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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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피

그리스도의 피(Sanguis Christi, Blood of Christ)
십자가 상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흘렸던 육체의 피를 말합니다.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인류 구원은 바로 이 피를 흘림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보혈(寶血) 또는 보배로운 피라고도 한다.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 등에서는 성찬례 때 사용하는 축성된 포도주는 성혈(聖血)이라고 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상에서 흘렸던 피와 동일시하는 신학적 용어라고 하겠습니다.

왜 예수의 피가 보배로운 피 입니까?

베드로전서 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로 한 것이니라.
For you know that it was not with perishable things such as silver or gold that you were redeemed from the empty way of life handed down to you from your forefathers.
but with the precious blood of Christ, a lamb without blemish or defect.

예수의 피로 우리가 구속함을 얻었습니다.
은이나 금으로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의 피의 능력을 믿는 자는 모든 죄를 깨끗이 씻음 받습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느니라”(엡 1:7).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롬 5:9)

예수의 피는 죄인을 의인으로 만들어 줍니다.
의의 옷을 입혀 주십니다.
예수의 피는 영원한 언약의 피입니다.

“이것은 언약의 피니라”(마 26:28, 막 14:24, 눅 22:20)

언약의 피는 살아 있는 피요.
말하는 피요.
의사를 전달하는 피 입니다.
믿는 자들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는 놀라운 피 입니다.

“그의 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시고”(계 1:5).

예수의 피는 죄에서 해방하시고, 사망에서 해방하시고, 사단에서 해방하시고, 모든 무거운 짐에서 해방하시고, 모든 억압과 눌림에서 해방해 주십니다.

예수의 피는 참된 음료입니다.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55).

그래서 주님께서 “내 피를 마시라”(마 26:27-28)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고 하셨습니다(요 6:54).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한다고 하셨습니다(요 5:56).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 2:13)

예수의 피가 하나님과 가까워지게 합니다.
동행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벗이 되게 합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이룹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담을 십자가상에서 흘리신 피로 헐어 버리셨습니다.
믿음으로 언제나 하나님께 나가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기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피가 우리를 항상 깨끗케 하십니다.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 7:14)

죄인이 깨끗케 되는 것은 오직 예수의 피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의 피는 성소에 들어 갈 담력을 주십니다.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 10:19-20).

예수의 보배로운 피가 우리를 성화시킵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히 13:12).

인간이 거룩하게 되는 것은 예수 피의 공로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의 피는 승리케 합니다.
“저를 이기었으니”(계 12:11).

예수의 피는 능력이 있습니다.
비난도, 시기도, 마귀의 공격도 이기게 합니다. 
예수님의 피는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복이 됩니다.
믿고 회개하는 자들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

예수 보혈을 믿고, 회개하기만 하면, 모든 죄를 기억도 안하십니다.
죄로 마구 낙서가 된 산만하고, 추한 마음이 깨끗한 백지가 됩니다.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치 아니하리라”(렘 31:34).

죄를 영원히 지워 버리십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시 103:12).

죄를 등 뒤에 던져 버리셨다고 하셨습니다.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사 38:17).

죄를 도말해 버리십니다.
“내가 네 허물을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하였으니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사 44:22).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사 43:25).
도말한다는 말은 지워 버린다는 말입니다.

죄를 깊은 바다 속에 던져 버리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미 7:18-19).

죄를 발견치도 못하게 하십니다.
“나 여호와가 사할 것임이니라”(렘 50:20).

죄를 가려 주십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

예수의 보혈의 피에 적심을 받은 사름들은 반드시 잘됩니다.
흥합니다.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심판과 저주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보혈을 믿고, 회개하며, 기도하는 자들의 모든 죄를 넉넉히 용서해 주십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모든 죄는 사함 받았습니다.
보배로운 예수님의 피의 능력은 영원한 능력입니다.
예수 피의 능력으로 새 힘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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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금(純金)과 정금(精金)은 ‘다른 금속이 섞이지 아니한 순수한 금’을 의미하는 같은 말이다.
성경에선 믿음의 순도를 비유할 때 종종 사용된다. 또 ‘지혜’와 ‘귀하고 소중한 것’ 등을 상징한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정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 중 하나인 금은 처음엔 광석에 불과하지만 온도가 1000도 이상의 용광로에서 40일 동안 세 번 살아남으면 순금이 된다.
무엇보다 온도가 제일 중요하다.
약간 높거나 낮아도 안 된다.
다른 액체가 함께 녹아 불순물을 걷어낼 수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제련사의 사전에는 ‘적당히’라는 말이 없다.
마지막 불순물이 제거되고 금의 표면이 장력을 일으켜 판판하게 퍼진다.
그때 금의 표면 위에 제련사의 얼굴이 거울보다 더 또렷하게 비친다.
마침내 순금이 탄생하는 시간이다.

순금을 만들려면 자신의 얼굴이 거울처럼 보일 때까지 연단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특히 금을 만드는 사람들은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신뢰, 사랑을 생명보다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세상의 어떤 정금이나 권력도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내 영혼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드러나야 한다.
용광로에서 노폐물이 제거되어 정금이 되듯 고통은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죄악의 찌꺼기들을 제거하고 거룩한 사람을 만든다.
한번 순금이 된 뒤에는 다시 광석으로 돌아가지 않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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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의 유명한 사회 운동가였던 헬더 까마라 주교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ad"내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빵을 나눠주면 사람들은 나를 성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내가 '이 사람들이 왜 이렇게 가난하냐?'고 물으면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합니다."

이런 말도 있다.
"남들과 대화할 때 성경 구절을 많이 인용하거나 '성경적'이라는 표현을 많이 쓰면 신앙 좋은 사람으로 불립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실천하면 또라이 취급 받습니다." 이건 누구 말이냐. 내 말이다.

       1 The Year of Living Biblically
▲  종교 체험기인 <미친 척하고 성경 말씀대로 살아본 1년>( The Year of Living Biblically)
미국의 대형 책방 '반스앤노블'의 유머 코너에 꽂혀 있었다.


생뚱한 소리는 아니다.
미국의 대형 책방 '반스앤노블'(Barnes and Noble)에서 본 <미친 척하고 성경 말씀대로 살아본 1년>(The Year of Living Biblically)가 유머 코너에 꽂혀 있기에 하는 말이다.

저자 A. J. 제이콥스가 글을 워낙 유머러스하게 쓴 탓도 있지만, 성경에 나오는 내용을 글자 그대로 똑같이 실천에 옮겨보겠다는 발상 자체가 웃기는 일이기에 종교 코너가 아니라 유머 코너에 배치됐을 게다.

오늘날 성경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책 제목처럼 '미친 척'하지 않으면 실천하기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을 유머 코너에서 한 번 더 깨달았다.

성경 이야기를 재미있게 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경건함과 엄숙함과 진지함이 문장마다 아로새겨 있어야만 할 것 같다.
하지만 <에스콰이어>라는 남성 패션 잡지의 편집자인 저자에게 경건, 엄숙, 진지 같은 말들은 애당초 거리가 먼 단어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건 그만의 글맵시를 죽이는 일이다.

수염을 길게 기르고, 구약성경 시대 목자들의 복장을 하고, 샌들을 신고, 한 손에는 십계명 돌판(번역서에는 성경을 들고 있다)과 다른 손에는 스타벅스 커피를 든 채(번역서에는 양 한 마리를 이끌고) 맨해튼 일대를 싸돌아다니는 저자의 모습을 담은 책 표지부터 재미있고, 본문 곳곳에서 톡톡 튀어나오는 기발한 장면들과 산뜻한 표현들도 재미있다.

성경 완독, 100여 권 도서 참고, 자문위원 구성 등 치밀한 준비

글맛도 글맛이지만 사뭇 진지한 내용이 돋보인다. 재미있다고 해서 새털처럼 가볍기만 하면 쓸모가 별로 없다.
제이콥스는 '무늬만' 유대인일 뿐 사실은 '불가지론자'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겠다는 태도다.
그런데도 그는 성경대로 실천하는 생활을 무척이나 진지하고 성실하게 진행했다.

준비 단계부터 그랬다.
그는 16권의 영어 성경을 구입해서 한 달 동안 하루 5시간씩 집중적으로 읽었다.
앞으로 실천해야 할 계율, 지침, 조언, 금언 들을 일일이 찾아서 컴퓨터에 입력했다.
그렇게 정리한 실천 목록은 700개가 넘었다.

원칙이 하나 있었다.
성경 구절을 임의로 취사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다고 하는 미국의 기독교인들 태반이 자기가 내세우는 명분에 맞는 성경 말씀만 골라내서 지키고 있었다.
보수든 진보든 마찬가지였다.

그는 제대로 해보고 싶었다. 그걸 통해 위대한 것, 영원한 것을 발견해 보고 싶었다. 구약성경에만 치우치지 않으려 했던 것도 그래서다.

그는 또 성경의 진의(眞意)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100권이 넘는 참고 도서를 읽었다. 무신론 주창자인 리처드 도킨슨, 기존의 성경 해석을 전면으로 뒤집은 존 셸비 스퐁,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 케고르, 대표적인 기독교 변증가 C. S. 루이스, 이밖에 폴 틸리히, 짐 월리스 등의 책들을 두루 섭렵했다. 다양한 신학 성향을 가진 영적 자문위원단까지 구성해서, 혼자 힘으로 풀기 어려운 암초를 만날 때마다 도움을 구했다.

자, 모든 준비가 끝났다. 드디어 순례의 길을 떠난다.

생리하는 아내는 불결한 여자

A J
▲  A. J. 제이콥스는 수염을 길게 기르고, 구약성경 시대 목자들의 복장을 하고, 샌들을 신고, 한 손에는 십계명 돌판과 다른 손에는 지팡이를 든 채 맨해튼 일대를 싸돌아다녔다.



첫날부터 일이 어이없이 꼬였다.

영적 순례를 시작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으려다가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라"는 레위기 19장 이야기 앞에서 멈췄다. 이걸 지키려면 폴리에스테르와 면 혼방 티셔츠부터 벗어야 했다. 그는 혼방 섬유 감별사까지 불러서 자기 옷가지들을 샅샅이 조사하게 했다. 감별사는 제이콥스가 봉급의 3분의 1이나 들여서 산 비싼 단벌 양복의 여기저기를 포크 비슷한 도구로 마구 쑤셔댔다. 그러더니 목깃 안쪽에 댄 흰 천을 의심했다. 혼방인지 아닌지 조사하려면 그걸 연구소에 보내야 한다고 했다.

시트콤 수준의 이런 장면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아내 줄리가 생리를 시작하자 다른 성경 구절이 그를 괴롭혔다. 창세기 말씀을 따라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해" 한동안 땀 흘리며 열심히 해왔던 성적(性的) 노동을 잠시 중단해야 했다. 게다가 일주일 동안은 '불결한' 아내를 만지기는커녕 가까이해서도 안 된다.

제이콥스는 줄리가 한번 앉았던 의자에는 절대 앉지 않았고, 집 열쇠를 건넬 때도 30센티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고 그녀의 손 위에 떨어뜨렸다. 아내는 문둥병 환자(요즘에는 '나병'이라고 순화했다)가 된 듯한 불쾌감에 휘감겼다.

자녀 교육도 꼬였다. 구약성경 잠언에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는 말이 있다. 또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면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라는 말도 있다. 자녀를 두들겨 패서라도 똑바로 키우라는 얘기가 여러 군데에서 튀어나왔다. 곤혹스러웠다.

실제로 미국의 일부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은 지금도 막대기나 채찍으로 자녀를 때려서 키우는 것을 성경적인 훈육법이라고 믿고 있다.

고심에 고민을 거듭한 저자는 결국 스티로폼으로 된 장난감 방망이를 샀다. 아이의 장난이 극에 달하자 방망이로 아이의 엉덩이를 때렸다. 한 번도 아이를 체벌한 적이 없었는데, 성경 구절 앞에서 지금까지의 원칙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주체하기 힘든 감정이 몰려왔다. 너무 고통스러웠다. 근데 아이가 동요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신이 나서 장난감 방망이로 아빠의 엉덩이를 마구 때리면서 웃어젖혔다. 저자의 체벌 시도는 무위로 끝났다.

성경의 역사가 길다 보니 별의별 희귀한 얘기가 다 나온다. 그걸 글자 그대로 지키면서 살려니까 온갖 해괴망측한 체험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기이한 일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삶에 긍정적인 변화를 주는 일들도 적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 위해 수입의 10% 기부

제이콥스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십일조를 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건 남편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남편보다 남 돕는 손이 큰 아내도 수입의 10%나 기부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둘은 꼼수를 생각해 내기 시작했다. "저작권 대행사에 지불하는 중개 수수료를 십일조로 간주할까?" "세금을 제하고 난 수입의 10%로 해도 되겠지?" 양심이 찔렸다. 이런 식으로 따지는 건 아무래도 '성경적'이지 않은 것 같았다.

제이콥스는 몇 군데 구호 단체를 골라서 그곳에 수입의 2%를 기부했다. 감사 메일을 받고 보니 기분이 흐뭇해졌다. 신의 존재를 확신하지는 않지만, 돈을 기부하면서 하나님의 기쁨을 느낀 것 같았다. 평생 했어야 할 일을 이제야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기쁨에는 고통이 수반되기 마련. 아직 8%를 더 기부해야 한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고 일곱째 되는 날 쉬었다. 이에 맞춰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일곱 번째 되는 해를 '안식년'으로 지키도록 했다. 이 해에는 농사를 짓지 않아 땅도 쉬어야 했고, 이웃이 진 빚을 청산해 주어야 했다.

특히 안식년을 일곱 번 지난 그 다음 해인 50년이 되는 해를 '희년(禧年)'이라고 불렀다. 우리말로 하자면 '기쁨의 해'이다. 희년에는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해방을 선포해야 했다. 저마다 제 소유지를 찾아 자기 지파에게로 돌아가야 했다. 농사를 지어서도 안 되었다. 무엇을 사고 팔 때 이웃을 억울하게 해서도 안 되었다. 세나 이자도 금지되었다. 빚도 조건 없이 탕감해주어야 했다. 식객과 종으로 타향으로 팔려나간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려보내야 했다.

제이콥스는 '대희년(大禧年) 유에스에이 네트워크'라는 단체에 자원봉사자로 들어갔다. 선진국들이 제3세계의 채무를 탕감해주라고 촉구하는 엽서를 국회의원과 정부 각료들에게 보내는 일을 도왔다. 그 일로 모처럼 줄리의 칭찬도 받았다.

제이콥스가 미국 근본주의 기독교의 상징 제리 폴웰 목사의 교회를 방문했을 때다(당시 그는 살아 있었다). 마침 교회 창립 50주년 기념일이었다. 제리 폴웰은 교회 창립 50년과 성경의 대희년을 접목하는 설교를 했다. 그는 린치버그에 있는 20만의 다른 영혼들을 누르고 승리하라고 설교했다. 제이콥스가 보기에 교회 확장과 대희년을 연결하는 제리 폴웰 목사의 설교는 성경의 진의(眞意)에 안 맞았다.

극과 극에 있는 근본주의자들과의 만남

팻 로버트슨이나 제리 폴웰 같은 근본주의, 문자주의 목사들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공을 적극 지지하고 도와주었다. 이스라엘 현지를 방문한 제이콥스는 그것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이들 주장의 배경이 되는 요한계시록 내용에 대해 자문위원들에게 도움을 구했다. 어느 목사가 이렇게 말했다.

"그런 태도(문자주의)는 <이솝우화>가 문자 그대로 다 사실이라고 믿는 것과 마찬가지일세."

저자는 같은 근본주의면서도 제리 폴웰과 정반대 위치에 있는 곳도 방문했다. 펜실베이니아 랭카스터에 가면 아미시 공동체가 있다.

아미시 공동체를 몇 문장으로 소개하기는 쉽지 않다.

아미시는 '국가 교회' 체제에서 이뤄진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아 '재세례파'라고도 불리는 기독교의 종파 중 하나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 1700년대 중반 유럽에서 미국의 이곳으로 넘어와서 공동체를 이뤘다. 이후 미국 곳곳으로 퍼져나가서, 지금은 20개가 넘는 주에 20만 명 이상의 아미시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들은 어느 기독교 종파보다 예수의 산상수훈을 철저하게 실천하며 산다. 비폭력 평화주의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전쟁은 물론이고 군 입대를 거부해 많은 젊은이들이 감옥에 가기도 했다. 몇 해 전 아미시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정신질환자가 총을 난사해 아이들을 죽였을 때, 부모들이 범인을 용서하고 범인의 장례식에서 죽음을 애도한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던 곳이다.

제이콥스는 공동체 아이들이 야구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 장면을 보고 쓴 글이다.

"아이들의 실력은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어딘가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잠시 후에야 이상한 부분을 깨달았다. 내가 이제껏 본 야구 시합 중에 가장 조용했다. 야유하는 소리도 없고, 관중석에서 목이 터져라 자기 아이를 응원하는 부모도 없었다. 가끔씩 방망이가 공을 때리는 소리만 들릴 뿐 거의 침묵에 가까웠다. 참으로 요상하고…평화롭고 아름다웠다."

둘 다 성경대로 실천한다는 점에서 둘째 가라면 입에 거품 물 사람들인데, 한쪽은 살인과 전쟁을 부추기고, 다른 한쪽은 용서와 평화가 충만하다.

양 극단뿐 아니라 중간 지점에 있는 사람들도 만났다. 저자는 토니 캠폴로나 짐 월리스 같은 이들을 통해서 "복음의 내용을 너무 많이 해석해서, 예수가 전하려 했던 진의(眞意)보다 그 해석을 믿기 시작한 데서 종교적인 문제들이 일어난다"는 걸 알았다. 대형 교회 목사들의 '번영 복음(Prosperity Gospel)' 교리가 '이단적'이라는 것, 예수의 절대적 관심은 동성 간의 결혼 문제가 아니라, 장벽을 허물고 사회에서 버림받은 이들을 포용하는 데 있다는 걸 알았다.

예상치 못했던 1년 뒤의 변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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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년 동안 종교 체험을 하면서 겉만 바뀐 것이 아니라 속도 바뀌었다.
온기 없이 쌀쌀맞던 40대 뉴요커가 1년 사이에 자기 수입의 10%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쓰고, 거짓말을 안 하고, 감사하는 생활을 누리게 되었다.


때로는 이렇게 해야 맞는 것 같고 때로는 저렇게 해야 옳은 것 같은 피곤한 씨름을 1년 동안 한 결론은 무엇일까.

제이콥스는 따뜻한 감성보다는 차가운 이성이 훨씬 더 반들거리는 40대의 전형적인 뉴요커다. 그런데 1년간 성경 말씀대로 살아본 다음에는 우주가 더 이상 무의미한 물리학적 입자들로만 보이지 않았다. 항상은 아니지만, 어느 때는 이 세상에 신성한 빛이 가득 드리워져 있는 느낌을 받았다. 우주가 한결 부드러워지고 풍성해지고 덜 사악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작은 일에서도 경이로움을 느끼고, 일상생활에서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행동에서도 작은 변화들이 일어났다. 신호등의 색깔과 보행자의 행동과 전혀 무관한 맨해튼 거리에서 차도를 건널 때 꿋꿋이 신호등을 지킨다. 거짓말을 안 하려고 노력한다. 수입의 십일조를 아시아 지역의 고아들을 위한 자선 단체에 기부한다.

가장 큰 변화는 '감사'다. 전에는 특별히 감사할 일에만 감사했는데, 지금은 모든 일상에 감사한다. 세상의 모든 소소한 기쁨, 모든 음식, 눈떠 있는 모든 시간, 물을 마시는 모든 시간,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그 기적과도 같은 사실을 감사한다. 감사의 대상이 지금 기독교에서 믿는 바로 그 하나님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제이콥스가 글자 그대로 지키려고 꼽은 700개의 종교적 규율이 그를 변화시킨 것은 아니다. 불가지론이 뒤집힌 것도 아니다. 구원의 확신을 얻은 것은 더군다나 아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평화와 나눔과 감사와 기쁨을 알았다. 그리고 개인주의로 찌들었던 자신의 삶이 공동체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깨달음도 얻었다. 1년 동안 또라이 짓을 한 대가가 이 정도면 제법 괜찮은 장사 아닌가? 책도 제법 팔렸으니 금상첨화다.

예수의 '피'만 빨아먹는 '뱀파이어' 기독교인들

오늘날 기독교와 기독교인에 대한 일반인의 비난과 원성은 상상을 초월한다. 안티 기독교 사이트에서 기독교라는 종교는 지구촌에서 박멸되어야 할 악성 바이러스 같은 존재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는지 뿌리를 캐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처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고 '예수' 때문에 욕을 얻어먹는다면야 눈 질끈 감고 감수할 수밖에 없다. 성경대로 실천하다가 욕을 먹으면 하늘의 상이라도 받는다. 사실은 일반인들한테 존경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하라는 걸 안 해서 생기는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 그것도 기독교의 아주 핵심적인 부분은 모조리 거세되어 있다.

달라스 윌라드 목사는 <잊혀진 제자도>에서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그의 피에만 관심이 있는 그리스도인들로 교회가 넘쳐난다.
나는 그들을 '뱀파이어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실천은 온데간데없고 '예수 천당, 불신 지옥'만 노래하는 기독교인들을 '흡혈귀'라고 한 것이다.

달라스 윌라드가 몰라도 뭘 한참 모른다.
요즘 청소년들 사이에 인기 만발인 영화 <트와일라이트>(Twilight)에 나오는 뱀파이어는 섹시하고 멋있는데.
예수 믿는 뱀파이어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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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중요성을 탐구하십시오.

성경은  를 생명의 상징이자 원천으로 간주합니다.
레위기 17 장 14 절은 "모든 피조물의 생명은 그 피다 : 피는 생명 이니 ..."( ESV )


구약에서 피는 중요한 역할을합니다.

출애굽기 12:1-13
첫번째 유월절에 양고기의 피가 각 문틀의 상단과 측면에 이미 죽음이 일어났다는 표시로 게시되었으므로 죽음의 천사가 건너 뜁니다.

대속죄일(Yom Kippur)에 일년에 한 번 대제사는 사람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피 제사를 드리기 위해 거룩한 신전에 들어갔다.
황소와 염소의 피는 제단에 뿌려졌습니다.
사람들의 삶을 대신하여 동물의 생명이 부어졌습니다.

하나님 께서 시내산에서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 셨을 때, 모세는 소의 피를 가져다가 그것의 절반을 제단에 뿌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절반을 뿌렸다(출애굽기 24:6-8)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생명과의 관계 때문에, 피는 하나님께 최고의 헌물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거룩성과 정의는 죄가 처벌되어야한다고 요구합니다.
오직 죄에 대한 벌이나 지불은 영원한 죽음입니다.
동물을 제물로 바치거나 심지어 우리 자신의 죽음까지도 죄를 치르기에 충분한 희생이 아닙니다.
속죄에는 올바른 방식으로 제공되는 완벽하고 흠없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완벽한 한 신의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순수하고 완전하며 영원한 제물을 바치려고 오셨다.
히브리서 8장에서부터 10장은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대제사장이되어 어떻게 희생 제물의 피로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있는 그 자신의 귀한 피로 천국에 들어가셨는지를 아름답게 설명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와 세상 죄를위한 궁극적 인 속죄 희생에 목숨을 부어 주셨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 언약의 기초가됩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위해 부어지는이 잔은 내 피의 새 언약이다."(누가 22:20, ESV)

사랑하는 찬송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귀중하고도 강력한 본성을 표현합니다.
이제 그 성경의 중요한 의미를 확인하기 위해 성경을 살펴 봅시다.

예수의 피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

우리를 구하자.

그분 안에는 은혜의 풍성함에 따라 우리의 죄로 용서받는 피로 말미암아 구속받을 수 있습니다 ... ( 에베소서 1 : 7)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닌 그 자신의 피로 그는 언제나 가장 성스러운 곳으로 들어가서 우리의 구속을 영원히 확보했습니다. (히브리서 9:12, NLT )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 시키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죄를위한 희생 제물로 예수님을 드렸습니다. 예수님 께서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고 피를 흘리신다고 믿을 때 사람들은 하느님 께 바르게 ... ( 로마서 3:25, NLT)

우리의 대우를 지불하십시오

여러분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빈 삶으로부터 여러분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 께서 몸값을 지불 하셨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그가 지불 한 대속물은 단지 금이나 은이 아니 었습니다. 그것은 죄없고 무모 한 하나님의 어린 양 이신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입니다. (베드로 전서 1 : 18-19, NLT)

그리고 그들은 새 노래를 불렀습니다. "너는 두루마리를 들고 물개를 열 수 있었습니까? 왜냐하면 당신은 죽임당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피로 당신은 모든 족속과 언어와 민족과 국가에서 하나님을위한 사람들을 속량하였습니다 ... ( 계시 5 : 9, ESV)

죄를 씻어라 (요한일서 1:7, NLT)

그러나 우리가 빛 속에 살고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빛 가운데 계신 것처럼, 우리는 서로 사귐을 가지며, 그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줍니다.

우리를 용서해주십시오(히브리서 9:22, ESV)

사실, 율법 아래서는 거의 모든 것이 피로 정화되고, 피를 흘리지 않고는 죄 사함이 없습니다.

우리 무료

...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그는이 일에 충실한 증인이며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서.

우리를 정당화하다(로마서 5 : 9, ESV)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그의 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의 진노에서 그분에 의해 훨씬 더 많이 구원을받을 것입니다.

우리의 죄책감을 깨끗케하십시오(히브리서 9:13-14, NLT)

예전의 시스템에서는 염소와 황소의 피와 새끼 암소의 유골이 사람들의 몸을 의식 불순물에서 제거 할 수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양심을 죄된 행위에서 얼마나 더 많이 정화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배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십시오.

영원한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우리 죄를위한 완전한 희생 제물로 하나님 께 바치 셨습니다.

우리를 성화시키다(히브리서 13:12, ESV)

그래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피로 백성들을 거룩하게하기 위해 성문 밖에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3:12, ESV)

하나님의 면전 길을 열어라(에베소서 2:13, NLT)

그러나 이제는 당신이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했습니다. 일단 당신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의 피로 그에게 가까이갔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인해 대담하게 하늘의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0:19, NLT

평화를주십시오.

모든 충만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기를 기뻐 하셨으며, 그를 통해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자신과 화목하게하셨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평안을 이루 셨습니다. 골로새서 1:19-20, NLT

적을 극복하십시오.

그리고 그들은 어린 양의 피와 그들의 간증의 말씀으로 그를 이겼으며, 그들의 삶을 죽음까지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요한 계시록 12:11)


가톨릭교회, 동방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등은  성찬례에서 사제가 포도주를 축성하면 성령의 힘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변화한다고 가르친다.

다시 말해 가톨릭교회, 동방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아시리아 동방교회 등은 포도주의 형상은 그대로 있으나 그 안에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그리스도의 피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특별히 가톨릭교회에서는 빵과 포도주가 성령의 힘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실체 변화하는 것을 성변화라고 부른다.
반면 개신교에서는 이러한 실체 변화를 인정하지는 않지만 이를 기념한다는 의미에서 성찬을 거행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희생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구약의 속죄의 희생제물은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대제사장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희생 제사를 드리던 성전 뜰은 주님께서 죽으신 골고다 언덕을 가리킨다. 구약의 성막은 손으로 짓지 아니한,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완전한 성막, 즉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가 있는 영원한 천국을 가리킨다.

성경은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세 가지로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9:11-22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속죄하신다.

(12절) 우리의 모든 죄값을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지불하신다.

염소와 송아지의 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He did not enter by means of the blood of goats and calves; but he entered the Most Holy Place once for all by his own blood, having obtained eternal redemption.

(14절) 우리를 하나님을 섬기는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신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How much more, then, will the blood of Christ, who through the eternal Spirit offered himself unblemished to God, cleanse our consciences from acts that lead to death, so that we may serve the living God!

(15절) 영원한 기업을 약속으로 얻게 하신다.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For this reason Christ is the mediator of a new covenant, that those who are called may receive the promised eternal inheritance--now that he has died as a ransom to set them free from the sins committed under the first covenant.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죄사함을 입고 새 생명으로 거듭난 성도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광스럽고 풍성한 기업을 얻게 될 것이다.
















    갈라디아서(10 / 13 / 2022 - 10 / 19 /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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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19일(수) 

    예수의 흔적(갈라디아서 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Finally, let no one cause me trouble, for I bear on my body the marks of Jesus.

    흔적. στίγμα 4742

    1. 표,  2. 흔적,  3. 낙인

    발음  / 스티그마(stigma)

    어원 / στίξω ‘찌르다’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흔적(갈6:17).
  1. 신약 성경 / 1회 사용


    흔적(mark)이란 헬라어로 ‘스티그마(στίγμα)' 라고 합니다.
    스티그마는 짐슴에게 불도장을 찍어 소유주를 표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심지어 노예들에게도 이러한 방법으로 소유주가 누구인가를 표시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지녔다고 자랑합니다.

    무엇 때문에 바울이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졌을까요?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을 미혹케 하는 율법주의자들 때문에 바울은 몹시 마음이 상했습니다.
    그럴때마다 바울은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말라 나는 그리스도의 흔적으로 모든 고난을 능히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의 고백을 주장한 것입니다.

  2.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흔적입니다.

    바울은 결코 그리스도를 떠나서 살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충만한 세계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의 모습은 “내가 내 몸에 예수님의 흔적을 가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삶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내 안에 그리스도가, 그리스도 안에 내가 있는 삶(요 15장)

    둘째, 십자가를 자랑하는 삶(14절)

    셋째, 그리스도 안에서 매일 내가 죽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흔적을 가진 삶은 우리의 교만함과 자기고집, 혈기와 방종, 그리고 타락하는 범죄의 행동이 죽고, 매일 새로운 사람의 모습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넷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살아가는 모습(18절).

    다섯째, 평강과 긍휼의 삶
    그러므로 바울은 “이 표준에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평화와 자비가 있기를 바랍니다.”(새번역 16절)

    여섯째, 위엣 것을 찾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삶
    골로새서에서는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라”(골3:1-3)고 했습니다.

    일곱째, 성령을 쫓아 살고 육체의 소욕을 따르지 않는 생활
    갈라디아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성령을 쫓아 행하라 그러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 찌니”(갈 5:25),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그리스도인의 삶은 경건의 삶이요, 그리스도의 삶이며 성령의 감동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간 흔적을 남기는 성도의 삶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수고와 고난의 흔적입니다.

    우리 인간은 존경과 사랑의 대상자를 위하여 수고하며 고난을 겪는 것을 기쁨과 자랑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그 대상을 위하여 고생하고 수고합니다.
    바울은 그를 사랑하시고 그의 죄악을 대속하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고생하고 수고한 흔적을 가지고 있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위해 고난을 겪은 마음과 육신의 상처와 아픔을 가지고 산 사람입니다.
    바울은 그가 체험한 셋째 하늘의 신비함과 영광을 자랑하기보다는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고 자랑한다”(고후 11:30; 12:10)며 주님을 위해 수고하고 고난을 격은 흔적을 자랑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를 가리켜 낙타무릎이라고 불렀습니다.
    많은 시간을 하나님 앞에서 무릎 꿇고 기도했기에 그의 무릎은 낙타무릎처럼 변한 것입니다.
    야고보는 기도하는 수고의 흔적을 가졌던 것입니다.


  3. 세계적인 발레리나 강수진이 공개한 그녀의 발은 여인의 발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흉측했습니다.
  4. 발가락은 벌어져 있고 마디마디에는 굳은살이 박여 있었습니다.
    또한 베이징 올림픽에서 인상과 용상 합계 326㎏을 들어올려 세계신기록을 5번이나 경신하면서 금메달을 거머쥔 역도 선수 장미란의 손 역시 여기저기 굳은살이 박여 있습니다.
    피겨의 여왕 김연아 선수도 외모가 예쁘고, 연기하는 모습도 아름답지만 그녀의 발등은 연습의 흔적인 굳은살 투성이입니다.
    세계적인 스포츠 선수들뿐만 아니라 TV에 출연하는 달인들의 손과 발도 온통 굳은살과 일그러진 흔적으로 가득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했습니다(갈 6:17).
    아마도 예수님을 전하다가 고난받은 상처들일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가 좋아서 그분을 전하다가 매 맞고 옥에 갇혔습니다(고후 11:24∼30).

    고대 카르타고에는 한니발(BC 247~183)이라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로마와 알프스 산을 정복했던 그는 수많은 전투를 치르던 중 한쪽 눈을 잃고 말았는데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세 명의 화가를 불러들였습니다.
    첫 번째 화가가 한니발의 한쪽 눈이 없는 모습을 그대로 그렸더니 “내가 이렇게 못생겼다는 말이냐?” 하고 곤장을 쳐서 내보냈습니다.
    두 번째 화가는 한니발 장군의 두 눈을 정상적으로 그려 넣었더니 이번에는 “너는 왜 정직하게 그리지 않았느냐?” 하고 그를 꾸짖고 곤장을 쳐서 내보냈습니다.
    이에 모두가 난감해하던 중 세 번째 화가가 찾아가서 정상적인 눈이 보이는 측면 초상화를 그렸더니 비로소 한니발 장군이 기뻐하며 후한 상을 내렸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처럼 자신의 상처를 감추려고 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몸에 지니고 있는 예수의 흔적을 감추지 않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예수 때문에 매 맞고, 옥에 갇히고, 고문당하고, 돌에 맞아 상처투성이가 된 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삶과 인격에서 예수의 흔적을 가지셨습니까?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가는 곳마다 반대하는 율법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말했지만 바울은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변론을 했지만 바울의 학문을 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있던 신체적 약점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에게는 육체적 가시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바울에게 있었던 육체적 약점을 감싸주었습니다(갈 4:14).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바울에게 있던 열병, 안질, 간질 등의 육체의 가시를 감싸주고 천사같이, 그리스도 예수같이 영접해 주었습니다.



    바울은 스스로 예수의 흔적이 있다고 말하며 자신을 예수의 종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흔적을 써내려 가는 책과 같습니다.
    내 몸과 삶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켈트 족의 전설 가운데는 ‘가시나무 새’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시나무 새는 죽을 때 가시나무의 가시를 향해 돌진해 찔리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그때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고 합니다.
    바울의 아름다운 노래를 들어 보십시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복음의 흔적

    유대인들은 율법에 의해 난지 팔일이 되면 할례를 받았습니다. 
    바울도 유대인으로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였습니다.

    “나는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 인 중의 히브리 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 3:5-6).

    그런데 그 때에는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대적하는 일에 앞장을 섰던 것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자기 몸에 지울 수 없는 영적 문신이 있었는데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의 흔적이었습니다.

    대속의 진리, 영생의 복음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에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모세의 율법이 비진리라는 의미가 아니라 율법이 가르치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모세의 율법을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 하는 것이니라”(요 5:39).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요 1:45).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롬 4:21).

     2. 고난의 흔적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같이 되었도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고전 4:11-14).

    신앙이 어린 사람들은 고린도 교회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로 인하여 부요하게 되고 높아지는 것을 자랑합니다. 이러한 신앙은 영적으로 어린 아이의 신앙임을 알아야 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전3:1-2).

    어린 아이의 신앙은 영생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므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 16:24-27).

    바울은 그 몸에 그리스도의 흔적 곧 고난의 흔적을 지녔습니다.

    3. 죽음의 흔적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롬 7:1-2, 4).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바울은 살아있는 성자였습니다. 과연 그는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우고 부활의 증인으로 살았습니다. 그가 옮긴 발길은 그리스도 예수의 흔적을 남긴 발길이었고, 그가 전한 복음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요 그의 서신이 그리스도 예수를 증언하는 진리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 흔적을 지닌 자는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영원한 부활의 영광에 이를 줄을 믿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그리스도 예수의 흔적을 몸에 지니고 영원한 영광이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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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18일(화) 

    종의 멍에(갈라디아서 5:1)

    종의 멍에(갈라디아서 5:1) 

    그리스도
    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It is for freedom that Christ has set us free. Stand firm, then, and do not let yourselves be burdened again by a yoke of slavery.

    ζυγός, οῦ, ὁ  2218

    1. 멍에,  2. 저울대

    발음  / 주고스(zügŏs)

    어원 / ζεύγνυμι ‘연합하다’의 어간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멍에(마 11:29, 행 15:10, 딤전 6:1), 저울(계 6:5).
    신약 성경 / 6회 사용

    ἐλευθερία, ας, ἡ  1657   자유를 한자로 표기하면 자유(自由)

    1. 지유,  2. 해방,  로마서 8:21

    발음 / 에류데리아(ĕlĕuthĕria )

    어원  / 165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자유(롬 8:21, 고전 10:29, 고후 3:17, 갈 2:4).
    신약 성경 / 11회 사용

    * 1658. ἐλεύθερος, έρα, ον 

    1. 자유로운,  2. 독립적인,  3. 요한복음 8:33

    발음 / 에류데로스(ĕlĕuthĕ- rŏs)

    어원 / 2064의 대체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
    관련 성경 / 면제된(마 17:26), 자유로운(요 8:33, 롬 6:20, 고전 7:21), [명] 자유인(고전 7:22, 9:1, 갈 3:28, 골 3:11).
    신약 성경 / 23회 사용

    * ἔρχομαι  2064  

    1. 오다,  2. 돌아오다,  3.누가복음 23:29

    발음 / 에르코마이(ĕrchŏmai)
    관련 성경 / 오다(마 2:2, 막 13:36, 눅 1:59), 가다(마 2:8, 막 5:38, 요 3:26), 들어가다(마 2:11, 막 1:29, 11:27), 임하다(마 3:16, 24:39,
    골 3:6), 나아 오다(마 7:15, 8:2), 이르다(마 9:1, 27:33, 막 2: 20), 나오다(막 1:45, 요 7:42, 계 7:14), 내려오다(눅 6:17), 나아가다(눅 7:7), 가서 보다(눅 11:25), 돌아오다(눅 12:36), 따르다(눅 14:27), 돌이키다(눅 15:17), 강림하다(살후 1:10), 내리다(히 6:7).
    신약 성경 / 636회 사용

    자유를 한자로 표기하면 자유(自由)

    자유(自由) : 스스로 자(自), 말미암을 유(由)

    自자는 "스스로, 몸소, 저절로"를 의미하는 自는 본래 사람의 코를 정면에서 본 모양을 뜬 글자로서, 사람의 코를 가리키며 자기를 나타낸데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由자는 "말미암을, 까닭, 행하다"등을 의미하는데 열매가 꼭지에서부터 나와 매달린 모양에서 그 뜻을 갖게 된 글자라고 합니다. 

    따라서 자유라는 말을 글자 풀이하면 "스스로에게 원인이 되다" 또는 "스스로 행하다"는 뜻이다.
    이것이 곧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다는 말과 상통한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의 자유는 어떠한 것일까? 기독교인의자유에 대한 루터의 말을 들어보자. "크리스찬은 가장 자유 하다. 세상누구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크리스찬은 가장 충성스러운 종이다. 세상 누구에게나 예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세상에서 크리스찬의 자유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다.

    미국 회중교회 목사로서 신학자, 노예 해방론자인 호프킨즈(Samuel Hopkins)는 인간의 자유를 재미있게 설명했습니다.

    "물고기는 물 속에서 헤엄치고 있을 때가 가장 자유입니다. 그러나 같은 물고기가 육지에 올라오면 아주 부자유하게 됩니다. 그것과 꼭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유라는 것도 인간 자신에게 구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있어야 할 곳에 장소를 얻고 있을 때, 자유로운 것으로서, 주로 자유는 인간의 심혼이 어디에 두어져 있는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1. 히브리어 데도르
    - `빨리 움직이다'라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근에서 유래 ; `자유'따라서 유출의 `자연스러움' 그러므로 `깨끗한' ; 자유, 순수한

    2. 헬라어 엘류데로오
    - `자유롭게 하다'즉(상징적으로)(도덕적으로 의례적으로 혹은 인간적인 책임에서) `면제되다', 해방하다, 자유롭게 하다.

    압해시스 - `자유', (상징적으로) `용서', 구원, 탕감

    3. 한자

    타인에게 구속받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 법률의 범위 안에서 마음대로 하는 말.

    자유에 대한 성구

    사람이 어디에서 자유를 얻을 것인가?

    1.  죄에서 자유

    로마서 6:18 - 죄에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로마서 6:22 -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서 해방이 되고

    로마서 8:2 - 생명의 성령의 법이 사망의 법에서 해방함

    로마서 8:15 -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않음

    2.  율법 의식에서

    갈라디아서 3:13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라디아서 5:1 - 우리로 자유케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에베소서 2:15 -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육체로 폐하심

    3.  사탄(마귀)에게서 자유

    창세기 3:15 - 여자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임

    누가복음 10:19 -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심

    골로새서 1:13 -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심

    히브리서 2:14 -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함

    요한일서 3:8 - 하나님의 아들이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

    4. 죽음의 형벌에서

    호세아 13:14 -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

    이사야 25:8 -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임

    고린도전서 15:55 -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히브리서 :15 -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자를 놓아주심

    자유는 누가 주는가

    이사야 61:1 - 복음이 자유케 함

    요한복음 8:32 - 진리가 자유케 함

    요한복음 8:36 - 그 아들 예수님께서

    로마서 8:2 - 성령께서

    고린도후서 3:17 - 주의 영이

    자유주의와 생활

    고린도전서 7:22 - 허락된 한도에서

    고린도전서 8:9 - 약한 자에게 거친 것이 되지 않도록

    고린도전서 10:29 - 판단을 받지 않도록

    갈라디아서 5:13 - 육체의 기회를 삼지 않는 것

    베드로전서 2:16 - 하나님의 종과 같이 생활하는 것

    성경이 강조하는 신앙 자유에 대하여 기본 원리

    첫째,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함을 받았다.

    인종, 빈부귀천모두 하나님께서 지으신 소중한 존재이다.

    둘째,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함을 받았다.

    짐승과는 달리 사람은 불멸의 영과 하나님의 속성인 지혜와 진선미로 거룩한 인격을 이룰 수 있다. 그리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

    세째, 자유를 주셨다.

    사람에게 양심을 주셨고 양심 위에 자유를 주셨다. 즉, 자유인은 창조함을 받았기에 자유는 사람의 기본 권리이다.

    제퍼슨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은 동시에 자유를 주셨다]고 했다.

    넷째, 사람은 평등하게 지음 받았다.

    계급(階級)과 귀천(貴賎)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위반된다.

    이 지구상에는 같은 동족들 간에도 평등 원리를 위반하므로 계급적 차별로 갈등과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인도에는 4대 계급이 있는데 천민중에도 불가근, 불가견, 불가촉의 사람이 있다고 한다.
    이들은 병이 나도 의사의 치료를 받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은 이와 같은 인간에게 기본적인 자유를 주시기 위해 오셨으나 그보다 더 근본적인 영적인 자유를 주시기 위해 오신것이다.

    예수께서 사역 초기에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여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전파하여 눈린 자를 자유케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누가복음 14:18-21

    예수님은 6백년전의 예언이 자기에게 임하였기 때문에 그를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정신적 영적 자유를 주셨다.
    그래서 주님은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한복음 8:36)

    바울은 예수를 전하다가 체포되어 빌립보에 갇혔으나 그의 영은 자유로웠다.
    그래서 감사와 찬송하기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함이 있느니라.](고린도후서 3:17)

    하나님께서 자유를 허락해 주셨고 그리스도를 보내주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에서 해방시켜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자유는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식의 면허가 아니라 반드시 책임이 뒤따라야 한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책임이 수반된 자유를 갖고 사는 것이 크리스찬이다. 사랑이 뒤따르는 자가 거기 있는 것이다.


    마틴 루터는 기독교인의 자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크리스천은 가장 자유하다.
    세상 누구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크리스천은 가장 충성스러운 종이다.
    세상 누구에게나 예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루터의 말처럼 이 세상에서 크리스챤의 자유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유를 허락해 주셨고 그리스도를 보내주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에서 해방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의 책임이 뒤따르는 자유인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의 주제는 자유입니다.
    ‘기독교 자유의 대헌장(the Magna Carta of the Christian Liberty)’이라는 별칭이 붙여진 갈라디아서에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통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죄와 율법의 멍에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갈라디아서 가운데 1장부터 5장 12절까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믿는 성도들은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유케 되었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말씀의 결론이라 할 수 있는 본문 1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하십니다.
    우리를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유케 하시려고 예수님이 대속이 십자가를 지셨는데, 다시금 율법주의로 돌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된 것으로 만들고 율법주의자들의 종이 되는 어리석은 일을 행치 말라는 겁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주제를 가지고 1장부터 5장 12절까지 율법주의를 비판한 사도 바울은 5장 13절부터 6장에서는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방종의 기회로 삼지 말라는 교훈을 더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13)하십니다.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으나, 이제부터는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사랑으로 섬기는 종 된 삶을 살아가라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부정하는 율법주의도 잘못된 것이지만, 이 자유를 남용하는 무법주의도 잘못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32절에서 예수님은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자유는 진리 안에서 주어진 자유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육체의 소욕을 따라 방탕한 삶을 살아가도록 허락된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진리의 안에서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사랑의 종노릇하도록 허락된 자유라는 겁니다. 이제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참된 자유의 의미를 생각해보도록 합니다.

     

    I. 율법의 저주로부터의 자유(1-12)

     

    1.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하십니다(1).

     

    하나님의 언약을 믿음으로 자유하는 여자 사라의 후손이 되었으니, 다시는 율법을 의지하고 자랑하는 여종 하갈의 후손이 되려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우리의 믿음이 모세가 율법을 받은 시내 산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예루살렘에 근거해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자유함을 얻은 우리가 다시금 율법의 멍에를 메고 율법의 종노릇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는 겁니다.

     

    2. 할례를 받으면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지게 된다 하십니다(2,3).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니라.”하십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가르쳤습니다. 유대인이면 반드시 받아야 했던 할례는 그가 율법에 속한 자가 되었다는 상징적인 표시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할례를 받는 순간부터 율법 전체를 지켜야 할 의무가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유함을 얻은 자가, 이제 다시금 율법의 종이 되겠다고 할례를 받으니 이처럼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느냐?”라고 사도 바울이 묻고 있는 것입니다.

     

    3.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자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 하십니다(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하십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자들은 스스로 율법의 종이 되려는 어리석은 자일 뿐 아니라,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부정하고,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창 15:6)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부정하는 자라는 겁니다.

     

    대속의 은혜를 부정하는 것은,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헛된 것이라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에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대속의 은혜를 믿는 믿음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를 의지하려는 순간부터 이미 그는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4.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진다 하십니다(9, 10).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9)하십니다.

     

    율법주의와 같은 이단적 교훈은 진리라고 하는 순수한 가루 반죽을 변질 시키는 누룩과 같습니다. 이 누룩을 제거하지 않으면 온 덩이에 퍼져 결국 교회 자체가 변질되게 되는 겁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도 그랬지만,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될 때 복음 전파를 방해하기 위해 사단 마귀가 사용하는 첫 번째 수단이 바로 핍박입니다. 하지만 이런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가 세워질 땐, 교회 안에 이단적 교훈을 퍼뜨려 교회 자체를 변질시키는 시도를 합니다.

     

    313년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하는 조치를 내리기까지 교회는 모진 핍박 속에서도 신앙의 순수성을 지켜왔습니다. 하지만, 밀리노 칙령이 발표된 이후로 교회는 로마인들이 섬기던 이방 종교와 결합되어 로마 카톨릭이라고 하는 기형적인 모습으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하신 말씀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후로 중세 교회는 1517년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으로 다시금 말씀 중심의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회복되었지만, 최근에는 또 다시 세속주의와 뉴에이지 사상이라는 누룩이 퍼져 많은 교회들이 진리를 떠나 ‘배도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한국교회 안에도 기복신앙이라는 누룩, 이데올로기라고 하는 누룩, 신사도 운동이라고 하는 누룩을 퍼뜨리는 어둠의 세력들이 있습니다. 이 누룩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한국 교회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10).

     

    5.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하십니다(12).

     

    율법주의라는 이단을 퍼뜨리는 자들을 ‘누룩’으로 표현한 사도 바울은 저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을 선언하면서(10), 12절에서는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하십니다.

     

    여기서 ‘베어 버리다’는 단어는 할례를 행한다는 의미를 가진 ‘페리템토’가 아니라, ‘아포코프토’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아포코프토’는 단순히 생식기의 표피를 자르는 것이 아니라, ‘거세한다’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헛된 육신을 자랑하기 위해 할례를 행하는 자들에게 생식기의 표피 뿐 아니라, 생식기 자체가 거세(아포코프토)되는 저주가 임하길 바란다는 의미를 담아 “스스로 베어버리기를 원하노라”하신 겁니다.

     

    율법주의자들처럼 육신적인 것들을 자랑하는 자들은 오히려 이 자랑이 저주의 빌미가 될 수 있습니다. 다윗의 왕위를 찬탈하려 했던 압살롬이 그랬습니다. 압살롬은 평소 검고 숱이 많은 그의 머리카락이 큰 자랑이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엔 전쟁에 패한 압살롬이 노새를 타고 도망을 치다 이 머리카락이 나뭇가지에 걸리는 바람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습니다(삼하 18:9). 율법주의자들처럼 압살롬처럼 육신의 것들을 자랑하는 이들은 이것이 저주의 빌미가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II.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열매

     

    1장부터 앞서 살핀 5장 12절까지가 그리스도인은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유함을 얻은 자라는 사실을 설명한 사도 바울은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 이러한 자유가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사는 방탕한 삶의 빌미가 되어서는 안된다 교훈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자유는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의 자유이지, 죄를 지을 자유가 아니라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봅니다.

     

    1.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서로 대적한다 하십니다(16,17).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하십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육체의 소욕’할 때 ‘육체’에 해당되는 헬라어 ‘사르코스’는 본래 ‘고깃덩이(flesh)’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로 육신의 정욕(롬 7:5)과 죄악으로 달려나가는 인간의 본성(롬 7:21)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후에도 아직 우리 안에 죄의 일락을 즐기는 육체의 소욕이 남아 있기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길 원하는 성령의 소욕과 서로 대적하며 갈등을 일으키는 겁니다.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런 갈등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2-24)하십니다.

     

    거듭난 이후에도 성화의 과정에 있는 성도들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이 육체의 소욕과의 싸움을 피할 수 없다는 겁니다.

     

    2.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사는 자들에겐 육체의 열매가 맺혀진다 하십니다(19-21).

     

    우리 안에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서로 대적하며 싸우는데 이 영적 싸움에서 육체의 소욕이 승리하면 결국 육체의 열매를 맺게 되고,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 하십니다(21).

     

    19절부터 21절까지는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사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육체의 열매들이 열거되고 있는데, 이를 크게 나눠보면 성적인 죄들(19)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적인 죄들(20상) 그리고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발생하는 죄들(20하, 21상)과 개인적인 죄들(21하)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봅니다.

     

    a. 성적인 죄들 - 19절에서 열거하고 있는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이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다가 짓게 되는 성적인 죄들을 묘사한 말씀인데, ‘음행’은 헬라어로 ‘포르네이아’라고 해서 여기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영어 단어 porn이 파생되었습니다. 음란한 영상들을 즐기고 몰래 그런 일들을 따라하는 행위가 바로 ‘음행’인 것입니다.

     

    ‘더러운 것’은 ‘아카다르시아’라고 해서 ‘성적인 불결함’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동성애와 같이 정상적인 성관계가 아닌 변태적이고 불결한 성관계를 추구하는 것이 바로 ‘더러운 것’입니다.

     

    ‘호색’은 ‘아셀게이아’라고 해서 본래는 ‘자제력이 부족하다’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지나치게 성적인 욕망만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호색’인 것입니다.

     

    b. 영적인 죄들 - 20절에서 열거하고 있는 “우상숭배와 술수”가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적인 죄들입니다. ‘우상숭배’는 사람이 만든 형상과 그림을 숭배하는 것 뿐 아니라, 하나님보다 더 믿고 신뢰하는 것 모두를 모두 우상숭배라 할 수 있는데, 현대인들이 숭배하는 가장 큰 우상은 ‘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형통신학, 축복신학이라는 미명하에 맘모니즘이 퍼지고 있는데, 아무리 교회를 열심히 다녀도 하나님이 아닌 물질이라는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술수’는 헬라어로 ‘파르마케이아’라고 해서 점을 보고 주문을 거는 등 각종 ‘마술적 행위’를 일컫는 단어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이를 witchcraft(KJV)로 번역해 놓고 있습니다. 최근 술수, 다시 말해 마법을 소재로 한 해리포터의 소설과 영화가 큰 인기를 끌면서 해리포터 분장을 하고 마녀들의 축제인 할로윈 데이를 기념하는 교회까지 생겨나고 있는데, 이런 육체의 열매를 맺는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라 오히려 사탄이 교회라 해야 합니다. 술수를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하셨기 때문입니다(21).

     

    c.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20,21)는 공동체, 특별히 교회라는 믿음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죄입니다. 교회 안에서 거짓 교훈을 전파하는 이단들을 물리치고, 시기와 분쟁과 다툼을 버림으로 교회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해야 한다는 겁니다.

     

    d. “술 취함과 방탕함”(21)은 개인적인 죄입니다. 매일 술에 취해 탕자와 같이 방탕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는 겁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하십니다. 육체의 소욕을 따라 술에 취해 방탕한 삶을 살지 말고, 성령충만을 받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사는 자가 되라 하십니다.

     

    e. “이런 일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21)하십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지속적으로 육체의 소욕을 따라 육체의 열매를 맺는 자들은 스스로 구원받지 못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열매를 통해 나무를 알 수 있듯이, 자신이 맺는 열매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가 진실한 하나님의 사람인지 알려면 그가 말하는 것 뿐 아니라, 그가 맺고 있는 열매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3.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사는 자들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하십니다(22, 23).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면 죄악된 육체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지만,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사는 자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 22절과 23절에는 9가지 성령의 열매가 소개되고 있는데,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그것이라 하십니다.

     

    여기서 ‘사랑’은 헬라어로 절대적인 사랑인 ‘아가페’라고 되어 있고, 기쁨을 의미하는 ‘희락’은 ‘카라’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헬라어로 ‘에이레네’라고 번역된 ‘화평’은 히브리어 ‘살렘’에 해당되는 열매입니다. 영육 간에 부족함이 없이 평안한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오래 참음’은 헬라어로 ‘마크로뒤미아’라고 해서 어떠한 시련도 견디어내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자비’는 ‘크레스토테스’라고 해서 관용을 베푸는 너그럽고 친절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양선’은 ‘아가도쉬네’라고 해서 ‘자비’라는 단어의 의미와 비슷하긴 하지만, 타인에게 친절을 베풀 뿐 아니라 보다 더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고자 하는 마음’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충성’은 ‘피스티스’라고 해서 영어로는 faithfulness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맡은 일, 특별히 하나님이 맡기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신실함’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온유’는 ‘프라위테스’라고 해서 ‘이웃을 향한 윤리적인 관용’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마지막으로 ‘절제’는 ‘엥크라테이아’라고 해서 육체적인 소욕을 이겨낼 줄 아는 영적, 도덕적 능력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9가지 열매 가운데 기독교의 가장 큰 덕목인 ‘사랑’이 그 첫 번째로 열매로 소개되고 있고, 육신의 소욕을 이겨내는 영적 도덕적 능력인 ‘절제’가 마지막 열매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9가지 열매 가운데서도 이 두 가지 열매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우리 모두가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다가 성령의 열매를 맺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4. 육체의 소욕을 십자가에 못 박고 성령으로 행하라 하십니다(24, 25).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자유를 방종의 기회로 삼지 말고, 날마다 육체의 소욕을 십자가에 못 박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면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자가 되라는 겁니다.

    결론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하십니다.
    또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하십니다.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으나,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사랑으로 섬기는 종 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바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우리로 자유케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셔서 죄에서 마귀에서 저주에서 구원하고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요8: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눅4: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1. 죄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1) 원죄

    (롬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우리는 잉태될 때 모태에서부터 죄인으로 잉태되고 태어날 때도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시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이렇기 때문에 '나는 법이 없어도 살 사람이다 ' '예수 안 믿어도 구원 받을 수 있다 '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그가 아무리 법 없이 살 사람이라도 아담으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죄인입니다. 그는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고 죄의 사슬에 묶여 태어났으므로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고 그대로 살면 영원한 멸망으로 보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착하고 선해도 육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요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2) 고범죄 (시19:13) 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우리가 예수 믿으며 다시는 범죄치 아니하리라 하면서도 죄악을 행하며 살고 있습니다.

    베드로같이 맹세하고 다짐해 봐도 역시 죄 가운데 삽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도덕군자 되라하지 아니하시고 예수 안에 거하라 하십니다.

    (롬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예수 안에 거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요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한다고 했는데 예수 믿는다하며 계속 범죄하며 사는데 이유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말합니다.

    (요일3: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요일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성령으로 거듭남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성령으로 거듭났음에도 계속 죄 가운데 있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성령을 따라 살지 아니하고 육신을 따라 살기 때문입니다.

    (갈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요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 예수가 우리를 죄에서 해방 시키십니다.

    (롬5:18-19)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3) 용서받지 못할 죄

    (요일5:16)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히6:4-6)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마12: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2. 종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요8:33-36)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1) 죄를 지면 죄의 종

    (요8: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우리가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 받았으니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무리에게 바울은

    (롬6:1-2)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롬6:11-13)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2) 마귀 따르면 마귀 종

    마귀 따르면 마지막은 마귀가 가는 지옥에 갈수밖에 없습니다.

    (마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계20:10)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마귀의 종이 된다는 것은

    ① 귀신의 가르침을 좇는 것을 말합니다. 이단사설

    (딤전4: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② 고의적으로 죄를 짓는 자

    (요일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③ 하나님을 훼방하고 하나님의 일을 무너뜨리는 행위

    (계16:10-11) 또 다섯째가 그 대접을 짐승의 보좌에 쏟으니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11) 아픈 것과 종기로 인하여 하늘의 하나님을 훼방하고 저희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더라

     

    욥기에 마귀는 욥을 참소(헐뜯다)합니다. 지금도 마귀는 우리를 참소합니다.

    (계12:10)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자가 쫓겨났고

     

    3) 회개하고 마귀 쫓아내고 예수님께 순종하여 의의 종이 되어야합니다.

    (롬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신앙이란 순종이요 믿음도 순종입니다. 순종하지 아니하는 것은 모두가 가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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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17일(월) 

    해산하는 수고(갈라디아서 4:19) ὠδίνω  5605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My dear children, for whom I am again in the pains of childbirth until Christ is formed in you.

    ὠδίνω  5605  

    1. 진통을 겪다,  2. 해산의 고통을 가지다,  3. 갈라디아서 4:19

    발음 / 오디노(ōdinō)
    어원 / 560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해산하다(갈 4:19), 산고(産苦)를 겪다(갈 4:27).
    신약 성경 / 3회 사용

    * 5604. ὠδίν, ῖνος, ἡ 

    1. 진통,  2. 마태복음 24:8,  3. 데살로니가전서 5:3

    발음 / 오딘(ōdin)
    관련 성경 / 재난(마 24:8, 막 13:8), 고통(행 2:24, 살전 5:3).
    신약 성경 / 4회 사용

    μορφόω  3445

    1. 형성하다,  2.  꼴을 이루다,  3. 형을 이루다

    발음 / 모르포오(mŏrphŏō)

    어원 /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ἐμορφώθην, 3449와 동일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형상을 이루다(갈 4:19).
    신약 성경 / 1회 사용
    * 3449. μόχθος, ου, ὁ 
    1. 노력,  2. 진력,  3. 수고

    발음 / 모크도스(mŏchthŏs)

    어원 / 3425의 어간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애씀(고후 11:27, 살전 2:9, 살후 3:8).
    신약 성경 / 3회 사용
    * 3425.  μόγις 
    1. 겨우,  2. 어렵게,  3. 누가복음 9:39

    발음 / 모기스(mŏgis)

    어원 / 기본형 μόγος ‘고동’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몹시(눅 9:39).
    신약 성경 / 2회 사용

    해산하는 수고( the pains of childbirth)

    첫째, 산모의 마음(요한복음 16:21)

    여자
    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을 산고(産苦)라고 합니다.
    그토록 힘든 고통을 경험한 산모가 다시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나 또 다시 아이를 낳는 것은 생명을 얻는 기쁨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 어머니의 마음(갈라디아서 4: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모정(母情)
    아이를 낳는 것이 힘든가? 아니면 낳은 아이를 양육하는 것이 더 힘든가? 라는 질문에 대다수의 어머니들은  아이 낳는 것보다 낳은 아이를 양육하는 것이 더 힘들다고 합니다.

    셋째, 스승의 마음(전도서 12:11)

    지혜자의 말씀은 찌르는 채찍 같고 회중의 스승의 말씀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의 주신바니라.
    사부(師父)

    스승의 가르침은 제자들이 잘 배워서 사회에 나가 필요한 일군이 되는 것에서 보람을 느낄 것입니다.
     

    넷째, 아버지의 마음(고린도전서 2: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부정(父情)

    작은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상속받은 후에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유산을 모두 탕진한 아들은 아버지의 집에서 품군으로 살며 바이나 실컷 먹겎다고 다짐하고 아버지의 집을 찾아왔을 때 아버지는 너는 잃었다가 다시 얻은 내 아들이라며 아들을 품군이 아니라 상속자로 받아드렸습니다.


    해산하는 수고란 생명을 품고 있다가 그 생명을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하는 생명의 신비가 나타나는 사건입니다.

    요한복음 16장 21절에서는 사람 난 기쁨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을 해산의 수고라는 과정을 통하여 복음으로 무장하기를 간절하게 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처음 복음을 전했을 때에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은 바울의 가르침을 기쁘게 받아드렸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의 신앙의 자세를 매우 흡족하게 생각하고 그 교회를 떠났습니다.

    얼마 후 바울에게 들려오는 소식은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이 다른 복음을 받아드리고 바울과 그가 전한 복음에 대하여 의심한다고 합니다.
    바울이 얼마나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을 사랑했으면 그들을 다시 품고 해산의 수고를 하듯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하겠다는 것을 결단을 하겠습니까?

    가르침을 배신한 사람들을 미워하거나 떠나버린 것이 아니라 얼마나 사랑했으면 그들을 가슴에 품었을까요?
    이것이 바울의 위대함이라고 하겠습니다.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풍토가 익숙한 현실에서 아직도 생명을 사랑하는 바울과 같은 믿음과 열정을 갖는다는 것은 복음의 참된 일군만이 갖는 마음이라고 하겠습니다.

    뜻이 다르기 때문에 헤어지고 다시 새로운 사람을 찾는 조급한 세대에서 오직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려고 생명을 사랑하고 생명을 온전히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려는 산고의 고통까지도 감당하려는 바울의 믿음을 생각하며 너무 쉽게 생명을 포기했던 지난 날의 실수와 잘못을 뉘우치며 생명을 사랑하는 수고에 동참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신앙생활에 열심히 하던 어떤 집사님이 공장을 세 개나 짓더니 사업에 바빠 교회와 멀어졌으므로 심방하셨던 목사님이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김집사님이 너무 바빠서 주일예배에도 참석 못합니다.
    신앙생활에 불편함 없도록 공장 두 개는 불태워 주옵소서!”
    깜짝 놀란 집사님!
    두 손을 가로젓던 그 집사님이 다음 주일예배에 참석했음은 물론입니다.
    하나님보다 공장에 불나는 것이 훨씬 더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속으로는 내가 왜 그 교회에 나갔는지 모르겠다고 후회도 하고, 마음으로 얼마나 그 목사가 꼴 보기 싫었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바울은 과거를 회상합니다(13-14절)

    바울에게는 육체의 약함이 있었습니다.
    전도자에게는 치명적인 것이었습니다.
    안질, 간질병, 말라리아의 후유증, 담석 등 무엇인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본인도 육체의 가시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어쩌면 마음의 시험을 받을만한 것입니다.
    제병도 못 고치면서....사도가 뭐 저래!
    복음이 믿을만 한가?
    외모도 그렇게 출중하지 못해!
    말도 잘 못해!
    바울 스스로도 고백하기를 ‘말에는 졸하나......’ 하는 말을 들어보면 달변가도 아니었습니다.

    성도들이 시험들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인들이 무시하지 않고, 업신여기지 않고 오히려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대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바울을 존경하고 사랑했습니다.
    할 수 있으면 눈이라도 빼주려 했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사랑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사도, 종이라는 생각에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종이라는 의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사도도 성도들도 얼마나 행복했을까?
    영적인 행복감은 목회자와 성도가 일치감을 갖게 될 때가 가장 행복한 것입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은 바울의 외모를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연약한 육체 안에서 빛나고 있는 복음의 능력을 보았고 또 자기들의 존귀함을 되찾게 해준 이 복음 전도자를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울이 떠난 이후입니다.
    성도들의 신앙이 지속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갈라디아 교인들과 바울의 관계가 대단히 악화된 상태에 있습니다.
    어떻게 살든지 가만히 내버려 두었더라면 그저 좋은 관계였을텐데 바울이 그들을 염려해서 무슨 말을 한 것이 그들의 심사를 틀어지게 해서 아주 나쁜 관계가 되어 버렸다는 뜻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어떤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교회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 날 공과공부 제목은 ‘하늘나라에 가는 길’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여러분, 내가 만일 집을 팔아 몽땅 교회에 헌금한다면 천당에 갈 수 있겠죠?”라고 묻자 아이들은 일제히 “아뇨”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시 선생님은 “그러면 내가 매일 교회 청소를 하고 유리창을 닦는다면 천당에 갈 수 있겠죠?”라고 하자 이번에도 아이들은 일제히 “아뇨”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지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다섯 살 먹은 사내 녀석이 벌떡 일어나 큰 소리로 “선생님이 죽어야 돼요”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죽어야 되는 일이 많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가 바울이 양보하고, 이해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믿음의 본질에 관한 일입니다.
    신앙의 원리에 대한 문제입니다.
    처음 느꼈던 아름다운 감사가 왜 없어졌습니까?
    복음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이 가짜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유치한 복음의 영역이 아닌 현대감각에 맞는 믿음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평생 예수 믿어 교회에서 헌신함으로 큰 교회에서 장로가 된지도 13년이 되었는데, 그분이 고백하는 말이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잘 몰랐다!’는 겁니다.
    그냥 어려서부터 착하고 살고, 정직하고, 교회 열심히 잘 나가니까 그것이 신앙인줄 알았는데 또 그런 나를 참 훌륭한 신앙이라며 장로로 세웠다는 겁니다.
    그런데 불과 몇 달 전 예수의 보혈이 나를 구원했다는 것을 이제야 분명히 알았다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 중에 수십 년 예수 믿으면서도 착하게 살기만 하면 되지 라고 생각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은 신앙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주일성수, 십일조, 일년에 한명 전도!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 신앙에서 정말 감당해야할 일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예전에는 주일에는 돈을 사용하는 것을 죄악시 했습니다.
    아직도 이런 일 때문에 마음이 무거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면 예수 믿는 본질이 무엇입니까? 
    오늘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거짓교훈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다른 교훈입니다.
    이단이라고 할 만큼 본질을 훼손하고 있습니다.

    정신과 질환에 "둔주" 라는 질병은 내가 다른 곳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면서 나를 모른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둔주는 도망쳐 달아남을 뜻한다.
    둔주는 특별한 목적지도 없이 여기저기를 배회함을 뜻한다
    * 해리장애의 일종으로 기억상실과 동반되어 일어나는 장애로서, 자신의 고유한 주체성(identity)에 대한 기억을 상실하고 자신의 과거에 대해 회상하지 못하며 일부 혹은 완전히 새로운 주체성을 갖는 상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자로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이 신이라면 인정하기가 쉽겠는데 동정녀 탄생을 믿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빼놓고 믿으려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믿지 못하면 이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문제도 중요합니다.

    이 둘을 하나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신적인 모습을 믿지 못하면 안되고, 완전한 인간으로서 십자가의 보혈의 대속이 없어서도 안됩니다.

    예수님이 육체로 부활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영적인 부활이 아닙니다.

    재림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에 대해 유보적이고 일부분만 인정하면 이단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케리그마이고, 복음의 근본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것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들었던 계시의 말씀을 한번도 본적이 없고 통성명한 적도 없는 베드로와 다른 사도를 만나보니 다 같은 말씀이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계시성이라고 합니다.

    사도성이 중요합니다.

    성령을 통해서 주일 예배가 다 연결됩니다.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이 고향에 가서 주일예배를 드리는데 전혀 다릅니까?
    어느 교회가든지 같은 복음이어야 합니다.
    사도성이란 복음의 동질성이 있어야 합니다.
    나 혼자서만 이제까지 들어보지 못한 특별한 말을 들었다면 가짜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비 진리에 미혹되었습니다.
    다른 복음이 들어왔기에 신앙의 동질성이 없어졌습니다.
    이제는 원수가 된 겁니다.
    신앙이 달라지면 같이 할 수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에 아무리 성공적이라 할지라도, 열심을 낸다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호소하고 있습니다.
    복음으로 돌이키라!
    믿음으로 이전에 가졌던 관계를 회복하자는 겁니다.
    해산하는 수고를 다시 하겠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변질에서 회복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바울에게 간절합니다.

    성도여러분!
    지금은 어지러운 시대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이 선명하지 못합니다.
    이때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믿음에 굳게 서야 할 때입니다.

    오늘 바울은 다시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자고 말합니다.
    사랑의 관계는 교제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성숙해집니다.
    교제가 없는 사랑의 관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제가 멀어지면 관계는 소원해지고 결국에는 깨어지고 맙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바른 복음으로 사랑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사랑의 채널이 다르니까.
    아이가 원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모든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을 원합니다.
    정서적인 안정감을 갖기를 원합니다.
    부모된 여러분이 그것을 깨닫게 될 때 자녀들이 건강하게 자랍니다.
    부모의 눈길을 피하려하는 아이는 이미 정서적으로 걱정스러운 상태입니다.
    사랑의 기본은 마주 보는 것입니다.
    눈동자를 마주쳐야 합니다.
    눈길은 교제를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의 눈길이 쌓여질 때 행복한 아이로 자라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하나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하신다면 주님과 눈길을 마주치는 시간이 많아져야 합니다.
    왜 자꾸 하나님의 눈길을 피하십니까?
    왜 하나님의 말씀을 피하십니까?
    왜 들으려 하지 않으시지요?

    성도의 신앙 성장단계는 다섯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주는 말씀만 받아먹는 단계

    전적으로 목사에게 의존하는 단계이므로 양육과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영적 성장의 필요성과 개인적인 책임을 느끼지 않는 단계입니다.

    주는 말씀만 받아먹는 것에 부족함을 느끼는 단계

    입니다. 목사의 가르침을 의존하면서도 영적 성장의 필요성과 개인적인 책임을 느끼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주는 말씀도 받아먹고 자신도 말씀을 먹는 단계

    목사의 가르침을 부분적으로 의지하면서 영적성장의 필요성과 개인적인 책임을 인정하는 단계입니다. QT도 노력해 봅니다.

    자신이 말씀을 먹는 단계

    목사에게 배운 원리를 자신의 원리로 만드는 단계입니다.
    성경읽기와 묵상을 통해서 영적 필요의 대부분을 채우며, 다른 사람의 영적 성장의 필요성과 책임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을 돌아볼 줄 압니다.
    눈에 들어옵니다.

    다른 사람에게 말씀을 먹이는 단계

    이제는 교사로서, 사역자로서 누군가의 격려자 역할을 하는 단계입니다.
    스스로 신앙을 정리하고 개혁하며, 공동체의 중요성을 깨닫고 다른 사람의 영적 필요를 채워주는 단계입니다.

    에베소서 4:13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이 때 내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믿음이 장성하여서 평신도 동역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러나 아직 자라나지 않은 상태에서 동역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더 배워야 하고 자신을 부인하는 법을 더 익혀야 합니다.
    자기 기분에 이끌리는 헌신은 본인을 위해서나 다른 사람을 위해서나 결코 좋지 않습니다.
    신앙은 삶입니다.
    복음의 본질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날마다 성령으로 새로워지며 성령이 주시는 깨달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3D 업종
    1. 더럽고 (dirty)
    2. 어렵고 (difficult)
    3. 위험한 (dangerous) 분야의 일을 통칭.

    예를 들면 제조업, 광업, 건축업 등이 있음.
    오랫동안 3D업종은 꺼리는 직업으로 여겨졌다.
    일이 힘들기도 하지만 ‘하대하는’ 사회적 시선을 견디기가 쉽지 않았다.

    1990년대에 들어온 말로, 원래는 다른 직종에 비해 어렵고 힘들어서 구직 희망자를 구하기 어려운 직업을 이르는 용어로 쓰였다.
    그랬던 것이 3D업종인데도 보수가 적은 일감이 나오고 있고, 이러한 직종은 임금이 적어서 구직자가 몰려오지 않는다는 편견 및 고정관념으로 인해 뼈 빠지게 일해도 생활비를 마련하지 못할 정도로 연봉이 적은 직업 전반을 이르는 용어로도 쓰이고 있다.

    후자의 경우는 대체로 이러한 직종은 열정페이에 노출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들어오는 수익은 적고, 그렇다고 직원을 무보수로 굴릴 수는 없으니, 형식적으로나마 월급을 터무니없이 적은 액수로 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는 인권 등을 앞세워야 돈을 못 벌면 본인네가 망할 뿐이다. 
    다만 이경우는 전자의 3D업종과 의미가 겹치지 않는다. 

    용어가 쓰이기 시작한 이래 현재 시점으로 '3D 업종'으로 흔히 부른다 하더라도 무조건적으로 고강도 저보수의 업무와 직업으로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느정도 지양 해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 3D의 요건을 충족하나 그만큼 고임금과 복지혜택을 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


    10년 전 미국의 PayScale은 3D업종에 대한 미국인들의 인식이 바뀌고 있다고 전했는데요.
    3D를 'Decent(수익이 좋은)', 'Dangerless(위험하지 않은)' 그러나 'Dirty(지저분한)' 직업으로 분류했습니다.
    즉, 조금 힘든 점을 감내한다면 수입도 높고 그렇게 위험하지도 않은 직업인 것이죠.
    그렇다면, 해외 취업에 유리한 3D업종에는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집니다.
    오늘 준비한 주제는 '해외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3D업종'입니다.
    이에는 어떤 직종이 있으며 어떤 기술을 획득하는 것이 좋을까요?

    폐기물 관리 연구원

    산업 성장과 함께 늘어난 폐기물. 경기 침체기에도 폐기물 관리 업체들은 분주합니다. 경기와는 상관없이 처리해야 할 폐기물은 끝없이 많다는 것이겠죠. 이들은 공기나 토지, 수원을 오염시키지 않고 효율적으로 폐기물을 관리하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폐기물 감소와 재활용을 위해 노력하며 기타 폐기물 관련 문제에 대해 대응하고 적극적으로 해결합니다. 세계적으로 환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폐기물 관리 연구원'에 대한 인식도 좋아지고 있습니다. Glassdoor에 의하면 환경미화원의 경우 시간당 약 1만 2천원을 벌지만, 폐기물 관리 기술자 및 수석 연구원일 경우 연봉은 9만 5천 달러로 한화 약 1억 1천에 달합니다. 평균 월급은 770만원에서 840만원이라고 합니다. 이 직업에서 요구하는 학위 또는 유사한 자격은 생물학, 생화학 과학, 화학, 물리학, 토목/구조/기계공학, 지구공학, 환경공학, 지리학, 지질학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환경과 지속 가능성 문제에 대한 관심과 이해, 인내심, 의사소통능력, 복잡한 법률을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능력, 모니터링 능력 등이 요구됩니다.

    배관공


    전형적인 블루칼라 직업으로 여겨지기는 하지만 수익이 좋은 대표적인 3D업종으로 분류되는 배관공. 이는 도시화된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직업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력이 곧 수입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일단 현장에서 일을 배우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들의 생활과 가장 밀접한 직업이기에 이 직업은 결코 여러분을 실망시키지 않을 겁니다. 다만 국내와 국외의 환경 자체가 달라서 국내에서는 흔하지 않지만, 해외에서는 제법 인지도가 높은 직업입니다. 배관공의 평균 연봉은 5만 2천 달러에서 6만 8천 달러로 한화 약 6천 2백만 원에서 8천 2백만 원에 해당합니다.

    석유 시추 작업가

    석유 대체재가 발명되고 있지만 여전히 석유는 현대 인류에게 떼어놓을 수 없는 자원입니다. 아직 많은 양의 석유가 땅속에 묻혀있고, 기술의 발달로 작업이 어려운 곳에서도 시추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특히 해양에서 진행되는 굴착 작업은 험난하기로 유명합니다. 석유와 관련해서는 시추 작업가, 시추 엔지니어, 석유 엔지니어 등의 직업이 있습니다. 시추작업자는 숙련도가 낮은 근로자라도 연간 4만 달러로 한화 약 4천 7백만원의 수익을 벌어들일 수 있습니다.(출처: Miler) 시추 컨설턴트는 연 23만 5천 달러(한화 약 2억 8천만 원)의 소득을 올릴 수 있으며, 석유 시추 작업자의 평균 연봉은 9만 9천 달러(한화 약 1억 2천)로 CNN이 조사했습니다. 석유 시추 작업자에게 요구하는 학위 또는 유사한 자격은 화학공학, 토목학, 해양공학, 기계공학, 지질학, 광업 또는 석유공학 등이 있습니다. 주요 석유회사들은 대학원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더욱 고도로 전문 엔지니어를 배출하고 있기도 합니다.

    치위생사


    한국에 온 외국인이 경악하는 것 중 하나가 '공공 화장실에서 이를 닦는 행동'이라고 합니다. 외국에서는 타인의 입속 있던 것이 밖으로 나오는 것을 매우 불쾌하게 여기기 때문에 공공장소에서는 간단하게 가글로 끝낸다고 하는데요.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와 다르게 외국에서 치위생사는 3D업종에 속한다고 합니다. 치위생사의 역할은 치아관리 및 치료에 있으며, 전문적인 자격증 또는 학위가 필요합니다. 치위생사의 평균 연봉은 6만 9천 달러로 한화 약 8천 2백만원에 해당됩니다. 이외에도 해외에서 유망한 3D업종에는 장의사, 광부, 화장실 청소부, 범죄현장 청소부 등이 있는데요. 이와 관련된 자세한 이야기는 아래 링크를 통해 확인할 수 있겠습니다.

     '조금 힘든 점을 감내한다면, 수입도 높고 생각만큼 위험하지도 않은 직업'인 3D업종의 종류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원래도 기본 소득이 높은 직업군인데 전문지식까지 더해지면 굉장히 고소득을 낼 수 있다고 해요! 성공은 자신이 선택한 길에서 최고가 되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선택에 자신이 있다면, 남들의 시선은 모두 뿌리치고 당당히 자신만의 길을 걸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주로 생산직, 건설직, 환경직이 들어가며, 농림직과 임업직, 수산직 또한 좁은 의미의 3D 직종에 들어간다.
    3D직종이 사전적인 의미의 3D(Difficult, Dirty, Dangerous)만 옳은 표현이며,
    연봉이 적은 직종이라는 의미의 3D는 틀렸다는 의견도 있는데,
    대부분의 대중들 사이에서 후자의 의미로 쓰이는 3D가 널리 통용된다면 이 의미도 표준어는 아니더라도 은어 정도로는 인정해 주어야 한다.
    그래도 이 의미가 틀렸다며 쓰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몇몇 사이에서 표준어 제일주의에 입각한 훈장질로 비칠 수 있다.

    한국의 경우는 과거에는 자국민을 그대로 투입했지만 임금 수준이 올라가면서 일부는 외국으로 이전했고, 일부는 '고용허가제'라는 이름하에 외국인 노동자를 불러다 쓰면서 상당수의 영세 3D업종의 실무 기술자들이 외국인으로 채워지고 있다.
    그러면서 한국인은 주로 외국인을 쓸 수 없을 정도의 경력이 필요한 장기 경력자나 아니면 대개 임금은 적지만 노동 강도도 상대적으로 낮은 직종(주로 비정규직)에 취직하는 경우가 많다.
    단 영세하지 않고 봉급이 어느 정도 나오는 3D업종은 한국인이 다수를 차지하는데, 현재 문제가 되는 중소기업의 열정페이는 중소기업 고용주의 인건비 절감 꼼수로 인해 나오면서 3D의 의미가 확장된 것이다.
    다만 이 쪽은 3D보다는 블랙기업에 더 가깝다.


    요즘은 3D라도 급여만 충분히 높으면 기피하지 않으며 차츰 3L(Long time(장시간 근무), Low pay(저임금), Low holiday(낮은 휴일, 즉 비상상황 대비로 인해 휴일이 없는)) 업무가 기피하는 업종이 되고 있다.

    공무원도 점차 갈수록 3D 업종이 되어가고 있는 현실이다. "응? 공무원처럼 즐겁고 재미있고 편안하게 일을 하면서 안 짤리고 월급&연봉이 따박따박 칼같이 오르는 유토피아 직장인 공무원이 무슨 3D 업종?"이라며 강력히 반문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겠지만, 사실 각종 매체를 통해서 공무원들의 잔혹한 현실이 많이 까발려지게 되었고, 해마다 늘어나는 의원면직률과 주 5일 근무제 및 주 52시간 근무제가 전혀 적용되지 않는 공무원 특성상 격무를 넘어선 폭무에 시달리는 공무원들이 과로사로 인해 요절을 한다든지 자살을 한다거나 분노한 민원인들에 의해 타살까지 당하는 등 그야말로 추악한 현실을 제대로 보여준 탓에 20~30대 취준생들의 공무원 선호도가 점차 떨어지게 된 것이다. 설령 공무원이 되더라도 매우 기뻐하기보다는 일을 잘 할 수 있을까 걱정하며 매우 슬퍼하는 경우도 상당히 늘어났다. 괜히 2022년 이후 공무원 경쟁률이 대폭 하락한 것이 아니다. 그만큼 공무원이 이제는 더 이상 완벽한 직장이 아닌 것이라는 것을 방증하는 셈.


    어느 사회든지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은 어려운 일을 하려고 하지 않고 쉽고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질자리를 찾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어려운 일자리는 제3세계 사람들이 그 일을 감당한다고 합니다.
    놀았으면 놀았지 수고가 많은 일은 하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수고가 많은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중소기업들은 우리보다 경제생활이 못한 외국인 근로자를 산업연수생이란 이름으로 수입해다가 그 자리를 보충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병리적인 현상은 산업현장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즈음 신세대들은 결혼하고서도 해산하는 수고가 싫고, 자녀 기르는 수고가 싫다고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경우가 20%에 육박하고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수고 기피 현상이 성도의 신앙생활속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데 심각성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수고스러운 일은 서로 맡아하지 않을려고 합니다.
    신앙생활을 편하게만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좋은 교회가 어떤 교회냐 좋은 목회자가 어떤 목회자냐 하면 수고할 것이 전혀 없는 교회, 그리고 성도를 수고롭게 하지 않는 그런 목회자가 좋다는 것입니다.
    안일무사가 최고의 가치처럼 여기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이해가 가지 않는 바는 아닙니다.
    복잡한 세상 속에서 힘들게 살다가 교회를 찾아왔는데 교회마져 이것 저것 머리 아프게 하고 수고롭게만 하는 것엔 짜증이 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세상적인 수고를 해야 사람노릇 하는 것처럼 교회에서는 교회적으로 영적인 수고를 해야 교인노릇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해산하는 수고 없이는 기쁨도 없고 보상도 없습니다.

    해산하는 여인을 보면 옆에서 보고 듣기가 민망할 만큼 고통스러워합니다.
    어떤 경우는 사경을 헤메이기도 합니다.
    그 때문에 고통이 있는 순간에는 다시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작정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곧 그 고통을 잊게 됩니다.
    왜냐하면 해산의 고통이 크지만 자기를 빼닮은 자식을 품에 안은 여인의 기쁨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해산하는 수고는 해볼만한 수고 입니다.
    영적인 산고 역시 해볼만한 해산의 수고입니다.
    신앙을 위해서 수고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보상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수고 없이 응답받는 즐거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말씀을 상고하는 수고 없이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즐거움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직고하는 공통이 없이는 용서 받는 감격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수고 없이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즐거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카네기 공대라고 하면 명문중의 명문입니다.
    그렇다면 카네기 출신에게는 100% 성공이 보장된 것일까요?
    답은 '아니올시다'였습니다.
    물론 후광효과는 얻겠지만 학교가 출세까지 가져다 주지는 않습니다.
    어느 집단에게도 그러하듯 그들 중에도 성공한 사람도 있는가 하면 실패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카네기 출신 중 성공인들을 대상으로 한 '성공비결'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전문 지식이나 기술은 성공하는 데 15% 밖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나머지 85%는 좋은 사람들에게서 얻는 힘에 있었다."

    뜻밖의 보고에 상당히 당혹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다음 대목에서는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특히 그들은 '세 가지 방문'을 잘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입의 방문', '손의 방문' 그리고 '발의 방문'입니다.

    '입의 방문'은 칭찬을 해서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용기를 주는 것이며
    '손의 방문'은 편지를 써서 진솔한 사랑을 전하는 것이고
    '발의 방문'은 상대가 병들었거나 어려움에 처했을 때 찾아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공의 비결은 '입품' '손품' 그리고 '발품'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다 보면 내가 '명품'이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말씀에서 "내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갈라디아 교인을 위한 수고를 해산의 고통을 겪는 여인의 수고에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미 갈라디아교인들을 위하여 영적인 산고를 겪은바 있습니다.
    갈라디아교인들은 바울로 인하여 우상을 버리고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갈라디아교회를 떠난 후에 유대인들이 와서 유혹하는 바람에 그만 믿음에서 흔들이게 되었습니다.
    바울 당시는 목회자 정착목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순회전도목회를 했기 때문에 교회를 세워놓고 다른 곳으로 또 전도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힘들게 태어나게 한 그 교회가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은 갈라디아교인들로 하여금 예수 믿게 하는 데 있어서 수고 했던 것과 같이 이제는 다시 갈라디아교인들의 신앙성장을 위해서 영적산고를 자청하고 나선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해산하는 수고는 처음 출생을 위한 수고가 아니라 이미 출생했던 생명을 품에 품고 성장시키기 위한 고통의 수고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양육을 위한 수고이며, 성장을 위한 수고이며, 성화를 위한 수고인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자신의 신앙 성숙을 위하여 해산의 수고를 해야 합니다.

    성도의 즐거움은 수고하는 중에 오는 즐거움이요 또한 그 수고가 지나간 후에 오는 즐거움입니다.
    하나님 자녀가 되어 구원받고 새사람이 되는 것은 단회적이고 일회적인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성화를 이루는 과정은 많은 시간과 노력과 자기 자신에 의한 고통의 수고가 필요한 것입니다.
    실재적으로 여러해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했으면서도 여전히 영적으로 미숙한 상태로 남아 있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왜그렇습니까?
    그것은 신앙의 성숙을  위하여 수고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는지 얼마 되지 않는 초보의 신앙인이 십수년 동안 신앙생활 해온 사람보다 더 성숙해질 수 있습니다.
             
    미국의 한 여류작가가 자신의 저서에 써 놓은 무디에 대한 기록을 보면 이런 귀절이 있습니다.

    "무디 선생은 크리스챤이 되자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하고 성경을 읽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그 말씀에 빨리 순종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무디 선생의 생활이 일부 믿는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그의 영적 성장은 여러해 동안 구원을 받았다고 자처하지만 실제로는 주안에서 성장을 하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을 거슬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매주 교회에서 주님 안에서의 새로운 체험들을 교인들과 이야기 했습니다.
    결국 오래 믿었다는 사람들이 무디 선생의 모범된 생활에 자신들의 체면이 손상 되는 것을 느끼고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그의 삼촌을 찾아가 조카를 잠잠케 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의 영적인 풍성함과 끊임 없는 열정이 오래 믿었다는 사람들의 어린애처럼 엄지 손가락을 빨고 있을 때 무디 선생은 이미 그런 시절을 넘겼고 그들이 좌우로 기웃거릴 때 무디 선생은 그들이 다가올 수 없을 정도로 계속 성장했습니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 여류작가가 지적하는 것처럼 어미 손가락만 빨고 어린양 하며, 좌우로 기웃거리고나 있는 그런 성도들이 되시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다른 사람의 구원과 신앙 성장을 위해서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합니다.

    죽어가는 영혼,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을 전도하여 믿음의 자녀를 낳는 행위는 영적인 해산의 수고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일이 해산하는 수고 없이 되려니 생각하면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 즉 산통을 느꼈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죽어가는 영혼 즉 믿지 않는 영혼을 보면 산통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믿는 이들 중에 아직도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인들을 위해서 산통을 느끼시기를 바랍니다.
    병든식구들, 어려움당한 성도들을 바라보면서 산통을 느끼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산통을 느끼며 기도하는 것이 바로 중보기도의 본질인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신앙 성장을 위하나 다른 이의 신앙 성장을 위해서 해산의 수고를 하는데 있어서 그 신앙 성장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입니다.
    사람이 목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그 마음, 그 인격, 그 영혼, 그 삶속에 이루어지기까지 해산의 수고를 계속해서 지불해야 하는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되는 법이 없습니다.
    조금 했다고 멈추면 안됩니다.
    주님을 날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우리도 주님처럼 해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모든 일을 수고 없이 해치우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믿는 사람들도 차츰 수고 없는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쁨도 덜하고 감격도 그렇게 크질 못합니다.

    심프슨 목사에 대한 일화 : 
    어느날 아침 심프슨 목사님 댁에 머물러 있던 한 손님이 서재쪽으로 갔다가 거기에서 그를 깊이 감동시킨 한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심프슨 목사님이 세계지도가 그려진 지구본을 양팔로 껴안은 채 책상에 홀로 앉아 있었는데 그의 양볼은 흘러내리는 눈물로 젖어 있었습니다.
    그는 죄악속에서 방황하는 세상사람들을 위해서 진정으로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도 죄악 많은 예루살렘을 바라보시고 고통하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종국에는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의 산고를 통하여 인류를 다시 낳으셨습니다.
         
    우리 모두 자신의 영적 성장을 위하여, 그리고 나아가 전도한 형제를 위하여 다시 한번 해산하는 수고를 아끼지 맙시다.
    이 고통 이 수고야 말로 성도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고통이요, 최고의 사랑이요, 최고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0월 15일(토) 

    몽학선생(蒙學先生, 파이다고고스. παιδαγωγός) 갈라디아서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몽학선생이란 예전에 한국에서는 양반들의 자녀에게 "천자문"을 가르쳤고 부모님에 대한 예절 교육을 맡겼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부모님이 직접 자기 자녀에게 부모님에게 이렇게 인사하라고 가르치는 것보다 몽학훈장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몽학선생이란 몽학훈장에서 그 의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고대 로마와 희랍에서는 몽학선생을 "파이다고고스(蒙學先生, παιδαγωγός)"라고 합니다. 
    '파이다고고스'는 "파이스(어린이)"와 "호대고스(인도자)"라는 두 단어가 합성하여 만든 단어입니다.  
    '파이도스' 라는 말은 철모르는 아주 어린아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않고 마구 뜯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아고고스' 라는 말은 인도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파이다고고스라는 뜻은 어린이를 인도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παῖς, παιδός, ὁ or ἡ  3816

    1. 아이,  2. 소년,  3. 아들

    발음 / 파이스(pais) 
    어원 / 3817에 유래한 듯
    관련 성경 / 사내아이(마 2:16), 하인(마 8:6, 8, 13), 종(마 12:18, 눅 1:69, 행 4:30), 신하(마 14:2), 아이 (마 17:18, 눅 8:51).
    신약 성경 / 24회 사용

    * 3817. παίω 

    1. 때리다,  2. 상처를 내다,  3. 쏘다

    발음 / 파이오(paiō) 

    관련 성경 / 치다(마 26:68, 눅 22:64, 요 18:10), 쏘다(계 9:5).
    신약 성경 / 5회 사용
    인도하다. ἄγω 71

    1. 인도하다,  2. 데리고 가다

    발음 / 아고(agō)
    관련 성경 / 끌려가다(마 10:18), 끌고 오다(마 21:2, 눅 19:30), 이끌리다(눅 4:1), 이끌다(눅 4:9, 히 2:10), 이끌다(눅 4:29),
    데리다(요 19:4, 행 17: 15), 끌어가다(행 9:21), 잡아오다(요 7:45, 행 5:21), 인도하다(요 10:16, 롬 2:4), 붙들다(행 17:19),
    데려가다(행 21:34), 데려오다(행 25: 6), 들어가다(행 23:10).
    신약 성경 / 67회 사용
    인도자. ὁδηγός, οῦ, ὁ  3595 

    1. 인도자,  2. 사도행전 1:16,  3. ὁδηγὸς τυφλῶ ν

    발음 / 호데고스(hŏdēgŏs) 
    어원/ 3598과 223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인도하는 자(마 15:14, 롬 2:19), 인도자(마 23:16, 24), 길잡이(행 1:16).
    신약 성경 / 5회 사용

    몽학선생(paidagōgos)은 노예로서 고대 그리스 로마 사회에서 귀족 자녀들의 교육을 돕는 일종의 가정교사였습니다.

    그들은 주인의 자녀들이 학교 교육에 익숙해지도록 초등학문을 가르쳤으며 학교까지 안전하게 데려가고 데려오는 일을 수행했습니다. 
    그들은 주인의 자녀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했으며 곁길로 가지 못하도록 했고 그들을 훈련시킬 권리도 주어졌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신분은 주인의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하는 노예였고 그들의 기능은 주인집 자녀들이 성인이 되기 전에만 필요하다는 한시적인 관계였습니다. 

    파이다고고스는 여러 노예들 중에서 가장 똑똑하다고 인정된 사람을 선택하여 아이들이 통학하는 길에 보호자 겸 안학교에 가는 길에 보호자로 인도자 역할을 합니다.
    또한 기초 문자와 글을 가르치는 역할을 감당합니다.
    이러한 일은 아지가 여섯 살 때부터 시작하여 대략 열 여섯 살이 되면 그 역할이 끝맺습니다.
    파이다고고스의 역할이 끝나면 다시 노예로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왜 율법을 몽학 선생이라고 하였을까?
    율법의 기능은 죄를 깨닫게 합니다.

    로마서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로마서 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죄를 깨닫게 하는 율법으로 구원을 이룰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율법은 구원으로 인도하는 몽학선생과 같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것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라함이 의롭다는 것은 믿음이었다(로마서 4:3,  갈라디아서 3:6,  야고보서 2:23)

    로마서 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갈라디아서 3: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야고보서 2:23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개혁자 루터는 하나님의 왼손은 율법이요, 하나님의 오른손은 은혜라며 하나님께서는 그 두 손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이해가 사도 바울과 서로 통한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도 율법을 몽학선생이라고 하여 구원의 문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몽학선생이란 영어 성경에서 튜터(tutor. 가정교사), 트레이너(trainer. 훈련자),  카스토우디언(custodian. 후견인, 관리인)으로 표현되는 등 여러 단어로 설명합니다.

    어린아이를 돌보고 보호하는 사람을 말한다. 

    헬라어로 아이(파이스. pais)인도자(아고고스. agogos)란 뜻을 지닌 이들은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6-16세의 어린아이의 가정교사

    “몽학선생(蒙學先生, 파이다고고스. παιδαγωγός)”이란 "어린아이의 공부를 가르치는 선생"을 말합니다.
    특히 헬라 시대의 몽학선생은 가르치는 교사라기보다는 아이들을 돌보고 감시하는 충실한 노예를 지칭합니다. 

    몽학선생은 누구인가? 

    몽학선생(paidagōgos)은 노예로서 고대 그리스 로마 사회에서 귀족 자녀들의 교육을 돕는 일종의 가정교사였다. 

    그들은 주인의 자녀들이 학교 교육에 익숙해지도록 초등학문을 가르쳤으며 학교까지 안전하게 데려가고 데려오는 일을 수행했다.
    그들은 주인의 자녀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했으며 곁길로 가지 못하도록 했고 그들을 훈련시킬 권리도 주어졌다.
    그렇지만 그들의 신분은 주인의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하는 노예였고 그들의 기능은 주인집 자녀들이 성인이 되기 전에만 필요하다는 한시적인 관계였다.

    왜 바울은 율법을 이런 몽학선생에다 비유했을까?

    율법의 역할이 과연 몽학선생처럼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해 주는 것인가?
    몽학선생이 주인의 자녀를 학교에 데려다 주면 그의 책임을 다하듯이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인도되면 율법은 그 준재 가치를 상실하는가?

    어떤 학자들은 몽학선생은 율법이 아니라 율법의 정죄라고 주장한다.
    율법은 계속 존재하지만 율법의 정죄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순간 없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바울이 말한 몽학선생이 율법의 정죄라고 하기에는 문맥상 어려움이 있다.
    그렇다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었다는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몽학선생을 율법이라고 할 때 율법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 우리에게 필요 없는 것이 되는가?

    율법에는 의식법(ceremonial law), 건강법(health law), 시민법(civil law), 도덕법(moral law) 등이 있다.
    짐승을 잡아 제사 지내는 구약의 모든 의식법(儀式法)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었을 때 모두 폐지되었다(히 9:26).

    원형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모형이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스라엘 에게만 해당되는 많은 관습법이나 시민법 등도 이스라엘의 멸망과 함께 사라져 벼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두 돌비에 친히 써서 주신 십계명까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폐지될 수는 없다.
    그것은 십자가로 오히려 더 완전케 된 법어였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율법을 폐하지 못한다.
    바울은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그러므로 바울이, 여기서 율법은 십자가에서 끝나고 이제는 소용없게 되었다고 말하여 구약시대는 율법으로 구원을 얻으며 신약시대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님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율법과 몽학선생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비유를 가지고 어떤 진리를 설명하는 것은 언제나 한계가 있고 완벽하지 못하다.

    몽학선생이 주인의 자녀를 훈련도 시키며 보호하여 안전하게 학교에 데려다 주는 것처럼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고 그리스도에게 향하게 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도록 우리를 돕는다(3:24).
    이런 관점에서 율법이 몽학선생에 비유되었다.
    그러므로 몽학선생이나 율법의 기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몽학선생 아래” 있는 것이다(3:25).
    다시 말해서 자기가 아들인 것을 잊어버리고 몽학선생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에게 순종하여 구원받으려 하는 것이다.
    율법의 기능은 우리의 죄됨을 드러내어 구주의 필요성을 절감하도록 하는 것인데 그 율법을 의지하여 구원을 논하려 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학교에 도착한 다음에도 몽학선생은 존재해 있지만 학생은 이제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않고 교사 아래 있다.

    몽학선생의 비유는 십자가 이후에는 율법이 필요 없게 되는 것처럼 오해하기 쉬우나 율법은 십계명으로 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몽학선생의 비유는 몽학선생의 존재나 기능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몽학선생을 의지해 그 아래서 구원받으려 하는 인간의 시도가 필요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를 통해 구원의 자녀 됨이 분명해졌으므로 다시는 “몽학선생 아래” 살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바울은 이 관습을 예로 들어 율법을 몽학선생에 비유합니다(갈 3:23~25). 

    몽학선생이라는 단어가 개역성경에서는 두 번 나오며, 개역경에서는 몽학선생을 초등교사로 소개합니다.

    몽학선생은 몽학훈장(蒙學訓長)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몽학훈장이란
    첫째는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훈장,
    둘째는 겨우 어린아이나 가르칠 정도의 훈장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정식 훈장이라기 보다는 보조교사 혹은 초보교사라고 하겠습니다.
    혹은 어린아이들을 정식교사에게 데려다 주는 보모정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몽학선생의 ‘몽(蒙)’은 어리석을 몽, 혹은 우매할 몽입니다. 

    바울 사도는 율법에 대하여 설명하며, 율법은 우리를 의에 이르는 길을 안내하는 정도의 몽학선생(초등교사)으로,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인도하는 역할만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우리로 죄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그 이유는 율법이 정하는 온전한 행위에 이를 수 없는 존재임을 자각하도록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믿음과 은혜는 우리를 의의 이르게 하시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인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이르게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의롭다고 하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이르기 위하여 믿음이 필요합니다. 
    몽학선생에 목매달지 말고 진정한 스승이며 완전한 교사이신 예수님께 믿음으로 나아가므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중국사람들은 몽골족속들을 무시하여 그들을 몽고고족(蒙古族)이라 비하 하였으며, 
    지금도 몽골리아(Mongolia)를 몽고(蒙古)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원래 몽골리아는 몽족이 중심(골, ГОЛ)이 되어 세운 나라라는 뜻입니다.
    몽골리아는 자신들이 몽고라고 불리는 것을 대단히 싫어합니다. 

    몽학선생이란 영어 성경에서 튜터(tutor. 가정교사), 트레이너(trainer. 훈련자)카스토우디언(custodian. 후견인, 관리인)으로 표현되는 등 여러 단어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왼손으로는 율법을 오른손으로는 은혜로 세상을 다스린다.
    루터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왼손은 율법이요, 하나님의 오른손은 은혜라며 하나님께서는 그 두 손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는 것은 믿음이었다(로마서 4:3,  갈라디아서 3:6,  야고보서 2:23)


    후견인, 곧 몽학선생은 옛날 우리 나라의 양반 가정에서도 있었던 제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몽학선생이라는 말 자체가 사용되고 있었으며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그 개념이 성립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오늘 전하고자하는 진리를 이해하는 일이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옛날 궁전이나 양반 가들의 가정에서 있었을 뿐 서민들에게는 있었던 제도가 아니기 때문에 이에 관한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야 이해를 할 수 있는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몽학선생이라는 말을 이해하기에 앞서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하였느냐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주제는 언제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어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와 같이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며, 그것은 오직 은혜로 이루어진다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구원론을 전개함으로 특별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원의 길로 믿고 지켜온 율법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 동안은 오직 율법이라는 교리와 자세로 지내왔는데 오늘에 와서는 오직 믿음, 오직 은혜로 바뀌어지게 되었으니 자연 양자의 관계성을 논해야 하는 문제에 부딪치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율법주의를 은혜로써 극복하는 교리를 전개해 나갑니다.
    그리고 거기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한 계단 더 나아가 그 은혜를 법적 관계에서 설명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은혜를 율법의 논리에 의해서 설명해 나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면에서 보아도 사도 바울은 참으로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의 신학적인 수준과 논리적인 전개는 20세기의 오늘에 와서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실로 높은 경지의 변증적인 이론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바울 신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첩경이 되는 것은 그가 설명하는 율법과 은혜에 대한 이해를 갖는 일입니다.
    이는 루터의 신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근간에는 율법과 은혜의 문제를 교육학적으로 풀이하는 분도 많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율법과 은혜가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어 나가는 교육 방법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가 아이들을 키울 때에도 적당히 때리고 적당히 칭찬해야 합니다.
    만약 그러한 것의 균형을 잃고 너무 자주 매질을 하거나 많이 때리면 의지가 죽어버리게 되어 의기 소침한 아이가 되고 맙니다.

    반면에 너무 위해 주기만 하면 영영 버릇 나쁜 아이가 되어 방종해지기가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왼손으로 때리면 오른손으로는 어루만져 주는 이러한 균형이 잘 맞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균형이 잘 잡히지 않으면 그 자식은 버리는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율법과 은혜의 문제는 어제나 오늘이나, 교육학적으로도 중요한 원리가 될 것입니다.

    바울이 생각하는 율법의 대표자인 모세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은혜의 대표자인 아브라함과를 대조하는 일입니다.
    사실 이 모세와 아브라함, 아브라함과 모세를 어떻게 균형 있게 바로 이해하느냐하는 것에 기독교의 교리를 이해하는 첩경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있는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지만 적어도 율법과 은혜의 관계는 충분히 이해할 정도가 되어야 믿어야할 바의 신앙이 굳게 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어느 신학자가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성경 자체가 말하고 있는 기독교의 진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교리는 그리스도인이 성숙되는 단계에서는 반드시 이해해야할 기본적 교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아브라함을 보는 교리의 핵심을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로 여기신 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구원을 얻은 것은 행함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의롭게 인정하여 주심으로 구원을 얻게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구원을 얻는 일에 있어서 원천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이 모세 이전, 즉 율법이 모세를 통해 가르쳐지기 이전에 있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하는 교리가 율법에 앞서 있어왔던 것이며, 그것은 비록 시간적인 문제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근본적인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을 버리거나 결코 잘못된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율법과 은혜를 어떻게 조화시키느냐 하는 것인데, 사도바울은 율법을 폐기하거나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율법 자체를 은혜 중심,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풀이합니다.

    이와 같이 율법의 의미를 근본 의미인 은혜로 돌아가서 풀이하고 있다는 데에 바울의 천재성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바로 그와 같은 율법의 입장을 설명하기 위하여 오늘본문에 기록한 대로 율법을 가리켜 "몽학선생으로 표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의 비유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은혜가 선포된다면 아브라함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이에는 모세, 곧 율법이 존재합니다.
    바로 그 율법이 몽학선생의 역할을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일정한 기간 동안 일단, 율법에 매여 그 율법 안에서 양육되어진다고 하는 이러한 관계를 몽학선생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4장 1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보다 분명하게 그 의미를 알 수가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부득불 어렸을 때에는 어느 기간 동안 몽학선생 하에 있게 된다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몽학선생이라는 말이 갖는 의미를 살펴보기 위해 그 어원을 한번 풀이해 봅니다.

    몽학선생이라는 말을 헬라 원어로는 '파아이다고고스'라고 하는데, '파이도스' 라는 말은 철모르는 아주 어린아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때에는 그저 아무 것도 모르고 말썽만 부리는 것이어서 교육학에서도 말하기를 그런 나이에는 자연도 미워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나무이든 꽃이든 가라지 않고 마구 뜯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런 기간의 어린아이를 가리켜 파이도스라고 하며 그 다음에 이어지는 '아고고스' 라는 말은 인도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파이다고고스라는 원어의 뜻은 어린이를 인도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고대 헬라 사람들의 기록에 의하면, 그들이 파이다고고스가 가르치는 어린아이들의 연령은 여섯 살에서부터 열 여섯 살 까지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열 여섯 살이라고 하면 상당히 자란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사실은 그 때가 더욱 어려운 기간입니다. 아무튼 여섯 살 때부터 열 여섯 살까지의 기간을 몽학선생 아래에 둔다고 하는 이야기 입니다.
    특별히 귀족의 가정이나, 경제적인 여건이 문제가 되지 않는 여유 있는 가정에서 자녀를 훌륭하게 키우고자 할 때 이 기간 동안을 몽학선생에게 맡겨서 교육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몽학선생이 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할 때 그 하는 바가 여러 가지로 많겠습니다마는 우리 나라의 몽학선생은 아주 어렸을 때에는 쉬운 천자문을 가르치고 예법을 가르치는 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하여 아침에 일어나서 부모님께 문안드리는 것을 비롯하여 앉고 서는 언행의 일체를 간섭하며 가르치게 됩니다.
    그러니까 부모님께 문안드리는 것을 부모님 자신이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부모님 자신이 "아침마다 일어나서 나한테 절을 하라."고 한다면 그대로 잘 통하지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몽학선생이 있어서 그 모든 것들을 어렸을 때부터 몸에 배이게 버릇을 가르쳐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헬라와 히브리의 몽학선생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학교를 오고 갈 때에도 동행을 하면서 그 출입의 전부를 간섭합니다.
    그러니까 한 어린아이에게 전적으로 한 사람이 달려서 열 여섯 살까지 간다는 것이며, 열 여섯 살이 지나야 후견인이 떨어지고 비로소 자유롭게 혼자 왕래할 수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생각해 보면 거기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옛날에는 혼자서 다닐 수 있는 거리가 못됩니다.
    특별히 개들이 많고 도적도 많으며, 아이들을 유괴해 가기가 쉽고도 많은 때에 돈 많은 귀족의 자녀가 혼자서 밖을 다닌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반드시 후견인이 따라다녀야 했던 것인데, 이 후견인으로는 물론 일반인도 없지는 않았으나 대체적으로 힘이 세면서도 성품이 좋고 믿을 만한 노예들을 세워서 돌보게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다른 일은 그만 두고 내 아이만을 맡아서 단정하고 훌륭한 아이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켜줄 것을 부탁 받은 이것이 바로 파이다고고스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비록 왕자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그가 어린아이인 이상 이파이다고고스 밑에 있어야만 합니다.
    어린아이란 왕자이든 아니든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똑같이 맞고 때리며 욕하기 마련이요, 불의와는 상관없이 도둑질까지도 재미로 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아이들이란 분별력도 없거니와 스스로 자기 조정이 안 되는 유치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후견인이 필요한 것이란 말입니다.
    그 결과 4장 1절에 기록된 말씀과 같이 후견인 밑에서 종과 다름이 없는 생활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율법을 몽학선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중생한 사람이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 있을 동안에는 율법에 매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처음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에는 마음으로는 예수를 믿으나 아직도 버리지 못한 좋지 않은 버릇들이 남아 있어서 아차 하면 그대로 튀어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오랫동안 잘못된 습관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고치려면 매우 힘이 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나오는 것도 오랫동안 습관이 되고 몸에 익은 분들은 의례히 그날이 되고 시간이 되면 교회에 나갈 줄을 알지만, 처음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닌 것입니다.
    더욱이 새벽에 일어나서 교회에 나온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새벽기도가 익숙해지려면 적어도 3년은 걸려야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처음에는 만사가 다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율법에 매이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치한 시절을 지나 성숙해지면 그 때에는 자유인이 됩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이것 하지 말라, 저것 하지 말라며 거의 매사를 저지하다가도 자랄 만큼 자라고 나면 마음 대로인 것입니다.
    그래서는 어렸을 때에는 귀가 시간이 조금만 늦어도 야단을 맞고 벌을 받아야 하던 것이 어느 나이가 지나고 난 다음에는 밤을 새고 들어온다 하여도 상관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어느 순간까지는 엄한 간섭을 받아야 제대로 성장할 수가 있습니다.
    알고 보면 우리가 굳이 오른 손으로 수저를 잡는 것이나 걸음을 걷는 일까지도 쉽게 배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크고 작은 동작 하나 하나는 상당한 후견인의 강한 간섭을 받은 훈련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십계명을 보면 열 가지 계명 중 "하라"는 것은 둘 뿐이고 "하지 말라"는 것은 여덟이나 됩니다.
    그러니 만큼 어느 수준까지는 율법에 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하지 말라"에 매여있습니까? 아니면 "하라"는 계명에 있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무한한 자유를 느끼면서 아무런 구속함이 없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이대로인 것입니까? 아니면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되지 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은 아
    닙니까? 바로 안 된다고 하는 여기에 율법의 힘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들어서 아는바 대
    로 옛날 서당에서 공부를 하던 시절 졸리는 것을 막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머리맡에 바늘
    이나 송곳 같은 것을 매달아 놓아 꾸뻑하고 졸게되면 거기에 찔려서 잠을 깨게 했다는 것인
    데 이것이 다 율법인 것입니다. 아직도 다듬어지지가 않고 세워지지가 않은 유치한 때에는
    이와 같은 강한 율법의 제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첫째는 시민법으로서의 율법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율법은 하나의 민법입니다.
    동시에 율법은 이스라엘 사람뿐만 아니라 온 인류에게 죄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갈라디아서 3:19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죄가 없고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율법이 있습니다.
    따라서 죄가 없고 죄를 지을 가능성이 없는 곳에는 율법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범죄함이 있고 계속 죄에 대한 가능성이 있으므로 율법은 항상 있어야 합니다.
    율법은 죄를 알게 하고 죄를 지은 결과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그 형벌까지도 가르쳐 줍니다.
    율법에 기록된 형벌들을 보면 "돌로 쳐죽여라."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등 참으로 무서운
    벌들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엄한 벌들이 있기에 죄의 길을 가지 않도록 몽학선
    생 밑에서 인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죄를 보여주는 거울과도 같습니다.
    거울을 보지 않는다면 비록 굴뚝을 청소하고 나온 후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얼굴에 새까맣게 묻은 그을음을 어떻게 알 수가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율법을 봄으로 간음, 도적질, 살인 같은 것들이 죄가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율법이 없어도 되는 충분한 양심의 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롬 2:14-14).
    그러나 범죄하여 죄에 익숙한 존재가 되므로 죄에 대한 감각이 흐려지고 둔해져서 이제는 죄인지 의인지 조차도 알 수 없는 상태에 와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율법을 주어서 바른 죄의식을 갖게 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임재 의식을 갖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율법은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몽학선생으로써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도 바울의 위대한 변증입니다.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다는 말은 간접적으로는 율법이 우리를 은혜의 길로 인도한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로 나와서 영생의 길을 묻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마 19:16-22, 눅 18:18-23)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지키라는 말씀을 하시게 되는데 이 때에 그 사람은 율법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같은 말씀을 들은 그 사람은
    심히 근심하며 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과연 예수님께서 율법을 지키라는 말씀을 하면서 기다리신 대답이 어떤
    것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만약 이 사람이 "선생님 어떻게 율법을 다 지킬 수가 있
    습니까? 아무리 지키려고 하여도 저로서는 지킬 수가 없습니다. 율법을 지켜야 만이 구원을
    얻는다면 저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하고 나왔더라면 예수님께서는 간단하게 "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얻을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교만하고 건방져서 어렸을 때부터 다 지켰나이다라고 하므로 정말 지켰
    나 안 지켰나를 어디 시험해 보자시며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하
    시니 여기에서 넘어지는 것이란 말입니다.

    율법이란 무엇인가?
    율법을 바르게 지켜보겠다고 노력하면 할 수록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오직 은혜가 아니고서는 우리가 구원 받을 길은 없습니다.

    율법적으로 죄의 문제를 자꾸만 깊이 생각하고 보면, 요즈음 같이 어려운 때에는 살아있는 것까지도 죄가 됩니다.

    "베풀지 않는 것은 도적질하는 것이다"라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격언이 있는데 이는 생각해 보면 맞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또한 베푼다면 어디까지 베풀어야 도적이라는 오명을 피할 수 있습니까?
    이와 같이 율법을 놓고는 아무도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인 니고데모가 예수님 앞에 나온 것도 그 때문인 것입니다.
    유대인의 관원인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을 다 지켜보았으나, 그것으로서는 안되겠기에 예수님 앞에 나와서 영생의 도리를 질문한 것입니다. 
    진정으로 진실해 보겠다며 애쓴 사람은 진실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율법을 정말 지키려고 했던 사람은 그 일이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실 지킨다고 해보았자, 지키지 않는 것과 오십 보 백 보일 뿐 그게 그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진정 율법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자기가 의를 행했다는 말을 조금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러나 저러나 다 죄인으로 비춰지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이 말한 바와 같이 내가 생각하는 것, 내가 행하는 것, 그 무엇이고 죄 아닌 것이 어디 있더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로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시는 오직 은혜와 오직 긍휼로 구원에 이르게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하는 그 무서운 율법은 몽학선생이 되어서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여 우리로 하여금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게 합니다.
    여기에서 나아가 율법은 그리스도인이기에 지켜야하는 중요한 생활윤리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하나님의 원하심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하나님의 마음의 계시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율법을 대하는 것은 벌을 면하고자 하거나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형벌이 무서워서도 아니며, 이것을 지켜서 구원을 받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이 여기 있으니까?'하는 생각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안식을 지키는 것도 '이것 지키지 않으면 벌받는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안식일을 주셔서 나로 하여금 쉬게 하시니 얼마나 감사한가'하는 마음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범사에 감사한 마음으로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인입니다.
    이제는 율법에 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모세의 때가 지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더 이상 몽학선
    생 아래에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로부터 간섭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마음대로 하라."고 하는 어거스틴의 말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감사와 기쁨
    에 가득찬 감격 속에서 그저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유로움 속에서 의롭게
    살아가는 거기에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삶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이것은 안되고, 저것은 못한다며 벌벌 떠는가하면 감기만 걸려도 내가 또
    무슨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며 두려워하는 이들이 많은데 언제까지 꼭 이래야만 되겠습니까?
    그러자니 교회에 들어서자마자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다 아직도 몽학선생 밑에
    있음으로 매를 맞을까 염려하여 두려워 떨고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이를 두고 기억할 것은
    그렇게 하고 있는 한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유인을 말합니다.
    이는 아직도 몽학선생에 매여 있어야하는 유치한 단계의 자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특별히 하나님의 성숙된 자녀로서 율법으로부터 벗어난 온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율법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켜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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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14일(금) 

    그리스도와 함께(갈라디아서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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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의 종(갈라디아서 1:10)

    종. δοῦλος, ου, ὁ 1401

    1. 종,  2. 마태복음 8:9,  3. 반대어 ἐλεύθερος

    발음  / 두로스(dŏulŏs)
    어원 / 121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종, 노예(마 8:9, 막 10:44, 눅 2:29).
    신약 성경 / 124회 사용

    반대어 ἐλεύθερος.  1658 

    1. 자유로운,  2.  요한복음 8:33,  3. 독립적인

    발음 / 엘유데로스(ĕlĕuthĕ- rŏs)
    어원 / 2064의 대체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
    관련 성경 / 면제된(마 17:26), 자유로운(요 8:33, 롬 6:20, 고전 7:21),
    [명] 자유인(고전 7:22, 9:1, 갈 3:28, 골 3:11).
    신약 성경 / 23회 사용

    다른(6절) 헤테로스 ἕτερος, α, ον  2087
    1. 다른,  2. 둘 가운데서 다른,  3. 둘 이상 가운데서

    발음 / 헤테로스(hĕtĕrŏs)
    어원 /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다른, 또[다른] 하나의, 다른 몇의, 그 밖의.
    신약 성경 / 99회 사용
    다른(7절) 알로스 ἄλλος, η, ο  243
    1. 다른,  2. 마태복음 13:5,  3. 요한복음 4:38

    발음 /  알로스(allŏs)
    관련 성경  /  다른(막 15:31), 더러는(마 13:5), 왼편(마 5: 39), 남(눅 23:35), 다른 이(막 12:32), 하나(마 21:33), 어떤 이(막 6:15),
    다른 사람(요 4:38).
    신약 성경 / 155회 사용

    그리스도의 종(고린도전서 7:22)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바울은 여기서 "주"라는 단어와 "그리스도"라는 단어의 위치를 제 예상과는 다르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해방과 예수님의 우리 주인되심을 연관짓고 있습니다("주께 속한 자유인").
    그리고 우리의 새로운 노예됨과 예수님의 우리 메시아되심을 연관짓고 있습니다("그리스도의 종").
    그러나 사실 메시아는 그의 백성을 압제자에게서 구하기 위해 오셨고, 반면 주인은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는 존재입니다.

    바울 사도는 왜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일까요?
    두 단어의 바뀐 위치는 우리의 새로운 해방에 두 가지,
    그리고 우리의 새로운 노예됨에 두 가지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를 "주께 속한 자유인"이라고 부름으로써,
    그는 우리의 새로운 자유를 확실하고 안전하게 하고 제한합니다.

    1. 그의 주되심(lordship)은 다른 모든 주인들 위에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해방은 다툼이 있을 수 없습니다 — 안전합니다.

    2. 그러나, 다른 모든 주인들로부터는 자유하지만, 그에게서 자유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자유는 자비롭게 제한됩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부름으로써, 우리의 노예됨을 느슨하게 해 주며 달콤하게 합니다.

    1. 메시아는 그의 백성들을 감금의 제한에서 해방시켜 평강의 트인 공간으로 데리고 오기 위해 그의 백성들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하십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이사야 9:7).

    2.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가장 달콤한 기쁨을 주기 위해 그들을 그의 소유로 삼으십니다. "반석에서 나오는 꿀로 너를 만족하게 하리라 하셨도다" (시편 81:16). 이 반석은 그리스도입니다.

    로마서 1:1 /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 복음을 위하여 선택받은 종

    고린도전서 7:22 /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 복음을  위하여 선택받은 종

    갈라디아서 1:10 /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는 종

    에베소서 6:6 /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종

    귀를 뚫는 종(출애굽기 21:1-17)  종에 관한 법

    [히브리 남자 노예의 권리
    네가 백성들에게 선포해야 할 법령은 다음과 같다.

    2) 너희가 히브리 남자를 노예로 샀을 경우에는 최대한 6년 동안만 일을 시킬 수 있다. 7년째가 되는 해에는 몸값을 요구하지 말고 그를 풀어 주어야 한다.
    3) 그가 홀몸으로 들어왔으면 홀몸으로 풀어 주고 장가를 들어서 왔으면 그의 아내도 같이 풀어 주어라.
    4) 그런데 주인이 그 노예에게 장가를 들게 하여 자식들을 낳았을 경우에는 그 아내와 자식들은 주인의 소유인 까닭에 노예만 홀몸으로 나가야 한다.
    5) 그렇지만 그 노예가 분명하게 `나는 주인님과 나의 처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혼자 나가서 자유로운 몸이 되지 않겠습니다.'하고 말한다면
    6) 주인은 그 노예를 하나님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를 문짝이나 문설주에 바짝 세워 놓고 귓바퀴를 송곳으로 뚫어라. 그러면 그는 죽을 때까지 그 주인의 노예가 된다.
    7) [히브리 여자 노예 보호 법령] 어떤 사람이 자기 딸을 노예로 팔았을 경우에는 남자 노예들처럼 7년째 되는 해에도 자유로운 몸이 되지 못한다.
    8) 그 여인을 아내로 삼으려고 사왔는데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에는 몸값을 받고 내보내라. 또한 결과적으로는 그 여인을 속인 것이므로 이방인에게 여인을 팔 수는 없다.
    9) 만일 그 여인을 며느리로 삼으려고 할 경우에는 자기 딸과 똑같이 대우해 주어야 한다.
    10) 또한 그 주인이 다른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이더라도 먼저 여인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다 대주어야 하며 잠자리를 같이하는 일도 그쳐서는 안 된다.
    11) 이 세 가지 의무를 주인이 지키지 않을 경우에는 그 여인에게 몸값을 요구하지 말고 풀어 주어야 한다.

    모세를 통해 고대 근동 사회에 일반적이었던 노예 제도 속에 적용되어야 할 율법이 먼저 제시되고 있습니다.

    백성 앞에 세울 법규
    (1)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며, 택하신 백성들의 구별된 삶을 위한 지침이 됩니다. 따라서 법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보여주며, 이방인과 구별된 삶이 되고,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드러냅니다.

    남자 종에 관한 법(2-6)
    사람은 빈부나 계급에 관계없이 누구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기에 각 개인의 생존권과 존엄성이 존중되어야 합니다. 율법은 노예에게도 이것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인 중에 가난하여 빚을 갚지 못할 때(레 25:35, 39), 또는 훔친 물건을 배상할 능력이 없을 때(출 22:3) 종이 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번 종이 되었다고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종은 6년 동안 주인을 위해 생활하다 일곱째 해에 자유가 보장되었습니다(2).
    몇 가지 조건에 따라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자유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3-4). 만일 종이 가정을 보존하고 생계유지의 어려움을 피하고자 한다면 그는 영구적으로 종으로 남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종이 “내가 내 주인과 아내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인이 되지 않겠다”라고 하면 주인은 그를 현관으로 데리고 가서 문설주에 대고 종의 귀를 뚫음으로써 그 종은 영구적으로 주인에게 속하게 됩니다.

    여자 종에 관한 법(7-11)
    경제적 압박을 겪는 부모는 딸이 미성년자일 때 결혼을 전제로 딸을 팔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건은 딸을 사는 사람이 직접 아내를 맞이하거나 그의 아들에게 주기 위한 경우에만 가능했습니다. 만일 남자가 아내로 맞이하기를 포기한다면, 적절한 보상을 한 후에 돌려보내야 했습니다. 결혼에 대한 약속을 깬 것이기에 속인 것으로 간주되었고, 합당한 배상이 이루어집니다. 만일 남자가 여자를 아들에게 주기 위해서 샀다면, 딸처럼 대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한 남자가 또 다른 여자를 아내로 삼을 경우 첫 번째 아내에 대한 정당한 의무를 다해야 하고(10),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남자는 여자를 조건 없이 자유롭게 해야 합니다. 여자 종에 대한 법규에는 여자 종에 대한 최소한의 인권과 자존감,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되고 있습니다. 또한 여자 종은 남자 종처럼 6년이 지나면 자유롭게 한다는 규정이 없는데, 이것은 사회에서 경제권이 거의 없고, 사회적 약자였던 혼자된 여자들에 대한 보호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적용 :  율법은 경제적·사회적·약자들에 대해 이방 사회와는 달리 인간적 존엄성과 자존감을 보장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신은 약자들에 대해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까?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뜻을 안다면 연약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힘입어 현재의 왜곡됨 또는 연약함으로부터 더 이상 부패하지 말고 전심으로 온전함에 이르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뿌리라는 영화에 보면 흑인들을 팔고 사는 노예의 제도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노예 시장에서는 흑인들을 사람인데 사람 취급을 하지 아니하고 물건처럼 다룹니다. 그래서 노예를 팔 때 노예 상은 이 사람은 치아가 튼튼해서 일을 잘 할 수 있고, 이 사람은 건강한 여자이기 때문에 아이를 잘 생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아이를 잘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은 종을 많이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건강한 남자라고 하는 것은 일을 잘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노예를 소개하고 값을 부르면 필요한 사람들이 흑인들을 종으로 사가는 시장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인권이 완전히 다 무시된 곳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생각할 때 먼 옛날에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현대판 노예 시장도 있어요. 요즘도 사람들을 돈 몇 푼에 잡아 철창 속에 가둬 놓고 돈벌이 수단으로 삼고 있다는 기사를 읽습니다.

    오늘 읽은 성경 본문은 이러한 노예 제도에 관해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노예제도를 찬성하고 노예제도를 허용하시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핏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주셨던 종제도는 현대인들이 만들었던 노예제도하고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왜 이런 종 제도를 성경에 기록해 놓으셨느냐 하나님께서 종 제도를 허락하신 것은 이혼하는 법을 허용하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원래는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결합시켜서 가정을 만들었을 때 절대 헤어지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너희가 나누면 안된다. 그래서 한번 결혼하면 평생 살아야 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에도 이혼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두 가정 당 한 가정이 이혼하는 추세에 우리가 도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미국에서나 있었던 이야기였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이혼하려고 하면 이혼 증서를 여자에게 써 주고 이혼을 하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뜻으로 종 제도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노예제도를 거의 폐지할 수 있을 만큼 엄격한 율법을 적용했습니다. 가령 예를 들면 노예가 종살이했다가 도망치잖아요. 그러면 붙잡아 갖고 억지로 되돌려 보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현대판 노예제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도망치면 끝까지 쫓아가서 잡아 옵니다. 그러나 율법에서는 도망간 종은 붙잡아 오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또 그런 사람을 보면 붙잡아 주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해 놓은 법입니다. 그래서 이런 규정을 볼 때 그러면 누가 종살이 하겠느냐. 종살이 하다가 도망치면 끝나는 것 아닙니까? 종으로 남아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는 정 반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종되는 경우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빚을 못 갚았을 때 종으로 팔려가게 됩니다. 빚을 많이 졌는데 갚으라고 해서 못 갚잖아요. 그러면 그 빚만큼 사람이 가서 종살이를 해야 합니다.

    둘째는 옛날에는 먹고 살기가 너무 어려웠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 종살이를 하겠다고 부자집에 종으로 들어가는 경우입니다. 부자집에 종으로 들어가면 먹을 것도 주고, 입을 것도 주고, 집도 제공 받으니까 그냥 종이 되겠다고 가서 나를 종으로 삼아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종이 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빚을 져서 종이 되는 사람이거나 혹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종이 되는 사람이 있는데, 문제는 6년까지만 종을 부리고 7년째는 무조건 자유를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7년째 되는 해는 주인의 허락을 받지 않고 그냥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주인의 집에서 가고 싶으면 가도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7년이 됐는데 나는 계속 종하겠다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종이 나갈 자유가 있지만 나가고 않고 계속 주인의 종이 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생겼을 경우에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종이 되겠다고 하는 사람을 데리고 재판장 앞에 가서 먼저 이야기합니다. 나는 이 주인의 평생의 종이 되겠습니다. 그렇게 의사를 밝힌 다음에 종이 되겠다는 그 종을 데리고 문설주에 귀를 대고 귀에 구멍을 뚫습니다. 그러면 귀 뚫은 종이 되어서 그 주인의 평생 종이 되는 것입니다.

    요즘 여자들이 귀를 많이 뚫잖아요. 가끔 남자들도 귀를 뚫는 분이 있는데 귀 뚫는 의미를 알고 귀를 뚫으시기 바랍니다. 왜 여자들이 자꾸 귀를 뚫으려고 할까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했는데 제일 먼저 따먹은 사람이 하와잖아요. 아담은 선악과를 먹다가 양심이 껄려 목에 그 씨가 걸렸는데 여자는 거리낌도 없이 싹 먹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최초로 불순종했던 사람이 하와거든요. 그러니까 하와의 후손들인 여자들이 귀를 뚫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저는 이제 평생 귀 뚫은 종으로 하나님을 떠나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귀를 다 뚫는 것입니다. 종이 귀를 뚫는 것은 7년째는 나가서 자유할 수 있지만 계속적으로 이 주인집에 남아 평생 종이 된다고 할 때 귀를 뚫습니다. 이렇게 귀를 뚫은 종은 사고 팔 수가 없습니다. 평생 귀를 뚫은 그 집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또 그 주인집을 떠날 수도 없습니다. 주인과 더불어 평생 살다가 죽는 종이 귀 뚫은 종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 귀를 뚫은 종은 왜 귀를 뚫는가를 생각하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주인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5절, “종이 진정으로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하지 않겠다” 주인을 사랑해서 귀를 뚫는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종의 귀를 뚫는 것은 평생 종으로 부려 먹기 위해서 강제로 종을 억압 해 뚫는 것이 아닙니다. 귀 뚫은 종이 되는 것은 본인이 스스로 자원해서 귀를 뚫고 주인의 평생 종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7년째 자유인이 되고 나가면 자유롭게 살 수 있지만 귀를 뚫어서 평생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귀 뚫는 것은 억지로 뚫는 게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믿음 생활을 할 때 억지로 믿음 생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을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원하는 예배, 자원하는 봉사, 자원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시고 자원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큰 역사를 이루실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올라갈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졌던 사람이 있어요. 본인은 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데 남이 갖다가 자기에게 십자가를 져주니까 억지로 십자가를 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구레네 시몬은 도대체 내가 왜 예루살렘까지 와서 십자가를 지려고 왔나하면서 원망 불평하면서 갈보리 산을 올라갔습니다. 구레네 시몬이 이렇게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갔다고 하니까 어떤 분들은 시몬처럼 억지로 신앙 생활하려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억지로 드리는 것은 기뻐하지 않아요. 가령, 새벽 기도를 쉽게 하는 분도 있구요. 어렵게 하는 분도 있습니다. 어렵게 하는 분들은 왜 어렵게 하는지 아세요? 하기 싫은 것 억지로 하려고 그러니까 어렵습니다. 목사님 눈치 봐서 하고 또 무슨 일 때문에 하고, 어떤 형편 때문에 하려고 하니까 지옥같은 것입니다.

    세상 남자들이 좋아하는 것 있습니다. 여하간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행처럼 좋아하는 것 있습니다. 찻간에서도 하고 기찻간에서도 하고 집에서도 합니다. 명절 때가 이제 곧 돌아올텐데 성도 여러분들 정신차리시기 바랍니다. 왜 그렇게 그것을 좋아하는지 노는 문화도 없어서 그런 탓도 있지만 어쨌든 정신을 못 차려요. 불신자건 믿는자든 동양화 나오는 그림을 보면 정신을 못 차려요. 그리고 날 밤을 새는지도 몰라요. 밤이 2시가 돼도 3시가 돼도 그냥 눈이 벌개 가지고 밤새도록 합니다. 솔직한 이야기로 밤새도록 해 봐야 남는 것도 없습니다. 그것 해 가지고 돈 많이 버는 줄 아세요? 떼 돈 버는 것도 아닙니다. 밤새도록 해 봐야 왔다 갔다 하다 보면 남는 것도 없고, 그냥 허리만 아프고 온 몸이 쑤시는데도 열심이에요.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이렇게 하면 다 칭찬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자원해서 열심히 하면 다 은혜가 될 줄로 믿습니다.

    가정에서 자녀를 키울 때에 아버지 사랑과 어머니 사랑이 다릅니다. 집에서 부부가 자식을 생산해서 낳잖아요. 그러면 아이가 어렸을 때는 칭얼거리기도 하고 낮 밤이 뒤 바뀌어서 울기도 하잖아요. 그러면 누가 끌어안아요. 남편이 먼저 끌어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를 울지마 울지마 하며 달래 봅니다. 아기가 울지마 한다고 말 귀를 알아듣습니까? 그래서 계속 울잖아요. 한참 울다 보면 에이 신경질 난다고 아이를 팽개칩니다. 남자들은 아이가 보채면 계속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낳은 엄마는 그렇게 안해요. 애가 울잖아요. 울고 보채는 아이를 끌어 않고 밤새도록 씨름하며 잠을 설칩니다. 그러면서 아이를 끌어안고 우는 아이 달래 주고 기저귀도 갈아줍니다. 우리 어머니들이 다 해 본 일이에요. 남편과 아내가 왜 다른지 아세요. 남편은 자기 뱃속에서 낳은 자식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둘이 협조해서 만들었는데도 자기가 열 달 동안 고생해서 낳은 게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이가 밤새도록 보채면 명분이야 좋습니다. 내일 직장도 나가야 되고 해야 될 일도 많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똑같이 고생해서 만들어 놓고 부인은 자기가 낳은 자식이기 때문에 끌어안고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어머니의 사랑이 다르다는 말을 합니다.

    예수님은 수고를 하고 우리를 낳았어요.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더 깊이 깨달아지면 깨달아 질수록 억지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게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나오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평생 예수님의 종이 되겠습니다 하고 귀를 뚫어야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제 귀를 뚫고 평생 주님과 함께 동거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은혜를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종이 주인과 더불어 살면서 은혜 받은 것이 별로 없다. 그러면 이 종이 그 주인을 위해서 귀를 뚫겠습니까? 이 주인과 평생 살겠다고 귀를 뚫겠어요. 절대 귀를 뚫을 리가 없어요. 귀를 뚫었다고 하는 것은 주인과 더불어 살면서 그 주인으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이 주인과 살면 앞으로도 많은 은혜를 받을 것이라는 것을 예상했기 때문에 귀를 뚫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 하십시오. "큰 은혜를 받아야 귀를 뚫는다." 그래서 6년 지나 7년째 자유할 수 있는 길이 주어졌지만 스스로 포기하고 평생 종이 되겠다고 귀를 뚫은 것은 은혜를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은혜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사도행전 9장 2절에 사도 바울은 귀 뚫지 않은 종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은혜를 받습니다. 어떻게 은혜를 받느냐 하면 다메섹으로 올라가는데 큰 빛이 바울에게 비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팍 꼬꾸라졌어요. 이때 바울이 두 가지 질문을 했는데 “주여 뉘시오니이까” 당신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기를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사울이 이전까지는 그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 인물인 줄 몰랐어요. 그래서 바울은 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지 예수님은 안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자기가 핍박하는 그 예수님이 하나님이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하나님인 것을 깨닫고 난 다음에 두 번째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무엇을 할까요” 하나님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받은 은혜가 무엇일까? 그 은혜는 자기가 그렇게 예수님을 핍박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가두었는데도 자기 같은 사람을 하나님이 불러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받은 첫번째 은혜입니다. 나 같이 못된 인간을 주님이 불러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러주신 은혜에 바울은 감격했습니다. 오늘 여기 앉아 있는 우리 하나님의 사랑하는 종들은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불러 주셨기 때문에 여기에 온 것입니다. 여기 여러분 제발로 왔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어떤 전도자의 인도를 받아 여러분들이 여기에 왔다고 생각하면 안돼요. 하나님이 오게 하지 아니하면 올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통계적으로 보면 예수 믿는 사람이 10분의 1밖에 안됩니다. 나 같이 못된 짓 하고 돌아다니고 탕자같은 자를 불러주셨다고 하는 생각을 하니까 너무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잘 나서 하나님이 불러주신 것 아닙니다. 여러분이 똑똑해서 하나님이 불러 준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능력이 있어서 불러 준 것도 아니에요.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은혜로 불러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 받은 것을 생각할 때 너무 감사한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만나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나 주셔야 우리가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만나고 싶다고 만나지는 것이 아닙니다. 대통령이 여러분들 부르면 쉽지만 여러분 대통령 만나러 가 보세요. 만날 수 있나. 여러분이 어떻게 대통령을 만날 수 있습니까? 면회도 안돼요. 청와대 문 앞까지는 갈 수 있을지 몰라도 들어갈 수는 없어요. 우리가 하나님께 나올 때 하나님이 문을 열어 주시고 오라 하셔야 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 주셔야 됩니다. 만나 주시는 은혜가 얼마나 감사해요. 하나님께서 바울을 다메섹에서 만나 주셨어요. 하나님이 만나 주시는 은혜에 바울이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바울을 불러 주시고 일감도 주셨다는 것입니다. 너는 내 일을 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장관 자리 주면서 부르면 여기 있는 분들 아마 다 달려갈 거예요. 일감 주는 게 얼마나 감사합니까? 아이구 나 보고 왜 교육부 장관하라고 하십니까? 아이구 나 보고 왜 외무부 장관을 하라고 하십니까? 난 그런 것 못합니다. 여러분, 능력이 없어서 못하겠다고 거절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많은 경우 감격할 것입니다. 대통령이 나를 부르시다니 하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불러서 주님의 일꾼된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하고 맹세하고 도망쳤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지난날의 잘못했던 모두 용서해 주시고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하면 네 양을 먹이고 내 양을 치라고 일감을 주셨어요. 얼마나 감사해요. 베드로를 다시 써 주셨어요. 베드로처럼 받은 바 은혜가 크다고 생각할 때에 귀를 뚫게 됩니다. 우리는 큰 은혜를 이미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물과 피를 쏟아 주신 그 은혜보다 더 큰 은혜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늘 생각하셔야 되요. 십자가를 통해 받은바 은혜에 감격해서 예수님을 위해 귀 뚫은 종이 되기를 나는 원합니다.

    3. 주인과 동거하기 위함입니다.

    귀를 뚫은 종은 주인과 평생 같이 살 수 있습니다. 귀를 뚫은 종은 예수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귀 뚫은 종은 사단의 모든 결박에서 놓임 받고 자유함을 얻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완전히 자유한 가운데 주님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귀 뚫은 종은 두 주인을 섬기지 않습니다. 오직 주인만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귀를 뚫지 않았을 때에는 마귀도 섬길 수 있고, 세상도 섬길 수 있고 우상도 섬길 수 있습니다. 귀를 뚫는다고 하는 것은 내가 이제 평생 이 주인을 위해서 살겠다는 것입니다. 귀 뚫은 종은 이제 내 것이 필요 없게 됩니다. 주인 것이 다 내것이요 내 것이 다 주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과 모든 것을 함께 누리는 은혜를 얻게 됩니다. 귀 뚫은 후로는 아무리 좋은 곳이 있어도 떠날 수도 없지만 떠나지도 않는 종이 바로 귀 뚫은 종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두 종류의 종이 있습니다. 귀를 뚫은 종과 귀를 뚫지 않은 종입니다. 하나님은 귀 뚫은 종에게는 세 가지 중요한 은혜를 주십니다.

    (1) 하나님의 비밀을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귀 뚫은 종에게는 이전의 공개하지 않았던 비밀스러운 것을 알게 하십니다. 귀 뚫은 종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입니다. 귀 뚫지 않았을 때는 주인이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귀 뚫은 종에게는 모든 것을 다 말 해 줍니다.

    (2) 주인과 더불어서 식탁에 함께 앉아서 음식을 나누게 됩니다. 주인과 함께 한 식탁에서 은혜를 나누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3) 주인의 모든 것을 맡는 자가 됩니다. 주인이 모든 것을 맡아 감당하는 종이 귀 뚫은 종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 앞에 받은 바 은혜가 크기 때문에 더 나아가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던 그 하나님과 우리가 평생 동행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귀를 뚫은 종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애굽기 21~23장은 ‘언약의 서’(Book of the Covenant)라고 합니다.
    줄여서 ‘언약서’라고도 하는데, 출애굽기 24장 7절에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언약서는 이스라엘의 ‘시민법’(Civil Law)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민사, 형사, 종교법 등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언약서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21장 1절부터 22장 15절까지는 노예제도와 사형제도, 그리고 손해배상제도와 같은 민•형사상의 범죄들과 그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둘째로 22장 16절부터 23장 19절까지는 영육을 문란케 하는 죄, 약자 보호, 또는 종교적인 의무 소송과 절기에 관한 법, 여러 가지 특정 분야에 대한 법이 기록되어 있는데, 주로 종교에 대한 법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마지막 셋째는 23장 20절부터 33절까지로 언약을 지키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다는 격려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법을 잘 지키면 복을 주시겠다고 격려하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의 어떤 법에 이것을 잘 지키면 복을 주겠다고 격려합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과 언약을 맺고 이렇게 격려해 주십니다. 그래서 언약서는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눠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약서의 내용은 한 마디로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주신 십계명이 인간 사회 생활 가운데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언약서의 내용이 인간 사회 속에 일어나는 모든 민사, 형사, 종교적인 문제를 다 다루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모든 것을 다루었다면 아마 출애굽기 21장만해도 분량이 큰 법전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중요한 경우를 선택적으로 다루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주신 십계명이 인류 사회에 어떻게 적용 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도덕법이 사회생활에 적용되는 원리와 그 원리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이 어떤 것인지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은 ‘신정통치’(Theocracy) 국가입니다. 하나님이 국가를 직접 다스리시고, 온 국민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공동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구약시대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등장한 모든 정치적인 나라도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미국, 영국, 한국도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신정통치 국가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입니다.

    이슬람 국가들은 알라 신이 나라를 통치한다고 주장할지 몰라도 지금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신정통치 국가가 없습니다. 신약시대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참된 교회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16절에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이스라엘’(Israel of God)은 하나님의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시민법에 나타난 법의 정신은 현대 국가에 적용해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에 영적으로 적용해야 할 법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적으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정신은 시민 사회에서도 여전히 존중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1차적으로는 하나님의 교회와 모든 성도들에게 영적으로 적용되는 원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공의’(Justice)와 ‘긍휼’(Mercy)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고, 동시에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언약서에 기록된 노예제도와 사형제도를 보면 하나님의 두 가지 성품이 현저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Ⅰ. 노예제도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

    노예제도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은 어떤 것일까요? 어떤 사람은 성경에 노예제도를 옹호하는 구절이 있다고 하며 매우 악한 책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은 주장입니다. 이스라엘의 노예제도는 19세기의 흑인들을 사고팔았던 무자비한 노예제도와는 완전히 성격이 다른 제도이기 때문입니다. 19세기의 노예제도는 제국주의자들이 약한 나라를 침공해서 식민지로 삼고 그들의 인권을 유린하여 인간취급도 하지 않은 채 사고 팔았던 아주 악한 제도였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종은 누가 붙잡아서 종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종이 되는 것입니다.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서 종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왜 종이 되겠습니까? 굶어 죽을 형편이 되니까 종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굶어 죽는 것이 좋습니까? 머슴살이라도 하는 것이 좋습니까? 저 같으면 차라리 종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종은 가난 때문에 스스로 부자 집의 종으로 들어가는 경우를 의미합니다. 종이 되는 것이 자유로운 결정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빚을 지고 갚지 못해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로 자발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종이 된 이후에 그의 부자 친척이 종으로 팔린 그를 위해 팔려갈 때 지불했던 돈을 다시 갚아주면 그 종의 주인은 그 종을 해방시켜야 했습니다. 그러면 그 종은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돈을 대신 물어주는 부자친척을 ‘기업 무를 자’라고 했고, 이처럼 종에서 해방시켜 주는 제도를 ‘구속’(Redemption)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죗값을 대신 치러주시고, 해방시켜 주시는 구속의 은혜를 구약성경은 이처럼 그림과 같이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노예는 구속해 줄 부자 친척이 없는 경우라도 6년을 일했다면 7년째는 아무 조건 없이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종으로 들어올 때에 단신으로 들어왔으면 단신으로 나가고, 아내와 자식들이 있으면 처자식과 함께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7년이 되기 전 이스라엘에 50년마다 찾아오는 희년이 왔을 경우, 꼭 6년을 채우지 않아도 자유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종은 첫째로 자발성이 그 동기이고, 둘째로 기한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6년이 그 기한이었고, 7년째는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종은 사실상 ‘연한을 계약하고 노동하는 근로자’(Indentured Servants)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노예제도는 가난으로 죽을 형편의 동족을 살려주는 일종의 사회보장제도인 것입니다. 사회보장제도라고 해도 국가가 모든 부담을 갖는 것이 아니라 노동력이 있는 경우 굶어 죽지 않게 일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상당히 발전된 제도였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언약서에 기록된 시민법을 보면 종에 관한 제도가 가장 먼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 약한 사람들에게 지대한 관심과 배려를 갖고 계시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약자들에게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BC 18세기에 바벨론의 함무라비라는 왕이 법전을 만들었습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며 그 법전의 조항들을 살펴보았는데, 총 282개의 조항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함무라비 법전에서 노예제도와 관련된 조항이 어디쯤 위치하는 지 알고 계십니까? 함무라비 법전에서 노예제도와 관련된 내용은 맨 마지막 5개 조항에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마지막 282번째 조항은 “노예가 주인에게 ‘당신은 나의 주인이 아니다’라고 말하면 노예의 귀를 잘라 버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벨론의 노예는 귀를 보면 그 종이 주인에게 몇 번이나 대들었는지를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바벨론의 법은 노예제도를 맨 마지막에 두었고, 하나님의 법은 종과 관련된 제도를 가장 앞에 두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약한 자들, 소외된 자들, 종들에 대해 얼마나 큰 관심과 배려를 가지고 계셨는지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불러 시내 산에서 법을 주셨는데, 온 우주의 창조주가 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종이 될 때에 ‘그가 단신으로 들어왔는지’, ‘결혼을 하고 들어왔는지’, ‘종이 된 이후 아내를 얻게 되었는지’와 같이 지극히 작은 일에도 세세하게 관심을 갖고 돌보셨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기만 합니다.

    또 하나님은 종이 7년째 자유를 얻어 주인의 집에서 나가게 되더라도 또 다시 가난으로 인해 굶어 죽지 않도록 배려해 주셨습니다. 신명기 15장 13~14절에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공수로 가게 하지 말고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 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그에게 줄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시행되고 있는 퇴직금 제도까지 생각해주셨습니다. 6년을 일하고 7년째가 되어 나가게 될 때에는 후히 주어 먹고 살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자비로운 하나님의 모습입니까?

    신명기 15장 18절에도 “그가 육 년 동안에 품군의 삯의 배나 받을 만큼 너를 섬겼은즉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하기를 어렵게 여기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가 6년을 일했지만 일을 굉장히 잘했으니 더 하면 좋겠다고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무조건 7년째가 되면 자유롭게 해 주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의 권리만 인정해 주신 것이 아니라 주인의 권리도 합리적으로 보장해 주셨습니다. 출애굽기 21장 4~6절에 “상전이 그에게 아내를 줌으로 그 아내가 자녀간 낳았으면 그 아내와 그 자식들은 상전에게 속할 것이요 그는 단신으로 나갈 것이로되 종이 진정으로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하지 않겠노라 하면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 귀를 뚫을 것이라 그가 영영히 그 상전을 섬기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남종이 6년 동안 일하면서 주인으로부터 한 여종을 얻어 아내로 삼아 자식을 낳고 가족을 이루게 되었다면 그 종의 아내와 그 자식들은 여전히 주인의 소유였습니다. 그래서 7년째가 되었을 때, 그 남종이 혼자 자유를 얻기보다 처자식과 함께 주인을 섬기고자 하면 주인은 그 남종을 데리고 재판장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재판장은 문설주에다 그 종의 귀를 대고 송곳으로 귀를 뚫어주었습니다. 그러면 그 종은 영영히 주인의 종으로 살게 된다는 표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영영히 주인의 종이 된다고 해도 그 주인의 아들, 손자에 이르기까지 종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주인이 죽으면 해방이 되는 것이고, 또 희년이 오면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이 가족을 갈라놓는 악한 제도를 말한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 종의 주인의 권리도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주인에게도 소유권이 있는 것입니다. 원래 그 종에게 준 여종은 주인의 소유 아닙니까? 그러니까 종에게 인격적 선택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주고, 또 아울러 주인의 소유권도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처자식을 버리고 혼자 자유를 얻겠다고 나가는 남자는 아내와 자식을 붙여줘 봐야 먹여 살리기 어려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자에게는 차라리 처자식을 주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그 주인이 데려다 먹여 살리고 양육하고 보호하는 편이 훨씬 나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법들은 결코 반인륜적이거나 잔인한 법이 아닙니다. 모두 은혜롭고 자비로운 법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어떤 것인지 잘 알 수 있는 법입니다.

    하나님은 특별히 여성이 종이 된 경우에 대해 더욱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역사적으로 여성들과 아이들은 가장 학대를 많이 당한, 약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성들도 일반적인 종인 경우에는 6년을 일하고 7년째가 되면 자유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신명기 15장 12절에 “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만일 육 년을 너를 섬겼거든 제칠년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것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21장 7절은 무슨 말씀입니까? “사람이 그 딸을 여종으로 팔았으면 그는 남종 같이 나오지 못할지며.” 왜 출애굽기에서는 나오지 못한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이것은 그 여종이 주인의 첩이 된 경우입니다. 여종이 일반적인 종이 아니라 주인의 첩이 된 경우, 주인이 남편이기 때문에 자유를 얻지 말고 남편과 함께 살라는 것입니다.

    여종이 주인의 첩이 된 경우에는 주인의 첩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모두 누리게 하였습니다. 당시 첩이 된 여종에게는 세 가지 권리가 있었습니다. 21장 10절에 “만일 상전이 달리 장가를 들지라도 그의 의복과 음식과 동침하는 것은 끊지 못할 것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인은 첩에게 의복을 사 줘야 하고, 음식을 공급해야 하며, 동침을 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주인의 첩으로서 모든 권리를 다 인정해 줘야 한다는 말입니다. 만약 이 세 가지 권리를 주지 않으려면 첩이 된 여종에게 자유를 허락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주인이 첩을 삼았는데, 말로만 들었던 그 모습과 전혀 다를 경우 이방인에게 팔지 말고 같은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팔라고 하셨습니다. 이방인에게 팔면 7년째 해방될 수도 없고, 첩으로 삼을 수도 없으니 이방인에게 팔지 말고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팔아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종이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이 여종을 첩으로 삼고자 했는데, 나이가 너무 어린 경우 아들에게 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아들은 장가를 가서 여종을 아내로 삼고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종을 아들에게 준 경우에는 그 여종을 딸처럼 대우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1장 8~11절에 “만일 상전이 그를 기뻐 아니하여 상관치 아니하면 그를 속신케 할 것이나 그 여자를 속임이 되었으니 타국인에게 팔지 못할 것이요 만일 그를 자기 아들에게 주기로 하였으면 그를 딸 같이 대접할 것이요 만일 상전이 달리 장가를 들지라도 그의 의복과 음식과 동침하는 것은 끊지 못할 것이요 이 세 가지를 시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속전을 내지 않고 거저 나가게 할 것이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상전이 살다 보니까 아내 외에 여종을 첩으로 얻었는데 또 하나를 더 얻고 싶을 때, 원래 첩에게 공급해 주던 세 가지 권리는 끊을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 시내 산에 모세를 불러 말씀하고 계시는 중인데, 이토록 사소한 것까지 신경을 쓰고 계시다는 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분이신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애굽의 노예제도에는 이런 자비로운 내용이 없었습니다. 히브리인의 남아가 태어나거든 나일 강 하수에 던지라고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여성의 권리는 인정되지 않고 학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 바로 애굽의 법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애굽의 노예제도와 이스라엘의 종 제도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노예제도에서는 하나님이 얼마나 자비로운 분이신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노예 제도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은 사회의 가장 약한 사람들에게 공의와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성품입니다. 이런 정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약시대의 하나님 나라 백성인 성도들에게 요구하시는 정신입니다. 우리는 약한 사람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마태복음 25장 40절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너희가 내가 감옥에 있을 때 나를 찾아와 돌봐주었고, 내가 헐벗었을 때에 옷을 주었고,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었다”고 말씀하시자, 이 말을 듣는 사람들은 “우리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바로 그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형제 중에 가장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곧 내게 행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마가복음 9장 35절에도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첫째가 되고자 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첫째가 되는 방법이 중요한 것입니다. 첫째가 되는 방법은 끝에 있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가서 약한 사람들을 섬기고 돌보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첫째가 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노예 제도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이 얼마나 공의롭고 자비로우신 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Ⅱ. 사형제도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

    이스라엘 국가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할 네 가지 범죄 제목이 있었습니다. 첫째로, 고의적으로 살인을 범한 자는 반드시 죽여야 했습니다. 출애굽기 21장 12절에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둘째로, 부모를 때리는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셋째로, 유괴한 자(사람을 수하에 둔 자)는 반드시 사형을 시켜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유괴는 살인죄와 똑같이 취급되었습니다. 16절에 “사람을 후린 자가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자기 수하에 두었든지 그를 반드시 죽일 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넷째로, 부모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했습니다. 17절에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 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방 국가에서 고의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종교시설로 들어가 몸을 피하면 국가권력도 함부로 하지 못하고 살아남는 경우가 더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법에는 이렇게 고의적으로 살인한 사람이 설사 하나님을 섬기는 단으로 피했다 할지라도 반드시 끌어내어 사형에 처할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고의적인 살인이 아니라 과실로 사람을 죽인 경우에는 죽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피해 살아갈 수 있도록 처소를 마련해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도피성 제도입니다. 도피성은 요단강을 기준으로 동편에 세 곳과 서편에 세 곳이 있었습니다. 이 곳에 피해 있는 사람들은 국가권력이나 피해자의 가족들도 그를 죽일 수 없었습니다. 공의가 시행되는 가운데 하나님의 자비가 보석처럼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고의적인 살인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사형을 하라고 엄명을 하셨을까요? 그 근거가 되는 구절이 창세기 9장 6절입니다.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고의적인 살인죄에 대해서 사형을 부과하신 이유는 살인한 자가 그 사람을 죽일 때 그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멸시했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멸시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말 것을 명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법은 특수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국가만의 법이 아닙니다. 사람을 죽인 자를 반드시 죽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이미 노아에게 주신 법입니다. 창세기 9장 6절의 배경은 노아시대입니다. 그러니까 이 법은 노아의 후손인 온 인류에게 주신 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법은 현대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형법 250조 1항에도 사람을 살해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나와 있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살인한 자는 하나님의 형상을 멸시하는 자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또 오늘날 한국 사회에는 유괴사건이 참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성들은 어두운 골목을 혼자 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필리핀에서도 한국 사람들이 수십 명이나 유괴를 당해 행방을 알 수 없는 비극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특히 서울에서도 유괴범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을 유괴하는 이유는 장기를 적출해서 팔려고 하는 목적이 있다고 합니다. 아주 극악무도한 자들입니다.

    사람을 살해한 자에게 사형을 부과해야 하는 것은 노아에게 주신 법이고, 이스라엘 국가의 법이며, 이것은 이스라엘 국가만의 법이 아니라 현대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해야 할 하나님의 법입니다. 그러나 사형제도의 근본적인 목적은 복수가 아닙니다. 인간이 인간을 어떻게 죽일 수가 있습니까? 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멸시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사람을 사형시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형제도의 근본목적은 복수가 아닙니다. 인간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보존하려는 것이 목적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타락한 존재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을 무시하는 자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의 통로가 되는 부모님도 존귀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부모를 저주하고 학대하는 자는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지 않는 자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물론 이 법을 우리 한국사회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부모를 저주한 자에게 사형을 언도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하겠습니까? 이 법을 현대 사회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부모를 공경해야 마땅하다는 정신은 성도들이나 혹은 불신자들이나 인간사회에서 마땅히 강조되어야 할 정신입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제 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입니다. 이 말은 반대로 하면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은 땅에서 잘 될 수 없고 단명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부모를 저주하고 때리는 자를 절대로 잘 되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 사람의 생명을 귀히 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잠언 3장 17절에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모에게 불효한 사람은 까마귀와 독수리가 많이 날아다니는 동네에 다니시면 안 됩니다. 그것들이 눈을 공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만큼 부모를 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에는 이만큼 약한 사람들을 돌보고 귀하게 여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면서도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가 그림처럼 나타난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해 우리가 마땅히 죽어야 할 그 자리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죗값을 갚아주신 사건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어야 할 죗값을 다 물으셨고, 하나님의 공의는 완벽히 시행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것은 예수님의 죄 때문이 아니라 나의 죄 때문이라고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은 죄 용서함을 받고 천국에 갈 수 있는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살펴본 모든 법률들을 오늘날 대한민국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이런 정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심을 기억할 때, 우리 성도들은 약자를 보호하고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고 부모를 존중하라고 명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고 주의 법을 배우고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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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울의 전도 여행

    https://biblical-charts.tistory.com/27


    * 종(두로스)은 한 주인에게 절대 복종하는 용어이다.

    바울은 이제까지는 율법의 종으로 살아왔으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후에는 율법의 완성자가 되시는 예수님의 종으로 살았다.
     

    철저한 무신론주의자인 포이엘 바하는 자신이 쓴 “기독교 본질”이라는 책에서 “인간이 왜 소외감을 느끼고, 공허감을 느끼며 사는가? 그것은 우리 인간이 원래 왕인데 그 왕좌의 자리를 예수에게 내어주고 우리 인간이 지금 예수의 종노릇을 하고 있으니 소외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가슴이 허전하고 자유함을 느끼지 못하고 살고 있는 것이다. 네가 너 자신의 왕이다. 예수를 쫓아내고 네가 그 자리에 앉으면 진정한 자유인이 된다”라고 말하며, 인간 해방을 주장했습니다.

    혹시 포이엘 바하의 이 말을 어디서 많이 들어 보지 않았나요?
    창세기 3장에서 마귀의 말과 똑같지 않습니까?
    마귀는 하와에게 “선악과 먹어도 괜찮아 너 안 죽어 하나님이 괜히 그러시는거야, 선악과를 먹으면 너도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어, 너도 왕이 될 수 있어” 한, 마귀의 말과 조금도 틀리지 않습니다.

    ​신앙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만이 오직 나의 주 나의 왕이십니다"라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신앙의 본질이란?
    예수 그리스도만이 내 인생에 왕이심을 믿는 일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아직 내 인생에 왕이 아니시라면, 그 믿음은 진실이 아닙니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예수님이 왕이시라면 우리는 그의 종이 되면 됩니다.
    예수님이 나의 왕이 되시고 내가 그분의 종이 되면, 우리는 진짜로 존귀한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1차 전도 여행 : AD 47-48
    사도행전 13-14장
    더베,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주님으로부터 벗어나 거짓 가르침을 받아들인 기독교인들에게 보낸 서한이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영적 속박을 가져오는 모세 율법의 힘든 “멍에”와 영적 자유를 가져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간의 차이점을 명확히 설명했다.

    갈라디아(Galatia) : 젖과 같이 희다

    소아시아 중앙의 고원에 있는 도시.
    1. 바울이 1, 2, 3차 전도여행에 매번 들려 전도한 곳(행 14:1, 16:1, 18:23)
    2. 베드로도 이곳 교회에 서신을 보냈다(벧전 1:1)

    갈라디아 지방은 옛지명으로 아시아 지역과 갑바도기아 지역사이에 위치하던 지역으로 터키 중부 지방을 말한다.
    갈라디아 지방은 우리들에게 매우 친숙한 이름이다.
    특별히 사도 바울이 초대교회 당시 갈라디아 지방의 성도들에게 유대주의의 거짓 교사에 현혹되지 말고 하나님의 진리의 빛에 거하라는 내용의 갈라디아서를 보낸곳이기도 하다.

    갈라디아는 지금의 중앙 터키에 해당하는 하나의 큰 주였다.
    이 주에는 산맥과 넓고 높은 평지들과 호수들이 포함되어 있다.
    바울과 그의 일행은 그들의 제1차 전도여행시 해안에서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가는 도중에 에그레디르 호수(Lake Egredir)를 지났을 것이다.

    바울은 교회 내부에서 '유대당'이 잘못 가르치는 것에 도전하는 편지를 썼다.
    유대적 영향력을 강했다.
    '갈라디아'에서 회당의 유적들이 발견되었는데 주후 초기에 지어진 이 회당 유적은 북부 이스라엘 바람(Baram)에 있는 것이었다.
    이 지역은 사도바울이 제2차, 3차 전도여행을 통해 복음의 씨를 뿌렸다.
    성경에 앙고라로 나와있는 앙카라는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한 도시로서 이스탄불에서 450km 떨어져 있다.
    터키 중심부에 위치해 있는 이곳은 1923년 케말파샤가 터키 공화국을 수립하면서 수도가 되었다.

    이곳은 주전 12세기까지 히타이트 제국에 속해 있다가 그후 프리기아 왕조의 지배를 받고 알렉산더의 지배를 거쳐 갈라디아인들인 켈트(Celts)족에 의해 갈라디아로 불려지게 되었다.

    주전 25년에 로마의속주가 되었다가 1360년 오스만 터키에 의해 정복당한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왜 갈라디아서를 공부하는가?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주님으로부터 벗어나 거짓 가르침을 받아들인 기독교인들에게 보낸 서한이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영적 속박을 가져오는 모세 율법의 힘든 “멍에”와 영적 자유를 가져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간의 차이점을 명확히 설명했다.
    독자들은 이 서한을 공부함으로써 영의 영향력을 받는 삶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얻은 자유를 더 잘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의 추론은 다소 복잡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의 대답은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질문을 설명한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복음을 어떻게 받는 것인가?
    복음을 일상 생활에 적용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의롭게 되는 것과 신앙은 어떤 관계인가?

    갈라디아서는 누가 기록했는가?

    갈라디아서는 이 서한의 작성자가 사도 바울임을 밝히는 내용으로 시작되며(갈 1:1).
    기독교에서 내려오는 전통과 신약전서 학자들의 의견들 역시 그를 이 서한의 저자로 인정한다.
    다른 서한들과 마찬가지로,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쓸 때 서기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서한 끝부분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은 추신을 직접 적어 넣었다.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갈 6:11).
    바울이 여러 서기를 부린 것에 대해 더 알아보려면, 로마서 16:22 주해를 참조한다.

    갈라디아서는 언제, 어디에서 기록되었는가?

    바울은 제2차 및 제3차 선교 여행 때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를 방문했다(행 16:1, 18:23).
    바울은 주후 57년 무렵 제3차 선교 여행 동안 마게도냐를 두루 다니면서 갈라디아서를 썼을 것이다.
    바울의 제3차 선교 여행 동안에 작성된 또 다른 서한으로는 로마서가 있다.
    학자들은 갈라디아서와 로마서가 내용, 구성, 문체 면에서 유사하기 때문에 이 두 서한이 같은 시기에 쓰였을 것으로 여긴다.
    한편, 일부 경전 학자들은 갈라디아서 2:1-10에 기록된 사건들이 예루살렘 회의(주후 49년에 개최됨, 행 15장) 전에 일어났다고 여기며, 갈라디아서 작성 시기를 주후 48년 또는 49년으로 제안하기도 한다.

    갈라디아서는 누구를 위해, 왜 기록되었는가?

    갈라디아는 소아시아 북부 중앙에 있는 지역이었다.
    그곳 주민들은 서유럽(현대의 프랑스)에서 이주한 사람들이었고, 이곳에서 그들은 갈리아인으로 알려졌다.
    바울은 제2차 및 제3차 선교 여행 때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도시를 방문했다.
    학자들은 갈라디아서의 수신인을 제 2, 3차 선교 여행 때 방문했던 도시의 성도들로 보기도 하고, 혹은 루스드라, 이고니온, 더베, (비시디아에 있는) 안디옥 등 바울의 제1차 선교 여행 때 방문했던 도시의 성도들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고니온을 제외한 이 도시들은 갈라디아 로마 속주에 속해 있었으나 일반적으로 비시디아 또는 루가오니아에 속한 것으로 여겨졌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주님에게서 벗어나 “복음을 변하게”(갈 1:6-7) 하려는 몇몇 사람들의 가르침을 따른 일로 크게 걱정하며 이 서한을 썼다.
    서한의 세부 내용을 보면 이 사람들이 유대인 기독교도들이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신약전서 해설자들은 때로 이들을 유대주의자라는 명칭으로 지칭한다.
    유대인 기독교도들은 구원을 위해 할례를 받고 모세 율법의 의식 요건을 준수해야 한다는 그릇된 교리를 이방인 기독교도들에게 가르치고 있었다(갈 6:12, 행 15:1, 행 15:105, 행 15:1, 24).
    몇몇 갈라디아 성도들은 그 사람들의 가르침을 신봉했다(갈 4:10).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기록한 주요 목적은 다음과 같다.

    1. 자신을 반대하는 거짓 교사들의 비난에 대해 스스로를 변호한다.
    2.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든 사람은 모세 율법이 요구하는 어떤 행위를 함으로써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분의 속죄를 통해 구원받음을 가르친다.
    3. 하나님의 계획에서 모세 율법이 하는 역할을 분명하게 설명한다.
    4.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맺으신 옛 성약과 그리스도 안에서 맺는 새 성약을 구별한다.
    5. 성도들에게 영에 따라 살라고 요청한다.

    갈라디아서에는 어떤 뚜렷한 특징이 있는가?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가장 간절하게 열변을 토한 편지로 유명하다.
    그는 이 서한에서 주님의 길에서 벗어나는 교회 회원들과 그들을 미혹하는 거짓 교사들을 날카롭게 꾸짖었다.
    바울은 참된 복음으로 돌아가도록 갈라디아인들을 설득하고자 자신의 개종 이야기를 전하고, 아브라함의 본을 설명하고, 구약전서에 나오는 다른 관련 성구들을 인용했다.
    갈라디아서는 문서상으로 바울이 의롭게 됨에 관한 교리, 즉 우리는 모세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에 관한 교리를 가르친 가장 초기의 기록이다.
    바울은 이 서한에서 의롭게 된(justified)이라는 동사를 20번 이상 사용했다.
    또한 이 서한에서는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가 대조를 이루며 제시되었다(갈 5:16-25).

    개요


    갈라디아서 1-2장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주님에게서 벗어나 거짓 가르침을 신봉했기 때문에 자신이 그들에게 이 서한을 보낸다고 설명했다.
    바울은 교회를 반대하다 개종하게 된 자신의 경험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음을 강조했다.
    또한 자신은 사도들의 승인을 받아 이방인들에게 성역을 베풀었다고 해명함으로써 사도로서의 자신의 부름을 변론했다.
    그는 이방인 성도들에 관해 베드로와 의견이 달랐던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은 모세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고 가르쳤다.


    갈라디아서 3-4장

    바울이 복음 메시지를 옹호했다.
    바울이 다음과 같은 내용을 가르쳤다.
    아브라함은 모세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신앙으로 의롭게 된 사람의 본보기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죄를 통해 인류를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속하셨다.
    모세 율법의 목적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는 것이었다.
    성도들은 신앙과 침례를 통해 속죄의 축복을 받고, 복음 성약을 맺으며,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고, 이제 더는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5-6장

    바울이 성도들에게 복음 성약의 영과 자유 안에서 살도록 요청했다.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바울이 성신을 지닌 사람의 특성과 반대되는, 즉 육욕적으로 생활하는 사람의 특성을 기술했다.
    성도들은 서로의 짐을 져야 하고 선행을 하는 일에서 지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심은 대로 거둔다.

    10월 13일(목)

    그리스도의 종(갈라디아서 1:10) a servant of Christ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문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로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고 답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그리스도의 종으로 사는 것일까요?

    첫째, 믿음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라(히브리서 11:6)


    지금 시대는 불신앙의 시대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을 찾아보기 힘든 시대입니다.
    성경지식과 신학 지식은 있는데 신앙과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옛 우리 선배 목사님과 성도들은 성경도 잘 모르고 신학적 학문도 짧았으나 한국교회의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그 이유가 저는 믿음, 곧 영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영혼 사랑과 구령을 위한 열정을 회복하라(마태복음 18:12)


    사도 바울 또한 영혼 사랑으로 복음의 열정을 갖고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 16절에 복음 전파를 통해 주님께 기쁨을 드렸던 바울처럼 최후의 시간까지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그리스도의 종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셋째, 올바른 예배를 회복하라(요한복음 4:18)

    예수님께서는 우물가에서 남편이 6명이었던 여인에게 예배에 대해 말씀합니다. 이어 23절에서는 하나님이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 하며 24절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배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하님이 창조하셨고 지금도 주님께서 이 우주를 운영하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살면서 어려움과 불가능한 일 앞에서 우리 인생이 해야 할 일은 주님을 찾고 주님을 만나 우리의 문제를 해결 받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전지전능 하신 분입니다. 주님을 만나면 우리의 모든 문제는 다 해결됩니다. 예배는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과거에도 날 도와주시고, 현재에도 동일하게 도와주시고, 미래에도 변함없이 도와주시는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 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모든 영광을 돌리는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신자는 예배의 성공자와 예배의 실패자로 나눕니다. 예배의 성공자가 하나님을 기쁘시기 하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영혼 사랑을 실천했던 바울 사도와 같이 위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도구로 쓰임 받는 생명을 살리는 전도자가 되고, 예배를 통하여 주님을 만나고, 바른 믿음의 고백과 순종의 삶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리스도의 종은 하나님을 위하여 순종하는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로마 제국의 수도 로마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인구 100만에 달하는 인류 사상 최대 도시를 형성했다.
    이 규모는 중국 송나라 시대나 19세기 초 영국 런던이나 일본 에도에 와서야 다시 도달하는 엄청난 수준이다.
    반면 중세가 되면 로마라는 도시의 규모는 인구 3~4만 정도로 대폭 줄어든다.
    로마 제국 안에 도시의 수가 2,500여 개에 달했다.
    이탈리아에만 400개가 넘었다.
    Mary R. Beard는 ‘폼페이, 사라진 로마 도시의 화려한 일상’이라는 책에서 폼페이 도시를 조명한다.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된 비운의 역사를 지닌 도시다.
    폼페이의 인구를 1만 2000명의 절반이 노예였을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B.C. 18세기 바빌로니아 제국의 왕 함무라비가 함무라비 법전을 제정할 당시 바빌론 사회의 5%는 자유인, 65%는 소작농, 나머지 30%는 노예였다.
    아카드어로 ‘와드둠(wardum)’이라 불렀다.
    제국 로마의 수도 로마에는 강한 권력의 귀족 가문이 100개쯤 있었다.
    실제 유사한 규모의 저택을 가진 가문은 500여 개에 달했다.
    이 귀족들의 저택은 10여 명 정도의 가사 노예를 부릴 정도의 규모였다고 한다.
    문제는 비록 부모는 귀족이지만 자신의 자식들을 직접 교육할 만하나 지적 역량을 지닌 로마인이 아니었다.
    인문학을 자신들의 언어인 라틴어로 연구해본 적이 없었다.
    아이들에게 읽힐 만한 라틴어 동화책조차 전무한 상태였다.
    그래서 그들은 정신문화의 선진국인 그리스의 텍스트를 받아들여야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리스어를 알고 가르칠 수 있는 개인교사를 모셔야 했다.
    그리스인들을 노예가 아닌 가정교사로 모실 수밖에 없었다.
    로마서를 그리스로 읽을 수 있는 로마인들은 대체로 그리스 노예였거나 저축을 통해 로마시민권을 취득한 자유인이었을 것이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우선적으로 생각한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그의 밀접한 관계를 표현하기 위하여 종(servant)에 해당하는 ‘δουλος’(둘로스)를 사용하고 있다.
    이 칭호는 그의 신분을 역시 암시한다.
    사실 노예(slave)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둘로스라는 용어는 ‘에베드 야훼’의 구약 용법에 기초하고 있을 것이다.
    이 용어의 초점은 구약의 탁월한 인물처럼 특권을 받은 직무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사도적인 사역을 하는 것에 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언급하기 앞서 둘로스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사용하는 권위가 종에게 위임된 권위임을 강조한다.

    노예(slave)는 내키지 않아 마지못해 하는 복종이라는 의미를 시사한다.
    요즘 직장인 사이에 창궐하는 ‘넵병’의 차원에서 종인지 노예인지 주인의 메신저에 도착한 답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넵!’과 ‘뉍’이다.
    누가 종인가, 노예인가.
    전자는 ‘당연하죠! 가능합니다’, 후자는 ‘절대적으로 따르겠습니다’라고 답한 것이다.

    이어령은 ‘기업과 문화의 충격’에서 노예와 자유인을 이렇게 구분한다.
    전자는 기개를 잃은 사람, 명예도 위신도 실리를 위해서는 모두 다 내던지고 무릎을 꿇는 사람이다.
    후자는 편안한 잠과 배부른 삶에 얽매이지 않고 따뜻한 가슴으로 살아가려는 사람이라 한다.
    Gustave Boulanger's painting The Slave Market

    바울은 로마서 포문을 열면서 첫 두 단어 가운데 둘로스를 사용한 까닭은 특별히 구약구절을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
    구약에는 모세와 여호수아로부터 시작해서 스스로를 야훼(הוהי)의 종 혹은 노예라고 불렀던 존경할만한 이스라엘인이 연이어 나오고 있다.

    예를 들어 시편 116:16에서 시인은 “여호와여 나는 진실로 주의 종이요 주의 여종의 아들 곧 주의 종이라 주께서 나의 결박을 푸셨나이다.”라고 노래한다.

    이전에는 결박에 묶여 있는 노예였는데 이제 주의 종이 되었음을 노래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이기 때문에 사도로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노력한다.

    로마 교인들 가운데 유대인들은 ‘바울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는 첫 네 마디를 읽었을 때 이사야 49:5-6에 나오는 ‘하나님의 종’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할 뿐만 아니라 이방의 빛으로 삼아 하나님의 구원을 땅 끝까지 이르게 하는 종을 생각했을 것이다.

    프랑스에서 역사·인물·소설 전문 작가로 꼽히는 Max Gallo는 ‘장편 소설’에서 로마가 노예제 사회였다고 진단한다.
    노예로 삼지 않을 포로는 가차없이 죽였던 로마인은 후회 없이 두려움 없이 타인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둘로스에 대한 신약의 묘사는 비록 전형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경멸이나 멸시를 암시하지는 않는다.
    이 점에서 신약은 헬라 세계와 다를 뿐만 아니라, 또한 종들의 사회적, 제의적 및 윤리적 지위를 낮게 보고, 종들이 오로지 그 주인의 지배 아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종이라는 말을 심히 모욕적이 말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유대교와도 다르다.

    헬라인들은 둘로스가 자기 자신의 자율을 파기하고 주인의 뜻에 자기 뜻을 복종시킨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노예의 지위에 대하여 오직 반감과 모욕감을 느꼈다.

    종이라는 개념은 로마의 노예제도가 아닌 특별히 하나님의 것으로 선택되었다는 이스라엘의 확신으로부터 그 의미를 끌어온 것이다.
    둘로스가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적용될 때 복종과 하나님을 섬기도록 선택받은 명예를 가리킨다.
    이것은 자기보다 상관에게 말할 때 자기를 비하시키는 셈족의 언어 윤리를 반영한 것인 듯하다(왕상 1:26, 27 참조).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은 오직 야훼(הוהי)께 속했다는 의미다.
    모세와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무조건적인 헌신과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간의 언약을 지키는 것으로 인해 그런 하나님의 종이라는 칭호로 영예를 얻었다.


    2.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표현은 바울의 서론적 도입 가운데 오직 빌립보서 1:1에서만 그렇게 형성되어 있다.
    여기서 바울은 분명히 자신의 유대적인 유산에 의존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바울의 명함과 다를 바 없다.
    명함이 자신을 소개하는 주요한 방편이다 보니 처음 인사를 할 때면 으레 명함을 주고받는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먼저 명함을 드리면서 정중하게 인사를 하면 윗사람이 그 명함을 살펴본 뒤 자신의 명함을 주는 것이 명함 교환의 일반적인 예법이다.
    바울은 생면부지의 로마 교인과 위아래를 따지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윗사람은 한 분 뿐임을 선언한다.
    예수 그리스도이다.

    MBC TV 탤런트 한인수씨의 명함에 적힌 글귀이다.
    “우리가 만난 후 당신이 나를 잊는다 해도 당신은 잃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분을 잊는다면 당신은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라는 글귀를 명함에 새겼다.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서두를 시작하는 것은 ‘나는 종이다.
    그리스도의 종이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다.’라는 뉘앙스를 갖고 있다.
    예수님은 나의 주인이시고 나의 왕이시다라는 고백이기도 하다.
    나는 왕이신 예수님의 종이다라는 표현이다.

    배부름을 잠재워주는 밥보다도, 갈증을 풀어주는 물보다도 인간은 가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필요하다. 바울이 생면부지의 로마 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가장 먼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으로 시작한다. ‘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 바울의 정체성을 확실히 하고 편지를 시작한다. ‘나는 누구인가’란 질문을 하고 바울은 대답한다. ‘나는 종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 시로 노래한다면 디트리히 본회퍼는 ‘나는 누구인가’란 시가 가사가 될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이것이 나인가 저것이 나인가/ 둘 다인가/.../ 내가 누구인지/ 당신은 아시오니/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오, 하나님!” 바울은 사람의 것이 아닌 예수님의 것이요,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것을 선언하면서 로마서 문을 연다.

    바울이 자기 자신을 종이라는 용어를 어떤 의도를 갖고 사용하였을까?
    구약의 하나님의 종들처럼 자신이 오로지 하나님께 속해 있고 또 의존하는 데 있어서 동일한 배타성과 무조건적인 특성을 시사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종은 영예가 아닌 헌신에 한 표시로서 표현한 것이다.
    사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그렇게 사용할 수 있다.
    신약에서 ‘주’에 해당하는 ‘κυρος’(퀴리오스)라는 칭호가 야훼(הוהי)를 나타내는 것에서 예수님을 나타내는 것으로 바뀌어 버렸다.
    이제 주님의 종은 그리스도의 종이다.
    이스라엘이 아니라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상관없이 주님의 종, 즉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

    로마에는 강한 권력의 귀족 가문이 100개쯤 있었다.
    이 귀족들의 저택은 10여 명 정도의 가사 노예를 부릴 정도의 규모였다.
    또한 주인을 도와 사업의 비서·회계·대리인 등의 역할을 담당했던 자들이 노예들이었다.
    종은 노예와 다르다.
    노예는 기본적으로 열심히 일할 유인이 전혀 없는 생산요소다.
    따라서 노예를 부리기 위해서는 채찍이 필요하다.
    그러나 때로는 당근을 사용하는 것이 더 이익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로마의 주인은 노예에게 의도적으로 사유재산을 허용한 것이다. 이런 유인체계에 의해 노예가 열심히 일하게 되면 그것은 주인에게도 좋고 사회적으로도 좋다. 로마의 노예는 저축을 통해 해방의 비용을 지불한 뒤 자유인이 될 수도 있었다. 달리 말해 로마 사회는 노예에게도 급격한 신분 상승이 가능한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체제였다는 것이다. 둘로스는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리스도에게 사용되고 있다(빌 2:7). 이스라엘 백성은 비록 그들이 자유민이지만 그들 자신을 왕의 종으로 생각했다. 바울이 자신을 종으로 서두를 시작하면서 자신을 독자와 같은 수준으로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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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종교(일반종교) : 사람이 신앙의 틀과 교리를 만들고 그 안에 들어가려고 한다.
    계시종교(계시종교) : 위로부터 드러내어 알려주신 신앙

    오직 믿음으로
     1. 갈라디아서
     자유의 대헌장 
     개혁자 루터 : 갈라디아서는 나의 신부이다.
     
     2. 로마서
     
    3. 히브리서

    요한복음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35-36절 / 자유롭게 하는 이는 아들 곧 예수 그리스도

    사도행전 13장 - 

    1절 /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최초로 유대인 개종자들이 설립한 교회
    최초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 


    가장 중요한 인물 - 바나바
    가장 중요하지 않은 인물 - 마나엔
    및 사울이라 - 사울은 아직도 의심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왜냐하면 헬라인들은 인물을 나열 할 때 가장 중요한 사람부터 소개하기 때문이다.

    2, 3절 /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안디옥교회에서 처음으로 파송하는 선교사가 바나바와 사울이 선택되었다.

    메시지 

    1. 교회(선교)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 바나바는 안디옥교회에서 가장 중심적인 인물이었다.
      교회는 주님이 운영하신다.

    2. 사람들의 관점에서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던 사울을 선택한 이유는 선교도 주님이 하신다.
    - 성경 전체에서 일관된 하나님의 주권(다메섹 도상에서 이미 사울은 이방인의 전도자로 부르셨다. 그러나 안디옥교회의 성도들의 입장에서 볼 때 과연 사울이 선교사로 임무를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와 의문이 있었다.)

    * 일을 할 때 돈이 더 들어가는가? 아니면 쉴 때 돈이 더 많이 필요한가?
    - 일을 할 때는 돈을 쓸 여유가 없지만 쉴 때는 돈이 더 많이 소요된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바울에 대한 비난
    1.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할례를 받아야 한다.
    - 재침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는 주장을 한다.|- 
    - 대머리, 시력도 않좋다, 외모도 볼 품이 없다, 키도 작다, 목소리도 별로다, 

    * 사이비(似而非)
    * 이단(異端)

    갈라디아서를 쓰게 된 동기

    첫째, 사도행전 15:1-21 

    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 행위구원 할례
    2.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 모교회 예루살렘에서 확인을 받자

    다른 복음에서 바른 복음으로 

    3. 저희가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녀가며 이방인들의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4.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5.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6.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7.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8.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9.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12.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 고하는 것을 듣더니 
    13.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가로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14.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15.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16.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7.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18.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 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19.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20.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
    21.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진리인가? 아니면 덕인가?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면 그 문화를 인정해도 된다. 

    이중적인가? 파라독스인가?
    - 할례의 문제를 이방인에게 강요하지 말라

    둘째, 기독교가 유대교의 한 분파로 인식되는 때 

    기독교가 유대교로부터 분리되어 나온다.
    안식후 첫 날을 예배하는 날로 지키게 된다.
    예배의 날을 안식일에서 다른 날로 정하므로 독립적인 교파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유대교에서는 예수님을 선지자로 인정하였다.
    아직도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초림의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다.

    셋째,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이시다

    유대교는 하라! 하지 말라!
    유대교는 도덕적인 윤리적 측면
    기독교는 윤리와 도덕의 기준이 아니라 예수 밖에 없다.

    갈라디아서 1:1

    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사울은 갈라디아교회에서 사도권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사도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는 교회에서는 사도로 이미 인정받았다는 증거라고 하겠다.

    오늘의 위기는 복음의 순수성을 잃어버린 것

    1. 교회는 물량주의에 의해서 선택되는 경향
    2. 가짜 박사 학위 선호하는 분위기
    3. 사이즈에 의한 기준
     

    복음 : 예수 그리스도(메시아) - 영적인 사건을 육적인 사건으로 이해하려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
     - 6절 /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속히 떠나(변절자가 된 상태)

    * 속히(ταχέως) - 타케오스 / quickly
    * 다른 복음(different gospel)
    * 이단의 속성(거짓 교사들의 특성, 순회 교사) - 수사학, 논리학의 발전   


    에베소서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영지주의 : 구원은 앎에 의해서, 영으로만 구원

    고린도전서 15:12-15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마가복음 3:13-15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 만든 기업도 100년, 200년간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세월이 지나면 망하고 주인이 바뀌게 됩니다. 그런데 2000년이 지나도 망하지 않고 주인이 바뀌지 않은 곳이 있으니 바로 예수님이 선택한 12명의 제자가 세운 교회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훌륭하고 대단한 제자들을 어떻게 알아보고 선택하신 것일까요. 예수님의 제자 선택의 기준은 얼마나 높았던 것일까요.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제자들은 선택될 만한 이유보다 선택되지 않아야 할 이유가 더 많았던 사람들입니다. 허물투성이였던 제자들은 온 인생을 하얗게 불태워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을 완벽히 수행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기준에 의해 제자들을 부르셨는지 성경에 정확히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고 말씀하십니다.(막 3:13) 예수님의 제자 선택 기준은 예수님이 원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원함과 바람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날이 밝아지자 열두 제자를 부르셨습니다.(눅 6:12~13)

    예수님이 밤새 어떤 내용을 가지고 기도하셨을지 궁금합니다. 밤을 새워 기도해야 할 정도로 제자들과의 사역이 부담스럽고 답답한 마음이었을지, 아니면 그들과 함께할 사역에 대한 기대와 설렘으로 흥분된 마음이었을지…. 저는 예수님이 제자들의 이름을 품고 산으로 올라 기쁨과 설렘으로 밤새 기도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원함으로 그들을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원함으로 이 땅에 오셨고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분입니다. 아직은 부족하지만 영광스럽고 아름답게 변화될 제자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아버지와 아들은 그렇게 한없이 밤을 지새우며 기뻐하셨을 겁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원하는 자들을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에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나를 부르심의 근거를 나에게서 찾을 수 없습니다. 또한 나의 부르심을 다른 사람이 결정해 줘서도 안 됩니다. 나의 정체성과 부르심은 예수님 안에서만 계속 확인받아야 합니다. 지금의 모습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함께하사, 전도도 하고,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원함과 바람으로 우리는 다 채워지고 세워질 것입니다.(막 3:14)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제자가 될 수 있는 이유를 자기 안에서 찾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분명한데 나는 항상 분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괜찮다고 하는데 나는 항상 괜찮지 않습니다. 나를 원하시는 예수님은 2000년 전 산에서 밤을 맞도록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신 것처럼 지금은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 밤이 맞도록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동안 제자로서 부족한 부르심과 정체성 때문에 얼마나 많은 갈등과 방황을 하며 손해 본 순간들이 많습니까. 모든 것을 버려야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제 정말 버려야 할 마음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원함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더 방황하거나 시간을 손해 보지 않고 주님의 부름에 분명히 응답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10월 17일(월)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갈라디아서 4:1∼31
    묵상을 위한 주제 : 해산하는 수고(19절)
    성구 :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해산하는 수고(the pains of childbirth)”란 생명을 품고 있다가 그 생명을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하는 생명의 신비가 나타나는 사건을 비유적으로 말씀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21절에서는 사람 난 기쁨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을 해산의 수고라는 과정을 통하여 예수 복음으로 다시 무장하기를 간절하게 원하기 때문에 '해산의 수고'로 그들을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처음 복음을 전했을 때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은 바울의 가르침을 기쁘게 받아드렸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의 신앙의 자세를 매우 흡족하게 생각하고 그 교회를 떠났습니다.
    얼마 후 바울은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이 다른 복음을 받아드리고 바울과 그가 전한 복음에 대하여 의심한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와 같은 소식을 들은 후에 사도 바울은 얼마나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을 사랑했으면 그들을 다시 품고 해산의 수고를 하듯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하겠다는 것을 결단합니다.
    가르침을 배신한 사람들을 미워하거나 떠나버린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그들을 가슴에 품었다는 것은 바울의 위대함이라고 하겠습니다.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풍토가 익숙한 현실에서 아직도 생명을 사랑하는 바울과 같은 믿음과 열정을 갖는다는 것은 복음의 참된 일군의 마음이라고 하겠습니다.
    뜻이 다르기 때문에 헤어지고 다시 새로운 사람을 찾는 조급한 세대에서 오직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려고 생명을 사랑하고 생명을 온전히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려는 산고의 고통까지도 감당하려는 바울의 믿음을 생각하며 너무 쉽게 생명을 포기했던 지난날의 실수와 잘못을 뉘우치며 생명을 사랑하는 수고에 동참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우리가 살아 가면서 가장 절망적인 순간은 언제 일까요?  생각대로 일이 안됐을 때 혹은 사업에 실패 했을 때 입니까?  이런 모든 것이 다 절망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절망 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을 잃었을 때 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랑과 정성을 쏟은 사람을 잃었을 때 우리는 큰 절망을 경험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지금 가장 큰 위기와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어제 본문 중에서 11절 말씀을 보면 바울의 심정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사도바울은 그 동안의 수고가 모두 헛것이 될 것 같은 순간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얻는다고 전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주의자들의 영향에 의해 마치 구원은 율법의 행위도 필요한 것처럼 가르쳤습니다. 율법 행위가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처럼 사람들의 생각을 변질 시켰습니다. 사람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만 하고 절기를 지켜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위기감에 빠져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도 같지 않을까요? 우리가 그 동안 수고한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느껴질 때, 한 사람을 변화 시키기 위해서 모든 정성을 쏟았지만 변화 되지 않았을 때 절망의 순간이 다가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과 사도 바울은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에게 육체의 약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할 때 14절 끝부분에 나오는 말씀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처럼 바울을 대했습니다. 15절 끝 부분에서도 이렇게 표현 합니다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눈 까지도 빼어 줄 수 있는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모습은 달랐습니다. 16절에 보면,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했습니다. 과거에 너무나 좋았던 관계, 서로 바라보면 그리스도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하나님의 올바른 뜻이 무엇인가 가르치는 사도바울을 갈라디아 사람들은 이제 원수처럼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절망의 순간이 있습니까? 오늘 그 동안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한 사람, 한 영혼에 대해서 포기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사도바울의 반응 입니다. 19절을 보겠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바울은 왜 ‘해산의 수고’ 라는 단어를 사용 했는지에 관심이 갑니다. 사랑의 수고, 눈물의 수고 등 많은 단어가 있는데 하필이면 왜 해산의 수고 라는 단어를 사용했을까 궁금합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고 자랍니다. 잘 자라줄 줄 알았던 아이가 망가집니다. 이럴 때 처음으로 돌아가서 마치 아직 해산 하지 않고 태 속에 아이가 있어서 해산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사랑과 수고를 다시 처음부터 시작 하겠다는 의미 입니다. 아직 낳지 않은 아이로 생각하고 새 출발을 하겠다는 것 입니다.

    두 번째는, 죽음을 각오 하는 것을 의미 합니다.
    요즘은 해산할 때 죽음의 위험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과거에 해산은 생명과 직결되어 있었습니다. 내가 낳으면 살고 내가 못 낳으면 죽는 것 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한 영혼을 낳기 위해서 사도바울은 지금 갈라디아 사람들을 위해 ‘해산의 수고’ 라는 단어를 사용 하면서 자신의 생명을 걸겠다는 겁니다.

    완전히 포기할 수 밖에 없고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순간에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까? 사도바울에게 어떻게 이런 힘이 나올 수 있었습니까? 그 당시 갈라디아 근처에는 고린도와 다른 지역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을 포기 할 수도 있었습니다. 해산의 수고를 하면서 다시 처음부터 시작 하지 않아도 될 뻔했습니다. 그러나 본문 안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얘기 합니다. “내가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해 수고하겠다.”  

    바울은 ‘바울 서신’ 전체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해산의 수고’ 가 무엇인지 철저하게 깨달았던 사람 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바울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기까지 끝까지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신 하나님의 ‘해산의 수고’를 철저하게 깨달은 사람 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지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준 사람들에게 ‘해산의 수고’를 감당 한다고 말합니다. “내가 믿음으로 너를 낳았다” 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단순한 혈통의 해산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 하신 방법은 하나님께서 직접 ‘해산의 고통’을 감당하시고 ‘해산의 수고’에 참여 하셨습니다. ‘해산의 수고’ 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입니다. 해산의 수고를 통해 하신 일은 인류의 모든 죄를 끌어 안고, 그 죄를 짊어지고 대신 죽어 주는 것, 대신 피를 흘려 주는 것, 이것이 즉 하나님이 우리에게 해주신 ‘해산의 수고’였습니다. 이러한 ‘해산의 수고’ 때문에 인간에게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해산의 수고는 변화 되지 않고 포기할 수 밖에 없던 인생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새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셨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해산의 고통으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 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 17).

    우리는 오늘 무엇 때문에 좌절 하고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 포기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 하고 있습니까?  아무리 매달려도 변화 되지 않는 가족이 있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 어떠한 인생의 절망의 순간이 다가와도 우리 믿는 사람들은 절대로 포기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절망 앞에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하나님은 그 순간에도 끌어 안으시고 포기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붙잡아 주시고 보혈의 능력으로 변화 시키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해산의 수고가 지금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해산의 수고 앞에서 변하지 않을 사람은 없기 때문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수고가 물거품이 되어버린 그 순간에도, 과거의 친구가 원수가 되어버린 순간에도, 포기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시 그들을 위하여 해산의 수고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는 포기 하는 것 입니다.  부부 사이에, 친구 사이에 우리는 쉽게 다 포기 합니다. 조금 하다 안되면 포기 합니다. 갈아 치웁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의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절대로 포기 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포기 하는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끝까지 붙잡고 계십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해산의 수고’에 동참 하고 있습니까?  나의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해산의 수고로 끌어 안을 때 결과는 반드시 ‘변화’ 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해산의 수고 없이는 변화도 없습니다. 기적도 없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내가 해산의 수고를 아끼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해산의 수고를 붙잡고 나갈 때 우리에게 다가 오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포기하고자 하는 사람에게까지 다가 오시고 원수에게까지도 다가 가십니다. 그 어떤 절망의 순간도, 내 자녀, 가족, 친구, 배우자, 원수까지도 반드시 변화됩니다.

    “우리를 구원 하기 위해서 해산의 고통을 견뎌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 하면서, 은혜에 힘입어 포기 하지 않고 해산의 수고를 각오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에는 해산의 수고가 있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해산이란 반드시 고통을 수반하는 것으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고통 중 가장 큰 고통과 동시에 가장 의미 있는 고통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이 많은 고통들이 해산의 수고와 같이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아마도 그 고통을 마다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해산을 하는 여인들을 보면 죽느니 사느니 하면서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아이를 낳습니다.
    그 때문에 고통이 있는 순간에는 다시는 안 낳겠다는 맹세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다른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의미가 있는 것이기에 그 뒤에도 둘, 셋을 계속 낳게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해산의 고통은 최대의 고통이요, 최고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자랑스럽고 가장 보상이 큼 고통이 해산의 고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엄청난 고생을 한다는 것임과 동시에 거기에는 그만한 의미가 있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지금 말하고 있는 해산의 수고란 처음 태어나는 그 출생을 위해서 수고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바는 낳는 것은 복음으로서 이미 낳았습니다.
    즉, 말하자면 이미 중생은 되어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중생이란 원래 단회적인 것이요, 신비로운 역사입니다.
    그리고 순간적인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는 마치 어느 한 순간 나도 모르게 땅에 떨어진 씨앗이 있었고, 그로 인해 싹이 나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과도 같습니다.
    여기에서 씨앗 하나가 땅에 떨어진 유일회적이면서도 순간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여 출생된 생명이 성장을 하는 데에는 긴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마찬가지로 단회적인 역사로 중생된 생명이 성장해 나가는, 즉 신학적인 용어로 성화 되어 나가는 데에는 많은 시간뿐만 아니라 그를 위한 수고가 또 다시 해산의 수고로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말하는 해산의 고통은 처음 생명을 출산하는 의미에서의 고통이 아니라, 이미 태어난 중생한 심령이 자라가야 하는 과정에 필요한 고통의 수고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태어난 생명은 반드시 성장의 과정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이것 역시그리스도의 역사요 복음과 성령의 역사이면서 전도자의 수고가 있습니다.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지만 생명이 태어나게 하고 자라가게 하는 데에는 전도자의 수고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고통 하여 낳은 다음 자라게 하는 데에도 그에 못지 않은 어머니의 수고가 뒤따라야 함을 가리켜서 해산의 수고라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수고를 하는 성장 목표는 어디까지인가 할 때 그 목표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라고 하였습니다.
    그 마음, 그 인격, 그 영혼, 그 삶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해산의 수고와 같은 그런 수고가 계속되어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사실 생리적으로 아이를 낳았으니 어머니가 되는 것까지는 그렇게 대단한 특권이 아닙니다.
    그것은 누구나 결혼을 해서 아이를 가지게 되면 낳게 마련이고, 그렇게되면 어머니는 자연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심하게 말하면 원하든 원치 않든 어머니는 쉽게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겪어서 아는 대로 가장 어려운 것은 낳은 자식을 키우는 일입니다.
    이를 두고 어머니의 입장을 생각해 보아도 낳은 어머니야 자기가 낳은 자식을 얼마든지 고아원에 내다 버리는 것이고 보면 낳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낳은 자식을 훌륭하게 키워나가자면 그 어려움이 참으로 큰 것입니다.
    그러기에 훌륭하게 자식을 키워놓은 어머니들께 낳을 때의 수고와 키울 때의 수고 중 어느 편이 더 어려웠던가를 한번 물어 보십시오. 낳는 일이야 비록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몇 시간동안만 꼬박 고생하면 되지만, 키우는 일은 이 십 년 삼 십 년을 키우면서 계속 마음 졸이며 고생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수고, 곧 계속적인 해산의 수고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성장 목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입니다.
    에베소서 4:13에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아무개, 누구만큼, 혹은 어느 목사, 장로만큼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자라야되는 모교는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의 형상이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인 만큼 누구보다 조금 낫고 못하고를 가지고 평가하거나 만족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그리스도인이 되는 과정을 놓고 생각해 볼 때 갓 태어난 상태, 그러니까 중생 하자 마자의 단계는 역시 유치한 단계입니다.
    이 유치한 단계를 에베소서 4:14 말씀에서 묘사한 것을 보면,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어렸을 때에는 순진하고 깨끗한 것까지는 좋으나 아무래도 판단력이 없고 어리석기 때문에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믿는 것도 처음 믿어 연조가 깊이 못한 사람은 이 말 저 말에 흔들리기가 쉽고 특별히 이단 사설에 유혹되기가 매우 쉽습니다.
    아직도 기독교 교리에 대한 이해와 확신이 없는 가운데 신앙 체험도 갖지 않은 상태라면, 그 신앙은 참으로 위험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이 말을 들으면 이 말이 옳은 것 같고, 저 말을 들으면 저 말이 옳은 것 같아서 계속 요동하게 됩니다.
    제가 가끔 교역자로서 어려운 질문을 받을 때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어떤 이상한 교단이나 교리에 대한 책을 읽고서는 "목사님 그것도 그럴듯하던데요."하고 말하는 것인데 거기에 대한 저의 대답은 "그럴듯하니까 사람들이 따라가는 것이겠고, 예수 믿은 지 1년 밖에 되지 않은 당신의 눈에는 그럴듯하지 않은 것이 어디 있겠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처음 단계, 이 유치한 단계는 이와 같이 분별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는 스스로 먹지를 못합니다.
    그 때문에 입에다 먹여주어야 됩니다. 먹
    여줄 뿐만 아니라 부드럽게 씹어서 먹여 주어야 됩니다.
    조금 미안한 이야기입니다마는 어떤 때 시골에서 보면 치아도 좋지 않은 할머니들이 밤 같은 것을 까서 씹었다가 꺼내서는 손자의 입에 넣어주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며느리들은 비위생적이라며 군소리를 하지만 사실은 알고 보며 가장 위생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짐승 중에는 자기가 먹은 것을 토해서 먹이는 짐승이 많이 있을 뿐만 아니라, 다 씹었고 침도 섞였으니 위에 들어가기만 하면 바로 소화가 되게 되어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 때문에 이빨도 없는 어린아이들이 넣어주는 대로 꿀꺽하고 삼키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하게 되느냐하면 그것은 유치한 단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간혹 어떤 이들은 성경 읽는 것을 싫어하고 또 읽어봐야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면서 꼭 설교만 좋아하는가 하면 그것도 주로 부흥사들의 설교를 좋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가끔 부흥회를 인도하려 가거나 하면 우리 교인으로서 그 자리에 와서 듣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 후에 그분이 저를 보고 하는 말이 "목사님! 본 교회에서 말씀하실 때보다 여기에서 하시는 것이 참 재미있고 좋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서 25분 설교하던 것을 거기 가서는 대상이 다르니 만큼 같은 주제를 가지고도 필요에 따라 긴 설명을 하고 보니 그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섞여 있는 다른 것이 많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드럽고 소화가 잘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거기에는 불순물이 많이 섞여 순도가 낮은 것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직접 대하는 것은 100%의 순도라고 한다면, 설명을 붙여서 받아들이게 될 때에는 이해가 잘되는 것까지는 좋으나 순도에 있어서는 그 수치가 떨어지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흔히 우리는 부흥회를 다녀온 사람으로부터 은혜가 많더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그럴 때에 은혜가 어떻더냐하고 물어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그 때문에 시간가는 줄을 모르겠습니다."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재미가 있다는 것과 은혜와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것이 재미있는 것으로 보아지는 이유는 바로 유치한데 있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그저 부흥회만 한다면 보따리 싸들고 어디이고 찾아다니며 이것저것 주워 먹고는 결국은 소화불량이 걸려서 또 고생을 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와 같이 유치한 나머지 세상 풍조에 밀려서 이리 저리로 흔들리며 스스로 먹지도 못하고 서지고 못하며 활동도 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그 맥락을 생각해 보면, 갈라디아 교인들은 사도바울을 통하여 복음을 받아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떠난 후에 유대인들이 와서 유혹하기를 예수를 믿고 비록 그리스도교가 진실한 종교라 하더라도 율법을 엄수하며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이러한 것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그가 참된 사도가 아니기 때문이라며, 십자가의 구속을 반대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갈라디아 교인들은 이쪽 저쪽을 왔다갔다하며 그렇다면 할례를 받아야 되나보다 하고 할례를 또 받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요동하는 무리가 되어 갈팡질팡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험은 다른 사람이 아닌 베드로에게도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11절 이하에 보면, 베드로가 안디옥에서 예수 믿는 이방 사람들과 식사를 하다가 할례자인 유대인들이 들어오자,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일어나 가버리는 것을 보고 비록 베드로가 선배이기는 하지만 사도 바울이 책망을 하고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 앞에서 베드로를 향하여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하려느냐?"며 크게 책망을 합니다.
    이는 이방 사람과 앉아서 식사를 했으면 끝까지 할 것이지 할례를 받은 유대 사람들이 들어온다 하여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여 일어나서 나가느냐?
    왜 이렇게 흔들흔들 하느냐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는 것이 다 같은 것 같아도 교리적으로 바른 이해를 하고 믿는 것과 그와 같은 아무런 지식이 없이 믿는 것과는 크나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유치한 신앙이란 신학적으로 아직 체계가 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어떠한 유혹적인 다른 말이 들어오면 그대로 이리 저리 흔들리게됩니다.
    그러나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 성서적으로나 신학적 혹은 교리적으로 체계 있는 이해를 하고 나면, 그 뒤에는 그 누가 무슨 말을 하여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에 유치한 단계와 성숙한 단계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정리를 하면 유치한 신앙의 단계란 기초가 약하므로 유혹에 빠지기가 쉽고, 다시금 세상 풍조에 끌려갈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리고 내적으로 다져지는 신앙보다는 형식적인 것, 곧 율법주의로 기울어지기가 쉽습니다.
    이와 같이 유치한 단계의 정도를 아이들에게서 생각해 본다면, 아이들이란 항상 사랑을 베풀어도 질과 양의 측면에서 말한다면 저들의 입장에서는 질보다는 양적인 것이 된다고 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머니로서 짧은 시간에 아주 귀중한 사랑을 베풀었다하더라도 아이들로서는 그 깊은 사랑을 알 리가 없는 것이며, 좋던 나쁘던 간에 어머니가 오랫동안 같이 있어 주기만을 바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이란 그 깊은 의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아이들이란 누구이든지 자기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 끌려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는 과자나 사탕을 주면서 하자는 대로 다 해주며, 어머니 아버지도 상관치 않고 어디든지 따라가고 마는 지극히 물질적인 영향하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깊은 의미에서의 사랑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때리는 것이 사랑이고 책망하는 것이 사랑일 수가 있습니다 만은 그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한 대만 때려도 아예 때리지 않는 집으로 가버리고 마는 것이 아이들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란 질적인 사랑에 대해서는 이해가 없는 반면에 양적인 사랑, 불량적인 사랑에만 기울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는 우리의 주위에서도 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가만히 보면, 성숙한 사람은 사업에 실패했을 때에 오히려 시련을 통한 굳은 믿음과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겸손하게 하시니 하나님 감사합니다하는 자세로 나옵니다.
    그러나 믿음이 어리고 약한 사람은 사업이 조금 잘 되면 복 받았다며 좋아하다가 조금 잘못되면 저주받았다며 울고불고 하는데, 이것이 다 유치한데서 비롯되는 소치이며 지극히 물량적인 증거입니다.
    이와 같이 유치한 단계에서는 세속주의의 풍조에 밀리고 율법주의에 빠지며 변덕이 심합니다.
    아이들을 보노라면 그 얼마나 변덕을 잘 부립니까?
    방금 웃다가, 방금 울다가 뿐만 아니라 울다가 방금 웃으면서도 부끄러워하거나 체면 같은 것도 없이 그냥 또 웃습니다.
    이렇게 하기를 한시간에도 몇 번씩 하면서 변덕을 부리는 것인데, 그것은 모두 유치하기 때문에 나오는 행동인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번 믿는다하고 시작을 했으면 끝까지 믿고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 교인 가운데 예수 믿기 시작하여 처음 나온 그날부터 오늘까지 7시 30분 예배에 3년 동안 개근을 한 분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은 들쑹 날쏭 변덕이 심하여 어떤 때에는 열심히 나오다가 어느 때에 보면 또 안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모두 유치한 신앙을 가졌기 때문이며 그 결과 변덕이 심하고 내가 남을 도와주며 친절히 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친절과 도움만을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이가 몇 살이든, 몇 십 년을 믿었던 간에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한 그것은 어린아이와 같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옛날 어떤 목사님의 설교 중에 "친절한 교회를 찾아서 방탕의 길을 떠난 한국 교인들이여!"하는 말이 생각납니다.
    어느 교회가 더 친절한가하여 기웃거리며 다니고 있는데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가 곧 교인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내가 친절을 베풀어야 내게도 베푸는 사람이 있는 것이거늘 베풀 사람이 따로 있고, 받을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더냔 말입니다.
    이는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본디 성장한 신앙이란 내가 누구를 도울까?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친절하게 할까하는 그런 문제에 신경을 쓰는 것이지 사탕만 준다고 하면 아무에게나 따라가는 아이들처럼 누가 나에게 친절히 해주느냐하는 따위에는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숙해 가는 데에는 일정한 단계가 있어서 젖을 먹을 때가 있는가하면 밥을 먹을 때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서도 다른 곳에서 세밀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알아야 할 것은 어린아이들이란 수준이 낮기 마련이며, 그 낮은 수준에 대해서는 거기에 따라 부득이 낮게 대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린아이를 놓고 당장에 어른이 되라고는 할 수가 없는 것이며, 유치하다고 나무랄 것만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애정과 통제, 율법과 은혜가 균형을 이루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제임스 더불류  파울러(James, W Fowler)가 6단계로 구분한 신앙의 발달 단계에 의하면 유치한 단계인 맨 첫 단계를 직관적이고 투사적인 단계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첫 단계에서는 하나님의 모습도 사람의 모습처럼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보이는 것만을 생각하고 보이지 않는 것은 생각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모든 것을 보이는 것 안에서 생각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성장의 과정에는 유치한 단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것을 위한 대단히 중요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말씀의 내용이란 어린아이에 대한 문제는 어른이 책임을 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볼 때 갈라디아 교회가 유치합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말로 책망도 해봅니다.
    그러나 교회가 유치하기 때문에 이제는 부득불 그 책임을 내가져야 되겠다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젖 먹는 어린아이가 잘못했다하여 거기에다 책임을 물어 감옥에 보낼 수는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의 잘못은 어디까지나 그 부모에게 달려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들이 대소변을 가릴 수 있는 시기는 2살 이후에야 가능한 것인데, 그것을 미리부터 왜 못가리냐며 매질을 하고 겁을 주게되면 그 아이는 그 일로 인해 의기 소침한 사람이 될 뿐만 아니라 조금 크면은 말더듬이가 된다고 하는 것이 심리학적인 해석입니다.
    그러니까 아직 성숙하지 못한 것을 놓고 성숙하라고 한다해서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고 보면, 부득불 그 책임은 교육하는 이쪽에서 져야한다는 말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부득불 내가 다시 해산의 수고를 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너희들의 신앙이 유치한 것에 대한 책임을 내가 지겠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로 하여금 예수를 믿게 하기 위하여 수고했던 사도 바울이 이제는 성장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필요한 희생을 지불하겠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어떤 사람들은 전도를 해서 한번 교회에 나오는 것을 보면은 그 이후에는 그대로 내어 버려 둔 채 성장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교회에 나오기를 시작했으면 이제는 신앙이 무럭무럭 잘 자랄 수 있도록 적어도 3년, 아니면 세례를 받을 때까지 계속 잘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어쨌든 그 유치한 단계를 놓고 본인에게 책임을 돌려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때로는 떠 먹이기도 하고 일일이 가르치기도 하며 본을 보이기도 해야 합니다.
    그 때문에 전도자의 책임이 중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 사람의 신앙 성장은 그를 전도해준 사람의 신앙만큼 자란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전도를 한 사람이 낮 예배, 저녁 예배, 새벽 기도 다 나오는 사람이면 전도를 받은 사람도 예수 믿는 것은 이런 것인가 보다 하고 처음부터 그렇게 형성이 되어 나갑니다.
    그러나 나를 전도한 사람이 주일 낮에 한번 나오는 사람이라면 나 또한 그런 정도의 신앙으로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다른 사람을 전도하고 인도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니 만큼 그 책임도 큽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를 가리켜 해산의 수고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어린아이를 낳는 수고와 같은 의미가 있는 수고인 동시에 그만큼 고통스러운 수고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사도 바울은 이 수고, 이 고통을 내가 계속적으로 지불하겠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최고의 고통, 최고의 사랑, 최고의 가치가 있음이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 입니까?
    여러분! 젖 먹는 어린아이에게 잘못했다하여 책망하며 매질하는 것을 보았습니까?
    그가 어린아이인 동안 매질도 안 하거니와 실망도 하지 않습니다.
    어린것이 발버둥치며 운다고 하여 저 녀석이 아무래도 성격이 나쁜가 보다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많이 우는 아이를 두고는 "커서 음악가가 될려는가 보다"라거나, 한참 울고 돌아가면 "고집이 있는 것을 보니 큰 사람이 되겠는데."라며 되도록 좋은 해석을 하는 것이 바로 어른들의 생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처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유치함을 놓고 어떻게 평가를 해야 되겠습니까?

    여기에 해산의 수고를 하는 전도자의 기본 자세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말씀 입니다 만은 쿼바디스라는 영화에서 보면 베드로가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박해를 피하여 로마에서 빠져 나와 도망을 가려고 성밖을 나서게 됩니다.
    로마를 향하여 걸어오고 계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에 깜짝 놀란 베드로가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하고 물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네가 버리고 가는 로마에 너 대신 가기 위하여 내가 지금 로마로 간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아닙니다.
    내가 가겠습니다."하고 돌아서서 다시 로마로 들어가 훗날 거꾸로 십자가에 못을 박혀 죽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비록 전설로 전해지고 잇는 이야기이지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배신하는 사람, 그리고 그리스도를 배신하고 도망가는 배신자들을 위해서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을 겪고 계시는 것입니다.
    잘못된 신앙의 소유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늘 또 다시 해산의 수고를 하시는 것이란 말입니다.
    한 심령이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서 그리스도인으로 성숙해 가는 데에는 이처럼 많은, 실로 엄청난 희생을 필요로 합니다.
    그 누군가 그를 위해서 대단한 수고를 하지 않고는 그가 자랄 수 없습니다.
    그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말씀이 전해지고, 성령이 감화하며, 그리고 전도자, 교역자, 친구, 이웃할 것 없이 누군가가 해산의 수고를 해야 합니다.
    해산의 수고를 한 사람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이 있다면 바로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가 온갖 방탕한 일을 다 하면서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지만 끝까지 낙심하지 않고 기도하면서 해산의 수고를 하므로 마침내 성 어거스틴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을 위해 사도 바울은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라고 말합니다.

    새벽을 깨우리로다(새벽기도회) /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04-22-2023(토)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사도행전 1:14)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

    그들은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위하여 응답이 올 때까지 기도에 전념하였다.
    예수께서는 교회를 인도하고 강화시킬 하나님의 선물로서 성령을 약속하셨거니와, 이 약속에 대한 성도들의 반응은 기도로 나타나야 했다.
    다시 말해서 초대 교회가 성령을 받은 것은 기도할 때였다.
    따라서 누가가 본서 시작부분에서 지속적이고 합심(合心)된 기도로써 성령 강림을 기다리는 제자들의 모습을 강조하고 있다.


    προσκαρτερέω  4342

    1. 집착하다,  2. ~에 애착을 가지다,  3. 대기하다
    발음 / 프로카르테레오(prŏskartĕrĕō)
    어원 / 4314와 259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대기하다(막 3:9), 힘쓰다(행 1:14, 2:46, 6:4, 롬 12:12), 전심으로 따라다니다(행 8:13)
    신약 성경 / 10회 사용





    09 - 24 - 2022(토) 오후 9:34

    성경에서 새벽의 의미

    (도입 이야기)

    탈무드에 소개된 이야기,
    어느 날 랍비가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밤이 끝나고 낮 시작되는 동이 트는 시간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겠는가?”
    그러자 제자 중 한 명이 말했습니다.
    “멀리서부터 개와 양을 구별할 수 있을 때가 동이 트는 시간이 아니겠습니까?”
    랍비는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가 “무화과나무와 포도 덩굴을 구분할 수 있을 때가 아닐까요?” 하고 말했습니다.
    랍비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제자들은 결국 랍비에게 “선생님, 우리에게 답을 알려주십시오” 하고 간청했습니다.
    그러자 랍비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다른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그들을 너희의 형제나 자매로 인식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빛이 있을 때, 그때가 바로 동이 트는 시간이다. 그때까지는 밤이며 어두움이 여전히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이 어두운 밤이라 말하면서 새벽이 다가온 것은 모르고 있습니다.
    내가 이웃을 사랑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동이 트고 새벽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새벽이란 내가 잠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고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할 때가 새벽이다.
    당신은 지금 새벽을 맞이하고 있습니까?
    아직도 새벽이 오지 않았다면 이제부터 새벽을 깨워야 할 것입니다.

    (전개하는 이야기)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선교에 일생을 바친 영국선교사였습니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당신은 어떻게 일생을 사역자로 보낼 수 있었습니까? 그리고 행복한 비결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제 헌신과 행복의 비결은 하루를 어떻게 시작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연주자는 음악회가 시작되기 전 악기를 조율합니다. 음악회가 끝난 뒤 조율한다면 어리석은 사람이겠지요. 저는 아침에 일어나면 하나님의 뜻과 맞추는 일부터 합니다. 그러면 인생이 보람있지요』

    새벽기도는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뜻을 일치시키는 시간으로서 참으로 중요합니다.

    시편 46:5 /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그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마가복음 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새벽(4404) πρωΐ  

    새벽(4404) πρωΐ  

    1. 일찍이,  2. 아침,  3. 일찍

    발음 / 프로이(prōï)

    어원 / 425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아침에(마 16:3, 요 20:1, 행 28:23), 새벽에 (막 1:35, 13:35,15:1), 해 돋을 때(막 16:2).
    신약 성경 / 12회 사용

    * 4253. πρό 

    1. 전에,  2. 앞에

    발음 / 프로(prŏ) 

    관련 성경 / ~전에(고전 2:7),  ~앞에(마 11:10), 앞서(눅 9:52), 먼저(요 5:7), 이전에(행 5:36), 전(행 12:6),  ~밖에(행 12:14),
    ~전부터(요 17: 24),  ~보다도(약 5:12).
    신약 성경 / 47회 사용
    -  누가복음 11:38 /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미명에(1773). ἔννυχος, ον 

    미명에. ἔννυχος, ον 1773

    1. 밤,  2. 중성 복수 목적격은 부사처럼 사용됨: ἔννυχα

    발음 / 엔누코스(ĕnnüchŏs) 

    어원 / 1722와 357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새벽 아직도 밝기 전(막 1:35).
    신약 성경 / 1회 사용
    * 새벽 미명에 : 아침 해가 뜨기 전 아직도 어둠이 주위사방을 덮고 있는 때에

    사사기 19:25
    무리가 듣지 아니하므로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무리에게로 붙들어내매 그들이 그에게 행음하여 밤새도록 욕보이다가 새벽 미명에 놓은지라

    1. 스바냐 3:7 / 부지런히

    1. 스바냐 3:7 / 부지런히


    내가 이르기를 너는 오직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 그리하면 내가 형벌을 내리기로 정하기는 하였거니와 너의 거처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그들이 1)부지런히 그 모든 행위를 더럽게 하였느니라.

    1)부지런히  : 일찌기 일어나서


    2. 잠언 1:28 / 부지런히

    2. 잠언 1:28 / 부지런히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지 아니하겠고 2)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2)부지런히 : 이른 아침에


    잠언 31:13 / 부지런히 일하며
    그는 양털과 삼을 구하여 부지런히 손으로 일하며.

    베드로전서 1:10 / 구원의 은혜를 부지런히 살펴서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예레미야 11:7 / 부지런히 경계하여 청종하라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간절히 경계하며 부지런히 경계하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청종하라 하였으나.

    3. 잠언 8:17 / 간절히

    3. 잠언 8:17 / 간절히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1)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1)간절히히, 새벽에

    * 간절히 기도하라(야고보서 5:17)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오고.

    * 간절히 사모하라(베드로후서 3: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 간절히 삼가라(히브리서 2:1)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찌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


    (맺는 이야기)

    영국의 노예해방 운동가 William Wilberforce는 그 아들에게 이렇게 써보냈다고 합니다.

    "내가 네게 원하는 것은 결코 아침 기도를 무시하거나 짧게 해버리거나 성급하게 마쳐 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특히 골방에 있어서의 하나님과의 교제를 등한히 하지 않도록 주의했으면 한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렇듯 치명적인 것은 달리 없는 것이다.
    만약 내가 하나님과의 보다 친근한 교제에 있게 된다면, 나는 지금보다 더 훌륭하게 하나님께 쓰이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성급한 기도는 흥분과 실패를 가져옵니다.
    기도에 시간을 들이는 것은 시간의 절약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새벽을 깨우는 일에 성공하셨습니까?
    내이도 새벽을 깨우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기대합니다.
    오늘의 기대가 내일로,
    내일의 기대가 그 다음 날에도
    이렇게 반복 계속 될 때 세상은 그리스도의 계절이 다가 올 것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오늘의 새벽은 내일의 새벽이 아니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사자당나귀, 여우 셋이서 힘을 합해 사냥을 했습니다.
    그리고 사냥한 것을 나누는데, 사자가 당나귀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당나귀는 똑같이 셋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랬더니 사자는 공평하지 못하다 하면서 당나귀를 잡아먹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번에는 여우한테 나누어 보라고 합니다.
    그러자 여우는 대부분을 사자 몫으로 돌리고 자기는 쥐꼬리만큼 가졌습니다.
    그때서야 사자는 흡족해 이제야 공평하게 되었구나 말합니다.
    사자가 여우에게 묻습니다.
    "너는 어떻게 해서 이런 지혜를 생각해 냈느냐"
    그러자 여우가 대답하기를, "어떻게는 뭘, 당나귀 죽는 것보고 생각해 냈지".

    남에게 일어난 일을 보고 내게 일어날 일을 생각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가를 보고 우리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미리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준비하여야합니다.
    다른 사람이 병에 들었습니까?
    그것을 보면서 우리도 병들 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준비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우리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을 알고 준비하셔야 합니다.

    성경전체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귀중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날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그 날' 이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창세기 7장 11절입니다.
    "노아가 육백세 되던 해 이월, 그 달 십칠일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 창들이 열려" .

    여기서 그 날은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시는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13장 19절에서 예수님은 "그 날들은 환난의 날이 되었음이라, 하나님의 창조하신 창조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그 날 역시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심판하실 날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심판의 날인 그 날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교인(느헤미야 11:1-36)

    느헤미야 11장은 당시 예루살렘에 사는 거주자의 이름이 열거된 장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유다 멸망 후에는 폐허가 되어 사람이 살만한 곳이 되지 못했습니다.
    포로생활에서 귀환 후에도 예루살렘은 예전처럼 복구되지 못했고, 느헤미야의 리더십을 통해 예루살렘 성벽이 수축되었지만 여전히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서 살기를 꺼려했습니다.

    할 수 없이 당시 지도자들은 예루살렘 인구 유입정책을 씁니다.
    그렇게 해서 예루살렘에 살게 된 사람들은 처음에는 폐허에 살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예루살렘은 수도의 지위를 회복하고 그 안에 살았던 사람들도 누구보다 축복된 백성들이 됩니다.
    이 장면을 보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교인이 어떤 교인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어떤 교인을 축복하실까요?

    1. 앞서 희생하는 교인

    본문 1절 첫 부분을 보십시오.
    “백성의 두목들은 예루살렘에 머물렀고.” 당시 리더들은 먼저 솔선수범을 했습니다. 그처럼 리더가 앞서 헌신하는 교회가 희망이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직분이 높을수록 더욱 헌신해야 합니다. 중직 자리는 높은 자리가 아니고 헌신하는 자리입니다. 누가 리더입니까? 헌신하는 사람은 리더입니다. 누군가 앞서 헌신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공동체를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옛날 중국 원나라의 탕왕이 천자가 된 후, 7년간 가뭄이 계속되자 한 노대신이 말했습니다. “황제님! 이번 흉년을 끝내려면 사람을 잡아 제물로 드려야 됩니다.” 그때 탕왕이 말했습니다. “내가 어찌 백성을 잡아 제물로 드리겠나? 내가 제물이 되겠다.”

    곧 탕왕은 목욕재개하고 흰 말이 이끄는 흰 수레를 타고 들에 나가 엎드려 통곡했습니다. “신이여! 제가 정치를 못하고 백성을 잘 돌보지 못해 이런 가뭄이 생겼습니까? 지금 뇌물과 참소가 성행해서 의인이 고통을 당해 이런 어려움이 생겼습니까? 이 모든 것이 저의 잘못입니다. 그러므로 저를 제물로 받으시고 이 백성을 구해주소서!” 바로 그때 순식간에 비가 내려 수천 리 땅을 적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앞서 희생해야 합니다. 희생이 무엇입니까? 바로 십자가입니다. 자기를 죽이면 만사가 해결됩니다. 우리는 어려움이 생기면 즉시 남 탓부터 하지 말고 즉시 내 탓부터 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려움이 내게 마음과 피부에 느껴지기도 전에 더 철저히 죽어버려야 합니다. 내 탓인 줄 알면 다 함께 살고, 남 탓인 줄 알면 다 함께 죽습니다.

    어느 날, 한 며느리가 밥을 짓다가 밥을 태웠습니다. 그때 시어머니가 욕설을 퍼붓고 구박하자 며느리는 “일부러 그랬느냐?”며 대들었습니다. 그러자 시아버지는 “어디서 말대꾸하느냐?”고 호통을 쳤고, 이것을 지켜보던 신랑이 손찌검을 하자 새댁은 “그래! 죽여!”라고 대들며 대판 싸움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다음날, 건너편 집의 갓 시집 온 며느리도 밥물이 넘치는 줄도 모르고 계속 불을 때다가 밥을 태웠습니다. 그때 시어머니는 “내가 물을 너무 적게 부어서 그렇게 됐구나!”라고 위로했습니다. 그리고 시아버지는 “내가 땔감을 너무 많이 들여서 그랬다!”고 며느리를 감쌌습니다. 그리고 신랑은 “내가 너무 물을 적게 길어 와서 그렇게 됐다!”고 자기 탓으로 돌렸습니다. 다 그렇게 하니까 그날 밥을 태우고 그 가족은 더욱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남을 이해하고 섬기고 희생하는 훈련을 잘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가정과 교회가 잘될 것입니다. 영어로 장관을 ‘미니스터(minister)’라고 합니다. 그런데 미니스터라는 말의 원래 뜻은 ‘섬기는 사람’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관은 섬기는 사람입니다. 더 나아가 섬기는 사람이 장관과 같은 머리의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2. 힘든 일에 선택된 교인

    계속해서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백성의 두목들은 예루살렘에 머물렀고 그 남은 백성은 제비 뽑아 십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와서 거하게 하고 그 구분은 다른 성읍에 거하게 하였으며.” 느헤미야는 백성들의 10분의 1을 제비 뽑아 예루살렘으로 이주시켰고, 나머지 10분의 9는 자기 원래 성읍에 거하도록 했습니다.

    그때 제비 뽑히지 않은 사람들은 “다행이다!”라고 신나했을 것입니다. 반면에 제비 뽑힌 사람들은 “내가 이 힘든 일에 뽑혔구나!”라고 탄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제비 뽑혀서 예루살렘에 산 사람들은 나라와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구레네 시몬의 경우처럼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때에는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내가 이 일을 해야 되나?” 그러나 나중에 보면 그 십자가를 진 것이 엄청난 축복으로 돌아오는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게 원치 않는 십자가가 지워지더라도 감사하며 그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옛날 인도네시아의 자바 섬에 스웨덴 출신 선교사 사모님이 심한 향수병에 걸렸습니다. 문화 충격도 심했고 터놓고 말할 대상도 없어서 향수병은 커졌습니다. 어느 날, 그 사모님의 눈에 스웨덴제 성냥갑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그분은 성냥갑에게 물었습니다. “성냥갑아! 너는 고국을 떠나 여기까지 뭐 하러 왔니?”

    그때 성냥갑이 마치 이렇게 대답하는 것 같았습니다. “선교사님! 저는 이곳에 불을 켜주러 왔어요. 그 임무를 마치면 버려질 거예요.” 그 내적인 음성을 듣고 사모님은 즉시 무릎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이곳에 저를 오게 하셨군요. 이제 버려져도 괜찮습니다.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하나님의 빛을 발하게 하소서!” 그 뒤 사모님을 향수병을 극복하고 자바 섬 원주민을 위해 헌신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곳에 왜 있게 되었습니까? 단 한 가지 분명한 이유는 이곳에 우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이곳에 보내셨습니다. 이제 이곳에서 십자가를 지고 빛을 발하며 살아야 합니다.

    저는 미국 기독교 선교연맹 출신 목사로서 왜 전혀 기반이 없는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었는가를 가끔 생각합니다. 다른 어떤 이유보다 하나님께서 제가 이곳에 필요하다고 보내주셨다고 믿습니다. 저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선교에 초점을 두는 것 말고는 저의 신앙색체가 장로교 통합측과 전체적으로 유사한 면이 많다고 생각하기에 그쪽으로 갈까 하는 생각도 잠깐 했지만 저는 그냥 저의 자리를 지키기로 했습니다.

    처음에 한국에 도착하니까 동기, 동창, 동역자, 후원자, 물질 등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디서 어떻게 사역을 시작해야 할지 정말 막막했습니다. 그때는 총각이었기 때문에 결혼할 일도 막막했습니다.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991년 10월에 미국에서 귀국하자마자 글을 써서 당시 대표적인 3군데 출판사인 두란노, 나침반, 엠마오에 보냈습니다. 그때 엠마오 출판사에서 반응이 와서 “하나님은 나의 전부”란 책을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그때 책을 보면 “미흡한 부분이 많고 더 잘 쓸 수 있는데...”하고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그 책 때문에 인세는 많이 벌지 못했지만 아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제 아내가 제가 지은 책을 보고 이렇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저 전도사가 가진 것은 없지만 들은 것은 있네.” 그 뒤 데이트를 하면서 신앙잡지에 나온 저의 글들을 읽으면서 저의 신앙 스타일과 비전이 마음에 들어 “저 정도면 결혼해도 괜찮겠다”고 안심했다고 합니다.

    그처럼 귀국 초창기에는 아무 것도 없어서 “하나님! 저를 왜 이곳에 보내셨습니까?”라는 생각도 간혹 들었지만 지금은 하나님께서 여러 사역에서 많은 열매를 주셨습니다. 저희 선교회를 꾸준히 후원하는 사랑의 후원자들도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 후원자들의 후원이 없었다면 저는 한국을 ‘선교 중간기지’ 및 ‘선교 자원국가’로 만들고 싶다는 원대한 꿈을 포기하고 벌써 미국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생각하면 앞이 막막합니다. ‘선교 자원국가의 비전’을 이루려면 요삼일육선교센터(John316 Mission Center)가 필요한데 현재까지 센터를 위해 적립된 후원금이 너무 적습니다. 그것을 보면 어느 세월에 그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정말 막막합니다. 그래서 매일 새벽마다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저의 비전이 시들지 않게 하소서! 하나님이 그 비전에 저를 선택하셨다면 그 비전을 보증하시는 하나님의 작은 징표라도 허락하소서!”

    저는 믿습니다. 지금까지 사역도 거의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사역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많은 열매를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런 믿음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가끔 하나님께서 사명 주셔서 허허벌판에 우리를 내몰더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믿음과 사명감만 잃지 않으면 허허벌판에서도 반드시 열매 맺는 역사가 있게 될 것입니다.

    3. 스스로 자원하는 교인

    본문 2절 전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무릇 예루살렘에 거하기를 자원하는 자는.” 당시 많은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살려고 하지 않아서 제비까지 뽑아 강제 이주를 시켰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스스로 예루살렘에 살겠다고 자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자원하는 사람들을 보고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힘을 얻었겠습니까? 우리는 남이 가지 않으려는 길을 자원해서 갈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축복을 원합니다. 그런데 어느 길이 축복된 길입니까? 그 길을 알기 위해서 “하나님! 길을 보여주소서!”라고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축복된 길은 아는 것은 어렵지 않기 때문입니다. 축복된 길은 대개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는 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몰리고 탐내는 길은 대개 저주와 심판의 길입니다.

    우리는 좁은 길, 좁은 문으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남이 가려고 하지 않는 길을 자원해서 가는 자를 결코 외면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시간은 자원해서 기쁘게 좁은 길로 가는 사람 편입니다. 그처럼 좁은 길로 가며 십자가를 지면 잠시 어려움이 있어도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역사가 있게 될 것입니다.

    어느 날, 불꽃놀이를 구경하던 아이가 말했습니다. “엄마! 너무 아름다워요. 저도 저 불꽃처럼 살고 싶어요.” 엄마가 말했습니다. “얘야! 저 화려한 불꽃을 너무 부러워하지 말라. 자기 몸을 태워야 저런 빛이 나오는 거야. 네가 저렇게 멋지게 살려면 너 자신을 희생할 줄 알아야 돼! 항상 남을 생각하고, 어려운 사람의 친구가 되어주고, 하나님 일 많이 해라. 그러면 너도 저 불꽃처럼 아름답게 살 수 있어.”

    우리는 우리 자신을 태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살고, 나라도 살게 될 것입니다. 나만 살겠다는 이기주의를 버려야 합니다. 개미집에 불이 나면 개미는 그 불 위에 몸을 던진다고 합니다. 그러면 자기 몸이 타면서 불연성의 진액이 나와 불이 꺼짐으로 다른 개미들과 개미집을 살린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희생하고 남을 살려주려고 하는 사람에게 더욱 영광된 삶을 허락해주실 것입니다.

    4. 남을 축복해주는 교인

    다시 한번 본문 2절 말씀을 보십시오. “무릇 예루살렘에 거하기를 자원하는 자는 백성들이 위하여 복을 빌었느니라.” 당시 백성들은 예루살렘에 살겠다고 자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복을 빌어주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자원해서 선교지로 선교하러 간 선교사님들을 위해 후방에서 기도해주는 모습과도 유사합니다. 하나님은 전방 선교사도 축복하시지만 후방에서 기도하는 후방 선교사도 축복하십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면 그 기도 대상자도 축복받지만 그 기도를 해주는 사람이 더욱 축복받습니다. 반면에 우리가 누군가를 저주하고 미워하면 자신이 더욱 저주받고 하나님의 미움을 받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하루 이상 남을 미워하지 말고 열심히 남을 위해 기도해주고 축복해주어야 합니다.

    어떤 분이 편의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옆에 편의점이 하나 더 생겼습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옆 편의점 주인을 미워하지 말고 축복해주어야 합니다. 미워하면 자기 가게가 망하지만 축복해주면 자기 가게가 잘됩니다. 우리는 경쟁자와 미운 사람을 축복해주는 훈련을 부단히 해야 합니다. 우리가 남이 어떻게 되기를 바라는 대로 내가 그렇게 될 것입니다. 말이 씨가 되듯이 마음의 생각도 씨가 됩니다.

    가끔 나보다 잘되는 사람을 보면 시기심이 생깁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 저에게 시기심을 없애주세요.”라고 기도해도 시기심이 잘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때에는 나보다 앞서 경쟁자를 힘껏 축복해주어야 합니다. “하나님! 그분 사업이 부흥하게 해주시고, 그분 자녀가 잘되게 하시고, 내 이웃 교회가 잘 되게 하소서!” 그때 하나님께서 “그래! 그는 잘 되게 하고 너는 망하게 하마!”라고 하실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먼저 평화와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 많이 해주고, 축복을 많이 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누구보다 선교사님들을 위해 기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들은 복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명 때문에 살기 어려운 곳으로 가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대신 해주는 분들입니다. 그분들을 위해 기도해주고 축복해주고 후원해주어야 합니다.

    5. 교회를 힘써 지키는 교인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폐허가 된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을 지킬 사람을 찾으시는 것을 봅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누군가 나서 지켜주시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물론 교회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지켜주시지만 하나님은 직접 그 일에 나서지 않고 자원하는 헌신적인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해서 우리가 교회를 지키는 일에 나설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교회를 지킬 수 있는 힘과 능력과 여건을 허락하실 것이고, 더불어 우리 영혼, 우리 자녀, 우리 가정도 지켜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작은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큰 힘으로 우리 일을 해주실 것입니다. 얼마나 수지맞는 일입니까?

    그런 의미에서 교회의 연약한 부분이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축복의 기회입니다. 내 힘이 교회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우리는 교회에서 무엇을 얻어 누리려는 성도가 되지 말고 교회를 지키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내 힘이 부족해도 내가 가진 작은 것을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해서 큰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작은 것을 가지고 큰일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작고 힘들고 어려운 환경을 탓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려운 환경은 오히려 우리를 단련시키고 성숙하게 만드는 축복의 산실입니다. 모든 위대한 믿음의 선진들은 환경을 탓하지 않고 그 환경을 디딤돌로 삼아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곳을 찾아 그곳에서 헌신하려는 태도입니다.

    요새 가장 중요한 경영학 용어 중의 하나가 레드 오션(붉은 바다)과 블루 오션(푸른 바다)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경쟁하는 레드 오션에서 마켓 쉐어를 늘리려고 하지 말고 나만이 할 수 있는 블루 오션에서 승부를 해야 합니다. 친구 따라 강남을 가면 큰 인물이 될 수 없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외롭고 한적할지라도 불루 오션에서 작품 인생을 만들 수 있고, 그곳에서 헌신할 때 하나님께서 더욱 기억해주십니다.

    당시 폐허가 된 예루살렘에 거주하게 된 사람들은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사나?” 그러나 그들은 성전이 있는 자리를 지켰기에 결국 그들은 어느 누구보다 복된 존재가 될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힘들고 어려워도 교회를 지키고, 어려운 교회들과 선교사님들을 지켜주는 일에 앞장서면 반드시 어느 누구보다 복된 존재가 될 것입니다.

    얼마 전 한 개척교회 목사님과 이천의 한 온천에 갔습니다. 그 목사님은 30대 초반에 신학교에 들어가셔서 지금 50이 넘으셨는데 태어나서 그런 곳에 처음 가보았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선교회에서도 그분을 돕고 있습니다. 우리는 화려한 무대만 보지 말고 우리 주변의 그늘진 곳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처럼 그늘진 곳을 살피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중심인으로 우뚝 서게 해주실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어리석은 모습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담 없이 신앙생활을 하려는 모습입니다. 부담이 없는 삶은 사랑과 행복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삶이고, 앞으로 주어질 축복도 없는 삶이고, 삶 자체의 의미도 없는 삶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가든지 십자가의 헌신을 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귀신을 쫓는 무기가 아니라 내가 져야 할 멍에입니다. 우리가 부담을 지고 좁은 문으로 들어갈 때, 시간이 지나면 그곳이 결국 넓은 문이 될 것입니다.

    어느 날, 교회에 처음 간 아이가 십자가를 보고 고모에게 물었습니다. “고모, 왜 정면의 벽에 ‘더하기(+) 표가 붙어있어?” 고모가 잠시 생각하다 말했습니다. “너 예수님 알지? 저 더하기표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셔서 우리에게 생명을 더해주셨고, 기쁨을 더해주셨고, 행복을 더해주셨다는 표시야.” 우리는 겉만 화려한 삶을 추구하지 말고 십자가의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진정한 축복이 더해지게 될 것입니다.

    외형 때문에 참됨을 잃지 마십시오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을 지키려고 했던 모든 두목들과 제비 뽑힌 사람들과 자원했던 사람들이 나중에는 예루살렘이 수도의 위치를 회복하면서 다 역사와 사회의 중심인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예루살렘이 폐허가 되었다고 다 좋은 곳을 찾아 떠났던 사람은 역사와 사회의 주변인으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그처럼 화려한 곳만 찾으면 점차 그늘진 인생이 되고, 그늘진 곳을 찾으면 점차 화려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2차 대전 즈음에, 미국에 존 블랭챠드(John Blanchard)라는 청년이 있습니다.
    어느 날, 그가 플로리다의 한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그 책을 기증한 사람의 이름을 보게 되었습니다.
    책을 기증한 사람은 미스 홀리스 메이넬(Miss Hollis Maynell)란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책 여기저기에 연필로 메모들이 적어 놓았는데 그 메모가 아주 사려 깊은 내용들이었습니다.

    존(John)은 호기심이 생겨 그녀의 주소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녀는 뉴욕에 살고 있었습니다.
    존(John)은 그녀에게 첫 번째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고 편지를 쓴 다음날 존은 2차 대전에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1년여 동안 편지로 교제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싹텄습니다.
    존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내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녀는 사랑한다면 외모는 상관이 없다는 신념에서 그 부탁을 거절했습니다.

    마침내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둘은 뉴욕 역(Grand Central Station)에서 저녁 7시에 만나기로 약속했습니다.
    약속한 날, 역에서 존은 장미꽃을 머리에 꽂은 여인을 찾았습니다.
    그때 푸른 눈에 금발을 가진 한 미모의 늘씬한 여인이 그 앞에 나타나 “저를 따라오실래요?”하고 말하며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장미꽃을 머리에 꽂지 않았습니다.

    그가 곧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보자 거기에 마침 장미꽃을 머리에 꽂은 미스 메이넬이 서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40세가 넘어 보였고, 몸은 통통했고 통통한 몸을 지탱하느라 발목도 두툼해 보였습니다.
    금발의 아가씨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존은 짧은 시간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그 미모의 금발의 아가씨를 따라가야 하나? 아니면 1년 동안 펜팔을 통해 정신적 동반자가 되어주었던 40대 여인을 만나야 하나?”

    잠깐 멍한 상태로 있다가 곧 존은 결단을 내리고 살찐 얼굴을 가진 40대 여인에게로 발을 옮겼습니다.
    그의 손에는 플로리다 도서관에서 구입한 책이 손에 들려져 있었습니다.
    그는 40대 여인 앞으로 가서 경례를 하고 책을 내보였습니다.

    “안녕하세요. 제가 존 블랭챠드(John Blanchard) 중위입니다. 미스 메이넬(Miss Maynell)이시죠?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때 40대 여인이 말했습니다.

    “예? 저는 무슨 일인지 잘 모르겠지만 방금 전에 여기를 지나간 금발의 아가씨가 저에게 이 장미꽃을 꽂아 달라고 간곡히 부탁해서 이 꽃을 달았어요. 그 아가씨가 길 건너편 레스토랑에서 기다린다고 하면서 갔어요.”

    그때 존은 미스 메이넬의 의도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순간적인 유혹을 이기고 자신의 ‘자신됨(integrity)’을 지켜 사랑과 행복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성도됨과 자신됨(integrity)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 앞에는 금발의 날씬한 여인과 40대의 통통한 여인이 함께 지나가며 서로를 선택하라고 합니다.
    그때 우리가 외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의 성도됨을 지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욱 소중한 것을 안겨주실 것입니다.
    항상 받을 생각만 하지 말고 주님 기뻐하시는 일에 헌신함으로 은혜와 사랑과 행복을 얻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이야기 자료)
    어느 날, 한 성도가 교회에 구두로 포천 땅 13만평을 기도원 부지로 기증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분이 운영하던 백화점이 부도 위기에 몰렸습니다. 그와 동시에 한 대기업에서 골프장을 세운다고 하면서 포천 땅값이 폭등했습니다. 유혹이 생겼습니다. “이 땅을 팔면 돈 걱정 없이 사업할 수 있는데... 이 땅을 팔아 어려움을 해결하고 다시 사 바치면 안 될까? 굳이 이 비싼 땅에 기도원을 할 필요가 있나?”

    그러나 그분은 곧 결단을 내렸습니다. “망하더라도 하나님께 드린다고 했으면 약속을 지키자.” 그래도 자꾸 마음이 흔들려 아예 등기를 이전해 교회에 바쳤습니다. 그 후, 신기하게 부도 위기를 면했고 그 다음 해에는 매출목표를 초과 달성했습니다.

    백화점 영업이 잘되자 그분은 사업 확장 계획으로 스포츠 센터를 짓기로 하고 설계도까지 만들었다가 곧 그 사업을 포기했습니다. 왜냐하면 백화점 앞에 누군가 조그만 스포츠 센터를 열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말했습니다. “제가 이 사업을 밀어붙이면 그 스포츠 센터는 그 날로 망합니다. 제가 하나님의 은혜로 이만큼 돈을 벌었으면 됐지 그 사람을 망하게 할 필요가 없지요.” 그런 마음을 가진 ‘마음의 부자’가 진짜 부자입니다.

    얼마 후, 백화점이 잘되니까 매장을 확장해야 했습니다. 2000평 정도 넓히려고 백화점 옆의 땅을 사려고 했는데 그 땅을 사지 않아도 될 일이 생겼습니다. 왜냐하면 시에서 도시 발전을 위해 백화점이 있는 지역의 건폐율을 높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백화점 층수만 올리면 되기 때문에 앉아서 엄청난 돈을 벌게 되었다고 합니다.

    내가 망해도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겠다고 하고, 남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복된 존재가 되려면 계산적으로 살지 말고 희생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은 어떤 일을 할 때 “이 일이 내게 이익인가?”를 생각하며 하지만 성도는 “이 일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먼저 생각하며 해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 사는 길이 있고, 문제 해결의 길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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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3일(수)

    영원한 언약의 파기(이사야 24:1-5)

    예언이란 한자는 "미리 예(豫)"와 "맡길 예(預)"로 구분합니다.
    구약의 예언서는 미래의 일을 미리 알려주므로 앞으로 멸망할 것을 깨우쳐서 지금 해야 할 일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사야 24장에서 자주 사용되는 단어는 "땅"입니다.

    1절, '땅(하아레츠)'은13-23장에서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으로 지정된 열국들을 포함한 온  세상을  가리킨다.
    이 땅이 여기서 더러운 그릇으로 비유된다.
    그 속에든 내용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그릇을 뒤집어 비우지 않으면 안 된다.
    이처럼 죄악으로 가득찬 이 세상도  미래의 어느 날 하나님에 의해 깨끗하게 될 날이 반드시 이를 것이다.

    2절, 하나님의 심판은 사람에게 동일하게 임한다.

    3절, 모든 일들이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 단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여호와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4절, 1절에서 '더러운 그릇'으로 비유된  '땅'이  여기서'가뭄으로 인해 시들고 쇠약해진 식물'로 비유된다.

    5절, 땅이 또한 그 거민 아래서 더럽게 되었으니 - 땅과 인간의  관계가  고려된다.
    땅이 심판받은 이유는 그것이 더러워졌기 때문이다(1-4절).
    그런데 그 땅을 더럽게 만든 장본인은 바로 인간들-하나님에 의해서 땅의 관리자로서 부름받는(창 2:5-7,  15)-이다.

    창세기 1:26-28
    하나님
    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육축과 온 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
    이 자기 형상하나님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
    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에 충만하라, 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땅은 그들에 의해 '오염되고 부패하고 더럽게 되었다'(하네파). 땅을 오염시키는 가장 주된 요인은 살인다.

    이사야 26:21
    보라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사 의 거민의 악을 벌하실 것이라 이 그 위에 잦았던 를 드러내고 그 살해 당한 자를 다시는 가리우지 아니하리라.

    민수기 35:33
    너희는 거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는 땅을 더럽히나니 흘림을 받은 땅은 이를 흘리게한 자의 가 아니면 속할 수 없느니라.

    시편 106:38
    무죄한 곧 저희 자녀의 를 흘려 가나안 우상에게 제사하므로 그 땅이 에 더러웠도다.

    음행(예레미야 3:1- 2. 9)
    세상에서 말하기를 가령 사람이 그 아내를 버리므로 그가 떠나 타인의 아내가 된다 하자 본부가 그를 다시 받겠느냐 그리하면 그 땅이 크게 더러워지지 않겠느냐 하느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네가 많은 무리와 행음하고도 내게로 돌아오려느냐. 네 눈을 들어 자산을 보라 너의 행음치 아니한 곳이 어디 있느냐 네가 가에 앉아 사람을 기다린 것이 광야에 있는 아라바 사람 같아서 음란과 행악으로 이 땅을 더럽혔도다.

    그가 돌과 나무로 더불어 행음함을 가볍게 여기고 행음하여 이 땅을 더럽혔거늘.

    우상숭배(예레미야 16:18, 에스겔 36:17-18)
    내가 위선 그들의 악과 를 배나 갚을 것은 그들이 그 미운 물건의 시체로 내 땅을 더럽히며 그들의 가증한 것으로 내 산업에 가득하게 하였음이니라.

    에스겔 36:17-18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이 그 고토에 거할 때에 그 행위로 그 땅을 더럽혔나니 나 보기에 그 소위가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의 부정함과 같았느니라. 그들이 땅 위에 를 쏟았으며 그 우상들로 더럽혔으므로 내가 분노를 그들의 위에 쏟아

    '심판'은 인간의 죄로 인해 더렵혀진  땅를  본래대로정결하게 회복시키는 기능을 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후 사람에게 주신 복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세기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에 충만하라, 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다스리라 하시니라.

    노아 홍수 후에 다시 생육하고 번성하라(창세기 9:7)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에 편만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

    그리고 영원한 언약을 약속하셨다(창세기 9:12-13, 16-17)

    무지개 언약(창세기 9:9-13)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한 육축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것 곧 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
    이 가라사대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영원한 언약(창세기 9:16-17)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하나님의 무릇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된 영원언약을 기억하리라
    하나님
    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복은 아브라함에게 이르러 용어가 변경됩니다.
    창세기 12:1-2, 큰민족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창세기 17:6,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개명 후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창세기 22:17,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시험 후에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아브라함에게서 생육과 번성은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생육과 번성의 복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족속이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8:18-20,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예수
    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육하고

    23절, 그 때에 달이 무색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니라.
    그 때에 이 무색하고 부끄러워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산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 그 장로들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니라.

    최종적으로 세말에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러움이 묘사된다.
    그 나라의  중심은 새예루살렘일 것이며(이사야 2:1-3)

    1.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받은바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이라
    2.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 들 것이라
    3.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구속받은 백성들을 대표하는 장로들이 영광 중에 주를 보필할 것이다(출 24:9-11,계 4:4, 9-11).

    요한계시록 4: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그 나라의 영광은 너무나 눈부신 것이어서  심지어 하늘의 해와  달마저도 그 앞에서  빛을  잃고  부끄러움에  고개를  떨굴  것이다(60:19, 욜 3:15, 슥 14:7, 계 21:23; 22:5)

    요한계시록 21:23
    그 성은 의 비췸이 쓸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요한계시록 22: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

    만왕의 왕이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군림하시는 그 날을 사모하며 오늘도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해서 두려움과 고통의 삶을 이어가는 이 땅의 모든 백성들에게 오직 소망이 주님께 있음을 깨달아 알고 믿게 하옵소서.

    메시아 예언 : 456회
    재림 예언 : 1518회(신약 / 300회)

    아우슈비츠 수용소 벽의 낙서
    우리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믿고 있다.
    단지 그의 도착이 늦어지고 있을 뿐이다.

