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룻기 4:1∼22 ♦ 묵상을 위한 주제 : 그 신을 벗는지라(8절) ♦ 성구 : 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 하고 그 신을 벗는지라.
“그 신을 벗는지라(he removed his sandal)”
사사시대에 베들레헴의 흉년으로 모압으로 이주하였던 엘리멜렉의 가족들은 십여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는 엘리멜렉과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은 죽었고 과부가 된 시어머니 나오미와 두 모압의 며느리 룻과 오르바가 남았습니다.
베들레헴 땅에 먹을 것이 풍성하다는 소문을 듣고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오르바는 친정으로 돌아갔지만 룻은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며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엘리멜렉 집안의 가장 가까운 친족으로 기업을 무를 자가 그 신을 벗어버림으로 그 다음 기업 무를 자는 보이스로 결정됩니다.
기업을 무를 자가 된다는 것은 상당한 물질적인 손실을 감수해야 합니다.
보아스가 룻의 기업 무를 자가 된 것은 물질적인 가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아직은 드러나지 않은 영적인 가치를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삶을 풍년과 흉년으로 구분할 때 평생을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음식으로 지냈던 거지 나사로와 같은 흉년의 삶과 매일 풍성한 잔치를 즐겼던 풍년과 같은 부자의 삶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자와 같은 삶을 좋아할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세속의 가치가 아니었기에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위로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일시적인 즐거움에 붙잡혀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영원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복된 자리를 놓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지금 어떤 인생길을 걷고 있습니까?
모압 여인 룻이 고향 땅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옮겨와서 풍성한 삶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었을까요?
룻은 베들레헴 땅에서 보아스를 만났습니다. 보아스를 만났기 때문에 다윗의 증조모가 되었으며 메시아 족보에 그 이름을 새길 수 있었습니다.
룻이 바라본 것은 시어머니 나오미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리고 시어머니의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을 따르며 시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흉년의 인생을 풍년의 인생으로 갈아엎을 수 있었습니다.
나오미가 남편과 두 아들을 먼저 잃은 것으로 그녀의 삶이 막을 내린다면 소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나오미의 삶은 슬픔이 기쁨으로 눈물이 웃음으로 뒤집어지는 삶의 주인공이 되어 소망이 무엇인가를 깨우치고 있습니다.
룻기서는 오벳이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는 말씀으로 막을 내립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왕은 다윗 입니다. 다윗 왕은 오벳의 손자 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온 세상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벳과 다윗의 자손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사사 시대에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나오미와 룻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만일 인생의 흉년을 지나가고 있기 때문에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서시기 바랍니다. 그 결단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새로운 깨달음을 갖게 할 것입니다.
새로운 깨달음 때문에 아직도 방황하는 많은 사람들을 향하여 회복시키는 생명과 나눔의 통로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나 어느 곳에 있든지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은 기근과 같은 자연에서(1장) 우연으로 보이는 일에서(2장) 그 인간의 계획에서(3장) 작용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4장에서는 그 손길이 사람들이 함께 어떤 일을 결정함에 있어서도 작용함을 보여줍니다.
당시 성문은 넓은 공터가 있어서 각종 사건들을 처리하고 해결하는 공공장소였으며, 길목이기도 해서 만남의 광장이었습니다. 보아스는 룻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성문”에 올라가 앉았습니다.
그 때 “마침”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친족인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갔습니다(1).
‘마침’은 ‘보라’는 히브리어 감탄사를 의역한 단어인데, 바로 ‘지금 여기’에 그가 때마침 등장했음을 강조합니다. 보아스는 그를 초청하여 성문에 앉혔고, 기업 무르는 일을 공식적으로 결정하기 위해 “성읍 장로 십 인”을 증인으로 초청했습니다(2).
보아스는 기업 무를 자에게 상황부터 설명합니다.
3절에서 “관할하므로”는 완료형 동사 ‘팔았다’(hr'äk.m', 마케라)의 의역입니다. 히브리어 완료형은 시간 개념보다는 동작의 완료를 의미하기 때문에, 미래의 일일지라도 확실하게 행해질 약속이나 결심을 표현할 때 사용됩니다.
여기서도 ‘팔려고 결심했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표준새번역 성경은 “우리의 친족 엘리멕렉이 가지고 있는 밭을 팔려고 내놓았소”라고 번역합니다.
보아스는 이름이 감추어진 ‘아무개’에게 나오미의 친족 권리를 사용하여 고엘의 의무를 수행하려는지 의사를 묻고, 그가 원치 않으면 다음 고엘은 자기뿐임을 밝힙니다.
아무개는 선 듯 “내가 무르리라”고 답합니다(4). 그러자 보아스는 그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야”(5)할 의무가 있음을 추가적으로 알려줍니다. 나오미의 기업을 무를 경우 룻을 아내로 맞이해서 고인의 이름으로 기업을 이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자 그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나의 무를 권리를 네가 취하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6)고 답합니다.
이스라엘에는 율법에 따라 자식 없이 죽은 형의 아내와 결혼하여 형의 대를 유지시키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형수나 제수와의 결혼이므로 수혼(嫂婚, levirate) 제도라 불렀고, 대를 잇기 위한 결혼이므로 계대결혼(繼代結婚)이라고도 합니다. 수혼 제도는 고인의 ‘형제’에게 부여된 의무였는데, 여기서 보아스가 기업을 무를 고엘에게 계대 결혼의 의무까지 말한 것이 좀 의아합니다. 하지만 아무개나 증인들이 이의를 제기치 않은 것을 보면, 그 시대에는 ‘형제’라는 의미를 친족에게까지 확대해서 해석했던가봅니다. 혹은 룻과 결혼해서 자녀를 낳아야만 엘리멜렉의 기업이 보존 되고, 진정한 의미에서 고엘의 역할을 한 것이므로 이렇게 말했을 수도 있습니다.
매년 밭에서 나오는 소출로 땅 값을 갚아 나가면서 나오미만 챙겨준다면, 몇 년 후에는 상속자 없는 그 땅이 영원히 고엘의 기업이 되니 상당히 득 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 경우는 룻 때문에 계대결혼의 의무가 추가되었습니다. 그것은 땅 값 지불에 두 과부를 먹여 살리는 수고를 한 후에도 결국 고엘이 그 땅의 실제 소유자가 되지 못함을 의미했습니다. 아무개는 추가된 정보의 의미를 재빨리 파악했습니다. 자기 재산만 축내는 일임을 알고 고엘의 권리를 포기합니다. 보아스에게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며 권리를 이양의 관습적 증표로 신을 벗어줍니다(7-8).
반면 보아스는 장로들과 모든 백성들에게 즉시 선언합니다.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에 너희가 오늘날 증인이 되었고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취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 그 이름이 그 형제 중과 그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않게 함에 너희가 오늘날 증인이 되었느니라”(9-10).
드디어 보아스와 룻의 결혼이 율법과 사회 도덕에 아무런 제약 없이 이루어 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100% 자기 뜻대로 생각하며 결정했지만, 그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100% 당신님의 뜻을 성취해 가셨습니다.
룻기는 눈에 보이는 아무런 기적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적을 ‘비상 섭리’라 하는데, 룻기의 하나님은 비상 섭리를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황폐한 삶이 풍요로워진 것은 일상의 삶 중의 하나님의 은밀한 섭리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판단과 결정을 주관하셔서 당신님의 뜻이 이루어지게끔 하셨습니다. 그 손길에 의해 귀하게 쓰임 받았던 사람들은 모두 인애의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영적 암흑기에 하나님 백성을 풍요롭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그분 나라답게 만들어간 사람은 신비한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기적 체험이 없어도 묵묵히 그분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서였습니다. 판단의 기준을 ‘자기 이익’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데 둔 사람들이지요. 실상 그 암흑 같은 시대 속에 그러한 사람들이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룻기 저자는 아무개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의 관심은 상식을 뛰어넘는 결정을 한 보아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개는 ‘자기 이익’이 판단의 중요한 기준이었습니다. 이득이 있으면 권리를 행사하고 손해가 예상되면 미련 없이 의무를 포기했습니다. 그것은 악행이 아니며 상식적인 수준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행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 백성다운 인애를 찾아볼 수는 없습니다. 반면 보아스는 ‘하나님 말씀대로’가 판단의 기준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결정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고엘의 정신과 규례대로 행했습니다.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라면 재산상의 손해도 기꺼이 감수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 백성다운 모습이지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은 그들 공동체 속에 룻과 보아스 같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기뻤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룻과 보아스를 크게 축복합니다.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 집을 세운 라헬,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너로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케 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이 소년 여자로 네게 후사를 주사 네 집으로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1-12).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 말씀을 잘 아는 사람을 만날 때 기쁩니다. 그보다 더 기쁠 때는 참으로 하나님 백성답게 사는 사람을 만났을 때입니다. 지속적인 손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 타락한 시대 속에서도 참으로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가는 사람을 발견할 때면 성문에 모인 사람들처럼 존경과 축복의 마음을 감추어두고 싶지 않습니다.
축복 속에 언급된 “베레스”는 보아스의 직계 조상입니다. 그는 다말과 그녀의 시아버지 유다 사이에 태어난 사람입니다(창 38장). 감추고 싶은 출생의 비밀을 가진 사람이었지요. 룻은 롯과 그의 큰딸 사이에서 태어난 모압의 후손입니다(창 19:30 이후). 룻 역시 수치스런 집안 내력을 가졌던 셈이지요. 모압 족속은 대대로 우상을 섬기며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려 했던 족속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베레스에게 은혜를 베푸셨던 것처럼, 백성들과 장로들의 축복대로 룻에게도 은혜를 베푸시고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헤세드는 감추고 싶은 과거를 가진 사람들에게도 신앙을 주셔서 귀히 사용하는 것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보아스가 룻을 취하여 아내를 삼았고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아들 ‘오벳’을 주셨습니다(13). 동네 아낙네들은 아픈 과거를 가진 나오미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헤세드를 목격하고 찬송하며 축복합니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가 낳은 자로다”(14-15). 나오미는 “아기를 취하여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었습니다(16).
나오미가 아기를 품에 안고 있는 장면은 나오미가 베들레헴에 막 돌아와서 아낙네들에게 둘러싸였을 때의 장면과 극단적으로 대조됩니다. 텅 비었던 나오미가 채워졌습니다. 괴롭게 하는 분인 줄 알았던 여호와께서는 그녀에게 그녀를 지극히 사랑하는 일곱 아들보다 귀한 며느리를 주셨고, 또한 그리스도의 조상이 될 오벳을 양육할 기쁨을 주셨습니다. 누구보다 괴로움을 많이 겪은 것 같았던 그녀가 실상은 누구보다 많은 복을 받은 사람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오해들이 반전되는 순간이지요. 하나님의 은총적 기적이 여기에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헤세드의 승리가 돋보이지요.
룻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는 당신님의 백성들을 향한 헤세드의 손길이었습니다. 그 손길은 그 시대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보아스와 룻과 나오미는 하나님 섭리의 일차적인 수혜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오벳”은 통합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한 “다윗” 조상입니다(22).
텅 빈 사사시대를 살던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의 모형인 다윗의 헤세드를 통해서 풍요로움을 경험하게 되므로 이차적인 수혜자기 됩니다.
룻기 저자는 하나님 섭리가 다윗까지 연결됨을 중요한 결론으로 삼습니다. 그런데 신약의 성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그분의 백성 모두가 궁극적인 수혜자가 되었음을 압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먼 옛날 몇몇 사람을 축복하신 이야기가 아니라, 구속사적인 안목에서 봐야할 이야기지요.
룻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밀한 섭리의 손길이 지금 여기까지 미치고 있음을 배웁니다. 그분을 신뢰하는 성도는 ‘자기 유익’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평범한 삶을 넘어서서 서로가 서로에게 헤세드를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비록 눈에 뚜렷이 보이는 기적은 없을지라도 은밀한 기적의 역사가 지금 여기서도 하나님의 은밀하신 섭리의 손길을 통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멀리 돌아가는 길이며 손해 보는 일일지라도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말씀대로 사는 것이 참 하나님 백성다운 삶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도 하나님의 헤세드가 드러나길 바랍니다.
♦ 12월 28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룻기 3:1∼18 ♦ 묵상을 위한 주제 : 기업을 무를 자(9절) ♦ 성구 : 가로되 네가 누구뇨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당신은 우리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기업을 무를 자(you are a kinsman-redeemer)”
‘기업을 무를 자’를 히브리어로 “키 고엘 앝타”라고 합니다(for thou art a near kinsman).
“룻”은 “ 보아스”가 “엘리멜렉” 가정의 ‘기업무를 자(NIV, a kinsman-redeemer)’이기 때문에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라고 말합니다.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라는 표현은 룻이 보아스의 보호를 받기를 원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Matthew Henry, Hervey, Atkinson).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독수리 날개로 보호하셨던 것처럼 룻은 보아스의 날개 아래서 보호받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보아스의 보호를 받는 길은 보아스와 결혼하므로 가능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 관계를 맺을 때에도 상징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겔 16:8).
결혼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언약" 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룻이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라는 말은 구혼(求婚)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라고 합니다.
기업을 무를 자가 되는 것은 강제성이 없습니다.
만일 당사자가 기업 무를 자격을 포기할 때는 신을 벗음으로 그 자격을 포기한다고 선언할 수 있습니다.
율법으로 규정된 의무를 득(得)과 실(失)에 의해서 결정하는 것처럼 오늘날도 이 세상이 점점 삭막해져 간다고 탄식(歎息)합니다.
그 이유는 치열한 경쟁과 이기적인 욕망이 지배하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사람은 보아스와 같이 소리 소문없이 어려운 이웃을 위하여 사랑을 베풀고 보살핌에 민감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며 이웃에게 나눔과 베푸는 진실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이 하루가 서로를 향한 따뜻한 사랑과 나눔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태도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삶을 실천할 수 있는 은총의 하루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주께로 나오라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2월 27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룻기 2:1∼23 ♦ 묵상을 위한 주제 : 여호와의 복(20절) ♦ 성구 : 나오미가 자부(子婦)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복(福)이 그에게 있기를 원(願)하노라 그가 생존(生存)한 자(者)와 사망(死亡)한 자(者)에게 은혜(恩惠)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의 근족(近族)이니 우리 기업(基業)을 무를 자(者) 중(中) 하나이니라.
“여호와의 복(The LORD bless)”을 누가 누구에게 줄 것인가?
‘생존한 자’는 “나오미”와 “룻”을 가리킵니다. ‘사망한 자’는 “엘리멜렉”과 “말론”과 “기룐”을 말합니다. 따라서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 복을 줄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습니다(Keil. Goslinga).
이러한 견해에 따라 영어성경(NIV, Living Bible)에서는 은혜를 베풀 수 있는 존재를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은혜를 베풀 자를 “보아스”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Matthew Henry, A. C. Hervey).
이러한 주장에 따라 ‘보아스’는 나오미와 그녀의 남편과 두 아들이 살아 있었을 때에도 호의를 베풀었으며 또한 지금도 여전히 호의를 베풀고 있다고 합니다.
본문의 문맥에서 은혜를 베풀 수 있는 존재는 보아스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보아스’는 ‘나오미’의 근족이며 기업을 무를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기업을 무를 자를 히브리어로 “고엘(גֹּאֶל)”이라고 합니다. ‘고엘’이란 “되찾다” “구속하다” “무르다”라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이스라엘의 고엘 제도는 하나님께로부터 할당받은 기업을 영구히 보존하고 혈족을 유지하며 부당한 피해를 받았을 경우 이것을 보상할 제도적 장치를 위한 목적에서 생겼다고 합니다.
따라서 고엘(Goel)이 된 사람은 ‘고엘의 의무’를 감당해야 합니다.
고엘의 의무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가난한 혈족의 땅을 도로 사주어야 합니다(레 25:25∼26) 둘째는 부당한 피해를 당한 친족을 위해 복수할 책임을 가져야 합니다(민 35:12, 19, 21) 셋째는 그 친족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대를 이어주어야 하며 죄 값을 대신 받기도 합니다(민 5:8)
고엘의 자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혈연적 관계(신 25:5∼7) 둘째는 자원해야 할 것(룻 3:13) 셋째는 고엘로서의 능력을 갖출 것(레 25:25)
은혜를 베풀 수 있는 존재는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나오미와 룻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는 존재는 당시 베들레헴 성에서 유력한 자이며(2:1), 친족에게 은혜를 베풀 줄 아는 보아스가 엘리멜렉의 가정을 위한 고엘로서 합당하다고 하겠습니다(근족의 의무 참조 / 레 25:8∼55)
베들레헴 성의 유력자 ‘보아스’처럼 이 세상에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이 삶의 자리에서 보아스처러 누군가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는 마음과 믿음으로 살아갈 때 세상은 살기에 좋은 곳으로 변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두 함께 모여 정답게 살아갈만한 세상으로 가꾸는 일에 정성을 쏟아낼 수 있는 은총의 하루를 지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나 어느 곳에 있든지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2월 25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룻기 1:1∼22 ♦ 묵상을 위한 주제 : 여호와의 손(13절) ♦ 성구 : 너희가 어찌 그것을 인(因)하여 그들의 자라기를 기다리겠느냐 어찌 그것을 인(因)하여 남편(男便) 두기를 멈추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因)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룻기서는 두 가지 특성을 갖습니다.
첫째는 룻이란 주인공이 모압 출신의 이방 여인입니다.
둘째는 사사시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사사시대의 순환 고리를 즉 “징계, 부르짖음과 회개, 구원자 사사, 평화”를 파괴한 내용으로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이렇게 시작합니다(1: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는 방향감각을 상실한 시대를 말합니다.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절대 진리를 잃어버리고 ‘사람마다 각각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룻기는 이처럼 어두운 시대에도 신앙을 지켰던 소수의 경건한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려주므로 하나님의 구속사의 손길은 암흑의 순간에도 멈추지 않았음을 말씀합니다.
또한 이 아름다운 신앙과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인 룻이 다윗의 조상이라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택하시고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신 것이 오래 전부터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섭리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룻기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관점에서 중요한 사실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룻이 ‘모압 여인’이라는 것을 본문은 여러 차례 반복해서 소개합니다(1:22, 2:2,21, 4:5,10).
모압 여인 룻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음으로 이스라엘 공동체에 편입되었으며 정통 다윗 왕가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여리고의 기생 라합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이 된 경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구원은 혈통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손(the LORD's hand)”이란 남편 “엘리멜렉”과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이 죽고 “나오미”가 남겨졌다고 표현함으로 이 땅에 비참한 존재로 남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나오미”는 자신의 불행을 ‘여호와의 손’이 자신을 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약속의 땅을 떠나 이방 땅으로 향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불행을 겪은 “나오미”가 이스라엘 땅으로 귀향하는 것과 더불어 다시 회복되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나오미는 여호와께서 자신을 괴롭게 하셨음으로 자신을 “나오미” 즉 “감미로움”이라 부르는 것은 합당치 않고 “마라” 즉 “괴로움”으로 부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나오미”의 고백은 자신의 불행한 처지에 대한 탄식과 함께 여호와께서 자신의 삶을 그렇게 만드셨다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신세 한탄이나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평의 표현이 아닙니다. 룻기 전체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나오미는 일관되게 여호와에 대한 신앙을 지키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오미의 탄식 어린 고백은 오히려 불행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섭리하시는 여호와의 주권에 대한 애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이처럼 애가를 불러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다가도 때론 감당키 어려운 시련을 만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는 사람의 생명보다 이익, 재산, 돈을 중시하다가 유라굴로 광풍 같은 고통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시련이든 고통이든 그 어떤 순간에도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애가를 부르는 사람을 하나님은 절대로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유라굴로와 같은 인생의 광풍을 만났을 때, 우리는 가던 길을 멈추고 걸어온 길을 돌아봅니다. 그때 비로소 바쁘게 걷다가 지나친 소중한 것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인생의 이정표를 다시 세우고 하나님을 향해 우리의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풍랑은 때때로 우리들에게 유익입니다. 애가를 찬가로 바꾸시는 살아서 역사 하시는 주님을 만나는 복된 하루가 열려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6~18절은 이스라엘에 흉년이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 베들레헴으로 귀향하면서 나오미는 자신의 두 며느리에게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이에 며느리들은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다고 응답합니다. 그러나 거듭되는 시어머니의 종용에 결국 오르바는 모압에 잔류하지만, 룻은 끝까지 나오미와 함께 하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습니다.
16절입니다.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여기서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통해 갖게 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모압의 신과 민족, 그 땅의 문화, 재혼하여 새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모두 포기한 채 늙은 시어머니를 따라 낮설은 이국 땅 이스라엘로 가겠다고 결심합니다. 이런 룻의 결심은 일차적으로는 시어머니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결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1:19절부터 마지막절까지는 무대가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바뀝니다. 초라한 모습으로 귀향한 나오미는 고향 사람들에게 자신을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20절입니다.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라”
베냐민 자손이 그같이 행하여 춤추는 여자 중에서 자기들의 수효대로 아내로 붙들어 가지고 자기 기업에 돌아가서 성읍들을 중건하고 거기 거하니라. 아멘
맹세하다(솨바, shâba) שָׁבַע / oath 사사기 21:1, 5, 7, 18
2가지 맹세 : a.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주지 않는다(1, 7, 18) b. 여호와의 총회에 올라오지 않은 자는 반드시 죽인다(5)
1절 /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맹세하여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구든지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 하였더라.
7절 / 그 남은 자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아내를 얻게 하리요 우리가 전에 여호와로 맹세하여 우리 딸을 그들의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18절 /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딸을 그들의 아내로 주지 못하리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맹세하여 이르기를 딸을 베냐민에게 아내로 주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하였음이로다.
여호와의 총회에 올라오지 않은 자는 반드시 죽인다
5절 / 이스라엘 자손이 가로되 이스라엘 온 지파 중에 총회와 함께하여 여호와 앞에 올라오지 아니한 자가 누구뇨 하니 이는 그들이 크게 맹세하기를 미스바에 와서 여호와 앞에 이르지 아니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라 하였음이라.
사사기 21:11 너희의 행할 일은 모든 남자와 남자와 잔 여자를 진멸할 것이니라 하였더니.
진멸하다(하람, charam) חָרַם 닫다, 보이지 않게 하다, 멸절시키다 * 가나안 족속을 진멸할 때 사용하는 용어
사사기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17:6, 18:1, 19:1, 21:25
야고보서 5:12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
오늘의 기도
거짓 맹세하지 말자! 불낙지교회로 세워주시옵소서!
몸 속의 독약
빅토르 위고의 단편 중 "93"이란 것이 있다. 큰배가 항해 도중 폭풍을 만났다. 배의 선창에는
수송용 대포가 실려 있었다. 대포를 묶었던 쇠사슬은 큰 풍파를 견디지 못하고 끊어졌다. 대포들은 배를 파괴하며 무섭게 굴러다녔다.
몇 명의 선원이 결사적으로 선창에 내려가 제멋대로 굴러 다니는 대포를 붙잡는다. 작가는 이 배를 인생에 비유하고 있다. 인간을
파괴하는 가장 무서운 적은 밖에서 오는 풍파가 아니다. 배 안의 대포인 "미움"과 "원한"과 "분노"가 사람을 망가뜨린다.
보쌈문화 / 약탈혼
남편을 둘 이상 섬겨야 할 팔자의 딸을 위하여 조선시대 양반집에서 행하던 것으로서, 잡혀온 남자는 함구령이 내려진 채 방면되거나 때로는 죽음도 당한다. 보쌈은 이처럼 대체로 처녀를 위한 것을 말하지만 조선시대 하류층의 수절과부가 노총각이나 홀아비를 같은 방식으로 납치하여오는 일도 보쌈이라고 하였다.
처녀를 위한 보쌈은 불경이부(不更二夫)라는 과부의 재가금지제도에서 나온 일종의 약탈혼과 같은 것이었다. 보쌈한 총각과 동침하면 그 처녀는 과부가 된 것과 같은 결과가 되어 과부의 액운을 면하였다고 믿으며, 따라서 다른 곳으로 안심하고 시집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남정네들이 과부를 보에 싸서 데려와 혼인하는 풍습도 있는데, 이것도 일종의 약탈혼으로 과부보쌈 혹은 과부업어가기라고 하였다. 과부보쌈에는 과부 본인이나 과부의 부모들과 내약 끝에 보쌈해가는 방식이 있는가 하면 합의 없이 보쌈하여 약탈해가는 방식도 있다.
전자의 경우는 은밀히 과부와 정을 통해오다가 혼인을 하기 위하여 보쌈의 형식을 빌려 주변의 이목을 속이면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와 같이 강제로 보쌈할 때는 사전에 과부의 거처를 탐지해두었다가 밤중에 침입하여 보쌈한 뒤 억지로 정을 통하여 배우자로 삼는다. 이럴 때 가끔 가족과 난투극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법적인 문제로 비화되지는 않는다. 이 밖에 소박맞은 여인이 친정에 돌아갈 수도 없는 처지가 되었을 때 이른 새벽에 성황당에서 기다리다가 보쌈해가기를 기다리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소박녀는 남편이나 자기자신의 저고리 옷섶을 세모꼴로 찢은 ‘나비’를 지니고, 등에는 이불보를 진 채 성황당에서 서성거린다. 이 소박녀를 최초로 만난 남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데리고 살아야 하는 관습적인 의무가 지워진다.
소박녀는 성황당에서 서성거리다가 남정네를 만나면 ‘나비’를 내보인다. 그러면 남정네는 소박녀의 등에 진 이불보로 보쌈하여 집으로 데리고 온다. 이러한 소박녀의 보쌈풍습은 여자가 귀했던 함경도지방에서 행해졌다고 한다.
과부보쌈이나 과부들의 남성보쌈은 유교적 영향으로 불경이부라는 유교적 질서가 고착되면서 여성의 경우 비록 남편을 사별하였다고 해도 재혼하지 말고 수절할 것을 강요당한 결과 파생된 풍습이다. 과부의 재혼을 금지한 제도는 대체로 고려 말에 등장하였으며 조선시대에 와서는 더욱 강력하게 시행되어,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는 민간에까지 깊이 뿌리내린 것으로 보인다.
고려 말에는 자녀안(恣女案)이라 하여 양반의 여자로서 부정한 행위를 하거나 세 번 이상 개가한 여성의 소행을 기록하여 그 자손의 관직등용을 제약하였으며, 조선시대 성종 때에는 『경국대전』에 재가하는 부인의 자손은 과거에 응시하지 못한다는 조문을 제시하여 과부의 공식적인 재혼을 금하였다. 이러한 제도는 1895년 갑오경장에 의해 부녀의 재혼이 허용된 이후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보쌈이 과부의 재혼금지제도 속에서도 비공식적으로 행해진 이유는 노총각이 죽어서 몽달귀신이 되거나, 과부가 죽어 원귀가 되면 가뭄이 자주 들게 된다는 믿음이나, 노총각이 많으면 민심이 흉흉해진다고 하여 어느 정도까지는 관에서 묵인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쌈이 행해졌다고 해서 재혼금지의 제도가 실행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정조관념 및 과부의 수절을 강조한 전통사회의 문화적 풍토 속에서 음성적으로 행해졌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가지 부작용도 많아서 혹시 수절을 결심한 열녀가 이러한 일을 당하면 자살 및 살인의 비극도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보쌈)]
12월 23일(목)
♦ 12월 23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사기 20:1∼48 ♦ 묵상을 위한 주제 : 악을 제하여 버리게 하라(13절) ♦ 성구 : 그런즉 이제 기브아 사람 곧 그 비류(匪類)를 우리에게 붙여서 우리로 죽여 이스라엘 중(中)에 악(惡)을 제(除)하여 버리게 하라 하나 베냐민 자손(子孫)이 그 형제(兄弟) 이스라엘 자손(子孫)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미스바”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총회가 열렸을 때 칼을 빼는 보병의 수가 40만명 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총회가 열리게 된 동기는 기브아 거민의 만행으로 인하여 기브아가 속해 있는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이스라엘 11지파가 베냐민을 응징하기 위해 미스바에 모였습니다(20:1∼3, 9∼11).
이스라엘 지파는 베냐민 지파에게 기브아 비류들을 처형할 수 있도록 내놓으라고 요구합니다(20:12∼13).
그러나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 지파의 요구를 거절하며 오히려 그들과 싸울 준비를 합니다(20:14∼17).
드디어 이스라엘 11지파와 베냐민 지파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베냐민 자손 중에서 칼을 빼는 자는 2만 6천명이었으며 기브아 거민 중에서는 7백명 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연합군(40만 명)과 비교할 때 베냐민 지파는 상대적으로 엄청난 열세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차(2만 2천명 전사)와 2차 전투에서(1만 8천명 전사) 이스라엘 연합군은 패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든 전쟁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성급하게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울까?” 하며 주님의 뜻 보다는 감정을 앞세웠던 것이 패배의 원인입니다.
결국 3차에 전쟁에 임할 때는 철저히 회개하고 주님의 작전에 의지한 이스라엘 연합군은 결국 베냐민을 진멸할 수 있었습니다. 베냐민의 남은 군사는 6백명 이었습니다.
승리의 비결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에 의해서 좌우 됩니다.
오늘날도 영적 싸움의 원리는 동일하다고 하겠습니다.
매일 아침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에 따라 기도하며 하루의 삶을 시작하며 영적 싸움에 승리하는 일에 힘을 다하여 경주하므로 날마다 승리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든든하게 세워져야 하겠습니다.
♪ 찬양 / 나는 예수 따라가 가는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사사기 20장은 레위인과 그의 첩이 기브아에서 유숙 할 때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레위인의 첩을 능욕한 후 레위인이 머물던 노인의 집에 버려두었을 때 아침이 되어 레위인이 첩의 시신을 싣고 집으로 돌아와 그 시신을 12조각을 내어 각 지파에 보내므로 이스라엘 총회가 미스바에 모였습니다.
이스라엘 총회에서 결의된 것은 베냐민 지파에게 불량배를 넘기라고 제안하였으나 베냐민 지파에서는 불량배들을 내어주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질서가 베냐민 지파의 가족주의에 의해서 무너졌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총회는 용사들을 선발하여 베냐민 지파를 공격합니다. 1차, 2차 공격에 실패한 이스라엘 공동체는 3차 공격을 시도하기 전에 다시 하나님께 묻습니다. 드디어 3차 공격에 성공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공동체 12지파 중에서 베냐민 지파가 진멸하게 되는 불행한 역사가 펼쳐집니다.
12월 22일(수)
♦ 12월 22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사기 19:1∼30 ♦ 묵상을 위한 주제 : 망령된 일(23절) ♦ 성구 : 집 주인(主人) 그 사람이 그들에게로 나와서 이르되 아니라 내 형제(兄弟)들아 청(請)하노니 악(惡)을 행(行)치 말라 이 사람이 내 집에 들었으니 이런 망령(妄靈)된 일을 행치 말라.
사사기 19장은 왕이 없다는 이유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악에 붙잡힌 삶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특별히 어떤 레위 사람이 첩을 얻었고 그 첩이 낯선 마을의 사람들에게 밤새도록 시달리다 죽은 후에 레위 사람이 그 첩의 시신을 열 두 조각으로 나누어 각 지파에게 보낸 사건을 소개합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17:6, 18:1,19:1, 21:25)”
사사기 17∼21장은 약속의 땅 분배 이후 열 두 지파 중 “베냐민 지파”와 “단 지파”가 가나안의 “여부스 사람들”과 “아모리 사람들”을 진멸하지 않아 결국 얼마나 큰 위협에 빠지게 된 사건을 소개합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하였더니”
레위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구별된 사람들로 엄격한 규정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레위 사람이 첩을 맞이하였으며 그의 첩이 친정으로 돌아간 후 4개월이 지난 뒤 찾으러 가서 처갓집에 머물며 5일을 지냈을 무렵 장인의 계속되는 권유에도 불구하고 레위인은 에브라임으로 떠났습니다.
레위 사람은 에브라임 산지 기브아에 거류하는 노인의 집에서 머물고 있을 때 성읍의 불량배들이 노인의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드리며 낯선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를 상관하겠다고 합니다.
집주인이었던 노인은 이런 망령된 일을 행치 말라 여기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이 있으니 그들을 욕보이든지 너희들 임의대로 하되 이 사람에게는 망령된 일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자 베냐민의 젊은 남자들은 레위인의 첩을 붙잡아 밤새 능욕한 후에 첩은 집 문 앞에 엎드려진 채 버려졌습니다.
레위인은 첩의 시신을 나귀에 싣고 집으로 돌아가 시신을 열 두 덩이로 나눈 후에 이스라엘 사방 온 지파에게 보냈습니다.
본문에 소개된 레위 사람은 가나안의 풍습을 따라 첩을 맞이하고 살아갑니다.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대로 살아가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연히 여기는 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보다 “자기 소견대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이와 같은 때를 “왕이 없을 그 때” 라고 합니다. 이 끔찍한 시대를 성경은 가장 부패한 “기브아의 시대”라고 합니다(호 9:9).
오늘의 시대를 이렇게 정의해 봅니다.
죄를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시대 돈이 인생의 목적이 되어 버린 시대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시대
자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시대
하나님의 통치 속에서 살아갈 때 비로써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을 인식하며 자기 소견이 아닌 하나님의 통치 속에서 신실하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교회는 외적인 부흥이 성과의 긍정적인 면으로
비춰졌고 본래의 사명보다 자신의 발전에 더 깊은 관심을 갖게 되면서 제도주의화 되어버렸다.
성경의 가르침은 나그네, 고아, 과부에 대한 관심을 잊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부흥과 성장에 붙잡힌 교회는 오히려 부자와 지위와 권력과 명예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결과 교회는 본래의 자리에서 이탈하고 말았다.
12월 21일(화)
♦ 12월 21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사기 18:1∼31 ♦ 묵상을 위한 주제 : 그때에 왕이 없었고(1절) ♦ 성구 :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王)이 없었고 단 지파(支派)는 이때에 거(居)할 기업(企業)의 땅을 구(求)하는 중(中)이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지파(支派) 중에서 이때까지 기업(企業)의 땅 분배(分配)함을 얻지 못하였음이라.
사사기는 사사들의 실패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사무엘서는 제사장들의 실패를 거짓 없이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열왕기서는 역대 왕들의 실패를 계시하신 말씀입니다. 그 결과는 영원불변하신 여호와 하나님만이 위대한 왕이시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실패한 인생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실패한 사사와 제사장과 왕을 대신하여 친히 사사처럼 제사장처럼 그리고 왕처럼 오셨고 그와 같은 삶을 온전하게 계시하셨습니다.
그 때에 왕이 없었다는 것은 실패한 인간의 변명이라고 하겠습니다.
세상의 복은 잠시의 기쁨과 만족을 누리게 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마치 삼손처럼 또는 미가처럼 망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복은 예수님 때문에 순종하며 살아가면서 때로는 손해를 당하고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도 장차 받을 상급과 영생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확신하십니까?
단 지파는 제비뽑기에 의해서 얻은 기업(땅)이 있었습니다(수 19:40∼48). 그 위치는 유다와 에브라임과 베냐민 사이의 한 지역과 해안 평야를 말합니다. 그런데 사사기 18장에서는 단지파가 땅 분배를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18:1). 그 이유는 분배 받은 땅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삿 1:34).
“아모리 사람이 단 자손을 산지로 쫓아 들이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지 아니하고.”
영생이란 복은 예수를 믿을 때에 이미 받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삶의 터전에서 믿음으로 지키지 못하므로 마치 영생을 빼앗긴 것처럼 사탄은 우리들을 조롱합니다. 그러므로 매 순간 영적으로 긴장하여 자기를 낮추고 부정하면서 오직 주님만 따라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은 많은 사연을 갖고 있었습니다. 믿음이 없었던 정탐꾼 10명 때문에 10일이면 들어갈 수 있었던 그 땅을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했으며 불순종했던 630,548명은 모두 죽고 ‘갈렙’과 ‘여호수아’ 두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단 지파가 그 땅을 가나안 족속에게 빼앗겼습니다. 그러므로 단 지파를 통하여 우리의 영적 상태와 신앙생활을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기업으로 받은 땅을 빼앗긴 것처럼 매일의 영적 전투에서 패배했던 것이 우리들의 영적 생활이 아니었습니까?
이제는 결단해야 할 때입니다. 지금은 지난날의 잘못된 삶을 회개하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채워주시고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실로에 있었습니다(31절). 실로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단 자손들은 그들이 원하는 곳에 우상을 세우고 그곳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약속의 땅보다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땅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 하나님이 임재 하시는 곳에 나아가 예배드리기보다 자기 임의로 우상을 세우고 예배를 드립니다. 이것이 단 자손이 선택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편리한 것을 좋아합니다. 편리한 것이 기준이 아니라 진리가 기준이어야 합니다. 기준이 되는 진리 편에 서야 할 때에 진리 편에 설 줄 아는 성도들과 교회들을 찾고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까? 내가 먼저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 편에서 승리하는 영생의 복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현대인은 하나님을 잃어버림으로 진정한 왕을 잃어버렸다. 하나님은 “영원무궁하도록 왕”(시
10:16)이시며 “영광의 왕”(시 24:10) 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그의 왕 되심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심지어 그를 왕으로
여겨야 할 그의 백성들조차도 하나님의 왕 되심을 실제 생활에서 인정하지 않는 소위 ‘실천적 무신론자’(practical
atheists)가 되고 있다. 자애로운 주인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임자 잃은 소처럼, 그 주인의 풍성한 구유를 잊어버린
나귀처럼, 현대인은 혼돈 속에서 속절없이 방황하고 있다.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갈등의 중심부에는 결국 “우리의 왕이 누구인가”라는 피할 수 없는 권위(authority)의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 신앙생활의 핵심적 문제도 ‘하나님이 나에 대하여 주권(sovereignty)을 가지는가’, 내
삶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주되심(lordship)을 인정받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하나님의 주재자 되심을 망각한 사람들은
자신이 인생의 왕좌에 올라가 이기적 왕국을 운영하고 있다. 아니면 이 세상은 허탄한 왕, 즉 우상들을 섬김으로 자신의 유익을
구하면서, 마땅히 신실한 충성과 존중을 받아야 할 왕 하나님을 떠나고 있다.
약 1,000년 남짓한 국가의 역사를 가진 이스라엘은 세계의 정치사에서 특이한 실례를 보여준 나라이다. 왜냐하면 이 작은 나라가
주변에 있던 국가와는 결정적으로 다른 왕권사상을 가졌기 때문이다. 히브리인들은 세속적 왕권을 뛰어넘는 구별된 하나님의 왕권을
인정하는 분명한 의식이 존재했다. 진정한 왕은 정치적 인물로서의 왕이 아니라, 오직 온 세상을 다스리는 창조주이면서 섭리주인
영원하신 왕 하나님이었다. 이 같은 하나님 왕권 사상은 이스라엘 초기 역사부터 왕조시대에 이르기까지 신앙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모세에게 있어서, 왕이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려는 분이시다(출 19:6). 이스라엘의 사사인 기드온은
미디안 족속을 격파한 후에 자신의 가문을 왕으로 세우려는 백성들의 요구를 거절하며,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삿
8:23)고 말한다. 사무엘에게도 하나님 왕권사상은 그대로 남아있다. 왕을 세워달라고 요청하는 백성을 대면하면서, 사무엘은 그것이
여호와의 왕 되심을 거절하는 의도임을 알고 왕을 세우기를 주저하였다. 성군 다윗에게 있어서도 하나님은 영원하신 왕이었다. 이사야
선지자 또한 오직 하나님만이 “보좌에 높이 앉으신 왕”(사 6:5)이라고 주장한다. 선지자 다니엘의 하나님은 “모든 왕의
주재”(단 2:47)이시며, “자기의 뜻대로 나라를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를 그 위에 세우시는 지극히 높으신
이”(단 4:17, 25, 32, 34)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의 왕 되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인 전기를 맞이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대리자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그를 영원한 왕으로 세우시는 것이다(요 18:37). 그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계 19:16)이시며,
그를 왕으로 영접하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요 1:12-13).
영원무궁토록 왕이신 하나님은 그 권세와 능력을 홀로 가지신 분으로서 머물러 있지 않으신다. 하나님 아버지의 왕권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위임된다.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이후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아버지께로부터 받으셨다(마
28:18).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 예수님은 그러므로 왕이신 아버지 하나님처럼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왕적인 존재가 된다(계 5:12).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서 하나님은 다스리는 권위를 사람 가운데도 세우시는
하나님이시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으니(롬 13:1), 이는 하나님의 위임일 뿐이다.
하나님은 권세를 가지신 분일뿐만이 아니라 그 권세를 나누시는 분이시므로, 역사 가운데 많은 왕과 방백을 세우시고 이스라엘 가운데
제사장과 선지자와 같은 중보자(mediator)를 세우시는 분이시다. 이처럼 왕을 비롯한 모든 권세의 출처가 하나님이라면, 모든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다.
그러므로 주권은 국민에게로부터 시작된다는 인민주권론(popular sovereignty)이나, 국가로부터 시작된다는
국가주권론(state sovereignty)과 같은 세속적인 주권론에 대하여,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주권론은 “하나님
주권론”(God’s sovereignty)이다. 이는 다윗이 솔로몬에게 왕권을 이양하면서 드리는 고백 속에 분명히 나타난다.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대상 29:11). 여호와 하나님은 오늘도 구체적인 정치사 가운데
들어오셔서, 세상 사람들을 포로로 잡고 있는 억압적 신화를 해체하시고 자유를 주시는 가장 높고 유일하신 왕이시다.
12월 20일(월)
♦ 12월 20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사기 17:1∼13 ♦ 묵상을 위한 주제 : 자기 소견(6절) ♦ 성구 :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王)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自己) 소견(所見)에 옳은 대로 행(行)하였더라.
사사기의 내용을 두 부분으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전반부(1장-16장) 전반부는 사사들을 세워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둘째는 후반부(17장-21장) 후반부는 사사 시대의 사회 환경은 종교적 및 도덕적 타락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묵상의 주제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everyone did as he saw fit)”
신앙생활을 위한 세 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첫째는 “십계명(Ten Commandments)”은 삶을 위한 기준입니다.
둘째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Lord's Prayer)”는 기도 생활을 위한 기준입니다.
셋째는 “사도신조(The apostle's creed)”는 신앙의 내용을 간단명료하게 정리한 신알을 위한 기준입니다.
사사시대의 특징은 신앙과 삶과 기도의 기준이 완전히 무너져버린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그 한 예를 본문에서 "미가"의 집안에 대한 사례를 통하여 느낄 수 있습니다.
“미가”라는 이름은 "이 세상에 여호와와 같으신 이가 누구냐?" 라는 뜻입니다(히브리식 발음 “미카예후”).
'미가'라는 이름대로 살아가려면 여호와 하나님을 항상 최고로 인정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사기를 읽다보면 실망하게 됩니다.
그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미가의 어머니는 은 1,100세겔을 잃어버렸습니다. 1세겔은 대략 3돈에 해당합니다. 당시 건장한 노예 한 사람의 값이 30세겔이었으므로 은 1,100세겔은 대략 36명의 노예를 살 수 있는 상당히 큰 금액이라고 하겠습니다.
미가의 어머니는 돈을 잃어버린 후에 돈을 가져간 사람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주합니다. 미가는 어머니가 저주하는 말을 듣고 그 돈을 자기가 가져갔다고 고백합니다.
미가의 어머니는 아들에게서 돌려받은 돈을 여호와께 온전히 바친다며 아들을 위해 은으로 신상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며 저주하는 것과 아들을 위하여 신상을 만들었다는 것은 당시 미가의 집안에서만 나타난 현상이 아니라 이스라엘사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현상 때문에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다'고 합니다.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도 믿음의 주는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매일의 삶에서 추구하는 것들은 건강과 행복과 지위와 명예와 재물 그리고 성공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한다면 미가의 집안에서 일어났던 것과 다를바 없다고 하겠습니다.
더구나 미가의 어머니는 유다 베들레헴에서 머물다가 에브라임까지 오게 된 한 레위 청년을 자신의 집 제사장으로 세웠습니다.
성소를 중심으로 살아야 하는 레위인이 떠돌이 신새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각 지파의 사람들이 그들의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바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기업이 없는 레위인들은 그들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떠돌이 신세가 된 것입니다.
사사기의 저자는당시에 왕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왕정시대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숭배하며 타락한 삶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청교도 신앙을 기초로 출발한 미국과 자유대한민국의 건국이념으로 세워진 한국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혼란과 어지러운 현상들을 지켜보면서 마치 사사시대가 다시 나타난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신앙과 삶의 기준이 무너진 사사시대처럼 오늘날도 진리와 가치의 기분이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분별력이 아닐까요?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며 참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는 분별력을 구하며 하나님 마음에 합하는 삶을 회복하는 은혜가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나의 영원하신 기업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사람은 세 종류의 눈이 있다.
첫째, 육안(肉眼)
사물을 보는 눈
둘째, 지안(知眼) 사물의 이치와 원리를 깨닫는 눈
셋째, 영안(靈眼) 신앙의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육신의 눈이나 지식의 눈을 가지고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의 마음이나 뜻을 깨달을 수도 없다.
시편 119편 18절에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다윗이 그토록 사모하며 열리기를 원했던 눈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령한
영적인 눈이다. 성도는 세상 사람들과 달리 영적인 눈이 있다. 영적인 눈은 유전자가 다르다. 믿음에서 나왔기 때문에, 유전자가
하나님께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지난번 독일에서 경주마를 훈련하는 것을 보았다.
경주마와 일반 말이 어떻게 다르냐고 했더니, 챔피언 경주마의 혈통을 가진 말은 일반 말에 비해 500배가 넘는단다. 경주마는
승자의 피가 흐르기 때문이다. 경주마의 혈통을 지닌 말은 성장하면서 성격이 다르고, 눈매가 다르고, 움직임의 민첩함과 기질이
다르다. 승자의 혈통을 가졌기 때문이다.
신앙도 이와 같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세상 사람들과 혈통이 다르고 유전자가
다르다. 평소에는 모르지만, 문제를 만날 때 경주마와 같은 야성이 나타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유전자의 피가 흐르기
때문이다.
믿음은 신앙의 눈으로,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그래서 문제를 만날 때, 바라보는 눈이 다르다.
세상 사람들은 문제를 보고 환경에 빠져 간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며 환경을 지배하는 것이다.
인생을 살다
보면 복병 같은 장애물도 많고 돌풍이 불어올 때도 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엘리사는 불말과 불병거를 탄 하나님의 군대가
도단성을 에워싼 아람군대보다 많은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믿음은 신앙의 눈으로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히브리서 12절
2절의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
잠언 21장 23 "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환란에서 보전하느니라"
불신(不信)과 미신(迷信)
하나님의 사실을 믿지 않는 것이 불신이라면 사실 아닌 것을 사실처럼 믿는 것이 미신이다. 따라서 참 사실을 참 사실대로 믿는 것이 참 신앙이다.
인간을 신앙의 면에서 세 가지로 분류한다면 무신(無信), 미신(迷信), 진신(眞信)으로 분류할 수 있다. 말을 바꾸면 사실은 하나인데 안 믿거나 잘못 믿거나 옳게 믿거나 셋 중 하나인 셈이다.
더 생각해 보면 바로 못 믿거나 바로 믿는 양자 택일인 것 같다. 하나님은 존재하든가 존재하지 않든가 둘 중 하나이지 제3의 입장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진리가 인간의 무지와 미지 속에 잘못 믿어져 왔던가.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할 때까지 전 인류는 수천 년 동안 천동설을 믿었다.
불신자의 미지(未知)와 무지(無知)와 오지(誤知) 속에서 예수가 못 믿어지고 있다.
사실을 안다면 안 믿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은 3일 동안 어디에 계셨을까.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 지옥의 형벌을 받으신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통전적 구원으로 영혼의 구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최근
‘믿음인가, 미신인가(넥서스CROSS)’ 책을 펴낸 조성노 목사(푸른교회)는 “사도신경의 공인된 원문(Forma
Recepta)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지옥에 내려가신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내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성경에는 이 부분이 빠져있다”고 지적했다.
반대 의견에서는 신학적 성찰이기보다 성경의 문자적 해석을 경계하거나 ‘신성모독’으로
여겨 이러한 내용을 표기하지 않았다는 것.
조 목사는 “기독교 신앙의 특징은 아는 만큼만 믿는다는 것”
“바른 지식이 우리의 신앙을 결정한다. 성경은 덮어두고 자기 소신껏 예배하는 것은 미신일 뿐이다”라고 일침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맹신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소원을 위해 예배에 나오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미신스럽게 믿는 것이며 신앙으로 제 욕심을 채우려는 행태는 우상숭배와 다름없다는 것이다.
“미신에서는 ‘대상’을 알 필요가 없지만, 기독교 신앙에서는 ‘대상’을 성실히 알아야 한다. 어떤 대상의 정체를 알 때
신뢰가 생기는 것처럼 기독교도 분명한 믿음의 대상을 알 때 신뢰가 생긴다”고 밝혔다. 알지도 못한 채 무턱 대고 믿으며 신뢰한다는
것은 무책임할 뿐만 아니라, 소위 ‘미신’과 다를 바 없다는 것.
한국교회의
‘믿음과 행함’의 이원화로 사회적 신뢰도가 악화되어 가는 가운데 종말론에 대한 그의 시각은 눈에 띄는 부분이다.
“지금
한국교회에는 위기의 믿음이 필요한 때” “‘종말론’에 대한 결여가 한국교회 신앙의 한계이자 약점이다. 이 시대의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건강한 종말론에 대해 설교하고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당부했다.
이를 위해 ‘마리아와
마르다(눅10:38~42)’ 이야기를 예로 든 그는 “당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최후의 만남으로, 마리아와 마르다가
손님 대접을 위해 분주하게 돌아다닐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맞이할 때라는 것을 분별하기 원하셨다”고 말했다. 마리아가 자신의
향유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부은 것도 임박한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기 위함이었다는 것.
또한 “지금 한국교회의
성도들도 마르다처럼 ‘때’에 대한 감각이 결여된 것 같다”고 지적한 그는 “아무리 실천하기 어려운 말씀도 ‘내일이라도 주님이 오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날마다 종말의 때로 여기고 깨어 근신하는 사람은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지나친 은혜의 추구와 감동 위주의 설교로 말씀을 바로 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현실적인 타협을 하지 않고 담대하게 설교하길 바란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은 순간의 귀를 즐겁게 하는 설교가 아닌, 제대로
된 ‘말씀’의 전파에서 출발한다.”
‘천일야화’로 불리는 ‘아라비안나이트’를 보면 마법의 램프가 나옵니다.
램프를 문지르면 “주인님”이라고 말하는 거인이
튀어나옵니다. 배고프다 하면 먹을 것을 가져오고 원하는 것을 모두 해줍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마치 알라딘 램프의
거인처럼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미신적인 신앙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4장을 보면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을 하는데 하나님이 아닌 언약궤를 앞세워 싸웠습니다. 결과는 전쟁에서 패했고
언약궤마저 빼앗겼습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에서 나온 영성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물건에 힘이 있다고 보고 앞장세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부인하라는 명제를 제일 앞에 두게 했습니다. 자기 부인이 안 된 사람은 자신의 헛된
욕망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되지 않은 것입니다. 미신은 하나님의 마음을 달래서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려는 것입니다. 반면 신앙은 하나님을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이 변화되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점쟁이의 말을 듣거니와 네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하지 아니하시느니라.”(신명기 18:14)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미신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성경을 펼쳐 처음 들어오는 말씀에 의해 인도를 받을 수 있다고 믿거나, 십자가에 액운을 쫓은 신비로운 힘이 있는 것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경건한 목회자가 쓰던 물건을 취하면 귀신을 쫓는 영험이 있다고 믿기도 하고, 십자가 앞에서 기도해야 기도가 더 잘 상달된다고 믿기도 합니다. 이러한 행위들은 한마디로 부적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신앙을 위장한 미신이라는 것이지요.
사무엘상 4장에서도 이러한 부적신앙을 가진 자들이 등장합니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기 보다 하나님의 법궤를 들고 나가면 전쟁에서 이길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부적신앙은 결국 그들을 멸망과 죽음으로 이끌고 말았습니다. 거룩과 성결을 상실한 채, 법궤를 부적처럼 활용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상이나 성물을 통해서 일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이 부적신앙에 빠져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진리의 부재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3장은 당시의 시대에 대해 말씀이 희귀하고 이상이 흔하지 않은 시대로 규정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비전이 없었던 것이 타락과 멸망의 원인이었던 것이지요.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감행했던 이유 역시 그 시대가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한 시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교회의 권위를 하나님의 말씀보다 위에 놓았습니다. 성경은 라틴어로만 기록이 허용되었으며 라틴어를 잘 알지 못했던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교회가 말씀을 독점하여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하는데에 이용해먹었던 것이지요.
말씀의 결핍은 결국 교리적 타락을 야기하고, 그것은 반드시 도덕적 타락으로 이어집니다. 독신제도를 고착화 시켰지만 고위 성직자들은 대부분 실질적인 아내를 두었습니다. 성직은 세습되었고,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매매되었습니다. 물질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였고 심지어 면죄부를 팔아 치부를 하였습니다. 가장 심각한 타락은 신앙이 미신적인 우상숭배가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자체의 효험을 믿었으며, 그 효험을 늘 발휘하게 하기 위해 성호를 만들어 그었습니다. 십자가의 나무조각이나, 바울의 손수건, 교황이나 신부가 축복한 물질 등이 능력이 있는 것으로 판매가 되었습니다. 성자숭배에 빠져 성자들의 무덤에서 기도했으며, 천사들을 숭배하여 천사들을 위한 찬송과 기도를 따로 만들어 읊조리고 다녔습니다.
마리아를 숭배하여 마리아 무오설, 마리아 종신 처녀설, 마리아 승천설 등의 거짓 신화를 창조해내었고 마리아의 상을 만들어 신상처럼 숭배했습니다. 각종 성상과 성물과 성화들을 만들어 냈으며 그것들을 숭배했습니다. 말씀을 알지 못하니 신앙이 미신으로 변질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지요.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속에도 독초처럼 잔존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당혹케 하는 것은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말씀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이 바로 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손가락 하나만 움직이면 말씀이 흘러나오지만, 그 말씀은 삶에 변화를 주지 못하고 다만 지적 욕구를 충족해줄 뿐이며 자신을 치장해주는 장식에 머물러 버리고 맙니다. 말씀의 홍수 속에서 살지만, 실상은 말씀과 진리가 희귀한 역설적인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신앙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우리의 유익이 신앙의 초점이 되면 우리의 신앙은 미신이 되고 맙니다.
말씀이 우리를 가루처럼 부셔야 합니다. 우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이 남아야 합니다.
사무엘 시대에 하나님의 임재가 떠나버린 법궤는 그저 도금된 나무궤짝에 불과 했습니다. 성도에게서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떠나버리면 성도는 아무런 매력도 능력도 없이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의 삶이 부적신앙을 버리고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머무는 삶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인해 집안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졌다. 그래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바로 맞은편 집이 무당 집이었다. 일주일에 한 두번 집 마당에서 무당이 굿을 했다. 그 당시에는 교회를 다니지 않았지만 무당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예수님을 영접하고 난 이후, 무당이 굿을 할 때 그 마당에 가서 열심히 주기도문을 외웠다. 무당이 굿을 못하도록 말이다. 물론 무당이 굿을 못한 적은 없었다. 당시 나의 믿음이 부족했었던 것 같다.
무당에게 굿을 부탁한 사람은 굿이 진행되는 동안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는지 모른다. 크리스천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보다 더 열정적이고 경건해 보인다. 굿을 잘하기 위해서 무당에게 내는 금액은 얼마인지 아는가? 크리스천들이 하나님께 바치는 금액과는 비교가 안 된다. 사람들이 용한 무당에게 받은 부적을 얼마나 소중하게 간직하는지 아는가?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책을 소중히 여기는 것보다 훨씬 더 귀하게 여긴다.
무당의 말에 얼마나 순종하는지 아는가? 무당의 말 한마디에 한국의 대기업들이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삼성동으로 사무실을 이주하거나 건물을 짓고 본사를 옮길 정도였다.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이다. 그렇지만 그들을 가리켜 누구도 신앙인이라 부르지 않는다. 미신을 좇는 자라 말한다. 그렇다면 미신과 신앙의 차이는 무엇인가?
미신은 인간이 자기에게 있는 돈이나 능력 혹은 재주로 신의 마음을 달래고 얼러서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려는 것이다. 이들은 귀신의 존재를 믿는다. 그래서 귀신의 마음을 잘 달래면 자신들에게 축복을 선물하고, 그렇지 않으면 해코지를 한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부단히 귀신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노력하며 재물 또한 바치는 것이다.
이런 경우 자기 자신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은 그대로 있으면서 재주껏 귀신의 마음을 돌이키려는 것이 바로 미신의 특징이다. 이에 비해 참신앙은 하나님을 변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절대적인 그분의 말씀 앞에서 자기 자신이 늘 변화되어 가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는 더 중요하다. 자기 변화가 없는 믿음이란 결국 미신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선지자 노릇 하며 많은 권능을 행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요즘도 사람의 병을 고치는 신유의 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찾아가는지 아는가? 저는 한국에만 그런 줄 알았다. 한국에는 샤머니즘이 삶 속에 뿌리 깊이 박혀 있어서 병을 잘 고치는 기도원 원장님이 있다면 돈을 싸 들고 찾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그런데 미국에서도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얼마나 맹목적인지, 또한 안수 한 번 받으려고 머리를 얼마나 들이미는지 모른다. 그런데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23절을 보면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시면서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은 행했지만, 그들 자신은 변화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님의 이름은 말하였지만 정작 주님의 뜻대로 행한 자들은 아니다. 오히려 주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자신들의 욕망을 채운 자들이다. 그래서 주님은 21절에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서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그들의 삶이 날로 날로 변화되어 가는 참 신앙의 사람일 수 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가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오늘 이 말씀 앞에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요즘 한국 뉴스에서 자주 교회의 문제점을 보도한다. 그런 소식을 접할 때마다 부끄럽고 창피하다. 세상에서 저지르는 죄들이 교회에서도 버젓이 행해지고 있다. 세상에서 소금이 되고 빛이 되라고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으면 길가에 버려져 사람들의 발에 밟힐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그렇게 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고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잘못을 한 사람들만 그렇게 조롱을 받는다면 괜찮은데 문제는 교회 전체가,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이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그런데 이것이 비단 몇몇 대형교회만의 문제인가? 현재 크리스천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 받고 있다면 먼저 나 자신의 신앙부터 다시 점검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나는 하나님 앞에서 날마다 변화되어 가는 참된 신앙의 소유자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달래고 얼러 나의 목적만을 성취하려는 미신적 신앙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돌아봐야 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한 평생 하나님을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날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나를 믿은 것이 아니기에 나는 너를 알지 못한다”고 부인 당한다면 이보다 더 허망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기에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더 이상 미신이 아닌 참된 신앙을 가져야 한다. 참된 신앙을 가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음 속에 새겨야 할 세 가지 사항이 있다.
첫째,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다. 그리고 그 이름을 ‘땅’이라는 뜻의 ‘아담’이라고 하셨다. 히브리어로 ‘아다마’(adamah)는 ‘땅’이라는 뜻이다. 먼지와 같은 보잘 것 없는 존재이지만 하나님께서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어주셔서 존귀한 자녀가 되었다. 그런데 이들이 불순종의 죄로 말미암아 결국 흙으로 돌아가야 되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먼지와 같은 존재로 되돌아 가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동안에도 아담을 유혹한 사단은 끊임없이 흙으로 빚어진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다. 하나님은 뱀에게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인간은 끊임없이 사단의 공격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는 말씀이다. 사단은 호시탐탐 인간을 노리고 멸망시키려 할 것이다. 종국에는 우리를 사망으로 끌어 내릴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태어나면서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그 누구도 예외가 없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은 자기만은 죽음에서 예외일 것이라고 착각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각자 이번 한 주간의 스케줄을 생각해보라. 그 약속을 한 시점이 몇일 전이든지, 아니면 일주일, 혹은 한 달 전일 수도 있다. 앞날에 약속을 했다는 것은 적어도 그 약속의 날까지는 죽지 않으리란 ‘착각’속에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죽는 사람은 있고, 노인뿐 아니라 청년과 어린아이들도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에서 미국으로 급히 들어오면서 한국에 인사 드려야 할 목사님들을 찾아 뵙지 못하고 오게 되었다. 그 중에 선교단체에서 사역할 때 섬겼던 목사님이 계셨다. 중국에서도 가끔 전화통화는 했었지만 미국에 와서는 한 번도 통화를 드린 적이 없었다. 미국 온지 4년이 되어서야 전화를 드리려고 인터넷에 이름을 검색했는데 돌아가셨다는 기사를 보게 된 것이다. 내가 미국에 있을 때 돌아가셨다. 나이는 60대 초반이셨다. 건강한 분이셨는데 갑자기 돌아가시게 되었다.
사실 죽음은 우리 삶에 아주 가깝게 밀착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잊으면 안 된다. 이집트의 파라오는 피라미드의 속에 있으면 죽음을 이길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시체는 어디에 있는가? 피라미드는 도굴 당하고 그 시체들은 대영박물관이나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들이 피라미드를 쌓아 올릴 때 사람들이 자신들의 묘실까지 들어와서 짓밟으리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과거로 올라갈수록 묘지들은 화려하고 웅장하다. 또 카톨릭 국가일수록 묘지가 웅장하다. 유럽에 갔을 때 유명한 공동묘지를 학생들 데리고 간 적이 있다. 그 묘지에는 유명한 음악가들의 무덤이 있었다. 화려하고 웅장하였다. 바티칸 성당 밑에도 역대 교황들의 관이 있다.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 관들이다. 그러나 화려하고 웅장하든 초라하든 묘지엔 죽음 이상은 아무 것도 없다. 어느 묘지나 그 속에는 썩어 가는 시체나, 이미 다 썩어져 버리고 흙만이 있을 뿐이다. 살아 있는 어떤 사람이라도 묘지를 부러워할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자신이 오늘 밤이라도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바르게 인식할 때에야 비로서 미신에서 벗어나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으며, 그분의 말씀 앞에서 진정으로 변화되는 크리스천이 될 수 있다. 죽음 앞에 있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가? 그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에서 이루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죽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직 살아온 삶에 후회가 있을 뿐이다. 사람답게 살아야 했는데 그렇지 못함에 후회를 가지고 있는 거지, 더 많은 돈을 벌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이나 후회, 더 성공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를 하는 사람은 없다.
둘째, 크리스천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면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오래 전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벌써 죽었다. 그들의 시체는 흙이 된지 이미 오래 되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나버렸다면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지 결코 산 자의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고 죽는 것으로 끝난다면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당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부르도록 하셨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육체는 죽어 흙이 되었으나 그들은 여전히 살아 있다는 뜻이다. 그들의 영혼은 하나님의 품속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부자와 거지 나사로가 있다. 이들은 모두 죽었다. 그러나 나사로는 죽어서 천국에 갔고 부자는 죽어서 지옥에 갔다. 지옥에 간 부자가 천국을 보았을 때, 자기 집 문 앞에 있던 거지는 아브라함의 품 속에 안겨 있었다. 아브라함의 육체는 죽었지만 영혼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아 있었던 것이다.
모세는 예수님이 오시기 1500년 전에 죽었다. 그의 육체는 흙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예수님이 변화산에 올라가셨을 때 모세와 엘리야가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모세의 육체는 죽었지만 그의 영혼은 하나님 나라에 그대로 살고 있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실 때 한편의 강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 강도의 육체는 십자가에 못 박혀 공동묘지에 버려졌겠지만 그의 영혼은 주님과 더불어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의 육체는 죽는 육체가 아니었다. 그러나 죄로 인해 사람의 육체는 죽게 되었다. 그렇기에 영혼만 살아서는 완전한 구원이 될 수가 없다. 하나님이 정하신 마지막 때에 우리의 몸마저 부활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완전한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때 몸의 부활은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던 범죄 이전의 영원한 육체로서의 회복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영원한 몸의 부활 역시 이미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사살이 중요하다.
매일 학교를 다녀도 자신이 학생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학생은 공부를 하지 않는다. 심지어 부모가 매를 들어도 안 된다. 자신이 학생임을 자각하는 학생만이 자발적으로 공부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크리스천 역시, 자신이 이미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음을 아는 자만이 영원한 것을 추구할 수 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할 때 사람들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썩어 사라질 화려해 보이는 ‘거대한 것’을 추구하는 잘못을 저지른다.
아브라함의 목동들과 롯의 목동들은 양들이 먹을 꼴 때문에 다툼이 생겼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먼저 땅을 선택하라고 한다. 그러면 자신은 그 반대편으로 가겠다는 것이다. 유대 문화에서 작은 아버지가 조카에게 먼저 선택권을 줄 수가 없다. 오직 작은 아버지가 먼저 선택을 하면 그 다음을 선택할 수 있다. 이것이 당시의 문화였다. 그런데 롯은 당시 중동의 문화와 예절을 무시하고 먼저 땅을 선택하였다. 왜 그런가? 그 안에 탐욕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소돔 땅을 선택했다.
눈에 보이는 소돔 땅은 에덴 동산처럼 물이 넉넉하고 풍요로워 보였다. 그러나 성경은 그 땅이 애굽 땅과 같았다고도 평가를 했다. 세상적이라는 말이다. 소돔과 고모라가 얼마나 타락했으면 하나님께서 불로 심판을 하셨을까? 그러나 롯에게는 그러한 분별을 잃어버린 자였다. 그저 눈에 보이는 것이 좋아서 쫓아가는 불나방 같은 자였다. 이처럼 거대하고 화려한 것을 추구하는 자는 결코 영원한 것을 보지 못한다. 그러니 참된 신앙을 가질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과 베드로를 생각해보라. 그들은 돈이나 권력과는 거리가 먼 자들이었다. 쇠사슬에 묶여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다가 바울은 참수형으로,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었다. 그보다 더 처참한 인생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 당시 거대한 것을 추구하던 로마의 황제나 부자나 정치인들의 이름은 모르지만 바울과 베드로의 이름은 아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진심을 다해 존경하고 사랑한다.
그래서 미국에서 베드로의 이름이나 바울의 이름이 얼마나 많은가? 부모들은 자녀들이 태어나면 제일 많이 짓는 이름이 성경에 기록된 이름이다. 그들은 거대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추구하면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목적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참된 신앙의 소유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느 곳에 있든지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믿어야 한다.
시편 139:7-8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이 세상 어디를 가든 하나님께서는 나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다윗의 고백이다. 또 이사야 52:12절에는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행하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희 뒤에서 호위하시리니 너희가 황급히 나오지 아니하며 도망하듯 다니지 아니하리라” 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내 앞에서도 계시고 내 뒤에도 계시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 행동을 어떻게 할까? 누가 보든 보지 않든 그 사람의 행동이나 말은 진실할 수 밖에 없고 경건을 추구할 수 밖에 없다. 매일 매일 말씀을 묵상하며 경건의 시간을 가지며 주님의 뜻을 구하게 될 것이다. 이런 사람은 모든 상황에서 비로서 순종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예기치 못한 상황이 언제든지 벌어질 수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기에 그분의 뜻을 구하며 믿음으로 대처하게 되는 것이다.
시편 34:10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것은 다윗이 왕위에 이을 때 고백한 것이 아니다. 사울의 칼날을 피해 이웃나라 아비멜렉을 찾아가 살기 위해 침을 흘리며 미친 사람 흉내를 냈을 때의 고백이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심에도 그런 상황이 벌어졌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심이 아니라, 그 같은 상황 속에서 더 굳건한 신앙의 용사로 세워주시기 위함임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모든 훈련이 끝났을 때, 하나님은 다윗을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으로 세워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불러 주셨고 그분을 알며 믿을 수 있는 은총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미신과 신앙을 혼동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자. 일평생 참된 신앙을 소유하는 자가 되기를 바란다. 내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내 삶을 바치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크리스천으로서 멋지게 살다가, 호흡이 끝나는 날 멋지게 하나님 앞에 서기를 바란다. 아무 후회 없이 말이다.
12월 18일(토)
♦ 12월 18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사기 16:1∼31 ♦ 묵상을 위한 주제 : 이번만 강하게 하사(28절) ♦ 성구 :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主) 여호와여 구(求)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求)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强)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怨讐)를 단번(單番)에 갚게 하옵소서.
