요 왜냐하면 전멸 당하게 생겼거든요
 
특별히 산헤립이 보내었던 랍사게라는 사람이 사람들앞에 이야기 합니다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왕하 18장 20절 네가 싸울 만한 계교와 용력이 있다고 한다마는 이는 입에 붙은 말 뿐이라 네가 이제 누구를 의지하고 나를 반역하였느냐
 
더 자손심 상한 말이 나옵니다
왕하 18장 33절 민족의 신들 중에 어느 한 신이 그의 땅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진 자가 있느냐
 
우리를 대적할 수 없어 자존심 상한 이야기를 합니다 야훼가 너희를 건져 줄 것을 믿지 마라 야훼도 앗수르를 당한 수 없어 자기 한계를 모르는 권력의 오만이 얼마나 압도적인지
 
그래서 11절 여호와께 악을 꾀하는 한 사람이 너희 중에서 나와서 사악한 것을 권하는 도다 하고 이아기 합니다
 
사실은 권력은 반드시 타락하도록 되어 있다고 하지 않아요 절대 권력은 절대 타락한다 이야기합니다 내 힘이 너무 세지면 그것은 인류에 대한 범죄를 저지르기 쉽습니다
 
이것을 Crime against humanity 인류에 대한 범죄라고 말하는 데 한 사람에게 행한 범죄는 인간이 특별히 가하는 범죄는 해당 당사자만의 범죄만이 아니라 인간 존엄성에 대한 거역이기에 인간 범죄어요
 
인간 범죄는 그의 인간 존엄을 해쳤기 때문에 어떤 개인에게 내가 잘못을 저지른 거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어요 특별히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고 믿는 우리들에게는 인간이 인간에게 자행하는 모든 죄는 인류에게 대한 범죄입니다
 
그래서 특정한 세력들 20세기에 가작 비극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가 나치에 의해 수업이 많은 유치인들ㅇ, 홀로코스트 유대인만이 아니지요 집시 장애인 사회 체제에 대하여 다른 생각을 가진 자들 그런 이들이 다 죽임을 당합니다
 
이것은 민족주의적 구 소련의 나라들이 그 민족들이 발흥하면서 서로를 죽이고 종교적 차이 이념적 차이 이런 것 때문에 아프리카에서도 부족간에 전쟁으로 잔혹한 살해 사건이 벌어지고 사회작 약자 혹은 소수자에 대한 증오가 벌어지고 이런 모든 일들이 인류에 대한 범죄라는 것이지요
 
한 개인에게 자행된 범죄만이 아니라 인류 보편에 범죄라는 것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가운데 칼 야스퍼스라고 하는 분이 있는데요 그 분은 독일이 2차 대전 당신 저지른 죄에 대한 참담한 물음들에 대해서
]
철학자 하이데커와 참담한 죄를 참회하는 의미에서 독일의 죄책에 대한 물음들이라는 책을 썼는데
 
인간의 죄책을 네가지로 설명합니다
(1) 첫째는 범죄적 죄책인데 죄책감을 느끼는 게
(2) 두 번째는 정치적 죄책인데 국민드이 모르는 척 하고 있는 것이어요
내가 그 일을 저지르지 않았으니까 말할는지 모른데도 나라가 그런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하지 않았어 침묵했어 이것이 정치적 죄책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3) 세 번째는 도덕적 죄책이라는 것이 있는데
자기 반성을 통해서 내 속에도 저런 죄의 가능성이 있어 느끼는 게 도덕덕 죄책입니다
 
(4) 그런데 마지막 형이상학적 죄책 말하는 데 이것은 너무 철학적이어요
그 말은 나 아닌 다른 사람들과의 연대성을 결여하는 것이 아닌가 남들이 고통 받고 있는데 국가에 저항하지 못한 것이 정치적 죄책이라 한다면 고통 받는 사람 곁에 있어주지 못하고 그들의 보호자가 되지 못한 것이 형이상학적 죄책이다는 것이어요
 
살아 남았다고 하는 것 다 죽었는데 살아 남았네 이것이 아니라 우리 이웃들이 죽임을 당하고 있을 때 모른 척 함으로 그를 사지로 몰아 넣은 나의 죄 여기에 대해서 참회해야 된다는 것이어요 이래야 문명이 바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정말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사람들을 오랫동안 두고 보시지만 이것이 권력의 극점에서 해서는 안 될 일이 반복되어 나타날 때 반드시 그 생각과 뜻을 무너뜨리시는 이심을 봅니다
 
12절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비록 강하고 많을 지라도 반드시 멸절을 당하리니 그가 없어지리라 내가 전에는 너를 괴롭혔으나 다시는 너를 괴롭히지 아니할 것이라
 
멸절 당할 것이다 없어질 것이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어떤 뜻입니까? 내가 멸절하겠다 내가 없에 버리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의지가 그렇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비록 강하고 많을 지라도 그들이 남들을 압도할만 권력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들이 메뚜기 떼 처럼 많을 지라도 그러나 그 속에는 반드시 심판하겠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12절 내가 전에는 너를 괴롭혔으나 다시는 너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13절 이제 네게 지운 그의 멍에를 내가 깨트리고 네 결박을 끊으리라
하나님은 멍에를 깨트리고 결박을 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중에 하나는 출애굽 사건입니다 구약에서는 출애굽 사건이고요 신약에서는 십자가와 부활이어요 바로 이 십자가와 부활을 중심으로 해서 신약 전체가 형성되었다고 해도 이야기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구약도 어떻게 보면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인류에게 알려지고 그 뜻에 따라서 살거나 살지 못했던 사람들의 경고의 이야기 이렇게 살아야 된다는 전체가 구약을 형성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을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바로로 상징되고 있는 애굽의 전제 정치로부터 그 속에서 비인간으로 취급되고 있는 사람들 하나의 부품처럼 늘 교환 가능한 존재로 취급받고 있던 사람들이 존엄한 삶을 누리도록 해 주는 것이 하나님의 꿈이었어요
 
그 하나님은 해방하는 하나님 결박을 풀어내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세상은 끊임 없이 누군가에게 집중해서 그를 죽음의 길로 내 몹니다
 
죽음을 누군가에게 우리는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일 수 있는 그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성경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우리의 몸을 죽일 수 있지만 영혼까지 죽일 수 있는 그 분을 두려워해야 한다
 
마 10장 28절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을 무력화 시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무력화 시킵니다 그것이 부활로 등장하지요 부활은 하나님이 일으키신 사건이지요 성서가 이야기하는 하나님은 결박을 푸시며 사람들을 부자유하게 하는 것을 무너뜨리고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하기를 원하시는 것이어요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멋있어져 합니다
함으로 부자유한 사소한 일에도 제발 그렇게 살지 말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인생을 즐겁게 살아낼 수 있어야 하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너무 우울증에 걸린 표정을 짓고 안 되어요
 
상훈씨 노래가 아주 즐겁게 밝은 노래를 하고 있지요 오로지 상훈씨에게 특화된 분야이지요 굉장히 중요한 대목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악한 자의 지배는 반드시 끊는다 이것이 이 본문이 하고 있는 이야기여요 제가 교회에 처음 나갔을 때 청년 시절에 나갔는데 신앙 생활을 늦게 했는데 그 때 부른 복음 성가들은 굉장히 심플합니다 내게 강 같은 평화 이런 것 또 무어이냐 하면 나 자유 얻었네 너 자유 얻었네 그런 곡들 그런데 그게 오랬동안 기억이 나
 
처음 만났기 때문에 그럴까 그 심플한 것이 감동을 주었어요 그 가사가 마음에 들어왔어요 주 말씀하시길 쇠사슬 끊겼네 우리 자유 얻었네 할렐루야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신앙생활의 보람은 무엇이냐 우리를 얽어 메고 있던 것들이 끊어지는 경험 세상의 경험 세상에 우리를 길 들이려고 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거기에 맞추어서 살아갔던 부자유를 운명처럼 여기며 살았던 주눅들고 그래서 신동엽 시인이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시를 보면 우리는 머리에 이고 있는 쇠 항아리를 하늘로 여기고 살았어요 쇠 항아리를 이것을 찢어야 돼 그래야 푸를 하늘이 보이는 것이어요
 
우리 머리에 쇠 항아리 같은 것이 드리어 져 있어요 하나님 믿는 사람들이 너무 두려움에 짓 눌려 있어 우리 하나님 믿는 사람들이 너무 무엇인가 짓 눌려 헌금 제대로 안 하면 벌 받는다든지 주일 날 일이 분조해 가지고 무엇하면 하나님을 너무 이상하게 하나님은 무엇하는 분이시냐 하면 여러분 그렇다고 해서 마음대로 해도 돼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 사람은 영혼의 문제가 잇어요
 
어쩼던 너무 율법적으로 두려워하지 마라 하나님은 우리가 즐겁게 살기를 원하시지요
14절 나 여호와가 네게 대하여 명령하였나니 네 이름이 다시는 전파되지 않을 것이라 네가 네 신들의 집에서 세긴 우상과 부은 우상을 멸절하여 네 무덤을 준비하리니 이는 네가 쓸모 없게 되었음이라.
 