    마태복음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신약 성서는 종말론적 관심이 옥중에서 해방을 기다리고, 밤중에 새벽을 기다림같이 열망적입니다.
    재림에 관련된 곳이 318번이나 썼고 천국과 지옥과 부활과 영혼 구원문제는 백주의 태양처럼 강렬한 현실이었습니다.
    "온 천하를 얻고도 네 영혼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현세주의자에게 주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너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하시고 말세에 사람들이 노아 때처럼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마 24:38)하는 현세가 전부이며, 유물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의 가치관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말세 인간들은 예수 재림을 기롱합니다(벧후 3:3).
    복음적 신앙을 오히려 반사회, 반문명, 반지성, 혹은 피안주의니 현실도피니 하는 낙인을 찍어 냉소하는 풍조를 만듭니다.
    그것도 진화론 공작과 함께 악마의 반성서적, 반내세적, 반종말적정신 풍토 조성을 위한 고등공작의 가장 성공한 케이스입니다.
    오늘도 영적인 세계를 알고 깨어 근신하며 건강한 신앙으로 세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베드로전서 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2월 4일(목)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he will swallow up death forever.
    (사망을 영원히 삼켜버릴 것이다)

    (현대인)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실 것이다.
    (새번역) 주님께서 죽음을 영원히 멸하신다.
    (공동번역) 죽음을 영원히 없애버리시리라.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사망이란 인생을 지배하던 최후의 적인 죽음을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5: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The last enemy to be destroyed is death.

    죽음은 죄의 결과입니다.
    만일 첫 사람 아담이 죄를 범하지 않았다면 죽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망을 멸하실 것이란 사망이 인간을 지배할 수 없게 하신다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의학적으로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을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노래하면서 이렇게 소개합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고린도전서 15:54).

    이와 유사한 사상에 대해서는 이사야 65:20, 다니엘 12:2, 호세아 13:14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65:20
    거기는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유아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세에 죽는 자가 아이겠고 백세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 받은 것이리라.

    다니엘 12:2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호세아 13:14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목전에 숨으리라.


    죽음이 제거된다면 그로부터 연유하는 눈물도, 슬픔도 없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는 죽음이라는 근본  원인을  제거하실뿐 아니라  친히  그  손으로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묻은  눈물을  닦아주신다(계 7:17, 21:4).

    요한계시록 7:17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요한계시록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그 백성의 수치'는 기본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관련된 말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조소거리가 되었었다. 
    그러나 세계 모든 민족들이 이스라엘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되는 그날에 모든 수치는 녹는 눈처럼 사라질 것이다(롬 11:11, 12)

    로마서 11:11-12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죽음 예화)

    서양인들의 묘지는 저 멀리 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동네 가운데 혹은 교회당 뜰에 있습니다.
    거기 가지런히 줄을 지어 서 있는 묘비에는 앞서 간 이에 대한 추모의 글이나 아쉬움의 인사가 새겨져 있습니다.
    한 사람이 묘지를 돌며 묘비들을 읽고 다니다 어떤 묘 앞에서 발길을 멈추게 되었습니다.
    그 묘비의 글이 흥미로웠기 때문입니다.
    글은 단 세 줄이었습니다.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었소."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두 번째 줄이 이어졌습니다.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곳에 서서 그렇게 웃고 있었소."

    이 글을 읽자 그는 '이게 그냥 재미로 쓴 게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세를 가다듬고 긴장된 마음으로 세 번째 줄을 읽었습니다.

    "이제 당신도 나처럼 죽을 준비를 하시오."

    죽음에 대한 준비만큼 엄숙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준비는 지금 살아 있는 동안에 해야 합니다.
    그 준비는 바로 '오늘'을 결코 장난처럼 살지 않는 것입니다.

    (죽음 예화)
    톨스토이의 작품 "인간은 무엇을 사는가?" 중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미하엘이란 천사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벌로, 지상에서 구두직공이 되어 일을 했다.
    미하엘은 일하면서 몇가지 문제를 풀어야 하는데 그중의 하나가 "인간에게 베풀어 있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였다.
    어느날 한 신사가 천사인 줄 모르는 이 구두직공에게 "한 일년동안 튼튼하게 신을 구두를 만들어 달라"고 말했다.
    미하엘이 보니 그 신사 옆에 죽음의 천사가 있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1년"을 운운하는 것을 본 미하엘은 "인간에게 베풀어 있지 않은 것"이 죽음의 날짜임을 알고 엷게 웃는다.
    언제 호흡이 멎을지 모르는 인생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구원 영생이다.

    잠언 27:1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없음이니라.

    시편 116: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Precious in the sight of the LORD is the death of his saints

    왜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귀중하게 보실까?

    은행에서 낡은 지폐를 주고 새 것으로 받았을 때 똑같은 가치이지만 새 지폐가 더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성도의 죽음이란 낡은 육체를 맡기고 새로운 육체로 바꿀 수 있는 은혜의 자리로 들어가는 것이므로 귀중하다고 하겠습니다.

    기독교인의 죽음이란 세상에서 병들고 지치고 상처 받은 육체를 버리고 영원한 보물 즉 자유, 승리, 환희를 얻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에게 있어 죽음이란 바로 '천한 육체' 또는 '낮은 몸'을 버리고 이사 가는 날을 의미한다. 죽음으로써 우리는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다. 

    1절,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의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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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15일(화) 여호와의 도

    회복이 없는 심판과 징계는 저주가 될 뿐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계속하여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하면서도 반드시 회복을 말씀합니다.
    이것은 저주가 아니라 징계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반복하여 강조하는 것은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심판과 징계가 임할지라도 돌아오면 반드시 회복될 것을 말합니다.
    심판과 징계라는 것을 두 종류의 포장지로 내려놓습니다.
    하나는 회복이라는 포장지입니다.
    다른 하나는 멸망이란 포장지 입니다.
    내용물은 똑같은 것이지만 누가 어떻게 포장지를 뜯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전혀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포장지를 뜯기 위해서는 여호와의 도를 갖고 가야 합니다(2절)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 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하시고 선한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주께 드리리이다.

    여호와의 도(The ways of the Lord)
    다레키 아도나이(여호와의 길들)

    호세아 14:9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이라야 그 도에 행하리라 그러나 죄인은 그 도에 거쳐 넘어지리라.

    호세아 14:1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네가 불의함을 인하여 엎드러졌느니라.

    죄는 과거에 붙잡혀 있는 것,
    회개는 미래를 향한 새로운 출발

    호세아 14:2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 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하시고 선한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주께 드리리이다.

    호세아 14:3

    우리가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말을 타지 아니하며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지은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 신이라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고아가 주께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 할찌니라.

    호세아 14:8

    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찌라
    내가 저를 돌아보아 대답하기를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하리라.

    호세아 14:5-7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저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그 가지는 퍼지며 그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 
    그 그늘 아래 거하는 자가 돌아올찌라 저희는 곡식 같이 소성할 것이며 포도나무 같이 꽃이 필 것이며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 같이 되리라.

    호세아 14:9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이라야 그 도에 행하리라
    그러나 죄인은 그 도에 거쳐 넘어지리라.

    오늘의 기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하소서

    1. 방향을 바꾸다
    2. 마음을 바꾸다                  
    3. 뉘우치고 고치다 

    사랑과 능력이 함께 할 때 걸작이 탄생한다.  존 러스킨 -                                           

    "When love and skill work together, expect a masterpiece."


    6월 14일(월) 다른 신을 알지 말라(호세아 13:4)

    다른 신을 알지 말라고 하신 까닭은 "하나님 이외에 구원할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호세아 13:4

    그러나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아멘

    호세아 13:1

    에브라임이 말을 발하면 사람이 떨었도다 저가 이스라엘 중에서 자기를 높이더니
    바알로 인하여 범죄하므로 망하였거늘.

    호세아 13:2

    이제도 저희가 더욱 범죄하여 그 은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부어 만들되 자기의 공교함을 따라 우상을 만들었으며
    그것은 다 장색이 만든 것이어늘 저희가 그것에 대하여 말하기를 제사를 드리는 자는 송아지의 입을 맞출 것이라 하도다.

    호세아 13:3

    이러므로 저희는 아침 구름 같으며 쉽게 사라지는 이슬 같으며 타작 마당에서 광풍에 날리우는 쭉정이 같으며
    굴뚝에서 나가는 연기 같으리라. 

    호세아 13:4

    그러나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호세아 13:6

    저희가 먹이운대로 배부르며 배부름으로 마음이 교만하며 이로 인하여 나를 잊었느니라.

    호세아 13:14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목전에 숨으리라.

    고린도전서 15:55-58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오늘의 기도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위하여

    1. 능력의 말씀
    2. 응답받는 기도
    3. 형통케하는 순종

    호세아 4:1-14:9은 9개의 설교로 구성되었다.

    1st. 4:1-5:4,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
    2nd. 5:5-6:3, 인간의 교만을 지적한다.
    3rd. 6:4-7:7, 인애가 없으므로 망할 것이다.
    4th. 7:8-8:14, 세속과 혼합된 죄를 책망한다.
    5th. 9:1-17, 부패의 죄를 징벌을 받는다.
    6th. 10:1-15, 이스라엘의 두 가지 큰 죄
    7th. 11:1-12:14, 인간적인 계책을 책망
    8th. 13:1-16, 우상숭배의 죄를 다시 책망
    9th. 14:1-9, 회복에 대한 약속

    6월 12일(토) 하나님을 바라보라(호세아 12:6)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공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라볼찌니라.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공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라볼찌니라.
                                   
                                           1. 회개하라
                                           2. (하나님)안에 거하라
                                           3. 쉼을 얻으라

                                           (예) 집을 나간 아들(탕자의 비유)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공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라볼찌니라.    

                                                           하나님의 대표적 속성
                                                             1. 인애(헤세드)
                                                             2. 공의(미쉬파트)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공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라볼찌니라.
                                                                                               (하나님에게만 희망을 두고 살아라)

                                                                                                미가 7:7, 구원하시는 하나님

                                                                                                히브리서 12:2a, 믿음의 주

    미가 7:7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

                                                                                          희망을 갖고 바라보는 것
                                                                                          (예) 바울과 실라

    히브리서 12:2a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믿음의 주
                                                             온전케 하시는 주 
                                                             (예) 유라굴로 광풍과 멜리데 섬의 모닥
    오늘의 기도

    주님만으로 만족한 삶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소서
    일용할 양식을 나누며 살게 하소서
    용서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시험을 이기게 하소서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소서 


    야곱의 세 가지 모습
    첫째, 출생 시 형 에서의 발 뒤꿈치를 잡고 나온 것(3a)
    둘째,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룬 것이며(3b)
    셋째, 형 에서를 피해 도망한 것(12)

    첫째는 출생 시

    태어날 때의 일이므로 의도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형 에서의 발 뒤꿈치를 잡고 나왔다는 것은 야곱의 천성이 어떠한가를 말합니다.

    둘째는 청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었다

    ‘장년’은 인간적 성숙을 의미하기보다 힘의 성장을 의미합니다.
    야곱은 자기 힘으로 천사와 겨루어 이기려고 했습니다.
    자기 힘을 믿고 살다가 결국 하나님께 붙잡히는데 거기서도 지지 않으려고 천사(그리스도의 현현)와 힘을 겨루었던 것입니다.

    그가 ‘이겼다’는 표현은 그가 마침내 돌이켜 울며 하나님께 축복을 간구하게 된 것을 가리킵니다(4).
    야곱은 계교를 쓰는 자였지만, 하나님께 울며 회개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셋째는 아내를 얻기 위하여

    아내를 얻기 위하여 14년 동안을 장인의 집에서 외삼촌의 양 떼를 위하여 6년 모두 20년 동안 고생했습니다.
    그 고생에서 20년을 하루같이 지낼 수 있었다는 것은 사랑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왜 인애와 공의를 행하고 항상 하나님만 바라보라고 하셨을까요?
    "저는 상고여늘 에 거짓 저울을 가지고 사취하기를 좋아하는도다."(7절)

    그는 상인이라 손에 거짓 저울을 가지고 속이기를 좋아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가 된 것을 보고 분노하셨습니다.

    상인은 장사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원문에는 ‘가나안 사람’이라고 되어있습니다.
    당시 가나안 사람이라고 하면 페니키아인들을 가리키는데 성경에 나오는 베니게 즉 두로와 시돈입니다.
    그들은 지중해를 오가며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습니다.
    그래서 가나안과 상인은 같은 의미로 종종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가나안사람들의 본거지인 두로와 시돈은 이스라엘을 미혹한 대표적인 우상인 바알종교의 발상지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저들은 상인이라”는 말속에 ‘저들은 가나안과 같은 자들이라’는 뜻이 들어있었을 것입니다.


    6월 11일(금) 사랑의 줄(호세아 11:4)


    내가 사람의 줄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 저희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저희 앞에 먹을 것을 두었었노라.

    BC 733.  앗수르의 침략,
    BC 722.  사마리아성 함락

    시편 32:9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찌어다 그것들은 자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로다.

    자갈(재갈)(bit), 굴레(bridle)

    호세아 11:1-2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 내었거늘.
    선지자들이 저희를 부를수록 저희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호세아 11:3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을찌라도 내가 저희를 고치는 줄을 저희가 알지 못하였도다. 

    호세아 11:4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 저희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저희 앞에 먹을 것을 두었었노라.

    오늘의 기도 

    십자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자기 부인 : 내가 포기해야 할 것
    자기 십자가 : 내가 실천해야 할 것


    6월 10일(목) 묵은 땅을 기경하라(호세아 10:12)

    묵은 땅이란?
    오래된 땅이 아니라 굳은 마음입니다.

    의 : 올바른 관계
           의를 행하는 삶

    긍휼 : 사랑을 베푸는 것( 삶)


    북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는 묵은 땅과 같다고 합니다.
    형식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이었으나 하나님의 진노를 샀고 마침내 멸망하고 말았다.

    그 당시 그들의 마음은 왜 '묵은 땅'이 되었던 것일까?

    첫째, 두 마음(10:1-2)

    하나님을 믿는 것 같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바알신을 섬기는 마음으로 나누어진 상태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삶은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가치관을 갖고 세상 중심이었다.

    둘째, 두 가지 죄 (9:11, 10:10)

    우상 신과 하나님이 아닌 인간 왕을 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북이스라엘에게 멸망을 경고하셨다(호 9:11, 10:10).
    하지만 당시 이스라엘은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경고의 말씀을 듣지 않다가 기원전 722년에 멸망한다.
    호세아 선지자는 묵은 땅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애타는 마음으로 '묵은 땅을 기경하라'고 호소한다.
    여기서 '기경하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나루'라는 단어인데, '갈아엎으라', '파서 일구라'는 뜻이다.
    마음이 완악해지고 죄악과 욕심의 잡초가 무성하니 완전히 갈아엎으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의 묵은 마음을 기경, 갈아엎을 수 있을까?

    첫째, 공의는 하나님의 바른 뜻 곧 말씀이다.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바른 뜻을 찾아 실천하라는 뜻이다.

    둘째, 인애를 거두라고 한다.

    인애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으로, 충성되고 진실된 사랑, 이웃에게 베풀어야 될 사랑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둘 수 있을까?
    본문은 하나님을 찾으라고 말씀한다.
    그럴 때 하나님의 새 영, 즉 성령이 우리의 마음에 임하게 되고, 성령은 돌 같이 굳은 우리의 마음을,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꿔주신다(겔 11:19).
    마치 농부가 씨를 뿌리기 전, 밭을 갈고 가꾸는 것처럼, 마음 밭을 가꾸어 주신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을 찾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의 은혜를 충만히 부어주신다.

    세상은 점점 어렵고 악해져 가고 있어, 물질만능주의로, 영적으로는 황폐된 마음으로 살고 있다.
    더욱 슬픈 것은, 믿는 사람들조차 마음이 굳어져 가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묵은 땅을 기경하듯, 마음을 가꾸는 영적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우리 안에는 여전히 죄의 성품이 남아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아가 성령의 은혜를 충만히 받아 십자가 보혈로 깨끗이 씻음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의 단비를 맞아, 마음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믿음을 소유해야 되는 것이다.


    6월 9일(수) 형벌의 날

    5st Preach / 부패의 죄에 대한 징벌(9:1-17)
    호세아 9:7

    형벌의 날이 이르렀고 보응의 날이 임한 것을 이스라엘이 알지라
    선지자가 어리석었고 신에 감동하는 자가 미쳤나니 이는 네 죄악이 많고 네 원한이 큼이니라. 아멘 

    호세아 9:17

    저희가 듣지 아니하므로 내 하나님이 저희를 버리시리니
    저희가 열국 가운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듣다(솨마) שְׁמַע - 로 솨마(לֹא  שְׁמַע ) 듣지 않는다.
                               복종하지 않다

    1. 왜 듣지 못하는가?(호세아 9:1)

    이스라엘아 너는 이방 사람처럼 기뻐 뛰놀지 말라
    네가 행음하여 네 하나님을 떠나고 각 타작 마당에서 음행의 값을 좋아 하였느니라.

    *음행하다 / 자나, זָנָה

    1. 음행하다  2. 우상을 숭배하다

    2. 왜 듣지 못하는가?(호세아 9:2)

    타작 마당이나 술틀이 저희를 기르지 못할 것이며 포도주도 떨어질 것이요.

    초실절(첫 열매 보리 수확)
    오순절(밀 수확)
    장막절(모든 과일과 곡식 수확)  참조 / 9:5

    3. 왜 듣지 못하는가?(호세아 9:3)

    저희가 여호와의 땅에 거하지 못하며 에브라임이 애굽으로 다시 가고 앗수르에서 더러운 것을 먹을 것이니라.

    애굽(종의 노예)
    앗수르의 더러운 것(우상 제물)

    4. 왜 듣지 못하는가?(호세아 9:4)

    저희가 여호와께 전제를 드리지 못하며 여호와의 기뻐하시는 바도 되지 못할 것이라
    저희의 제물은 거상 입은 자의 식물과 같아서 무릇 그것을 먹는 자는 더러워지나니
    저희의 식물은 자기 먹기에만 소용될 뿐이라여호와의 집에 드릴 것이 아님이니라.

    전제(네사크)  נְסַךְ

    술을 부어드리는 제사
    사도 바울 : 관제

    거상 입은 자의 식물(레헴 아벤) אָוֶן  לֶחֶם

    슬픈 음식(빵, 떡)

    오늘의 기도


    말씀대로 믿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위하여

    가장 작은 것부터 실천하는 훈련


    6월 8일(화) 그 죄를 벌하리라(호세아 8:13)


    나팔을 네 입에 댈찌어다 대적이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에 덮치리니 이는 무리가 내 언약을 어기며 내 율법을 범함이로다.

    * 나팔을 네 입에 댈찌어다 :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시작되었다.

    * 대적이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에 덮치리니 : 대적(원수) 앗수르가 독수리처럼 (먹이를 잡을 때 급강하하는 속도는 200-300km)
    여호와의 집(예루살렘, 이스라엘)은 절대로 무너트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오는 독수리가 먹이를 낚아채듯 예루살렘도 이스라엘도 무너질 것이다.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날까요?

    13절. 내게 드리는 제물로 말할찌라도 저희가 고기로 제사를 드리고 먹거니와 여호와는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이제 저희의 악을 기억하여 그 를 벌하리니 저희가 애굽으로 다시 가리라.

    바쳐진 제물 중에서 함께 먹을 수 있는 고기는 화목제물입니다.
    화목제란 하나님과 화목한 신앙입니다.
    화목제란 사람과 화목한 신앙입니다.
    그러나 역대 이스라엘 왕들은 모두 19명으로 대략 200년 동안 유지했습니다.
    어느 왕도 하나님과 화목한 왕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사를 드린 후에 하나님이 죄를 용서하였다고 스스로 위로하고 기뻐하는 것을 말합니다.
    요즈음의 예배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로 드려지는가 하고 점검해야 합니다.

    호세아 8:13

    내게 드리는 제물로 말할찌라도
    저희가 고기로 제사(자하브)를 드리고 먹거니와
    여호와는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이제 저희의 죄악(아온)을 기억하여
    그 죄(하타)를 벌하리니
    저희가 애급으로 다시 가리라. 아멘

    * 아온(불법) 구부러졌다(인간의 본성)
    * 하타(과녁에서 빗나가다)

    그 죄를 벌하리니
    그 죄(their wickedness), 벌(punish their sins)
    아온                               파카드


    벌(punish their sins)
    저희가 애급으로 다시 가리라.

    • 애급으로 돌려보내겠다

      그 죄(their wickedness) / 그들의 사악함

      14절,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은 자를 잊어버리고
      전각들을 세웠으며 유다는 견고한 성읍을 많이 쌓았으나 내가 그 고을들에 불을 보내어
      그 성들을 삼키게 하리라.

          이스라엘 : 전각을 세웠으며
                    왕궁(palaces)
              유다 : 견고한 성읍을 쌓았으나 
                                      요새(fortified many towns)

    그 죄(their wickedness) / 그들의 사악함

    호세아 8:11
    에브라임이 죄를 위하여 제단을 많이 만들더니
    그 제단이 저로 범죄케 하는 것이 되었도다.

    북 이스라엘 : 금송아지 우상 제단

    벧엘(Bethel) / 하나님의 집
    단(Dan) / 심판관


    호세아 8:4b

    저희가 또 그 은 금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었나니 파멸을 이루리라. 


    신앙 : 위하는 대상을 바꾸는 것


    고린도후서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호세아 8:3

    이스라엘이 이미 선을 싫어 버렸으니
    대적이 저를 따를 것이라.
     

    호세아 8:1b

    이는 무리가 내 언약을 어기며
    내 율법을 범함이로다.

    오늘의 기도

    내 삶에 숨은 죄악을 찾게 하소서

    1. 거룩한 예배자의 삶
    2. 진실한 기도자의 삶
    3. 진리의 말씀을 실천하는 삶







    6월 7일(월) 이스라엘의 교만(호세아 7:10)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교만’ 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보겠습니다.

    오래전에 영국 크리스천투데이는 '당신이 교만에 빠져있음을 알려주는 5가지 신호 '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1. 건강하지 못한 것과 비교를 한다.
    2. 비판받는 것을 거부한다.
    3. 듣는 것보다 더 많이 말한다.
    4. 자신의 이미지를 자꾸 꾸미려고 한다.
    5. 지위와 타이틀에 지나치게 집착한다.

    또 "교만 진단법"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상태를 교만이라고 합니다.

    1. 자기도 모르게 자신을 대단하다고 생각함을 넘어 자기 연민에 빠진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대해 아직 몰라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2. 자꾸 (사람으로부터) 칭찬 듣기를 원하고 인정받으려고 한다.
    3.  교만이 오면 그 현상으로 고집이 강해진다.
    (남의 말을 듣기 싫어하고 내 생각에 맞는 것만 반응한다.)
    4. 교만하면 시험에 자주 들고 자신이 오해 받고 있다는 피해의식을 가지게 되고 (자신에 대해) 변명을 많이 한다.
    5.  자존심이 강하고 자신의 평판에 신경을 많이 쓴다.
    6. 영적인 것에 사모함과 지속성이 없다.
    7. 자신이 보고 듣고 깨달은 것만이 최고라고 하는 경향이 있다.
    8. 권위에 순복하지 않는다.
    9. 논쟁을 좋아 한다.
    10. 시기와 질투가 많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교만이라는 말은 성경에 132번 정도 나오는 아주 중요한 단어가운데 하나입니다.
    물론 긍정적인 의미로 쓰인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교만 하라! 보다는 교만하지 말아라! 의 경우가 전부입니다.
    교만한 사람들의 패망을 이야기 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교만은 마귀의 성품으로 소개되어 엄청나게 나쁜 말로 쓰입니다.
    마귀는 교만이라는 성품을 지니고 있고, 이 못된 유전자를 사람들에게 이식시키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1.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교만한 사람은 애굽 왕 바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 왕 바로를 교만한 사람이라고 꾸짖으십니다.
    자기의 백성도 아닌데 하나님의 백성을 자신의 소유로 착각하고 있었고, 모든 백성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인 냥 큰소리를 치고 있었습니다.
    군사들과 짐승들과 백성들의 주인이 자신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교만이라고 지적합니다.
    내 것이 아닌데 내 것으로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2. 신명기에 보면 교만을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하나님 없이도 스스로 잘 살 거라고 착각하면서 그분의 말씀에 거역하게 되는 원인을 교만이라고 지적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거룩하심, 전능하신. 지혜로우심을 알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하 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잊고 자신이 모든 것의 주인인 냥 살아가는 것을 교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것이 교만이고, 하나님 없으면 못산다는 것이 겸손입니다.

    3. 은혜를 잊고 사는 것을 교만이라고 표현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은혜를 잊고 삽니다.
    히스기야왕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었습니다.
    사울왕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었습니다.
    그러자 교만한 사람이 되었고 그 교만 때문에 멸망에 이르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겸손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은혜를 감사함으로 보답합니다.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인정하고 무릎을 꿇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겸손을 생각하며 닮아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사람을 사랑하시기에 그 사랑 때문에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겸손의 능력이 사랑에서 나옴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랑함으로 겸손을 완성해가는 한 주간을 갈망합니다.

    교만이란 단어를 인터넷 성경에서 검색한 결과 "127구절"이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113 구절, 신약에서 14구절

    1. 교만의 정의

    우리말 사전에서는 ‘잘난 체하여 뽐내고 버릇이 없음, 거만’ 또는 ‘젠체하고 뽐내며 방자함’이라고 한다.
    이것을 쉽게 풀어쓰면 ‘잘난 체 하기 위해서 거만함을 가지고, 어떤 일에 주제넘게 가진 건방진 자세나 마음’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성경에서 교만은 대개 ‘우쭐대다’ ‘자기를 높이다’는 의미이다.

    헬라어 표기에서는 ‘부풀다’ ‘자고하다’ ‘연막치다’ ‘우쭐대다’ ‘자랑스럽게 여기다’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영어 성경에서 ‘pride(자만)’ ‘haughtiness(건방짐)’ ‘arrogance(거만)’ ‘boasting(자랑)’ 등으로 교만을 표현하고 있다.
    우리말과 성경에 나타난 교만의 표현은 통념상 ‘자기의 부족한 점을 알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높여 대단하고 훌륭한 존재라고 여기는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2. 교만의 시작

    교만이 시작된 것은 창세기 아담과 하와 때부터 임을 알 수 있다.
    에덴동산에서 살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으면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이며, 하나님과 같아 질 수 있다’는 사단(뱀)의 꼬임에 빠져 하나님을 배신하게 된 것이 시발점이다.
    자신을 창조해 주신 조물주인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피조물이 주제를 모르는 오만 방자한 마음, 하나님을 대항하려 했던 사단의 교활한 마음이 합치되어 최초의 인간의 마음을 파괴했던 것이다. 이것이 교만이 생긴 이유였던 것 같다. 그러므로 인간의 저주와 불행인 교만은 이 최초의 반역에서 생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인간의 마음에 들어온 교만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했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려 결국 씻을 수 없는 죄로 인류가 짊어져야만 한 유산(?)이 되었다.
    사단의 꼬임에 빠진 아담과 하와의 행위로 교만이 시기, 질투, 갈등, 파괴, 단절, 적대 등을 인간들의 마음에 심어 인간을 끊임없이 쓰러뜨렸다. 그 결과 교만은 이렇게 인간이 범하는 죄의 뿌리가 되었다.

    3. 교만에는 5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 지적인 교만
    둘째, 영적인 교만
    셋째, 권력적인 교만
    넷째, 도덕적 교만
    다섯째, 집단적 교만

    성경은 인간의 주제 넘음과 자찬을 교만으로 다루고 있으며, 이를 죄로 인식하고 지적하고 있다.
    교만에 대해 교훈을 주는 성경을 살펴보자.

    ● 패망의 선봉.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 (잠 16:18).

    ● 교만하면 은혜를 보답하지 않는다.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그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내리게 되었더니“ (대하 32:25).

    ● 교만하면 목이 굳어지고 주의 명령을 듣지 않는다.
    “다시 주의 율법을 복종하게 하시려고 그들에게 경계하셨으나 그들이 교만하여 사람이 준행하면 그 가운데에서 삶을 얻는 주의 계명을 듣지 아니하며 주의 규례를 범하여 고집하는 어깨를 내밀며 목을 굳게 하여 듣지 아니하였나이다” (느 9:29).

    ● 교만하면 하나님께 힘을 과시한다.
    “이는 그의 손을 들어 하나님을 대적하며 교만하여 전능자에게 힘을 과시하였음이니라” (욥 15:25).

    교만은 물리쳐야 할 마음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가 깊어지면 교만은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에게 임하는 은혜를 막아버리며, 영적으로 우리를 성장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무서운 적이 된다. 더 나아가 영적 성장을 방해한다.

    ● 얼굴이 교만하다.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시 10:4).

    ● 하나님을 향하여 교만해진다.
    “활 쏘는 자를 바벨론에 소집하라 활을 당기는 자여 그 사면으로 진을 쳐서 피하는 자가 없게 하라 그가 일한 대로 갚고 그가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라 그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여호와를 향하여 교만하였음이라” (렘 50:29).
    이렇게 교만해지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게 되고, 나아가서는 자신의 주위의 어떤 상황과도 관계없이 오만함과 거만함을 갖고, 자기와 반대인 사람을 억누르려 하며 약한 자를 핍박하게 된다.

    ● 심한 교만: 자고, 오만, 자랑, 거만하다.
    “우리가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 심한 교만 곧 그의 자고와 오만과 자랑과 그 마음의 거만이로다” (렘 48:29).

    ● 교만한 자는 가련한 자를 압박한다.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압박하오니 그들이 자기가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 (시 10:2).

    ● 교만한 자는 사형에 해당되는 자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롬 1:30).

    이렇듯 교만이 지속된 상태로 계속 되면 교만한 사람은 누구의 말도 듣지 않게 되고 결국은 교만이 스스로에게 분노의 감정을 갖게 하고 결국 자신의 억제 할 수 없는 단계로 까지 간다. 이러한 상태에 이르면 교만함이 가득한 사람은 쉽게 마음의 상처를 받고자 자신의 교만을 받아주지 않거나 꺾으려할 때 쉽게 분노한다. 교만은 더욱더 통제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

    ● 교만한 자는 스스로 영광을 취한다.
    “네가 에돔을 쳐서 파하였으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니 스스로 영광을 삼아 왕궁에나 네 집으로 돌아가라 어찌하여 화를 자취하여 너와 유다가 함께 망하고자 하느냐 하나” (왕하 14:10).

    ● 교만하면 자긍해진다.
    “네가 에돔 사람들을 쳤다고 네 마음이 교만하여 자긍하는도다 네 궁에나 있으라 어찌하여 화를 자초하여 너와 유다가 함께 망하고자 하느냐 하나” (대하 25:19).

    ● 교만하면 화려한 장식을 한다.
    “그들이 그 화려한 장식으로 말미암아 교만을 품었고 또 그것으로 가증한 우상과 미운 물건을 만들었은즉 내가 그것을 그들에게 오물이 되게 하여” (겔 7:20).

    ● 마음이 교만하면 스스로 속는다.
    “너의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바위 틈에 거주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 (옵 1:3).

    ● 사람의 속에 있는 교만.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막 7:22).

    ● 교만한 자는 정직하지 못하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합 2:4).

    ● 교만하면 가만히 있지 않는다.
    “그는 술을 즐기며 거짓되고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스올처럼 자기의 욕심을 넓히며 또 그는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르고 자기에게로 여러 나라를 모으며 여러 백성을 모으나니” (합 2:5).

    ● 교만하면 자랑을 일삼는다.
    “그 날에 네가 내게 범죄한 모든 행위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것은 그 때에 내가 네 가운데서 교만하여 자랑하는 자들을 제거하여 네가 나의 성산에서 다시는 교만하지 않게 할 것임이라” (습 3:11).

    ● 교만한 자는 변론과 언쟁을 좋아한다.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딤전 6:4).

    4. 교만한 자는 하나님이 아신다.
    사람은 스스로 교만함에도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교만한자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교만한자는 교만함을 숨기려한다. 교만함을 카리스마나 추진력이 있는 것이라 포장을 하지만 그것은 자신을 합리화 시키는 것일 뿐이다.

    ● 하나님은 모든 교만한 자를 찾아 낮추신다.
    “모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낮아지게 하며 악인을 그들의 처소에서 짓밟을지니라” (욥 40:12).

    ● 교만한 자를 하나님이 용납지 않으신다.
    “자기의 이웃을 은근히 헐뜯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리로다” (시 101:5).

    ● 하나님은 멀리서도 교만한 자를 아신다.
    “여호와께서는 높이 계셔도 낮은 자를 굽어살피시며 멀리서도 교만한 자를 아심이니이다” (시 138:6).

    ● 하나님의 심판이 교만한 자에게 임한다.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날이 모든 교만한 자와 거만한 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리니 그들이 낮아지리라” (사 2:12).

    5. 교만을 극복하기 위한 길
    마음속에 교만이 발생하게 되면 스스로가 교만함을 인정하고 고백해야 한다. 모든 문제의 해결의 첫 단추가 인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하듯이 자신의 잘못과 실수를, 부족함을 그대로 인정하고 고백할 줄 아는 것이 교만 극복의 길이다.

    ● 교만을 뉘우치면 산다.
    “히스기야가 마음의 교만함을 뉘우치고 예루살렘 주민들도 그와 같이 하였으므로 여호와의 진노가 히스기야의 생전에는 그들에게 내리지 아니하니라” (대하 32:26).

    ● 말세의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가 교만이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딤후 3:2).

    ● 교만한 자를 하나님 물리치신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약 4:6).

    ● 교만한 자를 하나님이 대적하신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벧전 5:5).

    하나님께서는 위의 성경구절처럼 교만한 자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교만한 마음을 가진 자를 하나님께서는 대적하신다. 자신의 교만함이 들어날까 전전 긍긍하며, 감추고 부정하려고 하면 점점 그는 교만을 넘어 거짓에 사로잡혀 살게 될 것이다. 결국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되고 심한 정신적인 스트레스에 눌려 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교만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길을 가야 하는가? 교만을 버리기 위해서 진정한 용기와 겸손의 마음이 필요하다. 성경에서 겸손이란 단어가 들어가는 구절은 신구약을 통해 40여 개다. 이 40개의 구절은 교만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취해야 할 태도를 겸손이라고 말하고 있다. 스스로 교만하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비추어서 자신의 교만을 발견하고 겸손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 겸손한자를 구원하신다.
    “사람들이 너를 낮추거든 너는 교만했노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리라” (욥 22:29).

    ● 귀를 기울여 들으신다.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시 10:17).

    ● 배부를 것이다.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시 22:26).

    교만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깨달아야 하고 동시에 자신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겸손하게 되려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면서 교만을 물리쳐야 한다.

    ●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 6:8).

    ● 마음의 쉼을 얻으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29).

    ● 모든 겸손과 온유로.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엡 4:2).

    ● 겸손과 온유의 옷을 입고.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골 3:12).

    ● 은혜를 주신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약 4:6).

    우리는 늘 하나님께 교만하지 않고 겸손함을 가지도록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 하루하루를 살면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모습이 흐려지고 그 음성도 점점 작아지게 되면, 교만이 다시 스멀스멀 우리의 마음속으로 기어들어오기 때문이다.

    ● 마귀가 두루 다닌다.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벧전 5:8-9).

    우리의 마음을 교만하게 하는 악한 영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대적해야 할 때에 교만한 마음이 물러가게 될 것이다.

    6월 5일(토) 호세아 6장 힘써 여호와를 알자!

    이스라엘 민족은 입으로는 “하나님, 하나님”이라 불렀지만,
    그 하나님을 몰랐기에 참 예배가 아닌 짐승만 잡아 죽여 드리는 종교적인 의식에만 열심내고,
    종교의식만 행하면 자신들이 할 일을 다 했다고 여기며,
    자손대대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될 것이라 착각했다.

    나중에서야 깨달은 것은 나라에 큰 어려움이 닥치고 온 백성들이 큰 환란을 겪게 되자,
    그때서야 자신들의 신앙과 삶이 얼마나 형편없었다는 것을 늦게 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하나님을 바로 알지도 못하면서 막연하게 선민임을 자랑했고,
    하나님의 축복이 자손대대로 계속되리라 기대했던 허황된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혹시 오늘 우리들의 믿음이 이렇지는 않은가?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면서도 아는 것처럼, 믿음도 없으면서 있는 것처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사랑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는 않나?     

    하나님을 바로 알면 참 신앙을 갖게 된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한다. 기도하게 된다. 사랑하게 된다. 진실하고 정직하게 된다.
    겉과 속이 다르지 않고 말과 행실이 일치된다.
    겸손하게 된다. 주의 일에 협력하게 되고, 주님의 교회를 사랑하게 된다.
    복음의 사명에 빚진 자의 심정으로, 늘 부담을 갖게 된다.
    그러면,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하나님은 누구신가?

     

    호세아 4:1-14:9은 9개의 설교로 구성되었다.

    1st. 4:1-5:4,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
    2nd. 5:5-6:3, 인간의 교만을 지적한다.
    3rd. 6:4-7:7, 인애가 없으므로 망할 것이다.
    4th. 7:8-8:14, 세속과 혼합된 죄를 책망한다.
    5th. 9:1-17, 부패의 죄를 징벌을 받는다.
    6th. 10:1-15, 이스라엘의 두 가지 큰 죄
    7th. 11:1-16, 인간적인 계책을 책망
    8th. 13:1-16, 우상숭배의 죄를 다시 책망
    9th. 14:1-9, 회복에 대한 약속


      이스라엘 민족은 입으로는 “하나님, 하나님”이라 불렀지만, 정작 그 하나님을 몰랐기에 참 예배가 아닌 짐승만 잡아 죽여 드리는 종교적인 의식에만 열심내고, 종교의식만 행하면 자신들이 할 일을 다 했다고 여기며, 자손대대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될 것이라 착각했다. 나중에서야 깨달은 것은 나라에 큰 어려움이 닥치고 온 백성들이 큰 환란을 겪게 되자, 그때서야 자신들의 신앙과 삶이 얼마나 형편없었다는 것을 늦게 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하나님을 바로 알지도 못하면서 막연하게 선민임을 자랑했고, 하나님의 축복이 자손대대로 계속되리라 기대했던 허황된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혹시 오늘 우리들의 믿음이 이렇지는 않은가?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면서도 아는 것처럼, 믿음도 없으면서 있는 것처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사랑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는 않나?     

    하나님을 바로 알면 참 신앙을 갖게 된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한다. 기도하게 된다. 사랑하게 된다. 진실하고 정직하게 된다. 겉과 속이 다르지 않고 말과 행실이 일치된다. 겸손하게 된다. 주의 일에 협력하게 되고, 주님의 교회를 사랑하게 된다. 복음의 사명에 빚진 자의 심정으로, 늘 부담을 갖게 된다. 그러면,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하나님은 누구신가?

     

    호세아서부터 시작된 12권을 소선지서라고 부른다.
    유대인들은 구약 성서를 계산할 때 12권의 소선지서를 한 권의 책으로 보았다.
    그들이 이 책들을 소선지서로 분류한 것은 그 내용이 대선지서보다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책들의 분량이 비교적 적기 때문이었다.

    호세아 선지서는 언뜻 읽을 때 이사야서의 축약 같은 느낌이 든다(2:18 etc.).
    그러나 그는 이사야 선지자 후에 예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사야보다 먼저 예언을 했다.
    즉 예언자들 중에서 호세아가 맨 먼저 예언을 한 선지자라는 것이다.

    특히 호세아는 이스라엘에 대하여 주로 예언하였고 유다는 잠깐 잠깐 언급하고 넘어갔다.
    호세아 선지자는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 문제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결여된 문제를 매우 강하게 지적하였다.
    타락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있는 무지 때문이다.
    그러므로 호세아 선지자는 강조한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호세아서의 주제는 “오라 우리가 여호와를 참되게 알고 그분께로 돌아가자!”이다. 타락한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은 회개하고 참되게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호세아서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얼마나 그분의 백성들을 사랑하시는지, 그분만을 사랑하고 의지하기를 원하시는지 알 수 있다.

    또한 군데군데 전후 구절과 관계없어 보이는 호세아의 잠언 같은 말씀들이 들어 있다. 무게 있는 격언들은 여러 말들보다 큰 영향력을 끼친다. 가령 “에브라임은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라는 한 마디로 그들의 치우친 신앙과 잘못된 상태를 지적해 냈다. 예레미아서나 에스겔서에는 호세아서에서 차용한 것 같은 말씀들이 많이 있다(렘 7:34, 16:9, 25:10, 겔 26:13, 겔 16:16 이하, 겔 19:12 등). 또한 호세아서의 구절들을 마태복음이나 로마서에 인용한 것으로 보아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초대 교회 당시 호세아서가 중요하게 읽혀진 것임에 틀림없다(1:10, 11:1).

    선지자의 책이라는 말

    사도행전 7장 42절을 보면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바”라고 했다. 그리고 이어서 “이스라엘의 집이여 사십 년을 광야에서 너희가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라고 했다. 이것은 아모스 5장 25절에 있는 내용을 인용한 말씀이다. 따라서 사도행전에서 스데반이 ‘선지자의 책’이라고 한 것은 엄밀히 말하면 ‘여러 선지자의 책들’, 즉 소선지서들을 가리킨다. 이것은 또한 신약의 사도들 시대에 이미 구약의 소선지서들을 성경으로 간주하고 읽었다는 근거가 된다.

    에브라임이라는 말

    호세아 당시는 이스라엘이 북조 이스라엘과 남조 유다로 분국이 된 상태였는데, 호세아서는 주로 북방의 열 지파로 구성되어 있는 이스라엘을 향한 예언이다. 유다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1장 7절, 4장 15절, 5장 5절 등에 있지만, 유다는 호세아 예언의 주요 대상은 아니다. 호세아서에서 ‘에브라임’이라는 명칭이 36번이나 언급되는데, 이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이름이다. 당시 에브라임이 열 지파 중에 가장 강한 지파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부를 때 ‘에브라임’이라고 부른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도 43회 언급되었다. 그리고 ‘유다’는 14회 언급했다. 또 베냐민과 유다를 통칭하여 ‘유다국’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유다 지파가 베냐민 지파보다 강성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호세아서에 예루살렘은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호세아서의 배경

    호세아서는 뜻과 순서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잘 읽어보면 또 이해하기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호세아’란 히브리어로 ‘여호수아’로서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다. 이것이 원명이고 또 여러 이름이 있다. 호세아서에는 여호와의 구원이 충만하게 나타나 있다. 즉, 여호와께서 배역한 이스라엘에 대해서 ‘구원’이 되심을 나타내는 책이 호세아서라고 할 수 있다. 다니엘서는 유다와 이스라엘이 다 망하고 바벨론으로 끌려간 후에 쓴 책이지만, 호세아는 다니엘보다 훨씬 전인 유다의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같은 왕들의 60년에 걸친 재위기간에 예언했다. 이스라엘 왕으로 본다면 주로 여로보암 때 예언한 선지자이다. 호세아와 동시대 선지자로는 이사야, 아모스, 미가가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사야보다 조금 일찍 예언한 것으로 보인다.

    1절에 나오지만 호세아는 브에리의 아들이고 그의 아내는 고멜이라는 음탕한 여자였다. 그에게는 두 아들과 하나의 딸이 있었다. 호세아서의 문체는 부드럽다. 호세아 선지자 자체가 사랑과 온유로 충만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각 방면에서 타락으로 기우는 것을 보면서 그의 어조가 근심스럽고 우울한 정서로 가다가도 사랑의 하나님을 생각할 때면, 그리고 이스라엘의 장래의 부흥과 회복을 생각할 때면 다시 그 어조가 기쁨으로 바뀐다.

    호세아서의 문체는 1장과 3장만 산문체이고 나머지는 운율과 가락이 있는 시어체로 되어 있다. 히브리어로 읽는다면 많은 상징들이 있을 뿐 아니라 매우 사람을 감동시키는 온유한 비유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호세아 선지자가 일어났을 때는 이스라엘이 쇠락(타락)하기 시작하고 나라의 상황이 매우 혼란스러울 때였다. 왕과 백성들은 지식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고 음란과 부정을 행하며 죄를 범하고 도적질하고 소동을 일으키고 강탈과 살인과 거짓말과 괴기가 팽배했다. 백성들은 이방인과 섞여서 결혼하고 신하들은 나라를 팔고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등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더 이상 이스라엘은 나의 백성이 아니다!’라고 선포하신 것이다. 따라서 호세아서는 아주 슬픈 내용의 선지서인 것이다.

    내용

    부정한 아내 고멜을 얻어서 아들 하나 딸 그리고 아들을 낳게 하고 각각 이름을 지어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게 하셨다.

    첫째 아들 ‘이스르엘’은 이스라엘과 발음은 비슷하지만 그 뜻은 완전히 다르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하나님의 흩으심’을 뜻한다.
    이 이름의 의미는 당시의 예후 왕을 심판하고 이스라엘을 흩어버리게 한 것(앗수르에 포로로 잡혀가게 한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호세아의 첫 아들을 이렇게 ‘이스르엘’이라고 한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큰 징벌을 받을 것의 표적이었다.

    다음으로 딸을 낳았는데 이름을 ‘로루하마’라고 지으라 하셨다.
    이는 긍휼히 여기지 않으시겠다는 말이다.
    로루하마가 젖을 뗄 때 아들을 하나 더 낳고 이름을 로암미라고 하셨는데 이는 더 이상 그분이 그들의 백성이 되지 않으시겠다는 포기이다.
    이는 고멜이라는 여자, 선지자의 아내의 부정한 것처럼 하나님의 아내인 이스라엘이 부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2장에 오자 1장의 말씀을 완전히 뒤집고 계신다.
    1장에서는 로암미(내 백성이 아니라)라고 하고 로루하마(긍휼히 여기지 않는다)라고 하시고는 2장에서는 돌변하셔서 내가 내 백성을 만들 것이고 내가 긍휼이 여길 것이고 용서해 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반전에 반전이 거듭되는 것이 호세아의 특징이다.
    이것이 또한 복음이다.
    복음을 받은 사람들은 인생이 반전된 사람들이다.
    “내가 나를 위하여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3장은 다시 바람이 난 부정한 여인 고멜을 뭘 좀 주고(은 열다섯개 보리 한 오멜 반) 다시 사오라고 말씀하신다. 다시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으니 속전을 주고 사와야 했던 것이다. 호세아 선지서의 내용의 특징은 사랑과 온유함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죄인들에 대한 ‘구애(求愛)’의 말씀이다. 오죽하면 여기서 ‘allure(꾀다, 매혹시키다)’라는 단어를 썼겠는가? 어떻게 해서라도 그들의 마음을 돌려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못 견디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호세아서 4장은 백성들의 죄악상에 대해,
    5장은 제사장과 왕족들의 죄악상에 대해 낱낱이 말씀하시며,
    6장은 참되게 회개하기를 권면하면서 종교적인 교만을 꾸짖는 내용이다.
    4장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하여 무지함을 탄식하신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음으로 망한다고 하시며 ‘하나님을 알자’라는 구절이 많은 것이 호세아의 특징이다.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라”. 호세아 선지자는 여호와를 아는 문제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왜 그들이 하나님을 알 수 없었는가? 그들의 심령이 우상숭배에 점유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선지자는 이미 그들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음란한 마음’이란 하나님을 떠나 다른 것을 섬기고 신뢰하는 마음이다. 또 하나님과 직접 대하지 못하고 사람의 명령과 조직을 따르는 것을 좋아했다(5:11). 6장은 여호와께 돌아가자고 하며 여호와를 알자고 말한다. 7장은 에브라임이 균형이 잡히지 않은 전병 같다고 하며 이방에 힘이 삼키워졌고 얼룩얼룩하게 혼잡되었다고 말한다. 교만하고 거짓된 것도 있다(1, 10절). 주님을 부르되 성심으로 부르지 않는다고 말한다.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권면하고 계신다.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고 하신다. 우리가 힘을 다해 의를 행한다면 주님은 긍휼을 거두게 해주겠다고 하신다. 의를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신다. 이는 의를 행함에 있어서 약간의 결점이 있어도 용서하시고 후히 대해주신다는 말씀이다. 게다가 묵은 땅을 기경하기까지 한다면 ‘의를 비처럼 내리실’ 것이라고 하셨다.

    호세아서에도 복음이 들어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하도다

    성경이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렇게 징계와 심판의 말씀을 하시다가도 마음이 순간 돌아서셔서 자기 백성인 에브라임, 이스라엘을 놓지 않으시는 것이다. 어떤 신학자는 ‘사람은 멸하기 위해서 사람을 벌하고 하나님은 그 사람을 고치기 위해서 징계하신다.’고 했다. 하나님이 심판을 하시고 칼이 성읍을 치고 빗장을 깨뜨리게 하시지만 ‘이것이 내가 너희를 버리거나 놓으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라고 하신다. 이것이 바로 복음인 것이다.

    그 가지는 퍼지며 그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

    “그 가지는 퍼지며”란 가지가 멀리까지 벋어 나간다는 것이다.

    그 그늘 아래 거하는 자가 돌아올지라 저희는 곡식같이 소성할 것이며 포도나무같이 꽃이 필 것이며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같이 되리라

    “그 그늘 아래 거하는 자가 돌아올지라”. 교회는 피난처 되신 그리스도의 그늘 아래 돌아온 사람들이다. 교회는 뜨거운 사막의 햇볕의 상해로부터 보호해주는 보호막이 있는 곳이다. 어떤 번역은 “저희가 돌아온 그의 그늘 아래 거할 것이다”라고 한다. 결국 호세아서도 복음으로 끝을 맺는다. 우리는 선지자들도 동일하게 복음을 말하고 있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하지 못한다. 특히 14장 4-8절은 복음의 결정판이다.

    중요한 구절들 분석

    호 7장 8절 에브라임이 ...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

    전을 구울 때 한 면만 구우면 한 면만 지나치게 타서 먹기 어렵게 된다.
    어떤 사람은 영적인 생활만 중시하여 땅의 생활을 잃어버리게 하고 어떤 사람은 지상의 생활만 중시하여 하늘의 생활(골 3:1, 위에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어떤 사람은 은혜를 중시하는데 의를 소홀히 하며 의를 중시하는 어떤 사람은 은혜가 조금도 없다.
    어떤 사람은 객관적인 진리를 중시하지만 성령의 사람 안의 역사를 소홀히 한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이미 완성하신 역사를 중시하고 내면의 주관적인 체험만을 소홀한다.
    어떤 사람은 생명의 체험을 중시하되 지식을 소홀히 한다.
    어떤 사람은 쉽게 한면 만을 보고 전체적인 조망을 보지 못한다.
    어떤 한 진리에 치우쳐서 기타 다양한 진리를 소홀히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심은 한면으로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중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명이 자라고 지식이 더하게 하며 사랑하는 마음만이 아니라 불의를 미워하는 마음을 갖게 하신다.
    뒤집지 않은 전병이 사람의 배고픔을 채울 수 없는 것처럼 한면으로 치우친 신앙의 사람들은 영적으로 배고픈 사람들의 필요를 채울 수 없다. 그러니 성도들은 진리의 한면의 매우 좋은 것만 보지 말고 사역자나 교회의 전체적이고 또 균형잡힌 가르침을 가르치는가를 주의해야 한다.
    그렇지 못해서 이단에 빠지는 수가 허다하다.

    호 4장 6절 내 백성이 지식이 없음으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그리스도인이 생명의 체험과 추구는 필수적인 것이지만 지식 또한 없어서는 안된다. 물론 생명 없는 지식만 추구하면 교만하게 하고 사망을 풍기게 하지만 그러나 생명의 성장에 있어서 지식은 매우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생명이 먼저이고 지식이 다음이다. 생명만 있고 지식이 없으면 위험하고 지식은 있는데 생명이 없다면 사망이다. 생명은 반드시 지식으로 부축되어야 한다. 성경은 덕에 지식을(벧후1:5)이라고 하였다. 바울은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모든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라고 하였다(빌1:9-10). 사랑을 합당하게 표현하고 실행하려면 지식과 견해가 필요하다. 그런 지식있는 사랑이 사람의 영적 유익을 돕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합당하게 선악과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분별못하여 분별없는 사랑으로 사람들을 해치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쉽게 우상숭배에 떨어진 것은 결국 율법에 대한 합당한 지식과 이해의 부족에서 기인되었다고 본다. 오늘 날도 지식없는 소위 영적 생명 체험자들이 이단에 빠지고 치우친 신앙으로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호 6장 4절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아침 구름이나 이슬은 좋은 것이지만 그것이 쉬 없어지는 것은 아쉬움이다. 한 때 뜨겁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변함없이 사랑하는 자들은 적다. 어떤 특별한 집회나 부흥회 세미나 등을 참석해서 은혜를 받았을 때 하늘로 치솟았다가 1개월도 안되어 푹 꺼진다. 아침 구름이나 이슬 같이 쉬 없어지는 것 같다. 당시 이스라엘이 그렇게 했다. 그들은 고난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의 긍휼로 구원을 받고 하늘에 오르고 매우 기뻐하나 얼마 안되어 다시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긴다. 왜 그런가? 원인은 말씀과 지식이 너무 없기 때문일 경우가 크다. 또 신앙의 균형이 없기 때문일 경우가 있고. 처리하지 않는 죄가 있을 것이며 세상에 대한 사랑을 근본적으로 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처리하지 않은 육체, 천연적인 애정을 처리하지 못한데 있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보다 사람과의 관계를 중시하기 때문에 그러하다. 또한 그런 경우는 대부분 고집이 세고 완강하여 그러하다(호4:16).

    요절들

    호 5:5. 이스라엘의 교만이 그 얼굴에 드러났나니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과 에브라임이 넘어지고 유다도 그들과 함께 넘어지리라

    호 11:8.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호 3:5.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호 14:4-8. 내가 그들의 반역을 고치고 기쁘게 그들을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그에게서 떠났음이니라 5.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그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6. 그의 가지는 퍼지며 그의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의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 7. 그 그늘 아래에 거주하는 자가 돌아올지라 그들은 곡식 같이 풍성할 것이며 포도나무 같이 꽃이 필 것이며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 같이 되리라 8. 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지라 내가 그를 돌아보아 대답하기를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하리라




    6월 5일(토) 호세아 6장



    호세아서의 교훈들

    음녀같은 이스라엘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

    1. 저자 / 호세아 : 이름뜻은 구원자, 이사야와 동 시대의 선지자로 활동 시기 : BC753~722

    2. 배경

    한때 시리아-팔레스티나의 패권국으로 광대한 영토를 병합했던 제국 이스라엘은 거의 모든 영토를 빼앗겼고 단지 사마리아 성과 그 인근지역만 남은 상태였음. 「호세아서」는 내용상 1~3장과 4장 이후로 나뉘는데, 1~3장이 이스라엘 국이 아직 번성하고 있던 때를 반영하고 있다면, 4장 이후는 아시리아 군의 침공으로 전쟁의 참화 속에서 멸망하게 되기까지 그리고 그 이후의 상황을 다루고 있음. 앞이 이스라엘의 영토가 방대했던 때였다면, 뒷부분은 사마리아 지방으로 쪼그라든 때임

    호세아서는 북왕국의 마지막 기간을 다루고 있다.
    지난날의 번영의 시대가 지나 이젠 쇠퇴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4, 5장에서 경제적 번영과 정치적 안정이 묘사되어 있지만, 당시의 많은 선지자들은 조만간에 닥칠 재난을 예고했으나 백성들은 이를 믿지 않았다.
    마치 그 전에 있었던 롯의 사위들이 임박한 종말을 단순히 농담으로 여겼던 것처럼 말이다.
    결국 이스라엘은 침공을 당하게 되고 일부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 가는 수난을 경험해야만 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 온 것이 아니라 애굽에 지원을 요청하고 다른 방법들을 모색하게 된다.
    하지만 그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결국 이스라엘은 끝없는 추락의 길로 들어선다.

    호세아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외면당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주를 받고 어려움에 봉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은혜와 사랑의 자리를 떠나 죽음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모든 원인을 하나님께 돌려 하나님을 원망하고 그 해결을 방법으로 다른 인간적인 방법들을 모색하는 마치 이방민족과 같은 모습을 가진 이스라엘을 책망하고자 했다.

     

    3. 주요 교훈들

    (1) 사랑하라(3: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

    * 사랑하라 : 자신을 싫어하여 떠난 사람들까지도 먼저 찾아가서 적극적인 활동을 통하여 다시 회복하는 사랑, 무한한 사랑

    3:2. 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그를 사고

    *그를 사고 : 카라, 물물교환으로 교역으로 얻다. 예수그리스도의구속의 예표

    (2) 돌아가자, 알자(6:1, 3)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 돌아가자 : 웨나슈바,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다. 하나님께 돌아 감

    * 알자 : 야다흐, 피상적 정보적으로 아는 것이 아닌 경험과 관계를 통해 본질들을 다 아는 것

    (3) 기경하라(10:12)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마음을 새롭게 함

    (4) 뒤집지 않은 전병(7:8)

    에브라임이 여러 민족 가운데에 혼합되니 그는 곧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

    한쪽에 치우칠수 있고 자기 모순 속에 살 수 있음

    (5) 어리석은 비둘기(7:11)

    에브라임은 어리석은 비둘기 같이 지혜가 없어서 애굽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앗수르로 가는도다.

    하나님 보다 세상의 도움을 더 의지하는 어리석음에 빠질 수 있음

    (6) 기경하라(10:12)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오랫동안 굳어진 마음, 형식화된 마음 죄악된 마음들을 기경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싹이크고 자랄수 있게 함

    4. 적용

    호세아 당시 이스라엘은 오늘날 교회 일에 열심인 자신을 바라보며 신앙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여기는 것과 같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즉 종교적인 것들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자신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는 것은 착각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종교적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실상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았음을 호세아서가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또 코로나로 어려움을 겪는 이시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의지하고 서로 불쌍히 여기고 긍휼이 여기며 사랑하며 돌보는 것이 많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에베소서 4: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대외적으로 평온기를 맞은 북이스라엘은 내부적으로는 크게 부패하여 하나님을 떠나 쾌락을 좇아 행하며 패역한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나라 안에는 죄악이 들끓고 나라 밖으로는 앗수르가 흥하여 침략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므로, 북이스라엘로서는 잠시도 방심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숭배와 탐욕에 젖어 살고 있었다.

    이때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분연히 일어난 선지자가 남유다 드고아 출신의 아모스였다.
    아모스 선지자는 남유다 출신으로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한 선지자이다.
    그는 사회의 부정의를 규탄하며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고했다.
    그러나 아모스의 열띤 외침으로도 안일한 북이스라엘 백성을 일깨울 수 없었다.
    이리하여 몇 해가 지나갔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북이스라엘 에브라임의 시골에 있는 호세아를 부르셨다.
    호세아는 눈물의 선지자, 사랑의 선지자였다.
    하나님께서는 의의 망치로 때려도 깨닫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과 눈물로 녹이려고 시도하신 것이다.

    호세아 선지자는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과 포로 생활에 대한 예언을 선포하면서 회개를 촉구하였다.
    하지만 북이스라엘은 회개는커녕 더욱 패역을 일삼았으며, 결국 여로보암2세 이후 갑자기 국운이 기울기 시작하는데,
    제13대 왕 여로보암2세 이후 마지막 제19대 왕까지 제대로 통치를 한 왕이 없었다.
    여로보암2세의 아들 14대 스가랴는 즉위한지 여섯 달 만에 살룸에게 피살된다.
    15대 살룸은 왕이 된지 한 달 만에 므나헴에 의해 다시 살해된다.
    1년 사이에 왕이 세 번 바뀐 것이다.
    므나헴은 북이스라엘의 가장 악한 독재자였으며, 앗수르 왕이 침략하자 백성들에게서 은 1천 달란트(약 34톤)를 거둬들여 그것으로 적을 매수하여 왕위를 유지하였다.
    결국 이것은 백성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었고 반란의 빌미가 되었다.
    므나헴의 아들 브가히야가 왕위를 계승했는데, 2년 만에 다시 군대장관 베가가 반역하여 브가히야를 살해하고 왕위를 빼앗는다.
    그리고 베가 역시 호세아의 반역에 의해 피살되었다.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으로, 앗수르에 대항하여 애굽과 연합하였으나 실패하고 결국 북이스라엘 온 백성들과 함께 앗수르에 포로로 잡혀가고 말았다.

    이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기던 이방 신의 종류만, 바알, 아세라를 비롯 성경에 무려 16가지나 기록되어 있다.
    아드람멜렉-전쟁과 사랑의 신
    아남멜렉-자녀를 희생제물로 요구함
    아세라-바알의 아내
    아시마, 아스다롯-풍요와 하늘의 여왕, 성적인 신
    바알-비, 바람, 구름, 땅의 풍요를 관장하는 신
    바알세붑, 그모스-땅의 신
    몰록(밀곰), 느보-지혜, 문학, 예술의 신
    네르갈-지하세계, 사망의 신
    닙하스, 니스록, 림몬-천둥, 번개, 비의 신
    숙곳, 브놋-전쟁의 여신...

    한마디로 깜깜한 시대였다.
    어찌 하나님께서 선민으로 택하신 이스라엘 민족이 이토록 타락할 수 있단 말인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영적 간음이 나라 전체를 휘감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호세아는 선지자로 부름받은 것이다.

    호세아라는 이름은 ‘여호와여 구원하소서’,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다.
    이 이름은 구약의 ‘여호수아’라는 이름과 신약의 ‘예수’라는 이름과 뜻이 동일하다.
    즉, 호세아 선지자는 그 이름 속에서 이미, 하나님께서 당신의 신실하심과 사랑으로 타락한 북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예언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호세아 선지자의 개인적인 신상에 대해서는 브에리의 아들이며 북왕국 이스라엘 출신이고, 음녀 고멜의 남편으로서, 세 자녀 이스르엘, 로루하마, 로암미를 두었다는 기록 외에 성경에 별다른 내용이 없다.
    이스라엘의 전승에 의하면 호세아 선지자의 부친 브에리도 선지자였다고 한다.

    다른 선지자들과는 구별되는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를 부르신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호세아를 선지자로 부르시면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무엇인가?
    “너는 저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서 이렇게 외쳐라!”였는가? 아니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1:2).”

    아니, 이게 무슨 말인가? 하나님께서 선지자로 호세아를 부르시면서, 제일 먼저 명령하신 것이, 음란한 여자, 창기와 같은 여자와 결혼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는 것이었다.

    여기에 사용된 ‘음란하다’라는 말은 단순히 마음이 음탕한 것을 의미하지 않고 이미 행동화된 음란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말이 본문에서는 복수형으로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음란한 행위가 연속되었음을 뜻한다. 즉 호세아가 맞이한 고멜이라는 여인은 음란한 행위를 직업으로 삼는 창녀였음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만일 여러분에게 이런 명령이 떨어졌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가? 아니, 대부분의 사역자들에게도 이런 응답이 왔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고 거부할 것이다. “아니, 하나님! 지금 무슨 말씀하시는 겁니까?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세요. 제가 잘못 들었겠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보다 성결해야 할 선지자로 하여금 왜 하필이면 창녀와 결혼하도록 하셨는가? 이러한 요구는 율법에도 어긋나는 것으로 호세아의 선지자 활동에도 큰 장애가 될 일이었다. 때문에 많은 신학자들은 호세아의 결혼이 환상 중에 일어난 하나의 가상이라고 이해하기도 했다.(제롬, 칼빈)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그러한 부도덕한 명령을 하실 수 없다는 점에서 일견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성경의 말씀에 충실하여, 특히 ‘디블라임의 딸 고멜’이라는 구체적인 언급을 볼 때, 고멜이 실제 인물이었으며, 또 호세아가 나중에 집을 나간 부정한 아내 고멜을 몸값을 치르고 데려오는 장면 등을 볼 때, 호세아와 고멜의 결혼 역시 실제 사건이었음을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호세아의 결혼이 실제적 사건이었다면,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이러한 불법적인 명령을 하셨을까가 문제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 명령의 근원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찾아야 한다. 호세아가 음란한 여인을 취하는 것이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면 하나님께서 우상을 숭배한 북이스라엘을 사랑하는 일 또한 용납되기 어려운 일이다. 공의의 하나님이 죄를 용납할 수 없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음란한 북이스라엘을 사랑하실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을 버리실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죄는 징계하시되 그들 자체는 여전히 사랑하사 다시 회복시키기로 하시고 그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시기 위해, 그리고 호세아로 하여금 하나님의 그러한 참 사랑을 먼저 깨닫고 그 사랑을 북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정으로 실감나게 선포하도록 하기 위해 고멜과 결혼하도록 명령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엇인가?
    십자가에는 죄는 징계하시되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 녹아 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이미 호세아를 통해 계시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호세아의 반응이다.

    현숙한 아내에 대한 소망은 모든 남성들이 갖는 큰 소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탕한 여인을 아내로 맞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온순하게 순종하는 호세아의 모습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받게 되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의 삶 속에서 얼마나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가? 나의 계획, 나의 욕심, 나의 자존심, 나의 체면 등과 말씀이 부닥칠 때, 말씀이 이기는가? 아니면 나의 인간적인 생각과 욕심이 더 많이 득세하는가? 그런 점에서 자기의 욕망과 이기심에 하나님의 뜻을 억지로 끼워 맞추어서라도 자기가 하고자 하는 바를 성취하는 현대의 성도들에게 호세아는 좋은 순종의 본을 제시한다.

    집을 나가 창부가 된 아내를 찾은 남편의 심정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에 가자고 그녀의 손을 붙들기 보다는 뺨을 후려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아내를 구타하는 몰염치한 자라고 규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 아내를 버린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도덕적으로 그리 거리낄 것이 없는 행동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결혼의 계약을 파기했고 혼인의 순결을 배반했으며 가정을 파괴시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러워진 그녀를 향해 집에 가자고 손을 내미는 호세아의 행동은 선택한 백성이 비록 타락할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내 돌이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을 보여준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호세아의 유일한 권고는, 다만 하나님께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6:1).”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10:12).”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는 데에는 더욱 깊은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내가 그에게 준 것이요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그가 알지 못하도다(2:8).”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4:1).”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6:6).”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11:3).”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이야말로 모든 은혜의 원천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 받은 이스라엘이 그것을 모르고 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이것을 모르고 세상에 매여 제 맘대로 살았기 때문에 저들은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파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4:6).”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지식은 세상 학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을 가리킨다. 아무리 세상 학문의 박사라 해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깜깜한 인생을 살아가기 십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모르면, 우주와 인생과 역사와 인간을 올바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6:3).” 호세아의 아내 고멜도 자기에 대한 남편의 사랑을 제대로 알았더라면, 남편의 곁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음행의 악령이 그녀의 마음을 우매하게 하여 남편의 사랑을 알 수 없게 만들었다.

    “그들의 행위가 그들로 자기 하나님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하나니 이는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라(5:4).” 고멜의 마음은 곧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었다.

     

    그래서 호세아는 행동으로 그녀에게 사랑을 알려 주려고 했다. 은 15세겔과 보리 한 호멜 반을 지불한다는 것은, 가난한 선지자에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많은 희생을 감수하여 그것으로 그녀의 몸값을 치루고, 음행한 그녀를 데리고 왔던 것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전 생애를 통해 알아야 하는 참 진리이다.
    그런데 호세아는 구약 시대에 신약의 이 진리를 전했다.
    가장 복음적인 선지자이다.








    6월 4일(금) 호세아 5장


    첫째 설교 / 4:1-5:4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
    둘째 설교 / 5:5-6:3 인간의 교만을 지적한다



    호세아 5:1

    제사장들아 이를 들으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깨달으라 왕족들아 귀를 기울이라
    너희에게 심판이 있나니 너희가 미스바에서 올무가 되며 다볼 위에서 친 그물이 됨이라. 아멘

    1차 설교 / 4:1-5:4
    하나님을 아는 지식(다아트 엘로힘)

    2차 설교 / 5:5-6:3 재판 연설 양식
    인간의 교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을 향한 말씀

    호세아 5:1
    제사장들아 이를 들으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깨달으라
    왕족들아 귀를 기울이라
    너희에게 심판이 있나니 너희가 미스바에서 올무가 되며 다볼 위에서 친 그물이 됨이라. 아멘

    삼단계로 표현
    점층적 방법으로 말씀의 절정을 강조

    호세아 5:1

    제사장들아 이를 들으라(솨마)
    이스라엘 족속들아 깨달으라(카솨브)
    왕족들아 귀를 기울이라(아잔)
    너희에게 심판이 있나니 너희가 미스바에서 올무가 되며 다볼 위에서 친 그물이 됨이라. 아멘 

    신앙의 명소를 우상숭배의 터전으로
    호세아 5:1


    제사장들아 이를 들으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깨달으라
    왕족들아 귀를 기울이라
    너희에게 심판이 있나니 너희가 미스바에서 올무가 되며 다볼 위에서 친 그물이 됨이라. 아멘

    미스바(Mizpah) 망대, 감찰하다 

    사무엘이 가로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삼상 7:5)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가로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삼상 7:12)

    다볼(Tabor) 높은 산 해발 588m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삿 4:4)

    바락에게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일만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가라(삿 4:6) 


    호세아 5:15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서 저희가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기다리리라
    저희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여 이르기를.
    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오늘의 기도

    신앙의 명소로 회복하자!

    1. 가정
    2. 교회
    3. 국가

    6월 3일(목) 호세아 4장

    호세아 4:1-14:9은 9개의 설교로 구성되었다.

    4:1-5:4,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
    5:5-6:3, 인간의 교만을 지적한다.
    6:4-7:7, 인애가 없으므로 망할 것이다.
    7:8-8:14, 세속과 혼합된 죄를 책망한다.
    9:1-17, 부패의 죄를 징벌을 받는다.
    10:1-15, 이스라엘의 두 가지 큰 죄
    11:1-16, 인간적인 계책을 책망
    13:1-16, 우상숭배의 죄를 다시 책망
    14:1-9, 회복에 대한 약속

    죄악된 생활을 청산하고 하나님의 무궁한 은혜 속에 거하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구약 성경에서 예언서의 말씀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Hear the word of the LORD)" 라고 하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그 말씀에 순종하라는 명령이며 애원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을 때 나타나는 두드러진 현상은 없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진실이 없다(There is no faithfulness)
    둘째는 인애가 없다(There is no love)
    셋째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There is no acknowledgment of God)


    제임스 심프슨((James Simpson)은 스코틀랜드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명석하여 에딘버러 의과대학을 졸업하면서 29세의 젊은 나이에 교수가 되었다.
    수술 할 때마다 환자들의 고통을 보며 어떻게 덜어줄 방법이 없을까를 생각했다.

    그러다가 성경을 읽으며 묵상하는 중에 창세기 2장의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라는 말씀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이 아담을 잠재우시듯, 환자를 잠재워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하고 수술을 끝내는 마취제 개발을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1847년 클로로포름(Chloroform)이라는 마취제를 발견했다.

    그 후 빅토리아 황후가 왕자를 분만할 때 이 마취약을 사용하여 분만에 성공함으로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그가 말년에 대학에서 마지막 강의를 끝내고 제자들에게 질문을 받았다.

    “선생님께서 지금까지 발견한 것 가운데 가장 큰 발견은 무엇입니까?”

    제자들은 심프슨이 “마취제 클로로포름을 발견한 것이 가장 큰 발견” 이라고 대답할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심프슨은 뜻밖에 대답을 했다.

    “나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내가 죄인이라는 것과 예수님이 나를 구원해주신 구세주라는 사실입니다.”

    최우성 박사 (생리학, 창조과학선교회)

    외과수술 기술이 없었다면 이 글을 읽지 못할 사람들이 상당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글을 쓰는 필자도 맹장수술을 받았는데 수술을 하지 않았다면 죽었을 지도 모릅니다. 본인이 수술을 받아 살아남은 사람도 많지만 부모님이나 조상들 중에 수술이 가능해서 자손을 낳고 그래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까지 합하면 그 수는 엄청 나게 많을 것입니다.

    1. 수술 기술발달에 획기적인 공헌을 한 창조론자들

    수술은 수천 년 전부터 있어왔지만 현대적인 수술기법에 혁신적인 공헌을 한 두 창조론 과학자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제임스 심프슨(James Young Simpson, 1811-70) 1847년 클로로포름(Chloroform)이란 마취제를 발견한 심프슨(James Young Simpson, 1811-70)은 영국 스코틀랜드의 산부인과 의사였다. 여러 가지 화학 약품들을 스스로 시험하던 중 심프슨은 다른 두 명의 친구들과 함께 이 클로로포름을 흡입하고 모두 다음 날 아침까지 골아 떨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을 자기 조카에게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물론 심프슨이 환자의 마취를 처음으로 한 것은 아니다. 첫 번째 마취제로는 1799년 데이비라는 사람이 발견한 웃음을 자아내는 아산화질소(N2O,nitrousoxide)였다. 하지만 이것은 전신마취를 할 만큼 강력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은 치과 등에서 얕은 마취를 할 때 사용하고 있다. 한때 에테르(ether)도 사용 되었지만 에테르는 독성이 너무 커서 절대로 사용하면 안 되는 것이다.

    심프슨이 발견한 클로로포름이 심장, 신장, 간 등에 강한 독성이 있기 때문에 지금은 사용되고 있지 않지만 심프슨의 발견은 의학발전에 획기적인 기폭제가 되었다. 당시에 고통은 죄인인 사람들이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겪어야 할 분량이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심프슨이 마취제를 사용하는 것을 비난했지만 심프슨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셔서 고통 없이 갈비뼈를 뽑아냈다’는 성경기록(창2:21)으로 대답하였다. 흥미 있는 사실은 그 동안 마취제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최근에 마취과정이 수면과정과 비슷한 생화학적, 생리학적 반응으로 이루어진다는 연구보고가 나온 것이다.

    심프슨은 전도에 아주 열심이어서 소책자를 만들어서 복음을 전했고 간증을 할 때면 “나의 위대한 발견은 내게 구원자가 있다는 것”이라고 고백을 하였다고 한다. 그는 58세에 죽으면서까지도 큰 감동을 남겼다. 영국은 그 가족에게 명사들이 묻히는 웨스트민스터사원에 매장할 것을 요청했지만 신앙심 깊은 가족들은 그 명예로운 제의를 거절하고 자기 고향에 그를 묻었다. 현재 런던 웨스트민스터사원에는 심프슨의 흉상이 그 자리에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조셉 리스터(Joseph Lister, 1827-1912, 영국) “종업원은 돌아가기 전에 반드시 손을 씻어야 합니다!”라는 문구는 식당이나 병원에서 흔히 보는 것입니다. 이런 문구가 언제부터 있었을까요? 1860년대 마취기술이 발전되면서 고통을 주지 않고 수술을 잘 마칠 수 있었으나 수술성과는 좋지 않았다. 오히려 수술 전보다 상황이 악화되기도 했고 수술 후에 거의 70%나 되는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그 원인은 감염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감염을 나쁜 공기에 접촉했을 때 화학적인 작용이 일어난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수술을 하는 의사도 손을 씻지 않았고 더러운 수술 작업복을 계속 입었다. 피가 묻고 냄새가 나는 더러운 작업복이 경력 많고 유능한 의사의 표징이었다. 의사인 리스터는 진화론이 팽배해가던 당시에 진화론을 극구 반대했으며 자연발생설 부정실험까지 수행했던 미생물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파스퇴르가 발표한 연구보고서를 읽게 되었다. 그 보고서는 공기가 없는 상태에서도 썩을 수 있고 발효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과 질환을 야기하는 미생물을 제거하는 3가지 방법(여과, 불, 약품소독)을 제안하고 있었다. 리스터는 앞의 두 방법은 환자에게 쓸 수 없기 때문에 3번째 방법을 택하여 실험을 하였다. 실험은 대 성공이었다. 1867년 연속해서 5개의 논문을 발표하였고 이 논문이 다른 의학 전문지들에도 재 등재되었다. 리스터는 소독액으로 환자의 피부를 씻었을 뿐 아니라 수술 도구들도 그 소독액으로 깨끗하게 하였고, 장갑도 끼고, 더러운 옷 대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현재 의사들이 입는 하얀 가운의 시초였던 것이다.

    리스터는 유명해졌고 자기 분야에서 대 성공을 거두었으나 그는 늘 겸손하였다고 한다. 그는 자주 이렇게 고백했다고 한다. “나는 기독교의 근본적인 교리를 신뢰한다.” 지금 많은 사람들은 리스터의 이름을 딴 구강세척제(Listerine)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의 신앙고백은 버렸다.

    2. 진화론의 영향

    파스퇴르 없이 리스터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파스퇴르와 리스터는 찰스 다윈이 진화론(종의 기원, 1859)을 발표하여 세상이 열광하고 있던 시대에 진화론을 믿지 않고 창조를 믿었던 믿음의 거장들이다. 그들은 창조를 사실로 믿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실험으로 증명하였다. 파스퇴르는 지금도 교과서에 나오는 S-flask 실험으로 알려진 진화부정실험을 하였다. ‘생물은 생물에서만 나온다’는 그의 결론은 지금도 사실이다. 모든 생명체들은 ‘종류대로’ 창조되었고 여전히 그 ‘종류대로’ 존재한다는 믿음은 지금도 사실로 확인되고 있다.

    진화론은 미생물 같은 간단한 것은 무생물에서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게 했다. 창조 사실을 부정한 결과는 인류에게 줄 혜택 대신 얼마나 많은 고통과 죽음을 주었는가? 거의 대부분의 수술환자들이 죽었다. 그럼에도 이 진화론은 여전히 건재하여 편도선은 진화과정에 쓸모 없게 된 흔적기관이라고 주장하는 바람에 미국에서만 수백만 명의 어린이들에게 해서는 안 될 편도선 제거수술도 시켰다. 진화론은 지금까지 단 한 건의 과학발달과 기술발달에 공헌을 해 본 적이 없다. 사실이 아니니까! 그리고 진화론은 무신론으로 가는 잘 닦여진 대로가 되었다.

    3. 완전한 시작

    최초의 완전한 마취와 완전한 외과수술은 하나님께서 하셨다. 창조6일째,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먼저 흙으로 빚어 창조하시고 깊이 잠들게 하신 후에 아담의 갈빗대(옆구리)를 잘라내셨다. 그리고 그것으로 하와를 만들어 아담에게 데리고 오셨다. 그때 아담은 이렇게 말했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2:23). 자기의 옆구리 뼈와 살로 만든, 자신 몸과 같은 존재로 여기며 사랑하였다.

    그 당시 인류가 죄가 없었을 때는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나지 않았다. 아픔과 고통과 죽음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수술하실 때와 그 후에도 아픔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타락된 이 세상은 아픔과 고통과 죽음으로 가득 찬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 오직 창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유일한 길이고, 완전한 세상으로 인도하실 수 있으며,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다. 그 길을 주신, 완전하신, 우리 아버지 되신, 사랑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메일:mailforwschoi@gmail.com




    있어야 할 것이 없을 때 세 가지 현상이 나타날 것이라고 합니다.
    첫째는 버려두라(leave alone) 17절
    둘째는 수치를 좋아하리라(dearly love shameful ways) 18절
    셋째는 수치를 당하리라( will bring them shame) 19절

    이러한 결과로 인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망할 것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망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백성들을 망하게 한 후에 다시 새롭게 세우실 것입니다.
    낡고 오래된 아파트를 재건축하여 새로운 아파트를 건축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므로 그들을 완전히 부셔버린 후에 다시 세우는 것은 비극적인 역사가 전개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상숭배의 자리에서 썩는 것보다 좋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은 항상 진실하게 하나님만을 섬기므로 영원토록 즐거운 삶을 원합니다.
    날마다 새롭게 변화되어 성숙한 신앙의 사람으로 우뚝 세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6월 2일(수) 호세아 3장


    그 은총으로 나아가리라(5절)


    그 은총이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히브리어로 "아하브"라고 합니다.

    출애굽기 20: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신명기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기에 기록된 사랑이 아하브입니다.

    ‘사랑하다’는 ‘아하브(אהב)’라는 동사입니다.

    첫번째 뜻은 ‘술 이나 음식 등을 지나치게 좋아하다’

    중독 증세를 보일 정도로 집착하면서 좋아하는 것을 묘사할 때 이 단어를 씁니다.
    게임 중독, 인터넷 중독, 커피 중독, 알코올 중독, 쇼핑 중독, 드라마 중독 등…
    이런 중독을 가리킬 때 쓸 수 있는 말이 ‘아하브’입니다.

    ‘없으면 미칠 정도로 무언가를 사랑하다’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뜻은 ‘배우자나 연인 혹은 가족을 절실하게 사랑하다’

    창세기 29장 32절에서 레아가 남편 야곱이 동생 라헬만 편애하니까 눈물로 침상을 적시며 괴로워하다가 첫 아들 르우벤을 낳고서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라고 고백할 때 이 단어를 씁니다.

    한 마디로 ‘아하브’는 ‘절실하고 애타게 갈망하듯이 사랑하다’를 의미합니다.

    솔로몬 왕과 슐람미 여인의 사랑을 노래한 아가서에서 연인에 대한 사랑을 묘사할 때 ‘아하브’를 씁니다.
    상사병에 걸릴 만큼 사랑할 때, 연인을 찾으려고 밤새도록 거리를 헤맬 정도로 사랑할 때 이 단어를 씁니다.
    아가서에서 ‘아하브’는 ‘연인을 상사병에 걸릴 만큼 절실하게 사랑하다’를 뜻합니다.

    ‘믿음’이란 중독증에 걸려서 하루라도 없으면 미칠 것 같이 무언가(술, 담배, 게임, 인터넷, 드라마…)를 갈구하듯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뜻합니다.

    믿음이란 하루라도 말씀을 읽지 않으면, 하루라도 기도하지 않으면, 하루라도 찬양하지 않으면, 하루라도 전도하지 않으면, 하루라도 주님과 깊은 만남을 갖지 않으면,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처럼 허전하고 견딜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그 허전함과 상실감, 미칠 것 같은 마음이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한 순간이라도 안 보면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첫 연인을 사랑하듯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연인에게 마음을 전부 빼앗겨 연인이 없으면 미칠 것 같아서 애타게 찾는 것처럼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시 42:1).
    시편 기자의 고백이 오늘 나의 고백이 될 때 나는 진실로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연인을 사랑하듯 애타게 주님을 사랑하고 갈망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천대까지 은혜를 베풀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은혜’는 ‘헤세드’(חסד)라는 단어로, 언약의 백성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과 은혜를 가리킵니다.

    이 단어에는 생명을 담보로 하는 사랑, 생명을 구원하는 사랑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베푸시는 언약의 사랑, 우리를 구원하시는 희생적인 십자가 사랑을 약속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지불하는 작은 대가와 희생은 감히 비교할 수 없는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라는 축복으로 되돌아 옵니다.

    인간이 이해하는 사랑의 그릇에 아하브의 의미를 담아 낼 수 없습니다.

    수영장만한 그릇을 가졌다 할지라도 초당 7,000톤씩 쏟아지는 나이아가라 폭포의 물을 담아 낼 수 없듯이 인간이 이해하고 추구하는 사랑의 그릇으로는 하나님께 받은 사랑의 깊이와 무게와 넓이를 값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오히려 인간이 그 사랑에 푹 잠길 뿐입니다.

    인간이 가진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그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 하는 역설적 사랑입니다.
    마치 어린 아이에게 과자를 사주고는 아이에게 사정하여 과자 하나를 얻어먹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하므로 아이로 하여금 작은 것이지만 자기 것을 내어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인간에게는 사랑이 없습니다.
    인간이 하는 사랑은 조건적이기 때문입니다.
    조건을 벗어난 사랑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조건 안에 있는 사랑도 제한이 있습니다.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자녀라 할지라도 그 아이의 목숨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이유 없이 아이가 밤새도록 보챌 때 부모로서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부모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에 제한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이 사랑입니다.
    이는 어떤 종교철학의 이론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가장 가까이 있었던 사도 요한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한1서 4:16)
    사도 요한의 신앙철학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터득한 사랑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아가페입니다.
    아가페 역시 인간은 이해할 수 없으며 헤아릴 수 없는 창조주의 본질적 사랑입니다. 

    사랑의 본질이 아가페라면 그 사랑을 경험하고 받은 것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사랑이 아하브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의 본질에 비하면 아하브의 사랑은 비스킷 한 조각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받은 만큼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백을 받았으면 백을 드릴 수 있는 것이고, 천을 받았으면 천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받은 것을 드리는 것에 대해 인색할 수 있습니다. 즉 받은 게 없으니 드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받은 과자 중에서 한 조각을 드릴 수 없다면 그 다음 부터는 더 많은 것을 받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드림으로 받은 것을 증명할 수 있으며, 더 많은 것으로 늘려 갈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사랑을 달란트로 비유했습니다.(마 25:14-30)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입니다. 다섯을 받은 사람은 다섯을 남길 수 있으며, 둘을 받은 사람 또한 둘을 남길 수 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한 달란트를 남길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남길 수 있다는 것의 다른 표현은 드릴 수 있는 아하브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한 달란트의 현대적 금액은 일반인들이 쉽게 벌 수 없는 천문학적 금액입니다. 은 한 달란트는 6천명의 노동자 하루 품삯입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달란트는 금 달란트입니다. 금 한 달란트는 은 달란트의 15배로 9만 명의 노동자 하루 품삯입니다. 2018년 최저임금은 시급 7,530원입니다. 하루 8시간 근무한다고 하면 하루 품삯은 60,240원입니다. 그렇게 환산하면 금 한 달란트는 60,240원에 9만 명의 품삯을 곱하면 54억( 5,421,600,000)이나 됩니다. 금 다섯 달란트는 270억(27,108,000,000), 금 두 달란트 180억 (10,843,200,000), 금 한 달란트는 54억 (5,421,600,000)이나 됩니다. 이는 최저 임금을 받는 아르바이트일 경우의 금액이기에 실제 기능직이나 전문직 노동자의 하루 품삯은 그 이상이 될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는 하나님께 받은 사랑의 크기를 현실적인 금액으로 이해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받은 것에 감사하여 드리는 것, 그것이 바로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아하브입니다. 그 받은 사랑을 찬송가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이 찬송은 1050년부터 불려진 ‘하따무트(Haddamut)'라는 히브리 명절인 칠칠절 첫날에 십계명을 읽기 직전에 부르는 찬송으로서 십계명의 서곡에 해당하는 노래였습니다.

    원래의 가사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은 말로 다 할 수 없도다.
    하늘 전체를 양피지로 삼고, 땅위의 모든 초목을 펜으로 삼아, 온 세상의 물을 다 잉크로 하여, 온 인류가 필기사가 되어 죽을 때까지 써도 다 쓸 수 없도다.”

    이 찬송시 역시 달란트만큼이나 비현실적인 표현으로 받은 사랑의 크기와 넓이를 고백한 것입니다. 하늘을 종이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서 글을 쓴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다 기록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의 크기를 인간이 측정할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그 받은 사랑에 과자 한 조각 드리는 것이 아하브입니다. 그 한 조각은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일부가 아니라 내 삶의 전부를 드리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받은 것에 감사의 마음으로 보답하여 드리는 것이며, 이웃을 사랑하는 것 역시 내 것을 내어 주는 선심이나 박애정신이 아닌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그 사랑을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복의 통로로 부르신 것처럼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갈3:7) 받은 복을 흘러 보내야 하는 아하브의 사명자입니다. 

    사랑은(‘아하브אהב’) 율법의 완성입니다.

     

     6월 1일(화)
    호세아 2장


    징벌적 사랑과 싸 메어줌의(포옹하는)  사랑

    호세아 2장은 크게 둘로 나누어집니다.
    전반부 2-13절은 패역한 이스라엘을 징벌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줍니다. 반면 14절부터는 징벌이 목적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다시금 사랑의 회복이 목적임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전반부를 ‘징벌적 사랑’이라고 할 수 있고, 후반부를 ‘싸 메어줌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패역한 이스라엘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징벌이 필요합니다.
    사랑한다면 잘못된 길을 막아야 합니다.
    그러나 징벌만으로 멈추지 말고 다시 싸메어 주어야 합니다.
    이 두가지가 이루어져야 사랑은 완성됩니다. 

    패역한 이스라엘의 앞길을 막아야 합니다.
    6-13절은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
    6절, 길을 막고 찾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7절 길을 잃고 바알을 만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9절, 흉년이 들고 입을 옷도 없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11절 희락과 명절을 폐하게 하고,
    12절 논과 밭을 황폐하게 만들어야 하며,
    13절 벌을 주어야 합니다.

    사랑한다면 먼저 길을 막고, 배 고프게 해야 합니다.
    자기 머리로 자기 술수로 잘 될 수 있다는 것을 우선 막아야 합니다.
    죄의 길을 간다면 막아 주어야 합니다.

    죄악된 길을 가는 이스라엘을 향해 침묵하는 것은 절대 무조건적 사랑이 아닙니다.
    침묵은 더 큰 죄를 짓게 만드는 공범입니다.
     

    그 앞길을 막는 징벌은 결코 심판이 아닙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한국의 신문에서 보았습니다. 한 어머니가 경찰서를 찾아와 울면서 아들을 고발했습니다. “내 아들을 체포해주세요. 저에게 나쁜 짓을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폭력배가 되어서 사람들을 폭행하고, 마약을 팔고, 사기를 치고 삽니다. 내 아들이 사람될 수 있도록 이 아들을 잡아주십시오.” 눈물을 흘리며 호소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그 아들이 잡혀와서 “도대체 어떤 놈이 고자질을 한거야? 알면 죽여 버리겠어”하며 행패를 부릴때 어머니가 달려와서 “아들아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너를 신고했다. 제발 나쁜짓 그만하게 해 달라고 내가 다 말했다. 이제 그만해라. 어미는 다른 것 바라지 않는다. 라면 끓여먹고 살아도 떳떳하게 살고 싶구나. 이분들 원망말고 이 어미를 원망해라. 이 어미를 원망해라.” 그렇게 울부짖자 아들도 눈물을 흘리며 순순이 조사를 받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심판이라고 해야 할까요? 사랑이라고 해야 할까요?
    기억합시다. 사랑한다면, 막아야 합니다.
    사랑 때문에 배고프게 하고 벌을 주어야 합니다.
    징벌없는 사랑은 무조건적 사랑이 아니라 사랑이 아닐 뿐입니다.
    죄의 공범이고 방조입니다. 

    동시에 징벌은 있지만 회복이 없다면, 그것은 처벌과 복수지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징벌적 사랑보다 더 큰 회복의 사랑을 베푸십니다.
    싸메어줌의 사랑은 징벌적 사랑 다음에 2:14절부터 시작됩니다.
    주님은 때리고 심판하고 그래서 배신에 대해 복수하는 것으로 멈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때부터 얼마나 불가능한 용서와 사랑을 시작하는지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은 완전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패역한 이스라엘을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살펴 보면서, 우리가 받은 사랑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어떻게 그 사랑을 나누어야 하는지 말씀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바알에서 이쉬로

    먼저 하나님은 용서하기도 힘든 음란한 여인같은 이스라엘을 향해 다시 사랑으로 가득한 남편이 되겠다고 하십니다.
    2:16에서 “그날에 네가 나를 남편(이쉬)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가 있습니다.
    여기서 ‘바알’이란 히브리어는 고유명사로 바알 신의 이름이 되고, 보통명사로 ‘남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쉬’라는 말과 ‘바알’이라는 말은 남편을 뜻할때에도 어감에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는 ‘여자의 상대적 의미로 동등성을 함유한 파트너로서의 남편’입니다.
    우리식으로 옮기면 “여보와 당신”의 관계에서 남편입니다.
    하지만, 후자는 ‘여자를 소유하는 자로서 법적 권리를 가진 남편’을 강조하는 의미입니다.
    즉 군림하는 왕으로서 소유자의 의미입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하나님은 우리와 관계를 회복하시는데, 군림하는 주인의 모습으로서 ‘주종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파트너로서 긴밀한 사랑을 나누는 ‘연인관계’로서 세워가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게 지금 가능한 이야기일까요?
    솔직히 당시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는 간음한 아내와 남편의 이야기입니다.
    간음한 아내가 있는 상황, 회복 불능입니다.
    받아 들여주기도 힘든 상황인데, 여보 당신의 관계로 간다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유대인 남성이 랍비를 찾아와서 “제 아내가 간음을 했습니다.
    이혼해야 할까봐요.”하면 당시 랍비들은 단호하게 “안돼”합니다.
    “그럼... 이런 상태에서도 참고 살라는 말입니까?”
    랍비는 대답합니다. “그걸 왜 이혼을 하니? 죽여버려야지.”
    이것은 유대인의 법상 이혼이 아니라 죽여야 하는 관계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이 상황은 ‘이혼상황’이 아니라 ‘사형상황’입니다.
    당시 유대인의 법상으로도 이건 이혼사유가 아니라 죽여야 될 상황입니다. 

    더구나 부부의 신의 관계상, 인간적으로 회복이 ‘절대불가능하다'입니다.
    이런 상황이면 용서하고 받아줘도, 사랑을 회복한다는 것을 불가능한 일입니다.
    바람 나서 집버리고 떠난 남편... 돌아오면 자식들 봐서 불쌍해서 받아줄 수는 있어도 “여보 사랑해”라고는 못할 것입니다.
    다시 회복하더라도, “내가 이를 악물고 다시 받아줬으니 이제부터는 찍소리 하지 말고 내말 들어.
    내 말에 토다는 달 토해버린다. 앞으로 내 앞에서 눈 내리깔고 주머니 손 빼고 집구석에 쳐박혀 있어.” 이래도 될 상황입니다. (너무 리얼하게 했나요?)

    그런데, 이처럼 회복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받아주기만도 어려운 상황에서, 사랑하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간음한 아내를 받아들인 것만이 아니라, ‘이쉬’ 곧 ‘당신’이 되는 사랑을 회복하겠다는 말입니다.
    그저 소유한 남편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주는 이쉬, 남편이 되겠다는 말입니다.
    우리와 다시 여보 당신의 관계를 회복하겠다는 말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 바알이 아니라 이쉬임을 찬양합니다.
    이렇게 아픈 사랑을 하신 이쉬의 하나님이 여러분의 신랑이십니다. 

    이것은 결국 무슨 말인지 아시죠? 내 가슴을 난도질 했던 지난날을 다 잊어버리고 용서하겠다는 말입니다. 가슴에 앙금도 남기지 않고 다 지워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지나간 일들을 기억하지 않고, 이전에 행한 모든 일 생각지 않으리, 돌같은 내 마음 어루만지사, 다시 일으켜 세우신 주를 사랑합니다.” 기억하십시오. 부유하거나 건강하거나 잘 될때에도 주님을 버릴 준비간 된 우리지만, 주님은 우리가 가난하거나 병들거나 간음할때에도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고 계십니다. 어찌보면 그건 ‘미친사랑’입니다. 내가 어떤 자리에 있었든지 무슨 일이 있었든지, 주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줄 믿습니다. 


    이런 사랑을 하십시오.


    내가 한 짓을 하나님이 용서하시기를 원하면서, 남이 한 짓을 용서하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누군지 아십니까? 자식죽인 원수입니다. 아들을 벌겨벗겨 놓고 침뱉으며 채찍에 때리며 나무에 달아 죽인 원수입니다. 그것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죽인 원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누군지 아십니까? 나의 사랑을 눈앞에서 배신한 간음한 아내와 같은 원수입니다. 벌거벗어 음란하게 우상에게 몸을 판 고멜입니다. 그런데 자식죽인 원수인 저와 여러분을 아들로 삼고 아버지가 되어 주셨습니다. 음란한 고멜인 저와 여러분을 아내로 삼고 이쉬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그 사랑을 해야 합니다. 삶의 한 조각이라도 그분의 사랑을 닮아가야 합니다. 이 말은 “자식죽인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내 사랑을 배신하고 간음한 배우자를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더 기가차고 놀라운 것은 회개하고 돌아온 인간들도 아닙니다. 오늘 2장을 보면, “회개하라. 그러면 사랑하리라” 이런 말도 없습니다. 2-13절을 보면 하나님이 징벌하고 길을 막겠다고 하시면서 회복을 반전이 14절부터 나옵니다. 보시면 “회개하면,” 이런 조건이 없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여기서 ‘타일러’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친밀감으로 토닥거릴때 쓰는 ‘침실용어’입니다. 분노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사랑으로 토닥거립니다. 그리고 여기서 ‘위로하고’는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마음에 말한다”는 의미입니다. 토닥거리며 위로하며 회복을 시작하겠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거친 들’로 데려간다 하셨는데, 거친들은 바로 이스라엘의 출애굽의 광야를 말합니다. 즉, 첫사랑의 자리로 데려가서 순수한 첫사랑을 다시 시작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15절 하반절을 봐도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때와 애굽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음란하고 더러운 여성이 아니라, 어린 아이처럼 순수하던 그 때 모습으로 대해주시고, 출애굽의 시작때 뜨거웠던 믿음과 사랑처럼 대해주시겠다는 말입니다. 회개하고 돌아와도 다시 시작할까 말까 할 상황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오히려 첫 사랑으로 돌아가서 너희를 사랑하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사랑에 눈이 멀었습니다. 우리는 눈먼 사랑 하시기 바랍니다. 한 눈 팔아도 용서가 안될 판에 두 눈 다 팔아버린 이스라엘이지만, 주님은 두 눈 질끈 감고 눈물로 흐려진 두 눈으로 눈 먼 사랑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눈 팔고 하나님 사랑하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눈먼 사랑을 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너희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아픈 사랑을 하기 위해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찢어지게 아픈 사랑하라고 부르셨습니다. 가시 나무새가 가시에 심장을 찔러 마지막 사랑노래를 부르듯 그렇게 사랑하는 일이 우리의 사명인줄 믿습니다.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여러분 우리도 그렇게 사랑하게 되길 소망합니다.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아도, 원수 같은 인생이라 할지라도, 이제 절대 회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완전히 포기했다 할지라도, 다시 첫 사랑이 시작될 것을 소망하는 일, 그것이 우리의 사랑인줄 믿습니다. 





    아골 골짜기를 소망의 문으로 


    그렇다면 이런 첫사랑으로 우리를 품어주시는 주님이 우리에게 어떤 소망을 주십니까? 15절을 보십시다.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저는 여기서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주신다는 것이 너무 가슴에 와 닿습니다. 아골 골짜기는 ‘사망’의 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쉬가 되시는 하나님은 ‘사망의 문 아골 골짜기를 소망의 문’으로 바꾸어주실줄 믿습니다. 

    아골 골짜기는 여리고 아래쪽에 있는 곳으로 아간의 죄로 인해 아이성 전투에서 패한 후 그를 죽이고 묻은 곳입니다. ‘고통의 골짜기’인데, 이 의미는 더 아픕니다. 이것이 의를 위한 고난과 고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은 죄 때문에 당하는 고통’을 말합니다. 즉, 내가 친 사기 때문에 감옥에 갖히는 고통을 말하고, 아버지의 알콜 중독과 아들의 마약 중독으로 인해 온가족이 경험하는 수치와 고통을 말합니다. 아골 골짜기는 하나님께 받는 고난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의 죄로 인해 나와 가족과 공동체가 겪어야 할 고통의 골짜기를 말합니다. 정말 수치스럽고 부끄럽고 남들에게 위로 받기도 힘든 고통을 말합니다. 


    고난이면 위로라도 받죠. 고난이면 기도해 달라고 부탁이라도 하죠. 고난이면 하나님 원망이라도 하죠. 내 죄로 인해 당하는 수치와 고통이라면 남들이 알까봐 말도 못합니다. 부끄러운 짓 하고 감옥에 갇혀 있는데 기도부탁할 염치도 없고, 말하고 나면 속으로 욕할까봐 눈치만 보이는 그런 일입니다. 그래서 남편자랑 자식자랑 집안자랑 다 포기하고 아무 말도 못하고 썩는 속 참는 것입니다. 지은죄가 있어서 원망도 못하고 흐느낄 수 밖에 없는 삶이 아골 골짜기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약속하십시다. 바로 그런 고통으로 가득한 아골 골짜기도 소망의 문이 될 것이다. 마약에 절은 자식보면서, 알콜에 찌든 남편 보면서, 바람난 아내의 빈자리를 보면서, 남들에게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힘든 아골 골짜기의 고통이 ‘소망의 문’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오늘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여러분 인생의 아골 골짜기, 사망의 문들은 이제 소망의 골짜기가 될 것입니다. 생명의 골짜기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담대히 선포하십시오. “내 인생의 아골 골짜기야 너는 오히려 소망의 문이 될 찌어다.” 그렇게 선포하시게 되기 바랍니다. 




    하나님 장가 가는 날


    오늘은 하나님 장가가는 날입니다. 이걸 새장가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다시 재혼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데 오늘 여기에서 사용된 결혼의 의미는 오히려 유대인들이 13살때 쯤에 하는 정혼 곧 약혼의 의미입니다. 음란한 아내로 인해 결혼생활이 파탄이 나버렸는데도 불구하고, 받아주는 것을 넘어 어린 시절 순수한 모습으로 우리를 여기시며 다시 약혼때의 사랑부터 시작하겠다는 말입니다. 신부는 이제 음란한 창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아름다운 신부의 모습이라곤 찾아 볼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우리 신랑되신 주님은 이런 우리는 13살짜리 소녀처럼 순수하게 여기시겠다는 것입니다. 

    고멜같은 우리들이 불안할까봐, 우리를 향한 사랑을 19-20절을 보면 3번에 걸쳐 “장가든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무슨 말일까요? “난 너를 절대 버리지 않는다. 영원히 살자. 할 수 없어서 결혼하는 것 아니다. 진실하게 너와 결혼하고 싶다.” 우리 주님의 고백이 깊게 담겨있습니다. 이게 우리 신랑되신 주님이신 줄 믿습니다. 더러운 죄인인 우리를 가장 아름답고 좋았던 모습으로 여기며 다가오시는 분...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누더기처럼 음란한 몸 뚱아리조차 가릴 수 없는 더러운 죄에 찌든 음란한 창기같은 우리들을 예쁜 교복입고 두 갈래로 머리 땋아 하얀 양말에 까만 구두 신은 여고생같은 첫 사랑의 자리로 이끌어 가시는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하나님 장가 가는 날... 사랑에 눈먼 날이었습니다. 하나님 장가 가는 날... 바로 십자가에서 신랑되신 예수님이 벌거벗기우고 죽으신 날이었습니다. 사형시켜야 할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 당신이 사형 당하신 날입니다. 아골 골짜기, 사망의 문을 소망의 문으로 만들기 위해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신 날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하며 사랑하신 날입니다. 오늘 이 호세아의 예언이 성취된 날은 바로 십자가 사건이 있던 유월절 전날이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음란한 신부였습니다. 하지만, 그 은혜와 사랑으로 구속받았다면 신랑되신 주님 다시 오실때에는 “순결한 신부”로 준비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 주님 하늘 영광으로 이땅에 다시 오실때, 우리는 다시 마지막 혼인잔치를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신랑되시 주님이 하신 아픈사랑처럼, 우리도 아픈사랑을 통해 진실로 신랑을 맞이할 준비가 된 신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만 장가가는 날이 되지 않게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시집 가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 받았으니 사랑해야겠지요. 음란한 여인으로 사랑받은 것에 감사하는 추억 만큼이나, 우리에게 장가드신 주님의 마음을 알고 서는 삶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그런 사랑위해 우리 주님 장가드신 것처럼, 저와 여러분도 시집가는 삶 되시길 축복합니다. 

    5월 31일(월)
    호세아 1장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호세아 1:1∼11
    ♦ 묵상을 위한 주제 : 음란한 아내(2절)
    ♦ 성구 :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淫亂)한  아내를 취(取)하여 음란(淫亂)한 자식(子息)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行淫)함이니라.  

    오늘부터 구약의 마지막 책들 “소선지서(minor prophets)”를 읽게 될 것입니다.
    ‘소선지서’는 12권의 책들이며, 그 내용이 “대선지서(major prophets)”보다 분량이 작기 때문에 구분하는 것입니다. 결코 선지자의 활동과 그 인품이 크고 작기 때문에 구분하는 것이 아닙니다.

    “호세아(Hosea)”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Jehovah is salvation)”라고 하며 별명은 “사랑의 선지자”라고 합니다.
    “호세아서”를 읽어가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새롭게 느껴야 하겠습니다.

    “아모스(Amos)”는 “정의의 선지자” 라고 합니다.
    ‘아모스’와 ‘호세아’의 활동을 비교하면 “아모스”는 하나님이 행하신 것을 강조합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이 느끼신 것을 강조합니다.

    호세아는 북이스라엘 출신으로 북 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하여 말씀을 전했습니다.
    호세아 1장은 여호와 하나님은 선지자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라”는 매우 충격적인 말씀을 전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명령을 하신다면 나는 호세아처럼 순종할 수 있을까요? “음란하다”는 단어는 복수형으로 한 번의 실수가 아니라 계속적으로 타락한 삶을 말합니다. 방탕한 삶을 즐기는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라고 하셨을 때 그 여자 “고멜(Gomer)”을 아내로 맞이하여 첫 아들 “이스르엘(Jezreel)”과 딸 “로루하마(Lpruhamah)” 그리고 둘째 아들 “로암미(Loammi)”를 낳는 선지자의 모습에서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은혜가 내 삶에서 분명하게 새겨져야 하겠습니다.

    “호세아”는 모든 죄인들을 사랑하는 하나님입니다.
    “고멜”은 계속적으로 죄악 된 삶을 즐기는 우리들을 말합니다.
    “고멜”이 낳은 “이스르엘”과 “로루하마”와 “로암미”는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합니다.

    선지자 호세아를 선택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실제적으로 어떻게 나타나고 있었는지 증거 하는 말씀에서 내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새롭게 깨닫는 은혜를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호세아는 "사랑의 선지자"
    호세아는 북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에 대한 예언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북 이스라엘 출신으로 이스라엘에 대해서 예언 활동을 합니다.

    호세아는 하나님, 고멜은 이스라엘, 고멜이 낳은 아들과 딸은 이스라엘 자손들이라고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음란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라고 합니다.

    음란하다는 단어는 복수형으로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행동을 말합니다.
    물론 문자적인 의미는 거리에서 몸을 파는 창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호세아서를 읽어보면 단순하게 몸을 파는 창기라는 해석보다 더 깊은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고메은 "디브라임의 딸"입니다.
    "디브라임"이란 이름은 "무화과 떡"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에게 바치는 제사에 사용하는 떡은 누룩이 없는 무교병입니다.
    무화과 떡은 이방 신전 제사에 바치는 제물입니다.
    그러므로 디브라임의 딸 고멜은 이방 제사 특히 바알을 숭배하는 집안의 딸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나라가 크게 행음함이니라(2절)
    나라가 행음하였다는 것은 나라가 우상 숭배에 깊이 참여하였다는 뜻입니다.
    나라가 음란하다는 것은 결국 우상 숭배를 말합니다.


    솔로몬 왕 이후 이스라엘은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분열합니다.
    남 유다는 유다지파와 베냐민지파가 참여합니다.
    북 이스라엘은 10지파가 참여합니다.

    남 유다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지만 북 이스라엘은 성전이 없으므로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세웁니다.
    모든 북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섬기게 되므로 이런 환경에서 성장한 고멜은 바알을 숭배하는 일에 매우 익숙해졌습니다.
    이런 생활이 곧 음란한 여자라고 하겠습니다.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남 유다 왕국의 멸망에 대한 예언을 전합니다.



    5월 29일(토)
    예레미야애가 5장


    예레미야애가 5장은 알파벳 시가 아니지만 22절이라는 구성을 맞추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긍휼을 기도합니다.
    비록 죄악으로 인하여 유다 왕국과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졌지만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합니다.

    묵상을 위한 주제 : 주께로 돌이키소서(21절)
    성구 : 여호와여 우리를 주(主)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主)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오직 내가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성경의 한 구절의 의미를 알기 위해선 반드시 성경 전체 대의에 따라 해석해야 하며 최소한 한 문단(paragraph) 안에서 어떤 뜻인지 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앞 뒤 구절을 잘 살펴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한 문단인지를 가장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구태여 그런 작업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에는 미리 문단의 구분을 다 해 놓았습니다. 조그마한 동그라미가 한 문단의 시작을 표시하고 있어 한 동그라미에서 다음 동그라미 바로 전 구절까지가 한 문단이 됩니다.

    본문은 21-26까지가 한 문단인데  이 문단의 대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형식적인 제사를 꾸짖고 삶 전체에서 진정한 순종이 참 된 예배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본문 23절은 22절, “대저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하지 아니하고”와 함께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출애굽할 때에 22, 23절을 말했는데도 너희들이 듣지 않았다고 지금 이전에 자신이 하셨던 말씀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출애굽할 때에 “앞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 때에 하나님 백성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율법대로 순종하는 것이지 복만 받으려 형식적인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다”라고 이미 경고했는데도 너희는 내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고 꾸짖는 것입니다.

    따라서 처음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벌써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하신 후에 주신 말씀입니다. 조건부로 어떤 행위를 해야 하나님 백성으로 삼아 주시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들이 형식적 제사를 드리는 까닭이 조건부 하나님으로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사를 드리면 드린 만큼 복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하나님이 형식적 제사를 꾸짖었다는 뜻은 신자의 불순종과 불신앙을 탓한 것인데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당신이 조건부 하나님으로 이해되는 것을 못 참으시고 야단 친 것입니다.





    19절부터 22절을 읽습니다.

    19.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세세에 미치나이다
    20.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오며 우리를 이같이 오래 버리시나이까
    21.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 가겠사오니 우리의 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22.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사오며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특심하시니이다.


    하나님은 죄를 간과하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죄에 대해 물으시고 죄 값을 치르게 하십니다.
    그러기에 죄 무서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갈수록 죄 무서운 줄 모릅니다.
    죄를 가볍게 여기고 도리어 죄를 자랑합니다.
    지금은 죄가 만연되어 있고, 죄의 정도가 도를 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것이 진짜 절망이며 고통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그러므로 죄를 청산해야 하고, 죄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길이 하나님이십니다.

    죄로 인한 유다의 멸망과 멸망으로 인한 유다의 고통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유다는 그 심판과 비참함 속에서 유다를 구해줄 이가 누구인지를 잊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부를 자를 부르고 돌아갈 자리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1절의 첫마디입니다. “여호와여” “주님” 그리고 19절, 21절입니다.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대대에 이르나이다.”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정직하게 우리는 날마다 죄를 짓습니다. 주 안에서 살아도 같은 죄를 반복합니다. 아직 세상에 속한 자들은 대놓고 죄를 짓지만 우리는 남몰래 죄를 짓고 은근히 죄를 짓습니다. 설교를 하고 죄를 짓고 설교를 듣고 죄를 짓습니다. 심지어 설교를 하면서 죄를 짓고 설교를 들으면서 죄를 짓습니다. 세상에 대해 우리의 영향력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세상에 속한 자와 우리의 차이점이 있다면 우리가 죄에 빠졌을 때 우리는 우리가 돌아가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를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 우리 죄를 인정하고 자복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회복하십니다. 또 다시 새로운 기회를 주십니다. 두 번, 세 번 기회를 주시고,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기회를 주십니다. 새로이 인생의 문을 열어주십니다. 복음의 비밀과 가치와 능력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깨달았다면 핑계거리를 찾고 합리화시키려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우리를 다시 받으시고 우리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요한일서1:8-9절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사야1:18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하나님은 우리의 판단과 생각을 넘는 주의 크신 긍휼로 우리를 용서하시고 받으시고 다시 기회를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순간순간 이 주의 긍휼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순종의 길을 가야 합니다.

    기도
    용서 받기에는 턱도 없이 부족한 저희들이지만 우리의 판단과 생각을 넘어 주의 크신 긍휼로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저희를 받아주시고 다시 기회를 주시는 감사합니다. 오늘도 이 주님의 긍휼, 주님의 기다림, 주님의 눈물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죽음을 대면하는 그 순간까지 순종의 길 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예레미야애가 5:1∼22
    ♦ 묵상을 위한 주제 : 주께로 돌이키소서(21절)
    ♦ 성구 : 여호와여 우리를 주(主)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主)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주께로 돌이키소서(Return to the Lord)”

    “예레미애가”를 “에카” 즉 “슬픈 노래”라고 합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유다 나라와 백성들이 죄악의 형벌에 따라 바벨론에 의해서 완전히 무너져버렸을 때 그 자리에서 슬픈 노래를 부르며 여호와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는 것이 예레미야애가 5장입니다.

    오늘날에도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와 같은 마음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간구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 일을 감당할 때 하나님의 은총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기도를 살펴보겠습니다.

    “여호와여 우리의 당한 것을 기억하시고 우리의 수욕을 감찰하옵소서.”(1절)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세세에 미치나이다.”(19절)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오며 우리를 이같이 오래 버리시나이까.”(20절)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21절)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사오며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특심하시니이다.”(22절) 

    이미 무너져버린 나라일지라도 창조주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새롭게 회복시켜 예전의 아름다움을 다시 볼 수 있도록 우리의 날을 새롭게 하여 옛적과 같이 세워주실 것입니다.

    5월 28일(금)
    예레미야애가 4장

    레위기 26:40-42

    레위기는 모세의 율법으로 모세 시대는 BC 1500년
    유다 왕국은 BC 586년에 멸망하였다.
    그러므로 레위기의 말씀은 1,000년 후의 사건을 미리 예견한 것이라고 하겠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신 것입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9)

    회개의 첫 걸음은 자기의 죄와 조상 곧 공동체의 죄를 깨닫고 자복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악과 그들의 조상의 죄악을 자복하고"(레 26:40)
    그리고 마음을 낮추고 죄악의 형벌을 기쁘게 받는 것입니다.

    "그 할례 받지 아니한 그들의 마음이 낮아져서 그들의 죄악의 형벌을 기쁘게 받으면 내가 야곱과 맺은 내 언약과 이삭과 맺은 내 언약을 기억하며 아브라함과 맺은 내 언약을 기억하고 그 땅을 기억하리라"(레 26:40~42)

    자기의 죄로 인한 형벌을 기쁘게 받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시고 긍휼을 베풀기 기뻐하시고 미워하지 아니하시고 사랑하시며 언약을 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죄악의 형벌을 기쁘게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그들의 원수들의 땅에 있을 때에 내가 그들을 내버리지 아니하며 미워하지 아니하며 아주 멸하지 아니하고 그들과 맺은 내 언약을 폐하지 아니하리니 나는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됨이니라"(레 26:43~44)

    바벨론의 침공을 받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바벨론 왕을 보내시고 그 벌을 기쁘게 받으면 반드시 회복이 있으리라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듣기 싫어하고 애굽으로 도망했다가 애굽에서 망하고 말았습니다.

    회개의 기본은 자기 죄를 자복하는 것과 그 형벌을 기꺼이 당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생과 근심과 두려움의 육체의 형벌을 주시는 것은, 그 육체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죄가 그치고 이 후에는 정욕을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

    이러한 육체의 형벌은 우리로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해 주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결국 회개의 마지막은 땅에 있는 지체를 영으로 죽이는 것이고, 그 이후에는 오직 온전한 회복과 은혜와 평강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골 3:5~6)

    세상은 회개를 거부하다가 멸망할 것입니다.

    "하늘의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더라"(계 16:11)

    그러나 우리는 생명 얻는 회개의 길을 가기 원합니다.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행 11:18)

    참으로 우리가 온전한 회개를 이루어서 하나님의 기쁨 되기 원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눅 15:10)



    죄의 형벌

    보편적으로 말하면 죄의 형벌은 죽음이다.
    이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빼앗기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서만 살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존재와 삶을 구별해야 한다.
    하나님께 영원히 버림 받은 자들도 계속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성경적인 의미로 말하는 ‘삶’이 없다.
    이 ‘삶’이 없을 때 그들의 존재는 내적으로 끝없는 모순을 겪게 된다.
    사람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 때 그들의 존재의 목적과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버림 받은 자들은 그들의 존재 목적을 상실한채 존재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원한 내적 갈등 속에 처하게 된다.

    이와 같이 죄는 죽음을 가져왔다.
    모든 죄는 본질상 지독한 죄악이다.
    어떤 죄라도 그 안에는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이 담겨 있다.
    우리는 자신의 죄에 의해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된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의 공의에 의해 스스로 자신에게 죽음을 가져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의 공의에 따르면 죄에 대한 처벌은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즉, 죄가 있는 곳에서는 자동적으로 보응이 발생한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면 우리는 스스로 삶을 버리는 것이 된다.
    이에 우리는 하나님이 율법으로 언약을 세우셨기 때문에 죄에는 반드시 형벌이 따라온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형벌에는 인간의 죄로 인해 자연스럽게 스스로에게 가해하는 면이 있고 또한 하나님 측에서 의도하신 요소, 즉 언약의 공의에 따른 하나님의 진노의 행위가 있다.
    따라서 형벌은 한편으로는 자연적인 보응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정당한 보응이다.

    이 차이를 영원한 형벌과 연결하여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자.
    바깥 어두운 곳이란 하나님께 영원토록 버려진 상태이다.
    그런데 죄인은 그 상태를 ‘스스로’ 원한다.
    그는 하나님과의 친교를 한번도 원치 않았으며, 이에 자기 소원대로 영원히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게 된다.
    이는 자연적인 보응이다.
    한편 성경은 영원한 불을 말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진노가 영원히 타오르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언약의 공의가 훼방된 것에 대해 그분의 영원한 진노를 나타내신다.
    지옥의 고통 역시 하나님의 거절된 사랑의 공의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정당한 보응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죽음을 인간의 몸과 영혼에 발생하는 영원한 죽음으로 이해한다.
    그 죽음은 하나님의 저주를 보여준다.
    근본적으로 저주를 받았다는 사실은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 및 그분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과의 교제를 잃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저주를 받게 되면 모든 것이 우리에게 대항하여 돌아선다.
    따라서 우리는 고립되며 철저하게 외롭게 된다.
    하나님은 시험적 명령을 주시던 때에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라고 저주 및 처벌을 선포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죄로 떨어지자 주께서는 당장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언약의 은혜를 통해 그에게 찾아가셨다.
    따라서 그 이후로 즉시 추가적인 구별이 필요하게 되었다.

    인간이 타락하자 하나님은 형벌을 보류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하나님은 “네가 먹는 날에는”이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심으로써 ‘언제’ 형벌이 집행될지 정확하게 언급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관계의 끈이 죄로 인하여 파괴되었다.
    하나님의 심판에 따라 죽음의 형벌이 시행되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빈말이 된다.
    하지만 하나님은 심판을 집행하는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는 이 세상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로 당장 언약의 회복을 주도하셨다.
    이는 이미 작정되어 있는대로 그리스도가 죽음을 제거하고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친교의 끈은 곧바로 다시 회복되었다.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된 언약 안에서 온 세상과 인류 전체가 구원을 받았다.
    이 말은 모든 각 개인이 구속을 받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을 머리로 한 유기적 연합체인 이 세상이 하나님과 다시 교제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많은 것들이 열매없는 가지처럼 잘려나갈 것이다.
    이에 성경은 “죄인들을 땅에서 소멸하시며 악인들을 다시 있지 못하게 하시리로다”(시 104:35)라고 말한다.

     이 사실이 불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은혜의 언약의 열매인 많은 축복들을 누리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다.
    더욱이 하나님과 회복된 교제의 결과들이 신자들에게 당장 최대한으로 다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이 사실이 뜻하는 것은 인간의 타락 이후에 하나님의 심판은 구별하는 특징을 가진다는 뜻이다.
    즉, 추가적인 구별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세상과 인류 전체는 하나님과의 친교로 되돌아왔다.
    따라서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영생을 얻는다.
    그들에게는 영원한 죽음이 제거되었다.

    이 사실은 “내가 너(뱀, 사단)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창 3:15)는 말씀에서 표현되었다.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셔서 자기에게 영원토록 있게 하시려는 인류와 사탄의 관계를 끊어놓으셨다.
    아담이 타락한 후에 하나님이 더하여 말씀하신 모든 것들은 보응의 의미로서의 형벌이 아니라 은혜의 언약 내에서의 징계였다.
    그 징계는 사람이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는 주님의 말씀이었다.
    즉, 육체의 임시적인 죽음은 하나님의 징계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은 사람은 육체의 죽음이라는 격변을 통과하지 않고는 영원한 영적인 삶으로 변화할 수 없다.
    이는 위협적인 자연적 죽음은 하나님의 보응하시는 심판의 일부이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죽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아야 할 것이다. 이 사실은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여인의 삶과 남자의 삶에 대해 각각 심판을 선포하실 때 나타난다.
    그 심판 안에는 은혜가 있었다.
    그 심판을 통해 사람은 더욱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을 염두하게 될 때 영원한 죽음과 일시적 죽음이 구별되어져야 한다.
         

    그리스도를 통해 온 세상에 은혜가 임한 결과로 인하여 불택자들은 당장에 궁극적인 심판을 받지 않는다. 온 세상을 위한 그리스도의 은혜는 오늘날도 존재하기 때문에 불택자들은 여전히 은혜의 날들 가운데 살고 있다. 하지만 불택자들에게는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의 은혜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여전히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는 연결된 끈이 없다. 그러나 영원한 죽음의 결과들이 당장 그들 안에서 최대한으로 나타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영원한 죽음에 이르렀다고 말하지 않고 영적으로 죽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 각 개인에게 심판을 선언하실 것이다. 우리는 아직 거듭나지 않는 택자들에 대해서도 그들은 아직 영적으로 죽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차이를 분명하게 하면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은 하나님의 언약의 공의에 따른 영원한 죽음인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붙택자들의 영원한 죽음을 통해 그들에게 거절된 하나님의 사랑의 합당한 요구를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진노와 은혜, 심판과 자비가 상호적으로 역사하고 있다. 따라서 같은 사건들의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영향을 나타낸다. 신자에게는 하나님의 징계로, 불택자에게는 영원한 죽음을 알리는 일시적인 심판으로 나타난다.

     

    이 사실은 또한 이 세상에 발생하는 온갖 종류의 재난에 적용된다. 주 여호와 하나님은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7)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 안에도 하나님의 심판이 분명히 담겨 있다. 하지만 이 심판의 완전하고 궁극적인 심판 또한 그 당시 당장 간섭하였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은혜와 부딪히게 된다. 지금도 모든 피조물들은 성령을 통해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기를”(롬 8:21) 부르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계속 나타나고 있다(참, 롬 1:1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질문]

    성경에 많은 부분에서 그리하면 .. 내가 무엇을 하리라라는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그 예로

    - 예레미야 [Jeremiah] 7장 23절
    오직 내가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
    - 야고보서 [James] 4장 10절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 잠언 [Proverbs] 3장 6절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 욥기 [Job] 22장 21절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설교 말씀 가운데에서도
    "성도들이 순종하면 ... ",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 "복을 받으려면..." 라는 말씀들을 많이 듣습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또는 말씀을 듣다 보면, 하나님은 무조건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조건적인 하나님처럼 보여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정말로 조건적인 하나님인가요? 아니면 그리하면(If)의 특별한 뜻이 있는 것인가요?

    [답변]

    많은 성도들이 갖고 있는 공통적인 의문을 잘 지적해 주셨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몇 가지 부분으로 나눠 순차적으로 답변 드리는 것이 이해하시기 좋으실 듯 합니다. 가장 먼저 질문자께서 예로 든 성경 구절의 정확한 해석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신자들이 쉽게 그런 의심을 가지게 되는 원인들을 살펴 보고 각각에  대한 바른 해결책을 제시하여 할 것입니다. 그 후 성경 전체에 드러난 하나님의 품성과 역사하시는 모습이 과연 조건부인가 아닌가를 따져야 하고 마지막으로 그런 하나님에 대한 신자의 올바른 반응은 어떠해야 하는지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각 성경 구절의 바른 해석

    1.1. 예레미야 7:23

    “오직 내가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성경의 한 구절의 의미를 알기 위해선 반드시 성경 전체 대의에 따라 해석해야 하며 최소한 한 문단(paragraph) 안에서 어떤 뜻인지 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앞 뒤 구절을 잘 살펴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한 문단인지를 가장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구태여 그런 작업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에는 미리 문단의 구분을 다 해 놓았습니다.
    조그마한 동그라미가 한 문단의 시작을 표시하고 있어 한 동그라미에서 다음 동그라미 바로 전 구절까지가 한 문단이 됩니다.

    본문은 7:21-26까지가 한 문단인데  이 문단의 대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형식적인 제사를 꾸짖고 삶 전체에서 진정한 순종이 참 된 예배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본문 23절은 22절, “대저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하지 아니하고”와 함께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출애굽할 때에 22, 23절을 말했는데도 너희들이 듣지 않았다고 지금 이전에 자신이 하셨던 말씀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출애굽할 때에 “앞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 때에 하나님 백성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율법대로 순종하는 것이지 복만 받으려 형식적인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다”라고 이미 경고했는데도 너희는 내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고 꾸짖는 것입니다.

    따라서 처음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벌써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하신 후에 주신 말씀입니다.
    조건부로 어떤 행위를 해야 하나님 백성으로 삼아 주시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들이 형식적 제사를 드리는 까닭이 조건부 하나님으로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사를 드리면 드린 만큼 복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하나님이 형식적 제사를 꾸짖었다는 뜻은 신자의 불순종과 불신앙을 탓한 것인데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당신이 조건부 하나님으로 이해되는 것을 못 참으시고 야단 친 것입니다.

    1.2. 야고보서 4: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4장 1-10까지는 세상의 더러운 정욕을 버리고 청결한 겸손으로 주님 앞에 서라는 권면이며 10절은 9절까지 말씀하신 것의 결론 격입니다. 즉 “너희 중에 싸움(신자 중에 다툼)”(1절),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3절),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 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4절),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5절), “하나님께 순복 하고  마귀를 대적”(7절), 등의 구절의 의미를 생각할 때 특별히 신자가 두 마음을 품는 것에 관한 경고입니다.

    따라서 “주 앞에서 낮추라”는 말씀은 단순히 도덕적 겸손이나, 주님 앞에서 종교적 경배만을 요구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세상을 쫓지 말고, 두 마음을 품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만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정욕으로 쓸려고 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100% 순종하려는 뜻으로 구하라는 것입니다.  

    신자의 참 겸손은 인간 관계에서의 온유한 태도나 도덕적인 선행으로만 판단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 완전히 항복하여 더 이상 세상의 것들로 흔들리지 않는 온전한 믿음이 겸손입니다. 세상의 힘을 더 이상 의지하지 않는다면 드러날 것은 하나님의 능력뿐입니다. 그런 자에게는 당연히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는 결과가 따르게 됩니다.  

    1.3. 잠언 3: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이 구절은 구체적인 설명이 별 달리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범사에 그를 인정하지 않는 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를 하나님이 지도하실 리가 없습니다. 불신자들에게도 하나님은 일반적인 은총, 즉 때에 따라 곡식을 추수하도록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리십니다. 신자의 농장에만 비가 오고 바로 곁에 있는 불신자의 과수원에는 비가 오지 않는 법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불신자에게 구체적으로 갈 길을 지도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신자에게는  길을 지도하십니다. 여기서 지도는 단순히 안내자의 역할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앞에 놓인 장애물을 제거하며 정한 목적지까지 데려 가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문제는 신자도 어떤 때는 의심과 불신앙에 넘어가 하나님을 범사에 완전히 인정하지 못할 때도 있는데  그 때 하나님이 화가 나 신자를 지도하지 않을 수 있는가 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가끔 신자의 연단을 위해서 신자가 믿음이 약해질 때에 지도하지 않거나, 가만히 침묵하거나,  심지어 더 큰 환난을 당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이 신자가 피할 길을 예비해 놓지 않고 또  합력해서 선이 되는  결과로 이끌지 않는 적은 없습니다.  

    혹시 신자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지도는 전과 다름 없이 항상 동일합니다. 그러나 범사에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자가 그것을 제대로 못 알아 차리고 그 지도를 따르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1.4. 욥기 22:21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욥기가 대부분의 신자에게는 해석하기 그리 쉽지 않습니다. 욥기만은 반드시 내용의 흐름을 알고 보셔야 합니다. 욥기는 원인 모를 고통에 관한 주제에 관해 욥과 그 세 친구 발닷, 엘리바스, 소발 간에 논쟁을 벌린 것이 주 내용입니다.

    세 친구의 주장은 하나님이 죄 없는 자에게 고통을 줄 리가 없으니 욥더러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님에게 빌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인간이 하기에 따라 하나님은 축복과 징계를 비례해서 주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욥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입술로도 범죄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하고 자기가 겪는 고통이 하나님의 심판이 아님을 믿지만 그 원인을 몰라 괴로워 하며 심지어 하나님께 불만을 토로하기도 합니다. 마지막 부분에 엘리후가 등장하여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은 하나님의 일을 도저히 알 수 없으므로 그 분께 완전히 순종하는 것만이 인간의 도리라고 설파하자 욥 또한 이를 수긍하고 다시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그래서 욥기는 가장 먼저 누가 한 말인가, 그가 갖는 사상이 무엇인가, 욥이 한 말이라면 엘리후 출현 전에 한 말인가 후에 한 말인가 등을 잘 구분해서 볼 줄 아셔야 합니다. 부분적으로 볼 때는 그 말씀이 합당하고 은혜가 되는 것 같이 보입니다만  누가 한 말인가를 먼저 구별하지 않고 보면  신학적으로 잘못된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인 양 착각하게 됩니다.

    제일 대표적인 말씀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8:7) 입니다. 이 말은 욥의 친구 발닷이 한 말로 그는 조건부 하나님을 믿는 자입니다. 바로 앞의 6절(청결하고 정직하면 정녕 너를 돌아 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과 연결 해 보면 이 말의 의미는 착하게 살고 열심히 잘 믿으면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또 4절에선 “네 자녀들이 주께 득죄하였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붙이셨나니’라고 했습니다. 죄 지으면 벌 받고, 착하게 살면 상 받는다는 사상에 의거해서 한 말입니다.  성경 전체적으로나 욥기의 사상으로 보아도 틀린 말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믿음이 좋으면 결과적으로  끝에 가서는  하나님의 은혜(현실적인 것보다 영적인 축복의 모습이 대부분이지만)가 넘침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 말씀을 신자가 그 상태에 이를 것을 소원하고 또 남도 그렇게 되길 축복해준다는 의미로 따로 떼어서 이해한다면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성경에  쓰여진 원래 의미는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그저 잘 믿으면 하나님이 나중에 현실의 커다란 축복을 주시는 것으로, 특히 비즈니스 하시는 분들이 적게 시작해도 나중에는 크게 번창하게 되는 것을 하나님이 보장하는 말씀처럼 인용되어지고 있으니 큰 일입니다. 신실한 신자의 기업도 얼마든지 부도 날 수 있습니다.  

    지금 예로 든 욥 22:21는 욥의 친구 엘리바스가 한 말입니다. 이 또한  권선징악적인 조건부 하나님을 믿는 사상에서 나온 말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별로 하자가 없는 말인 것 같지만 사실은 틀린 말입니다. 하나님과 화목 한다고 현실적으로 꼭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닌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욥기 전체 주제는 오히려 조건부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 성경을 해석하는 관점

    예로 든 네 가지의 해석을 간략하게 살펴 보았습니다만 각각 그 의미가 다른 것을 확인했습니다. 문법적으로 같은 표현이라도 전체 줄거리와 앞뒤 문맥에 따라 얼마든지 의미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왜 일반 평신도들이 오해하기 좋게  “그리하면 … 하리라”고 표현했는가 그 이유는 아래 몇 가지로 들 수 있습니다.

    2.1. 한글의 모호성

    한글은 문법적으로 성경에 기록된 히브리, 헬라어, 나아가 영어 같은 셈족 계통의 언어에 비해 정교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 말로 성경을 번역하는 과정에 원어의 뜻이 제대로 전달 되지 못하고 애매하게  표현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의 예레미야 7:23만 보아도 원어적으로는 “Obey my voice, and I will be your God”으로 명령과 결과(Do…, and…)를 나타내는 뜻이지 조건과 상벌(If ….then…)의 의미가 아닙니다.

    여전히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지만 구체적으로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회사 야유회를 가는 데 “내일 어느 공원에 몇 시까지 집합하시오. 그러면 갈비 파티를 즐길 수 있을 것이요”라고 하면 그 구조는 명령과 결과입니다. 그러나 야유회와 상관 없이 “내일 공원에 몇 시 까지 나오는 자에게는 갈비를 줄 것이요”라고 하면 조건과 상벌입니다.

    전자는 회사 직원이 100명이면 미리 100명 분의 갈비를 다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공원에 지정된 시간에 갔기 때문에 갈비를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회사 직원이라는 신분 때문에 누구나 갈비를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후자는 공원에 몇 명이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갈비를 미리 준비 해 놓은 것이 아닙니다. 공원에 정시에 도착한 것을 확인 한 후에야 도착한 사람 수만큼  갈비를 준비하거나 나중에 집으로  보내 주는 경우입니다. 갈비를 먹을 수 있는 근거는 공원에 정시에 도착해야 한다는 행위의 조건을 충족시켰기 때문입니다.    

    대조해서 설명을 듣고 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 말 표현 법은 이 둘을 정확하게 구분하지 못합니다. 모든 표현이  “그리하면… 하리라”로 밖에 되지 못합니다. 따라서 성경 해석에 있어 성경 전체 사상과 앞 뒤 문맥에 비추어 해석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2..2 하나님과 아버지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쓰여진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한 책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밝히되 인간의 눈 높이에 맞추어 쓰여졌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지정의 범위 안에서 이해할 수 있는 표현법과 문법과 형식이 동원된 것입니다.

    완전한 비유는 아니지만 그나마 가장 비슷한 경우를 들자면 아버지가 어린 자식과 대화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대해 먼 장래의 계획을 갖고 자식과는 비교가 안 되는 세상 돌아가는 형편과 모든 지식 경험을 갖고 자식에게 가장 유익한 길을 추구하고 있지만 미리 그것을 다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식의 수준에 낮추어 말합니다.

    서너 살 짜리 아이에게 아빠 구두 닦으면 백원 주겠다고 합니다. 아빠로선 구두를 닦고자 하는 목적도 아니요, 아이에게 백원씩 모으게 해서 돈 벌게 해주겠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직 대가 없는 돈은 없으며, 열심히 일한 다음에는 보상이 돌아 오며, 또  적은 일이라도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고등학교 3학년 아이에게 대학 들어가면 차 사 줄게 하면 차 사주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대학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혹시 대학 떨어졌더라도 정말 최선을 다해 공부했다면 떨어져도 차를 사 줄 수 있고, 반면에 맨 날 놀다가 막판에 보다 못한 아버지가 족집게 고액 과외를 부쳐 어떻게 삼류대학 최고 낮은 과를 들어갔다면 안 사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로선 두 경우 다 “그리하면 …하리라”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만약에 서너 살 아이에게 돈을 벌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고 하면 아직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또 고 3아이에게 떨어져도 최선을 다하면 차 사 줄 수 있다라고 하면 겉으로 최선을 다하는 시늉만 낼 수도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성경이 아무리 표현법이 정확한 언어로 쓰여졌다고 해도 하나님으로선 일부러 그렇게 말해야 합니다. 절대 표현법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나태함과 가식으로 드러날 수 있는 인간의 죄성  때문에 하나님은 그런 표현을 자주 쓰십니다.

    2.3. 구원(칭의)과 성화

    성경은 원칙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보도록 의도된 책입니다. 어거스틴의 말 대로 알기 위해 믿는 것이지 믿기 위해 아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열심히 공부해 깨달아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이 간섭하여 우리의 영혼이 거듭나야 합니다. 그 말은 성경의 거의 대부분이 이미 신자가 된 것을 전제로 해서 말씀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대신에 구원의 첫 단계 거듭나는 하나님의 은혜에 관해 말하고 있는 부분은 신약성경은 로마서 1-11장을 대표로 들 수 있고, 구약은 이사야서로 대표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는 부분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구원에 관한 설명은 다 무조건적인 용서와 사랑으로 하나님 쪽에서 능동적으로 주신 선물이자 인간쪽에선 수동적으로 받은 은혜의 형식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롬3:24)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 (롬8:28),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갈2:16),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사43:25),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사55:1)

    그러나 이런 구절들은 성경 전체로 보면 얼마되지 않습니다. 그 외는 대개가 구원 받은 백성, 하나님을 아는 백성으로 하여금 거룩과 의와 빛의 삶으로 인도하시기 위한 말씀이 주를 이룹니다. 성화는 성도가 의지적 결단과 훈련이 요구되는 부분입니다. 성도가 책임지고 피 흘리기 까지 싸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따라서 성경에는 신자의 헌신을 요구하는 명령형의 표현이 많고 또 그런 성화를 이뤄 나갈 때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축복이 자연적인 결과로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2.4. 행위와 신분  

    성화를 이루는 것이 신자의 의무이자 책임인 것은 분명하지만 기독교의 성화는 다른 종교의 도덕적 훈련과는 그 차원이 전혀 다릅니다. 모든 종교가 행위에 의한 구원을 지향하고 있기에 의롭거나 죄악 된 행위 하나하나와 그 신의 상벌 즉 구원과 심판이 직접적으로 연관됩니다. 기독교 식의 칭의와 성화의 구분이 없습니다. 모든 신앙 활동이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행위를 바로 잡는 데만 초점이 모아지고 또 죽은 후라야 그 결산이 가능합니다.

    기독교의 구원관은 다릅니다.  전적으로 부패된 인간이 그렇게 해선 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자 아무도 없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의롭다 하심을 입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바꾸면 다른 모든 종교는 인간이 죄악 된 행동을 했기에 죄인이 되었다고 보므로 그 행동을 바로 잡는 것이 구원이라면, 기독교는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에 죄악 된 행위를 한다고 믿으므로 그 인간 자체를 먼저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중생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것이 구원의 일단계이자 근거입니다. 중생이 없으면 인간 스스로의 도덕 훈련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 신자가 성화를 이뤄나가는 모습도 다른 종교와 다릅니다. 거듭난 새 생명은 이제 하나님 안에 신분, 소속, 위치가 바뀐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 보혈로 영혼이 먼저 깨끗하게 되는 것으로 성화를 이뤄나갑니다. 인간 혼자의 의지적 노력과 훈련만으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성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혼자서 죄를 씻거나 이겨낼 수 없으니 성령님께서 거룩한 능력으로 함께 해주시고 죄를 이길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면 싸워 나가야 합니다. 얼마나 내 의지로 나쁜 짓을 참아 내느냐가 아니라  매일 십자가로 얼마나 가까이 가느냐의 싸움입니다.      

    따라서 성경에 “그리하면 ….되리라”는 표현도 자꾸 행위적 관점에서만  해석해선 안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한다면, 성령의 도우심을 구한다면 은혜로 의로워질 뿐만 아니라, 포도나무에 달려 있기 때문에 자연히 그런 선한 행위를 하려는 열심과 소원과 능력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역으로 하나님 쪽에서 그런 행동에 관한 명령을 하시는 이유도 네가 분명히 내 안에 머물러 있다면 당연히 그런 선한 행위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품 안에 있는 신자에게 악한 세력이 접근 못하도록 막아 주시는 축복을 미리 준비해 놓고  있는 것이지 그 행위를 심사해서 따로 상벌을 준비 해 놓은 것이 아닙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와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닙니다. 구약시대에도 원리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시1:1-3)

    복 있는 자가 율법을 지킨 대가로 축복을 받기를 원한다고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율법 자체를 즐거워 한다고 했습니다. 시냇가에 심긴 나무와 같다고 했습니다. 나무가 시냇가로 일부러 옮겨 오거나, 나무가 자꾸  더 크게 더 많이 열매 맺자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시냇가에 심겨져 있기에 열매가 많이 맺힌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선한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은 그 신분과 소속이 바뀌었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명령도 그 바뀐 신분과 위치라면 당연히 그런 선한 행위를 해야 하지 않느냐는 뜻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입니다.

    2.5. 율법을 주신 목적

    신자들이 성경의 하나님이 조건부인가 아닌가라는 문제를 이해함에 있어  신약에선 별 문제가 없는데 구약에서 잘못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까닭은 율법을 주신 목적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구원의 방편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율법으로는 오직 죄를 깨달음을 알 뿐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롬3:20),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갈3:24) 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율법을 주셨을 때의 상황을 보면 더 확실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어린 양의 피로 출애굽시켜 바로의 압제로부터 구원해 내었고 홍해를 건넘으로 물 세례를 거쳐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구약의 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율법을 받은 것은 그 후입니다.  율법을 지켜야 구원해 주고 복을 주는 조건부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 명하신 바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행할 것이니…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얻고 네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젓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 수효가 심히 번성하리라.”(신6:1, 3)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을 스스로 밝힌 말씀입니다. 애굽에서 건져낸 자기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지킬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고 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과는 아무 상관 없이 노예의 땅에서 건져 내시고 젓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여 보내셨습니다.  

    율법은 가나안 땅에 들어 와서 지킬 규칙입니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공동체로 살 때에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 하려는 사랑과 축복의 약속이 율법입니다. 알기 쉽게  예를 들면 체육관에 들어와 운동하려면 면 티셔츠와 짧은 반 바지를 입고 두꺼운 양말에 운동화를 신으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야 운동하기 편하지 신사복에 넥타이 매고 구두 신고 하면 운동은커녕 자칫 다칩니다.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이 그 지킨 행위를 심사해서 비례해서 복을 준다고 믿는 것을 율법주의라고 합니다. 기독교를 제외한 대부분의 종교가 그런 신앙관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율법 다운 율법을 하나님께 직접 받은 기독교가 오히려 율법주의와는 거리가 멉니다. 율법을 지켜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지키는 것 자체가 복이자, 지키면 복은 자동적으로 보장되어 있습니다. 구원에서 뿐 아니라 성화의 단계에서도 하나님은 전혀 율법적이지 않습니다. 구약에서도 조건부 하나님은 찾아 볼 수 없는데 율법이라는 용어와 ‘그리하면 …하리라’는 표현이 성경에 너무 많다 보니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3. 성경 속의 하나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되 특별히 예수님에 관한 책입니다. 구약은 왜 예수님이 오셔야만 하는가, 오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를 설명해 놓은 책이고 신약은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과 그 의미와 결과를 적어 놓은 책입니다. 인간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조건, 전제, 방법을 설명해 놓은 매뉴얼이 아닙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5:39)

    그 말은 성경의 전체 주제가 예수님이요 그 해석의 기준과 힌트 또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의 말씀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으로 풀어 봐야 합니다. 그것은 잘 아시는 대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사랑을 확증”(롬5:8)하신 것입니다. 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신”(요일4:10)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라  인간을 대할 때에 자격과  조건을 절대  따지지 않습니다.  

    구약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과 견줄만한 출애굽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피로 양을 먹을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12:7,13)

    이스라엘 백성들도 죽음을 당해 마땅한 죄인들이었습니다. 애굽에서 불쌍하게 종살이 했다고 살려 주었고 바로와 애굽 백성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포악하게 굴었기에 죽인 것이 아닙니다. 어린 양 예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구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 받는데 한 일이라고는 어린 양을 자기 식구 숫자(모든 자가 다 죽어 마땅하다는 뜻)에 맞추어 잡고, 피를 문에 가로 세로로 칠하고(십자가를 상징), 집 안에 모여 죽음의 사자가 지나갈 때까지 가만히 있은 것 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도 윤리적, 종교적으로 의인과 죄인의 구별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래도 그들 전부를 살려 주신 것입니다. 조건부 하나님이 아니고 십자가 예수님의 아버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여호와 성부 하나님이시든, 나사렛 예수 성자 하나님이시든, 오순절 마가 다락방의 성령 하나님이시든 동일하신 분입니다. 처음이자 끝까지 다르지 않습니다. 만약에 구약에 조건부 하나님이었다 신약에 와서 무조건 적인 하나님으로 바뀌었다면 그는 이미 하나님이 아닙니다. 나아가 앞으로 또 어떻게 변할 지 인간에 불과한 우리로선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변한다는 것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며 하나님으로서 자격이 없다는 뜻입니다.

    4. 신자의 성경 말씀을 대하는 태도

    대략적으로 우리가 성경 말씀을 오해하게 되는 이유들을 알아 봤습니다. 그럼 이제 성도가 말씀을 읽을 때에 가장 신경 써야 하는 점은 이미 언급된 가운데 다 나왔습니다. 간략하게 정리해 보면

    -반드시 성경 전체의 주제인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해석하되,
    -각 성경 권별로 각기 다른 중심 사상과 배경이 있으니 그것을 아셔야 하고 (예의 욥기 같은 경우 해석의 오류를 막을 수 있음),
    -앞 뒤 문맥 최소한 한 문단 안에서의 뜻을 살펴야 하며,
    -하나님이 우리 눈 높이에 맞추어서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신자가 되기 전 칭의와 중생에 관한 말씀인지 아니면 신자가 된 후 성화와 훈련에 관한 말씀인지 구분해야 하며,
    -마찬가지로 성도에게 하는 말씀인지 불신자에 관한  말씀인지도 분별하셔야 하며,
    -하나님은 신자에게 도덕적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를 주 안에서 바꾸고 항상 주님과 연합하는 것을 원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며,
    -도덕적 명령과 요구도 그 준행 여부와 상벌이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사는 선한 삶 자체가 축복이요 권세임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에서 모호한 표현이 있거나 의심이 들면 항상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 진리에 나타난 사랑과 대비해 조금이라도 모순되는 생각, 이해, 해석이 나오면 일단 그것은 잘못이라고 보셔야 합니다. 말씀을 붙들고 의심을 하고 자꾸 따지는 것은 오히려 좋습니다. 대신에 그 때마다 반드시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셔야 합니다. 성경은 절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닙니다.  마음 문을 열고 하나님에게 말씀해 주시고 이해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한 후에 읽으시면 성령의 조명으로 살아 있는 생생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5월 26일(수)
    예레미야애가 2장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예레미야애가 2:1∼22
    ♦ 묵상을 위한 주제 : 여호와의 묵시(9절)
    ♦ 성구 : 성문(城門)이 땅에 묻히며 빗장이 꺾여 훼파(毁破)되고 왕(王)과 방백(方伯)들이 율법(律法) 없는 열방(列邦) 가운데 있으며 그 선지자(先知者)들은 여호와의 묵시(黙示)를 받지 못하는도다.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묵시를 받지 못합니다.
    묵시를 받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묵시 곧 여호와의 계시가 없으면 백성들이 방자하게 행동합니다(잠 29:18).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이 영적 기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이 영적 기갈임에도 불구하고 먹고살만한 환경이 되었기에 영원한 생명의 양식에는 관심이 없고 세상의 썩어질 것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에 대하여 선지자 아모스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외쳤습니다(8:11).

    북 이스라엘에 대한 선지자의 책망입니다만 남 유다도 오늘 우리도 영적 기갈을 느끼지도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슬픈 노래를 불러야 할 시대가 아닐까요?

    선지자 예레미야와 같이 유다 왕국의 무너짐을 통하여 슬픈 노래를 불렀던 것처럼 팬데믹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영적 기갈에 대한 안타까움과 슬픈 마음으로 묵시를 사모하는 믿음을 회복하여 무너지는 것들을 바르게 세워갈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굳게 일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어려운 일 당할 때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재림을 준비하라!

    초림에 대한 약속 : 구약 /  456회
    재림에 대한 예언 : 신구약 / 1,518회
    456회나 되는 예언도 성취되었는데 하물며 1,518회나 되는 예언이 안 이루어지겠습니까?






    11-12절,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끊어지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딸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 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기절함이로다 그들이 성읍 길거리에서 상한 자처럼 기절하여 그의 어머니들의 품에서 혼이 떠날 때에 어머니들에게 이르기를 곡식과 포도주가 어디 있느냐 하도다

    ‘부아(허파=폐)가 치밀어 오르다’와 ‘간이 배 밖에 나왔다’ 등 우리말도 신체의 장기로 감정을 표현하는데,
    대부분의 언어에서 신체의 장기로 감정을 표현합니다.

    히브리어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나라를 잃은 슬픔과 참담한 심경을 장기를 예로 들어 3중적으로 강조해서 표현합니다.

    첫째는 ‘내 눈이 상하며’

    18절에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를 쉬게 하지 말지어다”라고 증거합니다.

    생선이나 고기를 물에 담가 놓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물이 흐려지고 생선이나 고기가 부패할 것입니다.
    그처럼 예레미야 선지자는 너무 많이 운 것이 마치 눈동자를 물에 담가놓은 것과 같아서 눈이 상하였다고 합니다.

    둘째는 ‘창자가 끊어지며’

    우리말에도 같은 단어가 있습니다.
    ‘단장(斷腸)’입니다.

    중국 동진의 환공이 촉나라를 정벌하러가다가 양자강에서 새끼원숭이 한 마리를 잡아 배에 싣고 갔는데, 어미원숭이가 울부짖으며 100여리(약 40㎞)를 따라왔다고 합니다. 배가 정박했을 때 배로 뛰어오른 원숭이는 그대로 숨졌는데, 환공이 어미원숭이 배를 갈라보니 창자가 마디마디 끊어져 있었다는 고사에서 전해진 말입니다.

    옛 가요, ‘단장의 미아리고개’도 같은 의미입니다.

    셋째는 ‘간이 땅에 쏟아졌다’

    히브리인들에게 ‘간’은 ‘격한 감정’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간이 쏟아졌다는 것은 극한의 슬픔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나라 잃은 슬픔은 이러한 표현(눈이 상함, 창자가 끊어짐, 간아 쏟아짐)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더 나아가 어린 아이들이 어머니의 품에서 ‘곡식과 포도주(먹을 것)’가 없느냐며 굶어 죽는 상황입니다. 실제로 시드기야왕 통지 9년인 B.C. 588년부터 1년6개월 동안 예루살렘은 포위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서울 시내에 1년 6개월 동안 먹을 수 있는 것이 외부로부터 아무 것도 공급되지 않는다면, 참극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물며 2500년 전이겠습니까?





    5월 25일(화)
    예레미야애가 1장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예레미야애가 1:1∼22
    ♦ 묵상을 위한 주제 : 불결한 자(8절)
    ♦ 성구 :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犯罪)하므로 불결(不潔)한 자(者) 같이 되니 전(前)에 높이던 모든 자(者)가 그 적신(赤身)을 보고 업신여김이여 저가 탄식(歎息)하며 물러가도다.

    예레미야애가를 “답관체((踏冠體. acrostic) 시(詩)”라고 합니다.
    답관체(아크로스틱)란 “히브리 문학의 독특한 표현 방법”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한글의 자음 “기역(ㄱ), 니은(ㄴ), 디귿(ㄷ), 리을(ㄹ)”을 문장의 첫 문자로 사용하여 표현하는 것입니다.

    “가지 마세요,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싫어한다 해도

    내가있지 않습니까? 만일에 지금

    당신이 나를 멀리 떠난다하면 우리가 날마다 보아왔던

    라일락의 향기가 멀리 떠나버릴 것입니다.”


    한글 자음 가(기역), 내(니은), 당(디귿), 라(리을)처럼 답관체 시는 히브리어 알파벳을 사용하여 표현합니다.

    히브리어 알파벳이 모두 22자입니다.

    따라서 예레미야애가 1장, 2장, 4장은 22절로 마감합니다.

    다만 3장은 알파벳 순서를 따르며 3절씩 기록하므로 66절이 됩니다.

    예레미야애가 이외에 성경에서 답관체로 표현한 말씀들을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시편 25, 34, 37, 111, 112, 119, 145, 잠언 31장).


    예레미야애가 1장은 예루살렘에 대한 탄식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루살렘은 성지(聖地)와 같은 곳이었지요.

    그러나 바벨론에 의해서 무너져버린 후에는 황무지(荒蕪地)처럼 변했습니다.

    더구나 바벨론 왕의 정책에 따라 가장 가난한 농사짓는 사람들을 남겨두고 그들에게 땅을 분배한 후 농사를 짓게 하므로 화려하던 거리가 쓸쓸한 곳이 되었습니다.

    화려하고 왕성하던 유다 왕국이 무너져버린 것처럼 오늘날도 번성하던 나라가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있을 때 잘 하라!”는 우스개 말처럼 번성할 때 더 잘할 수 있는 믿음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영원한 화려함과 부흥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변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진리의 말씀은 변함이 없습니다.
    날마다 진리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부흥과 성장을 후손들이 계속 이어갈 수 있도록 가르치고 깨우쳐야 하겠습니다.


    BC 586년 철옹성 같았던 예루살렘은 바벨론 임금 느부갓네살에 의해 성벽은 무너져 내렸고, 성전은 불에 타서 파괴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의 함락으로 하나님의 선민임을 자처했던 이스라엘은 멸망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는 유다 왕국의 멸망을 눈물로 읊은 다섯 개의 시를 모은 ‘슬픈 노래(哀歌)’입니다.

    예레미야는 남 유다의 멸망과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까지 모두 목격하였기에, 당시를 돌아보며 생생한 묘사로 절망적인 애가(哀歌)를 지어 부를 수 있었습니다.

    하님이 무능한 신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스스로 지은 죄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초래했다고 진단했습니다.
    그는 조국의 멸망 앞에서 탄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고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그는 대재난 앞에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백성들에게 알리고, 앞으로 이스라엘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는 깊은 탄식으로 시작했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고백하며(3:22-24),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갈 것을 촉구했습니다(5:21-22).


    예레미야 애가는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애가'라는 시문학적 장르에 다섯 개의 균형잡힌 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두 가지 특징
    첫째, 66절로 구성된 3장을 제외한 나머지 장이 모두 22절
    둘째, 5장을 제외한 나머지 장의 22절은 히브리 알파벳 22자의 순서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3장이 66절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도 세절씩 같은 히브리어 자모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5장의 경우는 알파벳 순서로 배열되어 있지는 않지만 앞의 시들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 22개 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가 이같이 균형 잡힌 시의 구조를 띠고 있다는 것은 기억과 암송을 용이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스라엘에는 크게 다섯 개의 축제가 있고, 그 축제일 마다 읽는 책이 있습니다.

    유대인의 공식 절기에 읽혀지던 다섯 개의 책을 “두루마리(五軸)”를 의미하는 “메길로트(Megillot)”라고 합니다.

    1. 유월절 : 아가서
    2. 칠칠절 : 룻기
    3. 초막절 : 전도서
    4. 부림절 : 에스더서
    5. 예루살렘 멸망일 : 예레미야 애가

    유대교 예배에서는 아브월(7, 8월) 9일에 주전 586년 성전파괴 사건과 주후 70년 로마제국에 제2성전이 파괴된 사건을 기념하면서
    예레미야 애가를 읽습니다.

    1장과 2장은 백성의 불행과 예루살렘의 폐허 위에서 절망
    3장에서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예언자는 슬픔과 희망을 바라보며
    4장에서는 선지자의 예언
    5장에서는 이스라엘 회복을 애원하는 기도로 하나님 앞에서 결단

    본문 분석
    (1~9a) 멸망 후의 예루살렘의 모습

    1a. 슬프다 이 성이여

    슬프다’로 해석된 감탄사 ‘에카(ekha)’는 비극적인 상황을 묘사할 때 사용합니다.
    깊이 탄식하며 “아! 어찌할꼬”. 예루살렘이 처한 처절한 상황 앞에서 그는 가슴 속 깊숙이에서 복받쳐 오르는 비탄 속에서 깊이 탄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b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이 되었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 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이자,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거룩한 장소로 절기를 지키러 오는 사람들로 항상 붐볐지만, 이제는 아무도 찾지 않아 사막처럼 적막한 성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세기의 문명을 주도하던 강대국들이 주변에 있었음에도 그들에 비하면 보잘 것 없이 작디 작은 이스라엘은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었습니다. 모두가 주님의 은혜 덕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남편과 자식도 잃고, 법적으로 보호받지 못한 처량한 과부와 같이 되었습니다. 사랑받으며 곱게 자란 일국의 공주와 같이 귀한 신분이었지만, 이제 남의 집에 팔려간 시녀와 같이 비천한 신분으로 전락해버렸습니다.

    바벨론은 3차에 걸친 집요한 공격을 하면서 유다 왕과 그 가족은 물론 신하들과 백성들을 죄다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3차 공격으로 성이 함락되었을 때 시드기야 왕은 야간도주하다가 잡혀 두 눈이 뽑혀 죽는 날까지 옥에 있었습니다.
    3절에서 7절은 이러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영광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과부 또는 시녀로 전락한 이스라엘은 주변국들의 조소거리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낮아질래야 낮아질 수 없는 나락에 떨어졌지만, 아무도 이스라엘을 위로하지 않았고, 오히려 비웃고 있습니다. 5절에 의하면 “대적들이 우두머리가 되었고, 원수들이 형통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악이 형통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악이 즉 대적들이 흥하게 되었고 이스라엘의 영광이 사라진 이유를 예레미야는 “그의 죄가 많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곤고하게 하셨다“(5b),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함으로 조소거리가 되었다“(8a)고 진단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대적들과 원수들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우두머리가 되고, 형통하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을 벌하시기 위해 그들을 흥하게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은 공평한가요? 불공평한가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과연 공평한가요? 아무도 공평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가장 문명이 발전된 시대가 되었고, 민주주의가 깊이 뿌리를 내렸다 할지라도 세상은 여전히 불공평합니다.
    이 시대 역시 악이 선을 억누르고, 악이 득세하고 있지 않습니까!
    권력과 힘을 가진 사람과 집단, 사회와 국가가 자신들의 뜻대로 좌지우지 하고 있습니다.
    신앙인으로 하나님을 향해 이 시대의 불공평을 외칠 때도 있지 않습니까!

    세상이 불공평한 이유는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이 사회는 죄인인 인간들로 구성되어있기 때문에 불공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같은 현상을 신앙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우리의 죄로 인함입니다. 사회 법과 교계 법을 무시하고 자신과 교회는 치외법권에 있는 것으로 여기는 목사나 교회들이 몰락하기는 커녕 자신들의 세력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이슈를 일으키고 있는 한 대형교회는 얼마 전에 우리나라 정계, 재계, 교계의 유력인사들을 물론 해외의 석학까지도 동원해서 호화로운 헌당식을 했습니다. 기사를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헤롯대왕이 건축한 당대 최고 규모였던 헤롯성전이 오버랩 되었습니다. 엄청난 규모와 호화로움을 자랑한 그 성전을 바라보시며 주님은 비통해하셨습니다. 결국 성전이 완공된지 7년 만에 로마군에 의해 초토화 되어 버렸고, 현재 그 흔적만이 남아 있습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거나 불평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가 생명나무이신 주님께 제대로 붙어있는지를 돌아보고, 주님께 내 죄와 이 시대의 죄악을 탄식하며 눈물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2. 이 도성이 여인처럼 밤새도록 서러워 통곡하니, 뺨에 눈물이 마를 날 없고, 예전에 이 여인을 사랑하던 남자 가운데 그를 위로하여 주는 남자가 하나도 없으니, 친구는 모두 그를 배반하여 원수가 되었는가! (표준새번역)

    예루살렘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했던 예레미야였지만, 막상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 예루살렘과 유다의 처참한 모습에 그는 기가 막혀 밤새도록 통곡했고, 낮에도 눈물이 마를 날이 없다고 합니다. 그는 2:1, 4:1에서 계속 ‘에카’만 외치며 통곡했습니다.

    (9b ~11) 하나님을 향한 간구
    조국의 멸망을 바라보며 탄식하며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던 예레미야는 그대로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그는 바벨론이 거룩한 성전을 약탈한 사건을 하나님께 고하면서, 고통 속에 있는 유다를 위해 간구합니다.

    9b, 주님, 원수들이 우쭐댑니다. 나의 이 고통을 살펴 주십시오 (표준새번역)
    11, 예루살렘 온 백성이 탄식하며, 먹을거리를 찾습니다. 목숨을 이으려고, 패물을 주고서 먹을거리를 바꿉니다. 주님, 이 비천한 신세를 살펴 주십시오 (표준새번역)

    바벨론이 3차로 침공해서 예루살렘을 포위해있는 동안 성 안에서는 기근이 극심하여 자녀를 잡아먹을 정도로 비극적인 참상이 벌어졌었습니다(애 2:20, 4:10, 사 9:20, 겔 5:10). 그는 아직도 극심한 식량란을 겪고 있는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까? 나를 위해, 내 입을 위해, 내 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만을 위한 기도, 우리만을 위한 기도에 국한되어 있다면, 우리의 신앙은 성장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신앙은 이기적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새벽기도를 시작하면서 내 기도를 먼저 하지 않습니다. 오늘 같은 경우 우선적으로 미국과 중국의 갈등, 홍콩의 민주화 물결 등 세계를 위해 기도하고, 개인적인 기도는 가장 마지막에 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기도가 이타적일 때 우리의 신앙이 이타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이타적으로 했다면, 이를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어제 주일은 '사회봉사주일'로 성도님들이 잘 입지 않는 깨끗한 의료나 사용하지 않는 중고물품을 교회로 가져왔습니다. 교회에서 마포구를 넘어선 우리 이웃과 선교지를 섬기기 위해 매분기별로 '사회봉사주일'을 실시하고 있는 이유 역시 기도에 멈춘 신앙인이 아니라, 성도님들 모두가 기도를 행동으로 옮김으로 생명이신 주님의 열매를 맺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져 가기 위해서입니다.

    (12~19) 세상을 향한 외침
    예레미야는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 즉 주변 모든 나라들과 백성들을 향해 이스라엘이 이같이 비천하게 전락하게 된 이유에 대해 설명해줍니다.

    14.  내 죄악의 멍에를 그의 손으로 묶고 얽어 내 목에 올리사 내 힘을 피곤하게 하셨음이여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자의 손에 주께서 나를 넘기셨도다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해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자, 즉 바벨론의 손에 이스라엘을 넘겼고, 그 결과 이스라엘 영토 안에 청년, 처녀들의 씨가 마를 정도로 피폐하게 되었다고 증언합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했음에도 예레미야는 바벨론은 물론 주변 국가들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복음을 선포합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에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우리를 너희들의 포로가 되게 하셨고, 너희들의 조소거리가 되게 하셨다. 만약 너희도 계속해서 죄를 지으면, 우리와 같이 멸망하게 될 것이니, 하나님의 진로를 받은 우리의 모습을 반면교사 삼아 하나님께로 돌이키라‘고 선포합니다.

    예레미야는 죄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18.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그러나 내가 그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

    죄는 의로우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죄가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을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십니다. 다시 말하면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공의(公議)를 믿었습니다. 예레미야가 불의한 세상을 향해 당당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공의를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믿습니까? 그렇다면 죄에 대해 내 스스로 엄격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세상의 유혹 앞에서 넘어질 수 있습니다. 넘어진 것을 숨기지 마십시오.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다시 일어서십시오. 하나님을 의지하고 일어선 사람만이 불의 앞에서 당당할 수 있습니다.

    (20-22) 간구
    절망 속에서 예레미야는 세상으로부터 위로 받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고 멸망을 기뻐하는 주변 국가들 역시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처럼 멸망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21-22). 대신 예레미야는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20.  "주님, 나의 절망을 살펴 주십시오. 애간장이 다 녹습니다. 내가 주님을 얼마나 자주 거역하였던가를 생각하면, 심장이 터질 것 같이 아픕니다. (표준새번역)

    무슨 일로 절망하고 계십니까? 예레미야는 애간장이 다 녹을 정도로 절망에 빠져있을 때 하나님을 바라보았고, 하나님께 제일 먼저 자신의 죄를 회개했습니다. 예레미야가 무슨 죄를 저질렀습니까?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나 앞날이 보장되어 있던 그는 하나님의 소명에 도망쳤었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그는 하나님의 소명에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소명에 순종한 그는 매국노, 거짓 선지자라는 소리를 들어가며 투옥되었습니다. 그가 짊어져야 했던 십자가는 그의 삶을 짓눌렀습니다. 믿음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도 그는 소명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 길이 진리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배신하고 멸망해버린 조국의 현실 앞에서 예레미야는 “에카” “슬프다”를 외치며,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거역한 죄를 생각하면 심장이 터질 정도로 아프다고 합니다. 대치국면에 있는 여야가 한번이라도 이런 모습을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국제 정세와 경제가 여야가 함께 협력해도 모자랄 판에 서로 남 탓만 하면서 대치하고 있는 모습이 한심하기 그지없습니다.

    현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현재와 세상에만 집중한다면 불의와 거짓이 득세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이 부러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불의와 거짓이 난무했던 예루살렘을 향하신 주님의 진노하심의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시선을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악과 거짓의 세상을 보면서 우리는 ‘에카“를 외쳐야 합니다. 내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이 주님의 진노 아래 놓여있습니다. 처참한 상황 속에서 예레미야는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큰 죄악이 바로 하나님이 아닌 이웃 나라를 의지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그리고 이스라엘의 죄를 눈물로 통회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시선을 들어 주님을 향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무릎을 꿇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5월 24일(월)

    예레미야 52장

    남유다의 왕은
    르호보암-아비야-아사-여호사밧-여호람-아하시야-(아달랴)-요아스-아마샤-웃시야-요담-아하스-히스기야-므낫세-아몬-요시야-여호아하스-여호야김-여호야긴-시드기야-(그달리야)

    모두 19명의 왕이고 여자인 아달랴를 포함시키면 20명의 왕입니다.
    본 장은 여호아하스왕과 여호야김왕과 여호야긴왕과 시드기야왕까지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용구조는 여호아하스왕의 폐위(1-4절), 여호야김왕의 포로(5-8절), 여호야긴왕의 포로(9-10절), 시드기야왕과 유다의 멸망(11-21절), 유다 백성의 귀환(22-23절)으로 되어 있습니다.

    역대하36:1-23   

    1-4절에 "그 땅의 백성이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세워 그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예루살렘에서 왕으로 삼으니, 여호아하스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삼 세더라 그가 예루살렘에서 다스린 지 석 달에, 애굽 왕이 예루살렘에서 그의 왕위를 폐하고 또 그 나라에 은 백 달란트금 한 달란트를 벌금으로 내게 하며, 애굽 왕 느고가 또 그의 형제 엘리아김을 세워 유다와 예루살렘 왕으로 삼고 그의 이름을 고쳐 여호야김이라 하고 그의 형제 여호아하스를 애굽으로 잡아갔더라."고 했습니다.  

    애굽 느고 왕 앗수르의 요청을 받아 바벨론을 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갈그미스로 향했습니다.
    요아스 왕은 그들이 유다에 지배권을 가지려는 것을 막기 위해 므깃도에서 그들과 전쟁을 헸습니다.
    결국 요아스 왕은 므깃도 전투에서 화살에 맞아 죽었습니다(35:20-27).

    그러자 백성들은 심히 애통해 했고 요시야 왕을 이어 그의 넷째 아들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 때 여호아하스 왕의 나이는 23세였습니다.
    '여호아하스'(Jehoahaz) 살룸(Shallum)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3:15, 렘 22:11).

    요시야 왕에게는 4아들이 있었습니다.
    요하난, 여호야김(엘리야김), 여호아하스(살룸), 시드기야였습니다.

    요시야 + 하무말(립나의 예레미야의 딸) = 여호아하스
    * 립나 / 하맛 땅

    요시야 + 스비다(루마 브다야의 딸) = 여호야김
    * 바벨론이 공격, 3년을 섬기다 배반
    * 갈대아, 아람, 모압, 암몬 부대의 공격

    요시야 + 하무말(립나의 예레미야의 딸 = 시드기야


    3:15에는 여호아하스(살룸)가 막내로 나오지만 여호아하스와 시드기야는 모두 하무달에게서 낳은 아들들로서 두 사람의 즉위시 나이로 보아 여호아하스보다 시드기야가 더 나이가 어린 것이 분명합니다(왕하 23:31, 24:18).
    여호야김은 스비다에게서 낳은 아들이고(왕하 23:36),
    여호아하스와 시드기야는 하무달에게서 낳은 아들입니다(왕하 23:31, 24:18).
    여호아하스는 요시야왕의 셋째 아들인데 백성들이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세운 것은 특이한 일입니다.
    여호아하스가 다른 형제들보다 다 뛰어났기 때문이라는 자들도 있고, 여호아하스만이 요시야왕처럼 반애굽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아하스왕이 왕위에 올라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습니다(왕하 23:32).
    부왕 요시야왕의 행위를 따르지 않고 우상을 숭배한 열왕들의 행위를 따른 것입니다.
    그러다가 애굽 왕 느고가 불과 3개월만에 여호아하스 왕을 폐위시키고 유다에 은 100달란트(3,400kg)와 금 1달란트(34kg)를 벌금으로 내게 했습니다.
    이는 애굽이 므깃도 전쟁의 승리 후에 유다를 지배하게 되었는데 여호아하스왕이 반애굽 정책을 사용한 것에 대한 보복의 성격일 것입니다.
    애굽왕 느고는 여호아하스왕을 폐위시킨 다음에 함정으로 잡아 갈고리로 끌고 가 립나에 감금했다가 여호야김을 왕으로 세운 뒤 애굽으로 끌고 갔는데 그는 애굽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죽게 되었습니다(왕하 23:33, 겔 19:4).

    한편 애굽왕은 요시야왕의 셋째 아들인 여호아하스왕을 폐위시킨 대신에 요시야왕의 둘째 아들인 여호야김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여호야김(Jehoiakim)은 여호아하스 왕과 배다른 형제인 동시에 친애굽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호야김은 본래 '엘리야김'(Eliakim)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애굽 왕이 그를 왕으로 세운 다음에 여호야김으로 개명시켰습니다.
    아마도 애굽왕이 여호야김을 자신에게 완전히 복종시킨다는 의미로 개명을 했을 것입니다.

    여호아하스 왕이 3개월 만에 폐위되고 애굽으로 사로잡혀 가서 애굽에서 죽게 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좁은 의미로 보면 여호아하스 왕이 짧은 기간에도 하나님 앞에 악을 행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느고를 통해 폐위시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3개월 동안 어떤 악을 행할 수 있었겠는지 의문이 들기는 하지만 어찌 되었든지 하나님은 그를 악하게 보았던 것입니다. 여호아하스는 왕이 된 다음에 아버지 요시야왕의 종교개혁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요시왕의 신앙을 본받지 않고 열조의 악한 행위대로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습니다. 다시 우상숭배를 한 것입니다. 또한 백성들을 압제하고 학대했습니다 (겔19:3).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호아하스를 애굽에 붙인 것입니다. 넓은 의미로 본다면 하나님께서 요시야왕에게 하신 말씀을 시행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선지자 훌다를 통해 요시야왕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율법대로 우상숭배한 유다를 심판할 것이고 그렇지만 요시야왕 생전에는 심판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34:22-28). 이제 요시야왕 다음으로 일어나는 왕들이 모두 요시야왕의 아들들 대에 속한 왕들입니다. 하나님이 요시야왕의 선행과 기도 때문에 그 당대에는 유다를 멸망시키지 않다가 그 아들들 대에서 멸망시키려는 섭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면서 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2. 여호야김왕의 포로 (5-8절)


    "여호야김이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일 년 동안 다스리며 그의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올라와서 그를 치고 그를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잡아가고, 느부갓네살이 또 여호와의 전 기구들을 바벨론으로 가져다가 바벨론에 있는 자기 신당에 두었더라. 여호야김의 남은 사적과 그가 행한 모든 가증한 일들과 그에게 발견된 악행이 이스라엘과 유다 열왕기에 기록되니라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선한 왕 요시야 왕에게는 4아들이 있었습니다.
    요하난, 여호야김(엘리야김), 여호아하스(살룸), 시드기야였습니다.

    요시야 왕 때 바벨론(바빌로니아)이 앗수르(앗시리아) 니느웨를 함락시켰습니다.
    앗수르 군대는 북으로 도망하여 갈그미스에 규합했습니다.
    애굽(이집트)의 느보 왕은 앗수르의 군대를 지원하여 바벨론을 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갈그미스로 원정을 가기 위해 유다를 지나가려 했습니다.
    요시야 왕은 애굽 군대를 막기 위해 므깃도에서 전쟁을 했으나 패전하고 전사했습니다.
    요시야 왕이 죽자 유다 백성들은 요시야왕의 셋째 아들로서 23세였던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애굽은 여호아하스 왕을 3개월만에 폐위시키고 애굽으로 끌고 갔습니다.
    대신 요시야왕의 둘째 아들로서 25세였던 여호야김(Jehoiakim)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애굽은 유다를 속국화 했습니다.
    그런데 후에 바벨론은 갈그미스 전투에서 애굽을 물리치므로 애굽이 팔레스틴에서 물어나고 바벨론이 지배력을 강화하였습니다.
    바벨론은 유다를 속국화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야김왕이 처음에는 바벨론을 섬기다가 후에 반바벨론 정책을 썼습니다.
    아마 애굽이 보호해 줄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은 유다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점령했고 여호야김왕을 쇠사슬로 묶어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전의 기구들도 탈취해 바벨론 니므롯 신당에 두었습니다(단 1:1-4 참조).
    이 사건을 이른바 바벨론의 1차 침입이라고 합니다.  

    여호야김 왕은 25세에 왕이 되어 11년간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는 그 기간 동안 악한 열왕들을 본받아 하나님 앞에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우상숭배를 하고 선지자들을 적극적으로 박해했습니다.
    선지자 우리야를 죽이려 하자 우리야가 애굽으로 도망했는데 애굽에까지 사람을 보내어 붙잡아 와서 죽였습니다(렘 26:20-23).
    예레미야 선지자를 붙잡고 하나님 말씀을 기록한 두루마리를 칼로 베어 화로 불에 태웠습니다(렘 36:20-26).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세금을 늑봉하여 애굽왕 느고에게 바쳤고 심지어 필요 이상으로 과징하여 자기의 사치스러운 궁전을 세우기도 했습니다(렘 22:13-14).
    하나님이 이미 유다를 심판하기로 작정했는데 여호야김왕은 하나님 앞에 심판 받은 근거를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호야김왕 때 유다가 바벨론의 침략을 받게 하고 여호야김이 비참하게 끌려가 죽게 한 것입니다.
    선지자들의 예언을 참고하면 여호야김왕은 쇠사슬에 결박되어 갈고리에 꿰어 철통에 갇혀 사로잡혀 갔고 바벨론에서 죽어 예루살렘 밖에 던져져 나귀같이 매장당했을 것입니다(겔 19:8-9, 렘 36:30-31).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아무리 자신에게 정치력이 있고 보호국이 있을지라도 비참한 결말을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여호야긴왕의 포로 (9-10절)


    "여호야긴이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팔 세라 예루살렘에서 석달 열흘 동안 다스리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 그 해에 느부갓네살 왕이 사람을 보내어 여호야긴을 바벨론으로 잡아가고 여호와의 전의 귀한 그릇들도 함께 가져가고 그의 숙부 시드기야를 세워 유다와 예루살렘 왕으로 삼았더라."  

    요시야 왕에게는 4아들이 있었습니다.
    요하난, 여호야김(엘리야김), 여호아하스(살룸), 시드기야였습니다.

    그 중에 요하난은 일찍 죽은 것 같습니다.
    요시야 왕이 죽은 후 유다 백성들에 의해 셋째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이 되었고 3개월 후 애굽왕에 의해 둘째 아들 여호야김이 왕이 되었고 11년 후 바벨론왕에 의해 여호야긴이 왕이 되었습니다.

    여호야긴(Jehoiachin)은 여호야김 왕의 아들로서 여고냐(Jeconiah)라고 하기도 하고 고니야(Coniah)라고 하기도 합니다(3:16, 렘22:24). 그는 8세에 왕이 되어 3개월 10일 동안 왕위에 있었다고 했습니다(9절). 하지만 열왕기하 24:8에는 18세에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8세에 왕이 되었다는 것은 정황상 맞지 않는 면이 많이 있습니다. 8살 밖에 안된 자가 악을 행했다는 표현이 어색하며 (9절) 8살 밖에 안된 자가 3개월 만에 포로로 잡혀 간 사실과 그의 아내들과 자손들이 언급된 점을 보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왕하 25:15, 렘 22:28). 그래서 아마도 본서의 기록은 18세에서 '10'에 해당하는 '요드'(י)가 훼손된 결과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Keil & Delitzsch, Barker, Payne). 

    여호야긴 왕은 약 3개월 여만에 바벨론왕에 의해 폐위되고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되었습니다.
    애굽 왕이 세운 여호야김 왕은 반바벨론정책을 썼기 때문에 바벨론이 유다를 침략하여 여호야김왕을 사로 잡아가고 그의 아들 여호야긴을 왕으로 세웠는데 아마도 여호야긴왕도 여호야김왕의 반바벨론 정책을 그대로 따랐던 것 같습니다(Curtis).
    그래서 바벨론왕이 유다를 침략하여 여호야긴왕을 사로잡아 가고 그의 모친과 신복과 방백들과 내시들도 사로잡아 가고 용사와 공장과 대장장이들도 사로잡아 갔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도 이 때 사로잡혀 갔습니다(겔 1:1-2, 33:21).
    힘없고 빈천한 사람들만 남겨 놓고 힘있고 권세있고 능력있는 자들은 사로잡아 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왕궁 보물과 성전 기구들을 남김없이 탈취해 갔습니다(10절, 왕하 24:16).
    이 사건을 바벨론의 2차 침략이라고 합니다. 

    여호야긴왕은 바벨론에 사로잡혀 가 약 37년간 감옥생활을 했는데(25:27, 렘 52:31) 후에 석방되어 바벨론에서 결혼하여 아내와 자식을 낳고 산 듯 합니다(3:17-18).
    그가 왕이 된지 3개월 만에 사로잡혀 가게 된 것은 하나님의 심판으로서 그가 하나님 앞에 악을 행했기 때문입니다(9절).
    그는 아버지 여호야김왕의 모든 행위를 본받았습니다(왕하 24:9).
    그가 3개월 동안 얼마나 악을 행했겠는가 하는 의문이 들긴 하지만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에 대해 '좋아하지 않는 그릇' '깨진 그릇'이라고 했습니다(렘 22:28).
    그는 부친 여호야김의 종말을 보고도 여전히 우상을 숭배하고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백성을 학대했습니다(8-9절, 왕하 24:3, 렘22:13-17).
    이는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긴 것에 대한 징계이며 심판입니다(삼하 7:14).
    하나님 섬기는 것이 싫어서 다른 대상을 섬기면 그것을 섬기는 자들에게 붙입니다.
    모든 것을 다 빼앗깁니다.
    하나님이 주신 영력, 은사, 명예, 건강,  물질 등 모든 것을 빼앗깁니다(삿 14:6, 15:15, 16:3, 6-21, 눅 10:30-37, 15:11-24, 룻 1:1-5).  

    시드기야왕과 유다의 멸망 (11-21절)


    11-19절에 "시드기야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일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일 년 동안 다스리며, 그의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선지자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일러도 그 앞에서 겸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한 느부갓네살 왕이 그를 그의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게 하였으나 그가 왕을 배반하고 목을 곧게 하며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였고, 모든 제사장들의 우두머리들과 백성도 크게 범죄하여 이방 모든 가증한 일을 따라서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거룩하게 두신 그의 전을 더럽게 하였으며, 그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과 그 거하시는 곳을 아끼사 부지런히 그의 사신들을 그 백성에게 보내어 이르셨으나, 그의 백성이 하나님의 사신들을 비웃고 그의 말씀을 멸시하며 그의 선지자를 욕하여 여호와의 진노를 그의 백성에게 미치게 하여 회복할 수 없게 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갈대아 왕의 손에 그들을 다 넘기시매 그가 와서 그들의 성전에서 칼로 청년들을 죽이며 청년 남녀와 노인과 병약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였으며, 또 하나님의 전의 대소 그릇들과 여호와의 전의 보물과 왕과 방백들의 보물을 다 바벨론으로 가져가고, 또 하나님의 전을 불사르며 예루살렘 성벽을 헐며 그들의 모든 궁실을 불사르며 그들의 모든 귀한 그릇들을 부수고"고 했습니다.  

    요시야 왕에게는 4아들이 있었습니다.

    요하난, 여호야김(엘리야김), 여호아하스(살룸), 시드기야

     
    그 중에 요하난은 일찍 죽은 것 같습니다.
    요시야왕이 죽은 후 유다 백성들에 의해 셋째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이 되었고 3개월 후 애굽 왕에 의해 둘째 아들 여호야김이 왕이 되었습니다. 11년 후 바벨론 왕이 여호야김 왕을 사로잡아 가고 여호야김 왕의 아들 여호야긴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3개월 후 바벨론 왕이 또다시 여호야긴 왕을 사로잡아 가고 요시야 왕의 넷째 아들 시드기야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시드기야(Zedekiah)왕은 21세에 왕이 되어 11년 동안을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시드기야 왕이 애굽을 의지하고  반바벨론 정책을 사용했습니다.
    애굽의 도움을 받아 바벨론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하려 한 것입니다(렘 37:7-10, 17, 32:2-5, 겔 12:10-13, 17:20-21, 17:15-16, 대하 36:13, 렘 52:3).

    그래서 바벨론 왕이 바벨론을 배반한 것을 응징하기 위해 유다를 침략하여 예루살렘성을 포위하고 토성을 쌓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이 3년 동안 포위를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중에는 기근이 심했습니다.
    시드기야 왕은 성벽을 뚫고 밤에 도망하다가 붙잡혀 립나에서 심문을 당하고 아들들이 목전에서 죽임을 당하고 두 눈을 뽑히고 사슬로 결박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시드기야 왕은 바벨론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바벨론에서 죽게 되었습니다.
    바벨론 군대는 젊은이들을 무참히 학살하되 여자와 노인과 병약한 사람에 대해서도 긍휼히 여기지 않았고 장소가 성전이라 해서 긍휼을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전 기둥과 기구들과 기명들과 보물들을 탈취하고 왕과 방백들의 보물들을 탈취하야 바벨론으로 가져갔습니다(왕하 25:1-17, 렘 39:1-5, 52:4-23).
    또한 성벽을 헐고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귀한 그릇들을 부수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아가 노예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이후에 바사(페르시아)가 일어나 돌려보내 주기 전까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과 유다 땅은 70년 동안 황폐화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바벨론 3차 침략과 유다의 완전한 멸망 사건입니다.  

    유다 백성이 바벨론에 멸망하고 비참하게 사로잡혀 가게 된 것은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시드기야 왕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님 말씀으로 경고해도 겸손하지 않았습니다(12절).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에게 애굽을 의지하지 말고 바벨론에 항복해야 한다고 했으나 그는 그 예언을 묵살했습니다(렘 32:3-5, 34:3).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바벨론을 심판의 도구로 삼았다는 것에 대한 완강한 거부였습니다.
    그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수 없이 하나님께 돌아와야 한다는 경고를 들었음에도 마음을 곧게 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13절).

    제사장들과 백성들도 범죄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고 성전을 더럽혔습니다(14절).
    그들은 하나님이 에스겔, 예레미야, 다니엘, 하박국 같은 선지자들을 통해 끊임없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촉구했으나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비웃었고 선지자들이 전한 말씀을 조롱했고 욕하고 박해했습니다(렘 27:12-14,17, 32:3-5, 38:5-28, 39:14-15, 52:3).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불가피했고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기회 조차도 주어지지 않았게 되었습니다. 

    시드기야 왕 때 유다의 멸망을 보면서 깨달은 수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심판을 하시기 전에 돌아올 기회를 많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을 통해 돌아오도록 권고하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계속적으로 범죄하며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 자는 하나님이 심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방 사람들을 통해 심판하십니다(삼하 7:14).

    셋째, 심판을 받을 때는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과 물질적인 모든 것을 빼앗기게 됩니다(벧후 2:19, 계 3:17).

    넷째,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때는 섭리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지 않고 거슬리려 할 때는 더욱 비참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20-21절에 "칼에서 살아 남은 자를 그가 바벨론으로 사로잡아가매 무리가 거기서 갈대아 왕과 그의 자손의 노예가 되어 바사국이 통치할 때까지 이르니라. 이에 토지가 황폐하여 땅이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더라."고 했습니다. 

    남유다는 3차례에 걸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에 의해 정복당해 사로잡혀 갔습니다.
    1차 포로는 여호야김 왕 때,
    2차 포로는 여호야긴 왕 때,
    3차포로는 시드기야 왕 때 이루어졌습니다. 

    시드기야 왕 때에는 유다가 완전히 멸망하고 왕과 방백들과 귀인들과 기술자 등이 사로잡혀 갔습니다(렘 52:28-30).
    성벽은 무너지고 성전은 불타고 유능한 자들은 사로잡혀 갔기 때문에 유다는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레위기 26:34을 근거한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된 것입니다(렘 25:11, 29:10).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유다가 70년 동안 황폐하였고 바벨론에 사로잡혀 간자들은 70년 동안을 바벨론에서 종살이 하게 되었습니다. 이 '70년'은 1차에 사로잡혀 간 때로부터 3차에 돌아온 때까지의 기간입니다. 사로잡혀 간 자들은 3차례에 걸쳐서 귀환하게 됩니다. 1차 귀환은 바사(페르시아)왕 고레스왕 때, 2차 귀환은 바사왕 아닥사스다왕 때, 3차 귀환은 바사왕 아닥사스다왕 때 이루어집니다.

     

      유다가 멸망하고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 사로잡혀 간 것은 왕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오랫동안 길이 참으시다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되자 바벨론 군대를 통해 징계한 것입니다. 그 징계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들을 택한 목적 곧 제사장적 나라가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을 회개시켜 하나님만을 섬기고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고 하나님의 질서를 따르고 하나님이 주신 복을 누리며 살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격을 이루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렘29:10-11). 예레미야29:10-11에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바벨론에 사로잡혀 가 있는 동안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 성전과 율법을 사모했습니다. 그래서 70년 후에 돌아온 다음에는 율법 부흥운동을 일으키고 성전을 회복하고 성벽을 중수하여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정체성을 회복했습니다. 그 목적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70년 동안 사로 잡혀 가 있는 곳에서도 견딜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셨습니다. 예레미야29:12-13에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고 했습니다. 에스겔11:16에 "그런즉 너는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아내어 여러 나라에 흩었으나 그들이 도달한 나라들에서 내가 잠깐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징계하신 궁극적인 목적도 그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징계를 하심은 낮추고 시험하여 마침내 복을 주려는 것입니다.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하심입니다. 정금같은 믿음이 나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주 오시는 날에 영광과 칭찬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입니다 (신8:16, 약1:4, 욥23:10, 히12:10, 벧전1:7).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 민족적으로 세대적으로 환난과 고난과 시험을 주신 목적도 마찬가지입니다 (단1:5,12, 룻1:4, 계2:10, 렘29:10, 계13:5). 그러므로 이미 시련 가운데 있는 자는 벗어나려고 하지말고 그 환경 안에서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인내해야 합니다 (계13:10). 그러면 하나님의 정한 때가 되면 풀어지게 됩니다 (계 14:1-5).  

    유다 백성의 귀환 (22-23절) 
     

    "바사의 고레스 왕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여호와께서 바사의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바사 왕 고레스가 이같이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을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그의 백성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유다 백성은 시드기야 왕 때 바벨론에 사로잡혀 가서 70년을 지냈습니다.
    그런데 바사의 고레스 왕이 유다 백성은 본국으로 돌아가라는 칙령을 내리므로 유다 백성이 70년만에 다시 귀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70년 동안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다가 70년이 차면 귀환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렘 25:11, 29:10-14).

    하나님은 유다 백성이 바벨론에 사로잡혀 간지 70년이 되자 그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섭리했습니다.
    바사에 고레스(Cyrus)라는 왕이 있었는데 그는 메데를 정복하여 통합하고 이어서 바벨론을 정복하고 바벨론 하에 있던 모든 식민지들을 정복하여 바사(페르시아)제국을 건설했습니다.
    고레스왕은 바사제국을 건설한 첫해에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온 유다인들은 모두 본국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조서를 내렸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감동시켜 유다 백성을 본국으로 돌려 보낼 마음을 갖게 한 것입니다.

    고레스왕은 바벨론에 사로잡혀 온 다니엘 같은 신앙 좋은 정치 지도자들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고 구약의 예언서들을 접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사야서에는 고레스에 대한 예언이 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45:1-4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그 앞에 열국을 항복하게 하며 내가 왕들의 허리를 풀어 그 앞에 문들을 열고 성문들이 닫히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너보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하게 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빗장을 꺾고, 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 네 이름을 부르는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을 네가 알게 하리라. 내가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자 이스라엘 곧 너를 위하여 네 이름을 불러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

    고레스 왕은 그 예언이 자신을 가리켜 한 말씀으로 알고 그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고 그에 대한 뜻을 순종하기 위해 유다 백성을 귀환시킨 것입니다. 23절의 표현을 보면 고레스는 하나님이 만국을 자기에게 주셨고 유다 백성을 돌려 보내어 성전을 건축하게 하라고 했기 때문에 유다 백성에게 본국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내린다고 했습니다. 그 고레스왕의 칙령으로 바벨론 유수가 끝나고 많은 유다 백성이 유다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성전을 건축하게 됩니다. 물론 소화된 솔로몬성전에 비하면 훨씬 작은 규모이지만 족장들과 레위인들이 감동되어 금 은 보물을 드렸고 레바논에서 백향목을 가져와 건축했습니다(스 3:7).

    하나님은 우리의 공동체나 개인에 대한 뜻을 이루기 위해 섭리합니다.
    때론 이방인들을 이용해서라도 그 뜻이 이루어지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일하실 때까지 믿음을 지키면서 인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잠언 16:3에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이사야 14:24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내가 경영한 것을 반드시 이루리라" 

    한편 열왕기하 25:24-25에 보면 "그달리야가 그들과 그를 따르는 군사들에게 맹세하여 이르되 너희는 갈대아 인을 섬기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이 땅에 살며 바벨론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가 평안하리라 하니라. 칠월에 왕족 엘리사마의 손자 느다니야의 아들 이스마엘이 부하 열 명을 거느리고 와서 그달리야를 쳐서 죽이고 또 그와 함께 미스바에 있는 유다 사람과 갈대아 사람을 죽인지라"

    바벨론 왕이 시드기야 왕을 사로잡아 간 후 제사장 사반의 손자 그달리야(Gedaliah)를 왕으로 세웠으나 그 소식을 들은 이스마엘이 10명의 부하를 데리고 가서 그달리야를 죽였습니다. 역대하에는 이미 시드기야 왕 때 유다가 완전히 멸망했기 때문에 그달리야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오실 그리스도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이 예언되어 있습니다(창 15:5, 갈 3:16, 삼하 7:12, 사 11:1).

    그래서 마태복음 1장에서는 예수님이 구약에서 예언한 그리스도임을 증명하기 위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분임을 증명하려고 족보를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족보에서 그의 자손인 유다의 왕들 중 빠진 왕들이 있습니다.

    마태복음1:6-11
    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7.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8.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9.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10.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11.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을 낳으니라

    역대기에서 나온 다윗 왕을 이은 왕들을 보면 다윗-솔로몬-르호보암-아비야-아사-여호사밧-여호람-아하시야-(아달랴)-요아스-아마샤-웃시야-요담-아하스-히스기야-므낫세-아몬-요시야-여호아하스-여호야김-여호야긴-시드기야-(그달리야, 그달랴)입니다.

    이와 비교해 볼 때 다윗의 자손인 6명의 왕이 빠진 것입니다.
    8절에 나오는 요람(여호람)과 웃시야 사이에 아하시야와 요아스와 아마샤가 빠졌고,
    11절에 나오는 요시야와 여고냐(여호야긴) 사이에 여호아하스와 여호야김이 빠졌고, 여고냐(여호야긴) 다음에 시드기야가 빠졌습니다.

    그러므로 실제 다윗왕의 자손으로서 왕이 된 사람들 가운데 마태복음1:6-11에 나오는 다윗왕의 족보에는 빠진 왕들이 있는데 그들은 곧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샤,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시드기야입니다.
    이들은 모두 우상을 숭배한 악한 왕들입니다.
    아하시야는 모친의 꾀임을 받아 북이스라엘 아합의 집처럼 우상을 섬긴 왕이고, 요아스는 우상을 숭배하다가 선지자가 책망하자 그를 성전에서 죽인 왕이고, 아마샤는 우상을 숭배하다가 선지자의 책망을 받고도 불순종한 왕이고, 여호아하스는 우상숭배를 답습하다가 애굽왕에게 잡혀 간 왕이고, 여호야김은 우상숭배를 하면서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다가 바벨론왕에게 잡혀 간 왕이고, 시드기야도 우상숭배를 하면서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다가 바벨론에 잡혀 간 왕입니다. 바벨론왕을 배반했다가 자식이 보는 앞에서 죽임을 당하고 눈이 빼임을 당하고 쇠사슬에 묶여 사로잡혀 갔습니다.
    이 왕들은 한결같이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한 왕들입니다. 우상을 숭배하고 선지자들을 불순종하고 백성들을 학대한 왕들입니다.

    요한계시록 7:5-9에 보면 인(印)을 맞은 12지파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창세기49:1-27에 나오는 12지파의 이름과 비교해 볼 때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야곱의 12아들은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스블론, 잇사갈, 단, 갓, 아셀, 납달리, 요셉, 베냐민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는 유다, 르우벤, 갓, 아셀, 납달리, 므낫세, 시므온, 레위, 잇사갈, 스블론, 요셉, 베냐민 지파로 나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유다 지파가 가장 먼저 나오고, 르우벤 지파가 뒤에 나오고, 요셉 지파는 두 지파가 나오고(요셉의 아들 므낫세 지파가 포함), 단 지파가 빠진 것이 특징입니다.

    유다 지파가 맨 먼저 나온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왕권이 있기 때문이고, 요셉 지파가 두 지파로 나온 것은 장자 역할을 했기 때문에 두 몫을 차지한 것이고, 르우벤 지파가 장자에서 뒤로 물러난 것은 아비의 침상을 더럽히므로 장자권을 상실했기 때문이고, 단 지파가 빠진 것은 사단의 무리를 상징하는 지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구약의 지파이든 왕이든 하나님이 그 생애를 인정하는 자들이 있었고 인정하지 않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생애가 하나님 앞에서 옳게 인정받도록 평생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이 맡긴 사명을 이루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5월 21일(금)

    예레미야 50장


    여호와와 연합하자


    창세기 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창세기 29:34

    그가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시편 133:1 형제가 연합하자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이사야 56:3 여호와 하나님과 연합하자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여호와께서 나를 그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말하지 말며 고자도 나는 마른 나무라 말하지 말라.

    이사야 56:6-7
    또 나 여호와에게 연합하여 섬기며 나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나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예레미야 50:5, 영원한 언약으로 연합하자

    그들이 그 얼굴을 시온으로 향하여 그 길을 물으며 말하기를 너희는 오라 잊어버리지 아니할 영영한 언약으로 여호와와 연합하자 하리라



    로마서 6:5 그리스도와 연합하자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골로새서 2:2 사랑으로 연합하자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연합의 조건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거룩은 거룩함으로 연합해야 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은 영으로 존재하지만 사람은 육체를 갖고 있습니다.
    영과 육체가 연합하려면 영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거룩한 영이 육체에 임하게 하려면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딤전 4:5)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한다는 것은 육체에 자리를 잡은 거짓과 죄악을 제거하는 것으로 "회개"라고 합니다.
    제거라는 히브리 단어는 "‘다바크’(דבך)"라고 합니다.
    '다바크'는 마치 강력 접착제와 같습니다.
    "다바크"의 뜻은 "빈틈없이 달라붙다" 또는 "꽉 붙잡다" "꽉 매달리다" "친근하다" 라고 합니다.
    접착제를 사용하려면 먼저 붙여야 할 곳을 깨끗하게 정리하듯이 거룩하신 영으로 존재하는 하나님과 연합하려면 나의 몸과 마음과 삶을 깨끗하게 정리해야 할 것입니다.

    육체로 살아가는 사람은 두 눈으로 볼 수 있지만 영이신 하나님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영의 눈을 열어 하나님을 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믿음의 눈" 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연합하려면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의지한다는 단어는 "믿는다" "맡긴다" "의뢰한다"는 뜻입니다.
    나의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과 연합하기 위하여 먼저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히 11:6).
    나의 생명과 삶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행 16:31).
    그리고 매 순간 내 모든 형편과 사정을 기도로 아뢰야 합니다(빌 4:6-7).

    팬데믹 시대를 힘들게 살아가는 사랑하는 믿음의 형제 자매들이여!
    왜 좋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시련을 주셨을까요?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는 은혜를 위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선택받은 주의 자녀들이 먼저 아버지 하나님과 연합한 후에 연합한 신앙의 삶을 보여주므로 믿음이 없는 인생길을 걸으며 방황하는 무리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은혜로운 모습을 보여주며 증거할 때 하늘의 기쁨이 온누리에 임하게 될 것입니다.

     

    1. 제거하라!

    연합이란 단어를 히브리어로 ‘다바크’(דבך)라고 한다. 강력한 접착제로 붙인다는 뜻에서 왔다. 그래서 연합에는 ①빈틈없이 달라붙다. ②꽉 붙잡다(혹은 매달리다). ③친근히 하다는 의미가 있다. 상식적으로 무엇인가를 붙이기 위해선 우선 붙이고자 하는 곳을 깨끗하게 청소를 해야 한다. 페인트칠을 하려면 먼저 칠할 곳을 깨끗하게 소제를 해야 하고, 무엇인가를 붙잡기 위해선 손에 있는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하나님과의 연합을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하나님과의 연합을 위해 먼저 그의 아버지가 만들고, 세우고, 수입한 모든 우상을 제거했다. 심지어는 모세시대에 만들어진 유물인 놋뱀까지 제거했다(4). 백성들이 여기에 분향한 것을 보고도 오랜 세월을 거쳐 내려온 유물이었기 때문에 누구도 함부로 하지 못했는데, 그가 이것을 제거했다. 뿐만 아니라 앗수르와의 관계도 끊어버렸다(7). 이런 철저한 제거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과 연합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과 연합하기 위해선, 주님께 달라붙고, 주님을 붙잡고, 주님과 친근히 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있는 우상들을 깨뜨리고, 부수고, 깨끗하게 소제해야 한다. 내가 의지하고,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고 있는 것들과 결별을 선언해야 한다. 그래야 주님과의 완전한 연합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비우지 않고 채울 수가 없고, 파괴하지 않고는 다시 세울 수가 없고, 단절하지 않고는 새롭게 출발할 수 없다(이런 것을 심리학에서는 ‘분리효과’, 혹은 ‘지리적 효과’라고 한다). 바울은 자신은 ‘날마다 죽는다.’(고전15:31)고 고백했다. 자신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죽는다는 뜻이다. 죽어야 주님과 함께 다시 살 수 있고, 주님과의 연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마음에는 아하스가 만들고, 세우고, 수입하여 섬겼던 우상보다 훨씬 많은 우상들이 있다. 그것을 요한은 아주 간단하게 요약해서 설명하였다. 그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1요2:16)이라는 우상들이다. 이것들로부터 돌아서야 하고, 떠나야 하고, 제거해야 한다.

     

    2. 의지하라!

    밑이 빠진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 그 항아리를 물속에다 푹 담그는 것이다. 우리 힘으로 채워선 채울 수 없지만 물속에 담가두면 채워진다. 그러면 밑이 뚫린 항아리에 물이 가득 채워진다. 오히려 더 잘 채워진다. 우리는 깨진 항아리, 밑이 뚫린 항아리와 같은 존재다. 우린 인생이 채워지지 않아 늘 허기진 이유, 무언가로 열심히 채워보지만 여전히 허전하고 곤궁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깨져서, 밑이 뚫려서 채워도 채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힘으로 우리 자신을 채우려는 것은 말 그대로 밑 빠진 독에 물붓기다. 그런데 방법이 있다. 우리 자신을 주님께 맡기는 것이다, 주님께 잠기는 것이다. 그러면 채워지게 된다. 만족하게 된다. 힘을 얻게 되고, 능력을 얻게 된다. 바로 이것이 의지하는 것이다. 의지한다는 것은 ①믿는다는 것, ②신뢰한다는 것, ③맡긴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히스기야가 그의 아버지에 의해 완전히 폐허가 된 나라를 다시 채울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다. “히스기야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5).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과의 연합하는 방법이다.

     

    왕하18, 19, 20장은 히스기야에 대한 기록이다. 특히 여기에 그와 관련된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그가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중 하나가 앗수르의 대군이 유다를 침공한 일이다. 유다는 아하스 때부터 히스기야 집권 초기까지 앗수르를 섬기면서 막대한 양의 조공을 바쳤다. 그런데 그가 앗수르를 더 이상 섬기지 않게 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침공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한 것이다. 그리고는 회유와 협박을 하며 항복을 하도록 했고, 하나님과 왕을 모욕하고, 백성들을 선동해서 따르지 못하도록 이긴 질을 했다(18:17~35). 하지만 그는 선지자 이사야에게 중보를 부탁하고(19:2,3), 그 역시 하나님 전에 올라가서 앗수르 왕이 보낸 항복권고문을 하나님 전에 펼쳐놓고 간절히 기도드렸다(19:1,14~19). 이것은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란 가장 확실한 증거다. 아무리 위기여도 하나님을 믿지 않고 신뢰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결과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루 저녁 사이에 앗수르 군 185,000명이 죽고, 앗수르 왕 산헤립은 고국으로 돌아가 자신이 섬기는 신의 신전에서 암살을 당했다(이는 우상의 무능과 허상을 잘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연합한 사람이 누리게 되는 복이다. 그는 그의 신변에 대한 일을 처리할 때도 마찬가지였다(20:1~11).

     

    시125:1에,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않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고 했다. 여기서 산은 ‘부동과 안식의 표상’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이렇게 산처럼 어떤 역경과 환난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견고히 서게 되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안식을 영원히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의지하는 사람을 보호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하기 위해선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도 시온 산처럼 흔들리지 않는 인생이 된다.

     

    복 있는 사람

    수많은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소원이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이었다.
    중세시대에 인적이 닿지 않는 깊은 사막이나 산 속에서 수많은 수도원이 생겨난 가장 중요한 이유도 세속과 떨어져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고,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싶고, 하나님과 깊은 만남을 통해 하나님과의 연합하고 싶어서였다.
    이렇게 말한 것은 주님과의 연합을 위해 어떤 특별한 장소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연합이 그 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여기에 신자의 영광이 있고, 복이 있기 때문이다(시1:1~2).

    신앙생활이란 주님과의 연합에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제거하여 주님과의 간격을 좁히는 일이다.
    그리고 주님을 의지하여 믿고 신뢰하고 맡기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주님과의 연합이 일어나게 된다.
    그래서 주님과의 풍성한 교제(사귐) 가운데 거하게 되는 것이다.
    주님과의 연합을 통한 복 있는 사람이 되어 복된 삶을 누리자.

    예레미야의 메시지의 중심축 두 개는 이스라엘민족과 바벨론민족이라고 하겠습니다.
    드라마에 비유하면 이스라엘 민족은 주연급이며 바벨론은 조연급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애정의 대상인 이스라엘은, 또한 그 애정 때문에 심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바벨론은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심판의 도구였습니다.

    심판의 대상과 심판의 도구로 역사의 한 무대에 등장하는 이 둘의 운명이 참 얄궂습니다.
    망치가 되어서 이스라엘을 때려잡을 바벨론이 어느 정도의 상대인지,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보시는지 예레미야 6장 23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들은 활과 창을 잡았고 잔인하여 사랑이 없으며 그 목소리는 바다처럼 포효하는 소리라 그들이 말을 타고 전사 같이 다 대열을 벌이고 시온의 딸인 너를 치려하느니라 하시도다”

    한마디로 바벨론을 ‘아주 무지막지한 녀석!’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딸로 표현 됩니다. ‘시온의 딸’ 이렇게 부릅니다.
    하나님은 진노 가운데 심판을 행하려 하시지만 그 대상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하십니다. 딸입니다. ‘딸’ 이 한 글자가 주는 느낌을 아십니까? 아들만 있으신 분들은 잘 모르실겁니다. 제게는 아들 하나, 딸 하나가 있는데, 저는 딸 쳐다만 보고 있어도 심장이 녹아내리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6장 23절 이것만 읽어봐도 이스라엘의 나중의 모습이 어떻게 될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지금은 아빠의 손에 들린 매 때문에 아파하지만 나중에는 그 육체의 아픔 따위와는 비할 수 없는 아빠의 넉넉한 가슴에 꼭 안기는 모습, 우리 쉽게 그릴 수 있지요. 매는 방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내가 지금은 심판의 매를 들지만 너는 내게 버릴 수 없는 그런 존재야.’ 6장 23절 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이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체의 결말과 같은 오늘 본문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안도와 화해의 눈물로 아빠 품에 꼭 안기는 딸의 모습을 우리가 오늘 본문 4,5절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 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오며 유다 자손도 함께 돌아오되 그들이 울면서 그 길을 가며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할 것이며 그들이 그 얼굴을 시온으로 향하여 그 길을 물으며 말하기를 너희는 오라 잊을 수 없는 영원한 언약으로 여호와와 연합하라 하리라”

    잊을 수 없는 영원한 언약으로 여호와와 연합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애꿎은 건 바벨론인 것 같습니다.
    바벨론이 뭐라고 말합니까? 7절 하반 절 말씀입니다. “그들이-이스라엘이- 여호와 곧 의로운 처소시며 그의 조상들의 소망이신 여호와께 범죄 하였음인즉 우리는 무죄하다 하였느니라”
    이건 너희들 죄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지 우리는 죄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들의 말이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하는 것도 제대로 봤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처소라는 것이에요. 그리고 이스라엘 너희 조상들의 소망이신 분인데 너희가 배반하였다는 것입니다. 정확히 봤습니다. 회초리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한 바벨론의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역할 맡기셨어요.

    그런데 예레미야서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그런 바벨론에 대한 혹독한 심판이 예고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50장, 51장 합해서 110절에 이르는 긴 지면은 거의 다 바벨론에 대한 이야기이고, 그들이 혹독하게 심판 당하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매가 부러지는 거죠. 더 이상 매로서의 구실도 못할 정도로 토막토막 나서 부러지고 쪼개진다는 내용이 죽 나옵니다.

    이제 무대의 막을 내릴 때가 되니 쓸 만큼 쓴 바벨론을 그냥 버리시는 것 같습니다. 이제 사냥 끝났다고 주인 명령 따라 열심히 사냥한 사냥개 삶아 버리시는, 토사구팽하시는 하나님이신 것 같습니다. 광포하고 제멋대로인 주인 같은 모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그저 이스라엘 백성만 생각하시는 속 좁고 편협한 민족 신에 지나지 않습니까? 수단으로 이용하다가 쓸모없어지거나 하면 바로 매몰차게 버리는 냉혹한 신입니까?

    아니지요. 하나님은 제멋대로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배부를 때와 배고플 때가 다른, 사람의 입맛과 같은 변덕스러운 신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명확하십니다. 상대에 따라 기준이 달라지거나 하지 않습니다. 당신께서 대하시는 상대가 누구이든 같은 잣대를 가지고 판단하시는 불편부당하신 분입니다.
    공명하시고 정대하신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에 왜 맞았습니까? 7절에서 본 것처럼 “여호와께 범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벨론은 왜 입니까? 14절 “바벨론을 둘러 대열을 벌이고 활을 당기는 모든 자여 화살을 아끼지 말고 쏘라 그가 여호와께 범죄 하였음이라

    그리고 이들이 범죄 한 내용은 무엇입니까? 똑같이 교만 때문입니다.
    29절 하반 절에 뭐라고 나와 있습니까? “그가 일한대로 갚고 그가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라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여호와를 향하여 교만하였음이라”
    31절 또 바벨론을 향하여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교만한 자여 보라 내가 너를 대적하리니 너의 날 곧 내가 너를 벌할 때가 이르렀음이라”
    32절 “교만한 자가 걸려 넘어지겠고...”
    하나님이 바벨론을 향하여 말씀하실 때 반복해서 거론하시는 것이 바로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뭐냐? 하나님께서 왜 그토록 이스라엘을 야단치시는 것입니까? 바벨론과 이유가 다릅니까?
    예레미야서 13장 9절에서 명확하게 말씀을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이같이 썩게 하리라”
    13장 15절에서 몇 번씩이나 들으라고 강조하십니다. “너희는 들을 지어다, 귀를 기울일지어다, 교만하지 말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라”

    이스라엘이나 바벨론이 심판을 당했던 이유를 성경은 여호와께 범죄 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바벨론도, 이스라엘도, 교만이라는 본질적으로 똑같은 범죄의 내용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을 그저 자기 백성을 훈육시키는 수단으로만 쓰시다가 쓸모없어져서 용도폐기하신 것이 아닙니다.
    또 ‘내가 다섯 대만 때리라고 했는데 너 왜 내 말 안 듣고 열대나 때렸어. 왜 중상을 입혔어...’ 이래서 바벨론을 심판하신 것이 아니에요. 그건 본질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내 자식이고 바벨론은 남의 자식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시기 때문에, 차별하시는 분도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지위와 조건에 상관없이, 같은 관심과 동일한 애정을 쏟으시는 모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은 활과 창을 잡았고 잔인하여 사랑이 없으며 그 목소리는 바다처럼 포효하는 소리라 그들이 말을 타고 전사 같이 다 대열을 벌이고 시온의 딸인 너를 치려하느니라 하시도다”(렘 6:23)는 이 말씀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안타까움입니다.

    ‘시온의 딸’이라는 이 말에 하나님의 온갖 애틋한 사랑의 감정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메대-바사제국에게 심판 당할 바벨론에게도 동일한 안타까움과 사랑을 가지고 계셨음을 42절에서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그들은 활과 투창을 가진 자라 잔인하여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그들의 목소리는 바다가 설레임 같도다 딸 바벨론아 그들이 말을 타고 무사 같이 각기 네 앞에서 대열을 갖추었도다”
    시온의 딸아! 딸 바벨론아!

    하나님은 바벨론에게 심판을 말씀하시면서도 이스라엘에게 향한 것과 한 치의 다름도 없는 동일한 사랑을 그들에게 쏟으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무게로 당신의 긍휼을 바벨론 사람들에게 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까지도 사랑하시는, 바벨론의 하나님이시기도 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모압의 하나님이시요, 암몬의 하나님이시며, 에돔의 하나님이시고, 또한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넘어 이 땅 한반도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편만한 사랑이 바로 이 땅에 사는 저와 여러분의 구원의 근거인 것입니다.
    또한 그런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 인해 우리는 나의 조건이나 지위에 관계없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로운 처소가 되어 주실 것이며 우리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듯 모두에게 동일한 그리고 변치 않는 영원한 사랑의 언약을 가지고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은 열방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열방의 선지자이었던 것처럼 우리 또한 열방의 사람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열방의 사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시야와 관심이 나와 내 가족에게만 머무는 편협한 신앙에서 벗어나, 그리고 우리끼리 만의 게토화된 신앙에서 벗어나, 세상의 사각지대에서 고통 받고 있는 영혼들에게 까지 퍼져갈 수 있다면 나는 만유의 하나님을 믿는 열방의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의 시야가 커져야 합니다.
    우리의 섬김의 폭과 대상이 넓어져야 합니다.
    그리 할 때 우리 하나님께서 민족신, 편협한 기독교인만의 신이라는 세상의 오해에서 벗어나 세상 가운데에서 높여지시고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

     




    5월 20일(목)
    예레미야 49장

    예레미야 46장 애급에 대한 심판 선언 / 태양신 - 생명의 신 '프타(Ptah)'를 심판한다.
    예레미야 47장 블레셋에 대한 심판 선언 / 다곤(Dagon), 다간(Dagan) '다산의 신'
    예레미야 48장 모압에 대한 심판 선언 / 그모스(Chemosh) '전쟁의 신'
    예레미야 49장은 암몬에 대한 심판 예언 / 몰록

    하나님은 모든 나라를 다스리시고 통치하신다는 의미
    이방 나라에 대한 심판 예언은 돌아올 것이라는 약속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고향으로 돌아올 것을 약속하셨다.



    하나님의 심판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으며, 이유가 없는 심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암몬과 에돔이 무엇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되는지 본문을 깊게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1-6절은 암몬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암몬 자손을 심판하시는 하나님(1-6절)

    1절, 암몬 자손에 대한 말씀이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이 자식이 없느냐 상속자가 없느냐 말감을 점령하며 그 백성이 그 성읍들에 사는 것은 어찌 됨이냐.

    말감(Malcham) : 저희들의 임금
    암몬인의 신으로 "밀감"이라고도 한다(스바냐 1:5)

    무릇 지붕에서 하늘의 일월성신에게 경배하는 자와 경배하며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와.

    갓(Gad) : 요단 동편 "길르앗"(예레미야 49:1)
    "갓" 지파가 목축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므로 "모세"에게 청구하여 분양으로 받은 땅(기업).
    토지가 비옥하여 수림이 많고 목축업에 적합하고 풍경이 아름다운 곳이다.

    말감이란 "암몬"을 말하며 암몬 사람들이 갓 지파의 기업을 무력으로 점령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암몬 자손의 조상은 창세기 19장에 등장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 당하고, 롯과 두 딸이 산 속에서 온 세상에 자신들만 남았다고 생각하여 두 딸이 자신들의 아버지인 롯을 술에 취하게 하여 동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큰 딸에게서 낳은 아들의 이름은 모압이며 어제 본문에서 다루었던 모압의 조상이고, 작은 딸에게서 낳은 아들의 이름은 벤암미이며 암몬 자손의 조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자식이 없느냐 상속자가 없느냐 라고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자식과 상속자가 없냐는 질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유업으로 주신 갓을 자녀와 상속자들에게 물려주어야 하는데, 암몬에게 그 땅을 빼앗긴 이스라엘 책망하시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유업으로 주신 땅을 무력으로 빼앗은 암몬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암몬의 죄악은 무력으로 하나님의 유업을 빼앗은 것이고, 갓을 점령한 것이 말감이라 표현되어 있는데, 말감은 암몬이 섬기던 이방 신입니다.

    암몬 자손은 하나님의 유업을 강제로 빼앗고 우상숭배를 하였기에 심판의 자리에 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암몬의 죄악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4절, 패역한 딸아 어찌하여 골짜기 곧 네 흐르는 골짜기를 자랑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재물을 의뢰하여 말하기를 누가 내게 대적하여 오리요 하느냐

    암몬은 자신의 나라에 비옥한 골짜기를 자랑하였고, 재물들을 자랑하면서 다른 나라가 자신들에게 대적할 수 있는가라고 말하며 교만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들이 의지하였던 것은 이방신과 자신들의 재물이었습니다. 우리도 암몬 자손과 같이 삶 속에서 자랑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고백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나의 재물과 힘을 믿고 교만함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이방신과 제물을 의지하는 암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5-6)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두려움을 네 사방에서 네게 오게 하리니 너희 각 사람이 앞으로 쫓겨 나갈 것이요 도망하는 자들을 모을 자가 없으리라 그러나 그 후에 내가 암몬 자손의 포로를 돌아가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암몬 자손에게 사방에서 두려움이 임하도록 하셨습니다. 교만함에 가득차 있던 암몬은 하나님께서 주신 두려움으로 인해 어떠한 저항도 하지 못하고 허둥지둥하며 애통하고 결국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를 심판하시고 다시 회복시키셨던 하나님은 암몬 자손에게도 포로 된 자들이 후에는 다시 돌아가게 된다는 희망의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왜 이방신을 섬기는 나라에게까지 회복을 명하시는 것인지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그 의미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유다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온 세계의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에돔을 심판하시는 하나님(7-22절)

    암몬 자손에 대한 심판의 말씀 이후에 에돔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7) 에돔에 대한 말씀이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데만에 다시는 지혜가 없게 되었느냐 명철한 자에게 책략이 끊어졌느냐 그들의 지혜가 없어졌느냐

    에돔은 ‘붉은’이란 뜻으로 야곱의 쌍둥이 형인 에서의 별명입니다. 즉 에돔은 에서의 자손들입니다. 암몬에게 임하였던 하나님의 말씀처럼 에돔에게도 데만에 다시는 지혜가 없게 되었으냐 명철한 자에게 책략이 끊어졌느냐 그들의 지혜가 없어졌느냐 하시며 질문 형식으로 묻고 계십니다. 에돔 사람들은 오바댜 8절에서 지혜가 있는 자들이라 말하고 있으며, 데만은 에돔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도시이고, 욥의 친구인 엘리바스(욥 2:11)가 데만 출신입니다.

    삶을 살아갈 때 지혜는 필요합니다. 그 이유는 지혜를 통해 조금 더 편리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 지혜를 믿고, 아무리 머리를 써도 하나님이 아닌 지혜를 의지하며 나아간 에돔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는 에돔에게 철저한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상징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9-10) 포도를 거두는 자들이 네게 이르면 약간의 열매도 남기지 아니하겠고 밤에 도둑이 오면 그 욕심이 차기까지 멸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에서의 옷을 벗겨 그 숨은 곳이 드러나게 하였나니 그가 그 몸을 숨길 수 없을 것이라 그 자손과 형제와 이웃이 멸망하였은즉 그가 없어졌느니라

    포도를 거두는 자들이 모든 열매를 남가지 않을 것이고, 밤에 도둑이 욕심에 따라 물건을 훔쳐 가는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고 하십니다. 그들의 교만함과 지혜는 발가벗겨져 숨을 곳이 없게 드러나게 되며 그 주변의 모든 나라가 멸망하고 심판을 받은 것처럼 그들 역시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상징을 통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철저한 심판 중에서도 구원을 받는 자들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11) 네 고아들을 버려도 내가 그들을 살리리라 네 과부들은 나를 의지할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모두가 멸망하는 가운데 살아남는 자들을 고아들과 과부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고아와 과부는 당시에 자생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며, 아무도 그들을 돕지 않는 사회적 약자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하나님은 이들을 살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지혜와 명철이 있는 에돔은 자신의 힘으로 심판을 해결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은 오히려 지혜와 명철이 없고 자생능력이 없는 고아들과 과부에게로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구원의 손길이 임하는 곳이 있습니다. 구원에 손길은 자신의 지혜와 강력한 힘을 의지하는 자들이 아닌 자생능력이 없어서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고아들과 과부들에게 임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의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깊게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지혜와 명철로 나에게 닥친 일들을 해결하려고 발버둥치지만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면 의지하고 도움을 구해야 할 분은 나의 지혜와 명철이 아닌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혜와 명철을 자랑했던 에돔에게도 하나님의 심판은 어김없이 임하게 됩니다.

    (12-13)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술잔을 마시는 습관이 없는 자도 반드시 마시겠거든 네가 형벌을 온전히 면하겠느냐 면하지 못하리니 너는 반드시 마시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노니 보스라가 놀램과 치욕 거리와 황폐함과 저줏거리가 될 것이요 그 모든 성읍이 영원히 황폐하리라 하시니라

    술잔을 마시는 습관이 없더라도 반드시 마시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고 싶더라도 절대 피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또한 13절에 보스라가 놀램과 치욕거리가 될 것이다 말씀하시는데 보스라는 에돔의 수도입니다. 에돔의 수도부터 시작해 모든 성읍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지혜 말고도 다른 이유로 심판을 당하게 됩니다.

    16절, 바위 틈에 살며 산꼭대기를 점령한 자여 스스로 두려운 자인 줄로 여김과 네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네가 독수리 같이 보금자리를 높은 데에 지었을지라도 내가 그리로부터 너를 끌어내리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에돔은 전략적으로 안전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산꼭대기를 점령하고, 독수리 같이 보금자리가 높이 있었기에 그들은 대적들의 공격을 쉽게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교만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교만함의 결과가 무엇인지 잠언 16:18절 말씀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에돔은 자신들의 지혜를 의지하였고, 그들의 전략적으로 유리한 상황을 보며 교만함에 빠진 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이유입니다. 결국 이러한 에돔에게 철저한 심판이 임할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성읍들이 멸망한 것 같이 거기에 사는 사람이 없으며 그 가운데에 머물러 살 사람이 아무도 없으리라

    하나님은 에돔을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것과 같이 이들에게도 반드시 심판이 임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심판이 언제 임할지 모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에 그것을 분별하는 능력이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설교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일깨워 주시지만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면 심판이 임하게 됩니다. 또한 설교말씀 뿐만 아니라 우리의 환경과 상황을 통해서 알려주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깨닫고 그 뜻을 분별하기 위해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심판을 당하게 된 암몬과 모압은 모두 이스라엘에 뿌리를 두고 있는 민족들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이 아닙니다. 암몬과 모압은 하나님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으며, 하나님은 심판 하시기 전까지 인내하시며 충분히 돌아올 기회와 시간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암몬과 모압은 지속적으로 이방신을 섬기고, 자신들의 지혜와 힘을 자랑하였습니다. 두 민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였지만 그들은 세속적 틀 안에서 자신의 지혜와 힘만 의지하였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에 그것을 분별하는 능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분별하며 가정과 삶의 자리에서 진리와 생명의 틀로 하나님과 함께 지어져 가시기를 소망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므로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전쟁 소리로 암몬 자손의 랍바에 들리게 할 것이라 랍바는 폐허더미 언덕이 되겠고 그 마을들은 불에 탈 것이며 그 때에 이스라엘은 자기를 점령하였던 자를 점령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예레미야 49:2).

    1. 암몬은 롯의 작은 딸이 아버지 롯에게서 낳은 아들의 자손들, 즉 롯의 자손들이다(창 19:38). 그러나 그들은 사사 시대 때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침공하여 괴롭혔고(삿 10:8-9) 다윗 시대에나(삼상 11:1; 삼하 10:6 등) 그 후 시대에도 그러하였다(대하 20:1).
    ‘말감이 갓을 점령하였다’는 말은 북이스라엘이 앗수르 나라에 멸망한 후 암몬 자손들이 이스라엘의 요단강 동쪽 중남부 갓 지파의 땅을 점령하고 거하고 있었음을 보인다. 그 일은 하나님 앞에서 악한 것으로 간주되었다(1).

     

    2. 하나님께서는 암몬 족속에게 심판을 선언하셨다. 전쟁으로 그들의 땅은 황폐한 무더기가 될 것이며 그 촌락들과 거민들은 불에 탈 것이다. 그때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주셨던 본래의 땅을 회복할 것이다(2-3). 

     

    3. 하나님께서는 물질적 풍요함 때문에 교만하고 우상숭배하며 부도덕한 세상 나라를 미워하신다. 그들은 각기 쫓겨 나갈 것이며, 도망하는 자들을 모을 지도자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장차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실 것을 말씀하셨다(4-6). 

     

    4. 에돔은 야곱의 형 에서의 자손들이며 이스라엘의 친척이다. 그들은 사해 남쪽 세일산, 높은 산악지대에 거하였다. 데만은 에돔의 큰 성이었다. 에돔이 멸망할 때에 드단 거민들도 돌이켜 도망하고 깊은 데 숨어야 할 것이다. 포도를 거두는 자들은 약간 열매를 남길 것이며 밤에 온 도적도 그 욕심이 차기까지만 취할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에서 자손이 벌거벗은 몸이 되게 하실 것이며 그 자손과 형제와 이웃이 멸망할 것이다(7-11).

     

    5. 에돔에 대한 예언은 모압이나 암몬처럼(렘 48:47; 49:6) 회복의 말씀이 없다. 산꼭대기와 바위틈에 건립된 에돔 성들은 주위 나라들에게 두려움이었고 에돔 자신에게는 자존심이었다. 그러나 그 교만 때문에 회개치 못하여 결국 멸망한다. 에돔을 지나는 자들마다 놀라며 그 모든 재앙을 인해 비웃을 것이다. 멸망의 소리로 땅이 진동하며 용사들은 해산하는 여인같이 될 것이다(12-22).

     

    6. 아람의 수도인 다메섹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아람의 성들은 재앙의 소문을 듣고 낙담하고 슬퍼할 것이며 평안이 없을 것이다. 다메섹 사람들은 연약해져서 도망치며 떨며 해산하는 여인같이 고통스러워하고 슬퍼할 것이다. 청년들은 거리에 엎드러지고 모든 군인들은 죽임을 당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다메섹의 성벽에 불을 놓으실 것이며 벤하닷의 궁전은 불태워질 것이다(23-27). 

     

    7. 게달과 하솔은 팔레스틴 동남쪽 아라비아 사막 지역의 나라들로 유목민이었다. 게달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그들을 침공하며 그 장막과 양떼를 취하고 그 휘장과 모든 기구와 약대를 빼앗을 것이다(28-29).

     

    8. 하솔은 평안하고 형통하며 문빗장 없이 염려 없이 거하였으나, 바벨론 왕의 공격을 당하여 약대들과 많은 가축들은 약탈당하고 이리나 승냥이 같은 짐승들의 거처나 될 것이며 아무 사람도 거기 거하지 않을 것이다(30-33).

     

    9. 엘람은 오늘날 이라크의 동쪽 국경 너머 즉 이란의 남서부 지역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엘람의 힘의 으뜸 되는 활, 곧 가장 강한 장수의 힘을 꺾으시고 엘람 백성을 사방으로 흩으시고 그 왕과 귀족들을 다 심판하시며 멸망시키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마지막 날에 엘람의 포로들을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34-39).

     

    주께서 주신 오늘! 우리의 소망이신 오직 하나님만 섬기며 그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길 원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심판이 임하는 나라들에게는 분명한 이유가 있음을 바라보게 됩니다. 상황이 어려워지고, 환경이 어려워지면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 분별하지 못하고 우리의 생각대로 행하지 않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행위들이 있다면 그것을 분별하여 깨닫고 돌이켜 다시금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하루 가운데 세속적 가치관을 따라가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따라 나아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암몬 자손이 비옥한 골짜기와 재물을 자랑하고 의지한 것처럼 우리의 삶에서 의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2. 우리의 생각과 힘으로 나아가려고 했을 때 오히려 더욱 상황이 악화되고 어려움에 빠졌을 때가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을 의지하였는지 묵상해 봅시다.
    3. 에돔의 모든 사람들이 심판을 받을 때 사회적약자인 고아들과 과부들은 하나님께서 구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도 돕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을 때는 언제입니까?
    4.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기 위해 우리가 삶 속에서 실제적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묵상하고 실천해 봅시다.

    5월 19일(수)

    예레미야 48장

    예레미야 46장 애급에 대한 심판 선언 / 태양신 - 생명의 신 '프타(Ptah)'를 심판한다.
    예레미야 47장 블레셋에 대한 심판 선언 / 다곤(Dagon), 다간(Dagan) '다산의 신'
    예레미야 48장 모압에 대한 심판 선언 / 그모스(Chemosh) '전쟁의 신'

    하나님은 모든 나라를 다스리시고 통치하신다는 의미
    이방 나라에 대한 심판 예언은 돌아올 것이라는 약속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고향으로 돌아올 것을 약속하셨다.

    모압은 어떤 나라이었나?

    1. 현재 : 요르단
     (사해 오른쪽의 에돔 접경지역)

    2. 종교 : 그모스(48:7, 13
     (자기의 아들을 불에 던져 바치는 신앙)
     열왕기하 3:26-27
     모압
    왕이 전세가 극렬하여 당하기 어려움을 보고 칼 찬 군사 칠백을 거느리고 충돌하여 지나서 에돔 왕에게로 가고자 하되 능히 못하고. 이에 자기 위를 이어 왕이 될 맏아들을 취하여 성 위에서 번제를 드린지라 이스라엘에게 크게 통분함이 임하매 저희가 떠나 각기 고국으로 돌아갔더라.

    3. 민족 : 롯의 장녀와 관계를 갖고 태어난 족속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이므로 유대인의 혈통을 가졌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과 고모라 성이 불의 심판을 받았을 때 탈출하여 살아남았던 롯과 그의 두 딸이 아버지와 동침한 후 얻은 아들은 모압과 암몬입니다. 부정한 방법에 의해서 형성된 족속이지만 유대인의 혈통을 갖고 있습니다.

    롯은  아브라함과 갈대아 우르 지방을 떠나 하란을 거쳐 가나안 땅에 왔고 기근을 피하여 애굽에 갔을 때도 동행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돌아와서 아브라함과 목축할 땅을 두고 충돌이 생겼습니다.
    아브라함이 네가 좋은 곳을 먼저 택하라고 하자 당시에 비옥했던 소돔, 고모라 지방을 택했고, 점점 소돔, 고모라지역으로 가까이 가서 나중에는 그 속에 들어가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지역에 발생한 전쟁에 포로가 되었었으나 아브라함에게 구출된 후, 다시 소돔, 고모라지방에 살았습니다.
    그 지방은 타락, 특히 성적타락이 극심한 지역이어서 롯은 괴로와하며 지냈지만 거기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후에 하나님이 유황불로 그 지역을 멸할 때, 천사들에 의해 그 가족이 구출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 지역의 사상에 오염된 가족은 비록 그들도 롯처럼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들로 생각되나 세상에 물들어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롯의 처는 남겨둔 재산 등에 미련을 두고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으며, 롯의 딸들은 후손을 남긴다는 엉뚱한 발상으로 아버지와 관계하여 모압, 암몬을 낳게 됩니다.
    롯의 두 딸들이 아버지와 관계를 갖고 아들을 낳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소돔과 고모라 성의 성 윤리  의식을 엿볼 수 있었던 사건입니다.
    당시 소돔과 고모라 성은 동성애, 근친상간 등이 아주 평범한 풍습이었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그들을 멸하는 것도 금지하셨습니다.
    그들도 믿은 롯의 계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특기할 사실은 예수님의 족보계통에서 모압족속인 여인 룻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우상을 섬기는 민족 속에 살았지만 분명히 룻도 그들 조상에게서 하나님에 대하여 듣고 안 것이 있어서 믿는 그의 시어머니 나오미를 쫓아서 모압에서 나왔을 것입니다.

    신약시대의 역사도 똑같은 일들이 일어났고 지금도 있다고 봅니다.
    믿는 사람들이 소돔, 고모라같의 세상의 풍습에 오염 되면 형편없는 일들이 생깁니다.
    속죄의 경험을 확실히 한 사람들도 성령이 계시는 교회를 그룹을 지어 떠나게 되고 자기들 나름대로 거짓된 교리, 풍습 속에 삽니다. 그들은 복음에 오히려 반대하고 박해하는 집단이 됩니다.
    세상사람들과 똑같은 행동들이 나옵니다.
    그래도 그 속에 아주 적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우상숭배에서 빠져 나올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저주하는 것도 금하십니다.

    지금이 바로 소돔, 고모라같은 시대입니다.
    불심판이 닥칠 수 있는 시대입니다. 동성애, 근친상간 등이 활개치는 시대입니다.
    활발한 복음역사가 일어났던 곳에 성령의 활동이 지나가면 Free Sex 등 성적타락이 난무합니다.
    이런 풍조가 유럽선진국, 미국 등을 심각하게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Internet문화, 영상문화, 스포츠 등 오락문화 속에 모처럼 활발하게 일어나는 성령의 불길에 찬 물을 끼언는 입장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부모는 세상 오락에 빠져 TV, Internet, Video 앞에 있는 것들을 자녀들이 보게 하면서 아무리 충고해도 소용없습니다.
    롯이 딸들에게 충고 안했겠어요?
    롯의 사윗감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렇게 형편없는 사람들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장인어른의 올바른, 죄의 심판에서 도망하자는 권유를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예레미야 48:29

    우리가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 심한 교만 곧 그 자고와 오만과 자긍과 그 마음의 거만이로다.

    현대인의 성경

    모압의 교만에 대해서 듣고 보니 그 교만이 대단하구나.
    그가 거드럭거리고 뽐내며 자만하고 잘난 척하며 그 마음이 아주 거만하다.

    이사야 16:6

    우리가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 심히 교만하도다
    그가 거만하며 교만하며 분노함도 들었거니와 그의 자랑이 헛되도다.

    현대인의 성경

    모압은 우리가 들은 소문대로 정말 교만하고 거만하구나.
    그러나 아무리 모압이 잘난 척해도 그 교만은 헛된 것이다.

    예레미야 48:42

    모압이 여호와를 거스려 자만하였으므로 멸망하고 다시 나라를 이루지 못하리로다. 


    에스겔 25:11
    내가 모압을 벌하면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 것이다.
       

    예레미야 48:46

    모압이여 네게 화 있도다 그모스 백성이 망하였도다
    네 아들들은 사로잡혀 갔고 네 딸들은 포로가 되었도다.

    그모스(Chemosh) : 정복자. 전쟁의 신


    잠언 22:4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현대인의 성경)    

    겸손하고 여호와를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면 부와 명예를 얻고 장수하게 된다.


    오늘의 기도

    복음만을 믿고 따르자!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대한민국을 위하여(건국 이념)
    미국을 위하여(청교도 신앙)


    5월 18일(화)
    예레미야 47장

    예레미야 46장부터 51장은 남 유 다 왕국을 중심으로 그 주위 여러 나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말씀입니다.
    46장은 애급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47장은 블렛세에 대한 심판의 예언입니다.
    블레셋에 대해서 "여호와의 칼"이 임할 것이라고 합니다.

    블레셋 - 히브리어 "펠레쉐트" 이 말에서 "팔레스타인"이란 명칭이 유래된다.
    1. 해양민족
    2. 5개 도시 국가(가자, 아스글론, 아스돗, 에글론, 갓)
    3. 종교는 "다곤 신"(1/2은 물고기 모양, 1/2은 사람 모양)

    역대상 21:1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사탄이 다윗을 충동하여 인구조사를 하게 하였습니다.
    인구 조사는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용사들이 얼마나 되는지를 계수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스라엘백성들을 최초로 통일시킨 왕이었습니다.
    브엘세바에서 까지 모든 사람들을 계수하도록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압 장군은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보다 백배나 더 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백성이 다 주의 종입니다. 어찌하여 명령하여 하나님께 범죄하려고 하십니까?"
    그러나 다윗은 요압장군에게 재촉하여 계수하도록합니다.

    계수한 결과 칼을 뺄만한 자가 이스라엘 지파내에서 110만명, 유다지파에서는 47만명 그런데 요압은 레위베냐민 지파는 계수하지 않았다고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악하게 보셨습니다.
    선지자 갓을 통하여 세 가지 징벌을 내리신다고 하시면서 그 중 한가지를 선택하라고 하셨습니다.

    첫째는 3년 기근
    둘째는 3개월 동안 적군에게 패하고 적군의 칼에 쫓겨다님
    셋째는 여호와의 칼
    여호와의 칼이란 전염병이 3일 동안 여호와의 손에 빠지는 것입니다.

    다윗은 세 번째 여호와의 칼을 선택합니다.
    그 결과 전염병으로 7만 명이 죽었습니다.

    8절, 다윗이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를 범하였나이다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16, 17절. 다윗이 눈을 들어보매 여호와의 사자가 천지 사이에 섰고 칼을 빼어 에 들고 예루살렘 편을 가리켰는지라 다윗이 장로들로 더불어 굵은 베를 입고 얼굴을 에 대고 엎드려. 하나님께 아뢰되 명하여 백성을 계수하게 한 자가 내가 아니니이까 범죄하고 악을 행한 자는 곧 내니이다 이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컨대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으로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시고 주의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지 마옵소서.

    18절,
    여호와의 사자가 갓을 명하여 다윗에게 이르시기를 올라가서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우리 믿는 사람들은 다윗만큼 위대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용기 있는 사람이고 다윗은 노래와 시와 찬양이 있는 하나님에 대한 감성이 지극히 발달했습니다. 다윗은 튀어난 리더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가 마음에 합하지만 잘못하면 용서가 없는 분입니다. 아무리 목사라고 하여도 아무리 장로 권사, 집사라고 하여도 하나님앞에서는 인정사정없습니다. 하나님의 칼을 멈추게하는 방법을 찾아보록하겠습니다.

    여호와의 칼에서 벗어나는 신앙

    첫째, 회개(悔改)

    17절. 하나님께 아뢰되 명하여 백성을 계수하게 한 자가 내가 아니니이까 범죄하고 악을 행한 자는 곧 내니이다 이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컨대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으로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시고 주의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지 마옵소서.
    무엇을 회개해야합니까?
    다윗에게는 인구조사를 한 것에 대한 회개가 필요합니다.
    인구조사는 다윗의 시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구조사는 출애굽할 때에도 이루워졌습니다.
    성경의 전체의 내용인 민수기를 사람의 숫자를 세는 것입니다.
    사람의 숫자를 세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그런데 다윗이 인구조사를 한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라 다윗의 교만이었습니다.
    내가 이만큼의 군사들을 데리고 있다는 자랑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요구하는 것은 골리앗과 싸울 때에 가졌던 처음 믿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믿음을 버리고 다윗의 군사들을 생각한 것입니다.

    사무엘상 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골리앗은 2미터가 넘는 큰 장군입니다.
    놋투구를 쓰고 60키로가 넘는 비늘 갑옷을 입고 방패를 든 사람입니다.
    그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무장한 사람입니다.
    세상에 어떤 사람도 이길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어린 소년입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물매와 조약돌입니다.
    그리고 가장 가력한 힘 바로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무기였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항상 사탄과 영적인 전쟁을 진행중이면 우리는 영적인 싸움에서 가장 약한 분분을 통하여 사탄이 공격합니다.
    그 약한 부분이 자랑, 교만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우리가 넘어지고 그리고 좌절합니다.

    시험과 유혹을 받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다만 그것에 넘어가서 사탄의 영향력 아래있고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이 죄입니다.

    둘째, 예배를 회복하라

    18절. 여호와의 천사가 갓에게 명령하여 다윗에게 이르시기를 다윗은 올라가서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하나님이 후회하셨다고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후회할일도 없고 하나님은 착오가 없으신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표현을 사용했을까요?
    사람이 조금 이해하고 사람이 느낄 수 있다록 하기 위하여입니다.
    사람을 불쌍히 여긴다는 표현입니다.
    7만명을 죽이는데 하나님이 기뻐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불쌍하다는 표현입니다.

    다윗이 교만하여 범죄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범죄의 댓가를 지불하기 위하여 전염병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인하여 주님이 마음의 상태를 말한 것입니다. 마치 부모님의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매일 새벽마다 온라인으로 새벽 기도로 모일 수 있도록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먼저 제가 은혜를 받습니다.
    예레미야서를 읽어가면 제가 많은 은혜를 깨닫습니다.

    다윗이 인구조사를 하여 전쟁에 나갈 군사들의 수를 계수한 것처럼 그동안 우리가 하나님 앞에 겸손하지 못했습니다.
    한국에 복음이 전래된 이후에 전 인구의 25%가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자랑했습니다.
    더구나 세계에서 가장 큰 10대 교회가 한국에 있다고 자랑했습니다.
    선교사를 미국 다음으로 많이 파송한 선교국가라고 자랑했습니다.
    목회자들을 위한 세미나와 각종 모임이 고급 호텔에서 모여야 합니다.
    호텔에서 모임을 갖게 되면 고급 외제 승용차는 가장 편리한 주차장으로 안내합니다.
    그러나 승합차는 보이지 않는 곳으로 주차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의 모임에도 외제차와 승합차로 구분한다고 합니다.

    과연 이러한 현상을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오늘의 기도

    1. 회개의 삶을 회복하자(言行一致)
    2. 예배를 회복하자(禮拜者의 生活) 生活 禮拜

    여호와의 칼

    첫째, 온역(역대상 21:12)

    혹 삼년 기근일찌, 혹 네가 석달을 대적에게 패하여 대적의 칼에 쫓길 일일찌, 혹 여호와의 칼 온역이 사흘 동안 이 땅에 유행하며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온 지경을 멸할 일일찌 하셨나니 내가 무슨 말로 나를 보내신 이에게 대답할 것을 결정하소서.


    둘째, 심판(이사야 34:5-6)


    여호와의 칼이 하늘에서 족하게 마셨은즉 보라 이것이 에돔 위에 내리며 멸망으로 정한 백성 위에 내려서 그를 심판할 것이라.
    여호와의 칼이 피 곧 어린 양과 염소의 피에 만족하고 기름 곧 수양의 콩팥 기름에 윤택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보스라에서 희생을 내시며 에돔 땅에서 큰 살륙을 행하심이라.


    셋째,  황무지(예레미야 12:12)

    훼멸하는 자들이 광야 모든 자산 위에 이르렀고 여호와의 칼이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삼키니 무릇 혈육 있는 자가 평안치 못하도다.







    5월 17일(월)

    예레미야 46:16
    그가 많은 자로 넘어지게 하시매 사람이 사람 위에 엎드러지며 이르되
    일어나라 우리가 포악한 칼을 피하여 우리 민족에게로우리 고토로 돌아가자.

    예언(豫言)
    1. 다가올 재앙을 대비하라(회개)

    2. 이방민족을 다스리시는 하나님(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예레미야 46:1

    열국에 대하여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46장 : 애굽(여호야김 제4년에)

    47장 : 블레셋

    48장 : 모압

    49장 : 암몬

    50장, 51장 : 바벨론

    52장 : 시드기야

    고토(예루살렘)로 돌아가자!

    북 이스라엘 BC 722년
    남 유다 BC 586년
    - 회복을 위한 말씀


    모든 나라와 민족
    - 새 하늘과 새 땅(계 21:1) / 신천지(新天地) - 새 하늘과 새 땅

    욥기 30:8
    그들은 본래 미련한 자의 자식이요 비천한 자의 자식으로서 고토에서 쫓겨난 자니라.

    현대인의 성경
    이들은 어리석고 무식한 천민의 자식들로 자기 땅에서 쫓겨난 자들이다.

    미련한 자(잠언 14:9)
    미련한 자는 죄를 심상히 여겨도 정직한 자 중에는 은혜가 있느니라.

    이사야 14:1

    여호와께서 야곱을 긍휼히 여기시며 이스라엘을 다시 택하여 자기 고토에 두시리니
    나그네 된 자가 야곱 족속에게 가입되어 그들과 연합할 것이며.


    이사야 14:1 / 현대인의 성경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시고 다시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택하여 본래의 그들 땅에 살게 하실 것이며
    외국 사람들도 그들과 함께 그 곳에 가서 살 것이다.


    이사야 37:7       
    보라 내가 신을 그의 속에 두리니 그가 풍성을 듣고 그 고토로 돌아갈 것이며.

    에스겔 18:31
    너희는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예레미야 51:9
    우리가 바벨론을 치료하려 하여도 낫지 아니한즉 버리고 각기 고토로 돌아가자
    그 화가 하늘에 미쳤고 궁창에 달하였음이로다.

    에베소서 4: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마음과 생각으로 

    오늘의 기도

    1. 주의 영으로 새롭게 하소서
    (영과 혼과 육)

    2. 온 세상이 하나되게 하소서
    (진리의 말씀)




    5월 15일(토)
    예레미야 45장

    예레미야 45장의 역사적 배경은 엘리야 김 왕 제4년이라고 합니다.
    남 유다 왕국이 멸망하기 전 대략 18-19년 전이므로 기원전 604-605년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아주 특별한 만남의 관계를 여호수아와 갈렙, 예레미야와 바룩의 관계라고 하겠습니다.



    5월 14일(금)
    예레미야 44장

    유다 백성들이 이방 신에게 분향하고 섬김으로 여러 선지자들을 보내서 악한 일을 멈추라고 깨우쳤으나 백성들은 악행을 멈추지 않으므로 결국 예루살렘은 무너졌습니다.
    남은 백성들은 여전히 하늘 여신에게 분향할 때는 평안하게 지냈으나 하늘 여신 섬기는 것을 멈추므로 이런 끔직한 일이 일어났다고 하며 오히려 예레미야에게 반박합니다.
    그러므로 애급으로 피신한 남은 무리들에게 반드시 예루살렘에 내렸던 재앙이 임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예레미야 1장부터 52장까지 주된 메시지는 "남 유다 왕국 백성들이 바벨론에게 항복하고 70년 동안 고난의 시기를 겪은 후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예레미야의 이러한 예언은 비록 하나님의 말씀일지라도 당시 남 유다 왕과 백성들이 매우 듣기 거북한 예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의 예언을 부정하였고 심지어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하였으며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주인이 되신 여호와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감옥에서 끌어내셨고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명령에 따라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의 보호를 받게 됩니다.


    신명기 8:2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5월 11일(화)
    예레미야 41:1-18
    왕의 장관 이스마엘

    남 유다 왕국의 멸망이란 사건에서 혼란기 때에 나타나는 세 가지 유형의 지도자 모습을 살폅봅니다.

    이스마엘 : 저항하여 회복하려는 자세
    그다랴 : 복종하며 화합하려는 자세
    요하난 : 협력할 수 없는 사람을 제거하려는 자세

    예레미야 41장의 역사적인 배경은 BC 587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서방 원정을 계획하면서 유다와 암몬을 공격하게 됩니다.
    강대국 바벨론이 공격해온다는 사실은 암몬 왕 바알리스에게는 매우 위험한 소식이었음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암몬 왕 바알리스는 유대 왕가의 일원인 이스마엘을 부추겨 바벨론 총독인 그다랴를 죽이도록 모략을 꾸미게 됩니다(40:13-14).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다랴의 군대 장관이던 요하난이스마엘의 암살계획그다랴에게 급히 알려 대비케 합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임명된 유다 총독 그다랴가 살해된다면 그 이후에 엄청난 후폭풍이 불어올 것을 예상할 수 있음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다랴 요하난의 요청을 거부해버립니다.

    왜 그다랴는 그처럼 위험하다는 충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을까요?
    그다랴는 요하난의 경고와 같은 위험요소가 있다 할지라도 지금 이스라엘에 정치적인 화해와 단결을 이루어 재건에 매진하려는 마음이 더욱 커서 이스마엘을 의심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다랴가 정치적인 화해와 단결에 더 집중하는 마음이 있는 배경에는 그다랴의 선조들에게서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다랴 가문은 한 세기 이상 동안 유다의 왕실에서 아주 유력하게 득세하던 정치적인 명문가였습니다.
    그다랴의 조부 ‘사반’은 요시야 왕의 서기관이었습니다(왕하 22:8-10).
    그다랴의 부친 ‘아히감’은 예레미야가 성전을 비난하는 설교를 하였을 때 그를 위험에서 건져내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렘26:24).
    더구나 미스바에서 그다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렘 40:8) 현재 유대 땅의 지휘관들임을 볼 때 그다랴는 다른 정치적 이념을 지닌 이스마엘이라도 신뢰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마엘과의 식사자리를 가지는 것으로 오늘 본문이 시작됩니다.

    이 식사 자리는 첨예한 정치적 대립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유대 지방의 안녕과 회복을 꿈꾸며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려는 총독 그다랴암몬 왕 바알리스의 부추김으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데 혈안이 되어 살인음모를 꾸미는 이스마엘과의 대립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온해보이지만 그 안에는 치밀한 정치적인 이권과 다툼, 불일치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은 지금의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이기도 합니다.
    예레미야서에 전체적으로 흐르는 메시지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바벨론의 침략에 저항하지 말고 순순히 포로로 끌려가라는 것입니다(렘 32:3-5).

    이는 그가 예언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이 성을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차지할 것이며 유다 왕 시드기야는 갈대아인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반드시 바벨론 왕의 손에 넘겨진 바 되리니 입이 입을 대하여 말하고 눈이 서로 볼 것이며 그가 시드기야를 바벨론으로 끌어 가리니 시드기야는 내가 돌볼 때까지 거기에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갈대아인과 싸울지라도 승리하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더니 유다 왕 시드기야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같이 예언하였느냐 하고 그를 가두었음이었더라.”

    이스라엘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거부하고 애굽으로 피신하거나 철저히 저항함으로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렘 42:18).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나의 노여움과 분을 예루살렘 주민에게 부은 것 같이 너희가 애굽에 이를 때에 나의 분을 너희에게 부으리니 너희가 가증함과 놀램과 저주와 치욕 거리가 될 것이라 너희가 다시는 이 땅을 보지 못하리라 하시도다

    이스라엘의 상황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간의 첨예한 대립인 것처럼 그다랴와 이스마엘도 역시 대립 중에 있습니다.
    그다랴와 이스마엘의 식사자리가 첨예한 대립 속에서 이루어진 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인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선한 뜻과 이스라엘의 완악한 불순종이 함께 공존하여 대립하는 것과 대조를 이룹니다.

    원래 고대 근동의 전통적인 문화에 따르면 식탁을 베푼 주인은 손님을 극진하게 대접할 뿐만 아니라 그를 보호해야 했으며, 또한 손님은 이런 주인에 대해 신뢰할만한 행동으로 보답하는 것이 인간의 기본자세라 여겼습니다.
    평화와 안정을 이루고자하는 그다랴는 식사자리에서 자연스럽게 긴장을 풀었으나, 이스마엘은 철저한 암살계획을 세웠고 결국 그다랴를 해쳤습니다.
    그것은 개인에 대한 살해 행위이기도 하지만 바벨론 왕에 대한 반역이기도 하며, 또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으로 답하는 행위였습니다.

    이스마엘의 살인행위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80명의 성전 순례단을 살해하는 장면이 5절부터 시작됩니다.
    80명의 순례단들은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것에 대한 애통의 마음으로 소제물과 유향을 가지고 제사하려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제사장에게는 금하는 수염을 깍고 몸을 상하게 하는 이방 의식을 겸하고 있었습니다(5절).