기생에게 빠지고, 자신이 받은 축복을 이방 여인 때문에 잃어버리고, 결국엔 눈이 뽑혀 연자 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된 삼손의 모습에서 무엇을 생각하셨습니까?
누구든지 나는 삼손과 다른 삶을 살아갈 것이라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삼손과 같은 길을 가며 그와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내 삶의 주위가 천국처럼 느껴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시키는 대로 여전히 고된 맷돌을 돌리면서도 부정한 것을 부정하다고 외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 결과 진리를 볼 수 있는 눈은 뽑히고 말았습니다. 봉사해야 할 두 손은 개인적인 일에 묶여 있습니다. 힘을 상징하는 머리카락은 아름답게 보이려고 다듬기만 합니다.
삼손이 가졌던 인간적인 장점들을 전혀 쓸모없게 만들어야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될 것입니다.
나의 눈이 뽑히고 나의 두 손이 묶이고 얽매인 것들에 의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환경에서 드디어 하나님의 일은 시작될 것입니다.
그래서 절망 속에서도 고난 중에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나는 때로 삼손보다 더한 죄를 짓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하나님이 떠나시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실 계획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남은 날 수가 얼마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오늘이란 기회가 나의 마지막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맡겨진 시간에 최선을 다 합시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옵소서!"
♪ 찬양 /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12월 17일(금)
♦ 12월 17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사기 15:1∼20 ♦ 묵상을 위한 주제 : 라맛 레히(17절) ♦ 성구 : 말을 마치고 턱뼈를 그 손에서 내어던지고 그곳을 라맛 레히라 이름하였더라.
사사기 15장은 블레셋 여인과의 결혼 사건은 삼손으로 하여금 큰 분노를 일으키게 만들었고 블레셋에게 보복하는 내용을 소개합니다.
여우 300마리를 붙잡아 그 꼬리에 불을 붙여 블레셋 사람의 곡식밭으로 몰아넣어 곡식단과 곡식과 감람원을 태워버렸습니다(1∼8절).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잡으려고 유다에 진을 쳤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삼손을 묶어 블레셋 사람들에게 넘겨주었으나 오히려 삼손은 결박했던 줄을 끊고 나귀의 턱뼈로 블레셋 사람들 일천 명을 죽였습니다(9∼17절).
블레셋과의 싸움 후에 심한 갈증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기를 "주께서 종의 손으로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받지 못한 자의 손에 빠지겠나이다." 하고 울부짖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레히의 한 우묵한 곳을 터쳐 물이 솟아나게 하므로 그 물을 마시고 정신을 회복하였고 소생하였으므로 그곳을 엔학고레라고 하였습니다(18∼20절).
하나님의 백성들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40년 동안 심각한 억압에 시달리고 있으면서도 부르짖지 못할 때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려고 마노아 집안에 삼손을 보내주셨습니다.
삼손은 나실인으로 태어나서 위로부터 받은 힘의 원천을 사용할 때 하나님의 방법보다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사용하는 경솔한 모습으로 소개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실현하도록 이 시대에 부름을 받은 삼손과 같은 사명의 사람입니다.
삼손의 모습에서 과연 우리들은 특히 나는 하나님의 부름에 합당한 믿음의 길을 걷고 있었는지 깊은 성찰이 요구됩니다.
왜냐하면 이전보다 교회가 많고 성도들의 수가 더 많아졌다고 하지만 세상은 이전보다 더 악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나실인으로서 삼손이 나실인의 삶을 살아가지 못한 것처럼 오늘날도 세상에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한 주의 백성의 삶을 보여주지 못하므로 세상이 잘못된 방향으로 미친듯이 달려갑니다.
이와 같은 때에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깊이 묵상하며 오늘날 우리들의 삶의 자리가 과연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날 거룩한 자리인가를 점검하며 믿음의 터를 진리의 말씀 위에 더욱 견고하게 세워야 하겠습니다.
오, 주님 연약한 삶의 자리에 하늘 새 바람 일구어 믿음의 터전에 생명의 씨앗 뿌리게 하옵소서
♪ 찬양 /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사사기의 결론을 두 단어로 요약한다면 "라맛 레히"와 "엔 학고레"라고 하겠습니다. '라맛 레히'란 "높은 곳"이란 "라맛"과 "턱뼈" "뺨"이란 "레히"라는 두 단어가 결합하여 만든 단어입니다. 라맛 레히의 뜻은 턱뼈의 산이라고 합니다.
'엔 학고레'란 "우물"이란 "엔"과 "부르짖다"라는 "학고레"라는 두 단어가 결합하여 만든 단어입니다. 엔 학고레의 뜻은 부를짖은 자의 샘이라고 합니다.
라맛레히(Ramath-lehi)(사사기 15:17) 턱뼈의 산 소라(zorah)와 딤낫 근처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다. 삼손이 나귀 턱뼈를 사용하여 블레셋 사람 일천명을 도륙한 곳.
엔학고레(En Hakkore)(사사기 15:19) 부르짖는 자의 샘 엔(우물) + 학고레(부르짖다)
사사기 15:17
말을 마치고 턱뼈를 그 손에서 내어던지고 그곳을 라맛 레히라 이름하였더라.
* 라맛레히(Ramath-lehi) / 턱뼈의 산
사사기 15:19
하나님이 레히에 한 우묵한 곳을 터치시니 물이 거기서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은 엔학고레라 이 샘이 레히에 오늘까지 있더라.
엔학고레((En Hakkore) / 부르짖는 자의 샘 엔(우물) + 학고레(부르짖다) * 우묵한 곳(하마크테쉬) : 블랙홀(어두운 구멍)
엔학고레, 부르짖는 자의 샘
삼손이 심히 목마르므로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께서 종의 손으로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못한 자의 손에 빠지겠나이다.” 하나님이 레히에 한 우묵한 곳을 터치시니 물이 거기서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은 엔학고레라 이 샘이 레히에 오늘까지 있더라. (사사기 15:18~19)
엔학고레(En-hakkore), 부르짖는 자의 샘
우물(엔) + 부르짖다(학고레)
1. 엔학고레의 기원
삼손은 변변한 무기도 없이 옆에 있던 나귀 턱뼈를 주어 들고 블레셋을 물리쳤다. 그러고 기진한 삼손은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삼손에게 물이 솟아나는 샘물을 주셨다. 삼손은 그 물을 마시고 기력을 회복했고, 그 샘을 엔학고레라고 불렀다.
2. 엔학고레의 뜻
엔학고레란 무엇인가? 엔학고레(En-hakkore)는 우물을 뜻하는 ‘엔’과 부르짖는다는 뜻의 ‘학고레’를 합친 것으로
‘부르짖는 자의 우물’이라는 뜻이다. 삼손이 부르짖으니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 하나님의 응답은 삼손을 소생(revive)시켰다.
지금 내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는 것 같을 때가 있다. 우리가 모를 뿐, 하나님께서는 늘 응답하신다. 내가 구하는 것을 주지 않으시면 응답이 없는 것일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기도에 세 가지 방법으로 응답하신다. ‘그래(Yes)’, ‘아니(No)’, ‘기다려(Wait)’가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 뜻과 내
뜻이 같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래’ 하고 답하신다. 지금이 알맞은 때가 아닐 경우 기다리라고 하신다. 하나님 뜻에 전혀 부합하지
않을 때는 ‘아니’라고 답하신다. 빠른 기도 응답의 비결은 내 뜻을 하나님 뜻과 일치시키는 것이다.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아모스 3:3)
우리가 누리는 가장 큰 축복은 사나 죽으나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뜻이 같지 않으면 동행할 수 없다고 하신다.
‘하나님 뜻만 뜻이고 내 뜻은 뜻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전지(全知)하신 분이다. 우리에게 무엇이 언제 좋은지 우리보다 더 잘 알고 계시다.
우리도 어린아이들이 밥 먹기 전에 사탕을 달라고 하면, ‘밥 먹고 나서 먹자’하고 대답한다. 밥 먹기 전에 단것을 먹으면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해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잘 알아듣는 아이들도 있지만, 그저 욕구에 휩싸여 계속
떼쓰는 아이들도 있다. 우리는 자녀를 기르고 가르치면서 조금이나마 하나님 마음을 알 게되는 것 같다.
4.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하나님
또 너희 땅에서 너희가 자기를 압박하는 대적을 치러 나갈 때에는 나팔을 울려 불찌니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를 기억하고 너희를 너희 대적에게서 구원하리라(민수기 10:9)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은으로 나팔 두 개를 만들라고 하셨다. 회중을 소집할 때나 앞으로 나아갈 때도 나팔을 불어야 했고,
대적을 치러 나갈 때도 나팔을 불라고 하셨다. 나팔을 불면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기억하시고 대적에서 구하겠다고 하셨다.
이것은 출애굽 당시 백성들에게 주신 기도의 모범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성령 하나님을 보내주셨다. 위기의 순간에 부르짖기만 하면 된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로마서 8:26)
5. 우리에게는 마르지 않는 엔학고레가 있다
응답이 없을까봐 두려운가? 아니면 그저 게으른가? 무엇이 됐건 극복하자. 하나님께서는 나팔을 불듯 그저 부르짖으라 하신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바로 응답하신다. 우리 안의 반석에서 샘물이 나게 하신다. 그 샘물은 마르지 않는 샘물이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한복음 4:14)
엔학고레의 영성
삼손이
심히 목이 말라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 하니 하나님이 레히에서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시니 거기서 물이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 불렀으며 그 샘이 오늘까지 레히에 있더라 블레셋 사람의 때에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더라(사사기 15:18-20)
영어에 ‘번 아웃(burn out)’ 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탈진한 상태를 일컫는 말입니다. 어떻게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새로운 힘을 얻고 다시 일어나 달려갈 수 있을까요?
삼손은 태어나기 전부터 모태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사로 택정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삼손에게 복을 주시고, 여호와의 영이 삼손을 움직여 나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삼손을 사용하실 때가 되어 하나님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므로 사자를 염소 새끼 같이 죽이는 장사가 되었습니다.
삼손 같은 천하무적의 장수도 번 아웃 될 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삼손에게 임하여 일천 명을 쳐 부셨지만 너무 힘이 빠져 나귀 턱뼈를 땅바닥에 던져버리고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은 부르짖는 자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사사기는 ‘야훼 하나님은 부르짖는 자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이라는 것을 여러 번 나타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고 죄를 짓고 살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면, 고통 중에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이 그 부르짖는 기도의 소리를 들으시고, 사사를 세워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목말라 죽게 된 삼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우묵한 곳(하마크테쉬)’을 터뜨려 주셨습니다. 우묵한 곳, ‘하마크테쉬’는 어두운 구멍이란 뜻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두운 구멍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블랙홀(black hole)에 휘말릴 때가 있습니다.
블랙홀에 한번 걸려 들어가면 나올 수 없습니다. 빠져 나오려고 하면 할수록 더 빠져 들어가는 곳이 바로 수렁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서서 기다려야 합니다. 누군가 나를 잡아 끌어줄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삼손이 번 아웃 상태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더니 우묵한 곳이 터져 물이 솟아나왔습니다. 엔학고레는 ‘부르짖는 자의 샘’입니다. 삼손이 그 물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한 곳입니다.
하나님의 손을 움직여 우묵한 반석을 터뜨려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누굽니까?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 바네아 광야를 지낼 때 물이 없어 목이 마름으로 모세를 원망하고 돌질을 하려고 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호렙 산의 우묵한 반석을 쳐서 생수를 마시게 하셨습니다.
엔학고레의 샘물을 마시면 정신이 회복됩니다. 정신은 얼입니다. 기(氣, spirit)입니다. 기는 채울 수도 있고 빠질 수도 있습니다. 나귀 턱뼈 하나로 수 천 명을 죽인 삼손의 영성이 왜 빠져 나갔습니까?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면 얼이 빠져 나갑니다.
사사기 16장에는 삼손이 하나님과의 나실인 언약을 파기함으로써 하나님의 기, 얼이 빠져 블레셋 사람들에게 사로잡히게 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손의 영성의 원천은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삼손이 들릴라의 유혹에 빠져 머리카락을 잘렸습니다. 머리카락을 삭도당한 삼손은 어두운 감옥에 갇히고 블레셋 사람들의 노리개가 되었습니다.
삼손의 머리카락은 자라났습니다. 고통의 체험 속에서 하나님의 영성은 충전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칼날을 피하여 아둘람 굴에서 새벽을 깨우는 영성을 얻었습니다. 삼손은 고통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사사기 16:28)
삼손의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시고 다시 힘을 주셨습니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죽기를 각오하고, 힘을 다하여 기둥을 밀어냄으로 블레셋 사람들로 가득히 채운 다곤 신전을 무너뜨렸습니다.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사사기 16:30)
신명기 사가들이 삼손을 마지막 평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쓰시는 사람도 번 아웃 상태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바알 선지자 450명, 아세라 선지자 400명과 싸워 이긴 불의 사자 엘리야도 이사벨에게 쫓겨 브엘세바 광야로 도망하여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탄원하며 부르짖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호렙 산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호렙 산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신 곳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제자들은 불랙 홀에 빠져 있었습니다. 뿔뿔이 흩어지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런 제자들이 어떻게 다시 모여 힘을 회복하고, 순교를 각오하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아시아 유럽까지 나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을까요?
마가의 다락방이 있었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전심으로 합심으로 기도함으로 영성을 충전하였습니다. 성령 충만 받은 제자들은 정신이 살아났습니다.
삼손은 나귀 뼈 하나로 블레셋 사람 삼천과 대적하여 싸우다가 지쳐 나귀 뼈를 집어던지고 주저앉아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엔학고레’ 의 생수를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었습니다.
주의 일을 하다가 번 아웃 된 사람이 있습니까? 깊은 수렁에 빠진 사람이 있습니까? 엔학고레의 샘물을 마시고 소생한 삼손처럼 성령이 주시는 생수를 마시고 일어나 힘차게 다시 시작하십시오.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들어야 쇠잔한 영성이 살아납니다.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을 갖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하십시오. 영적 충전하는데 가장 좋은 것은 현장에서 조금 뒤로 물러나 말씀을 묵상하고, 은밀한 곳에 계신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현대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라고 합니다. 각자가 왕이 된 시대, 자기의
소견대로 하는 시대, 스스로 주인이 돼 살아가는 시대입니다. 인간은 광대한 우주의 비밀까지 파헤치려 하지만 정작 자신이 누군지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성의 가치가 극대화되고 과학주의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영적인 갈망이
팽배하고 신비주의가 득세하는 혼란한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해 인격이 파괴되고 정신적으로 공허해지며
극단화돼가고 있습니다.
12월 16일(목)
♦ 12월 16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사기 14:1∼20 ♦ 묵상을 위한 주제 : 수수께끼(12절) ♦ 성구 :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너희에게 수수께끼를 하리니 잔치하는 칠일(七日) 동안에 너희가 능(能)히 그것을 풀어서 내게 고하면 내가 베옷 삼십(三十) 벌과 겉옷 삼십(三十) 벌을 너희에게 주리라.
“겉옷(베가딤, בגדים)”은 평상복이 아니라 축제나 국가적 경사가 있을 때에 입는 예복을 말합니다.
고대 동방에 있어서 “베가딤”은 존귀와 부의 상징이었으며 귀중한 선물로 많이 이용되었습니다(창 45:22, 사 3:6, 7).
삼손이 제시한 수수께끼는 개인적인 체험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상식과 지식을 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블레셋 사람들은 약속된 칠 일의 기간 동안에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삼손의 아내를 협박하게 됩니다.
삼손은 단순히 잔치를 즐겁게 하려는 목적으로 수수께끼를 냈으나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의 위신이 손상될 것을 우려해 삼손의 아내가 될 동족 여인을 협박하였습니다. 이 위협으로 인해 삼손과 블레셋 족속 간의 감정이 악화되었고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대로 삼손으로 하여금 블레셋을 공격하게 하는 계기가 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삼손의 수수께끼는 히브리 시의 대구법적인 형태로 “먹는 자와 강한 자” 그리고 “먹는 것과 단 것”은 서로 같은 내용을 가리키면서도 서로 대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을 쉽게 풀어쓰면 “다른 짐승을 잡아 먹고 사는 동물에게서 먹는 식물이 나왔는데, 그 동물은 매우 강하고 그 식물은 달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 여인의 부모들이 삼손의 아내를 블레셋 사람에게 주어 버린 행위는 삼손이 블레셋을 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사슬에서 자유하게 하려는 방법은 참 놀랍습니다. 삼손이 이방여인을 사랑하였다는 것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구원의 방법을 보여주신 은총을 찬양하며 오늘도 우리들을 통하여 구원하시려는 계획을 분명하게 깨닫고 아름다운 구원의 도구로 쓰임 받는 은혜가 넘쳐나기를 기도합시다.
♪ 찬양 / 구원으로 인도하는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사사기 14:12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너희에게 수수께끼를 내리니 잔치하는 이레 동안에 너희가 그것을 풀어 내게 말하면 내가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너희에게 주리라. 아멘
선입견(편견)을 버리자! Let's get rid of prejudice!
삼손(Samson) 1. 나실인(포도주, 독주, 주검, 머리) 2. 이방여인을 사랑한 사람 3. 부모의 말을 거역한 사람 4. 힘의 비밀을 알려준 사람 5. 성경은 무엇을 말씀하셨는가?
사사기 14:4
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관할한고로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서 나온 것인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사사기 14:6
삼손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어 손에 아무 것도 없어도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음 같이 찢었으나 그는 그 행한 일을 부모에게도 고하지 아니하였고.
19절 / 여호와의 신이 삼손에게 크게 임하시매…
사사기 14:14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그들이 삼일이 되도록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였더라.
사사기 14:15
제 칠일에 이르러 그들이 삼손의 아내에게 이르되 너는 네 남편을 꾀어 그 수수께끼를 우리에게 알리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와 네 아비의 집을 불사르리라 너희가 우리의 소유를 취하고자 하여 우리를 청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냐.
사사기 14:19
여호와의 신이 삼손에게 크게 임하시매 삼손이 아스글론에 내려가서 그곳 사람 삼십명을 쳐 죽이고 노략하여 수수께끼 푼 자들에게 옷을 주고 심히 노하여 아비 집으로 올라갔고.
에베소서 4:27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오늘의 기도
사탄에게 틈을 주지 않게 하옵소서! 불. 낙. 지교회로 세워주옵소서!
사사기 14:18
제 칠일 해 지기 전에 성읍 사람들이 삼손에게 이르되 무엇이 꿀보다 달겠으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느냐 한지라 삼손이 그들에게 대답하되 너희가 내 암송아지로 밭갈지 아니하였더면 나의 수수께끼를 능히 풀지 못하였으리라 하니라.
12월 15일(수)
♦ 12월 15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사기 13:1∼25 ♦ 묵상을 위한 주제 : 내 이름은 기묘(18절) ♦ 성구 : 여호와의 사자(使者)가 그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를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奇妙)니라.
“기묘(奇妙)”란 NIV 영어 성경에서 “이해할 수 없는 것(It is beyond understand)” 이라고 소개합니다.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네가 알 수 없는 묘한 이름”이라고 소개합니다.
사사기 13장은 “삼손”의 출생을 알려주는 “삼손의 수태고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수태고지(受胎告知, Annunciation)”라는 단어는 “이끌다”는 라틴어 동사 “아눈티아레(anuntiare)”에서 유래한 고유명사입니다.
수태고지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사례는 “천사 가브리엘의 예수 그리스도의 수태고지”라고 하겠습니다(눅 1:26∼38).
“삼손”은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한 단지파의 “마노아”와 그의 아내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하던 “마노아”의 아내에게 어느 날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서 그녀가 낳게 될 아들은 태어나면서 나실인으로 구별된 사람으로 그의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고 포도주와 독주와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태어나기 전에 미리 구별된 나실인으로서 그가 할 사명은 블레셋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자식이 없었던 “마노아”는 앞으로 낳게 될 아이에게 어떻게 행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마노아의 아내에게 다시 나타났을 때 남편을 급히 불러왔습니다.
마노아는 하나님의 사자에게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사자는 내가 너의 식물을 먹지 낞겠으며 번제를 준비하려거든 여호와께 드리라고 합니다.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에게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라고 묻자 여호와의 사자가 "어찌하여 이를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니라" 라고 알려주었습니다.
마노아가 염소 새끼 하나와 소제물을 반석 위에 올리자 불꽃이 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며 동시에 여호와의 사자가 단 불꽃 가운데로 좇아 올라가는 것을 보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그제서야 마노아는 그가 하나님의 사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두려움을 느꼈지만, 그 아내가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으셨으므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마노아의 아내가 아이를 갖게 될 것을 하나님의 사자가 찾아와 알려주는 것은 다른 사사들에게는 언급되지 않는 특별한 내용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수태를 알린 여호와의 사자, 리브가에게 쌍태를 알린 여호와의 사자 그리고 사사 삼손의 탄생을 알리는 여호와의 사자와 훗날 세례 요한의 탄생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수태고지는 이어지게 됩니다.
이와 같은 구속사 속에서 삼손이란 사사가 등장합니다. 삼손은 레위인도 아니고 제사장 출신도 아닌 단지파의 후손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태어나면서 나실인으로 구별된 존재가 되었습니다.
삼손은 태어나면서 특별한 사명 즉 블레셋으로부터 자신의 백성을 구원할 것이라는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로 구분하여 말하고 있는 신약의 수태고지를 우리가 알고 있다면 삼손은 구약에서 그의 출생에 있어서 자기 백성을 블레셋으로부터 구원할 목적을 갖고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나실인은 자기 헌신의 결정에 의하여 구별됩니다. 그러나 삼손과 같은 나실인은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 즉 구속사적인 부르심으로 사람의 결정에 의한 것이 아니므로 우리가 본받을 수 있는 부르심이 아닙니다.
사도 베드로는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며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벧전 2:9).
혼탁하고 어지러운 시대를 살아가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구원의 소식을 전해야 할 거룩한 주의 백성의 반열에서 맡겨주신 본분을 바르게 감당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모두에게 기쁨이 될 수 있는 믿음으로 존귀하게 쓰임 받는 은혜가 충만한 하루가 펼쳐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 찬양 / 십자가 군병들아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사사기 13:18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를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니라. 아멘
* 기묘(필리) - 기묘자(펠레) 이사야 9:6
(현대인의 성경) 네가 알 수 없는 묘한 이름이다 beyond understanding, wonderful
사사들의 이름 / 대사사, 소사사
1. 옷니엘(유다) 40년 2. 에훗(베냐민) 3. 삼갈 4. 드보라(요셉) 40년 5. 기드온(요셉) 40년 6. 돌라(잇사갈) 23년 7. 야일 22년 8. 입다 6년 (11:1) 9. 입산 7년 10. 엘론 10년 11. 압돈 8년 12. 삼손(단) 20년
사사기의 순환 구조 불순종 - 징계 - 부르짖음 - 구원 - 불순종
사사기 13:1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십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니라.
* 블레셋(Philistines) - 팔레스타인 가사, 아스글론, 아스돗, 에그론, 갓
사사기 13:2
소라 땅에 단 지파의 가족중 마노아라 이름하는 자가 있더라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생산치 못하더니.
사사기 13:3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가 본래 잉태하지 못하므로 생산치 못하였으나 이제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사기 12:1∼15 ♦ 묵상을 위한 주제 : 십볼렛(6절) ♦ 성구 : 그에게 이르기를 십볼렛이라 하라 하여 에브라임 사람이 능(能)히 구음(口音)을 바로 하지 못하고 씹볼렛이라 하면 길르앗 사람이 곧 그를 잡아서 요단 나루턱에서 죽였더라 그 때에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者)가 사만 이천 명(二千 名)이었더라.
“십볼렛(Shibboleth)”이란 “에브라임(Ephraim)” 사람들이 바르게 발음을 할 수 없는 단어를 말합니다.
길르앗 족속이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자 에브라임이 입다에게 몰려가 불평합니다.
결국 길르앗과 에브라임은 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싸움은 에브라임의 시기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전쟁도 이처럼 어이없는 이해관계에 의헤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싸움에서 에브라엠 족속 42,000명이 죽었습니다. 그 배경은 요단 나루터에서 “십볼렛(시냇물)” 이라는 단어를 발음하게 하여 “씹볼렛”이라고 하면 모두 죽였습니다.
왜냐하면 에브라임 사람들은 “십볼렛”이라고 발음 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소통(疏通)을 위한 것입니다. 소통할 수 없는 언어는 발음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과 생각의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교만은 하늘에 닿는 “바벨탑”을 쌓아 하나님과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려는 욕망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바벨탑을 쌓는 인간의 무모한 계획을 무너트리려고 서로 소통하지 못하도록 언어를 분열시켰습니다.
그 결과 다양한 언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민족과 민족 그리고 나라와 나라가 서로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길을 인간의 과학 기술에 의해서 찾을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믿음에 의해서 해결책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철학자 “하이덱거( Martin Heidegger, 1889. 9. 26~1976. 5. 26)”는 “언어는 존재의 집((das Haus des Seins)”이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말하는 존재"라고 하겠습니다.
오늘이란 어제의 연장을 위한 시간이 아니라 새로운 소통을 위한 기회라고 하겠습니다.
일상의 언어는 생명을 유지히기 위한 필요를 요구하거나 채워가는 도구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언어는 육체적 생명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소통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소통을 회복한 후에 그 언어를 사람들과 소통하며 하늘의 기쁜 소식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줄 수 있는 도구로 사용되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사용하는 언어가 하늘의 뜻을 알려주며 구원해야 할 사람을 찾아 구원의 범위를 넓혀가는 선한 도구로 사용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 찬양 / 나의 영원하신 기업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사사들의 이름
1. 옷니엘(유다) 40년 2. 에훗(베냐민) 3. 삼갈 4. 드보라(요셉) 40년 5. 기드온(요셉) 40년 6. 돌라(잇사갈) 23년 7. 야일 22년 8. 입다 6년 (11:1) 9. 입산 7년 10. 엘론 10년 11. 압돈 8년 12. 삼손(단) 20년
사사기 12:6
그에게 이르기를 십볼렛이라 하라 하여 에브라임 사람이 능히 구음을 바로 하지 못하고 씹볼렛이라 하면 길르앗 사람이 곧 그를 잡아서 요단 나루턱에서 죽였더라 그 때에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가 사만 이천명이었더라.
* 십볼렛(이삭, 물줄기)
사사기 12:1 에브라임 사람들이 모여 북으로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네가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가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가 반드시 불로 너와 네 집을 사르리라.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찜이뇨 하고 크게 다투는지라.
사사기 12:2
입다가 그들에게(에브라임) 이르되 나와 나의 백성이 암몬 자손과 크게 다툴 때에 내가 너희를 부르되 너희가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아니한고로.
사사기 12:3
내가 너희의 구원치 아니하는 것을 보고 내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건너가서 암몬 자손을 쳤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붙이셨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오늘날 내게 올라와서 나로 더불어 싸우고자 하느냐 하고.
사사기 12:4
입다가 길르앗 사람을 다 모으고 에브라임과 싸웠더니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을 쳐서 파하였으니 이는 에브라임의 말이 너희 길르앗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로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중에 있다 하였음이라.
야고보서 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오늘의 기도
섬김의 겸손으로 열매를 맺게 하옵소서! 불낙지교회로 세워주시옵소서!
사사기 12장은 사사 입다가 이방 민족과의 싸운게 아니라 이스라엘 지파 중에 에브라임과 싸워서 이긴 내용과 사사 입산, 엘론, 압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사기 12:1-7절은 입다가 에브라임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야기입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성격이 참 특이한 것 같습니다. 사사기 8장에도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시비를 걸고 트집을 잡는 내용이 나옵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화를 낸 이유는 기드온이 미디안과 싸울 때, 에브라임 사람들을 부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기드온이 자신들을 무시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기드온이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 에브라임 사람들을 늦게 부른 건 사실입니다. 미디안과 싸우고 적군을 추격하는 일은 납달리, 아셀, 므낫세가 담당했습니다. 기드온은 미디안을 앞질러 벧 바라와 요단 강에 이르는 수로를 점령하는 일에 에브라임 사람들을 불렀습니다.
뒤늦게 합류한 에브라임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벳바라와 요단 강에 이르기까지의 나루들을 점령하였습니다. 그들이 미디안의 두 우두머리 오렙과 스엡을 사로잡아, 오렙은 오렙 바위에서 죽이고, 스엡은 스엡 포도주 틀에서 죽이고, 계속 미디안을 추격하였습니다. 그들이 오렙과 스엡의 머리를 요단 강 동쪽 지역에 있는 기드온에게 가져 왔습니다.
미디안을 이기는데 에브라임 사람들도 큰 역할을 감당했지만 그게 성에 차지 않았는지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을 찾아와서 왜 처음부터 부르지 않았냐고 따집니다. 그들의 말이 정당한 요구인지 그냥 트집을 잡고 시비를 거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기드온은 아주 지혜롭게 대처합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의 성질을 건들지 않고 달랩니다.
“이번에 내가 한 일이 여러분이 한 일에 비교나 되겠습니까? 에브라임이 떨어진 포도를 주운 것이 아비에셀이 추수한 것 전부보다 낫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미디안의 우두머리 오렙과 스엡을 여러분의 손에 넘겨 주셨습니다. 그러니 내가 한 일이 어찌 여러분이 한 일에 비교나 되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면서 트집을 잡습니다. 별 것도 아닌데 시비를 걸어옵니다. 급기야 말다툼이 일어날 상황입니다. 이 때,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상대방의 말을 맞받아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질 건드려서 좋을 것 하나 없습니다. 성질을 돋우지 말고 부드럽게 달래듯 말해야 합니다. 기드온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기드온이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부드럽게 말을 하니까, 그들의 노여움이 풀렸습니다.
사사기 12:1-6절에도 에브라임 사람들이 트집을 잡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사사 입다를 찾아와서 암몬 자손과 싸우러 갈 때에 자신들을 부르지 않았다고 난리를 칩니다. 에브라임 지파 사람이 싸울 준비를 하고 요단 강을 건너 사본으로 와서, 입다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입다와 그의 집을 불사르겠다고 협박까지 했습니다.
“너는 왜 암몬 자손을 치러 건너갈 때에, 우리를 불러 같이 가지 않았느냐?
우리가 너와 네 집을 같이 불태워 버리겠다.”
그러자 입다가 그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나와 나의 백성이 암몬 자손과 힘겹게 싸울 때에, 내가 너희를 불렀으나, 너희는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하여 주려고 하지 않았다. 너희가 구하러 오지 않는 것을 보고, 내가 목숨을 걸고 암몬 자손에게 쳐들어가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나의 손에 넘겨 주셨다. 그런데 어찌하여 오늘 너희가 이렇게 올라와서 나를 대항하여 싸우려고 하느냐?”
입다는 길르앗 사람들을 모두 불러모아,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과 싸워 무찔렀습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평소에 늘 길르앗 사람들을 보고 “너희 길르앗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친 자들이요,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속한 자들이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평소 에브라임 사람들이 길르앗 사람들을 무시하고 놀렸다는 말입니다.
길르앗 사람들은 에브라임 사람을 앞질러, 요단 강 나루를 차지하였습니다. 도망치는 에브라임 사람이 강을 건너가게 해 달라고 하면, 길르앗 사람들은 그에게 에브라임 사람이냐고 물었습니다. 그가 에브라임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 그에게 쉽볼렛이라는 말을 발음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 말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고, 십볼렛이라고 발음하면, 길르앗 사람들이 그를 붙들어, 요단 강 나루터에서 죽였습니다. 쉽을 십으로 발음하는 것을 보고 에브라임 사람들을 골라내서 죽였습니다.
경상도 사람들이 ‘쌀’을 ‘살’로 발음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때에 죽은 에브라임 사람의 수는 42,000명이나 되었습니다.
길르앗 사람 입다는 6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었습니다. 입다는 죽어서, 길르앗에 있는 한 성읍에 묻혔습니다.
왜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이 이렇게 기드온에게 트집을 잡고 시비를 걸었을까요?
사사기 8장에서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시비를 걸고 트집을 잡을 때는 기드온에게 잘못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사기 12장에도 에브라임 사람들이 입다에게 트집을 잡습니다. 사사기 12장에는 에브라임 사람들이 입다에게 시비를 걸고 트집을 잡는 것도 모자라 불질러버리겠다고 협박까지 합니다. 이것을 보면서 에브라임 사람들의 트집은 상습적이요, 병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에브라임 사람들은 기드온에게 이렇게 시비를 걸고 트집을 잡았을까요?
그들이 모세의 후계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여호수아의 후광을 업고 깝죽거린 것 같습니다. 여호수아가 바로 에브라임 지파 출신이거든요. 에브라임 사람들은 기드온을 향해 “감히 네가 우리를 무시해?”뭐 이런 생각을 가진 것 같습니다. 에브라임 지파는 여호수아를 배출한 지파인데, 기드온이 무시했다고 생각하고 엄청 열 받은 것 같습니다. 사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요셉의 아들입니다.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협력하면 좋았을 텐데 이렇게까지 관계가 틀어졌습니다.
법조계에서 정관예우하는 것처럼 에브라임 사람들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에브라임 지파에게 특별대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의 특혜를 바라는 갑질하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일이 있을 때마다 챙겨주고, 사람들 앞에서 세워주고, 언제 어디서나 일등석, 상석을 내드려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에브라임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해야할 일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오직 대접만 받으려고 합니다. 자신의 의무는 무시한 채 자기 권리만 찾아 먹겠다고 난립니다. 제 자리에서 묵묵히 자기 일 하기보다는 자기 자랑하면서 싸돌아 다니기 좋아합니다. 좋은 일 하나 해놓고 온갖 생색 다 냅니다.
길르앗 사람 입다는 6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었습니다. 입다는 죽어서 길르앗에 있는 한 성읍에 묻혔습니다. 입다에 대한 설명 중에서 시작과 끝에 나오는 설명이 바로 ‘길르앗 사람 입다’입니다.
입다를 처음 소개하는 부분에서 ‘길르앗 사람 입다는 큰 용사였으니..’(11:1)라고 표현되어 있고, 입다의 죽음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에서 ‘길르앗 사람 입다가 죽으매...’(12:7)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자는 입다를 소개하면서 입다 이야기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입다를 ‘길르앗 사람’이라고 강조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길르앗 사람 입다는 굉장한 용사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입다는 길르앗이 창녀(기생)에게서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길르앗의 본처도 여러 아들을 낳았는데, 그들이 자라서 입다를 내쫓았습니다. 입다의 아버지가 길르앗인데, 단지 기생이 낳은 아들이라서 아버지 길르앗의 유산을 받지 못하고 쫓겨났습니다.
그래서 입다는 자기의 이복 형제들을 피하여 도망가서, 돕이라는 땅에서 살았는데, 건달패들이 입다에게 모여들어 그를 따라다녔습니다. 그때 그 시절, 입다가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지만 마음속으로 수도 없이 외친 말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입다의 정체성입니다.
사사기 12:8-10절은 열 번째 사사 입산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 뒤에 베들레헴의 입산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들 30명과 딸 30명이 있었는데, 딸들은 모두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가나안 민족의 가문으로 시집보내고, 며느리들 30명 역시 이방 사람 집안에서 데려왔습니다. 그는 7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었습니다. 입산은 죽어서, 베들레헴에 묻혔습니다.
입산을 소개하면서 자기 아들과 딸들을 다른 집안(가나안 민족)의 자녀들과 결혼시킨 이야기를 왜 기록했을까요? 입산이 하나님께서 세운 사사인데 자식들을 이방 사람들과 결혼시켰다는 말입니다. 입산이 자신의 아들딸을 이방인의 아들딸과 결혼시켰다는 말은 결국 그가 사사면서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사사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30이란 숫자는 입산이 엄청난 힘을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입산은 아들과 딸의 결혼을 부귀영화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입산은 그의 아들딸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사람이었습니다. 즉 그는 정략결혼을 통해 지지 기반을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이방인과 통혼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사기 12:11,12절은 열 한 번째 사사 엘론에 대한 설명입니다.
입산이 죽은 뒤에 스불론 사람 엘론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10년 동안 사사로 있으면서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스불론 사람 엘론은 죽어서, 스불론 땅에 있는 아얄론에 묻혔습니다.
사사 엘론이 입산 보다는 나은 것 같습니다. 입산이 7년 동안 사사였는데, 엘론이 10년 동안 사사로 활동해서 낫다는 말이 아닙니다. 입산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다는 말만 나오지만 엘론은 10년 동안 사사로 있으면서 이스라엘을 다스렸기 때문입니다.
사사기 12:13-15절은 열 두 번째 사사 압돈에 대한 설명입니다.
사사 엘론이 죽은 뒤에 에브라임 지파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40명의 아들과 30명의 손자가 있었는데, 그들은 나귀 70마리를 타고 다녔습니다. 그는 8년 동안 사사로 있으면서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은 죽어서, 아말렉 사람의 산간지방에 있는 에브라임의 땅 비라돈에 묻혔습니다.
사사 압돈에게 40명의 아들이 있었고, 30명의 손자가 있었다는 게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인가요? 압돈의 아들과 손자들 70명이 나귀 70마리를 타고 다닌 것이 사사에게 그리 자랑할 일인가요? 압돈을 소개하는 숫자 70/70은 압돈이 사사였지만 사사의 본분(책임과 의무)을 다하기 보다는 그냥 부자로 많은 것을 누리고 살았다는 자랑질 같아 보입니다.
사사기 10-12장에 나오는 사사들 - 돌라, 야일, 입다, 입산, 엘론, 압돈 – 그 누구도 사사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진짜 이상한 사람들이요, 함량미달입니다. 입다와 그의 아들 아비멜렉도 마음에 안 들지만, 입다를 기준으로 앞에 언급된 사사 돌라와 야일과 뒤에 언급된 입산, 엘론, 압돈은 정말 사사로 생각할 만한 게 하나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사사기 10-16장에 나오는 7명의 사사들 – 돌라, 야일, 입다, 입산, 엘론, 압돈, 삼손 – 의 이야기 속에는 앞에 사사기 3-8장에 나왔던 사사들 – 옷니엘, 에훗, 드보라와 바락, 기드온 - 의 이야기에 나오는 ‘사사가 다스리는 동안에 평온했다’는 말이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만큼 문제가 있는 사사들이었다는 말이지요. 이런 사사들의 이야기를 왜 사사기에 기록해두었을까요? 사사기의 주인공이 사사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은 것 아닐까요? 사사기에 여러 번 나오는 구절이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입니다(17:6; 18:1; 19:1; 21:25).
작은(minor/소) 사사들 이야기를 통해 저자는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요? 사울 왕이 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 다윗이 왕이 된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사사기에 나오는 활약상이 두드러진 사사들이나 이름뿐인 사사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대부분 몰상식하고 비윤리적이고 함량미달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왕이라는 것입니다.
사사들 중에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게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믿고 스스로 일어난 사사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사들을 볼 때, 그들 뒤에 계신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방 민족의 고통과 압제 속에서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12월 13일(월)
♦ 12월 13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사기 11:1∼40 ♦ 묵상을 위한 주제 : 거민의 머리(8절) ♦ 성구 : 길르앗 장로(長老)들이 입다에게 대답(對答)하되 이제 우리가 당신을 찾아온 것은 우리와 함께 가서 암몬 자손(子孫)과 싸우게 하려 함이니 그리하면 우리 길르앗 모든 거민(居民)의 머리가 되리라.
“모든 거민의 머리(our head over all who live)”라는 의미를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길르앗의 통치자"라고 소개합니다.
“입다”는 아버지 “길르앗”과 창녀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서자(庶子)의 설움’을 받아 아버지의 기업을 받을 수 없다며 길르앗의 부인이 낳은 자녀들에 의해서 쫓겨나 “돕” 땅에 거주했습니다.
“적자(嫡子)와 적녀(嫡女)”는 정실부인에게서 태어난 남자와 여자를 말합니다.
“서자(庶子)와 서녀(庶女)”는 양인 출신의 첩에게서 태어난 남자와 여자를 말합니다.
“얼자(孽子)와 얼녀(孼女)”는 천민 출신의 첩에게서 태어난 남자와 여자를 말합니다.
“서얼(庶孼)”이란 양반과 노비 사이에서 태어난 얼자를 말하며 노비와 같은 천민의 대우를 받았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홍길동”이라고 하겠습니다.
얼마 후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침략하려 하므로 길르앗의 장로들은 ‘입다’에게 “우리의 장관”이 되라며 도움을 요청합니다.
입다는 언제는 나를 미워하여 아버지의 집에서 쫓아내더니 환난을 당한다고 어찌 나를 찾아왔느냐 하며 묻습니다.
길르앗의 장로들은 “만일 당신이 암몬과 싸워 이기면 우리들의 머리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입다는 장로들과의 약속을 확인 후 암몬과 싸워 승리하고 돌아올 때 나를 가장 먼저 반기는 사람을 번제로 바치겠다고 합니다.
입다가 암몬을 제압하고 돌아올 때 입다의 무남독녀 그의 딸이 춤을 추며 영접하므로 입다는 자기 옷을 찢으며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로다.” 하며 탄식합니다.
그러나 입다의 딸은 아버지가 하나님과 약속한 것이니 말씀대로 행하소서 다만 나에게 두 달의 시간을 허락하면 동무들과 산에 올라가 처녀로 죽음을 애곡하겠다고 합니다.
결국 두 달 후에 입다의 딸은 약속대로 번제의 제물이 됩니다. 이때부터 해마다 이스라엘의 여자들은 길르앗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하였다고 합니다.
함부로 서원하거나 말을 많이 하는 것은 덕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언어에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잠언 29:12)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나으니.”(전도서 5:5)
“네가 서원치 아니하였으면 무죄하니라 마는. 네 입에서 낸 것은 그대로 실행하기를 주의하라 무릇 자원한 예물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네가 서원하여 입으로 언약한대로 행할찌니.”(신명기 23:22∼23)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어떤 조건에 의해서 차별하는 것은 바람직한 방법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할 존재로 인정해야 합니다. 다만 아직도 주님 앞으로 나오지 못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그 심령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기를 기도하며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전념하여 열매 맺는 신앙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021년을 마무리하는 은총의 계절에 내가 맺은 열매는 무엇인가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라던 주님의 준엄한 책망의 말씀을 되새겨 봅시다.
♪ 찬양 / 예수가 함께 계시니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사사기 11:8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에게 대답하되 이제 우리가 당신을 찾아온 것은 우리와 함께 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하려 함이니 그리하면 우리 길르앗 모든 거민의 머리가 되리라. 아멘
길르앗 모든 거민의 머리가 되리라
(현대인의 성경) 당신이 길르앗 사람의 통치자가 될 것이오
(우리말 성경) 당신은 우리 길르앗 사람들의 우두머리가 될 것입니다
길르앗(Gilead) : 강하다 므낫세의 손자, 길르앗인의 조상(민 26:29, 수 17:1) 입다(Jepthah) : 그가 열다
사무엘상 22:1-2 다윗이 그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 듣고는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 장관이 되었는데 그와 함께한 자가 사백명 가량이었더라.
사사기 11:37
또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일만 내게 허락하사 나를 두 달만 버려 두소서 내가 내 여자 친구들과 산에 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
* 입다의 딸은 성소에서 평생 처녀로 봉사하였다
사사기 11:33
아로엘에서부터 민닛에 이르기까지 이십 성읍을 치고 또 아벨 그라밈까지 매우 크게 무찌르니 이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하였더라.
에베소서 5:17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오늘의 기도
주의 뜻을 끝까지 따르게 하옵소서 불낙지교회로 세워주옵소서
묘서동처(猫鼠同處)
대학 교수들이 올해의 사자성어로 선택한 사자성어 묘서동처(猫鼠同處)란 "고양이와 쥐가 함께 있다"는 뜻이다. 즉 "도둑을 잡아야 할 사람이 도둑과 한패가 됨을 의미한다."
교수신문은
전국 대학교수 880명을 상대로 설문 조사한 결과 29.2%(514표)가 ‘묘서동처’를 올해의 사자성어로 꼽았다고 12일
밝혔다. 조사는 지난달 26일부터 지난 2일까지 응답자들이 6개의 사자성어 중 2개씩 선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묘서동처’는
중국 당나라 역사를 기록한 ‘구당서’에서 처음 등장한다. 그 내용에 따르면, 한 지방 군인은 집에서 고양이와 쥐가 같은 젖을
빨고, 고양이가 쥐를 해치지 않는 모습을 보게 된다. 군인의 상관이 그 고양이와 쥐를 임금에게 바쳤고, 중앙관리들은 ‘복이
들어온다’며 기뻐했다. 이 모습을 본 단 한명의 관리만이 “이것들이 실성했다”며 한탄했다.
통념상
쥐는 곡식을 훔쳐먹는 ‘도둑’에 비유되고, 고양이는 쥐를 잡는 동물로 여겨진다. 때문에 쥐와 고양이가 함께 있다는 것은 ‘도둑을
잡아야 할 사람이 도둑과 한패거리(한통속)가 됐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이 같은 의미의 사자성어가 올해의 사자성어로 뽑힌 것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 임직원 땅 투기 사건 등 정치 사회적 사건들을 비판한 것으로 풀이된다.
‘묘서동처’를
뽑은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는 “국정을 엄정하게 책임지거나 공정하게 법을 집행하고 시행하는 데 감시할 사람들이 이권을 노리는
사람들과 한통속이 돼 이권에 개입하거나 연루된 상황을 수시로 봤다”며 그 이유를 설명했다.
이어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분립이
묘서동처 격이라면, 한 마디로 막나가는 이판사판의 나라”라며 “기본적으로 케이크를 자르는 사람은 케이크를 취해선 안 된다.
케이크도 자르고 취하기도 하는 꼴, 묘서동처의 현실을 올 한해 사회 곳곳 여러 사태에서 목도했다”고 했다.
한
60대 인문학 교수 또한 “국가나 공공의 법과 재산, 이익을 챙기고 관리해야 할 처지에 있는 기관이나 사람들이 불법과 배임,
반칙을 태연히 저지른다. 감시자, 관리자 노릇을 해야 할 사람이나 기관이 호시탐탐 불법, 배임, 반칙을 일삼는 세력과 한통속이 돼
사적으로 이익을 챙기는 일들이 속출한 양태”라며 ‘묘서동처’를 뽑았다고 밝혔다.
두
번째로 많은 표를 받은 사자성어는 ‘사람과 말이 모두 지쳐 피곤하다’는 뜻의 ‘인곤마핍’(人困馬乏)이었다. 삼국지에서 유비가
피난길에 ‘날마다 도망치다 보니 사람이나 말이나 기진맥진했다’고 한 데서 따온 사자성어다.
이를 뽑은 교수들은 코로나 팬데믹을
이에 비유하며 “코로나를 피해 다니느라 온 국민도 나라도 피곤한 한 해였다” “코로나로 힘든 시국에 정치판도 비상식적인 모습을
보인다” 등 반응을 보였다.
3·4위는
‘이전투구’(泥田鬪狗), ‘각주구검’(刻舟求劍)이 뽑혔다.
‘이전투구’는 ‘진흙탕에서 싸우는 개’,
‘각주구검’은 ‘칼을 강물에
떨어뜨리자 뱃전에 그 자리를 표시했다가 나중에 그 칼을 찾으려 한다’는 의미다.
그 뒤로는 ‘백 자나 되는 높은 장대 위에
올라섰다’는 뜻의 ‘백척간두’(百尺竿頭)와 ‘아이가 물에 빠지려 한다’는 뜻의 ‘유자입정’(孺子入井)이 올랐다.
히브리어 라(나쁜 악 역경)는 라아(괴롭히다)에 뿌리 둔 단어입니다.
라는 구약에 667번 나옵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창 2:8) 소돔 사람들은 악하였으며(창 13:13) 그들의 잘못(창 37:1) 참담한 말씀(출 33:4)
사나운 짐승(레 26:6) 곤경을 당하지 않게(11:15) 나쁜 일을 저질러서(신 9:18) 악한 영(삼상 16:14) 등에서
쓰였습니다.
영어 성경은 라를 디재스터(disaster· 화 참사) 이블(evil· 악) 애너미(enemy· 적) 리프로치(reproach· 나무람 비난) 디스그레이스(disgrace· 망신 불명예) 등으로 번역했습니다.
선지자
스바냐가 전했습니다.
“도성 시온아, 노래하여라. 이스라엘아, 즐거이 외쳐라. 도성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주님께서 징벌을 그치셨다. 너의 원수를 쫓아내셨다. 이스라엘의 왕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사람들이 예루살렘에게 말할 것이다. 시온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힘없이 팔을 늘어뜨리고 있지
말아라. 주 너의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신다. 구원을 베푸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너를 보고서 기뻐하고 반기시고, 너를 사랑으로
새롭게 해주시고 너를 보고서 노래하며 기뻐하실 것이다.”(습 3:14~17, 새번역)
다시는 화(禍)를 입을까 두려워하지 않을 기쁜 그 날을 기다립니다.
무종교, 탈기독교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신이나 초월적 존재 대신,
인간 자신을 숭배하면서 불멸과 신성,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러면서 교회를 향해 의심과 비판의 질문을 던집니다. 기독교인 역시 신앙
난제를 호소하며 묻습니다. 국민일보는 창간 33주년을 맞아 이 같은 솔직한 질문에 대해 정직한 답변을 드리고자 합니다. 성경은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벧전 3:15)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가진 소망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코로나 팬데믹에 이어 변종 오미크론의 집단감염까지 확산하는 현실에서 한국교회엔 질문이 쏟아진다.
‘당신들이 믿는 하나님은 왜 침묵하느냐’, ‘기독교인이라면 바이러스가 피해 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조롱 섞인 것들이다.
박영선(73) 남포교회 원로목사는 이에 대해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런 질문을 하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내려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너희가 믿는 신은 도대체 뭐냐.’ 이는 구약 시대부터 계속해 등장하는 질문이다.
박 목사는 최근 출간한
‘고난이 하는 일’(IVP), ‘미안해, 잘해 볼게!’(무근검) 등을 통해 위드 코로나 시대의 그리스도인에게 깊이를 갖출 것을
요구했다. 순교의 시대를 지나 부흥의 시대, 별 노력 하지 않아도 성도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던 시기를 거쳐 한국교회는 이제야 비로소
수치와 부끄러움을 감내하고 내적 수준과 깊이를 더하라는 요구를 받고 있다고 밝혔다.
수많은 교회가 전도폭발 프로그램
등을 통해 새신자를 출산하는 부모의 역할에 치중했다면, 이제는 낳아놓은 자식들을 깨우쳐 길러내는 교사로서 신앙의 깊이를
본격적으로 파고들어야 한다고 진단했다. 지난 4일 서울 송파구 교회에서 만난 박 목사는 예수를 믿는 것의 정의부터 다시 얘기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게 뭘까요. 코로나를 기회로 믿지 않는 이들뿐만 아니라 믿는 성도들에게도 이를 설명해야 합니다. ‘내가 이미 죽음을
넘어 영생을 가지고 있다면, 이 정도 고난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걸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를 보내셔서 안 믿는
당신들과 동일한 고통을 받게 하신다’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거기까지만 말해도 성공입니다. 믿지 않는 이들이 못 알아 듣는 게
당연합니다.”
‘교회는 답을 가지고 있느냐’는 세상을 향해 ‘교회도 답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걸 통해 더
성숙해지고 깊어질 것이다’란 메시지만 줘도 충분하다는 뜻이다. 고난과 죽음을 넘어서는 그리스도인의 의연함, 초대교회부터 내려온 이
전통, 구원과 영생을 말하며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의 이 모습이 바로 믿지 않는 이들에게 호기심을 일으키고 교회를
바라보게 만드는 핵심이라고 전한다. 박 목사는 “믿는 우리는 모든 걸 아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점, 하나님이 우주와
역사의 주인이시고,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분(출 34:6)이란 점을 아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명설교가로 꼽히는 박 목사는 1985년 남포교회를 개척한 이후 지금까지 설교 사역을 계속하고 있다. 83년부터 2013년까지
합동신학대학원대에서 설교학 교수로 강의하며 복음주의에 적을 둔 신학적 다양성을 폭넓게 모색해 왔다. 박 목사는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 우리가 신앙에 대해 가지고 있던 곡해들이 송두리째 부서지는 것이 바로 고난이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스라엘 학자 유발 하라리는 베스트셀러 ‘사피엔스’에서 종교는 인간이 만든
“상상의 질서”일 뿐이라고 깎아내렸다. 후속작 ‘호모 데우스’엔 이렇게 적었다. 언젠가부터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가 “창조하는
힘에서 반응하는 힘”만 과시하고 있다고.
하라리가 아니더라도 명망 있는 학자 중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가
수두룩하다. 영국의 리처드 도킨스는 ‘신, 만들어진 위험’ 말미에 이런 글을 적어두었다. “나는 우리가 과감하게 용기를 내어
성장함으로써 모든 신을 단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은 이 같은 주장들에 어떻게 응수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존재를 긍정하게 만드는 논리는 무엇인가. 지난 3일 경기도 성남 만나교회(김병삼 목사)를 찾아간 건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듣기 위해서였다. 김병삼 목사는 ‘하나님의 존재=인간의 상상’이라는 견해에 대해 “인류사에서 계속 제기돼 온 주장”이라며
말문을 열었다.
“인간은 바벨탑을 지을 때부터 끊임없이 신의 존재에 의심을 품었어요. 그리고 그럴 때마다 인간은
전쟁이나 전염병으로 절망에 빠지곤 했죠. 인간의 힘으로 뭐든 할 수 있다며 교만에 빠진 순간마다 처절하게 실패를 맛본 게 인류의
역사였어요.”
그러면서 대화는 과학을 대하는 기독교인의 태도에 관한 이야기로 뻗어 나갔다. 신학과 과학의 관계가 대립이 아닌 공존의 구도를 띨 수도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김
목사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과학은 그 일을 어떻게 풀어나갈지는 밝힐 수 있으나 왜 벌어졌는지에 대한 근본 원인은 하나님만
알고 있다”면서 “하나님이 계시를 할 때만 그분의 뜻을 알 수 있다는 것, 그게 인간이 가져야 할 겸손한 태도”라고 말했다.
김
목사가 거듭 강조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이었다. 그는 “기독교가 힘을 잃은 이유는 크리스천들이 세상에 드러난 ‘현상’에만
집중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기독교의 본질은 ‘체험’이 아니라 하나님과 끊임없이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인터뷰를 앞두고 준비한 자료를 건네줬다. 거기엔 영국 기독교 사상가이자 문학가인 CS 루이스가 저서 ‘순전한 기독교’에 썼던
문구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과학에서 사용하는 도구는 여러분의 외부에 있는 것들(현미경이나 망원경)인 반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도구는 여러분 자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물들의 배후에 무언가-그 사물들과 다른 종류의 무언가-가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는 과학이 던질 질문이 아닙니다.”
“기쁨과 능력과 평화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그것을 가진 존재에게 가까이 가야 하며, 더 나아가 그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속 기독교인은 하나같이 뒤틀려 있다. 최근
방영된 ‘지옥’ 역시 마찬가지다. 미디어를 통해 드러나는 기독교인의 모습은 대개 부정적이다. 세상이 기독교를 향해 던지는
메시지들도 다르지 않다. ‘기독교는 이중적이다’ ‘비합리적이다’ 등이 사회의 일반적 외침이 됐다.
이런 시선에
기독교인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지난 3일 서울 강서구 이음숲교회를 찾아 손성찬 목사에게 답을 구했다. 손 목사는 “누군가 제게
‘기독교인은 왜 이래요’라고 묻는다면 전 아마도 그분께 ‘정확하게 보셨고, 합리적인 비판이 맞습니다’라고 얘기할 것 같다”고
말했다.
기독교를 변호할 거라 생각했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답변이었다. 손 목사는 “(그 사람은) 기독교에 대해 화가 나 있는 상태이지 않나. ‘우린 그렇지 않다’며 싸울 필요가 전혀 없다. 변명할 게 아니라 죄송한 게 맞다”고 했다.
손 목사는 “언어에는 말과 행동 두 가지가 있다. 사랑한다면서 때린다면 사랑한다는 말이 거짓이라 생각하듯 우리는 둘 중 행동의 언어를 더 믿는데, 이게 메시지와 메신저의 문제로도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메시지가 복음이라면 메신저는 이를 전달하는 사람이 된다. 메신저의 부정적 행동을 통해 메시지 자체도 거짓이 돼 버릴 수 있다”고 전했다.
손
목사는 지금 한국교회에 결여된 것은 ‘솔직함’이라고 말했다. 그는 “기독교에 대한 이런 시선들이 확대 재생산되는 이유는 이미
깔린 문제가 많기 때문이다. 자꾸 아닌 척하는데 이 역시 교회의 책임임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손 목사는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이까지 같이 버리진 말 것”이라는 서양 격언을 인용하며 “기독교에 대한 비판의 시선이 주관적이라는 걸 깨닫게 해줄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손
목사는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시선에 맞대응할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왜 그렇게 말하는지 그 사람 개인적 맥락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손 목사는 “우선 그 사람의 상황에 공감해야지 않겠냐”며 “이 말을 왜 했을까, 이 질문을 왜 했을까 고민하고
같이 답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답을 주는 건 충분조건일 뿐 필요조건은 관심이라고 했다.
그는 “사람들은
한번 앉은 자리에 계속 앉는 경향이 있다.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의자를 옮기는 때가 있는데, 의자가 망가졌거나
불편해졌을 때”라며 “기독교 신앙 역시 마찬가지다. 자기 삶의 어떤 부분이 고장 났다 느낄 때 주를 찾게 되는데, 그때
기독교인으로서 손을 잡아줄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했다.
12월 11일(토)
♦ 12월 11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사기 10:1∼18 ♦ 묵상을 위한 주제 : 여호와께서 근심하시니라(16절) ♦ 성구 : 자기(自己) 가운데서 이방 신(神)들을 제(除)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困苦)를 인(因)하여 마음에 근심하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근심하시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급에서 노예로 살았던 경험이 있었기에 신분 사회의 아픔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약속의 땅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새로운 공동체를 세워야 합니다.
그러나 주위 여러 민족들이 강한 힘을 갖는 것은 그들을 통치하는 절대 군주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하여 미디안 사람들과 전투에서 승리한 기드온에게 우리의 왕이 되어 달라고 간청한 것처럼 강력한 군주의 존재를 갈망합니다.
기드온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왕은 오직 단 한분 하나님이시라며 백성들의 간청을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안타깝게도 기드온은 유일한 통치자 왕을 말하면서도 금을 모아 에봇을 만들었고 첩을 많이 두어 칠십 명이나 되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여전히 기드온에게도 또한 우리들에게도 남아 있다고 하겠습니다.
세겜의 첩은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을 낳았고 아비멜렉의 탐욕은 기드온이 죽은 후에 스스로 왕이 되려고 기드온의 칠십 명의 아들들을 몰살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아비멜렉도 그를 시기하는 세겜 백성들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이러한 비극이 모두 끝난 후 정신 차린 이스라엘 백성은 한동안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무릎 꿇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평안 속에 살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평화로운 삶에 만족하지 못한 백성들은 또다시 반복되는 악순환 고리를 끊지 못하고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려 섬기지 않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됩니다.
지긋지긋한 악순환 고리를 끊지 못하는 백성들처럼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반복되는 삶의 악순환 고리가 있습니다.
이제는 결단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당장 끊어버리십시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 주님을 향하여 담대하게 나가야 합니다.
오, 주님 일어나 걷게 하소서 뒤를 돌아보지 않게 하소서 미련을 버리고 꿈을 찾아가게 하소서
♪ 찬양 / 주여 지난 밤 내 꿈에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사사기 10:16
자기 가운데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를 인하여 마음에 근심하시니라. 아멘
* 하나님의 근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를 인하여 마음에 근심하시니라.
현대인의 성경 / 아파하셨다 새번역, 공동번역 / 보고만 계실 수 없었다
* 근심하다(카차르, qâtsar) קָצַר
견디지 못하다, 번뇌하다, 추수하다 이스라엘의 회개와 삶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
사사기 10:1
아비멜렉의 후에 잇사갈 사람 도도의 손자 부아의 아들 돌라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니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도도(Dodo) 사랑함 * 부아(Puah) 입 * 돌라(Tola) : 벌레
사사기 10:3
그 후에 길르앗 사람 야일이 일어나서 이십 이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니라.
* 야일(Jair) : 하나님이 교화시킴
사사기 10:6-7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려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블레셋 사람의 손과 암몬 자손의 손에 파시매.
사사기 10:10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폴 틸리히(Paul Johannes Tillich) 1886. 8. 20~1965. 10. 22
- 종교는 문화의 실체(내용), 문화는 종교의 형식 - 타락한 문화 1. 맘몬주의 2. 소비주의 3. 쾌락주의 4. 성장주의 - 종교다원화, 포스트모더니즘
고린도후서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오늘의 기도
근심을 회개로 바꾸게 하소서! 불낙지교회로 세워주옵소서!
이스라엘의 문제
평화로울 때는 하나님이 가져다주신 평화에 도취되어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제가 있을 때는, 그 문제의 해결에만 목적을 두고 문제만 해결되면 하나님을 외면합니다. 현안
해결이 하나님보다 더 큰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우리의 영원하고도 완전한 왕으로 보좌에 좌정하고 계시는데,
이스라엘은 그 왕 되신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자기들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합니다. 문제 해결,
현안 해결에만 지대한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소유화하고 도구화합니다.하나님이 사사 돌라를 통해서, 사사
야일을 통해서 행하시려는 바는 단지 그들을 어려움에서 구해주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구원의 현장을 통해서 그들의 진정한 왕되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왕이 없으므로 각자의 소견에 좋을 대로 하는 그 시대에, 사사 돌라를 통해 23년
동안, 사사 야일을 통해서 22년 동안 진정한 왕이 누구인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구원자이신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사사를 세우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근심
눈에 보이는 평화와 번영의 시기에, 그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져듭니다.
11-13절에서 하나님은 한탄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시되 내가
애굽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에게서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였느냐 또 시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마온 사람이
너희를 압제할 때에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므로 내가 너희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였거늘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자신들의 잘못을 고백하며 구원을 요청하는 이스라엘의 울부짖음을 하나님께서 들으셨습니다(15-16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되 우리가
범죄하였사오니 주께서 보시기에 좋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니와 오직 주께 구하옵나니 오늘 우리를 건져내옵소서 하고 자기
가운데에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울부짖음을 듣고 계신 하나님은 그들이 당하는 말 못할 수고와 고통을 보시고 마음에 근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십니다. 죄악에 대하여 엄격하시지만 그 죄악으로 고통당하는
자녀들의 모습을 보시고 마음 아파하십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여전히 실패와 죄악의 패턴을 반복하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시면서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 때문에 진노하시면서도 또한 그 죄악의 곤고함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때문에 마음 아파하십니다.
보이는 것 너머에 계신 하나님
오늘 우리가 선 자리는 어디입니까? 또 죄악 가운데 넘어져 주님께 부르짖고 있습니까?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는 문제의 실타래
한가운데 서 있습니까? 문제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때입니다. 좀처럼 찾아올 것 같지 않던 평화의 시대, 번영과
성공의 자리에 서 있습니까? 우리 눈에 보이는 평화와 권세, 번영과 성공 그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견고히 바라보아야 할
때입니다. 문제 해결에 혈안이 되어있는 나의 시선을 문제 너머에 계신 하나님께로 돌려야 합니다. 지난 시간의 성공적인 결과에
도취되어 또 다른 성공과 더 큰 만족을 찾으려는 나의 시선을 들어 영원하고도 완전한 왕이신 하나님께로 돌려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눈에 보이는 그 현안 너머에 계신 왕 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하루가 되십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 땅과
하늘을 다스리시는 영원하고도 완전하신 우리의 왕이십니다. 하나님을 참된 내 인생의 왕으로, 내 개인을 넘어 가정, 교회, 국가와
민족, 세계의 진정한 왕으로 그분을 바로 볼 때, 오늘 우리는 죄악의 반복되는 실패의 패턴을 끊고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참된 승리와 안식의 삶,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인 X의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아파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다. 그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의 새 걸음을 시작할 때 비로소 오늘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이 땅 가운데
펼치시는 하나님의 역사의 현장,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현장이 될 것입니다.
사사기는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징벌의 도구를 들어 징계하시고,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지도자(사사)를 택하신
후 사사를 통해 구원하시고 평화를 얻어 생활하다가 다시 죄를 짓고, 하나님께서는 징계하시는 일련의 과정들을 보여주는
기록입니다.
또한 후반부에는 애굽을 나와서 가장 잔악한 사건이 발생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사시기에는 총 13명(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을 포함할 경우)의 사사가 나옵니다.
사사기 1장
사사기 1장, 여호수아 죽은 후, 각 지파별로 적과 싸우며 쟁취해 가는 과정. 가나안
사람과 전쟁을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유다지파를 올려보내고, 유다지파는 함께 인접해 살고 있는 시므온 지파와 함께 갈 것을
요청하여 싸워 베섹에서 승리함. 왕인 아도니 베섹을 만나 수족이 여섯인 그를 잡아 수족의 엄지가락을 자르고 끌고 가니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죽음.(7절)
예루살렘을
쳐서 파하고 헤브론(기럇 아르바)을 취함. 기럇 세벨을 취함. 이 지역을 갈렙의 아우(조카임, 갈렙의 나이가 85세인데,
웃니엘이 친 동생이라면 결혼적령기의 나이차이가 너무 많이 나게 되죠, 광야에서 20세 이상은 다 죽었을 것이니까 잘 맞지
않습니다.)인 옷니엘이 취하여 갈렙이 딸 악사를 아내로 줌. (13절)
모세의 장인은 겐사람으로 백성 중에 함께 거한 것이 나옴. (민수기 10장 29절에서 아마도 모세가 처남 호밥에게 같이 가자고 했던 때에 함께 했을 가능성이 높음)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한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지 못해 지금까지 예루살렘에 거함.(21절)
요셉 족속이 벧엘을 취함.(25절)
므낫세, 에브라임, 스불론, 아셀, 납달리, 단 지파들이 대부분 쫓아내지 못함.
사사기 2장
사사기
2장, 여호와의 사자(과연 누굴까?)가 길갈에서 보김에 이르러 그 땅 거민과 언약하지 말고 그들의 단을 헐라했는데 청종치
않았다고 책망하고, 그들을 쫓아내지 않고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의 올무와 가시가 될 것이라고 말하자,(3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리
높여 움.
여호수아가 죽은 후 일어난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일을 알지 못함.(10절)(대단히 가슴아프고 의미있는 부분으로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잃어버리고 상관없이 살아가는 오늘날의 모습을 표현한 내용으로 이해됨)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을 섬기며 악을 행함.
여호와께서 노략당하게, 대적의 손에 패하도록 하시고, 재앙을 내리고, 괴로움이 심하게 놔두심.
사사기의 개요같은 내용이 2장 16절부터 19절까지임.
사사를 세우사 대적에게 건져내게 하셨으나 사사 말도 안 듣고 다른 신들을 섬김.
사사를 세울 때는 사사와 함께 하셨고 사사가 죽은 후에는 패괴하였음.
여호수아가 죽을 때 이방 열국을 남겨 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도를 행하는지 시험하려 함임.(21-23절)
사사기 3장
사사기 3장, 전쟁을 알지 못하는 세대에게 가르쳐 알게 하기 위해 남겨두신 열국으로 여호와께서 명하신 명령을 청종하나 알고자 하셨습니다. (4절)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그 이방 열국과 아들과 딸을 주고 받으며 그들의 신을 섬겼습니다.(6절)
첫 사사 옷니엘(7-11절)
1. 악을 행함,
2. 메소포타미아(구산 리사다임이 왕)를 사용, 8년간 섬김,
3. 부르짖음.
4.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을 택하심, 구원하시고 40년을 평안함.
둘째 사사 에훗(12-30절)
1. 악을 행함,
2. 모압(에글론이 왕)을 사용, 18년 섬김,
3. 부르짖음,
4. 베냐민 지파 에훗(왼손잡이:오른손이 불구임을 의미하는 말임)을 택하심, 에글론을 칼로 암살, 구원하시고 80년을 평안함.