여기에 너는 누구냐 하면 앗시리아입니다 내가 네 신들의 집에서 새긴 우상과 부은 우상을 멸절하며 네 무덤을 준비하리니 이는 네가 쓸모 없게 되었음이라
 
이름이 전파된다 잊혀진 존재가 된다 사람이 두려워 하는 것 가운데 잊혀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 위에 올라가서 바위에 이름도 세기고 가끔 누구 하트 그러면 늘 궁금해 이 사랑이 유지될까 그런 생각이 들 때가 많이 있는데 여하튼 그들의 이름 권력의 정점에 있는 것 처럼 보인 그들 오로지 세상에 그들 밖에 없는 것 처럼 보였던 신동엽 시인이 이야기한 것 처럼 우리 머리 위에 드리어 져 있는 쇠 항아리 같은 그들이 절대로 망할 것 같지 않던 그들이 그 이름도 전파되지 않고 그들이 잊힌 존재가 될 것이라고 하나님이 선고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문명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것들이 그 제국이 이루고 있던 신들인데 신들을 만들어 놓고 숭배하고 이 신들이 지켜 준다고 했는데 그것들 다 멸절한다
 
14절 그것들 다 멸절한다 네 무덤을 준비하리니 악취가 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무덤을 준비한다 왜 무덤을 준비하느냐 하면 악취가 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에스겔 32장 22절 거기에 앗수르와 온 무리가 있음이여 다 죽임을 당하여 칼에 엎드려진 자라 그 무덤이 그 사방에 있도다
 
23절 그 무덤이 구덩이 깊은 곳에 만들어졌고 그 무리가 그 무덤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죽임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진 자 곧 생존하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사람을 두렵게 하는 자로다
 
그러니까 권력의 정점에 있던 그들이 무너지는 그 무너짐이 마태복음 7장에서 어리석은 사람의 건축처럼 모래 위에 세운 집처럼 그 무너짐이 심하리라 말하는 데 앗시리아가 그렇게 멸망할 것임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망이 주어 집니다
15절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은 지어다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동행하지 아니하리로다 하시니라
 
이것은 이사야 52장 7절에도 거의 비슷한 소식이 등장 합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15절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이제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 지어다
 
왜 절기를 지키라고 이야기 하느냐 하면 악인이 질멸되었으니 다시는 그들이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dskg을 것이다 침략군이 네 나라를 짓 밟고 가지 못할 것이다 농사 지은 것을 다 따 먹거나 불살라 버리지 않는 그런 평화의 시기가 온다
 
평화의 이미지로 제일 중요한 것이 일상의 회복 우리에게 주어진 일상의 삶이 얼마나 아파보아야 여기가 아파봐야 건강의 중요함을 알아요 아파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 재미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여기가 아파 왜 왜 사람들은 아픈 대를 알고 여기를 치고 가는 것이야
 
어떤 분이 이야기 합니다 자기가 연기자인데 다리를 저는 연기를 해야 했데 다리를 저는 붙들이 어떻게 저나 보려고 거리에 나가 보았더니 다리 저는 분들이 정말 많더라는 것이어요 그 전에는 몰랐어 무심히 보고 지나가니까 그렇지요
 
내가 여기 아프면 여기만 치고 가는 것 처럼 느껴지듯이 이것이 무슨 이야기냐 하면 세상에 고통 받는 이가 세상의 중심이다 그 눈으로 보아야 세상을 제대로 보여요 건강한 사람들이 차 길을 건너갈 때 신호가 바뀌면 나는 두 번 왔다 갔다 할 수 있어
 
건강하기 때문에 정말 건강이 어려운 분들이 있지 않아요 그분들에게는 공포여요 시간 내에 걷는다는 게 좋은 사회라고 하는 것은 교통의 흐름도 중요하지만 이분들이 근심하지 않고 살도록 해 주어주는 것이 이것이 고통 받는 사람이 세상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는 것이지요
 
일상의 회복처럼 좋은 것이 없어요 절기를 지키고
] 제가 좋아하는 시편 89편 15절 표준 새 번역 축제의 함성을 외칠 줄 아는 백성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 그런 사람들은 주의 빛나는 얼굴을 보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축제의 함성 즐기가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경축하면 살 수 있는 사람들 우리의 일상 속에서 가능한 것인데 그런 때가 반드시 온다
 
15절 악인이 질멸 되었으니
악인을 뜻하는 단어가 벨리알이거든요
고린도 후서 6장 15절 그리스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대조 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섬긴 자가 벨리알을 섬길 수 없다고 하거든요 벨리알은 무 무가치함 사악함 죽음의 세력을 형상화 한 존재입니다
 
무엇인가 사람들에게 음습하게 사람들을 위축되게 만들고 사람들로 하여금 일상의 삶을 즐기며 살지 못하도록 만드는 그래서 우리를 종살이하도록 만드는 그것이 벨리알인데 그것이 여기에서는 악인이라는 말로 번역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뻐해야 하는 까닭이 악인이 진멸되었다 여기서 벨리알은 앗시리아이겠지묘 앗시리아 만으로 보아서는 안 되고 앗시리아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사람들을 두려움으로 집어 넣고 법적 그 자체가 아니라 수단으로 삼고 자기를 강화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짓 밟는 모든 사람들이 벨리알 들인데 하나님은 그들을 멸절 시킨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축제로 해 주신다 이것이 나훔이 전하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살아 계시지요 아직 악인들이 득세하는 것 처럼 보일지 몰라고 악인들은 졸지에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 들에게 기 죽지 않고 무릎을 꿇고 사느니 보다 서서 죽기를 원하노라 이런 당담함을 가지고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길을 걸아야 하겠습니다
 


제3강 나훔 2: 1-13 니느웨에 임할 재앙

여러분 산에 올라가 보신 적 있나요 산에 올라가신 적이 있나요 올라갈 때가 어려워요 내려올 때가 어려워요 내려갈 때가 어렵습니다 전문가들이 이야기할 때는 내려올 때 굉장히 조심해야 한다고 합니다 다리 힘이 없거나 다리가 아프거나 산에 갈 때 조심해야 되는 것은 내려올 때 무릎에 체중의 하중이 걸린다고 하지요
 
그리고 꼭데기까지 올라갔다 내려올 때면 마음이 약간 풀리거든요 안심하게 되고 인생 사는 것도 마찬가지여요 올라갈 때 까지는 최선을 다해서 올라가지요 올라가면 반드시 내려 올 날도 있어야하거든 거기에 머물 수 없지 않아요
 
산의 경우는 그렇지만 인생의 경우는 올라가서 거기 머물고 싶지 않아요 그게 문제이지요 그런데 머물수가 없어요 왜 그 꼭데기라고 하는 자리는 정상의 자리는 좁아요 좁지 않아요 바람도 많이 불어요
 
그러니까 그 좁은 자리에 올라오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뒷사람을 위해서 자리를 내 주어야 하고 내가 그 자리에 서 있지 않기 때문에 속상해지고 인생이 잘 사는 것이 아니지요
 
인생을 잘 산다고 하는 것은 잘 올라가는 중요하지만 잘 내려 오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다 그래야 자연스러운 생의 과정이지 젊음이 아름답지만 젊음만 아름답다고 하면 안 되거든요 하나님은 모든 때를 아름답게 하였기 때문에 젊음의 정점을 찍고 내려 올 때도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개인의 경우도 그렇고 역사 국가를 보더라도 정점을 찍은 국가들은 그 다음에 쇠망의 길로 접어들고 합니다 역사 속에 형성된 모든 제국은 다 무너졌어요 가장 화려한 문명을 누리고 있다는 것도 다 무너집니다
 
이것이 역사의 엄중함이기도한데요 우리는 늘 겸허하게 우리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섭리하고 지배하고 계신 분이 계심을 인정해야 하는데 내 힘이 커지면 그것을 인정하기 어려워요
 
이것은 종교인들도 똑 같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이 많아지고 나의 영향력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전능자가 된 것 같은 느낌 속에 들어가기가 쉬어요
 
제가 가끔하는 가끔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여러분 마르린 몬노 사진 가운데 유명한 사진이 있지요 지하철을 타는데 거기에서 바람이 올라오니까 치마를 내리지 않아요 부풀려고 하는 마음을 자꾸 내려야 돼 자꾸 부프려 오르려는 내 마음을 이렇게 누르지 않으면 수치를 겪도록 되어 있어요 역사가 그럽니다
 
우리가 지금 나훔서를 공부하고 있는데 나훔서는 니느웨에 대한 심판 이야기이지요 앗수르의 소도인 니으웨에 대한 심판 이야기인데 주전 7세기 8세기 가장 찬란한 문명을 만들어 내었던 앗수르가 어떻게 멸망했는지 보여주는 게 나훔서이거든요
오늘 공부할 내용은 나훔서 2장 1절에서 13절까지입니다
지금 니느웨의 멸망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니느웨에게 파괴하는 자가 임할 것이다 하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파괴하는 자를 영어로는 스케더라고 말하는데 전쟁을 통해서 그들을 침으로서 그들을 깨트려서 이산되게 하는 파괴하는 자가 올 것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에 파괴하는 자는 바벨론과 메데 연합군을 뜻합니다
 
1절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나니 너는 산성을 지키며 길을 파수하며 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 지어다
 
파괴하는 자가 와 이렇게 허리를 굳게하고 해봐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게 무기력증에서 벗어나서 그 침입해 오는 사람에게 힘 있게 맞서봐 라고 하는 말이 아니고요 새번역과 공동번역은 이렇게 번역을 해 놓고 있습니다
 
해 보려므나 너는 산성을 지켜 보려무나 너희 길을 파수하여 보려므로 네 허리를 견고하게 해 보려무나 이렇게 번역을 해 놓고 있습니다 그 말속에 해봤자 아무 소용없다 그렇지요 그런 뉘앙스입니다
 
개역 성경 번역을 보면 누군가를 격려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뉘앙스는 격려가 아니라 해 봐야 소용이 없어 그런 이야기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그렇게 제 아무리 힘을 써 봐도 이 심판을 하나님으로부터 수행되는 물론 하나님은 바벨론이나 메데 연합군을 들어서 앗수르를 치고 있지만 그러나 그들이 군사력으로 치는 것 처럼 보이지만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그들을 도구로 치기 때문에 막을 수 없다 아무리 존귀하다 해도 결국 망하게 될 것이다 말을 하고 있습니다
 
2절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이스라엘 영광 같게 하시리니
뜸금 없는 이야기인데요 야곱 혹은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지금 앗시리아라는 나라에 의해서 억압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억압자 이들이 억압자인데 이들을 치러 지금 군대가 와요 여기 바벨론 메데 연합군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겠는데 여기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파괴하는 자를 이야기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야 말로 파괴하는 자였어요 파괴하는 자가 파괴당하는 자가 되는 것이지요
 
이 앗시리아가 파괴를 당하는 까닭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억압과 관련이 되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야곱과 이스라엘이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2절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이스라엘의 영광 같게 하시나니 이는 약탈자들이 약탈하였고 또 그들의 포도나무 가지를 없이 하였음이라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이스라엘의 영광과 같게 하시나니 이스라엘의 영광과 야곱의 영광이 서로 꾸며 주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야곱의 영광을 회복시킨다 중요한 것은 회복이라는 단어이지요
 
구지 구별을 해 보자면 우리가 얍복강 사건을 잘 알고 있는데 외삼촌 라반과 불편하게 헤어졌다가 나중에 화해를 합니다 야곱이 돌아옵니다 20년 만에 고향으로 형 에서를 만나야 합니다
 
자기 나름대로 인간적 방책을 세웁니다
창세기 32장 7절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한 동행자와 양과 소와 낙타를 두 떼로 나누고
 
자기 재산을 반을 나누어 앞서 보내고 뒤로 보내고 자기는 얍복강 나루에서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존재가 나타나서 그를 붙잡고 씨름합니다 성경은 그 사람과 씨름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32장 24절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그 사람과 씨름을 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25절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야곱은 환도뼈가 부러집니다 대 퇴골이 됩니다 축복하기 전에 놓아 주지 않습니다
26절 그라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겟나이다
 