    “그 때에 사람 팔십 명이 자기들의 수염을 깎고 옷을 찢고 몸에 상처를 내고 손에 소제물과 유향을 가지고 세겜과 실로와 사마리아로부터 와서 여호와의 성전으로 나아가려 한지라”

    우리는 지금 본문 속에서 이스마엘이 그다랴를 살해한 사건을 보고 있는데 이 사건 하나로 이스라엘 전체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도 하나의 사건만 보더라도 사회 각 분야별로 어떤 상태인지는 금새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이스마엘의 살인사건을 볼 때 현재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상황은 바벨론을 바라보는 시각차이와 예루살렘 성이 훼파되고 나라가 존폐위기에 대한 인식의 다름으로 인해 온건파와 강경파의 지속적인 갈등이 일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성전이 무너진 암담한 상황에서 슬퍼하는 80명의 순례단을 보면 종교적인 열정은 있으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없어 야훼신앙과 이방신앙의 모습이 혼재된 혼란스러운 종교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마엘이 자신의 야욕을 이루고자 그다랴를 속이고, 80명의 순례단을 속여 살해하는 모습에서 당시 인간의 이중성 및 사악한 마음에 기인한 생명 경시의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80명의 순례단 중 몇 명이 목숨을 부지하고자 뇌물을 상납하고, 이스마엘은 그들을 살려주는 것을 보면서 이스마엘의 살인이 정의와 공의, 명분과 애국심이 아닌 탐욕과 악함에서 나온 살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도 수많은 사건들과 이야기들을 허락하십니다.
    그것은 너무도 일상적으로 자연스럽게 나타나지만 실은 나의 영적인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들려오는 소식들에 반응하는 모습에서도, SNS에 글을 올릴 때에도 실은 나의 영적인 상태가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오늘 하루 나의 말과 태도, 표정과 행동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묻어나며, 나의 신앙은 어떠한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는지 살펴보는 하루가 된다면 슬픔 중에 빠진 온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회복하는 거룩한 첫 걸음을 떼는 복된 하루가 될 것입니다.

    주님,
    예배하는 그 시간만 거룩한 것이 아니라 저희들의 모든 삶과 생각까지도 거룩한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물로 받은 오늘 하루가 온전히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거룩함의 본이 되게 하옵시고
    저희들의 삶을 돌아보는 영적 성찰이 있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주신 신앙으로 아픔을 넘어 세상을 위로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5월 10일(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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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 5. 6(목)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예레미야 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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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송 / 356장(성자의 귀한 몸)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예레미야 37:1∼21

    ♦ 묵상을 위한 주제 :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3절)
    ♦ 성구 : 시드기야 왕(王)이 셀레먀의 아들 여후갈과 마아세야의 아들 제사장(祭司長) 스바냐를 선지자(先知者) 예레미야에게 보내어 청(請)하되 너는 우리를 위(爲)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祈禱)하라.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은 유다로 진격해 와서 대부분의 도시들을 점령하고, 예루살렘까지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애굽의 군대가 진격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포위를 풀고 뒤로 물러섰다가 다시 예루살렘을 약 1년간 포위하여 마침내 함락했습니다.

    본문은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 포위를 잠시 풀었던 때인 주전(B.C.) 587년 전후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유다에는 모두 20명의 왕이 있었는데, 마지막 5왕(16-20대)은 모두 요시야와 관련이 있습니다.
    요시야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 아들 요하난은 왕위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유다의 16대왕의 요시야이었고, 17대 왕이 요시야의 셋째 아들 여호아하스(살룸)인데 3개월을 다스렸습니다. 18대 왕이 요시야의 둘째 아들인 여호야김(엘리야김)인데 11년을 다스렸습니다. 19대 왕이 여호야김의 아들이자, 요시야의 손자인 여호야긴(엘리야긴)인데 3개월을 다스렸습니다. 마지막 20대 왕이 요시야의 넷째 아들인 시드기야인데 11년을 다스렸습니다.

    미국 남북전쟁의 치열한 전투 중 하나가 아틀란타 근처 산악지대에서 있었다.
    전투가 끝난 밤에 연합군 소속인 스물 한 살의 젊은 장교가 중상을 입은 채 쓰러져 있었다.
    위생병들이 이 장교를 쳐다보고는 말했다.
    ″죽었어, 숨을 쉬지 않는 걸.″
    그는 장교를 버려둔 채 자리를 떠났다.
    이 청년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날마다 기도했다.
    그러나 아들의 성격은 너무 과격해서 대학 시절에 항상 그는 종교적인 문제 밖에 있었으며 무신론자로 자처했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젊은 장교는 누운 채로 의식을 회복하고 양친들의 믿음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좌절과 절망의 순간에서 그는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했다.
    ′만일에 나를 살게 해 준다면 남은 인생을 하나님께 봉사하겠다′
    인생의 위기가 닥쳐서야 비로서 하나님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위생병이 다시 그곳을 지나다가 아직 살아있는 그 장교를 발견하고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는 군목을 불러 그리스도인이 되려 했던 얘기를 털어놓았다.

    무엇이 전장에서 부상당하고 쓰러진 젊은이를 위생병이 발견할 수 있도록 하였겠는가?
    위생병들도 그 가능성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청년에게 손을 뻗치시고 다시 고쳐 만드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봉사하기로 서약했던 그의 남은 삶에서 무슨 일이 나타났는가?

    그는 필라델피아의 템플 대학교와 세 개의 종합병원을 설립하였다.
    필라델피아 침례교회도 그의 헌신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20여권의 저서를 내었고 수 천명의 영혼을 구원시켰다.
    그 청년이 곧 미국이 배출한 가장 기적적인 인물 중 한 사람인 러셀 콘웰이다.
    하나님은 그를 부셔뜨리고 나서 그에게 봉사하는 적절한 그릇으로 다시 고쳐 만드셨다.

    빨래줄 기도

    미국에 알타 베일이라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그녀가 하루는 주일날 교회에서 기도의 위력과 중보기도의 필요성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집안일을 하면서 오늘 들었던 설교말씀처럼 ´어떻게 하면 습관처럼 기도를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다 다림질을 하던 도중에 무심코 빨랫줄에 걸려 있는 빨래들이 눈에 들어왔고, 그녀는 곧 기도 제목을 걸어놓는 ‘기도의 줄’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하루 중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부엌을 가로지르는 짧은 줄을 걸어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부탁한 기도제목을 종이에 적어 걸어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줄이 보일 때마다 종이를 보며 의식적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응답받은 기도들은 빨래를 걷은 것처럼 줄에서 걷어 다른 상자에 보관을 해놓았습니다. 

    기도의 줄을 부엌에 설치한 이후에 그녀는 얼마나 많은 기도들이 응답받고 있는지 알게 되었고, 그 간증을 들은 주위 성도들도 자신들에게 적합한 장소에 ‘기도의 줄’을 만들어 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처럼 기도는 우리의 일상 속에 들어와야 합니다. 서로 기도하고 응답을 공유하는 신앙을 통해 다른 성도들도 기도의 중요성과 응답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깨닫게 됩니다.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에서 기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십시오. 반드시 창대하게 될 것입니다.


    의인은 고난을 받지만 악인은 심판을 받습니다.
    의인에게 고난을 주는 이들은 악인입니다.
    그리고 그 악인을 심판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본문에는 대조되는 두 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한 명은 시드기야이며 다른 한 인물은 바로 예레미야입니다.

    동시대에 시드기야는 권력의 상징인 왕이라면,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의 상징인 선지자입니다.
    그리고 권력의 상징인 시드기야를 왕으로 삼은 자는 그들의 원수였던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입니다.

    1절입니다.
    “요시야의 아들 시드기야가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으니 이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그를 유다 땅의 왕으로 삼음이었더라.”

    반면에 말씀의 상징인 예레미야가 선지자가 된 배경은 이러합니다.
    예레미야 1장 4- 5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리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예레미야는 이미 모태에 짓기 전부터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였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성별하시고 세우신 자입니다.
    그에 비해 시드기야는 하나님의 심판의 끝에 다다른 유다의 마지막 왕으로서, 그들을 멸망시킬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을 통해 왕이 된 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지자 예레미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하나님의 뜻을 듣고 순종하여야 했지만, 귀로는 들었을지라도 절대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귀로만 들은 시드기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자로 평가됩니다.

    2절입니다.
    “그와 그의 신하와 그의 땅 백성이 여호와께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을 듣지 아니하니라.”

    시드기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가볍게 여기며 순종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여후갈과 제사장 스바냐를 예레미야에게 보내며 자신들을 위해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기도하길 청합니다.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시드기야에게 여러 번 경고의 말씀을 주셨지만, 귀로만 듣고 순종하지 않았기에 결국 하나님께서 주시는 회개의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자신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를 부탁합니다. 이는 순종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을 보호해줄 수호신으로 하나님을 몰락하였기 때문입니다.

    시드기야는 바벨론 느부갓네살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애굽의 군대와 손을 잡고 그의 두려움의 대상을 몰아내려 하였습니다.
    느부갓네살을 두려워한 그는 어쩌면 더 큰 외부의 힘을 얻어 그 두려움으로부터 달아나려 했을 것입니다.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를 왕위에서 몰아내며 자신을 왕으로 삼은 느부갓네살은 시드기야에게 있어 가장 큰 존재이자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느부갓네살의 밑에서 모든 것을 명령받아야 했으며, 또한 신하들의 눈치를 보아야 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면서도 결과적으론 사람의 방법, 신하들의 의견을 따라 행동한 것입니다.
    시드기야 왕은 무늬뿐인 왕이며, 어떠한 것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너무나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아버지 요시야 시대의 선지자 예레미야의 말씀에 호기심 어린 마음으로 다가옵니다. 그런 그에게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히 전합니다.

    7절과 8절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를 보내어 내게 구하게 한 유다의 왕에게 아뢰라 너희를 도우려고 나왔던 바로의 군대는 자기 땅 애굽으로 돌아가겠고 갈대아인이 다시 와서 이 성을 쳐서 빼앗아 불사르리라”

    예레이먀의 두려운 대상은 결단코 새로 왕위에 오른 시드기야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두려운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셨으며, 그 분만을 경외하였습니다. 상황과 환경에 따라 처신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전하는 그의 모습은 그가 하나님을 가장 두려워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시드기야와 그의 신하들은 그들이 믿던 애굽의 도움으로 갈대아인, 즉 바벨론이 물러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유다의 지도자들은 스스로의 지혜에 속아 바벨론이 그들에게서 물러갔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여 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레미야는 찬물을 끼얹은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설령 유다와 애굽이 전쟁에서 승리한다 하여도 바벨론의 부상자들만으로도 유다를 심판하실 수 있으시며, 반드시 그들의 성을 불사르실 것이라 예언합니다. 10절입니다.

    “가령 너희가 너희를 치는 갈대아인의 온 군대를 쳐서 그중에 부상자만 남긴다 할지라도 그들이 각기 장막에서 일어나 이 성을 불사르리라”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경고에 시드기야는 진정한 능력이 어디에서 오며, 또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를 분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눈앞에 있는 바벨론의 군대들과 그의 곁에 있는 고관들과 신하들 앞에 눈치만 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타인의 눈치 앞에 민감합니다.
    그런 시드기야와는 반대로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는 예레미야의 상황은 어떠합니까? 예레미야는 시드기야와 그들의 신하들에게 하나님의 경고 말씀을 전하며 자신의 분깃을 받기 위해 예루살렘을 떠나 베냐민 땅으로 향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지기의 우두머리 이리야가 그를 붙잡아 고관들에게 끌고 갔고 그들은 노여워하며 예레미야를 옥에 가둡니다. 15절입니다.

    “고관들이 노여워하여 예레미야를 때려서 서기관 요나단의 집에 가두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 집을 옥으로 삼았음이더라”

    모함을 받은 예레미야는 매를 맞으며 결국 뚜껑을 씌운 웅덩이에 들어갑니다. 정말 분하고 억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그 역시 죽음 앞에 두려워합니다. 예레미야는 웅덩이 속에서 죽을 것 같은 괴로움을 느꼈고 자신을 찾아온 시드기야의 부하들에게 탄원합니다. 20절입니다.

    “내 주 왕이여 이제 청하건대 내게 들으시며 나의 탄원을 받으사 나를 서기관 요나단의 집으로 돌려보내지 마옵소서 내가 거기에서 죽을까 두려워하나이다”

    비록 예레미야가 죽음 앞에 두려움을 가졌지만,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억울한 죽음 앞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우리가 육체를 가진 사람이기에 죽음 앞에 두렵고 떨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 죽음보다 더 두려운 대상이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죽음 앞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하여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그 누구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악인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반면 의인은 반드시 악인들로 부터 고난을 받습니다.
    우리는 지금 악인들로부터 오는 고난 가운데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있습니까?
    악인과 의인을 구분하는 결정적인 요소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에 달려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심판과 고난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는 바로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가에 달린 것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대상이 정녕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찾아오는 고난을 두려워하십니까? 아니면 장차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십니까?
    우리는 두려운 하나님 앞에 서서 전심으로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오직 그분께 순종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위의 두려운 대상 앞에 오늘도 그들의 눈치를 보며 하루하루를 살고 계십니까?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지 않다면 분명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천만인이 우리를 에워싸며 진 친다 하여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소리와 소문에 두려워하지 맙시다. 불안과 염려, 걱정과 근심에 두려워하지 맙시다.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합시다.
    오늘도 하나님 앞에서 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심판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오늘도 오직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나님만을 경배합시다.










    누군가에게 기도를 부탁하여 기도하는 것을 “중보기도”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분명하게 깨우쳤습니다. 기도에는 “간구(懇求, Request)” “도고(禱告, Intercession)” “감사(感謝, Thanksgiving)” “기도(祈禱, Prayer)”라고 설명합니다.

    “시드기야 왕”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부탁한 것은 “도고(禱告)”라는 기도를 말합니다. “도고”를 다른 말로 “중보(中保)”라고 합니다.

    신자와 불신자 모두 “당신을 위하여 기도한다.”는 말을 좋아합니다.
    성령께서도 모든 사람을 위하여 탄식하며 기도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성령께서 중보 기도를 할지라도 당사자가 믿음위에 세워지지 않는다면 그 기도의 효력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누구나 위기 앞에서는 절대자를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시드기야 왕은 왕정국가의 전통에 의해서 왕위에 앉은 것이 아니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유다 왕국의 마지막 20대 왕이 되었습니다.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는 왕이 되었기 때문에 기도가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시드기야는 기도에 합당한 삶의 길을 선택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를 부탁했으면서 선지자 예레미야를 감옥에 가두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나를 위하여 기도하는 믿음의 사람이 있다는 것은 매우 소중한 영적 자산입니다. 이러한 영적 자산을 확장하여 큰 유익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믿음의 터전 위에 나를 세워가야 합니다.

    ♪ 찬양 /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https://www.youtube.com/watch?v=mdZ6yMN109M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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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 5. 5(수) 
    예레미야의 구전(예레미야 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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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송 / 66장(지난 밤에 보호하사)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예레미야 36:1∼32
    묵상을 위한 주제 : 예레미야의 구전(4절)
    성구 : 예레미야가 네라야의 아들 바룩을 부르매 바룩이 예레미야의 구전(口傳)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두루마리 책(冊)에 기록(記錄)하니라. 

    36:1, 두루마리를 불태우다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사 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야 김은 남 유다 왕국의 18대 왕으로 11년 동안 통치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야 김의 남은 통치 기간은 7년입니다.
    19대 왕은 여호야 긴으로 3개월을 다스렸고
    20대 왕 시드기야는 11년을 통치했습니다.
    이때가 기원전 586년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야 김 4년이란 남은 통치 기간 7년과 여호야 긴의 3개월 그리고 시드기야 11년을 합하면 19년 정도가 됩니다.
    기원전 586년에 19년을 더하면 대략 기원전 605년 또는 604년이 됩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40년 동안 예언 활동을 하였으므로 이 시대는 23년 정도 지난 시기라고 하겠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은 항상 같은 내용을 반복했습니다.
    유다 왕국은 바벨론에 의해서 무너질 것이며,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의 포로가 될 것이다.
    속히 회개하고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예언을 전하는 선지자 예레미야와 그 예언을 듣는 유다 백성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더구나 당시는 근동 지방의 패권을 애급이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바벨론이란 나라는 관심을 갖지 못할 시대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감옥에 갇힌 상태인지라 자유롭지 못하여 바룩을 불러서 그동안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모두 말하였고 바룩은 그 말을 적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금식하는 날에 성전에 올라가서 모든 사람들이 듣도록 읽어주라고 했습니다.

    이때가 여호야 김 왕 5년 9번째 달 금식이 선포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성전으로 올라왔습니다.
    바룩은 예레미야의 구전을 성전 "그마랴의 방"에서 읽었습니다.
    그마랴의 아들 "미가야"가 그 구전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미가야는 왕궁에 있는 서기관의 방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에는 모든 신하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곧 서기관 엘리사마와 스마야의 아들 들라야와 악볼의 아들 엘라단과 사반의 아들 그마랴와 하나냐의 아들 시드기야를 비롯해서 모든 신하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미가야는 거기에 모여 있던 신하들에게 바룩이 백성을 향해 읽었던 책의 내용을 모두 전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모든 신하들이 구시의 증손이요, 셀레먀의 손자이며, 느다냐의 아들 여후디바룩에게 보내어 “당신이 백성들이 듣는 앞에서 읽었던 두루마리를 가지고 이리 오시오”라고 전했습니다.
    그러자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두루마리를 가지고 그들에게로 갔습니다.
    신하들이 바룩에게 말했습니다.
    “앉으시오. 그리고 우리가 듣는 데서 그 두루마리를 읽어 보시오.”
    그래서 바룩은 그들이 듣는 데서 그 두루마리를 읽어 주었습니다.
    두루마리에 적힌 말을 다 듣고 난 신하들이 놀라 서로 쳐다보며 바룩에게 말했습니다.
    “이 모든 말씀을 왕에게 꼭 전해야 되겠소.”
    그들이 바룩에게 물었습니다.
    “말해 보시오. 이 모든 말씀을 누구에게서 받아 적었소? 예레미야가 불러 준 대로 적은 것이오?”
    바룩이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레미야가 불러 준 모든 말씀을 나는 먹으로 이 두루마리에 받아 적었습니다.”
    그러자 신하들이 바룩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예레미야와 숨어 있으시오. 아무에게도 당신들이 숨어 있는 곳을 일러 주지 마시오.”
    신하들은 그 두루마리를 서기관 엘리사마의 방에 맡겨 두고 궁정으로 가 왕이 듣는 데서 그 모든 말씀을 낱낱이 보고했습니다.
    여호야김 왕은 여후디를 보내어 두루마리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여후디는 서기관 엘리사마의 방에서 두루마리를 가져와 왕과 왕의 곁에 서 있는 모든 신하들 앞에서 그것을 읽어 주었습니다.
    그 때는 아홉째 달이어서 여호야김 왕은 겨울 별궁에 거주하고 있었고 왕 앞에는 불피운 난로가 놓여 있었습니다.
    여후디가 서너 단씩 읽을 때마다 왕은 서기관의 칼로 두루마리를 베어 내더니 난롯불에 던져 넣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왕은 두루마리 전체를 난롯불에 넣어 태워 버렸습니다.
    여호야김 왕과 그의 신하들은 두루마리에 적힌 모든 말씀을 듣고도 놀라지 않았고 슬퍼하는 표시로 자기들의 옷을 찢지도 않았습니다.
    엘라단 들라야그마랴가 여호야김 왕에게 두루마리를 태우지 말아 달라고 간청했으나 왕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왕은 왕자 여라므엘과 아스리엘의 아들 스라야와 압디엘의 아들 셀레먀를 보내어 서기관 바룩과 예언자 예레미야를 붙잡아 들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룩과 예레미야를 숨겨 주셨습니다.
    여호야김 왕이 예레미야가 불러 주고 바룩이 받아 적은 두루마리를 불태운 뒤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야, 다른 두루마리를 가져다가 유다 왕 여호야김이 불태운 첫 번째 두루마리에 적혀 있던 그 말들을 거기에 모두 옮겨 적어라. 그리고 유다 왕 여호야김에게 전하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이 두루마리를 태우고 ‘어찌하여 예레미야는 바빌로니아 왕이 이 땅에 쳐들어와 이 땅을 멸망시킬 것이라고 적었느냐? 그리고 예레미야는 어찌하여 바빌로니아 왕이 이 땅의 사람과 짐승을 모두 없애 버릴 것이라고 말하였느냐?’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유다 왕 여호야김에 관해 말하노라.
    여호야김의 자손은 다윗의 보좌에 앉지 못할 것이다.
    여호야김이 죽으면 그의 시체는 땅에 버려져 낮의 뜨거운 햇볕과 밤의 차가운 서리를 그대로 맞을 것이다.
    나 여호와가 여호야김과 그의 자녀에게 벌을 내리겠고 그의 종들에게도 벌을 내리겠다.
    그들이 악한 짓을 했기 때문이다.
    내가 경고한 대로 그들과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백성에게 모든 재앙을 내리겠다.
    그것은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예레미야는 다른 두루마리를 가져다가 네리야의 아들 서기관 바룩에게 주었습니다.
    예레미야가 불러 주면 바룩이 두루마리에 받아 적었습니다.
    유다 왕 여호야김이 불태워 버린 책에 적혀 있던 말씀을 그대로 적었고 그와 비슷한 많은 말씀도 더 적어 넣었습니다.

    나라가 망할 때는 반드시 망할 징조가 나타납니다.
    유다 나라가 망한 것은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유다 백성들과 예루살렘에 재앙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진리를 외치는 예언자가 일어나게 하소서!
    예언자의 깨우침을 듣는 백성들이 세워지게 하소서!








     
    바룩이 읽는 예레미야의 구전을 듣는 사람들은 그 말이 곧 예레미야의 말이라는 것을 알아듣고 예레미야와 바룩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어 있으라고 한 후에 왕에게 예레미야의 구전을 읽게 합니다.
    그러나 왕은 구전을 듣는대로 찢어서 불에 던져버립니다.

    예레미야는 다시 바룩에게 두 번째 예언을 적게 합니다.
    이렇게






    예레미야 36장은 “여호야 김 왕 4년”에 있었던 사건으로(1절) 예루살렘이 함락하게 된 근본 원인에 대한 말씀입니다.

    “여호야 김”은 남 유다 왕국 제18대 왕으로 11년 동안 통치했습니다. 유다 왕국이 멸망하기 18년 전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첫 사역 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예언의 말씀을 두루마리 책에 기록하라는 특별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때는 예레미야가 선지자로 부름을 받고 약 23년이 지난 때로 고대 근동의 패권이 신바벨론 제국에 넘어간 시점입니다. 유다가 바벨론 군대에 1차 침공을 받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포로로 끌려가게 된 시기이기도 합니다. 예레미야는 서기관 바룩(Baruck. 축복받은 자, 기록하는 자)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대로 두루마리 책에 예언의 말씀을 기록합니다(4절).

    왕궁 서기관의 방에서 예레미야의 구전을 기록한 예언을 바룩으로부터 듣고 예레미야와 바룩은 숨어 있으라고 한 후에 “여호야 김”의 왕에게 읽어주었으나 왕은 그것을 칼로 잘라 화로 불에 던져 두루마리를 태워버렸습니다.

    예레미야의 구전은 이 예언을 듣고 회개하라는 의도이었으나 오히려 여호야 김 왕은 예레미야를 붙잡으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왕이 그 예언을 듣지 않으므로 그 결과는 왕위를 물려받을 자손이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30절).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 그 나라가, 그 가정이, 그 교회가, 그 공동체가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믿음을 이어갈 것입니다.


    ♪ 찬양 / 주의 말씀 듣고서

    https://www.youtube.com/watch?v=JI8vncK8waY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예레미야 36장의 배경이 된 유다 여호야김 제4년은 주전 605년입니다(1절).
    그 해는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갈그미스 전투에서 앗수르와 이집트 연합군과 싸워 이겨 고대 근동에서 새롭개 패권을 장악했던 시기였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소명을 받은 지 23년이 지나면서 새로운 사역의 반환점을 돌고 있을 때(렘 25:1~3), 하나님께서는 그가 전한 모든 말씀을 두루마리에 기록하라고 명하셨습니다(2절). 예레미야가 지난 23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꾸준히 전해왔는데, 이제 모든 말씀을 기록해 두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은 하나님의 구상이었습니다.

    문자문화가 아니라 구전문화 속에 살았던 예레미야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정확하게 암기하여 불러주었고, 바룩은 그것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그것은 바룩이 기록한 완전한 인간의 문서였지만,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장기적으로는 예레미야를 직접 만날 수 없는 이들에게도 자신의 뜻을 전하시기 위해 예레미야에게 주셨던 메시지를 기록하라 하셨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하나님의 생각에 의해 기록되었고, 필사되었으며, 번역되어 우리 앞에 오게 되었습니다.

    당시 사용되던 두루마리는 파피루스로 만들어졌습니다.
    길이는 보통 9미터, 폭은 25~30센티미터 정도 되었습니다.
    나무 막대기에 말려 있는 형태로 한쪽에서 풀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말리는 방식이었습니다.
    말씀 기록을 위해 예레미야가 부른 바룩은 예레미야 32장에 처음 등장합니다.
    그는 예레미야의 토지 구매에 필요한 법적 절차를 처리해 주었습니다.
    그는 왕의 병참감이었던 스라야(렘 51:59)의 형제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전과 왕궁 집무실을 가진 정부 고관들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바룩은 로마서를 기록한 더디오(롬16:22)와 베드로전서를 쓴 실루아노(벧전5:12)와 함께 성경을 직접 기록하는 대열에 서게 되었습니다.

    물론 두루마리에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기록하는 것은 바룩에게는 고된 일이었으나 가치있는 사역이었습니다.
    그가 기록한 말씀은 그 다음 해인 주전 604년에 읽혀지게 되었습니다(9절).

    기록된 두루마리는 최종적으로 왕에게 전달되었지만, 위기의 상황에서 선포된 금식일에 성전으로 보내져 유다 모든 성읍에서 백성의 귀에 먼저 낭독되었습니다(10절). 그 때 예루살렘과 성전 뜰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이번에는 바룩의 음성을 통해 듣게 되었습니다. 예레미야가 갇혀 있기 때문에 갈 수 없었던 상황에서(5절), 바룩이 대신 성전으로 가서 자신이 기록한 말씀 전체를 낭독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시금 경고를 받은 유다 사람들이 악한 길에서 돌이켜 재난을 면하고 그 악과 죄를 용서받기를 원하셨습니다.(3절)
    바룩이 모든 백성에게 낭독했던 공간은 성전 새 문 어귀 곁에 있던 사반의 아들 그마랴의 방이었습니다.
    사반은 요시야왕 시대에 성전에서 발견한 율법책을 왕에게 읽어주었던 인물입니다.(왕하 22:10) 그의 아들 그마랴의 방에서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을 열고 경청했던 사람은 그마랴의 아들 미가야였습니다(11절)
    미가야는 왕궁으로 내려가 고관들에게 자신이 들었던 말씀에 대해 전했고, 모든 고관은 바룩이 직접 두루마리를 가져와 그들에게 낭독하기 원했습니다. 바룩이 그들에게 두루마리를 가지고 가서 직접 낭독했을 때 그들이 모든 말씀을 듣고 놀라 서로 보며 이 모든 말을 왕에게 아뢰겠다고 말했습니다.(16절) 저들은 진정성을 갖고 바룩의 메시지를 받았고, 예루살렘이 매우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음을 자각할 수 있었습니다.

    문자가 있고 책으로 기록되어진 하나님의 말씀이 누군가에게 전달되는 것은 매우 큰 복입니다. 오래 전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부모가 먼저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되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그것을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하라”(신 6:6~9)

    하나님의 뜻이 먼저 가정 안에서 자녀들에게 잘 전달되기 원하셨습니다. 예레미야 시대 사람들은 전체적으로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고 하나님의 분노를 살만한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가정교육의 실패에서 비롯된 모습입니다. 한 사회를 이루는데 가장 기본적인 단위는 가정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유대의 모든 가정이 신앙적인 교육을 등한히 하였습니다.
    먼저 왕실이 하나님의 법도에서 멀어졌고, 고관들과 백성들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 채 혼동 속에 살았습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부지런히 전달되었으나,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주는 메시지로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루살렘 성이 안전하게 될 것이며, 위협하던 강대국은 머지않아 물러갈 것이라는 거짓 메시지에 희망을 두었습니다.

    오래 전 가나안 땅에 정착했던 조상들은 각 가정마다 두루마리 한 권씩 갖고 있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교육의 초점을 하나님 말씀에 두고 기회가 될 때마다 사람들은 자신이 들었던 말씀을 어디엔가 기록하여 자기 자녀들을 부지런히 가르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그 일에 마음을 두지 않았으며, 그래서 서서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예루살렘 안에는 바알에게 분향하며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드려 하나님을 격노하게 했던 집들로 채워져 있었습니다(렘 32:29).
    그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하나님 말씀을 기록하라는 명령 대신 우상을 섬기는 일을 자녀들과 열심히 행하였습니다.
    바룩이 쓴 두루마리가 낭독될 때에 사태의 심각성을 고관들은 분명하게 느꼈습니다.
    그리고 왕에게 그 두루마리를 듣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야김 왕은 낭독하는 말씀을 들으며 요시야 왕처럼 자기 옷을 찢는 대신, 두루마리를 찢어 추운 겨울날 난방을 위해 피어 놓은 화로 위에 던졌습니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 자신의 미래만이 아니라 나라의 미래마저 어둡게 만들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바룩을 불러 다시 두루마리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
    두 번째 두루마리는 첫 번째 두루마리보다 훨씬 더 길었습니다(32절).
    바룩의 두루마리는 성경 안에 포함되어 온 세상의 언어로 번역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두루마리의 기록자이신 하나님은 다시 두루마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첫 개신교 선교사 칼 귀츨라프(Karl Gutzaff, 1803~1851)는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공부할 시기에 마구 제조 기술을 배우는 곳에서 일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18세에 프러시아 왕에게 자신의 비전을 담은 편지를 보내어, 왕의 지원으로 할례 대학에서 신학교육을 받고 학업을 마치고 선교사로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귀츨라프는 로드 암허스트(Lord Amherst) 호에 통역관 신분으로 승선하여, 1832년 7월 17일 한국 장산곶 근해에 선교사로는 처음으로 조선 땅에 상륙하였습니다. 한문 지식을 가진 그는 한국인과 접촉하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누었습니다. 그는 조선 왕이 하나님 말씀을 읽음으로 유익 얻기를 갈망하여 선물과 함께 성경을 왕에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회신을 기다렸습니다.

    바룩이 만난 고관들이 왕에게 두루마리를 가져가듯 선교사도 그런 마음으로 왕에게 자신에게 가장 귀한 선물을 보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가 보낸 선물과 성경은 한양 근처에도 가지 못했고, 모든 선교 행위는 불가하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고대도의 관리들과 서민들이 성경을 받는 모습을 보며 귀츨라프는 감격했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잠시 들렸던 제주도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그곳을 선교기지로 만들고 싶다는 소박한 생각을 했습니다.
    그의 소원은 19세기가 지나기 전에 은둔의 나라 조선에서 세계 선교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응답이 되었습니다.

    예레미야 36장을 읽으면서 기록된 하나님 말씀이 얼마나 가치 있고 소중하며 영향력이 있는지를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
    두루마리에 담긴 예레미야의 말이 하나님 말씀이 되고, 바룩이 두루마리의 말씀을 낭독할 때 예레미야의 음성을 대신한 것처럼, 가정에서 우리의 자녀들에게 낭독하는 말씀은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으로 전달될 수 있습니다.
    가족이 함께 모여 시간을 내어 성경을 읽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영적인 환경에서 우리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부모는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보내어진 바룩과 같은 역할을 우리 시대에 수행해야 합니다.
    성경을 낭독하고 듣는 과정을 통해 더 아름다운 미래가 준비되는 은혜가 모든 가정에 채워지기 바랍니다.




    일본의 성자 가가와 도요히꼬의 헌신


    일본의 성자 가가와 도요히꼬가 빈민촌에서 창녀와 노동자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루는 가가와의 가까운 친구가 방문해서 그의 선교활동을 옆에서 지켜 보았는데,
    그 환경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하고 형편 없었습니다. 

    어느 날엔가는 술주정뱅이 하나가 와서 가가와에게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하였는데,
    가가와가 순순히 돈을 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그 술주정뱅이가 길바닥에서 술을 마시고 도박을 하는 것을 본 그 친구는 기가 막혔습니다. 

    그래서 가가와에게 묻기를
    "여보게 자네는 그 주정뱅이가 자네가 준 돈으로 술을 마시고, 도박을 하고, 온갖 못된 짓을 다하는 것을 알고 있나?"
    "물론 알고 있네."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
    "아니, 몇 십 번은 되었을 거네."
    "그렇다면 그런 짓을 하는 것을 알면서도 준다는 말인가?"
    "좀 더 참아보게." 

    또 어떤 날에는 가가와가 목회하는 교회에 나오는 창녀들이 예배를 드리다가 술주정뱅이들이 와서 불러내자,
    예배드리다 말고 그 남자를 따라 나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어떤 술 취한 자들은 교회에 와서 잔뜩 토해 내기도 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본 그 친구는 가가와에게
    "이런 것이 주의 일인가? 예배인가? 선교인가? 자넨 위선자야. 악을 조장하는 것이 아닌가?" 라며 분개했습니다.
    그때 가가와는 말하기를
    "자네도 알지 못하네. 저들이 나를 밥 먹듯이 속이고, 혹시 내가 저들의 칼에 맞아 죽는다고 해 보세.
    그 이후에도 사랑은 끝까지 관통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예수님도 악에 의해 죽으셨지만,
    그로 인해 사람들 속에 작은 '사랑의 씨앗'이 자라난 것이 아닌가?" 하고 친구를 타일렀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가가와의 이야기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가가와 도요히꼬가 죽은 후,
    그가 지나갔던 곳에는 정말 작은 신앙의 싹들이 피어나고 크리스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다 불타 버리고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지만, 예수의 사랑이 그들의 마음속을 관통한 것입니다. 


    술주정뱅이의 회심

    주 계신 곳 그 어디나 하늘나라 - 최재권
     
    술만 먹으면 아내를 때리고 아이들에게 폭언을 일삼던 술주정뱅이가 같은 마을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가족에게만 피해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동네 사람들에게 싸움을 걸어 마구잡이로 폭행을 가하는 못된 인간이라고 소문이 났습니다.
    그가 저쪽에서 술을 먹고 나타나면 대부분 그를 피해 멀리 돌아가던지 상대를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저희 교회에 연세가 90이 되신 할머니 권사님이 한 분 계신데 여전히 정정하셔서 새벽기도회에 나오시고 열심히 마을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십니다.
    그 권사님이 이 술주정뱅이를 전도하시겠다고 나선 겁니다.
    그리고 무려 10년 동안 새벽마다 간절히 눈물로 기도하고 찾아가 전도를 하였더니 마침내 흔쾌히 새해 첫 주일부터 나가겠노라고 대답하더랍니다.
    할머니 권사님은 그 말을 듣고 뛸 듯이 기뻐 담임목사인 저에게 찾아와 반드시 그분이 새해 첫 주일 교회에 나오기로 약속했으니 기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약속한대로 1994년 새해 첫 주일에 할머니 권사님과 함께 예배를 참석한 것입니다.
    그는 예배시간 내내 얼굴을 숙이고 앞을 쳐다보지 못했습니다.
    저런 사람이 어떻게 술을 먹으면 그렇게 포악한 사람으로 변할까 의심이 갈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부터 그는 목사보다 먼저 예배당에 찾아와 머리를 숙이고 있다가 새벽예배를 드리고 무엇인가를 중얼거리며 기도하고는 집으로 갔습니다.

    이렇게 2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던 술주정뱅이는 그렇게도 좋아하던 술과 깨끗이 이별하고 주인 되신 예수님을 영접하여 성령의 새 술에 취해 항상 찬송으로 부르며 행복하게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 그가 저에게 찾아와 간증으로 또 한번 저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습니다. 

    자신이 어느 날 화장실에 앉아서 일을 보는데 무심코 빨래가 눈에 들어오더랍니다. 
    여러 빨래 가운데 부인의 속옷이 걸려있는데 구멍난 부분을 기우고 또 기워 누더기처럼 된 것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그는 자신이 살아온 지난 날이 얼마나 잘못된 삶이었나를 깨닫게 되었답니다.
    하루 술값으로 몇백 만원씩을 펑펑 쓰고 있을 때 내 아내는 저렇게 구멍난 속옷을 기워 입고 누더기를 걸치고 살았구나 생각하니, 얼마나 미안하고 부끄럽고 죄송스러운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더랍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엉엉 소리내어 울고 주님 앞에 참회의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그는 자신의 아내를 데리고 동대문 시장에 가서 속옷도 한아름 사고 예쁜 옷도 사주었답니다.
    그의 아내는 오랜만에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그렇게 행복해 하더랍니다.
    그 다음주일, 부인도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렸습니다.

    부인은 처음에 남편이 교회에 나가는 것을 보면서 그저 몇 주 나가다 말겠거니 했답니다. 
    그 지긋지긋한 술주정을 견뎌내며 모진 인생을 살아온 터라 으레 술 먹고 들어오는 날이면 매를 맞거나 집안이 시끄러워질 것을 운명처럼 여겼습니다.
    그래서 남편의 변화를 전혀 믿으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 달 두 달 그가 새롭게 변화되어 가면서 부인은 점점 믿기지 않는 일을 겪게 되었고 남편을 변화시킨 예수님을 자신도 영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난 설날 수요일 저녁예배 시간에 술주정뱅이 인생에서 변화된 그분이 아내와 아들 내외 그리고 시집간 딸들과 사위들을 모두 불러모아 예배에 참석해서 특송을 하였습니다. 

    찬송가 495장 '내 영혼이 은총 입어'를 부르면서 얼굴 가득 행복한 웃음과 눈물의 찬양을 하시는 것을 지켜보면서 예수님이 주인되신 가정은 이렇게 평화가 넘치는 천국이구나 생각했습니다.

    그 가정에 더욱 주님의 평화가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사랑과 친절과 교육하고 가르치라


    코카콜라는 전 세계인들이 즐기는 세계적인 음료수입니다.
    코카콜라를 처음 만든 아사 켄들러는 자기가 경영하던 작은 약국의 지하실에서 이 짜릿한 음료수의 제조권을 구입한 후 날개 돋힌 듯이 팔려 돈더미 위에 올라 앉는 큰 부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가정에는 한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외아들인 아서 쥬니어가 알콜 중독에 걸려 재산을 없애고 몸과 마음이 병이 든 폐인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서 쥬니어에게는 목사인 삼촌이 있었습니다. 
    그 삼촌은 사랑하는 조카가 알콜 중독에 걸려 폐인이 되어가자 남다른 애정과 안타까움을 갖고 이 조카를 바로잡기 위해서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켄들러 목사는 자기 조카를 한번도 꾸짖거나 설교하지 않았습니다.
    따뜻한 말로 위로하고 어떤 때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따뜻한 말로 위로하고 따뜻한 눈빛을 주면서 부드럽게 껴안아 주기만 했습니다. 
    삼촌의 따뜻한 사랑에 감동된 아서 쥬니어는 
    어느날 술병을 들고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술병의 마개를 따지 않겠소. 이 순간부터 술을 끊겠소.”

    아서 쥬니어는 그순간부터 술을 끊었고 
    그의 아내는 그 술병을 리본으로 묶어 가보로 보관하였으며, 
    지금도 그 술병은 코카콜라 회장인 켄들러 집안의 중요한 가보로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05-03-202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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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를 선언하라(예레미야 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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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송 : 202장(죄에서 자유를 얻게함은)


    예레미야 34-45장은 주전 586년 예루살렘의 함락 전후의 사건과 예언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1년 전 쯤 에레미야는 다시 시드기야 왕에게 예루살렘 성이 무너질 것이며, 시드기야 왕은 바벨론의 포로가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대단한 용기가 아니면 이런 예언을 통치자 앞에서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았기 때문에 주저하지 않고 그대로를 전했습니다.

    시드기야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 나물에 그 밥"이란 말처럼 왕이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기 때문에 백성들 또한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모든 노예들을 안식년이 되면 자유를 베풀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노예들을 희년이 되면 자유를 베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노예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처럼 행동했으나 곧 이어 노예들을 다시 붙잡아 일을 시켰습니다.

    왕과 백성들 모두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바벨론 왕의 군대는 예루살렘을 완전히 포위하고 기다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빌로니아 군대로 하여금 예루살렘을 포위했던 것을 잠시 풀었다가 다시 예루살렘을 공격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유다의 여러 성읍들이 초토화가 되어서 황무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이 함락당하고, 유다가 패망의 길로 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시드기야왕을 비롯하여 백성들이 모두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고, 파기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다운 길을 걷다가 손해를 당하고 박해를 당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다운 길을 걷지 않다가 나라가 망하는 것을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사실 우리도 우리의 삶을 정직하게 돌아보면 유다 백성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하루가 하나님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감으로 복된 날이 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지키는 것을 확인하고,
    그렇게 행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화 증거
    위대한 감독 암브로시우스와 데오도시우스 황제

    암브로우스(340-397)는 34세 때 밀라노 교회의 감독이 되었다. 
    그는 감독직에 있으면서 재산을 모두 팔아 교회 가난한 이들에게 주었다. 
    그는 권좌에서 내려와 가난한 자들과 하나가 되어 평생을 금욕하며 살았다. 
    그의 영향력은 황제의 칙서까지도 바꾸어 놓을 정도였다. 
    경건한 신자인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성질이 급한 군인이기도 하였다. 
    390년 데살로니가의 시민들이 난동을 일으켜 치안군의 장교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데오도시우스는 복수를 명하였고 결과적으로 집단적인 학살이 벌어졌다. 
    황제는 명령을 취소하였으나 그 명령이 도달하기 전에 일은 끝났다. 
    시민들은 경기장으로 몰아 넣어졌고 군인들은 출입문을 잠갔다. 
    그리하여 7천 명의 사람들이 살해되었다.

    이 소식이 들려지자 암브로우스는 황제에게 회개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수도인 밀라노에 있던 황제는 이 말을 듣지 않았다. 
    주일 아침 황제는 성전에 예배하러 나갔다. 
    암브로우스는 감독의 복장으로 교회 현관에서 그를 만났다. 
    큰 소리로 황제를 꾸짖으며 돌아가 회개하라고 외쳤다. 
    몇 달간 데오도시우스는 예배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돌이켜 말하기를

    "하나님의 교회가 노예와 거지들에게는 열려져 있지만 내게는 닫혀졌다. 
    그리고 하늘의 문도 닫혀졌다"

    그는 모인 회중 앞에서 땅에 엎드려 하나님과 사람에게 용서를 탄원하였고 회중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위대한 감독과 위대한 황제였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

    1775년 영국의 식민지 버지니아 회의의원이던 패트릭 헨리가 남긴 말이다.

    노비(奴婢)는 과거 신분제 사회에서 다른 사람의 노예 상태 였던 천민 사회 계급을 가리킨다.
    남의 집이나 나라에 몸이 매이어 대대로 천역에 종사하던 사람으로서 흔히 이라고도 불렀으며,
    노(奴)는 남자 종을, 비(婢)는 여자 종을 가리켰다.
    종 노(奴), 여자종 비(婢)

    노비 중에는 주인집에 같이 사는 솔거노비(率居奴婢)와 주인집과 따로 사는 외거노비(外居奴婢)로 나뉜다.
    외거노비는 주인과 따로 살면서 타지역 또는 멀리 있는 주인의 땅을 관리하고 그 대가로 곡식과 쌀을 바쳤다.

    국립국어원의 표준어 국어사전은 자유란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라고 했다.
    표준어 국어사전의 해석대로라면 내가 자유를 누리기 위해 남의 자유를 짓밟아도 좋다는 것일까?
    자유란?
    첫째, 행동이나 생각을 제약받지 않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
    둘째, 나쁜 것이나 싫은 것에서 벗어나는 자유
    셋째, 언론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종교의 자유, 재산 처분의 자유, 직업선택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와 같은 기본권으로서 개인의 당연히 누려야 할 사회적 권리로서의 자유가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3조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

    헌법에 의하면 한반도는 남한과 북한을 모두 포함합니다.
    그렇다면 북한에도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므로 먼저 북한에 자유가 보장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제까지 북한에 대해서 자유보다는 자유 이외의 것을 갖고 협상하던 방식을 수정해야 합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고린도후서 3:17

    자유는 모든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는 권리입니다.
    가난한 가정에 태어났을 수도 있고, 버려져서 그의 부모가 누구인지 전혀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는 그의 빼앗길 수 없는 태생적 권리입니다.
    피부가 검을 수도 있고, 배우지 못하며 살 수도, 빈곤 그 자체일 정도로 가난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 것이라 할 수 있는 땅 한조각도 가져 본 적이 없고, 입을 옷조차 거의 없어서 몸을 덮을 거적을 가진 것이 고작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가난하지만 자연은 그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는 자유로울 권리가 있습니다.
    자유가 없다면 그는 자유로울 때까지 결코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그 자유는 태어나면서 주어지는 권리이기 때문입니다. 

    자유는 아담의 자손들에게 주어진 유산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동반하지 않는 자유가 있을까요?
    모든 사람이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동일하게 주의 영이 없는 곳에서는 그 어떤 나라에서도 자유를 만나지 못한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습니다" 이 나라가 자유의 나라임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내가 숨 쉴 수 있는 이 땅은 노예의 신음이 없는 곳입니다. 팔려나가는 아이를 바라보며 눈물 흘리는 노예 어머니가 없는 그런 곳입니다. 이 땅은 자유의 진원지입니다. 그러나, 왜 그렇게 되었을 까요? 저는 확신합니다. 바로 우리의 제도 때문이 아니라 주의 영이 이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영이시고 진정한 믿음의 영이십니다. 

    영국이 자유에 있어 다른 나라들과 별반 다를 게 없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자유롭게 말할 수 없었고, 왕은 폭정을 행하고 의회는 그저 이름뿐이던 때가 있었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자유를 얻었나요? 누가 우리를 묶고 있던 사슬을 풀어주었나요? 저는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손 아래 있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크롬웰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양심의 자유를 누리거나 아니면 죽음 택한 사람들로 교활함이 없는 그들로서는 왕을 설득하지 못한다면 노예가 되기보다는 왕을 때려눕혔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 특히 엄격한 청교도들에 빚졌습니다. 이 청교도들은 비겁한 행동을 경멸했고 사람을 다스리는 원칙을 세운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우리의 자유를 지켜야 한다면, 그 자유는 영국에서 믿음에 기반한 종교의 자유에 의해 지켜져야만 합니다. 

    이 성경은 옛 영국 대헌장으로 성경의 진실과 교리는 우리를 얽어매고 있던 족쇄를 끊어버렸고 다시는 우리를 다시 묶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마음속의 성령님과 함께 진리를 말하기 위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성경이 풀린 곳을 제외하면, 다른 말로 복음이 전해진 곳을 제외하면 그 어떤 곳에서 자유를 찾을 수 없습니다. 다른 나라들을 돌아다녀 보십시오. 숨죽이며 말할 것이고, 두려워하게 될 것이며, 어떤 압제 아래 있음을, 위협이 있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자유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잘못된 종교가 낳은 폭정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자유로운 개신교가 없습니다. 자유롭게 될 개신교가 아직 오지 않은 것입니다. 자유가 있는 곳이 주의 영이 계신 곳입니다. 다른 곳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유에 대해서 말할 때 이상적인 정부, 플라톤의 공화국이나 오웬 주의자들의 이상향을 묘사하지만 그들은 공상적인 이론가 들일뿐이고 "주의 영이 계신 곳"을 제외하면 이 세상에는 자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가 이런 생각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을 위해 이미 많은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만약 종교가 그들을 구원하지 않았다면, 그들에게 주어진 자유는  종교의 영향 때문이란 점을 말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자유는 이런 자유가 아닙니다. 무한히 더 크고 더 좋은 것입니다. 시민적인 또는 종교적인 자유가 크다면 제가 말씀드리는 본문의 자유는 훨씬 더 초월적인 자유입니다. 존경하는 여러분, 영국에서 조차도 자유의 달콤한 공기를 맛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크리스천들만이 누리는 자유가 있습니다. 사람으로서 당당히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움츠러들고, 그들의 비위를 맞추려 하고, 굽신거려야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의지도, 원칙도, 목소리도, 용기도 없으며, 의식적인 독립심으로 똑바로 설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진리가 자유하게 만든 자유인입니다. 마음에 은혜를 가지고 있는 그는 자유합니다. 다른 이들의 눈치도 보지 않습니다. 그 안에는 성령님께서 거하십니다. 그는 고귀한 권한을 가진 천국 보혈 왕국의 한 왕자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선택받고 구별된 자녀로 굽신거리거나, 초라하게 움츠려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아닙니다! 그는 원칙을 버리기보다는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와 함께 불속을 걸을 것이고, 다니엘과 함께 사자굴에 던져질 것입니다. 그는 자유인입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충만하고, 가장 높고, 넓은 "자유함이 있느니라."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이 주의 영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주의 영이 없으면 여러분은 여전히 속박받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자유의 나라에서 몸으로는 농노가 없지만, 영혼으로는 노예일 수 있습니다.

    본문은 영적 자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저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우리 안에 "주의 영"을 가지고 있다면 여러분과 저는 영적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가 영적 자유가 없었던 때, 즉 노예였던 때가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고 있는 우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귀의 노예가 되어 마귀의 의지대로 이끌려 다니는 신세였습니다. 우리가 자유 의지를 이야기했지만, 그 자유 의지는 노예일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고 자랑했지만, 그러나 오! 우리가 가지고 있던 것은 노예적이고 꿈같은 자유였습니다. 환상 속의 자유였습니다. 우리는 욕망과 정욕의 노예였으며 죄의 노예였지만 이제는 죄로부터 자유를 얻었습니다. 우리는 아주 강력한 폭군으로부터 놓였습니다. 우리는 자유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자유는 무엇인지 좀 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1. 첫째로,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죄의 속박으로부터의 자유가 있습니다.  

    아! 제가 죄의 속박에 이야기하게 되면 저는 분명히 여러분 일부에게 흥분하면서 이야기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비참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실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속박과 종 됨 중에서 죄의 속박보다 더 끔찍한 것은 없습니다. 짚도 없이 벽돌을 만들던 애굽의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 말씀하시고, 잔인한 감독관의 채찍 아래 있던 흑인 노예에 대해서 말씀하시면 저는 차마 견디기 두려운 속박이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그러나, 훨씬 더 나쁜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죄의 짐을 버거워하게 된 죄인의 속박, 마치 사냥개가 지친 사슴에 울부짖듯이 자신의 죄가 스스로에게 으르렁 거리고 있는 사람의 속박, 죄의 짐을 어깨에 지고 있는 사람의 속박입니다. 그의 영혼이 견디기에는 너무 무거운 짐이고, 그가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오지 않는다면 영원한 고통에 빠지게 하는 그러한 짐입니다.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없습니다. 그의 눈썹에는 어두운 구름이 가득하고 근엄하고 심각하게 서 있습니다. 한숨이 곧 그의 말이고, 신음이 그의 노래이며, 눈물이 그의 미소입니다. 가장 행복해 보일 때 조차도 뜨거운 슬픔의 눈물이 흐르고, 볼에 델 것 같은 자국을 남깁니다. 그에게 그가 누구인지 물어보십시오, "나는 가련한 인간"이다 라고 할 것입니다. 그에게 어떤지 물어보십시오, "비참함의 화신"이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그가 어떻게 될 것인지 물어보십시오, "영원한 불속에 빠질 것이고 소망이 없다"라고 할 것입니다. 생을 홀로 마감하는 그를 보십시오. 베개에 머리를 누여도 고통은 다시 시작됩니다.  밤에는 고통스러운 꿈에 시달리고 낮이면 꿈꾸었던 고통이 현실이 됩니다. 속박 아래 있는 참 불쌍한 죄인입니다. 

    저는 그랬었고, 여러분도 그랬을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시는 분들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우울한 절망의 구렁텅이를 지나왔습니다, 어두운 참회의 계곡을 통과했습니다, 회개의 쓴잔도 마시게 되었습니다. 제가 모든 속박 중에서도 율법의 속박과 타락의 속박이 가장 고통스럽다고 말하면 여러분은 아마도 "아멘"이라고 하실 것입니다. "가련한 자여, 누가 이 속박으로부터 나를 풀어줄 것인가?" 그러나, 크리스천은 자유입니다. 이전에는 울었지만 이제 그는 미소 지을 수 있고, 이전에는 슬펐지만 이제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죠. "이제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제 가슴에 더 이상 죄가 자리하고 있지 않습니다,  모든 어두운 것에 대한 공포, 만나는 모든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고 이 땅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죄는 씻겨 나갔고 제 영혼에 더 이상 죄가 머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순수하고 거룩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저에 대해서 하나님의 찡그리시지 않으시고 대신 미소를 지으십니다. 주님의 눈에는 사랑이 흐르고 그의 음성은 감미로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저는 용서받았습니다, 저는 용서받았습니다, 저는 용서받았습니다!  만세! 족쇄를 끊으시는 영광스러운 예수여! 처음 속박이 사라졌던 그 순간을 떠올려 봅니다. 저는 제 앞에 있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를 생각하며 그의 죽음과 고통을 곱씹어 보았습니다. 주께서 저를 바라보고 계심을 생각하며 주께서 저에게 시선을 주실 때 그를 바라보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 내 영혼의 사랑
    당신의 품으로 날아가게 하소서"

    그가 '오라' 하셨을 때 그에게로 가서 그를 꼭 껴안았습니다. 다시 가라 하셨을 때 내가 가지고 있었던 짐들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없어졌습니다! 그곳에서 공기처럼 가벼움을 느꼈습니다. 날개 달린 요정과도 같았습니다. 저는 고난과 절망의 산 위로 날 수 있었습니다. 오! 제가 가졌던 자유와 기쁨을 어디에 비할까요! 제가 받은 엄청난 용서와 죄로부터의 자유는 저를 펄쩍펄쩍 뛰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첫 번째 자유입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죄의 속박으로부터의 자유가 있습니다. 

    2. 두 번째는 죄의 형벌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무엇일까요? 슬프게도 죄의 형벌인 영원한 죽음, 끊임없이 고통받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죽으면 지옥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내가 쓰러지면 사탄의 손아귀에 빠져 나를 괴롭히도록 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이 자리에서 하는 것도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왜 그럴까요? 이런 일은 생각만으로도 나를 괴롭히는 것이고, 내 존재에 대한 가장 큰 저주가 되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것과 같은 형벌을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이 땅을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어 무덤에서 썩어가는 것을 기꺼이 선택할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중에는 자신이 죽으면 지옥에 갈 것이란 것을 잘 알고 있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분들은 그 사실을 부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도 믿지요. 그리고 성경에서 자신의 파멸도 읽습니다. "마가복음 16:16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그분들은 자신을 믿는 자 사이에 둘 수 없습니다. 여전히 그리스도가 없습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자신의 죄가 너무 많아서 하나님께서 벌하실 수밖에 없다고, 벌하시지 않으시면 그의 공의를 해칠 것이라고 믿고 계신 분이 있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숨겨진 범죄와 공공연한 죄악을 벌하시지 않으시면, 하나님 되심을 그만두고 주의 보좌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 너무 반항적이라는 느낌을 들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죄의 형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며, 신음하고, 울부짖었을 것입니다. 아찔한 꿈을 생각합니다. 꿈을 꾸면 불타는 호수를 봅니다. 불타는 호수는 불의 물결과 불타는 유황이 피어오릅니다. 매일을 다음 단계에는 바닥 없는 구덩이에 빠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지냅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크리스천 여러분은 죄의 형벌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이점을 알고 계십니까? 이 사실을 인식하실 수 있으십니까? 이 시간 여러분은 죄의 형벌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여러분의 죄가 크고 엄청났을지라도 여러분은 용서받았을 뿐만 아니라 결코 형벌받을 수 없습니다.

    "한 죄인이 믿는 그 순간,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 순간,
    그에게 곧바로 주어지는 주의 용서,
    오로지 그의 보혈이 나를 구원했네"

    그리고, 여러분은 죄 때문에 결코 형벌받을 수 없습니다. 믿는 자의 형벌이요! 그런 것은 없습니다. 크리스천에게 이 죽을 수밖에 없는 삶의 고통은 죄로 인해 받는 형벌이 아닙니다. 심판의 형벌이 아니라 부모님의 꾸지람입니다. 저에게 지옥은 없습니다. 지옥은 지옥대로 불타라고 하십시오. 제가 믿는 자라면 저는 그곳에 없을 것입니다. 저가 의롭게 되었다면 저는 저주받을 수 없기 때문에 저에게 영원한 족쇄도, 속박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저 대신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에, 주께서 저에게 다시 형벌을 내리신다면 그것은 부당한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한번 형벌을 받으심으로 영원히 의롭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양심이 저에게 너는 죄인이라고 말을 한다면, 저는 양심에게 이렇게 말을 할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께서도 내 안에 계신다. 맞습니다. 저는 죄인이지만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맞습니다. 저는 형벌을 받아야 하지만, 제 몸 값이 이미 치러졌다면, 하나님께서 그 빚을 두 번이나 요구하실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거두셨습니다. 믿는 자가 지옥에 갈 일은 결코 없습니다. 우리는 형벌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형벌 때문에 두려워 떨 필요는 결코 없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형벌이 영원하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요.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결코 그런 고통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우리는 받아들이기 위해서 그 진주 대문 열 것이지만, 지옥의 철문은 모든 믿는 자에게 영원히 닫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이 자유는 얼마나 영광스러운지요! 


    3.  죄의식으로부터의 자유

    이건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크리스천은 믿는 순간 더 이상 죄가 없습니다. 왕이 선의로 한 살인자에게 사면을 베푼다면 처벌은 받지 않지만, 여전히 그는 범죄인입니다. 수천번의 용서를 베풀 수 있고, 법이 그를 건드릴 수도 없지만 여전히 그는 범죄인입니다. 그 범죄는 그의 머릿속에 항상 남아 있을 것이고, 그가 살아 있는 한 살인자의 꼬리표가 늘 따라다닐 것입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속박과 형벌로부터 놓였을 뿐만 아니라 죄책으로부터도 해방되었습니다. 여러분이 놀랄만한 일일 것입니다. "뭐라고요? 크리스천이 하나님의 시각에서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고요?"라고 여러분이 말하신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그가 스스로를 생각한다면 죄인이겠지만,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눈같이 흰 날개와 티 없는 천사의 의복을 입은 가브리엘 천사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피로 씻어져 눈보다 희게 된 죄인 보다 더 순수하게 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죄인의 그 죄책이 어떻게 없어지는지 이해하십니까? 저는 여기에 죄인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배신자로 서 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저의 구원을 위해 오셔서 제 감방을 떠나라 하십니다. "내가 네 자리에서 너를 대신 하마, 내가 죄인이 되겠다. 너의 모든 죄는 내가 감당할 것이다. 너의 죄들을 내가 가지고, 고통받으며 그것을 위해 죽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옷을 벗으며 말씀하십니다. "이 옷을 입어라. 너는 마치 그리스도인 것처럼 여겨질 것이고, 의로운 존재가 될 것이다. 나는 네 자리로 가고, 너는 내 자리로 오는 것이다" 그리고는 완전한 의의 옷을 제게 둘러 주십니다. 이것을 본 저는 이렇게 소리칩니다. "내 영혼아 이상하게도 너는 내 형제의 옷을 입고 있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면류관이 제 머리에 있고, 흠 없는 그의 옷이 저를 감싸고 있으며, 제 발에는 그의 황금 신발이 신겨져 있습니다. 이제 죄가 있습니까? 죄는 그리스도께로 갔고 의는 제게로 왔습니다.

    재판장이 "죄인을 이 앞으로 데려오라" 합니다. 죄인이 나옵니다. 누가 끌려 나옵니까? 바로 성육신 하신 성자 하나님입니다. 진실로 그는 죄를 짓지고 않고, 잘못도 없으시지만 죄가 그에게 전가되어 죄인의 자리에 서 계신 것입니다. 재판장이 외칩니다 "그렇다면 의로운, 완벽하게 의롭게 된 이들을 데려오라" 제가 누구를 볼까요? 바로 교회이고, 모든 믿는 자입니다. 재판장이 말합니다. "이들 모두가 완벽하게 의로운가?" "예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일들은 그들의 것이 되었고, 그들이 한 것은 그리스도께로 놓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의는 그들의 것이 되었고, 그들의 죄는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습니다." 믿지 않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이것이 참 이상하고 놀랍지 않으십니까? 극단적인 칼빈주의라고 자의로 정의하며 비웃으시지만, 여러분이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하나님의 진리로 세우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가된 의를 통해서 우리를 의롭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가 참 신자라면 저는 모든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어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책에는 저에 대한 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영원히 잊혔고, 지워졌습니다. 저는 결코 형벌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형벌받을 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저의 죄를 속죄하셨고 저는 그의 의로움을 받았습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4. 또한, 크리스천은 죄책과 죄의 형벌로부터 놓임을 받은 것처럼 그것들의 지배로부터도 자유로와 집니다.

    아직 거듭나지 않은 모든 사람은 정욕의 노예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유로운 삶과 생각을 찬양하죠. 술 취해서 흥청망청 진탕 마시고, 소리치고, 음란하며 불륜을 맺는 이런 것을 세상 사람들은 자유로운 삶이라고 부릅니다. 자유로운 삶이라고요! 노예가 자신의 족쇄를 들고는 딸랑거리며 이렇게 말하는 격입니다. "이건 음악이야, 나는 자유로와!". 참 불쌍한 미치광이입니다. 베들레헴의 미치광이는 감옥에서 쇠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끔찍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왕이라 하는 사람입니다. 참 불쌍한 사람입니다. 저는 그가 왜 자신을 왕이라 하는지 압니다. 그는 귀신 들렸고, 미쳤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은 자유로운 삶을 말하는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진짜 자유로운 것인가요? 아닙니다. 그들은 노예입니다.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밤에 잠자리에 들면 이리저리 뒤척이며 불안해한 적이 얼마나 많은가요? 잠을 깨면 "그 어제, 그 어제!" 하며 탄식하지 않으셨나요? 또 다른 죄의 날이 다가와도 지옥의 개처럼 "그 어제"는 또다시 짖어대고 여러분을 쫓아다니지 않았나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죄는 속박이며 노예입니다. 여러분은 그 속박을 없애보려고 해보지 않으셨습니까? 여러분은 해보았다고 말하시겠지만, 저는 그 노력의 끝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그런 시도를 하면 할수록 여러분을 옥죄고 있는 족쇄는 더욱 단단해지고 여러분을 묶고 있는 사슬은 고정되어 버립니다. 은혜 없는 죄인이 스스로를 개혁하려는 시도는 시시포스가 지옥에 떨어져 큰 바위를 산 위로 밀어 올리는 일을 한없이 되풀이하는 것과 같습니다. 은혜 없는 사람이 스스로를 구원하려는 시도는 다나오스의 딸들이 살인죄의 대가로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물독을 채우는 희망 없는 형벌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활시위 없는 활, 날이 없는 검, 총알 없는 총을 가진 것입니다. 힘과 능력이 필요합니다. 의미 없는 개혁이 될 수 있습니다. 화산 위에 흙을 덥고, 분화구 주위에 꽃을 심는 것과 같을 수 있습니다. 다시 움직임이 생기면 덮었던 흙은 없어지고, 뜨거운 용암이 꽃을 덮고 말 것입니다. 그의 모든 성과와 의는 완전히 파괴되고 말 것입니다. 은혜 없는 죄인은 노예입니다. 스스로는 자신의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그렇지 않습니다! 크리스천이 자기 죄의 노예일까요? 하나님의 참 상속자가 노예일까요? 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습니다. 불멸의 상속자이기 때문에 부정한 상태로 살지 않습니다. 이 땅의 구걸자들은 잘못된 행동에 굽신거릴 수 있지만, 하늘 보혈의 왕자들은 의로운 행위를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시선에 불쌍하고 비참한 이 세상 사람들은 부정직과 불의 가운데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상속자들은 그럴 수 없습니다. 자신의 주를 사랑하고, 죄의 능력으로부터 자유하며 그가 걷는 길은 의의 길이고 그의 끝은 영생입니다. 우리는 죄의 지배로부터 자유롭습니다.


    5. 다시 한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모든 경건한 사랑의 행동 가운데 자유함이 있습니다. 바로 율법에 대한 맹종적인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경찰이 겁나기 때문에 정직합니다. 대중의 눈이 무서워 술 취하는 것을 자제합니다. 겉보기에 종교적인 것은 이웃 때문입니다. 포도주스와 같은 미덕들이 많습니다. 벌집의 꿀처럼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 포도 주스를 얻으려면 꽉 짜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감히 말하건대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사람의 일은 노예의 일이고, 억지로 해야만 하는 것으로 하는 것입니다. 주의 자녀로 자유를 누리기 전의 저의 모습은 이랬습니다. 교회에 가는 것은 가야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고, 기도를 하는 것은 기도를 하지 않으면 뭔가 불행한 일이 일어날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 하심에 감사를 드린 것은 감사하지 않으면 다른 것을 얻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의로운 행동을 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 대한 보상을 해주실 것이고, 천국에서 어떤 상을 받을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저 단순하게 물을 긷고 나무를 하던 기브온 족속과 같은 불쌍한 노예였습니다. 제가 그렇게 하는 것을 그만둘 수 있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을 좋아했을 것입니다. 내 의지가 있었고, 갈 교회가 없었다면 저에게 종교도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 세상에서 제가 하고 싶은 대로 사탄의 길을 쫓아갔을 것입니다. 노예요 자유롭게 죄 가운데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크리스천 여러분, 여러분의 자유는 어떤 것입니까? 무엇이 오늘 여러분을 교회로 오게 만들었습니까? 

    "사랑은 네 발걸음을 가볍게 하고
    주저함 없는 순종을 행하게 한다"  

    무엇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기도할 때 무릎을 꿇게 하나요? 그것은 여러분이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와 소통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여러분의 지갑을 기꺼이 열도록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여러분이 어려운 처지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기 때문이고 자신이 너무나 풍성히 받은 것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무언가 그리스도께 돌려드리는 것 자체가 자신의 특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정직하고, 의로우며, 방탕하지 않게 살도록 부담을 지우는 것일까요? 감옥에 갈까 봐 그럴까요? 아닙니다. 여러분은 감옥을 열 수 있고, 정죄를 파괴할 수 있으며, 모든 사슬을 바다에 던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처럼 거룩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럼, 크리스천들은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말씀인가요?" 저는 그러기를 바랍니다. 만약 제가 제 마음대로 살 수 있다면 저는 그렇게 살 것입니다. 늘 거룩하게 살 겁니다. 만약 크리스천이 자기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다면 그는 항상 그가 마땅히 살 바대로 살 것입니다. 크리스천에게 죄는 노예이며, 의는 기쁨입니다. 오! 만약 제가 적은 대로만 살 수 있다면, 저는 마땅히 제가 살아야 할 것들을 적겠습니다. 만약 제가 뜻한 대로만 살 수 있다면, 저는 하나님께서 제게 명령하신 대로 살겠습니다.

    크리스천의 가장 큰 행복은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노예적인 것이 아닙니다. 크리스천을 여러분이 원하는 곳에 데려다 놓아 보세요. 그는 죄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 그를 어떤 유혹의 상황에 두어 보십시오 그에게 악한 마음이 남아 있지 않다면 그가 죄짓는 것은 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거룩은 그의 기쁨이고, 죄는 그에게 노예적인 것입니다. 아! 반드시 와야만 하기 때문에 교회에 오신 불쌍한 속박 가운데 있는 사람들, 아! 족쇄가 무서워 정직하고, 감옥이 무서워 방탕하지 않는 불쌍한 노예적 도덕주의 자들, 아! 여러분은 불쌍한 노예입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습니다. 여러분이 원한다면 우리를 율법 폐지론자로 부르십시오. 우리는 문제가 있는 이름이지만 그 가운데서 조차도 기뻐할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에서 해방되었지만 우리는 그 해방으로 이전보다 더 순종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는 이전보다 더 그의 주인을 섬깁니다. 그 옛날 어스킨이 말했지요. 

    "할 수 있거든 그의 사랑을 외면하라
    아니다, 아니다; 그의 무한한 친절은 사람들을 이끌어 온다.
    영원한 사랑이 불어오면,
    사람들은 기꺼이 순종하기로 결단한다;
    아주 깊은 구속의 사랑으로,
    죄 없던 아담의 때 보다 더"

     

    6. 끝으로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가 있습니다. 

    오 죽음은 얼마나 많은 달콤한 것들을 쓰디쓴 것으로 만들었던가요! 오 죽음은 얼마나 많은 재미있는 일들을 깨버렸었던가요! 오 죽음은 얼마나 많은 음식 잔치들을 망쳐 버렸었던가요! 오 죽음은 얼마나 많은 세상적 즐거움들을 고통으로 바꾸어 버렸었던가요! 여러분 이 아침 지난 몇 년간을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무엇이 보이십니까? 음침한 죽음이 거대한 벌 낫을 들고 서있습니다. 죽음이 조금씩 다가옵니다. 죽음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아, 그건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종려나무 가지가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도 죽음을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입니다. 바로 지옥입니다. 오 죽음은 죄가 창궐했을 많은 집들에서 출몰해 왔었고, 오 죽음은 정욕이 넘치는 많은 마음과 그 죄로 인해 떨기 시작한 많은 마음을 서늘하게 해왔습니다. 

    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지요. 세상의 절반의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어떤 정신 나간 사람들은 대포를 향해 달려가기도 하고 어떤 바보 같은 사람들은 피 묻은 손으로 창조주의 재판정으로 나서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렇다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바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 하나님 제가 두려워하지 않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다음 여름에 다시 콜레라가 올 수도 있습니다. 저는 콜레라가 오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만일 콜레라가 다시 온다고 해도 제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고생하며 떨어질 때까지 밤낮으로 병자들을 방문할 것입니다. 만약 저를 데려가신다면 갑작스러운 죽음은 갑작스러운 영광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곳에 계신 가장 연약한 성도들도 장래의 사라짐으로 떨지는 않습니다. 가끔 두려울 수도 있지만 그 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기쁨 속에서 지내실 것입니다. 조용히 앉아서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죽음이 무엇입니까? 죽음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입구입니다. 삶은 무엇입니다? 삶은 우리를 영광과 갈라놓는 좁은 장막이고 죽음은 그것을 걷어주는 것입니다.

    착하신 할머니 한분이 말씀하신 것이 기억납니다. "선생님, 저는 지난 50년간 아침식사 전에 내일 아침 요단강에 제 발을 담급니다. 제가 지금 죽는 것을 두려워할까요?" 죽음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왜 수백 번을 죽는 것일까요? 우리는 매일 죽습니다. 매일 아침과 밤에 잘 때 우리는 믿음으로 매일 죽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죽음을 대면하면 죽는 것은 이미 지나간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 죽음아! 너와 나는 참 오래된 사이구나, 매일 밤 침대에서 만났고, 매일 너와 대화를 나누었으며, 책상에 해골을 올려두고 가끔씩 너를 생각했었다. 죽음아! 결국 네가 왔지만 너는 환영받는 손님이란다. 너는 빛의 천사이고 내가 가졌던 가장 최고의 친구다." 죽음이 올 때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실 것이라는 두려움이 없는데 왜 죽음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여기서 저는 한 웨일스 여인의 일화를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침대에 누워 생을 마감하고 있는 착한 여인을 목사님이 방문했습니다. 목사님이 여인에게 묻습니다. "자매님, 가라앉고 있습니까?" 여인은 대답 대신 믿지 못하겠다는 눈빛으로 목사님을 바라봅니다. 목사님이 다시 "자매님, 가라앉고 있습니까?"라고 묻자 여인은 그런 질문을 하리라고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눈빛으로 목사님을 바라봅니다. 결국 여인은 몸을 조금 일으키더니 이렇게 말을 말합니다 "가라앉다니요! 가라앉다니요! 목사님은 죄인이 바위에서 가라앉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만약 모래 위에 서 있는 다면 가라앉을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저는 저를 영원한 반석 위에 두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거기에는 가라앉음이 없거든요!"

    죽는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지요! 오 천사들이여! 오 만군의 여호와의 일꾼들이여 당신들의 날개를 펴고 우리를 이 땅에서 끌어올리소서. 오 날개의 천사여 우리를 이 죄악 된 것들로부터 닿지 않도록 지키소서, 당신들이 올 때까지 나는 노래할 것입니다. 

    "예수는 나의 구주, 나는 두렴 없네
    이 진흙의 옷을 기꺼이 벗고,
    주안에서 죽는 것은 언약의 축복이라네;
    예수의 영광으로 죽음은 길을 열었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이 자유의 부정적인 면들을 할 수 있는 한 간단하게 여러분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졌는지 가능한 단순하게 말씀드리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그런 의문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우리의 자유에는 몇 가지 영광스러운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의미에서 율법에서 해방되고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무언가를 할 자유도 있습니다. 오래 이야기하지 않겠지만 제 형제자매들을 위해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몇 가지를 건네줄까 합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고" 그 자유는 우리에게 어떤 권리와 특권을 부여합니다. 

    우선 우리는 천국 헌장에 자유롭습니다. 천국 헌장, 대헌장인 성경에 대하여 여러분은 자유합니다. 여기 선택의 여지가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사야 43: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여러분은 이것에 자유합니다. 다른 구절도 있습니다. "이사야 54:10 산들은 떠나며 작은 산들은 옮길지라도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여러분은 이것에 자유합니다. 다른 구절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13:1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여러분은 이것에도 자유합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마음이 끌리는 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택하셨다면 여러분은 그것에 자유롭습니다. 다른 장에는 의인의 정죄 없음과 그들의 의롭게 됨을 말하는데 그것에 대하여도 여러분은 자유롭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자유롭습니다. 여기 무한한 은혜의 보고로 채워진 다함없는 보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천국 은행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에서 어떠한 허락이나 방해 없이 원하는 만큼 가져갈 수 있습니다. 믿음만 있으면 됩니다. 여러분이 가져올 수 있는 만큼 최대한의 믿음을 가져오십시오. 그러면 성경에 있는 모든 것을 자유로이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것이 아닌 약속이나 말씀은 없습니다. 모두 여러분의 것입니다. 깊은 고난 가운데서라도 그것으로 위로를 받으시고, 고통의 파도 한가운데서라도 그것으로 기뻐하십시오. 슬픔 가운데 있을지라도 그것으로 여러분의 도움으로 삼으십시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티켓입니다. 결코 그것이 닫히거나 먼지가 쌓이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자유합니다, 이제 여러분의 자유를 사용하세요. 

    다음으로 은혜 보좌에 대한 자유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영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항상 의회에 탄원을 제출할 수 있는 특권이 있듯이 믿는 자는 누구나 항상 하나님의 보좌에 탄원을 제출할 수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보좌에 대한 자유가 있습니다. 내일 아침 하나님과 말하고 싶다면, 저는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밤 저의 주님과 대화하고 싶다면 저는 그에게 갈 수 있습니다. 저는 그의 보좌로 나아갈 권한이 있습니다. 제가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었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저는 용서를 구할 것입니다. 제가 얼마나 불쌍한 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가서 주께서 저의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구할 것입니다. 저는 한 밤중의 어두운 시간에도, 한낮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도, 언제나 그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제가 어디에 있든지, 운명이 저를 땅끝까지 인도하더라도 저는 여전히 주의 보좌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 권리를 사용하세요.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그 권리를 사용하세요. 그 특권에 맞게 사는 사람이 없습니다. 많은 남자들은 자신이 번 것보다 많이 소비하여 자신의 수입을 넘어서서 살 것입니다. 그런데, 크리스천이 그렇게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제 말의 뜻은 자신의 영적 수입에 맞게 사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요! 여러분은 무한한 수입이 있습니다. 약속의 수입, 은혜의 수입입니다. 어떤 크리스천도 그 수입에 맞게 사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제가 돈이 더 많다면, 저는 더 큰 집과 말과 마차, 그리고 수많은 것을 가질 것입니다" 좋습니다. 아주 좋습니다. 그러나, 저는 크리스천들이 그러기를 바랍니다. 저는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영적으로 더 큰 집과 더 위대한 일을 하기를 바랍니다. 더 많은 행복을 바라보시고, 눈에서 눈물을 떨쳐 내시기를 바랍니다 -

    "종교는 결코 짜이지 않았다
    그랬다면, 우리의 기쁨은 반감되었을 것이다"

    은행에 저축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것이 엄청납니다. 가난하게 될 수가 없습니다. 일어나서 기뻐하세요! 즐거워하세요! 크리스천은 자신의 수입만큼은 살아야 합니다. 그것보다 아래로 살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 여러분이 "성령"을 모시고 있다면 여러분은 시온성으로 들어갈 권리가 있습니다. 여기 런던에는 많은 자유인들이 있습니다. 감히 말하건대 이건 엄청난 특권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런던의 자유인은 아니지만, 더 좋은 도시의 자유인입니다.

    "주의 은혜 내가 받아
    시온 백성 되는 때
    세상 사람 비방해도
    주를 찬송하리라"

    여러분은 시온성에 대한 권리가 있지만 그것을 행사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중 몇 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아주 좋은 기독교인이시지만 여전히 교회에 참여하지 않는 분들이죠. 여러분은 믿는 사람이라면 침례를 받아야 한다 것이 옳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오지 않으시는 이유는 아마도 익사하는 것이 무서우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매월 하나님의 식탁이 차려지고, 주의 모든 백성들에게 열려 있지만 여러분은 결코 오시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분의 잔치인데 말입니다. 만약 제가 부시장이었다면 시의 축제에 불참하지 않을 것입니다. 크리스천 되었다면 저는 크리스천의 잔치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성도의 잔치이기 때문입니다. 

    "천사는 결코 얻지 못한
    구속의 은총과 죽으심으로 주신 사랑"

    여러분 중에 일부는 하나님의 식탁으로 결코 오질 않습니다. 하나님의 예식을 무시합니다. 주께서는 "고린도전서 11:24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라고 하셨습니다. 도시의 자유를 얻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도시의 성문을 통과해서 들어갈 권리가 있지만 그냥 바깥에 서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세요. 제가 손을 잡아 드리겠습니다. 더 이상 교회 바깥에 남아 계시지 마세요. 여러분은 교회로 들어오실 권리가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인 하늘 예루살렘의 자유를 얻었습니다. 최고의 선물이지요. 우리는 천국의 자유를 얻었습니다. 크리스천은 죽을 때 천국 문을 열 수 있는 주문을 압니다. 문을 활짝 열게 하는 암호를 압니다. 그가 대속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하얀 돌을 가지고 있어서 그로 하여금 장벽을 지나가게 해 줄 것입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왕국으로 들어가게 해주는 여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직 믿지 않으시는 분들을 생각해 봅니다. 어둠의 땅에서 이리저리 헤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천국 문 앞에 섭니다. 엄청나게 크고 높은 문입니다. 문 위에는 "의인들만 여기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문지기를 찾고 있는데, 문위에 키가 큰 대천사가 나타납니다. "천사여 저를 들어가게 해 주세요" 말했더니, "너의 의복은 어디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의복을 찾아보지만 아무것도 없고 가진 것이라고는 넝마가 조금 있을 뿐 결혼 예복은 없습니다. 다시 "저를 들여보내 주십시오. 악당들이 저를 따라와서 저를 구덩이에 던졌습니다. 제발 들여보내 주세요"라고 간청해 보지만, 천사는 조용하게 손가락을 올리며 말합니다. "저기를 읽어 보아라. 의인들만 여기에 들어올 수 있다고 쓰여 있지 않은가?" 그러자, 무릎이 서로 부딪치고 손이 흔들릴 정도로 떨기 시작합니다. 황동 뼈와 철 입술이 녹아내릴 수도 있습니다. 문 앞에 서서 온 몸을 떨고 있지만, 얼마 되지 않아 한 음성이 나와서 놀라 엎드려 울부짖게 합니다. "마태복음 25:41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여러분, 혹시 여러분이 저런 모습이 될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이런 모습이 될까요? 천국 시민의 자유를 갖지 않으시겠습니까? 자유를 주는 성령을 찾지 않으시겠습니까? 아! 저는 그냥 내버려 두면 여러분이 그것을 갖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압니다. 아마도 여러분 중의 일부는 절대 갖지 않을 것입니다. 오 하나님, 그 수가 얼마 되지 않도록 허락하여 주시고, 구원받는 수는 크게 하여 주소서! 


    "돌아서면 내 영혼은 쉼을 얻겠네
    대제사장의 대속으로 
    자유를 얻었네.
    그의 보혈의 능력을 신뢰하라,
    주께 버림 받음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니네,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으니"












    05-01-2021(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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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르짖으라(예레미야 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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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송 : 94장(예수님은 누구신가)


    기도하는 것은 나의 목적 성취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바르게 감당하기 위한 것입니다.
    부르짖기 위해서는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말씀의 임재
    감옥에 갇혀 있는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신학자인 몰트만 박사가 희망신학을 주창하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독일이 영국과 미국과 전쟁을 할 때 징집을 했는데 그도 17살에 징집되어 독일의 군인으로 2차 대전에 나갔다가 그만 포로가 되어 영국의 포로수용소에 수감 되었습니다. 수감생활 중에 나치 독일이 망했으니 나라도 없고 함부르크 자기 고향은 폭격을 당해서 도시가 다 타버렸고 가족들은 다 죽었습니다. 나라도 없고 고향도 없고 친척도 가족도 다 잃고 이 세상에 살아갈 희망이 없어서 자살하려고 작정을 했는데 그 수용소 내에서 어느 한 목사님이 성경책을 한권 주시더랍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읽어 보자고 성경을 읽는 동안에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을 읽어보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비참하게 세상을 뜨고 죽어 무덤에 들어간 지 사흘 만에 사망을 이기고 부활해서 승리하는 것을 보고 그는 마음에 크게 감동을 받고 예수님이 절대 소망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이시구나. 이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면 내 생애 속에 있는 이 어마어마한 절망이 소망으로 바뀔 수가 있지 않겠느냐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는 수용소에서 무릎을 꿇고 예수님을 모셔 들였습니다. 그 결과 마음에 굉장한 위로를 받고 평안을 얻고 기쁨이 와서 죽으려고 하는 것 다 포기하고 그는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후에 수용소에서 해방되어 나와서 신학을 공부해서 세계적인 희망신학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부르짖어야 할까요?

    시편 120:1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환난 중에 있기 때문에 부르짖어야 합니다.

    어떤 환난이 닥쳐왔습니까?

    1. 세상은 코로나 바이러스 전염병
    2. 한국은 자유대한민국 정치체재에서 공산주의국가로 전향하려는 음모가 활개치는 환난
    3. 미국은 성경의 기초를 흔드는 환난(동성애) 

    사업을 하는 어느 그리스도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인내심이라고 느껴 왔습니다.
    그의 가장 큰 약점은 쉽게 화를 내는 것인데, 이것이 그를 아주 괴롭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인내심을 주시도록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에 그는 여직원을 새로 채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입사원의 행동은 너무도 느렸으며, 이제까지 그와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이것이 자기에게 인내심을 달라고 한 기도의 응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도에 응답하셨다는 것을 깨달은 날부터 그는 인내심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많은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어떻게 응답하시는지를 잘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모를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기도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하셨는지 잘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할머니의 기도 응답

    시골에 사는 어떤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신앙심이 깊었고 매일 문 밖에 나와서 큰소리로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를 하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옆집에 사는 한 할아버지도 문 밖으로 나와서 맞대답을 했습니다.
    "이봐, 할망구! 하나님은 없다구!"
    이 할아버지는 한마디로 사탄이었습니다.
    그래서 할머니는 이 할아버지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가난한 할머니가 먹을 것이 떨어져 하나님께 음식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데,
    옆집 할아버지가 먹을 것을 잔뜩 담은 큰 바구니를 몰래 문 앞에 놓아두었습니다.
    음식 냄새를 맡은 할머니가 문을 열고 바구니를 발견하고는 소리쳤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기다렸다는 듯 나와서 빈정댔습니다. 
    "이것 보라구, 그건 내가 사다 놓은 거야! 하나님은 없다니까?"
    그러자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하나님, 사탄을 통해서도 음식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영국의 청교도 목사인 존 번연(John Bunyan, 1628년~1688년)은 가난한 대장장이 아들로 태어나 시골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는 뜨겁고 열렬하게 청교도 신앙으로 복음을 증거 하다가 가톨릭적인 왕에게 미움을 받아서 그는 투옥되었습니다.
    열정적인 활동가인 그에게는 조그마한 감옥은 너무 답답하고 괴로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빨리 나가서 양무리를 돌보고 복음을 전해야 되겠는데 감옥에 갇혀있으니 어떻게 합니까?
    존 번연은 감옥의 창살을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제발 자유를 주세요. 하나님, 하나님 일을 자유롭게 하게 해 주세요."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부르짖는데 어느 날, 창살을 붙잡고 있는 그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번연아! 네 은혜가 내게 족하도다." 이런 하나님의 음성이 존 번연에게 세 번 들려왔습니다.
    그 순간 그는 무릎을 꿇고 그 좁은 감옥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자 그 마음속에 천로 역정이라는 소설을 써야 되겠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좁은 감옥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천로 역정이라는 소설을 쓰게 됩니다.
    그 책이 오늘날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히는 위대한 책이 되었습니다.

    ‘여리고’라는 마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지나가시는 이가 나사렛 예수라는 말을 듣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사람들이 좀 조용하시오 하고 야단을 쳐도 막무가내 애타게 부르짖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께서 그 소리를 다 들으시고 걸음을 멈추시며 "그를 불러오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그 맹인에게 예수님이 부른다고 일러주자 그는 낡은 옷을 버려두고 벌떡 일어나 예수께로 왔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묻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그 장님이 눈을 뜨고 만 것입니다.
    이렇게 몸부림치는 기도, 많은 주위의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잠잠하라고 그렇게 억압을 해도 아랑곳없이 부르짖는 기도, 이것이 바로 통성기도요, 간절한 기도인 것입니다.

    엘리야의 간절한 부르짖는 기도는 하늘 문을 닫고 열어 비가 오지 않게도 비가 오게도 하였습니다.
    절박하면 절박한 대로, 괴로우면 괴로운 대로, 부르짖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거창고등학교를 일으킨 전영창 교장선생님의 이야기는 기도의 능력을 생생하게 증거해 줍니다. 그가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부채가 많아 쓰러져가는 학교 하나를 맡게 되었습니다.이것이 바로 거창고등학교입니다. 그런데 너무 빚이 많아서 해결할 길이 없었습니다. 결국 1958년 4월 학교가 넘어가게 되었을 때 그는 성경과찬송, 담요 1장을 가지고 거창읍에서 40리나 떨어진 산 중턱의 동굴속으로 들어가서 자리를 펴고 1주일 금식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미국에 갔다 와서 이 나라에 좋은 고등학교 교육을 해보려고 하는데 이렇게 학교가 부채로 넘어가게 됐으니 어떡하면 좋습니까? 하나님 해결해 주세요”


    사흘이 지나도 아무런 응답도 없고 가슴만 답답했습니다. 그는 마침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제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으면 1주일 금식기도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 ‘일간신문에 하나님은 안 계십니다’하고 광고를 내겠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내려오니 조우복이라는 미국의 한 성도가 보낸 수표 1장이 도착해 있었습니다. 2050달러.이것은 그 당시 부채를 정확하게 갚을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에 이토록 정확하게 응답해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명령하셨습니다. “너는 네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예레미야33:3)


    그러면 우리가 왜 기도해야 할까요?


    첫째로 하나님은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처음 삐삐가 등장했을 때 삐삐를 구입한 사람이 여기저기 삐삐번호를 알려주고 자기에게 삐삐를 쳐주기를 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녀된 우리의 어려움을 아뢰고 도움을 구하고 뜻을 묻기를 원하십니다.


    둘째로 우리들은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너무나 연약합니다. 쉬 낙심하고 절망에 빠집니다. 연약한 우리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할 때 우리는 가장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의 지혜와 능력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들은 많은 문제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수많은 인생의 장애와 문제 앞에서 기도할 때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사야 37장에 보면 히스기야왕 때 아시리아의 공격으로 남왕국 유다는 큰 위기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히스기야왕은 적장 랍사게가 보낸 편지를 손에 들고 성전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인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나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위기의 시대에 함께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연약한 저희들이 늘 기도함으로써 능력있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시위대 뜰에 갇혀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공간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어디에 있든지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유롭게 찾아오십니다. 말씀 안에서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말씀은 임하십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답답한 상황 속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시위대가 지키고 있는 감옥을 뚫고 예레미야에게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하늘과 연결되어 교신(交信)하면 삽니다. 그러나 말씀이 끊어지면, 큰 사고가 일어납니다. 대책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으면, 상황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답답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상황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기대할 만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으면, 가장 답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 속에 임하고 있습니까? 말씀을 묵상하려고 말씀을 펴놨는데, 아무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면 문제입니다.
    설교를 들을 때,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고 눈물 흘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설교를 귀로만 들을 뿐,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면 위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는 상황, 진짜 감옥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듣지 못하는 상황이 갇혀있는 것입니다.
    감옥에 갇혀있어서 갇혀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는 것이 갇혀있는 것입니다.

    사무엘상에 보면, 엘리 제사장은 화려한 제사장의 의자에 앉아있었습니다. 제사장직을 가지고 멋있는 옷을 입고 근엄하게 앉아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稀貴)했습니다(삼상 3:1).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이 끝났음을 의미합니다.
    신약시대에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린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은 엘리의 시대가 끝나고 사무엘 시대가 왔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일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맡은 사람입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갇혀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런 곳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광야와 감옥처럼 열악한 곳, 의지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곳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에 적합합니다.

    지금의 상황과 조건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깨닫는 말씀이 있다면, 영혼이 묶여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침묵은 가장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끊어진 것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위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때가 가장 어두운 때입니다.

    상황이 잘 풀리지 않아 힘든 것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린다면,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일이 잘 되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시지 않는다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에게 어떤 말씀이 임했습니까? 예레미야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요청입니다.
    본문 예레미야 33장 3절에 보면,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예레미야가 절박한 상황 속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르짖는 것은 일반적인 기도와는 다릅니다. 절대적 한계상황에 빠져있음을 부르짖습니다. 시편에도 부르짖는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시편 86편 7절에 보면,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절망이 너무 깊으면,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할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암담한 상황 가운데서 기도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기도하라는 의미로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기도하라고 요청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하시기 전에 우리가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에 기도를 일으키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일하시기 전에 우리의 마음에 소원을 갖게 하시고, 때로는 고난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십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일을 다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먼저 우리의 마음에 기도의 마음을 불어넣으셔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십니다. 기도가 선행(先行)되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시대마다 먼저 기도를 일으키셨습니다. 1907년 평양에 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전, 1903년 원산에서 기도회가 있었습니다.
    20세기말 아주사거리에서 대부흥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락방에서 소수(少數)의 사람들의 기도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을 행하실 때에 하나님의 사람들의 마음 안에 기도의 마음을 불어넣으셔서 기도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일이 시작되게 하십니다. 기도가 앞서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가장 무섭고 절망적인 상태가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 기도가 중단된 것입니다.

    유다가 바벨론의 포로가 된 것은 그냥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범죄하고,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 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위기가 왔지만,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중단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선지자마저 기도하지 않고, 기도를 포기해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렘 33:3)”고 말씀하셨습니다. 상황은 절망적이지만, 포기하지 말고, 다시 일어나 부르짖으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좌절과 절망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현실은 답답합니다. 갇혀있는 듯 합니다. 어려움이 반복되고 상황이 악화되면, ‘아무리 해도 되지 않는다’라고 자기암시를 합니다. 이것이 무섭습니다. 안 된다고 자기 스스로 결론내리고 있습니다.
    절망이 깊어지면, 기도하지도 않습니다. 기도할 용기조차 없는 것은 최악의 상황입니다. “기도하면 뭐해” 이것은 가장 무서운 말입니다.
    어려움이 겹치고 힘든 세월이 오래 계속 이어지면, 신자도 “기도하면 뭐해”라고 말하는 것을 봅니다. 기도의 힘마저 믿지 않습니다. 이것은 최악의 상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유다는 완전히 패망했습니다. 소망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지 기도를 요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자세에서 적극적인 자세로 바꾸라는 의미입니다.

    기도하는 것은 가장 적극적인 삶의 태도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7~8)”고 말씀하셨습니다.
    단순히 “구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찾으라”, “두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매우 적극적인 표현입니다.
    없다고 주저앉아있지 말고, 잃은 것을 안타까워하지 말고, 닫힌 것을 끝이라 생각하지 말고, 힘들다고 푸념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얻을 때까지 구하고, 찾을 때까지 찾고, 열릴 때까지 문을 두드리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적극적인 행위입니다.
    기도가 쉬운 것 같지만, 사실 어려운 것입니다. 기도하면 삽니다. 그런데 기도가 잘 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시위대 뜰에 갇혀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절망적인 상황에 익숙해져있지 말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라는 의미입니다.
    나라를 빼앗기고 선지자도 정치적으로 탄압을 받아 감옥에 갇혀있는 암울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좌절하지 말고 일어나지 마라, 두려워하지 말고 부르짖으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지금 감옥에서 나오게 해주겠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기도의 자리로 나아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액션(action)이 시작되고 있다는 사인(sign)입니다.

    억지로라도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습니다. 기도하고 싶지 않아도, 기도의 자리로 나오세요. 힘들고 어려워 지치고 상하여 만신창이가 되어 기도하고 싶은 마음조차 없어도 기도의 자리로 나오세요.
    “기도하고 싶어 죽겠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발에 불이 떨어져야 기도합니다. 발에 불이 떨어지면, 그때서야 “하나님, 살려주세요.”라고 기도합니다.

    야곱은 자신의 힘과 열심과 의지가 강했습니다. 악착같습니다. 무엇이든 자신의 힘으로 해내려고 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축복도 자신의 힘으로 차지하려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하기를 싫어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궁지로 몰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할 수 없이 하나님 앞에 무릎 꿇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초청하신 것입니다.
    얍복 나루에서 야곱은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 32:26)”라고 하며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야곱의 본래 모습이 아닙니다. 야곱은 빌고 엎드리는 스타일이 아닙니다. 야곱은 자신의 머리를 이용하여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고 목적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궁지로 몰아가셔서 야곱을 엎드리게 하셨습니다. 야곱이 하나님 앞에 엎드리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기도를 배우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본문 예레미야 33장 3절에 보면,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냥 부르짖다가 힘이 빠져버리는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실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굉장히 후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응답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후하게 응답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응답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응답은 사람의 말로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에 대한 기대감과 흥분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에 가슴이 뛰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전에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뻔한 일을 하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나의 혼인 잔칫집에서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전에 그런 일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혼인 잔칫집에 있던 사람들은 이전에 한 번도 맛보지 못한 포도주를 거기서 맛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새 일을 행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하게 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바로의 예상을 뒤집어엎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각과 이성을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새 일을 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은밀한 일,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대반전을 일으키십니다.

    에스더서를 보면, 하만은 모르드개를 장대에 매달기 위해 음모를 꾸몄습니다. 치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하만은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세운 장대에 자기가 매달렸습니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흉내 낼 수 없는 일을 행하십니다. 유다가 완전히 멸망했습니다. 바벨론이 득세했습니다. 유다는 바벨론에게 심판 받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바벨론을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갖 묘수를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묘막측한 일을 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차원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께서 행하실 새 일에 대해 경탄(敬歎)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놀라우심에 경탄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놀라운 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기대감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대한 기대감이 있어야 신앙생활이 즐겁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실 것에 대한 기대감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기대감이 없으면, 신앙생활이 시큰둥해집니다. 하나님에 대한 기대감이 식으면, 신앙생활이 시큰둥해집니다.
    하나님에 대한 기대감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기대감이 없으면,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기대감이 있는 사람은 기도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기대감이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슴이 뛰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기대감이 없으면, 영적으로 권태감을 느낍니다. 영적으로 권태감을 느끼면, 타성에 젖습니다.
    무엇이든 오랫동안 하다 보면, 그것에 익숙해집니다. 익숙해지면 신선함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것에 대한 호기심이 사라집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시간이 지나고 그것에 익숙해지면 그렇게 됩니다.

    서울에는 초고층빌딩도 많고 차도 많습니다. 이로 인한 미세먼지도 심각합니다. 그런 곳에서 답답하게 살다가 부산에 와서 바다를 보면 환호를 지릅니다.
    그런데 바닷가에 사는 사람은 바다를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바다를 늘 대했기 때문에 바다에 관심이 없습니다. 바다가 신선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날마다 기도하고 늘 예배드리고 부지런히 교회에 다니는 사람 중에도 기도에 대한 갈망 없이 그저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냥 기도에 참여할 뿐입니다. 기도하는 것에 대해 아무 감정이 없습니다.
    늘 기도하다 보면 기도하는 것에 익숙해집니다. 기도에 대한 기대감이 없습니다. 의무적으로 기도할 뿐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무엇을 기도하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기도하면서도 기도에 대한 기대감이 없습니다.

    본문 예레미야 33장 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고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시고, 확실한 응답을 보장하셨습니다. 기도하기만 하면, 응답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하기만 하면 응답하시려고 준비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실 ‘크고 은밀한 일’은 무엇일까요? 본문 예레미야 33장 6절 이후에 보면, 자세히 기록되어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포로 귀환입니다. 포로로 붙잡혔던 자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용서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용서하셔야 바벨론의 포로 되었던 자들이 이스라엘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 33장 7절에 보면,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며”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다 망가진 예루살렘과 유다를 어정쩡하게 복구시키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완벽하게 회복시키겠다는 의미입니다.
    예레미야 33장 9절에 보면, “이 성읍이 세계 열방 앞에서 나의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요 그들은 내가 이 백성에게 베푼 모든 복을 들을 것이요 내가 이 성읍에 베푼 모든 복과 모든 평안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며 떨리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전에는 수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나의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완전한 회복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은 것을 단편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구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고 풍성한 것입니다.
    죽으면 천국에 가는 정도가 아닙니다. 구원은 굉장히 광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단순히 죄 용서로 끝나지 않습니다. 무궁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응답은 크고 비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상황에 따라 대충 답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는 아이에게 사탕을 물려주는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치밀한 계획 속에 기막힌 프로그램을 동원하셔서 일을 완벽하게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는 알아서 응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크고 은밀하고 놀랍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에 흥분됩니다.

    에베소서 3장 20절에 보면,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체험이 담긴 고백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이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는 것만 주시는 분도 아니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 주시는 분도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패턴을 넘어서 응답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십니다.

    본문 예레미야 33장 2절에 보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을 행하시는 분이시요 창조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의 창조자요 주관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는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왜 이렇게 표현하셨습니까? 유대가 다 망가져서 눈으로 보기에는 아무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초토화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뿌리째 뽑혀 소망이 전혀 없는 유다를 향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라고 소개했습니다. 창조의 하나님, 없는 것을 있게 하는 하나님으로 소개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뿌리째 뽑혔어도 다시 만들고 재건하고 회복시킬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기도는 이미 결론이 나있습니다. 기도를 받으시는 대상인 하나님께서 기도의 결론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의 응답이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시요,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요, 능히 하지 못하실 것이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예레미야 32장 27절에 보면,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새로운 창조사역입니다. 완벽한 회복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확실합니다. 애매모호하지 않습니다. 부족함이 없습니다. 완벽합니다.
    회복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 결정됩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최선보다 하나님의 알파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죽도록 최선을 다해도, 하나님의 알파가 없으면 안 됩니다.
    될 것 같았는데,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열심으로 이루어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열심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열심을 경험해보라는 의미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열심이 우리의 신앙에서 방해물이 될 때가 있습니다. 자기 열심에 도취되어 무너지고 낙심하고 절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완벽주의는 일종의 불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실 여백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유능해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답답하게 여기십니다. 최선을 다할 필요가 있지만, 자신이 모든 것을 다할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있고,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습니다. 최고의 전문가요 대가(大家)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일하실 여백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알파가 있어야 비로소 내 일이 완성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을 성취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을 마무리하시고 끝내시고 일이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인간의 연약함과 실수를 통해 하나님께서 더 큰 일을 행하실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실수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실 공간을 만들어드려야 합니다.

    내가 다 잘 하면, 내가 잘 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우리의 잘남이 하나님 앞에서는 보잘것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실수합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의 부족함이 채워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쥐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결정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이십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준비하고 계획한 것에 의해 움직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되돌아보면, 하나님께서 매 순간 일하셨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우연인 것 같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주인은 우리가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될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됩니다.
    시편 127편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잠언 16장 9절에 보면,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본문 예레미야 33장 1절을 보면, 예레미야는 암울하게 시위대 뜰에 갇혀 있습니다. 답답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곳에 임하셔서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렘 33:3)”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중에도 답답한 상황, 암울한 상황 속에 있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상황이 어떠하든 상관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놀라운 일을 행하시기 원하십니다. 먼저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행하실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우리의 상황은 바뀌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위대 뜰에 갇혀 있는 예레미야에게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고 설득하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기도의 책입니다. 성경에서 ‘기도’를 빼면, 이상한 책이 되어버립니다. 성경에서 ‘기도’가 없으면, 성경이 아닙니다.
    모든 비밀은 기도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시고, 그리고 동시에 응답을 약속하셨습니다.

    상황에 빠져있지 마세요. 아무리 힘들어도, 그것 때문에 마음까지 무너지면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의지입니다. 우리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을 믿고, 기도하기로 결단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살려주실 것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이것은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도하라고 하셨지만, 예레미야는 망가지고 무너진 상황 속에 갇혀 기도하지 못하니 하나님께서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는 수동적인 태도에서 능동적인 태도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크고 은밀한 일을 행하시기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비밀한 응답을 갈망하세요. 새로운 일을 기대하며 부르짖으세요.

    본문 예레미야 33장 2절에 보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얼마나 확실합니까.
    하나님을 기대하세요. 하나님께서는 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 일하십니다. 만드시고 성취하십니다. 창조의 하나님이십니다. 망가지고 뿌리째 뽑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다시 심으시고 세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게 부르짖으라”는 이 말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능히 하지 못하실 것이 없는 하나님으로 대우하라는 의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여호와이십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아는 사람은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절망을 절대희망으로 바꾸어놓으시는 하나님이심을 신뢰하고 기도하라고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십니다.
    다시 심으시고 세우시고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을 기대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반드시 응답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놀라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십니다. 예레미야 32장 27절에 보면,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응답 받는 놀라운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04-30-2021(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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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재앙과 모든 복(예레미야 3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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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송 : 325장(주 예수 대문 밖에)

    BC 587년(시드기야 10년) 유다 왕국 멸망 1년 전 

    예레미야 32:42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이 백성에게 이 큰 재앙을 내린 것 같이 허락한 모든 복을 그들에게 내리리라.

    재앙의 원인
    예레미야 32:23
    주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며 주의 도에 행치 아니하며 무릇 주께서 행하라 명하신 일을 행치 아니하였으므로
    주께서 이 모든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셨나이다.

    모든 복의 의미
    예레미야 32:41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정녕히 나의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

    여호와의 말씀에 붙잡힌 신앙
    예레미야 32:1

    유다 왕 시드기야의 제 십년 곧 느부갓네살의 제 십 팔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참조 / 6절, 26절

    믿음의 분별력
    예레미야 32:15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이같이 말하노라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기도하는 신앙(16-25)
    예레미야 32:16-17

    내가 매매증서를 네리야의 아들 바룩에게 부친 후에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능과 드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시니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신앙
    예레미야 32:27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오늘의 기도

    1. 말씀에 사로잡혀 살아가게 하소서!
    2. 믿음의 분별력을 주옵소서!
    3. 불이익도 기도하게 하소서!


    예레미야 32장은 남 유다 왕국이 멸망하기 1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1절에서 시드기야 제 십년이란 시드기야 왕의 통치 기간은 11년이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여전히 갇혀있었습니다.

    예레미야의 숙부 살롬의 아들 "하나멜"이 찾아와서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사라"고 합니다.
    1년 후에 망할 나라의 땅을 사라는 '하나멜'과 그 땅을 "은 십 칠 세겔을 주고 구입"하는 예레미야 모두가 비정상적인 행동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라고 명하신 것은 바벨론 포로생활을 마치고 반드시 다시 돌아올 것을 확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04-29-2021(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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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언약(예레미야 3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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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송 : 539장(이 몸의 소망 무엔가)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예레미야 31:1∼40
    ♦ 묵상을 위한 주제 : 새 언약(31절)
    ♦ 성구 :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言約)을 세우리라. 

    예레미야 30장부터 33장은 회복을 위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회복이란 바벨론 포로생활 70년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포로로 붙잡혀 갔으나 바벨론 땅에서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있고 바벨론 땅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입니다.
    마치 광야 생활 40년 만에 애급에서 나온 백성들은 모두 광야에서 세상을 떠났고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여호수아와 갈렙의 믿음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믿음의 사람들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30장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백성들에게 태평(평화)과 안락(안전)을 약속하셨습니다.
    31장은 새 언약으로 약속하십니다.
    32장은 영원한 언약으로 하나님께서 떠나지 않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33장은 다윗의 언약과 레위의 언약으로 약속하십니다.

    출애급 후에 십계명은 돌비에 새겨진 언약은 옛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옛 언약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언약의 관계를 회복하시려고 새 언약을 맺습니다.
    새 언약은 마음에 새겨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그 마음에 새 언약이 새겨져 있습니다.
    믿음이란 이미 새겨진 언약을 찾아내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언제 내 마음에 언약을 새겼느냐 하며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 예수님께서 오른편의 무리들에게 너희는 내가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다.
    헐벗었을 때에는 입을 것도 주었다.
    감옥에 갇혔을 때는 면회하며 보살펴 주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른편의 무리들은 주님께서 언제 우리에게 목마르다, 헐벗었다, 옥에 갇혔다고 하셨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왼편의 무리들은 주님이 언제 우리에게 부탁하셨나요?
    주님이 부탁하셨다면 당장 그 부탁을 들어주었을 것이라며 억울하다고 합니다.
    그 때 주님께서는 어린 소자 한 사람에게 베푼 것이 곧 나를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새 언약을 마음에 새겼다는 것은 선택받은 민족을 히브리 백성에게 제한시킬 수 없다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새 언약은 이미 새겨졌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내 마음에 새겨진 언약을 찾아내어 그 언약에 따라 순종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겨어냐을 이었지만 핫ㅂ니다우의

    “예레미야”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던지셨다.”는 뜻입니다.
    무너지는 유다 왕국으로 선지자 예레미야를 던지신 것처럼 우리는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들입니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사람은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고 정의했습니다.

    나는 지금 뉴욕이란 도시에 던져졌습니다.

    그렇다면 왜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로 살아가게 하셨을까요?

    “예레미야”는 남 유다 왕국이 우상숭배로 무너져 갈 때 “여호와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보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이 세상에서 복음의 증인이 되라고 보내셨습니다.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려면 성령의 임재가 따라야 합니다.

    “새 언약”이란 옛 언약처럼 돌비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마음(심령)에 새겨져야 합니다. 돌에 새겨진 것은 세월이 지나면 지워질 수밖에 없지만 마음에 새긴 것은 지울 수 없습니다.

    마음에 새 언약을 새기려면 먼저 마음에 얼룩진 죄악을 모두 씻어버려야 합니다. 마치 비석을 만들 때 표면을 다듬는 것처럼 마음을 다듬어야 합니다. 마음을 다듬기 위하여 지난 날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지 못한 모든 언행을 쏟아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새 언약을 새겨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사랑은 우선순위를 바꾸는 것입니다.
    나를 위한 삶을 이제부터는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결단하고 실천하므로 새 봄이 다가오듯 신앙의 봄을 맞이하여 사랑의 꽃을 피워 열매를 기대해 봅시다.

    ♪ 찬양 / 못 박혀 죽으신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04-28-2021(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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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평과 안락(예레미야 3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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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송 : 405장(나 같은 죄인 살리신)

    ♦ 4월 28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예레미야 30:1∼24
    ♦ 묵상을 위한 주제 : 태평과 안락(10절)

    ♦ 성구 :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종 야곱아 두려워 말라 이스라엘아 놀라지 말라 내가 너를 원방(遠方)에서 구원(救援)하고 네 자손(子孫)을 포로(捕虜) 된 땅에서 구원(救援)하리니 야곱이 돌아와서 태평(泰平)과 안락(安樂)을 얻을 것이라 너를 두렵게 할 자(者) 없으리라.

    예레미야 30장부터 33장을 “작은 위로의 책”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심판을 받은 후에 다시 회복될 것을 역속하신 예언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1, 2년 후에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것이라고 예언하였지만 예레미야는 반드시 70년을 다 채운 후에 돌아올 것이라는 비관적인 예언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희망적인 예언의 말씀을 전합니다.

    예레미야 30장의 내용을 살펴봅니다.

    30:1-11, 심판과 회복에 대한 예언

    30:12-24, 포로귀환의 약속과 열방들에 대한 심판의 예언 

    묵상을 위한 주제는 “태평(泰平)과 안락(安樂)(peace and security)”입니다.
    태평이란 평화 즉 살롬을 말하고, 안락이란 안전을 말합니다.

    어떻게 태평을 누릴 수 있을까요?
    태평을 누린다는 것은 전쟁이 끝난 상태를 의미합니다.
    더 이상 전쟁의 불안과 공포에 떨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안락할 수 있을까요?
    구원하신 후에는 놀라게 할 자가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을 멸망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혔던 이방 나라들을 무너트릴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더 이상 전쟁이 없고 안전하기 때문에 이전 보다 더욱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만일 또다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면 또 다른 재앙이 닥쳐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팬데믹 세상에 갇혀 있는 우리들이지만 그 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고 원하시는 삶을 회복할 때에 용서하시고 회복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며 기뻐할 그 날이 반드시 다가올 것을 기대하며 태평과 안락의 삶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나 어느 곳에 있든지

    https://www.youtube.com/watch?v=_IpTk9hOiu4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예레미야 30장에서 33장은 유다와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은 이후에 다시 회복될 것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거짓선지자들의 잘못된 예언을 비판하면서 그들의 예언처럼 유다가 1, 2년 만에 바벨론에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70년을 다 채워야 돌아올 수 있다는 어쩌면 비관적인 메시지였다면, 이 부분에서는 보다 희망적인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30장부터 33장을 일컬어 "작은 위로의 책"이라고 합니다.

    본문 30장은 유다와 이스라엘을 포로 된 곳에서 돌아오게 하신다는 내용입니다.
    30:1-11, 심판과 회복에 대한 예언
    30:12-24, 포로귀환의 약속과 열방들에 대한 심판의 예언

    심판과 회복의 예언(1-11)

    1,2절 말씀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신 바를 모두 책에 기록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자세하게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전해야 하는 사명이 예레미야에게 있었습니다. 30장 전체의 주제가 되는 내용을 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과 유다의 포로를 돌아가게 할 날이 오리니 내가 그들을 그 조상들에게 준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니 그들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미래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결국 유다 멸망 70년 후에 고레스 왕에 의해 1차로 스룹바벨이, 그리고 2차로 에스라가, 3차로 느헤미야가 이끄는 포로들이 돌아오게 되는데, 그 역사의 주인은 결국 하나님이시고,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못할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내 감정과 상황과 때로는 고난까지도 하나님의 개입하심과 주권 속에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 순간의 감정과 상황 속에 휘둘리거나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매 순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훈련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4절부터 7절까지는 이스라엘과 유다가 당할 심판에 대한 말씀을 극적인 표현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4-7)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하여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우리가 무서워 떠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 두려움이요 평안함이 아니로다 너희는 자식을 해산하는 남자가 있는가 물어보라 어찌하여 모든 남자가 해산하는 여자 같이 손을 자기 허리에 대고 모든 얼굴이 겁에 질려 새파래졌는가 슬프다 그 날이여 그와 같이 엄청난 날이 없으리라 그 날은 야곱의 환난의 때가 됨이로다 그러나 그가 환난에서 구하여 냄을 얻으리로다

    포로 귀환이라는 소망의 큰 주제의 말씀을 주신 후에 곧바로 심판을 언급하십니다.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던 유다와 이스라엘은 반드시 심판 또는 징계의 과정을 겪은 후에야 회복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서워 떠는 자의 소리가 있겠고 두려움이 임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남자는 해산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상상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는 예상 못한 일이 예루살렘에 벌어졌고 그로 인해서 남자들이 손을 허리에 대고 얼굴이 질려서 새파래졌다고 합니다. 해산의 고통과 같은 큰 심판이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슬프다 그 날이여’, 그와 같이 엄청난 날은 BC 586년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큰 슬픔과 환난의 때를 만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시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8절과 9절은 그러한 심판 이후에 있을 회복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8-9)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라 그 날에 내가 네 목에서 그 멍에를 꺾어 버리며 네 포박을 끊으리니 다시는 이방인을 섬기지 않으리라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며 내가 그들을 위하여 세울 그들의 왕 다윗을 섬기리라

    그 날에 멍에를 꺾어 버리고 포박을 끊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7절의 슬픈 그 날과 대조적으로 8절의 그 날은 여호와의 구원이 임하는 날이며, 고난 속에서 해방되는 날입니다. 여기서 멍에는 70년간의 포로생활을 의미합니다. 이 백성이 그 기간을 다 채운 후에 하나님은 그 멍에를 꺾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이방인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게 되고, 새롭게 세우실 다윗 왕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 분이 바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유사한 말씀이 에스겔 37장 24-25절에도 나옵니다.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 모두에게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들의 왕이 되리라.”
    이스라엘에 수많은 왕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백성들을 위한 왕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선지자, 진정한 제사장, 진정한 왕, 백성들의 삶을 가르치고 인도할 사명자가 필요했습니다. 메시야를 고대하게 된 것입니다. 기름부음 받은 자, 메시야를 통해 자신들을 구원해 주시도록 고대하고 소망했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새로운 왕, 영원한 왕을 세워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 성군 다윗과 같은 인류의 왕,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고 이 땅을 통치하는 날이 오게 할 것이라고 예언해 주신 것입니다. 그 약속의 성취로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고 그분의 통치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매일의 삶이 영원한 왕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0-11절 역시 회복에 대한 반복적인 메시지입니다.
    10절에 태평을 누리다는 단어는 본래 전쟁이 그친 상태를 의미합니다.
    더 이상 전쟁의 불안과 공포에 떨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고 태평과 안락을 주실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말고 놀라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11절에서는 이방인들을 멸망하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시겠지만, 유다가 범죄한 것에 대해서 행한 대로 징계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택한 백성을 지켜 주시지만,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것은 반드시 징계하시고 바로잡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수시로 우리 마음에 성령님이 죄를 지적해 주실 때 그 순간 하나님께 자백하고 돌이키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정결케 되는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포로 귀환의 약속(12-24)

    12절부터 24절까지는 전반부와도 비슷한 맥락 속에서 그동안 상처 받고 힘들었던 유다와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고 바벨론 포로로부터 구원해 주시리라는 약속을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2절부터 15절까지는 이스라엘의 상처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상처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 원인은 바로 이스라엘의 죄 때문이고 그로 인한 징계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기 때문에 죄에 대해 반드시 보응하시고, 징계 하십니다. 그러나 징계는 고치시기 위함입니다. 돌이켜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사랑하는 자녀이기 때문에 징계 하십니다. 혹시 우리도 인생의 어느 순간 징계의 터널을 지날 때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떠올리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기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16절부터 24절까지 이스라엘의 회복과 이방의 심판에 대한 예언이 계속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징계하셨지만, 또한 열방 중에서 지켜 보호해 주십니다. 상처받고 실패하고 징계 받았던 자리에서 이제 다시 감사하는 소리가 나오고 즐거워하는 자들의 소리가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인생 여정 중에 비록 잠시 징계의 터널을 지난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 좌절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전의 모습으로, 이전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21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백성 중에서 지도자를 세우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21) 그 영도자는 그들 중에서 나올 것이요 그 통치자도 그들 중에서 나오리라 내가 그를 가까이 오게 하리니 그가 내게 가까이 오리라 참으로 담대한 마음으로 내게 가까이 올 자가 누구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지도자는 담대함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변방 베들레헴에 아기로 오셨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한 없이 부끄러운 우리 인간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 주시는 중보의 대제사장으로 오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통해 이제는 하나님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22절은 새 언약에 관한 말씀입니다.

    (22)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은 사무엘하 7장에서 다윗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사무엘하 7장 14절입니다.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24절입니다. “주께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세우사 영원히 주의 백성으로 삼으셨사오니 여호와여 주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윗 왕조와 맺은 언약은 이제 끝이 나고 있습니다. 잠시 후 포로로 끌려간 이후에 그 언약은 먼저 그 약속을 저버린 이스라엘과 유다 때문에 파기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새로운 언약을 허락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 구원의 새 언약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되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과 맺어지는 언약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다시 와서 이 땅을 심판하시는 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또한 이 언약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먼저 제안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셔서 우리를 불러주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자녀 삼아 주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 언약을 잊지 말고 신실하신 하나님 앞에 그분의 백성답게 자녀답게 살아가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본문은 23절과 24절에서 악인에 대한 심판의 말씀으로 마무리 됩니다.

    (23-24) 보라 여호와의 노여움이 일어나 폭풍과 회오리바람처럼 악인의 머리 위에서 회오리칠 것이라 여호와의 진노는 그의 마음의 뜻한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돌이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끝날에 그것을 깨달으리라

    하나님의 진노는 뜻하신 바를 행하시며 이루기까지 돌이키지 않으십니다.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나서 그 때에야 이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우리도 죄를 멀리하며 시시 때때로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들고 우리 삶을 정결케 하며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포로생활로부터의 회복을 예언해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 삶에도 죄로 인해 포로된 것 같은 삶을 사는 모습이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무엇인가에 얽매여 자신의 의지대로 살지 못하고 시간과 에너지를 빼앗기며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으로부터 돌이켜야 하겠습니다.
    거기에서 건져 주실 분, 구원해 주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의 은혜로만 가능하기에 우리는 눈만 뜨면 우리의 왕 되신, 영원한 다윗 왕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찾고 늘 그분과 동행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실한 청지기로 함께 지어져 가는 길입니다.
    또한 오늘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늘 깨어,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을 고대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 날은 영원한 심판의 날이며, 또한 영원한 회복의 날입니다.
    오늘 하루를 내일을 위한 디딤돌로, 먼 훗날 우리가 또 다른 모습으로 쓰임받기 위한 준비의 과정으로 살아간다면, 주님께서도 우리 삶을 기쁘게 받아 주시고, 이 땅에 다시 임하시는 날 우리는 선한 청지기로 주님께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안타까운 심정을 조금이나마 깨닫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우리가 때로 주님의 뜻대로, 말씀대로 순종하지 아니할 때 고난을 통해 징계하심을 늘 기억하며 죄로부터 날마다 돌이키는 삶이 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삶에 먼저 찾아와 주시고 하나님 백성 삼아 주시며 구원해 주신 그 은혜를 늘 잊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진실하고 선한 청지기로 살아가는 삶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영원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안에서 그분의 다시 오심을 고대하며 준비하는 하루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시고 또한 회복시키시는 분이십니다. 내 삶에 하나님의 회복의 은혜를 구해야 하는 영역은 무엇입니까?
    2. 이해하기 어려웠던 고난의 시간이 지나고 보면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었다는 것을 느꼈던 적이 있었나요?
    3. 진실한 청지기로 살아가기 위해 더욱 더 그리스도의 주인 되심을 인정해야 하는 나의 삶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4. 예레미야처럼 이 민족을 위해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생각해 보고 잠시 나라를 위한 기도를 드려 봅시다.




    04-27-202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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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앙과 평안과 소망(예레미야 2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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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송 : 535장(어 두운 후에)

    예레미야 29:1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이 말씀은 바벨론의 포로가 된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전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포로가 된 백성들에게 두 가지를 부탁하셨습니다.

    첫번째는바벨론에서 번성하라

    집을 짓고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 번성하라고 합니다.

    두번째는 바벨론의 평안을 기도하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지만 바벨론에 머무는 동안 바벨론의 평안을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바벨론이 평안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평안하게 지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도시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도시의 평안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예언활동을 반대하는 사람들은(시드기야, 아합, 스마야) 여전히 예레미야의 예언이 잘못된 것이라고 백성들에게 듣지 말라고 합니다.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들어야 할 소리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생명과 평안과 소망이 될 것입니다.

    예레미야 29:1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그리스도인이 들어야 할 세 가지 소리를 소개합니다.

    첫째는 영심의 소리
    둘째는 역사의 소리
    셋째는 하나님의 소리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옮겨 간 포로 가운데 남아 있는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 시기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주전 597년 제2차로 유다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간 후 시드기야가 유다 왕위를 계승한 때입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바벨론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편지를 쓴 시기는 나라가 혼란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간 사람들이 몹시 불안해하였던 시기였고, 이러한 시기에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그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허락하신 본문 29장을 읽다보면 선지자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이 시간 다양한 목소리들을 살펴보므로 우리가 귀 기울여 들어야 할 음성이 무엇인지 살펴겠습니다.

    첫째, 선지자 예레미야의 목소리

    예레미야는 29장 전체에 걸쳐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1절부터 20절까지 내용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백성들에게 전합니다.

    29:1-14, 바벨론에 머물고 있는 백성들에게 보낸 편지

    사반의 아들 엘라사와 힐기야의 아들 그마랴 편으로 바벨론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되어 졌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국 이스라엘을 떠나 낯선 곳 바벨론에 머무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이루어 진 일들이니 바벨론에 잘 정착하여 평안 가운데 하나님만을 바라고 기도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며 지내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기한이 다 찼을 때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될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진심으로 원하시는 것은 11절의 말씀처럼 평안을 주려 하심이지 결코 재앙이 아님을 다시한번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억하도록 말씀하고 계십니다.

    바벨론에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에는 바벨론 강가에서 고향을 그리며 눈물을 흘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느라 밭을 경작하는 일을 소홀히 하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보내신 곳에서 열심히 살아가도록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온 세상이 여호와의 것이기에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은 어느 곳에 있든지 아버지 하나님의 땅에서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어떤 역경과 견디기 힘든 상황들 가운데에도 능히 감당할 수 있도록 도우시고 용기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9:15-20,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백성들에게 보낸 편지

    바벨론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들으며 예루살렘은 패망하지 않을 것이며 바벨론에 끌려온 자들도 곧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라는 생각을 갖기도 하였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헛된 꿈을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 선지자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들은 완전히 패망하게 될 것이고 예루살렘에 있는 자들에게는 고통과 핍박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로 인한 엄중한 심판이 있게 될 것임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29:21-23, 선지자 아합과 시드기야의 목소리

    아합과 시드기야는 거짓을 예언하였고, 악행을 저질렀으며, 이웃의 아내들과 음행을 저질렀던 아주 악한 선지자들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은 바벨론 왕 느부갓넷살에 의해 화형을 당하도록 하셨고 아합과 시드기야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들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하나님께서는 결코 죄를 짓는 자들에 대해서는 내 버려 두시지 않으시고 반드시 그 죄를 심판하시기 는 공의로우신 분이심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죄악을 심판하시는 도구로 악한 자들 까지도 들어 죄를 멸하시는 분이 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2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의 악행에 대한 모두 알고 계시는 증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짓는 모든 죄를 다 아시고 그 죄의 증인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아버지 하나님께 낱낱이 아뢰고 진심으로 용서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29:24-32, 스마야의 목소리

    스마야는 제사장 스바냐에게 편지를 써서 왜 예레미야 같은 자를 책망하지 않고 그냥 두냐며 예레미야를 처벌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하지만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예레미야를 통해 거짓 예언을 하고 있는 스마야를 벌하시고 멸절시키실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선지자라 불리던 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각각 메시지를 전하던 자들이었습니다.
    스스로는 다 자신의 메시지가 바로 하나님께서 내리신 메시지라고 하였지만 그 가운데 진실한 하나님의 음성을 전하는 자는 한 명 뿐이었습니다.

    나머지 거짓 선자들의 메시지는 어쩌면 당시 사람들에게는 더욱 합리적으로 들리는 메시지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메시지를 듣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더 유리한 메시지였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것은 모두 거짓이었고, 거짓을 전한 자들은 결국 하나님께서 모두 제하여 버리셨습니다.

    거짓 메시지를 전하는 자들은 그 메시지를 듣는 사람들을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하는 자들이기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속여 잘못된 길로 유인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모두 다 제하셨던 것입니다.

    나라를 잃고 바벨론에 끌려가 위기와 불안 가운데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참된 위로와 구원의 메시지는 오직 하나님의 음성뿐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참으로 많은 메시지를 들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메시지를 전하는 자들은 모두가 올바른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그 메시지 가운데 진정 하나님께서 바로 나에게 하시는 그 메시지를 들을 수 있도록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연약한 우리 인간들에게 참된 길과 진리는 하나입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이외에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의 모본은 어떤 훌륭한 선생이나 도덕 교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되시고 우리의 구원자 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삶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내가 듣는 메시지, 내가 걸어가는 그 길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적 없고, 예수님께서 걸어가셨던 길이 아니라면 그 메시지나 그 길은 우리가 따라야 할 것들은 분명히 아닐 것 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주신 삶은 좁은 문, 좁은 길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도 누리지 않으셨던 부와 안일한 삶을 추구하며,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복된 것이라 이야기 하는 것이 더 듣기 좋아 그것을 따라가고 있다면 다시 한 번 진지하게 내가 가고 있는 길이 어떠한 길인지를 확인하며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성난 자연의 현상 앞에서는 너무도 무능한 존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처럼 혼돈스러운 시기에 더욱 민감하게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음성에 우리의 마음을 집중하려 하고 계십니까?
    이 시간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내 마음속에 진심으로 전하고자 하는 그 메시지가 어떤 것인지를 귀 기울여 듣는 시간이 되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복잡한 세상에서 다양한 소리를 들으며 살아가가야 하는 저희들에게 들어야 할 소리와 듣지 말아야 할 소리를 구부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육신을 무너트리려는 사탄의 유혹의 소리 보다는 영혼을 윤택하게 하는 생명과 진리의 소리에 귀를 기우리게 하옵소서.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뉴욕 땅에 평안을 주셔서 모든 사람들이 이 도시에서 사람이 알아야 하고 들어야 할 하늘의 소리가 모든 교회를 통해서 들려지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에만 민감하게 반응하며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저희들에게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주의 음성을 듣게 하신 은혜를 감사하며 오늘도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위하여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로  함께 기도합니다.


    수 많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세상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소리와 생명을 죽이는 소리
    희망을 주는 소리와 절망에 빠트리는 소리
    수 많은 소리들 중에서 그리스도인이 들어야 할 소리가 무엇일까요?

    첫째, 양심의 소리

    사도행전 24:16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디모데전서 1: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양심은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주신 유일한 선물이다.
    그러므로 바른 인격을 형성하려면 양심의 소리에 민감해야 한다.
    양심과 믿음은 마치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서 믿음이 없이는 선한 양심을 가질 수 없고, 선한 양심이 없이는 좋은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양심이 밝지 않으면 마음의 눈이 어두워진다. 사람답게 살려면 양심의 소리를 들으며 살아야 한다.

    둘째, 역사의 소리

    히브리서 9:4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우리는 한 시대를 살아가는 역사의 주인공들이다.
    역사의 소리를 바로 듣지 못하면 훗날 우리들이 살다간 한 시대의 역사 앞에 부끄러운 유산을 후손들에게 남겨주고 말 것이다.
    역사는 바로 거울이다.
    역사의 거울을 보고 반복되는 실패를 막아야 한다.
    그런데, 어쩌다가 한국교회가 이렇게까지 야성을 잃었는지 역사의 거울을 보지 않는 것만 같다.
    나라가 지금 안보, 경제, 교육이 기울어진 운동장 같은 데도 예언자적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이 소리는 국민의 소리요, 시민의 소리요, 억울한 자의 소리요, 내 나라 내 조국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소리이다. 정치인은 국민의 소리를, 교육인은 학생들의 소리를, 사업가는 노동자들의 소리를, 공무원은 시민들의 소리를, 종교인은 소외된 영혼들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이것이 역사의 소리다.

    셋째, 하나님의 소리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의 소리는 생명을 살리는 소리요, 지친 영혼들에게 희망을 주며, 평안과 안식을 주는 소리이다.
    하나님의 소리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어느 곳에든지 반드시 들어야할 소리이다.
    만약 이 사회를 지킬 마지막 보루인 그리스도인 마저 역사적 사명 앞에 방관자가 된다면 누가 이 시대를 책임지겠는가?
    의인 열 사람이 없어서 소돔성의 심판을 막지 못한 슬픈 역사를 기억하자.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소리가 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소리가 있는가 하면 생명을 죽이는 소리도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들어야 할 소리를 바로 듣지 못함으로 에덴에 주셨던 모든 축복을 빼앗긴 장면입니다.
    에덴 동산에는 3가지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첫째, 악마의 소리가 있었습니다(1~4절)

    이 소리는 하와를 유혹하는 소리입니다. 유혹의 목적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하와를 보십시오.
    뱀이 동산의 모든 과일을 보여주면서 ࡒ이 동산의 과일을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더냐?
    아니야 다 먹되 중앙에 있는 나무의 과실만 먹지 말라 먹으면 죽을까 하노라ࡓ라고 했습니다(창 3:3).
    그러나 하나님은 ࡒ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ࡓ(창 2:17)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반드시 죽는다는 것입니다.
    악마의 소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와 교제를 끊어놓는 소리입니다.
    이 소리를 들으면 영육의 축복이 파괴됩니다.
    하와를 유혹하며 넘어뜨릴 때 뱀은 당시 들짐승들 중 가장 지혜로웠습니다.

    하와는 이 악마가 친구인 줄 착각하고 5가지 유혹에 빠져들었습니다.
    사단과 사귐과 보지도 말아야 할 선악과를 바라본 것,마귀의 유혹하는 소리를 들은 것과 만지지 말아야 할 선악과를 만진 것,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은 것입니다.
    이것이 유혹에 빠지는 과정입니다. 마귀가
    유혹하는 목적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려는 것입니다.

    둘째, 사람의 소리가 있었습니다(6절)

    이 소리는 믿음을 떠난 육신의 소리입니다.
    바로 하와가 아담을 넘어뜨린 소리입니다.
    그런데 하와는 이미 유혹에 빠져있는 사람입니다. 이미 믿음을 떠난 사람입니다. 지금 하와가 하는 소리는 육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입니다. 하나님이 주는 소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떠난 사람의 소리에 주의를 해야 됩니다. 사람의 소리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 성도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7~9절)

    성도는 하나님의 소리에 민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소리를 들어야 생명이 살고 영육도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소리를 따라 살면 환란과 고난 중에도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소리는 언제 들려옵니까? 기도할 때, 우리가 잘못할 때, 충성할 때 들려옵니다. 말씀을 통해, 양심을 통해, 성령의 감동을 통해 들려옵니다.

    어떤 소리를 듣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집니다. 말씀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들어 영성이 회복되며 마음의 평안을 얻고 영육간의 복을 누리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소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세상에서 천지를 창조를 하게 된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세상을 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소리’로 인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소리에 저항하지 않고 응답했기 때문에 인간이 살기 좋게 만드신 이 ‘세상’이 만들어지고 존재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부르시는 소리에 저항하지 않고 따라갈 때 내가 만들어지고 존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부르시는 소리는 내가 들어야 할 소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들어야 할 하나님의 소리와 듣지 말아야 할 세상의 소리가 있습니다.
    세상의 소리는 행복과 안정과 부유를 추구하는 본능적인 자극의 소리입니다.
    하지만 행복과 안정과 부유의 결과는 공허와 허무로 끝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더 큰 문제는 이 공허와 허무로 끝나는 세상의 소리가 처음에는 달콤하고 사랑스런 매력이라고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리의 끝에서 들리는 자기 내면의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결국, 세상의 소리는 내면에서 허무와 공허를 만나 후회된 삶을 살았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리는 세상의 소리와는 달리 공허와 허무로 만나지 않고, 기쁨과 승리로 만납니다. 그 뿐만 아니라 마지막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소리는 나팔 소리로 들리며 기쁨과 즐거움에 겨운 찬송과 기도의 소리가 들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들어야 할 소리인 하나님의 소리와 듣지 말아야 할 소리인 세상의 소리를 구분하며 들어야 할 소리인 하나님의 소리를 들어야합니다. 하지만, 죄악으로 둘러쌓여진 이 세상에서는 들어야 할 소리와 듣지 말아야 할 소리에서 갈등을 하게 됩니다.

    믿음의 장군 나희팔

    박정희 대통령시절 장성급 만찬자리에서 나장군이 인솔하는 부대의 모범적인 상황보고를 받고 기분이 한껏 고무된 박대통령이 나장군에게 친히 가득 부어준 술잔을 놓고 고민에  빠졌다.

    대통령이 따라준 축하주를 어찌해야 좋은가?
    대통령은 술잔을 들고 나희필장군이 받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 1분이 한시간처럼 길었다
    모두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나 장군은
    "각하 ! 저는 술을 못합니다
    저에겐 사이다로 한잔 주십시요! "

    박대통령은 난감한 표정으로 나 장군을 유심히 쳐다 보았다.
    이 날의 이 순간을 지켜봤던 한 장군은 이렇게 회고했다.

    "마치 폭탄이 터지고 난 후 엄청난 정적 속에 잠긴 것 같았다."

    대통령이 친히 술을 따라 내민 술잔을 딱 잘라 거절한 예가 있었을까?
    대통령의 굳은 표정을 본 국방 장관이 순간 벌떡 일어나,

    "각하 나 장군은 원래 술을 못합니다. 그 잔은 제가 대신 받겠습니다." 하고 잔을 뺏다시피 하여 단숨에 마셔 버렸다.

    대통령의 체면 손상!
    그 위기의 순간을 국방장관의 기지로 일단 넘어갔지만, 만찬장의 분위기는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고 말았다.
    만찬이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난 대통령은, 의기소침해 있던 나장군에게 다가 가더니,
    "니가 진짜 기독교인이다"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만찬장을 떠났다.

    아마 당시 박정희대통령이 공식 만찬 석상에서 축배를 거절을 당한 예는, 아마도 이때외에 전무후무한 일 이었을 것이다.

    한편 이날 만찬이 끝났을 때, 박종규 경호 실장이 나희필 장군에게 다가와 "선배님 해도 너무 하셨습니다!
    꼭 그렇게 각하에게 망신을 주었어야 합니까? 국군의 통수권자요 일국의 대통령께서,
    손수 축하의 술 잔을 권하면, 정중히 받아서 입잔 이라도 하는 척 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분 초를 따지며 대통령의 일거수 일투족과, 얼굴 표정 하나하나까지 살펴야 하는 경호 실장으로서,
    이 날 일촉즉발의 그 순간의 초조함과 고뇌가 어떠했을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대통령이 떠나간 후,
    선배 장군들이 나 장군에게 찾아와,
    군 통수권자 앞에서 너무 경솔했다는 질책을 했다.

    "이 사람아 별을 하나 더 달 수 있는 하늘이 준 8년만에 찾아온 기회인데, 왜 그렇게 미련한 짓을 했나? 내일 일찍 책상 정리나 하게.”

    사단장 관사로 돌아온 나 장군은, 정작 매우 불안해야 될 자신의 마음이 오히려 평안함을 느끼면서,
    "내가 과연 이런 신앙에 대한 용기가 어디서 나왔을까?
    내일 당장 청와대에서 어떤 책벌이 떨어진다해도 괘념하지 않겠다.
    내가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나의 앞날을 책임져 주시겠지,
    내가 육사를 졸업할 때, 구대장께서 장교가 되어 술을 마실 줄 모르면, 출세를 할 수 없다고 했는데,
    그러나 나를 이렇게 장군까지 진급시켜 주신 것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라고
    자위 하면서, 나 장군은 취침전, 이날 있었던 일을 기도로 하나님께 맡기고 기다렸다

    신앙인으로서 일생을 사는 동안, 술을 가까이 하는 삶보다, 말씀을 가까이 하여 말씀을 의지하는 삶이,
    더 신실한 삶이라는 것을, 성경 말씀을 통해 확신하였기 때문이었다.
    한편, 군복을 벗을 것이라 마음을 비우고 있었던 나 장군은, 아침이 되자 책상 정리를 끝내고, 상부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문책은 오지 않고, 오히려 별을 하나 더 달고 소장으로 진급, 육군본부 작전 참모부장으로 영전되었고, 다시 3군 사령부 창설의 중요한 임무를 담당했다.
    바로 이 것이 하나님의 이끄심 이 아니겠는가!

    나희필 장군의 군대생활에는, 아무도 모르는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월남전이 치열할 때, 우리나라 장성들과 고위급 인사들이 월남으로 갈 때는, 꼭 대만의 한 호텔에서 1일 숙박을 하는게 상례였다.

    잠이 들 무렵 호텔 지배인이 나 장군 방을 노크 하더니, 정중히 인사를 하고 책 한 권을 건넸다.

    여자들의 나체 사진첩이었다.
    한 사람 골라 주시면 보내 주겠다고 했다.
    물론 돈은 출장비에서 계산이 다 끝났다 고 했다. 그러나 나 장군은 이를 거절하고, 내일 새벽 교회를 가야 하니까 교회 위치나 알려 달라고 했다.

    그 후 이 호텔 지배인은, 한국의 고위 인사들이나 장성들이 이 호텔에 유숙할 때마다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이 호텔 건립이래 그렇게 청렴한 사람은, 과거도 지금도 오직 한국의 나 장군 한 사람 밖에는 없었습니다."

    전쟁터로 향하는 군인이, 그것도 공짜로 수청(?)을 들겠다는 아가씨와, 하룻밤쯤은 쥐도 새도 모르게 보낼 수도 있었는데도,
    "하나님은 항상 나와 함께 하신다"라는 평소 남편의 믿음이 그날 밤의 유혹을 단호히 거절했다는 것이다.  

    나희필 장군이 제대 후 어느 날 밤에,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정보부의 차장보 자리의 인선문제로 며칠 밤을 지새던 김재규 부장은, 문득 나희필 장군이 생각나, 새벽 두 시에 전화를 했다.
    "나 장군이야 말로 바로 이 자리에 앉을 가장 적임자요,
    내일 아침 일찍 출근하시오."
    당시 이 차장보 자리는, 중앙 정보부의 막대한 예산 집행에 관여하는 요직이기 때문에, 청렴결백이 요구되는 인물을 추천해야만, 대통령의 재가를 받을 수가 있었다.

    김재규 부장의 보고를 받고 난 박정희 대통령도 흐뭇한 표정을 지으면서, "일국의 국가 원수가 친히 권하는 축하의 술 잔도,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거절한 믿음의 장군 나희필이야 말로, 그 어떤 압력도 부정도 유혹도 거부할 수 있는 인물이다.
    잘 추천했다"라고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다.

    또한 수석 비서관 회의에서도 나희필장군에 대한 칭찬을 자주했다.
    얼마 후 대통령은, 나희필을 다시 장관급인 비상 기획원 위원장 자리로 영전시켰다.

    그런데 만일 이때 영전이 안되었더라면,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만찬의 자리, 대통령시해 현장에 나희필은, 김재규와 함께 꼭 참석을 해야만 되는 확정적 인물이었지만, 하나님의 가호로 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끝으로 박 대통령이 비명에 쓰러진 지 14년이 지난 1993년 9월 16일 위대한 신앙의 장군 나희필 장로는 68세로 세상을 떠났다.

    후에 나장군이 임종을 앞두고 새문안 교회 김동익 목사의 눈물의 기도를 받는 자리에서 그는 오히려 목사를 위로하면서
    "목사님 제가 목사님을 잘 보필하지 못하고 먼저 떠납니다.
    언젠가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납시다.
    목사님, 한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찬송가 455장을 좀 불러 주시겠습니까?"
    "주 안에 있는 나에게~~~."

    청초한 가을 백합화처럼,
    젖먹이 아이가 어머니의 품 안에서 포근히 잠든 모습처럼,
    그는 허물 많은 이 세상을
    미련 없이 하직하고,
    너무나도 편안한 모습으로,
    두 팔을 활짝 펴시고,
    이제 그만 나에게로 오라 부르시는,
    주님의 품안에 앉겼다. 정도의길을 간사람에게는
    결코 후회할일이
    오지 않는법이다

    오늘 타락한 우리 목회자 수치스런 정치꾼들이 부끄러움을 느끼며 본받아야할 역사의 한 페이지다 이런역사로
    대한민국이 기록
    되기를기원합니다

    오늘도 당신은 좋은일만 있을겁니다.








    포로에게 보낸 예레미야의 편지(1-23절)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과 바빌론 사이를 왕래한 편지들을 중심으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거짓 선지자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간 유다 백성들을 현혹시키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70년 후에 돌아갈 수 있다고 했는데, 거짓 선지자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도 말했습니다.
    1-23절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바빌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유다 백성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1) 선지자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이같은 편지를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끌고 간 포로 중 남아 있는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에게 보냈는데

    바빌로니아 제국은 B.C. 605년 여호야김이 왕위에 있을 때와 B.C. 597년 여호야긴이 왕위에 있을 때, 2번이나 굉장히 많은 유다 백성들을 바빌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래서 그발강 근처에 유다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거기서 유다 백성들은 어느 정도 자유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편지는 그들 중에서 장로들, 제사장들, 선지자들, 그리고 백성들에게 보내어 졌습니다.
    (2) 그 때는 여고니야 왕과 왕후와 궁중 내시들과 유다와 예루살렘의 고관들과 기능공과 토공들이 예루살렘에서 떠난 후라

    여고니야왕은 여호야긴왕으로 유다 왕국의 20명의 왕 중 19번째 왕입니다. 당시에 예루살렘에서 바빌론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유다 왕족과 고위관리들, 목공 기술자들, 철공 기술자들 등이었습니다. 바빌로니아 제국은 한 나라를 점령하고서 사람들을 끌고 갈 때에 아무나 끌고 가지 않았습니다. 자기 나라의 경제, 교육, 문화 등에 기여할 수 있는 사람들을 골라서 데리고 갔습니다.
    (4)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사람들은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이 유다 백성들을 바빌론으로 끌고 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바빌론으로 사로잡혀가게 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 붙어 있는 수식어가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에서 ‘만군’은 ‘땅과 하늘의 모든 군대’라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은 땅과 하늘에 있는 모든 군대의 총사령관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나라 군인들 중에서 가장 높은 계급은 대장(大將)이고, 모두 8명이 있습니다. 그들의 별을 모두 합쳐도 32개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있는 별은 셀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을 바빌론으로 끌려가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빌론에 있는 유다 백성들에게 3가지를 당부하셨습니다.
    첫째는 바빌론을 생활의 터전으로 삼으라입니다.
    (5)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거짓 선지자들은 바빌론에서 포로생활이 2년 만에 끝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 선지자는 70년이 지나야 돌아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빌론에서 집도 짓고, 과수원도 만들고 그 열매도 따먹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의 손을 들어주신 것입니다.

    둘째는 거기서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대를 이어서 살라고 하십니다.
    (6)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바빌론으로 끌려온 유다 백성들에게 거기서 결혼해서 자녀를 낳고 길러서, 그 자녀들이 또 결혼을 시켜서 거기서 번성하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말씀하심은 바빌론에서 포로생활이 일찍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셋째는 바빌론의 평안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7)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빌론의 평안을 빌라고 말하며, ‘평안’이라는 단어를 3번이나 사용합니다. 원수와도 같은 바빌론의 평안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거기서 오래 살아야 하는데, 바빌론의 평안이 유다 백성들의 평안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빌론에 있는 유다 백성들의 불안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8-9)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중에 있는 선지자들에게와 점쟁이에게 미혹되지 말며 너희가 꾼 꿈도 곧이 듣고 믿지 말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함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은 ‘(거짓) 선지자’, ‘점쟁이’, ‘꿈쟁이’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이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고, ‘점쟁이’는 다양한 점의 결과가 하나님의 계시라고 말하는 사람들이고, 꿈쟁이는 꿈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않았다. 그들은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사람들이다.”
    당시나 지금이나 이런 무속적인 것이 판을 치는 이유는 유한한 사람들 속에 불안과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고, 또 사람들에게는 욕망이 있어서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갖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유한하기 때문에 우리를 신뢰하지 않고, 주님을 신뢰합니다. 또 우리가 원하는 결과든 그렇지 않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수용하는 사람이 성숙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10)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의 포로기간이 70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결코 짧은 기간도 아니지만, 영원히 포로로 살게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초기에 바빌론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바빌로니아 제국에 조금이라도 이상한 징후가 있으면, 해방의 기회로 삼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100년 전에 3.1운동이 있었을 때, 이 땅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은 그 때 해방이 되기를 얼마나 갈망했겠습니까? 하지만 그 때로부터 26년이 더 지나서 이루어졌습니다. 또 유다 백성들이 포로생활에 지쳐 절망에 함몰되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 포로생활에 마침표를 찍어주신 때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망이 되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70년이 되면 유다 백성들을 ‘돌보고’, 이 곳(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돌보다(파카드)’는 ‘방문하다’는 뜻인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출애굽하게 하실 때에 사용된 단어입니다. 그래서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옴은 제2의 출애굽이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소망의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11-1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유다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심은 ‘평안’이고, ‘미래와 희망’이라고 하십니다. 비록 현재의 삶이 힘들고 고달파도 미래가 보이고, 희망이 있으면,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 수 있습니다. 반면에 현재가 평안해도 미래가 불안하고, 절망의 구름이 끼여 있으면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부르짖을 수 있고, 그것을 들으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소망이 되는지 모릅니다. 만약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신다면 공기의 진동이나, 대답 없는 메아리에 불과할 텐데, 우리를 만나주시는 하나님으로 인해서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소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 유다 백성들의 모습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9)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들이 내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니라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들에게 꾸준히 보냈으나 너희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쉼 없이 말씀하셨지만, 유다 백성들은 조상 때부터 반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습니다. 현재의 삶이 자신들이 상상하는 것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등대의 불빛과 같습니다. 그래서 캄캄한 밤, 그리고 크고 작은 바위가 많은 바다에서는 그 빛을 따라서 가야 안전하게 갈 수 있습니다. 만약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만 불빛을 비추어 달라고 하면 이내 좌초하고 말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데로 등대가 비추어주지 않는다고, 등댓불을 원망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스마야에게 보낸 편지와 하나님이 말씀(24-32절)
    바빌론에 있는 두 거짓 선지자, 아합과 시드기야의 비참한 죽음에서 대해서 선포하신 하나님께서는 24-32절에서 바빌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는 유다 백성들 사이에 있었던 스마야가 거짓 예언 편지를 예루살렘으로 보낸 것과 그에 대한 예레미야와 논쟁,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바빌론에 있었던 ‘스마야’라고 하는 거짓 선지자가 예루살렘에 있는 제사장 스바냐를 비롯해서 여러 제사장들에게 편지를 보내서 왜 예레미야를 책망하지 않느냐고 항의를 했습니다. 그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향해서 ‘미친 자’와 ‘자칭 선지자’라고 격하게 폄훼하는 말을 했습니다.

    (28) 그가 바벨론에 있는 우리에게 편지하기를 오래 지내야 하리니 너희는 집을 짓고 살며 밭을 일구고 그 열매를 먹으라 하셨다 하니라

    스마야가 격한 말을 써가며 보낸 편지 내용인 즉, 예레미야가 바빌론에서 오래 살아야 하니 거기서 집도 짓고 밭과 과수원을 일구어 그 열매를 먹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 그대로이었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면, 금방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말한 자신의 말이 거짓말이 되기에, 예레미야의 말은 거짓이라 우겨야 했습니다. 가짜가 진짜를 가짜라고 우기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짝퉁이 진품을 향해서 아무리 짝퉁이라고 우겨도, 언제나 짝퉁은 짝퉁이고, 진품은 진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에 현혹되지 않고, 내용을 정확하게 보고 분별해야 합니다.

    스바냐 제사장이 스마야가 보낸 편지를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읽어 주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1-32) 너는 모든 포로에게 전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느헬람 사람 스마야를 두고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그를 보내지 아니하였거늘 스마야가 너희에게 예언하고 너희에게 거짓을 믿게 하였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느헬람 사람 스마야와 그의 자손을 벌하리니 그가 나 여호와께 패역한 말을 하였기 때문에 이 백성 중에 살아 남을 그의 자손이 하나도 없을 것이라 내가 내 백성에게 행하려 하는 복된 일을 그가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께서는 거짓 예언을 한 스마야뿐만 아니라 그의 자손들에게까지 벌을 내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벌하다’는 단어와 10절에 있는 ‘돌보다’가 같은 단어로, ‘방문하다’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방문은 위로와 건져내심도 있지만, 책망과 심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가정에서 한 사람이 잘못을 하게 되면, 그 영향력은 온 가족에게 미치게 됩니다. 스마야가 거짓 선지자가 됨으로 그 영향력을 가족들과 가문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스마야를 따른 사람들은 동일하게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 두 갈래의 길을 보여 줍니다. 예레미야와 같은 하나님의 선지자가 있는가 하면, 아합, 시드기야, 스마야와 같은 ‘자칭 선지자’, ‘거짓 선지자’도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지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행하는 불의하고도 진실하지 못한 청지기와 같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바르지 못한 삶으로 인해서 신실하지 아니한 사람이 받는 벌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예레미야 선지자는 진실한 청지기와 같아서 때를 따라 생명의 양식을 나누어주며, 주인이 올 때에 문을 열어주는 청지기와도 같습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며, 예레미야 선지자가 걸었던 진실한 청지기와 같은 삶을 살아, 내일과 미래를 위한 디딤돌로 오늘을 신실하게 사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04-26-202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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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 멍에와 쇠 멍에(예레미야 2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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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절. 너는 가서 하나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나무 멍에를 꺾었으나 그 대신 쇠 멍에를 만들었느니라.


    * 하나냐(여호와의 자비하심)
    * 예레미야(여호와께서 던지셨다. 여호와의 의지)

    * 홍혜선에 대한 이단연구보고서 / 예장합동 2016년 (101회 총회)

     1. 홍혜선은 누구인가?

    홍혜선은 UCLA에서 언어학을 전공했다고 하고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여 자신이 풀러신학교(미국)에 입학하여 선교학 과정을 수학했다고 한다. 그러나 2014년 10월 27일에 홍혜선 씨는 미국 풀러신학교에 입학을 하였으나 학위 과정을 마치지 않아 졸업생이 아니라는 공식 입장을 내놓았다.

    홍 씨는 연극, 영화, 시나리오 작가, 배우, 프로듀서도 맡고 있다고 하는데 할아버지 홍 모 씨는 한국 최초의 연극 연출가로 알려져 있다. 그런 홍 씨는 돌연 2010년부터 천국과 지옥을 체험했고 이것을 세상에 알리라는 영적 존재의 명령을 따라 책과 유튜브를 통해 자신의 체험을 올리고 있는데 그녀가 유튜브에 올린 영상들만 무려 400여 건에 이른다.

    2. 홍혜선은 교인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신앙을 미혹시키는 거짓 예언자이다.

    홍혜선은 주로 한국에 전쟁이 발발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인터넷이나 유튜브에서 홍혜선을 클릭하면 한국 전쟁 발발에 대한 그녀의 메시지와 동영상을 쉽게 접할 수 있다. 2014년 9월 6일 한국전쟁 예언 메시지를 시작하여 무려 12번 혹은 13번에 걸쳐 한국전쟁이 발발한다는 것과 전쟁의 원인 등을 말한다. 유튜브에 실린 그녀의 메시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1-9번 메시지). 그녀는 주님이 자신에게 주신 메시지를 직접 전달하는 자로 자칭한다. 예를 들면 “주님이 말씀하셨다” 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직통 예언과 계시를 받았다는 것이다.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 한국 전쟁 메시지 1번(2014년 9월 6일: 동영상에 올린 날짜)

    - 2014년 3월 26일에 한국에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다.
    - 한국 교회의 주의 종들이 75%-85%는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 갈 것이다.
    - 주님이 한국의 전쟁을 취소하지 아니하시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성령을 훼방한 죄요 즉 성령을 탄압한 죄 때문이다. 자신의 예언은 하나님의 마음인데 듣지 아니하는 자는 성령을 훼방하는 자다.
    - 노인들과 군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다.
    - 하나님은 한국의 전쟁을 취소하지 아니하셨고 한국의 교회에 화가 많이 나 있다. 특히 목자들에 대해 화가 많이 나 있다.
    - 전쟁은 12월에 일어난다. 하나님이 화가 나서 더 이상 봐줄 수 없다. 비웃는 분들도 있겠지만, 소돔과 고모라 때 롯이 말할 때 사위들이 농담으로 보는 것처럼, 선지자가 예언하지 아니하면 피 값을 받는다. 그래서 예언한다.
    - 노인과 군인 십대 아이들에 대해 기도하라. 취소가 없다.
    - 대한민국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 앞에 많이 교만했다.

    2) 한국 전쟁 메시지 2번(2014년 9월 26일)
    - 박근혜 대통령 밑에 연세 드신 분이 박근혜 대통령을 잘 모실 수 있도록 중보기도 해야 한다.
    - 6.25 전쟁도 주님이 가르쳐 주시는데 이익을 위해 짜고 치는 프리메이슨의 작품이었다.
    - 이번 전쟁은 정부가 생각하는 것처럼 전쟁 후 평화가 오는 것과는 다르다.
    - 이번 전쟁은 프리메이슨이 이익을 위해 전쟁을 서로 하게 하는 그런 시나리오와는 다르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 오바마 대통령 보다 더 높은 지위의 어떤 사람은 한국에 전쟁이 나서 더 많은 사상자가 나오길 바란다. 오바마도 어쩔 수 없는 위에 어떤 세력이 있다.
    - 땅굴을 빨리 막으라고 주님이 말씀 하신다. 정부에서 하지 아니하면 국민들이라도 나서서 하라고 하셨다.
    - 땅굴을 통해 여인들을 납치하는 모습이 보인다. 여자들이 술집 여자들처럼 보인다.
    - 하루 전쟁이 아니고 긴 전쟁이다. 한국정부가 안 하면 국민들이 나서서 땅굴 막아라.
    - 김정은이 피신하고 있는데 주님이 김정은 밑에 세력이 붕괴되도록 기도하라 하셨다.
    - 북한을 믿지 말라.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을 지켜라.
    - 국지전과 전면전이 있는데 전면전이다.

    3) 한국 전쟁 메시지 3번(2014년 9월 29일)
    - 땅굴이 전국에 15군데 있다.
    - 국방부에 종북 세력이 있다.
    - 북군이 해군으로 공격한다.
    - 종북 세력을 제거하라고 하신다.
    - 연예인 가운데 프리메이슨이 있다고 경고하신다.
    - 땅굴을 막는 프로젝트를 만들라.
    - 김정은 뉴스는 거짓이 없다.
    - 박근혜 위해 기도해야 한다.
    - 생화학 없도록 기도하라.
    - 미국 아닌 다른 나라에 요청 기도하라.
    - 방송국 중에 종북 세력은 전쟁 때 피해가 많다.
    - 승리하려면 더 기도하라. 레위기 26장 1-4절처럼.
    - 12월 전쟁 막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4) 한국 전쟁 4번(2014년 10월 2일)
    - 전쟁은 적어도 5개월 이상이다. 
    - 땅굴 막는 것을 하지 않고 종북 세력을 제거하지 아니하면 안된다.
    - 지금 청와대 부근에 땅굴이 있다.
    - 국방부 높은 분 중에 종북 세력이 많다. 세월호 사건처럼 박근혜는 허수아비가 된다.
    - 전면전인데 종로와 은행이며 청와대 파괴된다(청와대가 종로에 있다?)
    - 땅굴을 묵인하는 자는 예수 믿어도 천국에 갈 수 없다.
    - 종북 세력은 적화통일 되어도 북으로부터 처형당한다.
    - 땅굴 막는데 도와준 기독교 기업이 구원 받는다.
    - 미국만으로 안 된다. 박근혜 선택이 중요하니 기도해라.
    - 군목들이 죽음을 준비하라.
    - 땅굴을 연구하는 분들을 도와주라. 방해하는 자들은 피 값을 묻는다.
    - 아무리 적어도 전쟁이 지속되면 5개월 이상이다.
    - 주의 종들 중에 종북 세력이 있다. 양떼들은 교회에서 나오라 종북 세력의 교회는 많이 공격 받는다.

    5) 한국 메시지 5번(2014년 10월 2일)
    - 한국과 북한의 평화스런 보도는 사실이 아니고 땅굴은 치밀하게 준비되고 있다.
    - 땅굴 조사, 파는 자 등은 계속하라고 말하라.
    - 박근혜 대통령이 땅굴 막도로 하지 않으면 상상치 못할 사망자가 생긴다.
    - 해군 쪽으로 공격하는 것이다. 방어 준비하라. 전면전인데 일산이다.
    - WCC에 가입된 교회는 지금이라도 탈퇴하라 피해가 크다.
    - 군대 목사님들 회개시키지 않으면 나중에 죄 값을 묻는다.
    - 여의도 국회의사당 주변에도 땅굴 있다.
    - 정부에서 예산을 쓰고 기업으로부터 지원받아 땅굴을 막아라.
    - 북한이 이슬람 나라의 도움을 받는 전쟁이다.

    6) 한국 메시지 6번(2014년 10월 9일)
    - 12월 청와대 침입하여 박 대통령 납치하고 전쟁하려 한다. 청와대 주변 땅굴 막아라.
    - 박근혜는 종북 세력에 휩싸여 있어 어쩔 수 없다. 국민과 의사소통하는 길을 마련하라.
    - 전쟁 시 북한은 남한 아이들을 북으로 납치한다. 인육으로 쓸 것이다.
    - 3차 전쟁이 되지 않도록 하나님이 하신다.
    - 11월 말까지 땅굴을 막하야 사망 25% 줄일 수 있다.
    - 남한의 북한 연구 기관들은 내용 중 북한의 강한 점에 대해 잘 모른다.
    - 한국의 쇼핑센터, 백화점 등을 종북세력들이 정보를 주어 파괴가 있다.
    - 가톨릭 신부, 수녀들이 있는 장소도 공격한다. 왜냐하면 교역자들의 말살 정책이다.
    - 북한이 전쟁의 승리를 위해 큰 병원을 공격하여 치료하기 힘들게 한다.
    - 국회의사당을 집중 공격해서 민주주의가 다시 서지 못하게 하기 위해 폭탄이나 미사일 공격을 할 것이라고 보여주었다.

    7) 한국 메시지 7번(2014년 10월 14일)
    - 박근혜 대통령 납치할 계획이라고 했는데 청와대 밑에 땅굴을 이용해서 데리고 가서 대한민국의 정부를 포기하라고 시인하게 한다. 국방부에 지휘하는 자가 없어서 쉽게 이루어진다. 중요한 건물 파괴한다.
    - 종로, 청와대, 대학로, 여의도 국회의사당, 큰 대학병원 주변 땅굴 막아라.
    - 천주교를 북한으로 하여금 치게 하신다. 하나님이 화가 났기 때문이다. 천주교는 666교육을 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주님이 화가 나셨다.
    - 전쟁 발발 시 미국이 도와준다 해도 땅굴의 반을 막지 못하면 베트남 전쟁처럼 패한다.
    - 대한민국 교육자들의 주소들을 알고 있다. 교육자들에 대한 말살 정책을 북한이 갖고 있다.
    - 한국의 큰 기업들을 무너뜨리기 때문에 그 자금으로 빨리 정부와 함께 땅굴을 막아라. 아니면 자금을 다 빼앗기게 된다.
    - 종북 세력은 국민의 45%다. 전쟁에 한국 인구의 반이 죽는다.
    - 국가의 중요 기관이 있는 주위에 살고 있는 자는 피난 가라.
    - 인천 공항 피해가 3번째 큰 피해가 된다.
    - 종북 세력들은 다 사형 당한다. 북한 돕지 말라고 경고한다.

    8) 한국 메시지 8번(2014년 10월 20일)
    - 한국의 큰 기업의 주차장과 땅굴이 연결되어 있다. 종북세력이다.
    - 한국의 종북 세력 기업은 일본의 정치에도 관계된다.
    - WCC 교회는 파괴된다.
    - 북의 프리메이슨은 가톨릭의 프리메이슨에 대항한다.
    - 전쟁 통해 가짜 선지자들이 멸망한다.
    - 항구에 큰 배들이 폭파된다. 잠수함으로 공격을 시작한다. 한국은 역부족이다.
    - 군대의 중간 위치에 있는 간부들이 돈으로 매수되어 땅굴의 신고를 감추고 있다.
    - 수많은 아이들이 산채로 납치될 것이다. 아이들과 유아들의 부모들은 12월 전쟁 전에 해외로 피신 가라.
    - 한국의 땅굴을 묵인하는 자는 모두 영원한 지옥에 간다.

    9) 한국 전쟁 메시지 9번(2014년 10월 25일)
    - 한국 전쟁은 생화학전이다.
    - 이 전쟁은 김정은의 가문과 모든 것을 건 처음이고 마지막 큰 잔악한 전쟁이다. 지금 이 상태로 전쟁에 대비 못한다.
    - 한국내의 이슬람 종교 세력이 북한과 함께 대한민국을 공격하고 북한은 이슬람 국가의 자금을 갖고 있다.
    - 미국이 선제 공격할 입장이 아니다. 미국을 의존치 말라.
    - 북한은 땅굴을 적화통일의 길이라고 한다. 상상할 수 없는 땅굴이 있다. 기업과 국민들이 앞장서서 막고 종북 세력을 압제하라.
    - 프리메이슨과 손 잡은 대기업들은 큰 피해 본다.
    - 하나님이 가톨릭교회 성도들이 악에서 돌아서서 종북 세력 두려워하지 말고 박근혜가 종북 세력 막도록 해야 한다.
    - 중요 방송국 중에 종북 세력이 적은 방송국이 있다. 이 방송국들이 땅굴 소식을 보도하여 땅굴을 막도록 하라.
    - 땅굴 세력 막는데 방해하면 생명을 지키지 못한다.
    - 진실 된 자료들을 묵인하는 기자도 지옥행이다.
    - 전쟁을 막지 못하면 경제적으로 어렵게 되고 적화통일 이후에 후진국이 된다. 히로시마 원폭 이후와 같은 비참한 결과를 초래한다.

    10) 홍 씨는 칼빈의 예정론을 비판하면서 칼빈이 지옥에 있다고 주장하였다.(2016년 5월 12일, 부천)
    (http://www.youtube.com/watch?v=96cdmlrx5Rw)

    3. 결론

    홍혜선은 거짓 예언과 직통 계시의 극치를 이룬다.
    한국전쟁에 대한 예언에서 시작하여 진행된 사이비 메시지는 “천국과 지옥을 볼 수 있다”(2015년 12월 13일 전주예수선교회)는 등 다양한 예언과 직통 계시를 말한다.

    예를 들면 2015년 12월 12일, 전주 성령집회에서 전라도에 획기적인 변화가 온다고 예언한다. 그녀는 이 일에 대해 비밀을 전한다고 하면서 지역담당 귀신이 물러가라고 기도하면 지역담당 귀신들이 실제로 물러나게 되고 비밀 역사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녀는 귀신론에 사로잡혀 있다. 2016년 6월 12일, 예수생명교회(부천: 베뉴메네 웨딩홀)에서 전한 메시지는 그녀의 귀신론의 정수를 이룬다. 그녀는 사람 안에 귀신의 영들이 들어있고 그 귀신들이 사람들의 악한 생각을 조종한다고 가르친다. 부부싸움에서 말꼬리를 물게 하는 것은 귀신의 작업이다. 우리 안에는 말 많은 영(쓸데없이 말 많은 사람), 싸움의 영(마귀), 짜증의 영(마귀) 등이 들어 있고 술 취한 자는 마귀가 그를 점령해서 컨트롤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부관계를 할 때도 남편이 깨끗하지 못하면 남편 안에 더러운 영이 부부관계 하는 동안에 부인의 영혼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부인이 깨끗하지 못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부부관계 하기 전에 깨끗하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은 부부관계 하기 전에 “예수님의 보혈로 내 영혼을 깨끗이 씻어주세요” 라고 기도한다는 것이다. 홍혜선은 지속적으로 거짓 방언과 거짓 계시를 받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예언하면서 신자들을 미혹하고 있다. 미국은 물론이고 한국교회 속에 깊이 침투되어 있다.

    홍혜선 씨의 비상식적이고도 비성경적 거짓 예언은 교회와 성도들을 혼란하게 하고 있다. 홍 씨의 잘못된 예언으로 말미암아 일부 사람들이 미국, 태국, 필리핀 등의 피난처를 찾아가는 등의 비상식적 행위로 인하여 기독교 자체가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홍 씨의 극단적 신비주의 형태의 직통 계시를 추종하거나, 그 집회에 참석하거나, 어떤 형태의 동조나 도움을 주는 일이 없도록 엄격하게 금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절망적인 예레미야의 예언 과 희망적인 하나냐의 예언

    예레미야 26-45장까지는 예루살렘 함락 전후와 바벨론 포로 전후에 있었던 여러 일들에 대해 증거하눈 말씀입이다.
    예레미야 28장은 예레미야 선지자와 당대 거짓 선지자 중에 대표할 만한 하나냐와의 대립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냐의 예언(1-4절)

    (3-4) 내가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이 곳에서 빼앗아 바벨론으로 옮겨 간 여호와의 성전 모든 기구를 이 년 안에 다시 이 곳으로 되돌려 오리라 내가 또 유다의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니야와 바벨론으로 간 유다 모든 포로를 다시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니 이는 내가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꺾을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냐는 하나님께서 이제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꺽고 바벨론에서 빼앗아간 성전의 모든 기구들과 유다의 모든 포로들이 2년 안에 다시 이 곳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적인 예언을 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선지자는 27장 16절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또 제사장들과 그 모든 백성에게 전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여호와의 성전의 기구를 이제 바벨론에서 속히 돌려오리라고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이는 그들이 거짓을 예언함이니라 하셨나니.

    당시 유다의 시드기야 왕을 비롯한 대부분의 백성들은 이제 조금만 있으면 모든게 괜찮아질거라는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에 마음이 많이 기울어져 있었고, 그 결과 자신들의 죄악을 진실로 회개하는 것에는 무관심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이러한 예언을 다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냐의 예언은 27장 16-22절의 예레미야 예언과 정면으로 대립하고 있으며, 예레미야는 다음 장인 29장 10절 말씀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70년간의 긴 포로 생활을 하게 될 거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냐는 2년 안에 우리가 바벨론의 속박으로부터 완전히 회복된다며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아주 자신 있게 말합니다.

    우리들은 삶 속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 가운데 있을 때, 희망적인 이야기는 분명 기분이 좋아지고 정신 건강에도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레미야와 같은 절망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보다는, 하나냐와 같이 기분 좋고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더 따르고 좋아합니다.

    하나냐의 예언에 대한 예레미야의 대답(5-9절)

    예레미야는 하나냐의 예언에 대하여 이전의 선지자들 이야기를 합니다.
    이전의 선지자들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 파기되었을 때, 신명기 29장에서 ‘전쟁과 재앙, 질병’을 예언했습니다.

    지금 예레미야의 반응만을 보면, 하나냐의 예언을 전적으로 부인하지는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하나냐가 언약 파기에 대한 책임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는 것에 대해 심히 우려하고 있습니다.

    (9) 평화를 예언하는 선지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응한 후에야 그가 진실로 여호와께서 보내신 선지자로 인정 받게 되리라

    9절에서 ‘평화를 예언하는 선지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이루어진 뒤에야 여호와께서 보내신 참 예언자라는 것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예레미야의 반응에 대한 하나냐의 행동(10-11절)

    (10-11) 선지자 하나냐가 선지자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빼앗아 꺾고 모든 백성 앞에서 하나냐가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이 년 안에 모든 민족의 목에서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이와 같이 꺾어 버리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선지자 예레미야가 자기의 길을 가니라

    하나냐는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빼앗아 꺽어버렸고(10), 3절에서 선언한 2년 내에 포로 생활이 끝날 것이라는 예언과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멍에로부터 유다를 해방시킬 것이라는 ‘희망찬 소식’을 또 다시 선언합니다(11). 하나냐의 이런 행동에 대해 예레미야는 이제 더 이상 답하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11).

    하나냐는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담대함인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인간적인 생각들이 마치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여러번 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 이야기를 합니다.

    2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일러 말씀하시기를”, 4절에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니라”, 그리고 11절에는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느니라”는 표현을 마구잡이로 사용했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냐의 거짓 예언의 결과를 잘 알고 있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마음대로 갖다 쓰는 이러한 표현들이 상당히 눈에 거슬리고 참 불쾌하게 느껴집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더욱 그러셨을 겁니다.


    하나야의 행동에 대한 예레미야의 예언(12-17절)

    (14B) 내가 쇠 멍에로 이 모든 나라의 목에 메워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게 하였으니 그들이 그를 섬기리라 내가 들짐승도 그에게 주었느니라

    예레미야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은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무 멍에’가 아니라 결코 깨지지 않는 ‘쇠 멍에’를 매어야 한다고 말씀 하십니다(13-14). 바벨론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냐가 어떤 말을 해도 깨질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나라들이 바벨론을 섬기게 하였고, 심지어 들짐승까지 즉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주었습니다. 이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데 새로운 도구가 되었습니다.

    (15B)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지 아니하셨거늘 네가 이 백성에게 거짓을 믿게 하는도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하나냐에게 14절의 말씀을 전달하였고, 이제 15절에서 ‘거짓 선지자’에 대한 책망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냐를 보내지도 않았으며 하나냐를 통해 말씀하신적도 없는데, 하나냐는 자신의 생각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여러 번 입에 올려 거짓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거짓을 믿게 하였으며, 결국 하나님께서 보낸 참 선지자 예레미야에게도 대항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한 자의 대가는 죽음임을 16절에서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16)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너를 지면에서 제하리니 네가 여호와께 패역한 말을 하였음이라 네가 금년에 죽으리라 하였더니

    예레미야의 이 예언은 지체 없이 실현되었습니다. 예레미야 28장의 마지막인 17절 말씀에서 “선지자 하나냐가 그 해 일곱째 달에 죽었더라”는 이야기로 말씀의 끝을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냐가 말한 11절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느니라”와 16절에서 예레미야가 말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는 전혀 다른 무게감으로 느껴집니다. 그 말의 중심에 ‘하나님의 생각’이 있느냐, ‘나의 생각’이 있느냐의 차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냐는 희망적이고 사람들이 듣기 좋은 예언을 해서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생각’만이 가득 차서 ‘하나님의 생각’을 마음대로 남발한 거짓 선지자였으며, 결국 죽음으로 그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로 불릴 정도로 ‘자신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달라서 마음 아파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하며 눈물 흘리던 선지자였습니다. 그래도 그는 눈물 흘리며 ‘자신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생각’만을 담대히 선포했습니다.

    우리는 하루 하루를 살아갈 때 어떤 생각을 품고 살아가야 겠습니까? 때로는 너무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너무 부담되서 지금 현실을 외면하고 싶고 울고싶다 할지라도 ‘나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생각’을 듣고 품으시기 바랍니다. 어제 주일 말씀처럼 바른 청지기 같이 ‘나의 생각’이 아닌 ‘주인의 생각’ 즉, ‘하나님의 생각’을 품고 이번 한 주도 최선을 다하며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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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본문은 바벨론의 유다 침공으로 여호와김이 폐위되고 그 다음 세워진 시드기야 왕에게 임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담고 있고, 그 와중에 일어난 거짓선지자와 예레미야의 예언 대결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 시드기야 왕은 남유다의 20번째 왕입니다. 20번째가 왜 중요할까요? 
    19는 북이스라엘 왕의 숫자, 20은 남 유다의 왕의 숫자입니다.
    드디어 남 유다의 마지막 20번째 왕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드기야에게 예레미야를 통해 남유다에 임할 최종적인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예레미야 27:12-13
    내가 이 모든 말씀대로 유다의 왕 시드기야에게 전하여 이르되 왕과 백성은 바벨론 왕의 멍에를 목에 메고 그와 그의 백성을 섬기소서 그리하면 사시리라
    어찌하여 당신과 당신의 백성이 여호와께서 바벨론의 왕을 섬기지 아니하는 나라에 대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으려 하나이까

    시드기야와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 하시는 말씀은 바벨론 왕의 지배에 순순히 항복하라는 것입니다.
    바벨론 왕을 거역하는 나라는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결구 죽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바벨론에게 항복하면 그래도 살 수 는 있다 라고 예레미야를 통해 시드기야와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한 마디 덧붙입니다.

    예레미야 27:14-15
    그러므로 당신들은 바벨론의 왕을 섬기게 되지 아니하리라 하는 선지자의 말을 듣지 마소서 그들은 거짓을 예언함이니이다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니 내가 너희를 몰아내리니 너희와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멸망하리라

    27:16-17절도 읽겠습니다.
    내가 또 제사장들과 그 모든 백성에게 전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여호와의 성전의 기구를 이제 바벨론에서 속히 돌려오리라고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이는 그들이 거짓을 예언함이니라 하셨나니
    너희는 그들의 말을 듣지 말고 바벨론의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살리라 어찌하여 이 성을 황무지가 되게 하려느냐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거짓예언자들도 일어났습니다.
    말세는 이단과 적그리스도가 일어날 것이라는 말씀이 맞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어둡게 하려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달을 수 없도록 악한 세력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나 우리를 혼란스럽게 할 것입니다.
    마치 유다 말기 여러 선지자들이 일어나 진리의 하나님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하나냐라는 선지자가 거짓선지자의 대표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왕과 백성들 앞에 서서 말합니다. 예레미야의 말은 거짓말이니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네 하나냐의 거짓 예언자입니다.

    하나냐가 이렇게 말하지요. 
    "예레미야의 말은 거짓말이다.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 민족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절대 우릴 버리지 않으시고 구원하신다.” 그리고 그가 펴는 논리는 예레미야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하나 거꾸로 뒤집는 것이었습니다.

    예레미야 28:2-4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일러 말씀하시기를 내가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꺾었느니라
    내가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이 곳에서 빼앗아 바벨론으로 옮겨 간 여호와의 성전 모든 기구를 이 년 안에 다시 이 곳으로 되돌려 오리라.
    내가 또 유다의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니야와 바벨론으로 간 유다 모든 포로를 다시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니 이는 내가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꺾을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으셨고, 
    그가 약탈해간 성전 기명들을 2년 내로 되찾아올 수 있다. 
    포로로 끌고 간 여고니야 왕과 우리 백성들도 모두 돌아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벨론에 항복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는데 뭘 걱정하느냐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냐는 하나하나 예레미야의 예언의 말씀들을 뒤집어서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예레미야를 통해 바벨론에게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셨고
    포로 생활 70년이 될 것이라 말씀하셨지만
    하나냐와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바벨론을 벌써 무찌르셨고 2년 후엔 포로들도 성전 기명들도 돌아온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제일 마지막에 말하지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러분 우리가 있는 때는 말세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주님올 온전히 바라볼 수 없도록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도록 우리에[게 혼란을 주는 이단과 헛된 사상들, 교회 안에서도 돌아다니는 이상한 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음성인지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첫째, 사람들의 말을 듣기 보다는 성경을 읽고 볼수 있도록 하십시오.

    예레미야 28:7-8
    그러나 너는 내가 네 귀와 모든 백성의 귀에 이르는 이 말을 잘 들으라
    나와 너 이전의 선지자들이 예로부터 많은 땅들과 큰 나라들에 대하여 전쟁과 재앙과 전염병을 예언하였느니라

    이미 하나님은 성경이라는 기록되 계시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성경을 세상적인 가치나 판단으로 자르거나 해석하려 하지 마시고 있는 그대로의 말씀을 듣도록 해야 합니다.
    너와 너 이전의 선지자들이 예로부터 예언했다는 것은 토라, 즉 모세 오경에 기록된 말씀을 뜻하는 것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을 받지만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고, 하나님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 심판하시겠다는 경고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가증스럽고 부끄러운 우상숭배의 죄악이,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나라와 임금들을 의지하려는 악하고 어리석은 생각 때문에 하나님은 유대를 멸하실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죄악에 대한 보응을 받을 수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설마 우리를 멸하실까, 다윗에게 주신 약속이 있는데
    이런 어리석고 악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시험하고, 
    거짓 선지자의 말을 달콤하게 들으려 하는 왕과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최종적인 심판을 선고하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성취되어지는지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예레미야 28:9
    평화를 예언하는 선지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응한 후에야 그가 진실로 여호와께서 보내신 선지자로 인정 받게 되리라

    누가 하나님이 보내신 참 선지자입니까? 그의 말이 이루어지는지 안 이루어지는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2년 안에 회복될 것이라는 거짓 예언을 한 하나냐의 최후가 무엇입니까?

    예레미야 28:16-17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너를 지면에서 제하리니 네가 여호와께 패역한 말을 하였음이라 네가 금년에 죽으리라 하셨느니라 하더니
    선지자 하나냐가 그 해 일곱째 달에 죽었더라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살펴 볼 수 있는 눈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온갖 말들이 나돕니다. 말세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누구의 말이 이루어지는지 잘 보시기 바랍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지금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 생각으로 하는 말, 또는 악한 영이 주어서 사람들을 미혹하는 말들이 지금도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이루어져가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는 눈과 지혜를 달라고
    성령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알 수 있겠지요. 기도하시면서 잘 살피시기 바랍니다. 어떤 말이 이루어지는지 하나님이 어떻게 응답하시는지 잘 지켜봅시다.

    하지만 지금 당장 우리 생각으로는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판단하기 어려워요.
    여러분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달라고, 우리 교회의 문제, 우리 가정의 문제, 나의 문제를 주님께 아뢰고 지혜 달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혼란할 수록 영적으로 혼탁할 수록 더 엎드려 기도해야 할 필요가 여기 있습니다.

    예레미야  28:12-14
    선지자 하나냐가 선지자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꺾어 버린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이르시기를
    너는 가서 하나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나무 멍에들을 꺾었으나 그 대신 쇠 멍에들을 만들었느니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쇠 멍에로 이 모든 나라의 목에 메워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게 하였으니 그들이 그를 섬기리라 내가 들짐승도 그에게 주었느니라 하라

    바벨론의 멍에가 더 무거울 것이다. 저항할 수록 더 무거운 멍에를 지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나무 멍에를 벗으려 하면 하나님 쇠 멍에를 채우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저항할수록 더 큰 징벌을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유다가 예례미야의 말을 들었을까요, 하나냐의 말을 들었을까요?
    결론이 궁금하시지요? 
    새벽기도회 계속 나오시면 아시게될 것입니다. 제가 스포일러를 하면 재미가 없어요. 그런데 힌트는 드리겠습니다.
    포로로 이미 끌려간 백성들이 있는데, 남은 백성들이 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나마 나마있던 성전이 완전히 기초까지 다 부셔지고 맙니다.

    하나냐와 거짓선지자들은 맹목적이고 근거 없는 희망의 말을 하였습니다.
    자기 말을 하면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한 것이라고 하나님의 이름을 거들먹거리면서 예언하였고, 예레미야를 통해 주신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하나 부정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왜 예레미야를 들어서 백성들을 향해 너희는 바벨론 밑에 들어가야해, 멸망은 피할 수 없는 길이라고 최종적인 심판을 선언하셨을까요?

    하나님께 저지른 일에 대한 진정한 회개 없이는 회복이 없음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냐와 거짓 선지자들은 사람 귀에 듣기 좋은 말들을 전함으로 백성에게 거짓 희망을 기대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때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바짝 엎드려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께 저지른 그 죄악들을 철저히 회개하며
    하나님 명령하신 대로 그냥 순종해야 할 때입니다.

    절망에 처한 자가 축복과 은혜의 자리를 기대하기 전에 주님께 돌이켜야 할 죄악이 무엇인지, 내가 흘려야할 땀과 감당해야 할 수고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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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언과 분별(Prophecy and Discernment)

    월터 모벌리 | 새물결플러스 | 468쪽

    '예언의 은사'는 오늘날에도 존재할까요?
    이 점에 대해 논하기 전에, 일단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예언'의 뜻을 살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예언'하면 '앞일을 미리 말하는 것'으로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때 사용하는 예언은 한자로 미리 '예(豫)'를 사용한 예언(預言)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씀하는 예언은 맡을 '예(預)'를 사용한 예언(預言)입니다.

    한자로 번역되어 성경에서 사용되는 단어의 의미를 살펴 본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은 앞일을 미리 말하는 것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서 말한다는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책의 저자인 월터 모벌리(R.W.L.Moberly)도 구약성경에서 '예언자'로 사용된 단어 '나비(navi)'를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비(navi)는 본질상 하나님 편에서 말하는 사람이요, 남성 혹은 여성 대언자(spokesman or spokeswoman)다.
    하나님 편에서 말한다는 개념은 자연스럽게 이 말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상관개념과 긴밀히 연결된다(33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언은 '앞일'에 대해 말할 때가 많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언자들의 말도 그러합니다.
    하지만 앞으로 이뤄질 일을 말하는 예언과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운명론적으로 정해진 미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이뤄질 '하나님의 심판'을 말함으로써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도록 돕는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미래에 이뤄질 일의 의미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전하는 의미의 예언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예언' 자체로 봐야 하는지, 아니면 '예언(자)적 선포'라고 해야 할지는 여전히 나눠야 할 부분들이 있겠지만, 본 지면에서 이에 대한 구체적 이야기는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언'에 대한 '분별'입니다.
    예언을 하는 자들이 모두 하나님의 권위에 기대 '말'(이 말은 인간이 인지 가능한 인간의 것)을 하고 있는데, 그 예언을 듣는 사람들은 무엇으로 그 '예언'을 '하나님 말씀(뜻)'으로 분별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죠. 물론 오늘날 성경 독자들은 성경 속 예언자들의 말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의 말이 '참 예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그들의 '예언'을 들었던 자들은 그것을 어떻게 분별했겠으며, 나아가 오늘날에도 '예언'이 유효하거나 혹은 '예언(자)적 선포'가 실행될 때 그 말을 듣는 우리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뜻)'인지 아닌지 어떻게 분별해야 하겠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생각해야 할 부분입니다.

    분별 기준을 성경이 들려주는 이야기들과 말씀 속에서 찾아 제시합니다.

    예레미야의 경우, 특별히 예레미야와 하나냐의 대립구도 속의 분별(2장과 3장 초반),
    그리고 미가야와 시드기야의 구도(3장), 엘리사와 발람의 경우(4장), 요한의 진술과 바울의 진술(5, 6장)을 통해 우리가 참 예언과 그렇지 않은 것을 어떻게 분별해야 할지 기준을 제시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저자는 예언을 행하는 예언자들의 삶의 모습과 태도에 그 기준을 둡니다.
    예언자의 도덕적 삶의 모습이 그 예언에 대한 진정성을 뒷받침해 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도덕적 삶의 모습이라는 것은 얼마든지 인위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점과, 도덕주의와는 구별되어야 하는 점을 또한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도덕적 삶'과 '도덕주의'를 구별할 수 있을까요? 저자는 여기서 '인간의 무능력함과 하나님의 전적 은혜'의 구도를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도구로 사용될 인간을 부르실 때, 그의 도덕적 상태를 보고 선택하시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은혜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잠깐 멈춰, 저자가 주장하는 내용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자의 도덕적 기준을 보고서가 아니고 은혜로 부르셨으며 그 은혜 안에서 자신의 말을 대언하게 하셨는데, 우리는 어떻게 그의 도덕적인 삶을 발견하고 그 삶 속에서 그가 말하는 것의 진위 여부를 분별하겠는가?", "그렇다면 인간이 과연 인위적이지 않은 도덕적 삶을 살 수 있는가?"

    그러나 저자는 예언자의 도덕적 삶이 무엇으로 나타나는지(특히 예레미야와 요한)를 말해 줍니다. 이와 더불어 예수님의 말씀을 빌어 '거짓 예언자'에 대한 분별 기준을 제시해 줍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서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한 '분별'의 기준을 발견했습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책을 통해 여러분들이 직접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책은 '예언자'에 대한 분별을 말하고 있지만, 책을 읽는 저는 목회자요 설교자의 한 사람으로서 오늘날 교회 공동체 내에서 이뤄지고 있는 '설교'와 '설교자'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는 듯 보이는 이 시대 속에, 그리고 목회자의 불의와 부정함들이 계속 드러나고 있는 분위기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전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이며 어떻게 그 일을 감당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결국은 삶의 신실성입니다.
    '도덕주의'로 치환되지 않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신실성입니다.
    이 신실성은 말씀을 전하는 자의 삶의 결과를 보면 알 수 있다고 저자는 제시합니다.
    이 결과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확인 가능한 결과를 말할 수도 있지만, 말씀을 전하는 자의 목표, 그가 추구하는 것으로서의 결과를 말하기도 합니다.

    대중(회중) 앞에서는 얼마든지 속일 수 있지만, 결국 그가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다른 것에 있다면 그것은 분명 드러나기 때문이며, 여기에는 인간의 나약함으로 인한 결과적 실패가 공존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 기준'은 바로 '탐욕·탐심'입니다.

    히브리서 13장 7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종교 지도자들의 과오 중 하나는 신적 권위를 힘입어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말'이 일종의 '권력'이 될 수도 있는 시대 속에, '하나님 말씀'을 전한다는 '설교자'들이 '설교'를 악용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설교'가 '예언'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예언적 측면이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그렇기에 1차로 설교자들은 설교 행위 그 자체에 권위를 둘 것이 아니라,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 먼저 삶을 돌아봐야 합니다.

    공동체 내에서 선포되는 '설교'는 1차로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교우들과의 관계 속에 이뤄지는 것이라 봅니다.
    이는 단순히 성경의 지식을 전하는 일에 그치는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방송(인터넷) 설교에 대해 긍정적 측면보다 부정적 측면이 많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최근 하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모벌리의 <예언과 분별>은, 이러한 가운데 우리에게 분별에 대한 방향을 제시해 줄 것입니다.


    참 예언인지 아닌지 구분하는 몇 가지 원칙


    첫째는 성경의 잣대로 재보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씀한 것과 어긋난 것이 있으면 아니라는 판단에서이다. 이 기준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왜냐면 모든 예언에는 100% 악한 영도 끼어 들어오기 때문이다. 악한 영이 해주는 말도 성령이 해주는 말투와 같기 때문이 겉으로는 구분할 수 없다. 성경적이 아닌 말이라면 악한 영이 해주는 말이다. 그러나 적지 않은 예언자들은 성경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넘어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이 같은 잣대로 어느 정도 걸러낼 수는 있지만, 악한 영의 능력이 엄청나고 계략도 대단하기 때문에 교묘하게 성경을 인용해서 말하는 경우는 흔한 일이다. 필자가 전에 귀신들린 집사를 쫒아냈을 때 그는 성경말씀을 줄줄이 말하곤 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지혜의 은사를 받았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귀신이 쫓겨나가고 완전히 제정신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더 이상 성경을 외우지 못했다. 귀신의 학습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조상이 들어왔다고 하며 조상들의 말투나 걸음걸이 등을 흉내 내는 무당을 본적이 있을 것이다. 조상에게 들어간 귀신이 다시 그 무당에게 들어간 경우이다. 그러나 그들의 성경의 지식은 완벽하지 못하기에 잘 들어보면 허점이 분명히 있다. 어쨌든 성경을 인용하여 말한다고 하더라도 성령의 말씀이라고 덥석 믿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성경으로 잴 수 없는 말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럴 때는 판단을 보류하고 그 예언이 이루어지는 지 조용히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모든 귀신들은 사람들의 생각을 읽기 때문에 사람들의 과거에 대해 소상하게 알고 있다. 용하다는 점쟁이들이 그렇지 않은가? 그들은 사람들의 과거를 족집게처럼 맞힌다. 필자가 평신도 때 처음으로 만난 귀신은 친척의 성대를 장악하고 내게 말을 걸어왔는데, 자신을 미가엘 천사라고 소개하며 내 생각을 읽어내서 완벽하게 속였던 경험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미래에 일어날 일은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자주 틀린다. 그러나 영적인 존재이므로 미래에 대해 더러 맞출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하지 말기 바란다. 그들이 말한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성령의 주시는 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경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말들은 보류해놓고 성취되는 지 지켜보고 판단하면 된다.  

    대부분의 거짓예언자들은 점쟁이처럼 말하는 경우가 흔한 일이다.
    남편의 승진 여부, 자녀가 진학해야할 학교나 학과, 사업해야 할 분야, 도망간 사람 찾기, 성공이나 결혼 하는 시기 등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은 수도 없이 많다. 그런 예언을 하는 자들은 전부 가짜이다.

    질문하는 의도가 무엇이냐고 물어보셨으며, 한 번 더 질문하자 물어보는 것만으로 족하다고 말씀하셨다. 그 다음에는 호기심을 만족시키거나 유익을 구하는 것은 더 이상 질문하지 않는다. 시기를 물어보는 것도 대답하지 않으신다. 만약 그런 것을 대답해 주신다면 믿음이나 인내가 소용없고, 성경을 읽을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나 거짓예언자들은 죄다 그런 것을 점쟁이처럼 말하고 있다.

    예언을 한다는 목회자들이 하나님께서 헌금을 바치라고 했다느니, 목회자의 말을 거역하면 벌이 내려오고, 교회를 떠나면 저주가 온다느니 하는 말도 전부 거짓이다. 성령께서도 죄악이나 잘못된 행위에 대해 책망을 하는 경우가 더러 있지만, 자신이라면 회개시키거나 다른 사람이라면 기도를 하라는 부탁이지, 정죄하거나 비난하고 비판하라는 뜻이 아니라. 사실 성령이 말씀하시는 예언의 대부분은 신앙이나 기도, 교회, 악한 영 등에 대한 주제이다. 개인에게 말씀해주시는 경우에도 위로나 권면 등이 대부분이지 미래를 알려주거나 책망하고 정죄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만약 그렇게 말한다면 거짓예언자라고 보면 된다. 또한 거짓예언자의 특징은 돈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헌금을 받고 예언을 하는 경우는 전부 거짓예언자라고 보면 틀림없다. 물론 감사해서 헌금을 드리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러나 드러내놓고 헌금을 요구하거나, 헌금을 내야하는 분위기를 연출한다면 전부 가짜라고 보면 된다. 또한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하나님이 벌이 내린다거나 저주가 내려온다고 해도 거짓예언이다. 성령은 그런 식으로 예언을 하지 않으신다. 성경에 사람을 두려워하면 덫에 걸린다고 말하고 있다. 아무리 목회자이고 예언자라고 하지만, 성경적으로 하지 않고 유익을 취하고나 두려움과 공포분위기를 연출한다면 전부 가짜이니 그 사람에게서 속히 빠져나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거짓예언들도 성경을 인용해서 말하는 경우도 적지 않고, 적지 않게 맞추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들의 예언에는 열매가 없다. 성령이 주시는 모든 예언은 잠자는 양들을 깨우고, 죽은 양들을 살리고, 병든 양들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등의 교회를 세우는 영혼 구원의 사역의 연장선에 있다. 그러나 그런 사역이나 성령의 열매가 없다면 아무리 성경을 앞세우고 잘 맞춘다고 하더라도 아니다. 그들의 예언은 틀린 경우가 종종 있으며 교회를 세우고 성도의 덕을 세우는 열매가 없다. 성령이 하시는 예언은 절대 틀리는 경우가 없다. 그분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한 영들이 주는 예언은 종종 맞지 않는다. 그러나 예전에는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일을 했기 때문에 좀 맞지 않더라도 그냥 믿는 사람들도 있다. 대부분의 예언자들은 처음부터 악한 영이 말하는 경우도 있고, 처음에는 성령이 말씀해 주셨지만 악한 영이 교묘하게 틈을 타서 말하는 것을 듣자 성령께서 떠난 경우도 있다. 말하자면 변질된 것이다. 많은 예언자들이 그런 경우가 많다. 성령의 종에서 분별력이 없어 악령의 종이 된 것이다. 과거에 좋은 열매가 있었지만 지금은 변질되었다면 그런 경우라고 보면 된다.

    귀신들의 특징은 교만이며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한다.


    성경적 예언이란 무엇인가.


    △성경 말씀 대부분이 예언적 메시지다. 성경적 예언은 다섯 가지 전제 조건을 갖고 있다. 첫째,이 세상에 분명 주인이 계시고 그분이 세상을 통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예언에는 구성 즉,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이다. 통제되는 역사 가운데 주인의 프로그램이 있다는 관점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헬라적인 사고관에서 벗어나 성경적 세계관을 가져야 한다. 셋째, 프로그램 안에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목적에 합당한 역할을 수행할 때만이 그 예언은 가치가 있다. 넷째, 하나님의 계시다. 다섯째,그  계시에는 책임감이 따른다. 이들 구성 요소 중 하나라도 결핍되면 그것은 참된 예언이 아니다.


    -성경에 나타난 예언자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이사야 예레미야 호세아 다니엘처럼 직업적으로 예언자는 아니지만 하나님에 의해 예언의 기록을 남긴 사람들이 있다. 사무엘처럼 전문적인 예언자도 있다. 엘리야처럼 직접 예언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지만 성경 말씀 속에 그의 행동과 예언이 나와 있는 사람도 있다.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신명기 13장 1∼4절을 참조하기 바란다. 만일 내일 50㎝ 가량의 눈이 올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고 정말 그렇게 됐다면 그것을 예언의 성취라고 할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이 장래의 일을 말하고 실제로 이뤄졌다 할지라도 그 사람을 ‘예언자=선지자=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불충분하다. 왜냐 하면 사탄도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를 예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예언자를 구별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 안에서 순수한 강론과 바른 가르침을 가지고 있는지를 봐야 한다. 누군가가 교회 안에 들어와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고 많은 자를 고치고 그가 재킷을 벗어 던져 사람들이 뒤로 넘어지게 한다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지 않는다면 거짓 예언자다. 이 때문에 성경을 통해 예언자를 판단해야 한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자가 그로 인해 자신의 유익을 구하고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 아모스 7장에 나와 있는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는 대표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구한 경우다. 셋째, 예언자가 도덕성을 최우선시하고 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호세아는 책임감을 갖고 살아간 예언자 중 한 사람이다. 참 예언자는 선포에 머무르지 않고 구제와 섬김을 고려해야 한다. 하나님을 예배한다면서 우리의 형제자매를 돌보지 않는다면 이는 거짓 섬김이다.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기 전에 형제에게 갚을 돈이 있다면 그 형제에게 가서 해야 할 일을 먼저하고 하나님께 예배 드리러 가야 한다.


    -오늘날에도 예언은 계속되는가.


    △물론이다. 하나님은 그의 일을 베일 속에 숨기시지 않으신다. 아모스서는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다”고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일을 하시는지 알고 싶은 사람들은 예언서를 읽기 바란다. 점쟁이에게서는 하나님의 의지와 그분의 계획을 발견하거나 들을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이 보여주신 말씀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할 수 있다. 선지자로서 책임감을 갖지 않은 자로부터는 올바른 예언이 선포되지 않는다.


    얼마 전에 본인이 시무하는 교회에 자칭 여성 예언자가 있었다. 어느 날 내게 예언해도 되겠냐고 물었다. 나는 성령을 소멸치 말고 예언을 부끄럽게 말라고 권하면서 예언이 성취되지 않았을 때는 돌로 쳐서 죽이라는 말씀 또한 적용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는 성경이 거짓 예언자를 돌로 쳐서 죽이라고 기록했기 때문이다. 에스겔서 3장 17∼21절은 계시에 대한 책임을 언급하고 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라…”


    -성 삼위일체로부터 온 예언인지를 어떻게 식별할 수 있는지.


    △ 예언을 받은 자가 확신이 없으면 예언을 해서는 안된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자는 예언의 은사를 받을 수 없다. 예언자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다. 이 시대에 거짓 예언을 하고 성경이 보여주는 예언자의 삶을 살지 아니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쉽게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개인 공동체 사회 국가에 임한다.


    -우리의 기도로 하나님의 예언의 시기를 앞당길 수 있는가


    △ 하나님의 예언의 목적은 그의 백성을 돌이키는데 있다. 이사야 60장 22절 하반부는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때가 정해져 있지만 간절히 바라고 사모하면 내가 그것을 속히 이루리라는 것이다. 베드로후서 3장 12절은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증거하고 있다. 모든 예언은 주기가 있다. 어떤 예언은 24시간 안에 결과가 나오는 것이 있고 어떤 것은 2000년 동안에도 성취되지 않은 것도 있다. 하나님의 약속에는 후회함이 없다고 로마서 11장 29∼31절은 증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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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24일(토) 줄과 멍에(예레미야 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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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찬송 / 216장(아버지여 나의 맘을)


    예언(預言)과 예언(豫言)입니다.

    한문 성경도 구분이 안 돼 있고, 한글 성경에는 둘 다 ‘예언’이라고 기록 되어 혼선이 온 것이다.

    예언(預言)은(프로페테우오 προφητευω, prophecy)

    ‘하나님의 계시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한다’는 뜻이다.
    구약의 예언자는 豫言者가 아니라 預言者이다.
    구약의 예언자를 ‘나비,א׳בכ 이고,헬라어로 프로페테스 προφητης라고 한다.

    예언(豫言)은(predict, prediction)

    ‘미래에 있을 일을 미리 말한다’는 뜻이다.

    구약성경 선지서들에는 예언이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거기 예언은 모두가 prophecy를 의미 합니다(預言).
    그래서 선지자들의 預言 가운데는 豫言이 포한되어 있는 경우도 많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선지자의 豫言이 아니라 하나님의 豫言을 한 것입니다.
    신약 성경의 고전12장과 14장에서는 계속해서 예언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영어 성경을 자세히 보면 prediction(豫言)이 아니고, prophecy(預言)으로 정확하게 구분하여 있습니다.

    우리 성경에서 또 다른 예로는 ‘사랑’이란 단어입니다.
    우리 성경은 모두 사랑입니다.
    헬라어나 영어 선경은 완전 구분되 있다.

    사랑
    ① 스톨케 στοργή : 가족적, 동족적인 사랑
    ② 휠리아 φιλία : 친구나 우애적 사랑
    ③ 에로스ἕρος : 이성적, 정적 사랑
    ④ 아가페 άγάπη :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사랑
    이렇게 구분된 단어를 우리 성경은 한 단어로만 사용하니 큰 혼돈이 오는 것이다.


    象徵 豫言
    行動 豫言

    어리석은 예언

    18세기에 영국 복음주의 각성 운동을 이끌었던 사람은 존 웨슬리(John Wesley)와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입니다. 
    존 웨슬리보다 조지 휫필드가 더 탁월한 설교자였습니다. 

    조지 휫필드는 영국과 미국을 13번 왕래하면서 대각성 운동을 이끌었는데, 어느 날 그의 아들이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휫필드가 너무나 마음이 괴로워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던 중 하나님께서 살려 주신다는 생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내 아들을 살려주신다고 예언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은 죽고 말았습니다. 
    조지 휫필드와 같은 사역자라 할지라도 때로는 자기 마음대로, 자기 심령대로 예언하면 틀린 예언을 할 수 있습니다. 
    조지 휫필드는 그 충격으로 때문에 6개월 동안 설교하지 못했다는 역사의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도 때로는 기도하다가 우리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예언하는 어리석음에 빠지면 안 될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자기 심령대로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루이 11세 때 일입니다.

    나라가 한참 혼란한 시기에 어떤 사람이 이상한 말을 퍼뜨린다는 예언자를 잡아오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화가 난 왕은 예언자에게...
    " 이런 고얀 놈! 네 죄를 알렷다.!"
    그러면서 오늘 그 사람이 네가 죽게 될 것을 아냐며 큰 소리를 질렀다.
    한참 고민을 하던 예언자는 왕에게 한마디를 하였다.
    "폐하, 중이 제 머리 못 깎듯이 예언자도 자신의
    운세를 잘 알지 못하는 법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폐하보다 3일 전에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순간 깜짝 놀랐다.
    예언자가 죽으면 왕은 3일 후에 죽게 된다고 하는 말에 약간 찜찜해진 왕은 한참 고민 후에
    "폐하!~ 사형을 집행 할깝쇼?"
    계속 고민은 더해 가고.....한참 후에 왕은.....
    "에이, 그 치사한 놈을 살려줘라!"

    예언의 종류
    (나바, 호제, 나타프, 맛사)

    1. 나바(거품이 일다, 솟구쳐 오르다)

    내부에서 물이 끓어오르듯 강력한 감동이 임하여 예언을 하는 것

    2. 호제(보다)

    환상이나 묵시, 곧 마음속에 그려지는 이미지를 통해서 예언의 말씀을 받는 것

    3. 나타프(물방울이 떨어지다)

    한 단어나 그림 등의 단편등으로 나타나는 것
    그러므로 연속적인 다음의 단편들을 기다려야 하는 형태의 예언

    4. 맛사(주의 손에 잡힌다, 덮인다)

    하나님의 성령이 직접 강력하게 임하여 예언을 하는 것
    예언자는 혼절하거나 탈진하거나 넘어지거나 기절하기도 하는 등의 아주 강력한 기름부음을 동반하는 예언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예언으로 우주적인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예언.

    예언적 상징 행동

    불레셋의 아스돗 왕은 앗시리아에게 대항하기 위해 여러 나라와 연합하여 전쟁을 일으킵니다.
    이 연합 전선에서 이집트와 에티오피아는 군사력에 있어서 가장 믿을만한 나라들이었습니다.
    아스돗 왕은 유다에게 사절단을 보내어 반앗시리아 연합군에 참여할 것을 권유합니다. 

    이 시점에서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겉옷을 벗은 채 맨발로 다니라고 말씀하십니다(2절).
    이것을 ‘예언자의 상징행동’이라고 부릅니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이 명령으로 인해 이사야는 3년 동안 엉덩이까지 드러나도록 벌거벗은 채 맨발로 지냅니다.
    예언자로서 그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었으나 이사야는 순종했습니다. 

    그 상징행동을 통해 이사야는 이집트와 에티오피아가 앗시리아에게 패하여 벌거벗은 채 맨발로 끌려 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린 것입니다.

    이것은 유다가 아스돗의 연합군에 가담하지 말아야 한다는 강력한 경고였습니다.

    묵상 :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삼 년 동안 벌거벗은 채 맨발로 활동한 이사야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에게 자주 이런 명령을 주셨습니다. 말로는 도무지 듣지 않기에 예언자로 하여금 이상한 행동을 하게 하여 당신의 뜻을 전하려 하신 것입니다. 이사야의 상징 행동은 다가 올 위기를 대비하기 위해 이집트와 에티오피아에게 의존하려는 유다 지도자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명 받은 자가 때로 감당해야 하는 무거운 짐을 봅니다. 예언자로 부름 받았다는 것은 결코 영예가 아니었습니다. 때로 백성이 듣기 싫어하는 소리를 외쳐야 하고, 때로 미친 사람처럼 행동해야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 막고 살아가는 우리의 실상을 봅니다. 이사야에게 극단적인 상징 행동을 하게 할 정도로 유다 백성의 마음이 무뎌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마음의 완악함이 부름 받은 사람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첫째, 문서 이전의 예언자

    사무엘, 나단, 미가야, 엘리야, 엘리사등이 속한다.
    이 예언자들의 특징은 그들의 선포가 따로 묶여진, 그래서 그들의 이름이 붙여진 예언서가 없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들은 문서 이전의 예언자라고 불리운다.

    둘째, 문서 예언자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 예레미야, 에스겔과 같은 예언자들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의 신탁(선포)은 그들의 이름을 제목으로 한 문서로 모아졌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문서 예언자로 불리운다.
    문서 예언자들은 본디 행동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몇몇 문서 이전의 예언자들이 해왔던 것 같이 어떤 왕에게도 기름을 붓지 않았으며, 더 이상 정치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오직 말씀으로만 활동할 따름이다.

    그러나 예언서 안에는 소수이긴 하지만 예언자들이 행동하는 것도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러한 소수의 행위들은 상징행동에 해당된다. 이러한 상징행동들은 일상생활에서 흔히 일어나는 행위를 이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언자들의 상징행동은 충동적으로 일어나는 우발적 행동이 아니고 의식적으로 실행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징행동에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여기에서는 먼저 예언자의 상징행동에 관한 개략적인 언급을 하고 특히 예언자 예레미야의 상징행동들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한다.

    2. 예언자의 상징행동

    문서 예언자들은 공공연한 상징행동(Symbolische Handlung/ A Symbolic Action)을 통해서 그들의 선포를 명백히 그리고 인상적으로 눈 앞에서 띄도록 행할 수 있었으며, 그럼으로써 그렇지 않으면 단지 들을 수 밖에 없는 것을 부가적으로 볼 수 있게하고, 선고된 미래를 상징적으로 성취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예언자의 상징행동은 드라마틱한 방법을 통해서 백성을 향한 야웨 하나님의 의도와 행위를 상징화하고 예언자의 선포를 확실히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구약성서에는 약 30개의 상징행동들이 나타난다(왕상 19:19이하; 왕상 22:11; 호 1장; 3장; 사 7:3; 8:1-4; 20:1-6; 렘 13:1-11; 16:1-13; 18:1-6; 19:1-13; 27-28장; 32장; 43장; 51장; 겔 4-5장; 12장; 슥 6:9이하 등등).

    상징행동양식은 세 가지 기본요소로 구성되어있다. 

    첫째, 상징행동을 실행하라는 명령(Befehl),
    둘째, 상징행동의 실행에 대한 보고(Bericht),
    셋째, 상징행동의 의미(Deutung)로 구성되어 있다.

    이 세 가지 구성요소가 모두 나타나기도 하지만,
    첫째 요소인 명령과 두 번째 요소인 보고는 내용상 중복되기 떄문에 어느 한 요소가 생략되기도 한다.

    이러한 상징행동은 고대 중동에서 폭넓게 알려져 있던 마술적 배경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5) 그런데 고대 중동의 마술적 행동은 어떤 의도대로 이끌어가는 그 자체의 힘이 있다. 그러나 예언자의 상징행동은 마술행위와 같이 자체적인 힘으로 미래적인 사건을 불러오는 효력을 발생하는 행위와는 다르다. 예언자의 상징행동이 보여주는 실제화의 효력은 이러한 행동을 명령하신 야웨의 능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이런 점이 예언자의 상징행동과 마법사의 마술적 행동과 다른 점이다.

    예언자의 상징행동의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것은 현재의 삶에서 앞으로 일어날 사건을 선취하여 선포하는 것이다.
    즉, 미래사건의 선취모사(模寫)이다.

    둘째, 상징행동은 그 행동자체 보다는 그 행동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더 중요하다.

    셋째, 상징행동은 의미(Sinn)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지, 그 자체안에 어떤 힘(Kraft)이 내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행동으로 묘사된 미래를 실제화 할 수 있는 힘이 그 자체안에 있지 않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있는 것이다.

    넷째, 상징행동은 하나님의 행동을 소개하고 표현해줌으로 예언자의 메시지를 강화시켜주는 것이 주 목적이다.6)

    3. 예레미야의 상징행동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구약성서에는 약 30여개의 상징행동들이 나오는데 이 가운데 약 절반에 가까운 분량이 예레미야서에 집중되어 있다.

    렘 13장은 허리띠를 통한 상징행동,
    렘 16장은 예레미야의 생애를 통한 상징행동,
    렘 18장은 토기장이 비유를 통한 상징행동,
    렘 19장은 깨진 항아리를 통한 상징행동,
    렘 27-28장은 멍에를 통한 상징행동,
    32장은 경작지 매입을 통한 상징행동,
    43장은 큰 돌을 통한 상징행동,
    51장은 책에 돌을 매어 유브라데 하수속에 던져버리는 상징행동을 보여주고 있다.

    예레미야의 상징행동은 대부분 심판의 의미를 갖고 있다.
    위에서 나열한 상징행동 가운데 논쟁의 말(Disputationswort)에 해당되는 토기장이 비유의 상징행동(렘 18장)과 구원의 뜻을 지닌 경작지 매입의 상징행동(렘 32장)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상징행동들은 심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심판선포를 강화시켜주고 있다. 이 글에서는 지면관계상 모든 상징행동을 다룰 수 없어서 렘 13장과 렘 16장 그리고 렘 18장의 상징행동에 국한하여 그 의미를 보다 자세히 살펴보고 그 안에 담겨진 메시지를 찾아보려 한다.

    4. 허리띠의 상징행동(렘 13:1-11)

    렘 13장은 예레미야서에서 맨 처음으로 나타나는 상징을 보여준다.
    이 상징행동은 렘 13:1-11에 보존되어 있다. 이 부분의 짜임새를 보면 다음과 같다 :

    명령 / 1절 : 허리띠 매입과 그것을 허리에 띠도록 명령

    보고 / 2절 : 명령대로 실행(붙들어 매어둠과 꼭 붙어있음)

    명령 / 3-4절 : 강가, 바위틈에 숨기도록 명령

    보고 / 5절 : 명령대로 실행(떨어져 나감)

    명령 / 6절 : 허리띠를 다시 가져와 결과를 확인하도록 명령

    보고 / 7절 : 명령대로 실행(떨어져 나감의 결과)

    의미 / 8-11절 : 허리띠 상징행동의 의미

    렘 13장의 상징행동은 이 짜임새에서 보여주는 바와같이 상징행동의 전형적인 3가지 구성요소가 잘 드러나고 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허리띠를 사서 허리에 두르고 물에 닿게하지 않도록 명령하신다. 예레미야는 명령대로 띠를 사서 허리에 둘렀다. 하나님의 말씀이 또 다시 예레미야에게 임하였다. 이번에는 허리에 두른 띠를 가지고 유브라데로 가서 거기서 그것을 바위틈에 감추라 하신다. 예레미야는 말씀대로 그대로 행했다. 몇 날이 지난 후 하나님의 말씀이 또 다시 임하였다. 다시 유브라데로 가서 거기 감추게 한 띠를 취하라고 명령하신다. 예레미야가 그 곳에 가서 감추었던 곳을 파고 띠를 취하니 그 띠가 썩어서 더 이상 사용이 불가능한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여기까지가 1-7절의 내용이다. 하나님이 상징행동을 실행하라는 명령과 이러한 상징행동을 실행했다는 보고가 세 번에 걸쳐서 나오고 있다.

    여기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유브라데강’이라는 지명이다. 이 지명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있는 유프라테스강을 가리키는 것이다. 예레미야가 있는 예루살렘에서 유브라데강은 약 1,000km 떨어진 거리에 있다.7) 여기에서 예레미야는 이 거리를 두 번씩이나 왕복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 거리는 이후에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귀환공동체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때 대상(隊商)과 함께 빠른 길로 왔을 때 약 넉 달 정도 걸렸다 : “이 에스라가 올라왔으니 왕의 칠년 오월이라 정월 초하루(아빕월 : 양력 3월 중순 이후)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도우심을 입어 오월 초하루(아브월 : 양력 7월 중순 이후)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스 7:8-9). 이 본문에서 언급된 ‘유브라데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러한 어려움 때문에 성서학자들은 상징행동을 “꿈(Traum)의 기록”8)으로, “환상(Vision)의 기록”9)으로, “비유이야기(Gleichnisgeschichte)”10)로, “드라마틱한 공연(a dramatic performance) 혹은 공연된 우화(enacted parable)”11) 등 서로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설명하는 주석가들은 본문의 유브라데강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예레미야가 실제적으로 유브라데강이라는 먼 곳까지 왕래를 하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 지명의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풀이할 수 있다. 이 ‘유브라데’의 히브리어 본문은 페라타(הꚓꙜ꘸)이다. 그런데 헬라어 번역인 아퀼라(Aguila) 역본에는 “파라(φαρα)”로 나와있다. 이 ‘파라’라는 장소는 예레미야의 고향인 아나돗에서 약 6km 떨어진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다.12) 이 지명은 수 18:23에서도 언급된다 : “아윔과 바라(הꙜ꘱)요 오브라”. 이곳은 현재의 ‘엔 파라('ēn fāra)’에 해당된다. 이 곳은 물이 풍부한 곳이며, 유브라데(페라 : תꙜ꘸)와 파라(הꙜ꘱)는 철자와 발음상 상호 매우 가깝다. 만약 ‘페라(유브라데)’가 ‘파라’를 잘못 기록한 것이라면 이 지명의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있지 않고 예루살렘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물이 풍부한 ‘파라’라는 곳에 가서 하나님이 명령하신 상징행동을 실천한 것으로 볼 수 있다.13)

    상징행동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그 행동의 뜻을 풀이해주는 본문이다. 렘 13장에서는 8-11절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 상징행위에서 사용된 허리띠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 대답은 11절에 나온다 :

    “나 야웨가 말하노라 띠가 사람의 허리에 속함 같이 내가 이스라엘 온 집과 유다 온집으로 내게 속하게 하여 그들로 내 백성이 되게하며 내 이름과 칭예와 영광이 되게 하려 하였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허리띠와 관련된 상징행동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예레미야 자신은 여기에서 하나님을, 허리띠는 유다 백성을 상징하고 있다.

    첫 번째 명령과 보고에 따르면 허리띠를 허리에 띠도록 했을 때는 원래의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예레미야가 허리띠를 허리에 붙들어 맨 것처럼, 하나님이 유다백성을 꼭 붙들어 두었다. 하나님이 백성을 꼭 붙들어 매어두고 백성은 하나님께 꼭 붙어있으면 원래의 상태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다. 곧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며(“네 하나님 야웨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친근히 하고 그 이름으로 맹세하라”, 신 10:20), 그 분을 사랑하고 그 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 분과 함께 그 분의 길을 가는 것(“너희가 만일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명령을 잘 지켜 행하여 너희 하나님 야웨를 사랑하고 그 모든 도를 행하여 그에게 복종하면”, 신 11:22)등이 바로 하나님께 붙어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붙어있는 사람들은 나라를 차지하게 된다 : “야웨께서 그 모든 나라 백성을 너희 앞에서 다 쫓아내실 것이라 너희가 너희보다 강대한 나라들을 얻을 것인즉,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다 너희 소유가 되리니 너희의 경계는 곧 광야에서부터 레바논까지와 유브라데 하수라 하는 하수에서 서해까지라”(신 11:23-24). 또한 번영을 누리게 된다 : “곧 저가 야웨와 연합하여 떠나지 아니하고 야웨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야웨께서 저와 함께 하시매 저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왕하 18:6-7).

    두 번째 명령과 보고에 의하면 허리띠는 예레미야의 허리에서 떨어져 나와 강가와 바위틈에 숨겨지게 되었다. 이것은 유다백성이 하나님의 품을 떠났음을 상징한 것이다. 그들이 떠난 이유는 9절에서 지적되고 있다. 바로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교만 때문이었다. 인간의 교만은 하나님의 품을 떠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이기도 하다 : “만군의 하나님 야웨께서 가라사대 주 야웨가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였노라 내가 야곱의 교만(개역은 영광)을 싫어하며 그 궁궐들을 미워하므로 이 성읍과 거기 가득한 것을 대적에게 붙이리라 하셨느니라”(암 6:8).

    세 번째 명령과 보고는 하나님의 품을 떨어져나간 백성의 결과를 묘사한다. 하나님에게 붙어있을 때 허리띠는 자신의 역할을 정상적으로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이후에는 “썩어서 쓸데없는” 허리띠가 되어버렸다. 유다백성은 하나님의 징벌로 인하여 썩은 허리띠와 같이 더 이상 아무 쓸데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이다. 그 원인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보면 그것은 야웨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다른 신들을 숭배하는 유다백성의 반역에 있는 것이다 :

    “이 악한 백성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하고 그 마음의 강퍅한대로 행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그를 섬기며 그에게 절하니 그들이 이 띠의 쓸데없음 같이 되리라”(13:10).

    야웨 하나님은 유다백성을 그의 몸에 매여있는 허리띠같이 귀하게 여겼지만 그들은 야웨를 배반하고 그의 뜻을 져버렸다(11절). 그래서 하나님은 유다백성을 썩어서 못쓰게 된 허리띠와 같이 썩게 할 것이다(9절).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자신에게 붙들어 매어두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 붙잡힌 바 되어 그 분께 꼭 붙어있으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본래적 모습을 유지할 수 있으며 더불어 생명을 얻는다 : “오직 너희의 하나님 야웨께 붙어 떠나지 않은 너희는 오늘까지 다 생존하였느니라”(신 4:4).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다른 신을 섬기게 되면 반드시 징벌을 받게 되어있다(신 28:15-19). 하바드 대학교의 교수인 하비 콕스(H. Cox)는 작년에 내한하여 행한 한 강연에서 21세기의 세계는 성서가 말하는 “야웨 하나님(Yahweh-God)과 시장의 하나님(Market-God)”의 대결의 장이 될 것이라는 전망을 한 적이 있다. 즉 성서의 야웨 하나님과 시장경제가 지배하는 돈이라는 맘몬신의 대결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런 시대는 먼 미래의 것이라기 보다는 바로 우리가 지금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구약성서가 영적인 하나님인 야웨 하나님과 물질적인 신인 바알신과의 갈등의 역사였다면 오늘날도 그 기본구도가 유지되어 바알의 숭배자들인 물질숭배자와 야웨의 백성인 기독교인의 대결의 역사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예언자 엘리야는 백성을 향하여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야웨와 바알)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하며 그들을 질타한 적이 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물질만능주의라는 또 다른 바알신 앞에 서있다. 야웨냐 바알(돈)이냐 하는 양자택일의 결단은 옛날에만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오늘의 한국교회에게도 요구된다.

    5. 예레미야의 생애를 통한 상징행동(렘 16:1-13)

    렘 16장은 예레미야의 상징행동가운데 두 번째의 것이다. 렘 15:17에서 예레미야는 “내가 기뻐하는 자의 회에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을 인하여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라며 탄식하고 있다. 렘 16장은 그가 어떻게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를 기록해주고 있다. 예레미야의 상징행동이 묘사되어있는 렘 16:1-13은 다음과 같은 구조로 짜여져 있다 :

    1-4절 : 결혼금지(첫번째 상징행동)

       2절 : 명령 “아내를 취하지 말라”

       3-4절 : 의미(심판의 말)

    5-7절 : 조문금지(두번째 상징행동)

       5a절 : 명령 “상가에 들어가지 말라”

       5b-7절 : 의미(심판의 말)

    8-9절 : 잔치참여금지(세번째 상징행동)

       8절 : 명령 “잔치집에 들어가지 말라”

       9절 : 의미

    10-13절 : 심판의 이유

    이 본문에서는 세 가지 상징행동이 나온다. 각각의 상징행동에는 명령과 의미라는 두 가지 요소만 반복되어 나오고 있다. 실행에 대한 보고는 생략되어 있다. 아마도 이는 명령대로 실행되었음이 자명하기 때문에 생략된 것 같다.

    첫 번째 상징행동(1-4절)을 보면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결혼하지 말 것과 자식을 두지 말 것을 명령하신다. 고대 이스라엘 풍습에 의하면 결혼과 자녀를 낳는 일은 정상적이고 당연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당시 독신이라는 것은 거의 전례가 없기 때문에 구약성서에서는 이를 표현하는 히브리어 단어조차 없다.14) 또한 자녀는 축복을 상징한다. 사람들은 자녀를 통하여 자신의 삶을 계속해서 이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녀가 없거나 자녀를 잃게되는 것은 심판이나 징벌로 이해되었다 : “한 날에 홀연히 자녀를 잃으며 과부가 되는 이 두 일이 네게 임할 것이라 네가 무수한 사술과 많은 진언을 베풀지라도 이 일이 온전히 네게 임하리라”(사 47:9).

    예레미야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명령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참으로 가혹한 것이었다. 이와같은 하나님의 명령은 당신의 예언자 예레미야가 예언직을 수행하는 일에 가족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 내려진 것이 아니다. 그의 전 삶을 당신의 메시지로 만들려고 끌어들인 것이다. 호세아가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여 음란한 이스라엘에 대한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삶을 통하여 대변하듯이 예레미야도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뜻 즉, 심판이라는 유다의 미래운명을 보여주었다. 예레미야의 독신생활은 유다의 미래 삶을 보여주는 표시이다. 이것은 유다 백성들이 곧 맞게될 상황 즉, 결혼을 할 수 없게되고 자식도 없게되는 가혹한 현실을 미리 묘사한 것이다 :

    “이곳에서 생산한 자녀와 이 땅에서 그들을 해산한 어미와 그들을 낳은 아비에 대하여 나 야웨가 이같이 말하노라. 그들은 독한 병으로 죽고 슬퍼함을 입지 못하며 매장함을 얻지 못하며 지면의 분토와 같을 것이며 칼과 기근에 망하고 그 시체는 공중의 새와 땅 짐승의 밥이 되리라”(16:3-4).

    두 번째 상징행동(5-7절)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상가에 들어가지 말라. 가서 통곡하지 말며 그들을 위하여 애곡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여기부터는 더 이상 예레미야 개인의 일이 아니고 그의 사회적 관계들도 포함된다. 상을 당한 초상집을 조문하지 않는 것은 매우 상스러운 처신으로 간주된다. 욥이 자식들의 죽음으로 상을 치루게 되었을 때 그의 친구들은 만사를 제쳐놓고 친구 욥에게 조문을 와서 7일을 보낸 것도 이러한 풍습에서 기인한 것이다(욥 2:11-13). 조문금지의 이유가 5절 하반절에 언급된다 : “내가 이 백성에게서 나의 평강을 빼앗으며, 인자와 긍휼을 제 함이니라”. 이 말씀은 구약성서에서 나오는 가장 가혹한 말씀중의 하나이다. 유다는 더 이상 ‘내’백성이 아니라 ‘이’ 백성이다. 호 1:9 “그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에서 내 백성이 아니라는 표현이 심판의 의미로 나온 것과 같은 맥락에서 쓰인 것이다. 유다와 하나님의 밀접한 관계는 끝장났고 일정한 거리감이 생기게 되었다. 또한 평강, 인자 그리고 긍휼이라는 야웨의 구원을 위한 전제들이 제거되었다. 예레미야의 조문금지와 장례풍습의 금지행동은 유다의 임박한 심판상황을 앞서서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유다는 곧 심판받아 모두 죽게되어 그들을 묻어줄 사람도, 장례를 치러줄 사람도, 조문할 사람도 없을 정도가 될 것이다 :

    “큰 자든지 작은 자든지 이 땅에서 죽으리니 그들이 매장되지 못할 것이며 그들을 위하여 애곡하는 자도 없겠고 자기 몸을 베거나 대머리 되게하는 자도 없을 것이며 슬플때에 떡을 떼며 그 죽은 자를 인하여 그들을 위로하는 자가 없을 것이며 그들이 아비나 어미의 상사를 위하여 위로의 잔을 그들에게 마시울 자가 없으리라”(16:6-7).

    마지막으로 세 번째 상징행동(8-9절)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잔치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앉아 먹거나 마시지 말라고 하신다. 잔치참여를 금지하는 상징행동은 인간생활에 활력을 주고 기쁨을 주는 일들이 모두 사라지게 됨을 미리 보여준다. 이러한 심판이 “네 목전, 네 시대에”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말은 심판의 임박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

    “만군의 야웨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 같이 말하노라. 보라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와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를 내가 네 목전, 네 시대에 이 곳에서 끊어지게 하리라”(16:9).

    10-13절은 왜 이러한 무시무시한 심판이 일어나게 되는가에 대한 대답이다.

    “너희 열조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서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고 나를 버려 내 법을 지키지 아니하였음이라. 너희가 너희 열조보다 더욱 악을 행하였도다 보라 너희가 각기 악한 마음의 강퍅함을 따라 행하고 나를 청종치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너희를 이 땅에서 쫓아내서 너희와 너희 열조의 알지 못하던 땅에 이르게 할 것이다 너희가 여기서 주야로 다른 신들을 섬기리니 이는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지 아니함이라”(16:11-13).

    예레미야는 결혼을 할 수도 없었고, 미래의 희망이요 축복의 상징인 자녀를 갖을 수도 없었다. 인간적으로 고독하게 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조문도 할 수 없으며, 잔치에 참여할 수도 없었다. 예레미야는 참으로 별난 삶을 살았던 것이다. 물론 이는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삶은 곧 유다의 미래를 보여주는 표시(Zeichen)였다. 메신져 예레미야와 그의 메시지는 하나였다. 말씀대로 살고, 삶으로 외치는 자가 바로 예레미야였다. 그의 삶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였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전 삶을 바쳐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였다. 그의 삶도 하나님의 메시지를 위한 도구로 쓰임받도록 한 것이다. 예언자의 존재와 삶 자체는 하나의 선포요 메시지인 것이다.

    한국교회는 물론 한국사회도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외침에는 어느정도 식상해있다. 진리는 어디서나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데 진리대로 사는 자는 쉽게 만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을, 그런 사람을 보고싶어 한다. 미 6:8 “야웨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의 미가의 외침같이 하나님도 공의와 인자와 겸손한 삶을 살라고 말로 요구하는 자가 아니라 그렇게 사는 사람을 찾고 계신다. 한국교회여, 이제는 말로만 외치는 자가 아니라 삶으로 보여주는 사람이 되자! 먼저 한국교회 강단의 설교자들의 삶자체가 하나의 메시지로 인정되기를 기도한다. 설교는 더 이상 말이 아니라 삶이다.

    6. 토기장이 비유의 상징행동(렘 18:1-6)

    앞에서 살펴본 허리띠와 예레미야의 삶을 통한 상징행동이 심판선포와 관련된 것이었다면 여기서 검토할 토기장이 비유의 상징행동은 논쟁의 말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부분은 보통 1-12절을 한 단위로하여 취급된다.
    그러나 좀더 자세하게 분석하면 1-6절과 7-12절은 각기 다른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1-6절을 한 단위로 보고 그 안에 담겨진 상징행동을 주목해 보기로 한다.
    이 부분의 짜임새는 다음과 같다.

    1-2절 : 명령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3-4절 : 보고와 행동의 관찰
    5-6절 : 의미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이 상징행동은 일반적으로 상징행동이 갖고있는 전형적인 3가지 구성요소(명령, 보고, 의미) 모두를 갖추고 있다.
    야웨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야웨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그 곳에서 그분이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 하신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한다.
    그는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그릇을 만드는 작업을 눈여겨 관찰한다.
    토기장이는 그릇을 만들어 놓고 그 그릇에 흠집이 있으면 자기 마음에 드는 그릇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그 일을 되풀이 하였다.
    그 때에 야웨께서 이러한 행동이 갖는 의미를 밝혀주신다.

    “나 야웨가 이르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 것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6절).

    예레미야는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는 분부만 받았다.
    그가 그곳에서 무엇을 관찰하여야 하는지에 대하여는 말이 없었다.
    그런데 그는 평범한 일상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새롭게 깨닫는다. 토기그릇을 만드는 세속의 공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계시의 장소가 된다.
    토기장이는 진흙이라는 재료의 주인이다.
    그는 자기가 만드는 토기그릇의 형체가 마음먹은대로 구워져 나오지 않으면 그것을 깨뜨려 부수고 다시 만들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당신 백성에 대해 주권(Souveränität)을 가지시고 그들을 만드실 수도 있고 없애실 수도 있다.
    진흙과 토기장이는 각각 유다백성과 야웨 하나님을 상징한다.
    토기장이가 진흙에 대하여 주권을 가지고 있듯이 야웨 하나님도 당신의 백성에 대하여 절대적인 주권을 갖고 계시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토기장이로 비유하는 또 다른 예언서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이 강조되고 있다.

    “질 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자로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를 대하여 너는 무엇을 만드느뇨 할 수 있겠으며 너의 만든 것이 너를 가리켜 그는 손이 없다 할 수 있겠느뇨”(사 45:9-10)

    렘 18:6의 핵심부분인 “이 토기장이의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는 수사학적인 의문문 형식으로 되어있다. 이러한 표현은 야웨의 주권에 대하여 회의적인 청중을 전제로 하며 논쟁조의 질문을 사용하여 그들을 설득시키려고 동원된다. 이런 예언자의 어투는 ‘논쟁의 말(Disputationswort)’라고 불린다. 여기에서 이 논쟁의 말은 야웨의 절대주권과 절대자유권을 강조하고 있다.

    예레미야가 이 상징행동에서 깨달은 바과 같이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이다. 사람의 생사화복은 하나님의 손안에 달려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토기장이라면 우리는 진흙에 불과하다 :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사 64:8). 토기장이의 눈에 흠이 포착되거나 그의 마음에 들지 아니하면 토기그릇은 깨어져 내버림을 당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이때 진흙은 왜 그렇게 하느냐고 토기장이에게 항의 하지 않는다. 토기장이이신 하나님 앞에서 한 덩어리의 진흙에 지나지 않는 우리 모두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엄위하신 주권에 겸허한 자세로 무릎을 꿇어야 한다. 사람은 자신의 이해득실에 비추어 너무나 쉽게 그리고 경솔하게 하나님을 판단하려든다. 진흙이 토기장이의 마음과 뜻을 모두 알 수 없듯이 사람도 하나님의 깊은 뜻과 하시는 일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 “야웨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8). 하나님의 일은 이해한 다음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고 실천하다보면 깨달아지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머리와 말(이해)보다는 손과 발(순종)이 더 빨라야 한다.

    7. 나오는 말

    우리는 위에서 먼저 예언자의 상징행동에 대한 개략적인 검토를 하였고, 이 가운데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예레미야의 상징행동에 초점을 맞추어 보았다. 예레미야의 상징행동 중에서도 지면 관계상 허리띠의 상징행동(렘 13:1-11), 예레미야의 생애를 통한 상징행동(렘 16:1-13) 그리고 토기장이 비유의 상징행동(렘 18:1-6)을 선택하여 분석을 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은 허리띠와 같이 하나님께 붙들린 상태에서 그 분께 꼭 붙어있어야 함을 배웠고, 삶 자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메시지로 살아야함도 자각했으며, 마지막으로 우리는 토기장이이신 하나님 앞에서 진흙과 같은 존재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한시도 망각해서는 안된다는 점도 깨닫게 된다.








    ♦ 4월 24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예레미야 27:1∼22
    ♦ 묵상을 위한 주제 :  줄과 멍에(2절)

    ♦ 성구 :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줄과 멍에를 만들어 네 목에 얹고.  


    유다의 마지막 세 명의 왕은 요시야 왕의 아들과 손자입니다. 18대 왕 “여호야김”은 요시아의 첫째 아들이며, 19대 왕 “여호야긴”은 요시야의 손자이고, 20대 왕 “시드기야”는 요시야의 셋째 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줄과 멍에(a yoke out of straps)”를 만들어 목에 걸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상징적인 행위를 통한 예언이며 멍에는 바벨론이 유다를 통치하게 될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지자들은 예레미야의 상징적 예언이 거짓이라고 주장할 때 예레미야는 꿋꿋하게 바벨론 왕을 섬겨야 한다고 외칩니다. 다만 유다 왕실과 성전에 있는 기구들이 바벨론으로 옮겨지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깨우쳤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을 듣지 않고 믿지 않았기 때문에 왕실과 성전의 기구들은 바벨론으로 옮겨지고 말았습니다.

    역사의 주인은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주관하는 역사를 선지자들이 입으로 흔들어도 그 역사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항상 주 하나님의 말씀만을 듣고 따라야 합니다.

    듣기 좋은 것만 듣고 주님을 따르지 않는다면 반드시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후회하며 깨닫는 것보다는 먼저 깨닫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너무 많은 소리가 사람들을 미혹케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들어야 할 소리와 소식을 말씀의 잣대와 저울로 가늠하여 참된 소식과 진리만을 전달하고 나눔으로 믿음의 공동체를 더욱 든든하게 세워나가야 하겠습니다.

    ♪ 찬양 / 주 없이 살 수 없네

    https://www.youtube.com/watch?v=aoont60SKYc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1. 은사에 관한 견해

    2. 예언에 대한 견해

    1) 예언의 종류

    2) 예언의 은사란 어떤 것인가?

    3) 기도원이나 선배들이 준 예언을 그대로 믿어야 하는가?

    3. 방언에 대한 견해

    1) 방언의 종류

    2) 일반 성도나 현대교회에선 방언이 필요한가?

    4. 결론




    1. 은사에 관한 견해
    ▲ 이병삼 목사(충신교회원로)

    신약성경에 ‘은사’에 대한 헬라 원어는 3가지가 있다.

    1) 도리스(δύαις 약1:17), 2) 도레아(δωρεά 고후9:15, 히6:4), 3)카리스마(χάριςμα 롬1:11, 5, 15)이다. 이 세 단어의 원뜻은 모두 ‘선물’(gift)이라는 뜻이다.

    이들은 신약성경에서는 특히 인간의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있는 자들에게 주어진 각종 재능과 사명, 직무 등을 총괄적으로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

    고전12장을 통해 성령의 은사에 대한 가장 중요한 것들을 뽑아본다.

    1) 모든 은사의 본질적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게 하는 것이다(12:3). 고전에는 성령의 은사를 9가지로 말하고, 롬12장과 엡4장에서는 12가지로 말하여 성경에 성령의 은사는 도합21가지로 기록이 나온다. 이 21가지 은사의 본질적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실현시키기 위한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것이다(요6:40)

    2) 모든 은사는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차이가 있을 수 없다(12:4).

    은사는 여러 가지이나 성령은 한 성령에게서 한 목적을 위해 주신 것이니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다고 말 할 수 없다. 어떤 은사는 굉장히 위대해 보이고, 어떤 은사는 좀 시시해 보이는 경향이 있다. 하등의 차이가 없으나 교만과 죄악 때문에 그렇게 보는 것이다.

    3) 각각 맡은 직임은 신앙의 척도도 아니고, 고저도 없다(12:5).

    직임과 직위를 계급처럼 보아서는 안 된다. 어떤 직임과 직위는 봉사와 섬기기 위한 것들이다. 섬기고 봉사하는 것이 신앙의 척도와 고저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직임과 직위든 감사하므로 순종할 뿐이지 명예와 신앙의 척도가 아닌 것이다.

    4) 은사는 신앙의 목적이 아니라 신덕을 위한 수단인 것이다(12:7).

    성령의 은사는 성도들의 신앙의 유익을 위해서 주신 선물이다. 만약 은사가 신앙의 목표라면 성경의 수많은 인물들이 어떤 은사를 가졌느냐가 초점이 있는 것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 말씀에 순종하며 신앙대로 사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5) 은사는 보이는 은사보다, 보이지 않는 은사를 더 귀중히 여겨야 한다(12:8-10).

    성령의 9은사는 드러나 보이는 은사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은사가 있으니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은사이다. 아무리 보이는 은사가 제아무리 풍성해도 눈에 보이지 않는 은사인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유익이 없는 것이다.

    6) 은사란 인간 자신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12:11).

    성령님이 자신의 뜻에 따라 각 사람에게 임으로 주신다. 그래서 선물인 것이다. 그러나 그 선물을 받았다고 그 사람의 전유물도 아니고 소유물도 아닌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은사를 소유할려고 애쓴다. 은사를 사모하는 것 자체는 잘못은 아니다. 내 뜻대로 쓰라고 주신 선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해 봉사와 섬기라고 주신 선물이다.

    7) 성령님이 나에게 준 은사란 무엇일까요(12:11).

    모든 성도에게는 21가지 중에서도 여러 개를, 또 보이지 않는 은사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은사 중 에서도 어던 분은 더 많은 봉사와 섬김을 위해 많이 준 자도 있고, 어떤 분에게는 예정하신 뜻대로 적게 주시고 한 가지나 몇 가지에 집중하도록 하신다.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받게 함과 교회 덕을 위함과 이웃과 사회를 위함이다.

    우리 같은 죄인들에게는 이런 선물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과분할 정도로 보이는 은사, 보이지 않는 은사로 귀중한 선물로 안겨 주심에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그간 알게 모르게 이 모든 은사를 나를 위해 내 뜻대로 사용된 점이 있다면 회개하고, 이제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와 이웃과 사회를 위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최선을 다해 충성, 봉사, 섬김, 베품으로 주님만을 기쁘시게 하시길 바랍니다.



    2. 예언에 대한 견해

    1) 예언의 종류

    예언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예언(預言)과 예언(豫言)입니다.

    한문 성경도 구분이 안 돼 있고, 한글 성경에는 둘 다 ‘예언’이라고 기록 되어 혼선이 온 것이다.

    ① 예언(預言)은(헬,프로페테우오 προφητευω 와 영,prophecy) ‘하나님의 계시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한다’는 뜻이다. 구약의 예언자는 豫言者가 아니라 預言者이다. 구약의 예언자를 ‘나비,א׳בכ 이고,헬라어로 프로페테스 προφητης라고 한다.

    ② 예언(豫言)은(영,predict(prediction이라는 단어로) ‘미래에 있을 일을 미리 말한다’는 뜻이다.

    구약성경 선지서들에는 예언이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거기 예언은 모두가 prophecy를 의미 합니다(預言). 그래서 선지자들의 預言 가운데는 豫言이 포한되어 있는 경우도 많이 있기도 합니다.그러나 그 선지자의 豫言이 아니라 하나님의 豫言을 한 것입니다. 신약 성경의 고전12장과 14장에서는 계속해서 예언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영어 성경을 자세히 보면 prediction(豫言)이 아니고, prophecy(預言)으로 정확하게 구분하여 있습니다. 우리 성경에서 또 다른 예로는 ‘사랑’이란 단어입니다. 우리 성경은 모두 사랑입니다. 헬라어나 영어 선경은 완전 구분되 있다.

    사랑 ① 스톨케 στοργή : 가족적, 동족적인 사랑 ② 휠리아 φιλία : 친구나 우애적 사랑 ③ 에로스ἕρος : 이성적, 정적 사랑 ④ 아가페 άγάπη :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사랑, 이렇게 구분된 단어를 우리 성경은 한 단어로만 사용하니 큰 혼동이 오는 것이다.

    2) 예언의 은사란 어떤 것인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예언의 은사는 預言을 뜻하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현대에서는 預言은 끝났다는 점과 豫言은 존재치 않는 것이다. 預言은 계시의 종말로 성경 66권 전부에 기록해 두었으니 더 이상 預言은 없으며, 豫言은 하나님과 성령님, 예수님만 할 수 있는 것이지 만약 사람이 이 豫言은 은사를 받았다는 자들이 있는데 그렇다면 100% 한 번도 틀림이 없이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豫言을 계속하고 있다면 그분이 곧 하나님이시다. 세상 지식적인 人間의 예언은 20~30%나, 어쩌다 맞는 것은 예언의 은사 받은 것이 아니고, 세상 지식적인 은사 받은 것이나 악령이나, 마귀의 은사 받은 것이나 아니면 또 혹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예언이라고 하든지, 통계학으로 어림잡아 하는 것이 맞는 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성령님이 주신 예언의 은사가 아닌 것이다. 고전에서 나오는 예언의 은사, 사도시대에 국한된 예언이었다.

    4C말까지는 정경이 완성되지 못해서 하나님이 일시 豫言의 은사를 주신 것 같으나 이미 預言된 말씀이 더 많다. A.D.397년 정경 완성으로 預言도 豫言도 종결된 것이다. 이제 더 이상의 預言이 필요치 않는 시대인 것이다.

    3) 기도원이나 선배들이 준 예언을 그대로 믿어야 하는가?

    계시 종결로 預言도 豫言도 더 이상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 시대인데도 기도원에 기도하려 가면 자칭 預言者들이 여러 가지로 예언해 준다. ‘당신은 신학 공부해서 목사가 되라’, ‘당신은 목사 사모가 되라’, ‘당신은 장로가 될 수 있는 꿈을 어젯밤 주셨으니 명심하라’. 이런 예언 받은 자가 혹 있거들랑 빨리 잊으세요. 다 점쟁이들이 점 꽤 대로 속이는 말이요, 무당들이 무당 굿하는 것과 같은 종류이다. 이런 것이 계속 예언되는데 다 맞고 틀림이 없다면 하나님이 또 다른 성경을 쓰시고 계신 것이니, 66권 이외 계속 출간되어야 한다. 성령님이 우리 기도 시간에 음성으로 잠 속에서, 꿈으로 다시 우리에게 예언해 주시지 않으시니 거기에 속지 말고 성경에 맞는 말씀만 하나님의 預言이지 성경에 맞지 않는 豫言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3. 방언에 대한 견해

    1) 방언의 종류: 성경에 기록된 방언은 세 가지로 기록이 나온다.

    ① 다른 나라 말인 방언이 있다: 성령의 감동으로 배우지도 않은 다른 나라 말을 성령의 능력으로 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순절 성령 강림 때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배우지도 않은 다른 나라 말로 전도한 것이다. 오순절에 모인 15개국 성도들께 그들 나라 말로 전해지는 말씀에 큰 은혜를 받게 된다. 예수님 제자들은 갈릴리 어부 출신이 대다수 였고, 외국어를 배울 기회가 없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만이 가능한 것이다.

    ②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이 있다: 고전14: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령님이 필요에 의해(장본인께 확신 주기 위함, 듣는 이가 신기하게 느끼게 하기 위함), 혹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방언은 통역이 없으면 교회에서는 하지 말라고 명하십니다(고전14:28). 통역이 없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교회 안에서 하게 되면 말하는 자도 야만이 되고,듣는 자들도 야만이 되고 만다. 혹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이 나에게 주어졌다면 믿음의 확신을 얻는 다음부터는 새 방언을 하던지 이미 預言된 말씀 정경으로 깊이 들어거야 신앙의 성장이 올바로 된다.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에만 머물러 있으면 영분별을 못하므로 마귀 유혹에 넘어가기 쉬워 교만과 자만에 빠져 신앙에 저해가 되고, 신앙의 열매가 없게 되고 마는 것이다.

    ③ 새 방언이 있다(막16:17): 새 방언이란 것은 성경 말씀을 새롭게 깨달아 자기 나라 말로 전하기도, 가르치기도 하는 것이다. 신령한 세계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깨달은 것은 처음 듣는 말이요, 그 내용이 새로운 말이다. 그래서 새 방언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성경 말씀은 하나님 말씀이라 유한된 인간은 평생 깊은 은혜의 세계, 신령한 세계로 들어가서 새로운 진리를 깨닫고, 연구하고 해도, 너무도 깊고 오묘해서 다 캐내어 알 수 없고, 완벽한 진리라고 확언할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은 완벽하고 조금도 부족 된 면이 없다.

    2) 일반 성도나 현대 교회에선 방언이 필요한가?

    행2장의 방언은 외국, 타국 방언이었고, 그 목적이 오직 복음 전하기 위해서 성령님이 일시 주신 것이지 제자들 일평생 이 은사가 계속된 것은 아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에서 행해지는방언은 듣는 사람이 알아 들을 수 없으며, 심지어 방언을 말하는 본인도 그 뜻을 전연 모르고 그냥 하는 것이다. 이런 방언이 무슨 목적으로 현대에 꼭 필요하다고 보는가? 이젠 필요치 않다고 본다. 현대 방언은 통역이 없으면 교회에 유익이 없다고 한 것을 보아 통역이 가능한 방언은 預言의 말씀이었다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특히 칼빈은 강하게 주장했다)

    고린도전후서는 A.D.52-57년 경에 기록되었고, 요한계시록 A.D.100년경에 기록되었다. 신약성경이 정경으로 채택되기에는 또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A.D.363년 라오디게아회의 때 목록 수집하기 시작하여 34년간 숙고 끝에 A.D.397년 칼타고회의 때 정경으로 27권이 확정되었다. 사도시대 이후 300년간 통역된 방언은 預言의 말씀으로 정경으로 채택되었다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정경이 완성된 후에는 계시가 종결된 것 같이 豫言도 종결되었고, 預言도 방언도 종결되어야 마땅하다는 견해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도나 현대 교회에선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은 자제하는 것이 성경적이다.



    4. 결론

    고린도교회는 성령의 은사는 충만한 교회였으나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교회였다. 그래서 분열,분당이 생겼으며(1:10-4:21), 부도덕해서 음행 죄가 교회 안에까지 침투했으며(5장 전체, 6:12-20),서로 싸워 세상 법정까지 고소했을 뿐 아니라(6:1-8), 주님의 성찬을 욕되게까지 하였다(11:17-34).뿐만 아니라 저들은 부활도 바로 이해하지도, 믿지도 않했으며(15장 전체), 이런 점에서 서로 자기만 내세우는 개인주의로 자기가 받은 은사를 자랑하고 뽐내는 통로였다. 그래서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 공적예배 시간에 소란을 피우므로 예배의 질서가 흐려지고, 혼란한 고린도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 고리도전서를 쓰게 됐다. 그래서 바울은 방언 보다는 預言을 힘쓰라고 한 것은 그 預言의 은사가 당시 고린도교회에 유용성 때문에 더 크게 부각시킨 것이다. 여기서 預言의 은사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 해석이요, 그 설교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방언이 통역이 되는 경우에는 듣는이까지 덕이 되고 유익이 있으므로 預言과 다를 바가 없게 된다.

    고전14장에 들어가서 전체의 흐름은 방언 자제 쪽에 무게를 두고 기록했다.

    ①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도록 하라(1절)

    ② 방언은 하나님께 하는 것이라 알아 듣는 자가 없고(2절)

    ③ 방언은 자기 덕을, 예언은 교회 덕을 세우나니(4절)

    ④ 방언은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예언하는 것만 못하다(5절)

    ⑤ 방언은 성도들에게 유익이 없다(6절, 계시, 지식, 예언에 비해서)

    ⑥ 방언은 뜻을 분별할 수 없음으로 알아들을 수 없다(7절)

    ⑦ 전쟁을 예비 할 수 없다(8절, 나팔)

    ⑧ 허공에다 말하는 것과 같다(9절)

    ⑨ 방언은 말하는 자나 듣는 자가 다 야만이 된다(10-11절)

    ⑩ 방언은 통역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12-13절)

    ⑪ 방언으로 기도하면 자기 영은 기도하나 마음에는 열매가 없다(14절)

    ⑫ 방언으로 축복이나 감사할 때, 무식한 자는 ‘아멘’할 수가 없다(16-17절)

    ⑬ 성경 깨닫고, 다섯 마디 말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하는 것보다 낫다(19절)

    ⑭ 방언이 복음의 세계를 접하지 못한 자들을 위해 주신 표적이나 지금 세계는 이 복음을 못 듣고, 못 본자 없는 시대이니 자제함이 좋고(21-22절)

    ⑮ 온 교회가 다 방언하면 무식한 자나, 불신자들이 볼 때 미쳤다고 한다(23절)

    ⑯ 다 預言하면 그들이 와서 책망, 판단을 받고, 숨은 일이 들어나므로 하나님게 경배하고,복음이 전파된다(24-25절)

    바울은 누구보다 방언을 잘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이 더 중요하므로 바울도 자제하고 삼가게 되었다. 성령 은사 중의 하나인 방언의 은사는 성령님이 꼭 필요한 자에게 개인적인 영적 깊은 세계의 은혜 생활하도록 주신 것이다. 그러나 교회나 공적 예배나 공동체에서는 유익이 없으므로 자제하고 삼가는 것이 성령의 뜻을 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더 나타낸 다고 바울은 지금까지 우리에게 설교하고 계신 것이다.

    출처 : 코람데오닷컴(http://www.kscoramde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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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23일(금) 분명히 알라(예레미야 2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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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찬송 / 322장(주께로 나오라)

    예레미야 26장의 역사적인 배경
    당시는 애급이 가장 부강한 나라로 패권을 쥐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에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었다.
    왜냐하면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과 멸망을 외친 예언은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여호야김 4년 "갈그미스 전투"로 애급의 세력은 몰락하고 중동의 패권은 바벨론에게 넘어갔다(예레미야 25장 참조).

    26장은 25장에 이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1절을 보면 이미 옛날 얘깁니다.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의 즉위 초에 여호와께로서 이 말씀이 임하니라 가라사대.

    시간적으로는 25장보다 훨씬 앞섭니다.
    주전 609년 경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유다가 바벨론에 주전 586년에 망합니다.
    26장은 주전 609년의 사건입니다.

    예레미야가 요시아 왕 13년에 사역을 시작합니다.(1:2)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다스린지 십 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주전 627년경 입니다.
    그래서 유다가 바벨론에 망하기까지 40년간 사역합니다.
    그리고 26장 사건은 예레미야가 사역을 시작한지 23년 정도 지난 사건입니다.
    예레미야가 성전 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재판에 회부 되어 죽임을 당할 뻔한 사건입니다.