19절에 '돌 뜨는 곳'은 '신상 만드는 곳'을 의미하는 단어 '페실림'을 번역한 것임.
셋째 사사 삼갈(31절)
소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600명을 죽이고 이스라엘을 구원
사사기 4장
넷째 사사 여 선지자 드보라
1. 악을 행함,
2. 가나안(야빈이 왕)을 사용, 20년간 학대,
3. 부르짖음.
4. 드보라를 선택, 전쟁에서 바락을 보내려하나 드보라와 함께가기를 청함. 바락과 드보라가 게데스로 가서 스불론, 납달리 만명을 택하고 전쟁을 치름.
다 이기고 적장 시스라가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에 숨자 야엘이 시스라를 죽임. 그후 야빈을 진멸시킴. (24절)
그때, 모세의 장인의 자손 중 겐 사람 헤벨이 게데스에 살고 있었음. (11절)
사사기 5장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
백성들이 즐거이 헌신하였음. (2절, 9절)
*번역의 차이가 어떻게 나타날지 모르겠으나, 헌신이라는 단어가 출애굽기에서 나오고(아론의 지도하에 우상을 만들었을 때 모세를 돕는 레위인들에게 사용된 단어임) 두번째 등장하고 있음.
“여호와여 주의 대적은 다 이와 같이 망하게 하시고 주를 사랑하는 자는 해가 힘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31절)
40년간 태평하게 함.
사사기 6장
다섯째 사사 기드온
1. 악을 행함,
2. 미디안을 사용, 7년간 압제
3. 부르짖음.
4. 기드온을 선택, 40년이 평안함.(8장 28절)
11절부터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에게 나타나신 여호와의 사자,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 사명을 깨워주는 순간입니다.
기드온 : 함께 계시는데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항변하는 기드온.
여호와 : 내가 너를 보내니 미디안에서부터 구해내라. 소명을 주시는 하나님(14절)
기드온 : 므낫세 지파 중 가장 미약한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여호와 : 너와 함께 하리니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 치듯 하리라.
기드온 : 당신이 주님이신 표징을 보여달라. 예물 준비해서 드릴 때까지 기다려달라.
기드온이 반석위에 고기와 무교전병을 두자, 여호와의 사자가 지팡이 끝으로 사름.
기드온이 단을 쌓고 "여호와 살롬"이라고 함.(24절)
기드온이 사명을 감당하는 행사를 하도록 하나님이 지시하심.
즉, 밤에 바알의 단을 헐고 아세라 상을 찍고(목상이니까 찍어야 함) 한을 쌓은 후에 아세라 나무로 불에 태워 번제로 둘째 수소를 드림. (27절)
성읍사람들이 낮에 이 사실을 알고 항의를 하러 기드온 집에 옴. 아버지 요아스가 강변하고 끝냄.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고 칭함. (바알과 대항하다라는 뜻, 성경에서는 "바알의 단을 훼파하였을 즉 바알이 더불어 쟁론할 것"임.)(32절)
미디안, 아말렉, 동방 사람이 요단을 건너와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침.
여호와의 신(성령님)이 기드온에게 강림하고, 기별하여 백성을 모음.
기드온이 양털을 가지고 소명을 확인함. (36-40절) 타작마당에 둔 양털과 마당을 번갈아 가면서 한 쪽만 적시게 하는 모습을 보여주시고 확인하는 기드온. 양털먼저, 마당 다음에.
사사기 7장
기드온 진영이 하롯샘 곁에 진치고, 미디안은 모레산 앞 골짜기에 진을 침 (1절)
하나님께서 사람의 힘으로 이겼다고 할까 두려워 너무 많다고 하고 두려워하는 자는 돌려보내라고 지시하니 2만 2천명이 돌아가고 1만명만 남음. (3절)
그래도 많다고 해서 물가에서 물을 핥는 자를 빼고 무릎을 꿇고 물을 먹는 자는 다 보내서 300명만 남김.(7절)
밤에 기드온이 부하 부라를 데리고 적진으로 가보니, 적은 메뚜기의 중다함같고, 해변 모래처럼 많더라.(12절)
적진에서 미디안 사람이 자기들끼리 꿈 이야기를 하면서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으로 들어와 장막을 쓰러뜨렸는데 "그것은 기드온의 칼날이었다"라고 해석까지 하는 소리를 들고 확신을 가지고 돌아가 3백명을 3부분으로 나누고 나팔과 휏불을 감춘 빈 항아리를 들고 전진함.
나팔을 불때 손에 가진 항아리를 부수고 왼손에 횃불, 오른 손에 나팔을 불며, 기드온의 칼이여 하고 포위하자, 적군은 서로 칼날로 치게 하고 미디안을 추격함.
에브라임에 기별을 보내 치게 하고 두 방백을 잡아 죽임. 요단 저편에서 기드온에게 나아옴. (25절까지)
사사기 8장
사사기 8장, 에브라임 사람들이 시기한 마음으로 기드온에게 따지려할 때 기드온의 지혜로운 답변으로 갈등을 피하고 힘을 합함. *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기드온 집안)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2절)
기드온 삼백용사들이 비록 피곤하나 따름(4절)
세바와
살문나를 추격하는 과정에서 협조하지 않는 숙곳사람과 브누엘 사람들을 세바와 살문나를 파하고 돌아오면서 징벌함. 세바와 살문나를
데리고 와서 장자 여델에게 처단할 것을 지시하나 두려워하자 기드온이 죽이고, 목에 있는 달의 형상을 장식으로 취함. (21절)
백성들은 기드온과 자식들이 자신들을 다스려달라고 했으나 기드온은 여호와께서만 다스릴 것이라고 말함.(23절)
한가지를 청구하는데, 대적이 차고 있던 금 귀고리를 달라고 함. 이스마엘 후손으로 그들은 금 귀고리를 하고 있었음) 그러자 탈취물을 줌. (금 귀고리, 새달 형상의 장식, 패물, 자색 의복, 약대 목에 둘렸던 사슬)(26절)
기드온이 금으로 에봇을 만들어 성읍 오브라에 두자 이스라엘 사람들이 음란하게 섬기고, 그게 기드온과 집에 올무가 됨.(27절)
기드온이 사는 날 동안 40년이 평온함.(28절)
부인이 많은 기드온이 아들을 70명이나 둠.
세겜에도 첩이 또 있는데 그의 아들이 아비멜렉임.(31절)
기드온은 죽고 아비 요아스의 묘실이 있는 오브라에 장사지냄.(32절)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음.(34,35절)
사사기 9장
기드온 사후에 왕자의 난이 일어나는 모습, 하나님의 심판까지..
아비멜렉이 세겜에 가서 외가쪽의 형제와 친척들에게 자신이 다스리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선동하고, 불량배를 사서 오브라로 데리고 가서 여룹바알(기드온)의 아들들 70명을 다 죽이고, 말째 아들 요담만 숨고 살아남.(5절)
세겜과 밀로 사람이 아비멜렉을 세겜에서 왕으로 삼자 요담이 그리심 산 꼭데기에 올라가서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가시나무 비유를 설명하며,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은 것은 여룹바알과 그 집을 선대함이 아니라고 호소함.
그리고 아비멜렉과 세겜/밀로족속이 서로 불을 내어 사를 것을 예언하고 브엘로 도망함.(21절)
아비멜렉이 다스린 지 3년이 지나 악한 신을 하나님이 보내사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게 함.(23절)
이는 70인을 죽인 죄를 아비멜렉과 세겜사람들에게 돌아가게 하심.(24절)
에벳의
아들 가알이 세겜사람들에게 선동하며, "왜 아비멜렉을 섬기느냐 차라리 세겜 사람들은 하몰이 후손을 섬기는 것이 좋겠다"고 하며
아비멜렉을 저주하자, 세겜 성읍의 장관 스불이 사자를 아비멜렉에게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오게하여 결국 가알과 전투를 벌이게
하고, 가알은 쫓겨 도망하고, 가알을 쫓는 사람들은 아비멜렉의 손에 많이 죽음. 세겜 망대에 있는 사람들 1000명까지 불질러
죽임.
계속
추격하며 아비멜렉이 데베스에 진치고, 성중 망대에 숨은 사람들을 또 불질러 죽이려고 할 때에, 한 여인이 맷돌 윗짝을 아비멜렉
머리 위에 던져 두골을 깨뜨리자, 아비멜렉이 전령을 불러 자신을 죽이게 함. (여인의 손에 죽었다는 소리 듣기 싫다며).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이 형제에게 행한 악행을 갚으신 것임.(56절)
그리고 세겜사람들이 아비멜렉을 추종한 악도 갚으신 것임.(57절). 결국 요담의 저주대로 응한 것임. (57절)
사사기 10장
아비멜렉(여섯째로 우선 분류) 후에, 도도의 손자 부아(일곱째 사사)가 사사로 일어남. (아비멜렉이 사사로 취급되는 것 같음)
23년 다스리고 죽음.
야일(여덟번째 사사)이 사사가 되어 22년을 다스림.
1.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 악을 행함.(6절)
2. 블레셋과 암몬의 학대를 18년 동안 당함.(8절)
3. 부르짖음. 나를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니 다시는 너희를 구원치 아니하리라. 너희가 택한 신에게 부르짖어 구원해달라고 하라. (13,14절)
"이스라엘 사람들의 곤고를 인해 마음에 근심하시니라."(16절)
*정말 가슴 터지는 하나님의 마음아닌가? 이런 백성을 끝까지 데리고 가시는 하나님..
암몬 자손이 길르앗에 진치고, 이스라엘 자손도 미스바에 진을 침.
12월 10일(금)
♦ 12월 10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사기 9:1∼57 ♦ 묵상을 위한 주제 : 내 그늘에 피하라(15절) ♦ 성구 : 가시나무가 나무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왕(王)을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避)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하였느니라.
“내 그늘에 피하라”는 말씀은 기드온의 첩이 낳은 아들 “아비멜렉”이 고향 사람들을 충동하여 기드온의 모든 아들을 죽였을 때 막내아들 “요담”이 그리심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 그리고 포도나무는 왕이 되라는 것을 거절하였으나 가시나무와 같은 ‘아비에셀’은 다른 나무들에게 “너희가 내게 기름을 부어 왕을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렇지 않으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라는 비유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요담”은 세겜 사람들에게 “우리 아버지가 죽음을 무릅쓰고 너희를 위하여 싸워 미디안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주었거늘 우리 아버지의 집을 쳐서 그 아들들을 쳐서 죽인 여종의 아들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웠다”고 빗대어 말했습니다.
에벳의 아들 “가알”은 세겜 사람들의 신뢰를 얻어 “아비멜렉”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데베스 사람들이 견고한 망대 위에 올라갔을 때 “아비멜렉”이 망대 앞에 이르러 불사르려 할 때 마침 망대 위에서 한 여인이 맷돌 위짝을 아비멜렉의 머리 위에 내려던져 그 두골을 깨트리자 아비멜렉은 병기를 잡은 소년을 불러 “나를 찔러 죽이라. 사람들이 그가 여인의 손에 죽었도다! 하고 비웃을 것”을 두려워하여 결국 소년의 칼에 찔려 죽으므로 하나님은 칠십인의 형제들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던 아비멜렉의 악을 갚았습니다.
감람나무는 기름을, 포도나무는 맛 좋은 포도주를 공급하는 것이 그 나무의 본분입니다. 그러나 가시나무처럼 자기의 본분을 잃어버리면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 될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과 사람에게 유용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만일 나에게 어떤 제안이 찾아왔다면 먼저 “이 일이 진실로 하나님과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며 유익을 줄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합니다.
교회는 어떤 직분을 얻기 위하여 모인 공동체가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며 섬김을 실천하며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고 모든 사람에게 기쁨과 유익을 줄 수 있는 믿음을 배우고 훈련하는 곳입니다.
살아있는 유기체와 같은 교회에서 날마다 영적으로 성숙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지기를 함께 기도합시다.
가시나무가 나무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왕을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하였느니라. 아멘
사사기 9:1 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이 세겜에 가서 그 어미의 형제에게 이르러 그들과 외조부의 온 가족에게 말하여 가로되.
* 여룹바알(Jerubbaal) / 바알과 다툼 * 아비멜렉(Abimelech) / 왕의 아버지 * 세겜(Shechem) / 검은, 일부분
사사기 9:5 오브라에 있는 그 아비의 집으로 가서 여룹바알의 아들 곧 자기 형제 칠십인을 한 반석 위에서 죽였으되 오직 여룹바알의 말째 아들 요담은 스스로 숨었으므로 남으니라.
* 요담(Jotham) / 여호와는 바르심
사사기 9:16
이제 너희가 아비멜렉을 세워 왕을 삼았으니 너희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 이것이 여룹바알과 그 집을 선대함이냐 이것이 그 행한대로 그에게 보답함이냐.
사사기 9:23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신을 보내시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였으니.
사사기 9:26 에벳의 아들 가알이 그 형제로 더불어 세겜에 이르니 세겜 사람들이 그를 의뢰하니라.
* 에벳(Ebed) / 종 * 가알(Gaal) / 갚음, 혐오
사사기 9:52-53 아비멜렉이 망대(데베스) 앞에 이르러서 치며 망대의 문에 가까이 나아가서 그것을 불사르려 하더니. 한 여인이 맷돌 윗짝을 아비멜렉의 머리 위에 내려던져 그 두골을 깨뜨리니.
* 데베스(Thebez) / 므낫세 지파에 속한 지역의 요새화된 성
사사기 9:56-57
아비멜렉이 그 형제 칠십인을 죽여 자기 아비에게 행한 악을 하나님이 이같이 갚으셨고. 또 세겜 사람들의 모든 악을 하나님이 그들의 머리에 갚으셨으니 여룹바알의 아들 요담의 저주가 그들에게 응하니라.
갈라디아서 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오늘의 기도
주여 진실하게 하옵소서! 불낙지교회를 세워주옵소서!
12월 9일(목)
♦ 12월 9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사기 8:1∼35 ♦ 묵상을 위한 주제 : 에봇 올무(27절) ♦ 성구 : 기드온이 그 금(金)으로 에봇 하나를 만들어서 자기의 성읍(城邑) 오브라에 두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淫亂)하게 위(爲)하므로 그것이 기드온과 그 집에 올무가 되니라.
기드온은 백성들에게 금을 상납받아 스스로 에봇을 만들었습니다. 금 1700세겔은 대략 20kg을 말합니다. 금 1돈은 3.75g입니다. 금 1700세겔은 대략 5300돈입니다. 엄청난 양의 금으로 제사장의 옷 “에봇”을 만든 것입니다.
기드온은 겉으로는 겸손한척 하며 왕이 되기를 거부했으나 제사장이 입는 ‘에봇’을 만들고 사람들이 자신을 기억해주기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미디안 전쟁을 승리로 이끈 기드온을 세상이 기억해주기를 바라며 만든 기념비와 같습니다.
왕의 버금가는 존경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공성이 불거(功成而 弗居)”란 “공을 이루고 머물지 않는다.” 뜻입니다. 공을 주장하면 이루어 놓은 공도 물러간다고 합니다.
기드온은 아주 작은 자로 포도주 틀 속에 숨어서 밀을 타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기드온을 “큰 용사여!” 하고 부르며 그에게 막중한 사명을 맡겼습니다. 마치 내가 위대하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일을 맡은 것이 아닙니다.
다만 기드온을 세워 미디안 사람들에게 고통을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려고 하셨습니다.
기드온은 가장 작은 자로서 부름을 받아 큰 용사로 사명을 잘 감당했으므로 자기를 나타내려는 것은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교만(驕慢)”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누가 기드온 입니까? 바로 이 사람이 기드온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척 하면서 속마음에는 교만이 꿈틀거립니다.
주여, 나는 절망적인 사람입니다. 나의 부끄러운 모습을 기드온의 거울로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 기드온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동시에 인간의 절망적인 삶도 봅니다.
주님, 내안의 기드온이 기어 나올 때 나를 성령의 바늘로 찔러 깨닫게 하시고 뇌성벽력과 같은 음성으로 멈춰라! 하는 소리도 듣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게 하옵소서.
♪ 찬양 / 영광을 받으신 만유의 주여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12월 8일(수)
♦ 12월 8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사기 7:1∼25 ♦ 묵상을 위한 주제 : 적진을 치라(9절) ♦ 성구 : 이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내려가서 적진(敵陣)을 치라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붙였느니라.
“적진을 치라(against the camp)”
기드온과 그의 군대가 “하롯 샘” 곁에 진을 쳤습니다(1절) “하롯”이란 “떨림”이란 뜻입니다. 하롯이란 지명의 의미에서 느낄 수 있는 분위기는 기드온의 군대가 미디안 군 앞에서 떨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기드온에게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두려워 떠는 자들은 돌아가라고 합니다. 이때 돌아간 백성들이 22,000명이었습니다. 이제 남은 백성들은 10,000명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기드온에게 아직도 백성이 많기 때문에 물가로 내려가서 물을 마실 때 “개가 핥는 것처럼 혀로 물을 핥는 백성”과 “무릎을 꿇고 마시는 백성” 그리고 “손을 움켜 물을 먹는 백성”을 구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결과 손으로 물을 떠서 마시는 백성들은 300명이었습니다.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의 모든 사람들이 마치 메뚜기처럼 많고 심지어 해변의 모래처럼 수다한 백성들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300명의 사람과 무수한 사람과의 싸움에서 어떻게 기드온과 300명의 사람들이 이길 수 있겠습니까?
기드온은 부라와 함께 미디안의 진을 정탐합니다. 미디안 진에서 어떤 사람이 꿈 이야기를 말하는 것을 기드온이 들었습니다. 그 꿈 이야기는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으로 굴러들어와 진을 무너트렸다”고 합니다. 그의 동무는 “이 꿈은 기드온의 칼날이라 하나님이 미디안의 군대를 그의 손에 붙이셨다”고 해석합니다.
기드온은 300명의 용사들을 세 대로 나누어 항아리 작전으로 미디안 군대를 무너트렸습니다.
오늘의 시대에 모든 성도들은 기드온의 300 용사처럼 이 세상을 이겨야 할 주의 군사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군사로서 날마다 삶의 자리에서 영적 싸움에 승리하는 큰 용사가 되어야 합니다.
큰 용사는 내 힘이 강한 것이 아니라 약한 나를 강하고 담대하게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엡 6:12∼13).
오, 주님 약한 나로 강하게 어리석은 나로 슬기롭게 늘 나와 함께 하셔서 삶의 자리에 승리의 기를 세우게 하옵소서 ♪ 찬양 / 피난처 있으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사기 6:1∼40 ♦ 묵상을 위한 주제 : 큰 용사여(12절) ♦ 성구 : 여호와의 사자(使者)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勇士)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사사기 6장에서 "기드온(Gideon)"을 '큰 용사'라고 합니다. 정말 기드온이 큰 용사이었을까요? 기드온은 결코 큰 용사가 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미디안 사람들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밀을 포도주 틀 안에서 타작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이 땅을 살아가면서 때로는 어려워진 상황속에서 한없이 작아진 나 자신을 안타까워함 열등감속에서 괴로워하는가 하면
때로는 모든 일에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러한 모습은 내 자신이 바뀌어진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현실앞에서 변화무쌍한 감정의
기복을 느끼며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조나단 스위프트(Jonathan Swift, 1667. 11. 30~1745. 10. 19)가 1726년에 영국을 배경으로 쓴 ‘걸리버 여행기’라는 작품은 당시 영국의 정치, 경제
상황을 풍자한 것이라고 합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의사로서 세상을 두루 여행하기를 즐기는 ‘걸리버’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배를 타고 여행하다가 뜻밖의 풍랑을 만나 특별한 네 나라를 여행하며 경험한 이야기입니다.
첫번째는 그가 탄 배가 큰 풍랑에 휩쓸려 정신을 잃었다가 낯선 섬에서 깨어납니다. 그곳은 15센티미터밖에 안되는 작은
사람들이 사는 ‘릴리풋’이라는 섬나라였습니다. 그 곳에서 걸리버는 갑자기 거대한 거인이 되어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
작은 사람들의 모순과 음모와 갈등의 세계에서 탈출하여 다시 영국의 자기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나 몇 개월 후에 걸리버는
다시 배를 탑니다.
두번째는 거인들이 사는 ‘브로브딩내그’라는 섬나라였습니다. 그 섬의
사람들은 얼마나 큰지 그들이 사용하는 침대의 높이가 7 미터이고 넓이가 18미터, 길이는 쉽게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고
합니다. 그들의 세계에서 걸리버는 졸지에 인형처럼 작은 사람이 되어 노리개가 됩니다. 거인들은 걸리버의 귀여운 행동을 즐기며
사랑했습니다. 목사이면서 작가였던 조나단 스위프트의 이 이야기는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상황의 변화에 따라 거인으로 또는 소인으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작은 사람들의 나라인
‘릴리풋’에서는 자신이 갑자기 대단한 거인으로 변신하여 한 순간에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며 살아가다가 거인들의
나라인 ‘브로브딩내그’에서는 자신이 갑자기 한없이 작아져 열등감 속에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사사기 6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디안의 침략으로 나라를 잃고 7년동안 극심한 고통중에 있었을 때 기도온이라는 한
사람이 하나님께 사사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기드온은 이방인의 압제속에서도 고통받고 있는 이스라엘백성들을 바라보며 늘 안타까워하며
하나님이 부르실 때에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미디안 사람들이 알게되면 모든 것을 빼앗길까봐 두려워하며 조심스럽게
타작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기드온은 자신에게 나타나셔서 부르시는 하나님께 하소연을 합니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미쳤나이까 또 우리 열조가 일찍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에 있습니까?"(13절)
이해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현실앞에서 기드온은 아픈 현실을 그대로 내어놓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동문서답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12절)…너는 이제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14절)”
이 말씀속에서 스스로 작다고 여기고 있는 기드온속에 깊이 잠들어 있는 거인을 깨우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기드온은 스스로 결코 작은 자라고 생각하며 의기소침하여 포도주틀 밑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14절)
그리고 함께하심속에서 승리의 확신을 주십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16절)
기드온을 향한 소명과 사명과 승리의 확신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미래형이 아니라 현재형입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안의 잠자고 있었던 믿음의 잠재력을 깨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부르실때 그가 대단해서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 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내가 무엇인가 남다른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교만이 우리안에서
싹튼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앞에 부름을 받아 귀하게 쓰임받는 것은 스스로 대단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큰 용사로 불러주시고 믿음의 사람으로 세우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속에 있는 거절감과 열등감을 몰아내주시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위축되고 의기소침해진 저희들의 마음속에 성령의
기운을 불어넣어 주실 것입니다.
‘큰 용사여 일어나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오늘 이 시대에 믿음의 거인으로 살아가라!”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경험한다면 어떤 상황속에서도 두려워하거나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용기를 내십시요.
하나님은 범인으로 살고 있던 우리 속에 있는 거인의 모습을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큰 용사 즉 거인으로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 찬양 / 십자가 군병들아 주 위해 일어나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사사기 6:12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아멘
* 기드온(Gideon) / 나무 찍는 사람(베히는 자)
* 큰용사여(깁볼 헤하일) - 능력 있는 용사 * 유력한 자(룻기 2:1)
믿음이란?
미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 하나님의 관점
(예) 베드로 - 사람을 낚는 어부
사사기 6:1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붙이시니.
미디안은 누구인가? 창세기 25:1-2
아브라함이 후처를 취하였으니 그 이름은 그두라라. 그가 시므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를 낳았고.
미디안(Midian) / 다툼
사사기 6:7-8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을 인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은고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사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며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여.
사사기 6:14
여호와께서 그를 돌아보아 가라사대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부르시는 일군의 모습 사사기 6:15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
모세 / 출애굽기 4:10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떨기나무 불꽃(3:2), 나의 영원한 이름 나의 표호(3:15), 지팡이와 뱀(4:3), 손을 품에 넣으라(4:6-7)
베드로 / 누가복음 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4절) *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10절)
바울 / 고린도후서 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10절)
시편 86:17 은총의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저희가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심이니이다.
오늘의 기도
은총의 표징을 주시옵소서! 불낙지교회로 세워주시옵소서!
12월 6일(월)
♦ 12월 6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사기 5:1∼31 ♦ 묵상을 위한 주제 : 메로스를 저주하라(23절) ♦ 성구 : 여호와의 사자(使者)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詛呪)하라 너희가 거듭 거듭 그 거민(居民)을 저주(詛呪)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勇士)를 치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도다.
“메로스를 저주하라(Curse Meroz)” “메로즈(Meroz)”란 “물러가다”는 뜻으로 “드보라”와 “바락”이 철병거 900승을 보유한 가나안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에훗 왕”이 “시스라”를 앞세워 이스라엘을 공격할 때 도움을 거절했던 성읍이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후 “드보라”는 “바락”과 함께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하는 찬양을 드렸습니다(드보라와 바락의 노래).
“여호와의 일을 태만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란 말씀에서 저주하는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예레미야 48:10).
오늘의 메로스는 누구일까요? 원수 사탄 마귀는 마지막 때에 믿는 자들을 무너트리려고 달려들 것입니다(계 12:12). 이때 이 싸움에 참여하지 않고 방관하거나 아니면 싸움을 회피하는 사람이곧 ‘메로스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메로스의 주민들은 이스라엘을 도와 함께 싸울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그들의 안전만을 생각하여 거절했습니다. 그 결과 전쟁 후에 저주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그리스도인은 영적 전쟁에서 항상 진리의 편에 서야 합니다. 때로는 진리 편에 서는 것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과정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싸움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공동체를 위한 것이므로 함께 고통과 아픔을 나눠야 합니다. 왜냐하면
형제의 어려움을 외면하는 것은 사랑이 없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여 예수님께서 저주했던 무화과나무가 말라 죽었던 것처럼 오늘날도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같은 사회적인 약자들을 외면하므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신앙은 생명이 없는 죽어버린 신앙이 될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불신자들과 낙심한 사람들 그리고 결단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을 찾아 하나님 편에 세워갈 수 있는 실천적인 믿음으로 하늘의 기쁨을 채워가는 일에 동참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사사기 5:23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 거듭 그 거민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도다. 아멘
* 여호와를 돕다 / 사람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도울 수 있는가?
메로스(Meroz) / 뜻 : 물러가다
에스드랄론 계곡이나 그 근처의 장소로 에스르엘 골짜기 남방 경사지 베이산(Beisan) 남서쪽 80km 지점. 이곳 주민들의 비애국적 태도는 드보라의 노래 가운데서 알 수 있다(삿 5:23). 이유는 시스라와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을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락의 출신지(시기로 인한 불참)
사사기 5:24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은 다른 여인보다 복을 받을 것이니 장막에 거한 여인보다 더욱 복을 받을 것이로다.
야엘(Jael) / 뜻 : 산양
겐 사람 헤벨의 아내(삿 4:17)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패주하여온 시스라를 자기 장막에서 죽임으로 이스라엘측의 칭찬을 받았다(삿 5:24). 그 전말은 산문과 운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삿 4:17-22, 5:24-27).
내 마음이 이스라엘의 방백을 사모함은 그들이 백성 중에서 즐거이 헌신하였음이라 여호와를 찬송하라.
1. 무릎을 꿇다 2. 하나님께 기원하다 3. 찬송하다 4. 복을 받다
사사기 5:6
아낫의 아들 삼갈의 날에 또는 야엘의 날에는 대로가 비었고 행인들은 소로로 다녔도다.
* 대로가 비었다 통행세를 받기 때문에 오솔길로 다녔다
사사기 5:20
별들이 하늘에서부터 싸우되 그 다니는 길에서 시스라와 싸웠도다.
역사가 요세푸스 시스라 군대 앞에서 일으킨 바람, 폭풍우, 천둥번개, 우뢰
요한삼서 1:4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오늘의 기도
진리를 따라 살아가게 하옵소서! 불낙지를 찾아 복음을 전하게 하옵소서!
사무엘상 17: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복(福)
무형적(無形的) 복 유형적(有形的) 복
시편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다니엘 12:2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내 그늘에 피하라
가시나무의 공허한 약속 가시나무는 왕직의 제안을 받자 그것이 진심인지 여부를 조건으로 건다.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왕을 너희들 위에 삼겠거든." 여기서 '참 으로'를 직역하면 '진실로서'(in truth) 인데, '계약과 협정에 대한 충성' 을 가리킨다. '나무들이 가시나무를 왕 삼기로 협정을 맺고 이에 충성한다 면'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나서 가시나무는 자기를 왕으로 삼고 이 계약 을 충성스럽게 지키면 얻게 될 계약의 축복과, 그렇지 않으면 받을 계약의 저주를 언급하고 있다. 우선 자기와 맺은 계약의 축복으로서 가시나무는 지키지도 못할 보호의 약 속을 늘어놓고 있다: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여기서 그늘이란 단어는 '보호'와 '그늘'이라는 이중 의미를 갖는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그늘'로 표현한다(시 17:8). 2.과연 그늘을 제공할 수 있는가? 어찌되었든 가시나무 잎은 작은 잎사귀가 3∼5개 달려 있는 데다가 머리칼 같이 생겨서 그늘이 생기지 않는다. 나무라기보다는 초목에 불과하다. 따라 서 가시나무는 그늘이라고 제공할 것이 없다. 그러기에 "내 그늘 안에 피하 라"는 말은 깊은 아이러니를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가시나무는 그늘 을 제공할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 그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진정한 그늘 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시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는 121편5절에서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라고 노래 한다. 3.가시나무의 협박 가시나무는 왕의 자리에 앉을 가능성이 주어지자 이를 적극적으로 움켜 잡 으면서 "와서 자기 그늘에 거하라"고 제안한다. 그러나 가시나무는 이 정도 에서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에게 대항하는 이들을 가만히 놔 두지 않겠다고 협박하고 있다. 가시나무는 자신의 왕권을 인정하지 않는 자 를 불로 사르겠다고 위협한다: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 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사실상 가시나무는 불에 쉽게 타는 관목이다. 가시나무에 불이 붙어 들판에 번지는 일이 적지 않다고 한다. 가시나무는 진정으로 자기 분수를 모르고 있다. 아비멜렉은 기드온처럼 통 치를 통해 백성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기는 커녕 파멸만을 가져올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이 될 자격도 없는 자가 스스로 왕이 되고, 지키지도 못할 '그늘'의 약속을 남발하면서 허세까지 부리고 있다. 오늘날 정치 지도자들이나 교계의 지도자들이 함부로 자신이 마치 그늘이 되는 양 허장성세를 드러내고 있다. 자기가 아니면 마치 한국이 큰 불행이 나 재앙을 만날 것인 양 떠들고 있다. 과연 그들이 우리의 그늘이 될 수 있 을까? 만민들이 우리 우편에서 우리 그늘이 되실 분은 오직 여호와 한 분이 심을 아는 날이 속히 오게 하소서.
적진을 치라
오늘
몬문은 기드온의 300명의 용사가 미디안, 아멜렉, 동방사람의 군대 135,000명과 싸워 대승하는 내용입니다. 미록 작은
인원이지만 소수의 300명은 하나님의 군대로 하나님의 권능에 손에 쓰임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어떤 자들인가?
첫째, 그들은 <두려움>을 극복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모든 자들에게 두려워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 광야 길의 두 번째 영도자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이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 1:5~9, 사 41:10)
하나님은 이 전쟁에서 자원한 자들을
향해서"누구든지 두려워서 떠는 자여든 길르앗 산에서 떠나 돌아가라”(삿 7:3)고 명령하십니다. 그 이유는 두려워하는 사람 때문에
다른 형제의 마음도 그와 같이 두려워 떨 것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여호와의 군대’로 부름 받은 이스라엘이 갖추어야 할 몇 가지 규례를 언급하실 때 "두려워서 마음에 겁내는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신 20:8)
이
말을 들은 22,000명의 군인이 황급히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직도 그의 사람들을 찾지 못하셨습니다. 남아
있는 10,000명의 군인 역시 너무 많았고 그들도 승리에 대한 자신의 공로들 주장할 것입니다. 소수의 사람들을 위한 시험이 다시
한 번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마음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입니다(딤후
1:7)
둘째, 목적에 적합한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이 전쟁에서 승리를 위해
300명을 남기는 과정에서 두 번째 시험을 합니다. 물을 먹는 모습을 통해서 군사들을 선정한 것입니다. 9700명은 무릅을 끓고
물을 허겁지겁 마셨습니다(삿 7:5). 무릅을 꿇었다 <카라>는 것은 단순히 무릅만을 꿇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무릅을
꿇고 허리와 고개까지 구프리고, 두 손은 바닥에 입을 댄 채 얼굴을 물에 처박고 정신없이 물을 마신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언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깨어 적을 경게하는 자세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전쟁에 적합지 않은
인원들입니다. 그러나 300명은 물을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주위를 경계하며 핥아 먹었습니다. 얼마나 남았을까?
300명뿐.
135,000에 대항해서 고작 300명, 이것이 하나님의 남은 소수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남은 소수의 사람들의 위력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당신의 힘과 계획을 아무런 의심 없이 의지할 무리를 찾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헌신적이고 순종적인 소수의 사람들만을 가져야 했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전투방식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300명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전심전력하여 오직 사명 완수에 깨어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깨어있는 자, 사명을 이루는 일에 충성하지 않는 자는 결코
하나님의 군사로 쓰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딤후 2:26, 벧전 5:8, 계 16:15)
3백명의
군대는 남은 자들입니다. 남은 자들이란 이스라엘의 미래를 책임질 자들입니다. 그들은 미디안에서 국가를 건져낼 전쟁의 영웅입니다.
그날 밤, 하나님은 기드온을 통해 군인들에게 전투 계획과 그들이 사용해야 할 무기들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방법에 의해 승리한 자들이다 (삿 7:16~21)
300명을
뽑은 그날 밤 하나님은 기드론에게 "일어나 내려가서 적진을 치라”(삿 7:9)에 말씀하셨습니다. 100명씩 세 대로 이룬
300용사는 적진을 빙 둘러 원을 이루며 에워싼 채로 포위망을 좁히지도 않고 "각기 당처에 서서”전혀 요지부동하는 자세로 계속하여
나팔을 불며 횃불을 들고 함성을 질렀습니다. 미디안 온 군사들은 혼비백산하여 전우끼리 칼날로 서로 치면서 자멸하고
말았습니다(삿 7:22). 이 전쟁에서 300명의 군사로 미디안 군인 120,000명을 죽이고 나머지 패잔병 15,000명까지
파하는 대승리를 갖고 왔으니, 이것이 사람의 힘으로 가능하겠는가?
그렇다면 기드온과 300용사의 승리의 비결이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300명과
135,000명과의 싸움,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이 전쟁에서 대승을 하게 된 것은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세우시고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사람을 따른다는 것입니다(삿 7:18~20,
대하 20:20).
둘째, 300명 용사의 일치된 순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은
300명의 용사를 세 부대로 나눈 이후, 좌수에는 횃불을 항아리 안에 감추어 들고, 우수에는 나팔을 가지도록 했습니다(삿
7:16, 20). 그리고 기드온은 특별히 ‘나만 보고 나의 하는 대로 하라’고 두 번이나 강조했습니다(삿 7:17). 300명
중에 단 한삼이라도 순종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할 경우 실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300명 전원이 기드온을 따라 한
덩어리와 같이 움직이는 행동의 통일! 그것이 곧 승리의 비결이었습니다. 그리고 세부대가 동시에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좌수에 횃불을 들고 우수로 나팔을 불며 외칠 때에, 하나님은 미디안 적군들이 자기들끼리 칼날로 서로 치며 도망가게 하심으로
기적적인 승리를 이루신 것입니다(삿 7:19~23).
결론 : 가나안 땅을 점령할 때 난공불락의 성
여리고성,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마지막 날 나팔 소리와 함께 이스라엘 전 백성이 한 목소리를 낼 때 그 큰 성이 무너지듯이(수
6:20), 이스라엘의 승리는 항상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날선 검에 의하여 이루어진 다는 것(계 19:21)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월
일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12
5
주일
설교 묵상 및 봉사
12
6
월
사사기 5:1∼31
메로스를 저주하라(23절)
12
7
화
사사기 6:1∼40
큰 용사여(12절)
12
8
수
사사기 7:1∼25
적진을 치라(9절)
12
9
목
사사기 8:1∼35
에봇 올무(27절)
12
10
금
사사기 9:1∼57
내 그늘에 피하라(15절)
12
11
토
사사기 10:1∼18
여호와께서 근심하시니라(16절)
♦ 12월 4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사기 4:1∼24 ♦ 묵상을 위한 주제 : 여선지 드보라(4절) ♦ 성구 : 그 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女先知)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士師)가 되었는데.
여자 선지자 “드보라(Deborah)”라는 이름은 “벌” 이란 뜻이며, 랍비돗의 아내입니다.
군대 장관 시스라가 이스라엘을 학대하고 침략했을 때 드보라는 바락을 격려하여 그와 함께 싸워서 가나안 군사를 물리쳤습니다.
이 승리가 드보라의 노래라는 아름다운 시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별들이 하늘에서부터 싸우되 그 다니는 길에서 시스라와 싸웠도다.”(삿 5:20).
“별들이 하늘에서 싸웠다”는 시적인 표현은 “비가 내렸다”는 것을 말합니다.
야빈 왕은 철병거 구백승이 있기 때문에 막강한 힘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강한 군사력을 갖춘 야빈과 싸워서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을까요?
철병거는 마른 땅에서는 잘 달릴 수 있지만 비가 쏟아져 진흙탕이 된 길에서는 잘 달릴 수 없었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전략은 사람의 지략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이 날에 하나님이 가나안 왕 야빈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패하게 하신지라.”(4:23)
하나님의 작전을 미리 알 수 있는 드보라와 같은 선지자가 있다면 세상이 아무리 혼란스럽고 전염병이 강하게 닥쳐와도 물리치고 이길 수 있는 하늘의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팬데믹의 고통과 오미크론의 변형에 의한 어려운 때를 극복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전략을 알 수 있는 드보라와 같은 믿음의 사람을 찾아 고난의 시기를 단축할 수 있는 은혜를 기도합시다.
전능하신 주님 하늘의 뜻을 혼돈의 땅에 드러내어 어지러움에 질서를 세우게 하소서
♪ 찬양 / 어지러운 세상 중에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사사기의 악순환 고리는 불순종, 징계, 부르짖음, 구원자 사사, 태평성대, 불순종...... 3장에서 세 명의 사사를 갈렙의 사위 옷니엘, 왼손잡이 에훗, 잡족 출신 삼갈을 만났습니다.
4장에서는 여자 사사 드보라(벌, 꿀벌)를 만납니다.
1절입니다.
“에훗이 죽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
80년 동안 태평성대의 세월을 보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훗이 죽은 후에 가나안 족속들의 바알과 아세라에 매력을 느끼고 악한 일을 즐기게 됩니다.
죄는 순환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죄의 근원이 되는
요소들을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 바로 지혜로운 그리스도인 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편 1:1-2)
세속적인 복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을 강요합니다. 바알과 아세라와 같은 우상을 향하여 기대하는 복은 세속적인 복입니다. 그러나 신령한 복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견고하게 유지하라고 합니다. 악인들의 꾀, 죄인들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는 눈으로 볼 수 없지만 마음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복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근거가 됩니다.
“여호와께서 하솔에서 통치하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으니 그의 군대 장관은 하로셋 학고임에 거주하는 시스라요 야빈 왕은 철 병거 구백 대가 있어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했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그 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사사기 4:2-5)
반복되는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또다시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내어주십니다. 그에 따라 이스라엘 자손은 이십년
동안 폭압속에 고통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심한 억압 속 울부짖는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당시 사사로 활동하고 있던 드보라에게
구원의 메세지를 전하시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사 드보라는 바락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게 됩니다.
“드보라가 사람을 보내어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러다가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지 아니하셨느냐 너는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가라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의 병거들과 그의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하셨느니라 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도 가지 아니하겠노라 하니 이르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번에 가는
길에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하고 드보라가 일어나 바락과 함께 게데스로
가니라”(사사기 4:6-9)
하나님께서는 드보라에게 야빈의 군대를 기손 강가로 유인해 오도록 명령하십니다. 승리할 수 있는 전략적 지역으로 상대를 이끌어 오는
전술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에 따라 드보라는 당시 이스라엘의 군대 장관으로 있던 바락을 불러 적들을 기손 강가로 오게 하는
병법을 알려주며 승리에 대한 확신을 심어줍니다. 이 전쟁이 바로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혼자 만 명의 군사를 이끌어야 함에 부담을 느낀 바락은 출정에 주저하게 되고 결국 드보라에게 동행을 요청합니다. 그러자
드보라는 그의 요구에 응하면서도 한편으로 결국 전쟁의 승리에서 오는 영광은 야엘이라는 한 여인에게 돌아가게 될 것을 예언합니다.
결국 그녀의 예언처럼 야빈의 군대 장관이었던 시스라는 한낱 필부였던 한 여인, 야엘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고 결국 그 영광이
그녀에게 돌려지게 됩니다.
드보라를 통해서 하나님의 명령이 전달되었을 때 바락은 강한 남성이었지만 드보라가 함께 동행하지 않으면 올라갈 수 없다고 거절합니다.
여자 사사 드보라는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했으나 남자 발락은 여전히 드보라와 함께 가기를 원합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연약한 드보라와 같은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깨우치고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 때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할 수 있는 믿음과 지혜와 분별력을 갖춰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우리의 순종속에 얻어지는 영적인 유익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을 통해서도
분명히 역사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나를 부르심에는 분명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과 목적이
있으십니다. 그 상황을 통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생생하신 역사를 직접 목도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일을 해 나가게 하심으로 그 일이
곧 나의 영광이 될 뿐 만 아니라 그를 통해 믿음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 곧 봉사의 자리를 너무나도 쉽게 거절합니다. ‘나 아닌 누군가 그
일을 할 사람이 있겠지? 하며 등한시 합니다. 봉사의 자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또렷하게 체험할 수 있는 기적의 현장이요 우리 믿음을
진보시켜나가는 영적인 페달입니다. 공동체를 위한 섬김의 일에 나를 헌신할 때 봉사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함은 물론 그 일이
곧 나 개인의 영광이 됩니다. 더 나아가 그를 통해 하나님을 향한 내 믿음이 성장하는 영적발판이 바로 봉사의 자리입니다.
바락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스스로 포기했습니다. 따라서 바락이 누릴 수 있었던 개인적인 영광, 복된 영적 체험을 다른
이에게 건네 주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지금 나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귀와 마음을 열고 순종하는 것, 바로 내
생애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이요 내 믿음이 성장하게 되는 영적 도약대가 됩니다.
하나님의 친히 싸워주심속에 결국 이스라엘은 기손 강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야빈의 군지휘관이었던 시스라는 패전후 도망을
치다 결국 겐 사람 헤벨의 아내였던 평범한 여인 야엘에 의해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드보라의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이제 전쟁은 마무리되고 그에 대한 성경의 평가를 읽어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이 날에 하나님이 가나안 왕 야빈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 굴복하게 하신지라 이스라엘 자손의 손이 가나안 왕 야빈을 점점 더 눌러서 마침내 가나안 왕 야빈을 진멸하였더라.”(사사기 4:23-24)
하나님께서는 반복적으로 죄악을 범했던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기 위해 가나안 왕 야빈을 사용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일은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진멸시키기 위함이 아니셨습니다. 고난이라는 용광로를 통해 그들을 영적으로 제련해 나가기 위한 선하신 계획의
일환이셨습니다. 반대로 잠시 사용하셨던 악인 야빈왕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결국 멸망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징계는 우리를 새롭게 빚어가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입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이 있으시기에 행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법입니다. 징계의 고통속에서도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붙들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한편 악은, 악인은 철저하게
굴복시키며 진멸시키시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우리가 악인의 압제와 형통속에서도 인내하며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소망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저희 모두에게 또 새 날을 허락하셨습니다. 주의 말씀을 붙드심으로 죄의 순환성의 고리, 즉 4화를 끊어 내심으로
주님의 4복을 경험하시는 복된 날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언제든 응답하심으로 봉사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생생하게 경험하시며 믿음의 진보를 이루시는 귀한 날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한편으로 비록 하나님의 징계로 고통가운데 있으실 지라도
회복케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임을 믿으시며 소망을 잃지 않으시는 사랑하는 우리 교우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오늘도 귀한 한 날을 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주의 말씀을 붙듦으로 죄의 고리를 끊어내고 역설의 4복을 경험하는 귀한 날
되게 해 주십시오. 주님 부르심에 순종하며 봉사하는 현장속에서 하나님을 더욱 생생하게 체험하며 영광을 얻게 하시고 더불어 영적
성장의 은총을 경험하는 이 날 되게 해 주십시오. 설령 지금 징계의 고통속에 신음하고 있더라도 주님의 새롭게 빚어주시는 사랑의
손길임을 믿음으로 인내하며 소망가운에 이 하루를 살아내게 해 주십시오 신실하신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오늘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께서 보시는 앞에서 또 악한 일을 저지르고야 맙니다(1절). 이스라엘 자손과 나와 유사점은
없습니까? 만약 있다면 그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어떤 방법으로 그 연결고리를 끊어낼 수 있겠습니까?
2. 드보라의 단독 출정 권면에 바락은 그녀에게 동행해 줄 것을 요청하고 결과적으로 그가 아닌 야엘이 시스라를 처단함으로 그녀가
영광을 취하게 됩니다(6-9절). 나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해 본 적은 없습니까? 만약 그 때 그 부르심에 순종했다면 이후
어떤 결과로 이어졌을거라 생각하십니까?
3. 하나님의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징계의 목적은 영적 제련인 반면에 악인에 대한 징계는 결국 악인의 멸망으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24절). 이 사실이 오늘 내게 주는 영적메세지와 그에 따른 영적 유익은 무엇입니까?
♦ 12월 3일(금)
♦ 12월 3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사기 3:1∼31 ♦ 묵상을 위한 주제 : 남겨진 열국(2절) ♦ 성구 : 이스라엘 자손(子孫)의 세대(世代) 중(中)에 아직 전쟁(戰爭)을 알지 못하는 자(者)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두신 열국(列國)은.
“남겨두신 열국”은 블레셋 다섯 방백과 가나안 모든 사람과 시돈 사람과 바알 헤르몬 산에서부터 하맛 어구까지 래바논산에 거하는 히위 사람이었습니다.
남겨두신 열국은 이스라엘을 시험하기 위한 목적으로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명하신 명령들을 청종하는지 알려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의 명령은 가나안 땅의 주민들과 가까이 지내지 말고 혼인시키지도 말라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가나안 주민의 딸들을 취하여 아내를 삼았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며 또 그들의 신들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 입니다.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 손에 붙이시므로 이기게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간사한 존재가 인간입니다. 급하고 어려울 때는 “아이구 하나님!” 하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습니다. 그런데 급한 문제가 해결된 후에는 이전의 삶을 즐기고 있습니다.
옷니엘은 대단히 희생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옷니엘이 사사로 부름을 받았을 때 그는 80세였습니다. 갈렙은 85세 때 헤브론을 정복했는데 옷니엘은 80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구산 리사다임을 제압했습니다.
옷니엘은 헤브론에 정착해서 이미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유다 지파의 최고 지도자로서 평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었는데도 안일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평안한 노년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힘들고 어려운 여생을 선택했습니다. 그의 결단으로 이스라엘이 향후 40년간 평온했다고 합니다.
갈렙과 옷니엘의 희생적인 삶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습입니다. 갈렙의 희생으로 가장 껄끄러웠던 헤브론이 정복되고, 옷니엘의 희생으로 이스라엘의 40년이 평화로워졌습니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오늘도 나의 헌신으로 나의 가족들이 평화를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가족들의 평안이 세상의 소금과 빛 되어 팬데믹과 오미크론을 평정하여 모두가 평화를 누리기를 기도합시다.
♪ 찬양 / 날 대속하신 예수께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2월 2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사기 2:1∼23 ♦ 묵상을 위한 주제 : 보김(5절) ♦ 성구 : 그러므로 그 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니라 무리가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祭祀)를 드렸더라.
“보김(Bokim, Pokim)”이란 “우는 자들”이란 뜻으로 “바카”의 분사형 입니다. “바카”는 “눈물”이란 뜻으로 “바카의 골짜기”는 “눈물의 골짜기” “통곡의 골짜기” 즉 통곡의 장소를 말합니다(시편 84:6).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들에게 “길갈에서부터 보김에 이르러 가로되 내가 너희로 애급에서 나오게 하고 인도하여 너희 열조에게 맹세한 땅으로 이끌어 왔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에게 세운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이 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그리함은 어찜이뇨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여호와의 사자가 전한 말씀을 듣고 소리를 높여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보김”이라고 불렀습니다.
“보김”이란 지명에서 형식적인 회개의 모습을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참된 회개는 동일한 잘못과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가나안 사람들과 교제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사람들과 사귀며 심지어 바알과 아스다롯을 하나님처럼 섬겼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여호와의 사자의 준엄한 메시지를 듣고 많이 울고 눈물을 흘렸으며 제사를 드렸습니다.
눈물을 흘리고 제사를 드렸다는 것은 종교 행위만 강화시킨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감성에 기초한 신앙은 위험합니다. 자책감을 갖고 회개하는 것처럼 울 수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것만으로 회개라고 생각하면 잘못된 신앙의 자세입니다.
산상복음에서 말씀하신 애통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자손들은 비록 울기도 하였고 제사를 드렸지만 변화된 것은 없었습니다.
정서적인 카타르시스를 회개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성경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회개는 하나님이 원하는 방향으로 완전하게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형제들이여 아직도 하나님께로 완전히 돌아서지 못한 요소가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말씀하신대로 믿고 순종하므로 보김의 눈물이 헛된 눈물이 아니라 참 회개를 위한 거룩한 눈물로 바쳐지기를 기도합시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 곧 그 사방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아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사사기 2:13-14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붙여 그들로 노략을 당케 하시며 또 사방 모든 대적의 손에 파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치 못하였으며.
사사기 2:15-16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매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사사를 세우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내게 하셨으나.
사사기 1: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가 올라갈찌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 손에 붙였노라 하시니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3 / 유다가 그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나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너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
사사기 1:19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하신 고로 그가 산지 거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 BC 1200-1000 철기 1시대 : 이집트와 헷 제국의 몰락과 세력확대, 해양민족들의 유입(블레셋 민족), 가나안 잔존세력, 이스라엘 백성
• 가나안의 문화와 종교 – 농업: 바알과 아스다롯 숭배
• 바알 : 봄의 의인화 , 못 : 겨울의 의인화
• 성적인 쾌락 – 신적 행위의 모방 및 동기를 부여 – 풍년의 기원
4. 12사사의 이야기
• 시간적인 순서로 기록된 것이 아님.
• 각자의 상황에 따라 사사의 등장이 다르고, 성경 내의 분량도 다름.
• 영웅들이 등장했으나 죄의 경향성은 계속 가속화되고 증가됨
• 19장은 당시 최악의 상황을 그대로 묘사
5. 사사기의 신학
• 과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할 것인가?
• 단순한 역사서가 아니라, 반복적인 불순종 구조를 통해 예언자적인 특징을 지님 – 회개의 촉구
•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사사기 21:25) -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사사기 17:6)
(사사기의 구조) 책의 이름 자체가 “사사기”이기 때문에, 이 책에 등장하는 사사들의 이야기가 “사사기”의 중요한 관심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사들이 살았던 삶의 이야기가 “사사기”라는 책의 줄거리를 이끌어가는 좋은
소재의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 긴 책에서 사사 개인의 삶을 기록한 이야기들은
3장부터 16장까지입니다(사사기 3:7-16:31). 그럼 나머지 1-2장은? 17-21장은요?
사사기 전체가 스물 한개
장(章)인데, 그 중에서 일곱 개 장(章)이 사사들의 일화를 다루는 이야기가 아니예요. 정확하게 2/3는 사사들의 이야기, 그리고
1/3은 사사들이 아닌 다른 이야기들로 짜여진 책이 사사기입니다.
사사기에 등장하는 모든 지도자들이 "사사(쇼페트)"라고 불렸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옷니엘" "에훗"은 "구원자"라고 불렸다. "삼갈" "기드온"은 "사사" 또는 "구원자" 그 어느 것으로도 불리지 않았다.
이런 형태를 “보따리 형태”라고 부르고 싶어요. "보따리 형태"란 3장부터 16장까지의 사사들의 이야기를 보따리로 싸서 묶은 것이 라고 하겠습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사사들과 함께 살면서 마치 전기문(傳記文)처럼 기록한 책이 “사사기”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던 사사들에 대한 기억과 기록들을 오늘날 우리들이 읽는 성경과 같이 두루마리 하나로
엮어서 기록한 것이 “사사기”입니다.
“사사기”라는 두루마리를 기록한 역사가가 이 두루마리를 기록할 때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
그러니까 이 두루마리를 기록한 이유와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와 목적을 바탕으로 사사들의 이야기를 구성했겠지요?
사사들의
이야기 보따리를 꾸릴 때, 사사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담을 텐데, 사사들의 이야기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보따리가 사사기 1-2장,
그리고 17-21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에게 주신 하나님의 영감,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이 두루마리를 읽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사사기 1-2장, 그리고 17-21장에 담겨
있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 사사기가 예언서라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약 성경을 “타낙”(תנ”ך)이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경을 구분할 때 1. 율법서(토라) 2. 예언서(느비임) 3. 성문서(케투빔)
이렇게 세 가지 분류의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율법서를 ‘토라'(תורה), 예언서를 ‘네비임'(נביאים), 성문서를 ‘케투빔'(כתובים)이라고 부릅니다. 이 세 분류의 히브리어 첫 글자들을 모아서
만든 단어가 “타낙” 입니다.
이렇게 나누다보니, 좀 의아한 것이 있습니다. 사사기는 누가 읽어도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후 벌어진
전쟁과 사건들을 나열한 역사 기록”인데, 이스라엘 사람들의 성경 분류에 따르면 예언서(전기예언서)에 속한다는 거지요.
그러고보니, 전기 예언서에 들어가는 책들이 다 이상해요.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가 모두 예언서라니 말입니다.
❖ ‘예언’이란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역사를 바라보는 유대인의 시각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역사는 과거에 일어났던 옛 이야기가 아니라, 그 과거의 역사 이야기가 미래를 보여
준다는 생각과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예언’ 하면, 대개 “무슨일이 앞으로 벌어질까?” 하는 것에 대해서 알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내가 네 얼굴을 보아하니, 분명히 이런 일을 당하겠구만. 운명은 피할 수 없어. 이미 신(神)이
정해 놓은 것이니까. 그래도 꼭 그 운명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액땜한다손 치고 이렇게 해봐.”라고 말하는 사람을 말하는 사람들을
예언자라고 부르지 않아요. 이런 사람들을 ‘무당’과 ‘박수’라고 불렀지요.
율법에 의하면 이렇게 운명적인 미래를 점치고 말하는
사람들은 다 사형에 처해야 되는 사람들로 분류해 놓았습니다(출 22:18; 신 18:9-12).
그러면 구약 시대에 예언자들이 하는 일들은 무엇이었을까요?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은 율법의 교사이자 일종의 역사가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지금 살아가는 모습이 이런 모양이거든요. 그런데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들이 지금 걷고 있는 길은 이미 예전에 우리 선조들이 한번쯤 다 해보았던 것들입니다. 예언자들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과 똑같은 길을 걸었던 과거 신앙의 선조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옛 우리 선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우리 선조들이 과거
바알브올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려 보세요. 광야에서 했었던 일을 생각해보세요. 잘 알다시피, 우리 선조들은 이러이러했잖아요.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는 이렇게 했잖아요. 그래서 그들이 요렇게 된 것 다 알지요? 그러면, 여러분들의 현재 모습은 어떠한가요?”
만약 잘못된 길을 걸었던 조상들의 생활 방식을 버리고 그들과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면, 아마 예언자들은 그들을 칭찬할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 선조들이 걸었던 그릇된 길을 그대로 따라 걷고 있다면, 예언자들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여러분들의 현재의 모습은 어떠한가요? 그렇게 살다가 하나님으로부터 큰 벌을 받았던 우리 선조들과
별다를 바 없지요? 똑같지요? 심지어는 그보다 더 어긋나 있지요?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옛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어떻게
되었지요? 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구나! 아~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그곳에서 고생 고생하다가
결국 블레셋 사람들에게 죽었구나.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될 것같아요? 하나님의 기준은 바뀌지 않을테니… 여러분도 옳지 않은
길을 걸었던 우리 선조들과 별다를 바 없는 미래를 맞이하겠군요.”
구약 시대의 예언자는 과거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율법)과 그 말씀을 받고 이 땅에서 살았던 우리 신앙의
선조들의 삶, 그리고 그 삶의 열매를 배우고, 그 역사를 기준 삼아 하나님의 영으로 오늘을 비평하고, 내일 우리가 걸어가야할
하나님의 길을 가르쳐 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예언자는 과거를 배워 오늘을 비평하고 내일을 기대하게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
“누가 참 예언자인가, 그리고 누가 거짓 예언자인가?” 구약 성경에서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구분하는 기준은 아주
분명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참 예언자라고 한다면, 그 예언자가 한 말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참 예언자라고 생각합니다. 큰 틀에서
틀린 말은 아닙니다.
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며,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라.(신 18:22)
그런데, 이것 만이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구분하는 기준이라면, 구약 성경에는 거짓 예언자의 글이 떡허니 있는 셈이
됩니다. 요나(Jonah)요. 니느웨가 40일 뒤에 멸망할 것이라는 요나의 예언(욘 3:4)은 틀렸습니다. 요나가 예언을 하자,
니느웨 왕과 대신, 그리고 백성들이 하나님께 용서를 빌고 회개를 하였거든요. 하나님께서 그 모습을 보시고는 니느웨를 멸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참 예언자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서 거짓 예언자로 만든 셈이지요. 예레미야는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구분하는 또 다른 기준을 말합니다.
평화를 예언하는 선지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응한 후에야 그가 진실로 여호와께서 보내신 선지자로 인정 받게 되리라.(렘 28:9)
이 구절을 구약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렇게 이해합니다. “예언자가 평화를 예언할 때는 그 평화가 이루어져야만 참
예언자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예언자가 “걱정마. 잘될꺼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문제를 지적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 길에 있지 않으니, 네가 걸어가는 길에서 돌이키라. 돌이키지 않으면 너희가 이러 이러하게 되리라.” 라고 예언을 했는데,
그 사람이 그 예언을 듣고, 돌이켜서 예언자가 말했던 그 미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예언 성취의 여부와 관련없이 그는 참
예언자이다.”
❖ 예언자의 역할, 역사의 역할, 그리고 사사의 역할
예언자의 역할은 피할 수 없는 미래를 가르쳐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자들은 율법을 기억하고 읽으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찾아내고, 지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의 영으로 오늘을 날카롭게 비평하는 사람들입니다. 과거에 비추어 잘한
일에는 칭찬하고 축복하고, 과거에 그릇된 길을 걸었던 신앙의 선배들의 길과 똑같은 길을 걷고 있다면, 현재를 살고 있는 그들이
잊고 있었던 과거(율법)를 다시 기억하게 하고,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게 하는 것이 예언자의 역할입니다. 나와 같은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얻었다면, 예언자의 격려로 더 큰 힘을 얻고,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예전처럼 지금 이 길을 쭉
걸어가면 되는 것이죠. 나와 같은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았다면, 예언자의 경고에 정신 차리고 지금 걷는
길에서 돌아서면 됩니다. 격려를 듣고 그대로 걷다가 하나님의 복을 얻으면, 복을 얻을 것이라고 예언한 그가 참 예언자가 되는
겁니다. 계속 이런 식으로 살다가는 결국 하나님으로 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질책을 듣고 그 길에서 돌아서서 하나님의 길을
걷는다면, “결국 하나님으로 벌을 받게 될 것이다.”라는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 때문에 예언자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품은
예언자”로 인정받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언자의 가장 큰 사명을 사람들의 미래를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실을 직시하게하는 촉매제는 과거의 역사이며 율법입니다. 이런 면에서 예언은 곧 “역사를 되짚어
보면, 내 미래를 직시하는 것”이라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같네요.
이스라엘 역사는 ‘지금’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반면교사의 역할을 하는 겁니다. 사사기를 읽으면서 “아, 사사 시대에는
사람들이 이렇게 살았구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어떻게 하나님을 그토록 쉽게 잊을 수가 있는거야?”라며 분노하는 것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그 사람들이 살았던 그 때의 삶을 날카롭게 비판하되, 현재 나의 삶을 직시하고 비교하면서, 나는 그들과 어떻게
다른가를 늘 마음에 품고 사사기를 읽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앞 날이 어떨지가 보일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의 기록,
사사기는 예언서입니다.
그러면, 역사이자 예언서인 사사기 두루마리에서 소개하는 사사들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사사기를 영어로는 The Book of
Judges 라고 합니다. “사사”라는 어려운 말로 번역해 놓기는 했지만, 간단하게 말해서 “재판관”이라는 의미이지요. 그래서
카톨릭 교인들이 읽는 성경에서는 이 책을 “판관기”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사사들이 재판을 하던 사람들이었나요? 물론
드보라처럼 재판하는 일을 했던 사사들도 있습니다만, 그에 못지 않게 전쟁 지휘관의 이미지가 더 빨리 떠오르기도 합니다. 사사치고
전쟁 한번쯤은 치루어 보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 같거든요. 물론 전쟁을 치루지 않은 사사도 있지만 말이죠. 사사들의 이야기들을
읽어나가다 보면, “재판관”, “군사 지휘관”이라는 이미지가 모든 사사들의 특징과 역할을 모두 아우른다고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의사결정의 최종 책임자”(Decision maker)라는 말이 제일 적합하지 않나 싶습니다. 즉, 민족이 곤경에 처했을
때,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무언가를 결정하고 그 결정을 수행해야했던 사람. 그 임무를 수행해야 했던 사람들 중에 가장 앞에
나서야했던 사람이 바로 사사라는 말입니다.
❖ 사사기가 순환구조라고?
사사들의 이야기를 묶어낸 “사사기”를 공부할 때,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는 사사기가 순환구조(Cyclical
framework)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도 그렇게 배웠고, 또 교회에서도 사사기를 공부할 때 그렇게들 말합니다.
순환구조라는 것이 무엇이냐면, [1]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평화롭게 잘 살고 있어요. 가나안 땅에 정착하며 살다보니
삶이 조금씩 좋아지거든요. [2] 경제적인 측면에서 삶의 질이 좋아지다보니, 여유도 생겨요. 그러다보니 슬슬 타락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길로부터 멀어져 가지요. [3] 결국은 고난을 당합니다. [4] 그러고나면, 그제서야
하나님께 울부짖어요. [5] 그러면 참 자비로운 하나님께서는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사사를 보내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낸
사사가 이스라엘을 구원해요. [1] 다시 평화의 시대가 찾아옵니다. 그 다음부터는 [2]-[3]-[4]-[5]-[1]이 계속
반복되는 것을 순환 구조라고 부릅니다.
굳이 말하자면, 사사기의 큰 맥은 그 순환구조일도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열두명의 사사 중에서 그 순환구조를 갖고 있는,
스토리를 갖고 있는 이야기는 다섯명 밖에 없고요, 그 중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순환구조를 갖고 있는 사람은, 옷니엘 밖에 없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나머지는 사사들의 이야기는 순환구조라는 틀 안에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마치 억지로 끼워입은 옷처럼 어색하고
불편합니다. 사사기의 순환구조는 사사기에서 소개하는 사사들의 삶, 그리고 그 이야기들을 이해하는데는 도움이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또 그 사사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군상을 이해하는데는 도움이 될 수 있기도 하지요. 그러나 그 순환구조가 사사기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전체 사사 이야기들의 절반에도 해당하지 않는 구조이니까요.
앞서서 “사사기”라는 책이 “보따리 형태”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사사들의 이야기를 묶어내는 보따리가
사사기 1-2장, 그리고 17-21장이라고도 말씀드렸어요. 그래서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에게 주신 하나님의 영감,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이 두루마리를 읽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사사기 1-2장, 그리고 17-21장에 담겨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고도 말씀드렸습니다. 사사기 1장부터 3장까지는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왜 사사기를 기록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소개하는 도입부이구요. 17장부터 21장은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정말로 고발하고 싶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현주소를 농축해 놓은
총정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찌보면은, 중간에 끼어있는 사사들의 이야기들은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전달하고자
했던 하나님의 강력한 메세지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사례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네요.
❖ 사사기 1-2장
사사기 1장과 2장은 시간의 순서로 보았을 때, 여호수아 23, 24장과 서로 포개어집니다. 시간 순으로 역사를 나열한다
손쳤을 때, 사사기 1장과 2장은 여호수아서 쪽에 들어가도 큰 문제가 없습니다.
내용을 볼까요? 여호수아가 23장부터해서 마지막
고별 연설하시고 돌아가시거든요. 그런데 사사기 보면은요, 사사들의 시대의 첫 출발을 알리는 과정에서 아직 여호수아가 죽지
않았어요. 그리고 사사기 2장에 가야지 여호수아가 죽습니다. 그럼 왜 이리 모호하게 여호수아서의 뒷 부분과 사사기의 앞 두분이
겹쳐지게 기록했을까요? 아마, 이 두개의 책이 나뉘어진 책이 아니라 결국 하나의 책으로 연결시켜 함께 보아야 할 역사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이지 않을까요?
그럼,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앞의 두루마리인 여호수아와 사사기를 포개 놓으면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요?
❖ “왜 하나님께서는 그 땅(가나안)의 사람들을 완전히 다 쫓아내지 않고, 남겨두셨는가?”
첫번째, 하나님을 인식하게 하려고
2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3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삿 2:2-3)
신명기 20장 10절부터 15절에는 전쟁을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할 전쟁 규정에 대해서 말해 줍니다.
10. 네가 어떤 성읍으로 나아가서 치려 할 때에는 그 성읍에 먼저 화평을 선언하라. 11. 그 성읍이 만일 화평하기로 회답하고 너를 향하여 성문을 열거든 그 모든 주민들에게 네게 조공을 바치고 너를 섬기게 할 것이요. 12. 만일 너와 화평하기를 거부하고 너를 대적하여 싸우려 하거든 너는 그 성읍을 에워쌀 것이며. 1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네 손에 넘기시거든 너는 칼날로 그 안의 남자를 다 쳐죽이고
14.너는 오직 여자들과 유아들과 가축들과 성읍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을 너를 위하여 탈취물로 삼을 것이며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적군에게서 빼앗은 것을 먹을지니라 15. 네가 네게서 멀리 떠난 성읍들 곧 이 민족들에게 속하지 아니한 성읍들에게는 이같이 행하려니와
첫째, 먼저는 무력이 아니라 항복할 것을 권유합니다. 둘째, 권유를 따라 항복하면, 서로 화평을 이루고 성문을 연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조공을 바치는 것으로 마무리 합니다. 셋째, 그러나 항복하지 않으면 본격적으로 전쟁을 하는데, 성 안의 남자들을 다
죽이는 겁니다. 넷째, 전쟁 중에 여자들과 유아들과 가축들과 성읍가운데 있는 모든 것들을 그냥 탈취물로 삼습니다.
왜 진멸시키는 전쟁(헤렘, חרם)을 선언하셨는가? 가나안 정복 전쟁에는 전혀 다른 전쟁 명령을 내리십니다.
히브리어로는
“헤렘”חרם이라고 부르는 “진멸”시키는 전쟁입니다.
하람(charam, חָרַם) 1. 닫다, 2. 보이지 않게 하다, 분사(חָרוּם ) 전멸시키다(수 2:10), 멸하다(민 21:2, 왕상 9:21), 진멸하다(수 8:26, 대하 32:14, 사 34:2),
남여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를, 그리고 그 성읍의 모든 것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는 거예요. 성경에는 구체적으로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이것은 일종의 “시험”입니다.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성인
남자들을 제외한 여자와 아이들 그리고 모든 가축들과 재산들은 “전리품”이예요. 전쟁에 참여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전쟁에서 얻게 되는 전리품이 전쟁 최대의 관심사 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진멸”을 말씀하시는 것은 전쟁에서 얻게될 개인의
“전리품”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께서 주실 그 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만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사람의 욕심이
그런가요? 성경에서는 아간으로 대표되는 한 인물의 사리사욕을 소개하고 있지만(수 7), 이런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었을 겁니다.