축복하지 않으면 놓아주지 않겠습니다
 
27절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입니다
야곱의 뜻은 발 뒤굼치를 잡은 자라는 뜻이지요 지금부터 네 이름을 야곱이라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 하라
 
28절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라
 
야곱의 삶은 얍복강 가에서 무너졌지요 야곱은 더 이상 자기의 힘을 의지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으로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야곱의 복이 이스라엘의 영광으로 회복되게 될 것이다 이야기 해서 이전 상황보다 더 나은 상황으로 가장 불행했던 시기가 오히려 복의 계기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주고 있어요 회복이라는 것은 그런 식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2절 약탈자들이 약탈하였고 그들의 포도나무 가지를 없이하였음이라
절망의 심연입니다 약탈자들에 의해 약탈 당합니다 포도나무로 상징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절하게 괴멸된 상태에 이르게 되었는데 어쩼던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하실 것이라고 슬그머니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 다음에 보면 이후에 멸망의 날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는데요
3-4절 나오는 이야기는 강렬한 전사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슨 색깔을 제일 좋아해요? 저는 보라색이어요 어렸을 때 사람들이 정신이 안 좋은 사람이 좋아한다고 좋아하면 안 된다고 보니까 보라색이 좋더라고요
 
좋게 해석하자면 하늘과 땅의 색깔이 붉은 색과 푸른색이거든요 동양 식으로 이야기하면 하늘이 붉은 것이어요 땅이 푸른 것이고 이 음양 이치로 보자면 그렇게 본단말이어요 하늘과 땅이 합쳐진 색깔이 보라색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사순절이나 대림절이 되면 목사님들 보라색이 스올을 하지요 보라색이라는 것이 참회의 색깔이기도 하지만 나를 정결하게 합니다 하는 정결한 색깔이기도 하지만 하늘과 땅이 만나는 그러니까 소통을 이야기하는 것이기에 괜찮은 것 같아요
 
보면 붉은 색 좋아하는 분들이 있지요 붉은 색이 가장 강렬하게 내게 다가온 것 중에 하나는 엣날에 영화 가운데 붉은 수수밭 밭이라는 영화가 있어요 붉은 게 막 넘쳐요 그런 느낌들 그리고 홍위병들 중국의 문화 혁명 시절에 홍위병들이 붉은 색깔 사람을 흥분 시키는 색깔이지 않어요
 
그래서 전투에서도 붉은 색을 사용한 것 같아요
3절 그의 용사들의 방패는 붉고 그의 무사들의 옷도 붉으며 그 항오를 벌이는 날에 병거의 쇠가 번쩍이고 노송나무 창이 요동하는 도다
 
이 앗시리아를 치기 위해 오는 군대 그 군대의 모습을 이렇게 형용하고 있는 것이지요
붉은 빛으로 마치 쇠로 만든 병거의 쇠가 반짝인다 노송 나무로 만든 창이 번쩍 번쩍하고 햇빛에 항오를 벌여서 군대가 탁 진을 형성해 가지고 지금 오고 있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병거가 달리는 것을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미친듯이 달리며
4절 그 병거는 미친 듯이 거리를 달리며 대로에서 이리 저리 빨리 달리니 그 모양이 횃불같고 빠르기가 번개 같도다
 
이 느낌이 무엇이냐 하면 압도적인 앞에서 거칠 것이 없는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게 앗수르 군대의 모습이라고 보기 보다는 그들을 치기 위해 나선 하나님의 심판을 나훔은 이렇게 형상화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앗수르가 멸망하게 된것이 주전 612년이거든요 그 때 이 전투의 광경이 등장했음이 분명합니다
 
5절에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이 나옵니다
5절 그가 그의 존귀한 자들을 생각해 내니 그들이 엎드려 질 듯이 달려서 급히 성에 이르러 막을 것을 준비하더라
 
그가 누구 인지 알기 어려워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앗시리아의 수비군을 이야기할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고 아니고 바벨론의 공격군을 이야기 할 것이다 서로 헷갈립니다
 
정확하게 무엇이다고 하는 것이 어렵기는 한데 여기에서 존귀한 자들이라고 하는 것은 정예군을 뜻해요 정예 군병들 그들을 파견하는 것이어요 그래서 대게 이렇게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정예군들으로 하여금 앗시리아의 도성을 치기 위해 달려가게 만드는 것이어요 그리고 이들이 해야 할 일은 성에서 공격해 오는 화살을 막기 위한 방어벽을 치고 바로 그 이야기로 보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까 공격하는 이들이 성으로 달려가서 성으로부터 날라오는 화살을 막기 위해서 방어진지를 탁 구축해 놓은 그 모양을 5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6절 강들의 수문이 열리고 왕궁이 소멸되며
앗시리아라고 하는 나라는 티그리스 강 가에 있는데 강물이 흘러가지요 모든 도시들이 그렇습니다마는 강도 있고 성이 있으면 외적의 침입을 막아내기 위해서 무엇을 하느냐 하면 여기에 성이야 여기는 곽이야 성과 곽 사이에 무엇을 하느냐 하면 해자
 
해자는 웅덩이 쳐럼 파 가지고 채워 넣은 곳 물이 있으면 즉각 성에 들어가기 어려워 이 성에 들어갈 때 해자를 건너기 위한 다리 들었다 났다 그 생각나지요 그러니까 이 니느웨를 거쳐가고 있는 강들이 있고 그 다음에 해자도 있고 그런데 난공불락이라고 생각했는데 무엇이라고 합니까?
 
강들의 수문이 열리고 그리스 역사가인 디오도스라는 사람은 니느웨가 성읍 양족으로 강물이 불어나서 성벽이 무너졌다고 라고 이야기 합니다 사실 1세기 후반의 역사가이기 때문에 몇 백년전에 일어난 일을 눈으로 보듯 서술했을 이는 없고 누군가의 자료에 의지했을 터인데 니느웨의 멸망을 물이 불어나고 있어서 성이 무너진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기에 이 나훔서의 이야기하고 맥락이 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결국 무엇이냐 하면 성곽이 있고 성이 있고 해자까지 있지만 인간으로 할 도리를 다 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이 도래할 때는 자랑거리로 여기는 것이 그들을 멸망 시키는 도구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7절 정한 대로 왕후가벌거벗은 몸으로 끌러가니 그 모든 시녀들이 가슴을 치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우는 도다
 
여기서 왕후가 끌려간다고 하는 것은 니느웨의 왕의 왕비가 끌려가는 이야기로 볼 수도 있으나 여기에서 왕후는 앗시리아 사람들이 섬기던 있었던 여신 아스다롯을 상징한 것으로 봅니다
 
그러니까 고대 세계의 전쟁은 신들의 싸움인데 신들이 탈취당한 것이어요 그러니까 그 신들을 숭배하고 있던 사람들이 슬피 우는 이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내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왕후가 끌려가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결국 자랑스럽게 여기던 것들이 적나나하게 벌겨 벗기는 그 날이 온다 온다
 
니느웨의 참상을 8절부터 이야기 하고 있는데요
8절 니느웨는 예로부터 물이 모인 못 같더니 이제 모두 도망하니 서라 서라하나 돌아 보는 자가 없도다
 
모든 문명이라고 하는 것이 물가에서 이루어지지요 우리가 다 아는 바입니다 인간의 몸의 70% 이상이 물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물 없이는 사람이 살수가 없었는데 물가에 있었는데 니느웨가 물이 모인 옷 같더니 물이 모여드는 것처럼 니느웨에게 부가 집중 되었음을 나타내는 세상에 중심이 되는 것 처럼 보였다
 
주변 세계가 풍요로움이 있는 것 처럼 보였어요 그런데 그 물이 오히려 니느웨를 치고 그래서 사람들이 다 흩어지는 것이어요 그래 서라 서라 하고 외쳐 보지만 돌아서는 자가 없습니다 그리고 노략군이 이릅니다
 
9절 은을 노략하라 금을 노략하라 그 저축한 것이 무한하고 아름다운 기구가 풍부함이니라
 
그 나라가 성이 무너지고 노략군이 당도해 가지고 집집마다 뒤지면서 고귀한 것을 빼앗아가고 이 상황을 이야기한 다음에
 
10절 니느웨가 공허하였고 황폐하였도다 주민이 낙담하여 그 무픞이 서로 부딪치며 모든 허리가 아프게 되며 모든 낯이 빛을 잃도다
 
니느웨가 공허하였고 황폐하였도다 이 10절은 히브리어 원어로 보자고 한다면 단어가 반복되고 있어요 황량 황폐 폐허 그렇게 여러 서술어를 붙이지 않고 단어를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황량 황폐 폐허 이야기 하는 데 부카 머부카 머불라카 바임이 있어요 무엇인가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풍부했던 파괴됨으로서 파괴가 완성되어가는 모습을 이런 언어 놀이로 들려주고 있는 것이어요 굉장히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결국은 니느웨가 서술적으로 말했지만 황량 황폐 폐허 니느웨 상황이어요
완전히 다 된 것이어요 그렇게 되자 주민이 낙담하여 그 무릎이 서로 부딪치며 무엇인지 알겠지요 무릎이 웨 부딪쳐요 덜덜 떠는 것이지요
 
그 다음에 허리가 아프게 되며 허리가 어떤 때 아프지요 긴장하고 허리가 아프고 모든 낯이 빛을 잃도다 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물이 가득 고인 물처럼 풍요롭게 이를데 없던 니느웨게 마치 마게가 빠져나가지고 물이 빠져 나간 것 처럼 누구도 막을 수 없게 되고 노략군들이 이르러 다 빼앗아 가고 그래서 황량 황폐 폐허가 그 속에 있고 거기에 머물러 있던 사람들이 낙담하고 서 있을 힘 조차 사라지고 그 상활이 여기에 언급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11절 이제 사자의 굴이 어디냐 젊은 사자의 먹을 곳이 어디냐 전에는 수사자 암사자가 그 새끼와 함께 거기서 다니되 그것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었으며
 
왜 갑자기 사자를 이야기 하고 있을까요? 앗시리아는 자기들이 사자라고 했어요 숫 사자로 세상의 것을 다 움켜쥐는 사자의 용맹함을 자기 민족의 상징으로 삼았던 것이어요
 
그런데 지금 이야기 합니다
이제 사자의 굴이 어디냐 황량 황폐 폐허로 변하고 나니까 사자의 굴이 무너진 것이어요
그리고 젊은 사자가 먹을 것이 어디 있느냐 전에는 수사자 암사자가 그 새끼 사자와 함께 거기서 다니되 거기서 두려워 할 것이 없었으며
 