    이 당시 유다는 애굽에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겉모습만 보면 안보상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였습니다.
    애굽이 당시 유다를 지켜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등장하면서부터 지난 20년간 줄기차게 유다의 패망을 선언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 황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강력한 애굽이 우리의 후견인인데 왜 우리가 망한단 말인가 라며 생각했습니다.
    이게 당시 모든 사람의 판단과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사회를 혼란에 빠트리는 반역자로 낙인이 찍혔습니다.


    마치 한국의 좌파 정권의 주장은 이제까지 자유대한민국이 미국에 의존하였으나 중국과 북한과 손을 맞잡고 새로운 세력으로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4자 안보 대화 또는 4개국 안보 회담(Quadrilateral Security Dialogue), 약칭 쿼드(Quad)
    인도 태평양 지역의 미국, 일본, 인도, 호주 4개국이 국제 안보를 주제로 가지는 정기적 정상 회담
    또는 그러한 회담을 통해 구현되는 체제를 말한다.

    쿼드 플러스 미국·일본·인도·호주의 쿼드 4개국에 한국·뉴질랜드·베트남 등 3개국을 포함시켜 확대 개편하려는 안이다.
    더불어 장기적으로는 3개국 이외의 다른 국가들도 참여시켜 나토와 같이 점점 확대시켜 나갈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좌파 정권의 반미 정책에 따라 쿼드에 한국이 합류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신용을 잃고 심각한 경제 파탄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에 대한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합니다(3절 참조)

    3절, 각각 그 악한 에서 떠나리라 그리하면 내가 그들의 악행으로 인하여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려 하던 뜻을 돌이키리라.

    13절, 너희는 너희 과 행위를 고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고하신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시리라.

    진실한 예언을 외치는 예레미야를 죽이면 어떻게 되는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고 외칩니다(15절).

    너희는 분명히 알라 너희가 나를 죽이면 정녕히 무죄한 로 너희 몸과 이 성과 이 성 거민에게로 돌아가게 하리라 이는 여호와께서 진실로 나를 보내사 이 모든 말을 너희 귀에 이르게 하셨음이니라.


    * 우리야 / 스마야의 아들, 여호야김 왕에게 살해당함.(20-23절)
    * 예레미야 / 사반의 아들, 아히감이 보호하여 백성의 손에 내어주지 아니하여 죽이지 못하게 하였다.

    예레미야 선지자와 미가 선지자의 시대는 약 100년의 간격이 있습니다.
    미가는 이사야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미가가 선지자 활동을 할 때는 히스기야왕이 다스릴 때였습니다.
    히스기야는 선한 왕이었지만, 그의 통치 초기는 아버지 아하스왕의 악행의 결과로 인해서 신앙적으로, 또 도덕적으로 매우 타락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 때에 미가 선지자가 “예루살렘은 폐허 더미가 되고, 성전은 나무만 무성한 숲이 될 것이라”고 예레미야와 동일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 때에 히스기야왕과 유다 백성들이 미가 선지자를 죽이기는커녕,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우리도 예레미야 선지자를 죽여 재앙을 초래하지 말고, 하나님께로 우리의 삶을 돌이키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시대에 예레미야와 동일하게 예루살렘이 말할 것이라고 경고의 말씀을 전한, 스마야의 아들 우리야라는 선지자가 있었는데, 여호야김왕은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우리야 선지자가 그 사실을 알고 애굽까지 도망을 갔는데, 여호야김왕은 거기까지 사람을 보내어 잡아와서는 죽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야 선지자는 죽임을 당했지만 예레미야 선지자는 아히감의 도움으로 살아나게 되었다고 전합니다.
    아히감은 요시야왕 때에 서기관을 지내며, 신앙개혁을 지지했던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또렷하게 대조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와 미가 선지자 그리고 죽임을 당한 우리야 선지자 그룹과 예레미야 선지자를 죽이려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 그룹입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자 하나님의 역사의 통로가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앞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받은 말씀으로 진리의 띠를 띠고 말씀의 등불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뒤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과 자신들의 기득권으로 띠를 띠고 있습니다.

    또 또렷하게 대조되는 두 부류는 미가 선지자의 말씀을 듣고 회개한 히스기야왕과 그 당시의 유다 백성들과 예레미야 말씀을 듣고 그를 죽이려고 하고, 우리야 선지자를 죽인 여호야김왕과 그 당시의 유다 백성들입니다. 역시 앞의 사람들은 말씀의 띠를 띤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뒤의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과 이기심으로 띠를 띤 사람들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말씀의 띠를 띠고, 말씀의 등불을 드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제사장들, 선지자들, 방백들, 백성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라고 말했습니다. (26:11)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멸망을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소리에 반대하여 예레미야를 보호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다른 고관들과 모든 백성들입니다. (16)

    그 지방 장로 중 몇 사람들입니다. (17)

    사반의 아들 아히감도 나섰습니다.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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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22일(목) 그리하면(예레미야 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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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찬송 / 215장(이 죄인을 완전케 하옵시고)


    예레미야 25:5

    이르시기를 너희는 각기 악한 길과 너희 악행에서 돌이키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너희와 너희 열조에게 옛적에 주어 영원히 있게 한
    그 땅에 거하리니.

    예레미야 25:1-3a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사년 곧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원년에 유다 모든 백성에 관한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선지자 예레미야가 유다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 모든 거민에게 고하여 가로되.
    유다 왕 아몬의 아들 요시야의 십 삼년부터 오늘까지 이십 삼년 동안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기로.

    유다 왕의 집(남 유다 왕국의 말기) 15대, 아몬 

    16대, 요시야(31년) - * 4명의 아들 참조
                             (1. 요하난, 2. 여호야김18대, 3. 시드기야 20대, 4. 살룸17대)


    17대, 살룸(여호아하스)(3개월) 


    18대, 여호야 김(엘리야 김)(11년) 

    바벨론 느부갓네살 원년


    19대, 고니야(여고냐, 여호야 긴)(3개월) 

    여호야김의 아들
    20대, 시드기야(11년)


    남 유다의 영적 상황

    3절,  내가 너희에게 꾸준히 일렀으나 너희가 순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절, 선지자를 너희에게 끊임없이 보내셨으나 너희가 순종하지 아니하였으며 귀를 기울여 듣지도 아니하였도다.

    7절, 너희가 내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8절,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예레미야 25:9

    보라 내가 보내어 북방 모든 족속과 내 종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불러다가 이 땅과 그 거민과 사방 모든 나라를 쳐서 진멸하여
    그들로 놀램과 치소거리가 되게 하며 땅으로 영영한 황무지가 되게 할 것이라.

    예레미야 25:11

    이 온 땅이 황폐하여 놀램이 될 것이며 이 나라들은칠십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예레미야 25:5

    이르시기를 너희는 각기 악한 길과 너희 악행에서 돌이키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너희와 너희 열조에게 옛적에 주어 영원히 있게 한
    그 땅에 거하리니.

    접속사(and, 그리하면) / ...해서, ...하면(as result)

    예레미야 25:6

    너희는 다른 신을 좇아 섬기거나 숭배하지 말며 너희 손으로 만든 것을 인하여 나의 노를 격동치 말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해치 아니하리라.

    예레미야 25:34

    너희 목자들아 외쳐 애곡하라 너희 양떼의 인도자들아 재에 굴라 이는 너희 도륙을 당할 날과 흩음을 당할 기한이 찼음인즉
    너희가 귀한 그릇의 떨어짐 같이 될 것이라. 

    오늘의 기도

    1.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우리게 하소서!

    2. 영적 현상을 분별하게 하소서!

    3. 회개의 영을 부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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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21일(수) 여호와를 아는 마음(예레미야 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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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찬송 / 216장(아버지여 나의 맘을)

    ♦ 4월 21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예레미야 24:1∼10
    ♦ 묵상을 위한 주제 : 여호와를 아는 마음(7절)
    ♦ 성구 : 내가 여호와인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로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무화과 두 광주리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한 광주리에는 아주 좋은 무화과가 있었고, 또 다른 광주리에는 먹을 수 없는 아주 나쁜 무화과가 있었습니다.
    바벨론 포로가 된 백성들은 좋은 무화과 같이 좋게 할 것이며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여호와를 아는 마음(a heart to know the Lord)"을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마음은 모든 사람이 갖는 마음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마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전도서 2:26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그가 주게 하시지만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마음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마음입니다.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말씀을 육신이 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갖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도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호세아 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Let us acknowledge the LORD; let us press on to acknowledge him.

    사람의 마음 한 구석에 아직 채워지지 않은 빈 공간이 있다고 합니다.
    그 공간은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지만 오직 하나님으로만 채울 수 있는 아주 비밀스럽고 신비한 공간입니다.
    비밀스런 공간에 하나님을 아는 마음으로 채워서 날마다 주님 닮아가고 주님처럼 순종하여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새벽마다 마음을 비워 놓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가며 하나님이 기뻐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나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고 높고 넓게 체험해야 하겠습니다.

    ♪ 찬양 / 나 어느 곳에 있든지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탈무드에 "사람의 마음" 이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시냇물 위로 외나무다리가 놓여있고 한 여인이 이 다리를 걷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ㅇ무라 살펴봐도 다리가 너무 오래되어 무너질 것 같았습니다.
    다리를 건너기 전에 서원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이 다리를 무사히 지나가게 해 주신다면 전  재산을 바쳐 하나님 사업에 쓰겠습니다.”
    다리 중간쯤 갔습니다.
    "이제 절반이나 왔는데 전 재산을 바친다?"
    여인은 가자기 후회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기도하기를 “하나님 이 다리를 건너고나면 저는 땡전 한푼 없는 알거지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 제가 그렇게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시겠죠?
    제가 재산의 절반만 바친다 해도 하나님은 이해하실 거예요 그것도 저는 엄청나게 큰 것이랍니다.”
    어느새 다리를 안전하게 다 건널 무렵 다시 기도하기를 “하나님 재산의 반을 바친다는 건 너무 심하지 않나요? 이 다리가 그렇게
    위험한 것도 아닌데 하나님! 딱잘라 5만원만 헌금하더라도 이해하시겠죠?”
    그러자 갑자기 바람이 불어와 다리를 마구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여인은 얼른 다시 기도합니다.
    “하나님! 맨 나중에 지껄인 제 말은 정말이지 농담이었습니다.
    그걸 진심으로 받아드리다니 너무 하십니다.”

    사람의 마음이 환경에 따라 쉽게 무너지고 변한다는 교훈일고 하겠습니다.
     
    탈무드의 이런 이야기는 오늘날 인간들이 얼마나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가는지 단적으로 들어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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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20일(화) 의로운 가지(예레미야 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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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찬송 / 372장(나 맡은 본분은)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예레미야 23:1∼30
    ♦ 묵상을 위한 주제 : 의로운 가지(5절)
    ♦ 성구 :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義)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장차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키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겠다는 뜻입니다.
    그때에 유다는 구원을 얻고 평안히 거하게 되는 복을 누리게 됩니다.

    예레미야 33:15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 


    의로운 가지(선지자, 메시아)

    1. 지혜로운 왕
    지혜(사칼) - 형통

    2. 공평의 왕
    물질의 공평(평등)이 아니라 신분의 공평

    3. 정의로운 왕
    모든 사람에게 적용(전체적 정의)

    하나님을 아는 것 / knowing God  &  하나님에 관하여 아는 것 / Knowing about God

    지혜는?
    1. 하나님을 아는 것
    2. 자기 자신을 아는 것 

     거짓 선지자 : 진실한 선지자(예레미야)

    창세기 18:19a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KJV) For I know him
    (NIV) For I have chosen him

    *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관계 : 아는 관계(야다)

    엄중한 말씀(33, 34, 36, 38절)

    너희를 버리리라!
    그 집에 벌하리라!
    말씀을 망령되이 사용하리라!

    39-40절
    내가 너희를 온전히 잊어버리며 내가 너희와 너희 열조에게 준 이 성읍을 내 앞에서 내어버려 너희로 영원한 치욕과 잊지 못할 영구한 수치를 당케 하리라.

    오늘의 기도

    1.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지도자
    2.  백성을 두려워하는 지도자
    3.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케 하소서


    그리스도께서는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자신이 의로우실 뿐만 아니라 인간까지도 의롭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참조, 고전 1: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메시야의 다스림은 당시 헤롯 왕의 그것과 달랐고 이전에 열왕들이 행했던 다스림과도 같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위엄을 가지되 주어진 위엄으로 다스리며 자신을 낮추기까지 복종하는 겸손과 순종의 자세로 다스리셨습니다. 

     내가 그의 의를 보리로다(미가 7:9)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니 주께서 나를 위하여 심판하사 신원하시기까지는 그의 노를 당하려니와 주께서 나를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게 하시리니 내가 그의 의를 보리로다.

     그 행한 의로 인하여 살리라(에스겔 18:22)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 행한 의로 인하여 살리라.

    로마서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예레미야 23장선지자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목장의 양 무리를 멸하며 흩어버리는 목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목자의 임무는 양 무리를 잘 관리하고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자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엄중한 말씀(맛싸. מַשָּׂא)”을(33, 34, 36, 38절) 망령되게 사용했습니다(36절).

    선지자들의 잘못된 예언(預言) 때문에 반드시 “의(義)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며 ‘의로운 가지’는 장차 만왕의 왕으로 등장할 메시아 즉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잘못된 가르침 때문에 비록 남 유다 왕국은 멸망할 것이지만(39, 40절) 하나님은 반드시 유다 왕국을 구원하여 이스라엘을 평강의 땅으로 회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유일한 왕은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세속의 역사가 때로는 뒤틀리고 역행하는 방향으로 진행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의로우신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를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은 세상 권력과 결탁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선지자는 대중의 인기와 명예보다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인정받는 일군으로 헌신할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볼 때 어느 것이 참이며 어느 것이 거짓인가를 분별할 줄 아는 믿음과 지혜를 기도하며 우리의 자유대한민국과 세계 경제와 질서를 주도하는 미국을 위하여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임하기를 기도로 준비하며 회복의 그 날을 기다립시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세상이 주는 기쁨보다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더 사모하는 사람들은 시대를 분별하는 영의 눈과 참 예언자가 누구인지를 분별하는 영적 능력을 얻기 위해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말씀의 묵상 없이 이러한 능력을 얻을 수 없습니다. 또한 기도 없이 이러한 묵상을 확증할 수 없습니다. 오늘도 기도와 말씀으로 전진하는 거룩한 주의 백성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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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19일(월) 습관(習慣)(예레미야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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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찬송 / 301장(사랑의 하나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예레미야 22:1∼30
    ♦ 묵상을 위한 주제 : 습관(21절)
    ♦ 성구 : 네가 평안(平安)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聽從)치 아니함이 네 습관(習慣)이라.  

    예레미야 22:21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
    습관이라.

    습관 /  This has been your way(당신의 방식이다)

    우이독경(牛耳讀經) / 소 우, 귀 이, 읽을 독, 지날 경
    소 귀에 경 읽기.
    백날천날 제 아무리 가르치고 일러도잘 알아듣지 못함.

    비슷한 사자성어

    마이동풍(馬耳東風) 남이 하는 말을 통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음.

    대우탄금(對牛彈琴) 우매한 사람에게는 가르쳐 줘도 말귀를 못 알아들음.

    남 유다 왕국의 말기(16대-20대 왕)

    11절 / 16대, 요시야(31년) - * 4명의 아들 참조(다음 화면 참조) / 암몬의 아들
    (뜻) 여호와께서 그를 지지하심
    BC 640-609
    열왕기하 21:25-26
    8세 즉위, 31년 통치, 선정(열왕기하 22:1)
    애급 왕 고고에 의해 죽임당함(역대하 35:20-24)

    11절 / 17대, 살룸(여호아하스)(3개월)

    18절 / 18대, 여호야 김(엘리야 김)(11년)

    24절 / 19대, 고니야(여고냐, 여호야 긴)(3개월)

    요시야의 아들들(역대하 3:15)

    1. 요하난(Johman) 뜻 : 여호와는 인자하심 
    유대국 요시아왕의 장자요 여호야김 시드기야 살룸의 맏형이다(대상 3:15)


    2. 여호야김(엘리아김)  18대(11년)
    아들 / 여호야긴 19대(3개월)

    여호야김(Jehoiachin) 뜻 : 여호와가 드심  
    유다왕(B.C. 609-598). 
    요시아왕의 둘째 아들(대상 13:15)
    바로 느고가 애굽으로 잡아가고 그 대신으로 추대 되었는데 본명은 엘리아김이었다.
    그는 25세에 즉위하여 국민에게 중세를 과하고 애굽왕 느고에게 조공을 바쳤다(왕하 23:31-36)

    여호야긴(Jeoiakim) 뜻 : 여호와가 세우심  
    유다왕(B.C.609-598). 여호야김의 아들로서 8세에 왕위에 올라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함(왕하 24:8).
    느브갓네살왕이 유다를 공격하여 그 백성들과 여호야긴 왕을 포로로 잡아감(왕하 24:9-16).

    3. 시드기야(Zedekiah) / 여호와는 정의이시다. 20대(11년)

    본명 : 맛다냐(맛다니야) - 시드기야(열왕기하 24:17)
    바벨론 왕이 또 여호야긴의 아자비 맛다니야로 대신하여 왕을 삼고 그 이름을 고쳐 시드기야라 하였더라.

    요시야의 막내 아들로서 유대국의 최종 왕이다(B.C. 598-587).
    21세 즉위, 11년 통치
    선지자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일러도 그의 앞에서 겸비치 않았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않았다.

    역대하 36:13-14,
    느부갓네살
    왕이 저로 그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케 하였으나 저가 배반하고 목을 곧게 하며 마음을 강퍅케 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였고.
    제사장의 어른들과 백성도 크게 범죄하여 이방 모든 가증한 일을 본받아서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거룩하게 두신 그 전을 더럽게 하였으며.

    4. 살룸(Shallum)(여호아하스, Jehoahaz)(열왕기하 23:30) 17대(3개월)
    바로 느고(하맛 땅 립나에 감금, 애굽의 포로)

    여호아하스(Jehoahaz)
    (뜻) 여호와가 치심


    누가복음 22: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습관 / as usual(늘 하던대로)

    40절,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마태복음 26:36-46)  

    시험은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1. 유혹(Temptation)
    마귀가 주는 시험

    2. 시험(Test)
    하나님이 하시는 시험

    마귀는 우리를 넘어뜨리고 불행하게 하고 실패하게 하려고 시험하고 하나님은 복 주시 쓰시려고 시험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생활 하다보면 하나님의 시험도 받고 마귀의 시험도 받는데, 시험에 합격하고 이기려면 빼놓을 수 없는 무기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기도의 능력과 말씀으로 이 시험에서 대승리를 하셨습니다.
    ①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하였노라(신8:3)
    ②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셨느니라(신6:16)
    ③ 주 너의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기도하지 않으면 물질 권세, 부귀영화 시험에 빠지게 되어 마귀 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히브리서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모이기를 힘쓰라!
    사도행전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화로의 불이 활활 타오를 때 활활 타고 있는 숯을 하나씩 하나씩 꺼내어 땅바닥에 놓으면 활활 타던 숯이 쉽게 꺼져버립니다.
    그러므로 모이기를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모이기를 힘쓰라!

    모이기”란 말이 헬라 원어는 “에피쉬나고게”입니다.
    마태복음 23: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암탉이 병아리를 그 날개 아래 모음을 의미합니다.
    암탉이 병아리를 그 날개 아래 모아서 그 체온으로 보호하며 적의 공격에서 지킵니다.
    그처럼 주님께서 그 사랑하는 자녀들을 양육하며 지키는 것이 교회의 집회입니다.



    크리소스톰은 말하기를 “교회를 어머니로 삼지 않은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다”

    루터는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찾고자하면 교회를 찾으라”

    교회를 통하여 복음을 듣고 진리를 배우고 깨달아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은 신자가 교회를 소중히 여김은 당연한 일입니다.
    크리스찬 중에는 교회를 위하여 자기의 재산을 봉헌하고 땀과 눈물로 봉사하며 주의 몸 된 교회를 사수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생명까지라도 아끼지 않고 바치는 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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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사의 습관

    중세기 구라파에는 흑사병이 만연되어 당시의 구라파 인구 3분의 1의 목숨을 앗아간 일이 있었다.
    이때 구라파에서는 페스트를 만연시킨 것은 유태인이라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유태인은 흑사병에 걸리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태인이 흑사병에 잘 감염되지 않았던 이유는 극히 간단하다.
    당시만 하더라도 구라파인의 생활은 야만적이었다.
    위생관념이 거의 없어 목욕하는 일이 좀처럼 없었다.
    대부분의 서민들은 비누가 무엇인지 몰랐다고 하니 얼마나 불결한 생활이었나 하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비하여 유태인은 오래 전부터 목욕을 하고 식사 전후에 손을 깨끗하게 씻는 생활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언제나 여호와께 감사드려야 하고 가까이 지내야 하기 때문에 몸을 깨끗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종교적인 규칙이며 신앙생활의 습관이었다.
    평소에 몸을 깨끗이 하는 습관이 그들을 무서운 전염병으로부터 구해준 원인이 된 것이다.
    유태의 어린이들은 아침에 일어나 이를 닦는 습관을 배우기 이전에 여호와께 감사하는 것을 배운다.
    부모가 의도적으로 감사하는 태도를 가르치는 것은 물론, 신에 대한 감사의 분위기에서 자라나는 어린이들은 은연 중에 감사의 생활을 몸에 익히게 된다.
    어떤 일이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필요한 것이다.
    특히 음식을 먹을 때 그 음식을 주신 여호와와 부모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없으면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유태인들은 생각한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은 곧 남에게 감사함을 받을 수 있는 선행을 낳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습관적인 신앙생활

    1920년 블론딘이라는 유명한 곡예사가 나이아가라 폭포에 쇠줄을 매고 그 줄 위에서 자전거를 타는 묘기를 선보였습니다.
    미국과 캐나다에서 모여든 수천 명의 관객들이 그가 묘기를 펼칠 때마다 환호성을 보냈습니다.
    마지막 묘기를 하기 직전 블론딘이 관객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아이 하나를 어깨에 얹고 줄 위에서 자전거를 타겠습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관중들이 열광적으로 외쳤다.
    "할 수 있소! 할 수 있소 ! "불론딘이 말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중에서 누가 자신의 아이를 내게 맡겨 주십시오!"
    이 말에 관중들은 갑자기 조용해졌습니다.
    지원자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최고의 유산은 건강한 심성과 좋은 습관

    네 명의 자녀를 둔 어머니가 유명한 랍비를 찾아가 물었다.
    “어떻게 하면 자녀들을 잘 키울 수 있습니까”
    랍비는 어머니를 정원으로 데려갔다.
    그는 정원에 있는 네 그루의 나무를 한번 뽑아보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갓 심어놓은 첫번째 나무를 아주 쉽게 뽑았다.
    두번째 나무는 심은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에 약간의 힘으로 가능했다.
    세번째는 심은지 꽤 지난 나무였다.
    어머니는 땀을 뻘뻘 흘리며 겨우 그것을 뽑았다.
    그러나 네번째 나무는 이미 견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어머니가 팔을 걷어붙이고 힘을 쏟았으나 나무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랍비가 어머니에게 말했다.
    “자녀교육도 이 나무와 같습니다.
    오랜 습관은 깊은 뿌리를 내려서 그것을 바꾸기가 어렵지요.
    어린 자녀에게 좋은 습관을 갖게 하십시오”

    부모가 자녀에게 물려줄 수 있는 최고의 유산은 건강한 심성과 좋은 습관이다.
    이것은 시련을 만나면 더욱 빛을 발한다.

    신앙의 부모가 자녀들에게 남겨 줄 신앙의 유산이 무엇인가?
    1. 성경 읽기
    2. 기도하기
    3. 헌금하기
    4.





    누가복음 22: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습관 / as usual(늘 하던대로)


    히브리서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습관(習慣)은 제2의 천성(天性)” 이라고 합니다.
    어떤 습관에 익숙 하느냐에 따라 삶이 결정됩니다.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에 훈련되지 않았다면 몸에 익숙해져서 자연스럽게 될 때가 계속적으로 반복하고 훈련이 필요합니다.

    유다 왕국에서 왕은 곧 메시아 입니다. 예레미야가 왕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것은 예언자가 “기름 부음을 받은 종”을 비판한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름 부음 받은 종”도 하나님 앞에서는 일군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잘못한 것이 있으면 비판을 받는 것이 당연하며, 회개하고 하나님께 자복해야 합니다.

    개혁교회는 말씀보다 사제의 권위가 더 우월하다는 것을 비판하여 시작한 교회입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는 교회를 세우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름 부음을 받은 종”을 비판하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다는 가르침과 전통이 지배하는 교회가 되었기에 왕들을 비판하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외침을 읽어가며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반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예레미야가 요시야의 아들들을 향해 퍼붓는 비판의 메시지는 “기름 부음을 받은 종” 즉 “왕들”에게 퍼붓는 외침입니다. 요시야의 뒤를 이은 네 명의 왕들이 모두  포로로 끌려가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왕들의 부정부패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 왕들만 고통을 당한 것이 아니라 그 백성들도 함께 고통을 당했습니다.

    “나는 정직하게 살았는데 왜 왕들이 지은 죄 때문에 백성들까지 벌을 받아야 하는가?” 성경의 가르침은 “기름 부음을 받은 종”들이 죄를 지을 때 백성들이 그에 대하여 침묵으로 동조한 죄를 함께 묻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라의 지도자들이 불의와 부정부패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들이 심판받을 때 함께 고통을 당해야 하는 비극적인 역사를 막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세워지는 나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넘치는 나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넘쳐흐르는 나라가 세워지기를 기도합시다.
    우리의 후손들은 마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생명의 양식을 흡족하게 먹고 살아갈 수 있도록 정치 지도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나라가 세워질 것입니다.

    ♪ 찬양 /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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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16일(금) 거짓 예언(예레미야 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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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찬송 / 27장(빛나고 높은 보좌와)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예레미야 20:1∼18
    ♦ 묵상을 위한 주제 : 거짓 예언(6절)

    ♦ 성구 : 바스훌아 너와 네 집에 거(居)하는 모든 자(者)가 포로(捕虜) 되어 옮기우리니 네가 바벨론에 이르러 거기서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너와 네가 거짓 예언(豫言)을 하여 들린 네 모든 친구(親舊)도 일반(一般)이리라 하셨느니라. 

    “거짓 예언(豫言)(prophesied lies)”을 외친 선지자 ‘바스훌(Pashhur)’과 그의 모든 가족들은 바벨론의 포로가 될 것이며 그곳에서 죽어 묻히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를 예언했던 선지자 ‘예레미야’는 조롱거리가 되었으므로 다시는 예언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의 중심은 불붙는 것 같아 골수에 사무쳐서 답답하여 견딜 수 없었다고 합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은 예루살렘의 고위층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고위층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하는 예언자를 임의로 태형에 처하고 잡아 가둘 수 있을 만큼 오만하고 권세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가 실제로 어떤 죄를 지은 것은 아니었기에, 그의 입에서 계속해서 심판의 메시지가 흘러나왔지만 붙잡아두지 못하고 하루 만에 풀어주게 됩니다.

    성전 총감독인 “바스훌”이란 이름은 “해방, 자유”라는 뜻입니다. 예레미야를 잡아가둔 일 때문에 “마골 밉사빕(두려움)”이란 이름을 얻게 됩니다. ‘바스훌’은 구원의 하나님을 심판의 하나님 두려운 하나님이 되게 만든 예루살렘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예레미야가 얼마나 사명감에 충실하였는지 그의 고백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9절).고난을 당한 후에 “다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나  마음이 편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사무치고 불붙는 열정을 느끼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사명을 감당하는 일은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예레미야로 하여금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하고 생각하게 할 정도로 괴로운 일이었습니다(14절). 두들겨 맞고 갇히는 일도 괴로웠지만, 많은 사람에게 외면당하고 모욕을 당했으며, 심지어는 친한 벗까지도 예레미야가 실족하기를 바라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기 때문에 예레미야의 심적인 부담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10절).

    그러나 고통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예레미야를 사로잡은 하나님의 손이 더 강했습니다(7절). 예레미야는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는 힘이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임을 시인합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가 마지막까지 말씀을 놓지 않고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십자가의 길은 어렵고 힘들기 때문에 내가 내 힘으로 감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힘은 어렵고 힘들 때 원망과 불평을 쏟아놓습니다. 그러나 사명에 대한 결단이 분명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길을 열어주십니다. 예레미야처럼 오늘날도 주님을 온전히 믿고 따를 때 겪게 될 어려움을 먼저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능히 감당하고 이기게 하시는 승리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믿음의 현장에서 온갖 시련과 고통을 넉넉하게 이길 수 있는 믿음을 기도합시다.


    ♪ 찬양 /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https://www.youtube.com/watch?v=rco1vI3Gr4c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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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15일(목) 살육의 골짜기(예레미야 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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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찬송 / 349장(구나 주의 도움 받고자)

    예레미야 18장은 토기장이를 통해 하나님의 주권을 말씀합니다.
    예레미야 19장은 토기 상태를 어떻게 처분하실지를 말씀합니다.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 힌놈의 골짜기는 예레미야 선지자 이전부터 이미 불길한 장소였습니다.
    이곳은 쓰레기를 태우거나, 짐승의 사체, 사람의 시체 등이 버려지는 곳이었을 뿐 아니라, 아하스나 므낫세 같은 왕이 몰렉숭배를 행했던 부정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힌놈의 골짜기에 가서 항아리를 깨뜨리라고 하신 명령은 두 가지의 중요한 의미를 가진 예언적 퍼포먼스입니다.

    첫째는, 이스라엘에게 자기 죄를 기억나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죄악이 돌이킬 수 없이 쌓여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면 깨진 항아리처럼 다시 복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경고하는 것입니다(11절).

    예수께서는 이 힌놈의 골짜기를 ‘지옥’이라는 뜻으로 사용하셨습니다(마5:22, 29, 30 외).
    히브리어로 가이 힌놈(גֵי־הִנֹּם)이라는 말이 헬라어 ‘게엔나(γέεννα)’가 되었는데,
    예레미야를 통해 선포된 대로 이곳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죽은 자들이 묻히는 곳이고, 우상이 지배하는 저주받은 장소이기 때문에 지옥이라고 칭하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지옥은 거기에서 받게 될 고통 때문에 무서운 곳이 아니라, 영원히 죽음의 지배를 받는 다는 점 때문에 무서운 곳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깨진 항아리가 다시 복구 되지 못하는 것처럼, 부활의 소망이 없는(11절) 영원한 살육의 골짜기(6절)가 바로 지옥인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인생이 우리에게 부여된 생명의 전부가 아니라, 오히려 극히 적은 일부에 불과하며,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이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온전한 분량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인데, 이는 단지 죽으면 천국에 간다는 식의 단순한 교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영원에 비하자면 한없이 적은 이 짧은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영원이라는 시간이 좌지우지된다는 무서운 교리입니다.

    예수께서 지옥을 일러주시는 까닭은 지옥이 천국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힌놈의 골짜기가 성전과 매우 가까운 곳에 붙어있는 것처럼 우리와 매우 가까운 곳에 있음을 알려주시기 위함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지옥이 어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등지고 우상숭배와 탐욕의 길에 들어선 사람이 사는 인생이 곧 지옥임을 알려주시기 위함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자 하는데, 굳이 영원한 죽음의 땅 스올을 선택할 이유는 없겠습니다.
    믿음을 얻었으니,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길을 걷는 주의 백성으로 살아갑시다.


    깨진 오지병의 비유(예레미야 19:1-15)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토기장이의 집에서 오지병을 산 예레미야는 그것을 들고 힌놈 골짜기로 가서 유다의 죄악을 지적하고 유다 백성의 어른들과 제사장들이 보는 앞에서 그 오지병을 깨뜨리면서 유다의 멸망을 선포합니다.

    이어서 예레미야는 장소를 옮겨 예루살렘 성전뜰에 서서 다시 한번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확실히 전했습니다.

    오지병을 들고 유다에 임할 재앙을 선포합니다(1-9절)

    오지병을 구입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지시에 따라 “백성의 어른들과 제사장의 어른 몇 사람들“을 데리고 힌놈 골짜기로 내려갔습니다.(1-2절), 이들을 데리고 힌놈 골짜기로 내려간 것은 자신이 전하는 하나님의 메시지에 대해서 증인으로 삼기 위해서였습니다.

    예레미야가 유다의 지도자들을 이곳으로 데려와 메시지를 전한 것은 재앙으로 멸망당할 유다의 잔혹한 모습을, 부각시키기에 적합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곳은 유다가 멸망(滅亡)하게 된 원인이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異邦神)을 섬겼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기에도 가장 적합했던 것입니다.

    유다에 임할 하나님의 재앙을 선포하고 그 이유를 밝힙니다(3-5절)

    하나님을 버림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떠나 이방의 더러운 우상들을 섬김으로써, 언약의 땅을 불결하게 만들었습니다.
    다른 신들에게 분향함입니다. 하나님을 버린 유다 백성들은 자기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이방의 우상들을 섬겼습니다.

    무죄한 자의 피로채움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우상 숭배로 인한 영적 타락뿐 아니라 도덕적인 부패와 사회적인 불의 등으로 무죄한 자의 피를 많이 흘렸습니다.

    바알을 숭배함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가나안 땅의, 대표적 우상인 바알을 섬기기 위해 산당을 지었고 자녀를 제물로 불살라 드렸습니다.

    재앙의 결과는 살육과 수치를 당합니다(6-9절)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상을 섬김으로써 약속의 기업을 불결케 만든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재앙이 임할 것인데 그결과는 너무도 비참할 것입니다.

    첫째. 도벳이 “살육의 골짜기”로 불려질 것입니다.
    둘째. 유다와 예루살렘의 계획이 무산될 것입니다.
    셋째. 세상 사람들의 놀람과 모욕거리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넷째. 성이 포위된 상황에서 인육을 먹게 될 것입니다.

    오지병을 깨드림으로써 유다의 멸망을 예언합니다(10-13절)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그 오지병을 깨뜨리라고 하시면서 또 다른 말씀을 주셨습니다.

    깨진 오지병은 유다가 버림받는 다는 것입니다(10-11절),

    하나님의 명령대로 선지자는 함께 동행한 유다 백성의 지도자들 앞에서 들고 있던 오지병을 땅에 내어던져 산산조각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레미야는, 자신이 왜 오지병을 깨뜨렸는지 깨진 오지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11절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사람이 토기장이의 그릇을 한번 깨뜨리면 다시 완전하게할 수 없나니 이와 같이 내가 이 백성과 이 성을 파하리니 그들을 매장할 자리가 없도록 도벳에 장사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오지병”은 유다와 예루살렘을 상징했습니다.

    그리고 오지병이 깨져 산산조각이 난 것은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이 적군에 의해 철저히 파멸될 것을 상징했습니다. 말하자면 심판의 날에 하나님께서 유다와 예루살렘 성을 마치 오지병을 집어 던지듯 산산조각을 내리라는 의미였습니다.

    깨진 오지병은 다시 쓸 수없어 버려질 뿐이기에 산산조각이 난 오지병은 심판으로 파멸될 유다의 운명을 그대로 보여준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審判)의 도구인 바벨론 군대(軍隊)에 의해 유다가 짓밟히고 예루살렘 성이 파괴(破壞)되며 유다 백성(百姓)들은 적군의 칼에 무참히 살육당하게 될 것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버림당한 이유는 우상숭배 때문입니다(12-13절)

    오지병을 깨뜨린 예레미야의 행위는 유다와 예루살렘이 깨뜨려진 오지병처럼 하나님게 심판을 받고, 버려질 것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행위였습니다. 12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이곳과 그중에 거민에게 이같이 행하여 이성으로 도벳 같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도벳“은 예루살렘 남서쪽에 있는 ”힌놈의 아들 골짜기“를 가리키는 말인데 이곳은 죽은 죄인의 시신이나 동물의 죽음을 불태워 처리하는 장소였습니다. 또한 이방 풍속을 좇아 자녀를 불살라 제사드리는 몰록신을 숭배하는 제단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읍을 “도벳”같게 할 것이라는 말은 예루살렘 성을 죽은 시체들로 넘쳐나는 더러운 곳으로 만들겠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인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침공할 때 그들의 무자비한 칼날 앞에서 살육당한 무수한 시체들이 예루살렘성내에 가득차게 되어 성읍 자체가 매장지가 되리라는 말입니다

    예루살렘 성전 뜰에서 심판을 확언합니다(14-15절)

    도벳 곧 힌놈의 골짜기에서 오지병 을 깨뜨림으로써 유다의 멸망을 생생하게 전한 예레미야가 이제 도벳에서 예루살렘 성전(聖殿) 뜰에 섰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모여 있던 군중(群衆)들에게 도벳에서 선포(宣布)했던 하나님의 재앙(災殃)을 다시 선포했습니다. 즉 도벳에서의 예언(豫言)을 확인(確認)한 것입니다. 15절에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 성에 대하여 선언한 모든 재앙을 이성과 그 모든 촌락에 내리리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외친 메시지는 또 다른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한 이방(異邦) 세력(勢力)은 예루살렘을 멸망케 할 수 없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바로 그 성전 뜰에 서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외친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가 놓여 있는 성전이라도 백성들이 하나님께 거역하면 심판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성전이나 예배같은 외적인 것들이 그들을 죄에 대한 심판에서 보호해 주지는 못한다는 교훈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레미야는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재앙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다시 밝혀 줍니다. 15절 하반절에 “이는 그목을 곧게하여 내 말을 듣지 아니함이니라 하셨다 하라.”고 했습니다.

    “목을 곧게한다”는 표현은 목을 뻣뻣하게 세운 채 버티고 반항하는 모습을 연상시켜 주는 표현으로 “불순종”을 말합니다. 모세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할 경우 무서운 재앙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선지자들고 끊임없이 불순종의 결과는 심판뿐임을 거듭해서 경고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시체가 뒹구는 죽음의 골짜기가 된다는 저주의 예언이 선포된 이유는 유다가 하나님께로 돌이키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목을 곧게 하여”라는 표현에서 그들의 거부가 고집스럽고 의도적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유다의 멸망은 스스로 저주의 길로 고집스럽게 치달은 결과, 그들의 의지와 선택의 결과였던 것입니다.
    하나님 심판을 이 세상의 권력으로나 명예로나 돈으로 아니 견고한 요새로도 피할길은 없습니다.
    오직 한길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 길만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아야 하나님께 합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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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14일(수) 헛된 말(예레미야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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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찬송 / 465장(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예레미야 18장은 토기장이를 통해 하나님의 주권을 말씀합니다.
    예레미야 19장은 토기 상태를 어떻게 처분하실지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민족에게 축복을 내리기로 결정하셨을지라도 그 백성이 거역하고 불순종하면 축복을 취소하실 수 있고,
    어떤 민족을 멸하기로 결정하셨다가도 그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이키면 얼마든지 심판을 취소하실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본문의 메시지는 유다 백성에게 이미 심판이 선포되었을 지라도 이제라도 그들이 돌이키면 심판이 취소될 수도 있다는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토기장이의 비유입니다(1-12절)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토기장이의 집을 방문한 예레미 야는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그릇을 만드는 것을 유심히 살펴본 후에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해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토기장이의 집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성읍 부근에 있던 “힌놈 골짜기”로 내려갔습니다.
    토기장이가 자신의 의도대로 그릇을 만드는 것을 봅니다(3-4절)

    토기장이는 어떤 모양의 그릇을 빚다가도 그것이 마음에 안들면 얼마든지 흙으로 다시 뭉쳐 얼마든지 자신이 원하는 형태의 그릇을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토기장이의 의미입니다(5-12절)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그릇을 빚는 작업을 지켜본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토기장이 비유의 핵심은 토기장이는 "하나님"
    진흙은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토기장이가 진흙을 다루는 것을 통해 강조하려는 내용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입니다.

    토기장이 비유의 교훈은 아주 분명해졌습니다.

    진흙과 같은 이스라엘이 토기장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고 신실하면 하나님께 복을 받아 번성할 것이고,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불순종과 배역의 길을 걸으면 재앙을 받아 뽑히고 깨뜨려질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같은 사실에 기초하여 예레미야는 토기장이 비유의 결론을 내립니다.

    불순종과 배역의 길을 걷고 있는 이스라엘은 토기장이에게 소용이 없는 그의 마음에 들지도 않고 가치도 없는 진흙덩어리처럼 하나님에 의해 깨뜨려질 수밖에 없으므로 속히 악한 길에서 돌이키라는 말입니다.

    유다의 가증함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입니다(13-17절)

    이스라엘의 가증함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립니다(13-15절)
    애굽의 노예로 있던 그들을 바로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언약을 맺고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 하나님께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고 충성할 것을 굳게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언약을 파기하고 이방의 우상을 섬긴 것입니다.
    자기들의 신으로부터 축복과 은총을 받지 못할 열방들도 자기들의 신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데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받은 이스라엘이 그분을 저버린 것은 아주 특이한 경우로서 가증함의 극치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징벌하십니다(16-17절)

    마땅히 걸어야할 옛길을 버리고 자신들이 새로 낸 곁길로 가는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징벌이 선포됩니다.
    그 땅으로 치소가 되게 합니다.
    치소하다는 말은 “혀를 끌끌찬다”는 의미입니다.

    그 사람들을 흩어버립니다.
    동풍이 농작물을 흩어버리듯이 하나님의 심판이 유다백성들을 흩어버리리라는 것입니다.
    의심할바 없이 이것은 바벨론 군대에 의해 포로 되는 것을 가리키는 비유입니다.

    하나님의 징벌을 요청하는 예레미야의 탄원입니다(18-23절)

    하나님의 주권과 유다의 가증한 죄악을 지적하면서 심판을 선포한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또 다시 유다 백성들에게 의해서 철저히 외면당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를 지적하면서 재앙을 선포하는 예레미야에 대해서 적개심을 품고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면서 도움을 청합니다.
    유다 백성들은 예레미야의 메시지에 심한 반발감을 나타냈습니다(18절)

    “그들이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꾀를 내어 예레미야를 치자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지혜로운 자에게 모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니, 오라 우리가 혀로 그르 치고 그의 아무 말에도 주의치 말자 하나이다.”

    양심이 마비된 눈먼 유다의 종교 지도자들이 들려주는 거짓에 길들여진 유다 백성들은 거짓이 거짓으로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평안하다, 평안하다”하면서 아무일도 없는 양 백성들을 현혹하는 기존(旣存)의 종교(宗敎) 질서(秩序)에 익숙해져 있던 유다 백성들은 심판을 선포하는 예레미야를 싫어했습니다. 바벨론의 침공과 유다의 멸망을 선포하는 예리미야를 동족의 배반자(背反者)로 간주했습니다.

    “여호와여 나를 돌아보사 나로 더불어 다투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소서.”라고 했습니다(19절)
    예레미야는 이처럼 선을 악으로 갚는 배은 망덕한 유다 백성들에게 공의로운 판결을 내려줄 것을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박해자들을 응징해 줄 것을 탄원합니다.(21-23절),

    예레미야는 아주 격렬한 심판(審判)을 구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자녀들이 기근을 당합니다.
    2. 칼에 의해 살육당합니다.
    3. 아내는 자녀와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됩니다.
    4. 장정들은 죽임을 당합니다.
    5. 청년들은 전쟁터에서 칼에 맞아 죽습니다.

    유다의 각 집들에서는 부르짖음이 들립니다 : 남편이나 혹은 자녀들의 죽음을 놓고 슬프게 통곡하는 여인들의 부르짖음일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들이 왜 이같은 무시무시한 전쟁(戰爭)의 참화(慘禍)를 겪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밝혔습니다.

    22절에서 “이는 그들이 나를 취하려고 구덩이를 팠고 내 발을 빠치려고 올무를 베풀었음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유다 백성(百姓)들은 예레미야의 경고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을 전한 선지자를 죽이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예레미야를 배척하는일이 아니라 예레미야를 보내신 하나님을 배척하는 행위였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예레미야를 죽여없앰으로써 예레미야를 보내신 하나님을 자신들의 삶에서 완전히 제외시키기를 원했습니다.

    따라서 예레미야는 회개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배척하는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계획(計劃)대로 심판(審判)을 베푸실 것을 청한 것입니다. 이제 유다에게는 긍휼이나 인내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만이 그들을 깨우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23절에 “여호와여 그들이 나를 죽이려 하는 계략을 주께서 다 아시오니 그 악을 사하지 마시며 그 죄를 주의 목전에서 도말치 마시고 그들로 주의 앞에 넘어지게 하시되 주의 노하시는 때에 이같이 그들에게 행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유다 백성을 향한 예레미야의 격렬한 심판의 호소는 그가 받은 상처에 대한 앙갚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복수의 탄원이 아니라 심판적인 복수의 탄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결국 복수라는 형태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임하는 심판은 그들이 지은 죄에 대한 마땅한 보응인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바르게 선포하는 사역자들은 홀대를 받고 습니다.
    귀를 솔깃하게 하는 말을 전하는 곳에는 구름때처럼 몰려듭니다.
    예레미야 때와 꼭같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평안이다 평안이다”라고 하는 말에 솔깃해서 선지자의 말을 무시했습니다.
    사역자의 경고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호세아 10:4
    저희가 헛된 말을 내며 거짓 맹세를 발하여 언약을 세우니 그 재판이 밭이랑에 돋는 독한 인진같으리로다.

    에베소서 5:6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디도서 1:10

    복종치 아니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특별히 할례당 가운데 심하니


    예레미야 2:25
    내가 또 말하기를 네 발을 제어하여 벗은 발이 되게 말며 목을 갈하게 말라 하였으나 오직 너는 말하기를 아니라 이는 헛된 말이라 내가 이방 신을 사랑하였은즉 그를 따라 가겠노라 하도다.

    예레미야 18:12
    그러나 그들이 말하기를 이는 헛된 말이라 우리는 우리의 도모대로 행하며 우리는 각기 악한 마음의 강퍅한대로 행하리라 하느니라.

    헛된 말의 의미는 우상 숭배를 하지 말라고 깨우쳤을 때 그 말을 헛된 말이라고 하며 듣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헛되다는 히브리 단어눈 "노아쉬" 라고 합니다
    "노아쉬"의 뜻은 "아무런 소망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지 않을 때 유다 민족의 미래는 어둡습니다.
    이둠이  계속되어 결국에는 유다 나라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악한 길에서 돌이키라는 말에, 유다 백성들은 12절에 ‘이는 헛되니’라고 응답합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어리석지 않을 수 없습니다.
    ‘헛되다’의 원어 ‘노아쉬’는 ‘아무런 소망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 소망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소망을 두지 않았을 때, 그들의 미래는 더욱 어두워지고, 궁핍한 삶을 살아가며, 결국 심판을 받아 절망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우리의 소망이 어디에 있는지를 재확인해줍니다.
    기독교 사상가 파스칼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는 모든 비참함과 불행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에서 사용된 헛된 말을 살펴보겠습니다.

    호세아 10:4
    저희가 헛된 말을 내며 거짓 맹세를 발하여 언약을 세우니 그 재판이 밭이랑에 돋는 독한 인진같으리로다.

    마음에도 없는 약속 또는 빈말이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5:6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어리석은 말, 허황된 이론



    디모데전서 1:6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디모데후서 2:16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디도서 1:10
    복종치 아니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특별히 할례당 가운데 심하니.

    (공동번역) 쓸데없는 토론
    (현대인의 성경) 터무니 없는 말
    (KJV) vain talkers
    (NIV) mere talkers
    (NASB) empty talkers


    “믿는 구석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무언가를 의지하고 자신 있게 행동할 때 대개 그런 말을 사용합니다. “나훔”의 메시지는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에 살고 있는 백성들에게 주어졌는데 니느웨 백성들에게는 바로 “믿는 구석”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견고한 니느웨 성입니다. 높이 30미터, 넓이 15미터로 넓고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였고, 2백 개의 성루들로 요새화되었으며, 깊은 해자(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주위를 둘러서 판 못)로 둘러싸여진 진실로 무너질 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성이 안전하게 지켜줄 것으로 믿었습니다. 더욱이 니느웨는 100여 년 전에 요나의 메시지로 전 백성이 하나님 앞에 회개한 후 큰 부흥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훔 선지자가 메시지를 전할 당시에 니느웨는 불경스럽고 부도덕한 태도로 악한 길로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이 때 나훔을 통해 하나님의 메시지가 전달되었는데 요나처럼 회개의 메시지를 전한 것이 아니라 인내심이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을 정도로 사악한 백성들에 대해 홍수로 인한 멸망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니느웨 백성들은 전혀 회개할 기미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는 구석, 견고한 니느웨 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훔의 예언대로 주전 612년에 바벨론에 의하여 이 성이 무너졌습니다. 난공불락의 성이 어떻게 무너졌을까요? 역사에 의하면 바벨론 군사들이 티그리스강을 막아서 물을 저장했다가 그 물줄기를 니느웨로 틀어서 쓰나미에 모든 것이 휩쓸려가듯이 홍수로 니느웨 성을 무너뜨렸다고 합니다. 150년 전에 고고학자들이 무너진 니느웨 성의 조각을 발견하고 영국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가 범람하는 물로 그 곳을 진멸하시고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시리라”(나훔 1:8). 하나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믿는 구석”은 헛된 믿음입니다. 결코 안전하게 지켜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안전은 인간의 강함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이것이 소선지서 나훔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입니다. 성경은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고 합니다(시 127:2). 달콤한 잠, 즉 평안은 하나님께서만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로 살아갈 때 폭풍에서도 단잠을 잘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는 구석”은 오직 하나님뿐이심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추수감사절에 그 분이 우리의 아버지 되심으로 인하여 진정한 감사를 올려 드립시다.
    유럽의 한 성당에서 신부가 성찬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한 어린아이가 그 신부를 도와서 성찬을 준비합니다.
    그러다 그만 이 어린아이가 실수를 해서 포도주가 든 그릇을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신부는 버럭 화를 내면서 저리 나가라고, 너 같은 녀석 필요 없다고 내쫓아 버렸습니다.
    이 아이가 커서 무신론자가 되고 그리고 철저한 공산 국가의 독재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유고의 ‘티토’ 대통령입니다.

    그 동시대에 또 다른 한 성당에서 신부가 성찬을 준비하는데 어린이가 보좌를 합니다.
    어린이가 그만 실수해서 포도주잔을 땅에 깨뜨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신부가 웃으면서 “괜찮아 괜찮아! 너도 앞으로 큰 신부가 되겠어, 나도 너만 한때는 그런 실수를 많이 했거든,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훌륭한 신부가 됐잖아.”
    그러면서 오히려 아이를 격려해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답니다.
    그 아이가 무럭무럭 커서 유명한 ‘플턴신’ 대주교가 되었다고 합니다.

    똑같은 실수와 잘못을 저질렀지만 어떻게 반응하게 되느냐에 따라서 그 아이들의 인생이 전혀 다른 운명으로 갈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이란 이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말이란 이처럼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6.25때 이야기입니다 부모를 잃어버린 한 남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빠가 불행하게도 폐결핵이 걸렸습니다. 치료할 돈도 없습니다. 여동생이 어쩔 수 없이 술집에 가서 술을 따르면서 돈을 벌었습니다. 물론 오빠에게는 절대적으로 비밀 이였어요. 그리고 그 돈으로 오빠를 병원에 보내서 치료를 받게 했습니다. 그 후에 전쟁도 끝나고 오빠도 건강해졌습니다. 두 사람은 교회에 나가서 열심히 봉사하고 충성하게 되었습니다. 

    아주 신실한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인들 가운데 바로 이 여동생이 술집에 있었던 사실을 아는 교인이 있었습니다. 이 교인은 다니면서 그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덕스러운 말은 아니었습니다. 오빠가 그 사실을 알게 되고 온 교인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오누이는 충격을 받고 그만 스스로 생명을 끊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좀 더 덮어줄 수 있었더라면, 지나간 과거의 일인데, 이제 새사람이 되었는데 그 뭐 그리 중요하겠어요. 그걸 꼭 끄집어내서 소문을 내고 결국 두 사람을 비극으로 몰아갔다는 것입니다.

    말이란 이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말이 있는가 하면 사람을 죽이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에게 유익한 말이 있는가 하면 해로운 말이 있습니다. 축복의 말이 있는가 하면 저주의 말이 있습니다. 화평케 하는 말이 있으면 불안케 하는 말이 있습니다. 공동체를 세우는 말이 있는가하면 공동체를 허무는 말도 있습니다. 그래서 말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돈도 그렇습니다. 돈을 나쁜 일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돈을 얼마든지 선한 일에 쓰면 사람을 살릴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말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나라의 임금이 신하들을 불러놓고 “너희들이 가서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 귀한 것을 가지고와라!” 또 다른 신하들에게는 “너희는 세상에서 가장 천하고 나쁜 것을 가지고와라!” 명령을 내렸습니다. 일 년 후에 신하들이 통에 무언가를 담아서 가져왔는데 제일 귀한 것이 무엇인가 가져온 것을 뚜껑을 열어보니까 사람의 혀라는 것입니다. 혀는 죽을 사람도 살리고, 낙심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고, 절망한 자에게 소망을 주기에 혀가 이렇게 훌륭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한 부류의 신하들이 세상에서 가장 천하고 나쁜 것을 담고 온 상자를 보니까 거기에도 역시 사람의 혀가 있었습니다. 혀라는 것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증오하게 만들기도 하고, 사기를 무너뜨리기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야고보서 3장 2절에 보니까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라고 말씀합니다. 말은 이처럼 중요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잘못된 말에 대해서 엄히 경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에 보면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라. 남을 헐뜯는 말 모두 버리라”고 말씀합니다. 디모데후서 2장에 보니까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쓸데없는 말 자꾸 하면 문제만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야고보 1장에 보면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고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했습니다. 듣기는 빨리하고 말은 좀 두 번, 세 번 생각한 다음에 하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에 보니까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더러운 말, 덕이 되지 않는 말, 은혜가 안 되는 말은 아예 입에도 담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디모데후서 2장에 보면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부부가 왜 잘 나가다 싸웁니까? 꼭 말 때문에 싸우고, 말 때문에 말꼬리 잡아서 그 말로 인해서 어려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또 좋은 말에 관한 격려도 있습니다. 잠언 16장에 보면 “선한 말은 꿀 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 좋은 말은 보약보다 좋다는 것입니다. 그 말 한마디에 병이 떠나갑니다.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엔돌핀이 막 솟구칩니다. 

    잠언 25장에 보면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 경우에 합당한 말은 정말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에 보니까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데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하라.” 덕을 세우는 말만 합시다. 덕을 세우는 말을 하고 비방하는 말, 헐뜯는 말은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것이 진실일지라도 공동체에 덕이 되지 않으면 묻어두는 것입니다.

    잠언 18장에 보니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혀를 쓰기 좋아하는 사람은 그 열매를 먹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데로 우리의 인생이 만들어 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에고치 알고 계시지요?  이 누에고치는 자기 입에서 나오는 실을 가지고 자기 집을 만듭니다. 누에고치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 누에의 나오는 실을 가지고 누에고치를 만들어서 자기가 그 속에 있는 거예요. 어찌 보면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이 결국 우리의 집을 지어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근사한 빌딩을 지어가고, 어떤 사람은 초라한 초가집을 지어가고, 어떤 분은 개집 같은 것을 지어갑니다. 우리의 말이 우리 인생의 집을 지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입에 이 은혜가 안 되는 말, 덕이 떠나는 말, 그런 말은 입에 담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왕이면 축복의 말, 소망의 말, 사랑의 말, 믿음의 말만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것이 우리 집을 지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붕어빵이 있고 잉어빵이 있습니다. 겨울에 화로에 밀가루를 반죽해서 붕어모양의 틀에 넣으면 붕어빵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붕어빵을 잉어빵으로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간단합니다. 붕어빵 틀을 버리고 잉어빵 틀을 놓으면 되는 것입니다. 어떤 틀을 놓느냐에 따라 빵이 결정 됩니다. 우리 인생을 바꾸려면 말을 바꿔야 합니다. 언어습관을 바꿔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성경 본문에서 말로 인해 운명이 갈라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입성을 앞에 두고 12명의 정탐꾼을 파송했는데 10명의 정탐꾼은 그 가나안 땅에 대해 매우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그 땅에 가보니까 그 땅은 정말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었습니다. 그들의 키는 장대 같아서 우리는 그들을 이길 수가 없고 그 성은 견고합니다.” 이렇게 악평을 했습니다. 우리는 메뚜기와 같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을 메뚜기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으니 온 백성이 술렁거립니다. ‘우리가 지금 고생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세상에, 그런 들어가지도 못하는 땅에 들어가려고 여기까지 왔나?’ 하면서 백성이 원망을 하고, 불평을 하고, 돌을 들어서 지도자들을 치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여호수아와 갈렙이 나와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본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입니다. 우리는 그 땅을 쳐서 이길 수 있습니다. 능히 이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 땅에 들어가게 하실 것입니다.”라고 긍정적인 믿음의 보고를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동요된 백성들은 돌아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매우 부정적인 말을 하는데 “우리가 애굽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을 걸, 광야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을 걸. 우리가 여기까지 와서 죽는다.”라고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광경을 다 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사진을 찍고 녹음을 해두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말한 대로 갚아주십니다. 그들이 말한 대로 보응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불평하고 원망할 때에는 ‘하나님의 녹음기에 또 녹음이 됐겠구나!’ 라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서 언어생활에 대한 어떤 말씀을 주고 계실까요?

    첫째, 하나님께서는 원망의 소리를 듣고 계십니다. 이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소리를 다 듣고 계십니다. 본문 27절 말씀을 읽어봅니다.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원망의 소리, 불평의 소리 하나님께서 다 들으십니다. 이래도 원망의 소리, 이래도 불평의 소리 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다 듣고 기록하고 계십니다. 우리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임금이 없는 곳에서는 나랏님도 욕한다.’ “임금이 안보이면 나랏님도 욕하는데 왜 욕하지 못하느냐?”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틀린 말입니다. 나랏님을 욕하면 하나님께서 다 듣고 기록하신다는 것입니다. 원망조차도 하나님은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전화 통화를 하는데 그 전화 내용이 다 녹음되고 있다고 하면 여러분 말조심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이것은 아무도 못 듣는 거야, 비밀이야’ 이래서 마구 이야기 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다 녹음되어진다면, 만약에 제가 지금까지 핸드폰에서 한 이야기가 다 녹음되어져서 공개된다면 얼마나 부끄러워질까요? 생각해보십시오. 끔찍하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소리를 다 기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의 불평과 원망을 다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후일에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우리는 말을 통해서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어떤 교회의 교인들이 너무 불평이 너무 많아서 목사님께 와서 자꾸 누구 험담을 하고 욕을 하고 그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어느 날 기도하다가 지혜가 떠올랐습니다. ‘교인 불평록’이라는 공책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와서 뭐 불평을 하면 “아 그렇습니까. 그럼 여기다 적겠습니다.” 하면서 다 적었습니다. “집사님께서 말씀하는 것, 어느 권사님이 어떤 일은 덕이 안 된다는데 지금 제가 적습니다.” 그리고 싸인하라고, 당신이 말한 것이 사실인지 싸인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싸인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불평하는 사람들이 줄어들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내가 한 말에 책임을 질 수 있으십니까?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불평하고 원망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 귀를 기울입니다.

    여러분! 하늘나라와 흑암의 나라가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언어는 무엇입니까? 찬양과 감사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찬양하고 감사합니다. 이것이 우리 성도들의 언어입니다. 그러나 흑암의 나라, 사탄의 나라는 무엇입니까? 불평과 원망입니다. 여러분! 사탄의 백성이 되고 싶으십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싶으십니까? 불평하고 원망하면 사탄의 자녀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원망의 소리를 들으신다는 거 꼭 마음에 새기십시오.

    두 번째 주시는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한 대로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너무너무 무서운 말입니다. 내가 말한 대로 하나님께서는 똑같이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 28절부터 30절까지 함께 읽습니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참 무서운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두고 맹세하신 말씀입니다. 말한 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그 말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기서 죽는 것이 낫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결국 다 죽었습니다. 정탐꾼이 정탐하고 돌아온 그 40일에 1년을 곱해가지고 40년 동안 그들은 광야에서 방황하고 유리하다가 20세 이상 된 성인들은 광야에서 죽어서 시체가 되어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20세 이하의 때 묻지 않은 젊은이들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와 갈렙 “우리는 그 땅을 이길 수 있습니다. 들어갈 수 있습니다.” 라고 말했던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말한 대로 된 것입니다. 이 말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정말 실수를 해도 “아이고 죽겠다.” 그런 말은 하지 마십시오. “죽겠다.” 물론 여러분은 그 말대로 다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말한 것은 그 말로 인해 비참한 결과가 다가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메랑의 원리라는 것입니다. 부메랑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던지면 돌아서 자신의 손에 다시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황금률, 마태복음 7장 12절 말씀을 보면 “너희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존경받고 싶으냐? 남을 먼저 존경하라. 축복받고 싶으냐? 너희가 먼저 남을 축복해라. 이것이 바로 황금률입니다. 말한 대로 응답하십니다.

    ‘사또 도미오’라는 일본사람이 쓴 책 중에는 <인생은 말하는 대로 된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매트 버드’라는 미국사람이 쓴 책 중에는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라는 책도 있습니다. 

    여러분! 이젠 말을 함부로 하시면 안 됩니다. 자녀들에게도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너는 그렇게 하다가 먹고나 살겠냐?” 이렇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자녀들에게도 이제는 축복을 선포해 주십시오. 비록 공부를 못하고 장난꾸러기일지라도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셔, 아빠 엄마는 너를 너무너무 사랑해. 넌 앞으로 훌륭한 인물이 될 거야.” 이 말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빌리그레이엄’목사님이 어렸을 때는 얼마나 장난꾸러기였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동네사람들은 “빌리가 커서 뭐가 되겠냐? 저거 깡패나 되겠지.” 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가 믿음이 좋은 분이었습니다. “빌리! 너는 말도 잘하고 너는 훌륭한 인물이 될 거야. 하나님께서 너를 귀하게 쓰실 거야.” 이렇게 칭찬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빌리그레이엄’ 같은 훌륭한 부흥강사가 나온 것입니다.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한 맥아더 장군은 어릴 때 완전히 싸움꾼이었습니다. 동네사람들은 맥아더만 보면 학을 땝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맥아더를 꼭 껴안고 “맥아더는 앞으로 훌륭한 인물이 될 거야. 훌륭한 장군이 될 거야.” 그랬더니 맥아더는 육군사관학교 졸업하고 훌륭한 대장군이 됩니다. 그 부모가 하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여러분! 주변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그 사람의 말과 그 사람의 인격은 비례하는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대로 그의 인생이 만들어져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집을 짓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믿음의 말을 하면 믿음의 집을 지어가는 것이고 소망의 말을 하면 소망의 집을 지어가는 것이고 사랑의 말을 하면 사랑의 집을 지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부정적인 말, 비판적인 말을 하면 다 부서져가는 비판적인 집을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주위를 한번 둘러보십시오. 절망적인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소망 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거친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부드러운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인생도 힘듭니다. 더러운 말을 입에 담는 사람이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거 보셨습니까? 없습니다. 부정적인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긍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거 보셨습니까? 없습니다. 불신앙의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신앙적인 삶을 사는 거 보셨습니까? 없습니다. 비방을 일삼는 사람이 남에게 칭찬 받는 거 보셨습니까? 없습니다. 타인을 무시하는 말을 뱉은 사람이 존경받고 사는 거 보셨습니까? 없습니다. 사람은 그 입술의 열매대로 먹으며 살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지혜로운 자의 혀는 영약과 같다고 말합니다.

    말에는 기술적인 힘이 있는 것입니다. 선한 말을 하면 내 마음도 선해지는 것입니다. 악한 말을 하면 내 마음도 악해지는 것입니다. 음란한 말을 하면 내 마음도 벌써 음란해지는 것입니다. 중요하지 않습니까? 아무생각 없다가도 누가 자꾸 옆에서 음란한 말을 하면 끌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비방하는 말,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을 멀리하십시오. 여러분도 거기 전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말을 하고 축복의 말을 하는 사람들과 어울리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이 성장할 줄로 믿습니다. 잠언 6장 2절에 보니까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 내 입의 말로 내 인생의 결정되어지는 것입니다. 운명이 결정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제는 말 한마디라도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듣기는 빨리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십시오. 두 번 세 번 깊이 생각하십시오. 정말 이 말이 내게 축복이 되는지, 남에게 유익이 되는지. 이 말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세 번째로는 말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여러분! 말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마가복음 11장 20절 이하를 살펴보았습니다.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이러한 말의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플러 신학교 ‘찰스 크래프트’ 교수가 <신자가 소유한 놀라운 권세>라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온 우주를 다스리는 모든 권세를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만물의 영장으로 인간을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참으로 악한 뱀의 꼬임에 넘어가서 그 권세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권세를 사탄이 빼앗아갔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40일 동안 금식하고 마귀에게 시험당할 때 마귀는 예수님을 향해서 외칩니다. “내게 절하라. 내가 너에게 권세를 주겠다.” 마귀가 가지고 있는 권세를 감히 예수님에게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피를 흘리시고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그 잃어버린 권세를 다시 찾아주셨습니다. 

    이제 우리 모든 믿는 자들에게는 주님이 찾아주신 그 놀라운 권세가 소유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비밀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것은 내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세 있는 말씀이 선포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풍랑을 향해 명령하신 것처럼, 이제 우리 자녀의 입에도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 한마디도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두려움이 오십니까? 여러분! 두려움을 향해서 명령하십시오. “두려움은 떠나갈지어다.”, “풍랑은 잔잔해질지어다.”, “질병은 치료받을지어다.”, “장애물은 해결되어질지어다.” 여러분! 선포하시고 명령하십시오. 여러분의 말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도 앉은뱅이를 향해서 “은과 금은 없지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네게 명하노니 일어나 걸어라.”고 했을 때 그가 일어나 걸을 수 있었던 것은 그는 권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떤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이제는 믿음의 말만 하십시오. 믿음의 말이 아니면 하지 마십시오. 불신의 말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소망의 말이 아니면 하지 마십시오. 정말 이 말이 남에게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고, 격려가 되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의 말만 하십시오. 그것이 격려를 되고, 칭찬해 주고, 그를 일으켜 세워주는 말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인생의 성공하는 비결은 바로 우리가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상인이 길거리에서 사람들을 불러모아놓고 말합니다. “성공하는 지혜가 여기 있습니다. 돈을 내면 그 지혜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이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고 몰려들었습니다. 돈을 다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성공하는 지혜가 무언가 들으려 했습니다. 그 때 그 사람은 딱 한 마디를 남기고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말 조심해.” 그리고 떠나갔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공하는 비결입니다. 말만 잘해도 천 냥 빚을 갚고, 말만 잘해도 죽을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대로 여러분의 인생이 만들어져가는 것입니다.

    어떤 시어머니는 아주 말이 거칠고 당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 외아들이 하나 있는데 며느리를 봤습니다. 참 참한 예수 믿는 며느리가 들어왔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다 혀를 찼습니다. “저 뭘 모르고 들어왔지, 저 집에 오면 죽어나가지, 살지 못할 텐데. 시어머니가 얼마나 말이 거칠고 독살스러운데.” 그런데 이 며느리가 너무 지혜롭습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초전박살 내려고 트집을 잡았습니다. 초반에 기를 잡으려고 무슨 일만 있으면 “너는 친정에서 그런 것도 못 배워가지고 왔느냐고, 무식한 년이라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며느리는 화를 내지 않습니다. “아이고 어머니, 저는 친정에서 별로 배운 게 없어요. 시집에 와서 훨씬 많이 배우네요. 어머니, 많이 지도해 주세요.” 이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습니다. 또 맘에 안 드는 일이 있으니 “야 너는 대학까지 나온 년이 그것도 모르냐?” 이 며느리가 얼마나 지혜로운지 “아이고, 어머니! 지금은 대학 나와 봤자 옛날의 초등학교 수준밖에 안 돼요. 어머니가 많이 가르쳐 주세요.” 그랬더니 시어머니가 손 들어버렸습니다. 이런 며느리에게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 이제 내가졌다. 너 하고 싶은 데로 다 해라.”라고 말했습니다. 자기를 죽이고 지혜로운 말로 시어머니에게 대응할 때 시어머니 마음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말의 지혜입니다.

    말은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입술에 이제 아름답고 귀한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복음을 증거하며 실망한 자들을 일으키고 낙심한 자들에게 용기를 주는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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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13일(화) 생수(生水)의 근원(根源)(예레미야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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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찬송 / 336장(여러 해 동안 주 떠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예레미야 17:1∼27

    ♦ 묵상을 위한 주제 : 생수의 근원(13절)

    ♦ 성구 : 이스라엘의 소망(所望)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主)를 버리는 자(者)는 다 수치(羞恥)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記錄)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生水)의 근원(根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고 의지하려 합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나의 힘으로 삼는다는 것이 쉬워 보이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 통장의 잔고는 많으면 많을수록 내 삶을 보다 윤택하게 해줄 수 있습니다.
    내 손에 있는 권력은 쥐면 쥘수록 나의 영향력을 보다 명확하게 드러내줄 수 있습니다.
    내 머릿속의 지식은 쌓이면 쌓일수록 이 세상을 보다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리고 내 몸이 건강하면 건강할수록 이 모든 것들을 보다 풍성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마치 어리석은 짓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다릅니다.

    온전한 믿음의 삶은 믿음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은 능동형(能動形)이 되고 하나님을 믿는 나는 수동형(受動形)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14절)

    이 말씀을 의역하면 “하나님이여, 저를 고쳐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고쳐지겠습니다. 저를 건져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건져지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의 찬송이시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겠습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능동형으로 자신을 수동형으로 고백합니다.
    이와 같은 고백은 믿음의 사람이 극심한 고난을 당하면서도 격변의 시대를 극복하며 견딜 수 있는 삶과 신앙의 방식으로 “생수(生水)의 근원(根源)(the spring of living water)”이 되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붙잡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의 원천이 되신다

    물은 모든 생명의 존재 근거이기 때문이다.
    물은 하나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속성 중 하나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큰 물소리’(겔 43:2; 계 1:15)같다고 한 것이나
    예수께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다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고 하신 것이 좋은 예이다.
    영적 목마름에 시달리고 있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해갈의 근원이 되신다.

    물은 생명의 원천이다.

    하나님께서 ‘생수의 근원’이 되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근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코르’는 땅 속에서 솟아나는 지하수 샘물을 의미한다.
    이 물이 흐르면서 큰 물줄기가 되고, 여러 개의 물줄기들이 모여 큰 강을 이루기도 한다.
    그런 생수의 근원은 때를 따라 내리는 비와는 성격이 대조적이다.
    이스라엘에서 비는 겨울 우기에만 내리는 제한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지역에 따라 강우량의 편차가 커서 농경과 목축이라는 서로 다른 문화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생수의 근원이 되신다는 것은 시기나 장소와 상관없이 언제 어디에서나 제한 없이 넘쳐흐르는 생수의 복을 주신다는 선언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웅덩이를 판다”는 것과 그것이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물 없이는 누구도 살수가 없기 때문에 생수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떠나면 사람들은 스스로 웅덩이를 팔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웅덩이’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브에르’는 빗물을 모아놓는 물 저장소를 말한다.
    물이 늘 부족한 이스라엘에서는, 겨울 우기 동안 내리는 빗물을 모으는 물 저장소가 집집마다 마련되어 있었다.
    주로 지반 역할을 하는 바위를 파서 만든 것인데, 여러 겹의 회벽으로 방수 칠을 하여 물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였다.
    그렇게 튼튼하게 만든 웅덩이 물 저장소라도 어딘가에 금이 가고 틈새가 생겨, 모아둔 물이 빠져나가는 터진 웅덩이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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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12일(월) 큰 재앙(災殃)(예레미야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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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찬송 / 471장(십자가 그늘 밑에 )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예레미야 16:1∼21
    ♦ 묵상을 위한 주제 : 큰 재앙(災殃)(10절)

    ♦ 성구 : 네가 이 모든 말로 백성(百姓)에게 고(告)할 때에 그들이 네게 묻기를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큰 재앙(災殃)을 광포(廣布)하심은 어찜이며 우리의 죄악(罪惡)은 무엇이며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범(犯)한 죄(罪)는 무엇이뇨 하거든.  

    예레미야는 자신의 드라마틱한 상징적 행위로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볼 수 있게 하므로 하나님의 의도를 깨우치려고 합니다. 언어가 아니라 행동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을 신학적으로 “행위 계시(行爲 啓示)” 라고 합니다. 13장에서 “허리 띠를 통한 행위 계시”를 읽었습니다.

    예레미야 16장에는 세 개의 행위 계시로 “큰 재앙(災殃)(a great disaster)”을 말씀합니다.

    첫째는 이 땅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며 자녀를 두지 말지니라(2절)

    결혼과 교회와 국가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세 개의 공동체입니다.
    결혼을 하지 말라는 것은 가족들이 무거운 짐이 될 것이며 심지어 칼과 기근 즉 전쟁과 굶주림에 죽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더구나 죽음을 슬퍼해줄 사람이 없으며 심지어 묻어줄 사람조차 존재하지 않아 썩어 땅의 거름과 같이 되고 짐승들의 먹이가 될 것이며 유다는 그 종족이 완전히 멸망하게 될 것을 말씀합니다.

    둘째는 초상집에 들어가지 말라(5절) 

    초상집에서는 눈물을 흘리면 함께 슬퍼하며 애도하는 예의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초상집에 가지 말라는 것은 더 이상 위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잔칫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앉아 먹거나 마시지 말라(8절)

    잔칫집은 즐거움이 가득한 곳입니다.
    이런 곳에 가지 말라는 것은 더 이상 즐거운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큰 재앙의 원인은 무엇인가?

    여호와께서는 어째서 우리에게 이런 큰 재앙을 선포하시는가?
    우리가 잘못한 것이 무엇이며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할 것이 무엇인가?

    너희 조상들이 나를 떠나서 다른 신들을 좇아 그들에게 절하고 섬기며 나를 버리고 내 법을 지키지 않았다.

    계시의 다양한 방법

    1. 하나님의 명령

    2. 개인적으로 말씀하심

    3. 인간의 입으로 말씀하심

    4. 기록된 말씀(성경)

    계시의 세 가지 특성

    1. 주권적 성격 :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2. 역사적 성격 : (구약) 이스라엘, (신약) 로마와 헬라

    3. 완성적 성격 : 예수 그리스도

    예레미야 16:19-20

    여호와여, 주는 나의 힘이 되시고 나의 요새가 되시며 환난날에 피난처가 되십니다.
    세계 각처에서 여러 민족이 주께 나아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우리에게 물려 준 것은
    거짓되고 쓸모없는 헛된 우상뿐이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신이 아닌 것을 자기 신으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재앙의 원인은 우상숭배가 그 원인이라고 합니다.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우상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며 온전히 하나님만을 믿고 따르는 일에 집중하므로 신앙의 순수성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예레미야 16:2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이번에 그들에게 내 손과 내 능을 알려서 그들로 내 이름이 여호와인줄 알게 하리라. 아멘 


    오늘의 기도

    1.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소서!
    2.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소서!
    3.
    주의 영으로 온 땅을 새롭게 하소서!

    큰 재앙(災殃)

    새번역 / 무서운 재앙(災殃)
    NIV / a great disaster
    KJV / great evil
    NASB / great calamity

    공동번역(예레미야 16:10)

    이 백성에게 가서 이 말을 그대로 전하면 그들은 이렇게 물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 하느님 야훼께 무슨 죄를 짓고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이렇게 큰 재앙을 내리시겠다는 것이냐?

    새번역(예레미야 16:10)

    그러나 네가 이 백성에게 이 모든 말을 전달하면, 그들이 너에게 묻기를
    무엇 때문에 주님께서 이토록 무서운 재앙을 모두 우리에게 선포하시는가?
    우리가 주 우리의 하나님께 무슨 죄를 짓고, 무슨 잘못을 저질렀단 말인가? 하고 물을 것이다.

    재앙이란 용어가 예레미야서에 55구절 사용되었습니다.
    성경 전체의 비율은 55/162 대략 34%가 예레미야서에 사용된 것입니다.

    예레미야 1:14
    야훼께서 이르셨다. "이 나라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북녘에서 재앙이 쏟아져 내리리라.

    예레미야 4:6
    시온으로 가는 길에 깃발을 꽂아 지체 말고 다들 피난하라.'고 하여보려무나. 북녘에서 재앙이 밀어닥친다. 대살육이 임박하였다. 내가 그렇게 하기로 작정하였다.

    예레미야 24:9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려 세상 만국이 보고 놀라 넘어지게 하겠다. 세계 방방곡곡으로 쫓겨다니며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희롱거리 조롱거리가 되게 하겠다.

    예레미야 25:6-7
    다른 신들을 받들어 섬기며 예배하면 안 된다. 너희의 손으로 만든 우상을 섬겨서 나의 분통을 터뜨려 재앙을 받지 않도록 하여라.
    나 야훼가 말한다. 너희는 나의 말을 듣지 않고, 너희의 손으로 만든 우상을 섬겼으므로 나의 분통을 터뜨려 재앙을 당하고야 말았다.

    예레미야 2:27-28
    너희는 나무를 보고 아비라 돌을 보고 어미라 하며 나를 외면하고 등을 돌렸다가도, 재앙만 만나면 나더러 살려달라고 한다.
    네가 만든 신들은 모두 어디 갔느냐? 유다야, 네가 섬기는 신이 성읍들만큼이나 많은데, 네가 재앙을 만나면, 그 신들이 너를 살려주려고 일어나야 하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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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지노에 없는 세 가지
    - 시계, 거울, 창문


    중독에서 벗어나려면 카지노에서 없애 버린 것 세 가지를 가지면 됩니다.
    세 가지는 시계, 거울, 창문입니다.

    첫째, 시계를 없애는 이유

    시간의 개념을 잊어버리고 밤낮으로 게임에 돌두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둘째, 거울을 없애는 이유

    밤낮으로 게임에 몰두하므로 자신의 초췌한 모습을 볼 수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셋째, 창문을 없애는 이유

    창문을 없애는 이유는 계절의 변화와 현실 세계를 볼 수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큰 재앙에서 벗어나려면

    시대를 분별할 수 있는 영적 시계를 가져야 합니다.
    자신과 세상을 볼 수 있는 영적 거울을 항상 맑고 깨끗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이웃들을 볼 수 있는 영적 창문 즉 신령한 마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중독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좋은 것에 중독되면 된다.
    좋은 것으로 가득 차면 된다.

    성 어거스틴은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좋은 것들을 주시려 하지만 우리 손이 항상 가득 차 있어서 그것을 받지 못한다고 했다.”

    다음 세대의 손에 중독물이 주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자녀가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 차게 해야 한다.

    복음서에 보면, 마음에 귀신 들렸던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떠나갔다.
    그러나 그 마음이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히지 못했을 때 어떤 일이 발생했는가?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마태복음 12:45).

    사람은 무엇인가에 중독된다. 악한 것에 중독될 것이 아니라 선한 것에 중독되어야 한다.

    손양원 목사님은 이런 자가 되라고 했다.

    예수에 중독

    나 예수 중독자 되어야 하겠다.

    술 중독자는 술로만 살다가
    술로 인해 죽게 되나니,

    아편 중독자는 아편으로 살다가
    아편으로 죽게 되나니,

    우리도 예수의 중독자가 되어
    예수로 살다가 예수로 죽자,

    우리의 전 생활과 생명을
    주님 위해 살면 주 같이 부활된다.
    주의 종이니 주만 위해
    일하는 자 되고 내 일 되지 않게 하자.

    세상 중독은 사람을 '조종'하고 그 종말은 '파멸과 죽음'이다. 그러나 예수 중독은 사람을 ‘인도'해 ’생명‘에 이르게 한다.

    예수님을 선택해야 한다. 경건의 틀을 가지고, 매일 매일 주님께 자신을 드려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선택하지 않으면 중독에 또 중독되고 결국 자신과 가정 및 속한 공동체를 죽이고 파괴하는 자로 남게 된다.

    만일 중독에서 자유하게 되었다면 이제는 다른 중독에 빠져있는 사랑하는 지체를 깨우고, 주님께 인도해야 한다. 그렇게 하시도록 주님이 먼저 나 자신을 중독이 넘치는 이 중독 세상, 애굽에서 출애굽 시켜 주신 것이다. 중독의 덫에서 나와 탈 중독의 틀을 가지고, 세상의 중독에 빠진 수많은 영혼을 구해야 할 사명이 바로 이 글을 읽는 나에게 있다.


    우리는 플랫폼처치(Platform Church)의 실현을 위해 1세기 사도행전적 교회의 3대 조건 즉 "영성(靈性)" "문화(文化)" "구조 회복(構造 回復)"이 필요하다.

    교회와 성도의 문화에 대해 고찰해본다.

    문화는 동시대 사람들의 세계관과 가치관, 삶의 양식, 영성의 외적 표출이자 열매로 볼 수 있다. 플랫폼처치의 문화도 플랫폼처치의 영성에서 기인한다. 1세기 초대교회 교인들은 성령과 구체적으로 동행하고 동역했다. 초대교회는 성령의 이끄심과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따라가는 성령 충만한 공동체였다. 이처럼 성령의 전적인 이끄심과 성령과의 동행을 원한다면 이에 합당한 생활 양식을 가져야 한다.

    1세기 사도적 교회와 같은 문화와 생활 양식의 핵심이 무엇인가. 바로 기도와 예배(행 6:4), 금식과 증인의 삶이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의 문화는 단순했다. 그들은 모이면 기도하고 흩어지면 전도하는 단순한 생활양식이 있었다.(행 2:42) 플랫폼처치의 그리스도인은 기도하고 예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런 삶을 통해 말씀을 살아내는 영성을 기르고 성령과 동행할 수 있다.

    오늘날 교회는 안타깝게도 기도를 잃어버리고 있다. 초대교회의 핵심 영성이 기도였던 점과 그에 대한 열매로 증인의 삶이 이뤄졌던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현재 우리는 기도에 대해 잘 모르고 있거나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많다. 우리 자신을 주님의 제자라고 하면서 스승 되신 예수님께서 가장 많이 말씀하시고 가장 많이 시간을 드리셨던 기도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다. 우리는 스스로 예수님의 제자라 할 수 있는가.

    새 부대 구조에 담아 운반하는, 강하지만 유연한 교회가 되기 위해선 기도가 회복돼야 한다. 플랫폼처치는 기도를 알고 동시에 강력히 기도할 수 있는 교회이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기도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는 교회이다. 기도는 우리를 부활의 증인이 되게 만든다.

    플랫폼처치는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가. 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기도한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오늘날 우리는 고난을 겪었을 때 겨우 하는 치우친 기도 방법에 대해 배웠다. 올바른 기도 방법에 대해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 특별한 고난이 없고 부유하게 지낼 땐 기도하지 않는다. 많은 경우 우리 기도는 이방인들의 기도와 다를 것이 없다.(마 6:32) 이미 구하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는 주님의 관점에서 받으시기에 심히 좋은 기도가 아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선포하실 때 기도에 대해 가장 많이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6장은 산상수훈 한가운데 있는 말씀으로, 사실 기도의 장이다.
    본문의 기도는 예수님의 기도이자 1세기 사도행전 교회와 사도들의 기도이다.
    이방인의 기도와 성도의 기도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바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기도’ 이다.

    기도의 신학과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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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10일(토) 견고한 놋 성벽(예레미야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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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찬송 / 215장(이 죄인을 완전케 하옵시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예레미야 15:1∼21
    ♦ 묵상을 위한 주제 : 견고한 놋 성벽(20절)
    ♦ 성구 : 내가 너로 이 백성(百姓) 앞에 견고(堅固)한 놋 성벽(城壁)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너를 칠찌라도 이기지 못할 것은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求)하여 건짐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레미야 14장과 15장은 남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심지어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믿고 따를 때에 심판하실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15장은 서로 상반되는 용어로 선포합니다.
    1절에서는 “쫓아 내치라!”(Let them go!)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세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찌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내치라.

    21절에서는 “구속하리라!”(I will save you!)
    내가 너를 악한 자의 에서 건지며 무서운 자의 에서 구속하리라.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쫓아 내침을 받는 신앙”으로 살아가렵니까? 아니면 “구속함을 받은 신앙”으로 무장하시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네 가지로 다스릴 것이라고 분명하게 선포됩니다(3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그들을 네 가지로 벌하리니 곧 죽이는 칼과 찢는 개와 삼켜 멸하는 공중의 새와 의 짐승으로 할 것이며.


    1st. 죽이는 칼
    2nd. 찢는 개
    3rd. 공중의 새
    4th. 땅의 짐승

    이러한 재앙은 구체적으로 나타날 것입니다(2절)
    그들이 만일 네게 말하기를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리요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사망할 자는 사망으로 나아가고 칼을 받을 자는 칼로 나아가고 기근을 당할 자는 기근으로 나아가고 포로 될 자는 포로 됨으로 나아갈찌니라 하셨다 하라.

    1st. 사망할 자
    2nd. 칼을 받을 자
    3rd. 기근을 당할 자
    4th. 포로 될 자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견고한 놋 성벽(城壁)(a fortified wall of bronze)”이 되어 무너지는 나라와 백성들을 건져내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여 힘들어하는 시대에 예레미야처럼 놋 성벽처럼 든든한 신앙으로 구원의 도구로 쓰임 받는 은혜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러한 사람을 사회학자 “에릭 프롬(Erich Seligmann Fromm, 1900. 3. 23~1980. 3. 18일)”은 “생명 지향적 인간(바이오필리아, biophilia)” 이라고 합니다. “생명 지향적 인간”의 반대는 “죽음 지향적 인간(네크로필리아, nekrophilia)”이라고 합니다.

    ♪ 찬양 / 환난과 핍박 중에도

    https://www.youtube.com/watch?v=UDB0Mpf-6uM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골로새서 3: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평강은 감사의 열매라고 하겠습니다.

    감사는 아주 평범한 것에서 시작합니다.
    특별한 것은 놀라면 됩니다.
    예를 들어 복권에 맞았습니다.
    그것은 감사할 일이 아니라 놀랄 일입니다.
    왜냐하면 일생 한 번도 없을 일이 갑자기 찾아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복권 당첨 소식을 듣고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었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일생동안 놀랄 일은 자주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주 놀라면 까무러쳐서 죽습니다.
    왜냐하면 놀라서 자빠진다고 하지요.

    바닷가 마을에 고기 잡으러 바다로 나갔다가 거센 풍랑을 만나 죽을고비를 넘기고 겨우 살아서 돌아온 어부들이 있었습니다.
    거센 풍랑을 만났을 때는 다시는 바다에 나가지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며칠 후 날이 맑아 바다가 잔잔합니다.
    그러자 다시 그물을 준비하여 고기 잡으로 나갑니다.
    그렇게 혼이 났는데 또 바다에 나갑니까?
    그러자 그 어부가 "밥을 먹다가 체했다고 다시 밥을 먹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감사할 수 있습니다.
    자주 일어나는 일에는 감사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늘 반복되기 때문이지요.

    장애(디스오더, 障碍. disorders)와 질병(디지스, 疾病. disease)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용어입니다.
    장애는 병이 멈춘 상태를 말합니다.
    병은 진행 중인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병이 더 나빠질 수도 있지만 반면에 더 좋아질수도 있습니다.


    정신과적인 용어 가운데 '불안장애' 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앵자이어티 디스오더스(Anxiety Disorders) 라고 하는 것입니다. 
    '장애'라는 말과 '병'이라는 말은 다릅니다.  Disorders, Disease 그건 개념이 다릅니다.  다같은 병이지만은 병은 지금 진행 중에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더 나빠질 수도 있고 혹 호전되서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 소망을 걸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병이라는 것이고요.  장애라고 하면 이 병이 멈춘 겁니다.  진행을 멈추어서 이제는 더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장애자들을 특별히 사랑해야 하는 것이올시다.  자, 이제 팔에 장애가 왔다.  그 팔이, 없던 팔이 생기는 게 아니에요.  시각에 장애가 왔다.  다시 시력이 회복될 가능성이 없어요.  이게 바로 장애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지금 말하는 것은 불안장애 증상이올시다.  '불안' 이라고 하는 것은 정상적인 사람에게도 있습니다.  걱정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고, 스트레스에 시달리기도 하고.  이 많은 정신적 고통과 우리는 정면대결하면서 싸워나가는 것이 한평생 사는 생활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어느 순간에 그만 이 상황이 뒤집히면서 불안에 압도되고 맙니다.  그러면 이 불안을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이 다 소실되어 버린 상태입니다.  이러면 헤어나지 못합니다.  불안의 노예가 되고, 불안에 완전히 사로잡힌 그런 존재로 살아갑니다.  이것을 불안장애, Anxiety Disorders, 현대인의 중후군이올시다.

    두 번째 장애가 있습니다. 
    그것은 공포장애입니다.  위험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생각으로 볼 때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괜찮아요.  그것을 알면서도 억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생각과 마음이 따로따로 노는 거예요.  이성과 감성이 서로 분리되는 시간입니다.  누가 물으면, 또 생각을 하면 아, 거 아무 일도 없는 거예요.  그러나 불안합니다.  그래서 불안을 원인을 알 수 없는 고통이라고 합니다.  그렇잖아요.  이게 도대체 생각으로 보면은 그럴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그러나 생각은 생각대로고 가슴은 가슴대로 불안에 떨게 됩니다.  이게 공포장애입니다.

    세번째는 공황장애라는 게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죽을까 하는 걱정입니다.  모든 상황을 분리한 쪽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면은 이것은 살길이 없습니다.  세상에 제일 미련한 사람이 죽을까 걱정하는 사람입니다.  이제 오늘 저녁에 제가 미국에 갔다가 토요일날 돌아옵니다.  Fuller 신학에 강의가 있어서 해마다 이때쯤 가야 되는데 이걸 가겠다고 어떻게들 소문을 듣고요 가지 말라고 전화가 많이 와요.  "왜요?" 그랬더니 "죽을까봐요."  "아, 그래요?  나는 죽을까 걱정은 해본 일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안할 것입니다.  왜요?  죽을 것이니까.  아니 죽을까 걱정해서 안죽는다면야 뭐 까짓 거 해봅시다 까짓 거.  하지만 다 죽을 것인데 문제는 시간 문제인데 그것 뭐 그렇게 그럴 게 뭐 있느냐?"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제가 농담 겸 진담으로 말했습니다.  "저는 장로교 목사입니다.  왜요?  저는 예정론을 믿거든요.  그런고로 'No problem'." 그랬습니다.  미국에서까지 전화가 왔어요.  정말로 올거냐고.  "가고 말고" 그랬습니다. 

    여러분, 이런 얘기가 있어요.  젊었을 때 제가 수필에서 읽은 얘기인데 너무나도 제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어서 기억합니다. 

    어느 어촌에 바다에 나갔다가 풍랑이 좀 심하게 일어서 어부들이 죽었어요. 
    그 아버지의 장례식을 모시고 다음날 그 아들이 그 배를 타고 또 바다로 나갑니다. 
    그러니까 그 동네 사람들이 "이 사람아, 아버지가 그 배를 타고 나갔다가 죽었는데 그 배를 또 타고 나가나?" 하고 물었어요. 
    그러니까 이 청년이 하는 말이 "나 한가지 물읍시다. 
    당신네 아버지는 어디서 죽었소?" 
    "침대에서 죽었지" 
    "그럼 당신 오늘도 침대에서 자우?" 
    "그럼, 자지." 
    그런 겁니다 생각하면 말이에요. 
    여러분, 적어도 우리 믿는 사람이라면 죽을까 하는 걱정은 날려버리세요. 
    그건 없이 살아야 됩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말이에요.

    여러분 아시는 대로 제가 지금도 차를 직접 운전을 해서 경주도 가고, 광주도 가고, 다 다닙니다. 
    어떤 분들은 깜짝 놀라서 "목사님, 아직도 운전을 하십니까?" 
    "그러면, 그럼 누구를 시켜야 되나?  운전기사를 시켜야 되지."  그럼 하나만 묻자고.  "운전기사를 시키면 사고가 나지 않나?  내 편에서는 오히려 그쪽이 더 불안하고만.  차라리 내가 하는 게 낫지.  안그러나?"  여러분, 이 불안이라는 것은 그건 끝도 없는 것입니다.  공항 장애, 뚝 떼어버려야 됩니다.

    네번째는 강박 장애라는 것이 있어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기 자신을 못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에다 가스불 잠갔나 안잠갔나? 여기 앉아서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래가지고 나가서 전화걸고, 별짓 다해요.  또 그런가 하면 '열쇠를 잠갔나 안 잠갔나?' 내려왔다가 '가만있자, 잠갔나?'  올라가서 만져보고 왔어요.  또 내려와서는 '가만있자, 잠갔던걸 내가 열고 내려오지 않았나?'  또 올라가요.  오르락내리락 해요.  제가 그런 사람을 직접 만나봤어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까짓 거 도적 맞고 맙시다.  그래야 헤어날 수 있지 내가 나를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어요.  하루종일 오르락내리락 해보세요, 되나.  '까짓 거 가져갈테면 가져가라' 그러고 말아야지.  그렇지 않고는 이건 절대로 자유할 수가 없는 겁니다.  이거 웃는 사람들 다 전과자예요.  한번씩 다 해봤다고요 지금.  장애, 이건 못고치는 병이에요.  이건 병입니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평강의 길로 인도하신다.' 

    평강의 하나님,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결론부터 말씀하면 우리 마음은 우리 마음대로 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평강을 주셔야 평안할 수 있어요.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다스려 주셔야 됩니다.  그가 우리를 다스리실 때 내가 평안할 수 있는 것이지 내 스스로 평안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평강은 빼앗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벌 수 있어도 평안을 벌 수는 없습니다.  출세를 얻어낼 수도 있지만은 평안한 잠을 잘 수 있는 것은 이건 은사올시다.  여러분, 평강이라는 것은 탈취하던가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싸워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전쟁을 가르쳐서 불가항적 사항이라고 합니다.  누구나 전쟁은 싫어요.  전쟁해서는 안되요.  다 죽으니까.  그래도 할 수밖에 없어요.  여기에 우리의 고민이 있습니다.  학자들은 말합니다.  전쟁은 Passion에서 시작된다고.  욕망, 끝없는 욕망이 전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P' 자로 시작되는 몇 단어를 나열합니다.   Passion for Pagentry, 과시입니다.  자기 과시, 자기 능력.  '우리는 큰 나라다, 우리는 힘이 있다.'  우리는 그레이트 소사이어티(great society)다.  자기를 특별히 생각하는 것, 교만한 마음이 전쟁을 일으키고요.  Passion for Possession, 끝없는 소유.  남이야 굶던 말던 나는 더 가져야겠다.  가지고, 또가지고, 또 가지고…….  바로 이 소유욕이 전쟁의 요인이 되고.  또 Passion for Protection, 이제는 빼앗기지 않으려고 보호하려고, 보호하려고.  생명도 보호하고 재산도 보호하려고 싸웁니다.  Passion for Profit, 보다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서, 이익을 위한 존재.  Passion for Patriotism, 애국심입니다.  애국심 위에 인도주의가 있고 인도주의 위에 신앙이 있는 것이에요.  애국심이 전능이 아니요 지존도 아닙니다.  이 집단적 이기주의가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진정한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Passion for Peace' 정말 평화를 위해서, 다시 물어봐야 되요. 정말로 평화를 위해서 싸우느냐?  그 진실을 물어야 할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발견하기까지는 그 어디서도 참평안을 얻을 수 없었노라. 
    하나님을 만나기까지는 절대로 평안은 없습니다. 
    언제나 이 세상은 불안합니다.
    환경은 에덴 동산이 결코 아닙니다.
    환경과 물질과 관계없는 것처럼 평안도 무조건적입니다. 
    환경이 나쁘다고 평안하던가요? 
    환경이 좋다고 평안해지던가요? 
    돈이 있다고 평안하고 없다고 불안하던가요? 
    그러면 돈이 없으면 다 괴롭던가요? 
    이 모든 것들이 관계있는 것 같이 보이는데 관계가 없어요. 
    그런고로 평안도 관계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조그만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데 풍랑이 일어나가지고 배가 하늘에 올라갔다가 땅에 떨어집니다. 
    제자들이 본래 어부 출신들이지만은 '아이고,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라고 이렇게 소란을 떨지만 예수님은 고물에 누워서 평안하게 주무셨습니다. 
    풍랑속의 고요함. 
    죽겠다고 떠드는 데도 예수님은 편안했습니다. 
    이 평안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앞에 놓고도, 십자가를 앞에 놓고 말씀하십니다. 
    "내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주는 기쁨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  세상 것과 달라요.  주님의 마음에는 바로 십자가를 몇시간 앞에 놓고도 평안함이 있었어요.  이 절대적 평강,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언제 어떻게 죽을는지 모릅니다.  로마에 가면 사도바울이 순교당한 그 자리에 조그만 예배당을 지어놓고 그 유적을 모아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만은 바울은 로마 시민권이 있기 때문에 법적으로 그렇게 하지 못했어요.  목을 쳐서 죽였는데 도마 위에다가 목을 이렇게 놓고 도끼로 내려 찍었더라고요.  사도바울은 이렇게 순교합니다.  그런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감옥에서 이 편지를 씁니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기뻐하라, 그리하면 주의 평강이 너희를 지킬 것이다.  여러분, 기쁨이 우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을 보지 마세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주께서 내 죄를 사하신 것과 내게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를 보며, 구속받은 자기 자신에 대한 축제의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이 절대적 기쁨.  세상이 어디로 가느냐고, 그거 너무 심각하게 묻지 마세요.  갈 데로 갈것이니까요.  내 영혼, 구원받은 내 영혼에 대한 축제.  주안에서 기뻐합니다.  그런고로 그는 감옥에 있어서도 그의 마음은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러할 때 주의 평강이 함께 합니다.  여러분, 때로 손자, 손녀 사랑합니까?  손자, 손녀들 다 예쁘지요.  그래서 할아버지 할머니 사랑을 많이 받고 지냅니다만은 가끔 섭섭할 때가 있는 거 아세요?  얘들이 아프면은요 꼭 엄마만 찾아요.  다른 때는 할아버지, 할머니 최고라고 하다가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오로지 엄마, 그래요.  우리 영혼은 오로지 그리스도 뿐입니다.  그리스도와 만나고, 그리스도와 화평하고, 하나님과 화목된 그 관계, 그 기쁨 속에 만이 진정한 평안이 있어요.

    나아가서는 '관용하라' 그랬습니다.  이 관용의 덕이라는 것은 이것은 일방적인 것입니다.  이해와 인내와 용서를 넘어서서 상대방이 어떻게 하던 말던 상관이 없습니다.  내 기쁨으로 저를 덮는 것입니다.  내 만족함으로 저를 덮는 것입니다.  내 충만함으로 저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게 관용이올시다.  관용은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즐거우니까 잘해줄 수 밖에요.  그래 내가 농담 겸 진담으로 말씀합니다만은 '주일날은 집에 돌아가서 절대 아이들 나무라지 말라'고.  왜요?  내가 오늘 은혜 받았으니까.  좀 꾸중할만한 일이 있어도 '오늘은 주일이다.  내 마음이 이렇게 기쁜고로 너희들을 다 용서하노라.'  관용입니다.  그리스도 인은 절대적 은혜에 살기 때문에 상대방과 관계가 없습니다.  관용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원수도 사랑하는 겁니다.  내 만족으로 저들을 다 덮어버리고 마는 겁니다.

    바울이 주장하는 평강의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감사하라는 겁니다.  감사함으로 아뢰라.  기도하되, 감사함으로 기도하라.  제 목회생활에서 얻은 경험입니다만은 어떤 아주머니가 참 결혼생활 10년 동안에 고생을 많이 했어요.  남편이 술을 너무 좋아해서 하루도 맑은 정신으로 돌아오는 날이 없어요.  그리고 와서 또 가끔 행패도 해요.  때로 얻어맞기도 해요.  그러면서 이걸 참고 사는데 얼마나 힘들겠어요?  교회에 잘 나와서 봉사하는 그런 여집사님이예요.  그가 하는 간증입니다.  어느날 또 술을 먹고 들어와서 토하고 어지러운데, 다 정리하고 남편을 깨끗한 자리에 누이고, 자기도 자기 위해서 옆에서 잠자리 기도를 하는데 기가 막히더랍니다.  '어쩌다가 내 신세가 이 모양이 되었나?  내가 이런 짓하려고 결혼했나?  어찌 내 팔자가 이 모양이냐?' 그리고 "주여, 어찌하여 나는 이 모양 입니까?"  한참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했는데, 이건 푸념이죠.  기도라기 보다는 푸념을 했는데, 성령이 감동하시면서 지난 주일날 목사님의 설교가 생각나더랍니다.  '감사함으로 아뢰라.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아뢰라.'  "옳지, 오늘은 내가 감사할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감사할 일이 없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할 일은 없습니다만은 좌우지간 감사합니다."  일단 감사합니다 라고 말을 했는데 이제 감동이 되는데 들려옵니다.  '그래도 과부보다야 낫지 않냐?'  저런 거라도 하나 있는 게 낫지 없는 것보다야.  언제 사람될지 알겠어요?  '그래서 감사합니다.  저렇게 술을 많이 먹고 다니는데도 제집 찾아 돌아오는 게 신통하고, 저렇게 허구헌날 술을 마시는데 건강하니 감사하고, 나 예수 믿는 거 방해하지 않으니 감사하고.'  한가지, 두가지 생각하니 감사할 일이 많더랍니다.  이렇게 감사하고 기도하고 있는 동안에 얼굴이 환하게 피었습니다.  남편이 목이 말라서 눈을 떠보니까 히죽히죽 웃고 있잖아요.  "술주정뱅이하고 살면서 무엇이 좋아서 웃나?" 그러더랍니다.  "아니요.  나는 너무 행복하고 너무 감사해서 웃습니다."  "이것 보세요.  이래 감사하고, 이래 감사하고, 이래 감사하고……."  죽 나열해서 설명을 하니까 남편이 가만히 있더니 "걱정하지마, 예수 믿어줄게" 그러더랍니다.  여러분, 감사함으로 아뢰라.  우리가 답답하고 괴로운 거 많아요.  잠깐 멈추세요.  그리고 감사할 것을 찾아보세요.  이리 뒤지고, 저리 뒤져서 감사할 여건을 찾아서 감사함으로 아뢰세요.  감사와 더불어 기도하세요.  평강의 하나님이 그를 지켜주실 겁니다.  마음과 생각, 감성과 지식 지켜주실 거예요.  생각할 수 없는 벅찬 감격으로 평강의 생활을 살아갈 것이에요.  평강은 환경의존적인 것이 아닙니다.


    유명한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사람을 둘로 나눕니다. 
    'The Heart of Man'이라고 하는 책에서 말합니다.  

    네크로필리아(Necrophilia)
    죽음을 사랑하는 즉 죽음 지향적인 인간

    바이오필리아(Biophilia) 
    생명을 사랑하는 즉 생명 지향적 인간

    모든 것은 죽음으로 지향합니다. 
    죽음 지향으로 생각하면 끝도 없습니다. 
    이걸 넘어서서 생명지향적으로 살 때, 보세요. 
    환경이란 역설적입니다. 
    어려울수록 더 사랑합니다. 
    환경이 어려울수록 더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환경을 거슬러서 역설적 즉 파라독시칼(paradoxical)한 삶을 선택합니다.
    생명의 특징은 역설적입니다.
    예를 들면 아스팔트를 뚫고 나오는 싹을 보셨나요?
    그것이 파라독시칼한 생명력입니다.
    근심과 불안은 내 병일 뿐입니다. 
    그건 장애입니다. 
    이제 중생함으로 이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환경을 묻지 마세요.  세상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건 내 마음, 내 영혼 상태의 문제입니다. 
    평강은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있고, 그리고 그가 내게 주시는 겁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실 때 그는 어떤 형편에서도 그 평강으로 충만한 생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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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9일(금) 확실(確實)한 평강(平康)(14:13) lasting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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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찬송 / 361장(주의 주실 화평)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예레미야 14:1∼22

    ♦ 묵상을 위한 주제 : 확실(確實)한 평강(平康)(13절)
    ♦ 성구 : 이에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선지자(先知者)들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칼을 보지 아니하겠고 기근(饑饉)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이곳에서 너희에게 확실(確實)한 평강(平康)을 주시리라 하나이다.  

    14장 내용 구분(문단 중심)

    14:1∼9. 첫 번째 탄식(가뭄 재앙 예언)
    14:10∼16. 하나님의 응답과 거짓 예언
    14:17∼22. 두 번째 탄식(하나님의 눈물)   

    “확실한 평강(lasting peace)”을 누가 보장할 수 있을까요?
    선지자도 거짓선지자도 어떤 누구도 확실한 평강을 줄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이 땅에 확실한 평강을 주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言語)에는 혼(魂)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에는 말에 영혼이 깃든다는 “고토다마(言靈)” 사상이 있습니다.
    한국에는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말(言語) 자체가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의 예언은 그 자체가 거짓이므로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고 그 결과는 허무와 좌절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계시하신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는 그 말이 참된 것이므로 말이 씨가 되고 말에 영혼이 있어서 그대로 실현될 것입니다.

    일본의 “에모토마사루(江本勝)” 박사는 물을 연구한 후에 물도 사람의 말에 반응한다고 발표했습니다(물은 답을 알고 있다).

    사람의 몸은 70%가 물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무슨 말을 듣느냐에 따라 반응합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한다.”는 말처럼 사람은 칭찬의 말을 듣게 될 때 신나는 반응을 일으킬 것입니다.

    확실한 평강은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듣는 말씀에 의해서 반드시 나타날 것입니다.

    예레미야 14∼15장은 예레미야의 탄식의 기도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을 통해서 유다 백성들에게 심판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인 배경은 유다의 20명의 왕들 중에서 18번째 왕인 여호야김 시대, BC 600년경에 이루어진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듣지 않고 거짓 선지자로부터 가짜 예언을 듣게 될 때 그들은 무너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리를 사모하고 그 진리를 찾고 들을 때에는 하나님의 능력에 따라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참 평강을 원하십니까?
    평강을 줄 수 있는 선지자를 찾아야 합니다.
    평강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믿음을 갖춰야 합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확실한 평강입니다.


    ♪ 찬양 / 나 어느 곳에 있든지

    https://www.youtube.com/watch?v=_IpTk9hOiu4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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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8일(목) 교만과 큰 교만(예레미야 13:9) the pride & the great pr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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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찬송 / 441장(비 바람이 칠 때와)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예레미야 13:1∼27

    ♦ 묵상을 위한 주제 : 교만과 큰 교만(9절)
    ♦ 성구 :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이같이 썩게 하리라.

     * 썩게 하리라 : I will ruin
          * 교만(驕慢) : 잘난 체하는 태도로 겸손함이 없이 건방진 것.
          - 교만한 사람은 위를 쳐다 볼 수 없다.

    13:1-11, 썩은 베 띠의 비유
    13:12-14, 포도주 병의 비유
    13:15-17, 최후의 경고
    13:18-19, 왕과 왕후에 대한 경고
    13:20-27, 예루살렘의 운명

    구약의 예언서에서 강조하는 두 가지 죄

      1. 우상숭배

      2. 사회적 불의
        - 십계명에 대한 것(하나님, 사람)

    베 띠의 상징(11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띠가 사람의 허리에 속함 같이
         내가 이스라엘 온 집과 유다 온 집으로 내게 속하게 하여
        그들로 내 백성이 되게 하며 내 이름과 칭예와 영광이
        되게 하려 하였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1. 하나님께 속한 것
               2. 하나님의 백성된 것
               3.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


      요한복음 21:18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시편 18:39
            주께서 나를 전쟁하게 하려고
          능력으로 내게 띠 띠우사
          일어나 나를 치는 자들이
          내게 굴복하게 하셨나이다.

      순종하는 예레미야(4-5절)
             너는 사서 네 허리에 띤 띠를 가지고 일어나
            유브라데로 가서 거기서 그것을 바위 틈에 감추라
            하시기로
            내가 여호와께서 내게 명하신대로 가서
            그것을 유브라데 물 가에 감추니라.
       
            * 예루살렘과 유브라데(바벨론)의 거리 ; 500마일(800km)
            - 6절, 여러 날 후에 

    에베소서 6:14a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누가복음 12:35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언어는 의소소통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특별한 언어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행동 언어" 라고 합니다.


    오늘의 기도

       1. 진리의 띠를 띠고 순종하게 하소서!

       2. 주의 영으로 온 땅을 덮어주소서!

      3. 겸손한 언행으로 주님을 따르게 하소서!


    베 띠를 사서 허리에 띠라(1절)
    유브라데 강가에 감추라(4-5절)
    감추었던 곳에 가서 띠를 취하라(7절)
    베 띠가 썩어서 쓸데 없이 되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교만을 이렇게 썩게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모든 병이 포도주로 차리라(12절)
    왕, 제사장, 선지자, 모든 거민들이 잔뜩 취하리라(13절)
    서로 충돌하여 상하게 하리라(14절)

    15절, 너희는 들을찌어다, 귀를 기울일찌어다, 교만하지 말찌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17절, 너희가 이를 듣지 아니하면 나의 심령이 너희 교만을 인하여 은근히 곡할 것이며 여호와의 양무리가 사로잡힘을 인하여 눈물을 흘려 통곡하리라.


    썩은 베 띠와 포도주 병을 통하여 유다의 임박한 심판과 고난을 경고하여 회개를 촉구하고 있다.
    또한 세 가지 짧은 경고인 '흑암의 산, 왕과 왕후의 화, 구스인의 피부,를 통해서도 동일하게 회개를 촉구하고 있다.




    언약을 파기한 유다에게 아직은 하나님의 긍휼이 상존함을 제시함으로써 지금이라도 임박한 재앙으로부터 피할 수 있도록 회개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유다 심판에 관한 아홉 가지의 예언 가운데 다섯번째에 해당되는 메시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장에는 고도의 함축성과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는 두 가지의 비유 즉 썩은 베 띠와 포도주 병을 통해 유다에 임할 심판과 환난을 경고하면서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또한 세 가지의 경고 비유를 통해 동정과 호소의 심정으로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유다가 멸망하는 이유

    1.  회개하지 않았음
     
    a. 칼과 기근에 멸망할 것이요(렘 14:15)
    b. 영원히 멸망하리이다(시 92:7)

    2. 거짓 선지자를 따랐음

    a. 영 분별의 중요성(요일 4:1)
    b. 거짓 선지자를 경계할 것(마 7:15)

    3. 우상을 숭배하였음
     
    ·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긴 고로(대하 24:18)





    예레미야 13장의 내용 분해(문단 중심으로)
    13:1∼14 : 멸(滅)하리라(베 허리 띠, 포도주 병의 상징)
    13:15∼27 : 교만(驕慢)하지 말라

    유다의 교만(驕慢, the pride)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the great pride)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을 상징적으로 말씀하시기를 물가에 두었던 베로 만든 띠와 같이 썩어 쓸모없게 만들겠다고 하십니다. 유대 백성이 썩은 베로 만든 띠와 같이 쓸모없는 민족이 되어버린 이유를 세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10절)

    “이 악한 백성이 내 말을 듣기를 거절하고 그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하며 다른 신들을 따라 그를 섬기며 그에게 절하니 그들이 이 띠가 쓸 수 없음 같이 되리라.”

    첫째,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거절한 것
    둘째,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한 것
    셋째, 다른 신들을 섬긴 것

    잠언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잠언 18:12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잠언 29:23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은 유다가 우상을 좇아가는 망령된 자들로 변해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고발하고 계십니다. 결국 썩은 베로 만든 띠를 통한 심판의 원인이 바로 유다의 타락에 있다고 합니다. 사랑이 없는 하나님이 아니라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큰 잘못을 작은 사람으로 덮으려는 어리석은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작은 잘못이라도 철저하게 뉘우치고 고백하므로 큰 사랑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머지않아 북방에서 바벨론 제국이 예루살렘을 진멸시키려고 쳐들어 올 것입니다. 긴박한 위기를 모르고 안일하게 살아가는 백성들처럼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먼저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 어느 곳에 하나님이 기뻐하는 믿음의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 눈물과 기도로 진노의 칼을 뽑지 않고 돌아올 때까지 또 기다리실 것입니다.

    돌아와 돌아와 집을 나간 자여
    어서와 주께로 돌아오라.

    ♪ 찬양 / 돌아와 돌아와

    https://www.youtube.com/watch?v=xzSSyajUpI8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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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7일(수) 죽일 날(예레미야 12:3) the day of slaugh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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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찬송 / 412장(우리는 주님을 늘 배반하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예레미야 12:1∼17
    ♦ 묵상을 위한 주제 : 죽일 날(3절)
    ♦ 성구 :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보시며 내 마음이 주를 향하여 어떠함을 감찰하시오니 양을 잡으려고 끌어냄과 같이 그들을 끌어내시되 죽일 날을 위하여 그들을 예비하옵소서.  


    (현대인의 성경) 
        여호와여 주는 나를 아시고 또 나를 보고 계시며
        주를 향하는 내 마음 자세를 살피고 계십니다.
        양을 잡으려고 끌어내듯 이 악한 자들을 끌어내어
        죽일 날을 위해 준비하소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40년 동안 예언활동을 했습니다.
    예레미야가 외치는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예레미야와 같은 고향 아나돗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모의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차라리 "죽일 날을 예비해 달라"고 호소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님께 질문하는 내용과 하나님의 대답이 12장입니다.

    예레미야 12장의 내용을 문단별로 살펴보겠습니다.

    12:1∼4, 예레미야의 질문(절망의 때)
    12:5∼6, 하나님의 대답
    12:7∼13, 사랑의 분노
    12:14∼17, 다시 세워주심

    12:1, 여호와여 내가 주와 쟁변할 때에는 주는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이 형통하며 패역한 자가 다 안락함은 무슨 연고니이까?

    선지자 예레미야는 아나돗 지방 출신이었습니다.
    그런데 고향이 같은 아나돗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합니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예레미야는 깊은 탄식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죽하면 그들을 끌어내어 “죽일 날(the day of slaughter)”을 예비해 달라고 호소합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아무리 네 고향 사람들의 말을 듣지도 말고 믿지도 말라고 합니다.

    12장은 예레미야와 하나님과의 변론입니다.
    예레미야는 근본적인 회의에 빠졌습니다.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마치 하박국 선지자의 항의와 같습니다.
    ‘악한 자와 반역자가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며, 그들의 뿌리가 박히고 열매를 맺었다’고 합니다.
    왜 악한 자와 반역자가 형통하도록 지켜보고만 계십니까?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대한 신앙이 흔들리면 하나님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주위에서 젊었을 떄는 교회에서 여러가지 봉사도 하였으나 지금은 교회를 떠났다는 사람을 만나보셨습니까?
    왜 교회를 떠날까요?
    왜 하나님을 떠났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신다고 하셨는데 왜 세상은 악한 자들이 더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나요?

    탈북민 박순종 전도사(한터교회, 총신대 재학중)가 간증했다.

    신명기 28장에 축복과 저주가 나왔다.
    하나님을 안 믿으면 이러이러한 벌을 가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몇천 년 전에 쓴 책인데 어떻게 지금 북한에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쓴 것인지 깜짝 놀랐다.
    만약 성경책이 맞다면 저렇게 우상숭배를 하는 게 나라를 망치고 민족을 망치고 정말 고통스럽게 하는 나쁜 일이라는 깨달음이 왔다”
     
    주는 의로우시니이다!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활동은 철저하게 눈물로 씨앗을 뿌린 것입니다.
    40년 동안 활동하면서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악한 자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의로운 주의 백성들은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주는 의로우시니이다!

    악인의 형통은 죄(잠언 21:4)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의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잠언 24:1)

        너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기도 원하지 말찌어다.

    하박국 2:4b,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 믿음으로 : 진실함으로(예무나) / 진실, 성실

    (이야기 자료)

    음식점 간판을 보면 세상이 어지럽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순두부를 만들어 파는 식당의 상호가 "원조 순두부" "시조 순두부" "종가집 순두부" "진짜 원조 순두부"

    참기름을 만들어 파는 상호도 마찬가지입니다.
    참기름집, 순 참기름집, 진짜 참기름집, 참 참 참 기름집, 원조 참기름집, 오리지날 참기름집......

    페르시아 황제 코스로스는 사람들의 기대를 뒤엎고 중병에서 회복되었습니다.
    그는 고문관들을 모두 불러놓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내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보오.
    여러분은 내가 좋은 황제라고 생각하오?
    거짓 없이 말하시오. 그러면 그 보답으로 내가 값진 것을 선물하겠소."

    고문관들은 한 사람씩 황제 앞에 나아가 온갖 아첨을 다 떨었습니다.
    현자 엘림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폐하, 저는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진실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자 엘림의 대답에 황제가 말했다.

    "좋소. 그대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을 테니 솔직하게 말해보시오."

    "폐하께서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약점이 있고 실수를 저지르는 한 인간입니다.
    폐하께서 축제나 궁전 건축, 특히 전쟁에 많은 예산을 낭비하고 있기 때문에 백성들은 지금 과도한 세금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황제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약속한 대로 고문관들에게 각각 보석을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엘림에게는 수상직을 임명했습니다.
    다음 날, 고문관들이 황제를 알현하러 왔습니다.
    그들 중 대표가 말했습니다.

    "폐하께서 저희에게 주신 그 보석들을 판 상인은 교수형에 처해야 마땅합니다. 그 보석들은 모두 가짜였습니다."

    황제는 당연하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들 말이 가짜인 것처럼 그 보석들도 가짜였다."

    거짓이 승리하면 인간들은 고통스럽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진실은 어렵습니다.
    습관이기 때문입니다.
    진실로써 거짓을 이기라고 가르칩니다.
    피에르 르페브르(Pierre Lefevre)의 <당신을 바꿀 100가지 이야기>에서 인용한 글입니다. 

    법구경(法句經)에서도 이렇게 가르칩니다.

    "진실을 진실인 줄 알고, 진실 아닌 것을 아닌 줄 알면, 이런 사람은 그 바른 생각 때문에 마침내 진실에 이를 수 있다."

    레프 니꼴라예비치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Tolstoy 1828-1910)가 전하는 메시지도 진실한 것이 더 손쉬운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진실한 것이 더 손쉬운 일이다. 어떠한 일이든 거짓에 의해서 해결하는 것보다는 진실에 의해서 해결하는 편이 항상 보다 직선적이며 보다 신속하게 처리된다. 그리고 남에게 하는 거짓말은 문제를 혼란시키고 해결을 더욱 멀게할 뿐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나쁜 것은 겉으로는 진실한 채 하면서 자기 자신에게 하는 거짓말이다. 그것은 결국 그 인간의 평생을 망치게 할 것이다."

    12:2,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 마음은 머니이다.

    유대인들을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430년 만에 애급에서 자유를 얻었고
    바벨론 포로 70년 만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독립국가 건설

    이 백성은 당신이 심었는데 그들 모두는 입은 하나님께 가까우나 마음은 다 떠났다고 합니다.
    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즉각적인 심판을 하지 않으실까요?
    어째서 하나님이 심은 포도나무인데 그들이 다 하나님을 떠나기까지 기다리고만 계시냐는 겁니다.
    왜 하나님은 즉각적인 징계를 하지 않으실까요?
    스스로 깨닫고 돌아오게 하려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래 기다리십니다. 스스로 새 출발할 수 있도록 말미를 주고 계신 겁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안심하고 죄를 범합니다.
    하나님은 인내로써 회개를 기다리는데, 인간은 더 악하게 사는 것이 현실입니다.
    유다 백성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오래 기다리셨다고 스스로 회개한 반역자는 없었는데도 하나님은 오늘도 기다리십니다.
    끝까지 지켜만 보고 계십니다.

    예레미야는 이게 답답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방법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12:3,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보시며 내 마음이 주를 향하여 어떠함을 감찰하시오니
             양을 잡으려고 끌어냄과 같이 그들을 끌어내시되 죽일 날을 위하여 그들을 구별하옵소서.

    죄악 가운데서 강제적으로 끌어내라는 겁니다.
    이게 옳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집을 나가겠다는 둘째 아들을 강제로 집에 잡아두지 않습니다.
    타향에서 고생하는 아들을 기다리며 문을 열어놓고 기다릴망정 붙잡지 않습니다.
    왜냐면 강제로 잡아두어도 또 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아버지 품으로 돌아오도록 문 열어놓고 인내로 기다리십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강제로 끌어오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회개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유다 백성을 강제할 줄 몰라서 가만히 계시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해봤자 헛된 것이기에 가만히 계시는 겁니다.

    12:4, 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이는 이 땅 거민이 악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가 우리의 결국을 보지 못하리라 함이니이다.

    당시 아나돗 사람들의 타락은 이랬습니다.
    6절입니다. “네 형제와 아버지의 집이라도 너를 속이며 네 뒤에서 크게 외치나니 그들이 네게 좋은 말을 할지라도 너는 믿지 말지니라.”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아비와 형제들도 그에게 적대적이라고 하십니다.
    아나돗 사람들은 이렇게 갈 데까지 간 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으시고 오랜 세월 동안 계약의 백성으로 열매를 맺기를 기대했건만 날이 갈수록 더욱 패역해서 이제는 유다 성읍 수보다 더 많은 우상을 숭배하고 거리마다 바알의 제단을 만들어 거기서 분향하고 있는 백성들, 더구나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선지자를 죽이겠다고 하고, 선지자의 가족마저 적대적이 되는 상황입니다.

    이제 더는 기다릴 수 없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이 심판의 칼을 빼드셨습니다.

    미국 조지아주 민주당 상원의원이자 애틀랜타 에벤느저 침례교회 담임인 라파엘 워녹(Raphael Warnock) 목사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도 선을 행하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 라는 글을 올렸다가 기독교 보수 언론이 잘못된 것이라고 반박하자 글을 내렸습니다.







    7절 이하입니다. “[7] 내가 내 집을 버리며 내 소유를 내던져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을 그 원수의 손에 넘겼나니
    [8] 내 소유가 숲속의 사자 같이 되어서 나를 향하여 그 소리를 내므로 내가 그를 미워하였음이로라.”

    세상에 자기 집을 내버리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가끔 수확해야 할 논을 갈아엎는 농부가 있습니다.
    하나님도 그런 심정으로 이제는 갈아엎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끝까지 ‘내 집, 내 소유,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직도 유다 백성에 대한 미련을 갖고 계신 겁니다.
    갈아엎겠다고 하면서도, 밭에 불을 지르겠다고 하시면서도 ‘내 사랑하는 것들을 원수의 손에 넘겨준다’고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피눈물이 나는 심정입니다. 8-9절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처음에는 내 사랑하는 양이었는데, 이제는 숲속의 사자가 되어 주인을 향해 으르렁 거리는데, 이게 바로 유다 백성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심판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12절입니다. “파괴하는 자들이 광야의 모든 벗은 산 위에 이르렀고 여호와의 칼이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삼키니 모든 육체가 평안하지 못하도다.”

    여기서 파괴하는 자는 바벨론 군대를 뜻하고, 하나님은 그 군대를 통해 유다를 징벌하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광야의 모든 벗은 산 위에 파괴자들이 이르렀다는 것은 심판이 박두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인내도 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기다려 주십니다.
    참아주십니다.
    그러나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준엄하게 심판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인내심을 시험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무섭습니다.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철저히 응징하시기에 혹독합니다.
    심판의 칼을 뽑으신 이상 철저히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다 갈아엎으십니다.
    유다는 결국 하나님의 기다림, 오래 참으심, 무한하신 인내를 시험하다가 철저하게 패망했습니다.
    이런 과거 유다 백성들의 실패의 역사가 오늘 우리에게 교훈이 되고 거울이 되기를 바랍니다.





    미국 조지아주 민주당 상원의원이자 애틀랜타 에벤느저 침례교회 담임인 라파엘 워녹(Raphael Warnock) 목사가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도 선을 행하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는 내용의 트윗을 부활절에 올렸다가 뒤늦게 삭제했다.

    미국 크리스천포스트에 따르면, 4일(현지시간) 워녹은 자신의 트위터에 “부활절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보다 더 초월적”이라며 “당신이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다른 사람을 돕겠다는 헌신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적었다. 그러나 반발이 거세지자 워녹은 해당 트윗을 삭제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변호사였던 제나 엘리스(Jenna Ellis)는 트위터를 통해 “워녹이 이단적인(heretical) 트윗을 삭제했다”며 “그는 자신의 이름 앞에 있는 목사(Reverened)도 삭제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앞서 그녀는 워녹의 발언에 대해 “거짓 복음과 이단(false gospel and heresy)”이라고 맹비난했다.

    이어 그녀는 “우리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 부활절의 중요한 절대적 진리와 유일한 의미는 문자 그대로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며, 우리는 그분을 주님과 구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워녹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보다는 파괴적인 정치적 의제를 추진하는 데 더 관심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그의 가르침이 “수많은 유대인을 학살시킨 두 가지 반유대주의적 교리인 대체 신학(Replacement Theology)과 해방 신학(Liberation Theology)의 결합”이라고 지적했다.

    무어는 워녹의 발언과 관련, “팔레스타인 예수 설화로 몰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전반적인 시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그(워녹)의 언론 담당자들은 그의 과거를 감추고 시온주의자이며 이스라엘의 확고한 동맹인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후계자로 채색하기 위해 24시간 일하고 있다”며 “실제 그는 그는 스승인 예레미야 라이트(Jeremiah Wright) 목사와 같은 옷에서 잘려나갔다”고 말했다.

    라이트 목사는 시카고 트리니티 연합교회 명예목사이자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목사로 알려진 인물로, 과거 미국 흑인들에게 ‘갓 블레스(bless) 아메리카’가 아닌 ‘갓 댐(damn) 아메리카’를 불러야 한다는 발언을 해 논란을 사기도 했다.




    은혜를 배반한 뱀

    어느 추운 겨울, 노인 한 사람이 길을 가다가 추위로 거의 얼어죽어 가는 뱀 한 마리를 보게 되었다.
    자비로운 노인은 그 뱀이 불쌍하게 생각되어 조심스럽게 집어서는 자기 품속에 품어 주었다.
    노인의 온기로 차츰 원기를 회복하게 된 뱀은 입장이 달라지고 보니 다른 생각을 품게 되었다.
    드디어 완전히 힘을 되찾게 되자 뱀은 생명의 은인인 노인의 몸을 둘둘 감아 죄어 죽이려고 했다.
    놀란 노인은 뱀에게 큰소리로 꾸짖었다.

    "이 나쁜 놈 같으니, 네가 얼어죽을 것을 불쌍히 여겨 내가 살려 주었거늘,
    감히 나를 죽이려 해! 이게 무슨 경우냐? 자, 함께 재판관 앞에 가서 따져보자."

    "좋지. 그럼 누구를 재판관으로 세우지?"

    "길을 가다가 우리가 맨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자를 재판관으로 삼자."

    "좋다."

    노인과 뱀은 함께 길을 가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서 저쪽에서 황소 한 마리가 오는 것이 보였다.
    황소를 불러 세운 노인은 황소에게 그 동안 일어났던 일을 모두 이야기했다.
    노인의 말이 끝나자 뱀이 한마디했다.

    "나는 당연한 일을 하고 있는 셈이네. 성서에도 나와 있지 않는가. '뱀과 여자의 후손은 원수가 되게 한다.'라고."
    묵묵히 듣고 잇던 황소는 점잖게 판결을 내렸다.

    "뱀의 말이 맞는 것 같군. 성경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다면 인간이 뱀에게 아무리 자비를 베풀었어도 뱀은 악하게 보답을 해도 좋을 것이오. 사실 그 동안 우리들은 너무 푸대접을 받아왔소. 나의 주인을 봐도 그래. 나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주인을 위해 뼈빠지게 일을 하고 있는데, 주인은 내게 고마워 할 줄 모르거든. 주인 놈은 하루종일 놀면서 맛있는 음식만 골라먹고 내게는 찌꺼기조차 주는 걸 아까워하지. 또 잠자리는 어떻고, 자기는 따뜻한 침대에서 포근히 자면서 나는 마당에서 덜덜 떨면서 자든지 말든지 신경도 안 쓰거든."

    황소는 처음엔 점잖게 나오다가 점점 흥분하여 욕을 내뱉기도 하는 등 과격한 말과 인간에 대한 불만만을 쏟아붓고는 자리를 떠났다.

    노인은 황소의 엉터리 판결에 화를 내며 다시 뱀과 함께 계속 걸어갔다.
    이윽고 이리 한 마리를 만나게 되었다.
    노인은 또 이리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재판을 해 달라고 말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이리는 노인과 뱀을 번갈아 보고 나서는 황소와 똑같은 판결을 내렸다.

    역시 화가 난 노인은 다윗 왕에게 가서 재판을 받자고 뱀에게 말했다.
    이윽고 다윗 왕 앞에 나선 노인과 뱀.
    그러나 다윗 역시 노인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려주진 않았다.

    "성서에서도 말했듯이, 옛부터 뱀과 인간은 원수지간이다.
    그러니 뱀이 너를 해친다 해도 나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노인은 눈물을 흘리며 다윗 왕 앞을 물러 나왔다.
    그때 뜰 한편에 있는 우물가에서 혼자 놀고 있는 솔로몬 왕자가 노인의 눈에 띄었다.
    그때 소년 솔로몬은 아버지인 다윗 왕의 지팡이가 우물에 빠졌기 때문에 수면에 돌을 던져 지팡이가 물위로 떠오르도록 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노인은 솔로몬의 그런 행동이 범상치 않음을 알아채고는 자신의 속사정을 이야기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저 왕자에게 내 사정을 이야기 해 봐야겠다. 어쩌면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해 줄지도 모르겠군.'
    노인은 솔로몬에게 다가가 뱀이 자기에게 했던 못된 행동을 소상하게 얘기했다.
    "아버님께 이렇게 다툰 이야기를 자세히 말씀드렸습니까?"
    "물론 그랬습니다. 그러나 대왕님께서는 대왕님의 힘으로도 저를 구해줄 길이 없다고 하시더군요."
    "그랬나요? 어디 우리 함께 아버님께 가봅시다."
    그리하여 솔로몬과 노인 그리고 뱀은 다시 다윗 왕 앞에 서게 되었다.
    "아버님, 아버님께서 이 사건을 해결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까닭으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요?"
    "성서의 가르침을 따르다보니 그렇게 밖에 판결을 내릴 수 없었느니라."
    "아버님, 그러시다면 이 사건을 저에게 한 번 맡겨 주시겠습니까?"
    솔로몬의 요청에 다윗은 잠시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아들의 총명함을 아는지라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먼저 솔로몬은 뱀을 향해 물었다.
    "너는 왜 너의 생명을 구해준 사람에게 해를 끼치려고 하는 거냐?"
    "그것은 아까도 말했지만 하나님께서 저에게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럼, 너는 성서에 나와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따르고 있느냐?"
    "물론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너는 이런 말을 들어보았느냐? '
    서로 다투고 있는 두 사람은 재판관 앞에서는 반듯하게 서 있어야 한다'는 율법 말이다.
    만일 네가 성서를 그렇게 존중한다면 너는 즉시 그 노인의 몸에서 떨어져 반듯하게 서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아, 그렇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뱀은 대답과 동시에 노인의 몸을 감고 있던 것을 풀고는 노인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자 솔로몬은 노인을 향해 판결을 내렸다.
    "성서에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성서에서 명하는 대로 빨리 하시오!"
    그러자 노인은 지팡이를 번쩍 치켜들어 뱀의 머리를 힘껏 내리쳤다.
    그리하여 뱀은 배은망덕했던 죄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소유, 하나님이 사랑하는 나라이며 백성들로 하나님의 포도원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끼고 사랑하는 존재가 하나님을 향해 숲속의 사자와 같이 맹렬하게 배반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배반한 이스라엘을 원수의 손에 넘기고, 온 땅을 황폐하게 만들겠다고 하실 정도로 분노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육체의 고통도 크셨겠지만, 제자들의 배신에 가슴이 무너져 내리셨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배신당하는 것만큼 큰 고통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로부터 당한 배신의 고통을 “황무지가 나를 향하여 슬퍼하는도다”라고 표현하셨습니다(11절).

    그렇지만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향하신 분노는 미움의 분노가 아니라, 사랑의 분노입니다. 미움의 분노는 상대방을 파멸시키지만, 사랑의 분노는 반드시 다시 세워주실 것입니다.   

    언제나 악한 사람들은 형통한 것처럼 살았습니다. 그러나 영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악인의 형통은 자랑이 아니라 수치와 파멸입니다. 하나님은 주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영원한 자랑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앞으로 겪어야 할 시간은 이제껏 경험했던 것들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전개될 수 있습니다.

    무너진 성윤리와 향락문화와 세대 차이로 인한 가족의 붕괴 현상 심지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이상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왜 이러한 격변의 시대를 살아야 할까요?
    그 이유는 편안한 삶의 자리에 안주하려는 우리들을 결단시켜 새로운 일을 이루시려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향한 나의 판단을 내려놓고 공의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졸병처럼 살지 말고 장군처럼 살아가라고 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죽음을 이기고 부활의 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시간적으로 미래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과거, 현재, 미래 모든 시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모든 공간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는 모든 시간, 모든 공간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입니다.

    나의 뜻을 내려놓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가려고 할 때 일상의 삶은 영원으로 이어져 나갈 것입니다.
      


    누가 배신자일까?

    1919년 3월 1일
    기미년 독립만세운동 사건이 일어났던 날입니다.
    3.1절이면 기억해 줄 만한 인물이 있습니다.
    그 이름은 "신철" 이라고 합니다.
    당시 종로 경찰서 고등계  형사로 있던 그는 특히 수상한 조선인을 색출하는 데는 귀신이라고 불릴 정도였다고 합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사십이었으며, 종로 경찰서에 10년간  근무한 고참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일본 경찰의 고위 간부들에게 인정 받기까지 수 많은 동족들의 피와 눈물이  있었습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는  내놓은 민족 반역자였고 천황의 사냥개였습니다.
    1919년 2월 26일 늦은 밤이었습니다.
    지금의 안국동  자리에 있던 인쇄소  보성사에서는 불빛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창문을 안에서 가리고 무엇인가를 찍어 내고 있었습니다.
    그때 보성사 부근을  지나고 있던 신철은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인쇄소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인쇄  중이던 독립 선언문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독립선언문을 읽어 보고 놀란  표정의 인쇄소 사람들을 한번 둘러 본 후 말없이 그곳에서 사라졌습니다.
    이 소식은 즉각 거사를 준비 중이던 핵심인사들에게 전해졌습니다.
    33인의 민족 대표  중의 한 사람이던 최린신철의 소재를  수소문해서 은밀하게 신철과 마주 앉았습니다.

    "당신은 이제까지 우리 동족들에게 참으로 많은 나쁜 짓을 저질렀소,
    이제 마지막으로 한번 우리 민족을  위해서 큰 일을 해 주시오.
    당신만 입을 다물어 준다면 우리나라는 머지않아 독립할 수가 있을 것이오, 
    그러면 역사는 신철이라는 이름을 명예롭게 기억할 것이오."

    최린은 당시 돈으로 거금인 5천원을 신철 앞에 꺼내 놓았습니다.
    이 돈이면 만주에 들어가 가족들과 함께 살 수 있을 것이오.
    우리 민족 전체의 미래가 당신 한 사람의 결정에 달려 있다고 생각해 보시오.

    최린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신철은 한순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사라졌습니다.
    3월 3일로 독립선언은 서둘러 3월 1일에 앞당겨 거사를 일으켰습니다.
    3.1만세 운동이 일제의 잔인한 탄압에 눌려서 독립의 희망이  점차 사그라들던 두 달 후,
    신철은 자살로 자신의 삶을 마감하고 만다.

    고등계 형사 신철과 관련해서  분명한 것 하나는,
    그가 독립 선언  계획을 사전에 탐지했지만 이를 일본 경찰에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3.1운동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최근 3.1운동 당시 33인 민족 대표로 불리는 이들 중  일부가 나중에 적극적인 친일 행각을 벌였다는 주장들이 대두 되고 있다.
    청주시 3.1공원 안에 있는 청주 출신 33인 대표 한  사람의 동상이 시민 단체들에 의해서 강제 철거 될 위기에 있다고 한다.
    해방 이후 이제  까지 우리 정부의 각료를  지낸 분들의 상당수가 친일 행위를 한 사람들이었다는 조사 결과가 몇일 전에 발표됐다.
    그런 저런 믿기  싫은 이야기가 발표될 때마다 신철이라는 사나이가  생각이 난다.
    그는 결코 훌륭한 인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의롭게 살다가  후에 변절한 사람들과, 개처럼 살다가 후에의롭게 죽은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 1995.3.1, 동아일보 어느 고등계  형사의 자살

    일관된 대답

    몇 년전 홍콩에서 한 친구가 중공에서 감옥 생활을  하다가 최근에 풀려난 어떤 분을 소개시켜 주겠다며 나를 좁은 언덕  아래에 있는 연립주택 2층으로 안내했습니다.
      친구와 함께 그 집에  이르러 문을 두드리자 약 60세 가량 되어 보이는 중국 노인이 문을  열고 우리를 맞아 주었습니다. 그 분의  얼굴은 반가운 미소로 환했으나 허리는  반쯤 굽어 있었습니다. 그 분의 안내를  받아 우리는 약간 초라한 방으로 들어섰습니다. 거의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중국 여인이 차를 들고 들어왔습니다.
      그녀가 차를 놓고 잠시 머뭇거리는 동안 자기 남편과  얼마나 정겹고 사랑스럽게 마주 보고  있는지, 나는 넋놓고 그들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무슨 일이냐고 친구에게 묻자. “아무 일도  아니야. 지금 이 분은 서로 대단히 만족해 한다는 것을 자네에게 보여 주고 싶어 그러시는 거야. 이 분들은 신혼부부거든.”나는 1949년 이 노인이 난킹 신학교의 학생일 때 이분들이  약혼을 했는
    데, 결혼  하루 전날 중국 공산당들이  신학교를 점령하고 학생들을  강제 노동 수용소로 끌고 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뒤 30년 동안 그녀는 신부가 되어 보지  못하고 일 년에 단 한 차례  수용소 사무실에서 몇 분 동안만 그를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만일 기독교인이 되기를 포기한다면 네 신부와 함께 고향으로 보내줄 수도 있지.”
      담당 공산당원의 이러한  말에 그는 해가 거듭  바뀌어도“아니오”라는 단 한 마디 말로 일관된 대답을 했습니다.  나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어떻게 가족도, 결혼도,  심지어 자기의 건강도 마다하고 그토록  오랜 세월을 견딜 수  있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그 분께  질문을 하자  그 분은 내 질문에 오히려 놀라는 기색으로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 저를 위해 치르신 그 모든 것을 받고서 어떻게 그 분을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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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6일(화) 언약(言約)의 말(예레미야 11:6) The terms of this coven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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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찬송 / 206장(오랫동안 모든 죄 가운데 빠져)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예레미야 11:1∼23
    ♦ 묵상을 위한 주제 : 언약의 말(6절)
    ♦ 성구 :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말로 유다 성읍(城邑)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선포(宣布)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 언약(言約)의 말을 듣고 준행(遵行)하라.  

    “언약(言約)의 말(the terms of this covenant)”

    (새번역) 그런 다음에, 주님께서 나에게 또 말씀하셨다.
                  너는 이 모든 말을 유다의 여러 성읍과 예루살렘의 거리에서 외쳐라.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여라.


    성경은 약속이다.
    약속이란 하나님의 약속이다.
    성경의 약속에는 두 가지 약속이 있다.
    첫째는 구원과 축복의 약속
    둘째는 심판과 저주의 약속


    언약(예레미야 11:4)

     
    이 언약은 내가 너희 열조를 쇠풀무 애급 땅에서 이끌어 내던 날에그들에게 명한 것이라
    곧 내가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언약의 결과(예레미야 11:4b-5a)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또 너희 열조에게 한 맹세 곧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리라 한 언약을 이루리라.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버리지 못하는가?

    문화사적 측면으로 이해합니다.
    애급의 노예로 살았기 때문에 문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 헷족속은 당시 철기문화 민족이었습니다.
    농경문화에 익숙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철기문화는 신선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대추나무에 대추를 많이 열리게 하려면 염소를 매어 놓는다고 합니다.
    묶여있는 염소는 특성상 잠시도 그냥 있지 않고 고삐를 당기며 나무를 흔들어 괴롭힙니다.
    그러면 대추나무가 잔뜩 긴장하면서 본능적으로 대추를 많이 열도록 하여 열매를 번식 시키려는 필사적 노력을 하게된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 정착시킨 것은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사람들에게 시달리면서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우상에 붙잡혀버렸습니다.

    만일 대추나무에 묶여 있는 염소가 대추나무를 흔들 때 대추나무가 염소가 귀찮다고 대추 열매 맺는 것을 포기한다면 대추나무는 뿌리체 뽑혀 버려질 것입니다. 그러나 염소가 흔들면 흔들수록 더 강하게 뿌리를 깊이 내리고 버티므로 열매를 맺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방 민족들의 우상 숭배를 따라갈 것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붙잡아야만 더욱 번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언약입니다.

    잡초와 잔듸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잡초를 뽑으면 잡초는 위기를 느껴 모든 영양을 뿌리로 보낸다고 합니다.
    그러면 잡초의 뿌리 주위에 미생물들이 많아진다고 합니다.
    이렇게 잡초가 견딜 수 있는 환경을 만든 후에는 주위에 있는 모든 영양을 잡초가 흡수하면 결국 잔듸는 말라 죽을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우상숭배는 잡초와 같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면 잠시 어렵지만 잔듸가 뿌리를 완전히 내리면 잡초는 결국 뽑혀질 수밖에 없습니다.

    식물들이 위기를 느끼면 씨앗 번식에 전력을 다하는 것은
    생명에 위기를 느낀 소나무가 솔방울을 많이 만드는 것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반드시 가나안 족속들을 진멸하라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잔인한 명령입니까?
    우상을 숭배하는 가나안 족속들은 잡초와 같은 생명력을 가졌기 때문에 반드시 잔듸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길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자와 어린 아이를 포함한 가나안의 모든 족속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셨는가?
    신명기 20:16-17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하신 대로 하라.

    예레미야 11장의 문단 구성 내용

    11:1∼8,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라
    11:9∼17, 언약 배반
    11:18∼23, 아나돗의 음모(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함)

    11:1∼8,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라

    언약(예레미야 11:4-5a)
    이 언약은 내가 너희 열조를 쇠풀무 애급 땅에서 이끌어 내던 날에 그들에게 명한 것이라
    곧 내가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또 너희 열조에게 한 맹세 곧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리라 한 언약을 이루리라.

    1. 청종하라(Obey)
    2. 좇아 행하라(Do everything)
    3.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리라

    6절. 듣고 행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말로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선포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 언약의 말을 듣고 준행하라. 

    11:9∼17, 언약 배반(17절)

    바알에게 분향함으로 나의 노를 격동한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의 악을 인하여 그를 심은 만군의 여호와 내가 그에게 재앙을 선언하였느니라.    

    * 바알 : 남신(男神), 아세라 : 여신(女神)

    11:18∼23, 아나돗의 음모(23b)

    내가 아나돗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곧 그들을 벌할 해에니라.

    예레미야의 고향인 아나돗의 사람들은 예레미야에게 예언을 하지 말라고 그를 위협하였다. 공공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것은 참으로 악한 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실 것이다. 그들을 벌하시는 해에 청년들은 전쟁에서 칼에 죽을 것이며 자녀들은 전쟁으로 인해 굶어 죽고 남은 자가 없을 것이다.


    잔듸와 잡초 / 우상은 잡초와 같다.
    잡초의 생존전략

    사람이나 초식동물들에게 먹히거나 뽑힌 잡초는 비상사태를 선포한다고 합니다.
    자신 안에 있는 모든 영양을 뿌리로 보내서 미생물들이 좋아하는 물질들을 흙속에 분비한다고 합니다.
    미생물들이 모여들어 활발한 활동을 시작하면 뿌리 주변에 많은 영양분들이 만들어집니다.
    그러면 잡초는 미생물들을 죽이는 물질을 분비해서 미생물들이 죽은 것까지 영양분으로 빨아들인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잡초의 강인한 생명력 때문에 다른 식물들보다 더 빠르고 왕성하게 성장할 수 있다고 합니다.

    언약의 세 가지 내용

    1. 청종하라
    2. 좇아 행하라
    3.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리라.

    구약의 문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우상(偶像)"을 숭배한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게 된 이유는 노예로만 생활했던 히브리 백성들에 "문화(文化)"가 없었기 때문에 낯선 문화는 히브리 백성들을 쉽게 유혹했을 것이라고 추측이 가능합니다.

    더구나 가나안 땅 헷 족속은 그 당시 "철기문화"를 사용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철을 도구로 만들어서 사용할 줄 알았기 때문에 히브리 백성들에게는 애급의 "농경문화(農耕文化)"녹에 익숙했었기 때문에 "철기문화(鐵器文化)"는 매우 신선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눈의 색깔을 바꿀 수는 없지만 눈빛은 바꿀 수 있습니다.
    입의 크기는 바꿀 수 없지만 입의 모양은 미소로 바꿀 수 있습니다.
    빨리 뛸 수는 없지만 씩씩하게 걸을 수는 있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겨야 할 백성들의 눈에 낯선 이방 문화가 새롭게 보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것이 모두 좋은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새로운 것이 진실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언약의 말은 청종하라! 좇아 행하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예레미야 7∼10장에서는 우상숭배에 대해서 고발했습니다.
    예레미야 11∼13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살아가는 완악함을 지적합니다.

    지금 이 순간 운명의 모습을 바꿀 메스를 쥐어라.
    불필요한 것들은 모두 잘라내고 새로운 기운과 새로운 삶을 덧붙여라.
    그리하면 분명 운명의 주인이 될 것이다.

    예레미야 11장의 문단 구성 내용
    11:1∼8,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라
    11:9∼17, 언약 배반
    11:18∼23, 아나돗의 음모(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함)

    선지서 예레미야는 시간 순으로 기록된 것은 아닙니다.
    또한 말씀이 선포된 순서대로 기록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유다 백성들의 우상숭배와 불순종, 언약의 파기, 윤리적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의 말씀을 전한다는 공통점을 갖습니다.

    오늘 본문은 요시야 왕(16대, 31년 통치)의 통치 후반기인 BC 610년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여 선포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선지자는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언약을 파기한 백성들의 반역에 대해서 외치라고 합니다.
    선지자의 외침은 사람의 외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고 부르짖지도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고통 가운데 시달리는 백성들이 부르짖을지라도 듣지 않으시겠다고 합니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부르짖음에 대한 응답이 없는 시대가 다가오기 전에 깨닫고 주님의 말씀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는 백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누군가를 세워 이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그 깨우침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의 문을 열고 귀담아 듣는 사람들이 날마다 증가되기를 기대하며 기도할 뿐입니다.

    ♪ 찬양 / 내 기도하는 그 시간

    https://www.youtube.com/watch?v=R_T2s440FaY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신의 모래시계는 멈추는 순간이 있다

    일요일은 손님이 가장 없는 날이라고 할수 있는데 그래도 오후 1시면 문을 연다.
    손님이 오면 고맙고 안 와도 혼자 이것 저것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데 3시가 못 되어서 손님이 왔다.
    처음 오는 젊은 손님이었는데 외모도 깔끔하고 전혀 술을 마시지 않은 상태여서 소주와 안주를 만들어 주었다.

    좀 오래 있어도 되느냐?
    그럼요.
    와이파이가 되느냐?
    되구 말구요.

    그는 혼자 술을 마시며 폰을 손에 서 놓지 않았고 시간은 흘러 어두워졌다.
    마신 소주는 네 병... 더 달라 해도 시간이 허락치 않기 때문에 그는 일어서야 했다.
    그 안에 다른 손님은 오지 않았고 나는 계산을 청구하고 그만 일어서 달라고 말했다.

    그는 지갑에서 카드를 꺼냈는데 한도 초과였다.
    다른 카드도 마찬가지여서 현금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신고하세요 였다.

    예의도 바르고 행동도 반듯했건만 이제 설흔 한 살의 젊은이가 4만원이 없어 신고하라는 그 목소리에 내 마음 속에서 뭔가가 끓었다.
    내가 묻는 말에 그는 천천히 대답했는데
    인력 사무실에 나가고있는데 요즈음 일이 없다고 했다.

    집안에 먹을 것도 없고 가스가 끊어진
    집은 추워서 그냥 정처없이 걷다가 우리 가게 안의 불빛이 그렇게 따스해 보여서 그냥 문을 밀고 들어 왔단다.

    고향엔 부모님이 있고 농사도 지을 수 있는데 이제는 아무래도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 중이라는 말에 나는 돌아 가라고 했다.
    부모님과 함께 살라고 했다.

    이렇게 타향에서 설움 받고 온 몸으로 고통 받으면서 살지 말고 부모님곁으로 가라고 진심으로 말했다.
    그는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요즘은 젊은이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무엇을 하고자 하고 본인이 찾기만 하면 지자체의 도움도 많고 사회 복지의 혜택도 많음을 말해 주었다.

    이렇게 타향의 냉혹한 바람 속에서 헤메지 말고 부모님의 품으로 돌아가 함께 살면서 효자가 되어 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은 천하의 불효자라고 하면서 연락도 안한 지가 2년이 넘었다고 했다.
    나는 내 아들보다 어린 그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옆에 있어만 줘도 효자라고...
    이제 고향으로 가서 부모님의 곁에서 농사를 함께 지으며 땅에 승부를 걸어 보라고 했다.

    내가 보기에 그는 도시의 풍파를 겪으며 살 수있는 영악한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서
    이번 명절에는 집에 돌아가서 함께 살겠노라고 말해 보라고 했다.

    부모님이 뭐라고 할지 들어나 보라고
    강권하자 그는 마지못한듯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가 받은 모양이었다.

    "예... 저예요... 아버지, 저 집에 가서 살아도 돼요?  예...여긴 일이 없어서...
    내일은 못 내려 가요...
    집도 정리하고
    짐도 보내고...
    예? 내일요?
    아버지....."
    그는 폰을 붙들고 통곡을 했다.

    나는 물수건을 따뜻하게 만들어 가져다주었고 그는 얼굴을 닦고 나서 허덕이면서 말했다.

    아버지가 내일 당장 올라 온다고 했다.
    트럭을 빌려서 올라와서 짐을 챙기고 같이 정리하자고 했다는 것이다.

    그 때 전화가 울렸다.
    나이 든 여자의 높은 목소리가 들리면서 비명처럼 그의 이름을 부르는 이는 어머니였다.

    당장 주소를 부르라면서 재촉하는 어머니와 데리러 오는
    아버지가 있는 그는
    그렇게 한 부모의 귀한 아들이었다.

    택시를 불러 그를 보내고 불을 끄고 나는 조금 울었다.
    어쩌면 술이 깨면 그는 고향으로 안 가겠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부모는 데리러 올 것이다.
    그리고 데려갈 것이다.

    그런데 오늘 오전에 전화가 왔다.
    그의 아버지였고, 다 정리하고 지금 제천으로 내려 간다면서 너무나 감사하다고 말했다.

    아들은 이제 다시는 고향을 떠나지 않고
    함께 살겠노라고 했다면서 이 은혜를
    무엇으로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그의 말에 나는 너무나 기뻐서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계좌번호를 문자로 보내 주면 아들이 신세진 것을 갚겠다고 하는 그의 말에 나는 바로 거절했다.
    이 기쁨만으로도 충분하며, 몸과 마음을 많이 다친 아들을 따뜻하게 품어 달라고 말했다.

    젊은이들이 너무나 살기 힘든 이 시대에 부모의 사랑이라도 없다면 어찌 살겠냐는 내 말에 그 아버지는 몇 번이나 고맙다고 했다.
    이제 아들은 다시는 부모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신은 모래시계를 가지고 인간의 복을
    저울질하는데 문득 멈추는 순간이 있다고 한다.
    그 순간이 인간의 의지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순간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는 그 날 신의 모래시계가 멈춘
    그 순간에 자신의 운명을 결정했다.

    귀생(貴生)과 섭생(攝生)


    대추나무에 대추를 많이 열리게 하려면 염소를 매어 놓는다고 합니다.
    묶여있는 염소는 특성상 잠시도 그냥 있지 않고 고삐를 당기며 나무를 흔들어 괴롭힙니다.
    그러면 대추나무가 잔뜩 긴장하면서 본능적으로 대추를 많이 열도록 하여 열매를 번식 시키려는 필사적 노력을 하게된다는 것입니다.

    식물들이 위기를 느끼면 씨앗 번식에 전력을 다하는 것은
    생명에 위기를 느낀 소나무가 솔방울을 많이 만드는 것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우리 몸도 그냥 편히 두면 급속히 쇠퇴하고 질병과 노화에 취약해집니다
    적게 먹고 많이 움직이고 굽혔다 펴기도 하고 흔들어 주고 문질러 주고 비틀어 주기도 하여야 생기가 살아나고 더욱 발랄해 집니다.

    노자는 이러한 논리를 귀생(貴生)과 섭생(攝生)으로 설명 했습니다.

    귀생(貴生)이란?
    자신의 생을 너무 귀하게 여기면 오히려 생이 위태롭게 될 수 있고,
     
    섭생(攝生)이란?
    자신의 생을 적당히 불편하게 억누르면 생이 오히려 더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선섭생자, 이기무사지(善攝生者, 以基無死地)
    섭생(攝生)을 잘 하는 사람은 죽음의 땅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내 몸을 적당히 고생시키는 '섭생'이 '건강'한 생을 산다는것을 설파한 노자의 지혜가 오늘날에 더욱 돋보입니다.  

    "몸은 귀하게 여길수록 건강은 더욱 나빠진다."

    잔듸와 잡초


    우상은 잡초와 같다.
    잡초의 생존전략

    사람이나 초식동물들에게 먹히거나 뽑힌 잡초는 비상사태를 선포한다고 합니다.
    자신 안에 있는 모든 영양을 뿌리로 보내서 미생물들이 좋아하는 물질들을 흙속에 분비한다고 합니다.
    미생물들이 모여들어 활발한 활동을 시작하면 뿌리 주변에 많은 영양분들이 만들어집니다.
    그러면 잡초는 미생물들을 죽이는 물질을 분비해서 미생물들이 죽은 것까지 영양분으로 빨아들인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잡초의 강인한 생명력 때문에 다른 식물들보다 더 빠르고 왕성하게 성장할 수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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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5일(월) 인생(人生)의 길(예레미야 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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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찬송 / 496장(십자가로 가까이)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예레미야 10:1∼25
    ♦ 묵상을 위한 주제 : 인생의 길(23절)
    ♦ 성구 :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人生)의 길이 자기(自己)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指導)함이 걷는 자(者)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현대인의 성경)
    여호와여, 내가 알기에는 사람이 자신의 운명을 다스릴 수가 없고 삶의 방향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도 없습니다.

    (도입 이야기)

    "인샬라" 라는 말은 이집트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마치 한국인 관광객들이 오면 동남아 상가에서 상점 주인들이 "빨리 빨리" 라고 소리치는 것처럼 한국인의 습성을 "빨리 빨리"라고 이해합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인샬라" 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샬라"는 이집트인들의 숙명론과 같은 사고방식을 말합니다.
    "인샬라"는 "신의 뜻" 이란 의미라고 합니다.
    얼핏 생각하면 "하나님의 뜻"을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마치 신앙이 좋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인샬라"는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핑계로 사용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게을러서 가난한 것도 "인샬라" 라고 하여 "신의 뜻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합니다.
    약속 시간보다 서너 시간 늦게 나오면서도 "인샬라" 곧 "신의 뜻"이니 당연하다고 말합니다.


    지금은 은퇴하셨지만 교회 장로님이셨던 한양대학 국문학과 최래옥교수님은 한국민속의 민담을 연구하신 분입니다.
    저희 교회 어느 권사님의 친척이신데 제가 한동한 한국민담에 대해서 자료를 수집하며 그 장로님의 소문을 듣고 자료를 찾을 때 마침 그 권사님께서 친척이라며 흔쾌히 도와주셨습니다.

    최래옥 교수님의 이야기에 아주 인상 깊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칠판에 여덟 팔자를 한자로 크게 적었다고 합니다.
    학생들에게 질문하기를 "무슨 글자냐?"
    "예, 팔자입니다."
    이번에는 팔자의 끝을 길게 연결하여 그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학생들이 "팔자가 늘어졌습니다."
    다시 팔자가 길게 늘어진 것을 짧게 지웠다고 합니다.
    "팔자 고쳤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팔자는 운명이 아니라 내 소관이다. 그러므로팔자타령 하지 말고 팔자를 고치며 살아야 한다." 라고 일깨웠다고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날마다 망한다! 망한다! 이렇게 외치므로 11장에서는 아나돗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모의합니다.
    진리를 외치는 선지자를 죽일 것이 아니라 팔자를 고치려면 나를 고쳐야 하고 나를 죽여야 할 것입니다.

    남 유다 백성들이 머지않아 멸망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유다 백성들의 불순종이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샬라" 라고 한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예레미야 10장을 세 단락으로 구분합니다.

    10:1∼11, 우상과 하나님의 차이
    10:12~16, 만물과 만군의 하나님
    10:17~25, 두려움 속의 기도

    여러분의 삶은 누구의 것입니까?
    내가 주인이 될 때는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인이 될 때는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 이렇게 찬양합니다.

    10:1∼11, 우상과 하나님의 차이

    성경에서 우상이란 단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출애굽기 20: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우상은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예레미야 10:8
    우상의 도는 나무 뿐이라.

    예레미야 10:14
    그 부어만든 우상은 거짓 것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예레미야 51:17
    그 부어만든 우상은 거짓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예레미야 50:38
    가뭄이 물 위에 임하여 그것을 말리우리니 이는 그 땅이 조각한 신상의 땅이요 그들은 우상에 미쳤음이니라.

    (새번역) 가뭄이 땅의 물을 치니, 물이 말라 버린다. 바빌로니아는 온갖 우상을 섬기는 나라이니,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이 그 끔찍스러운 우상들 때문에 미쳐 버릴 것이다.

    10-11절,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왕이시라 
    그 진노하심에 땅이 진동하며 그 분노하심을 열방이 능히 당치 못하느니라. 
    너희는 이같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 위에서이 하늘 아래서 망하리라.

    우상(偶像)이란 무엇인가?

    -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우상의 특징을 두 가지로 설명한다면
    첫째는 인본주의
    둘째는 탐욕주의
     
    애급에서 노예로 살았던 히브리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가나안의 헷 족속은 철기문화를 갖고 있었습니다.
    노예생활에 시달려 문화가 없었던 히브리 백성들에게 철기 문화는 굉장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문화가 없었던 히브리 백성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도 문화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이 가나안 족속과 분쟁 가운데서 더 굳게 뿌리를 내리려면 히브리 백성들이 가나안 족속보다 더 우상숭배를 잘 해야 한다고 다짐했을 것입니다.

    구약 전체 속에 흐르고 있는 주된 종교적인 주제는 "우상"입니다.

    1. 헬라어로 우상은 ‘비실재’(非實在)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2. 우상은 인간의 심중 내면에서 일어나는 열정의 목표물이 표상된 것입니다.
    3. 우상 숭배의 본질은 손에 넣으려는 욕망입니다.
    4.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것,
    5. 당신의 마음과 공상의 세계를 하나님보다 더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것,
    6. 하나님만이 줄 수 있는 것을 주려고 하는 것

    우상(偶像)
    출애굽기 20: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애급에서 43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하던 히브리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가나안 족속들은 이미 철기문화를 누리고 있었다.
    문화를 모르던 사람들의 눈에 철기문화는 매우 신기하게 보였다.
    그 호기심 때문에 우상을 숭배하게 된다.
    애급의 대표적 문화는 송아지이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좋아한다.


    피조물을 신(神)으로 삼고 스스로의 욕망을 위해 이용해 왔기 때문이다.

    구약 우상의 종류들

    송아지 우상
    드라빔(Teraphim)
    돌기둥/마체바(Matzeva)
    엘(El)과 바알(Baal)
    아세라(Asherah)와 아스다롯(Ashtarte)
    바벨론의 마르둑(Marduk)
    블레셋의 다간/다곤(Dagon)
    모압의 그모스(Chemosh)
    암몬의 밀곰/몰렉/몰록(Molech)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Beelzebub)
    앗수르의 신 니스록(Nisroch)
    수메르의 두무지(Dumuzi)
    바벨론의 담무스/탐무즈(Tammuz)
    하늘의 여왕(the Queen of Heaven)
    구리뱀(the Bronze Snake)
    일월성신(日月星辰)
    신당/산당/사당(High places)



    10:12~16, 만물과 만군의 하나님


    14절,
    사람마다 우준하고 무식하도다 금 장색마다 자기의 조각한 신상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 부어만든 우상은 거짓 것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16절, 야곱의 분깃은 이같지 아니하시니 그는 만물의 조성자요 이스라엘은 그 산업의 지파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니라. 

    10:17~25, 두려움 속의 기도 

    21절, 형통치 못하며(지혜롭게 행하지 못하며)
    목자들은 우준하여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므로 형통치 못하며 그 모든 양떼는 흩어졌도다.

    23절,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人生)의 길이 자기(自己)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指導)함이 걷는 자(者)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오늘의 기도

    부활의 신앙으로 살아갈 지혜를 주옵소서!

    하나님의 영으로 미국과 한국을 덮어주소서!

    코로나 방역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게 하소서!

    한국 가요계에는 가수들의 운명이 가수가 부른 노래를 따라간다고 합니다.
    비록 대중가요가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었지만 노래가사 따라 인생이 결정된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차중락이란 가수가 부른 노래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은 "낙엽따라 가버린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찬바람이 싸늘하게 얼굴을 스치면

    따스하던 너의 두 뺨이 몹시도 그리웁구나

    푸르던 잎 단풍으로 곱게곱게 물들어

    그 잎새에 사랑의 꿈

    고이 간직 하렸더니

    아, 그 옛날이 너무도 그리워라

    낙엽이 지면 꿈도 따라 가는 줄 왜 몰랐던가

    사랑하는 이 마음을 어찌하오 어찌하오

    너와 나의 사랑의 꿈

    낙엽따라 가버렸으니

    아, 그 옛날이 너무도 그리워라

    낙엽이 지면 꿈도 따라 가는 줄 왜 몰랐던가

    사랑하는 이 마음을 어찌하오 어찌하오

    너와 나의 사랑의 꿈

    낙엽따라 가버렸으니


    1966년 가을 미국으로 떠났고 그해 11월 발표한 이 노래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은 사연과 함께 뭇 여성들의 심금을 울리며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다.
    꼭 2년 후인 1968년 11월 무대에서 공연 중이던 차중락은 뇌막염으로 쓰러져 숨진다.
    절정의 시기에 그를 떠나 보낸 사람들이 그를 못잊자 그의 동생인 차중광과 그의 사촌형인 차도균이 그의 노래를 대신 불러주며 위안했다.

    중락이 낙엽따라 떠난 것이 1968년 11월.
    그로부터 꼭 3년 후인 1971년 11월 동갑내기 배호가 안개 속으로 떠났다.

    혜성처럼 나타났다 갑자기 사라진 가수, 그렇지만 그 여운의 꼬리가 긴 가수.

    그룹생활까지 합쳐도 고작 5년, 27살이란 젊은 나이로 요절한 가수이다.
    생전에 불 같은 인기로 당대 최고의 가수 배호를 능가하는 화려한 시절도 있었지만 기간이 길지 않고
    그가 남긴 노래가 많지 않아 여운만 깊이 남았다.
    차중락의 인기에 정점을 찍었던 노래는 가을을 상징하는 노래처럼 된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이다.
    엘비스 프레스리의 곡을 번안한여 부른 이 곡이 그를 가을 남자로 만들었고  "낙엽따라 가버린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가수는 그가 부른 노래처럼 된다는 전설의 시발점이 되기도 한다.


    운과 행운의 차이

    '운(luck)'과 '행운(good luck)'의 차이점이 뭔지 아나?"
    운은 스쳐 지나가는 것일 뿐 결코 머물지 않는다.
    행운은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므로 영원히 가질 수 있다.
    만일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룬다면 행운은 결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미래를 원한다면 그 시작이 분명 있어야 한다.
    그 첫발을 오늘 당장 내딛자!

    - 알렉스 로비라 셀마의 《행운》중에서 -

    운과 행운은 다릅니다. 운은 오늘 이 순간 잠시 내 손 안에 머무는 것이지만, 행운은 오늘 잠시 머문 것을 내일도,모레도 내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의 운이 내일의 행운이 될 수 있도록, 지금 당장 시작하십시요. 오늘 어떻게 시작하느냐가 운과 행운의 갈림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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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각은 운명을 좌우한다

     

    캐스렐리라는 처녀가 가수가 되기를 원했는데 불행히도 얼굴이 아름답지 못했습니다. 특히 그녀의 입은 크고 이는 뻐드렁니였습니다. 그녀는 뉴저지의 나이트 클럽에서 노래를 부를 때 이 뻐드렁니를 감추려고 자꾸 윗입술을 오므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감추려해도 감춰지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한 사람이 그녀의 노래를 듣고 그 재질을 인정했습니다.

    “아가씨! 나좀 봐요. 난 당신이 노래하는 것을 주의해 보고 있었는데, 당신은 무엇인가 감추려는 것이 있어. 그 이가 창피한 모양인데…….”

    그녀는 홍당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오히려 그녀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 이가 어떻단 말이오. 뻐드렁니가 무슨 죄가 있나? 감추려고 하지 말아요. 당신이 부끄러워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청중들은 오히려 당신을 좋아할 거요.”

    캐스렐리는 그 충고를 듣고 자기의 못생긴 이를 생각지 않고 늘 청중을 생각하면서 즐겁게 입을 벌려 노래했습니다. 그녀는 영화와 라디오의 톱스타가 되었고, 많은 희극배우들은 그녀를 모방하려고 애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를 계발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 운명 감정이 불가능한 사람

     

    훌륭한 인물에게는 훌륭한 스승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가 잘 아는 토정(土亭) 이지함은 조선조 5백 년을 통하여 기인적(奇人的) 행동과 파격적인 에피소드들을 남긴 전설적인 인물일 뿐만 아니라, 천문 지리 산수 의약 주역 등에 조예가 깊었던 선도(仙道)의 대가였다. 또한 연초마다 인기가 있는 토정비결(土亭秘訣)이 그에게서 유래되었음은 익히 아는 터이다.

    이 토정의 스승이 이른바 송도삼절 중의 하나이고 당대의 명기(名妓) 황진이의 요염한 유혹을 기(氣)로써 다스렸다고 알려진 화담 서경덕 선생이다.

    이 화담이 토정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유의태(柳義泰)가 허준(許濬)에게 냉혹한 방법으로 뜨거운 사랑을 베풀었던 과는 대조적으로 화담은 매우 정 많고 온화하게 토정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화담 선생이 죽을 때가 되어 토정에게 현실적인 가르침을 주려고 팔도를 함께 유랑하던 중 밀양에서 있었던 얘기다.

    며칠째 굶주리던 화담 일행이 요기를 하려고 주막에 갔더니 빗장이 걸려 있었다. 하여, 어느 작은 절에 가 봤으나 거기도 텅 비어 있었다. 내려 오다 보니 나무 다리 위에 40쯤 되어 보이는 포졸이 힘없이 꾸벅거리고 앉아 있었다. 연유를 물으니, 주위에 염병(染病)이 퍼져 과객들로 하여금 이 곳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지키고 있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열 명이 있었는데, 다 도망가고 혼자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왜 당신은 도망가지 않고 있는가 하는 물음에, 포졸은, “저까지 도망가면 누가 여기를 지킵니까? 내 비록 먹을 게 없어 포졸 노릇을 시작은 했지만 맡은 일은 끝까지 해내야 되지 않겠소?” 했다.

    그 후 화담 선생은 염병 환자들을 구완하러 가면서 제자들에게 말했다.

    “저런 이의 운명은 감정할 수도 없다네. 운명에 맞서 저렇게 의연한 이는 하늘도 비켜가는 법이지.”

     

    ▣ 우연과 필연

     

    무슨 일이든 원인과 환경요인들이 서로 얽히고 설킨 가운데

    터질 만 하니까 터진 것이다.

    - 이장규의《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중에서 -

     

    * 역사가 뜻하지 않은 돌발요인에 의해 움직인다는 우연사관도 있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우연이라는 것도 그럴만한 필연의 결과이기 쉽습니다. 사람의 일에 이유와 원인이 없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 우연 속에 있는 필연

     

    1948년 10월 초에 한 젊은 목사님이 오래 된 교회에 부임했다. 이전에 그 교회는 웅장함을 자랑했지만 그가 부임할 당시에는 낡고 초라했다. 그래서 그는 부임하자마자 교회수리 작업에 들어갔다. 그 해의 성탄절 전야예배를 아름답게 드리겠다는 일념으로 그는 3달 동안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성탄절을 이틀 앞두고 갑자기 폭풍우가 휘몰아쳤다. 낡은 지붕에서 비가 흘러내렸다. 벽이 스펀지처럼 빗물을 빨아들였다.

    얼마 후에 벽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고 그 자리에 구멍이 생겼다. 그 구멍 난 벽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는 크게 낙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탄절까지 강단의 벽을 보수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지난 3달 동안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믿음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 날 오후에 그는 중고등부에서 주관하는 자선 바자회에 참석했다. 이것저것 둘러보는데 낡은 식탁보 하나가 그의 눈을 잡아당겼다. 금색과 아이보리색으로 혼합된 4.5미터짜리 식탁보였다. ‘저 식탁보로 강단의 벽에 뚫린 구멍을 막으면 되겠군.’ 그는 이렇게 생각하고는 그 식탁보를 샀다. 하루 뒤, 성탄절 이브에는 내내 눈보라가 내렸다. 그는 교회의 문을 잠그고 나오다가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 한 중년여성을 보았다. 그런데 버스가 오려면 최소한 30분은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그는 그녀더러 교회로 가서 몸을 좀 녹이자고 권했다. 그녀는 그 지역의 유명한 부잣집에서 유모를 구한다기에 면접을 보러온 타지역 사람이었다. 그녀는 전쟁 피난민이었고 영어도 서툴러서 그 유모 자리를 얻지 못하고 돌아가던 중이었다. 그녀는 교회의 뒤쪽 의자에 앉아서 잠시 기도하고 있었고 그는 일어나 구멍 난 벽에다 그 식탁보를 걸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그에게로 달려오면서 외쳤다. “목사님, 제 겁니다. 제 식탁보가 틀림없어요.” 그가 깜짝 놀라자 그녀는 그 식탁보의 한 쪽 구석에 수 놓여 있던 자신의 이름을 찾아서 보여 주었다. 그녀는 이전에 자신의 남편과 함께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살았는데 2차 세계대전 직전에 나치에 반대하다가 스위스로 이주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둘이 함께 가면 위험하다고 남편이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그녀만 먼저 스위스로 떠나게 됐다. 나중에 그녀는 남편이 나치 수용소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그는 무척 감동을 받고는 그 식탁보를 그녀에게 돌려주려고 했다. 그러자 그녀는 그것이 교회 안에 있는 것이 더 아름답다면서 사양하고는 떠나갔다. 성탄절 전야예배가 드려질 때 그것은 촛불 아래서 더 없이 아름다워 보였다. 전야예배가 아주 감동적으로 드려졌다. 예배 후 성도들은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 때 한 노신사가 황홀한 듯이 그 식탁보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노신사는 교회를 나가면서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참 이상하네요. 오래 전에 저도 저런 식탁보를 가지고 있었어요. 제 아내는 아주 특별한 날에만 그 식탁보를 사용하곤 했지요. 빈에서 살 때였지요.” 갑자기 그의 온 몸에서 소름이 쫙 끼쳤다. 그는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애쓰면서 그 날 오후에 만났던 그 중년여성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그 노신사는 신음하듯이 말했다. “아니 이럴 수가...내 아내가 살아 있다니...어떡하면 만날 수 있지요.”

    그 노신사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는 그녀가 면접하러 들렀던 그 부잣집에 전화해서 그녀의 이름과 주소를 알아냈다. 그는 낡은 차를 몰고 그 노신사와 함께 그녀의 집을 찾아갔다. 그가 문을 두드리자 그녀가 나왔다. 그 날 밤에 그는 두 부부의 눈물겹도록 행복한 재회장면을 지켜볼 수 있었다. 징검다리를 만드는 돌덩이 하나하나는 우연히 거기에 놓여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쭉 이어져 있는 징검다리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필연이다. 하나님은 우연하게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엮어서 아주 필연적인 사건을 만드신다. 우연 속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고 하나님의 의도가 있다. 우리가 잘 살피기만 하면 우연 속에서 빙그레 웃고 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김종춘 목사(크리스천투데이)

     

    ▣ 인생은 무엇으로 사는가

     

    인생을 노력으로 살려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성공은 노력의 산물이라는 생각하에 매사에 최선을 다한다. 열심히 인생을 계획한다. 그리고 계획한 대로 열심히 산다. 그런가 하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틀은 결코 바꿀 수 없다는 운명론적 생각을 갖고 사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운명이 인생을 좌우한다고 믿기 때문에 모든 인생의 생로병사를 마치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나약한 인생을 산다. 그러나 인생은 노력으로 되어지는 것도 아니고, 운명이 인생을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다. 인생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산다. 그러면 무엇이 축복인가? 사람들은 부요와 건강과 장수와 성공 같은 유물적인 것을 축복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축복의 열매일 뿐이다. 진정한 축복은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하여 자녀 삼아주시고, 이 모든 삶의 조건을 날마다 충족시켜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길자연 목사(왕성교회)

     

    ▣ 역사를 바꾼 두 아이

     

    1889년, 역사를 바꾸어놓은 두 아이가 태어났다. 한 아이는 사촌간인 오스트리아인 부부 사이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소년은 알코올 중독자인 숙모 밑에서 성장했다. 그는 16세 때 학교를 중퇴하고 극렬분자가 됐다. 그의 이름은 아돌프 히틀러.

    또 다른 하 아이가 같은 해 미국 텍사스에서 태어났다.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받으며 자란 소년은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소년의 이름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두 사람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만났다. 한 사람은 분노의 독기를 발산했고 다른 한 사람은 평화를 외쳤다.

    히틀러는 56세 때 대피소에서 자살해 많은 사람들이 기뻐했고, 아이젠하워가 눈을 감을 때는 세계가 애도했다. 상반된 부모의 교육이 두 아이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 운명을 바꾼 책 한 권 이야기

     

    지금부터 약 90여년 전에 영국에서 일어난 일이다. 한 시골 소년이 런던의 어느 큰 교회를 찾아갔다. 소년은 집이 몹시 가난해 더 이상 공부를 할 수 없게 되자 교회의 도서관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그나마 공부도 하고 책도 읽으려고 무작정 올라온 것이었다. 소년은 목사가 외출하고 없자 대기실에서 기다렸다. 소년의 등뒤엔 수많은 책들로 가득했다. 그것을 바라보는 소년의 눈에는 반짝 빛이 났다. 흥분한 소년은 책을 둘러보다가 한쪽 구석에 두껍게 먼지가 쌓인 책 한 권을 발견했다. 볼품이 없는 그 책은 아무도 펼쳐보지 않은 듯 했다. 소년은 먼지라도 털 생각으로 책을 꺼냈다가 차츰 그 내용에 빨려들게 되었다. 그 책은 페브리에의 [동물학]이었다. 소년은 서서 그 책을 열심히 읽었다. 마침내 마지막 장을 읽었을 때 뒷장에 이런 메모가 남겨져 있었다. "이 책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제 곧 런던법원으로 가서 1136호의 서류를 가지십시오."

    어리둥절한 소년은 곧장 법원으로 달려가 서류를 받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서류엔 소년에게 400만 달러의 유산을 상속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소년은 눈을 비비며 다시금 꼼꼼히 서류를 읽어보았다.

    "이것은 나의 유언장입니다. 당신은 나의 저서를 처음으로 읽어주신 분입니다. 나는 평생을 바쳐 동물학을 연구하고 책을 썼지만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 권의 책만 런던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도서관에 기증하고 나머지 책은 모두 불살랐습니다. 당신이 그 교회의 내 유일한 저서를 읽어주셨으니 내 전재산을 드리겠습니다."

    그 사건은 영국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모두들 엄청난 유산에 관심이 쏠렸다. 소년은 페브리에의 뜻을 기려 영국 전역에 도서관을 세웠다. 그리고 좋은 책을 보급하는데 힘썼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며 평생을 보냈다. 책 한 권이 소년에게 놀라운 행운과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

     

    「살인을 위한 교본」이라는 책은 자살하는 방법에 대해 가르쳐 줍니다. 작가는 이 책머리 부분에서 "만약 당신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운명을 좌우하신다고 생각한다면 더 이상 읽지 마시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 궁극적으로 사는 것과 죽는 것을 지배하고 있을까요? 우리 몸의 권리증서를 누가 소유하고 있을까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민27:16)

    범죄한 인간이 최종적으로 선택할 것은 자살이 아니라 회개입니다.(계3:19)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와 핍박하는 자의 손에서 나를 건지소서"(시31:15)

     

    ▣ 어리석은 자의 주장

     

    성경: 시편 14 장 1 절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종교개혁자인 루터는 독일 아이스레벤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법률가가 되기를 원했기에 법대에 진학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는 운명적인 여름방학을 보낸 뒤 신학교로 옮기게 됩니다. 운명을 바꾼 그 사건은 친구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더니 천둥 번개가 쳤습니다. 그들은 근처에 있는 커다란 나무 밑으로 피했습니다. 잠시 후 느닷없이 벼락이 떨어져서 나무가 쓰러졌고 미처 피하지 못한 친구는 나무에 깔려서 죽었습니다. 루터는 두려움에 떨면서 땅에 엎드려서 기도했습니다. ‘성 안느여, 나를 구원하시면 내 평생 당신을 섬기겠습니다.’ 루터는 신의 존재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간 뒤 바로 진로를 바꿨습니다. 누구든지 이러한 일을 당한다면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현대를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시는 시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자들의 무지한 주장에 불과합니다. 이 순간에도 하나님은 어리석은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회개할 기회를 주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 기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하게 하소서.

    /시편을 통한 매일묵상집

     

    ▣ 데이빗 스원 같은 인생

     

    시골 젊은이가 푸른 꿈을 안고 도시 친척집을 찾아 길을 나섰습니다. 푸르고 울창한 숲가에 이른 데이빗 스원은 봇짐을 베개 삼아 곤히 낮잠에 빠져들었습니다. 젊은이가 달게 잠을 자고 있는 한 시간 동안, 많은 운명의 신이 그에게 다가왔다가 사라졌습니다. 아들 없는 부자 노부부가 쉬러 왔다가 순진한 얼굴의 젊은이를 보고 유산을 남길 양자로 삼을까 하다가 지나가기도 하고 강도가 봇짐을 빼앗으려고 칼을 들고 다가왔다가 갑자기 사냥개가 나타나는 바람에 그냥 지나가기도 했습니다. 어느 어여쁜 숙녀가 젊은이를 남편감으로 맞으러 머뭇거리다가 그냥 지나가기도 했지요. 이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는 데이빗은 잠에서 깨어 한길로 나와서 도시로 가는 차를 얻어 타려고 달려갑니다. 「주홍글씨」로 유명한 나다니엘 호돈의 단편「데이빗 스원」의 줄거리입니다. 젊은이는 갑자기 죽을 뻔하기도 하고 부잣집 양자가 될 뻔하기도 하고 아리따운 아내를 맞을 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운명을 인지하지 못한 채 다시금 일상의 생활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주인공의 모습과 당신의 모습은 어딘가 닮은 데가 없습니까?

    /여운학 사랑의편지 발행인

     

    ▣ 앞으로 나가는 생활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에 보면 장망성에서 뛰어 나온 후에 악마가 앞에서 대결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크리스천은 다시 뒤로 돌아서고 싶어합니다. 갑옷이나 철갑이나 흉배나 창은 앞을 향해서 앞에 있는 적과 싸우라고 있는 것이지 뒤에 있는 적에게 대찬 것이 아닙니다. 뒤는 무방비 상태입니다. 존 번연이 재미있는 묘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사단은 앞에 있는데 다시 옛날 생활로 되돌아가면 뒤에는 아무 방비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앞을 향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앞의 적을 위해서만 무장해 주었지 뒤로 돌아가기 위해서 무장해 준 것이 아닙니다. 뒤돌아 서면 죽습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운명입니다. 우리는 앞을 향하여 갈수 밖에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회의도 생기고 어려움도 생깁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눅9:62)

     

    ▣ 운명의 개척

     

    눈물을 흘리며 신앙 상담을 하러 온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술주정이 심한 아버지로 인해 어린 시절을 무척 고통스럽게 보냈기 때문에 남자는 전부 자기 아버지 같은 줄로만 알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녀는 절대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려고 했는데 교제 기간 동안에는 술을 입에 대지도 않았던 남편이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술주정을 하며 손찌검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왜 이렇게 팔자가 기구합니까? 친정아버지가 술주정이 심하여 늘 술을 마시고 와서는 어머니를 때렸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온갖 고생을 하며 우리들을 키우셨고 우리는 그런 부모님 밑에서 어린시절을 눈물로 보냈습니다. 그래서 제가 결혼할 때가 되었을 때도 아버지 같은 사람과는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남편 역시 그런 사람을 만나다니요. 하나님은 너무 불공평하십니다."

    "자매님은 하나님을 원망하며 운명을 탓하고 남편을 원망하지만, 실은 자매님 자신이 그런 운명 속으로 자신을 끌어들인 것입니다. 자매님은 남자들이 모두 자매님의 아버지 같다는 잘못된 자화상을 갖고 있습니다. 아내를 사랑하고 가족을 잘 돌보며 가정에0 충실한 남편을 마음속에 그리기보다는 술 먹고 난폭하게 손찌검이나 하며 게으른 남편을 마음속에 그려왔습니다. 그것이 자매님의 잠재의식 속에 깊이 박혀 있는 것입니다. 먼저 자매님의 마음속에 파놓은 함정을 메꾸십시오. 마음의 생각이 주 안에서 올바르게 될 때, 하나님은 자매님의 생각을 바탕으로 자매님을 변화시키고 환경을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매님은 지금이라도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속에 그리는 그림대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엡 3:20)' 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었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구하는 것을 통해서 역사 하시기 때문에 우리 마음의 생각과 기도 자세가 올바르지 않으면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믿고 하나님께 맡기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친히 도우시고 인도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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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5일(월) 인생(人生)의 길(예레미야 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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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찬송 / 496장(십자가로 가까이)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예레미야 10:1∼25
    ♦ 묵상을 위한 주제 : 인생의 길(23절)
    ♦ 성구 :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人生)의 길이 자기(自己)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指導)함이 걷는 자(者)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현대인의 성경)
    여호와여, 내가 알기에는 사람이 자신의 운명을 다스릴 수가 없고 삶의 방향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도 없습니다.

    (도입 이야기)

    "인샬라" 라는 말은 이집트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마치 한국인 관광객들이 오면 동남아 상가에서 상점 주인들이 "빨리 빨리" 라고 소리치는 것처럼 한국인의 습성을 "빨리 빨리"라고 이해합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인샬라" 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샬라"는 이집트인들의 숙명론과 같은 사고방식을 말합니다.
    "인샬라"는 "신의 뜻" 이란 의미라고 합니다.
    얼핏 생각하면 "하나님의 뜻"을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마치 신앙이 좋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인샬라"는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핑계로 사용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게을러서 가난한 것도 "인샬라" 라고 하여 "신의 뜻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합니다.
    약속 시간보다 서너 시간 늦게 나오면서도 "인샬라" 곧 "신의 뜻"이니 당연하다고 말합니다.

    "눈의 색깔을 바꿀 수는 없지만 눈빛은 바꿀 수 있다. 입의 크기는 바꿀 수 없지만 입의 모양은 미소로 바꿀 수 있다.
    빨리 뛸 수는 없지만 씩씩하게 걸을 수는 있다."

    지금 이 순간 운명의 모습을 바꿀 메스를 쥐어라.
    불필요한 것들은 모두 잘라내고 새로운 기운과 새로운 삶을 덧붙여라.
    그리하면 분명 운명의 주인이 될 것이다.

    지금은 은퇴하셨지만 교회 장로님이셨던 한양대학 국문학과 최래옥교수님은 한국민속의 민담을 연구하신 분입니다.
    저희 교회 어느 권사님의 친척이신데 제가 한동한 한국민담에 대해서 자료를 수집하며 그 장로님의 소문을 듣고 자료를 찾을 때 마침 그 권사님께서 친척이라며 흔쾌히 도와주셨습니다.

    최래옥 교수님의 이야기에 아주 인상 깊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칠판에 여덟 팔자를 한자로 크게 적었다고 합니다.
    학생들에게 질문하기를 "무슨 글자냐?"
    "예, 팔자입니다."
    이번에는 팔자의 끝을 길게 연결하여 그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학생들이 "팔자가 늘어졌습니다."
    다시 팔자가 길게 늘어진 것을 짧게 지웠다고 합니다.
    "팔자 고쳤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팔자는 운명이 아니라 내 소관이다. 그러므로팔자타령 하지 말고 팔자를 고치며 살아야 한다." 라고 일깨웠다고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날마다 망한다! 망한다! 이렇게 외치므로 11장에서는 아나돗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모의합니다.
    진리를 외치는 선지자를 죽일 것이 아니라 팔자를 고치려면 나를 고쳐야 하고 나를 죽여야 할 것입니다.

    남 유다 백성들이 머지않아 멸망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유다 백성들의 불순종이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샬라" 라고 한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예레미야 10장을 세 단락으로 구분합니다.

    10:1∼11, 우상과 하나님의 차이
    10:12~16, 만물과 만군의 하나님
    10:17~25, 두려움 속의 기도

    여러분의 삶은 누구의 것입니까?
    내가 주인이 될 때는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인이 될 때는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 이렇게 찬양합니다.

    10:1∼11, 우상과 하나님의 차이

    성경에서 우상이란 단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출애굽기 20: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우상은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예레미야 10:8
    우상의 도는 나무 뿐이라.

    예레미야 10:14
    그 부어만든 우상은 거짓 것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예레미야 51:17
    그 부어만든 우상은 거짓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예레미야 50:38
    가뭄이 물 위에 임하여 그것을 말리우리니 이는 그 땅이 조각한 신상의 땅이요 그들은 우상에 미쳤음이니라.

    (새번역) 가뭄이 땅의 물을 치니, 물이 말라 버린다. 바빌로니아는 온갖 우상을 섬기는 나라이니,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이 그 끔찍스러운 우상들 때문에 미쳐 버릴 것이다.


















    10-11절,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왕이시라 
    그 진노하심에 땅이 진동하며 그 분노하심을 열방이 능히 당치 못하느니라. 
    너희는 이같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 위에서이 하늘 아래서 망하리라.

    우상(偶像)이란 무엇인가?

    -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우상의 특징을 두 가지로 설명한다면
    첫째는 인본주의
    둘째는 탐욕주의
     
    애급에서 노예로 살았던 히브리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가나안의 헷 족속은 철기문화를 갖고 있었습니다.
    노예생활에 시달려 문화가 없었던 히브리 백성들에게 철기 문화는 굉장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문화가 없었던 히브리 백성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도 문화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이 가나안 족속과 분쟁 가운데서 더 굳게 뿌리를 내리려면 히브리 백성들이 가나안 족속보다 더 우상숭배를 잘 해야 한다고 다짐했을 것입니다.

    구약 전체 속에 흐르고 있는 주된 종교적인 주제는 "우상"입니다.

    1. 헬라어로 우상은 ‘비실재’(非實在)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2. 우상은 인간의 심중 내면에서 일어나는 열정의 목표물이 표상된 것입니다.
    3. 우상 숭배의 본질은 손에 넣으려는 욕망입니다.
    4.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것,
    5. 당신의 마음과 공상의 세계를 하나님보다 더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것,
    6. 하나님만이 줄 수 있는 것을 주려고 하는 것


    피조물을 신(神)으로 삼고 스스로의 욕망을 위해 이용해 왔기 때문이다.

    구약 우상의 종류들

    송아지 우상
    드라빔(Teraphim)
    돌기둥/마체바(Matzeva)
    엘(El)과 바알(Baal)
    아세라(Asherah)와 아스다롯(Ashtarte)
    바벨론의 마르둑(Marduk)
    블레셋의 다간/다곤(Dagon)
    모압의 그모스(Chemosh)
    암몬의 밀곰/몰렉/몰록(Molech)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Beelzebub)
    앗수르의 신 니스록(Nisroch)
    수메르의 두무지(Dumuzi)와
    바벨론의 담무스/탐무즈(Tammuz)
    하늘의 여왕(the Queen of Heaven)
    구리뱀(the Bronze Snake)
    일월성신(日月星辰)
    신당/산당/사당(High places)

    우상은 잡초와 같다.
    잡초의 생존전략

     ‘잡초’들의 놀라운 생존 전략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이나 초식동물들에게 먹히거나 뽑힌 잡초들은 비상사태를 선포한답니다.
    자신 안에 있는 모든 역량을 뿌리로 보내서 미생물들이 좋아하는 물질들을 흙속에 분비하게 한답니다.
    미생물들이 모여들어 활발한 생리활동을 하게 되면 뿌리 주변에 많은 영양분들이 만들어지게 된답니다.
    그리고 나면 이제 미생물들을 죽이는 물질을 분비해서 미생물 죽은 것까지 영양분으로 빨아들이게 된답니다.
    그래서 다른 식물들보다 잡초들이 급속하게 성장하게 된답니다.

    10:12~16, 만물과 만군의 하나님


    14절,
    사람마다 우준하고 무식하도다 금 장색마다 자기의 조각한 신상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 부어만든 우상은 거짓 것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16절, 야곱의 분깃은 이같지 아니하시니 그는 만물의 조성자요 이스라엘은 그 산업의 지파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니라. 

    10:17~25, 두려움 속의 기도 

    21절, 형통치 못하며(지혜롭게 행하지 못하며)
    목자들은 우준하여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므로 형통치 못하며 그 모든 양떼는 흩어졌도다.

    23절,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人生)의 길이 자기(自己)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指導)함이 걷는 자(者)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오늘의 기도

    부활의 신앙으로 살아갈 지혜를 주옵소서!

    하나님의 영으로 미국과 한국을 덮어주소서!

    코로나 방역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게 하소서!

    한국 가요계에는 가수들의 운명이 가수가 부른 노래를 따라간다고 합니다.
    비록 대중가요가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었지만 노래가사 따라 인생이 결정된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차중락이란 가수가 부른 노래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은 "낙엽따라 가버린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찬바람이 싸늘하게 얼굴을 스치면

    따스하던 너의 두 뺨이 몹시도 그리웁구나

    푸르던 잎 단풍으로 곱게곱게 물들어

    그 잎새에 사랑의 꿈

    고이 간직 하렸더니

    아, 그 옛날이 너무도 그리워라

    낙엽이 지면 꿈도 따라 가는 줄 왜 몰랐던가

    사랑하는 이 마음을 어찌하오 어찌하오

    너와 나의 사랑의 꿈

    낙엽따라 가버렸으니

    아, 그 옛날이 너무도 그리워라

    낙엽이 지면 꿈도 따라 가는 줄 왜 몰랐던가

    사랑하는 이 마음을 어찌하오 어찌하오

    너와 나의 사랑의 꿈

    낙엽따라 가버렸으니


    1966년 가을 미국으로 떠났고 그해 11월 발표한 이 노래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은 사연과 함께 뭇 여성들의 심금을 울리며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다.
    꼭 2년 후인 1968년 11월 무대에서 공연 중이던 차중락은 뇌막염으로 쓰러져 숨진다.
    절정의 시기에 그를 떠나 보낸 사람들이 그를 못잊자 그의 동생인 차중광과 그의 사촌형인 차도균이 그의 노래를 대신 불러주며 위안했다.

    중락이 낙엽따라 떠난 것이 1968년 11월.
    그로부터 꼭 3년 후인 1971년 11월 동갑내기 배호가 안개 속으로 떠났다.

    혜성처럼 나타났다 갑자기 사라진 가수, 그렇지만 그 여운의 꼬리가 긴 가수.

    그룹생활까지 합쳐도 고작 5년, 27살이란 젊은 나이로 요절한 가수이다.
    생전에 불 같은 인기로 당대 최고의 가수 배호를 능가하는 화려한 시절도 있었지만 기간이 길지 않고
    그가 남긴 노래가 많지 않아 여운만 깊이 남았다.
    차중락의 인기에 정점을 찍었던 노래는 가을을 상징하는 노래처럼 된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이다.
    엘비스 프레스리의 곡을 번안한여 부른 이 곡이 그를 가을 남자로 만들었고  "낙엽따라 가버린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가수는 그가 부른 노래처럼 된다는 전설의 시발점이 되기도 한다.


    운과 행운의 차이

    '운(luck)'과 '행운(good luck)'의 차이점이 뭔지 아나?"
    운은 스쳐 지나가는 것일 뿐 결코 머물지 않는다.
    행운은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므로 영원히 가질 수 있다.
    만일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룬다면 행운은 결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미래를 원한다면 그 시작이 분명 있어야 한다.
    그 첫발을 오늘 당장 내딛자!

    - 알렉스 로비라 셀마의 《행운》중에서 -

    운과 행운은 다릅니다. 운은 오늘 이 순간 잠시 내 손 안에 머무는 것이지만, 행운은 오늘 잠시 머문 것을 내일도,모레도 내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의 운이 내일의 행운이 될 수 있도록, 지금 당장 시작하십시요. 오늘 어떻게 시작하느냐가 운과 행운의 갈림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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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헬라어로 우상은 ‘비실재’(非實在)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철학자 플라톤은 영원 불변의 실재에 대한 반의어로서 환상과 같은 이 세상을 나타내는데 이 말을 사용했습니다.
    예언자들이 말한 이교의 우상은 유일하고도 참된 하나님에 대해서 비현실적인 거짓 신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온갖 거짓 숭배물로부터 멀리하라.”는 웨스트 코트의 말은 이것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2. 우상은 인간의 심중 내면에서 일어나는 열정의 목표물이 표상된 것입니다.

    즉 재산, 권력, 명예 등을 갖고 싶어하는 열망과 충동이 표출되어 나타난 것이 우상입니다.

    우상이란 곧 하나님 대신으로 생각하는 것, 다시 말해 우리의 가장 귀한 애정을 빼앗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하나님보다 자기의 아내나 자녀 혹은 명성이나 사업을 첫째로 생각한다면 그것이 그의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3. 우상 숭배의 본질은 손에 넣으려는 욕망입니다.

    사람은 신으로부터 무엇을 얻기를 원하여 우상을 만들고 이것을 예배합니다.
    심지어 사람은 희생과 봉헌물과 예배에 의하여 자기가 원하고 있는 것을 얻기 위해 신을 설득하고 매수할 수 있다고까지 생각합니다. C.F.D. 몰은 “우상 숭배란 자기를 신에게 봉사로 드리려는 것보다 자기 목적 때문에 신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상 숭배의 본질은 보다 많이 가지고자 원하는 욕망입니다.
    따라서 무엇을 얻으려는 욕망에 자신의 전생활을 맡기는 사람은 하나님이 설 자리에 물질을 놓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신이 아니라 물질을 예배하는 것이며 이것이 우상숭배입니다.

    1.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것,
    2. 당신의 마음과 공상의 세계를 하나님보다 더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것,
    3. 하나님만이 줄 수 있는 것을 주려고 하는 것

    우상은 사람의 마음을 통제하기 때문에 우상을 숭배하는 자는 두 번 생각하지도 않고 열정과 에너지, 감정과 재산의 대부분을 우상에 쏟아 붓는다.
    이와 같은 우상이 될 수 있는 것은 수없이 많다.
    가족과 아이들, 경력과 돈벌이, 성취감과 평론가들의 갈채, “체면” 유지와 사회적 지위, 능력과 기술, 안전하고 편안한 환경, 아름다움 혹은 지능, 중대한 정치적 대의나 사회적 대의, 도덕성과 미덕, 심지어는 성공적인 기독교 선교활동도 우상이 될 수 있다.

    삶의 의미가 다른 누군가의 인생을 바로잡는 데 있다면, 그것을 “상호의존”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기실 그것은 우상숭배다.
    당신이 무언가를 보고서 마음 속 저 깊은 데서부터 “네가 저것만 가질 수 있다면 내 인생에도 의미가 있다고 느낄 것이고, 나도 가치가 있음을 알 것이며, 그렇게 되면 자존심도 생기고 안전한 느낌도 가질 텐데….” 라고 말한다면, 그게 무엇이든 바로 당신의 우상이다.
    그런 관계를 묘사할 수 있는 방법이야 많이 있겠지만, 아마도 가장 훌륭한 것은 숭배 (Worship) 라는 표현이리라.

    성서에서 말하는 우상숭배는 극히 복잡한 개념으로 지적 범주와 심리적 범주, 사회적 범주, 문화적 범주, 정신적 범주를 모두 통합한 것이다. 우상 가운데서도 낭만적인 사랑과 가족, 돈, 권력, 성취감, 특정한 사회계층에 진입하고자 하는 욕구, 감정적 의존의 대상이 되려는 욕구, 건강, 몸매, 외적인 아름다움과 같은 것들은 개인적인 우상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것들에 의지해 오직 하나님만이 줄 수 있는 희망과 의미, 성취감을 얻으려고 한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인생(人生)의 길(a man's life)”은 내가 주인이 아니라 걸음을 지도하는 자 곧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이제부터는 내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믿고 내 생명과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자유를 얻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중심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과 다른 민족의 차이라고 하겠습니다.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사시는 하나님이시오 영원한 왕이시라.”(10a) 

    그러나 열방의 길을 걷는 백성들은 두려움에 붙잡혀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늘의 징조와 손으로 만든 우상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열방의 길을 걷는 백성들처럼 두려워하는 것은 우준하여 여호와를 찾지 않아 지혜롭게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21절).

    북방으로부터 크게 떠드는 풍성이 들려오므로 유다 성읍은 황폐하여 들짐승의 거처가 될 것이므로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여 나를 징계하옵시되 너그러이 하시고 진노로 하지 마옵소서 주께서 나로 없어지게 하실까 두려워하니이다.”(23∼24절)

    열방의 길을 걸으며 주의 이름을 알지도 못하고 기도하지 못하는 족속에게 주의 분노를 부으시고 주님을 찾는 자들에게 힘을 더하여 주소서.

    ♪ 찬양 /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https://www.youtube.com/watch?v=9FNMj1rPU2c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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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3일(토) 쑥과 독(毒)한 물(예레미야 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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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찬송 / 141장(웬말인가 날 위하여)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예레미야 9:1∼26
    ♦ 묵상을 위한 주제 : 쑥과 독한 물(15절)
    ♦ 성구 :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그들 곧 이 백성에게 쑥을 먹이며 독한 물을 마시우고.

    (공동번역) 14절, 그래서 나 만군의 야훼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으로서 선언한다. 나는 이 백성에게 소태를 먹이고 독약을 마시게 하리라.

    (현대인) 그러므로 전능한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말한다. 보라, 내가 이 백성에게 을 먹이며 독물을 마시게 하고.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
    왜 울어야 했습니까?
    거짓 선지자들의 거짓 예언 때문이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화두(話頭)는 "네가 무엇을 보느냐?"
    살구나무가지(샤케드)를 보나이다.
    지킨다(쇼케드)
    언어의 유희라고 합니다.

    2장 : 두 가지 악
    3장 : 하나님 마음에 합하는 목자
    4장 : 묵은 땅을 기경하라
    5장 : 기괴하고 놀라운 일
    6장 : 옛적 길 곧 선한 길
    7장 : 여호와의 전(성전지상주의)
    8장 : 중심의 번뇌(마음의 고통)
    9장 : 쑥과 독한 물(바벨론의 침략에 의한 멸망)

    북 이스엘 왕국
    남 유다 왕국을 덮고 있는 "더러운 영" 즉 우상숭배를 걷어버리고 거룩한 영으로 덮어야 합니다.
    오늘 날도 미국을 덮고 있는 진보적인 사상(동성애 합법화 작업)
    한국을 덮고 있는 좌편향 사상(중국과 연합하여 동북아시아 평화를 유지하겠다)
    정권 말기 누수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쑥과 독한 물(bitter food and drink poisoned wa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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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서 9장의 내용을 세 단락으로 구분합니다.
    9:1∼2, 예레미야의 애끓는 심정 
    9:3∼9, 유다 백성들의 멈추지 않는 죄
    9:10∼22, 하나님의 심판 

    옛날 조선 시대에 관가에서 "사약(死藥)"으로 사용하던 것은 "천남성"과 "초오(투구꽃)"라고 합니다.
    그런데 선지자 예레미야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에게 "쑥"을 먹이고 "독한 물"을 마시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쑥과 독한물은 이웃나라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침략을 받아 멸망할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나라가 망하는 징조 세 가지

    첫째, 우상숭배의 만연

    사람의 미래는 물론 사회의 미래도 "섬길 자를 누구로 선택하느냐?" 에 따라 상당히 좌우된다.
    우상숭배의 풍조는 나라와 민족이 망하는 제일 망조다.

    시편 144:15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시편 146:5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둘째, 리더십의 혼란

    리더십 체계의 혼란은 나라와 민족이 망할 것을 예고하는 또하나의 망조다.
    반면에 바른 리더십이 굳건히 서 있기만 하면 가장 큰 시험의 때는 오히려 번영의 때로 귀결된다.

    셋째, 사명감의 쇠퇴

    다양성은 무원칙이 아니다.
    다양성이 존중되어야 하는 만큼 질서와 원칙과 통합정신도 존중되어야 한다.

    사람에게 "절대로 기죽지 말라"는 교육과 도전도 중요한 것이지만
    "질서와 원칙을 지키라"는 교육과 도전은 더욱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존 교회가 갖고 있는 것들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것을 세우시려는 시기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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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은 쑥을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잠언 5:3-4 / 대저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 입은 기름보다 마끄러우나 나중은 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같이 날카로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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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는 독한 물을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예레미야 8:14 / 여호와께서 멸하시는 것

    우리가 어찌 가만히 앉았으랴 모일찌어다 우리가 견고한 성읍들로나 들어가서 거기서 멸망하자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멸하시며 우리에게 독한 을 마시우심이니라.


    예레미야 9:15 / 진멸 시키는 칼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그들 곧 이 백성에게 쑥을 먹이며 독한 물을 마시우고.

    예레미야 23:15 / 선지자들에게 쑥과 독한 물(거짓 선지자들의 예언)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내가 선지자에 대하여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그들에게 쑥을 먹이며 독한 을 마시우리니 이는 사악이 예루살렘 선지자들에게로서 나와서 온 땅에 퍼짐이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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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 유다의 죄는 무엇인가?(3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들이 활을 당김같이 그 혀를 놀려 거짓을 말하며 그들이 이 땅에서 강성하나 진실하지 아니하고 악에서 악으로 진행하며 또 나를 알지 아니하느니라.

    진실하지 아니하고 :
    진리를 위해 용감하지 않으며(MT, KJV)

    두 가지 악 : 거짓말, 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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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 9장의 교훈

    첫째, 죄의 결과는 하나님의 징벌이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 일들을 인하여 그들에게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런 나라에 보수(報讎)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신다.
    그는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인 동시에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죄를 회개치 않는 자들에게 엄하게 벌하실 것이다.

    둘째, 모든 죄를 회개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행음과 배신, 거짓과 이웃 비방, 악행, 또 하나님을 알지 못함을 회개해야 했다.
    오늘날 우리도 불경건과 배신, 우상숭배, 돈 사랑, 세상 사랑을 회개하고 육신적 음행도 멀리하고 거짓말을 버리고 남을 비방하는 죄도 짓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생명과 평안과 형통함을 얻을 것이다.

    셋째,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라.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유다 나라에 곧 내리실 두렵고 불행한 멸망을 바라보면서 눈물로 통곡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온 세상의 종말이 가까이 오고 있음을 깨닫고, 믿음 없는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 멸망하는 우리나라와 온 세상을 위해, 배교한 교회들과 타협적인 교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넷째, 죄악된 나라는 망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그들 앞에 세운 하나님의 법을 버리고 그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며 그대로 행치 아니하고 그 마음의 완고함을 따라 그 열조가 자기에게 가르친 바알들을 좇았다(13-14절).
    그러므로 그 나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고 수치와 욕을 당할 것이다.

    다섯째, 죄인들은 회개하고 애곡해야 한다.

    그들은 죄의 값이 멸망인 것을 깨닫고 우상숭배와 음란을 버리고 기타 모든 죄악들을 다 버리고 하나님께로 나와야 한다. 죄인들은 철저히 눈물로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제사는 어느 시대에나 상한 심령이다(시편 51:17).

    여섯째, 세상의 것들을 자랑하지 말고 하나님만 자랑하자.

    23-24절,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나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이 세상의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그것들은 그 심판을 모면하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고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자랑해야 한다.


    오늘의 기도

    1. 어둠의 영이 덮고 있는 미국과 한국을 보혜사 성령께서 덮어주소서!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는 우숭을 숭배하는 어둠의 영이 덮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미국과 한국을 덮고 있는 어둠의 영을 보혜사 성령으로 덮어주소서!
    미국은 진보적인 성과 신자본주의 검은 영이 덮고 있습니다.
    한국은 극좌의 검은 영이 덮고 있습니다.

    2. 영적 감각과 시대적 통찰력을 회복시켜 주소서!




    남 유다의 죄는 무엇인가?

    [3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들이 활을 당김같이 그 혀를 놀려 거짓을 말하며 그들이 이 땅에서 강성하나 진실하지 아니하고[진리를 위해 용감하지 않으며](MT, KJV) 악에서 악으로 진행하며 또 나를 알지 아니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두 가지 악을 지적하신다.
    하나는 거짓을 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악을 행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활을 당김같이 그 혀를 놀려 거짓을 말하였다.
    ‘활을 당김같이’라는 표현은 거짓말을 쏘아대고 뱉어댄다는 뜻일 것이다.
    또 그들은 진리를 위해 용감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거짓말을 책망하고 거절하고 혼자라도 진실한 길을 가려면 용기가 필요한데 그들은 진리를 위해 용감하지 않았고 비겁하고 비굴하게 거짓말을 용납하였다.

    또 그들은 악에서 악으로 진행하였다.
    즉 그들은 악에서 시작하여 악으로 진행하는 자들, 곧 악을 행하는 자들이었다.
    또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모든 죄악의 뿌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데 있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거짓말할 수 없고 이웃에게 악을 행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진리와 진실의 하나님이시며 거짓말을 정죄하시고, 또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고 선하게 사는 것이며 사랑은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은 쑥을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잠언 5:3-4
    대저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 입은 기름보다 마끄러우나
    나중은 쑥 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같이 날카로우며.

    성경은 독한 물을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 독한 물(메로쉬) : 독이 있는 물

    예레미야 8:14
    우리가 어찌 가만히 앉았으랴 모일찌어다 우리가 견고한 성읍들로나 들어가서 거기서 멸망하자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멸하시며 우리에게 독한 을 마시우심이니라.

    *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멸하시며 우리에게 독한 물을 마시우심이니라.

    ‘멸망하자’는 원어(닛데마)는 ‘조용히 있자’(KJV, BDB)는 뜻이다.
    ‘멸하시며’라는 원어(하딤마누)는 ‘잠잠케 하시며’(KJV) 또는 ‘멸하시며’(NASB, NIV)라는 뜻이다(BDB).
    유다 성읍들에 내리신 하나님의 재앙의 원인은 그들이 여호와께 범죄했기 때문이다.
    죄가 근본적 문제이다.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이 온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 없애실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독한 물, 사약(死藥) 같은 물을 마시우실 것이다.
    그들은 사약을 마시며 죽게 될 것이다.


    예레미야 9:15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그들 곧 이 백성에게 쑥을 먹이며 독한 물을 마시우고.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그들 곧 이 백성에게 쑥을 먹이며 독한 물(메로쉬)[독 있는 물]을 마시우고 그들과 그들의 조상이 알지 못하던 열국 중에 그들을 헤치고 진멸되기까지 그 뒤로 칼을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독 있는 물을 마시게 하시고 그들을 열국 중에 흩으시고 칼을 보내어 완전히 멸망시키실 것이다.

    예레미야 23:15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내가 선지자에 대하여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그들에게 쑥을 먹이며 독한 을 마시우리니 이는 사악이 예루살렘 선지자들에게로서 나와서 온 땅에 퍼짐이라.

    * 독한 물[독물]을 마시우리니 이는 사악(카눕파, 불경건)이 예루살렘 선지자들에게로서 나와서 온 땅에 퍼짐이라 하시니라.

    사마리아의 선지자들 중에 우매함이 있었다.
    그들은 바알을 의지하며 예언하고 백성을 잘못 인도했다.
    또 예루살렘의 선지자들 중에는 간음을 행하며 거짓말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다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벌을 선언하신다.
    그 불경건한 선지자들은 독물을 마시게 될 것이다.

    성경은 쑥을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잠언 5:3-4
    대저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나중은 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같이 날카로우며.

    기도에는 두 가지가 있다.
    푸시(Push)형과 풀(Pull)형이다.

    푸시형 기도는 환경의 압박, 생활의 압력에 의해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 선배들의 기도는 상당 부분 푸시형 기도였다.
    하나님께서 가난과 궁핍, 질병과 고통을 통해 가난한 심령으로 내몰고 기도의 심지에 불을 붙였다.
    사역자들은 영혼 구원과 교회부흥이라는 명제로 자신을 기도의 제물로 바쳤다.
    그렇게 기도가 깊어지고 넓어져 나라와 민족을 품고 기도했다.
    그런데 요즈음은 푸시형 기도가 사라졌다.
    교회의 새벽기도도, 기도원 산기도도 예전의 열기가 없어졌다.
    기도꾼이 사라졌다.
    이제는 절박성이 없어진 것이다.

    풀형 기도는 비전에 이끌려 기도하는 것이다.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터치에 의해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시는 성령 하나님이 시키시는 기도를 하는 것이다.
    풀형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녹아있는 미래를 향한 비전이 나의 영혼을 깨우는 것이다.
    기도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성삼위 하나님을 향한 태도이자 목숨을 건 인생관이다.
    땅의 것이 아닌 위에 것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를 조용히 이끄실 뿐 아니라 기도로 내몰고 계신다.
    지금은 환경적 압박도 만만치 않다.
    그만큼 절박해졌다.
    기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도록 성령 하나님이 우리를 내몰고 계신다.

    우리는 품격있는 나라에 살기를 원한다. 포괄적 차별금지법과 낙태법은 대한민국의 가정윤리와 생명윤리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다. 기도로 키워낸 이 나라가 망하는 길이다. 이제 모두 절박성을 가지고 가난한 심령, 애통하는 마음으로 하늘 보좌 앞에 나아가야 한다. 모든 성도가 하나 된 합심 기도로 하나님을 움직여야 한다. 코로나를 대처하는 방역정책이 기독교를 박해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고 우려한다. 성경은 통치에 있어서 공평과 정의를 강조한다. 하나님도 만민을 공평하게 심판하신다. 법의 적용은 공평해야 한다. 최근 우리 사회가 제기하는 공정성 문제는 최대의 이슈가 되고 있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유다 백성을 향한 선지자 예레미야의 눈물은 하나님의 눈물입니다. 심판받을 백성을 향한 예레미야의 연민은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애틋한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와 같은 마음의 사람들입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눈물과 연민을 마음에 담고 그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세상을 향해 울고, 하나님의 마음을 세상에 보이는 통로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거짓을 말하는 것”과 “속이는 것”은 유다 백성들이 반복하는 죄악입니다.  입으로는 이웃에게 평화를 말할 때에도 마음으로는 해칠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4절). 가까운 사람들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이미 그 공동체는 거짓으로 가득했습니다. 단순한 거짓말이 아니라 “혀는 죽이는 화살’이라고 합니다(8절).

    그러므로 죄에 대한 심판을 예고하신 하나님은 유다 백성이 결단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셨습니다. 인간의 지혜와 힘과 부를 자랑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아는 것을 자랑하고, 하나님이 긍휼과 공의를 세상에 실현하는 분이심을 깨닫는 지혜를  자랑해야 한다고 합니다. 까마귀도 길러주시는 하나님께서 하물며 사랑하는 자녀를 극진히 아끼시고 세밀히 돌보시는지 깨달아 알게 된 것을 자랑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힘이시고, 지혜이시고, 부가되심을 말과 삶으로 자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결단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만을 자랑삼고, 세밀히 돌보시는 주님의 손길을 경험하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주님의 긍휼의 마음으로 우리의 이웃과 가족 또 교회를 돌아보시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찬양 /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신 주

    https://www.youtube.com/watch?v=ePKu-JG1dWE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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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2일(금) 중심의 번뇌(煩惱)(예레미야 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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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송 / 143장(십자가에 달리신 주)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예레미야 8:1∼22
    ♦ 묵상을 위한 주제 : 중심의 번뇌(18절)
    ♦ 성구 :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慰勞)를 얻을 수 있을까 나의 중심(中心)이 번뇌(煩惱)하도다.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내가 내 슬픔을 걷잡을 수 없으니 정말 내 마음이 괴롭구나.”
    공동번역에서는 “이 백성은 영영 살아날 길이 막혔습니다. 가슴은 미어지고 마음은 터질 것 같습니다.”   

    중심의 번뇌(my heart is faint within me)”는 마음이 답답하고 괴롭다는 표현입니다.
    무너지는 남 유다 왕국을 바라보는 선지자 예레미야의 마음을 표현한 것처럼 오늘의 미국과 한국을 바라보는 마음이 이와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오늘은 고난주간 성 금요일(Good Friday)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면 마음이 답답하고 힘들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이 바라보아야 할 대상은 오직 예수님입니다.

    미국의 신학자 리처드 니버(Helmut Richard Niebuhr, 1894~1962)는 인간의 이상형으로 예수를 본받아야 한다.
    누구나 닮고 따라야 할 인생의 정도가 곧 예수라고 역설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두 가지를 본받아야 한다.
    첫째는 하나님을 향한 절대 신앙
    둘째는 인간을 향한 절대 사랑

    하나님을 믿고 인간을 사랑하면서 사는 길이 정도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겸허해지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7장부터 10장은 유다 백성들의 오염된 신앙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7장에서는 성전지상주의 신앙
    즉 성전이 있는 한 하나님께서 지켜 줄 것이라는 착각 속에 빠져 있는 유다 백성들의 잘못을 지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그런 잘못된 신앙에 빠져 있는 유다 백성들에게 속이 상하신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너는 이 백성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라.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8장에서는 왕과 방백과 제사장들과 예루살렘 거민들의 뼈가 묘실에서 끌어내어 지면에서 분토같을 것이다.
    유대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거룩함에 대한 끔직한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유월절 1주일 전부터 성전으로 올라오는 거리 좌우에 있는 무덤들을 정리합니다.
    이것은 순례자들의 거룩을 지키기 위한 매우 중요한 절차이었습니다.

    8:1-3,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을 원하리라
    8:4-12, 비정상적인 행동의 근본 원인
    8:13-17, 돌이킬 수 없는 임박한 심판
    8:18-22, 재앙으로부터 구원을 얻지 못한다

    8:1-3,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을 원하리라.

    침략자들이 무덤에 묻혀 있던 조상들의 묘를 파헤쳐 해와 달과 별들 아래 드러내어 지면의 분토와 같게 할 것입니다.
    해와 달과 별은 그들이 숭상하던 우상이었습니다.

    “그들이 사랑하고 섬기며 따르고 찾아 경배하던 해와 달과 하늘의 무수한 별 아래 흩어 버리고 그것을 거두거나 묻지 않을 것이니 그 뼈들은 분뇨처럼 땅에 흩어진 채 그대로 있을 것이다.”(2절) 

    열정적인 자세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랑하고” “섬기며” “따르고” “찾아 경배하던”
    이러한 열정은 하나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상숭배를 향한 열정이었습니다.

    8:4-12, 비정상적인 행동의 근본 원인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7절)

    공중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반구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 하셨다.

    8:13-17, 돌이킬 수 없는 임박한 심판

    * 8:13-9:3, 시 형태로 씌어진 대화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가올 재앙에 대해 암울한 톤으로 표현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고 잎사귀가 마를 것이다(13절)
    독한 물을 마시게 한다(14절)
    뱀과 독사를 보내어  물게 할 것이다(17절)

    8:18-22, 재앙으로부터 구원을 얻지 못한다(20절)

    우상숭배로 인한 재앙이기에, 오직 하나님만이 회복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중심이 번뇌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글 개역 성경을 인터넷으로 검색하여 "꽃" 이란 단어와 "열매"라는 단어를 검색한 결과
    "꽃"이란 단어는 "6구절"
    "열매"라는 구절은 "43구절"
    꽃처럼 화려하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 아니라
    열매를 맺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죄에 민감하라!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이 이야기를 하면서 나란히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리스도인이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너무 아픈 나머지 그리스도인은 불평 섞인 욕을 해댔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욕을 했던 것을 회개하면서
    "주님, 그리스도인으로서 산다는 것은 때로는 너무 힘이 듭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비그리스도인이 입을 열었습니다.
    "여보게 뭘 그런 걸 다 회개하나? 삶을 좀 자유스럽게 살게."
    순간 우리는 비그리스도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조그만 죄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은 그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는 사람은 죄를 짓고도 자신이 지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합니다.

    눈물의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심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시는 성령님의 애타는 마음을 깨닫고
    숨은 죄를 고백하며
    오직 주님 안에서 우리의 심령이 회복되어지고 고침받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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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1일(목) 여호와의 전(예레미야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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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송 / 144장(예수 나를 위하여)♦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예레미야 7:1∼34
    ♦ 묵상을 위한 주제 : 여호와의 전(4절)

    ♦ 성구 :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殿)이라, 여호와의 전(殿)이라, 여호와의 전(殿)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여호와의 전(the temple of the LORD)”
    여호와의 전이란 구약의 백성들에게는 예루살렘 성전을 말합니다.
    반면에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인의 몸을 가리켜 "성전"이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린도전서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광을 돌리라.

    구약의 성전은 하늘로 올라갈 수 없지만
    그리스도인의 몸은 하늘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여 일어나라!

    1885년 4월 5일 지금으로부터 126년 전 인천 제물포 항에 감리교 선교사 아펜셀러,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가 입국한 것이 한국 선교 원년입니다. 그 이후 한국교회가 세계적으로 교회가 급성장한 사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급하게 좌편향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현상을 생각할 때 한국교회가 정말 교회다운 교회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미국교회여 깨어나라!

    미국 여론 전문 조사 기관 갤럽(Gallup)에서 2021년 3월 29일에 발표한 보고서에 의하면 미국 전체 인구의 47%가 종교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보고서는 2018년부터 2020년까지 조사한 것으로 종교 활동은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를 말합니다.

    갤럽의 보고서에 의해서 미국 일리노이(Illinois)주 휘튼대학교(Wheaton College)의 에드 스테처(Ed Stetzer) 교수는 "미국인들이 종교에 무관심한 경향이 앞으로 빠르게 확산될 것"이라고 예측했다고 합니다.

    스테처 교수는 “우리가 기독교인끼리만 대화하며 신앙을 나누는 공동체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점점 더 세속화되어가는 현 사회 속에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기 위해 이전보다 더 큰 노력, 두 배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소감을 밝혔다고 합니다.

    전염성이 강해지는 코로나 변형 바이러스로 인하여 이전처럼 교회 부흥을 회복하는 것은 어려운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과거 팬더믹(pandemic)을 불러왔던 전염병들의 기록을 보면,

    흑사병(1346-1353년)은 8년동안 약 7,500만~2억 명 사망
    스페인 독감(1918년) 때에는 1년 동안 약 2~5천만 명 사망
    홍콩독감(1968년) 때에도 1년동안 약 100만 명이 사망

    이와 같은 사례들을 볼 때, 코로나 19로 인한 현 상황이 쉽게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끝난다 해도 ‘포스트 코로나’ 라는 새로운 시대의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예레미야 7장은 세 단락으로 구분합니다.

    7:1-15, 가증스런 예배 행위
    7:16-28, 일상 생활에서 드러난 불순종
    7:29-34, 힌놈 골짜기에서 자행된 죄악 된 행위

    7:1-15, 가증스런 예배 행위

    삶을 변화시킬 수 없는 예배는 참된 예배가 아니다.
    예배를 드려도 생활의 변화가 없다면 예배는 형식이다.

    (예) 가인의 제사 후 아벨을 돌로 쳐 죽인 사건

    3절
    .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거하게 하리라.

    * 바르게 하라(reform)   - 개혁하다

    (예화) 국수를 뽑는 기계는 국수 가락이 나오는 구멍의 크기에 따라 국수가 뽑혀 나온다.
               바르게 한다는 것은 틀을 바꾸는 것과 같습니다.
               틀을 바꾸지 않으면 국수의 굵기는 바뀌지 않습니다.

    5절.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공의를 행하며.

    * 바르게 하여(change)  - 바꾸다


    (예화) 국수의 색갈도 바꿀 수 있어야 한다.

    7:16-28, 일상 생활에서 드러난 불순종


    28절.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는 국민이라 진실이 없어져 너희 입에서 끊어졌다 할찌니라.

    * 청종치 아니하며(not obeyed the LORD)

    6절.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어 구하지 말라 내게 간구하지 말라.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비느하스는 제물을 그들 마음대로 가져다가 사용했습니다.
    이렇게 불순종하던 시대이었기에 어린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오늘의 시대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에 매우 어려운 시대가 아닐까 합니다.


    7:29-34, 힌놈 골짜기에서 자행된 죄악 된 행위

    33절. 이 백성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땅 짐승의 밥이 될 것이나 그것을 쫓을 자가 없을 것이라.

    34절. 그 때에 내가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 기뻐하는 소리, 즐기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가 끊쳐지게 하리니
              땅이 황폐하리라. 


    죄악이 온 세상에 너무 가득찼기 때문에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고 합니다.
    예레미야 5:1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에스겔 22:30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고로.

    2020년 2년 마다 한번씩 발행하는 "국방백서"에서 적이란 "대한민국의 주권, 국토, 국민, 재산을 위협하고 침해하는 세력을 적으로 간주한다."고 하면서 북한은 적이라는 용어를 삭제했습니다.

    또한 2018년에는 일본을 한일 양국은 지리적 문화적으로 가까운 이웃이자 세계 평화와 번영을 위해 함께 협력해 나가야 할 "동반자" 라고 하였으나 2020년에는 "양국 관계 뿐만 아니라 동북아 및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도 함께 협력해 나아가야 할 이웃 국가" 라고 표현하였다.

    정치 현실이 급변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교회에 대한 표현도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변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7장은 성전 밖의 사람들을 향한 말씀아닙니다.
    남 유다 백성들을 향한 외침인 것처럼 시대가 급변하는 때에 하나님은 다시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3절 말씀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거하게 하리라.




    남 유다가 아직은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붕괴되기 전이었습니다.
    마치 미국이 신경제자본주의 세력과 한국은 극좌파 세력에 의해서 질서가 흔들리고 있는 것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정치인들, 기업인들, 노동자들에게 외친 것이 아니라 성전에 출입하는 사람들을 향한 것입니다.

    너희는 생활 방식과 행실을 고쳐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계속 이 곳에 살게 하겠다.

    미국과 한국에서 지금처럼 번영을 누리며 안전하게 살아가려면 생활 방식과 행실을 고쳐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5-7절
    너희가 만일 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를 이 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 곳에 살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토록 준 땅에니라.

    생활 방식과 행실을 고친다는 것을 한 마디로 "정의를 행하는 것" 이라고 합니다.

    바르게 고친다는 것을 영어 단어로 설명한다면 "리폼(reform)" 이라고 하겠습니다.
    '리폼' 이란 단어를 쉽게 설명하면 국수를 뽑아내는 국수틀이 있습니다.
    국수틀의 구멍 모양에 따라 국수가 가늘게도 나오고 굵게도 나옵니다.
    리폼이란 이와같이 틀을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요즘에는 국수의 색갈이 녹색, 분홍색, 갈색 등 다양하게 생산됩니다.
    국수의 색갈을 바꾸는 것은 틀을 바꾼 것이 아닙니다.
    모양을 바꾼 것이 아니라 색을 덧입힌 것뿐 입니다.

    성전에 출입하면서 생활 방식을 바꾸지 않는 것은 색갈만 덧입히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모양을 바꿔야 합니다.
    모양을 바꾸려면 먼저 틀을 교체해야 합니다.




    생활 방식과 행동을 고치지 않으면서 성전에 드나드는 것은
    '너희는 생활 방식과 행실을 고쳐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계속 이 곳에 살게 하겠다.

    틀을 바꾸지 못한 신앙생활에 대한 책망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10-11절)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유다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존재하는 한 예루살렘과 유다는 결코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형편없었지만, 성전에 들어와서는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라고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또한 제사장들은 사람들이 그들을 거룩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 인정해 줌으로 성전 안에서 불법과 탈법을 일삼았습니다.
    그래서 성전은 마치 도둑놈 소굴처럼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더 이상 유다 백성들을 위하여 외치지 말고 기도하지도 말라고 하십니다(16절)

    그런즉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어 구하지 말라 내게 간구하지 말라 내가 네게서 듣지 아니하리라.

    기도하지 말라
    부르짖어 구하지 말라
    간구하지 말라

    이렇게 세 차례 반복하여 기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와 같은 불행이 닥쳐오기 전에 깨닫는 은혜를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왜 기도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17-18절)

    너는 그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행하는 일을 보지 못하느냐
    자식들은 나무를 줍고 아버지들은 불을 피우며 부녀들은 가루를 반죽하여 하늘의 여왕을 위하여 과자를 만들며 그들이 또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부음으로 나의 노를 일으키느니라.

    기도하기 전에 먼저 생활 방식을 바꾸고 행실을 고쳐야 합니다(23절)

    오직 내가 이것을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내가 명령한 모든 로 걸어가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우리는 한 나라에 소속한 개인입니다.
    개인이 나라를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아무리 개인이 기도할지라도 통치자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동을 한다면 개인의 기도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잘못된 통치자는 바꿔야 합니다.
    성경적인 시민의식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고난주간 네번째 날을 맞는 이 새벽에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의 통치자와 조국 대한민국의 통치자가 하나님 마음에 맞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생활 방식을 바꾸지 않고 행실을 고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작은 힘으로 모아 단합해야 합니다.
    작은 목소리가 아니라 힘을 모아 목소리를 더 크게 울부짖어야 하겠습니다.





    한국교회는 지난 1990년대 후반부터 심각한 정체의 길에 들어서서,
    2000년대 초부터는 그 수와 영향력에서 심각한 쇠퇴의 길을 걸어왔다.
    그러던 중, 코로나 19를 만나 그 쇠퇴의 속도가 더욱 빨라지고 있다.
    예배, 교육, 친교, 사역, 소그룹, 전도, 타문화권 선교 등 어느 것 하나 침체되지 않은 영역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준비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한국교회는 소망이 없다.


    한국교회가 갱신해야 할 영역을 8가지로 제언하였다.
    1. 모이는 교회에서 흩어지는 교회
    2. 예식으로서의 예배에서 삶으로서의 예배
    3. 연역적 전도에서 귀납적 전도
    4. 교회의 선교에서 하나님의 선교
    4. 개교회주의에서 공교회연합
    6. 시공제약(時空制約)에서 시공해방(時空解放)
    7. 이원론적 사고에서 통전적 선교
    8. 군중에서 선교사로의 전환

    8가지 영역이 성공적으로 실천된다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한국교회에게 위기가 아니라 새로운 기회가 될 것이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성전에서 설교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설교가 아니라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했다”고 합니다(1절).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은 무엇입니까?(3절)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거하게 하리라.”  

    유다 백성들에게 들려진 하나님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계속 살고 싶으면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고 하십니다. 바른 삶을 회복하지 않으면 예루살렘에서 살기가 힘들 것이라고 합니다.
    “바르게 하다”는 동사가 영어로 “바꾸다(change)” 또는 “개혁하다(reform)”라고 합니다.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는 것은 “삶의 틀을 다시 만드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적 가치관으로 바꾸는 것은 색깔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모양을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틀을 바꾸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고 원하시는 틀을 만들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지상주의’ 즉, 성전에 와서 제사만 드리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무조건 기뻐하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의 삶을 개혁하라! 삶을 바꾸라! 삶을 고치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7:11∼12)

    유다 백성들은 성전이 존재하는 한 예루살렘과 유다는 결코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삶은 형편없었지만, 성전에 들어와서는 “우리는 구원 받았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또한 제사장들은 사람들이 그들을 거룩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 인정해 줌으로 성전 안에서 불법과 탈법을 일삼았습니다. 그래서 성전은 마치 도둑놈 소굴처럼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어 구하지 말라 내게 간구하지 말라 내가 네게서 듣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16절)
    세 번씩이나 반복하여 “기도하지 말라” “부르짖어 구하지 말라” “간구하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아무리 성도들이 기도하고 부르짖고 통성기도할지라도 하나님은 듣지 않으시겠다고 합니다.

    형편없는 삶을 살면서(17∼18절) 부르짖는 것보다는 오히려 삶을 바꾼 후에 정직한 기도를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언제나 원하시는 것은 한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23절)

    제사를 드리는 것은 눈에 보이기 때문에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그래서 일상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바른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단지 예배를 드렸다고 해서 일상생활에서도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를 회복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기뻐하는 나라를 세워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형식적인 예배에 도취된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징계를 거쳐야만 회복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기쁨의 근원으로 다짐하는 신실한 믿음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성숙하고 성장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미국의 종교 인구가 50% 밑으로 떨어졌다는 연구 결과가 3월 29일 월요일(현지시간) 발표됐다.
    글로벌 여론조사 기업 갤럽(Gallup)이 2018년부터 2020년까지 미국 전역에 거주하는 만 18세 이상의 미국 성인 6,11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 기독교 교회, 유대교 회당, 이슬람교 사원인 모스크 등에 출석한다고 대답한 미국 인구가 47%로 나타난 것이다.





    갤럽에서 이번에 발표한 수치는 2019년 발표된 종교인 인구 수치인 50%보다도 감소한 수치다.
    또 갤럽이 1990년대 중반 같은 주제로 진행한 설문 조사에서는 미국 인구 70%가 교회, 회당, 모스크 등에 출석한다고 답변한 바 있다.

    이같이 낮은 종교 인구 수치는 자신을 무교라고 분류하는 미국 성인 인구의 증가 및 기독교 인구 감소가 주요 원인으로 분석된다.

    지난 20년간 미국의 무교 인구는 계속해서 증가해왔다.
    갤럽의 1998년-2000년 조사에서 8%였던 무교 인구가 2008년-2010년 조사에서는 13%로 증가했으며 이번 조사에서 21%까지 증가했다. 이는 미국의 복음주의 개신교 인구 및 천주교 인구와 비슷한 수치다.

    또 이번 설문에 따르면 젊은 세대일수록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등의 전통적 종교 단체에 낮은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1981년부터 1996년 사이에 출생한 밀레니얼 세대(Millennials)의 경우 36%만이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답변했다.





    동시에 미국의 노인 인구도 이전보다 적은 인구가 종교 단체 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1946년 이전에 출생한 미국 인구 중 66%가 정기 예배 및 종교의식 등에 참석하고 있는데 이는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조사된 수치인 77% 및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조사된 수치인 73%보다 낮은 수치다.

    제프리 M. 존스(Jeffrey M. Jones) 갤럽 선임 편집장은 미국의 종교 인구가 앞으로도 계속 감소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 일리노이(Illinois)주 휘튼대학교(Wheaton College)의 에드 스테처(Ed Stetzer) 교수 또한 뱁티스트 프레스(Baptist Press)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인들이 종교에 무관심한 경향이 앞으로 빠르게 확산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어 스테처 교수는 “우리가 기독교인끼리만 대화하며 신앙을 나누는 공동체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점점 더 세속화되어가는 현 사회 속에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기 위해 이전보다 더 큰 노력, 두 배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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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의 배경은 B.C. 609년 여호야김이 왕위에 오른 뒤 얼마 되지 않아 이루어 진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성전 설교라고 불리는 말씀인데 예레미야서에서는 오늘 본문과 매우 유사한 본문이 26장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두 곳의 차이가 있다면 7장은 선지자가 행한 설교의 내용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면 26장은 설교를 들은 청중들의 반응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성전의 문에 서서 외친 예레미야의 설교를 듣고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매우 격분하고 당장이라도 선지자 예레미야를 죽이려 한 반면 관료들과 일반 대중들은 선지자를 통해 선포되는 메시지를 듣고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려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집(성전)의 문에 서서 그 문으로 예배하기 위해 들어오는 유다 사람들을 향해 선지자의 입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3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 곳에서 살게 하리라"

    삶과 예배의 조화 / 무소부재(無所不在)

    신앙생활 + 생활신앙 = 성경적 삶(전인적 신앙생활)

    그 내용은 유다 사람들을 향하여 그들의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면 이 곳에서 살도록 해 주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곳은 하나님께서 계신 성전, 그리고 더 확대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시어 그들이 살아온 삶의 터전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과연 여호야김 당시 남 유다 백성들의 모습이 어떠하였기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라 자부하며 살아가던 그들에게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고 말씀하고 계셨던 것일까요?

    4절에 보면 백성들은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라고 말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당시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이 바로 성전이기 때문에 그들의 삶이 어떠하던 여호와께서 계신 성전에만 들어오면 거룩해 진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드리는 예물이나 화려한 겉 모습이 아니라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에 진실하게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자들을 기뻐하시는 분이신데 유다 백성들은 온갖 거짓과 잘못된 행위를 범하고도 단지 성전에 들어왔다는 사실 하나로 그들은 안전하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살다가도 성전에만 들어오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성전에서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통회하며 자신의 죄를 낱낱이 고하고, 온전히 하나님께만 자신을 제물로 드릴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해 주시는 것이지, 성전의 마당을 밟는 것으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5절부터 악에 빠져 제대로 그 길을 가지 못하고, 온전히 행하지 못하는 유다 백성들을 향하여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이는 8절부터 10절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들의 실제 생활이 도둑질, 살인, 간음, 거짓 맹세하고, 우상 바알에게 분향하고, 알지 못하는 신들을 따르면서도 스스로가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가증한 일을 행하는 유다 민족들이 그들의 잘못을 돌이켜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성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가나안 땅에 머물 수 있지만 그렇지 않고, 계속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외식하며 가증한 일을 행하다가는 장차 그들이 어떤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들에 대해 12절에서 "너희는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처소 실로에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악에 대하여 내가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실로라는 곳은 어떤 곳이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왔을 때부터 사무엘의 어린 시절 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고 온 법궤와 함께 성막은 실로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후에 법궤는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빼앗기고 결국 그렇게 유명하던 실로는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폐허로 남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법궤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막만 있으면 결코 패하지 않을 것으로 여기며 참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모습으로 살기 보다는 외식적이고 자기 마음대로 살면서도 하나님이 거하시는 실로에만 있으면 안전할 것이라는 유다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진심으로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실로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쫓아낸 것 같이 예레미야 시대의 남쪽 유다 백성들 역시 쫓아내실 것이라고 강하게 경고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을 욕되게 더럽히는 자들에 대해 11절에서 하나님의 전을 도둑의 소굴로 보고 있느냐며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마태복음 21장 12절부터 13절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 도다"하시면서 성전에서 매매하던 자들을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업으시며 성전을 유린하던 많은 예루살람의 사람들을 향해 쏟아 내셨던 예수님의 경고였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성전 문 앞에 서서 평소에는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성전에만 오면 다 괜찮다고 생각하던 외식하는 유다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성전을 더럽히던 장사하던 사람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교회를 드나드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선포되는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그들의 임무를 다 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곳에 오는 것만으로 자신의 모든 죄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제의 생활은 불의를 행하며 어렵고 소외된 자들을 멸시하고, 무죄한 자들의 피를 흘리게 하며, 각종 우상을 하나님보다도 더 섬기며 살아가면서도 자신은 충분히 구원 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행동을 가증한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오늘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며 우리의 행실을 바르게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정의를 행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와 같은 소외된 자들을 돌보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무죄한 자들의 어려움을 당하지 않도록 그들을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까?
    다른 신들을 좇으며 하나님보다도 그것들에게 더 마음을 빼앗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교회에 오는 것으로 내 할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가증한 자들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다시 한 번 나의 상태를 점검해 보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참 낯선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 분은 기도하지 말라, 내게 간구하지 말라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언제나 그 백성과 자녀의 기도와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신실하게 응답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레미아에게 너는 이 백성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 하시며, 내게 네게서 듣지 않으시겠다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18절입니다. “자식들은 나무를 줍고 아버지들은 불을 피우며 부녀들은 가루를 반죽하여 하늘의 여왕을 위하여 과자를 만들며 그들이 또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부음으로 나의 노를 일으키느니라” 온 세대가 합하여 우상을 섬기는 일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모든 세대가 하나님의 노를 일으키는 우상 숭배에 앞장서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거짓 약속을 믿는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갈증을 채워주지 못할 바닷물을 마시는 일이며 그 자녀들이 하나님이 주신 반짝이는 형상을 오물을 뒤집어 써서 감추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당신의 백성들이 하는 우상숭배에, 예레미아의 기도를 거절하십니다. 듣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우상 숭배 외에 또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그것은 불순종과 외식입니다. 21절에 하나님께서는 “너희 희생 제물과 번제물의 고기를 아울러 너희가 먹으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형식적인 제사는 드린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귀 기울이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겉과 속이 다르고, 말과 삶이 다르며, 앎과 행함이 따로 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섬긴다고 하지만 우상도 섬기며, 하나님의 명령의 중심에 있는 그분의 마음과 정신을 철저히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하나님의 마음과 정신입니까? 23절에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23 “오직 내가 이것을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내가 명령한 모든 길로 걸어가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 바로 하나님 말씀에의 청종과 순종입니다.

    이것이 기원전 600여년 전 여호야김 왕 때의 일뿐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우리 세대 역시 무론대소하고 외식과 불순종을 당연한 삶의 방식으로 여길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런데 이와 같은 우상숭배, 불순종과 외식과 같은 죄악은 하나님이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이유가 됩니다. 참으로 이사야 59장 1-2절 말씀처럼 여호와의 손이 짧으시거나, 잘 못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의 죄악이 하나님의 응답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때의 기도를 받지 않으십니다.

    그래도 하나님 너무 하시지 않습니까? 죄악 가운데 있는 불쌍한 그들을 깨닫게 해 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물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실은 그들을 위해 애굽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되, 끊임없이 보내었다고 하십니다. 25절입니다. 너희 조상들이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내 종 선지지들을 너희에게 보내되 끊임없이 보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목을 굳게 할 뿐 아니라, 더 많은 가증하고 악한 일을 계속한다 하십니다.

    어떤 일들입니까?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에 그들의 가증한 것을 두어 집을 더럽히고,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고, 그들의 자녀들을 그 우상들에게 주는 번제로 사르는 일들입니다. 하나님 주신 생명을, 호흡 없는 황소모양의 쇠 조각 우상을 위해 불에 살랐다니, 참으로 끔찍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일을, 이 백성들에게 명령은커녕 생각조차 하신 일이 없다고 하십니다. 도벳이라는 넓고 깊은 골짜기에 매장 할 자리가 없을 만큼 가득 생명을 죽여 묻었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그곳을 죽임의 골짜기라 부르십니다. 얼마나 죄가 가득하고 처참한 광경인지, 히브리어 힌놈의 골짜기라는 ‘게 힌놈’ 이라는 단어는, 이후 ‘게엔나’라는 지옥을 상징하는 헬라어 음역이 됩니다. 영어의 지옥이라는 헬 (hell)이라는 단어 역시 여기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백성이라면 심판이 마땅합니다. 진노와 저주에, 지옥에 합당합니다. 그런데, 그런데 예레미아는 바로 이와 같은 백성을 위해 주님께 부르심을 입습니다. 그리고 보내신 곳에서 그들을 위해 부르짖어 눈물로 간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가증한 사람들을 그저 바로, 지금 당장 심판하지 않게 하는 이유에는 예레미아가 있으며 그의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중보자로 예레미아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레미아를 통해 그 백성들이 돌이키기를 간절히 원하시며, 예레미아를 사용하셔서 깨닫고 돌아오라고 기회를 주시며 부르시고 계신 것입니다.

    돌아오는 자 한 사람을 찾고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며칠 전 보신 예레미아 5장 1절에도 나타납니다.
    한 사람도 찾지 못해 안타까워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에스겔 22장에도 나타납니다. 에스겔 22장 30장 말씀, 제가 읽어 올리겠습니다.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이기에, 오늘도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임박한 심판에 돌이키는 한 사람, 나아가 누군가가 돌이키도록 눈물로 간구하는 한 사람을 주님은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아를 통해, 기도하기 참 어려운 대상을 위해서도, 기도 받을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 사람까지도 위해 기도해야 함을 깨닫게 하십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을 배반하는 사람들, 도무지 소망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위해서까지라도 부르짖어 구하기를 쉬지 마시기 바랍니다. 죄악과 범죄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자를, 주님께서 찾고 계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 기도를 듣고 계십니다. 주님은 참으로 그들을 사랑하고 돌이키기 원하고 계십니다. 그렇지 않다면 예레미아를 모태로부터 선택해 그들에게 보내주실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심판하시면 그만이지 돌이키라고 계속 말씀하실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주님의 마음에 반대로 향하던 분이 계시다면 주님께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나단의 경고를 듣고 돌이켰습니다. 그의 인생 잘못이 없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은 그를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이스라엘 백성 역시도 계속해서 주시는 회개와 순종의 기회를 거절하고, 그 마음을 끊임없이 완악하게 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시게 하며 심판을 자초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셔야 할 곳에 우상을 두었으며, 생명을 살려야 할 자들이 죽이는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가증한 우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오늘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기를 망각하고, 거룩한 처소 된 나의 마음에, 미움과 분노, 외식과 염려, 원망과 정죄, 두려움과 같은 잘못되고 가증한 우상으로 가득 채우지는 않았습니까?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내며 우리를 통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성전된 삶과 무관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죄와 저주를 홀로 받으셨습니다. 그 가운데 자신을 옷 벗기고 모욕하고 때리고 죽이는 자들을 위해서까지 용서의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그 분은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성령 하나님으로 이제 우리 몸과 마음을 당신의 성전 삼아 거하고 계십니다.

    보내신 곳에서 기도의 짐을 진 예레미아의 모습을 기억하며, 십자가 앞에서도 자신에게 해를 끼치던 자들까지 위해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 마음에 새기기를 원합니다. 오늘 예레미아처럼 이 세대를 위한 기도자가 되십시다. 이 시대의 교회를 위한 기도자가 되십시다. 몰렉과 세상에 내던져지는 자녀들을 기도로 되찾는 사순절 기간이 되십시다. 요나가 거리끼는 니느웨를 위해 기도하고 다가가야 했던 것처럼, 때로 우리 관심과 시선을 넘어 기도하게 하시는 기도를 따라 간구하시며, 바울이 동족 이스라엘을 위해 자신이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질 지라도 그들을 구원하게 해 달라 기도했던 것처럼, 간절히 내 곁의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매일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무엇보다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내가 명령한 모든 길로 걸어가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시는 말씀을 따라, 주님께 돌아가는 하루, 기도하는 하루, 외식을 버리는 하루, 청종하며 순종하여 그분을 따르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내용개요]
    본장은 유다의 위선적인 성전 예배에 대한 질책을 다루고 있다. 특히 저자는 당시 유다 백성들의 거짓 종교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왜곡된 성전 신학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본장의 내용은 성전에서 백성을 꾸짖는 설교로서 유다의 가증스런 예배 행위를 진술하고 있는 전반부(1-15절)와 일상 생활에서 드러난 불순종을 지적하고 있는 중반부(16-28절), 그리고 힌놈 골짜기에서 자행된 죄악 된 행위를 다루고 있는 후반부(29-34절)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강  해]
    본장은 2장에서부터 20장까지의 유다 심판에 대한 아홉 가지의 예언 가운데 세번째에 속하는 메시지입니다. 본장에는 유다 백성들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면서 범한 우상 숭배의 죄를 지적하면서 그러한 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형벌을 내릴 것이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 하나님의 요구와 약속

    1)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유다 백성들에게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이 생활 속에서 드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의 신분에 관한 정확한 이해는 성도들 자신의 올바른 처신을 위해서 필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절망을 행해 질주하고 있는 수많은 영혼들을 위해서도 절실하게 요청되는 것입니다. 인생을 허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올바른 자아 인식을 결하고 있기 때문에 헛되이 수고하고 애쓰는 것입니다. 성도는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해야 합니다.  
    a.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말라(롬4:20)
    b.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히6:15)

    2) 성전에 거하게 하심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이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면 성전에 거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말은 유다 백성들이 의로운 삶을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요셉이 범사에 형통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은 그의 신앙과 성실한 삶을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그와 함께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해 주시겠다는 약속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모든 일이 형통할 것입니다.  
    a. 여호와께서 성전에 계심(시11:4)
    b. 예수께서 가르치심(막12:35)

    3) 이곳에 거하게 하리라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이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고 이웃들 사이에 공의를 행하며 우상을 섬기지 아니하면 이곳에 거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곳은 가나안 땅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바르게 살아간 다면 바벨론의 침략을 저지하여 이 땅에서 평안히 살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듯 크고 풍성합니다. 마땅히 정죄받고 멸망받아야 할 죄인들이라도 끝까지 참으시고 인내하시며 기다리시다가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만 하면 그의 모든 더러움을 제거해 주십니다.  
    a. 나와 함께 거하리라(창30:20)
    b. 돌아와서 거하려는 유다 땅(렘44:14)

    2. 위선적인 유다의 신앙

    1)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이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알지 못하는 신들을 좇으면서 성전에 와서 제사를 드리곤 했습니다. 그들은 성전에 와서 자신들은 구원을 얻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유다 백성들의 행동을 하나님께서는 성전인 너희들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외형으로 나타나는 각종 의식들과 행위들은 종교적 삶에 있어서 필연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형식 자체가 종교의 전부일 수는 없으며 종교의 참 모습일 수도 없습니다. 진정한 종교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생명력 있는 원리나 능력입니다. 실제 삶속에서 종교인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a. 거짓일을 멀리하라(출23:7)
    b. 사랑엔 거짓이 없음(롬12:9)

    2) 실로에 가서 보라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에게 실로에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악을 인하여 내가 어떻게 행한 것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실로는 가나안 정복 이래 엘리 제사장의 시대까지 하나님의 성막과 법궤가 있었던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범죄로 인하여 법궤는 블레셋인에게 빼앗기고 실로는 폐허가 되었습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들어 앞으로 예루살렘도 폐허가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 성읍을 가리킴(수18:1)

    3) 열심으로 우상을 숭배함
    예레미야 당시 유다 백성들의 아이들과 아비들과 부녀자들은 우상에게 바칠 떡을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당시의 백성들은 공공연하게 그리고 전력을 다하여 우상을 숭배할 만큼 타락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가나안 땅이 아무리 풍요롭다 할지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게 되면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버려서 속히 망하게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상 숭배로 인한 멸망은 너무나 철저하고 완전한 파멸이 됩니다.  
    a. 우상에게 미침(렘50:38)
    b. 우상이 가득함(사2:8)

    순종을 원하시는 하나님

    1. 내 목소리를 들으라
     
    하나님의 말씀에는 만물을 조성하는 창조력과 생명력이 있습니다. 
    a. 내 말을 들으라(욥 29:21)
    b. 오늘날 그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시 95:7)

    2. 제사의 진정한 뜻

    종교가 쇠퇴의 길을 걷게 되면 겉으로 드러나는 의식과 행위를 필요 이상으로 강조하려는 성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a. 이새를 제사에 청하라(삼상 16:3)
    b. 감사로 드리라(시 50:14)

    3. 불순종하는 백성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신이 명한 길로 행할 때 복을 내리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고 자기의 악한 죄와 강퍅한 대로 행하며  하나님을 멀리하였습니다.
    이러한 불순종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며 언약 관계가 끊어지게 된 것입니다.
    순종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유다는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멸망케 될 것입니다.
    a. 불순종의 아들들(엡 2:2)
    b.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라(사 55:7)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알수 있습니다.
    유다 백성들처럼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면서 우상을 숭배하는 이중 신앙, 위선적인 신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어떠한 가운데서도 미지근한 신앙, 세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는 신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우리에게는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가야 합니다.  


    [단어해설]
    3절. 바르게. '훌륭하다, 기쁘다'라는 뜻으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의미한다.

    10절. 가증한 일을. 물질적인 것뿐 아니라 윤리적, 제의적인 것도 나타내는데 특히 우상 숭배, 동성애와 성적 타락, 인신 제사등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을 말한다.  