이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옆구리에 가시를 하나 박아 두었습니다. 손바닥에 박힌 아주 작은 가시 하나가 그리 아프지
않지만, 갑자기 무언가를 만질 때나, 살짝 스칠 때, 따끔거리면서 그것에 주목하게 되듯이,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의 사람들을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 가시처럼 박아 두어서 하나님을 인식하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땅의 주인이다”라는
것을 말입니다.
❖ “왜 하나님께서는 그 땅(가나안)의 사람들을 완전히 다 쫓아내지 않고, 남겨두셨는가?”
-두번째, 현실점검을 위해서
20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이르시되 이 백성이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명령한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였은즉 21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 둔 이방 민족들을 다시는 그들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22 이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조상들이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을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23 여호와께서 그 이방 민족들을 머물러 두사 그들을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셨으며 여호수아의 손에 넘겨 주지
아니하셨더라(삿 2:20-23)
사사기 역사가가 말하는 두번째 대답 “현실점검”입니다. 이스라엘을 시험하기 위해서 그 땅의 사람들을 그대로 남겨 두었다라는
겁니다. 구약성경에서 “시험”이라는 모티브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은 이스라엘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고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과 삶의 현주소를 깨닫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을 아실겁니다(출 16).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시면서 하늘에서 비같이 내려서 이스라엘의
진 주위에 있게하고 먹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시험이었습니다(출 16:4). 안식일을 잘 지키는지 그렇지 않은지
확인해 보고 싶으셨던 거지요. 안식일에는 만나가 내리지 않았지요? 하나님께서 이미 그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만나
뜨러 나간 사람들 있었습니다. 만나를 주시는 은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을 잘 지키는지
시험하시고, 그렇지 않은 이들을 꾸짖으셨습니다(출 16:28-30). 하나님이 시험하시는 이유는요,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 나락으로
떨어뜨려서 어떻게든 벌을 주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험의 목적은 현실 점검입니다. 지금 살아가고 있는 걸음 걸음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 분의 목소리를 잘 들으며 옳은 길로 제대로 가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사사기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도(하나님의 율법)를 잘 지키나 그렇지 않나현실 점검을 하기 위해서 가나안 사람들을
남겨두었다.”라는 거에요. 그게 그 땅의 사람들을 남겨두신 두번째 이유입니다.
❖ “왜 하나님께서는 그 땅(가나안)의 사람들을 완전히 다 쫓아내지 않고, 남겨두셨는가?”
세번째, 역사를 알게 하려고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삿 3:2)
출애굽하고 광야에 40년을 보냈습니다. 이 광야에서 출애굽 1세대들이 모두 죽음을 맞이한 이야기는 잘 아실 거예요.
민수기에서는 출애굽 1세대와 2세대의 교체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가나안 땅에 들어간 출애굽
1세대가 없었다고 하니(민 14:30) 아마 여호수아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출애굽 1세대의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출애굽
2세대, 출애굽 3세대가 섞여 살던 시대였을 겁니다. 출애굽 3세대는 모세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아마 보았다손
치더라도 아주 어린 나이에 잠깐 스치듯 보았을까요? 이들은 선조들이 광야에서 아말렉 사람들과 싸우고, 모압사람들과 싸우던 이야기를
선조들의 입을 통해서 옛날 이야기 듣듯이 들으며 자랐던 사람들입니다. 사사기를 보면, 아예 이런 이야기 조차도 몰랐던 사람들도
있었던 같아요(참조. 사사 입다 이야기).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의 눈에 “전쟁의 이야기”는 곧 “역사”였습니다. 전쟁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전쟁을 알게 한다는 것은, 지금 이들을 모두 전쟁 용사로 키우겠다는 말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역사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역사를 알게 하겠다”는 말로 이해하면 훨씬 더 자연스러울 것같아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잊지 말아야할 또 다른 전쟁의 역사가 있습니다. 아니, 이 역사가 제일 중요한 역사일지도 모르겠네요.
사사기 3장 2절에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 두신 이방
민족들은…”이라며, 그 땅에 남겨진 민족들의 명단을 나열하고는 그 이방 민족과의 결혼 이야기를 하지요. 성경을 통틀어 가장 예민한
가정 문제가 이방인과의 결혼이었습니다. 출애굽 당시에도 이방인과의 결혼으로 큰 곤혹을 겪었던 역사가 있었습니다.
1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2 그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3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민 25:1-3)
이방인들과 결혼을 한다는 것은 오늘날 국제 결혼한다는 말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건 단순한 결혼의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의 문제였습니다. 민수기의 예와 같이 간단하게 가정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볼까요? 광야의 생활을 하며 안정적이지 않은
생활을 하던 출애굽한 사람들이 한 땅에서 정착하면서 나름대로 안정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만났으니, 그들과 결혼을 한다면 그
유랑 생활을 청산하고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깁니다. 십수년을 떠돌이 생활하던 출애굽한 사람들에게 이것은 매우
매력적인 유혹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할 통과의례가 있습니다. 이미 그 땅에 살고 있는
그들의 문화와 전통을 존종해야할 의무 뿐 아니라, 그들의 일원이 되어 그들처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모압
여인들과 함께 모압의 신들을 예배하는 자리에 나간 거예요. 안정적인 삶과 신앙을 바꾼 것이지요. 뭐, 이렇게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이 좋은 것을 왜 버려? 우리가 잘 취했다가 하나님께 드리면 되지. 아니 그
사람들이 이룬 선진 문화를 왜 죽이면서까지 없애? 잘 가다듬어진 문화를 흡수해서 우리 문화를 성장 시키면 되지”. 이렇게, 이방
문화와 타협했던 사람들, 그리고 “아니다. 우리는 조금 늦게 가더라도 하나님의 정체성을 지켜야 겠다.”는 사람들이 성경에서는 늘
싸우고 있는 겁니다. 지금도 싸우고 있지요. 타협했던 사람들은 이방인들과 결혼하여 우상 숭배의 길로 가고, 타협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계속 고난의 길을 걸어가는 거지요.
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의 수령들을 잡아 태양을 향하여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리라 5 모세가 이스라엘 재판관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바알브올에게 가담한 사람들을 죽이라
하니라(민 25:4-5)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의 눈에는 이방인과 결혼하지 않는 것은 “정체성 전쟁”이었습니다. 하나님 향한 신앙의 결단을 요구하는
전쟁 말입니다.
물질 문명의 화려함은 늘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가나안 사람들을 만나 이스라엘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즐기고 있는 물질 문명이 좋아보이고, 그들이 누리는 문화가 더 나아 보였을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이스라엘이
자기들이 보기에 좋아보이는 가나안의 것들을 선택하던 시대가 사사들의 시대입니다.
본서의 히브리어 표제는 '쇼페팀'(사사들, 재판관들,
통치자들)이다. 이 명칭은 여호수아 이후부터 사무엘 시대까지의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그들은 정치, 경제, 전쟁, 종교의
다방면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다.
저자 /
구약의 다른 역사서들처럼 성경 자체에서 분명한 언급이 없음으로 본서의 저자가 누구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사무엘이나 그의 선지
생도 중 누군가가 기록하였을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 한편 랍비들의 전통인 탈무드에 나타난 유대 전승에 의하면 본서를 사무엘이
기록하였다고 말한다.
기록연대 /
본서의 기록 연대는 본서 속에 나타나는 사건 정황들과 그 사건의 고고학적 역사 연대로 추측하여 가늠해 볼 수 있다. 본서 속의
사건들을 고려하여 볼 때 사사기의 기록 연대는 사울이나 다윗이 통치하던 시기인 B.C.1050년에서 1000년경으로 여겨진다.
사사기 1:29의 '게셀'에 대한 언급은 바로가 이 땅을 솔로몬에게 주기 이전으로서(왕상
9:15~17), 이는 본서가 적어도 솔로몬 이전에 기록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또 사사기 17:6의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라는 기사는 여부스족이 예루살렘에 거하고 있었다는 사사기 1:21의 기록과 더불어
다윗이 그들을 쫓아내기 이전에 본서가 기록되었음을 추측케 한다.
배경 /
본서는 여호수아의 죽음으로부터 사무엘 시대에 이르는 하나님 백성의 종교적 사회적 형편을 알려주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본서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 하나님의 심판, 회개 그리고 구원의 역사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는 인간의 악한 죄성과 더불어
택한 자를 결단코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택함받은 백성은 죄로 말미암아 고통 가운데
놓여있을지라도 언제라도 회개함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
특징 /
본서는 당시 부패와 혼란에 빠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은 필연적으로 심판을 가져오며 회개는 구원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또한 의로운 지도자가 지속적으로 나라를 이끌어 갈 필요성이 있다는 사실을 제시함으로써 사울과 다윗에 의해
확립된 왕권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하나님은 어려울 때마다 그 시대에 필요한 사람을 예비하시고 세우신다는 것이 사사기의
주제이다.
목적 /
사사기의 목적은 두 가지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 먼저 이스라엘의 불신앙이 가져온 결과로 왕정 정치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배반과 배교가 끝없이 순환되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용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압제와 구출이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사태는 사무엘 시대에 예언자 제도를 낳게 하는 동기가
되었다. 사사기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그분의 계명을 굳게 지키면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며, 만약 언약의
관계를 인간 스스로가 파괴하게 되면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구조 /
사사기의 사상적 구조는 특징있는 것으로 각 사사의 시대가 배신, 곤욕, 회개, 구원이라는 순서로써 기록되어 있다.
첫째로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신을 섬김으로써 배신한 사실 둘째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원수의 손에 붙이시사 그들로 곤욕을 당하게
하신 사실 셋째로 이스라엘이 회개한 사실 넷째로 이스라엘의 회개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사사를 보내셔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사실로
되어 있다.
사사기의 내용 구분
1~3:6, 사사시대의 배경 3:7~16:31, 사사시대의 역사
17:1~21:25, 사사시대의 대역
이것은 타락(부패의 역사), 구원, 다시 부패함으로 연결된다. 달리 말하면 부패의
원인(설명), 부패의 과정(명시), 부패의 상태(예증)라고 볼 수 있다.
내용 /
사사기에서는 반복해서 죄를 지어 왔던 유대 민족이 다섯 단계의 죄를 일곱 번이나 되풀이했던 기록이 있다. 우리가 역사로부터 배우는
유일한 것은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아무 것도 배우지 않고 있다는 것임을 잘 말해 주고 있다. 과거를 무시하면 지은 죄를 반복하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성경에 사람들의 성공에 관한 것과 함께 실패에 관해서도 기록하신 이유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역사(History)를 통해서 배우기를 원하시는데, 이 역사는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History)이다. 만일 우리가 성경의
모범을 따르고 성경의 훈계를 가슴에 새긴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을 실패에 의한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 배우게 되지 않을
것이다(고전 10:~1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메소포타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팔년을 섬겼더니"(사사기 3:8).
셋째 단계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사사기 3:9).
넷째 단계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되어..."(사사기 3:9~10).
다섯째 단계
"그리고 그들이 이전보다 더 즐겁게 여호와를 섬기었더라" 이 죄의 순환 과정은 구약 시대의 유대 민족에게만 특별히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는 불행하게도 신약 시대 신자들의 개인적 생활 체험 속에도 매우 빈번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미루는 것과 같은 죄이다. 노예화는 시험이나 마감시간 같은 형태로 된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다음 번에는 잘 하겠다는 약속을 하며
강한 청원을 한다.
하나님께서도 이 청원을 들어주실 것이다.
교훈
역사적인 교훈 :
본서는 여호수아와 사울 및 다윗 왕 시대 사이의 이스라엘의 쇠퇴, 압박, 그리고 구원으로 순환되는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본서는 이스라엘의 이른 군주정치 시대에 대한 설명과 이론적인 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교리적인 교훈 :
본서는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 또는 불완전한 순종까지도 고난과 외적의 침략을 가져 온다는 분명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그의 압박 당하는 백성의 회개와 기도에 구원으로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계시해 주고 있다.
기독론적인 교훈 :
본서에 나타난 각 사사는 정치가요, 구원자요, 왕으로 그들은 영적 및 정치적인 구원자로 사역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가진 자기 백성의 구원자로서의 역할을 보여 준다.
사사기(士師記)는 그
표제를 여호수아의 사후에 이스라엘을 통치했던 사람들의 직명에서 취한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 그들의 정부에
관하여 지시하는 중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각 성에서 네 지파를 따라 재판장(사사)과 유사를 둘 것이요”라고
명하였다(신 16:18). 모세가 입법적 활동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되고 여호수아도 실무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됨에 따라 사사들이
임명되어 그 땅의 최고의 공민적 권위를 세우게 되었다. 사사기는 여호수아의 사후로부터 곧 이어지는 기간에 일어난 역사이다. 그
기간 동안에, 이스라엘의 통치 권위가 사사들에게 부여되었다. 이 책의 이름을 붙였던 직명을 가진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에
명시된 사사의 공민적 기능보다 더 광범한 직무를 수행하였다. 그들은 대부분의 경우 거룩한 임명을 받고 그들의 큰 사업에 직접적으로
소환되었으며(삿 3:15; 4:6; 6:12) 백성의 통치자 보다는 외세의 속박에서 구원하는 자로서 더 많은 일을 하였다. 사실
그들의 부르심과 큰 공적의 필요는 일반화된 배교와 압박을 물리치려는 모든 정규 질서를 무익하게 만든 무정부 상태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에게 가장 유명하다고 하는 것은 공민적, 종교적 지도자로서보다는 민족적 영웅으로서였다. “장군” 또는 “두령”이 아마
그들에게 더 적합한 명칭일 것인데 그들의 업적이 주로 군사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사마다 백성을 “구원한” 다음에 그는 그의
여생 동안 백성을 다스렸다. 그러므로 사사라는 이름은 기록 당시의 이 책의 이름에 가장 적합한 듯하였다. 여러 세기 후 히브리인과
같은 언어와 혈통에 속하는 사람들이 사는 카르타고에서는 역시 정치 지도자가 “사사”(suffete)로 알려졌다.
2. 저자
사사기를
기록한 자는 알 수가 없다. 고대의 유대 전통에 따르면 사무엘이 기록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분명히 추측이다. 그리고 그것은 많은
사실들과 부합되지만 다른 요인들은 그 견해에 방해가 된다. 사사기의 저자가 좋아하는 말은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17:6; 21:25; 18:1; 19:1)였다. 이것은 저자가 왕위를 좋아하였을
것이라는 암시를 주는 생각이다. 마치 그의 말은 사실 “그와 같은 일들은 묵인되지 못할 것이지만 때때로 이스라엘에는 왕이 없어서
질서가 없고 사람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행할 수 있었다”는 것처럼 보인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을 위한 왕을 가진다는 생각을
반대하였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그가 이런 말들을 기록한 저자로 보기에는 있음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적 증거를
보면 사사기가 기록되었을 가능한 시간을 제한해 준다. 앞서 인용한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삿 17:6)라는 진술은 이
책이 사울의 군주 정치가 세워진 후에 기록되었음을 가리킨다. 다른 편으로는 이 책이 다윗의 통치 전에 기록되었을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며, 최소한 그의 통치 초기에 기록되었을 것이라는 증거가 있다. 삿 1:21은 말하기를, 여부스 족속이 예루살렘에서 쫓겨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베냐민 자손과 함께 거하였다고 한다. 성경 역사는 여부스 족속이 다윗이 헤브론 7년 통치 후에 그
성을 빼앗을 때까지 예루살렘을 소유하거나 또는 최소한 시온에 본거지를 가졌다고 지적한다(삼하 5:6-9; 대상 11:4-9).
그러므로 사사기는 다윗이 예루살렘을 노획하기 전 그의 첫 7년 통치 기간 동안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3. 역사적 배경
사사기에
기록된 사건들이 일어날 때의 근동사의 흐름에 있어서 정확한 특정 시간을 정하기가 불가능하지만 한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이
책이 B.C. 1400-1050년의 기간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정확한 시간은 출애굽의 시기가 확정되기까지는 확실하게 정할 수
없으며, 현재로는 대치되는 이론들 사이에 절대적 확실성으로 결정할만한 충분한 사적(史的) 자료가 별로 없다.
아마르나(Amarna) 서판이나 다른 비문들은 보여주기를, 그 땅을 소유했던 가나안 족들은 히브리인의 침입에 앞서 수 세기 동안
그곳에 정착했다고 한다. 그들의 문명은 오래된 것이었고, 메소포타미아나 애굽 등의 대제국들의 영향을 받아 괄목할만한 발전을
하였다. 사람들은 바로와 동맹 관계를 가진 군소 통치자들의 지배 아래 조직되었다. 그러나 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 서로
끊임없이 싸웠고, 그와같이 그들은 전술에 있어서 숙달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공통적인 위험에 직면하면 하나의 지도자 아래 다소
연합하기도 하였다.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그들의 금속 문화에 대한 유물적 증거를 통하여 산 언덕에 그들을 보호하는 요새화된
도시들이나 그들의 철병거들은 평지에서 그들을 막강하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예술과 건축은 히브리인들의 침략 후에 즉각적이고도
현저한 쇠퇴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영적 진리의 영역에 있어서 그리고 인생의 도덕과 철학에 있어서 히브리인들은 원주민들보다는
탁월하였음을 보여 주었다. 가나안 사람들은 근동 전역에 상인과 무역업자로 알려졌으나(후에 히브리어로 “가나안”은 “상인”으로
통하였다), 그들은 마찬가지로 농사 기술에도 능란하였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필수적인 믿음의 부족으로 이스라엘 족속은
가나안 족들을 쫓아내지 못하였고, 그리하여 그들은 전쟁 초기 수년도 되지 못하여 이스라엘 곁에 정착하여 살았다. 이 모든 기간
동안 히브리인들은 일치 연합된 민족이 아니었다. 경우에 따라 두세 지파가 공동의 적을 대항하여 일시적인 연합을 이룰 수 있었다.
사사기 5장의 드보라의 노래는 큰 위기의 때에도 모든 지파가 하나로 연합되는 것이 불가능하였음을 보여준다. 지파 사이의 내적
알력이 오히려 일반적이었다(삿 8:1-3; 12:1-6; 20:1-48). 이것은 일부 그 땅을 나누어 놓은 가나안의 요새들
때문에 지파간의 상호 교통의 부족에 기인된 것이었다고 본다. 오히려 새 입주자들이 원주민에게서 그들의 건축 방법을 신속하게
배웠는데, 이는 히브리인들이 지금까지 주로 유목 민족이기 때문이었다. 가나안 종교는 땅의 산출에 대한 안전을 도모하는 의식이
중심이었다. 거기에는 농업신들이 주는 풍요한 수확을 위하여 그들을 높이는 의식들이 많았다. 많은 히브리인들은 그 땅의 백성들의
농사 방법을 인수하는 중에 이 방법들과 연결된 종교까지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4. 주제
이
책은 여호수아의 사후에 군주 시대가 시작된 때의 사무엘 시대까지 히브리 백성의 갖가지 흥망성쇠를 열거한다. 여호수아는 특별한
의미에 있어서 모세가 시작한 계획을 수행하고 완성하도록 택함을 받았다. 여호수아가 죽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모세의 권위있는
지도나 여호수아의 행정적 경험을 다 버리고그들이 새로 얻은 땅에 대하여 독립적 관리로 강화해 가는 기간에 들어섰다.
이전까지 히브리인들은 노예로 있다가 광야의 유랑 생활을 하고 마침내 진영과 정복의 곤욕을 치루는 등 갖가지 불안하고 유동적인
상태에 살아왔었다. 주로 위대한 지도자의 자서전으로 꾸며진 여호수아서는 이 정복의 마지막 단계를 열거한다. 사사기는 다음 단계의
이스라엘 역사를 다루며 그들이 방랑적인 유목민으로부터 정착적인 농민으로 전환하는 도전을 맞는 것을 보여 준다. 이 책을
펴노라면 우리는 전쟁의 열기 속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 우리는 즉시 여호수아의 지도를 받아 연합된 진군을 한 후에 지파들이
흩어져 전쟁 준비를 서두르는 모습에 뛰어든다. 전쟁 회의가 열리고 지파들이 요단 골짜기에서 그들에게 정복하도록 분배된 지역을
소유하기 위하여 올라갈 때 휘두르는 무기 소리가 들리게 된다. 전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철병거들이 골짜기를 요란스럽게
지나가며 산허리는 무장한 군인으로 가득하다. 노래는 싸움과 전쟁에 속한 것들이며, 이스라엘의 대적을 분쇄한 자들은 영웅이 된다.
히브리인들이 산지대에서 승리하였지만 평야지대에서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낼 수 없었다. 전쟁 소리가 사라져갈 때 가나안
족들은 여전히 헤레스 산에서부터 아얄론, 샤알빔, 기브온, 비에롯, 기럇여아림, 그리고 예루살렘을 통하여 동서로 이어진 강력한
요새화된 일련의 성읍들을 소유하였다. 멀리 북쪽으로는 잇사갈, 스불론, 아셀, 그리고 납달리가 또 다른 장벽인 돌, 하롯셋,
므깃도, 타아낙 그리고 이블림에 이어지는 바다에서 요단강에 이르는 요새들에 의하여 중앙 가나안에 있는 지파들로부터 분리되었다.
벳산의 요새까지 요단으로 내려 뻗친 풍요한 이스르엘 계곡은 아직도 가나안 족들에게 속해 있었다. 그 땅을 가로지른 이 두 일련의
요새들은 지파들 간의 교통과 연합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같이 아직 정복되지 않은 성읍들에 의하여 상호간 두절된
상태에서 히브리 지파들은 공격에 노출되었으며, 그들이 적의에 찬 주민들 중에서 취한 중심지들을 수호하기 위하여 아주 어렵게
부분적인 연합을 이루어 그들의 대적을 대항할 수 있었다. 끊임없이 순환되는 호전적 백성들의 침략은 히브리 사람들에게
투쟁과 부담을 안겨 주었다. 북동쪽에서 메소포타미아인들이 침략해 오고, 남동쪽에서는 모압인들이, 동쪽에서는 미디안과 암몬
사람들이, 그리고 남서쪽에서는 블레셋 사람들이 침략해 왔다. 배교와 우상 숭배가 그들의 종교에 대한 충성이 이루어 놓은 민족적
결속을 약화시켰기 때문에 히브리인들은 이러한 맹렬한 공격을 저항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속박의 고통이 회개를 일으켰고, 백성들은
다시 한번 여호와를 경배하도록 돌이키게 하였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자 또는 “사사”를 일으키셨으며,
그는 속박의 멍에를 깨뜨리고 그가 죽기까지 백성들을 다스렸다. 이것이 이 책의 주제적 요소이다. 사사기의 저자가
설명하는 주요 주제는 참 종교에서 벗어나는 죄와 배교가 한 백성에게 하나님의 불쾌하심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에서
돌아서도록 하기 위하여 참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도록 돌이키게 할 수 있는 고통과 재난을 허용하신다. 참된 회개가 일어날 때
하나님께서는 구원과 구조를 가져오는 사람들과 여건을 준비하신다. 그 기간의 역사는 이러한 광범위한 명제를 밝히는 체계로
기록된다. 의는 민족을 높이지만 죄는 백성의 수치이다. 악한 친구는 선한 의향과 훈련을 망친다. 도덕적 타락은 언제나 민족적
쇠약을 가져온다. 택한 백성, 이스라엘의 문제는 하나님의 섭리의 즉각적인 보호 아래 있었다. 민족적인 죄는 하나님의 처벌을 가져
온다. 죄에 대한 처벌은 여호와께서 교육적인 차원에서 내리신 것이지 보복적인 것이 아니다. 응징은 그것이 참된 회개를 일으켰을 때
철회된다. 구원은 무력한 인간 밖의 노력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고취된 힘과 열심에서 나온다.
저자는 우리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의 규범의 원칙은 이 기간의 역사에 나타난 배교와 속박이 회개와 구원으로 바뀌는 특성을 설명한다고
한다. 이러한 명제들은 저자가 열거한 이야기 가운데 아주 훌륭하게 예증되었기 때문에 사사기를 열거한 역사 문서의 영역에서 역사의
거룩한 철학의 위치로 높여준다. 이 책의 영감받은 저자는 역사 자체보다는 그가 기록한 역사에서 배워야 할 교훈을 지적하는 일에
더욱 관심이 많았다. 심지어 사사기를 대충 읽어볼지라도 저자가 이스라엘이 새로 얻은 땅에서 만난 사건들 속에 하나님의 손길이
나타난 것을 증거할 의향이 있었다는 사실이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곳에 성과가 있었으며,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그들의
유일한 행복과 안전이 그를 섬기는 데 달려 있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배워야 할 그러한 길로 그들의 경험을 지도하셨다. 이
책의 소 주제는 이스라엘의 문제들은 주로 이방인 이웃들의 악한 감화에 기인된 것이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에 의혹을 느낄
것이다. 만일 그 땅의 우상 숭배하는 주민들이 히브리인들을 유혹에 빠지게 하는 역할을 했다면 하나님께서 왜 가나안 족들과 아모리
족을 몰아내어 당신의 백성을 배교에서 보호하지 않으셨는가라고 한다. 저자는 결국 이 책의 일부(삿 3:1-4)에서 이런
이의(異議)에 대한 대답을 한다. 여기에서 그가 진술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품성 형성에 있어서의 역경의 가치를 아신다는 사실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땅에 가나안 족속을 남겨두어 이스라엘이 그를 섬기는가의 여부를 입증하시고자 하셨다.
나아가서 저자의 목적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서술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지도와 축복 아래 어떻게 소수의 지파들이 외지(外地)의
적개심이 가득 찬 땅에서 영구적 정착을 성취할 수 있겠는가? 그들의 영웅들은 어떻게 명성을 얻었는가? 그리고 갖가지 관심과 영향의
와중에서 그들의 한 분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 다른 백성들에게 휘말리지 않도록 그들을 보호해 주었는가? 사사기는 다섯
개의 부분으로 잘 구분된다. 일반 역사적 서문(삿 1:1-2:5), 또는 여호수아에 의해 그 땅이 여러 지파에게 분배된 후에 그
땅을 부분적으로 정복하는 이야기로 장을 연다. 지파들은 그들의 특별한 유산을 단독으로 공격하거나 또는 때때로 강한 저항을 받을
때는 몇 지파들이 연합하여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오직 그들에게 분배된 땅을 소유하는 일에
부분적인 성공밖에 거두지 못하였다. 저자는 백성들의 실패는 그들이 여호와를 의지하는 신뢰와 성실이 부족한 탓이라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런 방법으로 그는 독자에게 뒤이어 일어나는 이스라엘의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며, 그리고 가나안 족들이 그
땅에 머물도록 허용된 이유를 밝혀준다. 이스라엘과 남아 있는 가나안 족들과의 관계는 계속 이어지는 장들의 역사적 배경을 형성하며
사사들의 필요성을 설명해 준다. 이 역사적 개요에 이어 두번째 서론(삿 2:6-3:6)이 나오는데 그 목적은 여호수아의
사후에 뒤따른 종교적 배교가 어떻게 계속 감소되지 않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백성들은 우상 숭배에 빠지고 하나님의 응징을
격동시켰다. 백성들이 회개할 때는 여호와께서 사사들을 계속 일으키심으로 구원해 주셨다. 저자는 주제를 이야기하면서 열 두
사사들 밑에서 지파들의 역사를 계속 열거한다(삿 3:7-16:31). 죄의 역사가 계속 반복되고, 하나님의 은혜는 계속 새로운
구원으로 맞선다. 이 구원자들 중 여섯 명의 영웅적인 행동은 충분히 서술되고 나머지 여섯 명의 이야기는 간단하게 언급된다.
아비멜렉의 찬탈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님의 지시에 일치하지 않는 군주를 택하는 위험에 대하여 백성들을 경고하고자 충분히
다루어진다(신 17:15). 이 책은 두 가지 부록으로 끝을 맺는데, 둘 다 사사 시대 초기에 일어난 사건들을 묘사한다.
첫째(삿 17, 18장)는 미가의 우상에 대한 이야기와 엘리가 죽을 때까지 단 지파에서 그의 우상을 보관한 북방 성소에 관한
이야기이다. 두번째 부록(삿 19-21장)은 기브아의 베냐민 족의 악행 그리고 다른 지파들이 그 지파에게 복수하는 이야기이다.
마지막으로 베냐민 지파가 사악한 기브온 사람들을 지지한 것 때문에 사실상 멸절된 뒤에 그들을 멸종으로부터 건져내기 위하여 취한
수단에 대한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5. 개요
Ⅰ. 일반 역사 서문: 역사가 시작될 때의 사건에 대한 진술 1:1-2:5 1. 지파들이 팔레스틴에서 그들에게 분배된 땅을 강화하고자 노력함 1:1-36 (1) 유다와 그나스 1:1-20 (2) 베냐민 1:21 (3) 므낫세와 에브라임 1:22-29 (4) 스블론 1:30 (5) 아셀 1:31, 32 (6) 납달리 1:33 (7) 단(남부) 1:34-36
2. 그들이 실패한 이유 2:1-5
Ⅱ. 주제 서론: 이 기간의 히브리 역사에 대한 저자의 개요와 해설 2:6-3:6 1. 여호수아서와 연결되는 역사적 서론 2:6-10 2. 이제 시작되는 역사에 대한 저자의 해설 2:11-3:6
Ⅲ. 사사들의 이야기 3:7-16:31 1. 옷니엘이 북동쪽에서 온 침략자들(메소포타미아인)의 압박을 끊음 3:7-11
2. 에훗이 남동쪽에서 온 침략자들(모압인)에게서 백성을 구원함 3:12-30
3. 삼갈 3:31
4. 드보라와 바락이 북방 가나안 족들의 압박을 끊음 4:1-5:31
5. 기드온 6:1-8:32 (1) 동편에서 온 미디안 족의 침입을 격퇴시킴 6:1-8:21 (2) 기드온의 생애의 후속 사건들 8:22-32
6.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의 찬탈 8:33-9:57
7. 돌라 10:1, 2
8. 야일 10:3-5
9. 입다 10:6-12:7 (1) 동쪽의 암몬 족의 침입을 물리침 10:6-11:33 (2) 그의 딸을 제물로 드림 11:34-40 (3) 입다의 사사 수행 기간 동안에 나타난 지파간의 투쟁 12:1-7
10. 입산 12:8-10
11. 엘론 12:11, 12
12. 압돈 12:13-15
13. 삼손의 탄생과 모험 13:1-16:31
Ⅳ. 두 가지 부록: 사사 시대에 일어난 두 사건 17:1-21:25
1. 미가의 우상의 출처와 단(북방)에 보관된 그의 우상 성소 17:1-18:31 (1) 우상의 주조 17:1-6 (2) 변절한 레위인이 제사장이 됨 17:7-13 (3) 단 사람들의 이주를 따라 우상이 단으로 옮겨짐 18:1-31
2. 베냐민 사람들의 악행과 그 무서운 결과 19:1-21:25 (1) 기브아의 베냐민 사람들의 방탕과 레위인에게 속한 첩의 죽음 19:1-28 (2) 다른 지파들이 베냐민 백성을 처벌함 19:29-20:48 (3) 베냐민 지파의 멸종을 방지할 수 있도록 지파들의 서약을 우회하는 방법 21:1-25
사사기는 여호수아의 죽음과 왕정체제의 시작 사이의 기간을 소개합니다. 이 책의 독자들은 흠이 많은 사사들을 통해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길이 참으시고 자비로우심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역사적 배경
사사기
시대에 해당하는 주전 이천년기의 후반부에는 근동지방 전역에 걸쳐서 거대한 민족 이동들이 이루어지던 시대였습니다. 물론 이 책의
저자도 익명으로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이스라엘의 왕정체제가 시작된 이후의 어느 시기에 살았던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이
책의 저작시기에 대한 단서를 18:30-31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모세의 아들 요나단의 후손인
제사장들이 계속해서 일을 했으며, 법궤가 실로에 있는 기간 동안 미가의 우상들이 계속되어졌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 자손이 자기들을 위하여 그 새긴 신상을 세웠고 모세의 손자요 게르솜의 아들인 요나단과 그의 자손은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어 그 땅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이르렀더라.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가 만든 바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
물론 이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에 대한 견해들이 많이 있습니다. 6세기의 늦은 연대를 주장하거나, 혹은 단 주변 지역이 빼앗긴 날 즉 이 부분이 이스라엘로 존재하지 않게 된 때를 가리킨다고 주장합니다.
아니면 사무엘상 4:1-11 이하의 내용과 관련해서 상당히 이른 시기를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 책의 마지막 장들 역시 연대와 관련된 정치적 성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책의 연대는 왕국 분열 이후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
장들의 역사 기록은 친 다윗적이자 반사울적인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성향으로 볼 때 이 이야기는
왕정시대의 상당히 이른 시기를 반영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므로 이 책의 내적인 증거는 왕국의 분열 직후의 시기를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연대적인 문제는 출애굽 연대와 관련해서 깊은 논란거리 중의 하나입니다. 사사들의 산술적인 연대는 410년이며, 또한
본문은 이스라엘이 우상숭배한 기간에 대한 언급은 없기 때문에 출애굽 연대를 어떻게 이해하든지 조화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몇몇 사사들이 이스라엘의 각기 다른 지역에서 중복된 시기에 활동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재구성을 위한 충분한 자료는
부족합니다.
문학적인 구조
지파들이 협력하여 정복활동을 하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그
결론은 지파들이 연합하여 한 지파에 맞서 싸우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서론에서는 이 책 전체의 주제, 즉 왜 가나안 사람들이 그
땅에서 완전히 쫓겨나지 않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나름대로의 사이클을 가지고 있는데, 죄 - 압제 - 구원이란 구조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한 순환론적인 흐름은 아닙니다. 보다 바람직한 용어는 "나선형 하강(downward spiral) "이라고 하겠습니다.
저자는
에훗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하나님께서 옷니엘을 세우시듯이 에훗을 세웠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에훗은 하나님의 신에 의해서
감동을 받지도 않았으며, 이스라엘을 치리하지도 않았습니다. 에훗은 속임수와 배반에 의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데 본문은 야웨의 뜻 및
그와 야훼의 관계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습니다.
드보라는 여 선지자로서 이스라엘을 치리하였습니다. 그러나 드보라가 사사로 활동했다는
사실은 이스라엘 남자들의 지도력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드보라의 노래 말 속에는 분파주의와 지파간의 분열을 예상케 하며, 결국 이것은 이
책의 마지막 이야기에서 그 절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사들의 지도력을 가지고는 이스라엘 영토가 안전하게 보존될 수 없다는 것이
메시지라고 하겠습니다. 사사들도 역시 이스라엘과 같이 연약하고 범죄하는 사람들입니다.
여호수아가 유산으로 남긴 통일된 이스라엘은 분파적이고,
지역주의적인 갈등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종교적, 정치적 혼란 때문에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땅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형태의
지도력이 필요함을 내다 보게 합니다.
신학적인 메시지
1. 은혜와 율법, 조건성과 무조건성
사사기서가
제공해주고 있는 것은 조직 신학이 아니라 관계의 역사를 말합니다. 사사기서는 우리에게 하나의 역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고 있는
관계는 조건적이자 무조건적이라는 역설을 남겨 놓습니다. 그리고 전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은 이 양자 사이의 긴장입니다.
2.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
사사기서는
비중앙집권적인 통치가 비록 국가의 지도권이나 전쟁 문제에 하나님께서 간헐적으로 개입하시는 식의 축복을 누린다 할지라도 결국
거룩한 나라를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사기서는 왕정 체제로서의 변천에 대해서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신약으로의 접근
사사기는 일반 인간 군상을 잘 묘사합니다. 사사들은 농부, 여자, 왼손잡이, 쓸모없는 떠돌이, 성에 집착하는 나실인 등이었습니다. 중심 인물들의 약점과 실패들을 통해서 우리가 지나치게 교만해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경계하십니다(고린도전서 6: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우리는 그들의 모든 흠집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가진 신앙에 대해서 배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한 것은 바로 그들의 믿음 덕분이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저들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리로 하여금
인내하고 예수를 바라볼 수 있도록 요구하고 있는 증인들의 허다한 구름 중의 일부입니다(히브리서 12:1-2).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요소수라는 용어가 요즘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요소수는 디젤차량에 넣는 환경보호물질인데요, 액체이며, 주유기 옆에 요소수 주입기가 같이 있거나 또는 별도의 통에 담겨 판매됩니다.
최근의 차량들은 연료를 넣는 곳과 나란히 요소수 구멍이 같이 있습니다.
1. 요소수란 무엇인가
이 물질은 액상의 화학물질로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요소 비료의 원료인 요소(Urea)와 순수한 물(water)을 혼합하여 만든 요소함량 32.5%의 화학물질이다.
이 요소수가 디젤엔진 자동차의 질소산화물을 정화하는데 쓰인다.
질소산화물은 기관지염, 폐렴 등 각종 호흡기질환을 일으키며 광학 스모그와 산성비의 주요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 연구 결과 교통사고
사망자의 2배가 넘는 사람이 자동차 매연으로 숨지고 있다는 보도가 있을 정도로 우리 일상생활에 차량배기가스가 미치는 영향이
크다. 그래서 선진국을 중심으로 오래전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온 온실가스감축의 일환으로 차량배기가스 규제가 점점 엄격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경유자동차배기가스규제’로 유럽기준을 따르고 있다.
△ 요소수의 개념
요소와
물을 결합해 만든 액체물질로 경유차에서 발생하는 질소산화물을 중화시키는데 사용되는 물질입니다. 유럽기준(유로6)에 따르는
우리나라도 요소수 주입이 2014년부터 의무화될 예정입니다. 그래서 관심들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2. 공인 요소수를 사용해야 하는 이유
요소수를 사용하여 질소산화물을 정화하는 기술을 Urea-SCR이라 하는데, 미국에서는 DEF(Diesel Exhaust Fluid), 유럽에서는 AdBlue로 칭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각 자동차 메이커에서 사용되는 요소수 기술원리는 거의 같지만 나름의 이름을 붙여, 메르세데스 벤츠의 블루텍(Bluetec), 폴크스바켄 아우디의 블루모션(BlueMotion), BMW, 혼다의 클린디젤 등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 장치에는 샤프심과 같은 긴 구멍으로 가득찬 핵심부품인 촉매장치가 있는데요, 공인된 요소수가 아닌 제품을 사용하는 경우 제 기능을 못해 배기가스가 여과없이 배출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센서 등의 부품이 망가지는데요.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둘째,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으므로(민수기 20:12)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민수기 20:7-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모세가 그 명령대로 여호와 앞에서 지팡이를 잡으니라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셋째, 모세의 신앙
- 모세의 신앙 원리
1. 말씀하신대로(신명기 31:3)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과 같이 여호수아가 너를 거느리고 건널 것이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네 앞서 건너가사 이 민족들을 네 앞에서 멸하시고 너로 그 땅을 얻게 하실 것이며.
2. 행하신대로(신명기 31:4)
여호와께서 이미 멸하신 아모리 왕 시혼과 옥과 및 그 땅에 행하신 것과 같이 그들에게도 행하실 것이라.
-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행하실 것이라(6)
3. 맹세하신대로(신명기 31:7)
모세가 여호수아를 불러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그에게 이르되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여호와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들로 그 땅을 얻게 하라.
변화산 사건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17:3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여호수아 24:1∼30 ♦ 묵상을 위한 주제 : 여호와만 섬기라(14절) ♦ 성구 :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敬畏)하며 성실(誠實)과 진정(眞正)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烈祖)가 강 저편과 애급에서 섬기던 신(神)들을 제(除)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여호와만 섬기라(Just serve the Lord)” 오늘은 여호수아서를 마감합니다.
여호수아서의 구조를 소개합니다. 전반부(1∼12장)는 가나안 땅의 정복을 위한 전쟁 후반부(13∼24장)은 정복한 약속의 땅을 분배
여호수아서의 마지막 부분은(23, 24장) 지도자 여호수아의 고별사 또는 고별 설교라고 하겠습니다. 23장은 지도자들을 향한 고별사라고 하면 24장은 백성들을 향한 유언과 같은 고별사라고 하겠습니다.
23장에서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강조하므로 “내가 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24장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적인 개관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인도하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 섬기겠노라(My household, we will serve the LORD)”
지난 일들을 돌아볼 수밖에 없는 언덕에 올라왔습니다. 그 언덕 위에서 지나온 발자취를 둘러보며 두 가지 단어를 생각합니다.
“아쉽다!” “후회한다!”
더 이상 두 단어에 붙잡혀 있을 시간적 여유가 없기 때문에 마지막 남은 시간을 이렇게 채우려고 합니다.
“힘을 다하라!” “집중하라!”
인생을 한 단어로 정리한다면 “조우(遭遇)”라고 합니다. ‘조우(遭遇)’란 한자는 “만날 조(遭)” “만날 우(遇)”라는 훈(訓)입니다. 인생은 “만남”과 “선택”이란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누구를 만났기 때문에 무엇을 선택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과정에 의해서 저와 여러분의 삶이 결정됩니다.
주여,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해야 할 일을 감당하며 섬겨야 할 주님 앞에 성실한 하루의 기쁨을
즐기며 감사하게 하옵소서!
♪ 찬양 /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11월 29일(월) 하나님을 사랑하라(여호수아 23:11)
♦ 11월 29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여호수아 23:1∼16 ♦ 묵상을 위한 주제 : 하나님을 사랑하라(11절) ♦ 성구 : 그러므로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Love the LORD your God)”
모세의 후계자가 되어 가나안 정복 전쟁과 분배하는 일을 맡았던 여호수아(Joshua)는 이제 나이 많은 늙은이가 되었습니다(1절).
모세는 ‘호세아’를 “여호수아”라고 불렀으며(민 13:16),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야훼는(주님은)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며 “예수(ישו)”라는 이름의 원형이기도 합니다.
나이가 많아 세상을 떠나야 할 ‘여호수아’가 강조하는 것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the LORD your God)”라고 합니다.
여호수아의 이 고백에서 무엇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첫째는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
모든 백성들에게 추앙을 받는 사람은 나이가 많아 죽을 수밖에 없지만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영원불멸의 하나님이라고 강조합니다.
둘째는 정복 전쟁을 승리케 하신 여호와 하나님
요단강을 건너 크고 강한 백성들이(아낙 자손) 거주하는 약속의 땅을 우리가 싸워서 이긴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기게 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남은 땅을 너희들의 힘으로 정복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싸워야 한다고 깨우칩니다.
셋째는 여호와 하나님만을 사랑하라
다른 민족들이 섬기는 이방신들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만을 온전히 믿고 따라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지금까지 너희들을 안전하게 인도하신 하늘과 땅의 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어떻게 마감되어야 할까요?
나의 후손들에게 무엇을 남겨줄 수 있을까요?
여호수아의 고별사 여호수아 23장을 읽으면서 이런 다짐을 합니다.
내가 읽었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건의 일기를 작성하여 유산으로 물려주려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각자 내 가 할 수 있는 신앙의 유산을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것을 찾아서 "신앙의 유산"으로 남겨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어떻게 죽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다." (S 존슨) 영국의 문학자
♪ 찬양 /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여호수아 23:11
그러므로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아멘 So be very careful to love the LORD your God.
- 누구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며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말 내가 믿는 그 믿음과 그 사랑이 하나님에 대한 것인가를 검증해야 합니다. 멕시코에서 사역하던 '김윤상선교사'가 교통사고를 당하여 의식불명 상태로 24일간을 병상에 누워있을 때 체험한 간증에서 어려서부터 교회 중심으로 생활했는데 그 모든 시간들이 정말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조심하여(솨마르, shâmar. שָׁמַר) 울타리를 치다, 지키다 신명기 4:15, 깊이 삼가라
사랑하라(아하브, ’âhab. אָהַב) 좋아하다, 사람을 사랑하다
여호수아 23:2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 곧 그 장로들과 두령들과 재판장들과 유사들을 불러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나이 많아 늙었도다.
(새번역) 장로들과 우두머리들과 재판장들과 관리들
* 늙다(자켄, zâqên / זָקֵן) 나이가 들다
여호수아 23:3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 모든 나라에 행하신 일을 너희가 다 보았거니와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는 너희를 위하여 싸우신 자시니라.
디모데후서 2:15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오늘의 기도
하나님의 사랑받는 일군으로 온전히 쓰임받게 하옵소서!
11월 27일(토)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라(여호수아 22:4)
♦ 11월 269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여호수아 22:1∼34 ♦ 묵상을 위한 주제 :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라(4절) ♦ 성구 : 이제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대로 너희 형제(兄弟)에게 안식(安息)을 주셨으니 그런즉 이제 너희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요단 저편(便)에서 너희에게 준 소유지(所有地)로 가서 너희의 장막(帳幕)으로 돌아가되.
여호수아서를 기록한 근거는 모세 오경입니다. 모세가 명령한 것을 모두 실천해야 합니다.
이제까지 가나안 땅의 정복을 위한 전쟁도 마쳤고 약속의 땅에 대한 지파별 분배도 마쳤습니다. 그러므로 요단 동편에서 이미 기업을 받은 “갓과 르우벤과 므낫세 반 지파”는 그들이 받은 기업의 땅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먼저 기업을 받았지만 가나안 정복 전쟁에 함께 참여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는 가나안 정복 전쟁에 기꺼이 동참했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킨 그들을 칭찬하고 성소와 떨어진 요단 동쪽에서도 하나님과의 약속을(율법) 지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라고 부탁합니다.
세 지파는(르우벤, 갓, 므낫세 반) 많은 재물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과 분리되어 구원의 약속에서 제외될 것을 걱정하여 자신들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요단 가에 큰 단을 쌓았습니다(10절).
요단 서쪽에 있는 지파들은 세 지파가 하나님이 금하신 새로운 제단을 쌓는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는데 세 지파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면 "아이 성"과 같은 작은 마을도 정복하지 못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요단 서쪽의 지파들은 사실을 확인하지도 않고 군사를 이끌고 세 지파를 심판하러 갔습니다.
오해를 받은 세 지파는 다른 지파와 상의하지 않고 단을 쌓은 경솔함을 깨닫고 하나님과 분리되지 않기 위한 증거의 단을 쌓았다고 설명하여 오해를 풀었습니다.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그 단의 이름을 “엣(Ed)”이라고 부르고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라고 하였습니다(34절).
나는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다고 행하는 것이 혹시 다른 사람들에게 거침이 될 수 있는 것이 없었는지 살펴볼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전보다 주님 사랑하는 일에 모두가 함께 즐겁게 참여할 수 있는 믿음의 길을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 찬양 /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가나안 땅 정복 전쟁이 끝난 후,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 자손은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 그 댓가로
받은 그들의 기업이 있는 길르앗 땅으로 건너가는 도중에 요단 언덕 가에 큰 단을 세우게 됩니다.
그런데 그 소문이 요단 서편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리면서 이 세 지파에 대해 분노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세워진 실로에 있는 유일한
제단을 무시하고 자신들만의 제사를 위해 다른 장소에 제단을 세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제단이 둘로
나뉘어지면 이스라엘의 공동체도 둘로 나뉘어질 수 있다고 하는 위기감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세 지파의 행동을 하나님과
이스라엘 전체 공동체에 반역하는 행위로 규정하고 군대를 소집하여 그들을 심판하려 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갈등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많은 갈등이 존재하지만 그 원인은 소통의 부재로부터 시작됩니다. 그것은 바로 서로의 생각이 다르고 입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가나안땅 요단 언덕 가에 세 지파가 제단을 쌓은 것은 하나님의 명령과 이스라엘 공동체를 무시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자신들
마음대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만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제단은 이스라엘과의 연합의 표시로 세운 것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세
지파의 제단을 본 요단 서편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남은 지파들을 향해 반역하는 행위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소통의 부재로 인한 갈등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관계를 악화시키게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갈등을 해결하고 이전보다
더욱 평화롭고 화평한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갈등을 해결하는 몇 가지 지혜를 배우게 됩니다.
요단 동편으로 간 세 지파가 제단을 쌓았다는 소문을 듣고 분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곧 군대를 모아 전쟁 준비에 돌입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바로 전쟁에 임하지 않고, 전쟁에 앞서서 세 지파에게 자초지종을 알아보려고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와 각 지파의
대표자들을 보내 회개를 촉구하는 한편, 왜 그렇게 큰 제단을 쌓았는지 자초지종을 듣게 했습니다.
그 결과 요단 동편으로 간 세
지파가 가나안땅 요단 언덕 가에 큰 제단을 쌓은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아주 순수한 목적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서로 오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 지파에게 간 대표자들은 아주 간절하게 그들의 행위를 돌이킬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께 거역하고자 하느냐... 여호와를 배역하면 내일은 그가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진노하시리라”(수 22:16-18)
만약에 이들 세 지파의 행위를 괘씸하게 여기고 대표자들을 보내지 아니하고 전쟁을 일으켰다면 서로 엄청난 희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쟁에 앞서서 서로 화목하기를 원했습니다.
우리가 갈등을 해결하려는 마음은 있지만 잘 되지 않는 이유는 접근하는 방식이 너무 과격하고 극단적이기 때문 입니다. 왜 이렇게
극단적으로 가는가 하면 문제만 보기 때문입니다. 문제만 보고, 그 문제만 해결하면 다 될 것 같은 착각에 빠집니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상처받고 희생당하는 사람들이 생긴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면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로 인하여 더 큰
상처와 후유증이 남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고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언제든지 결과도 중요하지만 방법까지도 바르게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행하여야 합니다. 멀리보고, 크게 볼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대표자들이 세 지파의 말을 다 듣고 보니 그들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배신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니까 그들은 서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습니다(22:33).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동편으로 간 세 지파에 대해 오해했던 것은
이스라엘이 한 공동체로서 다른 신을 섬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을까 싶어 우려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막으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만의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라는 명분만 주장하고 전쟁이라고 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다면 이 일로 도리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요단으로 간 세 지파도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또한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 세
지파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벌어진 위기는 결국 소통의 부재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뜻 안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소통을 통하여 서로 전쟁을 피하고 해결할 방법을 찾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말을 자주 쓰기도하고 듣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에만 집착하여 자기중심적 해결 방법만이
옳다고 주장하다보면 문제는 해결 되지 않고 더욱 관계만 악화되어 반목하게 되는 경우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 지파와 이스라엘백성들은 서로의 오해를 풀고, 세 지파가 세운 단의 이름을 '엣'이라 이름했는데 그것은 "우리 사이에 이 제단은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라고 했습니다.
세 지파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단을 통해 후손들에게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이 ‘참 신’이라는 사실을 가르치게 될 것이고, 하나님만이 영광받으시는 복된 섬김이 이어지게 될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소통의 부재로 인하여 전쟁까지 벌일 뻔 한 이 사건이 그들의 지혜로운 행동으로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공동체 의식을 더욱 견고히 하는 형제애를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많은 ‘오해와 상처로 인하여 치유가 필요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새 부대로
살아가기를 소망’하는 그리스도인 마다 오늘의 말씀을 기억하고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일에 한 마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앞에 더 잘하겠다는 행동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 잘못 알려지지 않도록 항상 소통의 문을 열어놓게 하시고 더 많은 대화와 의사소통으로 상대방의 마음과 뜻을 정확하게 알게 하옵소서 내 생각을 말하기 전에 상대방의 생각을 알게 하시고 내 결정을 행동하기 전에 상대방의 결정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그 결과 서로에게 오해된 것은 이해로 덮게 하시고 이해한 것을 힘을 모아 더 좋은 결과를 이루도록 노력하게 하옵소서.
전쟁이 끝나자 여호수아는 군대를 해산시켰다. 가나안 전쟁을 수행함에 있어서 항상 선봉에 섰던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의 군대는 때때로 요단을 건너갔던 것 같다. 여호수아는 그들을 소유지로 되돌아가게 한다(4절).
그들에게
많은 재산을 주어서 돌려 보낸다. 자신의 비용으로 전쟁에 나가는 자가 어디 있는가? 너희는 많은 재산을 가지고 너희 장막으로
돌아가서(8절). 여호수아는 "너희 장막으로 즉 너의 집으로 가라"고 말하였다. "많은 재산, 즉 그 땅에서 전리품으로 얻는
가축뿐 아니라 은, 금을 가지고 돌아가라. 가서 너희의 형제들과 그 전리품을 나누어 갖도록 하라."
지휘관에게
자발적으로 순종한 것에 대하여(2절) 형제에 대해 가진 지속적인 애착과 협력(3절)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신실하게 순종하였음을
칭찬하며 오직 하나님의 능력안에서 신실한 경건심을 가질 것을 권면하며 축복을 해주었다(6절).
요단 강 동편 땅으로 간 지파들은 가나안 땅에서 신앙을 고수하고자 하는 경건한 열의를 보이며 요단에 이르자(10절) 단을 건립하였습니다.
그런데
단을 쌓은 사건은 나머지 지파들에게 상당한 파문을 일으키게 됩니다. 즉 그 사건의 자초지종을 따지기 위해 대표자까지
파견하여(13-14절) 아간의 범죄와 바알 브올 사건 등을 거론하면서(17절) 하나님께서 혹시 이번에도 심판의 칼날을 빼시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휩싸이게 됩니다.
자신들이 쌓은 단으로 인해 다른 지파 사람들이 매우 격분하게 되었음을 뒤늦게 깨달은 두 지파 반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결코 불신앙이나 불경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역설하며 자신들의 입장을 해명하게 됩니다.
대표자들은
두 지파 반의 해명을 좋게 여기고 그 사실을 이스라엘 전체에게 전하였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크게 기뻐하며 요셉 후손의 땅
분배와 원망 사건 이후 조금 흩어지고 느슨해진 이스라엘 12지파의 단합을 꾀할 수가 있었습니다.
주께서 주신 오늘!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해야 하고, 서로를 향한 관심과 사랑의 마음으로 살아가길 원합니다.
11월 26일(금) 레위 사람에게 준 성읍(여호수아 21:3)
♦ 11월 25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여호수아 21:1∼45 ♦ 묵상을 위한 주제 : 레위 사람에게 준 성읍(3절) ♦ 성구 : 이스라엘 자손(子孫)이 여호와의 명(命)을 따라 자기(自己)의 기업(基業)에서 이 아래 성읍(城邑)들과 그 들을 레위 사람에게 주니라.
레위 자손들에게는 기업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수 18:7).
여호수아 21장의 내용을 구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수아 21:1∼2, 레위 지파의 요구 여호수아 21:3, 레위 지파의 청원 수락 여호수아 21:4∼7, 레위 지파가 얻은 성읍 여호수아 21:8∼42, 레위 자손들이 각 지역에 흩어져 거주하게 된 이유 여호수아 21:43, 미리 예언된 역사가 성취 여호수아 21:44, 하나님으로 인해 안식을 누림 여호수아 21:45, 하나님과 말씀의 관계
레위
지파 사람들은 특정한 지역에 함께 모여 살 수 있는 기업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 배경은 모든 백성들의 일꾼으로 일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흩어져 이스라엘 백성 중에 거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육적 건강을 위해 온 힘을
쏟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어느 한 곳에 편중해서 살게 하지 않았고, 윤택하거나 궁핍함을 가리지 않고 정해진 곳에 거주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기로 약속하셨고 이제 그 약속을 실행하셔서 그들이 그 땅을 얻어 거기 거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를 지나는 긴 여정으로부터, 가나안에서 전쟁에서 안식을 주셨으며, 이제 자신의 거주지에 평화롭게 거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출애굽 때부터 하나님이 늘 함께 하셨고 하나님이 마침내 종결시키신 가나안 정복 전쟁을 까지도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가나안 원주민들의 군사적인 위협과 충돌이라는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나 완전하고도 확실한 휴식의 시간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 안식이 성취됩니다(히 12:22∼24). 그리스도는 자기에게 오는 모든 자들에게 영혼의 위안과 해방과 참 안식을 주십니다(마 9:28∼30).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일이 하나도 남음이 모두 성취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비록 더디게 성취되는 것 같아도 성도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인내로써 기다리면 언젠가는 이루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내려주신 오늘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섬기며 그분의 영광을 위해 힘써 일하며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자기의 기업에서 이 성읍들과 그 목초지들을 레위 사람에게 주니라. 아멘
여호수아 13:33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모세가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심같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기업이 되심이었더라.
민수기 18:20
하나님께서는 대제사장 아론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의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
레위 자손의 기업(신명기 33:8a, 10)
레위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주의 법도를 야곱에게, 주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며 주 앞에 분향하고 온전한 번제를 주의 단 위에 드리리로다.
여호수아 21:41-42
레위 사람의 이스라엘 자손의 기업 중에서 얻은 성읍이 모두 사십 팔 성읍이요 또 그 들이라. 이 각 성읍의 사면에 들이 있었고 모든 성읍이 다 그러하였더라.
여호수아 21:44
여호와께서 그들의 사방에 안식을 주셨으되 그 열조에게 맹세하신대로 하셨으므로 그 모든 대적이 그들을 당한 자가 하나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모든 대적을 그들의 손에 붙이셨음이라.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시편 73:25-26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히브리서 11: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시편 39:7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오늘의 기도 영원한 기업을 위하여 맡겨진 본분 감당하게 하옵소서!
레위 지파 각 4자손에 따라서 성읍과 목초지를 나눠 주었습니다.
그래서 도합 레위성읍이 48성읍이 이뤄지게 됩니다.
우리가 또 주목하고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레위 지파를 이스라엘 전역에 흩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무엇때문 입니까? 이제 나눠져 있는 지파간의 연합을 이루고 갈등을 완화
하여 완충적인 역할을 할수 있는 지파는 레위지파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골고루 흩어져 있는 지역에서 이스라엘을 교육하며
제사하며 하나님의 사자로서 온전한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오늘날의 교회의 역할이 분명하게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습니다.
교회는 복음의 말씀으로 주의 백성들을 교육하며, 신앙으로 바른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민족을 하나로 연합하게
하며 민족간의 반목과 대립을 완충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정치적인 진영을 달리하며 한편에 서서 정치적인
색깔을 달리하는 기독교 단체가 얼마나 문제가 있는 것인지 알수가 있을 것입니다.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교회
답게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바로서야 할 것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레위 지파로 주신 사역을 감당할수 있는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그로 인하여 민족을 하나로 깨어진 민심을 하나로 연결시킬수 있는 교회적인 사명을 감당할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여호수아 13:33,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모세가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심같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기업이 되심이었더라.
아직도
남은 땅이 많았지만(수 13:1),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가나안 땅을 정복했고 그 일은 상당히 이루어졌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여호수아에게 그 땅을 모든 지파에게 분배하라고 명령하셨다. 열두 지파 중, 르우벤 지파, 갓 지파, 그리고
므낫세 지파의 절반은 이미 모세를 통해 요단강 동쪽의 땅을 얻었으므로, 요단강 서쪽의 땅은 나머지 아홉 지파와 므낫세 지파의
나머지 절반의 기업이 될 것이다.
레위 지파는 땅 분배에서 제외됨
그런데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에 레위 지파는 땅을 기업으로 분배받는 일에서 제외되었다.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여호수아[원문에는
'그가'; 모세를 가리킴]가 기업으로 준 것이 없었으니 이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물이 그 기업이 됨이 그에게
이르신 말씀과 같음이었더라"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모세가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심같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기업이 되심이었더라"라고 오늘 본문은 기록한다.
민수기
1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서 시내 광야에서 각 지파의 사람들의 수를 셀 때, 레위 지파는 모세의 명령대로 그
셈에서 빠졌었고, 그 대신,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야곱의 유언대로 두 지파로 간주되었었다. 레위 지파는 제사를
집례하는 제사장들과 그들을 도와 성막 봉사의 일을 하는 레위인들이었는데 그들만 성막에 대한 책임을 가졌다.
숫자적으로도
레위 지파는 다른 지파들에 비해 적었다. 다른 지파들은 20세 이상의 남자들의 수가 평균 약 5만 명 가량이었지만 레위 지파는
1개월 이상의 남자들의 수도 약 2만 2천 명에 불과했다. 레위 지파는 숫적으로 많이 번창하지 못했었다.
하나님께서
레위 지파를 땅의 분배에서 제외시키신 것은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기업이 되셨기 때문이다. 본문 33절은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모세가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심같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기업이 되심이었더라"라고 기록한다.
민수기 18:20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대제사장 아론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의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고 하셨었다. 그 말씀대로, 레위 지파의 기업은
하나님이셨다.
오늘날 레위 지파는?
레위
지파에 대한 말씀은 오늘날 누구에게 적용될 수 있을까? 물론 그것은 목사나 전도사들을 가리킬 수 있다. 그들은 세상의 일들을
버리고 하나님께 자신을 바친 자들이다. 또 교회의 일들을 돕는 유급 봉사자들도 레위인의 성격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그들도
세속적 일과 구별된 하나님의 집의 일에 종사한다. 그들은 돈을 버는 생각보다 하나님과 교회를 섬기는 정신으로 일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레위 지파는 그들뿐 아니라, 영적으로 모든 성도들을 상징하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모든 성도들은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이 지나가는 나그네의 삶이며 하나님이 그들의 기업이요 천국이 그들의 본향임을 고백하는 자들이다. 더욱이 성경은
성도를 제사장이라고 표현한다. 베드로전서 2:9,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세상은 지나가는 곳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우리가 영원히 살 곳이 아니고 여행하듯이 지나가는 곳이다. 다윗은 인생을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고 묘사하고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고 사람의 일생이 없는 것과 같다고 표현하였다(대상 29:15; 시 39:5-6). 전도서는
세상의 모든 일이 헛되다고 강조하였다(전 1:2-3). 야고보는 사람의 생명을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라고 표현하였다(약
4:14). 예수께서는 세상의 일들을 썩는 양식을 위한 일이라고 말씀하셨다(요 6:27). 성도들은 이 사실을 깨닫고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세상의 기업에 모든 마음을 두지 않는다. 지나가는 세상, 그림자 같은 세상, 안개 같은 인생의 삶, 썩는
일들에 마음을 빼앗기는 사람은 죽음 앞에 설 때 자신이 심히 어리석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보화
세상의
삶이 그러하기 때문에 다윗은 고백하기를,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라고 했다(시 39:7).
하나님은 우리의 보화이시요 우리의 소망이시다. 하나님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시편 73편의 저자는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고 고백했다(시 73:25-26).
하나님과
그의 일의 가치를 알았기 때문에,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을 전도자로 부르시는 주 예수의 부름을 받았을 때 그물과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마 4:18-22). 주께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를 따랐던 자들에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교훈하며 격려하셨다(막
10:29-30).
하나님이
우리의 가장 큰 보화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는 주의 말씀을 받을 수 있다(눅 14:26, 33).
사도
바울은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義)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義)라"고 고백했다(빌 3:7-9). 이것은 하나님의 가치를 안 자만 할 수 있는 고백이다.
천국은 우리의 본향
하나님이
우리의 보화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천국은 우리의 본향이다. 인생을 나그네라고 표현한 것은 그에게 참 본향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죽음을 '돌아가셨다'고 말하는 것도 사람에게 죽음 너머에 본향이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사람은 죽어 하나님께로
돌아가 선악간에 심판을 받는다.
히브리서는
신앙의 열조들에 대해 증거하면서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고 말했다(히 11:15-16). 하늘에 있는 우리의 본향인 그 성이 천국이다. 사도 베드로도 장차 구원받은
성도들이 들어갈 천국을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이라고 말하고 그것이 지금 하늘에 간직되어 있다고
증거했다(벧전 1:4).
하나님의 뜻만 행함
세상은
지나가는 곳이며 하나님은 우리의 보화이시며 천국은 우리의 본향이기 때문에, 성도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며 하나님의
뜻만 행하려 한다. 사도 바울은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증거하기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했다(롬 14:7-8). 얼마나 놀라운 증거인가?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가?
사도
바울은 다른 서신에서 또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다(고후 5:14-15). 주를 위해 사는 삶,
그것이 성도의 삶이다.
예수님
자신은,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하셨고(요 4:34), 사도
요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교훈하였다(요일 2:15, 17). 성도는 이 세상에 살며 이 세상의 일들을 하지만, 사실상 하나님을 위해 사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일을 힘써야 하는 자들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영적으로 레위 지파와 같다. 우리의 기업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게으르지 말고 성실히 살아야
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이 지나가는 세상이며 우리의 삶이 나그네와 행인 같은 삶임을 알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보화이시며 천국은
우리의 본향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도 하나님을 위해 살고 죽어도 하나님을 위해 죽어야 할 것이며 우리의 양식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영적인 성도의 모습이요 그것이 영적 레위인들의 삶이다.
우리는 모두 영적 레위 지파 사람이 되자.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고 레위인들처럼 오직 하나님만 우리의 보화로 삼고 천국만 우리의 기업으로 삼고 살자.
11월 25일(목) 도피성을 택정하라(여호수아 20:2)
♦ 11월 24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여호수아 20:1∼9 ♦ 묵상을 위한 주제 : 도피성을 택정하라(2절) ♦ 성구 : 이스라엘 자손(子孫)에게 고(告)하여 이르라 내가 모세로 너희에게 말한 도피성(逃避城)을 택정(擇定)하여.
도피성은 이스라엘 전역 어디에서든지 32km 이내에 위치하므로 도피성으로 가야할 경우 하룻길 이내에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 성을 향한 도로는 폭을 14m 이상이 되도록 넓게 잘 닦아 놓았으며, 또 길을 잃지 않도록 "미클라트(도피성)"라는 안내판도 곳곳에 설치해 놓았습니다.
도피성은 무슨 이유로 세워놓은 것일까요? 사람이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죄는 살인죄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 죄에 대한 형벌은 무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이에 대한 형벌이 없다면 사회 정의는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연속적으로 살인에 대한 끝없는 복수가 이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살인죄에 대한 형벌이 엄하기 때문에 의도적인 살인과 과실로 발생하는 사고와는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령 누명을 쓴 사람이 피살자의 가족들로부터 즉각적인 보복을 당하기 전까지 자기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도록 안전하게 피신할 장소가 필요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나 다 그 도피성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출 21:12-14).
도피성에 들어가 숨는다 하더라도 자신이 의도적으로 살인하지 않았음에 대한 판결을 받아야 합니다. 살인에 대한 도구가 있거나 계획적인 살인을 하였다면 구제 받을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과실로 살인한 자는 도피성에서 얼마든지 생활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받게 됩니다.
둘째, 반드시 도피성으로 스스로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살인자는 도피성 안에 있을 때만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도피하는 도중에 보복을 당하거나 도피성에서만 생활하는 것이 지루하다 하여 밖으로 나와 있다가 죽음을 당하는 일은 도피성에 대한 규정에 따라 보호받을 수 없게 됩니다.
아무리 자기 자신이 스스로 무죄하고 또 억울한 누명을 썼다고 생각할지라도 도피성으로 피하지 않으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도록 하는 보수(報酬)의 원칙에 따라 피해자의 가족들에게 내어준바 되어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죄 값을 치루게 될 수 있습니다.
셋째, 대제사장이 죽으면 도피성에 피해 있던 자들에게 사면이 내려진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죽어 사면령이 내려지면 보수자가 살인자를 만나도 보수의 원칙에 따라 피를 흘리게 할 수 없습니다(민 35:27-28).
대제사장의 죽음으로 대신 은총이 내려집니다. 왜냐하면 이 도피성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그림자요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서 우리의 과실에 대한 보수를 사면 받을 수 있습니다.
그에게 나오기만 하면 대제사장인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자유가 주어질 것입니다.
도피성의 의미
1. 게데스 - 구별하다 (납달리 산지) 2. 세겜 - 어깨 짐 (에브라임 산지) 3. 헤브론 - 연합, 동맹, 교제(유다 산지) 4. 베셀 - 요새 (르우벤 지파) 5. 길르앗 라못 - 언덕, 고지 (갓 지파) 6. 골란 - 기쁨 (므낫세 지파)
우리들의 영원한 도피성이 되신 우리 주 예수님 품으로 모두 나와 풍랑이 심한 세상에서 참 평안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갈 길을 밝히 보이시니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여호수아 20:2-3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내가 모세로 너희에게 말한 도피성을 택정하여. 부지중 오살한 자를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이는 너희 중 피의 보수자를 피할 곳이니라.