이 사자는 두려울 것이 없지요 그런데 그러니까 활보하는 것이지요 마치 포식 동물들을 언제나 귀를 쫓긋하고 포식자가 다가온 것을 보아야 하는데 이 사자들은 아주 눈치 안 보고 자고 싶을 때 자고 물가에 배 깔고 엎드려 가지고 쉬기도 하고 그러면 초식 동물들은 주츰 주츰하면 다가가기도 하고 그런 것이지요
 
마치 무엇인가 하면 요즈음 이제 여성들의 권익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마는 남성들이 알지 못하는 공포가 있어요 내가 남자이기 때문에 느낄 수 없는 공포가 있습니다 전에 밤에 어디를 갈 때 부득히 어두운 길을 가는데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앞에 가는 저 여성은 뒤에 들리는 발자국은 정말 공포스럽겠다
 
남자들은 의식 안하고 지나가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성들은 공포스러워요
그러니까 부득히 나도 그 길로 가야돼 두 가지를 취해요 저는 무엇이냐 하면 한참 기다려서 그 분이 시야에서 사라진 다음에 가던지 하나는 실례합니다 앞서 가겠습니다 말을 하고 앞서 갑니다
 
정말 남성들이 느낄 수 없는 공포 같은 것들이 여성들에게 있어요 여성들이 느끼는 공포에 대해서 남성들이 예민하게 느껴야 해요 사자가 제 마음대로 처신을 했어요 어느 누구도 두려워 하지 않고 지금은 그런 상황이었어요
 
12절 수사자가 그 새끼를 위하여 먹이를 충분히 찢고 그 암사자들을 위하여 움켜 사냥한 것으로 그 굴을 채웠고 찢은 것으로 그 구멍을 채웠었도다
 
두렵게 하던 자들입니다 그들이 두려워해요 아까 파괴하던 자들이 파괴를 당하는 자가 되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들이 축적했던 것들이 누구 차지가 됩니까? 다른 사람들의 차지가 된 것이지요
 
이것이 올라가는 것만 생각하고 내려 올지 몰랐던 오만하고 포악했던 문명이다고 합니다
13절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어 네 병거들을 불살라 연기가 되게하고 네 젊은 사자들을 칼로 멸할 것이며 내가 또 네 노력한 것을 땅에서 끊으리니 네 파견자의 목소리가 다시는 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나이다
 
여러분 이게 경정적인 이야기입니다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만군의 여호와라고 이야기 할 때 이 만군의 여호와는 항상 이 단어는 법궤와 관련이 됩니다
 
전쟁에 나갈 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모시고 간다는 의미에서 법궤를 모시고 가지요 그것이 만군의 여호와여요 하나님 살아 계심을 알지 못하고 오만한 세력에 대해서 하나님은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합니다
 
병거를 자랑하던 그들 젊은 사자처럼 찢던 그 용사들 거두어 드린 모든 노략물들이 다 사라집니다 그리고 그들은 식민지에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한 것은 무엇이어요 파견자들 사신들을 보내어서 공포를 뿌리고 다녔어 다시는 그렇게하지 못할 것이다 하고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은 망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정말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 있다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어요
시편 27편 1절 여호와는 나의 빛이시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그 이야기는 무엇이지요 두려워하지 않는다 데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누구를 무서워 하리요 나는 무서워 하지 않는다
 
2절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을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3절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든든함이 이런데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제가 우리 집에 액자가 하나 있는데 그 액자는 그 분이 진자 쓰신 것 진품이면 좋겠지만 진품이 아닌 복제품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이 쓰신 것이어요 백범 김구 선생님이 살해당하기 얼마 전에 쓰신 것이어요 그 분이 성경 구절을 쓰셨어요 로마서 8장 31절입니다 백범 선생님이 당신의 좌우명으로 삼고 살았던 말씀입니다
 
그 구절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 때 성경을 가지고 써요 만일 하나님이 아등을 위하시면 아등은 우리를 뜻한 것이어요 수가 능히 아등을 대적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내 편이시다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면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면 수가 능히 아들을 대적하리요 수는 무리수입니다 이 말속에 나는 하나님이 내 편이라면 하나님이 나를 위하신다면 두려울 것이 없다
 
바울 사도도 로마서 8장에서 이 세상에서 어떤 것 들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 낼 수 없다 이런 든든함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강력한 나라로 보이지만 그 나라들이 오만에 빠져 있을 때 그 오만함은 하나님은 무엇을 당신의 맞서는 것으로 보시는 것이고 하나님을 맞서는 모든 문명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냥 두시지 않고 그들이 자랑하고 있었던 모든 것들을 하나님은 오히려 자랑거리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그들을 치시는 것이지요
 
물이 모이는 것 같은 니느웨 자기를 완전하게 지켜 준다고 생각했던 강과 해자 같은 것들이 그들의 문명의 토대를 허물고 그들을 망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이것이 하나니이 하시는 일이라고 나품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은 고대 세계에 대한 이야기도 하지만 오늘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것이어요
누가 나를 치겠어 누가 나를 맞설 수 있겠더 내가 이만큼 섰는데 든든하게 섰다고 하는 그 때가 무너지는 때입니다
 
나훔서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만해야 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올라가는 일도 열심히 해야 하지만 내가 내려올 때가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겸허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올라가는 일만이 능사가 아니라 내가 주어진 모든 때는 하나님의 현존의 경험하는 때로 바꾸어 갈 줄 아는 것이 인생이 가장 곤고한 때에 지속되는 것을 하나님의 은총을 발견하라 우리들이 잘 사는 비결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러분 그런 의미에서 잘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4강 나훔 3:1- 7 화 있을진저 피의 성이여

우리기 나훔 이야기를 하는데 늘 망한 이야기 멸망하는 이야기 하는데 사람을 성장 시키는 것은 귀에 달콤한 이야기를 들려줄 때 보다는 쓰디 쓴 이야기를 들을 때 크게 되는 것이지요
 
성서의 언어는 미풍처럼 우리의 마음을 감싸주기도 하지면 망치 언어가 되어가지고 우리의 마음을 깨트리기도 하고 그러지요 걔트려져야 우리 마음에 보화가 들어나거든요 깨트려져야 되는데
 
나훔서 1장 2장 공부를 니느웨 멸망에 대한 이야기다는 이야기를 했지요 니느웨의 구체적 죄가 무엇이었는지 나훔이 들려주고 있는 니느웨의 죄 이것은 아직 실체가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하게 될 3장은 니느웨의 죄가 무엇인지 하나님이 왜 진노하시는지 거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3장을 시작하는 말이 화 있을진저라는 말로 강력하게 피의 성 브라디 시티 피의 성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사실은 어디를 보더라도 피가 베어 있다 하기 보기에 어렵게 화려하겠지요
 
그러나 예언자의 눈에는 피의 성으로 보입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가 가지고 내 백성을 해방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 안 듣지요
 
그 땅에 내린 첫 번째 재앙이 무엇이었지요
출애굽기 5장 1절 그 땅에 내린 첫 번째 재앙이 물이 피로 변하는 그 이야기는 애집트라는 나일강 때문에 세워진 것이지요
 
나일강이 가져다 주는 풍부함이 강 문명을 세웠다고 할 수 잇습니다 물이 피로 변했다는 그 말 속에 담겨 있는 것이 너희들의 문명의 강이라는 나일강 물이 백성들의 피의 강이라는 말이어요 수 많은 사람들의 노예 노동에 의해서 이루어진 문명이라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강렬한 뜻이 담겨져 있는 것이지요
 
3장 1절 너는 망한다 피의 도성 피가 복수로 쓰였습니다 피들의 도성입니다 복수형이라는 것은 부당한 폭력을 말할 때 복수형을 쓰기도 합니다 니느웨라는 그 도성은 연약한 사람의 폭력에 바탕을 둔 문명임을 보여줍니다
 
피의 도성에 가득찬 것은 무엇이냐 하면 거짓이고 포악이고 탈취입니다
여러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은 니느웨의 화려함일 것입니다
독일 베르린에 가면 페르가몬 미술관 박물관이 있습니다 거기 가서 보면 죽 유적들을 보고 가다가 어떤 방에 들어가는 순간 깜짝 놀라게 됩니다
 
앗시리아 문명관 바벨론 문명관이어요 그 화려함 이라는 게 그 장대함이라는 게 말할 수가 없어요 지금부터 2700년쯤 전인데 그 때 그들이 누렸던 융성함이라는 게 오늘의 내가 보기에도 놀라와요
 
내가 파레스타인 땅에 살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인데 거기에는 문화라는 것도 별로 없이 그러한 장소였는데 포로로 잡혀가서 바벨론 문 앗시리아 문을 통과하는 순간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내가 촌뜨기구나 이들에 비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이런 느낌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눈이 히둥그레 지고 예언자들은 그 화려한 그 속을 화려하고 장엄해 보이고 멋져 보이는 모든 것들이 거짓이고 포악이고 탈취하고 하는 사실을 깨 둟어 보고 있는 것이지요
 
예언자라는 사람들은 바로 깨 뚫어 보는 사람들입니다 한자로 본다고 하는 단어는 굉장히 다양하게 볼 견자 눈으로 보는 것이어요 시는 시각 시선 이런 것으로 해서 나의 입장을 가지고 보는 게 볼 시자이지요 볼 관자도 있지요 꽤 둟어 보는 것이어요 겉으로 보는 것 만이 아니라 깨 뚫어 보는 것이어요
 
관람하고 이야기할 때 람자도 있어요 람이라는 것은 둘러보는 것이지요 본다는 행위가 여러 가지가 있어요 예언자는 눈에 보이는 것만 보는 사람이 아닙니다 문명의 본질을 화려험의 피이고 거짓이고 포악이고 탈취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화 있을진저 피의 도성이여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 화라고 하는 것은 화 있을 진저 공동 번역은 망하게 되었도다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약자들의 희생을 둔 문명은 그 속에 멸망을 내장할 수 밖에 없다 힘이 지배하는 세상 멸망을 앞둔 세계이다 힘의 우위에 의해서 지배하는 세상
 
기미 3 1 독립 선언서 아등은 자야 조선이 독립국임과 독립선언문에 보면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독립 선언문에 보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결국은 우리가 독립을 선언한 까닭이 하늘의 명령이고 시대의 대세이고 온 인류가 살아갈 발동이다고 이야기 하면서 이천면 각자가 사람마다 마음 속에 칼날에 품으리 인류의 공통된 성품과 시대의 양심이 도덕이 무기가 되어 정의의 군대가 인륜과 도덕이 무기가 되어 우리를 지켜주는 오늘
 