    [신학주제]
    본장의 역사적 배경.
    여호야김의 통치(B.C.609∼598)와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레미야 26:1-2
    1.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의 즉위 초에 여호와께로서 이 말씀이 임하니라 가라사대
    2. 나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여호와의 집 뜰에 서서 유다 모든 성읍에서 여호와의 집에 와서 경배하는 자에게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게 한 모든 말을 고하되 한 말도 감하지 말라


    에 언급된 바와 같이 실제로 '성전 설교'는 여호야김이 즉위한 직후에 실행되었다(B.C. 609년).
    공허한 제물에 관한 질책(21-26절)은 요시야 통치 말기의 것으로도 볼 수 있지만, 헛된 제사에 관한 비난의 내용은 여호야김 통치 초기에 나온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여호야김 시대에 이교의 종교 의식을 허용한 데서 오는 부정적 산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본장의 시점은 유다 백성이 요시야 종교 개혁 이후 다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면서, 더불어 우상을 숭배하는 가증한 범죄가 재발했던 시기임을 알게 된다. 예레미냐는 지금까지 이스라엘 전체에서 유다 백성으로, 그리고 좀더 구체적으로 예루살렘으로 점점 더 이르러서는 드디어 예루살렘으로 성전에서 행해지는 죄악과 관련해서 예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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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31(수) 옛적 길 선한 길(16절)(예레미야 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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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송 / 145장(오 거룩하신 주님)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예레미야 6:1∼30

    묵상을 위한 주제 : 옛적 길 선한 길(16절)

    성구 :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善)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行)하라 너희 심령(心靈)이 평강(平康)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對答)이 우리는 그리로 행(行)치 않겠노라 하였으며.

    예레미야 1장 / 네가 무엇을 보느냐?
    예레미야 2장 / 두 가지 악
    예레미야 3장 / 하나님 마음에 합하는 자
    예레미야 4장 / 묵은 땅을 기경하라
    예레미야 5장 / 기괴하고 놀라운 일
    예레미야 6장 / 옛적 길 선한 길

    “옛적 길 선한 길(the ancient paths & the good ways)”

    예레미야 2장부터 6장유다의 심판에 대해서 증거 합니다.
    특히 3장부터 6장은 멸망한 북이스라엘이 갔던 길을 남유다도 그 길을 가는 것에 대해서 심판을 예고하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 6장을 세 단락으로 구분합니다.

    6:1∼8, 예루살렘의 함락
    6:9∼21, 회개의 거부
    6:22∼30, 북방에서 오는 침략자(바벨론 제국)

    6:1∼8, 남유다 예루살렘의 함락

    예루살렘이 반드시 무너질 것이므로 “베냐민 자손들아 피난하라”고 외칩니다(1절).
    남 유다 왕국은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가 연합하여 세운 왕국이었습니다.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 12지파 중에서 가장 작은 지파입니다.
    가장 작은 지파를 명하여 모든 지파가 예루살렘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문법적으로 제유법(提喩法) 표현 / 사람은 빵으로만 살 수 없다!
    빵은 먹을 것과 물질을 대표하는 것처럼  베냐민 지파가 유다 지파와 예루살렘을 대표하는 것을 말합니다.
    작은 지파를 통하여 전체에게 경각심을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1절에 3개의 명령형 동사가 있습니다.
    ‘피난하라’, ‘나팔을 불라’, ‘깃발을 들라’입니다.
    이것은 상황이 굉장히 다급해 질 것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예루살렘이 난공불락의 도시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은 무너질 수 없다며 떠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두 가지라고 하겠습니다.

    첫째는 예루살렘은 높은 고지 위에 세워졌기 때문입니다(해발 827m)
    둘째는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이기 때문입니다.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믿음은 신흥제국 바벨론에 의해서 처참하게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역사의식(歷史意識)이 없는 민족(民族)은 반드시 망(亡)할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의 역사는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를 얻게 합니다.
    오늘의 역사는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현실과 같습니다.

    2-3절, 침략은 북방에서 오는 사람들이 하는데, ‘내(하나님)가 멸절하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북방에서 오는 사람들을 통해서 예루살렘과 유다를 징계하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예루살렘이 지켜진 것이 단지 높은 곳에 있거나, 성전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켜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는 그냥 내버려 두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6:9∼21, 회개의 거부

    13절,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욕을 부리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거짓을 행했다’는 것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사람들을 속이는 것하나님의 말씀이 아님에도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감언이설로 선포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15절) 부끄러운 일을 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모든 백성들이 거짓에 깊이 붙잡혀 있기 때문에 "옛적 길 선한 길을 알아보고 그 길로 행하라"고 외칩니다.

    6:22∼30, 북방에서 오는 침략자(바벨론 제국)

    22절, 북방에서 오는 민족은 바벨론 제국을 가리킵니다.
    바벨론은 앗수르를 무너뜨렸고, 애급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했습니다.
    당시 바벨론은 활을 쏘는 부대와 창을 사용하는 부대는 다른 나라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손이 풀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출산하는 여인처럼 고통스러워 할 것이며, 사방에 원수들이 칼을 들고 있기 때문에 밭에도 길에도 다닐 수가 없고, 외아들을 잃은 어머니처럼 가슴이 찢어지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외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예루살렘아 훈계를 받으라(8절)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마지막 경고라고 합니다.

    둘째는 슬퍼하며 통곡하라(26절)

    예언(豫言)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려주므로 잘못된 것은 반성하고 회개하라는 경고등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경고등을 무시하면 대형사고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6:16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善)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行)하라 너희 심령(心靈)이 평강(平康)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對答)이 우리는 그리로 행(行)치 않겠노라 하였으며.

    청교도 신앙으로 세워진 나라 미국과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건국된 대한민국 땅에
    선지자 예레미야와 같은 외침이 더 크고 더 넓게 전파되어야만 미래가 보일 것입니다.

    한미동맹을 강화하라!
    한국은 현재 전쟁이 끝난 나라가 아니라 일시적으로 협정을 맺고 전쟁 중에 있는 나라입니다.
    6. 25 전쟁 이후 급속도로 경제가 성장하므로 마치 전쟁이 끝났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러므로 북한과 남한의 대립 관계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문제는 북한이 주적이라는 것입니다.
    북한은 남한을 적화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지만 남한은 북한이 마치 같은 민족이므로 같은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강원도 36사단을 해체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사병들이 휴대전화를 휴대하기 때문에 주말이 되면 많은 사병들이 외출한다고 합니다.
    이런 군인들이 전쟁에 임한다면 반드시 패배할 것입니다.

    후손들에게 미래가 보장된 나라에서 평강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기회가 계속되기를 소망한다면 이제 믿음의 눈과 귀를 열어 현실을 직시하며 마땅히 가야 할 길을 선택하는 일에 후회가 없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기도

    시대의 징조를 보고 한미동맹 강화하여 미래를 보장하게 하소서!

    * 한미동맹(韓美同盟)
      한국과 미국이 동맹을 맺은 것은 6. 25 전쟁 이후 한국의 적은 북한, 미국의 적도 북한이었기 때문이다.
     
    동맹(同盟) 

     사전적 의미 :  한가지 동(同), 맹세할 맹(盟)
     1. 개인 단체 및 국가가 서로 공동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동일한 행동ㅇㄹ 취할 것을 맹세하여 맺는 약속이나 언약
     2. 또는 그 결과로써 성립된 재휴 관계

    쉽게 설명하면 "동맹이란?" 
    적이 같은 것을 말합니다.
    한국의 주적은 북한이었습니다.
    미국의 주적도 북한이었습니다.
    서로 적이 같기 때문에  동맹을 맺고 적으로부터 서로의 안전과 평화를 지키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는 한국은 북한을 형제 같은 민족이라고 말합니다.
    한국정부는 북한을 형제 같은 민족이라고 말하지만 북한은 남한을 적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남한에 미군이 주둔하는 것이므로 미군철수를 주장합니다.

    현재 미국과 일본은 중국과 북한을 적이라고 하여 동맹관계를 유지합니다.

    한국은 중국은 우방이고, 북한은 형제 같은 민족이라고 하기 때문에  한미동맹이 위태롭습니다.

    앗수르가 북 이스라엘을 무너트렸을 때  앗수르를 무너트리기 위해 메대와 바사가 동맹을 맺고 앗수를 무너트립니다. 
    이러한 것이 동맹입니다.

    한미동맹이 필요한 것은 한국이 OECD 10국가에 속한다고 강대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아직도 미국의 지원이 없이는 현 상태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한미동맹이 파괴되지 않고 계속 유지되어 한반도에 자유통일을 완수할때까지 지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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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30(화) 기괴(奇怪)하고 놀라운 일(예레미야 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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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송 / 146장(저 멀리 푸른 언덕에)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예레미야 5:1∼31

    ♦ 묵상을 위한 주제 : 기괴하고 놀라운 일(30절)
    ♦ 성구 : 이 땅에 기괴(奇怪)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현대인의 성경)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새번역) 지금 이 나라에서는, 놀랍고도 끔찍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공동번역) 이 땅에는 기막힌 일, 놀라 기절할 일뿐이다.

    (NIV) A horrible and shocking thing has happened in the land.

    (KJV) A wonderful and horrible thing is committed in the land

    오늘은 사순절 제36일 고난주간 둘째 날 화요일입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처럼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무너지는 남 유다 왕국을 지켜보며 외쳤던 것이 무엇인지 새겨보겠습니다.

    “네가 무엇을 보느냐?”(1장)
    “두 가지 악”(2장)
    “하나님 마음에 합하는 목자”(3장)
    묵은 땅을 기경하라”(4장)

    예레미야 5장의 세 단락으로 구분합니다.

    5:1-13, 하나님께서 유다를 심판하실 수 밖에 없는 이유

    1절,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백성들의 타락(12절) - 여호와는 계신 것이 아니므로 재앙이임하지 않을 것이며, 칼과 기근을 보지 않을 것이다,
    제사장의 타락(13절) - 선지자들은 바람이라 말씀이 그 속에 없다.

    5:14-19, 하나님께서 유다를 어떻게 심판하실지 그 방법에 대하여

    15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보라 내가 한 나라를 원방에서 너희에게로 오게 하리니 곧 강하고 오랜 나라이라 그 방언을 네가 알지 못하며 그 말을 네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진멸하지는 않을 것이다(18절)
    여호와를 버리고 너희 땅에서 이방 신들을 섬겼은즉 너희 땅이 아닌 곳에서 이방인들을 섬기리라(19절)

    5:20-31, 하나님의 심판 예언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유다의 죄악상들에 대한 이야기

    25절,
    너희 가 너희에게 오는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
    30절, 기괴하고 놀라운 일
    31절, 선지자들의 거짓 예언,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을 자랑, 백성들은 맹목적으로 추종

    “기괴(奇怪)하고 놀라운 일(a horrible and shocking thing)”

    남 유다 왕국이 무너질 때 세 가지 기괴하고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합니다(31절).

    첫째는 예언자들은 거짓을 예언합니다(the prophets prophesy lies).
    둘째는 제사장들은 자기들의 권위를 갖고 다스립니다(the priests rule by their own authority).

    제사장들은 제멋대로 가르칩니다.
    제사장은 율법에 따라 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율법이 아니라 거짓 예언자들과 마음을 같이하여 가르치거나 제사를 드립니다.

    셋째는 백성들은 예언자들의 거짓 예언과 제사장들의 권위에 무조건 복종합니다(my people love it this way).

    백성들은 예언자들의 거짓 예언과 제사장들의 자기 멋대로 행하는 것을 무조건 좋아합니다.

    그러므로 그 결과는 유다 나라가 망할 것입니다.
    따라서 "기괴하고 놀라운 일"은 한반도 땅에서는 "한번도 경험하지 않은 나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미국은 "청교도 신앙을 무시하는 정책"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건국 이념은 "청교도 신앙"입니다.

    사람의 능력은 천차만별입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도 있고 머리가 둔한 사람도 있습니다.
    재능이 뛰어난 사람도 있고 재능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자유시장경제 체재에서 경쟁하려면 아무래도 머리가 둔하고 재능이 부족한 사람은 항상 뒤쳐질 수밖에 없습니다.

    청교도 신앙이란 자유시장경제를 보충하는 이념입니다.
    왜냐하면 자유시장경제의 원리에 따라 경쟁 구도에서 항상 많이 소유하는 부자가 있고 가난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빈곤층이 형성됩니다. 빈곤층은 자유시장경제 체채에서 언제나 뒤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지적 능력이 떨어지고 자본도 없으며 도와줄 수 있는 배경이나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항상 어렵게 살아야 합니다.
    청교도 신앙은 부자들이 물질은 내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섬기기 위한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사회에 기부하여 어려운 사람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복지정책을 위하여 사용하게 합니다.

    그러나 근자에 나타나는 현상은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아 대를 이어가며 누리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체채는 오래 유지될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건국 이념은 미국의 법에서 세 가지 이념이 기초가 되었습니다.

    "자유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
    "기독교 입국론"

    그런데 현재 한국 정치는 세 가지 기본 이념을 완전히 파괴하고 무너트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한번도 경험하지 않은 나라" 라고 합니다.

    기업의 총수를 감옥에 가두고 심지어 기업을 해체합니다.
    교육은 한국 역사를 완전히 왜곡하여 가르칩니다.
    노동조합은 근로 시간보다 더 많은 수당을 요구합니다.
    언론은 사실을 보도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의 입장을 옹호하려고 반대 세력을 집중적으로 공격합니다.
    선거는 부정한 방법으로 자기들의 세력을 확장시킵니다.
    심지어 코로나를 핑게로 예배를 통제하고 있습니다.

    강원도 고성 지역에 주둔하던 36사단이 해체되었다고 합니다.
    전방의 군부대가 북한의 도발에 대해서 전혀 대응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언론에서 보도하지 않기 때문에 지역의 택시 운전 기사들이 승객들에게 알려주므로 외부로 알려지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현상이 계속되지만 백성들은 나라가 잘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수시로 돈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계속되면 반드시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합니다.

    왜 이런 나라가 되었는가?
    19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연설문의 제목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그리고 연설문의 내용의 핵심은 "지금 제 가슴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열정으로 뜨겁습니다."

    취임 후 4년이 지나면서 나타난 사회 전반적인 현상은 나라가 이 상태로 지속되면 반드시 대한민국은 없어질 것이라고 한탄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남 유다 왕국
    한번도 경험하지 않은 나라 대한민국

    최근 일본 문부성에서 고등학교 교과서에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내용이 실렸습니다.
    만일 이와 같은 분쟁거리가 세계 여론화 될 때 한미동맹이 무너지면 미국은 즉시 일본을 지지합니다.
    왜냐하면 동북아 국제 정세의 안정과 평화를 위하기 때문입니다.
    한미동맹이 무너지면 독도가 일본 땅으로 인정되면 일본 영토의 끝이 독도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바다에도 영토(영해)가 있으므로 일본 영토가 독도로부터 영해를 주장하므로 중국이 태평양으로 진출하는 것을 일본에서 저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소망은 시민 의식이 깨어나는 것입니다.
    시민 의식을 깨우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교회가 깨어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과연 한국교회가 이 시대에 깨어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교회와 성도들은 이런 나라를 위하여 선지자 예레미야처럼 외쳐야 합니다.
    외쳐도 듣지 않으면 눈물로 호소해야 합니다.
    눈물로 호소해도 듣지 않을 때는 독일의 본 훼퍼목사님처럼 행동하는 신앙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라가 무너진 후에 남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서야 후회하였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남은 소망은 시민의식이 깨어나는 것 뿐입니다.
    시민의식이 깨어있으면 새로운 변화가 올 것이라는 작은 소망이 아직 남아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의 희망이다.
    시민의식을 깨우는 역할은 남 유다에서는 선지자 예레미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거짓 예언자들이 예레미야의 외침을 짓눌러버렸기 때문입니다.
    만일 대한민국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생각도 못한 처참한 일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한 번도 경함하지 않은 나라가 되기를 기대하는 국민은 없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선지자들의 타락(예레미야 23:14)

    “내가 예루살렘 선지자들 중에도 가증한 일이 있음을 보았나니 그들은 간음을 행하 며 내 앞에서 소돔 사람과 다름이 없고 그 거민은 고모라 사람과 다름이 없느니라.”  

    이스라엘의 가증한 일(호세아 6:10)

    “내가 이스라엘 집에서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거기서 에브라임은 행음하였고 이스라엘은 더럽혔느니라.”

    하나님이 허락한 땅에서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지 않으면 반드시 그 땅은 황폐한 황무지가 될 것입니다.

    자유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의 질서를 지키고 따라야 합니다.
    만일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파괴한다면 자유대한민국은 무너질 것입니다.
    나라의 국운(國運)이 무너지는 때에도 여전히 거짓 선지자들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잘못된 이념으로 다스리는 지도자들을 옹호(擁護)한다면 자유민주주의는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몸소 고난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는 고난주간 둘째 날에 조국의 앞날을 생각하며 나라와 민족을 위한 내가 감당해야 할 고난이 무엇인가 찾아서 그 일을 위하여 헌신할 수 있는 믿음을 준비합시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는 선지자의 외침을 들어야 합니다.
    우준하여 지각이 없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들에게 진리의 외침을 힘을 모아 더 크게 외쳐야 할 것입니다.
    패역한 백성들이 잘못을 깨닫고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실 줄 믿고 하나님의 공의와 질서가 나타나기를 기도합시다.  


    ♪ 찬양 / 어느 민족 누구게나

    https://www.youtube.com/watch?v=BjIWxpXoxo8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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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29(월) 묵은 땅을 기경하라(예레미야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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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송 / 147장(주 달려 죽은 십자가)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예레미야 4:1∼31
    ♦ 묵상을 위한 주제 : 묵은 땅을 기경하라(3절)
    ♦ 성구 : 나 여호와가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파종(播種)하지 말라.   


    오늘은 사순절 제35일, 고난주간 첫째 날 월요일입니다.

    “묵은 땅을 기경(起耕)하라(break up your unplowed ground)”

    양계장에서 산란용으로 사육하던 닭이 더 이상 알을 낳지 못하는 닭을 "폐닭" 또는 "노닭" 이라고 합니다.
    "폐닭" "노닭" "묵은 닭"이라고도 합니다.
    묵은 닭은 아주 싼 가격에 팔립니다.
    왜냐하면 산란용으로 그 수명이 다했기 때문에 양계장에서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묵은 닭을 닭장에 넣지 않고 넓은 들판 특히 야산에 울타리를 치고 6개월 정도 풀어놓고 사육하면 폐닭은 거의 "일반닭"처럼 그 몸이 변한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폐닭"의 가치가 아니라 닭 한마리의 정상 가격으로 거래된다고 합니다.
    "폐닭" "묵은 닭"은 알을 낳지 못하는 양계장에서 쓸모 없는 닭이지만 이렇게 바뀌는 과정을 거쳐 일반닭처럼 변화되는 것을 "보링"이라고 합니다.

    "묵은닭" "폐닭"을 보링하는 것처럼 묵은 땅을 기경하라고 합니다.
    묵은 땅사람의 마음을 말합니다.
    묵은 땅을 기경한다는 것은 마치 묵은 닭을 보링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보링할까요?

    선지자 예레미야는 묵은 땅을 갈라.
    묵은 땅을 갈아 엎으라고 합니다.
    선지자 호세아갈아엎으라는 말을 기경하라고 말합니다.

    호세아 10:12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마태복음 13장 "씨 뿌리는 비유"에서 네 종류의 밭을 말씀하셨습니다(13:18-23).

    첫째는 길가(the path)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는 자

    둘째는 돌밭(rocky places)

    말씀을 기쁨으로 받았으나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

    셋째는 가시떨기(the thorns)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

    넷째는 좋은 땅(good soil)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가 되는 것.

    묵은 땅이란?

    길가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는 것
    돌밭 환난과 핍박이 일어나면 넘어지는 것
    가시떨기 세상의 염려와 물질의 유혹에 무너지는 것

    묵은 땅을 기경한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실천하여 열매를 얻는 신앙으로 무장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묵은 땅은 삽과 곡괭이로 땅알 뒤집어 엎으면 기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뒤집고 갈아 엎을 수 있는 도구가 없습니다.
    어떻게 사람의 묵은 땅을 갈아엎을 수 있을까요?

    호세아 10:13
    너희는 악을 밭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었나니 이는 네가 네 길과 네 용사의 많음을 의뢰하였음이라.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이라.

    예레미야 5:23
    그러나 너희 백성은 배반하며 패역하는 마음이 있어서 이미 배반하고 갔으며


    가증한 것을 버리는 것 - 우상을 제거하는 것
    예레미야 4: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 오라 네가 만일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마음이 요동치 아니하며.

    마음 가죽을 베고나 여호와께 속하라 - 마음을 깨끗이 하고 너희 자신을 나 여호와에게 바쳐라
    예레미야 4:4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 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네 마음의 악을 씻어버리라 
    예레미야 4:14
    예루살렘아 네 마음의 악을 씻어 버리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네 악한 생각이 네 속에 얼마나 오래 머물겠느냐

    마음의 악이란 무엇을 말할까요?

    예레미야 4:18
    네 길과 행사가 이 일들을 부르게 하였나니 이는 너의 악함이라 그 고통이 네 마음에까지 미치느니라.

    남 유다 왕국을 진멸하려고 북쪽에서 남쪽으로 쳐 내려온 바벨론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것을 말합니다.

    남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갖는 것이 묵은 땅을 기경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주 안에서 한 마음을 갖는 것이 묵은 땅을 기경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빌립보서 2:1-2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한 마음, 한 뜻, 같은 사랑으로 하나가 되라!

    (현대인의 성경)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은 서로 격려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사랑으로 서로 위로하며 성령으로 교제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서로 친절과 동정을 베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한마음 한뜻으로 같은 사랑을 가지고 하나가 되어 내 기쁨을 충만하게 하십시오.

    오늘의 기도

    사랑으로 하나되어 한 마음, 한 뜻으로 섬기게 하소서!


    하나님께서는 돌아올 것을 요구하십니다(1절).
    나 여호와에게 속하라(4절)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 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첫째는 가증한 것을 버리라(1절)

    둘째는 진실과 정의와 공의로 살라(2절)
    정의와 공의는 히브리어 쩨데크와 미쉬파트를 번역한 것으로 사랑하라는 의미입니다.

    셋째는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3절)
    새롭게 변신하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옛사람을 버리고 새사람이 되라는 것과도 같습니다.
    ‘묵은 땅’이란 좋지 않은 땅이 아니라 한 번도 경작하지 않은 ‘새 땅’을 의미합니다.
    악행이 만연한 곳을 의미하는 가심덤불에 씨를 뿌려봤자 소용이 없기에 아예 새 땅에 파종하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악행으로 만연된 음행을 버리고 회개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할례를 행하라(4절)
    할례를 스스로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래 할례는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해 주어야 합니다.
    스스로 할례를 행하라는 것은 물리적으로 생식기의 포피를 제거하는 원래적 의미의 할례가 아니라 4절에 “할례를 행하여”에 연이어 나오는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라는 어구와 연관이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신명기10장 16절에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Circumcise your hearts, therefore, and do not be stiff-necked any longer.) 라고 하셨습니다.

    로마서 2:28-29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본문에서 “마음 가죽을 베고”라는 것은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는 것인데 여기서 강조하는 바는 하나님을 마음 중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회개를 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할례를 행하는 자가 4절에 말씀하듯이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것은 우상화된 물질인 가증한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새사람이 되는 회개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무서운 심판을 예고하실지라도 회개를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온 자, 14절 말씀처럼 마음의 악을 씻어 버린 자에게는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심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마음의 모양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남긴 상형문자에 따르면 어린이의 마음은 세모, 어른의 마음은 동그라미입니다.
    그래서 어린이가 죄를 지으면 마음이 아픈 이유를, 세모꼴 양심이 죄를 짓는 만큼 회전하면서 뾰족한 모서리로 마음을 긁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모서리가 점점 닳아져 둥그렇게 변하고 그래서 어른이 되면 잘못을 범해도 아픔을 별로 느끼지 못하게 된다고 여겼습니다.
    사실 어린이의 마음은 작은 일에도 아픔을 느낍니다.
    또 순수하고 정직했던 젊은이가 나이가 들면서 양심의 가책을 잘 느끼지 않는 무딘 사람으로 변하는 것을 봅니다.

    당신 마음의 양심은 어떤 모양인가요?


    에스겔 11:19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에스겔 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결론을 위한 이야기)

    수도원이 성황하던 시절 안토니오라는 한 수도사가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꽤 오랫동안 수도를 하다가 이쯤 하면 되었다는 자신감을 안고 수도원을 나왔습니다.
    그때 마침 수도원 문가에서 구두 수선공이 신발을 고치고 있었습니다.
    수도사는 그에게 신발을 고쳐 달라고 맡기고 잠깐 기다리면서 말을 걸었습니다.
    “식구가 몇인가요?”
    “아이들 여덟에 아내와 저, 이렇게 열 식구입니다.”
    “아니, 수입이 얼마나 되는지요? 그 많은 식구를 부양하려면 신발만 고쳐서 버는 돈으로는 부족하지 않습니까?”
    “……”
    구두 수선공은 아무 대답 없이 머리도 들지 않고 신발만 꼼꼼하게 기우다가 잠시 후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저는 다만 주님의 종들이 오랫동안 편하게 신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신발을 수선해 드릴 뿐입니다.
    제 가족의 삶이야 하나님이 다 책임져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 말에 그 수도사는 자기가 아직 수련이 한참 덜 되었음을 깨닫고 다시 수도원으로 되돌아갔다고 합니다.
    그 구두 수선공이야말로 마음을 다해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결론을 위한 이야기)

    어느 교포가 한국에 와 마음에 드는 아가씨를 만나서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 후 자신은 아내를 맞이할 준비를 하기 위해 먼저 미국으로 들어갔고 얼마 후 아내도 뒤따라 갔습니다.
    공항에 마중 나가 보고 싶었던 아내의 얼굴을 보니 남편의 마음이 너무나 기뻤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좋은 시간을 갖고 싶었습니다.
    어디가 좋을까 생각해 보니 자신이 가 본 곳 중에 가장 아름다운 광경으로 남는 곳이 센프란시스코의 금문교였습니다.
    그래서 금방 도착한 아내를 데리고 금문교를 향하여 갔습니다.
    미국의 도로 중에 가장 경치로 유명한 101번 고속도로를 따라 장시간 운전을 하며 달렸습니다.
    아내도 처음에는 경치를 구경하며 즐거운 기분이 들었지만 이내 피로를 느꼈습니다.
    잠간 쉬고도 싶었고 뉘엿뉘엿 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남편과 그동안 하지 못했던 대화도 나누고 싶었습니다.
    금문교보다는 남편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꼭 가지않아도 되니 쉬었다 가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무슨 소리냐며 펄쩍 뛰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그곳에 꼭 같이 가보고 싶었습니다.
    혼자 관광하면서 이 다음에 사랑하는 생기면 반드시 다시 오리라 담짐했었습니다.
    남편은 빨리가야 겠다는 생각에 아내는 생각하지도 않고 9시간 내내 운전만 했습니다.
    새벽 2시가 되었습니다.
    참다못한 아내는 남편에게 강제로 차를 세우게 했습니다.
    화가 난 아내는 차에서 내려 오던 길을 되돌아 갑니다.
    남편이 불러도 돌아보거나 대답하지도 않았습니다.
    남편은 당황하여 아내를 부르며 차를 타고 따라갑니다.
    한 여자는 맨발로 걷고 그 뒤에서는 차가 따라가니까 이 광경을 보고 그 옆을 지나가던 운전자가 경찰에 신고를 하였습니다.
    경찰차가 출동을 했습니다.
    할 수 없이 아내는 차에 오르기는 했지만 너무나 화가 나서 절대로 금문교는 보지 않겠다고 하는 바람에 1시간만 더 가면 금문교를 볼 수 있는 거리였지만 로스엔젤레스로 다시 돌아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생각이지만 서로의 생각이 너무나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같은 마음을 같는다는 것, 한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아니 내 자신도 이해가 안될 때가 얼마나 많은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마음과 생각이 나와 똑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서로의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마음을 같이하여 한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입니다.

    인간이 중심이 되고 인간이 기준이 되면 죽었다 깨어나도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한 마음을 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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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의 마음이 신비합니다.

    마음과 마음이 서로 통하는 경우 :
    마음이 서로 통하지 못하는 경우 : 상사병
    어떤 사람은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하여 병을 앓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오묘
    밭(땅은 에

    “묵은 땅”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이라고 하겠습니다(호세아 10:12).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세상이 요지경(瑤池鏡)과 같다고 합니다.
    왜 세상이 요지경이 되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씨앗”에 비유하여 씨앗이 떨어지는 네 종류의 밭을 말씀하셨습니다. 네 종류의 밭은 “길가” “돌밭” “가시떨기” “좋은 땅”을 말합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백배, 육십배, 삼십배의 결실하는 것을 말합니다(마 13:1∼23).

    묵은 땅을 기경하라는 것은 묵은 땅을 좋은 땅으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묵은 땅을 기경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음의 악을 씻어 버려야 합니다.”(14절)
    악한 생각이 마음에 오래 머물면 선을 행할 수 없게 됩니다(22절).

    마음의 악을 씻는 말씀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야고보서 4: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주의 인자와 자비를 기도하라(시편 51:1∼2)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쫓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악행을 멈추라(이사야 1: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죄를 짓지 않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강제로 멈추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내가 직접 멈추고 버려야 합니다.
       
    왜 마음의 악을 씻어야 할까요?
    마음의 악을 씻지 못하면 악이 쌓이고 쌓여 황무지가 되기 때문입니다(26절).

    맑은 물이 담겨진 유리잔에 잉크 한 방울이 떨어지면 처음에는 잉크가 흩어지는 것이 보입니다. 그러나 잉크를 한 방울씩 계속 떨어트리면 맑은 물은 잉크 색으로 변합니다.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좋은 땅을 만들기 위하여 묵은 땅을 기경한 후 진실과 사랑의 씨를 뿌리는 일에 성공하여 열매를 기대할 수 있는 은총의 하루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마음에 가득한 의심을 그치고

    https://www.youtube.com/watch?v=SWHuskJPqiM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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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27(토) 내 마음에 합(合)하는 목자(牧者)(예레미야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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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송 / 444장(예수가 거느리시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예레미야 3:1∼25
    ♦ 묵상을 위한 주제 : 내 마음에 합하는 목자(15절)
    ♦ 성구 : 내가 또 내 마음에 합(合)하는 목자(牧者)를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知識)과 명철(明哲)로 너희를 양육(養育)하리라.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예레미야 1장 : 네가 무엇을 보느냐?  -  믿음의 통찰력
     살구나무(샤케드)를 보나이다. 말씀을 지켜라(쇼케드)
     끓는가마가 남쪽으로 기우러진 것을 보나이다(임박할 진노)

    예레미야 2장 : 두 가지 악 - 전통적 신앙의 길
     생수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을 버린 것 
     웅덩이를 판 것 - 이방 나라를 의지하는 죄

    예레미야 3장 :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일군 - 희생과 헌신의 사람
     백성들의 잘못을 깨우치라 - 행음하는 죄(영적, 육적)
     
    오늘의 시대가 요구하는 일군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입니다.

    어느 마을에 양을 치는 목동이 있었습니다.
    저녁때가 되면 산에 방목했던 양을 몰고 우리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양들의 등에 긁힌 상처가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자 목동은 유심히 관찰했습니다.
    그런데 산에서 내려오는 좁은 길목에 작은 가시나무가 있었는데 그곳을 지나오면서 그 가시에 등이 긁히는 것이었습니다.
    목동은 다음 날 그 가시나무를 베어버리려고 톱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러나 목동은 그 가시나무를 자를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가시나무에 가까이 가려는 순간 작은 새들이 가시나무에 걸려 있는 양털을 물고 날아가서 양털을 모아 둥지를 만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동은 가시나무를 베지 못한체 돌아섰습니다.
    양들의 작은 희생과 헌신이 어떤 새들에게 행복의 재료가 되었습니다.
    이 시대에도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으로 매일의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기독교의 생명은 크고 위대한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작고 약한 것으로 하나님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

    지식과 명철로 양육하리라 : (현대인의 성경) 지혜롭게 인도하리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사도행전 13:22)

    어느 개인 병원의 원장으로부터 “내가 내 돈을 주며 직원들을  고용하지만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기가 매우 어렵다”고 하는 의미 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고 만나는 것도 어렵다면 누가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내 마음에 합하는 목자(shepherds after my own heart)”가 될 수 있는 비결을 살펴보겠습니다.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서 무너질 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선지자가 있었다면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을 떠나지 말라고 외쳤을 것입니다.

    첫째는 영적인 잘못을 깨우쳐야 합니다.
    - 영적 행음 죄(3:2) / 우상 숭배

    네 눈을 들어 자산을 보라 너의 행음치 아니한 곳이 어디 있느냐 네가 가에 앉아 사람을 기다린 것이 광야에 있는 아라바 사람 같아서 음란과 행악으로 이 땅을 더럽혔도다.

    영적 행음죄는 "우상숭배"를 말합니다.
    우상숭배의 원인은 "탐심" "탐욕" 이라고 합니다.

    골로새서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둘째는 육적인 잘못을 깨우쳐야 합니다.
    - 창조 질서를 파괴하는 것(남자와 여자의 성 정체성의 혼돈)
    - 육적 행음죄(5:7-8)

    내가  어찌 너를 사하겠느냐 네 자녀가 나를 버리고 신이 아닌 것들로 맹세하였으며 내가 그들을 배불리 먹인즉 그들이 행음하며 창기의 집에 허다히 모이며.
    그들은 살찌고 두루 다니는 수 말 같이 각기 이웃의 아내를 따라 부르짖는도다

    육적 행음죄는 "이웃의 아내를 찾는 것"과 "창기의 집을 찾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러한 죄를 계속할 때 하나님의 징계가 임합니다.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서 무너지는 것을 알고 있는 선지자 예레미야는 눈물로 호소합니다.
    그러나 남 유다 백성들은 오히려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을 더 좋아했습니다.
    결국 남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서 무너지고 바벨론에 포로가 된 후에 후회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일군의 외침은 후회할 때가 되어 들리게 된다면 이미 엎지러진 물이라고 하겠습니다.

    자유대한민국이 공산화가 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도 기도만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신앙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 마음에 합한 선지자가 필요하듯 오늘날도 자유대한민국의 체재를 지킬 수 있는 선견자적인 목자가 필요합니다.

    *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지도자를 세워 주소서!

    백성들이 잘못을 계속할 때 반드시 자연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자연의 재해(3절)

    그러므로 단 비가 그쳐졌고 늦은 가 없어졌느니라 그럴지라도 네가 창녀의 낯을 가졌으므로 수치를 알지 못하느니라.

    단 비가 그치고 늦은 비가 그친다는 것은 소나기도 없고 봄비도 내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기적이란 광야 생활을 할 때 하늘에서 맛나와 메추라기가 내리는 것만이 아닙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농사를 지을 때에 때에 맞는 비가 내리므로 첫 수확을 할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초실절이란 절기를 지키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기적의 은총을 깨달았습니다.

    이와 같은 시대적 상황에서 하나님이 찾는 일군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목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마음에 합한 목자는 하나님의 뜻을 모두 실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3:22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목자의 외침을 들어봅시다(15절)

    내가 또 내 마음에 합(合)하는 목자(牧者)를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知識)과 명철(明哲)로 너희를 양육(養育)하리라.

    (현대인) 내가 또 내 마음에 드는 목자들을 너희에게 줄 것이니 그들이 너희를 지혜롭게 인도할 것이다.


    첫째는 네 죄를 자복하라(13절)

    너는 오직 네 를 자복하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고 네 길로 달려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이방 신에게 절하고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현대인) 너는 다만 네 를 인정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한 것과 모든 푸른나무 아래서 이방 신들에게 절하고 내 말에 순종하지 않은 것을 고백하여라.

    죄를 자복하는 것은

    1. 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13절)
    2.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것입니다(13절)
    3. 하나님을 속인 것입니다(20절)

    아무리 영적 음란죄와 육적 음란죄를 지었어도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반드시 용서하실 것입니다(22절).

    (현대인) 신의 없는 자들아, 돌아오너라. 내가 너희를 신실한 자로 만들어 주겠다.' '예, 우리가 주께로 갑니다.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십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구원은 하나님 여호와께 있기 때문입니다(23절)

    (현대인) 우리가 산 언덕에서 떠들어대며 우상을 섬겼으나 헛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에게만 있습니다.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당면한 죄악의 문제는 동성애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가르침이라고 하겠습니다.

    동성애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 남자와 여자의 구분을 무너트리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동영상 자료

    존 파이퍼목사의 동성애가 나쁜 이유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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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은 “내가 믿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은 내가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 다음에는 나는 예수님이 기뻐하는 신앙을 유지하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명을 주시며 “너희는 나의 백성이며, 나는 너희 왕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계명을 주신 후에는 왕과 백성의 관계를 뛰어넘어 아버지와 아들과 같은 친밀한 관계가 되었고, 남편과 아내의 관계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이렇게 사랑하였는데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집을 나간 탕자처럼, 남편을 버리고 떠난 타락한 아내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첫째는 죄를 자복하라(13절)

    “너는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고 네 길로 달려 이방인들에게로 나아가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가서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둘째는 구원은 오직 여호와께 있느니라(23절)

    “작은 산들과 큰 산 위에서 떠드는 것은 참으로 헛된 일이라 이스라엘의 구원은 진실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있나이다.” 

    하나님 마음에 흡족한 사람이 되려면 신앙생활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스바냐 3:17)   

    내 삶의 주인은 이제부터 내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 된 나의 삶을 위하여 지혜와 총명을 기도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이사야 11:2∼3a)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지혜와 총명을 기도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나의 갈 길 다가도록

    https://www.youtube.com/watch?v=VZdMLgChd-8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행음하지 말라

    요한계시록 17-18장은 말세가 큰 음녀의 시대, 곧 음란의 시대라고 예언한다.
    그것은 육적인, 영적인 음행을 다 포함한다.
    오늘날 영상물 문화의 급속한 발전은 현대사회를 음란사회로 심각하게 병들게 하고 있다.
    우리와 우리 자녀들은 음란물과 음란풍조에 노출되어 있다.
    TV, 인터넷, 컴퓨터, 심지어 휴대폰까지 음란물들을 전달하는 통로가 되고 있다.
    또 현대인은 과학과 돈과 쾌락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우상숭배에 빠져 있다.
    영적인, 육적인 음행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이다.
    그것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에 들어갈 죄악이다.
    요한계시록 21:8은 행음자들과 우상숭배자들이 지옥 불못에 던지울 것이라고 증거하고,
    22:15는 행음자들과 우상숭배자들이 천국의 성 밖에 있으리라고 증거한다.
    우리는 육적, 영적 음행을 멀리하고 그런 것이 있으면 철저히 회개하자.

    둘째, 하나님 중심으로만 살아야 한다.

    죄인들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 중심으로만 살아야 한다.
    하나님 중심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중심으로 살고 성경의 중심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살고 또 성경적 교회 중심으로 사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살기를 원하신다.

    셋째, 하나님의 간곡한 권면은 회개하라는 것이다.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14, 22절).
    예수께서 전파하신 내용도 “회개하라”는 것이었다(마 4:17; 막 1:15).
    사도 바울도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전했다(행 20:21).
    아직도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은 다 회개해야 한다.

    넷째, 진리의 지식과 명철을 얻어야 한다.

    15절,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하는 목자들을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글인 성경은 하나님의 충만한 진리의 지식과 명철의 보배로운 창고이다.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우리는 성경책을 읽고 교회에서 시시때때로 성경적 설교를 들음으로써 진리의 지식과 명철을 넉넉하게 얻어야 한다.

    다섯째, 하나님만 섬기고 의지하고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자.

    이스라엘 백성은 범죄함으로 수치를 당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 섬기며 의지하고 그의 목소리를 청종해야 한다.
    그의 목소리는 성경 속에 있고 성경을 통해 전달된다.
    또 확고하게 성경에 근거한 성경적인 설교는 분명히 하나님의 목소리이다.
    우리는 성경말씀과 성경적 설교를 겸손히 사모하며 달게 받고 그 말씀을 다 믿고 힘써 행해야 한다.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사도행전 13:21-23)

    예전에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결혼은 부모님들이 정해준 짝으로 결혼 전 한 번도 얼굴도 본적도 없이 첫날밤을 지낸 후에야 남편과 아내의 얼굴을 서로 보고 살았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평생에 마음에 맞는 사람을 만날지 선택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도 평생 동안 서로가 마음에 들어 서로 아끼고 돌보며 살아오셨습니다.
    마음에 들면 다른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만큼 마음에 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비시디아 안디옥에 있는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려 설교 중에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다윗 왕과 하나님의 마음에서 멀어진 사울왕의 이야기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13:22-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 통일왕국시대에 왕이 된 다음 이스라엘 왕국의 뿌리가 되었고 그의 후손을 통하여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최초로 왕이 된 사람은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은 처음에는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 왕으로 세움을 받았지만 그런데 왕이 된 다음에 사울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했습니다.
    왕이 된 다음에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울 왕을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무엘 선지자를 베들레헴으로 보내시어 사울왕의 후임 왕으로 이새의 아들 중 다윗을 불러 그 머리에 기름 부어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시편 89:20
    내가 내 종 다윗을 찾아내어 나의 거룩한 기름을 그에게 부었도다.


    오늘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사울 왕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못한 이유?

    1.  처음과 끝이 달랐습니다.

    사울은 처음 왕이 되었을 때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왕으로 선출될 때도 나서서 자랑하거나 거만하지도 않고, 겸손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왕이 된 다음에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딴사람이 되어갔습니다.
    욕심이 나타났습니다(삼상 15:9).
    자기 이름 드러내기를 좋아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자기의 기념비를 세우기에 급급했습니다(삼상 15:12)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하기 보다는 자신의 이름을 높이고 자신이 영광을 받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보다도 자기 생각대로 행동했습니다(삼상 15:10-23).
    사울은 처음에는 잘했는데 끝에 가서는 잘못하고 말았습니다.
    처음과 끝이 달라졌습니다.
    결국에는 사울왕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 왕이 되었습니다.
     
    첫 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가 책망을 받았습니다.
    첫 사랑을 회복하지 못하면 촛대를 옮기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2:4-5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에베소 교회가 그들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에 대하여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책망 받은 것이 하나 있었는데 첫 사랑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그 첫 사랑을 회복하지 아니하면 네게 가서 네 촛대를 옮기리라 엄하게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은 처음과 끝이 다르지 말아야 합니다.
    첫 사랑을 잃어버린 채, 첫 열심을 잃어버린 채, 초심을 잃어버린 채,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한 사울 왕처럼 버림받는 어리석은 삶이 아니라 다윗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변치 아니하고 하나님 마음에 맞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인사- 변함없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2. 잘못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잘못을 오히려, 성공의 밑거름으로 만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잘못한 후에도 계속 잘못을 고치지 않아서, 영원한 실패자가 되기도 합니다.
     
    사울이 잘못했을 때, 사무엘의 책망을 받았지만, 잘못을 고치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억울하게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2번이나 사울의 목숨을 살려주었지만(삼상 24장, 26장),
    여전히 다윗을 미워했습니다.
    사울왕은 선지자를 통하여 잘못에 대한 책망을 받았지만 회개치 아니하고 고치려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기에 버림을 받는 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죄 없는 완벽한 의인을 찾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자기 잘못을 뉘우칠 줄 알고, 회개하고 고치려고 애쓰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러나 잘못을 고치지 아니하고 고집부리며 완악해질 때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못하게 됩니다.
    결국에는 사울 왕처럼 버림을 받게 되고 벌을 받게 되고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잘못을 뉘우칠 줄 모르는 사람 회개할 줄 모르는 사람 자기 고집만 내세우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날마다 수례바퀴의 삶을 통하여 날마다 큐티의 삶을 통하여 자신을 발견하고 잘못을 뉘우칠 줄 알고 잘못을 고칠줄 아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하나님께 쓰임 받고 축복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윗 왕이 하나님의 마음에 든 이유?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드는 것도 대단히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다는 것은 더욱 놀라운 축복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도 귀하지만 하나님께 인정받는 다는 것은 가장 큰 축복입니다.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께 인정받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윗 왕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으며 귀하게 쓰임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윗이 인정받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1. 온전한 믿음의 사람(열왕기상 9:4)

    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온갖 일에 순종하여 내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솔로몬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시를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약속하여 주셨습니다.
     
    다윗은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온 마음을 바쳐서, 하나님만 섬기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바르게 하나님을 섬기는 자였습니다.
    우리는 다윗에게서 이런 점을 본받아야 합니다.
     
    다윗이 어린 시절, 블레셋은 골리앗 장군을 앞세워 이스라엘을 침략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군사들은, 그 누구도 그와 맞서 싸울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든 군사들도 골리앗 장군 앞에서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심부름을 왔다가 이 모습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이방인의 군사인 불레셋 골리앗 장군을 통하여 하나님의 군대가 모욕당하는 것을 보고,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린 다윗이 나가서 싸우겠다고 청하였습니다. 사울 왕과 모든 군사들도 반대를 했지만 끝내 자신이 싸우러 가겠다고 자원을 했습니다.

    다윗은 아직은 어리고 몸은 작았지만, 하나님만 의지하는 큰 믿음으로, 적과 싸우게 되었습니다. 그때 다윗이 외친 말은 골리앗의 간장을 서늘하게 하는 말이었습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45)
    다윗에게는 골리앗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이 있었습니다. 그 담대함과 용기는 오직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의지하는 믿음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다윗에게는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분명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골리앗보다 강하시며, 하나님은 칼과 단창과 비교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지셔서 반드시 승리하게 하신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이런 믿음이 다윗을 전쟁에서 승리하게 만들었고 그를 위대한 왕으로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이런 믿음의 용기는 다윗이 온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는데서 온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온전한 믿음의 가정, 온전한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온전한 믿음을 가질 때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습니다. 온전한 십일조의 삶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과 백성들은, 편안할 때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는데, 골리앗을 보고 두려움에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았고, 눈에 보이는 골리앗 장군만 보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골리앗이 나타났을 때도,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골리앗이 체구가 크면 클수록 더욱 물맷돌로 맞추기가 쉽다고 생각하니 더욱 신나는 일이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힘든 상황도 쉽게 생각되었습니다.
     
    진정한 믿음을 가지게 되면, 어떤 환경을 두려워하거나 사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게 됩니다.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문제가 있기에 넘어지는 것보다는 온전한 믿음이 부족하기에, 믿음의 용기가 부족하기에, 쉽게 넘어지는 것입니다.
    골리앗이 있기에 이스라엘이 두려워 떠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불신 때문에 불안해하고 무서워 떨고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 정탐을 보냈을 때에도, 10명의 정탐꾼들은,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불신앙의 문제였습니다. 가나안땅의 힘이 센 장사들만 바라보았지 가나안땅을 약속하시고 허락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세상은 바라보았지만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불신앙 가운데 있기에 불안과 두려움과 부정적인 생각에 붙잡히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세상을 바로 바라보았지만 하나님을 바로 보았습니다. 세상의 문제보다도 전능하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더더욱 컷 기에 가나안은 우리의 밥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바라보는데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눈이 닫혀져 있습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영적인 소경으로 살아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소년 다윗처럼 작고, 세상은 골리앗만큼 크다고 할지라도, 문제될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성도들은 반드시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가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열린 모임도 세상만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능력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 안에서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때 우리를 괴롭히는 골리앗은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대하16:9을 보면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자에게, 위로해 주시고, 능력도 베풀어주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로 향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만 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눈이 열려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장부들이고,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아도, 하나님만 바로 볼 수 있다면 문제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도 이 세상에서 다윗과 같이, 넉넉히 이기며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담대합니다. 졸장부가 아니라 대장부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믿음의 대장부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기에 성령의 능력을 믿기에 우리는 반드시 가나안을 이길 수 있고 골리앗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으로 성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바르게 행하는 믿음 (열왕기상 9:4)

    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온갖 일에 순종하여 내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솔로몬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시를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약속하여 주셨습니다.
     
    왕상9:4 - “바르게 하여”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행했다고 했습니다.
    바르다는 말은, 거짓이나 꾸밈이 없는 곧은 마음을 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잘못하지 않았다는 말, 잘못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은“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르게 행했다는 말은 거짓 없이 꾸밈이 없는 진솔함을 뜻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잘못을 지적할 때, 겸손하게 받아들여서 회개하는 사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는 겸손하고 진실한 자만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했을 때, 나단선지자의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때 다윗은 왕이었기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변명을 할 수 있었습니다.

    권력의 칼을 휘둘러서 나난 선지자를 감옥에 가두거나 입을 틀어막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사람은 피할 수 있어도 하나님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들은 다윗은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고
    침상이 젖도록 눈물을 흘리며 중심으로 회개하였습니다. 누구에게도 책임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체면이나, 위신 같은 것도 생각하지 아니했습니다.
    모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엎드려 회개했습니다. 이런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과 은총과 축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사울 왕이 버림받은 이유는, 죄가 만아서가 아니었습니다. 사무엘 같은 선지자가 바른 말로 깨우쳐 줄 때,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멸망은 죄가 만아서가 아니라, 회개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한나라나 가정이나 개인이 망하는 것도, 잘못을 회개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순종하는 믿음(열왕기상 9:4)

    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온갖 일에 순종하여 내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솔로몬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시를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약속하여 주셨습니다.
     
    왕상 9:4- “.....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온갖 일에 순종하여 ....”
    다윗은 하나님의 명령에 전적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순종하지 않고 변명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자는 순종하는 자라야 합니다.
    다윗은 어떤 경우에도 순종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인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왜 삶속에 하나님의 축복이 없다는 것입니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기에 축복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말씀대로 믿고 순종할 때,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내 상식에 맞든 안 맞든 순종할 때, 축복이 일어났습니다.
    노아는 홍수가 무엇인지 몰랐을 때, 방주를 만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도 순종하여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믿었기에, 두말없이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가운데 순종하는 자에게, 기적과 축복을 주셨습니다.
    이치에 맞든 안 맞든, 상식이든 비상식이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기적과 축복을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순종하는 믿음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꼭 필요한 사람, 유익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서 지워진 사울의 인생을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다윗의 인생을 살아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윗 왕처럼
    하나님께 사랑받고 귀히 쓰임 받고 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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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26(금) 두 가지 악(예레미야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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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송 / 340장(구주 예수 의지함이)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예레미야 2:1∼37
    ♦ 묵상을 위한 주제 : 두 가지 악(13절)
    ♦ 성구 : 내 백성이 두 가지 악(惡)을 행(行)하였나니 곧 생수(生水)의 근원(根源)되는 나를 버린 것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貯蓄)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숨길 수 없는 죄

    자동차를 몰고가다가 교통경찰관에게 걸렸습니다.
    과속입니다
    운전하던 이는 자기도 모르게 “술 한 잔을 했더니 정신이 없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교통경찰관은 “음주운전을 추가합니다”고 말했습니다.
    그 옆에 있던 아내가 자기도 몰래 “무면허라 맨 정신에는 겁이 나서 운전을 못 해요”라고 말했습니다.
    경찰관은 “무면허 운전을 추가합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뒤에 앉아 있던 장모가 자기도 모르게 말했습니다.
    그것 봐라. 자동차를 훔쳐 타더니 오래 못 가지 않니” 이 말을 들은 경찰관이 말했습니다.
    자동차를 훔친 죄로 체포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붙잡아 갔습니다.

    그림자

    어느 어린이가 대낮에 거리로 나갔더니 뒤에 그림자가 자꾸 쫓아옵니다.
    그림자를 몰랐던 아이는 그만 무서워서 울면서 집으로 뛰쳐 들어와 엄마에게 말합니다.
    "내 뒤를 자꾸 시커먼 녀석이 따라와요!"

    그림자는 나를 쫓아다니는 죄라고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민족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죄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림자를 만들 수 있는 하나님이 항상 이스라엘을 지켜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어둠을 어둠을 악인의 길과 같다고 합니다.

    잠언 4:19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

    이사야 59:9
    그러므로 공평이 우리에게서 멀고 의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즉 우리가 빛을 바라나 어두움 뿐이요 밝은 것을 바라나 캄캄한 가운데 행하므로.

    요한일서 1:5b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요한복음 12: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두 가지 악(惡)(Two sins)”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첫째는 생수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을 버린 것

    예레미야 17:13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

    하나님을 버린다고 버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사용할 수 없는 물건이 아니므로 결코 버릴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버렸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포기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나님을 믿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곧 우상 숭배(偶像 崇拜)하는 죄를 말합니다.

    생수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을 버렸다는 것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한 죄를 말합니다.

    물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 가장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심지어 인간의 생명과 행복과 번영 그리고 구원과 영생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을 버린 것은 죽음이 아니라 완전한 파멸입니다(사 12:3, 55:1, 겔 4:1∼9).

    둘째는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

    스스로 웅덩이를 팠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이방나라를 의지한 죄를 말합니다.

    역대하 20:29
    이방 모든 나라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적군을 치셨다 함을 듣고 하나님을 두려워한고로.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물이 귀하기 때문에 수원을 확보하기 위해 흐르는 물을 가두어 놓을 저수지를 막거나 빗물을 모아두기 위해 웅덩이를 팠습니다. 그 웅덩이에 물이 스며들지 않기 위해 석회를 발랐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석회에 균열이가 물이 새어 나가고 맙니다.
    유다 백성은 생수의 근원인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물을 얻기 위해 웅덩이를 판 것입니다.
    모든 복의 근원인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살 길을 찾으려고 우상을 좇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터진 웅덩이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필요성을 거부하고 스스로 잘 살아 보기 위해 자신의 지혜를 따라 돈, 사람, 단체 등에 모든 생애를 거는 것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학개 1:2∼6, 누가복음 12:16∼21). 

    유다의 우상 숭배하는 모습을 이렇게 탄식합니다(11절)

    “어느 나라가 그들의 신들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의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

    기독교 전통의 일곱 가지 죄(罪)
    Seven deadly sins / Seven capital sins

    1. 교만(驕慢) Pride
    2. 시기(猜忌) Envy
    3. 탐욕(貪慾) Greed
    4. 탐식(貪食) Gluttony
    5. 분노(憤怒, 忿怒) Anger
    6. 정욕(情慾) Lust
    7. 나태(懶怠)  Indolence

    골로새서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4세기의 수도사 "
    요한 카시아누스"는 이 목록을 상세히 다뤘다.
    죄에 대해 에바그리우스는 ‘악한 사상’들로 위장하여 찾아오는 마귀와의 싸움이라 가르쳤고,
    "카시아누스"는 ‘지나친 욕망’으로 이해했다.
    이에 반해 "그레고리우스"는 “하나님의 권위에 대항하고 그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을 죄의 본질로 여겼다.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라(시편146:3~4)

    이사야서 12장 2절 말씀은“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느니라”하는 말씀인데,

    무디(D. L. Moody) 선생은 천국 가는 열차에 일등석을 타고 가는 사람이 있고 이등석을 타고 가는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등석을 타는 사람은 두려울 때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고,
    일등석을 타는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일등석이 이렇게 좋은데 왜 일등석 표를 사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이방 나라를 의지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고 따라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기 위해서 죄성이 강한 인간이 범하기 쉬운 것을 피해야 합니다.

    1. 인생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라.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시 146:3~4)고 했고, “모든 육체는 풀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라”(벧전 1:24)고 했습니다. 하나님만 의지해야 될 목사가 교인이 충성한다고 그 교인을 하나님처럼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그냥 안두십니다. 그가 배신하거나 떠나가게 하십니다.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2. 재물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라.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자는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도 못할 것은 저희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며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시 49:6~8)고 했습니다.“하나님으로 자기 힘을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죄악으로 스스로 든든케 하던 자”를 하나님은 멸하시고 장막에서 뽑아버리겠다고 했습니다.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 의인은 푸른 잎사귀 같아서 번성하리라”(잠 11:28)고 했습니다. 재물을 하나님보다 믿고 의지하는 것은 비극이요, 불쌍한 사람입니다.

    3. 우상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라.


    십계명 중 제1, 제2 계명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며 어떤 우상이든지 받들지 말고 절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나무더러 깨라 하며 말하지 못하는 돌더러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하2:18 이하)라고 했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만 믿고 의지해야합니다.

    4. 명철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라.

    사람이 똑똑하고 지식이 많으면 하나님보다 자기의 명철과 지식을 하나님보다 더 믿으려는 경향이 있는데 성경은 이를 경고했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잠 3:5)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무지몽매한 인간이며, 지척을 분간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와 같음을 절감하고 하나님만 의지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인도하시고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 25)고 했습니다.

    항상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는 결코 두려워하거나 근심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 잘되고 성공해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 돌리지 자만하거나 교만하지 않습니다.
    무슨 난관에 부딪혀도 하나님께 기도하여 해결하지 사람 찾아다니며 애걸복걸하지 않습니다.
    "자나 깨나 불조심"이란 표어처럼 믿음의 사람은 "자나 깨나 하나님만 사모하자!"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징계가 임하기 전에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늘도 믿음의 통찰력(spiritual insight)을 기도합시다.
    이 세상은 보는 만큼 알게 됩니다.
    이 세상은 듣는 만큼 생각하게 합니다.
    예언자 예레미야의 말씀을 보고 들으면서 이 세상에 던져진 우리들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 일을 찾아 책임을 바르게 감당하고 세상을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곳으로 다듬어가는 일에 보람과 희망과 기쁨을 함께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예레미야 2:13

    참으로 나의 백성이 두 가지 악을 저질렀다.
    하나는, 그들의 생수의 근원인 나를 버린 것이고,
    또 하나는, 그들이 전혀 물이 고이지 않는, 물이 새는 웅덩이를 파서, 그들의 샘으로 삼은 것이다"

    요한복음4:13-14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


    한 우물을 파라

    속담에 “우물을 파도 한 우물을 파라”

    속담의 뜻은 물론 우리가 다 아는 바처럼 변덕스럽게 인생을 살지 말고 꾸준하고 우직하게 한길을 가면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왜 “우물”이라는 말을 사용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땅을 파라고 해도 될 것이고, 다른 용어를 사용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첫째는 우물이란 생명의 근원이기에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며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 아니라 우물 없이는 사람이 살 수 없음으로 끝까지 최선을 다해 샘을 찾아야 합니다.
    파다가 힘들다고 중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둘째는 우물을 성공적으로 파는 데는 많은 유혹과 어려움이 따르는데 있습니다.
    처음 땅을 팔 때, 땅 아래 샘이 있으리라고 믿고 팝니다.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믿음 확신으로 팝니다.
    파다 보면 이 믿음이 시험을 받습니다.
    바위를 만나고 힘이 부쳐 더 이상 깊이 파기가 힘들어질 때 여기에는 물이 없다는 생각이 들고 그렇게 되면 중단하고픈 유혹을 받습니다.
    때문에 인생도 이와 같다는 생각에서 이러한 속담이 나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 의미는 우리 신앙생활에도 똑같이 적용 됩니다.

    첫 번째 죄 : 하나님을 떠나는 어리석음

    예레미야 예언자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그들이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고발하고 회개하며 각성하도록 촉구합니다.
    예레미야가 밝인 이스라엘 백성의 두 가지 죄가 있다고 합니다.

    생명의 물(우물)이 흐르는 근원(수맥)인 하나님을 버렸다는 것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을 버리는 행위, -사실 사람이 하나님을 어떻게 버리겠습니까? - NIV 성경에는 “They have forsaken me”라고 번역되었는데 버렸다라고 번역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을 배신하며 믿음을 포기하고 하나님과 관계를 끊어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일을 했다는 뜻이 됩니다.

    이 일이 생명수의 근원을 버리는 것과 같은 우매하고 어리석은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 것이 이스라엘이 지은 첫 번 째 죄입니다. 생명의 근원을 끊어버리면 결과는 죽음만이 남습니다. 생수 없이 생명체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우물”(샘)이라는 단어는 비유적인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의 근원이 된다는 뜻으로 사용된 단어입니다. 직역하면 “물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버렸다는 것입니다(the spring of living water). 여기서 물이란 “생명의 물”입니다. 성경에서 사용된 물은 사람을 살게 하는 영적 근원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은 생명의 물을 내보내는 근원(샘물)입니다(the spring of living water). 포기할 수 없는 샘물입니다. 버릴 수 없는 샘물입니다. 이 걸 포기하고 버린다면 그것은 최고의 어리석음이 되는 것입니다. 누가 자기 우물을 버립니까? 예레미야는 11절에서 “비록 신이라 할 수 없는 그런 신을 섬겨도, 한 번 섬긴 신을 다른 신으로 바꾸는 민족은 그리 흔하지 않다. 그런데도 내 백성은 그들의 영광을 전혀 쓸 데 없는 것들과 바꾸어 버렸다.”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합니다. “우물을 파되 한 우물을 파라” 하는 우리 속담을 설교 시작하면서 소개한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버릴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다른 것과 바꿔치기 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아닙니다. 생명의 근원을 어떻게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죽을 때까지,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생명입니다. 이 것을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폴 틸리히(Pau Tillich)라는 신학자가 신앙(faith)을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이라는 말로 정의한 것은 옳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을 생명의 근원으로 믿어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평생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좋은 우물은 깊은 곳에 물의 근원이 닿아 있어야 합니다. 깊이 파는 것이 어려워서 얕은 우물을 파고 나면 장마 때가 되면 물이 가득 찼다가 가뭄 때가 되면 말라버리는 우물이 되고 맙니다. 여러분의 인생, 여러분의 신앙과 삶이 깊은 물의 근원(하나님)에 닿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황폐합니다. 에덴동산에 추방당한 인간은 고독하고 외로운 인생입니다. 모든 사람은 인간의 고향 에덴동산을 그리워합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인간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평화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 수 있을 것만 같아서 하나님을 떠나보지만 결과는 죽음의 그림자만이 남을 뿐입니다. 누가복음에서 나오는 “탕자의 비유”(눅15)는 하나님을 떠난 존재가 돼지와 같은 비참한 인생임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이 것이 성경의 일관된 증거입니다. 구원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없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물과 관련된 수가성에 살고 있던 한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복음 4:14).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이요 진리요 길인 것을 믿습니다(요 14:6). 예수님은 요 7:38에서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어 영접하면 그 사람에게는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명의 근원인 샘이 솟아나게 됩니다. 이 샘물이 여러분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 째 죄 - 헛된 수고
    이스라엘의 또 한 가지 죄는 물이 고이지도 않는 깨어진 웅덩이를 파면서 헛된 수고를 하며 허망하게 살아가는 죄입니다.
    샘이 물의 근원(수맥)에 이어져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물이 고여 사람이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좋은 우물입니다. 그런데 웅덩이가 깨어져서 물이 고일 틈도 없이 다 새어나가고 말면 아무 쓸모없는 우물이 되고 맙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사는 모습이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 것은 죄가 됩니다.
    우리 속담에 “밑 빠진 독에 불 붇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열심히 노력은 하지만 아무 의미 없는 헛되고 어리석은 일을 말합니다. 열심히 우물을 파기는 했지만 건수가 들어 물이 생수가 될 수 없다면 그것 역시 허망한 일이요. 어떻게 생수의 근원(수맥)을 만났다 하더라도 그물로 먹고 살 수 없다면 허망한 일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많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평화를 누리지 못한다면 그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예수를 만났지만 그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생명을 마시지 못한다면 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부어도 부어도 채워지지 않는 웅덩이에 물 붓는 식으로 인생을 산다면, 헛된 것을 &#51922;아 살아간다면 그 인생이 허망하지 않겠습니까? 예수 믿고 교회를 다니지만 생수의 근원인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지 않고 세상의 욕망을 따라 산다면 예수 믿는 모든 노력은 허망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예수 믿는 일, 좋은 샘물을 파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에는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밑 빠진 독에 물 붙는 식의 신앙생활은 죄가 됩니다.

    수가의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을 말씀을 듣고 “그 생수를 내게 주십시오” 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남편을 데려오라” 하십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응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옳다.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그 남편도 남편이 아니다. 당신의 말은 참으로 진실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이 여인은 곧 예수님이 예언자이신 것을 안다고 고백합니다. 이어서 예배에 관한 대화로 옮겨갑니다. 우리는 이 대화 속에서 이 여인이 그동안 허망한 것에 목을 매고 살아온 것을 압니다. 남편이 자신의 생명의 물(근원)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남편을 제대로 만나면 팔자 핀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과거 다섯 남자를 두었고 지금 남자도 만족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렇게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남자가 생수의 근원이 될 수 없습니다. 물의 근원은 예수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물의 근원 우물을 파는데 동역자이며 그 물을 함께 마실 친구요 이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샘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지위가 아닙니다. 물질의 많음이 아닙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은 근원이 아니고 가뭄이 들면 말라버리고 말 헛되고 헛된 웅덩이에서 물을 찾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인간의 죄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우리의 참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이라고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는 근원이 말라버립니다. 샘이 없습니다. 다른 그 어떤 것도 샘물의 근원이 될 수 없습니다. 이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샘물이 아닌 것을 샘물인 것처럼 착각하여 허망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생명의 참 우물을 파십시오. 여러분 안에 생명의 강이 흐르게 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십시오.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생명의 진리가 흐를 것입니다. 허망한 것에 속지 않고 믿음의 열매를 맺는 복된 삶이 되십시오.


    기독교 전통은 우리에게 ‘일곱 가지 대죄(大罪)’의 목록을 전하고 있다. 교만을 비롯해 시기와 탐욕, 탐식, 분노, 정욕, 나태 등이다. 신원하 교수에 따르면 이 목록은 사막의 수도사들이 처음 만들어낸 후 6세기 교황 그레고리우스가 수도원에서 일반 교회로 가지고 왔으며,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1천년 이상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seven deadly(capital) sins)’로 부르며 가르쳐 왔다.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

    는 ‘7대죄’의 기원과 역사를 설명해 나간다. 현재 형태의 7대죄 목록과 정확하게 일치하거나 비슷한 목록은 성경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지만, 성경 잠언 6장 등 여러 곳에는 유사한 목록이 있다. 현재 목록과 가장 유사한 최초의 목록은 4세기 수도사 에바그리우스가 만들었고, 요한 카시아누스는 이 목록을 상세히 다뤘다. 죄에 대해 에바그리우스는 ‘악한 사상’들로 위장하여 찾아오는 마귀와의 싸움이라 가르쳤고, 카시아누스는 ‘지나친 욕망’으로 이해했다. 이에 반해 그레고리우스는 “하나님의 권위에 대항하고 그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을 죄의 본질로 여겼다.

    저자는 성경의 가르침과 교부들, 주요 신학자들의 사상을 따라 7가지 대죄들을 조목조목 분석하는 데 주력했다. 그리고 이 죄들이 구체적인 일상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공동체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피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근본적 방안과 실제 지침을 모색한다. 그가 표현하는 7대죄는 다음과 같다. ①교만: 뭇별 위의 보좌 ②시기: 녹색 눈의 괴수 ③분노: 사탄의 화로 ④나태: 정오의 마귀 ⑤탐욕: 불룩 나온 올챙이 배 ⑥탐식: 꽉 찬 배와 텅 빈 영혼 ⑦정욕: 타는 갈증에 마시는 바닷물.

    대죄를 ‘7’이라는 숫자에 맞추려 한 이유는 △기독교 전통에서 7이 지닌 ‘전체’ 혹은 ‘완성’을 가리키는 특별한 의미 때문이거나 △한 주가 7일이기에 주 단위로 기도 생활을 하면서 매일 한 가지 죄에 대해 기도할 수 있도록 했다는 의견이다. 성격에 따라 탐식과 정욕을 육체적으로, 나머지를 영적인 죄로 볼 수 있는데, 단테는 이를 왜곡된 사랑(교만·시기·분노), 불충분한 사랑(나태), 과도한 사랑(탐욕·탐식·정욕) 등으로 나눴다.

    또 20세기 단테 연구가인 도로시 세이어즈는 ‘뜨거운 마음의 죄(정욕·분노·탐식)’와 ‘차가운 마음의 죄(탐욕·시기·나태·교만)’로 분류했는데, 앞의 것은 일반 사람들이 저지르기 쉬운 상대적으로 불명예스러운 죄이고 뒤의 것은 종교적이고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 범하기 쉬운 당당한 죄다. 세이어즈는 “예수님은 뒤의 것을 더 신랄하게 꾸짖고 정죄하셨지만, 현대 교회는 예수님과 반대로 뜨거운 마음의 죄를 더 심한 죄로 비난하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한다.

    신원하 교수는 “수도원 전통과 중세 교회, 로마 가톨릭을 통해 내려온 이 7대죄 교리에 오늘날 교회가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이 교리가 영성훈련과 깊은 관련이 있고, 대죄를 이해하면 그리스도인이 갖춰야 하는 덕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기 때문”이라며 “이같은 흐름이 보여주는 것은, 죄에 대한 이해가 인간의 변화와 성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죄에 대한 의식이나 논의가 거의 사라져 교회에서만 사용되는 특수 용어로 축소되고 말았다”고 지적했다.

    “이에 비하면 다른 죄들은 벼룩에 물린 자국과 같으며(C. S. 루이스)”, 교부 시대부터 “다른 일곱 대죄들의 뿌리(그레고리우스)”로 여겨진 ‘교만’을 다룬 방식을 살펴보자. 먼저 교만의 여러 어원을 돌아보면서 성경과 역사를 통해 그 의미를 상세히 풀이한 후 ‘자기 기만’, ‘공동체의 분열’, ‘최후까지 남는 죄’ 등 그 특징과 함께 ‘영적 교만’이 왜 최악의 교만인지까지 분석한다. 마지막으로는 ‘자기 실상 바로 보기’, ‘공동체 훈련’, ‘겸손을 향하여’ 등 교만을 이기는 길들을 제시한 후 ‘성찰과 나눔’을 통해 읽은 내용을 되짚을 수 있도록 구성했다. 다른 6가지 죄도 이러한 서술 구조를 따르고 있다.

    결론 부분에서 저자는 “죄를 의식하든 안 하든, 인정하든 거부하든, 사람들은 누구나 죄를 짓고, 개신교회 안팎에서 최근 ‘영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지만 결국 그 훈련 프로그램이 다루는 기본적인 문제도 결국은 죄 문제”라며 “오늘날에는 죄를 영혼의 오염으로 보는 존재론적 관점과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으로 보는 관계론적 관점의 이해를 종합하는 좀더 온전한 죄 이해가 필요하고, 7대죄론을 연구하는 궁극적 목적이 성화임을 기억하여 단지 ‘옛 옷’을 벗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새로운 옷’을 입는 것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정리했다.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가 성경과 역사적인 교회의 전통에 바탕을 두고 ‘7대죄’를 충실히 정리하고 분석·적용하는 등 교리적인 글이라면, 은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다가오는 실제적인 유혹들을 다루면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이 꼽은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악’은 시기, 허영심, 분노, 나태, 탐욕, 탐식, 정욕 등이다.

    저자인 조의완 교수는 “현대 소비주의 시대에 무감각해지거나 정당화하기 쉬운 일곱 가지 치명적 죄악을 명명하며, 그것이 어떻게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유혹하고 있는지 묘사하는 데 책의 목적이 있다”며 “특정한 죄악들은 특정 시대 상황과 결부된 만큼, 사막 교부들과 중세 신학자들이 중요하게 다뤘던 7가지 치명적인 죄악들을 소비주의적 관점에서 재조명할 것”이라고 전제했다.

    조 교수는 소비주의 방식에 길든 세대의 기독교 신앙을 ‘iChurch’라는 용어로 정의하고 2장에서 이들의 자화상을 지적하고 있는데, 어쩌면 저자의 주장은 이곳에 집약돼 있을지 모른다. 가장 먼저 제기되는 문제는 ‘유명인 예화 신드롬’이다. 목회자들은 CEO나 정치인, 스포츠인, 예술가 등 유명인들의 일화를 ‘간증’이라는 이름으로 설교를 통해 자주 소개하지만, 그들의 신앙이나 도덕성, 삶의 방식은 전혀 검증하지 않은 상태다. 유명인들의 예는 뇌리에 깊이 각인돼 시너지 효과가 분명 있지만, 그 유명인이 ‘타이거 우즈’처럼 추락하기라도 하면 당혹스럽다. 예화 설교의 매력은 감동을 배가시키는 데 있지만, ‘성공주의 신학’의 그림자가 드리울 수 있다.

    현대 교회는 자본주의 시장에서 기업화됐고, ‘종교 소비자’들을 끌어들일 새로운 충격에 안간힘을 쓴다. 성도들은 요즘처럼 ‘신앙 생활’이 편한 때가 없지만, 우리의 ‘영적 생활’에 도움을 주는지는 다른 문제다. 실제로 ‘순종’이나 ‘헌신’은 줄어들지 않았나. 자신이 원하는 교회나 신앙의 도구들을 ‘선택’하다 보니, ‘메뚜기 신도들’만 늘어나고 있다.

    어느 때보다 풍성한 기독교 문화의 아이템들로 기독교는 이 세대에 ‘쿨’하게 인식될지 모르겠지만, 복음의 진리를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마치 표면적으로는 불교로 개종했지만 내면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간직하며 지내자는 일본 기독교 초기 핍박기의 ‘숨은 그리스도인들’ 전략의 일종인데, 그 결과 일본인들에게 기독교는 토속 종교와 별다를 것이 없어졌다. “숨은 기독교의 말로는 이와 같다. 진리를 감추거나 한 사회 문화 속에 종속시키는 일은 진리를 보호하거나 성도를 견고케 하는 충격을 주기보다는 거꾸로 그 문화 속에서 자신을 스스로 변질시킨다.”

    조 교수는 iChurch 그리스도인들이 회복해야 할 삶의 본을 ‘사막의 교부들과 수도사들이 몸소 보였던 죄악들과의 분투’에서 찾는다. ‘7대죄’ 목록을 만들었던 그들 말이다. 그들은 기독교 본래의 순수성을 회복하고자 사막으로 물러났고, 이는 도망이 아니라 책임감이었다. 자신의 모습에 대한 솔직한 투사와 참회를 통해 그들은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악’의 기초를 닦았다. 자신의 바람과 소원대로 ‘살려는’ 욕망은 허다하나, 자신의 죄악을 ‘죽이기’ 위해 분투하는 신앙의 자리는 부재한 iChurch 세대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죄악들을 직시하고 돌이키는 일이다.

    일곱 가지 죄악들에 대해 교부 시대와 현대를 아울러 구체적으로 살펴본 저자는 한국교회를 향해 “어떤 새로운 역사를 이루겠다는 야심과 포부보다는, 혹은 문제가 있다는 날선 비판보다는 차분히 자신의 죄를 목도하고 애통해하며 죄를 이겨내기 위해 힘을 다하는 오랜 경주에 매잔한다면 현재 우리가 그토록 찾고 싶어하는 새로운 돌파구 내지 시대의 지표가 되는 모습은 뜻밖에 쉽게 찾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죄악에 맞서 분투하는 혈기왕성한 투사가 아닌, 겸손한 무릎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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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25(목) 네가 무엇을 보느냐?(예레미야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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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송 / 441장(비 바람이 칠 때와)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예레미야 1:1∼19
    ♦ 묵상을 위한 주제 : 네가 무엇을 보느냐(13절)
    ♦ 성구 :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臨)하니라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對答)하되 끓는 가마를 보나이다 그 면(面)이 북(北)에서부터 기울어졌나이다.  

    "이사야"라는 이름은 "여호와는 구원"

    예레미야”라는 이름은 “일메”와 “야후”의 합성어으로 “여호와가 던지셨다” “주께서 세우신다”는 뜻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나라가 멸망해서 왕이 눈이 뽑히고 백성들이 죽임을 당하고,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비참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죽임을 당하고, 심지어 여인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자기의 자식을 삶아 먹는 것도 보았습니다.

    예레미야는 기적은 한 번도 행한 적이 없었고 그의 예언도 언제나 절망적이었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나라가 망해도 2∼3년만 지나면 돌아온다고 거짓 예언을 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70년이 지나야 돌아온다고 예언하므로 사람들은 그를 매국노라 비난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를 “눈물의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예레미야서를 읽으면서 오늘의 한국의 시대적 상황을 이해해야 합니다.
    한국 전쟁을 경험했던 어른들은 지금 한국의 현실이 마치 해방 후 1945년부터 1950년 6. 25 전쟁이 일어나던 시기와 너무 비슷하다고 합니다.
    이런 현실에 대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며 남북통일을 기도하면서도 현실을 모르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이유는 역사 교육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레미야서를 잘 이해하려면 그 배경을 우리나라의 1800년대 후반부터 한일합방인 1910년까지의 역사를 생각해 봅니다.
    1905년을사늑약이 체결되었을 때, 황성신문의 발행인이었던 장지연선생이 “이날을 목 놓아 통곡한다”는 의미의 “시일야방성대곡 (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썼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나라가 기울어가다가 망하는 모습을 보고, 목을 놓아서 울며 써내려간 글이 “예레미야”와 “예레미야애가” 입니다.

      
    “네가 무엇을 보느냐?”(What do you see?)

    예언서를 읽으려면 상징을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합니다.
    끓는 가마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 가마가 북에서부터 기울어졌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두 개의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살구나무 가지의 환상”과 “끓는 가마의 환상”이었습니다.

    12절의 “지켜” 앞에 아라비아 숫자 (1)이라 쓰여 있습니다. 난외에서 “히, 살구나무라는 말과 지킨다는 말의 발음이 비슷함”이라고 설명합니다.

    살구나무”는 “샤켓(shaqed)”이고,
    지키다”는 “쇼켓(shoqed)”입니다.

    살구나무는 매화처럼 가장 먼저 피어 봄이 왔음을 알리는 나무였습니다.
    살구나무가 봄을 알리는 것처럼 심판이 임박했으니 잘 살펴보라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끓는 가마가 기울어진 것”은 그 안에 있는 것이 쏟아진다는 의미로 심판이 곧 실행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팬데믹(pandemic) 세상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환상과 같습니다.
    시작은 코로나 바이러스이었으나 깨닫지 못하면 더 심각한 변형 바이러스가 사람들을 무너트릴 것이라고 하신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네가 무엇을 보느냐?”

    보는 만큼 보인다.
    듣는 만큼 안다.

    이스라엘과 아랍의 6일 전쟁에 대한 미담

    "조국 건설의 꿈이 사라진 후에 살아남기 보다는 차라리 그 꿈과 함께 죽는 길을 선택하겠다!"

    1. 한반도 땅에 거주하는 외국인의 수? 150만명
    - 중국 사람이 대략 100-130만명
    - 중국인은 3년 거주하면 지방의회 선거권을 제공
    - 주택을 구입할 때 은행 융자 우선
    - 예를 들면 어느 지방에 집중적으로 중국인을 이주시켜 지방 의회 의원을 중국인으로 선출 가능하다.
    - 일본의 경우 일본인 남편과 20-30년을 살아도 영주권은 제공하지만 시민권을 절대로 제공하지 않는다.
    만일 일본인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남편의 재산에 대해서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

    2. 최근 심각한 문제로 부각되는 것은 주민자치 기본법
    - 공산화로 가는 길목 / 주민 자치 기본법
    - 인민위원회를 조직하는 기초 단계 / 인민위원회 라고 명칭을 공개하면 국민들이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용어를 미화하여 국민들을 미혹하는 방법을 시도하고 있다.
    이런 숨은 의도에 대해서 교회와 성도들이 관심이 없다.

    ‘주민자치기본법’은
    거주자는 물론 조례에 의해 해당 주소지에서 일하거나 공부하는 사람 등 ‘생활인’도 주민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했다.
        (주민)                                                  (외국인 노동자)  (유학생)              (불법체류자)

    또 읍면동 주민의 최고 의사결정기구로 ‘주민총회’를 설치해 자치계획 승인을 비롯해
    △ 행정사무의 위임과 위탁
    △ 주민감사 및 조례발안 등 청구권 결정
    △ 국·공유재산 활용계획 심의
    △ 주민세율 및 부담금 신설 제안 등 공적 권한을 행사할 수 있도록 명시했다.

    주민자치기본법 공산화의 길목 / 이희천교수(국가정보대학원 교수)

    지금 대한민국은 건국 이래 가장 심각한 위기다.
    그런데, 무슨 위기냐?
    경제위기, 정치위기를 넘어 자유민주주의체제가 허물어지는 체제 파멸적 위기
    자유민주주의 체재에서 사회민주주의 체재로 전환하는 과정에 놓여 있다.


    오경에서 ‘환상’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원어는 하존인데 영역본들은 대체로 이 단어를 vision이라고 옮기고 있다.
    비전이란 영어 단어에 미래를 향한 전망을 밝게 보는 의미도 들어 있다.
    비전에 이처럼 다양한 뜻이 포함되어 있는데 히브리어 단어 ‘하존’도 우리말 ‘환상’의 사전적 정의 보다는 좀 더 넓은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히브리어로 "하존"이란 명사는 눈에 보이는 모종의 사건이나 광경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기본적으로 시각작용을 전제한다.
    (모세에게 나타난 불꽃 체험)

    이와 나란히 성경에는 청각작용으로서 말씀을 강조하기도 한다.
    (아브람에게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는 말씀)

    말씀을 선포하고 말씀을 듣는 행위를 성경은 매우 강조한다.
    그런데 청각으로 들어야 할 말씀이 어떨 때에는 예언자의 시각작용으로 전달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런 경우는 매우 주관적인 의식으로서 여러 사람이 함께 보는 객관적인 장면이 아니라 예언자 자신의 고유한 의식 속에서 예언자 자신만이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이러한 작용을 묘사할 때 <하존>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이 단어는 다니엘서에 12회 나오고 에스겔서에 7회 나온다.

    명사<하존>은 나훔서와 이사야서의 책 제목으로도 사용되는데 오경에는 이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오경에는 하존 대신에 이 단어와 비슷한 마하제란 단어가 창 15:1; 민 24:4, 16에 세 차례 언급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려고 아브라함에게 횃불로 지나가는 광경을 보여주시는데 이를 가리켜서 마하제란 단어를 사용한다(창 15:1).
    개역은 ‘환상’이라고 옮겼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행진을 막으려고 발락 왕에게 등용된 점쟁이 발람도 환상을 보는 자였다(민 24:4, 16).

    마하제는 예언서 에스겔에 단 한 차례 더 언급된다(겔 13:7, ‘묵시’[개역]).
    <하존>이나 <마하제>는 둘 다 동사 <하자>에서 파생한 동종 명사이다.
    동사 <하자>는 ‘보다’란 뜻인데 영어로는 behold에 해당한다.
    이 동사는 대부분 운문에만 기용되기 때문에 일종의 시어로 간주할 수 있다.
    이것은 성경에 50회 가량 언급되며 오경에는 네 차례만 사용된다(출 18:21; 24:11; 민 24:4, 16).
    모세는 백성을 다스릴 관리들을 선발할 때 그 인물의 됨됨이를 세밀하게 잘 살펴보아야 한다(출1 8:21).
    이스라엘 백성이 대표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언약을 맺은 후에 하나님을 뵈오며 함께 먹고 마셨다(출 24:11).
    점쟁이 발람은 환상을 보는 자였다(민 24:4, 16).
    이처럼 동사 <하자>는 평범하게 보는 시각작용이라기 보다는 좀 더 특별한 맥락에서 사용된다.

    보통 ‘보다’란 뜻으로 사용되는 동사로는 <라아>가 있다.
    이 단어는 성경에 무려 1400회 가량이나 언급된다.
    하지만 이에 비해 동사 <하자>는 그 빈도수가 매우 적다.
    이것은 <하자>가 일반적인 의미의 시각작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동사 <하자>가 눈으로 보는 일반적인 시각작용을 가리키는 경우는 욥기와 잠언에 나온다(욥 27:12; 잠 22:29; 29:18).
    또 연인끼리 서로 지긋이 바라보는 사랑스러운 눈빛을 가리키기도 한다(아 6:13 [히 7:1]).
    어떤 한 방향으로 바라보는 동작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런 동작으로 갖고 싶은 물건을 미리 예상했다가 마침내 획득한다는 개념으로서 영어의 provide란 단어가 생겼다.

    ‘공급하다’란 뜻의 provide는 라틴어 전치사 pro가 ‘보다’라는 동사 video앞에 붙어 있다.
    또한 이 단어는 순수한 영적인 깨달음을 가리킬 수도 있다(욥 36:25; 시 63:2 [히3]).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행위를 선악간에 감찰하시는 행위를 가리킬 때에도 이 단어를 사용한다(시 11:4; 17:2).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한 사람들에게 자신을 직접 보여주시는 장면도 있다(출 24:9~11).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에게 보여주시는 계시를 가리키기도 한다. 생시에 보이기도 하지만 영으로 보이는 경우도 있다(민 24:2).
    꿈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단 2:26; 4:5, 9[히2, 6]).

    성도가 죽으면 하나님을 뵙게 되는데 이 경우에는 눈으로 보는 어떤 시각 작용이 될 수 없고 영으로 보는 신비한 현상이 된다(시 17:15; 욥 19:26~27).

    예언자가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음으로써 하나님에 관한 특수한 지식을 습득하게 된다.
    이 때문에 동사 <하자>는 예언자 자신이 전하는 말을 가리키기도 한다(사 30:10).
    이사야 1장 1절에 언급된 의미는 계시로 받는다는 수동적인 의미라기 보다는 예언자 자신이 말씀을 직접 계시 받고 전달한다는 능동적인 의미가 더 강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파생한 명사<호제>는 ‘보는 자’란 뜻으로 예언자를 가리키는 전문용어로 사용된다.
    이 단어는 또 다른 단어 <나비>와 나란히 예언자를 가리킨다(삼하 24:11; 겔 12:27).
    ‘보다’란 일반적인 인식작용을 가리키는 동사 <라아>에서 파생한 명사<로에>도 예언자를 가리키는데 개역성경에서 흔히 ‘선견자’라고 번역되어 있다.

    하갈이 사막에서 구원을 받았을 때 하나님을 가리켜 "엘 로이"라고 불렀다.
    개역은 ‘감찰하시는 하나님’,
    개정역은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
    새번역은 ‘보시는 하나님’이라고 번역하였다.

    "호제"란 명사는 환상을 보는 예언자를 가리킨다.
    성경에 22회 나오는데 이중 11번은 특정한 인물을 가리킨다.
    아마도 예언자의 직책을 암시하는 듯하다.<

    "호제"로 호칭되는 예언자로는 "갓"이 있고(삼하 24:11; 대상 21:9; 29:29; 대하 29;25),
    "헤만"(대상 25:5), "잇또(대하 9:29; 12:15), 하나니(대하 19:2), 아삽(대하 29:25), 여두둔(대하 35:15)"이 있다.

    왕하17:13에는 "나비"와 "호제"란 호칭이 나란히 병렬되어 같은 직책을 가리키기도 한다.
    아모스 7:12을 보면 아모스는 "호제"이면서도 동시에 "나비"이기도 하다.
    이사야 29:10에도 "호제"와 "나비"를 결부시킨다.
    역대상 29:29에는 "나비"와 "호제"와 "로에" 세 단어가 함께 언급된다.
    다윗 왕의 행적은 처음부터 끝까지 선견자 <로에> 사무엘의 글과 선지자 <나비> 나단의 글과 선견자 <호제> 갓의 글에 다 기록되고(대상29:29[개역])이 세 가지 단어 중 <나비>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대언자라는 의미로서 후대의 디아스포라에서 더욱 특별하게 사용되게 되면서 특별히 예언자를 가리키는 전문용어가 되었다. <로에>나 <호제>는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신탁을 보는 시각작용을 강조하였지만 <나비>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자로서 예언자의 호칭으로 강하게 부각되었다.파생어로서 <하주트> 란 단어도 구약성경에 다섯 차례 나오는데 눈에 보이는 시각작용으로서의 환상을 가리킨다. <히자욘>이란 단어도 <하존>이나 <마하제>의 동종어로서 거의 같은 의미로 쓰인다(창15:1; 민24:4, 16; 겔13:7). 예언자 나단이 전한 예언은 <히자욘>이라고 표기되어 있다.개역개정역에 ‘환상’이라고 번역한 명사는 열 다섯 구절에 나온다. 창세기에는 아브라함이 보았고(창15:1), 또한 점쟁이 발람이 환상을 보는 자이다(민24:4, 16). 그러나 민수기 12:6에 ‘환상’이란 단어가 나오는데 이 경우에는 히브리어 원어로 מַרְאָה(마르아)란 단어가 사용되었다. מַרְאָה(마르아)란 명사는 ‘보다’란 동사 <라아>에서 파생한 명사인데 어떤 현상으로 나타난 광경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환상’으로 번역된<하존>과는 다르게 번역하면 더 좋을 것 같다.민수기 12장 6절은 어떤 환상이나 꿈과 같은 의식 내지 무의식의 시각현상 보다는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로서의 모세의 직분을 강조한다. 예언자는 무엇보다도 말씀을 전달하는 종인데 그 예언자 모세 안에는 ‘여호와의 형상을 보기도 하는’ <호제>와 <로에>의 직분도 포섭되어 있다."6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7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8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민12:6~8).

    믿음의 눈으로 보고
    믿음의 귀로 듣고
    믿음으로 행동하게 하소서.

    ♪ 찬양 /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https://www.youtube.com/watch?v=v7gkZWhgZDA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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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24(수) 소위(所爲)와 사상(思想)(이사야 6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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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송 / 21장(다 찬양하여라)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이사야 66:1∼24
    ♦ 묵상을 위한 주제 : 소위와 사상(18절)
    ♦ 성구 : 내가 그들의 소위(所爲)와 사상(思想)을 아노라 때가 이르면 열방(列邦)과 열족(列族)을 모으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榮光)을 볼 것이며.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할 주제는 “소위(所爲)와 사상(思想)”입니다.
    ‘소위와 사상’이란 “하는 짓 즉 소행(所行)과 생각”을 말합니다.
    영어 성경에서는(NIV) “행동(actions)상상력(imaginations)” 이라고 번역합니다.

    소위(所爲) / 창세기 31:28

      나로 내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지 못하게 하였느냐 소위가 실로 어리석도다.
                                                                                                 (所行)


    사상(思想)  /  역대상 28:9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찌어다.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버리면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
                                                                    (생각)

    (도입 이야기)

    브라이언 카바노프
    의 『씨 뿌리는 사람의 씨앗』이란 책 속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도끼를 잃어버려 한참을 찾다가 이웃집 청년을 의심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청년은 마치 도둑처럼 걸었고, 도둑처럼 말했으며, 도둑처럼 행동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농부는 자신의 밭을 걷다가 그곳에서 자신이 잃어버린 도끼를 발견했습니다.
    그 다음부터 농부는 이웃집 청년을 보면서 그 청년은 다른 청년들과 똑같이 걷고, 똑같이 말하고, 똑같이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그의 생각에 따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행동한다는 교훈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눈과 넓은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 볼 수 있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전래 동화에 "3년 고개"라는 이야기를 아시나요?

    어느 할머니가 3년 고개를 넘다가 그만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앞으로 3년밖에 살 수 없다는 생각에 집으로 돌아온 할머니는 매일같이 한숨을 쉬며 지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손주가 할머니를 찾아왔는데 할머니가 예전같지 않고 한숨을 쉬며 우울하게 지내는 것을 보고 할머니에게 "할머니 왜 그렇게 우울하세요?" 하고 물었습니다.
    할머니는 손주에게 "내가 3년 고개에서 넘어졌기 때문에 앞으로 3년 밖에 살 수 없기 때문" 이라고 합니다.
    손주는 할머니에게 "할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3년 고개에 가서 10번만 넘어지셔요. 그러면 30년을 더 살 수 있어요."
    그제서야 할머니는 "그렇구나!"
    할머니가 그 자리에서 일어나 3년 고개에 가서 10번 넘어지고 돌아와서 행복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생각은 그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놓습니다.
    오늘날처럼 각박한 시대에 우리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이사야서 마지막 장을 읽게 됩니다.

    제1이사야서 구약에 해당합니다.
    1~39장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예언이며

    제2이사야서
    신약에 해당합니다.
    40~66장
    회복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이사야서 66장은 이사야서의 축소판처럼 ‘심판과 회복’이란 말씀의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66:1~14절악인과 의인에 대해,
    66:15~24절심판과 회복에 대해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배교하는 악인에게는 심판이 있고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에게는 회복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즉 “새 하늘과 새 땅”의 시대가 열릴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시편 10:4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In his pride the wicked does not seek him;  in all his thoughts there is no room for God.
     

    이사야서의 결론은 교회와 성도의 회복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사야 66:2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자손이 예물을 깨끗한 그릇에 담아
      여호와의 집에 드림 같이
      그들이 너희 모든 형제를
      열방에서 나의 성산 예루살렘으로
      말과 수레와 교자와 노새와 약대에 태워다가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 것이요.

    이스라엘 자손 - 그리스도인
    예물을 깨끗한 그릇에 담아 드리라.

    어느 날 나는 꽤 큰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친구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자네 교회의 교인수는 얼마나 되나.” “5,000명쯤 되지” 그가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교회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되나.
    성가대에서. 교회 학교에서. 또는 안내 위원으로. 성경 공부 인도자 등 교회의 기타 부서에서 봉사하고 있는 사람이 몇명이나 되는가 말이네.” “음. 대략 1,500명 정도 되지.” 이 말을 듣고 나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교회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 소위 실업자가 3,500명이나 되는구나.

    다른 기회에. 목회를 하고 있는 또 한 친구에게 그 교회 교인수가 얼마나 되는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한 800명쯤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자네 교회에서 무슨 일이든 맡고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지.”하고 물었습니다.
    “글쎄. 지금까지 거기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아마 300명 가량 될 것 같네”하고 그는 대답했습니다. 주님을 위해 일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즉 “교회 일”이 있고. “교회의 일”이 있습니다. “교회 일”이란 교회의 공적인 자리에서 일하는 것이요. “교회의 일”이란 그 이외에도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모든 일을 말합니다. 교회의 공적인 자리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교회의 좌석을 차지 하고 앉아 있는 평범한 교인들은 바로 이 “교회의 일”에 적극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3,500명 또는 500명의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는” 교인들이 스스로를 복음을 들고 세상으로 나아가도록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은 사람으로 본다면. 모든 교인을 위한 충분한 일자리가 있는 것입니다. 각각의 모든 그리스도인의 목표가 영적으로 자격을 갖춘 무장된 일꾼이 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모두 주님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백인교회와 흑인 성도의 이야기

    내 안에 성령이 임재하고 있는가?
    성령의 임재가 뜨겁게 역사하는 성도와 교회가 세워져야 합니다.


    이사야 66:20

      나는 그 중에서 택하여
      제사장과 레위인을 삼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교회사 저술의 시조로 알려지는 에우세비오스의 글을 통하여 보면 실로 평안한 때야 말로 교회가 부패되기 쉬운 때임을 알 수가 있다. "로마 황제 아우렐리아누스 이후 26,7년에 걸치는 평화로운 동안에 교회가 어떠한 상태에 있었던가를 일언하여 둘 필요가 있는 줄 안다.

    그리스도의 종교에는 많은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모여 들었다.
    그 막대한 사람들의 집회, 그리고 여러 도시에서 모여 온 그 군중들, 예배당에 있어서의 굉장한 수의 군중에 대하여는, 다 기록하기 어려울 정도의 것이었다.

    그들은 옛 건물에 만x족할 수 없어서, 각처에 있는 도시에, 큰 회당을 세웠다. 이들 교회는 나날이 커졌고, 진보는 더하여, 어떠한 증오, 어떠한 대적에도 압복되지 않았다. 그렇듯 교회는 평화를 즐기면서 번영했다.
    그러나 극도의 자유로 인하여, 교회는 부주의와 나태에 빠지게 되고, 각양 방법으로 서로 투기하며, 욕지거리를 하게 되었을 때, 즉 이제라도 서로 무기를 들려는듯, 또 화살과 창으로써 싸우려는 것과도 같이 말로써 서로 습격하려는 때, 다시 말하여 감독은 감독을 비방하고, 신자는 신자를 상대로 일어나고, 위선과 허위로서 최대악의 절정에 달한 때, 군중이 또한 교회로 모여들 때, 언제나 부드럽게 시작되는 하나님의 심판이 아주 부드럽게 내려와서, 단속하기 시작했다"가 그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실로 평안의 때는 오히려 부패되기 쉬운 위기이며,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한 때이기도한 것이다.


    공동체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1. 섬김에서
    2. 하나됨에서
    3. 헌신함에서
    4. 맡은 일에 충성함에서




    사람의 행동은 그의 생각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합니다.
    무슨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언어가 사용되고 언어가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는 것은 언어로, 언어는 행동으로, 행동은 습관으로 습관은 인생을 만들어간다고 합니다.

    사람의 욕망은 아담과 하와처럼 좀 더 높아지려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욕망은 마지막에는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합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한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순종하는 본을 보여주시려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아주 작고 연약한 나라이며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연약하고 작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강한 나라가 되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마치 자기 힘으로 강한 나라가 되었다고 교만해졌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소위이며 사상입니다.
    우리도 같은 성향으로 살아갑니다.
    일이 잘 되면 내가 잘해서 일이 실패하면 사람을 탓하고 환경을 탓하며 심지어 하나님을 탓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외식적인 일과 생각들을 다 아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을 자신의 보좌로 땅을 발판으로 삼으실 정도로 높고 크고 위대한 능력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와 생각들을 다 알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원하기 때문에 좋은 것이 좋다고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올바른 것이 좋은 것이므로 잘못된 것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려고 할 때 이방인들도 하나님을 찾아 나오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방인들도 구원을 받아야 할 하나님이 지으신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할 새 하늘과 새 땅이 올 것이라는 약속을 기대하며 매 순간마다 거짓이 없는 우리들의 생각과 행동에 의해서 팬데믹 세상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세상으로 회복하는 은혜를 구하는 복된 하루가 펼쳐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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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22일(화) 진리(眞理)의 하나님(이사야 6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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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송 / 27장(빛나고 높은 보좌와)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이사야 65:1∼25
    ♦ 묵상을 위한 주제 : 진리(眞理)의 하나님(16절)
    ♦ 성구 : 이러므로 땅에서 자기(自己)를 위(爲)하여 복(福)을 구(求)하는 자는 진리(眞理)의 하나님을 향(向)하여 복(福)을 구(求)할 것이요 땅에서 맹세(盟誓)하는 자(者)는 진리(眞理)의 하나님으로 맹세(盟誓)하리니 이는 이전(以前) 환난(患難)이 잊어졌고 내 눈앞에 숨겨졌음이니라.
     

    “진리의 하나님(the God of truth)”이란 “아멘의 하나님((the God of amen)”을 말합니다.

    이사야 65장은 패역한 백성에 대한 선지자 이사야로부터 깨우침을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패역한 백성이란 이사야 30장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하는 자식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이라."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하고 맹서하라고 합니다.

    할렐루야와 아멘
    말을 훈련시키는 어느 조련사가 "할렐루야!" 하고 소리치면 말이 달리고 "아멘!" 하면 말이 멈추는 말을 훈련시켰다고 합니다.
    어느 신앙이 좋은 교인이 그 말을 구입한 후 "할렐루야!" 하고 외쳤더니 말이 달리기 시작하더랍니다.
    너무 좋아서 한참을 달렸는데 갑자기 낭떠러지가 나타나서 "아멘!" 하였더니 정말 말이 멈춰섰습니다.
    신기한 말의 행동에 감탄한 교인이 "할렐루야!" 하고 외쳤더니 말이 달려 결국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할렐루야와 아멘에 대한 풍자적인 교훈이라고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기독교 용어를 바르게 사용하므로 신앙생활에 유익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진리의 하나님에 아라비아 숫자 1자를 따라 난외의 주를 살펴보면 고린도후서 1:20, 요한계시록 3:14이라고 표기합니다.
    난외의 주를 따라 “아멘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아멘(고후 1:20b)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아멘”이라고 화답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믿음의 결단과 고백입니다.

    아멘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1. 입술로 하는 아멘
    2. 마음으로 하는 아멘
    3. 행동으로하는 아멘

    아멘약 주세요! 라는 전도용 책자의 저자 고 황수관박사에게 어느 부인이 진료를 받기 위해 찾아와서 하는 말이,
    박사님, 아멘 약 주세요.”라고 하였습니다.
    그 부인은 실제로 "아멘 약"이 있어서 그 약을 처방받으려고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부인에게 10분쯤 아멘 약에 대해 설명하자 그 부인 입에서 연신 "아멘"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부인은 심장이 몹시 나빠 수술하기도 어려운 상태였는데, 이 아멘 약 처분을 받고 가서 8일 후에 다시 왔는데 완전 얼굴이 좋아졌고, 아멘 약 덕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부인은 계단을 오르면서도 아멘,
    화장실에서도 아멘,
    설거지하면서도 아멘,
    이렇게 3일쯤 계속하고 나니 얼굴에 윤기가 돌더라는 것입니다.

    "아멘"하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신앙입니다.

    둘째는 아멘이신 예수님(계 3:14b)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

    예수님은 "아멘"으로 세상에 오셔서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 되셨습니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 되시려고 하늘의 명령에 따라 순종하신 하나님과 동등한 창조의 근본입니다.

    (예화) 세 딸을 출가시킨 어느 할머니가 시간이 나면 절에 가서 불공드리는 일에 열심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 딸들이 시집을 가서 예수를 믿게 되었고 어머니가 점점 나이가 들면서 딸들은 어머니가 불공을 드릴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어야 한다면 세 딸들이 주일마다 교대로 어머니 댁을 방문하여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는데 식사 기 전에는 "아멘!" 이렇게 하라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딸들이 여러 해를 어머니를 찾아가서 아멘을 가르쳤는데 어느 날 사찰에 유명한 스님이 오셔서 법문을 강론한다고 하여 그곳에 참석했는데 스님의 강론을 듣고는 "아멘!" 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집으로 돌아와서 그 불자 할머니는 "참 이상하구나! 왜 나무아미타불 하지 않고 아멘" 하였을까?
    그 이야기를 듣고 세 명의 딸들이 어머니를 찾아와서 "이제부터는 교회에 나가야 한다"며 어머니를 모시고 마을의 교회를 찾아가서 등록을 하였고 교회 목사님에게 부탁하여 성경공부를 하도록 주선했다고 합니다.

    아멘이란 예수님의 별명이기도 합니다.
    수님의 법문 강론을 듣고 "아멘"하고 화답했다는 것은 이미 그 마음에 주님이 자리를 잡았다는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아멘’이라는 이름을 가지신 예수님은 모든 일을 합력하여 좋은 결과를 이루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셋째는 진실의 아멘(요한복음 5:24a)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말씀을 헬라어로 "아멘 아멘 레고" 라고 합니다.
    "레고"란 "내가 말한다"는 동사입니다.
    그러므로 "아멘 아멘 레고"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말한다"는 뜻입니다.

    “아멘”이란 용어가 주로 찬송가를 마칠 때, 기도를 마칠 때 또는 설교를 듣고 마음으로 감동할 때, 성경을 읽을 때  “아멘”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아멘이라고 말했으면 그 아멘에게 대한 의무와 책임을 바르게 감당해야 합니다.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믿습니까? 라고 질문하면 교인들이 "아멘"합니다.
    그래서 정말 교인들이 아멘하는 것이 믿음으로 하는 것인지 알고 싶어서
    이번에는 "확신합니까?" 라고 질문하였더니 모든 교인들이 조용하더랍니다.
    믿습니까?
    확신합니까?
    다른 것이 무엇인가요?

    믿습니까?
    아멘!

    이런 분위기에 너무 익숙해져버린 교인들을 위하여 아멘의 의미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넷째는 순종의 아멘(느헤미야 5:13b)
     
    회중이 다 아멘 하고 여호와를 찬송하고 백성들이 그 말한대로 행하였느니라.

    노아와 세 아들들은 산꼭대기에 배를 지어라!라고 했을 때에 배를 지었습니다.
    그 때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는 분명히 미친 짓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하라고 하셨기에 그대로 했습니다.
    그리고 동물들을 방주안으로 몰아 넣으라!고 하시니 그것도 ‘그렇게 했습니다.’
    창세기 6장 22절을 보면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노아 할아버지와 그 세 아들과 자부들이 ‘그리하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이 시대에도 ‘그리하는’ 신앙대로 살면' 손가락질을 받고 조롱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리하는 신앙으로 살아갈 때 순종하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은혜가 더욱 분명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다섯째는 믿고 확신하는 아멘(요한계시록 1:7, 22:20)

    1:7,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22: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인생의 즐거움을 발견하는 법’이라는 책을 쓴 일본사람 가와키타 요시노리씨는 인생이 즐거워지는 세가지 조건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 모르는 일에 대해서 알기 위해 ‘공부하기를 좋아해야 한다’
    2. 자기가 모르는 것,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솔직’해야 한다
    3. ‘플러스 발상’을 하면 인생이 즐거워진다.

    인간이 좋은 일을 생각하면 좋게 되고, 나쁜 일을 생각하면 나빠지니깐 항상 좋은 일, 좋게 되기를 생각하면.“즐거운 인생을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 한 예로 록펠러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재난이 닥칠 때마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닥치기를 잘했다!고 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실패했을 때에는 좋은 경험했다고 생각하고,
    실연했을 때에는 ‘진짜 연인을 만날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요시노리가 주장하는 것은 신앙(信仰)은 아닙니다.
    신념(信念)입니다.
    그에게 누군가가 약속을 주신 것도 아닙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주장합니다.
    자기 마음을 지배하며, 자기의 마음에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므로 긍정적 사고방식을 갖게 해서 인생을 즐기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될 수도 있고, 안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절대적이지는 않습니다.
    좋은 일을 생각해도 나쁘게 되고, 나쁘게 생각해도 좋게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자기 스스로 만들어 낸 신념이기 때문에 불확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약속입니다.
    아멘 또한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하는 신앙'에 응답하는 확실한 언약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어 보십시오”
    시험해 보십시오.
    말씀에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뿐만 아니라 자기도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을 얻게 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상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교회를 오래 다녀야 상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약속하신 것은 주십니다.
    아멘의 신앙을 회복하여 믿음의 눈이 밝아져서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고 기도하는 것이 응답되는 신앙생활의 즐거움을 모두가 함께 회복하는 은혜의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진리의 하나님 아버지!
    아멘이신 예수님을 믿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아멘을 외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시고
    진실한 몸과 마음으로 순종하며
    주님의 도움을 구하므로
    구할 때마다 채워주시는 은혜에 감사하며
    우환질고 많은 세상에서도 평강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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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22일(월) 선대(善待)와 진노(震怒)(이사야 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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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송 / 247장(이 세상 풍파 심하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이사야 64:1∼12
    ♦ 묵상을 위한 주제 : 선대(善待)와 진노(震怒)(5절)
    ♦ 성구 : 주(主)께서 기쁘게 의(義)를 행(行)하는 자(者)와 주(主)의 길에서 주(主)를 기억(記憶)하는 자(者)를 선대(善待)하시거늘
    우리가 범죄(犯罪)하므로 주(主)께서 진노(震怒)하셨사오며 이 현상(現狀)이 이미 오랬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救援)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선대(善待)”“친절(親切)하게 잘 대접(待接)하는 것”을 말합니다. 
    “진노(震怒)” “하나님이 죄(罪)를 지은 인간(人間)에 대(對)하여 노여워하고 심판(審判)하는 것”을 말합니다.     

    NIV : help & angry(거룩한 분노, holy angry. 성질에 따른 분노가 아니라 의에서 벗어난 것에 대한 교훈과 가르침을 위한 분노)

    현대인이 성경 : 환영 & 분노

    이스라엘여호와 하나님의 관계아들과 어버지의 관계라고 하셨습니다(이사야 63:16, 64:8)

    주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과 야곱은 우리를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주는 항상 우리를 구원하시는 우리의 아버지가 아니십니까?

    그런데, 아버지가 아들을 선대할 때가 있고 진노할 때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震怒)"는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믿음의 순수성을 확인할 때

    예를 들면 대표적인 인물은 ""

    둘째는 믿음(관계)을 회복시키려고 할 때

    예를 들면 이스라엘의 경우 애급의 노예, 바벨론의 노예

    농부와 둥지를 짓는 새

    어미새 한 마리가 알을 낳기 위해 썩은 나뭇가지 위에다 둥지를 틀고 있었습니다.
    마침 이것을 목격한 농부는 그 둥지를 헐어버렸습니다.
    새는 다음날 똑같은 자리에 다시 둥지를 짓기 시작합니다.
    농부는 다시 그것을 부숴버렸습니다. 
    이렇게 몇 차례 반복한 후에 마침내 새는 그 가지를 버리고 다른 가지로 옮겨 둥지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새가 안전한 나뭇가지에 둥지를 만드는 것을 볼 때 비로소 농부는 빙그레 웃었습니다.

    새 둥지를 부숴버리듯이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때를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실 때(이사야 64:5b)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But when we continued to sin against them,  you were angry.

    (현대인의 성경) 주는 기쁘게 옳은 일을 행하는 자와 주의 법도를 기억하는 자를 환영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께 계속 범죄했을 때 주는 분노하셨으니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얻겠습니까?

    히브리서 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사랑하는 아들이 죄를 지었을 때 진노하지 않는 것은 아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을 바르게 세우려고 진노하십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심부름꾼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주의 백성들에게는 사랑의 매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는 선한 길로 인도하는 길잡이가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震怒)

    (현대인의 성경) 6절
    우리는 다 죄로 더러워졌으며 우리의 의로운 행위는 때묻은 누더기와 같아서 우리가 다 잎사귀처럼 말라 죄악의 바람에 휩쓸려 가고 있습니다.

    1. 바람같이 몰아칩니다(6절)

    -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

    2. 소멸시켜버립니다(7절)

    -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우리로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 

    동방 우스 땅에 의롭다고 소문난 사람에게는 10명의 자녀들이 있었습니다.
    욥은 매일 아침마다 자녀들의 셩결을 위하여 번제의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탄이 욥을 시험합니다.

    당시 욥은 큰 부자로 소문이 났습니다.
    양 : 7,000.
    낙타 : 3,000.
    소 : 500겨리(1,000)
    암나귀 : 500

    어느 날 갑자기 욥의 가정에 큰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맏아들의 집에 모든 자녀들이 모여 음식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며 즐기고 있었습니다.

    여러 종들이 소와 나귀를 데리고 들에 나가 풀을 뜯기게 할 때 갑자기 스바 사람이 공격하여 종들은 죽이고 나귀를 약탈하였습니다. 그때 겨우 한 종이 도망하여 욥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그때 또 한 사람이 달려와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들을 불살라버렸다고 합니다.

    연이어 또 한 사람이 쫓아와서 갈대아 사람 세 떼가 몰려와서 낙타를 빼앗고 종들을 칼로 죽이므로 한 종이 도망하여 왔다고 보고합니다.

    이번에는 또 다른 종이 태풍이 불어와 집 네 모퉁이를 치므로 자녀들이 모두 그 자리에서 압사당하여 죽고 말았습니다.

    죄를 범했을 때 진노하시는 것은 죄에서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욥과 같이 의로운 자에게 진노하신 것은 그 믿음을 저울질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욥은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과 자녀들을 잃어버렸습니다.
    이런 때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욥기 1:20-22

    그러자 욥은 일어나 자기 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여호와께 경배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태어날 때 아무것도 가져온 것 없었으니 죽을 때에도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리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가져가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기 원하노라.'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욥은 범죄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진노를 선대로 바꿔 주소서!(9절)

    여호와여 과히 분노하지 마옵시며
    죄악을 영영히 기억하지 마옵소서.

    (현대인의 성경)
    여호와여, 너무 분노하지 마시고 우리의 죄를 영원히 기억하지 마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들입니다. 우리를 굽어 살피소서.

    이제부터 이렇게 살겠다고 다짐합니다.

    의를 행하겠습니다(5절a)

    주께서 기쁘게 의를 행하는 자를 선대하시거늘.

    옳은 길, 바른 길을 걷겠습니다.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겠습니다.

    주를 기억하겠습니다!(5절b)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시거늘.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대로 믿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겠습니다.

    주의 이름만을 부르겠습니다!(7절)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주님은 반드시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 엄마의 이름

    여섯 살짜리 아이가 엄마 손을 잡고 대형 슈퍼마켓에 쇼핑을 갔습니다.
    그런데 그만 엄마의 손을 놓치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갑자기 엄마를 잃어버리고 나니까 두려워 소리 지르기 시작합니다.

    “엄마, 엄마”라고 부르는 대신에 엄마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아이 엄마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고 아이를 금방 찾았습니다.
    그리고 야단치기 시작했습니다.

    “이 녀석아, 엄마 엄마 하고 불러야지, 엄마의 이름을 그렇게 함부로 부르면 되겠어?”

    그러자 아이는 “이 슈퍼마켓에 엄마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제가 엄마를 부르면 사람들이 다 돌아보지 않겠어요?
    그래서 엄마 이름을 불렀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엄마보다 더 똑똑한 아들인 것 같습니다.

    유대인 속담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어머니의 손을 빌려 사랑을 베푸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고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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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20일(토) 주는 우리 아버지(이사야 6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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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순절 제28일
    주제 / 주는 우리 아버지

    신앙고백 /
    찬송 / 81장(귀하신 주의 이름은)
    성경 / 이사야 63:16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찌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상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부자관계(父子關係)" 또는 "부녀관계(父女關係)" 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은 친자(親子) 양자(樣子) 관계로 형성됩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내가 태어난 이후에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영(靈)의 아버지"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 수령을 영의 아버지라고 가르칩니다.
    공산국가에는 종교를 탄압하지만 북한에서는 기독교 말살 정책을 강요합니다.
    왜냐하면 김일성 수령이 어버이가 된다는 것이 기독교 신앙 때문에 거짓이라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공산국가에는 세습제가 없습니다.
    북한은 현재 3대째 세습 정치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세습 왕정 국가를 유지하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정치에 현혹된 좌파 세력들이 나라를 다스리려는 의도를 모르거나 외면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동네 어른들은 '승혁아 너 주워왔다!" 하며 놀렸습니다.
    그 이유는 저희 아버지가 직업 군인으로 군 부대에 머무셨고 저희들은 서울에서 거주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늘 저희와 함께 거주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동네 아이들과 놀고 있었는데 처음보는 어떤 어른이 "승혁아, 아버지 집에 계시니?" 하고 불렀습니다.
    "예, 아버지 집에 계세요" 하고는 그 어른을 모시고 집에 갔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누가 찾아오셨어요!" 라고 알렸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뛰쳐 나오면서 "아이구, 형님!" 하며 제게 큰아버님이시다 인사해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순간 제가 동네 어른들이 나를 볼 때마다 너 주워왔다고 하였다는 것이 거짓말인 줄 확실하게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처음뵙는 큰아버지가 나의 아버지를 아시기 때문에 나를 보는 순간 아들이구나 하고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은혜를 받은 우리에게 아버지 하나님은 누구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이사야 64:8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 것은 우리를 "영(靈)"지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영이 있습니다.
      그 영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말라기 2:15

    여호와는 영이 유여하실찌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영의 아버지가 되셨기 때문에 영의 주인으로 그 영을 구속하시려고 합니다.

    이사야 63:16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찌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상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은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때 권세를 합법적 권세(에쿠시아)라고 합니다.

    이사야 63:15

    주여 하늘에게 굽어 살피시며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게 보옵소서
    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주의 베푸시던 간곡한 자비와 긍휼이 내게 그쳤나이다.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인정하지 않고 멸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되신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사야 63:16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찌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상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

    누가복음 15장에서 작은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미리 상속받았습니다.
    당시 상속법에 의하면 아버지가 죽기 전에 유산을 미리 요구하는 것은 돌에 맞아 죽을 죄에 해당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아들이 요구하는 유산을 모두 주셨습니다.
    작은 아들은 유산을 받은 후에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낯선 도시로 나가 성공을 다짐했지만 결국 모든 재산 탕진하고 아무 것도 없는 거지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먹을 것이 없어 돼지를 키우며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를 먹으면서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먹을 것이 넉넉한 품군들이 있는데 이제 아버지의 집으로 가서 품군으로 살며 배고픔이나 잊어야지 하며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뛰쳐 나와 아들을 끌어안고 '너는 잃었다가 다시 찾은 내 아들" 이라고 하시며 아들을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자비와 긍휼입니다.

    구속이란 영원한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을 말합니다.
    죽음의 죄가 사라지고 생명의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스데반집사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돌에 맞아죽었습니다.
    돌에 맞아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처절합니까?
    그 고통을 어떻게 말로 표현하겠습니까?
    육신은 그와 같은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그 입에서는 누구를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버지여 저희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영원한 생명을 알지 못하면 이런 고백은 할 수 없습니다.

    사순절 제28일을 맞이하는 이 새벽에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은혜를 힘입고 승리하는 삶을 위하여 일어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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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19일(금) 헵시바와 쁄라(이사야 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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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순절 제27일

    신앙고백 / 사도신조
    찬송 / 216장(아버지여 나의 맘을)
    성경 / 이사야 62:4
    주제 / 헵시바와 쁄라

    이사야 62:4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바가 될 것임이라.

    기원전 587년 남 유다 왕국은 신흥 강대국 바벨론에 의해서 완전히 멸망합니다.
    유다의 왕족들과 귀족들 그리고 학식이 많은 사람들은 모두 바벨론의 포로가 됩니다.
    예루살렘 성에는 농사를 짓던 유다인들만 남았습니다.
    바벨론의 정책은 유다를 말살하려고 예루살렘에 이방족속을 강제 이주시켜 유다인들과 섞여 살게 합니다.
    그 결과 유다인들은 이방족속과 혼인을 하였고 순수한 유다인이 아닌 혼혈족이 거주하게 됩니다.
    유다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 형성된 혼혈족을 "사마리아 사람" 이라고 합니다.

    70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포로가 되었던 백성들이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를 상상해야 이사야 62장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완전히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바라보는 백성들의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이와 같은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이사야 62:4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아주바(Azubah)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셰마마(Shemamah)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나의 기쁨(Delight)              결혼한 여자(Be married)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바가 될 것임이라.


      * 버리운 자(forsaken) : 아주바(Azubah)

      *  헵시바(Hephzibah) :
    나의 기쁨(Delight)

      *
    황무지(버려진 땅) : 셰마마(Shemamah)

      * 쁄라(Beulah) :
    결혼한 여자(Be married)


    버리운 자 / 이사야 49:14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이사야 54:7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이사야 60:15
    전에는 네가 버림을 입으며 미움을 당하였으므로 네게로
    지나는 자가 없었으나 이제는 내가 너로 영영한 아름다움과 대대의 기쁨이 되게 하리니. 

    험한 세상이라고 합니다.
    왜 험하다고 할까요?
    거짓이 세상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험한 세상에서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이 고통은 더욱 믿음을 순수하게 다듬기 위한 하나님의 과정이며 방법입니다.

    요한계시록 21:1-2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이사야 55:8-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신앙생활을 하면서 도저히 내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내게 닥쳐왔을 때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길을 알려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새로운 신분(New Being) / 새로운 시작(New Begin)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 안에 :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영적 하나됨

    새로운 피조물 : 거듭난 사람(요한복음 3:3)

    예수
    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
                             
    새 사람(에베소서 4:23-24)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로마서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라.

     영의 새로운 것 : 성령의 새로운 방법

    - 베드로의 세 차례의 부인과 그림자(사도행전 5:15)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뉘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고.

    ref / 사도행전 5:1-11, 아나니아와 삽비라
    8-10,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 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가로되 예 이뿐이로라.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대.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 남편 곁에 장사하니 .

    - 바울의 손수건과 앞치마(사도행전 19:11-12)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

    에베소서 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너희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로마서 8:10-11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디도서 1:16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야고보서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이사야 62:12  

    사람들이 너를 일컬어 거룩한 백성이라 여호와의 구속하신 자라 하겠고  
    또 너를 일컬어 찾은바 된 자요 버리지 아니한 성읍이라 하리라.















    시편 57:8
    내 영광아 깰찌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찌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Awake , my soul! Awake, harp and lyre! I will awaken the dawn.

    시편 108:2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Awake, harp and lyre! I will awaken the dawn.

    잠언 1:28, 부지런히 나를 찾으라
    - 부지런히 / 2. 이른 아침에

    잠언 8:17, 간절히 찾는 자가

    - 1. 새벽에 

    시편 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 붙들어주신다.

    시편 5:3,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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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18일(목) 구원의 옷(이사야 61: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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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야 61:10-11.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이 싹을 내며 동산이 거기 뿌린 것을 움돋게 함 같이 주 여호와께서 의와 찬송을 열방 앞에 발생하게 하시리라.

    구원의 옷의의 겉옷

    구원의 옷이란 내적인 구원의 확신이라고 하겠습니다.
    의의 겉옷이란 외적인 구원 받은 자의 삶과 행동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어리석은 임금은 벌거벗은 것을 가장 좋은 옷을 입었다고 생각하고 거리로 나갔습니다.
    옷을 입은 것이 아니라 벗은 상태입니다.
    구원을 받았다고 믿었으나 실상은 구원을 받지 못한 상태입니다.

    반면에 의의 겉옷이란 외적인 옷이라고 하겠습니다.
    내적인 옷구원의 확신이라고 하면,
    외적인 옷구원의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원의 옷이란?

    (현대인의 성경) 그가 의를 갑옷처럼 입으시고 구원의 투구를 쓰시며 복수와 의분의 옷을 입으실 것이다. 그가 자기 원수들에게 분노하셔서.

    스가랴 3:3-4
    여호수아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 더러운 옷이란? 죄의 옷
      아름다운 옷이란? 죄가 해결된 옷 즉 구원의 옷이라고 하겠다.
      만일 구원의 옷을 시장이나 백화점에서 구입할 수 있다면 아마 대박이 날 상품이 될 것이다.

    마태복음 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지금 한국 땅엔 천 만 명이나 되는 예수의 신부들이 있다.
    예수의 신부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이 땅은 더욱 메말라가고 살벌해진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어떤 예수의 신부들은 말한다.
    그들은 예복을 입지 않은 가짜 신부요,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어리석은 신부일 뿐이라고.....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명령하셨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을 때는 하나님과 같아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기대감이 아담과 하와를 설레이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은 후에 설레임은 없고 오히려 벌거벗었다는 수치심에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고 부끄럽게 생각한 신체의 일부분을 가렸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옷은 더러운 옷이라고 합니다.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것은 아담과 하와의 죄과를 제하여 버리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구원의 옷이었습니다.

    오늘의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의 옷은 무엇일까요?

    요한계시록 7: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요한계시록은

    성경의 증거(요한일서 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예) 서울 어느 교회의 창설자 장로님의 마지막 임종 때
    이제 주님께서 부르시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나는 아무래도 죄가 많아서 못 들어갈 것 같아요!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을는지 못 얻을는지 죽아봐야 알겠고
    심판에 이를지 안 이를지 죽어봐야 알겠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질지도 죽어봐야 알겠느니라.

    그 장로님이 화를 내며 목사님, 성경을 어떻게 그렇게 망령되게 읽습니까?
    그러자 목사님이 지금 장로님께서 내가 죄가 많아 천국에 못 들어갈 것 같다고 하셨으니 그 고백에 따라 성경을 이렇게 읽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령의 증거(로마서 8:16)
    성령이 친히 우리 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생활의 증거(요한일서 2:29)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예)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가노라

    요한일서 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예) 요셉(창세기 39:9b,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옷은 크게 두 가지 목적을 가진다.

    하나는 신분을 상징
    다른 하나는 몸을 보호

    패션의 역사에서 가장 언급하는 패션의 시작은 모호하다.
    역시 두가지의 주제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첫번째 수단인 계급 즉 자신을 나타내는 수단으로서의 의복이다.

    의복에대한 성경의 첫번째 언급은 타락한 아담을 위해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지어주실 때이다.
    그보다 무화과 나무 잎으로 부끄러운 부분을 가렸다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는 것도 염두에 두자.

    고대 사람들은 특정한 의복을 입음으로 변화될 수 있다고 믿었다.
    예로 들면 사자의 의복(가죽)을 입으면 사자와 같은 힘을 얻는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이것과 비슷한 동화가 전래된다.

    "소가 된 게으름뱅이" 라는 동화이다.
    이곳에서 게으름뱅이가 어느 노인의 말을 듣고 소가죽을 입어서 소가 되어 게으름을 참회하고 다시 사람이 된어 부지런한 삶을 살게 된다는 교훈을 담고있다.

    이 외에도 문학 속이나 역사 속에는 비슷한 사례들과 이야기들이 많다. 

    고대 바벨론의 의례판 기록에 의하면 환자가 병을 나으려면 입고 있던 의복을 벗어야 한다고 전해진다.
    의복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의로 여기는 것이다.

    성경 속에서 제사장은 성막에 들어갈 때 반드시 제사장이 입는 옷으로 갈아 입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저주를 받게 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전에 발을 들여 놓기 전에 흐르는 시샛물에 목욕하고 깨끗하게 세탁된 옷을 입어야 했다.
    옷은 새로운 장소 특별히 신성한 장소에 들어가기 위한 규례이다.

    마태복음 22장에서도 예복을 입지 않고 혼인잔치에 들어온 사람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역시 계시록에서도 천국은 세마포 옷은 입은 사람들이 들어간다.
    이런의미에서 의복은 한 개인의 신분이나 자격등을 나타내주는 역할을 한다.

    더 나아가 옷은 그 사람의 직무와 소명에 관련된다.

    모세는 아론의 옷을 벗겨 그의 아들인 엘르아살에게 입힘으로(민수기 20:28) 제사장의 직무를 행하게 했다.
    요나단은 다윗에게 자신의 겉옷을 주고 언약한다.
    이러한 행위는 자신의 신분 즉 왕자로서 왕위를 물려받는 것을 다윗에게 의탁한다는 의미이다.
    엘리야 역시 엘리사에게 자신의 외투를 던짐음으로 엘리사에게 소명을 주었다.
    후에 엘리사는 엘리야의 옷으로 요단을 가름으로 엘리사의 직무를 대신하게됨의 서막을 알린다.

     

    옷은 의로운(악한) 행위를 상징한다.

    스가랴 3:3에서 더러운 옷은 죄 많은 상징으로 나타난다.

    욥기 29:14에서 의로 옷을 삼아 입는다는 표현과 공의는 그의 도포와 면류과 같다고 표현한다.

    사도바울이 로마교회 교인들에게 그리스도로 옷입으라는 충고(롬 13:14)와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은 자는 모두 그리스도라는 옷을 입는다는 표현(갈 3:27)역시 그리스도 다운 삶을 의미한다.

    의로 옷입다는 의로운 삶을 말하는 것으로 신약에서 구제와 동일시 되기도한다.

    옷은 육체적인 몸을 상징한다.

    우리나라 전통에도 사람의 죽으면 기존의 옷을 벗기고 새옷을 입힌다.
    저 세상으로 가기 위해 채비하는 행위이다.

    시리아의 교부 에후라엠은 의복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 성질의 덮개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덮는 덮개로 의복이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의복은 곧 육체를 뜻하는 것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옷

    빛을 입으신다(시 104:2)
    존귀와 권위를 입으신다(시 104:1)
    화려한 의복, 곧 능력으로..(사 63:1)
    보수로 속옷을 삼으시고 열심을 입어 겉옷을 삼는다(사 59:17)

    속이는 옷

    바리새인들이 옷술을 길게하고 다님.. 외식적인 행위
    야곱이 이삭 앞에서 동물의 옷을 입고 형이라고 속임(동물적인 탐욕의 죄를 짓는다는 영적의미를 가짐)
    마태복음 7:5에서 더 극명하게 나타난다. 양의 옷을 입고 오는 이리라는 표현은 사단의 속임수를 말한다.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는 마귀도 언급한다.

    구원사 속에서의 옷

    처음 사람은 벌거 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범죄 이후 부끄러워했다.
    수치를 느낌 사람은 나무 잎으로 자신을 가렸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수치를 반영구적인 가죽으로 대신함으로 수치를 가려주셨다.
    이것은 인류의 수치 즉 죄악을 가리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하기 위한 예언이요 암시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자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게 된다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 사는것을 말한다.
    잔치에서의 예복은 곧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천국 찬치로 비유된다.


    신데렐라의 옷

    신데렐라 컴플렉스는 가난한 소녀가 왕자를 만나 왕비가 되어 출세한 것을 말한다.
    연예인들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유명해지고 스타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진작 우리가 아는 신데렐라는 원소설에서는 없는 만들어진 가짜이다.
    (이 부분은 이양호가 지은 [신데렐라는 재투성이다]라는 책을 참고바란다)
    귀족의 딸이었던 재투성이(신데렐라)는 의붓 언니들에 의해 귀족 딸의 호화스런 옷이 벗겨지고 재투성이가 된다.
    어느날 왕궁에서 혼인잔치가 열린다.
    재투성이는 새로부터 받은 옷을 입고 왕궁의 잔치에 들어간다.
    모든 사람들은 재투성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고귀한 어느 나라의 공주로 생각한다.
    왕자는 재투성이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결국 그를 찾아 결혼하게 된다는 줄거리이다.

    상식적으로 재투성이가 어떻게 옷을 바꿔입는다고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일까? 

    '옷이 한 인간의 인격을 상징한다면, 어떤 사람을 두고 금빛 옷을 입은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안에서 인격이 잘 여물어 마치 빛처럼, 그 인격이 밖으로 퍼저나오는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둠 속에 빛으로 서있는 사람일 것이다.
    재투성이는 겉보기일 뿐, 그의 속살은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고 이야기꾼은 말하는 싶었던 것일까? 
    얼굴 예쁜 아가씨들 사이에, 그들과 생판 다른 사람 즉 빛을 품은 아가씨가 나타난 것이다.
    놀람, 기적이다.
    온 맘이 거기에 사로잡혔기 때문.. 한 조각의 마음도 거기서 빠져나올 수 없다. 왕의 아들도 그런 사람들 즉 그 아가씨에게 온 맘을 빼앗긴 사람들 중 하나이리라'(106-107쪽)

    재투성이가 고귀한 인품을 옷을 입고오자 그 찬란한 영광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지금까지 재투성이 속에서 살아가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부활 후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과 동일하다.

    이양호는 신데렐라가 매우 기독교적임을 상기시켜 주면서, 옷은 하늘 신랑인 예수가 준 옷이며 이 땅에서 신부로서의 거룩한 삶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이 땅에 가짜 예수의 신부가 판을 치고 있다고 냉소한다.

    "지금 이 땅엔 천 만 명이나 되는 예수의 신부가 있다.
    그런데도, 아니 예수의 신부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이 땅은 더욱 메말라가고 살벌해진다.
    이런,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어떤 예수의 각시들은 말한다.
    '그들은 예복을 입지 않은 가짜 신부요,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어리석은 신부일 뿐'이라고"(207쪽)

     

    전세계 신데렐라 이야기

    나뭇군과 선녀

    나무꾼이 선녀의 옷을 숨긴다.
    옷을 빼앗긴 선녀는 이 땅에서 살아가며 자녀를 낳는다.
    날개를 잃은 것이다.
    선녀의 날개는 하늘로 올라가는 매개체이자 수단이다.
    선녀의 옷은 하얀색이며, 세속적인 땅에서 신성한 하늘로 올라가게 한다.
    옷은 신성을 부여주는 것이며, 옷을 입는다는 것은 곧 이 세상과의 결별을 의미한다.


    시편29:2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시편 132:9
    주의 제사장들은 의를 옷 입고 주의 성도들은 즐거이 외칠지어다

    마태복음 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로마서 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요한계시록 3:4
    그러나 사데에 그 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요한계시록 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요한계시록 15:6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 띠를 띠고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세 가지 요소가 ‘의(衣), 식(食), 주(住)’이다. 의식주는  지리와 기후, 민족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이며,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기초 자료이다. 21세기 대한민국에 살아가는 우리의 의식주는 성경 속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식주와 큰 차이가 있다. 때문에 성경이 기록된 시대의 상황을 올바로 알려면 시대와 공간의 다리를 건너 당시의 의식주를 바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에 등장하는 의류는 고온건조하며 우기와 건기로 나뉘는 이스라엘의 기후에 적합한 옷들이다.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온대 기후의 대한민국에 살아가는 우리들이 성경의 뜻을 더 분명히 알기 위해서는 고대 근동의 의복 문화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성경에 나오는 5가지 옷

    속옷(케토네트) 

    성경의 ‘속옷’은 우리가 떠올리는 팬티 같은 속옷이 아니라 ‘기본 옷’의 개념이다.
    두 개의 세마포 천을 얼굴과 양팔이 들어갈 구멍만 남기고 꿰맨 단순한 형태의 옷으로, 일상 생활 시 편하게 입거나 일할 때 입는 짧은 소매의 옷이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속옷(팬티)은 히브리어로는 ‘하고르’에 가까운데,
    ‘치마’라는 의미로 허리 주변만을 간신히 가리는 옷이다(창 3:7).

    일반적인 속옷은 일하기 좋게 소매가 짧지만, 장자나 왕족은 손바닥까지 덮을 정도로 팔이 긴 속옷인 ‘케토네트 파심’을 입었다. ‘파심’은 손바닥과 발바닥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어린 요셉이 입었던 옷이 바로 ‘케토네트 파심’이다(창 37:3, 23, 32, 참고-삼하 13:18-19). 개역 성경은 당시 우리나라 문화를 고려하여 집안의 귀한 아들에게 입히는 색동저고리를 생각하여 ‘채색옷’이라고 번역하였지만, 사실 요셉의 ‘케토네트 파심’은 색상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보통 속옷과 달리 소매가 길었기에 일하기 적합한 옷이 아니었으며, 아마도 장식을 더하여 노동자와 구분하였을 것이다.

    또 하나의 특별한 속옷은 ‘호지 않고 통으로 짠 속옷’이다. 이 옷은 십자가에 달리실 때 예수님께서 입으셨던 옷이다. 일반적인 속옷은 씨줄(수직의 실)과 날줄(수평의 실)을 엮어 짠 두 장의 천을 꿰매서 만들었지만, ‘호지 않고 통으로 짠 속옷’은 오직 날줄만을 가지고 한 개의 옷감으로 옷을 만들었다. 따라서 일반적인 옷은 찢을 수 있지만 호지 않고 통으로 짠 속옷은 찢으면 올이 풀려 천으로도 사용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의 겉옷은 찢어서 나눠 가졌지만, 속옷은 찢지 않고 제비를 뽑아 통째로 가졌다(요 19:23-24, 시 22:18).

     

    겉옷(심라)

    겉옷은 양털에서 짠 실로 만들어 통으로 짠 네모난 천으로 만든 외투이다. 겉옷은 단순한 옷이 아닌 신분과 명예를 나타내는 신분증과 같은 의미이다(삼상 28:14, 왕하 2:9-14, 딤후 4:13). 겉옷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가장 큰 이유는 술(tassel)을 달기 때문이다. ‘술’은 옷 귀 네 군데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더하여 매듭을 짓고,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기억하고 준행하게 하는 것이다(민 15:38-40, 참고-구속사 시리즈 제7권, 440-444.). 히브리인들은 술을 만들 때 여덟 가닥의 실을 다섯 번 매듭 지어 율법을 형상화시켰다. 이 술은 신분증으로도 사용되었는데, 사료에 따르면 당시 고리로 돈을 빌릴 때 술의 매듭 모양을 진흙 토판에 찍어서 자신을 증명했다고 한다. 

    ‘술’은 히브리어 ‘치치트’(צִיצִית)로, 히브리어 문자가 가지는 고유한 숫자값으로 풀이하면 ‘600’에 해당한다. 여기에 여덟 가닥의 실을 다섯 번 매듭지어 600+8+5 = 613이라는 숫자를 통해 율법의 613가지 조항을 표현하였다.

    겉옷 술을 만지는 것은 그 사람을 만진 것과 동일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혈루병 걸린 여인이 붙잡았던 예수님의 옷자락 역시 술을 가리키며(마 9:20-21, 참고-막 6:56).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않고 옷자락만 잘랐다는 표현도 술을 자른 것이다(삼상 24:4-5, 11). 다윗은 사울의 겉옷에서 술만 벰으로써 사울을 죽이지 않고 그 상징만 베었음을 나타냈지만, 그 술은 사울을 상징했기에 마음 아파했다. 사울 역시 술을 베는 행위의 의미를 잘 알았기에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안다’라고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삼상 24:20-21). 요나단이 다윗에게 자기 겉옷을 준 것 역시 다윗이 왕이 될 것임을 인정하는 우정의 표시였다(삼상 18:3-4). 겉옷을 찢는 것은 가장 강력한 조문과 슬픔의 표시였다(삼하 1:11-12, 3:31, 욥 1:20-21, 렘 41:5). 

    겉옷은 실생활에도 필수적인 옷이었다. 겉옷은 이불로도 사용되었다. 겉옷이 없으면 추운 광야의 밤을 견딜 수가 없기에 율법은 겉옷을 저당 잡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다(출 22:26-27, 신 24:12-13). 아모스 선지자 시대의 타락상은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라고 표현되고 있다(암 2:8). 저당잡을 수 없는 옷을 덮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깔고 앉기 위해 빼앗는 악한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십자가를 앞두시고 예수님께서는 “겉옷을 팔고 검을 사라”라고 말씀하셨는데(눅 22:36), 이는 생존에 필수적인 겉옷을 팔아서라도 말씀의 검을 갖춰야 하는 임박한 환난 때에 대한 표현이다(참고-히 4:12, 마 24:18). 

    허리띠

    속옷과 겉옷은 모두 펑퍼짐한 형태로, 허리를 동이지 않고서는 옷이 펄럭거려 일을 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허리띠는 옷 입기의 끝이요, 일하러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유월절 식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어야 한다(출 12:11). 실내에서는 편안하게 허리띠를 풀지만, 밖에 나가기 전에는 반드시 띠를 띠어야 한다. 이는 출애굽 직전의 급박한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명자에게 ‘허리를 동이라’(렘 1:17), ‘띠를 띠우다’
    (사 22:21)와 같은 표현들이 나타나며, 엘리야나 세례 요한 같은 특별한 사명자를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다’라고 표현했다(왕하 1:8, 마 3:4, 막 1:6). 또한 띠는 옷 입는 순서에서 가장 마지막에 묶는 것으로, 전체를 완성하는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눅 12:35, 엡 6:14, 골 3:12-14). 

     

    모자(터번과 베일)

    중동 지방의 작열하는 태양과 거친 모래바람에서 눈을 보호하기 위해서 머리에 터번을 착용했다. 출애굽기 34:29-33에서는 모세가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 수건은 얼굴을 닦을 때 쓰는 수건이 아니라 넓은 천을 터번처럼 두르고 헤어밴드로 두르는 것을 의미한다. 모세는 자신의 얼굴 광채를 가리기 위해 헤어밴드를 풀고 터번으로 얼굴을 가린 것이다. 터번의 헤어밴드는 남성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여자는 헤어밴드를 쓰지 않는 베일로 얼굴을 가렸다. 개역성경은 이 단어를 ‘면박’
    (창 24:65), ‘너울’(아 4:1)로 번역하였다. 남자는 예배를 드릴 때 머리에 쓴 것을 벗어야 하고 반대로 여자는 베일을 써야만 했다(고전 11:4-7).

     

    신발(샌들)

    고대 근동사회에서 신발은 모두 샌들이었다. 샌들을 만들 때는 먼저 가죽이나 나무로 밑창을 만든 뒤, ‘신들메’ 끝으로 고정하였다(참고-창 14:23). 돌이 많은 유대의 특성상 밖을 나갈 때에는 반드시 신발을 신었고, 실내에서는 신발을 벗었다. 그러나 종은 맨발로 다녔다(참고-출 3:5, 수 5:15, 삼하 15:30). 신발은 증명서 역할도 했다(룻 4:7-8, 참고-눅 15:22). 신발은 다섯 가지 옷 중 가장 더럽고 냄새나는 것으로, 신발끈을 묶고 푸는 일은 종들의 몫이었다. 또한 종들은 신발을 벗고 나면 물을 받아와 발을 깨끗하게 씻겼다. 

     

    옷의 재료

    세마포

    속옷은 주로 세마포로 만들었다. 세마포는 ‘아마’(flax, 파피루스의 일종)의 줄기로 만들었는데, 씨가 가득 맺힌 아마를 물에 일정 시간 담근 후 지붕 위에서 햇볕에 말려서 베실을 뽑아내었다. 세마포로 옷을 만드는 기술은 애굽에서 유입된 것이다. 이스라엘에서는 여리고를 중심으로 아마를 재배했지만, 애굽의 아마가 최고의 품질로 인정받았다. 세마포는 매우 비싼 옷감으로, 양털로 짠 옷보다 귀한 옷이었다(잠 31:22).

     

    양털

    겉옷은 주로 양털로 만들었다. 양털 옷은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스라엘 의 양 한 마리에서 1년에 한 차례 0.75-2kg정도의 양털을 얻을 수 있다. 무더운 여름이 오기 전 양떼를 한데 모아 양털을 깎았는데, 이때 주인은 큰 잔치를 베풀었다. 당시 가난한 사람들은 자기 양떼를 직접 쳐야 했지만, 대부분은 삯꾼 목자를 고용해서 양을 치게 했다. 발굴된 계약 토판 등을 보면 삯꾼 목자는 1년 동안 맡은 양떼의 80% 이상을 살려야 할 의무가 있었고, 많은 양을 건강하게 데리고 올수록 많은 보수를 받았다. 양털을 깎는 날은 삯꾼 목자의 보수를 계산하는 날이자, 양떼를 위해 수고한 자들에게 보답하는 날이었다. 

    다윗은 갈멜에서 있었던 나발의 양털을 깎는 축제에 찾아가 그의 양떼를 보호했던 일에 대한 정당한 보수를 요구하였다(삼상 25:2, 5-8). 나발은 마땅히 그 수고를 치하하고 보수를 지불해야 했지만 도리어 다윗을 모욕하므로 어리석게도 화를 재촉하고 말았다.


    옷의 혼합 금지

    율법에서는 양털과 베실을 섞어서 옷을 짜는 것을 엄격히 금하고 있다(레 19:19, 신 22:9-11). 혼잡은 성경에서 엄격히 금지되는 것으로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못한 것을 혼합하는 일은 큰 죄로 규정되었다. 여자가 남장을 하거나 남자가 여장을 하는 것 역시 가증한 행위로 규정되었다(신 22:5).

     

    실 뽑기와 옷감 짜기

    아마나 양털에서 나온 섬유는 너무 얇아서 바로 옷을 지을 수 없었다. 그래서 먼저 여러 가닥의 섬유를 꼬아서 실을 만든 다음 실패를 돌려가며 굵은 실을 뽑아냈다. 실을 잘 뽑아내는 여자는 지혜롭고 현숙하다고 인정받았다(출 35:25-26, 잠 31:13). 실을 뽑은 뒤 경우에 따라 염색을 했다. 당시 염료는 매우 비싼 것이라 염색한 옷은 매우 귀한 옷이었다. 그중 가장 귀한 옷은 자색옷이었는데(눅 16:19-21) 당시 두로는 자색 염료와 염색 기술을 독점하여 막대한 부를 쌓았다. 두로 지방을 가리키는 ‘페키니아’라는 말 자체가 ‘자주색 염료’라는 의미에서 유래한 것이다. 자색 염료는 뿔고둥의 분비선에서 극소량을 채취하여 만들었는데, 가로세로 50cm를 염색하는 데 약 1만 마리의 뿔고둥을 채취해야 했다. 두로 사람들은 뿔고둥에서 분비선 부분만 채취하고 다시 해안에 놓아주는 식으로 염색 사업을 했다. 자주색으로 염색하는 것은 매우 큰 비용이 들지만, 다른 색깔의 옷에 비해 약 40배 이상의 값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을 볼 때 십자가에 달리시는 예수님께 로마 군병들이 홍포(자색 옷)을 입힌 것은 ‘유대인의 왕’을 향한 조롱과 빈정거림을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마 27:27-31). 또한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수’ 루디아가 대단한 부자였다는 것도 알 수 있다(행 16:12-15). 그녀는 빌립보에서 바울의 설교를 듣고 최초로 전도된 유럽인으로, 훗날 자신의 집에 교회를 세움으로서 빌립보 교회의 초석을 쌓았다(행 16:40). 

    실의 가공이 끝나면 베틀에 날줄을 매달고 베틀 북을 돌리고 베틀 채를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천을 짰다. 욥은 자신의 날이 실을 감기 위해 재빨리 움직이는 베틀 북처럼 빨리 간다고 고백했다(욥 7:6).  베틀 채는 길고 단단한 나무로 만들었는데 흔히 창자루의 크기를 설명할 때 사용되었다(삼상 17:7, 삼하 21:19, 대상 11:23, 20:5). 베틀의 씨줄은 수직을 이루는 실로 여성을 상징했고, 날줄은 수평을 이루는 실로 남성을 상징했다. 삼손은 들릴라에게 자신의 머리카락 일곱 가닥을 날줄에 섞으면 자신의 힘이 없어지리라 거짓말했고, 들릴라가 블레셋 사람이 쳐들어왔다 하자 일어나 베틀 말뚝에서 날줄을 뽑아버렸다(삿 16:13-14). 

    ‘맹모단기’(孟母斷機)라는 사자성어는 베틀에 짜던 천을 중간에 칼로 잘라버리면 베틀 채가 말려 올라가며 천을 쓰지 못하게 되듯이 학문을 중간에 그만두지 말 것을 가르치는 말이다. 히스기야 또한 자신이 곧 죽는다는 선고를 받았을 때 베틀 천을 자르는 모습에 비유하며 자신의 생명이 중간에 끊어져 말려 올라가는 베틀과 같다고 하나님께 눈물로 호소했다(사 38:12).

     

    옷의 세탁

    고대 근동에서의 세탁은 오늘날의 빨래보다 더 넓은 범주의 일이었다.
    갓 짜여진 옷감은 매우 뻣뻣하여 입을 수 없었기에 전문적인 세탁자가 물에 담가 발로 밟아가며 부드럽게 만들었다.
    또한 더러워지거나 퀴퀴해진 옷도 주기적으로 세탁했다.
    당시 마을에는 빨래하는 ‘세탁자의 밭’이 따로 있었는데(사 7:3),
    이는 고대 근동에서 사용하던 세제의 냄새가 썩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레미야 2:22에서는 세탁할 때 ‘잿물’과 ‘비누’를 인용하며 사람의 힘으로는 죄를 세탁할 수 없음을 가르치고 있는데,
    여기 ‘잿물’은 히브리어 ‘네테르’로 잿물이 아닌 알칼리 광물 덩어리를 의미한다.
    만약 ‘네테르’에 산성 식초를 뿌리면 화학적 반응을 일으켜 가치를 잃어버리고 만다(잠 25:20).
    ‘비누’는 히브리어 ‘보리트’로, 비비면 거품이 나는 사막의 비누나무 즙으로 만든다.
    비누나무 즙은 표백작용이 있어서 표백제로 사용되었다(욥 9:30, 말 3:2). 


    구속사적 뜻에서 본 옷

    말라기 선지자는 구속사의 최종 성취를 바라보면서 그날을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다’라고 표현했다(말 3:2).
    성도의 옷이 더럽고 시커멓다고 해도, 표백하는 자의 잿물로 깨끗이 씻어주어 ‘세탁하는 자가 그리 할 수 없을 만큼 찬란하게’ 빛나게 만들어주시는 것이다(막 9:3).

    이 옷은 변화산의 영광 가운데 예수님께서 입으셨던 찬란한 옷(마 17:1-2, 막 9:2-3, 눅 9:28-29)이 예표하듯 성도에게 입혀주실 그리스도의 옷이다(롬 13:14, 갈 3:27).

    마지막 때 우리의 모든 더러운 옷은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피로 깨끗이 세탁함을 입고(계 7:13-17, 슥 3:3-5),
    어린 양만 따라가는 성도들에게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혀주셔서 다시는 상하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게 하실 것이다(계 7:9-10, 14:1-4, 19:6-8,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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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17일(수) 빛을 발하라 이사야 6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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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야 60:1-3

    일어나라 을 발하라 이는 네 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두움이 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열방은 네 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이사야 59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에서 떠나면 여호와 하나님이 시온으로 돌아오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으므로 일어나서 열방을 향하여 빛을 발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사야 60:1
    일어나라 을 발하라 이는 네 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 일어나라는 히브리어는 "" 이라고 합니다.
    ""이란 "대적하여 일어서다"는 뜻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야이로의 딸이 죽어서 누워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달리다굼" 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이란 "일어나라"는 뜻으로 "달리다굼"이란 "소녀야 일어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죽은 사람을 일어나라고 말씀하면 즉시 그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1. 소녀야 일어나라(달리다굼) / 마가복음 5:41

    마가복음 5: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2. 청년아 일어나라 / 누가복음 7:14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은 청년입니다.

    누가복음 7:14
    가까이 오사 그 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3. 나사로야 나오라 / 요한복음 11:43

    베다니 마을의 나사로는 장년입니다.

    요한복음 11:42-43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사도 베드로도 외쳤습니다.

     4. 다비다야 일어나라 / 사도행전 9:40

    욥바에 다비다 라는 여제자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에 매우 열심이었습니다.

    사도행전 9:40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감옥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는 베드로에게 주의 사자가 나타나 일어나라고 하며 베드로를 깨웠습니다.

    5. 베드로에게 급히 일어나라 / 사도행전 12:7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헤롯 왕은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죽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므로 이번에는 베드로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마침 무교절이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이때 교회는 베드로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합니다.
     
    사도행전 12:7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조요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사순절 25번째 새벽을 맞이하는 이 시간
    영적을 깊은 잠에 빠진 나를 향하여 "일어나라!"
    병든 내 몸과 마음을 향하여 "일어나라!"
    죄악의 깊은 사슬에 묶여 움직이지 못하는 나를 향하여 "일어나라!"
    이렇게 외치며 주님의 이름으로 명령합시다.

    이사야 60:1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 빛(오르) : 생명의 빛

    빛이 있으라 / 창세기 1:1-3

    1. 태초하나님천지창조하시니라
    2.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3.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 있으라 하시매 이 있었고
    마태복음 5:9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16절.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추게 하여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라.

    발광체(發光體)와 비발광체(非發光體)
    태양(Sun)과 달(Moonn)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1b)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2b)

    이스라엘 백성은 스스로 빛을 비출 수 없다.
    빛을 받아야만 빛을 비출 수 있다.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빛을 받아야 한다.

    에베소서 5:8-9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착함(goodness)  
        의로움(righteousness) 
        진실함(truth)

    성령의 열매(갈라디아서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님이 지배하는 생활에는
    사랑과 기쁨과 평안과 인내와 친절과 선과 실함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가 맺힙니다.
    런 것을 막을 율법은 없는 것입니다.

    이사야 60:3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결론을 위한 이야기

    인쇄기술을 창시한 구텐베르크(Gutenberg)입니다.
    어느 날 수도원장의 요청으로 보석 연마공인 그는 나무에 성경을 새기기 시작합니다.
    큰 나무판에다가 창세기 1장을 다 파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일장을 찍으면 한 장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2장을 큰 나무판에다가 또 팝니다.
    그런데 어느 날 두 자만 더 새기면 되는데 그만 칼이 빗나가 목판에 상처를 내고 말았습니다.
    “아 안타깝다. 두 자만 새기면 되는데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겠구나.”
    허탈해하면서 실패한 목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번뜩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목판에서 이리 저리 한 글자씩 잘라내면 된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갔습니다.
    즉시 행동에 옮겼습니다.
    한 글자씩 큰 목판에 새길 것이 아니라, 새길 글자를 잘라내어 글자판을 만들어서 조합하여 찍으면 되는 것입니다.
    곧 abcd를 하나씩 만들어서 조합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활판인쇄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결과 모든 사람들 손에 하나님의 빛인 말씀이 손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사순절 제25번째 새벽을 맞이하게 하신 하나님
    이 새벽을 깨우게 하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저희들에게 일어나 빛을 발하라고 하셨사오니
    모두 함께 일어나 병들고 잠든 세상을 향하여 일어나라 선포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빛으로 어둠의 땅을 밝히며
    빛되신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기쁨을 누리게 하옵소서
    이와 같은 은혜가 임할 것을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로 함께 기도합니다.

    소설 "어둠의 눈(The Eyes of darkness)"
    딘 쿤츠(Dean R. Koontz)
    1981년에 쓴 소설인데 이 소설을 보면 중국 후베이성 우한에 있는 한 연구소에서 발생된 바이러스로 인해 의문의 사망사건이 일어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소설 내용 중에 바이러스 발생지역과 바이러스로 인해 사망자들이 속출한다는 내용이 코로나와 거의 일치하여 2020년 전 세계 역주행 베스트셀러 1위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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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16일(화) 분리(分離) 이사야 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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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구 : 오직 너희 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사야 59장의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봅시다.

    옛 속담에 "물에 빠진 사람 구해주었더니 내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는 말처럼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생활을 마치고 돌아오게 했더니 먹을 것, 입을 것, 성전 건축할 돈을 달라고 합니다. 

    바벨론 포로생활 70년 만에 극적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포로생활은 끝났지만 고향 땅에 돌아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매우 고달픈 생활이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과 불평을 쏟아놓습니다.
    "왜 우리를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여 이 고생을 하게 합니까?"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포로생활을 끝내려면 생활할 수 있는 여유도 필요합니다"

    이사야 59:1-3 / 시온에서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이사야의 책망

    여호와의 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는 너희 손이 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웠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발함이라.

    예레미야 5:25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가 너희에게 오는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

    본문의 배경을 재구성하면 이스라엘 백성들, 예언자 이사야, 여호와 하나님 이렇게 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이스라엘 벡성들은 하나님에게 불평과 원망의 말을 쏟아 놓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어디에 계십니까?"
    "하나님, 왜 우리를 구원해주시지 않습니까?"
    "하나님, 오늘 우리의 곤고함과 삶의 힘겨움을 알기는 합니까? 그런데 왜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까?"
    "하나님, 혹시 우리를 구원할 능력이 없으신 거 아닙니까?"
    "하나님, 솔직하게 말해볼게요. 하나님이 좀 의심스럽습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셨다면, 어떻게 예루살렘 성전이 불에 타고 우리가 포로로 잡혀갔단 말입니까?"

    이사야 59:1-8 / 이스라엘의 죄를 책망하는 설교

    이때 예언자 이사야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신랄하게 이스라엘 백성을 책망합니다.

    1절. 주님의 손이 짧아서 구원하지 못하시는 것도 아니고, 주님의 귀가 어두워서 듣지 못하시는 것도 아니다.
    2절.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의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의 죄 때문에 주님께서 너희에게서 얼굴을 돌리셔서, 너희의 말을 듣지 않으실 뿐이다.
    3절. 너희의 손이 피로 더러워졌으며, 너희의 손가락이 죄악으로 더러워졌고, 너희의 입술이 거짓말을 하며, 너희의 혀가 악독한 말을 하기 때문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잘못이 없다.모두 너희들의 잘못이다."

    이사야 59:9-15a / 이스라엘 백성의 고백

    이스라엘 백성은 즉시 무릎을 꿇고 자복합니다.

    11절. 우리 모두가 곰처럼 부르짖고, 비둘기처럼 슬피 울며, 공평을 바라지만 공평이 없고, 구원을 바라지만 그 구원이 우리에게서 멀다.
    12절. 주님, 주님께 지은 우리의 죄가 매우 많습니다. 우리의 죄가 우리를 고발합니다. 우리가 지은 죄를 우리가 발뺌할 수 없으며, 우리의 죄를 우리가 잘 압니다.
    13절. 우리가 죄를 짓고 주님을 부정하였습니다. 우리의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물러가서, 포학한 말과 거역하는 말을 하면서, 거짓말을 마음에 품었고, 또 실제로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이사야 59:15b-21 / 구원의 선포

     하나님께서 보십니다.
    구원할 사람이 없음을 보십니다.
    중재자도 없고, 스스로 구원할 능력도 없고, 저들 안에 소망이라고는 한 터럭도 없음도 보십니다.
    그리고 자비의 음성으로 선포하십니다.

    16절.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내가 너희를 구원할 것이다!
    나는 구속자이다(20절)

    20절. 주님께서 시온에 속량자로 오시고, 야곱의 자손 가운데서 죄를 회개한 사람들에게 오신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21절.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그들과 맺은 나의 언약은 이러하다. 너의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너의 입에 담긴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토록, 너의 입과 너의 자손의 입과 또 그 자손의 자손의 입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본문의 배경은 극심한 삶의 고난과 신앙적 갈등으로 몸살을 앓았던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푸념에서 시작됩니다.
    고레스의 칙령에 따라 바벨론 포로로 있던 이스라엘 백성이 유대 땅으로 귀환은 했습니다(사 40장).

    귀환은 감동과 영광의 시간이었건만 이어진 삶의 자리는 고난과 좌절의 현실입니다.
    가뭄과 흉작으로 먹고 사는 문제가 고통이 되었습니다(학개 1:9-11).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연고뇨 내 집은 황무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에 빨랐음이니라.
    그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은 산물을 그쳤으며.
    내가 한재를 불러 이 땅에, 산에, 곡물에, 새 포도주에, 기름에, 땅의 모든 소산에, 사람에게, 육축에게,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임하게 하였느니라.

     
    특히 이미 유대 땅에 자리를 잡고 있던 사마리아 사람들과 귀환한 유대인들 사이에 심한 갈등과 반목, 생존경쟁이 극심했습니다.
    여기에 성전재건도 인력, 재력의 부족으로 중단되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 지방 토주들이나 권력자들의 착취와 학대는 서민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습니다.
    정의와 공의는 무너진지 오래고 신앙마저도 흐릿해져가며 기복적 사고로 하나님께 불만을 토로하는 뒤숭숭한 민심 속에 이사야 선지자는 칼을 빼어든 겁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를 촉구하는, 뼈를 때리는 준엄한 예언적 설교를 토설하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이사야가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폭로하며 회개를 촉구하는 데, 가장 인상적인 구절은 3절입니다.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워졌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냄이라.

    손, 손가락, 입술, 심지어 혀가 모두 죄악으로 가득하다고 폭로합니다.
    총체적인 죄악입니다.
    어디 한 부분은 고쳐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전적인 구제불능이 맞습니다.
    회복이 불가능한 전부 죄악으로 망가진 이스라엘 백성의 실체와 현실을 그대로 직시하고 있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다른 구원이 없습니다.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하나님이 팔이 짧거나 귀가 어두워서 듣지 못하여 너희를 구원 못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 죄 때문에 이지경이 되었다!"
    "돌이켜라, 하나님께로 돌이켜라. 우리가 살 길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무장한 전사의 모습을 한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기꺼이 전사가 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애굽기 14:14)

    반드시 구원해내겠다는 하나님의 결단이자, 열정의 표현입니다.
    총체적으로 죄로 가득한 그 못난 백성을 위해서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자비입니다.
    공평과 정의가 사라진 사회, 흑암의 사회, 답이 없는 죄악으로 가득한 백성 가운데 하나님이 극적으로 개입하여 구원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푸념을 멈추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일만 남았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십니다.

    이사야 43:11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I, even I, am the LORD, and apart from me there is no savior.

    이사야 59:2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 중에 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
    The Redeemer will come to Zion, to those in Jacob who repent of their sins," declares the L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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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15일(월) 금식(禁食) 이사야 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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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구 : 나의 기뻐하는 금식(禁食)은 흉악(凶惡)의 결박(結縛)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壓制) 당하는 자(者)를 자유(自由)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Is not this the kind of fasting I have chosen: to loose the chains of injustice and untie the cords of the yoke, to set the oppressed free and break every yoke?

    (현대인의 성경)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압박의 사슬을 풀어 주고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며 억압당하는 자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금식에 관한 이야기
     
    성 프랜시의 일화 중 금식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프랜시스와 그의 제자들이 40일 금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하루를 남겨 놓은 39일째 되는 날 젊은 제자가 스프 냄새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한 숟가락을 입에 떠 넣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함께 금식을 하던 제자들은 눈을 부릅뜨고 그 젊은 제자를 노려보았습니다.
    젊은 제자를 노려보는 다른 제자들은 유혹에 넘어간 제자에 대한 안타까움이 아니라 분노에 찬 정죄의 따가운 시선이었습니다.
    유혹에 무너지지 않았던 제자들은 스프를 떠 먹은 젊은 제자를 엄하게 꾸짖어주기를 바라며 스승 프랜시스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프랜시스는 말없이 수저를 집어 들고 젊은 제자가 먹었던 스프를 천천히 떠먹기 시작했습니다.
    깜짝놀란 제자들이 프랜시스를 쳐다보자 제자들에게 조용히 말했습니다. 

    "우리가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은 모두가 예수님의 인격을 닮고 그분의 성품을 본받아 서로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저 젊은이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스프를 떠 먹은 것은 죄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를 정죄하고 배척하는 여러분들이야말로 지금 큰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굶으면서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는 실컷 먹고 사랑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금식”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제”와 “기도”와 “금식”에 대하여 특별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구제(救濟)는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 6:3).
    이것을 "대인관계(對人關係)" 라고 합니다.

    기도(祈禱)할 때는 골방으로 들어가라(마 6:6).
    이것을 "대신관계(對神關係)" 라고 합니다.

    금식(禁食)할 때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마 6:17)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대아관계(對我關係)”라고 합니다.

    금식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자기와의 싸움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고 흉한 모습으로 드러내는 것을 금(禁)한 것입니다.

    3월 29일(월)부터 4월 3일(토)까지 고난주간(苦難週間)으로 지킵니다.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하루에 한 끼씩 금식하며 금식한 한 끼 식사에 해당하는 금액을 결정하고 헌금으로 모아 북한 사역을 위하여 사용하려고 합니다.
    저희들이 매월 후원하는 “유진벨 재단”과 “모퉁이돌 선교회”를 후원하는 사역에 조금 더 보탬이 되려고 합니다.

    중국과 북한의 지하교회 성도들이 자유롭게 예배할 수 있는 그 날을 기도하며 기다립니다.
    북한 지역이 공산화되므로 자유를 찾아 남한으로 피난 내려온 성도들에 의해서 한국교회는 급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중국과 북한의 지하교회 성도들이 자유를 얻어 안일한 신앙생활에 만족하는 남한교회와 성도들에게 신앙의 본이 되어 자유대한민국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그 날을 기다리며 기도합니다.

    예수 한국, 복음 통일을 이루어 자유대한민국이 세게 선교의 전진 기지로 쓰임 받는 그 날을 위하여 금식하며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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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13일(토) 통회하는 자의 마음(회개하는 자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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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이사야 57:1∼21

    ♦ 묵상을 위한 주제 : 통회하는 자의 마음(15절)
    ♦ 성구 :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痛悔)하고 마음이 겸손(謙遜)한 자(者)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謙遜)한 자(者)의 영(靈)을 소성(蘇醒)케 하며 통회(痛悔)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蘇醒)케 하려 함이라. 
    I live in a high and holy place, but also with him who is contrite and lowly in spirit, to revive the spirit of the lowly and to revive the heart of the contrite.  

    오늘은 사순절(四旬節, Lent) 제22일째 날입니다.
    이사야 57장은 “우상숭배에 대한 책망”의 말씀입니다.
    우상숭배(偶像崇拜)가 성행(盛行)하는 것은 공의(公義)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인(義人)의 죽음에 관심(觀心)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의(義)로운 사람이 죽었을 때는 편히 쉼을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

    통회하다 - 죄를 깊이 뉘우치다, 회개하다

    오늘의 시대에 무엇을 회개할 것인가?
    교회와 교회, 교단과 교단과의 협력하지 못한 죄를 회개해야 한다.

    이야기 / 톨스토이의 작품에 "천국과 지옥의 식탁"

    마태복음 4:17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서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 회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열쇠와 같다.

    마가복음 1:14-15
    요한
    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회개(悔改) / 메타노이아
    변화(메타) + 머리(노이아) = 메타노이아(생각과 마음의 변화)
    삶의 방향과 목적이 바뀌는 의식의 변화

    성경에서 강조하는 회개의 모습

    1. 뉘우치는 것(마태복음 21:30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 뉘우치는 것은 죄를 깨닫는 마음(생각)

    2. 자백하는 것(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 하나님이 기억하고 있는 죄를 회개하라.
    성령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내가 기억하는 것을 회개하는 것이 아니다(후회하는 것으로 반복한다)
    회개의 영이 임할 때 비로서 회개가 시작된다.

    3. 갚는 것(누가복음 19:9)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 속건제(물건을 배상하는 제사)

    4. 벗어버리는 것(골로새서 3: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  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우상 숭배니라.

    골로새서 3:1-3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아담과 하와는 그들이 벌거벗은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창 3:7, 21)
    벗어버리는 것은 곧 갈아입는 것이다(계 19:8) 세마포. 옳은 행실

    이사야 57:19
    입술의 열매를 짓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찌어다 평강이 있을찌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




    이스라엘에 대하여 비인도적 행위를 일삼던 바벨론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회복시키실 것을 말씀하신 후에 56장에서는 이스라엘에게 “정의를 지키며 의를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바벨론은 이스라엘 사람에게 학대와 속임수 등의 비인도적인 행위를 하였으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무시와 불경의 비인도적인 행위를 일삼았습니다.

    나라가 망(亡)할 정도로 부패(腐敗)할 때 하나님은 의로운 사람을 찾습니다.
    주를 믿는 사람들이 의로운 사람으로 선택(選擇) 받으려면 통회자복(痛悔自服)하므로 나라를 바르게 세워야 합니다.

    나라 없는 교회(敎會)는 없습니다.
    공의(公義)가 실현(實現)되는 나라에 거룩한 교회(敎會)가 세워져서 소금과 빛으로 세상(世上)을 밝히며 부패(腐敗)하며 타락(墮落)하는 그곳에 진리(眞理)가 세워지기를 소망(所望)하며 기도(祈禱)를 멈추지 맙시다.

    어둠의 땅에
    밝은 빛 비추어
    진리의 길 따라
    믿음의 행진가를 부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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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12일(금) 만민의 기도하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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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민(萬民)의 기도(祈禱)하는 집( a house of prayer for all nations)

    솔로몬의 성전을 선지자 이사야는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합니다.
    성전만민의 기도하는 집이 되려면 먼저 여호와 하나님과 연합해야 합니다(6-7절).

    나 여호와에게 연합하여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나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참조 / 마가복음 11:17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마태복음 21:13, 내 집은 기도하는 집
    누가복음 19:46, 내 집은 기도하는 집
    요한복음 2:13-22,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으로 만지 말라
    (소, 양, 비둘기 파는 자, 돈 바꾸는 사람)

    예레미야 7:11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란 누구나 들어와서 기도할 수 있는 장소를 말합니다.
    그런데 누구나 들어가서 기도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닙니다.

    성전(聖殿)에 들어갈 수 없는 이방인(異邦人)들

    유대인이 아니면 누구도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여호와를 섬기는 이방인은 성전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합니다.

    강도(强盜)의 소굴(巢窟)로 만든 장사꾼들

    예수님 당시에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돈을 바꾸거나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이 그 장소를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성전에 들어가려면 헌금을 위한 돈으로 바꿔야 합니다.
    비둘기는 가난한 사람들이 바칠 수 있는 예물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수시로 성전에 올라갈 수 없었습니다.
    일 년에 한차례 유월절 절기를 맞아 겨우 성전을 방문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전에 들어가서 헌금을 하려고 정성껏 준비한 헌금은 거룩한 돈으로 교환하여야 바칠 수 있었습니다.
    액면가 그대로 교환해주는 것이 아니라 얼마씩을 제하고 교환해주는 돈 바꾸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비둘기를 예물로 바치려는 가난한 사람들이 정성껏 준비한 비둘기는 흠이 있는 것이라며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에게 비둘기를 구입하여야 했습니다.

    현대화(現代化) 된 교회(敎會) 건물(建物)

    최신식 설비를 갖춘 교회가 어느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없게 하므로 기도하는 집은 텅 빈 집이 되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닫아 버린 교회

    그나마 주일이면 교인들이 모여 예배하던 교회는 코로나 바이러스 전염병에 의해서 모이지 못하는 규제에 따라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탄의 전략을 점점 고도화되어 더 심각한 상황으로 전략을 바꿔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사탄의 전략은 기도할 수 없도록 미혹할 것입니다.

    솔로몬의 성전 - 스룹바벨 성전 - 헤롯 성전 - 교회 - 개인 성전

    기도가 막히는 이유

    기도가 막히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치명타다.
    사람에게 있어서 혈관이 막히는 것과 같다.
    기도가 막히면 신앙생활에 모든 것이 막힌다.
    기도 없는 회개는 상상도 할 수가 없다.
    기도하는 자가 성경도 읽고 싶고 전도도 하게 되며 교회생활에도 적극적이다.

    기도하지 않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는 뻔뻔함을 보일 수밖에 없다.
    기도는 우리의 양심을 흔들어 깨우는 촉매제와 같은 것이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체험한 자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모든 죄를 털고 일어날 힘을 얻게 된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임재 하시는 성령은 소멸하는 불이기 때문에 모든 죄된 것들을 살라 불태워 버리실 수 있다.

    기도는 비틀어진 우리의 심성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상화시킬 뿐더러 인간관계를 회복시켜 주는 역활을 한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신앙은 기도의 유무에 달려 있다.


    1. 죄를 품으면(시편 66:18)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현대인의 성경)
    내가 만일 마음 속에 죄를 그대로 품고 있었다면 주께서 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않았을 것이다.

    2. 교만(잠언 8:1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현대인의 성경)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것이 악을 미워하는 것이다.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거짓된 입술을 미워한다.

    교만이란 모든 것을 내 힘으로 할 수 있다는 자만심과 교만함이 기도를 안하게 만든다.
    이런 사람들은 고난을 맛보고 나서야 비로소 기도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 일이 닥치기 전에 먼저 기도하는 습관이 우리의 영혼을 살리고 역동적인 신앙생활이 가능할 수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3.
    게으름(잠언 19:15)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해태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

    (현대인의 성경)
    사람이 게으르면 잠은 실컷 잘지 모르지만 결국 굶주리게 될 것이다.

    게으름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보이지 않는 종양과 같다.
    서서히 신앙생활을 마비시키며 마침내는 하나님과의 단절로도 이어지게 하는 무서운 영적 질병이다.

    4. 우선 순위가 잘못되었기 때문(마태복음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현대인의 성경)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덤으로 주실 것이다.

    기도하는 손

    유명한 화가가 된 알버트 뒤러의 어린 시절은 무척 가난해서 학비조차 낼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는 같은 처지에 있는 친구를 만나서 학교에 갈 수 있는 방법을 의논하던 중에 친구가 이런 제의를 했습니다.

    “뒤러야, 우리 두 사람 모두 공부를 계속할 수가 없으니 네가 먼저 학교에 가서 열심히 공부해라.
    그러면 나는 식당 일을 하면서 돈을 벌어 널 도울게.
    그리고 네가 공부를 마치고 나서 나를 지원해주면 우리 둘 다 공부를 할 수 있지 않겠니?”

    두 친구는 아주 좋은 생각이라고 결정하고 행동에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뒤러의 친구는 식당에 가서 그를 위해 열심히 일하여 매월 꼬박꼬박 학비를 보냈고,
    뒤러는 친구의 도움으로 미술학교에 다닐 수 있었습니다.

    학교를 졸업한 후 뒤러는 자기의 학비를 벌기 위해 많은 희생을 한 친구의 도움을 생각하며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마침 그 친구는 식당 한 구석에서 절친한 친구 알버트 뒤러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의 친구 뒤러가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화가가 되게 해 주세요.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많은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러나 하나님, 저의 손은 이미 식당 일로 인하여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으니 제가 할 몫까지 뒤러가 모두 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기도하는 친구의 모습을 보고있던 알버트 뒤러는 자기를 위해 희생한 친구의 손을 바라보는 순간 커다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즉시 붓을 들어 사랑하는 친구의 기도하는 손을 스케치하였습니다.
    그 그림이 바로 그 유명한 뒤러의 “기도하는 손”입니다.

    고린도전서 3:16-17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린도전서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광을 돌리라.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의 몸이 기도하는 집으로 세워질 수 있도록
    보혜사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고
    삶의 자리에서 일하며 기도하므로
    온 땅을 주의 말씀으로 채워갈 수 있는
    지혜와 믿음과 힘을 더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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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지자 이사야는 당시 여호와께 연합한 백성들이 하나님의 집을 기도하는 집으로 세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만민의 기도하는 집을 장사하는 사람들이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습니다.
    요즈음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 너무 화려하고 고가품으로 장식되어 정규적인 예배 시간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자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상을 흘들면서 이제는 만민의 기도하는 집에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규제합니다.
    앞으로 어떤 사태가 일어날 것인지 가늠하게 합니다.

    솔로몬의 성전을 선지자 이사야는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합니다.
    성전이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 되려면 먼저 여호와 하나님과 연합해야 합니다(6-7절).

    나 여호와에게 연합하여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나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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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11일(목) 하나님의 생각과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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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 중국 은나라의 탕왕이 천자가 되고 나서 무려 7년 동안이나 가뭄이 계속 되었습니다.
    경험이 많은 한 노 대신이 “사람을 희생제물로 바치지 않으면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탕왕은 목욕재계하고 흰 말이 끄는 장식이 없는 흰 수레를 타고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려고 들에 나갔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아뢰었습니다.
    저의 정치가 절제가 없어 문란해졌기 때문에 가뭄이 온 것입니까?
    백성이 직업을 잃고 곤궁에 빠져 있는데 제가 자상히 돌보지 못해 비가 오지 않는 것입니까?
    뇌물이 성하여 바른 도를 해치고 있기 때문입니까?
    참소하는 말로 인해 어진 사람이 배척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입니까?

    그러자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큰 비가 내려서 수 천리의 땅을 적시었다고 합니다.
    지도자가 회개할 때 하늘도 움직입니다.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이사야 55:6∼9

    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7. 악인은 그 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8.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은 너희 과 달라서
    9. 하늘이 보다 높음 같이 내 은 너희 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 묵상을 위한 주제 : 하나님의 생각과 길(8절)
    ♦ 성구 : 8-9절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은 너희 과 달라서
    하늘이 보다 높음 같이 내 은 너희 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길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방법" 이라고 하겠습니다.
    어제 저녁 수요성서학당 강좌에서 "속죄제"에 대하여 소개했습니다.
    이제까지 우리들은 무슨 죄든지 반드시 피가 있어야만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구약 시대에는 동물의 피,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의 피가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레위기 5장에서 속죄제의 제사를 드릴 때 바쳐질 제물에는 아주 가난한 사람에 의해서 "고운가루 에바 1/10"을 속죄제의 제물로 바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고운가루에는 피가 한 방울도 없습니다.
    그래도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이러한 용서의 방법이 곧 하나님의 속죄와 구원에 대한 생각 즉 계획이라고 하겠습니다.
    또한 용서하시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길을 찾기 위해서 나의 생각과 나의 길을 버려야 합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한다면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길과 하나님의 길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생각의 차이 때문에 어처구니 없는 사고가 일어납니다.

    한 예를 소개합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저희 교회학교를 지도하시던 박내수전도사님이었습니다.
    그 전도사님이 어릴 때 가족들이 밥상에 둘러 앉아 식사를 하던 중 당시 모두 가난한 시절인지라 밥과 반찬은 김장 김치 뿐이었는데 김치속에 누런 황새기가 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도사님이 얼른 젓가락을 들고 그 황새기를 집어 입으로 넣으려고 하는데 마침 아버님도 그것을 집으려고 하더랍니다. 아들의 동작이 빨라서 그 황새기를 집어서 입속으로 넣었는데 그것은 황세기가 아니라 황세글 묶었던 볏짚이 김치아안에서 불어터져 마치 생선 조각처럼 누렇게 보였다고 합니다.
    아버님이 아들에게 그것을 왜 먹느냐?
    나는 누가 먹기 전에 꺼내려고 하였는데.............. 하더랍니다.
    그 때의 일을 생각하면 전도사가 되었지만 참 부끄럽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생각과 아들의 생각이 이렇게 다를 수 있습니다.
    먹을 것 때문에 이렇게 생각아 달라질 수 있다면 김치 보다 더 크고 좋은 것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생각이 달라질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을 깨닫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6절을 읽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사순절 20일째 날을 맞이합니다.
    2021년 사순절 경건의 삶을 살아가며 이 시대를 위한 살아계신 하나님을 찾고 만날 수 있는 은혜를 기도합시다.

    7절을 읽습니다.
    악인은 그 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나의 생각을 버리고, 나의 길을 떠나야 합니다.
    이것을 회개하고 합니다.

    세상(世上)은 사람의 생각과 방법(方法)대로 다스려지고 지배(支配)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과 방법은 분명(分明)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創造)하신 목적(目的)이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創造)의 목적(目的)은 영혼(靈魂)을 살리는 것입니다(3절).

    하나님의 생각은 하나님의 계획(計劃)이며 하나님의 길은 하나님의 방법(方法)입니다.

    남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滅亡)하는 것은 유다 백성(百姓)들이 하나님의 생각과 방법(方法)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 이사야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6∼7절)”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을 외면하고 바벨론 문화에 길들여진 유대인들의 삶이 잘못된 것이라며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2절)” 라고 외쳤습니다.

    바벨론 문화가 참된 양식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그 문화에 깊숙하게 빠져버렸습니다.
    더 이상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영혼의 질식(窒息) 상태가 되어버린 백성들을 향한 이사야의 외침은 듣기 싫은 잔소리와 같습니다.

    오늘날도 신흥 자본주의(資本主義)에 편승(便乘)하거나 숭배(崇拜)하는 현대 기독교인들을 향하여 동일하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3절)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영(靈)의 귀를 회복(回復)합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생각과 길을 따라 소망(所望)의 길로 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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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10일(수) 인자(仁慈)와 언약(言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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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이사야 54:1∼17
    ♦ 묵상을 위한 주제 : 인자와 언약(10절)
    ♦ 성구 : 산들은 떠나며 작은 산들은 옮길찌라도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은 옮기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Though the mountains be shaken and the hills be removed, yet my unfailing love for you will not be shaken nor covenant of peace be removed, says the LORD, who has compassion on you. 

    오늘은 사순절(四旬節, Lent) 제19일째 날입니다.
    이사야 54장은 “하나님의 영원한 자비와 언약”의 말씀입니다.
    “인자(仁慈)와 언약(言約)"

    이스라엘 사회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로 여겨졌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을 "이스라엘"에 비유합니다.

    첫째는 잉태치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여인(1절)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찌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찌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칠거지악(七去之惡)은 중국, 한국 등 유교문화권에서 남편의 일방적인 의사표시로 아내와 이혼할 수 있는 일곱 가지 이유,
    다시 말해 이혼사유이다. 글자 그대로는 '아내를 내쫓을 수 있는 일곱가지 잘못'이라는 뜻이다.

    1.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음(不順父母)
    2. 아들이 없음(無子)
    3. 음탕함(不貞)
    4. 질투함(嫉妬)
    5. 나쁜 병이 있음(惡疾)
    6. 말이 많음(口說)
    7. 도둑질을 함(竊盜)

    그러나 칠거지악에 해당하는 잘못을 지었더라도 다음과 같은 세가지 경우에는 내쫓지 못하도록 하였다.

    1. 내쫓아도 돌아가 의지할 곳이 없는 경우(有所取無所歸不去)
    2. 함께 부모의 삼년상을 치른 경우(與共更三年喪不去)
    3. 전에 가난하였으나 혼인한 후 부자가 된 경우 (前貧賤後富貴不去)

    이런 세가지 경우를 삼불거(三不去) 또는 삼불출(三不出)이라고 한다.

    둘째는 과부(4절)

    두려워 말라 네가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라 놀라지 말라 네가 부끄러움을 보지 아니하리라 네가 네 청년 때의 수치를 잊겠고
    과부 때의 치욕을 다시 기억함이 없으리니.

    셋째는 어릴 때 아내가 되었다가 버림을 받은 여인(6절)

    여호와께서 너를 부르시되 마치 버림을 입어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 곧 소시에 아내 되었다가 버림을 입은 자에게 함같이
    하실 것임이니라 네 하나님의 말씀이니라.

    그런데 이러한 여인들을 향하여 큰 긍휼 영원한 자비라는 약속을 말씀합니다(7-8절)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의 말이니라.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But with everlasting kindness I will have compassion on you)"
    영원한 자비를 히브리어로 "헤세드(hesed)"라고 합니다.
    '헤세드'란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독특한 사랑을 표현하는 단어라고 하겠습니다.
    신약에서는 아가페와 같은 단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존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를 짓고 미워할만한 행동을 할지라도 사랑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은 "남편이시며, 만군의 여호와시며, 구속자가 되시는 거룩한 자이며, 온 세상의 하나님"입니다(5절).

    영원한 자비를 베푸시므로 세상에서 비천한 존재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첫째는 잉태치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여인아 노래하라(1절)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 아니라 이제는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하시므로 노래하라고 축복합니다.

    둘째는 과부의 때를 두려워말고 놀라지 말라(4절)
    부끄러움과 수치를 잊게하실 것이라고 축복합니다.

    셋째는 어릴 때 아내가 되었다가 버림을 받은 여인(6절)
    여호와 하나님이 부르시고 항상 함께 하실 것이라고 축복합니다.

    팬데믹 세상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자유롭데 왕래할 수 없는 부자유스런 삶을 살아갈 때 창조주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구속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이것을 인자와 언약이라고 합니다(10절).

    산들은 떠나며 작은 산들은 옮길찌라도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은 옮기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아멘

    출애굽기 20: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헤세드)를 베푸느니라.

    마태복음 22:37-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신명기 6장 5절에 보면 “너는 마음을 다하고 을 다하고 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명령이 나온다.
    ‘마음, 뜻, 힘’이라는 단어의 기본 의미를 찾아보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이유가 충분히 나타나 있다.
    마음은 히브리어로 레브, 뜻은 네페쉬, 힘은 메오드이다.
    이 단어들의 기본 뜻은 심장(heart), 목(neck), 힘(power)이다.
    심장은 몸에 피를 흐르게 하는 가장 중요한 기관이고 목은 호흡하게 하는 기관, 힘은 움직이게 만드는 원천이다.
    이들의 첫 번째 공통점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는 기관들이다.
    두 번째는 전부 생명과 관련돼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조건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분이 아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수단인 마음, 뜻, 힘, 이 단어에 이미 하나님의 사랑이 충분히 들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이전에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담겨져 있다. 

       팬데믹 세상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자유롭게 왕래할 수 없는 부자유스런 삶을 살아갈 때
      창조주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구속자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입니다.
      내 삶과 생명이 주의 것으로 믿고
      진리를 따르는 삶을 보호하시는 것을
      인자와 언약이라고 합니다.

    이사야 54:10
    산들은 떠나며 작은 산들은 옮길찌라도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은 옮기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아멘

    이사야 54:13-14a  
    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1) 교훈을 받을 것이니 네 자녀는 크게 평강할 것이며.
    너는 의로 설 것이며….

    * 교훈을 받을 것이니 : (1) 제자가 될 것이니

    사순절 열 아홉번째 날을 맞이합니다.
    오늘 하루도 인자와 언약의 은총을 힘입고 가장 존귀한 믿음의 사람으로 행복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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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9일(화) 영혼의 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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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이사야 53:10∼12
    ♦ 찬송 / 514장(누가 주를 따라)
    ♦ 묵상을 위한 주제 : 영혼의 수고(11절)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예수님의 사역은 영혼(靈魂)의 수고(愁苦)였습니다.

    영(靈)의 원리(原理)
    창조(創造)의 영(靈)이신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


     1. 동물(魂의 生命) 창세기 2: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새를 지으시고.

      2. 사람(靈의 生命) 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호랑이 가죽(호피) 170-260만원 $ 2000
                송곳니 4-8만원 $80
                 뼈 1kg 17만원 $170


      마태복음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히브리서 10: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 침륜(destroyed, 멸망)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 나 보내신 이 : 창조(創造)의 영(靈)

      요한복음 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베드로전서 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베드로전서 1:24-25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죄를 속하려면 반드시 제물을 바쳐야 합니다.

    잠언 8:36
    그러나 나를 (1)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무릇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

    * (1) 내게 범죄하는 자는

     첫째, 속건제물(贖愆祭物)(guilt offering)(10절)


    그의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속죄제(贖罪祭) : 율법을 범한 것에 대한 제사

      속건제(贖愆祭) :  물질을 배상하는  제사

    잠언 8:36
    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내게 범죄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무릇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


    둘째,  범죄자(犯罪者)를 위한 기도(12절)
      (intercession for the transgressors)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누가복음 23:34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히브리서 7:25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로마서 8:34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
      구하시는 자시니라.

    또한 그 일은 여호와께서 몹시 기뻐하시는 수고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친히 계획하신 일일 뿐 아니라 아들의 영광을 위해서도, 택하신 당신의 백성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게 비록 혹독한 대속의 희생이었지만 자신의 영혼의 수고에 대해 진심으로 만족해 하십니다.
    후회하시거나 피해의식을 갖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뻐하시며 큰 보람을 느끼십니다.
    그만큼 택하신 자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홀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온갖 희생을 다하시면서도 기뻐하며 보람을 느끼는 것과 꼭 같은 것입니다. 

    영혼을 속건제물로(10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그분이 곧 <속건제물>이 되셨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속건제물이란 곧 속죄제물을 가리킵니다.
    본문은 어린 희생양이 자기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면 <그가 씨를 보게 된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씨>란 구원받은 자녀들을 본다는 뜻이며,
    <그의 날이 길 것>이라는 것은 메시야의 나라가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메시야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요한복음 6:39-40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얼마나 감격스러운 다짐이시고 약속이십니까?
    자기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바치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우리는 이미 다 영생을 얻었고 마지막에는 모두 부활하여 영원한 메시야의 나라에서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시니(12절)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주님은 당신의 영혼을 버려 범죄자들을 구해 주셨을 뿐 아니라 범죄자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사 늘 중보의 기도를 아끼지 않으신 분이셨습니다.
    물론 주님의 중보의 기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7:25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로마서 8:34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우리가 이렇게라도 믿음으로 살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는 것은 순전히 범죄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주님의 중보 덕분입니다.
    희망을 잃지 맙시다.
    약해지거나 의기소침해 하지 맙시다.
    우리를 위해 늘 기도하고 계신 주님이 계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로마서 8: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로마서 8:37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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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8일(월) 아름다운 발(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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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이사야 52:7∼10
    ♦ 찬송 / 346장(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
    ♦ 묵상을 위한 주제 : 아름다운 발(7절)아름다운 얼굴, 아름다운 손, 아름다운 몸 이런 말을 자주 사용하기도 하고 듣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름다운 발이란 말을 평소에 자주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발이란 사진이 있습니다.
    유명한 발레리나의 발을 사진으로 담아 액자에 넣어 걸어둔 사진입니다.
    그 사진을 보면 발레리나의 발은 발가락이 모두 울퉁불퉁 굽었습니다.

    '세계적인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을 그녀의 남편(툰치 소크멘)이 사진을 찍었다고 합니다(2011년 결혼).
    사진 속의 강수진의 발은 여기저기 물집이 잡힌 데다 울퉁불퉁한 모양으로 변형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강수진의 발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이라는 호칭을 얻었습니다.
    그녀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무대 뒤에 숨겨진 혹독한 연습의 흔적에 대해서 대중과 언론은 뜨거운 관심을 표했습니다.

    어느 날 연습을 마치고 아픈 발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쉬고 있을 때 남편 툰치 소크멘이 "가만히 있으라"고 하며 찍어준 사진이라고 합니다.

    중국인 출연자 왕심린은 "강수진은 중국에서 '세계 발레 무대의 정상에 선 발레리나'라고 소개된다"
    일본인 출연자 오오기도 "일본에서도 그 사진이 유명하다. 포털사이트의 연관 검색어로 바로 뜰 정도다"

    그렇다면 선지자 이사야가 아름다운 발이라고 예언한 것은 어떤 발일까요?

    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좋은 소식(Good News) 다니엘 9:2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서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고하신 그 년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년만에 마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예레미야 25:11-12
    이 온 땅이 황폐하여 놀램이 될 것이며 이 나라들은 칠십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칠십년이 마치면 내가 바벨론 왕과 그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인하여 벌하여 영영히 황무케 하되.

    예레미야 29:10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복된 좋은 소식(Good Tidings)(Gospel) 유앙게리온

    마라톤 경주(42.195km)
    주전 490년 페르샤 다리오 왕그리스 아테네를 침략하였다.
    그리스의 용장 "마르티 아데스"가 많지 않은 군대를 이끌고 "마라톤"에서 큰 싸움을 하였다.
    드디어 그리스가 승리한 후 "페이디패스"라는 사병이 대략 42km 달려 "우리가 이겼다!" 외치고 그 자리에 쓸어져 숨졌다.
    우리가 이겼다는 외침이 곧 "유앙게리온"이었다.

    예수 십자가(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19:30
    예수께서포도주를 받으신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평화를 공포하며(Proclaim Peace)

    이사야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가장 좋은 평화는 전쟁이 없이 평화를 누리는 것.
    북한과 남한의 좌파들이 주장하는 평화는 미군 철수라고 한다.
    미군이 철수하므로 전쟁에서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전략을 감춘 평화이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구원을 공포하며(Proclaim Salvation)

    이사야 45:7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구원을 입어 영원구원을 얻으리니 영세에 부끄러움을 당하거나 욕을 받지 아니하리로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Your God Reigns)

    이사야 32:1
    보라 장차 한 왕이 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공평으로 정사할 것이며.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의 산을 넘는 발이 참으로 아름답다.
    산이란 평지가 아니기 때문에 그 산을 넘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산을 넘기 위해서는 먼저 산에 올라가야 합니다.
    산을 오르려면 평지가 아니기 때문에 숨이 차서 헐떡거려야 합니다.
    산을 오르려면 높기 때문에 올라가는 것이 고통스럽습니다.
    산을 오르려면 끝까지 참고 견뎌야 합니다.
    인내가 필요합니다.

    첫째,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1절)

    옷은 사람의 행동을 상징합니다(계 19: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가죽 옷을 입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였기 때문에 입게 된 옷이었습니다. 가죽 옷은 회개하는 사람에게 약속된 옷입니다. 회개의 옷을 입으려면 티끌을 떨어버려야 합니다(2절). 회개의 옷을 입으려면 부정한 자리에서 떠나야 합니다(10절).

    둘째, 하나님을 만난 사람(6절)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라고 합니다(사 47:4). 그 이름은 우리의 구속자가 되신 이름입니다.

    셋째, 지혜롭게 행하는 사람(13절)

    형통하다는 히브리 단어는 “지혜롭게 행하다”는 의미로도 사용합니다. 아름다운 옷을 입고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이제부터 지혜롭게 행동해야 합니다. 지혜롭게 행동하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때문에 악을 멀리합니다(잠 8:13).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마가복음 9:45)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시편 119:101)

    “아름다운 발”이란 가장 좋은 소식(消息) 즉 복음(福音)을 전(傳)하는 발을 말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해서 몸과 마음을 조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예방주사(豫防注射)를 맞으려는 것처럼 죄(罪)와 사망(死亡)의 바이러스를 극복(克服)할 수 있는 구원(救援)의 백신을 전(傳)하는 아름다운 발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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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6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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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이사야 51:7∼8
    ♦ 찬송 / 252장(기쁜 소리 들리니)
    ♦ 묵상을 위한 주제 : 구원은 세세에 미치리라(8절)

    오늘은 사순절(四旬節) 제16일째 날입니다.
    오늘 묵상(黙想)할 주제(主題)는 “구원(救援)은 세세(世世)에 미치리라(my salvation through all generations)”

    (한글개역성경) 나의 의는 영원히 있겠고 나의 구원은 세세에 미치리라
    (현대인의 성경) 나의 의는 영원히 지속되며 나의 구원은 대대에 미칠 것이다.
    (공동번역 성경) 내가 세울 정의는 영원하고 내가 베풀 구원은 대대에 미친다.
    (새번역 성경)  나의 의는 영원하며, 나의 구원은 세세에 미칠 것이다.

    '구원은 세세에 미치리라'는 말씀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좁은 의미 : 바벨론에서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넓은 의미 : 죄에서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첫째는 메시아가 구원할 것이다(1절)

    의를 좇으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는 나를 들을찌어다 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

    유다에서 왕족과 귀족과 유능한 젊은이들을 바벨론 포로로 붙잡아 바벨론 우상 숭배 정치에 이용하였으나 반드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할 것이다.

    둘째는 메시아의 구원은 영원하다(6절, 8절)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을 살피라 하늘이 연기 같이 사라지고 이 옷 같이 해어지며 거기 거한 자들이 하루살이 같이 죽으려니와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

    그들은 옷 같이 좀에게 먹힐 것이며 그들은 양털 같이 벌레에게 먹힐 것이로되 나의 의는 영원히 있겠고 나의 구원은 세세에 미치리라.

    셋째는 메시아만이 유일한 구세주이다(15절)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바다를 저어서 그 물결로 흉용케 하는 자니 내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

    종교다원화주의 영향으로 현대인들은 마치 구원이 다양한 방법으로 진행된다는 것을 좋아합니다.
    만일 오직 구원의 길은 예수 뿐이라고 주장하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고방식을 갖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앞으로 이런 경향이 점점 더 심각해 질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에덴 동산에서 추방을 당한 이후부터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점점 더 신앙생활을 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넷째, 마지막 심판 때에 구원은 완성될 것이다(5절)

    내 팔이 만민을 심판하리니.



    어제 법륜스님의 동영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느 불자가 스님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는 대략 5-6분 정도 분량의 내용이었습니다.

    첫번째 질문은 다른 강연자들은 강연료를 받는데 왜 스님은 강연료를 받지 않는가?
    두번째 질문은 호텔에서 숙박하며 지내시지 않는가?

    나의 스승은 석가모니입니다.
    내가 석가모니에게 수업료를 한 푼도 지불하지 않고 지금까지 스님으로 살아왔습니다.
    더구나 해외에서 공부한 것도 아닙니다.
    내가 공짜로 배웠으니 공짜로 강연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닐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법륜 스님의 대답은 내가 고등학교 때 출가하여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받아 지금까지 지냈는데 해외에 나가 공부를 한 것도아니라 수업료 를 지불한 것이 아니다. 나는 공짜로 받았으니 공짜로 강연하는 것이 당연하다.

    석가모니는 "분소의(糞掃衣)"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분소의시체를 쌌던 옷감 또는 낡은 천을 주워 빨아서 옷을 만드는 옷감을 말합니다.
    이런 옷감을 모아 깨끗이 세탁하여 옷을 지어 입었는데 사시사철 갈아입을 옷만 있으면 되는데 무슨 옷이 필요한가?
    스님이 입던 옷을 누가 입을 수 있겠는가?

    석가모니는 나무 아래에서 잠을 잤는데 호텔에서 잠을 잘 수 있겠는가?
    석가모니의 제자라면 석가모니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석가모니는 음식을 구걸하여 먹고 지냈는데 호텔에서 잠만 자는데 구태여 호텔에서 숙식을 해야 하겠는가?

    과연 나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삶을 살고 있는가?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구원 받은 삶을 살아가라!

    지난 주 미 연방하원에서 평등법안(HR5)이 통과 되었다.
    상원으로 올라갔다.
    바이든 행정부는 이 법안을 취임 초기 100일 이내에 통과시키겠다고 공언하였다.
    이 법안의 내용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성경적 진리와 종교의 자유에 관한 것이다.
    생물학적인 남자와 여자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도록 한다.

    구원을 현대의 감각으로 재해석하는 잘못된 경향이 너무 강하다.
    예수님처럼 간소하게 소탈하게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이 요구되는 세상입니다.

    알렉산드르 이사예비치 솔제니친(Алекса́ндр Иса́евич Солжени́цын, Aleksandr Solzhenitsyn)
    1918. 12. 11 -  2008. 8. 3
    러시아의 소설가, 극작가, 역사가
    소련 육군 대위 시절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키도 한 그는 1945년 6월, 소련 육군 소령 진급하여 1945년 8월, 2차 대전 종전 후에도 소련군 포병 장교로 근무하던 중 스탈린의 분별력을 의심하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친구에게 보냈다가 1945년 11월에 투옥되어 10년 동안 수용소 생활을 했다.
    1970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1917년 러시아에서 공산(共産) 혁명(革命)이 일어난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 이라고 합니다.
    러시아에 많은 교회(敎會)가 있었는데 왜 그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렸을까요?
    그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생활(生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 주지 못하므로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이러한 역사(歷史)는 결코 러시아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 사회(社會)에 어떤 영향(影響)을 주고  있나요?
    믿는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물질주의(物質主義)의 노예처럼 아침부터 저녁까지 돈, 돈하면 누가 봐도 돈이 하나님으로 보이지 진짜 하나님의 존재(存在)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가 손해(損害)를 보더라도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努力)하면 주위 사람들이 겉으로는 우리를 괴롭힐지 몰라도 속으로는 “저 사람을 보니 하나님이 정말 있는 것 같다!” 하며 하나님을 존재를 두려워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인정(認定)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하나님의 구별(區別)된 성도(聖徒)들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주의 백성이라는 의식(意識)을 갖고 거룩한 사람으로 살아가므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유명한 미국의 전도자 무디는 "전도함으로써 이 악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하나님은 나에게 전세계를 개혁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세상은 도저히 구할 수 없는 난파선과 같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구명대로서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그 배로 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독교인은 어디에서나 사회악을 제거하기 위해 애써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과제는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을 구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百姓)들은 언제나 이방 종교 문화(異邦 宗敎 文化)에 둘러싸인 환경(環境)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恒常)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시대(時代)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도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우려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종교 문화에 관심(觀心)을 갖는 것처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주의 백성들도 세속 문화에 점점 더 깊이 빠져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나를 듣고 사람의 훼방을 두려워 말라! 사람의 비방에 놀라지 말라!”고 합니다(7절).

    왜냐하면 세속의 문화는 좀에게 먹히듯 벌레에게 먹히듯이 사라져버릴 것이지만 하나님의 의(義)와 구원(救援)은 영원(永遠)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끊임없는 구원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내가 정말 믿음의 사람이라면 내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안에 있는지 나를 항상 살펴야 합니다.
    나를 살피려면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지 나의 삶을 통해 증명(證明)해야 합니다.
    내가 매주일 예배(禮拜)에 참석(參席)한다고 주님의 통치(統治) 안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어느 곳에 있든지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흔적(痕迹)들이 드러나야 합니다.
     

    러시아의 작가 “솔제니친”은 “러시아에서 공산(共産) 혁명(革命)이 일어난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 이라고 합니다. 러시아에 많은 교회(敎會)가 있었는데 왜 그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렸을까요?
    그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생활(生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 주지 못하므로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이러한 역사(歷史)는 결코 러시아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 사회(社會)에 어떤 영향(影響)을 주고  있나요?
    믿는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물질주의(物質主義)의 노예처럼 아침부터 저녁까지 돈, 돈하면 누가 봐도 돈이 하나님으로 보이지 진짜 하나님의 존재(存在)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가 손해(損害)를 보더라도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努力)하면 주위 사람들이 겉으로는 우리를 괴롭힐지 몰라도 속으로는 “저 사람을 보니 하나님이 정말 있는 것 같다!” 하며 하나님을 존재를 두려워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인정(認定)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하나님의 구별(區別)된 성도(聖徒)들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주의 백성이라는 의식(意識)을 갖고 거룩한 사람으로 살아가므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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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5일(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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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이사야 50:4∼9
    ♦ 찬송 / 200장(주의 피로 이룬 샘물)
    ♦ 묵상을 위한 주제 : 학자의 혀(4절)

    오늘은 사순절(四旬節) 제15번째 날입니다.

    오늘 묵상한 주제는 "학자의 혀"
    '학자의 혀'
    를 다른 말로 "제자의 혀"라고 합니다.
    제자는 학식이 많은 박사, 교수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제자는 배우는 사람"을 말합니다.
    따라서 학자의 혀(NIV,  an instructed tongue. KJV, the tongue of the learned. NASB, the tongue of disciples)는 잘 배우고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학자(히브리어, 리무드) / 배운 자(Learned), 배우는 자(Discipled), 익숙한 자. 숙달된 자(Accustomed)


    제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흔히 들을 수 있었던 이야기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첫째 말을 잘 한다. 둘째 연애를 잘 한다. 셋째 거짓말을 잘 한다.
    왜 그와 같은 말을 하였는지 이해가 됩니까?
    말을 잘 한다.
    연애를 잘 한다.
    거짓말을 잘 한다.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쳤지만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받는 것을 더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4:13 / 교훈을 받다(리무드)

    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니 네 자녀는 크게 평강할 것이며.

    예레미야 2:24
    너는 광야익숙한 들 암나귀가 그 성욕이 동하므로 헐떡거림 같았도다 그 성욕의 때에 누가 그것을 막으리요 그것을 찾는 자들이 수고치 아니하고 그것의 에 만나리라.

    예레미야 13:23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찐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 의해서 망하고 포로가 되어 70년 동안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이때 유다 백성들은 왜 우리를 버리셨는가? 하며 불평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을 결코 버린 것이 아니라 너희들의 죄악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장차 고난의 메시아를 너희들에게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합니다.

    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첫째, 학자의 혀를 가지신 메시아(4절)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지를 아는 학자들의 혀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위로의 말씀을 주십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들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지쳐 헤매는 우리에게 주시는 능력의 말씀이며,
    그 음성을 듣고 위로와 안식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둘째, 학자의 귀를 가지신 메시아(4절)

    잘 배우려면 잘 들어야 합니다.
    메시아는 말씀을 주시기 위해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으셨습니다.
    먼저 배우는 자가 되지 않고는 결코 가르치는 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 맑은 정신으로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은혜를 날마다 공급받기 위해서는 아침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시편 5:3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시편 88:13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세째, 인내로 고난을 감당하신 메시아(5-6절)

    매시아는 인간으로서 겪을 모든 아픔과 상처와 고통을 몸으로 모두 겪어 내셨습니다.
    그러나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처럼 끝까지 순종하셨고, 구원의 완성을 이루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고난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이사야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히브리서 5: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셨다.”

    넷째, 담대한 용기를 가지신 메시아(7-9절)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선지자 이사야나 예수님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를 의롭다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신다!
    거짓 비방과 고소를 당하면서도, 오직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게 여겨 주심을 믿고 나아갈 때에 담대해 질 수 있습니다.
    원수들의 공격뿐만 아니라 나의 내면에서도 자책감과 한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네가 무슨 신자인가? 형편없는 존재일 뿐이야”라고 안에서부터 스스로 무너질 때에도,
    십자가의 은혜를 힘입어 담대히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흔들림 없이 담대하게 주님 보좌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은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반대자들, 원수들에게 선포합니다.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 지어다.

    로마서 8: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믿고 의지하며 담대하게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결론)
    나는 신자인가?
    아니면 제자인가?

    신자는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신자는 축복을 받기 위해서 기도합니다.
    이러한 기도를 값싼 은혜를 구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제자는 더 많은 문제를 찾으려고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따라가려면 자기 십자가를 붙잡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는 더 많은 것을 주기 위하여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주는 것이 복 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은혜에는 값비싼 은혜와 값싼 은혜가 있습니다.
    비싼 은혜를 찾는 성도는 제자가 될 것입니다.
    반면에 싼은혜를 찾는 성도는 신자가 될 것입니다.

    신자는 자기 구원에 만족합니다.
    제자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기뻐합니다.

    부라질에 후안 까를로스 목사님의 저서에 "당신은 제자 입니까?" 라는 이야기를 생각합니다.
    처음 교회에 부임했을 때  교인이 184명이었다고 합니다.
    몇 년 후에 교인이 600명이 되었을 때 정말 이 모든 교인들이 예수님의 제자일까? 라는 생각을 할 때 아니라는 마음이 강해지면서 교인을 제자로 세워야 한다는 사역으로 전환하였다고 합니다.
    마치 코카콜라를 파는 사업가처럼 예수를 팔고 있지는 않았는지?
    마치 리더스 다이제스트 잡지를 파는 것처럼 예수를 팔고 있지는 않았는지?
    점점 더 비대해지면 살이 찌는 것을 부흥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말랐어도 제자를 세우는 것이 바람직한 사역이라고 합니다.

    제자는 비싼 값을 치르며 산다.
    신자는 빈 어깨로 천국에 가려 하고, 제자는 남의 십자가까지 지고 천국으로 향한다.
    신자는 혼자 기뻐하고 혼자 만족한다.
    그러나 제자는 눈 물과 기쁨을 이웃과 함께 나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존경하라' '나를 예배하 라' '나에게 영광을 돌리라'라는 말 대신 '나를 따르라'라고 하셨다.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의 행동을 따라 실천하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나도 희생하고 예수 님처럼 나도 사랑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으니 나도 나의 십자가를 지 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믿음이요, 예수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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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4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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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이사야 49:5∼7
    ♦ 찬송 / 270장(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 묵상을 위한 주제 : 이방의 빛(6절)

    오늘은 사순절(四旬節) 제14번째 날입니다.


    이사야 49장은 두 단락으로 구분합니다.
    첫번째 단락은 49:1-7, 이스라엘은 이방의 빛
    두번째 단락은 49:8-26, 예루살렘의 회복

    묵상할 주제는 "이방(異邦)의 빛(a light for the Gentiles)"
    "이방 민족의 빛"
    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방의 빛이란 용어가 이사야서에 2회 사용되었습니다(이사야 42:6, 49:6).

    먼저 이사야 42:6 말씀을 읽겠습니다.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신명기 7:6-7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마태복음 5:23-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유대인들에게 이방이란 누구일까요?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한 민족들입니다.
    물론 선민(先民) 사상(思想)과 의식을 갖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히브리 사람만 선택했다는 것은 이미 성경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출애굽 당시 고센 땅에 거주했던 히브리 사람들만 나온 것이 아니라 구스 사람들도 함께 나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광야 생활을 할 때 모세가 구스 여자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민수기 12:1).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가 구스 여자를 아내로 맞이한 것을 비방했습니다.
    이와 같은 의식과 생각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이방이란 먼저 내 안에 이미 자리를 잡은 잘못된 생각을 수정해야 합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미리암, 아론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이 아침에 이런 생각을 버릴 수 있도록 내 안에 자리 잡은 잘못된 것을 깨닫는 은혜가 임하기를 기대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가 이 세상이 종으로 오셨다는 것을 반복하여 네 차례씩 강조했습니다.
    이사야 42:42:1∼4, 49:1∼6, 50:4∼9, 52:13∼53:12

    메시아의 종의 모습을 살펴봅니다.

    1. 이방에게 공의(公義)를 베풀 것이다(42:1∼4).
    2. 이스라엘을 회복(回復)시킬 사명(使命)과 이방(異邦)에게 빛을 비추어 구원(救援)을 베풀 사명(使命)을 위해 부름을 받았다(49:1∼6).
    3. 원수(怨讐)들이 공격(攻擊)할 때에 지혜(知慧)를 주실 것이다(50:4∼9).
    4. 사람들의 죄(罪) 때문에 모욕(侮辱)과 멸시(蔑視)와 고통(苦痛)을 받는 고난(苦難)의 종이 될 것이다(52:13∼53:12).

    메시아는 철저하게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이방과 민족과 원수들과 사람들의 죄로 인하여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의 빛으로 살아가려면

    첫째는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둘째는 자기 십자가를 짊어져야 합니다.

    첫째는 날카로운 입의 칼(2절)

    날카로운 칼이란 큰 영향력이 있는 말씀을 말합니다(히 4:12).
    능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눈으로 볼 수 없는 혼(魂)과 영(靈)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判斷)합니다.

    둘째는 손 그늘에 숨겨주심(2절)

    손과 팔은 능력구원을 의미합니다.

    시편 20:6b, 그 오른 손에 구원하는 힘으로 그 거룩한 하늘에서 저에게 응락하시도다.

    성경에서는 ‘여호와의 팔이 인도하셨다’ 또는 ‘하나님의 선하신 손이 도우셨다’고 말씀합니다.
    주님의 팔(能力)은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강(强)합니다.
    그래서 그 손은 우리들을 온전하게 지켜주실 수 있습니다.

    셋째는 마광한 살(2절)

    마광(磨光)한 살이란 갈고 닦은 화살을 말합니다.
    이것은 “적절한 인도하심”을 뜻합니다.
    양궁 경기에서 선수들이 활시위를 당기는 곳과(시위대) 과녁의 거리가 70m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거리가 아무리 멀어도 구원(救援)의 화살은 목표(目標)를 향(向)해 정확하게 날아갑니다.
    왜냐하면 그 화살을 쏘신 분이 우리의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방의 빛으로 살아갈 수 있는 말씀(3절)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라!
    나의 업적이 아닙니다.
    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이야기만 합시다.
    오늘 사순절 14일 째 날은 이와 같은 훈련에 참여하는 기회를 갖는 날입니다.
    오늘이란 훈련의 시간은 다시는 없습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을 즐거워 하라

    1. 하나님만을 예배하라
    2. 하나님만을 자랑하라

    이사야 49:26
    내가 너를 학대하는 자로 자기의 고기를 먹게 하며 새 술에 취함 같이 자기의 에 취하게 하리니 모든 육체가 나 여호와는 네 구원자요 네 구속자요 야곱의 전능자인줄 알리라.
    (Then all mankind will know that I, the LORD, am your Savior, your Redeemer, the Mighty One of Jacob.)


    심리적 이기주의(心理的 利己主義, psychological egoism)
    인간의 모든 행위는 자신의 이익에 따라 행해지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론이다.
    심리적 이기주의에 따르면 겉보기에는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위일지라도 그 동기를 철저히 분석한다면 사실상 이기적인 행동임이 드러난다.

    심리적 이기주의를 신앙적으로 고상하게 표현하면 "영적 이기주의" 라고 합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많은 것을 베풀고 있는 것처럼 보여지지만 실상은 그 내부는 철저하게 이기적인 것들로 채워지고 있다.

    성경의 가르침은 철저하게 "이타주의(利他主義)"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이기주의(利己主義)"로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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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3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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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이사야 48:4∼7
    ♦ 찬송 / 279장(주 하나님의 사랑은)
    ♦ 묵상을 위한 주제 : 은비(隱秘)한 일(6절)

    오늘은 사순절(四旬節) 제13일째 날입니다.
    묵상의 주제는 "은비(隱秘)한 일"(hidden things) "알려지지 않은 일" 또는 "은밀(隱密)한 일"입니다.
    "은비한 일" "알려지지 않은 일" "은밀한 일"을 이사야 43장 19절에서 "새 일" 이라고 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48:1-11, 새 일을 약속하신 하나님
    48:12-29, 백성을 인도하시는 처음이요 마지막이신 하나님

    (도입 이야기)
    미국의 어느 선교 자원하여 한국에서 젊은이들을 위한 복음 전하는 일에 헌신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3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열매가 없는 형편이 되었다.
    한국에서 사역하는 것을 포기하고 미국으로 돌아가려고 작정하고 기도하면서 이런 불평을 하였다.
    하나님, 나는 어느 선교단체, 교회의 후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내 모든 소유를 팔아 정리하고 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이 이제까지 복음을 전한다고 했지만 이제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미국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때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지금까지는 네가 했지만 이제부터는 내가 할 것이다!

    여러분 누가 새 일을 행하십니까?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행하실 것입니다.


    본문의 1-4절을 현대인의 성경으로 소개합니다.

    1. 이스라엘 백성들아, 유다의 후손들아, 들어라. 너희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지만 진리와 의로 하지 않는다.
    2. 그런데도 너희는 거룩한 도시의 시민이며 전능하신 여호와란 이름을 가진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다.
    3.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오래 전에 장래 일을 예언하였고 갑자기 그 일이 이루어지게 하였다.
    4. 나는 네가 얼마나 고집이 센지 알고 있다. 네 목의 힘줄은 무쇠와 같고 네 이마는 과 같다.

    쇠고집과 같은 이스라엘을 생각합니다.

    고집불통, 무쇠 같은 완고함과 믿음 없음의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청동 같은 얼굴을 하며 딱딱하게 굳어 쩍쩍 갈라진 메마른 심령의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런데 이 쇠고집의 백성을 포기하지 않는 분이 계십니다.
    그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하나님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고집입니다.
    못난 이스라엘 백성을, 아니 이 인생들을 ‘사랑하다 사랑하다’ 죽기까지 하셨으니, 눈물겨운 하나님의 집념이요 일념입니다. 이스라엘(인생)의 고집과 하나님의 고집 중, 어느 고집이 더 셉니까? 하나님에게는 항복이 없습니다. 포기가 없습니다. 이 인생을 사랑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죽음으로 그 결정을 증명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 많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확실히 보여주셨습니다. (롬5:8, 공동번역)

    인생을 향한 하나님 사랑의 결정은 번복이 없습니다.
    실수가 없습니다. '끝까지' 입니다. 결국은 인생이 하나님께 항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끝내는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환도 뼈가 부러지기 전에 항복하는 게 유익합니다(창32:25). "하나님, 하나님만이 처음이요 또 마지막입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저는 항복합니다."

    (20)너희는 바빌론에서 나오너라. 바빌로니아 사람들에게서 도망하여라. 그리고 '주님께서 그의 종 야곱을 속량하셨다' 하고, 즐겁게 소리를 높여서 알려라. 이 소식이 땅 끝까지 미치도록 들려주어라.
    (21)주님께서 그들을 사막으로 인도하셨으나, 그들이 전혀 목마르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바위에서 물을 내셔서 그들로 마시게 하셨고, 바위를 쪼개셔서 물이 솟아나게 하셨다.(새번역)

    “바벨론에서 나오라” 하나님이 명령하십니다. 그 소망의 외침을 미약하고 가엾은 포로 된 이스라엘에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독립! 만세! 해방! 나오라!"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희망찬 명령을 좇아가면 됩니다. 그 분의 소망의 외침에 순종하여 걸어 나오면 됩니다. 이전 출애굽시절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살 수 있었습니까? 그 사막 광야에서 말입니다. 자신들의 힘과 능력으로는 하루도 살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졸졸 뒤따르며 살았습니다. 그래야만 살아낼 수 있었습니다. 바위에서 물을 내셔서 이스라엘로 마시게 하셨던 하나님, 바위를 쪼개서 물이 솟아나게 하셨던 하나님,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셨던,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을 창조의 능력으로 먹이시고 입히셨던 그 하나님의 부르심에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응답할 차례입니다. “네, 제가 여기 있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나의 구원이십니다.” 화답하며 노래하며 뒤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그럼에도 미련하고 고집 센 인생들은 그 주님의 소망의 외침을 외면합니다. 십자가의 피 맺힌 주님의 구원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꼼짝 하지 않으려 합니다. 여전히 죄 가운데 포로로 묶여 고집과 억지를 부리려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나, 실은 자기를 고집할 뿐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무지막지한 죄의 본성입니다.

    (2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이제는 결정해야 합니다.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습니다. 결코 없습니다. 평강은 주 안에만 있습니다. 나 자신을 고집하는 만큼 평강을 잃게 됩니다. 주님으로부터 멀어진 만큼 평강을 잃고 맙니다. 주님의 구원의 부르심 앞에, 그 소망의 초청 앞에, 그 포기치 않으시는 이끄심과 인도하심, 주님의 그 '견인하심'에 순종하는 것, 매 순간 그렇게 순응하며 뒤따라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끝까지 씨름해야 하는 신앙 여정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 길을 걸어가기까지 주님의 고집과 열심은 결코 쉬지 않습니다.

    교우님, 그 주님만을 신뢰하며 경외하십시다. 오늘 우리가 두려워 할 것은 ‘바벨론’도 아니고, ‘내 안에 평강 없음’도 아닙니다. 내 고집으로 하나님 잃은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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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2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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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이사야 47:8∼11
    ♦ 찬송 / 40장(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 묵상을 위한 주제 : 재앙(災殃)이 네게 임하리라(11절)
    ♦ 성구 : 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본을 알지 못할 것이며 손해가 네게 이르리라 그러나 이를 물리칠 능이 없을 것이며 파멸이 홀연히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헤아리지 못할 것이니라.

    이사야 47장바벨론의 멸망에 대한 예언입니다.
    특히 바벨론을 마치 사람인 것처럼 의인화(擬人化) 하여 "처녀 딸 바벨론이여"(1절), "딸 갈대아여"(5절) 이렇게 부릅니다.


    11절, 재앙(災殃)이란 천변지이(天變地異)로 인(因)한 온갖 불행(不幸)한 일
    "재앙 재(災)" "재앙 앙(殃)"

    5절, 열국(列國)의 주모(主母) / queen of kingdoms. 세계의 여왕

    7절, 내가 영영(永永)히 주모(主母)가 되리라 /
    I will continue forever-- the eternal queen! 나는 항상 여왕이라!

    9절, 12절, 진언(嗔言)이란 "성내서 꾸짖는 말"을 의미합니다. 주문(呪文) potent spells(강력한 주문), magic spells(마법 주문)
    "성낼 진(嗔)" :말씀 언(言)"



    1절, “처녀 딸”과 같은 바벨론이지만 이제부터는 그 아름다움과 보좌(寶座)가 없어졌으니 티끌과 땅에 앉으라고 합니다.
    이것을 재앙(災殃)이라고 합니다.

    “재앙이 네게 임하리라(Disaster will come upon you)”
    재앙(災殃)이란 바벨론이 망(亡)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바벨론이 멸망할까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교만의 극치를 엿볼 수 있는 것은 금신상에서 찾습니다.

    다니엘 3:1
    느부갓네살 왕이 으로 신상을 만들었으니 고는 육십 규빗이요 광은 여섯 규빗이라 그것을 바벨론 도의 두라 평지에 세웠더라.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신상은 곧 자신이 신이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금 신상의 높이는 60규빗, 폭은 6규빗입니다.
    6이란 숫자는 미완성의 수를 말합니다.
    666은 사탄의 수 즉 미완성을 말합니다.

    7이란 숫자는 완성의 수를 말합니다.
    777은 하나님의 수 즉 완성을 말합니다.

    이사야 46장 1절에서 "벨은 엎드러졌고"
    벨의 뜻은 주(主), 주인(主人)입니다. 은 새
    느부갓네살 왕이 주가 된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려고 금신상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금신상에게 모두 절을 하라고 명령합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유혹을 받았을 때에도 선악을 알게하는 열매를 따서 먹으면 너희들이 하나님과 같아질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려는 것은 끊임없는 욕망입니다.

    "느보는 구부러졌도다"
    느보는 계시의 신, 학문의 신입니다.
    사람의 이성으로 느부갓네살이 정말 벨이구나 라고 가르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요한계시록 13:16-18을 읽어야 합니다.

    16.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를 받게 하고
    17. 누구든지 이 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18.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 륙이니라

    바벨론이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드러난 죄(罪)는 한 마디로 교만(驕慢)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교만은 내가 갖고 있는 권력과 능력과 힘과 재물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욕망에 의해서 금으로 만든 신상을 세워야 합니다.
    그 높이는 60규빗으로 높여야 합니다.

    제국(帝國) 바벨론이 멸망(滅亡)하게 될 원인(原因)을 선지자(先知者) 이사야는 이렇게 설명(說明)합니다.

    첫째, 긍휼(矜恤)히 여기지 않은 죄(6절)

    비록 하나님의 백성을 바벨론의 손에 붙였지만 그 백성들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았으며 심지어 멍에를 심하게 짊어지게 하였다고 합니다. 

    둘째, 교만(驕慢)한 죄(7절)

    바벨론은 영영(永永)히 주모(主母)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주모(主母)”는 “여왕(女王, the eternal queen)”을 의미합니다.

    셋째, 사치(奢侈)한 죄(8절)

    “사치(아딘, עדין)”란 “주색(酒色)” “향락(享樂)”이란 뜻으로 곧 “쾌락(快樂)”과 음탕(淫蕩)“을 말합니다(pleasures & wanton). 바벨론은 유흥과 방탕과 쾌락이 극에 달했습니다(다니엘 5:1∼4).

    역사가(歷史家) 헤로도투스(Herodotus)는 바벨론에서는 성적(性的)으로 타락(墮落)하였으며 환락가(歡樂街)도 많았고, 심지어 고레스 군대가 바벨론을 포위(包圍)했을 때에도 성(城) 안에서는 불을 훤히 밝힌 술과 향락(享樂)에 취해 춤을 추고 있었다고 합니다.  

    바벨론의 이러한 죄악(罪惡)은 우상(偶像) 숭배(崇拜)에 의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파스칼(Pascal)모든 사람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하나님의 공간이 있다.

    파스칼은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의 공간, 즉 공백이 있다.
    이것은 어떠한 피조물로도 채울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만이 채워주실 수 있는 공백이다."

    인간(人間)의 심령(心靈)에는 항상(恒常) 채워지지 못한 공간(空間)이 있는데 그 공간(空間)을 하나님 이외(以外)의 것이 자리를 잡으면 위와 같은 현상(現象)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더 강력(强力)한 전염병(傳染病)이 세상(世上)을 흔들기 전에 우리들을 붙잡고 있는 죄악(罪惡)들을 버리고 아름다운 땅을 후손(後孫)들에게 물려 줄 수 있는 성경적(聖經的) 신앙(信仰)으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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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1일(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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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 / 이사야 46:8-13
    주제 /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9절)
    찬송 / 369장(네 맘과 정성을 다하여서)

    오늘은 사순절(四旬節) 제 11일 째 날입니다.
    또한 3. 1독립 만세 운동 사건 102주년 기념일(紀念日)이기도 합니다.

    오늘 묵상(默想)할 주제(主題)는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記憶)하라" 입니다.
     
    이사야 40장부터 48장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예언된 말씀으로 남 유다 왕국을 무너트린 바벨론 제국이 멸망할 것이라는 내용으로 장차 100-160년 후에 일어날 사건을 말씀합니다.

    1절, 벨(벨 메로다크) : 바벨론의 주신(主神), "주(主)" 라는 뜻
    1절, 느보 : 주신(主神), 특히 학문의 신, 계시의 신으로 알려졌다.

    바벨론의 멸망을 예언하는 말씀 중에서 이사야 43:18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그 이유는 19절에서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

    서로 다른 주장을 말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언이란 한자를 두 가지로 사용합니다.

    첫째는 예언(豫言)

    장차 일어날 일을 말하는 것.
    이때 "예(豫)"를 "미리 예(豫)"라고 하여 "예상(豫想)" 이라고 합니다.
    어떤 일을 직접(直接) 대하기 전(前)에 미리 상상(想像)하는 것 또는 그 상상(想像)

    둘째는 예언(預言)

    깨우쳐야 할 가르침의 말씀을 위탁(委託)한 것.
    이때 "예(預)" 를 "맡길 예(預)"라고 하여 "예금(預金)" 이라고 합니다.
    금전(金錢)을 금융기관(金融機關)에 맡김, 또는 그 금전(金錢)

    이사야 43장 18절에서는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Forget the former things; do not dwell on the past.)

    그런데 본문에서는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Remember the former things, those of long ago.)고 말씀합니다.
    어떤 말씀을 따라야 할까요?

    우선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려는 것을 바르게 께달아야 합니다.

    (예화) 언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때 나타나는 현상
    어느 집에서 어머니가 아들에게 떡을 담은 접시를 주며 옆집에 가서 이렇게 말하라고 일러줍니다.
    "떡을 조금 밖에 하지 않아 구경만 하시래요!" 하고 떡 접시를 들고갔던 아들이 그대로 떡을 담은 접시를 다시 가져왔습니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말한 것은 떡이 적어서 죄송합니다 라는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과거의 일을 잊지 말라고 말씀하실 때는 그 옛날 애급에서 너희들을 인도하셨던 하나님의 구원을 잊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반면에 과거를 기억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너희들이 여호와 하나님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던 과거는 잊어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역사의 주인으로 살아가려면 잘못된 역사는 기억하여 바로 잡아야 합니다.
    역사의 주인으로 살아가려면 올바른 역사는 기억해야 합니다.

    제1차 세계 대전(World War I, WW1)
    1914년 7월 28일부터 1918년 11월 11일까지 일어난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세계대전이다.
    제2차세계대전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단순히 세계 대전(World War) 또는 대전(Great War)이라고 불렸다.
    미국에서는 처음에 유럽 전쟁(European War)라고 불렀다.

    1차 대전 후에 미국의 28대 대통령 윌슨은 "민족자결주의"를 강조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1차 대전의 패전국가들에게 식민지로 남고 싶다면 식민지로 남아 있고 행방되고 싶으면 해방하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자극을 받은 한국에서 1919년 3월 1일에 자유독립만세 운동을 일으켰다.
    3. 1운동은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후(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  9년 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런데 삼일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나기 전 1917년 2월(10월)소련에서 볼쉐비키 공산혁명이 일어나서 중국이 공산화가 되었다.

    이때 상해 임시정부에 설립된 내각과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이승만박사의 활동으로 삼일독립운동이 일어났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때 이미 공산화가 된 중국에서 상해로 한국의 지도자들을 모아 공산화 작업으로 시도하여 거의 모든 지도자들이 공산화 되었고 "김구선생"은 공산화가 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미국에서 이승만박사로부터 자금을 지원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45년 8월 6일에 일본 히로시마에 "리틀 보이(Little Boy)" 라는 원자탄이 투하되었습니다.
    히로시마는 당시 일본군 제2사령부이면서 통신 센터이자 병참 기지였으므로, 일본의 군사상으로 중요한 근거지였다.

    이어서 8월 9일에는 나가사키에 "팻 맨(Fat Man)"이란 원자탄이 투하되었습니다.
    그 결과 일본 천황은 1945년 8월 15일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역사학자들과 정치학자들은 당시 역사적인 상활에서 두 가지 기적이 일어났다고 주장합니다.
    첫째는 중국이 공산화가 된 것
    둘째는 한국이 해방을 맞이한 것

    그런데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취약한 상황에 놓여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한국이 아무리 세계에서 5위 안에 들어갈 수 있는 부강한 나라가 될지라도 지정학적으로 부강한 나라들 중에서 가장 낮은 단계에 머물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한국이 강대국이 될지라도 그 순서를 살펴보면 미국, 영국, 독일 , 중국, 일본, 한국이라고 한다면 중국과 일본의 사이에 놓여 있기 때문에 부강한 나라들 중에서는 가장 꼴찌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미국이 한국을 지지핮 않는다면 한국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시달릴 수밖에 없는 나라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남 유다 왕국의 백성들에게 너희는 옛 일을 기억하라고 선포합니다.
    옛 일이란 역사적으로 애급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은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한 것과 1950년 .6. 25 한국전쟁에서 공산화 되지 않고 자유민주국가를 세운 것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만일 이러한 과거의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8절, 너희 패역한 자들아 이 일을 기억하고 장부가 되라 이 일을 다시 생각하라.
    (현대인의 성경) 너희 죄인들아, 이 일을 기억하고 마음에 새겨라.

    12절, 마음이 완악하여 의에서 멀리 떠난 너희여 나를 들으라.
    (현대인의 성경) 의에서 멀리 떠난 악하고 고집스런 사람들아, 내 말을 들어라!

    13절, 내가 나의 의를 가깝게 할것인즉 상거가 멀지 아니하니 나의 구원이 지체치 아니할 것이라 내가 나의 영광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시온에 베풀리라.

    한국 전쟁 휴전 협정 / 1953년 7월 27일

    * 참조 자료 /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広島・長崎原子爆彈投下, Atomic bombings of Hiroshima and Nagasaki)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1945년 미국은 일본에 두 개의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8월 6일에 히로시마에 한 개의 원자폭탄을 떨어뜨렸다.
    8월 9일에 나가사키에 또 한 개의 원자폭탄을 떨어뜨렸다.
    원자폭탄 두 개를 떨어트리기 전까지 6개월간 미국은 일본인들이 거주하는 도시 67개를 공습했다.
    영국과 중화민국과 함께 미국은 포츠담 선언에서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강요 했으나 일본은 항복하지 않았다.
    1945년 8월 6일 월요일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이 명령하여 원자폭탄 "리틀 보이(Little boy)"가 히로시마에
    3일 후 8월 9일에 "팻 맨(Fat man)"이 나가사키에 투하됐다.

    원자폭탄 투하가 결정된 히로시마는 당시 일본군 제2사령부이면서 통신 센터이자 병참 기지였으므로, 일본의 군사상으로 중요한 근거지였다.

    원자폭탄을 떨어뜨리고 초기 2개월에서 4개월 동안, 히로시마에서는 90,000명에서 166,000명, 나가사키에서는 60,000명에서 80,000명 정도가 사망했으며, 그중 각 도시 사망자 절반은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당일에 집계되었다.

    히로시마 의료기관은 원폭투하 탓으로 60%가 섬광화상으로, 30%가 건물 잔해물로, 10%가 기타 원인으로 죽었다고 한 이 보고가 있은 후 다음 달에 더 많이 죽었는데 이는 원폭투하 탓에 후폭풍과 피폭과 기타 질병 합병증과 부상 탓에 발생했다.

    미국에선 이 사건이 최단기에 가장 많은 시민을 죽였다고 평가하였고 15%에서 20%가 피폭으로 20%에서 30%가 섬광화상으로, 50%에서 60%가 질병과 부상으로 죽었다고 보고했다. 사망자들 중 대부분은 일본제국 시민들이었다.

    나가사키 원폭투하 6일 후 8월 15일 일본은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으며, 9월 2일 항복 문서에 사인하면서 공식적으로 태평양 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알렸다.

    한편 독일은 이미 5월 7일 유럽에서 항복을 선언했다.
    이 원폭투하로 인해 전후 일본은 "핵무기를 만들지 않으며, 갖지 않으며, 들여오지 않겠다"는 비핵 3원칙을 수용했다. 이 항복으로 인해 아시아의 일본 식민지들은 자동적으로 독립하게 된다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가장 최악의 지리적 조건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세계 5대 강대국이 될지라도 미국, 중국, 일본, 영국에 이어 5위가 된다하여도 세계 강국들 중에서는 하위권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지정학적으로 미국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결국 중국에게 귀속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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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27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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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 / 이사야 45:4-7
    주제 /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7절)
    찬송 / 85장(구주를 생각만해도)

    오늘은 사순절 제10일 입니다.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는 물론 "여호와 하나님"을 말합니다.

    역사(history)를 "그의(his)" "이야기(story)"라고 정의합니다.
    물론 그의 이야기의 주인공은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 즉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이와 같은 역사관에 의해서 역사를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세속사(世俗史)

    세속사의 주인공은 당시 그 시대를 통치하는 왕을 말합니다.

    둘째는 구속사(救贖史)

    구속사의 주인공은 시대를 대표할 통치자가 세워졌지만 그 통치자를 세우기도 하고 폐하기도 하는 것은 역시 여호와 하나님이심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역사를 하나님이 직접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여 통치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 45장은 고레스 왕을 내세워 역사를 주관하심을 보여주십니다.
    고레스 왕은 여호와 하나님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레스 왕에게 기름을 부었다고 합니다.

    이사야 45장
    은 바사왕 고레스(Cyrus, 태양)에 대한 예언의 장이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고레스(B.C. 546-529)는 페르시아 제국(아케메니아 왕조)의 시조이며 바벨론을 무너뜨리고 고대 세계를 새롭게 통일한 강력한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레스에게는 ‘대왕(大王)’이라는 칭호가 붙여지곤 합니다.

    고레스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고 하였다(이사야 44:28, 45:1).
    구약 시대에는 "기름 부음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 제사장, 선지자"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방 나라의 왕 고레스가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고레스가 기름 부음을 받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이사야 44:28,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 하는 자니라.

    이사야 45:4,
    내가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찌라도 나는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

    고레스에게 나의 목자라는 칭호(稱號)를 주셨다고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기쁨을 성취할 목자

    당시 왕을 목자라고 표현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고레스나의 목자라고 표현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실현 할 목자"라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고레스 왕의 아버지는 페르시아 왕 캄비세스,
    고레스 왕의 어머니는 메디아 왕인 아스티아게스의 딸 만다네 입니다. 

    고레스 바벨론메데 리디아를 점령하고 페르시아를 세운 초대 왕이었다.

    고레스가 실현해야 할 하나님의 뜻은 

    1. 예루살렘은 중건 되리라
    2. 성전은 기초가 세워지리라.

    70인 역에서는 고레스를 가리켜 "그리스도(기름부음을 받은 자)" 라고 설명합니다.

    이사야 45:1,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열왕의 허리를 풀며 성 문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고레스에게 이르기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하나님께서 고레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45:3).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 중에서 믿음이 좋고 덕망이 있는 지도자를 택하여 부르신 것이 아니라, 이방 나라의 왕인 고레스를 지명하여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고레스보다 100여 년 전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이 어떻게 하여 이사야서에 기록이 되어 있을까요?
    그리고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고레스를 부르셨을까요?

    바벨론을 정벌한 고레스는 칙령을 내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도록 조서를 내리게 되었습니다(스 1:1-4).
    이때가 B.C 537년으로 스룹바벨의 영도 하에 백성들이 귀환하여 이스라엘을 재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섭리를 따라 우상숭배와 죄악과 불순종에 빠진 이스라엘백성을 훈련하고 단련하기 위한 목적으로 바벨론 포로 70년을 허용하셨으나 포로된 이스라엘을 고토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도록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세상의 왕을 고레스로 정하셨던 것이다.

    에스라 4:1-4,

    1.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전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2.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우리로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 같이 너희 하나님을 구하노라 앗수르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한 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
    3. 스룹바벨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고레스가 우리에게 명하신대로 우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하였더니
    4.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이사야 45:25
    이스라엘 자손은 다 여호와로 의롭다 함을 얻고 자랑하리라 하느니라 하셨느니라.

    역사(歷史)의 교훈(敎訓)

    오늘날 한때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렸던 평양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학교였던 평양의 숭실대학 건물은 김일성종합대학의 터가 되어 있고
    장대현교회평양학생소년궁전
    산정현교회평양지하철 승리역과 평양제일 백화점,
    창동교회평양의 공산혁명박물관이 세워졌습니다.

    북한은 마치 "동방 바벨론 제국"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역사의 주인이 되신 하나님은 반드시 바벨론 제국을 고레스 왕에 의해서 무너트린 것처럼 북한도 제2의 고레스와 같은 지도자를 내세워 무너트릴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가 실현되려면 이사야와 같은 예레미야와 같은 다니엘과 같은 에스더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존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속사가 속히 실현될 수 있도록 오늘도 코로나 바이러스와 같은 환경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하므로 이 세상을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분명한 증거가 보여지도록 각자 맡은 자리에서 수고하므로 그 결과를 기대해 봅시다.

    이사야 45:17, 22, 25

    17.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구원을 입어 영원구원을 얻으리니 영세에 부끄러움을 당하거나 욕을 받지 아니하리로다
    22.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
    25. 이스라엘 자손은 다 여호와로 의롭다 함을 얻고 자랑하리라 하느니라 하셨느니라.


    ​예레미야의 예언(25:1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칠십년이 마치면 내가 바벨론 왕과 그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악으로 인하여 벌하여 영영히 황무케 하되.

    ​예레미야의 예언(29:11-14)

    1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12.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13.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1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만나지겠고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열방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나게 하던 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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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26일(금)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이사야 44:6∼8
    찬송 / 32장(오 하나님 우리의 창조주시니)
    주제 / 너희는 나의 증인이라(8절)

    이사야 44장을 세 부분으로 구분합니다.

    44:1~8,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이시다.
    44:9~20, 하나님 이외의 우상은 무익한 것이다.
    44:21~28, 하나님만이 우리의 창조주시요 구속자이시다.

    사순절 아홉 번째 날입니다.

    묵상의 주제는 "너희는 나의 증인이라"(8절)
                                    You are my witnesses.

    너희는 두려워 말며 겁내지 말라 내가 예로부터 너희에게 들리지 아니하였느냐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나의 증인이라 나 외에 신이 있겠느냐 과연 반석이 없나니 다른 신이 있음을 알지 못하노라.

    나의 종 야곱(1절) : 야곱이란 이름은 속이는 전문가 즉 사기꾼입니다.

    나의 택한 이스라엘아(1절) : 야곱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른 것은 다른 사람을 속이는 사기꾼과 같은 삶을 즐기지 말고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다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택한 여수룬아(2절) : 여수룬이란 단어가 성경에서 4구절에서 소개됩니다(신명기 32:15, 33:5. 26, 이사야 44:2).
    예수룬이란 "의로운 자"라는 뜻입니다.

    야곱이스라엘이라고 부르셨습니다(1절)
    야곱여수룬이라고 부르셨습니다(2절)

    여수룬은 어떤 존재인가?

    첫째, 하나님을 버린 존재(신명기 32:15)

    그러한데 여수룬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

    둘째,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존재(신명기 33:26)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자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시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

    이사야 44:1-2,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
    너를 지으며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너를 도와줄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 말라.

    종으로 선택을 받았습니다.
    왜 종으로 선택하셨나요?
    하나님의 증인(證人)으로 사용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8절).

    너희는 두려워 말며 겁내지 말라 내가 예로부터 너희에게 들리지 아니하였느냐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나의 증인이라 나 외에 신이 있겠느냐 과연 반석이 없나니 다른 신이 있음을 알지 못하노라.

    잠언 21:28
    거짓 증인은 패망하려니와 확실한 증인의 말은 힘이 있느니라.

    증인(證人)(Witness)(μάρτυς)

    '증인'이란 진리에 대한 자기의 증거를 말이나 행동으로써 증명하는 사람이다.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이 말은 주로 법정에서 심문을 받을 때 어떤 사람에 대해서 증언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법률 용어이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증거한다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이러한 증거 행위는 때로는 체포와 매맞음, 쫓겨남, 심지어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에 이 헬라어 단어로부터 영어의 순교자(martyr)라는 말이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순교자라는 단어는 '신앙을 포기하기보다는 차라리 고난을 당하거나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을 칭하는 말이었다.

    적색 순교자(赤色 殉敎者)(Red Martyr)
    붉은 피 생명을 드린 순교자(Blood Witness)

    백색 순교자(백색 순교자)(White Martyr)
    눈물과 땀을 드린 순교자(Tear & Sweat Witness)

    이사야 44:22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구름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것은 해가 빛나기 때문입니다.
    안개가 사라지는 것도 해가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빛나는 해로 비유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말라기 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3.C. 170년 경에 시리아의 안디오크스 에피파네스가 유대 종교를 말살해 버리고 완전히 헬라화를 시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8만 명의 유대 사람들을 죽이고 10만 명은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또 예루살렘 성전에는 이방의 신을 모셔 놓고 강제로 숭배를 하게 했으며 돼지고기를 가지고 성전을 더럽혔고 성전을 창녀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신앙 때문에 생명을 바쳤습니다.

    특히 유명한 사건 하나는 일곱 사람의 형제에게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신을 섬기라고 했는데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 앞에서 하나씩 차례로 학살을 당했습니다.

    장남은 차바퀴에 결박을 하여 돌려서 죽이고
    차남은 쇠못 장갑으로 가죽을 벗겨서 죽였으며
    셋째는 능지 처참을 했고
    넷째는 혀를 자르고
    다섯째는 산 채로 돌방아로 찧어서 죽이고
    여섯째는 시뻘겋게 단 쇠꼬챙이로 창자를 찔러서 태워 죽였으며
    일곱째는 불가마에다 볶아서 죽였습니다.

    그런데 일곱째는 여섯 형제에 대한 그 고문과 학살을 지켜보면서도 그의 신앙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을 지킨 순교의 피가 면면히 흐르고 흘러 신약의 순교의 퍼가 흐르고 전도자들의 순교의 피가 흐른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카톨릭과 개신교의 많은 순교의 피가 이조 시대와 일제 시대와 공산치하에서 이렇게 흐르고 흘러서 우리들에게 생명의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복음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함부로 지나쳐 버려서는 안 됩니다.

    마태복음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지난 해 성탄을 맞이하여 북한어 성경을 보내는 일에 동참했습니다.
    최근 선교단체에서 보낸 내용 중에 북한의 어느 초신자가 성경책을 갖고 전도하려고 무작정 중국으로 넘어왔다고 합니다.
    성경책을 가져가야 할텐데 누구에게 부탁을 해야할지 몰라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하는데 벽에 숫자가 적혀지는 것을 보고 무작정 그 숫자가 전화번호라고 생각하며 전화를 걸었다고 합니다.
    전화를 받은 사람에게 무작정 "나 중국에 왔습니다. 작은 책을 주시라요" 이렇게 말을 하는데 전화를 받은 사람은 도대체 이 사람의 정체를 모르기 때문에 "내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습니까?" 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자초지종의 이야기를 듣고 그 사람을 데리고 3일 동안 복음을 가르친 후에 작은 성경책 20권을 주었는데 이불 한채만 구해달라고 하더니 이불을 뜯고 그 안에 작은 성경책을 감춘 후에 다시 바느질을 한 후 북한으로 넘어가는 그 열정과 죽음을 각오한 행동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적색 순교자도 필요합니다.
    백색 순교자도 필요합니다.
    자유민주국가에서 예수를 믿는 우리는 어떤 순교자로 살아야 할까요?
    백색 순교자의 삶을 통하여 중국과 북한의 지하교회 성도들을 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참조 /
    https://koreakin.tistory.com/entry/%EC%96%B4%EB%96%BB%EA%B2%8C-%EC%A6%9D%EC%9D%B8%EB%A7%88%EB%A5%B4%ED%88%AC%EC%8A%A4%EC%9D%B4-%EC%88%9C%EA%B5%90%EC%9E%90%EB%A1%9C-%EB%B3%80%ED%99%94%EB%90%98%EC%97%88%EC%9D%84%EA%B9%8C-%EC%9D%B4%EC%83%81%EA%B7%9C-%EA%B5%90%EC%88%98%EA%B3%A0%EC%8B%A0%EB%8C%80%ED%95%99%EA%B5%90-%EC%97%AD%EC%82%AC%EC%8B%A0%ED%95%99

















    2월 25일(목)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이사야 42:1∼7
    찬송 / 29장(성도여 다 함께)
    주제 / 너는 내 것이라(1절)

    이사야
    40-48장은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때로부터 약 100-160년 후에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망하게 되는 것과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게 될 것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사야 43-45장은 바사 왕 고레스를 통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될 것을 말씀합니다.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로 붙잡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독립운동을 하여 고향 땅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고레스 왕의 유화정책(宥和政策)에 의해서 돌아오게 됩니다.

    한글 개역 성경은 "야곱아 너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히브리 성경(영어 성경)은 "그러나 이제(but now)"로 시작합니다.
    접속사 "그러나 이제" 라는 의미는 앞에서 말씀하셨던 내용에 대해서 전혀 다른 의미를 말씀하려는 것입니다.
    42:18-25에 보면 유다 백성들을 소경과 귀머거리라고 비유했습니다.
    그 까닭은 하나님께서 아무리 말씀하셔도 백성들이 들으려고 하지 않고,
    아무리 보여주어도 보려고 하지 않는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아마 사람이라면 그만큼 말하고 보여주었는데도 알아듣지 못하고 깨닫지 않는다면 포기하고 돌아서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But now), 하나님은 다시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렇게 부르셨습니다.

    "야곱"이란 "발꿈치를 잡은 자" 라는 뜻입니다.
    길을 가는 사람의 발꿈치를 잡으면 그 사람은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야곱을 우리 말로 표현면 ‘발목을 잡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넘어지게 하는 사람’, ‘빼앗아가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하나님과 겨루어 이김’이라는 의미입니다.
    피조물인 사람이 어떻게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 실제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져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그렇게 말을 듣지 않아도,
    또 허물이 많아도, 다시 위로하시고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에 반복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지금 유다 백성들이 처해 있는 상황이 두려워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절망적이었음을 의미합니다.
    상황적으로는 다시 회복될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는 나타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아직 끝이 아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구속’은 어떤 사람의 가까운 친척이 그가 잃어버린 재산을 되찾아 주는 것,
    노예였던 사람을 돈을 주고 사서 해방시켜 주는 것,
    본래 가졌던 땅을 되찾아 주고,
    후손을 낳게 하여 가문을 잇게 해 주는 것,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사람의 원한을 풀어주는 것 등을 의미합니다.

    룻기를 한 단어로 표현하면 ‘구속’입니다.

    그런데 능력이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구속해 주는 것도 감사한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그렇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아무리 크고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여도 하룻밤에도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그 분이 구속자가 되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지명하여 부르시고, 당신의 소유를 삼으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정부의 각료로 부름을 받는 것을 가문의 영광이라고 자랑합니다.
    그런데 이런 부름도 길어야 5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과 소유됨은 영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어떻게 보호하실 것인지를 더욱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2절, 네가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물’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인도를 따라 건넌 홍해나 여호수아의 인도를 따라 건넌 요단강을 떠올리게 하고,
    ‘불’은 광야를 지날 때에, 한낮에 내리쬐는 작열하는 태양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처럼 물과 불은 문자적일 수도 있고, 극한의 환란을 의미하는 상징적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말에도 이것과 비슷한 표현이 있는데, ‘산전수전(山戰水戰)’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도무지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고난의 산을 만나기도 하고,
    결코 건널 수 없을 것 같은 환란의 강물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그 산을 넘게 해 주시고,
    그 강을 건너게 해 주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4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물과 불이 하나님의 백성을 삼키지도, 태우지도 못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보호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기 위해서 이스라엘보다 엄청나게 큰 애굽과 교환하시고, 많은 사람들을 대신 내어 주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이스라엘을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가끔 길거리 벽에서 ‘반려견’을 찾는다는 전단지를 보곤 합니다. 어떤 전단지는 찾게 해 주면 보상금을 주겠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그 보상금이 반려견을 새로 사는 것보다 훨씬 많을 것 같다고 생각 될 때가 있습니다. 처음에 강아지를 분양 받을 때는 적절한 가격을 지불하면 됩니다. 하지만 몇 년 함께 지내고 나면, 그 때부터는 가격보다도 관계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반려견의 가격보다 더 많은 비용을 들여서라도 수술과 같은 치료를 받게 합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그러하였습니다.

    우리의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면 하나님께서는 지금의 우리 각자를 만드시기 위해서 얼마나 노심초사하셨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붙여주셨습니까? 그 분들 중에는 기억에 또렷하게 남는 사람들도 있지만 지금은 이름은 물론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 않습니까?

    특히 1-7절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표현하는데,
    표현 방식은 문법적으로 복수형이 아니라 한 사람에게 말하듯 단수형으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단체로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봉사하고 하지만 실제로는 신앙의 출발은 철저하게 개인적입니다.
    그 개인들이 모여서 복수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하나님은 곧 나의 하나님입니다.

    14-15절,
    너희의 구속자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위하여 내가 바벨론에 보내어 모든 갈대아 사람으로 자기들의 연락하던 배를 타고 도망하여 내려가게 하리라.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자요 이스라엘의 창조요 너희 이니라 .

    21절,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시편 105:1,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 행사를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첫째는 영광(榮光)을 위하여 창조한 백성(7절)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8절) 눈이 있어도 소경, 구기 있어도 귀머거리인 백성

    영광(榮光)이란 한자는 "영화 영(榮), 꽃 영(榮), 빛 광(光)"이란 훈(訓)입니다.
    "불 화(火), 덮을 멱(冖)" , 열 십(十)" "빛 광(光)"

    둘째는 증인(證人)으로 택함을 받은 백성(10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증인(證人)이란 한자는 "말씀 언(言), 오를 등(登)" "사람 인(人)" 이란 훈(訓)입니다.

    증인이란 반드시 살아있고 생명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올라가야 합니다.

    셋째는 새 일을 기대하라(18-19절)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과거의 은혜에 집착하지 말라.
    홍해를 건넜다.
    요단을 건넜다.
    이런 것들을 기억하지 말고
    이제부터는 새 일을 행하실 것을 기대하며 광야에 길을 만드시고 사막에 강을 만드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자.

    코로나 바이러스에 붙잡혀 방황하거니 두려워하지 말고
    새 일을 위하여 예비하신 주님의 계획을 생각하며 오늘도 이 시대에 적합한 은혜 주실 것을 확신하며 건강한 신앙으로 건강한 삶을 만들어가시기를 승리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월 24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이사야 42:1∼4

    ♦ 찬송 / 14장(구세주를 아는 이들)

    묵상을 위한 주제 : 나의 종 나의 택한 사람(1절)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며 실의와 절망에 빠졌던 이스라엘에게 40장에서 해방의 메시지가 선포됩니다.
    그리고 41장부터는 바벨론의 임박한 멸망과 제2의 출애굽이 선포됩니다.
    42장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즉 바벨론으로부터의 해방을 이끌어줄 하나님께서 택하신 종을 소개합니다.

    나의 종을 보라!
    "자, 보라 종을(에베드)"
    종을 내세우거나 자랑하지 않습니다.