도피성(이르 미클라트) עִיר מִקְלָט
the cities of refuge 받아드리는 성읍
여호수아 20:9
이는 곧 이스라엘 모든 자손과 그들 중에 우거하는 객을 위하여 선정한 성읍들로서 누구든지 부지중 살인한 자로 그리로 도망하여 피의 보수자의 손에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며 그는 회중 앞에 설 때까지 거기 있을것이니라.
도피성의 의미
첫째, 생명의 보존을 위한 것
둘째, 인간은 모두 죄인
셋째, 유일한 도피성 예수
첫째, 생명의 보존을 위한 것(여호수아 20:3)
부지중 오살한 자를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이는 너희 중 피의 보수자를 피할 곳이니라.
민수기 35:11-12 너희를 위하여 성읍을 도피성으로 정하여 그릇 살인한 자로 그리로 피하게 하라. 이는 너희가 보수할 자에게서 도피하는 성을 삼아 살인자가 회중 앞에 서서 판결을 받기까지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
둘째, 인간은 모두 죄인(로마서 3:10-12)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셋째, 유일한 도피성 예수(사도행전 4:12)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로마서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오늘의 기도
생명의 법이 되신 예수님 앞으로 모든 사람들이 나오게 하옵소서!
도피성(City of Refuge)
도피성은
과실로 인해 사람을 죽인 자를 복수자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만든 성읍이다(민 35:6). 도피성은 모두 6개로 요단 강 동쪽에
베셀, 길르앗 라못, 골란, 요단 강 서쪽에 헤브론, 세겜, 게데스 이렇게 동서 각각 세 곳이 지정되었다(민 35:6-8; 신
4:41-43; 수 20:2, 21:13-38).
도피성은 레위인의 48개의 성읍 중에서 택한 6개였는데(민
35:6-7), 강 서쪽의 도피성의 경우는 가나안 전체를 균등하게 3등분한 뒤 각각 한 개씩 성읍을 택했다(수 20:7-8).
보통 도피성까지의 거리는 하룻길(48km 내외)이었는데, 이는 어느 곳에 있든지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이 빨리 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도피성에서의 재판 과정 :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은 우선 도피성으로 피해야 했다. 죽임당한 사람의 가족이나 친척이 원수를 갚겠다고 쫓아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그
후 정당한 재판을 받고, 고의로 살인한 것이 아니었다고 증명되면 그는 도피성에서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보호받으며 살았다(민
35:28). 하지만 대제사장이 죽기 전에 그가 도피성을 떠난다면 혹시 보수자에 의해서 죽임당한다 해도 보수자는 법적인 처벌을
받지 않았다(민 35:25-28). 그러나 재판에서 고살이라고 증명되면 그를 쫓아온 보수자에게 내어주어 죽임당했다(민 35:11-12).
도피성의 길이 잘 닦여진 이유 :
도피성은 사회에 속한 자들 중에서 약자나 곤경에 처한 자의 인권을 보호하려는 법적 장치였다. 공동체 구성원간에 보복심에 불타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가 되지 않게 하려는 제도이기도 했다(민 35:6-12). 여섯 개의 도피성은 각 지파가 사는 지역의 중앙에 위치했는데 죄인들이 어디서나 가까운 곳으로 빨리 피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 역시 인권을 최대한으로 보장하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높은 산지에 있었던 도피성까지의 길은 잘 닦여져 있었는데 그 이유는 누구나 도피성으로 가는 길을 잘 알 수 있어야 하고 피하기에 좋은 길이어야 했기 때문이었다(신 19:2).
유대인의 전승에 의하면 도피성으로 가는 길은 넓이가 14m나 되었으며 길에는 표지판을 크게 세워 놓았다고 한다. 이러한 도피성을 통해 실수로 살인한 죄인을 그 죄대로 벌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또
도피성이 누구나 볼 수 있는 곳,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는 것은 피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께 피할 수 있음을
가르쳐 준다. 잘 닦여진 길이고 안내표가 있었다는 것은, 이미 완성해 놓은 예수님의 구원의 길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누구든지 구원 받을 수 있음을 보여 준다.
평화는 군사력으로 지키는 최후의 수단이다.
국가에 대한 현실주의자 관점
1. 국가의 이익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 2. 국가의 이익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것
나라 국(國) / 사람이 땅 위에서 창을 들고 지키는 큰 땅
큰 입구(口) / 나라, 큰 땅 창 과(戈) / 무기(창) 작은 입구(口) / 사람 땅( /) /
문인(文人)
그칠 지(止) 창 과(戈)
무인(武人) / 창쓰는 일을 그치는 것 굳셀 무(武)
그칠 지(止) 창 과(戈)
보라 “세상 끝날 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또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신 그 비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환상과 비젼을 주셨습니다. 땅에서도 물론 할 일이 많고 육신을 위하여서도 무엇인가를 해야 하겠지만 우리는 영원한 천국 내세를 위해서도 지금부터 비젼을 가지고 준비하며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영원하고 갈 사람은 적다”
저는 오늘 영적인 길을 가는 위대한 사람들에 대하여 말하려고 합니다. 누가 위대한 사람들입니까? 제가 목사 안수 받은 지 30년이 넘었습니다. 그 동안 여러 종류의 신자들을 보았습니다. 산기도 파부터 시작해서 예언 파들, 귀신 파들, 기타 유사 기독교 단체들, 또 율법주의자들, 자유주의자들, 해방신학자들, 세계를 다니며 별별 신앙을 가진 사람을 다 겪어 보았습니다. 이들은 모두 한 결 같이 천국 가는 길을 나름대로 제시합니다. 그런데 이런 단체에서는 천국 가는 길을 다르게 제시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공통된 특징은 이러한 사이비에 빠지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나님에 대하여 열심히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쉽게 빠집니다. 사이비 일수록 열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열심이 있다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바른 길로 가야 합니다. 넓고 편한 길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길도 아닙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좁은 길, 그리고 좁은 문은 다름 아닌 예수님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문(The Door 요10:9)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문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모두 멸망의 문입니다.
예수님의 공로 즉 피의 복음을 통해서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영적으로 위대한 사람은 자기의 열심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고 강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누가 천국 까지 이르러 큰 인물 될는지 잘 알 수는 없습니다. 누가 하나님에게 기억되는 사람일까요? 재능이 많아서 여러 가지 일을 잘 하는 사람들일까요? 노래 잘하고 잘 가르치고 지도력 있는 사람들일까요? 이런 분들이 교회를 성장시키는데 참으로 유익한 덕을 줍니다. 하지만 재능이나 외모로 천국 가는 것은 아닙니다. 오로지 예수님으로만 갑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 만으로 영원한 천국에 이르게 되는지 말씀을 드릴려고 합니다.
먼저 기억하셔야 할 사실은 천국은 바로 이곳 오늘 우리가 딛고 있는 수원으로부터 출발해서 천국까지 가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들으려고 모이신 여러분들은 한결 같이 공통점으로 이 땅에서 영원히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 가는 길을 알려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 설교는 당연히 천국 가는 길을 말씀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천국에 가려면 우리가 무엇보다 기억해야 할 사실이 세 가지 있습니다.
그 첫째는 천국 가는 모든 사람은 그 출발점이 자기가 사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수원중앙교회가 있는 수원에서는 당연히 수원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무론 다른 분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그 자리에서부터 천국 가는 길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즉 어떤 사람도 태어 나지 않고 곧장 천국에 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정근모 과학기술처 장관은 가장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종로 성결교회 장로인 정근모 장관은 경기 고등학교를 수석 입학하였습니다. 정장관은 4개월만에 검정고시를 수석으로 합격하고,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한 수재였는데, 신부전증으로 고통을 받는 아들에게 콩팥을 떼어준 이야기로도 유명합니다. 그분은 말합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만을 믿는 사람들은 한없이 불쌍한데, 사람의 눈으로는 빛보다 파장이 짧은 자외선, 파장이 긴 적외선을 볼 수가 없습니다. 눈으로 보이는 것만을 진리라고 믿는 것은 교만입니다. 과학에도 분명히 한계가 있는데 자유, 사랑, 죽음, 생명, 구원, 하나님의 은혜를 과학의 이름으로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진리에도 서열이 있습니다." 참 멋있는 말입니다. 사랑을 과학으로 실험할 수 없다는 것을 멋지게 설명한 말입니다. 이 말을 들으면서 저는 생각하기를 ”저 분은 과학자요 학자로서 부름을 받으니까 성경을 보는 눈도 저렇게 다를 수 있구나” 하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학자는 과학자의 자리에서 부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술가는 예술가였던 자리에서 또 문학가는 문학가였던 자리에서 모두 다 하나님의 복을 듣고 천국을 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처럼 자기가 딛고 서 있는 곳에서부터 천국의 걸음을 시작합니다. 이 천국으로 가는 첫 걸음은 물과 성령으로 가듭나는 것입니다.(요3:5) 물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죄 사함을 받고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 첫걸음은 예수님 이십니다. 그래서 그 분이 길(The Road)이시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하셨음으로 다른 길로 가면 안됩니다. 주님의 제자중에 베드로나 야고보, 요한 같은 이는 어부였는데 그들이 첫발을 내 딛은 곳은 예루살렘의 한 작은 어촌, 갈릴리 라고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한 곳은 천국이었습니다. 그들이 갈리리에서부터 주님을 만남으로 위대한 삶이 시작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있는 곳에서부터 천국까지 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알아야 할 사실은 천국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가려면 바른 길로 가야 합니다. 천국으로 간다고 다 가는 게 아닙니다. 잘못 출발하면 그 길은 멸망의 길입니다. 사망의 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런 멸망과 사망의 길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멸망과 사망의 길은 의외로 찾는 사람이 많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바른 길은 찾는 사람이 적다고 말씀합니다. 문이 너무 작다는 것이지요. 길이 너무 좁고 협착하다는 것이지요. 13절에 보니까 그 문이 좁은 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영원하고 넓은데 갈 사람은 적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찾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잘못 찾아서 멸망의 길, 사망의 길인 지옥으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세에 대한 열망과 비젼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대로 믿지 않으면 안타깝게도 멸망의 길, 사망의 길로 가서 결국 지옥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 가는 길을 찾고 그 길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좁고 협착하다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보기에 미련하게 보인다는 뜻이지요. 사람들의 이성에는 부합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의 방법으로 간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것이지요.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러한 고민에 빠져 있는 고린도교회에 말하길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폐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고전1:18-19)습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은 예수님으로 만 천국 간다는 것을 믿지 못할까요? 그 이유가 사람들의 자기 성향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ㅛ,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2-24) 여기에 보시면 사람들의 성향이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진리를 차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는 방법은 “기적”과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결코 이 두 가지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진리에 이를 수가 없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천국가는 길이라는 것이 매우 좁게 보입니다. 협착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점에 굉장히 주의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기적이고 죽었다가 살아난 예수님이 지혜라는 것입니다. 즉 사람이 할 수 없는 그것을 예수님이 하셔서 우리를 천국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좁다는 것을 어렵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그리하여 자칫하면 율법주의자가 됩니다. 왜냐면 천국 가는 길은 너무나 쉽고 간단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누구라도 우리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복음을 듣고 마음에 예수님을 영접만 하면 됩니다. 그 이외에는 우리에게 조건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그 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휘황찬란하고 멋있고 기적적이라면 찾는 이가 많겠지요. 그러나 십자가는 너무나 초라합니다. 너무나 쉽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노력을 좀 보태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다른 길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다른 길은 멸망의 길이요 사망의 길입니다.
우리가 내 딛는 첫 발은 너무나도 초라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하는 순간 하늘에서 빵파레라도 울려퍼지고 천사들이 나타나 춤을 추는 것이 보여야 할텐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것이 좀 싱겁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오. 구원의 삶은 사람의 영혼 속 저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변화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먼저 예수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십시오 그러면 모든 죄가 예수 십자가의 피로 씻어지고 구원의 길이 시작됩니다. 우리가 이제 수원을 떠나야 하는 두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2. 수원을 뒤로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영접하여 하루빨리 구원받아 이 수원을 떠나 가야할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은 이 곳은 멸망할 곳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심판 받기로 선포되어 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련 없이 이곳을 떠나야 합니다. 물론 당장 이러한 심판이 온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조만간 그 실체가 드러날 것입니다. 또 그것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죽음으로 인하여 이 땅에서는 영원한 삶을 살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후 79년 죄악의 도시 폼페이가 베수비우스 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거대한 용암으로 인해 매몰될 때, 그 용암을 피해 도망한 사람들 중에 한 부인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 도망하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값진 보석들을 훔쳐서 한아름 안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품에는 가락지와 팔찌, 목걸이, 금고리 등의 많은 보화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녀는 그 도시를 빠져 나오다가 비같이 쏟아지는 화산재에 덮혀서 보석을 껴안은 채 죽고 말았습니다. 어느 도시에서 건축공사를 하기 위해 땅을 파다가 보석을 껴안은 채 죽어 간 여인의 화석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약 2천년 전의 이 여인의 비운은 경고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땅에 있는 것에 마음이 빼앗겨서 심판을 벗어 나지 못한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금은 보화가 인간의 생명을 구할 수 없습니다. 이 땅은 결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이어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수원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것이 구원의 시작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도 하나님은 먼저 그들에게 그들이 살고 있던 본토와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고 하였습니다.(창12:1) 그 다음에 가야할 곳을 명시하였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 약속의 땅으로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신앙이란 ࡐ~부터 ~에게로ࡑ입니다. 떠나는 것이 있어도 목적이 없으면 방황하게 됩니다. 떠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우리는 어느 날 이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들의 가족이 가려고 했던 곳은 하나님이 약속해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약속하신 곳까지 곧장 가야 합니다. 마치 고속도로를 타고 강원도로 가고 있다면 가다가 휴게소에 내려서 그 곳에서 기거해서는 안됩니다. 휴게소에서 살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목적은 다른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이 목적을 두신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영원한 천국을 얻기 위해서 지금 내가 이 곳에서 해야할 일은 이 세상을 뒤로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오해하면 염세주의자가 되라는 것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뜻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을 얻기에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인생은 어떤 의미에서 마라톤과 같습니다. 끊임없는 경주입니다. 항상 평탄하게 갈 수만 없습니다. 때로는 힘이 들고, 목이 마르고, 지치고, 쉬고 싶고, 포기하고 싶고, 뒤돌아 서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야할 곳은 골인지점입니다. 주변에 아무리 좋은 환경이 있고 안락한 곳이 있다고 해도 그곳에 머무르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곳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땅에는 기근이 있었습니다. 또 그곳에는 이미 일곱 족속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환경은 좋았지만 그 땅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영적인 전쟁을 해야 했고 옛사람을 몰아내야만 했습니다. 결코 신앙생활은 뜬구름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어렵고, 힘들고, 앞이 보이지 않고, 귀를 의심하게 되는 일들이 일어나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계속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예수 믿고 하나님이 원하는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이제 적당히 살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직업을 가진 이유가 무엇인지, 결혼한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사명으로 살아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알지 못하면 후에는 비참한 결론을 맺게 됩니다. 여러분이 가고 있는 길은 진정으로 하나님이 원하는 길입니까? 너는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ࡑ는 명령을 듣고 아브람은 믿음의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3.주님과 함께 가는 길입니다.
그 다음 우리가 기억 해야 할 것은 이 길은 이제 우리혼자 가는 길이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걸어갔던 것과 같이 엠마오의 길입니다. 주님이 함께 동행하여 주는 길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그 길이 되시고 또 그길에 동행하여 주시겠다는 것이지요. 서시로 유명한 기독 시인 윤동주는 노래하길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기도했습니다. 이 역시 우리의 노래가 되어야 하고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수원을 떠나 천국으로 가는 신자들의 삶엔 신이 함께 합니다. 성신께서 함께 합니다. 마치 살아 계신 예수님같이 우리와 함께 하며 우리와 생각을 나누고 우리에게 지혜를 주며 외로울 때는 위로자가 되시면서 무사히 천국에 이를 때까지 동반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체험이 있는 길이 천국가는 길입니다.
바로 에데 리컨베커(Eddie Rickenbacker)선장과 젊은 두 선원이 이런 체험을 간증합니다. 그들은 난파를 당하여 망망대해에 표류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들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작열하는 태양과 그로 인한 목마름과 밤이면 추위와 그리고 상어 떼들의 극성이었습니다. 탈수와 기갈, 뜨거움과 상어의 공포 때문에 정말 견디기가 힘들었습니다. 몇 일이 지나자 거의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베이커 선장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물이 침몰치 못하고'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불이 거스리지 못하게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하심, 그리고 기도의 능력을 믿고, 하나님께 계속 기도로 매달렸습니다. 하루하루가 죽음 같은 공포의 연속이었지만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기도하였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응답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갈매기가 날아와서 선장의 머리 위에 앉았습니다. 그들은 몇 일만에 그 갈매기를 잡아서 요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고기를 미끼로 삼아 낚시질을 하였습니다. 계속 끼니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비가 처음으로 내렸습니다. 그래서 물도 마셨습니다. 불볕 더위도 해소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확인하였고 더욱 용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후 두 주만에 기적적으로 구조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신문기자들이 모여서 어떻게 그 엄청난 공포와 역경, 배고픔과 뜨거움, 무서움과 초조함을 이겼느냐고 물었습니다. 선장의 대답은 꼭 한 마디 였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이 말은 어려울 때에 주님이 그들과 함께 동해하여 주셨다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어렵고 천국 가는 길이 어려워도 그리고 무서워도 믿음의 기도를 드리면 동행하시는 성령님이 우리를 도우십니다. 저는 이러한 간증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천명도 넘게 알 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은 적어도 수원은 출발한 사람입니다. 이 세상은 출발한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아직도 수원에만 여러분의 관심이 머물러 있다면 얼른 일어나십시오. 주님은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그 길은 비록 미련하고 찾는 사람이 적지만 생명의 길이요 또 하나님의 동행을 체험하는 길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람은 일생에 세 번 태어납니다. 첫째는 모태 속에 태아로 탄생합니다. 그러나 그 생명이 어머니의 그 안락한 터전에서 삶을 허락 받은 시간은 270일 입니다. 그 시간이 지나면 태아는 자궁에서 나와 이 세상에서의 삶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삶도 허락 받은 시간은 평균이 70이요, 강건한 사람이라도 80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인생은 때가 되면 또 다시 내세로 가야 합니다. 다음 세상은 둘로 나뉘어 지는데, 하나는 영원천국이요, 또 한 곳은 영원지옥입니다. 뱃속의 태아가 이 세상이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듯이, 사람들 역시 내세가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러나 그 곳에서 오신 주님이 말씀합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 내가 아버지께로 가서 처소를 예비하면 너희를 나 있는 곳에 데려가기 위하여 다시 오겠다” 이 약속을 믿는 자는 이제 천국으로 가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구원받는 다는 것은 이렇게 천국 가는 길로 들어섰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이 세상으로부터, 천국까지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자신이 살고 있는 인생 가운데서 부름을 받아 내세의 삶을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설교를 통하여 여러분은 수원에서부터 출발하여 천국까지 이르게 된 사람의 복된 자리에 있음을 깨달으십시오. 아니 아직 그 길에 접어들지 못하셨다면 이 시간 예수님을 구원주로 마음에 받아 들이십시오. 그러하면 여러분도 천국가게 될 것입니다.
11월 24일(수) 땅 나누는 일(여호수아 19:51)
♦ 11월 24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여호수아 19:1∼51 ♦ 묵상을 위한 주제 : 땅 나누는 일(51절) ♦ 성구 : 제사장(祭司長)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子孫) 지파(支派)의 족장(族長)들이 실로에서 회막(會幕) 문(門) 여호와 앞에서 제비 뽑아 나눈 기업(基業)이 이러하니라 이에 땅 나누는 일이 마쳤더라.
여호수아 13장에서는 이미 요단 동편에서 땅을 분배받은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의 이야기를 소개했습니다.
여호수아 14장에서부터 18장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땅에 들어온 이후에 유다, 에브라임, 므낫세 반 지파 그리고 베냐민 지파에 대한 땅 분배 과정을 소개합니다.
열 두 지파 가운데서 여섯 지파에 대한 땅 분배가 마무리 되었습니다.
여호수아 19장에서는 아직 땅을 분배받지 못한 여섯 지파 즉 시므온, 스불론, 잇사갈, 아셀, 납달리, 단 지파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시므온 지파가 받는 땅 앞에는 “유다 자손의 기업 중에서”’ 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처음 가나안 땅을 답사했던 사람들은 이 땅을 실제보다 더 크게 생각했었기에 유다 지파에게 충분한 땅을 제공했습니다.
그러나 정밀하게 땅을 살펴본 결과 땅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사람들의 수에 비해 더 넓은 지역을 차지했던 유다 지파의 땅을 나누어 다른 지파에게 주기로 결정했습니다.
시므온 지파는 모압 평지에서 실시한 2차 인구조사에 의하면 그 인구가 22,200명으로 12지파 중에 가장 인구가 적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다 지파가 이미 받았던 땅 중에서 일부를 시므온 지파가 받게 된 것입니다.
시므온 지파가 유다 지파의 분깃을 받는 것이 인간의 실수에 의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이것은 야곱의 유언이 그대로 실현괸 것입니다(창세기 49:7).
시므온은 급하고 잔인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누이 “디나”가 세겜 족장으로부터 강간당했을 때 그는 형제인 레위와 함께 잔인하게 복수 했습니다. 그 결과 레위와 시므온은 야곱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고, 야곱의 시므온에 대한 예언이 땅 분배 과정을 통해 현실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시므온은 17개의 성과 촌락들과 유다 지파가 받은 땅의 남부 지역을 받았지만 얼마 후에 독립성을 상실하게 되어 그들의 땅은 유다 지파의 영토로 흡수되고, 시므온지파 사람들은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의 땅으로 이주 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분열될 때에 원래 유다보다도 남쪽에 위치하고 있던 시므온은 북쪽 왕국에 속하고, 남쪽 왕국에는 유다와 베냐민만이 속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 가지 교훈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유다 지파가 자신들의 인구보다 많은 땅을 받았다고 하지만 이미 자신들에게 주어진 땅을 시므온 지파에게 나눠주어야 하는 상황에 대해 얼마든지 거부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동체의 평화와 공익을 위해 자신의 몫을 기꺼이 내어놓는 유다 지파의 결정은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내어놓는 것에 많이 인색한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전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내 것은 내 것이며 네 것도 내 것”이라고 주장하는 극단의 이기주의가 팽배한 세상에서 자기 몫을 나누어 줄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을 갖는 유다 지파 사람들의 모습을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눔의 미덕을 내 삶에 적용하며 나눌 수 있는 여유를 가져봅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업 분배를 위해 제비를 뽑을 때 여호와께서 임재하시는 회막문 앞에서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기업 분배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나안 땅 정복 초기 여리고 성을 점령하러 갈 때부터 신을 벗게 하시고 모든 전쟁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어 가실 것임을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분명히 기억하도록 하셨던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이제 모든 땅의 분배도 마무리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불의와 부정이 활개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는 믿음의 길이 더 넓게 펼쳐지기를 기도합시다.
♪ 찬양 / 나 어느 곳에 있든지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도입 이야기)
믿음이란 나쁜 땅을 좋은 땅으로 만들 줄 아는 지혜이다.
예수를 잘 믿는 한 사람이 남의 집에 하인으로 있었다. 하루는 주인이 하인을 불러 조롱하였다.
"나는 예수 믿지 않아도 아무 시험도 없이 잘 만 사는데 너는 예수를 믿는데도 왜 늘 어려운 시험을 당하느냐? 그럴 바에야 믿지 않는 게 더 낫겠다."
이때 믿음이 좋은 하인이 되물었다.
"주인님 노하지 말고 들어 주십시오. 가령 말입니다. 사냥 중에 사슴 두 마리가 있어 쏘았는데 한 마리는 즉사하고 한 마리는 다리에 맞아 피를 흘리며 도망간다면 주인께서는 어느 쪽 사슴을 보고 달려가겠습니까?"
그러자 주인은 어의 없다는 듯한 표정 대답했다.
"그야 죽은 놈은 내 수중에 든 것이나 다름없으니 산 놈부터 쫓아가 잡아야지."
하인은 웃으며 대답했다.
“옳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시험이 없다는 것은 영혼이 죽어 마귀의 것이 되어버렸으므로 내버려 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사람에게는 마귀가 이를 방해하여 자기 수하에 넣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니 시험을 당하는 것입니다."
지식이란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있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지혜란 지금부터 앞으로 있을 것을 아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느 땅을 받았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약속의 땅에 들어와 있는가?"
갈렙과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던 출애굽 1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었습니다. 12명의 정탐꾼들 중에서 가나안 땅은 우리들의 힘으로는 정복할 수 없는 땅이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반드시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다고 실망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던 인물이었습니다. 개국공신(開國功臣)과 같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먼저 가나안 땅에서 제일 좋은 땅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갈렙과 여호수아의 선택을 눈여겨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수아 14장부터 19장은 요단 서편 지역의 땅에 대한 분배 과정을 소개합니다. 14장은 갈렙으로 시작합니다. 19장은 여호수아로 막을 내립니다.
여호수아 19장 내용 구분 - 6 지파에 대한 기업 분배
19:1-9. 시므온 지파의 기업 19:10-16. 스불론 지파의 기업 19:17-23. 잇사갈 지파의 기업 19:24-31. 아셀 지파의 기업 19:32-39. 납달리 지파의 기업 19:40-48. 단 지파의 기업 19:49-50. 여호수아에게 허락된 기업 19:51. 사명을 완수한 여호수아
여호수아 19:51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 지파의 족장들이 실로에서 회막 문 여호와 앞에서 제비 뽑아 나눈 기업이 이러하니라 이에 땅 나누는 일이 마쳤더라. 아멘
베들레헴(떡집)
1. 유다 베들레헴 (마태복음 2:6)
2. 스불론 베들레헴 (여호수아 19:15, 사사기 12:8, 10)
여호수아의 기업에 대하여
여호수아 19:49-51 이스라엘 자손이 그 경계를 따라서 기업의 땅 나누기를 마치고 자기들 중에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기업을 주었으되 곧 여호와의 명령대로 여호수아의 구한 성읍 에브라임 산지 딤낫 세라를 주매 여호수아가 그 성읍을 중건하고 거기 거하였었더라.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 지파의 족장들이 실로에서 회막 문 여호와 앞에서 제비 뽑아 나눈 기업이 이러하니라 이에 땅 나누는 일이 마쳤더라.
요단 서편의 땅을 나눌 때 유다 지파가 먼저 분배받았습니다. 갈렙은 유다 지파에 속하므로 갈렙의 가족들도 땅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갈렙은 다른 족속들이 꺼려하는 산지를 달라고 합니다. 그 땅에 대한 정보를 몰라서 하는 선택이 아닙니다. 그 땅에는 거인족 아낙 자손들이 살고 있으며 심지어 크고 견고한 성읍입니다. 그래고 그 땅을 선택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었습니다.
갈렙의 기업에 대하여
여호수아 14:12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찌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이 산지란 정탐꾼들이 목격했던 아낙자손들이 거주하던 크고 견고한 성읍 헤브론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믿음의 지도자가 갈렙이었습니다.
여호수아 14:13-15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매.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며. 헤브론의 옛 이름은 기럇아르바라 아르바는 아낙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사람이었더라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갈렙의 기업(여호수아 14:13-15)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매.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며. 헤브론의 옛 이름은 기럇 아르바라 아르바는 아낙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사람이었더라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기업 분배의 완성(여호수아 19:51)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 지파의 족장들이 실로에서 회막 문 여호와 앞에서 제비 뽑아 나눈 기업이 이러하니라 이에 땅 나누는 일이 마쳤더라.
사무엘상 9:16
내일 이맘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삼으라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오늘의 기도 위기의 때를 믿음으로 다스릴 수 있는 지도자를 세워주시옵소서!
도피성(민수기 35:6)
도피성(이르 미클라트) עִיר מִקְלָט
민수기 35장은 도피성에 대한 말씀입니다. ‘도피성’의 뜻은 ‘받아들이는 성읍’입니다. 레위인에게 주어진 48개의 성읍
가운데 여섯 개가 도피성입니다. 요단강 동쪽에 세 개(바산골란, 길르앗라못, 베셀) 요단강 서쪽에 세 개(게데스, 세겜,
헤브론)가 있습니다. 여섯 개의 도피성은 각 지파가 사는 지역의 중앙에 있습니다. 이는 죄인들이 도피성으로 빨리 피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높은 산지에 있는 도피성은 그 길이 잘 닦여져 있었습니다. 유대 랍비들의 구전에 따르면 도피성으로 가는 길은
넓이가 14m나 됐으며 길에는 표지판을 크게 세워 놓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매년 12월에는 도로를 점검하고 보수하도록 해 언제든지
도피자가 쉽게 피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도피성의 목적은 원한 없이 부지중에 오살(誤殺)한 자를 그곳으로
도피시켜 생명을 보호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살인자가 도피성으로 피했다고 죽음을 면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반드시
부지 중에 살인한 경위를 증명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오살자는 반드시 죽게 됩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이 죽은 후에야 살인자는
자기 땅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는 대제사장의 죽음으로 과거의 원한이 모두 해결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곧 대제사장의 죽음은
살인자에게 새 시대가 시작됨을 알리는 것입니다. 물론 대제사장의 죽음은 죄를 속량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식을 통해
이스라엘은 모든 죄를 속량하실 진정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대망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도피성에 담긴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첫째, 도피성은 생명의 보존을 위한 것(여호수아 20:3)
아무런 악의(惡意)가 없이 실수나 부주의로 사람을 죽게 했을지라도 그가
자신의 처소에 있으면 그는 죽은 자의 가족이나 친척들로부터 피의 복수를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고의가 없이 사람을 죽였으면 즉시
도피성으로 피해 그곳에 있는 제사장에게 살인의 동기를 고하면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제사장은 도피자에게 도피성 안의
일정한 장소를 제공하여 살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둘째, 인간은 모두가 죄인(로마서 3:10-11)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탄식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모든 사람은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셋째, 인간을 진정으로 구원해 줄 수 있는 도피성은 예수님(사도행전 4:12)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고 말씀합니다.
도피성에 피한 살인자는 대제사장이 살아있을 때까지만 그 도피성에 머무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영생(永生)하시는 분이시므로 우리는 영원토록 그리스도 안에 도피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도피성이십니다. 날마다
구원의 도피성 되시는 예수님과 동행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의 지파의 족장들이 실로에 있는 회막 문 여호와 앞에서 제비 뽑아 나눈 기업이 이러하니라 이에 땅 나누는 일을 마쳤더라"(여호수아 19:51).
"These are the territories that Eleazar the priest, Joshua son of
Nun and the heads of the tribal clans of Israel assigned by lot at
Shiloh in the presence of the Lord at the entrance to the tent of
meeting. And so they finished dividing the land."(Joshua 19:51).
1. 시므온 지파의 영토(1-9)
실로에서 회막을 세워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한 데 모으고, 영적 각성을 촉구했었던 여호수아는 이제 나머지 여섯 지파들의 영토를 분배합니다.
시므온 지파는 유다 지파의 영토 내에서 기업을 취하게 됩니다. 그 까닭은 시므온 지파가 12지파 중 인구 비율상 가장
열세한 지파인데 반해, 유다 지파는 한 지파가 관리하기에 너무 많은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시므온 지파가 이처럼
약한 지파로 전락하게 된 이유는, 족장 시므리가 바알브올 사건에 연루된 과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2. 스불론 지파의 영토(10-16) 스불론 지파는 북부에 위치한 내륙 지역을 그 영토로 얻게 되었습니다. 남쪽으로는 사릿에 미치고, 서쪽으로는 욕느암 앞
시내에 미치며, 북쪽으로는 림몬에서 한나돈에 이르렀습니다. 이와 같이 스불론 지파는 갈릴리 북부 내륙 지방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스불론 지파가 '스불론은 배 매는 해변에 거하리라' 고 예언한 야곱의 말( 창49:13)과는 잘 조화가 되지 않는
듯이 보입니다. 하지만 스불론 지파 사람들은 매우 활달한 성격으로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시돈과 두로 지역 및 갈릴리 해안 지대와
활발한 상거래를 형성함으로써 많은 부를 축적할 수가 있었습니다(신33:19).
3. 잇사갈 지파의 영토(17-23)
잇사갈 지파는 야곱이 예언한 바대로 갈릴리 바다 남쪽과 서쪽에 위치한 농업 지역 곧 에스드렐론 평야를 위시한 많은 풍부하고
비옥한 농지를 지닌 곳을 영토로 분배받게 됩니다. 북으로는 납달리 지파에 접하였고, 남으로는 므낫세 지파에 접하였습니다. 그리고
서로는 스불론 지파에 접하였으며, 동으로는 요단 강을 경계로 하는 갈릴리 호수 주변의 땅을 그 기업으로 분배받았습니다. 이곳은 그
유명한 아합의 궁전과 나봇의 포도원이 위치한 지역이기도 했습니다.
4. 아셀 지파의 영토(24-31)
아셀 지파는 야곱이 예언한 바대로 갈릴리 호수 서쪽 경사지대인 비옥한 농사 지역을 차지하는 축복을 얻게
됩니다(창49:20). 남으로는 갈멜 산에 미치고, 서로는 지중해에 달했으며, 동으로는 이스르엘 평야에 미쳤으며, 북으로는 입다 엘
골짜기와 두로를 연결한 지역이었습니다. 이곳은 에스드렐론 평야와 악고 평야 등지를 끼고 있는 비옥한 곳입니다. 이 지역은 해양성
기후의 영향으로 기름을 생산하는 감람나무의 재배가 성했던 곳이었습니다.
특히 아셀 지파는, 국제 무역항인 두로와 시돈까지 그 영토가 뻗어 있는, 입지적으로 산업 활동에 유리한 지역을 차지하였습니다.
5. 납달리 지파의 영토(32-39) 모세가 예언한 대로 비옥한 땅을 얻게 된 납달리 지파는 이스라엘 12지파 가운데 가장 북쪽의 땅을 얻게
됩니다(신33:23). 남쪽으로는 갈릴리 호수 근처의 락굼까지이고, 동쪽으로는 요단 강이며, 서쪽으로는 다볼 산에 이르렀고,
북쪽으로는 레바논 골짜기에 미쳤습니다.
납달리 지파는, 가나안 정복 전쟁 당시 반이스라엘 정책을 가장 적극적으로 하솔 왕이 거하던 곳을 영토로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납달리 지파는 가나안 원주민들을 방치하였고 심지어 그들과 어울려 12지파 가운데 가장 일찍 우상 숭배에 빠졌습니다.
6. 단 지파의 영토(40-48)
야곱은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와 같이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이스라엘 12지파 가운데 가장 마지막으로 단 지파는 동편으로는 베냐민 지파에 접하였고, 남편으로는 유다
지파, 북편으로는 요셉 자손, 그리고 서편으로는 지중해에 접하였습니다. 그들은 지파의 인구에 비해 땅이 좁았고 가나안 족속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인구는 많은 대신 영토가 너무 좁았기에, 단 지파는 끝내 북쪽 메롬 호수 방면으로 자리를 옮긴 후 레센을 칼로쳐서 취하고 그 곳을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 단이라 개명하여 계속 거주하게 됩니다(신33:22).
7.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허락된 기업(49-50)
이스라엘 12지파가 모두 영토를 부여받은 뒤에 마지막 순서로 에브라임 산지에 있는 딤낫세라를 분배받았습니다. 이곳은 폐허에
가까운 보잘 것 없는 성읍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개인의 안녕과 영달을 취하고자 하는 헛된 노력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든 욕심을 뒤로 한 채 하나님과 백성의 유익을 위하여 헌신하였습니다.
8. 사명을 완수한 여호수아(51)
여호수아는 자신의 영토를 분배하는 것을 12지파들의 가나안 땅 분배하며 자신의 최후를 마감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이 붙어 있던 그날까지 자기에게 맡겨진 거룩한 사명을 모두 완수하였습니다.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여호수아 18:1∼28 ♦ 묵상을 위한 주제 : 오히려 일곱 지파라(2절) ♦ 성구 : 이스라엘 자손(子孫) 중(中)에 그 기업(基業)의 분배(分配)를 얻지 못한 자(者)가 오히려 일곱 지파(支派)라.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므낫세 반 지파와 르우벤과 갓 지파는 기업을 분배받았습니다. 여호수아는 이미 분배를 받은 지파에게 모두 요단을 건너가서 함께 싸워 기업을 얻은 후에 돌아와서 정착하라고 명령합니다. 이에 따라 유다지파와 더불어 선두에 서서 열심히 기업을 차지하는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유다 지파와 요셉 지파가 기업을 분배받았습니다.
이제 남은 지파는 일곱 지파가 남았습니다.
남은 일곱 지파에게 기업을 분배하려고 실로에 회막을 세웠습니다(1절).
실로에 회막이 있다는 것은 실로가 이스라엘의 종교, 정치, 군사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지역이라는 의미입니다.
“실로”는 “평화”를 나타내는 “샬롬”과 어원이 같습니다.
‘실로’는 “평온의 처소, 안식의 처소”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회막이 실로에 세워진 이유는 아직 땅을 분배받지 못한 지파들에게 공평하고 알맞은 분배를 하기 위한 것입니다.
먼저 분배를 받은 지파들에게는 이미 좋은 땅이 분배되었고, 나머지는 척박하거나 지형적 경계가 어려운 지역들만 남게 된 것입니다.
분배가 미진해진 상황에서 여호수아는 가나안 중심부인 실로에 회막을 세우고 하나님께 예배하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 중심의 신앙 공동체를 확인시키며 가나안 땅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약속의 땅임을 깨우치며 분배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가나안 땅을 배분받는 것은 단순히 남은 땅을 배분하는 차원을 넘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거룩한 사역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회막을 세우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먼저 여호수아는 남은 7개 지파들의 수동적인 모습을 지적하며 땅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라고 합니다(3~4절).
“지체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라파”는 “늦추다, 게으름을 피우다”는 뜻으로 시간의 늦어지는 것과 동시에 마음과 정신까지 느슨해진 것을 의미합니다.
가나안 족속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가나안에 세워야할 사명을 받은 이스라엘이 나태해진 것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이에 여호수아는 각 지파별로 3명을 선정하여 공평한 지도를 그려오게 합니다.
지파간의 이익이나 개인적인 영달을 위해 그릴 것이 아니라 신앙 안에서 믿음의 눈으로 지적도를 그려오게 했습니다.
그리고 선별된 지파 대표자들이 그려온 땅은 여호와 앞에서 제비를 뽑게 됩니다(6절).
회막 앞에서 기업을 분배하는 것은 여호수아 개인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대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하나님의 뜻대로 분배하겠다는 결단입니다.
레위 지파는 기업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백성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물이 그들의 기업이 되기 때문이며(수 13:14), 여호와께서 친히 레위지파의 기업이 되셨기 때문입니다(민 18:1, 수 13:33).
이어서 베냐민 지파가 받을 기업을 소개합니다(11절). 베냐민 지파는 유다 지파와 요셉 자손이 얻은 기업의 중간 지역에 기업을 차지합니다. 이 지경 내에는 모두 26개의 성읍과 인근 촌락들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베냐민 지파의 기업은 모세의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모세는 베냐민 지파가 하나님 곁에 거하며 하나님의 어깨 사이에 처하리라고 예언하였습니다(신 33:12).
그 예언대로 유다와 에브라임 지파의 중간에서 기업을 얻었으므로 하나님의 전이 실로에 있을 때에든지 예루살렘에 있을 때든 항상 그 가까이에 있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될 당시, 유일하게 남쪽 유다 왕국에 잔류하여 예루살렘 성전과 다윗의 왕좌를 고수함으로써, 장차 북왕국의 범죄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때가 되면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반드시 성취됩니다. 내 눈에 보이지 않고 알 수 없다 하여도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성취될 것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으시며, 한 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시므로, 종국에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새 나라를 세우실 것입니다.
문제가 많은 세상에 우리들을 내려놓으신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믿음을 강화시키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오늘, 모든 문제들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간구하므로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남은 지파 : 일곱 지파(18, 19장) 베냐민, 시므온, 스불론, 잇사갈, 아셀, 납달리, 단
여호수아 18: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거기에 회막을 세웠으며 그 땅은 그들 앞에서 돌아와 정복되었더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실로(Shiloh) / (뜻)안식의 장소, 제사 중심 길갈(Gilgal) / (뜻)굴러가다(4:20), 전쟁 중심
여호수아 18:3-4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점령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 너희는 각 지파에 세 사람씩 선정하라 내가 그들을 보내리니 그들은 일어나서 그 땅에 두루 다니며 그들의 기업에 따라 그 땅을 그려 가지고 내게로 돌아올 것이라.
여호수아 18:7
레위 사람은 너희 중에 분깃이 없나니 여호와의 제사장 직분이 그들의 기업이 됨이며 갓과 르우벤과 므낫세 반 지파는 요단 저편 동편에서 이미 기업을 받았나니 이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그들에게 준 것이니라.
여호수아 18:11
베냐민 자손 지파를 위하여 그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그 제비 뽑은 땅의 경계는 유다 자손과 요셉 자손의 중간이라.
잠언 16:33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낙원(樂園) / 즐길 낙, 동산 원 아무런 걱정이나 부족함 없이 살 수 있는 즐거운 곳
요한일서 5: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오늘의 기도
말씀으로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담대한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주시옵소서!
11월 22일(월) 스스로 개척하라(여호수아 17:15)
♦ 11월 22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여호수아 17:1∼18 ♦ 묵상을 위한 주제 : 스스로 개척하라(15절) ♦ 성구 :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네가 큰 민족(民族)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山地)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사람과 르바임 사람의 땅 삼림(森林)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開拓)하라.
스스로 개척하라(clear land for yourselves) 개척하라는 말씀은 "개간하라"는 뜻입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基業)입니다.
전쟁을 통하여 그 땅을 점령한 후에 각 지파별로 그 땅을 분배합니다.
여호수아 17장은 요셉의 자손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기업에 대한 말씀입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 자손들이 가나안 땅에서 기업을 분배받기 위해 제비를 뽑을 때 요셉 자손으로 한 제비만 뽑았습니다.
요셉 자손들은 여호수아에게 자신들은 두 지파인데 한 분깃만 받은 것에 불만이 있었습니다(14절).
그러나 여호수아는 요셉의 자손들에게 브리스 사람과 르바임 사람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고 명령합니다(15절).
이때 요셉 자손들은 "그 산지는 넉넉하지 못하고 그 땅에는 철병거를 사용하는 가나안 족속이 거주한다."고 합니다(16절).
철병거를 갖춘 가나안 족속과 싸우지 않고 손쉽게 땅을 얻으려는 요셉 자손들의 탐욕에 대해서 여호수아는 이렇게 명령합니다.
"너는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은즉 한 분깃만 가질 것이 아니라. 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사람이 비록 철병거를 가졌고 강할찌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16-17절)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하셨습니다(마 16:24, 막 8:34, 눅 9:23).
주님의 명령보다는 요셉 자손들처럼 손쉽게 얻으려는 내 안에 감추어진 탐욕을 찾아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온전하게 주님을 믿고 따라갈 수 있는 믿음을 기도합시다.
그러면 우리들도 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거룩한 주의 백성으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내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그 은혜로 이루어지기 위해 날마다 새롭게 개척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를 확신하며 순종하므로 세상을 이기고 승리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만을 의지하고 스스로 개척하여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어지러운 세상 중에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여호수아 17:15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찐대 브리스 사람과 르바임 사람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아멘
여호수아 17:14
요셉 자손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시므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찜이니이까.
여호수아 17:15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찐대 브리스 사람과 르바임 사람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개척하라(베레타) (원형) 바라(בָּרָא) - 황무지를 개간하여 옥토를 만들라
여호수아 17:16
요셉 자손이 가로되 그 산지는 우리에게 넉넉지도 못하고 골짜기 땅에 거하는 가나안 사람에게는 벧 스안과 그 향리에 거하는 자든지 이스르엘 골짜기에 거하는 자든지 다 철병거가 있나이다.
여호수아 17:17
여호수아가 다시 요셉의 족속 곧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일러 가로되 너는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은즉 한 분깃만 가질 것이 아니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큰 민족은 스스로 개척하는 민족이다!
여호수아 17:18
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사람이 비록 철병거를 가졌고 강할찌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비신앙적 요구에 대한 신앙적 권면
창세기 13:10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오늘의 기도 내 안의 잠재력을 개척하여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게 하옵소서!
11월 20일(토)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기업(여호수아 16:4)
♦ 11월 20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여호수아 16:1∼10 ♦ 묵상을 위한 주제 :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기업(4절) ♦ 성구 : 요셉의 자손(子孫)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그 기업(企業)을 얻었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되는 과정을 두 가지로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가나안 땅의 주요 왕들과 성들을 함락 시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이스라엘의 각 지파가 제비뽑기를 통해 분배된 지역에서 남아있는 가나안 족속들을 완전히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가나안의 모든 땅을 정복한 후에 나눈 것이 아니라 주요 거점들을 정복한 후에 각 지파들은 그들에게 분배된 땅으로 가서 싸워서 차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16장은 요셉 자손 "므낫세와 에브라임 지파"가 제비를 뽑아 그들의 기업인 땅을 분배 받습니다.
유다지파가 예루살렘의 원주민 여부스 사람들을 완전히 쫓아내지 못한 것처럼 에브라임 지파는 게셀에 거하는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게셀 사람들을 종으로 삼아 노역을 하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가나안 족속을 멸하라고 하셨지 노역하는 종으로 삼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에브라임 지파는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서 경제적 이득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들을 완전히 가나안 땅에서 몰아내라고 하신 것은 신앙적인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상과 미신으로 오염된 가나안 족속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살아가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도 오염이 되어 변질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문제를 신앙의 측면에서 보지 않고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며 그들을 노예로 부리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 결과로 가나안 족속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올무가 되고 만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하루의 삶 속에서도 세상의 경제적인 논리를 따라 살아야 할까요? 아니면 믿음의 눈을 들어 우리를 위하여 치밀하게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야 할까요?
아직도 내 삶 가운데 쫓아내야 할 것을 쫓아내지 못한 거침돌이 무엇인지 찾아야 합니다. 그 거침돌을 해결한 후에 참 평안과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은혜를 사모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에게 새 날 주심을 감사합니다. 허락하신 오늘 세상의 이익에 붙잡히지 않고 신앙의 눈을 들어 우리를 위하여 치밀하게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말씀에 순종하는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 찬양 / 세상의 헛된 신을 버리고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여호수아 16:4
요셉의 자손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그 기업을 얻었더라. 아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출애굽>므낫세 / 32,200명(민 1:35) : 52,700명(민 26:34)
<기업>에브라임 / 40,500명(민 1:33) : 32,500명(민 26:34)
여호수아 16:1
요셉 자손이 제비 뽑은 것은 여리고 곁 요단 곧 여리고 물 동편 광야에서부터 나아가 여리고로 말미암아 올라가서 산지를 지나 벧엘에 이르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리고(Jericho) 향기 벧엘(Bethel) 하나님의 집
창세기 49:22-26 22.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23.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그를 쏘며 그를 군박하였으나. 24.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25. 네 아비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원천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26. 네 아비의 축복이 내 부여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 없음 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여호수아 16:9
그 외에 므낫세 자손의 기업 중에서 에브라임 자손을 위하여 구별한 모든 성읍과 촌락도 있었더라.
여호수아 16:10
그들이 게셀에 거하는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가나안 사람이 오늘날까지 에브라임 가운데 거하며 사역하는 종이 되니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게셀(Gezzr) 분깃
열왕기상 9:15
솔로몬왕이 역군을 일으킨 까닭은 여호와의 전과 자기 궁과 밀로와 예루살렘성과 하솔과 므깃도와 게셀을 건축하려 하였음이라.
11월 19일(금) 유다 지파의 땅 분배(여호수아 15:1)
♦ 11월 19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여호수아 15:1∼63 ♦ 묵상을 위한 주제 : 유다 지파의 땅 분배(1절) ♦ 성구 : 유다 자손(子孫)의 지파(支派)가 그 가족(家族)대로 제비 뽑은 땅의 극남단(極南端)은 에돔 지경(地境)에 이르고 또 남(南)으로 신 광야(曠野)까지라.
여호수아 15장은 유다 지파가 그 가족대로 제비를 뽑은 땅의 경계를 소개합니다(1∼12절).
여호수아는 갈렙에게 헤브론 성을 분깃으로 주었고 갈렙은 헤브론 성을 기업으로 얻는 일에 성공합니다(13∼20절).
이어서 유다 자손들이 받은 기업들을 소개합니다(21∼62절).
유다 지파가 받은 기업이 가장 넓고 큰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는 야곱의 축복(창세기 49:8~12)
야곱은 죽기 전에 그의 열두 아들을 축복할 때 장차 유다의 자손 중에서 왕이 나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유다의 자손이 사는 땅이 마치 지장 낙원처럼 나귀와 포도나무와 포도즙으로 가득하게 될 것이라고 축복했습니다.
유다가 이렇게 복을 받은 것은 유다가 그의 막내 베냐민을 대신하여 그가 평생 노예가 되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창 44:18~34).
유다의 말을 듣고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밝혀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유다의 이 말로 깨어진 야곱의 자녀들의 관계가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야곱을 통해 유다의 자손에 큰 복을 내리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둘째는 유다 지파의 충성
야곱이 유다에게 이 복을 선언한 지 이미 480년이나 지났습니다. 요셉 지파의 경우 그때는 복을 받았으나 그 후손들이 그 복을 계속 이어가지 못해 나중에는 멸망하여 아예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되지만, 유다 지파는 그 후에도 계속해서 하나님께 충성하였으므로 야곱을 통해 주신 축복의 말씀이 계속 이어지는 것입니다.
갈렙과 웃니엘의 충성에 대한 기록은 유다 지파가 그 후에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광야 시대에서부터 사사기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이 전쟁을 할 때는 대부분 유다 지파가 앞장섰습니다.
그러나 유다 자손들의 한 가지 실수가 있습니다. 그 실수는 예루살렘 거민 여부스 사람들을 쫓아내지 못한 것입니다(63절).
오늘날도 예루살렘은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지역입니다. 그 원인이 예루살렘의 원주민이었던 여부스 사람들을 쫓아내지 못한 것이라면 아직도 내 안에 묻혀 있는 여부스를 쫓아내야 하겠습니다.
주의 구원에 대한 감사와 찬양을 하면서도 나를 움츠러들게 하는 여부스와 같은 요소들을 완전히 몰아내고 참된 기쁨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이 죄인을 완전케 하옵시고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여호수아 15:1
유다 자손의 지파가 그 가족대로 제비 뽑은 땅의 극남단은 에돔 지경에 이르고 또 남으로 신 광야까지라. 아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민수기 26: 52 / 명수대로 민수기 26:55 / 제비 뽑아
유다 : 야곱의 4째 아들 - 다윗 - 솔로몬
마태복음 1: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창세기 44:33 청컨대 주의 종으로 아이를 대신하여 있어서 주의 종이 되게하시고 아이는 형제와 함께 올려보내소서.
여호수아 15:13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명하신대로 여호수아가 기럇 아르바 곧 헤브론 성을 유다 자손 중에서 분깃으로 여분네의 아들 갈렙에게 주었으니 아르바는 아낙의 아비였더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기럇(Kiriath) 성읍
여호수아 15:16
갈렙이 말하기를 기럇 세벨을 쳐서 그것을 취하는 자에게는 내가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하였더니.
여호수아 14:11-12a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여호수아 15:63
예루살렘 거민 여부스 사람을 유다 자손이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사람이 오늘날까지 유다 자손과 함께 예루살렘에 거하니라.
여호수아 22:3 오늘날까지 날이 오래도록 너희가 너희 형제를 떠나지 아니하고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그 책임을 지키도다.
오늘의 기도
한 생명을 주님 앞으로 인도할 책임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여부스
족속은 예루살렘 지역의 원주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지역을 배분받은 베냐민 지파가 그들을 거기사 쫓아내지 못합니다.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족속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까지 예루살렘에
거주하니라(사사기 1:21).
그러나 후에 다윗이 그 여부스 사람들을 추방하고(삼하 5:6-7, 대상 11:4-6),
예루살렘을 왕국의 수도로 삼습니다. 그로부터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역사의 중심 무대가 되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여부스
족속은 대단히 교만하여 다윗의 군대를 우습게 여기며 <소경과 절뚝발이라도 너를 물리치리라>(삼하 5:6)하고
호언장담했으나 결국 <다윗이 그 시온 산성을 빼앗아>(삼하 5:7) <다윗 성>으로 삼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처음 그들을 멸절하지 못하고 함께 거주하며 통혼한 바람에 유다 족속과 베냐민 족속의 순수성과 정체성에는 많은 혼란이 야기되었으며
여호와 신앙의 정통성마저 발목이 잡혀 오랜 세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혹 당신에게는 아직 믿음으로 정복하지 못한 영역이
없습니까? 여전히 타협하며 함께 살아가고 있는 여부스 족속이 없습니까? <소경과 절뚝발이라도 너를 물리치리라!>며 내
믿음을 비웃고 조롱하는 옛 사람은 없습니까?
다윗의 군대가 여부스 족속이 지배하던 시온 산성을 빼앗아 다윗 성으로 삼은 것처럼 우리도 우리 안에 남아 있는 모든 옛 사람의 잔재들을 털어내고 내 온 몸을 하나님의 도성으로, 성령의 전으로 확실히 자리매김을 해야겠습니다.
<예루살렘>이라는 지명이 <여부스>로 불리운 이유에 대해 말씀해 보십시오(대상 11:4).
베냐민 족속이 왜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했을까요?
당신 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 원주민을 꼽는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주님,
바울 사도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며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여전히 옛 이스라엘처럼 저희 안에 여부스 족속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 <새 사람>이라는 신분에 걸맞지 않게 여전히 옛 사람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디
다윗의 군대처럼 여부스 족속을 색출하여 멸절하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저희가 다 온전한 성령의 전이되기에 부족함이 없게
해주시옵소서.
1. 여호수아 15:63절의 여부스 사람은 어느 민족인지? 2. 여호수아 16:10절의 가나안 사람은 어느 민족인지 궁금 합니다 ?
가나안 후손들과 분포 지역
가나안은 함의 마지막 넷째 아들이었다. 가나안은 노아의 16 후손들 가운데 셈의 아들 욕단 다음으로 많은 자녀의 이름을 성경에 남기고 있다. 함의 아들 형제 가운데서는 가장 많은, 11명의 자녀를 남겼다.
가나안은 시돈(Sidon)과 헷(Hittites)을 낳고 또 여부스족(Jebusites), 아모리족(Amorites), 기르가스족(Girgasites), 히위족(Hivites), 알가족(Arkites), 신족(Sinites), 아르왓족(Arvadites), 스말족(Zemarites), 하맛족(Hamathites)의 조상이 되었다. 이들은 우리가 가나안이라 부르는 지역을 중심으로 흩어졌다.
성경은 가나안의 지경(地境)에 대해 시돈(Sidon)에서부터 그랄(Gerar)을 지나 가사(Gaza)까지, 그리고 소돔(Sodom)과 고모라(Gomorrah)와 아드마(Admah)와 스보임(Zeboiim)을 지나 라사(Lasha)까지였다고 기록하고 있다(창 10:19).
즉 ‘가나안(Canaan)’은 훗날 로마인들에 의해 팔레스틴(Palestine)이라 불린, 오늘날 이스라엘과 요르단 지역의 히브리식 이름이었다. 이렇게 가나안은 같은 함족인 블레셋 민족과 더불어 팔레스틴 땅에서 이스라엘 민족과 정면으로 접촉한 민족이 되었다.
알파벳의 발명자 페니키아를 이룬, 가나안의 장남 시돈
가나안의 장자 시돈(Sidon)의 이름은 오늘날 고대 페니키아 사람들의 고대 도시 이름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대상 1:13). 시돈은 오늘날 레바논 수도인 베이루트에서 남쪽으로 약 36km 떨어진 ‘사이다’(‘Saida')에 위치하였다. 시돈은 성경 뿐 아니라 ‘아마르나 서신’(Amarna Letters)과 호머의 저작들에도 그 이름이 남아 있는 고대 유명 도시였다.
예수님과 바울도 이 도시를 방문한 적이 있다(막 7:31; 행 27:3). 예수님은 갈릴리 지방에 있는 이스라엘 도시들보다 오히려 이방의 도시 두로와 시돈을 더 높게 평가하셨다. 갈릴리 고라신(Korazin)이나 벳새다(Bethsaida)에서 행한 기적과 표적들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했다면 그들은 일찌감치 굵은 삼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했을 거라고 갈릴리 지방의 완악함을 책망하셨다(마 11:21-22).
사도 바울은 시돈에 친구가 있었다. 당시 친구가 되려면 신앙은 아주 중요한 고려 요소였다. 따라서 이들 친구들은 그리스도인들이었음이 분명하다. 이 지역 아구사도대 백부장(근위대 대장)인 율리오(Julius)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도 바울에게 친절을 베풀어, 바울이 친구들에게서 대접받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행 27:1-3).
이렇게 시돈은 이스라엘보다 복음에 먼저 문을 연 지역이었다. 구약은 보통 이 시돈을 페니키아라고 부르고 있다(신 3:9; 삿 10:12; 왕상 5:6). 페니키안이라는 이름은 헬라어로 <붉은 피부를 가진 사람>, 히브리어로는 <상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가나안의 장자 시돈은 지금의 레바논 해안가를 따라 두로(지금의 수르), 시돈, 베리투스(지금의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 비블로스, 아르와드, 우가릿 등의 도시를 구축하면서, 지중해를 넘나든 해상무역국가 페니키아를 이루었다.
이들은 지금의 키프로스 뿐 아니라 북아프리카 지역, 이탈리아의 사르디니아와 시칠리아섬, 아프리카와 유럽의 접촉 관문인 지브로울터 해협 양안까지 진출하였다. 북아프리카에 카르타고를 건설한 것도 이들이었고, 뛰어난 항해술로 홍해와 대서양까지 진출하여 남아라비아와 통상관계를 가진 것도 이들이었다. 주전 7세기경 바닷길로 아프리카를 일주한 것도 페니키아인들이었다.
활발한 지중해 해상 무역 기지를 구축했던 시돈의 공헌은, 무엇보다 주전 15세기 무렵 오늘날 알파벳의 원형이 된 페니키아 문자를 지중해 모든 민족들에게 전파한 일이었다. 즉 가나안(페니키아) 사람들은 자신들이 최초로 사용한 알파벳을 지중해 전 지역에 나누었다. 22개의 알파벳으로 구성된 페니키아 문자는 주전 11세기 페니키아인들의 식민지 건설과 해상 무역과 더불어 지중해 연안 지방으로 전파되어, 주전 8세기 무렵 헬라 문자와 에트루리아 문자를 통해 라틴 문자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가나안 언어는 고대 히브리어에도 상당수 녹아들었다. 많은 고고학자들은 고대 페니키아의 땅에서 페니키아어·헬라어·라틴어 알파벳의 모어(母言)의 원형을 발견했다. 이렇게 오늘날 모든 유럽 국가들의 언어는 함족 가나안의 후손 페니키아인들에게 결정적 빚을 지고 있다. 또한 해마다 우리 한민족이 페니키아어를 원조로 하는 영어 알파벳에 쏟아 붓는 정력과 돈은 얼마나 많던가!
대제국 히타이트의 조상이 된, 가나안의 둘째 아들 헷(Heth)
헷(Heth)은 고대 히타이트족(Hittite)의 조상이 되었다. 히타이트족은 주전 2천년 강력한 아나톨리아 제국을 건설한다. 이들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다가 일찌감치 북동쪽으로 이동하여 대제국을 이루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아브라함은 헷족속에게서 막벨라 굴을 가족 매장지로 구입한다(창 23장). 그리고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헷족의 딸들과 혼인하였다. 아브라함의 손자요 이삭의 장자인 에서는 헷족의 두 여자(브에리의 딸 유딧과 엘론의 딸 바스맛)와 결혼하여 부모인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을 근심케 하였다(창 26:34; 27:46). 믿음의 여인 리브가는 야곱조차 헷 처녀들과 혼인할지 모른다는 걱정으로, 남편 이삭을 설득하여 아들 야곱을 외삼촌이 사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보내게 된다. 함족 가나안 후손인 헷족속과의 혼인에 대해 셈족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어떤 입장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장면이다.
다윗과 솔로몬도 헷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 다윗은 수하에 헷사람 아히멜렉(삼상 26:6)과 충성스러운 장수 우리아(삼하 11장)를 두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여 아들 솔로몬을 낳았다. 하나님은 이 같은 행위에 대해 다윗을 꾸짖으신다. 밧세바의 일을 제외하고는,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다(행 13:22). 솔로몬도 헷사람과 혼인 동맹을 맺었고(왕상 11:1) 헷의 도시국가들과 무역을 하였다(왕상 10:29). 여부스족(Jebusites)은 누구인가(팔레스틴 땅에 정착한 가나안의 후손들)
시돈과 헷을 제외한 가나안의 아홉 아들들의 이름과 세거지(世居地)는, 창세기 10장 15-19절 사이에 기록되어 있다. 이들 가나안의 아홉 아들들의 후손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입성할 즈음 이미 그 땅에 정착하여 거주하던 가나안 족속들의 조상들이 되어 있었다.
여부스족(Jebusites)은 헷족과 더불어 일찌감치 예루살렘 지역에 정착하였다. 여부스 사람들은 가나안 정복 시 예루살렘 부근의 가나안 산중(hill country) 에 살고 있었다(민 13:29. 수 3:10; 11:3). 사사 시대에도 여부스는 여전히 예루살렘을 지칭하는 이름이었다(사사기 19:10). 그들의 왕 아도니세덱은 여호수아를 반대하는 아모리 족속의 연합을 주도하였다(수 10: 1-5). 이곳을 점령하여 수도로 정하고 예루살렘으로 개칭한 사람은 바로 다윗이었다(수 18:28; 삿 19:10; 대상 11:4; 삼하 5:6). 하지만 다윗의 정복 이후에도 여부스 사람들은 남아 있었다(수 15: 63, 삿 1:21).
여부스 성읍은 베냐민(수 18: 16, 28) 지파와 유다(수 15:8) 지파 사이에 있었다. 다윗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Araunah)의 타작마당과 소 값으로 은 50세겔(약 570그램)을 주고 여호와 하나님께 드릴 번제단을 정식 구입하였다(삼하 24: 16-25). 여부스 사람은 솔로몬 시대에도 남아 왕의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으며(왕상 9: 20-21) 훗날 이곳에는 성전이 세워졌다.
11월 18일(목)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여호수아 14:12)
♦ 11월 18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여호수아 14:1∼15 ♦ 묵상을 위한 주제 :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12절) ♦ 성구 :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山地)를 내게 주소서 당신(當身)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城邑)들은 크고 견고(堅固)할찌라도 여호와께서 혹시(或時)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畢竟) 여호와의 말씀하신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give me this hill country)”
여호수아 13장부터는 가나안 땅을 분배하는 과정을 소개합니다. 이제 14장에서 “갈렙(Galep, 개)”은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하고 요구합니다. ‘갈렙’이 요구한 산지란 “산악지대”를 말합니다. 여호수아와 더불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지도자이었으므로 더 좋은 땅을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산악지대’와 같은 ‘산지’를 요구한 것입니다.
‘갈렙’의 이와 같은 신앙을 묵상해 봅니다.
이 산지를 요구한 갈렙(14절)
갈렙은 힘겨운 전쟁을 치러야 하는 산악지대 즉 헤브론을 요구합니다. 헤브론 산지는 해발 1,000m의 높은 산악지대이며, 아낙 자손 즉 거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곳을 점령하려면 많은 희생이 따라야 합니다. 난공불락의 요새지와 같기 때문에 밑에서 쳐들어 올라가면 위에서 화살을 쏘고 돌을 굴리면 공격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갈렙은 이 헤브론 산지를 유다 지파의 기업으로 달라고 했습니다. 아마 다른 지파 족장들은 이런 땅 걸리까봐 두려워했겠지요. 그런데 갈렙은 이 산지를 구합니다.
당시 갈렙의 나이가 85세 노인이었습니다. 일선에서 물러나 전투에 직접 나서지 않더라도 비난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갈렙은 산간 지대 헤브론을 구합니다. 넓은 평야 요단 들녘을 구했던 롯과는 아주 대조가 됩니다.
산지를 구하는 이유가 분명합니다.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찌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이제 우리도 갈렙처럼 주님의 뜻이라면 ‘산지’를 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고난의 잔도 마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찌 존귀와 영광만을 구하겠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음지라도 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부활의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실천하는 갈렙
약속의 말씀을 따르는 갈렙(9절)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그 날”이란 45년 전을 가리킵니다. 갈렙의 나이가 지금은 85세이었으므로 45년은 40세 때를 말합니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가나안 땅을 정탐했던 사람들은 도저히 그 땅을 차지할 수 없다며 부정적이며 불신앙적인 보고를 하였으나(메뚜기 콤플렉스) 갈렙은 여호수아와 더불어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반드시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민 14:7∼9).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들이여! 어려운 시대에 우리 모두 갈렙과 같은 믿음으로 함께 나갑시다. 그리고 이 팬데믹 산지를 넘어봅시다.
믿음은 언어의 유희가 아니라 행동하는 노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시다.
♪ 찬양 / 믿음이 이기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기업 분배를 위한 조직
여호수아 14:1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땅에서 취한 기업 곧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 지파의 족장들이 분배한 것이 이 아래와 같으니라.
여호수아 14:12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찌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아멘
여호수아 14:13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갈렙(Caleb. 개) 헤브론(Hebron. 연합) 해발 1,000m
산지를 요구하는 신앙
첫째, 권리를 포기하는 믿음(7-9절) - 여호수아와 더불어 지도자의 대열에 참여
둘째, 말씀을 따르는 믿음(10절) -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 행한 이 사십 오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 나를 생존케 하셨나이다.
셋째,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11절) -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
솔선수범(率先垂範) /leading by example
고린도전서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오늘의 기도
믿음의 본이 되는 삶을 회복하게 하옵소서!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사람에 대한 표현
다윗 / 내 마음에 합한 자(사도행전 13:22) 모세 / 하나님을 대면하여 아는 사람(신명기 34:10) 갈렙 /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은 자(여호수어 14:14) 나는? / 작은 것에 충성된 자(누가복음 16:10, 19:17)
여호수아 14장 전후 배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입성해서 가나안 정복 전쟁을 치르면서 그들이 차지한 땅을 분배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그 일의 총 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 지파들마다 더 좋은 땅, 정복하기 쉬운 땅을 차지하겠다는 분위기입니다. 바로 그때 유다 지파의 대표인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나와 땅의 분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갈렙은 힘겨운 전쟁을 치러야 하는 산악지대, 헤브론(Hebron. 연합)을 구했습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갈렙이 요구한 ‘산지’란 헤브론 산지를 가리킵니다. 헤브론 산지는 해발 1000m의 높은 산악지대입니다. 우리나라 설악산과 비슷한 곳입니다. 설악산의 높이가 1700m이므로 설악산보다는 좀 낮은 지역이지요.
이
헤브론 산지에는 아낙 자손, 거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점령하려면 많은 희생이 따라야 합니다. 난공불락의 요새지와
같기 때문에 밑에서 쳐들어 올라가면 위에서 화살을 쏘고 돌을 굴리면 공격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갈렙은 이 헤브론 산지를 유다 지파의 기업으로 달라고 했습니다. 아마 다른 지파 족장들은 이런 땅 걸리까봐 두려워했겠지요. 그런데 갈렙은 이 산지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 내리이다."(12절)
여호수아 다음의 2인자로서 얼마든지 좋은 땅을 취할 권리가 있습니다. 기름지고 안정적인 평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가장 힘들고 점령하기 어려운 산지를 구했던 것입니다.
당시 갈렙의 나이가 85세 노인이었습니다. 이제 일선에서 물러나 전투에 직접 나서지 않더라도 비난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갈렙은 산간 지대 헤브론을 구합니다. 넓은 평야 요단 들녘을 구했던 롯과는 아주 대조가 돼지요.