인륜이 우리를 지켜 도덕이 무기야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아 새하늘과 새땅이 우리 앞에 펼쳐 집니다 새 날과 새 땅은 어떤 나라입니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힘의 시대는 가고 도의의 시대가 온다 이게 정말 위대한 것이어요
 
힘의 시대가 가도 도의의 시대가 우리에게 온다 내가 힘 있다고 해가지고 약자들을 함부로 능멸하고 심판하고 빼앗고 억압하고 이런 시대가 지나가고 이것은 옛 세계이어야만 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하는 것은 힘의 시대가 아니라 도의의 시대입니다
 
마땅히 지켜 갈 것을 지켜 가는 것 인간의 인간됨은 어디에서 발현이 되는 것이지요 내가 무엇인가 갖고 싶지마는 나의 욕망과 타자의 욕망이 충돌할 때 그의 필요에 의해서 나를 제한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것이 그게 도덕입니다
 
도덕은 나 홀로 개인이 서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타자와의 관계속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함께 사는 존재로 만들었기에 내가 인간답게 된다는 것은 타자의 입장을 서 보는 일을 통해서 발생한 것이어요
 
바로 이것이 도의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서의 언어이기도 하지요 새 하늘과 우리 앞에 전개되는 데 새 땅은 힘의 시대가 지나간 것이어요 폭력의 시대가 지나간 것이어요
 
나훔서 식으로 이야기 한다면 피 탈취 이런 것들이 없는 거짓 폭력이 없는 그런 시대가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겠는데 그러니까 힘의 바탕을 두고 니느웨에게 화 있을진저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나라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3절 휙휙 하는 채찍 소리 윙윙하는 병거 바뀌 소리 뛰는 말 달리는 병거 번쩍이는 충돌하는 칼 기변 무수한 시체여
 
단어가 착착 이어가지고 있어요 마치 문체가 이야기 하자면 폭포가 쉼 없이떨어지는 것처럼 그러니가 이 나라의 그 죄를 열거하기 위해서 서술법이 아니라 특정한 단어들을 반복함으로서 우리의 가슴 비트가 빨리 뛰게 만들지요
 
천천히 휙휙하는 채찍 소리 윙윙하는 병거 바뀌 소리 뛰는 말 달리는 병거 이렇게 낭독하면 재미가 없지요 휙퓍하는 채찍 소리 윙윙하는 병거 바쀠 소리 뛰는 말 달리는 병거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쩍이는 창
 
사실 이게 무엇이냐 하면 니느웨가 자랑하는 문명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고 있어요 채찍 그리고 병거 바뀌 소리 뛰는 말 달리는 병거든 폭력이야 이것이 성서 번역자들이 고민을 한 것 같아요
 
여기에 휙휙 윙윙 이런 의성어는 없어 원문에는 집어넣었어요 실감나게 번역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니느웨가 자랑하는 문명의 본질이 바로 이런 폭력에 근거하고 있다 하는 이야기이고 그러니까 앗시리아가 전쟁 국가라는 것입니다
 
다시 이야기하면 전쟁 국가의 특색이 무엇입니까? 영토 확장하려고 하지요 영토를 확장하려고 하는 까닭은 무엇이어요 아니지 않아요 무엇하기 약탈하기 위해서 무역로를 획득하기 위한 것입니다
 
누군가를 괴롭힘으로 자기의 부를 추구하는 것이지요 권력자들에게 전쟁처럼 매력적인 것이 없습니다 막대한 부가 자기에게 들어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전쟁에 승히한 자들은 전쟁에 패전한 사람들에게 막대한 전쟁 비용을 물리지요 그러니까 전쟁처럼 남는 장사가 없다고 여겨요 이게 무서운 이야기이지요 그러나 여러분 속상한 게 무엇이냐 하면 전쟁을 기획하고 전쟁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늘 안전합니다 안전한 곳이 있어요
 
그러니까 늘 전쟁터에 가서 죽고 다치고 이런 사람들은 누구냐 하면 아무런 결정 능력이 없는 사람들 약자들만 그렇게 되어 가는 것입니다 금방 이야기 했던 2절 3절은 숨가쁜 열거를 통해서 사태의 심각성을 아주 인상깊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전쟁 국가 전쟁을 통해서 주변을 복속시키고 탈취하고 거짓을 일삼는 나라인데
 
4절 이는 마술에 능숙한 미모의 음녀가 많은 음행을 함이라 그가 그의 음행으로 여러 나라를 미혹하고 그의 마술로 여러 족속을 미혹하느니라
 
음행과 미혹이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지요 음행과 미혹이라는 게 둘은 친구여요 그러니까 앞 구절이 전쟁 혹은 폭력으로 세워진 제국의 실상을 폭로했다면 여기서는 음행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이 나라가 주변 세계를 어떻게 정신적으로 지배했는지 이것을 보여 주는 것이지요
 
4절 마술에 능숙한 미모의 음녀 마숭에 능숙하데 아까 이야기한대로 앗시리아 문명 화려한 그 문명을 보면 미모이지요 겉으로 드러나 그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어요 그리고 마술에 능해 무엇인가 사람들을 신비하게 만드는 부분들이 있는 것이어요
 
문명의 화려함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음행과 미혹 니느웨가 보여준 화려한 문명과 문명의 본질이라고 하는 것은 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이렇게 이야기 했어요 종교는 문화의 내용이고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다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어떤 문명의 본질을 형성하고 잇는 것은 종교인데 어떤 문명에 대한 매혹은 그 문명에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종교의 매혹과 이어질 수 밖에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음행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어요 하나님은 야훼 하나님에 우상들에게 굴복하는 이스라엘을 음행을 했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바로 그 음행이라는 것은 다른 신들에게 매혹된 상태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요
 
마술에 능한 미모에 음녀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 선진 문명에 대한 선망이 있지요 사람들은 우리는 촌스러워 보이고 저기는 선진 문명으로 보여요 그러면 거기에 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 공동체도 그러했습니다
신명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면
신명기 31장 16절 이 백성이 그 땅으로 들어가 음란히 그 땅의 이방 신들을 따르며 일어날 것이요 나를 버리고 내가 그들과 맺은 언약을 어길 것이며
 
음란히 그 땅의 섬기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꽤 뚫어 보지지 않아요
인간은 연약해요 아무리 굳은 나를 버리고 내가 그들과 맺은 언약을 어길 것이야
그 음녀에게 매혹될 수 밖에 없어 그래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시는 말씀이
신명기 31장 11절 매 친년 끈에 면제년이 초막절이 되면 율법을 낭독하여 온 이스라엘이 듣게 하여라
 
끊임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고 그들이 그 말씀에 붙들고 살도록 함으로서 그들이 음녀에게 매혹된 것을 막아야 한다 모세에게 이야기 하고 있거든요
 
여러분 여기 앗시리아라고 하는 나라가 그런 방식으로 ant 나라를 미혹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5절 보라 내가 네게 말하노니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 치마를 걷어 올려 네 얼굴에
이르게 하고
 
상상이 되지요 치마를 덛어 올려
6절 네 벌거벗은 것을 나라들에게 보이며 네 부끄러운 것을 뭇 민족에게 보일 것이며
이제 어떤 이야기냐 하면 화려합니다 몇겹 치마 화려하게 보여요 이것을 뒤집어 올리므로 그들이 숨기고 싶었던 부끄러움을 드러내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6절 내가 또 가증하고 더러운 것들을 네 위에 던져 능욕하여 구경 거리가 되게 하리니
니느웨를 대적할 세력이 없는 것 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이 친히 그에 맞서신 것이지요
치마를 들어 올린다는 것은 여성들에 해당들에 들립니다마는 고대 중동에서 창녀들에 처벌이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했느냐 하면 치부를 드러냄으로 인간의 존엄을 박탈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존엄을 박탈하는 것이어요 수치심을 안겨 주는 것이어요 내가 수치스럽다 할 때에 수치심이 너무 커지면 사람들은 죽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나치의 수용소에서 가했던 고문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굴복 시켜야 돼 수용되어 있는 사람들을 이 때 관리들이 시킨 일이 무엇이냐 하면 용변을 보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몽둥이를 가지고 용변을 며칠토록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게 참을 수 있는 한계가 있지 않아요 쌀 수 밖에 없어요 싸고 나면 어떻느냐 하면 수치시려워 그게 오물을 싸고 서로를 혐오스러운 관계가 되게 만들어 혐오하게 만들어 그 다음에 무엇이냐 하면 오줌 똥을 싸고 침상에 묻히고 한 사람들을 나치의 관료들은 사람으로 안 봐 짐승같은 존재였어 이게 수치심을 안겨주는 것이어요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인간의 존엄을 빼앗는 것이야 수치를 안겨 주면서 우리가 살면서 우리 한국의 문화 가운데서 정말 안타까운게 무엇인가 하면 누군가를 수치심을 심어주는 일들 자꾸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어 놓은 일이 너무 속상해요
 
인간은 존엄한 존재인데 수치스러운 모습이 있으면 가려 주어야 합니다
노아가 술에 취해 있을 때 벌거 벗고 있을 때 아들들이 보고 놀리면 안 되거든요 뒤로 가서 가려 주어야 하지요 아 저것 보네 하고 막 드러내 가지고 망신주면 안 되지 않아요
 
우리 사회가 너무 포악해 지는 것 같아 망신주고 수치스럽게 내가 수치의 대상이 나의 존엄은 사라져요 나 스스로를 감당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개인 사이에 벌어진 일이 아니고 어떤 일을 하다 보면 잘못 저지른 일도 있습니다
 
거기에 받는 벌을 받으면 모두가 나서 가지고 그를 수치스러운 존재로 만들어 버려요 그것이 그가 설 땅을 빼앗는 행위이지요 산자의 땅에 있지 못하는 그런 일들이 많은 것이어요 이게 극복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무엘하 10장에 보면 암몬 왕 나하스가 세상을 떠납니다 암몬왕 나하스하고 다윗은 좋은 관계를 유지했거든요
 
사무엘 하 10장 2절 소문을 듣고 다윗의 소문 사절단을 보냅니다
사절단이 오자 하눈은 잘 맞이하려고 합니다
사무엘하 10장 3절 신하들이 가서 속닥 속닥해요 사절단을 좋은 뜻으로 보낸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우리를 염탐하고 우리를 치려고 사절단을 보낸 것입니다
 
경험이 많지 않은 하눈은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우려요
그리고 무엇을 했느냐 하면 다윗의 사신으로 간 사람들의 수염의 한쪽을 잘라냅니다 망신을 준 것이지요 수치스러운 것이지요
 