    종 또는 노예는 결코 대단한 신분의 사람이 아니라, 가장 하찮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 보라”라는 감탄사를 붙여서까지 종을 치켜세우시는 이유는 그 종은 하나님이 붙드신 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붙드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전폭적으로 지지한다는 것을 의미입니다.
    주님이 하찮은 종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직접 택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직접 종을 택하신 이유는 그가 주님께서 마음으로 기뻐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종"이란 누구일까요? 
    여러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째는 바벨론 왕 고레스

    바벨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은 바벨론과는 다른 정책을 폈습니다. 바벨론은 철저하게 민족 말살 정책을 펼쳤습니다. 유다를 정복하고 유다에 이방인들을 이주시키는 것과(결국 이 때문에 이후에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에게 철저하게 외면당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로 바벨론으로 끌고 갔던 것도 민족의 정체성을 말살시키려 했던 정책 중의 일환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레스는 유화정책을 폈습니다.

    둘째는 유다의 새로운 왕

    셋째는 장차 오실 메시아

    1절을 읽어봅시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세 가지 비결과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을 받은 후에 맡겨진 사명을 말씀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세 가지 비결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가 붙드는 나의 종이란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인생"을 의미합니다.

    왜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야 하겠습니까?

    18절을 읽겠습니다.
    너희 귀머거리들아 들으라 너희 소경들아 밝히 보라.

    귀머거리는 듣지 못합니다.
    소경은 볼 수 없습니다.
    듣지도 못하고 볼 수 도 없었기 때문에 누군가의 손에 붙잡혀야 바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19-20절,
    소경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누가 나의 보내는 나의 사자 같이 귀머거리겠느냐
    누가 나와 친한 자 같이 소경이겠느냐
    누가 여호와의 종 같이 소경이겠느냐.
    네가 많은 것을 볼찌라도 유의치 아니하며
    귀는 밝을찌라도 듣지 아니하는도다

    (현대인)
    누가 눈이 먼 자냐? 나의 종이 아니냐! 누가 귀가 먹은 자냐? 내가 보낸 나의 사자가 아니냐!" 누가 눈이 먼 자냐? 주님과 언약을 맺은 자가 아니냐! 누가 눈이 먼 자냐? 주님의 종이 아니냐!그는 많은 것을 보았으나, 마음에 새기지 않았다. 귀가 열려 있었으나, 귀담아 듣지 않았다.

    (새번역) 내 종보다 더 눈먼 자가 누구냐? 내가 보내는 사자보다 더 귀먹은 자가 누구냐?이스라엘아, 너는 많은 것을 보면서도 그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며 들을 귀가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듣지 않는구나.'

    그러나 소경도 아니고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지냈던 모세에게 어느 날 신기한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다.
    모세는 특별한 은총을 체험했습니다.
    갈대 상자에 담겨 나일강 물에 떠내려 갈 때 애급 왕의 딸 공주에게 발견되어 공주의 양아들로 왕자처럼 살았습니다.

    둘째는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내 마음에 기뻐하는 이란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는 인생"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다윗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셨습니다(사도행전 13:22)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은 처음과 끝이 항상 똑같습니다.

    열왕기상 9:4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 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한대로 온갖 것을 순종하여 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는 사람이 될 때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게 될 것입니다.

    셋째는 나의 택한 사람

    나의 택한 사람이란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선택하는 방법은 세상의 기준과 다릅니다(야고보서 2: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찌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약한 자를 선택하여 강한 자를 이기게 하십니다.
    (예) 다윗과 골리앗

    가난한 자를 선택하여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십니다.
    (예)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

    병든 자를 선택하여 건강한 사람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예) 사도 바울의 육체의 가시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된 후에는 하나님의 신으로 함께 하십니다.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하나님의 신(神)이란 신약에서는 성령(聖靈)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재하면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재하면 하나님의 일에만 전념해야 합니다.

    (예)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신에 붙잡힌 모세
    양무리를 이끌던 모세는 애급에서 신음하는 히브리 백성들을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하는 종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정하였던 베드로에게 부활의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묻습니다.
    성령의 임재는 믿음의 길이 흔들림이 없습니다.
    성령의 임재의 아주 중요한 요소는 인격적인 삶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검은머리 파뿌리가 되도록 사랑하며 살아가겠느냐?
    주례자가 이런 질문을 자주 했습니다.
    시종일관(始終一貫) 같은 마음과 사랑으로 살아야 할 것을 강조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령께서 임재하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될 것입니다.

    누가복음 3:22.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보라’라는 단어입니다. ‘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고 했습니다.
    종을 내세우는 주인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종을 만방에 내세우고 자랑하십니다.
    이 종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붙드는 종, 기뻐하는 종, 택한 종, 성령을 부어준 종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라고 하십니다.
    그가 이방에게 공의를 베풀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무엇인가?

    2절, 외치라
    3절, 공의를 베풀라
    4절, 낙담하지 말라

    2월 23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이사야 41:11∼14

    ♦ 찬송 208(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묵상을 위한 주제 :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14절)


    (지렁이 이야기)

    옛날에 가난한 선비와 그의 아내 그리고 앞을 못보는 선비의 노모(老母)가 함께 살았다고 합니다.
    선비가 과거 시험을 보려고 한양으로 올라갔는데 노모는 맛있는 고기가 없으면 식사를 못합니다.
    선비가 있을 때는 그래도 산에 가서 고기를 잡았으나 며느리는 사냥을 할 수 없어 고민하던 중 지렁이(土龍湯)를 잘 말려서 고기처럼 드렸다고 합니다.

    드디어 과거에 합격한 선비가 집으로 돌아와 부인의 정성에 감동되었는데 노모가 아들의 소식을 듣고 눈이 번쩍 떠서 모두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합니다.

    (지렁이 이야기)

    후백제 태조 견훤이 지렁이의 아들이라는 설화가 있다.
    견훤의 어머니가 자주 만나던 남성을 통해 임신을 하자, 그녀의 아버지의 계책으로 그 남자의 옷에 실 하나를 꿰었다.
    다음날 아침에 실을 따라가보니 땅 속에서 거대한 지렁이가 나왔고, 그렇게 태어난 아기가 견훤이란 설화이다.
    이것은 원래 용이었던 설화를 격하시킨 것이라는 설도 있다.

    이 설화에서 견훤은 전투 후에 강물에 들어갔다 나오면 힘을 완전히 회복해 다시 쌩쌩하게 전투를 치렀는데,
    이는 몸이 촉촉히 젖어 있어야 하는 지렁이의 후손이라는 이유이다.

    고려군은 이 이야기를 전해듣고 강물에 소금을 풀었고, 이를 모르고 회복하려 강물에 들어간 견훤은 온몸이 따가워서 마구 뒹굴었고, 힘을 회복하지 못해 결국 고려군에게 패배했다고 한다.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이 이야기를 들은 왕건이 고창 전투에서 견훤과 싸우기 전에 소금을 뿌리는 의식을 치르기도 했다.


    대한민국 축산법에 따르면 지렁이는 가축으로 분류된다.
    그래서 지렁이를 기르는 시설은 돼지, 소 등을 기르는 시설과 마찬가지로 축사로 분류된다.
    (지렁이를 키워 낚시용 지렁이를 판매하거나 농사용으로 판매하기 때문이다.)

    지렁이와 같은 너 야곱아!
    개역 개정 한글 성경에서는 "지렁이"를 "버러지" 라고 번역합니다.

    성경에서 사람을 가장 낮고 천하게 비유한 용어 세 개를 소개합니다.

    첫째는 지렁이(버러지)(이사야 41:14)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

    둘째는 벌레(시편 22: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But I am a worm and not a man, scorned by men and despised by the people).

    셋째는 구더기(욥기 25:6)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
    (how much less man, who is but a maggot-- a son of man, who is only a worm!)

    지렁이, 벌레, 구더기라는 표현에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하찮은 모습, 무능한 모습 그리고 연악한 모습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모습을 정확하게 읽을 줄 아는 사람의 고백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렁이와 같다고 엄숙하게 꾸짖습니다.
    동방 우스 땅의 의롭다 인정을 받았던 벌레와 같은 사람이라고 인정합니다.
    시편 기자는 나는 사람이 아니라 벌레라고 탄식합니다.

    사순절 여섯째 날을 맞이하는 새벽 시간에 함께 지렁이와 같고 벌레와 같고 구더기와 같은 나를 발견한 후에
    구속자가 되신 하나님의 은총을 사모하며 기도합시다.

    첫째, 지렁이는 무골(無骨) 충(蟲) 존재(存在)

    무골(無骨)이란 뼈가 없다는 것입니다.
    뼈가 없어서 몸이 흐느적 거리기 때문에 징그럽습니다.
    누가 지렁이를 보고 아름답다고 하겠습니까?

    사람을 지렁이와 같다고 하는 것은 "줏대가 없다"는 뜻입니다.

    줏대사물의 가장 중요한 부분.
    또는 자기의 처지나 생각을 꿋꿋이 지키고 내세우는 기질이나 기풍.

    줏대란 마음의 중심을 나타내는 뜻으로 줏대있는 사람줏대가 없는 사람으로 구분한다.
    줏대가 없는 사람의 특징은
    1. 은혜를 모릅니다.
    2. 원망을 좋아합니다(환경, 권력, 재물 등)

    지렁이 같은 야곱이란 믿음의 줏대가 없기 때문에 쉽게 흔들립니다.

    둘째, 지렁이는 음지(陰地)를 좋아한다

    음지(陰地)햇빛이 잘 들지 않는 그늘진 곳.
    또는 혜택을 입지 못하는 처지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지렁이는 빛을 싫어하고 습한 곳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지렁이는 눈이 없습니다.
    지렁이 같은 야곱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립니다.
    영적인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셋째, 지렁이는 시궁창과 같은 곳에 모여 있습니다.

    시궁창이란 "몹시 더럽거나 썩어 빠진 환경" 또는 그런 처지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하수구 또는 하수도, 개골창이라고도 합니다.

    에덴 동산이란 가장 좋은 환경에 감사할 줄 모르고 더 좋은 곳을 찾다가 결국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지렁이와 같은 야곱은 감사할 줄 모릅니다.

    사순절 여섯번째 날 새벽입니다.
    지렁이와 같은 야곱의 삶을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믿음의 줏대가 분명한 신앙으로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는 신앙으로
    감사하는 신앙으로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1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섬들아 내 앞에 잠잠하라 민족들아 힘을 새롭게 하라, 가까이 나아오라 그리하고 말하라 우리가 가까이 하여 서로 변론하자.

    첫째는 힘을 새롭게 하라

    힘을 바꾸라는 뜻입니다.
    이전에는 주로 내 힘을 사용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주님의 힘을 사용하라고 말씀합니다.

    둘째는 가까이 나아오라

    "고슴도치 딜레마" 라는 심리학 용어는 고슴도치가 온 몸에 뾰족한 가시가 있기 때문에 가까이 하면 따갑기 때문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죄는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가갈 수 없게 하는 고슴도치 딜레마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면 죄의 가시를 벗겨야 합니다.

    셋째는 말하라

    무엇을 말하라고 하셨습니까?
    4절을 읽겠습니다.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태초부터 만대를 명정하였느냐 나 여호와라 태초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

    (현대인) 누가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였느냐? 누가 역사의 과정을 정하였느냐?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도 있었고 세상 끝날에도 있을 나 여호와가 아니냐?

    신앙이란 오직 여호와 하나님 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결단하면 약속하신 말씀이 따라옵니다.
    6절을 읽겠습니다.

    각기 이웃을 도우며 그 형제에게 이르기를 너는 담대하라 하고.
    (NIV)(NASB) Be strong!
    (KJV) Be of good courage.

    14절을 읽겠습니다.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

    두려움이 없습니다(14절)
    도움을 받습니다(14절)

    구속자가 되신 여호와 하나님
    구속자란 문제의 해결자를 말합니다.

    이사야 54:5,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실 것이며.

    시편 78:35,
    하나님이 저희의 반석이시요 지존하신 하나님이 저희 구속자이심을 기억하였도다.

    이사야 43:14,
    너희의 구속자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위하여 내가 바벨론에 보내어 모든 갈대아 사람으로 자기들의 연락하던 배를 타고 도망하여 내려가게 하리라.



    코로나 바이러스가 만든 팬데믹 세상에서도 모든 성도들이 담대하게 용기를 갖고
    사순절 여섯번째 날을 믿음으로 다스리며 승리하는 강건하고 행복한 신앙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월 22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이사야 40:1∼5

    ♦ 찬송 28(복의 근원 강림하사)

    묵상을 위한 주제 :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3절)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는 예언은 신약에서 주의 길을 예비하라는 세례자 요한의 광야의 외침에서 다시 듣게 됩니다(마 3:3, 막 1:3, 눅 3:4).

    예비하라는 것은 준비하라(Prepare)는 뜻입니다.

    사람의 일생(一生)을 생각해 볼 때 세 가지 준비 과정이 있습니다.

    첫째는 출산을 위한 준비(아기옷, 기저귀, 유모차, 요람, 장난감)
    둘째는 결혼을 위한 준비(신랑, 신부)
    셋째는 장례를 위한 준비(영정사진, 수의, 유언)

    신앙인들은 한 가지를 더 준비해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을 맞이할 준비"라고 하겠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오실 길을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신약 시대에는 세례 요한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4절을 읽겠습니다.
    (현대인)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이 낮아질 것이며, 거친 땅이 평탄해지고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다.

    골짜기, 산, 땅지형적인 조건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씨 뿌리는 비유에서 네 종류의 밭을 의미합니다(마태 13장).
    길가, 돌밭, 가시떨기, 좋은 땅과 같은 사람의 마음을 말합니다.
    4절 말씀에서 주의 길을 예비하려면 세 가지 준비를 갖춰야 합니다.

    4절.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첫째,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 (현대인의 성경) 골짜기 메워지며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지리적인 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골짜기마음의 골짜기라고 하겠습니다.
    마음의 골짜기가 너무 깊기 때문에 그 골짜기를 메워야 합니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마음을 알 수 없다고 합니다.
    마음 깊숙이 틀어박힌 온갖 미움, 질투, 불만, 불평, 시기, 절망, 좌절, 불신과 같은 골짜기들을 모두 메워버려야 합니다.

    둘째,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 (현대인의 성경) 모든 산이 낮아질 것이며
    (새번역) 모든 계곡은 메우고, 산과 언덕은 깎아 내리고, 거친 은 평탄하게 하고, 험한 곳은 평지로 만들어라.

    산은 교만을 상징합니다.
    성경에 죄라고 사용된 단어가 대략 1,100가지 라고 합니다.
    그 많은 죄라는 단어 가운데 두번째로 많이 사용된 단어가 "교만(驕慢)"이라고 합니다.

    어제 황목사님께서 강조하셨던 설교의 핵심 교만이 멸망의 원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셋째,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

    (현대인의 성경)  거친 땅이 평탄해지고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다.
    (새번역) 거친 은 평탄하게 하고, 험한 곳은 평지로 만들어라.  
          

    요철(凹凸)이 심하고 울퉁불퉁한 길은 평탄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고르지 않은 곳과 험한 곳이란 굽은 마음 요즘 말로는 삐딱한 마음이라고 하겠습니다.
    마음이 굽은 사람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굽어졌기 때문에 정상으로 볼 수 없습니다.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주의 길을 예비하라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에 선지자 이사야와 세례 요한을 통하여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은 다시 오실 주님의 길을 예비해야 합니다.
    어떻게 예비할까요?

    세례 요한의 외침

    마태복음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마태복음 3:3,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捷勁)을 평탄하게 하라

    존 스토트(John R. W. Stott) 목사의 "새" 라는 책이 있습니다.

    만일 새들이 믿음을 가르칠 수 있다면 회개도 가르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어떤 새들은 추운 겨울이 다가오면 날아왔다가 따뜻한 봄이 되면 다시 날아갑니다.
    그렇게 많은 새들이 떠났다가 다시 돌아올 때는 모두가 돌아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에게로 모두 돌아오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철새가 갖는 귀소 본능만큼 인간도 영적으로 귀소 본능을 갖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의 영이 쉴 수 있는 집입니다.
    죄는 길을 잃어버린 삶과 같습니다.
    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철새들처럼 돌아가야 할 곳을 찾는 영적 귀소본능을 되찾는 것이 회개라고 하겠습니다.

    결혼식장에서 신랑과 신부를 보면 교훈을 얻습니다.
    결혼예식을 준비하는 신부는 결혼식 전에 피부 마사지를 받으며 관리합니다.
    결혼식 당일에는 아침 일찍부터 미용실에 가서 미용사들로부터 정성껏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신부 입장할 때면 또다시 거울 앞에 서서 신부의 모습을 확인합니다.
    그렇게 준비했으면서도 다시 거울 앞에 서는 신부의 모습에서 우리는 주님 앞에 서기 위하여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가 생각합니다.

    주님,
    사순절 다섯째 날을 맞이합니다.
    마음의 깊은 골짜기에 널려있는 각종 미움, 질투, 불평, 불만, 불신, 절망과 같은 것들을 성령의 메워주시고
    산과 같이 높아진 교만을 깎아주시고
    비뚤어진 마음을 바로잡아
    주님을 닮아가는 복된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새 힘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2월 20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이사야 39:1∼8

    ♦ 묵상을 위한 주제 : 남을 것이 없으리라(6절)(Nothing will be left)

    다 빼앗길 것이다!

    히스기야 왕은 유언(遺言)을 기도(祈禱)로 바꿀 수 있었던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죽음을 생명으로
    절망을 소망으로
    위기를 성공의 기회로
    이와 같은 히스기야에게 신앙의 위기, 영적 위기가 닥쳐왔습니다.

    (1절) 그 때에
    유다 왕 히스기야가 중한 병에 걸렸다가 완쾌된 후에 바벨론 왕 "므로닥 발라단"이 편지선물을 보냈습니다.

    바벨론 왕으로부터 편지와 선물을 받은 히스기야 왕은 바벨론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생각에 의해 히스기야 왕은 충동이 일어났다.

    첫째는 세상 보물을 자랑하려는 것(나도 이만큼 가지고 있다)
    둘째는 바벨론과 같은 강한 나라와 더욱 가깝게 지낼 수 있을 것

    이솝 우화헛된 자랑이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사슴 한 마리가 호숫가로 물을 마시러 갔습니다.
    이때 사슴은 물속에 비친 제 그림자를 바라보았습니다.
    나무 가지 모양 여러 갈래로 뻗친 뿔을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가느다란 다리를 보았을 때, 다리는 왜 이다지도 보기 싫은가 하고 한탄했습니다.
    "이런 다리는 없는 것만 못하다" 
    사슴은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마침 사자 한 마리가 나타나서 사슴을 잡아 먹으려고 쫓아왔습니다.
    사슴은 그 소용없는 것이라고 한탄하던 가는 다리 때문에 빨리 숲속으로 달려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뿔이 나무 가지에 걸려 사자의 밥이 되고 말았습니다.
    불쌍한 사슴은 이렇게 한탄을 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욕만 하던 다리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자랑으로 알았던 뿔 때문에 이 모양이 되어 버렸구나!"

    생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지구상에서 가장 큰 뿔을 가졌던 "메가케로스(megaceros)"라는 사슴이 멸종되었는데 그 원인이 너무 큰 뿔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것들보다 오히여 눈에 보이지 않는 정직과 믿음과 사랑이 더 중요하다는 교훈입니다.

    히스기야는 유언을 기도로 바꿀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그의 믿음이 무너져버린 것을 역대하 32:25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저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게 되었더니.

    죽을 병에서 15년 생명의 연장을 받은 것은 좋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 왕의 사절단이 들고온 편지와 선물 때문에 히스기야는 흔들렸습니다.
    갑자기 세상적인 것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몇 가지 질문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첫째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세기 3:9) /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 대신관계

    둘째는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창세기 4:9) / 나와 이웃들과의 관계 - 대인관계

    셋째는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창세기 4:10) / 내가 나를 대하는 자세 - 대아관계

    오늘은 사순절 제4일째 날입니다.

    히스기야 왕의 모습에서 이 시대를 살아가야 할 나의 삶을 점검해야 합니다.
    과연 나의 자랑은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의 이름(시편 20:7)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we trust in the name of the LORD our God.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랑하는 것은 구하는 것(역대상 16:10)
    그 성호를 자랑하라 무릇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찌로다.

    하나님 마음에 맞는 기도생활을 회복해야 합니다.

    둘째, 십자가(갈라디아서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 하나님만 자랑하고 십자가만 자랑하기 위해서는 날마다 나를 죽여야 한다(고린도전서 15:31) 

    형제
    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린도후서 12: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려면 주님의 기도를 회복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자랑하려면 생활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세상 것을 자랑하는 이유?

    1. 마음의 소욕(시편 10:3) 

    악인은 그 마음의 소욕을 자랑하며 탐리하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고린도전서 10:12,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히스기야가 이 말씀에 딱 걸렸다.
    죽을 줄 알았던 히스기야가 15년을 연장 받자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위험한 때가 성공의 때이다.

    (참고) 므로닥 발라단(Medrodach - baladan) : 발라단의 아들이며 바벨론 왕이다. 

    히스기야 왕이 병 들었다 하는 소식을 듣고편지와 예물 을 보냈다(사 39:1, 왕하 20:12).
    그 목적은 바벨론, 유대, 애급이 연맹하여 앗수르 왕이 침입하여 저를 왕에서 축출하였다가 7년후에 복위시켰으나9개월 후에 아주 패망하였다(주전 702년).

    2월 19일(금)♦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이사야 38:1∼22

    오늘은 사순절 제3일을 맞이합니다.
    이사야 38장의 사건은 열왕기하 20:1-11, 역대하 32:24-26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의 나이가 중년의 때라고 합니다(10절)
    중년이란 성인기 전반부터 노인 사이 생애, 일반적으로 약 45세에서 64세 사이라고 합니다.
    미국 인구 조사는 중년을 35~44세와 45~54세 나이대로 분류하지만 저명한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40~64세를 중년으로 정의합니다.

    2015년 UN 새로운 연령 기준을 제시

    청년 18-65세
    중년 66-79세
    노년 80-99세
    100세 이후 장수 노인

    (한국의 경우)
    청년 19-34세
    장년 35-49세
    중년 50-64세
    노년 65세 이상

    히스기야의 믿음은 "유언(遺言)을 기도(祈禱)로 바꾼 것"입니다.

    1절, 그 즈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나아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2∼3절,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의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추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니.

    5∼6절,  너는 가서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 오년을 더하고.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에게 원하신 것은 이제 죽게 되었으니 유언(遺言)을 남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유언(遺言)을 남기려고 주위(主位)를 정리하지 않고 오히려 벽(壁)을 보고 앉아서 기도(祈禱)하며 통곡(痛哭)했습니다.

    히스기야가 직면한 상황을 "하나님의 뜻" 이라는 명제(命題)로 살펴보겠습니다.

    1절에 "그 즈음(In those days)"이란 하룻밤 사이에 앗수르 대군 18만 5천 명이 모두 전멸한 사건이 일어난 그 무렵을 말합니다.
    히스기야와 모든 백성들이 함께 기도한 결과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기도의 능력을 히스기야를 비롯한 모든 유다 백성들이 함께 체험하고 깨달았습니다.
    이런 기적같은 일을 체험했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가 기도에 대한 믿음을 확신하고 있는지 시험하십니다.
    그래서 죽을 것이니 유언을 하라고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의 사람에게 이와 비슷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 이유는 "믿음을 더욱 견고(堅固)하게 하려는 것" 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고린도후서 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예를 들면 아브라함이 "영생(永生)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창세기 21:33)
    그러자 "그 일 후에" 즉 아브라함이 하나님은 영생하시는 여호와라고 고백했다는 것이 진실인지 시험하시려고 아브라함에게 "네 사랑하는 독자(獨子) 이삭을 번제(番第)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창세기 22:2)

    또 다른 예를 찾아봅니다.
    베드로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이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께서는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서 가르치셨습니다.

    믿음을 고백하거나 믿음을 확인한 후에는 그 믿음이 정말 진실한가?
    진실한 믿음이라면 더욱 견고해지기를 원하십니다.

    믿음이 견고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유언(遺言)을 하라하나님의 말씀하나님의 뜻이라고 합시다.
    이러한 뜻을 하나님의 의도적(意圖的)인 뜻 또는 하나님의 환경적(環境的)인 뜻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의도(意圖)환경(環境)은 경우에 따라 바뀔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히스기야의 생명(生命)을 15년을 더 연장(延長)하신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찾아보면, 요나 선지자가 니느웨에 가서 40일 후에 망(亡)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傳)했습니다.
    요나는 언덕 위에 올라가서 니느웨가 망하는 것을 확인하려고 기다렸지만 오히려 니느웨 성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망할 것이라는 니느웨 성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번제의 제물로 바치라고 말씀하셨던 하나님은 번제물로 수양을 준비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델레마(θελημα)" 라고 합니다.

    히스기야가 죽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뜻은 마치 니느웨가 회개하면 망하지 않았던 것처럼 히스기야가 기도하면 죽음의 시간을 15년 더 연장해 주심으로 당장 죽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 또는 주권적인 뜻은 어느 누구도 바꿀 수 없습니다.
    이러한 뜻을 "불래(βουλη)" 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2장 23절에서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뜻이라고 분명히 선언한다.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십자가의 인류 구속의 역사를 누가 작정하셨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어 그곳에서 순교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을 걱정하는 사람들은 로마로 가지 말라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내가 로마로 가서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모든 주위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로마로 떠났습니다. 로마로 가는 길에 유라굴로 광풍이 닥쳐와서 그 풍랑으로 죽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은 로마에 가서 복음을 증거한 후에 죽임을 당해야 하므로 무서운 광풍에서 살려주셨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세상에서 전염병 또는 불의의 사고와 같은 위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질병과 사고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인생의 계획을 무너트릴 수 없습니다.

    사순절 제3일째 날을 맞이합니다.
    항상 기뻐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며, 모든 일에 감사하므로 하나님의 뜻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이사야 38:19-20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오늘날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신실을 아비가 그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니 우리가 종신토록 여호와의 전에서 수금으로 나의 노래노래하리로다.

    (현대인의 성경) 아버지가 자기 자녀들에게 주의 신실하심을 말해 주듯이 오늘 나처럼 주를 찬양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살아 있는 사람뿐입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실 것이니 우리가 평생 여호와의 성전에서 수금으로 노래하며 찬양하리라.

    2월 18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이사야 37:1∼38

    이스라엘의 하나님 :
    믿음의 조상은 아브라함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렇게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왜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라고 부를까요?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한 개인의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때는 개인이 아니라 민족의 하나님, 나라의 하나님이라고 부는 것입니다.
    한 개인의 힘이 강합니까? 아니면 민족 전체의 힘 더 나아가서 나라 또는 국가의 더 강할까요?
    분명한 사실은 개인 보다는 민족, 민족 보다는 국가의 힘이 더 강합니다.

    한글 개역 성경에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 76구절
    이스라엘의 하나님 : 456구절

    히스기야 왕은 앗수르 대왕 산헤립의 유다에 대한 모욕적인 발언에도 저항할 아무런 힘이 없었습니다.
    결국 히스기야는 선지자 이사야의 도움을 받아 모든 대신들과 더불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 결과  앗수르 군대가 하룻밤 사이에 페스트라는 전염병에 의해서 18만 5천명이 죽고 말았습니다.
    유대 역사가 헤로도토스요세프스의 주장에 의하면 이때 하나님은 앗수르 진영에 페스트라는 급성 전염병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이렇게 놀라운 결과를 보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합니까?

    그런데 아주 놀라운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전쟁을 하였으나 이스라엘 보병 3만병이 죽었습니다.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 비느하스도 죽고 말았습니다.
    더구나 여호와의 궤를 블레렛 진영에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진영 아스돗 다곤의 신당으로 옮겨졌습니다.
    이튿날 아침 다곤 신당의 다곤이 얼굴을 바닥에 대고 엎드러졌습니다.
    다곤의 머리와 두 손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둥이만 남았습니다.

    블레셋 진영에서 여호와의 궤를 가드로 옮겼습니다.
    가드 지역에 갑자기 독종이 발생했습니다.

    그 다음에 여호와의 궤를 에그론으로 옮겼습니다.
    그러자 에그론 지역의 사람들은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에게로 가져와 우리를 죽이려 한다며 부르짖습니다.
    결국 여호와의 궤를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려보내기도 결정했습니다.

    여호와의 궤를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려보낼 때 블레셋 진영에서는 속건제를 드리기 위하여 블레셋이 숭상하는 금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을 여호와의 궤와 함께 처음 새끼를 낳은 젖나는 암소 두 마리가 끄는 수레에 싣고 만일 벧세메스로 곧장 가면 이번 재앙은 여호와 하나님이 내리신 것이지만 젖나는 소가 끄는 수레가 벧세메스로 향하여 나가지 않는다면 우연의 일치라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젖나는 두 마리의 암소가 이끄는 수레가 벧세메스를 향하여 달려가되 자우로 치우치지 않고 곧장 벧세메스로 향하여 나갔습니다.

    이스라엘 진영에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역사를 목격했습니다.
    블레셋 진영에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능력을 목격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란 한 개인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민족과 나라를 위한 하나님이 되심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나라의 하나님이 되게 하려면 먼저 그 나라에서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며 믿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란 에서와 야곱의 쌍둥이 형제 중에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부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뜻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 라고 합니다.
    그런데 좀 더 깊은 의미는 "하나님이 주도하신다"는 뜻입니다.
    야곱은 이제까지 자기가 주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게 된 이후에는 사람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도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을 말씀합니다.

    창세기 32장 24절에 보면 야곱이 혼자 남았는데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을 합니다'
    여기서 주어는 어떤 사람'입니다. 곧 하나님이죠.
    하나님이 야곱과 싸웁니다.
    그런데 싸움은 하나님이 먼저 거셨는데 시간이 갈수록 야곱이 그 싸움을 주도하게 됩니다.
    25절에 보면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쳤다'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못 이겼답니다.
    그러니까 분명히 야곱이 겨루어 이기는 것이 맞습니다.
    뭐 이때까지 야곱은 누구와 겨루든 늘 이겨왔었죠. 줄곧 그랬었잖아요.
    언제나 끈질기게 주도하고 늘어져서 자기의 목적을 이루어내고야 말았죠.
    형 에서와도 그랬고, 아버지 이삭과도 그랬고, 삼촌 라반과도 그랬죠.
    그리고 32장에서는 급기야 하나님까지 그렇게 물고 늘어져서 이기고야 말았습니다.
    26절에 보면 야곱은 하나님에게 '당신이 나를 축복하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노라'고 달라 붙기까지 합니다.
    이것을 보면 얼마나 야곱이 주도적인 사람입니까? 얼마나 끈질긴 사람입니까?
    결국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묻습니다. 그는 '야곱'이라 말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제는 야곱이라고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 하라. 왜냐하면 네가 (지금까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겼기 때문이다"(28절).
    여기서 하나님의 마음을 한번 느껴볼 필요가 있습니다.
    28절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다시 읽겠습니다.
    "너는 다시는 야곱이라고 부르지 말아라. 네가 지금까지는 '야곱'으로 살아서,
    사람들의 발목을 잡고 그들과 겨루어 이겼고 오늘은 하나님인 나와 겨루어서까지 이기고야 말았잖니.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렇게 살지 말거라. 이제는 '이스라엘'로 살거라. 이제부터는 내가 너를 주도하고 내가 너를 다스릴 것이다.

    전통적인 설명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창세기 32:28).

    그러므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고군분투 하다”, “영향을 미치다”, “승리하다” 라는 뜻의 히브리어 단어 샤릿(שרית)에서 파생되었다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브니엘에서 일어난 변화와 깊이의 이해를 돕는 ‘이스라엘’의 이름을 해석 하는 한 가지 방법이 더 있습니다.

    야곱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야샤르-엘(ישר-אל)이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단어 야사르(יָשָׁר) 곧고 정직하고, 명예롭고, 법을 준수하는 것을 의미하며,
    성경적 용법에서는 "올바르고, 신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반면, 이름 야코브(עָקֹב֙)는 “비뚤어지다”라는 뜻입니다. 
    이사야서에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고르지 아니한 곳(הֶֽעָקֹב֙)이 평탄하게 되며” (이사야 40:4).
    이제 우리는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뀐 것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란 하나님께서 “비뚤어지고 울퉁불퉁한 것”에 반대되도록 올바르게 만드신 것입니다. 

    히브리어가 진정한 의미를 알려줍니다

    고대 유대 세계의 이름들은 매우 중요한 것들을 담고 있습니다.
    이름이 사람의 성격을 알려주거나, 업적 혹은 그들의 본질을 알려줍니다.
    새로운 이름을 받은 사람들은 그들의 가진 본질이 변경됩니다.
    성경을 히브리어로 읽으면 번역된 성경이 미처 담고 있지 못하고 있는 이러한 인물들의 이름의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유일하신 하나님(37:16)
    둘째,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37:16)

    하나님의 선택적 주권 / 이스라엘은 장자(출애굽기 4:22)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Israel is my firstborn son.)

    이스라엘 나라는 모든 민족과 모든 나라의 장자가 되었다.
    나머지 민족들과 나라들은 장자의 뒤를 이어가는 나라와 민족이 된다.

    하나님의 선택(신명기 14:2)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의 기업의 백성을 삼으셨느니라 .

    신명기 32: 6
    우매무지한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너를 얻으신 너의 아버지가 아니시냐 너를 지으시고 세우셨도다.

    결론 / 시편 67:3, 5
    하나님이여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
    May the peoples praise you, O God; may all the peoples praise you.

    3절에서 (2)주를 찬송케 하소서 : 난 외의 주를 참조하면 (2)주께 감사케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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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17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이사야 36: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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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야 36장부터 40장의 내용은 "역사서(歷史書)"에 속합니다.
    그런데 역사의 이야기가 "예언서(豫言書)"에 기록된 이유는 "선지자(先知者)의 예언(豫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사야 36장은 역사서 열왕기하 18:13-27, 역대하 32:1-9에 소개된 내용입니다.

    그러면 이사야 36장의 내용을 요약하여 소개합니다.

    앗수르 왕 "산헤립"은 유다의 견고한 성읍들을 모두 점령합니다.
    유다 왕 히스기야는 앗수르 왕에게 "나는 범죄하였나이다. 나를 떠나 돌아가소서. 왕이 내게 지우시는 것을 내가 당하겠다"고 말합니다.
    앗수르 왕은 "은 300달란트, 금 30달란트"를 바치라고 합니다.
    히스기야는 왕궁과 여호와의 전에 있는 은을 모두 바쳤습니다.
    그러자 앗수르 왕은 "랍사게" "디르단" "랍사시르"에게 대군을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공격하라고 합니다.
    이때 유다 진영에서는 대신 "엘리아김"과 서기관 "셉나"와 사관 "요아"가 랍사게를 만나러 나갔습니다.

    랍사게는 유다 진영에서 나온 사람들에게 앗수르 왕의 명을 전달합니다.

    "너희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은 너희들을 구원할 수 없으므로 속히 항복하라.
    그러면 너희들은 지금처럼 평안하게 지낼 수 있게 될 것이다.
    너희가 믿는 애급은 부러진 갈대 지팡이와 같은 나라이며 너희들에게 말 2천마리를 줄지라도 너희들에게는 그 말을 타고 싸움에 나갈 용사들도 없지 않느냐?
    앗수르 왕이 이렇게 명하는 것은 이미 여호와 하나님께서 앗수르 왕에게 유다를 침략하여 쳐부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유다 진영의 사람들이 랍사게에게 이런 내용을 아람어로 말하고 히브리말로 말을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합니다.

    왜냐하면 유다 백성들이 이런 내용을 듣게 되면 백성들이 동요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랍사게는 내가 앗수르 대왕의 명을 전하는 것이 너희들처럼 궁내대신들과 귀족들만 듣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모든 백성이 들어야 한다면 히브리말로 똑같이 전달합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앗수르 대왕은 유다 백성들에게 너희들이 섬기는 여호와가 정말 너희들을 구원할 수 있겠느냐? 하며 유다와 여호와 하나님을 조롱하는 사건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모든 백성들에게 앗수르 왕의 명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랍사게를 만나러 나갔던 대신 "엘리아김"과 서기관 "셉나"와 사관 "요아"는 옷을 찢고 히스기야 왕에게 모든 사실을 보고합니다.

    이사야 36장에서 여호와를 의뢰(依賴)하는 두 가지 자세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침묵(沈默)하라(21절)

    그러나 그들이 잠잠하여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왕이 그들에게 명하여 대답지 말라 하였음이었더라.

    침묵(沈默)은 무언(無言)의 항변(抗辯)과 같습니다.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조롱하는 말을 듣고 있는 것은 유다 백성들만이 아니라 우리를 인도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두 보고 듣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을 "순종(順從)"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짊어지실 때에 말 없이 갈보리 산의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순종이란 내가 처한 환경을 인정하고 묵묵히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둘째는 옷을 찢으라(22절)

    때에 힐기야의 아들 궁내대신 엘리아김과 서기관 셉나아삽의 아들 사관 요아가 그 옷을 찢고 히스기야에게 나아가서 랍사게의 말을 고하니라.

    옷은 그 사람의 신분과 지위를 말합니다.
    대신의 신분, 서기관의 신분, 사관의 신분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이런 신분과 지위가 유다 나라를 앗수르로부터 구할 수 없다는 무능력의 표현입니다.

    옷을 찢는다는 것은 회개(悔改)하는  것입니다.

    옷을 찢으므로 그동안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오지 못한 모든 잘못들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아가겠다는 고백이며 결단입니다.
    그러므로 당당하게 앗수르 대왕의 명령에 침묵하며 회개하면서 맞설 수 있습니다.

    오늘날 모든 교회와 성도들은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전염병 세력과 맞서고 있습니다.
    의학적인 처방으로 백신 주사를 맞아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필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 마음에 합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할 때 지금 죽으나 나중에 죽으나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이므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상태로 죽어 주님 계신 낙원으로 이끌려 갈 것입니다.
    그러나 백신 주사를 맞고 지금은 건강하게 살았지만 하나님 마음에 합한 믿음이 아니었다면 나중에 죽을지라도 그 죽음은 부끄러운 죽음이 될 것입니다.

    여호와를 의뢰한다는 것은

    역대하 32:8
    저와 함께하는 자는 육신의 팔이요 우리와 함께하는 자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반드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리라 하매 백성이 유다 왕 히스기야의 말로 인하여 안심하니라.

    첫째, 내가 처한 환경과 상황을 인정하고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순종(順從)이라고 합니다.
    순종에는 나는 힘이 없습니다.
    순종에는 나는 힘이 없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능력이 있습니다 라는 믿음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 이제부터는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담대함이라고 합니다.
    담대함을 다른 말로 용기(勇氣)라고 합니다.
    용기에는 무서운 힘이 있습니다.
    평소에는 그러한 힘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위험한 상황과 위기가 닥쳐올 때 그 힘이 솟아납니다.

    풀무불에 던져질 때 아벳느고와 사드락과 메삭은 담대하게 풀무불속으로 던짐을 받았습니다.
    사자굴에 던져지는 다니엘도 담대하게 사자굴속으로 던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담대하게 그 고통과 아픔과 수치를 견디셨습니다.
    돌에 맞아죽는 처참한 현장에소서 스데반 집사는 오히려 돌을 던지는 무리들을 향하여 저희들을 용서해 달라고 담대하게 기도했습니다.
    .
    오늘날도 마찬가지라고 하겠습니다.
    담대한 믿음은 어렵고 힘든 환경을 인정하고 순종합니다.
    주님만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순종할 때 새 힘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늘도 이러한 힘을 의지하여 코로나 바이러스와 같은 환경에서 승리하는 삶을 보여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믿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가 믿는 것은 무엇입니까?
    믿음 소문가짜 뉴스에 의해서 흔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상에 전파된 원인의 주범이 마치 교회라고 언론에서 보도하므로 심지어 교인들이 전염병을 일으키고 전파하는 못된 단체와 사람들처럼 세상으로부터 조롱을 받습니다.
    이런 것이 소문이며 가짜 뉴스라고 하겠습니다.

    앗수르 대왕이 파견한 랍사게의 말처럼 여호와 하나님이 너희를 구원할 수 있는가?
    애급을 의지하고 앗수르를 물리치려고 하였으나 애급이 힘이 없지 않는가?
    이 세상 어떤 것도 인생의 위기를 온전하게 해결할 수 없습니다.

    시편 146편의 저자는 이와 같이 우리에게 교훈합니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시 146:3-4, 개역개정 성경)

    지금 당장 우리의 눈 앞에는 세상이 더 거대하고 세상이 더 힘이 있어 보입니다.
    돈으로 못할 일이 없어 보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하나님보다도 세상이 훨씬 더 현실적이고 강력해 보입니다.
    마치 남유다 백성들과 히스기야의 눈 앞에 진을 치고 있는 수많은 앗수르 군대와 같이 말입니다.

    하지만, 최후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 결과는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앗수르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사라지고 맙니다.
    특히 이 사건 이후에 앗수르왕 산헤립에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고향으로 돌아간 후, 자녀들에게 살해당하고 맙니다.
    자기들이 비난했던 애급처럼 앗수르도 힘없는 갈대 지팡이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국 흙이요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도 결국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겪는 믿음의 위기는, 세상과의 대결에서 승리해야 하는 때가 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은혜를 기억할 수 있는 바로 그 시점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오늘 하루를 살아가면서 우리를 향한 다양한 유혹과 비난의 손가락질이 있을 것입니다. 그 때, 우리가 할 일은, 히스기야와 같이 끝까지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일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역전시켜 주십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능히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나의 힘이 되시는 여호와를 의지함으로, 오늘 우리의 삶을 승리로 이끌어 나가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도움은 오직 여호와 뿐이십니다.  

    하나님, 앗수르의 랍사게가 교만하게 외쳤던 그와 같은 말을 오늘 우리들도 살아가면서 자주 듣습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의지하라는 유혹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능력하다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갈등과 고민 가운데 오늘을 우리는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확신과 믿음을 더하여 주옵소서.
    세상을 믿음으로 이겨 나가게 하시고 목자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월 16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이사야 35:1∼10
    ♦ 묵상을 위한 주제 : 구속(救贖)함을 얻은 자(者)(9절)
    ♦ 성구 : 거기는 사자(獅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救贖)함을 얻은 자(者)만 그리로 행(行)할 것이며.   

    이사야 35장은 “새 세계(世界)에 대한 회복(回復)”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사야서의 구성을 다시 한 번 더 강조합니다.
    이사야서의 구성을 살펴보면 볼수록 매우 흥미롭습니다.

    제1이사야서 : 1장-39장

    제2이사야서 :40장-66장

    제1이사야서는 내용적으로는 35장까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사야서 36장부터 40장까지는 예언서의 내용이 역사서와 거의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사야 36장
    열왕기하 18:23-27, 역대하 32:1-9
    이사야 37장열왕기하 19:1-7
    이사야 38장 열왕기하 20:1-11, 역대하 32:24-26
    이사야 39장 열왕기하 20:12-19
    이사야 40장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라(3절)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현대인의 성경) 어떤 사람의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너희는 여호와를 위하여 광야을 준비하라. 너희는 우리 하나님을 위하여 사막에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왜 역사서의 내용을 예언서에 첨부하였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된 말씀은 반드시 역사에서 실현되며 나타날 사건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묵상(黙想)할 주제(主題)는 “오직 구속(救贖)함을 얻은 자(者)만 그리로 행(行)할 것이라(But only the redeemed will walk there.)” (9절).

    이 말씀은 곧 성경의 결론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구속(救贖)이란 두 가지의미로 말씀합니다.

    첫째는 죄 사함에 대한 의미(구원 에베소서 1:17, 구속 골로새서 1:14)

    에베소서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죄 사함을 받았으니.

    골로새서 1:14
    그의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죄 사함을 얻었도다.

    구속이란 말은 이처럼 우리의 영적 구원과 연결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속이란 단어를 보편적으로 구원과 결부시키는 일에 제한하고 더 이상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놀랍게도 성경에서 이 구속이란 낱말이 구원에만 국한하여 사용된 것이 아니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두 가지 구절만 인용하겠습니다.

    둘째는 부활의 의미(로마서 8:23, 에배소서 4:30)

    로마서 8: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이때 구속이란 영적 구속, 우리의 죄 사함에서 오는 구원을 의미해 주는 말이 아닙니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란 말씀이 이 사실을 증거해 줍니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란 영적 구속인 구원을 의미하지만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고 하는 구속은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소망으로 기다리는 다른 또 하나의 구속으로 ‘부활’을 의미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 몸의 구속’이라 말은 그리스도인들의 육적 구속을 의미하는 부활을 말합니다.

    에베소서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구속의 날까지’란 말씀도 로마서 8:23의 말씀과 같은 의미로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다’는 말은 부활의 날까지 성령의 인치심을 받았다는 말로 부활의 날까지 우리의 구원의 보장을 의미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거룩한 길(성결한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 길은 “대로(大路, highway)”이며 “거룩한 길(the Way of Holiness)”입니다(8절).

    첫째는 깨끗한 사람 - 깨끗지 못한 사람(unclean)(8절)

    출애굽기 15:13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둘째는 지혜로운 사람 - 우매한 사람(wicked fools)(8절)

    시편 14:1a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시편 53:1a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깨끗한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을 “여호와의 속량(贖良)함을 얻은 자(者)”라고 합니다(10절).

    이러한 구속의 의미가 요한계시록에서도 다시 강조됩니다.

    요한계시록 14:1-5

    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 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2.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
    3.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 사만 사천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4.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5.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구속이란 죄 사함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첫 열매가 되는 부활로 이어지는 영원한 생명의 삶을 약속한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16-19에서 이렇게 강조합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금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구속이란 단어가 두 가지로 사용됩니다.

    기독교
    에서 사용하는 구속(救贖)

    구속(救贖) : 건질 구(救), 바칠 속(贖)(redemption)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그 흘린 피로 인간의 죄를 대신 씻어 구원한 일

    법정에서 사용하는 구속(拘束)

    구속(拘束) : 잡을 구(拘), 묶을 속(束)
    "세상에 얽매임”이란 뜻으로 형사 소송법에 의하면 “판사가 피고인이나 피의자를 강제로 일정한 장소에 잡아 가두는 일

    구속(救贖)이란 단어는 구원(救援), 속량(贖良), 대속(代贖) 이란 단어도 같은 의미로 사용합니다.

    구원(救援) :  

    대속(代贖) : 대신 대(代), 바칠 속(贖)(redemption,  구원, 구함)
    - 남의 죄를 대신하여 받음

    속량(贖良) : 속죄할 속(贖), 어질 량(良)(ransome, 몸 값, 배상금)
     1. 몸값을 받고 노비의 신분을 풀어 주어서 양민이 되게 하다. 또는 속신하다
     2. (기독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인류의 죄를 대신 씻어 구원하다. 또는 속죄하다


    “속량(贖良)”이란 “속죄할 贖, 좋을 良”이란 훈(訓)으로 “몸값을 받고 종을 놓아주어 양민(良民)이 되게 하는 것”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기독교(基督敎)에서는 “예수께서 인류(人類)의 죄(罪)를 대신(代身)하여 십자가(十字架)에 못 박혀 죽음으로써 대속(代贖)한 것”을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詛呪)를 받은바 되사 율법(律法)의 저주(詛呪)에서 우리를 속량(贖良)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詛呪) 아래 있는 자(者)라 하였음이라.  


    2월 15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이사야 34:1∼17
    ♦ 묵상을 위한 주제 : 자세히 읽어보라(16절)
    ♦ 성구 :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  

    이사야 13장부터 23장까지는 유다 주위 열 개 나라 대한 심판 예언입니다.
    바벨론. 모압, 다메섹, 구스, 애급, 아스돗(블레셋), 두마, 아라비아, 두로와 다시스

    이사야 28장부터 35장까지는 ‘화와 복’에 대한 예언입니다.
    내일 읽게 될 이사야 35장장차 도래할 메시아 나라의 영광스러운 모습에 대한 예언입니다.

    이사야 34장심판 예언에 대한 종합 요약이며 동시에 에돔을 들어서 말하는 구체적인 예라고 하겠습니다.
     
    이사야 34:1-8 : 장차 임할 하나님의 날에 심판이 있을 것을 예언합니다.
    이사야 34:9-17 : 하나님의 심판 이후에 이 땅의 최후의 모습에 대해서 예언합니다.

    특히 16절은 많은 오해를 일으키는 구절입니다.
    그 이유는 34장 전체 내용에서 16절을 살피지 않고 16절 한 구절만을 선택하여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오해했던 부분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 이때 여호와의 책을 "성경 책" 이라고 합니다.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 이것들을 "성경에 들어 있는 말씀"이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 -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그의 신 즉 성령께서 성경으로 만드셨다고 합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해석이 이제까지 오해를 일으켰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34장 전체의 문맥에서 16절을 읽어야 바른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사야 34장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34:1-10 : 만군(萬軍) 즉 모든 군대가 살육(殺戮)을 당하여 땅이 피로 물들게 될 것이다.
    34:11-15 : 사람 대신에 각종 들짐승들과 각종 새들이 그 땅을 차지하여 살게 될 것이다.
    (당아, 고슴도치, 부엉이, 까마귀, 시랑, 타조, 들짐승, 이리, 숫염소, 올빼미, 독사, 솔개)

    이러한 내용이 전개된 후에 이어서 16절이 소개됩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  

    이것들이 지시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가 안 된다면 다른 번역 성경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영어에 익숙하다면 영어 성경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어에 익숙하지 않다면 한글로 번역된 다른 번역 성경들을 참조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예를 들면,

    (현대인의 성경)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아라. "이 동물들 중에"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니 이것은 여호와께서 그렇게 되도록 명령하셨고 성령께서 그것들을 함께 모으셨기 때문이다.

    (새번역 성경) 주님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아라. "이 짐승들 가운데서"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것이 없겠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짐승은 없을 것이다. 주님께서 친히 입을 열어 그렇게 되라고 명하셨고 주님의 이 친히 그 짐승들을 모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공동번역) 야훼의 기록을 찾아내어 읽어보아라. "이런 모든 짐승들이"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으리라. 그것들은 직접 야훼의 입에서 떨어진 분부를 받아 그의 입김으로 몰려온 것들이다.

    그런데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이것들이", 개역 개정 성경에서는 "이것들 가운데서"라고 번역합니다.
    그러므로 "이것들이"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아니라 11절에서부터 15절 사이에 기록된 각종 짐승들 새 종류들을 말합니다.


    16절. 너희는 여호와의 책에서 찾아 읽어보라 이것들 가운데서 빠진 것이 하나도 없고 제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령하셨고 그의 영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

    이 말씀은 많은 오해를 일으켰던 말씀입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책에서 찾아서 읽어보라(자세히 읽어보라) 구약과 신약이 짝이 맞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성령님이 모으셨기 때문" 이라고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르지 못한 해석인 결정적인 이유는 ‘여호와의 책’을 ‘성경’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당시까지는 글로 쓰여진 성경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전후 문맥을 잘 살펴야 합니다.

    지금까지 황폐화된 에돔에 짐승들이 살 것이라고 말씀하시다가 갑자기 성경이 짝이 맞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제 짝이 없는 것이 없다는 말의 의미는 17절을 보면 금방 이해가 됩니다.

    17절. 여호와께서 그것들을 위하여 제비를 뽑으시며 그의 손으로 줄을 띠어 그 땅을 그것들에게 나누어 주셨으니 그들이 영원히 차지하며 대대로 거기에 살리라.

    (현대인의 성경) 여호와께서 그 땅을 측량하여 그 동물들에게 나누어 주셨으므로 그것들이 그 땅을 영원히 소유하여 거기서 대대로 살 것이다.


    하나님께서 제비를 뽑아서 에돔에 거할 짐승들을 뽑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짐승들 중에서 암수 짝이 없는 것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뽑힌 짐승들이 대대로 거기에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다시는 에돔이 재건되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마지막까지 하나님께 등을 돌린 나라들의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그 예를 에돔을 들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돔은 야곱의 쌍둥이 형, 에서의 별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에돔 족속에게는 유대인이 피가 섞여있습니다.
    비록 에돔에게 유대인의 피가 흐르고 있을지라도 심판의 한 사례가 된 것은 하나님을 향한 불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으로 향할 때, 모세가 가데스에서 에돔 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당신의 땅을 통과하게 하소서" 하고 간청하였으나 에돔 왕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민수기 20:14-21)

    오바댜 에돔에 대한 것이데, 예루살렘이 이방인들에 의해서 유린을 당할 때에 가서 돕지는 못할망정,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에돔이 그만큼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의 겉 모습은 유대인과 비슷했을지라도, 그 속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과 같았습니다. 

    세상의 마지막이 아니어도, 우리는 우리 각자의 마지막을 먼저 맞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과 믿음이 비극적인 결말을 맞지 않으려면, 우리의 속사람이 언제나 하나님을 향해야 합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면, 세상적으로는 아무리 연약하고 보잘 것 없어 보여도 우리는 영원한 시각에서 해피엔딩을 맞게 될 것입니다.

    거룩한 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일어나면 그 성은 거룩한 성이 아니라 온갖 들짐승과 각종 새들이 거주하는 곳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심판이 임하기 전에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는 메시지라고 하겠습니다.

    거룩한 성을 다양하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개인
    둘째는 가정
    셋째는 교회
    넷째는 국가

    이렇게 적용하므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 전에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수 있는 믿음을 회복하기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5:14-17
    그리스도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 나타날 징조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개인의 심령에 임할 때

    개인이 이러한 심판의 대상이 되면 아무리 좋은 환경과 좋은 시설에 머물지라도 그곳은 생지옥과 같을 것입니다.

    둘째, 가정에 임할 때

    천국과 같은 가정은 천국의 기쁨은 완전히 사라지고 미움과 불신과 증오와 서로를 탓하는 원망과 불평만이 가득할 것입니다.

    셋째, 국가에 임할 때

    공의로운 나라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 그 나라는 입법과 사법과 행정의 질서가 파괴되고 오직 권력의 힘에 의한 욕망이 나라를 흔들므로 그 나라가 든든하게 세워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개개인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이 말씀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이 천국 경험을 이루고 그와 같은 경험이 나라 안과 밖으로 전파되어 이 세상을 하나님이 처음 만드셨던 땅과 하늘로 회복될 때 새 하늘과 새 땅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 묵상의 주제가 “여호와의 책(冊)을 자세히 읽어보라(Look in the scroll of the LORD and read)”

    이사야서 34장 16절은 오해를 일으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책"을 "성경 책"이라고 해석하는 것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다"는 것에서 "이것들"을 "성경에 들어 있는 말씀"이라고 해석하는 것
    이와 같은 해석은 마치 구약과 신약에서 모든 것들이 짝을 이루고 있으므로 마치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사야 34장은  여호와께서 만국(萬國)을 향하여 진노하시며 만군(萬軍)을 향하여 분(憤)을 내시어 그들을 진멸(殄滅)하신다는 내용입니다.

    만군(萬軍)이 모두 살육(殺戮)을 당하여 땅이 피로 물들고 불모지(不毛地)가 되면(34:1∼10), 사람 대신에 당아(사다새), 고슴도치, 부엉이, 까마귀, 시랑(승냥이), 타조, 이름 모를 들짐승, 이리, 숫염소, 올빼미, 독사, 솔개와 같은 짐승들이 그 땅을 차지하고 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34:11∼15).

    그러면서, 16절에서 “너희는 여호와의 책(冊)을 자세히 읽어 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라고 말씀이 이어집니다.
    여기에서 “이것들”이란 11∼15절에 언급된 “짐승들”을 가리킨다는 것을 다양한 번역(飜譯)과 주석(註釋)을 참조하여 살펴봅니다. 

    GNB 영어성경에서는 “이 피조물들(these creatures)”
    델리치의 주석에서도 “피조물들(the creatures)”이라고 합니다.

    존 칼빈은 “짐승들”
    박윤선 박사는 동물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후일에 반드시 그 땅 (에돔)을 점령할 것이라고 주석합니다.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위에서 예언된 짐승들을 명하여 장차 황폐한 에돔 땅에 살도록 명령하시겠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만드셨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신, 곧 하나님의 영(靈)이 장차 그 짐승들을 에돔 땅에 모으시리라는 뜻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세상이 마치 사람이 아니라 짐승들이 모여 살아가는 것같을지라도 그 안에서 은혜를 누리려면 예수님을 찾아야 하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에 위로가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골로새서 2:2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분명한 의미를 이해한 후에 이제는 성견 전체에서 의미하는 것을 확장시켜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문맥(文脈)상으로는 분명히 짐승들이 짝을 이룰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성경(聖經)을 읽으면서 좀 더 깊은 은혜(恩惠)를 찾는다면 그것은 성경(聖經)에 감추어진 보화(寶貨)를 찾아야 합니다.
    그 보화(寶貨)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보화(寶貨)를 비밀(秘密)이라고 말합니다.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로새서 1:26∼27)


    날마다 함께 읽어가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보화(寶貨)와 같이 감추어진 비밀(秘密)이신 우리 주(主)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우리들의 삶에 변화(變化)를 일으켜 이 세상(世上)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세상(世上)으로 가꾸어 갑시다.


    어떤 설교자는 이 구절이 마치 성서영감설(聖書靈感說)의 근거로 오해합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라"고 했을 때, 여기 '여호와의 책'은 곧 '성경 책'이라는 것이다.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다"고 할 때, 여기 '이것들'은 성경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빠진 것이 없이 다 들어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다"는 것은, 구약과 신약의 말씀이 다 짝을 이룬다거나,
    종교개혁자들이 말한 '성경은 성경으로 푼다'는 원칙을 말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의 어느 한 곳에서 잘 이해되지 않는 구절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 해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는 성경에 쓰여진 말씀은 바로 여호와께서 입으로 직접 명령하신 것을,
    사람이 받아 쓴 것을 말한다는 것이다.
    또 "그의 신(神)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고 한 것은 성경의 말씀들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수집된 것을 말한다는 것이다

    이사야 34장은 여호와께서 만국(萬國)을 향하여 진노하시며 만군(萬軍)을 향하여 분(憤)을 내시어 그들을 진멸(殄滅)하신다는 내용입니다. 만군(萬軍)이 모두 살육(殺戮)을 당하여 땅이 피로 물들고 불모지(不毛地)가 되면(34:1∼10), 사람 대신에 당아(사다새), 고슴도치, 부엉이, 까마귀, 시랑(승냥이), 타조, 이름 모를 들짐승, 이리, 숫염소, 올빼미, 독사, 솔개와 같은 짐승들이 그 땅을 차지하고 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34:11∼15).
    그러면서, 16절에서 “너희는 여호와의 책(冊)을 자세히 읽어 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라고 말씀이 이어집니다. 여기에서 “이것들”이란 11∼15절에 언급된 “짐승들”을 가리킨다는 것을 다양한 번역(飜譯)과 주석(註釋)을 통하려 살펴봅니다. 

    성경을 읽을 때에 어느 한 구절만 뽑아서 마치 그 말씀이 성경 전체의 내용인 것처럼 가르치거나 교훈하는 것은 주의해야 합니다.

    먼저 문맥에서 정확한 이해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용을 파악한 후에 폭넓게 적용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2월 13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이사야 33:1∼24
    ♦ 묵상을 위한 주제 : 우리의 왕(22절)
    ♦ 성구 : 대저(大抵)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裁判長)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律法)을 세우신 이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王)이시니 그가 우리를 구원(救援)하실 것임이라. 

    이사야 33장은 "화(禍)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이때 "화(禍)"는 "재앙(災殃)"을 말합니다.
    문장 첫 단어가 히브리어로 "호이(화 있을진저)" 라고 시작합니다(이사야 28장, 29장 슬프다, 30장, 31장, 33장).
     
    여호와( יְהֹוָ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모세에게 자신을 소개하셨는데 진짜 여호와의 의미는 무엇일까?

    히브리어 알파벳에는 고유의 뜻이 있다.
    어떤 형상을 이미지화했는데 그 의미를 살펴보면 놀라운 비밀이 드러난다.
    여호와의 자음 네개의 뜻을 보면

    요드(י )는 손(יוֹד hand  יָד )의 의미 / 로마문자 Y
    헤(ה)는 숨구멍(הָא  הֵא)인데 보라(lo )의 의미 /  로마문자 H
    ​와우(ו  )는  갈고리( וָו hook)를 의미 / 로마문자 W
    헤( ה )는 역시 보라( lo )의 뜻이 있다. / 로마문자 H

    그래서 여호와의 자음 네게를 종합해보면 hand lo hook lo 이다.
    "손 보라 갈고리 보라"
    여기서 보라(lo )는 탄식이나 놀라움의 탄성을 지르는 감탄사이다.
    혹자는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손을 보라 못을 보라 해서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말한다.

    자음속에 숨겨진 숫자로 본다면י (5) ה (6) ו (5) ה (10)  인데   연상할 수 있는 숫자가 없다.
    여호와라는 이름의 자음속에 숨겨진 손을 보라 갈고리를 보라는 이미지에서 그리스도를 연상해낸다.

    신명사문자(神名四文字, τετραγράμματον)
    하나님을 뜻하는 여호와 또는 야훼의 이름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네 글자(יהוה)이다. 
    로마자는 "YHWH"로 적는다.

    신성사문자(神聖四文字) : YHWH

    하나님의 이름을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히브리 알파벳은 자음만 있고 모음이 없기 때문에 자음만으로 기록된 문자(로마식 문자로 표현할 때 YHWH)에 모음을 어떻게 적용하느냐에 따라 이름이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이름은 모음이 없기 때문에 구전(口傳)으로 전해집니다.
    문제는 당시 자음 문자에 모음을 넣어 발음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기록에 의하여 발음을 정합니다.
    그 이유는 십계명의 제3계명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에 YHWH(신성사문자, 신명사문자)라는 문자만 나오면 감히 이 문자를 읽지 못했다고 합니다.
    신성사문자가 나오면 그 부분에서는 침묵합니다.
    율법을 읽다가 침묵하면 잘못 오해할 수 있어서 "아도나이(Adonay)"라는 말로 대신했는데 이는 주(主)라는 뜻"입니다.
    아도나이라는 모음(아 오 아 이)을 YHWH에 적용한 결과 "여호와"라고 발음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훨씬 뒤에 학자들이 고 문헌 연구를 하다가 이방인의 문헌에 ‘이스라엘에는 야훼(Yahweh)라는 신이 있다’라고 기록 된 것''을 보고 ‘야훼’에 있는 자음이 히브리 문자의 YHWH와 같으므로 YHWH의 발음을 ‘야훼’로 읽기로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서 공동번역 성경에는 ‘여호와’로 기록하지 않고 ‘야훼’라고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는 누구신가?
    말할 것도 없이 여호와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43:15 - 창조자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자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 왕이니라.
    I am the LORD, your Holy One, Israel's Creator, your King.

    이사야 43:11, 14 - 구속자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I , even I, am the LORD, and apart from me there is no savior.

    너희의 구속자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위하여 내가 바벨론에 보내어 모든 갈대아 사람으로 자기들의 연락하던 배를 타고 도망하여 내려가게 하리라.
    This is what the LORD says-- your Redeemer, the Holy One of Israel: "For your sake I will send to Babylon and bring down as fugitives all the Babylonians, in the ships in which they took pride.





    첫째, 창조주 하나님(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엘로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둘째, 구속주 하나님(이사야 43:14) (참조 / 41:14, 44:6, 24, 47:4, 48:17, 54:5, 8, 59:20, 60:16, 63:16)

    너희의 구속자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여호와가 말하노라.

    시편 19:14,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셋째, 우리의 왕(이사야 33:22)

    대저(大抵)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裁判長)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律法)을 세우신 이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王)이시니 그가 우리를 구원(救援)하실 것임이라. 

    재판장(소푸테누) : 이사야 11:3-5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공의
    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

    공의에 입각하여 백성들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신다.
    오늘날의 사법부(司法府)와 같다.

    율법을 세우신 이(메호케케누) : 신명기 33:21

    그가 자기를 위하여 먼저 기업을 택하였으니 곧 법 세운 자의 분깃으로 예비된 것이로다 그가 백성의 두령들과 함께 와서 여호와의 공의이스라엘과 세우신 법도를 행하도다.

    삶의 규범을 제정하신다.
    오늘의 입법부(立法府)와 같다.

    우리의 왕(王)(말루케누) : 사무엘상 12:12

    너희가 암몬 자손의 왕 나하스의 너희를 치러 옴을 보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너희의 왕이 되실찌라도 너희가 내게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를 다스릴 왕이 있어야 하겠다 하였도다.

    이스라엘을 통치하신다.
    오늘날의 행정부(行政府)와 같다.

    현대적 의미의 입법(立法), 사법(司法), 행정권(行政權)을 모두 갖추고 있다.


    이사야 33:2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 환난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소서.

    * 앙망(仰望) 하오니 /  "카와" 참을성 있게 기다린다.
    어미 새가 먹이를 물어다 줄 때 새끼들이 둥지에서 어미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첫째, 은혜를 베푸소서 : 우리는 받을 자격이 없는 존재
    둘째, 앙망하오니 : 간절히 믿고 기다립니다
    셋째, 아침마다 : 일정한 시간, 어려운 시간, 정성을 드릴 수 있는 시간
    넷째, 팔이 되시며 : 능력이 되신다
    다섯째, 구원이 되소서 : 문제룰 해결하여 주신다.

    (예화) 예로부터 부모보다 자식이 먼저 세상을 떠나면 죽은 자식을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고 합니다.
    아주 비통한 슬픔을 말합니다.
    그런데 신앙이란 죽은 자식을 부모의 가슴에 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슴에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슴에 묻으면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방법으로 되돌려 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방법보다 더 놀라운 방법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아들이 부모보다 세상을 일찍 떠났을 때 그 아들이 구원할 생명들을 하나님은 또 다른 방법으로 더 많은 생명을 반드시 구원하실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가슴에 묻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가슴에 묻을 수 있는 분명하고 확실한 신앙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예화 전개)
    큰 은혜를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받은 은혜를 잘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적게 주셔서 문제가 되었던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여전히 은혜가 부족한 것은 무엇때문일까요?
    받은 은혜를 지키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충만하게 받았을 때는, 마음에 기쁨이 가득차고, 모든 죄악에서 이긴 것 같고, 어떤 시험도 이길 것 같고, 모든 이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런 상태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은혜의 생활을 유지하여야합니다.
    승리의 순간은 짧고, 실패는 길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은혜는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회사원이 근무 시간에 틈이 나면 인터넷을 열어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하루는 목사님에게 "나는 매일 어디서나 성경을 읽을 수 있어서 참 행복합니다!"
    그 청년의 이야기를 듣고 목사님은 "하나님은 그렇게 성경을 읽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회사에서 근무하는 시간은 회사를 위한 시간입니다.
    만일 당신이 회사 근무 시간에 성경을 읽는다면 그것은 회사의 시간을 도적질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깨우쳤다고 합니다.

    오늘도 우리들에게 맡겨진 생명과 시간을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모습으로 바르게 사용하므로 은혜를 은혜롭게 지켜갈 수 있는 거룩한 주의 사람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우리 성경에는 “여호와”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확실한 발음은 아닙니다.
    히브리 문자는 원래 자음밖에 없습니다.
    모음은 구전(口傳)으로 내려오는 대로 자음에 부쳐서 읽었습니다.
    ‘여호와’라는 문자도 자음만 기록되어 있는데 유대인들은 십계명 제 3계명에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에 YHWH( 神性四文字)라는 문자만 나오면 감히 이 문자를 읽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다른 표현 즉 ‘아도나이’(Adonay)라는 말로 대신했는데 이는 주(主)라는 뜻입니다.

    후대의 학자들이  YHWH(神性四文字)의 모음을 알 길이 없어 ‘아도나이’의 모음을 따서 YHWH에 라틴어 식의 결합을 한 결과 ‘여호와’라는 발음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훨씬 뒤에 학자들이 고 문헌 연구를 하다가 이방인의 문헌에 ‘이스라엘에는 야훼(Yahweh)라는 신이 있다’라고 기록 된 것''을 보고 ‘야훼’에 있는 자음이 히브리 문자의 YHWH와 같으므로 YHWH의 발음을 ‘야훼’로 읽기로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서 공동번역 성경에는 ‘여호와’로 기록하지 않고 ‘야훼’라고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BC 3세기경에 유대 학자 70명(정확히는 유대인 장로 72인)이 구약성경을 그 당시 세계 공용어였던 헬라(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 있습니다. 이를 LXX(70인 역)이라 합니다.

    LXX 구약 성경 번역본(飜譯本)에는 YHWH를 발음 표기(表記)하지 않고 퀴리오스(kyrios. 主라는 뜻)라는 단어로 대치(代置)하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가능성은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지만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기록하면서 그 속엔 수많은 구약성경의 인용구(引用句)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인용구를 보면 YHWH의 발음을 알 수 있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신약성경에는 구약성경을 인용할 때 YHWH를 하나같이 ‘주(主)’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이 원칙에 의해 이번에 새로 번역된 ‘포준 새 번역’성경에는 구약 성경에 나온 YHWH를 ‘주’로 번역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YHWH라는 하나님 호칭은 그 확실한 발음을 아직까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갈라디아서 4:6-7)
    선지자(先知者) 이사야가 활동(活動)하던 시기(時期)는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패망(敗亡)하기 전(前) 유다 왕 웃시야 때부터 북 이스라엘이 패망(敗亡) 이후(以後) 남 유다 왕 히스기야 때까지 활동(活動)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活動)하던 때에는 앗수르가 막강(莫强)한 힘을 가지고 중동(中東) 지역(地域)에 영향력(影響力)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先知者)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 선지자(先知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른 나라들과 같이 사람으로 자신들의 왕을 삼으려고 했습니다(사무엘상 8장).  그리고 결국 사람으로 왕을 삼은 것에 대한 결과는 이스라엘의 멸망(북왕국 이스라엘, 열왕기하 17장)과 남왕국 유다의 멸망(열왕기하 24장, 역대하 36장)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자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다시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살리라" 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고 돌이키지 않아 멸망하였습니다(열왕기하 17:13-14, 신명기 5:32-33, 느헤미야 9:29).

     그 후, 다시금 이스라엘과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만왕의 왕되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지만 오히려 그 왕을 알아보는 자가 없었고, 오히려 멸시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이사야 9:6, 요한복음 12:13, 마태복음 27:35-37, 41-4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고(사도행전 1:3), 승천하셨으며(사도행전 1:9-10), 이제 곧 다시 이 세상에 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사도행전 1:11).  그 때는 첫 번째 오셨을 때와는 다르게 심판의 권세를 가진 만왕의 왕으로 오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태복음 16:27, 요한계시록 22:10-12).

     우리는 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사단, 마귀, 귀신들은 이 세상에서 우리를 예수님으로 왕 삼지 못하게 하려고, 어떤 자들에게는 환란과 죽음의 두려움으로, 어떤 자들에게는 이 세상의 즐거움과 쾌락으로, 어떤 자들에게는 이 세상의 신기한 일들로, 어떤 자들에게는 이 세상의 먹고 마시는 것과 재물로, 어떤 자들에게는 권세로, 어떤 자들에게는 이 세상의 지혜와 지식 등으로 우리를 미혹합니다(마태복음 24:24, 디모데전서 4:1, 요한계시록 12:9).  마치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우리를 속입니다.

    사단, 마귀, 귀신들은 이 세상이 중심이 되어야 하고, 사람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그것의 결국은 이전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멸망뿐입니다(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


    만왕의 왕 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통하여 새 생명을 주셨고(고린도후서 5:15-17), 눈물도 없고 사망도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는 천국을 예비해 주셨을뿐만 아니라(요한계시록 21:4, 요한복음 14:2-3)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마태복음 19:29).  우리에게 주어지는 영광은 이 세상의 것과는 감히 비교할 수조차 없다고 하셨습니다(로마서 8:18).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선택은 분명합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은 이제 나그네와 행인과 같은 삶입니다(히브리서 11:13-16).  나그네와 행인이므로 비록 우리의 몸은 여기에 있지만 마음만은 우리의 왕 되신 예수님께 가 있고, 만왕의 왕 되신 예수님께서 참된 진리로 다스리시는 그 나라만을 사모합니다(베드로후서 3:11-13).  오직 그 나라에 가는 것만이 우리의 소망이고 희망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행하든지, 우리의 왕 되신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의지하며(골로새서 3:17), 간절한 마음으로 성경말씀을 읽고(사도행전 17:11, 시편 1:1-3), 즐거이 그 말씀을 좇아 살아가는 것이 마땅합니다(시편 110:3).  이는 우리의 시민권이 예수님께서 다스리시는 저 천국에 있기 때문입니다(빌립보서 3:20)!


    아멘,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 (요한계시록 22:20)


    ♦ 2월 13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이사야 33:1∼24

    ♦ 묵상을 위한 주제 : 우리의 왕(22절)

    ♦ 성구 : 대저(大抵)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裁判長)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律法)을 세우신 이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王)이시니 그가 우리를 구원(救援)하실 것임이라.  


    선지자(先知者) 이사야가 활동(活動)하던 시기(時期)는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패망(敗亡)하기 전(前) 유다 왕 웃시야 때부터 북 이스라엘이 패망(敗亡) 이후(以後) 남 유다 왕 히스기야 때까지 활동(活動)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活動)하던 때에는 앗수르가 막강(莫强)한 힘을 가지고 중동(中東) 지역(地域)에 영향력(影響力)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왕(王)(the LORD is our king)”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재판장(裁判長)이 되는 나라가 세워지기를 위하여 기도(祈禱) 합시다.  


    세상(世上)의 판결(判決)은 이미 어긋났기에 공의(公義)의 하나님께서 재판장(裁判長)이 되신다면 분쟁(紛爭) 중에 있는 어떤 재판(裁判)도 법(法)대로 질서(秩序)를 되찾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의 왕(王)이 되실 때 입법(立法), 사법(司法), 행정(行政), 삼권(三權)의 수장(首長)이 되셔서 완전(完全)한 통치(統治)로 이 땅의 무질서(無秩序)를 바르게 다듬어 갈 것입니다. 


    타락(墮落)한 세상(世上)을 향(向)하여 이사야 33장은 “화(禍) 있을진저”로 시작합니다. 매우 안타까워 슬퍼할 때 사용(使用)하는 감탄사(感歎詞)입니다. 32장을 제외하고 28장부터 33장까지 제일 첫 단어가 동일하게 “화(禍) 있을진저” 입니다. 


    33장에서 ‘화(禍)’의 대상은 1차적으로는 이스라엘을 학대(虐待)하고 위협(威脅)하는 앗수르 입니다. 2차적으로는 학대(虐待)하고 속이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가해자(加害者)는 반드시 뿌린 대로 거둘 것이라는 진리(眞理)대로 학대(虐待)와 속임을 당할 것이라고 합니다. 앗수르처럼 약자(弱者)를 학대(虐待)하고 속이는 행위(行爲)는 근절(根絶)되어야 하겠기에 이렇게 간구(懇求)합니다.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恩惠)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主)를 앙망(仰望)하오니 주(主)는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 환난(患難) 때에 우리의 구원(救援)이 되소서(2절).


    이사야 32장에서 예언(豫言)된 메시아께서 공의(公義)로 통치(統治)하고 정의(正義)로 다스릴 왕(王)에 대한 소망(所望)을 갖고 기도합니다. 


    33장은 이전(以前)과는 달리 선지자(先知者)의 예언(預言) 선포(宣布) 형식(形式)보다 마치 시편(詩篇) 기자가 하나님께 호소(呼訴)하고 간구(懇求)하듯이 시(詩) 형식에 가깝습니다. 억울(抑鬱)하게 학대(虐待)나 속임을 당할 때 제일 먼저 하나님께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지극히 존귀(尊貴)하시니 그는 높은 곳에 거(居)하심이요 정의와 공의를 시온에 충만(充滿)하게 하심이라. 네 시대(時代)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敬畏)함이 네 보배니라.(5∼6절)


    어그러진 세상(世上)에서 소망(所望)의 닻을 내려야 할 곳을 찾지 못하여 방황(彷徨)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유일한 위로(慰勞)와 평강(平康)을 약속(約束)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오늘도 힘차게 일어나 나아갑시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In this world you will have trouble. But take heart! I have overcome the world).”(요한복음 16:33b)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우리의 왕으로!
    “우리의 왕(王)(the LORD is our king)”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재판장(裁判長)이 되는 나라가 세워지기를 위하여 기도(祈禱) 합니다.  
    세상(世上)의 판결(判決)은 이미 어긋났기에 공의(公義)의 하나님께서 재판장(裁判長)이 되신다면 분쟁(紛爭) 중에 있는 어떤 재판(裁判)도 법(法)대로 질서(秩序)를 되찾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의 왕(王)이 되실 때 입법(立法), 사법(司法), 행정(行政), 삼권(三權)의 수장(首長)이 되셔서 완전(完全)한 통치(統治)로 이 땅의 무질서(無秩序)를 바르게 다듬어 갈 것입니다. 

    타락(墮落)한 세상(世上)을 향(向)하여 이사야 33장은 “화(禍) 있을진저”로 시작합니다. 매우 안타까워 슬퍼할 때 사용(使用)하는 감탄사(感歎詞)입니다. 32장을 제외하고 28장부터 33장까지 제일 첫 단어가 동일하게 “화(禍) 있을진저” 입니다. 33장에서 ‘화(禍)’의 대상은 1차적으로는 이스라엘을 학대(虐待)하고 위협(威脅)하는 앗수르 입니다. 2차적으로는 학대(虐待)하고 속이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가해자(加害者)는 반드시 뿌린 대로 거둘 것이라는 진리(眞理)대로 학대(虐待)와 속임을 당할 것이라고 합니다. 앗수르처럼 약자(弱者)를 학대(虐待)하고 속이는 행위(行爲)는 근절(根絶)되어야 하겠기에 이렇게 간구(懇求)합니다.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恩惠)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主)를 앙망(仰望)하오니 주(主)는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 환난(患難) 때에 우리의 구원(救援)이 되소서(2절).

    이사야 32장에서 예언(豫言)된 메시아께서 공의(公義)로 통치(統治)하고 정의(正義)로 다스릴 왕(王)에 대한 소망(所望)을 갖고 기도합니다. 33장은 이전(以前)과는 달리 선지자(先知者)의 예언(預言) 선포(宣布) 형식(形式)보다 마치 시편(詩篇) 기자가 하나님께 호소(呼訴)하고 간구(懇求)하듯이 시(詩) 형식에 가깝습니다. 억울(抑鬱)하게 학대(虐待)나 속임을 당할 때 제일 먼저 하나님께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지극히 존귀(尊貴)하시니 그는 높은 곳에 거(居)하심이요 정의와 공의를 시온에 충만(充滿)하게 하심이라. 네 시대(時代)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敬畏)함이 네 보배니라.(5∼6절)

    어그러진 세상(世上)에서 소망(所望)의 닻을 내려야 할 곳을 찾지 못하여 방황(彷徨)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유일한 위로(慰勞)와 평강(平康)을 약속(約束)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오늘도 힘차게 일어나 나아갑시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In this world you will have trouble. But take heart! I have overcome the world).”(요한복음 16:33b) 


    2월 12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이사야 32:1∼20
    ♦ 묵상을 위한 주제 : 성신(15절)
    ♦ 성구 : 필경(畢竟)은 위에서부터 성신(聖神)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리니 광야(曠野)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삼림(森林)으로 여기게 되리라.  

    이사야서 1장-39장 제1이사야 라고 하여 구약에 해당합니다.
    40장-66장
    제2이사야라고 하여 신약에 해당합니다.

    "이사야"
    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구원이시다"
    이사야서
    의 핵심 구절은 43장 11절입니다.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이사야 32장
    은 “메시아 통치(統治) 회복(回復)”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1절) “장차 한 왕(王)이 공의(公義)로 통치(統治)할 것”이라고 합니다.
    한 왕”은 역사적으로는 “히스기야 왕”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오늘 묵상(默想)의 주제는 "성신(聖神)"입니다.
    (15절)  필경(畢竟)은 위에서부터 성신(聖神)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리니 광야(曠野)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삼림으로 여기게 되리라.
    till the Spirit is poured upon us from on high, and the desert becomes a fertile field, and the fertile field seems like a forest.

    성신이란 한국에 기독교가 전파되얶던 초기에 성령(聖靈)성신(聖神)이라고 했습니다.
    개신교 전래 초기에는 "숨님" 이라고 번역했다.
    구약 히브리어 / 루아흐 코데쉬
    신약 헬라어 / 프뉴마
    라틴어 / 스피리투스 상투스(Spiritus Santus)

    이사야 31장과 33장은 "화 있을진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런데 32장은 "보라" 이렇게 시작합니다.
    화(禍)를 물리칠 수 있는 회복(回復)의 은혜를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회복의 은혜가 임합니다.

    첫째, 자연을 새롭게(시편 104:30) / 지구를 새롭게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When you send your Spirit, they are created, and you renew the face of the earth.

    본문에서는
    (15절) 광야가 아름다운 밭으로, 아름다운 밭은 삼림으로
    (16절) 광야에 공평이 거하며, 밭에 의가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둘째, 사람을 새롭게(에스겔 36:26∼27)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I will give you a new heart and put a new spirit in you; I will remove from you your heart of stone and give you a heart of flesh.
    And I will put my Spirit in you and move you to follow my decrees and be careful to keep my laws.

    본문에서는
    (15절)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 사람이 회복될 것을 말씀합니다.
    (18절) 내 백성이 화평한 집, 안전한 거처, 종용히 쉬는 곳에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회복의 복을 누리기 위해서
    (19, 20절) 먼저 상하고 파괴하는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그 후에 물가에 씨를 뿌려야 합니다.
    소와 나귀를 물가로 몰아가야 합니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내 안에 심어야 합니다.

    소와 나귀는 성령의 임재가 임하기 전에 야생의 사나은 기질을 갖고 있는 인간성입니다.
    이러한 야생의 기질을 물가로 몰고 가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복이 임할 것이라고 합니다.

    (예화) 영국의 귀족으로부터 트럭을 선물로 받은 인도 농촌의 귀족은 트럭을 여러 마리 말들이 끌고 다니도록 하였다.
    얼마 후 영국의 귀족이 인도의 귀족을 방문했을 때 깜짝 놀라고 말았다.
    모르기 때문에 이런 실수를 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예수를 믿으면서도 성령을 모르기 때문에 내가 믿으려고 노력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은 삼위일체(三位一體) 세 위격(位格)의 하나로서,

    삼위의 구분은 구원과 관련된 사역에서 주로 나타난다

    성부
    : 구원을 계획하신다.
    성자
    : 구원에 필요한 일을 완수하신다.
    성자의 육체적 현현(顯現)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성령
    : 성자가 완수한 구원의 은총을 구원 받을 사람에게 적용하신다.

    로마 가톨릭교회

    성령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된다’고 정의한다.
    모든 것은 결국 하나님의 예정대로 되기 때문에 개인의 의지나 행동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강하다.

    세대주의

    성부시대는 그리스도가 탄생하기 이전에는 하나님이 직접 이스라엘 백성들과 대화를 나누었던 시대
    성자시대그리스도가 탄생하여 승천할 때까지의 시대
    성령시대승천한 뒤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시대

    칼뱅주의(개혁주의)

    성령의 역할은 성자가 이룬 구속의 효력을 신자들에게 적용하는 것이다.
    구속의 효력은

    1. 죄책의 면제 : 죄에 대한 형벌로부터 면제된다.
    성자께서 신자들을 대신해서 형벌을 받았다는 믿음에 근거.

    2. 죄의 권세로부터의 해방 : 죄성(罪性)이 신자를 누르는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성자께서 신자들을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믿음에 근거.

    성공회의 성령론

    성령께서는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서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셨다.
    또한 온전한 진리로 이끄시며,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해 주시는 주님으로 믿는다.
    성령의 현존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할 때, 사랑과 조화속에서 하느님이 우리 자신과 이웃과 모든 창조물과 함께 살아갈때 알 수 있는데, 성령이 이끌어주시는 온전한 진리는 성서에 일치될 때 비로소 성령께서 가르쳐주시는 진리로 판명된다.

    “성신(聖神, the Spirit)”이란 “성령(聖靈)”을 말합니다.
    구약 시대에 성령(聖靈)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임(臨)했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부활(復活)하신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임(臨)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신(聖神)은 여호와의 신(神)입니다(이사야 11:2)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성신은 하나님의 신(神)입니다(요엘 2: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진퇴양난(進退兩難)”이란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궁지(窮地)에 빠진 상태(狀態).”를 말합니다. 왜냐하면 남왕국 유다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 제국의 위협(威脅)에 굴복할 것인가? 아니면 애급에게 도움을 구할 것인가? 아니면 이런 상황(狀況)에서 남 유다의 지도자들을 끝까지 믿으며 기다릴 것인가?

    결국(結局) 이 문제는 어떤 왕을 믿고 신뢰(信賴)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選擇)입니다. 앗수르 왕인가? 애급 왕인가? 아니면 유다의 왕인가? 그때 이사야는 “이 모든 어렵고 힘든 상황을 바로잡을 수 있는 진정한 왕은 하나님뿐” 이라고 강조(强調)합니다.

    성신(聖神)을 부어 주리니 광야(曠野)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은 삼림(森林)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15절).

    “위에서부터 영(靈)을 우리에게 부어주신다는 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사건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나오는 광야(曠野)는 죄(罪)로 말미암아 황폐(荒廢)해진 인간의 심령(心靈)을 의미합니다. 성령님께서 임하시기 전까지 인간의 심령(心靈)은 광야처럼 황폐(荒廢)합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소산(所産)을 낼 수가 없습니다. 죄로 인해 인간의 심령(心靈)에서 나오는 것은, 오직 남에게 상처를 주는 ‘가시와 찔레’와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임하면, 새로운 변화(變化)를 맞이하게 됩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에스겔 36:26∼27) 

    굳은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됩니다. 그리고 세상을 따르는 삶이 아닌 주의 율례를 따르는 삶으로 변화되게 됩니다. 그 율례를 따르는 삶은 화평과 평안과 안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위에서부터 오는 영’을 사모해야 합니다.


    20절에서 “모든 물가에 씨를 뿌리고 소와 나귀를 그리로 모는 너희는 복이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유다가 회복되어 농촌(農村)의 소박(素朴)하고 평화(平和)로운 목가적(牧歌的) 풍경(風景)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께서 무조건적(無條件的)인 복(福)을 약속하시는 것이 아니라, “소와 나귀를 모든 물가로 인도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모든 물가’는 생명이 있는 곳이며, 시편 1:3의 ‘시냇가’와 동일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居)하고 순종(順從)하며, 우리 자신을 세워나가는 것이 급선무(急先務)라고 하겠습니다. 

    2월 11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이사야 31:1∼9
    ♦ 묵상을 위한 주제 : 여호와의 불(9절)
    ♦ 성구 : 그의 반석은 두려움을 인하여 물러가겠고 그의 방백들은 기호를 인하여 놀라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여호와의 불은 시온에 있고 여호와의 풀무는 예루살렘에 있느니라.

    사야 31장은 애급을 의지하는 사람들에 대한 두 번째 경고입니다(1∼3절).
    따라서 이사야 31장은 “30장의 반복” 또는 “30장의 축소판” 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유다) 애급을 의지하는 것은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서 강대국과 동맹을 맺는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과거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베푸신 출애굽의 위대한 역사를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을 내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애급을 의지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를 무시하는 배교행위(背敎行爲)와도 같습니다.

    선지자(선지자) 이사야는 애급을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애급은 신(神)이 아니라 사람이다(31:3)
    둘째, 애급의 군마(軍馬)는 고기 덩어리(31:3)
    둘째, 애급은 갈대 지팡이다(36:6)

    하나님의 백성이 의지하려는 애급은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고 단호하게 꾸짖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신앙(信仰)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적인 상황에서는 잘 구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절박한 상황에서는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다윗은 블레셋 장군 골리앗 앞에 나갈 때에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나갈 수 있었습니다.

    솔로몬왕의 아들 르호보암 왕이 유다를 다스릴 때에 애급 왕 시삭이 유다를 침략했는데 예루살렘까지 거침없이 쳐들어왔습니다. 애급 왕 시삭에게는 병거(兵車)가 무려 1,200대나 있었고, 마병(馬兵)도 60,000명이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다에는 병거가 없었습니다. 이때 왕과 방백들은 여호와는 의로우시다 하며 겸손하게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기 때문에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대하 12:6).

    유다가 믿었던 애급의 실상을 선지자 이사야는 이렇게 증거 합니다.

    “애급의 도움은 헛되고 무익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애급을 가만히 앉은 라합이라 일컬었느니라.”(이사야 30:7)


    애급이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가만히 앉은 라합”이라고 합니다. “라합”은 창조 질서에 대적하는 혼돈의 세력을 상징하는 “바다 괴물”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 당시 애급의 군대를 바다에서 물리치신 사건과 관련하여 애급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성도들이 의지해야 할 대상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므로 위기에서 더욱 빛나는 신앙으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여호와의 불(Jehovah's fire)”(9절)이란 단어에 아라비아 수자 (3)를 난외의 주에서 살펴보면 “” 이라고 설명합니다.
    여호와의 불”이란 “여호와의 빛”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불"이 상징하는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시편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이니이다.
    Your word is a lamp to my feet and a light for my path.

    "에쉬(אש)”는 “”이라는 히브리 단어입니다.    
    성경에서 “”은 주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교훈하시려고 하늘에서부터 그의 음성을 네게 듣게 하시며 땅에서는 그의 큰 불을 네게 보이시고 네가 가운데서 나오는 그의 말씀을 듣게 하셨느니라.”(신명기 4:36)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예레미야 23:29)

    “여호와의 불”이란 “여호와의 말씀”으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신 그 말씀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둘째, 하나님(히브리서 12: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for our God is a consuming fire.

    *
    신명기 4:24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For the LORD your God is a consuming fire, a jealous God.

    * 이사야 10:17
    이스라엘의 은 불이요 그 거룩한 자는 불꽃이라 하루 사이에 그의 형극과 질려가 소멸되며.
    The Light of Israel will become a fire, their Holy One a flame; in a single day it will burn and consume his thorns and his briers.

    (예) 시내산 가시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임재하신 여호와 하나님

    셋째, 성령(마태복음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I baptize you with water for repentance. But after me will come one who is more powerful than I, whose sandals I am not fit to carry.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with fire.

    "성령과 불로" 라고 하였지만 "성령 곧 불로" 라고 번역하는 것이 원문에 가깝다.
    왜냐하면 헬라어 "카이"는 접속사로 "그리고" 또는 "곧" 이라고 번역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이라는 단어의 어근의 알파벳은 “쉰(ש)”입니다.
    “에쉬(אש)”는 “알레프(א)”와 “쉰(ש)”이란 두 알파벳이 만든 단어입니다.
    “쉰(ש)”의 상형문자는 “불(fire)”과 “이빨(teeth)”을 의미합니다.    
    이빨은 음식을 씹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씹어 삼키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이것이 성경에 “불로 태우다”는 개념과 연결되었습니다.
    “불로 태운다”는 것은 “이빨로 씹어서 삼킨다” “음식을 먹다(아칼)”는 의미와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아칼)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레위기 10:2)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아칼. 삼키다) 불이시오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신명기 4:24)

    성경의 이런 표현들은 히브리어 알파벳과 단어의 이런 개념에서 기초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게 되면 우리 안에 더러운 것들이 불로 태워져 죽게 된다.    이 죽음은 '십자가'의 죽음과도 같은 것이고 '불세례'와도 같은 것이다.    

    레위기 10장에서 불이 삼킨 것은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여호와께 분향하였기 때문이다.(레위기 10:1) 


    * 이사야 4:4 /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
    이는 주께서 그 심판하는 과 소멸하는 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시며 예루살렘를 그 중에서 청결케 하실 때가 됨이라.
    The Lord will wash away the filth of the women of Zion; he will cleanse the bloodstains from Jerusalem by a spirit of judgment and a spirit of fire.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여호와의 말씀이라 그러므로 보라 서로 내 말을 도둑질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령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들은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예레미야 23:29-30, 32)

    (예) 소돔과 고모라 성의 불로 심판

    넷째, 언약(창세기 15:17)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더라 

    성경에서 '불'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상징한다. 
    '에쉬'라는 단어가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사건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을 때이다. 

    여기서 '타는 횃불(에쉬 라피드)'이다.  
    이것은 '등불이 밝혀졌다'는 의미이다. 

    다섯째, 심판(누가복음 12:49-50)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히브리어 '에쉬(אש)'에 대해서 공부하는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바로 이 '에쉬(불)'를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 불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는 표현을 원어로 살피면 '던지다'라는 단어는 '씨를 뿌리다'는 의미의 단어이다.
    불을 던진다는 것은 말씀을 씨를 뿌린다는 것과 같다. 
    불이 붙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처럼  좋은 땅이 되어 말씀을 받고 인내하여 열매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받을 세례'라고 번역했지만 '예수님이 가지신 세례', '소유하신 세례'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세례요한의 증거에 의하면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 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요한복음 1:33)
    이것을 마태복음은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고 기록했다.

    성령과 불로 라고 번역했지만 원래 의미는 성령, 곧 불로 이다. 
    '그리고'라는 헬라어 '카이'는 '곧' 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예수님의 말씀이 곧 '불'이고 이 말씀을 먹을 때 우리 안에 가라지와 쭉정이들이 불로 태워지는 것이 바로 '불세례'의 개념이다.

    성경에서는 '불에 구워먹는다'는 개념들이 있는데 이것은 바로 '(성령님을 통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먹는다'는 의미를 갖는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숯불에 구운 떡과 고기를 주셨다(요 21:9).
    구약에 '볶은 곡식(수5:11)', 떡과 고기를 구워먹는 것은 이런 의미들을 담고 있다. 

    * 누가복음 24: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에게 말씀을 풀어주셨을 때 '뜨겁다'는 헬라어 '카이오'는 불을 켜다, 등불을 밝히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바로 히브리어 '에쉬(אש)'의 개념이다. 

    * 마태복음 5:15
    사람이 등불을 켜서(카이오)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누가복음 12:35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카이오) 서 있으라. 

    하나님은 불 가운데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불이 붙은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불 가운데 강림하셨다.
    이 날은 오순절이다.
    오순절은 하나님께 불 가운데 말씀을 받은 날이다.   
    그냥 말씀이 아니라 '불 가운데 받은 말씀'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 출애굽기 19:18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 출애굽기 19:16
    셋째 날 아침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번개'는 '바라크'인데 '빛을 밝히다'라는 뜻이다.
    시내 산에 '우레'와 '번개' '나팔 소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상징한다.

    * 요한계시록 4: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 시편 89:14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를 앞서 행하나이다.

    하나님의 보좌는 인자와 진리를 의미하고 번개, 음성, 우렛소리, 등불 일곱, 일봅 영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 즉, 성령님을 통해 깨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의미한다.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시내산에 하나님께서 불 가운데 강림하신 것과 연결되어 있다.


    * 신명기 33:2
    그가 일렀으되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오시고 세일 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 산에서 비추시고 일만 성도 가운데서 강림하셨고 그의 오른손에는 그들을 위해 번쩍이는 불이 있도다.

    불가타 역과 몇 사본에는 '번쩍이는 불'이 '불타는 율례'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경이 말하는 불, 에쉬는 그냥 말씀이 아니라 불타는 하나님의 말씀 불타는 규례(에쉬 다아트), 의의 말씀(히 5:13), 하나님의 의의 규례(계 19:8), 성령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그 불이 밝혀지는 진리를 상징한다.  

     










    2월 10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이사야 30:1∼33
    ♦ 묵상을 위한 주제 : 패역한 백성(9절)
    ♦ 성구 :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 하는 자식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이라.  

    왜 하나님의 백성(百姓)들을 향(向)하여 “패역(悖逆)한 백성(百姓), rebellious people)”이라고 하셨을까요?
    ref. 이사야 65:1-2

    구약의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대상은 하나님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들을 "패역한 백성" 이라고 강조합니다.

    패역(悖逆) / 어그러질 패(悖), 거스를 역(逆).
    도리(道理)에 어그러져 패악(悖惡)하고 불순(不順)함

    패역(悖逆)하다는 말은 마음이 완악(完惡)하고 불순종(不順從)한다는 뜻입니다.
    즉 주인(主人)의 말을 듣지 않는 동물(動物)에 대해, 부모(父母)의 말을 듣지 않는 패륜아(悖倫兒)에게 주로 사용(使用)되는 용어(用語)입니다.

    (공동번역) 배반하는 백성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을 거역하는 백성
    (새번역) 반역하는 백성

    이사야 1: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이사야 1: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이사야 30장은 온전(穩全)히 하나님을 의지(依支)하지 않고 애급에 도움을 요청(要請)한 자들에 대한 책망(責望)의 메시지입니다.

    죄에 죄를 더하는 짓이란?(1절) / (현대인의 성경)  를 더하고 있다.
    (예) 미운 7살 / 하는 행동이 눈에 거스리는 짓만 골라서 하는 나이
    요즈음에는 중학교 2학년이라고 합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행동

    1. 북왕국 이스라엘이 위협할 때는 아람에게 도움을 요청
    2. 아람에게 위협을 당할 때는 앗수르에게 도움을 요청
    3. 앗수르가 위협을 하므로 애급에게 도움을 요청
    이러한 것들은 죄에 죄를 더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왜 패역한 자식(1절) 또는 패역한 백성이(9절) 되었을까요?

    1. 거짓말 하는 것(9절)

    2.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것(9절)
    하나님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것

    (1) 정직한 비전을 제시하지 말라고 요구(10절)

    ‘선견자’와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전달해 주는 예언자를 가리킵니다.
    그들에게 미래에 대한 것을 보지도 말고, 비전을 제시하지도 말라고 요구하는 것은 예언자의 역할과 직무를 하지 말라는 말이며, 또한 자기들을 위한(for us)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말라는 것하나님의 간섭을 받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오직 자기들 마음대로 할 것이니, 하나님은 참견하지 말라는 반항인 것입니다.

    참 한심한 인간들입니다.
    먼 미래를 보지 못하는 인간으로서 미래의 비전을 제시해 준다면 얼마나 고마운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비전(vision)을 말하지 말라는 것은 꽉 막힌 자기들의 계획, 자기들의 전략대로 밀고 나가겠다는 고집인 것입니다.

    (2) 부드러운 것과 거짓된 것을 보여 달라고 요구(10절)

    ‘옳은 것을 보이지 말고’ 오히려 부드러운 것을 말하고 ‘거짓된 것을 예언하라’는 것은 자기들 스스로 진리의 길, 하나님이 요구하는 삶을 살지 않겠다는 반항적 태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올바른 계시’, ‘옳은 예언’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절대로 필요한 것임에도 그것을 거절하고 거짓 예언을 요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겠다는 불신앙적 행동인 것입니다.

    마치 사도 바울이 종말의 때에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자기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게 될 것이라고 예견한 것처럼(딤후4:3-4) 참된 진리를 싫어하는 사특한 인간들입니다.

    (3) 선지자들에게 바른 길과 첩경에서 떠나가라고 요구(11절)

    ‘길과 첩경’이란 여호와의 참 종교, 또는 참된 교훈, 교리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목적하시는 것을 자신들에게 가르쳐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한 마디로 참된 예언자를 버리고 거짓 예언자를 찾는 패역한 인간들입니다.
    거짓 예언자들이 판을 치는 혼탁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사탄적 사고인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보내지도 않았음에도 예언하고(렘 23:21),
    헛된 것을 가르치고(렘 23:16),
    허망한 꿈을 이야기 하고(렘 23:27),
    거짓된 점괘를 말하였던 것입니다(겔 13:6-7).
    백성들은 지금 엄청나게 착각하고 있습니다.
    세속화 되어 있고, 신앙은 허울과 형식뿐이고, 권력에 편승해 있고, 허망한 꿈 이야기나 하고, 거짓 예언이나 하는 자들을 참 선지자요, 참 교리를 전하는 자들인 줄 착각하였던 것입니다.
    참된 예언자를 물리치고 거짓 예언자를 찾는 것은 불행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4)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우리 앞에서 떠나가게 하라고 요구(11절)

    패역하고 타락한 인간들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열국 앞에서 하나님의 증인으로서, 하나님을 대변하는 종들이 되어야 할 사명을 부여받은 인간들이 자기들 앞에서 하나님을 떠나게 하라는 것은 완전히 자신들이 감당해야 할 본연의 사명, 존재의 목적, 주어진 과제가 무엇인지를 잃어버린 패역한 자식들인 것입니다.

    ‘떠나게 하다’(שׁבת, 솨바트)라는 단어의 뜻이 더욱 하나님을 비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는 ‘어떤 것을 행하는 것을 그만두게 하다’(to cause to cease from doing any thing), 아무 것도 못하도록 ‘제지하다’(to restrain)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도록 제지하고 포기시키고 떠나가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완전히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동이며 배신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기들 앞에서 바보로 만들어 놓겠다는 심산(心算)인 것입니다.

    (5) 하나님이 제시한 구원의 방법을 거절하고 오히려 말 타고 도망가겠다(15-16절)

    하나님께서는 앗수르 군대의 거대한 공격 앞에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 하셨지만 그들은 거절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아니라! 우리가 말 타고 도망하리라. 우리가 빠른 짐승을 타리라”고 말하면서 반항적 태도를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제의와 권면을 거절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행동하겠고 고집하는 것이야 말로 패역한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유한한 인간이 전능하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반항적 태도를 취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기다리자!(18절)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살아갑시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의 백성들이 앗수르의 공격을 받을 때 먼저 애급의 도움을 구하듯이
    저희들도 코로나 바이러스의 공격을 받으며 먼저 백신을 찾았습니다.
    이처럼 연약한 저희들이오니
    진리의 말씀으로 저희들을 다듬어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있는 영의 눈을 뜨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들을 수 있는 영위 귀를 열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려고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로 함께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民族)에게 오래 전 광야(廣野) 생활(生活) 동안에도 결코 애급으로 돌아가지 말 것을 명령(命令)하셨고, 애급과는 어떤 동맹(同盟)도 체결(締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신 17:16).

    왕은 말을 많이 소유해서는 안 되며 말을 사려고 백성을 이집트로 보내서도 안 됩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다시는 그리로 돌아가지 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17:16)

    우상(偶像) 숭배(崇拜)하는 이방나라와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심으로 선민(先民)으로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고, 또한 하나님의 백성(百姓)이기에 오직 야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앗수르가 침략(侵掠)해 오자 애급으로 사신(使臣)을 보내 지원(支援)을 요청(要請)했습니다(2절).
    하나님을 의지(依支)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애급으로부터 수치(羞恥)와 수욕(羞辱)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3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급해진 이스라엘은 많은 재물(財物)을 어린 나귀와 낙타에 싣고, 사나운 짐승과 독사(毒蛇)가 우글거리는 광야(廣野)를 지나 생명(生命)을 걸고 구원병(救援兵)을 요청(要請)하러 애급으로 사신(使臣)을 보냈습니다(6절).


    말씀으로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때로는 환경(環境)으로도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전염병(傳染病)으로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백성들아, 더 이상 지체(遲滯)하지 말고 바른 길로 돌아서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간절(懇切)한 주님의 음성(音聲)이 들립니까?
    영(靈)의 눈을 뜨고 영(靈)의 귀를 열고 주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모두 모여 함께 부르짖어야 하겠습니다.

     '달과 6펜스' 의 작가 서머셋 모옴이 문단에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의 일이다.

    당시 그의 소설은 인기가 별로 좋지 않았다.
    출판업자들도 더 이상 선전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절망적인 말을 했다.
    몹시 실망한 그는 차츰 자신감을 잃어 우울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는 늘 찡그리고 다녔으며 얼굴에는 우울한 그림자가 떠나지 않았고 점점 신경질 적이 되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부인이 그의 사무실을 방문했다.
    그녀는 그의 소설을 읽고 몹시 감동을 받아 직접 만나고 싶어서 찾아왔다고 말했다.
    그 부인은 나이는 많았지만 기품이 있어 보였다.
    다른 사람에 비해 빼어난 외모는 아니었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왠지 모르게 다른 사람들과는 확실하게 구분되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쓴 소설의 최초의 팬으로서 직접 방문해 준 그 부인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뜻에서 물었다.

    "당신은 얼굴만 아름다울 뿐 아니라 당신의 모든 것이 놀라울 정도로 밝고 매력적으로 느껴지는데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그 부인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나는 나의 입술로 진실을,
    나의 눈으로 관심을,
    나의 손으로 봉사를,
    나의 얼굴로 정직을,
    나의 목소리로 친절을,
    나의 가슴으로 사랑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를 싫어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는 간절한 내 마음을 담아 기도하지요.
    이것이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더불어 내 모습을 아름답게 하는 삶의 비결입니다."

    2월 9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이사야 29:1∼24
    ♦ 묵상을 위한 주제 : 사람의 계명(13절)
    ♦ 성구 :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이사야서의 주제가 되는 구절은 이사야서 43:11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
    I, even I, am the LORD, and apart from me there is no savior.)

    이사야 28-31장33장‘화禍의 노래’ 또는 ‘화와 복의 노래’라고 합니다.
    이 다섯 장(28, 29, 30, 31, 33장)에 ‘화 있을진저’라는 말이 반복해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1절에서는 "슬프다" 라고 합니다. 슬프다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화로다(호이)"와 같은 단아와 같습니다.
    이 단어가 15절에서는 "화 있을진저" 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의 환란과 회복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예루살렘(Jerusalem)"이란 "평화의 터전" "평화의 땅" 이란 뜻입니다.
    예루살렘이란 원래 여부스 족속의 땅이었습니다.
    다윗 왕이 여부스 족속을 내쫓고 그 성을 "다윗 성" 이라고 불렀습니다.
    "다윗 성"이 "예루살렘"입니다.
    그런데 1절에서 "슬프다 아리엘이여!" 이렇게 노래합니다.
    "아리엘"이란 단어에 아라비아 수자 (1)이 적혀있습니다.
    (1)을 난외의 주에서 "예루살렘을 가리킴" 이렇게 소개합니다.
    따라서 슬프다 아리엘이여! 이 말씀은 슬프다 예루살렘이여! 라는 것을 말합니다.
    "아리엘"이란 2절에서 아라비아 수자 (3)을 난외에서 찾아보면 "하나님의 제단의 면" 이라고 합니다.
    "아리엘"이란 "하나님의 제단"이란 뜻입니다.
    예루살렘(평화의 터전)이 아리엘(하나님의 제단)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번제의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아리엘 즉 하나님의 재단의 면이라고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묵상하려는 주제는 “사람의 계명(誡命)(rules taught by men.)” 입니다.
    13절
    을 함께 읽겠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평화의 터전 예루살렘이 무너질 것이라는 슬픈 소식입니다.
    하나님의 번제단이란 아리엘이 무너질 것이라는 슬픈 소식입니다.

    오늘날도 이런 소식이 우리들의 귀에 들려오고 있습니다.
    미국(美國)이란 나라의 뜻은 "아름다운 나라" 입니다.
    어떤 사람이 미국(米國)을 "쌀이 많은 나라일 뿐"이라고 합니다.

    지금 미국이란 나라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바이든 대통령이 행정명령(
    Executive order)에 사인한 것들 중에 아주 이상한 내용이 있습니다.
    만일 내가 생물학적으로 남자이지만 감정은 여자라고 생각하면 여자 화장실에 들어가도 된다.
    반대로 생물학적으로 여자이지만 감정은 남자라고 생각하면 남자 화장실에 들어가도 된다.

    이러한 일이 전개되고 있는 나라가 미국입니다.
    이런 나라를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나라로 인정하실까요?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계명을 사람의 계명으로 바꾸기 때문이라고 선지자 이사야는 외쳤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전염병 때문에 교회에 모여서 예배하는 것을 금하기 때문에 각 가정에서 예배합니다.
    만일 이러한 예배가 계속될 때에 예배자의 자세가 흔들려서 형식화 될 때에 여호와 하나님은 화있을진저, 슬프다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고 이 시대를 분별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사람의 계명으로 바꾸지 말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계명으로 믿고 따라야 하겠습니다.

    이사야 29:23-24

    그 자손은 나의 손으로 그 가운데서 행한 것을 볼 때에 내 이름을 거룩하다 하며 야곱의 거룩한 자를 거룩하다 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할 것이며.
    마음이 혼미하던 자도 총명하게 되며 원망하던 자도 교훈을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아멘

    첫째,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라 / 하나님을 인정하라!
    둘째, 하나님을 경외하라 /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셋째, 마음을 총명하게 하라 / 마음을 바르게 가지라!
    넷째, 교훈을 받으라 / 가르침을 받으라!

    (예화)
    하나님만 바라보고 따르는 삶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실천하는 삶

    작고하신 송재천목사님의 아들 송문호군이 초등학교 4학년 무렵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고 하여 병원에 입원하고 수술을 받았는데 그만 실명하고 말았습니다. 주위에 여러 목회자들이 찾아가서 무슨 말로 위로할까 걱정하는데 오히려 송문호군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세상의 더럽고 추한 것 이제 그만 보도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그 말씀을 따르라는 주님의 분부라고 믿기 때문에 감사하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말로 하기는 쉽고 전하는 것도 아주 쉽습니다.
    그러나 만일 이런 상황에 부딪치면 정말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내 형편이 넉넉하고 건강하고 항상 좋은 일만 일어날 때에만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고통과 아픔이 있는 일이 내게 닥쳐올지라도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믿고 따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내가 주님을 믿고 따르면 주님께서 어떤 보상을 해 주실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주님을 믿고 따르면서 주님 가신 그 십자가의 고통스런 길을 거부하지 않고 순종하는 믿음을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시편 112:8
    그 마음이 견고하여 두려워 아니할 것이라.
    His heart is secure, he will have no fear.

    믿음의 공동체의 가족들이여!
    팬데믹 시대를 살아갈지라도 전염병에 두려워하지 말고 내 이름이 하나님 나라 생명책에서 지워질 것만 두려워하며 날마다 믿음으로 전진하여 승리하는 그 날을 향하여 함께 나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람의 계명을 성경의 다양한 번역으로 소개합니다.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사람의 가르침이나 규정”
    새번역 성경에서는 “들은 말”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사람들에게서 배운 관습”

    “사람의 계명(誡命)”이란 예루살렘이 앗수르 군대의 침략(侵掠)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理由)를 설명(說明)한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百姓)들이 하나님을 경외(敬畏)한다는 것은 들은 말을 흉내 내는 것뿐이라는 의미(意味)라고 하겠습니다.

    제사(祭祀)는 드렸지만 제사(祭祀)의 내용(內容)보다는 형식(形式)에 치우친 것을 말합니다. 마치 가인과 아벨이 제물(祭物)을 바쳤을 때 아벨과 그 제물(祭物)은 열납(悅納)하셨지만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悅納)하지 않은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제물(祭物)만 받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제물(祭物)을 바치는 사람까지도 받지 않으셨다는 것은 제사(祭祀)에서 제물(祭物)보다 사람(際主)이 더 우선(優先)이라는 교훈(敎訓)입니다.

    팬데믹으로 인하여 대면예배(對面禮拜)를 비대면예배(非對面禮拜)로 전환(轉換)한 것은 예배(禮拜) 시간(時間)을 지켰다는 의미(意味)가 아닙니다. 비록 비대면(非對面) 예배(禮拜)를 드릴지라도 성령(聖靈)의 인도(引導)함을 받아 진실(眞實)한 몸과 마음으로 예배(禮拜)에 참여(參與)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百姓)들이 하나님을 공식적(公式的)으로 버린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포로(捕虜)로 잡혀갔을 때를 제외(除外)하고는 언제나 제사(祭祀)를 드렸고 절기(節氣)를 지켰습니다. 그러나 제사(祭祀)를 드릴 때 자신(自信)의 마음과 삶까지 드리지 못하고 제사(祭祀)만 드렸습니다. 하나님만을 섬기는 제사(祭祀)가 아니라 다른 우상(偶像)도 섬기면서 제사(祭祀)도 함께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진노(震怒)하신 것입니다.

    마치 자식(子息)이 한 달에 한 번씩 부모(父母)를 찾아와서 그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용돈만 주고 간다면 부모(父母)의 마음이 어떨까요? 그런데  동일(同一)한 액수(額數)의 용돈을 옆집 친구(親舊) 부부(夫婦)에게도 준다면 분노(憤怒)가 치밀어 오를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百姓)들의 신앙(信仰) 상태(狀態)가 이와 같았다고 하겠습니다.


    모이지 않는 예배(禮拜)가 오래 동안 계속되므로 마치 이러한 신앙(信仰)이 정상적(正常的)인 것으로 착각(錯覺)하여 진리(眞理)의 길에서 벗어남이 없도록 말씀대로 믿고 말씀대로 순종(順從)하는 신앙(信仰)으로 함께 무장(武裝)하여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榮光)을 돌려보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祝福)합니다.

    2월 8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이사야 28:14∼22
    ♦ 묵상을 위한 주제 : 전하는 도(19절)
    ♦ 성구 : 그것이 유행할 때마다 너희를 잡을 것이니 아침마다 유행하고 주야로 유행한즉 그 전하는 도를 깨닫는 것이 오직 두려움이라.


    1-6절 : 교만한 사마리아에 대한 예언(북 왕국 이스라엘)
    7-22절 : 남유다의 타락하고, 교만한 지도자들에게 전하는 경고
    23-29절 : 하나님의 다스림을 씨뿌림과 추수에 비유하여 교훈

    경만(輕慢)하다(14절) : 비웃다. 조롱하며 거만한 태도를 취하다. / 참조 이사야 28:22, 29:20
    우심(尤甚)하다(22절) :
    더욱 심해지다.


    10절에서 “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하는도다”
    이것은 이제 막 말을 배우는 아이들이 하는 말을 흉내 내는 것입니다.

    공동번역성경
    이 히브리어 그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하는 소리를 좀 들어보세. 사울라사우, 사울라사우! 카울라카우, 카울라카우! 즈에르삼, 즈에르삼!

    이것은 아이들이 상대의 말을 듣기 싫을 때, “에에에에에에∼...”라고 말하며 귀를 막는 것과 유사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13절에서 사람들이 했던 말을 그대로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들이 덫에 걸리고, 포로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의 교훈 /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 너희는 세상의 빛
    사도 베드로는 너희는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이 말씀은 "너희는 세상에서 영적 지도자" 라는 교훈이라고 하겠습니다.
    만일 영적 지도자들이 그 직분을 바르게 감당하지 못할 때는 북 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무너지고, 남 왕국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서 무너지듯이 너희들이 살고 있는 그 나라도 무너질 것을 깨우치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막중한 책임이 주어진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사야"
    라는 이름은 "하나님은 구원이시다."
    따라서 이사야 43:11,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I, even I, am the LORD, and apart from me there is no savior.)”는 말씀이 이사야의 핵심구절입니다.

    이사야서를 성경 중의 성경
    1장부터 39장은 제1이사야(구약에 해당, 39권 39장)
    40장부터 66장은 제2이사야(신약에 해당 27권 27장)

    이사야 1장-35장은 심판
    이사야 40장-66장은 회복

    이사야 1-12장 :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한 심판
    이사야 13-23장 : 이방 열국’에 대한 심판을 나라별로 선언
    이사야 24-27장 : ‘온 땅과 그 주민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종말론적인 언어로 묘사
    보통 이사야 24-27장을 ‘이사야의 묵시록’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24-27장 속에 ‘세계적인 종말’, ‘최후의 심판’, ‘죽은 자의 부활’ 등의 주제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28장부터 35장은 화와 복의 노래라고 합니다.
    28장은 화 있을진저(호이)
    29장은 슬프다(호이)
    30장은 화 있을진저(호이)
    31장은 화 있을진저(호이)
    33장은 화 있을진저(호이)

    화 있을진저’라는 단어가 구약 성경에 46번이 나오는데 그중에서 이사야서에만 21번이나 나옵니다.
    그 의미는 재앙이 내려 반드시 참상을 당할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고,
    반복적으로 하나님께 등을 돌려 바르지 못한 삶을 사는 것에 대한 의로운 분노(거룩한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의와 평화가 가득한 메시아가 다스리는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세상의 악한 세력을 멸하시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지킨 사람들을 구원의 성으로 불러 모으실 것을 예언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6절 : 교만한 사마리아에 대한 예언
    7-22절 : 남유다의 타락하고, 교만한 지도자들에게 전하는 경고
    23-29절 : 하나님의 다스림을 씨뿌림과 추수에 비유하여 교훈

    1∼6절은 사마리아의 멸망에 대해서 예고하고 있습니다. 

    히브리리어 성경에는 ‘화 있을진저(호이, woe to)’라는 감탄사로 시작됩니다.
    28장부터 33장까지는 ‘복과 화의 노래’이기 때문에 “화 있을진저”로 시작됩니다(28, 29, 30, 31, 33장).
    29장은 “슬프다”라는 감탄사로 시작되는데, 히브리어로는 ‘화 있을진저’와 같은 단어(호이)입니다.

    화 있을진저’라는 단어가 구약성경에 46번이 나오는데 그중에서 이사야서에만 21번이나 나옵니다.
    그 의미는 재앙이 내려 반드시 참상을 당할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고, 반복적으로 하나님께 등을 돌려 바르지 못한 삶을 사는 것에 대한 의로운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애급이 유다와 맹약(盟約)을 하였을지라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애급도 도울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애급이 잠자리를 편안하게 해 주리라 생각했는데 다리도 제대로 펼 수 없었습니다.  또한 온 가족이 다 덮을 수 있는 담요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는 한 사람도 제대로 덮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애급의 도움은 헛되고 무익하다 즉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Do Nothing)라고 합니다(사 30:7).

    애급의 도움이 헛되고 무익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애급을 가만히 앉은 라합이라 일컬었느니라.

    전(傳)하는 도(道)(The understanding of this message)”

    성경(聖經) 전체(全體)의 맥락(脈絡)에서는 ‘전(傳)하는 도(道)’는 “복음(福音)”을 의미(意味)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의미하는 것을 여러 번역으로 살펴봅니다.

    현대인의 성경은 “말씀을 깨닫는 것
    새번역 성경은 “말씀을 알아듣는 것
    공동번역 성경은 “속뜻을 깨달으려느냐?

    전하는 도를 두 가지 의미(意味)로 해석(解釋)합니다.
    첫째는 새로운 공격(攻擊)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所聞)입니다.
    둘째는 선지자(先知者)를 통(通)해서 전(傳)해진 두려운 소식(消息)입니다.
    대부분의 학자(學者)들은 두 번째 해석(解釋)을 선택(選擇)합니다.

    왜냐하면 “에브라임의 교만(驕慢)한 면류관(冕旒冠)”은 북 왕국 이스라엘을 말하며,
    술에 빠진 자의 성”은 사마리아 도성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전(傳)하는 도(道)"
    어느 시대든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선지자들은 반드시 그 나라에 대하여 쓴소리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라고 하겠습니다.

    미국이나 한국의 정치 현실을 바라보는 목회자들이 침묵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지 못한 지도자의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반드시 잘못된 길을 선택하고 정책을 도입하려는 것에 대해서 외쳐야 합니다. 만일 이러한 책임을 바르게 감당하지 않는다면 미국이나 한국도 북 왕국 이스라엘 처럼 남 왕국 유다처럼 반드시 무너지는 고통과 아픔을 겪어야 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북 왕국 이스라엘앗수르에 의해서 무너졌습니다(BC 722년).
    따라서 이사야 28장북 왕국 이스라엘의 멸망(滅亡)에 대한 예언(豫言)의 말씀(預言)으로 선지자(先知者)를 통하여 선포(宣布)된 메시지라고 하겠습니다.

    북이스라엘 왕국(기원전 922년경~기원전 722년경) 또는 사마리아 왕국
    이스라엘 왕국이 북부와 남부로 분열될 때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르우벤, 스불론, 시므온, 므낫세, 단, 잇사갈, 아셀, 에브라임, 납달리, 갓 등 이렇게 열 부족을 규합하여 북부를 지배한 왕국이다.
    209년간 존속해 19명의 임금이 나라를 다스렸다.

    왕조의 교체가 빈번하여 정정(政情)이 불안하였다.
    벧엘 이북을 영토로 하고 오므리 왕조 시대에 남쪽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에 대항하기 위하여 수도 사마리아를 건설하였다.
    유다에 비하여 땅이 비옥하였으므로 농경적 성격이 강하고 종교적으로도 토착종교 또는 이민족의 신앙이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구약 성서의 기록에 따르면, 예후 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기존의 야웨 대신 몰렉, 아스타르테, 바알 등의 신들을 숭배했다고 한다.
    기원전 722년 앗수르 제국의 침략으로 멸망했다>
    이스라엘을 정복한 아시리아 제국은 단호하게 통혼 정책을 펴 '동화'시켰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남은 유다 백성(百姓)에게 영화(榮華)로운 면류관(冕旒冠)과 아름다운 화관(花冠)이 되셔서 상당한 기간(其間) 하나님의 보호(保護)를 받지만 결국(結局)에는 우상(偶像)을 숭배(崇拜)하므로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滅亡)하게 될 것입니다.

    유다 백성(百姓)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 주는 초보적(初步的)인 말씀으로 반복(反復)된 교훈(敎訓)이라고 멸시(蔑視)하며 거절(拒絶)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百姓)을 이방(異邦) 나라 바벨론의 포로(捕虜)로 잡혀가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BC 586년).

    그 이유는 애급이 유다와 맹약(盟約)을 하였을지라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애급도 도울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애급이 잠자리를 편안(便安)하게 해 주리라 생각했는데 다리도 제대로 펼 수 없었습니다.  또한 온 가족(家族)이 다 덮을 수 있는 담요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는 한 사람도 제대로 덮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애급의 도움은 헛되고 무익(無益)하다 즉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Do Nothing)라고 합니다(사 30:7).

    신앙(信仰)이란 세상 환경(環境)이 어렵고 힘들 때 도움을 구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종교는 일시적인 고통의 자리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일시적인 고통의 자리를 벗어나는 것만이 아니라 영원한 고통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基督敎)는 종교(宗敎)가 아니라 생명(生命)입니다.

    영원(永遠)한 생명(生命)을 보장(保障)하시려고 십자가(十字架)의 죽음을 부활생명(復活生命)으로 그리고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심판(審判)의 주(主)로 다시 오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와 같은 전염병(傳染病)이 육체(肉體)를 흔들어도 영원(永遠)한 생명(生命)을 향한 믿음은 무너트릴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믿음으로 오늘도 강건(康健)한 삶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2월 6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이사야 27:1∼13
    ♦ 묵상을 위한 주제 : 지각(知覺)이 없는 백성(百姓)(11절)
    ♦ 성구 : 그 나뭇가지들이 말라 꺾이면 여자들이 그것을 주워 불을 피울 것이다. 이 백성이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므로 이들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이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고 은혜를 베풀지 않으실 것이다. 

    이사야 27장은 “이스라엘의 회복(回復)”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사야서는 심판(審判)과 회복(回復)에 관한 예언입니다.
    지각(知覺)이 없는 백성(百姓)(This is a people without understanding)”은 하나님의 은혜(恩惠)를 누릴 수 없습니다(11절).

    도입 이야기 /
    옛날 어느 시골에 두 형제가 있었는데 형은 열심히 공부하여 도시에서 공무원이 되었는데 동생은 고향에서 농사일만 하고 있었다. 형이 낙향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지내는데 동생이 하는 농사 일을 도와주려고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하려는데 나무를 자르다가 넘어져서 허리를 다치고 말았다. 얼마 후 몸이 회복되어 이번에는 논에 나가 논둑을 다지는 일을 하려는데 또 논둑을 다지는 것마저 실패하여 논둘을 터치고 말았다.
    보다 못한 동생이 형에게 "형님, 나무를 잘 하는 방법과 논둑을 막는 일을 글로 써보세요!" 라고 하자 글로 썼는데 정확하게 표현하였다고 합니다. 글로는 정확하게 표현하면서도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것을 허무한 지식이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도 머리는 잘 알고 있지만 실 생활에서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생활하지 못하는 것은 허무한 신앙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지각이란 지식과 지혜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지각(知覺)"이란 한자는 "알 지(知)" "깨달을 각(覺)"이란 훈으로 "알고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히브리어 "비노트"는 "비나(깨달음, 이해)"의 복수형


    1절, 에 여호와께서 그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리워야단 꼬불꼬불한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을 죽이시리라.

    델리취(Delitzsch)는 '날랜 뱀리워야단'은  앗수르,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은 바벨론, 바다에  있는용'은 애급을 가리킨다고 해석합니다.

    이와 같이 세 나라로 해석하는 것은 학자들 모두 동일합니다.
    그러나 세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는 학자들마다 서로 다른 의견을 제시합니다.
    따라서 세 나라는 역사적인 배경과 성경의 내용에 따라 앗수르와 바벨론과 애급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무난합니다.
    특별히 세 나라들은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나라들입니다.

    2절, 그 에 너희는 아름다운 포도원을 두고 노래를 부를찌어다.

    아름다운 포도원은 이스라엘 나라 및 그 백성들을 말합니다. 

    역사적인 배경에서 이스라엘이 약할 때에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지각 있는 백성이 되라고 합니다.
    지각 있는 백성이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4-5절,
    나는 포도원에 대하여 노함이 없나니 질려와 형극이 나를 대적하여 싸운다 하자 내가 그것을 밟고 모아 불사르리라.
    그리하지 아니할 것 같으면 나의 힘을 의지하고 나와 화친하며 나로 더불어 화친할 것이니라.

    질려와 형극은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앗수르와 바벨론 그리고 애급을 말합니다.

    1. 지각(知覺)이 있는 백성은 하나님의 힘(능력)을 의지합니다(5절a).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무엇이든지 잘 감당할 수 있다는 신앙을 말합니다.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는 여전히 감옥에서도 찬송을 부르며 기도합니다. 
    그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옥터가 흔들리며 그 안에 갇혀 있던 모든 죄수들이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2. 지각(知覺)이 있는 백성은 하나님과 화친합니다(5절b).
    화친(和親)이란 "화할 화(和)" "친할 친(親)"이란 훈으로 "가깝게 지내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 갈 때 좋은 일도 있지만 나쁜 일도 있습니다.
    좋은 일은 누구나 감사하며  즐거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쁜 일에 감사할 수 있고 즐거워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욥이란 사람은 하나님과 화친한 신앙으로 하나님이 복을 주실 때는 날마다 번제를 드리며 감사했습니다.
    갑자기 나쁜 일이 닥쳐왔을 때는 입술로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3. 지각(知覺)이 있는 백성은 불의를 사함 받습니다(9절).

    갈보리 언덕에 세 개의 십자가를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회개한 강도의 십자가 그리고 회개하지 않은 강도의 십자가.
    똑같은 상황에서 한 강도는 지각이 있었기에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십자가의 주님에게 도움을 구합니다.
    그러나 지각이 없었던 강도는 여전히 십자가의 주님에게 기적만을 기대합니다. 
    그 결과는 회개한 강도는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를 것이라"는 은혜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신명기 32:28
    그들은 모략이 없는 국민이라 그 중에 지식이 없도다.

    첫째, 지각이란 하나님을 찾는 것(시편 14:2)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시편 53:2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둘째, 지각이란 계명을 지키는 것(시편 110:10)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 그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좋은 지각이 있나니 여호와를 찬송함이 영원히 있으리로다.

    셋째, 지각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는다(요한일서 5:2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시편 9:17, 하나님을 잃어버린 열방은 반드시 무너질 것이다.
    악인이 음부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열방이 그리 하리로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온 세상을 뒤흔드는 어지럽고 힘든 세상에서 믿음의 사람들은 환경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은 세상을 지배하는 힘은 강대국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나라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믿음으로 어지러운 세상을 말씀으로 다스려 질서의 세상으로 변화시켜 가는 일에 쓰임 받는 일꾼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하던 시대에 미국을 다녀온 목사님들이 한결같은 설교는 해외를 다녀보면 예수를 믿는 나라가 부강한 나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며 단 한 나라 일본이 잘 사는 이유는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일본이 잘 사는 이유는 정직한 정책이라고 하겠습니다. 

    “지혜”(히브리어 ‘하캄’)는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신앙(믿음)과 행위,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르는 성품을 의미합니다. 
    “지식”(히브리어 ‘빈’)은 인간의 지성에 근거한 이해력, 분별력, 통찰력 등의 종합적 사고력을 뜻합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증거 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깨닫는 백성들과 나라가 부흥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사야 65:16, 
    이러므로 땅에서 자기를 위하여 복을 구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할 것이요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니 이는 이전 환난이 잊어졌고 내 눈앞에 숨겨졌음이니라.

    시편 33:12,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시편 144:15,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시편 146:5,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21세기를 흔히 ‘지식산업 사회’ 혹은 ‘뇌본주의’(腦本主義, Brainism) 시대라 부릅니다.
    기업에서 생산되는 제품을 통해서 보면, 근육에 의해 만들어지는 물건보다 두뇌에 의해 창출된 콘텐츠가 경쟁력과 수익을 좌우하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단순 노동에 의존하여 능율성과 효율성으로 경쟁을 할 수가 없으며, 조직원인 사람의 지식과 창의성이 경쟁의 무기가 되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머리(腦)에서 나오는 아이디어와 기술, 발명이 중심이 되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옛날에 어떤 머리 똑똑한 선비와 고향에서 농사를 짓는 배우지 못한 동생이 있었습니다.
    형이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하게 되어 동생 집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동생도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못하여 얹혀사는 것이 미안하여 농사일을 거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평생을 글만 읽은 형이 땔감을 하기 위해서 나뭇가지에 올라 자르다가, 가지와 함께 굴러 떨어지고, 여름에 논두렁에 물이 넘쳐 터진 둑을 막아야 하는데, 삽으로 바깥에서 막으려니 되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동생이 보다 못하여 말하길 “형님, 나무를 자르고 둑을 막는 방법을 글로 써보시지요.”라고 하자 제대로 기록하는 것이었습니다.
    생각과 글로는 할 수 있어도 행동으로는 하지 못하는 공허한 지식주의를 풍자한 것이지만,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얘기입니다. 

    큰 깨달음 

    어느 젊은이가 큰 스승을 찾아와 물었습니다.
    “가장 큰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 
    “인간이 삶의 그 시종을 다 알 수 없음을 아는 것이지.” 
    “그 깨달음에 이르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이 되고 인간은 인간이 되는 것이네!”

    2월 5일(금)  / 이사야 26:1-21

    심지가 견고한 자(26:1-7)

    (3절)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새벽을 깨우는 이유?
    음악회에 가면 시작하기 전에 수 많은 악기들이 서로 음을 맞추려고 불협화음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조율이 끝나면 듣기에 좋은 소리로 바뀌는 것처럼 새벽을 깨우는 것은 밤중에 내 마음에 불협화음을 만드는 요소가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그 불협화음을 쫓아내고 화음을 만들기 위하여 찬송과 말씀과 기도로 내 마음을 조율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세상에는 물리적인 힘, 경제적인 힘, 영향력 등 세 가지 힘이 있습니다.
    힘이 있는 사람은 큰소리치고 힘없는 사람은 아무 소리도 못합니다.
    세계 각 나라들은 군사력이란 물리적 힘을 가지려고 하고 사람들은 경제적인 힘을 숭상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이 갖춰야 할 것은 견고한 마음 즉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는 마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외적인 어떤 것에 의해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사야 26장은 회복을 위한 구원의 노래에 대한 말씀입니다.

    회복에 대한 예언은 이사야 4장 시온의 회복, 9장 메시아 왕국, 11장 메시아 시대, 12장 하나님의 구원, 26장 구원의 노래, 27장 이스라엘의 회복, 32장 메시아 통치,  35장 새 세계에 대한 회복의 말씀입니다.

    심지(心志)가 견고(堅固)한 자(者)를(mind is steadfast) 평강(平康)으로 지켜주신다고 합니다.
    심지가 견고한 자는 “견고한 마음”을 말합니다.
    견고한 마음은 “하나님만을 굳게 붙잡고 의지하는 마음” 상태를 말합니다.

    * 견고한 / 히브리어 "무크"는 "는 "머물다, 받치다"는 뜻

    성경에서는 주로 "견고한" 이란 단어가 "" "" "망대"에 사용하여 견고한 집, 견고한 망대, 견고한 성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견고한 이란 단어가 마음에 관하여 사용된 시편 112편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계명을 즐거워하는 자(시편 112:1)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

    요한일서 5: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한일서 3:24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정직한 자(2-4절)
    그 후손이 에서 강성함이여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
    부요와 재물이 그 집에 있음이여 그 의가 영원히 있으리로다.
    정직한 자에게는 흑암 중에 이 일어나나니 그는 어질고 자비하고 의로운 자로다.

    은혜를 베푸는 자(5절)
    은혜를 베풀며 꾸이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공의로 하리로다.

    (9절) 저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에게 주었으니 그 의가 영원히 있고 그 뿔이 영화로이 들리리로다.

    은혜를 베푸는 것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을 더 즐겨하는 것입니다.

    흉한 소식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7-8절)
    그는 흉한 소식을 두려워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그 마음이 견고하여 두려워 아니할 것이라 그 대적의 받는 보응을 필경 보리로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약속의 땅에 원주민들이 강하고 큰 민족이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반드시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다고 백성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게 했습니다.


    26:16 /  백성이 환난 중에...주께 기도하였나이다
    - 선지자의 사고(思考)는 다시 현재로 되돌아온다.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를 믿는 신앙이 확실하다 할지라도 일상에서 겪는  경험적 현실 앞에서 신자들은 거듭거듭 심각한  무력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전폭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그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기도밖에 없는 것이다.

    기도는 절망의 상황에서 희망의 열쇠와 같다.

    잠언 4:23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예화) 감옥과 수도원의 차이는 무엇일까?

    죄수들은 타에 의해 감옥이라는 곳에서 세상과 단절된 생활을 합니다.
    수도사들은 스스로 산 속 수도원에서 세상과 담을 쌓고 단절된 생활을 합니다.
    죄수도 수도사들도 사람을 만나지 않고 고독하고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죄수는 내내 환경을 불평하거나 타인을 저주하기 때문에 감옥이 그야말로 감옥입니다.
    그러나 수도사는 깊은 진리를 찾아 스스로 나선 사람들이기 때문에 환경이 힘들어도 며칠식 굶어도 기쁨과 감사로 하루를 보냅니다.
    감옥의 죄수가 수도사와 같은 마음을 먹는다면 감옥은 수도원이되고, 수도사가 불평을 하며 죄수와 같은 마음을 품으년 수도원은 감옥과 다를바가 없습니다.

    공자가 세상을 한 바퀴 둘러본 후에  "하늘도 문제가 아니고 땅도 문제가 아니다. 오직 사람의 마음보가 문제다."


    감옥은 세상관 단절된 곳이다.
    수도원도 세상과 단절된 곳이다.
    그러나 그 차이는 마음이라고 하겠다.
    감옥에 갇힌 죄수들은 기


    심지가 견고한 사람의 특징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여호와는 구원(救援)의 성곽(城郭)(1절)

    아무리 견고한 토성(土城)을 쌓을지라도 그 성은 반드시 무너집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성은 어느 누구도 무너트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盤石)이 되시기 때문입니다(4절).

    둘째, 정직(正直)한 삶(7절)

    주께서는 정직(正直)한 자의 길을 평탄(平坦)하게 하십니다. 또한 정직(正直)한 자는 의인(義人)의 길을 따라갑니다.

    셋째, 주의 이름을 사모(思慕)합니다(8절)

    주의 이름은 구약에서는 “여호와”라고 합니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임마누엘”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주의 이름은 곧 주의 기념(紀念)입니다.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심판(審判)의 날에 완전(完全)한 자유(自由)를 얻게 될 것입니다(9절).

    심지(心志)가 견고(堅固)한 사람이 지키는 나라를 더 크게 하실 것입니다(15절).
    나라를 더 크게 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로 인구가 번성하고 그에 따라 국토의 경계가 더욱 확장됨을 뜻합니다(9:3, 54:2∼3, 미 7:11).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세상(世上)을 떠날지라도 하나님이 통치(統治)하는 그 날에는 어떤 전염병(傳染病)도 사람을 쓰러트릴 수 없습니다. 견고(堅固)한 심지를 갖고 주님을 의지(依支)하므로 이와 같은 은총(恩寵)의 날이 속(速)히 임(臨)하기를 간구(懇求)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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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2일(화)

    두로에 관한 경고(이사야 23:1-7)

    1절, 두로(뜻, 바위) / 자주색 옷감의 유명한 생산지(염색업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
    - 7절, 희락의 성
    - 역사가 헤로도투스(Herodotus)는 두로의 도성이 약 2,700년의  역사를 가졌다.
      개척 정신이 활발하여 시장을 확장하였다. 


    4절, 바다의 보장(바다의 견고한 성, 바다의 요새)
    - 요즈음으로 말하면 마치 홍콩과 같은 국게 무역 항구

    5절,  그 소식이 애굽에 이르면...통도(痛悼)하리로다.
    두로의 패망 소식은 애굽에게  큰충격과 슬픔을 안겨준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곡물  수출업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기 때문
    둘째는 방파제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던 두로의 몰락으로  애굽  역시 군사적 위험에 놓이게 되었기 때문

    어떻게 고난과 위기를 극복해야 할까요?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한 때는 기원전 722년이었습니다.
    당시 남 유다는 히스기야 왕이 통치하던 시대이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아버지 아하스 왕의 위를 이어받은 다윗의 14대 손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히스기야 왕 가까이서 많은 조언을 하므로 히스기야 왕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 남 유다를 괴롭혔던 이웃 나라들은

    첫째는 앗수르
    둘째는 바벨론
    셋째는 메대 바사(페르시아)

    하나님의 의도를 바르게 이해합시다.
    택하신 백성들을 바르게 세우기 위하여 징계하십니다.
    징계는 사랑의 채찍입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히브리서 12:8).

    하나님의 백성들을 징계하실 때 백성들에게는 고통과 고난의 시기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난과 고통을 통하여 아주 중요한 것을 깨우치십니다.
    그것은 순종(順從)입니다.
    순종하면 다시 회복(回復)시켜주십니다.

    하나님의 이와 같은 의도(意圖)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틀 통해서도 잘 나타났습니다.

    히브리서 5:7-9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은 그의 아들까지도 철저한 고통과 고난을 통하여 순종을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의 순종 때문에 우리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문이 열렸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고통과 고난을 통하여 믿음의 사람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것은 순종입니다.
      순종하면 회복하는 길을 열어주십니다.

      이사야 23장에서 두로가 멸망을 통하여 반드시 배워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18절, 그 무역한 것 이익거룩히 여호와께 돌리고 간직하거나 쌓아 두지 아니하리니 그 무역한 것이 여호와 앞에 거하는 자의 배불리 먹을 자료, 잘 입을 자료가 되리라.

      '하나님께 거룩히  여김이  된다'는 말은 하나님께 봉헌한다는 뜻입니다.
      이때 '열방과 음란한 행위를 해서  번  돈이 하나님께 바쳐질 수 있는가?' 라는 물음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창기의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하나님께 가져오지 말라. 이는 하나님께 가증한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신 23:18).

      그러나 이에 대하여는 두로에게 적용된 '기생'이라는 말이 상업 활동에 종사하는 두로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합니다(Oswalt). 상행위 자체는 근본적으로 악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는 것을 경계하라고 하셨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디모데전서 6:10)

      결론 이야기

      몽골의 선교사와 소똥 한자루
      소똥도 받으실까?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받으십니다.

      넓은 초원에서 방목하는 소들이 원주민의 집 앞에 와서 똥을 싸고 가더랍니다.
      소똥을 모으려면 그 넓은 초원을 다녀야 하는데 소들이 집 앞에 똥을 싸고 가므로 초원을 다니지 않고 손쉽게 소똥을 모아 쌓아놓게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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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린도후서(09 / 27 /2022 - 10 / 11 / 2022)


      01-26-2023(목) 전도서 강해 자료 /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전도서 11:1)

      전도서 11:10
      그런즉 근심으로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으로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청년의 때가 다 헛되니라.

      청년의 때라는 문구에 아라비아 숫자 1자가 난외에서 "새벽"이라고 번역합니다.

      새벽이란 신앙인에게 매우 중요한 시간입니다.
      새벽의 의미를 살펴봅니다.

      잠언 1:28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부지런히 라는 단어에 아라비아 숫자 2자는 난외에서 "이른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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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2-2022(수)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린도후서 13:5)

      확증하라. δοκιμάζω  1381  

      1. 시험하다,  2. 시험하여 증거하다,  3. 증명된 것으로 받아들이다.

      발음  / 도키마조(dŏkimazō)
      어원 / 미래 δοκιμάσω, 제1부정과거 ἐδο- κίμασα, 완료수동 δεδοκίμασμαι, 138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분간하다(눅 12:56, 롬 2:18), 시험하다(눅 14:19, 고후 8:22, 히 3:9), 연단하다(벧전 1:7), 분별하다(롬 12:2, 빌 1:10),
      옳다 하다(롬 14: 22), 살피다(고전 11:28, 갈 6:4), 인정하다(고전 16:3), 증명하다(고후 8:8), 감찰하다(살전 2:4), 헤아리다(살전 5:21).
      신약 성경 / 22회 사용

      시험하다. πειράζω 3985    

      1. 시도하다,  2. 시험하다

      발음  / 페이라조(pĕirazō)
      어원 / 미완료 ἐπείραζον, 미래 πειράσω, 제1부정과거 ἐπείρασα, 제1부정과거중간태, 2인칭단수 ἐπειράσω, 수동태, 제1부정과거 ἐπειράσθην, 완료분사 πεπειρασμένος,

      398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시험받다(마 4:1, 약 1:13, 히 4:15), 시험하다(마 4:3, 눅 11:16, 고전 7:5), 애쓰다(행 16:7), 시험 당하다(고전 10:13, 히 11:37, 계 3:10).
      신약 성경  / 38회 사용

      믿음에 있는가?(5절)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신(信) - 사람 인(亻) +말씀 언(言)

      πίστις, εως, ἡ  4102

      1. 믿음,  2. 신실성,  3. 엄숙한 약속

      발음  / 피스티스(pistis) 

      어원 / 398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믿음(마 8:10, 롬 1:8, 히 10:22), 도(행 6:7), 충성(갈 5:22), 신앙(빌 1:27, 히 6:1).
      신약 성경 / 243회 사용
      * 3982. πειθώ

      1. 확신을 가지게 하다,  2. 설복하다,  3. 끌어들이다.

      발음 / 페이도(pĕithō)

      관련 성경 /  권하다(마 27:20, 행 13:43, 고후 5:11), 신뢰 하다(마 27:43, 빌 1:14, 3:4), 믿다(눅 11:22, 행 26:26, 롬 2:19),
      인정하다(눅 20:6), 따르다(행 5:36,37, 롬 2:8), 옳게 여기다(행 5:40), 화목하다(행 12:20), 권면하다(행 18:4, 19:8), 권유하다(행 19:26), 순종하다(히 13:17), 확신하다(롬 8:38, 고후 2:3, 빌 2:24), 의지하다(고후 1:9, 히 2:13).
      신약 성경 / 52회 사용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시험하라’, ‘조사하라’, ‘확증하라’, ‘증명하라’는 말을 하면서 자신의 믿음을 철저히 조사해서 믿음이 있는 지, 믿음이 있다면 그 증거를 보이라고 합니다.

      5절의 특징적인 말 중에 ‘너희 자신을’, ‘너희가 스스로’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재귀대명사로 ‘자기 스스로’라는 강조의미입니다.
      남이 아니라 먼저 자신을 테스트하고, 확증하고, 스스로 알아야 함을 말하고자 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시험-조사, 점검-해야 할 믿음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자신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가 입니다.
      우리의 모든 믿음의 첫 출발은 내 속에 계신 예수의 영이 정말 계시고, 그 성령님과의 교통이 있을 때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 성령님을 통해서 믿음의 증거들과 성령의 열매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독수리의 일종인 뱀잡이수리가 있는데, 주로 공중을 높이 날아다니다가 두더지나 뱀을 발견하면 쏜살같이 내려가 낚아챈다고 합니다.
      평상시에는 뱀잡이수리가 민첩하게 잘 날아다닙니다.
      그런데 땅에 내려와 먹이를 먹고 있는데 맹수의 습격을 받게 되면, 날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해 뛴다고 합니다.
      너무도 당황한 나머지 자기가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늘을 나는 짐승이 땅에서 뛰어봐야 얼마나 빨리 뛰겠습니까? 결국 얼마 못가서 맹수에게 잡아먹히고 맙니다.

      이처럼 평상시에는 무척 믿음 있는 사람으로 알려졌지만 실제 믿음을 적용해야 할 상황에 맞닥뜨리면 휘청거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땅에 살면서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우리의 마음속에 성령님이 살아계시고, 그 성령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고, 능력 받을 수 있는 믿음의 날개를 주셨는데, 삶에 적용하지 못하므로 환난의 맹수, 사단의 맹수에게 잡아먹히는 자 없기를 바랍니다.

      선을 행하고 있는가?(7절)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버림받은 자 같을지라도 너희는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

      선(善) -  양 양(羊) + 입 구(口) + 초두머리 초(䒑)


      καλός, ἡ, όν  2570

      1. 아름다운,  2. 좋은 유용한,  3. 흠이 없는

      발음 / 카로스(kalŏs) 

      어원 /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좋은(마 3:10, 막 4:8, 요 2:10), 아름다운(마 7:19), 착한(마 5:16), 마땅한(마 15:26), 나은 (마 18:8,9, 막 9:45),
      선한(요 10:11, 고후 8:21, 딤전 1:8), 옳은(고전 5:6), 잘하는(딤전 3:13), 유익을 얻는(히 13:9).
      신약 성경 / 101회 사용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기를 구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버림받은 자 같을지라도 선을 행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만큼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선을 행하며 살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선과 악에 대해 아주 쉽게 풀이를 했습니다.

      “선이란 뒷맛이 좋은 것이다. 악이란 뒷맛이 나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선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선을 행하기는 처음은 어렵고 힘들지만, 나중에 그 결과를 보면 흐뭇합니다.
      악이란 처음에는 내게 큰 쾌락이 되고, 좋은 것처럼 보여도 나중은 오히려 고통이 됩니다.
      기도하지 않고, 봉사하지 않고 쉬면 몸은 편하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몸은 힘들지만 기도와 봉사를 열심히 하고 나면 마음이 편하고 즐거운 것입니다.

      감리교 창시자인 영국의 존 웨슬리 목사는 “나는 하루에 세 번씩 내 자신을 향해서 질문한다.
      아침에는 내가 오늘 아침에 무슨 선한 일을 할까 질문하고, 점심에는 내가 정오에 무슨 선한 일을 할까 질문하고, 저녁에는 내가 오늘 무슨 선한 일을 행하였는가 질문한다”고 했습니다.

      ‘마천동 슈바이처’라는 불리는 서내과 원장 서대원 씨의 아버지는 사업을 하다가 부도를 냈고, 장남인 그에게 2억 원의 부채를 남기고 쓰러져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는 서울 경찰병원에서 인턴생활해서 겨우 70만원의 월급을 받으며 살았는데, 빚쟁이들이 찾아와 그 월급의 절반을 가져갔습니다. 그러자 그의 아내가 보따리를 싸면서 ‘의사한테 시집와서 호강할 줄 알았는데 고생만하는구나’하고 2살짜리 아들을 두고 가출했습니다. 그는 절망에 빠졌고, 경제적으로도 어렵고, 아내도 떠났고, 2살짜리 아들과 함께 살아갈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무작정 길을 걷다가 ‘소망의 집’이라는 지체장애인 보호시설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장애인들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몸이 아픈 것을 보고 들어가서 진료했습니다.
      이때 서 원장은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구나, 나도 여기서 보람을 느끼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고 의료봉사를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그는 그들이야말로 내 인생을 새출발하게 해 준 사람들이라며, 무의탁 노인들과 장애인들을 도와주기 시작했습니다.
      그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은 돈을 내든지 내지 않든지 성심껏 치료해주었습니다.
      ‘마천동의 슈바이처’라고 소문이 나서 처음에는 돈이 없는 사람들이 주로 많이 찾아왔었지만 지금은 진료비를 다 내는 손님들도 많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선행도 하고, 존경도 받고, 또 내과에 손님들이 많아지니 경제적인 문제도 해결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선을 행하면 처음에는 어려워도 하나님이 더 큰 복을 주십니다.
      왜냐하면 선을 행하는 십자가는 더하기의 복으로 갚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온전하게 되어 가고 있는가?(9절)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가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온전(穩全)
      - 편안할 온(穩), 온전할 전(全)

      穩 : 안정되다, 믿음직하다, 확실하다 
      벼 화(禾) + 삼갈 은(㥯) / 숨을 은(䔌), 마음 심(心)

      全 : 흠이 없다, 갖추다
      사람 인(Ƣ) +  임금 왕(王)

      κατάρτισις, εως, ἡ  2676

      1. 완전하게 됨,  2. 완성

      발음 / 카타르티시스(katartisis) 

      어원 / 267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온전하게 되는 것(고후13:9).
      신약 성경 / 1회 사용

      * 2675.  καταρτίζω 
      1. 정돈하다,  2. 원상으로 복구시키다,  3. 완전하게 하다

      발음  / 카타르티조(katartizō) 

      어원 / 미래 καταρτίσω, 제1부정과거 κα- τήρτισα, 제1부정과거 중간태 κατηρ- τισάμην, 완료 수동태 κατήρτισμαι, 2596과 739의 파생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깁다(마 4:21, 막 1:19), 온전하게 하다(마 21:16, 살전 3:10, 벧전 5:10), 온전하게 되다 (눅 6:40, 고후 13:11), 짓다(히 11:3), 바로잡다(갈 6:1), 예비하다(히 10:5).
      신약 성경 / 13회 사용

      바울은 자신이 약하게 되더라도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온전하기를 간구합니다.
      우리는 온전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부분적이거나 일시적인 것도 안 됩니다.
      온전하되 끝까지 온전해야 합니다. 봉사해도, 순종해도, 예배를 드려도, 예물을 드리더라도 온전히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학생들이 좋은 결과를 얻으려면 모든 과목마다 성적이 좋아야 합니다.
      한 과목을 아무리 잘 봤어도 다른 과목을 망치면 통계점수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 출석, 말씀 순종, 봉사, 충성 등 모든 분야에서 온전하길 바랍니다.

      현대 조각 가운데 아상블라주(Assem-blage)라는 장르가 있습니다.
      이것은 폐품, 다른 사람들이 버린 빈 깡통, 고물, 철사 등을 모아서 작품을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피카소의 ‘황소의 머리’라는 작품도 누군가 버린 고물 자전거에 망가진 쇠붙이와 고철을 모아서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이 작품에 사용된 재료는 값어치 없이 버려진 것이었지만, 피카소가 손을 대었을 때 고가의 작품이 되었습니다.

      ‘아상블라주’란 프랑스어로 집합 ·집적을 의미하며, 특히 조각 내지 3차원적 입체작품의 형태를 조형하는 미술상의 방법을 말한다.
      종이나 베의 조각 등을 화면에 풀로 붙이는 큐비즘의 콜라주에서 비롯되었지만, 콜라주가 평면적인 데 대하여 아상블라주는 3차원적이다.

      1961년 뉴욕에서 열린 아상블라주전(展)의 기획자 W.사이츠는 “아상블라주는 무엇보다도 먼저 예술품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물체의 집적이어야만 한다”고 정의하였다.

      피카소의 《압생트 술병》(1912) 등이 선구적 작품이지만, 본격적인 개화(開花)는 다다이즘 및 초현실주의, 특히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네오다다이즘, 팝아트, 누보레알리즘 및 환경예술 등에서 이루어졌다.

      D.스페리(1930∼ ), F.아르망(1928∼ ) 등은 폐품을 소재로 예술화한다는 데서 더 나아가, 오히려 ‘잡동사니’ 폐품이 지닌 표현력을 끌어내려는 데 예술활동의 중점을 두고 있다. 또한 공업제품의 폐품을 주로 사용한 정크 아트(junk art)도 이에 속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하나님의 작품이 된다면 우리의 삶을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를 만져주시도록, 삶에 개입하시도록 기도하십시다.
      그럴 때에 내 인생의 작품은 계산할 수도 없는 고가가 됩니다.

      우리 스스로 자신에게 ‘믿음이 있는가’,
      ‘선을 행하고 있는가’,
      ‘온전하게 되어가고 있는가’를 물어봅시다.
      비록 우리는 부족해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하게 사용해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온전하라”는 무슨 의미인가?(마태복음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어떻게 인간이 하늘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처럼 온전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무죄한 존재이시다.
      그러나 타락 이래로 인간은 죄성을 타고난 존재가 되었다(엡 2:3).
      그렇다면 인간이 어떻게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할 수 있다는 말인가? 예수께서 하신 이 말씀은 무슨 의미인가?

      마태복음 5:48에 있는 예수님의 분명한 이 말씀은 산상설교의 두 번째 부분의 결론이다.
      산상설교 전체는 마태복음 5-7장인데, 그것의 둘째 부분은 5:17-5:48이다.
      이 부분의 서언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케 하러 왔다고 주장한다.
      서언 다음에 연속되는 여섯 개의 대조 진술(antithesis)이 뒤따라 나오는데, 예수님은 구약의 성경절이나 전해 내려오는 말씀을 다음과 같은 형식으로 인용한다.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마 5:21, 22).

      이 대조 진술들은 구약의 개념들을 거부하고 예수의 새로운 가르침으로 대체하려 한다는 인상을 준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매 경우마다 구약의 가르침을 더 심도 있게 적용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분은 자신이 온 목적이 구약의 원칙들을 폐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옛 명령의 깊이와 더 폭넓은 적용을 보여 주려는 것임을 나타내셨다.

      “그분은 당신께서 온전하신 것처럼 온전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분께서 우주에 대해 빛과 축복의 중심이 되시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작은 사회에서 그렇게 되어야 한다.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나, 그분의 사랑의 빛이 우리에게 비췸으로 우리는 그 빛을 반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역에서 온전하신 것같이, ‘선하신 그분의 선하심을 빌어’우리는 우리의 영역에서 온전하게 될 수 있다.”(산상보훈, 77쪽).

      마태복음 5:43-48에 나오는 마지막 대조 진술은 원수를 사랑하는 문제를 다룬다.
      예수님은 레위기 19:18의 일부(”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를 인용하면서, 거기에 전통으로 내려오는 진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을 덧붙인다.
      그런 다음 그분은 우리의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그 유명한 원칙으로 전통적인 진술을 뒤엎는다.
      계속하여 주님께서는 원수에게 이런 원칙을 행동으로 옮기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결과가 나온다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행위와 맞먹는 일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만을 사랑하는 사람들 또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자들을 언급하심으로써 자비가 크신 하나님의 행위와 대조하신다.
      그런 사랑은 세리나 이방인 곧 성경적 종교의 범위 밖에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하는 사랑이나 진배없다고 말씀하신다. 이렇게 하여 두 부류의 행동 방식 곧 선인과 악인 모두에게 사랑과 관심을 베푸시는 하나님과 오로지 자신만을 사랑하고 자신에게만 관심을 두는 세리나 이방인이 대조되고 있다. 이런 내용이 있은 후에 제자들에게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처럼 온전하라(마 5:48)는 요청이 뒤따라 나온다.

      마태복음 5:48의 문맥을 이해하는 것이 본문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는 데 필수적이다. 마지막 대조 진술의 문맥 안에서 온전[완전]은 결점이 없거나 일체의 도덕적 결함이 근절된 상태로 정의되지 않고, 오히려 우리와 사이가 가장 먼 자들 곧 우리의 원수에게까지도 사랑을 베푸는 것으로 정의되고 있다. 대조 진술의 전체 문맥 안에서 마태복음 5:48의 온전하라는 요청에는 가장 높은 도덕적 순결에 대한 의식이 포함돼 있다. 예컨대, 미움도 살인으로, 음욕의 눈길도 간음으로 재정의하고, 미움도 품지 말고 음욕도 품지 말라고 명한다.
      이런 최상의 요구에 대면하여, 우리는 간단히 제자도를 포기해 버리려 하거나, AD 2세기에 한 저술가가 디다케(Didache)라는 책 6장 2절에서 마태복음 5:48에 대해 말한 것처럼 생각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그대가 주님의 온전한 멍에를 멜 수 있다면 완전해 질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그대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라.”

      또는 예수님의 의도가 그렇지 않은데도, 완전은 불가능한 것이며 게다가 그리스도인은 은혜로 구원받기 때문에 그런 것은 불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한 데까지 나아갈 수 있다.

      “온전”[완전]의 의미 :

      마태복음 5:48에서 “온전”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텔레이오스인데, “완전한, 결함이 없는, 온전한, 충분히 발전된, 성숙한, 목표나 목적을 달성한” 등을 의미한다.(1)

      어떤 것이 다 성장하여 그것의 목표에 도달하면 텔레이오스라고 말해진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목표가 있다.
      그것은 하늘 지향적이다.
      위에서 부르신 복음의 부름은 분명하다(빌 3:12-14).
      하나님이 어떤 수준의 지점에서 우리를 발견하든 우리를 가납하시지만, 그 수준에 그대로 머물도록 내버려 두진 않으신다.
      그분은 그리스도인 성숙으로의 여행으로 우리를 초청하신다.
      마태복음 5:48의 예수님의 명령은 그 여행의 결실에 대해 말한 것이다.
      그 명령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여행을 받아들여 그분의 뜻 안에서 걸어가는 것을 말한다.
      온전[완전]의 목표 곧 그리스도인 성숙, 다시 말해서 하늘 아버지처럼 되는 것은 우리를 좌절시키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고, 도덕적 어둠의 세계에 비치는 우리의 길라잡이별과 같은 기능을 한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5:48은 그리스도인의 목표[온전]를 향해 끊임없이 걸어가라는 주님의 초청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 유비무환(有備無患) 

      한경직 목사님께서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목사님들이 한경직 목사님을 찾아갔더니 그런 말씀을 하시더랍니다.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 예수 잘 믿으세요”

      “목사님들 목회 잘 하세요”가 아니라,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 그러시더랍니다.
      그래서 그 중에 어느 목사님이 작은 소리로 말했답니다.
      “아이고 목사님! 저희들 목사들입니다.”
      그러니까 한 목사님은, 여전히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
      그제서야 모든 목사님들이 충격을 받고, 한 목사님의 하신 말씀을 받고, 정말 자신들을 돌아보면서 더 열심히 목회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목사가 목회를 잘하려면 예수를 잘 믿어야 하지요.. 그것이 기본이지요.
      그러면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은 뭘까요? 예수를 잘 믿는 것입니다.

      예수를 잘 믿는 것은 뭘까요?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신 것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버리운 자”라는 것입니다.
      버리운 자 (새)실격자, (공)낙제한 것, (현)불합격자, (영)실패자

      오늘 예배에 오신 여러분들은 예수님이 내 마음에 와 계시는 것을 확실히 시험해 봤더니 나는 확실히 주님이 계시는 것을 확증할 수 있어 그러면 ‘성공자’입니다.

      그러나 그런 확신이 없으면 우리는 신앙의 ‘실패자, 낙제자, 실격자’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런 확증이 없다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잘 믿기 위해서 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항상 우리의 신앙을 잘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 건강도 그렇습니다.
      잘 먹고 운동하고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정기건강 검진을 잘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큰 병 생기는 것도 모르고 지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참으로 중요한 것이 점검을 잘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몸에 갑자기 통증이 나면, 병원엘 갑니다. 병원 응급실에 가면, 응급조치를 한 후에 하는 일이, 통증에 대한 진단, 점검을 하는 일입니다.

      진단을 잘 해야, 바른 처방이 나오고, 정확한 의료행위로 사람을 치료할 수가 있습니다.
      그 환자의 통증을 잘 진단하느냐 못하느냐가, 잘 점검을 하느냐 못하느냐가 그 사람의 치료의 관건입니다.
      잘못된 진단을 하면, 잘못 처방이 되고, 잘못된 처방이 나오면, 잘못 치료가 되어 치료가 불가능해집니다.
      육적인 진단도 중요하지만 영적인 진단도 중요합니다.

      고린도후서 13장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마지막 편지의 마지막 장입니다.

      5절을 새번역으로 읽어봅니다.

      “여러분은 자기가 믿음 안에 있는지를 스스로 시험해 보고, 스스로 검증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모른다면, 여러분은 ‘실패자’입니다.

      사람의 눈을 가리고 어느 운동장으로 가로질러 똑바로 걸어가게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똑바로 가지를 못하고 삐딱하게..
      그런데 그래도 운동장을 웬만큼 바르게 건너갈 수 있는 방법은 눈을 가리고 가다가 가끔씩 멈추어 서서 내가 가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점검을 하면 그래도 웬만큼 똑바로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공하면 성공할 이유가 있고, 실패를 하면 실패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 여호수아 7장에,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군대가 하나님의 기적으로 여리고 성을 정복했지만 그 다음에는 아주 작은 아이 성을 정복하려다가 오히려 실패를 하고 말았습니다.

      여리고성을 정복하고 난 후에, ‘아이 성’은 아주 쉽게 정복하리라 생각했는데 실패했습니다.
      그 이유를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 가서 기도하면서 진단을 하니까 진단이 나왔습니다.

      ‘아간’이라고 하는 한 사람이, 여리고 성을 정복할 때, ‘모든 물건은 여호와께 바치라’고 하였는데, 아간이 물건을 보고 탐욕을 느낀 나머지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의 금덩이 하나를 자기 장막에 숨긴 것이었습니다.

      진단이 잘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 처방을 어떻게 했지요?
      여호수아는 아간과 그 물건을 찾아내고, 아간의 자녀들을 ‘아골 골짜기’로 가서 돌로 쳐 죽였습니다.
      수술을 한 것입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모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시험해서 잘 진단을 해야 합니다.

      ‘내 안에 주님이 계시는 것이 믿어지는가?’
      ‘주님이 내 안에서 내 인생의 운전대를 붙잡고 일하고 계시는가?’
      그것이 안 믿어진다는 우리는 ‘실패자, 실격자, 불합격자, 낙제자’라는 것입니다.

      "시험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라조(πειράζω)"는 ‘되돌아보다’. ‘자세히 조사하다, 살펴보다’라는 뜻.
      ‘노력하다, 분투하다, 책임지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즉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라’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그 말씀대로, 그 믿음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고, 애쓰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항상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고, 점검하면서 혹시, 나태하지는 않았나, 혹시, 게을러지지는 않았나, 혹시, 교만하지는 않았나, 혹시, 하나님의 영광을 내가 가로채고 있지는 않는가? 시험하고 점검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고린도 교인들은,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을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고린도후서 10:7절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사람은 외모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 안에 주님이 계시는가?’ ‘그 사람은 주님과 동해하고 있는가?’

      사무엘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우리 사람을 볼 때 얼마나 외모를 보나요?
      가진 것 보고, 배운 것 보고, 그 사람의 배경을 보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그런 것 보지 않으시고 우리의 중심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인가?”
      “예수님을 목자로 모시고 사는 사람인가?”

      그렇지 않으면 그런 사람은?
      새)실격자, 공)낙제한 것, 현)불합격자, 영)실패자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판단하지 말고 나를 시험하고 뒤돌아보고 점검을 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에 대한 시험을 해야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데 눈을 돌리면 내게는 은혜가 없습니다. 은혜가 내리지 않습니다.

      5절을 읽으면서도 우리의 관심은 우리 자신이어야 합니다.
      나는 정말 우리 주님이 내 안에 오셔서 역사하고 계신 것을 믿는가?
      이것이 믿어지지 않으면 우리 신앙은, 실패, 실격, 낙제, 불합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는 나의 눈이 다른 사람의 신앙을 살피고 점검했다면 이제는 “나는 믿음이 있는가, 나는 믿음의 사람인가, 나는 믿음으로 살고 있는가”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서울에 어떤 대형교회에 담임목사님을 모시기 위하여 담임목사 청빙위원회가 조직이 되고 여러달 후에 한 분을 담임목사로 청빈 위원회에서 소개하였습니다.

      “여러분 한 분을 소개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분에게는 이런 흠이 있는데 우리 교회에서 청빙을 해도 될까요?”

      첫째, 이 분은 중년이 되엇는데도 결혼을 못했습니다.
      둘째, 이 분은 목회를 하면서 가끔 사업도 하는 분입니다.
      셋째, 이 분은 외모가 너무 못생겼습니다.
      넷째, 이 분은 간질병을 갖고 있어 가끔 발작도 하십니다.
      다섯째, 이분은 말이 너무 어눌해서 설교를 잘 못하십니다.
      여섯째, 이 분은 한 교회에 오래 계신 적이 없고, 자꾸 교회를 개척하면서 옮겨 다니십니다.
      일곱째, 이 분은 신학대학교도 나오지 않은 분이라 당연히 박사학위도 없습니다.

      누굴까요?
      사도바울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이런 흠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 분 안에는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섰을 때 무엇으로 주님께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우리의 가진 것 배운 것 일생 쌓아놓은 것일까요? 지위와 명예, 직분인가요?
      무엇에 관심을 가지며 살았습니까?
      세상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살았으면 우리는 실패자 실격자 낙제자 불합격자입니다.  

      내가 세상에 가진 것이 없어도 내가 내 안에 주님을 모시고 주님과 의논하고 주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살았다면 우리는 성공자입니다.
      천국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다른 사람의 신앙을 진단하고 판단하는 자리에 있었다면 이제는 자신의 믿음을 바르게 진단하고 바르게 검진하십시오.
      그것만이 내 영이 사는 길이요.
      내 믿음이 바로 서는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참 신앙인과 신앙인답게 보이는 사람의 차이점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참 신앙인은, 예수님이 내 마음의 주인으로 살아가시도록 내 마음의 중심을 주님께 드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처럼 보이는 사람은, 자기가 인생의 주인입니다.
      이런 사람은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자기 마음대로 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 신앙의 불합격자이냐? 낙제생이냐? 실패자이냐?

      성도가 언제 실패자가 되고, 언제 불합격자가 됩니까?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시지 않을 때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지 않는 예배,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지 않는 기도,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지 않는 찬송과 헌신과 봉사....
      이런 것은 낙제 불합격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며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계시는데도 믿지 못하는 어리석은 성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을 대화하고 사랑하고 교제를 해야 합니다.

      항상 점검하고 확증해야 합니다.
      여러분 건물을 잘 점검하지 못해서 무너지는 것 보셨죠?
      다리를 점검하지 않아서 무너지는 것을 보셨죠?

      건강진단도 잘못 점검되어 중병에 걸리는 분들... 자동차도 1년에 한 번은 검사를 받습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
      유비무환(有備無患)

      첫 번째는 자기 자신을 시험함을 통하여 입니다.
      시험하라는 명령형이며 현재형입니다.
      지속적으로 자기 자신을 시험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시험이라고 사용된 단어는 무엇인가를 증명하기 위한 시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신자가 자기 자신을 지속적으로 시험해야 하는 이유는 자신이 믿음 안에 있는가 입니다.
      믿음 안에 있는가 하는 것이 시험의 이유이자 목적인데 믿음 안에 있다는 의미는 문맥에서 예수 안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누구 안에 있다라는 말이 가지는 의미는 항상 그 존재와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영향력 아래 있으며 지배아래 있다는 의미입니다.
      원문에서 안에 라는 말은 소유의 개념이 강합니다.
      즉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의 그의 소유아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와 예수 밖에 있는 자의 큰 차이는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가 이며 예수님의 지배와 다스림 가운데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그분의 말씀이 우선 순위이며 그분의 말씀이 앞서는가는 스스로 자신을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잣대입니다.
      삶이 여전히 자신의 마음대로이고 내가 생각하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육체를 위하여 살고 있다면 예수 안에 있지 않고 밖에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대로 못합니다. 하고 싶은 대로 살지 않습니다.

      예수를 안에 있으면 말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조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행동이 조심스럽습니다.
      혹시 남에게 피해가 갈까, 다른 이가 나의 이러한 행동으로 오해할까 생각해서 행동하고 말합니다.
      내가 믿는 그분이 사람들 가운데 멸시를 받고 조롱이 될까 하여 말에나 행동에나 절제합니다.
      그러나 예수 밖에 있는 사람은 항상 생각이 인간적일 뿐만 아니라 자신만을 생각합니다.
      말에 절제가 없고 행동에 절제가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겉과 속이 같은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도 예수를 위해 살고자 합니다.
      자신이 예수 안에 있음을 잊지 않고 그대로 살아갑니다.

      두 번째의 명령으로 확증하라는 것입니다.
      확증한다는 것은 입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험을 통하여 입증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신을 보며 무엇 보다도 어떠한 상황에서도 예수의 다스림과 주권을 인정하고 높이여 주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자세와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스스로 시험을 통하여 입증됩니다.
      자신의 내면을 자세히 살피는 일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내가 행하는 모든 일의 의도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하는가? 무엇을 위하여 하는가? 이것을 통하여 나는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하는 진지한 물음을 자신에게 던져 본다면 스스로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예수 안에 있는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지를 말입니다.

      카테큐만(catechumen.  입문자 또는 예비 신자)

      1-2세기 당시의 교회들은 신자를 만들어내기 위하여 엄격한 규정을 두었습니다.
      카테큐만(catechumen.  입문자 또는 예비 신자)
      이라고 하여 정식 교인으로 받아들이기에 앞서서 그가 크리스천으로서 믿음을 따라 살아가기에 필요한 신앙 교리와 고백을 갖추었는지 살피는 일정한 기간을 두었습니다.
      이 기간을 잘 견디지 못하고 카테키즘(Catechism: 교리 문답)을 통과하지 못하면 교인으로 받아들이지 아니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때에는 크리스천으로서의 믿음을 인정받은 사람이 비로소 교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요즘도 세례를 위한 공부를 하고 세례문답을 하지만, 크리스천으로서의 믿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교인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세례를 주며, 아직 크리스천으로서의 죄사함의 확신도 없고 믿음의 고백이나 삶이 없는데도 직분자로 삼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만, 바른 교회생활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크리스천으로서의 자기 확신이 있음이 바람직하다고 할 것입니다.

      한 스님이 “나는 30년 동안 좌선(坐禪)을 해왔기 때문에, 번뇌(몸과 마음을 시달리게 하고, 어지럽히고, 귀찮게 하고, 사로잡혀 방황하게 하고, 더럽히는 정신작용)가 말끔히 없어졌습니다.”고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이를 듣고 있던 어떤 큰스님이 초상집에서나 하는 조문(弔問)의 인사를 합니다.

      “정말 얼마나 상심이 되시겠습니까?”

      그러자, 자기의 오랜 좌선 수련을 자랑스럽게 말했던 스님은 화를 내면서 그런 조문의 인사를 하는 이유를 말하라고 대듭니다.
      큰스님은 대답합니다.

      “번뇌가 있어야만 벗어나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번뇌는 벗어나고 깨닫는 밑천입니다.
      스님은 (번뇌가 없다고 하니) 그 밑천을 없애버렸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살아있는 한 번뇌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없어질 때는 사람이 죽은 뒤인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상심이 되셨는지 물어본 것입니다.”
      (송원스님의 「알기 쉬운 반야심경(般若心經) 」에서)

      바울은 로마서 7장 24절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부르짖습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울 자신의 곤고(困苦)를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바울이 아직 구원에 이르지 못했을 때를 돌아보며 이렇게 탄식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그보다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의 상태가 그 자신만으로는 곤고함이 있음을 말씀함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롬 8:2 참고)이 끊임없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지 않는 한 우리는 항상 죄에 노출되고 죄로 인하여 넘어지기 쉽습니다.

      교회생활을 오래 하였다고 하는 사람이 “나는 별로 기도할 것이 없습니다. 나의 모든 삶이 다 순조롭습니다.”라고 말할 때 이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함에 이르는 성화의 삶을 살지 않고 있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성화의 삶을 사는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밝은 빛 가운데 자신이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자신의 부끄럽고 추한 모습과 생각으로 인하여서 안타까와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서도 “죄인 중에 내가 괴수(魁首)니라”고 고백합니다. 여느 크리스천들보다 예수님의 모습을 가장 많이 본받고 있던 바울의 입에서 어떻게 이런 험상궂은 고백이 나올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함의 거울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가까이 이르른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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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의 기쁨은 밤에 잠을 자던 중 갑자기 꿈에 전해야 할 말씀에 대한 가르침을 받을 때이다.
      1시 30분경 눈을 떠야 했다.
      왜냐하면 "사탄의 사자"라는 묵상의 주제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자성어로 생각하라는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즉지 자리에서 일어나 사자성어들을 살펴보면서 사도 바울이 천국에 대한 환상을 본 후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결국 세 가지 사자성어로 정리할 수 있었다.

      σκόλοψ, οπος, ὁ  4647

      1. 말뚝,  2. 막대기,  3. 가시

      4628과 3700의 어간에서 유래한 듯 함 : 말뚝

      발음  / 스코롭스(skŏlŏps)
      관련 성경 / 가시(고후 12:7).
      신약 성경 / 1회 사용

      자고. ὑπεραίρω 5229

      1. 일어나다,  2. 스스로 높아지다,  3. 의기양양하다

      발음  / 후페라이로마이(hüpĕrairŏmai) 

      어원 5228과 14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자만하다(고후 12:7), 자기를 높이다(살후 2:4).
      신약 성경 / 1회 사용


      10-11-2022(화)

      사단의 사자(고린도후서 12:7)

      안중무인(眼中無人)

      눈 안,  가운데 중,  없을 무,  사람 인

      - 눈에 보이는 사람이 없다는 뜻으로, 방자하고 교만하여 다른 사람을 업신여김을 이르는 말.

      안하무인(眼下無人) 동병상련(同病相憐)

      눈 안,  아래 하,  없을 무,  사람 인

      - 눈 아래에 사람이 없다.

      교만을 의미합니다.
      천국을 경험했다는 많은 간증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같은 것이 없다.
      도대체 천국은 보는 사람마다 다른 것일까?
      천국 환상에 대한 자기 교만이 섞여 있는 것은 아닐까?

      동병상련(同病相憐)

      한가지 동, 병 병, , 서로 상, 불쌍히 여길 련(연)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면 그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고 한다.
      그 아픔이 얼마나 지독할까?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왜 이런 아픔을 주시는 것일까?
      그 이유는 같은 아픔을 겪는 부모를 위로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신 것이라고 하겠다.
       
      합려(闔閭)는 자객(刺客)인 전저(專諸)를 시켜 오나라(吳--)의 왕 요(僚)를 죽이고 왕위(王位)에 올랐다.
      오자서(伍子胥)는 전저(專諸)를 천거(薦擧)한 공로(功勞)로 대부(大夫)가 되었고 또한 초나라(楚--)에서 망명(亡命)한 백비(伯嚭)를 천거(薦擧)하여 함께 정치(政治)를 하게 되었다.
      그때 같은 대부(大夫) 피리(被離)가 「백비(伯嚭)를 한 번 보고 왜 그렇게 신용합니까?」라고 물으니 「그것은 그와 내가 같은 원한(怨恨)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상가(河上歌)에 같은 병에는 서로 불쌍히 여겨 한 가지로 걱정하고 서로 구하네.」라고 대답(對答)했다.
      결국 오자서(伍子胥)는 백비(伯嚭)를 경계(警戒)하는 피리의 충고(忠告)를 듣지 않다가 월나라(越--)에 매수된 백비(伯嚭)의 참언(讒言)으로 분사(焚死)했다.

      오월춘추의 합려내전(闔閭內傳)에 나오는 일화에서 유래했다. 오자서가 합려를 오나라 왕으로 만들어 정권을 차지하는 데 성공하고 각지의 인재들을 끌어 모았는데, 그 가운데 내정의 명수 백비가 끼어있었다. 사람들은 백비가 물욕이 심하고 강직하지 못하다고 평했으나, 오자서는 백비의 가족이 초나라 왕에게 몰살당했음을 들면서 "같은() ()을 앓는 사람들은 서로() 동정하는() 법이다. 백비는 나와 같은 병을 앓고 있으니 나를 잘 이해할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한다. 사실 그정도가 아니라, 오자서도 초평왕의 방관 속에서 비무기의 농간 때문에 집안이 멸문당해서 오나라로 도망왔고, 백비도 비무극의 차도살인으로 집안이 초토화 되어서 오나라로 도망온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말대로 훗날 백비는 은혜를 잊고 오자서와 대립하고 그를 모함해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언유재이(言猶在耳)

      言   말씀 언,  오히려 유, 在  있을 재,  耳  귀 이

      들은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천국 간증을 들으면 성경보다는 천국 간증이 더 흥미롭다.
      가장 귀한 진리는 성경이다.
      기준을 능가하는 간증 더구나 사도 바울의 간증을 듣는다면 성경의 기준보다 더 그 가치를 높이므로 진리가 훼손되거나 오염 될 것이므로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개인이나 국가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구약성경에서 가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이나 환난을 가리켰고, 신약성경에서는 바울이 가졌던 경우처럼 육체의 가시를 가리켰습니다.
      누구나 가시 없는 평안한 삶을 소망하겠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개인과 국가에까지도 가시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닭 우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주님을 부인했던 일을 기억하고 괴로했을 것입니다.
      모세도 광야에서 순간 하나님의 명령을 제대로 받들지 못하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민 20:1-13).
      엘리야 선지자에게도 연약한 가시가 있었습니다(왕상 19장).
      더군다나 사무엘 선지자에게도 두 명의 자식이라는 가시가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8:2-3을 볼 때 요엘과 아비야 두 아들은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않고 이(利)를 따라서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도 창 15-16장을 볼 때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믿지 못했던 약점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에게는 하갈이라는 이방 여자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삭에게는 이스마엘이라는 가시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개인뿐 아니라 어떤 조직 기관 안에서도, 국가에도 가시를 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민 33:55을 보면 ‘그 땅의 백성들을 다 쫓아내지 아니하면 그 남겨둔 자들이 너희 눈에 가시가 되고 너희 옆구리를 찌르는 가시가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전체에게 주신 국가적인 가시를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시를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개인의 가시든 어떤 단체의 가시든 당사자에게는 매우 괴로운 것입니다. 마음속의 고통도 어려운 것이지만 육체의 가시도 참으로 견디기 어렵습니다. 여러 가지 가시로 인해 고통과 괴로움을 당할 때는 전력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가시를 주신 이유를 깨닫고 그 뜻대로 합당한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첫째, 겸손을 위한 것 

      사도 바울이 가졌던 많은 지식과 신비한 영적 체험이 그를 교만하게 할 수 있음을 아시고 하나님께서는 육체의 가시를 주셨던 것입니다. 모세도 40년간이나 바로의 궁에서 애굽의 모든 지식을 통달하였으나 동족을 돕다가 죽이는 바람에 미디안 광야로 도피하여 40년간 처가살이라는 가시에 찔리면서 겸손을 익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가시를 주셔서 하나님의 종들을 겸손하게, 낮아지게 만드시는 분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잠 16:18) 인류가 최초로 지었던 죄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교만의 문턱에서 믿음으로 이 가시를 택함으로 하나님 앞에 끝까지 온전하게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두로 왕은 정치에 성공한 위대한 왕으로서 모든 길에 완전한 듯 했지만 그의 교만이 파괴와 멸망을 불러왔습니다(겔 28:1-24). 그의 오만과 허욕을 하나님께서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나아가 두로 왕과 함께 한 시돈 나라도 두로 왕을 모방하다가 패망하게 되는 무서운 심판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둘째,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것 

      고후 12:10을 볼 때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가시에 찔려 약해졌을 때 하나님의 강함이 나타나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셉도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으나 형제들의 미움의 가시, 애굽의 종으로 팔리고 보디발의 아내의 가시에 찔리고 마침내 옥에 갇히는 가시에 찔리게 됐지만 이러한 가시들을 통해 그의 신앙인격이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동족을 기근에서 구원하고 이스라엘의 명맥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는데, 이 모든 과정에서 요셉은 온갖 가시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성도에게 가시는 참기 어려울 정도로 아픔과 쓰라림을 줍니다.
      이 가시를 이기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첫째, 주님의 가시관을 생각할 때 우리의 작은 가시의 고통을 이길 수 있습니다.

      둘째. 사도 바울같이 그의 곤고를 기뻐하는 믿음이 가시를 이길 수 있는 비결입니다(고후 12:10, 8:13).

      셋째, 가시를 피하려만 하지 말고 오히려 그 가시를 정복하고 성숙한 신앙으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가시를 은혜로 받아들이고 감사하며 찬송과 기도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때 진정으로 가시를 이길 수 있습니다.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하심이니라(고린도후서 12:7)

      ​내 육체에 가시가 있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범위 내에 있는 것입니다. 
      질병을 두시거나 아니면 불편한 환경적인 요소를 두게 하심으로 상한 마음을 가지게 합니다.
      이 가시는 육체의 고통을 있게 하거나 마음이 상함으로 더욱더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게 합니다.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권세가 허락된 범위 내에 있으나 오히려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런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심으로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한 하나님을 의지하게 합니다. 

      1. 하나님께서 교만하지 않게 하십니다.

      ​바울이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은 지극히 큰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무익하나마 부득불 자랑하는 것은 주의 환상과 계시였습니다.

      바울은 낙원이라는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갔습니다.
      낙원에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었습니다.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을 자랑하겠으나 절제할 수 있는 것은 자기를 돌아보아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영계의 세계를 보고 절제하지 못함으로 자랑하다가 넘어지는 자들이 많습니다.
      사람이 은사를 많이 받았다고 해서 인격까지 훌륭한 덕을 지닌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은사가 사람을 교만하게 합니다.
      나중에는 신이 된 것처럼 교만하다가 넘어지는 것입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의 은혜는 영계의 세계를 본 것을 자랑하지 못하게 육체의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2.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12:8~9)"

      내가 세 번 주께 간구

      사도바울은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인 질병이 있어 고통스러웠습니다.
      이것이 바울에게서 떠나기 위하여 세 번 주께 간절하게 구하였습니다.
      내게서 질병의 병마가 예수 이름으로 떠나가기를 구하였으나 여전히 질병은 떠나지 않고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주께 구하여 응답하여 주시는 기도가 있고,
      세월이 지나서 이루어지는 기도가 있고, 
      기도를 해도 들어주지 않은 기도도 있습니다.

      질병의 고통을 당하는데도 주께서 들어주시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계셨습니다.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가 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어떤 중국의 목사님이 몸에 만성질병에 시달렸습니다.
      하나님께 구하여도 몸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꾸었습니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고 있는 앞에 큰 바위가 있어 건너갈 수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내가 이 바위를 치워주랴 아니면 물이 바위를 넘치게 하여 건너가게 해주랴?"

      목사님은 물이 바위를 넘치게 하여 건너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물을 바위 위로 넘치게 하여 배를 건너가게 하였습니다.
      꿈에서 깨어 목사님은 깨달았습니다.
      내 육체에 곧 사단의 사자가 있으나 질병이 있어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러 있어 약한 것들을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2. 만성질병이 내게 있어 오히려 크게 기뻐한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편하고 안전한 것입니다.

      소유에 있습니다.

      외모에 있습니다.

      자랑에 있습니다.

      부족함이 없는 넘치는데 있습니다.

      인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기쁨은 잠시 잠깐이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은 오히려 약한데서 크게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은 세상적으로 잘나가는 것도 없고

      내게 아무것도 없어도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할 수 있습니다.

      내 속에 있는 기쁨은 "예수 기쁨 나의 기쁨"입니다.

      약한 데서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약함으로 강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하박국3:17~18)"

      ​3. 나의 여러 약한 것들을 자랑한다.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능력을 발휘하게

      부르심을 받아 쓰임받는 자들은 사람의 강함에 있지 않습니다.

      성경인물들을 보면 약한 데서 하나님의 강한 것이

      나옵니다.

      모세는 나이 많았고 미디안의 오랜 광야생활로

      애굽의 언어도 잊어 버렸으나 능력의 지팡이를 주셨고

      말 잘하는 아론을 붙여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학문이 없는 자였으나 성령을 충만하게 받음으로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기탄없이 설교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어린 소년이라도 담대한 믿음으로

      3미터나 되는 골리앗을 물맷돌로 이마를 맞게 하여 이기게 하셨습니다.

      아직도 내가 강하고 능력있고 내가 내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능력에 있을 때 기독교를 박해하는 자였습니다.

      다메섹으로 그리스도인을 결박하러 가다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눈멀어 3일간 회심하는 시간을 가짐으로

      복음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나의 약한 것이 있어 강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린도전서1:26~28)"​

      3.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고린도후서13:4)"​

      예수님은 지극히 높으신 신성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 땅에 임하심은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셨습니다. 
      울 자리 조차 없어 말구유에 누우셨습니다.
      말 밥통에 누이는 수치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장 낮은데로 임하시는 것은 가장 약한 자를 들어 사용하심입니다.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셨습니다.
      촌동네 나사렛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육체의 부친은 목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촌동네 사람 나사렛 예수라 불렀습니다.
      예수께서 능력이 부족해서 정말 힘이 없어 붙잡히신 것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하늘의 하늘군대 천사들을 보내어 대적들을 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육체의 약함을 보이셨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조롱을 받았습니다. ​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 내려오라 하며(마태복음27:40)"

      ​예수께서 얼마든지 십자가에서 내려 와 조롱하고 희롱하는 자들을 다 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미련한 자는 십자가의 도를 어리석게 보나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약하지만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로 부활의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낮은데로 임하소서"​의 저자 안요한 목사님은 실명 전에 목사의 아들로 외국어에 능통하여 카츄사가 되었습니다. 

      외국의 유학길이 열려 결혼까지 하였습니다.
      안요한은 자신을 더 의지하였으나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어느날부터 눈에 이상이 옴으로 실명하고 말았습니다.
      실명하였을 때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약할  그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약해진 실명으로 인하여 신학공부의 길이 열려 뉴욕의 헬렌켈러제단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실명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내게 약한 것 때문에 고민하고 염려합니까?
      그 약한 것이 질병,가난, 배우지 못한 것, 가정의 어려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망과 불평으로 벗어나려 하고 간구하여도 그대로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자랑이 무엇입니까?
      세상 것들을 붙잡아서 위로 받기 보다 약할 때 하나님의 강한 것을 붙들어 하늘에 소망을 가지고 사는 신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약할 그 때에 강하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린도후서12:10)"







      조슈아 W. 지프는 책 ‘환대와 구원’에서 초기 기독교 서적인 ‘클레멘스 1서’에 나오는 이야기를 언급한다.
      아브라함 롯 라합이 믿음과 환대를 통해 구원을 얻었다는 내용이다.
      결코 우리가 환대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은 반드시 환대로 이어진다는 의미다.
      오늘날 개인주의 시대에서 교회가 잃어버린 것이 있다면 타인을 향한 환대와 ‘손대접’일 것이다.
      ‘뜻밖의 회심’ 저자인 로자리아 버터필드는 기독교에 적대적이었고 레즈비언 공동체에 소속돼 있었던 사람이었지만, 복음을 따라 환대를 베풀었던 한 부부의 식탁 교제에 참여해 교류하면서 극적 회심을 경험했다.
      복음전도가 잘 되지 않는 시대에 가장 효과적인 복음전도 방법도 바로 이웃에게 베푸는 환대와 손대접일 것이다.
      그들과 친구가 되어보라.
      우리의 우정과 섬김을 따라 복음이 흘러가게 될 것이다.
      고립의 시대에 환대의 공동체는 외로운 시대에 가장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별명 중 하나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과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의 복음은 환대를 통해 흘러 들어갔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0-10-2022(월)

      하나님의 열심으로(고린도후서 11:2) 

      도입 이야기 /

      남자가 보기에 심히 좋은 여자에게 구혼을 하고자  만날 약속을 하고 그 곳에 도착했습니다.
      두군거리고 떨리는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고 여자에게  청혼을 합니다.

      남 :  '당신을 위해선 내 목숨까지 줄 수 있을 수 있을 정도로 사랑 합니다. 나와 결혼해 주십시요.'

      여 :  '좋아요.  그럼 당신은 집이 있나요?'

      남 :  '아니요. 그러나...'

      여 :  '그럼 당신은 BMW 차가 있나요?'

      남 :  '아니요. 그러나...'

      여 :  '그럼 됐고요. 당신은 샐러리맨 인가요?'

      남 : '아니요. 그러나...'

      여 : '그러나, 그러나 하며 핑계 되지 마세요. 저는 당신과 같이 무능한 사람과 결혼 할수 없어요. 다신 연락하지 마세요.' 하고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여자가 떠난 후 남자는 혼자 말합니다.

      나는 집은 없지만 맨숀이 여러채 있고, 자동차는 벤틀리와 람보기니, 포르쉐, 페라리등 여러 대가 있는데 왜 싸구려  BMW를 타야 하는지 모르겠네.
      그리고 난 세계 최고 기업을 소유하고 있는데 왜 샐러리 맨이어야 하는지...' 

      사람을 자신의 생각과 기준의 잣대로 평가 하거나 보지 말라는 예화라고 하겠습니다.

      이 이야기를 예수님과 연결해서 살펴 보고자 합니다. 

      저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님께서 죽으시기까지 사랑한 그 사랑과 그 분의 진정한 가치를 모른채 저희의 판단과 기준과 생각 가운데 예수님을 저 버리고 사는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그 분은 우리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귀한 분이시고 엄청난 능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우리의 협착한 생각에 사로잡혀 그 분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사는자의 삶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아울러 이러한 예수님이 저희의 신랑이시라는 것을 잊지 말고 사시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그 분을 너무나 잊고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아직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예수님의 청혼을 잠시 있다 없어질 세상의 것에 마음이 빼앗겨 그 부르심을 거부하므로 행복한 삶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습니다.
      저희는 이 사람들에게 찾아 나가 그들이 예수님의 청혼에 기쁨으로 응답하여 그 분의 신부가 되게 하는 중매장이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 일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성령의 검인 말씀을 읽으신 후 열심히 전도하는 저희들의 영적 전쟁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교회를 부흥시켜 주시고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교회가 되리라 믿습니다.
      이같은 예수님의 중매장이가 되는‘전도’이것은 해도되고 안되는 일이 아니라 저희가 꼭 매일의 삶 속에서 억지로라도 행하여야 할 저희의 의무와 사명과 축복입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면 정말 좋겠습니다.




      중매(仲媒) 해 본 적이 있습니까?

      중매하다. ἁρμόζω 718 

      1. 결혼시키다,  2. 결합시키다,  3. 고린도후서 11:2

      발음  / 하르모조(harmŏzō)
      어원 / 제1부정과거중간태 ἡρμοσάμην, 완료수동태 ἥρμοσμαι, 제1부정과거수동태 ἡρμόσθην, 79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중매하다(고후11:2).
      신약 성경 / 1회 사용

      열심. ζηλός, ου, ὁ, ζηλός, ους, τό  2205

      1. 열심,  2. κατὰ  ζηλός :  열심에 관한한,  3. ζηλός θεοῦ : 하나님을 향한 열심

      발음  / 제로스(zē- lŏs)
      어원 / 220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열심(요 2:17, 롬 10:2, 빌 3:6), 시기(행 5:17, 롬 13:13, 고전 3:3, 고후 12:20)
      신약 성경 /  16회 사용

      * 2204.  ζέω

      1. 끓는 열성으로,  2. 사도행전 18:25,  3. τῷ πνεύματι ζέοντες

      발음  / 제오(zĕō)
      어원 / [기본형] 분사 ζέων : 끓이다, 삶다, ζέων τῷ πνεύματι
      관련 성경 / 열심을 내다(행 18:25, 롬 12:11).
      신약 성경 / 2회 사용

      중매(仲媒, 하르모조, ἁρμόζω)
      남자와 여자를 소개하여 결혼하도록 돕는 일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신부가 된 그리스도인들을 신랑이 되신 예수님께 소개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중매를 "거룩한 중매" 또는 "영적 중매"라고 합니다.

      성경은 믿음을 결혼과 비유해 말씀합니다.

      구약에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결혼한 신부라고 비유하면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고 우상에게 제사하는 행위를 아내가 딴 남자에게 한 눈 파는 외도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도 우리 성도들이, 또 교회가 거룩한 신부로서 신랑 되신 예수님과 결혼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처녀를 총각에게 중매하는 것처럼 우리 성도들을 예수님에게 중매해 영원히 함께 살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한 처녀와 총각을 중매해 성공하는 데도 얼마나 노력이 필요합니까?
      얼마나 헌신이 필요합니까?
      시간 들어가, 돈 들어가, 관심과 노력이 얼마나 많이 필요한지 모릅니다.
      하물며 우리 성도들을 거룩한 신부로 예수 그리스도께 중매하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과 희생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모든 것을 이 일을 위해 바칩니다.

      사도 바울의 이력을 살펴보면 세상적인 조건이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화려한 이력서의 소유자인데 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다 버리고 오직 주님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리고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해서 주님께 중매하려고 내 모든 것을 바치고, 시간과 물질과 땀을 바치고, 인생의 성공도 포기하고 헌신했습니다. 심지어 자기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드렸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바로 이런 헌신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가장 위대한 중매쟁이가 될 수 있었고 기독교역사 상 가장 위대한 사도요 선교사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노력과 열심을 바울은 뭐라고 표현합니까? 2절을 다시 보세요.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하나님의 열심으로!”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 거룩한 중매를 위해 노력을 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뜨거운 사람, 가장 열정적인 사람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의 뜨거움과 열정은 결국 하나님의 열심을 본받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의 열정은 바로 하나님의 뜨거움을 닮은 것이었습니다.

      ‘열심’이라는 헬라어로 ‘젤로스’인데 그 어원은 ‘제오’라고 합니다.
      '제오'는 '끓이다, 뜨겁다’ 하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뜨거운 것입니다.
      펄펄 끓는다는 뜻입니다.

      열심이란 ‘젤로스’를 ‘열심’ 또는 ‘열정’(熱情)으로 번역합니다.
      하나님의 열심!
      우리 하나님은 본디 아주 열심히 있는 분이고 열정이 있는 분입니다.
      아주 뜨거운 분입니다. 펄펄 끓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시는데 그냥 대충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냉랭하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정말 뜨겁게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너무 뜨겁게 사랑해서 견딜 수 없을 정도십니다.

      스바냐 3:17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어요.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우리 때문에 하나님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까지 뜨겁게 사랑하다보니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우리를 위해 죽게 하실 정도로 사랑하신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뜨겁게 열정적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하나님의 열심, 하나님의 열정, 하나님의 뜨거움을 닮은 사도 바울이 그렇게 뜨거운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고 하나님처럼 내게 가장 귀한 것, 내 모든 것을 다 내어줄지라도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님에게 중매하기 위해 다 투자한 것입니다.


      그러면 중매해서 결혼한 그 부부는 지금도 잘 살고 있습니까?
      우리 주변에 유난히 중매(仲媒)를 잘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분은 희한하게도 중매를 했다하면 성공합니다.
      그래서 이분의 중매를 통해 수많은 부부가 탄생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매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중매에는 세 가지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첫째, 중매가 잘되면 뭐지요?

      술이 서 말이요?
      우리는 예수 믿으니까 술 서 말은 좀 그렇고, 중매 잘 하면 양복 한 벌이라도 얻어 입을지 모르지요.
      하지만 못 되면 뭡니까? 뺨이 석 대지요.
      그러니까 중매라는 게 잘 되면 좋은 일이지만 잘 안 되면 참 그것만큼 곤란한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렵지요. 

      둘째, 중매를 하려면 반드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확신이요? 양쪽에 대해 다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신랑 될 사람과 신부 될 사람 둘 다에게 확신이 있어야, 이 사람은 반드시 잘 살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중매를 하지 잘 모르는 사람을 중매 섰다가는 큰 코 다치기 십상입니다.

      셋째, 중매가 잘 되어서 성공해서 결혼한다 쳐도 결혼해서 오래 오래 잘 살아야지 만약 그렇지 못하면 두고두고 원망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중매는 참 어렵다는 것입니다.

      중매를 잘 하는 사람은 인간관계가 좋고 넓어서 아는 사람도 많고 그 많은 아는 사람들 중에서 “이 친구하고 이 친구는 틀림없이 잘 맞겠다” 싶으면, 확신이 오면 중매를 서는 것입니다.
      물론 100% 잘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적어도 내가 잘 아는 사람, 확신이 있는 사람끼리 만나게 하니 잘되는 것입니다.

      내 일도 아닌데 아낌없이 헌신하고 희생합니다.
      바쁜 시간 쪼개가며 두 사람을 만나게 해주고, 심지어 내 돈 써가며 둘을 연결시켜 주려 합니다.
      이렇게까지 열심이고 헌신을 하니 중매가 잘되는 것입니다.
      양복 한 벌 얻어 입으려고 중매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 사람을 사랑하고 위하기 때문에 좋은 사람 만나게 해주려는 순수한 마음으로 중매를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2절)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사도 바울의 중매는 한 여자를 남자에게 소개해주는 사람을 소개하는 중매가 아니라 ‘거룩한 중매’를 말합니다.
      ‘거룩한 중매’는 신부된 성도들을 남편인 그리스도께 중매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 받아 만나고, 사귀고, 결혼해서 영원토록 동거하며 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 우리의 믿음을 이렇게 결혼과 비유해 말씀합니다. 구약에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결혼한 신부라고 비유하면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고 우상에게 제사하는 행위를 아내가 딴 남자에게 한 눈 파는 외도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도 우리 성도들이, 또 교회가 거룩한 신부로서 신랑 되신 예수님과 결혼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처녀를 총각에게 중매하는 것처럼 우리 성도들을 예수님에게 중매해 영원히 함께 살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한 처녀와 총각을 중매해 성공하는 데도 얼마나 노력이 필요합니까? 얼마나 헌신이 필요합니까? 시간 들어가, 돈 들어가, 관심과 노력이 얼마나 많이 필요한지 모릅니다. 하물며 우리 성도들을 거룩한 신부로 예수 그리스도께 중매하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과 희생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모든 것을 이 일을 위해 바칩니다. 지난 주 살펴본 것처럼 세상적인 조건이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화려한 이력서의 소유자인데 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다 버리고 오직 주님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리고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해서 주님께 중매하려고 내 모든 것을 바치고, 시간과 물질과 땀을 바치고, 인생의 성공도 포기하고 헌신했습니다. 심지어 자기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드렸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바로 이런 헌신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가장 위대한 중매쟁이가 될 수 있었고 기독교역사 상 가장 위대한 사도요 선교사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노력과 열심을 바울은 뭐라고 표현합니까? 2절을 다시 보세요.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으로!” 따라합시다. ‘하나님의 열심!’ 바로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 거룩한 중매를 위해 노력을 했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사도 바울이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뜨거운 사람, 가장 열정적인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 사도 바울의 뜨거움과 열정은 결국 하나님의 열심을 본받은 것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렇군요. 사도 바울이 왜 그리 뜨거운가 했더니 바로 하나님의 뜨거움을 닮은 것이었군요.

      여기서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낱말은 헬라어로 ‘젤로스’인데 그 어원이 ‘제오’ 즉 ‘끓이다, 뜨겁다’ 하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뜨거운 것입니다. 펄펄 끓는다는 뜻입니다. 뭐가요? 마음이지요. 그래서 이 ‘젤로스’를 우리말로 ‘열심’으로 번역하기도 하고 ‘열정’(熱情)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열심! 우리 하나님은 본디 아주 열심히 있는 분이고 열정이 있는 분입니다. 아주 뜨거운 분입니다. 펄펄 끓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시는데 그냥 대충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냉랭하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정말 뜨겁게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너무 뜨겁게 사랑해서 견딜 수 없을 정도십니다. 그래서 스바냐 3:17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어요.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우리 때문에 하나님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까지 뜨겁게 사랑하다보니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우리를 위해 죽게 하실 정도로 사랑하신 것 아닙니까? 이게 다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뜨겁게 열정적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하나님의 열심, 하나님의 열정, 하나님의 뜨거움을 닮은 사도 바울이 그렇게 뜨거운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고 하나님처럼 내게 가장 귀한 것, 내 모든 것을 다 내어줄지라도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님에게 중매하기 위해 다 투자한 것입니다.

      우리의 열정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리고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분의 형상으로 지어진 우리는 그분의 성품, 그분의 행동, 그분의 모든 것을 닮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분을 닮아가지 않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특히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뜨거운 열정을, 그 열심을 닮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뜨거운 성도들입니까?
      우리는 얼마나 뜨거운 교회입니까?
      우리는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그를 예수 그리스도와 중매하기 위해 얼마나 투자하고 희생하고 헌신하고 있습니까? 생각하면 할수록 부끄러운 일 뿐입니다.

      아내와 함께 백화점에 갔습니다. 그런데 매장에 들어서니 복도에서부터 직원들이 나와 자기 물건 사달라고 난리입니다. 시장에서나 호객을 하지 백화점은 안 그럴 줄 알았는데 백화점도 시끌시끌하게 호객행위를 해서 처음에는 좀 얼굴이 찡그려졌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그들을 보며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정말 한 사람이라도 더 손님을 붙잡으려고 기를 쓰고, 정말 한 사람이라도 놓칠까봐 안타까워하는 그들을 보며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월급을 받고 일하는 저들도 저렇게 안타까워하고, 기를 쓰는데 하물며 영원한 하늘나라 상급을 바라고 사는 우리는 한 영혼을 어떻게 대하는가?”라고 말입니다. 저 자신부터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우리는 진정 하나님의 열심을 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열정을 닮아가야 합니다. 한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마음, 불타는 가슴을 닮아가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에 대한 열정과 열심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열심으로 믿고 뜨겁게 따르려는 자는 반드시 그 결과가 한 영혼을 향한 열심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한다고 아무리 말로 해도, 아무리 뜨겁게 믿겠다고 말해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다면 너는 몇 사람이나 나에게 중매했니?”라고 물으실 것입니다.

      첫째, 우리의 ‘열심’은 이렇게 전도로 나타나야 합니다. 저는 올해 전도 작정을 하면서 열 사람을 작정했습니다. 여러분은 몇 사람이나 작정하셨나요? 솔직히 열 사람을 써내면서 자신이 별로 없었습니다. 매년 다섯 명씩 전도 작정을 써내면서 단 한 번도 성공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니, 아예 단 한 사람도 전도하지 못한 적이 더 많았습니다. 스스로에게 핑계를 대보기도 했습니다. “너는 담임목사잖아? 목회도 얼마나 바쁜데 어떻게 전도를 하겠어? 그리고 꼭 나가서 한 사람 데리고 오는 것만 전도가 아니라 네가 열심히 설교하고 심방하면 그게 다 전도 아니겠어?”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다 핑계에 불과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전도하라고 하면 “저는 바빠서요, 저는 숫기가 없어서요, 다른 건 다 하겠는데 전도는 정말 못하겠어요” 하고 핑계 대는 성도들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참 부끄럽습니다. 그동안 제가 성도들보고 전도하고 하면 “목사님도 못하면서 무슨 전도?” 하고 얼마나 흉봤겠습니까? 그래서 무슨 수를 써서든 올해는 꼭 전도를 하자, 올해는 반드시 목표를 달성하자, 하면 된다, 마음먹으면 된다 하고 결심하고 지금도 열심히 전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4주 전 소개했지만 하나님이 한 가정(유장용, 이정순, 유지수 성도 가정)을 제게 붙여주셨어요. 오늘 4주째가 되어 등록을 합니다만 정말 제가 직접 전도한 것도 아닌데 성탄절 때 우리 교회 와서 우연히 저를 만났고(화장실 안내) 그 후 또 우연히 통화할 일이 생겨서 “우리 교회 오세요” 하니까 “명절(설) 지나고 남편하고 가겠습니다” 하시는 거예요. 

      그러더니 진짜 오셔서 제 이름으로 등록을 하신 겁니다. 좀 겸연쩍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내가 직접 가서 전도한 것도 아닌데 저를 인도자라고 쓰신 것을 보니 말입니다. 그런데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아, 하나님이 이분들을 내게 붙여주셨구나, 내가 전도하겠다고 마음먹고 기를 쓰니까 하나님이 이 분들을 내게 붙여주셔서 전도하게 하시는구나, 그러니까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나에게 이 분들을, 이 가정을 책임지고 정착시키라는 뜻이구나” 하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열심을 품으면 하나님이 붙여주십니다. 물론 거리고 나가서 전도하고 집집마다 다니며 문을 두르려야 하겠지만 우리가 일단 뜨거운 마음을 품으면 하나님이 사람들을 찾아 붙여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 경험을 꼭 할 수 있기 바랍니다. 이 가족 덕분에 제가 용기를 얻고 올해 꼭 열 명, 전도목표 달성하자 하고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도 꼭 저처럼 용기를 얻고 뜨거움을 품고 일단 시작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의 뜨거우신 하나님이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둘째, 우리의 ‘열심’은 또한 찾아온 성도들을 중매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찾아오기만 하면 뭐합니까? 그분들을 정착시켜야지요. 우리 교회에 발만 들여놓으면 뭐합니까? 우리가 모든 수단방법을 다 써서라도, 모든 것을 다 내주고서라도 그 분들을 예수님에게 중매해서 결혼시켜야지요. 우리가 중간에서 이런 중매자 역할을 꼭 해야지 이것을 못하면 책망 받습니다. “내가 그렇게 많이 보내주었는데 다 어디 갔냐?” “그 수많은 새가족들 지금 다 어디 있냐?” “왜 중매 제대로 못해서 나와 혼인시키지 못했냐?”고 하나님께 크게 야단맞게 됩니다.

      지난 주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지요? 어떤 새가족이 “이교회 정말 냉랭하다”고 해서 제가 속이 상해서 며칠 몇날을 잠을 못 잤다고요. 그분 말씀이 제가 처음 왔을 때 환영도 열렬히 해주고 노래도 불러주고 꽃도 주고 해서 “야, 이 교회는 정말 사랑이 많은 교회구나. 뜨거운 교회구나” 기대했는데 그 후에 몇 달이 지나도록 선교회에서도 아무 연락이 없고, 구역방학이라지만 구역에서도 연락이 없고, 누구도 아는 척도 전화 한 통도 안 해서 실망했답니다. 이 교회 계속 다녀야 하나 고민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제가 이 말 듣고도 잠이 오겠어요?

      정말 많이 달라졌다지만, 정말 좋아졌다지만 아직도 이게 우리의 현실이라면 심각한 문제 아닙니까? 물론 이렇게 냉랭해도 애써 적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를 쓰고 적응해야, 살아남아야 하겠다는 분들입니다. 하지만 더 많은 분들은 앞문으로 들어왔다가 뒷문, 옆문으로 나갑니다. 떠나갑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이 떠나도 잘 모릅니다. 누가 갔는지, 왜 갔는지 말입니다. 물론 우리 나름대로 노력을 했는데 그 진심이 전달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오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런 분들을 다 일일이 따라다니면서 챙기고 책임지겠습니까? 그런데 제가 성경을 읽다가 창세기 4:9을 주목해서 보게 되었습니다. 아담의 아들 가인이 동생 아벨을 너무 시기해서 돌로 쳐 죽이고 시침을 떼고 있는데 하나님이 가인에게 물으십니다. “가인아,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랬더니 가인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모릅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하나님, 내가 한가하게 아우나 지키는 사람으로 보입니까? 난 모르는 일입니다.” 이런 뜻입니다. 저는 정말 이 말씀을 보는 순간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게 내 모습 아닌가? 이게 지금 우리의 모습 아닌가? 하나님이 ‘내가 보낸 그 수많은 영혼들, 새가족들 다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실 때 ‘내가 그 사람들이나 지키는 사람입니까? 저 그렇게 한가한 사람 아닙니다’ 하는 우리의 모습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 좀 더 뜨거워져야 합니다. 우리 좀 더 하나님의 열심, 열정을 품어야 합니다. 지금도 뜨겁지만, 지금도 열심이지만 이 정도로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지금 이렇게 아름다운 새 성전 짓고 난 후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뜨거운 가슴’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뜨거운 사랑’입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교회의 온도는 아직 100도로 펄펄 끓지 않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단 한 번이라도 뜨거워본 적이 있습니까? 연탄재 발로 차는 사람처럼 뜨거운 사람 평가하고 판단하기 전에, “왜 저리 나서냐, 나대냐?” 하기 전에, “저 사람 왜 요즘 안 나오지?” 하기 전에, “우리가 도대체 뭘 잘못한 거지?” 하기 전에 우리는 일생 예수 믿으면서 단 한 번만이라도 하나님의 열심히, 그분의 열정으로 뜨거워 본 적이 있었는지, 한 영혼을 향해 불타는 심정으로 나 자신을 내 준 적이 있었는지 정말 뜨겁게, 치열하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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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곱 교회에 대한 칭찬, 책망 및 권면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오늘 우리 교회가 어떠한 상태에 있는 지 알 수 있으며 또한 우리 개인들의 신앙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 지를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기 위해서 교회나 개인들이 가지고 있어야 할 요소들을 A부터 Z까지 순서대로 나열해 보면서 그 성경적인 근거를 한 번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A(Amen : 아멘)

      아멘은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뜻이니 선포되는 하나님 말씀은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은 아멘으로 화답하고, 간구하는 기도는 아멘으로 함께 간구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실 것입니다.

      B(Belief : 믿음)

      성경에서 믿음의 장이라고 하는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믿음(faith)이라는 단어가 26번이나 나오고 있으며 히브리서 저자인 바울은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에 대해서 열거하면서 시간이 부족하여 말 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왜 거룩하고 공의로운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을 징계하지 않으시는지 물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종말이 정녕 임하리라고 말씀하시면서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라고 응답하시고 계십니다. 사도 바울도 이 구절을 로마서 1장 17절에서 인용하면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이신칭의(以信稱義)라는 로마서의 핵심 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C(Confession : 고백)

      우리의 어머니가 죄 가운데 우리를 잉태하였고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죄를 가지고 있었으며(시 51:5), 모든 자연인(natural man)은 죄인이라고 바울은 말씀하시고 계십니다(롬 3:9-10). 먼저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그 죄를 다 입으로 토설하는 죄의 고백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첫걸음일 것입니다. 죄를 고백해야 하나님의 죄사하심을 입어 죄문제가 해결됩니다. 솔로몬은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고 말씀하시며, 여호와께서는 이사야를 통해서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 1:18)"라고 우리들에게 회개(repentance)를 촉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버가모, 사데, 라오디게아 교회 대해서도 회개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또한 입으로 주를 시인하는 신앙 고백이야말로 구원을 얻는 일이라고 바울은 말씀하시고 계십니다(롬 10:10).

      D(Diligence : 근면)

      예수님께서는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 게으르지 아니하고 부지런함을 칭찬하고 있습니다(계 2:3). '부지런한 사람이라야 먹고산다(The early bird catches the worm)'라는 속담이 있듯이 세상일을 함에 있어서도 우리는 부지런해야 합니다. 솔로몬도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잠 10:4)" "부지런한 자의 마음은 풍족함을 얻느니라(잠 13:3)"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라는 말씀을 생각해 볼 때 세상일도 부지런해야 할진대 하물며 하나님 나라의 일이겠습니까?

      E(Endurance : 인내)

      예수님께서는 에베소 교회가 자기 이름을 인하여 인내한 것(계 2:3)과 두아디라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가 인내의 말씀을 지킨 것(계 2:19, 3:10)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크리스천들도 이 땅을 살아 가면서는 시험과 시련을 당할 수 있는데 그럴 때일수록 낙심하지 아니하고 주 안에서 인내하는 자는 복되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야고보는 인내를 온전히 이루면 성도의 인격이 온전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으며(약 1:4), 베드로 사도는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벧전 1:7).

      F(Faithful : 충성)

      직분을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으며(고전 4:2), 요한은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달란트 비유(마 25:14-30)를 통하여 작은 일에 충성된 자가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G(Godliness : 경건)

      예수님께서는 사데 교회에 대해서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라고 책망하고 있습니다(계 3:1). 그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딤후3:5) 즉, 외적으로는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 같으나 내적으로는 복종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바울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참된 경건이란 절제된 언행, 소외계층에 대한 보살핌, 세속에 물들지 아니한 구별된 삶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약 1:26-27).

      H(Hope : 소망)

      크리스천들에게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세상 사람들이 누리는 온갖 종류의 쾌락을 즐기지 못하는 우리의 삶은 참으로 불행한 삶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 39:7)"라고 고백하고 있으며 바울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I(Imploration : 간구)

      여호와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 간구하면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십니다. 또한 의인의 간구는 역사 하는 힘이 많다고 했으니(약 5:16) 우리가 의롭게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닫게 해주며 요한이 그의 사랑하는 자의 영혼과 건강을 간구했던 것처럼(요3 1:2) 성도들을 위한 중보의 기도는 개인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도 큰 도움이 됩니다.

      J(Jesus : 예수)

      우리 삶에 있어서 예수님보다 더 중요한 분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권세를 받습니다(요 1:12). 지금까지 살아 왔던 나의 삶의 방식을 완전히 포기하고 예수님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모시면 예수 안에 우리가 거하고 우리 안에 예수가 거하는(요 6:56, 갈 2:20) 놀라운 일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적인 가치관에 의해 의사결정을 내렸던 우리의 삶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면서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까?라는 생각으로 가득 찬 삶으로 바뀌게 됩니다.

      K(Keep : 말씀을 지킴)

      알고도 행치 않는 것이 죄라고(약 4:17) 야고보가 지적하셨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온 마음을 다해 그것을 지켜 행해야 합니다. 또한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며 우리를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한다고 하였습니다(딤후 3:15-17). 하나님 말씀을 읽으면 우리가 죄인이므로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을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 말씀을 지켜 행하면 거룩한 하나님의 속성을 우리도 닮아가게 되고(聖化)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갈 5:22-23).

      L(Love : 사랑)

      사랑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입니다. 사랑의 장으로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의 필요성, 특성, 영원성에 대해 설명하면서 13절에서는 믿음, 소망 사람 중 사랑을 으뜸으로 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14)"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 즉,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따라서 거기에는 행함이 있고 진실함이 있습니다(요1 3:18). 바울도 피차 아무에게도 아무 빚도 지지 말되 사랑의 빚은 지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롬 13:8) 진실한 마음으로 형제간에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M(Mercy : 긍휼)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마 5:7). 야고보도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약 2:13). 바울은 그의 서신의 인사말에서 은혜, 긍휼, 평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딤전 1:2, 딤후 1:2) 긍휼은 하나님의 은혜의 구체적인 표현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아무 대가도 치루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거져 받았으니(엡 2:8) 우리 이웃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N(New-born : 중생)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이요, 산헤드린의 회원으로 정치인이었으며, 학문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선생이었던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요 3:1-21).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다는 것은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말하며(엡 4:22-24) 바울은 이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셨습니다(고후 5:17). 거듭난 사람의 생활은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엡 4:25-32, 골 3:12-17).

      O(Obedience : 순종)

      순종이란 우리의 생각이나 의지를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따르는 것입니다. 아말렉의 모든 소유를 진멸하도록 명령을 받은 사울은 이에 순종하지 않고 좋은 것들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는 명목으로 가져 왔을 때 사무엘로부터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삼상 15:22)"라는 책망을 들었습니다. 순종은 사랑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우리가 부모를 사랑하기 때문에 부모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요 14:23)"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순종하면 하나님으로부터 큰 축복을 받습니다(신 28:1-14).

      P(Prayer : 기도)

      기도는 크리스천들의 영적 호흡이며 마귀를 대적하는 영적 무기입니다. 또한 영육간의 필요를 하나님으로부터 얻기 위한 수단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기도의 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으며(눅 6:12) 성경은 항상 기도에 힘쓰고(골 4:2)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살전 5:17) 말씀하고 있습니다.

      Q(Quiet Time : 묵상)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수 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묵상해야만 우리의 죄를 깨닫게 됩니다. 바울은 "하나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며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라고 적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 전에는 우리가 죄인인 지를 깨닫기가 어렵고 하나님 말씀을 읽어야만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율법의 역할입니다(롬 3:20).

      R(Resurrection : 부활)

      부활은 기독교가 존재하는 근거가 됩니다. 초대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않음에 대하여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을 통하여 부활의 확실성과 성격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시지 못하셨다면 복음 전파와 믿음이 헛것이며(14절),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거짓 증인이 될 것이고(15절), 우리가 여전히 죄중에 있을 것이고(17절), 주 안에서 죽은 자도 멸망할 것이고(18절), 그리고 믿는 자가 가장 불쌍한 존재가 될 것이라고(19절)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눈으로 직접 목격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10명의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자기들의 목숨을 버릴 수 있었을까요?

      S(Sacred : 거룩함) 

      거룩함(holiness)은 하나님과 인간이 공유하는 하나님의 보편적 속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창 1:26-27). 우리 조상 아담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자연인)의 그러한 속성은 불완전하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자연인과 구별하여 거룩하기를 명령하고 계십니다(레 20:26). 바울은 우리의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릴 때 거룩함에 이른다고 말씀하시면서(롬 6:19)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롬 12:1)"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실인의 서원 제도(민 6:1-21)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신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함을 닮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나실인이 되어 하나님의 거룩함을 날마다 연습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T(Tolerance : 관용)

      관용이란 남에게 자진해서 주는 넓은 마음입니다. 저와 우리 가족의 삶의 원칙 중의 하나는 '자신에게는 엄격하게, 남에게는 관대하게(Strict to yourself, but generous to others)'입니다. 바울은 교회 감독의 자격으로 관용(gentle)을 들고 있으며(딤전 3:3), 디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관용(considerate)을 선행의 하나로 들고 있습니다(딛 3:2). 에베소 교회가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않음에 대해서 칭찬을 받은 것처럼 악과 거짓 가르침에 대해서는 일체 관용을 베풀지 말아야 하지만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롬 12:18)"는 바울의 말씀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최대한 관용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U(Unafraid : 담대함)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우리를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듯이 달려드는 마귀(벧전 5:8)를 생각하면 두려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라고 노래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당신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고, 굳세게 하고, 도와주고, 의로운 오른손으로 붙들어 주실 것이니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사 41:10). 예수님께서도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V(Victory : 승리)

      바울은 우리의 싸움은 육적인 것이 아니고 영적인 싸움이며 이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엡 6:10-20). 또한 바울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라고 말씀하셨으며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1 5:4). 우리가 믿음을 지켜 세상을 승리하면 우리는 의의 면류관을 그 상급으로 받을 것입니다(딤후 4:7-8).

      W(Wisdom : 지혜)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지혜의 대표적인 인물은 솔로몬입니다. 그가 하나님께 장수나 부를 구하지 않고 지혜를 구했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아 하나님께서는 지혜와 함께 부와 영광도 주셨습니다(왕상 3:3-15). 그러한 솔로몬은 지혜를 얻은 자는 복이 있으며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낫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잠 3:13-14). 야고보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고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고전 14:20).

      X(Cross : 십자가)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믿는 자들은 죄사함을 받았습니다(히 9:11-22).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십자가는 죄인들을 죽이는 형틀의 상징에서 죄인들을 죽음에서 건져낸 생명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눅 9:23). 바울도 죄의 법을 섬기려는 육신의 생각과 하나님의 법을 섬기려는 영의 생각이 그의 속에서 투쟁함을 보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롬 7:13-24).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인 육신의 소욕을 능히 감당하고 이겨내면 영생을 얻을 것입니다(갈 6:8).

      Y(Youth : 젊음)

      저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아버님께서 제게 주신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시 119:9)"라는 말씀을 붙들고 유혹 많은 청년의 때를 하나님의 은혜로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솔로몬도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하면서 청년에 대한 권면의 말씀을 주시고 있습니다(전 11:9-12:7). 하나님께서는 말세에 젊은이들은 환상(vision)을 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행 2:17). 비전(vision)이 없는 청년은 무늬만 청년일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적으로는 나이가 들어간다 하더라도 우리의 믿음은 비전으로 가득한 활기를 항상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Z(Zeal : 열심)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 열심을 낼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면 토하여 내치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계 3:15-19). 바울도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12:11)"고 권면하고 있으며 좋은 일을 열심히 사모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갈 4:18).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도 가장 뛰어났던 사람 중의 하나였던 바울이 세상적인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고 하나님의 일에 보여 주셨던 그 열심을 우리도 가져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 13:5)"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Examine and test yourselves! 우리 교회 안에 그리고 우리 안에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을 위와 같은 요소들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우리가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는 요소들은 더욱 굳게 붙잡고, 가지고 있지 않은 요소들은 가지도록 해야겠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의지와 결단과 노력으로 가질 수 없고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가질 수 있으니 우리는 매일 매일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한국 교회가 양적으로 큰 성장을 하다가 이제는 양적으로 감소하는 시대를 맞았습니다.
      이에 대한 여러 가지 진단이 나오고 있지만 저는 내적(영적) 성숙이 외적 성장에 크게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숫자놀음에서 벗어나 우리 개인이나 교회가 진정으로 영적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오늘날 개인이나 한국 교회가 하나님의 칭찬을 받기 위해서는 참된 경건을 회복해야 합니다.
      의인 10명이 없어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소돔과 고모라를 생각해 볼 때 오늘 우리 사회를 구원하기 위해서 크리스천 한사람 한사람이 경건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귀중하며 축복 받은 일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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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8-2022(토)

      주께서 주신 권세(고린도후서 10:8)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파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권세. ἐξουσία, ας, ἡ  1849

      1. 선택의 자유,  2. 능력,  3. 사도행전 1:7

      발음 / 에쿠시아(ĕxŏusia)
      어원 / 1832 ‘능력’의 의미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권위(마 7:29, 눅 4:6), 군사(마 8:9), 권능(마 10:1, 행 8:19), 권한(막 13:34, 행 1:7), 병사(눅 7:8), 관할(눅 23:7), 마음(행 5:4), 권리(고전 7:37, 9:5, 12, 살후 3:9), 자유(고전 8:9), 힘(계 9:19).
      신약 성경 / 102회 사용

      세상에 있는 교회

      요즈음 우리 사회의 분위기를 보면 기독교가 사회로부터 조금 무시 혹은 배척을 당하는 느낌이 든다.
      기독교를 향한 부정적인 정서가 있다면 그것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심각하게 생각하고 이를 위해서 구체적인 대안을 세워야 할 것 같다.

      흔히 이것을 기독교에 대한 핍박으로 치부할 수 있는데 종교적인 핍박과 교회를 향한 세상의 부정적인 정서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일들은 과거에 교회가 종교적으로 핍박을 받은 것과는 구별이 되는 것 같다.
      그때는 기독교의 진리를 억누르기 위해서 그것을 따르는 사람들을 향해 핍박을 한 것이었다면 지금 교계가 겪는 것은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의 표현처럼 보인다. 무언가 정확한 원인을 꼭 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현재 교회가 사회 속에서 인기를 잃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다.

      언젠가 직장 내에서 아직 신앙을 갖지 않은 직원과 이야기하다가 이런 반응을 듣고 당황한 적이 있다.

      “기독교에 대해서는 관심이 있지만 교회는 나가고 싶지 않다.”

      정말 마음을 섬뜩하게 만드는 이야기였다.
      현재 우리 교회가 이 세상에서 주님이 원하는 만큼 소금과 빛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음을 반영한다.
      교회만이 인기를 잃는다면 문제가 안 되지만 그 바람에 주님과 주님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배척당하게 되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교회가 성장했으며 거대한 교회건물들이 세워졌지만 그것으로 사회를 향한 영향력이 커지지는 않았다.
      정말 중요한 것은 교회를 통해서 머리되신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때로는 교회가 정말 낮아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세례요한의 겸손한 외침이 생각난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
      - 아필쇄미 타필흥왕(我必衰微 他必興旺)

      요한이 기대한 것처럼 예수님이 흥하시도록 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전략이 필요하다.
      그 전략은 지금까지의 전략과는 달라야 할 것 같다.

      사람들은 교회가 큰 건물을 짓든지, 그 안에서 얼마나 열심히 봉사하든지 그것 때문에 교회를 인정해주거나 머리되신 예수를 알아주지 않는다.
      세상 속에서 사람들의 칭찬을 받을만한 일들을 해야 한다.
      초대 교회가 성장하는 과정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7)”.

      오늘 우리 교회도 바로 이런 과정을 필요로 한다.
      초대교회는 예루살렘과 유대를 복음화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었지만 복음화 이전에 먼저 세상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그 단계가 있은 후에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오게 되었고 교회가 성장을 했던 것이다.

      한국 교회가 선교의 사명을 강조하면서 5천만 민족을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게 하자고 외친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5천만에게 칭찬받는 교회가 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세상 속에 흩어져 사는 교회의 지체된 성도들이 칭찬을 받아야 한다.
      불신자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사는 곳에서 인정받고 칭찬을 들어야 한다.
      그것이 세상이 교회를 향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정서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며 현재 한국교회에게 맡겨진 중요한 사명이다.



      고린도후서 10장은 인간의 교만과 자랑을 무너트리는 복음의 능력에 관한 말씀입니다.
      오늘 묵상할 주제는 "주께서 주신 권세(the authority the Lord gave us)"라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서신서의 마지막 부분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거짓 교사들의 영향력 아래서 사도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마지막 권면입니다.
      그들은 사도가 자신들에게 문전박대와 비난을 당한 뒤 돌아가서 눈물로 쓴 비통한 편지를 읽었습니다.
      그들이 볼 때, 사도는 면전에서는 약하지만 글로 쓰는 편지로는 강한 사람입니다.
      사도는 그들의 비난을 의식하고 그것을 인정합니다(1~2, 9~11).
      오히려 사도는 다음 방문에서도 그들을 대면하여 약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이 회개할 때에만 가능합니다.
      그때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사도가 그리스도의 권위로 벌하게 될 것입니다(6).
      이것은 사도의 최후통첩입니다.
      이 싸움은 육체에 속한 싸움이 아닙니다(3).
      이것은 고린도교회 안에 있는, 하나님과 복음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세력을 향한 싸움입니다.
      사도의 무기는 견고한 진을 파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4).
      사도는 이 무기로 복음의 진보를 가로막는 자들의 자기 자랑에 의해서 세워진, 자기 신뢰와 자기를 높이는 방어진을 무너뜨릴 것입니다(5). 이것이 ‘견고한 진’입니다.

      두 번째 파괴 대상은 ‘모든 이론과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입니다(4b~5).
      이것은 하나님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그들의 죄악된 정신 구조, 하나님 없는 세상 방식입니다.
      복음의 진리가 세상 방식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의 사고 구조를 무너뜨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들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세 번째로 사도는 인간의 지적 사고의 중심인 정신을 포로로 사로잡기까지 싸우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모든 생각’이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바입니다(5b).
      싸움이 끝나 복종할 자들이 복종하게 되면, 사도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벌하러 갈 것입니다(6).
      그러므로 아직도 거짓 교사들에게 속고 있는 고린도사람들은 그들 눈앞의 실상을 보아야 합니다(7).
      만일 사도가 가짜라면 그들은 그들의 판단으로써 자신들이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셈입니다.

      이 싸움의 핵심에는 복음이 있습니다.
      복음은 인간의 모든 교만과 자랑을 깨뜨립니다.
      회개하지 않는 고린도사람들은 세상 자랑으로 충만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자랑의 수준은 남과 비교함으로써 자기를 드러내는 유치한 수준이었습니다.
      이런 자랑과 교만은 복음으로만 파괴됩니다.
      참 복음은 인간의 헛된 자랑과 교만을 꺾는 힘이 있습니다.
      사도는 고린도사람들을 세우려는 깨끗한 동기로 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8).

      모든 자랑이 다 헛되고 교만한 죄성에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합당한 자랑도 있습니다.
      그것은 남과 비교하는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기준 안에서 자랑하는 것이다(13~16).
      하나님께서 주신 분량의 한계를 따라서 하는 자랑입니다(13).
      사도는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아 자신의 한계를 지켜 소명을 이루어왔다고 말합니다(14).
      사도는 결코 다른 사도와 자신을 비교함으로써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의 거짓 사도들은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는 자들입니다(15).
      이것은 도둑질입니다.
      사도는 고린도사람들의 믿음이 성장하면서 자신의 진실과 사도직이 그들 안에서 더욱 견고하게 세워지기를 기대하면서(15b) 이들의 지원을 받아 로마와 스페인으로 갈 계획도 전합니다(16).

      끝으로 자랑하려면 주 안에서 하라고 사도는 말합니다(17).
      이것은 주어진 모든 것이 자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마치 원래부터 자기 것인 양 자랑하는 모든 태도는 다 악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를 자랑하고 높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칭찬해주시는 사람, 하나님께서 자랑하실 만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17).

      사도의 무기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습니다.
      그 말씀의 능력이 인간의 모든 교만을 꺾을 것이라는 사실을 사도는 확신했습니다.
      또한 우리가 매일 당하는 싸움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나와 내 생각과 내 생활방식을 지배하고 있습니까?
      우리를 끊임없이 세상 방식의 노예로 삼으려는 죄의 유혹은 실로 엄청납니다.
      내 안에 하나님 앞에서 헛된 자랑과 교만이 뿌리째 뽑혀 나가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의 능력을 통해서입니다.
      매일, 매순간 말씀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인정이나 칭찬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을 소중히 여기고 사는 은혜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사도권 변호(1-11절)

      열세 장으로 구성된 고린도후서는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1:1-11이 서론이라고 한다면,
      13:11-13이 결론입니다.
      그 사이 1:12-13:10이 본론입니다.

      이 본론도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12-7장은 바울 자신의 사도성에 관해 설명합니다.
      즉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주님께 불러주셨기 때문이고, 그 사도직을 수행하기 위해서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사람들을 하나님께 연결해 주는 연결고리로 살았다고 고백합니다.

      8-9장은 연보(구제)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은 ‘연보’를 말하면서, ‘복’이라는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연보’는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서 물질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데, 그것이 받는 사람에게는 물론 드리는 사람에게도 복이 된다고 말합니다.
      연보가 드리는 사람에게 복이 되는 것은 해보면 압니다.

      10장-13:10인데, 고린도 교회를 흔드는 거짓 사도들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부터는 앞에서보다는 좀 더 강한 어조로 말합니다.

      [(1) 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새번역성경은 이 구절의 앞 부분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내가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을 때에는 여러분에게 유순하나, 떠나 있을 때에는 여러분에게 강경하다고 합니다.” 이것은 바울을 반대하는 거짓 교사들의 주장을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을 굉장히 폄훼하는 말입니다. 즉 ‘바울은 사람이 없는 곳에서는 큰소리치지만, 직접 대면해서는 말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권한다’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 때 고린도에 와서, 고린도 교회를 시작하고 1년 6개월 동안 머물며 그들을 양육했습니다. 비록 그들이 한때, 거짓 교사들에게 현혹되기도 했지만, 이제는 돌아왔고, 바울은 그들이 사랑해야 할 대상임을 잊지 않습니다. 그래서 온유와 관용으로 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2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거짓 교사들을 대할 때는 담대하게(강경하게) 대했지만,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그렇게 대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말합니다.

      [(3-4)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우리 그리스도인은 육신을 갖고 있지만, 그 육신을 따라서 즉 자신의 욕망이나 세속적인 가치관을 따라서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 주님께서 거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욕망이나 세속적인 가치관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며 사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바울을 모함하고, 바울을 공격하는 거짓 교사들은 바울에게 위해(危害)를 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위해를 가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싸움을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싸움이 욕망을 성취하기 위함이나 세속적 가치관의 시각으로 좋아 보이는 것을 위한 싸움이 아니라 진리를 위해, 생명을 위해 영원을 위해 그 반대편에 있는 것과의 싸움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서, 첫 국어 수업 때, 선생님이 칠판에다 ‘놀아라’, ‘싸워라’, ‘이겨라’라고 쓰셨습니다. 그리고 잘 놀고, 잘 싸우고, 잘 이겨라고 설명했습니다. 그 후에 그 단어들 뒤에 글자 세 자를 더 쓰셨습니다. ‘단 책과’. 바울도 놀고, 싸우고, 이기려고 했습니다. ‘단 진리와 생명으로’ 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싸움인 것을 잘 인식하고 있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거룩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통로로 사용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세속적인 가치관, 영원하지 않은 것과의 싸움이라면 무기가 있어야 하는데, 그 무기가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육신에 속한 것으로는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육신에 속한 무기는 재물, 지식, 능력, 권력, 명예 등일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갖추고 있으면 당장에는 이길 것 같지만, 나중에는 이런 것들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절감(切感)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을 충분히 갖춘 것처럼 보이는데도, 깊은 한숨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가 갖추어야 할 무기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한때 고린도 교회에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이 견고한 진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무너졌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진리와 진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유사 이래에 수많은 이론과 철학들이 왕성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지 않는 것은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사람들이 하찮게 여긴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논리와 가치관을 무너뜨렸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능력이고, 진리이며,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5)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하나님의 능력은 모든 이론을 무너뜨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 교만과 생각을 무너뜨린다고 말씀하십니다. 새번역성경은 5절 상반절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는 모든 교만을 쳐부수고’라고 번역합니다.
      자신을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세운 사람은 결코, 결코 교만할 수 없습니다. 크신 하나님을 직면하는 순간 형편없고, 정말 보잘것없는 자신의 실상을 직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는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7)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바울은 고린도 교회 사람들에게 “어떻게 사람을 외모로만 보십니까? 만약 자신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인 것을 확신한다면, 우리도 그런 사람들인 것을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거짓 교사들이 바울을 외모로 공격했고, 그것을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그대로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2세기의 글에 의하면, “바울은 키가 작고, 양 눈썹은 붙었고, 코가 좀 크고, 머리는 벗어졌으며, 다리가 구부정하고 단단한 몸을 가진 은혜가 충만한 사람이었다. 사람처럼 보이면서도 때때로 바울은 천사의 얼굴을 가진 사람으로 보였다”라고 그리고 있습니다. 바울은 요즘 표현으로 하면, ‘얼짱’이나 ‘몸짱’, ‘훈남’과 같은 말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던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어쩌면 거짓 교사들은 바울보다는 외모로 훨씬 나아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그들의 말을 듣고, 한때 바울을 불신했던 것이었습니다.

      [(8)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무너뜨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회 사람들에게 자신에게 있는 권위를 자랑했더라도 그것이 부끄럽지 않게 생각한 것은, 그것을 통해서 고린도 교회를 더욱 건강하기 세우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어떤 모임이나 공동체에 우리가 있으므로 그곳이 세워지고, 사람들이 삶이 변화된다면, 그것보다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것이 또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으로 인해서 고린도 교회가 다시 세워지게 된 것을 깊이 감사하는 것입니다.

      또 거짓 교사들은 바울을 이렇게 폄훼했습니다.
      [(10)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이 말의 무게 중심은 앞에 있지 않고 뒤에 있습니다. 즉 ‘바울은 글은 좀 쓰는 것처럼 보이지만, 말은 형편없다’ 입니다. 바울의 말이 형편없기에, 그가 쓰는 글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바울의 글과 말을 다 폄훼하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 제국의 5대 도시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에베소 그리고 고린도였습니다. 고린도는 수사학이 발달한 도시라, 많은 사람이 웅변술을 배웠습니다. 바울도 배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씨가 뛰어나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비아냥거렸던 것입니다. 바울은 달변가가 아니었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초라하게 보였기 때문에 오히려 진리만을 전했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영원한 가치로 승화시켜 주셨습니다.

      [(11) 이런 사람은 우리가 떠나 있을 때에 편지들로 말하는 것과 함께 있을 때에 행하는 일이 같은 것임을 알지라]

      거짓 교사들은 말을 잘하느냐 못하느냐로만 사람을 평가하지만, 바울 자신은 편지로 말하는 것과 자신이 고린도에서 행했던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즉 바울은 ‘언행일치’의 삶을 살았고, 거짓 교사들은 ‘말만 행함’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사람의 말은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속일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은 ‘말하는 수준의 우리’가 우리의 실상이 아니고, ‘살아가는 것 수준의 우리’가 우리의 실상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확인할 때는 그 사람의 말이 아니라 그의 삶을 보아야 합니다.

      [주 안에서 자랑(12-18절)]
      [(12)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어떤 자’는 ‘거짓 교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들은 말밖에 없고, 자기를 자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의 비교 대상이 되고 싶지 않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 구절에서 ‘자기’라는 말이 5번이나 나옵니다. 거짓 교사들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들의 삶의 표준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절대 표준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야 영원한 생명이 머물게 됩니다.

      [(13) 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바울은 자신도 자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고 자랑을 하는데, 단지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한계 안에서 한다고 말합니다. 즉 자신은 자신을 표준 삼고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지금의 삶을 살도록 해주신 것을 자랑한다고 말합니다. 즉 바울은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삶을 살게 해주신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고린도까지 오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14-16) 우리가 너희에게 미치지 못할 자로서 스스로 지나쳐 나아간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자랄수록 우리의 규범을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풍성하여지기를 바라노라 이는 남의 규범으로 이루어 놓은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너희 지역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함이라]

      바울은 자신이 일행과 함께 고린도까지 간 것은 욕심 때문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먼저 복음의 씨를 뿌린 곳에는 가지 않았고, 고린도 교회의 믿음이 자라기를 바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고린도를 디딤돌 삼아 나중에 로마까지 갔고, 이 고린도에서 쓴 편지가 로마서입니다.

      [(17-18)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주님 안에서 자랑하는 사람은, 자기밖에 주님이 계시니까, 자랑을 해도 주님만 보이게 됩니다. 자기 안에서 자랑하면 자기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칭찬을 받는 사람은 자화자찬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칭찬을 받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칭찬을 받는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세우는 것입니다. 말씀 앞에 자신을 세우지 않고 칭찬을 받는 방법은 없습니다.
      올해 우리 교회가 성경 일독하기와 요한복음 쓰기를 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말씀 앞에 세우지 않고는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예배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세우면 하나님의 말씀이 크게 들리지만, 말씀 앞에 서지 않으면 세속적 가치관의 소리, 자기 욕망의 소리만 크게 들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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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7-2022(금)

      즐겨내는 자(고린도후서 9:7) 

      5절.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제임스 허드슨 테일러(James Hudson Taylor, 1832. 5. 21 - 1905. 6. 3)
      영국 출신으로 중국 내지 선교회 창설자

      우리가 염려해야 하는 것은 돈이 너무 적다는 것이 아니라
      성별되지 않은 돈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 11. 10 ~ 1546.  2. 18)는 독일의 종교개혁가

      지금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드릴 것은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으나
      명주와 비단을 살 돈은 가지고 있다.

      헌금과 연보의 문제는 돈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라고 하겠다.



      연보. 유로기아, εὐλογία, ας, ἡ  2129

      1. 찬양,  2. 아름다운 말,  3. 축복

      발음 / 유로기아(ĕulŏgia)
      어원 / 2127과 동일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축복(고전 10:16, 히 12:17), 아첨(롬 16:18), 연보(고후 9:5), 복(롬 15:29, 갈 3:14, 엡 1:3, 벧전 3:9), 찬송(계 5:12, 13, 7:12).
      신약 성경 / 16회 사용

      * 2127. εὐλογέω 

      1. 좋게 말하다,  2. 축복하다, 

      누가복음 24:50

      발음  / 유로게오(ĕulŏgĕō) 

      어원 / 미완료 ηὐλόγουν, εὐλόγουν, 미래 εὐλογήσω, 제1부정과거 εὐλόγη- σα, 완료 εὐλόγηκα, 완료수동분사 εὐ- λογημένος, 미래 수동태 εὐλογηθή- σομαι, 1095와 3056의 합성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축복하다(막 10:16, 고전 10:16), 축사하다(마 14:19, 막 6:41, 눅 24:30), 찬송하다(마 23: 39, 막 11:9, 눅 2:28), ㅋ
      복을 받다(갈 3:9), 복이 있다(눅 1:42), 복을 주다(행 3:26, 히 6:14), 복을 빌다(히 7:6, 벧전 3:9).
      신약 성경 / 42회 사용


      11절. 너희가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ἁπλότης, ητος, ἡ  572

      1. 단순함,  2. 관용

      발음  / 하프로테스(haplŏtēs)
      어원 / 57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성실함(롬 12:8, 엡 6:5, 골 3:22), 거룩함(고후 1:12), 풍성한 연보(고후 8:2), 너그러운 연보(고후 9:11), 후한 연보(고후 9:13), 진실함 (고후 11:3).
      신약 성경 / 8회 사용


      ♦ 10월 7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고린도후서 9:1∼15
      ♦ 묵상을 위한 주제 : 즐겨내는 자(7절)

      ♦ 성구 :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린도후서 9장은 풍성한 나눔이 낳는 풍성한 열매에 관한 말씀입니다.
      풍성한 나눔이란 “즐겨 내는 자(a cheerful giver)”를 말합니다.

      고린도교회가 이미 일 년 전부터 예루살렘교회를 돕기 위한 구제 연보를 준비하고 있다고 마게도냐교회 사람들에게 자랑했으며 이것은 마게도냐 사람들에게 신선한 자극이 되었습니다.

      연보를 갑작스럽게 하려면 의무와 억지로 할 수 있고 이것은 합당한 자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5절에서 사용한 ‘연보(율로기아, εὐλογία)’라는 단어는 ‘축복(blessing)’ 혹은 ‘풍성한(bountiful)’이란 의미로  전후 문맥에서 ‘연보(하프로테스, ἁπλότης)’와는 다른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돈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복에 대해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은 흘러가고 나누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6절).
      적게 심는다는 말은 인색하게 심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헌금이 참된 헌금이 되려면 인색한 마음이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7절).
      그러므로 마음에 정한대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충동적이거나 강요로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미리 준비해 두는 것이 바람직 합니다.

      하나님은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받는 기쁨 보다 주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연보가 아닐까요?
      물질의 지배를 받는 삶이 아니라 물질을 잘 관리하며 모두가 함께 균등하게 누릴 수 있는 세상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 찬양 / 주 날 불러 이르소서

      https://www.youtube.com/watch?v=SUi1YQ72_OI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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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6-2022(목)

      섬기는 일(고린도후서 8:4)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연보(捐補) : 버릴 연(捐), 도울 보(補). λογεία
      헌금(獻金) : 바칠 헌(獻), 쇠 금(金). δῶρον

      헌금은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드려지는 예물(수직적 관계를 형성)
      연보는 사람을 돕기 위하여 드려지는 예물(수평적 관계를 형성)

      연보(捐補, the collection) λογεία
      헌금(獻金, offerings) δῶρον

      연보는 성도를 섬기는 일 - 수평적 관계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 - 수직적 관계  

      연보에 관한 말씀은 고린도전서 16장과 고린도후서 8장 그리고 9장에서 반복하여 소개됩니다.

      이렇게 여러 차례 언급하는 이유는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대해 주의를 상기 시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바울이 비방을 받았던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연보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교인들이 연보한 것을 바울이 사적으로 사용했다는 비방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바울이 전하는 복음까지 훼손되는 일까지 일어났습니다.

      만약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고 싶었다면 연보 이야기는 당분간 꺼내지 않은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러한 부분에 대해 염려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언급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연보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일이며, 심각한 기근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연보(捐補, the collection)”와 “헌금(獻金, offerings)”을 구분해야 합니다.
      연보는 사람을 돕기 위한 것입니다.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연보는 수평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며 헌금은 수직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도입 이야기)
      감리교회를 창설한 요한 웨슬리 목사님이 어느 날 돈에 관한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최대한 돈을 많이 버십시오!
      그러자 회중들은 모두 큰 소리로 "아멘" 하고 화답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여러분 돈을 많이 저축하십시오!
      그러자 다시 회중들은 모두 "아멘"하고 외쳤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여러분 많은 돈을 헌금하십시오!
      그 순간 회중들은 "오늘 설교 죽 썼네!" 하며 모두 돌아갔다고 합니다.

      마틴 루터 / 지갑이 화개해야 진정한 회개이다.

      언더우드 목사의 헌금

      미국의 어느 주일학교 예배 시간에 있었던 일입니다.
      헌금 시간이 되었습니다.
      모든 아이가 헌금을 하는데 한 아이만 헌금은 하지 않고 눈을 감고 앉아 있었습니다.
      담임 선생님이 아이를 따로 불러 사정을 물어보았더니 아이는 집이 너무 가난하여 헌금할 돈이 없어 대신 그 시간에 기도를 한다고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무슨 기도를 하느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하나님께 내 몸과 생명과 내 일생을 바치겠다고 기도드려요.”
      그 말에 감동한 선생님은 아이를 격려하고 나서 약간의 돈을 주고는 잔돈으로 바꿔 매주일 1달러씩 헌금하라고 말했습니다.
      몇 주일이 지나자 매주 꼬박 꼬박 헌금을 하던 소년이 더 이상 헌금을 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다시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잔돈으로 바뀌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헌금을 했는데 사먹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어요.
      사먹으면 죄를 지을 것 같고... 그래서 지난 주일에 몽땅 바치고 이제는 다시 기도만 하기로 했어요.”

      어려서부터 이렇게 성실하게 기도하던 소년이 바로 1884년 부활절에 한국에 온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 목사님입니다.


      미국의 찰스 콜슨(Charles Colson)은 예수님을 알기 전 닉슨 대통령의 보좌관으로 있다가 거듭난 후 교도소 전도자로 다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쓴 책에 미국 의회 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순간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순간은 인도 캘커타의 고인이 되신 테레사 수녀가 미국 국회를 방문하여 연설했던 때라고 합니다.
      미국 사람들은 대부분 연설 때 연설자에게 박수를 아끼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상하게도 테레사 수녀가 연설을 마치자 그 누구도 박수를 치지 않더랍니다.
      오히려 침묵만이 감돌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숨막히는 감동과 전율이 그들의 가슴과 목을 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박수를 칠 여유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마지막 테레사 수녀가 던진 한마디의 말 때문이었습니다.

      “섬길 줄 아는 사람만이 다스릴 자격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에서 연보에 대한 바람직한 사례를 “마게도냐교회들”에게서 살펴보겠습니다.

      마게도냐 성도들은 극심한 환난과 가난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기근으로 인해 고통 당한다는 소식을 듣자, 없는 형편 가운데서도 더욱 풍성한 연보를 모았습니다. 이제 이 연보를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전해주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날처럼 연보금을 Check를 써서 편지로 보낼 수가 없습니다. 신용카드 한 장 들고 가서 긁고 올 수도 없습니다. 상당한 무게와 부피를 가진 은화와 금화를 직접 등과 어깨에 매고 전달해주어야 합니다. 중간에 도둑을 만나 헌금을 몽땅 빼앗길 위험도 있고, 노중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만에 하나 불미스런 일이 일어나게 되면, 바울에게도 큰 타격이 미치게 될 것이고, 결과적으로는 교회 성도들과 하나님의 복음에 불미스러운 영향을 주게 될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이 막중한 임무를 자신의 동역자 디도와 두 명의 형제들에게 맡기었습니다.
      바울은 이제 디도가 고린도 교회로 향하기에 고린도 교회 성도들 역시 마게도냐 성도들과 같이 기근에 처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돕는 일에 자원하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 마음에 이미 자발적으로 섬기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고린도후서 8장 10절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이미 1년 전부터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기 위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마게도냐 성도들에게 전해 준 것이고, 그로 인해 마게도냐 성도들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도전을 받아 풍성한 연보를 마련하게 된 것이죠. 그러니 바울은 이제 앞서 이들보다 1년이나 먼저 연보 모을 준비를 해온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이 일에 마음과 힘을 모아주기를 바랬습니다.
      바울이 먼저 디도와 나머지 두 형제를 고린도 교회에 보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3절 입니다. “(고후 9:3) 그런데 이 형제들을 보낸 것은 이 일에 너희를 위한 우리의 자랑이 헛되지 않고 내 말한 것 같이 준비하게 하려 함이라” 그것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바울이 도착하기 전에 스스로 돕겠노라고 약속했던 헌금을 미리 준비하도록 시간적인 여유를 주고자 함이었습니다. 특별히 바울은 이번 고린도 교회 방문 때 마게도냐인들도 함께 방문 할 것을 언급하였습니다. 4절 입니다. “(고후 9:4) 혹 마게도냐인들이 나와 함께 가서 너희의 준비치 아니한 것을 보면 너희는 고사하고 우리가 이 믿던 것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하노라” 만일 풍성한 상황 속에서 살고 있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모은 연보의 액수가 극심한 가난과 환난을 겪고 있는 마게도냐 성도들보다 적으면 이는 마게도냐 성도들이 실망하게 될만한 일이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바울은 마게도냐 성도들에게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1년 전부터 이 일을 준비해 왔다고 언급해 놓은 상태 입니다. 따라서 만일 연보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바울은 마게도냐 성도들에게는 거짓말쟁이가 되는 셈이고, 마게도냐 성도들은 바울의 선전에 속았다는 느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자기 자신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당황하거나 부끄러워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고 편지에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디도와 두 형제를 자기보다 앞서 고린도 교회로 보내는 이유가 바로 이런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미리 준비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5절 말씀을 보면 “(고후 9:5)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라고 바울이 말하며 이들이 연보를 모을 수 있는 시간적 준비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죠.
      바울은 6-7절에서 하나님께 헌금하는 자의 자세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6-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고후 9:6)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고후 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헌금에 인색함의 때가 묻지 않도록 주의시켰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그들의 연보가 손 떨리는 금액의 돈이 아니라, 흔쾌하게 나누는 복의 선물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을 인색하게 억지로 드려서는 안 됩니다. 7저에서 말하는 인색함이란 단어는 ‘근심’ 또는 ‘슬픔’을 가리킵니다. 이는 헌금을 내는 자가 자신의 물질을 잃어버리는 마음으로, 손해보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런 상실감으로 헌금을 드려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기쁜 마음으로 드려야 하나님께서도 기쁘게 받으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쁨의 자세로 섬길 때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의 섬김이 복의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공급하심을 언급합니다. 8절 입니다. “(고후 9: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모든 넉넉함을 갖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서 ‘넉넉하다’는 이 말은 ‘자족’이란 뜻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만족이며,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만족 입니다. 인생의 참된 행복과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야만 우리가 누릴 수 있습니다. 또한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이러한 넉넉함 즉 자족을 우리에게 주시는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즉 우리의 넉넉함을 통해서 부족한 형제, 자매, 이웃들을 섬기고 돕도록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본래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모든 착한 일을 행하는데 사용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 예수님께서 살아 생전에 직접 말씀하시기를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재물과 은혜를 가지고 우리 형제자매들 그리고 이웃들과 함께 나누고 그들의 필요를 채우고 아픔을 위로하는 것이 곧 우리 주 예수님을 섬기는 것 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웃들을 섬기는 것을 곧 자기 섬기는 것으로 간주하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가 기쁜 마음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허락하신 은혜를 통해 더 많은 이들을 도와주고 섬기고 세워감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게도냐 교회들

      '마게도냐'는 현재의 그리이스 북쪽에 있는 발칸반도로서 서쪽으로는 아볼로냐로부터 동쪽으로는 빌립보에 이르는 지역을 가리킨다.
      이곳은 B.C.148년 이후부터 로마의 영토였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들'은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교회를 가리킨다(행 17:10-15, Bruce).