성도여러분,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지금까지 이 주제를 알고 부르셨나요? 갈렙이 구한 것은 ‘평지’가 아니라 ‘산지’입니다. ‘초장’이나 ‘들녘’이 아니라 ‘산악지대’입니다. 혹시라도 여러분은 입술로는 ‘이 산지를 주소서’ 노래했지만 마음으로는 ‘평지를 주소서’ ‘푸른 초장을 주소서’ 그렇게 찬송하지는 않았는지요?
이제
우리도 갈렙처럼 주님의 뜻이라면 ‘산지’를 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고난의 잔도 마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찌 존귀와 영광만을 구하겠는가. 주님을 위해서라면 음지도 구해야지요, 어찌 양지만 좇겠는가? 부활의 영광을 위해서는 십자가를
저야 합니다.
갈렙처럼 주님을 위해서라면 산지도 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를 위해서라면 험한 일, 궂은 일, 힘든 일도 회피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의 길, 좁은 길도 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제자의 길이요, 사명자의 길이 아니겠는가?
그러면 갈렙은 어떻게 산지를 구했을까?
2. 갈렙은 45년 전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해서입니다.
45년 전 언약의 말씀이란 무엇인가? 본문 9절입니다.
(수 14:9)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여기서 ‘그 날에’ 말씀을 주목하십시오. ‘그 날’이란 바로 45년 전을 가리킵니다. 갈렙의 나이가 지금은 85세, 45년 전이니까 40세 때입니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고 얼마 안돼서 가나안땅 입성을 목전에 두고 있을 때, 미지의 땅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때
모세는 12지파에서 대표 한 명씩, 12명을 뽑아서 가나안땅을 정탐하게 합니다. 40일 동안 가나안 정탐하고 돌아온 정탐꾼들의
보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마디로 패닉 상태로, 공황 상태로 몰아넣었습니다. 아주 부정적이고 불신앙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민 13:28)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민 13:31)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민 13:32)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민 13:33)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가나안
땅은 어디를 가든지 빈 땅이 없고 원주민들을 몰아내야 하는데, 문제는 그 원주민들이 아주 강한 족속들이라는 것입니다. 헤브론
산지를 본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낙 자손들이 살고 있었고 이들은 거인 족속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에 나오는 골리앗이 바로 이
족속입니다. 그 거인들에 비하면 자기들은 메뚜기와 같으니 이 땅을 결코 정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메뚜기 컴플렉스’에 완전히
빠졌습니다.
이 보고를 듣고 온 백성들이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통곡하며,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습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하나님께서
이 모습을 보시고 매우 슬퍼하셨습니다. 이들에겐 하나님의 존재도 없고 하나님의 약속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반역하고
불순종하는 백성들에게 벌을 내리셨습니다. 결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도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로 돌아가 40년 동안을 방황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당시 20세 이상의 장정들은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성도여러분, 하나님을 불신하고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마십시오. 원망하고 불평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뒤로 돌아가!” 하십니다. 그러면 괴로운 광야 생활을 계속 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헤아리며 감사하십시오. 믿음으로 가나안 땅에서 천국을 사시기 바랍니다.
어떻든 약속의 땅, 가나안 입성이 위기를 맞은 것입니다. 바로 이때 12정탐꾼 중 두 사람인 여호수아와 갈렙이 오늘 본문 7절 말씀처럼 ‘성실한 마음으로’ 보고를 했습니다.
(민 14:7)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민 14: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민 14:9)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러고 나서 45년이 지난 것입니다. 40년 광야 생활을 끝내고 지금은 가나안 땅에 들어와 가나안 정복 전쟁을 하고 있고 또 땅을 분배하고 있습니다. 그때 갈렙이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요구한 것입니다.
갈렙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정탐꾼으로 파견됐을 때는 40세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85세의 노인입니다. 하지만 갈렙의 믿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이 말은 45년 전 정탐꾼으로 왔을 때에 믿음으로 모세에게 보고하였고 그 보고를 들은 모세가 갈렙에게 약속한 대로 해달라는 것입니다. 본문 6절이 그 얘기입니다.
(수
14:6) 그 때에 유다 자손이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나아오고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와 당신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이르신 일을 당신이 아시는 바라
모세가 갈렙에게 약속한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수 14:9)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여기서 ‘네 발로 밟는 땅’은 헤브론 산지를 가리킵니다.
본문 12절을 봅니다.
(수
14:12)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 내리이다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이 말씀도 바로 헤브론 산지를 가리킵니다. 이 땅이 유다지파의 기업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십시오. 6절에 ‘여호와께서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와 당신에게 대하여 모세에게 이르신 일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10절을 보세요.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갈렙은
45년 전에 정탐꾼으로 믿음의 보고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갈렙의 보고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보고 두려워했던 그
산지, 그 산악지대, 거인인 아낙자손들이 살고 있는 바로 그 헤브론 땅을 갈렙에게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고
갈렙은 약속을 받은 자입니다. 갈렙은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그 산지를 구하는 것입니다.
입장 바꿔 여러분 같으면 이때 헤브론 산지를 구하겠는가? 그건 40년 전 얘기고 기왕이면 평지, 평야를 구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갈렙은 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45년을 한결 같이 살아왔습니다. 이제 이 약속의 말씀이 자기를 통해서 성취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갈렙은 자기의 유익대로 되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충성된 모습입니다. 갈렙은 참으로 충성된 종이었습니다.
(수 14:8)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으므로
(수 14:9)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忠’자는 가운데 ‘中’에 마음 ‘心’이고
‘誠’자는 말씀 ‘言’ 변에 이룰 ‘成’자다
충성(忠誠)이란 무엇인가? ‘忠’자는 가운데 ‘中’에 마음 ‘心’이고 ‘誠’자는
말씀 ‘言’ 변에 이룰 ‘成’자입니다. ‘충성’이란 마음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어 순종하는 태도입니다. 바로 45년 전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이루려고 헤브론 산지를 구했던 갈렙이 충성 된 자의 모습이 아닌가?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축복하시고 귀하게
쓰십니다. 우리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갈렙(Caleb, 개)의 나이는 85세라고 합니다. 아직도 살아있고 강건케 하신 하나님께 충성하고자 했습니다.
갈렙의 진솔한 고백을 여호수아 14:10에서 읽어봅시다.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 오늘 내가 팔십오 세로되.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 원망 불평하던 백성들은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갈렙의 생명을 지켜주고 가나안에 입성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너무 감사한 것입니다. 갈렙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자신을 생존하게 하셨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살아 있을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강건하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자신을 정탐꾼으로 보내던 날과 같이 강건하니 그때나 지금이나 일반이라고 고백합니다. 나이가 85세인데 45년 전 하고 똑같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14:11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85세의 노인이 된 갈렙이 젊은이 못지않게 강건해서 그 어떤 전쟁이라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그 말입니다.
성도여러분,
갈렙의 이런 건강이 부럽지 않은가? 갈렙은 영적인 건강, 정신적인 건강, 육체적인 건강이 충만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갈렙의
건강을 축원합니다.
9988234가 아니라 9988231
어떻게 갈렙처럼 강건할 수 있을까? 갈렙처럼 불타는 꿈이 있어야 합니다.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거룩한 꿈을 꾸어야 합니다. 인간적 야망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꿈을 붙잡아야 합니다.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이 같은 거룩한 꿈을 꾸고 믿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거룩한 꿈을 꾸면 나이를 뛰어 넘습니다. 산지 같은 절망적인 상황도 넉넉히 이겨나갈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승리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에 아낙
자손이 있고 무너트릴 성읍들이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면 그들을 쫓아 낼 수 있습니다. 기필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을 만들어야 합니다. 나의 삶의 현장이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줄 믿습니다.
맥아더 장군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단순이 오래 산다고 해서 늙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늙어가는 이유는 목적과 이상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세월은 피부를 주름지게 할 뿐이지만, 목적이 없는 무관심한 생활은 영혼을 주름지게 만든다. 당신은 믿는 만큼
젊어지고, 의심하는 것만큼 늙는다. 당신은 희망을 갖는 것만큼 젊어지고, 절망하는 것만큼 늙는다."
매우 뼈가 있는 말입니다. 갈렙은 나이가 들었지만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목표를 상실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해야 할
사명을 잊어버린 일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있어서 세월이 피부는 주름지게 할지는 모르지만, 그 정신은 늙도록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갈렙에게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나이가 많던 적던 인생의 목표를 분명히 정하고 도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리라고 약속하신 산지가 어디인지 기도하면서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도전해야 될 목표가 무엇인지 각자 하나님 앞에 질문해
보십시오. 나이에 관계없이 금년에 내가 도전해야 될 목표가 무엇인지, 나의 남은 생 몇 년 동안 도전해야 될 목표가 무엇인지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분명히 찾으십시오.
목표를 분명히 찾으면 갈렙처럼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정복하겠다는 도전 의식이 생겨납니다. 갈렙은 높고 견고한 성곽에서 진을 치고
있는 강한 아낙 자손과 위험한 도박을 벌린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 지역을 점령하려면 얼마나 많은 인명 피해가 있을는지
모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신을 갖고 나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땅이다. 내 발로 밟는 땅은 다 내 것이 된다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어. 그러므로 내가 가서 밟으면 그것은 내 땅이야.' 확신했기에 값을 지불하는 것쯤은 두려워 않은 것입니다. 그
결과 자신의 믿음대로 그 땅을 손에 넣었던 것입니다.
빌립보서 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성령이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도록 하십니다. 이 착한 일이 바로 산지요, 목표입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인도해
주세요." 하고 열심히 기도하면서 "주여, 금년에 어떻게 해야 될까요?"라고 물으면 성령님이 우리의 마음 속에 무언가 하고 싶은
착한 일이 생각나게 하실 것입니다. 뭔가 내가 하고 싶은 착한 일이 떠오를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산지요, 목표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꽉 붙들어야 합니다.
어떤 목표를 정하고 도전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의 질이 결정됩니다. 확실한 목표를 갖고 있습니까? 그 삶의 질은 분명히 높을 것입니다. 모호한 목표를 갖고 있습니까? 그 삶의 질은 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반드시 두 가지 목표가 있습니다. 하나는 영적인 목표요, 다른 하나는 현실적인 목표입니다. 영적인 산지와 현실적인 산지 두 가지 입니다.
영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이라면 똑같이 적용되는 목표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끝까지 추구해야 될 목표가
하나 있는 데,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세상을 복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최종적인 목표입니다.
사도행전 13:22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신약 성경에서는 그 말을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자'라고 바꾸어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한 자가
되는 것,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되는 것, 예수님을 닮은 제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도들이 예수 믿고 구원을 받은 다음, 생명이 남아 있는 동안 끝까지 추구해야 될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추수 때에 얼음냉수 같이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세상을 복되게 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새해에는 작년보다 더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드는 자가 되어야지.' 이처럼 거룩하고 아름다운 목표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어제보다 오늘 더 주님을 닮아가는 자리로 올라가야 합니다.
인생의 승자는 다른 사람보다 더 우월한 자가 아니고, 과거보다도 오늘 더 우월한 자입니다. 작년보다도 오늘 주님 보시기에 더
합당한 자가 되고 주님의 마음에 더 기쁨을 드리는 자가 되었다면 그가 승자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은 지 20년이 되었지만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별로 발전이 없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요소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벌써
패자입니다. 지금까지 목적 없는 신앙생활을 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제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것을 목표로 세웠으면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놓고 도전하십시오. 각자가 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가장 불편하게 생각하실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성경은 복 있는 사람은 야훼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했는데 나는 성경을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먹고 사는 일을 묵상하고 있어. 하나님께서 날 보실 때 이것은 절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실 거야.' 이처럼 마음에 어떠한 가책이 오면 이에 대해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찾으십시오. 이것이 도전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런 식으로 읽겠다고 각오하고 도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들고자 하는 사람이 그런 도전도 없이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에 들 수 있겠습니까?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마음에 꼭 들고 싶은데, 잘 안 되는 것이 뭐가 있습니까? 기도입니까? 하루에
5분도 제대로 기도를 안 합니까? 그러면서도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합니까? 시험이란 시험은 다 드는 성도라면 하나께서 기뻐하실
리가 없습니다. '내가 기도 좀 해야 되겠다. 작심하고 기도 좀 하자.' 했으면 새벽 기도회에 나오시든지, 매일 기도회에
나오시던지 뭔가 각오를 하고 도전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직 물질에 애착이 있어 제대로 헌금하지 못합니까? 십일조도 안 합니까? 헌금하라고 하면 나도 모르게 인상이 달라지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그것을 좋아하실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 그 동안 제게 많이 주셨는데, 금년의 목표는 제가 가진 것을 좀 더
많이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헌금을 어떻게 해야 되겠다. 선한
일에는 어떻게 써야 되겠다.'는 나름대로 실천사항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실천사항을 가지고 우리가 도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주일을 철저히 지키지 않습니까?
남이 모르는 죄를 계속 용인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말씀으로 그것을 지적하고 책망할 때 귀를 막아버립니까? 그런 태도를 가지고는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달려가야 될 길, 우리가 손에 넣어야 할 산지를 분명히 확인하면서 달려 2019년을 우리 생애에 최고의 해로 만들어 갑시다.
3.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려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갈렙이 달라고 한 이 산지는 헤브론 산지입니다. 헤브론은 어떤 곳입니까?
창세기 23:19 그 후에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를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더라 (마므레는 곧 헤브론이라)
창세기 25:10 이것은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서 산밭이라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니라
갈렙은 자신이 해야 할 가장 고귀한 사명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쓰임 받는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아브라함에게 이 땅은 너와 네 후손에게 주리라 약속하셨는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묻힌 헤브론 땅을 정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갈렙은 분명히 알았습니다. 비록 지금 그들이 가나안에서 주도권을 쥐는 세력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이 헤브론 산지를 빼앗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없다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가 평생 힘써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가 무엇입니까?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을 버리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사울의 목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있지 않고 자신의 뜻을 이루는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목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라면 비록 그 일이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할지라도 감당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다윗을 귀하게 사용하시고 큰 복을 주셨던 것입니다.
갈렙의 위대함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약속을 성취하시는 것을 만백성에게 보여 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을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헤브론 산지를 달라고 한 것에 있습니다.
갈렙처럼 85세가 되었어도 하나님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안나처럼 84세가 되어도 하나님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이가 들어도 하나님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을 했던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나이를 탓하지
말고, 환경을 탓하지 말고 더 좋은 공동체 만들기 위하여, 다음 세대에 선한 영향을 끼치는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고귀한 뜻을 이루기 위하여 헌신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1월 17일(수) 요단 동편 땅의 분배(여호수아 12:8)
♦ 11월 17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여호수아 13:1∼33 ♦ 묵상을 위한 주제 : 요단 동편의 땅 분배(8절) ♦ 성구 : 므낫세 반 지파와 함께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은 요단 동편에서 그 기업을 모세에게 받았는데 여호와의 종 모세가 그들에게 준 것은 이러하니.
여호수아서를 전반부(1∼12장)와 후반부(13∼24장)로 구분합니다. 전반부는 “가나안 정복 활동”에 관한 것입니다. 후반부는 “가나안 땅의 분배”에 관한 말씀입니다.
아직 얻어야 할 땅이 많이 남아 있으나 여호수아가 나이가 많아 늙었으니 이미 점령한 땅을 이스라엘에게 분배해 기업으로 삼게 하라고 여호와께서 말씀합니다.
모세는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에게 아모리 왕 시혼 바산 왕 옥의 땅인 모압 평지를 분배하였으나, 레위 지파에게는 기업을 주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두 지파 반은 요단 동편의 땅을 분배 받았으나 그 땅에 있는 그술과
마아갓 족속을 쫓아내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 13장의 내용을 구분합니다. 13:1∼7, 요단 강 동쪽의 정복하지 못한 지역 13:8∼14, 요단 강 동쪽 땅의 분배 13:15∼23, 르우벤 지파의 땅 13:24∼28, 갓 지파의 땅 13:29∼33, 므낫세 반 지파의 땅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족속과 싸운 지도 벌써 5∼7년이 지났습니다. 이때 여호수아의 동료인 갈렙의 나이가 85세라 했으니
여호수아는 갈렙보다 더 많은 나이라고 하겠습니다. 학자들은 대략 100세 정도라고 합니다. 확실한 나이는 모릅니다. 그러므로 이제 전투에 앞장서기 어렵게 되었으나 가나안 땅의 많은 부분을 아직 점령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홉 지파 반에게 나누어 그들의 기업이 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여호수아 이후의 시대를 말씀하는 것으로 그동안은 모세나 여호수아 한 사람의 지도력으로 움직였으나 이제부터는 각 지파별로 자기에게 할당된 땅을 스스로 얻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직도 많이 남은 땅을 정복하려면 하나님께서 계속 도우실 것이니 싸워서 얻으라고 합니다.
그동안 힘들고 어려운 싸움도 많았으나 두려움을 이기고 싸움터에 나가면 언제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크게 이겼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도우실 것이니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가서 싸우라고 합니다.
모세는
가장 강력했던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물리쳤습니다. 그러나 모세로부터 그 땅을 물려받은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는
그들보다 힘이 약한 그술과 마아갓 족속을 물리치지 않고 그대로 두었습니다. 진멸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때 물리치지 않은 그술과 마아갓 족속은 후일 이스라엘의 골칫거리가 됩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어머니는 그술의 공주였으며(삼하 3:3),압살롬은 암논을 살해한 후 그곳으로 도망가 아버지의 진노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삼하 13:37~38). 마아가 사람들 역시 다윗에게 골칫거리를 선사한 자들이었습니다.
마아가 사람 1,000명이 다윗에 대항했던 암몬 사람 연합군에 속했기 때문입니다(상하 10:6, 8). 여호수아 때 제거하지 못했던 자들이 훗날 다윗에게 피해를 입힌 것입니다.
여호수아 13장의 교훈은 정복해야 할 땅을 정복하지 못하고 진멸하지 못한 결과 훗날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히는 골칫거리가 되었던 것처럼 오늘날도 용서받지 못한 죄와 잘못된 습관은 훗날 나를 괴롭히는 요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옛 사람의 죄악 된 습관과 생활 방식을 철저하게 버려야 할 것입니다. 당장 고칠 수 없는 것이라면 고쳐주실 것을 믿고 끈질기게 간구해야 합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를 도와 애급에서 벗어나게 하셨고 가나안을 이기게 하신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을 확신하며 주님의 거룩한 백성답게 건강하고 신실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은 요단 강 동편 땅 분배에 대한 말씀입니다. 먼저 1절에서 7절은 정복하지 못한 지역에 대한 말씀입니다. 여호수아 13:1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이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의 남은 것은 매우 많도다.
나이 많아 늙어서 라는 말씀은 "임종의 때가 다가왔다"는 뜻입니다. 임종의 때가 다가올 때 나이 많은 사람의 신앙적 자세는 무엇일까?
레위 지파와 같은 삶을 살아봅시다. 여호수아 13:14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여호수아가 기업으로 준 것이 없었으니 이는 이스라엘하나님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물이 그 기업이 됨이 그에게 이르신 말씀과 같음이었더라.
여호수아 13:33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모세가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심 같이 이스라엘하나님여호와께서 그 기업이 되심이었더라.
오직 하나님에게 집중하는 신앙
나이 많아 늙었다는 것은 인생은 한계가 있다는 교훈입니다.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제한된 시간에 집중할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삶은 아쉬움이다
독일 작가인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의 묘비명은 “좀 더 빛을(Mehr
Lichr)”이다. 이 말을 묘비에 기록한 것은 ‘좀 더 빛난 인생’, ‘세상이 빛된 곳’이길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괴테의
아쉬움이 묻어난다. 삶은 늘 아쉬움이 남는다.
한 해가 저물면, 지난 한 해의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면 어제에 대한 아쉬움이 남게 된다.
작년에도 아쉬움이 있었다. 자신을 호되게 채찍질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올해는 삶이 느슨해졌다. 아쉬움이 남지 않는 날이 별로 없다.
그러나 인생에 아쉬움만 남는 건 아니다. 감사도 남는다. 사실은 감사가 더 많이 남는다. 어제의 흡족한 삶으로 인해, 오늘의 내가 있다. 작년의 만족 때문에, 올해도 힘차게 달려가고 있다.
인생에 아쉬움이 없을 수 없다. 다만 아쉬움이 아쉬움으로 그쳐선 안 된다. 아쉬움을 날려버리려고 노력해야 한다. 더 혹독하게
자신을 채찍질해야 한다. 자신을 채찍질할 때 인생에 ‘집중’할 수 있다. 인생에 집중할 때 아쉬움이 감사로 바뀐다.
예수님께 집중하라
학창시절에는 집중이 더욱 중요하다.
나이 먹어서 독서에 집중했다. 10년간 독서할 때, 세 가지를 붙들었다. ‘집중, 반복, 지속’이다. 그 중 하나가 ‘집중’이다. 10년 간 독서에 집중했다. 그랬더니 아쉬움이 아니라 감사가 남게 됐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보다 우리 자신에게 관심이 많다. 이건 신앙이
아니다. 신앙은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집중했다. 그렇다면 우리도 하나님께 집중해야 한다.
끝까지 집중하라
신앙생활은 예수님께 집중하는 것이다. 예수님께 집중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예수님이 우리를 먼저 집중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선물로 받았다.
구원은 내가 가져올 수 없다. 하나님께서 주셔야 한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집중하신 결과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 끝날까지 집중하신다. 이젠 우리가 할 일만 남았다. 우리도 하나님께 끝까지 집중해야 한다. 우리의 인생이 끝날 때까지 집중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집중하셨다. 그러자 아브라함도 하나님께 집중한다. 그 결과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집중했다. 그러자 바울도 예수님께 집중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집중하셨다. 그러자 다윗도 하나님께 집중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를 집중하신다. 하나님께서 집중하셔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도 하나님께 집중해야 한다. 그러면 구원을 선물로 받게 된다.
구원에 집중하라
베드로는 구원에 집중하라고 말한다. 구원에 집중하기가 그리 만만치 않다. 세상으로부터 핍박이 심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핍박한다. 핍박이 극심할수록 구원에 집중하기 힘들다. 목숨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집중해야 한다. 그래야 아쉬움이 남지 않는 인생을 살 수 있다.
다니엘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사자굴에 들어갈 것이 뻔했지만, 하나님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사자 굴에서 죽지 않고 살았다.
다니엘의 세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느부갓네살왕의 금신상에 절하라는 명령을 거부했다. 그 결과
평소보다 7배나 뜨겁게 달군 풀무불에 던져졌다. 하지만 머리털도 그을리지 않고 불 탄 냄새도 없이 풀무불에서 살아났다.
이건 성경 속에만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인도에 듣지 못하는 12살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예수님을 만났다. 아버지와 오빠는 소녀가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매질한 뒤 집에서 쫓아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회에 나갔다.
어느 날 예배 중 앞으로 불려 나갔다. 소녀는 기도를 받았다. 기도를 받을 때, 기도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기도 소리는 점점 커져 갔다. 소리가 점점 분명해 지더니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전에 가족들이 여러 병원과 힌두교 성전에 소녀를 데려갔었다. 심지어 마술하는 자에게까지 데려갔다. 하지만 병은 전혀 차도가 없었다. 소녀가 핍박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나아갈 때 귀가 뚫렸다.
기독교를 적으로 여기는 북한에는 지하교인들이 있다. 그들은 땅속에서 손전등을 이용해 성경공부를 하고 하나님을 찬양한다. 북한의 성도들은 기독교를 버리면,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악명 높은 수용소에서도 자신의 신앙을 버리지 않는다. 예수님을 믿게 되면 정치범 수용소나 교화소로 보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버리지 않고 더욱 열정적으로 믿는다.
왜 당하지 않을 핍박을 당하고 고통을 받는가?
하나님께 집중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선물에 집중하기 위함이다. 아쉬움 없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다.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에 집중해야 한다. 그 이유는 구원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최고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에 보면 구원을 아는 것조차 쉽지 않다고 한다. 우리들은 구원을 쉽게 안다. 하지만 베드로 당시에는 구원을 아는 것
그 자체도 거의 불가능했다. 그 때는 핍박이 극심해 예수님께 접근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어려운 정도가 아니었다. 마치 쏟아지는
적의 포화를 뚫고 고지를 점령하는 것과 같았다.
베드로는 구원을 소중히 여겼다. 그렇다면 우리도 구원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에 집중해야 한다.
젊은이들이 취업할 때 많은 관문을 거쳐야 한다. 먼저 취업을 준비해야 한다. 3년이 기본적인 준비다. 취업의 문을 두드린 다음에는 발표를 기다린다. 당락이 결정되는 발표에 집중한다.
취업준비생이 취업 여부에 집중하듯, 그리스도인은 구원에 집중해야 한다. 요즘 신천지 등 이단이 활개를 친다. 그들의 구원은 가짜다. 구원이 성령님으로부터 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구원은 인간인 교주에게서 온다.
인간에게서 오는 구원은 가짜다. 오직 성령님으로부터 오는 구원만 진짜다. 가짜에 집중하지 말고 진짜에 집중해야 한다.
구원의 가치는 크다. 당시는 구원에 관한 예언을 기록한 예언자들조차 잘 알지 못했다(10절). 하늘의 천사들까지도 알려고
애썼다(12절). 그러나 알 수 없었다. 성령님에 의해서만 알려지기 때문이다. 구원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성령님께 집중해야
한다. 성령님께 집중할 때 구원을 바로 알게 된다.
끌려야 한다
집중의 전제 조건이 있다. 끌려야 한다. 사람들은 끌리는 것에 시간을 투자한다. 정치가들은 정치에 끌린다. 운동하는 사람들은 운동에 끌린다. 필자는 독서에 끌린다. 글쓰기에 끌린다. 영화에 끌린다. 시간만 나면 영화관에 간다.
사람마다 끌리는 것들이 다르다. 한양대학교 경영교육원 센터장인 윤정원은 책 《끌리는 것들의 비밀》에서 사람의 마음이 끌리는 것 여덟 가지를 말한다.
1. 취향 : 특별대우를 해주는 곳에 끌린다. 2. 가격 : 가성비가 좋은 곳에 끌린다. 3. 감정 : 행복도를 높이는 곳에 끌린다. 4. 편리 : 귀찮은 일을 줄여주는 곳에 끌린다. 5. 건강 :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방법에 끌린다. 6. 재미 :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드는 재미에 끌린다. 7. 연결 : 사람들과 연결되는 것에 끌린다. 8. 공유 : 밀레니엄 세대는 소유보다 공유에 끌린다.
여려분은 어디에 끌리는가? 필자는 여섯째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드는 재미에 끌린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 끌려야 한다. 예수님을 알아가는 재미에 빠져야 한다.
우리는 마음 가는 것에 끌린다
사람들은 세상에 끌린다. 돈에 끌린다. 돈에 마음에 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이 아니라 예수님께 끌려야 한다. 세상에 끌리면 죄악의 구렁텅이가 들어가기 쉽다. 그럼 인생이 불행해진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끌렸다. 이제 구원에 끌린다. 지금 다른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끌려고 한다. 우리는 구원을 선물로 받았다. 이제 베드로처럼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끌어야 한다. 구원의 길을 찾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
영성가 필립 얀시(Philip Yancey) 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요즘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를 나누어 주는 사람이 아니라 죄책감을 나누어 주는 사람들이다.”
이 말은 우리가 집중할 곳에 집중하지 않고, 집중하지 않을 곳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구원이 아니라 욕심에 이끌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구원을 선물로 받았다. 선물의 특징이 있다. 선물은 받는 자가 선정하지 않는다. 주는 자가 선택하는 것이다. 선택받은 것은 엄청난 축복이다. 엄청난 축복을 받았다면, 선물을 주신 분에게 집중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주신 축복은 그냥 주신 것이 아니다. 소중한 목숨과 맞바꾸셨다. 십자가와 맞바꾸셨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은 세상 하나뿐인 최고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최고의 선물인 구원,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려고 해야 한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쓴 편지 중, 구원에 관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려면, 예수님께 집중해야 한다. 집중할 때 비로소 나의 최고의 선물이 된다.
사랑과 감사로 집중하라
집중할 때 예수님께 사랑과 감사로 집중해야 한다.
첫째, 사랑으로 집중하라!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어머니의 만류를 물리치고 프랑스에 유학 간 아들이 있다. 그는 빈털터리가 되자 하는 수없이 급한 전보를 쳤다. ‘굶어 죽어가요, 아들이!’ 어머니의 회신은 이랬다. ‘굶어라 어머니다!’
아들은 이 회신을 받는 순간 마침내 어머니의 사랑을 깨달았다. 후에 어머니가 아들에게 한 말이 ‘정말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네가 스스로 성장하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어머니는 아들이 자신의 인생을 살기를 원했다. 이는 어머니의 책임 회피가 아니라, 어머니의 사랑이었다. 하나님께서도 그리스도인들을 어려움 가운데 내모신다. 미워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힘들 때 느낄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핍박 한가운데 있을 때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둘째, 감사로 집중하라!
라이프 곱스라는 사람은 감사의 위대함을 이렇게 말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자를 벌하는 법은 없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삶 자체가 벌이기 때문이다.”
감사할 줄 모른다면, 이미 벌 받은 사람이다. 특히 구원을 받은 우리가 구원의 주이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것은 이미 벌을 받은 것이다.
삶은 집중이다. 집중에 따라 삶이 결정된다. ‘문제는 누구에게 집중하느냐?’이다. 우리는 예수님께 집중해야 한다. 예수님께
집중할 때 비로소 선물이 주어진다. 하나님께 집중하면 사랑의 선물이 주어진다. 예수님께 집중하면 구원의 선물이 주어진다. 성령님께
집중하면 감사의 선물이 주어진다.
이런 말이 있다.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
집중도 방향이 중요하다. 그 방향은 하나님이시다. 그럼 하나님께서 구원의 선물을 주신다. 우리는 하나님께 집중해야 한다.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 선물이다.
우리는 날마다 선물을 받아야 한다. 오늘도 여러분이 하나님께 집중했다면 선물을 받은 것이다. 받은 선물은 세상 최고의 선물이다. 항상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선물을 받기를 축복한다.
오리슨 스웨트 마든(Marden, Orison Swett)
1850년에 미국 뉴햄프셔에서 태어나 1920년에 세상을 떠난
분인데 성공에 대해서 연구하였던 사람들 중에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마든이 태어난 후 세 살 되던 해에 어머니가, 일곱 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사망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후견인은 즉시 어린 마든을 일터로 내몰았습니다. 그 후 그는 아주 험난한 삶을
살았습니다. 낮에는 손에서 피가 날 때까지 돌을 나르고, 밤에는 빨래와 청소를 해야 했습니다. 채찍으로 맞고, 발길질 당하기
일쑤였고 제대로 먹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시골 농장 다락방에서 책 한 권을 찾아냈는데 그것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계기를 제공했습니다. 그 책은 다름
아닌 스코틀랜드 의사이자 신문 편집자, 철도회사 서기관이었던 사무엘 스마일즈가 지은 ‘자조론(自助論)’이란 책이었습니다.
자립의
방법으로 성공하는 인생을 이야기한 책입니다.
‘자조론’에 영향을 받은 마든은 17세에 법적 후견인을 떠나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밤에는 글을 읽고, 낮에는 생계를 위해 웨이터로 일을 하는 그야말로 주경야독의 생활이었습니다. 나중에는 호텔 지배인으로
일했습니다. 그리하여 뉴 런던 아카데미, 보스턴 대학, 하버드 의대, 보스턴 로스쿨을 졸업했습니다. 그는 식당을 시작하고, 호텔과
부동산을 사들이는 등 기업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나이 32세에 재정적으로 안정을 얻은 그는 여유 시간을 이용하여 격려가
되는 글을 모으고 세상에서 의미 있는 누군가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돕는 데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독자들에게서 수많은 감사 편지를 받게 되자 마든은 석세스(success, 성공)란 잡지의 창간을 결심하였습니다. ‘석세스’지를
통해 마든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교훈을 줄 수 있는 성공의 사례들을 소개했습니다.
마든은 당시에 가장 성공적이고 영향력 있는
인물들을 하나 하나 인터뷰했으며 석세스 지는 미국 사회에서 특별한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그가 에디슨을 인터뷰했었는데 그 때
에디슨의 성공비결이 무엇인가를 물었습니다. 에디슨은 말하기를 ‘한가지 일에 끊임없이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를 쏟아붓는
집중력’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집중력. 이것이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결국 성공으로 인도합니다. 에디슨을 인터뷰한 마든은
수많은 사람들의 성공의 공통점이 집중력임을 발견하고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의 목표에 집중하고,악착같이 붙잡고, 노력한다면 어느것도 당신을 막을 수 없다. 꿈에 집중하라”(오리슨 스웨트 마든- 하고 싶은 일을 하라, 중에서)
우리는 주님의 주신 꿈에 집중할 수 있기를 기도해야합니다.
그러나 무조건 집중한다고 해서 섣불리 어떤 목표, 대상을 정하고 거기에 집중했다가 나중에 보면 잘못된 것이라서 크게 후회할 수가 있기에 우리는 이 집중을 잘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일에 어떻게 집중해야 할까, 라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인생과 사명에 성공하는 길을 알리십니다.
첫째,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집중하라.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위하는 일에 집중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집중해야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아버지의 일,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그의 인생을 집중하셨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하나님의 뜻일까, 를 늘 생각하는 습관을 가져야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 분의 뜻을 안다면 그 계획, 목적, 방향, 이유를 안다면 그 뜻, 방향에 집중하면 실패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5:16 항상 기뻐하라
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으니 그 뜻에 집중하라, 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해야지, 라는 생각을 갖는 것부터 우리
인생은 집중력있는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우리의 인생은 성공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늘 이렇게 생각합시다. ‘나를 향하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이
생각을 시작하시는 순간부터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에 승리의 문을 여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에 인생의 목적을
두고 살기를 바랍니다.
위하여! 우리는 어떤 모임에 가서 축배를 할 일이 있을 때 잔을 들면서 위하여, 라고 하지요.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위하는 일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예수님 믿는 일에 집중하라
하나님의 뜻에 집중한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데 집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건배할 때 위하여, 라고 하지만 동시에 향하여, 라고도 외쳐야합니다. 향하여! 그렇습니다. 믿음은 향하는 것입니다.
7월 4일, 이 때가 미국의 독립기념일인데 미국항공우주국, NASA는 세계적인 뉴스를 전했지요. 나사가 쏘아올린
우주탐사선 ‘딮 임팩트’호가 7개월의 기간에 템펠1, 이란 혜성을 향해 약 4억 km를 날아갔습니다. 약 3천3억원을 투자한 이
탐사선 발사의 목적은 앞으로 지구를 충돌할 우려가 있는 혜성들의 방향을 바꾸는 일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만 그 외에도 이번
실험의 목적들이 또 있다고 합니다. 태양계생성 당시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혜성들을 분석하여 우주의 기원을 연구하겠다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미국의 독립기념일에 이 실험이 성공함으로써 미국국민들의 애국심과 긍지를 높인다는 것입니다. 이런
여러가지 목적을 가지고 나사의 과학자들은 이 딮 임팩트 호의 발사의 성공에 집중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딮임팩트호는 7월4일,
구리로 된 충돌체, 임팩터를 그 템펠 혜성을 향해 발사했습니다. 마치 고속으로 발사된 하나의 총알이 두번째 총알을 쏘아서 다른
날아가는 총알을 마추는 것 같이 그 혜성을 정확히 명중시켰습니다. 미항공우주국의 집중력은 우주선의 집중력을 낳았고 결국 목표물에
명중하면서 나사항공우주국과 미국의 뜻을 이루어냈습니다. 집중력의 열매입니다. 딮임팩트호가 목표를 향하여, 향하여, 향하여,
날아간 것 같이 신앙생활은 무엇을 위하여, 어디를 향하여, 전진하는 일입니다.
신앙은 방향입니다. 먼저 우리를 주님 예수님께 맡겨드리는 방향의 운동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우리의 신앙을 향하느냐가 중요한데
우리의 방향, 인생을 맡기는 방향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그 신앙의 집중은 우리를 구원과 축복으로 인도합니다.
어떤 방해를 받아도 예수님께 집중한 신앙생활은 결코 후회가 없게 됩니다. 신앙의 집중력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예수님 믿는 일은
예수님께 맡겨진 인생이 되게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 나와 모든 것을 맡겨드리는 일이 신앙입니다.
인생은 주님께 맡겨질 때
구원이 따르고 축복이 따르고 승리가 따릅니다. 우리는 정말 주님께 우리 자신을 맡기지 않고 살면서 왜 잘 안되나, 라는 탄식만
합니다. 기도하면서도 자기 인생을 자기가 움켜쥐고 삽니다. 맡겨지지 않은 인생입니다. 그러나 맡기십시요. 예수님께
맡기십시요. 예수님믿는 일에 집중하십시요. 주여, 정말 믿습니다, 라고 집중적으로 고백하십시요. 그 때부터 인생은 분명히
열매를 맺기 시작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예수님 안으로,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오늘 성경은 다시 이렇게 말씀합니다.
5:16 항상 기뻐하라
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수님을 향하고 예수님께 인생의 방향을 정하여 그분께 나아가서 인생을 맡겨드리고 믿는 것이 첫째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씀입니다. 먼저 그 분 안에 있어야 무언가 해결이 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집중해서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창조자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분으로 믿고 전적으로 우리 인생을 주님의 것입니다,
라고 맡기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향하여 나아와야합니다. 에수님을 향하여 인생들의 방향을 이끌어야합니다.
마치 딮임팩트 호가 다시 임팩터라는 충돌체를 발사하여 혜성을 충돌하고 그 방향을 바꾸는 실험을 한 것 같이 우리는 지옥으로 가는
인생, 남에게 피해를 주며 사는 인생을 향해 나아가서 충돌하여 그 방향을 주님께로 바꾸는 일을 해야합니다. 방향을 바꾸는
일. 우리의 신앙은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일에 집중력을 발휘하여야 하는 신앙이어야합니다. 바울사도는 이 사명을 알기에
빌립보 감옥에서 간수에게 전도할 때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16:31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리고 간수의 인생의 방향을 바꾸어놓았습니다. 그 가족의 방향을 예수님께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신앙의 집중력은 방향의
집중력입니다. 주님을 향한 방향을 확실히 가진 사람들은 사람들의 인생에 충돌해서 그 방향을 예수님께로 향하게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다 인생을 맡기는 방향으로 인도하여 드디어 주님 안에 그리스도 안에 맡겨진 인생이 되게 만듭니다. 맡기면 복이 옵니다.
은행 안에 돈을 맡기듯이 예수님 안에 우리 인생을 정말 맡기십시다. 주님의 교회에 맡깁시다. 주님께 전적으로 맡기십시요.
제가 설교할 때 노트북을 사용합니다. 새벽에 제 방에 갖다 놓으면 1부 예배 전에 우리 전산실 담당하는 최집사님이 가지고 가서
강단에 설치를 합니다. 그 분께 맡기면 이렇게 설치를 하고 제가 쓸 수 있게 합니다. 제가 만일 최집사님께 맡기지 않고 그냥 제
방에 갖고 있다면 이 노트북은 이렇게 쓰이지 않겠지요. 맡기는 일이 중요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 분께 맡긴 인생을 맡으셔서
가장 쓰기 좋은 인생으로 만들어 다시 주십니다. 이렇게 노트북을 이곳에서 제가 쓰듯이 말입니다. 주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집중적으로 맡기십시요. 주님, 돈도 맡깁니다. 가정도 맡깁니다. 건강도 맡깁니다. 주님 다 맡깁니다. 주님 보호하시고
인도하옵소서, 그리고 우리가 할 일은
셋째, 성령의 도우심에 집중하라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성령의 도우심을 받는 일입니다. 성령의 도우시는 은혜에 우리가 집중해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 예수님을 향하여 사는 신앙에 집중하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신앙의 집중력체험은 바로 보혜사로서 우리를 도우시는 분,
바로 성령의 체험입니다.
신앙의 집중력을 위해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요.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일에 집중하십시요. 신앙의 집중력은 성령의 도우심이 우리에게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세계를 경험하는 일입니다.
성령님은 놀라운 집중력이기도 하십니다. 성령의 일하시는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데 집중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성령을 받으면 놀라운 올바른 집중력이 생깁니다. 그리고 모든 일이 획기적으로
바뀌면서 불가능해 보이던 일들이 신기하게도 가능해 집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하게 됩니다.
‘성령이 도우시면 된다’. 정말 그렇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지요.
스가랴 4:6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오직 나의 신, 성령으로 되느니라’
성령께서 도우시면 된다, 는 이 확신은 우리에게 성령의 체험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아야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처음 대면하실 때 하신 말씀이 바로 성령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0:22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주님과 호흡이 일치하는 길은 성령을 받는 일로 가능해집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으면서 우리는 인생에 굉장한 변화를 얻게 됩니다. 이른바 정말 필요한 몇가지 일에 집중력을 갖게 됩니다.
첫째, 기쁨의 세계를 향한 집중력입니다.
둘째, 기도의 세계를 향한 집중력입니다.
셋째, 감사의 세계를 향한 집중력입니다.
성경은 오늘 이렇게 말씀합니다.
5:16 항상 기뻐하라
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 세가지 세계를 향한 신앙생활의 집중력이 생기면서 우리는 정말 기뻐하고 기도하고 또 감사할 일이 계속 생기는 인생이 됩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 예수님을 향하여 살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사는 인생이 되면 우리는 정말 항상 기뻐할 일이 생깁니다. 쉬지
말고 기도해야할 이유가 자꾸 생깁니다. 그리고 그 응답가운데 범사에 감사할 일이 풍성해 집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수많은 기회에 감사할 일을 주십니다.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기뻐할 일을 주십니다. 우리는 정말 감사하고
정말 먼저 기뻐해야합니다. 저는 이 기뻐할 일은 명령임을 압니다. 제가 홍콩 나가기 전 제 딸이 초등학교 1학년 때
충현교회 부목사로 있었을 때였습니다. 아침에 출근해서 교회로 가고 있는데 갑자기 마음 속에 ‘기뻐하라’는 말씀이 들립니다.
그래서 아니 주님 기뻐할 일이 지금 없는데요,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기뻐하라, 는 강한 명령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길을
걸으며 마음 속에서 손을 들고 주님 순종합니다, 기뻐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사무실에 도착해서 일하는데 전화가 집에서
왔어요. 딸이 상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KBS가 주최한 전국어린이 글짓기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아서 아침에 학교조회 때
교장선생님이 상을 주었고 이제 다시 KBS에서 하는 시상식에 참석하라고 연락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 때 제 마음이 기쁘다가 곧
깨달았습니다. 아 기뻐할 일을 예비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뻐하라고 명령하시는구나, 라고 말입니다. 신앙의 집중력은 기쁨의
집중력입니다. 기쁨의 세계로 집중적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 신앙의 집중력, 성령의 집중력으로 우리는 확 바뀐 신앙생활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크게 깨닫습니다. 기뻐하라, 기도하라,
감사하라, 는 주님의 명령은 곧 약속이라는 깨달음입니다. 강한 명령은 사실 꼭 이루어주겠다는 약속입니다. 명령이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진정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성령께 우리의 큰 관심, 시인의 관심을 보여드리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말합시다.
성령이 도우시면 된다, 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집중적으로 성령 받기를 기도하십시오. 성령께서 크게 환영 받고 높임 받으실 때 그 분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를 세우실 것입니다.
결국 신앙의 집중력은 하나님의 영광, 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그 이름을 높이는데 집중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높이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을 높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 신앙, 믿으면서 우러러 보며 높여드리는 이 신앙의
집중력은 나를 부인합니다. 나를 잊습니다. 이 집중력으로 보입시다. 그래서 이번 여름출애굽 때 우리는 나를 벗어나는 엑소더스를
해서 예수님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여행을 본격적으로 합시다. 주님 믿습니다, 정말 믿습니다. 주님 높여드립니다. 정말
주님 높입니다. 성령님 도와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합시다. 이제 하나님의 영광이 목적이 되는 일에 집중하는 신앙을 가지고 이
일에 성령의 도우심을 받으심으로써 정말 순종하고 순종하여 마지막으로 이제 그 영광을 위해 집중합시다. 하나님의 뜻, 그 분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예수님을 향하여,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항상 기뻐하는 세계, 쉬지 않고 기도하는 세계, 범사에 감사할
세계로 인도되는 신앙의 집중력의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5:16 항상 기뻐하라
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첫 발을 디디며 가나안 정복전쟁을 시작한 이후 세월이 많이 흘러 어느 새 여호수아도 늙었습니다. 이 때
여호수아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여호수아도 늙어 일선에서 퇴장할 때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
정복하지 못한 가나안 땅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2절 이하 6절은 그 땅이 어디인지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아직 정복하지 못한 땅을 이스라엘 아홉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6-7절입니다.
“또 레바논에서부터 미스르봇마임까지 산지의 모든 주민 곧 모든 시돈 사람의 땅이라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리니
너는 내가 명령한 대로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분배하여 기업이 되게 하되 너는 이 땅을 아홉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나누어
기업이 되게 하라 하셨더라.”
사람에게는 시작할 때와 마칠 때가 있습니다. 등장할 때와 퇴장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때를 잘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고, 또한 마칠 때가 되었을 때, 퇴장할 때가 되었을 때 마무리를 잘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작하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 마칠 때이고, 등장할 때보다 잘해야 하는 것이 퇴장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곧 끝 모습은 사람들의 오랜 기억과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마침과 퇴장을 잘하는 길이 믿음으로 끝까지 자기소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끝까지 자기소임을 다했던 것처럼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맡겨주신 자기소임을 다할 때 하나님과 사람에게 아름다운 기억과 의미를 남기고, 새로운 미래의 지평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8절 이하 14절은 므낫세 반 지파와 르우벤 지파, 갓 지파가 받은 요단 강 동편 지역에 대한 말씀입니다. 8절 “므낫세 반 지파와 함께 르우벤 족속과 갓 족속은 요단 저편 동쪽에서 그들의 기업을 모세에게 받았는데 여호와의 종 모세가 그들에게 준 것은 이러하니” 곧 요단 강 동편 지역의 땅은 모세가 이미 세 지파에게 약속한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14절입니다.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여호수아가 기업으로 준 것이 없었으니 이는 그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물이 그들의 기업이 되었음이더라.”
그리고 같은 말씀이 33절에서도 반복됩니다. 33절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모세가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심이었더라.”
그런데 14절, 33절에서 발견하게 되는 차이가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모세’입니다. 곧 14절은 여호수아가 레위지파에게는
기업으로 준 땅이 없다고 하는데 33절에서는 모세가 레위지파에게 기업을 주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이 차이가 깨닫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모세가 시작한 것을 여호수아가 완수한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노릇과 역할이 있습니다. 자기 혼자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고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대와 역사의
변화에 따른 제 노릇과 역할이 있습니다. 터를 닦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세우는 사람이 있고, 확장하고 발전시키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저마다에게 주신 하나님의 분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사의 한 시기와 지점에서 하나님의 교회와 세상을 위해 자신의 노릇과 역할을 다했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고 주 앞에 서는 날에 영광의 상급이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의미로 남고 영광이 기다리는 퇴장이 되는 것입니다.
15절에서 23절은 르우벤 지파에게 준 기업에 대한 말씀이고, 24절에서 28절은 갓 지파에게, 29절에서 31절은 므낫세 반
지파에게 준 기업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말씀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땅을 분배할 때 “가족대로 주었다”고 말씀합니다. 15절
“모세가 르우벤 자손의 지파에게 그들의 가족을 따라서 기업을 주었으니” 23절 “르우벤 자손의 서쪽 경계는 요단과 그 강 가라
이상은 르우벤 자손의 기업으로 그 가족대로 받은 성읍들과 주변 마을들이니라.” 24절 “모세가 갓 지파 곧 갓 자손에게도 그들의
가족을 따라서 기업을 주었으니.” 28절 “이는 갓 자손의 기업으로 그들의 가족대로 받은 성읍들과 주변 마을들이니라.” 29절
하반절 “그들의 가족대로 주었으니.” 31절 하반절 “곧 마길 자손의 절반이 그들의 가족대로 받으니라.”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통해 요단 강 동편 땅을 분배할 때 마구잡이로 기분 내키는 대로 하신 것이 아니라 가족 수를 따라
분배하셨습니다. 곧 가족 수가 많은 가문에는 좀 더 많은 것을 주시고, 가족 수가 적은 가문에는 조금 작게 준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배려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의 형편과 사정을 아시고 도우시고 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연약한 자에게는 힘을
주시고, 낙심한 자에게는 용기를 주시고, 슬픈 자를 위로하시며, 아픈 자를 어루만져 주시고, 가난한 자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또한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진실한 자에게는 주의 진실하심을 보이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주의 은혜와
존귀로 응답하시고, 교만한 자에게는 수치와 멸망으로 응답하시고,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고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십니다.
사람은 등장할 때와 퇴장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도 때에 대한 분별의 지혜가운데 배려하시는 하나님, 공평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으로 위로를 삼으며 아드라뭇데노호 같은 삶의 자리에서 휘페레테스와 마르튀스의 소임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13:14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여호수아가 기업으로 준 것이 없었으니 이는 이스라엘하나님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물이 그 기업이 됨이 그에게 이르신 말씀과 같음이었더라.
여호수아 13:33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모세가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심 같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기업이 되심이었더라. (But
to the tribe of Levi, Moses had given no inheritance; the Lord , the
God of Israel, is their inheritance, as he promised them.)
13장은 아직 정복하지 못한 땅들과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가 요단 동부 지역을 차지하게 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유대 사회에서는 보통 60-70세를 노인으로 보는데 여호수아 당시는 아직 활동이 왕성하기에 80세부터 임종 때까지에야 비로소 늙었음을 인정합니다(1절).
성경은 노년의 백발은 영화로운 면류관으로 표현하고 있다(잠언 16:31)
정복하지
못하고 남은 땅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갖으시고(13:2-5절) 여호수아가 늙었지만, 아직 정복되지 않은 모든 땅이 이스라엘의
차지가 될 것임을 약속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이 정하신 때에 자신의 일을 행하신다(6절). 하나님은 성취하지 못한 일을 살피시고
고려하셨다. 하나님은 성도가 행할 수 있는 일뿐만 아니라 그들이 완성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까지도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직접 이루십니다.
땅을 분배할 때의 원칙은 각 지파의 사정에 따라 공평하게
나누셨다(7절). 성경에서 토지는 결코 매매나 증여에 의해서 타인의 소유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공평하게 나누게
하는데 이유는 땅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레위 지파가 기업을 얻지 못한 이유는 하나님께 드리는 화제물이 그들의 기업이 되기 때문입니다 (14절). 레위 지파를 통해 본 성직자의 바른 자세는 오직 하나님만을 자기 기업으로 삼아야 함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33절).
주께서 주신 오늘! 마지막 구원의 때를 소망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결한 삶을 살아가길 원합니다.
평화는 군사력으로 지키는 최후의 수단이다.
국가에 대한 현실주의자 관점
1. 국가의 이익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 2. 국가의 이익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것
나라 국(國) / 사람이 땅 위에서 창을 들고 지키는 큰 땅
큰 입구(口) / 나라, 큰 땅 창 과(戈) / 무기(창) 작은 입구(口) / 사람 땅( /) /
문인(文人)
그칠 지(止) 창 과(戈)
무인(武人) / 창쓰는 일을 그치는 것 굳셀 무(武)
그칠 지(止) 창 과(戈)
왜 남북의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는가?
분단의 원인이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다. 다른 나라에 의해서 분단이 되었기 때문에 주위 나라들이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 통일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한국의 자구책은
1. 핵무기를 보유하는 길 2. 중국의 영향을 받는 길 3. 일본과 동맹을 맺는 길
현재 미국이 한반도 평화를 위하여 요구하는 것은 일본과 동맹을 맺는 것이라고 한다.
11월 16일(화) 멸한 왕들(여호수아 12:7)
♦ 11월 16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여호수아 12:1∼24 ♦ 묵상을 위한 주제 : 멸한 왕들(7절) ♦ 성구 :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子孫)이 요단 이편 곧 서편(西便) 레바논 골짜기의 바알갓에서부터 세일로 올라가는 곳 할락산까지에서 쳐서 멸(滅)한 왕(王)들은 이러하니 그 땅을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구별(區別)을 따라 그 지파(支派)에게 기업(基業)으로 주었으니.
여호수아 12장 내용 구분 12:1~6, 모세가 정복한 요단 동편 지역 12:7~24, 여호수아가 정복한 요단 서편 지역 a. 남쪽 지역 왕들의 목록(7~16절) b. 북쪽 지역 왕들의 목록(17~24절)
“가나안 땅”에 대한 성경의 묘사를 살펴봅니다. 첫째, 아름다운 땅(신명기 3:25) 둘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출애굽기 3:8) 셋째, 기름진 땅(예레미야 2:7) 넷째, 영화로운 땅(다니엘 8:9) 다섯째, 거룩한 땅(스가랴 2:12) 여섯째, 약속하신 땅(히브리서 11:9)
이렇게 묘사한 가나안 땅의 거민들을 완전히 진멸하라고 하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가나안 땅은 아름다운 곳이라고 하셨지만 그곳의 주민들은 “근친상간” “수간” “간음” “우상숭배”에 철저하게 사로잡힌 거짓된 삶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로부터 나쁜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진멸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름다운 땅에서 사악한 삶을 살아가는 가나안 거주민들처럼 오늘날도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들이 죄악된 삶을 즐기는 험악한 세상을 이기려면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에 새기고 승리의 삶을 기도해야 합니다.
날마다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일까요?
가나안 땅을 점령하라는 사명을 주신 은혜 악과 싸워 이길 수 있도록 항상 함께 하시는 은혜 필요한 것으로 채워주시는 은혜
오늘도 주님의 용사로서 그 은혜를 힘입어 삶의 터전에서 다 같이 승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의 주인공으로 살아봅시다.
♪ 찬양 / 너 주의 사람아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여호수아 12:7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이 요단 이편 곧 서편 레바논 골짜기의 바알갓에서부터 세일로 올라가는 곳 할락산까지에서 쳐서 멸한 왕들은 이러하니 그 땅을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구별을 따라 그 지파에게 기업으로 주었으니. 아멘
여호수아 12장
12:1~6, 모세가 정복한 요단 동편 지역(6절 참조)
12:7~24, 여호수아가 정복한 요단 서편 지역 (7b-8 참조)
a. 남쪽 지역 왕들의 목록(7~16절)
b. 북쪽 지역 왕들의 목록(17~24절)
여호수아 12:6
여호와의 종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을 치고 여호와의 종 모세가 그 땅을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 지파에게 기업으로 주었더라.
여호수아 12:7b-8
그 땅을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구별을 따라 그 지파에게 기업으로 주었으니. 곧 산지와 평지와 아라바와 경사지와 광야와 남방 곧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땅이라.
출애굽기 3:8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 Little Jew / Sahara Desert
1-12장 / 가나안 입국과 그 땅의 점령
과정 13-24장 / 점령한 가나안 땅을 지파별로 분배하는 과정
전반부와 후반부 전체를 통하여
부각된 인물은 여호수아이다. 전반부에서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며 가나안 정복 전쟁을 승리로 이끈 여호수아는 후반부에서 점령지역을
지파별로 균등하게 분배하여 정착시키는 조정자로서의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여호수아서의 가나안 정복 전쟁은 11장 마지막 부분(11:16-23)과 12장을 통하여 마무리되고 있다. 그 중에서 11장
마지막 부분(11:18-23)은 비교적 장기간 지속되었던 가나안 정복 전쟁에 대한 실제적인 결론이며, 그 뒤를 이어 나오는
12장은 모세와 여호수아가 점령한 왕들이 누구인지를 최종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여기에서 전반부의 실제적 결론에 해당되는 11장
마지막 부분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내용이 담겨져 있다.
1. 가나안 점령에 대한 역사적이고도 신학적인 마무리(16-20절) 2. 마지막 남은 적인 아낙자손에 대한 여호수아의 군사적 공격(21-22절) 3. 최종적인 결론(23절)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그러한 결론적인 언급에는 출애굽 사건을 연상시키는 몇 가지 요소들이 들어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소는, 출애굽에서 바로에게 하신 것처럼, 여호와께서 가나안 왕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신 것이다(20절).
그 결과로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그들을 진멸시킬 수가 있었다. 출애굽이나 가나안 정복은 적들과 적당하게
타협하여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에 목적이 있지 않았다. 완전 전멸을 통한 출애굽과 가나안입국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이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는 한 가지 예외가 있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기브온 거민 히위 사람들과 화친을 맺은 일이다. 그것은
분명히 여호수아가 실수로 그들의 속임수에 넘어가 맺은 화친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의 실수를 받아주시고 기브온 사람들을
전멸시키지 않으셨다. 기브온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여호수아의 실수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여호수아를 속아 넘길 수
있을 만큼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세운 기브온 사람들의 지혜로움과 집요함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절명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내다보면서 그 역사를 겸허하게 받아들인 기브온 사람들은 자신들의 살 길을 스스로 마련한 지혜로운 민족이 되었다.
출애굽과 관련된 또 다른 요소는 아낙자손을 멸절시킨 내용이다(21절). 여호수아가 산지에 살고 있던 아낙자손들을 몰아낸
사건은 가나안 정복을 위한 마지막 군사작전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서 아낙자손은 더 이상 이스라엘이 차지한 땅 안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다만 블레셋 지역인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만 약간 남아 있는 정도가 되었다.
아낙 자손들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에게
위협적인 존재였었다. 특히 가나안 정세 파악을 위하여 파송되었던 12명 가운데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10명의 정탐꾼들이
부정적인 보고를 하게 된 배경에는 아낙자손의 위협이 크게 영향을 끼쳤다(민 13:21-33).
여호수아가 마지막 군사작전으로
아낙자손을 몰아낸 것은 가나안 정복이 출애굽 사건의 마무리였음을 나름대로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곧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국을 40년
이상 지연시키고 그 대신에 광야에서 생활하게 하였던 중요 원인을 제거하게 된 셈이다.
11장의 마지막 절인 23절은 가나안 정복의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다. 곧 여호수아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대로
온 땅을 점령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별을 따라 기업으로 나누어 주었고, 그것으로 그 땅에 전쟁이 그치게 되었다.
이것을 통하여
가나안 정복의 최종적 과제는 땅을 점령하는 것에 있지 않고 오히려 점령한 땅을 지파별로 분배하는 것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호수아서가 균등하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11월 15일(월)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여호수아 11:23)
♦ 11월 15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여호수아 11:1∼23 ♦ 묵상을 위한 주제 :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23절) ♦ 성구 :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대로 그 온 땅을 취(取)하여 이스라엘 지파(支派)의 구별(區別)을 따라 기업(基業)으로 주었더라 그 땅에 전쟁(戰爭)이 그쳤더라.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Then the land had rest from war.)”
여호수아 11장 내용 구분
11:1~15, 북부 지역 정벌 북방의 동맹군들에 대한 승리(1~9절) 하솔과 다른 성들의 점령(10~15절)
11:16~23, 정복된 지역에 대한 보고
하솔 왕 “야빈”을 사사기 4~5장의 하솔 왕 야빈과 동일 인물이라고 하여 여호수아서와 사사기는 동일한 전승을 공유하고 있으며, 사사기의 전쟁 이야기가 여호수아를 주인공으로 삼아 각색되어 여호수아서에 기록된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 학자들은 “야빈”이 인명이 아닌 왕조의 이름이므로 여호수아와 사사기의 "야빈"은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하솔 왕 야빈이 북쪽 왕들을 모아 이스라엘에 맞서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그 결과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을 완성하고 지파별로 땅을 분배합니다.
아무리 강한 군대가 대적할지라도 하나님이 지켜주심으로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솔 왕 야빈의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신앙적인 교훈을 살펴봅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싸워주신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며 가나안 족속들을 모두 진멸하라고 하셨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신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군사들이 싸우는 곳마다 함께 하셨습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승리는 그들의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신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영광을 오직 여호와 하나님에게 돌려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솔 왕 야빈'이 주도한 연합군들이 "메롬 물가"에 진을 쳤을 때 마치 해변의 모래와 같고 말과 병거가 심히 많았을지라도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불로 병거를 불사르면 내일 이 맘때에 몰살시킬 것이라는 작전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가나안 땅의 전쟁은 화친을 맺은 기브온 사람들 이외에는 모두 진멸되었고 그 땅에서 전쟁이 그쳤다고 합니다.
오늘날도 영적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순종하며 믿고 따를 때 승리를 확신 할 수 있습니다.
"두려워 말라 강하고 담대하라!"는 말씀을 믿고 삶의 현장에 나가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천지 주관하는 주님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여호수아 11:23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대로 그 온 땅을 취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별을 따라 기업으로 주었더라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아멘
여호수아 11:4-5
그들이 그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나왔으니 민중이 많아 해변의 수다한 모래 같고 말과 병거도 심히 많았으며. 이 왕들이 모여 나아와서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메롬 물가에 함께 진 쳤더라. 지도 참조
여호수아 11:6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일 이맘때에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 붙여 몰살시키리니 너는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불로 그 병거를 사르라.
여호수아 11:20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 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
출애굽기 10:27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그들을 보내기를 즐겨 아니하고.
히브리서 3: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히브리서 3:8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오늘의 기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신 은혜를 먼저 생각하게 하옵소서!
권혁승 칼럼 / 여호수아가 순종한 두 가지 명령
하솔왕 야빈의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함으로 여호수아는 여리고에서 시작된 가나안 정복전쟁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여호수아의
이전 모든 전쟁이 그러했듯이, 메롬 물가의 전쟁 역시 여호와께서 적들을 이스라엘 손에 넘겨주셨기 때문에 얻은 승리였다(수
11:8).
전쟁에서의 승리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허락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은 신앙 안에서 승리하는 삶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우리들에게 교훈해 준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일을 계획하며 시도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뜻뿐이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는 주기도문 내용도 그런 점에 대한
강조이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온다"(잠 16:1)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다"(잠 16:9)
궁극적인 승리가 하나님께 있음을
강조한 내용들이다. 그래서 지혜의 근본은 여호와에 대한 경외 곧 그분의 뜻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마음가짐에서 시작되는 것이다(잠
1:7; 9:10).
전쟁은 하나님 손에 달려있다. 그래서 전쟁에서의 승리를 얻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은 당연하면서도 우선적인
요소이다. 여호수아의 전승도 그런 점이 강조되어 있다. 여호수아의 전략은 다른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하는
일이었다. 그런 순종은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는 물론 전쟁을 마치고나서도 철저하게 지켜졌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을
때에는 가혹할 정도로 무섭고 호된 결과가 뒤따랐다. 대표적인 경우가 아이성에서의 패전이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명령을 어기고 몇 가지 물건을 훔친 아간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가 패전이라는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만 했었다.
가나안 땅 정복을 위한 마지막 전쟁과 관련하여서는 두 가지 하나님 명령이 소개되어 있다.
하나는 전쟁을 앞둔 여호수아에게
직접 주신 명령이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그들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일 이맘때에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
넘겨주어 몰살시키리니 너는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그들의 병거를 불사르라 하시니라"(수 11:6).
이 명령 속에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격려와 함께 승리에 대한 약속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특히 '내일 이맘때'라는 시간이 특정됨으로 승리에
대한 약속이 보다 더 구체성을 띄었다.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적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도 구체적으로 지적되어 있다. 곧
이스라엘은 적들의 말 뒷발굽 힘줄을 끊고 병거를 불살라 버려야한다는 명령이다.
또 다른 하나님의 명령은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이다.
"여호수아가 그 왕들의 모든 성읍과 그 모든 왕을 붙잡아 칼날로 쳐서
진멸하여 바쳤으니 여호와의 종 모세가 명령한 것과 같이 하였으되"(수 11:12).
여기에서 여호수아가 순종한 명령은 전쟁터에서
직접 받은 것이 아니라 이전에 모세를 통하여 주신 것이다. 신명기 20장에 기록된 전쟁관련 규정으로 추측되는 그 내용은
여호수아가 평생 동안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묵상해야할 거룩한 말씀을 의미한다(수 1:8). 비록 모세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받은 것이지만 여호수아는 그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처럼 중요하게 여겼다.
여호수아는 위의 두 가지 명령을 구별 없이 철저하게 순종하였다(수 11:15).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방법으로
우리들에게 말씀하신다. 하나는 각자의 상황에 따라 우리들이 구체적으로 실천해야할 말씀들이다. 동시에 우리들에게는 항상 가까이 두고
묵상하며 지켜야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전자가 구체적 상황 속에서 주어지는 '레마'로서의 말씀이라면, 후자는 기록된
계시의 말씀 곧 '로고스'로서의 말씀이다. 이 두 가지는 따로 구별되는 별개의 말씀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같은 하나님 말씀이다.
하솔왕 야빈의 주도로 결성된 북부 연합군은 수적으로도 월등했을 뿐 아니라 말과 병거라는 강력한 무기를 갖춘 군대였다. 이들이 진을
치고 여호수아의 군대를 맞은 곳은 '메롬 물가'였다. 당시의 메롬 물가가 어디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두 지역이 가능한
후보지로 거론되고 있다.
하나는 상부 갈릴리산지에 위치한 '메이론'으로, 오늘날의 사페드에서 서북방향으로 5km 정도 떨어진
지역이다. 이 지역에 있는 몇 개의 샘들은 갈릴리바다로 유입되는 '와디 메이론'의 급수원이 되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하솔에서
북쪽으로 15km 떨어진 훌레 호수 근처의 '마룬'이다. 당시 야빈의 연합군이 말과 병거를 갖추고 있었다는 점을 미루어볼 때
산지에 위치한 '메이론'보다는 계곡에 위치한 '마룬'이 메롬 물가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 말이 이끄는 병거는 산지보다는 평지에서 더
위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호수아의 공격방법은 기브온 전투에서처럼 상대방의 방심을 틈타 허를 찌르는 기습공격이었다(수 10:9; 11:7).
이스라엘의 본진이 위치했던 길갈에서 메롬 물가까지는 150km 이상 떨어진 먼 길이었다. 여호수아는 먼 거리에서 오고 있다는 점을
역으로 활용했던 것 같다. 야빈의 연합군은 이스라엘 군대가 그와 같은 먼 길을 오려면 상당한 기일이 걸릴 것을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자신의 군대를 서둘러 행군케 함으로서 예상치 못한 시간에 공격을 감행할 수가 있었다. 소위 틈새를 공략하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선제공격으로 야빈의 연합군을 패배시킨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도주하는 적들을 추격하여 하나도 남김없이 전멸시켰다. 그런
추격전은 북쪽과 서쪽과 동쪽의 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시돈은 전투가 벌어졌던 메롬 물가에서 북서쪽에 위치한 항구도시이다.
미스르봇마임은 오늘날 이스라엘과 레바논이 서로 국경을 접하고 있는 '로쉬 하니크라'(일명 '두로의 사닥다리'라고도 함)로서, 메롬
물가에서는 서쪽에 위치한 해안지역이다.
앞선 3절에서 '미스바땅'으로 언급되었던 미스바골짜기는 동편 지역으로서, 헬몬산 아래의
고원형산지에 해당된다.
세 방향으로 추격하여 야빈의 연합군을 전멸시킨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그들의 병거를 불살랐다(수
11:9).
하나님께서는 왜 말과 병거를 없애버리라고 하셨을까?
오히려 그것들을 잘 활용하여 앞으로의 전쟁을 대비하는 무기로
삼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정반대 방향의 명령을 내리신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철기문화가 도입되지 않아서 병거와
같은 최신무기를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도 한 요인으로 지적될 수 있겠다.
그러나 말과 병거를 모두 없애버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에는 그보다 더 큰 의미가 담겨져 있다. 그것은 지금 진행되고 있는 가나안 정복전쟁이 여호와께서 주도하시는 거룩한
전쟁이라는 점과 관련된다.
여호와의 전쟁은 사람의 수나 무기의 우수성과는 상관이 없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여호와 전쟁이다. 그런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군대가 지니고 있던 말과 병거를 취하여 자신들의 무기로
삼는다면,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아닌 무기의 우수성에 마음을 빼앗길 수 있다.
하나님보다는 인간의 힘을 의존하는 잘못된 신앙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전쟁에 임하는 여호수아에게 그런 명령을 내리신 것은 잘못된 신앙에 빠질 수 있는 가능성을 사전에
원천적으로 차단시키시기 위함이었다.