수염이라는 게 권위의 상징인데 엉덩이 쪽에 옷자락을 잘라 냅니다 엉덩이가 드러나게 만드는 것이지요 수치 스럽게 만들어요 결국 그 일 때문에 다윗이 대노하지요 사신을 갔던 사람들은 망신을 당하고 돌아와서
 
5절 수염이 자랄 때 까지 여리고에 머물라고 합니다 그들의 수치가 닦아져야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어요 살아가면서 저는 내가 어떤 사람을 안 좋아할 수는 있어요 저 사람은 내 마음을 들지 않아 그렇다고 해서 수치의 대상으로 폭로하는 일들은 악마적이다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것들인데 어쩼던 이러한 세상이기는 합니다마는 그런데 다른 나라를 가차없이 침략하고 약탈하고 능욕하고 수치를 안겨 주었던 니느웨가 똑 같이 일을 당하게 될 것이다 파괴자가 파괴 당하는 자가 되는 것 처럼 다른 나라에 수치를 안겨준 그 나라도 똑 같은 일을 겪게 될 것이다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움으로 드른 나라를 미혹하던 드러날 것임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가증하고 능욕하여 구경거리가 만들거리가 되게 할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자기 힘에 하나님이 그저 두시지는 않지요
 
마리아의 찬가를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이
누가복음 1장 51절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절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절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베불리셧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마리아의 노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당신을 통해 이 땅에 오게될 그리스도가 하실 일이 이런 세상임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지요
 
정말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 분명합니다
7절 그 때에 너를 보는 자가 다 네게서 도망하며 이르기를 니느웨가 황폐하였도다 누가 그것을 위하여 애곱하며 내가 어디서 너를 위로할 자를 구하리요 합니다
 
니느웨를 보는 자가 다 도망할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마치 못 볼 것을 보는 것처럼 행여라고 재앙이 그에게 옮겨올까봐 두려워하는 것 처럼 그렇게 도망하며 니느웨게 황폐하였도다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황폐함이라고 하는 것은 전쟁으로 초토화 된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이렇게 이야기 누가 그것을 위하여 애곡하여 줄까 합니다 여러분 세상에 제일 슬픈게 그 죽음 앞에서 애곡하여 줄 자가 없는것 처럼 슬픈 일이 없지요
 
꽃도 없고 상여도 없고 만장도 없고 시속에 등장하는 이야기인데 그런 죽음처럼 쓸쓸한 것이 없는데 그런데 여기에 여신들은 남신들과 여신들이 있는데 고대 세계에서 여신들이 하고 있는 굉장히 중요한 역할들이 있어요
 
그 여신들이 하는 일 가운데 대지에 품어 안아주는 역할도 하지만 그 땅에 살고있는 이들의 애곡해 주는 역할들 그들의 슬픔을 함께 아파해 주는 역할들 여신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이야기 하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는 것을 보고 누가 우느냐 하면 땅 속에 있는 라헬이 울었다 성경에 보면 라헬이 우는 것이 등장하지요
 
예레미야 3장 15절 땅 속에 있는 라헬이 울지요
대지에 살고 존재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알아내는 존재가 여신으로 형상화 하는 때가 많이 있는데 니느웨가 결국은 파괴될 것이고 그 여신조차도 참혹하게 끌려가기 때문에 그 땅은 그 백성들 위에 울어줄 수 없는 상황이 될 것이야
 
포악한 나라의 운명이어요 누군가가 보면서 참 안 되었어 좋은 이웃이었는데 그렇게 안한다 그 말이어요 그 망한 것을 보고 잘 되었다 간 것이지요
 
애도 의식이 있지 않아요 사람들마다 애도 의식을 치룹니다 요즈음 기독교 장례에서는 슬피 올지 않지 않아요 잘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어요 왜냐하면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니까 우리가 감사하고 기뻐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데 어떤 이들은 장례를 천국 환송식이라고 하지요 그 말도 일리가 있어요
 
그러나 생각해 보면 사랑하는 이가 세상 떠나면 슬프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 분과 함께 지내 왔던 시간들 또 그분이 나의 영혼속에 남겨 놓았던 흔적들 이런 것들 생각하면 슾프지요 그래서 울지 않아요
 
많은 기독교인들이 좋은 대 가셨는데 왜 울어 그래요 나는 그게 불편해 울게 좀 두지 옛날에 장례식 집에 가보면 곡하지 않아요 아이고 아이고 그리고 우리가 놀림 삼아 이야기 하는게 아이고 아이고 하다가 무엇이다고 하느냐 하면 예 부침게 타는 냄세 난다 뒤집어라 형식화 되는 울음 이야기인 것철 이렇게 이야기 하는 데 형식에 애도하는 의식은 중요합니다
 
사람에게는 슬픔의 수문을 열어야 할 때가 있어요 울어야 할 때 울 수 있어야 해요 왜냐하면 울어야 할 때 실컷 울어야 부정적 감정이 나를 사로잡지 않아요 그런데 애도하는 시간을 지내고 있는 사람에게 그만하면 됐다 지겹다 이제 그만 울어라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은 대단히 비 인간적이어요
 
우리 사회에서 어떤 사람들이 슬픔을 당했어 그래서 울어 아프다고 이야기해 그런데 그 아파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쉬운일은 아니어요 그렇다고 해서 그만 칭얼거리라 말하는 것은 대단히 폭력적인 일이라고 볼 수 있어요
 
왜 그가 그 자기의 상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상실에 대해서 충분히 아파하고 그 아픔 속에서 누군가가 내 곁에 머물러 주면서 격려하고 따뜻하게 보듬어 주었던 그것이 나를 산자의 땅으로 인도한 길이 되지 않아요
 
애도하는 사람에게는 함께 아파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애도란 무엇이냐 하면 사랑하는 대상이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마음속으로 인정하고 점차 상실의 충격에 벗어나는 것이 진자 애도여요
 
그럴 수 있는 시간은 충분히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애도의 시간을 충분히 누리지 못한 사람들은 무엇이냐 하면 우울증이 생겨요 자기 속에 우울증이 생겨요 상실한 대상과 자기를 무의식적으로 동일시 하기 때문에 내가 사랑했던 자아 상실처럼 느껴져
 
중요한 것이 애도하는 시간을 충분히 누리도록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에 애도조차 받지 못하는 문명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처절하게 그들에게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오늘 3장 1절에서 7절까지 이 대목은 앗시리아 특별히 니느웨의 문명의 본질이 무엇인지 보여 주었고 그것이 폭력이었고 그리고 수치를 안겨주는 문화였고 자기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누군가를 도구화 하는 일이었지요
 
저는 이것이 제일 문제인데 도구화 한다고 말하는데 다른 말로 물화 물화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물건처럼 만드는 것이어요 어떤 존재를 물화 시키는 것이어요 물화 이렇게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정말 주의해야 해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나의 욕망을 위해서 나의 잇속을 위해서 누군가를 내가 도구로 삼고 내가 누군가를 도구로 삼는 순간 나는 그에게서 인격을 박탈하는 것이어요
 
인격성을 똑 같은 이야기인데 도구화 한다는 것이 수치심을 안겨주는 것인데 수치를 안겨준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인간적 존엄을 박탈하는 행위인 것이지요 그렇게 누군가를 수치스럽게 만든 문명 그런 대상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대로 돌려줄 것이다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게 하나님이 정하신 법도인 것이지요 니느웨는 바로 그런 죄로 말미암아 파멸의 위험에 처하게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생각해 봅니다 오늘의 교회가 사람들에게 어떤 취급을 받고 있나 자꾸만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을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은 사람들을 자유의 길로 인도해 내는 것이 교회의 책임이다고 볼 수 있는데 오히려 신앙을 통해서 사람들을 억압하고 가두어 두고 자유로운 사고를 못하게 하고 이럴 때 교회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설 수밖에 없다는 것을 두려움으로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말씀을 드립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을 어떤 방식으로 대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고 누군가를 가두어 놓는 사이에 수치를 안겨 주는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 보면서 절대로 내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그 사람을 혐오와 수치의 대상으로 만드는 일을 우리의 삶속에 하지 않는 그러한 마음을 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을 해요


제 5강 나훔 3: 8-19 강함을 자랑하지 말라

우리가 오랜만에 만난 사람에게 하나도 안 변하셨네요 이 이야기 좋은 이야기여요 나쁜 이야기여요 좋은 이야기 같은데요 늙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이기도 하지요 어떻게 보면 변하기도 해야 하는데 사람이 좋은 방향으로 변하지요
 
그런데 대게 안 변하였어요 하는 말은 긍정적 메시지라고 볼 수 있지요 우리는 어쩼던 변합니다 페라크레토스라는 철학자 530 680 사람은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에 잠글 수 없다 흘러가는 강물만이 아니아 그 강물에 발을 들여 놓는 나도 이전과 이후는 달라져야 지요
 
왜냐 하면 그렇게 이야기 하려면 세포가 수천억개가 죽지 않아요 새로 재생되고 어제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나이기도 하지요 모든 것은 태어나는 때가 있고 성장하는 때가 있고 성장이 멈추는 때가 있고 쇠퇴하기 시작하고 마침네 돌아가지요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고 역사도 그러거든요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변화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나훔서를 공부하고 있어요 나훔은 니느웨에 대한 경고하는 말로 시작이 되어서 그 당시에 가장 강력한 나라 앗시리아가 권력의 정점에서 어떻게 무너질 수 밖에 없었는지 나훔 선지자가 보여주거든요
 
오늘 마지막 시간이어요 오늘은 나훔 3장 8절에서 19절까지 공부하겠습니다
앗수르라고 하는 나라 앗시리아라 였지요 앗수르라는 주요 도시 이름을 딴 것입니다마는 앗수르라는 나라가 권력의 정점에 있었고 폭력성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이렇게 잔혹할 수 있나 상상 이상이거든요
 
사실 20세기에 가장 비극적인 일이 있다면 나치에 의해서 자행된 유대인과 히피 장애인들 동성애자들 이런 사람들에 대한 무차별 학살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지요 살아남은 사람들의 증언을 요약하자면 무엇이냐 하면 현실이 문학을 능가한다
 
인간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폭력이 자행된다 그러니까 인간이라는 게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기는 했습니다마는 그 인간이 원래의 자리에서 벗어났을 때 얼마나 악마적 존재로 변할 수 있는 지 그런 것을 보여 주는 것이 20세기이고 그래서 19세기 말에 인간에 대한 낙관론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인간이 못할 준 신적 존재처럼 트꼈지요 인간이 신적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두 번의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인간은 통제 되지 아니한 인간 방향성을 잡지 않는 인간이 얼마나 권력 귀결될 수 있는가를 처절하게 느끼게 되지요 신학자들도 고심을 하면서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고는 느끼게 되거든요
 