      은혜를...알게 하노니

      바울이 마게도냐 교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고린도교인들에게 이야기해 주는 이유는 그 말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극이 되어 예루살렘교회를 위한 헌금을 모으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바울이 헌금에 관한 문제를 '은혜'(카린)의 관점에서 접근해가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바울은 마게도냐의 교회들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헌금을 기꺼이 그리고 분에 넘칠 정도로 한 것에 대해서(2-4절) 하나님깨 은혜를 받은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바레트(Barrett)가 말하는 대로 '은혜'는 관대함을 뜻한다고볼 때, 죄인으로서 심판(審判)을 받아야 마땅하고 아무런 용서받을 조건을 갖추고 있지 못한 인간으로서의 마게도냐 교인들이 아무런 조건없이 베풀어진 하나님의 관대함을 입었기 때문에 다른 이들을 위하여 자비를 베푸는 것은 공로가 아니라 마땅히 해야할 일이었다.

      결국 마게도냐 교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관대해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하나님의 은혜이다.

      8: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 마게도냐 교회들이 당한 시련에대해서는 빌 1:29, 30; 살전 1:6;2:14;3:3, 4; 살후 1:4-10에 언급되어 있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다. 다만 유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환난과 같은 것을 마게도냐 교인들도 받았다고 언급될 뿐이다(살전 2:14). 마게도냐의교인들이 당한 환난은 그들이 기독교를 믿는다는 사실 때문에 당한 것이었으며, 아마유대인 적대자들에 의해 난동꾼들로 모함을 받았거나 유대인들로부터 직접적인 공격을받았을 것으로 보인다(행 16:20;17:5, 13). 또한 마게도냐 교인들은 피식민지 백성으로 받는 시련도 있었다. 이 모든 시련 가운데서도 마게도냐의 교인들은 넘치는 기쁨속에 살았다고 바울은 전해준다. 혹자는 말하기를 '이 기쁨은 마게도냐 교인들 자체에서 나온다기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관대함의 결과'라고 말한다(Schlatter). 아무튼 마게도냐의 교인들은 시련을 당할수록 오히려 넘치는 기쁨을 누렸는데 그것은 그들의 신앙이 매우 성숙한 수준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마치 그들은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는' 바울의 모습(6:10)과도 같았다.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 당시에 마게도냐는로마의 지배하에 있었으므로 금광이나 은광, 선박용 나무를 베는 권리 등의 수입원들을 모두 로마인들에게 빼앗겨 구조적인 가난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마게도냐는 전체적으로 농업, 광업, 목재 산업 등이 번성하였기 때문에 '극한 가난'의 상태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본다(Barrett).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 마게도냐 교회들의 형편을'극한 가난'으로 표현한 것은 경제적인 요인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해진 박해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본문은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마게도냐의 교인들은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였다는 사실을 또한번 전해주고 있다. 여기서 '연보'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플로테토스'(* )는 '소박', '단순', '순수함'이라는뜻으로 헌금의 기본적인 태도는 마음의 순수함에서 비롯되어야 하는 것임을 말해준다.한편 본문은 '가난'이라는 상황이 남을 돕거나 하나님께 드리는데 인색함의 동기가 되서는 안됨을 말해준다. 마게도냐의 교인들은 마치 자신의 전재산을 하나님께 바친 한가난한 과부처럼 극한 가난속에서도 자기들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었으니 그것은'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의 모습이었다(6:10).

      8:3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 바울이 보기에 마게도냐의 교인들은 기대 이상으로 연보를 드렸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의 행위가 요청이나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자원(自願)해서 했다는 사실이다. 혹자는 마게도냐의 교인들이 오히려 물질적 원조를필요로 했기 때문에 바울이 이들에게 재정적 협조를 요청하기를 주저했을 것이라고 본다(Lowery).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게도냐 교회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어려운 사정을 외면할 수 없었고 바울이 말하지는 않았지만 자원하여 돕겠다고 나선 것이다. 참으로 놀랍도록 헌신적인 사랑이었다. 이런 이야기에 고린도의 교인들은 상당히 마음의 자극을받았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8:4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 마게도냐의 교인들은 곤경에 처한 다른 성도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구제하는 일이 성도로서 마땅히 해야 할 '특전'(공동 번역)이라고 보았고 그 특전을 나누어 달라고 바울에게 간청하였다. 여기서 곤경에 처한 성도들이라 함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가리키는데, 당시 유대 전역의 사람들은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Claudius, A.D. 41-54)가 통치하던 때에 있었던 심한 기근으로 대단히 궁핍한 생활을 했었다(행 11:27-30). 더구나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비천한 사람이었고 그런 만큼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 친구들도 없었다. 오히려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유대인들로부터도 종교적인탄압을 받고 있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친밀한 형제애(兄弟愛)로 굳게 뭉쳐 서로를 돕는 것이었다. 마게도냐인들이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일에 헌신적으로 나선 것은 그들도 가난했기 때문에 가난한 자의 고통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감사할 줄아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8:5
      자신을 주께 드리고 - 마게도냐의 교인들이 보여준 헌신적인 행위들은 바울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성숙한 신앙적 행위였음이 드러나고 있다. 마게도냐의 교인들은단지 동정적인 행위나 인간적인 사랑의 행위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헌금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마음에서 행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음을 알았고 따라서 그들의 소유도 필요시에는 주님을 섬기는 일에 바쳐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Bruce).

      우리에게 주었도다 - 본절의 의미는 '우리에게도 헌신하였습니다'(공동번역)이다.마게도냐의 교인들은 바울을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보내신 사도로 존중하였고 따라서그를 헌신적으로 잘 섬겼다. 그들은 사도에 대한 이런 마음이 곧 주님께 헌신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8:6
      이러므로 우리가 디도를 권하여...성취케 하라 - 본절은 바울이 디도를 고린도에보낸 목적이 '눈물의 편지'를 전달하는 것 외에 예루살렘 교회를 구제하기 위한 헌금모금에 고린도 교인들도 참여케 하려는 목적도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고린도에서의 모금 사업이 이미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디도를 재차 보내 헌금 모금을 성취케 하라고 한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헌금을 내는 일에 기대에 못미쳤음을 본절이 또한 간접적으로 암시해준다. 여기서 '헌금 모금을 성공적으로 끝내라'는 말을 '은혜를 성취케 하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고린도인들이 헌금 모금에 참여하는 것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의미일 수 있고, 또 마게도냐의 교회들이 즐거이 헌금을 내어줌으로써 주님께 헌신하고 나아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성취하는 것처럼 고린도의교인들도 동일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성취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한편 본절의 '이러므로'는 마게도냐 교인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헌신이 바울로 하여금디도를 고린도에 보내 모금 사업을 완성하게 하도록 하는 동기가 되었음을 말해준다.고린도 교인들은 마게도냐 교회들이 외부적인 박해(迫害)와 내부적인 극한 가난의 상황에서도 능력 이상으로 헌신한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며 나아가 상대적으로박해도 받지 않고 가난에 시달리지도 않는 자신들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를 요청받고 있다(Harris).

      8:7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 고린도 교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갖게되었고(고전 12:9;13:2, 13), 말과 지식이 풍부했으며(고전 1:5), 바울에 대한 간절함과 사랑을 풍성히 가지고 있었다(7:7).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하나님과 사도 앞에서는 바르게 서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그들에게 한 가지 더 필요한 것은 형제된 성도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이었다. 여기서 이 사랑을 '은혜'(* , 카로티)로 표현한 것은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이웃을 위하여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하는 것임을 깨닫게 해주고자 함이다. 따라서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헌금을 제공하도록 요청한 것은그들에게 어려운 짐지워주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은혜를 더 풍성하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8:8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도로서의 권위가있었고(10:8;13:10) 따라서 그의 성도들에게 유익한 일이라면 명령할 수 있는 위치에있었지만, 결코 명령으로 고린도 교인들의 행위를 이끌지 않고 다만 방향만을 지시하며 권유하거나 호소할 뿐이었다. 바울이 그렇게 한 이유는 (1) 마게도냐의 교회들이행했던 행동처럼 고린도 교인들도 자발적인 사랑을 행하도록 촉진하고, (2) 또한 자원함으로 드려진 연보만이 하나님께 합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께 대한 내적헌신이라는 동기에서 비롯되지 않은 구제헌금을 하였다면 그것은 바리새인의 외식 행위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눅 21:1-4).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증명코자 함이로라 - 본절의 정확한 의미는, 마게도냐 교인들이 보여준 헌신적인 사랑에 견주어 고린도 교인들의 사랑이 과연 진실한것인가를 증명해 보고자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마게도냐 교인들의 헌신적 사랑은 다른 교인들의 신앙과 사랑의 표준이 되고 있다(Martin).

      8:9
      부요하신 자로서...가난하게 되심은 - 앞에서 구제 헌금의 동기를 마게도냐 교인들의 모범(模範)으로 유발시켰던 바울은(1-7절) 보다 더 차원 높은 연보의 동기 및 근본원리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비하 즉 성육신하심(incarnation)과 만인을 위한 대속적 죽음을 들고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희생의 최고 모범으로서 고린도 교인들이 구제 헌금을 해야만 하는 신학적 당위성의 근거를 제시해 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본체이셨으나(빌 2:6)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낮고 선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시어 머리 둘 곳조차 없을만큼 희생적인 고난의 삶을 사셨고(마 8:20; 눅 9:58) 마지막에는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으니 그것은 절대적 가난의 한 모습이었다.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 루터(Luther)는 본절의 내용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그리스도의 가난함을 찬양하였다. "그는 가난한 모습을 하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하늘에서 부요하게 하시며, 당신의 사랑하는 천사들과 같게 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이같은 은혜를 주신 것은 그은혜를 받은 자도 그분이 하신 일을 본받게 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같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고린도 교인들은 마땅히 자신들의 부요함을 포기하여 가난한성도들을 유익하게 해야만 했다.

      8:10
      이 일에 내가 뜻만 보이노니 - 바울은 명령할 수 있는 위치에 있고 또 명령할 수있을 만큼 당위성이 있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명령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그는 '...이 좋겠습니다'(공동번역)라는 말로 정중하게 권고하고 있다. 이것은 바울이보여주는 목회자로서의 모범인 바, 하나님 앞에서 아무리 대의 명분이있는 일이라 하더라도 명령이나 강요에 의해 이루어져서는 안 되며 오직 행하는 자 스스로의 온전한결단에 의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유익함이라 - 이 말의 의미가, 고린도 교인들이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결단에 의해서 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인지, 아니면 기왕에 시작한 일인만큼 끝까지완수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인지 분명치 않다. 물론 두가지가 다 해당될 수도 있다.
       너희가 일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즉 - 여기서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그것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적어도 1년 전에 구제 헌금 사업을 시작했다는 것과, 그 일이 지지부진하여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지 못했다는사실이다. 이와 관련하여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구제 헌금 사업을 이제는 속히 완성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하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1) 고린도 교인들이 구제 헌금을 시작한 것은 전적으로 그들 자신의 의사에 의한 것이었다. (2) 그들이 구제 헌금 사업을 시작한지가 1년이나 되었지만 그들의 헌금은 그들보다 늦게 시작하고 시련과 극한 가난이라는 어려운 상황에서 헌금을 한 마게도냐 교인들보다도 미흡했기 때문이다(3절). (3) 적어도 그것이 선한일이라면 빨리 끝을 맺는 것이 신앙적으로 유익하다. 그렇지 않고 중도에 그만둔다면 그것은 진실한 신앙이 아니며(8절) 앞으로도 승리하는 생활이 되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4) 구제 헌금을 빨리 완성하여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속히 아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Harris).

      8:11
      행하기를 성취할지니...있는 대로 하라 - 고린도 교인들은 말과 지식이 풍부하고마음의 열정도 넉넉하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좀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요청되는 것은 마음에 있는 것을 행함으로 성취하는 것이다. 바울은 결코 그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는다. 그저 '있는 대로' 즉 '소유하고 있는 대로', '드릴 수 있는대로' 성의(誠意)만 보이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마게도냐 교인들에 비해 빈궁한 생활을 하지 않았고, 따라서 고린도 교인들은 마게도냐 교인들보다 많은 구제 헌금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8:12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 여기서 '받으실 터이요'의 주체는 하나님이다. 고린도교인들의 구제 헌금이 가시적으로는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에게 도움이 되겠지만, 궁극적으로 받으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중요하다. 이것은 달리 말해서고린도 교인들이 예루살렘 교인들을 위한 구제 헌금을 할 때 누구를 돕는다는 생각을해서는 안 되며 다만 하나님께 드린다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본절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헌금을 받으실 때 드려진 것의 양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사람의 마음을 중요하게 보신다는 것이며 또한 드려진 헌금과 드리는 자의 소유의 관계에서 평가하신다는 것이다(막 12:41-44). 그러므로 많이 소유한 자가많이 드리는 것과 적게 소유한 자가 조금밖에 드리지 못한 것 사이에는 어떠한 가치의차이도 없다. 다만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이다.

      8:13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 본절은 고린도 교인들 중에서 구제 헌금에 대하여 말하기를 '남을 편하게 하기 위하여 바울이 자기들에게 짐을 지우고 있다'고 불평한 이들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Bruce). 그러나바울은 있는 자의 재물을 거두어 그를 가난하게 하고 그에게서 거둔 재물로 가난한 자를 부요하게 하는 것이 결코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중요한 것은 가진 자나 가지지 못한 자 모두가 평등하고 공평하게 살도록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떠한 강제도 물리적알력도 배제된다. 다만 넉넉한 자가 자원(自願)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은혜에 응답하여 가난한 자에게 자기의 소유를 나누는 것인데, 이것이 기독교의 공동체 의식이다.바울이 여기서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헌금에 참여하도록하기 위해 전개하는 논리는 상부 상조하는 공동체의 논리이며(14절) 이것은 로마서에서 사용한 논리와는 다르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이방인 성도들이 예루살렘 성도들로부터 영적인 것을 나누어 받았기 때문에 육적인 것에 관한 한 이방인 성도들이 예루살렘성도들을 위해 나누어 주는 것은 마땅하다는 논리를 전개하였다(롬 15:27). 한편 혹자는 본절에 "너희는, 예루살렘의 성도들에게 사치품을 제공하기 위해 너희를 가난하게하려는 친유대인적 경향이 나에게 있다고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암시가 있다고 보기도 한다(Farrar).

      8:14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 바울이 본절을 통해 예루살렘과 고린도의 상황이 뒤바뀔 것을 예견했다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당시의 경제상황이 전체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 있었으므로 그럴 수 있는 가능성또한 얼마든지 있었다. 그리고 만일 그런 뒤바뀐 상황이 도래한다면 예루살렘의 성도들은 기꺼이 자기들의 소유를 나누었을 것이다.왜냐하면 예루살렘의 성도들은 이미 평균하게 사는 방법을 실천했기 때문이다(행 2:44, 45).

      8:15
      기록한 것 같이 - 바울은 자신이 제시한 평균의 원리에 더 강한 설득력을 부여하기위하여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내려주신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출 16:13-36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주실 때 많이 거두어 들인 자나 적게 거두어 들인 자나 모두가 배불리 먹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많이거두어 들인 자의 남은 것은 썩어서 저축될 수 없었다는 점과 적게 거두어 들인 자는모자라지 않았다는 점이다. 바울은 이 광야의 이야기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적용될수 있는 경제의 원리라고 생각한 듯하다. 즉 하나님께서는 과거 광야에서 직접 개입하시어 이스라엘 백성들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시되 남은 것의 축적(蓄積)을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백성들간의 경제적 평균을 이루게 하셨다. 이제 지금은 직접 개입하시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당신의 백성들이 이런 원리를 지켜 서로 풍족한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즉 물질을 넉넉히 가진 사람은 그물질이 하나님께로서 왔다는 것을 알고자기가 쓰고 남은 여분의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8:16
      너희를 위하여 같은 간절함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 본절은 "내가 여러분에게 기울이는 것과 같은 열성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공동번역)의 뜻이다. 바울이 신뢰하는 동역자 디도가 고린도 교인들에 대해그 같은 열정을 갖고 있다는 것은 고린도에 가서 구제 헌금 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할수 있는 인물을 찾던 바울에게는 여간 감사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한편 바울은 본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디도의 열정을 상기시킴으로써(7:13-15), 고린도 교인들이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해주기를 은연중 바라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유익을위함이지 헌금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10절).

      8:17
      저가 권함을 받고...자원하여 너희에게 나아갔고 - 바울이 처음에 디도에게 고린도교인들의 구제 헌금을 성취케 하기 위해 이 일을 권한 것은 사실이다(6절). 그러나 디도는 권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깊은 열정 때문에(7:15) 자원하여나섰다. 본문에 대해, 혹자는 디도가 종종 바울의 전도와는 독자적(獨自的)으로 일했다는 암시가 있다고 보지만(Harris) 이는 타당치 않다.

      8:18
      복음으로서...칭찬을 받는 자요 -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구제 헌금을 위해 디도 외에 두 사람을 더 보냈다(22절). 본문에 '복음으로서 칭찬을 받는 자'(공동번역에는'복음을 전하는데 명성을 떨친 사람'으로 되어 있다)라고 소개된 이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학자들은 '누가'나 '디도의 형제'일 것이라고 추측하는데 이에 대한 근거는없다.다만 우리는 이 사람이 바울의 신뢰를 받았고 여러 교회로부터 칭찬을 받았던 자라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다.

      8:19
      여러 교회의 택함을 입어 - 본문은 방금 바울이 소개한 사람이 바울에 의해 선택된것이 아니라 여러 교회들에 의해 선택되었으며 이 선택의 방법은 교회들에 의한 공식적 투표에 의한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택함을 입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케이로토네데이스'(* )는 '거수(擧手)로써 투표하여 선택한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 선택된 사람이 공신력있는 인물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혹자는 이 사람이 마게도냐의 교인들로부터 뽑힌 대표자일 것이라고 보는데(Barrett), 이렇게 볼 수 있는 가능성은 많다. 왜냐하면 이미 마게도냐 교인들의 구제모금은 끝이 난 상태였으므로 모금된 돈을 디도와 함께 운반하고 보호할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8:20
      이것을 조심함은 - 바울이 구제금을 모금하고 관리하기 위한 실무자를 그의 측근인디도 한 사람으로 국한하지 않고 두 명을 더 참여시킨 것은 불필요한 오해를 야기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한 사려깊은 행위였다. 거액의 연보로...
      훼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 '거액의 연보'에 해당한는 헬라어'하드로테티'(* )는 '살진', '큰', '부유한'의 뜻을 가진 '하드로스'(*  )에서 파생된 말로 단지 '심정적(心情的) 많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실제로 '많은 액수의 헌금'이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훼방하지 못하게'가 뜻하는 바는그 모금된 돈을 도둑질 당하거나 분실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거액의 연보가바울과 관계되어 있음으로 해서 생길 수 있는 의혹이나 인간적인 의심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것을 뜻한다. 이는 '훼방하지 못하게'로 번역된 헬라어 '메 모메세타이'(* -   )가 문자적으로 '비난을 받지 않다'를 뜻하는데서 알 수 있다(be no accusations, JB). 당시 복음 전도자들이 대개 받았던 비난처럼 바울도 자신의이익을 위해 선교활동을 한다는 비난을 예견한 만큼, 바울은 오직 주의 영광과 성도들의 구원을 위해 일한 것이(4:12), 도리어 불필요한 오해를 일으켜 선교하는데 조금이라도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해야 했다(Barrett). 그러나 바울의 이런 세심한 주의에도불구하고 악의에 찬 오해를 면할 수는 없었다(12:16-21).

      8:21
      주 앞에서만 아니라 - 사실상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 앞에서 깨끗하다 인정받는 것이다(고전 4:4). 그러므로 그는 결코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지않았다. 그럼에도 바울이 이렇게 사람들의 의혹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좋지 않은 평판이 나는 것은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다(6:3;고전 9:12;10:32). 한편 본절은 바울이 70인역 잠 3:4을 인용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있다(Barrett, Harris).

      8:22
      또 저희와 함께 우리의 한 형제를 보내었노니...여러 번 시험하였거니와...너희를크게 믿은 고로 - 여기서 또 한 사람의 알려지지 않은 동반자가 소개되고 있다. 이 사람은 여러차례에 걸친 시험에서 증명될 만큼 열성을 가지고 있었고 더욱이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큰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였으므로 이번 일에 동행하게 하였던 것이다.학자들은 이 사람이 아볼로나 두기고일 수있다고 추측하나(Farrar, Robertson) 확실하지는 않다.한편 바울이 디도와 함께 보낸 두 사람에 대해서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은,디도가 이 편지를 고린도 교회에서 읽을 때 그들을 소개하려고 했거나 아니면 두 사람의 대표자들이 마게도냐 교회들에 의해 선출된 자로서 이미 고린도에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Harris).

      8:23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무요...동역자요 - 고린도에서 보내진 디도 일행에 대한 신임장(信任狀)이 서술되고 있다. 디도는 다른 두 사람과 구별될 만큼 다소 특별한 존재였다. 여기서 '동무'라는 표현은 바울과 디도가 상당히 친밀한 관계에 있었음을 말해주며 '동역자'라는 표현은 디도가 복음 전파의 사역에 한 주체로서 지대한 공헌을 했음을 말해준다.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 - 여기서 '여러 교회'는 19절에서의 주석처럼 '마게도냐의 교회들'을 지칭하고, '사자들'(* , 아포스톨로이)은 '사신' 또는 '사절'을 뜻한다. 이 형제들은 바울이나 디도처럼 사역자로세워진 것이 아니라 이번의 구제금 사업을 위해 여러 교회들로부터 선택된 사람들로사도에 준하는 사람들이었다. 또한 구제금 모금 사업의 재정적인 면을 담당하는 지역교회들의 대리인들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한편 본절에 언급된 이러한 구별이 바울이나 디도와, 여러 교회들에서 선택된 '사절'들 사이에 지위의 차별을 암시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전자나 후자 모두가 그리스도의 영광이라는 점에서 동일 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디도를 비롯하여 두 형제들은 바울이 인정하고 신임하는 자들이었으며, 다른 교회들로부터도 신임받는 사람들이었다.

      8:24
      여러 교회 앞에서...보이라 - 공동번역은 본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 "그러니 여러분은 그들을 사랑으로 대하여 우리가 여러분을 자랑한 점이 사실이라는 것을모든 교회에 드러내십시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이 보내는 사절단을 따뜻하게 환대(歡待)할 것을 요청하고 있으며 이러한 환대는 자신이 고린도 교인들에 대하여 자랑한 것을 확증해주는 의미를 갖는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바울의 요구는 고린도교인들이 참으로 성숙하고 훌륭한 성도임을 보여달라는 것이었다.












      1절입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마게도냐교회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린 헌금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2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마게도냐교회 성도들이 풍성한 헌금을 드린 이유가 환난과 시련과 극심한 가난 중에서도 풍성하도록 연보하였다고 합니다.

      마게도냐교회 성도들이 풍성한 헌금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삶에 환난이나 시련이 없어서 즉 삶이 형통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경제적으로 여유롭고 넉넉하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흔히 우리가 감사할만한 이유가 생겼을 때 감사헌금을 드리는 것처럼, 감사할 조건이 생겨서 감사로 헌금을 드린 게 아니었습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감사할 이유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속에서 풍성한 기쁨이 있었기에 드릴 수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그 기쁨은 어디로부터 온 기쁨이겠습니까?
      세상적인 관점에서 감사할 이유가 생겼기 때문에 솟아난 기쁨이 아니라면, 그것은 세상으로부터 온 기쁨이 아닐 것입니다(9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마게도냐교회 성도들의 기쁨의 원천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해 세 가지를 말했습니다.

      첫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원래 부요하신 분이었습니다.
      둘째,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셋째, 그로 인하여 우리가 부요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 부요한 분이시지만, 가장 절망적인 가난에 처하셨습니다. 로마의 식민지 지배를 받는 이스라엘, 그것도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셨으며, 동물의 여물통에 뉘였습니다. 가장 부요하신 분이 왜 가장 가난하게 되셨는가? 그 이유는 바로 우리를 부요하게 해 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마케도냐교회 성도들의 기쁨의 원천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나에게도 마게도냐 교회의 성도들처럼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기쁨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기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풍성한 연보를 드린 마게도냐교회들처럼 나도 풍성한 연보를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0-05-2022(수)

      세상 근심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고린도후서 7:10)  

      근심. λύπη, ης, ἡ  3077  

      1. 슬픔,  2. 아픔,  3. 심뇌

      발음 / 루패(lüpē)
      관련 성경 / 슬픔(눅 22:45, 벧전 2:19), 근심(요 16:20, 고후 2:1, 빌 2:27).
      신약 성경 / 16회 사용

      1. 히브리어
      카아브 - 아픔을 느끼다, 슬퍼하다, 상하다, 아프다.

      2. 헬라어
      루페 - 슬픔, 한숨, (싫은 것을 억지로) 근심, 서러움.

      3. 한문
      괴롭고 애를 쓰는 마음

      4. 한글
      해결되지 않은 일 때문에 속을 태우거나 우울해함.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세상 근심

      다섯 가지 감옥

      영국의 작가 G. 엘리오트는 나름대로 인간을 이렇게 분석하고 있다.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다섯 가지 감옥에 갇혀 살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자기가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을 자기도 모른다는 데 있다.
      알 때도 있지마는 모를 때가 더 많다. 철장이 없는 감옥, 쇠사슬에 매인 것도 아닌데 더 강력하게 붙들려 있는 감옥, 그 감옥에 매여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부터 자유해야만 인간이 바로 설 수 있고 자기 성취를 이루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첫째, 이기적인 '자기 사랑의 감옥'

      가만히 보면 남을 사랑한다 해도 결국은 자기 사랑이다.
      특별히 자기 자식을 사랑한다는 말 같은 것을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이다.
      자기 삶의 연장일 뿐이다.
      이웃을 위하고 누구를 돕는다 하더라도 결국을 보면 자기를 위하는 것이다.
      사람은 이기적인 이 자기 사랑의 감옥에서 출옥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문제이다... 어째든 이기심, 자기 사랑, 이것이 큰 감옥이다. 이로부터 벗어나기 전에는 사람답게 살지 못한다.

      둘째, '근심이라고 하는 감옥'

      근심이야말로 쓸데없는 것 아닌가?
      걱정해서 되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걱정을 하고 보면 내 마음 상하고 남의 마음 해치고 주변 분위기까지 다 못쓰게 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과 가지고 있는 능력, 지혜마저 다 사라져 버린다.
      창의력은 상상조차 못한다.
      근심하는 자는 그야말로 가장 비겁하고 나약한 사람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걱정은 쓸데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감옥에서 헤어나지를 못한다.

      셋째, 과거를 생각하는 '향수의 감옥'

      과거를 생각한다.
      그래서 옛날로 돌아가 본다.
      그 당시에는 그 때가 제일 어려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는 그 때가 좋았다 한다.
      특별히 잘못되기 쉬운게 뭐냐 하면 과거에 대해서 가정법을 쓴다.
      그 때에 그러지 말았어야 되는데, 이 사람하고 결혼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 말을 믿지 말았어야 되는데, 그 때 좀더 열심히 공부할 것, 뭘 할 걸... 이렇게 생각한단 말이다.
      이거야말로 아무 소용없는 짓이다.
      이 과거지향적인, 과거에 대한 향수와 미련, 이것도 하나의 감옥이다.
      여기에 붙들려 절대로 미래로 향해 나갈 수가 없다.
      미래를 망치는 것이다.
      비행기를 보라. 옛날에는 프로펠러 비행기였는데 앞에 있는 공기를 잡아당기면서 앞으로 추진되었다.
      그래서 그때 엔진은 비행기의 앞에, 머리에 있었다.
      그러나 요즘의 제트엔진은 뒤로 밀치면서 나간다.
      그래서 엔진이 전부 뒤에 있다.
      어떤 것은 아주 꼬리에 붙어 있다.
      모름지기 과거를 밀쳐 버려야, 떨쳐버려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훨씬 더 강하게 나아갈 수 있다.
      과거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면 마치 연의 줄처럼 그 한계에 딱 멈춰버리고 더 못 올라간다.
      현재와 미래를 다 망치게 된다.

      넷째, 남의 것만 좋게 보는 '선망의 감옥'

      내 것이 왜 중요하지 않은가?
      그런데 언제나 남의 것만 좋게 보인다. 남의 남편이 더 좋아 보이고, 남의 아이들이 더 잘하는 것만 같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다른 사람의 처지를 선망하는 것이다.
      어느 새 나도 모르게 여기에 빠져들면 자기에게 주신 소중한 은사도 다 망각하게 된다.
      남의 것은 남의 것이고 내 것은 내 것이다.
      이걸 분명해 해야 된다.

      다섯째, '증오라는 감옥'

      어느 사이에 남을 미워하고 시기 질투하고 있다는 말이다.
      아직 이만큼이라도 살아 있으면 고마운 줄 알지 왜 이렇게 사람들이 오래도록 한을 품는가?
      찬 몸서리가 난다. 이걸 풀지 못하고 한을 그대로 뭉쳐 가지고 죽어버린다.
      이 증오, 이 가옥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증오는 사람들의 뼈를 말린다.






      100여 년 전(前), 미국에 '헨리 콤스톡(Henry Comstock)'이란 땅 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1856년(年) 당시 미국에서 가장 큰 '콤스톡 광산(Comstock Mine)'을 소유하고 있었던 광산업자이기도 했는데, '네바다'주(州) '버지니아 시티'에 있던 나무와 엉겅퀴가 무성한 척박한 산을 별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여 1만 1천 달러의 헐값에 팔았습니다.
      그는 손에 지폐 다발을 들고 기뻐했습니다.
      몇 년 후, 그 산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척박해 보이기만 하던 산(山)에서 미국(美國) 최대(最大) 규모(規模)의 금광(金鑛)이 발견된 것입니다.
      매장량(埋藏量)이 무려 5억 달러에 상회했습니다.
      '콤스톡(Comstock)'은 땅을 치며 후회(後悔)했습니다.
      그는 자신(自身)의 잘못된 선택(選擇)을 한탄(恨歎)하며 술로 세월(歲月)을 보내다가 한 달 만인 1885년 10월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러나 1914년(年), 한 발명가(發明家)의 집과 연구실이 전소되는 대화재(大火災)가 발생(發生)했습니다.
      200만 달러가 넘는 전(全) 재산(財産)을 날린 그의 인생(人生)은 잿더미처럼 공허(空虛)했습니다.
      이 발명가(發明家)의 나이는 67세, 사람들은 재기(再起)하기에는 너무 늙어 보이는 그를 찾아와 위로(慰勞)의 말을 건넸습니다.
      그러자 위대(偉大)한 발명가(發明家)는 빙그레 웃으며 말합니다.
      "낡은 건물(建物)과 시설(施設)에 연연(戀戀)하는 내 좁은 소견을 깨우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청소(淸掃)를 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새 것을 주시기 위한 방법(方法)이랍니다."

      이 사람은 발명왕(發明王) '토머스 에디슨(Thomas Alva Edison)'입니다.
      그는 화재(火災)를 딛고 일어나서 이전(以前)보다 더욱 훌륭한 연구실(硏究室)을 지었고 이전(以前)보다 더욱 의욕적(意慾的)인 활동(活動)을 펼쳤습니다.

      '콤스톡(Comstock)'과 '에디슨(Edison)'은 절망(絶望) 앞에서 상반(相反)된 선택(選擇)을 했습니다.
      한 사람은 고난(苦難)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自殺)을 선택한 '실패(失敗)한 인생(人生)'이었고, 다른 사람은 한 번의 고난(苦難)을 오히려 새 출발(出發)의 기회(機會)로 삼은 '도약(跳躍)의 인생(人生)'이었습니다.

      '에디슨(Edison)'에게는 시련(試鍊)이 곧 새로운 출발(出發)의 시그널(signal)이었습니다.
      절망(絶望)을 대(對)하는 엇갈린 태도(態度)가 인생(人生)의 운명(運命)을 판이(判異)하게 가르는 법입니다.
      결국 문제(問題)는 절망(絶望)이 아닌 그것을 대(對)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Christian)들에게는 문제(問題)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祈禱) 제목(題目)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 지 말고 오직 모든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염려는 무엇인가?

      worry라는 영어 단어는 메림나오(merimnao. μεριμνάω)라는 희랍어 동사에서 생겼다.
      그런데 이 단어는 "나누다"라는 의미의 메리조와 "마음"이라는 의미의 누스라는두 개의 단어가 합쳐진 합성어이다.
      그러므로 염려란 "마음을 나눈다"는 의미이다.

      μεριμνάω  3309

      1. 염려하다,  2. 돌보다

      발음 / 메림나오(mĕrimnaō) 

      어원 / 미래형 μεριμνήσω, 제1부정과거 ἐμερίμνησα, 330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염려하다(마 6:27, 눅 12:26, 고전 7:33), 돌보다(고전 12:25), 생각하다(빌 2:20).
      신약 성경 / 19회 사용

      야고보는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야고보서 1:8)

      염려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은 정서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분열된 사람이다.
      염려는 죄악이다.
      염려한다면 그는 참으로 하나님을 거짓말장이로 비난하는 것이다. 롬 8:28, 히 13:5...
      염려는 하나님의 성전인 인간의 신체에도 해롭기 때문에 죄이다.

      의학 적으로 밝혀진 바에 의하면 마음을 한 곳에 쏟는 사람보다 염려하는 사람이
      더 많이 사고를 당한다는 것이다.

      염려의 치료 :

      1. 기도하기를 힘쓰라. 눅18:1
      2. 기뻐하기를 힘쓰라. 빌4:4
      3. 신뢰하기를 힘쓰라. 마6:25-34
      4. 일하기를 힘쓰라. 시37
      5. 당신의 축복을 세어보기를 힘쓰라.
      6.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와 다른 사람에게 주의를 집중하라. 빌2:4


      *인간의 세 고민

      실존 철학자 하이덱거는 "사람에게는 세 가지 고민이 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 고민 중 첫째는 물질에 대한 것, 둘째는 사람에
      대한 것, 그리고 세째는 자신에 대한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물질 즉 돈을
      벌려 한다. 그것이 성공하면 다음으로는 다른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려 한다.
      이것이 성공하면 마지막으로 자신에 대하여 고민을 느끼게 된다.

      첫째의 고민을 누구나 노력하면 풀수 있다.
      둘째의 고민을 푸는 자는 드물다.
      세번째의 고민은 아무도 풀지 못한다."
      이 세째의 고민은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만이 해결할수 있는 것이다.







      “근심하게 한 것”
      (8절)으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의 원형 ‘루페오(λυπέω)’ ‘성가시 게 하다’, ‘슬프게 하다’, ‘비통하게 하다’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일반적 인 근심이나 걱정을 뜻하기도 하지만, 죄로 인해 겪는 징벌과 관련된 고 난들을 뜻하기도 한다.

      근심 없이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은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고 살아가는 존재이지만, 딱 하나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반드시 해야 합니다.
      그 근심이 믿음을 성숙시키기 때문입니다.

      첫째, 상처가 되더라도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충고를 담은 편 지를 보내고 잠시 후회했습니다. 자신 의 말이 사람들에게 상처가 될까 염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 성 도들은 바울의 편지를 받고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정직하게 인정함으로 바 울에게 결국 기쁨을 주었습니다. 

      둘째, 유익이 되는 근심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편지 로 인해 분명한 마음에 찔림을 경험했 고 이윽고 잘못을 회개했습니다. 그들 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여 그런 결 과를 얻었고 더욱 참되고 경건한 그리 스도인의 삶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멀어질 때 반드시 근심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셋째, 회복되는 열정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는 사람은 올바른 신앙생활을 위해서 더욱 진지하 고 열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바로 그런 노력 을 기울이고 있다고 칭찬했으며 그들을 더욱 바르게 세우기 위해서 사랑으로 권면했습니다. 우리도 그런 목적으로만 서로에게 권면해야 합니다.

      신앙적으로 바른 충고나 권면은 사 람을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합니 다. 비록 당장은 말하거나 듣기 불편하 더라도 권면이 낳는 절대적인 영적 유 익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사랑으로 서 로 권면하고 함께 회개하는 교회가 가 장 건강한 교회입니다.

      회개의 실제성

      죄를 진심으로 후회하고 슬퍼하는 것은 아주 실제적인 일입니다.
      아무도 죄 안에 살고 있으면서 죄를 미워한다 고 말할 수 없습니다.
      회개는 우리로 하여금 죄의 악함을 보게 하되 이론적으 로만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적으 로도 보게 합니다.
      마치 불에 덴 아이가 불을 무서워하듯 그렇게 죄를 무서워하 게 됩니다.
      마치 최근에 강도를 만나 곤 욕을 치른 사람이 고속도로 위에서 다 시 강도를 만나게 될까 봐 두려워하듯 그렇게 죄를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래 서 죄를 피하되 모든 점에서 죄를 피하 려 듭니다. (찰스 스펄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란 내 행위를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까, 내 행위가 죄는 아닐까, 내 언행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은 아닐까 등을 근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근심은 성도로 하여금 회개에 이르게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한 근심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분열되어 분쟁하며 음행과 자기자랑으로 더럽혀져 있을 때에 바울은 그들을 돌이키게 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로 알려진 편지를 써서 보냈고, 편지를 받고도 회개하지 않자 55년경에는 직접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방문은 소위 ‘가슴 아픈 방문’이 되고 말았습니다.
      적대자들이 바울을 모함하며 몰아 세웠고 성도들은 그에 동조하거나 침묵 또는 방임하며 바울의 편에 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상황의 진보는 없이 마음의 상처만 안고 돌아온 바울은 56년 봄, 한 통의 편지를 더 써서 보낸 것으로 보입니다.
      현존하지는 않지만, ‘눈물의 편지’, 또는 ‘준엄한 편지’로 불리우는 편지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눈물의 편지 역시 사랑의 편지였지만, 고린도 성도들에게는 고통을 준 편지였습니다.
      편지의 어조가 너무나도 강렬하여 보내는 바울도 눈물로 썼지만, 읽는 성도들도 눈물로 읽어야 했습니다.
      바울은 그것에 대해 잠시 후회를 했습니다.
      편지의 내용이 너무 과격하여 성도들이 근심할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린도의 성도들은 일시적으로 근심했을 뿐 이내 회개하고 돌이키는 최상의 반응을 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의 근심은 회개로 전환이 되었고, 그로 인해 바울의 후회는 기쁨으로 전환이 되어졌습니다.
      그것은 편지가 가진 설득력 때문이 아닌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한 것이 근심을 회개로, 후회를 기쁨으로 전환한 것이지요.

      두 가지의 근심

      성도에게는 두 가지의 근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과 세상 근심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란 내 행위를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까, 내 행위가 죄는 아닐까, 내 언행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은 아닐까 등을 근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근심은 성도로 하여금 회개에 이르게 합니다.
      성결에 이르게 하는 ‘거룩한 근심’이라는 것이지요.

      세상 근심이란 세상 사람들도 동일하게 하는 근심, 세상 것들에 대한 근심을 말합니다.
      이러한 근심은 좌절과 원망과 불평과 분노 등을 낳습니다.
      이러한 근심이 자기를 향하면 적극적으로는 자기 파괴 행위로 이어지고 소극적으로는 자기 정당화로 이어집니다.
      지나친 자기 정죄로 인해 땅굴을 파고 들어가거나,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옹색한 변명들을 늘어 놓다가 오히려 사람들을 더 아프게 합니다.
      이러한 근심이 상대방을 향하면, 적극적으로는 상대방을 공격하거나 험담하게 되고, 소극적으로는 대인기피증이 생겨 사람들과의 관계를 피하게 됩니다.

      결국 세상 근심은 성도와의 관계, 목회자와의 관계,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관계를 더욱 단절시키게 되며, 결국 영적 사망으로 이르게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세상 근심을 영적 사망을 이루는 것이라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한 근심의 결과

      하나님의 뜻대로 한 근심은 회개로 이어지고, 회개는 반드시 합당한 열매들을 맺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맺은  7가지 회개의 열매들을 나열합니다.

      1. 간절하게 함

      고린도 성도들은 자신들의 죄를 인지하게 되었으며, 죄를 교정하고 싶은 마음과 자신을 성결하게 만들고자 원하는 마음으로 간절해졌습니다.

      2.  변증하게 함

      고린도 성도들은 자신들의 죄를 회개했지만, 자신들의 진심에 대해서는 적극 변증을 했습니다.
      그들은 변명한 것이 아닙니다.
      변명은 죄로 인해 오는 결과를 모면하려고 늘어놓는 것일 때가 많은 반면, 변증은 자신들의 진심은 보이는 것과 다른 것임을 밝힘으로써 상대방을 기쁘게 해주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적대자들이 바울을 공격할 때에 그에 넘어가 동조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바울을 옹호하는 대신 침묵하거나 방조했습니다.
      이는 바울로 하여금 대부분의 성도들이 등을 돌렸다는 극도의 외로움과 복음의 진리가 퇴색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을 낳게 했습니다. 성도들은 이에 대해 자신들의 진심은 바울을 여전히 사랑하고 존경하고 있음을 표현했던 것 갖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복음과 진리에 대해서도 변함이 없음을 변증했을 것입니다.

      3. 분하게 함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에 대한 진심을 변증하는 한편 바울을 모함하고 비방했던 적대자들에 대해서는 분노했습니다.
      가슴아픈 방문 때와는 전혀 다른 반응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4. 두렵게 함

      고린도 성도들은 그들의 죄로 인해 바울을 대면하기를 두려워했고, 또한 하나님 진노가 임할 것을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5. 사모하게 함

      고린도 성도들은 자신들의 죄로 인해 일그러진 바울과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할 수 있기를 열망했습니다.

      6. 열심있게 함

      성도들은 성결한 삶에 대하여 그리고 바울 일행을 섬기는 일에 대하여 열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7. 벌하게 함

      성도들은 회개하고 돌이켜서 성결을 위한 열정을 품었을 뿐 아니라, 그들 안에 있는 바울의 적대자들을 공의대로 처벌하였습니다.

      죄에 대한 침묵과 방임은 죄

      고린도의 성도들은 이를 통해 자신들의 깨끗함을 나타냈습니다.
      깨끗함을 나타냈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는 모호합니다.
      적대자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성도들이 침묵하거나 방조했을 뿐 죄에 가담하지는 않았다는 뜻일 수도 있고, 이제 회개하고 돌이켰으니 깨끗해졌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명확한 것은 적대자들이 바울을 모독하고 비방할 때에 고린도 성도들은 동조하거나, 침묵하거나 방임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로 인해 바울의 마음을 찢기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죄를 적극적으로 짓지 않더라도, 죄에 동조하는 것이 죄임을 알아야 합니다. 심지어는 죄를 침묵하거나 방임하는 것도 죄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악한 자에게 동조해서는 안됩니다. 더 나아가 악한 자를 묵인하거나 방임해도 안됩니다. 그것은 무고한 사람을 아프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아프게 하는 행위입니다. 무고한 사람을 비방하는 말을 퍼뜨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 대해 묵과하지 말고 단호한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비방자와 적대자에 대한 용납은 사랑이 아니라, 무고한 자에 대한 배반이요, 죄에 대한 동참입니다.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를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를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가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로 말미암아 안심함을 얻었음이라.

      눈물의 편지의 목적

      불의를 행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불의를 당하는 자가 있습니다. 음행이라는 불의을 행하는 자가 있으면, 음행자의 배우자는 불의를 당한 것이 됩니다. 바울을 비방하는 불의를 행하는 자가 있으면, 바울은 불의를 당한 피해자가 됩니다. 그런데 바울이 눈물의 편지를 써서 보낸 것은 불의를 행한 자를 위한 것도, 불의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누군가의 편을 들기 위한 것도 아니고, 최대 피해자인 바울 자신을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눈물의 편지를 보낸 이유는 바울 일행에 대한 그들의 순수한 진심이 하나님 앞에 나타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를 통해 무너진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 앞에서도 막힘없이 설 수 있게 해주려는 의도였던 것이지요.

      그러한 바울의 의도대로 고린도 성도들은 회개하고 돌이켰으며, 바울 일행에 대한 그들의 진심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식이 디도를 통해 전해졌고, 그로 인해 바울 일행은 위로를 얻었습니다. 특히 디도가 안전하게 돌아왔고 환대를 받았다는 사실이 바울을 더욱 기쁘게 하였습니다. 눈물의 편지를 들고 고린도로 파송을 받을 때만 해도 디도의 마음은 무거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외로 고린도 성도들은 디도를 환대했고, 디도의 가르침과 인도에 순종했습니다. 그것이 바울의 마음에 위로와 기쁨을 더욱 증폭시켰던 것입니다.

      내가 그에게 너희를 위하여 자랑한 것이 있더라도 부끄럽지 아니하니 우리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 것 같이 디도 앞에서 우리가 자랑한 것도 참되게 되었도다

      그가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과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

      목회자와 성도가 서로에 대해 가져야 할 태도

      바울은 회개하고 돌이킨 고린도 성도들로 인해 기뻤습니다. 성도들이 회개한 자체도 기뻤지만, 자신이 성도들에 대해 디도에게 했던 자랑이 증명되었기에 기쁘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비록 죄에 대한 동조와 침묵과 방임을 통해 바울의 가슴을 아프게 했어도 그들 안에 있는 진심과 가능성을 볼 줄 아는 눈이 있었습니다. 성도들이 비록 죄를 짓고 있어도 그들 안에 심겨진 복음으로 인해 결국 돌이키게 될 것을 믿었고, 그들이 갖고 있는 강점들을 여전히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로 향하는 디도가 불안에 떨고 있을 때에 바울은 고린도의 성도들을 자랑했습니다. 겉으로는 자랑스러울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 보이지만, 바울은 여전히 그들에 대해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들을 바라보는 목회자의 태도여야 합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이 가슴 아프게 하고, 미흡하고, 죄 가운데 있더라도, 그들 가운데 있는 장점을 보며 그들을 자랑스러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회개할 수 있었던 여러가지 이유 중 하나는 디도에 대한 그들의 태도였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디도를 대할 때에 두려움과 떨림으로 대했으며, 디도의 가르침과 인도에 순종했습니다. 디도는 어린 사람이었고 12 사도 중 한 명도 아니었습니다. 두려워하거나 떨 이유가 전혀 없었지요.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사역을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성도들은 그를 두렵고 떨림으로 대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 자세는 순종의 행위로 이어졌던 것이지요. 성도들은 목회자를 두렵고 떨림으로 대하며 그 말에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목회자가 위대하고 잘 나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전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성도들에 대한 목회자의 마음도 더욱 깊어지는 것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에 대해 디도의 마음이 깊어지게 되었던 것처럼 말이지요.

      내가 범사에 너희를 신뢰하게 된 것을 기뻐하노라

      회복은 회개의 아들

      바울은 죄에 빠진 채 자신을 대적하는 고린도 성도들로 인해 마음이 아파 있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을 자랑하기는 했으나 성도들을 향한 온전한 신뢰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성도들이 회개하고 죄를 청산했으며, 악한 자들을 축출했기에, 그들에 대한 신뢰가 회복되었습니다.
      회개는 회복을 낳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돌이키면 언제나 회복이 있습니다.
      회개하고 돌이키면 성도와 성도 사이에, 성도와 목회자 사이에, 그리고 성도와 하나님 사이의 회복이 있게 됩니다.
      참된 회개를 통해 서로 간의 신뢰가 회복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누리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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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4-2022(화)

      은혜 받을 만한 때(고린도후서 6:12)

      헛되이. κενός, ἡ, όν  2756

      1. 빈,  2. 내용이 없는,  3. 마가복음 12:3

      발음 / 케노스(kĕnŏs)
      관련 성경 /  헛된(고전 15:10, 엡 5:6, 살전 2:1), 헛되게 하는(살전 3:5), 허탄한(약 2:20).
      [명] 빈 손 (눅 1:53), 허사(행 4:25), 헛것(고전 15:14).
      신약 성경 / 18회 사용
      은혜란 무엇인가?

      1. 값없이 받는 사랑
      2. 예수님을 닮아가는 모든 환경과 사건

      ‘오스카 와일드’라는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가 있습니다.
      19세기 영문학을 대표하는 당대 최고의 극작가였습니다.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단편집으로 ‘행복한 왕자’가 있습니다.
      여러 단편 중에 한 편인 ‘행복한 왕자’는 아마도 제 기억에는 교과서에도 실렸던 것 같습니다.
      자기 몸에 붙어 있는 모든 보석을 떼어서 가난한 백성들을 도와주려는 왕자의 동상(銅像)과 그 왕자 동상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서 추운 겨울이 와도 따뜻한 남쪽으로 내려가지 않고 돕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는 제비의 이야기입니다.

      당시대 민중들의 척박한 삶의 상황과 그들에 대한 연민이 짧은 소설 가운데 잘 드러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작가인 오스카 와일드는 이렇게 시대의식이 있었고, 재미있고 풍자적인 작품을 많이 남겼습니다.

      지옥의 단편이라는 단편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은 예수님이 한 때 은혜를 베풀어주었던 사람들을 다시 만난다는 설정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어떻게 변했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을 만난 후에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았을까요?

      소설에서 예수님은 먼저 한 술주정뱅이 청년을 만납니다.
      그는 한 때 예수님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반갑게, 또한 안타깝게 물으셨습니다.
      “당신, 왜 그런 생활을 하고 있소?”
      그가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절름발이였을 때 나를 찾아와 걷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걸어 다닌들 무슨 행복이 있겠습니까? 그동안 직업을 구해 보았으나 괜찮은 직업을 구할 수가 없었고, 도무지 먹고 살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날마다 술이나 마시며 삽니다.” 차라리 절름발이였을 때는 동정이라도 얻을 수 있었는데 이제 사지 멀쩡하여 아무런 배운 것도, 가진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사람이다 보니 이렇게 신세한탄이나 하며 폐인이 되어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났었는데도 말입니다.

      한 창녀를 만납니다.
      많은 남자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희롱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전에 그녀를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어째서 이런 생활로 되돌아갔소?” 여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창녀의 삶에서 건져 새 사람을 만들어주셨지요. 그런데 내가 손을 씻은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세상은 여전히 나를 외면하고 조롱했고, 나는 도저히 이 세상에서 다른 삶을 살 수가 없었어요. 나는 결국 다시 이 생활로 돌아오고 말았어요.” 세상이 자신의 변화를 인정해주지 않았고, 결국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났는데 말입니다. 

      한 깡패를 만납니다.
      역시 이전에 예수님이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여보시오... 청년, 저를 아시지 않소. 어째서 다른 사람들과 이렇게 싸우며 살고 있소?” 그가 대답합니다. “예, 나는 당신이 눈을 뜨게 해 준 소경이었습니다. 그러나 눈을 뜨고 도대체 무엇을 보라는 겁니까? 보이는 것 모두가 나를 신경질 나게 하고 화나게 만드는데 말입니다, 결국 나는 이렇게 날마다 세상과 싸우며 살고 있습니다.” 그는 오히려 이전보다 더 나빠졌습니다. 예수를 만났는데도 말입니다. 예수님이 고쳐주셨는데도 말입니다.

      여러분, 오스카 와일드는 이 이야기들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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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3-2022(월)

      새로운 피조물(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영적 하나됨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주인이 되신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하나가 될 때 성립됩니다.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별개의 사건입니다.
      누구나 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그리스도와 함께 하고 따르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에 교회를 드나들고 교인으로 등록한 사람의 숫자는 1,200만 명에 가깝다고 합니다.
      이 속에는 허수도 끼어있습니다.
      교회 정착을 못하고 이 교회 저 교회를 전전하면서 교인으로 등록하기 때문에 교인 숫자가 겹치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 사람들이 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리고 교회의 위상을 망가뜨리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고백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입니다.
      거듭난 사람들, 구원받은 사람들이 곧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에는 ‘거듭난 사람’이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4장 24절에서는 ‘새사람’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고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어 지으신 영을 가진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거룩한 영적 형상이 파괴되고 죄의 지배를 받는 타락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은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구원과 회복의 길을 터주셨습니다.
      예수를 믿고 영접하고 부르는 사람들은 새로운 피조물, 새것이 된다는 것이 바울의 고백이고 선포입니다.

      새로운 존재가 되고 새것이 되려면 이전 것은 지나가야 합니다.
      이전 것을 그대로 지키고 있는 한 새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2∼24절에서 바울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너희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 새 것, 새 사람,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이전의 삶의 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쉬운 예를 들어봅시다.
      집을 새로 구입하여 이사를 합니다.
      이제부터는 옛 주소와 새 주소로 구분합니다.
      이전에 살던 집과 현재 살고 있는 집으로 구분합니다.
      이전 주소를 사용하면 우편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전 집으로 들어가려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집은 더 이상 내 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지구가 태양을 도는가, 아니면 태양이 지구를 도는가?
      현재는 가장 쉬운 천문학 지식이지만 몇백년 전만 하더라도 이러한 질문에 답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심지어 목숨까지 바쳐야 했다. 중세까지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믿고 있었다.

      ​성경의 여러 말씀이 그러하거니와, 지구가 정지하고 않고 돌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란 어려웠다.
      감히 이러한 인식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사람이 바로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이다.
      그런데 그가 이러한 발견을 하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재미나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우선 코페르니쿠스가 이러한 발전을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과학적인 발견에 의해서가 아니라 심미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관심 때문이었다.
      그는 천문학자임은 틀림없으나 단순한 아마추어에 불과했다.
      그는 그 이전까지 전해오던 지구중심설인 프톨레마이오스의 모형을 놓고 생각하다가, 그 모형이 상당히 복잡하다고 느꼈다.
      독실한 신자였던 그는, 전지전능하신 신이 프톨레마이오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우주를 그렇게 복잡하게 만들지 않았을 것이라는 확신을 했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복잡한 것보다는 단순한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성스러운 신전을 비추어 주는 촛불을 어디에 놓아야 전체를 동시에 비출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곳은 당연히 중앙이 아닐까 생각했던 것이다.
      곧 태양을 중심에 두어야 빛이 골고루 비추어지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는 이같은 추측을 발판으로하여 소위 태양중심설을 전개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새로운 체계를 발표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도 잘 알다시피, 자신의 체계가 당시의 상식과는 크게 어긋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친구들과 제자들의 노력에 의해서 결국 1543년에 그의 저서 "천체의 회전에 대하여"가 출판되었다.

      그때가 바로 그의 임종 때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코페르니쿠스는 생전에 자신의 천문학자적인 체계로 인해 이단으로 몰릴 것을 두려워했다.
      교회와의 갈등을 두려워해서 그렇게 된 것인지 아니면 출판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인지 알 도리는 없지만, 그의 임종에 맞추어 책이 발간되었다는 것은 아무튼 참으로 공교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두려움은 이해할 만한 것이다.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루터나 다른 종교지도자들은 여전히 과거의 신념에 매달리고 있었다.
      루터는 이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주장을 전해 듣고, 코페르니쿠스를 가리켜 천문학의 '천'자도 모르는 바보라고 하며 "이 바보는 천문학 전체를 뒤엎으려 하고 있다.
      그러나 거룩한 성경은 여호수아가 멈추게 한 것은 태양이지 지구가 아니었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고 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천체의 회전에 대하여"라는 책 제목에서 '회전'이라는 단어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당시에는 180도를 돈다는 뜻의 '회전'이라는 단어가 나중에는 정치적인 격변을 뜻하는 '혁명'이라는 말로 서양에서 사용되었다.
      우리가 아는 '혁명'이란 뜻의 어원이 바로 코페르니쿠스의 책 제목에서 나왔던 것이다.
      과연 그의 전환이 서양 역사에서 얼마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그의 인식론적인 전환을 더 자세하게 이야기한 사람이 바로 시간보다도 더 정확하게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고 하는 철학자 칸트였다.
      칸트가 철학에서 이룩한 인식론상의 전환은 자연과학에서 코페르니쿠스가 이룩한 전환과 아주 비슷했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시작하여 칸트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정신이 대상들을 인식하려고 대상들의 주위에 돌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던 것을 칸트는 대상들로 하여금 정신이라고 하는 중심적 사실의 주위를 돌게 했다.

      이제는 정신이 대상의 조건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정신이 정해 놓은 조건에 따르게 되었다.
      다른 말로 한다면, 우리들의 인식은 대상에 의거한다고 이제까지 생각되어 왔지만, 대상의 인식은 우리들의 주관 구성에 의하여 비로소 가능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놀라운 전환이었다.
      그는 이것을 철학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불렀다.
      마치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것처럼 주관과 대상의 위치가 서로 바뀌었던 것이다.

      칸트 자신이 이렇게 말했다.

      ​"이와 같은 나의 생각은 별자리가 관측자의 주위를 회전한다고 보아서는 천체운동을 설명할 수 있다고 본 코페르니쿠스가, 오히려 관측자의 편에서 회전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별의 위치를 정지시킴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좀더 합당한 해답이 얻어질 수 있으리라는 획기적 사상을 제시했던 것에 비길 수가 있겠다."

      ​그래서 이제 커다란 전환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곤 한다.
      그러나 제아무리 기발한 발상의 전환이라도 정작 코페르니쿠스의 전환에 비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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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SG란 영어 단어의 약자
      Environmental(친환경)
      Social(사회적 책임)
      Governance(공공경영)

      현재 기업들은 ESG 경영을 향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ESG가 세상적인 단어인 것 같지만, 사실은 성경의 나타난 정신이며 이미 교회가 추구해왔어야 하는 가치입니다.

      친환경과 관련해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다스리는 청지기의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지 말라고 해도 해야 하는 것이 창조세계의 보존이며, 생태적인 삶입니다.

      사회적 책임은 이웃 사랑입니다.
      율법에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또 예수님이 말씀하신 새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공공경영과 관련해 하나님 나라는 세상적인 방법으로 성공하는 사람만 인정받고 누리며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라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특정 유대인이나 종교지도자들만이 아니라 모두가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이며, 하나님께서는 작은 자를 통하여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시는 분이십니다.

      고린도전서 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1.행복한 새티스파이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최대 만족을 추구하는 맥시마이저와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고 사는 새티스파이스다.
      만족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맥시마이저는 항상 더 많이,더 높이를 추구하기에 성취도가 높아 일에 성공할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자신보다 더 잘 나가는 사람이 옆에 있는 한 만족하지 못한다.
      그래서 맥시마이저는 쉽게 행복해질 수 없다.
      반면 새티스파이스는 이 정도면 됐잖아라고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다.
      새티스파이스는 현실에 만족할 줄 알기 때문에 변화나 상승 의지에 약해 상대 평가에는 크게 성공하지 못한 사람일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별로 개의치 않기 때문에 늘 감사하는 삶을 산다.
      중요한 것은 맥시마이저는 내적 기쁨을 누리지 못하지만 새티스파이스는 내적 기쁨을 누린다는 것이다.

      잠언서 기자는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잠 17:22)

      끊임없이 소유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감사의 삶이다.

      하나님의 형상(צֶלֶם , 첼렘)과 모양(דמות,드무트), 평행어법

      하나님의 ‘형상’(ֶלֶצם 첼렘, image)과 ‘모양’(דמות 드무트, likeness)에 대한 단어의 의미를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 원인은 구약성경 최초의 번역서인 칠십인 역(LXX) 때문이기도 하다.

      LXX역은 창세기 2장 26절에 나오는 구절을 ‘우리의 형상과(and) 모양을 따라’로 번역했다.
      형상과 모양 사이에 ‘and’를 넣어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해 형상과 모양이 마치 서로 다른 의미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어로 기록된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리의 형상, 우리의 모양을 따라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여기에서 표현된 형상과 모양에는 차이점이 없다.
      문법적으로 동격이기 때문에 사실 같은 말이다.
      하나님의 모양을 닮은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은 히브리어로는 단어의 모양은 다르지만, 사실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두 단어를 구분해서 이해를 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올바르지 않는 성경 해석이므로 지양해야 한다.

      그렇다면 서로 다른 두 단어가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다음 두 가지 사실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창세기의 본문에서는 이 두 단어가 교차되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26)’ /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창 1:27)’ /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창 5:1)’ /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창 5:3)’

      만약 두 단어 사이에 서로 다른 의미가 있다면 이렇게 교차되어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다. 그런데 문맥을 조사해 볼 때 강조점을 향해 흘러가는 방향성은 있지만, 의미상에는 큰 차이가 없다.

      둘째, 성경을 해석하는 중요한 원리 중 하나인 병행어법이다.

      이것은 평행어법(Parallelism)이라고도 하는데, 성경을 기록한 문학적인 기법과 용어를 함께 사용하고 있다.
      형상과 모양이라는 단어가 서로 따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한 문장에 함께 있다는 원리이다.

      서로 다른 단어이지만 내용과 의미, 그리고 사상이 같이 간다.
      두 단어는 구분이 불가능한 단어의 쌍(word-pair)으로 존재 한다.
      가끔 예외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단어의 쌍이 올 때에는 뒤에 오는 단어에 강조점이 주어진다.
      이는 성경 해석의 중요한 원리이다.
      예를 들어 A와 B라고 하는 두 단어가 쌍으로 있다 하자.
      그럴 때 해석은 이렇게 된다.

      B는 A 그 이상이다(B is more than A).
      A와 B라고 하는 두 단어가 올 때 앞 단어 A보다 뒤 따라오는 B에 훨씬 큰 의미가 있다.
      의미의 무게 중심이 B에 있다는 것이다.
      이제 이런 성경 해석을 창세기 1장 26절에 적용한다면 두 단어 중 어디에 강조점이 놓여 있겠는가?
      A=형상, B=모양이다.
      강조점은 B, 즉 모양에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숨겨진 카드가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rodemnamusho&logNo=220452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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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1-2022(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고린도후서 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성경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가장 완벽한 존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는다는 것을  두 가지 측면으로 이해합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삶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중 육신의 몸으로 이 세상에서 생활하셨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삶의 방식과 우리 삶의 방식이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집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먼저 집을 찾습니다.
      집이 있어야 복잡한 도시에서 편안하게 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성품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온유하면 빼앗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겸손하면 짓 밟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도저히 겸손과 온유를 유지하지 못합니다.
      이미 세상의 질서가 너무 많이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별 따기 라는 말이 아주 쉽고 간단하게 더구나 무책임하게 남용됩니다.
      사랑을 위해서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으시댑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어느 누구도 하늘의 별을 따 온 사람은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형상이 되셨던 것에서 두 가지를 찾아야 합니다.

      첫째는 삶을 통한 형상의 회복

      어렵더라도 예수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삶은 섬김을 받는 것과 높은 자리를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먼저 섬기며 더 낮은 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둘째는 믿음을 통한 형상 회복

      믿음이란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위로부터 내려주신 은총을 따라가는 것 뿐입니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너무 멀리 떠났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내 삶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하여 고쳐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찾아봅시다.
      내 믿음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하여 해야 할 기도와 적용해야 할 말씀을 찾아봅시다.
      그리고 찾아낸 것을 내 마음 판에 새기고 예수님을 따라가도록 함께 달려봅시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주님께서 주시는 건강을
      지금보다 더 좋게 하려고 몸부림 칠 것이 아니라 지금 상태만이라도 유지하면서 오늘을 살아봅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세기 1:26)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다는 말에는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피조물임과, 인간이 본래는 하나님과 닮은 데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형상을 상실했다면 회복해야 한다는 엄숙한 제시가 있음을 본다.

      창세기 1장 26절에서 사용한 형상과 모양에 대한 히브리어는 쩰렘(צלם)과 데무트(דמּות)이다.
      쩰렘은 영어로 Form 혹은 Image로, 데무트는 Likness로 번역되었다.
      히브리어 쩰렘은 '자르다'의 어근으로 추정되고, 데무트는 '닮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쩰렘과 데무트가 외형적으로 사용된 성경 구절들을 살펴보자.

      "느부갓네살이 분이 가득하여 … 낯빛을 변하고(단 3:19)"의 '빛(첼렘)'은 마음의 속 상태를 보여 주는 외적인 모습이다.

      열왕기하 16장 10절에서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 가서 거기 있을 구조와 제도의 식양을 그려"에 쓰인 '식양(데무트)'은 타브니트와 마찬가지로 물질적인 의미로 쓰였다.

      신명기 4장 16절의 "두렵건대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하여 아무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되 남자의 형상이라든지, 여자의 형상이라든지"에서는 형상(타브니트)과 우상(테무나)이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구약성경에서는 겉으로 보이는 모양과 물질적인 유사성이 강조되어 있다(형상에 대하여 신약에서는 빌립보서 2장 6~8절에서, 모르페(형상), 호모이오마(형체), 스케마(모양)의 세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고 할 때 외형적인 형상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외형적인 형상이 없는 영적 형상의 참된 신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어떤 물질적 형상이나 모양을 의미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영의 특성들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의 특성들을 따라 창조함을 받은 사람의 특성들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골 1:15)."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후 4:4)."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 것은 유형의 형상을 말하는 것인가 무형의 형상을 말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이 나오게 된다.
      하나님은 유형의 형상이 없으니 무형의 형상이라 함이 자연스럽다.
      아래 성구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무엇인지를 감지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30)."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 3:10)."

      로마서 8장 29절과 30절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시고 구원하셨다는 것이고 골로새서 3장 10절은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하여 새사람이 된 것은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한 결과라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은 보이지 않는 무형의 형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보이지 않는 형상은 하나님의 의(시 99:4), 거룩(출 15:11, 시 22:3, 사 5:15, 57:15), 선(막 10:18), 사랑(신 7:9, 요3:16)임에 틀림없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형상은 존재론적으로는(영적 형상) 영이시며 보이지 않으시며 영원히 죽지 않으시는 형상이요, 의미론적으로는(속성적 형상) 의와 거룩과 선과 사랑이시다.

      이 형상을 인간에게 주셨지만, 사단의 꼬임에 넘어가 타락하여 이 영적 형상을 상실해 버렸다.
      육체까지 영생의 존재가 육체에 사망이 왔고 거룩해야 할 존재가 죄악 된 존재가 되어 버렸다.
      죽지 않는 영혼마저 지옥 형벌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갈보리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와 사망을 짊어지시고 영원한 속죄 제사를 드려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죗값으로 사망한 육신이 부활하게 되고 불행한 영혼이 행복한 영생과 거룩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되었다.

      이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칭의요 점진적 성화이며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두 가지 면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첫째는 믿음을 통한 칭의적 회복
      둘째는 삶을 통한 행함의 회복

      하나님의 형상(첼램)


      성경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고 합니다.
      다른 모든 피조물은 “각기 그 종류대로 ”창조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으셨습니다.

      창세기 1:26-27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첼램 H6754) 우리의 모양대로(데무쓰 H1823)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아담 H120)

      창조하시되 남자와(자칼 H2145) 여자를(네케바 H5347) 창조하시고.

      *우리의 형상을 따라(첼렘 H6754) - ‘자르다, 베다’동사에서 유래

      * 우리의 모양대로(데무쓰 H1823) - ‘무엇 무엇과 비슷하다’에서 나옴
      자르고 베고 갂아서 하나님과 비슷하게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과 어떤 특정한 유사점이 있다는 것을 본문에서 추출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31.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토브 H2896)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어진 인간이 처음에는 순결했으며 죄가 없었으며 거룩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투영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존재하는 대표입니다.
      *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
      인간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형상이란 좁은 의미와 넓은 의미의 형상으로 구분합니다.
      넓고 포괄적인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 - 구조적 측면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과 그 존재가 맺고 있는 다양한 관계 속에서 인간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을
      행하도록 하게하며 하나님의 소명에 반응해서 살아낼 수 있는 모든 은사들과 재능들이 총체적으로 인간에게 부여된 상태.
      인간의 이성적,합리적 능력들을 하나님의 이성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도덕적 감수성도 하나님의 도덕적 성품을 반영시키고 있습니다.
      인간이 사회적인 교제를 할 수 있는 것도 성부 성자 성령하나님의 교제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결정을 하고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자기의 뜻에 따라 결정하시는 하나님의 결정 능력을 조금이나마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미적감각 역시 절묘하고 웅대한 자연의 경관을 만들어 내신 하나님의 미적 감각을 닮은 것입니다.
      우리가 노래를 할 수 있는 재능도 역시 노래를 부르시며 즐거워하시는 하나님을 닮은 덕택입니다.
      좁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 - 기능적측면

      인간이 창조될 때 소유하게 된 영적인 특성들,
      다시 말해 참된 지식,의로움,거룩함”
      골로새서 3:10
      새 사람을(네오스 G3501-새로운) 입었으니(엔뒤오 G1746)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에이콘 είκών G1504) 좇아 지식에(에피그노시스 ἐπίγνωσις G1921) 까지 - 명확한 지식,인식- 에피기노스코ἐπίγινώσκω에서유래;알다,인식하다
      에피 ἐπί G1909-위에 + 기노스코 γινώσκω G1097;알다,알게되다
      - 일관되게 구약과신약에서 하나님을 아는 자의 해위에 영향을 끼치시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인식으로서의 ‘지식’을 의미(바이블렉스)
      새롭게 하심을 받는(아나카이노오G341) 자니라.
      아나ἀνάG303-위로+카이노스καινόςG2537- 새로운
      - 도적적 갱신(바이블렉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선물로 받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의
      기준에 따라 끊임없이 새롭게 되기 때문.
      (고후4:16)에서는 바울로 하여금 외적압력들을 초월하게 하는 성령을 통해
      날마다 새롭게 되고 힘을 얻는 것을 가리킴
      (엡4:24)
      하나님을 따라 의(디카이오쉬네G1343)와진리(알레데이아ἀλήθειαG225)의
      거룩함(호시오테스G3742)으로;경건,거룩
      -호시오스ἅσιοςG3741에서유래 ‘올바른’
      -‘하나님께 바쳐진’(경건한,신성한,분명한)거룩한,자비,될지어다
      지으심을 받은(크티조κτίζω2936)-만들어내다,창조하다
      새(카이노스G2537) 사람을(안드로포스G444) 입으라.(엔뒤오G1746)
      * 입으라(ενδύω)- 옷을‘입다’;옷속에 ‘스며들다’라는 의미에서 유래
      -입다,입히다,붙이다의 뜻포함
      엔ένG1722-안에;정지에의미 + 뒤노δύνω또는뒤미δυμι G1416
      ;(duo-가라앉다의 연장형)-내려가다,해가지다
      * 사람(안드로포스ἄνθρωποςG444) -‘인간의 얼굴을 가진’인간
      아네르άνήρG435-사람,남편 + ops(안색,옵타노마이 όπτάνομαιG3700에서유래)
      -응시하다;크게 뜬 눈으로 현저한 어는 것을 향한 것처럼)
      :헬라어에서 짐승이나 신과 반대되는 ‘인간’을 의미
      경멸적인 의미로‘노예’를 의미.비난및 노예를 부를 때 사용.
      죄의종,율법적인 인간을 의미합니다.(바이블렉스참조)
      타락하기 전의 인간은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을 모두 완벽하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을 닮아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독수리는 날아다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독수리의 날개가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난다는 것은 좁은 의미 즉 기능적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이고,
      날기 위해서
      필요한 구조적인 것을 넓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 이 세상 신(ὁ θεὸς τού αἰώνος τούτου, ‘이 세대의 신’)은 사단을 가리킵니다.

      * 마음을 혼미케 하여의 혼미케 하여는 에튀플로센(ἐτύφλωσεν)으로서 ‘소경이 되게 하다’, ‘어둡게 하다’, ‘헛갈리고 흐리멍덩하게 하다’ 등을 의미한다(롬 1:21).

      사람이 믿지 않는 것과 사단이 마음을 혼미케 하는 것은 밀접한 상관성이 있다.
      사람이 믿지 않으니까 사단이 그 마음을 혼미케 할 수 있고, 또 사단이 사람의 마음을 혼미케 하기 때문에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에 대해 인간은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는 불신자의 마음의 눈을 감기게 하는 사단의 목적이자 결과이다.
      즉, 사단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 복음이 발하는 광채(시 44:3, 78:14)가 비취지 못하도록 불신자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 것이다.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εἰκὼν τού θεού)

      그리스도가 물질적이거나 육체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이 표현은 성육신 전의 그리스도나 현재의 영광스런 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에 국한시켜 이해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형상이었으며, 지금도 그렇고, 또한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요 17:5).
      그분의 성육신이 그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이 되게 한 것이 아니라, 성육신의 과정을 통해 그분은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바로 그 형상이 되신 것이다”(Nicholson, p. 75).②}(저자의 골 1:15의 주석)

      “형상”이란 에이콘(εἰκὼν)

      단순한 유사함이나 모방이 아니라, ‘원형적 대표’를 의미한다(T. K. Abott, G. G. Findlay).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질을 그 본질로 삼는 것이다(黑崎幸吉). 이것은 요한복음 10:30의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와 같은 의미이다.

      “이 낱말은 ‘현시’(manifestation)를 의미하기도 한다”(J. B. Lightfoot,③ C. Vaughan).
      즉,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사랑, 의, 선, 지혜, 능력 등)과 존재가 완전히 그리스도 안에 드러났다는 점에서 볼 때, 그분은 하나님의 형상인 것이다(J. B. Lightfoot,④ C. Vaughan).

      스튜와트(J. S. Stewart) 역시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그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본질과 존재가 가장 완전히 계시됐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⑤라고 설명하였다.

      이것은 요한복음 저자의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 14:9)과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7:5) 등의 말씀으로도 뒷받침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성도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고후 4:6)을 가지고 있으며, 성도들이 주님의 영광을 볼 때, 주님의 영으로 인해 주님과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른다고 담대히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분(창 1:26-)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 그 자체라는 것이다”(F. W. Beare).

      특히, 형상이란 고대 세계에서는 주권 또는 왕권을 표시하는 개념이었으며, 더 나아가 왕들은 현현신(現顯神)으로 간주되었다. 예를 들면, 애굽의 바로, 로마의 가이사, 중국의 천자 등이다. 따라서 바울이 그리스도를 가리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 것은 만왕의 왕으로서의 우주적 주권을 의미한 것이기도 하다.}(저자의 골 1:15의 주석)

      주석(해)서에서 인용할 경우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1) 참조: 골 1:15, 히 1:3.
      2) in C. Vaughan.
      3) in 이상근.
      4) 상동.
      5) J. S. Stewart, op. cit., p. 303.

      딕툼 메움 팍툼(Dictum Meum Pactum)

      이 글은 영국 런던의 금융가(더 시티)에는 세계 최고(最古)의 옛 증권거래소가 있다.
      그 건물 전면에 라틴어로 딕툼 메움 팍툼(Dictum Meum Pactum) 이란 문구가 새겨져 있다.
      ‘내가 한 말은 곧 보증수표’라는 뜻이라고 한다.

      철저한 신용과 단단한 신의가 금융의 생명임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날 런던이 세계 금융의 중심이 된 것은 영어가 세계 공용어인 때문만도 아니고 시차 때문에 24시간 국제영업이 가능한 때문만도 아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축적된 신뢰 때문이다.
      정부 정책도 금융 못지않게 신뢰가 중요하다.
      국민이 정부를 신뢰하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기대하는 성과를 거둘 수 없다.
      영국이 대영제국으로 발전한 역사나, 미국이 패권국으로 도약한 역사는 신뢰받는 정부의 역할을 빼놓고는 설명할 도리가 없다.

      최근 우리 정부의 신뢰수준은 바닥에 떨어졌다.
      정부가 부동산 대책을 빈번히 쏟아 냈지만 국민은 집값·전셋값 급등과 극심한 희망고문이라는 최악의 결과를 경험했다.
      탈원전 정책은 과학적 분석과 충분한 공론화 과정 없이 결정되었다.
      코로나 방역과 관련해선 ‘조금만 참으면 정상화될 것’이란 말을 정부가 수없이 반복했지만, 그런 호언장담을 믿는 국민은 이제 아무도 없다.
      소상공인들은 빚더미에 짓눌려 생사의 기로로 내몰리는데도, 정부는 코로나 피해의 효율적·효과적 보상을 위한 선택과 집중은커녕 재난지원 대상을 전 국민에게로 확대하지 못해 안달이다.
      피해가 크든 작든, 피해를 입었든 안 입었든 모든 국민이 똑같이 획일적으로 위로받아야 한다는 선거용 정치논리인가. 심각한 위험에 빠진 국민을 최우선으로 구하기 위해 정부가 진정성 있게 다가서지 않는다면 누가 정부를 신뢰하겠는가. 소수의 국민은 영원히 속일 수 있다.
      많은 국민도 잠시 속일 수는 있다.
      그러나 많은 국민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는 일이다.

      정부가 신뢰 받아야 국가가 성장
      부동산·방역 등 정책 잇따른 실패
      사과하고 잘못된 것 빨리 고쳐야
      동반성장을 사회 작동원리 삼기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제라도 신뢰를 회복하려면 정부가 그간의 정책 실패를 인정하고 국민에게 사과하는 수밖에 없다.
      정부는 구체적으로 누구를 말하나?
      국정의 최고 책임자는 대통령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야 한다.
      주변의 다른 사람이 대신 사과해 봐야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다.
      또 고칠 수 있는 것은 빨리 고쳐야 한다.
      사과는 어떻게 할 것인가?
      신뢰 회복을 위해서는 정직과 투명성이 중요하다.
      그것은 정부가 지금껏 해온 것과는 다른 새로운 대응을 뜻한다.

      1930년대 대공황기 미국의 뉴딜정책은 배울 게 많다.
      상황이 똑같지는 않지만 그때 미국이나 지금 한국이나 위기인 건 마찬가지다.
      미국의 뉴딜은 구호만으로 성공한 것이 아니었다.
      과감하고 꾸준한 실천으로 성공했다.
      성공의 뒤에는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있었다.
      그리고 신뢰를 얻기 위한 루스벨트 대통령의 끊임없는 노력이 있었다.
      그는 당시 라디오 ‘노변정담’에서 특유의 유머, 과장하지 않는 솔직함과 담백함으로 국민을 감동시키고 주요 정책을 국민에게 쉬운 말로 허심탄회하게 전달했다.
      임기가 7개월밖에 안 남았지만 우리 대통령도 해야할 일은 끝까지 해야 한다.
      ‘대장동 사건’ 말이다.
      이 사건의 공명정대한 처리는 대통령에게 그동안의 실책을 적잖게 만회할 기회라고 생각한다.
      대통령이 대장동 사건을 신속히 그리고 철저히 조사토록 지시하고 그 진상을 세상에 밝힐 것을 촉구한다.

      신뢰의 추락도 걱정이지만 한국경제의 앞날도 만만치 않다.
      코로나 이후의 세상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국가의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는 가운데 기술혁신만큼 더 중요한 것도 없다.
      그러나 미래가 불확실한 때일수록 원리원칙부터 세워야 한다.
      나는 이 참에 동반성장을 우리 사회의 작동원리로 삼기를 제안한다.
      있는 사람 것을 빼앗아 없는 이에게 나누어주자는 것이 동반성장인가?
      그렇지 않다. 동반성장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공정한 기회, 불편부당한 규칙, 그리고 공정한 분배를 통해 다수의 참여를 이끌어내고 경제 전체의 파이를 키워 ‘함께 멀리가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동반성장은 경제학의 아버지인 애덤 스미스(A Smith)『국부론』과 『도덕감정론』에서 수립한 자본주의 정신에 부합한다.
      중상주의, 고전적 자본주의, 케인스주의, 신자유주의를 이어갈 새로운 사회작동의 원리요, 철학이기도 하다.
      코로나 이후 동반성장의 필요성은 더욱 커졌다.
      그리고 오늘날 동반성장은 세계적 추세이기도 하다.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
      CSV(공유가치창출), 포용성장, 기업시민, ESG(환경·사회·지배구조)운동 등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동반성장이야말로 대한민국이 지속 가능한 성장을 통해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다.
      의식주가 넉넉할 때 변하지 않는 도덕심이 함양된다(恒産恒心).
      우리 사회가 양극화를 해소하고 성장의 가치를 공유하여 모두 함께 잘 살 수 있을 때, 건강한 공동체가 비로소 실현될 것이다.
      국민 각자가 서로 배려하고 관용하며 스스로 앞장서 건강한 공동체를 일궈가는 사회. 바로 이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동반성장 사회다. 물론 신뢰받는 정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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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30-2022(금)

      그리스도의 편지(고린도후서 3:2)  만족. ἱκανότης, ητος, ἡ  2426

      편지. ἐπιστολή, ῆς, ἡ 1992

      1. 편지,  2. 서신,  3. 고린도후서 7:8

      발음 / 에피스토래(ĕpistŏlē)
      어원 / 198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공문(행 9:2, 22:5), 편지(행 15:30, 롬 16: 22, 고전 5:9, 고후 3:3), 추천서(고후 3:1).
      신약 성경 / 24회 사용

      * 1989. ἐπιστέλλω

      1. 편지로 알리다,  2. 단순하게 편지를 쓰다, 3. 사도행전 15:20

      발음 / 에피스텔로(ĕpistĕllō)
      어원 / 제1부정과거 ἐπέστειλα, 1909와 472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편지하다(행 15:20, 21:25), 쓰다(히 13:22).
      신약 성경 / 3회 사용

      만족. ἱκανότης, ητος, ἡ  2426

      1. 알맞음,  2. 능력,  3. 자격

      발음 / 히카노테스(hikanŏtēs) 

      어원 / 242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만족(고후 3:5).
      신약 성경 / 1회 사용

      * 2435.  ἱλαστήριον, ου, τό 

      1. 속죄하는 것,  2. 속죄의 장소

      발음 / 히라스테리온(hilastēriŏn) 

      어원 / 2433의 파생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화목제물(롬 3:25), 속죄소(히 9:5).
      신약 성경 / 2회 사용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제일 먼저 무엇을 보셨습니까?
      눈, 얼굴, 옷, 말투.........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모를 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 사람의 능력이나 학벌이나 직장, 배경 등을 보면서 그 사람을 평가합니다.
      오늘날 사람을 평가 할 때 그 사람의 중심이 어떤지는 별로 고려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으시고 그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습니다(삼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외모에 관심을 갖습니다.
      그런데 그 외모는 단지 겉모습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사회적인 신분이나 능력과 조건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믿음의 사람인지 아닌지를 보려면 자신이 결혼을 하거나 아니면 자녀를 결혼시킬 때에 보면 압니다.
      외적인 조건은 좋은데 믿음이 없는 사람과 외적인 조건은 별로인데 믿음이 있는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을 선택하는지를 보면 그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과는 정반대로 사는지가 드러납니다.
      이처럼 결혼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선택을 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이 믿음의 사람인지, 아닌지를 우리는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도 바로 이런 문제에 부닥친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교회를 떠나 다른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중에 어떤 선생이라는 자들이 고린도교회에 왔습니다.

      그들은 유명한 사람들의 추천서를 들고 왔습니다.
      이처럼 외적인 조건들을 갖추었다는 사람들이 와서는 바울은 사도도 아니며 추천서도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의 말을 듣지 말고 자신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의 마음이 흔들립니다.
      바울의 가르침을 버리고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에 끌리는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와중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흔들리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무엇이 진짜 중요한 추천서인가를 말합니다.  

      1~3절의 말씀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살다보면 우리도 종종 사람을 소개받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을 소개받을 때는 아무래도 서로 대면하여 보는 것이 가장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직접 소개받는 경우도 있고 제삼자를 통해서 소개받기도 합니다.
      때로는 서신이나 전화상으로 소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평소 잘 아는 사람끼리는 소개를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자신을 소개하지 않습니다. 만일 아들이 아버지에게 소개서를 쓰라든지 한다면 이것은 대단히 무례한 요구이며 상식을 벗어난 행동입니다.

      그런데 보면, 사도 바울에게 추천서, 편지를 고린도교회에서 가져오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바울 사도가 경우가 그렇습니다.
      고린도교회 개척을 누구 때문에 했습니까?
      사도 바울입니다.
      추천서가 필요없습니다.
      바울의 추천서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낳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당시에 거짓선지자들이 많이 있어서 예루살렘교회 사도들의 추천서가 필요하였다하더라도 사도 바울에게 이런 관례를 들어 추천서를 요구하는 것은 바울을 아주 모욕하는 거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추천서를 요구하는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바울은 너희는 바울의 편지라고 말하였습니다.
      바울의 복음 전도로 인하여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에 대한 글씨가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편지가 성도들 마음에 새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에 새겨져 있는 그리스도의 편지인 바울의 추천서는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의 쓰여졌습니다.(3절)

      우편으로 편지를 받았을 때 봉투 위에 찍힌 스탬프와 우편소인을 봅니다.
      그 우편소인이 뚜렷하게 보일 때도 있으며 너무 희미하여 그 편지가 어디에서 우송되어 왔는지 알기가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희미하여도, 그 편지가 거기에 도착하였고 그것을 뜯어보면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희미하여도 도장 찍힌 것이요, 우체국에서 찍은 스탬프라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 영과 더불어 증거하시는 성령의 증거도 희미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인침이 있는 것을 압니다.
      그것이 매우 강력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의 추천서는 거짓 사도들의 추천서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완전하며 자랑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성령을 통해 고린도 성도들의 마음속에 새겨진 것으로 하나님 앞에 빛날 면류관이요 상급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야 말로 바울의 직분을 증명해 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라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4~5절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사도 바울의 이러한 고백이 참으로 그런 점에서 너무나도 놀랍습니다.
      바울 사도는 무슨 일에든지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 수 있는 확신이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만족이 있는 것이 보입니다.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하면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지 말입니다.

      생각하여보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족하시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하는게 바로 신앙입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보면, 그렇게 하는 것이 결국 우리 자신의 영혼에게 영원한 이익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산 이 세상에 세워진 교회는 이런 식으로 전도해서는 안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정확하게 깨닫게 하고 그 영혼들이 천국 사람으로 확실하게 변화하는 것에는 관심을 갖지 않고 오직 사람들이 자기 교회 교인들이 되게 하는 일, 그저 모든 사람들이 자기 교회를 다니게 하는 일에만 전념하는 교회는 이 세상에서는 성공적인 전도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크게 근심시키는 일이요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을 다해서 전도하고 말씀을 가르쳤으나 우리가 전도하고 가르친 사람들이 다른 교회 교인들이 되었다고 해서 우리가 손해 볼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세상이라면 그런 일이 큰 손해가 되겠지만 천국에서는 결코 손해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어떤 교회의 교인이 되었든지 천국 사람으로 변화하는 사람들이 우리의 전도를 통해서 우리의 가르침을 통해서 변화한 사람들이라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억하실 것이고 사람들의 영혼에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들에게 천국의 영광과 상을 풍성하게 내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마음이 사도 바울의 만족에 대해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요, 또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사도바울의 복음전도의 증거였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께서 써주신 추천서, 편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은 바울의 사도권은 예루살렘 교회의 추천서가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증명한다는 말입니다.

      이를 통해 보면,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그리스도를 알게 됩니다. 세상은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를 보고, 그리스도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전한 것을 통한 성령의 역사를 통해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우리의 전도에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메시지를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것으로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의 편지인 복음이 성령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곧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오늘 주신 이 말씀의 은혜 잊지 말고 더욱 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세 가지 종류의 편지


      1절.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당시에도 추천서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어느 분을 어느 지역으로 파송할 때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추천서를 써주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더 이상 고린도 교회와 당신 사이에 이런 추천서는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2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고린도 교우와 사도바울의 일행은 하나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추천서는 전혀 필요가 없는 관계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라는 표현에서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우들과 하나가 되어 있음을 읽어 볼수 있다고 봅니다.

      고린도 교우들은 이 글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아마 이들은 마음이 뿌듯해졌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모든 교우들이 뿌듯한 생각을 갖지는 않았을 줄 압니다. 어떤 사람들은 겸연쩍은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사실 지금 사도바울이 이처럼 두세 번 편지를 쓰는 이유는 사도바울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꽤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인정하는 그룹과 인정하지 않는 두 그룹이 늘 다투었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써서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도를 통해 보내기도 한 것입니다. 그것이 고린도전서입니다. 고린도전서 하면 생각나는 것이 있죠. 고린도 전서 13장, 곧 사랑의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하여튼 겸연쩍어 하던 뿌듯해 하던 사도바울은 세 번째 종류의 편지를 언급합니다. 3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고린도 교인들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믿을 수가 없어서 눈을 비비며 보았을지 모릅니다. 특히 사도바울에게 불만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은 더 놀랐을 것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니.”

      사도바울과 그 일행의 편지 곧 ‘우리의 편지’라는 말도 그렇게나 좋았는데 아니 미안하기까지 했는데 이제는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말을 들은 것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니.”

      늘 내분이 심하고 싸움이 심한 자기들의 교회를 향해서 최고의 찬사를 사도바울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그리스도의 편지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져 있을까요? 3절 말씀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구약을 좀 아시는 분이라면 이 말씀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편지는 돌판에 쓰인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돌판이라고 하면 당연히 구약을 아시는 분이면 모세의 십계명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그리스도의 편지를 모세의 돌판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모세의 돌판 곧 십계명을 최고의 것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이를 완전히 뒤집어엎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 근거 없이 뒤집어엎는 것이 아닙니다. 이를 7, 8절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모세의 십계명은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이라고 표현합니다. 반면 그리스도의 편지를 소유한 자들은 영의 직분을 소유한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곧 묵직한 십계명의 돌판은 정죄의 도구이었지만 그리스도의 편지는 도리어 살리는 도구가 되어 있다고 말씀합니다.

      결국 사도바울은 십계명과 그리스도의 편지를 소유한 자를 다음과 같이 구분합니다. 11절 말씀입니다.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모세의 빛은 사라지는 빛이지만 고린도 교우들은 영원에 이르는 빛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우들은 그리스도의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Justin Wren이라는 한 때 두 차례 프로 레슬링 챔피언이었던 젊은이가 있습니다. 이제는 콩고의 Pygmy족을 위한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어릴 때 친구들에게 늘 놀림을 당하였는데 선생님과 의사에게 우울증 환자라는 낙인까지 받게 됩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레슬링을 보게 되었는데 자신의 모든 frustration을 풀 수 있는 운동이라고 생각해서 레슬링에 빠지게 됩니다. 생각 보다 잘하게 되자 부모님이 후원을 해 줘서 레슬링을 자기의 career로 삼게 됩니다.

      레슬링으로 성공도 하지만 레슬링을 하다가 부상을 입습니다. 그런 후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합니다. 결국 선수와 코치들에게 버림을 받습니다. 하도 마약에 빠져서 가장 친한 친구 결혼식에도 참석치 못합니다. 자기가 best man인데도….
      이처럼 가장 어려울 때 친한 친구에게서 이메일이 옵니다. 60번 계속 보냈지만 Justin은 읽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친구는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정죄의 편지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60번의 이메일을 한번쯤을 읽을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메일의 제목은 ‘Game Plan for Victory’였습니다. 레슬링 매치에서 승리하는 방법이 기록된 것인지 하고 열어보니 친구가 수양회로 초대를 한다는 이메일이었습니다. 한편 더 반가운 소식은 본인이 다 지불하겠다는 약속을 하였습니다. 막상 아무데도 갈 데가 없었는데 친구의 요청으로 수양회에 참가합니다. 결국 그의 삶을 뒤집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긴 말씀 다 못 드립니다. 다시 레슬링으로 챔피언이 됩니다. 그러나 그 후로는 자기를 위한 선수가 아닙니다. 주님을 위한 레슬러가 됩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이제 잠시 레슬링을 접고 아프리카로 찾아 가게 되었습니다.
      콩고의 피그미족들이 노예로 사는 모습을 가슴 아파하며 그들을 위한 선교사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마약에 찌든 레슬러를 선교사가 되게 했던 사건은 바로 친구의 편지였습니다. 정죄의 편지가 아니라 곧 십계명의 편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편지였습니다. 그 편지가 한 사람만 살린 것이 아닙니다. 이제 콩고에서 노예 생활로 죽어 가던 수많은 피그미 족들을 구원하게 하는 장본인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주는 가슴 아픈 교훈이 있습니다. Justin이 왜 60개의 이메일을 열어보지 않았습니까? 크리스천들의 손에는 돌이 들려져 있다고 생각해서 입니다. 가뜩이나 괴로운데 크리스천에게서 또 다른 돌을 맞기가 두려워서였습니다.

      그러면 왜 Justin 은 기독교인들은 정죄의 돌을 손에 쥔 자로 생각하고 있었나요? 그렇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게 보였습니다. 남은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안 보이는 것뿐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안 보일 수 있나요?

      그러나 그것은 별로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답은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곧 우리가 우리가 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면 되는 것입니다.
      Justin의 친구처럼.

      감사하게도 사도바울은 ‘우리가 우리가 되는 방법’을 5절 말씀을 통하여 역설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곧 하나님으로 초점을 돌릴 때 우리는 최고의 그리스도의 편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초점을 돌리며 살 때 우리의 전 삶은 아름다운 편지가 되어서 우리를 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읽힌다는 것입니다.

      괄목상대(刮目相對)

      괄은 비빌 괄(刮)인데, 눈을 비비고 다시 대한다는 뜻입니다.
      삼국시대 초엽 오나라 왕 손권의 부하 중에 여몽이라는 장수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손권이 여몽을 불러 말합니다.
      “자네가 좀 더 훌륭한 장군이 되기 위해서는 공부를 게을리 하면 안 될 것이네.”
      이 말을 들은 여몽은 전쟁터에서도 책을 놓지 않고 학문에 힘썼습니다.
      몇 년 후 재상 노숙이 여몽을 찾아왔습니다.
      여몽과는 막역한 사이였던 노숙은 대화를 나누면서 여몽이 너무나 박식해졌음에 매우 놀랐습니다.
      노숙이 여몽의 학문적 깊이를 칭찬하자 여몽은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무릇 선비란 헤어진 지 사흘이 지나 다시 만나면 ‘눈을 비비고 다시 대할 정도로 달라져야 하는 게 아니겠나?”

      우리 기독교인들도 하나님 앞에서 선비들이 아닙니까?
      사흘만 하나님 앞에서 지나면 눈을 비비고 다시 대할 정도로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삶 전체를 그리스도의 편지로 삼았던 사람 중 한 사람이 위대한 예술가 미켈란젤로입니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1474. 3. 6~ 1564. 2. 18)
      14살 때 베르톨도 조반니((Bertoldo di Giovanni, 1420년 이후, Poggio a Caiano – 1491. 12. 28, 플로렌스)의 문하생이 되기 위해 그를 찾아 갔습니다.
      미켈란젤로의 놀라운 재능을 본 조반니가 물었습니다.

      “위대한 조각가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느냐?”
      “제가 가지고 있는 재능과 기술을 더 닦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술만으로는 안 된다. 네 기술을 무엇을 위해 쓸 것인지 분명히 결정해야 한다.”

      그러고는 미켈란젤로를 데리고 나가 두 곳을 구경시켜 주었습니다.
      먼저 고급 술집으로 데려가 그곳의 조각품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어린 미켈란젤로의 손을 잡고 거대한 성당으로 가서 아름다운 조각상을 보여주며 말합니다.

      “너는 이 아름다운 천사 조각상이 마음에 드느냐, 아니면 저 술집 입구에 있는 조각상이 마음에 드느냐?
      똑 같은 조각이지만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또 하나는 술 마시는 쾌락을 위해 세워졌단다.
      너는 네 기술과 재능을 무엇을 위해 쓰기를 바라느냐?”

      미켈란젤로는 대답합니다.

      “저는 제 재능을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쓰겠습니다.”

      미켈란젤로 안에 있는 영광스런 빛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밝게 빛나게 된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편지가 된 것입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함으로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편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 세상으로 나갑니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헌신하면 우리는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 세상을 밝게 만들어 갑니다.
      이 땅 위에 아름다운 자취를 남기게 될 것입니다.
      미켈란젤로의 고백을 함께 나누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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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29-2022(목)

      그리스도의 향기(고린도후서 2:15)

      향기(香氣) /  εὐωδία, ας, ἡ 2175

      1. 향기,  2. 향내,  3. 에베소서 5:2

      발음 / 유오디아(ĕuōdia)
      어원 / 2095의 합성어와 3605의 어간의 합성 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향기로운 제물(엡 5:2, 빌 4:18), 향기(고후 2:15).
      신약 성경 / 3회 사용

      * 2095. 유(εὖ) 
      1. 잘,  2. 좋게,  3. εὖ ποιεῖν,  좋게 행하다

      발음 / 유(ĕu) 

      관련 성경 / 잘, 좋게, 다행히(마 25:21, 눅 19:17, 행 15:29, 엡 6:3).
      신약 성경 / 6회 사용

      * 3605. 오조(ὄζω) 
      1. 악취를 풍기다,  2. 냄새를 풍기다,

      발음 / 오조(ŏzō) 

      관련 성경 / 냄새가 나다(요 11:39).
      신약 성경 / 1회 사용

      에베소서 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빌립보서 4:18
      [주] Χριστοῦ εὐ. ἐσμὲν τῷ θεῷ :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그리스도의 향기,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고린도후서 2:15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악취(惡臭) / ὄζω 3605

      1. 악취를 풍기다,  2. 냄새를 풍기다,  3. 요한복음 11:39

      발음 / 오조(ŏzō)
      관련 성경 / 냄새가 나다(요 11:39)
      신약 성경 / 1회 사용

      요한복음 11: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고린도후서 2: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 이기게 하시고(2358) θριαμβεύω 

      1. 개선행진에서 누군가를 무엇을 끌고 가다,  2. 개선하게 하다,  3. 공개적인 행진에 나타내 보이다.

      발음 /  드리암뷰오(thriambĕuō) 

      어원 / 제1부정과거 ἐθριάμβευσα, 2360의 어간과 680의 파생어의 연장된 합성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이기게 하다(고후 2:14), 이기다(골 2:15).
      신약 성경 / 2회 사용

      * 개선장군이 행진을 할 때 끌고온 노예들을 군중들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행진에 세워주는 것.

      페로몬(pheromone)같은 종의 동물끼리의 의사소통에 사용되는 화학적 신호를 말한다.
      체외분비성 물질이며, 경보 페로몬, 음식 운반 페로몬, 성적 페로몬 등 행동과 생리를 조절하는 여러 종류의 페로몬이 존재한다.

      개미는 페로몬이라는 화학 물질을 배출해 의사소통하거나 길을 안내합니다.
      개미 한 마리가 페로몬을 분비하면 다른 개미는 더듬이로 냄새를 맡아 방향을 알게 되는 식입니다.
      또 다른 개미들도 이런 방법으로 앞선 개미를 따라갑니다.

      이 흔적을 따라 먹이를 찾고 이를 들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기독교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배출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세상 사람들이 구원의 길로 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쓴 건 교회가 사분오열돼 사랑이 식고 용서가 사라져 복음이 변질됐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며 이들을 생명으로 인도하길 원했던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개척한 교회입니다.
      하지만 그는 교회의 주인이 되길 원치 않았습니다.
      분명히 자신이 설립했고 깊은 애정이 있는 교회였지만 그리스도의 사랑 외에 어떤 것도 교회의 중심이 되길 원치 않았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바울의 바람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세상에 전하고 세상이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참 생명을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참 냄새는 어떤 의미여야 할까요?
      로마 황제나 장군들은 전쟁에서 승리한 뒤 포로를 끌고 오면서 시민들에게 전쟁에서 이긴 걸 알렸습니다.
      이때 개선 행렬 안에 향을 피웠습니다.
      개선 행렬은 사실 피비린내가 진동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마차 위에 향로를 피워 향기로 피비린내를 덮었던 겁니다.
      피어나는 연기로 개선 행진을 만방에 알리는 효과도 있었지요.
      개선행렬에 참여한 군인과 시민에게 마차에서 나오는 향냄새는 기쁨과 축제를 느끼게 하는 승리의 향기입니다.
      하지만 끌려오는 포로에게는 죽음의 냄새이기도 하죠. 한 냄새가 두 가지 의미를 지닌 셈이죠.

      교회는 다릅니다.
      교회 안이나 밖에서 모두 생명의 냄새를 풍겨야 합니다.
      그래서 15절에서는 그리스도의 향기(유오디아, εὐωδία)를 말합니다.

      창세기 8장 20-21절a에서 노아는 제사를 지냅니다.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

      여기서 나오는 ‘그 향기를 받으시고’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희생 제사로 하나님께서 향기롭게 받으시도록 제물을 태웠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냄새를 하나님께서 먼저 받으셨습니다.
      이는 결국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향기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날마다 머무는 자리에서 승리의 향기를 배출해야 합니다.
      이를 하나님께서 받으십니다.
      또한 주변에 승리의 기쁨과 축제의 즐거움을 전하는 교회로 만들어 갑시다.

      교회에서 직분을 감당하면서 나의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냅시다.
      봉사의 자리에서도 내 이름 대신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냅시다.
      세상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생업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향기 즉 생명의 냄새를 풍겨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내보내는 향기를 따라 기쁨과 축제 그리고 승리의 자리로 찾아 오도록 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길 원하고 추구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부자 되길 바라자는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인은 여기에 매달려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돼 생명의 냄새를 배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곧 은혜의 향기이자 선행의 향기이며 사랑의 향기를 배출하는 성도가 돼야 합니다.

      우리에게 생명의 향기가 진하게 배어 나와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세상에 사랑을 전하고 사망에 이르는 이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

      어느 날 순례자가 한 덩이의 진흙을 발견했는데, 그 진흙에서 놀라운 향기가 났습니다.
      순례자는 그 이유를 찾아내었습니다.
      이 진흙은 백합과 같이 있었던 것입니다.
      진흙 속에 배어 있는 백합의 향기, 어쩌면 이런 향기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알게 하는 냄새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유명한 대학에 소아마비로 큰 불편을 겪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은 공부도 잘 할 뿐 아니라, 항상 명랑하고 자신감에 차 있었습니다.
      그 비밀을 말해달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소아마비가 내 마음까지 파고든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사지는 멀쩡한데 마음의 병, 영혼의 병을 앓고 있어서 주위를 괴롭히는 사람도 많습니다.
      육신의 장애는 자기만 불편한 것으로 끝나지만, 영혼의 장애는 자기는 물론 다른 사람에게 까지 피해와 상처를 줍니다.
      썩은 오물이 풍기는 악취는 바람 불고 씻으면 없어지지만, 인격이 풍기는 악취는 잘 지워지지도 않고, 오랫동안 괴롭힙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게서 나오는 냄새는 어떤가요?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멀리 레바논에 가서 백향목을 가져다가 성전을 지었습니다.
      백향목이란 좋은 향기가 나는 나무입니다.
      모세가 성막을 지을 때도 향단이 있었고, 동방 박사들이 예수님을 경배하고자 할 때 귀한 세 가지 예물을 드렸는데 그 중에 유향과 몰약은 향기를 내게 하는 향품입니다.

      또 베다니에서 마리아가 좋은 옥합을 깨뜨려서 그 향기로운 기름을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그 발을 씻으니 향기가 온 방에 가득 찼다고 했습니다.

      이렇듯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향기는 거룩한 것, 사랑, 충성과 정성, 믿음의 상징으로 생각되어 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향기로 생각할 뿐만 아니라 성도와 헌금 그리고 성도의 기도 역시 향기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모든 만물에는 독특한 냄새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냄새는 특성상 퍼져 나가게 됩니다.
      더구나 냄새는 그 본체를 미루어 알게 합니다.

      일제 말기에 어떤 장로님이 계속 신사참배를 거부하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찾아와 신사참배 할 것을 강요하니까 참다못한 장로님은 “내가 얼마나 믿음이 없고 썩었기에 이렇게 똥파리들이 달라붙느냐”며 통곡을 했다고 합니다.
       
      누군가 나에게 아주 더럽고 나쁜 유혹을 해온다면 나의 신앙을 다시 한 번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의 모습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향기가 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더러운 냄새를 풍겼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으로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요즘 같이 더운 여름철에는 여기저기에서 많은 냄새가 나는 계절입니다.
      더구나 요즘 들판에 나가보면 수많은 꽃들이 향기를 풍기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통하여 예수님을 전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는 사랑으로 풍성하게 하는 향기가 되고, 기쁨으로 넘치게 하는 향기가 되고, 평화와 즐거움을 넘치게 하는 향기가 되고, 감사와 찬양을 넘치게 하는 향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위에 사는 사람들에게 불쾌한 냄새를 풍기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가는 성도에게는 당연히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경건함과 거룩한 삶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를 나는 냄새가 되는 것입니다.
      꼭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고린도후서 2: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공동번역)
      우리를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언제나 끼워주시는 하느님께 감사 드립니다. 또 우리로 하여금 어디에서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풍기게 하시는 하느님께 감사 드립니다.

      냄새(3744) ὀσμή, ῆς, ἡ 

      1. 향기,  2. 좋은 냄새,  3. 좋지 않은 냄새

      발음 / 오스메(ŏsmē)
      어원 / 360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냄새(고후 2:14, 16). 향기(엡 5:2, 빌 4:18).
      신약 성경 / 6회 사용
      * 3605. ὄζω 

      1. 악취를 풍기다,  2. 냄새를 풍기다

      발음 / 오조(ŏzō)
      관련 성경 / 냄새가 나다(요 11:39).
      신약 성경 / 1회 사용

      시바 여왕과 솔로몬의 지혜   


      시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사모하여 그를 방문할 때에 솔로몬의 지혜를 시험해 보기 위하여 아름다운 꽃을 심은 화분 둘을 가져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꽃들은 똑같은데 실상은 하나는 진짜 꽃이요 다른 하나는 사람이 만든 조화였습니다.
      시바 여왕이 화분 둘을 멀리 갖다 놓고 솔로몬 왕에게 어느 화분이 참꽃이냐고 물었을 때 솔로몬 왕은 조금 생각하더니 신하에게 “동산에 나가서 벌과 나비 몇 마리를 잡아오라”고 하여 신하가 벌과 나비를 잡아 왔습니다.
      솔로몬 왕은 “그 벌과 나비를 방안에 놓아 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벌과 나비들은 그  방에서 조금 날더니 금방 화분 있는 대로 날아가더니만 한쪽 화분에 가서 앉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에 솔로몬 왕은 웃으면서 “저 벌과 나비가 앉은 화분이 진짜 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진짜 화분의 꽃에는 향기가 있었기 때문에 벌과 나비는 향기 있는 화분을 찾아 날았던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있습니다.
      모양은 그리스도인인데 그리스도의 향기가 없으면 이미 그는 가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는 성도는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식당에 가면 음식 냄새가 납니다.
      병원에서는 소독 냄새가 납니다.
      생선 가게에 가면 비린내가 납니다.
      화장품 가게에 가면 화장품 향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쓰레기 하치장에 가면 썩은 악취로 호흡이 곤란함을 겪습니다.
      그것은 온갖 채소, 과일, 생선, 음식물들이 뒤범벅되어 썩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채소나 과일이나 생선이나 음식물들이 처음부터 악취를 내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방치되고 돌보지 않아 부패되면서 부터 악취를 내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그렇습니다.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 예수님을 모신 감격과 기쁨으로 살았고, 구원의 기쁜 소식을 나 혼자만 지닐 수 없어서 그 감격과 기쁨을 표현하려고 애쓰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지금 혹시 마치 쓰레기 하치장의 썩은 악취를 내듯 나의 생활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아닌 세속적 비도덕, 비윤리, 비신앙적 삶을 통하여 악취를 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진솔한 대답으로 “나는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할 수 있는 우리들의 삶이 되기를 기도하면서 말씀을 전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15절)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여기의 “향기”는 헬라어에서 ‘유오디아’(ευωδια)라는 말인데 이 말은 구약에서 “희생 제사”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창 8:21, 출29:18, 레 1:9, 민 15:3). 
      바울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복음 증거의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희생적인 제사와 같은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에베소서 5:2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향기로운”에 해당되는 헬라어 ‘에이스 오스멘 유오디아스’(εις οσμην ευωδιας)는 70인 역에서 희생 제사와 관련된 문맥에 많이 나타나는데(창 8:21, 출 29:18, 레 1:9, 민 15:3),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은 향기로운 제물임을 시사하고 성도들도 그와 같은 희생적인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향기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18에서도 “향기로운 제물”이라는 동일한 말이 나오는데 여기에서는 빌립보 교회의 바울의 필요를 체우고도 남았다는 “풍부한지라”(περισσεύω, 페릿슈오)로 연결되는데, 즉 바울의 복음 선교 사역을 돕는 빌립보 교회의 물질적 도움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의미가 부여되고 그것은 곧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을 향기로운 제물이 된다는 놀라운 뜻을 담고 있습니다.

      성도가 그리스도의 향기가 됨은 바로 예수의 복은 선교 사역에서 표현되어지는 지고한 축복이며,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희생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지는 거룩한 성도의 희생적 삶에서 표현되어지는 아름다움입니다.

      향기 가운데서도 고급 향기로 살아갈 것인가 싸구려 향기로 살아갈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컨대 ‘샤넬 넘버 5’(Chanel Number Five)는 전세계의 여성들에게 사랑 받는 대표적인 향수입니다.
      이 향수는 장미 꽃잎 45Kg을 가지고 향수액 28g을 만들어 낸다고 합니다.
      이것은 약 1.600배로 농축을 한 것입니다.
      장미 꽃잎 45Kg은 대단한 양입니다.
      장미 꽃잎이 그 정도 무게를 가지려면 트럭으로 몇 대는 족히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향수는 한 방울만 떨어뜨려도 하루 종일 많은 사람들의 기분을 상쾌하게 해 줄 것입니다.

      인삼에서 뽑은 향기가 인삼향이고, 국화향, 모과향, 오렌지향 등도 나름대로 각각의 향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의 향기, 봉사의 향기, 전도의 향기, 성가대의 아름다운 찬양의 향기 등 각자의 독특한 향기를 나타내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싸구려 향기는 다른 사람의 속을 매쓰겁게 하고 도 아무리 많이 뿌려도 오래가지를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악취를 내는 성도의 생활을 하면서 헐뜯고, 흉보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파당을 짓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그런 사람들에게서 악취가 납니다.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싸구려 향기인 것입니다.

      향수 가운데서도 고급 향수가 있고 싸구려 향수가 있듯이 성도 가운데서도 고급 신자가 있고 싸구려 신자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시체는 3일 동안 그대로 두면 썩은 냄새가 난다고 합니다.
      눈을 들어서 세상을 한번 바라봅시다.
      가혹한 표현일지 모르지만 걸어다니는 시체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육체가 살았다고 영혼이 살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영혼이 죽어서 온갖 악취가 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야 합니다.

      두 가지 냄새(16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그리스도의 향기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 얻는 자에게 생명의 냄새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복음을 거부하는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죽음의 냄새로 나타납니다.

      멸망하는”의 헬라어 ‘아폴뤼메노이스’(απολλυμενοις)
      구원 얻는”의 헬라어 ‘소조메노이스’(σωζομενοις)'는 둘 다 현재 분사형으로 쓰여 그 행위에 대한 즉각적인 결과가 계속적으로 일어남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향기의 실제적 의미를 말하는 것인데 곧 그리스도의 향기는 복음의 내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이 성도들에게는 집 모통이의 요긴한 돌이 되지만 불신자들에게는 거치는 돌이 되며(마 21:42, 행 4:11),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생명의 냄새가 되지만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사망의 냄새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똑같은 하나의 냄새지만 어떤 사람은 그 냄새로 힘을 얻고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 냄새를 맡으면 죽어 버리고 맙니다.
      마치 여름에 모기향을 피울 때 그 향은 사람에게는 아무런 해가 없지만 모기에게는 죽음에 이르는 냄새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꿀벌은 주인을 위해서는 꿀을 준비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독침을 줍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향기는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되지만 멸망할 사람들에는 이 냄새가 역겨워 맡기도 싫은, 그래서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복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여러분에게서 그리스도의 냄새가 나고 있습니까? 똑같은 포장이지만 비누를 쌌던 포장지는 향내가 배어 잇고 굴비를 쌌던 포장지는 비린내가 배어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들 모습에서 예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우리들의 모습에서 풍겨 나는 냄새는 맡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에게서는 무슨 냄새가 배어 나오고 있습니까?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냄새라고 했던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의 냄새가 풍겨나야함은 두말할 일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향기로서 우리는 기도의 향기를 발해야 합니다.
      성도의 기도는 금 대접에 담긴 향기라고 했습니다(계 5:8, 8:3).

      독일의 화가 '앨버트 듈러'의 "기도하는 손"
      이 그림의 배경을 아시나요?

      “하나님, 내 친구로 하여금 유명한 화가가 되게 하기 위하여 제가 이렇게 일을 해가면서 친구의 학비를 담당하였는데 이제 제 손은 엉망이 되었습니다. 이 손으로는 그림을 그릴 수 없사오니 내 친구에게 하나님 은총을 내려 주셔서 제 소원까지도 이룰 수 있도록 유명한 화가로 만들어 주소서”

      그리고 우리는 믿음의 향기를 발해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향기입니다(히 11:5).
      그리스도의 향기로서의 우리들은 순종의 냄새를 나타내어야 합니다.
      제사보다 나은 것은 순종입니다(삼상 15:22).
      그리고 헌신의 향기를 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성도의 아름다운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발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롬 12:1).
      우리는 또 감사의 향기를 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의 향기도 발해야 합니다.

      향기는 그리스도 안에서 발생(14절)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성도의 모든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주 안에서”(εν κυριω, 엔 퀴리오)는 성도의 기쁨과 감사와 축복의 원천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할 수 있는 향기입니다.

      한 나그네가 한 덩이의 진흙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진흙에서 굉장한 향기가 발산되었습니다. 나그네는 진흙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바그다드의 진주냐?” “아니오”
      “그럼 너는 인도의 사향이냐?” “아니오”
      “그럼 너는 무엇이냐?” "나는 그저 한 덩이 진흙일 뿐입니다.“
      “그러면 어디서 그런 향기가 나오느냐?” “나는 백합화와 함께 오래 살았습니다.”

      하찮은 진흙 한 줌도 백합화와 오랫동안 함께 했을 때 사람의 이목을 끄는 굉장한 물질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한 세월은 얼마나 되었습니까?
      1년? 10년? 아니면 30년?
      그런 세월을 예수와 함께 살아온 사람들에게서 예수 냄새와 성령 냄새가 나지 않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입으로는 예수와 함께 했지만 실제로는 물질과, 세상과 함께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흔드는 골치 아픈 악취를 발산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좋은 매장에 손님이 다시 가고 싶은 것처럼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교회가 되면 사람들은 그 교회에 서로 오고 싶어할 것입니다.
      교회가 싸움 냄새를 풍기면 구경꾼밖에 더 몰려들겠습니까?
      교회가 원망과 불평의 독기를 발산한다면 교인들은 저절로 멀리 멀리 피하여 달아나게 하는 훼방꾼밖에 더 되겠습니까?

      기도할 때 그리스도의 향기가 발산됩니다.
      서로 사랑할 때 그리스도의 향기가 발산됩니다.
      감사할 때 그리스도의 향기가 발산됩니다.
      찬양할 때 그리스도의 향기가 발산됩니다.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라 했는데 고난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은 불평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향기로서 아름다운 삶을 나타내는 것입니다(아 2:2).
       
      옥합을 깨뜨린 여인처럼, 내게서 소중한 것이라 생각되는 것도 주님을 위하여 깨뜨릴 수 있을 때 향유 냄새가 온 집안을 가득 채우듯 하나님의 교회가 나의 희생과 헌신과 봉사와 사랑, 그리고 그리스도의 향기로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씨시의 프란시스가 제자들과 함께 전도를 나갔습니다.
      제자들은 프란시스가 큰 소리로 외치면서 복음을 선포할 줄 알았는데 프란시스는 밭에서 땀 흘리면서 김을 매는 사람에게 가서 함께 김을 매어 주고, 힘겹게 짐을 진 사람의 짐을 대신 져 주고, 그렇게 하루종일 돌아다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를 믿으시오”라고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의아해서 묻자 “우리가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 우리 인격과 삶에서 예수의 향기가 충만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사람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발산되는 것이고 그 향기를 통해서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당신은 어떠하십니까?


      구약성서에 보면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제사를 받으실 때에 번제를 받으셨다.
      성서에 언급된 첫 번째 번제(燔祭)는 노아의 홍수 이후이다.

      “노아는 야훼 앞에 제단을 쌓고 모든 정한 들짐승과 정한 새 가운데서 번제물을 골라 그 제단 위에 바쳤다. 야훼께서 그 향긋한 냄새를 받으시고 속으로 다짐하셨다.” (창세 8:20-21)

      하느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에 관한 규례를 주시면서 분향단에서 향(Franklincense, 또는 incense)을 피워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하느님은 향긋한 냄새를 통하여 당신의 제사를 받으셨다. (출애굽 30:8, 40:27, 레위기 2;1, 2;15)
      구약성서에서 하느님께 제사를 지낼 때엔 향기로운 향을 피웠다.
      그 뿐만 아니라 요한 묵시록에 보면 하느님 나라에서의 예배 중에서도 향을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느님은 나처럼 향긋한 냄새를 좋아 하셨나 보다.

      속죄의 제사

      분향단, 또는 향에 대하여 개신교 목사들이 쓴 책에는 향의 기능을 단순히 성도들의 기도라고 해석을 하였는데 이를 향의 성능과 기능을 이해하지 못한 가운데 쓴 것이다.
      물론 향은 성도들의 기도를 상징하는 면이 있다.
      그 외에 향은 몇 가지 기능이 더 있다.

      향은 우선 아름다운 냄새를 준다.
      아름다운 냄새를 통하여 좋지 않은 냄새를 멀리하고 아름다움으로 채운다.
      그래서 유향은 정화의 상징으로서 사용되어졌다.
      이스라엘에 재앙이 내리면 분향으로서 그것을 정화하려 했으며(민수기), 분향은 살육과 희생의 장소를 깨끗하게 해 준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분향제는 하느님 앞에서 속죄를 드리는데 효과적이라고 생각되었다.
      특히 레위기 16장을 보면 속죄제에 대한 규정이 나오는데 이때에 속죄와 정화의 의미로 유향의 사용에 대하여 나온다.
      대제사장은 향기가 자욱한 가운데 지성소에 들어가 피를 일곱 번 뿌리며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속죄했다(레위 16:11-19).

      “야훼 앞 제단에서 숯불을 향로에 담고 향기 좋은 향가루를 두 손으로 가득 떠 가지고 휘장 안으로 들어가서 그 향을 야훼 앞에서 숯불에 피우고 향기로 증거궤 위에 있는 속죄판을 가리워야 한다. 그래야 죽지 아니할 것이다.” (레위16:12-13)

      “아론은 분향단 뿔에다가 해마다 한 번씩 속죄예식을 행해야 한다.
      해마다 한 번씩 속죄제물로 바치는 희생제물의 피를 발라 분향단을 정하게 하여라.
      너희는 대대로 이렇게 해야 한다.
      이것이 야훼께 바치는 것 중에서 가장 거룩한 것이다.”(출애30:10)

      1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향단의 뿔을 위한 속죄제를 드렸으며, 7월 10일 대속죄일 하루만은 향로가 옮겨져 지성소에 들어갔다(히브리 9:4).
      그러므로 향을 피워서 제사를 드리는 것은 이스라엘에서 속죄의 제사를 드릴 때에 사용하였음을 볼 수 있다.

      속죄의 예식으로서 장례예식

      전통적인 교회(동방정교회, 천주교, 성공회)에서는 장례예식에서 죽은 이에게까지 분향을 한다.
      비록 유한한 육신은 죽었지만 하느님의 성전이었던 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생의 희망과 부활을 믿으면서 하느님께 이 죽은 사람을 맡기는 행위, 당신의 거룩함으로 받아주시고 모든 죄를 용서를 구하는 기도의 청원인 것이다.

      외경 집회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주님은 모든 사람들 중에서 그를 뽑아 주님의 제사를 주관하게 하셨고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향기롭고 감미로운 분향으로 기념 제사를 드리게 하셨다.“(집회서45:16)

      야곱(창세 50:2-3)과 요셉(창세 50:26)의 시체는 향료를 사용하여 미이라로 만들었을 것이고, 아사왕의 장사에는 향료와 향유가 그의 관에 뿌려졌으며(역대하 16:14), 왕가의 화장(火葬)에도 향료가 사용되었음에 틀림없다.
      니고데모(Nicodemus)는 몰약과 침향 섞은 기름을 예수님의 시신에 바르려고 무덤으로 가져갔다.(요한 19:39-40)

      그러므로 우리들은 장례예식에서 죽은 이에게 분향을 하는 것, 또는 향료를 사용한 것은 속죄를 위한 신앙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정화의 상징으로

      집 안에서도 안 좋은 냄새가 날 땐 좋은 냄새로서 냄새를 대신한다.

      예를 들면 보통 향이 있는 초를 피워서 냄새를 제거한다.
      한 번은 교우 중에 한 분이 집에서 사골 국을 끓이다가 그것을 잊고 태웠다.
      사골 타는 냄새가 온 집안에 베게 되었다.
      냄새를 어떻게 없애면 좋겠느냐고 나의 집 사람에게 물었다.
      그래서 나는 그 교우에게 교회에서 쓰는 유향을 드렸고 유향으로 냄새를 제거하라고 말씀드렸다.
      아름다운 향은 냄새로서 안 좋은 냄새를 제거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냄새로서 그곳을 새로운 영적인 에너지로 변화시킨다.
      아름다운 향은 그 속성으로 그 장소를 깨끗하고 정한 곳으로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향을 피우면 벌레들이 도망을 가고 모이지 않는다.
      벌레들이 향의 냄새를 통해서 죽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정화의 기능이며 깨끗케 하는 의도이다.
      그래서 모든 종교에서, 특히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향을 통하여 공간을 정화하는 것으로 사용하였다.
      향기 있는 냄새를 피워서 하느님을 예배드리는 것, 그것은 보편적 인간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 속성이며, 인간은 향기 있는 냄새를 통하여 새로운 영적인 기운으로 인도되는 것이다.

      악취가 나는 곳에서 사람들의 감정과 행동은 어떻게 반응을 할까?

      우리들은 일상의 삶 속에서 자주 악취를 경험하고 그 악취의 영향을 잘 알고 있다.
      미국 인디애나 대학교의 질맨(D. Zillman) 교수는 담배냄새를 가지고 사람들의 생리반응을 실험하였다.

      담배냄새가 가득한 방과 냄새가 나지 않는 방을 준비해 놓고 각각 사람들의 반응을 조사하였다.
      이 실험에서 실험자는 실험 참가자에게 비디오를 보고 있을 때의 생리반응을 조사한다고 말하고, 참가자의 팔에 여러 가지 기계를 연결하면서 움직이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하지만 이 실험의 본래 참가자의 화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목적이었던 터라 참가자가 팔을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실험자는 이런 식으로 화를 냈다.
      “움직이지 말라고 했잖아요.
      자꾸 움직이면 정확한 테이터를 뽑을 수가 없어요.
      왜 지시사항에 따르지 않는 거죠?
      그게 그렇게 어려운가요?”

      실험결과, 참가자가 화를 내는 정도는 냄새가 나지 않는 방보다 담배연기로 가득찬 방에서 2.8배나 더 많이 나타났다.
      담배연기는 화를 증폭시키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환기시설이 좋지 않은 가게, 선술집 등에서는 손님들이 난폭하게 구는 경우가 많다.
      공기기 나쁘기 때문이다.
      냄새에 따라 사람들은 다르게 반응하는 것이다.

      바로 향은 아름다운 냄새를 통하여 그 공간을 새로운 정화의 장소로, 새로운 창조의 공간으로, 새로운 영적인 기운이 감도는 장소로 변화시킨다.
      향긋한 향을 받으시는 하느님, 우리들의 어둡고 더러운 것을 태워서 아름답고 향긋한 향기로 변화시키기를 기도한다.

      출애굽기 29:18
      그 수양의 전부를 불사르라. 이는 여호와께 드리는 번제요, 이는 향기로운 냄새니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니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향품 만드는 비결을 가르쳐줍니다.

      출애굽기 30:34-3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의 향품을 취하고 그 향품을 유향에 섞어... 향을 만들되... 그 향 얼마를 곱게 찧어 내가 너와 만날 회막 안 증거궤 앞에 두라. 이 향은 너희에게 지극히 거룩하니라.

      그런데 이 향품은 너무나 거룩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서만 만들고 인간들을 위해서는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이 향품의 냄새를 맡으려고 개인적으로 만드는 자는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출 30:38) 즉 죽는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 향품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만 전용으로 쓰는 향품이므로 인간이 그 영역을 침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치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것과 비슷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하나님이 전매특허를 낸 향품입니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은 냄새에 상당히 민감하고 조예가 깊으신 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구약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꿀을 그냥은 드리되 불에 살라서 화제로는 드리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꿀을 불로 태우면 냄새가 고약하기 때문입니다.(레2:11-12) 신약 성경에서도 보면 예수님과 냄새 즉 향기의 관계를 불 수 있습니다. 누구나 그렇듯이 예수님도 향기를 좋아합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이 탄생할 때 선물로 가지고 온 것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왕권을 상징하는 황금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하는 쓰디쓴 몰약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삶을 상징하는 향기로운 유향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라는 유명인사가 예수님의 시체 썩는 냄새를 방지하려고 많은 향품을 가지고 왔습니다. 물론 여인들도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 두 사람이 나옵니다. 한 여인은 막달라 마리아라고 추측하는 여인이고(누가복음 7장) 또 한 여인은 나사로와 마르다의 동생 베다니 마리아입니다. 특히 베다니에 사는 마리아는 지극히 비싸고 귀한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드림으로써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한 여인입니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은 탄생 때 동방박사가 가지고 온 유향의 냄새를 맡으셨고, 죽으실 때에는 베다니 마리아의 나드 향유의 냄새를 맡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리스도의 향기’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향기는 과연 어떤 향기일까요? 어린 아이들이 자기 엄마와 아빠를 보고 가끔 이런 말을 합니다. “으- 아빠 냄새! 오- 엄마 냄새!” 저도 옛날 어렸을 때 추억을 더듬으면 아빠는 밖에서 술 드시고, 담배 피우시고, 안주 드시고... 뭐 그런 것들이 어울어진 비리비리한 냄새가 납니다.

      그런데 엄마는 날마다 화장을 하니까 늘 향기로운 냄새가 납니다. 그래서 아빠가 들어와서 내 얼굴을 비비면 저는 얼굴을 찡그리고 말합니다. “으- 아빠 냄새!” 그러나 엄마가 가까이 와서 껴안으면 코를 벌렁거리고 냄새를 맡으며 기분 좋게 말합니다. “오- 엄마 냄새!“

      그런데 예수님의 냄새는 참 특이한 냄새입니다. 두 종류의 정반대의 냄새가 납니다. 하나는 사망의 냄새이고, 또 하나는 생명의 냄새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냄새를 가장 싫어합니다. 마귀는 예수님 냄새를 맡으면 기겁을 합니다. 그러니 마귀는 예수님이 나타났다 하면 그 냄새를 맡고 일곱 길로 도망갑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있어 예수님의 냄새는 향기로운 엄마 냄새와 같습니다. 예수님의 냄새를 맡으면 우리들은 기분이 좋습니다. 이 세상의 어느 향기보다 예수님의 향기가 가장 좋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향기를 뿜고 나타나면 사망의 세력, 질병의 세력, 저주의 세력, 미움의 세력이 사라집니다.

      저희 집에는 자주자주 향초를 피웁니다. 특히 김치 냉장고를 몇 번 열고나면 냄새가 집안에 진동합니다. 이때 얼마간 향초를 피우면 좋지 못한 냄새는 제거되고 향긋한 냄새가 납니다. 금요일에 보면 우리 교회에 렌트하는 알코올 그룹이 가끔 식당에서 양초를 피웁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한국 사람들은 익숙해서 잘 모르지만 아마 그들에게는 마늘 냄새, 김치 냄새가 아주 역겨울 것입니다. 물론 우리들도 서양 사람들을 가까이 대하면 그들에게서 노린내가 납니다. 꼬리꼬리한 치즈 냄새입니다. 또한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그들만의 냄새가 나고, 중국 사람들에게는 그들만의 냄새가 납니다.

      오늘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냄새가 납니까? 만약 마귀가 여러분의 냄새를 맡는다면 어떻게 반응할까요? “어- 이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술 냄새, 담배 냄새, 마약 냄새, 불신 냄새, 불순종 냄새, 음란 냄새, 교만 냄새가 아닌가?” 하고 마치 똥파리가 똥냄새를 맡고 모이듯이 여러분에게 덤벼듭니까?

      아니면 “어- 이거 내가 가장 싫어하는 예수님 냄새네! 에이- 저 냄새 오래 맡다간 죽겠다. 도망가자.” 하고 일곱 길로 도망갑니까? 여러분! 우리는 마귀를 예수님의 향기로 쫓아내야 합니다. 마치 스컹크가 고약한 냄새로 적을 물리치듯이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향기가 나야 합니다. 그래야 마귀가 물러갑니다.

      그런데 이건 뭐 아주 요상 야릇한 냄새가 납니다. 향수에다가 똥물을 섞으면 무슨 냄새가 날까요? 시간이 있고 궁금하신 분은 한번 시험해보십시오. 요즘의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런 요상 야릇한 냄새를 풍깁니다. 말로는 예수님의 향기가 나는데 행동으로는 악취 나는 마귀의 냄새를 풍깁니다.

      여러분! 주일날 우리 교회 처음 들어오면 무슨 냄새가 납니까? 일단 식사 당번이 국을 끓이는 냄새가 날겁니다. 그리고 주일날 같이 식사하고 교회에서의 모든 행사를 마치고 집에 가서 속옷을 벗고 냄새를 맡아보십시오. 속옷까지 음식 냄새가 날것입니다. 머리털은 두말할 것도 없이 냄새가 많이 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우리의 코로 맡는 냄새도 있지만 우리의 코로 냄새를 맡지 못하는 영의 냄새가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갔다 오면 마귀는 그 냄새를 알아차리고 싫어합니다. “으- 교회 냄새! 으- 찬송 냄새! 으- 기도 냄새! 으- 감사 냄새! 으- 예수 냄새!” 하며 그 집에서 더 있지 못하고 도망가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14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즉 사도 바울 일생을 통하여 하나님은 각처에서 예수님을 전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전하는 것을 예수님의 향기를 전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향기를 맡는 사람들이 “아- 향기 좋다!” 하고 예수님께 나아오면 그는 생명을 얻는 것이요, “어- 이게 무슨 악취냐!” 하고 예수님을 거절하면 그들은 사망과 지옥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다행히도 저와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냄새를 맡고 좋다고 느끼는 분들입니다. 고로 예수님의 냄새는 우리를 생명과 축복으로 이끌게 됩니다.

      결론입니다. 나에게는 지금 어떤 냄새가 나고 있습니까? 세상 악취가 납니까? 아니면 요상 야릇한 냄새가 납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향기가 납니까? 만약 악취가 나거나 요상 야릇한 냄새가 나면 빨리 제거해야 합니다. 회개의 기도로 씻어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의 향수를 날마다 뿌려야 합니다. 그래서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사랑을 풍성히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향기

      첫째는 복음의 향기
      둘째는 생명의 향기


      온갖 냄새 중에 좋은 냄새를 향이라고 합니다.

      예로부터 향은 사람들에게 유용하게 사용되어져 왔지요. 사람들이 선호하는 향이라면 아마도 꽃에서 나는 냄새 즉 ‘꽃향기’일 것입니다. 향기가 나는 꽃 곁에는 항상 벌과 나비 등 곤충들이 모여듭니다. 그래서 꽃은 향수의 주원료가 됩니다.

      사람에게도 풍기는 각자의 냄새가 있지만, 인품이 훌륭한 사람에게서 풍기는 좋은 향기가 있습니다. 좋은 향기가 나는 사람이라면 더 가까이하고 싶고 자주 만나고 싶어지게 됩니다. ​

      본문 14절에,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 하여 '냄새'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가 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냄새를 내는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이기게 하십니다.

      이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란 어떤 것인지 함께 알아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복음의 향기입니다.

      15절에,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

      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로 하나님 앞에서 풍기는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풍기는 즉 복음의 향기를 전했던 것입니다. 그는 사역을 하면서 인간적으로는, 교회들에 대한 걱정, 동역자의 안부에 대한 염려 등, 골치 아픈 일들로 많은 고심꺼리가 있었겠지만,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는’ 기쁨이 넘쳤다는 것입니다.

      여기서‘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언제나 끼워주시는’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자기 자신을 당시 로마 군대의 개선식에 참여한 군인에 견주어 표현한 것입니다.

      세상에는 갖가지의 기쁜 일들이 있지만, 전쟁을 이기고 개선하는 장군이나 용사의 기쁨에 견줄만한 것이 또 있을까요?

      개선장군과 병사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본분을 다해서 나라를 지켰고 국민을 보호하는 사명을 다 한 자긍심과 함께, 전리품과 포로들을 앞세우고 로마로 개선합니다. 그 개선 군을 환영하는 로마시민들은 온 거리에 향을 피웠습니다. 승리의 기쁨을 그 향냄새와 함께 온 도시 구석구석에 퍼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쁨과 함께 퍼지는 향기와 같이, 성도들이 어디를 가나 풍기는 냄새가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리스도의 지식을 다른 사람에게 알게 해 주는 향기입니다. 즉 성도는 어디를 가든지 만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즉 복음의 향기를 풍겨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을 향기가 전해지는 것으로 비유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는 사람은 항상 승리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의 복음 전도의 현장은 전쟁터였습니다.

      목숨이 경각에 처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항상 보호해 주심으로 복음은 전해졌으며 영혼 구원의 열매가 열렸던 것입니다. 성도가 풍기는 냄새 역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여야 하며, 생명으로 인도하는 향기이어야 합니다. 이 향기를 세상에 나타내는 것이 성도의 사명이요, 전도자의 사명이며 보람이고 또한 복음의 승리인 것입니다.

      이 승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항상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도우심을 받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당한다할지라도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바로 그런 기쁨이 늘 가득 넘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는 것이, 세상 사람들, 불신자들의 눈에는 고생을 사서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매사에 이기는 재미가 있음을 오늘 본문은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이기는 재미에 산다는 것을 모든 성도는 각자가 먼저 체험을 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향기를 풍기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에 향수를 먼저 발라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즉 향기의 근원이 될 만한 것이 자기 몸에 먼저 배어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참다운 개선장군이신 그리스도와 늘 동행한다면,

      -예수 안에서 사는 즐거움을 누리며,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보람을 가지고,

      -겉으로는 그저 고생만 하는 것 같고, 좁은 길로만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에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승리의 길을 가는 감격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나 자신도 모르게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젖어 그리스도의 향기, 복음의 향기를 많이 풍기는 성도가 되어 있게 될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15절에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라고 합니다.

      향기란 것은, 원래 한 가지 냄새만 풍기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같은 향기일지라도 그 맡는 사람에 따라서 달리 느껴질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개선식에서 피운 향 역시 그것을 맡는 개선군과 로마시민들의 코에는, 하나같이 승리에 도취된 기쁨의 향기이겠지만, 패잔병인 포로들에게는, 치욕과 고통을 더해주는 역겨운 죽음의 냄새일 것입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향기라 함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이며 동시에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복음의 향기를 전하는 전도자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막3:14). 그리고 복음 전도는 주님의 명령입니다(마28;19,20).

      그리스도께서 함께하는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의 성품, 그리스도의 모습,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타납니다. 성도의 언행을 통해 전달되는 복음의 향기를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천국의 영생을 가져다주는 생명의 향기가 되지만, 그 향기를 거부하는 불신자들에게는 지옥의 심판을 불러오는 죽음의 냄새가 되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로 예수님께서, 요3:36절로 자신을 가리켜 스스로 증거하시기를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향기는 그 누가 맡아도 다 향기로운 향기가 결코 아닌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향기를 그저 아무에게나 무조건 좋은 냄새만 나도록 만들려고 하는 자들이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설교에 천국을 언급하면서도 지옥을 결코 언급하지 않는 목회자 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하는 목사 들입니다.

      -신명기 28장은 68개의 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행하면 복을 주신다고 3절에서 14절까지 11개절로 말씀하시 지만, 만일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말씀 이 15절로 68절까지 임으로 54개의 절로 언급하고 있음에도, 복 주신다는 11개절만 설교의 주 메뉴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類)의 설교는 불신자들이 들어도 조금도 기분 나쁘지 않는 말, 망하는 자들이 들어도 조금도 ‘사망의 냄새’가 나지 않는 말, 무조건 좋은 게 좋다는 식의 말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설교, 어느 누구에게나 기분 좋은 냄새만 풍겨 주는 그런 말들이 정말 향기로운 복음 같지만, 오히려 정반대로써 사실상 교인들의 영성을 말리는 것임을 우리는 똑바로 직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그 맡는 사람에 따라서, 천국 영생의 향기와 지옥 영벌의 냄새로 다르게 느껴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진짜 복음의 향기가 가진 본질이요 특성인 것입니다.

      비유로 한 가지 들자면,

      청국장의 냄새를 맡는 사람에 따라서 어떤 사람에게는 그 냄새가 그리운 고향의 아련한 향기요, 어머니의 냄새 같은 구수하고 맛있는 냄새이지만, 그 맛을 모르는 사람이나 이방인들에게는, 코를 틀어막고 고개를 돌리며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악취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청국장이 가진 특성인 것입니다.

      이런 청국장을 모든 사람이 먹기 좋게 만든다고 그 고유의 냄새를 없애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청국장 고유의 냄새에 코를 틀어막든 사람이 조금 맛을 보게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청국장의 원 맛을 알고 애용하던 사람들에게는 그것은 청국장이 아니므로 변질된 맛에 실망한 나머지 고개를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도를 하면서,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

      는 말을 했을 때 그 말을 듣고 기분 나빠하고 욕하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조금도 당황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게 되어 있는 하나님의 택한 자들에게 천국 영생을 느끼게 해 줄 이 지극히 좋은 향기를 풍겨야 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먼저 체험한 그리스도를 간증하고 늘 부지런히 자랑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그리스도의 좋은 향기를 풍기는 성도되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생명의 향기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모든 사람에게 미칩니다. 그 향기를 맡아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본문 16절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복음의 향기는,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냄새요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사망으로 인도하는 냄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증거하는 복음의 이중적인 면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복음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지만 그 복음을 거부한 자들에게는 곧 심판입니다. 그래서 복음 안에는 생명과 사망, 구원과 심판이 동시에 나타납니다.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누가 이런 사명을 수행할만한 자격이 있느냐?’라는 뜻입니다.

      ​과연 어떤 사람이 이런 진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길 수 있을까요?

      과연 어떤 사람이 천국 구원을 선포하면서 동시에 지옥 영벌을 경고하는 이 진짜 복음 전파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요?

      17절에 그 적격자와 부적격자를 각각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 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는 사명을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자격 미달자들이 사도 바울 시대에 “수다하게”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바로 ‘하나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자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진리 그 자체에는 아무 관심 없고 다만 젯밥에만 마음이 있는 자들이 예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제멋대로 요리해 왔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안에 들어와 있던 거짓 교사들은, 마치 정직하지 못한 상인들이 포도주에 물을 섞어 팔듯이 하나님 말씀에 불순물들을 첨가시킨 자들이었습니다.

      유대 율법주의와 헬라 철학을 성경 말씀에 섞어 넣음으로써 복음의 진수를 왜곡시켰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는 성도는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전파한다고 바울 사도는 밝힙니다.

      당시 사도들은 복음을 전파함에 있어서, 인간적인 욕심이 전혀 섞여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답게 순전한 복음의 향기를 전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17절 말미에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고 확신에 찬 표현을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자신이 영적으로 연합한 상태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명품 향수는 가격이 비싸지만 다른 보다 저렴한 향수에 비해서 향기가 훨씬 더 좋을 뿐만 아니라 조금만 뿌려도 좋은 향기가 오랫동안 지속되는 것입니다. 만일 불순한 생각을 가진 자가 양을 늘리기 위해 다른 액체를 넣어 희석시켜 만든 짝퉁향수라면 그 향기와 효능은 확실히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복음을 전할 기회가 있으면 순수한 복음만을 전해야 합니다. 영혼을 구원받아 천국시민이 되는 것이 목적인 것이지 이 땅에서 보다 잘 살기 위해 예수 믿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전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게 되는 사람도 많이 있지만, 불신자들에게 반감을 주지 않고 자연스럽게 전도하는 방법이 바로 성도가 자기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이 최고급 향수를 자기 자신에게 먼저 뿌려 놓고 그래서 자연히 각처에서‘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즉 만나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 사람에게서 나는 냄새는 다른 교인들에게서 나는 냄새와는 다르구나!!!’라는 느낌을 가지게 만드는 향기이어야 합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는 향기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향기입니다.

      성도도 이 향기를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성도는 이 향기를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라면 항상 그리스도의 향기로 충만해야 합니다.

      어디에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죽은 영혼을 살리고 병든 영혼을 고치며, 낙심한 영혼이 소망을 얻는 역사가 나타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혼잡하게’ 만들어서, 싸구려로 파는 삯군들이 설치는 이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조해 놓으신 이 고귀한 복음을 하나님께 받은 그대로 100퍼센트 순수하게 지키면서, 자신의 인격과 생활을 통해 늘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만을 풍기는 여러분 모두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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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28-2022(수)

      성령의 보증(고린도후서 1:22)

      보증(아르라본) ἀῤῥαβών
      ἀῤῥαβών, ῶνος, ὁ  728

      1. 첫 분납금,  2. 보증금,  3. 공탁금

      발음 / 아르라본(arrhabōn)
      어원 / 히브리어 66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보증(고후 1:22, 5:5,  엡1:14).
      신약 성경 / 3회 사용

      명사 - 첫 분납금, 보증금, 공탁금(물건에 대한 권리나 계약을 유효하게 만들기 위해서 미리 가격의 일부를 지불하는 것을 의미한다. 상징적으로도 사용됨) , 고후 1:22, 5:5, 엡 1:14.

      * 662. ἀποτολμάω 

      1. 담대히 ~하다,  2. 감히 ~하다,  3. 로마서 10:20

      발음 / 아포톨마오(apŏtōlmaō)
      어원 / 575와 511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담대하다(롬 10:20)
      신약 성경 / 1회 사용

      * 575. ἀπό 

      1. ~으로부터,  2. ἀπάγεσθαι,  3. 마태복음 27:24

      발음 / 아포(apŏ)
      관련 성경 / ~부터(마 1:17).
      신약 성경 / 646회 사용

      * 5111. τολμάω

      1. 감히 ~하다,  2. 할 마음이 들다,  3. 용기가 있다

      발음 / 톨마오(tŏlmaō)
      어원 / 제1부정과거 ἐτόλμησα, τόλμα ‘담함’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담대하다(고후 11:21), 감히~하다(마 22:46, 막 12:34, 유 1:9), 당돌히~하다(막 15:43), 용감히~하다(롬 5:7),
      담대히~하다(고후 10:2, 빌 1:14).
      신약 성경 / 16회 사용

      위로. παράκλησις, εως, ἡ 3874

      위로. παράκλησις, εως, ἡ 3874

      1. 격려,  2. 간청,  3. 위로

      발음 / 파라크래시스(paraklē- sis)
      어원 / 387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위로(눅 2:25, 행 9:31, 롬 15:4, 5, 고후 1:3, 행 4:36), 권면(빌 2:1, 살전 2:3, 히 13:22).
      [동] 권하다(행 13:15, 딤전 4:13, 히 12:5), 위로하다(행 15:31, 고후 1:4, 롬 12:8), 권면하다(고전 14:3).
      신약 성경 / 29회 사용

      의뢰하다. πειθώ  3982  

      의뢰하다. πειθώ  3982

      1. 확신을 가지게 하다,  2. 설복하다,  3. 끌어들이다.

      발음 / 페이도(pĕithō)
      관련 성경 / 권하다(마 27:20, 행 13:43, 고후 5:11), 신뢰하다(마 27:43, 빌 1:14, 3:4), 믿다(눅 11:22, 행 26:26, 롬 2:19), 인정하다(눅20:6), 따르다(행 5:36, 37, 롬 2:8), 옳게 여기다(행 5:40), 화목하다(행 12:20), 권면하다(행 18:4, 19:8), 권유하다(행 19:26), 순종하다(히13:17), 확신하다(롬 8:38, 고후 2:3, 빌 2:24), 의지하다(고후 1:9, 히 2:13).
      신약 성경 / 52회 사용

      거룩함. ἁπλότης, ητος, ἡ  572   

      1. 단순함,  2. 관용,

      발음 / 하프로테스(haplŏtēs)
      어원 / 57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성실함(롬 12:8, 엡 6:5, 골 3:22), 거룩함(고후 1:12), 풍성한 연보(고후 8:2), 너그러운 연보(고후 9:11), 후한 연보(고후 9:13), 진실함(고후 11:3).
      신약 성경 / 8회 사용

      명사 단순함, 순진, 소박, 성실, 정직, 솔직, 고후 1:12, 11:3, 엡 6:5, 골 3:22.
                관용, 관대, 롬 12:8, 고후 8:2, 9:11,13, 11:13


      진실함. εἰλικρίνεια, ας, ἡ  1505  

      1. 순수,  2. 순전,  3. 고전 5:8

      발음 / 에이리크리네이아(ĕilikrinĕia)
      어원 / 150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순전함(고전 5:8, 고후 2:17), 진실함(고후 1:12).
      신약 성경 / 3회 사용

      은혜. χάρις, ιτος, ἡ  5485

      1. 우아함,  2. 은총,  3. 은혜로운 행위

      발음 / 카리스(charis)
      어원 / 546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은혜(눅 1:30, 행 4:33, 몬 1:3), 칭찬(눅 6:32, 34), 칭송(행 2:47), 은총(행 7:10), 호의(행 25: 3), 은사(고후 9:15), 기쁨(몬 1:7), 아름다움 (벧전 2:19, 20), 사랑스러움(눅 2:52), 감사(눅 17:9, 롬 6:17, 고후 8:16, 골 3:16).
      신약 성경 / 156회 사용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성령의 보증은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보증금(保證金) Deposit

      중요한 상거래를 할 때에 상대방이 약속을 어기지 못하도록 보증금을 걸거나 보증인을 세웁니다.

      예를 들면 집을 구할 때 그냥 “이 집 사겠습니다” 하고 말로만 한다고 계약이 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보증금을 걸고 말을 해야 계약이 유효해지기 시작합니다.
      성령의 보증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에 대하여 모두 책임을 져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씻음을 받아 변화가 되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붙잡게 되면 성령께서 그에 따른 보증을 해주십니다.
      우리 모든 삶을 붙들어주시고 책임지고 인도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보증을 어디에다가 주실까요?
      마음 안에 주십니다(고후 1:22).
      성령의 보증의 역사가 우리의 내적인 마음의 상태에서 시작됨을 알려줍니다.
      아무리 돈이 많거나 환경이 풍요해도 마음이 슬프면 인생이 괴롭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문제가 있고 환경이 어려워도 내 마음이 기쁘면 인생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귀신이 들리게 되는 것은 미움이나 분노 그리고 나쁜 생각 악한 생각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생각을 완전히 포기하고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스스로 자신의 인격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우리의 마음에 기쁨과 평강을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은혜를 보증해주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성령께서 임하시면 우리 마음에 .매였던 결박들이 다 끊어지고 자유롭게 됩니다.
      염려와 근심이 사라지고 불안과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천국의 기쁨과 평강을 보증해 주십니다.

      둘째는 선불(先佛) prepayment

      선불이란 “미리 지불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기도를 통하여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고 진리의 말씀을 통하여 인침을 받게 되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하늘의 영광과 축복을 미리 맛보게 해주십니다.
      선불은 이미 나의 것이 된 것입니다.
      나머지 돈은 나중에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와 성경공부와 성도의 교제와 다양한 섬김을 통하여 하늘의 기쁨과 축복을 체험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풍성한 기업과 유산을 깨닫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주님은 천국 시민권을 가진 성도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특권과 영광을 미리 맛보게 하십니다.
      이것은 성령의 보증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성령의 보증이 우리 마음에 있게 되면 힘든 상황 속에서도 불안하거나 두렵지 않습니다.
      어떤 고난과 어려움이 와도 흔들리거나 쓰러지지 않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담대하게 하시고 견고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날부터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삶을 보증하기 시작하셨고 이 보증하심은 매일 매일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상황이 절망적이라고 느낄 때마다, 성령의 보증하심은 우리 마음을 소망으로 가득차게 합니다.
      내가 연약하다고 느낄 때, 성령의 보증하심은 나에게 매일 새로운 용기를 부어줍니다.
      내가 믿음이 식어지고 떨어지려고 할 때 성령께서는 새로운 믿음을 보증해 주십니다.
      내가 사랑이 없어 답답해할 때 성령님을 의지하면 성령께서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보증해 주십니다.
      성령께서 내 마음에 하나님의 은총을 부어주셔서 나의 마음을 천국으로 만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성령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보증을 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4).
      성령의 역사는 예수님을 증거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어떤 힘든 상황에도 낙심 절망하지 말고 성령의 보증으로 담대함과 확신을 갖게 되시길 축원합니다.

      성령의 보증 세 가지

      첫째, 보증금(保證金)(고린도후서 1:21-22) 

      21.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22.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21 ὁ δὲ (And the one) βεβαιῶν (confirming) ἡμᾶς (you) σὺν (with) ὑμῖν (us) εἰς (in) Χριστὸν (Christ) καὶ (and) χρίσας (having) ἡμᾶς (us) Θεός ([is] God.)

      22 ὁ (And the one) καὶ σφραγισάμενος (sealing) ἡμᾶς (us) καὶ (also) δοὺς (giving) τὸν (the) ἀρραβῶνα (pledge-money) τοῦ (of the) Πνεύματος (Spirit) ἐν (in) ταῖς (the) καρδίαις (hearts) ἡμῶν (of us.)

      헬라어 원문은 네 가지 분사가 사용되고 있다.
      ‘굳건하게 하시고’ - 베바이온(βεβαιῶν) 
      ‘기름을 부으시고’ -  크리사스(χρίσας)
      ‘인치시고’ -  스프라기사메노스(σφραγισάμενος)
      ‘주시고’ -  두스(δοὺς)

      분사들의 주어는 하나님이시다.
      즉 하나님이 굳건하게 하시고, 기름을 부으시고, 인치시고, 성령을 주신다.
      하나님은 기름을 부어 인치신다.

      도장을 찍는 목적이 무엇인가?
      너는 내 것이라는 것을 표시하기 위하여.

      옛날에는 말이나 소 같은 가축에 도장을 찍어 자기의 소유를 나타내었다.
      물론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 양에게 그럴 필요가 없었지만 거기다가 성령을 보증금 ἀρραβῶνα(pledge-money)[알라보나] τοῦ(of the) Πνεύματος(Spirit)으로 주셨다.

      보증금(알라보나, ἀρραβῶνα. pledge-money)은 페니키아의 상업용어로서 이것이 βεβαιῶν(confirming)와 함께 쓰여 구속력이 있는 법적 용어로 사용된다.
      보증이라는 법적 용어를 사용하여 우리의 구원이 확실한 것임을 보장하는 것이다.

      성령은 구원의 보증만 아니라 우리가 받을 기업의 보증이 되신다(에베소서 1: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14. ὅ (which) ἐστιν (is) ἀρραβὼν (an earnest) τῆς (of the) κληρονομίας (inheritance) ἡμῶν (of us) εἰς (in) ἀπολύτρωσιν (the redemption) τῆς (of the) περιποιήσεως (possessing) εἰς (into) ἔπαινον (the praise) τῆς (of the) δόξης (glory) αὐτοῦ (of him.)

      보증(금)은 미래에 온전히 받을 것에 대한 일부를 현재에 받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앞으로 온전히 받게 될 구원과 기업을 이 세상에서 누리게 하신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우리가 험악한 세상을 어찌 견딜 수 있으랴.

      둘째,  양자(養子)(로마서 8:15) adopted son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5. οὐ γὰρ (For not) ἐλάβετε (you received) πνεῦμα (a spirit) δουλείας (of slavery) πάλιν (again) εἰς (to) φόβον (fear,) ἀλλὰ (but) ἐλάβετε (your received) πνεῦμα (a spirit) υἱοθεσίας (of sonship) ἐν (in) ᾧ (which) κράζομεν (we cry out) Ἀββᾶ (Abba) ὁ Πατήρ (Father.).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자녀, 요한은 양자라는 단어보다 어린 자녀, 테크니온(τεκνίον)이란 단어를 사용)가 된 것이다.
      양자라는 단어는 5번 나타나는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양자가 된 것은 특권이었다(출 4:22).
      그런데 성령은 양자 됨을 우리에게 증거하시는 영이시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시기를 좋아하셨고, 예수님에게 부여된 어떤 호칭보다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기뻐하셨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조차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유일하신 자’ μονογενής[모노게네스] (우리 성경에는 독생자로 번역)로서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셨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아들(자녀)이 되었다.
      당시 법으로 양자는 친자와 차별 없이 자식의 권리가 주어졌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자녀)이 되었다는 것은 이런 뜻이 있다.

      로마서 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εἰ δὲ (And if) τέκνα (sons) καὶ (and) κληρονόμοι (heirs,) κληρονόμοι (heirs) μὲν Θεοῦ (of God,) συνκληρονόμοι δὲ (and joint heirs) Χριστοῦ (with Christ) εἴπερ (if indeed) συμπάσχομεν (we suffer together) ἵνα (then) καὶ (also) συνδοξασθῶμεν (we be glorified together.)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 συνκληρονόμοι(joint heirs) Χριστοῦ(with Christ)’가 된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해졌나?
      그것은 바울 신학의 특징인 ‘그리스도 안에서’(그리스도와의 일체 一體 의미하는것) 가능해진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계 21장)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양자가 되어 상속자가 된 것이 더 영광스럽다.

      셋째, 첫 열매(고린도전서 15:20) first fruit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Νυνὶ δὲ (But now) Χριστὸς (Christ) ἐγήγερται (has arisen) ἐκ (out) νεκρῶν (of the dead.) ἀπαρχὴ (The first fruits) τῶν (of those) κεκοιμημένων (having fallen asleep.)

      ‘첫 열매’ 아파르케(ἀπαρχὴ) 출 23장이나 신 26장을 근거를 하고 있는 표현이다.
      이것은 앞으로 추수할 소출을 대표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성도들도 예수님처럼 부활하게 될 것을 대표하는, 보증하는 사건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키심으로 우리에게 같은 소망을 가지게 하신다.
      이것을 성령께서 보증하신다.

      로마서 8: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신 분은 다름 아닌 성령이시다(롬 1:4).
      예수님을 부활의 첫 열매로 일으키신 바로 이 성령께서 우리의 부활을 보증하시고 우리를 죽음에서 일으키실 분이 바로 성령이시다.

      결론적으로 성령께서는 우리의 구원의 보증,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 됨, 그리고 부활을 보증하신다.

      성령의 보증을 받은 성도의 삶

      타인의 보증을 잘못 서 주어 엄청난 재산상 피해와 정신적 패해를 입는 경우가 많다.
      부자간, 친척 간, 동료가 어쩔 수 없는 인정이나 관계 때문에 보증을 섰다가 패가망신을 당하는 경우가 흔하다.
      인간이 인간의 보증을 선다는 인간 세계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그러나 성령께서 인침을 받은 택한 백성의 영원한 보증이 되신다.

      고린도후서 1:21-22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를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의 마음에 주셨느니라.

      고린도 후서 5:5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성령의 인침과 보증의 의미는 무엇인가?
      누가 성도를 보증해 주시는가?
      성도들은 과연 어떤 보증을 받는 것인가?
      누가 보증을 받을 수 있는가?
      성령의 보증을 받은 자의 삶은 어떻해야 하는가?
      보증자 되신 성령님을 어떻게 하면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겠는가? 

      첫째, 성령의 인침과 보증의 의미

      성령의 인침은 성령님 즉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된 자라는 표식이다.
      하나님의 권세가 함께 하는 자라는 증거이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가 함께 하고, 하나님께 대한 의무가 뒤따르는 자라는 의미가 있다.
      성령의 보증이란 이러한 인침을 받은 자에 대한 구속의 날 까지 성령께서 책임을 져 주신다는 의미이다.
      성령의 인침은 성령의 보증의 근거가 되고, 뒤집어 말하면 성령의 보증이 성령의 인침의 결과라는 말이다.
      성령의 인치심은 과거 내지 현재적 사실이라면 성령의 보증은 하나님 앞에서의 미래적 사실에 대한 보장이다.

      우리가 예전에 양복점에 가서 옷감을 고르고 몸의 치수를 재고 선금을 얼마만큼 지불한다.
      그러면 영수증에는 중간에 마름질한 옷을 대충 꿰매서 입어 보는 날짜를 적고 선금과 잔금의 액수가 기록되며, 그 날 선택한 양복이 바로 이런 계통이라는 뜻으로 양복지 일부를 잘라 붙인다.
      바로 이 양복지 중 일부를 잘라 붙인 영수증이 최종적으로 입고 다니게 될 양복에 대한 보증이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현재적 인치심은 바로 미래에 이루어질 성도들의 구원에 대한 성령님의 보증이 되신다는 말이다.
      성령의 보증을 이미 받은 성도들이기에 구원과 축복과 상급과 부활이 확실한 것이다.

      둘째, 누가 성도를 보증하가?

      성도들에게 성령을 부으신 분은 성부 하나님이시다.
      성도들에게 인을 치신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미래에 대한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다.
      성도가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바로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확실하고도 든든한 보증이다.

      우리가 토지를 매입할 경우에 거래가 성사되면 그 땅을 앞으로 완전하게 소유하게 된다는 보증으로 그 땅에서 가장 좋은 흙을 떠 주었다던 옛 선진들의 거래가 의미가 있다. 또한 어떤 작농 중에 있는 밭을 살 경우에도 거래가 이루어지면 그 밭에 있는 제일 좋은 곡식이나 열매의 일부를 보증으로 주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이 또한 미래에 우리가 누리고 받을 영광과 축복에 대한 보증과 증거가 되신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리고 성령안에 있다는 것만큼 보장이 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도들에게 성령님을 통하여 보증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영원불변 하신 분이시다. 영원토록 그 신실하심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시다. 끝까지 약속을 지키시고 계신다. 그 하나님이 영원히 살아 계셔서 대대로 통치하신다. 그런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이시다.

      셋째, 성도들은 어떤 보증을 받는가?

       1. 영원한 구원의 보증(히브리서 5:9)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성령님을 통한 인침을 받고 새생명을 얻은 성도는
      ① 영원한 형벌에서 구원을 얻는다(살후 1:8~9).
      ② 눈물과 고통에서 영원한 구원을 얻는다(계 21:3~4)
      ③ 영원한 지옥불 속에서 영원한 구원을 얻는다(계 20:6).
      ④ 악한 마귀에서부터 영원한 구원을 얻는다(계 20:10).

      2.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가 되는 보증(로마서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그리스도처럼 고난을 받지만 천국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의 후사가 될 것을 보증하신다.

      3. 썩지 않을 부활의 보증(고린도전서 15:42~44)

      성령은 주를 믿는 사람은 주님처럼 썩지 않을 부활의 몸을 입을 것을 보증해 주신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4. 영원한 안식처를 보증(고린도후서 5:1~5)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나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집, 하나님이 지으신 집에 거하는 보증을 얻는다.

      육신의 몸을 입고 사는 우리를 흙집이라고 한다면 부활의 영광스러운 몸은 대리석 집이 될 만큼 엄청난 차이를 갖는다.
      이 놀랍고도 영원한 천국 집에 거하는 보증으로 하나님은 성도의 심령 속에 성령님을 부어 주셨다.

      요한계시록 21:1~7에 보면 성도는 그들의 영원한 기업으로 천국을 얻게 된다고 밝히고 있다.
      천국은 하나님이 만드신 집이요 영원히 새로운 집이요 영광의 집이다. 또 주님과 함께 사는 집이며 거기 에서는 오직 기쁨과 감사만이 늘 있을 것이다. 더욱이 그 집에 거하는 자들에게는 절대 사망이 없고 밤이 없으며 애통이 없는 집이다. 예루살렘 성과 같이 빛나고 수정같이 맑으며 금으로 된 성과 그 성곽은 벽옥으로 장식되고 성의 기초석은 열두 보석으로 되어 있다.

      좌우에 생명수 강이 흐르고 그 강의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어 달마다 열두가지 실과를 맺는다. 생명과 찬양과 기쁨이 넘치는 성이다. 눈물, 애통, 죽음이 없고 죄와 악과 고통, 그리고 어둠이 없다. 태양 빛 대신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비추는 영원한 낮의 세계로 성도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 성령님이 보증해 주신다.

      5. 영광스런 상급을 보증

      천국에 가면 이 세상에서 주님을 위하여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의 상급이 있다.
      그것은 주를 위해 이 땅위에서 수고한 자에게 보상되는 면류관과 영광이다.
      ① 의의 면류관이 있다(딤후 4:7~8).
      ② 영광의 면류관이 있다(벧전 5:4)
      ③ 생명의 면류관이 있다(계 2:10)
      ④ 영광의 상급이 있다(고전 15:40~41)

      넷째, 누가 하나님의 보증을 받을 수 있나?

      1.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듣는 사람이 성령의 인치심을 받고 그 인침을 받은 자가 보증을 받는다(엡 1:13)

      약속의 성령의 인치심을 받을 자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말씀을 전하는 일과 그 말씀을 듣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른다. 말씀은 살아 있다. 말씀에는 중생케 하는 힘이 있다. 말씀이 성령님과 함께 역사 하시기 때문이다. 말씀이 바로 살리는 도구이다.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말씀을 들을 때 역사가 일어나 죽었던 영혼이 살아난다.

      2. 복음을 믿는 자가 바로 성령의 인치심을 받고 그 인침을 받은 자가 바로 보증을 받는다(엡 1:13).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서 끝나지 않고 말씀을 영접하고 말씀을 믿을 때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듣고, 그 말씀 안에 거하며, 그 말씀을 믿으면 말씀은 살아서 역사 할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에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 하느니라”“라고 증거하고 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면 거듭날 것이다. 거듭나는 역사는 바로 말씀과 성령으로 되어지기 때문이다(요 3:5)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자는 바로 거듭나게 된다. 이것은 바로 성령의 세례를 받은 자요 또한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자인 것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 즉,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 자는 그 증거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 로 부르게 된다. 로마서 8장 15~16 절에 “너희는 양자의 영을 받았으니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시나니” 라고 밝히고 있다.

      다섯째, 보증을 받은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성령님은 어떤 사람도 또한 그 무엇에 의해서도 결코 자신을 받기를 강요하지 않으신다.
      그는 불신자들에게 구원을 받도록 강요하거나 압력을 행사하지 않으신다.
      또한 신자들에게도 굳이 성화되도록 강요하는 일이 없다.
      그러나 성도가 죄를 범할 때 성령님은 크게 슬퍼하신다.
      성도가 죄를 지을 때 그는 역사하지 않으시며 괴로워하신다.
      성도들이 성령님을 오해하고 잘못 대하거나 상처를 주고 그 앞에서 교만하며 세상과 타협할 때, 그의 감동하심을 거부할 때 그는 깊은 근심을 하게 된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자신들의 생각대로 스스로의 고집대로 제 감정대로 나아갈 때 매우 안타까워하시며 슬퍼하신다. 우리가 성령님을 거절할 때도 그는 우리를 너무나 돕고 싶어하신다. 동행하기를 원하신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주님 뜻대로 살기를 원하신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

      에베소서 4:30
      우리는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다.

      그러기에 우리의 영적, 도덕적 수준과 행위가 온전하지 못하다고 성령님이 우리를 떠나가시는 것은 아니다.
      그는 결코 우리를 버리시지 않는다.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존전에 설 때까지 우리를 보호하시는 은혜의 보혜사 이시다.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님의 내주를 통해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가야 할 성령님의 목표를 거부한다면,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높이고 주님 중심의 삶을 사는 것을 거절한다면 성령님의 인도하시고 견인하시는 역사는 일시적으로 중지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① 성령님은 영광의 영이시다(벧전 1:14)
      그러므로 우리가 높아지려고 교만하고 우리가 영광을 받으려고 한다면 성령님은 근심하게 되신다.

      ② 성령님은 생명의 영이시다(롬 8:2)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으로 연약해지고 영적인 성장이 중지되고 옛성품에 따라 살 때 성령님은 슬퍼하신다.

      ③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다(요 14:17) 
      그러므로 어떤 거짓, 사기, 비판은 성령을 근심하게 만드는 것이다.

      ④ 성령은 믿음의 영이시다(고후 4:13)
      그러므로 의심하고, 믿지 못하고, 걱정하고, 고민하는 것은 성령을 근심케 하는 것이다.

      ⑤ 성령님은 은혜의 영이시다(히 10:29)
      그러므로 냉랭하고, 비참하고, 인색하고, 용서치 않고, 사랑하지 않는 것은 성령님을 근심케 하는 것이다.

      ⑥ 성령님은 성결의 영이시다(롬 1:4)
      그러므로 불결하고, 음란하고, 비열한 것은 성령님을 근심케 만드는 것이다. 죄로부터 분리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로의 회귀를 원하신다.

      ⑦ 성령님은 지혜의 영이시다(사 11:2, 출 28:3)
      그러므로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어리석은 자들과 동행하는 것은 성령님을 근심케 하는 것이다.

      성령님을 근심케 하는 성도의 삶의 모습을 성경은 매우 구체적으로 에베소서 4장에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새생명의 영이신 성령의 역사로 인치심을 받고 영광과 구속과 부활을 보장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이 옛 구습을 쫓고 육신의 소욕대로 산다면 우리 안에 내주 하시고 우리를 살리시고 인치시고 보증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방해하고 근심케 하고 괴롭혀 드리게 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40년의 긴 여정 속에서 그처럼 수없이 범죄 했지만 결코 그들을 떠나지 않으셨고 그의 성막을 옮기지도 않으셨다. 그렇다 지금 우리의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므로 성령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는 않으신다. 그러나 그는 우리와 교제하지 않으시고 교통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성령님을 슬프게 해드리면 우리는 기쁨이 사라지고 삶에 생기가 없어지며 슬픔과 어두움과 무기력과 무의미가 우리를 압도하게 된다.

      또한 성령님은 우리가 계속적으로 죄를 짓도록 허락하지 않으신다. 주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영적인 자유를 허락하셨다. 그러나 그 자유를 죄를 짓는데 사용한다면 성령님은 매우 마음 아파하시고 그 분이 주신 자유의 의미를 가치 없이 저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성령 안에서 주신 자유는 죄로부터의 자유, 죽음으로부터의 자유, 옛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율법과 양심과 사탄으로부터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유가 오히려 죄, 죽음, 옛 속박, 사탄을 위한 자유가 된다면 이 얼마나 주님의 구속 사역에 배치되는 일이 될 것인가? 어떤 자라도 계속적으로 범죄하며 산다면 그것은 그가 영적으로 죽어 가고 있다는 결과를 드러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을 통하여 몸의 죽은 행실을 죽이게 된다면 영적인 생명을 다시 회복할 것이다.

      여섯째, 보증자 되신 성령님을 어떻게 하면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겠는가?

      1. 우리가 범죄로 성령님을 근심케 해 드릴 때, 지체 말고 말씀의 거울 앞에 서서 우리 안에 있는 죄를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 고요히 나아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고 토설하면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자비와 긍휼과 인애가 풍성하신 주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깨끗하게 해 주시고 회복의 기쁨을 주실 것이다.

      성령님을 다시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은 오직 한가지 길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가 지은 죄를 자백하는 길이다. 오늘의 현대인들은 죄를 자백하라, 회개하라는 설교를 제일 싫어한다. 목회자들도 그런 설교에 부담을 느끼는 성도들을 의식한 나머지 거짓 축복과 평안만을 빌기를 좋아한다. 그리되면 주님은 매우 슬퍼하시고 마귀는 너무나 좋아할 것이다. 실지로 우리 한국 교회 내부적인 상황이 그런 사실들을 증명해 주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많이 빌어 온 우리들의 평안은 지금 다 어디로 갔나? 쌓을 곳이 없도록 내려진 축복들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이야말로 회개하고 돌이켜야 할 때이다. 그것도 너무나 시급히 행해져야 할 과제들이다. 좌우를 둘러보기 전에 먼저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회복의 용광로 속으로 집어넣어야 한다.

      성도들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그리고 성령님과의 원활한 교제를 이루고 성령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길은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 자백하는 길밖에 없다. 자백을 힘들어하는 것은 그만큼 죄의 수렁에 깊이 빠져 있다는 증거이다. 자백을 싫어하는 것은 그만큼 마음이 교만한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고백하고 회개치 않는 다면 그는 그만큼 마음이 강퍅해졌기 때문이다. 인간은 죄를 지을 때 다 무신론자가 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죄 가운데서는 자기 자신만을 신앙하기 때문일 것이다.

      죄를 자백한다는 것은 결국 영적 싸움이기에 용이한 일이 아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더욱 힘들다. 성령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라. 우리는 죄를 고백하지 않고 숨기려 할 때 결코 형통하지 못할 것이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2. 죄에 대하여 민감해야 한다.

      철저히 죄에 대하여 민감해야 한다. 혹여시 연약해서 범죄할 경우는 성령께서 탄식하시며 근심하시고 계신다. 이 때, 범죄한 죄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철저하게 회개해야 한다. 대충 회개하거나 적당히 회개하거나 미루어서는 안된다. 죄는 하나님과 단절, 자신과의 단절, 이웃과의 단절, 물질과의 단절을 가져 온다. 죄는 하나님과의 신령한 교통을 막아버린다. 아름답게 자라던 꽃나무에 비치는 햋볕은 차단하면 서서히 말라 죽는다. 죄는 하나님과의 은혜의 빛을 차단한다. 영혼의 시들어지고 만다. 하나님의 관계가 단절되고, 영적으로 무기력해지고, 생명의 빛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성령의 보증을 받은 성도,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은 철저히 죄에 대하여 민감해야 한다.

      3. 하나님의 용서를 믿음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

      요한일서 1장 7절에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용서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죄의 확신을 가지고 믿음으로 자백하면 그 순간 성령님은 더 이상 근심하지 않으시고 또한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동에서 서가 먼 것같이 사하여 주시고 기억도 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하나님과 막혔던 관계가 회복되어 지고 새로운 은혜의 생활을 하게 된다.

      4.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우리가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아들이고 성령님과 교제가 회복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최선의 방책은 계속해서 성령님의 충만과 지배를 받는 것이다. 계속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성령님께 자신을 맡긴다는 구체적 의미가 무엇일까? 디모데전서에 보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자신의 영적 삶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바람직한 영적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이렇게 권면하고 있다.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 4:16). 쉽게 표현하자면 영적인 삶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그 영적 양식을 계속적으로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에베소서 5장 18절의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
      골로새서 3장에서는 말씀이 지배하는 삶을 살라
      그러므로 우리가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정기적으로 성경을 공부하는 일이 영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는 올바른 비결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뭇상하며 그 말씀을 자신의 삶 가운데 적용하는 자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쫓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게 된다” 고 말씀하고 있지 않는가.

      성도가 어떤 어려움에 처했을지라도 성령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철저히 깨닫고 매일 매 순간 마다 우리 구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성령님을 의지하고 살 때 우리 속에 성령님의 역사는 더욱 활발해지고, 바로 그 때 우리의 삶은 힘과 기쁨이 넘치며 소망을 가지고 충만하게 될 것이다.

      더욱이 성령님의 인치심을 받은 성도는 안정과 확신과 즐거움을 누리며 살게 된다.
      그리고 참다운 내적 안식과 위로와 평화와 감격이 넘치게 된다.
      그러나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성도가 죄를 범하게 될 때 사랑의 하나님이신 성령님은 근심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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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린도후서

      저자 :
      고린도후서 1장 1절은 고린도후서의 저자를 사도 바울로, 그리고 아마 디모데와 함께 그 서신을 쓴 것으로 알려줍니다.

      저작 연대 :
      고린도후서는 주후 55-57년경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기록 목적 :
      고린도 교회는 주후 52년에 바울이 두 번째 선교 여행을 하면서 거기에 방문했을 때 시작되었습니다.
      그 때 그는 그곳에서 1년 반을 머물렀는데 그가 원하던 곳에서 그렇게 오래 머문 것은 처음입니다.
      이 방문과 교회 설립에 관한 기록은 사도행전 18장 1-18절에 나와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고린도 교인들이 그의 ‘엄중한’ 편지(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를 긍정적인 태도로 받아들인 사실에 대해 안도와 기쁨을 표현합니다. 그 편지는 교회를 분리시키는 문제들, 또한 바울의 성품을 비난하고 신자들 사이에 불화를 심고, 거짓 교리를 가르치면서 자찬하는 (거짓) 사도들의 출현(고후 11:13)을 주로 다루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진실성(고후 1:15-17)과 언변(고후 10:10, 11:6), 그리고 그가 고린도 교회의 지원을 받아들이기를 꺼려하는(고후 11:7-9; 12:13)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듯 하였습니다. 또한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 방탕한 삶을 회개하지 않은 몇몇 사람들도 있었습니다(고후 12:20-21).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그의 ‘엄중한’ 편지를 잘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긍정적으로 여겼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의 대다수가 바울을 대적한 일에 대하여 회개한 것을 디도를 통해 알고는 매우 기뻐하였습니다(고후 2:12-13; 7:5-9). 이에 바울 사도는 진정한 사랑의 표현으로 그들을 격려합니다(고후 7:3-16). 바울은 또한 교회의 일부 사람들이 그의 권위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자신의 사도직을 옹호하였습니다(고후 13:3).

      핵심 구절 :

      고린도후서 3: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고린도후서 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후서 10:5,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고린도후서 13: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요약 :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에게 안부 인사를 하고 왜 그가 원래 계획대로 그들을 방문하지 못하였는지를 설명한 다음(고후 1:3-2:2) 바울은 그의 사역의 성격을 설명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승리와 하나님 앞에서의 신실함은 교회에 대한 그의 사역의 특징이었습니다(고후 2:14-17).
      그는 그리스도 의의 영광스러운 사역을 율법의 “정죄의 직분”(고후 3:9)과 비교하면서 강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사역의 타당성을 선언합니다(고후 4:8-18).
      5장은 기독교 신앙의 바탕, 곧 신자의 새로운 본성(고후 5:17)과 그리스도의 의와 우리의 죄의 교환을 요약합니다(고후 5:21).

      6장과 7장에서 바울은 자기 자신 및 사역을 옹호하고, 또한 고린도 교인들에게 다시 한 번 그들에 대한 진실한 사랑을 확신시켜 주면서 회개와 거룩한 생활을 권고합니다.
      8장과 9장에서 바울은 고린도 신자들에게 마게도니아에 있는 형제들의 본을 따라 도움이 필요한 성도들에게 풍성하게 베풀라고 권합니다.
      그는 그들에게 은혜로운 연보의 원리와 보상을 가르칩니다.

      바울은 그들을 향한 그의 권위를 다시 언급하면서 서신을 마칩니다(10장).
      그는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거짓 사도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실함을 보여줄 것을 당부합니다.
      그는 부득불 자신의 사도 자격과 그리스도를 위한 그의 고난을 자랑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자신을 "어리석은 자"라고 부릅니다(11장).
      그는 자신이 체험한 천국의 환상과 겸손을 놓치지 않도록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육체의 가시"를 언급함으로 서신을 마칩니다(12장).
      마지막 장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들의 믿음이 진짜인지 확인하도록 권한 후 그들에게 사랑과 평강의 복을 빌어주는 것으로 서신을 마칩니다.

      연결 :

      바울은 모세의 율법을 자주 언급하면서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및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의 놀라운 위대함과 비교합니다.
      고린도후서 3장 4-11 절에서 바울은 구약의 율법과 은혜의 새 언약을 대조하면서 성령은 생명을 주는 반면 율법은 ‘죽이는 것’이라고 언급합니다.
      율법은 단지 죄와 그 심판을 깨닫게 하기 때문에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직분”(고후 3:7; 출 24:12)일 뿐입니다.
      율법의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것이지만 성령의 사역은 율법을 성취하신 그리스도를 주신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와 사랑을 나타내기 때문에 율법의 사역보다 훨씬 더 영광스럽습니다.

      적용 :

      이 서신은 바울 서신서 중에서 가장 전기적이며 가장 교리가 적습니다.
      이 서신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사도인 바울이 사역자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어떤 사람인지 더 많이 알려줍니다.
      우리는 이 편지에서 몇 가지를 끄집어 내어 오늘날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 중 한 가지는 돈뿐만 아니라 시간에 대한 청지기 정신입니다.
      마게도니아 사람들은 관대하게 연보했을뿐만 아니라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습니다"(고후 8:5).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주께 바쳐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 전체를 바쳐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돈이 필요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전능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섬김을 바라고 기뻐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원하십니다.
      청지기 정신 및 하나님께 바치는 연보는 단지 돈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수입의 일부를 십일조로 바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칠 때 우리에게 복을 베푸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더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100 %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모든 것을 바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존재 전체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우리의 아버지를 섬기며 지내야 합니다.
      우리는 월급을 받은 후 연보로 하나님께 드려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가 그분을 나타내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을 주님께 바친 후, 그 다음에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 사역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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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고린도후서를 공부하는가?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있는 교회 회원들에게 보낸 이 서한은 고난 가운데서도 위안을, (바울 자신이 본보기가 되었듯이) 약한 것들 가운데서도 힘을, 거짓 교사들 사이에서 참된 교사를 분별하는 것을 주제로 다룬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고린도후서에 기록된 바울의 모범과 가르침은 여러분이 마주한 상황이나 결과에 관계없이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맺은, 영원한 성약에 참되고 충실하도록 영감을 줄 것이다.

      누가 고린도후서를 기록했는가?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이 서한을 썼다(고린도후서 1:1).

      고린도후서는 언제, 어디에서 기록되었는가?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쓴 직후에 에베소에서는 그의 가르침에 반대하여 소동이 일어났으며(행 19:23-41), 그는 마게도냐로 떠났다(행 20:1, 고후 2:13, 7:5).
      그가 마게도냐에 있는 동안에 고린도후서를 쓴 것으로 보이며, 그 시기는 대략 주후 55년에서 57년으로 추정된다.

      고린도후서는 누구를 위해, 왜 기록되었는가?

      고린도후서로 실리게 된 이 서한은 고린도에 있는 교회 회원들을 위해 기록되었다.
      바울이 제3차 선교 여행을 하던 시기에 마게도냐에 있는 동안, 디도는 바울이 앞서 보낸 서한을 고린도 성도들이 잘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고후 7:6-13).
      고린도의 교회 지부는 발전하고 있었으나, 바울은 그곳에 그리스도의 참된 교리를 부패시키고 있는 거짓 교사들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바울은 처음으로 고린도를 방문한 이후에, 아마도 두 번째로 방문했을 때(고후 1:15-16) 성도들 중 일부를 질책했던 것으로 보인다(고후 2:1, 12:21).
      예루살렘 지역 출신이었던 그 일부 설교자들은 고린도로 와서 그곳 성도들에게 유대인의 관습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바울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고린도후서의 많은 부분이 이 거짓 교사들이 일으킨 문제들을 다루는 내용이다.

      바울의 서한은 그의 말씀을 더 듣고자 했던 사람들과(고후 1-9장),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했던 사람들 모두를 위해 기록되었다(고후 10-13장).
      대체로 고린도후서에는 이 서한의 몇 가지 목적이 다음과 같이 드러난다.

      이전에 보낸 서한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 성도들에게 감사를 표현하고 그들을 강화한다.
      그리스도의 순수한 교리를 부패시킨 거짓 교사들에게 경고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자신의 성품과 권세에 대해 변론한다(고후 10-13장)
      고린도 성도들에게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후한 헌금을 하도록 권한다(고후 8-9장) \

      고린도후서에는 어떤 뚜렷한 특징이 있는가?

      바울의 서한 중 다수가 교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반면, 이 서한에서는 대체로 자신과 고린도 성도들과의 관계와 그들에 대한 자신의 사랑과 염려를 강조한다.
      바울은 자신을 비난하는 이들에게는 굳건하게 맞섰지만, 한편으로 그는 성도들의 행복과 안녕을 염려하는 애정 어린 신권 지도자였음이 고린도후서 전체에 걸쳐서 나타난다.
      그는 또한 자신의 삶에 대한 몇 가지 상세한 내용을 자전적으로 서술했으며, 자신이 지닌 “육체[의] 가시”에 대해 썼다(고후 12:7).

      고린도후서 12:2-4에  나오는 성스러운 경험에 대해 기록하면서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으로 묘사했으며,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들었다고 설명했다.
      이 시현은 앞서 그가 부활체마다 영광의 차이가 있다고 했던 교리적 언급과 더불어 볼 수 있다(고전 15:35-44)

      개요

      고린도후서 1-5장

      바울은 하나님께서 온갖 고난을 겪는 당신의 자녀들을 위로하신다고 간증한다.
      성도들에게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라고 당부한다.
      복음과 주님의 영이 하는 일은 모세 율법의 조문보다 더 영광스러운 것이다.
      역경을 겪는 독자들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이 영원함을 상기시킨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해야 함을 이해하도록 돕는다.

      고린도후서 6-13장

      바울은 거짓 교사들의 비난과 반대에 맞서서 주님의 종으로서 자신의 진실성을 변론하고 독자들에게 세상에서 분리되라고 권고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에 대하여 가르친다(고후 7:10).
      고린도 성도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금한 것에 대해 감사를 전하고, 그들에게 계속해서 후하게 헌금할 것을 권고한다.
      “거짓 사도들”에게 강력히 반박한다(고후 11:13).
      주님 안에서 자랑하며, 자신이 겪은 고난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자전적으로 상세히 전한다.
      셋째 하늘에 대한 시현을 기록하고, 성도들에게 스스로를 살피고 자신의 충실함을 증명하라고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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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린도전서(09 / 09 / 2022 - 09 / 26 / 2022)


      고린도교회를 행하여 기도하며 4번에 걸쳐 그들에게 편지하고 방문하여 권면하고 꾸짖으며 그들을 바로 세우려한다.

      첫 번째편지 : 전해지지 않음
      두 번째편지 : 고린도 전서
      세 번째편지 : 전해지지 않음
      네 번째편지 : 고린도후서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고린도 지역 지형에 위치한 최고의 상업 도시로서 로마 속령인 아가야(Achaia)의 수도이다.
      하나님의 사도 바울이 교회의 소재를 고린도로 밝히는 서두의 글은 하나님이 지역 교회를 사랑하고 있음을 나타내 준다.
      로마의 역사가 중 스트라보(Strabo) 파우사니아스(Pausanias)는 고린도 도시에 대한 유일의 기록을 남기고 있는 데 내륙이 약 3.2km의 아크로 고린도 해안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바울이 이 편지의 수신인을 서두에 분명히 명기하고 있는데, 이들은 바울이 친히 세운 교회의 교인들이며 해상에서 동서가 피차 만나고 있는 까닭에 상업과 해운업이 발달하였다.
      또한 육로로는 남북이 만나지는 특수 지역이므로 그리스 굴지의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이전에는 이곳이 로마에 대하여 항거하는 대표적 도시 중의 하나가 되기도 하였는데 B.C.14년무미우스(L. Mummius)가 이끄는 군대에 의하여 초토화되기도 하였다.
      상업이 번창한 까닭에 성도덕이나 윤리 수준이 형편 없는 곳이기도 하였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고전 1:2).

      바울은 그가 개척하여 설립한 고린도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라고 불렀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그의 제2차 선교 여행 때(A.D. 50, 51) 1년 6개월 동안 체류하면서(행 18:11) 개척 설립한 교회
      이 교회는 그 도시의 타락상 만큼이나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뜨거운 애정을 가지고 그들의 윤리적, 종교적 문제에 대하여 깊은 신앙적 통찰력으로 때로는 엄격하게, 때로는 자애로운 언어로 교훈하고 권면했습니다.

      * 사도행전 18:11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고린도 교회가 어떤 교회였는가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역사적 배경 

      고린도 시

      고린도는 로마 제국의 한 통치 구역인 아가야 도의 수부로서 총독이 주재하고 있던(행 18:12) 정치적, 군사적, 상업적 중심지었습니다.

      "갈리오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이 도시는 헬라 본토(발칸 반도)와 그 남쪽에 큰 섬처럼(현재는 1893년에 완성된 고린도 운하로 완전한 섬이 됨) 매달려있는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잇는 지협에 위치한 도시로서 동쪽 12km 지점에는 에게해 연안의 겐그리아 항구(롬 16:1)와 서쪽 2km 지점에는 아드리아해 연안의 레카이움 항구를 끼고 있는 항구 도시였습니다.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남북으로 육로를 연결하고 동서로는 해로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이러한 지리적 요건은 이 도시로 하여금 아테네, 스파르타와 함께 정치적, 군사적, 상업적 도시 국가로 번창하게 만들었습니다.
      고린도는 이들 고대 헬라의 도시 국가들의 맹주 역할을 했었으나 로마군에 의하여 파괴되었다가(B.C.146) 100년 후에 줄리어스 시이저(Julius Caeser)에 의하여 재건되었습니다.
      20만 명의 자유인과 40만명의 노예로 구성된 이곳 주민은 대다수의 희랍인과 로마인들이 주축이었으며, 소수의 유대인들과(행 18:1-17) 지중해 연안의 각국에서 모여 든 상인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헬라의 다른 도시들처렴 고린도도 다신교적 우상 숭배가 성행했고(행 17:16) 아프로디테(Aphrodite) 신전에는 1,000명의 여사제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종교적 창녀들이었습니다.
      고린도는 음란과 방탕의 도시로서 헬라에 있어서의 '허영의 거리'라고 일컬어졌습니다.
      이러한 타락상은 고린도 교회 안에 침투되어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설립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제2차 선교 여행 중에(A.D. 50, 51) 1년반 동안 고린도에 머물면서 설립한 교회입니다(행 18:1-11).
      이에 앞서 전도한 아덴에서 전도 효과를 별로 얻지 못한 바울은 고린도에 와서 전력을 다해 전도한 것처럼 생각됩니다.
      다행히 로마에서 이주해 온 유대인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나 같은 직업인 천막 깁는 일을 하면서 주로 안식일에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전도했습니다(행 18:1-4).
      그 후 실라와 디모데가 이에 합류해씁니다(행 18:5).

      바울은 고린도 전도 중 유대인들에 의하여 총독에게 고발되었으나 갈리오 총독이 유대인들의 종교적 문제라 하여 재판을 기각시켜 버렸으므로 무사했습니다(행 18:14-17).

      예루살렘 교회가 마가, 요한의 집에서 시작된 것처럼 고린도 교회는 디도 유스도의 집에서 시작됐습니다(행 18:7-11).
      그후 고린도 교회는 많은 문제로 바울을 괴롭혔으나 바울을 뜨거운 애정을 가지고 이 교회를 돌보았습니다(고전 4:14,15).

      고린도 교회의 윤리적 상황

      1. 내적 분쟁

      고린도 교회 안에는 그들에게 신앙적 영향을 준 사람들을 따라 분파가 생겼습니다.
      ① 바울이 이 교회를 개척했으므로 고린도 교회의 주류였을 것으로 생각되며
      ② 아볼로파는 성경에 능통하고 웅변적이었으므로 지적인 교인들이 이를 따른 것 같고
      ③ 게바(베드로)파는 예루살렘 등지에서 예수의 수사도인 베드로에게 감화를 받은 유대인 중심의 그룹으로 이해됩니다.
      ④ 그리스도파는 어느 파에도 초연한 입장을 취한 자들로, 배타적이며 독선적인 그룹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고전 1:11, 12).
      바울은 이러한 파당적 분쟁을 단호히 부정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각 사역자는 있을지라도 분파는 있을 수 없음을 강조했습니다(고전1:13-17   고전 3:4-9).

      2. 윤리적 상황

      고린도 교회는 근친 상간의 음행이 있었고(행 5:1).
      성도들끼리 세상 법정에 송사하는 도덕적 무질서가 있었으며(행 6:1-8),
      독신 생활자와 이혼자, 재혼자 등 결혼 생활에 대해서도 매우 난잡했으므로 바울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성서의 교훈과 도덕적 규범에 따라 상세히 지도함으로써 고린도 교회의 정결을 도모했습니다.

      3. 고린도 교회의 종교적 문제

      고린도는 우상 숭배의 도시였으므로 우상의 제물이 시중에 범람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성도들의 신앙 생활에 문제가 되었으며(고전 8:1-10:33),
      공중 예배에 있어서 여자의 머리에 쓰는 수건의 문제(고전 11:1-16),
      성령의 은사에 대한 무질서(고전 15:1-58)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종교적 문제에 대해서도 심오하면서도 구체적인 지도를 함으로써 고린도 교회에 대한 그의 목회자적 정열을 보여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고린도 교회의 논란에 대해서도 그는 끈기 있게 논리 정연한 필치로 그의 사도로서의 권위를 옹호했습니다(고후 1:15-17,  고후 10:1-13:10).

      4. 고린도 교회의 긍정적 측면

      고린도 교회는 이러한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교회였으나 그들은 매우 지적으로 우수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각종 은사에도 부족이 없는 영적으로도 풍족한 은혜를 소유한 교회였습니다(고전 1:4-7).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헌금을 하는 봉사 정신도 가지고 있었으며(고전 16:1-4), 아가야 지방에 있어서의 복음의 요람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 

      바울이 복음을 전한 지방임(행 18:1-8)
      음란과 우상 숭배가 만연함(고전 5:1)
      은혜가 풍성한 교회로 성장함(고전 12:9)

      1. 고린도 지방

      a. 아가야의 상업 도시임
        ㉠ 아가야의 수도(고후 1:1)
        ㉡ 총독 갈리오가 다스림(행 18:12)
        ㉢ 아가야 지방의 첫 개종자느 스데바나임(고전 16:15)

      b. 바울이 교회를 세웠음
        ㉠ 바울의 2차 전도 여행 중 방문한 도시임(행 18:1)
        ㉡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의 도움으로 재정적 지원을 얻음(행 18:2)
        ㉢ 하나님의 교회를 세움(고전 1:2)
        ㉣ 믿는 무리를 성도라 일컬음(고전 1:2)

      c. 고린도 지방의 윤리적 상황
        ㉠ 근친 상간이 성행함(고전 5:1)
        ㉡ 죄를 등한히 여기지 않음(고전 5:2)
        ㉢ 우상 숭배가 만연함(고전 10:7)
        ㉣ 부도덕함(고전 5:1-7)
        ㉤ 웅변과 철학이 성행함(고전 1:5)

      2. 고린도 교회의 종교적 상황

      a. 당시의 신앙 생활
        ㉠ 성령의 존재를 알지 못함(행 19:2)
        ㉡ 부활의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음(고전 15:12)
        ㉢ 교우의 송사를 불의한 자들 앞에서 행함(고전 6:1)
        ㉣ 시기와 분쟁이 있음(고전 1:11)
        ㉤ 주의 성찬을 무질서하게 행함(고전 11:20-22)
        ㉥ 네 개의 파로 나뉨

      ① 바울파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이므로 추종함(롬 11:13)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고린도 교회의 설립자이므로 추종함(행18:14) 이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1절)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4절)

      ② 아볼로파  
      아볼로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하므로 추종함(행 18:24)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③ 게바(베드로)파  
      유대인 사도로서 추종함(갈 2: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④ 그리스도파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거만을 중요시함(고전 1:11-13)
      이는 다름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12절)

      b. 교회의 분쟁에 대한 바울의 권면
        ㉠ 악한 사람을 내어 쫓으라(고전 5:13)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 자기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전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 주 안에서 결혼하라(고전 7:39)
        아내가 그 남편이 살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 교회에서 하나님의 질서에 순종하라(고전 11:16)
        변론하려는 태도를 가진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규례가 없느니라
        ㉤ 성찬에 참예하기 전에 자신을 살피라(고전 11: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 하나님께 얻은 대로 연보하라(고전 16:2)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 받은 은사대로 봉사하라(고전 12: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3. 고린도 교회의 발전

      a. 모든 은혜가 풍성함(고후 8:7)
      b. 성령이 충만함(고전 12:9)
      c. 방언의 은사를 받음(고전 12:10)
      d. 지혜와 지식의 축복을 받음(고전 12:8)

      고린도교회에 서신을 쓴 계기

      바울이 A.D.50년경(49-51년)에 고린도에 가서 복음을 전함으로 고린도 교회를 창설하였다(행 18장).
      바울은 고린도에서 18개월간 복음을 전한 후에 에베소에 있을 때에 고린도전서 ‘이전의 편지(Previous Letter)'를 고린도에 보냈던 것 같다(고전 5:9).
      바울이 어떤 계기로 그 편지를 썼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편지는 탐욕과 강도와 우상숭배와 아울러 특별히 신자들 중에 성적인 부도덕에 빠진 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룬 내용이었다.
      바울은 그 후에 A.D. 53-54년경 에베소에서 고린도전서를 써서 고린도에 보냈다(16:8).
      그렇다면 바울이 왜 고린도전서를 써서 보냈을까?

      바울은 글로에의 집 편으로 고린도 교회에 분쟁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1:11).
      고린도 교회에는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등 분파들이 있었고 그들 사이에 분쟁이 이었던 것이다.
      바울은 또한 고린도 교회로부터 편지를 받게 되었다. 결혼과 독신에 대한 질문과 우상의 제물에 대한 질문이 그 편지의 내용이었던 것 같다(7:1, 8:1).
      고린도 교회의 편지는 에베소에 있는 바울을 방문한 고린도 교회의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를 통해서 바울에게 전달된 것 같다(16:17).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다룬 내용 중에 어느 부분이 말로 들은 것에 대한 편지이고 어느 부분이 고린도에서 온 편지에 대한 회신인지 1-4장의 내용, 즉 글로에의 집 편으로 들은 내용과 편지로 문의한 7-10장의 내용을 제외하고는 확인하기 쉽지 않다.
      어쨌건 바울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로부터 들은 내용과 편지로 받은 내용은 고린도 교회의 분파 문제(1-4), 간통 문제(5장), 세상법정 고소 문제(6장), 결혼과 독신 문제(7장), 우상제물을 먹는 문제(8-10장), 공예배와 성찬식 문제(11장), 영적인 은사 문제(12-14장), 육체적인 부활 문제(15장)등이었다. 바울은 이러한 사회적, 윤리적, 교회적, 신학적 문제에 대해 신학적이고도 실제적인 해결책을 고린도전서에 기록했다. 특별히 신학적으로 볼 때 고린도전서는 분파문제를 십자가의 복음으로 해결함으로 시작해서 육체적 부활을 부인하는 문제를 육체적인 부활을 증언하는 것으로 해결함으로써 끝나는 서신으로 상당한 의의가 있다.

      3. 고린도의 바울 반대자들

      고린도후서 2장 1절에서 바울은 “내가 다시 근심으로 너희에게 나아가지 않기로 스스로 결단”했다고 했다.
      이 말씀은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보내기 전에 고린도 교회에 ‘근심의 방문(Painful visit)'을 한 것을 암시해 준다.
      바울이 ’근심의 방문‘을 한 것을 통해 그 방문 이전에 이미 고린도 교회 안에 상당한 문제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고린도후서 10-13장에서 언급된 대로 고린도 교회에 외부인들이 침입해 들어와서 바울을 대적하고 고린도 교회를 혼란하게 했다는 증거가 고린도전서에는 강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9장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가 복음을 전하면서 거기서 나오는 것을 먹고 마실 권한을 언급하다가 12절에서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라고 했다.
      여기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너희”라고 하고 바울과 바나바 등을 포함한 복음 사역자들을 “우리”라고 하면서 외부에서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자들을 “다른 이들”이라고 했다.
      고린도 교회에는 이렇게 외부로부터 들어와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외부인들이 바울을 대적하고 고린도 교회를 혼란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지만, 고린도전서에서는 고린도 교회 자체 내에서 바울을 대적한 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바울이 4장 18절에서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라고 했는데, 이것은 고린도 교회 안에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여 바울의 권위를 약화시키면서 교만을 부리는 자들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바울은 15장 12절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 했다.
      바울이 분명히 고린도 교회에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했음에도 불구하고(15:1-4)고린도 교인들 중에서 “어떤 이들”은 육체적인 부활을 부인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고린도 교회의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바울이 전한 복음에 도전했음을 보여준다.
      4장 18절과 15장 12절을 보면 고린도 교회 안에 사도인 바울 자신과 바울이 전한 복음에 대해서 도전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린도전서에서는 고린도의 바울 대적자들이 고린도후서에서처럼 바울을 공개적으로 대적한 단계에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바울에 대한 적대관계는 소수에 의해서 시작되어 점차 악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1:12; 4:3, 6, 18-20; 9:3; 10:29-30; 14:37; 15:12)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의 사도적 권위와 복음에 도전한 자들은 고린도의 헬라 -로마 문화권과 바울이 전한 복음 진리 간의 괴리 때문에 도전한 것으로 보인다.
      고린도 교회는 복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헬라-로마 문화권에서 중시하는 ‘로고스’와 ‘소피아’와 ‘그노시스’를 종래와 같이 중시한 결과 십자가의 복음, 즉 세상적으로 미련해 보이고 무능해 보이는 십자가의 ‘로고스’를 경시했던 것 같다(1:18-2:9).
      고린도 교회는 “모든 구변”(‘로고스’)과 “모든 지식”(‘그노시스’)과 “모든 은사”를 풍족하게 받았는데(1:5-7), 그것을 십자가의 복음과 통합하지 못하고 세상적인 웅변화 지식 면에서 생각하면서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바울과 그 복음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고린도 교인들이 헬라적 웅변과 지혜의 각도에서 보았을 때에 바울에게는 그런 것이 부족했던 것이다(2:1-5).
      그들이 헬라-로마 문화에서 자랑하는 지도자의 웅변과 지혜와 명예 면에서 볼 때 “만물의 찌끼”와 “세상의 구경거리”같은 십자가와 이에 걸맞는 십자가의 복음 사역자 바울은 초라하게 보였을 것이다(4:6-13).
      그들은 스스로 이미 성령을 받아 하나님 나라가 실현된 상태에서 다스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4:8)(“과도실현”종말론, “영화 종말론”)바울은 초라하기 짝이 없으니 십자가의 복음과 십자가 복음의 사역자를 이해하지 못한 그들이 바울과 바울이 전한 복음에 대해 도전한 것이다.
      사실 ‘로고스’와 ‘소피아’와 ‘그노시스’와 ‘프뉴마’(성령)가 교만과 자랑의 요인과(4:6, 18; 5:2; 8:1) 고린도 교회안에 분파와 분쟁의 요인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바울과 바울이 전한 복음에 대해 도전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바울이 9장에서 자신의 사도권을 강력하게 변화한 것도 “바울을 힐문하는”, 즉 재판자리에 앉아 바울을 재판하는(9:3)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의 사도권을 무시한 대적자들은 심지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문제에 있어서도 유일하신 하나님만 계시고 우상들은 없다는 ‘그노시스’(지식)에 근거하여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다고 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신전에서 제사과정 중 하나로 우상제물을 먹는 잔치 행사에 참석하여 그 음식을 먹는 것도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주장한 것 같다(8-10장).
      바울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에 있어서도 자신의 사도권이 무시되는 것을 염두에 두고 9장에서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했던 것 같다. 바울은 그러면서도 자신은 자신의 사도권을 자신의 자유와 권한을 누리고 행사하기 위해서 사용하지 않고 어찌하든지 사람들을 구원하는 방향에서 사용하기 위해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자유로운 자신이 모든 사람들의 종이 된다고 한 것이다.

      바울이 9장에서 언급한 사도권, 즉 복음을 전하는 자가 복음을 전함으로써 거기서 나오는 것을 먹고 마실 수 있다는 것을 언급할 때 어쩌면 고린도 교회의 부자 신자들의 후원을 염두에 두었는지도 모른다.
      고린도 교회의 일부 부유한 신자들은 고린도 교회를 후원할 뿐 아니라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등 분파 형성의 배후에도 후원자들로 있었을 것이다.
      고린도 교회 안에 라이벌 가정교회들이 따로 있고 그런 후원자들이 각 분파의 가정교회를 후원했을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교인들을 후원한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런 후원자들이 볼 때 바울은 자신들의 후원을 거부하기 때문에(고후 11:7-11) 그들 속에 반(反) 바울적 심리가 생겨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그런 상황 속에서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하면서 그것을 구원의 복음 전파를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는 말을 하였을 것이다.
      고린도교회에서 바울에게 도전한 자들은 위에서 말한대로 ‘성령’ 문제에 있어서도 자만심을 가졌던 것 같다.

      바울은 14장 36-37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고 했다.
      고린도 교인들 중에 성령의 은사들을 받은 자들이 자신들만이 신령하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심지어 바울까지도 무시하는 경향을 보였던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그렇게 교만하여 자신의 사도적 권한을 무시하는 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고 한 것이다.
      고린도 교인들은 앞서 지적한 대로 성령의 은사들을 받은 것이 마치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완성된 것처럼 생각하고 자신들은 그 완성된 천국에서 다스리는 자들인 것처럼 행세하면서 교회 안에 혼란을 초래했던 것 같다.
      그들은 특별히 방언의 은사를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하나님께서 은사를 한 사람에게 다 주시지 않고 각 신자에게 분배하신다는 것과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그 지체들의 덕을 세우는 것이 은사의 목적임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12-14장). 

      본문에는 세 종류의 사람들

      1. 유대인(22절) -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 / 기적을 좋아하는 신앙
      2. 헬라인(22절) - 지혜를 찾는 사람들 / 지식 및 지성인
      3. 십자가인(24절) - 부르심을 입은 자들  / 십자가를 자랑하는 신앙 

      세 부류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자신들의 독특한 눈과 시각을 가지고 십자가를 보고 있습니다.

      첫번째 유대인

      유대인들은 이성으로 논리를 추구하는 것을 좋아하기보다는 신앙으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기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22절에서 헬라인은 지혜를 추구하지만 유대인들은 표적을 찾는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기다릴 때에도 메시야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진짜 메시야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척도도 메시야로서의 표적을 행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는 유대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전혀 메시야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분입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규하면서 하나님께 원망하면서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신 예수를 메시야라고 볼 수가 없지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메시야는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로마를 뒤집어 엎어 버리고 이스라엘의 영광을 되찾아 주는 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기대를 우리 주님 예수에게서 유대인들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범죄자의 한 사람으로 수치스럽게 맥없이 나무 위에서 죽었던 나사렛 출신의 목수를 유대인들이 어떻게 메시야로 믿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두번째 헬라인

      헬라인이란 혈통적으로 그리스인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와 지식을 숭상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요즈음 말로 헬라인을 정의한다면 세상 고등 교육을 잘 받은 지성인이라는 말입니다.

      이들은 십자가를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십자가를 foolish하다, 즉 미련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십자가는 미련한 것이기에 그 십자가 안에는 참된 지혜를 찾을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십자가를 경멸합니다.
      그들은 철학을 통하여 사물의 근본을 밝히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지성적인 눈에는 십자가는 천하기 그지없습니다.

      세번째 십자가인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형틀에 죽었습니다.
      그런 수치스러운 십자가를 우리들은 자랑합니다.
      23절과 24절 말씀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18절에 기록되어 있는 데로 십자가의 도, 즉 십자가의 메시지는 현재 영적으로 멸망 당하여 있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현재에 얻어 가지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누구입니까?
      오늘 우리들에게는 2천년이라는 시간의 갭이 있어서 십자가가 미화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의 이미지는 오늘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는 아름답고 고상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 당시의 십자가는 그야말로 처절한 십자가입니다.
      피를 흘리면서 고통 스럽게 죽어 가는 처형대라는 말입니다.
      그런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가는 예수를 바라 보면서 그를 주님이라고 부를 수가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 십자가에 못박혀서 피흘리면서 고통스럽게 죽어 가는 예수를 저주 받은 자로 보았습니다. 십자가에서 절규하면서 죽어가는 예수를 바라보면서 예수께서 주님이시다 라는 고백을 하는 무리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 저 뒤에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인데, 그것이 무엇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
      피흘리며 죽어 가는 예수의 모습 속에 무엇이 나타나 있습니까?
      오늘 본문 24절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십자가 저 뒤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첫 번째로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어떤 능력입니까? 나의 죄를 사하는 능력이 십자가입니다. 인생들이 죄를 지어서 죄에 매여 살게 되었습니다. 그 죄의 속박과 죄의 권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막강한 힘과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죄인들이 그런 죄의 속박을 부수고 죄의 권세로부터 탈출하도록 만들어 주는 권세가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18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되어져 있습니다:십자기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는 죄를 멸하는 능력입니다.
      인류의 과학기술 문명이 발달하여서 로켓을 쏘아서 지구를 벗어 나서 달로 그리고 태양계 밖으로 까지 나갈 정도가 되었습니다. 로켓이 지구를 벗어 나기 위해서는 지구가 끌어 당기는 중력을 뿌리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힘이 없으면 로켓은 땅으로 떨어 집니다. 굉음을 내면서 로켓이 하늘로 솟아 올라가는데, 몇 분 동안 중력을 뿌리치는 가속도를 내면 지구의 중력이 영향력을 미치지 않는 무중력 상태에 들어가게 되지요.
      십자가에 나타난 능력은 우리를 나락으로 잡아 당기는 죄악의 권세를 뿌리치는 능력입니다. 죄의 권세는 우리를 유혹하면서 나락에 떨어지도록 우리를 잡아 당깁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죄의 권세를 이겼습니다. 더 이상 죄의 권세가 우리를 억압하지 않는 그런 상태에 진입해 있습니다.


      두 번째로 십자가 위에는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났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빠진 인류를 바라보시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두가지의 속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 이 두가지는 서로 대척하는 속성입니다.
      하나님이 속에 가지고 있는 공의라는 속성은 인류를 그대로 멸망시키라고 주장하시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속에 가지고 계시는 다른 속성인 사랑은 인류를 구원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딜레마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모두 충족시킬 묘책이 있겠습니까?
      그 방법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고민이 해결되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자신의 딜레마에서 빠져 나오는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도 100% 만족시켰고 하나님의 사랑도 100%만족시켰습니다. 어떻게 십자가가 그런 일을 했습니까?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독생자입니다.
      독생자라는 말은 하나님과 독특한(unique) 관계를 맺고 있는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뿐이면서 하나님과 독특한 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리면서 죽었습니다.
      왜 그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는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인류가 지었던 죄값을 청산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는 죄를 짓지 않았지만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지고서 십자가에서 피흘리고 죽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었습니다.
      그냥 우리가 지은 죄를 말로 면죄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하나 뿐인 아들이 죄인인 우리를 대신하여서 피흘리고 죽었기에 그 댓가로 우리의 죄가 사하여졌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리심으로써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었습니다.
      또한 십자가 사건은 하나 뿐인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죽일 정도로 하나님이 죄에 빠진 인류를 사랑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사건입니다.

      로마서 5: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는 인류를 구원하려는 감추어진 하나님의 지혜가 들어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여러분과 저에게는 십자가는 더 이상 수치스러운 물건이 아닙니다.
      그 십자가는 여러분과 저를 죄와 죽음과 영원한 지옥의 심판에서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입니다.

      세 번째로 십자가 전도

      십자가를 통하여 죄를 멸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지혜를 체험한 성도들에게 우리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전도입니다.

      21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세상에서 솟아난 지혜인, 유교, 도교, 불교, 또한 스스로 계시의 종교라 자처하는 이슬람교도 그들 자체의 지혜로는 결코 십자가를 수용할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을 결코 세상 지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먼저 깨닫고 믿고 안 자들이 전도를 통하여 십자가의 도를 전수 할 때에 영혼을 구원할 수가 있습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를 깨우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라도 땅끝까지, 우리 주님이 가라 하는 곳으로 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면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라는 명령은 우리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전도사역을 통하여 세상 불신자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참 미련한 방법이지만, 전도 외에는 사람의 영혼을 구원할 방법이 없습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영혼이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가지고 이방 불신 세계로 가지 않기에 많은 사람들이 지옥 불 속으로 들어갑니다.
      교회에 성령 불이 꺼져 가고 있기에 수 많은 사람들이 지옥 불 속으로 들어가고 있음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다시금 교회가 성령으로 불타 오르기를 바라고 소원할 뿐입니다.

      십자가는 죄를 멸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를 죄의 늪에서부터 건져 올리는 능력이 십자가 위에 나타나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자랑입니다.
      더 이상 그것은 수치가 아닙니다.
      십자가에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우리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가 나타나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 땅에서의 모든 우리의 삶을 끝내고 영원 세계에 들어 갈 때에도 우리는 십자가를 의지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땅 위에서 생겨난 인간의 지혜로는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를 헤아려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전도를 명하셨습니다.
      지금도 우리 주님의 바람 같은 성령은 교회 밖, 불신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불고 있습니다.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교회 밖에 살고 있습니다.
      학문을 연마하며 지혜를 추구하며 사는 지성인들의 가슴속에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께서 들어가실 수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처럼 신앙적인 체험을 구하는 사람들의 심령 속에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는 들어 가실 수가 있습니다.
      주님 명령 따라서 내가 깨달아 알게 된 십자가의 도를 불신 이웃들에게 전하는 우리의 삶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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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린도전서

      십자가의 도(고린도전서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For the message of the cross is foolishness to those who are perishing, but to us who are being saved it is the power of God.

      십자가의 도( the message of the cross)

      십자가의 도(The Word of the Cross)
      - 호 로고스 가르 호 투스타우르
        Ὁ λόγος γὰρ ὁ τοῦ σταυροῦ
      The message for of the Cross

      십자가의 도는 십자가의 말씀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도(道)"라는 헬라어는 "로고스(λόγος)"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λόγος, ου, ὁ 3056

      1. 말하기,  2. 말,  3. 너의 말

      발음 / 로고스(lŏgŏs)

      어원 / 300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말(마 5:37, 눅 1:20, 행 2:22), 말씀(마 8:8, 막 4:15, 행 6:2, 11:19, 14:25, 살전 1:6), 소리(눅 3:4), 소문(눅 7:17, 행 11:22),
      이야기(눅 24:17), 글(행 1:1), 언변(고전 1:5), 모양(골 2: 23), 일(행 15:6, 18:15, 19:40), 고발(행 19: 38), 전도(골 4:3), 결산(마 18:23, 25:19), 전파(막 1: 45), 말씀(막 2:2, 요 2:22, 행 20:35), 고(벧전 4:5), 예언(벧후 1:19), 이유(마 5:32, 벧전 3:15).
      신약 성경 / 330회 사용


      * 3004. λέγω
      1. 말하다,  2. 글로 말하다,  3. 묻다
      발음 / 레고(lĕgō)
      |관련 성경 / 칭하다(마 1:16, 눅 20:37), 말씀하다(마 2:15, 눅 11:45, 요 2:22), 이르다(마 5:18), 말하다(마 6:29, 12:38, 요 8:25),
      대답하다(마 13: 51, 요 9:17), 논의하다(마 16:7), 여쭙다(마 19:7, 26:22, 막 1:30), 묻다(마 22:35, 막 8:29), 일컫다(행 15:17),
      고발하다(롬 11:2), 고하다(막 9:5, 행 5:25).
      [명] 말(막 13:37, 14:58, 행 15: 24), 대답(롬 11:4)
      신약 성경 / 2262회 사용

      십자가의 도 즉 십자가의 말씀이란 무엇일까요?

      첫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둘째는 십자가의 교훈(말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란 곧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유대인들은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실 수 있는가?
      이것은 사람들의 눈에 그렇게 보였을 것이라는 주장을 합니다.
      이러한 주장을 가현설(假現說)이라고 합니다.

      가현설(假現說)을 영어로 도우시티즘(Docetism)이라고 합니다.
      도우티시즘이란 그리스어로 "보이다"라는 뜻의 '도케오'(δοκέω)가 어원으로 예수의 몸은 환상일 뿐이라는 영지주의 교리를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증언합니다.
      이사야 7:14b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마태복음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성육신(成肉身) 이라고 합니다.
      성육신이란 강생(降生, incarnatio)이라고 하여 하나님이 사람이 된 사건을 말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강생한 하나님 즉 하나님의 공현(Epiphany)이라고 믿습니다.

      십자가의 도란 십자가의 교훈을 말합니다.
      십자가의 교훈이란 십자가의 복음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고린도교회에는 여러 당파들이 서로 자기들이 믿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도를 말합니다.

      다양한 교단과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어지럽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교회는 오직 하나뿐입니다.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며 교회도 하나뿐입니다.
      어느 교회 어느 교단을 자랑하지 말고 오직 십자가의 도가 되는 예수님만을 자랑하며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지 말고 끝까지 그 길을 걸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통해 예루살렘에 최초의 기독교 공동체가 생겨난다(행 2:37~41).
      성령이 오시면 능력을 받아 예수의 증인이 되리라는 예수의 약속이 본격적으로 성취되기 시작한다.
      베드로를 포함한 다른 제자들의 놀라운 변화(행 2:14~36)도, 신도 수가 삼 천이나 "더해진 것"(행 2:41, 수동태의 주체는 성령)도 성령의 능력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누가는 성령의 역사로 시작된 예루살렘 공동체의 삶을 세 번에 걸쳐 간략하게 서술한다(2:42~47; 4:32~35; 5:12~16).
      여기에 나오는 초기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성령 충만(자기 비움)을 통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행 2:36)의 가치관과 삶이 어떻게 변화될 수 있는지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그중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행 2:42~47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네 가지 공동체의 중요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첫째, 가르침을 받는 공동체

      가장 먼저 사도들의 가르침이 나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도들이 지상의 예수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목격자요 증인이라면, 그들의 가르침은 곧 예수의 가르침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에서 그들이 믿고 섬기는 주님의 교훈을 배우는 것은 가장 우선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도들의 가르침이 진리임은 그들을 통해 나타난 기사와 표적들이 입증해 준다(43절).
      예수의 기적이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대한 가시적인 징표인 것처럼, 사도들의 기적은 그들의 선포와 가르침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다는 점을 확인시켜준다.
      이런 기사와 표적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경외심이었다(2:43; 5:5, 11; 8:13).

      둘째, 사랑하는 공동체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가 된 공동체(41절)가 서로 연합하고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 '교제'란 말은 헬라어 '코이노니아'의 번역인데 이러한 교제는 성도 간의 재산 공유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44~45절; 4:32).
      예수의 부활을 확신하는 성도들에게 돈이나 권력은 더 이상 절대적인 가치가 되지 못한다(행 4:33~34; 행 26:29).
      이러한 재산 공유 공동체의 가장 큰 특징은 자발성이었다(4:32~35).
      가진 자가 자신의 전 재산이나 그것의 일부를 내놓는 것은 성령의 감동에 따른 자발적인 헌신이었다.
      다양한 인종과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사랑으로 하나가 된 공동체의 존재 자체가 외부에 있는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가장 강력한 매력과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셋째, 예배하는 공동체

      처음 교회는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만날 때마다 떡을 떼며 기도에 힘썼다.
      "떡을 떼다"는 말은 단순히 음식을 나눈다는 의미보다는 공동식사와 함께 거행된 성만찬을 의미할 것이다(고전 11:17~34).
      처음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모범을 따라 자주 식탁공동체로 모인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성만찬과 함께 처음 공동체의 주요 예배 행위는 기도였다. 사도행전에는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그리스도의 삶에 있어서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1:14; 3:1; 6:4; 10:4, 31; 12:5; 16:13, 16).
      이전에는 성전에서 행해지던 예배와 기도가 이제는 어떤 특정 장소나 공간을 넘어서 성령이 임하시는 곳이면 어디서든 드려진다.
      처음 교회가 성전에서 모이기도 했고 집에서도 모였다는 점(46절)은 오늘날 교회의 공식적인 예배와 비공식적인 소그룹 모임 간의 바람직한 균형을 예시할 수 있다.

      넷째, 전도하는 공동체

      본문에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전도했다는 언급은 없다.
      그러나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는 2:47의 요약은 처음 기독교 공동체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온 백성의 칭송(47절)은 그들의 경건한 삶과 사랑의 교제가 불신자들에게 끼친 가시적인 영향을 말해준다.
      교회의 일치와 연합(2:46; 4:32; 5:12), 상호 사랑, 모범적인 삶의 방식이 지역사회에 매력적인 것으로 드러날 때 교회는 그 자체로 세상에 대한 선교적 공동체가 된다.
      사도들의 강력한 선포와 교회의 변화된 삶이 초기 교회 선교의 중요한 요소로 나타난다.

      처음 교회는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와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의 균형을 이루었기에 부흥할 수 있었다.
      오늘날 교회의 참된 부흥은 이러한 초기 그리스인의 영성을 회복하는 데 있다.
      그들에게는 분명 우리가 잃어버린 교회 본연의 모습이 있었다.

      세상에는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다른 것들이 있습니다.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다가 적이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랍니다.
      다 같은 예수믿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가 이단인 것을 알고 깜짝 놀라기도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저는 이슬람 학생과 대화를 하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이슬람 경전인 코란에 “예수를 믿으라”는 말이 나온다는 겁니다.

      이 학생은 코란에 예수에 관해 참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코란에 나오는 예수에 대한 기록을 들어보니, 성경에 나오는 것과 거의 비슷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신 것이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셨다는 것, 그리고 그 복음을 믿어야 한다고도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자들을 고치시고 놀라운 기적을 베푸신 것도, 또한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것과 다시 재림하실 것도 기록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쯤 되면 이슬람교는 유대교보다 우리 기독교에 더 가까운 종교라고 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자칫 이슬람교와 기독교는 충분히 대화가 가능한 종교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한 가지 있었습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슬람은 예수의 십자가에 대하여 생략하거나 무시하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고 단언하며 가르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음을 모면한 후 샘이 흐르는 곳으로 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슬람교는 예수를 구세주가 아니라 알라가 보낸 위대한 선지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기독교가 예수를 잘못 가르치고 있다고 하면서 크리스챤을 적대시하고 공격합니다.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다른 것이 바로 종교입니다.
      신구약 성경을 통하여 보면 십자가가 결정적인 기준입니다.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빼면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껍데기만 기독교의 탈을 쓰고 있는 것이지 진정한 기독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예수의 기적을 믿고, 예수의 말씀을 따르려고 노력하고,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승천까지 믿는다고 해도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가 빠지면 그것은 헛된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의 십자가를 부인한다면 아무리 예수를 치켜세우고 심지어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해도 그들은 모두 적그리스도입니다.

      오늘날 많은 종교, 많은 사상에서 예수를 인정합니다.
      예수를 치켜세우고 존경을 표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들이 말하는 예수 안에 십자가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의 죽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 구원이 없는 것입니다.
      많은 크리스챤들이 예수님를 닮아가야 할 모델로 따릅니다.
      그 말씀을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정작 십자가의 죽음이 생략되거나 강조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나 지혜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기독교의 핵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의 도로 우리가 구원을 받고, 십자가의 도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의 도”란 과연 무엇일까요?

      “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는 “로고스”로서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도”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에 대한 말씀”을 가르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에 선포되어지는 말씀 – 즉 복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복음이 무엇일까요?
      십가가의 복음은 과연 무엇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

      먼저 십자가의 도 – 곧 십자가의 복음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나타내신 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24절).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는 말씀을 하시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죄악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말씀을 세상에 보내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란 표현은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모든 활동이 담겨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런 활동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는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성육신 자체만 보아도 하나님의 초능력입니다.
      마리아에게 나타난 천사들의 말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마실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눅1:35).
      동정녀 탄생에 대하여 믿지 않는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던지 예수 그리스도는 초능력으로 죄가 없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이 바로 성경의 선포입니다.

      예수님의 세상에서의 삶만 보아도 하나님의 능력 자체를 볼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바울은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의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롬 1:3-4).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하나님의 신성을 가지시고도 제한된 세상의 삶을 사시며 죄가 없이 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죄가 없는 삶은 당시 세상 사람들에게 논란의 대상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죄와 상관없이 해맑은 양심을 가지고 살 수 있을까?”

      예수님의 죽음도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 쓰게되면 우리는 그 억울함을 호소하며 발버둥 칠것입니다.
      현대사회라면 아마도 고소하고 항소하고 대법원까지 가서라도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며 싸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침묵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죄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스스로 자신의 머리를 숙이시고 자신의 영혼도 하나님 아버지께 의탁하시며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는 감당할 수 없는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다시 사심도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태초부터 하나님이 행하셨던 모든 이적과 능력의 사건들을 아우르고 대치해 버리는 최고의 능력을 행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능력은 결국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로 종결이 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런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십자가의 복음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다이내믹한 능력으로 나타난 것을 믿은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지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24절).
      본문에서 조금 지나 30절에 보면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지혜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의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예수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불가능한 일이 하나님의 지혜로 우리가 의롭게 변화된 것입니다.
      수천년 전에 욥기에서 빌닷의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겠으며…”(욥 25:4)라는 질문의 바로 그 답이 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음에 내어주심을 당하시고 또한 우리의 의를 위하여 살아나셨습니다(롬 4:25).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단순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하나님의 지혜로 우리에게 돌려진 것입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의 문을 열어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그들의 모든 노력은 허사이고 시간낭비입니다.
      이미 2000여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꼐서 이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우리가 해야하는 것은 믿음으로 빗장을 열고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지혜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거룩함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결코 거룩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거룩함이 있다면 매일 매일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거룩함이한 안과 밖이 같은 것입니다.
      감출 것이 없는 것이 바로 거룩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안과 밖이 같으신 거룩한 분이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분이란 것입니다.
      성도의 삶은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십자가의 능력으로 매일 매일 실험적으로 살아내어 밖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거룩한 삶이 내 노력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지혜가 되시는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때문이란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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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령한 자(고린도전서 2: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The spiritual man makes judgments about all things, but he himself is not subject to any man's judgment.

      고린도전서에서는 사람을 세 종류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육에 속한 사람(The man without the Spirit)(2:14)

      Ψυχικὸς δὲ ἄνθρωπος
      The natural however Man

      둘째는 신령한 사람(The spiritual man)(2:15)

      ὁ δὲ πνευματικὸς
      He who however Spiritual

      셋째는 육신에 속한 사람(worldly)(3:1) The Man of the Flesh

      ὡς σαρκίνοις
      as to fleshly

      * worldly : 세속적, 속세의
      • worldly, secular, 
      • the world, secular society

      육(肉)에 속한 사람, 육신(肉身)에 속한 사람, 영(靈)에 속한 사람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일을 받지 못하는 인본주의적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불신자들을 말합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영적 미숙아로서 시기와 질투, 미움과 분쟁이 있어 공동체 생활에 적응하기가 어려운 교인들이라고 하겠습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위해 섬기며 살아갈 수 있는 성도를 말합니다.

      이 세상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가시적인 현상만 보게 됩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땅의 일에는 관심이 없으며 영원한 천국만을 사모하며 일합니다.
      성령과의 교통 안에서 일합니다.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사람, 천국 시민권자로 살아가고 있기에 행인과 나그네의 삶에는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믿음의 사람으로서 강하고 담대하게 살아갑시다.


      교인(敎人)과 그리스도인(基督人)

      교인이란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 즉 교회에 다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한국어 사전에서는 기독교인을 ‘기독교를 믿는 사람’, 성도는 ‘기독교 신자를 높여 부르는 말’로 풀이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인과 성도에 대한 세상의 이해이며, 기독교인조차도 이러한 이해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은 물론이고 기독교조차도 성도에 대한 이해가 바르게 정립되어 있지 못한 현실입니다.

      이로 인해서 스스로 성도라 자처하면서도 정작 성경이 말하는 성도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성도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 다만 기독교인이라는 종교인의 길로만 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기독교인으로 사는 것을 성도의 삶인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린도전서 2:14) 

      육에 속한 사람이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일까요?
      누군가가 여러분께 ‘당신은 육에 속한 사람이다’라고 말하면 기분이 나쁘겠지요?

      육에 속한 사람을 말할 때 그 반대의 의미로 영에 속한 사람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로마서 8:5-6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바울은 인간을 육신과 영으로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따라서 육에 속한 자와 더불어 영에 속한 자가 있습니다.
      영에 속한 사람을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5:48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여기서 생각할 것은 신자 또한 육에 속한 자였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5-6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신자라 할지라도 그 본질은 진노의 자녀이고 죽은 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육에 속한 자인 것입니다.

      로마서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모든 일이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즉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을 때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는 죽은 자에서 산 자가 된 것이고, 흙에 속한 자라는 신분에서 하늘에 속한 자의 신분을 얻은 것이고, 육신 속한 사람에서 영에 속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존재의 변화, 신분의 변화는 오직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육신에 속한 사람에게 ‘영에 속한 사람이 되라’는 말이 가능할까요?
      당연히 가능하지 않는 말입니다.
      영에 속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선택한 자에게 주어진 은혜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육신에 속한 사람에 대해 언급하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성도로 지칭했습니다.
      그 말은 고린도 교회가 죄의 죽음에서 생명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늘에 속한 자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고린도 교회는 성도로서 육신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결론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특정 사람에게 속한 것을 자랑으로 여겼고, 그로 인해 분쟁과 분파가 있었으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다시 말해서 육신에 속한 사람에게 어울리는 모습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성도로 인정되는 교회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자신에 대해 혼란스러워 하고 갈등하며 당황하는 것 중의 하나가 자신에게서 도무지 성령 받은 것 같지 않고 믿음이 아닌 것 같은 모습들이 있다는 것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은 거룩한 성도답지 않은 부정적으로 생각되는 모습들로 인해서 성도라는 존재성에 대한 회의와 의심에 붙들리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분쟁과 분파 등 수많은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 이상합니까?
      그런데 그러한 교회를 향해서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성도로 지칭한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인간의 본질은 죄에 속한 자이고 죽음의 존재입니다.
      비록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고 하늘에 앉힌바 되었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본질이 달라진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오해하기 때문에 자신에게서 육신의 모습이 보이는 것으로 당황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육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로 구분됩니다.
      그리고 영에 속했다는 것은 육에 속한 자로부터 나왔다는 것이기 때문에 육에 속한 자의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일반적 생각입니다.
      영에 속했다는 것을 육의 세계와의 결별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현실은 우리가 상상하는 신앙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고린도 교회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육에 속한 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여러 부정적인 행동들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자신의 성령 받음이나 성도됨에 대하여 확신이 희미해지면서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고린도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교회에서 동일하게 발생하는 문제로 인식해야 합니다.
      모든 인간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여러분께 문제가 있다면 그 또한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애당초 성도의 존재를 성도 아닌 사람보다 나은 행동을 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 잘못이며 그것을 성령 받음으로 이해한 것이 문제입니다.

      신자가 성령을 받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거룩한 성도로 여김 받지만 육에 속한 자라는 본래의 본성은 그대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자신에게서 육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목격하고 확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고린도 교회였던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를 시작하면서 말씀드렸던 내용이지만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문제없는 교회가 되게 하는데 관심이 없습니다.
      바울이 쓴 편지의 내용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바울은 교회의 문제를 책망하면서 ‘너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성도인데 분쟁하고 분파를 만들고 자기를 자랑하면 되는가? 그것은 육에 속한 사람들이나 하는 행동이니까 성도답게 행동해서 아름다운 교회가 되어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교회에 문제가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까 그런 것에 신경 쓰지 말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라는 생각만 하고 살아가면 된다’라는 취지로 말하는 것일까요?
      그런 것이라면 16장까지의 긴 편지는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몇 줄의 내용이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교회의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

      13절에 보면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분별이라는 말을 하는데 여기서 말한 분별은 아닌 것은 아닌 것으로 알고 참된 것은 참된 것으로 아는 것을 뜻합니다.
      즉 무엇이 육적이고 무엇이 영적인가를 아는 것을 분별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 하나님이 행하신 영적인 일들을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성령을 주신 것입니다.
      영적인 일은 성령을 받은 자만이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오심의 목적은 인간의 변화에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이 미련하고 어리석게 보입니다.
      그래서 방언을 하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처럼 믿음의 능력을 과시할 수 있는 것을 성령의 능력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을 아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영적인 일들을 보이지 않습니다.
      인간의 행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새로운 세계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육이 중심이 되어서 육의 가치를 높이고자 하는 속성을 드러내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영적인 일과 충돌된다는 것을 까맣게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고린도 교회의 실상이었습니다. 

      그러면 이런 의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성령을 받았다면서 왜 하나님의 영적인 일을 분별하지 못하고 육의 속성에서 나타나는 자신들의 모습을 알지 못하는가?’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드릴 수 있는 답은 성령을 받았다고 하여 그 즉시로 모든 지식과 앎에 대한 변환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아도 인간에게는 여전히 육에 속한 자로 살아온 습성이 있고 종교적 문화도 남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고넬료에게 베드로를 청하라고 말씀하시고 고넬료는 베드로를 자기 집으로 청하기 위해 욥바로 사람을 보냅니다.
      그런데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도착하기 전에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부정한 짐승이 담긴 그릇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환상을 보여주면서 잡아먹으라고 하십니다.
      베드로의 반응은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결코 먹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 강림을 체험했습니다.
      즉 성령 받은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설교했을 때 각 나라 사람들이 그 말을 알아들었고 마음에 찔림을 받아 회개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베드로가 여전히 유대교 전통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말씀드린 것처럼 성령을 받았다고 하여 즉시로 기존의 습성과 지식과 앎의 변역이 있게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신자는 성령으로 인해서 기존의 앎에 대한 갈등이 있게 되는 것이고, 생각하고 고민하는 가운데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또한 말씀을 들으면서 자신의 잘못에 눈을 뜨게 되고 복음의 의미를 알아가면서 진리의 길을 점차 분명하게 보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 받은 성도라 하여 육에 속한 사람의 습성이 전혀 나타나지 않아야 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바울이 말하는 육신에 속한 자는 언약 밖에 있는 멸망의 존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존재를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되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을 알지 못하고 영적인 일을 분별하지 못하면서 여전히 육신에 속한 자의 습성에 의한 것을 신앙으로 착각하는 것에 대한 지적입니다.
      그리고 신자라 하는 우리를 향한 지적이기도 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영적인 일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에게 속한 것으로 자신을 과시하고자 하는 것이 십자가를 믿는 것이 아니고 성령 받은 신자의 모습도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대해 무엇을 생각하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요?
      중요한 것은 다시금 십자가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절)
      십자가로 돌아가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에게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사실이 현실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고 성령을 받은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는 뜻입니다(16절).
      따라서 신자는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자신을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보기에 세상의 헛됨을 아는 것이고 육신의 가치 또한 허망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습성은 세상으로만 향하고 싶어 하고 그것이 육에 속한 것임을 알기에 나 같은 자를 구원하신 은혜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일을 분별하는 신자로 사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

      육에 속한 사람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영적인 것은 알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고전 2:14) 

      육신에 속한 사람

      육신에 속한 사람은 거듭나기는 했으나 영적으로 자라지 못하여 어린 아이들과 같은 사람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전 3:1)

      신령한 사람

      거듭난 사람의 영이 자라났을 때 이를 신령한 사람이라 합니다.
      즉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을 신령한 사람이라 합니다.

      로마서 8:5~6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이 세상에는 수많은 민족과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구약 성경은 이 땅에 사는 사람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누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으로 선택한 이스라엘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 즉 이방인

      신약성경도 두 부류의 사람으로 나누는데,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그리스도인
      예수를 믿지 않는 비그리스도인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시어 예수를 주로 믿는 사람들을 모우사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셨는데,
      그 교회 안에도 두 부류의 사람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 한 부류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며 그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
      다른 한 부류는 자신의 영광과 축복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

      다시 말하면, 하늘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땅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며 사는 사람과 자신이 행한 선과 의를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

      사도 바울은 그것을 “영에 속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으로 나누어 말하고 있습니다(고전 3:11~14). ​

      오늘의 많은 교인들이 입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 말하지만, 실제 삶에 있어서는 자신의 유익과 복을 구하며 자신의 영광과 자신의 이름을 위해 힘쓰며 사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늘 자신의 행복과 기쁨을 먼저 구하며 자기만족과 자신의 축복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며, 어떤 문제에 부딪치면 자기를 변명하고 합리화하며 자신은 잘못이 없는 사람으로 보이려고 애를 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살지 못하기에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주님이 주시는 구원의 큰 기쁨과 하늘의 위로를 얻지 못하며 늘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될 뿐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귀면, 그 사람과 자주 만나게 되고, 오랜 만남과 사귐을 통해서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되고, 서로의 생각과 마음을 앎으로 서로를 신뢰하며 사랑하게 되고, 이제 서로 소중한 친구가 되어 기쁨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귀한 관계가 되지요.

      이렇게 인간관계 속에서 서로의 사귐은 너무 귀하고 중요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은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고 사귀고 느끼며 하나님을 알고, 이제 그분을 깊이 알아 감으로 내 마음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며 의지하고 살아가는 실제적인 삶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과 깊은 인격적 사귐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알게 되고, 날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내가 하나님의 자녀 됨의 기쁨과 하늘로서 주시는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의 복을 위해 하나님을 예배하고, 더 많은 축복을 받기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거나, 교회로부터 인정받고 칭찬받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복과 기쁨을 구하는 것은,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이며, 자기를 예배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살지 못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라고 말씀하신 이유인 것입니다.

      로렌스 형제는 “하나님의 임재 연습”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다는 것은 시종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어떤 비결이나 신비로운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잠자리에서 눈을 감을 때까지 자신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을 한순간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일이다.” 라고 말합니다.​

      일을 하면서도, 길을 가면서도, 누군가를 만나면서도, 매 순간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과 사귀며 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경험하며 하늘의 큰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영에 속한 사람의 삶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 -> 육신에 속한 사람

      육에 속한 사람이 거듭나면 육신에 속한 사람이 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고 육신에 속한 사람은 거듭나서 성령으로 믿게 되어 구원받은 사람입니다(고전 12:3하).

      육에 속한 사람이 육신에 속한 사람이 되는 거듭남은 사람의 생각과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해주셔 수동적으로 거듭나게 됩니다(엡 2:1).
      그리고 육에 속한 사람이 육신에 속한 사람이 되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순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육신에 속한사람 -> 신령한 사람

      육신에 속한 사람은 믿음의 행함으로 인해 신령한 사람으로, 그리고 점진적으로 자라게 되는데 중요한 것은 행함이 없으면 자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약 2:17)

      이 때 행함이란?

      1. 기도가 아닙니다.
      물론 기도 생활은 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도를 많이 한다고 신령한  사람으로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2. 믿음도 아닙니다.
      믿음이 자라서 큰 믿음을 가져야 하지만, 믿음이 크다고 꼭 신령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3. 성경 말씀을 많이 아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 말씀을 많이 알아서 신령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을 많이 알고도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이 될 수도 있습니다.

      4. 선한 일을 많이 하는 것도 아닙니다. 불우 이웃을 도와주고 교회 행사에 열심봉사한다고  곧 신령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5. 성령의 은사를 받고 그 능력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무조건 신령하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령의 은사를 받아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고 귀신을 쫒아내고 병자를 고치고 죽은 사람을 살리면 신령한 사람인 줄로 오해하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고전 1:7) 아홉 가지 은사를 다 받았습니다.(고전 12:8-10)
      그런데도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을 신령한 자가 아니고 육신에 속한 자라고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전 3:1)

      육신에 속한 사람이 신령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1.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2.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3. 성령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 5:16)

      이 때 성령을 따라 행하지 아니하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행하면 육체의 열매 15가지를 맺게 됩니다.(갈 5:19-21)
      그러나 십자가를 지고(갈 5:24) 성령을 따라 행하면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갈 5:22-23)  

      그러므로 신령한 사람이 되는 것은 이 성령의 열매에 비례 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의 열매가 없으면 아무리 큰 업적을 남기고, 신비한 이적과 기사를 행할지라도 여전히 육신에 속한 사람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갈 5:25-26)

      영혼육(Spirit Soul Body) 3분설에 대하여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image and likeness) 창조하셨습니다(창 1:26).
      삼위일체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하긴 어렵지만,
      흔히 물의 3 상태에 비유하기도 하고(수증기, 물, 얼음)
      시간의 3 개념에 비유하기도 하며(과거, 현재, 미래)
      인간의 영혼육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사람에겐 영과 혼과 육이 있기에 셋이면서도 하나인 개념을 어렴풋이나마 납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영혼육이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기에 이 개념도 독립적인 세 분이면서도 공존하는 한 분인 하나님을 설명하기엔 턱없이 부족합니다.

      “오 주여, 신들 가운데 주와 같은 이가 없사오며 주께서 행하신 일들과 같은 일들도 없나이다(시편 86:8).

      하늘에서 누가 여호와와 비교될 수 있으리이까?
      신들의 아들들 중에서 누가 여호와와 같으리이까?(시 89:6)
      위로 하늘에나 아래로 땅에 주와 같은 하나님이 없나이다(왕상 8:23)”

      비록 영혼육의 개념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온전히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 해도, 영어나 원어 성경에 영과 혼과 육에 해당하는 독립된 단어들이 나오는 건 사실입니다.

      예전에 영혼육을 셋으로 나눠 생각하는 것은 이단이라고 쓴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한국어 성경은 ‘혼’, 즉 ‘soul(영), nephesh(히), psyche(헬)’에 해당하는 단어를 ‘영혼’ 혹은 목숨, 생각, 마음 등으로 번역했기에 ‘영혼’과 ‘육’으로 2분화 해야지 정통성을 인정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영혼육을 각각 나눠 표현합니다.

      “평강의 바로 그 하나님께서 너희를 온전하게 거룩히 구별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흠 없이 보존해 주시기를 구하노라(살전 5:23).”

      또한, 영과 혼이 같이 나오는 구절이 성경 전체에 11번인데, 이 구절들을 읽다보면 영의 역할이 있고 혼의 역할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레 20:6; 삼상 1:15; 욥 7:11; 사 26:9; 42:1; 57:16; 마 12:18; 고전 15:45; 살전 5:23; 히 4:12; 벧전 1:22).

      레위기기 20:6
      음란하듯 신접한 자와 박수를 추종하는 자에게는 내가 진노하여 그를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사무엘상 1:15
      한나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것 뿐이오니.

      욥기 7:11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아픔을 인하여 말하며 내 의 괴로움을 인하여 원망하리이다.

      이사야 26:9
      밤에 내 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

      이사야 42: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이사야 57:16
      내가 영원히는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장구히는 노하지 아니할 것은 나의 지은 그 과 혼이 내 앞에서 곤비할까 함이니라.

      마태복음 12:18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고린도전서 15:45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이 되었나니.

      데살로니가전서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과 및 관절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베드로전서 1: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구약 성경에서 영을 지칭하는 히브리 단어는 ‘ruach(רוּחַ)’이며, 혼은 ‘nephesh(נֶפֶשׁ)’입니다.
      히브리 언어엔 오히려 영과 혼은 있어도 거기에 대조해서 부를 수 있는 ‘육신’ 즉 ‘몸(육)’을 일컫는 단어는 없습니다.
      영어 성경에서 ‘body(몸)’로 번역된 히브리 단어들을 찾아보면 다 제각각이기에 더 연구해보니, 히브리어는 몸의 한 부분을(배, 등, 뼈, 살, 창자 등등) 지칭하는 단어들만 있으며 그 단어들이 전체적인 ‘몸’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히브리어에서 ‘몸’과 가장 비슷한 단어를 뽑으라면, ‘고기 육(살)’을 뜻하는 ‘basar(flesh)’일 것 같습니다.

      이에 비해 헬라어는 영과 혼뿐만 아니라 육(몸)을 지칭하는 확실한 단어가 있습니다.
      신약에 영을 지칭하는 헬라어는 ‘Pneuma‘, 혼은 ‘Psyche‘, 육(몸)은 ‘Soma‘입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영혼육에 비유해서 나눠 생각해 볼 수 있는 내용이 꽤 나옵니다.

      예를 들면, 지성소, 성소, 성막뜰로 나누어지는 모세의 성막입니다.
      가장 깊은 곳에 안치된 지성소를 영, 성소를 혼, 성막뜰을 육에 비유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에 해당하는 지성소엔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번 들어갈 수 있으며 언약궤가 있습니다.
      언약궤 안에 들어있던 증거판, 만나를 담은 항아리, 그리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히 9:4)도 영혼육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영이라면, 증거판은 혼, 만나 항아리는 육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은 나무 지팡이에서 싹이 트이는 것은 마른 뼈에 핏줄이 붙고 살이 붙는 성령의 역사로 느껴지기 때문이고,
      증거판은 혼(의지, 자아, 생각)을 순종시켜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기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요 5:39, 빌 2:16).
      그리고 만나를 담은 항아리는 주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하늘에서 내려온 빵(bread) 즉 육으로(flesh) 생각됐습니다(요 6:33, 35, 48, 51, 58).

      물론 이 부분은 개인마다 생각의 차이가 있을 터이니 제 생각만 맞다고 주장하는 건 아닙니다.

      또한 모세의 성막에서 혼에 해당하는 성소에도 3개의 기구(촛대, 분향단, 진설병)들이 있는데 이 또한 영혼육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금촛대빛은 영에 비유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며(요 4:24) 곧 빛(light)이시기에 그분 안에는 전혀 어둠이 없고(요일 1:5) 새 예루살렘에서는 어린양께서 그 도시의 빛(light)이시기 때문입니다(계 21:23).
      그리고 분향단혼을 뜻하는 기도(간청, 간구)라고 생각합니다.
      요한 계시록에는 ‘기도(prayer)’란 단어가 3번 나오는데 모두 금 향로나 금 그릇에 담은 향과 연기에 비유됩니다(계 5:8, 8:3, 8:5). 진설병은 빵이기에 역시 육을 뜻합니다(요 6:33, 35, 48, 51, 58).

      모세의 성막에서 을 뜻하는 성막뜰에는 물두멍 번제단 밖에 없기에 기구들을 영혼육으로 나누지는 못하지만 번제단에 드려지는 희생 제물들은 크게 3그룹으로 나뉩니다. 

      레위기의 5대 제사에 드리는 희생 제물들은 ‘소’와 ‘flock(양과 염소 떼)’ 아니면 ‘비둘기’에서 취합니다.
      이 3그룹을 좀 더 세밀하게 나누면 소(Ox)는 숫소(bull)와 암소(heifer)로, 양(sheep)은 숫양(ram)과 암양(ewe)과 어린양(lamb)으로, 염소(goat)는 새끼염소(kid)나 어른 염소, 비둘기는 산비둘기(dove)와 집비둘기(pigeon)로 나눠집니다.

      따라서 비둘기는 성령(마 3:16; 막 1:10; 요 1:32) 또는 신부를(아 2:14; 5:2; 6:9) 상징하기에 영에 비유할 수 있고 양과 염소는 혼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2:4절에 따르면 너희 혼의 수에 따라 양을 취하라고 되어 있고 벧전 2:25절엔 너희가 전에는 길 잃은 양 같았으나 이제는 너희 혼의 목자에게로 돌아왔다고 하며 민 15:27절은 어떤 혼이든 모르고 죄를 지었거든 암 염소를 제물로 바치라고 돼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소는 육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단 4:33, 5:21; 히 9:13).
      이것 역시 제 생각만 옳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막에 이어 성경에 등장하는 주요 나무 3가지(올리브나무, 포도나무, 무화과나무)도 영혼육에 비유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올리브나무는 영을 뜻하는 기름, 포도나무는 혼(생명)을 뜻하는 포도주(피), 무화과나무는 육을 뜻하는 열매를 내니 말입니다.
      또한 성경의 대표적인 3대 직분인 ‘선지자(대언자)’, ‘제사장’, ‘왕’도 순서대로 영혼육에 각각 비유될 수 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이 임해서 예언하거나 대언하는 사람들이며, 제사장은 희생 제물의 피로 백성들과 자신의 죄를 속죄하는 사람들이며, 왕은 백성들을 입히고 먹이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영이시지만 굳이 성부 성자 성령을 영혼육에 비유하자면, 성령은 영, 성부는 혼(자아 의지 생각 생명 마음), 성자는 육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셋째 하늘에 거하시며 거기에 ‘낙원’이 있습니다(눅 23:43; 고후 12:2-4; 계 2:7).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알았는데 그 사람은 십사여 년 전에 셋째 하늘로 채여 올라갔느니라…그가 낙원으로 채여 올라가서 말할 수 없는 말들을 들었는데 사람이 그것들을 말하는 것은 법에 어긋나느니라(고후 12:2-4).”

      따라서 하늘도 성막처럼 셋으로 나눠진 걸 알 수 있으며 셋째 하늘이 영이라면, 둘째 하늘은 혼, 첫째 하늘은 육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또한 첫째 하늘은 공기권, 땅, 땅 밑(지옥) 셋으로 나뉘어 이 또한 영혼육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이 유업이요 약속의 땅이란 의미에서 영이라면 광야가 혼, 에굽은 육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히브리어는 몸의 한 부분을(배, 등, 뼈, 살, 창자 등등) 지칭하는 단어들만 있으며 그 단어들이 전체적인 ‘몸’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주석에서 해당 부분만 발췌한 것입니다.

      http://www.biblestudytools.com/dictionary/body/

      1. In the Old Testament:

      soma, Latin corpus:

      The term “body” is not found in the Hebrew of the Old Testament in the sense in which it occurs in the Greek “The Hebrew word for `body’ is gewiyah, which is sometimes used for the `living’ body (Ezekiel 1:11), `bodies of the cherubim’ (Genesis 47:18Nehemiah 9:37), but usually for the dead body or carcass. Properly speaking the Hebrew has no term for `body.’ The Hebrew term around which questions relating to the body must gather is flesh” (Davidson, Old Testament Theology, 188). Various terms are used in the Old Testament to indicate certain elements or component parts of the body, such as “flesh,” “bones,” “bowels,” “belly,” etc., some of which have received a new meaning in the New Testament. Thus the Old Testament “belly” (Hebrew beTen, Greek koilia), “Our soul is bowed down to the dust; our belly cleaveth unto the earth” (Psalms 44:25 the King James Version)–as the seat of carnal appetite–has its counterpart in the New Testament: “They serve …. their own belly” (Romans 16:18). So also the word translated “bowels” (meim, rachamim) in the sense of compassion, as in Jeremiah 31:20, King James Version: “Therefore my bowels are troubled for him,” is found in more than one place in the New Testament. Thus in Philippians 1:8 the King James Version, “I long after you all in the bowels (splagchna) of Christ,” and again, “if there be any bowels (splagchna) and mercies” (Philippians 2:1 the King James Version).