전쟁에서 승리를 얻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자축연을 벌리는 대신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으로 전쟁을 마무리 지었다.
여호와 전쟁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가장 성대하면서도 거룩한 자축연이다. 하나님은 풍성한 제사보다도 말씀에 대한
순종을 더 소중하게 여기신다. 그래서 성경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삼상 15:22)고 하였다.
권혁승 교수(서울신대 구약학)
[권혁승 칼럼] 여호수아서 연구(1): 여호수아는 어떤 책인가?
여호수아서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이스라엘이 어떻게 점령하여 자신들의 소유로 삼았는가를 기록한 책이다. 여호수아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1장-12장은 가나안을 점령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13장-24장은 지파별로 땅을
분배하여 각자의 소유로 삼는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전체 내용은 비교적 단순해 보이지만, 이 책의 올바로 이해를 위해서는 그
중심 사상이 무엇인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여호수아서의 중심축은 가나안 땅임이 분명하다. 그 땅을 점령하고 차지하는 과정이 이 책의 핵심 내용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문제는 그 땅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하는 점이다.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약속하신 특별한 땅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두 가지 약속을 주셨다. 하나는 자손을 번성케 하시겠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스라엘은 430년의 애굽 체류생활을 통해 거대한 민족이 되었으며, 출애굽 구원과 시내산 언약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거듭났다.
그러나 땅의 약속은 여호수아 시대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그런 점에서 여호수아서는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약속-성취 도식의 거룩한 역사 기록이다.
가나안은 이스라엘에게 축복으로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가나안이 하나님의 선물이라 함은, 그 땅이 이스라엘의 완전한 소유가
아님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은 단지 그 땅을 청지기와 같이 위탁받아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 땅의 소유권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속해 있다.(레 25:23) 땅을 제비뽑기로 나눈 것이나, 첫 소산물과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려야하는 것(신 26:9-15;
14:22-29) 등은 모두가 땅의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땅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기준을 지키며 살아가야함을 의미한다. 가나안은 이스라엘에게 특별한
생활양식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땅이다. 특히 신명기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면서 평생 동안 지켜야할 규례와 법도들이
무엇인지를 강조하고 있다(신 11:31-32).
가나안 점령을 책임 맡은 여호수아에게 여호와의 율법책을 주야로 묵상하며 그 안에
기록된 것들을 지켜야 한다고 당부한 것도 그 때문이다(수 1:8).
하나님의 율법은 거룩한 백성이 마땅히 순종하며 따라야할 삶의
올바른 방향이며 땅의 풍요로움을 안전하게 보호해주는 하나님의 튼튼한 울타리이다.
하나님이 주신 땅에 살면서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은 곧 그 땅에게 죄를 지우는 것이며(신 24:4) 그 땅을 더럽히는
일이다(민 35:33-34). 그런 불순종의 결과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서의 땅을 상실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 비극적 상황을
성경은 '땅이 스스로 이스라엘을 토하여 내는 것'이라고 표현하였다(레 18:25).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은 가나안을 축복의 땅 곧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출
3:8)으로 만드는 길이다.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가나안은 무엇보다도 물질적 풍요가 넘치는 땅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은
하나님께서 직접 보살펴주시는 땅으로서(신 11:12) 먹을 것이 결핍되거나 부족함이 없는 땅(신 8:9)이다. 그런 축복의 땅은
이스라엘에게 참된 안식을 제공한다. 그것은 물질적 풍요와 더불어 모든 외부환경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를 받는 참된 평화이다(신
12:9-10). 그런 점에서 여호수아서는 약속하신 것을 끝까지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런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곧 참된 복을 누리는 승리의 길임을 가르쳐주는 책이다.
권혁승 칼럼 여호수아서 연구(2): 여호수아와 여호와 전쟁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수 1:6)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눈의 아들이었던 여호수아의 본명은
'구원'이라는 의미의 호세아였다(민13:8; 신 32:44). 그런데 모세는 그를 자신의 수종자로 삼으면서 '여호와'가 더해진
여호수아라는 새 이름을 지어주었다(민 13:16). 젊은 시절부터 여호수아는 모세의 마음에 들만큼 신앙이 깊고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는 인물이었다. 여호수아의 깊은 신앙은 가나안 땅 정탐을 마치고 나서 갈렙과 함께 신앙에 근거한 긍정적인 보고를 한 것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런 신앙 때문에 여호수아는 갈렙과 함께 가나안에 입국한 단 두 명의 출애굽 제1세대가 되었다.
여호수아는 신앙의 인물이면서도 전쟁에 능한 훌륭한 용사였다. 여호수아가 용사로서의 탁월한 능력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르비딤에서 벌어졌던 아말렉과의 전투에서였다(출 17:8-16). 그 후로도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전투를 치렀다. 미디안 족속과의 전투를 비롯하여 요단 동편 땅에서 아모리 족속의 두 왕과의 전투는 모두 여호수아가 주도하여 이긴
전쟁이었다. 전쟁과 관련하여 여호수아와 모세와의 관계는 특별했다. 비록 전쟁터에 나가 직접 싸운 인물은 여호수아였지만, 전쟁을
승리로 이끈 실제 주역은 모세였다. 그것은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의 승리는 전적으로 모세의 기도에 근거하였기 때문이다.
모세가 손을 들고 기도하면 여호수아가 승전을 거두었지만, 모세의 손이 피곤하여 내려오면 그것은 곧 이스라엘의 패배로 이어졌다.
그래서 전투가 끝날 때까지 아론과 훌은 모세의 양 손을 받쳐줌으로 더 이상 내려오지 않게 하였다.
모세의 기도에 힘입어 여호수아가 수행했던 전쟁을 가리켜 '여호와 전쟁'이라고 부른다. '여호와 전쟁'은 전쟁의 주도권이
여호와께 있음을 의미한다. 곧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싸우시는 전쟁의 용사이시다. 전쟁에 참여하는 이스라엘은 자신의 힘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싸우심에 순종하며 동참할 뿐이다. 그러기에 전쟁에 나서는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르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다.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거나 전쟁의 두려움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면, 여호와 전쟁을 제대로 수행할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전쟁에 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겁내지 말며 두려워 말며 떨지 말며 그들로 인하여 놀라지 말라"(신 20:3)고
명령하셨다. 그리고 새 집을 짓고 낙성식을 거행하지 못한 자, 포도원을 만들로 그 과일을 먹지 못한 자, 여자와 약혼만하고 정식
결혼을 못한 자, 심지어는 두려워서 마음에 겁을 내는 자는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하시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신 20:5-8).
두려워하거나 집안일로 정신을 빼앗기면 여호와께서 주도하시는 전쟁을 망치게 된다.
모세가 죽은 후 가나안 점령을 눈앞에 둔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거듭하여 당부하신 것도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수 1:6, 7, 9)였다. 그것은 앞으로 여호수아가 수행할 전쟁이 세속적인 정복전쟁이 아니라 거룩한
여호와 전쟁임을 보여준다. 모세에게 함께 하였던 것 같이 여호수아를 떠나지 않고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은 율법책을 그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고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며 그 내용을 지켜 행할 것을 명령하셨다(수 1:8). 살벌한 전쟁터에서 신앙을
굳건히 지키는 길은 곧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에 집중하는 것이다.
구약시대의 여호와 전쟁은 오늘 우리들이 겪고 있는 영적 전쟁의 모형이다. 영적 전쟁에 임하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여전히
마음을 강하게 하고 두려워 말 것을 당부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지켜 행할 것을 명령하신다. 그것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능력으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을 이기신 우리의 용사이시며,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영원한 주님이시다.
[권혁승 칼럼] 여리고 정탐이 주는 의미와 교훈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꾼으로 보내며 이루되 가서 그 땅고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리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 (수 2:1)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두 명의 정탐꾼을 여리고로 보냈다. 여호수아는 왜 곧바로 가나안 땅을 쳐들어가지 않고
정탐꾼을 보냈을까? 가나안 정복을 약속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부족해서였을까? 여기에서 여리고 정탐이 주는 의미와 교훈을 찾을 수
있다.
(1) 전쟁의 승패를 쥐고 계신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가나안 정복을 분명하게 약속하셨다. 그러나 그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에 관하여는 명확한 지시가 없었다. 구체적인 것은 여호수아의 손에 맡겨져 있었다. 전쟁의 지도자로서 여호수아는 올바른 전략을
수립해야 했고, 그것을 위하여 적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수집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점에서 여리고 성에 대한 정탐은
필수적이었다.
(2)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정탐을 지시하지는 않으셨다. 그러나 그것은 모세가 명령한 율법을 철저히 지키라는 말씀 속에
담겨져 있는 내용이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는 격려의 말씀과 더불어 모세의 율법책을 주야로 묵상하며 그
안에 기록된 모든 것을 지키라고 하셨다(수 1:7-8).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말씀 가운데에는 정탐꾼을 보내어 가나안의 사정을
알아보라는 명령도 포함되어 있다(민 13:1-2). 그런 점에서 여호수아가 정탐꾼을 파견한 것은 모세에게 준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들인 것이 된다.
정탐꾼들을 파견하는 일과 관련하여 여호수아는 두 가지 점에서 이전의 모세와는 달랐다. 첫째는, 정탐꾼 파견이 비밀리에
이루어진 점이다. 모세는 가나안 정탐을 공개적으로 실시하였다. 그래서 열두 지파에서 각각 한 명 씩의 대표자를 선발하였고, 정탐
후에는 전체 백성들 앞에서 그 결과를 보고하게 하였다. 그러나 모세가 공개적으로 실시한 정탐은 국론의 분열을 초래하였고, 그로
인하여 가나안 입국은 40년이나 지연되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잘못된 전례를 반복하지 않았다. 그는 비밀리에 정탐꾼을 파견하였다.
하나님의 일이 때로는 은밀하게 진행될 필요도 있다. 느헤미야도 성벽 재건의 전략을 세우기 위하여 아무도 모르게 예루살렘 성
주변을 순찰한 적이 있다(느 2:12). 두 번째는 지파별 안배 없이 자신의 측근 중에서 직접 정탐꾼을 선발한 점이다. 전쟁에는
치밀한 작전을 수립하는 것과 그것을 주도면밀하게 수행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려면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 명령 지휘 계통이
세워져야 한다. 두 명은 일의 효율성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최소한의 인원이다. 성경은 재판에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증언도
최소한 두 명의 증인에 의한 것이어야 함을 강조한다(신 19:15).
(3) 정탐꾼들이 살펴본 내용은 여리성의 외적인 요인들이 아니라 여리고성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심리적 상태였다. 그런 점은
라합의 증언을 통하여 잘 드러나 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실제는 너무도 두려워한 나머지 간담이 녹고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수 2:9-11) 특히 홍해를 마르게 한 일과 아모리의 두 왕 시혼과 옥을 전멸시킨 일 등은 여리고 백성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런 사건들은 여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여호와께서 천지의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심을 믿게 만들었다. 라합과 그의
가족은 그런 위기 속에서 용감하게 여호와의 신앙을 선택한 최초의 개종자자들이었다. 정탐꾼들이 돌아와 여호수아에게 보고한 내용도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주셨고 그 땅의 모든 주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아있습니다"였다(수 2:24).
여호와의 전쟁은 우리에게 승리가 보장된 싸움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승리는 우리들에게 맡겨져 있다. 그래서 지혜롭게 전략을
세워 하나님의 승리를 우리의 것으로 삼아야한다. 예수님께서도 뱀처럼 지혜로울 필요를 강조하셨다. 그 길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사는 것이고 믿음으로 앞서 이루어 놓으신 하나님의 승리를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11월 13일(토) 야살의 책(여호수아 10:13)
♦ 11월 13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여호수아 10:1∼43 ♦ 묵상을 위한 주제 : 야살의 책(13절) ♦ 성구 : 태양(太陽)이 머물고 달이 그치기를 백성(百姓)이 그 대적(對敵)에게 원수(怨讐)를 갚도록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冊)에 기록(記錄)되기를 태양(太陽)이 중천(中天)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終日)토록 속(速)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 하지 아니하였느냐.
“야살의 책(the Book of Jashar)”이란 성경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들을 기록한 책입니다. '야살의 책'은 창세기부터 사사기 1장까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성경에 짧게 나오거나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사건들 사이의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야살의 책'은 한글이나 영어 성경으로는 알 수 없는 성경 원문의 히브리적 개념을 소개합니다.
예를 들면 성경은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고 '장막에 거주한다'고 합니다(창 25:27).
'조용한'이란 히브리어로 '톰'이라고 하며, '흠이 없는, 완전한'이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여 하나님이 보시기에 흠이 없고 완전한 자'를 의미합니다(창 17:1, 욥 1:1).
'장막에 거한다'는 것은 '장막 안에서 그의 부모나 조부모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모가 집에서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도록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신 6:7).
이와 같이 야살의 책은 '히브리적 개념'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설명하는 책이라고 하겠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거짓으로 위장하여 여호수아와 조약을 맺었습니다. 그러자 가나안의 다른 다섯 왕들은 연합군을 조직하여 기브온을 공경하려고 합니다. 이때 기브온 사람들은 길갈 진에 있던 여호수아에게 "속히 우리에게 올라와서 우리를 구조하소서" 하고 도움을 요청합니다.
여호수아와 모둔 군사들이 길갈에서 올라갈 때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을 두려워 말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너를 당할 자 없다"고 하셨습니다.
여호수아의 기습적인 공경에 아모리 다섯 왕들은 패배하였고 막게다 굴에 숨어 있었습니다.
심지어 큰 우박 덩어리가 떨어져 연합군들을 죽었는데 이스라엘 자손의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에 맞아 죽은 자가 더 많았다고 합니다.
더구나 해와 달을 멈추게 하여 완전한 승리를 이루도록 낮을 길게 연장시켜 원수를 갚게하셨다는 사건이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기브온을 공격하겠다고 구성된 아모리 연합군 덕에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은 오히려 탄력을 받게 되었으며 전쟁에서 승리한 여호수아와 그의 백성들은 다시 길갈 진영으로 돌아왔습니다.
'야살의 책' 88장에서 여호수아 장군이 아모리 다섯왕과 싸워 승리한 것과 태양과 달이 멈추었다는 것을 소개합니다.
물론 이것은 성경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참조할 수 있지만 성경의 권위를 능가할 수 없습니다.
기브온 거민들이 거짓 위장으로 이스라엘과 약조를 맺었으나 그 약조 때문에 기브온 거민들은 성전에서 물긷고 나무를 패는 종으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죄로부터 자유함을 받았으므로 죄악된 삶에서 벗어나 참 자유를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에 따라 날마다 진정한 자유를 주 안에서 즐기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 찬양 / 예수 더 알기 원하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성경에서 해가 멈추었다는 사건이 여호수아서와 열왕기하 그리고 이사야서에 소개되었습니다.
열왕기하 20:11 선지자 이사야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아하스의 일영표 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로 십도를 물러가게 하셨더라.
이사야 38:8 보라 아하스의 일영표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뒤로 십도를 물러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더니 이에 일영표에 나아갔던 해의 그림자가 십도를 물러가니라.
여호수아 10:12-13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붙이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고하되 이스라엘 목전에서 가로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골짜기에 그리할찌어다 하매.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치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도록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기를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 하지 아니하였느냐.
여호수아 10:13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치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도록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기를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 하지 아니하였느냐. 아멘
기브온 사람들의 구조 요청 여호수아 10:6-7
속히 우리에게 올라와서 우리를 구조하소서.
* 조약(條約) / 나라와 나라 사이에 맺은 법적 구속력을 가지는 약속
전쟁에서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
여리고 성(6:2)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아이성(8:1) 보라 내가 아이 왕과 그 백성과 그 성읍과 그 땅을 다 네 손에 주었노니.
아모리 다섯 왕(10:8) 그들을 두려워 말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그들의 한 사람도 너를 당할 자 없으리라.
협력(協力) Cooperation - 힘을 합하여 돕는 것
* 동맹(同盟) / 두 나라 혹은 수개국이 방위 또는 공격을 하기 위하여 조약에 따른 공동 행동을 맹약하는 국제 협정
아모리 다섯 왕의 동맹(10:3-5) 이스라엘과 기브온의 동맹(10:6-7)
여호수아 10:13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치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도록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기를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 하지 아니하였느냐.
여호수아 10:11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하여 벧호론의 비탈에서 내려갈 때에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큰 덩이 우박을 아세가에 이르기까지 내리우시매 그들이 죽었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에 죽은 자가 더욱 많았더라.
여호수아가 아모리 사람들과 전쟁 할 때 태양이 머물고 달이 멈추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기까지
하였다(여호수아 10:13).
이 사건은 과학적으로 태양이 멈추었던 시간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를 찾기 이전에 자연적 현상이
아닌 초월적 사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봅니다. 즉 이 사건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내재의 세상에 직접 개입하신 사건으로 과학적
증거를 필요로 하는 사건이 아닌 초월(믿음)의 영역에 속한 사건인 것입니다.
태양이 기브온 위에 머물고
달이 아얄론 골짜기에 그치므로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않았다는 이 기적(수 10: 12-13)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에 들어가기 까지 일어났던 초월적 사건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여러 기적 사건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즉 모세가 애굽 술사들과 정면 대결한 열 가지 재앙 사건부터 시작하여 가나안 입성 직후
나타난 모든 일련의 사건들은 단순한 사건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주관하시는 전지전능하신 보여주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가 작용한 초월적(초자연적) 역사라고 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이 같은 사건이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다고 묘사합니다(수
10:14).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
과학적 검증의 시도
이 사건을 과학적 설명이나
자연현상으로 해석해보려는 여러 시도가 있기는 합니다. NASA의 컴퓨터가 여호수아 사건의 빠진 시간을 계산해냈다는 주장도 있었고
일식, 태양광선의 굴절, 구름이 태양을 덮은 일 등으로 이 초월적 사건을 해석해 보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유명한 창조론자인 해리
림머(Harry Rimmer) 목사는 하버드 연구소의 피커링(Pickering)이 여호수아 시대의 빠진 하루를 찾아냈다거나,
예일대학의 토튼(Charles Totten, <여호수아의 긴 하루>, 1890)도 그런 결론을 내렸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Bernard Ramm, The Christian View of Science and Scripture,
Eerdmans, 1954, 159).
하지만 이 문제가 불거지자 NASA는 그런 계산을 한 적이 결코 없다고 공식 발표합니다.
1997년 3월 25일, NASA의 고다드
우주비행센터(http://imagine.gsfc.nasa.gov/docs/ask_astro/answers/970325g.html)는
홈 페이지를 통해 공식적으로 '그런 일이 없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특정한 때의 시간'이 비었다는 것을
계산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즉 이를 계산하려면 시간의 정확한 출발점이 확인되어야 하고 출발 시간부터 지금까지 하루의
시간은 24시간으로 동일해야 한다는 가정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사건이 일어난 때가 정확히 몇 년, 몇 월, 며칠, 몇
시였는지를 알아야 겠지요.
따라서 이 사건은 자연 법칙으로 설명하려는 무리한 집착보다 자연 법칙의 창조주요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간섭하신 초자연적 사건으로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즉 이 사건을 바라보는 것은 자연에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적 역사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해 그림자가 뒤로 물러난 기적
남왕국
유다의 히스기야 왕 당시에도 이와 유사한 사건이 있었지요.
열왕기하 20장에 보면 히스기야가 이사야 선지자에게 내 병이 치유되고
삼일 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게 하실 징조는 무엇이냐고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에 대해 이사야는 해 그림자가 십도 나아가게 할
것인지 십도 물러가게 할 것인지 히스기야에게 직접 선택의 자유를 줍니다. 히스기야는 그림자가 십도 나아가기는 쉬우니 뒤로 십도
물러가도록 표적을 달라고 말합니다. 이사야는 히스기야가 표적으로 구한 대로 하나님께 간구하니 하나님은 아하스의 일영표(日影表)
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십도 물러가게 하였습니다(왕하 20:11).
이 일영표는 바벨론에서 만들어 졌는데 아하스가 다메섹에
있는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을 방문했을 때 거기 있는 단(壇)을 보고 그 모든 모형을 본떠 올 때 가져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보다 고대 왕국 시대때에도 인류는 대단히 다양한 과학적 기구들을 사용해 왔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과학
기술시대인 오늘날뿐 아니라 고대 이스라엘 왕국의 지식인들에게도 해 그림자가 규칙을 벗어난다는 것은 대단히 충격적인 사건이었을
겁니다.
결국 이 사건도 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과학적 설명을 구하려는 무리한 시도보다 하나님의 간섭 가운데 일어난 초월적 역사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봅니다.
해와 달이 (과학적으로 입증 가능하게) 멈추었다고 믿어야만 창조를 믿는 신앙인이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나는
성경은 과학교과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상을 사는 시선으로, 알상적인 표현을 입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천지와 모든 만물, 사람을 창조하셨음을 믿고, 성경이 그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음을 믿는다.
오래 전에 들었던, 도전을 받았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어떤 분들이 전 세계의 모든 역사를 수퍼 컴퓨터에 넣었더니 역사에서 하루치의 기록이 없음을 확인했다. 그런데, 그 사라진 하루의 증거를 성경에서 찾았다.
그 중 하나가 히스기야 왕 때에 시간이 뒤로 되돌아 갔던 것과 여호수아 시대에 해가 멈췄던 것을 합치니 딱 하루였다'는 것이다.
그 분들이 언급한 그 증거 본문은 아래와 같았다.
열왕기하 20:8-11 선지자 이사야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아하스의 일영표 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로 십도를 물러가게 하셨더라.
여호수아 10:12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넘겨 주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아뢰어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이르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서 그리할지어다 하매.
이집트에
머물던 90년대 초 이후, 종종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지역을 방문할 수 있었다. 방문했던 곳 중에는 여호수아의 기록에 등장하는
기브온 지역이 있다. 20여년 전 봄에 이곳을 찾았을 때, 기브온 언덕 위에 해가, 아얄론 골짜기(서쪽)에 달이 떠있는 장면을
보았다. 그랬다. 성경 사건이 어렵지 않게 눈에 들어왔다. 어려운 해석이 필요없었다.
달은
밤에 뜨는 것만이 아니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달이 뜨는 위치는 움직인다. 초승달에서 상현달, 보름달 그리고 하현달, 그믐달로
서에서 동으로 달이 뜨는 지점이 변한다. 상현달로 변하는 직후부터는 대낮에 달이 떠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여호수아
때의 기브온에서의 전쟁 사건 시기는 봄에서 여름 사이로 보인다. 이 시기에 어느 달인지 정확하지 않지만 그 봄날의 달이 뜨는
시각이 12:00, 1:00, 2:00, 3:00, 4:00, 5:00, 6:00, 7:00 였을 것이고, 한 낮에 아얄론 골짜기 위에 떠있는 날이 있었을 것이다.
(* 한국과 이스라엘 예루살렘 지역의 월출, 월몰 관련 내용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성경은 일상을 사는 이의 시선으로 성경 속 사건을 느끼도록, 분석이 아닌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성경은 나와 우리를 독자로, 일상을 사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일상'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다.
* 김동문 선교사께서 'sun-stop'에
대한 나사 증명이 옳지 않다는 것을 제시했습니다. 대학에 다닐 때..90년대.. 그러한 소리를 들을 때 과연 그렇구나.. 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창조와 과학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창조를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고,
과학으로(계산) 성경의 정당성을 제시하려는 자세에 회의를 가졌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해보니... 시간이 비는 것을 계산했다는 것은
전체 시간을 알아야 평가할 수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즉 나사가 그 빈 시간을 알려면 처음 시작점을 명확하게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의 처음점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태양이 멈춘 사건을 후대에 어떤 방식으로 계산, 추론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기준점(시작과 현재) 중에 한 점만 정확하지 않아도 중간점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나사가
태양이 멈춘 사건을 계산했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사가 계산했기 때문에 여호수아의 태양멈춤 사건이 사실이라는 논증방식은
계시보다 과학을 우선하는 부당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은 오직 계시로만 가능하지, 과학이나 합리로 확립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 10:12-14을 김동문 선교사께서는 태양과 달이 함께 떠 있는 자연환경으로 제시했다. 필자는 태양멈춤 사건이 아닌
자연현상에 대한 표현으로 제시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여호수아의 태양멈춤 기도에 대해서 태양이 멈추었다고 단순하게 이해했던
방식에서, 태양멈춤이 멈췄다는 것에 대한 고려가 없는 것이다.
태양이 멈추었을까? 나는 여호수아 10:14(이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를 근거로 태양이 멈추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고경태)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수아 10:12~14
태양이 머물고, 길어진 날을 말하고 있는데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여호수아서에는
많은 기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기브온 전투에서 날의 길이를 연장한 것만큼 주목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지구의 회전이 멈추게 된 것이고 천체의 모든 운행이 정지되었다는 것이므로 이것은 천지가 개벽되는 것 보다 더 어려운 일인
것입니다.
당시 태양과 달이 머물렀다는 것은 4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시적 표현
이것이 사실이 아닌 느낌이나 시적 표현 이었다면 당시 우박의 기적도 시적 표현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 일광 시간의 연장
실제 사건이라기 보다는 일광시간을 길게 연장 시키셨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일광 시간이 여름과 겨울이 다른 것처럼 하나님께서 일광시간을 조정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무시한 합리적 해석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 문법적 이해
여호수아는 긴 날을 하나님께 구한 것이 아니고 낮시간에 비취는 뜨거운 열로부터 구해 줄 것을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dom'이라는 동사는 머물다, 조용하다, 쉬다, 그치다로 번역되는데 작열하는 태양볕 아래서는 전투를 할 수 없으니 태양볕을
멈춰달라고 기도하므로 우박을 내려 주시고 반나절 동안에 힘을 얻어 온종일 할 수 있는 만큼의 효과를 낼 수 있었다는 해석입니다.
넷째, 지연시킨 것
13절 말씀에 의하면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속히 내려가지 않았다는
것은 해가 움직이는 것을 지연한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정상 궤도를 찾기 위해서는 24시간보다 48시간 후 자전이 시작된
것을 말한 것입니다.
Harry Rimmer에 의하면 완전한 하루가 천문학적 계산에서 사라져 버렸다고 합니다.
Rimmer는 하버드 관측소에서 이것이 여호수아 때의 것으로 추정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일의 Totten도 같은 주장을
했습니다(Bernard Ramm, The Christian View of Science and Scripture, Grand
Rapids : Eerdmanns, 1954, p.159).
이 사건이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위대하시다는
사실을 말씀한 것입니다. 태양도 달도 머물게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또한 여호수아 같은 담대한 신앙을 배워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적은 하나님이 베푸시지만 여호수아도 자기 책임을 다하는 신실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여호수아 9:1∼27 ♦ 묵상을 위한 주제 : 기브온 거민(3절) ♦ 성구 : 기브온 거민(居民)들이 여호수아와 여리고와 아이에 행(行)한 일을 듣고.
“기브온 거민(the people of Gibeon)”이란 히위 족속의 성읍에 거주하는 백성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소문을 듣고 두려워서 꾀를 내어 마치 먼 거리에서부터 찾아온 것처럼 헤어진 전대와 찢어지고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싣고 곰팡이 난 떡을 예비한 후 낡은 옷과 신발을 신고 여호수아를 찾아와서 약조를 맺으려 합니다.
여호수아는 성급하게 기브온 사신들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 결과 삼일이 지난 후에 그들이 가까운 곳에 거주하는 진멸의 대상이 되는 히위 사람에게 속한 기브온 사람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성급한 결정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경험해보셨는지요?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진멸 당하는 것 보다는 차라리 이스라엘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것을 선택한 기브온백성들은 제단을 위해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일을 맡았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살 길, 생명의 길, 구원의 길을 찾으려고 위장전술을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기브온이 이스라엘 공동체 안으로 들어온 이후부터 먼 훗날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여 예루살렘을 복구하는 일에 협력하기까지 변심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과 화친한 이유가 단지 생명을 지키려는 의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픔에 안기려는 것이었습니다.
모압 여인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르려고 "어머니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며, 어머님의 백성은 나의 백성입니다"라는 고백 까닭에 메시아 가문에 그 이름을 올린 것처럼 오늘날도 저희들의 이름이 하나님 나라 생명책에 기록되는 일에 꾸밈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기브온 사람들 이스라엘 공동체에 들어온 이후에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이스라엘과 하나님 편에 섰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있는 그 자리가 나의 신앙과 나의 삶이 만나는 현장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드러내야할 것입니다.
나의 믿음 까닭에 누군가에게 복음의 소식이 들려질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하며 기도합시다.
오, 주님 반복하는 일상의 자리에 새롭게 역사하는 생명을 구하는 주님의 솜씨를 새기며 빈 영혼을 생명의 말씀으로 채우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 찬양 /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여호수아 9:3
기브온 거민들이 여호수아의 여리고와 아이에 행한 일을 듣고. 아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수아 11:19 / 기브온 거민(Gibeon) 히위 사람
가나안 족속 진멸법(신명기 7: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있는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반응(反應) Reaction - 자극에 대응하여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 일 또는 그 현상
일곱 족속의 반응 / 여호수아 9:2 모여서 일심으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로 더불어 싸우려 하더라.
기브온의 반응 / 여호수아 9:3-6
기브온 거민들이 여호수아의 여리고와 아이에 행한 일을 듣고. 꾀를 내어 사신의 모양을 꾸미되 해어진 전대와 해어지고 찢어져서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싣고. 그 발에는 낡아 기운 신을 신고 낡은 옷을 입고 다 마르고 곰팡이 난 떡을 예비하고. 그들이 길갈 진으로 와서 여호수아에게 이르러 그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르되 우리는 원방에서 왔나이다 이제 우리와 약조하사이다.
기생 라합의 반응 / 여호수아 2:12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
18절 /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내리운 창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비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가나안 연합군의 반응 : 전쟁
기브온 사람의 반응 : 위장 평화
라합의 반응 : 믿음으로
믿음의 반응
인생의 성패를 결정하는 10%는 실제 일어난 사건과 관련이 있고 90%는 그것에 대한 우리의 반응에 달려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브라함 : 순종 롯 : 선택 베드로 : 회개 도마 : 의심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히브리서 10:38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오늘의 기도
믿음의 방법만을 따라가게 하옵소서!
낙타 나누기
아버지가 임종 전 세 아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내가 17마리의 낙타를 물려줄 터이니 맏이는 절반을 갖고 둘째는 1/3을 갖고 막내는 1/9을 갖거라." 삼형제는 심히 난감한 상황에 처했는데 17은 2로 나누어 떨어지지 않고 3이나 9로 나누어 떨어지지도 않는다. 애초에 1과 자신만으로만 나누어 떨어지는 소수이기 때문에 유언에 따라 낙타를 나눈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렇게 며칠 밤낮을 고민하던 차에 지혜 있는 사람이 그들을 찾아와 해법을 알려 준 덕분에 삼형제는 아버지의 유언대로 낙타를 잘 나눠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현자의 방법은 17마리의 낙타에 한 마리를 더하여 18마리로 만들었다. 그리고 첫째 아들에게는 18마리의 절반 9마리를 주었다. 둘째 아들에게는 18마리의 삼분의 일 6마리를 주었다. 셋째 아들에게는 18마리의 구분의 일 2마리를 주었다. 그런데 한 마리가 남았다. 왜냐하면 큰 아들의 몫은 8.5마리, 둘째 아들의 몫은 5.6마리, 셋째 아들의 몫은 1.5마리이었으나 원래 받아야 할 유산 보다 더 많이 받았으므로 아무런 불평이 없었다. 아들들은 더 많이 받고도 한 마리가 남았다는 것이 신기하였다.
터키 지방에서 현자를 "나스레딘" 이라고 합니다.
기생 라합의 지혜와 믿음을 생각해 봅니다.
11월 11일(목) 단창(여호수아 8:18)
♦ 11월 11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여호수아 8:1∼35 ♦ 묵상을 위한 주제 : 단창(18절) ♦ 성구 :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잡은 단창(短槍)을 들어 아이를 가리키라 내가 이 성읍(城邑)을 네 손에 주리라 여호수아가 그 손에 잡은 단창(短槍)을 들어 성읍(城邑)을 가리키니.
“단창(短槍, the Javelin)”이란 전쟁 무기로 사용하는 ‘긴 창’과 대조되는 ‘짧은 창’으로 대개는 호신용이었다고 합니다(수 8:18).
아이 성을 공격할 때 여호수아는 단창을 들어 아이 성을 가리켰는데 그것은 단창의 끝 부분을 햇빛에 반사시켜 멀리 떨어져 있는 군사들에게 신호를 보내려는 것입니다(수 8:18). 그리고 그는 싸움이 끝날 때까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신다는 표시로 단창을 든 손을 내리지 않았습니다(수 8:26).
모세가 홍해를 건널 때 그의 손에는 “지팡이”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지팡이’를 들어 홍해를 가리키라고 하셨습니다(출 14:16).
하나님은 지금 내 손에 있는 것을 사용하려고 합니다. 나는 내 손에 무엇을 잡고 있습니까? 그것을 나를 위한 개인의 행복과 만족과 기쁨을 위한 이기적인 목적으로 사용하지 말고 더 많은 이웃들을 위하여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아이 성’에 3천명의 군사를 파송하였다가 크게 낭패했던 여호수아는 군사 3만 명을 뽑아 매복하라고 합니다.
첫 번 실패에서 여호수아는 구체적인 전략을 수립합니다. 이것은 지도자(리더)의 역량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바뀐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과 방법을 바꾸게 하십니다. 생각과 방법을 바꾸려면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을 위한 기본원칙을 소개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뜻에 맞는가? 하나님의 뜻에 맞는다는 것은 내 안에는 기쁨이 되고 주님께는 영광이 됩니다.
둘째, 공동체(이웃, 지체)에게 유익이 되는가? 나의 결정이 다른 그리스도인에게 도움이 되며 또한 불신자들에게도 유익이 되는 가를 살펴야 합니다.
셋째, 믿음으로 행했는가? 믿음으로 행한다는 것은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때로는 환경이 따라주지 못하고 어렵게 돌아갈지라도 세 가지 원칙에 따라 선택하고 결정했다면 믿음으로 인내해야 합니다.
아이 성과 같은 실패를 거울삼아 새롭게 도전하며 더 큰 기쁨과 소망의 길을 개척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여리고와 아이 성 전투의 차이(여호수아 8:1~17)
인생을 살다보면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내 뜻대로 살아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흔히 성공 가도를 계속해서 달려온 사람들은 이럴 때 견디기 어려워합니다. 그러나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입니다. 실패를 딛고 일어서는 사람이 진정한 성공을 이룬 사람입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육지처럼 건넜습니다. 그리고 여리고를 믿음의 방법으로 무너트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생각지도 못한 아이 성 전투에서 좌절을 맛보고 말았습니다. 너무 쉬워 보였습니다. 그래서 편안한 마음으로 전투에 임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36명의 젊은이가 전사했습니다. 패배해서 쫓기는 부끄러움을 당했습니다. 여호수아와 백성들은 그만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 길은 걷다가 포기할 수 없는 길입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걸어가야 하는 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고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전투하는 교회를 실패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것은 죄였습니다. 탐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교회가 성결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교회와 함께하시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바친 물건을 욕심내어 취하는 죄가 공동체에서 근절되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여호수아와 백성들은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죄의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아간을 찾아 아골 골짜기에서 그의 가족들과 함께 단죄해야 했습니다. 그런 후에 아직도 가야 할 길이 그들에게 남아 있었습니다. 아이 성은 아직도 그들 앞에 버티고 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반드시 아이 성을 정복해야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전투하는 교회가 직면한 두 번째 위기인 아이 성을 어떻게 극복해 가는지를 통해서 우리가 살아내야 할 현실에서 어떻게 우리의 장벽을 극복할 수 있을지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라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전투하는 교회에 던지는 첫 번째 화두가 오늘 본문 1~2절에 나옵니다. 7장에서 우리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늘 하던 대로 정탐을 보냈습니다. 정탐꾼들의 보고는 아이 성은 작고 쉽게 정복할 수 있으니 이, 삼천 명만 보내면 될 것이라고 진단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삼천 명을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처절한 참패로 나타났습니다. 사실 아간의 범죄 때문이라는 표면적인 이유가 밝혀졌기에 이 사실은 그대로 묻혔습니다.
그런데요? 오늘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작전 지시를 보십시오.
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군사를 다 거느리고 일어나 아이로 올라가라. 보라 내가 아이 왕과 그의 백성과 그의 성읍과 그의 땅을 다 네 손에 넘겨주었으니”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이 성 전투의 패배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두려움을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실패는 늘 우리에게서 용기를 빼앗아 갑니다. 다시 또 실패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를 삼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정탐꾼이 본 것과는 정반대로 이야기하십니다. 하찮아 보이는 아이 성이지만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삼천 명의 군사가 아닌 모든 군사가 올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전투하는 교회에 주는 첫 번째 교훈은 아무리 사소한 일처럼 보이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경험치로 쉽게 생각하고 전투에 임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작아 보이는 아이 성이라고 쉽게 생각하고 기도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지 않을 때 처절한 패배를 맛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두 번째 아이 성 전투의 전략을 가르쳐 주시면서 모두가 다 올라가라고 하십니다. 즉 최선을 다해 전투에 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적을 쉽게 보는 잘못을 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이 성처럼 쉬워 보이는 전투에 왕왕 실패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내가 이것밖에 되지 않는가 하는 자괴감에 빠집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천성을 향해 가는 길에 우리가 만나는 대적들 가운데 쉽게, 만만히 상대할 대적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전력을 다 동원해서 나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이것을 자주 잊고 사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땅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최선을 다했어도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고 하나님이 승리를 주시지 않으면 절대로 승리할 수 없습니다.
건강은 최선을 다해 관리해야 합니다. 매일 매일 정성을 들여 운동해야 합니다. 게으르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많습니다. 몸이 천근만근 무거울 때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이기고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건강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으면 하룻밤 사이에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재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일해야 합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부지런해야 합니다. 좋은 항목을 개발하고 판촉 활동을 하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재물은 하나님이 주셔야 합니다. 노력만 한다고 다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의 핵심은 최선을 다하되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1절 후반부를 보십시오. 내가 아이 왕과 그의 백성과 그의 성읍과 그의 땅을 다 네 손에 넘겨주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넘겨주셔야 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세상 역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함께하실 수 있는 거룩한 공동체가 되는 것은 너무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하실 수 있는 거룩한 공동체가 되는 것은 더욱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요? 2절 말씀을 보면 아간의 탐욕이 더욱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하나님은 아이와 그 왕에게 여리고 왕에게 행한 것처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후에 거기서 탈취한 물건과 가축은 스스로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드릴 때가 있고 가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온전히 바친 물건을 욕심낸 아간은 그것을 한 번도 입어보지도 못하고 써 보지도 못하고 자신과 가족이 비참한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처음 전투에 하나님은 여리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드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처음 전투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든 노획물을 다 온전히 바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 성 전투에서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얻는 노획물들은 스스로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때와 가질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가지라고 할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욕심을 낼 때 우리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략과 전술을 사용하라.
여리고 정복의 핵심은 이 전쟁이 믿음의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전략과 전술의 전쟁이 아니라 가나안 정복의 첫걸음은 믿음으로 하는 전쟁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힘이 아닌 믿음으로 여리고를 정복했습니다. 그런데 아이 성 전투는 여리고와는 아예 양상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2절에 하나님은 아이 성 뒤에 복병을 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대한 여호수아의 전략과 전술에 대한 설명이 3절부터 나옵니다. 이렇게 최선을 다해야 할 싸움을 삼천 명이 올라갔다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모릅니다.
아이 성 전투를 위한 매복조는 두 개의 팀으로 나누었습니다. 성읍 뒤편에 매복한 군사는 삼만 명입니다. 그리고 12~13절에는 성읍 서쪽 벧엘과 아이 사이에 매복했습니다. 이 매복 팀은 벧엘과 아이가 연합 작전을 펼치지 못하도록 배치한 군대입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벧엘과 아이가 가까운 거리여서 항상 공조 방어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이 성이 공격당하면 반드시 벧엘에서 원군이 올 것을 예측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와 함께한 본진이 있었습니다.
전략은 이런 것입니다. 이미 한 번 승리의 경험을 맛본 아이 성은 한껏 고양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의 본진이 이들을 공격하려고 하다가 도망치면 앞의 경험이 있어 성문을 열고 추격해 올 것이라는 추측입니다. 그때 매복해 있던 삼만의 군사가 아이 성을 점령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벧엘 성에서 공조하지 못하도록 병력을 차단하고 말입니다. 아이 성과 벧엘 성은 3.2km의 거리에 있었습니다.
길갈에서 아이 성까지는 24Km나 됩니다. 그러므로 다음 날 전투를 위해서 야간행군을 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밤새 매복조와 본진을 배치하고 날이 밝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얼마나 치열하게 전쟁에 임하고 있는 것입니까? 여리고와는 아예 궤적을 달리하는 전쟁입니다.
2절에 하나님은 분명히 아이 성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방법은 여리고와 완전히 다릅니다. 여리고는 믿음으로 하는 전쟁이었다면 아이 성은 최선을 다해 싸워야 하는 백병전이었습니다. 적당히 싸워서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싸우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24km의 행군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시겠다고 했지만, 복병을 배치하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아이 성은 저절로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한 전략과 전술을 모두 사용해서 치열하게 싸워서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리고처럼 믿음으로 싸워야 하는 전쟁이 있고, 아이 성처럼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 전쟁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영적 전쟁의 현장은 늘 치열합니다. 그것이 여리고처럼 침묵의 전쟁이든 아이 성처럼 치열한 전쟁이든 말입니다. 그러나 이 두 전쟁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준비된 사람만이 승리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절로 얻어지는 승리는 없다는 것입니다. 여리고가 믿음과 인내라는 무기를 사용했다면 아이 성은 전술과 전략을 무기로 사용한 것입니다.
어떤 때 어떤 전략을 사용할 것인가는 우리의 선택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어떤 방법을 택하든 믿음이 있어야 하고 오래 참아야 하며 불굴의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가끔 믿음으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아무 노력도 전술과 전략도 필요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기도만 하면 만사형통이라는 기막힌 믿음도 만납니다. 그러나 아이 성은 그렇게 정복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움직여야 합니다. 노력해야 합니다. 싸워야 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가야 하는 광야의 여정에 매번 같은 방법으로 싸울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모든 경우에 여리고의 방법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창의적이고 적극적인 전략과 전술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믿음으로 요단강에 발을 디뎌야 합니다. 때로는 매복하고 유인하고 정복해야 합니다. 한 가지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비둘기같이 순결하되 뱀처럼 지혜로워야 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천성을 향해 가는 길에도 여리고가 존재하고 아이 성이 존재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기도할 때와 행동할 때, 지혜로울 때와 믿음으로 나아갈 때를 잘 분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때로는 저돌적으로 나아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가만히 앉아 깊이 성찰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것을 옳게 분별하는 지혜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실패를 거울삼아
19세기의 영국의 유명한 설교자 로버트슨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실수를 가장 적게 하는 리더가 가장 훌륭한 리더인 것은 아니다. 가장 훌륭한 리더는 자신이 저지른 실수들을 발판삼아 가장 눈부신 승리를 거둔 리더다. 그러므로 이미 저지른 실수들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승리를 위한 궁리를 하라.”
아이 성 전투에서의 실패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약이 되었습니다. 실패의 경험이 없는 사람은 작은 실패에도 크게 낙담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실패를 딛고 일어 설줄 아는 사람은 거듭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좌절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영원한 천국을 향해 여행할 때 우리는 이런저런 상황들에 직면합니다. 인간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부부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함께 공동체를 이뤄갈 때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어려움과 실패나 좌절은 과정입니다. 훈련입니다. 잘 견디고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아이 성 전투는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할 때 이렇게 싸워야 할 때도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전략과 전술을 다 사용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가만히 앉아 열매만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걸고 싸워야 합니다. 때로는 모험도 필요합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매슬로우는 “망치를 잡으면 모든 문제가 못으로 보인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를 망치 증후군이라고 부릅니다. 사람은 모든 문제를 자기중심적으로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를 알고 대책을 찾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자기 중심성, 혹은 자신의 전문성이라는 울타리에 갇히지 않도록 마음을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11월 10일(수) 아간(여호수아 7:18)
♦ 11월 10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여호수아 7:1∼26 ♦ 묵상을 위한 주제 : 아간(18절) ♦ 성구 : 삽디의 가족(家族) 각(各) 남자(男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支派) 세라의 증손(曾孫)이요 삽디의 손자(孫子)요 갈미의 아들인 아간이 뽑혔더라.
“아간(Achan)”이란 이름은 “곤란(困難, difficulty)”이란 뜻입니다. 이름을 왜 곤란하다는 의미로 불렀을까요?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영역이나 하나님의 것으로 성별된 것을 침해하는 것을 경계합니다. 이것을 신성불가침(神聖不可侵)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다른 사람의 재산을 범하면 벌을 받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재산을 침해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지성소에 대제사장 말고 다른 사람이 들어가면 죽습니다. 하나님의 신성한 영역을 범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과 십일조 등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도나 형식은 달라졌지만 근본정신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은혜시대이므로 율법시대처럼 하나님이 즉시 심판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영역을 침해하는 것은 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역을 존중하며 살아야 합니다.
여리고 성은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은 철옹성(鐵甕城)이었지만 여리고 작전에 의해서 쉽게 함락되었습니다. 가나안 정복의 교두보를 마련한 것입니다.
여리고 성 정복에 앞서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두 가지를 당부했습니다.
첫째는 성의 모든 물건은 여호와께 바치라(수 6:17) 둘째는 기생 라합과 그의 가족은 살려주라(수 6:17)
여리고 성을 점령한 후에 두 번째 “아이 성”을 공격하려고 합니다. ‘아이 성’은 여리고 성 보다 규모가 작기 때문에 대략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공격합니다. 그런데 ‘아이 성’을 공격하던 중 36명이 죽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마음이 물 같이 녹았다고 합니다.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앞서서 싸우실 것이라 하셨는데 왜 이렇게 비참하게 참패하여 백성들을 낙심케 하셨습니까?
패배의 원인을 찾으려고 제비뽑기를 합니다.
유다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뽑혔습니다. 아간은 하나님께 바쳐야 할 물건 중에서 “시날 산 외투 한 벌, 은 200세겔, 금 50세겔”을 탐내어 장막에 감추었습니다.
아간의 죄 때문에 이스라엘 진영은 큰 패배를 경험했습니다. 오늘날도 아간과 같은 사람의 죄 때문에 실패를 경험할 것입니다. 아간은 누구일까요? 아간을 내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외투와 은과 금 때문에 가족의 생명을 잃어버렸던 것처럼 오늘날도 보이는 것 때문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일이 있었다면 그 죄를 자복해야 할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이 명령하신대로 아간과 그 가족 그리고 짐승, 숨긴 물건을 다 가지고 아골 골짜기로 가서 다 돌로 쳐 죽이고 물건도 불에 태워버렸습니다.
그 유명한 아골 골짜기가 형성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새 출발을 하는 시작이었기에 아간의 경우는 시범 케이스에 걸린 것입니다.
아간과 같은 죄를 해결하지 못하면 실망과 좌절과 패배는 계속될 것입니다. 오늘은 아간과 같은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 앞에 내려놓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붙잡아야 하겠습니다.
여호수아 7:18 삽디의 가족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이요 삽디의 손자요 갈미의 아들인 아간이 뽑혔더라. 아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삽디(여호와의 선물), 유다(찬송), 세라(바위), 갈미(포도원), 아간(곤란)
여호수아 7:1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친 물건을 인하여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바친 물건을 취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바친 물건(헤렘. chêrem) חֵרֶם 드림, 바친 것, 진멸당할 것
여호수아 6:17 이 성과 그 가운데 모든 물건은 여호와께 바치되 기생 라합과 무릇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살리라 이는 그가 우리의 보낸 사자를 숨겼음이니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리고 성은 가나안 땅의 첫 열매 바치되 ↔ 살리라
실패의 원인 / 여호와의 진노(1절)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친 물건을 인하여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바친 물건을 취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공동체 신앙의 붕괴
실패의 원인 / 사람의 소리(3절) 백성을 다 올라가게 말고 이삼천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마소서.
4-5절 / 백성중 삼천명쯤 그리로 올라갔다가… 그들의 삼십 륙인쯤 죽이고…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 같이 된지라.
갈라디아서 3: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오늘의 기도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하여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자!
여호수아서는 신명기적 가르침에 의해
기록된 책
신명기의 중요한 가르침은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심판을 받는다는 인과응보의 교리이다.
신명기 28장에
상세하게 기록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으며,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다.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고 들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하는 일마다 저주를 받는다. 그러한
가르침대로 구현된 삶의 증언이 여호수아기에 잘 나타나 있다.
여리고 성은 크고 견고한 성읍이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공격하여 함락시키려면 무척 많은 힘과 시간이 요구됐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떤 전술 전략을 가르쳐주거나 군사력을 강화시키지 않고, 다만 성읍 주위를 7일 동안 돌라는 약간 기이한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성적으로는 잘 납득이 가지 않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하루에 한번씩 성읍을 돌고, 7일째
날에는 일곱 번을 돌았다. 그리고 마지막을 돌면서 나팔을 불며 외치자 성벽이 무너져 내리는 기적이 일어나 여리고 성을 정복하게
됐다.
이스라엘은 아이 성의 정복을 가볍게 여기고,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인지 알아보지 않았다. 그래서 여리고 성을 정복할 때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은금과 시날산 외투를 훔친 아간의 죄도 파악하지 못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이 성의 공격에
실패하고 말았다. 불순종으로 인해 패배와 죽음을 겪게 된 것이다. 패전한 후에야 비로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 겸비하게 그 뜻을 구했다. 결국 아간의 죄를 알게 되었고 그를 처벌해 불순종의 악을 백성들 가운데 제거하였다. 이처럼 아이
성을 정복하게 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회개하고 순종한 결과임을 보여준다.
여호수아기의
가르침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크고 강한 성읍일지라도 쉽게 정복할 수 있지만, 불순종하면 작고 보잘 것
없는 아이 성도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여호수아서의 저자는 마치 산과 골짜기가 뚜렷한 산수화를 그리는 것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정복기사 중에서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을 선명하게 대조시켜 순종과 불순종의 교훈을 분명히 알게 했다. 그후에
예루살렘 연합군과의 전쟁에서도 순종하고 부르짖는 여호수아 군대에게 해와 달이 멈추는 기적이 일어나 승리한 사실을 기록했다.
이와
같이 여호수아기를 비롯한 사사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의 역사서들은 단순히 사건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 사건들을 통하여
순종을 배우고 믿음을 얻게 하기 위해 기록됐다.
성경 기자들은 그러한 가르침이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특정한 사건들을
강조했다. 나아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깨달을 수 있도록 역사적 자료들을 적절하게 선택하고 배열했다. 그래서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의
정복 이야기는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고 잘 알려지게 되었지만, 다른 수십 개 성읍의 정복 이야기는 잘 기록되지도 않고 알려지지도
않게 되었다. 이로써 여호수아서를 읽는 사람들이 순종의 축복과 불순종의 심판을 확실하게 기억하고 마음에 새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정탐군의 보고(여호수아 7:3)
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서 그에게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마소서 하므로.
여리고를 무너뜨리고 난 다음에, 아이성을 정탐하고 온 이스라엘 정탐꾼의 견해입니다. 가나안에서 가장 강한 성 여리고와의 전쟁에서는 대승을 거두고, 작은 성 아이성과의 전쟁에서 패배를 하였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성경은 아이성이 패배한 이유가 유다지파에 속한 아간이 하나님의 물건을 탈취함으로 여화의 진노의 결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죄가 이스라엘 전체에 엄청난 재앙을 초래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아간의 죄 외에도 여호수아를 비롯한 이스라엘 전체 백성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간과한 엄청난 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착각
여리고의 승리가 자신의 힘으로 된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아이성 점령을 위해 다가지 말고 이삼천만 가자고 제안합니다. 이
성 인구가 12000명입니다(수 8:25). 만약 여리고성을 자신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대승을 거둔 사실을 안다면 결코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둘째, 기도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여리고의 승리로
인하여 승리에 도취된 이스라엘은 전쟁을 나가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하나님께 여쭈어 보았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아이성 점령을
하기 전에 그 어떠한 신앙적인 행위를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여러고성 점령과는 너무나 대조되는 모습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엄청난 착각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 마치 자신이 한 것으로 착각했다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자신도 할 수 있다고 착각 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치 여리고성을 자신들이 무너뜨린 줄 알고 여리고성을 아이성 점령을 위해
기도하지도 않고 하나님께 여쭈어 보지도 않고 기세등등하게 시도하다가 실패 한 것입니다.
만약
여리고성을 자신이 아닌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생각하였다면 절대로 위와 같은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스라엘 백성이 가진 하나님을 등에 업고 서 스스로 높은 곳에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이 마음이 어리석은 인간의 마음은 아닌지
생각하게 됩니다.
나는 오늘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으면서 혹시나 나의 힘으로 된 것처럼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혹시 하나님의 능력을 갈취하고, 마치 내가 한 것이라고 어깨를 으시대고 있지는 않은지 오늘도 저는 저의 삶에 존재하신 하나님의 흔적들을 찾아봅니다.
왜냐하면 어처구니 없이 아이성의 패배가 저의 삶에 찾아오지 않기 위해 어처구니 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자녀가 되지 않기 위해....
날마다 저희들의 참 모습과 위치 그리고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참으로 많은 전쟁을, 긴 기간동안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여리고성보다 더 큰 성이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이야기가 길게 그리고 자세하게 기록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실제로
여리고성과 아이성은 앞으로 이스라엘이 감당할 모든 전쟁의 원칙이 주어진 전쟁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크고 견고한 성일지라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이길 수 있다는 것이고, 그러나 아주 작은 성일지라도 불순종하며, 공동체에 죄가 있으면 철저히 패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개인의 신앙의 원리요, 공동체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어떤 문제가 있을지라도 거룩의
원리, 순종의 원리가 가운데 있으면 이길 수 있다, 극복할 수 있다, 감당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적인 조건이 다 갖추어져
있을지라도 불순종과 죄의 영향 하에 있으면 이길 것 같지만 지고, 감당할 것 같지만 주저앉고, 쉬운 것 같지만 엄청 어려운 길이 될
것이다.”
이 순종과 불순종의 단순한 원리를 새삼 마음에 새겨봅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모든 전투에서 승리하므로 승승장구했습니다. 요단 동편의 아모리왕 시혼과 옥을 물리치고 요단강을 기적으로
도하하고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을 기적적 역사로 정복했습니다. 그러나 아이성 전투에서 36명의 용사가 죽고 아이성 정복에 실패하게
됩니다. 여리고성에 비해 형편없이 작은 성임에도 불구하고 전투에서 참패하게 된 것은 아간이 범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리고성을 정복할 때 여리고성의 금 은 동 철 모든 기구는 개인이 취하지 말고 여호와의 곳간에 들이라고 했는데 아간이 욕심을 내어
취한 것입니다. 내용구조는 아이성 전투 패전 (1-5절), 여호수아의 문제 해결 (6-15절), 아간의 색출과 처형
(16-26절)로 되어 있습니다.
아이성 전투 패전(여호수아 7:1-5)
아이성은 이스라엘이 여리고성을 정복한 다음에 요단 서편에서 두번째로 맞는 성이었습니다. '아이'는 '황폐한 작은 산'이란
뜻으로서 벧엘 동쪽으로 2km, 여리고에서 서북쪽으로 18km 지점입니다. 인구는 12,000명 정도였습니다(8:25).
이스라엘이 한 명의 전사자도 없이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을 정복했습니다. 그런데 조그마한 아이성 전투에서 실패했습니다. 36명의
전사자가 나고 3,000명의 용사가 패주해 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물같이 녹았습니다(5절). 전에는 가나안 사람들의
마음이 녹았으나 이제는 이스라엘의 마음이 녹았습니다(5:1, 6:1). 그들은 아마 지금까지 도와 주시던 하나님의 힘이 갑자기
없어졌다는 데 대한 두려움이 더 컸을 것입니다. 아이성 전투의 실패 원인을 여러 가지로 들 수 있습니다.
첫째,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
여호수아의 경솔함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정복할 때는 하나님께 물었습니다(5:13-15). 전에 여리고성을 정복할 때는 하나님의 지시가 있었고(6:2-7), 뒤에
아이성 전투에서 승리한 때도 하나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8:1-2).
그런데 이번에는 여호수아가 묻지도 않았지만 하나님의 지시도
없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일을 결정하고 행동함에 있어서 먼저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그 뜻이 나타나기 전에는 결정하지
말고 더디더라도 행동을 미루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삼상17:47).
둘째, 아간의 범죄 때문
아간이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1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리고성을 정복할 때에 무릇 금은동철 모든 기구를
여호와의 곳간에 들이라고 했습니다. 만일 개인이 취하면 화를 당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6:18-19). 그런데 아간이 노략물
가운데 시날산 아름다운 외투 1벌과 은 200세겔과 금 50세겔을 보고 탐내어 취했습니다. 그것들을 자기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습니다(21절).
여리고성을 정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전쟁입니다. 하나님의 언약민에 대한 구원
계획을 이루기 위한 거룩한 전쟁입니다. 그러기에 모두 하나님의 목적을 생각하며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전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 공동체적 의식을 가져야 했습니다. 이 거룩한 하나님의 목적있는
역사에 인간의 개인적인 욕망이 들어오면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아간은 하나님 말씀을 어기고 물질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도적질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에 이기적인 탐욕을 전체를 실패하게 하는 누룩적인 요소입니다.
신약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행 5:1-10).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파되는
것이었습니다(행 1:8).
보혜사 성령으로 제자들을 통해 그 일을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순절에 기도하는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여 능력과 은사를 주었습니다. 제자들이 말씀을 전할 때 세력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세례를 받아 예루살렘교회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예배, 말씀, 기도, 성찬, 구제에 힘썼습니다. 그러던 중 바나바가 자기
밭을 팔아 사도 발 앞에 바쳤습니다. 그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권위자'라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이 현상은 순전히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순전한 성령의 역사로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바나바의 영광받는
모습을 보고 자신들도 영광을 얻기 위해 밭을 팔아 전부를 드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밭을 팔고 보니 욕심이 생겨 밭을 판 값
절반은 감추고 절반만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의 선언을 통해 그들을 죽게 했습니다. 그 결과를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마음을 가졌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심판당한 것은 거짓말한 죄라 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이기적인 욕심을 성령의 역사로
가장한 외식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의한 성령의 역사를 인본주의로 전락시킨 죄라 할 수 있습니다. 밭을 판
다음에 물질에 대한 욕심이 생겼지만 그 이전부터 칭찬받으려는 욕심(시기 질투심)이 생긴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도 욕심 때문에
범죄하여 죽게 되었습니다(창 3:6).
잠언 1:19 "무릇 이를 탐하는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
디모데전서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골로새서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셋째, 정탐꾼들위 자만 때문(2-3절)
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아이성의 사정을 알기 위해 정탐꾼들을 보냈습니다.
그들이 아이성을 정탐하고 여호수아에게 돌아와서 아이성은 수가 적으니 모든 백성을 보내어 수고롭게 할 것이 아니라 2~3,000명만
올라가 치게 하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그 말대로 3,000명만 보내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36명이 죽고
대부분이 패주하고 말았습니다(4-5절).
정탐꾼들이 잘못 본 것입니다. 아이성의 인구가 12,000명이기 때문에(8:25)
출전할 수 있는 사람은 기껏해야 3~4,000명 안팎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이성은 800m나 되는 산지에 있고 인근 벧엘 사람과
합동 작전을 펼 가능성도 많습니다(8:17).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말한 것은 요단강 도하와 여리고성 정복 때문에 자만해져
분별력을 갖지 못한 것입니다. 여호수아도 백성도 동일하게 받아 들였습니다. 여리고성을 정복할 때는 하나님을 완전히 순종했고 모든
백성이 참여하여 전심전력을 다했습니다. 여리고성을 정복하고나니 자만해져 자신들이 그렇게 한 줄 알고 최선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영적 전투에서는 일심정력을 기울이고 전심전력을 다 기울여야 합니다. 신약의 소아시아에 있던 빌라델비아교회는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고 주의 말씀을 지켜 충성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열린문을 두셨습니다(계 3:8).
빌라델비아 교회는
외적으로 좋지 못한 환경 가운데 있었습니다. 소아시아 7교회 중 역사가 가장 짧았습니다. 다른 교회들처럼 유명한 신학자나 목회자도
없었고, 교인들의 신분이나 지위나 소유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유대주의자들의 핍박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적은
능력'(μικραν-δυναμιν)을 가진 교회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말씀을 지켰고, 고난이 올 때에도 인내로서 끝까지 믿음을
배반치 않았습니다. 이는 생명력 있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좋지 않은 환경에서도 말씀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고 주님이 맡긴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렙다 과부는 빵 하나 드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했고 (왕상 17:10-22), 어린아이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하나님의 표적을 나타냈습니다(요 6:3-14).
여호수아의 문제 해결 (6-15절)
첫째, 기도(6-11절)
이스라엘이 아이성 전투에서 완전히 패배하자 여호수아와 장로들이 옷을 찢고 언약궤 앞에서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무릅쓰고 기도를 했습니다 (6절). 그리고 백성들에게 스스로 성결케 했습니다 (13절). 이는 겸비하고
낮아져서 죄를 회개하는 태도입니다. 실패의 원인을 찾기 위해 죄를 회개하는 기도를 한 것입니다. 시편51:17에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 하시리이다"고 했습니다. 여호수아의 기도
내용을 보면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강을 건너게 하여 아모리 사람들 손에 붙여 멸망시키려 하냐고
했습니다. 요단강 동편에 만족하고 거했으면 좋을 뻔 했다고 했습니다. 가나안 거민이 이스라엘의 패전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이스라엘의 이름을 세상에서 끊을 것이니 하나님의 이름이 어떻게 되겠느냐고 했습니다 (7-9절). 이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나안에 들어오게 하신 목적을 상기시키며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영광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아모리
사람들에게 패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우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아모리 사람'에게 패했다고 하는 것은 아모리
사람이 가나안 족속 중에 가장 강한 족속으로서 가나안 사람 전체를 가르쳐 한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패전 원인을 알려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언약을 어기고 범죄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바친 물건을 취하여 도적하고
사기해서 자기 기구 가운데 두었다고 했습니다 (10-11절).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가 문제를 해결합니다. 모세의 기도,
히스기야의 기도, 느헤미야의 기도, 바울의 기도가 대표적인 기도입니다.
둘째, 회개(12-15절)
여호수아가 회개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패전 원인을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것을 도적한 자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바쳐진 물건을 도적질 함으로 자기도 바침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를 멸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다시는 함께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아침에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지파대로 모이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를 뽑고 그 지파 중에 한 가족을 뽑고 그 가족 중에 뽑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뽑힌
자와 그의 소유를 불사르라고 했습니다 (12-15절). 이는 제비 뽑는 방식으로 범인을 색출하신다는 말입니다. 제비뽑기는
구약시대에 하나님이 뜻을 알리기 위해 사용한 방법 중 하나입니다. 신약시대에도 사도 수를 보충할 때 사용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오늘
날에는 잘 행하지 않는 방법입니다. 오늘날은 성경말씀과 기도와 섭리와 신앙양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혹
직분자를 뽑을 때 제비뽑기를 해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으나 자칫 요행수가 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범죄자와 소유를
불사르라고 한 것은 죄악을 완전히 제거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발견했으면 제거하고 끊어 버려야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아간의 색출과 처형 (16-26절)
이스라엘이 아이성 정복 실패한 후 여호수아는 그 원인을 찾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원인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취하지 말라고 한 것을 도적질하여 감춘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범죄자를
색출하여 제거하면 함께 해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직접 색출하시기 위해 다음날 아침에 지파대로 하나님께
나아오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가 다음날 아침에 이스라엘 지파대로 하나님께 나아오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지파를 뽑았고 유다지파 가운데 세라
족속을 뽑았고 세라 족속 가운데 삽디를 뽑았고 삽디의 가족 가운데 갈미의 아들 아간을 뽑았습니다.
여호수아가 아간에게 죄를
고백하라고 했습니다. 아간이 죄를 고백했습니다. 진정한 회개라기 보다 시인입니다.
시날산 외투 1벌과 은 200세겔과 금
50세겔을 보고 탐내어 취하였고 그것을 자기 장막 땅 속에 감추었다고 했습니다. 은 1세겔(11.4g)은 일반 노동자 4일 품값에
해당하고 금 1세겔은 은의 1.5배에 해당합니다.
여호수아가 사자를 그 장막에 보내어 본즉 물건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것을
가져와 하나님 앞에 놓았습니다.
여호수아가 백성들로 더불어 아간이 훔친 외투와 은과 금뿐 아니라 아간과 아들들과 딸들과 소들과
나귀들과 양들과 장막과 무릇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아골 골짜기에서 돌로 치고 불살라 그 위에 돌무더기를 쌓았습니다. 그제서야
하나님의 극렬한 분노가 그쳤습니다 (16-26절).
하나님은 살인자나 배교자(신13:5-10), 안식일을 범한자(민15:32-35),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한
자(레24:10-16)는 돌로 쳐 죽이게 했습니다. 아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므로 하나님을 멸시했고, 언약성취를 위한 거룩한
전쟁에서 하나님께 바쳐진 것을 개인의 탐욕을 부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촉범했습니다. 그것은 신약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성령을
속인 죄 곧 성령의 거룩한 사역으로 가장하여 외식하므로 성령의 사역을 인본주의적 사역으로 바꾸어 버린 죄를 지으므로 죽임을 당한
것과 같습니다 (행5:1-10). 하나님은 이런 죄를 지극히 싫어하시고 분노하십니다. 특히 하나님의 목적과 관련된 공동체에 대한
범죄에 대해서는 엄히 다스리십니다.
아간이 범죄한 원인은 탐심 때문이었습니다. 마음의 탐심, 개인적인 탐심을 물리치지 않으면 자기도 망하고 공동체의 사역도
실패합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범한 것도 탐심 때문입니다(창 3:6). 물욕과 정욕과 사욕을 이겨야 합니다(요일 2:16). 땅에
있는 지체 곧 탐심을 물리쳐야 합니다(골 3:5).
아간의 범죄가 온 이스라엘을 실패케 했습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돕지 않은 것입니다. 아간은
자신의 죄를 아무도 모를 것이라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아시고 심판하셨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일입니다 (롬 2:5). 하나님 앞에서는 감추일 것이 없고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마 10:26). 하나님 앞에서는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나게 됩니다(히 4:13). 하나님 앞에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므로 자신을 정결케 해야 하겠습니다.
아간이 도적질한 물건들 목록
그가 도적질한 물건은 먼저 바벨론(시날) 산 외투 한 벌이었다. 이는 영적으로 말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좋게 보이고자 하는
외식이다. 바벨론이란 그 자체가 혼돈이고 섞인 것이다.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하나님께 속한 것과 사람에게 속한 것이 함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중 아간에게 있는 이런 죄를 처리하지 않으면 이런 죄는 사람의 육체에 걸맞은 것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을 미혹할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것들을 다 태워버리라고 명하셨지만(6:18, 24) 아간은 외투 한 벌만큼은 자신을 위하여 남겨두었다.
외식은 말하자면 편한 길이다. 실제가 없어도 외적으로만 그럴듯하게 보이면 되기 때문이다. 헌신과 충성이 없는데도 남들에게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외식이다. 시날 산(産) 외투란 바로 이런 것이다. 속에는 별 것 입지 않았는데 사람들에게 아주 잘 입은
것처럼 보이려는 것이다.
아간은 외투만이 아니라 은 이백 세겔과 금 오십 세겔을 장막에 감추었다. 이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면 여호와의 곳간에 갖다
놓아야 할 것들이다(6:19). 금과 은은 장래적인 것이다. 즉 자신의 장래의 삶을 편안하게 보장해주는 것이다. 아간은 철저히
자신을 위한 사람이었다.
보암직도 하고
모든 죄악의 근원은 보는 것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에덴 동산에서 하와에게 있었던 일과 같다. 사람이 죄악에 빠지지 않으려면 보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아간은 먼저 보았고 그 다음 탐심을 갖게 되었다.