그런 상황인데 앗시리아라고 하는 나라가 권력의 정점에서 주변에 보인 폭력의 정도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지금도 부조물 같은데 보면 나타나는 데 여러분 사실은 우리 평범한 사람들은 살아있는 것들을 죽이는 게 매우 부담스럽지요
 
그러니까 무심코 이렇게 개미 같은 것 밟을 수도 있지만 지나가는 애릉 일부러 눌러서 죽이는 것은 꺼림찍한 일입니다 살아 있는 것을 바퀴 벌레 경우에도 그런데 우리가 조금 더 큰 동물들은 어려운데 인간이 인간에 대해서 자행하는 폭력의 정도라는 것이 상상을 초월했던 것이지요
 
그렇게 무도했던 권력들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보야지지요
8절 네가 여기 노아본보다 낫겠느냐
너라는 것은 앗시리아를 뜻이지요
 
노아몬 그러면 생각나는 것이 있나요 그런데 노아몬이라는 것이라는 것은 아몬의 도시 혹은 아몬의 거리라고 하는 뜻인데요 아몬이라는 것은 고대 이집트 사람들이 섬기던 신의 이름입니다
 
아몬신의 이름이고 아몬신의 신전이 있는 거리 그 도시 이것이 노아몬인데 고대 세계에서 노아몬으로 불리우는 도시는 테베라고 불리었어요 이집트의 테베인데 지금의 지명으로 하면 룩소로라 합니다
 
요즈음도 이집트 관광하러 가는 사람들은 룩소르를 대부분 들립니다 거기가 고 왕조의 번성했던 자리이기 때문에 신전들이 많이 있고 많은 신전 건물들이 있습니다 룻소르 신전이라든지 기타 다양한 신들이 많이 있는데요
 
특히 이제 카르락이라는 신전을 보면 그 규모가 대단하고 거기에 서 있는 오벨리스크 이런 것들의 규모 거기에 있는 부조물들 거기에 있는 입상들 이런 것들을 보면 고대 로마가 얼마나 번성한 국가인가 보여주는데 그것이 아몬 신의 도시라고 일컬어 져 있고 지금은 아프리카가 중심으로 서 있지 못한 것이 사실이지만 고대 세계에서 아프리카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실은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200년 300년 전만 해도 아프리카 북부 지역은 세계 학문의 중심지였거든요 그러니까 세상의 석학들이 거기에서 다 나와요 아프리카 지역에서부터 나옵니다 특히 이집트라는 나라는 여기 대단한 나라였지요
 
여기 노아몬이라고 하는 게 바로 그 곳을 이야기 하는데 지정학적으로 이야기 하면 한쪽은 바다가 있고 한쪽은 나일강이 있고 그러니까 일종의 천연 요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바다가 있고 나일강이 흘러가고 천연 요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강들 사이에 있으므로 이렇게 말합니다
9절 구스와 애굽은 그의 힘이 강하여 끝이 없었고 붓과 루빔이 그를 돕는 자가 되었으나
주변에 있는 나라들이 애굽의 강서함 때문에 서포트해 준 것이지요 그러니까 난공 불락처럼 보었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습니까?
10절 그가 포로가 되어 사로잡혀 갔고 그의 어린이들은 길 모퉁이 모퉁이에 메어침을 당하여 부셔졌으며 그의 존귀한 자들은 제비 뽑아 나뉘었고 그의 모든 권세자들은 사슬에 결박 되었나니
 
고대 세계에서 일어났던 참강가운데 하나가 어린이들은 인간으로 보지 않는 것이지요 사실 어린이라는 말도 어리석다는 말에서 유래 되었다는 말이 있지 않아요 아직은 개몽되어야 할 존재 소파 방정환 선생님은 그 말의 의미를 바꾸었지요 얼인 이 얼 같은 존재야 어리석은 존재가 아니라 같은 깊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아이들입니다
 
어린이의 지위가 올라간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항상 어린이는 미성숙하고 자기 인격을 갖추지 못한 반 인간 절반 이 정도 취급을 받았어요 그런데 어린 아이들은 미래 세계를 담고하고 있는 사람이지요
 
그러니까 적들을 적의 성읍을 파괴했을 때 그들이 했던 일들은 무엇이냐 현재의 성인들 죽이는 일도 하지만 미래에 우환이 될 아이들까지 다 죽이지요 참 끔찍한 일인데 사실은 이것이 고대 세계만 벌어진 일이 아니고 2차대전 시절에도 이런 일이 벌어졌고 인제 만행도 듣고 있지 않아요
 
아이를 던지고 총에 착검한 검을 가지고 찌르고 이런 이야기들이 증언이 되고 있는데 인간이 얼마나 악마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데 전쟁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나쁜 평화가 가장 좋은 전쟁보다 낫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상황 때문입니다
 
전쟁은 사람들을 이렇게 만듭니다 전쟁터에서 그렇게 잔혹한 일을 자행하는 것을 보면 타고난 악인들이서가 아닙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 놓였기에 그런 일을 하는 것이어요 사람들이 예를 들어서 성호씨는 절대 안 그럴 것이야 그렇게 이야기 할 수가 없어요
 
어떤 가능성이 있어요 충분히 그러니까 우리가 저 사람들이 유난히 악인일 것이야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지 않다는 것이어요 여러분 유대계 미국 사상가였던 한나 아렌트 아렌트라고 하는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열렸던 아히히만이라고 하는 나치에 부역을 했던 그 장교 유대인 학살에 아주 가담한 중요한 전범 재판에 가서 봅니다
 
1961년 이 아히히만이 악인으로 보이지 않고 너무나 평범한 것이어요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고 죄책감이 없어요 자기가 한 일에 대한 죄책감이 없어요 왜 죄책감이 없냐 하면 나는 위에서 지시한 일을 수행했을 뿐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한나 아렌트가 무엇이라고 이야기 하느냐 하면 악이라고 하는 게 악을 저지르는 특정한 사람들이 아니구나 악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평범한 사람들이어요 예를 들면 자식 등록금 걱정하고 꽃을 보면 예쁘다고 느끼고 누가 웃은 소리하면 깔갈 거리고 크레식 음악을 좋아하고 이런 사람들이 악을 저지를 수 있는 것이어요
 
그래서 한나 아렌트가 한 말이 악의 평범성 이라는 말을 하는데 특정한 사람만 악을 행하지 않더라는 것이어요 어떤 사람들이 악을 행하느냐 그것은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그래서 무엇이냐 무사유 이야기 하는데
 
thoughtlessness 생각하지 않는 것이어요 쇼트라는 게 생각이지오 리스는 부정이고 생각하지 않은 나는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어요 자기의 삶에 대한 책임적 주체가 되어 사고하지 않고 남의 생각을 기계적으로 받아 들이고 자기의 책임을 면하려고 하는 것 생각하지 않는것
 
함석헌 선생님이 1901-1989 생각하는 백성이어야 산다 말하거든요 생각을 해야 돼 전쟁이라는 상황은 우리에게서 무엇을 빼앗아가느냐 하면 생각을 빼앗아간다 왜야 하면 옆에서 포탄이 터지고 내 동료가 쓰러지고 그러면 생각의 가능성이 사라지고 동물적 본는 이런 것들이 살아나지요
 
그러니까 상대방을 존귀한 주체로 보지 않고 내가 극복해야할될 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지요 이게 전쟁 상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정한 사람만이 아니다 비극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10절 사람들은 포로가 되어 잡혀 가고 어린아이들은 내치어 졌고 그리고 으시대고어 살고 있었던 존귀한 사람들 조차 종으로 팔려 가는 것이어요 떵떵 거리는 권세자들은 사슬에 묶여 가지고 사로 잡혀 갔다 고대 이집트 강력한 나라가 한 순간에 망한 것을 이야기 하면서
 
11절 너도 술에 취하여 숨으리라 너도 원수들 때문에 피난처를 찾으리라 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술에 취한다고 하는 것은 심판과 연관이 되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술에 취한 사람이 지각이 없는 것 처럼 그런 상황 속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너도 원수들 때문에 피난처를 찾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강력한 앗시리아 산성들 그 산성들이 무너지는 것을 이야기 하는데 상상력이 기가 막히비다 너희 산성들이 와르르 무너질 것이다 이렇게 표현하는 데 여기에는 무엇이라고 말 합니까?
 
12절 네 모든 산성은 무화과 나무의 처음 익은 열매가 흔들기만 하면 먹는자의 입에 떨어짐과 같으리라
 
정말 생생합니다 성경을 문학적으로 보아도 놀라는 것이 있는데 성이 무너지는 것을 무화과 나무가 우수수 떨어지는 것 우리는 무화과가 많이 없으니까 밤 가을이 되어 가지고 입을 벌리지 않아요 안에 들어간 알밤이 있는데 먹고 싶을 때 장대 가지고 떠는 것도 있지마는 도토리 같은 것 딸 때에도 시골에서 나무 매가 있어요
 
나무로 만든 망치 이것을 가지고 나무를 탁 탁 치면 우수수 떨어져요 상훈씨 같은 사람은 대게 매로 안 하고 자기의 육중한 몸으로 그런데 이런 상상력을 가지고 이야기 하는데 결국 네가 그렇게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산성도 이렇게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야
 
13절 네 가운데 장정들은 여인같고 네 땅의 성문들은 네 원수 앞에 넓게 열리고 빗장들은 불에 타도다.
 
네 가운데 장정들은 여인 같고 이 이야기는 승리자들은 패배자들을 여성에 비유하곤 했어요 그러니까 이것이 남성 중심의 문화여요 패배자들을 조롱하기 위해서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렇게 말함으로 이게 조삼스러운 이야기는 한데 남근을 제거하는 것이어요
 
그 사람에게서 자기들의 자부심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는 남근을 제거하는 것이야 말로서 그들을 여성 취급함으로 그러니까 옛날에 그런 이야기 많이 하지 않아요 사네 자식이 이런 이야기 계집 아이처럼 이렇게 이야기 하고 그 말은 그가 가지고 있는 자수심으로 남근을 제거해 버리는 것이어요
 
여기 그 이야기입니다
13절 네 가운데 장정들은 여인 같고 네 당에 성문들은 네 원수 앞에 넓게 열리고 빗장들을 불에 타도다고 말하고 하는 대요 다 알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성문이 원수 앞에 열리고 이 속에는 전쟁에서 승리한 자들이 여성들을 자기들의 쾌락의 도구로 삼았던 그 아픈 역사가 이 말속에 넌지시 암시되어 있어요
 
그렇게 너희가 될 것이다 결국은 너희들이 그동안 다른 나라에 이런 일들을 자행했는데 이제는 너희들이 똑 같은 일을 당할 수 밖에 없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가장 강력한 것이 가장 허무하게 무너지는 상황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14절부터 나오는 이야기는 일종의 빙정 거립니다
너는 물을 길어 에어 쌓일 것을 대비하며 너희 산성들을 견고하게 하며 진흙에 들어가서 흙을 밟아 벽돌 가마를 수리하라.
 