      2:15 /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판단하다(ἀνακρίνω) 350

      1. 자세히 조사하다,  2. 질문하다,  3. 사도행전 17:11

      사도행전 17:11 /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발음 / 아나크리노(anakrinō)
      어원 / 제1부정과거 ἀνέκρινα,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ἀνεκρίθην, 303과 291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고발하다(눅 23:14), 질문하다(행 4:9), 심문하다(행 12:19,  24:8,  28:18), 상고하다(행 17:11), 분별하다(고전 2:14),
      판단받다(고전 4:3), 판단하다(고전 4:3), 비판하다(고전 9: 3), 묻다(고전 10:25,  27).
      [명] 판단(고전 2:15, 14:24).
      신약 성경 /16회 사용

      2:16 / 그리스도의 마음
      νοῦς, νοός, νοῒ, νοῦν, ὁ  3563

      1. 이해력,  2. 지성,  3. 태도

      발음 / 누우스(nŏus)
      관련 성경 / 마음(롬 7:23, 고전 2:16, 딤전 6:5), 영(살후 2:2), 총명(계 13:18), 뜻(계 17:9).
      신약 성경 / 24회 사용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성전(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Don't you know that you yourselves are God's temple and that God's Spirit lives in you?

      성전

      ναός, οῦ, ὁ 3485


      1. 성전,  2. 예루살렘 성전,  3. 하늘의 성소 - santuality 

      발음 / 나오스(naŏs)

      어원 / ναίω ‘거하다’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성전(마 23:16, 막 15:29, 눅 1:9, 고후 6:16), 성소(마 27:5, 23:45), 전(행 17:24, 고전 6:19).
      신약 성경 / 45회 사용

      성전
      ἱερόν, οῦ, τό  2411
      1. 성소,  2. 이방성전,  3.  예루살렘 성전 마 12:6 - Temple

      발음 / 히에론(hiĕrŏn) 

      관련 성경 / 성전(마 24:1, 막 11:15, 고전 9:13), 신전(행 19:27) 
      신약 성경 / 71회 사용
    1. 고린도전서 6:19-20
    2.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3.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광을 돌리라.
      Do you not know that your body is a temple of the Holy Spirit, who is in you, whom you have received from God? You are not your own;you were bought at a price. Therefore honor God with your body.
    4. 사람의 몸은 성전 성전

      우리는 우리가 섬기는 교회의 건물을 성전이라 한다.
      물론 그렇게 부를 수 있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성전이라기보다 예배당이다.
      성전은 건물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이 머물러 계시는 자리이다.
      그래서 우리들이 사는 자리가 어디이든지 그곳에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이 거하시면 그곳이 바로 성전이다.

      고린도전서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린도전서 3:16-17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기에 우리 몸이 바로 성전이 된다.
      바로 몸 성전이다.
      우리 몸이 성전이기에 성전 된 우리 몸을 소중히 지키고 가꾸어 나갈 책임과 의무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몸을 너무 소홀히 한다.
      몸에 해로운 담배를 피우고 과도하게 술을 마신다.
      운동을 게을리 하고 음식을 가려 먹지 못한다.
      성전인 우리 몸을 마구잡이로 다룬다.

      이런 잘못을 바로 잡으려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
      하나님의 영이 머무시는 성전을 가꾸는 마음으로 우리 몸을 가꾸어야 한다.
      우리 몸을 그렇게 가꾸는 데는 훈련이 필요하다.

      디모데전서 4:7-8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너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경건의 훈련
      육체의 훈련

      경건의 훈련을 통하여 우리들의 영성이 자라고 육체의 훈련을 통하여 성전인 몸이 강건하여진다.
      그런데 사람들은 영성의 강화와 육체의 건강을 분리하여 생각하려든다.
      성경의 가르침은 영과 몸이 분리되지 아니하고 일체를 이룬다.
      그러므로 경건의 훈련과 육체의 훈련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첫째, 경건의 훈련
      둘째, 몸의 훈련
      셋째, 생활의 훈련

      하나님의 성전(God’s Temple)
      나오스 데우(ναός  θεόῦ)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아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성전 - 나오스(ναός) : Sanctuary / 몸된 성전 : 장소, 위치, 건물이 아니라 성령의 임재가 있는 것
              - 히에론(ἱερόν) : Temple Area / 건물 성전

      영(지성소), 혼(성소), 육(성전뜰)



      외경 토비트 2장에 이런 기사가 실려 있다고 합니다.

      토비트라는 사람이 날씨가 너무 더워서 목욕을 하고, 얼굴을 덮지 않고 담 옆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새들이 담 위로 날아가다가 뜨거운 똥을 토비트의 눈에 누고 가버려서, 토비트가 양쪽 눈을 잃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 토비트는 그런 것으로 유명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포로가 되었을 때 이방 민족의 음식을 먹었지만, 그는 단호하게 그런 음식을 거절했던 사람, 즉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절개를 지키고, 자기의 몸을 소중하게 간직했던 경건한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구약성경에도 보면 이와 비슷한 기사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던 다니엘은, 우상에게 바쳐졌던 왕의 진미대신 채소만 먹고서도, 그 나라의 고기를 먹는 소년들보다 더 건강한 몸을 유지했던 기사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우리는 자신의 몸을 소중하게 간직한 사람들을 귀하게 여깁니다. 

      자신의 몸을 소중하게 여긴 사람이란, 자신의 몸을 깨끗하게 목욕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죄와 더러운 것에 물들지 않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나라를 위해 절개를 지켰던 정몽주나, 한 임금을 섬기기 위해 충절을 지켰던 사육신과 같은 사람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며, 열녀나 충신을 칭송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본문 말씀을 중심해서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0:21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집인 교회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유일한 기초라는 것은, 성경에 나타난 일관된 사상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터 위에 세워진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천하사람 중에, 예수 그리스도 외에 구원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으며, 교회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기초는 어떤 사람이나, 조직이나, 철학이나, 그 어떤 것도 될 수 없습니다.
      철학도 흔들리는 기초이며, 과학도 불완전한 기초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위의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것에는, 우리의 인생을 마음 놓고 세울만한 반석이 없습니다.
      교회의 기초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유일한 기초가 되실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세상 모든 것의 기초가 되신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그 어떠한 터도, 곧 사람에 의해 닦여진 사상이나 업적에 의한 그 어떤 것들도, 참다운 기초가 될 수 없습니다.
      소련은 20세기 초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사상을 기초로 하여, 레닌이 제정 러시아를 쓰러뜨리고 건설한 공산국가라고 했지요?
      한 때는 세계 최초로 우주선을 쏘아 올리며 전 세계를 놀라게 했고, 미국과 경쟁하며 세계를 양분하여 지배하던 초강대국이었습니다. 

      하지만 때가 되자 허망하게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소련이라는 거대한 제국을 세웠던 레닌의 동상은 이제 거의 모두 철거되어, 공원 한구석에 거적으로 덮여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찍이 다니엘을 통해 말씀하셨던 것처럼, 인간의 터 위에 세워진 것은 제아무리 강대해 보이는 나라라도, 결국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비단 한 나라 뿐만 아니라, 각 사람의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의 기초로 삼지 않는 사람들 역시, 제아무리 화려하게 성공한 것처럼 보여도, 결국 때가 되면 무너지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인생의 기초로 삼지 않은 자들은, 장차 마지막 심판 날에 자신이 세운 모든 공적이 무너지는 것을 볼 것이며, 그 자신도 영원한 멸망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그 어떤 다른 기초에 두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두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와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사, 우리를 요동치 않게 하실 영원한 반석이 되심을 믿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의 집’이라고 했던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였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신 것을 알지 못하느냐?”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향해, 그들이 곧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물론 이것은 비단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라, 만 세대 모든 성도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선언은 유대인들에게는 충격 그 자체요, 그들에 대한 정면 도전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성전은 오로지 예루살렘에 있는 돌로 지은 성전 한 곳 이외에는 있을 수 없다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그곳은 자신들조차도 함부로 접근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거룩한 곳이어서, 이방인들은 일정한 한계를 절대로 넘어서는 안 된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이렇게 제한적으로만 성전 접근을 허락하던 이방인들에게, 성전의 출입을 허락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들이 성전 그 자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성전이라 전파하고 다니는 사도 바울을 가리켜, 절대로 살려둘 자가 아니라고 흥분하며 티끌을 날렸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무슨 근거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가리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성도 안에 계시는 성령의 내주하심에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그 순간 성령께서 각 성도의 심령에 들어와 내주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이 누구십니까?
      삼위 하나님 가운데 제 3위시요,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의 영이 내주하시는 성도 역시,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즉 구약 시대의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신 것과 같이,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각 성도 안에 내주하심으로, 각 성도는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각 성도들의 집합체인 교회 역시, 하나님의 성전임에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처럼 성도나 교회를 구약의 성전에 비유한 까닭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이 성도나 교회를 하나님의 성전에 비유한 것은, 교인들이 나뉘어 분쟁하는 것이 교회를 부패시키고 파괴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중대한 죄악임을 경고하기 위함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성전을 더럽히는 자들은 사형에 처하거나, 하나님의 선민 공동체에서 추방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행위는, 곧 하나님을 모독하고 도전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성전을 더럽히는 자에 대해서는, 사형에 처하거나 선민 공동체에서 추방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성경을 보면 성전을 더럽힌 자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징벌하신 사례가 나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율법에 지시되지 않은 불로 분향함으로써, 성소를 더럽혔던 나납과 아비후를 즉시 불로 심판하셨으며, 제사장이 아니면서도 스스로 하나님께 제사했던 사울 왕과 웃시야 왕을 심판하기도 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성전을 더럽히는 일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일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처럼 돌로 지어진 성전을 더럽히는 자에게조차, 엄중한 형벌을 내리도록 규정하신 하나님께서, 영적 성전인 교회 공동체를 더럽히는 자들을 멸하실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므로, 분쟁을 그치고 교회를 거룩하게 유지하라는 것이 곧 사도 바울의 교훈인 것입니다. 

      그래서 17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고 했습니다. 특별히 이 말씀은 두 가지 측면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경종을 울립니다. 먼저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를 더럽히는 일에 대한 경고가 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인 성도들의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교회 역시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더럽히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파당을 만들어 분쟁함으로써, 교회를 더럽히고 파괴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더럽히고 파괴하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는, 간혹 자기의 이기적인 탐심을 위해, 교회를 나누고 더럽히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 역시 결단코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성도 자신을 더럽히는 일에 대한 경고가 됩니다. 이미 여러 번 언급한 대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각자는 스스로 죄와 불의를 멀리함으로써,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을 깨끗하게 간직해야 합니다. 만일 성도가 자기 몸을 죄 가운데 두며 회개하지 않고 계속해서 불의를 행하면, 심판을 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표어 중 첫 번째는 ‘순결한 신앙 공동체’입니다. 그것은 먼저 우리 교회가 신학적으로 영적으로 너무도 혼란한 이 시대에, 순수 복음 신앙을 간직한 순결한 신앙 공동체가 되자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소돔과 고모라를 훨씬 능가하는 성적으로 타락한 이 시대에, 육체적으로도 순결한 신앙 공동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정한 표어입니다. 

      3S 시대란 Science, Sports, Sex를 말합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Speed 시대라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문화와 성을 찬미하는, 소위 성의 혁명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현대의 가장 강력한 종교는 성의 종교라고도 했습니다. 이 성의 종교는 가장 많은 숫자의 신도들을 거느리고, 우리의 세계에 군림하고 있습니다. 여러 해 전 미국의 ‘패인’ 제단에서, 유명한 교육자들을 통하여 영화를 연구케 한 일이 있습니다. 

      그들은 1500편의 영화를 검열한 후, 대부분의 영화 주제가 성문제였다고 보고했습니다. 이미 우리의 청소년들도 이와 같은 음란한 영상물을 보며 자라고 있습니다. 수많은 잡지와 T. V의 노골적이고 선정적인 화면, 컴퓨터의 사이버 포르노 등, 도처에서 성문화가 홍수처럼 범람하고 있는 시대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엘톤 트루불러드(Elton Trueblood)는 말하기를 “문명의 부패는 잘못된 성 모럴의 미화에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한 시대 한 문화 한 사회가 몰락하기 이전에, 그 사회가 성의 문제를 어떻게 취급했는가를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잘못되고 부패한 성모랄 성도덕을,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그 사회는 언제나 멸망으로 치닫고 말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의 원인은, 말할 것도 없이 음행이라는 범죄 때문이었습니다. 폼페이의 최후와 로마의 멸망은, 음란과 간음의 죄가 가져온 무서운 최후였습니다. 어떤 역사가는 이러한 로마의 멸망사를 취급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로마는 희랍을 정복했지만, 희랍의 다신 문화와 오염된 섹스 문화는 마침내 로마를 정복하고 말았다.”고 증언했습니다. 로마는 희랍을 정복했지만, 희랍의 썩고 부패한 성문화까지 정복할 수 있는 거룩한 능력이 그들의 속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마침내 이 강대국은 부패한 성도덕 때문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부도덕을 정복하지 못하면, 그 사회는 결코 오래 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가공할 성도덕의 타락상을 보십시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에, 모든 사람들 속에 내재한 타락성이, 말과 행동으로 표출되는 현상이 성적인 타락입니다. 그런데 현시대의 성적 타락상은, 가히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요즘 젊은 세대를 향해 혼전순결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메시지로 들릴 지경이 되었습니다. 여러 해 전 인터넷 뉴스를 보니까, 미국의 한 여대생이 학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자신의 처녀성을 경매에 내놓았다고 합니다. 그런가하면 국내에서만도 하루 평균 500개씩의 음란 사이트가 생성되고 있다고 하며, 이 사이트들을 통해 배포되는 국내외 음란 동영상은, 하루에 1,000건이나 된다고 합니다. 온 나라가 음풍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성적 타락은 청소년 문제만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T. V 드라마는 불륜을 소재로 하여 안방을 침투하고, 간음을 조장하여 이 사회를 온통 병들게 하고, 가정을 파괴시키고 있습니다. 수많은 가정들이 불륜으로 깨어지고, 이런 면에서 기독교인들의 가정도 예외는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소돔과 고모라를 훨씬 능가하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사람들은 이러한 세태를 탓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부끄러움을 간직해야 할 처녀들까지도, 야한 모습이나 옷차림을 즐기며 섹시하다면서, 옛날 같으면 입에 올리지도 못할 말을 예사롭게 합니다. 

      전국의 모든 경치 좋은 곳에는 러브호텔이 즐비하고, 도시에도 모텔들이 교회당보다 더 많아 보이는 현실인가 하면, 사회 일각에서는 끊임없이 간통죄 폐지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남여가 합의해서 하는 성행위는 죄가 아니므로,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폰팅이니 채팅이니 원조 교제니 해서, 얼마나 많은 청소년들과 가정들이 무너져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나라의 이혼율은 갈수록 높아만 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마치 나비가 이 꽃에서 저 꽃으로 훨훨 날아다니고, 새들이 이 나뭇가지에서 저 나뭇가지로 옮겨 다니듯이, 이 남편에서 저 남편으로 이 아내에게서 저 아내에게로 옮겨 다닙니다. 

      급기야는 ‘스와핑 클럽’이라는 것까지 생겨나서, 회원들은 모임이 있을 때 부부가 꼭 동반해서 가는데, 거기에 가서 남편과 아내를 바꾸어 쾌락을 즐긴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세상은 이제 갈 데까지 간 것 같습니다. 세상은 온통 타락한 성문화의 범람으로,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 직전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이미 인류는 핵전쟁, 자원 고갈, 혹은 공해 같은 문제로 멸망 직전에 있지만, 전술한 바와 같은 타락한 성도덕 때문에 마침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고야 말 것입니다. 

      이렇듯 악한 시대에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실로 소중한 경종을 울려줍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신 것을 알지 못하느냐? 하나님의 성령이 그 안에 임재해 계시는 성도의 몸은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성령을 모신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 역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고 경고했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교회를 더럽히는 죄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를 불평으로 오염시키고, 교회를 나누고 분열시키고, 파당을 만들어 분쟁함으로써, 교회를 더럽히고 파괴하는 자들이 되면 절대로 안 됩니다. 

      다음으로 성도는 하나님의 성전인 몸을 더럽히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인 몸을 더럽히는 죄 가운데 하나가 곧 간음입니다. 성도덕이 참으로 무섭게 타락한 시대, 성 문화가 홍수처럼 범람하고 있는 시대, 예술과 문학이 아무리 성을 예찬하고 미화시킬지라도, 인본주의자들이 아무리 간통죄의 폐지를 주장할지라도, 성경은 분명히 간음은 죄라고 말씀합니다. 이 죄의 대부분이 은밀한 중에 행하여지기 때문에, 혹 사람의 정죄는 받지 않을 수 있으나, 하나님의 심판은 절대로 피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간음죄에 대한 성경의 경고를 들어보십시오. 욥 31:11에 “이는 중죄라. 재판장에게 벌 받을 악이요 멸망하도록 사르는 불이라.”고 했고, 잠 6:27-29절에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야 어찌 그 옷이 타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숯불을 밟고야 어찌 그 발이 데지 아니하겠느냐. 남의 아내와 통간하는 자도 이와 같을 것이라. 무릇 그를 만지기만 하는 자도 죄 없게 되지 아니하리라.”고 했으며, 고전 6:9-10절에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음행하는 자나....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했고, 레 20:10절에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했습니다. 

      계시록에 보면 간음하는 자들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 살인자들과 함께,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롬은 말하기를 “순간적인 쾌락을 얻고, 영원한 고통을 대신 얻는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 교회와, 우리의 몸을 더럽히지 말고, 거룩하고 성결하게 간직하는 순결한 그리스도의 신부들이 되어서, 예수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 몸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聖殿)입니다! (고전 3:16-18)

      우리 인간은 특별한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사람은 다른 동물과 달리 하나님의 특별한 작품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만물의 영장으로 모든 피조물을 지배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이 다른 생물들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생각하는 존재

      둘째는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입니다.
      언어가 있어서 자기 의사를 남에게 표현하며 의사소통을 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동물도 나름대로의 커뮤니케이션을 갖고 교류하고 삽니다만 인간과 같은 언어의 소통은 없습니다.

      셋째는 영적 존재
      그러나 인간의 가장 큰 신비는 인간은 영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동물과 같은 몸만을 갖고 있는 존재가 아닌 영혼이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영을 갖고 있는 존재로서 하나님과 교류하고 소통할 수 있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 방법으로 하나님은 성령을 우리 속에 보내주셨고 그 성령이 거하는 성도는 곧 하나님의 영이 거하므로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앞 부분에서 두 가지 중요한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하나는 교회 내의 분쟁의 문제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 사이에 바울파니 아볼로파니 게바파니 심지어는 그리스도파니 하는 파당들이 생겨나 교회가 마음과 뜻이 하나되지 못하고 파당이 생겼습니다.
      어떤 공동체라도 하나가 되지 못하면 분열이 생기고 무너지게 됩니다. 특히 교회공동체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 되는 곳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4:4-6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니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다른 하나는 지혜의 문제입니다.

      참 지혜는 세상의 지혜가 미련한 것으로 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야말로 참 지혜임을 확신시키는 문제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미련한 것으로 보는 자들은 멸망할 자들이고,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고린도전서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참 지혜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10-12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이 성령을 통해 얻게 되는 지혜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받아들이는 것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서 나뉘지 않고, 하나 되는 것을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교회'라는 개념에 연결을 시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이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이 그 안에 계셔야 하고, 성령이 계시다는 것은 십자가의 도를 믿는 지혜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서 하나 되는 지혜가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지혜가 있어야 하나님의 성전이라 할 수 있으며, 이 두 가지 지혜가 없으면 교회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교회를 각 사람의 심령 위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리 몸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16-17)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지만, 특히 우리 몸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것을 6:19절에서 더 구체적으로 강조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 몸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요, 성령이 거하시는 곳입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몸은 이제 더 이상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값을 주고 우리 몸을 사셨습니다.
      내가 주님을 영접하여 성령이 내 안에 오시는 순간부터 이제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 몸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씀에 몇 가지의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소중한 존재

      이사야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셨고, 우리를 한사람씩 지명하여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것이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러면서 4절에 서 '하나님의 눈에 나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긴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세상에서 무엇보다도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십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우리는 이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보배롭고, 존귀한 사람들, 하나님이 가치 있고,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여기에 모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는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내가 소중한 존재이기에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시고, 나의 삶을 책임지신다고 아울러 말씀하십니다.
      평온할 때는 물론이고, 혹이라도 우리 삶에 힘들고 어려울 때에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사랑하시고, 지키고, 보존하고, 이끌어 가십니다. 

      나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이 내가 고난 당할 때, 힘들어할 때, 상처받고 아파할 때, 가만히 두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나를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때마다 힘을 주시고, 평안을 주시고, 피할 길도 주시고, 모든 시련을 능히 감당하게 하십니다.

      이사야 43:2-3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둘째는 나는 하나님의 성전

      내가 곧 하나님의 성전임을 잊지 말고 행동해야 합니다. 
      '나'라는 존재는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예수그리스도를 믿기에 우리는 내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하고 더 나아가 자부심을 갖고 당당하게 살라고 하십니다.
       
      성도는 자신에 대해 두 가지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고백하는 자세입니다.
      마땅히 죄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는 용서 받은 죄인
      그러나 또 한편으로 예수를 구주로 믿어 하나님의 자녀 된 자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너무 죄인의식만 갖고 소극적으로 살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못된 짓을 하다 들켜 혼났다고 늘 죄송해하고 부모 앞에서 기죽고 사는 것을 기뻐하지 않듯이 이제 모든 죄를 용서받았으니 당당하고 멋있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는 프라이드를 갖고 담대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내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믿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때 인간이 죄 가운데 빠져 방탕할까요?
      자신에 대한 정체성이 사라질 때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며 동시에 성령이 내 속에서 거한다는 성전의식(聖殿意識)을 갖게 되면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면 좌절과 절망, 방황 속에 살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라는 존재가 가치 있는 존재요, 하나님 앞에서 쓰임 받는 존재임을 깨닫고 살아갈 때 그리스도인의 행복이 있습니다.

      셋째는 성전을 관리하는 책임

      내 몸에 성전을 귀하게 관리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배롭고 존귀한 사람들이기에, 이제 우리 몸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내 몸을 하나님의 것으로 알고 잘 관리해야 합니다.
      내 몸을 혹사시키거나 학대하면 안 됩니다.
      내 몸은 내 것이 아니기에 내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무서운 죄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자살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정면 도전입니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니 죄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자살은 또 다른 살인입니다.
      살인이란 다른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만이 아닙니다.
      자살도 일종의 살인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습니다.
      생명은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주님께서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희생하셨습니다.
      이런 귀한 생명을 버리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상황은 이해가 되어도 우리의 목숨을 스스로 끊거나 버려서는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생명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자살론을 말하자, 한 때 유럽은 자살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적이 있었습니다.
      자살 신드롬이 생겨난 것입니다.

      넷째는 더럽히지 말라

      나의 몸을 더럽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문이 바로 여기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문제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자신을 더럽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상숭배나, 음행이나, 부도덕, 세상의 문화로 깨끗하게 보존해야 할 몸을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바른 신앙을 심어주기 위해 고린도전서를 기록했습니다.
      본문도 그런 관점에서 우리가 이해되어야 은혜를 받습니다.

      자기와 몸을 더럽히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6:15-20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 몸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곳입니다. 그래서 몸을 거룩하고 깨끗하게 잘 보존하고, 몸을 지키고, 더럽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분명 성경과 세상의 문화는 다릅니다. 하늘의 것이 있고, 땅에 것이 있습니다. 세상에 속한 것이 있고, 교회에 속한 것이 있으며, 사탄에 속한 것이 있고, 분명 하나님께 속한 것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세상에 삽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문화나 관습에 빠지거나 물들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것을 상징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대표적인 것이 바로 '술과 담배'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것이 세상을 대표합니다. 하나님의 것으로서 우리는 바로 이런 것에서 나를 보존하고, 더럽히지 말아야 합니다. /아멘!/
       
      담배는 우리의 건강과 생명을 빼앗아 갑니다.
      우리의 몸을 헤치는 독과 같습니다. 몇 해 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고 이주일 씨의 금연광고가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담배, 그거 독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한때 담배의 1급 광고 모델로 남성미를 과시했던 최고의 영화배우 '율 브리너'도 담배 때문에 폐암으로 사망했습니다.
      1985년 죽기 전 녹화한 필름에서 그는 '나처럼 담배를 많이 피워서 폐암에 걸리지 말아 달라'고 간곡하게 호소했습니다.

      의사들의 연구에 의하면, 담배 한 개비를 피우면 5분 30초의 수명이 허공으로 날아간다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담배의 유해성분은 발암물질과 독성 화학물질을 합쳐 무려 4,000여종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서 가장 해로운 3대 물질이 '타르, 일산화탄소, 니코틴'입니다.
      특히 타르는 인체에 치명적입니다.
      담배 연기를 통해 인체에 흡수되는 타르 속에는 약 60여종의 발암물질이 포함돼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폐암을 일으키는 주원인입니다.
      폐암 뿐 아니라 무슨 암으로 죽던지 원인의 30-40%도 담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담배는 자기도 죽이고, 남도 죽입니다.
      그렇습니다. 담배가 바로 몸을 헤치는 주범입니다.
      담배가 이런 것이기에 절대적으로 멀리하라고 권합니다.
      하물며 내 몸을 하나님의 것으로 아는 우리가 담배로 몸을 헤치고, 더럽혀서야 되겠습니까?
      절대 안됩니다. 독을 알면서 독을 가까이 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고 강조합니다.
      독을 모르고, 아니 독을 알면서도, 독을 끊지 못하는 것이 '미련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술도 마찬가지입니다.
      술도 건강의 적이요, 독입니다.
      술은 우리 몸에 위, 뇌, 특히 간에 치명적인 병을 줍니다.

      성경에는 술에 대해 많은 교훈을 줍니다.
      물론 술은 때로 약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술을 멀리하라고 명령합니다.
      특히 에베소서에서 보면,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5:18) 

      술은 곧 '방탕'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술은 결코 술로 끝나지 않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술은 곧 방탕으로 가는 통로입니다.
      그것을 대표적으로 알려주는 사건이 성경에 나옵니다.

      다니엘서 5장에 보면, 메대와 바사의 연합군은 바사의 장군인 고레스의 지휘아래 바벨론에 진격하여 바벨론을 격파하고 성를 포위했습니다.
      이제 벨사살 왕과 바벨론의 운명은 풍전등화가 되었습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는 목숨을 내놓고 싸울 임전태세를 갖추고 깨어 경계를 해도 부족하였습니다.
      그런데 벨사살 왕은 큰 잔치를 배설하고 허세를 부렸습니다.

      그는 바벨론 중에서 중요한 인물 일 천명을 초대했습니다.
      벨사살 왕이 거나하게 취하여 술기운이 오르자 곧 자제력을 잃고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술은 이성의 조절기능을 마비시켜 본성과 본능대로 행하게 만듭니다.

      벨사살 왕이 어떻게 했습니까?
      술 취한 벨사살 왕은 명하여 그 부친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전에서 취하여 온 금, 은 기명을 가져오게 하고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로 더불어 그것으로 술을 마셨습니다.

      느부갓네살 같은 위대한 왕도 감히 거룩한 성전 기명에 손을 댈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들이 지극히 거룩하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가까이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벨사살은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죄를 범하게 했습니다.
      십계명에 비추어 볼 때 그는 신성 모독죄를 범했습니다.
      신성모독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공공연히 모욕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벨사살은 금, 은, 동, 철, 목, 석으로 만든 신들을 찬양했습니다.
      우상숭배는 또 다른 신성 모독죄입니다.

      벨사살 왕과 그 귀인들이 잔치를 벌이며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을 때, 이들 앞에 두려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다니엘 5:5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그때에' '여흥이 한창 무르익었을 때에' 술잔치가 다 끝났을 때에, 모든 사람들이 잠에 곯아 떨어져 있을 때가 아니고, 한창 지금 술잔치가 무르익은 그때에 벽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났습니다.

      조금 더 실감나게 표현한다면 '나타났다'는 말은 '툭 튀어나왔다'는 뜻입니다.
      벽에서 뭉클뭉클 하더니 사람의 손가락이 튀어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떠들면서 술을 마시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가 그 모습을 보고 놀라서 쥐죽은듯이 조용하게 되었고 찬물을 끼얹은 듯한 긴장감이 감돌았을 것입니다.
       
      다니엘 5:25
      '기록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메네'는 세어보았다는 뜻으로서 하나님이 여러 해 동안 그의 날을 세어보시다가 '이제 너의 시대는 끝났다'고 정지 신호를 내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끝났다고 선언하시면 인생들은 하던 모든 것을 중지해야 합니다. 벨사살 왕이 교만하여 하나님을 대적했을 때 하나님은 그의 날을 끝나게 하셨습니다.

      '데겔'은 '무게를 달아보았다'는 뜻으로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우바르신'은 무게를 잰 결과로 왕의 나라가 끝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과 호흡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끝났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끝난 것입니다.
      부르시면 가야 합니다.
      실제로 그 날이 벨사살의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30절을 보면 '그 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술 취함으로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사람들이 또 나옵니다.
      그중 한 사람이 헤롯왕입니다.
      헤롯이 자기 생일날 연회를 배설하였을 때, 헤로디아의 딸이 요사스럽게 춤을 추었습니다.
      만취한 헤롯은 그 춤에 매료되어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무엇이든지 원하는 데로 주겠다고 헛소리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 딸은 세례요한에게 원한이 사무쳐 있던 그의 어머니 헤로디아의 사주를 받아 요한의 목을 달라고 했습니다.
      결국 헤롯왕은 의인의 무죄한 피를 흘리는 무서운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노아도 술 때문에 큰 실수를 했습니다.
      의인이요 그 시대에 완전한 사람이라고 인정받았던 노아도 포도주에 취해 그의 막내아들을 저주하는 죄를 졌습니다.
      술은 의인이나 악인이나 가리지 않고 죄를 짓게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술입니다.
      술은 그냥 술로 끝나지 않습니다.
      방탕하게 되든지, 추태를 부리든지, 자기 몸을 내팽개치든지, 정신이 없어지던지 그렇게 이어집니다. 

      술에 잔뜩 취해 밤길을 비틀거리고 걷던 술꾼 한 사람이 맞은편에 서 있던 할아버지와 부딪혔습니다.
      순간 '꽈당'하는 소리와 함께 할아버지는 뒹굴고 말았습니다.
      겁이 더럭 난 그는 얼른 할아버지의 뺨을 두들겨 보고 가슴에 귀를 대어 봅니다.
      아무 소리가 없자, 할아버지를 업고 자기 집으로 갔습니다. 

      그는 할아버지를 자신의 침대에 뉘여 놓고 찬물을 끼얹고 다리를 주무르며 제발 살아만 달라고 애원합니다.
      그러다가 지쳐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새벽녘에 눈을 뜬 그는 기겁을 하고 말았습니다.
      물에 흥건히 젖어 있는 할아버지는 KFC의 광고용 할아버지 조형물이 누워 있는 게 아닙니까?
      술에 취하면 사람인지, 인형인지 구분이 안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18에서 '술 취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술은 먹되 취하지만 않으면 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술을 먹고 취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한잔만 먹어도 취하고, 어떤 사람은 10잔, 20잔 먹어도 취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도대체 술 취하는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하겠습니까?
      성경이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의 의미는 '술이 습관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습관이 무섭고, 몸에 베이고 중독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퇴근하면 가정이 생각나야 하는데, 한잔이 생각나는 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처음 술을 한잔부터 마시지 1병, 5병을 생각하고 마시지는 않습니다.
      한잔, 두 잔을 계속하면 습관이 되고 중독이 되어 빠져 나오지 못합니다. 

      그것은 담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이 박히고, 중독이 되면 좀처럼 끊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술과 담배가 내 삶에 습관이나 문화가 되지 말라는 뜻으로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술이 아니라 성령으로 취하고, 성령이 나를 지배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삶을 살라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몸 된 성전을 거룩하게 관리하라'고 명하십니다.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로마서 2:1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그 방법은 12:2의 말씀처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세상 사람들은 땅엣 것만 생각합니다. 그들은 썩어질 것, 덧없는 것, 일시적인 것만 추구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새로운 마음, 변화를 받은 마음은 다릅니다. 우리는 위엣 것을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영원한 것을 바라보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소망을 두면서 살아갑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세대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문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즉 세상적인 가치관에서 주님의 가치관으로 변화하라는 것입니다. 즉 성도는 세상 사람들이 즐기는 것 즐기고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같이 좋아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노는 물이 달라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 것을 본받지 않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변화란 외향적인 외모를 말하지 않습니다. 심령의 변화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라' 또 '변화를 받아라'라는 말은 다른 방향으로 가라는 말입니다.

      지금까지는 나 자신을 위해 살아왔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믿/ 그런데 그것이 내 힘으로 안됩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 즉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하나님의 뜻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별하라'는 말은 '도키마조' 시험하여 갈라놓는다는 뜻입니다. 참 진리와 비 진리를 구별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 비결은 무엇인가?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신앙 양심에서 찾아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에서 찾아야 합니다.

      마음에 성전 삼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윗 왕이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시14-15).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시 14:1)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성경은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누구인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설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엄숙하게 선언할 뿐입니다.

      창세기 1: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성경 첫장 첫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관해서는 더 이상 논할 여지가 없는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면 시인이 말한 것처럼 '어리석은 자.'가 됩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의 마음은 어떤 상태일까요?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부패한 까닭에 하나님을 깨달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패하지 않은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8세기의 유명한 불란서의 무신론 철학자 볼테르(Voltaire)는 '기독교가 세워 지기까지 여러 세기가 결렸지만 불란서의 한 사람이 50년 안에 기독교를 박멸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리라'고 큰 소리 치면서 펜을 들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은 지 20년 만에 스위스 제네바 성서공회에서 그의 집을 사서 성경 출판소로 만들었습니다. 그 후에는 외국어 성경을 출판하는 본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볼테르가 쓴 책은 6권 한 질에 1달러도 안 되는 90센트에 팔리기도 했습니다. 그가 죽을 때 한탄하며 말하기를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걸...' 그러면서 천국도 지옥도 없다던 그가 죽어가면서 고통 속에 '나는 지옥으로 간다.'고 자기 입으로 고백했답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소련의 최초 우주 비행사 유리 가가린은 비행을 하고 돌아와서 '하늘에 올라 가 봐도 하나님은 없더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모독했습니다. 그런 그가 비행사고로 34세 젊은 나이에 죽었습니다(l934-1968). 그러나 미국의 우주 비행사 암스트롱은 우주비행을 하면서 하나님의 신비한 창조의 솜씨에 충격을 받고 돌아와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세상 것에만 집착하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이 사람이 어리석은 것은 세상에 재물을 많이 쌓아 두면 그것이 영원히 자기 것이 되는 것으로 착각을 했습니다.
        이 어리석은 사람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인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많이 심으십시오! 성경은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심은 데로 거두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죽음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

      이 심판은 불신자들이 가는 지옥 음부에 심판입니다.
      그곳에서 영원히 몸부림을 치며 지내야 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 있는 우리들은 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저 천국에서 영원히 왕 노릇하며 살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교훈은 무엇인가?
      어리석은 자로 살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음의 성전 삼고 살아가는 바른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무엇인가?(시편 15:1-3)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나는 바른 예배자로 살고 있는가?'를 늘 묻고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시15:1).

        여기서 '주의 장막'이란 '하나님의 성전'을 의미하고, '유할 자'란 '계속적으로 머물러 살 자'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계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가 누구냐는 질문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입니다.

      기독교사상을 집대성한 교부 '어거스틴'은 자신이 대단한 신앙의 경지에 들어가 있는 줄로 자부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분이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천국에 갔습니다. 천국에 들어서자 입구에서 천사가 물었습니다.
        '너는 누구냐?' '저는 어거스틴이고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 천사가 다가와서 어거스틴을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야 네 머리 속에는 철학 사상만 가득 차있어'라고 호통을 치더랍니다.

      깜짝 놀라서 꿈에서 깼습니다. 그리고 차분하게 객관적인 관점에서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자 천사의 말처럼 자신은 머리로만 예수를 믿고 있더랍니다. 다시 회개하고 철저하게 신앙생활에 정진했다고 합니다.

      다윗은 시15:1절에서 '성전에 들어가서 예배할 수 있는 사람의 자격'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러 나오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물었다는 것입니다. '과연 제가 성전에 들어가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요?' 이 말씀은 예배하러 나오는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물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과연 나는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인가? 과연 하나님께서 내가 드리는 예배를 받으실 까?'
      이 말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 늘 고민하면서 살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다윗이 그리스도인의 덕목 몇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시15:20)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하나님 앞에 바로 사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직, 공의, 진실'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사는 모습입니다.

      '정직'은 '모든 참된 행위들을 포괄하는 근본적인 행위의 원리'입니다. 사람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이중적인 마음을 품지 않는 것, 즉 흠 없이 완전한 것을 말합니다.

      '공의'는 '무엇을 행하든지 치우치지 않고 상황에 따라 변하거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원칙을 거스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진실'은 '모든 언행의 근원인 마음속 깊은 데서부터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남을 속이지 않는 것은 물론 스스로에게도 정직한 것을 말합니다.

      신설동 설렁탕 집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신앙이 좋은 집사님이 설렁탕 집을 권리금을 주고 모든 것을 그대로 주방장까지 인수받았습니다.
      내일이면 이제 설렁탕 집을 운영하게 된 집사 님이 교회에 와서 간절히 기도하기를 '하나님! 우리 집에 오시는 손님을 예수님을 대접하듯이 하게 하여 주세요'

      다음 날 새벽기도를 마치고 첫 출근을 했습니다.
      주방장은 언제나 그렇듯이 하루 종일 팔 설렁탕 국물을 큰 가마솥에다 끓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고기 국물처럼 보이게 하려고 커피 후림을 약간 타서 뽀얗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것을 본 집사 님이 혼자 중얼거리기를 '예수님을 어떻게 커피 후림을 탄 설렁탕 국물로 대접 하냐?' 그리고 그 국물을 아깝지만 다 쏟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문 앞에 이렇게 써 붙였습니다. '금일은 휴업입니다!'

      식사 때가 되어 설렁탕을 먹으러 온 손님들이 왜 휴업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사정 이야기를 그대로 솔직하게 다 하자, 그 주변에 소문이 나기 시작했는데, '저 설렁탕 집은 진짜 고기국물만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그 설렁탕집은 사람들이 바글바글 끓어서 최고로 잘 되는 설렁탕 집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달라야 합니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집트의 한 가난한 농부가 알라 신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돈 200파운드만 달라는 것입니다.
      그 편지를 본 우체국에서는 수신자가 알라 신이므로 어디로 전해 줘야 할지 몰라서 계장에게 주었고 계장은 과장에게, 과장은 국장에게, 국장은 체신부 장관에게 전달하였습니다.
      이를 받은 체신부 장관은 그것을 대통령에게로 보냈습니다.
      당시 이집트 대통령이던 '낫세르'는 그 편지를 뜯어보고는 농부의 사정을 매우 딱하고 불쌍하게 여겨 대통령 이름으로 100파운드를 우송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농부는 100파운드를 받고 기뻐하거나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노발대발했다고 합니다.
      '알라 신은 분명히 내가 요구한 200파운드를 보내 주셨을 거야.
      그런데 대통령이 중간에서 100파운드를 떼어먹고 나머지 100파운드만 내게 보낸 거야' 우리들의 이야기가 아닙니까?

      어느 가게 주인이 동네 사람들에게 가까운 교회의 새로 부임해 온 목사님 칭찬을 하더랍니다.
      특히 그분 설교를 참 잘한다고 하더랍니다.
      한 번은 손님이 물었답니다.
      '그러면 목사님이 지난주에는 어떤 설교를 했습니까?'
      주인이 대답하기를 '저는 교회 다니는 사람이 아닙니다.
      한 번도 그 목사님 설교를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손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목사님이 설교 잘하는 줄 압니까?'
      주인이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그 교회 교인들이 그 목사님 오신 후에 외상값을 잘 갚아요'

      그렇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머리로 깨닫고 끝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마음으로 결심하고 끝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직하게 행하는 사람을 돌봐주십니다.

      욥기 8:6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정녕 너를 돌아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

      정직하게 행하는 자의 기도를 응답해주십니다.

      잠언 15:8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정직하게 행하는 자의 자손에게 복을 주십니다.

      시편 112:2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

      정직하게 행하는 자의 가정은 흥하게 됩니다.

      잠언 14:11
      '악한 자의 집은 망하겠고 정직한 자의 장막은 흥하리라.'

      정직하게 행하는 사람에게 장수의 축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한 히스기야 왕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그가 기도하자 그의 생명을 15년 동안 연장해주셨습니다(왕하 18:3, 20:6).

      언행심사가 바로 되어야 합니다(시편 15:3)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혀로 참소 한다.'는 말은 남을 해치기 위해서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중상 모략하는 것을 말하고,
      '행악'이란 온갖 나쁜 일로 괴롭히는 것을 말하며,
      '훼방'은 함부로 멸시하고 비난하는 것을 말합니다.

      '스펄전'은 말하기를 '남을 해치기 위하여 이 집 저 집을 두루 다니는 자의 혀끝에는 마귀가 붙어있고, 그 말을 잘 들어주는 자의 귀에도 마귀가 붙어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항상 남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축복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손과 발과 혀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전달해주는 매개체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는 지혜자로 살아야 합니다(18).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여기 '이 세상에서'는 '이 세상의 기준에 따라'라는 사는 자들을 뜻합니다.
      이 세상 기준으로 지혜 있다 하는 사람들을 신앙적인 눈으로 보면 어리석은 자일 뿐, 그러니 모두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볼 때 지혜로운 것을 세상의 기준으로는 어리석어 보여도 택할 줄 알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는 세상사람들이 보면 미련한 것으로 보이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 사실을 바로 아는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고린도전서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여러분, 인생이 이 땅에 태어나는 것이 우리의 뜻이 아니듯이, 떠나는 것도 인간의 뜻이 아닙니다.
      내 의지나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부르면 언제라도, 누구라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가야합니다.
      그것을 보면 분명 인생은 우리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 내 것이 아닌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미련한 사람은 이것을 모르고 더디 알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다릅니다.
      바울 사도는 바로 그것을 알려줍니다.
      내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고린도전서 3:21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만물이 아무리 모두 우리의 것이라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결국 우리는 곧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가만히 보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고린도전서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린도전서 2: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하나님의 성전(聖殿)   

      왜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일까요?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인 이유는 하나님의 성령이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내 안에 거하는 사람은 그 삶이 성령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삶은 성령의 사람입니다.

      (나오스, ναός)와 (히에론, ἱερόν)

      헬라어로 성전을 ‘나오스(ναός)’ 또는 ‘히에론(ἱερόν)’이라고 합니다.
      ‘나오스’는 몸된 성전
      '히에론’은 건물 성전

      한글성경에서 이 두 단어를 구분 없이 '성전'이라고 번역했지만, 의미는 많이 다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고전 3:16-17, 6:19, 고후 6:16, 엡 2:2)
      "예수께서 성전 된 자신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요 2:21)

      1세기 당시에 유대인들에게 성전은 건물성전 뿐이었기 때문에 예수님 이후의 몸 성전에 대한 이해는 전혀 없었습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 곧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시기 전까지는 성전이 대부분 건물성전 ‘히에론’을 말했습니다(마 4장, 12장, 21장, 24장, 막 12장, 요 7장, 행 2장. 행 3장, 4장, 5장, 21장,  24장, 25장).

      그러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고 하더라"는 성전은 ‘히에론’이 아니라 ‘나오스’입니다(마 26:61, 27:40, 요 2:19-21).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는데, 그 '성소'도 ‘나오스’였습니다(마 27:51, 막 15:38). ‘나오스’의 휘장이신 예수님의 몸이 찢어지신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아비 사가랴가 분향했던 성소도 ‘나오스입니다(눅 1:9, 21-22).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는 대부분 성전을 건물성전 ‘히에론’으로...,
      서신서 이하에서는 대부분 성전을 몸 된 성전 ‘나오스’를 사용했습니다.
      히에론은 건물성전의 외형을 가리켰지만,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는 몸 된 성전은 ‘나오스’를 사용했습니다.

      ‘나오스’는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곳, 언약궤가 있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던 곳으로, 성도들의 몸이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시는 ‘나오스’입니다(고전 3:16).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임재 하려면,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우리도 거룩해야합니다(고전 3:16-17,고후 6:16-18).
      이제 더 이상 건물이 성전이 아니라 우리 몸이 성전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이 됩시다!
      성령의 사람이 됩시다!
      신령한 사람이 됩시다!

      분쟁, 시기(3:3)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분쟁(2054 ) ἔρις

      ἔρις, ιδος, ἡ

      1. 다툼,  2. 논쟁,  3. 불화

      발음 / 에리스(ĕris)

      어원 /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분쟁(롬 1:29, 고전 1:11, 빌 1:15), 다툼(롬 13:13, 고후 12:20) 
      신약 성경 / 9회 사용

      시기(2205) ζηλός

      ζηλός, ου, ὁ, ζηλός, ους, τό

      1. 열심,  2. κατὰ ζ.: 열심에 관한한,  3. ζ. θεοῦ: 하나님을 향한 열심

      발음 / 제로스(zē- lŏs)

      어원 / 220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열심(요 2:17, 롬 10:2, 빌 3:6), 시기(행 5:17, 롬 13:13, 고전 3:3, 고후 12:20).
      신약 성경 / 16회 사용
      * 2204. ζέω

      1. 끓는 열성으로,  2.사도행전 18:25,  3. τῷ πνεύματι ζέοντες

      발음 / 제오(zĕō)

      어원 / [기본형] 분사 ζέων: 끓이다, 삶다, ζέων τῷ πνεύματι
      관련 성경 / 열심을 내다(행 18:25, 롬 12:11).
      신약 성경 / 2회 사용

      사역자(3:5) - διάκονος, ου, ὁ, ἡ 1249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1. 종,  2. 협조자,  3. 집사

      발음 / 디아코노스(diakŏnŏs)
      어원 / 아마도 폐어가 된 διάκω ‘심부름을 가다’에서 유래[1377과 비교]
      관련 성경 / 섬기는 자(마 20:26, 막 10:43, 요 12:26), 사환(마 22:13), 하인(요 2:5, 9), 사역자(롬 13:4, 고전 3:5), 추종자(롬 15:8),
      일꾼(롬 16:1, 고후 3:6, 엡 6:21), 집사(빌 1:1, 딤전 3:12), 짓게 하는 자(갈 2:17).
      신약 성경 / 29회 사용

      동역자 συνεργός, όν 4904


      1. 함께 일하는,  2. 조수

      발음 / 수네르고스(sünĕrgŏs)
      어원 / 4862와 2041의 어간의 합성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돕는(고후 1:24), 함께 수고하는(빌 2:25, 요삼 1:8).
      [명] 함께 역사하는 자(골 4:11), 일꾼(살전 3:2), 동역자(롬 16:3, 고전 3:9, 빌 4:3).
      신약 성경 / 13회 사용

      고린도전서 3:23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오늘의 기도

      하나님의 것으로 살아봅시다!
      Let's live as Go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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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의 일군(4:1) ὑπηρέτης, ου, ὁ  / 맡은 자 οἰκονόμος, ου, ὁ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찌어다.
      So then, men ought to regard us as servants of Christ and as those entrusted with the secret things of God.

      숨길 비(秘) - 향기로울 별
      1. 숨기다,  2. 향기롭다,  3. 祕의 俗字

      示(보일시) + 必(반드시필)

      빽빽할 밀(密)
      1. 빽빽하다, 2. 자세하다, 3. 은밀하다,  4. 숨기다, 5. 조용하다

          宓(잠잠할밀) + 山(메산)



        일군(5257).  ὑπηρέτης

        ὑπηρέτης, ου, ὁ 

        1. 하인,  2. 사환,  3. 조수

        발음 / 휘페레테스(hüpērĕtēs)
        어원 / 5259와 ἐρέσσω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옥리(獄吏), 아랫사람(마 5:25, 막 14:54, 요 7:32), 일꾼(눅 1:2, 고전 4:1), 맡은 자(눅 4: 20), 종(요 18:36, 행 26:16),
        부하(행 5:22, 26), 수행원(행 13:5).
        신약 성경 / 20회 사용

        맡은 자(3623).  οἰκονόμος

        οἰκονόμος, ου, ὁ  3623


        1. 청지기,  2. 일반 관리인,  3. 신적인 업무를 맡은 자

        발음 / 오이코노모스(ŏikŏnŏmŏs)
        어원 / 3624와 3551의 어간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청지기(눅 12:42, 갈 4:2, 딛 1:7), 재무관(롬 16:23), 일꾼(고전 4:1), 맡은 자(고전 4:2).
        신약 성경 / 10회 사용


        충성(忠誠)

        1. 히브리어

        아만 - 기본어근 ; 아마 `세우다', 또는 `지탱하다' 부모나 유모로서 `양육하다', 상징적으로 `확고하 다', 또는 `신실하게 하다', `신뢰하다', 또는 믿다, 영구하다, 또는 조용하다, 도덕적으로 진실하다, 또는 확실하다, 한번은-따라서 확신, 믿다.

         2. 헬라어

        페이도 - 기본 동사 ; 확신하다, 유추적으로 `화해하다 진정시키다, 동의(내적인 확신으로) 의존하다

        피스티스 - `설득' 즉 `신용', 도덕적으로(종교적 진리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에 대한, 종교적 선생에 대한) 확신, 특히 구원에 대해 그리스도를 신뢰(추상명사) 직업에서의 `꾸준함', 연루된 의미로 종교적(복음) `진리'자체의 체계, 충성(막11:22,롬3:3).

        피스토스 - 대상이 `믿을만한', 주체가 신실한.

        * 충성(忠誠)에 대한 성구

        1. 충성의 정도(범위)

        마 25:21 - 지극히 적은 일에 충성

        눅 16:10 - 큰 것에도 충성

        눅 16:12 - 남의 것에 충성

        고전 4:2 - 맡은 바에 충성

        히 2:17 - 하나님의 일에 충성

        히 3:2 - 하나님의 집에 충성

         2. 충성해야 할 이유

        마25:28 - 가진 것까지 빼앗기기 때문에

        딤전 1:12 - 더 큰 직분을 맡기니

        딤후 2:2 - 전할 사명이 있기 때문에

        히 3:6 - 아들이 고로

        계 2:10 - 생명의 면류관을 맡기 위하여

        3. 충성한 자의 결과

        마 25:23 -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게 됨

        마 25:29 - 풍족하게 됨

        눅 19:17 - 권세를 차지함

        딤후 2:2 - 타인을 가르치게 됨

        계 2:10 - 생명의 면류관을 얻음

        * 이렇게 일하자

        1. 성막에서 일하는 자처럼 책임감을 가지고............출 25:2

        2. 느혜미야와 그를 돕는 자들처럼 기도의 음성으로.....느 4:9

        3. 구스의 내시에게 간 집사 빌립처럼 민첩한 걸음으로..행 8:30

        4. 배 위에서 사람들에게 행한 사도들처럼 친절한 말로..행 27:34-36

        5. 마술사 시몬에게 한 베드로처럼 식별함으로..........행 8:22

        6. 고기잡이를 같이 돕던 제자들처럼 일하는 손으로.....눅 5:7

        οὕτω 3779

        1. 이와 같은 방식으로,  2. 다음과 같이,  3. 요한복음 3:14

        발음 / 후토(hŏutō)
        어원 / 377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이렇게, 이와 같이, 그렇게, ~같이, ~그렇게(눅 11:30, 요 3:14, 롬 12:5, 고후 1:5), 그대로(요 4:6).
        신약 성경 / 208회 사용

        능력(能力)

        δύναμις, εως, ἡ  1411

        1. 힘,  2. ἰδίᾳ δ. ~의 권능으로,  3. ἐν δ.: 권능으로

        발음 / 두나미스(dünamis)
        어원 / 141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권세(마 6:13, 행 4:7), 권능(마 7:22, 막 6:5, 행 1:8), 능력(마 13:54, 눅 1:17, 롬 1:4), 재능(마 25:15), 권능자(막 14:62),
        뜻(고전 14:11), 힘 (고후 1:8, 8:3, 히 11:11), 세력(히 11:34).
        [동] 능하다(막 9:39, 눅 19:37), 강하다(고전 15:43), 힘있다(계 1:16)
        신약 성경 / 119회 사용

         

        충성에 대한 이야기 

        처칠 수상이 하루는 국회에 나가 연설을 하게 되었는데 손님을 맞이하다가 시간이 좀 늦었다.
        그래서 운전수에게 신호를 무시해도 좋으니 속력을 내어 시간 안에 국회에 닿게 하라고 명령했다.
        도중에 교통순경이 달려와 차를 세웠다.
        운전수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수상 각하의 차요, 지금 국회에 가는 길인데 시간이 좀 늦어서 급하게 가는 중이요"

        그러나 교통순경은 뒷자리에 앉아있는 처칠을 한번 힐끗 보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수상 각하를 닮긴 했는데 영국의 수상인 처칠 경의 차가 교통위반을 할 리가 없소, 당신은 교통 위반에다 거짓말까지 했소.
        면허증을 내놓고 내일까지 경찰서로 출두하시오"

        처칠은 교통순경의 직무를 수행하는 엄격한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경시총감을 불러서 그 교통순경을 일 계급 특진시켜 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경시총감은 이렇게 말하며 처칠의 명령을 거절하는 것이었다.

        "경찰 조직법에 그런 규정이 없어서 특진을 시킬 수가 없습니다."

        두 번째로 감명을 받은 처칠은 아주 만족스럽게 웃음을 터트리면서 말했다.

        "내가 오늘은 경찰에 두 번씩이나 당하는군." 

         고종황제가 러시아 공관에 피신하고 있었다.
        친로파가 쿠데타를 일으킨 셈이었다.
        나라 일이 정동 골목에서 집행될 수밖에 없었다.

        그 때 이상재 선생은 참찬이라는 벼슬자리에 있어 고종을 뵈려고 러시아 공관으로 갔다.
        그러한 난중에도 나인(궁녀)들은 자줏빛 보자기에 싼 것을 고종 앞에 갖다놓으니, 매관 매작하는 첩지(사령장) 보따리가 분명하였다.

        선생은 아주 천연스럽게,
        "임금께서 계신 방이 어찌 이리도 추운고?" 하시며 슬쩍 그 보자기를 집어 벽난로에 넣으니 사령장 보따리는 활활 타버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땅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대죄를 하고 고종도 선생의 충성을 가상히 여겨 이를 불문에 붙이기로 하였다.
        선생이 밖으로 나오다가 내시들을 향해 "이놈들아, 외국 공관에까지 와서 폐하를 욕되게 하느냐?"고 큰 소리로 꾸짖었다. 

        영국의 그 유명한 빅토리아 십자훈장이 처음으로 수여된 것은 1857년, 런던의 하이드팍 공원에서 이었다.
        여왕에게 그 훈장을 받기 위하여 한 사람씩 올라오는 중에, 싸움터에서 용감하게 큰 공로를 세우고 팔과 다리를 잃은 군인이 여왕 앞에 올라와 섰다.
        지팡이에 의지하고 간신히 서있는 영국의 용사를 바라보던 여왕은 훈장을 떨어뜨린 채로 뒤로 돌아 서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여왕은 수천의 군인을 등 뒤로 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잠시 후 진정한 여왕은 수천의 군인의 돌아서서 훈장을 집어 들고 용사의 가슴에 꽂아주며 사례의 말을 했다.
        그러자 그 군인은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하나님이시여, 우리의 여왕을 축복하소서!
        여왕페하와 조국을 위해서라면 한번 더하래도 이 몸 바쳐 싸우겠습니다."

         팔 다리를 하나씩 잃어버린 용사의 심금을 감동시킨 것은 가슴에 찬 훈장 때문이 아니라, 나라 위해 희생한 충성을 뜨겁게 인정해 준 여왕 폐하의 눈물이었던 것이다.

        세상의 사람들이 모두 죄악과 정욕으로 살고 있는 동안에도 당신과 내가 주님을 섬기는 거룩한 믿음을 지켜 열심히 충성했다면 그분이 왜 이 모든 것을 모르시겠는가?

        히브리서 11장에는 신앙의 거성들이 수록되었는데 하나님께 충성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늘 아버지께 효자요 충신이요 산 순교자들이다.
        사람은 달란트가 각각 다르고 은사도 다르고 처해있는 상황도 다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처해있는 [지금] [여기]에서 충성하는 것이다.

        크리스천이 부름 받은 장소는 [지금 여기]다.
        과부가 가진 엽전 두 닢, 몸이 열개라도 모자라는 중요하고 바쁜 시간 중에서 주님께 드리는 첫 시간을 주님은 원하신다.
        병들고 깨진 질그릇 같은 인생이냐 깨진 항아리 소리로 찬송을 불러라. 문둥이면 어떠냐.

        법주사 뜰 구석 큰 바위 꼭대기에 500년 묵은 앙상한 소나무가 있다.
        던져진 곳에서 불평 없이 충성되게 삶을 지킨 그 나무같이 되고 싶다.

        내가 목사가 되기 전에 남부의 어떤 큰 상회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
        "자네가 한 훌륭한 일의 결과에 대하여 크게 치하하고 싶네."
        나는 이 말을 매우 고맙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너는 충성하였구나.
        잘하였다."고 하시는 것을 듣는다면 얼마나 굉장하겠습니까?

        우리 국군병사들이 전선에서 돌아왔을 때 그들의 충성과 훌륭한 행동을 축하하며 환호 갈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성도들이 하는 나라의 거리를 행진해 갈 때 주님께서 그들의 충성을 칭찬하실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보답은 언제나 충성된 자에게 돌아갑니다.

        뉴욕시에 어떤 사람의 청동상이 있는데 그의 팔다리가 묶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동상 밑에는 "조국을 위해 바칠 목숨이 하나 밖에 없는 것이 원통하다"는 글이 쓰여 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에게 충성합시다.
        우리의 목숨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 유일한 애통함이 될 것입니다.

        어느 고을에 두 명의 머슴을 둔 사람이 농사를 짓고 있었다.
        두 머슴 중 한명은 주인이 보건 안보건 상관없이 자기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여 주인의 농사일을 거들어주었고, 또 다른 한명의 머슴은 그와는 달리 주인이 없을 때는 일을 하지 않고 있다가 주인이 나타나기만 하면 지금까지 가장 잘 하던 것처럼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주인은 이를 모르는 척하고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그 해가 저물어 가고 있는데 주인은 이들 두 머슴에게 사경을 주기로 하고 그들을 불렀다.

        "이보게, 자네들. 지금까지 우리 집 일 해주느라 고생이 많았네.
        내일은 내가 자네들에게 사경을 줄 것이니 오늘 마지막으로 새끼를 꼬아 주겠나."

        그러자 한 머슴은 아무 말 없이 짚을 가져다가 물을 추겨 새끼를 꼬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주인 위해 일하는 것이니 잘 해주고 가리라 마음 먹었다.
        또 한 머슴은 생각하기를 내일이면 이집을 나가는데 새끼를 꼬라고 하니 하면서 투덜거렸다 일을 하기는 싫고, 하는 둥 마는 둥 한 발정도 시작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는 이내 잠을 청하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주인은 꼰 새끼를 가져 오라고 하더니 새끼줄 길이만큼 엽전을 꼬여서 가져가라고 했다.
        항상 주인 눈치만 살피던 머슴은 한 발 정도 밖에 안 되는 새끼줄에 엽전을 가져가야 했다.

        어느 공산주의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공산주의 철학보다 인간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너희를 이길 수 있다.
        우리는 현실주의자이다.
        우리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들을 갖고 있다.
        나는 공산주의를 위해 나의 봉급, 나의 정력을 모두 바친다.

        반면에 너희 기독교인들은 복음을 전하는 데 지극히 적은 정성을 쏟고 있다.
        기독교가 실제적 생활 속에서 증거하지 않으면 어떻게 그 높은 이상을 증거할 수 있겠는가?
        너희 기독교인들은 손에 흙이 묻는 것조차도 두려워하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은 당의 명령이라면 생명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들과 대항하기 위해서는 공산주의자들보다 더욱 확고한 신념과, 그리고 어느 누구도 용서할 수 있는 사랑과 그리스도의 명령이라면 세상 끝까지 따라가는 충성심이 우리에게 필요할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잘 아시는 김활란 박사께서 63세에 이화여대 총장직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퇴임 후 그가 처음으로 찾아간 사람은 감리교의 감독님, 목사님이었습니다.

        "제가 이제 목사 안수를 받아 목사가 될 수는 없습니까?"

        그 때 김 박사는 63세였으므로 감리교 헌법으로는 목사가 될 수 없었습니다.
        목사 안수를 받을 길이 없자 김 박사는 미국 유니온 신학교에 가서 두 학기 동안 성서를 연구했습니다.

        비록 목사 안수는 받지 못했지만 돌아오셔서 강원도와 충청도로 다니시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분은 억압받고 무시당하는 여성들의 교육을 위해서 일생을 바쳤습니다.

        자신은 첩의 딸로 태어났지만, 하나님의 복음으로 구원을 얻었으니 이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며 강원도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생명이 다할 때까지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나려는 때 제자와 친구들이 모여 슬퍼하자,
        "여러분, 나는 최선을 다해서 살아왔소. 내가 죽거든 장송곡을 부르지 말고 '할렐루야' 코러스를 불러주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조용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분은 언제나 죽음을 준비하면서 위대하게 살았던 것입니다.

        ‘오늘 내가 이 세상을 떠난다면 나는 어떤 흔적을 남기고 갈 것인가? 내 죽음의 준비는 되어 있는가?'

        오늘도 우리는 우리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 충성을 다하는 하루를 살아야 하겠습니다.

        어느 부자가 섣달 그믐날에 종들을 불러놓고 볏짚 한 단씩 주며 새끼를 꼬라고 했습니다.
        새끼를 꼬되 새끼손가락보다 가늘게 꼬라고 했습니다. 종들은 투덜거렸습니다.

        "아무리 지독한 주인이지만 섣달 그믐날까지 이렇게 새끼를 꼬라고 할게 뭐람?
        그것도 굵은 새끼가 아니라 손가락보다도 더 가늘게 꼬라고 하니 밤새도록 꼬아도 이 볏짚을 어떻게 다 꼴 수 있담?"

        어느 종은 새끼를 꼬다 말다 하는가 하면, 어느 종은 손가락의 몇 배나 굵게 꼬아서 빨리 볏짚을 없애려 했습니다.
        그러나 한 충성스러운 종은 아무 불평 없이 주인이 꼬라는 대로 가느다랗게 그리고 보기 좋게 꼬았습니다.
        그는 다른 종들이 요리조리 요령을 부려 일찍 끝내고 자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고 혼자서 밤새도록 새끼를 꼬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주인은 커다란 주머니를 하나 들고 나왔습니다.

        "모두들 들어라. 작년 한 해는 다 나를 위하여 너무나 수고가 많았다.
        이제 너희들이 꼰 새끼줄로 이 엽전을 마음껏 끼워 가져가거라.
        돈은 얼마든지 있으니 가져가도록 하라.
        단 새끼줄에 끼워 가는 것에 한한다."

        이 말을 들은 종들은 당황했습니다.
        자기들이 꼰 새끼로는 돈을 끼워 가져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종들은 후회가 막급하였으나 이제는 별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인이 하라는 대로 충직하게 밤새도록 가느다랗게 새끼를 꼰 종은 그가 충성스럽게 한만큼 많은 엽전을 가져갈 수 있어서 마침내 종살이를 면했다고 합니다.

        일본의 유명한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가 동경 제일 고등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
        일본 천황의 '교육 칭호'라는 것을 거부하여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교육 칭호'를 읽게 되면 모두 일어서서 차렷 자세로 듣곤 했습니다.
        그런데 우찌무라 선생은 천황도 사람인데, 거기에다 경의를 표할 필요가 없다고 했던 것입니다.

        우찌무라는 젊었을 때 미국으로 건너가 식당에서 접시를 닦으며 공부를 계속했습니다.
        그 때 어느 사람이 우찌무라에게 "무엇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하느냐?"고 묻자
        "나는 세상의 부귀와 명예에 관심이 없소. 내가 원하는 것은 더 큰 영광이외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충성을 약속한 사람에게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승리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이 면류관의 약속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리스도께 충성할 수 있는 힘을 공급해주는 것입니다.

        사냥꾼이 개 두 마리를 길렀다.
        한 마리에게는 사냥을 가르치고 다른 한 마리에게는 집을 지키게 하였다.
        그런데 사냥꾼은 사냥하여 온 것 중에서 한 몫을 언제나 집지키는 개에게 주곤 하였다.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사냥개가 집 지키는 개에게 항의를 하였다.

        "내가 고생 고생하여 잡아온 것을 너는 아무 일도 안하면서 먹다니 말이 되느냐."

        그러니까 집 지키는 개는 대답하였다.

        "그 말은 나한테 하지 말고 주인한테 하렴. 나는 네 것을 먹는 것이 아니고 주인의 것을 먹는 거란 말이야."

        불란서 시인 알프레드 뮈세는 `5월의 밤'이라는 시(詩)로 유명합니다.

        이 아름다운 시 속에서 어미 새 펠리컨이 등장합니다.
        어미 새 펠리컨은 갓 낳은 굶주린 새끼 새들을 해변 위에 놓아두고 먹이를 구하기 위해 여행을 떠납니다.
        그러나 오랜 여행에도 불구하고 어미 새는 단 한 줌의 먹이도 구하지 못하고 되돌아오고 맙니다.
        여행에 지친 어미 새 펠리컨이 저녁 안개 속에서 갈대숲으로 돌아올 때  굶주린 새끼 떼들은 어미 새에게로 몰려갑니다.

        그러자 어미 새는 목을 흔들면서 늘어진 날개 속으로 새끼들을 포옹합니다.
        다음 순간 어미 새는 해변 위에 누운 채 자신의 심장을 새끼들의 먹이로 내어놓습니다.
        어미 새의 심장과 내장이 새끼들의 입으로 사라지기도 전에 어미 새는 숨을 거두고 맙니다.

        자신의 심장과 생명들을 살아가게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헌신일 것입니다.

        예수는 내 삶의 주인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다는 고백은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겠다는 결단입니다.
        이렇게 결단한 사람을 “예수님의 제자, 그리스도의 종, 하나님의 종, 관리인, 일꾼”이라고 합니다.

        ‘일꾼(ὑπηρέτης)’이라는 말의 원어의 의미는 그 당시 로마시대 전투를 하는 배 가장 밑층에서 노를 젓는 노예를 말합니다.
        노예 중에 가장 천한 노예입니다.
        주인의 명령, 배의 함장의 명령에 따라 일할 수 밖에 없는 일꾼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일군이요 종이 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우리는 그러한 밑층에서 노를 젓는 노예와 같은 자라고 알리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사도 바울이 이런 말씀을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고린도교회 안에 아볼로파, 바울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라는 파벌이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파벌이 형성되는 것은 사람이 주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인 하나됨을 깨트리는,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는 일을 하는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속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런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아볼로도, 베드로도, 바울인 나 자신도, 그리고 여러분 모두도 다 같은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는 신분을 분명히 알려 주고자 한 것입니다. 편이 나누어져 다투고, 싸워서는 안되는 모두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는 같은 일꾼이라는 것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은 주인이 되신 주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주님의 일이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것을 말합니다.

        ‘맡는 관리자’라는 말은 ‘오이코노모스’라는 단어이며 큰 집을 관리하는 청지기, 관리자, 집사란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일꾼이 하는 일이란 하나님의 집의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집의 일을 하는 일꾼 된 성도들이 가져야 할 첫 번째 자세는 “이런 경우에 관리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신실성입니다”
        개역성경에는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충성, 신실성이란 하나님이 믿을만한 사람, 신뢰할만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누구를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합니까?
        책임감이 있는 사람입니다.
        맡은 일을 끝까지 책임감 있게 수행하는 사람이 믿을만한 사람, 충성스런 일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 잘 하기를 요구하기보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끝까지 감당하기를 원하십니다.

        충성되고 신실한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서 기쁨이 되는 행동과 모습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회사나 가게에서 일을 하는 종업원들 가운데 주인의 마음을 힘들게 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 안에서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분열하게 하고, 힘들게 하는 험담과 미움, 시기와 불순종으로 어렵게 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충성됨은 하나됨, 화목함을 이룹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충성됨은 사랑의 열매, 기쁨의 열매, 감사의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충성됨은 오래참음으로 마지막에 선을 이룹니다.
        그렇기에 요한계시록 2:10절에도“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3절을 보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서 심판을 받든지,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받든지, 나에게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개역성경에는“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사도 바울은 사람들의 칭찬과 비난의 평가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매우 작은 일” 이라 했습니다.
        타인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겠단 뜻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는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잣대는 부정확합니다.
        잘 했다고 칭찬해도 너무 으슥해하지 말고, 잘못한다고 비난해도 너무 좌절과 분노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일꾼 된 우리는 스스로를 평가할 때가 있습니다.
        3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그뿐만 아니라, 나도 나 자신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개역성경에는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바울사도는 자기 스스로 자기를 평가하는 것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합니다.
        스스로 착각하여 우쭐해지기도 쉽고 열등감에 빠져 낙심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나를 판단하고 스스로 자책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결코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평가도, 자기 스스로의 평가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면, 그럼 진정한 평가는 어디에서 이루어집니까?
        바로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4-5절을 보십시오.
        “나는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로 내가 의롭게 된 것은 아닙니다. 나를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는, 아무것도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어둠 속에 감추인 것들을 환히 나타내시며, 마음 속의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 때에 사람마다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한 사람에 대해 내리는 평가는 지극히 일부분에 대한 평가입니다.
        우리가 그 사람의 일상을 24시간 관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까칠해보이고, 깍쟁이처럼 보이고, 뺀질뺀질해 보여도, 다른 곳에서는 후덕하고, 사랑이 많고, 섬기는 일을 잘하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못 보는 감추인 부분들을 다 드러내어 최종적인 평가를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가는 우리 마음의 뜻이 어떠한지 중요하게 평가하십니다.
        여기 “마음의 뜻”이란 마음의 동기를 말합니다.
        무슨 동기로 일하느냐는 것입니다.
        사람은 행동만 보지만, 하나님은 마음의 의도를 보십니다.
        고상하고 거룩한 일들을 하면서도, 이기적인 마음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가 보기에는 의심쩍고, 겉으로만 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거룩한 마음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사람들의 속마음을 아십니다.
        하나님만이 그 마음의 동기와 속을 보시고 바르게 평가하십니다.

        진정한 평가는 하나님 앞에서 이뤄집니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판단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명령이 5절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는 아무것도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어둠 속에 감추인 것들을 환히 나타내시며 마음속의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 때에 사람마다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나의 신분, 우리의 신분과 사명은 그리스도의 일꾼, 배 밑에서 노를 젓는 노예와 같다는 겸손함을 가지고 살아가십시오. 주님의 명령대로 함께 한 방향으로 노를 저어 배를 움직여 목적지에 도착하게 하는 자임을 기억하시고 하나됨으로 섬기는 자가 되기를 기도하십시오.

        우리는 누구를 판단하고 정죄하고 비난할 자격과 능력이 있지 않음을 깨닫고 마음의 속 마음을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다 드러내 심판하실 자는 심판하시고 상 주실자는 상 주실 것을 믿고 우리가 할 일은 그 영혼을 살리고, 세우고, 함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하나됨을 위해 힘써야 할 것임을 기억하고 살아가는 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신스틸러(scene stealer)? 후페레테스(ὑπηρετης)? 

        Scene Stealer란 관심을 독차지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ὑπηρέτης는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높은 지위와 명성에 대한 열망이 있다.
        명성은 다른 사람들이 어떤 개인에게 부여하는 가치다.
        가끔은 주목받고 싶고 인정받으며 살고자 한다.
        화려한 무대에서 관객의 박수를 한 몸에 받는 주연이 못되어도 괜찮다.
        투명인간으로 살고 싶지 않을 뿐이다.
        역사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시고 우리는 조연이지만 scene stealer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잖아 있다.
        영화나 TV 드라마에서 발군(拔群)의 연기력이나 독특한 캐릭터로 주연 이상의 주목을 받은 조연(助演), 즉 ‘신스틸러(scene stealer)’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람은 역사의 무대에서 주연이신 그리스도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뛰어난 연기력을 앞세워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신 스틸러’, 즉 주연 못지않은 조연 연기자가 아니다.

        사실 아담은 신스털러 1호였다.
        유발 하라리가 쓴 책 제목처럼 신이 된 인간, 즉 호모데오스가 되고자 하였다.
        하지만 에덴동산의 청지기요 조연 주제에 주인공이신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다 인류에게 죄와 사망을 가져오는 죄를 범하였다.
        자아실현에 대한 욕구가 있는 것이다.

        David Zweig(데이비드 즈와그, 언론인이자 작가)는 그의 책 'Invisibles'에서 딴지를 건다. "타인의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실제 가치보다 훨씬 과장되어 있다.
        외부의 인정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매우 뛰어난 능력이다. 묵묵히 맡은 일에 몰입하는 것이 나를 위대하게 만든다.

        일꾼에 해당하는 ‘ὑπηρετης’(후페레테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사자인 Hermes에 대해서 사용되었다.
        루스드라 사람들이 바울을 말하는 신으로 여기고 헤르메스라 부르는 일이 있었다(행 14:12).
        휘페레테스는 제우스의 뜻을 행하는 자, 그래서 자기 배후에 제우스의 권위를 지닌 자를 뜻하는 것이다.
        사자가 권위 있는 것이 아니라 제우스가 권위자이기에 사자도 또한 권위가 있는 것이다.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은 지도자들을 평가할 때 있는 그대로가 아닌 다른 사람과 비교에 의해 내려졌다.
        고린도전서 4:1에서 ‘사람이 마땅히 여길지라’는 호소를 통해 독자들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인식하길 원한다.
        여기에 사족을 달 필요가 없다.
        굳이 사도, 선교사, 목회자, 박사라는 군더더기를 달지 않아도 된다.
        일꾼이 강조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높아져야하기 때문이다.
        교회지도자를 비교하는 배경에는 더 훌륭하다, 더 좋다는 비교의식이 빼어있다.
        바울은 이런 높은 자리와 높은 지위 그리고 선호하는 호칭과 대조적으로 일꾼과 맡은 자라는 실질적인 지위와 호칭을 제시한다.
        ‘일꾼’은 종 또는 하수인(subordinates)이다.
        ‘맡은 자’는 관리인(estate-manager) 혹은 청지기(steward)다.

        과거 조직 리더에게 상명하복(上命下服)의 소통은 매우 효율적인 것이었다.
        선배 리더는 ‘답’을 알고 있거나 알고 있는 것으로 생각됐다.
        이때 후배는 ‘선배의 명령’에 큰 신뢰를 보내고 상황 판단에 대한 권한을 선배에게 위임한다.
        그리스도는 단순히 선배 리더가 아니라 주인이요 왕이다.
        우리는 후배 정도가 아니라 일꾼이요 종이다.
        주인의 권위와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휘페레테스의 자세다.
        휘페레테스는 종교에서 제사를 돕는 사람을 나타낼 때 쓴다.
        그리고 인간관계에서 이 용어는 친구를 위해서 무엇인가 안정되도록 이타적인 마음을 갖고 도와주는 사람을 말한다.
        복종을 받아들이고 봉사한다는 뜻이 언제나 초점이다.
        영화 ‘친구’의 명대사에서 찾을 수 있다.
        늘 한수 위인 친구 유오성에게 장동건이 불쑥 던진 말은 ‘내가 니 시다바리가’이다.
        일본말 시다바리는 ‘아랫사람, 부하, 조수’가 ‘일꾼’에 해당하는 ‘휘페레테스’이다.

        왕의 일꾼

        일꾼에 해당하는 ‘휘페레테스’는 사역자에 해당하는 ‘디아코노스’와 다르다. 휘페르테스는 ‘공적인 자리에 있는 어떤 이를 돕는 자’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일꾼은 주군이 왕이신 그리스도이심을 잊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일꾼은 철저하게 왕이신 그리스도의 사람이면 족하다. 수식어가 필요 없다. 그리스도의 총애를 받는 일꾼, 선임 일꾼, 수석 일꾼 같은 사족이 불필요하다. 사람들이 화려한 수식어에 매료되고 호감을 가질 것이라는 기대를 내려놓아야 한다. 그냥 왕의 사람이면 된다. keyman, 즉 중심인물이라는 말을 듣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중요 인사, 핵심 인물, 특정인, 오른팔, 좌청룡과 우백호가 아니다.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좌청룡 우백호가 있었으니, 바로 마에케나스와 아그리파였다. 바울은 자신을 비롯한 일꾼들이 모세에게 아론과 훌과 같이 그리스도를 섬긴다고 말하지 않는다.

        바울은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고 단언한다. 이것이 일꾼의 자세이다. 그리스도의 일꾼들은 남들이 알아주면 한편으로는 고맙지만 알아주느냐 아니냐에 목숨을 거는 자가 아니다. David Zweig는 'Invisibles'에서 남들이 알아주는 것이 일꾼의 가치를 측정하는 수단이나 기준이 아니라고 말한다. 누구의 눈에 띄지 않아도 좋다. 그리스도께서 알아주시면 오케이다. 사명을 감당하는 자체에 성취감과 기쁨을 얻으면 만족스러운 것이다. 일꾼이 세상에서 박수 받고 상을 다 받으면 하늘에서 상이 없다(마 6:1-2).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자는 백배의 복을 받고 핍박을 겸하여 받으면 내세에 영생을 얻지 못할 자가 없다(막 10:30).

        일꾼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자가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는 자들이다. 영화 ‘다이하드’를 보면 주인공 John McClane은 땀과 피로 얼룩진 런닝만 걸치고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부단히 악당들과 맞서 싸운다. 그 이유를 묻자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있다. 그렇다.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중심적이어서 고생스럽고 힘든 일은 가급적 남에게 넘기고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아담도 그랬다. 맡겨진 일에 만족하고 충성하였다면 선악과에 먹지 않았을 것이다. 마귀의 제안대로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되면 힘든 노동을 하지 않고도 영생불멸할 것으로 여겼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하고 싶은 일만 찾아 하고 해야 할 일을 남에게 미루는 사람이 아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엔 '신사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리스도의 일꾼

        그리스도의 일꾼은 그리스도를 최측권(最側權)에서 보좌한 자를 말하지 않는다.
        일꾼은 과거에 불법과 편법으로 주군을 모시다가 증언 혹은 배신을 때리는 가신, 최측권, 집사와 다르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최고의 지도자로 손꼽는 바울, 아볼로, 그리고 베드로는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문고리 3인방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일꾼은 일꾼인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그리스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다.
        일꾼인 자신은 무익한 종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인비저블이다.

        '인비저블(Invisibles)'은 "투명인간"을 말합니다.
        투명인간은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지만 분명하게 존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자기 일에 조용히 매진하면서 깊은 성취감을 얻는 이들이다.
        허황된 인정 욕구와 질투의 감정에 주목하면서 이런 흐름을 거스르는 자들이다.
        대부분 사람은 일에 성공할 때 주목을 받지만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던 선지자 요한은 한참 인기가 절정에 이를 때 자신은 쇠하고 역사의 무대에 서게 될 그리스도는 흥하게 되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자신이 보이지 않는 존재, 쇠하는 존재로 선언한다.

        일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이다.
        둘 중에 가장 행복한 사람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가?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이 일치하는 사람이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일꾼은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을 선호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일군은 해야 하는 일을 즐기는 자들이다.
        심지어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죽기 살기로 감당하는 자다.
        자신이 좋아하고 열정을 가진 분야에서 일하라는 조언은 독이 될 수 있다고 William MacAskill가 ‘냉정한 이타주의’에서 말한다.
        이는 좋아하고 관심을 가진 일은 생각보다 자주 바뀌기 까닭이다.
        심리학자 Daniel Gilbert는 사람들의 관심사가 생각보다 훨씬 자주 변하기 때문에 절대 과대평가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일꾼은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주신 일, 즉 해야 할 일을 즐겁게 감당하는 종이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종들을 보라.
        해야 할 일이지만 익숙지 않고 어색하고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처음 하는 사업이라 힘들고 짜증스럽고 종이라고 무시 받고 어려움이 많아도 이 일은 주인께서 그들에게 하라고 주신 일이기에 열심히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경영인으로 인정하고 알아 준 것을 생각할 때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하게 될 때 100%의 성과를 거두지 않았는가. 반면 한 달란트 받은 종은 해야할 일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변명을 할 때는 좋아하지 않은 일이라, 즉 주인이 마음에 안 들었다고 구차한 변명을 하므로 악하고 게으르다는 책망과 함께 형벌을 받는다.

        '용비어천가' 제1장에 ‘일마다 천복(天福)이시니’라는 말이 나온다.
        일은 ‘하늘이 주신 복된 노동’이다.
        또 ‘이루다(成)’의 어근 ‘일’은 명사로서 ‘일(事)’의 뜻을 지니고 있다.
        일의 목적은 이룸에 있고, 이룸이란 뜻하던 일의 완성에 있다.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는 것과 일꾼으로서 일을 잘하는 것은 다르다.
        누구나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고 제자가 될 수 있다.
        야구선수들의 특징을 줄줄 외우고 있는 야구광이 스포스용품 가게를 내는 것과 성공하는 것은 다르다.
        본인이 스포츠를 좋아하는 것과 다른 사람에게 물건을 파는 것은 다른 영역의 문제다.
        마찬가지로 일꾼이 되는 것과 일을 잘할 능력 사이에 간격이 있다.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잘한다는 것도 다른 문제다.
        명성과 능력은 비례하지 않는다. 일꾼은 자질과 함께 훈련이 필요하다.
        기술이 아니라 자세가 중요하다.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
        실적보다 적은 일에 충성하는, 즉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목숨을 걸고 사명감을 갖고 해야 하지만 즐거움과 기쁨으로 감당하는 일꾼에게 칭찬이 있다.

        판단(判斷) -
        1. 다른 사람의 판단 : 눈치를 보는 것, 자기의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야 하므로 실속이 없다.
           예를 들면 연예인이 인기가 없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가 자주 일어난다.

        2. 자기 성찰을 위한 판단 : 너 자신을 알라!
           후회 없는 삶을 위한 것

        3. 주님의 판단 : 상급을 얻는다
           최선을 다하였는가? 문제는 의롭다 할 수 있는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09-14-2022(수)

        육신과 영(고린도전서 5:5)


        육신(肉身)(4561)

        σάρξ, σαρκός, ἡ
        1. 육체,  2. 인간이나 동물의 뼈를 덮고 있는 물질을 총칭,  3. 몸

        발음 / 사르크스(sarx)
        어원 / 4563의 어간에서 유래한 듯함
        관련 성경 / 몸(마 19:5, 막 10:8), 육체(마 24:22, 요 8:15, 고후 1:17), 육신(마 26:41, 롬 1:3, 딤전 3:16), 살 (눅 24:39, 요 6:55, 56),
        육정(요 1:13), 육(요 3:6, 6:63, 고전 15:50), 골육(롬 11:14).
        신약 성경 / 147회 사용

        * 4563. σαρόω 

        1. 쓰다,  2. 깨끗하게 쓰다,  3. 마태복음 12:44
        발음 / 사로오(sarŏō)
        어원 / 제1부정과거 ἐσάρωσα, 제1부정과거수동 ἐσαρώθην, 완료수동분사 σε- σαρωμέ νος, σαίρω ‘솔질하다’의 파생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청소되다(마 12:44, 눅 11:25), 쓸다(눅 15:8)
        신약 성경 / 3회 사용


        영(靈)(4151)
        πνεῦμα, ατος, τό

        1. 불기,  2. 바람,  3. 숨 내쉬기 

        발음 / 프뉴마(pnĕnuma)

        어원 / 415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성령(마 4:1, 막 1:10, 눅 2:27), 심령(마 5:3, 눅 1:17), 귀신(마 8:16, 눅 4:36, 요 16:18), 마음(마 26:41, 막 8:12),
        영혼(마 27:50, 눅 23:46, 요 19:30), 중심(막 2:8), 하나님의 말씀(행 18: 5), 영(눅 24:37, 39, 엡 1:17), 빛(엡 5:9), 한마음(빌 1:27),
        기운(살후 2:8), 바람(히 1:7), 생기(계 11:11, 13:15).
        신약 성경 / 379회 사용
        * 4154. 프네오(πνέω) 
        1. 불다,  2. 숨을 쉬다,  3. 마태복음 7:25
        발음 / 프네오(pnĕō)
        관련 성경 / 불다(마 7:25, 요 3:8, 계 7:1). [명] 바람(행 27:40)
        신약 성경 / 7회 사용

        음행(淫行)

        음행(淫行)

        πορνεία, ας, ἡ  4202

        1. 매음,  2. 음란,  3. 부정

        발음 / 포르네이아(pŏrnĕia)
        어원 / 420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음란(마 15:19, 막 7:21, 고전 6:13), 음행(마 5: 32, 행 15:20, 고전 5:1, 계 2:21), 추악(롬 1:29).
        신약 성경 / 25회 사용
        * 4203. πορνεύω

        1. 몸을 팔다,  2. 고린도전서 6:18,  3. 요한계시록 17:2

        발음 / 포르네우오(pŏrnĕuō)
        관련 성경 / 음행하다(고전 6:18, 10:8, 계 17:2, 18:9), 행음하다(계 2:14).
        신약 성경 / 8회 사용
        고린도전서 6:18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요한계시록 17:2

        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포도주에 취하였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음행의 의미 

        성경이 말하는 음행이란 하나님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를 말합니다.
        남,녀간의 성적인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상황 속에서 음행의 문제를 살펴보고 성적으로 개방적인 현대문화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조심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음행에 대해선 오늘 본문 외에도 고린도전서 6장 9절과 18-19절, 그리고 갈라디아5장 19-21절에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불의 한자(고린도전서 6:9-10)
        자기 몸에게 죄를 짓는 것(고린도전서 6:18)

        고린도전서 6:9-10, 18-1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육체의 일(갈라디아서 5:19-20)

        갈라디아서 5:19-21

        육체
        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음행(淫行) : 음탕하고 난잡한 짓

        음란할 음(淫)
        1. 음란하다, 2. 지나치다, 3. 담그다, 4. 방탕하다, 5. 넘치다

        다닐 행(行)
        1. 가다,  2. 행위,  3. 줄,  4. 행실,  5. 대열(隊列)

        πορνεία, ας, ἡ  4202 - 포르노(Porn) 

        1. 매음,  2. 음란,  3. 부정

        발음 / 포르네이아(pŏrnĕia) 


        음행이란 단어가 한글 개역 성경에서 구약에서 20, 신약에서 25

        민수기 25:1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성경에서 처음의 음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여자와 성 관계를 갖기 시작한 것으로 소개됩니다.

        요한계시록 19:2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

        성경에서 마지막으로 음행은 땅을 어럽게 하는 큰 음녀 즉 영적으로 타락한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성경에서는 음행이란 육체적인 죄로 시작하여 마지막에는 용서받을 수 없는 성령 훼방 죄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현장에서 간음한 여자를 돌로 쳐 죽일 듯이 달려든 군중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시며 율법으로 정죄하는 것에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하시며 그 여인을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나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는 "성령 훼방 죄" 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12:31, 마가복음 3:29)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누구든지 성령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성(性)범죄에 대한 성경적 고찰  

        히브리서 13:4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간음(姦淫)과 음행(淫行)

        간음(姦淫)은 타인의 아내, 또는 남편과의 부정한 성(性)행위를 말하고, 음행(淫行)은 불법적 성행위를 말한다.

        1. 간음(μοιχεία)

        간음은 헬라어로 μοιχεία(모이케이아)며 μοιχὁς(모이코스)에서 왔다.
        어근은 μἱχ(믹)으로 ‘안개’, ‘어둡다’, ‘어두침침하다’의 뜻을 갖고 있다.

        이 단어의 파생어는 다음과 같다.
         
         ὀμίχλη(호밀클레) : 안개, 어둠, 구름 낀(구름). a mist, fog
         μοιχὁς(모이코스) : 간음자(눅 18:11; 고전 6:9; 히 13:4; 약 4:4)
         μοιχαλίς(모이칼리스) : 간음한 여자, 간부(마 12:39,16:4; 막 8:38; 롬 7:3; 약 4:4; 벧후 2:14)
         μοιχάομαι(모이칼로마이) : 간음하다
         μοιχεία(모이케이아) : 간음(마 15:9; 요 8:3; 막 7:21; 갈 5:19)
         μοιχέυω(모이큐오) : 간음하다(마 5:27,28; 막 10:19; 눅 16:18; 요 8:4; 롬 2:22; 약 2:11; 계2:22)

        2. 음행(πορνεία)

        음행은 헬라어로 πορνεία(포르네이아)며 어근은 περ(펠)로 ‘팔다’를 뜻한다.
        동사 περἀω(펠아오)는 물건과 같이 자신의 몸을 파는 행위를 뜻한다.

        περ(펠)에서 유래한 근의어는 다음과 같다.

         περάω(폴라오) : 몸을 팔다.
         πόρνη(포르네) : 창녀
         πόρνος(포르노스) : 음행자
         πορνεία(포르네이아) : 음행
         ἐκ πορνέομαι(엑크 포르네이오마이) : 음행하다

        간음과 음행에 관련된 마태복음 5:28에 의하면,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했고.
        마태복음 19:9은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라”고 했다.
        요한계시록 2:14에 나온 행음(πορνεία)이 영어성경에는 fornication(음행)으로 되어 있으나 간음(μοιχὁς)과 음행(πορνεία)을 혼동해 병행해서 사용된다.

        행음(行淫)의 헬라어 πορνεῡσαι(포풀뉴우스아이)는, 단순과거 가정법으로 ἐδίδασχεν(에디다스켄: 가르쳐)을 설명하는 보족어로 사용되며, 이 단어의 명사형 πολνεία(폴네이아)의 어근 περ(펠)은 ‘팔다’를 뜻한다. 동사 περάω(펠아오)는 물건과 같이 자신의 몸을 파는 행위를 뜻한다. 헬라어 περ(펠)에서 유래한 용어는 περάω(폴라오: 몸을 팔다), πόρνη(포르네: 창녀), πόρνος(포르노스: 음행자), πορνεία(포르네이아: 음행), ἐκπορνέομαι(엑크포르네이오마이: 음행하다) 등이 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음행에 대하여

        1. 음행하는 자는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며,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며 하나님이 심판하신다(고전 6:9; 갈 5:19-21; 엡 5:5,6; 골 3:6; 살전 4:3-8; 히 13:4; 유 1:7; 계 2:20-22; 21:8; 22:15)고 기록하고 있다.

        2. 음행을 금지한 규례를 범한 자는 죽이라고 했다.(레 18:20-30; 20:10-12, 14-15, 16,17, 20,21; 신 22:21,22, 24-25; 신 22:22-27; 요 8:5)

        3. ‘음행은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엡 5:3)

        4.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유 1:7)

        5. 음행을 회개하지 않으면 침상에 던질 터이요, 큰 환난에 던지고, 그의 자녀를 죽인다.(계 2:20-23)

        6.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8)

        7.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계 22:15)

        8. 음행을 영적(靈的)으로 해석하여 우상숭배로 대칭했다.(민 25:1-7; 호 2:1)

        9. 이방의 동화(同化)를 가리키는 것으로 쓰였다.(계 14:8; 17:2-4; 18:3; 19:2)

        한글 개역 성경에서 간음과 음행으로 번역된 구절

        * 간음 - 마 15:19; 막 7:22; 요 8:3.

        마태복음 19:9의 ‘음행한 연고 외에’(μή ἐπί πορνεία)는 신명기 24:1 ‘수치되는 일’(ד ת, 에르와트 다바르)을 인용한 것인데, ‘몸을 수치스럽게 드러냈다’를 뜻하며 음행을 지칭한다. - 창 7:22,23; 출 20:26; 겔 16:36,37; 신 23:4,5; 레 18:20

        * 음행 - 마 5:32; 19:9; 행 15:20,15:29; 21:25; 고전 5:1; 갈 5:19; 엡 5:3; 계2:21; 9:21; 14:8; 17:2, 17:4; 18:3; 19:2

        ⦁ 음란 : 마 15:19; 막 7:21; 요 8:41; 고전 6:13; 고후 12:21; 골 3:5; 살전 4:3

        ⦁ 추악 : 롬 1:29. 사악한 기질(악의)

        ⦁ 부정, 불법, 죄악 : 마 22:18; 막 7:22; 눅 11:39

        * ‘수치되는 일’은 이혼의 조건이 되었는데 미쉬나(Mishnah)에 세 가지 학설이 있다.

        Shammai 설(70인 공회 부회장) : 음행을 하지 않으면 이혼하지 말고 음행하면 이혼하라.

        Hillel 설(70인 공회 회장) : 아내가 남편에게 식사를 잘못 제공하면 이혼하라.

        Akiba 설(교법사로서 학문의 최고 권위자) : 자기 아내가 보기 싫을 때 마음에 드는 다른 여자가 나타나면 아내를 버리고 장가들라.

        위 학설은, 예수 당시 바리새인의 이혼설로 서로 논쟁이 되곤 했다.
        바리새인이 예수께 와서 시험한 것은 예수가 세 학설 중 어느 것을 지지하는지를 알아내고 상호 시비를 걸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는 바리새인의 이 질문에 대해 인간의 창조원리를 말씀하며 이혼할 수 없다고 했다.(마 19:4-6)

        성(性)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1.  간음하지 말지니라(출 20:14)
        2.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출 20:17)
        3.  네 어머니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레 18:7)
        4.  네 아비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레 18:7)
        5.  네 계모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레 18:8)
        6.  네 자매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레 18:9)
        7.  네 아비의 딸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레 18:9)
        8.  네 어미의 딸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레 18:9)
        9.  네 손녀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레 18:10)
        10. 네 외손녀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레 18:10)
        11. 네 계모의 딸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레 18:11)
        12. 네 고모의 딸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레 18:12)
        13. 네 이모의 딸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레 18:12)
        14. 네 아비의 형제의 아내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레 18:14)
        15. 네 자부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레 18:15)
        16. 네 형제의 아내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레 18:16)
        17. 너는 여인과 그 여인의 딸의 하체를 아울러 범하지 말라(레 18:17)
        18. 그 여인의 손녀나 외손녀를 아울러 취하여 그 하체를 범하지 말라(레 18:17)
        19. 너는 아내가 생존할 동안에 그 형제를 취하여 그 하체를 범하여 그로 투기케 하지 말라(레 18:18)
        20. 여인이 경도로 불결할 동안에 그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레 18:19)
        21. 타인의 아내와 통간(通姦) 하지 말라(레 18:20)
        22. 너는 여자와 교합 함과 같이 남자와 교합(交合)하지 말라(레 18:22)
        23. 짐승과 교합하지 말라(레 18:23)
        24. 네 딸을 더럽혀 기생이 되게 하지 말라(레 19:29)
        25. 여인과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레 20:13)
        26.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고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라(신 22:5)
        27. 창기가 있지 못할 것이요, 미동이 있지 못할지니...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이니라(신 23:17,18)
        28. 무릇 짐승과 교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신 27:21)
        29. 자기의 분노를 더하여 그로 취케 하고 그 하체를 드러내려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합 2:15)
        30.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
        31. 음란과 호색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3,14)
        32.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면 사귀지도 말고 함께 먹지도 말라(고전 5:11)
        33. 음란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 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
        34. 음행을 피하라.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고전 6:18)
        35. 서로 분방하지 말라(고전 7:5)
        36.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엡 5:3)
        37.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히 13:4)

        음행자의 멸망에 대한 성구

        1.  싯딤에서 모압 여자와 음행할 때 하나님이 염병으로 쳐 이만 사천 명이 죽음(민 25:9)
        2.  아내를 취한 후 처녀의 표적이 없으면 그 아비 집 문에서 끌어내고 성읍 사람들이 돌로 쳐 죽임(신 22:20,21)
        3.  남자가 유부녀와 통간(通姦)할 경우 그 통간한 남자와 여자를 모두 죽였음(신 22:22; 레 20:10)
        4.  처녀가 약혼한 후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서 만나 통간 하면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돌로 쳐 죽였음(신 22:23,24)
        5.  만일 남자가 어떤 약혼한 처녀를 들에서 만나서 강간할 경우 그 강간한 남자를 죽였음(신 22:25)
        6.  만일 남자가 어떤 약혼하지 아니한 처녀를 만나 그를 붙들고 통간하는 중 그 두 사람이 발견되면 그 통간한 남자는 그 처녀의 아비에게 은 50 세겔을 주어야 했음(신 22:29)
        7.  음행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함(갈 5:19-21; 고전 6:9)
        8.  음행은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고 했음(엡 5:3)
        9.  음란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함(골 3:5,6)
        10.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유 1:7)
        11. 간음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심(계 2:22)
        12. 땅의 왕들이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짐(계 18:3)
        13.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함(계 19:2)
        14.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들이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일 시간에 망함(계 18:9,20)
        15.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죽였음(레 20:10)
        16. 계모와 동침하는 자는 그 아비의 하체를 범한 것이므로 둘 다 죽였음(레 20:12)
        17. 누구든지 자부와 동침하는 자는 둘 다 죽였음(레 20:13)
        18. 여인과 교합(交合)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한 것이므로 반드시 죽임(레 20:14)
        19. 아내와 그 장모를 아울러 범하면 그와 그들을 함께 불살랐음(레 20:14)
        20. 남자가 짐승과 교합하면 반드시 죽이고 그 짐승도 죽였음(레 20:15)
        21. 여자가 짐승에게 가까이하여 교합하면 여자와 짐승을 죽이되 반드시 죽였음(레 20:16)
        22. 그 자매 곧 아비의 딸이나 어미의 딸을 취하면 민족 앞에서 끊어졌음(레 20:17)
        23. 이모나 고모의 하체를 범할 경우 죄를 당했음(레 20:20)
        24. 백숙 모와 동침하면 그들이 그 죄를 당하여 자식 없이 죽었음(레 20:20)
        25. 그 형제의 아내를 취하면 그 형제의 하체를 범한 것이 되므로 자식을 얻지 못했음(레 20:21)
        26. 여호람이 유다 여러 산에 산당을 세워 예루살렘 거민으로 음란하듯 우상을 섬기게 함으로 창자에 중병이 들어 창자가 빠져나와 죽음(대하 21:18)
        27. 간음하는 자와 동류가 되면 하나님이 네 죄를 네 목전에 차례로 베품(시 50:18,21)
        28. 음녀로 인하여 한 조각 떡만 남게 될 것이며 음란한 계집은 귀한 생명을 사냥하는 자다(잠 6:26)
        29. 음란한 여인 오홀라와 오홀리바를 하나님이 심판함(겔 23:4-38)
        30.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함(히 13:4)
        31.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 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약 4:4)
        32.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음(벧후 2:6)
        33.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음란하여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됨(유 1:7)

        성경에 나타난 음행자

        1.  소돔의 백성들이 천사와 상관(相關)하여 동성애(Sodomites)를 하려고 함(창 19:5)
        2.  롯의 두 딸이 롯을 술 취하게 한 후 아비와 동침함(창 19:30-38)
        3. 히위 족속의 추장 세겜이 야곱의 딸 디나를 강간함(창 34:1,2)
        4. 르우벤이 그 서모 빌하와 통간함(창 35:22)
        5. 오난이 그 형수에게 들어가 설정한 것이 여호와의 목전에 약하였기에 그를 죽임(창 38:9)
        6. 다말이 그 시부 유다와 동침함(창 38:14-18)
        7.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음행한 이스라엘 남자와 미디안 여인을 처형함(민 25:6-15)
        8. 이스라엘이 싯딤에서 모압 여자들과 음행함(민 25:1)
        9. 삼손이 가사에 가서 기생을 보고 음행함 (삿 16:1)
        10.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과 동침함(삼상 2:22)
        11.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함(삼하 11:4)
        12. 암논이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강간함(삼하 13:14)
        13. 압살롬이 온 이스라엘 무리의 눈앞에서 그 부친의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함(삼하 16:22)
        14. 호세아의 처 고멜이 결혼 후에도 음탕한 짓을 행함(호 1:2)
        15. 바리새인의 집에서 음탕했던 여자가 회개함(눅 7:36-39)
        16.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음(요 4:18)
        17. 순리를 역리로 사용한 이방인들이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받음(롬 1:26,27)
        18.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예수께서 사해 주심(요 8:1-11)
        19.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고전 5:1)
        20. 이세벨의 행음(계 2:20)

        음행에 대한 제 학설

        King James 역은 fornication, The Emphasized New Testament는 unfaithfulness, R.S.V.는 unchastity, The New Testment: A New Translation(Olaf M.Norlie)은 adultory, New International Version은 marital unfaithfulness, Good News for Modern Man은 unfaithful로 번역했다.

        몇 가지 학설

        1) H. Baltensweiler 설 : 레위기 18:6-23에 금지된 죄, 하체에 대한 범죄를 말함(Baltensweiler, Die Ehe im Neuen Testament, 1967, p. 93;
        J.A. Fitzmyer, “The Malthean Divorce Texts and some New Palestinian Evidence”, Theological Studies, 37, 1976, pp. 208-211).

        2) Mark Geldard 설 : 혼인 전 성 행위를 말함(Geldard, “Jesus Teaching on Divorce”, Charchman 926, 1978, 134-143).

        3) T. V. Fleming 설: 간음(Fleming, “Christ and Divorce”. Theological Studies, 24, 1963, p.109), 이 학설은 예레미야 3:8,9에 의함.

        4) Joseph Jensen 설 : 넓은 의미의 제반 성적범죄를 말함(Jensen, Does Mean Fornication? pp. 161-184; William Hendriksen, The Gosple of Matthew, pp. 716-717).

        5) R. K. Harrison 설 : 자진해서 갖는 남녀의 성행위를 말하며, 간음은 결혼한 남자가 다른 여인과 정욕적 성관계를 갖는 것을 말함(Harrison, Encyclopedia of Biblical and Christian Ethics, p. 158).


        간음하지 말지니라

        예수는 음행에 대해 가르치길,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 하였느니라’(마 5:28)고 했고, 음란은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고 했으며(마 15:20; 막 7:21) 음행한 연고 없이는 아내를 내어 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마 19:9; 눅 16:18)고 했다. ‘간음하지 말라’고 강조했고(마 19:18; 막 10:19; 눅 18:20), 음행하는 사마리아 여자를 회개시켰으며(요 4:3-26)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돌에 맞아 죽게 될 음녀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면서 살려 주었다.(요 8:4-11)

        사도 바울은 결혼 전, 부정한 성행위를 금했다.
        고린도전서 7:1, 2에서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 했다. 바울은 음행을 말할 때, 혼전 성관계(고전 6:18; 7:1-2), 불의의 성관계(고전 5:1), 동성 관계(롬 1:26-27), 포욕(살전 4:6) 등도 언급했다.

        고린도전서 6:9-10에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자, 10인이 나열되었다.

        ① 음란하는 자
        ② 우상숭배 하는 자
        ③ 간음하는 자
        ④ 탐색하는 자
        ⑤ 남색 하는 자
        ⑥ 도적질 하는 자
        ⑦ 탐람 하는 자
        ⑧ 술 취하는 자
        ⑨ 후욕 하는 자
        ⑩ 토색 하는 자

        동성애 성(性) 행위가 창궐한 이때, 죄를 증오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도록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아야 한다.


        간음과 음행에 대한 해결책

        1. 정욕적인 눈빛이나 접촉을 근절시켜야 한다.(잠 10:31; 마 5:27-30; 롬 6:6; 8:13; 골 2:11; 3:11)

        2. 지체에 대한 자아 부인이 요구된다.(눅 9:23; 롬 6:13; 벧후 3:17; 잠언 1:10; 4:14)

        3.  회개함으로 지옥에 던지게 되는 것에서 돌아서게 한다.(삼하 12:13)

        * 위의 글은 이상찬 박사 저. 아시아 일곱교회(도서출판 두레마을, 1989년)와 목회자를 위한 산상수훈(도서출판 두레마을, 1990년)을 토대로 발췌, 정리했다.

        * 형법 제 32장 강간(强姦)과 추행(醜行)의 죄

        제297조 【강간】 폭행 또는 협박으로 부녀를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제298조 【강제추행】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에 대하여 추행을 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5백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제299조 【준 간강, 준 강제추행】 사람의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를 이용하여 간음 또는 추행을 한 자는 전 2조의 예에 의한다.

        제300조 【미수범】 전3조의 미수범은 처벌한다.

        제301조 【강간 등 상해. 치상】 제297조 내지 제300조의 죄를 범한 자가 사람을 상해하거나 상해에 이르게 한 때에는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제301조의 2 【강간 등 살인. 치사】 제297조 내지 제300조의 죄를 범한 자가 사람을 살해한 때에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한다. 사망에 이르게 한 때에는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제302조 【미성년자 등에 대한 간음】 미성년자 또는 심신미약 자에 대하여 위계(僞計) 또는 위력(威力)으로써 간음 또는 추행을 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제303조 【업무상 위계 등에 의한 간음】 ① 업무, 고용 기타 관계로 인하여 자기의 보호 또는 감독을 받는 부녀에 대하여 위계 또는 위력으로써 간음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5백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제304조 【혼인빙자 등에 의한 간음】 혼인을 빙자하거나 기타 위계(僞計)로써 음행의 상습 없는 부녀를 기망하여 간음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제305조 【미성년자에 대한 간음, 추행】 13세 미만의 부녀를 간음하거나 13세 미만의 사람에게 추행을 한 자는 제297조, 제301조 또는 301조의 2의 예에 의한다.

        제305조의 2 【상습범】 상습으로 제297조부터 제300조까지, 제302조, 제303조 또는 제305조의 죄를 범한 자는 그 죄에 정한 형의 2분의 1까지 가중한다.

        제306조 【고소】 제297조 내지 제300조와 제302조 내지 제305조의 죄는 고소가 있어야 공소를 제기할 수 있다.


        음행이란 단어는 헬라어 포르네이아(πορνεια)를 번역한 것입니다.

        성경적 관점에서 말하면, ‘하나님이 정한 질서를 벗어난 성적 관계’를 말합니다.
        B F 웨스트 콧은 음행을 ‘불법적 성관계’로 정의했습니다.
        그런데 동성애와 동성결혼 등은 이전엔 불법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는데 최근엔 합법화되는 추세입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법적 차원보다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질서에 근거해 음행을 규정해야 할 것입니다.

        성에 관해 하나님이 정한 질서는 이렇습니다.
        창세기 계시에 따르면, 하나님은 창조 여섯째 날에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서로 다른 성적 존재로 만드셨다는 뜻입니다.
        그런 다음 남녀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결혼을 의미합니다.
        결혼은 남녀의 성적 관계를 허용하는 의식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결혼으로 연합된 남녀 두 사람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자녀의 출산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결혼하고 부부가 된 두 남녀 사이에만 성적 관계를 허용해주셨습니다.

        부부의 성적 관계는 두 가지 중요한 기능을 합니다.
        첫째는 한 몸이 되는 기쁨을 누리는 것
        둘째는 자녀를 얻는 기쁨 

        만일 성적 관계가 공부나 일처럼 하기 싫고 힘들기만 하다면 누가 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성적 나눔에 쾌감을 느끼도록 해주셨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 쾌감을 느끼는 것도 그렇습니다.
        맛을 느끼지 못하면 먹는 게 지루하고 고통스런 일이 될 겁니다.
        그러면 안 먹으려고 할 겁니다.
        아이들이 채소를 잘 안 먹는데 아직 그 맛이 좋다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크면서 맛을 알면 잘 먹게 되죠.
        그래서 하나님은 남녀가 관계를 가질 때 쾌감을 느끼게 디자인하셨습니다.

        인간이 범죄하고 타락하자 성적 관계에도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일부일처의 부부만 성관계를 허용하셨는데, 타락한 인간이 이런 하나님의 질서를 무시하고 육신의 쾌감을 느끼는 수단으로 하나님이 정한 질서를 벗어난 성적 관계를 맺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음행입니다.
        예를 들면, 비 혼인관계에 있는 남녀의 성관계인 간음, 배우자가 있는 사람이 배우자 이외의 사람과 성관계인 간통, 돈을 주고 관계를 맺는 매춘, 여러 사람이 관계하는 혼음, 동성애, 스와핑 등 이런 게 모두 음행입니다.

        범죄로 인간의 심성이 부패해진 후 남녀의 성관계는 가장 오용되고 오염된 것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최근에 펼쳐지고 있는 미투(metoo) 운동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그 동안 괜찮다고 존경받던 인사들인 유명 방송사의 메인 앵커, 국회의원, 주지사, 심지어는 대통령까지 성추문에 연루된 사람으로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이라고 하시긴 했지만, 우선 여기선 행동으로 옮긴 경우에 대해서 이야기 합시다.

        음행은 어떤 고린도교인이 “그 아비의 아내를 취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다음과 같은 상황을 가정해볼 수 있습니다.
        나이든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젊은 계모만 남았습니다.
        아들에게 친 어머니가 아니고 자기와 나이가 비슷하거나 적을 수도 있습니다.
        옛날에 다윗 왕이 늙고 병들어 주로 침실에 누워있을 때 신하들이 왕의 침실 시중을 들라고 처녀 아비삭을 궁에 들였습니다(왕상 1:2).
        생전에 다윗왕은 아비삭과 동침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왕이 죽은 후, 넷째 아들 아도니야밧세바를 찾아가 아비삭을 자기 아내 삼고 싶다며 솔로몬에게 허락을 받아달라고 요청한 일이 있었습니다(왕상 2:17).

        아내로 번역된 헬라어 구나이카(γυναικα)는 여자, 아내의 뜻을 가진 말입니다.
        성경엔 아내로 번역되어 있는데, 아비삭처럼 정식 부인이라기보다 그냥 아버지의 여자였을 수도 있습니다.
        아들이 그 여자를 취한 걸 보면, 여자로서 매력 있는 미인이거나 혹시 돈 많은 과부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이목이 부담스러운데도 아버지의 여자를 취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았겠습니까?
        어쩌다 범했더라도 매력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아들을 정당화하려는 게 아닙니다.
        죄를 짓게 만드는 어떤 요인을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하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일이 교인 중에 일어났는데 “어찌하여 한탄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고 책망했습니다.
        바울이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걸 보면, 이 일은 교인 사이에도 이미 알려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지도자들이 이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께서 염려한 것은 이렇게 되면 다른 교인들까지 음행의 유혹에 빠져 교회가 문란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6절의 누룩 이야기는 바로 그 뜻입니다.

        교회가 교인들의 죄를 다루는 목적은 교인들이 죄에 오염되는 것을 방지하고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케 된 교회에 죄가 퍼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바울이 물리치라고 한 것은 죄를 부인하며 은폐하지 말고 회개하고 용서받아 회복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걸 알지만 서로 한 교인으로 지내며 교제하던 사람인데 죄를 지적하며 회개할 때까지 교제를 단절하겠다거나 교회에 나오는 걸 금하겠다고 하기가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한국인들의 경우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자기 가족 중에 누가 잘못해서 교회의 징계를 받게 되면 다른 사람의 없는 죄까지 들추며 반발할 수도 있습니다.
        잘못하면 교회가 분란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권징은 당사자나 교회 모두 유익하도록 기도와 지혜로 잘 시행해야 합니다.

        음행의 문제와 관련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이 주는 몇 가지 교훈을 제시하는 것으로 결말을 짓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어느 시대보다 성적으로 개방된 문화 속에 하나님의 질서를 벗어난 성적 관계를 맺을 유혹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자만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교회에서 죄를 방치해서 다른 교인까지 그래도 괜찮다고 오해하는 일이 없도록 그런 문제가 발행했을 때는 가능한 빨리 회개하고 회복되도록 조치를 취할 수 있게 모두 협력해야 합니다.

        셋째로 음행은 신앙생활은 물론 인생을 망친다는 걸 유념합시다.
        최근 미투 운동에서 보듯 어렵게 올라간 자리에서 수치를 당하며 내려와야 하고 가정도 깨질 위험이 있습니다.

        넷째로 그리스도 안에서 음행도 용서받을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그걸 은폐하려고 남편 우리야를 전쟁터로 보내 죽게 한 죄를 범했지만 하나님은 나단을 보내 죄를 깨우치고 회개하여 용서받게 해주셨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도 음행의 죄가 있으면 지금 당장, 아니면 이번 한 주 동안 진심으로 회개하며 용서받고 새 출발하기를 축원합니다.

        행위의 율법에 적용을 받을 때에는 '성민' 들 사이에서의 육체적인 일을 일컫는 말이었으나 마음의 율법이 시행되는 그리스도 이후는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의 경우나 결혼과 이혼에 대한 경우로 다시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세상에서의 윤리적 선이나 사회적 법은 세상에 속한 것이고 내가 그 해당사회의 법을 따르고 도덕을 지키는 것은 진리이기 때문도 아니고 양심의 문제 때문도 아닙니다.
        내가 속한 사회의 법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세상이 하나님의 선과 악의 섭리를 통하여 움직여지는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나의 경기장이기 때문입니다.

        각 사람이 속한 사회는 모두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고 그 다른 가치관에 따라 어느 나라는 마약을 해도 되고 어느 나라는 안 되는 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는 간통이 죄고 어느 나라는 죄가 되지 않는 이러한 각 사람이 처하고 있는 상황 윤리적 환경은 각각 하나님이 택하신 그 사람에게 있어서 거룩함을 향해가는, 혹은 하나님을 찾게 하는 수단으로 작용을 합니다.

        악이 있을 때에만 선이 분별이 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마땅히 있어야 할 것들이 있는 것이므로 그 각 사람이 속한 사회의 법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사회의 가치관이 변하면 법도 변하고 전에는 지켰던 것을 법이 변하면 안 지켜도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가는 사람에게는 인생들의 가치관에 의하여 만들어진 사회적 법은 그렇게 나그네가 어떤 동네에 들어가서 그 동네의 규칙을 따라야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의미는 없습니다.

        영적인 질서 상에서 아비먼저 된 자, 즉 전도자를 말합니다.

        어떤 이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 전도를 하게 되면 전도의 열매로 처음 맺은 피 전도자는 전도자의 선택받음을 증명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성령이 그 전도자에게 함께 했다는 표시가 바로 처음 전도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 전도된 사람은 그 전도자를 돕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돕는 자'를 '아내'라고 성경은 표현합니다.

        솔로몬이 '처와 첩을 많이 두었다'라는 표현은 '직접 돕는 자와 간접적으로 돕는 자를 많이 두었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한 개인을 돕는 성령도 그에게 있어서 아내로 표현 되며 피 전도자도 아내로 표현 됩니다.

        그래서 잠언에는 "젊어서(전도자의 상태에서) 얻은 아내를 기뻐하라." 혹은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네 집 내실에 있는 아내"라는 말에서 '집'은 그리스도의 터 위에서 지은 내 마음 안에 지어진 집이고, 그 집이 성전이 되게 해야 하며, 그 집이 성전이 되게 했을 때 하나님의 나라가 내 마음에 섰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집의 내실에 있는 아내는 성령인 것입니다.

        이렇듯 성경이 말하는 음행은 이러한 질서 안에서 남의 아내, 즉 남이 전도한 사람을 자기의 사람으로 만들려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전도자에게 돕는 자로 주신 사람이므로 그를 데려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를 파괴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분파가 일고 서로 사람 빼앗기 경쟁을 하는 것에 대하여 "이런 음행은 이방인들도 안 한다"고 한 것은 "육신의 일만을 생각하며 사는 이들도 육신적으로 그와 같이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 안에서 영적인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를 할 수가 있는가?" 라고 하는 것입니다.

        레위기에 언급되어 있는 음행에 관한 규례를 굳이 들여다보고 참고할 필요도 없이 각 사람이 현재 가지고 있는 육적인 가계도 안에서의 육체의 성적인 질서를 영적인 질서에 적용을 하면 바로 이해가 될 것입니다.

        육체적인 도덕적 양심이나 윤리적 선이나 사회적 법규를 하나님의 진리와 혼합하여 사고하며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그렇게 섞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성령의 법을 훼방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육신으로는 가이사의 사회에 살므로 가이사의 법을 따르고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사회에 살므로 하나님의 법을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혼동했을 때 집총거부니, 병역거부니, 탈세니 하는 문제들이 야기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서 사는 사람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몸으로는 가이사의 사회에서 가이사의 것을 사용하고 있으니 가이사에게 주어야 하는 것은 마땅히 가이사의 것을 주고, 하나님의 나라에 사는 마음으로는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드리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은 '유물' 이 아닙니다.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인데 어찌 하나님이 당신의 돈이 필요하겠습니까?
        이 말을 빌미로 헌금을 하라고 말하는 것은 불법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달라고 하셨지 돈을 가져오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헌금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빙자하여 사기를 치는 것입니다.
        인생이 자기의 육체적 욕구를 채우기 위하여 육에 속한 것을 가져오게 한 것이 헌금입니다.

        영적인 나라에 어찌 육적인 규례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육체의 행위의 율법은 모세의 율법과 함께 폐하신 것입니다.
        마음의 율법을 세웠는데 행위의 율법을 다시 만들고 주장하는 것이 곧 하나님에 대한 음행인 것입니다.

        이와 함께 오늘날 ‘기독교’가 행하고 있는 음행에 관하여 말씀을 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낙태’, ‘수혈’등에 대한 교계의 ‘의사표명’입니다.
        낙태를 하는 것에 찬성을 하는 것이 옳은가, 반대를 하는 것이 옳은가를 말하기 이전에 그에 대하여 성경의 이름으로 의견을 표명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하여 음행을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재산 나누는 자로 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재산을 어떻게 나누는 것이 성경적이라는 가르침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인생은 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영이 살지 못하면 흙으로 돌아가고 끝나는 것입니다.
        당신이 어떻게 세상에 나왔습니까?
        당신의 부모의 육적인 욕구를 발현한 행위의 결과로 당신이 나온 것입니다.
        당신의 부모도 흙이며 당신도 흙입니다.
        흙이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가는데 어떻게 돌아가는 것이 바르게 돌아가는 것이라는 가르침이 성경에 있겠습니까?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의 기준과 육신들이 만들어 놓은 윤리적 선의 기준은 서로 섞일 수 없는 것입니다. 영의 법과 육체의 법이 어떻게 섞일 수 있겠습니까.

        인생이 아이를 배고 낳았습니다.
        그러면 그 아이는 이제 영이 사는 길을 가야합니다.
        예수님과 같이 자기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 와중에서 흙으로 만들어진 인생이 하나님의 아들인 신이 되는 것입니다.
        신이 되지 못하면 모두 흙으로 돌아가고 끝나는 것입니다.

        당신이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그냥 하나님의 아들인 신이 되겠습니까?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생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인생의 윤리적 선에 대한 의견을 교계가 표명한 것이며, 그 표명의 근본에는 ‘세상에 속하려는 마음’이 그 지도자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들의 사회적 윤리란 하나님의 선을 따라가는 사람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므로 그에 대하여 의견이 있을 수도 없는 것이며, 오히려 이렇게 의견을 표명하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에 대하여 영적인 음행을 저지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경우는 마치, 사람이 동물세계에서 벌어지는 약육강식의 법칙에 대하여 인생들의 윤리적 선을 적용하여 의견을 제시하고 그것을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수컷을 잡아먹는 암컷 사마귀에 대하여 형법을 적용하여 ‘살충 죄’를 적용하고 도덕과 관습법을 적용하여 ‘친고죄’ 나 ‘배은망덕’ 이라는 도덕적 기준의 잣대를 들이대 평가하는 것과 같이 우스꽝스러운 일인 것입니다.

        부부가 이혼을 하든지 말든지, 낙태를 하든지 말든지, 수혈을 받든지 말든지, 군대를 가든지 말든지 그것은 단지 육체를 가지고 세상에 속하여 사는 흙으로 돌아갈 인생들의 일이지 결코 영에 속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성경을 부정한 인생들의 윤리 책으로 변질시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잠언 27:5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면책이라는 단어 ‘토카하트’는 훈계와 징계를 의미합니다.
        누군가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은 큰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 허물을 계속 덮어주었을 때 결국 그 허물로 인해 그 사람과 그 사람이 속한 공동체에 큰 어려움을 겪을 게 분명하다면 사랑의 용기를 가지고 그 잘못을 훈계하고 징계하여 바로 잡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오히려 그냥 덮어주고 뒤에서 챙겨주는 사랑보다 낫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에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교회 교우들에게 스승을 넘어 복음으로 그들을 낳은 아버지의 마음을 가졌음을 이야기하며 마치 부모가 그 사랑하는 자녀를 훈계하며 매질하듯 그들의 잘못을 바로잡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어서 5장부터 실제로 고린도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바로 잡기 위한 권면을 시작합니다.

        음행한 자에 대한 징계(1-5절)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고린도교회에서 벌어진 심각한 음행에 대하여 이야기 합니다.
        특히 그 음행은 하나님의 법도를 모르는 이방인들 가운에서도 없는 음행이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바로 ‘아버지의 아내’ 곧 계모를 자신의 아내로 취하여 들인 사건입니다.
        여기서 계모라고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바울이 직접적으로 어머니를 취하였다고 하지 않고 ‘아버지의 아내’라고 부른 것으로 보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계모라고 해도 아버지의 아내로서 자신에게 어머니임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교우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대하였습니까?
        통한히 여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통한히’라는 단어는 ‘펜데오’라는 단어로 ‘슬퍼하다’, ‘애통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일어나지 않을 음행의 사건이 벌어졌음에도 그 사실에 슬퍼하거나 애통함이 없이 여전히 자신들은 신령한 공동체라 자부하는 교만함에 빠져있던 것입니다.
        그런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쫒아내지 않았다는 말씀은 아무런 치리의 조치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겠습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고린도는 성적타락이 만연한 도시였습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교회가 세상을 제자삼지 못하고 교회가 세속화되는 과정을 겪었던 것으로 볼 수 있고 혹은 그 사람이 참 회개의 열매 없이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가능성은 그들이 구원에 있어서 잘못된 가르침을 받아 은혜를 오용하고 있었을 가능성입니다.
        4장에 고린도교회에는 아무런 능력이 없이 말로 사람들을 선동하는 거짓 교사들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상을 가진 자임을 알 수 없지만 5장 서두의 문제들과 연결해서 생각해 보았을 때 ‘쾌락주의적 영지주의자’들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활보하는 시대는 아니었지만 그 사상적 뿌리들이 초대교회에 나타나고 있을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영지주의는 물질은 악하고 영적인 것만 선하다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주장합니다.
        그래서 물질계에 속한 우리의 육체는 더 악한 행위를 한다고 해서 더 더러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잘못된 교리적 주장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을 죄악된 길로 미혹하는 사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영지주의적인 가르침을 받은 이들 중에 극단적 자유방임 혹은 도덕 폐기론자들이 생겨서 교회의 일원이 된 뒤에 어떤 죄를 짓더라도 상관없다는 잘못된 신앙을 갖게 된 자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이 사람도 그중에 속한 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요즘에도 어떤 이단들은 영지주의와 비슷한 주장을 펼치기도 합니다.
        한 번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미 모든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에 다시는 회개를 하거나 죄를 용서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굉장히 달콤하게 들리는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칭의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가는 성화의 삶을 살며 우리가 받은 구원을 완성해가고 또한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삶으로 증거 해가는 치열한 자기부인의 현장입니다.
        이런 성화의 삶을 부정하는 구원론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아 자신의 욕망을 위해 그리스도의 보혈을 욕보이는 인간의 욕심 그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진심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우리의 부르심의 목적과 이유를 따라 때론 넘어질지라도 일어나 계속해서 그 구원의 길을 걸어가는 자이어야 합니다.
        마치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면죄부처럼 여기며 자기 정욕을 따라 죄악된 길을 고의적으로 계속해서 걸어가는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은 구원받았다하고 정욕을 따라 방종하는 자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런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이런 문제가 있을 당시 고린도교회에 머물러 있지 않았으면서도 아비의 마음으로 아파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 교우들은 이 문제가 생겼을 때 통한히 여기며 슬퍼하고 돌이키지 않았지만 도리어 멀리 떨어져 있던 바울은 고통스러워했습니다.
        3절에 몸은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다는 이야기는 바울이 고린도에 육신으로 함께 있지는 않지만 그 모든 상황들을 알고 함께 있는 자 이상으로 마음을 쏟고 이 일을 숙고하였음을 알려주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어주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사탄에게 내어주었다는 표현이 다소 과격하여 해석하기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지만 본문 2절에 ‘너희 중에서 쫒아내지 아니하였느냐’라는 표현이나 맥락을 살펴보면 ‘출교’에 대한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세상 사람들도 짓지 않는 음행을 저지르고 또한 아무런 회개의 조짐이 보이지 않는 그 사람을 교회에서 내보내는 최고의 권징 곧 ‘출교’시킬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출교는 단순히 죄를 지은 사람을 벌주기 위한 목적이 아닙니다.
        출교를 함으로써 먼저 교회가 어떤 공동체임을 나타내는 목적이 있습니다.
        만약 이런 음행하는 자가 회개하지 않고 뻔뻔히 죄악된 길을 가고 있음에도 그런 자를 내어 쫒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들은 교회가 성적으로 방탕하고 타락한 공동체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권징을 통해 교회 스스로의 자정능력을 잃지 않음으로 세상 속에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정체성을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는 출교를 당하는 자에게도 유익이 됩니다.
        회개할만한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회개치 않는 다는 것은 둘 중 하나입니다.

        첫 번째는 그가 원래 회개하지 않고 단순히 종교인으로서 교회의 일원으로 출석만 하고 있던 자이거나
        두 번째는 회개하고 주님을 믿었지만 죄에 미혹되어 영적 분별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병들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출교가 그에게 어떻게 작용하게 됩니까?
        일반적인 치료에서는 쓰이지 않지만 환자가 완전히 의식을 잃고 심장이 정지된 상태에서 그를 깨우기 위해 고강도 전기충격을 가하는 제세동기를 사용하듯이 출교는 곧 그의 죽어있는 혹은 잠들어 있는 신앙의 뿌리를 흔들어 깨우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신앙이 없었다면 자기 영혼의 문제에 대하여 깊이 고민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요 신앙이 있음에도 유혹에 미혹되어 잠들어 있었다면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놓고 깊이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출교를 통해 그를 예수님의 몸 된 교회에서 끊어버렸지만 그 일을 통해 회개하고 돌이켜 육신의 정욕에 속한 죄악을 멸하고 회개하여 주 예수의 날에 다시금 구원의 자리로 나아오게 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쉬운성경에 보면 5절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을 사탄에게 내어 주어, 그 사람의 죄의 본성은 멸망당하더라도 영혼은 우리 주님의 날에 구원 받게 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그 사람을 놓지만 완전히 놓은 것은 아니였습니다.
        아마도 그 사람의 구원과 회개를 위해 누구보다 더 뜨겁게 가슴아파하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마치 매를 맞는 아이보다 매질을 하는 아비의 마음이 더 아픈 것처럼 말입니다.
        교회가 정말 하나님의 가족공동체라면 우리는 서로를 향한 칭찬과 감사의 말도 해야 하지만 때로는 상대를 위하여 사랑에서 우러나온 권면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권면이 나를 향한 진심어린 사랑의 마음에서 우러러 나온 몸에 좋은 한약임을 알고 기꺼이 받아들여 마실 수 있을 때 우리의 신앙은 더욱 순결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성숙함을 이루어 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출애굽기 12장 15절에는 ‘너희는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어지리라’라는 무교절 지키는 규례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유월절과 함께 이어지는 무교절 기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집안에 누룩을 미리 제거하였습니다.
        바울은 음행으로 인해 악행을 저지른 자를 누룩에 비유하며 그리스도의 보혈로 거룩하여 진 고린도교회 교우들을 누룩 없는 덩어리라 부릅니다.
        이 말은 만약 이 사람을 출교하지 않고 받아들이게 된다면 누룩이 반죽을 부풀어 오르게 하듯 곧 그의 음행은 교회공동체의 도덕적 기준들을 무너뜨리고 세상 같은 아니 세상보다 더 도덕적 기준이 낮은 악한 공동체로 변질될 것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치 유대인들이 유월절 어린 양을 잡아 먹고 이어지는 무교절 기간 누룩을 제거하듯 유월절 어린 양, 예수님의 희생으로 거룩한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면 우리도 공동체의 거룩함을 위해 누룩 같은 죄악을 방치하지 말고 권징을 통해 제거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이는 권징의 궁극적인 목적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거룩함을 유지하는 것에 있음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죄는 확산성을 가지고 있기에 교회의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심각한 죄악을 근실히 징계하고 바로 잡아 거룩한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도록 애써야 합니다.

        그때에 8절 말씀처럼 순전함과 진실함의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순전함이란 도덕적 순결함을 의미하며 진실함이란 ‘알레데이아’ 곧 진리를 의미합니다.
        이는 교회가 단순히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는 날까지 존재하는 것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순결과 진리의 공동체로 거룩하여져서 결혼식 단장한 신부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주님 앞에 발견되어져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내 삶에 더러운 죄악과 날마다 싸워야 하고 또한 우리 공동체가 직면하는 악함의 누룩을 기꺼이 제거하려는 거룩한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하기 이전에 보내었던 서신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고 경고하였는데 이 말을 오해한 고린도교회 교우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고린도지역은 성적 타락이 극심하였기에 만약 부부의 순결을 깨끗하게 지키는 자와만 사업을 하거나 교제를 한다면 그들의 사회적 입지는 너무나 제한적으로 축소될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10절에 그런 자들과 만나지 않으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의도로 쓴 것이겠습니까?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

        바울이 사귀지 말라고 한 것은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믿음의 형제라고 하면서 음행과 탐욕과 우상 숭배와 모욕 그리고 술 취함과 속여 빼앗는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과 교제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성령 하나님의 거룩하게 하시는 성화의 삶을 따라가는 자가 아니라 육체의 정욕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지만 교회 안에서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스스로 누룩을 자처하며 교회를 병들게 하고 다른 사람을 죄악의 자리로 이끌어가는 미혹자들이 있다면 그들을 내쫒아야 한다는 엄중한 명령을 내리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전해준 말씀을 통해 세상 속 교회의 위치와 사명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됩니다.
        세상 밖에 존재하지 않지만 세상과 같지 않은 순전함과 진실함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촉매(觸媒. catalyst)’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는 화학 반응에서 그 자신은 변하지 않지만 다른 물질의 화학 반응을 일으키는 역할을 하는 물질을 의미합니다.
        세상 속에서 세상과 같아지지 않지만 오히려 그들을 변화시키는 존재로서 우리가 살아갈 때에 그 삶이 바로 예배의 생활화 생활의 예배화가 될 것이며 영과 진리로 살아가는 예배자의 삶이 될 것입니다.
        오늘도 세상으 소금과 빛으로 촉매 역활을 바르게 감당하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육신은 멸하고 영은...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이 구절은 해석상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다.
        유대교에서는 육체의 죽음을, 속죄받지 못한 죄들을 속죄하는 수단으로 취급하기도 하였으나 본절에서 이와같은 원리를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다시 말해서 육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영혼이 구원받는다는 견해는 성립될 수 없다는 뜻이다.
        성경에는 영과 육이 따로 분리되어 구원받거나 멸망받는 일에 대하여 전혀 말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둘다 구원받든가 둘다 멸망하든가 해야한다(Lenski).
        특히 바울은 다른 모든 구절에서 속죄는 육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본절의 육신의 멸망과 영의 구원은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칼빈(Calvin)은 전반부에 등장하는 '내어준다'라는 말의 법정적, 선언적 의미를 강조한다.
        다시말해서 사단에게 내어주는 행위는 일시적(一時的)인 것으로서 궁극적인 심판과 구원에 선행하는 임시 조치라는 뜻이다.
        음행한 자들을 사단에게 내어주는 교회의 심판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궁극적이며 영원한 그리스도의 심판에 의하여 그의 운명은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참된 사랑의 원리인 징계를 나타냄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다시 그들에게 미칠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하며 또한 올바
        른 징계를 행함으로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그들을 도와야 한다.
        한편 바울은 '주 예수의 날'이라는 구절을 첨가함으로써 그 징계받은 죄인들을 주의 백성들 가운데서 다시 볼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따라서 본절에서 범죄자에 대한 징계의 목적을 살펴볼 수 있다.
        즉 징계는 범죄한 영혼에 대한 최종적인 심판이나 유기가 아니라 회개와 돌이킴을 위한 일시적 고난이며 구원을 전제로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이다.

        본절은 특히
        1. 범죄자를 그대로 방치하는 행위는 사랑이 아니라 무관심의 소치로서 그 사람을 멸망에 빠뜨리며 다른 사람들까지 함께 타락케 만드는 범죄라는 사실
        2. 참된 징계의 정신은 사랑이라는 점을 극명하게 교훈해 준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09-15-2022(목)

        주와 합하는 자(고린도전서 6:17)  

        주와 합(合)하는 자는 한 영(靈)이니라.

        6:1. 너희 중에 누가 다른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 송사하고 : 2919. κρίνω

        1. 나누다,  2. 판단하다,  3. 결정하다

        발음 / 크리노(krinō)
        관련 성경 / 고발하다(마 5:40, 고전 6:6), 비판하다(마 7:1), 심판하다(마 19:28, 눅 19:22, 요 3:17, 계 18:8), 정죄받다(눅 6:37),
        판단하다(요 8:16, 롬 2:1), 다스리다(눅 22:30), 심판받다(요 3:18, 벧전 4:6, 계 20:12), 재판하다(요 18:31), 결의하다(행 3:13, 21:25),
        작정하다(행 20:16, 고전 2:2, 딛 3:12), 심문받다(행 23:6, 24:21, 25:20), 판단받다(롬 3:4, 고전 11:32), 정죄하다(롬 14:22),
        결심하다(고후 2:1).
        신약 성경 / 115회 사용
        6:20. /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을 돌리라.

        영광(榮光) : 불 화(火) + 덮을 멱(冖 ) + 열 십(十)

        "예배"란 뜻과 마음과 몸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무한한 가치를 의도적으로 표현하는 모든 행동을 포괄하는 용어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예배에 대해 생각할 때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 의식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배를 그렇게만 생각한다면 이는 예배의 참의미를 아주 제한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러한 제한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삶의 모든 부분이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먹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아침식사이든 피자헛에서의 식사이든 혹은 오전 간식이든 그 무엇이라도 좋습니다.
        성경은 모든 먹는 행동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은 우리 삶에 있어 가장 기초적인 것들입니다.
        무엇이 이보다 더 실제적이고 인간적일 수가 있겠습니까?

        성행위를 예로 들어 봅시다.
        바울은 음행에 대한 대안은 예배라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6:18-20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죽음을 예로 들어 봅시다.
        죽음은 이 땅에서의 몸의 마지막 행동입니다.
        몸은 작별을 고합니다.
        이러한 몸의 마지막 행동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예배할 수 있습니까?

        빌립보서 1:20-21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바울은 그의 죽음을 통해서 그의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을 소망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서 "내게는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라고 더합니다.
        우리는 죽는 것을 유익한 것이라고 여김으로써 죽을 때 그리스도의 무한한 가치를 나타냅니다.

        여러분에게는 몸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여러분은 항상 하나님의 전 안에 있습니다.

        식사(고린도전서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죽음(빌립보서  1:20-21)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성행위(고린도전서 6:18-20)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사람이 하나님의 성령님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도바울은 다메섹에서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돌이켜 회개하고 전에 옛 사람의 목숨을 버리고 새사람이 되어 그 마음에 주님의 성령을 받아 모시고 하나 된 상태를 한 영(靈)이 되었다고 말합니다(고전 6:17).
        이는 주님의 성령과 나의 영혼이 연합된 것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기름부음은 거룩하게 구별하여 직분을 위임하고 성령으로인(印)을 치며 죄악에서 완전히 떠난 것을 인준하는 것을 말합니다(출28:41-43. 엡 1:13. 요일 2:27).
        또 다른 말로하면 하나님의 신(神)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를 예수께서 너희 율법에 기록된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은 신이라고 증언하셨습니다(요 10:34).
        이것은 이미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살을 떡으로 피를 언약의 피로 제시하시고 이를 먹고 마시는 자는 영생의 생명을 소유한자이며 이를 먹는 자속에 예수께서 거하시겠다고 말씀하시고 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靈)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6:54, 56, 63).

        예수께서 이르는 말씀이 주님 안에 계신 성령으로 말씀하신 것이며 그러므로 주님의 모든 말씀은 영(靈)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은 또 주는 영(靈)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은 자유가 있다고 말하여 주님과 성령께서 서로 다른 인격이지만 일체라는 말씀으로 증거 했습니다(요 6:63. 고후 3:17).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성경의 율법의 증언을 따라 주님의 말씀을 받은 자들을 신(神) 즉 성령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요 10:35). 

        시편에 아삽의 시(詩) 가운데서도 여호와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를 말하기를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시82:6). 

        이것은 우리가 주님과 같은 성령을 받는 것으로 주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그 말씀이신 성령과 그 안에 계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주의 영으로 우리가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이른 말씀에 성령님이 함께하신 것이시기 때문입니다(요 6:63).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과 육신에 있고 세상에 있고 죄악을 행하며 마귀에게 잡혀 그 감옥에 갇혀있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율법의 말씀으로 다가오고 생명을 살리는 영의 양식이 아닙니다(사 14:17, 42:7. 유 1:18, 19). 

        이들에게는 성령님이 함께하시지 않고 그 눈과 귀를 율법의 수건으로 덮어 놓아 주님의 말씀을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셨습니다(사 6:9, 10, 29:10-14. 마 13:14, 15. 고후 3:14).

        사도바울은 이와 같은 율법의 기능을 몽학 선생이라 후견인과 청지기라고 말합니다.
        이들에게는 율법으로 자신의 죄악 된 정체성 파악을 하여 죄인된 것을 알게 하고 하나님과 주님이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죄악에서 떠나지 않으면 결코 주님을 만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갈 4:1-4). 

        그 후에 하나님의 때가 차면 예수님께 나와 구속의 은총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게 하여 하나님의 원수인 세상에 속한 육적인 목숨과 불의한 죄악과 어둠의 영들과 세상의 우상들을 다 십자가에 드리고 구속을 받아 성령으로 새 생명을 받고 새롭게 되면 “율법의 모든 말씀들이 태도가 바뀌는데” 이제는 성령과 하나 된 자들에게는 시편에서 다윗은 주님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한다”고 말합니다. 

        그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자로 지혜롭게 하며 그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그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영이요 생명의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전에 정죄하고 어둠가운데 있는 것을 알게 하던 율법이 이제는 오히려 성령님과 함께 생명을 소성케 하며 보호해주고 마음을 기쁘게 하며 눈을 열어 밝히보게 해주는 우리 영(靈)의 생명의 양식으로 그 기능이 바뀌었습니다(시 19:7, 8. 요 6:63). 

        이는 우리가 주님과 그 영 안에 있게 되어 신분이 바뀌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므로 그 율법의 말씀들이 태도가 싹 바뀌어 우리를 살리는 말씀이 되어 그 영(靈)이 함께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가 되어 연합되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의 일을 받아드리게 되었습니다(고전 2:14, 6:17).

        이제는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함께 계신 것을 우리로 알게 하셨습니다(요 14:16-20, 26). 

        또 우리에게 오신 그 영께서 우리로 하나님과 일치하는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슥 4:6. 벧전 4:6. 빌 4:13). 
        이는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셔서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게 하셨으며 또 주님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알게 하셨습니다(요일 4:12, 13). 

        그 결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은 육신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되었습니다(롬 8:9). 
        이와 같은 자들은 비록 몸이 있어도 전(前)에 육신의 정욕에 있던 것과 같이 육신의 소욕에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갈 5:16, 17).
        이들에게는 그 몸속의 죄에 법이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어 멸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은 옛 사람의 죄에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게 하려한 것이라고 말합니다(롬 6:7, 14, 7:23)

        이제는 우리가 성령 안에 있어 그 영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는 자며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우리의 몸이 성령님의 전이되어 이제는 우리의 몸이라도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이는 주께서 죽음을 맞이하셔서 피 값으로 사셨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것으로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고전6:19, 20. 갈2:20)

        그러므로 이제는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으며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어야합니다.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일 뿐입니다(롬 14:7, 8). 
        이와 같은 자들은 주의 영과 합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어 주와 일치되는 삶을 살게 하시는데 이는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나님처럼 온전하게 살아간다는 말입니다(마 5:48. 벧전 4:6)

        이제 우리는 성령님과 하나 되어 신령한 영혼과 몸으로 성전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또 주님의 말씀인 그 영(靈)으로 주께서 기뻐하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며 산제사 드리는 예배 자가 되었습니다(롬 12:2. 고전 6:20. 벧전 2:5).
        그런데 우리가 주의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믿지 않는 자들과 사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그들을 예수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서 동반자로 지내야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일을 벗어나서 사귀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에 바울사도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고 합니다.
        의와 불법이 또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사단이 어찌 조화 될 수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으로 불신자와 어둠에 속하고 세상에 속한 자들과 사귀는 것을 스스로 구별해야하며 제한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우리는 그의 자녀이고 우리의 신분은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요 17:16. 고후 6:14-18). 

        우리의 신분은 성령님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만일 우리가 세상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그것을 사랑하여 주님에게서 돌아서면 영적인 간음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와 합한 자들로 한영인데 주안에는 의롭고 성결하며 거룩한 자들로서 이를 귀히 여기지 않고 죄를 범하면 몸 밖에 있던 죄가 우리 몸 안으로 들어오게 되어 우리가 다시 옛 사람으로 전락하여 타락한 자가 됩니다(고전 6:18).

        그러므로 조심해야하며 우리의 신분이 이제는 주님의 영과 합하여 한영이 되었기 때문에 오직 우리 영혼과 몸으로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 자기를 위하여 살지 말고 오직 우리를 위해 죽었다가 다신 사신 예수그리스도의 것으로 주님만 위하여 살아가는 거룩한 주의 백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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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16-2022(금)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고린도전서 7:24)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이제까지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직면한 문제에 대해서 해결을 위한 대답으로 말씀을 소개했습니다.
        교회 안의 분쟁에 대한 말씀 : 1-4장
        음행 : 5장
        소송 : 6장
        결혼 : 7장

        7:5.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절제(節制) / ἀκρασία, ας, ἡ  192

        1. 자제력이 없음,  2. 무절제,  3. 방종,  4. 방탕

        발음 / 아크라시아(akrasia)
        어원 / 19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방탕(마 23:25), 절제 못함(고전 7:5).
        신약 성경 / 2회 사용

        마태복음 23:35 - 방탕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제시한 세 가지 제도는 가정과 교회와 국가라고 합니다.
        가정을 위한 제도는 결혼으로 시작합니다.

        결혼은 법률행위로서, 일종의 계약을 말합니다.
        혼인에 합의한 당사자가 혼인신고를 하면서 법률혼은 시작합니다.
        이로써 부부, 남편, 아내 등으로 일컬어지는 계약관계가 형성되며 인척도 발생합니다.
        혼인에는 여러 가지 법에서 정한 의무가 있고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정조의 의무라고 하겠습니다.
        정조의 의무는 여러 인간관계 중 부부관계에만 유일하게 적용하는 법적 의무입니다.

        연애감정이 결혼의 전제조건은 아니며 쌍방간의 합의만 있으면 가능한 것이 결혼이고, 연령 역시 서로 비슷한 나이대의 연령끼리만 결혼하는 것도 아닙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는 이성 결혼과 남자와 남자 혹은 여자와 여자가 결혼하는 동성 결혼도 자주 언급되는 현실입니다.

        문제는 세상의 풍속과 성경의 진리를 혼돈하면 안 됩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세상의 가치로 전환하려는 잘못된 방향과 시도를 차단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법으로 이러한 시도를 금지하려고 합니다.
        그만큼 성경적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현실이라고 하겠습니다.

        결혼 적령기라는 말은 육체적 욕망에 사로 잡힐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육체의 욕망 때문에 결혼을 결정하는 것은 욕망의 대상이 바뀌때마다 심각한 문제를 야기 시킬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혼이란 성생활 적령기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가 결합하여 성경의 가르침을 함께 실천할 수 있는 기초를 쌓는 것이어야 합니다.

        때로는 사람마다 성적 관심과 감정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혼자서 지내는 것을 더 좋아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차라리 혼자 지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깨우칩니다.
        그러나 욕망이 불타올라 도저히 혼자서 견딜 수 없을 때는 결혼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결혼이란 남자와 여자가 서로 뜻이 맞아야 하고 성향이 같아야 합니다.
        서로 다른 체질과 성향 때문에 요즈음은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때 공항에서 이혼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6장까지는 고린도 교회가 가진 본질적 문제인 교회의 분쟁과 음행과 같은 도덕적 무질서에 대해 책망 하였습니다.
        7장에서는 매우 사적이고 개인적인 성과 결혼의 문제를 다룹니다.
        크게 두 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 단란은 1-24절까지이며, 이곳에서 바울은 결혼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몇 가지의 문제들을 다룹니다.
        둘째 단락은 25-40절까지로 아직 결혼하지 않는 처녀나 홀로 있는 여성들에게 조언합니다.

        우리가 고린도전서 7장을 이해할 때는 시대적 배경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고린도라는 항구도시와 성적으로 굉장히 문란했던 도시의 특성이 고린도 전서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하는 조언보다는 좀더 극단적이고 강력한 방향으로 조언을 했습니다.

        1-24절 결혼한 이들에게
        25-40절 홀로 있는 이들에게

        결혼의 의미 : 서로에게 의무를 다하라
        음행을 피하기 위해 남녀는 결혼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결혼했다면 남녀는 서로에게 의미를 다해야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부부 생활에 중요한 원리를 이야기합니다.
        남편의 몸은 아내가 주장하고, 아내의 몸은 남편이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개인주의 정신이 물든 현대인들에게는 굉장히 어색해 보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복음의 원리에 의한 것입니다.
        로마서 14장에 보면 믿음이 강한 자들은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위해 절제하고, 조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교회 안에서 다른 성도를 배려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신앙생활하는 것이 맞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원리를 부부생활에도 적용하여 자신의 몸이라고 자신의 마음대로 하지 않고 상대를 먼저 생각하고 고려하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한 가지의 원리는 결혼은 인간이 가진 육신적 본성을 충족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합니다.
        '음행을 피하고, 절제 못함으로 인해’분방하지 말라는 말은 인간이 마치 육신적 욕망에 사로잡혀 사는 존재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헬라적 사고를 육신을 열등하거나 악하게 보지만, 구약 성경에 뿌리는 둔 히브리즘은 몸을 악하게 보지 않고 하나님의 선한
        피조물로 봅니다.
        육신을 입고 있는 인간에게 배고픔과 갈증, 성욕 등은 당연한 것이며 선한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말씀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 악한 것입니다.

        이혼의 문제

        과부들에게 가능하다면 결혼하지 말로 홀로 지낼 것을 당부합니다.
        그러나 절제할 수 없다면 결혼하는 것이 낫다고 말합니다.
        만약 지금 결혼했다면 서로 갈라서지 말 것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결혼에 대한 것입니다.
        한쪽만 신자일 경우 상대편의 영혼의 문제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종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혼하게 되면 반드시 얽매이게 되어 있고, 그로 인해 얻는 것도 있고 잃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결혼은 사람이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음행을 피해야할 책임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지워지므로 거룩을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과도한 종속이나 짐으로 다가온다면 굳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바울의 권면입니다.

        결혼하는 것도 좋고, 결혼하지 않은 것은 더욱 좋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현대의 교회가 그대로 받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지금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가 아니라 극도로 타락했던 고린도라는 도시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적으로 너무나 문란했던 고린도에서 결혼은 어떤 면에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동시에 잘못되면 사람에게 얽매일 수
        있는 길로 들어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지금 ‘임박한 환난’이 임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종말론적 관점은 29-31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결혼하여 세상에 얽매이게 된다면 그것이 안타깝다는 것입니다.
        32-34절은 결혼하는 것과 하지 않은 것의 차이를 말합니다.
        결혼하면 가정에 충실해야하고, 결혼하지 않으면 오직 주님만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지역의 음란한 문화는 결혼마저도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반대로 결혼 자체가 악하다고 여기는 금욕주의자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좋지만, 음행을 피하기 위해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 말합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만든 선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한 몸을 이루고, 함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기 원하십니다.
        따라서 결혼은 결코 음행이 아니며, 오히려 사람들을 음행의 문제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현실은 성적인 문제에 있어 그 기준을 이미 상실했으며, 교회 안에서도 심각한 경우가 많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이러한 문제로 고통을 겪고, 부부간에 큰 문제를 야기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오직 결혼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성관계를 허용하셨으며,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행복과 즐거움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당시의 아내들은 남편의 소유물에 불과하다고 할 정도로 가정에서 여성들의 힘은 약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내의 몸은 남편이, 남편의 몸은 아내가 주장하도록 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따라서 부부 간에는 서로 동등한 지위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에 전념하기 위해 얼마 동안의 분방은 부부가 서로 합의하여 할 수 있지만, 반드시 다시 합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서로가 절제하지 못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결혼하지 않은 자와 과부에게 말합니다.
        지금 자신이 독신으로 주님을 위해 살고 있는 것처럼 독신으로 주님을 섬길 것을 권했습니다.
        그러나 정욕이 불같이 타올라서 절제 할 수 없다면, 결혼을 하라고 권면합니다.
        정욕이 불타올라 시험에 빠져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것보다 결혼해서 주님을 섬기는 것이 훨씬 낫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결혼이 자유 아래 있다고 가르쳤지만, 이를 오해하여 결혼과 이혼을 가볍게 여기지 않도록 당부합니다.
        결혼한 자들은 이혼하지 말아야 합니다.
        혹시 이혼을 했다면 다시 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 남편과 아내는 한 몸이 되었기 때문에 비록 갈라서더라도 그 한 몸 됨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이혼율은 국가 통계청의 자료에 따르면 계속 증가하는 추세이며 2020년 9월 기준으로 한 달에 9,536건이나 발생을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혼인율은 계속해서 낮아지고 있지만, 이혼율은 점점 높아지고 있어서 혼인신고에 대비하여 절반인 50%에 가까운 이혼율을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아시아 국가에서도 우리나라의 이혼율은 1위입니다.

        지금도 하루에는 수많은 가정들이 여러 이유들로 깨어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많은 가정이 이혼과 별거, 싸움과 갈등으로 서로가 멀리하게 되기도 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자신의 의무를 외면하고 상대방이 지켜야할 책임만을 강조한다면 관계는 더 나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부부간의 사랑은 서로를 바꾸고 조종하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존중하고 수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주님 안에서 남편과 아내가 한 몸 되었음을 깊이 인식하고 복음의 진리 안에서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 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에도 주님이 세우신 가정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다른 경우의 사람들에게도 말했습니다.
        바울은 나중에 고린도후서 6장 14절에서 불신자와 함께 멍에를 메지 말라고 가르치지만, 이미 결혼을 한 상태라면 배우자가 신앙이 없어도 결코 이혼 사유가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배우자가 지금은 믿음이 없어도 나중에 예수님을 믿는 다른 배우자를 통해 믿음을 갖고 거룩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자녀들도 동일하게 믿음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부부가 갈라서지 않고 모두가 평화롭게 살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들의 주변에는 현재 믿지 않는 배우자로 인해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믿음이 없었지만, 믿음의 배우자로 인해 그 남편이나 아내, 온 가족이 신앙을 갖게된 경우들도 많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는 곳 마다 하나님의 복이 흘러넘친 것처럼 우리들도 그렇게 영과 진리로 아브라함처럼 살아간다면, 우리 주변의 가족들이 변화되리라 믿습니다.
        처음에는 지치고 힘든 과정일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며 남편과 아내의 역할을 영과 진리로 잘 감당 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고린도 교회 성도 가운데는 자신의 상태나 신분을 바꾸려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대로 있으라고 권합니다.
        할례자는 할례의 표지를 제거하기 위해 육체적 수술을 받을 필요가 없고, 무할례자도 할례가 절대적인 성도의 표지라도 되는 것처럼 할례를 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인위적으로 외적인 상태를 변화시킨다고 해서 스스로를 새롭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불러 주신 지금 현재의 상황 속에서 마음을 다해 영과 진리로 하나님의 뜻을 지키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그 부르심에 따라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삶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어떠한 순간에도 홀로 있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믿고 그분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일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결코 녹록지 않은 현재의 상황을 살아가야 된다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끈을 놓아버리지 않고 영과 진리의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하루를 살아갈 때도 바른 작심을 통해 영과 진리로 온전히 하나님만을 목적삼고 살아가며, 예배의 생활화와 생활의 예배화를 이루어 갈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결혼제도를 허락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가정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맡겨주신 역할과 책임을 끝까지 다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서로가 다른 욕망 때문에 갈등하며 원망하기보다는 서로 이해하며 받아주므로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게 하옵소서.
        믿음으로 더욱 굳건하게 천국 가정 이루도록 역사하여주시옵소서.


        가정(家政)과 교회(敎會) 그리고 국가(國家)는 하나님께서 인간사회에 내려주신 가장 이상적인 제도라고 하겠습니다.
        가정은 결혼하므로서 시작합니다.
        결혼(結婚)이란 하나님이 맺어 주신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평생 지속할 연합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연합은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제정하신 성스러운 결합입니다.
        하나님님께서는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서 자기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됩니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결혼의 목적 세 가지

        첫째는 둘이 하나 되는 것

        창세기 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서로 다른 사람 둘이 만나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여자는 마음의 친밀감을 원하고 남자는 육체적 친밀감을 원합니다.
        서로 다른 친밀감을 함께 해결하며 온전한 하나로 세워가야 합니다.
        온전한 하나가 되는 친밀감을 영적인 친밀감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자녀를 생산하는 것

        창세기1:27-28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셋째는 서로 돕기 위한 것

        사람은 처음부터 교제하며 사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여자는 남자를 돕는 자로 창조되었습니다.
        사랑의 교제는 결혼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본래의 목적입니다.

        에베소서 5:31-33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결혼은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로 발전해야 합니다.


        넷째는 음행의 방지를 위한 것

        세상은 ‘악하고 음란한’ 세상이며 성도는 세상에서 음행의 시험을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통해 이런 시험을 물리칠 수 있게 하셨다. 결혼은 음행에 대한 최선의 방지책이다. 잠언5:18-19는,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고 말한다.


        근자에는 결혼하는 만큼 이혼도 늘어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입니다.
        결혼은 둘이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나누면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절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혼이란 반쪽이 되는 것입니다.
        반쪽이 된 상태에서 또 다른 반쪽을 찾는 것이므로 재혼이 결혼보다 더 어렵다고 하겠습니다.

        결혼을 크게 기뻐하신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첫 번째 기적을 혼인 잔치에서 행하셨습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지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결혼은 정부의 권위를 앞서며 초월하는 성례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으로 한 몸을 이룰 때 그들의 연합은 하나님과 깊이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서로를 위해 만드셨으며 각자를 당신의 형상을 본떠 지으시되 서로가 없이는 불완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남녀의 연합을 다른 관계들과 달리 아이들을 낳아 기르는 특별한 관계로 의도하셨습니다. 
        진정한 결혼관계에서 남편과 아내는 임신과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반길 것입니다.
        이는 각자의 상황 때문에 임신과 출산이 어렵거나 불가능해 보일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는 결혼의 신비를 깊이 존중하시며 순결한 삶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의 선물인 성은 하나님과 그분의 뜻에서 동떨어질 때 영혼을 더럽히며, 결혼 밖에서 이루어질 때는 죄가 됩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혼전이나 혼외 관계에서 금욕하라고 요구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음욕을 품고 바라보는 것조차 마음으로 간음하는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결혼은 창조의 뜻에 따라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평생 연합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성적인 사랑을 오직 남편과 아내 사이에만 나누도록 의도하셨기 때문에 교회 공동체는 절대로 동성애 관계를,
        그것이 법이나 사회적 용어로 정의되어 있더라도 결혼으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동성애적 끌림을 가진 이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대변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누구도 정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고 선포하십니다.
        모든 제자를 이 좁은 길로 계속 가라고 부르십니다.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아들여 그분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의지가 있는 이들을 환영합니다.

        결혼은 아주 고귀한 선이지만, 최고선은 아닙니다.
        믿는 사람은 다른 어떤 것보다 그리스도가 항상 최우선이어야 합니다.
        미혼인 사람은 결혼하려는 마음보다, 결혼한 사람은 배우자에 대한 헌신보다 그리스도가 우선이어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에서 멤버는 교회 공동체의 축복이 있어야만 결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결혼은 모두 그리스도에 대한 공통의 신앙에 기초하고, 그리스도의 일을 위해 헌신되어야 합니다.
        결혼식에서 신랑과 신부는 절대 그릇된 일에 서로를 따르지 않고,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순종을 서로의 결합보다 우선으로 여기겠다고 약속합니다.
        이 약속은 그리스도인의 결혼이 세워져 있는 기초를 보호합니다.

        결혼의 목적 세 가지 


        러브(Love)와 로바(Lobha)

        사랑이라는 의미의 영어 단어 (Love)는 산크리스트어의 로바(lobha)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합니다.

        로바는 불교에서 말하는 악(惡)의 3가지 뿌리인 3업 즉 (貪, lobha)/탐욕, (瞋, dosa)/노여움, (癡, moha)/어리석음 중에서 탐욕을 의미합니다.  

        사랑이라는 말이 탐욕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로부터 갈라져 나온 것은 우연일 수 있으나, 한 편으로는 그저 우연이라고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 배경에는 연금술과 같은 신비한 과정이 숨어 있음이 틀림없는데 그것은 탐욕이 부드럽게 풀어져 사랑이 된다고 하여 로바(lobha), 그것은 탐욕이었으나 녹아 내리면 사랑이 된다고 할 뿐 아니라

        사랑은 나누어 주는 것이며 탐욕은 쌓아 두는 것이다.

        탐욕은 결코 나눠주려 하지 않고 사랑은 오로지 주려고 하고 보답을 바라지 않는 조건 없는 나눔이기에 로바(lobha) 라는 단어가 영어의 러브(Love)가 되기까지는 마법처럼 신비한 이유가 있다고 하겠다.

        내면의 연금술이 적용하지 않는 한 로바는 사랑이 되지 않으므로 “사랑이라는 신비를 행하는 사람은 진리의 그림자가 아니라 진리 그 자체와 만날 수 있다”고 플라톤이 말했다.

        복음의 무지로 멋대로 판단하여 선생이 될 뿐 아니라 복음의 무지로 신기루 외모인 도덕천을 따라 여호와께서 주신 이성으로 스스로 온전해지기 위하여 여호와께서 주신 자유의지인 감성을 소멸하기 위하여 감성을 탐욕으로 착각하여 불의와 불법으로 똥칠인 나팔과 꽹과리 소리로 미혹한 후 탐욕의 유사어 갈애(taṅha), 욕망(rāga), 감각적 욕망(kāma) 등을 통하여 탐욕은 바라고 원하는 것과, 물질적 세속적 이익을 얻으려고 집착하는 것을 비롯하여 아끼고 절약하는 것도 미묘한 형태의 탐욕으로 정의하고 또 탐욕의 기능은 대상을 붙잡는 것이고, 포기하지 않는 것으로 대상을 얻지 못하면 쉽게 분노(dosa)로 변하므로 결국 탐욕은 모든 해로  업의 원인이 된다.

        불교의 기초교리에서도 탐욕은 바램, 소원, 소망, 바램, 꿈, 희망, 욕망, 욕구, 등의 나쁜 마음으로 표현하여 결국 탐욕이 없으면 바로 열반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깨달음으로 나아가는데 가장 큰 장애가 된다고 하는 것을 보더라도 모든 종교는 신기루 외모인 도덕천을 따른 이성으로 스스로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여호와께서 주신 자유의지인 감성을 소멸하기 위하여 불가능에 도전하는 발악임을 바로 알 수 있고 또 바라고 원하는 것이 거의 대부분 탐욕에 해당하지만, 열반을 원하거나, 붓다의 가르침을 배우고자 원하거나, 가난한 자에게 보시하기 위해 돈을 원하는 것이나, 종교 단체에 헌금하는 것은 탐욕이 아니라고 자신들의 편의나 유익을 따라 멋대로 좋은 탐욕과 나쁜 탐욕으로 억지 분별을 할 뿐 아니라 이런 억지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아비담마에서는 스스로 분별한 좋은 탐욕을 열의라고 한다고 하며 그 이유로 아비담마에서 탐욕을 원숭이는 끈끈이에 한 손이 붙으면 다른 한 손으로 떼어내려다가 두 손 모두 끈끈이에 달라붙고, 입으로 물어 떼어내려다 입마저 달라붙고, 두 발로 밀쳐내려다 두 발마저 달라붙는다고 한다. 이렇게 머리로는 떨쳐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더 달라붙는 끈끈이처럼 탐욕은 대상이 다가오면 강하게 붙잡으려고 하고 또 달구어진 냄비에 고기가 달라붙듯이 대상에 달라붙으며 옷에 기름이 묻으면 깨끗이 제거하기 어렵듯이 대상에 한 번 집착하면 제거하기 어려운 것은 탐욕의 견해가 잘못되어 괴로운 것을 즐거운 것으로, 더러운 것을 깨끗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엉터리 주장을 할뿐 아니라 빨리어에도 탐욕과 관련된 뻬마(pema), 탄하(tanha), 라가(raga), 까마(kama) 등의 용어가 있는데 뻬마는 가족 간의 사랑, 남녀 간의 애욕 또는 애정을 말하고 애정이나 애욕은 족쇄가 되기도 하여 한 번 엮이면 벗어나기 힘들게 상대방을 속박한다고 하고 배고픔, 갈증과 같이 좀 강한 욕구를 갈애(딴하, tanha)라고 하며 원초적 욕망 중에 가장 강하고 질긴 것이 성욕으로 성욕과 같이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을 욕망(라가, raga)이라고 부르며 라가의 문자적 의미는 사람에 대한 집착이고 탐욕은 크던 작던 간에 괴로움의 원인이 되며, 탐욕이 크면 괴로움도 크고, 탐욕이 작으면 괴로움도 작으며 탐욕이 없으면 괴로움도 없고 그것이 바로 해탈이라고 불가능의 도전을 강요할 뿐 아니라 탐욕은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데 그것은 송아지가 자라면 뿔도 자라듯이 사람도 나이가 들수록 탐욕도 점점 커지며 순진무구한 어린아이는 탐욕이 뭔지 모르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소유욕과 집착이 커져간다고 피조물의 자유의지인 감성을 모르는 참으로 참담한 헛소리를 용감하게 하며 소금물을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심해지는 것과 같이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하고 충족하면 할수록 탐욕이 더 심해져 가기에 결국 탐욕이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집착하고, 그로 인해 윤회 속을 헤어나지 못한다고 복음에 무지로 온전한 복음을 가리는 똥칠을 할 뿐 아니라  아무리 작은 조약돌이라도 물에 던지면 가라앉듯이, 아무리 작은 탐욕이라도 악처에 태어나는 원인이 될 수 있기에 (법구경 240번 가사에 대한 집착으로 이가 된 띳사 장로 이야기 참조) 배우자, 자식, 재산에 대한 집착으로 아귀(불행한 귀신)계에 태어난 사람들이 많지만 그러나 탐욕이 많더라도 공덕이 있으면 선처에 태어날 수도 있다는 복음에 무지한 참담한 똥칠을 마치 바위를 강물에 던지면 바로 가라앉지만 배 위에 실으면 가라앉지 않고 저 언덕에 도달할 수 있는 거와 같다고 미혹하고 있지만 문제는 이 세상의 배가 유한하고 온전하지 못한 것처럼 배로 표현된 공덕도 온전하고 완벽하지 못함을 바로 안다면 플라톤이 <향연>이란 책에서 “사랑이라는 신비를 행하는 사람은 진리의 그림자가 아니라 진리 그 자체와 만날 수 있다. 인간의 축복 받은 본성을 알기 위하여 사랑보다 더 좋은 조력자는 없다”는 말은 복음에 무지한 플라톤이 자신이 가진 대단한 이성으로 회개하고 복음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서로 사랑함으로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인 자유를 누리는 복음을 외모로 분별한 것으로 만약 플라톤이 우리가 소유한 복음을 바로 알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그렇게 갈망하던 이데아가 되었다면 얼마나 기뻐하고 좋아하며 감동할 것이지 생각하며 더 열심히 서로 사랑함으로 우리가 받은 복을 신나고 행복하게 누리는 오늘이 되어야 하겠다.

        이혼과 재혼에 대하여 그리스도는 “누구든지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그 여자와 간음하는 것이며, 또 아내가 자기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도 간음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지켜 나가야만 합니다.
        그것만이 진정 신실함과 사랑으로 일관된 자세입니다.
        드물게 별거가 발생할 수는 있지만, 교회 공동체의 어느 멤버도 배우자와 이혼해서는 안 됩니다.
        나아가 전 배우자가 여전히 살아 있는 동안에는 어떤 이혼한 멤버도 재혼해서는 안 됩니다.

        남편과 아내의 부르심은 다르지만 똑같이 소중합니다.
        신약 성경에 따르면 남편은 가족의 머리이며 아내는 돕는 배필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절대 지배해서는 안 되며 아끼고 겸손하게 섬겨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에서 결혼식을 치를 때 남편은 아내를 언제나 존중하고 존경하겠다고 약속합니다.
        만약 남편이 이를 무시하면 하나님께서 기도를 거부하실 수도 있다는 사도 베드로의 경고를 결혼식에서 새겨 듣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내는 선한 일에 언제나 남편을 지원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두 사람이 받은 사명은 서로를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나가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은 신랑과 신부의 연합을 성스러운 신비이며 그리스도가 당신의 교회에 보여 주신 사랑의 증표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혼인 잔치에 비유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앞으로 도래할 그리스도의 완벽한 사랑의 통치를 상징하는 심오한 뜻을 결혼에서 어렴풋이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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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17-2022(토)

        우상의 제물(고린도전서 8:7)


        지식과 사랑에서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운다.

        지식 / γνῶσις, εως, ἡ 1108

        1. 하나님의 속성으로서의 지식,  2. 지식의 열쇠,  3. 율법에 있는 지식의 규모

        발음 / 그노시스(gnōsis)
        어원 / 1097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지식(눅 11:52, 행 11:33, 롬 2:20), 아는 것(고후 10:5), 아는 지식(빌 3:8), 알게 함(눅 1:77),
        [동] 알다(고후 2:14, 4:6).
        신약 성경 / 29회 사용
        * 1097.  γινώσκω

        1. 알다,  2. 신비를 알다,  3. 하나님을 알다

        발음 /  기노스코(ginōskō)

        관련 성경 / 알아보다(막 6:38), 알다(마 6:3, 12:5,7, 막 5:43, 8:17, 눅 20:19, 요 1:40), 알게 하다(마 9:30, 요 19:4), 알려지다(마 10:26, 눅12:2), 깨닫다(마 24:39, 막 5:29), 알리다(막 9:30, 요 7:17), 동침하다(마 1:25), 주다(막 4:11)
        신약 성경 / 222회 사용

        사랑 ἀγάπη, ης, ἡ ἀγάπη  26

        1.  사랑,  2. 인간의 사랑,  3. 사랑의 대상이 없는 경우  고전 8:1

        발음 / 아가패(agapē)
        어원 / 2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사랑(마 24:12, 고후 2:4, 갈 5:6), 애찬( 유1:12) 
        신약 성경 / 116회 사용
        * 25. ἀγαπάω

        1. 사랑하다,  2. 인격에 대한 호감,  3. 마태복음 5:44

        발음 / 아가파오(agapaō)
        어원 / 미완료 ἠγάπων, 미래 ἀγαπήσω, 제1부정과거 ἠγάπησα, 완료 ἠγάπη- κα, 완료분사 ἠγαπηκώς, 완료수동분사 ἠγαπημένος, 미래수동태 ἀγαπη- θήσομαι, ἄγαν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임
        관련 성경 / 사랑하다(마 5:43, 막 10:21, 눅 6:27, 요 3:16, 롬 9:13), 기뻐하다(눅 11:43), 사모하다(딤후 4:8), 아끼다(계 12:11).
        신약 성경 / 143회 사용

        교만하게하다 φυσιόω 5448  

        1. 부풀게 하다,  2. 잘난체하다, 

        발음 / 푸시오오(phüsiŏō) 

        어원 / 완료 수동태 분사 πεφυσιωμένος, 제1 부정과거 수동태 ἐφυσώθην, 544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교만한 마음을 가지다, 교만하여지다, 교만하다(고전 4:6, 5:2, 13:4), 과장하다(골 2:18).
        신약 성경 / 7회 사용

        덕을 세우다  οἰκοδομέω  3618  

        1. 건축하다,  2. 마태복음 21:42,  3. 마태복음 16:18

        발음 / 오이코도메오(ŏikŏdŏmĕō)
        어원 / 미완료 ῷκοδόμουν, 미래 οἰκοδο- μήσω, 제1부정과거 ῷκοδόμησα, 미완료수동태 3인칭단수형 ῷκοδομεῖτο, 완료수동부정사 ῷκοδομέσθαι, 완료수동분사 οἰκοδομημένος, 과거완료수동태 3인단수 ῷκοδόμητο, 제1부정과거 수동태 ῷκοδομήθην, 미래 수동태 οἰκοδομηθήσομα ι, 3619와 동일어에서 유래더보기
        관련 성경 / 짓다(마 7:26, 눅 6:48, 행 7:49), 세우다(마 16:18, 눅 14:28, 살전 5:11), 만들다(마 23:29, 눅 11:48), 건설되다(눅 4:29),
        서다(행 9:31), 건축하다(롬 15:20), 세워지다(벧전 2:5).
        신약 성경 / 40회 사용

        마태복음 21:42 /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마태복음 16:18 /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고린도전서 8장은 제사를 지내는 문제와는 다른 문제입니다.
        당시 고린도는 물건들이 장터에 나오기 전에 우상에게 바쳐져서 나옵니다.
        그래서 시장에 가면 대부분의 물건들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들입니다.
        이것을 "먹어야 되는가 말아야 되는가" 라는 문제입니다.
        바울은 우상숭배와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를 분리시킵니다.

        우상숭배의 경우에는 명백한 계명위반입니다(고전 10:7).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데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문제는 윤리적으로 규정 할 수 없는 "아디아포라"의 문제입니다.
        바울은 우상제물을 먹는 문제에 대한 세 가지의 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고전 8장).

        첫째는 믿음과 양심의 원리

        바울은 이점에 있어서 각자가 하나님이 주신 믿음과 양심의 원리대로 행하라고 합니다.
        당시에는 두 부류가 있었습니다 한 부류는 믿음이 강한 자(바울을 포함, 혹은 지식이 있는 자로 표현됨)로서 "먹어도 괜찮다"는 견해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근거는 "우상에게 제물이 바쳐졌다 하더라도 그 우상은 거짓이며 아무 것도 아니다.
        또 그 음식은 근본적으로 따져보면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먹어도 괜찮다"는 견해입니다(고전 8:3-6).

        그런데 또 한 부류는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견해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우상숭배인데, 우상숭배에 드려졌던 제물을 먹는다는 것은 결국 그 우상숭배의 행위에 동참하는 것으로 믿음의 양심에 위배된다는 것"입니다(고전 8:7).

        그러면 이에 대한 사도 바울의 입장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음의 양심대로 하라는 것입니다(롬 12:3).
        즉 먹느냐, 먹지 않으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믿음에 따른 양심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즉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또 다른 사람은 먹지 않는 믿음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각 개인의 고유한 믿음과 양심의 자유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죄가 되는 것은 믿음이 약한 사람(먹지 못하는 사람)이 자신의 믿음을 속이고 먹는 것입니다.
        먹는 것 때문에 죄가 아니고, 그가 자신의 믿음을 버린 것이 죄가 됩니다(고전 8:10-12).

        둘째는 서로 정죄(비판)하지 말라

        이 문제가 초대교회에서 심각한 문제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믿음의 양심만 절대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고 비판하고 정죄하는 논리입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이것 때문에 서로를 인정하지 못하고 정죄한다면, 그들을 받으신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합니다(고전 8:12, 롬 14:1-12).

        셋째는 공동체적 사랑의 원리

        고린도 교회는 믿음이 약한 자들이 다수를 차지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약한 자들이 바울과 같은 믿음이 강한 자들의 자유함에 대해서 상처가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이 하는 말은 아무리 믿음이 중요하고, 양심이 중요하고, 지식이 중요하지만 형제들에게 상처가 된다면 우상의 제물을 절대로 먹지 않겠다고 말합니다(고전 8:13).
        즉 믿음도 중요하고 양심도 중요하고, 지식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사랑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고전 8:1, 2).

        이것은 우상제물을 먹는 문제뿐만 아니라, 확실하게 성경에서 계명으로 규정하지 않은(윤리적으로 절대화할 수 없는) 아디아포라의 문제를 다루는 세 가지 중요한 원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제사의 문제가 아디아포라의 문제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될 수도 있고, 안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될 수 있다는 것은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과연 제사가 전통적인(무속적인) 의미에서 지켜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제사의 문제는 아디아포라의 문제가 아니고, 절대적 계명준수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만일 제사의 문제가 종교적으로 큰 의미가 없이 습관적 관행으로 일가친척들이 모이는 모임이라면 아디아포라의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우리의 문제는 절대적인 문제를 상대화시키며, 상대화할 문제를 절대화시키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것을 구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 아디아포라(adiaphora, ἀδιάφορα, 무관심한 것)

        스토아주의에 의해서 형성된 개념으로, 선도, 악도 아니고, 명령 받지도 않고, 금지되지도 않은 것.
        신약 성서에서도 이용되어 기독교의 개념으로도 논의되게 되었다.

        아디아포라는 희랍어 '아디아폴론'의 복수형으로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용어는 '성경에서 명하지도, 금하지도 않은 행동들'을 일컫는 말로 사용된다.
        종교개혁에 있어서 루터와 칼빈 간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는데, 그것은 아디아포라의 문제였다.

        루터와 칼빈, 쯔빙글리와 멜랑히톤 모두 근본적으로 성경에 기초한 개혁을 말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디아포라의 문제에서는 서로 다른 관점을 취했다.

        루터는 성경이 명백하게 금하지 않는 한에 있어서 로마교회의 전통과 관습은 구속력이 있고, 따라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칼빈은 성경이 명(命)하지 않는 한 로마교회의 모든 전통이나 관습들은 거부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 원리는 교리적인 문제에서만이 아니라 교회관이나 교회정치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디아포라(diaphora) & 아디아포라(adiaphora)

        성경이 명백하게 말하고 있는 것을 디아포라(diaphora)라고 하고 반대로 성경이 명백하게 말하지 않고 있고, 따라서 임의로 할 수 있도록 남겨진 영역을 아디아포라(adiaphora)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몇 시에 예배드릴 것인가, 예배 시에 어떤 색깔의 옷을 입어야 할 것인가, 예배순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등의 문제가 여기 속한다.

        자유는 칭의로부터 나온다고 하며 그리스도인의 자유에는 세 가지 차원이 있다고 했다.

        첫 번째 차원의 자유는 율법으로 부터의 자유이다.
        두 번째 차원의 자유는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양심의 자유이다.
        세 번째 차원의 자유가 아디아포라(adiaphora)로부터의 자유 즉 비본질적인 문제들로부터의 자유이다.

        칼빈은 일상가운데 비본질적인 것 때문에 양심에 거리낌이나 마음에 불안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가르쳤다.

        예를 들어 성례에서 어떤 포도주를 쓸 것인지, 물을 한번 뿌릴 것인지 세 번 뿌릴 것인지와 같은 것들은 각 지 교회에서 결정할 일이라는 것이다.
        이런 문제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 얽매여서 신앙 양심의 거리낌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디아포라로부터의 자유이다.

        아디아포라로부터의 자유는 교회 정체 체제에도 적용된다고 말했다.
        교회 정치체제는 구원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에 장로교 정치제도 뿐 아니라 감독정치도 가능하다고 칼빈은 주장했다.

        아디아포라로부터의 자유는 칼빈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칼빈주의 신학자들이 아디아포라로부터의 자유 부분을 몰라서 너무 편협적인 경향을 띠는 것이 사실이라고 밝혔다.

        칼빈학자들 간의 일부 해석의 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큰 틀에서는 칼빈이 아디아포라로부터의 자유를 중요시 여긴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밝혔다. 그러므로 비본질적인 것에 얽매여서 갈등을 만들고 거기에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가 없다.

        칼빈이 밝혔듯이 우리의 자유를 방종과 남용의 기회로 삼아서는 안 될 것이라고 강의했다.
        우리는 약한 형제들의 무지와 형편을 고려하면서 자유의 사용을 조절할 것이다.
        우리는 언제든지 사랑을 추구하며 이웃의 덕을 세우는데 유의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명백한 규칙은 이웃의 덕을 세우는 결과가 될 때에는 우리의 자유를 행사하고, 이웃에 도움이 되지 않을 때는 자유를 포기해야 한다.

        우리의 자유는 신앙 양심의 자유이다.

        양심이라는 말은 con+scientia (하나님과 공유한 지식)이다.
        따라서 양심의 문제는 Coram Deo의 문제이고 우리의 자유는 바로 하나님 앞에서의 자유이다.
        비본질적인 것으로부터 자유하여 말씀의 본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자유가 우리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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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19-2022(월)

        복음을 위하여(고린도전서 9:23) for the gospel, for the sake of the gospel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I do all this for the sake of the gospel, that I may share in its blessings.

        언행일치(言行一致)

        위하여  διά  1223  복음 εὐαγγέλιον, ου, τό  2098

        1. ~을 통하여.  2. διέρχεσθαι διὰ πάντων: 모든 곳을 거쳐가다

        발음 / 디아(dia)

        관련 성경 / «속격»통하여, 항상,«대격»~ 때문에, ~을 위하여, 말미암아(요 1:3), 후에(막 2:1), 인하여(마 10:22), 까닭이니라(마 17:20), 이러므로(마 18:23), ~에게는(마 26:24), 가운데로(막 9:30), 안으로(막 11:16), ~이므로 (눅 2:4), 새도록(눅 5:5), ~하니(눅 18:5).
        신약 성경 / 668회 사용

        복음 εὐαγγέλιον, ου, τό  2098  

        1. 좋은 소식에 대한 보상,  2. τὸ εὐαγ- γέλιον,  3. ὁ λόγος τοῦ εὐ.

        발음 / 유앙게리온(ĕuanggĕ- liŏn)

        어원 / 2095와 3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복음(마 4:23, 막 16:15, 롬 1:1).
        신약 성경 / 76회 사용
        * 2095. εὖ 

        1. 잘,  2. 좋게,  3. εὖ ποιεῖν: 좋게 행하다

        발음 / 유(ĕu)
        관련 성경 / 잘, 좋게, 다행히(마 25:21, 눅 19:17, 행 15:29, 엡 6:3) 
        신약 성경 / 6회 사용
        * 32. ἄγγελος, ου, ὁ

        1. 사자,  2. 사람이 보낸 사신,  3. 하나님이 보낸 사자 : 메시아의 예고자

        발음 / 앙게로스(anggĕlŏs)
        어원 / ‘소식을 가져 오다’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사자(使者)(마 1:20, 행 5:19, 약 2:25), 천사 (마 13:39, 히 1:4, 계 1:1)
        신약 성경 / 176회 사용
        사도란 누구인가?

        ἀπόστολος, ου, ὁ  652  * 649. ἀποστέλλω

        1. 고전 헬라어나 후기 헬라어에서의 ὁ ἀ.는 해양탐험의 대장을 나타내는 말이었는데 ‘보냄을 받은 자’란 의미가 있었다:
        2. 대의원,  3. 하나님의 사자

        발음 / 아포스토로스(apŏstŏlŏs)
        어원 / 64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사도(마 10:2, 눅 17:5, 롬 1:1), 사자(使者)(빌 2:25), 보내던 사람(행 15:33).
        신약 성경 / 80회 사용

        * 649. ἀποστέλλω 

        1. ...을 보내다,  2. 마태복음 13:41,  3.마태복음 15:24

        발음 / 아포스텔로(apŏstĕllō)
        어원 / 미래 ἀοστελῶ, 제1부정과거 ἀ- πές τειλα, ἀποστείλω, 행7:34, 현재완료 ἀπέσταλκα, 현재완료수동태 ἀ- πέσταλμαι, 제2부정과거수동태 ἀπε- στάλην, 575와 472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보내다(마 2:16, 막 12:2, 요 5:33), 통지하다 (마 14:35), 파송하다(마 23:37, 눅 13:34), 대다(막 4:29), 보내심을 입다(눅 1:19), 보내심을 받다(눅 1:26).
        신약 성경 / 132회 사용

        사도란 누구인가?

        1. 예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자
        2. 예수님에게 배운 자
        3. 부활을 목격한 자 - 사울이 사도로 주장하는 근거(행 22:6-
        4.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자

        * 사도의 신분은 계승되는 것이 아니다.
        단 사도의 신앙과 정신은 반드시 계승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도를 세웠던 것은 교회를 세우려는 것이었다.
        교회를 세우고 교회의 머리가 예수님이 되심을 이미 드러내셨기 때문에 사도직이 단회적이라고 한다.

        * 바울도 유대인이 고대하던 메시아를 기다렸다.
        그러나 예수는 오히려 죽으러 가야 한다고 가르쳤다.
        더구나 저주스런 나무에 달려 죽으신 것이다.
        이러한 예수를 바울이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은 잘못된 메시아 신앙이 수정되는 사건이었다.

        바울의 사도권이 무너진다면 전한 복음도 완전히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사도 구권을 주장한다(9:2)

        권(權) ἐξουσία, ας, ἡ  849 바울의 사도로서의 권리

        1. 선택의 자유,  2. 능력,  3. 사도행전 1:7

        발음 / 에쿠시아(ĕxŏusia)
        어원 / 1832 ‘능력’의 의미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권위(마 7:29, 눅 4:6), 군사(마 8:9), 권능(마 10:1, 행 8:19), 권한(막 13:34, 행 1:7), 병사(눅 7:8), 관할(눅 23:7), 마음(행 5:4), 권리(고전 7:37, 9:5, 12, 살후 3:9), 자유(고전 8:9), 힘(계 9:19).
        신약 성경 / 102회 사용

        바울의 사도로서의 권리 

        고린도전서 9:4-7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첫째, 먹고 마실 권리
        목회자의 생활을 교회가 책임져야 할 권리


        둘째, 가족 부양의 권리

        셋째, 일을 하지 않을 권리 
        세상의 직업을 갖지 않을 권리

        바울의 사도권이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나에게도 이러한 권리가 있지만 나는 이런 권리를 사용하지 않겠다.

        * 비지니스 미니스티리(Business Ministry)

        최근에 교회 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교회 수는 늘어가고 목회자의 배출은 여전히 변함이 없고 인구는 점점 줄어드는 시대에 과연 목회자가 목회에만 전념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목회자에 대한 이중직 문제가 거론되고 있다.


        8장에서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사도권으로 해석하는 방법

        12사도만 사도인가?
        12사도는 초기에 이미 결정되었으며 바울의 경우 그 후에 사도로 임명되었다.
        특별히 고린도교회에서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논쟁이 심각하였다.

        고린도전서 15:8-10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행동 강령 

        고(故) 주선애교수의 어느 특강에서 들었던 교육학에서 정의하는 죄

        첫째, 모르면서 배우지 않는 것
        둘째, 알면서 행동하지 않는 것
        셋째, 알면서 가르치지 않는 것


        첫째, 지식(智識)

        지식이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 이외에는 신이 없다.
        그러므로 우상은 있을 수 없으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다.

        둘째, 사랑(愛)

        사랑이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한다면 우상의 제물을 먹지 못하는 이웃을 실망하게 하는 행동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먹을 수 있으나 사랑 때문에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겠다.

        셋째, 양심(良心)

        양심이란 "수네이데시스(συνείδησις)"라고 한다.
        그 "서로를 아는 것( knowing together with)" 

        영어 conscience의 유래가 되는 고대 그리스어 συνείδησις(쉬네이데시스)나 라틴어 conscientia는 어원적으로 '함께 앎'이라는 뜻이다.

        양심’이란 단순히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인간의 품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양심은 하나님과 내가 서로 교제하게 도와주는 수단이다.
        즉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음성의 통로다.

        그래서 다윗은 “양심이 밤마다 나를 교훈하도다“라고 하였다.

        비로소 사도 바울이 왜 하나님을 양심으로 섬긴다고 하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인간은 영과 육으로 구성된 동시에 이 둘이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 착각한다.
        전혀 무관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밀접한 관계도 갖고 있지 않다.
        육체적 훈련이 영적 훈련일 수 없는데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유사 기독교인들이 경건한 자들을 혼란시키고 있고, 사회도 어지럽히고 있다.

        이와는 달리 영이 잘되면 육도 건강하고 복을 받는다는 극단주의자들이 있다.
        성경은 결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과거 율법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연약한 무리들을 위해 가시적인 것을 통해 진리를 선포하셨다.
        하지만 그들 역시 가시적인 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찾았고 오실 그리스도를 늘 바라보았다.
        심지어 가시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늘 하나님의 뜻을 찾았다.
        육과 영은 무관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기독교강요> 1권 5장 5항).
        그 영에는 양심이 자리잡고 있다.
        어떤 때는 영을 대표하는 것을 양심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놀라운 것은 양심이란 그릇에 믿음이 담겨 있다고 성경은 표현한다(딤전 3:9).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기독교강요> 3권 2장 12항). 또 양심에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새겨져 있기에 누구도 하나님을 부인할 수 없다(1권 3장 2항).
        누구든 종교성을 가진 것을 보아 양심에 새겨진 그분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복음을 직접 듣지 못했다 하더라도 자연과 양심에 새겨진 그분에 대한 인식으로 심판을 누구든 받게 된다(롬 2:15).

        양심이란 무엇일까?

        칼빈은 양심을 다음과 같이 정의 내린다(4권 10장 3항).
        마음과 지성을 가진 자들이 사물에 대한 지식을 파악할 때 그들은 안다고 한다. 양심이란 말은 지식이란 이름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보다 문자적으로 해석해 보면, 양심이란 영어로 ‘칸션스(conscience)’이다. 칸션스라는 영어는 라틴어 ‘콘슈엔티아(conscientia)’에서 나왔다. 이 단어는 두 단어의 복합어로 ‘콘(con)’과 ‘슈엔티아(scientia)’이다.
        ‘콘’이란 뜻은 ‘함께’라는 의미고, ‘슈엔티아’는 ‘안다’라는 의미다. 즉, ‘~와 함께 안다’는 의미다.
        또 라틴어 슈엔티아는 영어 사이언스(science)로 표기되어 과학이란 단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결국 칼빈이 양심의 정의를 ‘아는 것’이라고 내린 것은 정확한 것이다.

        다른 양심

        문자적으로 양심이 지식이라고 한다면, 지식에 따라 양심이 다를 수 있다.
        누구와 더불어 무엇을 아느냐에 따라 양심의 정도는 달라진다.
        무엇을 아느냐에 따라 양심의 척도는 다르다.
        누가 아느냐에 따라 양심은 다르다.
        문화와 시대에 따라 다르다.
        왜냐하면 문화와 시대에 따라 습득한 지식이 다르기 때문이며, 그것에 따라 살기 때문이다.

        같은 문화와 같은 시대에 살고 있어도 양심은 다르다.
        그 이유는 무엇을 알고 있느냐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시대마다 어디든 생기는 것은 그 기준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학식에 따라, 가정 문화에 따라, 각자의 경험에 따라 양심은 다르다.
        누구든 자신의 지식과 기준에 따라 살아간다.
        누구에게는 이것이 옳은 것이지만, 저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다.
        바른 지식이 갖춰지면 바른 양심을 가질 수 있다고 사회학에서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맞지만 궁극적으로 그 양심은 바꿔지지 않는다.

        기독교인의 양심

        기독교는 사회와 다른 양심의 기준을 갖고 있다.
        절대자이신 하나님이 모든 것은 안신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기독교인 양심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도덕성을 가진다.
        개인과 문화에 따른 양심이 아니라 절대적 양심을 갖고 있다.
        전지하신 하나님이 아신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요셉은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하며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창 39:9).
        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믿음은 지식이라 말할 수 있다(3권 2장 6항).
        이런 면에서 사도바울은 믿음이 양심이란 그릇에 담겨 있다고 말한 것이다(딤전 3:9).
        믿음도, 양심도 모두 지식이란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양심도 동일하게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중생된 자는 하나님에 대해 배우려고 한다(요 6:45).
        주님께 오는 자는 배우는 자라고 예수님도 말씀하신 것이다(마 11:29).
        배워야 하는 이유는 호기심에 따라 그리스도를 알라는 것이 아니라 그분에 대해 아는 지식으로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함이다.

        양심의 가책

        감람산으로 가려 하실 때 예수님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왔다(요 8:3).
        이들은 신명기 22장 23~24절레위기 20장 10절에 근거해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고 의도했다.
        이것을 파악한 예수님은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다(요 8:6).
        무엇을 쓰셨는지 우리는 전혀 알 수 없다.
        또 알 필요도 없다.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다(요 8:7).
        그리고 다시금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다"(요 8:8).
        이 말을 들은 그들은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갔다(요 8:9).

        이 본문을 어떻게 해석할까?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는 다윗의 간곡한 부탁에도 요압은 듣지 않고 그를 죽였다.
        그러자 “부끄러워 도망함 같이 가만히 성읍으로” 들어갔다고 한다(삼하 19:3).
        유사한 현상이 요한복음 8장에서도 일어났다.
        양심의 가책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기에 그들의 고소하는 악행과 악한 의도를 멈추도록 하셨다.
        땅에 무엇인가 쓰인 것이 그들의 양심을 찌른 것일까?
        우리가 말씀을 쓰신 것을 모른다는 것은 말씀 내용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임을 암시한다.

        양심적 행위

        하나님은 영이시다.
        인간의 영, 즉 심정 또는 양심을 살핀다.
        내면을 살핀다.
        영의 상태와 기능들을 살핀다.
        선한 의지를 갖고 있는지 저울질하신다(3장 23장 10항).
        이와는 달리 인간은 외형으로 판단한다.
        우리는 인격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격에 따라 판단한다.
        인간의 양심은 인격의 대변이요, 내면의 세계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판단의 대상이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갖고 있다면 선한 양심을 가진 것이다.
        그 지식인 믿음은 참된 성도로 하여금 실천을 행하도록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라 말씀하기 때문이다.
        행함이 부족하다는 것은 그만큼 지식이 없다는 것이고, 양심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자들은 배우려 하지 않는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배우면 배울수록 양심은 더해지고 행함으로 드러난다.

        신앙경력은 오래되었는데 실천이 따르지 않는 것은 양심의 문제가 있는 것이다.
        지식은 갖추고 있는지 몰라도 삶을 통해 얻어진 참된 믿음을 갖추질 못했다.
        그 참된 지식이 없기에 양심적 행위를 행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자는 가르치려고만 하지 배우려 하지 않을 것이다(롬 2:1~5).
        참된 믿음이 없는 것이다.
        결국 믿는 자가 아닌 셈이다.
        믿는 척할 뿐이다.
        그 안에는 성령도 거하지 않는다(요일 3:24).
        성령이 거하시지 않기에 말씀을 통한 역사도 없다.
        그 역사가 없기에 말씀의 순종도 없는 것이다.
        결국 양심적 행위가 있을 수 없다.

        구원을 이루어 가라(빌립보서 2:12-13)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바울은 디모데에게 복음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복음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부르신 것은 우리의 선한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하나님의 목적과 은혜로 된 것이다.
        이 은혜는 영원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우리 구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이제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인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은 만세전부터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준비하신 하나님의 비밀 이였지만 이 비밀이 예수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통하여 인류에게 알려진 복음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복음이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예수그리스도는 내 인생의 모든 허물과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신 이 복된 소식이다.

        복된 소식을 들은자의 반응은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바울과 같은 사람
        둘째는 부겔로와 허모니게 같은 사람
        셋째는 오네시보로 같은 사람

        1. 바울같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움을 받았다고 합니다.
        바울의 인생의 목적은 이 복음을 위해서 살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그 치욕스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하여 감옥에 투옥되며 매맞으며 배고프며 헐벗으며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가 믿는 하나님을 내가 알고 내가 의탁한  자기의 생명을 변함없이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것을 예수님 오시는 날까지 하실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디모데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 내게 들은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고 명령합니다. 

        인생의 목적을 복음에 두고 살았던 바울 복음 때문에 감옥도 피하지 않았던 바울 매 맞는것도 피하지 않고, 배고픈 것, 헐 벗은 것도 참으며 주님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던 바울 믿음과 사랑으로 본을 보인 바울 주님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 신앙되게 하옵소서. 고난 앞에서도 담대하게 하옵소서.

        2. 부겔로와 허모게네와 같은 사람

        바울이 두번째 로마의 감옥에 투옥되었을 때에 바울을 떠나갔던 소아시아 사람 가운데 한명이다.
        당시에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가 매우 심했는데 박해가 두려워서 믿음을 지키지 못한 자의 대표일 것이다.
        주여 나로 믿음을 지키게 하옵소서.

        3. 오네시보로 같은 믿음의 사람

        바울이 감옥에 갖혀있을 때 사슬에 매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로마의 감옥에 갖혀 있을 때에도 부지런히 심방하여 찾아 만나고 로마에서 뿐만이 아니라 에베소에서도 얼마나 바울을 잘 섬겼는지 네가 잘 안다고 디모데에게 오네시보로의 숨은 봉사를 언급한다.

        당시의 그 심한 박해를 피하지 않고 감옥에 까지 심방하고 유쾌하게 하고 에베소에서도 로마에서도 변함없는 섬기는자, 봉사자 오네시보로 오네시보로의 이름의 뜻이 '유익을 가져다 주는 자' 라고 합니다.
        나도 이런 유익을 주는 자 되었으면 좋겠다.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생명을 거는 자가 있고,
        핍박과 박해가 왔을 때 돌아서서 떠나는 자가 있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섬기고 봉사하는 자
        나를 섬긴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 칭찬하는 자가 있음을 봅니다.

        주여 나로 믿음의 사람되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시는 사람들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책임져주신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대해 순종하면,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으며,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신 28:6, 8).
        하나님께서 모두 책임져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나의 방법으로 복을 받겠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을 찾는 사람을 책임져주신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찾는 사람을 아주 기뻐하십니다.
        여러분, 무슨 문제가 있으면 혼자 고민하지 말고, 부르짖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찾으시면 만나주십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책임져주십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저버리시거나 외면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레미야 29:12~13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셋째,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사람을 책임져주신다.

        요한일서 5:14~15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려고 하고, 하나님의 뜻만 이루어지기를 구했더니 다 이루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구한 것을 다 받은 줄로 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마음으로 살면, 하나님이 책임져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넷째, 주님과 복음을 위해 사는 사람을 책임져주신다.

        마가복음 10:29~3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백 배나 받는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전부 책임져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복음을 위해 사는 사람은 아무것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시는 축복을 가로막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기심과 탐욕’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기심과 탐욕에 사로잡혀 눈이 어두워져서 얼마나 많은 우상을 가지고 사는지 모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전부 우상입니다.
        우상을 버리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시는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책임져주시는 복을 주시기를 원했습니다.

        창세기 12:1~3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아브라함은 이 말씀에 무조건 순종했습니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는 것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순종했습니다.
        이 순종이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시는 복을 받는 비결이 되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가서 번제로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무조건 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요구하신 것은, 백세에 낳은 아들 이삭이 아주 귀하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가장 큰 우상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상을 가지고 있는 한 하나님이 책임져주시는 복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에 우상을 버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무조건 순종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22:16~18).

        여러분에게는 우상이 없습니까?
        어떤 사람은 돈이 우상이고, 어떤 사람은 명예나 권력이 우상입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가장 큰 우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우상이 되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자기를 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도 바울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버리고, 예수님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사도 바울처럼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주님을 섬기는 종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주인 노릇을 하고 삽니다.
        세계 최대의 부자로 꼽히는 록펠러는 중년의 나이에 회사와 직원이 아주 많아서 사업에 쏟는 스트레스로 인해 심한 노이로제와 소화불량, 무력감과 악몽에 시달리며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담당 의사가 죽음을 준비하라고 하자, 그는 자신이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았습니다.
        그때까지 그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밤낮 돈 버는 것, 세상의 일에만 골몰하다보니, 돈은 많이 벌었지만, 건강을 잃고 죽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잘못된 삶을 하나님 앞에서 통회 자복하고, 회개하고, 인생을 완전히 바꿨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자기 재산을 하나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쓰기 시작했습니다.
        대학과 교회를 세우고, 교육과 선교 사업에 후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자기를 비우고 물질을 사용하자 그의 건강이 회복되어 무려 98세까지 장수했습니다.

        그는 생전에 4,928개의 교회와 24개의 대학을 세웠습니다.
        수많은 복지센터를 설립했고, 자선사업에도 7억 5천만 불, 약 9천억 원을 기부해 지금까지 사회사업에 투자한 금액으로는 최고를 기록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123만 원을 2천 년 동안 매일 지급한 것과 같은 금액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록펠러 재단에서는 매년 1만 명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으며, 그의 장학금을 받은 사람 중에 무려 60여 명의 사람이 노벨상 수상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물질에 잡히고, 욕심과 탐욕에 잡혔을 때에는 생명을 잃게 되었지만, 자기를 비워 하나님을 위해, 남을 위해 살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생명, 건강, 축복과 행복까지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모든 것의 주인을 하나님으로 알고, 주님의 종으로 주님을 위해서 사는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강동석 집사님은 호텔에서 30년간 근무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호텔의 이사까지 했는데, 그 호텔이 계속 적자가 나더니 결국에는 부도가 나서 토지공사에 매각되었다고 합니다.
        그 바람에 집사님은 실업급여를 받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2개월 후에 토지 공사 측에서 그에게 한 가지 제의를 했습니다.
        호텔 지분의 절반을 주는 대신, 다른 어떤 후원도 없는 조건으로 파산한 호텔을 운영해보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만년 적자에 후원도 없는 호텔을 경영할 자신이 없었지만,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기로 하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호텔은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나는 종으로 경영할 테니 이 호텔을 맡아도 괜찮습니까?”

        그때 주님이 마음속에 “맡아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2개월 동안 문을 닫았던 호텔에 가서 매일 청소하고, 정비했습니다.
        그리고 기도실을 만들어 직원들과 함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호텔 경영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는 결단하고 매일 자정부터 새벽 2시까지 소나무 숲에 들어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오전 11시 30분에 전 종업원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이 호텔은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때부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 주말에는 빈 객실이 없고, 매출이 늘면서 적자경영이 회복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교사업도 많이 하고, 축복을 받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어려울 때에 하나님께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모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일을 해주실 뿐 아니라, 우리를 책임져주십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사십니까?
        무엇을 위해 사업하시고, 직장생활을 하십니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 살고, 가족을 위해 일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밤낮 달라는 기도만 합니다.
        건강하게 해주시고, 아이들이 공부 잘하고, 사업이 잘되고, 시집을 잘 가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은 미신을 믿는 사람과 같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회사를 경영해도 자기가 사장이고, 하나님은 돕는 자가 되어 달라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가 왕이고, 하나님은 자기 비서 노릇만 해달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뜻대로만 살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뜻대로 될 수 있도록 축복해 달라고 하나님께 비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책임져주시는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책임져주시는 복을 받으려면, 자기 자신이 왕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그 자리에 모셔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 가정의 주인이 되어주시고, 우리 회사의 주인이 되어주시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이 주인이 되어주셔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주인이 되어주시면, 하나님의 큰 손이 우리의 일을 하시고, 모든 일을 책임져주십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절대 주권을 가진 분이시고, 신실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실수나 실패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우리의 일을 해주시고, 우리를 책임져주시면, 잘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책임져주시는 복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과 복음을 위해 집이나 밭, 부모 형제나 자녀를 버리면 백배의 복을 받는다고 말씀하셨는데, 주님은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집이나 땅이나 부모 형제, 자녀가 우상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보다 그것을 더 사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이 책임져주시는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므로 그 아들을 잃어버렸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그 아들을 얻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책임져주시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복이 되었습니다.

        스펄전 목사는 “헌신은 자기에 대한 소유권을 하나님께 이전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헌신하는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의 소유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소유로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려고 한 것은 그 아들을 자기의 소유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소유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시는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0:37~39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주님을 위해 버리고 포기하면, 잃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십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 우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시는 복을 받으려면, 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과 복음을 위해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삶의 목적은 땅 끝까지 주님과 복음을 전파하는데 있어야 합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6:15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주님은 이 말씀대로 사는 자를 가장 기뻐하십니다.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므로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힘은 부족하지만, 주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에 반드시 그대로 성취됩니다.

        마태복음 28:19~20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주님께서 복음 전하는 자와 항상 함께하시기 때문에 실패할 것 같아도 성공합니다. 안 될 것 같아도 됩니다.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리라 말씀하셨으니 그대로 됩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됩니다.
        마태복음 24장 1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으니 그대로 됩니다. 반드시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주님과 복음을 위해 살면,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시는 복을 받습니다.

        마태복음 6: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가 주님과 복음을 위해 살아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져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복음을 가장 열심히 전하는 나라가 가장 강한 나라가 되고, 가장 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영국은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고, 선교사들을 많이 보낼 때가 제일 강대국이었습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할 정도로 전 세계 구석구석에 영향력을 미치도록 하나님께서 도우셨습니다.
        복음 전하는 것 하나 때문이었습니다.
        죄 짓는 사람도 있지만, 복음 전하는 주의 종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본문의 배경이 되는 고린도전서 8장부터 10장 사이에 대두되고 있는 논쟁점들을 간단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논의의 주제는 우상숭배와 음식 나눔으로 인한 교회의 시험이 주요 주제입니다.
        고린도교회 안에는 소위 믿음이 강한 자들과 믿음이 약한 자들이 존재했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들의 입장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이제 만유의 주재되신 하나님 한 분 만을 섬기니 우리에게 이 세상의 우상은 실재가 아니다라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자유자로서 당시 주변 환경과 풍속과 음식등에 거리낄 것이 없다라는 입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상 제의에 참석은 하지만 문화의 하나로서 그것을 넘어서고 신앙 양심에 거칠 것이 못되고, 우상에게 드려졌던 고기들이 시장에서나 혹은 믿지 않는 친구들이 대접할 때에 거리낌 없이 먹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들에게는 세례와 성만찬을 매번 하기 때문에 구원에 아무 문제가 없다라는 입장입니다.
        반면에 소위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찌 보면 이제 막 믿기로 시작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매사에 우리가 이방 신들의 제의에 참여하고 그들의 음식을 먹는 것이 옳은지, 혹 남의 초대를 받고서도 눈 앞에 차려진 음식들과 고기들을 보고 혹시나 이 음식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것은 아니었는지, 혹은 시장에 가서도 그들 앞에 놓인 고기가 신전 제의에 사용된 것이었는지 늘 물어보며 염려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소심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내에 이런 믿음의 차이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 판단하고 정죄하는 시험이 찾아온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쉽게 다가오는 문제이기도 할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리게 된 사람들이 주변 세상 문화에 그들이 대하는 태도가 각각이고 그 태도에서 누리는 자유함의 강도가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사도 바울은 이런 고린도교회의 상황을 보면서 어떤 권면을 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본문 말씀을 통해서 두 가지 뚜렷한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자유인으로서 지식에는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겸손하지 않으면 지식의 종이 되어 교만과 방종할 수 있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의 결국은 구원의 패망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구약과 연결해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권면합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그들의 세례와 매 모임마다 함께 하는 성만찬을 자랑했습니다.
        이것이 그들 구원의 조건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더 나아가 이제 하나님이 그들의 주님이시기에 그들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해서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일면 신학적으로는 이런 그들의 모습을 적극 지지합니다.
        그래서 시장에 나온 음식과 고기들을 묻지 말고 그냥 먹으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음식들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 속에서 나왔기에 아무 문제가 없다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들의 윤리적인 부분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복음으로 자유함을 얻었다고 하지만, 그들 속에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어도 여전히 애굽의 이방 풍속을 그리워하고, 우상을 숭배하며, 모압 여인들과 간음하고 하나님을 구원을 의심하며 원망했듯이 그러한 옛사람의 모습이 그들에게도 있었던 것입니다.
        직업을 따라 참여했던 아프로디테와 각종 이방 신들에 대한 제의가 더 이상 우상숭배로 참여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것을 부러워했고 선망했다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들 중에 신전 창기들과 간음을 행한 옛습관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세례 받았으니까, 우리는 성만찬을 하니까,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을 믿으니까 괜찮다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식이 그들의 현세적 삶을 정당화 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믿음이 있는데 이만큼 타협한다고 뭐 어때? 세상을 살면서 이 정도는 해도 괜찮지 않아. 예수 믿는 다른 사람들도 다 이렇게 하는데. 때론 예수님도 이렇게 했잖아. 성경에는 이것에 대해서 아무런 말이 없잖아?’

        우리들도 역시 우리 주변의 많은 일들을 얼마나 우리의 신앙의 지식으로 정당화하고 타협하는지 모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자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그런즉 (믿음의 지식으로 굳게)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린도전서 10장 11-12절).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고린도전서 10장 5절)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가진 믿음의 지식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겸손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성경을 더 많이 안다고 해서 그것들을 판단과 우리 삶의 정당화의 잣대로 들이 내밀지 마시고. 오히려 지식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도구에 불과할 뿐이지 우리를 온전히 세울 수 없는 불완전한 것임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또 무엇을 권면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고린도전서 8장 1절에서 그 힌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또 10장 23-2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이 말들을 쉽게 표현하자면 우리가 덕을 세우며 남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의 종이 되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신앙 양심에 거리끼지 않고 우리가 누릴 자유는 참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행함이 믿음이 연약한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을 얻기 위해 우리가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고 그들에게 전도와 믿음의 덕을 세울 줄 아는 사랑의 매임이 필요합니다. 사실 자원하여 매인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구약에서는 매칠년 안식년 때에 해방된 종들이 주인의 은혜와 사랑이 너무 고마워 자발적인 종이 된 경우가 있습니다. 제사장 앞에서 자신이 자유를 포기하고 자발적으로 종이 되었다는 증거로 그의 귀를 뚦습니다. 물론 이러한 경우에 그 종의 주인은 그 종을 하대하거나 막대하지 않습니다. 이후로는 종이지만 그들 아들처럼 귀하게 여깁니다. 이런 경우에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상호이해가 성립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에 매여 자발적으로 섬김의 종이 되는 경우를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오해합니다.

        서른 셋 나이로 2006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우리에게 깊은 신앙의 감동을 남겨주고 떠난 청년이 있습니다.
        바로 ‘그 청년 바보의사’의 주인공인 안수현 형제입니다.
        2000년도에 한국에 의약분업 분쟁으로 인해 거의 모든 병원에 파업이 일어났습니다.
        모든 의사들이 다 파업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리고 설령 파업에 참여했다고 하더라도 밤에 몰래 와서 진찰하고 처방을 내리는 의사들도 있었지만 당시 대세는 파업이었습니다.
        특별히 위계질서가 엄한 병원에서 개인행동을 한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고대 안암병원에서 레지던트 2년차였던 안수현 형제는 홀로 남아서 끼니를 걸러가며 밤을 새우며 환자들을 지켰습니다. 그에게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대의 명분이 많이 있었지만, 의사란 환자 곁에서만 의미가 있다라는 소신과 또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원하시는 바라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고 앞으로의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파업 병동을 지켰습니다.
        이때 사람들 중에 드러내놓고 혼자 튄다고 비난하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러 논리에 밀려 위로 받지 못하고 충분히 돌봄을 받지 못하는 환자들이 제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합니다.
        누구보다도 위로 받아야 할 사람들, 병원에서 도움이 될 길과 하나님 앞에서 자유할 수 있는 길을 위해 기도하면서 병원에 남는 길을 택했습니다.
        기도해 주십시오. 고대병원 내과 R2 스티그마 안수현”¨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선한 양심에 비추어 죽어가는 한 사람이라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사람들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사랑의 종이 되라고 권면합니다.
        사랑의 종이 되기 위해서는 고린도전서 9장 25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가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우리에게 절제가 필요합니다.

        교회 내에서는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배려할 줄 아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혹 믿음이 약한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먹을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그 음식들이 우상에게 드려진 것이라고 밝히면 그것을 먹을 자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게 한 자와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10:29)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교회 밖에서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처럼 율법 있는 자에게는 율법 있는 자같이, 율법 없는 자는 율법 없는 자같이, 그리고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들 같이 된다는 말은 사랑에 근거한 자유함의 절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쉽게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이웃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의 방식, 자신의 스타일도 포기하고 이웃을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자신을 포기하겠다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인간으로 보내신 방식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 같은 인간의 모습을 입고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의 모습처럼, 우리가 가진 신앙적 지식의 허울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우리의 이웃을 얻기 위한 낮아짐이 필요함을 우리에게 가리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절제요 희생이며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보스톤 트리니티 교회의 설교자로 계셨던 필립 브룩스(Philip Brooks)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에게는 로버스 잉거솔(Robert Ingersoll)이라는 무신론자 친구가 있었습니다.
        브룩스는 아주 절도 있고 철저한 시간 계획을 따라 사는 분이었지만, 이 무신론자 친구를 전도하기 위해서 자주 자신의 시간 계획을 바꾸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까지 자네가 할 필요가 있느냐?”라는 물음 앞에 그는 “내가 그를 참으로 사랑하고 그를 천국으로 인도하기 원한다면 내 시간표가 아닌 그의 시간표를 따라야 하지 않겠느냐?”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브룩스가 말년에 병을 얻어 병원에 입원했을 때에 그는 심신의 안정을 위해 ‘면회사절’이라는 푯말을 걸어두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만일 잉거솔이 찾아 오면 예외로 만나게 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잉거솔이 그 사실을 알고 “왜 나에게만 자네가 예외로 하고 만나주느냐?”는 물음에 브룩스 목사는 빙그레 웃으며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다른 친구들이야 다시 천국에서 만나겠지만 자네에게는 그런 보장이 없지 않느냐?”고.
        이 실화는 참으로 우리가 되새겨야 할 많은 교훈을 줍니다, 우리 위해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도 복음을 위해 사랑과 섬김의 자발적인 종이 되시기를 권면합니다.

        우리가 종이 되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를 살리고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복음의 종이 되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그러하기 위해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을 알아가며 복음의 지식으로 자유함을 누리지만 그 풍성한 지식에는 늘 겸손하며, 그리스도를 본받아 절제함과 담대함이 드러나 사랑에 매인 종이 되는 그런 진정한 그리스도인들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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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20-2022(화)

        남의 유익(고린도전서 10:24)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Nobody should
        seek his own good, but the good of others.

        유익한 것. συμφέρω  4851

        1. 가져다 쌓다,  2. 돕다,
        3. 마태복음 18: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발음 / 쉼페로(sümphĕrō)
        어원 /  미완료 συνέφερον, 제1부정과거 συνήνεγκα, 제1부정과거분사 συνε- νέγκας, 4862와 534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유익하다(마 5:29, 요 11:50, 고전 6:12), 낫다(마 18:6), 좋다(마 19:10), 유익하게 하다(고전 12:7).
        [명] 유익(요 16:7,고전 7:35, 히 12:10).
        신약 성경 / 15회 사용

        남의 유익(the good of others)을 구하라!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신앙이며 삶의 자세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에는 다른 사람을 위하는 여유가 사라졌고 오직 자기만을 위하는 공간을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자기보다 남을 위한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1-4장은 인사와 고린도 교회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분쟁에 대한 답변
        5장은 음행에 대한 답변
        6장은 성도 간의 소송 문제에 대한 답변
        7장은 결혼에 대한 답변
        8-10장은 우상 제물에 대한 답변 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사백 년 동안 노예살이했던 애굽에서 자유하는 은총을 입었음에도 그 자유를 남용하고, 패역한 삶을 삶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던 사실을 상기시킴으로 교훈하고 있습니다.

        교훈을 받아드리는 자세가 두 가지라고 하겠습니다.

        첫째는 소극적인 자세
        둘째는 적극족인 자세

        소극적인 자세는 나도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나도 남을 돕지 않는 자기 중심적이 삶을 선호하는 것입니다.
        적극적인 자세는 내가 먼저 남을 돕고자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신명기 8:12-14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우리 안에는 우리에게 재물을 얻을 능력을 주신 하나님을 잊게 하고, 자신의 능력과 자신의 힘으로 이 재물을 얻었다고 말하게 하는 자기 중심적인 죄성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슬하(膝下)’가 ‘무릎 아래’입니다.
        그래서 ‘구름 아래’는 ‘하나님 슬하’의 의미입니다.
        출애굽기, 민수기, 신명기를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얼마나 많이 보호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무릎 아래’ 정도가 아니라 ‘눈동자’와 같이 지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바다 가운데로 지났다’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홍해를 열어 주셔서, 그 바다를 건너갔다는 것입니다.

        구름 아래에 있었다는 것과 바다 가운데로 지났다는 것은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이 아니라, 노예가 자유인이 되는 신분의 변화가 일어났으며, 애굽에 속했던 사람이 가나안에 속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 된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구름 기둥 아래에 있다가 홍해를 건넌 것을 ‘세례’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홍해를 건너기 전에 세례 예식을 행하고, 서약을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데 홍해를 건넌 사건은 정말 세례의 의미를 잘 설명해 줍니다.

        애굽이 죄와 사망의 상징이라면, 가나안을 향하는 길은 복과 생명의 상징입니다.
        그들이 홍해를 건널 수 있었던 것은 헤엄을 쳐서 스스로 가나안 땅에 닿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또한 크고 작은 배를 타고서 힘을 써서 배를 조종했거나 노를 저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열어 주시고, 그 땅바닥을 마르게 해 주셨기 때문에 건널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건너고 나자 홍해는 다시 닫혔습니다.
        그들은 다시는 애굽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홍해를 건너는데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홍해가 열리고 길이 났던 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결단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적용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고, 세례 교인이 된 것이 우리의 능력이나 지혜, 선함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죄의 세상에서 우리를 불러주시고,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세례 교인으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더 이상 애굽으로 돌아가는 길은 없고 가나안을 향하는 길만 있듯이, 우리에게도 주님을 믿기 이전으로 돌아가는 길은 없고, 하나님을 목적 삼고 걷는 길만 있습니다.

        ‘신령한 음식’은 ‘만나’를 가리킵니다.
        만나는 몸을 위한 양식이었습니다.
        그럼에서 ‘육체의 양식’이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신령한 음식’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만나가 땅에서 솟아나지 않고 하늘에서 내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주워야 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만나를 하루분씩만 주우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많이 거둔 사람도 남는 것이 없었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욕심을 부리고 다 먹지 못할 정도로 거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그 삶이 썩고 냄새가 날 수 있습니다.
        또한 안식일 전날에는 이틀분을 거두도록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날에도 만나는 괜찮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몸을 위한 음식이 신령한 음식이 되었습니다.
        동일하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면 우리의 먹는 모든 음식은 신령한 음식이 됩니다.

        르비딤에서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반석을 쳤더니 물이 나왔습니다.
        그래야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마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반석이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즉 그 물이 터지게 해주신 분이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터진 반석’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징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신령한 반석’이 그들을 따라다녔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동행해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런 은혜를 베푸심에도 그들을 그것을 몰랐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홍해를 건넘과 불기둥과 구름기둥, 반석에서 터진 물, 만나로 대표되는 은혜 베푸심을 수없이 보았음에도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했습니다.
        특히 가데스바네아에서 12명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왔는데, 10명은 “우리는 그들 앞의 메뚜기와 같다”라고 보고했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곳은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심히 아름다운 땅이고, 그들은 우리의 먹이다”라고 보고했습니다.
        불행하게도 이스라엘 자손들은 10명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 결과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출애굽의 1세대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마침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믿는 사람에게는 매해가 약속의 땅이 됩니다.
        물론 이 땅에서 그 약속의 땅을 마지막으로 받으면, 영원한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본보기(튀포스)’는 ‘맞아서 생긴 자국’을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던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못 자국을 보여주시며 “믿는 자가 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자국’과 ‘본보기’가 같은 말입니다.

        혹 몸에 수술 자국이나 불에 덴 흉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그때를 떠올리며 더욱 조심해서 살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불순종을 우리 몸에 있는 상처 자국으로 여긴다면, 우리는 더욱더 바른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민수기 25장에 나오는 싯딤에서의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우상숭배하고, 모압 여인들과 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것은 고린도 교회가 우상숭배하고 음행을 저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도 마음이 상해서, 만나도 지겹고, 애굽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했을 때 불뱀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달아, 그것을 본 사람은 치유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을 광야 생활 내내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원망’은 내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 일어나곤 합니다.
        고린도 교회에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과 원망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고, 주어진 상황에 순종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진면교사(眞面敎師)’라고 한다면, 이스라엘 자손들은 ‘반면교사(反面敎師)’와 같습니다.
        우리가 중심으로 진면교사를 본보기로 삼지 않으면, ‘미워하면서 닮는다’라는 말처럼, 반면교사의 삶이 우리의 삶을 비춰주는 거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그런즉’이 중요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이 서 있지 못하면서 서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고, 성숙하지 못했음에도 성숙하다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는 걸림돌이 많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 다 자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 자람을 잘하기 위해서 말씀을 읽고 쓰고,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4가지의 경고를 했습니다.
        우상숭배, 간음, 하나님을 시험,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고린도 교회에 만연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피할 수 있는데, 피하지 않았다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습이 고린도 교회에 그대로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도 동일하게 요구받습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 세속적인 욕망 추구,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스라엘 자손이고, 고린도 교회입니다.

        우리가 이런 삶을 살지 않고,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기 위해,  주일예배, 수요 성서여행, 새벽 묵상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진정한 교인으로 살아가는 한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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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21일(수)

        나를 본 받는 자 되라(고린도전서 11:1)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본 받다.
        μιμητής, οῦ, ὁ 3402

        1. 모방자,  2. 본 받는 사람

        고린도전서 4:16

        발음 / 미메테스(mimētēs)

        어원 / 3401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본받은 자(고전 4:16, 엡 5:1, 살전 2:14), 행하는 자(벧전 3:13)

      • 신약 성경 /  6회 사용

      • *3401. μιμέομαι

        1. 모방하다,  2. 본따다,  3. 본받다

        발음 / 미메오마이(mimĕŏmai)
        어원 / 명령 μιμοῦ, 미완료 ἐμιμοῦμην, 미래 μιμήσομαι, 제1부정과거 ἐμιμησάμην, ‘흉내내다’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본받다(살후 3:7, 히 13:7, 요삼 1:11).
        신약 성경 / 4회 사용

        11:2. (이제)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대로 그 유전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이제) - 데(δέ) 1161
        1. 그러나,  2. 마태복음 6:1,  3. μέμδέ

        발음 / 데(dĕ)

        어원 / 헬라어
        신약 성경 / 2801회 사용

        11:3.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머리. κεφαλή, ῆς, ἡ  2776
        1. 머리,  2.사람이나 짐승의 머리,  3. 그리스도를 가리킴

        발음 / 케팔레(kĕphalē)
        어원 / 기본형 κάπτω ‘잡다’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머리(마 5:36, 행 18:6, 계 1:14), 머릿돌(마 21:42, 막 12:10, 벧전 2:7).
        신약 성경 / 75회 사용
        *케팔라 : 통치하다, 권위가 있다, 기원이 된다, 출처가 된다, 지휘한다, 결정권이 있다.
        청빈낙도(淸貧樂道)

        벤치마킹(Benchmarking)

        벤치마킹(Benchmarking)이란 말을 들어보셨지요?
        벤치마킹이란 어느 분야에서건 그 분야에서 모범이 될만한 인물을 선정하고 그를 본으로 삼아 자기 자신을 발전시켜 나가는 경우를 말합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자신의 가슴 속에 저마다 벤치마킹의 모델이 있기 마련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을 벤치마킹하라고 권면합니다.

        본 받는다는 말은 어떤 대상을 통해 누군가를 흉내내고, 모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빌립보서 4: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배우고 듣고 본 바를 그대로 행하는 것은 그 사람을 닮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본문에서 자신을 본받으라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자신을 닮으라는 것이고, 모방하라는 말입니다.
        사실 자신의 삶에 웬만큼 자신이 있지 않고서는 타인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구 사도 바울이 자신을 본받으라고 한 것은 그만큼 자신의 삶에 충실했고, 성실했다고 하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바울이 나를 본받으라고 권면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비결은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있기 때문”임을 오늘 본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자 된 것이 하고 있습니다.
        현재진행형으로 나타나있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본받아 닮아가고 있는 자신과 함께 그리스도를 같이 본받아 가자는 권면입니다.
        그래야 10장 31절 말씀처럼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거치는 자가 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것은 사도바울처럼 곧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이요, 자신을 통해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가운데 나도 모르게 그리스도처럼 변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삶이 바로 참된 신자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닮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사람은 자주 만나는 사람을 닮아갑니다.
        부부는 닮는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마도 그것은 매일 만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매일 만나다보면 서로 닮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후 바울의 삶은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이 변하여 이방인의 사도 바울로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세리 마태도 예수님을 만난 후 그의 삶이 완전히 달라져서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이웃을 향하여 베풀고 나누는 삶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야만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본받아 닮아 갈 수 있습니다.

        자신을 비우는 겸손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그 당시의 모든 것을 갖춘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운 최고의 지식인이었습니다.
        어디에 내놔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비웠기에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이 상대보다 낫다고 생각하면 상대를 본받을 수 없고, 닮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낮아지고 겸손해져야 닮아갈 수 있고 본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시대는 대단한 이기주의의 시대요, 나 중심의 시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게 요구하시는 것이 생길 때 우리는 아주 불편해 집니다.
        사실 우리의 내적 자아는 하나님께 푹 빠지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자신을 비워야 합니다.
        자신을 비우는 겸손이 바로 하나님과 만나는 자리인 것입니다.
        자신이 겸손하지 못하면 결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사도바울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비우고 낮아지고 겸손해져야 그리스도를 본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사람들을 좋아하는 사람을 닮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청소년들을 보면 대중스타를 닮아 갑니다.
        대중스타들이 하는 목걸이, 머리 스타일, 입는 옷 등 흉내를 내고 다닙니다.
        왜 입니까?
        청소년들은 그들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을 닮아가기 마련입니다.
        사모하고 존경하면 닮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의 겉모습만 닮아 가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인격까지 닮아가기 마련입니다.
        이처럼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사모했기에 예수님을 본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들도 사도바울처럼 우리 자신을 통해 그리스도가 나타나야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나를 통해 그리스도를 느끼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하나님께 영광을 위하여 사시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나를 통해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 다면, 즉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 라고 생각하신다면 우리의 믿음이 좀 더 성숙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입술로만 겉모습만 닮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내면의 인격으로부터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는 참된 신앙인으로 살아감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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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22-2022(수)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린도전서 12:31)


        은사(恩賜)란 무엇인가? 

        Ⅰ.  이끄는 말
        Ⅱ.  은사란 말의 뜻
        Ⅲ.  은사의 종류
        Ⅳ.  은사의 용도(목적)
        Ⅴ.  은사의 구분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로마서 12:4-8   

        Ⅰ. 이끄는 말  


        종교개혁 이후, 지금처럼 교회가 성경에서 이탈되어진 경우도 그렇게 흔하지는 않을 것이다.
        서구 교회들은 물론, 한국 교회 역시 성경과는 거리가 상당히 먼 기형적(畸形的)인 교회들이 너무도 많아지고 있다는 데서 위기의식(危機意識)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한국 교회가 이와 같은 모습으로 탈바꿈이 되어지기까지는 여러가지 원인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신학적인 미숙은 물론, 성경교육에 대한 미온적 태도, 또는 사회적 환경, 신자들의 의식구조 등 다양한 원인들을 들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신학적인 미숙과 성경교육에 대한 미온적인 태도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에 근거한 구체적인 신학적 이론을 무시하고 소위 성령 운동을 통한 체험 위주(爲主)의 신앙을 우선한 결과가 바로 오늘의 기형적인 교회로 변하게 된 것이다.
        이론이 무시된 체험은 자기 최면(催眠)일 수 있다.
        자기 최면 상태가 진리일 수는 없는 것이다. 체험 일변도의 신앙생활은 자연히 은사면(恩賜面)에 치우치게 된다. 허다한 교회들이 소위 성령의 은사에 관심을 가지는 원인도 체험 중심의 신앙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는 성경으로 돌아가서 치료를 받아야 할 상태이다. 아니, 대수술을 받아야 할 중병을 앓고 있는 상태이다. 아무리 큰 수술이라도 한국 교회는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수술을 하기전에 먼저 질병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필요하다. 그리고 병명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질병의 원인도 파악되어야 한다.

           한국 교회가 앓고 있는 중병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성령의 은사'에 대한 오해이다. 전통적으로 무속신앙에 잘 길들여진 한국 교회 신자들은 철저하게 무속적인 행위들을 '성령의 은사'라고 착각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것은 성령의 은사에 대한 성경적인 이론적 체계의 결여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은사'란 과연 무엇인가? 이에 대한 해답을 본 논고에서 제시함으로써 대 수술을 받아야 할 만큼 중병에 시달리고 있는 한국 교회의 중환 치료에 적게라도 기여하고자 한다.



        Ⅱ. 은사(Gifts)란 말의 뜻  



          국어사전에서는 은사라는 뜻을 '임금께서 내려 줌', 또는 '임금께서 내려주는 물건'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경에서 은사라는 말은 헬라어로 '퓨뉴마티카(  )'인데, 그 뜻은 영에 속한 것들이라는 말이다. 또는 '카리스마타'라고도 하는데, 그 뜻은 은혜의 현현(顯現), 거저 주어진 선물들이라는 말이다. 이상의 언어들을 종합적으로 의역(意譯)을 한다면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에게 베풀어지는 모든 것을 뜻한다고 말할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는 은사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언급이 되고 있으나, 구약성경에서는 신약성경에서와 같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구약성경에도 은사로서의 의미를 담고 있는 내용이 신약성경 못지 않게 많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 일이나

        (창12:1-2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근원이 될지라)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에게 잉태케 해서 이삭을 낳게 하신 일

        (창17:15-16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야곱으로 하여금 거부가 되게 하신 일

        (창30:37-43  야곱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취하여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 무늬를 내고 그 껍질 벗긴 가지를 양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 구유에 세워 양떼에 향하게 하매 그 떼가 물을 먹으로 올 때에 새끼를 배니 가지 앞에서 새끼를 배므로 얼룩얼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은지라

        야곱이 새끼 양을 구분하고 그 얼룩무늬와 검은 빛 있는 것으로 라반의 양과 서로 대하게 하며 자기 양을 따로 두어 라반의 양과 섞이지 않게 하며 실한 양이 새끼 밸 때에는 야곱이 개천에다가 양떼의 눈앞에 그 가지를 두어 양으로 그 가지 곁에서 새끼를 배게하고 약한 양이면 그 가지를 두지 아니하니 이르므로 약한 자는 라반의 것이 되고 실한 자는 야곱의 것이 된지라  이에 그 사람이 심히 풍부하여 양떼와 노비와 약대와 나귀가 많았더라)

        요셉으로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신 일

        (창41:37-43  바로와 그 모든 신하가 이 일을 좋게 여긴지라  바로가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있는 자가 없도다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  내 백성이 다 네 명을 복종하리니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 뿐이니라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로 애굽 온 땅을 총리하게 하노라  하고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사슬을 목에 걸고 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를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로 애굽 전국을 총리하게 하였더라)

        또는 모세로 바로 앞에 신이 되게 하신 일

        (출7: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내가 네게 명한 바를 너는 네 형 아론에게 말하고 그는 바로에게 말하여 그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보내게 할지니라)

        여호수아를 세워 모세의 뒤를 잇게 하신 일

        (수1:1-2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사사들을 세우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신 일

        (삼상16:6-13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듬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그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이새가 아비나담을 불러 사무엘의 앞을 지나게 하매 사무엘이 가로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이새가 삼마로 지나게 하매 사무엘이 가로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이새가 그 아들 일곱으로 다 사무엘 앞을 지나게 하나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고

        또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가로되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이에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레위 지파로 제사장을 삼고 선지자들을 기름부어 세우신 일 등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의 많은 사건들이 모두가 구약성경에 있어서의 은사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내용들임을 알 수 있다. 알고 보면 구약성경에 있어서의 은사가 아주 넓은 의미를 담고 있음을 볼 수 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 전 영역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 되어지고 있다.

           신약성경에 있어서도 구약성경에서와 같이 넓은 의미로서의 은사적인 내용들이 많이 있다. 처녀 마리아에게 예수가 잉태된 사실이나

        (눅1:26-38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세우신 일

        (마4:18-22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저희가 곳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바울을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세우신 일

        (행9:1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등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베푸신 은사로 이해될 수 있다.

           결국, 신ㆍ구약성경에 있어서의 은사(Gifts)란 말은,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이나 재능, 그리고 임무나 능력 등이 은혜로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을 말한다.



        Ⅲ. 은사의 종류  



          하나님께서 은혜로 인간에게 주시는 은사의 종류는 매우 많고 다양하다. 신ㆍ구약성경에서 그 종류를 다 찾아 열거(列擧) 한다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그 수가 많을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어느 것 하나 하나님께로부터 은사로 주어지지 아니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은사의 종류는, 주로 신약성경에서 구체적으로 밝혀주고 있는 은사들을 중심으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 글의 목적이 현재 은사 중심의 신앙으로 인한 교회들의 폐단(弊端)을 시정하고자 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넓은 의미의 은사에 관하여는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으나 신약성경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몇몇 종류의 은사들에 관해서만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신약성경에 언급된 구체적인 은사의 종류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밝혀준 내용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이에게는 성령을 따라 지혜의 말씀을 어떤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어떤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이에게는 방언을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전12:4∼11)"고 밝혀 주었다.

        그리고 로마서에서는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12:6∼8)"고 했다. 이들 말씀의 내용들은 모두가 은사의 종류들을 말해주고 있다.

           이상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면, 은사의 종류는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침, 능력 행함, 예언, 영들 분별, 방언, 통역 등이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들 은사보다 더욱 큰 은사가 있음을 말한다. 그 은사는 사랑이다.

        (고전13:13   그런즉 믿은,소망,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이와 같은 은사들은 교회에 세운 직임과 함께 주어진다. 즉 은사를 받은 자는 받은 은사에 따라 직임이 주어진다는 뜻이다. 그 직임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언급한 사도, 선지자, 교사 등

        (고전12: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이며,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는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 등이라고 했다.

        (엡4: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Ⅳ. 은사의 용도(목적)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은사를 주시는 목적이 무엇인가? 무엇을 하시기 위해서 무슨 용도로 주시는 것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해답은 은사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작용을 하는 것이다. 은사의 용도(목적)는 성령의 사역과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다. 그 이유는 성령의 사역이 은사들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신 이후, 오순절에 성령을 보내 주신 것은,
        첫째로 사도들로 하여금 신약성경을 기록하게 하시기 위함이며

        (계22:17-19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둘째는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케 해서 교회를 세우도록 하기 위함이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이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은사를 주어 받은 자들로 하여금 은사 따라 사용하게 하시는 것이다. 결국 은사는 성령의 사역을 이루는 데 도구로 쓰시기 위해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먼저, 은사는 신약계시를 완성시키는 데 사용된다

           오순절 성령강림 전에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복음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문서화 되어진 사실이 없다. 다만 제자들이 예수께로부터 직접 귀로 듣고 배운 바는 있으나 기록으로 전해진 바는 없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의 내용을 제자들이 분명히 깨닫지 못하고 있는 부분도 많이 있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베드로에게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요13:7)"고 하신 말씀이 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예수 자신이 죽으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 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2∼13)"고 하셨다. 이와 같은 말씀들은 오순절 성령강림 전에는 제자들이 복음진리에 대하여 분명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예수께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어 주신 것은 제자들로 하여금 복음의 진리를 확실히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고 말씀 하셨고,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7)"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성령이 오셔서 제자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셔야 진리를 알 수가 있기 때문에 예수께서 가셔서 성령을 보내어 주시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하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오순절 날에 보혜사 성령을 보내어 주셨고

        (행2:1-4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성령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복음진리를 깨달아 신약계시를 완성 시키게 하시려고 제자들에게 각종 은사들을 선물로 주신 것이다. 그래서 은사들 중에는 복음진리를 깨달아 알게 하는 은사들이 있는 것이다.

        다음은 은사는 진리의 터 위에 교회를 세우는 데 사용된다

           예수는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 교회는 머리되신 예수의 몸이 된다. 예수께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어 주신 것은 예수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이다. 예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성령께서는 제자들에게 능력을 받게 하시고, 복음을 깨닫게 해서 예수의 증인이 되게 하시므로 예수의 몸된 교회를 세우게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교회를 세우실 것에 대하여 말씀하신 바가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신분에 대하여 물었을 때, 베드로가 합당한 고백을 하니까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陰府)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고 말씀 하셨다.

        그리고 승천하시기 직전에는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제자들에게 대한 예수님의 약속이었다.

        이 약속대로 예수께서는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어 주셨고, 성령께서는 제자들에게 권능을 받게 하여 예루살렘을 비롯해서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하셨고, 그 결과로 예루살렘과 이방 땅 여러 곳에 주님의 몸된 교회가 세워지게 하셨다. 이것이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께서 하신 또 하나의 일이었다.

        이에 관하여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말하기를, 예수께서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교회에 받은 바 은사 따라 직분을 세우신 이유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2)"고 했다. 그리고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신데 온 몸이 서로 상합(相合)해서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세운다고 했다.

        (엡4:15-16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예수께서 성령을 통하여 주신 은사들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시는 데 사용하시기 위해 교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다.



        Ⅴ. 은사의 구분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성령을 통하여 은혜의 선물로 주신 은사들은 몇 가지로 구분이 된다. 먼저는 일시적(一時的)인 은사이고, 다음은 지속적(持續的)인 은사이며, 그 다음은 영원적인 은사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원전 작정하신 섭리 따라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시고, 그 계시된 진리 위에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시고 영원한 천국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에서 그 때마다 필요한 은사들을 성령을 통하여 주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 같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은사이지만 용도에 따라서 구분이 가능하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대부분의 교사들이 성령의 은사를 아무런 구분 없이 이해하고 받아들여 가르치고 주장해 왔기 때문에 신앙에 많은 혼란을 일으켜 온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대한 정확한 성경적인 정립(定立)은 은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결정적인 작용을 하게 될 것이다.

        먼저는,
        일시적인 은사이다

        일시적인 은사는 성령께서 어떤 특정한 기간에만 필요로 해서 주신 것으로 그 기간이 지나면 폐해 버리시는 은사를 말한다.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이후, 오순절에 보내신 성령을 통하여 지상에서 사역하게 하시는 기간 중에 특정한 기간이 있다. 그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 중의 하나인 신약계시시대라고 말한다. 이 시대는 성령이 강림하신 이후부터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계시를 받아 요한계시록으로 신약계시 기록을 끝마칠 때까지를 말하는 것이다.

           앞 장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예수님 당시에는 제자들이 진리에 대하여 미숙한 상태에 있었으나 성령강림 이후에는 보혜사 성령의 인도를 따라 진리를 온전히 깨닫고 기록을 한 것이 신약성경이다. 이 성경 이외에 일점일획(一点一劃)이라도 더하거나 덜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한 계시가 주어진 것이다.

           성령께서 신약계시를 기록하게 하신 계시시대에는 복음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은사로서 방언, 예언, 지식 등과 같은 일시적 은사를 주셨다.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실 때에 베드로가 방언으로 각국에서 온 유대인들에게 복음의 내용을 전했다.

        (행2:1-13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에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놀라 동하여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담니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즉 복음의 비밀을 말하게 하신 것이다.

        (고전14: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예언의 은사 역시 복음의 내용을 깨닫도록 하기 위하여 주신 은사이다.

        (고전14:6, 24-25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마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

        지식의 은사는 복음진리의 기초지식으로서 복음을 깨닫게 하는 도구로서의 은사이다.

        (고전14:6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즉 복음진리를 깨닫도록 인도해 주는 구약적 지식의 은사를 말한다.

        (히10: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이상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방언과 예언과 지식 등의 은사들은 신약계시 기록이 완성된 이후에는 다 폐해진 일시적인 은사들이다.


           이에 관하여 사도 바울은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 13:8∼10)"고 했다.
        즉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방언이나 예언, 그리고 지식의 은사가 폐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온전한 것이 올 때"를 예수 재림하실 때라고 해서 지금도 방언이나 예언의 은사들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올 때"는 완전한 계시가 주어질 때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계시가 주어지는 시대(사도시대, 주후100여년까지)에는 방언이나 예언, 그리고 지식 등의 은사를 통하여 부분적인 신약계시가 주어졌으나 완전한 신약계시가 주어진 후에는 이들 은사들은 모두 폐해진 것이다. 따라서 이들 은사들은 모두가 일시적인 은사들이다.


        다음은 지속적인 은사이다

        지속적(持續的)인 은사는 성령께서 신약계시가 완성된 후에도 교회를 세워 견고히 자라게 하기 위하여 과거는 물론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 예수 재림때까지 지속적으로 주시는 은사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부터 예수 재림시까지를 교회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대에는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께서 지상 교회에게 지속적인 은사를 주어 교회를 자라게 하고 견고히 하여 유익하게 하신다.

        (고전12:7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와 같은 지속적인 은사는 신약계시 기록을 위한 일시적인 은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은사들이다. 즉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침, 능력 등의 은사들인데

        (고전12:8-10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성령께서 이같은 은사들을 주어 교회에 목사나 교사, 복음 전하는 자, 능력을 행하는 자, 병 고치는 자, 봉사자, 다스리는 자 등을 세워

        (엡4: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고전12: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교회를 자라게 하신다. 이 외에도 사도나 선지자 직임이 더 있으나 이들 직임들은 사도시대 즉 신약계시 시대에만 국한된 일시적인 직임들이다. 따라서 현재 교회에는 사도나 선지자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속적인 은사라고 해서 성령께서 신약교회 성도 모두에게 분별 없이 주시는 것은 아니다. 성령께서 필요에 따라 교회 중의 몇을 세워 직임을 감당하게 하시려고 그들에게만 주시는 것이다.

        (고전12:28-30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따라서, 지속적인 은사는 교회가 세워지고 자라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 이들 은사들은 모두가 성령을 따라 주어지는데 서로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지혜의 말씀은 지식의 말씀을 가능하게 하고, 지혜와 지식의 말씀은 믿음을 가능하게 하며, 지혜와 지식의 말씀에 의한 믿음은 병 고침과 능력 행함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므로 모든 은사 중에 가장 머리되는 은사는 지혜의 말씀인 것이다. 은사 중에 '지혜의 말씀'은 하늘로서 오신 참 지혜

        (고전1:24-25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2:6-7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즉 복음진리에 대한 말씀을 뜻하며 진리의 영이 오셔서 진리를 알게 하고 깨닫게 하는 말씀을 통하여 배워서 아는 말씀을 말한다. 따라서 지혜의 말씀 없이 지식의 말씀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이 따로 분리될 수 있는 성질의 은사가 아니다.

        이러한 말씀의 은사 없이는 믿음의 은사 역시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말씀의 은사와 믿음의 은사가 서로 나누어질 수 없다. 말씀을 통하여 깨달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 된

        (엡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성숙된 믿음 없이는 병 고침과 능력 등의 은사 역시 불가능하며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교회를 세우기 위한 지속적인 은사들은 모두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의 분량 따라 역사하게 하시려고 성령께서 선물로 주신 것이다.

        (엡4:15-16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리라)

        그 다음은 영원적인 은사이다

        영원적인 은사는 현세 즉 교회시대에는 물론, 예수 재림 후 영원한 천국에 가서까지 영원토록 주어지는 은사를 말한다. 이 은사는 모든 은사들의 처음이며 나중이고 또한 가장 큰 은사이며 제일 좋은 은사이다.

        (고전13:8-13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페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페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페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소망,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이 은사는 곧 사랑인데, 이 은사를 기초하지 아니한 모든 은사들의 사역은 모두가 무가치한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고전13:1-3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그 이유는 모든 은사들의 사역 목적이 사랑의 은사를 실현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은사들은 사랑을 따라 구해야 한다.

        (고전14:1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바울은 사랑의 은사에 대하여 강조하면서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4∼7)"고 했다. 이같은 사랑은 교회가 세워지고 자라는 데 있어서 반드시 있어야 할 요소이다.

           사랑의 은사는 지상교회에서는 완전하게 실현될 수는 없다. 다만 교회의 성숙 과정의 농도에 따라 비례적(比例的)으로 실현이 되는 것이다. 사랑의 은사가 완전하게 실현이 되는 곳은 바로 영원한 천국이다.
        천국은 사랑의 은사가 영원토록 실현되는 곳이다. 지상의 교회는 사랑의 은사가 완전하게 실현되는 목표를 향해 점진적(漸進的)으로 성숙되어져 가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방언이나 예언의 은사로 혼란을 빚고 있는 고린도 교회를 향해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12:31)"고 말했고,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전13:13∼14:1)"고 한 것이다.

            성령께서 교회에게 주시는 사랑의 은사는 일시적이나, 지속적인 모든 은사들의 목적이 되는 은사이며, 가장 크고 제일이 되는 영원적인 은사이다.

           결국 성령의 은사는 신약계시를 완성하기 위해서 주신 일시적인 은사와 교회를 세우기 위한 지속적인 은사, 그리고 영원한 천국에서까지 영속되는 영원적인 은사로 구분이 된다. 이들 은사들은 서로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주어진 직임따라 사역을 하게 된다. 일시적인 은사는 신약계시를 완성해 놓은 후 폐하게 되고, 지속적인 은사는 완성된 계시진리 토대 위에 교회를 세워 자라게 한 다음 폐하게 되며, 영원적인 사랑의 은사는 자라난 교회가 천국으로 인도된 후에 영속적으로 실현이 되는 은사이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고전13:8) 

         


          
         

         

        <십자가의 전달자>

         

        난 지극히 작은 자 죄인 중에 괴수

        무익한 날 부르셔서

        간절한 기대와 소망 부끄럽지 않게

        십자가 전케 하셨네

         

        어디든지 가리라 주 위해서라면

        나는 전하리 그 십자가 내 몸에 벤 십자가

        그 보혈의 향기

        온 세상 채울 때까지

         

        살아도 주를 위해 죽어도주를 위해

        사나 죽으나 난 주의 것

        십자가의 능력 십자가의 소망

        내 안에 주만 사시는 것

         

        난 지극히 작은 자 죄인 중에 괴수

        무익한 날 부르셔서

        간절한 기대와 소망 부끄럽지 않게

        십자가 전케 하셨네



        고린도의 시대적 배경과 고린도 교회의 문제


        고린도는 그리스 중남부의 펠로폰네시스 반도에 위치하며 아테네에서 서쪽으로 약 80km 떨어져 있습니다.
        기원전 3천년 전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어요. 지금은 인구 3만명의 시골이지만 로마 시대에는 인구 60만
        명의 부와 방탕의 도시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고린도와 코린토스는 같은 말이예요.


        그리스 반도와 대륙을 연결하는 지협 남단에 잇으며 겐그리아 항구와 로마의레기온 항구를 연결하고 지중해의 동서를 연결하는 묘한 지형으로 상업과 물 질적인 변영을 누린 도시요 잡다한 인종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어 동서 문화 와 종교의 혼잡을 이루었다. 고린도의 종교중에 여사 프로디트라는 우상이 있어 600피트나 되는 산상에 무녀가 무려 1,000명이나 있고 이로 인하여 고린도인들은 음탕한 풍습에 젖어 고린도라하면 음행한 사람의 대명사가 되었다.

        (1) 바울이 2년을 선교하여 교회를 설림(행 18:1-8).

        (2) 교인 전체의 수가 상당히 많은 것으로 예상된다(고전 1:26).

        (3) 바울의 동역자 그리스보 (행 18:8)가이로 에라스도(롬 16:23)스데바나 (고전 1:16)등으리 거주지다.



        바울이 처음으로 이방인들에게 선교를 시작한 곳이다.> 현재 고린도라고 하는 시는 신 고린도로 1858년과 1928년의 대지진 후에 세워진 곳으로 아테네에서 서남쪽으로 80 Km 되는 거리에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전도했던 고린도는 그리스에서 가장 활발한 상업 중심지로 국제적인 도시였다. 고린도는 천혜의 지리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었는데 즉 서쪽에는 이오니아 해와 이탈리아로 향하는 레카이온 항구를 품고 있었고 동쪽으로는 아테네를 바라보면서 에게 해로 나갈 수 있는 겐그레아 항구를 품고 있었다. 아카 지방의 수도였던 고린도는 번창한 항구 도시 였으나 심한 빈부의 차이와 퇴폐적인 윤리 생활로 악명이 높은 곳이기도 했다. 사도 바울은 제 3차 전도 여행 중 에베소에 3년동안 머물면서 고린도전서를 집필했고, 57년 경 그리이스 북부 마케도니아에서 후서를 써 보냈다.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 내용은 교우들이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어 그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고 사목적인 대답을 해 주기 위해 쓰여졌다. 

        이 서간에서 다룬 문제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고린도 신자들 중에는 의붓 어머니와 동거하는 사람이 있는데도 이를 방관만 하고 있었고 (고린도전서 5:1-13), 어떤 교우는 자유를 구실 삼아 창녀와 관계를 맺었고 (고린도전서 6:12-20), 또 성행위라고 하면 무조건 죄악시 하는 극단적인 사람이 있었다. (고린도 전서 7:1-10).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결혼, 이혼, 독신 등 성윤리를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다. 그 외에도 교우들 간에 분쟁이 생겼을 때, 이교도 법정에 가서 소송하는 문제 (고린도전서 6:1-11),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는 문제 (고린도전서 8:1-11), 성찬의 전례시 부자들은 그들이 가져온 음식을 배불리 먹고 가난한 사람들은 굶은 사례도 있었기에 올바른 성찬례를 가르쳐 주고 (고린도전서 11:17-34), 그 외에도 교회의 질서를 파괴하고 (고린도전서 14장), 부활 신앙을 부인하는 (고린도전서 15:12) 사례를 그리스도 부활의 근거로 삼아 주장하며 가르쳤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신자들간의 분쟁과 파벌 의식 이엇다. 신자들 간에는 바울파, 아폴로파, 그리스도파 등이 조성 되었다. 이러한 파벌 의식이 만연되었다는 교회의 소식을 듣고 바울은 이 서간에서 그들이 전해 듣고 받아들인 복음을 상기 시키면서 교회 공동체가 무엇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역설하였다. 

        둘째 편지인 고린도후서는 첫째 편지를 발송한 다음에 고린도에 거짓 선교사들이 와서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부인하였다. 사태가 다급함을 인식한 바울은 직접 고린도 교회를 찾아 갔지만 이미 대부분의 신자들이 바울을 반대하는 자들에게 동조하여 그를 맞아 주지 않았다. 



        바울은 비통한 마음을 안고 에베소에 돌아와 '번민과 비통한 마음을 안고 울면서' 매우 격앙된 어조로 편지를 썼는데 이것이 고린도 교회로 보낸 '눈물의 편지'이다. (고린도후서 2:4). 바울은 디도를 고린도로 보내어 이 눈물의 서간을 보내고 그 사이에 마케도니아로 건너가서 지도가 돌아 오기만을 기다렸다. 마침내 디도를 만나 고린도 신자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사도에게 순종하고 모든 적들을 엄하게 다스리겠다는 약속을 들었다. 이에 대한 바울의 답신으로 나온 편지가 고린도후서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이 고린도후서는 사도직에 대한 편지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사도직의 본질과 역활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나 겸허한 태도로 자신의 약함 안에서 힘차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높이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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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린도전서(1Corinthia) 0|고린도전서(1Corinthia)



        1. 배경

        고린도는 아가야 지방의 수도로서 지리적 위치로 보아 상당히 중요한 지점에 놓여 있다.헬라 본토에서 페로폰네소스반도로 나가는 바로 길목에 있어서 육로와 수로로 상업상 교통이 빈번한 곳이다. 

        고린도에는 잡다한 인종이 모여 살고 있었기 때문에 각 곳에서 모여온 우상도 많았고 생활은 사치 하였으며 윤리적으로는 방탕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이러한 곳에 바울은 전도하여 교회를 세웠다.바울은 글로에의 집안 식구들이 고린도에 다녀와서 전도하는 말을 통해서 고린도 교회가 가지고 있는 파당의 문제 계모와 같이 사는 부 도덕한 생활 문제, 또 신자들 끼리 관청에 소송하는 문제등에 있어서 고린도 교회의 영적 생활과 전도 사업을 위협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또한 고린도 교회에서도 그 교회에 발전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 바울의 의견을 묻는 편지도 보내왔던 것같다.그러므로 바울은 이 여러 문제에 대하여 실제적인 해답과 교훈을 주기로 하고 이 편지를 썼다.바울은 3차 여행을 하는 중에 에베소에 머물러 있으면서(고전16:8), 57년 이 편지를 썼다 신약 성서에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로 한 서신이 둘 밖에 없다.그러나 실상은 적어도 네번은 하였으리라는 사서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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