돌에 맞아 죽은 아간
결국 아간은 그가 탈취한 모든 소유와 자녀들과 함께 멸망을 당했다. 백성들이 돌로 치고 불살랐다. 하나님의 명을 떠나 자신의
마음대로 산 사람들은 결국 그 얻은 것과 더불어 멸망을 당한다. 어떤 죄악은 그 죄의 분량이 커서 심판도 크다. 아간은 결국
돌에 맞아 죽었다. 여호수아는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뇨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를 괴롭게 하시리라”고 했다.
우리가 받은 용서는
여호와께서는 극렬한 진노를 그치셨다. 하나님은 범죄를 심판하지 않으신 채 용서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사람의 죄악도 그
아들 안에서 심판하심으로 용서하신 것이다. 우리가 받은 구원과 용서는 심판을 거친 것임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한다.
아골 골짜기와 골고다
그 돌무더기가 있는 곳이 아골 골짜기 곧 괴롭힘(troubling)의 골짜기가 되었다. 이는 아간에 대한 영원한 수치의
표시였다. 예언자들은 아골 골짜기를 회복기에 회복하는 소망의 곳으로 예언하였다(사 65:10, 호 2:15). 어떤 사람은 아골이
골고다의 그림자라고 말한다(Ridderbos).
구약과 신약에서의 두 교훈
6장에서 대적의 모든 세력을 멸하시는 하나님을 보며, 7장에서 그 동일한 능력으로 회중 가운데 있는 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본다.
우리는 구약과 신약에서 이 두 가지의 교훈을 생생하게 본다. 승리를 보장하시는 하나님은 또 거룩을 요구하신다.
이러한 교훈은 회중에게나 우리 개인에게나 다 해당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게 하려면 거룩함에 모순되는 것들을 던져버려야
하며 하나님의 속성에 어긋나는 것들을 철저히 심판해야 한다.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시며, 치유하시지만 또한 악을 용납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소멸하는 불이시다(히 12:29).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이 시작되었나니”(벧전 4:17). 하나님은 그분을 닮은 백성을 원하신다. 그러므로 그분께 맞지 않는 것들을
하나 하나 제거해야 하며, 그분의 이름에 불명예를 돌려드리지 않도록 우리는 우리의 습관과 모습을 잘 살펴야 한다.
6장에서 여리고에서 대승한 군대가 아이성에서 왜 굴욕적인 패배를 하였는가? 이는 물론 아간이 저주받은 물건을
취하여 범죄하였기 때문인데, 여기서 우리는 다른 차원의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보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은 회중 가운데 한
사람의 죄를 전체 회중의 죄로 간주하신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한 나의 언약을
어기었나니 곧 그들이 바친 물건을 취하고 도적하고 사기하여 자기 기구 가운데 두었느니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 대적을
능히 당치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자기도 바친 것이 됨이라 그 바친 것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10-12).
이는 매우 엄중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간음한 형제에 대하여 쫓아내야 한다고 하면서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아간 한 사람이 범죄한 것을 ‘이스라엘이 범죄하였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범죄를
모든 사람의 죄로 여기신다. 당시 회중 가운데 임하신 여호와의 임재가 모두를 하나로 묶으셨다. 동일하게 지금도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거하시는 성령께서는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으신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죄가 모든 지체에게 미치게 되는
것이다.
성도들은 한 사람의 죄가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알고 모든 행실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 중 누구도 몸에서 자신을
분리하여 독립적이 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한 성령의 역사로 연합된 한 몸의 지체들인 것이다. 우리가 만일 스스로를 자기
방관적으로 함부로 행한다면 성령을 슬프게 할 뿐 아니라 모든 몸의 지체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2장 26절은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라고 한다. 우리 한 개인의 상태가 모든 다른 지체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우리의 생활이 얼마나
중대한가를 느끼게 한다. 한 지체가 고통을 느끼면 다른 지체도 자동적으로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며
악을 용납할 수 없으시다.
우리는 7장에서 회중 가운데 있는 악을 보며, 이런 작은 한 명의 악이 있어도 하나님은 그 회중과 함께 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보았다.
아골 골짜기의 교훈은 무엇인가?
작은 악이 있을 때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않고 그
누룩을 철저히 심판하신다. 여호수아는 회중을 다 소집해야 했고 악의 근원을 찾아 모든 피조물 앞에서 바벨론(시날산
외투는 바벨론의 요소를 대표함)을 심판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악을 찾아내시어 돌로 치고 불사르고 돌무더기를 크게
쌓았다.
오늘날 우리는 큰 일을 하려는 미혹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함께 나아가기 위해, 한 사람의 작은 것이라도 범죄한 것을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도행전 2장이 아니라 디모데후서 2장에 와 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큰 집의 불결한 그릇에서
벗어나 분별된 위치에 있어야 한다. 경건의 모양은 갖고 있으며,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에게서 돌아서야 한다.
11월 9일(화) 여리고(여호수아 6:1)
♦ 11월 9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여호수아 6:1∼27 ♦ 묵상을 위한 주제 : 여리고(1절) ♦ 성구 : 이스라엘 자손(子孫)들로 인(因)하여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出入)하는 자(者) 없더라.
“여리고(Jerico)”는 “향기(香氣)”라는 뜻의 지명입니다.
여리고 성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전쟁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었는지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 주위를 6일 동안 매일 한 번씩 돌았고 마지막 7일에는 동일한 방식으로 일곱 번 돌고난 후에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불 때 백성들이 함성을 지르자 성벽이 무너져 내려 성안으로 들어가 점령했다고 합니다.
당시 여리고성은 베냐민 지파가 분배 받은 경계 안에 있었고 가나안족이 거주하는 곳이었습니다.
여리고성 함락이 우리에겐 은혜로운 말씀이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참 믿기 어려운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고고학자들의 발굴 작업으로 역사적 사실이었음을 입증하기 전까지 여리고성에 관한 성경의 이야기는 지어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고고학적인 발굴 결과 당시 여리고 성의 넓이는 당시 보통 성의 크기 32km2 이었으며 이런 규모의 성에는 1,200명 정도의 인구가 거주하였을 것이라고 추산합니다.
성서고고학자 “Bryant Wood”는 증거물들을 분석한 후 여리고성 파괴는 BC 1400년경에 발생했다고 합니다(후기 청동기 1기 말). 이것은 성경에서의 정복 연대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리고성의 거민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포위에 대해 잘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여리고 성내에는 충분한 물을 공급할 수 있는 샘이 성벽 안쪽에 있었으며, 수확이 끝난 시기였으므로 식량도 충분하게 준비하고 있었습니다(수 3:15).
1930년대에 “존 가스탕(John Garstang)”의 발굴 자료와 “캐슬린 케년(Kathleen Kenyon)”의 발굴에서 가나안 인들의 집에서 곡식이 가득찬 항아리들이 발견된 사실로 입증할 수 있었습니다.
풍부한 식량과 충분한 물이 있었으므로 여리고 성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여리고 백성들은 아마 몇 년 동안을 버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군대 장관은 전혀 새로운 전술을 사용하여 첫 번 정복 전쟁을 완전한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만일 이 전투에서 실패했다면 백성들의 원망은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과 원망으로 항의했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여리고성의 정복 같다고 하겠습니다.
불리한 상황이고 상식에 맞지 않는데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라면 그 약속을 믿고 순종하는 것만이 가장 좋은 길이라고 확신하며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고 따르는 사람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필요하면 기적을 일으켜 도와주시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여!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대하기 전에 먼저 믿음으로 순종합시다. 그리고 기도하며 기다립시다.
하나님의 약속이 분명하다면 반드시 그 약속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 찬양 /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여호수아 6:1
이스라엘 자손들로 인하여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 없더라. 아멘
여호수아 6:20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여호수아 6:2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 - 여호수아
여호수아 6:6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언약궤를 메고 일곱 제사장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행하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수아 - 제사장
왜 나팔을 불어야 하는가? 민수기 10:8-9 그 나팔은 아론의 자손인 제사장들이 불찌니 이는 너희 대대에 영원한 율례니라. 또 너희 땅에서 너희가 자기를 압박하는 대적을 치러 나갈 때에는 나팔을 울려 불찌니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를 기억하고 너희를 너희 대적에게서 구원하리라.
* 성취하시는 하나님
여호수아 6:7
또 백성에게 이르되 나아가서 성을 돌되 무장한 자들이 여호와의 궤 앞에 행할찌니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수아 - 백성
출애굽 / 홍해 / 요단강 여리고 작전(여호수아 6:10)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레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찌니라.
눈은 법궤를 바라보라! 귀는 나팔 소리에 귀를 기우리라! 입은 침묵하라!
신명기 13:4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순종하며 그를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며 그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에게 부종하고.
순종, 경외, 지킴, 청종, 섬김, 충성
사무엘상 15:22b(새번역)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
오늘의 기도
순종하는 믿음으로
한 번의 순종이 기적을 이룰 수 없다. 그러나 온전한 순종이 기적을 일으킨다.
* 결론을 위한 이야기 /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으라
어느 임금이 한 신하를 불러 이상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우물물을 길어 저기 밑 빠진 독에 가득히 채우시오.” 밑
빠진 독에 물이 채워질 리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신하는 오직 임금의 명령만 생각하면서 밤을 낮 삼아 물을 길어
날랐습니다. 결국 우물 바닥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우물 바닥에 무엇인가 번쩍이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것은 엄청나게 큰
금덩어리였습니다. 신하는 임금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임금님, 용서하소서. 독에 물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물 바닥에서
이 금덩이를 건졌나이다.” 임금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우겠다고 우물이 바닥나도록 수고했구려.
그대는 참으로 충성스러운 신하요. 그 금덩이는 그렇게 순종하는 신하를 위해 준비된 것이라오.”
세상에는 꾀를 내세우며 똑똑한 체하다가 망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충성된 사람의 성실을 기억하십니다.
여리고 성(여호수아 6:15-21)
성경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
주위를 6일 동안 매일 한번씩 돌고 마지막 7일에는 동일한 방식으로 일곱번 돌고난 후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불 때 백성들이
함성을 지르자 성벽이 무너져내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안으로 들어가 점령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 여리고성은 베냐민
지파가 분배 받은 경계 안에 있었고 가나안족이 거주하는 곳이었습니다.
여리고 성의 위치는 사해 북쪽으로 12km, 요단 서쪽으로
9km, 예루살렘에서는 동북쪽으로 30km지점입니다.
먼저 요단강을 건너기까지 과정을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여호수아는
정탐꾼의 보고를 받은 다음날 아침 일찍 백성들을 인솔해 싯딤을 떠나 요단강에 도착해 거기서 삼일을 보냈습니다.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널 때는 강물이 언덕까지 넘실댈 정도로 물이 많이 흘러 내리는 시기였습니다(3:15).
여호와의 궤(ark)를 멘
제사장들의 발다닥이 요단물을 발고 멈췄을 때 위에서 흘러 내리던 물이 끊어져 강수위가 갑자기 줄어들어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성 북동쪽에 위치한 길갈에 진을 쳤습니다(4:19). 규모는 달라도
홍해를 건널 때처럼 또 한번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여리고왕 뿐 아니라 가나안 여러 부족왕들이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소문을 듣고
마음이 녹고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습니다(5:1).
여호수아는 여리고성 침공을 앞두고 길갈에서 백성들에게 할례를
행했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에서 출생한 남자들이 할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할례는 출생후 8일째 되는 날에 하라고
했기 때문에(레12:3) 그 율법을 잘 지켰다면 벌써 했어야 했는데 사실은 불순종했던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거룩한 전쟁을 시작해야 하는데 혹시 이것이 화근이 될까 염려해 긴급하게 할례를 받게 했던 것 같습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전쟁
직전에 군사들에게 할례를 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죠. 낫기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적이 기습한다면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호수아도 이 정도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할례를 받게 한 것은 성전을 치루기 전에 거룩하게 구별하는 게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인해 간담이 녹고 정신을 잃을 지경이 된 여리고성은 성문을 굳게 닫고 출입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사내들은 모두 동원되어 전투 배치되고 가족들은 집안에 숨어 있었을 것입니다. 전쟁을 하려면 지휘관은 전술과
전략을 세워야 합니다. 이스라엘 총사령관이신 하나님이 세운 전술은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법괘를 메고 나팔을 불며 매일 여리고성을
한번씩 6일 동안 돌다가 마지막 7일에는 일곱 번을 돌다가 함성을 지르라는 것이 전략이었습니다. 이 전략도 심리적으로 상당한
효과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나팔불고 성을 도는 모습을 상상하니 엉뚱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좀더 생각해보니
여리고성을 함락시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이럴 때 보면 하나님은
참 재밌는 분입니다.
여리고성 함락이 우리에겐 은혜스런 말씀이지만 믿음 없는 사람들 입장에선 참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습니다. 지어내려면 뭔가 논리적으로 그럴듯해야 속아넘어가지 이건 정말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금세기 고고학자들이 여리고 지역을 발굴해 역사적 사실이었음을 입증하기 전까지 여리고성에 관한 성경의 이야기는 지어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금세기에 이르러 고고학적인 발굴을 통해 여리고 성의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이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여기서 여리고에 대한 고고학적 탐사 역사를 다 살펴볼 수는 없고 탐사결과 일부는 참고하겠습니다.
성서고고학자 Bryant Wood는 이전의 고고학적 증거물들을 더 심층 분석해 본 결과, 여리고성 파괴는 BC 1400년 경에
(후기 청동기 1기 말에) 발생했고, 이것은 성경에서의 정복 연대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출애굽 연대를
BC1447 또는 BC1441년 사이에 있었다고 볼 때 광야에서 보낸 40년을 빼면 잘 맞습니다. 물론 이 보다 더 이전에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출애굽연대나 여리고성 함락 연대를 단정하긴 어렵습니다.
고고학적인 발굴결과
당시 여리고 성의 넓이는 32제곱키로미터로 보통 성의 크기 정도였다고 합니다. 여리고 성이 있던 구릉(mound or
tell)은 아래쪽에 돌로 된 옹벽(retaining wall, 기초성벽)을 가지고 있는 거대한 토벽(earthen
rampart)으로 둘러싸여 있었답니다.
옹벽은 무려 4-5m (12-15 feet)의 높이에 달했고, 이 옹벽 위로 폭 2m,
높이 6-8m의 진흙벽돌로 된 성벽(mudbrick wall, 외벽)이 있었습니다.
이 진흙벽돌의 제방(둑, embankment)
위로는 유사한 진흙벽돌로 된 성벽(내벽)이 있었는데, 그 내벽의 기저부위는 외벽의 바깥쪽 땅에 비해서 14m나 높았았습니다 .
내벽 안쪽의 도시 면적은, 안쪽 도시와 요새화 된 성벽들이 차지하는 면적들을 다 합하면, 전체 약 9
에이커 정도가 된답니다. 고고학자들이 추정하는 에이커 당 200명을 기준으로 하면, 상부 도시의 인구는 대략 1,200명 정도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금세기초 독일 팀의 발굴 결과에 의하면, 사람들이 외벽과 내벽 사이의 제방에서도 산 흔적을
찾아냈습니다. 또한, 성 주변의 마을에 사는 가나안 사람들도 성 안으로 피난을 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 성을 공격했을 때 수천 명이 성 안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여리고성의 거민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포위에 대해 잘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고대는 물론이었고 현재에도 오아시스 지역인 여리고 성내에는 충분한 물을 공급할 수 있는
샘이 성벽 안쪽에 있습니다. 공격 시점은 수확이 막 끝난 시기였으므로(여호수아 3:15), 그들은 충분한 식량도 준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1930년대에 존 가스탕(John Garstang)의 발굴 자료와 또한 캐슬린 케년의 발굴에서, 가나안 인들의
집들에서 곡식이 가득 찬 항아리들이 발견된 사실로도 입증이 됩니다.
풍부한 식량 공급과 충분한 물이 있었으므로, 여리고 성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여리고 백성들은 아마 몇 년 동안을 버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라합(Rahab)의
집은 요새화된 성벽의 일부분으로 되어 있었습니다(여호수아 2:15). 만일 성벽이 무너졌다면, 라합의 집은 어떻게 남아 있을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시를 점령했을 때, 약속대로 라합과 그녀의 가족들은 구조되었습니다 (여호수아
2:12-21, 6:17,22-23). 여리고 성의 둔덕 북쪽 끝에서 고고학자들은 라합에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놀라운 것들을
발견했습니다.
1907-1909년 독일팀의 발굴에서, 북쪽 성벽의 짧은 구간은 다른 부분과는 달리 무너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진흙벽돌 성벽의 일부분은 아직도 2m 이상의 높이로 서 있었답니다. 더구나 이 성벽에 잇대어 집들이 지어져
있었습니다. 이곳에 라합의 집이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위쪽의 내벽과 아래쪽의 외벽 사이의 제방에 위치한 이곳은, 전쟁이 났을
때는 살기에 적당하지 않은 곳이므로, 집값이 쌌을 것입니다. 이 지역은 도시 내부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사는 가난한 지역으로,
아마도 빈민촌이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성을 점령한 후 도시와 그 안의 모든 것들을 불태웠습니다.
"무리가 불로 성읍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사르고..."(여호수아 6:24)
이 불태웠다는 것이 고고학적 발견으로 사실임이
확인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 의해 파괴된 성의 동편 일부분이 발굴되었습니다. 고고학자들은 어디에서든 발굴이 일정 깊이에
도달하면 1m (3 feet) 정도 두께의 재와 불에 탄 잔해들을 발견했답니다.
가스탕과 케년은 둘 다 불에 의해서
파괴된 곡물로 가득한(full of grain) 많은 저장 항아리(storage jars)들도 발견했습니다. 이것은 고고학적
기록에서 매우 특별한 발견이었습니다. 곡물은 단지 식품의 근원일 뿐만 아니라, 다른 상품으로 교환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가치도
있었습니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곡물과 같은 귀중품은 정복자에 의해 약탈되는 법입니다.
여리고에서는 왜 곡물이 그대로 남겨져
있었을까요? 그 해답은 성경에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읍과 그 안의 모든 것들을 여호와에 바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었습니다(여호수아 6:17). 여리고에 남아 있어서 현대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된 곡물은 3500년 전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순종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리고의 성벽이 어떻게 무너졌는가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스탕과 케년은 둘 다 도시가 종말을 맞았을 때에 지진(earthquake) 활동이 있었다는 증거를 발견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 날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시기 위해서 지진을 사용하셨더라도, 지진이 필요한 정확한 시점에 일어났고, 라합의 집을 보호했던
것은 여전히 기적이라고 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을 사용하셨든지, 하나님께서 성벽을 무너뜨리신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여리고성의 정복 같은 것입니다. 불리한 상황이고 상식에
맞지 않는데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일은 믿음으로 순종해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믿고 따르는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필요하면 기적을 일으켜 도와주셨습니다.
여리고성 전투는 실패해서는 안되는 정말 중요한
전투였습니다. 가나안 진격 후 첫번째 정복전쟁인데 여기서 패한다면 얼마나 사기가 떨어지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이미 승리를
예비해두셨던 것입니다.
사람이 사는 세상은 날로 변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감당해야 할 사명도 시대에 따라 다릅니다.
지금 우리가 여리고 전쟁을 치룰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여호수아와 그 때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정복전쟁을 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라면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증거하고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승리를 예비하신 것처럼 우리 앞길에도 승리가 예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같은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일을 하는 한 실패할 수 없습니다. 여리고 성의 싸움(여호수아 6:1-7)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얻기 위해서 무려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방황했다. 드디어 가나안의 문턱에 다다랐다. 그러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들어가자면 첫 관문인 여리고 성을 통과해야만 되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이 여리고성을 통과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1절에 "이스라엘 자손들을 인하여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 없더라"라고 했다. 여리고성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불가능의 성이었다. 이와같이 천성을 향하여 가는 성도들에게도 앞길을 막는 닫혀진 문이 있다. 불가능한 여리고
성이 있다. 그러면 이 문을 어떻게 통과할까? 이것은 오늘을 사는 성도들에게 삶의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본문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주고 있다.
성도 여러분! 믿음의 생활이 어려운가? 쉬운가? 대체로 "어렵습니다"고 답할 것이다. 그런데 국제 C.C.C를 창설한 미국의 빌
브라이트 박사는 "믿음 생활이란 어려운 것이 아니고 불가능하다"라고 했다.
무슨 말인가? 믿음 생활을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은
착각이다. 진정한 믿음 생활은 내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 안에서만, 하나님에 의해서만,
하나님을 통해서만 할 수 있다. 세상을 살아갈 때 성도들도 많은 어려움에 부딪힐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어떻게 할꼬?
갈등을 한다. 인생이 무엇인가? 하나의 싸움, 전쟁이다.
영국의 존 번연은 천로역정에서 그는 성도의 싸움을 "거룩한 싸움"이라고
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싸워주시고 또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시기 때문이다.
본문 2절을 보면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라고 했다. 여리고 싸움은 하나님의 싸움이다. 전략도 하나님께서 짜시고, 친히 싸우시고, 여리고 성을
여호수아에게 맡기셨다. 여리고 왕도, 용사들도 여호수아에게 맡기셨다. 그러니까 이미 이겨놓은 전쟁이요, 여리고 싸움에서의 성공은
벌써 이스라엘의 것이 되었다. 그러나 여리고 싸움에서 우리의 역할이 있다. 삶속의 전쟁에서 성도가 지녀야 될 자세가 있다. 다시
말하면 닫혀진 문 앞에서 마땅히 취하여야 할 삶의 초점이 명확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본문은 말씀한다. "모든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라" 생각하면 사람마다 삶의 본능적인 초점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를 삶의 초점에다 두고
무엇을 하든지 어디에서나 "나 나 나"하면서 살아 간다. 정치를 하면서도 나를 위해서라고 말한다. 나 때문에 라고 고집을 부린다.
사업을 하면서 내가 부자 되어야지, 그리고 나는 나의 장래를 위해서 사업을 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믿음으로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은 이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어야 한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라" 이것은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성경이 당부하는
말씀이다. 케이블 T.V를 시청할 때 가령 채널 32에 맞추면 나무아비 타불 관샘보살을 듣게 되고, 채널을 42에다가 맞추면
할렐루야 찬양을 듣고 생명의 말씀을 듣게 된다. 상황이 달라진다.
여리고 싸움에서 성공하기를 원하는가? 삶의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라. 이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 본문은 두 가지의 도구를 동원하고
있다. 하나는 법궤요, 또 하나는 나팔이다. 먼저 법궤을 생각해 보자. 법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하나님
임재의 상징이다. 본문7절에 보면 "여호와 궤 앞에 행할지니라"고 했고, 8절을 보면 "여호와 앞에서 진행하며"라고 했다. 즉,
법궤 앞에서 행하는 것이 곧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임을 설명하는 말씀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법궤를 바라볼 때마다 하나님이 거기
계신다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항상 성도의 삶은 하나님이 초점 되도록 하는 삶이다. 그래서 우리의 찬송은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라고 한다.
다음 나팔의 역할을 보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팔 소리가 울릴 때 하나님의 행동 계시로 여겼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팔소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겼다. 나팔소리가 나면 그들은 이제 행동을 개시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 나팔은 명령의 도구이다.
나팔이 울리는 명에 따라 살아야 한다.
여기 법궤와 나팔의 초점은 무엇인가? 하나님이시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성도의 삶의 초점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내 인생의
삶의 바탕이요, 목적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누구인가? 여리고 작전에 출전한 십자가 군병들이다. 그런데
우리의 진군은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곤란하다. 여리고 성을 날마다 빙글빙글 돌아야 하는 진군이기 때문이다. 일곱 번째 날에는 일곱
번을 돌아야 한다. 언약궤를 앞세우고 양각나팔을 불어야 한다. 전쟁은 전쟁인데 너무 이상한 전쟁이다. 따라서 이 전쟁에 동참한
우리는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다.
본문은 전쟁하는 방법 세 가지를 생각해 보자.
첫째, 침묵하라
10절을 보면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레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고 했다.
여리고 싸움은 어떤
작전이라는 것인가? 눈은 법궤에만 고정시켜 두고, 귀는 나팔소리를 향하여 열어두고, 입은 꼭 다물고 침묵하는 작전이다.
왜
침묵하라고 했는가? 만일 그대로 두었더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 성을 돌면서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 이러한 전쟁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우리가 무슨 산책하러 왔다는 말인가. 이 모양으로 백 번 여리고 성을 돈다고 이
성이 무너질 수 있다는 말인가 온갖 부정적인 말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교회의 일은 이 점에서 유의해야 한다. 잡음이
생겨나지 않기를 위해서 입을 다무는 훈련이 필요하다. 원망을 해서도 안되고, 불평을 해서도 안된다. 하나님의 나팔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고 오직 하나님의 법궤만 바라보면서 진군을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경건 훈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침묵 훈련이다. 왜냐하면
침묵을 배우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시끄럽게 할 때 하나님께서는 입을 다무신다. 내가 침묵할 때
비로소 하나님은 입을 열어 말씀하신다. 내 이야기만 하고 있으면 이웃의 말을 들어줄 여유가 없다. 내가 지껄이다 보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여유를 잃게 된다.
그래서 바울이 말했다. 고린도전서 14:28에서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솔로몬도 전도서 5:2에서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다윗도 시편 141:3에서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섬기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매우 은혜스런 말씀이다.
둘째, 순종하라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수 있는 방법은 백성들이 6일 동안은 하루에 한 바퀴씩 돌았고, 제7일에는 7바퀴를 돌았다. 그리고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울려 불 때 모두 외쳤다.
끝까지 순종해야 기적이 찾아온다. 본문을 묵상하던 한 성경학자는 "한 번의
순종이 상황을 바꾸지 않는다. 그러나 온전한 순종은 반듯이 상황을 바꾼다"고 했다.
엘리야의 경우를 보면 한 번 기도했을
때 아무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일곱 번을 기다리며 기도했을 때 손바닥만한 구름이 생겨나고 그것이 소낙비를 내리게 되었다. 왜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을 여러 번 돌라고 했을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서 온전한 순종을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시편 37:7에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고 했다. 우리는 기다리지 못하고 불평을 먼저 토설할 때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좀더 기다린가를 보시려고 우리를 주목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도 우리를 위하여 기다리신다. 집을
나간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를 생각해 보자. 아직도 상거가 먼데 저 멀리 바라다보면서 오늘이나 돌아올까를 생각하며 기다렸다.
셋째, 신뢰하라
20절에 "이에 백성이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듣고 동시에 크게 소리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밀가루 떡이 깨지듯이 모래성이 와르르 무너지듯이 여리고 성이 무너졌다. 함성을 지를 때에 무너졌다. 그러나 여리고의 그
견고한 금성 철벽이 사람의 함성 소리 때문에 무너졌는가? 함성을 지른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것 뿐이다. 그러니까 여기
함성은 "하나님이여 명하신 대로 행하였나이다. 이제 하나님께서 역사 하실 차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을 이제 무너지게
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라는 함성이다.
그러므로 여기 함성은 믿음의 함성이요, 믿음의 기도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함성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렸다는 말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11:30에서 "믿음으로 칠일 동안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라고 했다.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것은 바로 믿음이다. 여리고 싸움이 무엇인가? 그러한 의미에서 믿음
작전이다. 우리의 싸움은 처음부터 믿음이 요청되는 전투이다. "성 주위를 한 번씩 돌 때에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고 말씀하셨다.
만일 믿음이 없었더라면 그들은 돌지 아니했을 것이다. 또 돌지 아니했다면 여리고 성은 무너질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돌을 던지라, 망치로 때려 부수라" 하지 않았다. "하루에 한 번씩 성을 돌라 그리하면 성이 무너지리라"고
했다. 얼마나 어리석은 싸움인가?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 그리고 믿음으로 돌고, 믿음으로 나팔을 불고, 믿음으로
잠잠하고, 믿음으로 때가 되매 함성을 질렀다. 결국 여리고 성은 믿음으로 무너뜨린 것이다. 그러면 믿음생활이 무엇인가? 믿음으로
시작하여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으로 완성하고 그래서 끊임없이 믿음으로 진군하는 삶이다.
삶의 앞길을 가로막는 여리고 성이 와르르 무너졌다. 여리고 싸움에서의 승리는 무엇인가? 미사일인가? 스텔스 전투기인가? 아파치
헬기인가? 아니다. 여리고 성을 돌기만 했다. 그런데 돈다고 그 철벽이 무너질 수 있는가? 백 번을 돌아도 도는 그 것은 성이
무너지는 데 영향을 줄 수 없다. 그러나 열세 번을 돌았을 때 여리고 성이 무너졌다. 그냥 돈 것 아니다. 그들이 돌 때 믿음으로
돌았다. 무의미하게 보인 것 같으나 믿음으로 행하면 기적이 나타난다. 우리의 삶 속에서 기적이 일어나기를 원하는가? 또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가? 그런데 기적은 사람의 꾀로 만들 수 없다. 욕심과 지혜로 만드는 것도 아니다. 기적은 믿음이 만든다. 축복도
믿음이 만든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성경의 원리는 똑 같은 것이다. 그것은 믿음으로 순종하면 축복이다. 그러나 불신앙으로 불순종하면
저주이며 실패다. 그런데 믿음 생활이 무엇인가? 믿음으로 사는 생활이다. 믿음 생활에서 믿음을 빼 버리면 의미없는 생활이다.
처음도 믿음, 나중도 믿음, 믿음 이것이 성도들 생활의 알파요 오메가이다. 귀신들린 아들을 가진 아버지가 마 9:23에서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라고 했다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책망을 들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으로 성을 돌았고, 잠잠했고, 궤를
앞장 세웠고, 나팔을 불었고, 함성을 질렀다. 사람들 보기에는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모습이요. 유치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
광경을 누가 보고 있었는가? 수 3:10을 보니까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서 보고 계셨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살아 계신다.
그래서 우리의 싸움하는 삶을 보신다. 우리의 삶의 초점이 사람이냐, 하나님이냐를 보신다. 삶의 중심에 믿음이 있느냐, 욕심이
있느냐를 보신다. 또 살아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 우리의 기도가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
침묵하라, 순종하라, 신뢰하라 이 세 가지를 삶 속에서 실천하면서 우리 눈앞에 있는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 승리을, 몸에있는
질병의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 승리를, 내 갈길을 가로막고 있는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 승리의 역사가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1월 8일(월) 길갈(여호수아 5:9)
♦ 11월 8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여호수아 5:1∼15 ♦ 묵상을 위한 주제 : 길갈(9절) ♦ 성구 :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급의 수치(羞恥)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길갈(Gilgal)”이란 “굴러가다”는 뜻의 지명입니다.
무엇이 굴러갔습니까? “애급의 수치(the reproach of Egypt)”가 굴러갔다고 합니다.
‘애급의 수치’에 대한 해석은 다양합니다. 첫째는 애급의 노예로 살았다는 과거의 행적과 수모 둘째는 애급인의 모욕적인 언사와 생각으로 아직도 광야에서 헤매고 다닌다는 것 셋째는 위에서 언급한 과거의 행적과 수모 그리고 아직도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방황하고 있다는 것
그런데 요단을 마른 땅처럼 건넜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요단 서편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들에게 퍼졌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녹았고 정신을 잃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벌써 가나안 원주민들은 두려워 떨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이런 상승 기세로 점령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첫째는 할례를 행하라(2절) 둘째는 유월절을 지키라(10절)
할례를 행하면 며칠 동안 아무 활동도 할 수 없습니다. 유월절을 지키려면 아무 노동도 할 수 없습니다.
정복 전쟁을 앞두고 용사들을 움직일 수 없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순종과 믿음만을 원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정복 전쟁을 선두에서 지휘할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앞장서서 가나안 땅을 정복할 것입니다.
더 넓고 좋은 땅과 더 좋은 집과 더 튼튼한 몸을 원하는 현대인들에게 먼저 금식하며 하나님께 예배하며 기도하라고 말씀한다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하나님은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불평하며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사람들의 생각대로 결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할례를 행하였고,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려면 오직 믿음과 절대 순종만이 우선이라고 확신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대로 요단을 건넜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데 까지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한번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신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정복 전쟁에 불필요한 것 같은 할례와 유월절 절기를 지킴으로 약속을 더욱 견고하게 실현하시는 하나님의 생각과 방법을 따른 것입니다.
기적과 같은 특별한 것을 볼 수 없어도 하나 만드신 세상에서 주의 신성과 능력과 권능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언제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일에 성공하는 주의 거룩한 백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11월 6일(토) 이 돌들은 무슨 뜻이뇨(여호수아 4:6)
♦ 11월 6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여호수아 4:1∼24 ♦ 묵상을 위한 주제 : 이 돌들은 무슨 뜻이뇨(6절) ♦ 성구 : 이것이 너희 중(中)에 표징(表徵)이 되리라 후일(後日)에 너희 자손(子孫)이 물어 가로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뇨 하거든.
“이 돌들은 무슨 뜻이뇨?(What do these stones mean?)”
역사적인 사건이 거짓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할 때에 증거물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이 “이 돌들”이라고 하겠습니다.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에 들어갔을 때 “사르단” 가까운 “아담읍” 변방에 일어나 쌓이고 염해로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들은 마른 땅으로 요단을 건널 때 요단강 바닥에 있던 돌을 지파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한 개씩 들고 나온 것입니다.
요단강을 마른 땅처럼 건넜다는 역사적 사실을 후대 사람들은 모르기 때문에 이 사건을 기념하려고 돌을 선택했습니다.
이때 요단강을 건넜던 백성들의 수가 대략 200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강을 건널 때까지 제사장들은 요단강 가운데 바닥에 법궤를 매고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겨라”는 말이 있듯이 요단강을 건넜던 사건을 자손대대 가르치고 깨우치려고 돌들을 취하여 기념으로 삼으라고 합니다. 기념비는 하나가 아니라 강바닥과 길갈 두 곳에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비록 요단강을 건너는 경험은 없지만 돌무더기를 보면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는다면 사람의 몸을 생각하면서도 하나님의 기적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 몸의 70%가 물이라고 합니다. 물의 화학 기호는 H₂O 라고 합니다. 수소분자 2개, 산소분자 1개가 결합된 것이 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수소와 산소는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볼 수 없는 수소와 산소가 결합하면 영원히 볼 수 없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전혀 새로운 물이 나타납니다.
수소와 산소는 마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수소와 산소가 결합하여 물이 되면 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신비합니까?
아니면 신비하지 않습니까?
악하고 음란한 세대는 표적을 구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세대는 기념비가 세워졌다는 말씀을 읽기만 하여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합니다. 내 몸의 신비한 구조를 생각만 해도 창조주 하나님의 오묘한 솜씨를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밤 잠에서 일어나 새 날을 맞이하게 하시는 변함없는 사랑과 은혜를 힘입어 놀라운 삶의 여정을 마음껏 누려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홍해를 건널 때는 물이 갈라진 후에 마른 땅처럼 건널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단을 건널 때는 강물은 여전히 거세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건너야 할까요? 먼저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강으로 발을 딛고 들어가야 합니다. 물이 갈라지고 강바닥의 마른 땅이 드러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제사장들은 그 명령에 순종하여 강물에 발을 담글 때 물이 멈추고 갈라졌으며 백성들은 드러난 길로 건너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의 방법과 다르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밀을 추수하는 시기에 요단 강물은 최고의 수위를 기록하는 때라고 합니다. 강둑으로 물이 넘쳐날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그 강물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먼저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여호수아의 지도력이 모세와 같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언약궤를 앞세우고 따라가면 그 길이 순조롭게 열릴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순종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이 임재하신 증거가 되므로 이제부터는 언약궤 중심의 신앙으로 무장해야 할 것입니다.
아직 요단강이 갈라지지 않았으므로 기적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믿음의 발을 내딛게 하신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린다면 결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먼저 준비해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언약궤를 앞세우라(3절)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과 백성 사이의 거리는 이천 규빗(약 1 km)을 유지해야 합니다.
언약궤를 메고 앞서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나의 삶의 길잡이가 될 것을 말합니다.
길잡이가 되신 하나님은 오늘도 그 말씀으로 우리들의 삶을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둘째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5절)
스스로 성결케 하라는 것은 세상과 구별된 삶을 말합니다.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세상과 다른 삶의 방식을 선택해야 합니다. 날마다 나를 성결케 하는 일에 성공하는 것이 신앙생활을 잘 하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을 싫어하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을 기뻐하는 삶이 성결케 하는 비결이라고 하겠습니다.
요단강과 같은 어려움이 내 앞에 닥쳐올 때에도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뒤따라가게 하옵소서. 말씀에 따라 성결하도록 자신을 점검하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게 하옵소서.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며 내 길에 빛이 될 것을 확신하며 언약궤를 짊어진 하나님의 사람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순종(Obedience)(3절 , 6절) 그 뒤를 쫓으라, 앞서 나가라 -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라(신 30:20)
3. 성결(Holiness)(5절) 스스로 성결케 하라 - 마음을 성결케 하라(약 4:8)
여호수아 3:17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온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으로 행하여 요단을 건너니라.
에베소서 3: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 속에 머물러 계시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오늘의 기도
주님과 동행하며 진리의 길을 걷게 하옵소서!
11월 4일(목) 붉은 줄(여호수아 2:18)
♦ 11월 4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여호수아 2:1∼24 ♦ 묵상을 위한 주제 : 붉은 줄(18절) ♦ 성구 :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 내리운 창(窓)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父母)와 형제(兄弟)와 네 아비의 가족(家族)을 다 네 집에 모으라.
“여호수아”의 본래 이름은 “호세아” 이었습니다. “모세”가 정탐꾼들을 보낼 때 ‘호세아’를 ‘여호수아’라고 불렀습니다(민 13:16).
‘여호수아’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구원”입니다. ‘호세아’라는 이름의 뜻은 “구원”입니다.
“붉은 줄”은 정탐꾼들을 달아 내린 줄을 말합니다. 정탐꾼들의 생명을 구한 줄이 “라합(넓다)”과 그 가족들을 구하게 될 생명줄로 사용됩니다.
여리고 성의 기생이었던 ‘라합’은 소문에 의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여정과 홍해를 건넜던 사건을 듣고 이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정복할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정탐꾼과 약속하기를 여리고 성을 공격할 때 창가에 붉은 줄을 드리우면 그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지켜줄 것이라고 합니다.
그 약속에 따라 오늘도 주 예수를 믿으면 누구든지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은혜를 예시한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붉은 줄”을 창문에 매고 가족을 모두 네 집에 모으라!(18절)
여리고 성의 사람들은 기생 라합이 창가에 붉은 줄을 매달고 있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약속을 믿는 라합에게 붉은 줄은 자기 가족들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진실한 표가 됩니다.
비록 비천한 신분이라고 사람들로부터 멸시받았던 라합이었지만 믿음의 눈을 떠서 하나님을 찾았고 알았고 믿었기 때문에 생명의 붉은 줄을 붙잡을 수 있었습니다.
세상이 나를 반대하느냐? 그러면 나도 세상을 반대하겠노라!
초대교회 교부 크리스소톰의 선언입니다.
내가 믿는 예수를 너희들이 반대한다면 나는 오히려 너희를 반대하며 믿음의 길을 선택하겠다는 당당한 고백처럼 날마다 내 삶의 창가에 구원을 상징하는 붉은 줄을 매고 생명을 지키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도 구원의 줄을 세상으로 던져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봅시다.
♪ 찬양 / 생명줄 던져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출애굽기 12:7 그 피로 양을 먹을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 피(샤니)
* 줄(가브) : 소망, 약속
붉은 줄(샤니 가브) / 1. 피로 이루어진 약속 2. 피로 이루어진 소망
첫째, 홍색실(레위기 14:2-7)
레위기 14:4,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명하여 정한 산 새 두마리와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를 가져오게 하고. 레위기 14:6, 다른 새는 산대로 취하여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와 함께 가져다가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 피를 찍어.
둘째, 홍포(출애굽기 28:5-8)
그들의 쓸 것은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이니라. 그들이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공교히 짜서 에봇을 짓되. 그것에 견대 둘을 달아 그 두 끝을 연하게 하고. 에봇 위에 매는 띠는 에봇 짜는 법으로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에봇에 공교히 붙여 짤찌며.
셋째, 성막(출애굽기 26:1)
너는 성막을 만들되 앙장 열 폭을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을 공교히 수 놓아 만들찌니.
*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라합의 붉은 줄 (여호수아 2:15-21)
기생 라합은 여리고 성 정복에 앞서 이스라엘 정탐꾼을 살려 준 이방 여인이었습니다. 성경은 그의 행동을 믿음으로 인정하여 성경 여러 곳에 그의 이름이 등장하는 영광을 부여합니다(히 11장, 약 2장).
라합의 집이 여리고 성벽 위에 세워졌다고 했으니 성문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잠시 들려 술을 마시거나 머물다 가는 주막집이었을 듯 합니다.
라합은 이 주막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의 소식을 자주 들었을 것입니다. 요단강 동쪽의 족속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정복당하고 그 왕들이 어떻게 비참한 최후를 맞았는지 여리고 성 안에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의 첫번째 성이었던 여리고는 강을 건너려고 준비하는 이스라엘 군대를 어떻게 막아야 할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던 중입니다.
여리고의 왕은 이스라엘의 공격을 대비하여 경계를 몇 배나 강화하였고 온 여리고 성 사람들이 바짝 긴장하던 중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여호수아는 그 성을 탐지하고 오라고 두 명의 정탐꾼을 보냈고 그들은 이미 여리고 성으로 들어와 기생 라합의 집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이스라엘의 첩자들이 라합의 집으로 들어간 것을 왕에게 보고하였고, 왕은 군사들을 라합의 집으로 보내어 당장 첩자들을 끌어내라 명령하였습니다.
두 정탐꾼을 지붕 위에 숨겨두었던 라합은 거짓으로 군사들을 따돌리고 두 사람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들통나면 죽을 줄 알면서 자기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 정탐꾼들의 목숨을 살려준 셈입니다.
라합이 정탐꾼들에게 했던 말을 들어봅시다.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라’(수 2:9-11)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이 정탐꾼 앞에서 진술한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 고백은 거짓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고백은 모압 땅에 살던 이방 여인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 앞에서 진술한 고백과 함께 위대한 신앙고백으로 전해집니다. 그리고 이 두 여인은 이스라엘 남자와 결혼하여 택한 백성의 계보에 들어왔고 다윗 왕의 족보에 이름을 올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르는 영광스런 여인들이 되었습니다.
라합이 이방인으로서, 기생의 신분으로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에 대한 정보를 들었을 때 그 정보는 라합에게 구원을 알리는 복음이었습니다. 복음은 어떤 경로를 통해, 누구를 통해 듣든지 듣고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생명을 살리는 복된 소식입니다. 듣고 믿은 라합에게는 구원의 복음이 되었지만 거부하고 경계하는 여리고 사람들에게는 간담을 녹이는 두려움이 되었습니다. 복음이 어떤 이에게는 구원의 기회가 되지만 어떤 이에게는 두려움과 근심의 원인과 심판의 근거가 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 가운데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고후2:14-16) 하였습니다. 동일한 소식이며 동일한 냄새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생명이 되고 어떤 이들에게는 두려움과 죽음이 되는 것이 복음의 특징입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지신 하나님은 약속에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건지신 것은 그들이 애굽을 떠나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백성이 되게 하심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만 섬기고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면 그 약속의 땅에서 자손대대로 살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들을 섬기면 가나안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징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약속을 기준으로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었음은 물론이며,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은 구원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구약시대에도 모두에게 공평한 복음이었습니다. 첫째는,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날 때 함께 따라 나온 많은 잡족들이 있었으니 그들도 이스라엘 백성과 동일한 은혜를 입고 홍해를 건넜으며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고 가나안을 향해 행진하였습니다.
둘째는, 기생 라합의 가족과 같은 가나안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땅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지 말고 모두 진멸하라 하셨습니다. 그만큼 가나안의 사람들이 죄로 타락하여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할 심각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구원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여호수아 9장을 보면, 이스라엘의 소문을 듣고 일찌감치 평화조약을 청했던 기브온 사람들이 그 좋은 예가 됩니다. 기브온은 이스라엘 군대가 주둔한 곳에서 가까운 지역 사람들이었지만 먼 곳에서 온 것처럼 속임수를 썼습니다.
해어진 전대와 찢어져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싣고 발에는 낡아 기운 가죽 신을 신고 낡은 옷을 입었으며, 다 마르고 곰팡이 난 떡을 준비하여 여호수아에게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듣고 심히 먼 곳에서 왔으니 우리가 하나님의 명성과 애굽에서 행하신 일을 들었습니다. 요단 동편에 있는 나라들에게 행하신 모든 일을 들었으므로 우리 부족 사람들이 우리를 당신에게 보내어 항복하고 종으로 받아달라 부탁드리러 왔습니다. 우리가 집을 떠날 때 뜨거운 떡을 준비했는데 이렇게 말랐고 곰팡이가 폈습니다. 우리가 먼 길을 여행하느라 새 포도주 부대도 낡아 찢어지게 되었고 우리의 옷과 신발이 다 해어졌습니다’하며 애원할 때 여호수아가 기브온 사람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조약을 맺었습니다.
삼 일이 지난 후에야 여호수아와 백성들이 그들에게 속은 줄 알았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맺은 언약을 번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을 멸하지 않고 살려주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여호수아가 기브온 사람들에게 왜 거짓말을 했느냐 물었을 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종 모세에게 하신 말씀대로 이 땅을 모두 당신들에게 주셨다는 말이 우리의 귀에게도 분명히 들렸으므로 우리의 생명을 잃을까 심히 두려워 이같이 하였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주실 것을 바라고 이스라엘에 항복하였고 생명을 건졌습니다.
여호수아는 그들을 여호와의 집에서 물을 긷고 나무를 패는 일을 하게 했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이 전에는 하나님과 가장 멀리 있었고 다른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던 자들이었지만 이제 하나님의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봉사하는 일군이 되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잔인한 살륙자가 아니라 공의를 시행하시는 심판관이시며 누구든지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는 그 생명을 구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긍휼과 사랑입니다. 죽을 수 밖에 없던 사람들이 생명을 얻는 것, 이것이 복음입니다.
다시 라합의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라합은 정탐꾼들에게 ‘내가 당신들에게 선을 베풀었으니 당신들도 나에게 선을 베풀라. 나와 내 부모형제들을 죽음에서 건지겠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나에게 진실한 증표를 달라’고 했다. 정탐꾼들이 라합에게 구원의 증표를 남겨주었습니다. ‘우리를 달아내리운 창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비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서 거리로 가면 그 피가 그의 머리로 가고 우리는 허물이 없을 것이다. 누구든지 너와 함께 집에 있는 자에게 손을 대면 그 피는 우리의 머리로 돌아오리라. 이 일을 아무에게도 누설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이 일이 누설되면 너와 우리의 맹세는 무효가 된다.’
이 말을 들은 라합의 행동을 봅시다. 정탐꾼들을 안전하게 내보낸 다음 라합은 곧 붉은 줄을 창문에 달았습니다. 우선 다른 일부터 마무리하고 시간이 되면 나중에 생각날 때 달아야겠다 하지 않고 약속을 받았을 때 즉시 그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 일보다 급한 일이 없었고, 붉은 줄은 자신과 온 가족들 살리는 생명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라합이 어떤 일을 했는지 우리는 충분히 짐작합니다. 부모형제와 그 집 가족들에게 급히 연락하여 이 사실을 알리고 ‘모두 우리 집으로 모여라 그래야 산다’ 하지 않았겠습니까? 여리고 성이 언제 무너질지 알 수 없는 시점에 꾸물거리고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습니다. 가족들이 다 모였을 때 라합은 다시 한 번 정탐꾼들이 남긴 말을 반복하여 강조하고 또 강조합니다. ‘절대로 이 집 문 밖으로 나가지 말고 여기서 기다리라. 그래야 산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셨을 때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노아의 가족들이 그 심판으로부터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길은 방주 안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에 순종하였을 뿐 아니라 그 안으로 들어가라는 명령도 순종하였습니다. 사람들의 조롱과 비웃음을 참아가며 오랜 세월 거대한 방주를 지었던 노아의 가족들이 그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하늘에서 벼락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습니까? 그래야 비웃던 사람들 앞에서 노아의 체면이 서는데 그날도 그 다음 날도 세상은 여전히 변함없고 하늘은 푸르고 아무 일이 없었습니다. 방주 밖에 있던 사람들이 노아의 가족들을 보며 얼마나 비웃고 조롱했을까요? 방주 안에 있던 노아의 자녀들과 자부들은 이런 상황에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우리는 그들의 마음을 알 수 없지만 아마 엄청난 조선 공사와 그 배를 가득 채워야 할 식량과 물자를 부지런히 옮겼고, 거기다 각종 짐승들을 방주 안으로 안내하느라 숨 쉴틈이 없다가 방주에 들어간 후에야 비로소 평안을 되찾았을 것입니다. 방주에 들어간 순간 갑자기 폭우가 쏟아진 것이 아니라 칠 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였습니다(창7:10). 만일 노아의 가족들이 그 칠 일을 견디지 못하고 문 밖으로 뛰쳐나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홍수 심판 때 구원은 오직 방주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은혜로 주어졌습니다.
출애굽기 12장을 보면, 애굽의 바로가 끝까지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보내주지 않을 때 결국 마지막 열 번째 장자 죽음의 재앙을 만났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구원하시기 위해 모세에게 일러주신 구원의 증표가 있으니 어린 양의 피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날 밤에 흠이 없고 일 년 된 수컷 어린 양이나 염소를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집에 들어가 있으라 하셨습니다. 그 밤에 이스라엘 자손들은 양을 잡은 그 집에 모여 고기와 발효되지 않은 빵과 쓴나물을 먹으며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의 명을 따라 어린 양의 피가 발라진 집 안에 모여 유월절 식사를 하는 동안 밖에서는 무서운 재앙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바로에게 경고하신 것처럼 그 밤에 애굽에 있는 모든 집에서 출생한 장자들과 짐승들의 첫 새끼들이 모두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집에 있던 히브리인들은 그 재앙으로부터 면제를 받았습니다. 문에 바른 그 피를 볼 때에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집을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이때에 모세가 백성들에게 엄하게 경고한 것이 있습니다.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설주의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로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니니라’
하나님의 은혜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선을 행하였고 의롭기 때문에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주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라합이 정탐꾼을 살려준 댓가로 온 가족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지만 그 구원은 라합의 선행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를 신뢰하고 붉은 줄이 달린 집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정탐꾼들을 살려보냈으니 이스라엘 군대가 여리고를 정복하면 나와 우리 가족은 모두 살려준다고 했다’ 자랑하고 다닐 수 없었습니다. 정탐꾼들이 신신당부한 것처럼 이 사실을 누설하지 말고 문 밖으로 나오지 말고 집 안에 있어야 했습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이스라엘 군대가 그 성으로 들어갈 때 여호수아는 그 성을 정탐했던 두 사람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 기생의 집에 들어가서 너희가 그 여인에게 맹세한 대로 그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라’ 정탐꾼들은 명령을 따라 라합의 집에 들어가 그 가족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여 성 밖으로 이끌어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심판의 날에 자기 백성들을 구별하여 구원하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선배들을 열거할 때 여리고 성의 라합을 믿음의 여인으로 추천합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히 11:31) 라합은 정탐꾼들을 보낸 다음 곧바로 붉은 줄을 창문에 매었습니다. 라합은 즉각적인 순종으로 그의 믿음을 증명하였고 온 가족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 빌립보 성 감옥의 간수가 바울에게 이 복음을 듣고 초청에 순종하였습니다. 바울과 실라를 자기 집으로 데려다가 매맞은 상처를 씻겨주고 온 가족들과 그 집에 있는 사람들이 복음을 들었다. 그리고 온 집안이 세례를 받았으며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한 사람 간수의 믿음과 순종이 온 가족에게 구원의 기회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 안에 있을 때 효력이 있습니다. 구원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다(행 4:12). 예수 안에 있는 백성은 영생을 얻습니다. 노아의 가족이 방주 안에 있을 때 구원을 얻었고, 애굽에서 고통 중에 있던 이스라엘 자손이 어린 양의 피가 칠해진 그 집안에 있을 때 죽음을 면하고, 이방의 여인 라합이 붉은 줄이 달린 집안에 있을 때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얻은 것처럼 세상의 마지막 심판의 날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바라보고 예수 안에 거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건짐을 받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요 15:5,6)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인용하여 그의 편지들 가운데‘주 안에서’라는 말을 아주 많이 반복합니다. ‘주 안에서’는 바울 신학의 중요한 주제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 2)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우리가 어떻게 예수 안에 있게 됩니까? 사도 요한은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5, 16)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 나의 구원자로 믿고 시인하십니까? 그렇다면 주님이 나의 안에 계시며 내가 주님 안에 사는 사람입니다. 언제나 그 믿음으로 주님과 하나가 되시기 바랍니다. 라합의 붉은 줄이 그를 죽음에서 건지는 언약의 보증이 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구원의 보증이십니다.
라합은 죄인이었는가? 그렇다. 그녀는 분명 죄인이었다. 그러나 죄인이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바요
복음이다. 성경은 거듭 그녀를 ‘기생’ 라합이라 말한다(수 2:1, 6:25, 히 11:31, 약 2:25). 기생은 천한 죄인의
신분이다. 그러나 그녀는 의롭다 함을 받고 이스라엘의 일부로 여겨지게 됐으며, 놀랍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참여했다(마
1:5). 그녀는 결국 유다 지파의 한 사람과 결혼을 하여 보아스를 낳았으며, 그는 매우 경건한 사람이었다.
그러면 무엇이 그를 이렇게 바꿔 놓았는가?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믿음이었다. 사도 베드로는 이 믿음을 보배로운 믿음이라
했다. 믿음이 사람의 신분을 이다지도 크게 바꿀 수 있다는 말인가? 참으로 그러하다. 그녀는 믿었기에 정탐들을 숨기고 보호하여
평안히 보냈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하신 일을 전해 들었고 믿었다. 그리고 믿음대로 행했다. 또 그녀는 정탐들이 말한 대로
붉은 줄을 성벽에 달아 내렸다. 이 모든 것이 그들의 말을 믿은 증거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해서 의롭다 함을 받았는가? 원칙상 라합과 같다. 우리는 죄인인가? 분명 죄인이다. 그런데 우리도 어느날
하나님의 하신 일을 들었다. 그분이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셨고, 그 독생자께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셨으며, 승천하시고 보좌에 앉으셨다가 이제 다시 오셔서 죄로 가득한 이 땅을 심판하시고 불로 태워
멸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의 권력과 부와 명예를 추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기다린다. 우리는 라합이 붉은 줄을 달아 내린 것으로 표징된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한다. 우리는 그 피가 우리 모든 죄를
씻으셨음을 믿는다. 우리는 세상 편에 서 있지 않고 하나님 편에 서 있다. 여러분에게 이것이 있다면 당시 라합이 가진 믿음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믿음을 가졌다. 이 믿음으로 우리는 의롭게 되며 우리 신분이 바뀐다. 하나님 나라 백성 가운데 참여한 것이다.
라합은 정탐들이 떠난 후 붉은 줄을 달아내렸고, 그 집은 약속대로 구원을 받았다. 이 세상이 심판받고 멸망할 때 어린 양의
피가 있는 사람들이 구원되는 것과 같다. 여호수아 2장에서 우리는 라합의 믿음을 보며 가나안은 결국 믿음 있는 사람들의 동역으로
정복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라합이 한 일
1. 그녀는 정탐들을 평안히 영접했다(히 11:31).
적진에 들어간 사람들을 평안하게 영접하는 것은 매우 선한 봉사다. 이
나라에도 처음 선교사들이 들어왔을 때 그들을 영접한 가정들이 있었다. 그때 그러한 행동은 매우 위험한 것이었다.
2. 그녀는 그들에게 큰 용기를 줬다.
그녀는 그들을 어떻게 격려할 줄을 알았다. “우리는 이 땅을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줄을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2:9)”. 또 그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실 때 홍해 물을 말리신 일과 두 왕 곧 시혼과 옥을 멸망시킨 일을 들었다고 했다. 이것은 가나안
정복을 목전에 둔 이스라엘 군에게 큰 용기와 격려를 주는 말이었다.
3. 그녀는 자신 뿐 아니라 자신의 권속의 구원까지 생각했다.
그녀는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고 다만 자기의 가족을 구해달라고 요청했다. 가족의 구원 문제를 염두에 뒀는데, 이 또한 하나님을 매우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라합이 할 일
1. 창 밖에 붉은 줄을 달아 내려야 했다.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라합의 붉은 줄은 그 색깔이
희생제물을 통하여 얻는 안전을 말한다(스코필드 관주). 이러한 라합의 행동도 순종에 속한다. 그는 자기 나름대로 생각해서 구원의
방법을 취한 것이 아니라 말한대로 따른 것이다.
이 붉은 줄은 중요하고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정탐꾼들이 지시한 바는 유월절 행사시 양의 피를 문 좌우설주에 바른 것을 염두에 뒀을 것이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는 사실을 선명히 보여주고 있는 그림이다.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단다는 것은 신앙에 대한 공개 표명이다. 그분이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몸을
찢기우시고 피흘리시는 고난 당함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도 그분의 이름을 부르고 그분을 믿는 신앙고백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집 안에 있는 서적들이나 TV, 사이버 공간에도 붉은 줄이 매달려 있어야 한다. 가정의 모든 가구나 집안의
붙여놓은 그림이나 액자들에도 다 붉은 줄이 있어야 한다. 즉 그리스도의 피가 발라져 있어야 한다. 붉은 줄을 매다는 일은 우리
영혼을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리시는 주님의 모습을 잊지 않는다는 표시다.
2. 가족을 다 모아 집에 머물게 하고 창문을 닫으며 집안 사람들이 거리에 나가 바깥 사람들과 섞이지 않게 해야 한다.
섞여
있으면 그들 가운데 구분이 없으므로 함께 멸망당한다. 이는 구속받은 사람들이 분별돼야 함을 의미한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불의에서 떠나야 하며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아야 한다. 믿는 이들은
분별돼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말아야 하고 다른 사람의 죄에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
3. 비밀을 누설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가 만일 입을 열어 이 일을 공개하면
그녀는 이스라엘에 의해서가 아니라 가나안왕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 이는 다른 사람을 위해 선행을 베풀 뿐
아니라 자신을 지키는 법도 배워야 한다.
4. 2:21에서 라합이 한 말은 매우 귀한 고백이다.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이것이 믿은 자들의 선한 고백이다.
믿음은 이와 같이 순종을 산출한다. 얼마나 달콤한 고백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말이다.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나는 이
시대에도 이런 믿음의 말들이 많이 들려지기를 고대한다.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이는 다 순종에 속한 아름다운 표현들이다.
이런 말들이 상용되는 교회는 아름다운 교회다.
11월 3일(수) 묵상하라(여호수아 1:8)
♦ 11월 3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여호수아 1:1∼18 ♦ 묵상을 위한 주제 : 묵상하라(8절) ♦ 성구 : 이 율법책(律法冊)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晝夜)로 그것을 묵상(黙想)하여 그 가운데 기록(記錄)한대로 다 지켜 행(行)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平坦)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亨通)하리라.
“묵상하라(meditate)” ‘묵상(黙想)’이란 말은 마치 영어 단어에서 “약(medicine)”과 같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약’이란 “봉지” 또는 “병”에 담아 사용합니다.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봉지를 뜯어서 먹어야 하고 아니면 병에 든 약을 마셔야만 내 몸에 효력을 얻게 됩니다. 만일 세상에서 가장 좋은 약을 갖고 있어도 두고 보기만하면 내게는 아무런 효험이 없습니다.
성경(聖經)은 자동차 뒷면에 얹어 놓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매일 그 책을 열어 내 눈으로 읽고 마음에 새기고 묵상할 때 그 말씀에 의한 생명과 힘을 얻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에게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여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라”고 강조합니다.
어떻게 묵상할까요?
첫째는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 Lectio divina)
‘렉시오 디비나’는 “독서(讀書)” 라는 명사 “렉시오(Lectio)”와 “신적(神的)”이란 형용가 “디비나(divina)”로 ‘디비나’는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聖經)”을 말합니다.
거룩한 독서는 믿음을 전제로 하는 성경 읽기를 말합니다. 다른 말로 그리스도교적 독서이며 믿음 안에서 또한 믿음의 증진을 위한 독서라고 하겠습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말씀과 친숙해지고, 말씀에 맛들이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려는 독서의 한 가지 방법을 말합니다.
둘째는 암기하라(메모리테르, memoriter)
‘메모리테르’는 라틴어로 영어로는 기억하다(memorize)는 뜻입니다.
암기하라는 것은 무조건 외우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독서를 실천한 후에 읽은 말씀 중에서 한 구절 또는 여러 구절을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되새김질을 하는 동물은 들에 나가 풀을 뜯어 먹습니다. 그리고 밤에는 뜯어 먹은 풀을 되새기며 아주 잘게 씹어서 완벽하게 소화시킵니다.
암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주 되새기며 내 삶에 적용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메모리테르(memoriter)는 라틴어로 영어로 “기억하다(memorize)”라고 번역합니다. 기억한다는 것은 다시 나타내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메모리테르는 “정확한 기억으로 눈앞에 보이게 하다, 또는 제시하다, 드러내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셨다면 그 말씀을 반복하여 읽고 마음에 새긴 후에 생활의 현장에서 무슨 일을 만나든지 강하고 담대하게 그 말씀으로 극복하고 물리치고 이기는 신앙의 자세를 말합니다.
팬데믹 세상에서 창궐하는 전염병에 시달릴지라도 현대 의학의 도움을 받아 면연력을 갖고 질병과 싸워 이김으로 말씀을 내 삶에 적용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도 강하고 담대하여 온갖 시련과 유혹의 싸움터에서 십자가 군병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가나안 땅은 가나안 족속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그 땅을 정복하려면 반드시 전쟁을 해야 합니다. 전쟁에 나가는 용사들에게 강한 훈련과 체력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율법책을 묵상하라고 하셨습니다. 왜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까? 율법책을 묵상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까?
여호수아 1:1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여호수아 24:29
이 일 후에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일백 십세에 죽으매.
여호수아 1:2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여호수아 1:3-4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
디모데후서 2:15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모세 사후 유대인들의 지도자로 본명은 호세아로 눈의 아들로 알려진 인물이다. 에브라임 지파의 지도자로 야훼가 모세의 백성들에게 벌을 내릴 때 유다 지파 족장 갈렙과 함께 긍정적 주장을 하여 벌을 피한 유일한 사람이다.
모세가 죽은 후 그의 후계자가 되어 요르단 강을 건너 여리고, 아이, 예루살렘, 헤브론 등 여러 성을 정복해 가나안 땅을 정복하였다. 임종시 하나님을 경외할 것을 부탁하고 110세로 죽었다.
여호수아는 원래 이름이 호세아로 예수아라는 히브리식 이름의 헬라어(고대그리스어)로는 이에수스 즉 예수라고 부른다.
여호수아는 약서아(若蘇厄書)라는 한자어의 Yuēshūyà(쥬에쓔야)라는 원래발음의 한국어식 표기다.
여호수아의 영어 이름은 Joshua이다.
* 자료출처 / 위키 백과에서
침공→ 전쟁→ 승리라는 간단한 패턴이 여러 번 반복되며 야전, 공성전, 기습 등의 다양한 전쟁 양상이 나오기 때문에 비기독교인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15장부터는 땅 분배 등 부동산 이야기가 전개된다.
대다수의 학자들은 여호수아서가 초기 이스라엘에 대한 역사적 가치가 거의 없으며 훨씬 후기 시대를 반영한다는 데 동의한다.
여호수아는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 여호수아의 본래 이름은 ‘구원’이라는 뜻을 가진 호세아인데 모세가 이름을 바꾸어줍니다(민 13:8, 16). 여호수아를
헬라어로 번역하면 ‘예수’가 됩니다. 구약의 예수가 바로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는 그 이름대로 여호와께서 가나안 정복을
성취해주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집트로부터의 구원을 완성합니다.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 5권의 책을 오경이라 부르는데, 오경이
‘여호와의 약속’의 책이라면 여호수아는 그 ‘약속의 성취’의 책입니다. 여호수아서는 여호와는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분임을
가르쳐줍니다.
여호수아서는 오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모세가 홍해를 갈랐다면,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가릅니다. 유월절 문설주의 피로 장자들이 죽음을 면했다면,
라합 집의 붉은줄은 그 집안의 사람들을 살립니다. 12명의 정탐군중 2명이 좋은 보고를 했다면, 여호수아는 2명의 정탐군을 보내
좋은 보고를 받습니다.
모세는 이집트에서 민족을 이끌기 전, 불붙는 가시떨기나무에서 여호와의 사자를 만났다면, 여호수아는 가나안
전쟁을 시작하기 전 여호와의 군대장관을 만납니다.
모세는 출애굽전에 유월절을 보내며, 여호수아는 정복 전에 유월절 절기를
보냅니다. 모세는 10재앙과 하나님이 개인적으로 보여주신 3가지 기사를 합해 13가지 표징을 행하며, 여호수아는 첫 정복전에
여리고 성을 총 13번 돕니다.
광야에서 백성들이 불순종 했을 때 모세가 중보기도를 하듯, 여호수아도 아이 전쟁의 실패 후
이스라엘을 위해 중보기도를 합니다. 여호수아는 제 2의 모세로 활약합니다. 오경의 여호와가 창조주이시기에, 여호수아서에서 여호와는
원하는 국가에게 땅을 줄 수 있는 권리가 있으신 것입니다.
여호수아서는 역사서에
속하며,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여호와의 일하심을 보여주기 때문에 신학적역사라고도 불립니다. 시대적 배경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의견이
분분하나, 대략 주전 15세기말 내지 13세기로 보는 두 견해가 주류를 이룹니다. 마지막에 여호수아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으므로,
적어도 여호수아가 죽은 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책이 완성되었다고 봅니다.
바알신을 섬기는 가나안
백성들의 음란한 문화는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여호수아서에서 가나안 땅 백성들을 진멸하라는 명령은 그들의 죄에
대해 심판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룩함을 유지하려는 두 가지 목적을 모두 달성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여호와께서 직접
진두지휘하시고,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행해지는 전쟁을 ‘거룩한 전쟁’(Holy War) 또는 ‘여호와의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나타난 것도 이 전쟁이 여호와께 속한 것임을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제사장이 언약궤를 메고 여리고성을 도는
것도 이 전쟁이 단순한 국가간의 침략이 아닌 ‘여호와의 전쟁’임을 드러낸 것입니다. 동시에 이 전쟁은 돌이킬 수 없는 가나안의
죄에 대한 심판이며 하나님의 공의를 만천하에 선포하는 전쟁입니다. 그러기에 전쟁의 승리 비결이 군사력이나 무기에 있지 않고,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여부’에 달려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쟁에 임한 리더인 여호수아에게 군사전략이 아니라 ‘율법책을
입에서 떠나지 말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고 그 안에 기록된 것을 그대로 다 지켜 행하라’고 요구하십니다(수 1:8). 율법을
지키면 모세와 함께 하셨던 것처럼 여호수아와도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수아서는 바로 이것이 전쟁의 승리 비결임을
가르쳐주기 위해 쓰여진 것입니다.
여호수아서는 1-12장의
정복, 13-21장의 분배, 22-24장의 여호수아의 고별사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정복부분에서는 여리고 전쟁을
비롯하여 아이성과의 전쟁, 기브온 거민의 사기극, 마지막에는 점령한 31개 성읍명단이 나옵니다. 분배부분에서는 12지파 모두에게
분배를 마치면서 ‘여호와께서 주리라 맹세하신 온 땅을 다 주셨고 약속하신 말씀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했다’라고 결론을
내립니다(21:41-43). 여호수아의 고별사 부분의 핵심은 ‘여호와만 섬기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경건한 리더십을
보여주는 훌륭한 모델입니다. 하나님께서 전쟁 후에 이스라엘에게 주신 안식은, 신약에서는 우리가 들어갈 영원한 안식과
연결됩니다(히 4:8-9). 우리모두는 지금 영적 전쟁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 본받아 앞으로 갔지만’,
현대의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을 본받아’ 믿음과 순종을 통해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그날까지 영적 전쟁에서 열심히
싸워야겠습니다(엡 6). 여호수아서를 읽고 힘 내서 승리하는 삶 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