이제 방비를 하라는 것이지요 너희를 치러오는 적들이 올 때 포위 공격 당할 때 살아남기 위해서 물이 있어야 하지요 무엇이 있었아 합니까 물이 있어야 하지요 물을 길어서 외워쌓일 것을 대비하라
 
그리고 산성들을 견고하게 하라
15절 그렇게 수고해서 느치기 메뚜기 비슷한 종류를 이야기 하는데 우리가 흔히 그런 이야기 하지 않아요 음식점 가지고 맛갈란 음식들을 먹으면 서로 쑥쓰러워 가지고 아이구 메뚜기가 지나가는 것 같다 남김 없이 먹었다고 성경에 메뚜기 이미지가 많이 등장하지요
 
우리가 음식점 가 가지고 왕성한 사람들이 더 먹어 치우는 것을 보면 아이구 메뚜기 지나간 자리 같다 그러니까 나를 지켜 내기 위해 방비를 철저히 한다고 하는데 바로 거기에서 너를 멸망시킬 것들이 나올 것이다
 
장기 공방전을 대비하기 위해 그들이 많은 수고를 했지마는 결국은 다 망해 버리고 군비를 확충해 보아서 결국은 그것이 자기를 치는 그런 일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16절 내가 네 상인을 하늘에 별보다 많게 하였으나 느치가 날개를 펴서 날아감과 같고 앗수르 왕이 네 목자가 차고 네 귀족은 누워 쉬며 네 백성은 산들에 흩어지나 그들을 모을 사람이 없도다
이 앗시리아라고 하는 나라가 군사력을 통애서도 자기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지만
사실은 군사력을 약탈문들로 사실은 약탈하기도 했지면 그 땅을 지배하는 까닭이 세금도 거두어 드리고 그 곳을 자기들의 판매처로 삼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것이어요
 
상인들이 하늘의 별보다 많았어 다니면서 그러니까 그들이 일시에 마치 느치가 날개를 펴서 날아감과 같고 붙잡으려고 해도 붙잡을 수가 없어요 순식간에 그들에게 부를 가져다 주는 것들이 일시에 다 사라고 만다
 
자고 일어나니까 사라진 것 같고
17절 네 방백은 메뚜기 같고 너희 잠수들은 큰 메뚜기 떼가 추운 날에는 울타리에 깃들였다가 해가 뜨면 날아감과 같으니
 
지배하는 사람들 장군들 이런 사람들도 전부 메뚜기가 사라짐 같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군대도 소용 없어요 경제력도 소용 없어요 그들이 의지하던 모든 것들이 다 무너집니다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그들이 가장 자랑스러워 했던 것들 정말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다 하고 말합니다
 
18절 앗수르 왕이여 네 목자가 자고 네 귀족은 누워 쉬며 네 백성은 산들에 흩어지나 그들을 모을 사람이 없도다
 
이제는 직접 앗수르 왕을 겨냥해서 앗수르 왕이여 네 목자가 자고 목자는 잠들어 있으면 안 되지요 목자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리가 오는지를 보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네 목자는 잠들 것이다 네 귀족은 누어 쉬며 그렇지요 백성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할 귀족들이 자기 직무를 안하는 것이어요
 
무엇이냐 하면 도덕적 해이가 찾아 온 것입니다 영어로 모랄 헤자드라고 이야기 하는 데 도덕적 해이가 찾아와서 더 이상 가지의 책임을 감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무엇이어요 그렇게 자기를 돌봐 주어야할 울타리 같은 사람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니까 백성들은 흩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흩어진 백성들을 모을 중심조차 없어지게 될 것이다 이것이 앗수르의 상처라고 합니다
19절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 부상은 중하도다 네 소식을 듣는 자가 다 너를 보고 손뻑을 치나니 이는 그들이 항상 네게 행패를 당하였음이 아니더냐 하시더라
 
회복할 상처가 다가 옵니다
네 소식을 듣는 자가 다 너를 보고 손뼉을 치나니 하고 말합니다 앗수르에게 당한 사람들 횡패를 당했지요 그들이 횡해라고 번역된 단어는 악 악행을 듯하는 단어인데요
 
앗수르의 악행에 시달리는 나라는 자기들을 괴롭힌 나라가 속적 없이 망하는 모습을 보니까 기뻐 한다는 것이어요 백성들은 흩어지고 책임을 질 사람은 책임을 지지 않는 무책임의 극치를 보여 주고 있고 그렇게 주변 나라들은 기뻐하고 있다 하고 말합니다
 
네게 행패를 당하였음이 아니더냐 하는 의문문의 평태로 끝나고 있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결국 이 이야기를 통해 나훔이 들려주려고 하는 것은 앗시리아라고 하는 나라가 속절 없이 멸망 당할 것을 이야기 하지만 이것이 앗시리아만이 이야기가 아니고 앗시리아 사람들 혹은 문화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함께 살라고 준 이웃들을 함께 살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자기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삼고 있는 일체의 행위들 강자들 여기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앗시리아라고 하는 나라는 특정한 나라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앗시리아가 상징하고 있는 것은 무도한 강자입니다
 
여기 무도하다 이야기 하고 있는데 도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어요
(1) 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살아 계심을 아는 것이 도여요
그래서 우리가 역사를 바라볼 때 우리는 역사를 예측할 수가 있어요 역사의 뱡향이 이렇게 가고 있을 것이다 하고 이야기 합니다 4차 산업 혁명을 이야기 하고 에이 아이 시대가 돌아온다고 그대로 진행 될 것이라고 믿는 것은 역사주의여요
 
그런데 역사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예측한대로 가지 않아요 어떨 때 물고가 바뀌어요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세상을 바라볼 때 예측은 해야 합니다 우리가 늘 염두에 역사의 주인인 하나님이 살아계시다
 
어느 순간에 역사의 방향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을 해야 합니다
(2) 그 다음에 무도라고 이야기할 때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를 인간으로 만드신 까닭이 무엇이냐 하면 연약한 자들의 버팀목이 되어주라고 만들었어요
 
사람이라는 글자가 서로 서로 기대고 있는 모습이지요 어떤 사람이 여기에다가 이렇게 썼어 인 인 인 인 인 한자 해석 사람 인자를 여러개 섰어 해석 사람이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사람은 태어나지만 이 이야기를 사람은 태어납니다 사람은 태어난 순간 사람이어요 그러나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구성되고 만들어 지는 것이야 관계를 통해서 우리가 어떤 사람보고 인간답지 못하다는 것이어요
 
인간 다움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인정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지 않는 것이고 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데 대하여 책임을 지는 것 사람 다움이어요 대게 무도함은 앗시리아로 상징되고 무도한 강자들이 어떻게 몰락하는 지를 보여 주고 있어요
 
그래서 물음표로 이야기 하고 있지요
19절 이는 그들이 항상 횡패를 당함이 아니더냐 말함으로 이 말을 이제부터 어떻게 살네 이것을 우리에게 묻고 있단 말이어요
 
그래서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여전히 무도한 강자들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지요 힘이 있는 사람들이 힘없는 사람들을 착취하고 짓 누르는 세상이지요 이런 세상에 살면서 지칠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이러니까 바꿀 수 없어 지레 말하면 안 됩니다 이 무도한 강자들은 우리에게 끊임 없이 어떤 생각을 짚어 넣느냐 하면 네가 아무리 애써도 세상은 달라지지 않아요 가만히 있어 세상 달라지지 않아 이것을 우리 속에 집어넣어 주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하면 그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배하신다는 한가지 근원을 붙잡는 것이야 하나님이 원하는 세상은 공의와 정의가 살아 있는 세상이단 말이어요
 
우리는 그런 세상이 열리도록 소리를 높여야 돼 악이 승리한 유일한 조건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선한 사람들의 침묵 악이 승리하기 유일한 조건이어요 그래서 우리는 아니야 이것은 나쁜 세상이야 이야기 해야 돼
 
그러면 그런 희망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늘 환영 받지는 않아요
그러니까 희망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잘 안 보칠 때가 많이 있습니다
1990년에 제레미야 마이트라는 목사님이 미국 사회에 희망을 역설하면서 그림 하나를 소개를 했어요
 
그 그림이 무엇이냐 하면 죠지 프레드릭 와츠라는 사람이 그린 희망이라는 그림입니다
혹시 보신 분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지구본 같은 곳에 소녀 하나가 앉아 있습니다 남루한 옷을 입고 있고 허리를 잔득 구부리고 고개도 숙인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의 눈이 가리어져 있어요 눈이 붕대 같은 것으로 가려져 있고 이 소녀가 기대듯 손으로 붙잡고 있는 것이 하프 일곱줄 하프인데 여셧개의 줄이 끊어졌어 단 하나만 남았어요
 
그러면 이 그림의 제목으로 적절한 것이 무엇이냐 절망일 것 같지요 그런데 죠지 프레드릭 왓츠는 그 제목을 희망이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모든 조건이 좋기 때문에 희망이 아니고 모든 가능성이 자라진 것 처럼 느낄 때 단 하나 남은 희망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 인간 다음이라는 것이어요
 
그 목사님이 제레미야 라이프 목사님이 어떤 유명한 사람의 담임 목사이어요 그 사람의 이름이 버락 오바마이어요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기전에 그 이야기를 들어요 그리고는 버락 오바마가 2004년에 민주당 전당대해서 이 그림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 미국 사회가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는데 인종차별이라든지 빈부 격차라든지 탐욕이라든지 여러 가지 사람들이 희망 없는 것처럼 이야기 하지만 이 한 줄의 희망을 이것을 붙들고 우리 가야한다
 
그것을 담대한 희망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모든 조건이 무르 익고 성숙했기에 희망을 갖는 것이 아니고 아주작은 가능성일 망정 그것을 붙들고 씨름하는 것이 희망이다는 말이어요
 
나훔서는 앗시리아의 멸망을 사실은 강자들의 무도한 폭력에 의해서 무너지기 위해서 무너진 세상에 대해서 어떻게 믿음의 사람들이 희망을 품고 아름다운 암시를 주고 있는 책이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